Covenant


질문


오랜 시간 배우자 기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 제 짝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제 배우자를 예정해 놓으셨을까요?



배우자와 하나님의 주도하심


선생님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 있는데, 학교의 선생님 만나는게 얼마나 중요한가요? 그런데 누구도 오랜 시간 꾸준히 우리 아이가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혼인에 관해서 배우자 기도가 있습니다. 왜 배우자 관계만 유독 기도를 하고 하나님 뜻을 찾나요?

외로운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어서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가장 심대하게 허락한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혼인을 주도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결혼시킬 때 하나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섬리 아래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택합니다. 이것만 보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결혼에 관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 19:6)


이러한 구절만 봐도 혼인과 하나님의 뜻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등장합니다.



배우자와 하나님의 뜻


그러나 성서는 혼인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자기 편에서 주도적으로 혼인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주선해 주셨을 때에도 아담은 하나님이 주셨구나 수동적으로 하와를 자기의 부인으로 맞이한게 아니라 하와를 보고 감격하고, 노래를 부르고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배우자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나의 배우자다 라고 관계를 주도합니다. 인간이 혼인에서 관계를 주도한 것, 그것이 다른 한 부분으로 내려옵니다.

이삭의 아들인 야곱을 보면 그런 상황이 나옵니다. 야곱의 경우 도망을 가서 외삼촌 집에 살면서 결혼을 합니다. 원래는 라엘을 사랑해서 라엘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외삼촌에게 속아서 언니인 레아아와 결혼했습니다. 라헬은 아이가 없으니 고민하다가 빌하와 실바하고도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혼인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신 결혼 | 사람이 주도한 결혼 두 기둥


성서 한 쪽에는 혼인의 중요성과 하나님이 주도하신 결혼에 관한 이야기 다른 한 쪽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욕구와 욕망과 주도성을 가지고 혼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가지를 항상 병행해서 생각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섬리과 배려의 터를 생각해야하며 그 안에서 인간이 주도성을 갖고 책임감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랑 결혼하라고 계시를 받으면 네 하고 결혼하면 끝인가요? 성경은 인간의 인격적 주체성을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섬리와 준비와 마련함과 계획속의 선한 뜻을 지우지 않습니다.


각각 주신 은사가 다르다는 것은 주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고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책임감과 삶의 성실성을 가지고 주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독신과 하나님의 뜻


독신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이 나옵니다. 어느때 이혼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두 배우자 중 한 배우자가 혼인 사이에 있는 신실하고 성실한 관계를 깰 경우 이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더니 다 놀랍니다. 그러면 혼자 사는게 좋겠네요? 반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마 19:11)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마 19:12 공동번역)


혼인하지 않고 따로 사는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혼자 사는 것의 위상을 좀더 높입니다. 혼인하지 않은 사람,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에게 그냥 지내라고 합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 7:8)


그 시간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독신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혼인도 은사, 독신도 은사입니다. 바울은 약간 충격적이게 표현합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9)


그렇다고 바울은 독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성경을 쭉 읽어보면 독신이나 혼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사일 수 있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섬리가 드러나지 않은 혼인과 독신의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인간의 삶을 하나님께서 너그러히 봐주시고 적극적으로 은사와 가치로 부르십니다. 혼인이든 독신의 삶이든 어떤 가치에 매진하며 살 것인가 입니다. 독신의 삶을 선택했으나 하나님 앞에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자격과 은사가 있으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인을 통해서 인간을 배우고 하나님을 깊이 알 자질이 있고 은사가 있으면 그 방식을 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급진적인 이야기입니다. 혼인하든 혼인하지 않든 그것이 사회의 어떤 규범이나 어떤 사회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초기 1세기 교회 <바울과 테클라행전> 문서를 보면 혼인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은 그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혁명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말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부활 후의 삶을 말 하실 때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0)


결혼은 인간 안에 매이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는데, 부활 곧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때에 천사와 같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굉장히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인간과 인간을 가장 깊이 매어놓은 것 이상의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풍성함이 또 다른 인간과 관계 맺는 풍성함이 부활한 몸에 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출처

Youtube 잘잘법 채널 김학철 목사님의 답변 을 정리한 것입니다. 각 글의 헤더 문구는 제가 작성한 것이며,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표현을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