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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분당우리교회 설교



주일설교


12월 2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절실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 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창 39:1-6)


오늘은 두 가지 이야기를 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처음 이야기는 제가 경험한 것인데 명동을 갔습니다. 함께 동석한 분이 있으십니다. 이 분은 벤처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명동 근처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젊은 직원들이 많은데 연세대 출신 직원이 많다는 것입니다. 연세대면 미션스쿨 아닙니까? 믿음 좋은 분이니깐 아무래도 믿는 사람들이 많겠지 했는데 전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조사를 해봤더니 연대 출신 직원 10명이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놀랐고 마음이 아프게 되었다. 통계적으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보았지만 정말 많은 청년이 교회를 떠난다고 했습니다. 그날 리모델링 건물 보고 탐방을 갔는데 한 곳을 볼 데가 있다고 명동의 명소를 데려갔습니다. 옥상에 야외 카페를 만든 것입니다. 진짜 놀랐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그날 미세먼지가 엄청나게 심한 날인데 젊은 청년들이 줄을 서서 대기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그렇게 많은 청년을 한꺼번에 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환경이 좋지 않은데 청년들에게 뭔가 매력 있는 것 하나니깐. 남산도 눈앞에 잘 보이니깐.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목사니깐, 너무 부러운 것입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떠난다고 하는데 여기는 어떻게 수많은 청년들이 몰려든 것인가. 제가 거기를 다녀온 이후로 종종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제가 잘못해서, 목회자가 잘못해서 교회에 실망한다고 하는데 반드시 은혜 주시고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우연히 인터넷으로 강의 하나 들었습니다. 이순신 장준에 대한 강의입니다. 먼저 참 인상적인 것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맨 마지막에 남긴 말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이순신’ 그렇게 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의아하고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여러분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 이순신은 평생의 꿈을 망가트린 사람 아닙니까? 그렇기에 죽으면서 이순신 이름을 부르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 무패. 최근에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보니 45전 45승이었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쨌든 무패였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한 이순신 장군인데, 일본군이 돌아가야 하는데 이순신 장군님이 버틴 곳이 노량해전 아닙니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님이 전사하신 것 아시죠? 그 강의에서 제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한 마디가 이것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이 수많은 병사들에게 호소했던 한 가지 있습니다. 일본 왜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여라. 그다음 말이 저를 먹먹하게 했습니다.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마음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그리고 그분이 거기서 전사하셨잖아요. 제 목회자의 잘못으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을 들었기에 더욱 막막한 것 같습니다. 23전을 했든 45전을 했든 전쟁에 지칠 만도 한데 전사하기 전까지 끝까지. 끝까지 왜 의지를 불태웠느냐?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도록. 어른들의 목숨, 핏값이 되도록. 젊은이들은 일본에 꿀리지 않잖아요. 이 이야기를 왜 드리느냐면 저에게 남은 소원 있다면 기성세대가 잘못해서 젊은이들을 실망하게 하고 복음의 능력을 못 가르친 일이 있는데 저를 사용하셔서. 세상에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또 있을까요? 거꾸로 해서 안나가 성도. 세상에 이런 가슴 아픈 명칭이 우리나라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꿈을 갖고 떠나간 성도와 상처받은 청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데 우리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1만성도 파송운동의 출발도 이런 애틋함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좋은 것 보다는 다음 세대가 보기에 교회가 부끄럽지 않도록. 저의 목회 목표는 딱 하나입니다. 작게는 우리 집 세 아이. 세 자녀가 자기 아빠가 목사인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는 것. 폭을 좀 더 넓혀서 분당 우리 교회 수많은 청년들, 청소년들이 자기가 분당우리교회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모든 초점을 여기에 두어야합니다. 밑에가 올라오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아이를 낳지 않은 것 때문에. 교회가 그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해서든지. 미세먼지 자옥함에도 매력이 있어서. 노천카페 줄을 져서 기다리는 것처럼.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갖는 것처럼. 분당 우리 교회를 사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제목을 절실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잡았지만 맞는 말은 아닙니다. 절실하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절실 하인지를 사전에 찾아보니 뼈저리게 강하다. 안되면 어쩔 수 없고가 아닙니다. 절실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소원을 되뇌면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모습입니다.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창 41:54-55)


제가 12, 13년일까요? 제가 전 교회 적으로 선포한 것이 요셉의 창고를 열어라입니다. 엄청난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2기 사역을 선포하면서 요셉의 창고를 열어라. 이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흉년 만난 이 시대에 기근을 만난 이 시대에, 분당우리교회와 출석하는 모든 성도님이 마음을 합하여 풍성하게 먹일 수 있는 꿈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윌리엄 캐리의 이 말 하시죠?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윌리엄 캐리)


큰 소리로 선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이들을 시도하라.


새해에 꿈으로 새해를 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꿈꾸기를 원합니다. 10명이 모이면 꿈이 10가지이고, 100명이면 각자 꿈이 다를 것입니다. 저는 목사니깐 하나님 아에 이런 꿈을 꾸는데 의사 선생님, 학교 선생님 가게 하시는 분 다 꿈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꿈은 다르지만 꿈꾸는 모든 사람이 공통점으로 갖는 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경험하는 인생


요샙을 묘사하면서 반복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


요셉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묘사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요셉 정도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도 대통령이 꿈이었습니다. 대학교가면서 흐지부지된 것 같습니다. 요셉 정도로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은 성경에서 그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는 형통한 사람이라고. 요셉이 꿈꾸는 것이 특징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황당한 꿈을 꾸는 어린아이의 꿈을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한 형통하심. 그것이 특징입니다. 성도님들의 가정의 자녇르이 요셉이 누린 형통의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신 분, 조금 있으면 취소할래? 하실지 모릅니다. 성경은 형통하다 하는데 헷갈립니다. 형통이 형통이 아닙니다.


요셉이 이집트로 끌려갔다. 요셉을 이집트로 끌고 내려간 이스마엘 사람들은, 바로의 신하인 경호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다.(창 39:1 새번역)


배경을 아시겠습니까? 요셉 인생에 가장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돈 받고 요셉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남의 나라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본문의 시작이 어떤 사람이 요셉을 돈 주고 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본문을 6절까지 읽었는데 7절을 보면 더 끔찍합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창 39:7)


요셉이 그 끔찍한 여자의 성적인 유혹을 물리치니 분노, 괘씸죄 아닙니까?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가는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이런 형통을 원하십니까? 우리 어머니가 오신 줄 알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기도하실때 우리 아틀 찬수가 요셉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뭣도 모르고 아멘 아멘 했는데 요셉이 끔찍합니다. 인신매매 당하고, 강간 미수범으로 감옥에 가고. 우리 어머니가 그것을 원한 것입니까? 형통하고 거리가 먼데, 성경은 형통하다. 형통하다. 계속 반복해서 오늘 본문에서만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 눈치채야하는 것도 있습니다. 기돌르 안하는 것도 문제이고 잘못 알고 구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는 형통은 부자 되는 것, 좋은 대학 가는 것. 하나님의 형통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형통하다고 하느냐?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이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지난 한해 많이 힘드셨죠? 저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31년 목회 중에 올해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종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너지고 힘들고, 여름 때부터 힘든 고비를 넘기고왔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힘든 고비 고비를 넘겼지만 내 생에에 가장 형통한 한 해중 하나였구나 새벽마다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불쌍하게 여겨달라고했던 것이 형통이었습니다. 다행이잖아요. 감옥에 안갔으니깐.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셨습니까? 절박함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갔으면 여러분의 삶은 형통한 삶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요셉의 삶을 잘 알고 있잖아요. 네가 형통하다고 하면 하나님 장난치십니까? 하겠지만 우리는 알잖아요. 누명당하고, 치이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 나라가, 온 민족이 흉년을 만나 기근에 빠져있을 때 멋지게 창고를 열어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음을. 우리의 문제는 근시안적인. 한 치 앞도 못 봐서 일희일비 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말씀을 배웁니까? 영원과 영원을 잇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형통이 조삼모사, 악한 시대에 한 치 앞도 모르는 형통과 비교가 되지 않는. 또 한가지 요셉보고 꿈쟁이라고하는데 진짜 꿈쟁이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꿈을 이루어가시는 분이고, 더 놀라운 것. 꿈꾸시는 하나님이 우리랑 같이 꾸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민생활을 다 정리하고, 저는 40살까지 미친 듯이 돈 벌어서 고아원, 양로원 차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당겨서 30에 한국에 돌아오니 제 나이되서 봤더니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길을 인도하시는 분. 오늘 성령께서 꿈쟁이 되시는 하나님. 너와 같이 꿈꾸기를 원한다. 편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올 한해 여러분, 꿈꾸는 자로서 여러분 달려오셨습니까?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것. 새해에 하나님의 내재하심. 내 안에서 일하는 하나님 충만하게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이 되기를 원합니다.




2. 주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인생


본문 5절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죄성을 갖은 우리 인간은 성경을 좀 바꾸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어이 우리가 이기적인 본능을 내려놓고. 이찬수 목사를 위하여. 이찬수 목사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심으로 여기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12장 2절 기억하십니까?


내가 너를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너를 축복하여 내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될 것이다(창 12:2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너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스티브 킹이 한 말. 다른 사람에게 선물이 되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같습니다. 내년 분당 우리 교회 4대 비전을 갖고 기도하시길 원합니다. 1. 1만 성도 파송운동 2. 드림 센터 사회 환원 3. 가평 우리 마을 4. 기독교연구소. 하나하나 어려운 비전인데 비전이 있어서 살았습니다. 그중에서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4월 첫주 시작이 끝이 아닙니다. 1만 성도 29 교회로 파송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제가 29 목사님들에게 여러 번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에게 죄송한 것이 이것입니다. 본게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말씀 중심으로 교회가 너무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본게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원형은 성경을 통해서 아는데 잘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촌뜨기가 옥한흠 목사님을 만나서 가까이에서 본게 있어서 이 정도라도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는게 얼마나 중요한것인지 아십니까? 29 예비 담인 목사님들에게 여러차례 부탁했습니다. 후배 전도사님에게 보여주자. 모델하우스는 다 쇼입니다. 보여주기 위해서 쇼하는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당신들이 살 집을 멋지게 만들어보자 성경적으로 목회하면 행복할 수 있구나. 처음 시작부터 차별하해서 시작하자. 진짜 중요한 기도 제목을 드리려고합니다. 더 많은 경우 공공장소를 구할 수 없으면 상가를 임대해야하는데 억장이 무너집니다. 이야기 잘 하다가 업종이 뭡니까? 교회인데요? 교회 안해요. 어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왜 교회가 안되느냐고?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이야기 안하려고합니다. 주변에 대안학교, 좋은 예배 장소가 있으면 꼭 연락을 주셔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 상가를 찾고있는데, 무슨 기도제목을 드리려고 하나면 장소 예약, 인테리어 다 예산 아닙니까? 분당우리교회가 돈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교회 엄청 부자인줄 아시는데 드림센터 건축헌금 안했잖아요. 엄청난 금액을 사회 환원할거니 우리가 섬긴 차원에서 빛을 갚자 해서 빛을 다 값았습니다. 허리띠를 괭장히 졸라매면서 왔습니다. 29교회를 시작하려고하니 인간적으로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늬들 알아서해라는 안되잖아요. 어떤 결정을 했냐. 드림센터를 담보로해서 융자를 얻기로했습니다. 2~300억은 필요하지않을까요? 시도를 하는데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29 목사님들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은행 융자로 해줄테니 값아라. 그 비용은 따로 비축을 해서 꿈을 꾸기를 원한다. 그렇게 의논이 되었는데 최근에 성령님께서 생각을 바꾸게 해주셨습니다. 드림센터 담보로해서 초기비용을 충분하게 제공할 것입니다. 그 대신에 29 교회는 다 갚아야 합니다. 초기비용 들어간 만큼 공동 기금으로 비축할 것입니다. 29 교회와 분당 우리 교회가 함께 200억, 300억 비축된 헌금을 갖고 필요한데 한번 한국교회를 섬겨보자. 이제 교회가 시작되는 29 교회가 빛 값은 것으로 시작해서 되겠느냐? 꿈꾸게 하자. 그런데 한 가지 29 목사님들에게 부탁했는데 참여하는 성도님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뒷주머니 찾지 마세요. 세상과 다르게 가기를 원합니다. 크고 작은 상황에 맞추어서 양심껏 똑같이 진행할 것입니다. 교회가 담보로 해서 요구하는 대로 내줄 예정입니다. 그만큼 비축할 예정입니다. 딴 주머니 찾지 않기를. 더 많은 헌금이 나오는 교회도 없고, 헌금이 없어서 힘든 교회도 없고. 4월 첫 주가 되면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겠지만. 홈페이지에 29 교회를 위한 헌금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니고,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초기 비용으로 들어가는 결과가 있고 몇 년이 지나면 그 헌금이 29 교회의 공동 기금으로 모아져서 어디에 쓸지는 29 교회와 분당 우리 교회가 의논할 것입니다. 꿈으로 갈 것입니다. 어제는 살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마음을 모으면 되지 않을까? 웃으시늘걸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어느 성도님들이 십일조랬나 체크한적 한 번도 없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니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찰스 스터드)


1만 성도 파송운동 4차 보고 영상을 촬영했는데 한 대목에서 울컥했습니다. 왜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햐냐고 묻느냐면,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너 뭐하다 왔니? 어마어마한 말을 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몸부림은 쳤습니다. 그래도 몸부림은 치다 왔습니다. 울컥하였습니다. 신실한 모든 성도님에게 이런 꿈을 같이 꾸기를 원합니다.






12월 1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기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암 7:7-9)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연말에 안타까운 한국교회를 묵상하다가 옥한흠 목사님께서 쓰신 평신도를 깨운다. 책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아픈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연약한 부분을 지적하시는데 3허 현상을 지적하셨습니다. 3허 현상은 무엇이나 면 ‘양적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3허 현상이라고 붙일 수 있다. 허세, 허수, 허상이다. 허수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통계에 대해 통탄할 정도로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교회의 교인 수 등 중요한 통계치는 2배 3배 과장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허세는 사회 각 분야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 데 비해 영향력이 미미한 것을 가르친다. 93년부터 97년까지 장·차관 비율은 기독교 신자가 6-70%다. 그러나 이 시회는 도덕적으로 시민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안타깝게도 큼직한 스켄들은 장로, 집사가 언급된다. 한국교회가 제 역할을 못한다. 믿는 사람이 있더라도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세이다. 허상은 불신자와 차별성을 보이는 데 실패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행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는 지난 한 주 동안 3허. 허수, 허세, 허상을 놓고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주신게, 20~30년 전 주신 말씀인데 이 시대가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결론에서 ‘맛을 잃은 소금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듯이 교회가 사람들의 비판의 과녁이 되어가고있다.’ 아모스의 주젼 8세기 시대를 보니 이 시대의 가슴아픈 사회적, 교회의 연약한 부분과 너무나 일치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본문을 배경으로하는 주전 8세기는 평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외세의 공격도 거의 없었고, 아정적인 상황을 바타으로 상업과 무역을 장려하여 경제적으로는 황금기였습니다. 인간의 죄성이라는게 부를 누리는 번영이오면 함께 잘사는 것을 모색하지 않고 분배의 불균형. 전 세계적으로 예외가 없습니다. 빈부 격차. 이 시대도 똑같했습니다. 대 지주가 나타나고 큰 부자들이 생기고 돈과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는 시대적 배경을 오늘 본문이 갖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더 큰 부를 얻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자료를 보면 심지어 재판관을 매수하는 일까지 빈번히 일어났다. 우리나라에도 비아냥거린 말이 떠돌았지 않습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 오늘 본문 이스라엘과 비슷하게 흘러가고있다고 봅니다. 아모스서에 제일 유명한 말씀을 꼽으라고 하면 안 믿는 사람도 압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이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시대상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더 타락했습니다. 이스라엘 성소는 늘 붐볐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가득 찼지만, 성소에 몰려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부자로,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저급한 생각이 꽉 차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존 브라이트가 쓴 이스라엘의 역사책을 봤더니 도자기, 유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도자기, 바알이라는 이름의 횟수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욕망을 자극하는 바알을 섬기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 가운데 뭐라고 쓰고 뭐라고 읽는다고 한다는 말을 유행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쓰고 바알을 의지한다. 바알은 물질을 풍요롭게 하는 신이라고 믿었으니깐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의 심판의 경고 말씀을 주십니다. 5가지 환상. 메뚜기 환상. 다림줄 환상. 성전 붕괴 환상 5가지 환상을 통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경고를 주십니다. 오늘 살펴볼 환상은 다림줄 환상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암 7:7-8)


이 말씀에서 무서운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갖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다림줄을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로 재보니깐, 다림줄 다 아시죠? 밑에 무거운 추를 달고, 똑바로 잘 지었는지 측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담을 쌓는 분이 중간중간 삐뚤지 않은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이 있습니다. 기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 보니깐, 집으로 말하면 붕괴 직전이다. 용서하지 않겠다. 저는 두려운 마음을 갖습니다. 주전 8세기와 비슷한 양상을 갖고 있는데 집으로 치면 붕괴하기 직전이다. 탄식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까. 이 시대를 보면서 두려운 것입니다.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사 28:17)


이 세상 사람들은 세 분류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사람은 다림줄이 없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삶의 기준이 없습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 그냥 부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시대적 타락. 저는 주말 연속극을 보다가 딴 데 돌렸습니다. 20대 애들이 동거하는 거 나오고,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 남자 좋아한다고 하고 쳐들어가서 같이 살자고 하고. 이 시대가 너무 타락했다고 느끼는 게 당시 그렇게 나오면 폐지되었습니다. 확인 안 해봐서 모르는데 악플이 쏟아지고 항의하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깐 기준이 없으면 우리가 모두 흔들리며 놀아나며 사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다림줄이 있는데 자기가 만든 다림줄입니다.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교회가 헌금도 많이 나오고, 코로나에 사람도 이렇게 많이 나오고, 유튜브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듣는지 아느냐고, 우리 교회는 문제가 없다고 평가를 하는데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주님께서 교회에 권고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다림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 아닙니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천국 위에도 노른자를 줄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 대단한 긍지가 있는데 그를 향한 주님의 기준을 보시겠습니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차라리요 기준이 없는 사람은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깯았고 만들면 되니깐. 나는 다림줄이 있어. 제가 목회 31년 설교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사람들은 진짜 안 바뀝니다. 설교 한 편 듣고 회개하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왜 그러나면 자기 다림줄이 있습니다. 자기 다림줄로 설교를 재지 않습니까? 매 예배 때마다 내 다림줄이 어떤 다림줄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의 좋은 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모스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다림줄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암 7: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짧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다 셋째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주셔서 내가 만든. 조종사들이 계속 반복 교육을 받는데 자기 느낌으로 비행하지 않고 계기판으로 비행하는 훈련을 합니다. 철저하게 계기판을 의지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보면 자기 다림줄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모스가 보았던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섰더니. 저는 아모스서를 읽으면서 참 하나님의 마음이 와 닿았습니다. 보통 아모스서의 대표적인 말씀이 아까 목사님이 읽으셨던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아모스서의 대표 구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


아모스서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입니다. 5가지 환상을 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늬들 이래서 심판할 거야. 협박하려고 준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한국교회 문제 100가지하고 끝나면 그게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연약함 점검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인내하는 사랑으로 돌이키는 것이 설교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네. 너희가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런 점에서 긴급한 점검 두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긴급한 적용이라고 붙였습니다.



1. 하나님 기준에 역행하는 잘못된 관행을 철폐하자.


관행은 오래전부터 해오는 대로함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 오셨던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이 그것 아닙니까? 그것이 장로의 유전이라는 말로, 전통이라는 말로. 그게 자기들이 만든 다림줄인데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아닙니까? 잘못된 관행. 가정에 있어서도. 교회에 있어서도. 김윤희 교수님이 쓴 글을 보니깐 아모스와 관련한 글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직면한 문제. 말씀으로 도라가는 것, 사회 약자를 무시하는 것. 거룩하지 않은 삶 등 많은 이슈가 있습니다. 주전 8세기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부르짖었던 그것이 우리 삶에 비추어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관행을 하나씩 철폐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주신 3허 현상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나머지는 여러분께서 철폐하시면 됩니다.


‘허수는 한국교회가 통계에 통탄할 정도로. 교회 등록 수 2배, 3배 과장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난주에 최근에 있었던 모 대통령 후보 재적 문제로 언급해드렸는데요. 어떤 분은 들었고, 어떤 분은 못들으셔서 제가 다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못들으신 분은 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막 언론에서 연락이오고 기자분이 연락이 오고 재적한게 맞냐? 무슨 기준으로 했냐? 홈페이지에 입장문 글을 썼습니다. 재적이라는 억양이 강해서 오해를 하시는데 성도님들 중에서 해외를 가시거나 여러 이유로 장기간 연락이 두절된 경우, 정기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분을 재적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화를 안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수정하면 바로 수정이 됩니다. 징계가 아닙니다. 이웃교회를 다니는데 왜 쌓아둘 이유가 있습니까? 다시 복귀하면 바로 수정해드립니다. 한번 나간 사람은 못 옵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오해를 받아가며 정기적으로 성도님 재적을 하느냐? 간단합니다. 옥 목사님께 배운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지난주 말씀드렸잖아요. 기준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지 유명한 연예인이나 정치가이면 10년 잡아드리고 평범한 사람은 칼 같이 지키고,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허세. 사회 각 분야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많은 비에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천만이면 무슨 소용입니까? 영향력이 없는데. 허세입니다. 내막은 능력이 하나도 없으면서. ‘허상. 한국교회에 몸담는 성도가 불신자와의 차별을 보이는 데 실패하는 것을 허상이라고 한다.’ 교회가 조직적으로 공동체로서 세상의 공동체와 다른 그룹이 있습니까? 교회가 이야기하는 믿어주어야 해. 이것은 어떻게 정상적입니까? 지난주에 들은 분 계시죠? 아끼는 청년이 세월이 지나서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모 대학 겸임 교수로 재직하다가 전임으로 되었습니다. 정직한 분입니다. 이 분이 저에게 자기가 재직하는 대학이 미션스쿨이어서 출석 교회의 담임 목사의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부탁을 해주어서 흔쾌히 허락하고 교적을 보니 재적 성도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을 압니다. 간단하게 쓰면 됩니다. 너무 미안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재적 성도로 나와서 추천해 드릴 수 없다고. 목사님 고맙습니다. 연락이 왔습니다. 이것은 추천서 쓸 때 하는 말 아닙니까? 마침 툭 튀어나온 실수겠죠. 어느 교회에서 거짓말해서 언론 보도한 그간입니다. 그 성도가 저에게 안 써주어서 고맙다고 나왔습니다. 이 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제가 인정에 못 이겨서 써주었으면 잠깐 기분 좋고 그분 이런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저게 목사야? 이것이 기준입니다.


허수, 허세, 허상 이것을 줄여나가기 위하여 너무나 익숙한 관행을 깨트려가야 합니다. 철폐해야 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국교회에 젊은 목사님께서 제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하는데 한국교회에 중요한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선거철이니. 옛날에 후보가 에배드리면 그게 그렇게 좋은가봐요. 제가 정말 보기 싫고 보기 싫은 게 오전에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찍습니다. 오후에 부처님에게 가서 있고. 이 일에 교회가 놀아나서 되겠느냐고요.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기도해달라고 하면 이 분 안 찍을 거라도 목사는 호불호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교회에서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예배는 정치적은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만 드러나는 고귀한 장소입니다. 유명한 후보가, 정치가가 왔다고 일절 인사하지 않는 캠페인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허세, 허수, 허상. 어떤 후보 기준도 없고, 대통령 후보도 배출하였고. 이것을 떠들고 다니면 저는 주의 종이 아닙니다. 이번에 1번 찍어라. 알려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늰 성경적인 가치관을 전하는 곳입니다. 모든 성도님이 그 기준으로 자유롭게 주신 은혜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절 언급을 안 해서 맨날 욕을 먹고. 이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림줄이 우리의 기준이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뭐 완벽하겠습니까? 그래도 몸부림은 치는 것 아닙니까?



2. 하나님의 다림줄인 성경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자


이것이 너무 중요한 대안입니다.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하고 영어로 캐논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카넬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카넬은 원래 뜻은 갈대입니다. 습지에서 자라는 갈대 식물을 카멜이라고 합니다. 갈대가 쭉쭉 뻗어 나가니 갈대를 측량자로 사용했습니다. 사물을 측정하는 표준. 척도로 쓰였기에 영어로 캐논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림줄입니다. 기준을 알아야 기준대로 살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이 순장님들과 믿음 좋은 분들이 29 교회로 나가는 분위기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지도자들이 다 가시고 나면 초신자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순장님이 안 계셔서 다락방 못합니다. 내년에 너무 어숫너하고 소그룹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저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가장 영적 충만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시는데 이것이 표적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학교가 있습니다. 한국부가 있는데 한국교회를 섬겨야겠다해서 READING JESUS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고 읽자는 운동입니다. 웨스터민스터 대가인 교수님께서 강의하고 번역준비를 하고있습니다. 그 표적이 한국부 담당 교수님께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나서 하는 말씀이 분당우리교회가하는 1만성도 파송운동이 진짜 잘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난주에 나온 책. 분당우리교회를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1월 첫째주부터 어떻게 읽고 진행하고. 그래서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한국부 담당이신 권혁민 대표님께서 코로나 19로 한번 나오면 2주씩 격리되는데 작년에 얼마나 분당우리교회를 들락거리는지 아십니까? 분당우리교회에 맞도록 만들어드리겠다고. 제가 까탈스럽잖아요? 그렇게 1년간 만들었는데. 오늘 설교를 드리는 교회들이 것을 쓰기를 원합니다. 모든 읽기 운동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 전무후무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거라고 믿습니다. 말씀이 모든 성도님 손에 들려질 때입니다. 또 하나 고마운 것이 이 책을 전부 분당우리교회 홈페이지에 풀어서 올려주겠다고합니다. 1년에 4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자녀 성경적 성 시리즈. 지난주에 설명드린것은 개정판이고 이번주에 나온것은 워크북입니다. 이것 가지고 자녀교육을 못시키겠다고하셔서 워크북을 만들었습니다. 지난주부터 무슨 책 장사가 된 것 같습니다.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습니다. 규장 출판사에서 개정판 만드는 과정에서 1억 몇천만 원 손해 봤습니다. 빚진 마음을 갖고 정말 한 권씩 구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기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설교 제목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기준은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담기기를 원합니다. 너무나 기쁨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도록 영상 하나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 기쁨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12월 1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악한 영향력에 물들지 않도록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 17:1-6)


제가 네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 텐데요. 이 네 가지 사례를 들으시면서 공통으로 어떤 성경 말씀이 떠오르는지 생각하며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미국의 유명한 마돈나 가수를 기억하시죠. 거주하던 고급 저택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집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375억 원 집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땅값도 비싸지 않은데 엄청난 호화 저택입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그 집을 내놓은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것입니다. 6년짜리 독일 쉐퍼트 견. 어떻게 된 일인가 봤더니 윗대 윗대의 개의 주인이 억만장자였는데 개에게 유산을 물려준 것입니다. 엄청난 돈을 물려받은 개가 자산 관리하는 팀도 있고 개를 섬기는 사람 종도 있고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는 데요. 개가 가지고 있는 현재 재산이 5천 9백억 원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다 쓰고, 개의 새끼에게 물리겠죠. 기사 일부를 들어보세요. 개인 제트기를 이용해 밀라노, 바하마 여행을 떠나고 매일 최고급 고기와 가끔 철갑상어 요리를 즐긴다. 호화로운 원형 레드벨렛 침대에서 잔다고 합니다. 굉장히 독특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일입니다. 낙타 미모 경연대회가 열렸습니다. 총상금이 770억 원이라고 합니다. 낙타주인들이 우승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낙타한테 보톡스 주사를 맞힌다는 것입니다. 정말 웃겼던 것은 사진을 봤는데 어떤 낙타에 보톡스 주사를 맞았다가 입술이 터졌다고 합니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앞의 이야기는 코믹한다고 하면 세 번째는 웃프다라고 할까요? 어떤 기사에서 남자가 임신한 사진을 봤습니다. 아내가 임신 배에 귀를 대고 있는 사진입니다. 내용을 보니 트랜스젠더 부부입니다. 두 분이 성을 바꾼 것입니다. 남편은 원래 여성이었는데 남성으로 성을 전환하였고, 아내는 원래 남성이었는데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케이스입니다. 도저히 이해도 잘 안 되고, 이것을 미국에서 보여주면 저게 어때서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네 몸을 사랑하라.' 책의 내용입니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초등학교에서 다양한 사회적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11살 딸은 둔 학부모가 한 말을 인용합니다. 요즘 학교에서 젠더 이슈를 크게 만들어서 아이들 사이에 너 트랜스젠더야? 끊임없이 하고 반에 레즈비언 아이들이 있는데 자기 딸에게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 웃기는 것으로 시작해서 점점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관통하는 어떤 성경 구절 이야기가 떠올랐나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6)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했나 보니 첫 출발은 삶의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개를 사랑해도 제가 갑부라고 치면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개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그게 사회적으로 통념이 되어서 개를 떠받드는 시중이 개의 재산을 지켜주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 첫 출발이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무슨 뜻입니까? 기준이 있는 인생이라고 설명할 때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통용이 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기준 없는 삶에서 출발한 이상한 것들이. 기준 없는 삶은 점진적으로 혼란의 자리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처음에 차별금지법을 만들 때 얼마나 좋은 동기입니까? 소수라도 차별해서는 안된다'로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발생할 줄 누가 알이겠느냐고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시작하는 차별금지법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좋은 것으로 시작했는데 끝이 없는. 아들을 길렀는데 그 아들이 배가 불룩해 잇는 모습으로 나타나면 누가 그것을 상상하겠느냐고요. 제가 두려운 것이 이것입니다. 기준이 없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종종 말씀드리잖아요. 비바람이 몰아쳐도 바다에 갈 수 있는 것. 바다가 여기까지만 온다는 안전감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것을 넘는 것이 쓰나미 아닙니까? 똑똑하다는, 케나다일수록. 우리같이 선진국이 아닌 나라라도. 그게 하나님이라는 기준이 없는 인생은 끝이 없어서입니다. 이게 어디까지 갈지는. AI 인공지능을 사실 두려워합니다. 10년 전 20년 전 영화에만 봤던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이 진짜 가능할것같다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이런 관점으로 설명해보려고합니다. 사사기를 21장 입니다. 크게 두 파트입니다. 1장부터 16장까지가 본론이고 17부터 마지막까지가 부록입니다. 16장에서 사사 삼손의 이야기로 끝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17장부터 부록을 만드셨나. 부록에 보면 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7, 18장 미가와 어머니의 사례가 나옵니다. 19장부터 21장까지 레위인과 첩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록은 역겹고 추하고 도저히 읽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간 타락의 극치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16장에서 끝내시면 되는데 부록을 만드셨을까?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두 번 나오는것 아시죠? 핵심 말씀인 것 아시죠? 이 이야기가 전부 부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부록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경고합니다. 기준이 없는 인생은 그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끝이 없는 타락의 자리로 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기준을 세우셔야 합니다. 결혼하셨습니까? 어제 결혼한 신혼부부 지금 내일 신혼여행을 가는 분이 있다고 할 때 구경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출산 계획이 있습니까? 이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 자녀 교육에 대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준이 없는 교회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모 후보 분당우리교회 제적 관련해서 시끌시끌했습니다. 저는 이게 제일 싫어하는 일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슈되는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많은 분이 교회에서 문의가 오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재적한 것 맞느냐? 진짜 이유가 뭐냐. 제가 홈페이지에도 올렸지만, 제적 성도는 입장문 그대로입니다. 해외에 가시거나 지금은 다른 교회가거나 다른 일로 연락이 안 되어서 확인이 불가능한 분. 우리 교회 가다가 다른 교회로 갈 수 있잖아요. 적을 옮기는 것이 재적입니다. 징계도 아니고. 왜 우리교회는 이런 오해를 받아가면서 정기적으로 재적을 하느냐고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허수만 잔뜩 있어서. 이런 비아냥거린 말 들었습니까? 재적수 다 합치면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을 것이다. 거품 걷어내자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을 갖고 있는데 엄청난 요직에 있는 분은 잣대를 이만큼 늘려드리고. 별로 드러날 것 없는 분은 잣대를 엄하게 들이대고. 이것을 도저히 믿어주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사실 두 주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 분도 중진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모 기독교 대학에 겸임 교수로 있다가 고맙게도 전임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미션 스쿨이니 담임목사님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추천할 수 있는 좋은 크리스천이지만 이 분이 재적된 성도입니다. 우리교회 안 다니는 분입니다. 엄청 인간적으로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통보했습니까? 추천서를 써 드릴 수 없다. 너무나 아끼는 청년이지만. 19년 동안 이 자리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동기 목사님들이 선교사님, 미자립교회로 많이 가고 하시니 동기니깐 후원 요청하지 않습니까? 서류 좀 보내봐라. 말로 하지 말고. 담당 교역자님에게 넘겨주는 일 밖에 못합니다. 제 친조카가 한때 선교사님이었습니다. 1원도 후원 못 했습니다. 담임 목사님 조카라고 후원하면 기준이 없는 것 아닙니까? 교회는 기준이 있어야합니다. 그 기준은 제가 반복하는 사사기 17:6 교회도. 가정도 예수 믿는 부부도 왕이 없으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 주말에 가슴 아픈것이 이것입니다. 교회가 말을해도 믿어주지 않으니깐요. 무슨 흑막이 있습니까? 교회도 반성하고 크리스찬도 반성하고 중직자도 반성하고. 우리 가정에 기준이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사사기 부록에 나오는 미가와 가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의 공통점이 레위인과 첩 이야기가 가정에 관련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개인도 그렇고 가정에서 기준이 세워져야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악한 시대에 물들지 않으려면 꼭 기억해야 합니다.




1. 부모의 가치관이 바뀌어야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미가 엄마 때문입니다. 이 분이 중심이 없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삿 17:1-2)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 훔칩니다. 어머니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돈 훔쳐간 놈을 저주하니깐 그 이야기를 들은 아들이 이실직호합니다. 그랬더니 엄마의 태도를 제가 다루는 초점입니다.


그가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누군가가 은돈 천백 냥을 훔쳐 갔을 때에, 어머니는 그 훔친 사람을 저주하셨습니다. 나도 이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은돈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가져 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주님께서 너에게 복 주시기를 바란다."(삿 17:2)


자녀교육에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아들이었어? 돈 훔쳐가면 어때. 3절 후반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삿 17:3)


처음을 보면 이것이 엄청난 믿음의 결단을 한 것 같지만, 전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신상을 만드는 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고요?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정말 믿고 싶지 않은데요. 연말, 연시가 되면 많은 권사님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용하다는 점쟁이가 왜 그 이야기를 하나면 내가 권사입니다. 말을 하나 봐요. 정말 믿고 싶지 않습니다. 미가 어머니처럼 중심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싫어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아들 미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십시오.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삿 17:4)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드라빔은 우상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레위인도 아닌 아들을 제사상으로 삼는 것을 보세요. 윤리적 도덕적인 것을 어머니 돈을 훔치는데 주저함이 없고 복 받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상관없이 거는 것. 부모의 기준 없는 신앙교육이 자녀를 이렇게 만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1만 성도 파송 운동을 놓고 마음이 복잡한 것을 압니다.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에이 우리 목사님이 그래도 3/4이 안 나간다고 정말 사표야 내겠어? 걱정 안 해도 돼', '내년에 하나님 말씀을 관통하는 목회를 하겠다니 그만둘 사람이 그런 말 하겠어?' 1만 성도 파송운동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말아주세요. 자다가 일어난 약속이라도 내 주인 되신 주님께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시면 됩니다. 5천 명 성도가 남지 않으면 약속한 이상 번복한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내가 나가더라도 잘 정비하더라도 어떻게 안식년을 가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정비할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꼭 성공해야 한다고 성공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인위적으로 몰아쳐서 5천 명 이하로 남긴다면 그것은 순리가 아닙니다. 성도님들이 다 남더라도 약속만 지키면 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이 있습니까? 기준이 고무줄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왕이 우리 삶의 기준인 그런 성도님이 모인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 기준이 있는 자녀교육이 필요합니다.


미가의 어머니 같은 자녀교육을 100번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들이 거액의 돈을 훔쳤는데 꾸짖기는 커녕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삿 17:2)


저도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친구 같은 아버지가 미가 어머니같이 모든 것을 허용하는 친구 같은 아버지라면 우리 아이들이 상처받을지는 몰라도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애완견 훈련사 강형욱 씨 아시잖아요. 강아지 키우면서 이 분의 조련방식을 배웠습니다. 개를 정말 사랑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조련사이지만 훈련 시킬 때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동물 학대 아닌가 생각이 들 만큼 가혹합니다. 오은영 박사님도 사람을 대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위계질서를 만들고 철저합니다. 이 시대가 마주한 가슴 아픈 현실이 무엇입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참 잘했다. 복 받을 거야. 미가 어머니가 보여주시는 너무 무서운 타산지석, 경고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걸핏하면 이 시대를 본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이 시대를 본받는 목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 양심을 걸고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을 분별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분별은 도키마제이인데 영어로 말하면 test and prove. 시험하고 증명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다니엘서에서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준을 세우면 김지찬 교수님의 책을 보면 사사기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샬롬에서 엔 샬롬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화의 땅에서 샬롬 없는 삶을 산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 이것이 딱 우리 아닙니까? 샬롬이 없습니다. 이것을 테스트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책 기억하십니까? 1년 반 전에 우리 자녀 성경적 성교육 시리즈 책을 야심작으로 번역서를 연구소에서 했습니다.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책만으로는 아이들 자녀 교육하기 힘들다. 또 하나는 미국 책을 번역하다 보니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판매 중단했습니다. 1년 반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개정판을 만들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한 워크북을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책을 구입하신 분은 새 책을 사지 않아도 됩니다. 총신대 교수님 팀과 워크북을 만들었습니다.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이진아 전도사님의 강의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보완을 해서 1년 반, 우리 팀도 부산을 여러 번 갔습니다. 책을 만든 규장 출판사에서 우리 이것 때문에, 판매 중단을 해서 10권 만드니 재고가 2만 5천 권 남았고, 1억 2천만 원 손해를 본 것입니다. 목사님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반드시 좋은 책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꺼이 만들어드린 것입니다. 눈물로 호소하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19만 아니면 책을 마당에 쌓아놓고 강매하고 싶습니다. 꿈틀 거려야 합니다. 점점 미국과 유럽을 닮아가는 실정 속에서 자녀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연구소가 방향을이렇게 잡아가기를 원합니다. 자녀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주일학교와 연계해서 부모교실을 만들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 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 자료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공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버스 기다리듯이 아무것도 안하고 정류소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가 어머니 같은 부모가 되지 않기를 위하여. 이 땅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기준으로 갖고. 내 안의 살롬. 오늘 이시대는 넘치는 땅에서 샬롬을 잃어버린 시대라면 우리교회아 가정과 우리 성도님들에게 샬롬이 넘치는 시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12월 0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그 안에서 별견되려 함이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4-9)


요즘 급변하는 세상, 변화가 많은 세상을 사는 게 참 힘들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이 직장 문제도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요즘 전기차, 수소차 보급이 늘지 않습니까? 이래서 어려움을 겪는 사업체가 많아집니다. 요즘 국도변의 주유소 중에 문 닫는 주유소가 많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고 하다 보니 국도 이용하는 차량이 줄어드는데 전기차 수소차가 늘어나니 주유소를 이용하는 손님들이 줄어들어 문을 닫는 일이 일어나고, 앞으로 전기차가 본격적으로 출시되면 휘발유 사용하는 모든 주유소가 문을 닫게 되는 엄청난 시련에 직면하는 것 아닙니까? 기사 제목이 이렇습니다. 전기차 보급률 5%, 자동차 정비업소 13% 폐업.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이 3만 개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부품 공장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유통하는 분들이 있고, 부품을 자동차 정비 업소에서 차를 고치는 데 쓰이는데 전기차가 나오면 어마어마한 업체들이 다 문을 닫아야 하는 현실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전기차가 보급되니 많은 업체가 비상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위기는 자동차 산업만이 위기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은행을 가면 깜짝 놀랍니다. 창구에 직원이 없습니다. 지점 자체가 문을 닫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제 손님들이 인터넷뱅킹으로 주를 이루다 보니 은행의 지점을 점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급볂나느 세상을 살다 보니 익숙한 것에 안주하면 큰일 난다. 변화를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한다. 변화하지 안흥면 망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책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이런 부류의 책 중 하나가 딥 체인지라는 책입니다. 예전에 이 책을 읽는 기억이 나는데 이 책이 강조하는 포인트는 딱 하나입니다.


DEEP CHANGE or SLOW DEATH


근원적인 변화를 하든지 서서히 죽어가든지. 인공지능, 로봇, 블록체인 예전에 듣지도 못한 용어가 쏟아져나오고 있고, 급변의 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꿈꾸지 않으면 천천히 죽어가게 될 것이다. 한때 저는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제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닌데 책에 왜 관심이 많았느냐면 교회도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예전의 방식으로 목회하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 구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처럼 위기를 맞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19 아시잖아요. 소수의 성도님만 제외하고 2년 가까이 교회를 출입한 적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것은 코로나 19가 언제 끝날 것인지 모릅니다. 백신 두 번 맞으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부푼 발표를 들었는데 지금 와서 아무 소용이 없고 세 번째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최근에 이상한 변이 바이러스가 와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니 언제 성도님들이 교회를 찾아오겠느냐고요. 가정에서 TV 켜놓고, 유튜브 켜놓고 예배드리는 게 익숙해져서 코로나가 사라져도 교회를 찾아오지 않은 성도님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교역자들에게 1년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변해야 한다. 절대로 가정에서 예배드릴 수 없을 만큼 현장에서의 예배가 역동적이고 만남의 축복이 넘치지 않는다면 아까의 슬로건 그대로입니다. 천천히 죽어가는 현실을 내버려두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력서에 크리스천 쓰는 것으로 되는 시기가 아닙니다. 완전한 변화를 꿈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님들에게 많은 경고의 말씀이 담겨있는데 사도바울도 감옥에 갇힌 위기에 있지만 편지의 수신자인 빌립보 교회도 여러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실 수 있나. 시험 드는 사람도 많이 나올 것이고, 성도님들 간에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유대 율법주의자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 좋지, 그런데 예수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 위에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아야 한다. 유사복음으로 성도들을 혼미하게 하는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으니 교회 안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2)


여기서 말하는 개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이런 격한 표현을 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위로하고 경고하고 그렇게 하고 빌립보서 말미에 이런 말씀을 적어놓았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


아무리 공격이 심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평안을 주실 것이다. 저는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다 보니 사도바울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계속 교회를 공격하는 이런 것들에 접한 성도님들이 주일날 종이 인도하는 예배에서 은혜를 누리면 마음의 안정감을 누리는 교회. 얼마나 꿈꾸는지 모릅니다. 이런 꿈을 목사만 꾸어야 합니까? 가정에 아내와 남편들, 불안해하는 성도들 안정감을 느끼고 권면하는 성숙한 성도의 꿈. 이런 꿈을 같이 꾸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남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이대로 죽을 것인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감옥 안의 성도님들을 안도하는 글을 쓸 수 있는가. 본문의 표현 세 가지를 갖고 우리도 이것을 추구했으면 좋겠다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요동하지 않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1. 그러나


오늘 본문에 그러나가 두 번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그러나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4-6)


늬들이 육체를 자랑하지만 네가 늬들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이전에 자랑하던 것을 쏟아냅니다. 육체적인 자랑. 배경을 자랑한 바울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엄청난 그러나입니다.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러나가 있습니까? 오늘 율법주의자들과 바울이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러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에 빠라거나 열등감에 빠지거나.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남을 밟거나 자기가 밟히거나. 7절에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그러나를 통하여, 여기에 나온 그러느냐는 어떤 그러나입니까? 가치관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이건 히브리서 11장에도 나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 24-26)


왕실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동족들과 같이하겠다.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눅 19:2)


황금 만능주의입니다. 로마와 결탁하면 어떠냐는 것입니까? 마귀와 결탁할 수 있다. 욕먹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어떤 가치관으로 변하였습니까?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가치관이 변한 것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 믿는 사람은 그런 말을 쓰면 안 됩니다. 개같이 벌면 안 됩니다. 그 가치관이 변하니 돈, 돈 하며 피눈물 흘리게 하는 그가 아낌없이. 내 소유의 절반을. 어마어마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변화의 그러나가 있습니까?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신비로워요. 1주일 전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우리교회 청년인데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진짜 잘 살아야 합니다. 제가 여기에 개척 안 했으면 절대 만날 수 없거든요. 하나님이 맺어주신 사람 아닙니까? 참 귀합니다. 두 에비 부부가 저한테 와서 목사님 이제 결혼을 하면 우리 부부는 분당우리교회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29 교회로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받는 은혜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손편지로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 성경 다음으로 열심히 읽었습니다. 앞, 부분 조금 읽어드리고 설교 정리 부분에 나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분당우리교회를 오기 전까지 감정적으로 믿었지만, 성경의 원리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에 기대었습니다. 성인이 되자 매번 당연하게 출석하는 교회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합니까? 신앙에 회의가 온 것입니다.


제 뜻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다가 나중에 돌아오겠습니다. 선언하며 부모님의 영향력에 벗어나 미국, 유럽에 가서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관성으로 갔지만, 유럽에서는 교회가 없는 곳으로가 여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의 결과는 우울증, 불안, 타인을 지나치게 의심함, 중독 등의 문제를 경험하였습니다. 해외에서 15국을 여행하며 즐거운 순간은 있었지만 어떤 것을 경험해도 기쁨, 슬픔은 잠깐이며 마음의 공허함이 커졌습니다.


교회 가라는 가족도 없으니 마음껏 살았는데 마음에 찾아오는 공허함, 우울, 자살 충동, 중독 그렇게 혼미한 상태에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분당우리교회에 가보라 추천을 받은 것입니다. 대학부 목사님에게 갔는데 목사님이 대단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 나와봐라. 자매같이 갈등하는 대학부인데 와보면 알게 된다. 우리교회에서 시작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이제 뒷부분 결론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모태신앙이라고 우리 신혼 때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전도도 못 하는데 애나 많이 낳아야지. 그거 100% 농담입니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애 많이 낳는다고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철 드니깐, 나이가 드니깐 회의가 오니깐요. 교회 교육에 진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에 해당하는 복음의 능력을 가르치지 않으면 교회만 와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교회 열심히 다녔습니다. 저를 돌아보면 교회 생활했던 중고등학생 때 저에게 그려나가 없었습니다. 오늘 가정이, 교회가 연대해서 이 놀라고 온 복음의 능력이 가치관을 뒤집어놓고 그런 신앙인, 그러나를 가르치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얻고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한국교회가 진짜 회복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추구한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얻고 가 없으면 다 꽝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얻고가 아닌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불교 스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고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8:8)


진짜 중요한 포인트를 발 편한 데요. 8절을 다시 보세요. 케르다이노라는 단어인데 고대 산업 용어입니다. 이 상품은 저 상품으로 교환하는 교환 거래를 의미하는 고대 산업 용어를 의미하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으니 손해 보고 살아야지. 이게 그리스도를 얻고가 아닙니다. 산업 용어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약 4:13)


장사하여 이것이 케르다이노입니다. 무엇을 강조하시는지 아십니까? 즐거움도 주를 위해서 바치라. 십자가 져라 그래서 얻는 것이 그리스도를 얻고가 아닙니다. 저울질하고 이런 것입니다. 제가 89년에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저는 미친 듯이 돈을 벌고 40대에 고아원, 양로원을 지을 꿈을 가졌었습니다. 제가 하던 스몰 비즈니스 내려놓고 한국에 목사가 되어서 청소년들을 도와라. 제가 한국 온 지가 32년이 되었습니다. 케르다이노 요즘은 저울질을 많이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사 안되고 슈퍼마켓하고 돈을 벌었으면 뭐 캐딜락도 타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손님이 99센트 물건을 찾는데 내가 아침에 반드시 구하겠다 하고 밤에 달려서 그거 사다가 대주고 했던 일입니다. 불이 탔으니깐요. 제가 30년이 지난 지금 장사하며 살았으면, 한국에 안 돌아왔으면 저울질하며 케르다이노 하는 것입니다. 저울질하니깐, 인생의 장사가 대박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도 행복할 수 없고, 이렇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어렵고, 미국에 있었으면 아내와 같은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계속 그렇게 사시렵니까? 그렇게 아등바등하면서 그런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발견되자는 헬라어로 유니스코의 수동태입니다. 왜 중요하냐면 9절에 나와 있는 발견하다가 쓰여있는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6)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주님, 양을 잃어버린 목자가 양을 찾아냈습니다. 주인 관점에서 그런데 양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주인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수동태를 씁니까? 자기는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발견되기 전에는 내가 율법을 구현하려고 아등바등, 내가 의를 율법으로 몸부림칠 때 전혀 얻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발견된 이후 자기 삶에 이루어지더라. 이런 삶이 왜 기쁘냐. 내가 노력해서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노력해서 득도했다. 우리가 한 것은 없습니다. 수동태입니다. 발견됐을 뿐입니다. 이찬수 목사는 1984년도에 인생의 밑바닥을 헤맨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 발견된 인생입니다. 지난주 누렸던 복은 무엇입니까? 번아웃 이야기를 지난주에 했잖아요. 그래서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얼버무렸지만 최근 일입니다. 잠을 못 자고 무기력해지고 우울하고. 왜 오늘 오픈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십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요. 얼마나 저를 놀랍게 인도하는지 아십니까? 주일날 시간은 점점 가는데 한 시간 넋을 놓고 있어도 그 주에 발견된 자들이 느끼는 복은 무엇입니까? 매 주일 설교하는데 기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 애들이 그 기간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애들도 들어오면 아빠 괜찮아요. 그렇게 가면 설교할 때 보면 신나게 설교하고 집에 가면 어 힘들다. 있으니, 발견된 자들이 누리는 복이 이것입니다. 그분의 힘으로 사는 인생. 지난 화요일에도 이게 팔 풀어졌다가 붙고 확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괜찮았다가 힘들었다가 그런 과정이 약하게 일어납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에 하나님이 나머지 목회에 대한 가이드를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 고백을 하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선 목회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가 주인공이 되시고 중심이 된 목회를 하길 원합니다. 지난주 화요일 가슴 떨리게 했습니다. 너무 가슴이 벅차서 내년 이후 교회를 이끌 29 목사님이 나가시고 젊은 목사님들을 소집하고 화요일의 뜨거움을 간증하고 분당우리교회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교회를 하겠다. 1월 첫주부터 전 성도님들이 추구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목회를 하겠다. 결론을 아까 청년부 결혼을 앞둔 자매의 편지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크리스마스 가정의 트리를 이 정신으로 계속해주시고, 저녁에도 행복한 가족 밥상, 자녀들과 그러나에 대한 말을 나누시고, 3주간 매일 성탄을 기다리며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며 감사를 기록할 수 있는 것을 매일매일 올려드릴 것입니다. 연말까지 계속 묵상하시되 그리스도를 얻고, 기쁨을 맛보는 공동체로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또다시 사람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예배만 드리려다가 호기심에 새 가족 1강 반을 들으려 갔습니다. 성경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가족 반을 통해서 죄의 의미를 알며 내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의롭게됨을 얻고 복음의 핵심 내용을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분당우리교회는 복음의 의미를 알려준 고마운 교회입니다.


이 자매의 고백과 같은 고백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알게 한 교회입니다. 이 수많은 간증들이 분당우리교회와 29 교회와 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11월 2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간절한 기다림이 주는 힘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25-33)


고도를 기다리며 제목의 연극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장기 공연을 해서 연극을 보신 분이 있을 텐데요. 이 작품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연극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연이 이루어지는 작품입니다. 고도는 사람 이름입니다. 연극의 큰 줄거리가 주인공 두 사람이 나무 아래에 앉아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데 끝까지 안 옵니다. 연극의 전체 줄거리가 고도를 기다리면서 오지 않으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허무한 농담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하다가 끝나는 것이 연극의 큰 줄거리입니다. 이 연극을 부조리극이라고 설명합니다. 검색해보니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극작품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쓸데없는 잡담 하다가 끝나버리는 연극이 왜 작품성을 인정받았을까. 최근에 나온 기다림의 의미 책을 보니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흔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가리키며 21세기 뛰어난 희극 중 하나라고 합니다. 공허를 가르치고 기다림은 낭비의 동의어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서 손에 넣으라고 합니다. 마치 기다림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끝까지 안 오고 허무하게 끝나는. 이치에 맞지 않는 극작품이라고 하는데 노벨 문학상을 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니 오늘 이 시대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떤 문화입니까? 기다림은 헛된 것이다. 안 온다. 마음에 충동이 일어나면 찰나를 즐겨라. 오늘을 즐겨라. 이 시대의 문화와 연극이 보여주는 스토리가 너무나 부합하기에 작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연극과 관련해서 이리저리 작품을 찾다 보니 흥미로운 것은 많은 분이 자꾸 질문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기다리는 고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무슨 뜻으로 기다리느냐고 하니깐 희곡을 쓴 작가가 웃기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작품을 썼겠지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의 글들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인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믿는 신앙을 가졌다면 정말 위험하겠다. 예수 믿는 신앙생활이 너무나 막막하고, 극작가도 모르고. 끝내 안 오고. 사실 신앙생활은 자체가 기다림 아닙니까? 성경의 맨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 아십니까?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0)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기다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예수님의 말씀 기다림과 연극의 기다림은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다리라고 가르치시는데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뚜렷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점에서 12월이 다가오면 떠올려지는 인물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 2:26)


유대를 점령한 로마의 앞잡이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한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는데 부익부 빈익빈. 딱 북한이 그런 것 아닙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피폐함. 소수의 악한 지도자들이 이런 시대가 바로 시므온이 살던 시대입니다. 악한 권력자의 불의로. 오죽하면 왕이 죄 없는 세례요한을 치던. 마음먹은 누구라도 죽이고. 한국 드라마 보다가 걸리면 죽인다고 합니다. 이런 공포적인 시대를 살았고, 영적으로 말라기 선지자.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던. 글자 그대로 암흑기입니다. 시므온은 놀랍게도 희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오실 메시아기를 기다리는 인물. 시므온이라는 무명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고도라는 누군지도 모르고 막연하기 짝이 없는 확신 없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최근에 청년 중에 우연히 검색하다가 청년이 쓴 글을 본 데요. 제주도에 내려간 상황입니다. 그 글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연락하였습니다. 만났는데 굉장히 감동을 하였습니다. 자매가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잘 믿고, 대학을 갔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은 복음의 불모지입니다. 계속 공격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매 보러 뭐하러 하나님을 믿느냐 자료도 보여주고 하는데 자매가 뭐라고 말하느냐면 네 말이 뭔지 알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했기에 네가 뭐라고 말했기에 떠날 수 없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누구는 신앙생활이 막연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이 없습니다. 그분의 신앙생활은 고도를 기다리는 게 있다면, 다른 자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도 하심. 네가 뭐라고 말해도 주님을 떠날 수 없다. 차이를 아시느냐고요. 지난주에 오래 사역했던 부목사님께서 메일을 보내셨는데


최근 우리 교회에서 사역 하나하나가 왠지 모를 뭉클함과 감사함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추수 감사 주일은 제 생에 최고의 추수 감사 주일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성도님 중에 18년 루게릭 판정을 받은 분이 있으십니다.


올해 초 방문하셨을 때 호흡은 하였으나 목소리를 잃게 된 성도님이십니다. 봄에 뵌 이후 따님과 소통을 하였지만, 과일 나눔을 하게 되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댁에서 큰 감사를 받았습니다. 안구 인식 자판을 통해서 2시간 동안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침상에 누워있는데 눈 깜박깜박하는 것을 통해서 글씨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한 대로 자판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밝게 인사를 하여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였지만 두 시간 동안 모음, 자음을 치며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표현 한 번 하는데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분이 쓴 글이 다 이렇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침 삼키는 것, 움직일 수 있는 것, 자가 호흡하는 것 하나하나가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며 비록 병상에 누워 계시지만 침상에 누워서 묵상하는 시간이 하나님의 품에서 여행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29 교회로 분립하는 모든 목사님이 앞두고 두려움이 오듯이 이 분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2시간 동안 대화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벌벌 떠는 저에게 응원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눈물까지 흘리며 감사 고백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최고의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보약 선물 받았어요. 분리 개척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루게릭으로 목소리를 잃었고, 눈을 깜박거리며 글을 쓰는 성도님. 이런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메일을 드리기로 한 것은 이 성도님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상에서도 감사하며 이 분의 꿈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간병하는 딸도 믿지 않기에 세상 노래를 틀지만 분당우리교회 유튜브를 틉니다.


지난주에 간증했던 우리 교회 또 다른 암으로 시한부 판정받은 분 아십니까? 바로 오후에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또 하나님의 실수 없으심을 느꼈습니다. 제가 성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목사님을 통해서 전달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지만 저에게 2~3개월 남았다면 이런 여유가 있을까? 말씀을 드리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도를 기다리는 기다림 아닙니다. 올지 말지 모르고, 안 오면 할 수 없고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이 성도님이나, 루게릭병으로 누워계신 성도님이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이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훈련 받아서 영적으로 가나안에 진입하여 성숙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신실한 약속을 의지하는 기다림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은 기다림. 놀라운 유익을 주시는데 몇 가지로 정리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의지하는 기다림을 사는 사람의 유익이 무엇이냐




1. 흔들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이 구도가 너무 안정적이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던 투병하시는 성도님의 상황과 상관없이 안정적이듯이요.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범죄 사건에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연휴가 되어 있느냐고요. 영화를 봐도, 소설을 봐도 목사, 신학가 크리스천 어떻게 된 거냐고요. 왜 우리가 깨끗하심과 같이 깨끗하시느니라.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한 것을 놓치고 있는가? 소망을 가진 자마다. 저와 여러분이 소망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경건한 삶의 자리로 가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50에 읽는 논어책을 보고 옮겨적은 것이 있습니다.


오도일이관지


공자가 70이 넘은 상태에서, 쓴 글의 뜻은 나의 길은 하나로 꾀어져있다.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할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다. 제가 70 넘어서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흔들리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비정상 아닙니까? 이것이 가능하도록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2. 영적인 안목과 통찰력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8-29)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몰라보던 메시아를 무명의 할아버지가 알아보는 영안이 열린 것입니까?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눅 2:25-26)


시므온에 묘사되는 성령.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로 번역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승천하시는 마지막 제자들에게 하시는 부탁이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느냐고요. 정말 시므온처럼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약속을 따라 제주도에 있는 젊은 청년처럼 성령의 인도 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분당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으로서 기도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안목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안목은 사물이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능력. 통찰력은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큰 교회에서 담임목사나 당회가 판단 하나 잘못하면 1억2억 날아가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두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젊은 교역자들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헌금도 많이 못 하는데 성도님들이 하시는 헌금이라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드림 센터 교역자 실이 있는 8층 복도 한두 개 빼고 다 꺼져있습니다. 큰 교회가 복도 불 아낀다고 얼마나 아끼느냐고요. 교역자들이 복도를 오가면서 느끼라고요. 성도님들이 땀 흘려 눈물의 결정체를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여름에 저는 담임목사 방 혼자 쓰니깐, 어지간하면 에어컨을 안깁니다. 설교 준비할 때만 빼고. 담임목사님이 에어컨 킨다고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고요. 정신입니다. 종에게 분별력을 달라고. 통찰력을 달라고. 뭐 하나 잘못 판단해서 피 같은 헌금이 엉뚱한 데로 세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통찰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답은 딱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성령 충만해야 한다. 네가 생각으로 하는 목회는 안 되고 시므온이 경험한 것처럼 성령의 인도 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사춘기 자녀를 기르시는 모든 분의 고민이 그것 아닙니까? 잘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는데 부모가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므온에 주셨던 성령의 인도 하심. 아버지 겉만 번지르르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무지해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던 상황에서 시므온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통찰력은 기다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님의 인도 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눅 2:30-33)


제가 여러분에게 마리아, 요셉이 시몬의 통찰력을 놀라워했듯이 예수 잘 믿는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믿음의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마지막이 아름다운 인생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8-29)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날밤을 새우고 성적이 잘 본 애들이 이제 시험 다 끝났다. 딱 이런 느낌입니다. 청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이 많은 분들의 모든 분의 소원은 마지막이 잘되기를 원한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더 이상 여한도 없고,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것도 없고, 시므온처럼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도다' 저와 여러분의 노년이 이렇게 마무리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언젠가 소진으로 엄청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사전 의미로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한 사람이 극도로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다. 제가 딱 맞으랬습니다. 저는 새벽에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번 아웃이 무서운 게 새벽이 힘든 것입니다. 저는 떡 중에서 벌떡을 좋아합니다. 새벽에 2시, 3시기가 되면 벌떡 일어나는 사람인데 번 아웃이 무서운 게 안 일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벌떡은 아니더라도 서제 않는데 너무 무기력한 것입니다. 힘이 다 빠지고 멍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3 ~ 4주 동안 주일 설교가 진짜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묵상한 것을, 주일 새벽에 3 ~ 4시간 총정리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멍하게 있으니깐 1부 예배가 아침 7시에 있는데 큰일 났네 이거, 3 ~ 4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 하나님께서 무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에벤에셀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엄벙덤벙하면 안 되는데 너무 신기한 것이 단에서나 그 설교이고, 번 아웃이 와서 3-4주 무기력해서 자판도 안 두드려지는 상황에서 설교해도 그 설교고요. 제 이야기를 듣고 아 그때 설교 3~4주 개판으로 하듯이 그때가 그날이었구나. 안 계실 것입니다. 개판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에벤에셀이 저를 살려주었다 했잖아요.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용을 쓰나 긴장해서 준비하나 항상 그 설교입니다. 너무나 번아웃이 와서 무기력할 때 저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그분을 의지하면 되는데.


두 번째로 극복한 것. 장애인 어머니가 하신 것. 엄마들이 사랑으로 하시는 말씀. 내가 얘보다 하루 더 살고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숭고한 이야기입니다. 숭고한 사명입니다. 제가 29 목사님들 모아놓고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장애인 어머니의 말씀을 알 것 같다 고. 내 남은 생에가 29 교회가 잘되는 것 돕는 일이 내 남은 숙제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빨리 번아웃이 와서 되겠냐고.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 2:26)


의욕이 떨어진 분이 계세요? 여러분 힘 내셔야 합니다. 아직 사명을 감당하려면. 언젠가 우리가 소망의 날이 옵니다. 저도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장애인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듯이, 제게 사명이 있기에 이 아이보다 하루 더 살기를 원합니다.


분당우리교회 개척 19년 만에 이렇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빨리한 데가 없었습니다. 11월 말에 크리스마스 트리한 적은 없고,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글씨. 시므온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는. 저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분의 선한 영향력을 받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기다림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 밥상 시작하셔야 합니다. 사명 경연대회를 하려고 합니다. 백화점 앞을 지나갈 때마다 속상합니다. 엄청나게 큰 트리가 있는데 예수님은 뺏습니다. 스타벅스는 좋아하지만 괘씸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제거하고 해피 할리데이로 바꾸었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님이 주인공이신 트리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가정 가정마다 만들어서 홈페이지에 올려주시면 팀에서 심사해서 제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매 광고가 끝날 때마다 트리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11월 2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광야에서 테스트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출 16:1-10)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손흥민 선수 아버지가 쓰신 책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기본에서 시작한다. 제목입니다. 책에 나온 몇 구절을 인용해드리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몇 가지가 있다. 겸손하라. 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너의 것이 아니다. 감사하라. 세상은 감사하는 자의 것이다. 삶을 멀리 봐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비운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다.


상대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그 상황이 공을 툭 차도 골이 들어가더라도 사람을 챙겨라. 너는 축구선수 이전에 사람이다. 사람이 먼저다.


나에게 스포츠맨십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리스팩트다. 상대편에 대한 존중, 같이 뛰는 선수들에 대한 존경.


왜 책의 제목이 기본을 지키는 삶의 철학이라고 정했는지 이해가 되시죠? 본인이 축구선수니 골 넣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았는데 그런 내용은 없고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 가득 찼습니다. 제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설교준비를 하면서 아버지가 자녀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기본적 됨됨이, 인성 교육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우리를 어떻게 훈련하기를 원하는지 이것이 연상됩니다. 홍해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이 딱 손흥민 아버지와 너무 같은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홍해를 건넌지 한 달이 지난 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지 가나안으로 도달하기 전에 그 광야를 훈련 장소로 정한 것입니다. 왜 광야를 정하였느냐면 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노예입니다. 태어나니 윗대, 그 윗대, 그 윗대 노예로 살았습니다. 몸은 애굽의 악재를 벗어났지만, 마음은 상황 환경에 매어살고 하나님께서는 목적지 가나안에 도달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도록 광야를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점은 무기 쓰는 법 없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훈련, 인격 훈련, 겸손 훈련 전부 다 이런 훈련입니다. 제가 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교육책을 보면서 하나님이 떠올랐는지 이해가 되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원망과 불평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4)


홍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추격해 건너는 과정에서 바로 왕의 군대의 추격에 바로 왕의 군대를 멸하고 그들을 구원해줍니다. 홍해를 걷는 백성들이 극찬합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이게 무려 21절까지 계속됩니다. 계속 하나님을 극찬하던 그들이 마라의 쓴 물에서 마실 물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니 태도가 100% 돌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뢰하고 상황에 눌려 사는 그들의 모습 아닙니까? 끌려다니는 삶에 익숙하다 보니 삶에서 원망과 불편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출 15:25)


쓴 물을 달게 만들어주시는 기적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험하실 새입니다. 아이들이 한 학기 수업이 끝나고 방학을 앞두고 있으면 기말고사를 봅니다. 중간쯤에 중간고사를 봅니다. 애들이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교육을 잘 이해했나 그것을 점검하는 것이 기말고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시험장소로 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초점은 광야가 아니라 목적지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하나님 자녀의 인격을 어떻게 성숙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순간순간의 안락함, 불평에 있으니 불만과 원망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배려하여 광야 훈련을 통해 주인의식을 갖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로 그들을 훈련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1-3)


광야생활에 결핍된 것이 많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원망이 습관처럼 터져 나오는 상황인데, 앞서 살펴본 15장과 똑같은 조치를 취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창 16:4)


이들을 시험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 내내 추수 감사 주일을 묵상하면서 왜 하나님은 11월 말에 추수감사절을 허락하셨는가? 감사라는 도구를 통해서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성숙하였는지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검사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두 주 추구감사절 감사 챌린지를 보냈는데 어떤 분들은 코로나 19 와중에 감사할 것이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첫 주에 다 채우고 그 다음 주에 홈페이지에 오셔서 다운로드 받고요. 쥐어짜듯이 감사하는 분들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추수 감사 주일은 감사라는 도구를 가지고 어느 만큼 성장하였는지 체크하는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요. 바로 지난주입니다. 교구 목사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성도님이 계시는데 이 분이 그동안 항암 치료를 33번 받았다고 합니다. 항암 치료를 한 번 받으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죽음입니다. 그동안 기적적으로 견뎌온 분이십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게도 최근에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서 병원으로부터 너무나 가슴 아픈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앞으로 2-3개월 정도만 남았다고.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극약 처방하듯이 주사를 맞으면서 그 고통을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평창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는데 왜 교구 목사님께 연락이 왔느냐면 이찬수 목사님과 꼭 통화하고 싶다고. 보통 이렇게 어려움 중에 있는 분들이 통화하고 싶다는 것은 기도해 달라고 그것 아닙니까? 물론 기도를 원하셨겠죠. 그런데 근본적으로 저와 통화하고 싶었던 포인트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 목사님과 통화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분당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 듣고 그 과정에서 얻었던 은혜가 너무 크기에 목사님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극심한 진통으로 고통을 버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평온한 것입니다. 이 분과 전화통화를 하고 이 시간까지 그 통화가 마음에서 쟁쟁 거리는 것 같습니다. 설교는 제가 하지만 오늘 수많은 정말 하나님의 광야 테스트를 눈물로 견디어 내셔서, 이 땅에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 저는 한 번도 그 길을 가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덤덤한지. 하나님의 초점은 이땅에 있지 않다고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천국 백성에 있는 인격적인 훈련을 위하여. 이 땅에서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 땅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훈련받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만나보고 싶다. 기도도 해드리고 싶지만, 너무나 대화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고통에 빠진 경우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코로나 19로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님이 인내하고 훈련을 견디는 수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에게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느냐. 감사 챌린지로 또다시 도전하기를 원합니다.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 타이틀로 분당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한 달을 보내기를 선포합니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하다 보니 미국은 11월 넷째 주 목요일 공휴일 이입니다. 아는 분들을 초대하고 기쁨으로 감사를 보내는 아름다운 날을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보내면 크리스마스 분위기입니다. 요즘 상술 때문에 변질하였지만 우리도 추수감사절, 내가 이 만큼 성숙한 것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내일부터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왜 추수감사절이 11월 마지막에 있고 크리스마스가 12월 마지막에 있는지. 한 해를 보내면서 코로나만 보이면 어떡하겠습니까. 1만 성도 파송운동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함유하시는 어떤 분들은 분당 우리 교회에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아닙니까?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를 원합니다. 10년, 20년 지났을 때 이찬수 목사님 많이 늙었겠지? 이러면 최악입니다. 사람이 생각나면 최악입니다.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예수님 만났던 교회지. 그 교회에서 예수님 사랑하는 법을 배웠지. 예수님이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찬수 목사님은 철저하게 잊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압축하고 압축하면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 남는 분당 우리 교회 신앙생활이 되기를 위하여 감사 챌린지를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아서 한 주 예수그리스도 은혜에 대한 감사. 많이 기록되고 되뇌어졌으면 합니다. 이런 마음의 소원을 하고 광야를 걷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테스트라면 어떻게 합격, 많이 성장했어.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점검해야 할 4가지 잣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1. 근시안적인 삶의 태도를 돌아보라


제가 근시안 적에 대해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앞날의 일이나 사물 전체를 보지 못하고 눈앞의 부분적인 사물에만 사로잡혀있는 것. 하나님은 멀리 가나안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데 백성들은 눈앞에 있는 것. 그들은 일희일비. 이것이 우리 아닙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온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가. 50에 읽는 논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희 또래에게는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에서 문장 하나 발견했습니다.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신이 있다. 이 문장 중에서 원려 단어를 한 주간 주목하였습니다. 원려는 먼 앞길까지, 먼 앞일까지 미리 헤아려 생각함. 자녀교육에 필요한 것이 원려 아닙니까? 온통 수능 점수만 잘 받으면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원려가 없기에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방황하는 것 아닙니까? 광야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는 거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이 땅이 목적지가 아닙니다.




2. 과거에 매여 사는 삶의 태도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누가 들은면 애굽의 왕족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언제 그런 삶을 살았냐고요. 세상에 자기 입으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고통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절규의 입술로 과거를 미워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의 특징은 과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맨날 옛날이 좋았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과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뭐가 과거가 좋습니까? 영어로 프레젠트는 선물이라는 뜻이지만 현재라는 뜻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이 선물입니다. 100세 사시는 김형섭 교수님 말씀을 들어보니 65세부터 좋았다고 하십니다. 제가 정말 부탁하는데 과거에 속지 마세요. 착각입니다. 지금이 좋은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수 만 명 집회하는 사진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 사진 들고 뭐하려고요. 지나간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요. 누가 햄버거 사주면 그거 찍습니다. 나중에 한국 와서 먹고 싶을 때 구경하려고요. 저는 감사패, 공로패 남겨놓지 않습니다. 무슨 공로패가 중요합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께 공로하고있는것이 중요하지. 우리가 얼마나 과거에 매여 살기 쉬운 존재인지. 사도바울처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신혼 때보다 지금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 살고 있습니다. 신혼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서툴고 사랑의 표현도 못 하고 어리숙한 때로 왜 돌아갑니까?




3. 사람만을 상대하는 태도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출 15:24-25)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하지 마세요. 인간은 원래 실망하는 존재입니다. 왜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까? 백성들은 모세를 집중하는데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이 시선의 차이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세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여러분도 하나님을 집중하세요. 왜 이찬수 목사님이 잊혀야 합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눈물에 집중하십니다.




4. 이웃을 배려하는 삶의 태도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출 16:16)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고령이셔서 그런지, 너무 어려서 그런지 하나님의 만나를 거두러 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 것도 너희들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놓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지침을 묵상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미입니까? 책 내용은 기억 안 하는데 말이 쟁쟁 거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으면 받은 존재입니다. 창피한 이야기인데요. 나이가 이렇게 들어도 과자가 맛있습니다. 나 먹으려고 사두면 다 없어집니다. 숨겨놓고 먹는데 맛있겠습니까? 다 불러가 지고 같이 먹는 게 재밌더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 하나님의 정신이 만든 결과를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 16:17-18)


이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계속 강조하잖아요. 마음껏 누리세요. 그렇게 하고 남는 것은, 무슨 사연인지 연약한 자들의 몫입니다. 왜 우리가 추수 감사 주의 헌금을 가평 우리 마을을 위해서 사용합니까? 정성껏 과일을 준비하고 비대면으로 오시는 분들은 홈페이지로 오시는 분들에게 과일바구니를 드립니까? 경제적으로 과일 하나 사 드실 수 없는 분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합니까? 너를 위해서는 일인분만 가져가고 만나를 누릴 수 없는 사람에게 대신해서 거두어 주지 않겠니?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광야에서 테스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셔서 하나님의 테스트에, 작년 이만큼 보다 성장했습니다. 불평이 줄어들었습니다. 고백해내는 믿음의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1월 1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약자의 눈물을 보심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 16:7-16)


아마도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시는 송해 선생님을 모든 분들이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연세가 90대신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시는 모습을 보면 부럽습니다. 얼마나 건강하고 정정하신지. 이 분이 저희 어머니하고 연세가 비슷하다 보니 활동적인 것을 보면서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웃기시는 것을 보면서 평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셨나 보다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 이 분과 관련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기사가 남산 절벽 투신 ... 가지 걸려 살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오셨던 실향민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생활이 어려운지 남산 절벽에서 투신했는데 소나무 가지에 걸려 살았다고 합니다. 오래전 20대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남대교를 타고 가다가 숨졌다고 합니다. 오래전에 일어났지만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지금도 한남대교를 걷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겉으로 활력이 넘치시고 명량하시는데 내면에 이런 아픔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이게 인생이다. 저나 여러분이나 아무렇지도 않은듯 씩씩하게 살아도 마음안에 크고 작은 아픔, 상처가 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살아가는게 인간이지 않는가. 지난주 본문 하갈를 묵사하다가 송혜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너무 인생이 가엽고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사람인데 남의 나라에 와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본인이 희망하고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자기를 인격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물건 취급을 하니 대리모라고 하나요. 옛날에 씨받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성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인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 광야로 도망갑니다. 얼마나 인생이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주일 코미디 프로를 보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웃기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남종 여종 식솔이 얼마나 많은데 종 하나 없어졌다고 누가 주목하겠느냐고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상처 많고 아픈 하갈을 하나님이 만나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


영어 성경을 보니 find의 과거형으로 되어있습니다. 만나다는 히브리어로 맛자라고 하는데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맛자 단어를 구약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창 18:26)

이 심각한 상황에서 찾으면 나온 것이 맞자입니다. 삿삿히 뒤져서 의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 이것이 맞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광야의 샘물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만났다고 하는데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찾고 또 찾은 것입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여종 하나 없어진 것 물건 하나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온 마음이 쏠려있습니다. 더 감동인 것은 지난주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여종을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5)


대리모로 쓸만한 여종 하나를 찾았는데 얼마나 인정을 했으면 하갈을 택했습니까? 그럼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 16:6)


이 부부가 하갈을 대하는 태도가 비인격적인 물체를 대하는 것 같습니다. 이 상처를 안고 광야를 뛰쳐나간 하갈입니다. 그를 만나자마자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 (창 16:7-8)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처음 나옵니다. 토미 워커 유명한 찬양이 있는데 내 이름 아시죠.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이 찬양을 만들었는데 곡의 배경을 듣고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언젠가 토미 워커 목사님이 필리핀 집회에 갔습니다. 제리라는 고아 소년을 만났습니다. 제리라는 아이가 사랑에 목마르고 버림받은 기억이 있는데 제 이름 뭐에요? 계속 확인하는 것입니다. 네 이름 알지 제리잖아. 자꾸 와서 묻는다는 것입니다. 매번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목사님이 불쑥 드는 생각이 얼마나 버림받은 기억이 강했으면 존재를 확인받고 싶을까. 모든 이 땅의 인생은 이 아이처럼 사랑에 목마른 존재. 그러다가 불쑥 영감이 떠올라서 만든 찬양이 이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서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가 들으시죠


많은 성도님과 함께 목회하지만 텅 빈 들판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65세 이상 브라보 시니어 어른들. 정말 기도가 나옵니다. 분당 우리 교회가 청년들 많이 모이는 교회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평생 주의 교회, 가정을 위하여 헌신한 어른들인데 은퇴하니 찾는 사람도 없고, 들판에 서 있는 고독감에 있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가 나옵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아무리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 범주에서 벗어난 인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는데 인간의 위로는 인사말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집에 실컷 놀다가 가는 사람보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했는데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버리는 힘이 없는 것이 인간의 인사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격려의 위로의 말씀에는 인간이 갖지 않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오늘 하갈를 향하신 인간의 위로를 보니




1. 문제의 원인을 깨닫게 하심


하나님께서 하갈의 이름을 불러주셨다고 했는데 이름만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8)


왜 깔끔하게 이름만 부르시지 왜 여종이라고 부르셨느냐고요. 아까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에는 문제의 원인을 지각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왜 하갈이 비참한 자리에 빠졌습니까?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4-5)


물건 취급한 아브라함 부부에게 있지만, 근원적으로 임신하고 나니 교만해져서 임신도 못 하는 늙은 여자 주제에 멸시하는 것이 쫓겨나는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자각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방자히 행할지 모르는 인생입니다. 항상 말씀이 행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중에 교만한 사람이 이렇게 많고 목사들 중에 이렇게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까. 말씀이 작동이 안 되는데 목사가 무슨 소용이냐고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주의 법도를 배우는 유익함이 있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얻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되기를 원합니다.




2. 회복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심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창 16:7)


하갈이 상처받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시고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8)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8-9)


도대체 어디 숨었니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거기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온 천하 만물보다 귀하고 귀한 존재로 지었는데 이 초라한 꼴이 뭐냐는 것입니다. 하갈에게 근원적인 문제와 그 길로 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9절에 냉정하게 한 마디 붙이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하나님 너무 잔인하신 것 아닙니까? 가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하시겠습니까? 한주 내내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가 와 닿지 않아서.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잔인하게 말씀하시는가. 그 악한 자기를 핍박한 여주인에게 수하를 복종하라니.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다가 몇몇 자료에게 은혜받았습니다. 복종하라는 단어는 히브리니어 아넬이라는 히트파엘형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재귀형 동사입니다. 복종하라는 너 스스로를 낮아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이 제시하는 포인트입니다. 여기로 내몰린 것은 주인의 나쁨이 근원이지만 네가 제공한 측면도 있다. 애도 못 낳는 늙은 여자라고 폄하해서 격분한 것 아니냐. 현실도피가 아니라 문제에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딪히라고요? 겸손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낮아짐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 16:10-11)


임신한 산모 입장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메시지였습니다. 인생의 궤도에서 벋어나 있으시고 관계가 어긋나면 회피하면 안 됩니다. 직면해야 합니다. 돌파해야 합니다. 더 낮아지는 것입니다. 29 예비 담임 목사님께 노래를 누르는 것이 있습니다. 사자성어를 기억해야 한다. 역지사지. 우리 성도님들이 10년 20년 은혜를 받고 있었는데 얼마나 아프고 힘든 일인지.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목회자가 아니다. 저도 역지사지로 29 목사님들을 생각합니다. 담임목사님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느냐고요. 너무 야속하지만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봐라. 평생을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연세 많이 든 여주인에게 어떻게 그런 태도를 갖을 수 있는가? 겸손히 낮아져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해법입니다. 하갈에게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독특하고 이례적인 일을 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 (창 16:14)


브엘라해의 뜻은 나를 살피신 살아계신 자에게 속한 우물입니다. 내버려두었으면 그 우물은 송해 선생님에게 한남대교와 같습니다. 평생에 고독하고 외로운 절망의 샘으로 자리매김할뻔했던 샘을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해주시니 감격의 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야반도주하듯이 도망갔습니다. 비참한 그 자리에 자기가 자업자득한 것. 자기가 문제를 만든 사건이지만 야곱을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28장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8-19)


언제까지 절망적인 샘을 보면서 쫓겨난 기억, 배척당한, 핍박당한 그 샘이라고 기억하고 사십니까? 룻을 벧엘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 고통의 샘을 브엘라해로이. 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하나만 하면 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하나님이 먼저 나오고. 오늘 여기에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그것을 하갈처럼 인식하고의 차이입니다. 교회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에게 호소하고 꾸짖고 싶습니다. 인간들은 실망시킨다고 하더라도 애굽으로 가려고하면 큰일납니다. 돌아가고 회복해야합니다. 하갈을 만나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 외로운 루스가 벧엘이 될 줄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추수 감사 주일이자 대학 청년 구 총동원 주일입니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청년들이 모여 루스에서 벧엘로 바꾼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고 싶습니다. 이런 선포를 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마음에 소원을 두고 있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이 루스에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평 우리 마을은 벧엘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일 추수 감사 주일 헌금은 전액 가평 우리 마을을 위해서 쓸 것입니다. 우리가 가평 우리 마을을 위해서 작정하고 헌금하지 않아서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번 힘을 주셔서 지친 사람들에게 벧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번 추수 감사 주일 한 가지. 과일을 가져오시면 재포장해서 상처받은 분들에게 선물을 드렸는데요. 올해는 추수감사절 과일 선물을 유난히 한해를 보낸 분들에게 드리려고 합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분들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예배를 가정에서 드리는 분들을 위해 홈페이지 오셔서 과일 도매상 하시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분과 의논이 되었습니다. 홈페이지에 오셔서 과일 헌금을 해주시면 그것으로 올 한해 힘드신 분들에게 전달해드릴 계획입니다. 큰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 한해 광야로 내몰린 하갈과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성도님이 계신다면 작은 정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 첼린지. 성격이 급한 분들은 지난주에 다 썼다고 합니다. 이 파일을 월드비전에서 허락해주셔서 카피해서 쓰실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 내내 이것이 좋지 않습니까? 월요일은 내게 주신 것에 감사, 화요일은 가족, 수요일은 교회, 목요일은 이웃, 금요일을 환경, 토요일은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11월 0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믿음의 다른 말은 기다림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1-6)


성경을 읽다 보면 인내에 대한 말씀이 종종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인내로 기다리지 못해서 어려움과 위기를 겪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송아지 우상 사건 아닙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 갔는데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엄청난 진노를 받고 민족이 멸절될 위기를 겪었습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인내하지 못해서 아들을 고생시킨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신했을 때 강하게 인도한다고 하셨는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 있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하려다가 야반도주하듯이 아들이 도망하고 평생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 인내하지 못해서 겪어야 할 비극이 종종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도 똑같은 경우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1-2)


사실 오늘 본문을 다루는 바로 앞 창세기 15장 전주에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존재를 걸고 하신 약속이 앞장에 있었는데 이렇게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인간적인 편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곳으로 갑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이렇게 잘못된 제안을 했던 사라 자신이 경험한 것은 물론이고 이것이 가져다주는 비극적인 일을 다 알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람 사라 부부를 보면서 이 말씀이 맴돌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 10:36 새번역)


아브람, 사라가 이렇게 위험에 빠진 내면의 도사린 두 가지 위험요소가 있었습니다.




1. 상대방은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


사라가 여종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1-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창 16:5)


사라는 여종 하갈을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구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고 죽을아하면 죽고. 아브람도 똑같습니다. 여종 하갈이 임신하고 하갈을 대하는 태도가 보이니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 아닙니까? 남편 앞에 당신 책임 아니냐고 추궁하니 아브람의 대답이 충격적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창 16:6)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자기 여종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아내 사라가 영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전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면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는 어리석은 일이 생깁니다. 지난주에 오징어 게임은 설교 원고에 없는데 이야기했는데요. 자꾸 말하면 보실까 봐. 어릴 때 했던 달고나 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요즘에도 하는 것을 더러더러 보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놀이로 드라마를 만든 것은 좋은데 엄청 폭력적이에요. 수백 명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찾아오는 마음으로 갔는데 딱 1명만 남고 다 죽여버립니다. 이런 드라마가 나온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세계 1위다. 젊은이들이 열광한다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파리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죽입니다. 미국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총기 난사사건 어디서 기인했겠습니까? 온 TV가 그런 것을 보도로, 참 가슴이 아픕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희 동네 슈퍼마켓이 규모가 있는 데요. 오랜만에 가봤더니 계산대에 직원들이 없어지고 무인판매대가 되었습니다. 씁쓸한 것입니다. 앞에 종업원하고 손님하고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기도 하고 제 차례가 되면 쑥스러우니 짧은 한 두 마디지만 마음을 전하는 것이 사라지고 거대한 침묵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점점 인간과 인간이 대화하고 계산하는 것이 사라지고 기계와 상대하는 시대의 흐름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저는 29 예비 담임 목사님들에게 당부하는 몇 가지가 있는 데요. 제일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와 당신과의 관계가 거래 관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상보다 넉넉하게 많이 주네. 그게 아니라 존재를 감사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동전의 양면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성도님들과 거래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따라가시려나 그런 게 궁금하다 할지라도 따라오시는 분들, 안 따라오시는 분들 이렇게 구분지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인격적인 만남은 거래관계, 저 사람이 유익하네, 가까이 가면 얻을게 있네. 이런 위험이 있다면 교회에서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남편과 아내가 결혼하면 화목할 수 밖에 없는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친절한데 가정에서 그렇지 않으면 깊이 되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한 사람 철학은 한 영혼을 기능으로 대하지 않고 인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쓰러저 죽을 때까지 모든 성도를 만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성도를 만나더라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합니다. 최근에 우리 부부 장로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년퇴직하시고 쉬시는데 성실하시고 책임감이 강하셔서 취직되셨습니다. 나이가 되었는데 다시 일할 거리가 생겨서 감사하게 다시는데 장로님이 뭐라고 하시느냐면 아내 되시는 권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해서 취직했다고. 이 권사님이 하나님께 열심이 기도했습니다.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응답받은 것이라고. 그런데 그다음 말이 감동적입니다. 왜 돈이 필요했나면 오래전부터 순장 사역을 하시고 교회를 잘 섬기셨기에 성도님들 중에 상담받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제가 알기도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성의없게 한 적이 없습니다. 젊은 자매님의 기도제목을 듣고 마음이 우울하시고 힘드신 분인데, 건성건성하지 않으니 시간이 갈 것아 아닙니까? 제가 밥도 사주고 커피를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당신 월급의 절반은 내꺼야. 농담으로 하셨지만, 장로님도 귀하신 게 허투루 듣지 않고 진지하게 수용하는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의 논리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 도우면 떡이 나와 밥이 나와. 떡이 나오고 밥이 나와 인격체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이기에. 매달려 기도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16장 영적으로 침체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갑질하고 허울뿐입니다. 오늘 16장에서 보여지는 아브람과 사라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악한 시대의 영향력 아래 놓임


제가 기동년교수님의 책을 보니 사라의 제안이 우리 관점에서 생뚱맞습니다. 난임이라고 딴 여자하고 아들 낳아오세요.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수님 책을 보니 당시 사회는 대리모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잣집 여주인은 사라처럼 씨받이라는 끔찍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말이 통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악한 시대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고 합니까? 더 기다려야 한다.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며 내 모든 걸 걸고 약속을 지킨다고 하셨던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시대에서 통용된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하나님 말씀의 영향을 많이 받으세요? 시대의 영향을 받으십니까?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악한 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낸시피가 내 몸을 사랑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뉴욕에서 일하다가 은퇴하신 팀켈러 목사님의 말을 인용합니다. '전사인가 자유인인가?' 한 사람은 주후 800년, A.D 800년 전에 엥글로 색슨족 전사 한 사람과 뉴욕 맨해튼에서 살고있는 청년 한 사람을 비교합니다.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내면의 본능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앵글로 섹슨 전사는 무례하게 대하고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보고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전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나야. 이게 내 정체성이야.'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전사 맞아. 법을 어긴 사람을 때려죽이는 정체성을 갖었어. 충동이 하나 더 있는데 동성애 충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만 보면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사에게 있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거야. 똑같은 충동을 이 시대에 뉴욕의 맨해튼에 있은 청년에게 일어났다고 해봅시다. 지하철에 있는 청년에게 누가 새치기하면 죽이고 싶다. 이러면 분노조절 프로그램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겠다. 동성애 감정이 일어나면 나 이런 사람이야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인간은 사회의 상황과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A.D 800년에 태어난 사람은 그 시대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점점 혼미한 시대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진리가 아닌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설교하는 저를 위시해서 저희 모두가 해당하는. 이 시대가 미혹게 하는 영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시대의 조롱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창세기 15장을 다루면서 다룰 게 많고 시간이 없어서 다루지 않은 포인트가 있는데 지난 한 주 내내 잔상으로 제 머리에 남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창 15:9)


하나님이 이렇게 명하시고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 15:10)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창 15:11)


솔개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집요하게 아브라함을 괴롭히는 상황에서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창 15:12)


우리 자녀들을 혼미하게 하는 너무나 많은 것이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우리 시대 목회자의 코드는 고뇌이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고뇌이다. 오늘 본문에 너무나 어려워 흑암과 어려움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였더니, 이런 시대에 살고 있기에 꿈꾸어야 할 것은 17절입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하나님께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눈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믿음의 다른 말은 기다림이다. 더 많은 솔개가 우리를 지배할지라도. 오랜 하나님의 침묵이 있더라도. 내면의 흑암과 두려움으로 혼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횃불로 나타나실 하나님. 횃불 이미지로 나타나실 하나님.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 10:2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신앙생활은 기다림입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는 자녀들을 품고 눈물로 기도하시는 여러분. 기다림입니다. 지난주에 맨 마지막에 보여드렸던 골판지 간증이 한주 내내 화재였습니다. 많이 우셨데요. 우선 코로나 19전 꽉 찬 본당을 보고. 어린 중고등학생을 위시해서 구순 어르신에 이르시기까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간증을 했는데 처신 자 남자분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 만나기 전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10년 전 회사 부도, 빚보증. 자살 충동. 뒤집에서 공동체 보살핌 안에서 다시 희망을 찾고 뚜렷한 목적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주 중에 홈페이지에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강도 만나 그간 죽어가던 나를 만난 하나님. 실업자. 지체장애인. 술과 담배. 삶의 만족도 10점 중 1점. 예수님 만나 모 구청 정신 담당. 중앙 자살 센터장 최우수상. KBS 방송 출연, 삶의 만족도 10점 중 15점. 달라진 삶을 표현했는데 울컥했던 아내분의 댓글이었습니다. 몇 년 전 골판지 간증을 보니 그 후 슬픔을 겪었던 것이 안쓰러운 것이 생각났어요. 삶의 뚜렷한 목표를 잊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다락방, 찬양대, 오가며 격려해주신 분들로 세곂 네 곂 꽁꽁 싸매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 분이 Before, After 간증이 공짜로 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인내하고 기다리고 견디며 그것들을 이루어갔다는 것이 저에게 와 닿았고, 성가대에서 제자 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격려해주는 것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은 공짜로 이루어졌지만 예수 믿은 다음 그리스도의 성화를 통하여 많은 인내, 많은 대가지불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는 결론을 맺기 전에 한 가지 포인트만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남대학교 병원 정신의학과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늘 결론을 이렇게 맺을 줄 알고 놀라운 섬리가 자주 겪는 분입니다. 저도 제 메일 주소를 모르니 교역자를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내용은 의사분이 속해있는 전남대학교 정신의학과 팀이 코로나 이후 연구를 했는데 코로나 블루와 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솔루션. 코로나 19로 인한 우울감 무기력증을 말하는것 아닙니까?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을 연구했습니다. 코로나 19와 스트레스 예방 솔루션의 예방의 하나는 감사다. 교회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의학 전문가가 연구한 것입니다. 정부에서 발주해준 예산을 가지고 그렇게 연구한 결론이 우울함, 어두운 마음을 몰아내는 것이 감사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왜 아브람과 사라가 갔는가? 감격이 없습니다. 아내 사라의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안주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기다림입니다. 감사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라가 하나님이 언제 자식을 주는지에만 매달려있지 않고, 어떻게 자기를 인도해주시고, 엉뚱한 길로 판단을 잘못해서 과거에 어떤 일로 되돌려주셨는지 감사함으로 기다릴 수만 있다면. 지난주에 소개한 월드 비전에서 너무 고마운 일을 했습니다. 감사 노트를 10만부를 준비해서 원하는 교회마다 보내주시는데 분당우리교회도 엄청난 혜택을 받았습니다. 추수 감사 주일전 한 주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부터 하지. 추수감사절까지 3주 남았는데 그냥 하시잖아요. 쓰다가 만것 다 꺼내서 찾아보세요. 아무 노트에다 해도 괜찮습니다. 훨씬 다듬어진것은 매 요일마다 주제가 다릅니다. 월요일에는 나에 대하여, 화요일은 가족에 대하여, 수요일은 교회에 대하여, 목요일은 이웃에 대하여, 금요일은 환경에 대하여, 토요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고 감사를 찾자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하실 수 있겠죠? 집에 있는 감사 노트를 다 꺼내서. 추수 감사 주일 한 주에 정식으로 쓰고. 이 방식대로 쭉 따라가면 3주간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백 감사가 나옵니다. 내일부터 감사 노트를 시작하겠다 결심하시면 아멘 해보세요. 저도 시작하고 여러분도 시작하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억울해서라도. 하나님 좀 더 인내하기를 원합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되 감사함으로. 과거에, 예전에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셨는지 되돌아보고 점검하면서.






10월 3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절박함이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7-21)


지금 우리나라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신간 서적을 봐도 그렇고 많은 인문학 인터넷, 유튜브 강의를 봐도 그렇고 인문학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어있습니다.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님의 강의입니다. 저에게 메시지가 되는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이 현상이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위기를 맞았다는 분석을 하는데 인문학과 상관없는 기업인들에서 열풍이 부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답으로 하시는 말씀이 학이라는 것은 정지해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학을 학으로만 다루는 사람은 멈추어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불고 있는 인문학 연구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 기업인들이 주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실 기업가들은 굉장히 예민한 촉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업이 망할지 모른다. 생과 사이 경계에 있기에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에 투자하는 것이 돈이 되기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저도 뜨끔했던 질문을 던집니다. 왜 기업인들이 대학의 인문학 상황을 외면하고 자기들이 따로 인문학을 사용하는가? 다른 답을 던집니다. 기존의 인문학이 새로운 인류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제가 왜 뜨끔했을까요? 강연하는 교수님이니깐 겸손히 분석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멈춰선 사변적인 것은 안된다. 제가 인문학이 아니라 목회에 집어넣으니 경고로 들립니다. 그럴듯한 이론으로 무장된 인문학이라도 이론에 끝난다면 생사를 다투는 기업인들 입장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제 설교도 맞지 않습니까? 이것이 온 세상이 변화하는데 옛날에 머물러있는 고정된 생각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친한 교수님을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공대 쪽은 기술 발전이 어마어마하기에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뀌지 않지만, 오늘 성경을 대하는 성도님들은 너무나 급변하기에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갖고 실제적인 힘이 되도록 할까? 늘 고민이 설교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신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균형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체계적인 교리 공부를 해야 한다. 교육 전도사님에게 방학 때 어지간하면 교회 일을 안 시키기를 원합니다. 신학 공부를 안 하면 뼈도 없는 오징어 같은 종교면 되겠는가? 학문이 정확하게 습득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신학을 잘 배우는 것 이상으로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많이 경험해야 한다. 실제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오늘 나의 고민을,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여기 계시고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어른들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소나무 뽑힐 때까지 기도한다고 매달릴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학생들만 해당할까요? 모태신앙. 중직자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인문학 열풍을 주도하는 것은 학자들이 아니라 기업가들이다. 인문학을 배워야겠다 하여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다. 그게 아니라 살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그게 왜 도전이 되었을까요? 코로나라서 교회를 못 오고 뛰어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내가 삽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학문으로서 하나님. 성경의 지식적인 하나님을 뛰어넘는. 위기 속에서 생명력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을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번에 소개해드렸던 막국수집 사장님이나 덕양중학교 교장 선생님 다 그런 것 아닙니까? 절박함입니다. 여기서 식당이 잘 안되면 끝이다. 그 절박함. 덕양중학교 교장 선생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꾸 이사가서 폐교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회복시키는 열매가 된느 것 아닙니까?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막국수집사장님하고 덕양중학교 교장 선생님하고 자리를 바꾸었으면 어떻땟을까? 바꾸어도 성공할 것 같은데요. 원리는 같으니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절박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매달려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영혼이 달린 문제인데요. 지금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1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1-2)


듣기 따라서 하나님 입장에서 버릇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무리 물려받아도 무슨 소용입니까? 자식도 안 주시는데. 하나님이 왜 버릇없어 보이는 아브라함 말을 왜 수용했을까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비아냥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절규입니다. 하란을 떠나왔는데 약속은 더디 이루어지고, 안되면 어떻게 됩니까? 신학교에 갔을 때 갖은 절박함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안 계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니체가 말한 것처럼 죽은 신이라고 하면 우리 집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아버지 인생은 뭡니까? 저까지 목사 되겠다고 신학교에 갔으니 얼마나 내 마음에 하나님을 사모했겠느냐고요. 절박한 사모함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 너무나 힘든 이런 사명이 주신다고 하였는지 했지만, 이 끔찍한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두려움도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되어서 나에게 주신 축복이구나. 두려움이 없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지금이야말로 절박함이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다. 설교 제목이 길어지면 쓸 수 없어서 쓸 수 없어서, 절박함만으로 축복은 아니고 절박함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도구가 될 때 두려움이 힘이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현실의 두려움을 이기는 두 가지 기도제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라


제가 8월 말에 2학기 준비를 하면서 전 교역자들과 일일 수련회를 가지며 골목식당을 꼭 봤으면 좋겠다. 닭갈빗집 식당입니다. 아들이 운영하기로 해놓고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식당을 하는데 일을 엄마만 다하고 식당에 친구들만 들락날락하고 벽에 다트 게임을 합니다. 얼마나 잘 던지는지 선수입니다. 그래서 백종원 씨에게 엄청나게 혼납니다. 이게 뭐냐고 청소도 안 해서 지저분하고 으악 소리를 지를 만큼 어지러피고 엄청나게 야단을 치는지 엄마도 우시고, 아들도 얼마나 짠하겠습니까? 본인도 울고. 그래서 백종원 씨가 음식의 기초가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다 치우고 청소하자고 숙제를 내주고 다시 왔는데 안 해요. 방송국에서 CCTV를 달아놓지 않습니까? 요즘 기계가 얼마나 발달하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녹음도 다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마음의 이야기를 다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서 카메라 앞에만 하고 있어요. 결정적인 한 마디. 엄마도 울고, 저도 방송용 눈물 좀 흘리고. 이게 다 나간 것입니다. 그 다음 주에 진짜 민망하게, 저는 백종원 씨를 목회 멘토라고 생각하고, 영적인 식당으로 생각하고 봅니다. 정말 무섭게 화를 내더라고요. 그랬더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습니다. 정말 진짜 음식도 달라지고 맛집이 되었습니다. 왜 이것을 2학기 시작하면서 전체 교역자들이 돌아보았으면 좋겠다고 했을까요? 기도회 하니 기도하고, 예배하니 참여하고 모든 것을 다하는데 건성건성, 카메라만 돌아가는 데만 닦으면 되지 하면 영혼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절실함이 없는 분. 면전에서 잘 듣는 척 하고 어떤 변화가 없는 분. 이것이 진짜 위기인 줄 알아야 합니다. 가계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진짜 회복해야 하는 것은 절박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라는 인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 아실 텐데요.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


하나님은 이 가녀린 여성의 절박함을 보시고 민족을 구하십니다. 삼일을 우리 교회를 위하여 금식기도를 해주세요. 우리나라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데 우리나라를 위하여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합니다. 절박함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민족이 멸망할 위기에 있을 때 모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이런 지도자를 만날 수 있겠죠? 그런가 하면 삼손, 세상에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수많은 재능과 은사를 쓸데없는데 쏟아버린 인간.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그때 삼손이 깨닫고 절박하게 구했던 기도.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삿 16:28)


그 엄청난 힘을 갖고 있을 때는 다 허비했지만, 힘을 잃은 상황에서 인식하고 이번만 강하게 하사 절박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안 들어줘. 이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분 계십니까? 지금이야말로 절박하게 구할 때입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딱 한국교회가 구해야 할 기도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올때 절박한 마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안을 감사함으로 수용하라


8절에서 아브라함이 마음의 두려움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창 15:8-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너무 두려워하니깐 너무 두려워하면 계약을 맺자. 계약을 맺는 데 필요한 준비물입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 15:10)


이게 지금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쪼개는 게 무엇을 의미하냐면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쪼갠다는 것입니다.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약속을 안 지키면 쪼개진 짐승들처럼 돼도 좋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과합니다. 순진한 의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총신대 교수님의 논문을 보았는데 당시 계약 방식이 두 가지였습니다. 상호 동등한 관계로 맺는 계약, 주종 관계로 맺는 계약. 상호 동등한 관계는 둘 다 같은 행동을 합니다. 둘이 같이 지나갑니다. 여기에 반해서 주종관계에서 맺는 계약은 종만 쪼갠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주인이 왜 지나갑니까? 종이 지나가서 주인과 계약을 맺지 않으면 저처럼 될 것이라는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보니 전에 없던 감동이 있더라고요.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가고 계십니다. 18절부터 눈 씻고 찾아봐도 아브라함이 쪼갠 고개를 지나가는 내용은 없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쪼갠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왜 은혜가 될까요? 이 방식으로 하나님이 먼저 지나가고 약속을 지킬 거야. 약속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저나 죽음의 계약식입니다. 하나님의 대안을 그냥 수용하는 게 아니라 눈물로 수용하라고 강조를 하나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횃불 언약을 하는데, 갈라다이서 3장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십자가와 연결된다는 것이 충격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통과를 면제한 대신에 하나님께서 갔습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파기한 것을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저주를 가신 사건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앞에서 설교한다고 떠들어대는 이찬수 목사. 이 귀한 교회에서 성도님들을 섬길 수 있는 모든 명분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언제 궤도 이탈을 못 하는, 횃불 언약식으로 말미암아 끝끝내 묵묵히 가도록 하는 하나님. 이 찬양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저와 여러분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성경을 통째로 외워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갈 때입니다. 눈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계약에서 쪼갠 짐승을 지나가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이 하셨구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우리가 부르는 찬양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의 출발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맡겨진 은혜를 뚜벅뚜벅 가는 것은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여러분 지쳐 계십니까? 하나님의 대안인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저도 두려움이 많습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두려움과 내용이 다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잘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근원적인, 음란하고 악한 온 한반도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이 시대가 두렵습니다. 무력한 나 자신이 많은 성도님을 인도하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오징어 게임 그래서 봤더니 기가 막히더라고요. 대놓고 사람을 죽이고 오죽하면 애들이 절대 보여주면 안 된다는 지침이 나오겠느냐고요. 전 세계에서 그게 나오면 1위, 모두가 황폐한. 그게 두렵습니다. 너무 손발이 짤린 무기력한 한국교회가 두렵습니다.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의 대안인 십자가 수용하는데 감사함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지난 8월에 월드비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월드비전에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 전 6일간 감사 챌린지를 벌이는데 왜 저에게 연락이 왔느냐. 월드비전에서 감사 노트를 제작해서 배부하는데 목사님 감사라는 책으로 이것을 만들고싶습니다. 분당우리교회 감사노트 153을 잘 편집애서 쓰고 싶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허락을 위해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좋다고 했습니다. 제가 출연했기에 우리 교회에서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할 때 사양했습니다. 2~3주 전 되었는데 새벽에 하나님이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2년 가까이 시달리고 있는 성도님들이 감사로 회복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1만 성도 파송운동 비록 연기되었긴 했지만, 코앞에 있지 않은가? 분노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이 책자를 한국교회를 위해서 10만 부를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이 작지 않은데 무료로 보내주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그리스도에 감사의 문을 열고 가야합니다. 결론을 지난 주 중에 스파크처럼 떠올려주셨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골판지 간증 아십니까? 예수 믿기 전에 이랬고, 이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영상을 보는데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설교를 마음으로 정리하기를 바랍니다.






10월 2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1-6)


최근에 난 신문 기사 하나가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세상이 두려워요. 은둔 청년 전국에 51만 명' 기사 내용을 보니깐 지금 외부와 단절된 채 은둔생활 하는 청년이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둔 청년이 길어지는 상황이 길어지는 취업준비, 승자와 패자만 있는 사회. 한국 청소년 정책연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의 4.7%가 은둔 청년에 해당한다. 사실 은둔형 외톨이는 1990년대 일본에서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돈은 잘 버는지 몰라도 나라는 엉망이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확산된다고하니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은둔 청년 지원단체 한국지부에서 능력이 있어야 인정받는 능력주의 사회인데 경제 불안까지 겹치는, 마음의 좌절이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드림센터 사회환원. 강도만난 이웃을 돕는 공간이 되기를 원하는데 갈 바를 모르는 젊은이들, 수많은 강도 만난 분들을 잘 섬기는 공간이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은둔 청년 기사를 보고 오래 머릿속에 잔상에 남아서 기분이 좋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닙니까? 책을 보니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5개월, 7개월이 지나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하더라고요. 코로나 전에 교회에 많은 애기들이 만나면 한 번만 애기 안아봐도 돼요? 아기를 얼마 안 지나서 아기 엄마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자지러듯이 우니깐요. 애기가 세상을 뭘 알길래 낫선 사람이 자기를 안으면 공포를 느끼는 그것이 인생입니다. 나이가 들고, 채면이 있고 대놓고 울지 못해서 그렇죠 우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6번 나온다고 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들으라는 설교를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랗마이 엉뚱한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흥미로운 포인트를 찾았습니다. '이후에' 왜 맨 앞에 나올까요? 이후가 언제입니까? 자기 힘으로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말미암아 조카 롯을 구해서 온 아브라함 같으면 가슴 터질 것 같은 감격스러운 순간이 '이후에'입니다. 화려한 조건이 있고 대단한 성공이 있고 사업이 너무나 잘되더라도 여전히 두렵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질 때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해도 원하는 조카를 구해도 두렵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두려움에 빠질지 생각해보니 표면적인 두려움, 전쟁은 자기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보복하러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현실적인 두려움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통해서 위기를 겪어내도 그다음 이런 일이 생기면 또다시 잘할 수 있을까?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아브라함을 두렵게 하는 것은 본문에서 흐름을 보면 금방 아브라함의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창 15:1 새번역)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보상 많으면 뭐합니까?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아브라함 내면에 무슨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자녀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셔서 하란에 머물렀다가 말씀앞에 반응해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전쟁한 번 이긴다고 무슨 소용이냐. 근본적인 약속이 성취되지 않고 있는데.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중간지대 불안. 서커스 단원이 높은 데서 줄을 타기 하는데 의지하는 줄을 놓았습니다. 아직 저기 줄을 잡지 못하는 짧은 순간. 이것이 중간지대 불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겪는 것이 중간지대 불안 아닙니까? 영원하나 하나님나라 본향을 꿈꾸지만, 아직 가지 않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왜 위험한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은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상황, 판단을 오판하게 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2절에서 아브라함이 조급한 게 느껴집니다. 하나님 답을 기다리지 않고 3절에 답을 합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3)


아브라함의 상태가 느껴지십니까? 불안하니깐, 두려우니깐 자기가 하나님께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우리 아닙니까?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내면에 불안함이 자리 잡을 때는 뭘 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티비를 보다가 진짜 가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조기 은퇴하셔서 퇴직금 받고 그동안 모은 돈 끌어모아 치킨집 내야겠다. 그러다가 다 털어먹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먹먹합니다. 젊을 때는 다시 일어서기라도 하지. 퇴직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쁜 사람은 이것을 이용하잖아요. 거기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하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왜 귀가 얇고, 현명하고 똑똑한 분이 그런 일에 속아서.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이 엄습할 때는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두려울 때는 빨리 결정하면 안 됩니다. 본문 말씀을 가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올 때 두 가지 대안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하나님께 의뢰하고) 말씀으로 교정받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잘한 것이 이것 아닙니까? 맹목적으로 아멘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쿡 찌르면 아멘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아브라함의 말은 어떻게 보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2-3)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교정해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창 15:4)


하나님께서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의 교정이 잘못된 판단이 교정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담임목사님 힘내라고 아멘 아멘 하라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아무리 교회 다니면 뭐합니까? 말씀으로 가야 할 바를, 올바른 지침을 내려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신앙 생활하겠습니까?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홍수가 오면 피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저지른 실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의뢰해야죠. 홍수 이후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인간의 원죄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원죄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지방식대로 옷을 지어 입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두려우니깐 그 짓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급해주겠다는데 공급해주면 뭐합니까?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탓하지 안 아십니다. 시편에 하나님 찬양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악한 것을 왜 내버려두느냐부터 시작해서 모든 감정을 허락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질문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2.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기


5절에 하나님께서 독특한 행동을 하십니다. 보통 말씀으로 교정해주시고 끝납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실까? 일주일 묵상하는 가운데 성경의 한 구절 하나가 툭 생각이 났습니다.


"아, 주 하나님, 보십시오,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렘 32:1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이끌고 나오셨겠습니까? 생각이고, 행동이고 뭐고 점점 안으로 좁아지는 것 아닙니까? 온통 내게는 자식이 없는 것이지? 왜 안 주시는 것이지? 몰입하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셔 수많은 뭇 별들을. 아브라함의 생각 지경이 넓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새벽에 일어나서 종종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지난 금요일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시골에서 보는 별이 쏟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달이 너무 아름답게 떠 있는 것을 보는데 영적으로 제가 리프래시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고 독백입니다. '하나님 이번 주일 설교할 아브라함처럼 저도 내면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내에게도 이야기를 못 하고 성도들에게 이야기를 못 합니다.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면 불안해하시니깐.'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새벽에 제가 저의 생각을 넓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우리 아들딸에게 종종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어떻게 너희는 행동반경이나 생각이 온 세상이 그것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후회한다. 1층에서 바라보는 주변 세계하고 드림 센터 옥상에서 바라보는것과 다르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내 영혼이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찬양이 생각이 납니다. 시편 8편으로 만든 생각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가 베풀어 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생각이 많고 어디 가서 나눌 때도 없을 때 지금은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끌어 뭍별을 보게 합니다. 낮에도 하늘을 종종 봅니다. 제 스마트폰에 구름 사진 엄청나게 많습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저께는 별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은 낮에 멀리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완전 착각입니다. 진짜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멀리 봤다고 그러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밤에 보입니다. 미래에 대하여 답답하세요? 두려움이 많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함을 받을 때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할 때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타이틀로 짧은 글로 메일을 보냈는데 놀라운 것은 아침편지 독자가 400만 명이었습니다. 이분이 재단을 만들어서 충주의 7만 평에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운영하시며 대안학교, 쉼터, 먹거리를 잘 하고 있는 곳이라서 지난주에 임정택 대표하고 방문했습니다. 전체 둘러보고 고도원 대표님과 만나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돌아오는데 얼마나 마음이 벅찬지요. 제가 임정택 대표에게 가평 우리 마을 진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다. 개인이 저렇게 하시는데 마음에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분의 나이가 70입니다. 대화하는데 청년보다 큰 꿈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분이 청소년에게 하는 강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골교회 목사 아들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을 가지고 돌아다니지 못할 만큼 가난했습니다. 이사를 10번 넘게. 친구 좀 사귈만하면 짐 쌓아야 하고. 얼마나 상처가 많았겠습니까? 제 짐작에 이사를 하고 얼마 안되었을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왕따가 됩니다. 동네 형이 자기에게 너무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왕따 당해본 분 아시겠지만 얼마나 반갑고 고맙겠습니까? 자꾸 형이 여기로 오라는 것입니다. 계략을 꾸민 것입니다. 밟으면 쑥 빠지는데 거기가 똥통인 것입니다. 온몸에 똥이 범벅되어있는데 깔깔깔 웃으면서 그것을 조롱하는데 어린아이가 살의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너무 충격이 와서 실어증과 대인 기피증이 온 것입니다. 하루종일 집에만 머물러있는데 무엇을 알겠습니까? 아버지가 목사님이니 집에 있는 것이 책밖에 없습니다. 하루종일 책만 읽는 것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에 할 게 없어서 책을 읽었는데 똥통에 빠진 순간이 대한민국 최고의 독서가를 탄생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무려 25권의 저서를 발간한 저자가 되었습니다. 아침편지는 400만 명의 독자가 생겼으며 아침편지 문화재단을 만들어서, 가보니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분이 쓰신 책 중에 '꿈 넘어 꿈' 저의 마음속에 이분의 제목이 있습니다. '꿈 넘어 꿈' 실어증에 빠지고 집에 있는 게 책밖에 없어서 이런 작가가 되었는데 애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렸다면 위대한 화가가 되었을 수 있고, 노래를 계속 연습했으면 가수가 될 수 있었을 거다. 저는 울었습니다. 이 말이 너무 맞아서. 여러분이 캄캄한 밤을 만나고 불투명한 미래로 잠을 자지 못하고, 누구나 다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는데 인생의 밤이 온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의 생각이 확정될 줄을 믿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분당 우리 교회 귀한 교회, 하나님의 피의 값을 주고 사신 교회 어찌 저는 생각이 좁은지, 어떻게 폭이 좁은지. 매일매일이 기도제목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두려움이 올 때 절제하셔야 합니다. 점점 수령으로 빠져들어 가니깐. 이 절제의 의미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주 내내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려움이 많은 저. 판단력이 흐린 저. 하나님이 한 주 저를 어떻게 인도해주셨는지.






10월 1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기쁨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 14:13-24)


구원 이후의 여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부제를 옮겨두고 묵상하였습니다. '과정적이고 지향적인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두 가지 아이덴티티가 있는데 과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중고등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종종 따라 해라. '나는 공사 중입니다.' 엄마·아빠에게도 전해라. 너희는 공사 중이라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과정적인 존재가 없다 보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합니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가? 타인에 대해서 실망을 합니다. 왜 교회에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은가? 그것은 오해입니다. 교회는 완전히 예수님 닮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미완성. 공사중인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삐걱거리고 시끄럽고,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지향적인 존재는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않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이 축약해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갔다. 한 줄이면 될 것을 많은 설명이 있는 것은 의도한 결과입니다.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믿는 우리는 이런 말을 함부로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가는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대학시절 마음의 지침이 있는데 '성경을 읽기위해서 촛대를 훔쳐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성경 읽게 된 것을 잘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루어져 가시는 과정적이고 지향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가도 중요하지만 나는 점진적으로 성장해가고 있는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본문 아브라함을 이런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과정적이고 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출발은 얼마나 미숙했습니까? 창세기 17장에 보면 가는 중에 하란 이라는 곳에 도중 하차한 것이 미숙한 아브라함 일행 아닙니까? 12장에 와서 보니 가나안에 처음 도착한 직후에 하나님이 기근을 허락하셨습니다.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 일어나니,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고 제멋대로 이집트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집트에 가서 얼마나 미숙합니까? 아내보고 누이라고 해라. 이런 비겁한 남자가 어딨습니까? 과정에서 엄청 미숙함을 드러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12장을 넘어 13장에 와서는 얼마나 성숙을 향해 갑니까? 롯과 결별하는 과정에서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13장의 아브라함입니다. 13장보다 훨씬 더 성숙해진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모델로 살펴본다는 것은 그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해가는 아브라함.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모습을 성경은 과정적이고 지향적인 모습으로 드러내 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인물이 조카 롯입니다. 롯의 인생과 아브라함의 인생을 대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의 삶이 비극인 것은 롯이 출발이 부족하고 미숙해서가 아닙니다. 탐욕으로 택해서 안 되는 땅을 선택한 것이 문제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택한 그곳 탐욕의 땅에서 전쟁에 잡혀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압르하마의 극적인 도움으로 겨우 포로에서 되돌아왔는데,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롯의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경고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속해서 성장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비참한 일을 겪었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롯은 그런 게 없습니다 .징게를 받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망할 때 함께 망한 것이 롯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하나님의 초점은 지속적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부교역자 청빙을 많이 하니 여러 다양한 경우를 보는데 딱 두 가지입니다. 심사위원이 점검할 때 무조건 청빙해야한다 목사님이 있고,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 그래도 아닌데 청빙하는 턱걸이로 들어오는 분이 있습니다. 너무 궁금하시죠? 절대 이야기 안 하죠. 제가 드리는 포인트는 턱걸이로 들어온 목사님 중에 꽤 많은 목사님이 너무 성장하는 것입니다. 몇 년 지나고 보면 본인들에게 당신 청빙 안 했으면 어쩔뻔했냐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점이 선을 이루어서 인생의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고 했는데요. 인생이 롯이 간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망해야, 왜 그때 정신 안 차렸을까? 점진적으로 성장하려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성숙한 모습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나는 어느 정도 성숙한가 점검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1. 약자를 대하는 태도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 14:16)


절대로 하면 안되는 짓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당시 부족국가라고 하지만 사병 300명으로 4개국 연합군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도전하는 것이 무모합니다. 아브라함은 어찌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가? 그러다가 보니깐 발견한 것이 아브라함 머리의 생각은 롯을 구해야 한다 하나입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당황스럽게 만드는 무모한 아브라함인데 본문 아브라함을 보면서 예수님 생각이 납니다. 마가복음 3장 손 마른 장애인을 고쳐줍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막 3:1-2)


예수님의 안식일에 손 마른 장애인을 고쳐주면 율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어 올무에 잡으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아시면서 얼마나 곤욕을 치릅니까?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예수님이 왜 이런 위기를 자초하십니까? 어리석은, 무모한 일을 하실 수밖에 없는가? 4절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막 3:4)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 대해서 이렇게 무모한 사병 300명을 끌고 가는 것이 무모합니다. 생각해보면 괘씸합니다. 저한테 어떻게 해주었는데, 그래도 양보했는데. 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롯의 마음에 꽉 차있는 것이 롯을 구해야 한다. 마음이 있었기에 무모한 전쟁에 투입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처럼 배은망덕한 것 쳐내고.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데 아니라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계산적인 분이라면 십자가라는 어처구니없는 도구로 우리를 구원하셨겠느냐고요. 오늘 내가 얼마나 성숙하느냐는 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어디에 머물러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까짓 것 구해야 해? 삼백 몇십 명 있는데 내가 어떻게 구해. 예수님은 손 마른 자 먼저 고치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복이 될 지라는 사람과 관계된 것입니다. 족속을 살려내고. 신기한 게 이런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월요일에 편한 마음으로 인간극장을 봅니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분이 나오셨습니다. 묘한 생각을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칡넝쿨을 뽑아내며 하는 이야기가 애는 자기만 위하는 놈이에요. 이 본문을 묵상하는데 너무 저에게 의미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메모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뽑아내면서 요놈은 자기만 살려고 발버둥 치려는 놈이야.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기준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구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로 성숙했다면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매 가을 특별새벽기도회, 엑센트를 주는. 가을 결실에 은혜의 자리로 가는. 바로 이어지는 것이 새 생명축제. 영적으로 분별력 있을 때 땅 사야겠다. 로또를 사야겠다. 이쪽으로 물꼬를 트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축제입니다. 코로나로 행사는 차질이 생길 수 있지만. 여러분의 성령 충만히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해내는데 물고 가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우리가 알고 있는 정적인 경건뿐만 아니라 약자들을 향한 경건. 아브라함에게서 약자를 향한 성숙한 모습을 배웁니다.




2. 품위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


돌아오니 빼앗겼던 롯을 구해서 돌아오는데 왕 두 사람이 마중 나옵니다. 한 사람이 소돔 왕입니다. 소돔 왕은 질이 좋은 왕이 아닙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창 14:21)


소돔 왕이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유를 설명하는 게 중요합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 14:22)


아브라함이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부패한 타락한 소돔 왕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혜보다 명예를 택한 아브라함의 모습 아닙니까? 창세기 12장에서 바로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성숙한 것입니까? 소돔 왕덕 뿐에 부자가 되었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한국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예수그리스도의 품위, 명예. 목사로서 성도로서 존재를 빼앗기면 안됩니다.


제가 30대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미숙하지만, 그때도 미숙했습니다. 다혈질이었습니다. 1년에 몇 번은 멱살 잡히기 전까지 갈 때가 있었습니다. 빌라에 살면 주차 문제가 어렵습니다. 괘씸한 사람하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폭발한 것입니다. 이 집 가만 안 둔다고 씩씩거리면서 한 판 하려고 내려가다가 독백을 했습니다. 아참 나 목사지. 그날 아무런 일도 없이 잘 넘어간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으로 이까짓 일에 혈기를 부리지 않을 거라는 존엄. 하나님 앞에서의 자존심입니다. 주의 종인데 이까짓 것 못 참아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애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하나님의 장자권이라는 명예가 없는 것입니다. 이까짓게 뭐가 중요하냐고. 한국교회가, 분당우리교회가 이 시대에 되찾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에요.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없나. 우리가 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돈 보다, 물질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명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품위, 질서. 이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보여줍니다.




3. 은혜체험 이후의 성숙한 태도


4국 연합군에 대응하는 것이 무모한데 승리하였습니다. 은혜는 은혜로 아는 것. 내가 밤에 전술을 잘해서 내가 대박을 터트렸지. 그러면 아브라함은 바보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 가운데 은혜를 주시길 원합니다. 은혜 주실 때 은혜를 은혜로 아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한 가지만 구하는 것보다 같이 하셔야 합니다. 제가 만약 어디 취해서 야 나는 목회 확실히 달인이야. 그렇게 하면 내가 망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은혜를 주시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시 내가 하는 일마다 안되는 게 있느냐? 이것이 세상의 바보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8)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20)


땀의 결정체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이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어려울 때 땀 흘려 수고 해서 번 돈을 십일조로 낼 수 있다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처럼 이름도 안 불러주고 누가 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요. 성숙으로 치면 손톱만큼도 댈 수 없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주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 그것이 은혜임을 알면 기쁨도 생기고 감격도 생기지만 더 중요한 것.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제가 이 한 줄을 계속 되뇌며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면 기쁨도 얻지만, 현실의 장애물을 뚫고 갈 용기가 생깁니다. 이 찬양 뒤에 부분을 보세요.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브라함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왜 참여하였는가?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고 살려주셨는지 감격이 있다 보니 전쟁은 내가 치르는 것이 아니다. 은혜다. 여러분은 어떤 난관에 있습니까? 개척 초기에 창도 없는 여기에 와서 눈물 찔찔 흘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용감해지는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무슨 생각으로 드림센터 6개월있다가 10년 뒤 환원하겠습니다. 공동의회에서 50%가 안나왔으면 사표내려고했습니다. 1만성도 파송운동, 멀쩡한 성도님들을 1만5천명을 파송하겠다고. 은혜를 은혜로 알면, 내 삶 가운데 내 힘으로 한 것 아무것도없어. 하나님께서 하실꺼야.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제가 철이 들면서 알았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과정에 주님이 이 말씀을 어떻게 구현해주셨는가? 놀라지 말아라 내가 하나님이 됨일아.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여러분에게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능력이 됨을 믿습니다.


우리가 29 예비 담임목사님들을 청빙하는데 이미 담임목사님 검증된 29분을 청빙하는것이 아니라 왜 부목사님 가운데서 청빙하냐고요. 우리 잘되자고 목사님을 빼갓고오면 이건 안 되잖아요. 두 번째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29 예비 담임목사님들을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12월에 분리하려고 했는데 성도님들이 목사님과 교제도 없고, 고심하면서 미루기로 했습니다. 연말에 하는 것은 무리다. 여건이 빨리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너무 이 상황이 혼란하기 때문에 얼마나 미룰지도 모릅니다. 늘 하는 이야기가 코로나 19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이용해 담임목사로서 성숙해지고, 잘 사용하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될 것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사정이 어려워지셨습니까? 그것을 이용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때입니다. 과정적이고 지향적인 존재로서.






10월 1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복의 사람이 피해야 할 탐욕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 14:1-12)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라. 네가 엉뚱한 곳에서 세월 낭비하고 있다. 내가 보여주는 그 땅으로 가라. 두 번째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말씀을 주시는 데요. 다시 힘을 얻어서 목적지 가나안을 향해 목적지로 향해가는데 지난주에 여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특별 새벽기도 부흥회, 이후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특별새벽기도회의 설교를 요약하면 두 가지 시험, 연단을 살펴보았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꿈에 걸맞게 키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갖으세요. 그러기 때문에 꿈의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연단하시고 시험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두 가지 아브라함의 연단을 보지 않았습니까? 첫 번째 연단은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의 기근, 흉년이 와서 먹을게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견뎌내지 못하고 이집트로 내려간 내용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대인관계의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 롯의 목자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함께 하기 어려워 둘이 헤어지려고 하였습니다. 내면에 하나님의 벅찬 꿈을 갖고있는 사람답게 너무나 성숙하게 양보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고, 좌하면 우하겠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다 압니다. 너무나 성숙하게 조카 롯과의 결별을 평화롭게 잘 마무리했다. 여기까지가 특별 새벽기도부흥회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조카 롯이 아브라함부터 독립해서 나갔는데 그다음에 발생한 첫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불행한 일이 발생했는데 롯이 전쟁포로로 끌려갑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 14:11-12)


삼촌 아브라함이 큰 양보. 그렇게 배려를 해주었더니 롯이 너무나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물이 넉넉해 보이고 것 보기에 좋은 것을 택해서 그리로 내려갔더니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불행한 일이 생기는가? 겉보기에 화려하고 넉넉하고 아름다운 땅이었지만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이 한마디에 롯이 당할 엄청난 고난을 암시하는 것 아닙니까? 탐욕으로 잘못 선택한 땅에서 롯이 엄청나게 끔찍한 일을 겪게 됩니다. 첫 번째 경험한 것이 전쟁입니다. 롯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 눈에 탐나는 땅이면 모든 탐욕에 쩌는 사람들이 노리는 땅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으로 롯이 그렇게 포로로 잡혀간 오늘 본문 사건은 탐욕에 찌든 롯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분석하면 정확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문을 보면 흥미로는 것이 있습니다. 롯을 묘사할 때 꼭 같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 14:12)


재물까지도 부연해서 넣었습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 14:16)


그냥 롯만 구해주었다 하면 되는데 그의 재물을 구해주었다. 롯의 입장에서 재물을 구하지 않고 자기만 구하면 의미가 없다? 이런 생각을 했나. 의도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롯은 어떤 가치관을 가졌습니까? 가장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도 재물이었고 롯의 존재 자체가 재물과 자기 이름을 한 세트로 묶을 정도입니다. 하나님 도움 필요 없어. 돈이 나를 인도하는 것이지. 이것이 롯이었습니다. 롯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구해주러 가니 그들이 도와주러 옵니다. 롯은 정작 자기가 본인인데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비참한 인생 아닙니까? 롯의 모습을 포인트로 해서 탐욕이 갖는 문제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탐욕이 갖는 일반적인 문제점을 보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보려고 합니다.




1. 탐욕은 분별력을 흐리게 합니다.


탐욕에 찌든 사람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땅이 아닙니까? 꼭 무슨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창 14:2)


이 말씀의 시작이 싸우는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창 14:4-6)


요지는 치고, 치고, 또 치고 치니라. 이런 것으로 도배된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롯이 탐욕의 전쟁터로 제 발로 걸어간 것입니다. 판단을 잘못해서. 탐욕은 그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왜 사기당합니까? 사기 치는 사람들이 너무 간절한 사람. 탐욕적인 사람들에게 찾아갑니다. 사기당하는 패턴을 보면 거의 똑같습니다. 지나치게 이자를 많이 준다는 것. 너무나 쉽게 돈을 버는 방법. 이런 사람들이 나쁜 게 '너한테만 말한다.' 이게 탐욕에 약한 우리의 본성을 갖고 장난질 치는 것이 사기를 치는 것 아닙니까?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니 땅 사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미리미리 땅을 확보해야 한다. 앞산, 뒷산, 주차 좋은데, 오를 거라고. 진짜 우리 교회를 위한 분도 있지만, 이게 곧 풀린다고 하는데 20년이 지났잖아요. 아직도 안 풀렸어요. 온 성도들 돈 끌어모아 몇십억짜리 땅을 샀다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끔찍한 일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탐욕은 우리의 분별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2. 탐욕은 위기에서 건저줄 능력이 없습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 14:12)


정작 자기가 위험에 처하니깐, 수많은 재물들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 예수님이 경고하시는것이 딱 이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 아닙니까?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6-19)


그래서 나는 걱정 없다는 것 아닙니까? 모든 초점이 내가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모으고.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를 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탐욕은 왜 자기를 위기에서 건저줄 능력이 없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그렇게 자기 집착이 심하면 자기를 위하는 것 같지만, 우리를 치명적으로 독한, 악한, 해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 본능입니다. 제가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에게 두 아이가 있습니다. 두 아이가 어마머아하게 서로 싸운 것입니다. 인근에 있는 미국은 울타리가 없으니 앞집 옆집 친하게 지내는데 이웃이 와서 왜 이렇게 싸웁니까? 링컨 대통령이 대답하기를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저녀석들에게 제가 과자 3개를 주었더니 서로 두 개를 먹겠다고 싸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문제, 세 개가 있으면 내가 당연히 두 개 먹어야지. 형이고 동생이고 없습니다. 이게 왜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입니까? 이 땅의 싸움은 모두 여기서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이 본능. 나 중심. 탐욕. 내가 두 개 가져야지. 네가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우리는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홍정기 목사님이 쓰신 책을 보니 나인홀드 니버의 말을 인용합니다.


욕망이란 창조 때 주어진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이기적 동물로 타락함으로 나타난 제 2의 습성이다(나인홀드 니버)


원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악 된 욕망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질병이다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항상 정곡을 찌릅니다. 두 개 뺏어 먹고 자기 합리화로 인간이 그렇지 뭐. 질병입니다. 절대 늬가 하나 먹어야지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래 창조질서 아닙니다. 본성의 질병입니다. 이 두 가지 아시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악한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방치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재물이 어리석은 부자를 구해낼 수 없습니다.




3. 탐욕은 주신 복을 흘려보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당당하게 구하세요. 복 주시길 원합니다.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에게 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왜 이 응답이 안 오는가? 세트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주신 복을 내가 먼저 감사함으로 누리고 고여두지 않고 복을 유툥하겠습니다. 나누겠습니다. 베풀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많은 복주신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매 특별 새벽기도에 너무나 힘든데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에게 특새가 월요일과 화요일 새벽이 제일 힘듭니다. 외부 강사님을 모시지 않으니, 주일날이 되면 저는 진이 다 빠집니다. 우선 집중이 안 되고 글도 잘 안 읽힙니다. 그래서 월요일, 화요일 설교는 준비해둡니다. 목회는 생물입니다. 설교가 생물입니다. 왜 외부 강사님 안모십니까? 식당 밥 안 먹이려고. 엄마 밥 먹이려고. 개척 19년 동안 한 번도 외부 강사님을 쓴 적이 없습니다. 설교도 생물이라 지나면 식은밥이 됩니다. 월요일 설교를 하니 초점이 다른 것입니다. 새로 준비하려고 하니 엄두가 안 납니다. 설교 준비가 한나절만으로 되느냐고요. 머리는 지끈지끈 거리고. 마음에 부담이 생기니. 제가 찾는 자료가 교회에 있네. 우리 딸에게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갔습니다. 드림센터에가서 자료를 준비하는데 머리는 지끈거리고 약 먹고. 내일 새벽인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완성이 안되면 어떻게되는거야? 결론을 말씀드릴까요? 화요일 아침에 제가 준비한 설교가 아니에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 술술술 나오는데 그날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번 특새 참석 안 한 분은 월요일, 화요일 것만 들으면 됩니다. 하나님 은혜가 주신 것입니다. 제 작품이 아닙니다. 화요일 아침에 모르겠습니다. 성도님들이 은혜로 받았는지 아닌지. 저에게 벅차오르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리며 19년간 저에게 복을 주셨는데, 분당우리교회에게 이처럼 많은 복을 주신 것. 이 복을 가두어 두지 않고 흘려보내겠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한국교회로 흘려보내길 원합니다. 수 목·금·토요일 보내는데 너무나 마음이 벅차오르고. 우리 집사람은 죽어 나갑니다. 나에게 짜증이 나는데 그 짜증을 들어야 합니다. 몸부림치고 노력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복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업하시는 분, 물질의 복을 구하세요. 이거하다 죽을 사람처럼 달려가면서. 그래서 물질의 복을 주시면 그것을 가두어두시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에 두 바다가 있잖아요. 헐몬 산에서 풍성한 물을 공급받는것은 공통점인데 갈릴리 바다는 요단강으로 흘려보내줍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생명이 삽니다. 사해바다는 요단강 줄기를 받아서 같습니다. 죽은 바다입니다.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여성분들은 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냉동실에 온 음식. 연말에 다 버릴 거라는 거 알잖아요. 냉장고 청소하면서 독백하잖아요. 기왕에 버릴 것 같으면 친정어머니 가져다 드릴 것. 흘려보내지 않으면 사해 바다가 됩니다. 설마 여러분 인생이 사해 바다 같기를 원하세요? 여러분에게 다가가면 그 사람이 죽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안 되기에 갈라디아 5장 24절 다시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열열한 욕망에 집중되어있는 상태.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탐심입니다.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고 2002년 3월 첫주부터 예배를 드렸는데 딱 개척하고 한 달 있다가 책이 나왔는데 양 도둑질. 제목이 19년 동안 제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늬 교회 키우려고 남 교회 성도 빼앗으면 안 된다. 그래서 1만 성도 파송운동이 툭 나온 것 아닙니다. 개척 초기에 기존 성도님 안 받는 운동 3번 했습니다. 양 도둑질 안된다. 늬 한 교회만 잘되는 것은 곤란하다. 목회자니깐 이런 문제로 근심한다면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갖고 근심하시겠습니까? 가둔 복을 가두어두면 여러분의 인생이 사해 바다가 됩니다.


최근에 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섬세함을 경험했습니다. 큰 숙제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는 풀려갑니다. 가평 우리 마을이 지친 자들의 쉼터가 되도록. 의미있는 카페, 의미 있는 숙박시설, 공익적으로 장애인 부모님들을 초대하던지. 너무나 지친 장애인들을 섬기는 복지사들을 초대한다든지. 불교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는데, 가평에서 꿈꾸는 것이 그것입니다. 쉼을 얻고 회복을 얻고. 미자립교회에서 수련회 장소로 쓸 수 있도록 빌려드리는 것. 이것이 조금 정리가 되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도 29 목사님들과 잘하고 있습니다. 드림 센터 사회환원운동으로 잠을 못 잤습니다. 청년들이 자살하기 전에 들리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꿈을 펼치기에 건물이 너무 큰 것입니다. 1층부터 12층까지 어떻게 할지. 최근에 하나님이 기가 막힌 답을 주셨습니다. 너무 궁금하시죠? 다음에 이야기해드릴게요. 언제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허풍 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드림 센터가 이렇게 하면 되겠다. 뜨거움이 용솟음치는데 초창기 집사님이 연락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부부를 못 뵌 지 10년이 넘은 것 같은데, 만나서 드림 센터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의 소원이 엄청난 큰일을 하시고 은퇴를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도 상당히 이루었습니다. 자녀들에게 큰돈을 물려주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셔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데 하나님께서 드림 센터에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드림 센터에 강도 만난 자들이 회복되는 곳이라고, 젊은이들이 치유하는 곳이라고 정리되자마자 이분들이 치유하는 곳이라고. 봉투 하나 주셨는데 엄청난 돈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분의 선함. 그렇게 땀의 결정체, 연구하고 기여하시고 그 대가로 얻은 엄청난 물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면 안 된다. 드림 센터를 위해 쓰라고 가져왔을 때 목사는 눈 가리고 아웅. 진짜 약자들을 위해서 결단을 하면 물질을 보내주시는구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이런 예를 드리는 것이 조금 위험한 것이 재산 전부. 이런 것도 있지만 흘려보내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상 하나 보여드리는데 특새때 보여드렸지만, 다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자영업자분들에게 도움이되고자 자영업 리스트를 올렸습니다. 교역자 몇 분이 격려하려고 갔는데, 후일담이 어떤 성도님은 카페를 하시는데 열심히 사시는데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어깨와 허리 수술을 받았는데 카페를 해야 하는데 명절 직전에 큰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낙심한 상황에 우리 교구 사역자분이 방문하셨는데, 예수님이 우리 가계에 찾아온 것 같다. 어떤 분은 교회가 우리를 기억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흘려보내는 것은 전 재산 바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잠깐 가서 기도하는 것.


지난 목요일 새벽에 영상을 같이 보고 홈페이지에 자영업 주소를 쭉 올렸더니 아침에 일찍 출근을 하는데 가평 우리 마을에서 근무하는 우리교회 청년입니다. 손에 이렇게 들고오는데 수고하는 분들 주고 저에게도 줍니다. 인근에 편의점 주소가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 들려서 사 왔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복을 흘려보내는 것은 전 재산 주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녀간 것 같습니다. 교회가 힘든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군요. 이렇게만 끝나면 곤란합니다. 우리끼리만의 잔치가 되면 곤란합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분당우리교회 성도, 성도 아닌 사람 구분 없이 섬기는 것. 받은 복을 흘려낼 수 있도록.






10월 0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새 출발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1-5)


리추얼이라는 책의 부제는 일단 움직여라. 마음은 따라온다는 책입니다. 책 표지에 비슷한 구호를 봤습니다. 생각보다 중요한 행동의 힘. 해보면 하고 싶어진다. 목차에 보면 제1장의 제목도 비슷합니다. 이 구호는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마음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심이 중요하다.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아무리 마음을 먹고 결심해도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는데 몸이 가는 게 아니라, 몸 가는데 마음이 간다. 여러 가지 자료로 증명하면서 책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먼저 행동해라. 마음은 뒤따라온다. 그런가 하면 무조건 심플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전문 경영 컨설턴트 저자가 오랜 연구 끝내 내린 결론입니다. 비즈니스에서 내린 결론은 사업장을 단순하게 해라는 것입니다. 내용도 안보고 구입했습니다. 무조건 심플은 제 인생의 구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잡하게 살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 어렵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 복잡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한다. 하나님의 뜻이면 움직인다. 그러면 마음이 따라온다. 무조건 심플은 묵상하는 데 도움이 된 책 제목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모범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모세를 부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0-11)


하나님이 계속 설명해주십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듣겠습니까? 누가 내 말을 믿어줍니까? 아무도 안 믿어줍니다. 나는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모세 생각이 너무 복잡한 것입니다. 읽다가 시원한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7-18)


주님이 따르라고 그러시니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가 싶으면 따르면 됩니다. 제가 29살 때 이민을 가서 작은 비즈니스를 시작할 즈음에 목사가 되어라. 청소년을 도와라. 아무 일도 아닙니다. 굉장히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콜링이면 순종해야지. 저는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두 달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뭐 복잡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얼마나 간단하게 생각했으면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어디서 잘지 생각도 안 했습니다. 당시 신혼부부였던 제 친구 집에서 보름간 살았습니다. 온 가족이 도와서 비즈니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죠. 하나님 저 한국에 못 갑니다. 말할 것도 10가지는 넘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개척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갑자기 옥한흠 목사님이 불러서 갑자기 개척해라. 제가 중고등부만 하고 어른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제가 옥한흠 목사님께 제가 개척 못 한다고 10가지도 더 댈 수 있는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옥목사님을 보면 하나님의 종이 맞는데 얼마나 기도하고 생각을 했으면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가. 기도하고 생각해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라고. 그래서 혼미한 개척을 하고 혼미한 몇 달을 보냈지만, 그때 안 합니다.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아까 그 책 제목 그대로 무조건 심플, 하나님의 명이면 순종한다. 아브라함에서 이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젊은 부교 역자들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생각을 줄여라. 당신 생각이 너무 많다. 뭐가 생각이 복잡하냐. 하나님이 하라면 하고, 아니면 안 하면 되고 뭐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이는가?


하나님 말씀 앞에 너무나 단순하게 반응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셨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순종했는지 내일 특별 새벽기도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1. 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가라는 명령을 내리시는데 그 앞에 하나님이 전재를 말씀하십니다.


고향과 친척, 아비의 집 모두 아브라함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네 고향을 떠나라. 이것은 쉽습니다. 여러분들도 고향을 떠난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친척을 떠나라 이것은 약간 더 어려운데, 점점 더 강도가 쎼서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서. 무슨 아파트 1동을 떠나라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우리 가족을 떠나는 과정에서 제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겪어 보아서 압니다. 이안 덕위드가 쓴 책인 믿음으로 산다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소중한 모든 것을 떠난다. 예전에 나온 책 익숙한 것들과 결별 책이 있었습니다. IMF 이후 우리나라에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습니다. 직장인들과 젊은이들이 갈팡질팡하는 소용돌이가 있었습니다. 이 책이 강하게 말하는 것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를 강조하는 책입니다. 예전에 나온 책인데 지금도 되뇝니다. 모든 사람이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익숙한 것은 마음의 안정을 줍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하냐고요? 익숙한 것은 안정감을 주지만 안주하는 순간 도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 번씩 이 제목을 다짐하면서, 책 제목 하나를 더 되뇝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생쥐 두 마리가 무궁무진한 치즈가 공급되는 창고에서 치즈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언젠가 무궁무진한 치즈가 사라질 때 당황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왜 가라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과의 결별을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까? 데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수 24:2-3)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썩어져 가는 유혹의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가라. 가나안을 향해 가라. 안주하면 안 된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 새벽기도 부흥회 때, 옛사람의 습관을 끊어버리는 것이 내일 특별 새벽기도회 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복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두 가지 포인트를 찾아내야 합니다. 복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어렵습니까? 연구해야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주 전에 살펴보았던 창세기 11장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2절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내려고 바등바등 안 해도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 주시기 원하는 하나님은 배제하고 알량한 생각으로 바벨탑을 쌓으니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이 한 두 사람입니까? 바등바등하는 것이 되던 데가요. 생각을 복잡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데, 믿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굉장히 단순하지만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착취하려고 부르시는 것 아닙니다. 29살 철없던 시절에 비즈니스 이제 시작했는데 한국가라하고 하시니 두려웠습니다. 엄청나게 각오하려고 몸살도 걸렸는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31년간 제가 맏은 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다 아시잖아요. 모르는 분 계세요?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님들도 복을 누린 분들이 많았습니다. 개척 초기에 이민 가려고 수속을 밝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행복해서 이민을 안 간 분이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분들 생각이 납니다. 그 복은 제가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역이민 안 왔으면 어쩔뻔했나. 하나님은 우리를 착취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라 복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첫째 우리에게 복 주시길 원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둘째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너를 축복하여 내 일므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12:2)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시니라 (현대인의 성경 12:3)


신나는것 아닙니까? 이찬수 목사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 제가 기도하는 것 아시죠? 제가 누군가에게 선물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찾으면서 제가 구약학을 전공하신 하경태 교수님의 논문을 읽게되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말씀의 의미는 학자마다 다르다고 하시는데 제가 두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로서 아브라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처럼 복을 받을 것이다. 지난주 새벽에 깨달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벅찬 것입니다. 문자를 보내서 이 내용을 전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당당히 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복 받기 원합니다. 구하셔야 합니다. 당당하게 복 받기를 소원을 하고 구하셔야 합니다. 그것만 하시면 안 됩니다. 복 누리기를 원합니다. 구함과 동시에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를 같이 드려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 오병이어 사건이 나오고 5장 헤롯왕의 잔치가 나옵니다. 헤롯왕의 잔치 특징을 보시겠습니다.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막 6:21-22)


자기 자신의 기쁨을 누리는 잔치의 비극은 죄 없는 세례요한이 참수당하는 비극의 열매를 낳게 된 것입니다. 바로 다음 나오는 것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막 6:41)


예수님의 축복 오병이어를 세상 사람들이 누리기 전에 저희가 먼저 누립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고입니다. 이 세상은 오병이어를 묵상하면서 느끼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혼자 5천 개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남의 굶주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배탈 나서 자기가 먼저 문제가 생깁니다. 이 세상은 탐욕에 절어 있는 시대인데 헤롯왕의 잔치의 특징인 나의 행복을 위하여, 나만의 유익을 위하여 죄 없는 세례요한을 참수하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제가 마음이 너무 기뻣전 덕이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할 때 6년을 저에게 배운 제자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결혼한다고 예비 신부를 데리고 왔습니다. 덕담을 나누는데 잊혀지지 않습니다. 낡아빠진 노트를 꺼냅니다. 중학교 때부터 목사님의 말씀을 받아적은 것입니다. 메모해놓은 것을 보고 대화하는데 잊혔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구호를 외치고 따라 하라고 했던 것이 있는데, 배워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은혜받아서 남 주자. 91년부터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공부 안 하면 늬 엄마가 공부해서 남 줘? 하는데 네 대답해라. 이렇게 우스갯소리도 했습니다. 이 친구가 이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코흘리개 중학교 애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제가 탐욕에 절어서 목회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한번 따라 해보겠습니까?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은혜받아 남 주자. 당당하게 주님께 구하세요.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고 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 복을 흘려보내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있는 것, 삭막한 이 시대에 그들에게 선물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분당윌교회 지난 19년은 복을 말로 다할 수 없게 받았습니다. 송림 중 고등학교입니다. 거의 20년째 쓰고 있습니다. 학교랑 문제가 없느냐고? 갈수록 사이가 좋아지는데 기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거래 관계로 내가 요만큼 쓰고 이게 없었습니다. 이것은 말로 안되는 혜택입니다. 뒷거래하는 것 아니냐? 그런 거 없습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돼서 행복합니다. 송림중고등학교 짓고 우리가 바로 왔습니다. 규모 있는 교회에서 들어오겠다고 했습니다.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은 큰 보상이 이루어지고 장학금과 같은 것을 제공하겠다는 그 교회를 거절하고 그때 30~40명 모이는, 게다가 담임목사님은 완전 애송이 42살, 얼굴은 35. 임대료를 내고 장학금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 큰 교회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불가사의합니다. 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학교를 위해서 기도를 안 하면 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을 기억하며 많이 흘려보내야 합니다. 29 교회가 분립하는 과정에서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런 혜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장소를 물색하는데 많은 단체에서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일산의 어떤 장애인 학교는 진짜 고맙습니다. 거의 써라. 어떤 신학교는 신학교 안에 캠퍼스가 크니 교회가 있지만, 여기를 써라. 엄청나게 불편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얌체같이 공짜로 쓰고 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여러 가지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가?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감사하면서. 5천 명분 다 먹겠다고 탐욕에 쩌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29 교회가 5천 명을 먹이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1-12)


받은 복을 흘려보내기를 원합니다. 복이 흘러가 대한민국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09월 2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새로운 출발의 조건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1:27-12: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를 향해 가는가 이런 질문을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라고 합니다. 박승훈 교수가 쓴 정체성의 심리학책을 보니깐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체성이란 자기에게 중요한일, 의미 있는 일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한다. 정체성일 잘 정립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특징을 설명하는데 흥미로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정체성이 잘 형성된 사람의 특징은 영혼의 x-ray를 가지고있다. 정체성 정립이 잘 된 사람은 겉으로의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의 중요함. 자기 삶의 가치와 내면이 잘 정립되어있다. 또 하나, 자기 삶의 목적지가 찍힌 내비게이션을 갖는 사람이다. 초행길 인생인데, 정체성 정립이 잘 된 사람은 자기가 나아가야 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상록을 쓴 몽테뉴의 말을 인용합니다.


목적지가 없는 사공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사람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정해져야 맞닥뜨리는 것이 축복인지 아는 것 아닙니까?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인터넷으로 쏟아지는 정보가 유익한 것인지, 쓰레기 같은 것인지 판가름나려면 방향이 정해져야 합니다. 정보의 호수인데 잘못하면 빠져 죽습니다. 어떤 바람을 유익하게 사모하고 탓하기 전에 인생의 방향이 정해져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정립한 x-ray가 있습니까?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있습니까? 여기갔다 저기 갔다 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어리석은 모습이 아닙니까? 유은정 원장님, 상처받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기 이런 책을 쓰신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크리스천 의사입니다. 건강한 정체성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이 분이 귀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과거의 상처에 빠져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힘든 분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 내가 먼저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해야겠다. 병원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납니다. 의사로서 이런 소명의식이 있다면 귀한 분 아닙니까? 저자 소개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개원한 병원이 자리 잡기 시작할 때 신학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광야 같은 그곳에서 지식은 해답이 되지 않았고 갈급함이 있던 차에 하나님 말씀을 통해 방향을 꺧알았다. 이 말씀이 내면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영적인 x-ray 사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구약의 인물 아브라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위기입니다. 코로나 19가 2년째 다가오고 있는데 이게 잦아들지 않고, 주사 두 번 맞았는데, 어제는 확진자가 신기록을 세우고, 언제 끝날지 모르니 모두 지친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는 1만 성도 파송운동이라는 과업이 있는데, 정확한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면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혼란함에 빠진 시기에 우리 내면을 살필 수 있는 x-ray 사진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가야 할 목적지를 보여주는 영혼의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혼미한 아브라함에게 갈 바를 알려주시고, 영적인 내비게이션이 된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첫째 시간으로 이 한 마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지난여름 내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유명한 신학과 교수님을 통해서 얻지 못한 내 삶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았다. 제 원고에 아브라함의 이름을 빼고 제 이름을 넣어서 묵상했습니다. 왜 아브라함만 그러는가, 여호와의 말씀이 이찬수 목사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어느 청년에게 이르시되, 모두가 이런 마음의 소원을 하고, 미국 유학을 갈 정도로 갈급한 원장이었지만 말씀이 일하니 내 정체성과 소명이 정리되는, 여러분과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한 마디에 담긴 파워, 힘.




1. 혼란과 무질서를 잠재우는 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뺴놓으면 큰일하는 것이 창세기 11장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창 11:27-28)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데라 족보의 처음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자녀가 등장합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30절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 11:30)


계속해서 낳았고 낳았고가 계속해서 나오는 기록 다음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난임이라는 것입니다. 결핍. 이게 인간의 역사 아닙니까? 가장 비참한 것은 다음 절에 나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0-31)


하나님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엉뚱한 곳으로 새어버린 것입니다. 허송세월하다가 인생이 끝난 데라의 족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12장 1절의 말씀을 다각도로 보려고 논문을 보다가 도표 하나가 명쾌하였습니다. 한쪽은 바벨 사건 이후 언어와 흩어진 비참한 상황,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를 비교하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방금 우리가 보았던 창세기 12장 1절에서 보았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데라의 족보, 아브라함의 족보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 아닙니까? 하나님 없이 우리 지혜로 바벨탑을 쌓을 수 있다. 언어가 혼란해지고 흩어짐을 경험하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 아닙니까? 제가 창세기 1장 2절을 다룬 기억이 있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렘 4:22-23)


하나님께서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사실 그들의 실제 상황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데 왜 자꾸 인생이 허무한 것입니까? 분명히 예수를 믿는데 왜 창조 이전과 같이 혼돈과 공허상태에 빠지는 것입니까? 채리 힐이 쓴 공허함이라는 표현, 우리 인생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감기고, 하나는 공허함이다. 예수 믿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고백하는데 어떻게 공허함이 내 인생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되도록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나안을 목적지로 가라고 내비게이션을 장착했는데 하란 이라는 엉뚱한 곳에 기웃거리는 것 아닙니까? 인생이 혼란스럽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창세기 12장 1절의 말씀으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이르시되가 히브리어로 아마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빠졌던 아마르, 이르시되 이것이 혼란한 데라의 족보가 기록된 11장이 끝난 12장 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히브리어로 아마르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간이 겪은 언어와 흩어짐을 이루는 능력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혼란을 잠재우는 것도 하나님의 아마르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혼란스러우십니까? 어디가 길인지 모르겠습니까? 감기하고 수시로 찾아오는 것이 마음의 공허함입니까? 하나님의 아마르가 필요합니다. 이찬수 목사님만 흘러가는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마르가 선포되기를 원합니다. 데라의 족보가 슬프디 슬픈,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아들이 나오고, 온 세상이 낳고 낳고 하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슬픔. 하나님은 가나안을 목적지로 정해주셨는데 거기서 인생을 다 허비하고, 죽어버리는 인생, 이 모든 혼란을 잠재우는 창세기 1장 12절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다시 출발하게 하는 힘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 11:32)


하란은 교차로라는 뜻을 갖는 이름입니다. 하란은 이름 뜻 그대로입니다. 국제 무역로의 교차점에 있는 곳입니다. 상업도시로 번성한 곳입니다. 아브라함 일행이 볼 때 갈대아 우르보다 훨씬 번창하였고,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니 눈이 번쩍 뜨인 것 아닙니까? 둥지를 틀려고 했는지 잘 모르지만, 아버지 데라가 허송세월하고 죽은 것입니다. 이런 분석의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30살 되는 해에 5남매 중에 막내여도 모따리 들고 한국에 지낸 지가 31년 차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못산 지 31년이 되었습니다. 왜 역이민을 결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이 소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을 섬겨라, 아름다운 교회를 섬겨라. 데라를 보면서 마음의 소원을 갖습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이 하란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제 사역의 마지막이, 화려한 하란에 서 있어요. 그러면 내 인생은 실패하는 것 아닙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이, 내 목회의 마지막이 가나안에 위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살펴보는데 여기서 부르심은 두 번째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2-4)


목적지를 따라가다가 하란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2차로 부르신 것입니다. 제가 이민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저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지정한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이렇게 큰 교회는 꿈꾸지도 않았고 원하는 바도 아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100% 지원해주는 분립개척 1호였음에도 불구하고 70평 자리 엘리베이터 없는 상가에 얻은 것 아닙니까? 옥 목사님에게 견적서를 드리니 왜 이것밖에 청구를 안했어? 이러시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가에 70평이면 어마만한지 상상도 안 갈 것입니다. 어른 모이는 공간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흘러 흘러 왔다가 하니 분당우리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어있네요. 뭐가 두려운지 아십니까? 내가 은퇴할 때 목적지가 가나안이어야하는데 분당우리교회는 화려한 하란이 되어버린것 아닙니까? 너무 좋은 분들이 구름 때처럼 모여듭니다. 교역자들이 너무 인격적으로 좋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못하는 게 없습니다. 화려한 하란이 아닌가, 젊은 시절 꿈꾸던 가나안을 향한 꿈, 여기가 좋사오니 나 대형교회 목사인데, 내 인생은 데라가 되는 것입니다. 캠퍼스를 바라보며 꿈을 꾸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별 볼일 없던 1학년 2학년, 페트병 몇 개 사놓고 과자 집어 먹으면서 꿈을 꾸던 시절이 있잖아요. SFC라는 단체에서 강영 외우고, 요즘도 되뇝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다음으로 한다.


  •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 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이 화려한 분당우리교회가 화려한 하란이 되어서 여기에 머무는 것 아닌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수련회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타락한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을 때 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쩌다가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화려한 하란에 머무렉 되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두 번째 부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부교역자가 전라도 광주의 목회자로 갔습니다. 부교역자가 간다고 하니, 제가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서두냐고. 교구 사역도 안 해보고 중등부만 하다가. 진지하게 숙제를 주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라. 목사님이 며칠 뒤에 다시 왔습니다. 그 교회가 청빙한 것이 아닌, 제 마음에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10년 차인데 너무 편하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안주하기 쉬운 교회에 있는 게 아닌가, 기도하던 중에 얼마 있지 않아서 교회에서 청빙이 와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축복하고 허락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지금도 마음에 있습니다. 60~70명이면 서로가 잘 아는 사이인데, 광주의 그 교회가 하나님이 허락한 가나안인 줄 믿습니다. 꼭 서울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나안일 줄 믿습니다. 얼마 전에 대구로 부임한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 15명을 뽑았을 때 목사님 이름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함부로 할 수 없으니, 10명씩 후보자의 이름을 쓰라고 했으니, 청년부 오래 했으면 서로 잘 모릅니다. 이분이 나이로 보나 교구로 보나 당연히 15명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흔들리지 않고 하는 말이 목사님 뜻인데, 진짜 기도하는 것은 15명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청했을 때 자신 있게 이 목사님을 추천했습니다. 한 번씩 연락이 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땅에서, 안쓰럽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빗대어 설명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가나안이기에 너무나 감사하게 행복하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변질했고 타락해고 이런 소리 많이 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곳곳에 하나님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이곳이 가나안입니다.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기도로 후원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스티븐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축사를 언급하고 마무리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한정되어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면서 여러분의 삶을 낭비하지 마세요.


엉뚱한 하한에서 세월 낭비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이 한정되어있으니 하나님이 원하는 가나안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어떤 분들은 분당우리교회에 남아서 이곳이 가나안이길 원합니다. 29 교회에 옮겨서 그곳이 가나안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디든 상관이 없는데 하란은 더 이상 곤란합니다. 데라처럼 비참하게 인생을 끝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허락하심. 꿈꾸며 기도합니다. 저의 목회의 마지막이 화려한 하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09월 1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승화시키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1-9)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벨탑 사건을 다루고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이후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를 다스릴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들은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나온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이런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이런 내용을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의 전개 방식에서 흥미로운 것 하나를 발견합니다. 불순종해 바벨탑을 쌓는 것을 하나님과 대결구도로 보는 것입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


이렇게 자, 자,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시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7절에 하나님이 똑같이 반응합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 11:7)


비슷한 구도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4-5)


보통 이런 표현을 잘 안 쓰지 않습니까? 무소 부재한 하나님이신데 내려오셨더라 표현. 4절에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이 시도에 대하여 이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대조해서 설명하는 것이 내려오셨더라 표현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의 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9)


창세기 2장에서도 발견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그 말씀에 대한 사탄의 반응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순종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갑니다. 제가 물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아이들에게 인생 쉽게 살아라. 인생 간단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그분이 내려주시는 지침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복잡하게 살지 않는 비결입니다. 젊은 시절을 뒤돌아보면 인생을 허비한 것을 느껴집니다. 이전처럼 낭비가 없습니다. 생활이 단순해졌습니다. 물 철학입니다. 새벽에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내 생각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창조주 하나님과의 대결 구도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일진하고 틀어져서 두들겨 맞고 틀어져서 전학을 가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 않습니까? 한 학교 울타리에서 일어나는 공동체에서도 일진과 관계가 흐트러지면 학교 선생님도 우리도 손을 못 댄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과 불화해서 어떻게 인간이 안식을 누리겠습니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질서를 따라. 그것이 우리를 위해주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경계해야 하는 두 가지. 회복해야 하는 한 가지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경계 1. 우리 이름을 내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팀켈러의 '내가 만든 신' 책에서 가장 최고의 신은 내가 만든 신, 우리 이름을 내고. 어디에 가면 동양 최대의 불상이 있다 합니다. 저도 가봤는데 두렵지 않습니다. 그 불상이 제 삶에 영향을 안 줍니다. 그런데 두려워할 것은 내 마음에 있는 신입니다.


내가 만든 신의 목차는 이렇습니다.


  1. 내가 만든 신, 평생소원: 오래 간절히 바랄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오래 바라고 소원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도 있지만 내 이름을 내고, 이것이 목마를 수 있습니다.


  1. 내가 만든 신, 사랑: 사랑에 속고 속다 환멸에 찬 노예가 되었다.

오늘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짜 사랑이 얼마나 우리를 혼미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1. 내가 만든 신, 돈: 풍족한 소유와 소비로도 영혼의 헐벗음을 면치 못한다.
  2. 내가 만든 신, 성취: 그 어떤 성공신화도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3. 내가 만든 신, 권력

제가 몇 가지 점검을 해봐도 제 안에 내가 만든 신이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옵니다. 대형교회를 만들었어. 그렇게 교회가 커진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대형교회가 내가 만든 신이 됩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악하게 쓰면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극단적으로 위하는 것. 내 이름을 내고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아닙니까?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삼상 15:12-13)


마음에 충동이 있으면 발표를 해야 합니다. 은퇴식이 어때서, 다른 목사님이 은퇴식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저는 왜 안 하기로 결정했는가? 내 마음에 내가 만든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중간에 역할 끝나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에 대해 적용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4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요즘에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초미의 관심사다 보니깐, 1만 성도 파송운동 이야기를 자제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해야 합니다. 많은 분은 오해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따라가는 것이 내 이름을 내고에 있다면 불순종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합니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여름에 하나님이 저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5천 명 이하로 안 줄면 사임하겠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어떻게 성공하기 위해서 쥐어짜듯이 몰아치면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어떤 강요를 안 합니다. 내 영광을 위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유 하는 것입니다. 29 교회에 가는 것이 영광되면 가는 것입니다. 단, 큰 교회는 절대 안 됩니다. 또 다른 큰 교회 만들자고 하는 것 아닙니다. 기준은 우리 이름을 내고. 경계해야 할 첫 번째를 본문에 잡은 것입니다.




경계 2. 악을 도모하는 어리석음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창 11:2-3)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 구호는 하나는 맞고 둘은 틀립니다. 뭉쳐야 할 진짜 이유가 있다면 선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 우리는 잘못하면 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손 마른 장애인을 고칩니다. 적들이 죽이려고 하는데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은 앙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로부터 독립을 바라던 사람입니다. 헤롯 당은 로마 당국에 충성을 다하던 사람입니다. 우리 옛날 역사로 치면 친일파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 아닙니까? 이 앙숙인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하여 의논하리라. 악을 도모하는 일에는 단합이 잘됩니다. 이것이 죄성을 갖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근래에 이렇게 금술좋은 부부는 처음 봅니다. 이러다가 망했잖아요. 사도행전에 아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에서 한 방향을 향해서 가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하나의 전재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나타나는 열매가 선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 되는 것. 거기에 겸손이 있고, 온유가 있고, 오래 참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선한 일을 도모하는 공동체의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회복해야할 것.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승화시키기


바벨탑을 쌓았던 결정적인 잘못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창 9:1-2)


바벨탑을 쌓았던 결정적인 잘못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 세계를 너희 손에 다 맡겼다. 너희들이 다스리기를 원한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직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불행하게도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꿈을 짓밟아 버렸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물 심판을 받는 비참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데요. 놀랍게도 9장 1절에서 주신 어제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이 너무나 벅찬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짓밟아 버린 그들이잖아요. 하나님의 권위를 밟아버린 그들이잖아요. 현실은 홍수 이후에 파괴된 것들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꿈으로 선포하신 것이 그렇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몰라도 너무 모르니 이따위 짓을 하는 것 아닙니까? 탑 쌓고 우리끼리 잘살아 보자.


지난주 덕양중학교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본 이유는, 우리 현실을 보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9장 1절, 꿈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꿈으로 장착하기 전에 1만 성도 파송운동 스타트 하면 안 된다. 교장 선생님이 쓰신 책 제목이 무엇이 학교를 바꾸는가. 그 책을 구해서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하였습니다. 책 첫머리의 프롤로그 제목이 학교가 아프다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아프다. 몸보다 마음이 아프다. 학생만 아픈 게 아니라 교사도 앞으로 학부모도 아프다. 아픈 마음이 시작되는 곳이 학교가 되어버렸다.


폐교 권고를 받았던 학교에 예수 잘 믿는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을 때, 그 영상 보신 분 있으시잖아요. 세상에 그렇게 황폐해져 있던, 그 학교 아이들이 졸업식 하는데 학교를 떠난다는 것에 눈물을 흘리면서. 학교가 아프다. 대신에 교회가 아프다. 성도로 고쳐서 읽습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이 아프다. 몸보다 마음이 아프다. 성도만 아픈 게 아니라 목사도 아프고 전도사도 아프다. 오늘 우리는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했던 결과물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학교는 아프다. 교회는 아프다. 놀랍게도 여기서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 심판으로 끔찍하게 비극이 벌어진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다 내가 너희 손에 맡긴다. 바벨탑 짓는 짓 하지 않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29 교회가 생기는 것 말고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는 새로운 교회를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8)


너무나 당황스러운 현실이지만 막아주심이 은혜입니다. 더 큰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잘못된 내 이름을 위해서 건설한 바벨탑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브라함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내가 만든 신의 책에 이렇게 나옵니다. 참 하나님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대상만 바뀔 것이다. 프롤로그에 우상 생각보다 위험하다.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여러분이 만든 신은 배신합니다. 왜 제가 은퇴식을 안 하고, 내가 만든 신 앞에 하나님의 신이 어려움을 겪을까 봐 부들부들하는 것은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내가 만든 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09월 1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25-37)


워비곤 호수 효과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자기 능력을 평균보다 과대평가하는 성향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워비곤 호수는 미국 라디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상 마을 이름입니다. 가상 마을에 등장하는 사람 모두 자기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평균보다 잘 생기고,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입니다. 여기서 착안해서 만든 용어입니다. 인간 내면에는 그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자기 과시의 증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이론이 평균 효과 이상 이론, 자기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특별하고 독특한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재미있는 조사가 많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당신의 운전 실력이 어떠냐는 물음에 평균 이상으로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수님은 94%가 평균 이상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인은 80% 정도가 자기가 우수 인재라고 합니다. 이 조사 바로 밑에 부연 설명이 잔인합니다. 기업에서 실제 우수 인재로 분류하는 사람은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면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식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종종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주식을 고르는 사람들은 내 능력을 믿는다. 많은 사람이 주식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주식 시장의 변동성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지금 하면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 과도한 자신감이 워비곤 호수에서 기인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은 실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과대포장하기에, 오늘 본문을 딱 보고 이렇게 설교하겠군. 그러면 실제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 교사의 모습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 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5-28)


성경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분석하는 책입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자기는 이미 다 꿰뚫은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데, 예수라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런 정리가 되어있는지 테스트해봐야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율법 교사로서 그럴듯하게 드러내는. 겸손이 깨닫는 게 없습니다. 혹시 오래 예수 믿은, 저 같은 사람이 가장 위험한 것 아닙니까? 어떤 말씀 앞에서, 율법 교사의 태도로 말씀을 받는다면, 적신호가 울린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본문에 이런 야비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내면은 또 다른 생각을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감동합니다. 저 같으면, 다혈질 같은 분이면 그냥 안 넘어갑니다. 나 놀리니? 나 뭐로 보고 그런 질문을 해? 우리 같으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일절 내색을 안 합니다. 그 사람 스스로가 깨닫을 수 있도록. 그래서 들려주시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 비유 아닙니까? 우리의 너무나 보잘것없는 믿음을 대단한 믿음인 것처럼. 제가 맨날 이런 고백을 하는데, 어떤 성도님들은 설교 들으시면 우시고, 그러시는데 오늘 설교가 너무 좋았냐보다. 그래서 제가 아침에 만 보씩 걸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가는데, 이상하다. 소리를 꾁꾁지르는데, 들으면 창피해질 때가 있습니다. 제 안에 어떤 증상이 있는 것입니까? 평균 이상의 이론, 이 설교 엄청나게 잘하네! 여러분 그 설교에 눈물 훔치는 것은 그분의 순수한 믿음이라는 것을 제가 설교를 다 듣고 인정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락방 은혜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지적하러, 집사님 그러면 안 돼.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분. 이 분이 너무나 좋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율법 교사처럼 거만한 태도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스스로 깯았기를 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무엇을 깯았기를 원하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유대인에게 손가락질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불쌍히 여겨 온 정성을 다해서 치료하고 도와주었다. 다 아시죠? 크리스마스 연극의 거의 소재거리로 등장하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가 던졌던 질문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문제를 정확하게 아시고 비유를 가지고 되받아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는 그 율법 교사가 갖고있는 못된 생각. 옳게 보이려고 했다. 유대인이 갖는 못된 태도는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이 이웃을 정해놓은 것입니다. 정해놓은 범위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 이런 일을 실천하고 있는데요. 율법 교사를 포함한 이웃이 자기 동족입니다. 저것들은 내 이웃 아니야. 불쏘시개야. 함부로 폄하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율법 교사가 우쭐해져서 자기가 옳은 것을 옳게 보이려고 묻습니다.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나 정성으로 섬기는지 아시느냐고.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무엇이냐. 선한 사마리아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등장시키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합니다. 이웃은 네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만 너희끼리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 사랑은 강도 만난 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을 진짜 이웃으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저보다 조금 미숙하시니깐 1주일에 한 번만 듣도록 배려하시는데, 1주일 내내 이 말씀으로 찔림을 받게 하십니다. 교회가 왜 욕을 먹습니까? 우리가 서로 얼마나 위하고 사랑합니까? 세상은 늬들끼리의 사랑이다. 1년 다니다가 다락방에서 서로 사랑하다가 이 사람 진보야? 이 사람 보수였어? 에이 반 딱 잘라버리고. 좀 지나다가 경상도 사람이었어? 전라도였어? 서울말해 이 사람이. 이웃 아니네? 잘라버리고. 제가 드리는 말이 과장이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의 사람끼리 잘 지내는 것입니까? 이렇게 쳐내고. 미국 딱 갔을 때 제가 좋아했던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이 한 모습을 보고 그때 20대 초반 너무 실망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오늘 우리가 갖고있는, 율법 학자가 갖고있는, 같은 유대인만의 이웃이라는, 이런 태도를 고치지 않고는 세상 사람들 앞에 전 세상 사람들이 이웃이다. 이것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대한민국 사랑을 사랑한다고 인정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이가 들수록 이웃이 많아져야 하는데. 이렇게 자르고, 이념으로 자르고, 외로워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십자가 아래 어지간하면 이웃입니다. 어지간하면 수용하고. 생각이 다른 무지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사람을 설정하기를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한 것과 같이.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으로 제사장, 레위인을 등장시킵니다.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0-32)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제사장, 레위인은 성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된 것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 모습 아닐까요? 제 모습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 엄청나게 영향력을 믿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하고. 교회 밖에서는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교회 밖에서는 사회에 영향력이 없습니까? 제가 간혹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설교제목도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 레위인들이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강도 만난 사람들 앞에서는 왜 무기력했느냐? 성전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명사의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명사로서의 사랑은 복잡하다. 심리적인 뉘양스 등을 탐구하느라 수천, 수만쪽의 내용을 기록했다. 성경에서는 그런 탐구는 놀랍도록 적다. 이 단어는 명사로 자주 사용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살아서 움직이는 동사이다. 하나님은 사랑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깊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동사로 만들었습니다. 깊이 묵상하고 명사로서 점검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래야 사랑을 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7일 내내 명사로 연구하는 분들. 성경공부 그만하셔도 되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던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의 다른 일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일어서면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습니다. 하면서 하시는데, 본인이 대장암 말기였다고 하시면서 사모님이 유방암 초기 아닙니까? 본능적으로 아 나는 감사하다. 너무 빨리 발견이 되어서. 항암 치료도 안했습니다. 그냥 그 부위만 조금 떼어내는 걸로 끝났습니다. 집사님이 말씀하기를 그게 가장 위험합니다. 항암 치료 안 하고 똑 떼고 나면 왜 암이 찾아왔겠습니까? 음식 습관이 나쁘고, 생활 습관이 나쁘지 않기에. 그래서 원래 생활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재발합니다. 영육간에 진짜 맞는 말씀입니다. 죄짓고 금요 기도회 와서 회개하고, 1주일 내내 그냥 살고. 교회가 회복하기 위해서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바뀌어야 할 시스템이 무엇입니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7-28)


율법학자처럼 자기가 우월한 것을 우쭐하려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웃을 사랑하되 내 마음대로 이웃이라고 정한 것을 다 허물고, 강도 만난 자를 돌보고 섬기는 이 구조를 바뀌지 않고는 교회의 회복은 없습니다.




1.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말씀을 되뇌어야 합니다. 율법 교사처럼 내가 만든 이웃. 나는 진보이기에 진보가 좋아. 이런 이웃의 선을 다 지우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오늘도 어려움 당한 절실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




2.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명령형 동사 '가라', '하라.' 합니다. 삶의 현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처럼 받은 그링 있습니다. 우리 직원이 올린 글을 발견해서 제가 읽었습니다. 그 분 크리스천인 것 같습니다. 아파트를 신혼부부에게 월세를 주었습니다. 5년 잘 살았는데 자영업을 하는데 잘 안 되었나봅니다. 다시 직장으로 들어갔는데 크리스천 부부가 목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세로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데 여건이 안 되었나봅니다. 1년만 월세로 살면 안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크리스천 부부가 어려워도 입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번 달 월세를 돌려드리자. 다음 달 월세를 안 받는 것보다 이번 달을 돌려드리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찬수 목사님이 교인들과 펼쳤던 임대로 인상 안 하기 운동을 하였습니다. 카카오뱅크로 돌려드렸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이 이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으로 카톡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강단에서 제가 사랑을 이론으로 명사로 설명했더니 이 부부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신혼부부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되돌려주시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다고. 이것이 복음 전도 아닙니까? 오늘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이 가라, 하라. 이번 주말부터 추석이 시작되는데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어지간하면 가세요. 예배는 본 교회에서 지켜야 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성경에 그런 말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하기로 했던 헌금하고 오세요. 추석 설날에 교회 예배의 문을 닫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다녀간 사랑의 동사로 작은 시골 교회가 얼마나 위로를 받고 회복을 받을 수 있다면 가세요. 그리고 하셔야합니다. 그런가하면 지난주 눈물을 흘리면서 본 영상이 있습니다. 우리 교역자 한 사람이 보내주었습니다. 무엇이 학교를 바꾸는지 교장 선생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분 100% 크리스천이다. 그렇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없다. 학교 중에 덕양중학교 교장 선생님. 개발 제한 구역으로 주민들이 다 떠납니다. 폐교 권고를 받을 정도로 어려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폐교 위기를 받던 교회에 이준원 교장 선생님이 공모 교장으로 부임해서 완전히 바꿉니다. 공부 잘하는 학교, 영어 잘하는 학교 만들기가 아닙니다. 무기력하게 등교하는 애들, 모든 학생에게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교장 선생님 뒷벽에 전교생 학생과 이름이 있습니다. 핸드폰 사용 절제에 관해서 토론하게 만들고, 마지막 졸업식을 하는데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한 분 부임하니깐 아이들이 울면서 왜 중학교가 3년밖에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하는 모습. 제가 그 영상준 목사님에게 이야기했더니 기어이 수소문해서 통화를 했데요. 크리스천 맞습니다. 저녁에 야간 공부로 신학 공부도 했다고 합니다. 교장님 한 분 바뀔 때 폐교 위기의 학교가 바뀔 수 있다. 예비 29 목사님 모여서 다 봤습니다. 29 교회로 나누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같이 꿈을 꾸자고. 사랑을 동사로 만드는 교회를 꿈을 꾸며 이것으로 한국 교회를 섬기자고. 그 교장 선생님이 다음 달에 전체 교역자 앞에서 특강을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09월 0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가슴 벅찬 꿈으로 위기를 돌파하라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14-21)


징비록이라고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승용 알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징비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니 전에 있었던 잘못과 비리를 경계하여 삼간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임진왜란의 뼈아픈 아픔으로 삼아서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겪지 않을 수 있을까? 피를 통하는 마음으로 쓴 책이 징비록이구나. 임진왜란 전쟁의 참상을 적날하게 노출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타던 수레가 환도하니 불타고 남은 것들만 성안에 가득하고 그에 더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신은….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어 죽은 시신이 보이면 가르고 먹어 피와 살이 난자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이런 비슷한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백성들의 삶을 보면서 경세유포 서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유배지에서 만나는 백성들의 절박함을 보면서 어른의 고뇌가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을 되뇌고 되뇌었습니다. 목사로서 이 내용을 읽으면서 위기를 만난 한국교회라고 하는데, 코로나 19가 끝나고 대면 예배가 회복되면 한국 교회의 거품이 빠질 것이다. 비관적인 전망이 오는데, 목사로서 고뇌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이것도 고쳐야 하고 저것도 손을 봐야 하지만 무엇보다 젊은이가 저 같은 목회자에게 실망해서 떠나간다. 수많은 통계가 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냐는 것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


유럽 교회가, 미국 교회가 지금 어떤 전철을 밟고 있는가? 그래서 지금 뭔가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교회가 위기를 맞이할 것이니깐.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성도의 사정에 따라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된다. 분당 우리 교회에 주신 이런 면에서의 사명, 명령은 1만 성도 파송 운동입니다. 모든 교회가 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희 뭔가라도 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위기를 만다난다. 다시 정리해 드리면 우리 교회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1년의 등록이 4천 명, 급증하고 그 해에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선포 안 하면 5천 명을 돌파할 예정입니다. 당시 분당만 하더라도 1년에 200군데 교회가 문을 닫는다는데 분당 우리 교회로 쏠림을 내버려둬도 되겠습니까? 담을 공간만 있으면 5만 명이 모이겠습니까? 6만 명이 모이겠습니까? 비상해서 드림 센터 매입하고, 그 옆에 건물 매입하고 그게 옳겠느냐고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하면, 류승용, 정약용 선생님의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교회의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나에게 안 좋다. 여러분이 마음이 아프니 저도 병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아팟지만요. 저에게도 너무 버거운 일입니다. 우선 29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1시간 대화 나누고 저 목사님 만나서 한나절 다 써도 역부족입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들려지는 상처받았다는 이야기, 아프다는 이야기. 어떤 분은 우리 성도님 중에 이찬수 목사님이 미워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미워 죽겠는 게 아니라 엑센트가 밉다는 말을 합니다. 7월에 아픈 시간을 보냈다니 더 밉다는 것입니다. 지도 그렇게 아플 거면서. 이찬수 목사 쫓아 내야 한다. 5천 명 이하 안 줄어들면 나간다고 했으니 우리 나가지 말자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한 것이 아니라 애들 쪼그만 할 때 예방주사 놓으면 아빠 미워. 그런 슬픔이 옵니다. 19년 목회하는 동안 이찬수 목사 쫓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물밑에서 하셨는지는 몰라도 생전에 처음 듣는 이야기이지만 처음 듣는 말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이 되지도 않을 일을 괜히 벌여서, 제가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일시적으로 공황이 와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제가 잘된다고 우쭐할 일도 아니고 이것은 분당 우리 교회를 향한 시대적인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런 부분을 회개했습니다. 늬가 후회한다고 안할 일이 아니고 이것은 너희 교회에 맡겨질 시대적 소명이기에 명하시면서 깨달을 말씀이, 제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당위성만 이야기했는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기왕 해야 한다면 꿈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슴 벅찬 비전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대안을 발견했습니다. 9월 첫주를 너무나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이제 1만 성도 파송 운동을 너무나 가슴 벅찬 꿈으로, 비전으로 선포하고 나아갈 줄을 믿습니다. 창고에 몰건 29개 나누는 것입니까? 얼마나 잘 나누어지느냐로 하는 것이 아니라, 29 교회를 세우는 꿈, 우리가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 전 교역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건강한 교회론을 공부하자고. 성경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어느 공부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기가 교회론을 공부하니깐 건강한 교회론은 건강한 목사론이더라. 100% 동의합니다. 기왕에 목사 되고 전도사 되고 했는데, 어떤 전도사가 건강한 목사이고 전도사인지, 사도행전이 말하는 바로 그 교회를 꿈을 갖고 만들어보자. 제가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교역자들이 같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님이 다 볼 수 있도록 건강한 교회에 대한 메뉴얼 북을 만들어서 오픈할 것입니다. 29 예비 담임목사님께 본보기 주택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당신들이 살 집 29개를 만들자. 성도님들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을 만들어서, 여러분의 교회를 방문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그 전 주, 건강한 교회에 대해서 토의를 하고 있습니다. 목사들만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 꿈이 있잖아요. 만났으면 하는 교회, 죽기 전에 안심하고 물려줄 수 있는 바로 그 교회에 대한 꿈을 여러분도 꾸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2학기에 공부하셔야 합니다. 저는 제 책 이야기를 꺼내면 오글거려서 못 꺼내는 데요. 에클레시아라는 책으로 공부하길 원합니다. 이외에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소개할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목사가 끄는 데로 따라갑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지키고, 꿈을 품고, 여름에 저의 아픔을 통해서 대안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갖고 이런 각도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영광송이 담겨있습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세 가지 대안을 발견합니다.



1. 능력으로 강하게 됨을 구하기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능력을 주시길 원합니다.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외적인 능력, 이런 게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구하는 능력은 마음을 강건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내려면 이렇게 약해서는 안 됩니다. 에배소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책에서


마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고, 죄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는 성도가 이방 사회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맞습니다. 악한 영들과 싸우기 위해서 강해져야 합니다. 바울의 기도라는 책에서 속 사람의 강건함에 대해서 잘 쓰여 있습니다. 거룩해지는 능력,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능력, 순종하고 신뢰하는 능력, 담대한 내면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속사람의 강건함을 구해야합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사도바울이 속사함의 강건함을 놓고 왜 기도합니까? 자기 속사람이 강건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으라는 조건을 왜 답니까? 바울은 압니다. 능력의 원천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마인트 컨트롤 100권 읽어보세요. 마음이 강해지는가? 본문의 소제목을 하나님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잡혀있습니다.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 속사람, 마음의 강건함을 허락해 주시길 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기


길성남 교수님이 쓰신 책을 보니깐,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한 것을 보니 18절, 19절을 뒤집어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며 (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시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구에 모교 회에 가서 설교했습니다.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외부 집회를 안 간다고 결심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70주년이기에 이번에 설교가 없는 주간에 갔습니다. 7월 마지막 주 토요일입니다. 바로 전주에 하나님이 날 잡아서 뒤흔들고 1부밖에 설교 못 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제가 잠이 안 온다면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런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차를 몰고 내려가는데 지금 이제 한 달 지난 그때를 떠올리면 딱 이 색깔입니다. 잿빛 느낌입니다. 차를 몰고 내가 부산으로 가는지, 광주로 가는지 암담한 상황입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그때가 7월 마지막 무라 너무 답답해 나왔습니다. 한참을 걷고, 국밥 한 그릇 먹고 숙소에 들어왔는데, 씻지도 않고 침대에 털썩 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든 것입니다. 몸은 모 교회 설교하러 내려왔지만, 뚫고 갈 힘도 없고,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새벽 2시 넘어서 눈이 떠진 것입니다. 설교 준비 다 끝나고 원고 프린트하고, 이번에는 늦게까지 실컷 잠자야 하지 하는데 웬걸요. 예기치 않은 은혜, 그 새벽의 충만함을, 치유해주시고, 회복의 스타트가, 그 날 새벽에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 충만한 마음으로 모 교회 강단에 섰는데요. 설교는 생물입니다. 옛날 것 꺼내서 설교하면 죽은 설교가 할 때까 있습니다. 그날 설교 절반밖에 못 했습니다. 큰 사랑과 은혜에 너무 감격이 되어서, 내 어릴 때 권사님들 여러분 앉아계시고, 설교하면서 떼를 썼습니다. 성도님들이 걱정하니깐 하지 못한다고. 여러분이 저를 키웠으니깐 저를 책임져달라고, 기도해달라는 소리죠. 많은 분이 우시더라고요. 모 교회가 참 좋은 곳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고 바로 올라왔습니다. 장로님 몇 분하고 식사하고 바로 올라오는데, 어제 토요일 오후에 잿빛 무슨 생각 하면서 운전했는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올라갈 때는 제가 과속을 했습니다. 빨리 가고 싶어서, 모 교회는 위로받고, 저의 사역지는 분당 우리 교회 아닙니까? 차를 밟았습니다. 기뻤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무엇인지 깨닫고, 경험한 시간을 보냈기에, 지난주 내내 너무 묶었던 호텔을 가보고 싶은 것입니다. 어제도 가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장소니깐요. 힘드신 여러분, 주님과 추억의 장소가 있습니까? 너무 힘들 때, 잿빛 하늘일 때, 뚫고 갈 힘이 없을 때, 인간적으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을 때.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장소 있습니까? 힘들 때마다 가보고 싶은, 바울이 이걸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가 알기를 원합니다. 이번 여름에 깨달았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그 이후로 받은 십자가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너무 광대하고 크시기에 안 믿어지는 것 아닙니까? 믿을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세 번 역으로 보니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7월 마지막 주에 설교를 한 번 한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여름에 오히려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휘어잡기 때문입니다. 매 아침마다 홀로 서 있는 현장에서 언제는 혼자가 아닙니까? 수 만 명이 예배를 드리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위로받으려는 순간 영성이 죽으니깐, 고독한 골방에서 주님의 사랑이 나를 휘어잡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어제 새벽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휘어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번 2학기에 맛보고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지길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기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1)


이번 여름에 일시적으로 패닉이 오고 마음이 무너졌을 때 두 가지 대안을 주셨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 말고, 일생에 한 번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이 대안이었습니다. 성도님드에게 이것을 전하라. 너 자신도 그렇게 해라. 앝은 대서 나에게 좋은 일인가? 안 가는 게 좋아? 얕은 찰싹거림이 아니라 더 큰 그림으로, 더 원대한 그림으로 이번 2학기 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라. 저는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30대 설교 순 엉터리입니다. 여러군대 주석보고 그러대니깐, 에배소서 설교를 한 두 번 했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보니깐,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수없이 오해당하고, 믿는 동역자조차 사도바울을 모함하고, 또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잘난척하더니 뭐 별수 없네.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감옥에 왜 가. 수치심으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위축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위축됨이 없는지 보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상처받지 않을 비결을 봤습니다. 상처 안 받으려면 너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배소서 처음 펼치면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첫 말씀이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 상황에 너무 함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많았던 분 돌아보세요.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믿을 수 있는 목사야? 이게 두려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안은 인간적인 자기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위대한 하나님을 선포하고, 높여 찬양할 때 우리 안의 두려움은 사라질 줄을 믿습니다.






08월 2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막 6:35-44)


제가 간혹 인간이 갖는 편견과 선입견을 설명할 때 확증 편향 용어를 갖고 설명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에만 집중하고 그 외의 정보는 신경 쓰지 않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는 태도입니다.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본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우연히 청소년을 위한 책인데요, 14살에 시작하는 처음 심리학책에서 확증 편향에 대해 정곡을 찔러서 설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봐, 내 말 맞잖아.'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제 수준이 14살이라는 것을요.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열린 사람이 되자. 그래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14살에만 해당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을 살펴보다가 이런 설명이 떠오른 것은 제자들의 귀함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과정에서 좁은 생각에 갇혀 큰 뜻을 분별하지 못했다. 우리가 어디 가서 큰돈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제자들입니다. 본문을 보다가 놀라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좁은 생각, 좁은 시야에 빠진 제자들이지만 제자들이 너무나 예수님의 수족이 되어서 예수님의 의중은 잘 살필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예수님의 수족을 드는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똑똑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손색없이 동역할 수 있는가? 비록 시야는 좁았지만, 주님 앞에서 주님이 틀렸잖아요. 태도가 아니라 언제나 틀릴 수 있다. 주님의 말씀 앞에 교정받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공생애 기간에 주님에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편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가가니 말씀으로 교정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비록 부족하지만, 주님에게 쓰임 받고 싶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고 싶습니다. 갖추어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과의 소통


본문의 흐름을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막 6:35-36)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 6:37)


생각이 부족한 그들이지만 끊임없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막 6:38)


어차피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의 똑똑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주원인이 아니고 오병이어의 기적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기적의 원천이 주님이라는 것을 갈고 소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소위 똑똑하다는 목회자들이 울 범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저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신학생들이 물으러 오고, 후배 목사님들이 질문하러 오니 자칫 잘못하면 여짜오되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지도가 없으면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연약한 그들이지만 제자들이 주님 앞에 여짜오되라는 삶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면 주님이 틀렸잖아요. 제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이런 소통을 잘한 인물이 구약의 모세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


모세 같은 선지자가 참 선지자다 하시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이큐가 200이고, 유능하여서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수시로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출 24:1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출 24:15)


모세가 이렇게 빈번하게 산에 오른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출 24:16)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산에 올랐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친밀함을 갖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이 왜 중요하냐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에 광채가 납니다. 진짜 영성은 모르는 영성입니다. 제가 수많은 목사님들을 만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내린 결론은 얼굴의 광채가 나는 사람은 내 경험상 대부분 작은 교회 목사님들입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제가 작은 교회 목사님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작은 교회하는 내 주제에. 하나님은 큰 교회, 작은 교회 기준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 기준으로 영적인 충만함이 나타나기 때문에 큰 교회 목사님들은 항상 두려워 해야 합니다. 한때 저에게 별명 짓기를 카푸치노 커피라고 했습니다. 거품이 무성해서 후 불면 실제로 1/3밖에 없습니다. 친구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버럭 화를 내며 당신이 그렇게 향기롭단 말이야?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닌데. 큰 사업체, 작은 사업체, 지혜로운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그게 아니라 주님과 소통하는 지입니다. 개척 초기에 저의 부족함 때문에 너무 목마름이 많았을 때 불 꺼진 본당에 앉아서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 때 그것이 모세가 찾은 산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무거운 일들 때문에 힘들다면 모세가 찾았던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소를 주님이 만들어주실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잠깐 눈을 감으면 이 세상과 격리됩니다. 주님과 대면하며 교제하는 일. 소통하는 일.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받았던 평가처럼,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같은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2. 절대 순종


내 생각도 이렇고 주님이 시키는 것도 이해가 되면 그냥 순종이고요.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막 6:39-40)


왜 대단한 것인지 상상해보세요. 무슨 메시지입니까? 먹을 것을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앉으라는 것입니다.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물고기도 멸치 같은 것입니다. 왜 절대 순종이 주님의 동역자로 쓰이는 기준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가 그래서 가능한 것 아닙니까? 저는 요한복음 2장에 나온 가나안 혼인 잔치의 기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압닙니까?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저는 목사가 된 이후 요한복음 2장 9절처럼 그렇게 부러워하고 되기를 원합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요 2:9)


기적의 현장에 주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맹물을 퍼날렀던 사람들이, 비록 그들은 심부름하느라 기적의 포도주를 못 마셨지만 세치 혀만 적시는 얕은 기쁨을 누리는 하객들이 절대로 모르는, 기적의 비밀을 아는 하인들의 기쁨,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하객이 되기를 원했다면 벌써 타락했을 것입니다. 원리는 뭔지 모르겠고 교회만 키워주세요. 영적으로 깊던 얕은 사람만 많이 모아주세요. 교회가 커지고 작아깆고보다 관심 있는 것은 물 떠온 하인들만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근거를 갖고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객들이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물 떠온 하인들만 아는 기적을 누린 감격은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요 2:8 새번역)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얼마나 깊은 말씀인지 아시나요? 하객들이 기분이 좋아서 포도주 더 가져와. 그러는데 맹물을 부어주면 봉변당할 짓 아닙니까? 여러분 같으면 하시겠습니까? 평생에 잊히지 않는 추억의 날을 하객들이 꿈도 못 꾸는 물 떠온 하인만 아는 비결을 여러분도 맛보고 싶다면 절대 순종입니다. 맹물 부어서 욕먹을 텐데, 저는 부교역자들에게 종종 이야기합니다. 당신 생각이 너무 많다. 종들은 단순해야 조건이다. 주인이 복잡해야지 종이 뭐가 복잡한가요. 목사들이 생각이 너무 복잡하면 안 됩니다. 제가 사실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한 비결이 이것입니다. 어깨에 하나님이 이상하게 저에게 많은 것을 맡겨서 1인 4역 5역을 해야 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만 해도 허리가 휘청거리는데 드림 센터 사회 환원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몇 가지나 어깨가 휘청거리는데 자고 나면 괜찮고, 아침에 일어나면 괜찮아지고, 새벽에 소통하는 것은 주님의 지령을 받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간첩들 난수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파를 맞추면 자기들만 아는 난수표를 갖고 지령을 받는 시간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당신 하나님께 지령받았나? 지령도 안 받고, 우리가 최종 책임자가 아닌데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아침마다 하나님의 지령을 받으십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니 열심을 내면 낼수록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5)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여라. 이게 어렵습니까? 생각이 많이 복잡해야 합니까? 무슨 말씀을 하듯 순종하는게 어렵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쉽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비 꼬이는 복잡한 삶을 사세요? 사랑하는 우리 아들딸 권면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간단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듯 그대로 하여라. 분당 우리 교회 당회 장로님들 만만치 않습니다. 믿음도 좋으시고 대단합니다. 안건을 내면 요모조모 잘 따지십니다. 한번은 연말에 12월 31일에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 드리고 인사하러 가니 문앞에 기다리셨는지 우연히 마주쳤는지 시무 장로님이 자꾸 반대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장로님 역할입니다. 더 철저하게 반대해주세요. 그랬더니 그분이 안심하고 반대하셔서 너무나 은혜롭게 당회가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걸러주지 않으면 안티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꾸로 하시는 것 아닙니까? 사람에게는 눈치보고 하나님 앞에서 막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는 경청하시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순서가 가꾸로 되면 곤란합니다.




3. 선행 감사


그냥 감사는 세상 사람들이 다 합니다. 믿는 우리들이 하는 것은 선행 감사입니다. 출처가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막 6:41)


예수님이 축사하시는데 유대인들이 당시 식사 관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식사를 하기 전에 그렇게 기도를 드리는데 영어 NIV로 보니깐 He gave thanks. 예수님은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모든 유대인도 식사를 앞두고 감사기도를 합니다.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먹기만 하는 그때에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차리기 전에.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는 상황에서. 슬로우 처치라는 책에서 교회가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제공하기 위해서 몇 가지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감사 훈련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결핍에 집중하고 있을때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셨고, 예수님은 작지만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다.


이해가 되나요? 제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안 갖고 있는 것에 집중하니 감사가 나왔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있지만 있는 것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개척을 처음에 하고 많이 두려웠습니다. 요새는 안울읍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 없습니다. 19년 목회하면서 알았거든요. 하나님은 강점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터무니없이 작고 보잘것없지만 작은 저의 장점을 부각시키셔서 손색없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에 집중하면 그것은 부족한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기적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제자들이 자기의 결핍에 집중할 때 예수님은 작지만 이미 가진 것에 감사를 드렸다.


오늘 본문에서 정말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막 6:41)


하늘을 우러러 축사합니다.


감사란 조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왜 제자들이 자기들의 결핍에만 집중하면 안 되는지 아십니까? 어저피 오병이어의 기적의 능력은 자기들의 떡과 물고기 분량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갖춘 것이 없어서 쓰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자주 하늘을 쳐다봐야 합니다. 땅의 것을 보시면 안 됩니다. 자주 영적인 세계를 꿈꾸셔야 합니다. 화려하고 사람 많이 모이고 갖출 것 다 갖추고, 영혼을 가난하게 만들 도구입니다. 도시교회 치명적인 문제 아닙니까? 어린애 도시락밖에 없네. 맨날 비관하고, 도시락 100개 모아서 교만하고. 하늘을 우러르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내가 도시락 100개 1,000개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족한 재료를 갖고, 오병이어 기적을 이루실, 하나님을 향한 반응입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그러나 내게 당신이 있습니다. 정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께서 쓰신 책의 제목을 따온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쓰러진 나를 일으킵니다. 나를 사랑한 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입니다.


이 문장이 주님을 묵상하는 재료가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님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쓰러진 나를 일으킵니다. 나를 사랑한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입니다.


비록 우리 인생이 결핍된 것투성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의 결핍을 호소할 수밖에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 가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 힘으로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주님이 계속 내 마음에 되뇌게 하신 두 마디. 다 배불리 먹고. 감사란 조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빈 들이고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제 나이가 그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의욕도 점점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뿐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축복입니다. 빈 들에서,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자리에서 설교 제목 그대로 고백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들이지만, 그러나 내게 당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08월 2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진심 어린 사랑이 낳은 기적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막 6:35-44)


지난 한주 내내 품에 끼고 다닌 책이 있었는데요 이 책은 모 지역에서 막국수 식당을 하는 주인입니다. 제목이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 이런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감동을 받고 목사인 저도 이분에게 배워야겠다는 포인트는 이 분은 식당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거짓으로 쓸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입니다. 식당 부부는 1년에 280번 식당의 막국수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300일 영업을 하는데 매일 막국수를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당 하시는 분에게 이런 말을 들어볼 것입니다. 중국 식당을 오래 하니 냄새만 맡아도 질린다. 이해가 되는데요. 이 부부는 긴 세월을 거의 매일 자기 식당에 나오는 막국수를 먹을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1. 막국수가 좋다고 합니다. 좋아하니깐 생각하고 먹게 된다. 이 내용을 다루는 소제목이 좋아하니 계속하고 계속하니 깊어집니다. 이 소제목이 목사인 저에게 받아들일 점이 많습니다.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좋아하니깐 막국수 장사를 한다. 저에게는 이런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지요.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손님들에게 권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저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 목회자 아닙니까? 점점 주님이 사랑이 되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내 삶 가운데 말씀 묵상할 때가 행복하고, 설교할 때가 행복하고, 그래야 제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손님을 대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를 좋아했다. 두 번째는 그 날에 막국수를 평가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 변한 것이 없는가? 매일매일 막국수를 먹으면서 손님 처지에서 생각하고, 점검하기 위해서 막국수를 먹는 것입니다. 손님 중에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애 뒷바라지하고, 기저기 갈고 하면 음식 먹는 속도가 느립니다. 이런 분들을 배려해서 그 탬포에 맞추어서 먹어본다는 것입니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맛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손님에 집중하는 사랑 없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손님들 앞에서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주방을 남편분이 담당하는데 손님들이 다 가고 모든 일과가 마치면 그때부터 청소가 시작됩니다. 손님들이 어마어마하게 옵니다. 솥도 엄청나게 크고 장비가 많은데 청소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놀랐던 것은 반죽 기계 나사를 다 풀어서 청소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전날 사용한 반죽이 기계에 끼어있으면 위생도 그렇고 맛에 미세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식당이 다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감동을 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식당 주인에게 이런 감동적인 행동을 만들어내는가? 책의 한 대목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국수집을 시작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지만 그렇기에 손님이 오면 음식을 내고 돈을 받는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국수 먹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하는 일에 활력을 느끼고 손님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 식당은 단체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분의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가 한 주 내내 이 책을 들고 다니고 후배 목사님에게 권하고 목회에 접목을 해보자고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감동을 받는 포인트가 예수님의 한 사람 정신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무엇을 강조하는 주님의 말씀입니까? 하나에 몰두하면 계산이 사라집니다. 계산이 안나와? 한 마리 잃어버릴 수 있지. 이것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강아지를 키우기 전에는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강아지 수술하는데 100만 원이 들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비싼 돈이 드리면 강아지 새로 사면 되는데, 분노의 눈으로 보는 분들은 다 강아지 키우는 분들입니다. 강아지를 키워보니, 관계가 형성되고 사랑이 가니 강아지 수술도 했습니다. 어떻게 내다 버리고 새로 삽니까? 예전에 우리 애들이 놀렸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희락인데, 병이 들어 수술하는데 50만 원 드는데 주저 없이 할 거니깐 묻지도 않습니다. 100만 원 들면 하실 거예요? 200만 원 들면 하실 거예요? 500만 원 들면 하실 거예요? 한 가지 배운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몰두하는 것은 계산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리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포인트 아닙니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번 주 먼저 오병이어 사건의 의미를 두 가지 포인트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주님. 주님의 이 정신이 만들어낸 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자기가 갖는 스케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쉬러 가셨습니다. 이런저런 필요가 있으니 군중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갈등 없이 스케줄을 미루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밤에 성도님이 전화 오면 버럭 화를 내며 제가 출근이 9시부터 6시라고. 이러면 목사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토록 사랑하시는 한 영혼에 관심을 두는. 밤늦게 전화 받는 것이 힘들 때가 있죠. 고3 맡을 때는 24시간 전화해라. 했습니다. 새벽 1시가 피크고요. 새벽 3시에도 전화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의 영혼이 중요하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정신입니다.


사람에 집중하면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엄청 유명한 사건이지만 엄청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렸지만 한 사람으로서는 밥 한 끼 만든 것입니다. 온 천하를 구원한 주님 관점에서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습니까? 제자들의 논리가 그것 아닙니까? 각자 알아서 하라고. 내가 식당 하러 오나? 메시아인데. 밥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 그래.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꾸 우리가 대의명분하며 사소한 것은 신경 안 써도 되. 이게 아닙니다. 한 사람 집중하는. 내 목회가 한 사람 철학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주 어금니 이야기를 괜히 해서 지금 괜찮냐.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찬수 목사님의 관심은 1만 성도 파송운동 밖에 없어서 잘 안될까 봐 어금니 빠져서 고민한다고. 너무 슬펐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에 빠져서 변했다. 달라졌다. 여러분 그래서 상처를 받으면 공연한 상처입니다. 제가 아픈 포인트는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잘되고 안되고 자체에 신경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기업도 아니고. 더군다나 성도님들이 두부 자르듯이 됩니까? 몸통 잘라져도 할 수 없다. 대의명분을 갖고 하는데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어도.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 성도님들이 다쳐도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꾸 오해하니. 설교시간에 1만 성도 파송운동 이야기밖에 안 한다고. 계몽을 해서 내보내려고합니다. 제가 설마 목사의 양심으로 내보내려고 1만 성도 그러겠느냐고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론으로 설교하면 약장사이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을 자기 삶 속에서 자기를 관통해낸 설교가 설교다. 이것은 제 지론입니다. 가평 우리 마을 설교할 때는 한 주 내내 가평 우리 마을에서 약자들, 지친 자들을 치유하는 동산이 될까? 고민하고, 응답받은 일이 있어서 관심사로 예를 드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도 그것 때문입니다. 분당우리교회가 시작한 운동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시험받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새벽에 집중하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이 답을 주시기에 하는 것이지 계몽해서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9월 첫째 주에 지난여름 받은 말씀을 선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발견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단 말이야? 이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시기까지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주님. 한 사람, 한 사람, 밥 한 끼 늦게 먹는 것조차 사랑의 결정체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장님들의 열정은 너무 감사한데요. 눈물로 호소합니다. 남은 2학기가 순장님과 순원님들의 잊혀지지 않는 주님과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다락방이 되기를 원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갈 거야 말 거야 묻지도 말고, 답을 찾아가기를 원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오병이어의 정신으로 수고하는 것, 너무 잘 압니다. 어린아이들 하나하나에 대해여 마음 다하여 섬겨주시면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 6:37)


제자들에 위힘하시는 주님입니다.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막 6:39)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막 6:41)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령 있는 것처럼 일하라. (성어거스틴)


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 없이 일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아무 선한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허드슨 테일러)


제가 하루 5시간 기도해요. 이렇게 자랑하면 목사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머지 시간에 성도님들을 제대로 섬기려고 그렇게 오래 기도합니다. 여기까지 가야 이해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교역자들에게 종종 점검합니다. 새벽에 큐티했냐? 기도했냐? 무엇을 위해, 어떤 내용의 기도를 했는가. 목회자들의 모든 기도의 핵심이 있다면 너희들의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 힘을 얻기 위해. 건강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제가 우울증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사망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쓰임 받기 위해 거쳐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제대로 쓰이기 위해서




1. 자신의 좁은 시야 깨닫기


본문에서 드러나는 제자들의 좁은 시야를 보세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 6:37)


메시지 성경이 너무 적날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들의 저녁을 마련하여라." 그들이 대답했다 "진신입니까? 이들에게 큰돈을 쓰라는 말씀입니까?"


큰 너비와 깊이를 갖고 대하는데, 자신의 기준으로. 저는 항상 두렵습니다. 저의 좁은 시야가. 크신 주님의 과업에 방해가 될까 봐. 정말 커지고 싶어요. 진심으로 생각의 깊이가 넓은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던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생각의 좁음을, 우리의 편협함을, 걸핏하면 오해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시인해야.


요한복음 6장에 같은 내용을 다루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5-7)


주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유도했는지 요한복음에 설명합니다. 제자 빌립이 자기의 좁은 생각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00 데나리온만 참는 인간의 한계를 자각해야 오병이어의 기적을 구하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마인드 셋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은 성경 안 읽어도 눈치채는 것 아닙니까? 고정 마인드 셋, 고정관념으로 자기 생각으로 변할 생각이 없는 사람. 이것이 고정 마인드 셋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반대되는 개념이 성장 마인드 셋. 성장하려면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려야 합니다. 저분은 100으로 설명하는데 1로 받고, 혼자 삐지고.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 고정 마인드 셋을 인정하면 성장 마인드 셋으로 가야 합니다. 기왕 예배드리는데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 그런 마인드로 임하는 것이 성장 마인드 셋에 해당한다. 하나님에게 쓰임 받고 싶습니까? 자기 시야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쓰임 받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2. 자신이 가진 보잘 것 없는 것을 주님께 가져가기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자신의 좁은 시야로 대답한 것이 빌립입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8-9)


빌립과 안드레의 공통점은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뭔지 아시죠? 빌립은 자기 생각에 함몰되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면 도시락은 문제로 해결할 수 없어 주님께 가져간 차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막 6:38)


주님이 원하는 포인트를 아십니까? 이미 너희에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19가 예상보다 너무 길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힘든 상황입니다. 자영업자들은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맨날 이것 때문에 비관하고 우울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러시겠습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초라한 것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야곱, 잔꾀의 대왕 아닙니까? 척척척 200데나리온 구해야 한다면 구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실패했습니다. 야곱을 다시 묵상하는데 얼마나 새로운 은혜를 발견하는지 모릅니다. 야반도주합니다. 비참한 들판에서 밤을 보내는데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창 28:11)


어린애 도시락밖에 안남은 초라한 상태이구나. 이런 비참한 상태를 묘사한 16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잔꾀 부리면서 200데나리온 모을 때에는 여호와께서 여기 계산 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힘든 가정이 있다면, 꿈꾸며 달려간 일들이 수포로 가서 마음이 상했다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것을 깨달을 시간입니다.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주님입니다. 어떤 이벤트, 행사도, 교회 2만 명 전부 주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은 여러분입니다. 제가 주님 이름으로 약속을 하고, 고백합니다. 저도 그렇게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코로나가 터지고 이제 교회에서 결혼 장소를 잡았는데, 제가 주례하는 것으로 약속되어있는데 한때는 교회에서 결혼 주례를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예식장에 가서 주례하다가 마음이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다 좋은데 예식장 직원은 주례십니까? 따라다니며 하는 말이 30분 넘기면 안 됩니다. 한 번은 모 예식장을 갔는데 지금도 불쾌합니다. 따라다니면서 30분 안에 끝내야 합니다. 주례설교를 하는데, 여직원 하나가 뚜벅뚜벅 와서 쪽지를 봅니다. 주춤해서 쪽지를 읽어보니 30분 안에 끝내주세요 입니다. 막 성질대로 하면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절대 예약하지 말라 하고 싶은데, 예식장이 거기라고 하면 앞이 캄캄합니다. 돈 버는데 관심있으면 모든 하객이 축하하는 잔치를 하나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쁨의 잔치를 누리는데 30분 안에 끝나야 하는데, 그렇게 촘촘하기 힘들이면 간격을 늘리던지. 저를 반성합니다. 제 관심은 어디에 있는거지?


두 번째 포인트를 잊으면 안 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렇게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특히 자영업자. 너무나 힘들다고 하는데 주님의 말씀을 적용해서 부탁합니다. 한 번씩 주문해서 드세요. 밥 먹을 수 있지만, 식당으로 직접 찾아가서 드세요. 먹고 싶어서 먹을 수 있지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콩나물국밥을 먹었더니 7천 원 나와요. 잔돈은 힘내시라고 안돌려주셔도됩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힘을 얻겠습니까? 미자립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자립교회는 휘청휘청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잖아요. 자기에 몰두한 마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좁아터진 저의 생각을 깨트리길 원합니다. 한 교회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오리일까. 엄청난 거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밥 한 끼 먹어줄 수 있잖습니까.





08월 1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방황과 혼란을 잠재워 주심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0-34)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목민심서를 다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공직자들의 행동지침서를 다룬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왜 이런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 정약용 선생님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요즘에 지방 장관이라는 자들은 이익에 치중하고 어떻게 백성들을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다. 떠돌다가 죽은 시체가 구덩이에 가득한데도 장관이라는 자들은 자기들만 살찌우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당시 악한 관리들의 폭정을 고발하고 제발 백성들을 사랑으로 다스려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님께 감동하는 것은 귀양살이할 때 집필한 책입니다. 억울한 귀양살이를 18년 동안 했는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상황을 마음 아파하며 책을 썼다. 얼마나 귀합니까? 정약용 선생님이 목민심서, 목민에 왜 심서를 붙였는지 설명이 있습니다.


유배된 몸이기에 목민이지만 기회가 없기에 심서라고 붙였다. 이런 마음으로 섬기기를 바란다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입장에서 이 분이 너무 존경이 되는 것입니다. 목민심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 생각이 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목민과 예수님의 목양이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 같은 사람들을 보고 목회자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조선 시대에 집필한 책을 현대에도 찾는 것은 역설적 있게 정약용 선생님의 참된 지도자를 목말라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 선거 후보들이 나오는데, 이런 정신을 갖은 지도자 한번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을 읽으며 한 영혼, 한 영혼 목숨을 거시는 주님이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사람 없는 곳으로 쉬러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 아닙니까? 어지간하면 내칠 것 같은데, 참 목자 되신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열정에 대해서 사역을 하고 있으십니다. 이 동력이 뭐냐? 불쌍히 여기다입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 관점에서 이 정신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몇 명을 목회하는데 한명 한명 기도하는가?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사. 얼마나 힘드실까? 설교도 해야 하는데 하는 설교와 주중의 성도님들의 삶의 애환을 생각하면, 무슨 말씀으로 그들의 삶을 위로할까?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바로 이 마음. 이 마음이 있었기에 다시 주님이 쉬는 것을 뒤로하고 마음을 다하고 섬기는 것이 목민심서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차원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을 제대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본문의 구조를 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6장 설명하면서 원 줄기는 파송 받은 제자들이 주님에게 보고하는데 샌드위치 구조. 세례요한의 순교 이야기가 중간에 끼워져 들어있다. 저자 마가가 왜 이런 센드위치 기법을 사용했는지 보면, 자기들의 사역 보고를 하는 내용 아닙니까? 이런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례요한이 갖은 순교 정신, 너무나 험난한 길이기에 박수받고 칭찬받는 거기에 신나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의 정신을 놓치지 않는, 세례요한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샌드위치 기법을 쓴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흐름을 따라서 샌드위치 기법을 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 왕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악한 왕을 대비해서 누가 참 왕이냐, 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샌드위치 기법으로 헤롯왕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잔치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시는 광야에서의 잔치가 열린 것입니다. 헤롯왕에게서의 잔치와 광야의 잔치를 어떻게 대조하는가? 너무나 대조되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참여하는 손님들의 구성원이 다릅니다.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막 6:21)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 고관 대작이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잔치에는 마음이 상하고 찢겨지고 목자 잃은 양처럼 마음 둘대가 없는 사람. 이것이 다른 차이입니다. 대조적인 잔치의 비교보다 진짜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헤롯의 잔치에는 사람을 죽이는 잔치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는 아무것도 없는 빈 들에서 이루어졌지만, 사람을 살라고, 사람을 먹이는 잔치였던 것입니다. 샌드위치 기법을 통하여 마가가 보이고 있습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악한 지도자와 하나님이 예비하신 좋은 목자를 대비합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 34:2-3)


성경이 묘사하는 악한 목자는 자기 배만 불리는 목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큰 교회 만들어서 호의호식하는 걸로. 맞는지 틀리는 것인지 하나님이 평가하지만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수치 아닙니까? 진짜 그런 것입니까? 이런 내용을 피력하는 것이 에스겔 34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 34:8)


악한 목자들에 대해여 피력하는데 아예 목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악한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한국사회가 교회를 떠나는 가슴 아픈 현실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지도자가 없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5)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모든 책임은 악한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얼마나 두려운지 아십니까? 분당우리교회의 모든 잘못된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담임목사인 저의 책입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로 말로 다할 수 없는 피폐한 책임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저의 책임입니다. 청년들의 집회를 갈 때마다 사과합니다. 나를 용서해달라고. 이게 지도자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회복되는 길은 지도자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목민심서의 정신을 갖고. 18년 억울한 유배 중에서도 백성들을 위해서 책을 쓰는, 우리나라에 불과한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느 목사를 기대하고, 어느 정치 지도자를 기대하고, 어느 자기 배를 생각하고 국민만을 생각하는 경제 지도자를 어디서 생각하겠습니까? 곳곳에 많이 있겠죠. 안 드러나서 그렇지. 참 지도자가 배출되기를 원합니다. 순 당을 불리는 거지, 국민을 위한 것인가? 이런 말이 안 나오는. 보수니 진보이니 극심한 골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또 한편으로 좋은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해야 하지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왜 양들은 선한 목자가 필요할까? 양은 왜 목자가 필요한지 너무 잘 설명해놓은 짧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양은 왜 목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가? 1. 양은 위험을 피할 분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앞서가는 양만 봅니다. 해외 토픽을 보면 양들이 벼랑 끝으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볼 때가 있잖아요. 어리석은 양들의 시야 때문입니다. 앞에 양만 보고 가니 벼랑으로 떨어지면 그것밖에 길이 없는 줄 알고 몰살당하는 것입니다. 절대량을 벼랑 끝으로 몰지 않는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2. 양은 고집이 쎄고 제멋대로의 동물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훈련이 가능합니다. 강아지를 키우면 먹이 주기 전에 손 하면 앞발을 주는 재미로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강아지는 빵 하면 죽는 시늉을 하고. 그런데 양은 훈련해서 되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은 훈련해서 생존하게 돕는 동물이 아니라 목자가 직접 인도해야 합니다. 3. 양은 뒤집어지면 일어설 능력이 없는 동물입니다. 인간이랑 너무 닮았네. 인간도 너무 어리석습니다. 똑똑하다 뭐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악한 문화가 줄줄줄 악해져 갑니다. 얼마나 고집에서고 제멋대로인지. 양은 인간에게 졌다. 항복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고집불통입니다. 코로나 19가 1년 반 잡아보겠다고 합니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백신 두 번 맞으면 된다. 웬걸, 갑자기 변이 바이러스가 퍼진다고 하며 계속 악화, 감염자가 토요일로 최고 기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슨 교훈을 얻습니까? 과학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같더라도,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 없이는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코로나 19를 통해서 철저하게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목자 되신 주님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한 조건은 내가 신뢰하고. 비록 타락한 인간에 불과한 저지만, 부목사님을 보시면 저를 신뢰합니다. 무슨 책을 읽으라고 하더라도 도움되니 읽으라고 하겠지, 금식하자고 하면 신뢰하기에 따라 합니다. 제 마음에 어떤 다짐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저를 믿는 자들에게 절대 실망하게 하면 안 되겠다. 가끔 보면 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보면 홀가분합니다.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신뢰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먼저 회복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신다. 갈 길을 알지 못하는 내가 의지하실 목자가 되신다. 신뢰함이 있을 때 갈등 없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절박함을 회복하기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왜 빈들에 왔니? 답이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병을 고쳐준다고 하고, 제자들이 귀신 내쫓는다 해서 구경 온 사람도 있을 것. 주님이 아니면 고칠 사람이 없어서 무조건 왔다. 이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유튜브, 인터넷으로 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지만, 이유가 다 다릅니다.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니, 절박한 마음을 갖고 주님만이 치유를 해주신다고 하면 치유가 되더라고요. 아이고 예배를 안 드리면 부인이 너무 못살게 구니 한 시간 앉아있지. 기왕에 주님께 나왔으니 절박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니 심판에 대한 경고도 있지만, 하나님의 경고도 나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 34:23)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 목자입니다. 대안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선하신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절박함을 회복하는 것. 이 은혜를 누렸기에 너무 감사가 느낍니다. 얼굴이 이런 것은 피곤해서 그렇지, 제 영혼은 해 같이 밝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잖아요. 1만 성도 파송운동 준비 하는 과정에서 번아웃, 패닉이 왔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예배 인도를 할 수 없고, 이런 아픔을 경험했는데 참 놀라운 게,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하면, 마음 이편에서 이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시켜주실까? 기대감도 같이 가는 것입니다. 설교하면 같이 공부한 동기 목사님들이 너무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래서 동기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위로가 오고, 어떤 분들은 커피 선물을 보내고, 저를 아끼니깐요. 누가 목사님을 괴롭힙니까? 그런 이야기도 하는데 저의 고통은 누가 저를 괴롭혀서가 아닙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 한 명도 저에게 와서 따지고, 시비 거는 분이 계시지 않았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너무나 고마운 성도님들입니다. 어떨 때는 따지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울기만 하시니깐. 제 안에 누적된 마음의 고통이 무엇이나 면, 어떤 젊은 자매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엄마 꼭 한 번만 만나주세요. 목사님이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하시니 눈물만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으로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런 게 누적되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분들이 두려워하는 게 크게 두 가지입니다. 못 따라간다. 우리는 29 예비 담임목사님들이 누군지 모른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 뭘 믿고 따라가는가? 내부 15 목사님도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따라갑니까? 이게 제 마음을 너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지금 한국에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왜 또 29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지 동의가 잘 안된다. 차별화를 모른다. 그런 말씀들이 제가 들려지니, 29 교회가 되다 보니 어마어마하게 숫자가 많은 것 아닙니까? 편차도 심하고 다릅니다. 두려움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양 한 마리에 모든 것을 걸으시는데,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창고에 물건을 배분하는 것. 성도님들이 창고의 물건입니까? 결과적으로 성도님들이 주님 안에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공연한 짓을 해서 성도님들을 괴롭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금니 하나 뽑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뽑은 것이 아니라, 몸이 힘들면 약한 치아로 와서 그래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치통도 오고 자도 잔 것 같지가 않고 그런 시간을 보냈는데 아까 말씀드렸죠. 마음 한편이 아픈데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뭐로 나를 위로해주시니? 뭐로 대안을 마련해주실까? 너무나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기대했던 그 이상으로, 이번 여름은 앞으로 힘든 날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저를 쉼의 자리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동기 목사님들, 후배 목사님들, 그런 큰 교회 목사님도 목회가 힘드시군요. 내가 힘든 게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정서적으로 주님이 만져주시고 쉼의 자리로 인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1만 성도 파송운동에 대해서 놀라운 대안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맨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2~3주만 지나보세요. 논의 중입니다. 곧 대안이 발표할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양같이 어리고, 양같이 여린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팠던 이야기를 왜 상세하게 하는지 아십니까? 오해하지 마시라고. 저는 목자가 아닙니다. 저를 목자로 생각하고 따르면 상처밖에 없습니다. 목자는 주님 한 분이시고, 저는 양몰이 개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으로 잘 가도록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약하디약한 것이 저입니다. 인간을 기대하면 100% 실망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목자 되신 주님은 죽은 이후에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만져주십니다. 열정을 다하여 주님을 찾을 때. 주님 한 분 아니면 대안이 없다고 생각이 들게. 모든 성도님이 열정을 회복하는 주님 앞에서 선 양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기적보다 선행하는 주님의 가르침 받기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본문에 수 많은 길잃은 양들을 위해서 해 주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라 가르치심이 먼저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양들은 시야가 좁기 때문에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가기에 시급한 것은 오병이어로 밥 한 끼가 아니라 주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이 사실을 개척하던 그해부터 경험하였습니다. 이상하게 분당 우리 교회를 세우니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예전 교회 목사님에게 받은 상처, 어떤 분은 뒤에 제 사무실에 와서 눈이 붓도록 웁니다. 이런 식으로 배신당하고, 상처받았습니다. 학교를 빌려서 하다 보니 그분들을 치유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주일에만 자유롭게 쓸 수 없으니깐요. 제자훈련에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관심, 30분 설교 듣는 것으로 어림도 없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 너무나 아픈 시간을 보냈지만 치유하심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인도하셨다고 하는데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전략가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해야 하니깐. 말씀을 주일날 선포하기 전에 저를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0)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내 삶에 신실한 목자로, 정서적으로 저를 만져주셨다고합니다. 어느 새벽에, 그 새벽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다친 저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해주시느냐.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주님 나를 부르시니 주님 내게 오라시니
주님 여기 계시기에 이 깊은 바다가 반석이 되고
주님 여기 계시기에 반석 위를 내가 걸어가리라


인간의 잔꾀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하시기에 하는 1만 성도 파송운동. 쏟아지는 너무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대안들을 이번 여름 내내 부어주신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있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오늘의 저의 간증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이 찬양으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 여기 계시오니, 말씀 중에 예배 가운데 무엇 가운데 혼란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방황과 혼란 가운데 잠재워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 가운데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08월 0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쉼과 회복의 자리로 나아가기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0-34)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생각이 너무 많은 30살에게 책이 있는 데요. 책의 표지에 저자 이름이 김은주라는 분인데 김은주 저자 이름이 나오고 괄호하고 구글 수석 디자이너라고 저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5년간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일하며 배운 것들이라는 부재를 달고 있습니다. 표지만 봐도 저자가 대단한 분으로 느껴집니다. 실제 25년간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퀄컴을 거쳐 구글 수석 디자이너까지 갔으니 성공한 디자이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부러운 경력을 갖고 있습니까? 모든 직장인들이 부러워할 경력을 갖는 저자인데,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가면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나옵니다. 저자가 구글에 입사해서 느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스트레스. 가면 증후군이라는 마음의 병을 얻었습니다. 백과사전에는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여겨졌다고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을 속여왔다고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심리상태. 본인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가짜라는 것입니다. 곧 실력이 들켜서 쫓겨난다. 심지어 회의하기 전에 화장실에 숨어있고, 주차장에 자기 차에 가서 내리지 않고.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폭식하고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인터넷만 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쫓겨서 결과물이 안 나오니 자기가 밉고 한심하고. 병든 상태가 1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서 언어도 짧고 문화도 익숙하지 않고, 너무나 공감이 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에 나온 내용입니다. 어느 날 그 마음을 구글 직원들 내부 이메일 소통하는데 자기 동료들에게 그런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에 왔는데 넓은 바다에 작은 섬의 작은 우물에 있었다. 그런데 이메일을 직원들에게 보냈더니 그 메일이 직원들 사이에 너무 빠르게 퍼져나가서 연락이 오는데 나도 울었다. 너무 공감된다. 내가 당신 글을 읽고 너무 많이 위로를 받았다. 쇄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아니 언어가 짧고 문화가 낯선 곳에서 힘들어하는 한국분 저자의 열등감과 마음의 어려움은 이해되는데 세계적인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구글 직원들도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에 빠져있다. 저자가 놀라서 한 줄 표현합니다. 똑똑하고 잘난 그들도 나처럼 숨죽인 채 자신과 열심히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 혼자만 힘든 게 아니구나 소제목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인 피로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이 주장하는 것이 21세기는 성과사회이다. 이전에 권위주의 사회는 규율사회이다. 이전에 겪었던 권위주의 사회는 강압적인 규율이 특징이라면 성과사회는 억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긍정을 강조하고 낙관을 강조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것 보기에 훨씬 좋아졌습니다. 무한 긍정을 강조하는 게 성과사회라는 것입니다. 성과사회의 함정은 긍정의 과잉을 강조한다. 긍정의 과잉을 갖고 스스로 착취하고 혹사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규율사회는 타인에 의해서 혹사당한다고 한다면 성과사회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유지되고 있다. 성과사회는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드는 사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엄청나게 혹사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해드렸던 구글 직원. 온 세상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하는 직원도, 외국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시스템으로 가기 때문에 모든 직원이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에 빠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세계보건기구에서 탈진, 무기력, 번아웃이 국제 질병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탈진이 우리 시대 병입니다. 몇 주 동안 이런 것을 묵상한 이유는, 여름 휴가 동안 교역자들,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스스로 착취하고 혹사시키는 시스템에 빠져있는 성도님들인데, 휴가 기간 성도님들에게 회복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저는 알아요. 이런 기도가 효과가 없다고요.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다고. 제 마음에 이번 여름에 묵상 된 말씀이 시편 23편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3)


세상이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을 주님이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생 입장에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쉼과 회복의 자리로 가야합니다.


딱 3주 전인데요. 이렇게 간증하는 것은 괜찮아졌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패닉이 온 겁니다.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괜히 해서 성도님들을 괴롭히는 것 아닌가. 3주전 주일 하루 전 토요일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머리가 너무 심하게 아픈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준비를 어떻게 합니까? 새벽 두 시에 마음이 불안하니 눈이 떠졌는데 여전히 머리가 아프니 설교 마무리가 잘 될 수 없었습니다. 1부 예배를 인도하고 그러고 사실 비상회의를 소집해서 2부 회의를 못 하고 3부도 못했습니다. 19년 동안 설교 한 번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집으로 와서 머리가 너무 아프고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드림 센터 사회환원을 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것 아닌가. 어저피 되지도 않는 거 내가 꺼내고 성도님들을 괴로움과 고통의 자리로 몰려가는 게 아닌지 고통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상세한 간증은 언젠가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시작한 지난 3주인데, 하나님이 저를 만져주신 것은 말로 다 못합니다. 정서적인것부터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선명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후회한다고? 그렇다고 안하는 것이 아니고, 후회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너같은 목사에게 맡겨준 사명이니깐 그런 것으로 갈등하지 말아라. 안 할 것은 괜히 했나 이것이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만져주신 정서적인 치유는 말로 못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은 시작도 안했는데 무슨 근거로 두려워하느냐고. 두 번째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안을 주십니다. 8월 넷째 주, 다섯째 주. 지난여름에 하나님이 주셨단 많은 통찰력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대안을 주신다. 근원적으로 인도해주신다. 그런 마음의 확신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휴가 갔다 왔는데 쉰 것 같지 않고, 잠을 자고 잔 것 같지 않은 마음의 부담감. 저자가 경험한 가면 증후군. 다 가짜야. 다 들통날 거야. 마음의 괴로움이 있다면 시편 23편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지쳐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회복되기를 원합니까? 쉴만한 물가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의지하셔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늘 우리를 쉼과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주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의 이 말씀이 예배 가운데 여러분의 내면에 울림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마가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몇 주 동안 살펴온 과정을 기억하시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파송한 제자들이 열정적으로 사역해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12-13)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막 6:30-32)


피로사회의 오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들어올 때 배 저어야 하는 것 알지? 막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질 때는 나에게 길게 설명하지 말고 열심히 하란 말이야. 우리 주님은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주님의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열매가 나타났는가 기뻐하는 동시에 쉼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3주간 눈물 나게 회복을 경험하면서 이런 주님을 경험한 것 아닙니까? 제 한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치유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주십니다.




1. 쉼의 자리로 초대해 주심


이시형 박사라고 정신과 의사, 원로 의사이신데요. 이 분이 쓴 책 중에 쉬어도 피곤한 사람들 책이 있습니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있습니다. 이는 쾌락 호르몬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돌아오면 쾌락이 있습니다. 밤을 꼬박 세서 설교준비를 하면 전혀 피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업무에 열중하는데 상사가 와서 자네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런 말을 듣고 힘을 내는 것은 도파민 호르몬이 나와서 그렇다고 합니다. 의욕 호르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stop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갈망하게 됩니다. 더 많은 것을 향해. 끝없는 열망은 도파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독성이 있는 위험한 호르몬이다. 이런 설명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굉장히 와 닿는 한 마디를 책에 하시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도파민 사회이다.


나는 감히 피로사회, 스트레스 사회는 도파민을 충족시키기 위한 역기능이라고 하고싶다. 뇌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는 욕심을 줄여야한다.


피로사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성과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하는 것.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도파민 사회라는 것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 사이에 두 갈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지거나 우울하거나, 브레이크 없는 도파민 사회로 가거나, 주님의 초청 때문에. 예배가 왜 시큰둥합니까? 예배드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수능이 어디 있느냐고 예배 타령하느냐? 미친 듯이 독서실 가도 될까 말까 하는데. 안식이라는 책이 있는 데요. 안식일의 의미를 잘 풀어쓴 책입니다. 저자는 안식일의 개념을 4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자는 안식일을 설명하면서 거침. 그분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안식일은 노력을 거치는 날이다. 엄청나게 저에게 와 닿았습니다. 주일은 노력을 거치는 날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대한 거침을 선언하는 것이며, 주일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우상으로부터 거침을 선언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저에게 주는 경고가 이것입니다. 안식을 설교하면서 왜 안식이 없느냐? 방향이 다르고 색깔이 다른 것이지. 더 유명한 목사가 되고 싶고, 더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고 싶고, 더 큰 교회의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도시교회는 어디 목사님 모집한다고 하면 200명 응시하는데 시골교회는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가 아주 많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가 목사가 되었다고,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맨날 성경만 본다고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뭐가 안식일이냐고요? 탐욕에 대한 거침을 선언하는 것이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타인이 나를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대는 내가 나를 쉬지 못하게 하고, 내가 나를 끊임없이 억압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 3주 동안 저를 다루면서, 수많은 목사님들에게 이것을 전해주시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있는 평안을 빼앗는. 안식일의 거침은 인간의 탐욕을 선언하는 것이며 우리를 얽어매는 우상으로부터 거침을 선언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제가 경험했던 그 두려움은 불신안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죽었나. 1만 성도 파송운동 한것 후회한다고? 늬가 후회한다고 거칠어지는 것이고, 잘했다고 생각하면 잘되는 것인가? 늬가 싫다고 하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이면 가는 길이고.


남 탓이 많은 시대 아닙니까? 저 사람 때문이라고. 피로사회는 자기가 자기를 얽어매는 것입니다.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2. 의미부여 후에 다시 달리게하심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막 6:31-33)


사람들이 먼저 와 있는 것입니다. 전부 자기들 상황으로 손 내미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큰 무리는 예수님의 쉼을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쉼을 방해한 그 사람들에게 호의를 배풀어주신 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 분도 정신과 의사입니다. 이 저자가 이토록 멋진 휴식이라는 책에 추천사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2002년도에 실시한 통계조사에 의하면 70% 직장인이 번아웃이 왔다고 하였다. 그저 일하지 않는 휴식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좋은 에너지로 채워야한다. 오태움이라고 한다.


자기 내면을 좋은 에너지로 채우는 휴식을 오태움이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한 마디를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치유란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활기를 되찾는 것이라고 깯알았다. 왜 의미를 부여했을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적한 곳으로 갔습니다. 주님이 바로 육신적인 쉬심을 포기하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고 목자없는 양같이 긍휼함을 갖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풀어주셨습니다. 왜 두 번째 부재를 의미부여 후 다시 달리게 하심이라고 하실까요? 당회에 6개월 쉬게 해달라고 요청안한 이유를 하시죠? 사명으로 의미부여를 하셨습니다. 1만성도 파송운동, 드림센터 환원, 너와 분당우리교회에 맞겨진 사명이다. 이 의미를 회복하니 치유가 되던데요. 다음주에 이어서 이 부분을 거론할 생각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길 원합니다. 맨 앞에서 소개해드린 생각이 너무 많은 30살에게. 파블로 피카소 말을 인용합니다.


삶에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막연히 8자로 드러누운다고 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가르치시는 일을 통해서 제자들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피곤은 의미가 부여될 때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도파민 사회입니다. 끊임없이 착취하고 소진하고, 주변 사람 모두를 피곤하게 만드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쉼의 자리에 초청하시는, 거침의 영성입니다. 그 책에 거침의 종류를 설명하는데 근심, 걱정.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거치는 것. 이것이 거침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거치시고, 그분이 제공하는 쉼의 자리로 가는 남은 여름철이 되기를 원합니다.





08월 0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아무개’로 生을 끝낼 것인가?


설교자 : 옥성석 목사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룻 4:1-4)


요한은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 땅 가운데 오셔서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산상보훈입니다. 마지막 되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포즈를 취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앉으셔서 마지막 때에 일어날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외 없이 앉으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유명한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마 13:1)


상상해보십시오. 바닷가입니다. 모래였을까요? 자갈같이였을까요? 물이 질퍽질퍽한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시는 것입니다. 앉으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다가왔습니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마 13:2)


앉으셔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 앉으셔서 말씀을 전하셨을까? 서서 이야기를 해야 배에 힘도 들어가고 크게 말씀하실 수 있을 텐데 앉으셨을까? 배를 마련하고 왜 앉으셨을까? 고개를 갸우뚱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요 8:2)


그러고보니 당시 헤롯왕도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행 12:21)


그래서인지 로마 교황은 중요한 교설을 바랄 때에는 항상 그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교서를 바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앉는다는 표현 속에는 내가 지금 너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바라니 너희가 집중하여 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펼친 룻기서 1장 1-4절을 보면 짧은 구절에 앉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이 일이 1절에 보시면 성문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성문은 어떤 곳입니까? 단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은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용도로 당시에 쓰였습니다. 어떤 사항을 공개적으로 판결하거나 밝힐 때에는 항상 성문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신 25:7)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삼하 15:2)


성문은 판결하는 장소로 쓰여졌습니다.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31)


현숙한 여인이 정말 칭찬받을 만하다고 성문에서 듣는 것입니다. 앉는다는 것과 성문이라는 말이 함께 등장하는 본문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장로가 10명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증인 두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증인이 무려 10명이나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문에서 앉는다. 증인 10명이 참여했다 하는 것을 보면 오늘 다루는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습니다. 평소에 성경을 가볍게 대하는 분이 있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로 다가오는지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기업물을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 그 땅에 독특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고엘 제도입니다. 내 형제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외면해서는 되지 않는다. 어려움을 도와주어 형제의 힘든 상황을 내가 격려해줌으로 그 일을 극복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 이것이 고엘제도입니다. 그런데 고엘 제도에는 단서가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친척이 먼저 담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에 나호미와 룻이라는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나호미는 나이 많은 홀로된 여인 과부였고 룻이라는 여인은 젊은 여인이었지만 이방인으로서 홀로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보리삭을 주서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딱한 처지에 있습니다. 기업 무를 일이 생긴 것입니다. 나호미와 룻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이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일을 차일 피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책임을 지기가 제일 먼저 감당해야 하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안타깝게 생각한 보아스라는 자가 성문에 장로 10명을 소집하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 사람까지 불러와서 판결을 구하는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때에 기업무를 자가 선선히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룻 4:4)


싱겁게 끝났습니다. 보아스가 한 가지 더 묻습니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룻 4:5)


핵심은 너의 기업을 세우는 것이 아니야. 너의 이름을 세우는 것이 아니야. 죽은 자의 기업, 죽은 자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야. 보아스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엘 제도에 있었던 단서 조항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는 이 부분을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보아스에 의해서 들켜버렸습니다.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룻 4:6)


그러면서 이 사람이 어떤 엑션을 취합니까?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룻 4:8)


신을 벗는 행위. 하나님께서 고엘 제도를 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신 25:9)


기업무를 책임을 가진 자가 그 책임을 소홀히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신을 벗기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욕을 가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스스로 자기 발의 신을 벋는 것입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나는 모욕을 당해돚호다.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좋다. 내 기업을 세우는 일. 내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적 표현이 신을 벋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 기업을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 기업을 세우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 이 사람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룻기에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멜렉, 그의 아내가 누구며, 그의 아들이 누구며, 그의 자부들이 누군지 소상히 밝혀지는 것이 룻기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1절을 주목하십시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룻 4:1)


이름을 아무개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보아스가 이 사람을 아무개여라고 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불렀을까요? 정말 이 사람의 이름을 몰랐을까요? 여러분 보아스나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나 전부 베들레헴의 사람입니다. 베들레헴 성은 작은 성입니다. 더군다나 보아스나 기업 무를 자는 친척 간입니다. 서로 왕래를 자주 하는 그런 사이였고, 젓가락 숟가락도 아는 관계입니다. 보아스가 이름을 몰랐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 때 보아스가 아무개여라고 불렀다고 기록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우리를 향한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룻기서의 저자가 누구라고 합니까? 혹자는 사무엘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룻기서 4장 마지막 절을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2)


후대에 기록된 책입니다. 사사기서의 저자와 룻기서의 저자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학자들은 봅니다. 더 중요한 것 하나는 룻기의 저자 또한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 룻기서를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사사기서를 기록하고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사들의 행적을 기록해갔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사는 12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사의 기록은 아주 길게, 어떤 사사의 기록은 아주 짧게 기록합니다. 어떤 사사는 한 줄로 처리해버립니다. 사사들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사들의 행적을 마무리할 때는 대동소이합니다. 누군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몇 년 동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었다. 그런 형태로 한 사람의 행적을 마무리하고, 그다음 사사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삼손이라는 사사의 행적을 샘플로 살펴봅시다. 사사기서 13장부터 그의 행적이 소개가 됩니다. 15장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삿 15:20)


삼손에 관한 행적을 여기서 마무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15장 20절에 그렇게 기록을 하고 16장을 열면 여전히 삼손에 관한 행적이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 31절에 다시 반복합니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삿 16:31)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사용하실 때 기계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학력, 경험, 능력까지 다 사용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4 복음서가 전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지만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사사기서의 저자를 성령님께서 사용하실 때도 그 사람의 생각과 판단력을 이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길게, 어떤 사람은 짧게 기록한 것입니다. 15장에서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 저자이신 성령께서 감동하셨습니다. 아니야 더 기록해라. 무엇을 말입니까? 삼손이 블레셋 기생의 뒤를 쫓고, 데릴라와 있었던 사건을 다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부분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록하라고. 행적 속에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있다고. 그래서 기록한 것이 사사기서 16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아스도 오늘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부른 그 사라므이 이름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아무개여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명의 이름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성경께서 감동하셨습니다. 그 부분을 고쳐라. 그 일므을 지워버려라. 아무개여라고 기록해라. 자기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이름이 오랫동안 남길 원했던 그 사람.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영원토록 남기려고 했던 자들을 그 이름조차도 지워진다는 깨우침을 성령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 자기 이름이 대대로 드러내기 원했던 이 사람. 성경에서 그 이름조차도 지워진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아무개로 처리해버리신 것입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한 사람은 자기 이름, 자기 기업만이 소중했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이 최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언제나 자기 이름, 자기 기업이 최고였습니다. 꽈악 쥐고 놓으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강도 맞은 자가 저쪽에서 피를 흘리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모른 체하고 지나쳐버린 제사장들과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이 사람의 바램은 어떻게 끝났습니까?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아무개로 그 생이 처리되어버린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초대 교회가 120명으로 잠시후 5,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6장 1절을 보면 더 많아졌다. 6장 7절을 보면 더 심히 많아졌다. 그냐말로 풍선입니다. 풍선은 터지기 마련입니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직면해있습니다. 70년대 80년대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는 것이 위기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999년 가을로 기억합니다. 제가 사랑의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서대문 교회의 충정교회로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10년 이후 일산으로 옮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99년 3월 옥한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분이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옥 목사 앞으로 두고 봐. 내 밑에 많은 부교역자들이 있고 지나갔는데 그 부교역자들 중에서 이 사람, 이 사람을 한번 눈여겨봐.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뜻있게 사역하게 될 거야. 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제가 아는 사람도 있었고, 제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사역을 하면서 그 세 분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옥한흠 목사님이 거명하신 분이 그 뒤 몇 년 지나서 2002년인가 분당으로 개척을 시작하셨다. 학교 강당을 빌려서 개척을 시작하고있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정말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피부를 찌르는 메시지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머리를 숙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분이 다섯 가지 부분에 관심이 없다고할까. 욕심이 없다고할까. 자제력을 발휘한다고 할까. 제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건물에 대해서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들이 개척하면 건물을 가지려고 하고, 건축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새로 건축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습니다. 드림센터를 하나 세웠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교육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사용하는 용도이지, 예배를 위한 건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땅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땅을 확보하고, 그런 것을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교인들에 대해서도, 교인들을 등록시키고, 이런 부분에 혈안이 된 목회자들과 달랐습니다. 다른 교회에 등록한 자들은 우리교회 등록받지 않는다. 필요한 교회에 섬기십시오. 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교권에 대해서, 교회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발을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교권에 대해서 발을 들이고 활동하는 흔적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명예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섯 가지 부분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신선한 충격을 교회에 주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일을 하나 저지르시더라고요. 제가 가지고 나왔습니다. 교계 유력 일간지에 큰 교회 쪼개 30개로. 성도 2만 교회의 나누기 실험. 이 기사를 보면서 찬찬히 읽어보며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30개 교회를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드림센터를 지었는데 드림센터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교회 교인들을 30개로 나누어서 다시 한 번 흩어지는 교회. 건강한 교회. 분당우리교회와 같은 교회를 30개를 나누어서 하나니므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확장시켜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무엇입니까? 모였던 교회가 8장 1절에 보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흩어지는 것에 해답이 있습니다. 신 31장 보면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흩고, 새끼를 밖으로 밀쳐 건강하게 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어미 독수리가 하는 것을 보며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이 원리를 알았습니다. 네 교회가 커지는 것이 옳으냐. 당회가 한마음이 되었고, 온 교우들이 뜻을 모으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한국교회가 사는 길을 주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아닙니다. 네 기업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네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위하여. 분당우리교회가 이 일에 매진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탑 현장에 어떤 이야기가 들렸습니까?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그들이 탑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별명을 주셨습니까? 기업 무를 자라는 별명입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우리가 외면할 것입니까? 모른 척 할 것입니까? 기업 무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는 것입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할 일들이 어떤 일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는 이런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일에 앞장서니 교우들도 한 마음이 되어서 이 귀한 일을 담당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뭇성도 피를 흘리며 큰 싸움하는데


나 어찌 편히 누워서 상 받기 바랄까 (찬송가 353 십자가 군병들아)


내일 일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아무개는 자신의 기업, 자신의 이름이 최우선이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그 반대였습니다. 자신의 옷자락을 펴서 그녀를 덮어주었습니다. 자원하여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메시아의 가장 이상적인 그림자로 보아스를 우뚝 세운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말합니다.





07월 2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회복은 어떻게 오는가?


박철현 목사 (총신대 신학대학원)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삼상 1:9-18)


2008년도에 굉장히 어려운 일로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어서 작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기도와 관련해서 신학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남모르는 사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받아들었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당시 제 강의를 들으시는 성도님들이나 신학생들은 구약의 하나님이 얼마나 따뜻한 분인지 느껴져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하나님이 따뜻하게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기도할 때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제 기도를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충성 되게 살고 싶었지만 외면한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낙담 되었습니다. 2008년 2월 굉장히 어려운 일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채플실에 아침저녁으로 공간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작정하고 특별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역시 제 기도를 듣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의 말일 제 잎에서 나와 하늘에 올라가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단어들이 입술에서 나가자마자 발밑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이 생생했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주 후 자정에 제 신앙생활 중에서 가장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채플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반대편에 누군가 기도하는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습니다. 저를 보시기에 산적같이 생겼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깎는데 생긴 것은 산적같이 생겨서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산적과 같다는 것을 느꼈는데 제 생김새와 다르게 귀신이야기를 무서워합니다. 자정에 인기척이 느껴지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기도하는데 누가 있는 게 느껴졌습니다. 눈을 떻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데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듣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옆에 앉아있는 느낌의 존재가 기도 한 마디 할 때마다 내가 네 마음을 알아. 대꾸하는 느낌이 계속 몰려왔습니다. 제 망밍 정말로 포근하고 평온해졌습니다.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기도를 하다말고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상황에서 저의 일 가지고 이거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 옆에서 저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느낌을 음미하다가 하나님 행복한 목소리로 한 마디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운 것은 그렇게 잠깐 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가더라고요. 그 전에 20분 기도 채우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긴 기도목록을 가지고 기도하면 5분 가있고 그랬습니다. 며칠 행복한 느낌으로 하나님과 행복에 겨운 나머지 제 입에서 결코 해서 안되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찬수 목사님이 이전에는 사람 잘 웃겼는데 요즘 유머가 잘 안통하더니 웃으라고 하면서, 툭 튀어나왔다는 것은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요. 앞으로 당신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제 옆에서 장난스러운 얼굴로 정말? 하는게 느껴졌습니다. 정말이에요. 했습니다. 이 대답으로 정말 14년 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이 박교수 그동안 일 가지고 간증집 책을 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럴 정도로 온갖일을 다 겪었습니다. 제가 예전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촉촉해지고 항상 콧물이 나옵니다. 하여튼 제가 하나님 앞에 시키신일 뭐든지 다할께요 말을 하고, 생각해보지 못했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소심해지고 겁이 많았던 사람이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시키신 하나님의 일은 제가 잘 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정처없이 광야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표내라는 강한 요구를 하시면 온갖핑게를 대고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겠다는 말을 갖고 제 목사, 신학교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분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집안의 가장이 사표를 내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어떻게 하냐? 가장은 무책임하면 안 돼. 했습니다. 당시 심하게 은혜가 넘치다 보니 그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찬수 목사님이 아버님과 관련해서 많이 했던 간증이었습니다. 성도님께서 많이 들어서 아시듯이 이 목사님은 시골교회의 목회 하시고 기도하시다 돌아갔습니다. 이 목사님은 분노하시다가 결국 목사가 되시고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교회가 생각한 것보다 부흥하는 것을 보면서 이찬수 목사님이 내가 뭐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부어주시는건가? 찾은 답 중 하나가 내가 갖은 선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하나님께 죽기까지 헌신하면서 뿌리신 씨앗의 열매를 내가 누리는 것이구나. 내가 과감히 사표를 내는가 아닌가? 이찬수 목사님의 이런 간증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친구 목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 아버지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잘 안되는 것이고 충성되게 살다가 이찬수 목사님 아버지처럼 죽더라도 하나님은 인간 인간 아버지가 하는 것보다 더 잘 될 것이다. 하는 것이다. 저도 몰랐는데 벌써 14년 되었습니다.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찬수 목사님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알게 되었으니 저란 사람의 인생에 책임을 갖으라는 부담감을 말합니다.


저희가 한나 이야기로 들어가보겠습니다. 한나는 자기 인생에서 갖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나의 고난과 기도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현재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할까 보겠습니다. 한나 여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나는 개인적으로 깊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한편으로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의 대를 이어줄 아이를 갖지 못함으로 낙담하였습니다. 브닌나가 쑤실 때 힘듦을 경험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님의 삶과 유사합니다. 어떤 부분은 풍족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풍부하지 못합니다. 한나가 겪은 것은 우리와 성장이 같은 사람으로서 겪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가 갖은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사무엘상 저자가 당시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나는 당시 고통을 받던 당시에 이스라엘이 어떤 영적 상태인지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성경 상으로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이런 시대를 보여주는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이것이 한나가 고통을 겪던 시대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몸이던 한나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던 시대이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이 시대의 상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나가 고통을 받은 이야기를 봅니다. 한나가 그 시대에서 고통을 받는 이야기를 봅니다. 이찬수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자주 하시던 말씀 믿음은 곧 해석이다. 한나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를 보면서 고난이 꼭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벌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알 수 없는 여러 이유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심판적인 측면에서만 보지 않으면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싸인일 수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주석가는 하나님은 우리의 철저한 무기력을 출발점으로 삼은다. 우리의 무능력은 다음 단계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 즐거 사용하는 토대이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절망, 영과 육의 고난을 당신의 역사하심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고난을, 절망 상태에 있을 때 이 점을 유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발휘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을 좌절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한나가 자신의 고난을 대했던 방식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고난을 당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결과로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본문으로 살펴보겠습니다. 7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찬수 목사님은 주로 3가지 포인트로 설교하시는데 저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가 있기에 제가 요령껏 다루겠습니다.




1. 오래하는 기도, 많이 하는 기도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삼상 1:12)


히브리어에서는 많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많은 양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에서 많은 양의 기도를 하는 중요성을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오직 은혜가 맏는 교리이긴 합니다. 결코 하나님이 성도님들을 버릇없는 자식으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점성, 노력 또한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전, 영적 고난을 받을 때 삐쩍 말랐다고 합니다. 맨날 금식하고 기도하고 자제했다고 합니다. 당시 루터가 하나님 앞에서 깨달음을 얻고 종교개혁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카톨릭 신부 앞에 나가면 그의 모습 자체에서 엄청난 거룩성을 느끼고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성공하고 나중에 살이 뚱뚱해졌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전 이미지가 퇴색되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신교가 놓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은혜 교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를 받아들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유도 주지수 동아리가 있는데 제가 담당 교수가 되어서 개강 설교를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깡패를 이길 힘을 달라고 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안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주권자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상황을 해결해준다고 할때 내가 없는 신체적인 능력을 만들어내서 깡패와 강도를 제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강도, 깡패를 이기고 싶으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성공하고 싶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됩니다. 시험이 닥쳐서 하나님 아버지 믿사오니 좋은 성적이 나오게 해주세요.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갑자기 시험 답안지를 환상 속에서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역사하신다면 하나님이 부정행위를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인 것과 학습적인 부분에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은 당장 눈에 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깊은 체험을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격투기 선수가 링에 올라가기 전에 내가 이길지 말지 알게 됩니다. 저는 기도 응답의 문제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응답받는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하면 기도에서 훈련과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양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기도를 하고 그 기도하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싶다고 하면 많은 양의 기도를 하시라는 것입니다.




2. 심정을 쏟아붓는 기도


엘리 제사장이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뭐라고합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삼상 1:15)


내 심정, 내 심령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마음을 쏟아붇는다는 말이 성경을 찾아보니 구약성경에 총 7번 나옵니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 있어서 표현은 강렬한 표현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욥 3:16)


내 생명이 녹는다는 표현과 한나의 내 심정을 쏟아붓는 것은 히브리어로 동일한 표현입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 심정에 짓눌려 고름이 흘러내린 것으로 쏟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령을 그냥 혼자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이 고통 당할 때에 쏟아붓는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앞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깊은 절망이 있고 곪아 터진 고통이 있다면 그 절망이 썩어 문드러질때까지 두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고난의 고름이 완전히 빠져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까지 쏟아 부으시길 원합니다. 쏟아 붇는 고통의 심정을 받아주시고 듣고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3. 많이 우는 기도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1:10)


강조법을 써서 울고, 울었다. 아주 심하게 울었다.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통곡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도하면서 울어보신 적인 가장 최근 언제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우는 기도가 오랜 옛 추억으로 남겨있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가 무기력하고 많은 성도님들 마음속에 좌절감이 있는 것은 한국교회에 눈물이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못우는 것은 영적인 폐색증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는가는 눈물로 회개하고 회복할 때라고 굳게 믿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실 때에 눈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눈에 대고 받아서 하나님의 병에 차곡차곡 담으신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실 때에 이 이미지를 기억하시고 눈물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병에 차곡차곡 이미지를 볼때 남아있는 설교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목회자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꼽을 분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당시에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마지막 문구를 계시록 문구와 연결하면서, 성도의 기도를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성단의 향단에 올라가 하늘에 차곡차곡 올린다. 정해진 분량이 찰 때에 반드시 역사하신다. 하늘의 향로가 찰 때까지 모든 성도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기도하는게 의미가 없더라도, 당장 못 느껴도 하늘의 향로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눈물과 기도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도를 드릴 때에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을 끓이면 1도씩 올라갑니다. 그런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임계점 100도가 넘어가면 물이 끓습니다. 기도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기 전에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기도를 모읍니다. 눈물의 기도를 흘리시고 하나님의 병에 눈물이 쌓이는 것입니다. 2008년에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다음에 별일 다 겪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제가 자연인으로 느끼기에는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 순간을 만드시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에 경험.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는다는 것. 이것이 도저히 안 되는 순가에 버티고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신기하게 어느 순간이 되면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일어납니다. 7일 동안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고 돌라고 합니다. 그런데 잇 드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채워지는 순간 두꺼운 성벽이 알아서 무너져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기도하실 때 확신을 하시길 바랍니다.




4. 확신이 있는 기도


확신은 자동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한나의 기도에 관련해서 앞서 특징들,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 기도했을 때 기도의 응답마저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순간이 됩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삼상 1:17-18)


엘리라는 존재가 한나에게 확신을 줄 만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여러 논의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한나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엘리를 통해서도 기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5. 통찰력 있는 기도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기억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자카르라는 말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일 때 구약에서 구원의 스위치로 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창 8:1)


노아 홍수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홍수가 차오르는 이야기, 기억하사 라는 말이 나오고 이후로 홍수가 가라앉는 이야기가 되어있습니다. 홍수 이야기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사가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나옵니다. 기억하다에 붙인 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구원의 스위치입니다. 구약에 기억하다 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이후에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나가 기억하사 라는 말을 한 것은 구약학자인 저의 관점으로 A+기도입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삼상 1:19)


그를 생각하신지라 단어에 히브리어로 보면 기억하신지라로 봐야 합니다.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했을 때 하나님이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아까 말한 것처럼 구원의 스위치입니다.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삼상 1:20)


한나는 자신의 기도를 기억하셔서 자기에게 구원을 준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6. 서원이 있는 기도, 서원을 지키는 기도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이 기도는 어불성설입니다. 아들이 없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1절에 기도는 그 아들을 당신에게 펴생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아들을 원하는데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어불성설의 기도이지만 이런 기도는 실제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실제로 이 서원을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젖을 때자마자 제가 영원히 바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서원을 하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됩니다. 오랜 기도 응답을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서원 받을 일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영적 지도자다 보니 저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다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뭔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악착같이 피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데 월권행위인 것 같아서 참는 경우가 있습니다.




7. 개인의 안위를 넘어서는 기도


한나가 기도 응답을 받고 찬양시가 나옵니다. 시작은 개인 문제에 대한 감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 넘어서 매시아를 갈망하는 기도로 나갑니다. 이찬수 목사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것, 개인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큰 것을 봐라.


한나가 이런 기도를 했을 때 어떻게 응답했는지 살펴보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삼상 2:21)


아들을 낳자마자 서원한 여인에게 그 여인이 간구했던 세 아들, 다산의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한나가 단순히 한나가 서원한 것을 통해서 한나가 살았던 시대의 병을 고쳤습니다. 한나는 시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대를 바꾸었습니다. 3장 1절에서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삼상 3:19-21)


사무엘을 통한 말씀이 이스라엘에 퍼져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구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07월 1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더 큰 나를 위해 지금의 나를 버리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막 6:14-29)


박지성 선수라고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였는데요. 박지성 선수가 쓴 책 중에 더 큰 나를 위해 지금 나를 버리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4강에 가도록 활약하였고,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박지정 선수가 평발이라는 것입니다. 90분 내내 달려야 하는 선수에서 평발은 불리하고 산소탱크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책에 보면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 위해서 견뎌야 하고 치러야 했던 열정적인 인내가 참 인상적입니다. 저는 이 선수가 쓴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에 보면 제목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끊임없는 것에 대한 갈구였습니다. 비워야 나를 채울 수 있고 가벼워야 힘차게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가 목회자인 저에게 외워야겠다는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축구나 신앙생활이나 원리는 똑같은 거구나.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헤롯왕은 자기 집착에 빠져 망한 인물이다. 자기 집착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망하게 되었다. 오늘 살펴보게 될 헤롯 왕에게 순교 당한 세례요한의 삶을 정리해보니 제목 책과 같습니다.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 세례요한의 삶을 묵상하다 보니 박지성 선수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비워야 나를 채울 수 있고 가벼워야 힘차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삶의 큰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세례요한의 삶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삶의 중심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기에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삶의 축이 있습니까? 헤롯왕이 그렇게 자기 집착에 빠져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던 것은 세례요한 삶의 축, 삶의 근거, 삶의 전체. 이 중심을 가지고 세례요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우선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자 마가가 샌드위치 기법을 사용하는데 오늘 본문의 구조가 딱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본문의 줄거리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를 파송했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보고하는 와중입니다. 빵과 빵 사이에 고기가 들어있는 것처럼 흐름을 한번 보십시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막 6:13-14)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막 6:30)


바로 연결이 자연스럽게 제자들의 사역 보고로 연결됩니다. 마가는 한참 제자들의 예수님께 드리는 보고에 대한 기록이 있다가 마가 이야기, 세례요한의 죽음. 순교 이야기를 길고 장황하게 펼쳐놓고 있는가? 제가 이 질문으로 묵상하다가 떠오른 책이 있습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이 쓰신 제자도입니다. 원제목은 급진적인 제자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저자가 제자 앞에 급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가하면 급진적은 라틴어 뿌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근원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런 단어입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이 저술하실때 왜 레디컬이라는 단어를 썼는가? 제자도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쭉 설명하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막 4:5-6)


뿌리가 없는 제자들도는 시늉밖에 되지 않는다. 마가가 왜 샌드위치 기법으로, 성공적인 사역 보고를 하는 기록 중간에 세례요한의 순교를 왜 끼워 넣었을까요?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도 중요하지만, 제자들이 걸어가는 길은 순교도 불사할 고난의 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도 중요하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중심이 잡혀있지 않는 것은 기만하는 일이다. 이것이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왜 이 말씀이 도전이 되었나면요. 제자가 따로 있고 크리스천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은 모두가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스와일드 센더스가 쓴 영적 제자도에 신약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인 표현은 세 번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약 성경에 세 번 나오고, 신자들은 딱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라는 표현은 269번이나 나옵니다. 제가 사전을 뒤져보니 일반 사전입니다. 제자 단어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 일반론 적인 제자를 설명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 누가 제자라고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 그러면 성경에서 왜 크리스천 표현은 세 번밖에 안나옵니까? 오스와일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라는 뜻은 학생이라는 뜻이지만 예수님은 깊고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제자는 가르침을 믿을 뿐만 아니라 삶 속에 실천하는 학생. 배우는 학생이다. 스승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본받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배운대로 따르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신중한 선택, 의지적인 순종이 필요하다.


제자라는 표현이 269번이나 나오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한번 은혜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는 스승의 관점과 생활 양식을 그대로 본받는 사람 아닙니까? 끊임없이 몸부림쳐야하는 것은 참 스승되신 주님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참 스승 되신 주님을 뒤 따르는 제대로 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이야말로 예수님께 제대로 배운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만큼 제자도를 실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세례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믿는 우리들이 구원받았다. 이제 내 멋대로 살아도 된다. 그게 아니라 정말 주님을 닮아가고자하는 이런 열망을 갖은 한국교회가 되기를 원하며 주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할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본문 세례요한을 중심으로 세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단순한 삶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다고 생각이 드는게 세례요한의 등장으로 마가복음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1-4)


마가복음을 세례요한이 연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에 맡겨진 것이 주님 오실 길을 평탄케 하여라. 단순 명료한 역활을 부여받았습니다. 메시지는 엄청나게 간단합니다.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실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얼마나 강조하면서 선포하는 게 세례요한의 메시지입니다. 이런 단순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말만 단순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의 간단한 삶 아닙니까?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막 1:6)


너무나 간단한 사명을 부여받았고, 너무나 간단한 메시지를 전했고, 단순 명료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 세례요한인데요. 오늘 뺄셈이라는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책의 저자가 미술을 배운 적이 있나 봅니다. 미술 전문가를 찾아가서 미술을 가르쳐주세요. 하니깐, 선생님이 하는 말이 지금 수준이 어떤지 알아야 하니깐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와 보세요. 이분이 좋아하는 선생님이니 일주일 내내 숨은 실력을 보여주려고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애를 썼습니다.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이런 탄성을 지릅니다. 어이쿠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겠네요. 엄청 칭찬할 줄 알고 갔는데, 실망이 되어서 제 그림에 어떤 문제입니까? 당신은 그림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했어요. 뺄셈의 미학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것을 뺴느냐에 달려있거든요. 모든 설교자가 그럴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제가 설교 죽을 쑤는 날은, 준비한 게 아까워서 빼지 않고 인용했을 대가 설교가 죽을 쓸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했느냐가 아니라 전할 것을 전했을 때. 아까운 것입니다. 아까워서 다 집어넣은 설교는 항상 제 마음에 후회되는 설교입니다. 31년 겪으면서 여전히 집착을 못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핍되어서 비참한 적은 없습니다. 70년대가 왜 그리워합니까? 결핍이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과잉입니다. 지난주에 헤롯은 집착을 버리지 못해서 망했다고 했는데, 버리지 못한 것들로 생기는 고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존스토트 목사님, 뿌리가 있는 제자들이 갖는 자질 8가지를 설명합니다. 그중에서 단순한 삶.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되신다면 여러분의 삶 너무 복잡합니다. 여러분은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그 생각이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함부로 힘들게 할 수 있습니까? 복잡한 생각이 헤롯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분은 흥해야겠고, 나는 초라해져도 괜찮다. 뭐가 복잡한 것입니까? 박지성 선수가 쓴 책의 프롤로그, 비우면 새로운 생각과 공간이 열린다. 축구 선수가 이 정도로 쓴다면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연결되어있구나.


때로는 인생의 기어를 한 단계 낮추고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경고가 이것입니다. 일만 성도 파송 운동을 앞두고 너무 힘듭니다.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을 높이는 일. 하나만 바라보면 복잡한 게 없을 것입니다.




2. 거룩을 추구하는 삶


지난주에 헤롯이 비참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권력을 쥔 헤롯이 세례요한을 무서워했다. 이유가 20절에 나와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차마 못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놓치면 정말 어리석습니다. 교회를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저 같은 목회자를 너무 막 대하는 것 아닙니까? 진짜 유일한 대한이 있다면 주님을 닮은 거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 삐까번적하게 지으면 세상이 존경을 삼던가요? 전 세계에서 설교를 제일 잘하면 세상이 무서워하나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입만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거룩을 추구하십시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고 두렵고, 보호하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당한 게 아닙니다. 부도덕한 헤롯왕의 삶을 지적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허무하다고 분석하는데 정말 모르는 분석입니다. 헤롯왕이 죽은 것은 복음 전하다가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이 18절에 나옵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막 6:18)


왕보고 똑바로 살라 하다가 죽은 게 세례요한입니다.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존스토트 목사님이 쓰신 제자도라는 책의 내용이 자질 8개 중에, 세상에 대한 불순응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드릴게요.


교회는 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책임을 가진다. 세상을 섬기고 세상에서 증인의 역활을 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세상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제자도의 첫 번째가 세상에 대한 불순응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 헛되다고요?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온전하게 제자도를 살았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한편 세상에 오염되지 않을 세상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제가 부끄러워야 할 것은 지식이 없어서 엉뚱한 것을 떠드는 것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제 부끄러움은 몸은 교회에 살고 그러면서 세상의 삶을 사는 것. 세상에 대한 불순응 이것은 입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 없이 반복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오염된 생각과 악함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3.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거는 삶


세례요한의 삶의 전제가 요 3:30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막 10:28)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사도바울의 집중력이 느껴지십니까? 예전에 나온 책에 올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문장 하나, 나는 너를 원한다. 우리가 왜 단순하게 살아야 하냐고요? 주님의 명령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잡다한 설명 없습니다. 저를 원하신대요. 여러분을 원하신대요. 이것이 복잡합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이단이 이것을 곡해해서 이혼해라. 가출해라. 미워하는 것은 언어적인 의미로 덜 사랑하라 뜻을 갖습니다. 남편 막 대하라는 말 아닙니다. 의미의 문제입니다. 중심의 문제입니다. 내버려두면 자기 집착, 나 자신, 내 아내, 내 부모에 몰두하는 인생이기에 조금만 덜 사랑해라.


이 세 가지를 늘 마음에 품고 묵상 재료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스데반이 복음 전하다가 어이없게 죽었습니다. 변화되기 전 바울이, 저들의 죄를 용서하라는 놀라운 고백 앞에 많은 학자들이 분석합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바울 내면에 갈등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죽으실 건데요. 어떻게 살아가시길 결단할 것인데요? 점이 이어저 선이 연결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이렇게 죽기로 결정했는데, 오늘 여러분의 점 하나가 오늘 여러분들이 만들어지는 점 하나가 그렇게 죽기를 바라는 고상한 쪽으로 가기 시작해야 선을 이룬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최근에 제가 받은 충격이 너무 큽니다. 성도님 중에 정신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계십니다. 최근에 옮기셨습니다. 이분이 말하는 충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세 가지 과업, 드림센터 사회 환원해서 청년들이 네 가지 꿈. 목회자 청년, 크리스천 청년, 난 크리스천 청년, 장애인 청년 이들이 꿈꾸고 회복이 되는 공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저 드림센터가 절망한 청년이 자살하기 직전에 들리는 곳이면 좋겠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려서 치유받고 살아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셨습니다. 그리고 옮기기로. 목사님 드림센터가 청년들 자살하기전에 들리는 곳이라고 하는데, 정신과 의사가 뛰어가면 5분 안에 있는 곳에 대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눈물이 날라고 그래요. 저하고 너무 대조되어서, 비교되어서. 목회자들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중지자들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강단에서 입만 산 목사가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시늉이라도, 썩어질 하나의 밀알이. 후배 의사와 같이 일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농담으로 했다고 합니다. 돈은 당신이 벌어. 내가 병원을 옮긴 것은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어가는 청년 살리기 위해서라고. 5분 안에 달려가는 곳에 대기하기 위해서 병원을 옮겼다고. 스데반처럼, 세례요한처럼 죽음의 공포. 고난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점 하나의 삶이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07월 1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멈추지 못해서 망한 사람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막 6:14-29)


신앙생활은 신앙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이 자기 집착의 문제입니다. 자기 집착 사전을 찾아보니깐, 사전에 이렇게 풀이합니다. 자신의 행복과 동기에만 집착하는 증상. 이렇게 자기 집착을 풀이했고요, 영국의 철학자 책에 보니 자기 집착을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풀이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쓰신 사랑의 초대 책을 보니 자기 집착에 관해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다른 용어로 표현하면 그것이 자기 집착이다.


인간은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늘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집착하든 거기에 마음을 쏟고 있는 자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돈에 집착하든 권력에 집착하든 모든 인간은 집착입니다. 자기 욕망에 대한 집착이기에 자기 욕망에 집착하는 삶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흉기로 드러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타인에게 흉기가 되기 전에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 자기 집착이다. 행복의 정원 책에서 어린 사춘기 시절 부터 허무해서 자기를 증오하고 자살을 품고 살았다. 이렇게 어려운 사춘기 시절부터 늘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 삶을 즐기는 인생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너무나 자기 삶을 증오한 비참한 삶에서 시간이 갈수록 자기 인생을 즐기고 자기 인생을 즐기는 인새응로 변화한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집착을 줄여나간 덕분이다. 저는 철학자로부터 철학자의 주장을 다 수용할 수 없지만, 이것은 100% 동의합니다. 내가 진짜 행복하기 위해서 자기 집착의 문제를 줄여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두 주간 설교할 것입니다. 자기 집착과 연민에 빠져 망한 헤롯왕. 자기 집착과 욕망을 해결한 세례요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혜롯왕의 정확한 이름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이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집착과 연민으로 자기와 타인을 망하게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유아살해를 명령한 인물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세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막 6:26-28)


이 사람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제수씨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본처를 내쫓고 제수씨와 재혼을 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지적하니 감옥에 가두었다가 세례요한을 참수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헤롯입니다. 묵상하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몇 가지 증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착에 빠진 증상




1. 두려움에서 오는 강박


지난주에 살펴본 마가복음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막 6:13-14)


뜬금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황당한데요. 그러나 저는 이렇게 반응하는 헤롯의 반응을 보면서 이 인간이 불쌍한 인간이구나. 예수의 이름의 소문이 퍼져나가는데 얼마나 그 악한 일에 대한 죄책감, 두려움이 강박증이 되어서 이런 표현을 하겠느냐고요.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는 말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그의 두려움이 20절에도 드러납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세례요한의 목숨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사람은 헤롯왕인데 세례요한이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헤롯왕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사울 왕. 어린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헤롯왕과 같은 양상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 18:12)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삼상 18:15)


다윗이 사울 왕을 두려워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지 시웰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움은 양심이 죄에 내는 세금이다.


굉장히 와 닿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헤롯왕이 두려움에서 오는 강박에 빠진 것입니다.




2. 허세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막 6:22-23)


어린 애 앞에서 헤롯왕이 허세를 부리는 것 아닙니까? 왜 헤롯은 체면도 없이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까? 이런 과장된 허세를 부리는가. 이것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니 헤롯이 왜 이렇게 허세를 부리느냐고요? 마음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늘 자기 집착에 빠진 사람의 공통점은 과시하고 떠벌리기 좋아하는데 마음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구역모임을 하는데 허세를 부리는 순원이 있습니다. 다락방 하면 헤세 부리고 하면 김 집사 뻥치지마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분당우리교화가 알려지면서 드리는 어린애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교회 조금 커졌다고 골목대장 노릇 안 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웃긴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진지합니다. 교회가 커진 것이 무슨 의미라고 허세를 부리는 목사님은 부목사 데리고 다니는 것은 엄청 좋아합니다. 까만 양복 입히고 줄세우는 분도 봤습니다.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제 안에 있는 죄성이 이런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위험이 있기에 허세를 부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허세를 부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집착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 집착에서 나와야 허세를 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하면서 목사님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불꽃놀이가 되면 안 된다. 허세를 부리면서 뻥뻥뻥 날리면 한국 교회에 안 좋다. 이벤트가 아니라 운동이다. 무브먼트이다. 그래서 29 교회로 나누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입니다. 많은 미자립교회를 섬기고, 작은 교회와 연대하고 섬기는 무브먼트가 시작될 줄을 믿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허세를 부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위해서 한국교회를 살린다. 그게 아닙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이 명한 일을 받들면서 허세가 없어야 합니다. 무브먼트가 작은 교회에 희망과 용기를 주고 그들을 살리는 운동이 되길 위해서는 자기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3. 사람만 의식하는 태도


지금 헤롯이 자기 생일을 축하하여 춤추는 헤로디아의 어린 딸에게 허세를 부리니 엄마와 상의하더니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조금 허세를 부렸더니 이런 소리를 하면 간단하게 떼끼 쪼그만 애가 무슨 그런 말을 해. 헤롯왕의 반응을 보세요.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막 6:26)


지금 헤롯은 표면으로 애를 상대하지만, 헤롯이 상대하는 것은 앉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집착하고, 자기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자기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을 의식하다 보니 경적되어 이런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 아닙니까? 역사에 이런 일이 드문드문 일어나는 일이 많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제 욕망에 몰두하면 경직이 일어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짓을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제가 하나님을 너무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사람들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이 되길 위해서 자기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야겠다.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아닙니까?


두려움에서 오는 강박, 허세 사람만 의식하는 태도 누가 이것에서 자유롭겠습니까? 세 가지 자기 집착에 빠진 헤롯이 보여주는 것은 곰곰이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점검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단상입니다. 치명적인 문제를 헤롯이 갖고 있습니다.




1. 멈추지 못한 인생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완전히 양심이 마비된 사람으로 인식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전하는 말을 달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헤롯 내면에 양심의 가책이 작동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세례요한의 지적을 달게 들을 수 있었던 헤롯이지만 헤롯의 문제는 그렇게 말씀을 달게 들었다가 20절인데, 21절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막 6:21)


세례요한을 죽일 찬스가 왔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님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말씀 듣고 어떤 분은 마음이 찡하고, 어떤 분은 도전을 받으십니다. 헤롯도 그랬습니다. 그게 악한 길로 가는 헤롯의 삶을 돌이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닙니까?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12층 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고, 사망자 78명 실종자 62명. 너무 끔찍한 아파트 붕괴 사건이 일어나는데, 꼭 뒤따라 나오는 분석. 미국 붕괴된 플로리다 아파트 이미 3년 전부터 이상징후 싹 무시했다. 맨날 우리나라 사고 현장에서 듣던 것을 미국도 똑같네요. 플로리다 아파트가 붕괴되기 3년 전부터 이상징후 경고가 있었고 심지어 붕괴되기 두 달전부터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어 한다는 말을 싹 무시한 것입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의 말을 달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붕괴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떻습니까?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저는 그때 서초동 사랑의교회에서 중고등부 사역을 해서, 가깝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실제로 중고등부 제자가 죽었고, 중고등부 제자의 부모와 가족이 죽었던 것을 억장이 무너진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TV 프로에서 원인을 분석하는데 마음에 누르지 못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537명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10일 전에 전조현상이라고 하잖아요. 백화점 식당이 흔들거리고, 구멍이 생기고. 그러고 붕괴 하루 전에 식당에 거대한 싱크홀, 펀칭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를 받은 백화점 경영진이 취한 조치는 직원들에게 입조심해라. 무엇에 그 당시 경영인들이 미쳐있었습니까? 매상 떨어지면 안 되는데, 이미지 깨지면 안 되는데. 헤롯이 세례요한의 말씀을 달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게 들으면 뭐합니까? 변화가 없는데. 그 다음절에서 죽이는데.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1-2)


돌이키라는 말씀 아닙니까? 가정에서 비록 모니터인 열악한 상황이지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헤롯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헤롯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그는 멈추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멈추지 못해서 망한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삼풍백화점 무니지기 하루 전에만 그랬더라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면, 하루 전에만 멈출 수 있었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헤롯에게 치명적인 것.




2. 말씀이 스며들지 않는 인생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막 6:20)


달게 들었지만 왜 변화가 없었나?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죄는 인간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이다.


경양성을 철학 사전에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음이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상태, 이것은 본능과 관심과 유사하다. 죄의 경향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이미 죄로 기울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왕이 말씀을 달게 들었고 말씀을 들으면서 괴로운 것 까지 갔는데 헤롯의 문제는 내버려두면 양심으로 반응하는 쪽보다 죄쪽으로 기우는 이 성향을 방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존 오웬이 강조하는 죄 죽이기 책을 추천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와의 투쟁이 필요하다.


여기 앉은 성도님 중에 여러분이 방심하는 문제를 아십니까? 죄의 경양성 때문에. 이렇게하고 다시 죄 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라 할지라도 죄의 경향성이 있기에 끊임없이 죄와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전 교회 적으로 금식기도를 선포하였습니다. 너무 바쁘다 보니 금식을 하다 보니 깜빡했네. 오늘부터 하시면 됩니다. 이번 주말까지지만 한주 더 하시면 됩니다. 왜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금식을 선포했습니까? 전 교역자들에게 몇 주 전부터 금식을 선포합니까? 저를 위해서, 교역자들을 위해서, 성도님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지난주 알렉산더가 백전 백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타겟을 잘 알기에. 사단은 알렉산더보다 더 전략가입니다. 사단은 저를 부너트리기 위해서 발악을 할 것입니다. 제가 여성도를 성추행을 했다. 분륜을 저질렀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실감이 안 나세요? 교회 돈을 1억을 해먹었다. 그러면 1만 성도 파송운동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더 두려운 것입니다. 목회 31년 차입니다. 이제는 목회의 기능을 위해서라면 새벽 예배를 일찍 안 일어나도 됩니다. 30 몇 명 모이던 개척 초기보다 더 길게 시간을 갖습니다.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어떤 공격을 어떻게 받을지 모르는 것이 저의 위치입니다. 제가 죄의 자리에 한 번만 빠지면 성도님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 아닙니까? 무슨 은혜를 구하는지 아십니까? 잘 이길 수 있도록, 견딜 자신이 있으니 지켜만 주십시오. 기도할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를 요약하는 찬양을 부를 건데요.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우리가 왜 금식하느냐고요? 전 교역자들이 금식하느냐고요? 오늘 해야 할 강력한 일이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셔야 합니다. 언제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그의 은혜를 구할 때. 예전에 제가 설교할 때 설명해 드린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 대요.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독수리 날래를 펴 올라가듯입니다. 독수리가 파닥파닥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는 참새가 아닙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이 아니라 상승 기류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목회 31년 차 제가. 어느 때보다 긴 시간을 제가 새벽에 일어나서 비디오를 보니까? 연속극을 봅니까?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은혜의 상승 기류에 올라타야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금식해야 하냐고요? 영적으로 훨씬 강하기에 금식 안 해도 되. 그게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의 말씀을 달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찔림도 있고 아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경향성. 방심하지 않았기에. 오늘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두려움에서 오는 강박 없습니까? 그렇게 낮에는 비싼 옷 입고 높은 자리에 서서 근엄하게 잘 사셨는데 그거 벗어 던지고 침대에 올라가면 마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몰려오는 분 없습니까? 허세가 왜 나오느냐고요? 사람만 의식하는 태도, 여러분은 없습니까? 멈추지 못해 나아간 헤롯. 말씀이 스며들지 않아서 없는. 그래서 좋아 내가 내일 집중해서 성경을 읽을 거야. 그게 아니라 은혜의 상승 기류에 몸을 맞기세요. 그분이 하십니다.





07월 0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가슴 떨리는 목표와 기준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막 6:7-14)


저희 교회 출석하시는 성도님들은 다 아시겠지만 분당우리교회가 갖는 자기 정체성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화면으로도 이 내용을 띄워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면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동시에, 세상으로 보내면 받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이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제자교회를 하는 대부분 교회,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의 공통적인 고백이지 않나 합니다. 두 가지 균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부르면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 모임. 교회는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공동체라는 사실, 자격이 없는 우리를 십자가로 택함 받은 감격, 뒷부분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임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명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분된 사람들끼리 잘 살고 잘 먹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라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이 부르심을 받았다. 보냄을 받았다. 균형을 갖춘 건강한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두 가지 균형을 갖춘 사람이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 바울이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사도바울은 사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면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토스라는 말인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의 자기 정체성은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아. 두 가지 균형을 갖는 게 우리 모두 가져야 하는 균형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설명해 드리느냐면 오늘 본문을 이 포인트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배경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사롯에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선입견을 품고 배척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대안 중 하나가 제자들을 여러 지역으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마가복음 6장 7절입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보내사, 보내시어. 제자들을 3년 내내 양육하고 훈련시켜 그러고 주님의 꿈이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쓰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는 일을 주안점에 두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 바로 예수님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도 부르심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사명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이런 내용은 부르사, 부르시어 잘 녹인 찬양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대목에 감격해야 합니다. 참 주님께서 오늘도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일하시는 하나님,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제가 부르는 모든 찬양에는 랩 적인 요소가 있어서 늘리고 줄이고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쉬지 않으시는,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우릴 보내시는 하나님 이 균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을 향하여 소명의식. 사전을 찾아보니 소명의식은, 부여된 명령을 하고 수행해야 하는 책임의식이 소명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부여된 명령을 따라서 책임감. 소명의식으로 무장된 주님의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냄 받은 자의 소명의식 받은 자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1. 명하시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7절을 중심으로 소명을 갖고 사명을 갖고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다. 권능을 되찾아야한다가 포인트라면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막 6:8)


간혹 교회를 보면 세 가지만 기억하고 바빠서 그랬는지 명하시되를 빠트리고 교회를 섬기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이 교회를 섬기면 교회가 어렵습니다. 어지럽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내사, 부르시며, 권능을 주시고 그리고 마지막 명하시되를 잊으면 안 됩니다. 명하시되는 내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이해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예화를 들지만 제가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주제를 생각하고 성경에서 뽑아내면 그것도 안 됩니다.


야구를 볼 때마다 야구선수들처럼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타자라도 제멋대로 휘두르지 않습니다. 투수가 공을 던질때마다 코치의 사인을 받는 것 아닙니까? 모자를 만지는 것, 지침을 받는 것 아닙니까? 자기 앞에 안타를 친 선수들 때문에 1루 2루 다 나갔습니다. 어느 선수가 욕심이 없습니까? 감독이 잔인한 사인을 내립니다. 희생 번트를 대라는 것입니다. 희생번트는 저 사람들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죽는 게 희생번트입니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은 선수라도 자기는 죽고, 루상에 나간 선수들이 하나씩 진로를 시키는 것 아닙니까? 이런 관점에서 야구를 보면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2루쯤 가 있는데 다음 타자가 안타가 되서,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 아닙니까? 2루에 있는 사람이 냅다 홈까지 달리려고 하면 3루의 코치가 못 가게 막습니다. 막 달리던 선수들이 그 코치의 지시를 받고 멈춥니다. 한 번도 코치를 밀고 달려가는 선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암만 야구를 잘한다고 해도. 배구도 네 왜 그렇게 하냐, 농구는 안 그렇습니까? 부르사, 부르시며, 권능을 받고 내 멋대로 하면 그것은 소명 받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타락의 시대 아닙니까? 성경에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구약의 나아만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장군인데 우리 시대로 치면 한샘병에 걸린 것 아닙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엄청 기분 나쁜 것입니다. 누가 사람을 보내서 하는 말이 요단강에 7번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난 것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낫게 하려면 그런 걸로 되겠냐고. 나아만 장군이 내 생각에는 아무리 외쳐도 8절에 나온 명하시고, 순종하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나아만 장군같은 크리스천이 현대인들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까지 왔잖아요. 설교를 들으면서 내 생각에는, 그래서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게 설교해도 게시판 불탑니다.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이 너무 똑똑해서 못 고칩니다. 죄성을 갖은 우리들은 저 김 집사 고집이 쎄. 이런 여러분도 고집이 쌥니다. 성격이 강해서 겉으로 보이거나 속으로 보이거나 이런 것입니다. 너무 답답해서 한때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했습니다. 제 자유 의지를 반납하겠습니다. 얼마나 제 안에 있는 내 생각에는이 많았으면 이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니 우리에게 선물 중에 준 선물이 자유의지인데, 너무나 자비로우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자유의지를 반납해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개념이 없고 순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편 가르고 내 생각에는, 하는 사람이 기도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타고나기를 유순하고 고집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좋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고집쎈 나의 동료 여러분 여러분은 조건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고집을 아는데 이 정도 순종하는 거 보통 어려운 거 아닌거 다 안다. 자유의지를 반납해서 되는 거 아니라는 것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 환상 방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환상 방향이라는 것은 안개가 심한 숲에 있으면 동쪽을 향해 잘 간다고 생각하는데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환상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똑바로 걷는다고 하면서도 한쪽으로 쏠려서 걷기에 발생한다고합니다. 서산대가 말한 말인가 시인가, 눈길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소, 뒷사람이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우리교회 부교 역자들이 제 목회의 눈길을 보고 따라왔으면 좋겠는데, 내가 목회를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데, 아빠의 발자국을 따라와라. 이거 위험한 것 아닙니까? 인생의 어려움을 피하려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기에 인생의 혼미한 길에는 자기 감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침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차별금지법, 성 소수자에 관한 것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우리나라도 폭풍전야입니다. 차별 금지법을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엄청난 독소가 숨어있기에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차별 금지법이 정한 차별사유가 23가지. 성별,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하느냐면 미국을 보니깐, 유럽을 보니깐, 차별 금지법이라는 너무 좋은 법이 성적 지향을 포함한 제3의 성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과정으로 갑니다. 그래서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보니 하나님 없는 이 시대의 특징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부모아닙니까?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그만. 하는 것 아닙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시대 뿐만 아니라 한계를 그어주는 역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 하나님 없는 세상의 특징은 한계가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으로 끝나면 저 같아도 찬성을 하겠습니다. 미국을 보니 유럽을 보니 끝이 없습니다. 지난주 말도안되는 미국발 기사를 봤습니다. 첫 번째 기사의 제목이 이렇습니다. 미국 여권 신청시 성별 자유롭게 선택. 미국 국무부에서, 제가 미국 사람이라 치고, 여권을 신청하면 서류에 저를 써야합니다. 거기에 성별, 우리로 치면 남, 여 이것을 내멋대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사도 안하고 다 인정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인 미국이 한계없이 나아간다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미국 국무부가 구멍가게 주인도 아니고, 이런 무질서를 정해놓고 의미부여를 이렇게 했습니다. 여권 발급할때 성소수자를 존중하는 것으로, 제가 여자라고 여권에 쓰면 성소수자의 존엄을 증진합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데 반대가 없습니다. 모두가 맞다 맞다 합니다. 또 하나 미국발 말도 안되는 기사를 봤습니다. LA 일입니다. 목욕탕 같은 것입니다. 안마도 받고 그러는데, 여탕에 어떤 남자가 완전히 벌거벗고 갔다는 것입니다. 프론트 직원이 그 사람이 여자라고 해서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여자애들있는데 벌거벗고 여탕에가면 성소수자의 인권과 존엄이 높아집니까? 문제는 계속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두 걸음 뒤처져서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절대 차별하면 안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어떤 약자도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제가 차별금지법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미국이 걸어가는 발자국은, 유럽이 걸어가는 발자국을 보니,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 처럼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일수록 소수의 약자에게 그리스도의 긍휼함으로 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그렇게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라고 교회 나오지마.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옳고 그름은 구분짓고 하자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되버렸습니까? 8절에 명하시되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애가 컴퓨터 게임을 계속하면 엄마가 이제 그만 해야 하는 것처럼요. 이런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8절의 명하시도. 내 멋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명하시되. 그분의 인도 하심에 따라 신앙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막 6:12-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다가 마음에 확 끌었습니다. 1학기를 마무리하고 2학기를 준비하며 전반기 목회를 점검하기 원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 다 포함하지만, 열매는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니? 그날 새벽에 굉장히 저 자신을 돌아보며 심각하게, 열심히 한 학기를 보낸 것도 사실입니다. 수면 시간도 짧고 설교 준비하려고 잠을 제대로 못 잔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랑하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니? 화요일 새벽에 제가 너무나 심각하게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면서, 화요일 오전에 마침 또 신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해서 합류해서 전체 교역자들이 있는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심방을 많이 했는지, 그것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모든 교역자에게 금식을 선언했습니다. 금식하며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얼마나 목회를 열심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찬수 목사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소명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트레인시 '당신의 무기는 무엇인가? ' 우리 현대인의 삶과 일상 전부가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12가지 무기를 갖추어야 한다. 저자가 전쟁터 같은 인생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12무기 중에서 명확한 목표를 갖는 것. 전쟁터 같은 인생에서 승리하는 무기입니다. 알렉산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알렉산더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투마다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전략은 정확한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누구를 죽여야, 누구를 생포해야 적이 와해가 되는 것.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 이것이 승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승리를 위해서. 눈길을 빙빙 도는 인생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정확한 목표가 있습니까? 정확한 목표는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1만 성도 파송운동의 출발은 하나님이 어느 새벽에 8절의 명하시기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1만 성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이니 그것은 아닙니다. 1만 성도 파송이 한국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당우리교회에 명하시되의 사명을 준 것입니다. 그것을 열심히 잘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타 교회 분이 듣고 계신다면 분당우리교회 파송 운동하는데 우리교회는 왜 안 하느냐? 이러면 큰일 납니다. 분당우리교회에 준 명이 다 다릅니다. 각각 교회에 주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나가면 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의 궁극적은 목표


내년부터 29 교회에 합류, 분당우리교회에 남는다. 동네 교회로 옮길 것이다. 큰 교회는 안 됩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내 생각에는 으로 하면 안 됩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지만 전 성도님들에게, 전 교회 적으로 금식을 선포합니다. 두 주간 필요에 따라서 한 끼, 두 끼, 세끼 금식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걸려있고, 자녀들의 장래가 걸려있는데 나아만 장군처럼 선포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가족 행복 밥상 다 하시고 있으시죠? 저녁에 홈페이지 오시면 토의하라고 자료를 만들어드렸습니다. 1, 2, 3 중에서 하나님의 명하시되가 어느 것인지. 내일부터 두 주간 금식하시면서, 결정을 12월 말에 하시면 됩니다. 기도하면서 방향을 잡아가자는 것 아닙니까? 결론을 맺겠습니다. 최근 설교에서 리차드 바커가 인용한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갈매기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일이 아니라 먹는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 갈매기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일이 중요하다. 날기를 좋아했다. 대부분 세상 갈매기는 먹는 것이 중요하다. 호구지책으로, 밥먹자고 하는 일이지. 소명자들은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소명의식입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1만 성도 파송 운동이 죽을 것 같습니다. 29 교회로 나누기만 하면 됩니까? 여러분이 창고의 물건입니까? 감사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제 책임 아닙니까? 시간이 갈수록 두려운 것입니다. 이 무거운 책임을 어떻게 지는가. 영적인 세계에 힘 하나도 들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일어나 그저 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 먹는 일이 중요하다는 결과로는 두려워 죽을 것 같지만 조나단 갈매기에는 나는 일이 중요하다. 주께서 명하시므로, 궁극적인 목적. 성령의 위로하심이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가평 우리 마을 수년을 두려움 속에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가평 우리 마을 직원을 채용하는 공고가 계속 나갈 것입니다.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직원이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드림 센터 사회 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이 내용을 마음에 담으시고.





06월 2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능력 회복을 위한 3가지 훈련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7-13)


올 상반기 중에 나온 영화 중에 자산어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동안에 자산어보라는 영화의 주인공 정약전 선생의 삶에 되뇌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부르사, 보내시며에 대한 감동 때문에 정약전 선생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가톨릭 신자입니다. 흑산도로 귀향 떠나지 않습니까? 정조 대왕의 총애를 받던 인재 중의 인재 아닙니까?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갑니다. 유배에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오매불망,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주기를. 한양에 부름을 받아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기를 사모했는데, 정약용은 한양으로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리는데 자기는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영화 끝 부분에 너무나 쓸쓸하게 부름을 받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영화 끝 부분이 저에게 굉장히 충격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밖으로 걸어나가는데 마음에 먹먹함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껏 쓰임 받을 수 있는 인재를 정당하지 않은 이유를 가지고 평생 망치는 것을 보면서 오늘도 이런저런 아픈 사정 때문에 너무나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는데 사장되는 분들이 있는데 동전의 다른 면처럼 보잘것없는 제가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부르심을 받아서 과분하게 쓰임 받는 것이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던 것이 있습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부르사, 보내시어의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손이 많이 가는 자녀라서 버겁고 힘드세요?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들면 흑산도로 가시던지요. 참 가정을 맡겨주시도하고, 저도 한 번씩은 버겁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흑산도보다 여기가 낫지. 보내사, 부르시어. 다음 주에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7절 끝에 나오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자격 없는데 불러 사명을 주시고 쓰임 받게 되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많이 묵상한 데요. 권능을 주시고. 하나는 권능에 대한 긍정적인 말씀. 하나는 부정적인 말씀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나,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신 주님. 아무 힘도 주시지 않고 가서 일하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목사님들에게 종종 이야기합니다. 그 자리에 맡게 일을 주시더라. 청소년 사역하는 제가 분당우리교회를 섬길 수 있는,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저에게 그 자격에 맞는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에 제가 떠오른 권능에 대한 구절입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눅 17:15-16)


두 구절을 대조하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힘든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시대 교회는, 우리 시대 목회자는 전자에 가깝습니까? 후자에 가깝습니까? 늘 십자가를 관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으로 더불어서 주님에게 힘있게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기쁨을 전합니까? 고치지 못합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비아냥하는 것이 고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도님들과 제가 두 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길 원합니다. 하나는 저희가 정약전 선생님처럼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이 불러주실 때 소명의식으로 무장되기를 원합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무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부르신자 답게, 우리들 마음에 주님 주신 권능, 권세와 능력에 대한 확신을 하기를 원합니다. 허구한 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힘이 없지만, 주님에게 보고드릴 수 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를 자주 경험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능력 회복을 위한 세 가지 훈련을 하고 어떻게 주님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기 위해서 지침을 주시는데 이것이 훈련이구나.



1. 주님만 의지하는 훈련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8-9)


요즘으로 치면 복음을 힘있게 전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사줄께, 사람들을 붙여줄게. 그런데 지팡이만, 심지어 옷도 두 벌 갖지 마라. 왜 이런 지침을 주셨을까요? 주님이 주신 권능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훈련.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이렇게 무능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주님 말고도 도와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당회 이런 장로님들 어떻게 만납니까? 주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잘 돌아갑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그게 교회입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넘치는 게 지팡이고, 상징적으로 여러 벌의 옷이 있고. 그러다 보니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불 가운데 지날 때에도, 물 가운데 지날 때에도 염려하지 말아라 하는데 과잉보호로 부모님들이 불 가운데를 가주고. 우리가 결핍으로 자란 것이 신앙생활의 보약 중의 보약이었구나. 중학교 때부터 금식기도하고. 중학교 때부터 밤샘 기도하고. 요즘에도 대학교에 들어가도 공예배를 안갑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너무나 약해진 다음 세대를 보면서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예수 이름만 있으면 된다. 이런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주의 능력이 없어서 아닙니까? 엘리야가 경험한 것도 그것 아닙니까? 아합왕에게 너무나 멋진 도전장을 던집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얼마나 엘리야가 멋있습니까? 엄청난 선포입니다. 아합 왕에게 역사의 전면에 짜잔 등장하는데, 멋진 엘리야의 스타일을 구겨버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2-4)


아합에게 도전장을 던졌는데 백성들 입장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사라졌네. 큰소리친 엘리야 선지자 관점에서 모양새 다 구겨지게. 사람들도 없는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먹이로 연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까? 대답 간단합니다. 엘리야는 모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고 철저하게 주님 말씀만 의지하는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두 분류입니다. 말씀도 잘하고, 잘생기고 능력이 있는데 그릿 시냇가를 통과하지 못한 분이 있습니다. 이론으로 설명은 잘하는데 경험을 못 해본 목회자가 있습니다. 지팡이 하나 들고, 너무 대형교회는 거품이 많고 부실하기 쉽습니다. 알찬 교회는 미자립교회에 있습니다. 곰팡이 냄새나는 상가에 있지만, 오늘 당장 임하지 않으면 쌀이 떨어지니깐, 저처럼 복부비만. 기도 안 해도 다 굴러가는. 너무 자기 비하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문제 아닙니까? 그릿시냇가 통과한 신앙인입니까? 모르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이 고백이 여러분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세상에 사로밧과부. 이것 먹고 죽어야 하는가 하는데 빌어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가는 엘리야이기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뺄셈의 미학에 대해서 많이 묵상했습니다. 뺄셈의 미학에 대해서 묵상한 한 두 가지 소개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가 있습니다. 욕망은 우리를 자꾸자꾸 끌고 간다. 어디로 끌고 가느냐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우리의 불행은 거기에 있다.


덧셈의 미학으로 이것도 갖추어야 하고 욕망이 자꾸 자기를 자극하면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생텍쥐페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완성이란 더 덧붙일게. 없는게 아니라 더 뺄게. 없을때이다.


우리 시대는 빌립보서 말씀이 딱 이 말씀 아닙니까?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땅에서 어떻게 해보겠다고.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돼지는 구조상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돼지보고 이 돼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땅의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신은 배요. 덧셈의 미학을 추구하는 시대이기에, 예수 믿는 우리가 달라야 할 것은 뺄샘의 미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만 성도 파송운동은. 교회가 세상 논리로 덧샘의 미학. 욕망은 우리를 자꾸자꾸 끌고 간다.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드림 센터 사서 다 채우고. 또 드림 센터 사서 다 채우고. 덧셈의 미학으로 가면 끔찍하지 않나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피곤한 게 없는 게 아니지만, 주님은 이것을 원하신다고 확신합니다. 뺄샘의 미학이 있어야. 그래 시냇가에 까마귀가 물어다 주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뺄샘의 미학에 빠졌기에. 엘리야가 한 역사를 바꾸는 쓰임을 받지 않았습니까?




2.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막 6:10)


너무나 호의적인 분이 여기에 머무세요. 갔더니 마음에 안듭니다. 바퀴벌레도 보이고.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셈세하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자료를 찾다보니, 어느 집이 편한가? 어느집이 반찬이 잘 나오나.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못받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에 비교하니 너무 와닿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돈을 많이 준다고하고 너희들 교회갔다가. 다른 교회에서 벤츠준다고 옮기고. 원하지 않잖아요. 자기 문제에만 집착하지 않도록. 그 지역을 떠나지 않도록 유하라는 것은, 자기 문제에만 집중하지 말라는 지침입니다.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왜 신부님들이 결혼을, 수녀님들이 결혼을 안하도록 하는 것은 이해가갑니다. 목사님들이 가정을 잘 만들면 잘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방하다가 우리 애들하고 대화를 많이 해야하고, 외식하고 과외하고 이러면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너무 가정적인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합리화 한다고 제 아내가 듣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자기 합리화도 있지만 저는 옥한흠목사님을 생각하면 눈물나는 대목이 이것입니다. 개척하려고 준비하는데 불러서 두 가지 챙겨라. 건강을 챙겨라. 네 에너지의 70%만 사용해야 오래 사역할 수 있다. 애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신이 못한 두 가지를 부탁한 것입니다. 시계를 돌려서 백투터퓨처. 옥목사 신혼때부터 다시 시작해라. 옥목사님은 자신이 걸었던 그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거든요. 사명을 받은자는 자기 문제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저는 분당우리교회 개척 이후 19년동안 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개척 장소를 찾으려고 분당, 죽전, 수지를 다니면서 계속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달라야 할회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상가에 두 개씩있고, 어떤 열받은 건물은 세 개씩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왜 하나의 끌고 간다 세워야하냐고. 과포화 상태끌고 간다회인데. 교회가 신학교 나온 제 직장제공을 위해서, 밥벌이를 위해덧셈의재하는가? 이 교회에 진짜 저의 섬김이 필요한 것인가? 29 고마피곤한 게담없는 게님아니지만, 주님은가지고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안심이됩니다. 주의 말씀으로 무장된 사물어다 주지은 너무 굶어야 하는 몰두하는 것을 벗어날 때 사명 감당하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3. 거절당함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


지난 주 설교에서 연장해서 말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막 6:11)


파송받아 복음 전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는 것은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지 네 잘못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주님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훈련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지난주 살펴본.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편견과 선입견으로 바라보고 내칠 때 주님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처럼, 선지자는 원래 고향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 의연하게 헤쳐나가는 것을 제자들이 다 지켜봤잖아요. 이것은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님들이 보여준 모범은 이 지침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여러분 지금 복음 전하다가 생기는 오해, 핍박, 불신 이런것으로 주님 전하실때 위축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니, 십자가를 통한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세 가지 주님만 의지하는 훈련,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 거절당함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 지침을 요약해보니 하나입니다.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넓고 쉬운 길로 가지 말고 고난의 길,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지난 화요일 너무나 실제적인 사레를 위해서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두 갈래 길을 놓고 선택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은퇴하신 멘토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두 가지 길이 있을 때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목사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요즘에는 망설여진다. 목사님 자신이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경험한 것은 후회가 없는데, 후배에게 좁은 길로 가라고 권면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은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교회에서 청빙이 왔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는 규모가 있는 교회, 한 교회는 50여 명 있는 교회. 제자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이 더 젊을 때니, 성령 충만하고 확신에 있으니깐 좁은 길로 가야 한다. 바로 순종해서 큰 교회를 내려놓고 50명 교회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50명 교회를 선택한 목사님이 20년 내내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교회 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우시는 것입니다. 확신을 하고 좁은 길로 가라는 용기가 안 난다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먹먹하게 하는 것은 이틀 뒤에 스승 목사님이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도 좁은 길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한국교회에 이런 목사님들이 많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이런 목사님이 많이 나오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주님의 권세가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예비 29 목사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허락하셔서 모든 성도님을 성도의 능력으로 잘 섬기기를 원합니다. 29 목사님의 모든 소원입니다. 이웃의 작은 교회를 제대로 섬기고, 희생하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십자가의 길을 시늉이 아니라 제대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계속 기도하고 이런 것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나누는데, 사람 많이 따라가는데, 왜 그런 좁은 길로 가기를 고심할까요? 그래야 그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쉐인 클레어본이 쓴 책입니다.


교회에서는 크리스천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쳤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기독교적인 것으로 피둥피둥 살이 쪘지만,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기독교적인 것에 짓눌려있지만, 하나님에게 배고파하고 있었다.


모태신앙이고 교회에서 문화의 밤도 학도, 성탄절 날 새벽쏭도 돌았습니다. 기독교적인 것으로 피둥피둥 살이 쪘지만, 교회에서 역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보내사 부르시고 권능으로 주셔서. 맨날 들리는 소리는 분당우리교회는 허우대는 멀쩡한데 고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제압하는, 주님의 이름으로 악한 것을 묶는. 교회에서 이런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저와 여러분의 꿈이 되기를 원하고. 현실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6월 2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거절감의 상처 다스리기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막 6:1-6)


오늘은 거절감의 상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지난주는 예수님을 배척했던 동네 사람들, 나사렛 동네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배척당하신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려고 합니다. 거절감의 상처라는 것. 현대인이 겪는 만성적인 질병. 많은 부작용.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가슴 아픈 기사가 떴습니다. 전교 6등 여고생. 유서 쓰고 투신 뭔가 보니깐, 학교 영어 시간에 쪽지시험을 봤나 봅니다. 그런데 학생이 컨닝을 했다는 의심을 받은 것입니다. 선생님께 아무리 컨닝을 안 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교무실에 가서 반성문을 쓰고, 억울함을 나타내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거절감에 대한 상처가 이런 비극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글 하나를 발견하고 읽었습니다. 글 쓰신 딸이 아기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기는 한번 자고 깨지 않기에 엄마가 방심한 것입니다. 동네 슈퍼마켓 갔다 왔습니다. 많이 시간 걸리지 않는 사이인데, 엄마가 시장 간 사이에 애가 깬 것입니다. 엄마가 자기를 보호하는 존재인데 이방 저방 돌아다니면서 엄마를 찾아 헤매는데, 엄마가 없는 것입니다. 세탁기에 쓰러져서 잠이 든 것입니다. 이게 아기가 생후 10달에 일어난 일인데요. 그 상처와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게 갔는지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세탁기가 있는 옆방에 자는 것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각인된 거절감의 상처가 오래가는가. 이 글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성경에도 거절감이 주는 상처가 큽니다. 가인의 살인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오늘 인용하려는 것은 다윗의 큰 형 엘리압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려고 투입되는 과정에서 큰형 엘리압이 분노를 쏟아내지 않습니까?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


제가 최근에 골리앗 끝장내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내면에 도사리는 거절감의 상처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일곱 형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이세를 찾아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찾으러 왔는데 아들을 불러달라고. 아버지 이세가 장남 엘리압을 부릅니다. 사회적인 장남을 귀히 여기는 분위기를 봐도 그렇고, 엘리압을 봐도 그렇고 당연히 장남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보더니 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다윗의 형들 하나하나 사무엘 선지자 앞에 보이는데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막내 다윗을 사무엘 선지자가 지목하면서 바로 이 아이입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겠다는 것입니다. 맏형 엘리압에게 거절감의 상처가 되었는지. 막내는 후보에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탈락인가. 거절감의 상처가 다윗을 향한 질투로 변해서 골리앗 앞에서 들이퍼붓는 것입니다. 엘리압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주변 병사들에게 애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은 사람이라고. 거절감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괴적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거절감의 상처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가져옵니까? 두 가지 파괴적인 양상으로 가져옵니다. 하나는 자기학대. 또 하나는 타인 학대입니다. 굉장히 잔인하게 대하고. 이것이 거절감의 상처 때문입니다. 타인 학대 때문 아니라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이 자기 학대입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낮은 자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절감의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기 연민, 수치심을 느끼기에 거절감의 상처를 갖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상처를 잘 받습니다. 거절감의 상처를 주님 앞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령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거절감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길 원합니다. 이후에 예수님처럼 이런 일에 상처받지 않는 담대함. 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님이 당한 거절감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한 마디 한 마디가 조롱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여성을 비하하던 시대입니다. 누구 집 엄마 아들이야 라고 소개하는 적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비아냥거리는 것은 마리아의 아들 아니냐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가 분석하기를 예수님의 육신의 아들 요셉이 일찍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깐 이 사람들이 주님을 비아냥거리는 포인트가 남편을 먼저 잃고 아버지는 일찍 여인 예수님과 가족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없는 애가 무슨 기적을 일으키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수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제일 치사한 것이 직업으로 폄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것이 이 본문이 처음입니까? 제가 이번에 거절감과 관련된 글을 읽다가 예수님과 관련해서 마음 아픈 일이 있습니다. 거절감에 대한 상처는 어릴 때 받는데, 태아 때 거절감에 대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산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를 가질 때. 예를 든 것입니다. 갑자기 넷째가 들어섯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스럽네. 이 나이에 넷째가 왼말이야. 태아가 거절감에 대한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모에게 필요 없는 존재구나. 태중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니 근거가 있는 것 아닙니까? 마음이 아팠던 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의 마구간 생각하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님의 마구간이 거절 감을 상징하는 것 아닙니까? 이 땅에 오실 때 거절 감을 당했던 것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빈방 없어요. 이것이 거절감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 자체가 거절로 시작해서 십자가까지가 거절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 저의 거절감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먹먹한 은혜를 누리는 데요. 제가 본문에서 주목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하고 조롱하는 상황인데요. 예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6:3-4)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조롱당하는 일, 배척당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가볍게 툭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거절당하지 않는 힘이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로버트 데니로가 어떤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서 축사했던 내용. 저도 유튜브에서 축사 내용을 들었었습니다. 졸업생들이 다 예술을 전공하고 예술 대학인 것 같습니다. 이 분이 돌직구입니다. 예술가의 인생은 변호사나 의사나 다른 전문직처럼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의 인생은 너무나 많은 거절당하는 인생의 삶이다. 여러분 앞에 새로운 문 제목이 있다. 그 제목이 거절의 문이다. 완전 돌직구 아닙니까? 그러면서 예술가의 최고의 주문을 외워야 하는데 예술가들이 거절당할 때마다 주문해야 할 주문은 next, 계속 자기 암시처럼 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배역을 얻지 못했다고요? 다음, 그 다음, 그래도 안되면 그 다음다음. 그러면 여러분은 해낼 수 있습니다.


예술로 성공하는 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거절에도, 수많은 거절에도 당연히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다음을 연설하는 것입니다. 엄청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 책에 세일즈 하시는 분에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세일즈에 처음 입문한 초보 판매원에 거절하는 것이다. 소비자 행동연구에 의하면 거절은 평균이다. 소비자는 물건을 사기전에 평균 4번의 거절을 한다. 마케터는 네 번은 거절당해야합니다.


어떨때는 40번씩 거절 당하지 않습니까? 원래 이런 거절을 거쳐야한다. 예수님이 거절감의 상처를 안 받는 비결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냥 나사렛 사람들의 비아냥거림과 예수님이 열 받으셔서 너 왜 마리아의 아들이냐 하는가? 그냥 받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런 거절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부교역자들에게 상처 안 받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드림 센터에서 AK플라자쪽으로 가다 보면 엄청나게 담배를 많이 피는 지역이 나옵니다. 거기를 관통할 때 지나가기 직전에 숨을 이빠이 들이마십니다. 그 지역을 지날때 숨 멈추지 않을 만큼만 금붕어처럼 숨을 쉽니다. 거기를 지나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마십니다. 상처를 안받는 방법이 여기있다. 누구에게 모함당하고 배척당하고, 당신의 월급속에 악플받고 배척당하는 값이 30만원 들어가있다. 누가 집에까지 가져가서 잠도 못자는가? 얕은 숨. 엄청나게 그런 일을 겪지만 31년 목회를 하면서 이런 것 때문에 잠을 못자본 적이 없습니다. 얕게 얕게.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보세요. 상종을 안합니다. 원래 사명 감당하러 왔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주님의 자녀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분 좋은 일이 있더라도 나 상처 받았지 하면서 묵상하는 것 아닙니까? 상처 안 받기 위해서 얕은 숨을 쉬는 것입니다. 내 폐 깊숙이 찌르지 못합니다. 접속을 못 하게 합니다. 이런 교훈으로 받아야 하는데 어디서 담배를 피우지 하면 안되고요. 우리가 거절감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 거절감의 상처를 영적으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1. 거절감을 치료해 주시는 주님께 나아가기


제가 골리앗 끝장내기를 인용하였는데요. 현대인에게 다섯 가지 골리앗이 있다. 여기에 거절감이 있지 않습니까? 한 항목, 한 항목, 두려움 끝장내기, 거절 끝장내기 있는데, 거절감 끝장내기의 머릿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자기 안에 있는 거절감이라는 골리앗을 물리치기 위한 대안은, 당신을 이미, 그리고 온전히 받아주신 예수님을 붇들라. 제가 그 책에서 진짜 중요한 한 가지. 저에게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골리앗을 물리쳐야 하는데,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물리치는 다윗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 제게 큰 깨달음이 되었냐면, 네가 골리앗을 물리치려면 물맷돌을 들어야하지 않는가? 이것도 엉터리 적용은 아닙니다. 네가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골리앗을 무찌르는 것은 누굽니까? 골리앗을 쓰러트리는것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다윗처럼 용사가 되라. 이런 주문은 우리 삶에서 전혀 통하지 않고 골리앗은 활개를 치고 다닌다. 이야기 속 다윗은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순간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에게서 예수님으로 옮겨가는 순간, 그 순간이 놀라운 변화의 출발점이다.


저는 20대에 경험한 내용입니다. 20대 초반 이민을 가서 어떻게서 적응하려고, 공부를 해야하는데, 학비를 벌어야 하는데, 안 해본 고생이 없다고 하는데 안해본 고생이 저를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 거절감입니다. 영어 못하기에, 시카고 엄청나게 덥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대중교통 위주가 아닙니다. 버스가 한 번 오는데 30~40분 걸립니다. 여름에 엄청나게 무더운데 그래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시카고 선 타임즈라고 당시 25센트 주면 신문을 살 수 있는데 help wanted, 구인 구직란입니다. 식당 웨이트도 영어가 못해서 못합니다. 버스 보이라고 다 먹으면 그릇을 치우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안시켜주더라고요. 점점 발버둥치더라도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걱정하는 것이 은퇴이후. 은퇴하면 어떻하지? 그런데 무기력증이 오는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말에서, 내가 골리앗의 현실을 물리치는 줄 알고 그렇게 발버둥첬는데 발버퉁 칠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런 훈련이 내 안에 이루어졌을때, 이 환경의 골리앗과 싸워주신다고, 내 인생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그 분을 의지하면서 상황이 안바뀌는 것입니다. 여전히 취직 안되고 통장에 20불 남아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이거 먹고 죽어야하는가? 제가 주님을 의탁하면서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끝장이 나는게 아니었습니다. 훈련이구나.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서 20대에 절망가운데 만들어진 것이라고. 좌절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싸워 주시는데. 또 하나 달라진 것. 주님이 보내주시는 만남의 축복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깯알은 것입니다. 저를 살려준 것은 이민교회입니다. 여러분만 아니면 벌써 갔습니다. 갈려고 여러번 마음으로 충동을 느꼈지만 분당우리교회에 시집을 갔기에, 이민교회를 섬길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다면, 너무나 거절감으로, 나같이 얼굴도 못생기고 돈도 없고 이런 사람을 맞이할 사람이 없다는 거절감으로 꽉차 있던 저에게 그렇지 않다고 한 시카고 교회의 성도님들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빛을 갚아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청년으로 용납해주고, 미스터 리. 당신의 아버지가 금식하다가 돌아가셨다고하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느냐고 걱정하지 말라고. 사랑의교회에서 청소년 사역할 때 잊히지 않는 은인들이 제 제자들입니다. 강남의 8학군. 저와 종자가 다릅니다. 우윳빛 피부에 다 서울말 쓰는데, 저는 행사하는데 가서 5만 원 양복을 샀는데, 밤무대도 아닌데 번쩍번쩍하는 양복을 샀습니다. 이상하게 애들이 너무 따르는 것입니다. 애들이 와서 목사님은 동네 아저씨 같아서 하나도 부담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저씨 같은 분은 없다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는데, 번쩍이 옷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입고 설교하면 다 좋아하실 텐데,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만남의 축복이 엄청나구나. 19년 동안 만남의 축복이라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골리앗을 상대해서 물리칠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신앙생활 하기를 축복합니다.




2. 거절감을 사명의 도구로 승화시키기


이 부분은 다음주에 연결해서 전하려고 하기에 오늘은 큰 타이틀만 이야기하려고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6:4)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선지자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아픔이 있고, 거절감에 대한 상처가 있다면 사명으로 승화시키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절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친히 거절감으로 가셨던것처럼요. 제가 주목한 것은 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막 6: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6:4)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인것은 제자들입니다. 무엇을 배웠을까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막 5:12)


이것을 즐거움으로 받으라는 말씀이구나. 교회에서 봉사하면 100% 상처입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다음 주에 연결해서 말씀드리고 결론으로, 최근에 금요 철야기도 시간에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고 기도회 시작할 때 청소년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하는데 마음이 확 열렸습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불공평하다며 당신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던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으 나의 삿대질을 보시지 않고 그 갈망만을 보고 계셨죠


빛과 먹선이야기라는 그림책입니다. 이 책을 구입해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분노하며 삿대질합니다. 폭우를 맡으며 저게 23살의 제 모습입니다. 너무 분노가 많으니깐, 당신이 살아있느냐고. 내가 볼 때 당신은 죽은 신이라고. 내가 볼 때 당신은 죽은 신이 아니라면 무능하기 짝이 없다고. 실제 밤 10시 넘어서 시카고 밤 10시에 하늘을 삿대질하며 눈물 펑펑 흘리며 대든 사람입니다. 나의 삿대질만 봤다면 이 자리에 제가 있었겠습니까? 그 터널을 지나는 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거절감입니다. 나 같은 것. 주목을 받을 수 없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자리 세우시는 것은, 제 존재를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결론으로 이 찬양을 올려드리길 원합니다. 아바 아버지. 아람어로 아빠라는 뜻입니다. 그 은혜 아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내 마음을 고치시고, 왜 안 보이는지 아시지요? 태중에 받은 상처인데 어떻게 보입니까? 주님은 내 마음을 고치시는데 볼 수 없는 마음의 상처까지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내면의 상처를 실제로 싸매어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영적인 사건이 찬양 가운데 일어나길 원합니다.






06월 1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기회 주실 때 거부하지 말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막 6:1-6)


데이빗 시버리가 쓴 심리학책입니다. 기회를 잡는 사람 기회를 놓치는 사람의 책이 있는 데요, 기회, 찬스라는 풀이에 대해 나옵니다. 찬스라는 단어에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라는 뜻도 있지만, 때를 소중히 여기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 속에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지만 찾아오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찬스, 기회와 관련된 설명을 그 책에서 덧붙이고 있습니다.


기회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운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절박함에서 기회를 쟁취하는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은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회를 볼 줄 아는 눈과 기회를 포착하는 탁월한 눈이 있다. 기회를 놓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친다. 기회인 줄 모른다.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기회를 볼 줄 모르고 외면한다.


설교의 결론을 이 책에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나사렛 사람들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막 6:1-2)


예수님이 어린 시절 머물던 나사렛에 갔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낙후된 시골입니다. 나사렛에 대한 유명한 말씀 아시죠?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 1:45:46)


그런 낙후된 지역에서 무슨 기대할 만한 일이 있겠는가? 그러니 나다나엘 말 한 마디 속에서 나사렛이 얼마나 침체되고 낙후된 지역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 말씀을 가르치고 여러 일을 행하니깐 낙후된 지역에서 변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기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이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주님을 선입견으로 바라보고 배척하였습니다. 결과 5절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 6:5)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은 기회가 와도 놓친다. 이게 딱 어리석은 나사렛 사람들의 모습 아닙니까?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가? 그들이 갖은 알량한 선입견 때문에. 참 아이러니한 게요.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예수님을 잘 아다는 것이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강조하는 것 아시죠? 저와 여러분에게 공통점이, 저는 집에서도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고요, 저는 세 마리 개를 키우고 있고, 개를 안 키우는 분은 두 마리 개를 키웁니다. 하나는 선입견, 하나는 편견. 진짜 개는요. 교회 올 때 집에 두고 옵니다. 그런데 마음에 키우는 개는 마음에 끌고 오시는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렛 지역의 사람들은 두 마리 개를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나사렛 사람들을 보니깐. 우리 마음의 개는 우리 시야를 좁게 만들고, 자기 생각에 몰두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야가 좁고, 자기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왜 무서우냐면, 제 주변에 엄청나게 똑똑한데 보이스 피싱으로 몇억씩 사기당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당했냐고 하는데, 보이스 피싱 하는 사람들이 절대로 전화를 못 끊게 하는 것입니다. 바깥세상하고 연결되면 사기에 안 걸리니, 자신의 말에 쏙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거액의 돈이 연루되면 끊고 생각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이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이단의 공통점이 집에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말하면 안 됩니까? 자꾸 대화해서 생각이 넓어지면 요한계시록에만 몰두해서 나를 혼란하게 하는 것 아닌가? 성경 공부할 때 절대 비밀로 하라는 것은 교역자들에게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좁은 생각, 좁은 시야.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것 아닙니까?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고신교단 출신입니다. 왜 제가 고신대학 신학대를 안 가고 총신으로 갔는가? 20대에 순수한 마음이에요. 고집도 쎄고 그런데, 고신에서 잔뼈가 굵은데, 내 성격상 고신고신하며 교단에 파묻힐것 같아서. 저는 고신교단이 참 건강하고 아버지의 후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만. 제가 신학대학원갈때 두 가지를 정했습니다. 1. 고신은 안 간다. 2. 고신이랑 제일 신학이 비슷한데. 그 곳이 총신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갔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시려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참 20대 순수할때 편협하지 않으려고. 작은 생각에 매이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제가 경상도 사람 아닙니까? 모르셨죠? 워낙 표준말을 잘 구사하니깐요. 제가 경상도에서 자랐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자랄 때 지역감정이 엄청나게 극심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진짜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은 나라에 남북이 갈라졌으면 됐지. 동서가 미워하면 어떡하겠느냐고. 교회를 개척하고 전라도 출신 교역자들이 60%가 되었습니다. 경상도 담임목사가 설교하니. 뭘 마음에 두는 것입니까? 저는 전라도 출신 친구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안 밝혔는데 하두 가짜뉴스의 사람들이. 저는 일절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진보적인 성도가 시험에 안 든 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진보적인 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저는 진짜 꿈꿉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진짜 건강한 진보와 보수가 서로 약점을 보완해가며 선의의 경쟁을 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죽기 전까지 그런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모든 허물을 덮었기 때문에. 저는 제 고향이 너무 좋아요. 고향 사람이 너무 그립고 좋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지역을 폄하하는 것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 고향이 너무 그립듯이, 서울분도 충청도 분도, 강원도 분도 조금만 생각의 폭을 넓히면 올림픽 할 때 경상도가 어디 있고 충청도가 어디 있습니까? 같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밤새도록 응원하는 것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8-19)


내 아버지 하나님은 그 너비와 높이와 깊이가 충만하고 풍성하신데, 자녀 된 우리는 속이 좁아서, 편가름이 심하냐. 18절에 나오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공동번역으로 보니 마음이 트여서. 마음이 트인 사람이 은혜도 잘 받는 것입니다.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은혜도 못 받잖아요. 모든 주님의 형제자매 여러분. 베라아 사람처럼 마음이 트인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지간하면 품어주고. 99가지가 같은데 지역이 다르데. 잘라버리고, 99가지가 같은데 이게 좀 다르데. 성령의 원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 강의를 듣다니 보니 쉐일 샌드버그라는 페이스북 운영자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우주선의 자리를 준다고하면 그냥 올라타라.


이 분이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침체한 지역을 되살려 주겠다고 오셨는데, 편견을 가지고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닙니까?


영국의 리처드 브렌슨도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일을 제안했으면 승락하라. 이후에 배워라.


은혜받는 일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영적으로 침체되어있고, 우울감이 있고 패배감이 있는 분들에게 꼭 잡야할 것이 있습니다.




1. 계속 기회주고 계심을 알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 6:5)


지난주에 묵상하다가 은혜를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하였다는 말을 하지말고, 여전히 내가 주님을 사모하고 여전히 침체한 영혼을 주님이 회복한다고 믿고 믿음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느 자리인지 생각하지 말고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갈망합니다. 한가지 약속드릴 것이 있는 데요. 29 목사님들에게 매일 하는 말입니다. 올해 이찬수 목사님의 사역은 29 목사님을 돕는데 에너지를 쓸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 내면 29 교회로 가는 데 방해가 되니깐. 2학기는 아무것도 안 할 것입니다. 특별 새벽기도회는 전도집회는 영혼에 관한 것이니깐. 올 한해는 과도기로 29 교회가 잘 세워지는. 한 교회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교회가 태어나는 것. 진짜 가슴 떨리는 일 아닙니까? 앞으로 내 남는 시간 모든 목회 노하우를 다 전수해 주겠다고.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지난 주에 회의하다가 중요한 한마디를 했습니다. 내가 당신들 목회를 위해서 다 도와줄 수 있는데 한 가지는 못한다. 그릇은 당신이 준비해야 한다. 다 전수해 주는데 쏟아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요. 주님은 낙후된 나사렛 지역을 위해서. 주님의 지혜, 기적을 베푸는 것입니다. 개 두 마리 편견과 선입견을 품고 쏟아버리는데.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 주기를 원합니다. 그릇은 우리가 준비해야 합니다. 쏟아지는 그릇으로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까 인용해드렸던 베레 아사람 들을 배워야 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오늘 침체된 우리의 심령이. 회복이 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해야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고,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대형교회가 돼서 여러분과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게 아쉽고, 이게 목회인가? 자기 양 얼굴도 모르는 게 목회인가? 제가 여러분도 잘 모르고, 여러분도 저를 잘 모르고 인간적인 어떤 것이 없습니다. 말씀에 집중하면 됩니다. 저와 친해서 저 목사 가까이에서 보고, 먹는 것도 더럽게 많이 먹고, 목사가 왜 그러지. 집안에 가보니 목사가 그러니. 주일에 제가 설교할 때 더럽게 많이 먹더라. 은혜가 안되는 것보다. 예를 든 것입니다. 저는 더럽게 많이 먹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은퇴하면 냉면 한 그릇 사달라고 할 사람이 없어요. 늬가 사면 되잖아. 그게 아니고, 누가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당회 장로님들하고도 거리를 두고 친하지 않습니다. 그분들하고만 친해지면 다른 목회는 어떻게 합니까? 29 목회자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전적으로 당회는 성도님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전적으로 담임목사는 성도님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전혀 친하지 않더라도. 우리 여전도회 없잖아요. 남 전도회 없잖아요. 빨간 글씨 있을 때마다 등산하고 탁구치는 것 좋은데요. 더 좋은 것은 말씀을 상고하는 일입니다. 서로가 말씀을 상고하는 일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주 내내 찬송가 523장


어둔 죄악 길에서 목자 없는 양같이 모든 사람길 찾아 헤멘다
자비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가 너를 지금 부르니 나오라
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받은 때가 이때라
지금 주께 나아와 겸손하게 아뢰라 구원함을 얻으리 얻으리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지금은 영적인 지금입니다. 영원히 은혜로 인도하는 놀라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금이 은혜받을 때입니다. 다음 주도 은혜받을 때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그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영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기


나사렛 사람들은 왜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게 됩니까? 놀라운 감격을 그들이 쏟아버렸습니까?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막 6:3)


육신의 눈으로 보니깐. 3절 맨 끝에 나오는 배척한다는 잘 된 번역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스칸달리조라는데, 덫에 걸린다는 말입니다. 배척이 우리말로 예수님을 따돌리고 예수님을 몰아낸 것의 이미지인데 그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덫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다가 자기들이 자빠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케이스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영안을 열고 보지 못하니 덫에 걸려 자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119편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2:13-14)


영안이 열리지 않아 웃기고 인문학 강의처럼 예화를 들면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구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영안이 열렸다는 그분의 확신도. 라오디게아교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영안이 어두워져, 영적으로 벌거벗은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8-19)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른다고요? 십자가 능력을 의지해서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목사 31년 차. 맨날 설교한다고 까불다가 교만해져서 영안이 어두워졌습니다. 설교 잘 못 하는 것은 회개할 것은 아닙니다. 영안이 닫힌 채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무지무지 악한 것입니다. 저는 분당 우리 교회 개척 초기에 너무나 많이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어른 목회도 해본 적이 없고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보내주시는데, 목회를 잘할 자신이 없는데. 개척 초기에 아무도 안 계시잖아요. 여기는 창문이 없어서 밤낮 캄캄합니다. 가운데쯤에 앉아있으면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인생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울면서 참 많이 찬양을 불렀거든요.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 까지


개척 초기에 특별 새벽기도회 60일 했습니다. 성도님들 출근하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설교 준비하다가 앞에 앉아서 울고. 결과 다 아시잖아요. 자신감도 없고, 경험도 없고 부족한 종이 담임목사가 되었지만, 그분의 인도 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목회더라고요. 결론을 맺으면서 에베소서 1장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능력을 영안이 열리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이른 아침에 교회를 향해 가는데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 유난이 어려운 분들이 많이 올거라고. 사모님들이 이런 기도부탁을 엄청나게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오늘 유난히 힘들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분들이 많이 오실 거라고 하는데 제가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저는 그런 눈물을 닦을 능력이 없습니다. 눈물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에게 영안을 열어주기를 원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로 보듬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06월 0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간절한 바람이 가진 능력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21-43)


어느 교수님이 쓴 칼럼을 읽다 보니 TV 프로그램 중에 싱어게인 프로가 있었나 봅니다. 실력은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오디션에 참가했던 이무진이라는 젊은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요. 청년이 올해 22살, 굉장히 젊은 청년입니다. 청년이 꿈이라는 노래를 선곡해서 불렀는데요.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가 늪인지 아무도 말을 않네. 심사의원이 왜 이 곡을 선곡했냐고 하니, 이 노래가 자기 이야기 같아서 선곡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면 너는 이 길을 갈 수 없어. 그러면서 자기를 등지고 외면하더라. 이것이 어린 청년에게 상처가 되는 것 아닙니까? 노래가사가 나와 닮아서 선곡했다고 합니다. 검색해서 청년이 나왔던 프로그램에 들어가 들어가 보고, 꿈이라는 노랫말을 찾아서 보니깐, 가사가 이렇습니다.


괴롭고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늪인지 아무도 말을 않네


청년들이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알려주는 곳이 없구나. 사실 어디가 숲인지, 늪인지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청년 뿐이겠습니까? 많은 세월을 살았다는 백발의 누구라도, 어디가 숲인지, 늪인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는 게 인생 아닙니까?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참 오리무중인데 우리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은 사는 내내 왜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까?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들어보쎠죠?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노출되니 내 노력으로 무기력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학습된 무기력 아닙니까? 최근에 나온 책입니다. 잠 못 드는 당신을 위한 심리학.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70%가 물이라면 이들의 정신을 구성하는 70%는 불안이다. 너무 와 닿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왜 이렇게 시작하느냐면 회당장 야이로의 상황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상황을 보면 어디가 숲이지 어디가 늪인지 오리무중일 것 같습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2-23)


절망에 놓인 회당장 야이로이지만 본문의 야이로에서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은데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할 때입니다. 목사 찾아와서 어떤 문제가 해결되던가요. 풀기 어려운 시간이 되면 그때가 주님이 부르는 시간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즐거울 때 찬송을 부르라는 포인트를 알겠죠? 기쁨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마음속에 고난이 찾아올 때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자가 있느냐? 기도할 것이지요. 자기 삶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훈련을 안 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갈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기에 하나를 더 얹어서 간절함과 겸손함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2-23)


그 당시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상당히 존경받는 위치였는 데요. 높은 위치의 사람이 당시 무명의 인물이라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행동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에는 겸손이 포함되어있고요, 그만큼 절박하고,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야이로의 태도가 주님 앞에 나올 때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 145:19)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간절한 바람이 갖는 능력. 바램이라고 썼더니 문법에 안 맞다고 해서, 간절한 바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왜 간절한 바람이 능력인지 아시지요? 부르짖어 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혈루증에 고통받는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34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어설픈 여인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구원하였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믿음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런 주님의 정신이 본문 36절에도 나타납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막 5:35-36)


지금 이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사건은 야이로로 가는 사건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앰블런스가 경찰 대동해서 싸이렌이 울리며 가는 상황인데, 옷을 만지고 하는 상황이 아닌데, 기구나 말을 타고 가는 상황인데 예수님은 왜 미적거리는가? 누가 슥 만졌으면 그냥 가면 되는데, 누가 만졌느냐 하고. 예수님은 왜 빨리 가시지 않고 딸을 죽게 하였나 생각해보니 딱 한마디를 선포하려고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믿음을 강조하시는 데요.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막 5:38-40)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비웃는 것입니다. 왜 비웃었을까요? 피조물로 자신의 한계를 갖는 자신이 예수님의 행동을 생각하니 비웃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여러분의 탁월한 식견을 놀라워합니다. 읽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수준에 맞추어서 읽으세요. 한계를 갖는 인간의 좁은 머리를 가지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비웃음거리밖에 안보입니다. 홍해를 안가르니 그 사람은 인간이고, 가르시니 그분은 하나님입니다. 자기 수준에 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니, 이해되면 믿겠다고, 주님 오시는 게 빠르지 그 사람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칼럼을 읽다가 와 닿는 문장을 옮겨적고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정된 신경망을 사용해서 사고하기때문에 한 가지 생각과 의견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지기 쉽다고 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융통성이 없고 올곧고 고집이 세다.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세다. 이것이 완고하다는 것입니다. 젊은 분들 솔직히 대답해보세요. 나이 든 사람만 완고합니까? 죄 된 인간이 그렇습니다. 세 살이 제일 완고합니다. 신발을 신겨주면 내가 내가 하다가 엄마가 신발을 신겨주면 벗고 다시 신고 갑니다. 나이 들어서 완고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더 완고해진다는 것은 심각한 것 아닙니까? 나이들수록 늘 익숙해지던 고정된 신경회로망으로 사고하고 생각하기때문에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한다. 나이가 드는 게 조금 두렵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완고한데 나이 들면 더 완고해진다고, 너무 쓸쓸해질 것 같은데. 늘 익숙하게 쓰던 고정된 신경회로망만 사용하기에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넓으신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전체 교역자 회의에 이야기했습니다. 목회자가 완고해질 수 있다. 왜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는데 그들이 비웃습니까? 바로 이런 것 때문 아닙니까? 불신앙이 결과입니다.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막 5:39 - 40)


주님의 말씀을 자기 수준에 두고 비웃은 사람들의 비극을 알겠지요?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소녀를 살려내는 기적의 현장을 목도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불신앙이 악순환입니다. 믿음이 있는 분은 달리다굼의 현장을 묵도하고 믿음이 좋아지고 믿음이 없는 분은 점점 자기 세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계를 알 수 없는 좁은 생각에 갇히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풍덩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생각이 풍성해지면 연세가 드실수록 완고해질 수가 없습니다. 계속 말씀으로 자기를 은혜로 하면, 연세가 드실수록 여유롭고 융통성이 있고, 생각만 해도 귀하고 부러운 일 아닙니까? 우리가 모두 본문에서 내 생각의 기준을 내려놓고 좁은 시야를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으로 있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딸이 고침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믿음이 이것 아닙니까?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었으며 예수님은 믿음의 행동을 보인 야이로에게 두 가지 선물일까요?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1. 그와 함께 동행해주심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3-24)


제가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서 다짐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 있는 데요. 일일이 먼저 찾아갈 수 없더라도,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일주일 뒤, 두 주 뒤라고 할지라도 어떤 경우라도, 어떤 기도부탁, 상담하는 성도님에 대해서라도 시간이 없다고 거절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인 되시는 주님이 그렇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계실세. 그러고요. 24절에 나오는 그와 함께 가실세 말씀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인물 에녹이 생각이 났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간 사람은 엘리야, 에녹입니다. 엘리야는 특별한 은혜로 데려가신 거라 승복이 됩니다. 어마어마한 선지자입니다. 에녹은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에녹은 진짜 아무것도 안 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에녹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길게 그를 설명하는 세 구절인가 딱 한 군데 나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1-23)


얼마나 기록할 게 없으면 애 낳은 것을 또 쓰고 또 쓰고, 이것을 보면서 야 정말 한 것 없으시구나. 24절에 보니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엘리야는 어마어마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면 에녹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밖에 없었는데,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이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밤낮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니 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과 동행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영광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백신 다 맞고, 코로나가 끝나서 온 성도님들이 모여서 축제를 할 것은 구상하면 너무 행복합니다. 어느 행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동행하게 하는 삶이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에녹을 보고 힘을 내서 애를 낳으십니다. 우리 집처럼 셋은 그냥 살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찬송가 443이 새벽에 툭 터졌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분당우리교회 19년 동안 저 같은 사람이 어리버리버리 한 사람이 담임목사였지만 혼란스러웠던 것 한 번도 없습니다. 그분과 가는 길이 전부 길입니다. 제가 보니깐요. 지 혼자 부르다가 같이 부르는 얼떨결 한 상황인데요. 정말 여기에 지침으로 삼으시며 정신 차리고 함께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2. 희망을 선포하고 새로운 출발을 허락해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8-39)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 5:41-42)


저는 41절의 달리다굼의 선포가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헬러어 단어를 소개하려고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 5:25-27)


손이 닿았다는 것에 서 부싯돌에 돌이 낳아서 불이 붙는다. 이 뜻도 있습니다. 오랜 혈루병으로 고통받고 여인은 상한 갈대처럼 꺾인 여자입니다. 그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여인의 삶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계기가 하토마이, 옷자락에 손을 대는 사건으로 시작했습니다. 제가 서두에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학습된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하토마이. 지지난 주부터 한신대 김재성 교수님의 글을 보고 힘이 회복되었는지 모릅니다. 교수님이 쓴 비접촉 시대에 예수님과 접촉하기. 지금이야말로 주님과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세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을 때. 부싯돌이 부딛혀 불이 켜지는 놀라운 능력이 일어나는 접촉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부정적인 어려운 상황에서 내 힘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상황에 탈출할 도구가 하토마이,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니. 언젠가 서강대 철학과 교수인데요. 교수 정년을 7년이나 남기고 교수직을 사임했다고 합니다. 학교를 떠나면서 왜 기라야만 하는지 독특한 말을 하였습니다. 나만의 고유한 생선 비릿내가 사라져서 사임한다. 최근에 이 분이 쓴 탁월한 사유의 시건이라는 책을 보니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이 아니라 요동치는 물고기가 되고 싶다. 서강대 교수로 살아가는 일이, 교육이나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무기력한 교수 일을 하는 상황에서 떨치고 싶다. 아무리 무서운 파도가 엄습해도, 큰 물고기가 잡아드는 물속이라도, 물속을 요동치는 물고기로 살고 싶다. 제가 왜 정신이 번쩍든지 아십니까? 19년 누가 쫓아내겠습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이것이 시장 좌판에 있는 물고기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환경이 좋다고, 시장 좌판에 누워있는 생선이 아니라 물고기로 살아가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싯돌이 부딪혀서 불이 켜지듯이 도전해야 해요.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고. 끝났다. 인간의 한계의 눈으로 회복될 수 없다는 사건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에 주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인 것을 믿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 너무 환경이 좋은, 아무 위험이 없는 물고기가 누워있지만, 시장 좌판에 진열된 것이라면 그것은 죽은 생선입니다. 아픔이 많나요? 가는 데마다 안티들이 득실거리나요? 살아있어서 그렇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 전체를 아우르면서 우리들의 찬양 471번 선포하듯이 부르기를 원합니다.





05월 3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예수님과의 접촉이 가진 힘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21-34)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함으로 예배드리는 분하고 아무 간절함 없이 예배드리는 분하고 결과의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오래 예수 믿은 사람일수록, 중질자일수록 간절함을 회복해달라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절박함,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이라는 병을 갖고있는데요. 하혈이 멈추지 않는 부인병인 것 같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5-26)


여자의 병이 불치병입니다. 이 의사를 만나고 보고 저 의사를 만나보고 돈 아끼지 않고 병 고침 받으려고 애를 썼는데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것입니다. 12년간 병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유대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한 사람으로 격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아픔을 갖는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 5:27)


고침을 받은 이런 간단한 내용입니다. 고침 받은 여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데요. 아주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를 다루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4)


지금 혈루증을 앓던 여인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상황입니다. 지금 짚고 넘어가고가 하는 포인트는 뭐냐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댔는데 왜 여자 한 사람만 고쳤는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오지 않습니까? 예배 한번 잘 드리면 마음의 치료가 일어납니다. 한때 건의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두루마기가 아니라 크리닉스를 가져다 달라. 너무 눈물을 흘린 분이 있어서.. 예배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분이 있다면 전혀 그런 게 없는 분들. 이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몸에 손을 대고 유독 여인만 고침을 받았는가? 이게 오늘 살펴볼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오늘 왜 여인만 치료를 받았는가? 두 가지 요소가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1. 몰입 - 간절함이 따르는 믿음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7-28)


생각 없이 밀어대는 다른 사람하고 이 여인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 당시 여인은 부정하다고 낙인 찍힌, 경리 되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터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 난관이 많은 상황이지만 옷에 손만 대어도 치료를 받겠다는 믿음이 난관을 뛰어넘는 것 아닙니까?


랜디 포시 교수님이 최장암에 걸리고 유튜브 강의를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마지막 강의라는 책입니다. 29개 언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랜디 포시 교수님이 하셨던 말 한마디를 간직하기를 원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애물에 부딪히거든 나에게 절실함을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잊지 마라. 난관이 찾아오면 너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런 난관에도 연연하지 않을 만큼의 절실함이 있는지 물어보는 장치로 생각해라. 이게 참 제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버드 상위 1%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는 데요. 이 책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신호를 차단하고 깊이 몰입하라. 이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비밀입니다. 가장 강력한 성공 공식이 block and deep입니다. 차단과 깊은 몰입. 책의 주제가 영적으로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block and deep. 주님과 깊은 교제를 방해하는 혼미한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음란한 것, 악한 것, 패역 한 것,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저는 자극적인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궁금한 이야기. 그것이 알고 싶다. MBC 무슨 탐사 이런 것을 즐겨봅니다. 이제 끊어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토막살인. 별의별 이상한 사기. 프로를 돌아가며 보니깐 제가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안 알고 싶다. 안 보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bock and deep. 악한, 포악한 행동이 아니더라도. 저희 어머니는 저녁 시간에 TV를 일절 안 보았습니다.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왜 잠들기 전에 저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저런 것을 보고, 자면서 그런 영향을 받아야 하는지. 말씀 암송하고, 말씀 묵상하고 이것이 block의 정신이라는 것을 나이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것들. 혼란한 것들을 차단하려고 계십니까? block 해야 합니다. block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몰입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몰입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뭘 깊이 몰입해야한다고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


군중들이 밀쳐도 아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때 12년간의 끔찍한 혈루병이 떠나가는 아름다운 일을 경험하면 좋지 않습니까? 저는 전화기를 발명했던 알렉산더 벨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 햇빛은 아무것도 태우지 못한다. 태양이 어마어마한 빛을 가지고 있지만,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 어떤 것도 태우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믿는데 주님을 사랑하고 알아가는 이런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안 보도록 저를 기도해주세요. block and deep. 깊이 몰입하는데, 예수를 바라보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 보니 저 같은 설교자에게 하는 메시지를 보았습니다. 권호 교수님의 인터뷰 질문이 이렇습니다. 변화를 이끄는 설교를 위해서 어떤 것을 해야 합니까? 본문 몰입과 깊은 영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본문에 완전히 몰입해야 합니다. 적어도 하루 두세 시간씩 몰입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본문에 몰입하지 않으면 절대 청중을 몰입시킬 수 없습니다. 한 주 동안 제가 본문 말씀을 어느 정도 몰입하지 않으면, 본문 프린트를 화장실 갈 때도 들고가고. 성도님들이 그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 아닙니까?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수많은 군중들처럼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열 두 해 혈루증을 겪는 여인이 주님을 경험한 차이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두 가직 조건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청소년 아이들이 해수욕 가자고 해서 파도에 출렁거리는데 발 하나 담그고 있다가 악 도망하고 해수욕 다녀왔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그런 것 아닙니까? 발 하나 주님의 성령 물에 담그고. 해수욕 갔다 왔다고 하는 신앙생활이면 곤란한 것 아닙니까? 저는 깊이에 문제 있어서 날마다 고심하고 괴로운 사람입니다. 월요일 새벽이 되면 마음이 흔쾌할 때보다 괴롭고 답답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심령 골수까지 찌르는 깊은 말씀인데, 12년 여인을 치료하는데 왜 내 설교는 얕은가,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하는가. 말씀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치유의 일이 일어나고, 제가 이런 문제로 괴로워할 때 성도님은 어떻게 괴로워해야 합니까? 깊은 곳에 그물 던지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매 가을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 특별한 사연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차를 가지고 와서 새벽 한두 시쯤와서 닫혀있는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는 분도 있으시고요. 강북 자매는 찜질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찍와서 문 앞에 있는 분들이 여러분 나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그런 상태입니다. 몰입하고, 몰두하고, 은혜받아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옷자락을 잡을 때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열두해 혈루증 앓는 여인이 고침 받을 수 있었던 첫 번째입니다.




2. 행동이 따르는 믿음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7-28)


이날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된다고 하고, 병 고침 못 받으면 어떻습니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다락방 모임을 하고, 행함으로 연결되지 않은 부분이 마음에 아픈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한 순간에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이 들려야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행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도,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한결같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막 5:32)


주님은 이 순간에도 수 많은 분에게 유독 주목하는 분이 있습니다. 혈루병 환자와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행동하는 믿음으로 삶을 실천하는 자들 아닙니까? 12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혈루병을 치료받는 사건이 기록되어있다면 이 말씀을 준비하는 내내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여인처럼 예배 중에 육신의 질병이 떠나가고 육신의 질병이 회복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를 믿습니다. 이 여인처럼 투병하는 성도님들의 육신 질병이 예배드리는 가운데 깨끗이 고쳐지는 사건이 예배 가운데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저도 저 자신이 맛이 간 건가. 정상인 건가. 그것이 인생입니다. 모두가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데요. 혈루증 여인을 고쳐준 것이. 마음의 아픔을 치유해주실 줄 믿습니다. 가정의 회복이 예배드리는 가운데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가정 가운데, 예배 가운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고 경험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인처럼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 5:30)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침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불러 새우기 위한 질문입니다.




1. 능력의 주님과의 관계 맺기


여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을 꿇습니다. 놀라우신 메시아의 고침의 능력을 경험했기에 경외감입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1-32)


맹장염 수술도 잘해주셔서 낳은 것과 관계는 다른 것입니다. 문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관계 맺음의 문제이고, 주님과의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면 능력자 되시는 주님이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묵상하다가 어떤 강의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전투,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무기가 비교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군의 무기가 무라타 소총입니다. 이 총이 무서운 게 유효사거리가 800m, 1분에 15발을 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사용한 화승총이 120m 유효사거리입니다. 화약을 장전하려면 서서 장전해야 합니다. 교수님이 예를 드는데, 우리 동학 농민운동에서 화승총으로 전투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동학군 3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편 3만 명이 죽을 때 일본군은 1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 군인이 왜소하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기의 차이 아닙니까? 이게 영적으로도 그런 게 아닌가? 화승총으로 싸우는데 120m의 유효사거리, 원수 마귀는 800m. 한국교회를 보면 비참한 상태 아닙니까? 어제 신문을 보니 여자 목사님이 식당에 가서 어떤 일을 벌이면서 비참하였습니다. 화승총으로 싸우겠다는데, 이래서는 백전백패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령의 검으로 무장해야 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라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6-17)


지난주 4대 비전 선포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 유효사거리 120m 인간이 만든 총으로 싸우면 백전백패입니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든 소총 내려놓으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기도입니다.




2. 주님의 평화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예수님이 평안히 가라는 말씀은 병고쳤으니 편하게 살아라가 아니라, 주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누리는 샬롬. 샬롬을 누리며 살도록해라. 그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이 샬롬이 절실한 시대 아닙니까?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인간의 샬롬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 여러분과 주님과 관계가 회복되를 원합니다. 평화의 샬롬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설교 제목을 예수님과 접촉이 갖는 힘이라고 지었는데, 그분의 능력과 샬롬을 덧입는 것이라고 하면 가평 우리 마을을 두고 수년째 기도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 혈루병으로 고통받는 그런 여인이 모인 공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병을 고칠 수 없어 신음하는. 거기서 치유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드림 센터를 사회에 환원할 때 저곳에서 이 땅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건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치유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자살하려고 한강 가려다가 저기 들렀다가 가야지.


인간의 얄팍한 계획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 최근에 뉴질랜드 유학생이 보낸 편지를 소개합니다. 제가 무엇 일로 힘들 때 위로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편지가 너무 감동되어서입니다. 편지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는 뉴질렌트 오타고 대학에 다니는 김리석입니다.
목사님 설교에서 나왔던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 영향력 안에 거하고 예수님 닮아가기
대학에 들어와서 대중의 흐름에 흘러가지 않으려고 기숙사에서 형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하루를 시작할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목사님이 전해주는 말씀으로 감사하고 회개합니다.
제 설교를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설교하고
목사님 위해 기도합니다. 항상 말씀으로 ...


대학교 1학년, 2001년 생입니까? 저를 위로해주려고 편지를 쓰는데, 인간의 말로 화이팅이아닙니다. 뉴질렌드에 있는 제가 있느데 힘을 내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빠졌다고 하지만 소망 있는 젊은이들이 일어나기에 저는 여기에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내야 하는 명분, 살아야 할 이유.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 샬롬으로 덧입는 것. 평화 평화 하늘에서 내려오네. 인간의 공격으로 무너질 수 없는 샬롬으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창립 19주년 헌금을 냅니다. 오늘 드려지는 헌금이 오병이어 기적을 내는 도시락이 되기를 원합니다. 헌금으로 생명이 살아나고 젊은이들이 꿈을 꾸고, 거기서 치유가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05월 2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4가지 비전을 선언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 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대상 22:1-5)


저의 청소년 시절에 나온 소설 중에서 갈매기의 꿈. 많은 분이 읽고 듣고 하신 우화 소설인데요. 이 책 하면 떠오르는 문구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검색을 해보니 출판사 리뷰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작가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속에 꿈과 이상을 간직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주인공 갈매기는 먹이를 먹겠다는 본능으로 하늘을 날지만, 주인공 갈매기는 꿈과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다윗을 생각하다가 갈매기의 꿈이라는 주인공 갈매기가 생각이 난 이유는 딱 이 다윗왕이 꿈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꿈과 이상 때문에 하늘을 날았던, 꿈꾸던 인물이었다고 정리가 되기 때문에 이 소설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편 27편 4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저에게 감동을 주는 순수한 다윗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순수한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이라는 꿈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 잔인하신 것 아닌가? 성전 건축이라는 다윗의 꿈을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일이 이루어질 거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윗 입장에서 너무 잔인한 말 아닙니까? 보통 사람들이면 상처받고 떠날 수도 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전혀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항변하고 떼를 쓰는 것은 없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대상 22:6)


이런 태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을 해보니 6절에 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에 무게중심이 있는 게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라는데 초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바울의 삶에 갈등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사도바울이나 오늘 본문의 다윗왕이나 이런 분을 보면서 지난 저의 목회를 되돌아보면서 안 그러려고 애를 많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의 무게중심이 잘못되었을 때가 참 많았구나! 반성을 하게 해됩니다. 사도바울처럼,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여호와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고 하면 모르는 분들은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아? 이렇게 하면 삶의 갈등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다윗을 묵상하며 세 가지 질문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1. 나에게는 순수한 꿈이 있는가?
  2. 그 꿈이 자녀세대로 계승되고 있는가?

제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목사님 아닙니까? 교회를 위하여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기도하다가 돌아가시는 영광을 누리셨을지 모르겠지만, 목회의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것은 80년 90년 사는 인간의 생각이고, 저의 아버지의 꿈을 들으시고 아들에게 계승하였기에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것 아닙니까?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 세대보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영혼과 영혼을 이으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꿈을 가지고 달려가는 것도 좋지만, 자녀들에게 계승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이 성전 건축의 아름다운 꿈이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1. 그 꿈을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준비 없는 꿈은 그냥 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22절을 보면 준비하고, 준비하고 준비하였으니.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 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대상 22:3-5)


꿈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윗처럼 꿈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주인공 갈매기처럼 생존을 위해,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나는 초라한 갈매기가 아니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다윗이 뭐도 준비하는 것은 좋지만, 다윗이 진짜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욕심 내려놓기


엄청난 혼란과 재앙이 임했을 것입니다. 내 영혼을 위하여 자꾸 욕심을 내려놓는 훈련이 우리에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날에 다윗 너 피를 많이 흘려서 성전 건축 못 한다고 했을 때 다윗이 거기에 대해서 항의하고 떼를 쓰고 그게 저를 위한 전쟁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 일인데 제가 왜 책임을 져야 합니까? 이렇게 항변하고 때를 썼다고 생각해봅시다. 창조주 하나님의 결정을 누가 번복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귀함은 하나님과 논쟁이 없습니다. 참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면 너무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한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외길인생, 신학교 들어가고 한길로 간 것 같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한 순간이 후회됩니다. 제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고 안간힘 써야 한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가짜 뉴스를 만들었다고 메일을 보내면 내가 이런 사람을 상대하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힘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제대로 에너지를 흘려보내기 위해서 자잘한데 마음 쓰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세요.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 기왕에 믿기로 했다면 한번 전적으로 믿을 수 없습니까? 의처증 환자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승복을 못 하면서 그런 것에 에너지를 얼마나 많이 보냅니까? 아버지가 금식기도 하다가 돌아가시고 저희 어머니가 하나님과 논쟁에 노출된 것 아닙니까? 교회를 위하여 40일 금식한 주의 종을 불러가면 어떡합니까? 그런 논쟁을 했다면 저희 어머니 인생은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인생을 샀을 것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지점은 어머니는 하나님과 논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승복한 것입니다. 아들인 저에게 네가 아버지 뒤를 이어 아버지가 못한 목회의 꿈을 이루어 들어야겠다. 그래서 제가 목사가 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하고 논쟁하지 말고. 깨끗하게 승복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고요. 집중해서 꿈을 향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고요.


예전에 청소년 사역할 때 중등부가 어렵습니다. 집에 사춘기에 한 명만 있어도 난리가 나는 집이 많은데 사춘기의 시한폭탄 같은 애들이 1,400명. 교사들이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중등부 교사를 오래 하는 분 많지 않습니다. 중등부 교사를 오래 하는 분이 존경스럽습니다. 중등부 교사분들에게 항상 앵무새처럼 말하는 이야기가 뭐냐. 울며 씨를 뿌렸기 때문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겠다는 마음으로 조급해집니다. 우리는 울기만 하자. 딴 욕심 내지 말자. 애들 잘 안 바뀝니다.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기만 하면 누군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이 욕심만 내려놓으면 청소년 사역이 훨씬 즐거울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20 몇 년 이 지나고 40대 50대 초반도 있습니다. 이게 뭐가 되겠나 할 애들일수록 달라져 있습니다. 중등부 교사들에게 했던 권면을 나에게 해야 한다. 내가 울며 씨를 뿌렸으니깐 내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겠다는 것이 위험한 생각이겠구나. 나는 울며 씨를 뿌리면 되고, 분산되는 교회를 축복하며 그들이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으로 축복하는 그런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지난주에도 이런 속사정을 모르고 이찬수 목사님이 야속하다고.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계속 가라고 하신다고. 나는 더 울고 싶어요. 그런 하나님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누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고, 그래야 29 교회가 살기 때문이에요. 다른 어떤 것보다 뭘 준비해야 하나, 욕심을 내려놓고, 준비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2. 아들 솔로몬에 대하여: 믿음으로 무장시키기


이제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그 때에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대상 22:11-13)


아들을 믿음으로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을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현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잘 못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우리 가족 행복 밥상 캠페인을 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요리사를 초대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이니 초대라고 할 것도 없지만. 오늘은 요리사를 초대해서 오후 4시에 오픈되니 꼭 한번 해보세요. 저에게 팀에서 소개하는 문구를 보내주었는데 푸드 스타일리스트, 쿠킹 클래스 강사. 오늘의 요리가 리스 샐러드와 봉골레 크림 파스타 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 게 국수 같은데요? 교회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요리사를 초청해서 저녁에 아이들과 즐겁게 요리를 만드는 것을 준비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모여 아버지가 갖는 꿈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부부가 꿈을 나누면서 이 세 가지를 전수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정에 꿈이 있는가? 꿈이 자녀세대에 계승되는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나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 꿈을 갖고 비상하는 주인공 갈매기 같은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녁마다 함께 이것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파편으로 던지던 네 가지 비전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홈페이지에 올려 계속 영글어 가기를 원합니다.



  1. 드림센터 사회 화원 꿈입니다.

남은 숙제가 이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우리 교회를 오신 분들을 위해서 한 번은 정리해 드려야 하는 데요. 드림 센터 사회환원이 어떻게 시작했느냐면, 저희 교회 출석이 2만 명 될 때까지 주 중에 모일 데가 없었습니다. 주 중에 학생들이 오면 저희가 쓸 수 없었습니다. 장로님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스무 군데를 임대를 위해서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누가 드림 센터 매각을 전해 듣고 되파는 조건으로, 임대하는 심정으로 구입하자. 그래서 구입했습니다. 드림 센터에 입주하는 그 날부터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미자립교회가 이렇게 많고 지하 불편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은 현실에 우리 편하자고 12층 건물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인가? 죄책감을 들었습니다. 한때 드림 센터에서 손님을 못 만났습니다. 식당에서 만나고 율동공원에서 만났습니다. 어느 새벽 3시에 1만 성도 파송운동 꿈을 주셨든 새벽에 같이 약속했든 것이 10년만 쓰고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건물을 팔아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쓰겠습니다. 당회를 거치고 공동의회를 거쳐야 하는데 누가 찬성하겠습니까? 눈물의 헌금을 하고, 자녀와 자녀의 복을 받게 해달라고 하는 성도님이 있는데 내놓자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1부부터 5부까지 공동의회에 가평 우리 교회 사회환원에 찬성 1, 반대 2 했는데 97%가 찬성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잠을 잘 못 자는 것입니다. 드림 센터가 잘 쓰임을 받아야 발을 뻗죠. 파리만 날리면 성도님들에게 죄짓는 것 아닙니까? 이 꿈을 같이 꾸자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바로 얼마 전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매입하겠다고 제안서를 보내왔습니다.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400억 원에 팔라는 것입니다. 2-3년 전에 그런 제안이 왔을 때 1100억원에 왔을때 사양했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 금액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쓰면 한국교회, 사회를 위해 쓰면 좋겠다고 했는데. 당회에 의논하겠다고 하는데, 계속 하나님에 제 마음에 꿈을 주는 것입니다. 1,400억으로 비교가 되지 않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창의적인 일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다음세대 살리는 것을 위해. 목회사 청년을 섬기고, 난 크리스천 청년을 섬기고 장애인 청년을 섬기고, 온전히 녹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재단을 만들고 기증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눈물로 호소합니다. 드림 센터에서 마음으로 혼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1층 2층 다 터서 취업이 안된다고 좌절하는 청년, 예수 믿는 청년, 믿지 않는 청년 고용 박람회가 일어난다면, 거기서 커피 한잔 하면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명사들이 젊은이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여러가지를 가르쳐주는 일이 일어난다면, 단 한 번도 대한민국 건물에서 일어나지 못한 그 일을. 청년들의 자살이 그렇게 많다는데 드림센터가 다음세대 청년이 이것도 안되고 좌절할 때 꿈꾸며 들리는 곳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드림 센터 들렀다 가야겠구나.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장애인 주간 보호 시설, 어린아이 보호시설은 많은데 35세 이상 중장년 장애인 주간 보호센터는 분당우리교회가 1호라고 알고 있습니다. 발달장애인들, 직업 적응 훈련을 통해서 꿈을 심어주자고요. 저는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1. 일만성도 파송운동

29 담임목사님과 함께 꿈을 꾸는데 날마다 호소합니다. 이벤트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불꽃놀이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일만 성도 파송 운동이 29 교회와 더불어 한국교회 미자립 교회와 목사님들에게 꿈을 꾸는 운동이 되기를 원합니다.



  1. 가평 우리 마을

그 할머니의 눈물 젖은 엄청난 헌금과 그 소식을 들으신 귀한 성도님 부부, 가평 2만 평 땅 기증으로 시작한 것이 저는 수년간 잠을 못 잤습니다. 교회 수양관 만들면 되겠습니까? 이랜드의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회장님과 그 이해가 안 되는 섬김을 받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구나. 가평 우리 마을은 지친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약자들과 함께 꿈꿀 수 있는 동산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년 3월에 오픈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이것도 승복하겠습니다. 더 잘 준비하라는 뜻으로 받겠습니다. 10개월 남짓한 기간 가평 우리 마을은 모든 성도님이 꿈꾸며 이루어가는 동산이 되기를 기도해주세요.



  1. 다음 세대를 위한 연구소

이전까지는 하드웨어면 지금은 소프트웨어입니다. 연구소가 미자립 교회, 목회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젊은 목회자를 위해서 전수하는 그런 아름다운 열매가,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주시길 원합니다. 이제 이 내용이 홈페이지에 하나하나 꿈이 붙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 19주년 헌금을 드릴 때 이 일이 가슴 벅차게 드리기를 원합니다. 유산 안 남기기 운동입니다. 자녀들을 배려하고 양육하고 남는 것. 한국교회를 위한 것. 드림 센터, 수많은 헌신자들과 봉사자들과 물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꿈을 같이 꾸자는 것입니다. 창립 19주년 아이고, 네 가지 꿈을 정리해서 선포하는 시간을 갖는 게,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일부러 맞춘 것 아닙니다. 지난주 하나님이 제 마음에 네가 하는 거 아니야. 요엘 2장 28절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6-17)


제가 선포한 이 네 가지 꿈은 말세에 네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성령 충만 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하려고 설치는 순간 망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성령님이 이루어주는 힘을 주시길 원합니다. 제가 너무 에너지를 쓸데 없는데 낭비했습니다. 이 생명, 너무 쓰잘데기 없는데 낭비하고 살았습니다. 지금부터, 다윗처럼, 하나님이 주는 꿈을 갖고, 그 꿈이 잠자리에 들 때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꿈 없이 하루를 마감하지 않게 해주세요.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를 보면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창립 19주년을 맞이해서 지난 하나님 은혜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매 예배 시작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영광 송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어떤 영광 송은 수년간 부르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 매 예배 때마다 영광 송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창립 19주년 영광을 올리길 원합니다.




05월 1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되고 싶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왕상 2:1-4)


하나님이 몇 살에 죽고 싶니? 라고 물으시면 저는 은퇴하고 2~3년 정리하고 하나님이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은 사명은 행하는 곳이지 누리고 즐기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한 하나님 나라 대사예요. 사명을 감당하러 왔기에 목회자의 인생이 끝나면 다하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출가하면 더 좋겠지만요. 저희 어머니도 거의 100세 가까이 되시는데 장수하시는 것을 보니 저도 일찍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기도하는 것은 70대에 인생을 정리할 수 없다면,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라면 제가 좋은 어른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어른의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신문의 칼럼을 읽는 데요 노인과 어른의 차이에 관해서 설명한 글이 있더라고요. 그분이 노인을 정의하기를 나이 들어 자기만 아는 사람, 주위 모든 사람이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것이 노인이고, 어른은 나이가 들수록 남을 배려하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이 어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호기심이 생겨서 어른과 노인의 차이를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국어사전은 노인을 나이이가 들어 늙은 사람. 제가 국어사전을 보면서 노인은 떼놓은 당상이네.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노인이 됩니다. 어른은 다 자란 사람.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 저절로 시간이 지나 노인이 아니라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 이런 사람을 어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기를 원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 이것을 제가 어른이라고 정의해 보았습니다. 제가 90살, 100살 산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 마음의 소원입니다. 어느 영화에 나오는 장면인데요. 방송국에 일하는 후배 기자와 선배 기자가 나오는 데요. 선배님은 왜 언론 일을 시작하셨나요? 물었더니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시작했다. 그러면서 선배기자가 질문을 하면서 자네는 왜 기자가 되었나? 후배가 한마디 하였습니다. 선배님 때문에요. 이게 괭장히 감동이 되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청년들 중에 신학교 다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왜 신학대학 다니는지 물어보았을 때 저 때문이라고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은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오늘 본문은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이 담긴 말씀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윗의 권면 말씀을 보면서 인생의 마지막에 어른은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죽는구나. 부러웠습니다. 저도 다윗과 같은 어른이 되어서 내 인생의 마지막에, 내 자녀들에게 어른다운 권면을 남기고 그렇게 이 땅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이 본문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 다윗을 가지고 진정한 어른의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순리를 따르는 사람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왕상 2:1-2)


만약 다윗이 소설책을 쓰면서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하면 그냥 표현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이 좋다. 그런데 다윗은 실제적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두려움 없이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는 보통 내공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물 흐르듯이 내맡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순리대로 덤덤하게 자기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두려운 것이 있는 데요. 치매가 와서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있을까 봐. 자녀들에게 추해질까 봐 두렵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기억되는 것이 평생 각인될 텐데. 물 흐르듯이 순리에 거스르지 않고, 죽음조차 하나님이 만든 법칙이니 수용하겠다고.


내가 할 일을 잘 마무리하고 네가 할 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라. 이런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 71:9)


저 자신을 봐도 40대보다, 30대에 비해서 많이 마음이 약해지고, 불안도 많아지고 그런 것을 느낍니다. 시편 기자가 있는 그대로 마음의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이분의 어른 됨은 그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누가 노인인지 아십니까? 염려만 있는 사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어떡하지? 염려가 가득하면 노인입니다. 어른은 자기의 염려조차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사람. 연세 드신 분들이 어른이 되기를 원합니다. 염려가 많으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를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시간 지나며 얻는 노인이 아니라 어른의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설교 제목을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되기를, 청년들이 어른 들으라고 하는 설교인가? 그거 아니에요. 저는 어른이 되고 싶다. 이런 꿈을 품은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최근에 어떤 글을 읽은 데요. 로마에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개선장군이라 하며 시가행진을 합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행진을 하는데 로마에서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서 행렬 뒤에서 메멘토모리를 외치라고 했습니다. 평생에 잊히지 않는 승리의 기쁨을 영광스러운 수많은 군중들이 영광하는 개선장군의 자리에 죽음의 기억하라. 죽음 기억하라. 왜 노예를 시켜서 선포하라고 합니까?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박수받는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지만 너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 지혜롭다. 제가 목회하면서 두려운 것은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칭찬을 들으면 긴장해야 합니다. 청년들 잘 들으세요. 칭찬을 많으 듣는 게 왜 위험하나면 칭찬에 우쭐하고 자기만족이 생기면 성장이 끝납니다. 인생의 성장이 끝나면 끝 아닙니까? 제가 얼핏 명언을 보았는데요. 이런 명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27살에 죽었다. 장례식은 80살에 했다. 그 사람은 27살에 죽었다. 무슨 뜻입니까? 실제로는 80살에 죽었는데 27살에 성장이 멈추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하고 대단한 장군이라고 하고 칭찬이 쏟아질 때 노예를 시켜서 메멘모토리 죽음을 기억하라. 저는 몇 살에 죽을지 모르지만, 언제 죽을지 크게 연연 안 하지만, 제가 100살까지 산다면 죽기 전까지 성장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인생이 살아있는 인생이거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삶에서 메멘토모리. 창조주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젊은 시절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보약이 될 수 있습니다. 하프타임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는 데요. 밥 버포드라는 저자는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에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자기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잘나가는 사업에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인생의 전반전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후반전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절망으로 몰고 갔지만 인생의 성숙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중간휴식시간이라는 책의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전반전에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어떤 위치에 오를지 고민합니다. 후반전에는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인생을 잘 마친 사람들의 특징은 끝을 염두에 두고 오늘을 사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메멘토 무리 아닙니까? 중간휴식시간이라는 책을 쓴 밥 버포드라는 사람의 지혜는 어디 있습니까? 성숙을 향한 인생의 의미를 앞당긴 사람입니다. 인생의 전반전과 후반전은 나이로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지만, 인생의 전반전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어리지만, 후반전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을 잘 마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끝을 염두에 두고 오늘을 사는 지혜라고 한다면 어른은 어떤 모향을 갖고 있겠습니까?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한 인생의 후반전을 사는 어른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


우리 자녀들에게, 청년들에게, 다음 세대에게 중심을 잡아주는 분이 어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어떤 중심을 잡아줍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이것이 중심을 잡아주는 말씀 아닙니까?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역대상 28:9)


영적 중심을 잡는 역할이 어른이 할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담임 목사가 교회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큰일 날 말입니다. 이끄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는 이끄는 주님에 손수레 뒤를 이끄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성도님들과 부교역자님의 중심을 잡는 말입니다. 성도님들이 기도에 초점을 맞추는데 하나님을 모르면서 기도로 부르짖기만 한다면 말씀의 중요성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 공부하자는 것은 잘하는데 기도를 안 한다. 그러면 기도가 중요하다고 설교하는 것. 이것이 중심을 잡아주는 것 아닙니까? 부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에도 있는 데요. 부교역자를 불려서 어떻게 목회자가 소심해서 어떻게 목회하겠느냐. 대범해져라. 바로 한 시간 뒤에 덜렁거리는 목사를 불러서 소심하게 일해라. 똑같은 교훈을 하는데요. 완전히 다르게 권면합니다. 연애는 안하고 공부만 하는 큰아들에게는 연애를 해야 산다 하고 막내는 공부해야 산다고 말하는 것이 어른입니다. 누가 어른입니까?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 윗대의 어른들이 이런 일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1만 성도 파송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는 데요. 대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목사님도 목사님 아들입니다. 훌륭한 목사님이 것 같습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교회 개척을 다섯 번 하였습니다. 든든한 후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 목사님의 기억에 광명시 철산리 야산에서 군용텐트를 치고 아버지가 개척하였습니다. 후원이 든든하면 야산에 탠트치겠습니까? 주님 한 분만 바라보는 훌륭한 목사님 같습니다. 종이공장 한 편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예배를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가장이 아버지가 충실하면 가족들이 고생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 떠올리면 가난 두 글자밖에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아들이 엄마를 걱정합니다. 우리 아들이 엄마만 걱정하는 것 같아요. 이 목사님 생각에 엄마가 너무 안쓰러운 것입니다. 쌀이 떨어지면 엄마가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던 기도 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아들도 훌륭하게 컸지 않습니까? 아버지 뒤를 이어서 신학교에 갔는데요. 젊은 신학생 마음에 하나님 제가 다른 길은 다 가도 개척은 못 하겠습니다. 그게 너무 마음에 와 닿잖아요. 그랬는데 분당우리교회에서 1만 성도 파송운동. 분리개척교회 목사님을 모집한다고 하고 청빙이 되니 마음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개척이 아니라 분리교회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을 때 어머니 사모님이 훌륭하세요. 같이 기도하고 어느날 아들을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너 개척이 많이 두렵지 그런데 엄마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개척할 거야. 개척교회에 문을 열고 한 명의 영혼이 들어올 때마다 그 소중한 한 명의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지. 엄마·아빠의 고생이 하나도 고생이아니야. 너도 한번 용기를 내보렴.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날 어머니 말씀 이후로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어른 아닙니까? 아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차를 타고 가는 상황이었는데 운전하는 목사님이 본인이 1대입니다. 가족들이 예수를 믿는 지 1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모태신앙에 비해서 길지 않지만, 아들에게 두 가지 당부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어머니 자신이 예수를 믿고 감사를 보여주신 것뿐만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목회를 하다보면 감사를 놓칠때가 있습니다. 또 하나 당부의 말씀은 너 기도할때 하나님께 더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라. 우리 아들은 충분히 다 받았다. 이것이 어머니의 본능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요. 목사 아들이 외적으로 보이는 물량주의에 빠질까 봐. 어머니도 중심을 잡아주는 분 아닙니까? 29 교회의 예비 목사님을 보면 다 훌륭해요. 설교가 다 좋잖아요. 내가 42살에는 저러지를 못했는데 참 성숙한 데 그 배후에 어른인 부모님이 계시는 거에요. 오늘 새벽인데요. 설교를 마무리하는 찬양을 주시는데 노래를 주셨습니다.


  1.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저를 목사 만들어 주시려고 하나님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스승을 보내주셨습니까? 주일학교 선생님, SFC 캠퍼스에서 만난 선배님들, 꾸지람을 듣기고, 두드려 맞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담긴 것을 알기에 상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1. 태산 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은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은혜

누가 몇억 가져가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을 길러주신 분입니다. 부 교역자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백발의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은 영적으로 내 마음을 키워주신 분이라고. 정말 이런 결과를 가져다 오는 이것이 제 마음의 소원이에요. 될지 안 될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겠지만요.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제가 교역자들에게 마음을 키워준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내가 어떻게 교회를 키웠는지 아느냐? 강당을 뚫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이런 소리만 하면 어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팔을 펴서 나타내신 그 능력. 그 능력을 오고 오는 세대에 전하렵니다. 우리 뼛속에 기억해야 할 고린도전서 말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나를 본받으라고만 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저 달을 가리키는 존재입니다. 분당우리교회 자랑을 많이 하는 것 그것은 절대 좋은 것 아닙니다. 달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팔을 쳐서 우리 가정에 늬 엄마·아빠 인생에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이것을 전하는 부모가 노인이 아니라 어른의 자리에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우리 가족 행복 밥상. 오해하지 마세요. 축도 끝나고 영상이 나가거든요. 밥 잘 차리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고요. 어떻게 해서든, 쉐마교육 뭐가 쉐마입니까? 들으라 이것이 쉐마입니다. 쉐마교육의 첫 번째 들으라는 아들딸보고 하는 들으라가 아닙니다. 부모인 당사자에게 주신 것이 들으랍니다. 마음에 각인시켜라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원래 화목한 가정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부러웠습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아들딸이 부모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가? 화목 밥상에 중고등부 아이들. 정성도 좋지만, 마음을 다하여 부모님과 대화하는 그것. 그 가정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설교 전체를 요약하는 찬양이 있다면 아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 은혜 주셔서 부모님이 어른이 되고 가정이 회복될 줄을 믿습니다.




05월 0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회복을 위한 식탁


어버이 주일인데요. 매 75세 이상 되시는 어머니, 아버지 축복하고 선물도 주시는 시간을 가졌는데 작년도 못하고 올해도 못했습니다. 참 마음이 아픈데요. 참 내년 어버이 주일에는 모든 어른이 함께 예배드리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각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부모님들, 오늘 우리가 있도록, 교회가 있도록 이 나라가 이 정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허리가 휘도록 일한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모든 어르신이 주님 안에서 당당하게 사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요. 어른이 많은 교회인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어른들을 섬겼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신 6장 4-9절)


프랑스의 어떤 기자가 책을 썼는데요. 책 제목이 너의 죄를 사하노라 라는 책입니다. 40명의 신부가 경험한 고해성사를 묶은 책입니다. 기자가 신부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해성사가 무엇입니까? 70%가 불륜, 포르노 중독과 같은 성적인 문제였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경험한 사례를 듭니다. 어느 부인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고백하기를 자기가 불륜에 빠졌는데 상대방 남자가 남편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불륜을 저지른 남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불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 불륜에 빠진 상대방이 불륜에 빠진 아내의 남편의 아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카자흐스탄에 사는 남자가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여성 신체를 본뜬 성인 리얼돌을 보았습니다. 돌을 보니 인형인 것 같네요. 이 남자가 성인용 인형과 열애한 끝에 결혼식을 올려드렸다. 모든 결혼 순서 하나가 진지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전하는 기사를 보세요.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신랑은 춤을 추었다. 어느하나 다를 것 없었다.'


성인용 인형이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웃프다보다 역겨운 것 같잖아요. 우리 시대가 걱정되는 것이 몇몇 정신 나간 사람들만의 돌발 행동이 아니구나고 생각합니다. 남자 4 여자 2 내무반. 노르웨이가 2016년부터 여성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혼숙을 한다는 것입니다. 배치하기를 숙소에 남자 4, 여자 2로 배치한다는 것입니다. 노르웨이가 방이 모자라는 것입니까? 뭘 하는 것이냐는 거에요. 그 과정에서 반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유럽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남녀가 혼숙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지? 두려워하는 것은 고삐가 풀린 인간의 자유 추구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그런 것을 유럽의 어느 나라는 법으로 허용한다. 이렇게 멈춘 것이 아니라 끝이 없이 가는 것 아닙니까? 자녀의 자녀세대 되었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 없는, 이것이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병든 유럽과 미국의 가치관이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있습니다. 청년들이 즐겨보는 넷플릭스를 많이 본다고 하는데 거기에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요. 우리 청년이 얼굴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청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교회의 무기력함을 보세요. 무슨 신앙교육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가정은 어떻습니까? 이 아이들이 무섭게 장악하는 생각의 변화를 우리가 뭘 도와주고 있느냐고요.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쉐마 본문으로 알려준 것입니다. 모세의 설교입니다. 모세가 자녀 교육에 대해 얼마나 강조합니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신 6장 4-9절)


너무나 절실한 마음으로 호소하는 것 아닙니까? 틈나는 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런 애타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신명기서는 모세의 설교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 설교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가나안에 진입하면 타락한 가나안 원주민 세대가 노출이 될 텐데 중심을 갖고 자녀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출애굽 2세대에요. 출애굽 1세대는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종살이도 해보고, 10가지 재앙을 거치고 홍애를 어떤 은혜로 건너게 해주셨나 이것이 출애굽 1세대입니다. 출애굽 2세대는 광야세대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가나안으로 간 정복 전쟁을 치른 세대입니다. 출애굽 2세대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하나님이 어떻기 일으켰고 하나님이 홍애를 어떻게 갈라졌는지 경험하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달받는 거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출애굽 3세대는 가나안 세대라고합니다. 가나안에 정착해 안정을 추구하는 세대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에요. 저는 2세대. 우리 윗대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처음 예수님을 경험하고 6.25를 경험하고 보릿고개를 경험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은 세대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2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은혜는 부모 세대에게 경험은 미미해요. 그러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등록금을 주지 못해 학교를 그만 보내야 하나 하던 시기에 하나님이 어떤 은혜로 돌파시켜주셨는지 아느냐? 이런 말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제가 목사를 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딸 세대는 3세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나안 원주민의 타락한 문화에 노출되어있듯이 3세대입니다. 지도자 모세의 심정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끔찍한 타락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잡신들이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중심 없이 사랑하면 안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에 노출될 때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그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대에 쉐마교육을 가지고 중심이 잘 세워져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시작한 것이 우리 가족 행복 밥상 캠페인입니다. 너무나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주일 저녁에 매 식구가 같이 대화를 하면 좋겠다. 요즘 거의 우리 가족이 이야기하는데 식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식구가 7인데요. 가족은 일본식 한자이고 가족의 순우리말이 식구라는 것입니다. 식구는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먹을 식 입 구. 한마디로 밥 같이 먹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현대인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식탁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정말 우리가 식탁 회복에서 몇 가지 목표를 가졌으면 좋겠다.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신앙적인 대화를 회복하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하나님의 교육방식이 이런 대화 아닙니까? 최근에 제가 인터넷으로 어떤 강의를 듣다 보니 강사님이 여자분이에요. 자기가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이 책을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되게 독특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결혼 전인가 결혼 후인가 보니 시댁을 갔더니 대화가 엄청나게 활발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을 안되는 소리라도 자르고 면박을 주는 게 아니라 다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강사님의 친정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책 안 읽는 남편을 보고 결론을 내린 것은 우리 남편 책 안 읽어도 된다. 대화가 이 정도 활발하고 대화 가운데 여러 지혜와 지식이 안 오더라도 따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나? 이번 설교를 준비하며 밥상머리의 교육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보았는데 밥상머리에서 활발한 이야기가 오간 집에서 아이는 훨씬 더 많은 어휘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거는 부모를 만난 자녀들이 그렇지 않은 자녀보다 어휘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어휘력과 학업 성적이 관련 있다는 것 아닙니까? 학원 보내느라 밥상머리 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초룩 우산 어린이집에서 설문조사를 보니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이 13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예수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에, 스케줄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자녀와 전혀 소통되지 않은, 용돈이나 주는 사이에 미국 드라마, 넷플릭스에, 미국에서 흘러오는 역겨운 문화가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치하시겠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함께 저녁 식탁을 같이하면서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떤 은혜를 받아 여기까지 왔는지 아는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봐라. 이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대화가 오가고 아이에게 질문이 오가는 것. 신앙교육이 이루어지자. 이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2. 주 안에서의 즐거움 회복하기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히브리어로 샤난이라는 단어인데요. 갈다. 날카롭게 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주입한다고 되던가요? 감동이에요. 제가 청소년 사역 시기에 책 제목을 잘 지은 것이 있습니다. 교육은 감동이다. 신앙은 전수인데요. 강제로 전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활용하신 것이 예수님 아닙니까?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결과를 한번 보자고요. 세리와 죄인을 누가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들을 비난한 예수님 아닙니까? 그 악한 세리와 죄인을 초대해서 한 식탁을 나눈 예수님의 밥상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반성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제가 많은 질문을 하는 데요. 여러분 오늘 아빠들은, 엄마들은 경직된 종교 지도자의 모습으로 다가갑니까? 밥상을 차려주시는 예수님으로 다가갑니까? 대부분의 애들이 예수 잘 믿는 부모를 싫어합니다. 제가 얘들아 모이자면 애들이 엄청 싫어합니다. 애들이 경직되어서 중간고사인데요. 그렇습니다. 제가 반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우리 아들에게 경직되게, 목사 애가 그래서 돼? 모이면 그렇게 될 것 같으니. 이제는 제가 바뀌어 보려고 노력을 하는데 애들이 싫어합니다. 애들이 선입견으로 저를 대하기에, 어떨 때는 섭섭해서. 이렇게 아빠가 시간이 없는데도 시간을 안 내 주셨는데 어떻게 그러냐? 애가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어릴 때 시간 안 냈잖아요. 반성을 많이 합니다. 오늘 가정이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주일 저녁마다 밥 같이 먹으라고 했다 하면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저녁마다 우리의 어떤 태도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격려로.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요즘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고요. 어린 시절의 모 교회가 그렇게 그리워요. 가난하고 결핍된 것도 있었지만, 그 교회 담임목사로 가고 싶어요. 11시 예배를 마치고 애고 어른 할머니 할 것 없니 점심 국수를 같이 먹었던 것. 메뉴는 잔치국수 맨날 똑같습니다. 모 교회 어른들과 농담하는 것이 그리워요. 이민교회는 예배 마치고 온 성도님들이 식사합니다. 요새는 도넛으로 바뀌는 교회도 있다하는데요. 미국사람들 밑에서 살다가 함께 밥먹는게 전도가 너무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 신세를 많이 졌는데요. 성탄절에 맘 놓고 놀게 해주신분 아닙니까? 사치기 사치기 사뽀보. 새벽 4시까지 놀고 나면 권사님들이 국밥을 합니다. 애드아 국밥 먹으로 와라 하면 그때 먹은 국밥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조를 나누어서 새벽 송으로 가는데. 별동별이 쏟아져 내리는 새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암만 하늘을 봐도 그때 다 쏟아져 버렸는지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 한 순간만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이게 교회에요. 이래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뜨거운 국밥으로 추억을 쌓으면서. 이것이 신앙교육입니다. 29 교회로 나누어졌으면 좋겠어요. 교회마다 이런 즐거움을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요새같이 외로운 첨단기술 시대에 모두가 외로운 시대가 하이터치 시대 아닙니까? 잔치 국수 먹자고 함께 손잡고 가는 교회 아닙니까?


설교를 준비하다가 눈시울이 붉어지는 노래가 있는 데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기본이 6남매, 7남매 주렁주렁 애들이 있어서 방은 한 칸밖에 없어서 한이불 덮고 있는데 가운데 형이 화장실 간다고 하면 잠 깨고 화내던 시절인데 그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리운 것입니다. 작은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기도 끝나면 맛있는 반찬이 다 사라져있었던. 이것을 회복하자고요. 주일 저녁에 왕의 밥상을 찾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오순도순 티격태격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3. 식탁 공동체의 능력 회복하기


세 번째가 제일 중요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가 본문을 묵상하다가 너무나 중요한 포인트를 묵상하였습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0-32)


주님을 모신 예수 믿는 가정의 따뜻한 가정에서 주님의 영안이 열리는 상황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죽여달라고. 비참한 상태에 빠진 엘리아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밥상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 19:5-8)


엘리야가 회복한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내일 직장으로 가려고 하니 짓눌림 속에 있는 가족이 주님과 함께 온 가족이 누리는 식탁에서 음식물의 힘에 의지하여. 제가 좋아하는 구절로 시편 23편을 꼽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다윗이 온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시기에, 적들이 많은 시기에 비웃는 원수 가운데서. 주께서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악한 것들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융숭한 손님으로 대우해주는 것을 보면서 다윗이 의기양양한 것입니다. 봤지 나 무시하지 마.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님의 배려와 사랑을 받고 자라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주님 이름으로 모여있는 식탁의 자리가 시편 23편의 하나님의 초청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주눅이 들지 않고, 원수들이 아무리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잔칫상을 배설해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아빠가 차려주는 밥상이더라도 계3의 놀라운 능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쉐마교육이 일어날 때, 중심이 잡혀 흔들리지 않는 자녀로 세움 받을 줄 믿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밥상에서, 밥상에서 오가는 신앙적인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날마다 무장을 하는, 가정 가정마다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05월 0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주님을 꽉 붙잡아야 할 이유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12-20)


우리나라 법 중에 공무원 품위 유지라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반했을 때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강력한 처벌 수위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궁금했습니다. 공무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법이 불편하겠지만 어떤 면에서 공무원들에게 엄청난 긍지를 가져다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 맥락에서 저도 목회자다 보니깐 목사가 된 이후 늘 마음에 품는 단어가 있습니다. Dignity 품위, 위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과유불급이라고 모든 일에 대해서 절제하고 이 정도면 됐다는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서 제가 하나님 종으로서 존재로서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젊은 교역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목사가 성도님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하겠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권한을 주었다면 품위가 있어야 한다. 절대 소탐대실 하지 마라. 목회자들에게 독약이다. 늘 목회자가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뿐만 아닙니다. 모든 크리스천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게 우리가 지켜야 할 존재에 걸맞은 품위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머리가 똑똑하다. 엄청나게 실력을 갖추었더라.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품위가 있다. 뭔가 이런 품위가 있습니다. 변화 받은 우리야 마음의 기도제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오늘 이런 말씀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한 번 더 살펴봐야겠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광인의 모습을 보면서 귀신들이 노리는 것이 이거구나.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 5:5)


결국, 귀신이 노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빼앗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두려움은 추해질까 봐 두려워요. 육신이야 어떻합니까? 피부도 옛날 같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지만, 마음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 어르신을 보면서 정말 존경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제가 하나님 앞에서 추해지지 않도록 간절히 하는 기도 중 하나입니다. 저는 진실로 저의 세 자녀에게 추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진짜 우리 성도님들에게 추한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부교역자들이 저를 보면서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깐 이찬수 목사 정말 추해 이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품위 있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에 디그니티 단어를 가지고 묵상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 관점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회복하면 좋겠다는 세 가지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1. (자신에 대해) 믿는 자로서의 품위 지키기


어느 누가 품위를 지키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만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발견한 것이 8장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막 5:8)


이것이 품위를 지키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영향력의 문제 아닙니까? 더러운 귀신의 영향력 안에 있으면 추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진노의 자녀가 무엇을 강조합니까? 악한 영을 닮았다는 것 아닙니까? 아주 못된 짓을 하는 아들을 보고 지애비 닮았겠지 않습니까? 진노의 자식이라는 표현에는 악한 영을 닮은 것.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전부가 다 애들이 방을 안치우고 지저분하게 한다고 귀신 오는 것 아닙니다. 귀신들이 기뻐하는 악하고 음란한 영역에 빠져 있으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악한 영을 닮을 수 없는 것은 본질상 진노의 악한 영이 기뻐하는,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고. 목회자가 품위를 지키기 원할 때 어떤 일을 하더라도 품위를 지키길 원합니다. 분노를 하고 있으면 악한 영을 갖는 목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엡 2:4-5)


이제 내 영역은, 내 통치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귀신들린 광인처럼 악한 영의 영향력 안에 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내 살을 지키는 영향력. 끊임없이 싸우는 것. 너희의 악한 귀신들의 영향력 안에 있지 않다. 악한 사단은 떠나갈 지어다. 이것이 품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다음 단 한 번도 품위를 잃지 않은 사도바울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이런 품위가 어디서 나오느냐? 주 안에서 갇혔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도 주님의 영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지금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 품위가 없는 것처럼 어린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갖는 군사들의 모양새, 큰 칼을 차고 군장을 갖고 좋은 등치를 자랑하는 디그니티가 소년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년 다윗이 같는 디그니티가 무엇입니까? 네가 갖는 칼과 창과 단창이 없지만, 만군의 여호와 이름이 있기 때문에 비굴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그 사람이 원하는 은과 금을 갖추고 누리는 디그니티가 베드로 사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갖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디그니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로서 두려운 것이 있는데요. 헛멋에 빠질까 봐 무섭습니다. 골리앗처럼 외관을 잘 갖춘 것. 대형교회가 되었다고 거들먹거리면서 어디 가는 데 까만 양복 입은 부교역자 거느리고, 이것이 다 헛멋 아닙니까? 부모가 헛멋으로 디그니티를 만들 수 없습니다. 모양새는 엄청난 골리앗 앞에 돌멩이 몇 개 거느린, 품위라고 없어 보이는 그런 상태이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 이름이 있기에 그것이 어린 다윗을 품위있는 용사로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여러분 헛멋에 빠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2. 타인에 대해 예수님의 한 사람 철학 장착하기


본문을 묵상하다가 주목하게 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막 5:1)


제가 주목하는 것은 20절까지 본문 말씀이 끝나고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막 5:21)


지금 말씀의 시작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것을 시작해서 도로 배를 타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광인 한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을 만나러 거기까지 가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까? 풍랑을 훈련 차원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이 겪으셔야 했던 대가지불이 얼마나 컸습니까? 세상에 어떤 지도자가, 제가 한 사람 만나려고 거기까지 가라는 거야? 그래서 일만 성도 파송운동은 분당우리교회에 유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한 성도의 존재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한 사람의 철학으로 무장에 반해서 마을 사람들을 보세요.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취한 조치는 하나입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막 5:3)


묶어서 내쫓는 것입니다. 그것이 울분에 빠트리는 것 아닙니까?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주님이 가졌던 한 사람의 소중함보다는 돼지가 가져다주는 유익인 재물이 더 소중했던 사람입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막 5:11-13)


그 일을 행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겼다면 예수님을 막고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을 사람들은 고침 받는 한 사람보다 돼지를 잃게 되었다는 것. 어느 교회에서 장애인 학교를 세우려고 하니 인근에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게 반대했을까요?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장애인들 들락거리면 집값 내려간다고.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보다 집값 떨어질까 봐. 한 사람 고침 받는데 돼지가 희생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집값 떨어졌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비싼 동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우리와 제가 예수 믿고 해결이 되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사실 제가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내년 이맘때 걱정이 됩니다. 지금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너무 강렬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는데 1만 5천 명이 쑥 떠나면 제 감정이 어떨까 걱정이 됩니다. 지난 여섯 번의 분리 개척을 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도 슬프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설교 준비하는데 신실한 순장님 부부가 생각납니다. 목사님 떠나겠습니다. 했는데 오후 내내 설교준비를 못 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내년 이맘때가 되어서 제가 뭘 몰라서 내년에 안식년을 갖겠다 했는데 그게 뭘 모르는 소리입니다. 내년만 오천 명이 나갔는데 제가 없어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예언하는데 안식년 절대 못 합니다.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6. 25 이후 복구해야 하는. 다수의 순장님이 빠져가기에 내년에 다락방을 할 수 있는지도 퀘스천마크입니다. 제가 불안한 거예요. 내년에 제가 소문에 이찬수 목사가 우울증 치료를 받고 다닌다더라. 이것은 아니잖아요. 마을 사람이나 제가 내 교회가 잘되는 것. 돼지떼가 희생된 것을 보고 예수님 좀 가주세요. 이런다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싸워야죠. 그래서 여러분 일만 성도 파송운동은 이찬수 목사님께 주신 고귀한 훈련 도구이고 훈련입니다. 사실 지난 주일 저녁에 제가 설교를 다 마치고 오후에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지난주에 설교하면서 귀신들인 사람들의 특징과 좌파, 우파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십수 년 일이 떠오르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이유를 알아요. 제가 어느 서울에 있는 교회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첫날 저녁에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서울 같은데는 부흥회 기간이라도 새벽기도를 마치자마자 교회 출근하고 다시 집회하러 가더라고요. 저녁에 다시 가니 목사님들이 덕담을 하십니다. 지나가는 말로 목사님 교회에 연세가 드신 권사님이 계시는데 안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좌파 목사님 설교 안듣는다. 하고 안왔다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 있나 하고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둘째 날 저녁에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그러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권사님에게도 은혜가 필요할 텐데 내가 무슨 좌파라니. 내가 설교시간에 좌파 우파 이야기를 하려고 초청받았겠느냐고요. 부흥회가 끝나고 코로나가 터지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힘들었습니다. 한참 가짜뉴스가 있을 때 분당우리교회를 떠난 성도님들이 있으십니다. 대부분 연세 드신 가정입니다. 2만 명이 넘는데 몇 사람 가는 게 무슨 대수야 하면 저는 주의 종이 아닙니다. 말 나온 김에 또 하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니 마음에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개인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부담되지만 바로잡기 위해서. 가짜 뉴스로 공격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명 지사가 분당우리교회 장로라는 것으로 공격합니다. 이 분이 출석 안하는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초신자였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장로라니요. 이제는 만날 수 없으니 한 번씩 기도가 나와요. 어느 교회라도 출석하기를 원합니다. 저희 교회는 시의원, 국회의원, 진보 정당에서 정치하는 분 여러 계십니다. 저는 그것으로 구분한 적이 없습니다. 담임 목사 눈에는 복음을 잘 전해서 예수 믿게 해야겠다. 중직자라면 진보정치가, 보수정치가 크리스천 정치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정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가 누구를 지지한다. 나는 어떤 성향이다. 일절 밝히지 않습니다. 우리 딸에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보수 10년 동안 진보 성도님들이 얼마나 있으신지 아십니까? 정권이 바뀌니 정반대 일이 일어납니다. 누가 제보를 했습니다. 이런 것을 다루는 모 이단의 그룹이 있습니다. 제가 확인을 안하였기에 숫자를 밝히지 않습니다. 분당우리교회, 저를 좌파교회. 이념에 찌든 목사님이라니는 전체에 따지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한 사람 철학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이 소중히 여기는 한 영혼은, 주님이 귀신들린 한 영혼을 고쳐주시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주신다면, 공식적으로 거론하려고 하는 것은 분당우리교회 뿐만 아닙니다. 이념의 문제로 고통받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다락방의 철칙은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 사람 철학을 갖는, 꺼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젊은이들이 이런 교회의 현실을 힘들어해서, 그런 책임을 우리 기성세대가 어떻게 지려고 합니까?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 18:12-13)


이것이 주님의 한 사람 철학인데, 젊은이들이 교회의 염증을 느끼고 떠나가는데 이것은 방치할 수 없습니다. 저와 모든 기성세대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3. 가정으로의 파송


같은 사건을 다루는 누가복음을 보다 보니 마가복음에 없는 한 포인트를 찾았습니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눅 8:27)


고침 받기 전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 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막 5:18-20)


두 가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고침 받았습니까? 은혜받았습니까? 주님의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잘 먹고 잘살았더라.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니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역을 방문하니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막 7:32)


고침 받는 광인이 데가볼리에서 전파했다고 합니다. 고침 받았습니까? 주님의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파송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 동네에요. 자기 집입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막 5:19)

오늘 저는 파송식을 열기를 원합니다. 가정으로 파송받아 가기를 원합니다. 저녁에 우리 가족 행복 밥상 캠페인, 매 식구들이 함께 식사하는 캠페인을 왜 하기로 하였는가? 테이블 펠로우십, 식탁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밥 같이 먹는 사람이 식구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정을 흩는 전략입니다. 밥을 같이 먹는 것을 해체했습니다. 앞으로 전문가들 초청해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식사 대접하는 잔치를 할 것입니다. 아름답게 식탁을 준비한 것을 홈페이지에 올릴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엄마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이 세 가지를 놓고 기도하세요. 타인에 대해서 예수님 한 사람의 철학으로 무장되기를 원합니다. 초신자 한 영혼이 교회를 떠나면 목에 연자맷돌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고침 받았으면 파송을 받아야 하는데 가정 선교사로 파송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꽉 붙잡아야 이 세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설교제목을 놓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할 이유 이것이 점잖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꽉 붙잡아야 할 이유라고 정했습니다. 예수님 붙잡는 것과 꽉 붙잡는 것은 다른 줄로 믿습니다.




04월 2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통제 불능 인생에서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막 5:1-8)


오늘 본문에서 귀신에 빠져 혼미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본문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회복시킨 사건은 마가복음 1장에서 주님의 선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바로 이 말씀을 구현한 사건으로 의미 부여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고는 송신대 신현호 교수님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왕 노릇하던 시대는 끝이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시대가 와 있다는 의미로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말씀은 마가복음 1장 15절을 구현한 말씀이다가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귀신들린 사람을 다스리는 주체가 바뀌어진 사건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묵상하다가 괴테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겨울철 과일나무와 같다. 그 나뭇가지에 다시 푸른 잎이나고 꽃이 필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을 꿈꾸고 그렇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열매를 절대 맺을 수 없는 동토의 땅을 살아가지만, 다시는 나뭇가지에 꽃이 필 일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겨울나무가 꿈꾸는 것은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그 날을 꿈꾸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귀신들린 광인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예수 믿기 이전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막 5:2)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막 5:9)


귀신들린 사람은 다수의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귀신들린 사람은 통제 불능 인생입니다. 이렇게 말씀 묵상하다 보니 조주빈이라는 청년이 떠올랐습니다. 25밖에 안된 청년이 박사방이라는 채팅방을 만들어서 미성년자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서 구속이 되었습니다. 1심 재판에서 징역 45년 형을 받았습니다. 청년이 구속되면서 했던 말을 다 기억하죠?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출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기 힘으로 멈출 수 없었는데 붙잡히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본문의 사람이 통제 불능의 상태 아닙니까? 이 청년이 연결되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아인슈타인이 본문과 연결이 되더라고요. 글을 읽다가 혼란스럽습니다. 사촌 누나와 분류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을 일을 한 사람이 아닌데 부인할 수 없도록 아인슈타인의 글도 공개했습니다. 사촌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 엄청난 괴로움을 표현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불쌍한 악마들이야. 누나에게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가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할꺼야. 서로의 애정에 굴복하면 불행만 불러올 거야.


불행한 것은 다 알면서도 아인슈타인은 자기 아내를 버리고 사촌 누나와 재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조주빈과 아인슈타인의 공통점은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이게 본문에 나온 광인과 비슷한 것 아닙니까? 똑똑하고 아무 소용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군대 귀신이 들린 상태입니다. 최근에 미국 주에서 대마초를 합법화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은 제정신입니까? 더 경악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15번째 허용입니다. 이전에 대마초를 합법화한 주가 14개의 주가 되었습니다. 뉴옥주에서 구매는 물론 집에서 대마초를 키우는 것도 합법화되었습니다. 대마초 합법화는 뉴욕주는 3억 5천 달러의 세수가 생기고 고용이 창출될 것이다. 돈 되는 일이어서 합법화 한 것 아닙니까? 많은 미래학자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럽과 미국이 가정 파괴가 된 것은 오래된 것이고 가정이라는 제도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것이 아닙니까? 예수 잘 믿는 부모일수록 자녀교육이 어려워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자녀 교육에 일어나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겨울철 과일나무와 같아요. 동토를 살아가는 이 시대이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푸른 잎이 나고 꽃이 필 것을 우리는 꿈꾼다.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이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당신 마음에 붙들려있는 것이 당신의 신이다. 교회다닌다고 다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목사라고 다 크리스천입니까? 천만에요. 귀신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기를 점검해야 해요. 물론 죄악이 관영하는 땅에 살다 보니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살 수 없지만, 주님의 다스림을 갈망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광인의 심각한 상태


1. 고립과 고독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막 5:2)


귀신에가 사로잡힌 사람의 가슴아픈 특징은 비정상입니다.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죽은 시체를 모은 무덤가에 있다는 것은 고립이고 고독입니다. 국어사전에 고립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 않거나 외톨이가 됨. 고독도 찾아보니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의 상태 아닙니까? 우리 시대가 정말 아이러니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이후로 우리 시대만큼 극단적인 이기적인 상태 봤습니까? 조금만 손해를 보면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들끓는 상태 아닙니까? 오늘 우리 시대가 고독의 문제, 고립의 문제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SNS, 카톡 소통의 놀라운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가 연애할 때는 밤새도록 썼다가 지우고, 이만큼 쓰레기가 나올 정도로 정성껏 편지 붙여서 보내면 상대가 답이 올 때까지 최소한 일주일이에요. 기다리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답을 줄까? 불편한 시간을 보냈는데 카톡 1초 만에 가요. 10초 만에 답이 와요. 소통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이 되는 시대인데 오늘 시대만큼 외로움이 많고 고독이 있는 시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말 드라마 보다가 재미없어서 안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주인공 변호사가 인근 식당 주인과 바람을 피우다가 들킵니다. 부인이 너무나 분노해서 남편을 추궁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뭐가 모자라서 바람을 피었냐고 하니깐 밥 때문에 라는 어이없는 말을 합니다. 재미가 없어서 안 봤습니다. 그러니깐 어느 전문가가 글 쓴 것을 보니 너무 타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밥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것이 변호사로서 외롭고 힘든 일을 하는데 밥을 차려주지 않는 것은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최근에 읽은 기사 중에 슬픈 기사를 보았습니다. '급증하는 청년 고독사' 고독사를 하면 혼자 살다가 겪는 이미지라고 되어있는데 청년들의 고독사가 노년층을 따라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 귀신 들린 시대 아닙니까? 우리나라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청년의 문제로 오래전부터 심각했습니다. 유럽의 영국은 외로움 담당 장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럽과 미국처럼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 문제입니다. 외로움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런 성도를 담임해도 저도 외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든 게 아닙니다. 뭐가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나는가?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 102: 6-7)


지붕위의 외로운 참새같은 존재.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02:1-2)


비록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은 고독이지만 여러분 인생을 답해보세요. 참새같은 고독만 있는 인생입니까? 1, 2절도 함께 있는 인생입니까? 외로울 때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주님과 교제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인생이 성숙한 인생 아닙니까?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시 25:16-17)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은 외로움을 어떻게 승화시킵니까? 어떤 영감을 갖는 설교는 대부분 새벽에 얻습니다. 정말 외로운 시간입니다. 외롭다고 아무한테 전화를 못 합니다. 저의 외로움이 창조적인 고독으로 바꾸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저를 윤택하게 하는 모든 것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외로움으로 나가는 자리에 저를 숨 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2. 울분과 분노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 5:4-5)


최근에 서울대 보건대학교 연구원이 발표한 한국사회 울분 조사 결과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너무나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6명이 만성적인 울분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울분이 지속하거나 전문가 도움이 필요할 정도의 울분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신문 한 장만 펼쳐보면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범죄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침체기다. 교회 안에 울분이 너무 많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향해. 부교역자는 담임목사를 향해. 담임목사는 장로를 향해 울분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것은 괴로움이 저에게 메일로 상담 요청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주님이 다스리는 교회가 이렇게 울분과 상처를 양성하는 것이 그것이 어떻게 정상입니까?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지니깐. 저의 목회 19년은 이것을 추구하였구나. 저를 무슨 진보니 보수니 정치에 찌든 사람으로, 친동성애자로 조회 수가 30만, 40만 됩니다. 이단성이 있는 교회가 만들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믿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5편만 보세요. 제가 정치적인지. 대놓고 분당 우리 교회가 좌파 교회라고해요. 왼손잡이만 모였나. 마음의 분노를 일으키는 19년을 살지만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지니깐. 마음의 울분이 일어날 때마다 귀신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제가 치아가 별로 안 좋아요. 이를 악물면서 견디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탄이 기뻐하는 것은 울분을 하는 것이고요. 성도님만 피해 보는 것 아닙니까? 울분 가득 찬 설교를 들으니깐.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목회가 판단력이 흐려지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막 5:19)


내 집에서 가능한 것이 선교입니다. 어떤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는가?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긍휼입니다. 긍휼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이 자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에 긍휼히 엄청난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배신감, 상처를 받겠습니까? 긍휼로 품으면 됩니다. 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울분과 분노는 군대 귀신이 나를 다스리는 증거임을 알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3. 더러움의 상태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막 5: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막 5:12-13)


조주빈이라는 청년이 어떻게 징역 45년 형을 받을 만큼 음란한 짓을 하는가? 군대 귀신이 들어간 것 아닙니까? 우리교회 25살 청년을 보면 해맑기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닙니다. 권사님들 앉아계시는데 우리 교회 권사님들을 보며 감동하는 것이 해맑기가 소녀 같아요. 진짜입니다. 최근에 70대 할머니 권사님들과 상담을 하는데 저에게 얼마나 수줍음을 많이 타시는지 여고생을 앉혀놓은 거에요. 61살인데 저 해맑지 않습니까? 동안이라는 말을 예전에 많이 들었는데 저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막 5:7)


예수님과 격리된 상태. 예수님과 멀어진 상태가 더러운 상태입니다. 사춘기 애들을 기르는 분들이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방을 더럽게 하느냐? 귀신 나오겠다.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 영역을 벗어나 더러운 세상을 배회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세상을 기웃기웃하는 것은 원수 마귀를 초청하는 짓입니다. 항상 주님의 다스림 영역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음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 시대 속에 살아가는 우리인데 더럽고 부정한 것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이 시대에 날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소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집사님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후 3:8-9)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원수 마귀의 속성은 더러운 거에요. 여러분에서 풍기는 것이 무엇을 쫓는지. 거룩을 추구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자기파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막 5:5)


사실은 우리 시대만큼 자기를 위하지 않는 시대는 없습니다. 그렇게 존경하는 목사님이 성추행으로, 공금횡령으로 잊힐만한 일이 나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한방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여당이고 야당이고 가릴 것 없이 나오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설교를 너무 잘해서 분석을 잘하나 했더니 중학교 1학년이면 아는 그런 짓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를 위해주세요. 군대 귀신이 다스리는 악한 세상에서 청년들이 자기를 엄청 위한다고 하는데 자기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가슴 아픈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다수의 악령이 미쳐 날뛰는 시대이기에 이런 논란의 일이 생기니 저를 아끼는 분들이 목사님은 변하지 마세요. 목사님이 변하면 우리 설 땅이 없습니다. 저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고 기도해주세요. 저를 지탱하는 힘은 주의 그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찬수 목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영역을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런 종이 되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그런 다스리면 안에 있을 때는 절대로 타락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영적 점검 잣대로 사용하십시오. 고독과 고립의 상태를 주님과 교제의 상태로 바뀌길 원합니다. 울분과 분노의 세상에 사는 우리가 주님의 긍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긍휼을 주위 이웃에게 흘려보내기를 원합니다. 타락한 시대에 거룩과 수련을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학대와 파괴가 많은 시대에 날마다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길 원합니다. 부족한 종이 귀한 성도님을 놀래키지 않기를 원합니다. 무덤에 갈 때까지 기도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문 19절 말씀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막 5:19)


나의 나 된 것. 전적으로 불쌍히 여겨주는 하나님의 은혜이에요. 여러분에게 안 들킨 수많은 것들. 강단에 서면 멱살 잡고 끌어내리고. 그렇게 추한 일을 안 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근심하는 것이 너를 너무 과장한다고. 이거 수습 어떻게 해야 해. 하여튼 긍휼히 필요합니다. 그 긍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나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04월 1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21.04.18] 분당우리교회 주일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35-41)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엄청난 풍랑을 만나는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7-38)


엄청난 고난에 빠져있는 상황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살면서 쉬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저도 제목 때문에 책을 구입한 케이스입니다. 책을 펴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번 일만 잘 버티고 넘기자 수천 번 넘게 마음속에 되뇌며 살아왔다.
예전에 광수생각이라는 굉장한 인기를 누렸던 만화가입니다. 이런 만화가도 살면서 쉬웠던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도 잘 버티자고 말하는 삶이라면 평범한 성도의 삶은 얼마나 버텨야 할 일이 많은가 참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김해남 교수님이 쓴 어른으로 산다는 것 책입니다. 부제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법. 무슨 구호 같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너무나 많은 풍랑, 파도에 힘든 성도님들이 많은데 어떻게 말씀으로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서 풍랑과 싸워 이겨 일어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모순 아닌가 질문거리가 참 많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타고 계시는데 예수님이 타신 배에 풍랑이 엄습해 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거리가 나오는 데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배에서 생사를 오가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제자들의 고난의 원인 제공자가 예수님이십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막 4:35)


제자들은 순종해서 배를 탄 것입니다. 절망적인 풍랑이라는 것.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가하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격려해주지 못할망정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이게 꾸짖을 상황입니까? 누구라서 그 정도 광풍을 만났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요. 대부분은 주님의 꾸짖으심이 이해가 되는데 본문에서 납득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AI가 되는가? 감정도 없어야 가능한가?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 아닙니까? 제자들이 죽을 고생을 하는 상황에서 주님이, 우리 주인 되시는데 어떻게 주무시고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우리 상황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기도를 외면하는 것 같아요. 기도 안 하는 분은 이게 뭔 소리인지 모르실 거예요. 이런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책을 통해 살펴보고 답이 뭘까? 분명 모순이 아닐 텐데.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1번 문제가 해결되면 2번이 모순이고 2번이 해결되면 3번이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되는 마스터키를 발견하였습니다. 마스터키는 모든 건물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이 마스터키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막 4:35)


저게 무슨 마스터키일까요? 저자인 마가가 오늘 본문을 기록하는 첫 표현으로 강조하는 것이 그 날 저물 때 라는 시제라면요. 그 이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4장 말씀의 첫 시작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막 4:1)


여러 가지 비유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어요. 그리고 그 날 저물 때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원인 유발자가 예수님이십니다. 종합적으로 묵상하다가 구호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낮에는 이론, 밤에는 실습. 낮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론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지고 실습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실습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하나님 나라가 진짜 강인한 성숙한 공동체가 되려면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도 받아야 하지만 실습을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풀리지 않는 풍랑 앞에서 제자들처럼 절규하는 일이 있을 때 우리 주님이 말씀으로 가르치신 모든 것이 실습으로 위대한 왕이라는 것이. 풍랑의 현장에서 일련의 일이 훈련의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최근에 제가 한양대 정재찬 교수님이 쓰신 책과 강의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 강렬한 메시지를 얻었는데요. 교수님 강의의 전제는 인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아 파란만장한 삶을 산 후배들이 보이는데 이야기를 책으로 쓰라고 합니다. 권한 제목은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게 더 낫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목표하면서 그러는데 이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길이 있는 그곳에 뜻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길 가운데 길이 보이네. 이런 것은 별로 없고 험한 길을 만날 때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힘들어하면서도 절대로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생이 망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못 만나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가 여기 온 데는 뜻이 있을 거야. 끝까지 험한 길을 달려가다가 많은 사람이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길이 있었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뚫어낸 그 사람이어서 길이 난 것입니다. 이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불타는 전의가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기어이 뜻이 있는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꿈이라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주신 것은 우리를 향하여 이루시길 원하는 주님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꽃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도발적으로 말합니다. 꽃길로 가라니. 남이 억지로 만든 꽃길을 짓밟으며 가고 싶지 않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은 꽃길이라서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년부터 꽃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것은 속이는 짓입니다. 열악하고 험한 길이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뚫어내야 할 길. 우리 자녀들이 우리 후손들이 그 꽃길을 누릴 수 있는 꿈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당장 내년에 꽃길을 걷듯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29 예비 담임 목사님들에게 엄청나게 제가 몰아붙입니다. 힘들 거예요. 제가 계속 몰아붙입니다. 겨자씨로 순수함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순수함을 잃으면 뭐가 남는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 속에 꽃길만 걸으세요. 이것은 신앙인이 길이 아닙니다. 풍랑 만난 제자들의 상황과 현실을, 아무 고난이 없고 순탄해서 돌아보니 꽃길만 걸었네. 잘못한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시작조차 안 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풍랑이 찾아올 때 기억해야할 것을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 정리를 했습니다.



1. 풍랑을 훈련으로 인식하기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훈련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세요. 요나가 만난 풍랑은 자기가 자초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욘 1:3-4)


이것을 두고 거룩하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겪지 않아도 되는 풍랑입니다. 선지자 같지 않지만 배워야 하는 점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기왕에 만난 풍랑인데 어떻게 하느냐고요. 분석하고 있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내게 찾아온 풍랑을 훈련의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욥 아닙니까? 욥기 맨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는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욥 42:2-3)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 42:5)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했을까요? 욥에게 고난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거에요. 욥이 경험한 수많은 고난이 훈련의 도구가 되어서 이런 성숙함. 이런 깨달음. 이제는 귀로만 들었는데 고난 당해본 사람은 아실 거예요. 주인 되신 주님이 내 피부 가까이 말씀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길을 가르쳐주시고. 생생하게 말씀하시다 보니. 낮에 말씀을 들은 사람은 제자도 오고 이 사람 저 사람 왔는데 실습은 제자들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안 겪어야 한다고, 고난을 겪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길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기왕에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고난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여러분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훈련 도구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내 인생의 배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여러분이 아시지만, 제자들의 상당수는 어부입니다. 제자들이 경험하는 고난의 경험이 예전에 경험하고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살아서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차이는 결정적인데요. 그 배에 지금 주님이 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 최근에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공감하는 부분이 있는 데요.


그 사람이 믿는 믿음의 참된 여부는 종교 행위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믿는 믿음의 대상에 관해서 결정합니다. 무당을 찾아가서 굳하는 것을 보십시오. 수 천만 원이 듭니다. 그 정성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손을 비비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세요. 밥도 먹자 않고 밤을 새우면서 기도합니다. 종교 행위는 대단하나 믿음을 갖는 사람이 아니라 미신을 갖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격렬한 마음으로 이어갑니다.


왜 미신을 갖는 사람이라고 하나면 믿음의 대상이 죽은 돼지 대가리나 좋아하는 잡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려고 몸부림치고 집 팔아갔다 바치고 이런 것으로 우리 신앙의 참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위대하심을 증명하고 삶 속에서 경험으로 나타내야 한다면 이 말씀에 대해서 동의가 됩니까? 분당우리교회가 이찬수 목사가 목회 잘함을 드러내기를 원합니까? 죽은 돼지 대가리나 좋아하는 잡신과 비교가 안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드러내기를 원합니까? 지난 금요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에 참석하신 분들 죽은 돼지 대가리나 좋아하는 신 때문에 새벽을 깨웠습니까? 무슨 문제가 한국에 일어나는지, 믿음의 참됨은 열심을 드러내는 종교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탁월하신 능력자되시는 그분이라고. 그것이 풍랑에서 실습 포인트 아닙니까? 풍랑을 잠재우는 주님을 상상만해도 눈물이 납니다.


앞에서 드린 문제 제기중에 왜 제자들을 주님이 격려 안해주시는가? 답을 알려드릴까요? 인간 본능을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요. 핵심 포인트를 찾았는데요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예수님이 타고 계신 그 배가 어떻게 망할 수가 있느냐고요? 꾸지람 들을 일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힘든 것은 이해가되요.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다. 라는 말이 이해가 돼요. 인간의 삶이 끝없는 고통으로 가득찼다는 표현이 이해가 되는데요. 하나 더 덧붙이면 기독교입니다. 인생은 고해인데 주님과 함께하는 고해라는 것입니다. 그냥 고해는 불교. 고해인데 주님과 함께 하는 고해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도대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양식이 불교적입니까? 기독교적입니까? 죽게 되다니요. 우리가 죽게 되다니요. 한국 교회가 망하게 되었다니요. 우리가 무험한 말을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고해인데요. 주님과 함께하는 고해입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을 아는 데요. 여러분 우리 교회는 돼지 대가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요.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구호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찬수 목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이다. 삼단 논법. 그러므로 이찬수 목사는 망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죽겠다. 눈뜨면서 죽겠다. 죽지 못해 산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무의식적으로 했으니깐 봐주실 것 같해요. 오늘 이후로 힘든 것은 이해가 돼요. 망할 수가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배에 키를 쥐고 계세요.


예수님 주신 꿈을 품고 사는 내 인생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제자들 입장에서 낮에는 이론, 밤에는 실습 이야기를 했는데요. 낮에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제가 지난주에 위대한 꿈이라고 제목을 지었습니다. 이찬수 목사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꿈입니다. 그날 제자들에게 겨자씨에 비유해서. 지금은 겨자씨처럼 초라하지만, 그 어느 나무보다 큰 가지를 내서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꿈을 낮에 심어 주셨는데 어떻게 그날 밤에 풍랑으로 제자들이 죽을 수 있습니까?


다시 지난주 설교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위대한 꿈 설교로 돌아가서 지난주 설교를 들으시고 오늘 이 설교를 다시 들어보기를 원합니다. 이 둘은 때고 읽으면 안 됩니다. 낮에는 이론, 밤에는 실습.


저는 주님이 내 인생에 있기에 망하지 않지만, 주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 전까지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관리를 얼마나 하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서 건강관리 제일 잘합니다. 이 가슴 벅찬 새들이 깃드는 나무를 누리면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꿈으로 말미암아 나는 망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이 고백을 날마다 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3. 주님 깨우기 훈련


주님이 계시는 것. 인식하면 뭐합니까?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깨우는 행위가 우리로 말하면 기도입니다. 저는 예레미야를 읽으면서 모순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렘 3:33)


당신을 흔들어 깨우기를 원합니다. 우리 기도 안 해도 이루시는 분이에요. 기도 안 해도 성취하시는 분이에요.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갈 때 내 인생의 키를 가지고 있는 그분의 일하심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하나님이 일 안 하신다고 불평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염려하거나 기도하거나. 이것이 오늘 본문으로 빗대서 설명해볼까요? 풍랑 가운데 죽을 것 같다고 비명 지르며 살 것인가? 주님을 흔들어 깨우던가. 풍랑으로 고생하든지, 주님을 깨우던지. 염려에 있든지 기도하든지.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훈련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훈련하시는 예수님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목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대상을 옮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풍랑 앞에 두려움이에요.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41)


두려움이 옮겨졌어요. 풍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경외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이렇게 방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에요. 고난 속에 계시는 분. 이것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현실을 어렵게 하는 풍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가기를 원합니다. 지난 한 주 내내 찬송가 370장을 가지고 교회를 가면서 듣고, 오면서 들으면서 왔습니다. 계속 찬송을 들으면서 어느 지점에서 뜨거움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큰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구주여 광풍이 불어 찬송가 371)


일만 성도 파송 운동 때문에 불면증이 왔어요. 성도님들이 힘드시데요. 주님이 찬양을 주셨어요. 늬가 풍랑을 잠재우나?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배의 주인이 예수님이신데. 잠을 못 잘 정도로 믿음의 꼴이 너무 한심하지 않느냐고. 이 꼴을 벗어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04월 1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위대한 꿈 - 선교주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21-34)


예전에 가수 인순이 씨가 부른 거위의 꿈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텐데요.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더라도 보물같이 간직하던 꿈. 뜻모를 비웃음 내 등뒤에 흘릴 때에도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난 난 꿈이 있었죠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모를 비웃음내 등뒤에 흘린대도 난 참아야 했죠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노래를 부른 인순이 씨의 상황이 노랫말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순이 씨는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와 혼혈로 태어났지 않습니까? 당시 혼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인순이 씨가 살았던 상황이 상처투성이 아니었겠습니까? 홀어머니 밑에 자라서 경제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상황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뎌서 본인이 원하는 멋지고 훌륭한 가수의 꿈을 이루어낸 분이어서 야 저 노래 제목이 거위의 꿈이 되기도 하지만 인순이의 꿈이라고 해도 되겠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부르고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랫말이 떠오른 이유가 있는 데요. 겨자씨의 비유는 비유가 그렇듯이 여러 각도로 조명하고 해석할 수 있지만, 겨자씨 비유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품어야 할 하나님 나라 꿈 이야기로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4:30-3)


제가 지난 새벽에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예수님 당신의 이야기이구나. 예수님의 꿈. 주변에 있는 가까운 제자들에게 이 꿈을 나누고 계시구나.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이야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는 큰 나무이지만 당시 예수님은 겨자씨 대접을 받던 상황 아닙니까? 거대한 로마 상황에서 조그마한 속국에 불과한 나라에서 또 변방의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면 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가 겨자씨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상황은 너무 비참하거든요. 포로 생활을 겨우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니 온 나라가 폐허의 상황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의 미래를 바꾸어놓을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 60장 22절입니다. 현실은 절망이지만 절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꿈으로 극복하라는 구절 아닙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달려나갈 때 큰 나무가 되고 새들이 깃드는 것을 꿈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겨자씨 비유가 왜 마음에 뜨거움을 주냐면 여러 번 간증했지만 20대 제 존재 자체가 겨자씨 아닙니까? 대학을 졸업할 실력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셨죠. 돈을 벌어야만 생계가 가능해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풀타임으로 학교 다니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밤새워서 주유소에서 일하고 가면 밤새우고 와서 공부가 되겠느냐고요. 하루종일 도서관에 앉아서 책 읽고 단어 외우고 그래도 안 되는 판인데 풀타임으로 노동해서 되겠냐고요. 겨자씨에요. 초라하고 비참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남루한, 브랜드 옷을 입겠습니까? 일 년 열두 달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너희 내 초라하게 보이지? 30년 뒤에서 분당 우리 교회에서 큰 목회를 할 거라고. 내 인생이 꿈 자체라고요? 그렇게 돌아다녔으면 병원에 입원했을 거에요. 과대망상증이라고. 그러나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낙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것이지 존재가 비참한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에게 '이찬수 너 이렇게 끝날 인생 아니라고' 저한테 말 거는 것은 20대부터 계속했던 것 같아요. 금옥이라고 거만 떨고 있으면 믿음에서 이탈한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겨자씨에요. 하나님 이름 능력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고 낙심하지 않고 큰 꿈을 구워가는 것. 겨자씨의 비유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단락은 하나님 말씀을 주의깊게 읽으라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0-22)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때문에 이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6-28)


예수님 비유가 이런 속성을 갖고 있는데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한 것은 씨 뿌리는 것이며, 이후 씨가 자라는 과정에서 농부의 열심과 상관없이 자라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인간의 수고와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다스림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분당 우리 교회 19년을 돌아보면서 이것을 부인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인간이 했다고 하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우리 동기 중에서 탁월한 목사님이 많으신데 왜 이찬수 목사님을 분당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세웠을까? 대답 간단해요. 탁월한 목사가 담임하면 저게 목사 탓이요 하나님 은혜여? 답 딱 나오는데. 어른 목회해 본 적 없고 어리바리한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농부가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심.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7)


우리 목사들이 이 구절 잊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자기가 설교를 잘해서, 교회 목이 좋아서, 프로그램이 좋아서 그렇느니. 이게 헛소리에요. 잘 모름. 저는 분당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30 교회 하다가 딱 이틀 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목사님이 생겨서, 30 교회 이게 입에 착착 붙는데 29 교회 입이 안 붙는 거에요. 모든데 10단위로 가는데 29 교회로 분립했다. 사람들이 되게 이상하네! 30이 아니라 29 교회야? 29주년에 했나? 설명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 왜 이틀 전에 헷갈리게 틀어버렸을까? 요새는 인생은 해석이에요. 30은 인간이 만든 숫자에요. 29는 하나님의 인준하신 숫자입니다. 29 교회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고 하나님의 통치가 느껴져서 29 교회가 마음에 듭니다. 인간의 계획은 뜻대로 안 되는 것이거든요. 어떤 순장님이 영적인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전에는 30 교회 + 분당 우리 교회 하니 분당우리교회가 위에 있는 것 같은데 분당우리교회 30개, 사도행전 28장까지 있는데 Acts 29 새로운 사도행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30이라는 숫자를 만들어도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여호와입니다. 이틀만에 어떤 목사님 데려와서 30 교회 구색을 갖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


무슨 역병, 무슨 이상기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연질서를 인간이 역행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절차 무시하고. 저는 요즘에 물처럼. 물은 자기가 갈 길을 자기가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순리의 길을 가는 것이 물철학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구조를 잘 보면 앞에 두 단락 전재를 주시는 데요. 이를 잘 정리하고 겨자씨 비유를 잘 보면 마으멩 와닿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0-32)


계속 우리 마음에 삶에 새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막 4:31-32)


시작과 결과의 대조 아닙니까?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겨자씨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라는 작고 초라한 것에서 시작해서 어떤 나무보다 더 큰 가지를 뻗어 나가는 풍성한 결과를 가져온다. 세상에 어떤 신이 왕으로 임하고 능력으로 임하고 신하들을 보세요.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한 아기로 나오는 신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7-18)


이 말씀을 받을 때 부부가 웃었어요. 하나님의 농담이 썰렁해. 하나님의 연세가 많으셔서 엄청나게 농담이 썰렁하다. 자녀가 한 명도 없는데 바다의 모래와 같은, 별과 같은 웃으면서 시작했는데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5-6)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에요. 제가 20대 때 쓰레기를 치우며 유대인 가계에서 일해서 저를 허드렛일 시키려고 저를 고용하고 나머지는 미국계 유대인인데요. 주로 제가 하는 일은 허드렛일인데 저의 존재는 비참한 인간 아닙니까? 끄러나 믿음의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믿음이 있기에 이것은 기능이지 존재가 이들보다 낮다는 것이 아니니깐요. 미국에 인종차별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이 비참해 보이는 거에요. 그러면서 제 마음에 계속 꾸어지는 꿈은 장차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가 해서 그 꿈의 100배 1000배 이루어가는 것 아닙니까? 제 나이의 제가 전데요 너무 생소해요. 그런 분 계세요? 제가 너무 생소해요.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지? 모르는 거에요. 아마 60대 되니깐 살맛 납니다. 인생의 전성기는 60대인 것 아세요? 겨자씨는 계속 자라니깐 점점점. 우리 교회에 3부 예배에 머리 백발인 분들 많으니깐 너무 좋아요. 누가 은퇴한 게 은퇴입니까? 은퇴는 retire, 타이어 갈아 끼우는 것이 은퇴예요. 진짜 은퇴는 장례식이에요. 꿈꾸시기 바랍니다. 겨자씨로 시작했지만, 내 시작이 밑바닥. 쓰레기 치우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맨 겨자씨로 시작했는데. 이게 우리가 닮아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2.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2)


왜 새들이 와서 깃들이느냐? 그늘이 있어서 그래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여러번 울컥했는데요.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요즘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많은 생각이 겹치면서 어릴 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20대에 저는 죽고 싶었거든요. 미시간 호수에 빠졌으면 좋겠다. 엄청나게 많이 했는데 저를 살려준 것이 교회예요. 유대인끼리 본의 아니게 왕따가 되고 일주일을 살면서 저를 살려준 것이 교회예요. 교회만 가면 성도님들이 주는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자기 집에 데려가서 갈비를 대접해주고, 미스터리 힘내. 젊을 때 다 하는 거야.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비록 내가 겨자씨 같은 상황이지만. 그게 그늘이에요. 교회는 그늘입니다. 땡볕 아래에 갈증을 느끼며 고통받던 성도들이. 주 십자가의 그늘 내 쉴 곳 찾았네. 교회 가서 싸우고 애들 앞에서. 애들이 교회 와서 그늘을 느끼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가지고 두 가지 숙제를 발견하는데요. 내가 먼저 그 그늘을 누리는 것. 그것이 숙제입니다. 교회를 헌신해야 그게 충성이 아닙니다. 호의를 배 풀 때 받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의도 잘 안 베풀고 호의를 받는 법도 모릅니다. 문 열고 뒤에서 오면 잡아주는데, 다른 분은 확 닫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성의를 가지고 호의를 베푸는데 내 들고 기다리는데 저쪽을 지가 열고가. 아니 진짜 열 받는 일 아닙니까? 얼굴이 화끈거려요. 너희 같은 호의를 안 받고 싶다. 말하는 것 같아서요. 주님이 보여주신 호의를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로 만드신 주님의 그늘을 누리셔야 해요. 나만 누리지 말고 복음을 모르는 수 많은 분에게 그늘을 전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1만 성도 파송운동이라는 듣지도 보지 못한 운동과 가평 우리 마을, 드림 센터 환원 감당 못 한 짐이 있었는데 주님이 제가 지고 있는 짐을 꿈으로 바꾸어주셨어요. 이 많은 짐이 저에게 행복이 되었습니다. 일만성도 파송운동 저에게 꿈이 있습니다. 5년 뒤, 10년 뒤 왜 내가 분당우리교회 왜 떠나야해 했는데 너무 행복하다고, 교회가 2만 명 넘어가고 사람대접도 못 받았는데 나누어진 교회에서 너무 기쁘게 신앙생활한다. 29 예비 담임 목사님 엄청나게 닦달하는 것입니다. 사람 많이 모인다고, 일 많이 한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늘 머물게 하라고. 정말 우리만 잘되는 교회가 아니라 지역의 교회와 함께 꿈을 꾸고 미자립 교회에 꿈을 나누고. 너무나 가슴 벅찬 꿈입니다. 드림 센터 사회환원 큰 숙제가 남았습니다. 드림 센터에서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꿈을 꾸기를 원해요. 우리가 사회 화원하는 드림센터를 통해서 하나님의 꿈이 펼쳐지기를 믿습니다. 가평우리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친 이들이 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꿈을 꾸며 동산을 만들어나가고. 성도님들이 마음이 힘들면 가평에 다녀갈때가 되었구나. 영적인 그늘 아래 충족이 일어나는 곳. 여러분 가평우리마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확실한 것이 쁘티프랑스를 설립하신 교수님이 가평우리마을의 설계가 얼마나 아름답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재능기부로.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씩 사례비 한 푼 안받고 꿈을 꾸시는 것이 신기한 것이 아닙니까? 이랜드 박성수 회장님. 저와 만나 대화를 했습니까? 당신의 꿈으로 받아서 고급 직원 두 명을 파송해서 가평이 그때부터 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 연로하신 권사님의 엄청난 금액을 주신 것도 부담이었고, 교회 수양관 만드는 것이아니라, 가평 우리 마을을 통해서 지친 자들에게 그늘을 만드는 것이라고. 아시죠 저를. 저는 헌금 강조 안 합니다. 교회가 일에 대한 준비도 안했는데 헌금 많이 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가평을 위해서 헌금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셨지만 턱없이 부족합니다. 곧 재단 만들어서 넘길 것입니다. 29 교회가 함께 운영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 맺길 원합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2)


하나님의 호의를 누리시길 원합니다. 수 많은 영혼들에게 소개하고 안내하는 것. 가평우리마을이, 드림센터가,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4월 0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위대한 반전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 13-17)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 24: 30-35)


이제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큰 좌절과 낙심으로 엠마오 라는 마을을 향해 가는 두 제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묵상을 한 두 주 하면서 혼자서 은혜를 참 많이 받았는데요. 그 과정에서 딱 떠오르는 노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전 버스를 타고 가는 데 우현이 들었는데 굉장히 노랫말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이게 무슨 사이인 건지 사실 헷갈려 무뚝뚝하게 굴지마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너


섬 탄다 말을 가끔 듣는데 아직 연인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사귀듯 가까이 지낸다는 말입니다. 엠마오 두 제자를 보다가 왜 이게 생각났는지 나중에 말씀드리고요.
이 본문으로 만든 찬양인데요.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어렸을 때 여성 이중창으로 많이 들려주곤 했던 기억이 나는데 월요일 아침에 확 다가왔습니다. 계속 마음에 슬픔이 굉장히 저에게 있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사실 엠메오 마을로 가던 제가는 불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 제자 아닙니까? 그런데도 절망과 공포에 싸이고, 끝없는 슬픔에 싸여있는. 분당우리교회 수많은 성도님들이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여러 문제로 절망과 공포에 있고, 계속 기도제목을 받는 게 아닙니까? 매일매일 제 마음에 찬양이 울리는 데요. 하루는 교회를 향해 들어가고 있는데 이 찬양이 마음에 울리는데 얼마나 많은 성도님이 힘들어하는지 한 주간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제 오전에 불쑥 앞에 설명들인 섬이라는 노래가 막 어떻게 검색을 하니 가사를 보니 예전에 우연히 들었든 가사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를 생각하다가 섬이 생각났는지 말해드릴게요.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눅 24:20)


그들의 낙심 원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2-23)


두 제자가 왜 슬픔에 가득 찼느냐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몰되어서, 부활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에게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 어쩌다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안 믿으니 와닿지 않는게 아닙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눅 24:21)


두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은 메시아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힘을 키우고 능력을 갖추고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주어야 하는데 메시아라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 온통 여기에 생각이 집중해 있으니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가는게 아닙니까?


제자들을 보니 딱 썸 가사 이거에요.


신자인듯 신자아닌 신자같은 너
제자인듯 제자아닌 제자같은 너


이게 딱 두 제자의 모습 아닙니까? 부활도 믿지 못하는 크리스천인 듯 크리스천 아닌 듯. 사실 한국교회 안에 헷갈리는 이런 모습을 갖는 분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구원이 필요한 분들이 너무 많은 거에요. 정말 주일날 간절히 촉구합니다. 청년들 표현을 빌려서 한다면 하나님과 썸을 타는 것이 아닌 사랑을 고백하세요. 지금 여러분이 아픔이 많잖아요. 걱정이 많잖아요.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 마음고생 중에서 상당수 안해도 되는, 안 겪어도 되는 마음고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부활하신 주님,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엠마오를 향해 기쁜 소식을 전하러 발걸음을 활기차게 가는 것을 오해해서 안 겪어도 되는 슬픔을 겪는 거 아닌가요? 그 모든 걱정 근심을 껴안고 사는 우리지만 사실 대부분이 피할 수 있는 마음고생이고 대부분이 안 해도 되는 근심·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숙하다는 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눅 24:1-4)


어릴 때부터 예수님 믿은 사람들의 특징이 너무 익숙한 거에요. 아무 저항감 없이 통과. 이 구절이 문제라는 것은 믿으세요?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근심할 거리입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이 본문에서 마리아와 여인이 너무 근심하고 너무 당황하고 슬퍼하니깐 빈 무덤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부여하느냐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 24:6)


여인들이 무엇을 놓쳤습니까? 감이 오십니까? 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있으시다. 이것이야말로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렇게 그냥 한 인간으로 죽고 끝났다. 그래서 시신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여인이 통곡할 이야기 아닙니까? 천사들이 주는 메시지. 갈릴리에 어떻게 말했나 기억해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 24:7)


주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는데 시신이 그대로 있다. 이것은 속은 것밖에 더 되냐고요. 마리아와 성숙한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할렐루야를 외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근심하는 것입니다. 왜 근심하나요?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이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 24:6)


기억 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코로나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허락한 인원이 차도록 은혜를 받는데 믿음이 결정적으로 필요할 때 까먹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희 가정에도 그런 일을 겪었지 않습니까? 아내가 갑자기 건강을 잃었습니다. 세포가 모든 세포에 엄습해올 때 부활한 예수님이 와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때에 까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어떻게 약속했는지 기억해라.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눅 24:8)


여러분 여인들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게 된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 신비로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슬펐거든요. 두 슬픔 가득한 두 제자가 슬픔을 거두어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저에게도 임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위기를 느끼는 것은 저를 꾸짖는 사람이 없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계셨을 때는 화요일 오후에 전화가 오세요. 네 설교 잘 듣고 있다. 그러면 내 멋대로 할 수 있습니까?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슬픈 것이 꾸짖을 사람이 없구나. 젊은 사람들이 불쌍해요. 어른들도 대접을 못 받아서 마음이 아프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이 마음이 아파요. 여러분 지난 1년 되돌아보셔서 누군가 여러분을 꾸짖어 주는 사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6-27)


두 혼란을 잠재운 것도, 주님이 못 자국을 보여주시고, 신비로운 무엇을 보여주셔서가 아니에요. 말씀이에요. 한국교회가 진짜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말씀으로 들어가야 해요. 한국교회는 교회, 교회마다, 목사의 영향력이 너무 큰 이게 진짜 위험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종교개혁을 왜 합니까? 말씀의 권위보다 교황이, 회개를 직접 못하는 것을 깨트리기 위해서 오직 말씀을 위해서 아닙니까?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할 때라고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이 너무 많이 변질한 것. 성도들이 말씀을 안 읽어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 상태. 어떻게 하시려고 성경을 그렇게 안 읽으세요. 이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30분 떠드는 게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주야장천 설교 듣는데 쓰는 시간을 성경을 펴세요. 그 혼란을 잠재우는 것도 말씀으로 설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었고, 빈 무덤을 보고 절망하는 여인을 회복시켜준 결정적인 동력도 말씀이 기억이 나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가 가슴 쓸어내리는 놀랄 일. 아픈 일도 많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많은 수많은 상황에서 기억날 말씀이 없는 것은 어떻합니까? 무슨 목사밖에 보이지 않고. 이것이 종교 개혁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목숨 걸고 종교 개혁한 것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저희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침에 성경을 읽지 않으면 밥도 안 주었습니다. 쥐꼬리만 한 용돈 몇 원씩 쥐여주면서 성경 한 절씩 암송해야 줄 거야. 이것을 자식들에게 전수해야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으니깐. 오늘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나이키를 산다고 됩니까?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 인생에 SFC 소중한 단체. 학생 신앙운동. 고맙게도 중등부, 고등부 예배 때마다가 강령을 외우게 하는데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이렇게 가르쳐준 선교단체에 시간이 갈수록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이에요. 저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새벽에 일어난 이야기를 계속하는지 아십니까? 어제 번아웃 된 제가 이른 새벽에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대면할 때 새벽의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라. 지쳤는데 금방 회복되게 만들고, 금방 의욕이 살아나게 하고, 1만 성도 파송운동, 가평우리마을, 드림센터 환원 운동 무거운 문제를 감당하게 하는 것. 새벽에 신선할 때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부모들이 먼저 말씀의 능력을 실감 못 하고 하니깐. 어떤 가정에 믿음이 되게 좋은 여집사님이 계섰나봅니다. 남편이 믿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부인이 너무 아파서 교회를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걱정이 되어서 여보 혼자 예배를 보러 가더라도 목사님 말씀 집중해야 한다고 해요. 예배 마치고 나면 말씀을 요약해서 들려주세요. 신신당부하는데 남편이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다 해서 드렸습니다. 득달같이 아내가 말씀이 어땠느냐고 하니깐. 아내를 부둥켜 안는 것입니다. 이게 결혼하고 처음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말씀을 드렸느냐고 했는데 오늘 목사님의 말씀 주제가 원수를 사랑하라였어. 웃길려고 만든 이야기겠죠?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까? 저는 웃기려고 드리는 말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격이 달라지고 이혼하려는 가정은 수백 가정이 넘을껄요. 이혼한 가정도 특별 새벽기도에 재결합식을 인도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4-27)


맨날 흔들거리며 불안하는 인생은, 들려진 인생에 순종하며 나가느냐 그렇지 않으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상태 아닙니까? 그러헥 해서 혼란에 빠진 제자들을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니깐, 말씀으로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마음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매 예배 때마다 성령님이 저와 굳어진 마음이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2. 방향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눅 24:33)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눅 24:29)


지금 상황이 밤이거든요. 주님보고 주무시고 가라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니 바로 유턴, 더이상 엠마오로 갈 일이 없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계속 엠마오로 갔다. 이것은 코미디 아닙니까? 이 코미디가 매 예배 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받고 화장실 가서 눈물 콧물 훔치고, 그 설교 동영상으로 들으라고 전하고 자기는 엠마오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모습 아닙니까? 저는 요즘에 토니 와그니 교육 전문가의 말을 메모합니다.


세상은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이 아는 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잘못 가던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해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 24:35)


말씀으로 뜨겁게 변화시켰다. 이것을 전할 할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는 할 일이 생긴자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제가 지난 월요일날 엠마오 마을로. 금요일까지 슬프게했다고 말했잖아요. 어제 토요일이에요. 이제 이 찬양이 슬프지 않고 너무 감격과 기쁨으로 바뀌는 놀라운 것을 어제 경험했습니다. 제 가사에 중심이 틀렸더라고요. 앞 부분에 나온 두 번씩 나온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있을 때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이 찬양은 앞쪽에 무게를 두고 만든 찬양이 아니라 절망과 공포로 잠겨있을 때. 끝없는 슬픔이 있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다.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최근에 팀켈러의 부활을 읽다 책이 나왔늗네 부제가 '인생 단 하나의 희망,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03월 2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피해야 할 영적 지뢰밭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 4:10-20)


씨 뿌리는 비유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뿌려진 씨의 문제가 아니라 땅의 수용성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께서 뿌려주시는 말씀의 씨았은 생명력이 있기에 제대로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성장과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야 할 포인트가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 4:8)


'더러는'입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가시떨기와 같아서, 가시 떨기의 기운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런 말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지뢰밭이다. 지뢰를 피해야 한다. 우리 말로 삼천포로 빠졌다. 상징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다가 예수님의 목적이 네 번째에 등장하고요. 돌 밭에 떨어지고 가시 떨기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은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야 하는데 삼천포로 샌 것입니다. 특히나 신앙생활에 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느냐?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시 140:5)


누군가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기 위해서 올무를 두고 삼천포로 빠지도록. 어느 날 보니 옆길로 새버린 것입니다. 좋은 땅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것이 오늘 다루고 싶은 큰 주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우리가 피해야 하는 세 종류의 땅을 보려고 합니다.



피해야할 종류의 땅: 길가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막 4:3-4)


사람들에게 밟혀서 땅이 굳어진 상태입니다.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들이 밭을 막 갈아엎는 것은 부드러워야 씨가 스며들 수 있는데. 길가는 마음이 굳어져 버린 상태. 마음이 굳어져서 그 마음에 접수가 안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일부 서기관 바리새인의 마음 상태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들려주시는 데요. 사람들이 가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포함해서 찾아와서 예수님 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까?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막 4:11-12)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씀인데요. 예수님이 인용하시는 구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6장 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9)


배경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타락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2)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 1:5-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설명해야 했는지 말씀에 답을 주면서 이사가 1:9 말씀을 주는 포인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로 보아도 들리는 들어도 깨었지 못하게 하시는 그것을 인용하셨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굳어진 상태에 빠진 사람이 많은지 그게 바로 딱딱해진 길가의 상태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서기관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이 너무 두려워요. 오래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이래 저라 마음에 상처가 있잖아요.


담임 목사로서 은행을 조심합니다. 제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분과 저의 관계의 소중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담임 목사와 오해가 생기면 말씀에 마음이 닫힙니다. 저는 성도님들과 농담도 잘 안 합니다. 농담했다가 오해받으면 안되니깐요. 오래 예수님 믿은 성도님들이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다면 오늘 성령님이 치유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돌가에 뿌려진 씨처럼 마음이 닫혀버리는 이링 생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이유가 어찌 되었든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막 4:15)


굳어진 마음은 사단의 놀이터가 됩니다. 이것이 길가라는 지뢰밭입니다.



피해야 할 세 종류의 땅 2. 돌밭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막 4:16)


앞에서 설명해 드린 길가다 마음이 딱딱해진 상태라면 돌밭은 얕음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도 들었습니다.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얕은 것입니다. 청년들이 찬양집회 하고 손을 들으면 좋은데요. 그다음 말씀이 없으면 위험합니다. 감정저긍로 신앙이 흐르면 위험합니다. 시간이 좀 된 옛날이야기인데요. 모 신문부 종교부 기자와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종교 부 기자이니깐 여러 종교 지도자를 만나고 대담하는 데요. 통화 중에 무슨 말을 하셨느냐면 천주교 지도자님과 인터뷰를 하고 불교 지도자와 대화를 나누고 개신교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딱 세 지도자와 해보니깐 개신교 목사님 대화가 질이 낮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기억이 납니다. 그분이 누구와 대화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사님의 대화 수준이 낮다고 모두가 낮은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는 깊지 못하다는 것이 이미지화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세계적인 추세가 얕음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책이 넓고 앝은 지식입니다. 대놓고 얕은 지식을 광고합니다. 얕음이 흠이 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기사의 사회학과 교수님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얕은 지식이 메력적인 시대이다. 사단이 청년들, 청소년들을 공격하는 것 중 하나가 아이들을 얕음으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서 이 시대가 우려스럽습니다. 얕음. 청년들은 대부분 유튜브 영상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들렸고, 5분 넘기면 안듣는다. 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게 즉석 해서 얕음 얕음 살아가고 있기에 19세기 사상가 월던 이라는 책을 주목합니다. 하버드 대학을 나왔는데 다른 동기 졸업생과 다른 길을 갑니다. 땀 흘리며 얻는 노동의 소중함에 집중합니다. 월든 호숫가 숲에 들어가 오두막을 직접 짓습니다. 헬리 데이빗 소로우와 관련해서 월던에 있던 3개의 의자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내 오두막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한 의자이다.


너무나 분주하게 살아가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 수 없는 현대인이기에 저와 여러분이 3개의 의자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고독의 의자. 홀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만든 것입니다. 왜 하버드를 나와서 2년 2개월 동안 홀로 머무는 의자를 만들었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의자. 마지막 하나는 세상을 향해 열린 의자. 이것은 은둔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소통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내면이 바로 서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세 가지 의자가 있습니까? 우리는 의자 하나 더 마련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한 의자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하나님과 말씀을 묵상하는 의자가 있습니까? 네 개의 의자. 속도에서 깊이로 책이 있습니다. 나만의 월든 존을 만들어라. 아무리 헬리 데이빗 소로우가 수픙로 간 것이 부러워도 우리는 따라할 수 없습니다. 누가 2년 2개월동안 숲 속으로 들어가서 묵상하며 지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은혜받고 2년 2개월 강원도로 가면 되겠습니까? 확 던지고 못하니깐 일상 속에서 월든 존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13평 아파트 사는 순장님이 화장실을 하나님 말씀 묵상하는 곳으로 정했다. 이것이 월든 존인 것입니다. 제가 새벽을 깨우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것 아닙니까? 새벽에는 저를 아무도 안 찾습니다. 전화도 안 오고요. 하나님을 묵상하는 의자를 만듭니까? 휴대전화기를 안 봐도 되는 상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저는 목회하는 가운데 성도님 목회하는 것은 안 힘듭니다. 제가 늘 괴로워하는 것은 목사가 어떻게 깊지 못한가? 이것이 제가 한탄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풍성하신데 나는 이렇게 얕을 수밖에 없는가? 제가 새벽에 일어나서 이찬수 목사를 세계적인 목사로 만들어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 제가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새벽은요 주님을 독대하는 가슴 벅찬 시간이기도 하지만 저의 얕음이 고발되고 따뜻해지는 시간입니다. 새벽을 묵상하면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잘한다고 하는데 지적을 하는 게 어떻게 이렇게 얕을 수밖에 없나. 여러분은 괜찮으십니까? 여러분은 자신만만하십니까? 개신교는 얕은 종교야. 개신교 목사님들은 장사꾼 같아. 이런 것은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우리가 성령님조차 도 얕디얕은 기능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령님은 너무나 깊으신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해서 예수님 믿는 저 사람 깊어. 말 한마디 해도 먼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보내는 카톡 한 줄을 보아도 깊어. 우리 앞에 가로막힌 지뢰밭 얕아.



피해야할 땅.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막 4:19)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태복음의 부자청년입니다. 예수님께와서 내가 뭘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명하지마라 계정을 잘 지켜라 했더니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


예수님께서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 10:21)


바로 청년이 반응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가슴이 뜨거운데 세상의 욕심, 탐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참 이것이 비극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제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목사가 되어서 포장은 잘하는데 네 욕심이 너무 많이 들어있다. 탐심이 많으면 망할 줄 알아라. 많이 듣습니다. 내 교회 잘되는 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코로나 시기가 되어서 설교 조회 수가 늘어나는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싸울 무기로 준 것이 1만 성도 파송 운동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내면에 도사린 가시떨기. 내 영이 성장을 못하는 게 어떻게 방치합니까? 재물을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시고. 가평 우리 마을에도 헌금하시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2:15-16)


성령님 앞에 늘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탐심을 내려놓으려고. 이제 여러분. 4월 1일 주일부터 실질적인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스타트 되는 것이 아닙니까? 지지난 주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지난주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29의 교회가 좋은 밭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그 목사님도 세월이 갈수록 성장하고 그 성도님도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 상상만 해도 아름다우니깐요. 한분 한분이 모두 순수하세요. 말씀도 잘 전합니다. 제가 스타트를 앞두고 심란하니 수시로 잔소리 합니다. 더 깊어져야 한다. 더 성장해야 한다.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인데 제가 잔소리합니다. 그러나 수용력입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29 목사님과 제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이미 금욕이라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순수하기에. 더불어 함께 성장하는 이런 꿈 꾸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가 고난 주간인데 잠을 못 이루는 것은 다락방 때문입니다. 어떤 다락방은 통곡했다고 합니다. 게시판에 어떤 글을 올렸는데 기가 막혀요. 10명인데 8교구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눈물로 수용하고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 너무 감사해서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부터 하실일은 이 일은 십자가로 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우리 고난 주간도간 십자가 앞으로. 우리가 자꾸 얕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기독교 교회가 욕심이 많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그저 십자가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데로 설교를 짧게 하고 온 가족이 같이 모여 서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 딸을 칭찬해주고, 매일매일 묵상 거리를. 카카오톡에 매일 자료를 팀에서 보내준다고 하니깐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굳어진 길가와 같은 마음을 깨트려주기를 원합니다. 이 얕은 초라함을 불쌍히 보여서 성령님. 깊은 말씀을 담을 수 있도록.



03월 2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말씀 안에 있는 생명력을 누리자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1-9)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려고 하는데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쪼아 먹어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해에 타버렸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에 막히어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간단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깊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담겨 있는지 한 주 만에 못 다룹니다. 이번 주 다음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씨 뿌리는 비유에 관한 두 가지 전재를 가져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특징은 땅의 수용성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하나님이 주도하심입니다. 인간의 어떠함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도 하심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땅의 수용성입니다. 말씀을 받은 인간의 마음 상태. 농부가 똑같은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자랄 수 있는지 없는지. 이것은 땅의 수용성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이 경험하는 그 상황으로 분석해보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선포합니다. 네 군데 똑같은 씨를 뿌리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제자로 따르는 것입니다. 똑같은 씨가 뿌려져도 지난주 살펴본 서기관 같은 부류가 그렇지 않습니까? 분노가 생기고 화가 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의 차이는 땅의 수용성의 문제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전재는 씨앗의 생명력의 문제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막 4:8)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엄청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니깐 오늘도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이 좋다면 이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은 씨았의 생명력의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사렛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선입관을 갖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땠는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마 6:5)


최근에 딸과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평점이 좋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시작하고 10분 눈이 감겨서 푹 잠을 잤습니다. 너무 허탈해서 영화를 본 거야 안 본 거야.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컨디션이 아니라면, 영화 볼 기분이 아니라면 안 가는 게 좋습니다. 제가 아주 좋은 주옥같은 영화는 컨디션 좋을 때 가야 하는구나. 오늘 비유에 나온 원리와 비슷합니다. 땅의 수용성을 생각한다면 기억해야 할 말씀이 호세아 10장 12절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씨뿌리는 비유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은 말씀을 듣는 태도와 연관된 말씀을 줍니다. 들으라로 시작합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말씀의 시작도 들으라. 마치는 말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로 끝납니다. 주님이 잘 설명해 주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말씀 듣는 태도가 말씀이 갖는 생명력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말씀 안에 있는 생명력을 누리자.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대요. 모든 성도님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생명력을 마음껏 누리면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 아닙니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날마다 가뭄에 있는 식물처럼 시들하고 비틀거리고 너무나 메말라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사도바울이 너무 잘 알기에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사도바울하고 저하고 무게감을 비교하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사도바울의 심정이 저의 심정입니다. 너비와 깊이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말미암아 충만하고 풍성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성도님과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구현되기 위해서 말씀 안에 있는 생명력을 누려 하는데 말씀 안에 있는 생명력을 누리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마음 안에 새겨지고 말씀 안의 생명력을 누리는 성도님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에 대한 건강한 수용성의 회복


앞에서도 강조했습니다만 씨뿌리는 비유는 말씀을 듣는 태도를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4:14)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4:20)


말씀을 듣고 받아, 이것이 건강한 수용성 아닙니까?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4)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막 4:15)


저는 이 말씀이 진짜 저를 두렵게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면 이것이 사탄 우리의 영혼을 내어주는 것과 같은 무섭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학교를 빌려서 써보니깐, 자기 건물이 없다 보니, 친선 탁구대회 같은 것을 안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내성적이어서 넓은 교제의 폭이 없어서 약간 외롭기도 하고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해 갈급함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 밭이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말씀의 심령은 진공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땅의 수용성. 어떻게 하든지 말씀이 자리 잡기를 원합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니 시청각으로 하나님께서 찬양을 들려주십니다.


전는앟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없네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아무도 이길 자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 다음 가사를 놓치면 안됩니다.
주의 말씀 의지하며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 없네


저는 청소년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 거부감이 없습니다. 중간에 가사를 불러드리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저의 배려 아닙니까? 이 말씀이 생명력이 있어 시들시들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능력이 있음을 이론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시길 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불철주야 담임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말씀을 잘 전하고 모든 교역자가 동원되어서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 말씀 안에 생명력을 누리기 위한 조건입니다.



말씀을 통한 성장과 열매를 추구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 4:8)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씨앗을 심는 분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정책 두 가지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데요.


(1) 하나님은 작고 미천한 씨앗으로 출발하심


우리 인간은 금옥을 심는 이미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앗을 심습니다. 성경을 보면 씨앗으로 비유하지 않습니까?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세상의 영향을 받아 금옥을 심는 이미지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부터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당회에서 의논하기 시작할 때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부교 역자 15분, 외부의 좋은 분들 15분 정도 오시면 조화가 잘 이루어지겠다고 의논하는데 제 마음에 40대 중 후반의 담임 목회 잘하는 유능한 목사님 15분 스카우트 하겠다. 제가 마당발 아닙니까? 15분 모으는 거 이번 한 주 만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 마음을 교정시켜 주셨습니다. 담임 목사 중에서 모신 것이 아니라 부 교역자 중에서 15분을 초빙한 것입니다. 왜 담임목사를 모시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면 그 교회는 어떡합니까? 담임 목사님과 함께 성장하는 교회를 스카우트하면 우리 교회 잘되자고 남의 교회 흔들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남이 키운 것을 가져다가 쓰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맞지 않습니다. 나이가 젊고 큰 목회 경험이 없더라도 저와 모든 성도님이 잘 섬기면 그분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섬기면 신나는 것 아닙니까? 내년에 출발하게 될 1만 성도 파송 운동은 금옥이 와서 성도님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성장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도 성장하고 성도님도 같이 성장하니깐 너무 기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미지이니깐요. 이게 발에 땅을 딛고 살다 보니 퀘스천 마크가 생기는 것입니다. 알려지고 목회 잘하는 분을 모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밑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깁니다. 바로 이틀 전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데요. 1만 성도 파송운동 3차 설명회를 녹화하기로 하고 4월 첫주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딱 당일이에요. 금요일에 외부 15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사정이 생긴 것입니다. 금요일에 당황스러움이 말로 다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생겼습니다. 어디 없나 꿰맞추고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는 게 옳은가? 이틀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신 줄 아십니다. 29로 가기로 했습니다. 이틀 전 일입니다. 마음에 퀘스천 마크가 생기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들 중에서 모셨다면 이런 일이 안생길까? 부목사님에서 청빙을 하기로 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함께 기도하면서 목사님들이 세워져 가도록, 모두 순수하세요. 잠재력이 제 눈에 보입니다. 4월 첫주부터 여러분이 경험하게 될 교구 목사님들. 주님 이름으로 같이 성장하겠다고 꿈을 꾸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2) 하나님은 비효율적으로 일하시는 분


비효율을 쓰고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들인 노력에 비해서 얻은 노력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 비효율이라고 합니다. 산술적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농부 되시는 주님께서 길가나 덤불과 좋은 땅, 결실을 본 것. 25%밖에 안됩니다. 들인 노력에 비해서 얻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지 않습니까? 영혼에 무게가 있으므로. 제가 이것을 깨닫고 길가다가 울었습니다. 지난 한주는 일만 성도 파송 운동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자꾸 걱정이 찾아오고, 또 하나님의 일하심에 기대하니 없던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진짜 괴롭더라고요. 제 아내도 힘들었습니다. 계속 가슴이 뛰니깐. 내일 스케줄을 보면 강행군인데. 서재에 있다가 이래서 안된다 해서 이미 잠든 귀한 분을 깨울까 봐 조심조심 더듬거리면서 누웠는데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니 답답해 죽겠더라고요. 15분 뒤에 조심조심 나와서 서재에 앉아있다가 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아침에 보니 다 알고 있더라고요. 이런 괴로운 밤을 보내는 어느 아침인데요. 몸은 좀 피곤하고. 이제 좀 걸어가야겠다 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오전 내내 괜찮았다가 또 울컥하고. 어느 지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비효율 때문에 돌밭, 가시밭에 떨어지는 일을 하셨기에 강팍한 내 심령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저를 구원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비효율, 하나님의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 은혜였구나. 머리에 돌아가는 생각.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이미지는 돌밭을 옥토로 바꾸어주시는 이미지가 생각나니 십자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를 건져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은혜를 받았던 내가. 더 효율적인 부목사님, 더 효율적인 장로를 만나야겠다. 이것이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효율적으로 잘나고 똑똑하고. 이런 사람만을 모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너무 고집덩어리이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들. 하나님의 비효율이.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선포되고 5부 예배가 끝나면 29교구 지역과 담당 목사님 이름이 오픈될 것입니다. 제비뽑기로 지역을 결정하였습니다. 지역 하나하나를 놓고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기도하며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큰 교회가 갈라먹기 하듯이 500, 500 이런 것은 절대 안 된다. 비슷한 원리가 두 번째 원리인데요. 성도님들이 계시는 그 자리로 찾아가자. 이것은 효율로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김포 지역을 심방을 갔는데 아시잖아요. 막히면 2시간 3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거기에 놀랍게도 다락방 몇 개가 있습니다. 한 분의 말씀이 귀에 쟁쟁쟁 꺼리는 것입니다. 목사님 교회가 너무 멀어요. 이쪽 지역에 개척교회 세워주세요. 1교구가 김포지역입니다. 제비뽑기해서 그 먼 김포지역 우리 교회 출신의 목사님이시거든요. 너무 은혜를 받습니다. 요 가까운 지역에 배정되면 성도의 수가 당연히 많죠. 적은 숫자로 배정받은 목사님이 지난 금요일에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지역에 대한 소망이 생긴다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입니다. 지역으로 범위를 정했지만 2학기 들어가면 장소를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같이 기도하며 결의하는 것은 이제 그 지역의 작은 교회들, 미자립 교회들에 하나님 이름으로 같이 협력하는 방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표하지 말자. 우리의 각오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지역 가서 어느 교회가 성도들을 다 쓸어가는 논리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 함께 씨가 자라고. 그것이 구현되리라고 믿습니다. 말씀으로 이렇게 마무리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님들은 분리 개척교회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말에 하시면 됩니다. 동네 작은 교회로 가셔도 됩니다. 지금은 누리실 때입니다. 29명의 젊은 목사님들을 보면서 좋은 밭에 던져진 그래서 함께 성장해가고, 갈수록 풍성한 은혜가 세워져 가고. 29개로 분리하는 것이 저와 성도님들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세들이 깃들고 지친 자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29 교회, 분당우리교회,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월 1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무한 신뢰가 가진 힘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3)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1-35)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의 연장입니다. 세트로 묶어서 같이 읽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종류의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1. 악한 서기관들의 공격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 3:22)


예수님이 엄청나고 놀라운 일을 모함하고 있습니다. 이것까지는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이고요, 오늘 살펴볼 다른 공격은 예수님의 친족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공격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막 3:21)


사실 예수님의 친족들이 악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있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공격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들의 잘못은 서기관의 거짓 소문에만 마음을 담고 예수님을 오해하는 실수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친족들 잘못에 대해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1.얇은 귀 =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


자꾸 예수님에 대하여 귀신 들렸다 헛소문이 떠돌고 있을 때 귀가 얇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여서 쉬게 해 드려야 한다. 이런 선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강권해서 모시고 가려고 친족들이 왔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도했지만, 그들이 갖은 치명적인 문제는 악한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4)


예수님의 친족들은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아이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4)


누가 막 교회가 어쩌니 권사님이 어쩌니 하면 거기에 솔깃하고. 악한 것은 아니지만 미숙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


비록 예수님을 잘 섬겨 보자는 선한 의도로 했다고 하더라도 지난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그들을 붙들고 나오니 라는 표현이 얼마나 강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태도. 사실 오늘 본문의 구절을 샌드위치 구조라고 합니다. 이 본문의 구조가 지난주 살펴본 마가복음 3장 20절 21절 예수님의 친족에 대해서 기록을 하다가 22~30절 악한 서기관과 거기에 응수하는 예수님이었다가 다시 예수님의 친족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에 가끔 센드위치 구조가 나옵니다. 서기관의 악한 모함이나 잘못된, 미숙함으로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는 사건의 뿌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저를 괭장히 긴장되게 합니다. 저는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공격한 적은 없지만 잘한다고 하는데 제가 미숙하면 예수님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모드가 이것을 긴장해서 들어야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친족들은 미숙한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1-35)


친족들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고 민망한 이야기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선언은 신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선언입니다. 선언이 있었기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더라도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 가족이 다 미국에 있는데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피를 나눈 형제나 오늘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님이나 사랑의 무게감에서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해졌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묶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 가족 공동체의 특징을 설명해 드릴 것인데 잘 정리하면 교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나아질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특징


1. 예수님을 무한 신뢰하는 공동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은 2주 3주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쭉 말씀하고 마지막에 정리하시면서 반석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말씀하시며 행하는 자라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강조되는 말씀 모두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정리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땀 흘리는 것도 봉사라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첫 번째 특징,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무한 신뢰하는 태도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마어마한 힘을 줍니다. 저는 매일 그 힘을 매일 누리고 살아갑니다. 종종 인용하는 12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합니다. 울고불고 성경에 보면 밤새도록 통곡을 합니다. 오죽하면 종살이로 돌아가자 죽는 것보다 괜찮지 않냐,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 신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낙담할 때에 신뢰를 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을 만 1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청소년 사역을 그만두면서 하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찾아 먹을 기쁨은 아이들에게 찾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제 기쁨을 우래서가 아니라 진짜 은혜를 갚으면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기도할 정도로 저에게 황홀한 기쁨입니다. 제 기쁨이 지속합니다. 이제 1만 성도 파송운동도 2주 뒤면 30개의 교회, 1년 뒤에는 독립적으로 갑니다. 마음이 여러 가지로 복잡한 것이 아닙니까? 심신이 지치고 그랬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청소년 사역할 때 썼든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청소년 사역할 때 고등학생이었던 제 제자가 편지를 보내주었습니다. 본인이 썼는지 베꼈는지 잘 모르지만, 책에서 언급한 것을 보였습니다. 시 내용이 이렇습니다.


천 년에 한번 우는 새가 있습니다.

그 새의 눈물이 모여 바다를 이룰 때까지


이게 과장이 엄청나게 심하지 않습니까? 천 년에 한번 새가 우는데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고 하면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저의 영원한 스승님이십니다.

그 바다가 마를 때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지쳐있으니깐 20 몇 년에 받았던 편지에 나온 내용 같은데 저를 너무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다짐을 합니다. 이렇게까지 나를 믿는 성도님들을 실망하게 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지.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짐합니다. 나도 내 주님께 이런 무한 신뢰의 신앙 고백을 드려야겠다. 다짐하고 문장을 바꾸어 읽기도 하고 묵상을 합니다. 무한 신뢰를 고백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천 년에 한번 우는 새가 있습니다.

그 새의 눈물이 모여 바다를 이룰 때까지

주님은 저의 영원한 스승님이십니다.

그 바다가 마를 때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


어떨 때는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돕니다. 뭐가 하나님의 일인가요? 이 땅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를 많이 하다가 이것을 놓친 분들은 하던 봉사를 다 멈추어야 합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이런 마음을 갖은 사람이 모여 이룬 공동체가 하나님의 새 가족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2. 묵묵히 일하는 자의 가치를 인정받는 공동체


오늘 본문을 읽다가 감동이 되는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1-32)


옥한흠 목사님의 어머니를 옥 목사님이 모시고 사셨습니다. 연로하신 옥 목사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걸음걸이에 자부심과 긍지가 있습니다. 저것을 볼 때마다 부러웠습니다. 우리 엄마 생각이 나기도 하고요. 오늘 상황이 그 상황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모였는데 그 처지에서 볼 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하니깐 얼마나 부러운 것입니까? 그런 상황인데 아마 저 같은 상황에서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형제들이 부러워하는데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3-34)


그 감격을 말로 다할 수 없겠습니다. 묵묵히 일하는 자의 가치를 인정받는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분주하게 사람들을 고치고 돌보느라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 없이 일하셨다고 하는데 둘러앉은 자들이 예수님을 섬기고 수종들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나온 사람들은 무명입니다.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주인공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운 공동체의 주인 되신 주님은 이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내내 언성히어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는 인간적으로 볼 때 보잘것 없는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제 모교회의 이름이 성 밖 교회입니다. 이름을 서 교회를 중학교 때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제 모 교회를 서교회보다 성 밖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부르면 언성히어로 어른들이 너무 많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 가난하던 60년대, 70년대 최태규 장로님은 엄청난 부자로 기억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시절에 부자면 얼마나 부자였겠습니까? 그 가난한 사람들이 득실하던 곳에서 어느 성도가 너무 급해서 돈 빌려 달라고 할 때 장로님이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언성히어로, 누가 지나간 어른을 기억하겠습니까만 이런 분들의 귀함을 인정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당우리교회 초기 개척에 너무 마음이 아팠던 것이 교회를 위하여 온 정성을 다 바치었던 것이 교회에서 모함을 당한 것이, 상처를 받고 쫓겨난 분들이 너무 많이 오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분의 눈물을 닦아주십니까? 주님이 하십니다. 이들이 내 형제라고,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는 이름도, 빛도 없이 눈물로 헌신하는 가치를 인정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3. 먼저 주시는 사랑을 공급받는 공동체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3-34)


주님께서 먼저 저를 사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먼저 사랑을 공급받은 것을 가지고 오늘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소설을 잘 안 읽습니다. 15분 있다가 회의 가야 하고 그래서 잘 안 읽습니다. 최근에 어떤 책에서 추천받아서 소설을 읽습니다. 그 소설 3040p밖에 못 읽었지만 주옥같은 부분은 다 얻었습니다. '사랑의 생애'입니다.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올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들어와서 자격을 갖춘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지 않으면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너무나 성경적인 가치관을 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과 이승우씨가 누군지 몰라서 검색해보니 신학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소설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진짜 하나님 가족 공동체로 살기 위해서 일을 많이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합니다. 소설가도 말합니다. 어느 순간 사랑이 내게 들어올 때 비로소 나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고쳐야할 문제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형제를 용서해야해. 되나요? 고갈되어 있는데, 먼저 주시는 그 사랑을 누리셔야 합니다. 부어주시는 폭포수를 다 마음을 가지고 용납하지 않은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를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 비운의 시간을 보낸 선지자압니다. 포로로 끌려간 초기만 해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갈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포로생활 11년에 조국의 멸망 소식을 듣습니다. 희망을 갖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에스겔 선지자가 계속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다시 재건된다. 왜 포로생활 하던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유독 에스겔만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7장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 성경 문지방에서 물이 흐릅니다. 그 물이 어디까지 차고 올라오냐면 점점 물이 풍성해지더니 무릎, 허리 그리고 이제는 건너지 못할 강이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차고 흘러서 도시를 넘어서 사막으로 흘러가, 사해 계곡으로 흘러가 온갖 식물과 동물로 가득한 살아있는 바다로 변하는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이 생명을 살리는 풍성함으로 보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물줄기의 출발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정으로 시작된 특징이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물줄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을 압축한 것이 아닌가요? 작은 물줄기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있다는 원리와 같은 것 아닙니까? 그 물줄기의 출발이 하나님이 계신 성정으로 출발 된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코로나19가 너무나 계속 지속되며 경제적인 어려움, 한국 교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는 여기저기 신음 소리가 들리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은혜의 물결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 소망, 환상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엘리야 선지자, 그 포악한 아합 왕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로가 오랜 가뭄으로 지속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 올라서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가뭄이 끝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7번 처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엘리야가 발견한 것은 시커먼 먹구름이 아닙닌다. 손바닥 만한 그룸입니다. 신경써서 안보면 보기 어려운 손바닥 만한 구름입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왕상 18:44)


올 연말에 30개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 저의 두려움이고 우리 성도님의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는 제 악한 뜻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 두려워합니다. 왜 교회를 나가야하나 마음이 두려움이 있는 성도님들에게 어마어마한 먹구름은 아니더라도 손 만한 작은 구름을 보여주시아니요. 하나님이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자격도 없는, 주목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우리지만 우리들의 섬김을 너무나 귀하게 바라사랑하셨는즉, 이 공동체의 주인이 되십니다.



03월 0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다른 길 가는 자의 외로움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2)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막 3:20-30)


인간이 경험하는 고독의 문제는 두 가지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1) 고립감. 제가 이민 생활을 끝내고 저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서울 생활이 낯설고, 저 혼자 한국에 떨어져 있을 때 고립감은 심각한 욀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2) 저는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전히 제가 가끔씩 느끼는 고독감은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이해받지 못할때 입니다. 한집에 한이불을 덮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공감받지 못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고독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대가지급 중에서 강력한 것은 고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에워싸지만 결국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우리는 겟세마나 동산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결국, 주님 혼자 아닙니까? 저는 이런 말씀을 묵상하면서 울컥울컥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이해받지 못한 고독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7)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쫓아내고 왕을 삼으소서 하던 그들이 주님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니 다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슬픔이 베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하며 마음에 슬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종류의 공격을 당합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 3:20)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 3:22)


지금 너무 많은 환자가 몰려오고 귀신을 쫓아내느라 육신이 정상적인 생활이 아닌데 예수님의 상황을 보고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행위를 한다고 합니다. 제가 19년 전 개척하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개척하던 해는 더는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수면이 23시간밖에 안되었고 집에서 옷 갈아입다가 쓰러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없습니다. 꿈을 가지고 달여가는 것은요. 제가 20대 초반 이민 갔을 때 조카 애들이 비디오 게임을 하는데 저도 재밌어서 누나 집에 갈 때마다 저도 게임을 했습니다. 속도를 내며 전속력으로 달리면 에너지가 저장됩니다. 그런데 벽에 부딪히면 에너지가 줄어듭니다. 저는 이 게임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일 열심히 하고 충성을 다한다고 소진되지 않습니다. 옆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고 모함하는 것이 에너지를 소진하게 만듭니다. 한 영혼을 온 마음을 다해서 섬기는 예수님이 서기관이 어떻게 악한 모함을 할 수 있습니까? 마귀의 힘으로 일한다는 것이 엄청난 상처 아닙니까? 이것보다 더 큰 상처는 무엇입니까? 가까운 친족들의 동조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막 3:21)


가장 가까운 친족들이 그 말을 믿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라는 단어는 체포 수준의 쎈 단어입니다. 저도 겪어봐서 알지만 말도 안 되는 이단성 교회들이 저에 대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성도님들이 믿는다는 것이 상처입니다. 이찬수 목사님이 친동성애자, 이념에 찌든 목사네라는 말을 들으면 진짜 낙심되는 말입니다.


설교 제목을 다른 길 가는 자의 외로움이라고 잡았는데 이런 것이 주님을 외롭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명자들이 반드시 치러야 할 고독 외로움에 대해서 묵상하였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다가 예전에 들었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나 봅니다. 목사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지니 상처가 되어서 우울증과 불면증이 왔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서 약을 먹자 않을 만큼이 되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은, 목사님이 말씀 한 구절을 보고 치료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6)


모든 성도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병이 생긴 게 아닌가. 사명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오해와 모함으로 군중 속의 고독.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모함하며 고독에 빠지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사명자의 자세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누가복음 6장 26절의 말씀이 치료의 말씀입니다. 저도 억울할 때마다 이 말씀을 봅니다. 잘 용납하고 수용하길 원합니다. 저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다른 길 가는 과정에서 고독, 외로움을 감당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물며 우리 같은 종에게 외로움과 고독이 찾아오면 잘 가고 있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문제가 있구나. 지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왕이 되소서 할때 휘둘리는 것 없으시고 말도 안되는 모함, 조롱을 하여도 낙심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감동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냉철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막 3:23)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흥분부터 합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갑니다. 말도 안 되는 인간으로 저를 매도하든지 그런 것에 영향받지 않고 주님의 스케줄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생.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보여주신 딱 중심을 잡고 가시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보여주는 모범, 기도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솥구쳐 오를때 기도가 그것을 막아주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왕 삼으소서 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2-23)


예수님은 홀로 기도의 자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매도당하는 슬픈 일이 있을 때 기도가 우리를 안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새벽을 고집하는지 여러분은 알지 않습니까? 새벽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육신을 같은 제가 견디지 못합니다. 새벽 2시에 눈이 떠졌는데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예수님처럼 너무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기도시간을 확보하세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전 세계가 요동하고 흔들리는 것, 상상을 초월하는 시기인데 그것에 놀아나지 않는 중심을 갖기를 원합니다. 다른 길 가는 자들이 치러 내야 할 고독, 외로움을 잘 견디어 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신 도구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서기관에 맞추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 3:22)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모함을, 가짜뉴스를 퍼트릴 수 있는가? 답을 찾았습니다. 기득권자의 본능입니다. 두 가지 양상을 뜹니다. (1) 자기 영역을 지켜야 하는 강박증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입니다. 다윗에 의해 자기의 자리가 흔들리지 않을지 걱정합니다. (2) 증오심. 내 영역을 흔들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입니다. 모든 인간 세계에 대해서 기득권이 갖는 본능이 이것입니다. 저도 기득권자가 되었습니다. 교육 전도사 때와 달라졌습니다. 지켜야지. 누가 치고 올라오는 부교 역자들, 제가 없는 얼굴까지 잘생기면 위협을 느끼고 견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제주도 가서 개척해라. 그래서 새벽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저열하고 비겁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저는 영국의 작가 조지 엘리어트가 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섯 가지 감옥에 갇혀 산다는 것입니다. (1) 자기 사랑의 감옥 (2) 근심의 감옥 (3) 과거에 빠져있는 회상의 감옥 (4) 질투의 감옥 (5) 증오심의 감옥. 자기 사랑의 감옥으로 시작해서 증오심으로 끝나는 것이 인상 깊습니다. 요즘은 자기 소리를 내고 자기 사랑의 극치의 시대입니다. 자기 사랑이 잘못된 사랑입니다. 서기관의 자기 사랑은 못 말리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거짓을 가지고 퍼트리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자기 사랑의 감옥에 빠진 것입니다. 인간이 경의 감을 잃는 순간이 불행입니다. 방치했더니 맨 마지막에 증오심의 감옥. 이런 증상이 있으면 늦이 않았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본문의 서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발견합니다.



(1) 편견에서 오는 '제멋대로의 판단'을 중지하기


최근에 마음이 흐르는 대로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책과 관련한 인터뷰를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똑똑한 의사들이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내 분야에서 전문가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의사들. 환자들이 대하면 99.9% 책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아주 가끔 책에 나오지 않는, 안 배운 증상을 갖는 환자가 찾아옵니다. 똑똑한 의사들은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환자들에게 내가 들어보니깐 당신은 별문제가 없는데 너무 예민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의사뿐만은 아니라 교사, 목사, 자동차 수리하시는 분, 컴퓨터 다루시는 분. 전부 다 이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서기관이 이러합니다. 서기관 수준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참 많이 모자라기에 주님께 배워야지 이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많은 것들이 제멋대로 아닙니까? 자기 생각과 다르다면 틀리다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책 1권 읽은 사람입니다. 모든 세상의 잣대를 자기가 읽은 책 한 권에 대입하니 나머지는 틀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편견에서 나오는 제멋대로의 판단. 정말 실력있는 목사는 자신이 무지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마귀가 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겸손히 무릎 꿇고 모르는 것이 많다고 인정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위험한 짓임을 자각하기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막 3:29-30)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성경을 읽을 때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서 모독하는 것이 큰 죄인지 경고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제임스 애드워드 교수님은 이 말씀은 그만큼 경계해야한다. 함부로 주님을 모독하면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제멋대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제가 위험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저에게 욕해도 용서받지 못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해서는 조심하셔야합니다.


제 스스로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서기관과 같이 잘못된 태도가 없는지. 결과적으로 주님을 방해하는 짓을 하지 않는지. 나는 소명자로서 받아야할 오해와 그로 인한 외로움을 나는 수용하고있는가? 다른 길을 걷는자들이 반드시 치루어야할 외로움과 고독을 나는 피하지 않는가? 예수를 잘 믿으면 낮은 단계의 고독은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낮은 단계의 고독이 해결된 대신에 무거운 차원의 고독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새벽마다 고독을 느낍니다. 다른 길 걷는 자의 고독함. 제가 고독을 피하면 성도님들이 고독이 갈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낮은 단계의 고독이 아닌 더 높은 단계, 사명자가 갖는 더 높은 고독의 단계로 가기를 원합니다.


지난주에 문화 심리학 책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유치해서 이야기를 해야하나 고민했다가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왁스 가수의 '화장을 고치고' 노래로 시작합니다. 뻔한 남녀 사랑 가사였습니다.


나같은 여자를 왜 사랑했는지 왜 떠나야 했는지

...

살다가 만나면 모질게 따지고 싶어

힘든 세상에 나 홀로 남겨두고 왜 연락 한번 없었느냐고


제 아내에 대한 감사가 확 몰려왔습니다. 떠나지도 않았으니깐요. 샥 지나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왜 사랑하셨는지. 대가 지불이 필요한 억울한 일을 감수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가슴이 뜨겁고 감사가 나오고 그랬는데 신비로운 감정을 경험했습니다. 너무 가슴이 져미어 오는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한마디 만들기 위해서 서기관의 모욕을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군인의 모욕을 견디지 않았으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뭉크 '절규' 그림도 있는데 '골고다' 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저것을 볼때마다 눈물을 지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있느데 사람들의 시선이 주님을 집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각 태도와 표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을 볼수 있다. 종교 생활의 겉모습은 있으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현대 신앙인의 고독처럼. 너무 마음이 죄송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고독하게 만든 원인은 저. 모든 신앙 생활을 한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십자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저, 여러분. 이것이 주님을 고독한 자리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아니면 마음이 막 져미어 오는 것입니다.



02월 2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미혹 당하지 않을 만큼의 성장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막 3:19)


16절로 베드롤르 보았으며 17절을 보고 야고보 요한, 18절을 보고 안드레를 보았습니다. 절 구분은 저자인 마가가 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서 편의상 갈라놓은 장과 절이지만 절따라 말씀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씀을 나누니 거기에 처한 은혜가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2천 년이 지난 지금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것이 부정적인 유명함입니다. 수치와 불명예를 꼬리표로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가롯 유다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롯 유다에 대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장이 멈춘 사람. 성장이 멈추어 미숙했기에 마귀에게 생각을 뺏긴 사람. 조금만 더 늘리면 성장이 멈추어 미숙했던 그가 미숙함으로 마귀에게 마음이 뺏겨 예수님을 팔아버린 사람. 이렇게 요약을 하면 딱 맞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나쁘기도 하지만 미숙함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4)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2)


저는 이런 내용을 묵상하다가 가롯 유다는 어떻하다가 성장이 멈추었는가? 질문을 던지었습니다. 세 가지로 성장이 멈춘 이유를 분석하게 되었습니다.



1. 자기가 설정해 둔 낮은 단계의 꿈에 집착했기 때문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첫 번째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가롯 유다 내면의 탐심 때문입니다. 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환멸을 느끼게 되었는가? 예수님과 가깝게 있었는데 그랬나? 자기의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보니깐 예수라는 분이 고통 속에 있는 자기 민족을 로마로부터 구원해낼 그런 지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실망입니다. 군사를 모으고 힘을 모으고 카리스마를 가져야 하는데 계속 예수님은 약한 말, 실망스러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해라. 이래서 어떻게 로마를 이깁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고 대중이 열광할 때 예수님은 슬그머니 나가서 산으로 갔습니다. 가롯 유다의 성장이 멈춘 이유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장이 멈춘 이유와 같습니다. 좁디좁은 피조물 인간의 생각, 꿈을 큰 그림을 그려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좁디좁은 자기 생각에 주님을 끼워 넣으려고 하니깐 마음에 환멸밖에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야 좁음의 문제, 자기 민족의 해방의 꿈을 꾼다. 어떻게 나쁜 꿈입니까? 교회가 분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예외 없이 조각품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8-9)


맨날 주변 사람에 대해서 울분을 터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신뢰를 안 갖는다면 가롯 유다는 딱 여기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2. 약점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 12:4-6)


제가 몇 주전에 예수님은 약점을 보완해주신다고 하셨는데 마귀는 약점으로 무너트린다는 것을 아셔샤합니다. 가롯 유다는 돈에 약합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6:14-15)


가롯 유다 역활론이라는 황당한 말을 하는데 성경은 돈 때문에 넘겨준다는 말을 성경은 분명히 합니다.


베드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뻥뻥 큰소리를 쳐놓고 그에 대한 아무 대비도 안 하는 허술한 면을 보여주는데 정확히 그것을 가지고 공격을 합니다. 마귀는 얼마나 고단수 전략적인데요. 약한 부분을 방치하면 그것 때문에 무너집니다. 건강을 다치는 분을 보세요. 온몸이 건강해서 펄펄 뛰는데 한 곳이 무너지면 그것 때문에 건강이 상합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삼손을 찾아보세요. 성경에 등장하면서 여자를 밝힙니다. 이방인이고 누구고 상관없어합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눈이 뽑히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점이 있습니까? 다락방에서 집사님 다 좋은데 이 부분을 위해서 기도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데 저까짓게 뭘 안다고 안 나가. 하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30대 초반 정도 되는 전도사가 목사님 설교 좀 그런데요 하면 왜 받아들입니까? 누가 지적하든 유익하다면 무슨 상관입니까?



3. 예수님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


모태신앙인 사람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으로 기독교도고, 주일날 예배를 보러옵니다. 너무나 귀하지만 가롯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가롯 유다가 그 악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얼마나 많은 경고를 통해서, 주님께서 여러 차례를 통해 경고하지만 가롯 유다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김기현 목사님이 '가롯 유다 딜레마'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쭙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마 26:22)


예수님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합니다. 모든 제자가 놀라서 저는 아니지요? 하는 분위기입니다. 모든 제자가 주어 라고 부릅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 26:25)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9)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주로 섬긴 것이 아니라 학식 높은 랍비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주라 시인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고백 속에는 그분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을 담은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고백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며 전인격과 전생에를 그분에게 맡겨드리겠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랍비로 생각한 것입니다. 참 두려운 것은요, 오늘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딱 두 종류로 나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으로 생각하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 되지 않는 신앙생활은 성장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주님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이유로 가롯 유다는 성장이 멈추었습니다. 이 상태에 마귀가 유혹하였고 주님을 팔았습니다. 우리가 가롯 유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 인간이 부실한 인간일세라는 마음을 갖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가롯 유다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안에 가롯 유다의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롯 유다가 갔던 비참한 길을 가지 않을까?


대안은 두 단계입니다.



1. 첫 번째 단계: 회개를 통한 관계 회복


가롯 유다가 용서받지 못할 악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서 망하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치명적인 것은 그 경고를 무시해서 주님을 파는 자리에 빠졌습니다. 양심이 있었습니다. 스승을 이렇게 팔면 안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양심적으로 자살했다고 나와 있지만, 여기에 가롯 유다의 정체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양심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의 기준은 끝까지 자기 하고 싶은 것, 자기 생각으로 수습하는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차이점입니다. 박순영 목사님이 '그리스도 예수 마음을 품으라.' 책에서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결국 돌이켰습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데 그쳤습니다. 가롯 유다는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회개를 안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성령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내가 예수님과 상관있다고 말해주는 도구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가롯 유다는 안에 악한 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성도를 듣고 많은 사람이 회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7-38)


회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이제 내가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회개라는 책에서 죄를 자각하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회개의 첫 단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를 자기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16개월 입양한 정인이를 확대한 사건으로 모든 국민이 분개하였습니다. 양아버지가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글을 썼는데 한 문장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주변에서 그토록 잘 보였던 이상한 점들을 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주변에서 조언하고 충고했는데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누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집니까? 누가 그 상황에 주어지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갖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연약한 상태를 자각하는 것. 주님에게 다가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화 하나가 늘 저에게 경종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전갈과 개구리 우화입니다. 전갈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헤엄을 못 칩니다. 헤엄을 잘치는 개구리에게 업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개구리는 너 독침 쏠 거잖아 하고 거절합니다. 전갈은 강을 건널 때 너를 독침 쏘면 다 죽는 거잖아 라는 말을 합니다. 개구리가 이 말에 혹 넘어갑니다. 전갈을 태우고 한참 강을 건너는데 독침을 맞아 둘 다 죽습니다. 개구리가 죽어가면서 왜 이런 짓을 하느냐? 왜 날 찔러서 둘 다 죽게 하느냐? 전갈이 죽어가면서 죽은 한 마디가 뼈에 새기는 경고로 저에게 남습니다. 전갈은 어쩌겠니? 이게 내 본능인걸.


전갈은 강 건너기 전에는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갈은 그것을 통제할 힘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젊은 여성들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또 말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말 '오빠 믿지?' 이 말에 가슴 아픈 상처를 간직하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빠가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로는 어쩌겠니 이것이 내 본능인데.


사춘기 애들이 부모님께 저 좀 믿어주시면 안 돼요? 믿어야죠. 그러나 자녀들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회개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지닌 본성, 날 때부터 죄에 대해서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한 관계 회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2. 주님의 영향력 아래 변화와 성장 이루기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4-15)


우리의 사명,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생명체는 자람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장이 없다는 것은 100% 죽은 것입니다. 이관수 목사님이 대구에 있는 좋은 교회로 부임하셔서 위임 예배를 하게 되어 저를 초청하였습니다. 가지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교회의 장로님이신 분이 이관수 목사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님들이 이목사님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하나 기쁜 것은 우리 교회 출신 목사님이 축하하러 오셨습니다. 대화를 하나 보니깐 1, 2년 사이에 이 분이 성장한 것입니다. 청출어람이 이론인 줄 알았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성장하는 제자가 스승에게 기쁨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모교방문의 날을 하여 그분들의 성장을 목도 해야 합니다. 반대가 나옵니다. 스승에게 슬픈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성장이 없는 제자. 예수님이 가롯 유다를 향해서 굉장히 슬펐을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짓을 해서 슬픔을 드릴 수 있지만, 우리의 성장이 없는 상태가 주님에게 슬픔입니다.


가롯 유다를 보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성장이 멈춘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감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경이로운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옥합을 깨트리고 예수님 발을 닦는 마리아.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이 벅찬 감격을 지켜보는 것이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의 분위기 깨는 한마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5)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오죽했으면 여인이 주님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눈물로 헌신하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보면 컴퓨터 같습니다. 냉정한 인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감정을 잃어버린 분들을 가끔 봅니다. 그러면 마음이 슬픕니다.


여러분 성장하고 있으신가요? 주님에 대해 감탄을 하고 있으신가요? 바른 소리, 바른말을 또박또박 잘하는데 감탄을 잃어버린 인생이 불행한 인생입니다. 이관수 목사님의 위임 예배 때 모처럼 아내와 같이 갔습니다. 고향에 갔으니깐 그냥 집에 가기 아까워서 제가 자랐던 곳도 가보고 여기, 저기 가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분당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제가 자란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던 것이 모 교회 종탑이 보였습니다. 모 교회 종탑이다.'라고 하면서 교회의 이름이 성 밖 교회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차 안에서 감탄하면서 가난했던, 꿈도 없는 나를 생각하면 이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이 길을 걸어간 내가 기적이다. 홍해가 내 안에서 12번도 갈라진 것입니다. 운전하는데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이 동네에서 꿈 없이 자라던, 초중고 12년 동안 담임선생님에게 단 한 번도 주목받아본 적도 없는 성 밖 교회 다니던 이찬수라는 사람이 주님의 손에 붙잡혀 갈수록 윤택한 인생으로 만들어주신, 감탄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유혹당하지 않을 성장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장이 되는 조건이 해주신 일들에 대한 감탄입니다.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상황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생각으로 냉랭한 가롯 유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도 감탄, 경이로움이 생겨나지 않은 인생이라면, 밤새 고생한 자기들을 찾아와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사건을 감탄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는 어떻고, 순장은 어떻고 감탄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



02월 2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강점으로 일하시는 예수님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마 3:16-19)


'나음보다 다름'이라는 책의 제목이 좋아서 구매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묵상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책의 뒷면을 보니 경쟁하지 말고 차별화하라. 이 말이 목회자인 저에게 접목되었습니다. 책 소개 글에도 나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이긴다. 이 세상 구도는 거기서 따르는 불가피한 경쟁, 이 사람보다 나아져야 한다 라는 것이라면 예수 믿는 우리는 다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도 이 세상과 다름의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 38-42)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관은 원수를 갚으라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분당우리교회에서 가르치는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것이 다름이 아닙니까?


최근에 카카오 김범수 의장은 5조 원을 세상에 환원하겠다는 말을 보았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어마어마한 돈을 기부하게 만든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설교시간에 인용했던 시였습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랄프 왈도 에머슨


To laugh often and much;
많이 그리고 자주 웃는 것.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현명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애정을 받는 것.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정직한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고
잘못된 친구들의 배신을 견뎌내는 것.


To appreciate beauty;
아름다움을 한 껏 느끼는 것.


To find the best in others;
사람들 안에 있는 가장 좋은 점을 발견하는 것.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건강한 아이를 낳든,
작은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당신이 살아 있음으로
단 한명의 생명이라도 조금 더 쉽게 숨 쉴 수 있었다는 걸 아는 것.


This is to have succeeded.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공이다.


이런 시를 통해서 김범수 의장은 다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 이것이 다름의 문제 아닙니까? 저도 이 대목을 옮겨서 묵상하는가 하면 큰 교회 맡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세상과 다름. 1만 성도 파송 운동도 세상과 다름아닙니까?


그리스도 제자로서 세상과 다름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감이 있지만 이렇게 다름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7-9)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정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름의 문제 아닙니까? 롯은 나음을 선택했습니다. 그 타락으로 인해 망해버린 것이 조카 롯입니다. 이 세상에 남이야 눈물을 흘리듯이 나는 능력이 있어 나는 너희보다 나은 것을 추구할 거야. 이것이 인생의 행복을 갈아먹는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다름을 선택하니깐, 영적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고 변화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라는 공동체나 결국 추구하는 것은 다름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태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교회가 다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4-46)


어떻게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나누어 쓰고 이런 것은 다름입니다. 예배 들어오시다가 좋은 거 있으면 문 앞에 두고, 한때는 새벽기도 마치고 이런 것을 추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쌀을 누군가 헌금하면 어떤 분이 헌금하면 누군가 가져갔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가 다름을 추구하다가 나음을 추구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구도가 경쟁구도가 되고, 이 집사님과 저 집사님 자리싸움하고, 집사, 장로 선거하면서 마음 아픈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나음의 문제가 들어가면 경쟁이 들어가고 상처가 생깁니다. 분당우리교회가 나음의 공동체, 늬가 잘랐다, 내가 잘났다 내가 목회를 참 잘하는데, 나음을 자랑하고 나음을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만이 할 수 있는 다름을 꿈꾸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살펴볼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안드레를 꼽고 싶습니다. 안드레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다름의 삶을 살아낸 사람입니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베드로를 전도한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요 1:41-42)


베드로가 성격이 괄괄하니깐 점점 영향력을 미치더니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기록할 때 베드로가 맨 앞에 나옵니다. 베드로의 영향력이 점점 퍼져가더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의 존재를 너무 크게 본 나머지 가톨릭에서는 베드로는 1대 교황이라고 합니다. 반면 안드레는 잘 모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영향력을 많이 미친 선도그룹입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니 유행어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본문의 구도는 안드레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은혜받으려고 읽는 것이 아닌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문을 보세요.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마 3:16)


베드로에 대한 독방을 주고 부연 설명을 하였습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마 3:17)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3:19)


가룟 유다는 특별한 일을 했기에 독방을 주었습니다.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마 3:18)


안드레 입장에서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우리 형은 설명을 해주는데 여기서는 제자 이름을 열거합니다.


마가가 이렇게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안드레가 상처받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이렇게 쓰지 않겠습니까? 유명해지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면 무슨 상관인데요?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속기 때문에 너무 처참하게 낭비하며 보내는 것입니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를 질투했습니다. 살리에르 자체는 어마어마한 음악가라고 합니다. 대단한 궁중 음악가인데 자기의 강점을 드러내지 못하고 나음을 추구하다 보니깐, 노력도 별로 안 하는 것 같은데 앞서가고 있고.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그런 차원에서 경쟁을 유발하는 나음의 길이 아니라 다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한 다음 고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을 파송할 자신이 없습니다. 성도님들이 가라고 가는 분들이 아닌데 인격체인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작은 교회로 파송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뇌가 되고 잠이 안 왔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성경 인물이 생각나게 했습니다. 많은 인물 중에서 요나단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사무엘상 23:17)


나는 이 교회 담임목사니깐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습니다. 나는 이 교회에 남고 어떻게 성도님을 보내지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왕좌도 이렇게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데 분당교회목사 담임목사 자리를 꽉 잡고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 때문에 1만 성도 파송운동이 되지 않는다면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를 사임하겠습니다. 이것이 다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제가 너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름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하기 위해 전혀 생각지 못한 30개의 교회로 파송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경직되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쟁을 유발하는 나음을 추구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다름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안드레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에 시간을 낭비하는지, 다름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안드레처럼 살기 위해서 2가지 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작은것의 가치를 인식하기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 출발은 안드레의 안목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 6:5-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같이 먹었는데 개수에도 넣지 않던 시절입니다. 안드레는 그 무시당하던 아이라는 재료가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때 강점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강점으로 일하시는 주님인데 저는 강점이 없습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 강점도 강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화근입니다. 작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분당우리교회는 대형 행사가 없는 교회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큰 이벤트를 가지고 생산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개척 초기에 행사를 너무 좋아해서 이벤트리가 제 별명이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그 아이디어에 소질이 있습니다. 교회가 대형 행사 위주로 가면 교역자들이 진이 빠져서 성도님 돌볼 힘이 없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교구 목사님의 손이 안 닿을지도 모를지라도. 이 큰 교회에서 교구 목사님이 어떻게 이렇게 알뜰살뜰 살피는가? 저는 이벤트하고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저 구석진 곳에 울고 있는 성도님 눈물을 볼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2. 조용한 영향력의 가치를 인식하기


제가 베드로를 의식해서 제목을 붙였습니다. 베드로는 시끌벅적합니다. 한번 설교회 3,000명이 회심합니다.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베드로입니다. 안드레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기껏 안드레는 한 사람 인도. 존재감 없는 애를 주님께 데려옵니다. 요한복음 12장 빌립이 사람을 안드레에게 데려갑니다.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요 12:21-22)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시끌벅적한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제가 안드레를 존경하는 이유는 베드로 같은 수천명을 회심시키는 능력이 아니지만, 베드로를 인도한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소음이 난무할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인류 최초로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딛 사람입니다. 그 때 닐 암스트롱 뿐만 아니라 20분 뒤 버드 올드린이라는 우주사도 발을 닫혔습니다. 그런데 1등만 기억해서 버드 올드린은 모릅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왔다는 TV 프로를 보았습니다.


새벽에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분당우리교회 창립맴버 5명의 교육 전도사입니다. 지금은 시에틀에 목회하는 목사님부터. 처음부터 사례비가 없다. 그래도 오겠는가? 그랬더니 종이 무슨 사례비에 신경 쓰겠습니까? 그러고 왔습니다. 교회에서 월 150을 주었습니다. 5 등분 해서 30만 원씩 교역자들이 연명하던 상황이었습니다. 5명의 영웅이 눈물이 납니다. 토요일 교회 청소부터 강대상 올리고 물건 올리고. 그때도 우리 교회는 초신자가 많았습니다. 목사들은 원래 그런 일을 하나보다. 초신자분이 전도사님 이것도 치워야겠는 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사님들이 지난 몇 주 동안 마음이 얼마나 울렸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할 때, 대구 서문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사역할 때 보았던 선생님들. 한 아이를 두고 얼마나 뜨겁게, 시간 지나고 이찬수라는 이름이 남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이 교사님들의 이름이 더 크게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분당우리교회 19년이 지나고 이찬수 담임목사라는 이름만 남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그들이 더 큰 상금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의 비결은 경쟁을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나음이 아니라, 나 큰 교회 만들었어, 나 사업 번창해가 아니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 나라의 다름의 가치관으로. 저는 오늘 눈물로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교회 초창기에 너무나 교회를 헌신하던 사람들이 연세가 드시고 은퇴를 하시고 존재가 작아지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사실은 분당우리교회의 금옥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30개 교회는 나음을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다름을 추구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02월 1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나음보다 다름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6-17)


다비드상과 미켈란젤로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소녀가 와서 질문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어린아이에게 저 바위는 돌덩어리가 아니라 천사가 들어있어. 아저씨는 천사를 깨우는 중이야. 12사도 책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각가가 멋진 말을 조각했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했습니다. 예술 작품을 만든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말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든 깎아 버리는 것이 비결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다가 본문에 열두 제자가 열거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조각가이십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평범한 제자들을 불러서 주님께서 어떻게 다듬어가는지, 멋진 말 조각상을 만드는지. 예수님께서 영적인 조각가이십니다.


야고보 요한 형제들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6-17)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베드로의 강력한 특징을 한 마디로 묘사하고 있다면 야고보 요한도 똑같습니다. 보아 너에게란 이름을 더했다. 이것이 두 형제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중심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별명이 말해주듯이 형제는 엄청난 다혈질입니다. 우레가 갖는 강점이라는 것은 열정이 많은 것 처음에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도 열정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19-20)


오래 생각하고 결정하면 실수를 안 합니다. 야고보 요한처럼 다혈질인 사람은 실수는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일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진리구나! 행동을 합니다. 제가 이 과이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이해가 됩니다.


29살 가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한국으로 가라. 청소년들을 섬겨라. 저는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그냥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안 가게 됩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1만 성도 파송운동도 생각이 많으면 못합니다. 하나님이 전략가 아닙니까? 오후 3시에 불렀으면 안 했죠. 새벽 3시에 네 교회에 모이는 것이 옳으냐? 그때 1만 명 파송하겠습니다. 했습니다.


야곱과 요한의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강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빛이 강했습니다. 열정이 강했습니다. 어떻게 교훈으로 삼을까.


첫 번째 교훈. 열정을 회복하자


주님이 부르시면 가겠습니다. 내 사업체 버리고. 집에 가서 생각해보고 가겠습니다. 하면 100% 못 갑니다. 저는 우리교회 젊은 교역자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담임목사 되어서 좌충우돌하면 불안해서 성도님들이 못사신다. 나랑 같이 일할 때 부교 역자로 있을 때 실수 많이 해라. 다 책임져주겠다. 그것 때문에 있는 존재이다. 열심히 하다가 실수하는 것은 다 막아주겠다. 담임 목사가 할 일 중 하나가 부교 역자가 안심하고 실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절대 못 도와 주는 교역자가 있습니다. 안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실수를 안 합니다. 그런데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대책 없는 사람이 열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여기 있으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생각해보고요. 지금도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강점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 청결한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 17)


사도바울에게서 꼭 배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


마음의 뜨거움이 있으니 사도바울과 같은 에너지가 나오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을 보면서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성적인 죄, 도덕적인 죄를 범하면 몰락하기 때문에 시편에서 배우고 저에게 격려를 해줍니다. 저에게 설득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낙심될 때 외부에 누가 위로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주님은 스스로 위로할 힘을 줍니다. 저는 저에게 성적으로 죄를 지으면 몰락한다. 긴장을 놓치면 안 된다. 공금을 투명하게 쓰지 않으면 너는 몰락한다. 요즘은 저는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데 성적으로 죄를 지어서 급격히 몰락할 확률은 젊을 때보다 덜하지 않습니까? 죄짓는 것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열정 없이 목회하면 천천히 죽이는 죄입니다.


저는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열정이 사라질 때. 설교준비도 열정입니다. 부교 역자들에게 도자기 굽는 것이라고 합니다. 초벌, 재벌구이해도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 구우면 빛깔이 다 되었습니다. 월요일 저녁 되면 뼈대가 나오지만, 단에 오르기 전까지 설교를 다듬는 것은 열정입니다. 1부 예배 마치고 원고를 찢어 버리는 것은 열정입니다. 요새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30년 하다 보니 귀찮습니다. 2부 마치고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제 마음에 그럴 때마다 갈등이 있을 때 확 찢는 것은 다혈질이어서. 저에게 다짐하는 것은 그렇게 귀찮으면 목회를 그만두지? 교회가 크다 보니 이 기도부탁, 전화 오고 그렇습니다. 제가 엄살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동기 목사님보다 왜 이렇게 일이 많지? 그렇게 일이 많은 게 힘들면 시골교회로 가지. 갈 마음 없잖아. 우리가 성적인 죄를 짓고 물질적으로 횡령하는 것은 급격하게 나를 몰락시키는 일이지만 열정 없이 사는 것은 천천히 나를 몰락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호흡이 다 하는 그날까지 달려가게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혜택이 있지만, 나에게도 혜택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 요한을 보면서 열정을 회복시키기 원합니다. 거기에 늘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의 위험성을 인식하기


야고보, 요한은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이었습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누 9:52)


쉴 곳을 얻지 못하고 거절을 당합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4)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야고보 요한의 성격을 안으신 것을 진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다혈질이었다면 저와 여러분들 반 이상이 벼락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미숙한 야고보 요한과 같이 다혈질을 품으셨습니다. 그 열정이 다듬어지지 않고 미숙한 열정이여서 파괴적인 에너지가 나옵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49)


열정은 많은데 미숙하고 편협한 사람의 손에 붙들리면 온 나라가 몸살을 겪습니다. 열정이 주님의 손에 다스림을 받는 성숙한 열정이어야 합니다. 일 많이 하는 사람, 교회의 중진을 보면 열정이 넘치고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정은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칼이 날카로울수록 칼집에 있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절제니, 나머지 성령의 열매가 은혜롭게 작동하기 위해서 자신을 통제해야 합니다. 이 기능이 없는데 8가지가 펼쳐진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정이 필요하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린 열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야고보, 요한을 보며 통제하지 못한 열정의 위험성은 야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5-37)


교회를 위하여 인생을 건 분들을 뵈면 존경이 가지만 그런 분 중에 가끔은 저것은 야망인데, 저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데? 일절 판단 안 하려고 내색은 안하지만 저에게 경고합니다. 제 열심히 주님의 손에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저급한 야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설교 준비를 위해서 잠을 안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설교 잘하는 목사가 돼야지. 이것은 야망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 요한의 갈수록 풍성함과 성숙함이 좋습니다. 야보고와 요한이 주님 손에 붙들린 이후 어떤 성숙이 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1-2)


눈에 띄도록 복음을 전하니 제자들 최초로 죽게 되지 않습니까? 모든 권사님, 장로님, 성도님들이 꿈꾸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열정이 주님 앞에 쓰이기 원합니다. 내 열정이 하나님 앞에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협하였는데 주님 손에 붙들리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랑의 사도로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신학적인 논리를 찾으려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고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야고보서를 읽어야 하고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을 알려면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는 말로다 못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7-11)


대학생 이찬수, 철딱서니 없던 이찬수가 주님께 붙들린, 오늘 본문에 살펴보는 요한의 모습이 아닙니까? 연세가 들어가는 어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질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를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주세요. 이기적인 기도를 하며 탐하던 요한이었는데 얼마나 성숙하였나면 자기가 기록한 요한복음인데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3)


그렇게 자리를 탐하고 명예를 탐한 요한이었는데 주님 손에 열정이 붙들리니 겸손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형제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습니다. 1. 강점으로 일하시는 예수님, 2. 약점을 다듬어 교정해 주시는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공통점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제되지 않은 다혈질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선두그룹에 속해있던 사람입니다. 저도 그 혜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미숙으로 치면 구석에 가있어라. 저기 가 있어 이것이 인간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강점으로 일하십니다. 약점을 다듬어갑니다. 99가지 약점이 있더라도 한 가지 강점으로 일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32년차 목회를 되돌아보면서 주님의 성품의 혜택을 내가 받았다. 약점으로 치면 책 한권이 나오지만 좋은 성도님을 통해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가 강점으로 일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허물은 덮어지고 강점은 키우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신 분당우리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는 후배 목사님 이야기를 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가정입니다. '저는 부유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믿지 않은 집에 신앙인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모든 분들이 그러시겠고 목회자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은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사는 것이 인간에게 괴로운 일입니다. 왜 설교는 이렇게 밖에 못하는지, 성도님을 용서를 못하는지, 그런데 주님은 강점으로 일합니다. 약한 부분을 그것이 강점이다. 새벽마다 흔들어 깨우는 주님. 오늘 이 자리에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주인입니다.


02월 0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막 3:16-19)


월요일 아침의 심리학이라는 책은 직장인들의 월요병에 관한 책입니다. 직장인 직업을 세 가지 분류로 나눕니다. 1. 단순한 생계수단. 2. 커리어 3. 콜링, 소명 적측 면을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이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일하는 사람을 연구하다 보니 콜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직장 생활이 훨씬 즐겁고 직장 내에서 높으 자리에 빨리 오른다는 연구 결과를 보았습니다. 직장인의 직업을 소명의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능률 있게 일할 수 있는가 분석을 해보았더니 내적 성찰을 통해서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주도적으로 의미 부여한 사람들이기에 동력으로 열정적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연구팀에서 소명의식을 갖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훨씬 만족하고 결과도 활력도 뚜렷하고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 부류 중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가장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조사했더니 돈벌이로 생각하는 그룹의 사람들은 자기 삶에 가장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는 것이 일의 능률도 오르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제가 최근에 짧은 영상을 보다가 책이 주장하는 것이 맞는구나 느꼈습니다. 한 교역자가 유튜브의 짧은 영상을 건네주어서 봤더니 할아버지께서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이 분은 평생을 피아노 조율사로 사신 80대 중반의 어른입니다. 고3 때부터 피아노 조율을 해서 65년 동안 조율을 하고 살았습니다. 인터뷰하는데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워서 책을 쓰셨다고 하셔서 바로 읽어 보았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감 당당함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콘서트 조율사에게는 조율이 곧 연주다. 조율하는 동안 나는 연주자와 똑같은 느낌을 가진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라는 성대를 빌려서 일한다. 음은 자신의 조율에 따라 움직인다.'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이고 멋인 것이지. 나 같은 것은 쓸모가 없다고 자리매김하면 이런 당당함이 나올 수 없습니다. 조율사에게는 조율하는 것이 연주다.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피아노를 칠 수 있겠느냐고. 피아노 조율사의 길을 걷게 된 게 고3 때 시골교회를 갔는데 시골교회의 풍금을 보고 도전을 받아서 일본에 책을 주문해서 공부하고 했습니다. 어린 나이의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꿈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지.


월요일 아침의 심리학책을 읽어서 기뻤습니다. 종교 서적이 아니라 일반 책입니다. 일반 심리학자가 소명의식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좋았고 놀랐습니다. 소명이라는 단어는 신앙 용어 아닙니까?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흔히 우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소명이라고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교수는 소명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지만, 밥벌이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환자를 짜장면 한 그릇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환자의 질문을 성가시게 여긴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하얀 가운을 입니다. 이 문구를 목사로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보통 목회자를 성직이라고 여기는데 반은 맞고 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 자체는 성직은 아닙니다. 목회를 밥벌이의 수단으로 여기면 저급한 직장에 불과합니다. 똑같은 의사이지만 나는 생명을 살린다고 여기면 성직자가 맞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 오네 라고 하면 저급한 장사꾼입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 그런 교역자들도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도 '밥 먹고 하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먹고 살자고 목회를 하면 비참한 것 아닙니까? 이 말씀을 듣는 크리스천 의사들이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성직이라는 자리매김이 있기를 바랍니다.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가르치는 모든 선생님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강단이 소명의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왜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느냐면 십이 사도를 부르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열두 제자가 열거되는 본문입니다. 방금 설명한 콜링 차원에서 본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가가 그런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운 제자를 사도,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부름을 받은 자가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콜링입니다. 저는 오늘 16절 한 절만 가지고 말씀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16절을 읽으면서 짧은 한마디에 많은 의미를 찾고 기뻣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막 3:16)


세우셨으니, 콜링입니다. 이름을 더하셨고는 소명 의식을 갖은 사람에게 배려 아닙니까?


1.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왜 열두 제자를 세우셨지는 이스라엘 십이지 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설명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일반적인 설명 외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 27:17)


서로가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를 주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지으면 받은 존재입니다. 최근에도 쥐를 가지고 실험한 칼럼을 보았습니다. 실험용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한 그룹은 혼자 지내도록 격리를 하고, 또 다른 쥐는 함께 모여 살도록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모든 쥐에게 종양 세포를 투입하였습니다. 1년간 조사를 해보니깐 동료들과 함께 산 쥐들에게는 종양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혼자 산 쥐는 30% 발견되었습니다. 2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후에 조사를 해보니 그룹으로 산 쥐들과 달리 고립된 쥐들에게서 거대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글의 소제목이 잊히지 않습니다. 격리된 쥐는 암에 취약하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격리된 쥐가 암에 취약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예수님이 아주 유능한 제자를 뽑은 것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룹으로 하는 것이 좋다면 더 많이 뽑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왜 13명이 아니라 12명인가? 이 소그룹 수가 늘어나면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지. 12명의 일꾼을 부르시는데 너무 다른 사람입니다. 어떤 제자는 차분하거나, 어떤 제자는 다혈질입니다. 이질적인 요소의 백미가 18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막 3:18)


열혈당원 시몬이 있는데 세리 마태는 로마에 빌붙어서 세금을 바치는 사람 아닙니까? 생각이 다른 사람이 서로 품어주고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최근에 어떤 분하고 말을 하다가 이데올로기가 위대한 것은 좌파 우파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리는 결과를 거둡니다. 만약 하나님을 이런 분이야 규정을 하면 하나님을 엄청나게 제한시킨다는 것입니다. 우파, 좌파적인 생각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폭 넓으신, 열혈당원 세리를 품어주신 주님을 제한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간혹 진보적인 성향의 성도님, 목사님을 만나서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귀 기울여야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치우친 생각이 강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으로 하나 된 것을 강조하려면 제 생각을 노출하면 반대쪽 성도님을 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열혈당원 시몬을 묶어서 하나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선 밖으로 부르신 예수님. 모든 이 땅의 성도님들이 선 밖에 예수님께 귀를 기울일 때 되지 않았습니까? 나랑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입니다.


2.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2)


신앙 생활은 기대감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생각의 지경을 넓혀주시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위험한 것은 좌파, 우파에 하나님을 가두어둔다면 그것을 초월해서 일하시는, 우리의 생각은 좁은 곳에 고정되기 쉬운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리라. 신앙생활은 오래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잘못된 것은 기대감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 환갑이 되었습니다. 요즘 청년을 만나거나 젊은 목사님을 만나면 이래 봬도 나는 값 환산입니다. 몰랐지 동안이지? 이런 당황스러운 말을 합니다. 사실 저도 제 나이가 너무 생소합니다. 제 어릴 때 환갑이라는 나이는 그때까지 안 죽어서 축하한다고 하는 것이 환갑잔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환갑이라니. 제가 이런 농담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60대가 된 것이 너무나 기대된다. 이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60대가 가슴 벅차게 기대가 됩니다. 20대 초반에 저는 시몬도 아닌데 게바라 반석이 될 것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20대에 준비했더니 세상에 30대에 사랑의 교회에서 만난 제자들은 은인이에요. 보잘것없는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0대에 분당 우리 교회를 개척해서 은혜를 누리고, 50대에는 나 같은 것도 꿈꾸지 못하는 1만 성도 파송운동, 가평 우리 마을이라는, 요즘 60대는 울며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0대는 늙어간다. 흰머리는 다. 쭈굴쭈굴한다 그러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님에게 공통된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더의 7가지 언어라는 책에는 리더가 가져야 할 언어 중에서 비전의 언어를 강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비전의 언어를 강조하는 소제목에서 가슴에 꿈을 주는 말 비전의 언어라고 합니다. 시몬에게 비전의 언어, 장차 게바가 되리라. 비전의 언어 아닙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지난주 아들딸에게 미안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비전의 언어보다 지적의 언어를 많이 구사했습니다. 너 이거 고쳐야만 해. 지적의 언어로는 자녀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보면 얼마나 더디 성장합니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마 16:9)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5)


상처받은 제자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비전의 마음을 품고 제자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나온 말씀입니다. 돌이켜야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메아리로 끝나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비참하게 빠집니다. 저도 실수한 것이 마음에 덕지덕지 남아 있습니다. 감정이입을 하니 베드로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여라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주님을 부인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베드로였지만, 눈물 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예수님이 지적의 언어를 사용하면 베드로는 끝입니다. 지적의 언어가 아니라 네 양을 먹이라. 비전의 언어 아닙니까? 아무리 나 자신이 초라하다 하더라도 잠깐 넘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주저앉을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캐스트 어웨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미국의 페덱스라는 유명한 화물 택배 회사 직원이었던 주인공이 배달할 물건을 비행기에 담고 태평양을 가는데 비상기류로 추락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도 살지 않은 무인도에 떨어진 것입니다. 절망 아닙니까? 영화에서 감동한 한 대목이 있습니다. 해변으로 상자가 떠내려옵니다. 칼도 구하고 다 구하는데 택배 상자 하나는 뜯지 않고 둡니다. 4년을 둡니다. 4년 뒤에 구사일생으로 무인도를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지막 장면이 울컥합니다. 택배를 주소 주인에게 배달 갑니다. 초인종을 눌러도 주인이 없어요. 이 분이 쪽지 하나를 남깁니다. 이 택배 상자가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상황이에요. 고독한 밤. 우울함이 밀려오는 그 시간에 택배 상자를 남겨놓고 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에 죽으면 안 된다. 4년을 되뇌었을 그 모습을 생각하니 울컥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너무 낙심되고 자영업자들이 낙담한 것을 보면 무능한 나 자신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소명이 있기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언어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18:17)


능력의 언어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전의 언어 꿈으로 다가와 주시는 그분이 이 초라한 질그릇 같은 내 인생에 보배로 자리 잡고 있기에 소명이 있기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살려내는 복음의 능력을 담아내는 말씀인 줄을 믿습니다.



01월 3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3-15)


최근에 정재영 교수님이 쓴 칼럼을 읽다가 생각하는 한 대목을 만났습니다. 기독 청년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가 열거가 되는데 한 대목이 보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교회를 다닌 비율은 13%밖에 되지 않았다. 새신자가 거의 없습니다. 전도가 잘 안 된다는 것을 통계로 확인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교수님이 쓴 글에서 교회 다니는 청년의 인식 조사에 대해서 큰 우려가 생겼습니다. 성경 말씀을 지키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대답한 청년이 40%인 것입니다. 내 주위에는 성경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응답한 청년이 61.7%입니다. 교회의 청년들이 전도도 안 되고 교회 다니는 청년도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에 대해서 신뢰도가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목회 데이터를 보니깐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경우는 20%,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70%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명이 있습니다. 악한 이 시대에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 역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책임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맛 잃은 소금이다. 교회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100에 9명밖에 안되는 상황이면 내버려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 고뇌해야 합니다. 어떻게 잃은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목회자다 보니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고 어떻게 신뢰를 회복할지 고민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본문을 보니 답이 여기 있네. 어떻게 하면 신뢰를 회복할지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균형을 회복하면 됩니다.


첫 번째 균형은 지난주에 다루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우리는 교회를 그냥 다니는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마음을 쏟아야합니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신비 아닙니까? 새벽마다 찾아온느 은혜의 감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균형은 '또 보내사(막 3:14)'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되는 순간 기억해야합니다. 뭐해야하지? 나는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하지? 442장 3절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이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새벽마다 하나님앞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있고 감격하고 있다면 젊은 부교역자, 수 많은 성도들에게 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야 제가 새벽에 누리는 은혜가 진짜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을 방치하겠습니까? 밤 깊도록 주님과의 교제, 이른 새벽에 임재의 기쁨을 누리는 기쁨. 반드시 은혜를 누리시고, 거기에 머무는 분들 일어나세요. 사명의 자리로 나가셔야 합니다. 또 보내사가 먼저 나오면 안되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지난 주에 살펴본 것은 훈련의 관점으로 보셔야합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주님 닮은 아름다운 성화를 통해서. 또 보내사가 먼저이면 100% 실족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료로 어떤 선한 것을 만들겠습니까?


설교와 설교자 책을 보면서 저를 점검합니다. 진정한 설교라면 갖추어야할 특징이 나옵니다. 진정한 설교의 첫번째로 꼽는 것은 설교자의 인격입니다. 필립스 부르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인격을 통과한 진리. 이것이 얼마나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설교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 설교하는 목사의 인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들부들 떨리는 이야기 아닙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예수님을 닮은 삶을 추구한다면 3가지 목표를 갖어야 합니다.


1.예수님의 인격 닮아가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수사학 책이 있습니다. 저같은 설교자는 수사학에 관심을 갖어야합니다. 이 책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합니다. '1. 로고스' 논리, 논증.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내용물이 있어야합니다. 준비 많이 해야합니다. 준비를 안해서 횡설수설하면 곤란한것 아닙니까? 단에 올라오기 1분 전까지 하나님 제가 이 논리를 펼처갈 때 성령님 도와주세요. '2. 파토스' 마음에 와닫게 설득했는가? 제가 엄청나게 준비했는데 5분 설교했는데 다 주무시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3. 에토스' 말하는 그 사람의 됨됨이, 성품입니다. 이 중에서 에토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부교역자들에게 흠 잡히지 않도록, 성도님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야한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나와서 청상유수처럼 말하면 성도님들이 시험듭니다.


리더의 7가지 언어에서 똑같은 것을 강조합니다. 리더들이 되려면 리더들이 갖어야할 언어 특성 7가지를 회복해야합니다. 자기 철학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청산유수처럼 말하는데 배껴서 말한다. 그것은 설득이 없습니다. 설교할때 슈바이처 이야기를 안합니다. 왜합니까? 지난 한 주간 예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언행일치의 언어입니다. 이것이 리더십의 완성입니다. 앞에 어떤 것을 갖추더라도 언행일치가 안되면 그 리더는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현란한 설교를 다 하셨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사람을 사랑하여 끝까지 사랑하신 말이 부활 직후 보입니다. 부활하시고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기 위해 구하는 그런 역사를 구해야합니다.


2. 예수님의 권위를 닮아가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5)


한국교회가 권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에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교육하는데 부모님들이 엄청나게 많은 말을하는데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새벽에 묵상을 하면 성령님이 제 마음에 제 말이 많다는 것을 깨우쳐주세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에 권위가 중요합니다. 몇마디 하더라도 말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지할때 나타납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7-18)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7)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제자들이 주님의 영향을 못받기에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담임목사만 의지하면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해드릴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정해드릴때. 언제 영적 권위가 회복될 수 있나면 세상을 의지하는 태도를 버릴 때 나타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2)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막 6:7-9)


크리스찬이 맛 잃은 소금이 되었냐,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엔가 사로잡힌 세상에 살고있다. 또한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있다.' 세상의 물질, 권력, 명예 그런것에 사로잡혀있으면 주님의 엑소시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보여준 모범은 무엇입니까? 장애인이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걸어라. 은과 금을 추구하는 대신에 나사렛 예수를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화가 은인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 교회에 유력한 사람이 많아서 주님을 의력하기보다 전화 한통하면 되는것이 아닙니까? 물론 인간의 도움도 청해야하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사로잡힌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권위는 사명을 감당할때 나타납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


여러분 귀신을 쫒는 권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해야합니까? 귀신을 쫒으려고 시도해야합니다. 기능을 수행해야합니다. 교회가 우리끼리 좋다고하고 그러는데 귀신을 쫒는 권능을 쓸 기회가 없습니다. 너무나 혼란한 이 시대에 동성애의 문제 등등 혼란스러운 현실 앞에 권위를 회복해야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늘 은혜를 많이 받으세요. 내일부터 회사에가서, 가정에서 귀신을 내어쫒는 권능을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권위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권위가 회복될 줄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섬김 닮아가기


오늘 제자들을 부르시며 또 보내사 중요한 포인트를 담기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역자들에게 종종 이야기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친했으며 좋겠다. 그런데 안친하면 어떤가 우리가 동호회로 모였는가?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끼리 노닥거리는 것이 중요한가? 교회를 신뢰하는 사람이 9%밖에 없는 현실에 노닥거릴 시간이 있습니까? 주님의 섬김을 회복해야합니다.


점염병과 마주한 기독교라는 글에서 이상규 교수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두번에 겪은 역병, 무려 15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인구의 1/3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49년 로마에서만 하루에 5000명이 죽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2/3가 죽었다고 추청합니다. 용어 하나를 발견하고 계속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파라블라노이는 위험을 무릅쓴자라는 단어입니다. 왜 이 단어가 마음에 맺혔다면 초대 기독교 성도들에게 불리어진 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역병이 사람을 죽이고 그럴 때 감염의 위혐을 무릅쓰고 목숨걸고 간호하는 일을 행해서 위혐을 무릅쓴자라고 합니다. 교회의 공신력이 떨어지는 것과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역병을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코로나 19를 멈추는 일에 결정적인 일을 했다. 이것을 만들어내야하지 않습니까? 초기 기독교가 두 번의 역병을 거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확 늘었다는 것입니다.


작년 코로나가 기승일때 아름다운 사진을 보았습니다. 청년부 예쁜 자매 사진을 보았는데 근래에 이러헥 아름다운 사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의 편지는 이렇습니다. '매일매일 감사하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행복해요.' 그러나 화면에는 못띄웁니다. 하루종일 무거운 옷에 사진에 보면 엄청 자국이에요. 차마 이 사진을 띄울 용기는 안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험을 무릅쓴자 아닙니까?


지난주에 임정택 대표를 소개했습니다. 25세 젊은 나이에 하나님 저를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도 가운데 응답을 받아서 사회적 기업을 세우고 우울증, 정신병 장애인을 훈련시켜서 최고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꿈이 왜 감동시킵니까? 다들 피하는 사람들을 위험한 것이 아니다. 회복될 수 있다. 꿈을 가지고 다가가서 22호점까지 커피숍을 만드니 위험을 무릅쓴자 아닙니까? 그래서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임정택 대표가 가평 우리마을 운영책임자로 우리와 함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많은 우여곡절을 젊은 청년에게 주셨는데 제 사명은 임정택 대표가 날개를 달아주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운영하는 다문화카페가 있습니다. 드림센터에 10여년 세운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주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합니다. 최근에 간증 편지를 받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문화 카페를 통해 낮선 이 땅에서 분당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정성 어리는 멘토링으로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결과를 받으면서 너무 마음이 기뻣습니다.


설날 성도님들에게 숙제를 드립니다. 다문화 카페를 못연지 1년이 되었습니다. 다문화 카페에서 설 선물 세트 인터넷판매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다문화 카페와 히즈빈즈가 손을 잡아서 더치 커피 세트를 판매합니다. 히즈빈즈의 더치커피의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맛이 좋아서 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곳곳에서 어려움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위혐을 무릅쓴자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방에서 나그네 시절이 있었습니다.


드림센터를 사회에 환원까지 2년이 남았습니다. 누구에게 환원했는데 파리만 날린다. 그러면 제가 죄를 지은게 아닙니까? 진실로 다음세대를 살리고 청소년들을 살리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01월 2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3-15)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입니다. 돌아가셨지만 가장 뛰어난 기업인이라고 인정을 받고있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사업은 사람이 전부이다'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책의 목차 1장 사람을 쓰다. 2장 사람을 움직이다. 3장 사람을 키우다. 4장 사람을 살리다. 5장 사람이란 무엇인가? 모든 목차가 사람으로 가득차있다.


창업 초기에 직원에게 '만일 고객들이 마쓰시타 전기가 무엇을 만드는 회사라고 물으면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라', '마쓰시타가 신입 사원들에게 항상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누가 파나소닉이 무슨 회사냐고 물으면 우리 회사는 사람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더불어 상품도 만듭니다. 전기 전자 제품을 만듭니다. 물건을 만들기 이전에 사람을 만듭니다.' 사람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사업은 사람이 전부이다.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 사람의 정신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사업은 사람이 전부이다'가 떠오른 이유는 본문이 예수님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막 3: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마가가 기록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그 당시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던 시점에 열두 제자를 세우고 있습니다. 주님은 앞으로 닥칠 십자가 일을 염두에 두고 제자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열두명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사람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저같이 평범하거나 떨어진 사람도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운 목적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


가장 먼저 나온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기능만 강조하는 회사에서 놀랍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자네를 키워주겠네, 월급 주어가면서 당신과 함께 있으려고 당신을 뽑았어 그러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가 성도들의 피 같은 헌금으로 유지되는 교회에서 당신을 키워주고 싶어서 전도사님을 청빙하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른 목적은 우선적으로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가 세상의 발을 딛다보니 주님의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일만 성도 파송 운동을 선포하니 많은 성도님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일만 성도 파송 운동을 선포하고 제일 불안한 그룹은 우리 직원들입니다. 11개월 지나면 성도님들이 3/4이 줄어드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걱정을 합니다. 제가 연말에 전체 직원을 모아놓고 약속했습니다. 성도님들이 3/4이 줄어서 3/4을 내보내는 일을 하지 않겠다.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들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이끌 것이다. 약속을 했습니다. 모든 성도님이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금으로 쓸데없이 직원을 데리고 있는지 하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이니깐요.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이 말씀을 새벽에 준비하다가 어머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연세가 많으시니 전화가 예전처럼 안 됩니다. 19년 전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에 어머니가 미국에서 전화를 항상 주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같이 어른 목회도 안 해보고 경험도 별로 없고 어리숙한 목사를 믿고 찾아오는 성도님들이 평생 은인인 줄 알아라. 창립 맴버들은 죽을 때까지 못 갚는 은혜로 알아라. 어머님의 말씀은 사람을 귀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막 3:1-2)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 3:4)


손 마른 장애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온통 마음이 간 정신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근본정신은, 우리들의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몇 주 동안 그 한마디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 한 마디를 묵상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기가 우선입니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관계 다지기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것이 이것이 아닙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 14:33-34)


예수님이 군대를 모아달라고 했습니까? 함께 있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0)


30개 교회 예비 담임목사님과 줌으로 회의하다가 제가 갑자기 버럭 목사님들이 사람들에게 의리가 없는 것을 아십니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깐, 목사님들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면 버럭 화를 낼 것 같습니다. 3년을 어떤 정신으로 지도했는데 뭘 요구했길래, 같이 이어달라고 했는데, 중보 기도를 해달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아니었으면, 예수님이 제자훈련 실패다. 새로 훈련할 것이라고 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눈물 나는 이야기를 아시잖아요. 부활하신 직후에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막 16:7)


'마가복음의 제자 도의 완성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되었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제자로 받아주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한 제자가 되었다가 포인트가 아니라 의리도 없고, 손에 들려진 고기에만 관심이 있으니 계산이 끝나면 확 관계를 정리해 버리고, 이런 제자들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제자로 부르시고 다시 받아주는 것 이것이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포인트라고 하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열두 번도 탈락했을 것이 저입니다.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능력 없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을 잘 모르는 것 이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실천사항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천사항 1. 누리기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하는데 기성세대의 책임이 큽니다. 주안에서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규율만 있고 강요만 있고, 신앙 생활의 묘미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한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저는 새벽이 너무 좋습니다. 일만 성도 파송을 앞두고 있으니 이 시간을 소중히 하십니다. 저에게 저녁이 없습니다. 8시에도 자고 9시에도 자고 어떨 때는 7시에도 쓰러질 듯이 잡니다. 한시, 두 시에도 일어납니다. 새벽이 너무 좋습니다.


새벽마다 이 찬양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음성 분명하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님 나와 동해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찬송가 442장)"


저와의 교제를 주님도 기뻐하십니다. 저와 같은 피조물 중에서도 아무 쓸데없는 나도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신앙생활은 비밀입니다. 신앙생활은 신비입니다. 큰 교회 목사라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거들먹거리면 그건 아닙니다. 내 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새벽입니다.


교역자와 일만 성도 파송운동 이야기를 하다가 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4월 첫주부터 담당 목사님들이 발표되고 여러 가지가 떠오를 때 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저는 이렇게 두려움이 몰려오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두려울 때 생각하면 가중됩니다. 그러면 초저녁에 잠을 잡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한 네 시간 다섯 시간 충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그 새벽에 다 회복이 되었어요.


여러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누리셔야 합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찾아가는 대상이 실패한 제자도. 주님의 사랑의 잣대로 사랑하시는, 무슨 재미로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실천사항 2.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태도를 회복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히 누린 다음에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람을 통해 누리는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장착이 된 다음에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기능으로 다가가서 무슨 은사가 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만난 교회를 70년 60년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신령한 은사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주님의 정신을 그분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앞에서 마쓰시타 고노케 관련 자료를 보다 보니 마쓰시다 전기는 2차 세계대전 전범 기업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한 전력이 있습니다. 확 깨는 것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일본 사람에게만 통하고 바로 물 건너 어려움을 겪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통하지 않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갖는 의는 제한된 자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인공이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되면 압니다. 정치인들에게 상처받는 것도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사람들에게만 그럽니다. 이것이 다 폐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근본정신 차원에서 차별하지 않고, 봉사하면 더 많이 사랑하고, 헌금을 많이 내면 더 많이 사랑하고 이것은 자기 위에 대해 나오는 사람입니다.


30개 교회 예비 담임목사에게 공포의 반복을 합니다. 분당 우리 교회는 제가 여러분을 담임목사로 모신 것은 30명의 용사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를 뒤집어 놓을 용사가 아니라 평범한 분당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섬길 담임목사님을 모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같은 평범한 사람을 위하여, 한 생명을 목양할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살아나면 한국 교회가 살아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만 성도 파송운동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이론으로 작동하는 말씀이 아니라 6개월 동안 수많은 장애인들을 만났습니다. 장애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갖는 장점을 훈련받을 곳이 없다. 히즈빈즈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울증, 정신분열을 가진 장애인들입니다. 이런 꿈을 꾸는 곳에서 기독교 학교의 기도실에서 눈물로 꿈을 꾸며 기도를 하고 재학생이 총장님과 교수님을 설득해서 도서관 3층에 학교 캠퍼스에 학생이 15평의 공간을 얻고 카페를 만듭니다. 오픈 첫날 오늘까지 학기 중에 줄을 서지 않으면 먹기 힘든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22호점까지 갔습니다. 이 형제와 교제를 하며 감동을 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22호점을 만드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이 분의 기쁨은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꿈을 의뢰하고 누림이 있으니깐 요즈음에 주일 설교를 마치면 항상 연락이 옵니다. 지난 설교에서 이런 꿈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있게 하시고 정신을 젊은 형제가 누리고 예수님의 근본정신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있으니 장애인을 향한 꿈을 갖는 것입니다.


브래는 시각장애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신론을 부추기는 가장 큰 요인은 입으로는 예수님을 고백하고 문밖을 나가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이찬수 목사 진짜 사람이 가장 소중하냐? 이론 아니냐? 문학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질문합니다. 제가 자극받았던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원합니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을 좋아하시죠? 진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론 아닙니까? 문학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까? 무슨 삶이 이렇게 추상적입니까? 이 고질병을 고치려면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여 십자가에 모든 것을 내놓으신 주님을 만나고 누리셔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가 충분히 이루어질 때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삶 가운데서 정신으로 승화될 줄을 믿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정신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 회복인 된다면 교회는 회복될 줄을 믿습니다.

01월 1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3: 13-15)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세우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제자를 세우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일을 해야 하기에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 6:12-13)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12명의 기준을 가지고 세웠을까요? 우리 교회도 교역자를 세울 때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떤 기준으로 세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습니다.


(막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제자의 강력한 특징, 부르시니 나아온 것입니다. 미국에 생활할 때 차를 세워놓고 어디 있는지 모를 때 차를 찾는데 한 시간 동안 찾습니다. 요즘은 차 키를 꾹꾹 누릅니다. 반응하는 차는 제 차 딱 한대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부름에 대한 반응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제자입니다.


설교 제목을 성숙을 향한 첫걸음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성숙에 대한 첫걸음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숙을 향한 첫 걸음 - 1. 그리스도의 주도하심을 인정하기

(막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니' 예수 그리스도의 주도 하심을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많은 무리의 요구에 주님은 따르지 않고 떠나갑니다. 무리들이 갖는 치명적인 잘못은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좌지우지하려는 태도! 아무리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막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제가 신학교 1학년 때가 생각났습니다. 존재감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지만 그 시절이 부럽습니다. 그때는 예수그리스도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목회 31년 차, 교회 규모를 갖춘 담임목사이지만 요즘은 너무나 많이 풀려있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 장로님들, 권사님들 교회를 주도하는 여러분들이 영적인 지식이 충만하더라도 예수님을 조정하는 태도가 악하다고 한다면 모두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기도를 안 하세요? 발걸음 발걸음마다 그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태도가 제자의 자세입니다.

조영택 목사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전 '주님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더 할 것 없지.' 이제 사명이 끝났기에 주님의 부르심에 흔쾌하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부럽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처럼 되기 위해서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자녀교육이 부럽습니다. 목사님의 딸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지으신 분이고 아드님은 한동대 교수님이신데 그의 생각을 지은 분입니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생각 끝이 없단다' 이 찬송을 들으면 네가 네 인생의 대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 삶의 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부터라도 그 엄청난 영적인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귀신의 행보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주님이 부르실 때 반응하는 성숙한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주도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선순위로 계획하십니다.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예수님은 물러나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세우는 일을 행하고있습니다. 이 두 모습에서 너무나 확연히 다른 주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왜 예수님이 바다로 물러가셨나요? 악한 그들과 논쟁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창조적인 일 생산적인 일, 복음을 증거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셨기 때문에 물러가시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들과 논쟁하느라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생명을 살리고 복음을 전하기에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딛 3:8-9)

누가 지적을 하더라도 잘 받으면 유익한 것이 아닙니까? 어리석은 논쟁이 아니라 영적으로 생산적인 것, 영혼을 치유하는 것, 여기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적인 순결을 놓치지 않은 주님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의하지 않습니까?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임금 삼으려는 그들을 주님이 격리되어 떠나가시려는데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3)

요즘으로 열광하는 팬을 주님이 스스로 떠나는 이유는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 29:25)

주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 복잡하고 어려워지면 기도하러 산으로 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선행해서 앞서가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기도로 승화시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숙을 향한 첫걸음 - 2. 부르심에 반응하기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3)

성숙을 위한 강력한 첫걸음입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3)

세속적인 단절을 말합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1)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4-5)

모세에게 놀라운 여호와 말씀을 받은 그곳, 계명들을 백성들에게 전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거룩한 삶, 세상과의 격리.

존스토트 목사님이 제자도의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급진적인 제자의 특징을 나는 불순응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주변 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책임을. 한편으로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 편으로 우리는 세상에 오염되지 않아야한다. "

이 세상은 섬기는 대상이지 여기서 뒤섞여서 살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더 쾌락적이지 못해서 아쉬움을 갖고 있으세요? 성숙한 제자의 첫 번째 특징은 이 세상에 대해서 불순응하는 태도입니다. 대형사고에 크리스천이 있는 이유가 왜입니까? 세상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것입니다.

13절 '나아온지라' 인생을 건 결단이 내포된 표현입니다. 제자들이 나아올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온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한 번, 얻어먹을 것 있나? 따라온다면 그것은 무리입니다.

폴트루니가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각인하고 싶은 문장이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모험은 인간 특유의 본능이다.'

하나님 자체가 가장 위대한 모험가입니다. 모험가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모험정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이 내용을 묵상하다가 저의 20대, 미국에 가서 7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겨우 가계 조그마한 거 하려고 할 때 한국에 가서 청소년을 섬겨라, 신학해라 이것이 모험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순종한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31년이 됩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목회자로 살아가는데 31년간 목회는 모험 그 자체입니다. 모험의 가장 정점이 1만 성도 파송운동입니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은 두려움 없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각종 두려움을 인지하는 가운데 영위하는 삶이다.' 이 대목을 정말 마음으로 진리다. 다 겪은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선포하고 7-8년 동안 저는 두려웠습니다. 만약 제가 새벽을 붙잡지 않았으면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불면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신적으로 건강합니다. 이 모든 것은 모험할 때 생기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하다면 다음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여호수아는 지도자 모세를 아름답게 인도했는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수 1:2)

여호수아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선포하고 잘 안 되면 성도들에게 죄인이 되는데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할머니 권사님의 피로 눈물로 설명해도 안 되는 42억이라는 어마어마한 헌금과 부부 성도님의 가평에 2만 평의 땅을 헌금하였기에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교회 수양관 비슷하게 지어버리면 죄를 지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새벽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놀라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래서 이 근래에 새벽마다 부르짖는 것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7, 8년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이 올해 거두어질 것입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이 일이 착한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정사와 평안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 (고후 11:2)

아무리 놀라운 비전과 꿈을 가지더라도 하나님의 열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고난주간

03월 29일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21.03.29]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장 12-14절)


미국에 존 오트버그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요. 누더기 하나님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왜 이 책 제목을 지었나 하면 누더기 인형이므로 앞부분에 풀어나가십니다. 그녀의 이름은 펜디였다. 머리숱이 별로 없었고 한쪽 팔도 잃은 상태였다. 흔히 그렇듯이 자기를 꼼짝 못 하는 솜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내 동생 밥이 좋아하는 인형이었다. 이 저자의 동생이 아주 어릴 때 이 분의 고모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여동생에게 인형을 선물로 구입해 준 것입니다. 처음 인형을 선물 받을 때는 예쁘고 매력적이고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길 정도였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볼품없는 인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펜디는 더는 특별한 인형은 아니었다. 특별한 인형은 아니었다. 내 동생 바비는 여전히 사랑했다. 누더기가 되었을 때도 열렬히 사랑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너무 볼품없어서 어떤 사람은 쓰레기인가 초라한 인형인데. 나이가 많이 져도 인형을 가지고 놀 때가 아니어도. 인형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도였느냐면 한번은 캐나다로 여행을 간 적이 었었다. 돌아오는 와중에 인형을 호텔에 두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일리노이로 포드에서 캐나다로 휴가를 떠났다. 일리노이에서 펜디가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갔다. 일리노이주는 제가 이민 갔을 때 살던 곳이니깐 캐나다 가는 곳이니 12시간이 걸립니다. 이 저자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미 인형을 캐나다 호텔에 두고 엄청난 시간에 걸려서 왔는데 상상해 보건에 펜디 인형을 두고 왔다고 난리를 부렸을 것입니다. 인형을 가지러 호텔까지 간 것입니다. 심지어는 동생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는데 어머니가 인형을 버리지 못하고 천에 싸서 상자에 넣어 20년간 다락방에 보관하고 나중에 여동생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는데 누더기 인형을 캘리포니아 인형을 수리하는데 가지고 가서 자기 아이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쭉 제가 들으면서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펜디에 대한 여동생의 사랑이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펜디라는 인형을 가지고 책 제목을 우리말로 그렇게 바꾸었지만, 누더기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풀어가는 첫 대목에서 유치하게 보이면 유치한 내용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게 어디에 접목이 되어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이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고난주간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핵심 메시지입니다.


제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담임목사가 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해주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이 된 것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2)


오래전부터 이 말씀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사실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충성스럽지도 않고 이런 직분을 맡을 사람이 아닌데 주께서 충성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팔이 하나 떨어지고 그 인형이 뭐가 그렇게 아름다웠겠습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 펜디 인형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이 비효율이 어디 있습니까? 수 시간을 되돌아가서 인형을 가지도록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펜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주변의 가족들이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포인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저도 비슷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미대 조소과에 나왔습니다. 17평 빌라에 사는데 그 좁은 집에 자기가 만든 작품이라면서 거의 저만해요. 여자 하나가 서 있는. 완전 이것은 쇳덩어리입니다. 뭔 것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작품들을 못 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부교 역자 시절에는 2년에 한 번, 1년에 한 번 이사 다니는 열 몇 번 이사 다니는 것입니다. 작품이 하나 팔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진짜 볼품이 없었습니다. 되게 흉악스러워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이니 화장실 가다가 놀란 적도 있습니다. 왜 이것을 두는지. 흉스러운 이것을. 계속 제가 부탁하고 협박하고 조르기도 하는데 못 버리는 것입니다. 왜 못 버릴까요? 제가 보기에는 팔 하나 떨어져 나간 흉물처럼 보이는 것인데 아내 입장에서는 자기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누더기 하나님의 책에 나오는 인형을 버리지 못하는 저자의 여동생과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펜디 인형 끝 부분을 읽다가 막 눈물이 나면서 정말 후회를 했습니다. 결국은 내가 버리게 하였거든요. 이것을 버리는 날 속이 시원했습니다. 징글징글하던 게 없어졌다고. 제가 진짜 후회했습니다. 저는 얕디얕은 인생이라고 어제도 고백했지만요. 그 소중한 것을. 팔 떨어져 나간 그 조각 하나 있다면 진짜 제게 은혜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에요. 팔이 하나 떨어져도. 다리가 하나 떨어져도. 아까 져 자가 표현한 쓰레기 같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근원적인 출발이 우리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팔 떨어진 것을 보면 얼마나 은혜가 되었을까. 후회됩니다. 집에 팔 떨어진 작품이 있으면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펜디 인형을 앞에서 쭉 설명하고 이런 적용의 글을 남겼는데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더기 인형이다. 타락 이후 모두 누더기 상태에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연약함에 고정되어있다. 진리가 선포될 때 우리는 속이기를 원한다. 불평한다. 충성의 맹세가 있을 때 우리는 고의적으로 배반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누더기 인형이다. 하나님은 우리 누더기 상태에 잘 알고 계신다. 어떻게든 우리를 사랑하신다. 누더기 상태는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29명의 예비 담임목사님과 제가 매일 고백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29교회의 예비 담임목사로 스는지. 무엇이 매력적인 것이 있는지. 우리 모두 누더기 인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누더기 인형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못하는. 팔이 하나 잘려버린 조각 인형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봐줄 수 없는 인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인형을 버릴 수 없어 꽁꽁 싸서 20년간 다락에 보관하는 하나님의 누더기 인형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각도로 묵상하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것은 이 구도더라고요. 요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악한 니느위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의 생각이 옳지 않나요? 그들의 악독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와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9-11)


허랑방탕하게 온 그 녀석에게 살찐 짐승을 잡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둘째 아들은 패륜아입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자 취급한 인간말종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시각이 너무나 이성이 발달한. 누가 이야기하면 반박할 수 없는 큰아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여겨주시는 사랑입니다. 여전히 너는 내 아들이야. 이것이 여겨주심. 여겨주심의 사랑을 인식하고 감격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에 마음이 너무 뜨겁고 은혜가 되다 보니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예수 (찬 337)


여겨주심이에요.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바울이나 저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된 여겨주심이 두 종류의 여겨주심을 여겼는데요.



두 종류의 여겨주심: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심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43:4)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대면하는 이웃에 대하여 여겨주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은혜를 모른다고 여기는 것 아닙니까?



직분에 대해 충성됨으로 여겨주심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2)


자기는 오히려 주님을 핍박한 자격을 상실한 사람인데 주님이 나를 충성 되게 여겨주시는 은혜. 이게 아닌데 사실은. 충성스러운 자로 여겨주시고 존재가 옆구리 터진 인형 같은 팔 하나 잘린, 매력도 없고 사람들 앞에 내세울 게 없다면 내 존재를 귀한 것으로 여겨주시는 은혜를 감격하면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한가지 살펴볼 것이 있는 데요. 제가 사도바울에 대해서 묵상하고 살펴보면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시간이 가면서 자기를 비하하는 게 점점 더 심해집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자기를 스스로 낮추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자기를 조금 더 낮춥니다. 사도 중에 작은 자에서 모든 성도 중에 작은 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 정도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맨 먼저 자기를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표현했던 고린도전서 말씀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에 기록한 편지의 말씀 내용이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는 감옥에 투옥된 이후에 기록된 서신이고 맨 마지막에 나온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감옥에 투옥된 이후 죽음을 앞두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갈수록 자기 비하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까지 자기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낮추는 원동력은 바울이 누렸던 두 종류의 사랑. 존재를 귀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어떤 상황에서도 충성스러운 자라고 여겨주시는 사랑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겸손의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두 종류의 여겨주심을 받았는데 이 여겨주시는 사람에 나오는 특징이 무엇인가? 자신감입니다. 자신감 없이 자기를 비하할 수 있습니까? 제가 겪어보니깐 사람들이 저보고 솔직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자기 오픈을 잘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맞는데 한편은 틀려요. 해결된 것만 오픈을 합니다. 여전히 내 망므에서 부대끼는 것, 해결하지 않은 것 부끄러운 것 오픈하지 않습니다. 가려가며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픈을 많이 하니깐 해결된 게 많은 것으로 받아주세요. 여전히 예수 믿는데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게 많을수록 교역자일수록 자존심을 건드리고 터트려야 하는데 못하는 교역자를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긍지와 자부심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왜 걸핏하면 상처받습니까? 왜 걸핏하면 오해하십니까? 저 사람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고 왜 그러십니까? 왜 우리는 사도바울이 같는 겸손함.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사도바울의 존재를 위대한 종으로 인식을 하는데 자기는 정반대로 자기 비하가 심해집니까? 거기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자신감이 베어저 있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가지 못합니까? 사도바울이 누렸던 두 종류의 여겨주시는 사랑을 누렸기에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우리로 하여금 자신감을 되찾아주고 삶의 여유를 가져다줌으로 말미암아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시비 걸고 없는 말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좁아터진 내 존재. 내 속이 너무나 속상하고 너무나 원망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왜 여유가 없느냐고요? 사랑의 풍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주간에 가정의 대화가 복구되기를 원하고 옛날에 우리는 가정보다 식구라고 했습니다. 식구가 뭡니까? 밥식 자가 입구 아닙니까? 밥 같이 먹는 사람이 식구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 가정마다 고난 주간을 계기로 밥 같이 먹는 시간이 확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서를 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이 은혜를 가정 안에서 대화를 나누어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축복하고 대화하는 소재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1. 여겨주심의 사랑을 누려라


삶의 풍성함이 있고 자신감이 있고 자기를 드러내는데 어떤 부끄러움도 부끄럽지 않으려면, 우리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저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인터넷의 플룻 신학대학 교수님의 명언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떤 것은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저는 후자에요. 다른 목사님이 갖지 못한 어마어마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제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치가 있는 거예요. 누더기 인형같이 옆구리도 터지고. 아내 작품처럼 팔이 이사하다가 떨어진 흠이 많은 저지만 남들이 갖지 않은 가치를 갖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겨주심의 사랑으로 저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랑에 힘으로 모든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이 겸손 떠나 하겠지만 제가 설교를 하고 청소년 사역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연락이 와서 누가 이번 주 설교가 은혜가 되었다고 하면 그런가 하면서 기쁘잖아요? 산책하면서 들어보잖아요. 하도 이해가 안 돼서 예전에 청소년 사역할 때 중학교 애들이 목사님 은혜받았다가 해서 제가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이게 설교를 아 했는데 성령님이 성도들 귀에 어라고 물리적으로 바꾸어주시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지루하게 설교하는데 지루하게 들리면 육적인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엄청나게 지루하게 설교하는데 매력 없는 걸 계속하는데 성령님이 어로 들리게 하시나 보다. 그렇게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내 인생이 유난히 사랑받을 조건이 있어서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거에요. 수천 명이 인정을 해도 여전히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없는데 여겨주심의 사랑을 받아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팔 떨어져 나간 조각품이지만. 싸우면서까지 애쓰는 여겨주심의 사랑. 그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가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3절이 더 좋아요.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라. 논리 0점이에요. 논리가 안통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기를 택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이 오늘 저를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인생으로 바꾸어 가는 것.


두 번째 실천사항. 십자가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게 첫 번째라면. 두 번째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누더기 하나님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나의 누더기 인형을 사랑하라. 이것은 패키지 거래다.' 여겨주심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이 사랑으로 점점 감격이 넘쳐진다면 패키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존귀 여기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마음으로 나의 누더기 인형들을 사랑하라.


29 목사님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거든요. 29 목사님을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는 방식을 택하신 하나님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우리의 발달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실력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너무나 주님 안에서 성숙한 성도님들을 만나면서 긴장이 풀릴 때 마음껏 사랑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결론을 맺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의 주제 '십자가 변화의 능력'입니다. 변화의 능력이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면 풍성해진 사랑을 가장 먼저 흘려주시는 대상은 가장 가까운 대상입니다. 그것이 가정이고 가족입니다. 오늘서부터 금요일까지 식구. 저녁을 식사를 같이하고 말씀을 같이 듣고 여겨주심의 사랑으로 어떻게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하고 섬길 것인지 가족 간에 많은 대화와 기도 제목이 오가기를 원합니다.




03월 30일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21.03.30]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3:14-22)


소아시아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보면 칭찬도 받고 책망을 받는 교회도 있고. 책망은 듣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듣는 복된 교회도 있는데 유독 오늘 살펴보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칭찬이 없고 주님의 책망만 있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 꾸지람을 듣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게 3:15-16)


상상하지 못한 주님의 무서운 질책 아닙니까?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히에나볼라의 온천수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수 km를 통과하면서 뜨거운 온천수가 다 식어서 물이 미지근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히에라볼라 온천수는 그 지역이 석회질이 많아 물이 미지근하면 사람이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물맛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지역, 상황을 들어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무섭게 질책합니다. 온천수에 대해서 설이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그 상황을 들어서 너희들이 어떤 상황인지 아느냐? 구토가 나올 정도로 마실 수 없는 물들을 너희들이 볼 수 있지 않느냐? 너희들의 신앙 상태가 이런 상태이다. 심각한 경고의 말씀 아닙니까? 사실 히에라볼라 지역의 온천수가 너무나 뜨겁고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흘러내렸느데 지나가는 과정에서 다 식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초심을 지킨다는 것. 하나님 모든 교회들이 개척을 시작할 때 목회자가 성도 할 것 없이 모든 결혼한 부부가 가정을 시작할 때는 그 열정을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부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넘쳐나는데 시간 지나면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여러 차례 다짐의 의미가 있는 데요. 자꾸 이런 것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제가 30살 되던 해에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왔을 때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저는 고신 교단에 자랐는데 합동 교단으로 너무나 괴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너무나 은혜가 충만하고 단독 목회를 하면 인생을 불태우겠다고. 뜨거움의 시작이 목회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안정이 되면서 저 자신에게 책망하는 것. 돈의 욕심이 생기잖아요. 제가 꾸짖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땀 흘리고 벌지 왜 그랬냐고. 명예에 자꾸 마음이 가면 처음에 이러려고 한국에 나온 것이 아니겠냐고. 제가 사랑의 교회에 옥한흠 목사님 밑에서 너무나 배우고 싶을 때 그 기도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 사례비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제가 사랑의 교회에서 어떤 권리를 찾지 않겠습니다. 그때는 사랑의교회 문고리 잡는 일이라도 맡겨만 주신다면. 그렇게 시작한 것이거든요.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그 교회는 문고리가 없는 거예요. 문고리 잡으려고 갔는데. 새 생명 축제가 열리면 신임들에게 맡기는 것. 2층 맨 끝에서 목사님이 복음 설교를 하시고 초청하시고 콜링하시고 다 일어나서 마짐가 찬양을 부를 때 제가 투입된 것은 총알같이 의자를 접는 것.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비록 젤 끝에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성도들 일어났을 때 빨리 의자를 접어서 나가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제가 그 일을 하면서 엉엉 울면서 했습니다. 초청된 영혼들이 간절히 일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2층 맨 꼭대기에서. 그렇게 제가 사역자의 길을 걸어갔는데요. 이게 어떻게 되었는지. 어제도 잠깐 그런 고백을 했는데 포장술만 는 것이 아닌가. 개척 초기에는 목사님 말도 더듬하고 어눌한 것이 매력적이다. 요새 그런 이야기는 아무도 안해요. 제가 너무 세련되었나 봐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해진 것이 아닌가요? 저녁에 왜 집회를 합니까?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처음 은혜받았던 그 자리로 돌아가자는 결단 아니겠습니까?


29 예비 목사님들과 몇 개월을 지나면서 어떻게 말하더라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제가 의도적이지만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지금은 실탄 나누어 지기 전에 조교들이 엄청 굴리지 않습니까? 정신 차리라고 엄청나게 굴리는데 지금이 그 시간이다. 4월 1일부터 29교구. 실질적으로 1만 성도 파송 운동이 시작되는데 2시간씩 잔소리를 했습니다. 오늘도 드림센터 우리교회 예비 15 담임 목사님을 딱 마주쳤는데 나지막하게 목사님 더 꾸짖어주세요. 어떤 지적을 해도. 지난주에는 너무 모독적인 말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우리 같은 이 정도도 안된다고. 우리가 마주한 한국교회 상황이 사단의 무서운 공격이 너무나 어마어마 하기때문에 이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서 금식하자는 것입니다. 29 목사님 모두 초심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그 자리에 앉아있고 29 목사님들이 저를 꾸짖어야 합니다. 미지근해진 것 같아요. 내 힘으로 안 되면 어떻합니까? 십자가 앞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주간 함께 나와 사모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뜨거운 온천수가 그렇게 출발을 했는데. 그 수로를 따라 라오디게아 지역에 도달할 때에는 미지근해서 사람들이 석회수를 먹기 곤란한 물로 변질되는 것처럼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인데 미지근한 신앙상태. 주님이 얼마나 싫으시면 그런 표현을 쓰시겠습니까? 엘리야 선지자의 촉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라오디게아 교회 예를 왜 들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갖춘 것 같은데 창립 20년이 되어가는 분당 우리 교회가 미지근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두려운 마음에 묵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표현은 내가 주님만 사랑합니다. 이 표현 아니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뜻은 내가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둘 사이에서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고 이것은 주님 사랑합니다가 아닙니다. 이런 엘리야의 촉구에 대해서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이게 미지근한 신앙이 아닌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 마음으로 큰 소리로 선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설교도 길지 않고 찬양도 줄여서 가정에서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왜이렇게 미지근해졌지? 신앙 교육이 왜이렇게 미지근해졌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내가 주님을 엄청 잘 믿고 있다고. 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 오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두려움은 이것입니다. 30살 때 한국으로 돌아와 31년 자부심이 있습니다. 한 길로 달려왔다고. 그런데 이게 라오게디아 교회와 같은 오판이었다면. 불법을 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이것으 두려운 것입니다. 평가는 주님이 하시는 거니깐요. 점수는 내가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늘은 라오게디아 교회의 상황이 참 두렵습니다. 정말 분당우리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라오게디아 교회처럼 오판하는 교회. 소문이 얼마나 나는지 아느냐? 이런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오판되지 않도록.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죠. 그러면 라오게디아 교회는 어처구니없는 오판. 잘못된 판단을 내렸나?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상업이 발달하고 의료가 발달하여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외적인 풍요로움이 항상 우리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하고 내일 이틀에 걸쳐서 라오게디아 교회를 설교하는 데요. 7 교회 중에서 현대인들. 도시 교회와 가장 닮은 교회가 라오게디아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겉보기에 다 갖추었고. 사람 많이 모이면 좋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헌금 얼마 들어오느냐. 6 교회 단 한 곳도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헌금 많이 들어오면 달라고 할 것도 아닌데. 교회를 그런 것으로 판단하는 물질적인 세상에 살다보니깐. 이렇게 것으로 부유한 덕에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라오게디아 교회는 로마 당국으로 재정적인 도움도 안 받았다는 글을 얼핏 보았습니다. 그게 병드는 조건입니다. 오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터널을 지난다면 성령님이 마음에 깨우침을 주길 원합니다. 결핍된 마음으로 내 영이 살게 되었다고. 이런 점에서 라오게디아 교회는 겉보기의 환경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라오게디아 교회는 자기들의 여건이 너무나 풍요로워 존재 가치가 가치 있는 것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코 사랑받을 것이 없는 나 같은 것을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나 같은 것을 사랑해 주시는 어떤 대상이 있기에 어떤 것은 가치 있기에 사랑을 받는다. 어떤 것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여러분의 존재가 가치가 있어서 라오게디아 교회에 바라는 것이 없어. 이것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는 것. 사실 그 설교를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거 어디에 버렸느냐고. 본인도 모르더라고요. 하도 시간이 오래되어서. 오전 오후 내내 아쉬웠습니다. 미련한 것. 그 평생에 교훈이 될 그 멋진 작품을 왜 버렸을까. 마음에 팔 떨어진 조각품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저게 내 모습이라고. 내 모습이 존귀해서가 아니라 이런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존귀한 내가 되었다고. 이런 고난 주간을 앞두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 말씀이 내 마음에 맴돌게 하였는데요. 지식이 없어 망하는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내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지. 내일 제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맨 앞의 무지함은 나를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은 목사에게도 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가 커진 것이지 담임목사 존재가 커진 것입니까? 그렇게 속이는 것 아닙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깨어지는 일이 고난주간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내일은 라오게디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살펴보려고 하고, 문제 많은 교회에 대해 주님의 세 가지 배려. 영적 무지에 빠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배려를 보려고 합니다.



1. 다 아신다. 혹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개척 초기에 제가 사람을 뽑았습니다. 지난 10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데 제가 뽑지 않습니다. 우리 교역자들에게 다 넘겨 주었습니다. 맨 마지막에 올라온 그분들만 점검하지 제가 직접 뽑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29 목사님을 청빙하는 과정에서 내부는 부교역자들이 스스로 청빙하고 외부에서 6명의 맨토 목사님으로 그분들이 주도를 해서 채워지는 것은 제가 나서서 했지만 제가 나서지 않습니다. 제가 저를 믿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시간이 갈수록 다 아신다. 내가 행위를 아노니. 제가 남에 대한 판단, 비판도 할 수 있는 데로 안 하는 이유가 이 판단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 장로님 제가 섣부른 판단도 안 할 뿐더러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 판단이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다 안다. 벌거벗은 몸으로. 거짓 없이. 오늘 저는 시편 139-1-2 참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2)


그 주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우리 하나님이 다 아신다. 관심을 갖고 계신다. 라오게디아 교회에 주님의 첫 번째 배려입니다.



책망으로 교정해주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자녀의 성숙 행동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 책망으로 징계하오니 비참하게 만드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를 책망하고 징계를 위하여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예수 안믿는 사람들은 제멋대로 하는데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바로바로 징계하세요. 잠도 안 오고. 이게 너무나 불편하지만, 이것이 축복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분당우리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담임목사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면 큰일 났겠지만 하나님이 매일 책망하십니다. 나단 선지자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달콤하고 유익한 것만 찾아 읽는 성경은 반쪽짜리 교훈입니다. 또 하나 주님이 보내주신 신실한 동역자. 그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 책망을 수용하고 있습니까? 징계를 받습니까? 어느 순간 교회가 징계가 없어졌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주일을 어겼다든지. 무슨 집사님 일어나세요. 몇 달간 수 찬을 제합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교회가 여기밖에 없나. 가버리니깐요. 옥한흠 목사님이 너무나 그리운 것이 목사님의 꾸지람 때문입니다. 화요일 새벽마다 한주 첫 시작을 아침도 안 주시면서 7시 30분 불러서 너무나 무서운 말씀으로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한 두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삯꾼, 분기마다 나오는 것은 목회 그만두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그것을 그대로 닮아서 9시에 목회 그만두어라. 그렇게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데 뭐하러 목사 하냐고. 그 당시 그랬고 당시 분당 우리 교회 부목사들도 그렇고 상처받지 않습니다. 지난주일 일부에 소개한 적이 있는 데요. 실탄 나누어주기 직전인데 두 시간씩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고 잔소리를 하고 지난주 날이에요. 새벽에 가책이 느껴지는 것이에요 내부 15 목사는 저를 잘 알지만, 외부 14 목사님은 얼마나 그렇겠습니까? 새벽 3시 넘어서 외부 14 목사님 중 한 분이 목사가 왔습니다.


해외 입양된 분에서 들었는데 소외감을 느꼈을 때 혼내지 않은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기꺼이 혼나고 잘 배우겠습니다. 모든 일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가족 됨에 대한 일들이라고 생각하고 매진하겠습니다.


새벽 3시에 너무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런 목사님 29분이라면 되었다. 이 초심이 잘 지켜지도록 기도해주시고. 제가 계속 그러겠습니까? 이러다 마는 것이지. 이 초심을 가지고 주님이 사랑하셔서 말씀을 가지고. 주변의 지도자나 사람으로 지적하고 책망을 할 때 우리 주님의 배려라는 것을 깨닫는 영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인 기쁨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책망받을 짓만 하는 교회 성도들에게 왜 초청의 자리에 부릅니까? 그분의 애절한 메시지가 있는데 라오게디아 성도들이 누리는 물질의 풍요에 빠진 그들에게 주님이 무슨 말씀으로 고정해주기를 바랍니까? 나와의 교제 없이는 어떤 것도 너희를 부유하게 할 수 없어. 그분의 영적인 교제 없이는 깊게 할 수 없어.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성도님들이 꽤 많은데요. 그중에 저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판단을 잘못할 수 있는 저에게. 성도가 몇만 명 모이는 것으로 부유하게 할 수 없어. 너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 사랑의 교제 없이는 절대로 부유한 인생이 될 수 없어.


박영선 목사님이라고 은퇴하신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최근에 쓰신 책을 보았는데요.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
요셉의 활은 그보다 튼튼하고, 그의 팔에는 힘이 넘친다.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


너의 아버지가 받은 복은 태고적 산맥이 받은 복보다 더 크며, 영원한 언덕이 받은 풍성함보다도 더 크다. 이 모든 복이 요셉에게로 돌아가며, 형제들 가운데서 으뜸이 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창 49-23-26)


축복하면서 하나님이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 중에서 신앙 수준이 제일 떨어지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은 그런 자신을 알기에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너의 아버지가 받은 복. 박영선 목사님의 책에서 이 부분을 강조하는데 너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왜 나의 하나님을 강조하는지 아시잖아요. 야곱은 알아요. 자기가 자기 아버지보다 자기 할아버지보다 누더기 인형이라는 것을 알아요.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어요. 팔 잘린 초라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요. 나의 하나님.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 너의 아버지가 받는 전능하신 분. 이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에요. 라오게디아 교회가 갖는 끔찍한 오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붙잡고 있는 것. 그게 아니라 비록 야곱처럼 참 여러 가지 문제가 많고 부끄러운 것이 많고 수준이 낮고. 예수 믿은 지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속적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누더기 인형 같더라도. 내 여호와 하나님. 내 아버지 하나님.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


예야 그걸로 너는 부유하게 될 수 없어. 문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주님을 내 심령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 교제하며 그 분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나를 부유하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월 31일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21.03.31]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3:14-22)


어제와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 데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은 듣지 못하고 책망만 듣던 교회였다. 책망도 얼마나 끔찍한 책망인지 모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 :16)


이 정도 끔찍한 책망이 있을까요? 무서운 질책을 받았던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었는 데요.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항을 발견하는데 쭉 이것을 살펴보다 보니깐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지고 꾸짖으시는 주님이 전반부 후반부로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전반부 후반부 나누는 분기점이 18절의 한 마디였는데요.


'내가 너를 권하노니'


이 짧은 한마디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전반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너무나 비참하고 변질되고 타락한 것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주님의 한마디 말씀이 그 앞에 나오는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하나하나가 너무나 비참한 것 아닙니까? 비참한 상태가 전반부인 17절까지 묘사한 것이라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한 마디가 그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라오디게아 교회에 반전을 이끄는 단초가 아닙니까? 내가 너를 권하노니 이 말씀 안에는 여전히 비참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라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문을 보다 보니 암과 명이, 전반부는 너무나 어두운 먹구름으로 차있는 말씀이지만 '내가 너를 권하노니' 한 마디를 기점으로 암이 명으로 바뀌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얼마나 거룩하고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 이상으로 비참하더라도 주님의 한 마디 '내가 너를 권하노니'에 반응할 수 있다면 완전한 반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모여드는 이유가 이 한마디 듣기 위함 아닙니까? '내가 너를 권하노니' 어제 말씀 드렸조. 7 교회 중에서 가장 비참한 교회를 이틀동안 살펴보기 위한 것은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보다 낫습니까? 미지근한 상태에 빠졌다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들었던 책망을 안들을 자신 있습니까? 더했으면 더헀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3:22)


이 설교 다 듣고 주님 저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보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 꾸지람과 책망.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주님. 아픈 마음으로 주님의 권면, 주님의 책망 마음을 듣고 수용하겠습니다. 이게 고난 주간 견재해야할 말씀 아닙니까?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주님의 권면 세 가지를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까지 용어도 만들어보고 듣기 좋게 만들었다가 오후에 다 치웠습니다. 내가 가공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 그대로 표현하자. 이 세 가지를 그대로 받으면 좋겠습니다.



1.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금의 특징을 표현한 것인데요. 이 말씀을 이애하려면 베드로전서 1장 7절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벧전 1: 7 새번역)


믿음이라는 것은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연단을 통해서 굳세어져 가는 성질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연단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쇠붙이를 불에 두드려 단단하게 함.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이것들을 종합해보니 하나님 나라의 훈련, 강력한 특징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들겨서 단단함으로 형체를 바꾸는 것.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 이상으로 너무나 편하고 여러 가지 여건이 좋고 지금 저는 한 걱정입니다. 지금 코로나 19가 1년 반, 2년을 향해 가는데요. 교회를 못 가는데 마음이 아프고, TV를 켜놓는 게 마음이 아팠는데 주차 걱정도 없고 옷 안 갈아 입어도 되고 편한 거에요. 코로나가 끝나도 이제 나 이렇게 예배드리지. 이런 분들이 나올까봐 걱정입니다. 코로나 19라고 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연단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귀의 악한 공격. 편하게 신앙생활해라. 뭐가 다르냐.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연단을 통해서 굳세어 지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려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모든 것이 결핍이 되니깐. 갖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깐. 주님이 만나를 내려 주지 않으면 내일 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 속에 빠져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내가 사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20대 때 너무나 강퍅한 저를 한국에서 훈련하기 어려우니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 시카고로 던졌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철 없이 지내던 제가 3월 15일 저의 제2의 생일입니다. 제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아무도 모르던 철부지 중의 철부지인 제가 시카고 공항에 도착하면서 낌새가 이상하더라고요. 우선 영어 하는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듣고 이민 수속받는데 이상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억장이 무너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흘린 눈물은 한 통이 될 것입니다. 길가면서 울고, 초라해서 울고, 몸이 고단해서 울고, 맨날 세수하다 보면 코피가 나고 너무나 많은 연단을 경험했는데 그러고 8년 차 부터 역이민, 우리나라에 와서 영어 안 해도 되고 한국에 와서 좋았는데 그때부터 외로움. 온 가족이 외국에 있는데 결혼도 안 한 막내 동생이 서울생활 하는데 또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하여튼 제 가슴은 주인을 잘못 만나서 20대부터 지금까지 터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좋아서 터지고 안 터지는 게 신기해요. 93년 11월 1일까지 결혼하기 전까지 말로 다할수 없는. 오죽 답답하면 방학 때 동료 전도사님들이 집으로 가는데 저는 사당동 총신대 기숙사에서 하루에 세 마디도 못할 때가 다반수였습니다. 너무나 답답해서 총신대 앞에서 숭실대 넘어가는 언덕에서 거기 가면 사람들이 많아요. 막 소리를 지르면서 그때부터 설교를 너무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돌들 여러분 소리도 질렀습니다. 그때 생각하면 너무나 초라했죠. 너무 말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 미국 사람들 아래에서 영어 못하고 육체노동으로 고생했던 7년 한국 돌아와서 결혼하기 전까지 4년간의 훈련이 저를 낮추는 훈련이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분당 우리 교회에서 쫓겨나는 거 걱정하지 않습니다. 시카고에서 쓰레기통을 뒤졌는데 나와봐야 쓰레기통밖에 더 있을까요? 원고에 없는 말을 하다 보니 또 있었는데 까먹었네요. 내일 아침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것을 모르고 인생 7년을 그렇게 보냈기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아노라. 이 훈련을 14년 받다 보니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선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8년 동안 점심 먹으면서 어떤 교역자가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진짜 이것은 기적입니다. 목사님이 이거 발표하면 교회가 혼란스럽고 악한 공격이 있고 성도님들이 뒤죽박죽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성도님들이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지, 교회가 어떻게 은혜의 길로 가는지 말로 다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저도 동의하였거든요. 제 인생에서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14년의 기간이 축복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이에요. 그게 뭔지 아시잖아요.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이고 그런 면에서 불쌍한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축복을 모르기에 얕디얕은 초라한 인생으로 전락한 것이 아닙니까? 이런 차원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억장이 무너지는 시간을 틈만 나면 여러분에게 자랑하는 것을 이해되세요? 14년의 고난과 연단의 시간이 얼마나 저에게 복된 시간이라고.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이라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성도가 많고 노출이 되었기에 단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나지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강심장이 아니라 새가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이걸 구현해낸 인물이 요셉 아닙니까?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그 못된 배다른 형제들로 인해서 애굽에 인신매매되어 팔려간 것도 죽을 지경인데 만난 것도 이상한 여자입니다. 남자보다 여성들이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어서 부실해요. 그런데 여성은 심장을 보호하는 재료로 만들어서 여성들이 훨씬 우수합니다. 성적인 충동에 매이는 것도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성숙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만나도 이런 욕정의 중년 부인을 만나서 어린 애에게 말도 안되는 성적 유혹을 하는 그것을 요셉이 끝끝내 이겨냅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대는 여자를 뿌리치느라고 옷을 벗고 갑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요셉인데 세상에 갖다 붙일 것을 붙여야지. 성폭행 미수범이 뭡니까? 그래서 18절이 나온게 아닙니까?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8)


손발이 묶인 것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성폭행 미수범이라는 사실이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요셉 입장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요셉을 큰 위기의 때에 온 나라와 민족을 귀하는데 쓰였든 어마어마한 종으로 쓰였든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단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은 요셉이 썼다 생각하고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이게 요셉의 이야기에 해당이 됩니까? 안됩니까? 지난 끔찍한, 수치스러운 그 모든 세월을 너무너무 기뻐하는 너무너무 감사하는 이것이 요셉과 저의 공통점 아닙니까? 젊은 청년들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수 많은 LH가 뭔가 수많은 청년들의 분노를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모순된 사회를 통한, 여러분이 남몰래 흘려야 할 눈물이 반드시 이 땅 가운데서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사건으로 바뀌게 될 줄을 믿습니다. 바뀌게 될 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에서 배우는 메시지는 보통 금의 순도를 나타내는 단위가 캐럿 아닙니까? 99.9% 순금은 24K, 불순물이 섞이면 18K, 금이라고 다 금도 아니에요. 24K가 되기 위해서 14K, 18K가 겪었던 뜨거운 불 정도로 안됩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이 정도면 되었어는 없습니다. 99.9% 온전한 성숙을 위해 성화를 향해 가기에 사도바울이 존귀한 것이 이것 아닙니까? 이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몸부림이 그 과정에서 사도바울이 끝없는 연단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하는 마음으로 달려간 것이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고난이 없었어? 주님이 권면을 받아들이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4-5)


흰옷을 입는 표현은 하나님을 위한 구분됨.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 도덕적이거나 영적으로 깨끗해짐.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뜻이 흰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다.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우상숭배와 악행에 물들어있던 악한 짓을 청산하고 거룩을 추구해라. 성결을 추구해라. 음란한 자리에 빠져있지 마라. 이것이 권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떻습니까? 세상과 구분되는 흰옷을 입고 다니세요?


그런가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늘 음란하고 악한 시대에 물들지 않으려고 그냥 막 컴퓨터 클릭 하나조차 도 긴장하면서 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시대이기에 육신이 약해서 음란하고 악한 시대에 잠깐잠깐 빠졌다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같이 양털같이 희게 되는 꿈을 꾸며 나가는 삶.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권면 아닙니까? 저는 18절 말씀이 마음이 아픈 것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오늘 이 시대는요 부끄러움을 잊어버린 시대 아닙니까? 옛날에는 못된 짓을 하고 카메레가 들이대면 얼굴 안 보이려고 하는데요. 요즘도 그러지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상태입니다. 저는 윤동주 시인 서시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의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영적으로 섬세한 크리스찬의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니깐요. 예전에 윤동주 시인을 소재로한 영화가 나왔잖아요. 흑백으로 만든 동주 영화의 한 대사가 이렇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지.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 씨의 초기 작품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짧은 소설이 있는 데요. 저자인 박완서 씨가 부연하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끄러움은 승화를 통해 환희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부끄러움 자체는 고통이에요. 그런데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더 낳은 존재로 가기 위한 발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짓을 하지 않기 위한 발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옷이 남루한 것이 부끄러움입니까? 영화 한번 보세요. 드라마 한번 보세요. 그 스토리 전개에 아무 상관 없는 십자가가 나오는데 어김없이 위선자로 나옵니다. 어김없이 예수 믿는 사람의 이미지는 할렐루야 아멘 한다 하면 100% 위선자로 등장하지 않습니까? 감독이 왜 끼워 넣습니까? 그래야 사람이 공감하니깐. 부끄럽지 않으세요? 목사가 뭐가 부끄러운 것입니까? 목사가 사기꾼 비슷하게 말에 책임도 안 지고 내키는 대로 내재 끼고 떠들어 재끼고 이런 이미지가 된 현실이 얼굴을 못 드는 것 아닙니까? 허구한 날 술 마시지 않는 것. 담배 안 피는 것.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술 마시지 않고 담배 안 피는 것. 진짜 부끄러워야할 시대입니다. 부끄러움이 잃어버렸기에 주님의 권면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누가 흰옷을 사서 입어야 한다고 합니까? 더럽혀진 내 모습이 부끄러워질 때. 수치가 회복되어서 그래서 제가 견딜 수 없어 주님 앞에 매달려 회개의 자리로 나가길 원합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 새번역)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헷갈리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진지한 권면이에요. 엘리제사장 다 아시잖아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삼상 3:1-2)


육신의 눈이 어두워져 가는 엘리를 묘사하면서 제사장이라는 포지션과 어울리지 않는 영적으로 무지한 그 상태가 집안을 몰락시키잖아요. 자식들이 그냥 제멋대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렇게 살아도 그것을 제어하는 힘을 잃어버린 눈이 어두워진 상태거든요. 주님의 권면을 두려워하면서 받아야 하냐? 엘리 제사장 가문처럼 몰락하니깐요. 삼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직 몰락하지 않았잖아요. 비참한 결과가 도래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밤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까? 십자가 보혈의 안약을 사서 영적인 안목이 사라진 우리가 밝아지는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방치하면 안됩니다.


이 세가지 아시겠죠?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금을 사라. 흰옷을 사라. 안약을 사라. 세 가지의 초점을 바꾸어서 '내게서' 사서라는 공통점에서 어디에 걸리면 주님에게서 사라는 것입니다. 내게서 사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이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주시는 것. 너희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만 나와 교제 없이 영적으로 풍요로울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살펴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서, 헬라어로 아고라조라는 말입니다. 속량하다. 구원하다 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18절의 말은 금을 사고 흰옷을 사고 안약을 사는 말은 이미 너희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값으로 산 것이라는 것. 주님께서 어두워진 영안을 친히 열어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표현한 말씀이에요. 이미 주님이 사셨어요. 이미 구원하셨어요. 이 말씀의 너무나 소중한 핵심은 너무나 어두워진 비참한 상태에 있지만, 주님의 의지. 내가 친히 너희를 연단하고 거룩과 성결의 자리로 연단하고. 고난주난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음에 뜨거움이 올라왔는데요.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느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의지 하는가
주님 예수 다시올 때 그대는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그대 몸은 거룩한 곳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됐는가


제가 눈물로 부르는게 4절이에요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미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금을 사고 흰옷을 사고 안약을 살 은혜를 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희를 연단하고 내가 친히 너희를 거룩과 성결의 자리로 가고. 더러워진 예복을 눈같이 희게 씻어주기를 내가 사모합니다.




04월 01일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21.04.01]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저도 참 사도바울을 너무나 흠모하고 닮기를 원합니다. 그중에서 두 가지 너무 부럽고 닮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둘 중의 하나. 흔들림 없는 중심을 가지고 삶의 방향으로 가는 것.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참 인생길 가운데 갈지자 걸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바울뿐 아니라 목표가 분명하기에 삶의 방향이 뚜렷하기에 삶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닮고 싶고요. 또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중에 찾아오는 고난이 있고 연단이 있고 여러 가지 아픔이 있다고 할 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하나님 앞에 중심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 정말 닮고 싶은데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보이는 사도바울은 고난의 모습을 초월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고난에 대해서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요. 제가 이런 것을 유심히 보니 고난에 초연할 수 있는 강력한 요인은 처음 믿음을 가질 때 받았던 그것이 이겨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바울이 잘 숙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바울이 권면하는 것을 보면 다메섹 도성에서 주님이 얼마나 고난을 받을지 잘 숙지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가 아니더라도 다 경험할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종종 말합니다. 목회는 의미부여라고요. 광고로 끝낼 수 있는 것도 영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설교 메시지가 된다고요. 제 설교를 잘 들으면 광고 같은 메시지가 많습니다. 영상팀에서 새벽 부흥회를 하고 목사님에게 영상을 보내드린다면 가만히 있어봐라. 오늘 영상이 말씀 속에서 의미가 부여되면 설교 뒤에 의미 부여해서 보여드리면 되고 그게 안 되면 광고에 붙여서 해라. 아시겠죠? 영상을 보면 설교 뒤에 오면 의미 부여했구나. 앞에 오면 의미 부여가 안 되었구나 하면 됩니다. 어느 광고 같은 일도, 가평 우리 마을 어떻게 됐습니다. 하면 광고에 불과합니다. 의미 부여가 되면 영적인 메시지가 됩니다. 무엇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하나하나가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났다. 밥 먹었다. 회사 갔다. 잤다. 하루 소일한 것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삶이지만 내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따라 사는 것은 얼마나 풍성한 일이겠습니까? 예를 들어서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어마어마하게 부담스러운 말씀이에요. 멍에를 내려주지만 어마어마한 사명의 멍에를 줍니다. 예수그리스도 멍에라는 것이.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이게 안 되면 예수 잘못 믿어서 맨날 괴로운 것 아닙니까? 맨날 주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가 부럽다고, 죽기 1분 전에 예수 믿어서 천국 갔다. 이것은 사명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이 의미가 구현되기 위해서 주님이 지어주시는 짐에 의미 부여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구현됩니다. 제가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일복을 들이부어 주십니다. 분당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일이 만만치 않은데 1만 성도 짐이라는 것을 붙여서 한 번도 생각이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가평 우리 마을, 귀한 헌금응 주시고 땅을 주셔서 이것을 아무 의미 없이 교회 수양관처럼 지으면 죄짓는 거다. 짐도 엄청나게 무거웠거든요. 드림 센터 한국교회와 사회 환원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면 되겠습니까? 호적 보면 우리 아들에게 주면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부교역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끝나고 드림센터 잘 환원하면 분당우리교회 목사 파트타임이면 하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지쳤다가, 자고 나면 회복이 되고 제가 괴로운 것은 주님도 너무하세요. 새벽에 원래 하던 본문이 있었는데 새벽에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해 죽을 것 같아요. 일주일 전 계시의 말씀으로 주면 되는데 아침마다 바뀌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새벽에 가슴도 답답한데 잠은 안 오고 스데반으로 갔다가 시편으로 갔다가 그래서 급하게 만든, 아까 자매가 막 이렇게 하는데 설교 준비가 마쳐서 올라온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가 피곤함에 쩔고 지치고 죽을 것 같이 보이십니까? 자주 지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자고 나면 회복이 됩니다. 오죽하면 분당우리교회 담임 목사만 하면 이것은 파트타임으로 해낼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한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님이 저에게 인간적인 나약함, 짐, 안 해도 되는 쓸데없는 고민을 드러내 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주님의 동역자, 엄청난 사명의 짐을 부여해 주시는데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숨 쉬는 것 하나까지도 의미 부여가 있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주님의 선물, 사명이 부여되면 그게 힘들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금방금방 회복됩니다. 모든 교역자가 항상 제게 하는 일은 그래요. 회복이 너무 빠른 거에요. 지쳐 보이다가 또 괜찮아지고.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 무거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 있는 것이 고난에 대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안희숙 여사. 일제 강점기에 악한 사람들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고, 끔찍한 고난의 길을 잘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고난이 복음을 위한 진리사수라는 의미 부여가 일어나니깐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남자들도 변질되고 하는데 가냘픈 여성으로서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사도바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결 아닙니까? 에스더라는 구약의 인물이 죽으면 죽으리라 담대하게 그 길을 뚫고 나갈 수 있던 힘도 사촌오빠 모르드게로 부터 일에 대한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사실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만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명을 부여받은 이유 하나 때문에 감당해야헀던 고난은 말로 다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 11:23-25)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행 16:22-23)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바울이지만 그는 이런 사명에 주님이 부여해주신 의미가 부여되니 감당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약함은 걸핏하면 상처받았다 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하고, 모든 것들이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 불친절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숨을 쉬는 것 하나하나 주님이 부여해주신 의미 부여의 발걸음입니다. 교역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잠이 안 오는데 뒤척뒤척하는 것도 내일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고, 밥이 안 넘어가는데 꾸역꾸역 먹는 것도 사명을 감당하려는 것이고, 치킨이 아른아른해도 컨디션 조절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요. 저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막 보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에 써먹을 수 있는 영화만 봅니다. 바람 쐬러 가는 것, 쉬는 것, 잠자는 것, 누구를 만나 대화하는 것. 우리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주님이 내게 주신 가치 있는 삶,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야겠다고. 학생들은 빨리 믿음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의미부여가 된다면, 이 은혜를 조금만 일찍 받았더라면.


불면증을 겁을 내면 반드시 불면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불면증이 두렵지 않거든요. 지난주에도 겪었고 지지난 주에도 겪었지만. 어떨 때는 새벽 1시에 눈이 따지고, 두 시에도 눈이 따지고 나는 두렵지 않아요. 12시 가면 화장실 갔다가 다시 자려고 양 세면서 그것은 어리석게 생각하거든요. 눈이 떠지면 바로 일어나서 아침에 교회 출근할 때까지 성경을 읽든지 말씀 묵상을 하든지 무엇을 해도 채워지기에 잠 일찍 깨는 게 두렵지 않아요. 그래서 불면증이 안 와요. 초저녁에 눈이 떠지며 불면증을 걱정하면 그렇게 되요. 유튜브에 의사 강의를 들어보니 제 생각과 같더라고요. 잠이 안 오면 일어나라는 것이에요. 의미를 모르면 장난치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누구에게 고난이 찾아올까요? 고난이 올 때마다 의미 부여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거구나. 받아들이면, 조금이라도 아픔에 겁을 내면, 사단이 누구에게 공격을 많이 하겠습니까?


이게 고난에 관련한 의미부여가 잘된 사도바울이 갖는 성숙한 모습입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어떻게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는가? 이게 과장인가? 바울의 삶을 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도바울이 고난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 놀라운 것.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님이 주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의지가 강력해서 바울이 그것들을 견디어 낸 것이 아니라 주셨던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그에게 함께 하셨다는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이 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면 정말 억울하고 원통한 일 아닙니까? 두 가지가 정리되십니까?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을, 모든 것에 주님이 의미 부여하여, 이 일을 통하여 어떤 유익이 일어날 것인지. 인간적인 애씀 말고, 정말 주님의 시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간섭하심이 있다. 이것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고난이 고난 되지 않는 특별한 비결 하나 더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사도바울이 똑같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도바울의 세 번째 비결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십자가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고난과 맞서 싸울 힘과 능력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온르 고난주간 우리가 왜 모였습니까? 이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도 내 삶에서 환난과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수많은 박혜중에서 뚫고 나가는 강력한 힘이고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능력이 여러분의 어려운 장애물과 여러분을 괴롭히는 고난을 이겨낼 능력이 됨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감격이 실제 여러분의 삶에 작동되냐고요? 벤츠사고 기아 중립하고 엔진 소리 듣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말했습니다. 바퀴와 기아가 물려야 합니다.


다루고 싶은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사도바울은 강력한 십자가 아래 자기가 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요.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의 강력한 특징을 아시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특징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에요. 오늘 교회 안에서 비치는 교회의 탐욕 덩어리, 주둥아리만 살아서. 맨날 희생, 아가페 아가페 비아냥 소리를 듣는 이런 것은 한국교회의 중병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진짜 내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면에 강건 하도다.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고 설교하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어제 말했잖아요. 부끄러움을 모르고 다니는 것이 진짜 부끄러움이라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에요.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선포하고 제가 여러분을 불신했어요. 누가 일만 명을 파송하겠나. 여러분 앞에서 사과합니다. 지금 보이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 9개월 남았고, 29교구 나가는 게 오늘 시작인데요. 대세가 29 교회로 옮겨가겠다고. 어떤 순장님이 여건이 어려워서 힘들다고 하니 남으시라고. 했더니 대세가 가는 분위기라고. 남으면 왕따입니다. 하더라고요. 여러분의 신앙을 제가 불신한 것 같습니다.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과 이 땅의 모든 성도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특징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일만성도 파송운동을 멋찌게 성공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능은 우리 교회가 커지면 돼요. 2만 명,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하면서 히딩크처럼, 내년까지 4만 명, 8만 명 10만 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사랑의 모습이 아니에요. 내 교회가 커지면 주변의 연약한 교회가 아파해야 해요. 내 교회가 커지면 하나님 앞에 부담이 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개척 초기에 눈에 보이는 교회마다 축복했습니다. 상가 교회 이름을 불러가면서 축복했습니다. 십자가 은혜의 감격을 누리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 은혜의 감격으로 누리고 사신다면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 정신이 마음에 잘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관점을 골 1:24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두 번에 걸쳐서 위하여가 나옵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렸던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실천 사항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두 종류의 위하여에서 첫 번째는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은 철저하게 너희를 위하여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까?


제가 신학교 갈 때 휘어잡은 말씀이에요. 외로워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0-24)


장수하고 싶으세요? 이 말씀을 붇잡고 기도하세요. 바울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세상에 부귀영화 누리려고 그러겠느냐고요. 내가 살아야 할 명분이 있다면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리라. 29 예비 담임 목사님들에게 강하게 말한 것이 그래요. 신학교 나온 사람들의 일자리가 필요해서 교회가 더 세워져 야합니까? 성도님들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학교 나온 사람들의 일자리라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휘몰아치는 은혜를 누리길 바랍니다.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라. 위하여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느혜미아를 보세요. 솔직히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호화롭게 사는 사람이었지만 조국에서 들리는 비참한 소식을 듣고 그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 3-4)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애통함이 보이지 않는 게 가슴 아플 뿐입니다. 호화로운 기득권 생활을 내려놓고 동족들 슬픔의 자리에 들어가 성벽을 재건하려던 모습.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특별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느혜미아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의 삶이 이런것이구나. 그저 풍족하게 쓰시고, 여유롭게 쓰시고 애들에게 넉넉하게 주시고 그러하고도 남는 것은 약한 이웃을 위하여, 유익한 것을 위하여 그렇게 창고를 열고 이런 삶을 사는 것을 해보세요. 어느 쪽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교회를 위하여의 삶.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계시록이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아닙니까?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게 2:1)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교회를 붇는 분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스리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계시록 서부에 강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원 자체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섬기는 담임목사가 제가 이 땅의 교역자들이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우습게 보이세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세요? 마음에 안 들면 이까짓 교회. 우습게 보이세요? 무서운 회개 중 하나가 교회를 우습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우습게 알고 함부로 여기고. 자기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우습게 보는 성도. 교회 알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장로. 이것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든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29 교회를 4월 1일 시작하면서 그렇게 누우면 잠을 자는 제가 잠을 왜 못 자는 것입니까? 교회 하나하나가 이게 어마어마한 의미를 담고 있는, 주님이 붙들고 계시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주님이 관심이 쏠려있는 교회를 위한. 29 예비 목사님께 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전에 어떤 사역을 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을 잘 모른다고. 그런데 몰라도 괜찮자고. 이전에 삯꾼이었는지 종이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이전에 어떤 목회자였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달라지면 되는 게 아니냐? 올 연말서부터. 신학교 나왔던 목사 일자리 없어서 만든 게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붙들고, 그리스도가 주목하고 있는 남은 인생에 사명이 있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던지기를 원합니다. 고난주간 이 깨달음을 얻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겠다는 정신이 골로세서 1장 24절의 결론입니다.


고난주간 은혜받는거 좋습니다.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기도하고 다 좋습니다. 기도하고 났더니 찝찝한 게 다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랬다면 오늘까지 기도의 지경을 넓혀주세요. 두 가지 위하여를 두고. 나 자신에게 급급한 좁디좁은 지경이 넓어져서 너희를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대가지급을 통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신실한 자녀 너희가. 하나님, 이찬수 목사가 살아있는 게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제가 분당우리교회 담임으로 있는 이 일이 신학교 나오고 개척한 일대 목사여서 할 수 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04월 02일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21.04.02] 분당우리교회 고난주간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 9-19)


방금 읽은 본문 말씀을 포함한 요한복음 17장 말씀에는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둔 시점에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드리신 기도를 분석해보니 세 파트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한 기도. 제자를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미래 신자들을 위한 기도. 세 종류로 나뉘어 주님께서 시도하시는 데요. 본문의 예수님 기도를 보면서 기도의 중요성 관계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셔서 알겠지만, 사역의 시작과 끝을 금식과 기도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일정한 시간을 떼어 중요한 일들. 제자를 세우는 일들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이 주님이 보이신 모범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너무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 주님 아니겠습니까? 신앙 생활하는 우리가 다른 게 변질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 기도의 의미를 모르는 것. 기도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고, 대인 관계에서 기도 빼고 나와 너의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상처받고, 나는 1로 말했는데 상대방은 2로 알아듣는 것. 풀면 풀수록 꼬이는 것.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성금요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사실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자를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에 감동을받았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제자를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성구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우리가 사랑을 고백하는 대상이나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부부간에, 누구야 정말 사랑한다. 고백을 하는데 대상을 향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사말인 것입니다. 요즘에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같이 안 드리다 보니 길 가다가 성도님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마스크를 해서 상대방이 절대 나를 못 알아보겠다고 하는데 다 알아보더라고요. 길 가다가 목사님 사랑합니다. 이야기하는 분이 있거든요. 공식적으로 말씀드리는데 저를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 안 하는데 사랑합니다. 그건 인사말입니다. 사랑하고 중보기도하고 연관관계. 너무 형식적인 것에 익숙해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어느 성도님에게 다락방 식구에게, 성도님에게, 장로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곡을 어렵게 썼는지 모릅니다. 누군가 딱 나오는데, 예수님 날 위하여, 성령님 날 위하여. 성령님께서 또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리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더 감동을 느끼는 것은 10절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


제자들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 부실한 제자들로 인해 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감동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완벽해야 받는 게 아닙니다. 흠도 티도 없어야 모습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게 아니에요. 큰소리 뻥뻥 치고, 결정적인 순간에 부인할 수 밖에 없었던 나약한 베드로였지만,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가끔가다가 예수 잘 믿는 분 중에서 이런 분들이 있는 데요. 영적 결벽증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잘못했고, 나는 부끄럽고,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과하게 부끄러운 것도 문제 아닙니까? 더 성숙을 향해 나가야 하지만 주님의 넉넉하심. 주님의 포용력. 제자들을 허물로 들자면 책이 한 권 나올 정도로 허물이 많은 그들이지만 주님께서 그런데도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기도하는 모습 중에 너무나 감사한 주님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놀라운 말씀 속에 내가 감사했던 것은 40대 초반 교회를 개척하고 정말 제가 실수 많이 하고 인격적으로 미숙하고 참 많은 성도님에게도 감사하지만, 주님께서 애는 목사 같지도 않아서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을 보내면 안 되겠다 해서 주일마다 입구에 천사가 막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갈보리교회로 가라 하고, 갈보리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목사님이 목회시던 땐데요. 정말 허물이 크고 약점이 많고 도대체 이게 담임목사, 말투부터가 애 같고, 그때는 말씀 전하러 나올 때는 성도님들이 그렇더라고요. 목사님 왜 이렇게 총총총 오시냐고요. 말도 애들하고 해야 해서 목사 같지도 않고. 그때는 사무실에 담임목사를 찾는다고 해서 가보면 담임목사님은 안 오나요? 하는데 제가 긴데요? 하면 안 믿고 그랬거든요. 개척하고 난 이후로 얼마나 신실한 성도님들을 보내주시고, 이것이 감동이 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해야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미숙하고, 연약한 것이 많더라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보시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연약한 가운데서도, 긍지가 회복되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두 가지를 전제로 말씀하면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데요. 예수님을 향하여 진짜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세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되기를 원하심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그들은 다른 그들이에요. 제가 앞에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20절에 나오는 그들은 앞으로 믿게 될 미래 신자들을 놓고 말하는 첫 마디거든요. 20절, 21절을 보면서 너무나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하는데 예수님의 안목과 통찰력입니다. 아니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너무나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인데 주님께서 미래에 믿게 될 신자. 20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미래에 믿게 될 사람이에요. 그 영혼까지를 놓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지도자의 모습이에요. 지도자는 바로 오늘 필요한 자기를 따르는 것들도 제공하는 것이 리더이지만, 5년 뒤, 10년 뒤를 내다보고 방향을 잡아주고. 목사라는 것은 오늘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5년 뒤, 10년 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이 원근이라고 하잖아요. 현재와 5년 뒤를 동시에 기도하고 지도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가정의 부모가 할 것이 아닙니까? 오늘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도하고 양육하지만 10년 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 아시죠? 급한 불만 끄자 하면서 경쟁률만 보면서 대학에 넣어서 4년 내내 애들을 고통하게 만들잖아요. 자기 적성에 하나도 안 맞는데.


저는 20절 21절 너무나 절실한 하나를 발견하는데요. 미래에 믿게될 신자들 저와 여러분을 이야기한다면 주님의 기도가 반복해서 하는 기도가 하나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제가 이것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우리 시대를 예견하신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편을 가르고, 코딱지만 한 나라가 캘리포니아 주 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동쪽 서쪽 지역감정이 있습니까? 미국 정도 되면서 지역감정이 있으면 말을 안 해요. 우리가 언제부터 이념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습니까? 진보가 보수가 주님 사랑하는 것보다 큰 문제입니까?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주님은 왜 미래에 믿게 될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기도. 하나 되게 하소서. 이 탄식이 되더라고요. 무슨 교회 안에 그렇게 하나 되는 게 어려운 일입니까? 여기서 서울을 가는 것.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지하철 타고, 택시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갈 수가 있고, 걸어갈 수 있고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칼같이 가지만 답답하잖아요. 자전거를 타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오늘 같은 봄날 미세먼지 없는 날에 탄천 길을 즐기면서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차를 타고 가면 빨리 가지만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의 형편은 문 앞에서 자전거 타고 가자, 택시 타고 가자 싸우느라 한 걸음도 진도를 나가지 않는 게 한국교회 같아요. 한마음이 되어서 발걸음을 떼는 게 중요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다른 것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 되게 해주세요.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있는 데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기쁨 누리길 원합니다.



기쁨누리길 원함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어느 교수님이 쓴 칼럼을 보니 유엔이 행복 보고서를 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올해 세계 62위라고 합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나요? 61위는 필리핀입니다. 우리는 훨씬 잘산다고 부자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무시하지 마세요. 우리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 보니깐 매우 행복하다, 행복하다는 53%이고 중국이 93%, 미국이 73%입니다. 중국이 93%은.. 김치통에 남자가 들어간 걸 본 이후에 김치를 먹다가 그 남자가 떠올라서 남겼습니다. 중국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고 한국 분들이 가지고 있는 매우 행복하다. 대체로 행복하다 이렇게 응답한 비중이 너무 낮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아픈 것은 결코 높다 할 수 없는. 교수님의 통계에 보니 점점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젊은 부부가 애를 안낳겠습니까? 보통 문제가 아닌데, 이런 상황인데, 주님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내내 큰 목표가 제가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 주의 종이여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를 벗허나는 행복은 탈선이니깐, 그래서 저는 요한복음 가나안 혼인 잔치. 조금 전에도 어떤 성도님과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객들은 기적의 포도주. 세 치 혀를 즐거움밖에 없는데 심부름하는 하인들은 주님의 동역자가 되어 이 포도주의 출처를 알잖아요. 그래서 포도주를 섬기느라 자기를 포도주 한 방울 혜택을 누리지 못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기쁨은 물 떠온 하인들은 안더라. 이것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 저들이 주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지금 노력해보니깐요. 여러분 실천해보세요. 지금 행복을 갈아먹는 것이 뭐지? 분석을 해보세요. 미래의 근심. 통계를 까먹었는데 엄청나게 높더라고요. 미래를 근심하느라 행복을 까먹는 거 제하고. 제가 지난주에 우리교회에 있는 분당우리집 기자분들이 오셔서 인터뷰했는데 이렇게 질문하더라고요. 1만 성도 파송 운동을 앞두고 성도님들이 애를 쓰는데 너무 불안해하더라고요. 이게 교구를 따라갔는데 영 아니면 다시 받아 줄 것입니까? 목사님 받아줄 거냐고 궁금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답한 줄 아십니까?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아니 29 교회에 잘 안 맞을 생각을 왜 하느냐고 지금 생각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제가 공개적으로 받아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갈려고 마음먹었다가, 안 받아 주겠다고 했다가. 지금 짐을 싸서 나갈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냉정한 목사 하면서. 제 지론은 지금 걱정할 것만 걱정하자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기쁨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13절 다시 보세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분당우리교회 목사님의 최대 과제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기쁨을 갉아먹는 것을 쳐내는 것. 쓸데 없는 걱정을 쳐내는 것. 누구 하나 미워하는 것. 내 이 내면세계에 미세먼지를 들이퍼붓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 하나 미워하는 것은 중국 황사 같은 것을 내 마음에 퍼붓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내 마음에서 내보내세요. 뭐하러 용서하기 어려운 것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오 미운 그인간,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다 쳐내는 못하지만, 그들이 없는 근심 누려야 합니다 생각 많이 안합니다. 설교준비 하는 하나에 모든 것의 에너지를 집중엄청나게니다. 먹는 것 생각 별로 안합니다. 입는까먹는 거희 집사람이 걸어 놓은 것 그것만 입으면 됩니다. 이렇게 넥타이 딱 한 것. 저한테는 권한이 없어요. 안들키고 몇번 바꾸었는데 귀신같이 알아요. 뭐하러 옷입니고 그런 거 신경 쓸 일이 없잖아요. 이 나이에 넥타이 예쁜거 하면 제 얼굴이 예뻐지겠습니까? 저는 진짜 다른 거 신경 안 씁니다. 목회하는 것에 민감합니다. 나머지는 둔해요. 이게 몸부림치는 첫 번째이고, 출처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집니까? 어떻게 해야 기쁨이 행복해집니까? 그분과 친밀한 관계. 주님께 아부하고 싶어요. 저는 아부의 대상이 두 대상이 있습니다. 내 모든 에너지로 아부하고, 주님께 아부하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께 잘 보이고 싶습니다. 그래야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하게 합니다. 아까 말씀을 준비하다가 30-40분 전에 찬양 하나가 기쁘게 하였습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있네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맘에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맘에


이 기쁨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십니까?


이제는 정죄없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이제는 정죄없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없네


예수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정죄하지 않는, 누구에게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나를 정죄하도록 내버려두지않습니다.


이제는 해방됐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이제는 해방됐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해방

주님 주시는 기쁨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중국보다 더 행복지수가 떨어지고, 필리핀보다 못한 이 나라 누구를 탓합니까? 주님 안에서 나는 기쁘고 나는 즐겁고 나는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갉아먹는 것을 쳐내고, 행복의 원천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님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신앙생활 하기를 원합니다.



세상과 구분되어 거룩하기를 원하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6-19)


가장 많이 반복하는 게 거룩히 에요. 16절에서 잊으면 안 됩니다. 몸은, 발은 이 세상에 딛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거국입니다. 목사가 설교 좀 못할 수 있고, 엄벙덤벙할 수 있고, 노래 못 부르고, 박자 못 맞출 수 있습니다. 목사가 거국을 잃으면 다 잃은 거에요. 모든 목회 천재 요소가 다 있는데 거룩히 없다. 목사가 아니거든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증거를 담배 안 피는 것 좋은 증거죠. 술 안 마시는 것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증거는 거룩이 에요. 세상은 갈수록 음란하고 세상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저는 17절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3)


새로운 흰 옷으로 입혀주시는 분이 주님이신주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1)


함께에요. 희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교회가 이 함께를 구현하되 서로가 거룩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세워주고. 세상은 거룩을 추구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기준으로 거룩은 큰 그릇이고, 거룩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오늘 성 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데요. 거룩을 잃어버렸던, 주님이 십자가 지신 가슴아픈 날이지만 성금요일 너무 감사한 날 너무 기쁜 날, 성금요일 날 십자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것은 말주변 좋고가 아닙니다. 거룩입니다. 내 삶의 기준이 달라졌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오늘 청년들을 위시해서 긍지를 갖으세요. 좋고 비싼 옷 입을지 모르지만, 용돈 두둑하게 흘리고 다닐지 모르겠지만, 외모를 가지고 살지 모르겠지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은 모르지만, 우리가 그러하도다. 오늘 성금요일 날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러하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거룩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 긍지와 자부심이 있는 사람인줄을 믿습니다. 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으로 나를 자녀삼아 주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이름 알려진 목사가 되어서. 이것이 저의 긍지가 되어서 거룩을 추구하는 마음이 약해졌을까 봐. 우리가 그러하도다를 잊어버릴까 봐.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기대하십니다. 이 땅의 수많은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를 기대하십니다. 교회의 건강성은 하나 됨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됨은 세상과 구분된 거룩 이라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입니다. 하나 됨이 거룩 안에서 하나 됨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가정 안에서 이 세 가지를 갖고 자녀와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추구하도록.







특별 새벽기도

10월 04일 분당우리교회 특별 새벽기도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스토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 12:1-5)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 책을 소개해 드렸지 않습니까? 식당을 찾아주는 손님들을 향한 식당 주인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독특해서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식당 주인이 손님들에 대한 관심을 끌게 되었는가?


국숫집을 시작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손님이 오면 음식을 만들어내고 돈을 받는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국수 먹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준비하고 화요일이면 순장반 운영하고, 교역자 회의 주관하고 회의하고, 루틴하게 진행되는 일상이 되면 여기에 반드시 권태감이 찾아옵니다. 식당이 알려지고 손님이 오면 돈 버는 것에 대한 즐거움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일상이 됩니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고, 사람들이 모여드니 굉장한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좋다고 했을 때 더 힘이 되었습니다. 새우깡 하나 먹을 때하고 두 봉지째 먹을 때하고 마음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식당 주인의 말이 너무 이해가 됩니다. 너무 반복되니 당연히 식상하고, 권태감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데 식당 주인이 너무나 지혜로운 게 권태로움을, 식당 나오는 것을 줄고 골프치러 다니고, 종업원에게만 맡겨두고, 맛이 없어지고, 손님이 떨어지고 그게 아니라 그분의 초점을 두당 얼마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분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전환했더니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주더라. 제가 전체 교역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면서 목회 적으로도 똑같다. 그러면서 제가 했던 이야기가 자기가 파는 막국수에 스토리를 입혔다고 했습니다. 몇 천원 하는 막국수이지만 그분이 스토리를 입히니 8천 원으로 계산되지 않는 엄청난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대체공휴일 어느 날 아내와 같이 갔습니다. 그날 식당을 가는데 날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대체공휴일에 가니 입구부터 엄청나게 막히는 것입니다. 1시 넘어서 갔는데 대기 손님이 200명입니다. 망설이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대체공휴일에 막국수 가느라 허비한 시간이 얼마입니까? 점심도 딴 집에 가서 냉면 한 그릇 먹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식당주인이 막국수에 스토리를 입혀놓았으니 그 시간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입니다. 깔깔거리면서.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초신자들이 부럽습니다. 처음 신앙 생활하는데 모든 게 낯선 모든 것이 행복입니다. 왜 10년 지나니 권태기가 옵니까? 청년들만 본당에 있어서 무슨 일이야 기여하는데, 결혼하세요. 예수님과 처음 만난 새 가족이 부러운 것이 그것입니다. 저처럼 평생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 처음 신학교가고 교육전도사 시절 청년들 사역하면 행복했는데, 목회 30년 하면 권태롭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도, 너무 식상하기 쉽습니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매주 매주 설교 준비하는 과정에, 강단에 서는 과정에 저만의 하나님만의 스토리를 입히려고 엄청 노력합니다. 진짜 노력 많이 하빈다. 지난주와 다른 하나님과 스토리 쌓는 말씀준비. 내 생에 가장 행복할 때가 새벽에 일어날 때입니다. 설교 준비 자체가 행복한 것이다기보다 하나님과 저만의 스토리를 쌓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스토리를 만들지 않는 시간은, 사단은 찬스의 귀재 아닙니까? 바로 빈틈을 타고 와서 공격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소개한 책, 스토리가 스팩을 이긴다. 최고, 유일함 이것의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스팩은 경쟁 속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일등을 추구하는 스팩, 최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경쟁해서 1등 하려고 충고가 만연한 이 땅에 스팩보다 너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소개가, 이렇게 감동적인 저자 소개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자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비교를 멈추자 구별되기 시작했고, 최고를 포기하자 유일의 길이 열렸고, 상품을 포기하자가 작품이 되어갔고 경쟁을 피하자 진정한 승리를. 업에 주목하자 직이 손을 내밀었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사람.


이 저자가 계속 반복하는 것이 비교, 스팩을 쌓는 것입니다. 사단은 여러분을 싸구려라고 합니다. 작품은 값으로 매기지 않습니다. 고유의 독특성이 있기 때문에요. 막국수 한 그릇에 스토리를 쌓으니 그것이 저에게 의미가 되는 작품이 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싸구려 상품이 되는 것입니까? 어떤 직종,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네버 엔딩 스토리 옛날 유행가 있었잖아요. 하나님과 우리가 만드는 스토리는 끝이 없습니다. 새벽마다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스토리를 인도해가시는지. 초등학교 때 여름성경학교에서 가끔씩 흥얼거립니다.


작은 광주리의 모세를 알죠 어둔 구덩이의 예레미야도
큰 물고기 속의 요나도 알죠 방주 속에 있던 노아 가족도
모두 만나보겟네 천국에 가면 보겠네 내 죄가 용서받아 자유케 됐네
모두 만나 보겠네 천국에 가면 보겠네 이 얼마나 즐거운 모임일까


저의 특새는 절대로 졸수가 없습니다.


크고 장사였던 삼손을 알죠 기도할 줄 알았던 엘리야 선지
사자 굴에 갇혀 있던 다니엘 물매 돌로 거운 죽였던 다윗
모두 만나보겟네 천국에 가면 보겠네 내 죄가 용서받아 자유케 됐네
모두 만나 보겠네 천국에 가면 보겠네 이 얼마나 즐거운 모임일까


여기 나온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 하나하나가 누가 더 훌륭하고, 덜 훌륭하고도 없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만의 쌓아가는 스토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인물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스팩쌓으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은 지루할 수 없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리를 읽히려는 것은 교리로 말미암아 정확한 하나님과 정리된 상태로 중구난방이 아니어야 합니다. 책 구해서 다 할 수 있습니다. 교리의 바다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 귀한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스토리를 만드는 교리로 사용해야 합니다. 새벽 3시에 오면서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도로가 마비되고. 마지막 말씀을 다듬고 있는데 청년들의 향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2021년 코로나가 득새한 어느 해에 하나님과의 스토리를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하나님의 스토리를 같이 만들어볼래? 1절의 말에 이에는 좋죠. 반응이 있는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스토리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민생활 하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하지 않을래? 이에 반응해서 제가 귀국했잖아요. 그때부터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쌓이는데 그 즐거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운 인생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반응한다고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근도 오고.


하나님과 폭우도 만나보고, 웅덩이에 빠져보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스토리입니다. 오늘 첫날 하나님과 오늘부터라도, 인식을 못 했다면, 스팩을 쌓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스토리를 만드는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보면 스토리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스토리의 주도자는 하나님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스토리의 주도자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1절도 하나님이 주도합니다. 아무 준비가 안 되어있던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1-3)


지금 창세기 1장부터 스토리를 만들어가기를 작정하는 분이, 몇 개를 뺄 정도로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내가입니다. 창세기 12장을 읽으면서 복이 될 지라가 주제어다. 떠나가라가 주제어다. 오해하는데 모든 성경이 다 그렇지만 창세기 12장 1절부터 5절까지는 내가가 주제입니다. 가라 이것이 아니라 복이되라. 복 설교할 때마다 본문을 잡지만 가장 중요한 주제어는 내가입니다. 그 스토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으로 가라. 여러분 다 보여주면 무슨 재미입니까? 막내는 군대갈 정도로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되면 한 번은 엄청나게 화가 났습니다. 무슨 만화영화를 보러 가는데 제 친구랑 보는 것입니다. 저기 영화가 전재가 되면 5초 전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 죽는다. 넘어진다? 계속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 너무 힘들어합니다. 모르는 소리입니다. 보여줄 땅. 다 안 알려주셨기에 아름다운 스토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해주시는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주도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지고 인터넷에 우연히 본 것 하나가 머리에 남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사하라 사막에 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비셀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막을 가로질러 빠져나가는데 삼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1926년에 영국사람 켄이 마을을 찾은 것입니다. 마을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3~4일이면 벗어날 수 있는데? 청년 하나 고용해서 실험한 것입니다. 10일 정도 물과 낙타 4필을 준비해서 길을 떠난 것입니다. 이 청년이 10일을 헤매다가 원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켄은 그 과정에서 이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 반복을 계속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북국 성의 존재를 몰라서입니다. 북국 성은 길 잃은 나그네의 나침판 역할을 합니다. 켄은 청년에게 사막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줄게. 낮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자라. 밤이 되면 북극성을 따라가면 된다. 청년에게 이 조언을 드리려고합니다. 낮에 뭐가 잘 보이는것 같지만 진짜 결정적인 것은 밤에만 보입니다. 별, 가장 먼 별. 낮에는 안보입니다. 인생이 왜이렇게 힘들다고요? 뭔가 열심히 하는데 제자리를 돌아오는 것 아십니까? 청년들에게 상징적으로 드립니다. 낮에는 쉬세요. 가장 결정적으로 보이는 북극성이 보일 때 북극성을 따라가세요. 스토리의 주도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과 스토리를 써내려가면서 북극성 대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 아닙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제가 목회를 하면서 종종 하나님 앞에 이 목사 가만히 있어라. 네가 왕성하게 설칠 낮으로 보이니? 이때가 쉴 때야. 북극성이 보이기 전에 설치지 마.




2.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왜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따라갔고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갔는가? 주도자 하나님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의 말씀이 구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1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20)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너무나 청년들이 감동적으로 찬양을 불러주셨다면 필사하세요. 새벽에는 말씀과 기도로, 낮에는 에베소서를 필사하세요.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도구를 잃어버린 것 아닙니까?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책이 있습니다.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는 데요. 조금 전 말씀을 준비하는데 찬양팀에서 이 찬양을 준비하느라 부른 것 같습니다.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건너니라
주님 여기 계시기에 이 깊은 바다가 반석이되고
주님 여기 계시기에 반석위를 내가 걸어가리라


옆 방에서 준비하는데 눈물이 핑 도는 것입니다. 어금니 하나 빠질 정도로, 1만 성도 파송 운동이 성도님들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면 어떻게 되나. 아브라함을 설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이거든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난 7월 이후로 너무나 억장이 무너지고 앞이 캄캄하고, 되돌아가기에 너무 멀리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장이 또 하나 아름다운 추억의 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새벽마다 말씀으로 입니다. 말씀으로 인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찬양 감사한데요. 이제 하나님의 도구가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3. 결말. 마침내 완성케 하시는 하나님


5절 말씀이 너무나 감동이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창 12:5)


이 짧은 마침내 한 마디 안에 너무나 많은 스토리가 농축되어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 너무나 순종을 잘하는 것 같은데 순종하지 않는 아브라함.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가는 것 같은 데 자기 생각에 뭉쳐있는 아브라함. 오래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다 녹아 있는 것 아닙니까? 마침내 말씀 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제가 중학교 다닐때 히트친 노래입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만 편지
인생은 미완성 부르다 만 노래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만 그림
인생은 미완성 세기다 만 조각


우리 인생이 죄성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쓰다만 편지 같고, 부르다 만 그림 같은 것이, 가슴 아픈 미완성 인생이지만 4절에서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라. 노랫말에 엑센트가 달라집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만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 가야해
인생은 미완성 부르다 만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해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만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해
인생은 미완성 세기다 만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세겨야해


이것도 상징입니다. 내 인생은 미완성이야. 부르다 멎은 노래 같아. 초라하고 비참해. 어제 있는 일인데 엑센트가 어느덧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이 용기를 새벽마다 주시기에 용기의 원천이 본문 4, 5절에 나오는.


스토리의 주도자는 하나님입니다. 스토리의 도구는 말씀입니다. 마침내 완성케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우리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새벽에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서 마음이 많이 울컥울컥 했습니다. 순수한, 세상적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그리다 만 그림입니다. 목사님으로 교회를 불같이 일으키고 싶어서 40일 금식기도 하고 싶은데, 금식기도 끝나고 부흥해서 2만 명, 3만 명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면 완성된 그림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적으로, 세상 적으로 금식기도해서 돌아가는 순간은 그리다 만 그림 같고, 세기다 만 조각 같고 쓰다 만 편지 같았지만, 영원과 영원을 이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으로 아버지의 그림이 거기까지 전수되었기에 아들의 저의 그림에 생략되어 뛰어드니 그림 그리기 너무 좋은 것입니다. 윗대 어른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며 말씀을 정리합니다. 영원과 영원을 지으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간의 눈으로 폐기하지 않으시고 그 그림에서부터 이찬수 목사에게 나머지 그림을 그려가는 하나님이시기에 여러분의 하나님 앞에 했던 작은 몸짓 하나, 작은 눈 방울 하나, 헛되이 끝나는 게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10월 05일 분당우리교회 특별 새벽기도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 12:6-9)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무장이 되면 무한히 달려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있지만 꿈 없는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종 교역자들에게도, 성도님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시계를 다시 돌려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던 29살로 돌아가서 한국에 가서 목회자가 되고 교회를 개척하고 지나온 삶에 대해서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안 해도 되는 기회를 주겠다 하면 망설이지 않고 걸어간 그 길을 다시 가기를 원합니다. 제 아들이 만약 아빠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굉장히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원하면 목사가 되는 것, 3대째 목사가 되는 것이니 이것보다 영광되는 것은 없겠지만, 마음은 아플 것 같습니다. 지나온 시간,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왔지만, 부교 역자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다시 하려면 못 할 것 같다. 지난 19년 동안 물밑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 너무 당황스러운 일, 억장이 무너지는 일, 상상을 초월하는 일. 그런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 가정이 좋은 게 아내와 자녀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큰딸이 정이 많아서 그런 말을 합니다. 본문을 묵상하다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딱 이런 말이 생각이 납니다. 불쌍한 아브라함. 어제 우리는 창세기 12장 5절 말씀으로 너무나 감동을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 기쁘게 첫날 특별 새벽기도를 마쳤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벅찬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갔는데 너무나 큰 기대를 하고 가나안에 간 아브라함이 당황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당황한 이유는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좋지 않은 환경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창 12:6)


모레는 선생이라는 뜻인데 주석을 보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선생이라는 신들을 대언하는 악한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암시한다는 해석을 보았습니다. 가나안에서 상수리나무는 키가 크고 무성한 나무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들의 능력이 특별하게 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찌를듯한 높은 나무를 보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거기에 재단을 세우고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난감한 것 아닙니까? 자동차가 있습니까? 고속도로가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갔는데 가장 먼 거 기록한 것이 모래 상수리나무. 한 마디로 상수리나무는 우상숭배에 자주 사용되던 나무입니다.


산꼭대기에서 희생제물을 잡아서 바친다. 언덕 위에서 분향한다.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의 그늘이 좋다고, 거기에서도 제물을 잡아서 불살라 바친다. 너희의 딸들이 음행을 하고, 너희의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호 3:13 새번역)


악한 도구로 사용되던 것이 상수리나무.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고 꿈을 갖고 갔더니 거기에 우상이, 신전이 있고,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갈대아 우르하고 다르게 하나도 없네. 뭐가 신선해.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진입하면서 실망을 빠질 수 밖에 없던 것은 난폭한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던 땅.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창 12:6)


더군다나 땅을 차지한 가나안 사람들은 대적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가 만연한 좋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대하기도 끔찍한. 우리는 메뚜기다. 그렇게 만든 족속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사나운.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달려가면 늘 행복하고 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꿈을 꾸는 그 순간부터 괴로운 것입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 친구들도요. 어디 회사에 다니고 직장을 다닌 친구들, 99% 다 은퇴했습니다. 등산 다니고, 손자 맨날 사진 보내주고 하는 데요. 저는 지금도 하루에도 수면 시간이 3시간, 4시간. 꿈꾸는 것은 고달픈 것입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꿈 꾸라고 할 때 안 꾸면 되는 거 아니냐고. 엘렌로스 교수님이 쓴 순종은 저항에 부딪힌다. 100%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저항이 저항으로 끝나는 것으로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신뢰할 때 엄청나게 유익한 것이 많은데 몇 가지로 정리하며 하나님은 순종은 저항에 부딪히게 하는 현실인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고난으로 모시는가? 꿈꾸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열학한 것으로 몰고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온천이 나오고, 최고 좋은 환경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위협적인 가나안 원주민이 사는 땅으로 인도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단련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0-12)


꿈꾸는 자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연단이요. 꿈꾸는 사람이 가장 혜택을 누리는 것은 꿈꾸는 것만큼 연단해서 성장시켜줍니다. 지난 30년 내내 경험했습니다. 아무런 꿈도 안 꾸고 교회해서 무난하게 설교하고 주중에는 골프를 치러 다니고 어실렁 어실렁 목회를 하면 고생은 안 합니다. 그 대신에 성장 없습니다. 29 예비 담임목사님들 안스럽습니다. 설교 잘하고 인물은 여러분들이 다 확인해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안 와도 청빙 돼서 목회 잘하실 분입니다. 그들이 겪을 마음고생으로 시작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안쓰럽습니다. 한 번도 저는 불쌍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고생 한 만큼 단련되고 성장할 것이니깐요. 교역자들이 부임하면 항상 이야기합니다. 성장통이 필요하다. 아파야 하고 괴로워야 한다. 그 대신에 불필요한 소모적인 통은 필요하지 않다. 얼마나 부교역자들에게 무섭게 내치는지 몰라요. 다 한 가닥 하던 사람들이라고 자부심 느끼고 모였는데 첫날 다 깹니다. 차범근이라고 생각하는데 동네축구 차범근이다. 몰랐지 그거, 거품 다 빼라.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제가 왜 과장된 자극을 줘야만 합니까? 성장통을 위해서 필요하니깐요. 가나안을 향해 가니 돌침대부터 있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부터 시작된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과 싸우는 과정에서 은혜를 구하고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서 성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장하고 싶지 않으세요? 꿈을 꾸세요. 꿈꾸면 그 무게만큼 하나님이 키워 주시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꿈에 걸맞은 존재로 키워주기 위해서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자마자 겪게 하시는가? 땅에 대한 기대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으로 옮겨가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7)


나타나 이르시되입니다. 꿈꾸면 생 고생을 하고 죽을 고생을 하고 순종은 저항에 부딛힌다는데 뭐하러 꿈을 꿔야 해? 꿈꾸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큰 혜택 중 혜택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제가 누리는 행복은, 이루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여러분은 놀라지 않은 것 같은데. 저는 저녁에 어제도 그랬고, 7시에 좋은 아내를 만나서 배려를 해주니 가능하지만, 저녁 먹고 바로 잘 때도 있습니다. 새벽부터 설쳐서 저녁 먹으면 잡니다. 오늘도 1시에 일어나서 여기 오기까지 여러분들이 오전에 쓸 시간 다 쓰고 왔습니다. 특별 새벽기도회 오전은 체력 때문에 죽음입니다. 원래 어제 하기로 했던 것 다 찢고, 드림 센터 가서 하루에 준비한 설교입니다. 가장 좋은 것 주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어제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한지. 특새 안 하면 외부 강사님 쓸 텐데. 매년 하는 말입니다. 내년에는 외부 강사 쓸 거다. 제 아내는 대꾸도 안합니다. 화요일 되면 말 바뀔것 을 아니깐. 어제 새벽에도 에드빌 먹어가면서 에너지가 소진되지만 외부강사를 안썼기에 하나님이 대면에주시기에, 새벽 1시부터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줄 믿으시길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7)


하나님은 뜬구름 잡는 지침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이미 차지했네. 어떻게 되었지? 가장 적절한 말씀이 하나님이 나타나서 주셨던, 내가 이 땅을 내 자손에게 주시라 하신 지라. 상황보고 놀리지 마라. 그 상황으로 네가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네 말씀으로 움직이는 존재야. 달라지는 것 없어.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너무나 가슴 벅찬 혜택을 누린 것 아닙니까? 믿음이 떨어져 예배를 드리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으로 무장되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고생을 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누리는 놀라운 특권. 하나님은 왜 당황스러운 환경으로 아브람을 모는가? 땅에 대한 기대감이 가 있으면 그런 자식들은 부모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자식들입니다. 유산에만 가있는 자식들은 몹쓸 자식들입니다. 그 유산이 아니라 아끼지 않고 물려주시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눈이 가, 일어나도 감사하고 누워도 감사하는 것이 그게 제대로 된 인간 아닙니까?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우리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니, 우리가 불 속으로, 우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시 66:10-12 새번역)


어느거 하시겠습니까? 고난이 오나 대반전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이끄는 하나님을 따르겠습니까? 고생하기 싫어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가에 엑센트가 있습니다.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가 아니라 그것을 주관하시는 것이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그분이 주도하시고 그분이 이끄시는, 내가 중요하다고 했듯이.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이따 우리가 마지막에 부를 찬양입니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오늘 여러분 다되어 있어서 주님이 일하실 게 하나도 없게 만드는 게 지혜로운 것입니까? 주님이 날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제가 언제인가 '그러나 내게 당신이 있습니다.' 이 책이 아브라함이 들으면 딱 내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게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쓰러지는 나를 일으킵니다. 그것이 내 삶의 가장 큰 힘입니다.


가나안이 악한 것 때문에 득실거려야 하는지 아십니까? 땅에만 주목하는 어리석은 내 시선이, 그것을 평정하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시선이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직후 가장 먼저 한 것이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합니다. 땅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땅을 보는 그에게 나타나시고 여전히 약속은 유효하다. 어찌 예배하지 않겠냐 그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먼저 한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7)


아브람의 제단을 쌓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에게 신뢰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 펼쳐질수록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예배가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분은 더 열정적으로 예배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나라와 사람들이 손을 못 씁니다. 세계의 경찰이라고 하는 미국이 짚는 것마다 틀립니다. 7월에 분명히 들었습니다. 백신주사 다 맞으면 돌아갈 거라고. 인간 지도자들의 열악함, 그래서 예배로 가야 합니다. 상황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여전히 내 약속은 유효하다. 또 하나. 감사입니다. 얼마나 마음에 안정감을 찾고 감사가 나왔겠습니까? 힘들면 힘들수록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크다면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저도 엄청 혼미하고 저도 너무나 힘들고 1만 성도 파송운동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을 때 29 목사님이 전부 그랬습니다. 29 목사님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했습니다. 감사 노트를 다 사주었습니다. 가격은 싸지만 엄청난 선물. 저도 꺼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감사할 때입니다. 29 교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부터가 역부족입니다. 한국교회에 작은 섬김을 해야 하는데 우리 실력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목사님은 너무 힘드니 내부에서 다하지 왜 외부에서 뽑았느냐고.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고뇌하는 만큼 성장하니깐. 그래서 감사 노트를 다 선물한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두 권째 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악한 것만 보이고 상수리나무만 보이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있는데 뭐가 문제냐. 말씀을 받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와서 한 것이 있습니다.




2.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8)


하나님을 향한 믿음, 신뢰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온 악한 잡신에게 놀아나고 있는 그들에게. 우상 숭배가 만연한 그곳에서 가나안의 진짜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 아닙니까? 가나안에 가서 내가 누릴 혜택, 축복. 우리 하나님 앞에서 꿈을 누리는 것은 그것만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발을 내디뎠던,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가 이루어지는. 왜 감동이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타락한 땅에 선포하는 것이 왜 감동이 됩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름을 높여주겠다 하시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졸업식 노래.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들은 ~


언니는 앞에서 끌고, 우리는 뒤에서 밀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시겠다고 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내 이름을 위하여 교회를 키워주세요. 내 이름을 위하여 설교를 잘하게 해주세요. 이런 11장에 나와 있는 타락한 존재들과 달리 하나님은 내 이름을 높여주길 원하고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를 원하고.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6-7)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제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깐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하나님은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최근에 29 예비 담임목사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며칠 전입니다. 여당도 그렇고 야당도 그렇습니다. 우연히 대통령 후보 토론을 켰는데 10분 듣다 껐습니다. 매년 빠짐없이 듣는데 기권해야 하나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장을 뽑는 것도 아니고. 국민에게 꿈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11분째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큰일 난 것 아닙니까? 지금도 국민이 꿈을 잃고 이렇게 힘든데. 29 목사님들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성도님들에게 100분 토론하면 성도님들에게 어떤 꿈을 제시할 것인가? 목회를 해보니 목사들이 미숙한 것 다 용서해준다. 개척 초기에 기다려주시는 분 없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그런데 성도들이 절대 못 참는 것이 있는데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는 사람. 예의를 갖추지 않는 사람. 두 번째 목회 철학과 꿈이 없는 목사. 절대 성도님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늘 겸손해야 한다. 성도님들에게 무슨 꿈으로 교회를 할 것인지 내놓지 않고는 절대로 개척하면 안 된다. 물론 다 갖고 있죠. 준비를 한 사람만 청빙하니깐요. 하나님은 꿈꾸시는 자를, 그 열학한 가나안땅에 아브라함을 꿈으로 무장시킵니다.






10월 06일 분당우리교회 특별 새벽기도

내 멋대로 결정하는 것의 위험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창 12:10-13)


아브라함 입장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움을 유발시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근이 든 것입니다. 기근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 어린 시절부터 가나안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이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약속의 땅으로 발을 딛기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굶주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어제 말씀을 통해서 이런 일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나누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필수적입니다. 어제 말한 것처럼 꿈꾸는 자에게 그 꿈에 걸맞게 키워주시길 원합니다. 어려운 일을 통해서 세상에 어느 조개가 모래알을 품고 괴롭기를 원하는 조개가 어디 있습니까? 모래 한 알 때문에 오랜 시간 괴로워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겪는 사건보다 해석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는가? 예수 믿는 사람은 '오늘 내가 재수 없는 일 만났어.' 오늘부터 쓰면 안 되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재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인생은 의미부여입니다. 조개에 있어서 일생의 가장 재수없는 사건, 모레 한 알이 들어왔어. 일생에 가장 기분 나쁜 사건을 통해서 아름다운 진주조개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목사가 되면 수많은 성도님들의 조개 같은 속살의 모래 하나 들어가 쓰라린 일을 끊임없이 듣는 게 목회자의 자리입니다. 모든 사안을 슬픔으로 받으면 우울증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아픔의 소식을 들으면 고통의 시간을 보내실까 마음이 당연히 듭니다. 이쪽을 갖고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재수없는 일 만났네가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왕에 집사님 가정이 이런 일을 만났는데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가나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렇게 고뇌하지 않고 자기 삶의 축복의 변장하고 찾아온, 이것이 교역자의 마음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 아닙니까? 어떻게 지혜롭게 쓰기에 따라서 젊은 사람의 표현으로 대박사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가정법을 사용하신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박정근 목사님이 쓰신 책을 보니깐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가정법을 말하면서 헬라어 문법을 말합니다. 헬라어는 가정법이 세분되어있어서 제1 ~ 제4 가정법까지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것은 제1 가정법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을 가정할 때 사용합니다. 만약에 내일 아침에 해가 뜨거든, 다들 아십니다. 해가 떻다 안 떻다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은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들 삶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꿈과 비전을 주실 뿐만 아니라 꿈에 걸맞은 그릇을 키워주시기 위해서 여러 시험을 주시는데 그 시험을 기쁘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라는 것 아닙니까? 여러 가시 시험을 당하거든 이라는 가정법은 어떻게 결론이 나는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2-5)


결론을 아시겠죠? 제1 가정법으로 여러 시험을 만나거든 이라는 말씀의 결론이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시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이 이것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꿈을 주시고 마침내 가나안에 당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손 털고 내 할 일은 여기까지다.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입니다.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첫 번째로 보여주시는 사건이 기근입니다. 아브라함 일생의 가장 큰 축복이 될 수 있는 사건 아닙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자기 생각과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문제가 기근이 들었음으로입니다. 해결하는 방식 사이에서 뭐가 하나 생략이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의 정신이 생략이 되어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


시간적으로 즉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 제기와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생략되었습니다. 바로 나오는 것이 내 생각에는, 내 방식에는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내일 살펴보겠습니까만,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이성 전투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르는 전투에서 패배해서 백성들이 절망하는 여호수아 7장에 담겨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 바로 나오는 전투가 여리고성 전투입니다. 난공 불락 성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긴장 상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리고성 전투를 대비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 여호수아 5장 14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수 5:14)


그 천사에게 무릎을 대고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의 정신이 창세기 12장 4절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닙니까? 도저히 우리 힘으로 승리할 수 없는 전투를 앞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주시길 원합니다. 그렇게해서 난공분락의 여리고성 전투를 승리하고 고새 교만해져서. 그들이 비참하게 패배한 아이성 전투의 태도를 보는 것입니다. 아이성이 너무 작은 성이어서 기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수 7:3)


교만이 뚝뚝뚝 묻어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도 빠져있는 것이 자신감이 너무 충만한 나머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의 정신이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방심하면서 살아가다가 쓰라림을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종 개척 초기가 그립습니다. 그때는 목회가 저에게는 그야말로 여리고 성입니다. 아무 경험도 없고 곤에 연장도 없고, 나이는 또 어리고, 경험도 없는 저였기 때문에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주중에 여기 창고를 개조해서 그 당시로 열악했는가면 한 번은 벽에 손님이 앉아있었습니다. 전화선이었던지 생쥐 한 마리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손님은 등지고 안보고있는데 대화하면서 생쥐의 행로를 보고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가 알아서 나가서 말은 안했습니다. 주중에는 학교니 교회가 흔적도 없어지고요. 그곳에 분당우리교회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 자신이 두렵고 떨림으로 있어서 창문도 없어서 컴컴한 이곳에서 울기도 많이 울고 여호수아의 절박한 마음을 잘 압니다. 내 주어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기 앉아서 울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개척은 했고 자신은 없고.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말씀해주세요. 너무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데 그러한 절박함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면 본문에 너무나 가슴 아픈 아브라함의 쓰라림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진입한 이후에 일상생활에 보여주었던 감동적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고,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처음에 분당우리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일상생활 속에서 큐티도 잘하고 기도생활도 잘하고 늘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애를 쓰고, 신학교 다니던 시절 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평상시에 경건 훈련이 잘되었던 태도를 보여준 아브라함입니다. 결정적으로 평소에 쌓은 영적인 실력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했던 아브라함이 그것은 평상시의 일이고 문제가 생기니 옛 자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아닙니까? 29 목사님들이 처음에 부임하고 제가 잔인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29 교회의 담임목사로 세워지는 1년 전 되었나 그렇게 모여든 교역자들에게 제일 먼저 저에게 던지는 메시지였기도 합니다. 이제 당신이 준비된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작동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너무 추상적인 언어가 발달을 하여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설교를 해 재끼는 것 아닙니까? 설교자 자신에게 문제가 찾아오면, 우리 부목사님 중에서 그런 일을 의연하게 처리하는 목사님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을 만났는데 우왕좌왕하고 수심이 가득한 교역자들을 몇 번 보았습니다. 주석에도 그렇게 나와있고 서적에도 나와 있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마라 설교 엄청나게 잘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만났을 때 한 번도 적용한 적이 없으면 본문의 아브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수없이 되뇌었던 복음의 능력이 삶 속에서 나타난 줄 믿습니다. 수 없이 큐티하고 기도했던 모든것들이 삶속에서 작동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은 그것에 실패한 것 아닙니까? 아침에 하나님께 구해야할것이 오래 쌓아왔던 큐티, 말씀 묵상, 기도생활에 전념하고 이 모든 쌓아온것들이 추상적인 메타버스, 가상공간에서만 작동이 되고 삶에서 아무 영향을 안 주는 공허한 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몸부림이 기근을 만난 현실에서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잘못된 열매가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즉각적으로 애굽으로 내려가 버리는 구조 속에 잘못된 열매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1. 두려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창 12:11-12)


아브라함처럼 내 방식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 풀려고 하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최근에 깨달은 잘못이 생각이 났습니다. 29 목사님들에게 잔소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공포의 반복으로 잔소리하는데 어느 새벽에 하나님이 그 실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치면 어떡하나. 내면의 두렴이 29 목사님을 계속 잔소리하는 것입니다. 사춘기를 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합니다.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에 부모님의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살려고 하나. 제 안에도 잔소리하는 실체를 발견한다면 우리 부모님들, 어떤 기근을 만나 고통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그 두려움을 내버려두시면 안됩니다. 29 목사님들에게 고백하고 사과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잘 안나 타기를 원한다. 잔소리가 너무 많다. 이제 피하고 싶습니다. 피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되뇌어야 할 말씀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기근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 처지에서 생각해봅시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풀 수 없는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어떤 계획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간구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취하면 두려움이 엄습할 수 없습니다. AI, 컴퓨터도 아니고 순간순간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바로의 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머문다면 어떻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직전 본문 6절, 7절에서 재차 주신 약속의 말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7)


몇 장 앞의 이야기 아닙니까? 바로 몇 장 앞에서 애도 없는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했을 때 동의가 되었으니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것 이야기하는데 쓸데없는 이야기 한다고 하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브람에게도 믿음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의뢰하지 않으면 다 까먹습니다. 사실 제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경직되니 29 목사님들에게 계속 잔소리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아닙니까? 29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직을 풀어야 합니다. 경직을 풀어야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여유롭게 가시는 것 아닙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오늘 이 새벽이 이 말씀이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애들에게 잔소리를 줄이고, 저는 부 교역자들에게 잔소리를 줄이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결단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2. 거짓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창 12:13)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서 들리는 소문이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면 자기 아내로 삼는다더라. 그런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의뢰하지않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도 잘못되었지만 막상 준비 안된 사태로 가보니 시대가 악해. 어떻게해야합니까? 이민을 갔는데 애들의 인신매매, 밤되면 밖에 나갈 수 없고 어떻게 해야합니까? 기도안하고 결정했네. 전혀 그런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어보이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영향력을 별로 못받았다고 말하나요?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특새에 해야할일 너무 많은 상황이지만 잠언 30장을 봐야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7-8)


목사인 저에게 적용해 설명하면 목회가 순탄하게 하여주옵소서다 아니라 정직한 목사가 되게 하여주옵소서를 먼저 말하라고 합니다. 40일 작정 기도하시는 분, 기도 절박한 것을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고 구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정직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합니까?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해라. 일 년 동안 행복하려면 새집을 지어라. 일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여라.


마침 어제 읽은 칼럼입니다. 영국 런던의 금융가에는 세계 최고의 증권 거래소가 있는데 건물 전면에는 라틴어로 된 한마디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 내가 한 말은 보증수표이다. 이것은 교회 입구에다가 붙여야 하지 않나.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이 두 가지 악한 열매가 여러분에게 없는지 점검하는 새벽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때그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두르는 거짓의 인생. 두 가지 악한 열매를 제거하려면 내 멋대로 판단하는 태도를 없애는 것부터 두 가지 악한 열매를 물리치는 비결이 될 줄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대안을 잠깐 나누어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두려움과 거짓이 내 마음에 빌붙지 못하도록 시편에서 대안을 찾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일상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져서 순간순간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임박하신 분. 잠을 깨울 겸 크게 선포해주세요.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특새 첫해에 여기 모 백화점 앞을 지나가면 추억의 자리가 있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마음에 눌림이 있을 때 이른 아침에 모 기독교 병원에 말씀 전하러 그 백화점 복도를 지나다가 벤치 의자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셨던 축복같은 찬양이 있습니다.


보라 너희는 두려워 말고 보라 너희를 인도한 나를
보라 너희는 지치지 말고 보라 너희를 구원한 나를
너희를 치던 적은 어디 있느냐?
너희를 억누르던 원수는 어디 있느냐


예기치 않았던, 구하지 않았던, 기가 팍 죽어있고 눈에 초점이 풀려있던 길을 가던 저에게 찬양과 더불어 놀라운 말씀을 새벽에 주셨기 때문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특별새벽기도 부흥회입니다. 얼마나 뜨겁게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악한 능력이 있다고 보이는 바로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시는 하나님. 자녀 한 명 없는 상황에서 꿈으로 보여주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으면 두려움은 사라졌고, 안 해도 되는 거짓말로 수치는 사라졌을 줄 믿습니다.






10월 07일 분당우리교회 특별 새벽기도

왜곡과 수치의 자리에서 건져주심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 12:14-20)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것이 큰 문제이다. 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문제가 되냐면 평상시에는 나를 잘 모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내가 대처하는 방식이 믿음의 현주소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아무리 많이 기도 많이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터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이 그 사람의 현 주소입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내 주소가 하나님의 다스리면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헬라어 제1 가정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이 왜 1 가정법이나면 아침에 해가 반드시 뜨는 것처럼 여러 가지 시험은 당연히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온전히,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을 합니다. 왜 기쁨으로 받아야 하나면 5절에서의 결론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그리하면 주시리라. 안 주시는데? 거기에 초점을 두지만 가장 복된 것은 내가 너무 당황스러울 때 내 주변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하나님께 구하라. 그 구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날마다 찾아오는 어려움이 있고 날마다 찾아오는 고난이 있는 것을 왜 기쁘냐면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대로 다 주시는 신이라면 그분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이 구하는 대로 다 안주잖아요. 구하는 대로 다 주는 것은 그 애를 죽이는 것 아닙니까? 미숙하면 미숙할수록 10가지 구하는데 한 가지 들어줄까 말까입니다. 구하면 주시리라는 광의적인 말씀을 응답하지 않으면 응답으로. 알라딘의 마술 램프처럼 문지르면 펑. 그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을 의심할 수 없듯이 우리 인생은 이 문제 저 문제 늘 여러 가지 시험에 봉착하는 것이 축복이다. 아무도 이 문제를 나눌 곳이 없는 그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는 내 인생에 절망적이었던, 하나님이 그렇게 몰고 가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여러 시험을 당한 것이 축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 안에 놓여있는 것이 왜 중요하냐.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 안에 있을 때야 내 사람의 내면세계가 정돈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다스림 영역 안에 있을 때 그 삶이 얼마나 정돈이 잘되어 있습니까?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삼상 23:2)


이 전쟁의 위기 속에서 혼란이 없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9)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하나님께 의뢰하고 묻는 인생의 가장 큰 특징은 그래서 이런 많은 복을 받았다. 이전에 의뢰할 대상이 있다는 것.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 다윗이 교만해져서 엉뚱한 데를 기웃 기웃거릴 때 안정된 다윗과 완전히 다른 다윗을 봅니다. 성적인 죄를 짓고, 삶의 질서가 있으면 내가 미쳤나 그래야 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을 보세요.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은 끝이 없습니다. 파도가 아무리 바람을 불어도 여기까지라고 한계를 그어야 바닷가에 놀러 가지 파도가 수시로 온 땅을 들락거리면 어떻게 삽니까? 백만 번 양보해서 유부녀와 성적인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치자고요. 그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전혀 인식을 못 하니깐 상대방 여자의 남편을 죽이는 짓을 저지르는 것.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얼마나 실망하면 저런 인간은 처음 봤다. 저런 인간의 저런 모습만 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면 완전히 딴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기도 부탁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 추해지지 않도록. 제가 목회하는 힘은 제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와이파이 터지는 곳에 있기에 목회를 하는데, 영적으로 와이파이 터지지 않는 곳에 가면 제 인생도 별수 없습니다.


어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눈에 두드러지는 두 가지 열매. (1) 두려움 (2) 거짓. 나는 두려움이 하나도 없어요 하면 그것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두려움이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지만, 새가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두려움이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두드러지는 악한 열매 말고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악한, 하나님의 영역 안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창 12:13)


안전하고는 히브리어로 아타브입니다. 안전하다는 잘되다 성공하기의 단어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이를 잘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창 12:13 새번역)


우리는 뒤에 있는 것만 강조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원어 적으로 내용을 보니 목숨을 부지할 것뿐만 아니라 대접을 잘 받고. 아내를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스멀스멀 오려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이용해서 잘 살게 됩니다.


바로가 그 여인을 보고서, 아브람을 잘 대접하여 주었다. 아브람은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창 12:16)


그냥 이에 바로가 아브라함을 후대해서 많은 재물을 얻었더라가 아니라 세세하게 기록하였을까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나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두려움이라는 악한 열매 거짓이라는 악한 열매가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걷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철없는. 20대는 예쁜 여자랑,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해서 잘 살아야겠지. 생각은 귀엽게 봐줄 수 는데 50이 되고 60일 되어서는 내 아내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결혼했더니 친정에 돈이 하나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복이 될지라 이 잣대를 갖고 점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이 생각이 올라온다면 적신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29 목사님들이 이렇게 많은 성도님을 보내준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분 없습니다. 떠나는 게 좋아? 남는 게 좋아? 무엇이 유익하지? 이것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매사가 그것 하나밖에 없다면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온 세상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젊은 목사님들에게 경고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우리 밥벌이를 위해서 존재하냐? 성도님들을 위해서 존재하냐? 정리가 안 되면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는 목회자라 하고 하기 힘듭니다. 내 내면이 거짓의 아비는 사탄인데 정직하지 못하고 내 유익을 위한다면, 거리낌 없이 나오는가? 이 두 가지를 점검해야 하지만, 날 위하는 마음이야.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느냐고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르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추합니까? 우리 내면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아브라함의 외적인 부작용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1. 복의 통로 역활은커녕 타인에게 재앙을 초래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7)


심각한 말씀입니다. 복을 흘려주라는 번역보다 네 자체가 복이다. 네가 들에 가면 들에 있는 사람이 늬 때문에 복을 받고. 늬가 분당에 개척을 하면 분당에 있는 사람이 너 때문에 복을 받고. 일산에도 갈뻔했고요. 역시 분당사람이 제일 좋아. 이러려고 목회 하사면 안되는것 아닙니까? 존재론적으로 이런 부담을 갖어야합니다. 1만 성도 파송 운동이 툭 튀어나온 것 아닙니다. 기전 성도 등록 안 받는 운동 세 번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으므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러는 꼴을 보세요.




2. 이방인에게 꾸지람듣는 비참한 수치를 당함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창 12:18)


바로가 아브라함을 꾸짖으려고 불렀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반응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에 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그 위기 속에 밑창에 내려가 잠을 자는데 예수 믿지 않는 선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 선장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욘 1:6)


제가 왜 이것이 고통스러운지 아시죠? 딱 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치유하라고, 세상에 남산에 올라서 보면 붉은 십자가를 들이 부어주셨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합니다.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데, 목사가 왜 저리지. 그저께 PD 수첩에 나왔는데, 목사님이 저러시면 안 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대놓고 악한 짓하고 대놓고 성적으로 죄짓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무기력한 상태. 자는 상태. 그것도 똑같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이탈하면 존재가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성 아브함이라고 할지라도 유구무언, 한 마디도 말을 못합니다. 안 믿는 선장이 추궁하더라도 변명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가장 초라하고 아브라함의 생에 가운데 가장 비참한 순간인데, 여러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가장 아브라함에게 회복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떻게 회복이 일어났나. 회복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선: 하나님의 개입하심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창 12:17)


본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게 추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수많은 가축을 선물 받았고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수치가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 관점에서 하나님의 개입 하심은 불편합니다. 좀 내려버려 시지. 복이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수치를 당하는 자리에 빠지게 되고. 그저 목숨 건지고 부자가 되어서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불편한 일을 초래했는데 이것이 사실은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1-24)


더러운 가축을 선물로 받아서 덕 좀 보자. 그렇게 아내를 팔아버리는 더러운 욕구가 꿈틀꿈틀 거려서 얻게 된 부산물을 가지고 떵떵거리는 상태를 내버려주게 하시는 분 있으세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특징이라면,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절대로 방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일이 일시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평생 치욕의 순간이 된다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개입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축복이 될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수치를 겪지만 그다음 19절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창 12:19)


아브라함이 무너진 자존감. 선행적으로 일어난 다음에 회복이 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3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2-3)


하나님이 있기 전 혼란, 혼돈입니다. 가장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 여러분을 놓고 기도합니다. 바람 피신 분 무조건 들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지 않은 것은 다 망하길 바랍니다. 수치심 가운데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길 바라세요. 위장된 평화 속에 살아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미끄럼틀 위에서 축복이라고 결정적인 순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개입 하심.




2. 후: 초심의 회복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창 13:1)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3-4)


내 생각, 내 방식으로 궤도의 이탈함. 수치를 당하고 부끄럼에 빠지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지렁이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 꽤 많은 지렁이가 비참하게 마르는 것이 있습니다. 지렁이들이 이탈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때가 요즘입니다. 한 두 달 전부터 지렁이들이 탄천길에서 쏟아져나옵니다. 왜 비참하게 꿈틀거리는가? 궤도를 이탈해서입니다. 누군가 원래에 있던 곳으로 옮겨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징계가 집어서 진흙으로 옮기는데 얼마나 아프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는 징계가 사실은 원래의 자리로 옮기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일 줄 아십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요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미는 것. 선 하나님의 개입 하심. 하나님께서 여기까지가 내일이야 늬들이해 이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입 하심은 영원한 줄 믿으세요. 항상 하나님의 개입하심 은혜가 느껴지면 4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지금이야말로 뒹굴고 있는 지렁이 같은 우리지만 선 하나님의 개입 하심이 우리 인생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도구가 기도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우리가 기의 자리로 나가면 꿈도 꾸지 못한 하나님의 방법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인생이셨고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매일 아침에 해가 반드시 뜨는 것과 똑같이 내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면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버려진 존재가 아니내. 창조주 하나님이 되시네. 기도로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너에게 보이리라. 어떤 사람은 매일매일 겪고 사는데 모태신앙이 하나도 안 겪어보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매 순간 순간 새벽마다 이 말씀 앞에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 방식으로 절대 풀 수 없었던,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10월 08일 분당우리교회 특별 새벽기도

정확한 대안을 제시하는 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5-13)


우리가 잘 아는 어린 왕자를 보면 주옥같은 명언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정말 나이가 들어갈수록 진짜 명언이다.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해가 아침에 뜨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러 시험을 만나는 게 당연한데 여러 시험 대부분이 사람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대인관계가 힘들다.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다. 특히 교회에서 만나는 분들은 늘 덕담을 전하는데 익숙하다 보니 속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대인관계를 잘 맺는 게 어렵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점검을 대인관계를 통해서 확인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충만한가? 영적인 문제이기에 확인이 안 되는데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대신 관계 아닙니까? 바로 그다음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이것은 대인관계 아닙니까? 하나님 관계가 충만 해도 사람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영적인 상태가 나쁜 것입니다. 두 가지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대신, 대인 이 조화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성숙한 교회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셉은 해가 아침에 뜨는 것이 당연하듯이 요셉의 삶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충만하고 성숙하도록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의 영적인 충만함을 대인관계 성숙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형들이 복수할까 두려워하며 벌벌 떨 때 안심시키며 한 말.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대인관계에 하나님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만 끝내면 대부분 관계가 처음에 좋았다가 끝에는 안 좋을 것입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마라라는 말에 공감하듯이 서로에 대해서 신실하게 대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애당초 없습니다. 요셉처럼 항상 영적인 충만함을 대인관계의 물고로. 4월 5월 논에 물을 댈 때 내 논으로 끌어들여야 하듯이 영적인 충만함을 대인관계로 잘 흘려보내야 합니다. 부부관계는 내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는 잣대입니다. 내 아내에 대하여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가 영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특별 새벽기도의 주제가 너는 복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이것이 대인관계 아닙니까? 복을 주시는 분은 대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복이 될지라. 이것은 대인관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데요. 어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에서 벗어나 멋대로 행동해서 이집트로 가서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결과적으로 행복한 결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창세기 13장 4절 말씀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회복되자마자 대인관계의 문제가 나옵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로 가자마자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창 13:7)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해가 아침에 반드시 뜨듯이 하나님의 테스트도 이루어집니다. 성령 충만하게 새벽기도를 끝나면 집에 가면 아내가 롯이 있습니다. 아내가 롯이 아니면 회사에 가자마저 롯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받은 은혜 다 잊어버립니다. 초심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선포되고 놀라운 일이 기록된 말씀 바로 다음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의 다툼이 기록되는 게 하나님의 점검,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인관계를 통해 아브라함이 너무나 성숙한 대인관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이 얻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4절에서의 충만함을 가지고 오늘 하루 여러분이 꼭 기억하고 이루어야 할 것은 대인관계에서 오는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성숙함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창 13:5-6)


다툼의 원인이 소유가 많아져서입니다.


역경은 때로는 살마을 곤경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역경을 견디는 자가 100명이라면 번영을 경험하는자는 단 한명에 불과하다.


많은 연단이 있는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진짜 힘든 것은 번영입니다. 부자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물질적으로 부를 이루고도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성숙한 분들을 보면 저절로 존경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고 재산이 많아지면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당 우리 교회가 드림센터 사회 환원. 사회 환원하면 우리 어떡하지? 3개 층을 10년 뒤에 기증하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어쨌든 환원할 것입니다. 안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원리로 볼 때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재산이 많아지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건물 안 갖는 교회 끝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드림센터 환원하면 학교 빌려서 쓰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선한 일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지킬 재산이 많아지면 그때부터 복잡해집니다. 제가 부모님을 참 잘 만났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우리 집은 만 원 한 장 물려받을 수 있는 집이 아닙니다. 오 남매가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서로서로 향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세 아이가 곧 저희를 고마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산 안 남기기 운동이 자녀를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평 우리 마을 할머니의 큰 헌금, 땅을 기증해주신 집사님 부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땅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애들한테 해가 되기에 그래서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땅 주인을 찾고 있었는데 할머니의 기증 소식을 듣고 주인을 찾았다고. 그래서 교회로 문서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정신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재산을 물려주면 자녀들이 편할 수 있겠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의 다툼이 있는데, 영적으로 충만한 아브라함이 대인관계의 문제를 풀어 나는 것이 너무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평화의 정신이라는 큰 전제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8)


이 전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가 추구하는 전재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29 목사님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이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뭐냐. 아브라함의 가장 큰 전제. 다투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다투지 말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 새번역)


하나님 자녀의 강력한 특징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영어로 peace maker라고 되어있습니다. 사사건건 우리 얼마나 유능하고 똑똑합니까? 남의 약점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시시비비 가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가 누리는 복중의 복, peace maker가 되는 것입니다. 제 소원이 이것입니다. 제가 가는 곳이 다툼이 없어지고, 제가 가면 분쟁이 사라지고. 제가 사실은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잘 되면 내가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민교회를 다니면서 이민 교회가 어려움을 많이 겪지 않습니까? 제가 나누어진 교회를 다시 수습하고 담임 목사님 세우고. 그렇게 10년하고 은퇴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닌가? 29 교회가 세워지면 판단하고 수습할 일이 많을 텐데. 제가 필요하다면 내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제 기준은 하나입니다. 분당 우리 교회에 남던지. 이민교회를 가던지 peace maker가 될 수 있다면. 역할 다 끝났는데 왜 저 목사님은 얼쩡거리지 하면 peace maker가 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무슨 결정을 하든 혼란이 없습니다. 이민교회를 가서 peace maker가 된다면 결정 간단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신 여러분, 삶의 가장 큰 판단의 정신은 평화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잃고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를 빼앗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에 어떤 태권도 관장이 애들 훈련 다 시키고 집에 데려다주려고 차에 태우는 과정에서 묻지마 폭행. 느닷없이 달려들어서 관장입니까? 했으면 안 때렸을 것 같습니다. 얼굴 위주로 날벼락을 맞았는데 뉴스 영상을 보면서 감동이 왔습니다. 태권도 도장에서 버스 안에서 방금 가르친 제자들이 다 보고 있는데 관장님이 그 묻지마 폭행에 방어만 하고, 그래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것입니다.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그날 태권도 사범이 잊히지 않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보복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기준으로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할 때 하나님께서 태권도 사범처럼 가르쳐주었습니다. 맨 처음 상가를 계약하고 인근 교회를 다니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분당이 계획도시여서 상가 아니면 개척할 수 없으니 다니며 폐를 안 끼치겠다고 했습니다. 한두 교회를 못 갔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오지 마라. 그 교회 목사님이 한 말이 지금도 뼈가 아픕니다. 이찬수 목사 여기오면 우리 다 죽는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고뇌의 시간에 빠지고, 계약금을 지불하고. 땅도 못 밟아본 그곳에 임대료 관리비 다 내야 하는데. 내가 계약했는데 왜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지 마음의 저항이 많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그때 태권도 관장님처럼 주셨던 말씀이 시시비비 가리지 말고 이웃교회와 싸우며 하면 안 된다. 어떤 경우라도 교회를 이웃교회와 다툼으로 시작하면 안 된다. 너무나 중요한 지침을 주셨기에 그 장소를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기라는 순종이 이루어져서 겨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분당, 수지, 죽전 다 뒤져서 고거 하나 남아있던 공간인데 억장이 무너지는 시간을 지나서 얻은 곳이 송림 중고등학교 만 평의 땅. 70평 땅을 포기했더니 만 평의 땅을 주셨을 줄을 믿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다툼은 안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첫 번째 성숙입니다.




2. 양보의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9절 말씀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우리의 문제는 총론이 너무 강합니다. 평화의 정신 구현해야지. 상대방이 양보하면 될 텐데. 이것 아닙니까? 피 흘림의 축복입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은 희생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피 흘림입니다.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것을 알면서 실천을 안 하는 것입니다. 늘 큰 선포는 잘합니다. 평화를 이루어야죠. 피스메이커가 되어야죠. 양보 추구는 안 합니다. 일만 성도를 이루는 과정에서 후배 목사님이 너무 힘드시죠? 하는데 총론은 너무 쉬운데 각론이 좀 어렵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고 싶으세요? 평화를 이루는 존재로 사는 삶을 살기를 원하세요? 양보 없이 불가능합니다. 네가 우할 테니 네가 좌하라. 이렇게 만드는 것 아닙니다. 서로 다투지 않기 위해서 뉴스, 정치 이야기를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다툼을 보도하는 것이 국민 정서에 해로운 것 같습니다. 선거의 원리는 다투지 말자. 그래서 네가 양보해야 한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어른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삼촌 아닙니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삼촌에 의해서 그런 부를 이루었는데 당당하게 말할 수 있잖아요. 삼촌 잘 만나서 이런 부를 이루었는데 다툼이 있네. 네가 좌로 가라. 사랑은 논리가 아니더라고요. 영적 충만에서 오는 사랑은 논리를 뛰어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장기려 박사님. 별명이 바보 의사입니다. 유명한 일화 아시죠? 장기려 박사님이 운영하는 병원에 너무 가난해서 퇴원을 못하는 환자에게 원장님이 뒷문을 열어둘 테니 직원들 몰래 도망가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입니다. 저를 봐도 그렇습니다. 총론 평화를 이루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이루자. 이것은 너무 합의가 잘됩니다. 각론에 들어가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픕니다.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론으로 몰라서 가난한 환자를 못 도와주는 것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기를 구하세요. 몰라서 못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기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척을 시작하실 때 교회와 교회의 다툼으로 시작하면 안 된다. 새벽에 고뇌한 인물이 이삭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과 똑같은 정신입니다. 우물을 파서 못된 것을이 와서 시비를 걸고. 그 새벽에 시작 때문에 하나님 제가 깨끗이 양보하겠습니다. 포기하겠습니다. 천몇백만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했다고 생각하지. 목사님 찾아가서 기쁨으로 손을 맞잡고 조금도 미안해 마시고 목사님과 저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입니다. 기쁨으로 축복하며 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양보의 정신입니다. 피스메이커가 되어야지. 단 이 일은 저 사람이 양보해야지 그게 아니라 장기려 박사를 바보 의사처럼 죽고 나서 바보 목사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도 하나님 말씀 앞에 눌려서 바보 목사. 바보 엄마가 되시고 바보 아빠가 되시고. 자녀들이 여러분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3. 정확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창 13:6)


아브라함은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아브라함의 분석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에 정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저는 분당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처럼 구하고 구하는 것은 안목을 구합니다. 최근에 실력보다 안목이다. 책을 봤습니다.


안목이란 사물의 좋고 나쁨 또는 진위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이다. 비즈니스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고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다.


신앙생활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안목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고 본질을 꿰뚫는 힘이다. 믿음이 부실해 보이는 결정적인 차이는 안목의 차이입니다. 롯을 보시겠습니까?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겉으로 보기에 물이 넉넉하니. 풍요로움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 13:11)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는 게 안목이라고 했는데 롯은 드러난 것만 보는 인간 아닙니까? 그래서 망한 것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땅이지만,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 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2-13)


그래서 여러분 엄청 고초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가족을 망하게 만드는게 롯 아닙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때 수능 잘봐서 서울대가게 해주세요. 그게 아니라 어느 학교를 가든 상관없이 안목을 허락해달라고. 부모인 우리가 안목을 구해야합니다. 29 목사님들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산수 못해서 괴로워합니까? 무엇보다도 29 목사님들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혼미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지도자들이 안목이 있어야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 119:99)


여기서 명철이 NIV로 insight라고 되어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29 예비 담임 목사님들과 함께할 모든 성도님에게 통찰력. 영안을 주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근원적인 차이를 보았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복을 선포하신 후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약속의 말씀을 그를 움직인 동력이 되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갔고. 한국교회가 미성숙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 교회 담임목사는 새벽마다 하나님을 따라갔고 성도님들은 목사님을 따라갔고 그러면 그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제가 없어져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영적으로 꾸지람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사람만 보시느냐고. 목사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목사만 쳐다보는 구조가 기형적인 대형교회를 만드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롯을 구분하는 말씀을 보길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갔고. 결론을 고린도후서 4장 18절 말씀으로 맺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자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합니다. 특새가 지나면 이찬수 목사님 설교준비 많이 했데. 그게 아니라 2021년 그때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기 시작했으니.









송구영신

12월 31일 분당우리교회 송구영신

기대감으로 도전하자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수 3:1-6)


오늘 새벽입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이런 일이 일 년에 몇 번 있습니다. 딱 1년 전 작년 12월 31일을 위시해서 1년 전 어간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참 걱정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년 연말 기준으로 올해에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시작돼야 하는데 코로나는 잦아들지 않고,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시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뒤 따라오는 혼란들이 있지 않습니까? 성도님들이 1/4 정도 줄어들면 우리 직원들은 어떻게 하나. 직원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교회 상황 때문에 내보내는 일이 없다. 이런 약속을 했지만 막막한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귀한 헌금으로 유지되는 교회인데. 참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야 말씀드리는데 내부에서 15명 부 교역자분들 청빙하고 외부에서 15분을 청빙하다보니 1년에 5번에 걸쳐서 15 목사님을 결정하고 청빙하니 당연히 들어가지 않는 목회자분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쓰이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민망하고, 마음이 상하고, 공정하지 않습니다. 빈번하게 나서는 목사님은 교역자들이 80명 넘습니다. 청년부가 있는다든지, 주일학교가 있는다든지 하면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겨진 교역자분은 어떻게 해야 하나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성숙함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승복하고 하나님의 주권. 나이가 있고 배려가 있고. 승복하고 기가 막히게 한해 내내 너무나 적절하게 목회자를 잘 인도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오늘 새벽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너무 두려웠고 1만 성도 파송운동 하는 과정에서 교회에 편이 갈라지고 최악도 생각하다 보니 올 한해에 단 한 건의 문제로 인해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너무나 기적입니다. 너무나 벅찬 감격으로 새벽을 보내는데 제 아내가 한 해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일찍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교회 출근하기 전에 마음을 나누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하나 나누면서 진짜 신의 한 수다. 기쁜 새벽을 보냈습니다. 작년 이맘때에 2021년을 생각하면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여러 혼란에 대하여 진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한해였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왜 이딴 것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받아들이지 않고 저를 만나면 그냥 우시는 것입니다. 우울증이 온 가정이 있다고 하고, 힘든 가정이 있더라도 수용하는 것이, 여기까지 오는 것이 너무 감격하였습니다. 아침 9시, 29명 예비 담임목사님 전체 모임이 있었는데 간증을 하였습니다. 벅찬 마음으로 아침을 보냈는데, 여러분과 제가 1년 후 이맘때에 타임캡슐 만들지 않습니까? 새해에 꿈꾸는 내용을 받아서 1년 뒤에 가정으로 보내드렸던 개척 초기 성도님들이 많지 않으시니 가능했습니다. 아침 9시 29 담임목사님들과 이런 것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딱 내년 이맘때에, 29 목사님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전부 부교역자들에서 청빙을 해서 담임목사님은 처음이잖아요. 그래서 보면 29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눈에 핏발이 많고, 대화하면 피곤이 몰려오는 것. 못 잤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눈에 쓰여 있는데. 불안한 2021년 연말을 보내고 있는 29명인데요. 1년 뒤에 오늘 새벽에 내가 은혜를 경험한 것을, 내년 이맘때에 29 목사님들이 아눌 수 있도록 이 꿈을 갖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기준에 오전 9시 29 목사님들께 제안했던 것을 모든 성도님들에게 제안하기를 원합니다. 오 머시기 변이 바이러스가 나와서. 모두가 불안하고 내년 어떻게 되는 거야? 이런저런 어려움, 염려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전 교회 적으로 함께 기도하면서 내년 이맘때에 이 두려움을, 이 마음의 불안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소시켜 주셨는지. 어떤 은혜의 길로 인도해주셨는지. 전 교회 적으로 간증하는 꿈을 같이 꾸기를 원합니다. 이 꿈을 꾸기 위해서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 말씀을 묵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보니깐 동전의 양면처럼 뿌리는 같은데 두 감정의 양상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는 너무 벅찬 감격일 것 같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후로 40년 광야를 돌면서, 이 순간을 한순간이라도 잊었겠습니까? 언젠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꿈을 꾸면서 왔던 그 꿈을.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은 제가 겪어보니 그냥 주지 않으십니다. 연단을 통해서 주십니다. 분당우리교회가 처음 시작하면서 상가를 얻었다가 이웃교회의 요청으로 양보하면서 지금 29 목사님들이 제가 20년 전에 겪었던 그것을 다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잘 압니다. 좋은 데가 나오면 업종이 뭔가요? 교회입니다. 교회는 안줍니다. 29 목사님은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실 때 반드시 테스트를 통해서 주십니다. 요단 강이 가로막혀있죠. 요단 강을 건너가면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 상황을 생각해보니 우리들의 상황이다. 한 교회가 동시에 주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 29개가 만든다는 역사적인 해가 내년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들에 대하여, 지난주에 말씀드렸잖아요.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악한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목사로 불렀는데 주님께서 너 뭐하다 왔니? 그래도 몸부림은 쳤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년이 너무나 가슴 벅찬 한 해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표적, 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도님이 걱정하고 29 교회가 어떻게 될까? 나는 가는 게 옳을까 많은 고민을 하고 갈등하는 시간이지만 내년 4월 첫 주부터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목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기적중의 기적 아십니까? 어떻게 29 교회가 예비 목사님들이 세워져가고 어떻게 이런 혼란 없지, 갈등 없이. 이것 자체가 기적아닙니까? 그래서 새해를 꿈꾸면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인지라 불안한 것입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집 애들도 불안한가 봐요. 아빠 우리는 어떻게 돼?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알겠니 내가 알겠니.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고 이렇게 불투명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송구영신 예배 때 이런 말을 농담으로 했습니다. 제가 이 예배 몇십 번하면 은퇴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농담 안 합니다. 진짜 다가와요. 오늘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벅찬 감격으로 기대하면서 시작하는 한 측면이 있는가 하면 저를 포함해서 장래가 불투명해요. 이런 상황이기에 지도자 여호수하 앞에서 한치의 혼란 없이 요단 강을 진입하는 상황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수 3:7)


왜 감격의 말씀이 되느냐? 2022년도 우리도 1만 성도 파송운동이 혼란 없이 진행될 줄을 확신합니다. 갈등 없이 하나님이 이끌어주시는 은혜의 길로 가게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구하고 구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폴 트루니가 쓴 모험으로 사는 인생 책이 있는데 연말이 되어 책을 새로 꺼내서 읽었습니다. 액기스처럼 한 대목을 잊지 않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인생은 모험입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걷는 것입니다. 2022년도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오미클론이가 하는 변이 바이러스가 잦아들면 더 센 바이러스가 나올 줄 모르고, 어떤 학자들이 예견하는 것처럼 코로나 이전으로 못 돌아간다. 한 번도 안 가본 길입니다. 대면하지 못한 악한 바이러스를 대면하는 것이 불투명한 인생입니다. 놀라운 것은 인생은 모험인데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입니다. 정말 너무 신날 것 같습니다.


가족이 다 미국에 계시니깐요. 애들이 태어나면 저희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인사를 시켜야 하잖아요. 그때가 아주 갓난아기 때입니다. 애가 방 하나 택해서 눕혀놓은 데요. 애도 시차가 있을 것 아닙니까? 저와 애는 저쪽 방에서 대화하고 있는데 자지러들듯이 우는 것입니다. 놀란 것입니다. 완전히 낯선 데니깐요. 자기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엄마 여기 있어. 한마디 했습니다. 그렇게 공포에 막 우는 게 아니라 좋은 표현인지 모르는 데 악을 쓰듯이 울었습니다. 바로 잠들더라고요. 인생은 자다가 깨보면 너무 두렵습니다. 어떻게 가야 하지?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딱 이것입니다. 하나님 여기 계셔. 나 여기 있어. 새해에 초행길 인생. 불안함이 많은 2022년 인생길에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인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함께 따라 해보세요.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폴 크루니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각종 두려움을 충분히 인지하는 가운데 두려움이 있는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요?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새벽마다 여호수아와 똑같습니다. 원리는 같습니다. 새벽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받은 말씀을 대언하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교회가 될 줄을 믿습니다. 본문을 보니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새해에도 도전에 승리하는 새해가 되기를 위하여 세 가지 권면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언약궤 바라보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수 3:3)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언약궤는 임재의 상징입니다.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다 아시잖아요. 상자 안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언약궤의 내용물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셨던, 인도하셨던 지팡이와 만나가 담겨있다는 것.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삶.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을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혼란에 빠진 분 있으신가요? 존재가 초라해 지신분 있으신가요? 지금이야말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주를 알아야 합니다. 제일 미련한 사람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못 받는 사람입니다. 하는 것 모두 실패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 깯아야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그에게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 1:8)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수 3:3)


무엇을 보고 무엇을 따르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레위사람 인간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이 메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여러 번, 수 없이 강조하잖아요.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 담임목사 아니에요. 한국교회가 진짜 어려움에 빠진 첫 단추가요. 언약궤를 봐야 하는데 제사장만 보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면 손만 봅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청소년 사역할 때 아이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달 대신 예수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이야. 손가락만 쳐다보지 말고, 손가락이 예쁘다고 좋아하고. 내 손 보는 게 기분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목사님 최고예요. 멋있어요. 심지어 잘생겼다고 말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부산 집회를 마치고 나가는데 잊히지 않는 칭찬이 있습니다. 서울말로 설교하니 듣기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요지는 언약궤를 보지 않고 제사장을 보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그 언약궤가 능력의 도구가 아닙니다. 역사 아시죠? 언약궤를 의지했다가 엄청난 비극을 경험한 패배를 맛본 것 아시잖아요. 성경책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은 성경을 소중히 여겼으니 그랬잖아요. 성경을 베고 자면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귀한 것은 알겠지만, 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하나님 우리가 정말 새해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29 교회로 가시면서 이찬수 목사님 이제 헤어져서 어떻해요? 인간적으로 해야죠. 20년은 같이 지냈으니 굿바이 하면 안 되죠. 목사님 서운해요. 이정도 인사는 하셔야 하는데 그 정도 들어가시지 마세요. 목사님 없어서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2. 거룩으로 무장하기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 3:5)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전쟁 도구를 잘 챙겨라고 하지 않고 왜 여호수아는 요구했다고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강조하겠습니다만 교회가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스피커 만들고 본당 크게 만들고 유력한 성도님을 교회로 모시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 12:14)


17세기 청교도 서로 격려하면서 격려하는 말이 있습니다. 졸리는 분들이 있어서 화면으로 영어로 올렸습니다.


Holiness is better than happiness.


청교도들은 서로 격려하며 쓰는 말입니다. 거룩이 행복보다 귀합니다. 행복보다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잘 믿었는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보다 더 소중한 것은 거룩 이라는 것.




3.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기


이번 주와 다음 주에 반복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 3:5)


담임목사가 해야 할 것은 성도님들이 기대감을 같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윌리엄 캐리)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평 우리 마을,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할 줄을 믿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을 정리하면서 스탠리 존스가 쓴 자서전에 나온 책입니다.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한 위대한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놓아버리겠다. 그것을 다시 추구하기 위하여.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더 알아가기를 원합니까? 익숙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하나님 은혜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년 한 해에 이런 꿈을 갖고 목적을 갖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Source. 한동대학교 현동홀 4층 (@velo_bread)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