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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분당우리교회 설교



주일설교



12월

12월 2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사랑이 태어나고, 희망이 다가오다

사랑이 태어나고, 희망이 다가오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목사님은 여름이 좋으세요 겨울이 좋으세요 질문을 하면 서로 장점이 있어서 고민이 되지만 여름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는 점만 고려해서 답을 한다면 저는 단연코 여름이 좋습니다. 겨울에 아침 7시 예배다 보니깐 아침에 교회를 향해서 집을 나서면 캄캄한 밤이 안 그래도 추워서 움츠러드는데 너무 싫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름이 좋습니다. 아침에 3월 말 어간으로 가면 어느 순간 교회 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환하게 밝아지는 게 1년에 기다리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입니다. 낮이 길기에 여름이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 목사님은 하지를 좋아하겠다고 생각하시면 아닙니다. 동지가 좋습니다. 낮이 긴 게 좋다면서 1년에 낮이 짧은 동지를 좋아한다면 모순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년 중 가장 낮이 짧지만 그때부터 낮이 길어지는 스타트가 일어나기에 이번 동짓날도 기뻤고, 느끼지는 못하지만 길어지지 않습니까. 3월 말 되면 환의 날이 옵니다. 서서히 가 아닙니다. 어느 날 아침에 교회에 말씀을 전하려고 문을 나서면 환하게 밝아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게 좋아서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면서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유희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바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디마라는 사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단 두 단어 기다림과 희망으로 집약된다.


이게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이게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현찰 받아서 현재 누리는 종교가 아니에요.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기다림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희망은 이간을 시들게 하지 않는 영원한 샘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하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가 너무 좋아하는 1년 중 낮이 긴 날이지만 점점 원하지 않는 낮이 짧아질 수밖에 없으니깐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하는 게 응답이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은 기다림의 축복입니다. 기다림이 있기에 늘 마음에 소망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강대국 사이에 껴서 고통받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는 방법을 쓰지 않고 고통받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힘든 마음속에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계속 전하고 계시는 것이 구약에서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이사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에 대한 경고 말씀이 여러 곳에서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이사야서가 심판에 대한 경고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런데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의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구조를 보면 죄와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와 희망의 메시지가 교차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희망에 대한 메시지의 정점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그 당시 강대국 틈에 껴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다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선포될 때 가슴 벅차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지금 아수르를 위시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주변 국가들의 강퍅한 움직임 속에 두려워하던 시기, 그렇기 때문에 기다림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이 주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앞두고 책을 한 권 구입했습니다. 베들레헴 그날 밤이라는 책입니다. 책을 구입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책을 봤을 때 평이했어요. 그런데 책값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은 부제 때문에 에요. 사랑이 태어나고 희망이 다가오다. 이번 12월에 가까이 가지고 다니면서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것만큼 액기스를 담은 게 있을까.


이번 성탄절 날 우리가 모두 사랑이 태어나고 희망이 다가오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린 것처럼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마라나타.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에 어떤 상황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져다주는가를 맛보기를 바랍니다. 사실 제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생각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너무 가난하고, 문화가 어딨습니까? 먹고살기 바쁜데. 당시 대한민국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곳이 교회였거든요. 거의 2학기만 되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꼭 크리스마스이브 마당 공연할 때 연극이 동원되는데 초등학교 1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연극에 탈락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연극에 발탁되었는데 주인공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연극이라는 것이 대사가 간단했습니다. 술 취한 행인2를 맞아서 비틀거리다가 무대 중앙에서 넘어지는 게 다예요. 이거 하나 하려고 10월 말부터 연습하는데 배역이 짧은것에 대해서 섭섭한 적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나누고, 연습을 마치면 엑스트라 같은 배역을 맡은 저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눈깔사탕 3개를 주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중고등부 만나서 게임하고, 여학생들과 게임하고, 여전도회 어머니가 옵니다. 국밥 먹으러 와라. 새벽 3시에 뜨거운 국밥 먹고 새벽 송을 돌면 세상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큰 보자기를 들고 다니면 새벽종. 국민들이 여유가 있었습니다. 새벽 4시에 잠을 깨우면 긴 10년 이상 했지 않습니까. 새벽송한다고 항의한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종교가 달라도 인정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별똥별이 쏟아지는 것도 잊을 수가 없고, 집에 가서 찬양을 불러드리면 꼭 성도님이 나오셔서 과자를 주세요. 큰 보자기에 과자를 담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깐 대부분이 불량품이었습니다. 7시에 과자를 나누는데 불꽃이 튑니다. 내 몫을 적게 줄까 봐. 불을 켜고 지켜보고. 모든 과자를 뒤섞어서 나누니깐 요즘 애들이 보면 버리세요. 할 거예요. 그 추억이 마음에 그리운 것입니다. 자꾸 생각하다 보니깐 제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기다리지 않은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국밥 먹는 게 중요하지 주인공이 누군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많은 분이 요즘에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 난다. 캐롤이 하나도 안 들리나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게 펼쳐대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진짜 기다려야 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아는,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것을 제대로 사모하는 그런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탄절에 진짜 사모해야 하는 것을 정리했습니다.




1. 주님의 다스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정사는 다스리는 일. 정사는 왕권을 말합니다. 가장 강력하게 예언하는 게 무엇이냐.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왕인가. 내 인생의 보좌에 내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이 보좌에 왕이신 그분이 좌정하는 게 아닌가. 요즘 제가 정독하면서 읽는 책이 있는 데요. 김상근 교수님이 쓴 군주의 거울이라는 책입니다.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철학 용어의 하나인데요. 해결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의 상태. 아포리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입니다. 길 없음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의 상태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단어는 위기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직면한 것이 아포리아입니다. 이 책에 보면 저자가 우리 대한민국이 아포리아 상태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길 없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이렇게 분석할 때는 대충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철저한 근거를 학문적으로 조명하기에 이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분이 쓴 글 일부를 읽어드릴게요. 우리는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곤고한 시대를 버티게 한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젊은이들 사이에 희망이 사라지는 이유는 우리들 사회에 리더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없는 상태. 길 없음의 상태가 된 이유는 지도자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서 저자가 이런 권면을 합니다. 지금까지 남들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앞을 향해서 저었습니다. 인문학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밤하늘의 별을 보라고 요구합니다. 내 인생의 좌표는 어디인지 자신을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혼미하고, 뭐가 잘못 된 지 규명이 잘 안 되는데 열심히 노 저어서 목적지만 가면 뭐하느냐. 열심히 노 젓기 전에 고개를 들어서 북극성을 보라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알려주는 북극성을 보고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정했는지 점검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이 책 정독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 출구 없음의 상태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리더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웠습니다. 제가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잖아요. 제가 혼미하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목사가 되면 수많은 성도님들을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다는 두려움이 이 책을 정독. 최근에 분립 개척한 29 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이 책을 소개하고 정독하자. 그래서 29 교회가 은혜를 누리고 달려가기를 원한다면 지도자가 각성해야 한다. 왜 성탄절에는 우리가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다스림을 점검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아무리 열심히 산다면 뭐합니까? 길 없는 길인데. 시편에 나오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열심히 했는데 제자리입니다. 열심히 하기 전에 어깨에 정사를 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가. 잠시 혼란하더라도 금방 혼란하지 않아 하는 삶을 사는가 점검하셔야 합니다.




2. 감탄의 회복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제가 보니깐요. 뒤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안의 왕이라. 훨씬 더 중요한 개념 같아요. 맨 앞에 그의 이름은 기묘자 묘사라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맨 앞에 나오는 기묘자가 히브리어로 펠레라는 단어입니다. 경외로는 일. 불가사의라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원더풀이라고 번역합니다. 원더풀은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감탄사입니다. 주님의 속성을 묘사하는 기묘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으로는 기묘자, 묘사라라고 했는데 썩 잘된 번역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콤마가 있으면 안 됩니다. 한 개념이니깐요. 오늘 우리 시대가 길 없는 상태. 아포리아 상태라면 원더풀 상담사가 되시는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분의 지도를 받지 않고는 자녀교육 어려워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제일 먼저 묘사하는 것이 원더풀 카운셀러. 놀라운 상담자. 요즘에 제가 꺼내놓고 다시 가볍게 읽는 책이 있는 데요. 책은 도끼다라는 책입니다. 책의 저자는 카피라이터에요. 유명한 광고 문구를 많이 만든 분이에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생각이 에너지다. 혁신을 혁신하다. 히트 문구를 만든 전문가인데요. 이 분이 쓴 책은 감탄과 관련된 내용이 꽤 되는 것입니다. 제가 메모해놓고 묵상합니다.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다. 왜 중요한지 쭉 읽어드릴게요.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친구보다 감동을 잘 받는 친구들이 일을 잘합니다. 감동을 잘 받으면 풍요로운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음악 하나 들으면서 정말 좋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친구들이 일도 잘하고 인생도 풍요롭죠. 20년간 분당우리교회를 거쳐 간 굉장히 많은 부교역자들을 보면서 이 분의 말에 100% 동감해요. 감사가 잘 흘러나오는 분이 성도를 심방하면 감동받더라고요. 본인이 심방을 가야하는데 가면 어떻게 감탄이 전수가 되느냐고요. 우리 부교역자들 만날때마다 저는 별명이 있어요. 공포의 반복. 감탄을 회복하라. 나에게 선물 가져다주려고 하지 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성도님들에게 드려봐라. 성도님들이 우리에게 섬기는 것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해보면 알 것이다. 성도님들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드려도 얼마나 감탄합니까? 아싸 담임목사님들에게 얻어먹었다. 일기장에 써요. 뭐 갈비를 사다주어도 시큰둥한거에요. 어지간하면 대접받지 말고, 대접받으면 아싸. 심방 받고 목사님에게 설렁탕 사드렸는데 목사님이 아무 말도 안 하면 절대 사주지 마세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감탄이 있는 사람이 목회도 잘해요. 이 분 카피라이터를 보니깐, 감동이 있고 감탄이 있는 게 일도 잘한다는 것 아닙니까? 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창의력이라는 것은 집중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수박을 보고도 감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과 하나를 보고도 감동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 김정훈 교수님이 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감탄은 인간만의 욕구라는 것입니다. 감탄은 인간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키워보니 이 말이 너무 공감됩니다. 강아지가 인간 친화적이라서 좋은데 감탄을 못해요. 어쩌다가 삼겹살을 구우면 침도 삼켜요.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요. 그 참 피 같은 고기 한 점은 안 먹고 넘겨주면 으압아 먹고 끝이에요. 씹지도 않아요. 그리고 또 기다리는 거예요. 이놈아 네가 그리니깐 개지. 쪼금만 감탄하면 내가 또 주는데.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결정적인 것이 감탄할 줄 아는 거에요.


태정 태세 문단 세 무슨 감동이 있습니까? 대학 가느라 감탄을 죽인 게 가슴 아픈 교육 아닙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날아가는 새만 봐도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세대라고. 옷도 보잘것없었지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샤워를 못 해서 냄새가 나더라도 그때는 감탄이 있었어요. 온돌방에 모여서 불편하게 생각 안 하고 형하고 누나하고 깔깔거리고. 어느 날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왜 위험한지 아십니까?


충족하지 않은 감탄은 욕구와 절이 된다. 적개심이 되고 공격성이 된다. 모두들 어디 건들기만 해봐라 하는 표정으로 다닌다. 정치가 개판이어서가 아니다. 감탄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문화적, 종교적 체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세요. 날아가는 새만 보고 웃던 시절이 365일 중 몇 번이나 있었느냐고요. 그 책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느냐의 기준은 간단하다. 하루에 얼마나 감탄하냐이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혜에 있더라도, 감탄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 인생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울분 공화국이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분노의 악순환이 쌓여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기묘자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좌정하시는 것이에요. 내 안에 울분이 감탄으로 바뀌어 줄을 믿습니다. 일상이 지치니깐 이 분이 서평을 썼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좋은 선물을 받아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얻지 못했다. 내 삶 전체가 의무감을 위해서 감동하는 척하는 것이다. 감동하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다. 사도행전 3장 인물 하나가 기뻐하는 게 계속 머리에 맴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8)


거지가 감탄을 경험했습니다. 왜 경험했습니까? 기묘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행 3:10)


기묘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니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영향력 주는 자리가 그 사람을 영향력 있게 만들지 않아요. 여러분 인생에 감탄이 회복될 때 춤을 추는 감격이 일어날 때 그때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될 줄을 믿습니다. 이런 감탄의 삶을 산 인물이 구약의 다윗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나는 기막히게 감탄스럽다. 영어로 발음이 안 좋아서 화면에 뛰어달라고 했는데요. I am awesomely wonderful. 다윗은 자기 인생을 기막히게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묘사합니다. 다윗은 목동 아닙니까? 평생 권력자에게 쫓겨 도망가던 인생 아닙니까? 나는 울분이 많아. 나는 상처가 많아. 너희도 상처를 경험하면 그렇게 말 못해.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I am awesomely wonderful. 나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인생이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I’m awesomely wonderful이에요. 3D업종의 일을 하지만,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을 감탄하니깐 내 인생이 감탄이 나오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다. 부족한 것은 감탄이다. (G.K. 체스터턴)


오늘 저 개인적으로 오래 기다린 날이에요. 가평 우리 마을을 공개하는 날이에요. 오래 기다렸고 하나님이 이것을 계속 허가와 이것을 지연해서 수년을 기대했는데 오늘이 오픈하는 날이에요. 화면으로 짜잔 보시겠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이 너무 아름다운 건축이 가능했던 것은 강병권 교수님이라고 지금은 유명한 명소가 되었잖아요. 쁘띠 프랑스를 설계한 분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이 아니에요. 이 교수님의 감탄,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점검한 것을 가평 우리 마을에 재능기부. 한 푼 보상 바라지 않고 설계해 주시고 수년을 주마다 한 번씩 가서 진두지휘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설계하신 한 교수님의 감탄이 저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 마치고 홈페이지 가면 사진이 나와 있고 부탁의 말이 있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이 진짜 환대의 집이 되기를 바라고, 삶에 찌들어서 감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감탄을 회복하는. 미자립교회 사모님들, 미혼모들을 초대해서 감탄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아이디어를 주세요. 어떤 프로그램으로 하나님의 환대를 맛보게 해드릴까.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하반기 가평 우리 마을 오픈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마음의 왕좌에 그분을 모셔다드리는 성도들이 많은 모인 그런 믿음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요. 성탄절에는 기묘자 되신 주님을 모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감탄을 회복하는. 꿈 넘어 꿈 회복 프로젝트를 지어봤습니다. 올 3월까지 11 교회에 4억 원씩 44억의 예산을 갖고 후원해드리고, 내년부터 권별로 대한민국 전체를 어우르기를 원해요. 충청도권. 제주도권 지역 교회들과 연대해서 진짜 감탄을 잃어버린 교회들, 목사님들에게 주님 이름으로 섬기는 일을 할 텐데 오늘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그 일의 씨드머니가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오늘 드리는 오병이어의 헌금이 어린아이의 도시락이 되게 하여주세요.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그 예수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2월 1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사람을 얻는 자, 모든 것을 얻는다

사람을 얻는 자, 모든 것을 얻는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1-8)


메디치 가문이라고 15세기, 17세기에 이를 때까지 이탈리아 피렌치를 지배했던 가문이 있습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가문인데요. 메디치 가문을 소개한 글을 보면 당시 세계 최대 부자 가문이었는데 교황 두 명을 배출했으며, 미켈란젤로, 갈릴레오같이 수많은 인물을 키워낸 가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소개도 있습니다. 중세의 낡은 시스템을 마무리하고 르네상스를 여는 가문이다. 350년 동안 르네상스와 예술에 대해 이바지를 하였다. 어마어마한 인물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또 한가지 이 가문이 갖은 놀라운 점은 한 가문에서 당시 중세를 마무리하고 르네상스를 여는 주역 역할을 하였다.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른 포인트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제가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 이야기. 책의 부제를 보고 저의 관심사로 엮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무려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책의 소개 글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 모든 것을 얻는다. 요즘에 공부하고 있는 데요. 왜 제가 메디치 가문에 관심이 있나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독교 핵심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는법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인 창업자입니다. 조반니, 비치 대 메디치. 수능시험에 이런 게 나오면 힘들겠다. 이름이 긴데요. 메디치 가문의 창업자. 엄청난 가문을 만들게 되었나. 저자가 사자성어 두 가지로 이 분의 철학을 요약했는데 굉장히 동의가 되더라고요. 메디치 가문이 갖은 가문, 가훈이 유약겸야라고 요약이 된다. 약하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고 자기를 낮춘다. 이 가문에서 갖고있는 신조가 무엇이냐면, 너의 유능함을 드러내지 마라. 온화해야 한다. 몸을 낮추어야 한다. 조심히 처신해야 한다. 예수님의 낮아짐의 정신과 부합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갖고 있던 두 번째 신조, 여민동락의 정신.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한다. 메디치 가문에 갖고 있던 정신에는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추진하면 안 된다. 기업 경영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메디치 가문이 갖고있는 기업 경영의 대 원칙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들이 주장하는 옳은 일은 언제나 대중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는 것. 사업하는 경영원칙이 메디치 가문이 갖고있는 중심 원칙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사업을 추진해야 하고, 수입이 많이 생기는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은 것이라면 과감하게 포기했다. 제가 이런 내용을 살펴보면서 사람들에게 아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민동락의 정신이구나.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 이 내용을 갖고 공부를 할수록 계속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는 장면이에요. 바리새인이 예수님이 마른 장애인 손 마른 것을 고쳐주는 즉시 예수님이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손 마른 장애인을 고쳐주실 수밖에 없었던 정신. 감시하고 있었던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막 3:4)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사람들이 유익한 것. 옳은 일이다. 정신과 부합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런 맥락에서 지난 몇 주간 저의 목회를 돌아보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든 분이 알고 있지만 기독교가 위기라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외면해요. 기독교에 대해서 매력을 늦지 못합니다. 젊은이들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기독교도는 매력이 없다. 저는 첫 출발이 예수님의 정신을 놓친 것이거든요. 예수님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 사람에 관심을 두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거든요. 한국 교회가 70년대 갑자기 성장하면서 거기에서 굉장히 독소가 함께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나쁜 의도로 그랬겠습니까만, 막 사람들이 몰려드니 숫자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만나면 몇 명 출석하느냐. 제가 목회를 해보니 숫자에 관심을 두는 순간 사람에 관한 관심이 죽어요. 분당우리교회 2만 명 모입니다. 그러면 2만 명 안에 사람이 보입니까? 숫자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교회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고발당한다 할지라도. 손 마른 장애인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중심인데요. 어느 순간 사람이 중요해지지 않고, 사람 숫자가 중요하고, 큰 건물이 중요하고. 이렇게 되면 사람은 규모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도구에 불과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 하나님이 저에게 병을 주었어요. 자립을 잘했다는 결과가 있지만 저는 마음이 슬퍼요. 제가 여러 가지 잘못한 게 많다는 게 드러나요.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목회를 한 것. 제 마음에 아픔이 되고 병이 되고 있습니다. 내년에 분당우리교회의 방향을 환대로 잡은 게 여기서 출발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창 18: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어요. 사람에게 임재하셔요. 1절은 아무 특이한 게 없는 데요. 2절이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 18:2)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뜨거운 땡볕 아래 그중 한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래서 잘 대접한 게 아니에요. 변장하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독특한. 땡볕 1절에 나오는 날이 뜨거울 때. 한낮 가장 더운 시간이에요. 상상할 수 있죠. 비 오듯 옷이 젖어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나. 이런 질문에 대하여 살펴보려면 1절을 유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창 18:1)


원어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말 성경에 생략된 의미가 있는 데요. 의미를 살리면 여기에 접속사 그러나를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것은 A 문장과 B 문장이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창 17:26-27)


하나님이 왜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셨나 질문을 던져보면 할례받은 이후 아브라함의 태도를 점검해보려는 것입니다. 테스트해 보는 것입니다. 이게 참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게요. 신약으로 오면 구약의 할례에 어떻게 의미 부여합니까? 마음의 할례라는 표현을 씁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


구약의 할례 의미를 여러 군데에서 설명한 것을 하나만 읽어보려고 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마음과 당신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순종하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신 30:6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고 마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살아갈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진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점검하는 잣대가 여러 가지 있는데 아브라함에게는 나그네로 변장하셔서 가장 중동지역의 뜨거운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온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이 보는 것입니다. 타락하여 망할 수밖에 없었던 소돔을 향하여 중보기도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아브라함에 점점 하였던 잣대로 점검하면 나는 교회만 왔다 갔다 했지. 그랬는데 어느 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찾아주지 않았어. 진짜 변화된 크리스천인지를 점검하는 강력한 잣대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서 이런 정신을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남편들이 여로 나오는 똑같은 요구가 나옵니다. 예수 믿은 가정에서 결혼했을 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내 아내를, 남편의 환대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더 섬겨야 한다 말하지 말고, 아내가 변장하고 찾아온 예수님일 줄 모른다 하면서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부작용일까요. 낮 동안에 상담이나 교역자 면담을 주로 하지 않습니까? 오후 2시에 한 팀 약속하고 3시에 어떤 분하고 약속하고, 4시에 약속을 하고 촘촘하게 잡을 때가 있습니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2시에 상담을 하고 나면 근래에 이런 생각이 들어요. 혹시 변장하고 하나님이 다녀가신 건가. 어떻게 상담을 해야 했지. 무성의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쑥쑥 듭니다. 3시에 다른 사람하고, 4시하고, 어떨 때는 화장실도 못 가요. 바로 나가시고 바로 들어오시고 하고. 지치고 하면. 이렇게 하면 제 아내가 반드시 이렇게 말해요. 오늘 말 많이 했죠? 목소리에 말 많이 한 게 나타난대요. 5시에 상담을 미룰까? 그러면 5시에 변장한 예수가 올지 모르는데.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이 정신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아내를 대하고 남편을 대할 때 주께 하듯이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내년 분당우리교회의 강력한 목표를 환대로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양하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의 테스트에서는 분당우리교회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관심을 둬 주지 못하는 상황이 핑곗거리가 되었습니다. 성탄을 맞이해서 교회 행사를 많이 안하는데 꼭 하나만 부탁하고 싶습니다. 꼭 주변에 한 사람, 한 가정, 다락방이나 가정으로 초대할 수 없을까요. 이번에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소외당하는 사람. 세상의 약자. 본문에 하나님이 변장하고 찾아온 땀을 뻘뻘 흘리는 약한 사람. 우리 가정에 초대하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게 성탄의 정신 아닐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칭찬하는 목사님도 있지만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이루어진 게 크게 기쁘지 않아요. 오히려 이 일 때문에 겪어야 할 슬픔이 크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분들에게 제대로 대접을 했나? 마음이 아파요. 내년에 정말 분당우리교회적으로. 아침에 9시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만나. 내가 8명을 365일 만나봐야 우리 성도 몇 명이라도 만나겠느냐고. 하는 데까지는 하자는 것이에요. 할 수 있는 데까지 만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예수님의 근본정신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 여기에 온 마음을 집중해 보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테스트에 분명히 합격했을 것입니다. 그냥 합격한 게 아니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변장하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세요.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 18:2)


왜 막 달려갔을까요. 중동지역에 뜨거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온 나그네에 온 정성을 들여 찾아온 아브라함에 태도가 배어있는 것이거든요.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 18:6-7)


저는요 내년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아브라함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잘 섬기는 것 이미 보여주고 계시고요. 정말 변장하고 찾아오신 하나님을 못 알아본 아브라함이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뭔가 지쳐 보이는 나그네에 대하여 정성을 다해 보이는 태도.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하여튼 입만 살아서. 말로 다하지. 부끄러운 고백을 들었던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에요. 주님 앞에 이 테스트를 내년에 해보자는 것입니다. 교회 사람들 초대해서 대접하자는 것 아닙니다. 수고하는 경비 아저씨라고 할지라도. 섬겨야 할 주변의 무명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내년 분당우리교회 목표가 분당우리교회가 환대의 집이 되기를 원합니다. 누가 이 교회를 찾아오든지. 창립 때부터 오셨던 분이든 구분 짓지 않고. 주차장에서부터. 넉넉하게 뒤에 차를 나보다 먼저 가도록 양보하는 환대하는 것. 교회의 문화로 자리 잡는 게 꿈이고요. 분당우리교회가 추진하는 가평 우리 마을. 허가도 잘 안 되고 생각지도 못한 복병들이 나타나서 계속 늦어져 이것 때문에 병이 생길 지경이었는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 오픈을 늦어지면서 진짜 원하는 일이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데요. 가평 우리 마을 방향을 잘 잡았습니다. 분당우리교회가 추진하는 가평우리마을은 하나님의 환대가 일어나기를. 지친 이들의 쉼터로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가평우리마을 목표를 나눌 테니깐요. 기도 제목으로 삼아주세요. 가평우리마을을 어설프지만 여러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100번대, 200번대 300번대로 구분해봤습니다. 청년들이 잘 쓰는 표현으로 100번대는 내 돈 내 산입니다. 진짜 중요한 곳은 200번대입니다. 이제 너무나 지쳐있는 분들 장애인 부모님들,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한 자녀를 주셨기에 많이 지쳐 계세요. 지친 장애인 부모님들을 어떤 대가를 받지도 않습니다. 가평우리마을에서 1박 2일로. 좀 더 많은 쉼이 필요한 분들은 2박 3일로 극진히 대접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자립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60%, 70%가 우울증이래요. 가평우리마을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다는 못하지만 일정한 숫자를 초대해서 가평우리마을에서 쉬게 해 드리는 것. 이 시대에 너무나 지친 그룹이 있다. 알려주시면 누구를 막론하고 초대해서 어떤 회비. 이런 것 없이 완전히 섬기는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300번대는 공익대여. 가평우리마을은 일반 교회의 수련회 장소로 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명 이하 교회 수련회 하기 적합하게 만든 곳이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 수련회, 장애인 부서 수련회를 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공간을 빌려줄 수 있도록. 설교시간에 다 못 드리니깐요. 주 중에 영상을 만들 계획입니다. 출발부터 모든 과정을 정리하고 꿈꾸는 가평우리마을. 진짜 방향 잡았으니 내년에는 오픈해주세요. 내년에 가평우리마을은 지친 이들이 모여드는 곳. 하나님의 환대가 모이는 곳이길 원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본문을 묵상하니깐 내년도 분당우리교회 목표가 생겼습니다. 두 가지 새해 분당우리교회 목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목표가 이 구호가 굉장히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데


  1.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아브라함이 변장하고 오신 하나님께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창 18:4)


때양볕아래 육신을 배려해주는 표현이에요. 지친 몸의 필요를 채워주는 환대라면, 두 번째 목표는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창 18:5)


5절은 영혼을 갖은 동물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쉼을 얻어야 하거든요. 우리의 마음이 상쾌하게 하신 후에. 내년에 인사말처럼 나왔으면 좋겠는 데요. 연습 한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1.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반성해요.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톤을 줄이겠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거대한 나무를 제공하기를 원합니다.


  1.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마음이 지친 자들이 상쾌하기를 원합니다. 힘을 얻는다면 또 세상을 섬기고 이웃을 돕고 작은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적으로는 쉼터가 되기를 원합니다. 환대가 경험되기를. 가정마다 어지간하면 초대하고. 현대인들이 가정을 개방 안 하잖아요. 내년에 진짜 캠페인을 할 생각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잘 이루어진 데요. 정신은 흘러가야합니다. 우리끼리 잘 살아봐야 한다 안됩니다. 11 교회를 이미 개척한 교회 중에 쪼금만 더 후원해주면 부흥할 11 교회를 찾는 진행중에 있습니다. 11 교회 선정하는 과정중에서 많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것도 고맙지만,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은 교회론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미나 좀 열어주세요. 3달 미루었습니다. 내년 3월 첫주에 결정하는 것으로 하고 이 목사님들을 초대해서 세미나를 열기로 했습니다. 분당우리교회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3월 첫 주부터 11 교회가 발표되면 한 교회당 4억 원을 후원할 계획입니다. 2억원은 분당우리교회에서 후원하고요. 나머지 2억 원은 29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전체가 250억 전후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드림 센터를 은행에다가 담보로 맡기고 융자를 얻기도 했는데요. 29 목사님들에게 반드시 갚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분당우리교회로 값은 게 아니라 꿈으로 갖자. 교회가 자립이 되고 재정이 되면 우리교회로 값은 게 아니라 꿈의 통장으로 갚아 나가자. 올 한해 11 교회가 세워지면 분당우리교회가 2억 원을 부담하고 이 통장에서 2억씩 해서 22억이 출현이 될 것입니다. 내년부터 한국교회에 조금만 더 후원하면 일어날 교회를 권역별로 세울 것입니다. 충청도권 전라도권, 경상도권, 강원도권. 어디가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1년에 10 교회씩 4억을 후원할 뿐만 아니라 목회 철학을 가르치고, 가슴이 벅차지 않으세요? 한 교회가 매년 전국에 있는 교회들과 연대해서 29 교회와 연대하고. 11 교회를 선발하는 일에 존경하는 목사님들을 만나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표정이 어두운 분이 있는 데요. 끝난 줄 알았는데 또 하는 거야. 또 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에게 나쁘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에요. 지친 나그네를 섬기는데 우리를 먼저 힘을 주세요. 내년에 이 모든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로마서 5장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선행돼서 주신 하나님의 환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을 때에 얼마나 놀라운 사랑으로 거두어주시고 환대해주셨는지를, 은혜의 감격이 회복되는 한 해가 될 줄을 믿습니다. 그다음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이에요.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에 매치치 가문의 정신의 부자가 있잖아요. 경주 최부자 가문에서 외쳤던 구호를 아시죠?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분당우리교회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백 리 안에 영적으로 육적으로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꿈을 꾸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꿈은 왜 이렇게 작이냐고요. 꿈을 꾸면서. 하나님의 환대를 우리가 누리면서 내년에 분당우리교회는 거대한 나무 그들이 만들어지는. 나그네들에게 환대를 실천하는 가슴 박한 친해서 되기를 축원합니다.






12월 1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우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우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창 37:18-20)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허준희 교수라고 한국 처음으로 수학계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받아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 한 말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준비를 거쳐서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 병원에 사망할 준비에 정신 팔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젊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권면하는 내용인데요. 제가 아무리 봐도 이분이 열거하는 것에서 잘못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취업준비, 결혼준비, 육아, 결혼, 승진 다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살지 말라고 하나면 이 문장의 끝에 한 마디 권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준비를 거쳐서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 병원에 사망할 준비에 정신 팔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을 준비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그런 것만 추구하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노아의 방주를 언급하면서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그런데 주님의 지적은 허준이 교수님과 똑같습니다. 근원적인 본질을 놓치고 사는 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예배 드리기 바로 직전에 29 교회 예비 담임 목사님들에게 여러 가지 당부한 데요. 그중에 했던 것은 동사무소 목회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동사무소 목회는 짐작이 가실 텐데요. 행정처리만 잘하는 교회. 이번 주 몇 명이 늘었네. 중등부 숫자가 왜 이렇게 되었어. 겉으로 드러나는 규모만 보고 현상에만 집중하는 교회. 동사무소 목회하지 말자. 우리 교회가 얼마 모이고 있는가. 헌금이 늘고 있는가 이런 것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우리 교회는 생명이 살아나고 있는가. 수많은 지친 영혼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는가?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점검하는 게 동사무소 목회를 추구하는 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목회만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지적하시고, 취업준비, 창업준비, 노후준비, 죽을 때 너무나 비싼 1인실 병에서 죽어가는 게 인생의 목표다. 이것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동사무소 돈이 얼마큼 있고, 노후까지 쓰고 쓰고 다 쓸 수 없는 돈이 있어서 나는 안정적이다. 예수님이 성경에서 무서운 경고를 하잖아요. 그 사람이 놓치고 있는 것. 그 생명을 취해가신다면 그 모든 준비가 다 헛것이 된다는 것. 오늘 본문 읽은 말씀에서 도전되는 포인트를 발견한 데요.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창 37:18-19)


이것은 비웃는 이야기에요. 제가 요셉의 삶을 정리하고 묵상하면서 진짜 제가 추구하는 것은 이 부분이거든요. 요셉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비웃음을 실제로 살아내 버리는 것입니다. 비웃으면서 꿈꾸는 자가 오네. 요셉이 이것을 그 형제들 모두에 입에서 감탄으로 바꾸는 일을 한 인물 아닙니까? 분당우리교회 내년 사역을 준비하면서 저는 마음이 벅찹니다. 분당우리교회 내년 사역으로 지난 4월 1만 성도 파송예배 이후 2기 사역을 선포하고 영적 기초 다지기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어수선한 것을 정비하느라 애를 썼는데요. 1월 추구하는 게 시작될 것인데요. 추구하는 2기 사역의 몸부림은 이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숫자가 줄다가 채워지네. 예산이 걱정 안 해도 되네. 이것을 뛰어넘는, 꿈꾸는 자가 오도다 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삶에서 이루어내는 인생. 목표를 갖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찰리 해지스가 했던 말. 꿈이란 당신이 잠에서 깨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우는 무엇이다. 기성세대의 문제가 꿈은 애들만 꾸는 줄 압니다. 맨날 야단치는 게 꿈이 없느냐고 야단치는 게 꿈이 없는데. 50대, 60대, 70대, 80대 어른들이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가슴이 벌렁거리고. 이루어주지 않으신. 자다가 벌렁거려서 깨시는 분 있으세요? 손들어보세요. 오늘 설교를 면제해드릴게요. 경지를 넘으신 분이에요. 우리나라만 그런지, 세계가 그런지 몰라도 꿈은 애들만 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른들은 현실만 있으니깐 죽어라도 책을 안 읽고. 이 부분은 할 말이 없지만, 드라마만 계속 보고. 이거 우리 교회와 함께 새로 회복하자고. 동사무소 인생 마지막에 위험합니다. 우리 한번 사람들을 조롱할 때 저 꿈꾸는 놈 오네. 이것을 이루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기간은 짧다. 짧은 인생도 천하게 보내기에는 길다. 내년 2기 사역 이름만이 아닙니다. 많은 부분에서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동사무소 교회가 아니기를 바라고, 동사무소 가정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애가 인서울 내, 서울에 있는 무슨 대학에, 들어갔던 통계가 그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겪은 분은 다 알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묵상하는 가운데, 꿈꾸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을 몇 가지 뽑아냈습니다.




1. 요셉의 형제들: 얽매여 있는것에서 벗어나기


요셉의 형제들은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배다른 동생들을 이렇게 싫어했는가. 첫째는 아버지의 편애 때문입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3-4)


부모의 자식 편애가 아이로 하여금 원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 배다른 동생이 요셉을 미워했나. 요셉이 꿈꾼 꿈 때문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 37:5)


자꾸 꿈 이야기를 하니 미운 것입니다. 나중에는 애를 죽이려고 시도하다가 남의 나라에 인신매매로 팔아버립니다. 악한 에너지가 결집이 되니깐 보통이 아니에요. 동생을 향한 분노, 미워하는 마음, 떨치지 못하고 점점 악한 에너지가 모이는 배다른 형제들에게 모이는 안토니오 살리에르리. 최근에 이 내용을 다룬 피터 셰퍼가 쓴 희곡집을 봤습니다. 아마데우스 희곡집을 봤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쓴 희곡집에서 언급한 게 인상적이어서 책을 샀습니다. 희곡집을 사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겪은 갈등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막이 열리자마자 살리에리가 나이가 많이 든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40년 전 겪은 사건의 진상을 틀어야겠다고 희곡이 시작이 되는데요. 모차르트도 대단한 음악가지만 살리에르도 어마어마한 음악가에게요. 궁중음악 가라면 엄청난 사람이에요. 희곡집에 의하면 믿음이 엄청난 사람이에요. 하나님께 꿈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하소서. 음악으로 주를 찬미하게 하시고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그리하면 그 대가로 가장 깊은 겸손과 삶 전체를 드리겠나이다. 성공한 인물 아닙니까? 그랬던 살리에리인데 무슨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배다른 형제들하고 똑같은 상황입니다. 모차르트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나타난 후부터 나 자신이 싫어졌다. 한마디 말 만큼 잘 표현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의 배다른 형제들의 고백일 것입니다. 질투, 시기심, 열등감이 불행으로 몰고 갑니다. 이제 분노가 점점 축적되니깐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당신과 적입니다. 영적으로 병을 가져다주거든요. 그러고부터 모차르트를 죽이려고 하는.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모르지만, 희곡집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셉에 대하여 죽이려고 하는 배다른 형제들이나, 파멸로 이끄는 살리에르를 보면서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얽매이기 쉬운 죄는 엥텡글이라고 하더라고요.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예문을 이렇게 쓰더라고요. 그 새는 철망에 걸려서 꼼짝을 못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얽매이기 쉬운 죄는 내 주변에 있는 죄에요. 내 주변에 남아 있고 있는데 잊으리라는 말이 있어요. 쉽게 얽매이게 하는 죄에요. 이것을 경계해야 하는 거에요. 성경을 묵상하다 보니깐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7-8)


새로 달려가 보자고요. 그러려면 첫 번째 관문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죄는 분노, 너희 입에 부끄러운 말이라. 극도의 열등감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도. 모차르트만큼 시대에 날 만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옥한흠 목사님을 신학교 들어갔더니 100년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한 분이라고. 그래서 좌절했습니다. 이미 나버렸네. 그래서 제가 불행합니까? 신학교 가면서 포기했거든요. 목사님이 있어서 제가 불행하다고 몰고가지 않았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10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분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게 죄에요. 우리 목사 중에서, 요셉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하는 조롱을 현실로 만드는 진짜 꿈꾸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나야 합니다. 자꾸 비교하고, 살리에르가 갖고있는 울분을 올 한해 가기 전에 떨쳐내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요셉: 과거의 상처 흘려보내기


창세기 41장에서 그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고 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정하는 대목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 41:51-52)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짓는 요셉을 보면서 요셉이 엄청난 과거에 상처가 많았을 것 아닙니까? 살해위협을 당했죠. 인신매매를 당했죠. 성폭행 미수범으로 감옥에 들어갔죠. 관리들이 약속을 안 지켜서 빼네 주겠다고 하고 잊고 있었죠. 요셉의 삶은 상처 구덩이를 뒹군 삶입니다. 요셉이 상처가 많더라도 나보다 적을 걸이라는 생각한다면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요셉만큼 안 겪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어떻게 극복했나. 거기다가 요셉이 어떤 해석을 덧붙이는지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짓고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 41:52)


정말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배다른 형제들처럼 비교의식 속에 아버지도 몰고 가고, 엄마도 몰고 가는 시대 아닙니까? 질투심을 느끼고. 자기의 고유한 것보다 저 사람을 비교하는 나 자신을 떨쳐내야 하지만, 과거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움켜지고 있는 것은 자신입니다.


여호수아 4장을 보면 길 갈이나 옵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목적지 가나안에 도착하는 데요. 제일 먼저 진을 치는 곳이 길 갈 입니다. 이렇게 무사히 요단 강을 건넌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고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곳에 12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을 세웁니다. 길갈이라는 지명은 굴리다, 없앤다는 단어입니다. 길갈에 세운 돌의 의미. 과거의 모든 수치는 지나갔다. 선언하는 차원으로 해석됩니다. 그들이 길 갈 에 열두 돌을 세운 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것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내포하는 것은 길갈이에요. 과거의 모든 수치는 물러갔다. 새로운 게 왔다. 에벤에셀 외치잖아요. 여기까지 도우셨다. 그런데 과거의 수치는 왜 갖고 다니시느냐고요. 아까우셔서요? 한 번씩 꺼내야 생각이 워낙 우여곡절의 인생을 살았기에 지루하지 않아서입니까?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저 꿈꾸는 자가 오네. 과거와의 단절. 과거를 굴려 보내는 것입니다. 두 아들을 통해서 다 사라진 것처럼. 올 연말까지 다 흘려보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고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지만 상처를 주는 대상입니다. 과거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또 자빠지고 넘어지는 것이지만 처음 자빠진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아버지 야곱: 우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저는 이번에 요셉의 일생에 대하여 쭉 살펴보다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머물던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5)


자녀들의 위로를 거절해요. 나는 메시지 성경으로 보니깐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이 위로하려고 했으나, 그는 그들의 위로를 마다했다 나는 내 아들을 죽음을 슬퍼하면서 무덤으로 가련다. (창 37:35 메시지 성경)


자식 잃은 아버지의 눈물을 이것보다 잘 설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의 눈물을 흘린 게 아버지 야곱은 데요. 요셉이 잘해서 조롱을 멋진 성공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아버지 눈물이라는 대가지불이 있었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앞두고 있잖아요. 매년 성탄절을 앞두고 대림절 묵상집이라고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묵상집이 있습니다. 올해는 땅끝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묵상집이 남았습니다. 묵상 소제목이 우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21장에 이삭을 낳고 대리모, 배다른 종을 통해서 하갈을가를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쫓아내 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쫓겨나서 정처 없이 빈 들을 헤매고 있는 데요. 준비한 식량도 떨어지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으니 어머니가 못 견뎌 통곡을 합니다. 어린 아들도 그것을 보고 같이 우는 것입니다. 묵상집에 창세기 21장 16절을 새번역으로 올렸더라고요.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창 21:16 새번역)


그 상황에서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창 21:17 새번역)


하나님은 기도만 들으시는 게 아닙니다. 흘리는 눈물을 드립니다. 말보다도 눈물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과 뜸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울컥울컥 하고 갑자기 슬퍼지는 것을 새벽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유난히 근래에 아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자녀 문제로 오래 고심한 부모님이 있는데 끊어지지 않는 아들의 문제로 또 일이 터진 거에요. 아버지가 굉장히 훌륭한 분이에요. 정말 눈물로 하염없이 흘리면서 아들의 문제로 흘리는 눈물이 잊히지 않고요. 성도님 중에 자녀를 너무 잘 키우셨어요. 여러 가지 잘 갖춘 귀한 자매가 계속 반복되는 남편의 외도. 이혼을 결정하고 이 과정에서 연세 드신 아버지, 어머니가 눈이 짓무르도록 우시는 것 아십니까? 어떤 청년이 지난주에요. 이런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월요일 아버지가 갑자기 간암 진단을 받았는데 약사를 구할 수 없어서 목사님, 안 그래도 기도부탁 많이 할 텐데 나는 안 해야지 하는데, 어머니가 목사님이 기도 능력이 있어. 이 땅은 야곱과 같은 잇냉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지난주 내내 가슴이 먹먹한 시간을 보낸 데요. 29 교회 모두 자립했다. 그것은 숫자와 재정적인 이야기입니다. 29 교회가 얼마나 많은 대가지급을 하고 눈물을 흘려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원하지 않은 일을 만나기도 하고,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소식이 있습니다.


정말 내 마음에 위로가 되는 찬양을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주셨습니다.


주 예수 오셔서 내 슬픔 아셨네
나의 앞길도 내 주 아셨네
나 주를 버리고 떠나갔었네
주님 약속대로 날 붙드셨네! 주 말씀하네
물가로 나오라 내 곁에 서라
네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에 헤맬 때 흘리던 네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이 굴레를 벗어난 분이 많지 않으세요. 어둠을 헤맬 때 흘리는 그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아버지 야곱의 위로하지 마라. 나 죽을 때까지 슬픔을 갖고 가기를 원한다. 아버지의 눈물의 대가지불이 그 아들 요셉을 기어이 꿈꾸는 아들로 만들 수 있다면, 29 교회 많은 진통이 따르죠. 자란 배경이 다르고. 아빠가 갑자기 간암에 걸렸는데, 약국에 약사가를 구해야하는데, 제 기도가 무슨 응답이 있겠습니까? 이혼을 앞두고 가슴 아파하는 딸을 보는 눈물. 어떤 이런저런 아픔과 상황이 있는지 모르지만, 내년에 동사무소 인생이 아니라, 동사무소 교회가 아니라 조롱하는 사람들 조롱을 너무나 멋지게 뒤집어엎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눈물을 위해 죽었노라 한 마디만 기억하시면 될 것 같아요. 눈이 짓무르도록 흘리는 눈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12월 0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결국은 웃게하시는 하나님

결국은 웃게하시는 하나님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9-15)


저는 간혹 그림책을 구입해서 묵상할 때가 있는 데요. 그림책이 갖고있는 최고의 좋은 점이 문장 하나에 액기스를 담습니다. 한 번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보다 보면 좋은 메시지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나는 기다립니다. 그림책인데요. 진짜 글자는 몇 자 나오지 않습니다. 기다리이라는 매개를 해서 한 사람의 일생을 다 그려 넣거든요. 괭장히 저에게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맨 먼저 아기 때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잠들기 전 나에게 와서 뽀뽀해주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사랑을
나는 기다립니다. 영화가 시작되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한 통의 편지를
나는 기다립니다. “좋아요.”라는 그 사람의 말을
나는 기다립니다. 우리 아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곧 태어날 아기와의 만남을
나는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자라기를


이제 아내가 아픕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괜찮습니다.” 라는 의사의 말을
나는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아내가 죽고, 아이들이 장성하여 자랍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다시 봄이 오기를


이런 식으로 글자를 풀어쓰면 몇 줄 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라는 매개로 쭉 살펴보는데 굉장히 저에게 감동이 오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왜 이 그림책으로 묵상을 했느냐면 아브람의 아내 사라에 집중되었거든요. 사라는 인생에서 기다림이 소중한데, 기다림의 기쁭을 놓쳤어요. 낮은 자존감으로 괴로워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 부부를 부를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것인데 100세 때 응답을 받습니다. 긴 세월 기다림. 아브람 부부만큼 뼈져리게 느끼는 사람은 없는것 같습니다. 아드릉ㄹ 주신 지 24년이 되는 상황입니다. 24년 지날 때까지 응답을 못 받는 상황이 얼마나 지칩니까? 동트기 전 새벽이 제일 어둡다. 다가올수록 힘든 것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사라의 무너진 자존감과 초라함과 자기 스스로를 비참하게 생각하는 게 오늘 본문에서 묻어나옵니다. 찾아주시는 데요.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하나님은 자기를 만나주시러 오셨는데 하나님 앞에 나서주시지 않는 사라에요. 12절에서 무너진 사라의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데요. 하나님이 아들을 죽인다고 다시 약속을 주십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웃다 차크는 긍정적인 뜻 기쁨, 부정적으로는 조소, 비웃음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12절에서 사라가 속으로 웃고 있을 때는 불행하게도 후자입니다.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 속았나. 이런 비웃음이 살아가 보여주는 차크입니다. 이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인 곳이 나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사위는 농담으로 듣는 것입니다. 비웃음이 차크입니다. 묘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것 아닙니까? 사라는 왜 하나닝이 친히 상한 마음을 치료해주시려고 비웃음으로 막아버리는 것입니까? 지쳐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동원해봤거든요. 대리모사건. 기다리다가 안 되어서 자기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서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방법을 동원했겠느냐고요. 아들 이스마엘을 낳고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라고 하는데, 수년이 지나서 이것은 너의 아들 아니다 하는데 얼마나 낙심이 되겠느냐고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농담처럼. 저 소리 한 두 번 듣나.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기다리라는 약속을 건강하게 수용하지 못하니 영저긍로 병이 드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없으면 우리를 낮은 자존감으로 몰고 가고, 자기 스스로를 굉장히 비정상저긍로 몰고 가서 영적인 통로가 차단되는 것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이제 응답이 언제 되겠는가. 여성으로서 아드릉ㄹ 낳을 기능이 다 사라졌는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살아가 기다림을 놓쳤기 때문에 모든 즐거움을 상실할 묘사를 하는 정 반대 인물을 알아요. 12월만 되면 이 인물이 생각이 납니다. 시므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 2:25)


기다림에 확신을 하고 주님을 기다렸기에 시므온과 사라 사이에 공통점이 많아요. 죽으라고 기다렸는데 응답이 안 되는 것도 공통점이에요. 둘 다 늙을 때까지 응답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시므온은 지치지 않고 약속을 기다렸고, 사라는 기다림에 실패했고. 결정적인 차이는 시므온이 바람직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비관이 없습니다. 응답도 못 받은 비참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없습니다. 이에 반해 사라는 열등감으로 수용이 안 됩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흥하는 것은 그 안에 상처가 많아서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희망으로 받습니다. 우리가 모두 기다림이라는 공통점. 나아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공통점이라면 시므온이라는 길을 걸어가십니까? 사라의 모습으로 살아가십니까? 늘 부정적이고, 인생에 좋은 게 뭐가 있겠느냐고. 설교는 저렇게 하지만, 나에게는 저런 것을 본 적이 없다. 여러분은 어느 쪽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기다림에 실패하면 인생이 초로 해지고 초라함이 지나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버리는 것이요. 이런 맥락에서 기다림이 인생이고, 기다리다가 지칠 때, 초라해질 때 꼭 해야 할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지금이야말로 약속의 말씀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목적이 뭐냐. 사라를 만나서 무엇을 들려주시기 원하느냐?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9-10)


사라가 이 상황을 알기를. 설교도 똑같해요. 하나님이 한 주 내내 저에게 먼저 들려주시잖아요. 이것은 저에게도 적용되지만, 여러분에게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들려주는 것입니까? 네 안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기다림에 지칠 때는 굉장히 위험할 떄이기에 약속의 말씀을 상기할 때입니다. QT, 묵상에 지쳐있을 때 말씀을 드릴 때입니다. 바로 최근에도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말씀이 반복해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지쳐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만나주셔서 얼마 전에 했던 이야기를 아내 사라에게 전해라. 사라로 하여금 듣게 하신다.


열등감이 많아지면 말씀이 막힐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을 다 아시잖아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10)


가짜뉴스로 유튜브에 퍼 나르고, 바울이 사생활이 어떻더라.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더라가 바울입니다. 이때 내러 비워두면 우울합니다. 내버려두면 인생의 회의가 옵니다. 지난주에 브라보 시니어. 우리교회 65세 이상 어른들이 모이시는 브라보 시니어에 가서 당부하는 게 이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위축이 되는 게 있습니다. 싸우시라고, 방치하지 말라고. 내가 초라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짐에도 불구하고 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라로 하여금 병들게 한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약해지고. 이 베드로 요셉이 보여주는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 5:5)


비즈니스 융자해서 다 쏟았는데 낙심하는 분 계세요? 우울로 들어가요. 나 같은 게 이렇지. 당신이 늘 이래 왔지. 이것 말고 뭘 잘되겠어. 이럴 때 해얗나느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지금이야말로 말씀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요셉처럼 억울하고 분하게, 수치스럽고 궁지에 몰려계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내버려두면 죽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가 말씀을 붙들 때입니다. 요세 너무 잘 나오지 많아요. 읽을 힘이 없으면 틀어놓아도 나오잖아요. 듣든지 읽든지 암송을 하든지. 방치하면 본문의 사라처럼 흘러가는데 시므온처럼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붇잡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을 가지면. 사라는 행복한 결말이 되었지만, 이 과정까지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 나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집중할 때이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아까 10절에서 다시 말씀을 상기시켜주시고, 비웃는 그 사이에 11절이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창 18:11)


하나님의 옳으심을 드러내고, 불리함을 지우는 게 성경이 아니에요. 사라의 말씀이 조금도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묘사하거든요. 결정적인 것.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더라. 아무도 사라를 탓하지 못해요. 비웃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타이틀을 이렇게 잡았잖아요. 내 사람에 집중해봐야 다 맞는 것이거든요.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우울합니다. 내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사라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묘사하고, 14절에서 어떤 돌파구를 주십니까? 네말 다 맞는데,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돌려야 한다고요? 최근에 재미있는 기사를 봤는데 뇌과학이라는 책입니다. 천장이 높아지면 창의력이 높아진다. 아이들이 창의적이려면 집 천장을 높여라. 보통 우리 아파트 천장이 2.3m입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천장높이가 30cm 높아지면 창의력이 2배로 높아집니다.


사람들은 공간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 다릅니다. 천장이 높으면 훨씬 더 높게 생각합니다.


연구 끝에 이것을 알게 되어서 보통 연구소보다 천장 높이를 70cm 높여서 지으니깐 소크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5명이나 배출했습니다. 꼭 천장에 높여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구한 분이 시시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천장이 높아지면 창의력이 높아진다. 아파트는 어떡하겠습니까? 집에만 가두어두지 않고, 하나님의 천장을 보여주세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5)


나는 생리가 끊어졌고, 잘될 수 없는 조건 100가지라도 들겠습니다.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더 나오지 않습니다. 인생이 정체된 것 같고 갇힌 것 같으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이 자신감이 있으니 기록하는 것 아니겠느냐고요. 1만 성도 파송운동 10년 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도 모르고 선포하고. 주변에서 들리는 것은 1만 성도 파송운동 절대 불가능한 100가지. 안티도 많이 생겼고 두려웠죠. 제가 생각해도 안될 것 같으니깐요. 1만 성도 파송운동 완결을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저 때문에 안될 것 같다. 스스로 인기가 있는 줄 알았어요. 나 때문에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잘 안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 덜컥 약속했잖아요. 출석 5천 명 이하로 줄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 사임 약속을 하고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인기가 좋기에. 6개월만에 29 교회 모두 자립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헌신과 봉사가 29 교회에서 일어나고, 9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한주 딸랑해서 되겠나, 출석 통계 평균을 내보니 3,975명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분당우리교회는 겉보기에는 멀쩡한데요. 손볼 대가 많습니다. 봉사자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일학교 부서에 20명씩 부족합니다. 29 교회 모두가 진통입니다. 오늘 남아있는 우리 교회 성도님이나 29 교회 성도님들에게 호소합니다. 괜히 따라갔나, 괜히 나갔나. 사라가 생리가 끊어진 상황을 보지 않고, 천장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방식, 내 생각 절대 안 된다고 선포한 저조차도 안될 것이라는 생각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있었는데 하나님이 하셨거든요. 나머지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놓치면 안되는 게 있습니다. 사라는 어떤 의미에서 실패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조롱하고 비웃은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 결과는 아시잖아요. 창세기 22장에서 약속대로 아들을 낳습니다. 이삭의 뜻이 웃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차크는 기쁨으로 가득한. 아브라과 사라는 이삭, 웃음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의 순간을 마음에 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부에게 엄청난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웃음을 웃음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 이삭이라고 지은 게 아브람이 지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우리는 인생의 18장쯤에 왔습니다. 약속은 받았는데 응답은 보이지 않는. 21장을 소망하며 말씀을 붙들 때입니다. 초라한 내게 집중할 때가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그 말씀이 떠올랐겠느냐고요. 연약한 내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11월


11월 2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시간이 많지 않음을 자각한다면

시간이 많지 않음을 자각한다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7-11)


오래전에 나온 책인데요. 죽기 전에 후회하는 25가지 책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호스피스 전문 의사가 쓴 책입니다. 말기 환자를 섬기면서 1천 명의 환자를 지켜본 의사입니다. 과정을 보면서 마지막 순간 눈을 감으면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내 인생에 후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눈을 감는 분도 계시지만 훨씬 많은 분이 후회와 회한이 있습니다. 이 분이 책을 엮었는데 보니깐 후회하시는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후회하시는데 25가지로 묶어서 책을 냈는데,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가장 많이 나온 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1번입니다.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친절을 베풀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너무 사는데 찌들어서 여행을 하지 못했던것. 후회할 거리가 되고 회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책을 다시 꺼내서 설교 준비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눈을 감을 때 어떤 후회를 할까. 당장 하나님이 불러가신다면 나는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 잠깐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나는 여한이 없어. 후회되는 게 없어 눈을 감을 수 있는지. 마음에 걸리는 어떤 게 있다면 얼마나 복됩니까? 아직 기회가 있는 게. 제일 많이 후회하시는 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늘부터 하면 됩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서 명사를 초청해서 인터뷰하는 프로가 사람들에게 흥미를 가져다주어서 많은 분이 시청하는 데요. 언젠가 종양외과 전문의사가 출연했습니다. 의사분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독특한 게 있는데, 그 병원에는 임종방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임종하는 환자가 많다 보니깐 의사 관점에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임종 방을 만들어서 환자가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인간의 기관 중에서 제일 오래까지 살아남는게 청력입니다. 기능이 멈추어도 청력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합니다. 병원에서 가끔씩 가족들이 환자가 마지막 순간 숨을 거두기 직전, 숨이 끊어질지라도 이런 권면을 합니다. 환자 귀에다 대고 마지막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라고. 이것도 짐작이 가잖아요. 대부분의 마지막 하는 말들이 가장 맺혀있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눈물 어린 고백을 합니다. 진짜 당신을 사랑했다고. 당신을 만나서 너무 행복했다고. 당신이 내게 고마웠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마지막에 말하는 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런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마지막에 사랑을 고백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게 아름답지만 빨리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청력이 살아있다고 해서 크게 귀에다 대고 고백하지만, 귀에다 대고 안 해도 되는 일상에서 고백을 자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평상시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이렇게 평상시에 사랑을 고백하지 못할까?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해보니깐 방심하는 것입니다. 시간 아직 많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나 보니깐 죽을때 후회하는 25가지 책 뒤표지에 나오는 스티브 잡스의 글 하나가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분이 17살에 읽은 글에서 감동하여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하루하루가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다른 길에 서게 될 것이다. 거기서 결론에 말이 이렇습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여러분의 삶에도 죽음이 찾아온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비슷한 글을 어느 책 속에서 봤습니다. 죽음을 명심하라는 선인들의 말은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이렇게 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을 인식하면 살아라. 사실은 이런 좋은 책 사서 읽지 않아도 성경에 이런 권면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도 권면의 말씀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기독교가 갖은 독특성 중에 종말론적인 의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3)


이 순간에도 의식하고 살아야한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한 포인트입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1-2)


도둑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방심하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삶 가운데 우리가 모두 이 부분은 방심하고 있습니다. 방심하다가 그냥 인생의 끝이 후회스럽게 끝나면 안 되기에 도둑처럼 임하게 된다. 우주적인 종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는 일이 있지만, 은행은 번호표대로 추측이라도 되지만, 인간의 종말은 예고가 없습니다.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3년 전에 제 아내가 유방암 발병이 되었다. 그 순간이 평생 잊히지 않을 때인데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집회가 있는데 영적인 존재여서 잊히지 않습니다. 똑같이 전화벨이 울리는데 직감이라는 게 진짜 신기했습니다. 여보 내가 유방암이래요. 제가 두 마음이 강렬하게 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이런 일이 우리 집에도 오네. 목회자는 성도님들의 가슴 아픈 소식을 숨 쉬듯이 듣고 사는 존재라고 하니깐요. 그래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암으로 고통받다. 그러니 하늘이 노랗고 충격이지 않고, 내 차례도 있네. 두 번째로 든 생각이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모든 분이 그렇잖아요. 헤어지는 것은 상상을 안 해봤잖아요. 제 아내가 유방암이래요. 할때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이 우리 사이도 끝이 있구나! 자각이 되었어요. 워낙 초기에 발견이 되어서 항암치료도 받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제 아내가 유방암이 발병한 것이 소중했습니다. 이전에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많이 의식합니다. 예전에는 어디 가자 하면 두통이 있어서 가지 않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가을에 어디 단풍이 좋다고 하는데 그러면 타이레놀 두 알씩 먹고 갑니다. 유한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소중한 깨달음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병장수 100살까지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이 분의 문제가 99살까지가 인생의 끝이 있다고 인식하지 않고 99살에 인생이 유한하라고 하면 1년짜리 인생입니다. 일상의 하루하루가 기쁘고, 가정 안에서 아내와 남편과 관계의 소중함. 제 인생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긴박한 종말 의식을 갖고 살아라 하나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긴박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막살지 않습니다. 저는 외도하는 문제를 갖고 설교시간에 여러 번 권면하잖아요. 외도는 하면 안 되는 일이어서 절제해야 하지만 만에 하나 하나님이 외도해도 괜찮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을 그렇게 분산해서 사는 것이 옳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몰두하고 인생을 집중하면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그렇게 긴장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근신하며 기도로 연결하기를 원하신다. 성도님들, 예배자로 인도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 아내 발병 이후로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로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설교 한편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매번마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뜩 들면 다음 주 또 있는데 그러지는 않습니다. 삶이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긴박한 종말의식을 갖고. 제 아내의 유방암 발병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깨달았는데 여러분이 아직 그런 일이 오지 않았다면 수용하면 됩니다. 아내가 어디 가자고 하면 두통이 하지 말고 가자. 이런 일을 안 겪고 여러분이 하실 수 있다면. 죽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 게 후회가 된다고. 오늘부터 하시면 됩니다. 이런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방심하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긴박한 종말의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가정하고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긴박한 종말의식을 갖은 사람이 갖은 실천사항을 세 가지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1.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기


오늘 본문 8절에 말하는 권면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우리가 열심히 사랑하는 데요. 상대방의 약점이 덮일 때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사랑이 덮일 정도로 허물이 덮일 정도로 사랑하지 않기에 분발해야 합니다. 세 번 역으로 보니깐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리는, 공동번역에서 모든 일에 앞서 뜨겁게 사랑할 지니라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저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마음에 병이 듭니다. 29개 물건을 어디에 기증한다고 가정을 하면 내놓을 때 아까울 것 같습니다. 내놓고 나면 시간 지나면 잊힐 것 같습니다. 1만성도 파송운동은 반대입니다. 모두가 힘들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것을 해드리는 것이니깐요. 6개월 지나서 눈물도 나고 힘이 듭니다. 왜 점점 더 마음에 병이 깊어질까 생각을 하니깐 뼈저리게 아픔이 있습니다. 계실 때 더 만나고 교제하고 기도해드리고 이런일을 못했습니다. 그분이 떠올려지는데 어떤 분은 목사님, 목사님이 제 죽을 때 장례 치러주실 거죠? 이렇게 드옥한 어른을 생각하면. 그분이 가실 날이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거든요. 이것을 자각하고 나니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지만, 제 아내가 발병했던 것과 똑같이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 성도님 한 분 한 분 섬기고 은퇴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까. 저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면 은퇴 이후 정말 고통스러울것 같습니다. 저만의 문제가 아니겠죠. 기회 있을 때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뜨겁게 사랑하세요. 죽을 때 같이 있지.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약점이 덮일 때까지. 철이 드니깐 젊을 때 하지 마라, 해라. 치약은 끝에서부터 짜라. 이런 잔소리를 많이는 안 해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걸핏하면 목사 부인이 그래도 돼? 요즘은 어떤 간섭도 안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게 있는 데요. 인간은 절대로 안 바뀌는 존재입니다. 별로 중요히 지 않은데 갈등하고 싸우고 다투고 정말 안타까운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의 허물이 덮일 때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저긍로 가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는 것이기를 알게되기를 바랍니다. 손잡으시면서 여보 사랑해. 자꾸 하셔야 합니다. 자꾸 표현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긴박한 종말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2. 섬기고 봉사하는 삶 살기


오늘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우리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게 아니라, 분당우리교회 설교 얼마나 좋은지 아시잖아요. 나 같은 담임목사 만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이러면 안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속내 다 이야기하라고 하면 잘 보신 것입니다. 본능은요. 우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게, 부부간에도 얼마나 생색내고 싶은지 살아보면 있더라고요. 나 같은 남편 만나는 게 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가지 표현을 하면서 전달을 하면 아내는 접수를 안 합니다. 화제를 바꾸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이 말씀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대상 중에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증상이 뭐냐. 나는 당신의 종이다. 이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딸린 것을 전파함이라.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가 침체하였다면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많이 있지 않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들어낼 뿐만 아니라, 내 아내에게, 남편에게 종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가정의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 기초 다지기를 해온 데요. 4가지를 해왔습니다. 기초 다지기 첫 번째 말씀 묵상 기초 중의 기초다. 두 번째 기도훈련 세 번째 공동체성의 회복 네 번째가 예배의 회복. 8까지 갔습니다. 지난주에 없애버렸습니다. 딱 하나만 더하고 문 닫기로 했습니다. 내년에도 우리 교회가 강조할 것입니다. 기초 다지기 첫째가 말씀 묵상입니다. 두 번째가 기도훈련입니다. 세 번째가 공동체성. 다락방에 가셔야 합니다.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네 번째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가 섬김. 왜 이것이 중요하나.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섬김, 봉사가 기초 중의 기초에요. 마지막 긴박한 종말의식을 갖은 분이 실천해야 하는 것.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 하는 것. 가정에도 교회에도 직장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제주도에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과 권사님이 하시는 규모가 큰 리조트가 있습니다. 그 리조트는 장로님 권사님이 망하기 직전인지 잘 모르겠지만 망해버린 리조트를 장로님 부부가 매입한 것입니다. 그 리조트를 운영하시는데 놀랐던 게요. 완전히 망한 리조트를 매입했는데 2년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손님이 얼마나 많이 찾고, 2년만에 흑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몇 년 전에 이틀을 묶었는데 답이 나오더라고요. 우선 직원들이 너무 친절합니다. 체크인하면 키 주면서 요렇게 돌아서 301호가 있습니다 가르쳐주잖아요. 여기는 체크인하면 안내했던 분이 따라나서요. 가방 갖고 문까지 안내해주어요. 그 다음 날 아침 조식시간인데요.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손님이 아침 먹으려고 앉아있는 데요. 당근으로 생과일주스를 만드는데 기계도 크고 당근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놀랍게도 장로님 사장님 부부가 새벽에 발 벗고 나서는 것입니다. 한 번도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받으니 또 가고 싶은 것입니다. 권사님에게 질문했어요. 2년 만에 흑자를 어떻게 돌리게 했나요?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는 우리 교회 여전도회했던 봉사 그대로 했는데 껌뻑 넘어가던데요. 세상 사람들은 이런 대접을 받은 게 없잖아요.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것을 교회에서 했던 것을 했더니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 중에 직원들이 부작용이 생겨요. 그 리조트 이름을 알려주세요. 그러려고 설교하는 게 아니고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전심을 다 해서 섬기면 세상에서도 통하는 것이거든요. 오늘 사역박람회입니다. 1년 동안 내년에 섬길 분들을 모집하고 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데요. 사역 박람회 이름을 지어놓고 이번에 후회했습니다. 내년부터 사역 축제, 사역 기쁨 축제로 바꾸기를 원해요. 호객행위로 교사가 필요합니다. 찬양 대가 필요합니다가 아니라 사역 축제는 1년 동안 봉사하신 분들이 주님 안에서 얼마나 기쁨이 넘쳤는지를 나누는 시간이 되게 할 것입니다. 아까 권사님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리조트를 했더니 너무나 많은 부흥이 되었다. 오래전에 들었는데, 특 찬양 하나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찬양인데 오늘 설교를 요약한것 같습니다.
화려하지 않다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우리는 그렇게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에 주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벌였더니 어디서 이런 향내 나는 고급 포도주를 만들었나 감탄하는데, 요한복음 2장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은 포도주 마셔서 즐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주님과 더불어 섬김의 동력을 행할 때 거기게 기쁨이 있는 것이거든요. 한 두 분이 너무 많은 짐을 지지 않도록 1인 1섬 김입니다. 아버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이 없었던 게 아니고, 지금도 흘러오거든요. 이것을 걷어내시고 모든 성도님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11월 2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흔들리지만 넘어지지 않은 비결

흔들리지만 넘어지지 않은 비결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10-22)


외로워서 그랬어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국어 교사이자 상담 선생님이 쓴 책인데요. 아프고 외로운 청소년 현실을 현직 교사가 지켜보면서 마음 아프게 쓴 책입니다. 2011년도에 나온 책인데, 출판사 리뷰 글을 읽다가 참 마음이 아팠던 게요. 당시 고등학교 학생 평균이 35명인데 4명이 우울증약을 먹는다고 합니다. 지금은 70%가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2011년도 이야기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입시로 괴롭히는 것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저자가 청소년 마음을 깊이 이야기하려고 교육 대학원에 진학해서 상담대학원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밤늦게 공부해서 집에 가는데 가르치는 고3 학생 하나가 술에 취한 모습으로 선생님 길을 막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깐 자기 반 아이인데 눈에 눈물이 범벅되어서 비틀거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술에 취했는가? 너무 좋아서 자기 친구에게 대학에 붙었어. 문자를 보낸 것입니다. 문자를 보낸 친구가 짧게 ‘넌 참 좋겠다.’ 답장을 보내고 자살을 했습니다. 비틀거리며 선생님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기의 괴로움을 봐달라는 것 아닙니까?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또 한 권은 흔들리지 않는 마흔은 없다. 책입니다. 우리나라 중년들의 애환을 담은 책입니다. 이 책 프롤로그는 이렇습니다. 중년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이다. 책에서 마음 아픈 글을 발견한 데요. 공황장애. 막 한참 인기를 구사하는 연예인들이 공황장애가 왔다는 글을 볼 수 있어서 공황장애는 연애인 병이다 라고 하는데 40대 50대에 발병률이 높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산다는 것이 너무 소중해서 절대 쓰러질 수 없는 사람이 느끼는 병이 공황장애라고. 죽을 것 같은 공포, 여기서 쓰러질 수 없기에 생기는 병이다.


이것이 공황장애라는 병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하잖아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기를 우울증은 힘든 등산 뒤에 찾아오는 근육통이라는 것입니다. 고단한 인생을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지친 상태. 우울증은 너무 달려서 지쳐서 생긴 병이라는 것입니다. 두 책을 병행해서 읽다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어린 중고등학교 때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어린 나이에 겪는. 중년의 현실에 다루는. 참 인생에 뭔지 모르는 어릴 때부터 고통에 시작되어서 쭉 가는 것입니다. 중년은 중년이라서 힘든 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유사 이래로 편리한 게 없다고 하는데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추수감사절이 실질적인 한 해의 결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저 스스로에게도 이런 말을 합니다. 한 해 동안 애쓰셨습니다. 쉼 없이 달린 사람들이 겪는 게 공황장애고 지쳐서 겪는 게 우울증이라고 하면 수고했습니다.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셔서 지난 시간에 대한 감사를 포함하지만, 이 시간 감사가 넘치는 추수 감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이 경험했던 치유와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삶을 되뇌면서 했던 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임종을 앞두고 중간 결산을 해보세요. 그 누구라서 나는 행복하기만 했습니다는 없습니다. 어린 중학생 붙잡고 요약하면 어떻게 하겠니?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의 지난 삶을 정리하게 하신 한 마디가 굉장한 메시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이 의미 있다고 보는 게요. 오늘 본문은 험악한 세월의 첫 단추입니다. 본문부터 험악한 세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생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불신앙 때문 아닙니까? 이 아들에 대하여 큰 꿈을 갖고 이 땅에 보내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는데 엄마의 불신앙, 야곱은 별명이 꾀돌이 아닙니까? 형의 장자권을 탈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가 이러다가 형에게 살해 위협을 느끼니 야반도주하듯이 생긴 일이 오늘 본문입니다.


야곱은 어떤 의미에서 마마보이입니다. 엄마 차마 폭에 쌓였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집을 쑥 떠나는 사건은 자체로 고통 아닙니까? 오늘 본문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창 28:10-11)


의도적으로 거기서 자야 지가 아니에요. 돌을 베고 누워있는 한 남자를 떠올려보세요. 광야라는 현실도 두려움이지만 야곱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절망적인 밤에 놀라운 은혜로 야곱을 만나주시는 데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지금 야곱 인생에 단절이 일어났습니다. 엄마와의 단절, 두려움 그 자체 아닙니까? 옆을 봐도 막혀있고 앞을 봐도 막혀있고 단절의 상황에서 사다리라는 도구를 계시해주시는 데요. 사다리가 이쪽 끝은 땅에 닿고, 저쪽 끝은 하늘에 닿아있습니다. 야곱은 오랫동안 우리로 치면 교회는 다녔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단절의 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그것을 연결해주는 게 사다리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찬양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62년 예수를 믿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저 찬양입니다. 나 스스로가 밝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게 인간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보입니까?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예배 가운데 지치고 곤하여 넘어진 분이 있다면, 엄청난 사업에 실패하여 지치고 곤한 게 아닙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더라도 시시로 곤하고 넘어집니다. 이 시도 때도 없이 지치고 곤한 삶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게 보이는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와 주시는 데요. 하나님께서 광야에 내던진 야곱에게 참 인상적인 게 약속을 주시기 전에 13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놀랍게 치유하기 전에 당신의 관계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 우리는 순서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먼저 달라는 것. 어렵습니다. 13절, 14절을 같이 합심해서 읽겠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3-14)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반복하시면서 하나님과 관계 회복된 자들에게 주시는 복을 약속하시는 데요. 말씀 속에서 중요한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것이 굉장히 실질적이고요.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도 실질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여기서 몇 가지 짚어드리겠습니다. 제일 먼저 주신 약속. 내가 너와 함께 있어. 홀로 던져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엄마는 떠나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 계시다. 이것보다 실질적인 복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 고독한 광야에서 함께 있다. 너무나 실질적인 말씀입니다. 현실의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내 인생은 어디로 가야 하나. 외삼촌이 나를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이 말씀보다 생생한 현실이 있습니까? 언젠가는 돌아온다. 이 말씀이 얼마나 마음에 든든한 지침이 되었느냐에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 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당우리교회가 초신자가 많은 교회가 되었고, 초신자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른 상태로 와있는데 내년에 하나님이 불을 부어주시길 원합니다. 내년까지 기다릴게 뭐 있습니까? 오늘 불을 부어주시길 원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야곱에게 밤에 임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실질적인 하나님 말씀 앞에서 두 가지 회복합니다.




1. 감격의 회복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제 방식대로 의역해봤습니다.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의역했느냐면 살길이 있네! 해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너지는 거 아니네. 이것이 감격의 회복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이번 추수 감사 주일을 과거에 주신 감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입술에서 감탄, 감격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실 굉장히 묘한 뉘앙스를 가져다주는 느낌이 본문에 있는 데요. 야곱은 눈 감고 있었습니다. 잘 때에요. 꿈을 꾸었잖아요. 야곱이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돌을 베고 누워 잘 때 놀라운 역사와 능력이 나타났거든요. 야곱이 눈을 부릅뜨고 형 꺼도 빼앗고 자기 것도 챙길 때 부작용밖에 없었습니다. 저기 눈 감고 있는 분에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꿈꾸고 있으시죠.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설교도 내가 뭘 해보겠다고, 이번 설교는 대박이 날 거야. 이번 설교 기대해 했던 게 힘 들어가니깐 안되더라고요. 제 아내보고 기대하라고 했는데. 야곱이 눈 감고 있습니다. 무기력합니다. 짐승이 울어대는데 방어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야곱의 인생을 뒤집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야곱에게 임할 때 감격이 회복됩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 28:18)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은 의욕이 회복된 것입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일종의 우울증이에요. 침대에서 눈이 떴는데 일어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은혜를 받고 의욕이 회복되고 마음의 활력이 생기면 일찍 일어납니다. 요새는 병원에도 권하고 해서 잠을 더 자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되어요. 제 심장이 가만히 안 두어요. 골방으로 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묵상하면 의욕이 생겨요. 기끔이 회복되는 게 감탄 회복입니다. 오늘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리고 나면 꺾여있는 내면의 의욕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제 아내는 어떨 때 귀찮을 거에요. 새벽만 되면 밥 줘 너무 엑센트가 들어가서 저분 또 잠을 깨워서 죄송한데요.




2. 의미 부여의 회복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8-19)


루스는 살구나무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이름입니다. 야곱이 너무 은혜가 충만해서 이름을 바꾸었잖아요.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육안으로 살구나무 매우 많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찬양 대가 7시부터 찬양 잘하네. 이런 것밖에 못 보는 인생에서 의미 부여되니깐 살구나무가 지명인 루스가 벧엘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화장실이, 여러분의 샤워하는 공간이 여러분이 만나는 식당 귀퉁이 한 곳이 거기에 의미부여가 되면 그곳이 의미 있는 곳이됩니다. 내가 가는 곳. 내가 만나는 사람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야곱의 삶을 상상해보세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사나운 짐승은 멀리서 울고, 내가 잘 때는 돌을 베고 잤는데 황금이 되었네! 아닙니다. 엄마가 와있습니까? 아닙니다. 상황 달라진 게 없습니다. 미국에서 우울증 같은 게 오고, 나 자신이 비참하고 자살하고 싶고. 시간을 보냈을 때 정신 차리고 보니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성경에는 은혜받으면 방언이 터진다고 하는데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무너질 인간이 아닌데,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돌아가셔서 인생의 바톤이 넘겨졌는데. 오늘 성령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의미부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겪는 무엇 하나라도 그냥 일어나는 것 없습니다. 그곳에서 의욕이 일어나고.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0-22)


나는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단절된 내 모든 것을 연결해주셨다. 제가 20 몇 년전에 받은 편지 한 통 보관합니다. 이번 한 주 내내 이 편지가 저를 눈물짓게 하고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할 때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보낸 편지입니다.


한참 사춘기 무렵일 때 밤마다 눈물로 흥건히 잠들곤 했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 말 못할 상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에 폭력 가정이었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이유 없이 엄마를 사정없이 때리고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45일. 엄마가 큰 언니를 임신한 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산과 이혼은 엄마의 가치관에 벗어나는 행위였습니다. 매일밤 아버지의 바지에 매달려서 엄마를 방언했습니다. 결국, 유방암에 걸리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쪽 가슴을 절단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악몽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34년 조심해야 하는 충고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그대로였습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부위를 주먹으로 치는 것입니다. 잊히지 않는 끔찍한 장면. 아버지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엌에서 식칼을 빼 들고 움켜쥐고. 엄마를 생각해서 절대로 죽을 수 없었습니다. 유치부부터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던 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피나는 수고에 불구하고 98년 부도를 맞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도저히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철저하게 물질을 빼앗았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어머니의 말대로. 신실한 기독교도였기에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지만, 불안한 과거보다 변화한 아버지를 보면서 한없이 감사합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요즘은 학교를 퇴직하고 건물 관리인을 합니다. 어머니는 호떡을 팝니다. 더 이를 악물고 공부하려고 합니다. 요즘 두 언니 입학을 앞두고 입학금 때문에 잠을 뒤척입니다. 3달 월세가 밀렸지만. 담대하게 주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제까지 고난과 시험을 통해 저는 하나님을 만났고 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시험을 통해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합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 상황이 달라지고 모든 것을 갖추어서 감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신 것.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 아닙니까? 이 분도 고맙고, 저 일도 고마운 많은 일이 있지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는 감사함.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날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11월 1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마음의 눈 밝히기

마음의 눈 밝히기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 6:8-17)


우리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좀 더 잘 보려고 하기 위해서이다. 동의가 되더라고요. 잘 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참 많지 않습니까? 약한 시력을 교정하려고 안경을 만들었고, 늘 감사한 게 안경입니다. 안경이 없다면 40대 중반, 20년 전에 은퇴했을 것입니다. 글자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말씀이 보입니까? 세 종류의 안경이 있습니다. 설교할 때 안경, 글 볼 때 돋보기안경, 또 하나는 제세한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데 말했습니다. 가방에 안경을 두 개 들고 다니는데 다른 거 빠트리면 불편하고 마네 한다면, 안경이 없으면 집에 가서 다시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더 멀리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망원경을 만들었고요. 그런가 하면 세밀하게 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겉으로 보려는 것을 보려고 x-ray를 만들었고요. CT 촬영, 우리 몸의 정밀한 부분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최근에 본 실력보다 안목이 다에서 열거하는데,


덕분에 인류는 항해시에 지동설을 입증하였으며, 우주개발을 계속하고, 박테리아를 발견하고, 의료분야를 발전시켜 생명 연장에 기여하고 있다. 좀 더 잘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인류 발전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세삼 와 닿는 내용이더라고요. 육신의 눈으로 자세히 보려고 많은 도구를 사용하지만, 이런 것으로 보완할 수 없는 것이 안목을 키우는 것입니다. 영적인 안목.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 안목이라고 하더라고요. 돋보기안경으로 발견되지 않더라고요. 옷 하나를 사러 가서 옷을 잘 고르는 안목이 있어야 비싸지 않은 싼 값에 너무나 좋은 옷을 고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안목이 없으면 엄청나게 비싼 옷, 하나도 태 나지 않는 옷을 사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결혼을 잘 하는 것 아닙니까? 사업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렇더라고요. 사업도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어야 사업을 할 수 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모든 성도님이 다 보는 것만 본다면 무슨 말을 전하겠느냐고요. 아무리 노력해서 성도님들이 볼 수 없는 부분을 봐야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안목이 없어서 망한 인물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 아닙니까? 통 큰 양보를 하지 않습니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9-10)


많은 젊은이가 결혼할 때 롯처럼 판단해서 후회를 참 많이 하는 것이에요. 저처럼 결혼이 늦어지는 것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더 예쁘나, 누가 더 돈 잘 쓰나. 친구들에게 과시하고 이래가지고 결혼해서 얼마나 고생 많이 하는 이야기가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안목이 없으면, 안목 있는 사람이 골라주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최고예요. 너 애하고 애하고 해라. 진짜 자신 있는데 아무도 안 와요. 좀 오세요. 골라줄께요. 그런데 오는 사람을 모르기에 골라주기 어려운 면이 있네요. 안목이 없으면 엄마·아빠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얼굴이 피는 분은 엄마 아빠에요. 인생의 모든 결정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데이트 할 때는 비싼 것 사준다고 헬렐레하는 시간이 아니라 섬세하가 이 남자, 여자가 감춘 것을 보는. 데이트 할 때는 초긴장 상태로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이런 면에서 모든 부분의 안목이 필요한데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녀들 앞에서 기도할 때 안목을 달라고. 분당우리교회 은퇴하는 그 시간까지 지혜를 구합니다. 아버지 저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주님, 저에게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길 바랍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목회하면 얼마나 성도님들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겠습니까? 윌리암 시어드라는 인물이 한 주간 내내 영향을 미쳤습니다. 1687년 미국 국무부장관에 있을 때 러시아가 알래스카 매각을 성사시킨 인물입니다. 요세 러시아가 알래스카 다시 돌려달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당시 알래스카 매입시 들어간 비용이 720만 달러입니다. 알레스카 땅 1 헥타르당 5센트였다고 합니다. 당시 거져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론이 반대하고 쓸데없는 땅을 왜 사느냐. 반대가 엄청 많았다고 합니다. 언론들이 비아냥하면서 이런 기사를 썼대요. ‘우리에게 이토록 거대한 얼음박스가 필요하냐’. ‘다 빨아먹은 오렌지를 매입했다.’ 모두 반대했다고 합니다. 1867년도이니깐 얼마나 쓰임 세가 없겠습니까? 지금은 다 아시잖아요. 알레스카를 매입하고 이후 금광이 발견되고 석유, 석탄, 천연가스, 엄청난 지하자원이 미국에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제 지정학적으로 옛날 소련하고 대치할 때 알래스카라는 땅이 얼마나 적들을 위협하기 좋은, 군사적 경쟁을 벌일 때 알래스카에 미사일을 배치해서 턱밑에서 러시아를 위협하는. 당시 반대할 때 시워드 장관이 의회에서 설득할때 너무 감동이었습니다. ‘저는 눈 덮인 알레스카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를 위하여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한주 묵상하면서 너무 감동인 것입니다. 목회자 중에도, 많은 목사님들이 제가 진짜 금식하며 기도해야합니다. 눈에 보이는것만 보고 따라서 정치하는 지도자들을 바라보며 사는 국민들이나 성도님들은 참 불쌍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울때도 이런 안목으로 자녀를 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진짜 절박하게 기도해야합니다. 영안을 열어주세요. 안목을 열어주세요. 새벽에 마음에 절박한 소원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전쟁합니다. 기습공격을 단행하는데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습공격을 하면 번번히 이스라엘 군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알아봤더니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왕하 6:11-12)


이스라엘의 군사력 때문에, 이스라엘 정보력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에 있을 때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보면서, 잘 준비된 한 사람의 영향력을 보면서 지도자의 영향력은 말로다 못하는 것입니다. 기습공격을 단행해도, 성공할 수 없는 아람 왕의 분노가 감정 이입이 되는 것입니다. 잡아오라는 특명이 내려졌습니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왕하 6:14)


엄청난 군사들을 동원한 데요. 제가 주목하는 안목이 없는, 영안이 닫힌 두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하나는 시리아 왕 아닙니까? 이 사람이 갖고있는 초라함이 무엇이에요?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엘리사를 잡아서 되는 게 아닌데. 시리아 왕의 모습도 굉장히 초라하고요. 또 초라한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왕하 6:15)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큰일 났다. 우리가 교회 아무리 오래 다녀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일상이 탄식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큰일 났다. 평생을 이렇게 살 것인가요?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종과 같은 삶을 회피하고 싶다면 본문에서 엘리사가 너무나 절망하는 젊은 종에게 던지는 한마디 들어보세요.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 6:16)


한 사람은 절망해서 탄식하는데, 또 한 사람은 마음에 여유를 갖는 게 무엇입니까? 인생은 어디까지 보느냐입니다. 청년 집회 가서 자주 이야기하는 게 시편 23편이에요. 목자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위대한 왕으로 가느냐. 다른 사람은 목자로 시작해서 목자로 끝났는가. 그 답을 시편 23편 1절에서 찾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다윗은 푸른 초장 넘어서 하나님을 본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영적 수업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3)


양들을 데리고 가서 푸른 풀밭에 꼴을 뜯게 하는 것은 다윗 자신이에요. 자기 직장 아닙니까? 자기 직장에서 권태가 없느냐? 다윗은 안목이 있었습니다. 푸른 초장 넘어서 보는 능력이 있었기에, 양 먹이는 밀. 주 5일 40시간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양 풀이나 뜯고 지루해 죽겠다가 아니라 다이내믹 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듯이 내 인생을 견인한다는 것을 묵도하니깐 얼마나 다이내믹 하겠느냐고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때때로 양을 쳐다보면 양이 죽기도 하고 골짜기에 빠지다가도, 1주일에 한 시간 백 년을 예수 믿어보세요. 신앙에 성장이 있느냐. 이게 안목을 키우는 길입니다. 분당우리교회 지난주 처음 등록한 성도님들 포함해서 일상 모든 순간이 권태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호기심 천국입니다. 모든 게 즐거워요. 2주 전에 재신임 해준 것 큰절을 하고 싶었는데 참았습니다. 주님 나라 가는 순간까지 저와 여러분 함께 꿈꾸면서 양을 키우는 정도가 아니라 푸른 초장 넘어서 보는 영안의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구해야 할 두 가지.




1. 영적으로 ‘좀 더 잘 보려고’ 노력하기


교회만 다녀서 안 됩니다. 예수님 만나고 나 영안을 열었어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7-18)


바울은 기도문을 이미 예수 잘 믿고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은 아담의 범죄 이후 영적인 안목, 어두워진 영적인 눈을 밝히는 것입니다. 교회 아무리 다녀도 이 기도 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내버려두면 우리의 영안이 점점 어두워질 수 있다는 것을 에베소 1장에서 기도의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나 예수 믿는데, 영안을 떴는데. 눈이 점점 어두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7-18)


우리가 영적으로 몸부림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교회 안에서 눈이 어두워진 분이 너무 많으세요. 장로님들 중에 허망하여 눈이 어두워진 분이 한둘이 아니고, 목사라 하더라도 저도 그럴까 봐. 내버려두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방치하고 있으시냐고요. 최근에 남편을 계곡에서 살해해서. 한 편으로 이렇게 악할 수 있나.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도 인간. 세상이 이런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함부로 대하고, 돈이나 뜯으려고 하고. 저 같으면 이혼은 못 하고. 각방 쓰고 안 마주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여자 남편을 보니깐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남편을 보는 눈이 없는 것 아닙니까? 여자는 귀한 남편의 값어치를 못해서 계속에서 살해해서 무기징역을 받습니까?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요일 2:16 공동번역)


그저 월급 얼마나 받을까 생각이나 하고, 그러면 영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반성할게요. 그렇게 사시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얼마나 경고를 합니까? 여자와같이 악랄하게 나쁜 자리에 가는 사람은 없지만, 미련한 마음에, 영안이 어두워져서 안목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면 교회가 빛과 소금은커녕 맛을 잃으면 버림받는 일이 아닙니까? 아내로서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영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2. 자녀들이 영적으로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돕기


이렇게 기도하였다. "야훼여, 이 시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야훼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불말을 탄 기마부대와 불병거부대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온 산에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왕하 6:17)


17절 말씀이 자녀 키우는 저와 부모들이 절박하게 읽어야 할 말씀이에요.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우리나라는 청년들에게 정말 나쁜 나라인 거 아시잖아요. 눈 뜨려는 것 감게 만드는 게 교육 아닙니까?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저 점수 몇 점 받아오라고 닦달하기 전에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다 아시죠. 저 지방대학 나왔습니다. 저 영어 못하는 거. 목사님 지루합니다. 이제 그 정도만 하세요. 이것 말고 하는 게 없는 것 어떡합니까? 목회하는데 아무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저희 어머니께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 어머니 소원이 목사 되는데요. 98세. 지금도 침대에서 기도하겠습니다. 시시한 목사 되지 않게 해달라고. 오늘 본문으로 빚대어 말하면, 눈을 열어 목회하게 하소서. 출가시킨 아들딸 어머니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 딸. 그들의 배우자. 영안을 열게 하여주소서. 지난주에 박위 형제. 저녁 5시에 청년들을 위해서 특강을 했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오고 유튜브로 많은 사람이 참여한 데요. 이 분이 유명한 의류회사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친구들에게 축하파티를 하면서 폭탄주를 만들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추락해서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다. 제가 설교시간에 원래 술을 안마셨는데 그날 폭탄주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술을 엄청 좋아했데요. 저는 술과 폭탄주를 포기할 수 없으니 회색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겠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찌릿 봐서 근거 없는 말을 설교했냐고 했습니다. 정정할게요 술을 좋아했습니다.


MRI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고 직후 의식이 없어 보는데 MRI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이거 왜 찍는지 아느냐. 나중에 우리 아들 박위가 간증할 때 증거 자료로 써야 한다. 이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어머니가 보여주는 놀라운 안목 아닙니까? 아들은 사고를 당해서 정신마비 상태인데, 일어날 거야.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거야. 하나님이 얼마나 너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하는지 보여줄 때. 여러분 아들, 여러분 딸 영안을 뜨이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열려진 영안으로 자녀들을 양육할 때 건물과 건물 사이로 추락할 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 빠질 때 회복의 길로 가게 되줄을 믿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구해야 한다.


거짓 바데미오 이야기를 드렸잖아요. 천국 가면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시각장애인 거지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막 10:47-48)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였다.(막 10:51)


우리 아들, 우리 딸 이태원 사고 이후 많은 전문가가 논의하고 대책을 세우지만, 한계가 있잖아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꿈을 갖고 다음 세대로 나갈 수 있겠느냐고요. 거짓 바디메오처럼 절박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둔한 상태로 자녀 교육할 수 없습니다. 영안을 뜨기를 원합니다. 먼저 부모된 우리를 열어주기를 원합니다. 우리 아들 딸, 혼미한 자녀들에게 잘 안내하기를 원합니다. 너무나 마음이 뭉클한 성경 구절 하나를 본문에서 발견하는 데요. 본문 1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 6:15-16)


음주 운전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 추락해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을 두고, MRI 사진을 보고 증거를 남겨야지 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남긴 것.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마라. 너 안 끝난다. 회복된다면, 드림 센터 사회 환원 꿈꿉니다. 절망한 많은 젊은이. 눈물을 닦아주기를 원합니다. 이 한마디가 하루 온종일 울림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마음을 갖고 시선이라는 찬양인데요.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님을 보기 시작할 때


인간이 잘 보기를 원하는 갈망이 얼마나 놀라운 인류 발전을 가져왔다면, 안목을 회복하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11월 0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고통스런 한계에 갇혀 있을 때

고통스런 한계에 갇혀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예전에 저희세대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폴레옹이 했던 말,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괭장한 명언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책상에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붙여놓고 공부하기도 하고요. 여러 선생님들에게 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신념 때문이었다. 너희들도 불가능이란 없다는 마음을 갖고 도전해라. 이런 선생님들의 권면이 여러번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청소년들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이 엄청난 명언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보니 꼭 그럴까 쾌스천 마크가 드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 말씀처럼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생각을 갖었기에 이룬게 있지만, 반대로 내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해야하는데 사전에 없기에 나중에 그가 웰림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에 패해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서 쓸쓸히 죽어갔던 역사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멈추어야할때 멈추지 못하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데. 제가 생각하는데,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은 패기를 갖을때 필요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우리 스스로 한계를 인식하는게 아름다운것 같습니다. 내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히 낮아지는 삶을 통해서 내게도 불가능이란 있다. 내가 다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인정하는게 아름다움이지 않을깨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푸스가 주장하는 한계상황이라는 철학 용어를 종종 떠올리고 자료를 찾고 묵상도 해봅니다. 지난주에 참 많이 묵상했습니다. 철학용어로 한계상황은 무슨 뜻인가하면 우리 인간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데요. 철학자 야스푸스가 인간이 갖은 대표적 한계상황으로 몇 가지를 들었는데 그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게 죽음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달나라까지 다가와도 죽음은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오는 인간의 한계상황입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로 야스푸스가 주장하는 것은 고독이라는 것입니다. 고독은 극복할 수 없다. 겪어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결혼을 늦게 했거든요. 결혼이 늦어지니깐 30대, 그때는 20대 중 후반에 할때니깐, 30대가 되니 너무 외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때를 쓰고 협박하고 장가좀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기도가 응답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참 좋은 자매를 만나서 결혼하니 깯알은게 있는게, 결혼하니 상당부분 외로운게 해결된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나 긍국적인 고독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쓸쓸해지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한계상황이라고 설명하고, 또 한가지 한계상황이 있는데 사람과 관계에서 오는 갈등. 이것이 한계상황이다. 이게 뼈져리게 와닿는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관계가 회복이 되지 않는것을 많이 경험하거든요. 야스푸스가 주장하는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지 마라. 그래서 요즘은 마음이 편해요. 노력해도 상처를 주었을때 타격이 컷는데, 요즘은 수용합니다. 더이상 안되는 것은 어떻게 하겠나. 달래는것이 요즘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더 설명하면 인간이 갖은 죄쵝감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데. 죄책감의 문제가 해결되었어. 그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가 갖은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계 상황은 우리가 어떻게 노력을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기에 한계 상황이 절망하게 하고, 우리를 비참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한계상황입니다. 자살충동을 느끼고. 전부가 다 한계상황에 느끼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계상황을 놓고 묵상을 많이하거든요. 한계상황을 뭐하러 묵상하나. 이런 치명적인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한계 상황이 갖은 순 기능이 있습니다. 야스푸스가 인간이 한계상황을 받아드림으로서 자기 자아가 자각하고 참된 실존을 회복한다. 철학자니깐 어렵게 말했지만 신학용어로 쉽게 순기능을 설명드릴께요. 인간이 갖은 한계 상황이 갖은 순기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계를 인식해야 하나님을 찾아요. 마음이 무너질때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을 인시갛게 됩니다. 이것이 순 기능입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 그것은 철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불가능이 없습니까? 철저하게 한계상황을 인식하고 연약함으로 하나님을 찾기에 한계상황은 너무나 소중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나 아닙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데 요나서 1장을 보면 대놓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요나가 2장에 가면 절박하게 찾습니다. 요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한계 상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니깐 하나님을 찾는데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오늘 설명으로 풀어 의역하면, 요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한계 상황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계 상황입니다. 요나서를 묵상하다가 한계 상황과 관련해서 중요한 말씀을 하나 자각을 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욘 2:7 새번역)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한계 상황 아닙니까? 한계상황에 봉착해서 낙심하는 너무 많은 분들의 기도제목을 알거든요. 가정이 깨져서 이혼을 경험하고, 자녀가 문 밖을 나오지 않아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눈물 없이 사연을 들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알거든요. 오늘 본문도 딱 그 상황입니다. 나라는 망했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가고 싶다. 악용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돌아간다. 거짓 희망을 막 넣어주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을 확 그으시잖아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앞에서 말씀드렸던 이런 저런 한계상황에서 목사님,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가슴아프게 죽고 싶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가슴 아픈 사연이 많이 들려집니다. 아제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의 절망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한계 상황을 철저하게 인식하지만, 한계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연결해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말씀 가운데 죽고 싶을 정도로 낙심과 절망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연약함으로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대안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고통스러운 한계에 갖히게 될때 반드시 회복해야할 몇 가지가 있다는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질서 회복 차원에서의) 말씀의 회복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 말씀 선포로 말미암아 내면의 질서 회복을 원하시는 차원에서의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여기에 나오는 혼돈이 카오스에요. 혼란스러운 상태. 애들이 방을 너무 안치워서 쓰레기고 뭐고 뒤죽박죽하면 참으로 카오스로세 하면서 청소하잖아요. 철학을 하는 분이 이렇게 말하겠죠. 엉망진창, 질서가 없는 상태가 카오스에요. 카오스 상태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하잖아요. 사전을 찾아보니 굉장히 의미있는 설명을 합니다.


코스모스(명사)(특히 질서있는 시스템으로서의 우주) 이것이 코스모스래요. 그냥 우주가 아니라 질서있는 시스템으로서의 우주에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해가 뜨고를 질서있는 시스템으로서의 우주래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 1: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계 상황으로 나는 죽어버려야겠다. 나는 자살밖에 남지 않았다 상태를 코스모스로 바꾼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하지만, 전철 안에서. 부장님께 엄청 깨지고, 너까지게 필요 없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카오스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을 코스모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터치가 이루어지는 인생은 정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계 상황으로 마음이 많이 무너진 분들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질서 회복 차원에서 말씀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하나씩 풀어나면 되는거에요. 하나씩 정리해 나갈 수 있는 힘




2. (하나님과 소통의 도구인) 기도의 회복


기도는 소통하는 것입니다. 어떤 소통이 본문에서 이루어집니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 29:12)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의도하심, 하나님의 생각하심,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되는 거에요. 희망이 없다. 끝이다 생각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설명을 듣는게 기도에요. 안하시기 때문에 참말인게 하는 표정을 짓는분이 세 분 있으시는데요. 맨날 문질렀는데 왜 지니는 안나오는거야하니 재미가 없죠. 기도를 하나님의 심정을 소통하는 차원에서 기도를 해보면 진짜 재미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눈 아픈데 드라마 보느라. 오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혜아려간다면.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고요? 요나, 한계 상황에 직면할때.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히스기야 왕의 한계상황이 얼마나 축복이겠냐고요.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왕하 20:1)


이게 제가 계속 설명하는 한계상황이에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암이 찾아왔어요. 사업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내 힘으로 막아지던가요? 그때 해야하는 것은 죽어버리자가 아니라, 히스기야에 배워야하는 2절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왕하 20:2)


한계상황에는 도와줄 인간이 없습니다. 죽을병을 누가 도와줄 수 있냐고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계 상황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계상황을 인식하는 것만큼 지혜로운게 없습니다. 진시황, 나 안죽을 수 있어 이것이 그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낯을 벽을 향하여 바라보신분 있으세요? 많지 않아요. 여전히 인생은 모르는 것입니다. 애들 옛날에 슈퍼맨 영화만 나오면 애들이 몇명 죽었어요. 보자기 둘러싸고 3층에서 뛰어내려서. 보자기 모으면, 돈 좀 모으면 슈퍼맨이 되는것 아니거든요. 히스기야에게 배워야해요. 때로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경우에 낯을 벽을 향해서 돌려야합니다. 제 아내에게 저 대신 죽을래 하면 조금 고민하다가 그러지 할것 같아요. 그런데 제 고뇌는 해결하지 못해요. 헌신하는 배우자가 있지만 때때로 우리는 낯을 벽을 향해야해요. 이게 안되면 나폴레옹처럼 인생이 되게 비참해집니다. 하루라도 빨리 깨닫는게. 그래서 저는 한계 상황이 갖는 역기능에 대해서 기도가 갖는 순 기능을 강조하는 구절을 아는데요.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5-7)


기도는 심정이 통하는 거에요. 기도할때 하나님이 진짜 내 편이시구나. 많이 누리시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으로 인한) 희망의 회복


하나님으로 부터 인한 희망의 회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요 근래에 우울한 소식이 들려서 모든 국민이 집단으로 우울증에 걸릴만큼 마음이 힘들었는데요. 이런 우리들에게 선물처럼 기쁜 소식이 전해졌지 않습니까? 지난 10월 29일 광산에서 채굴작업하면 과정에서 갱도가 무너져서 작업하던 두 사람이 거기에 갖혔는데 열흘이 지난 상황 아닙니까? 열흘이 보통 기간입니까? 폐쇄된 갱도 안에서. 이 분들이 무려 221시간만에 걸어서 나왔습니다. 너무 기뻣습니다. 내 형제일처럼 기쁘더라고요. 62세. 청년 나이처럼 체력이 강할때가 아닙니다. 제가 어느 기사를 보나보니깐 오늘 설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살아나게되는 조건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갱도안의 물입니다. 놀라운게 두 번째 계획성있는 섭취인데 믹스커피가 있었데요. 반대로 이거 먹으면 진짜 살찌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을게 없으니깐 밥처럼 나누어 먹으면서 버텼다. 반대로 믹스커피 100% 살로 가는거야. 엄청나게 고 칼로리인것 같아요. 마지막 세 번째가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분석했더라고요. 기사를 보니깐 1982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네요. 강원도 태백 탄광이 매몰되어서 광부 4명이 갖혔는데요. 똑같은 분석이 나왔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서로서로 갱목 껍질로 버텼는데 결정적으로 살 수 있었던 원인이 살 수 있다는 생존의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 청년 주일 연장해서 강사 한명을 초대합니다. 박위 형제가 위라클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왜 미라클이냐. 박위의 이름 위와 미라클을 합쳤습니다. 자라라는 세계적인 패션 회사가 있습니다. 거북이보다 더 유명하다고, 1부때는 아재 개그가 통하거든요. 3부때 하면 큰일납니다. 청년 애들이 나가버려요. 자라 패션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가 정규직으로 들어갑니다. 친구들이 파티를 열여서, 폭탄주를 만들어줍니다. 안마시는 사람이 마셔서 취하고, 추락사고가 일어나서 병원에서 전신 마비 판정을 받습니다. 전신마비인데 자라고 거북이고 어떻게 다녀요. 오늘 설교 포인트로 말하면 한계 상황을 맞은 것입니다. 끝이에요. 그런데 눈에 뜨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에요. 하나님 원망 안하고 내가 만든 일이야. 현실을 수용하는 거에요. 나 못받아들이겠어. 죽어버릴꺼야가 아니라 수용한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살기를 선택합니다. 표현이 너무 멋지잖아요. 하루아침에 멈춘 절망적인 상황에도 살기를 선택했기때문에 사고 당일날 묘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는 더 내려갈 곳이 없었기에 편했다.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 간증을 유튜브에서 들어보세요.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겠냐고요. 얼마나 하나님과 소통했겠냐고요. 그래서 그에게 주신 선물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얼마나 이 청년이 밝은지,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면서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훨씬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아요. 어떤 자매가 이 청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침대에서 휠체어로 갈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휠체어를 차에 분해해서 실을 수 있을정도로 회복이되는데요. 청년의 위라클이라는 사이트에서 회복이 됩니다. 어떤 자매가 교통사고로 걷지 못할것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좌절, 절망 한계 상황에서 박위 형제를 만나고 다 고쳐진 것입니다. 내 인생은 박위 형제를 만나기 전과 후로 구분된다. 여러분 이런 인생으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게 한계상황이 박위형제에게 준 선물이에요. 오늘 5시가 옵니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는 하는데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힘들고 지쳐 낙막하고 넘어져 일어날힘 전혀 없을때. 한계 상황이 왔어요.


조용히 다가와 손 잡아주시며 나를 잡아주시네.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차분하게 다시 들어보시고 저와 함께 같이 나폴레옹처럼 불가능이란 없다는 철 없는 소리 하지마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것도 도움이 되지만, 얼굴을 벽으로 돌려야합니다. 하나님만 해결할 수 있는 한계상황.








10월


10월 3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심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최근에 인터넷 강의를 하나 들었는데요. 제목이 뭘 해도 행복한 사람과 불만인 사람의 말버릇이라고 되어있었습니다. 강의에 대한 부연설명 글을 읽었더니 뭘 해도 긍정적이고 행복한 사람이 있지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 에너지를 퍼트리는 사람들. 반면에 뭘 해도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말을 자주 쓸까요?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가까우신가요? 뭘 해도 행복한 사람과 뭘 해도 불만인 사람. 흥미로웠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니깐 뭘 해도 행복한 사람에게는 독특한 말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을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 잘하는 것은, 방법이 있을 거야. 예상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을 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은 지금은 힘들어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을 거야. 코로나 19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코로나 19 때문에 유익한 일이 있을 거야. 그런가 하면 이런 말을 또 자주합니다. ‘이만하기 다행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일을 만나더라도 안 죽었으니 다행이지. 저도 어떤 경우에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애를 씁니다. 제가 차를 몰고 가다가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타이어가 펑크가 나거나, 이상한 사람이 저를 괴롭히는 일이 있을 때 혼자 독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고만 나지 않으면 어떤 일이라도 괜찮아. 사고만 나지 않으면 다 괜찮아. 혼자서 독백을 할까요? 뭘 해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런가 하면 반대로 뭘해도 불평불만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는 데요. 제 눈에 띄었던 것, 해석의 왜곡 성을 가졌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왜곡해서 해석하는 특징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해주어도 해석의 왜곡 성으로 어김없이 무슨 의도로 잘해주는 거야. 무엇을 얻으려고 그래?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겠느냐고요. 강사님이 설명하기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불신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다. 아무도 믿지 마. 오늘 우리에게 이런 불신에 대한 신념이 없습니까?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강의가 생각났던 것은 본문의 상황이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것. 이 점에서 강의 생각이 났던 것은 바로 본문의 상황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강의 생각이 나게 만드는 부분이었습니다. 남 유다 백성이 나라가 망해버렸잖아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상태입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포로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 아닙니까? 빨리빨리 해방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모든 포로가 가진 희망 사항인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가짜 목사나 거짓 선지자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전하는 것. 가짜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짓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니야인데요.


느부갓네살 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 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렘 28:11)


포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을 듣기 원해 하는 것. 가짜 선지자에게요. 우리가 아는 신실했던 선지자 예레미아가 반박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렘 28:15)


그래서 이제 본문이 29장이고, 바로 앞 28장에서 논쟁이 벌어집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누구 말을 믿고 싶습니까? 당연히 하냐냐 말을 믿고 싶죠. 예레미야 선지자는 엄청나게 핍박을 받은 선지자로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있었겠느냐고요. 그런데요, 이런 논쟁이 있고 난 다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70년 뒤에 풀려난다는 백성들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말씀인데 하나님은 여기에 더 덧붙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니아의 예언대로 성취시켜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70년 묶어두면서 무슨 희망이냐고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부감 느끼는 말씀인데, 왜 심각하냐면 예수 잘 믿는 우리에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전혀 수용하기 어렵고,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매번 목사님 설교에서는 평안을 주기를 원한다 하니 갈등이 일어나는 거라고요.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일해서 갈등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사는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대안 몇 가지를 오늘 나누려고 합니다.




1. (자기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아멘 하고 받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받는 것입니다. 왜 중요하냐면, 우리 인간의 머리로 납득하면서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릅니다. 수학은 사회학과 다르게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와 이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의 가장 기초는 구구단 아닙니까? 7 * 7 = 49 논리적으로 복잡하게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고, 창조자 하나님과 충돌해서 좋을게 뭐가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긍정적인 수용이 필요한데, 그러면 반발이 생기잖아요. 반발하는 분이 있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답을 이사야 55:8-9에서 찾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전재에요. 만약 하나님의 생각 수준이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면 재앙 아닙니까? 어 하나님은 내 생각과 너무 똑같해. 재앙이에요. 사춘기 애가 혼미한 사춘기 생각하고, 아버지 생각하고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다 보니깐 신앙의 성장이 없어요. 믿음이 없는 분들은 하나님 왜 저렇게 일한데. 이해가 안 돼.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만이고 아니면 그만이에요. 하나님의 생각을 끌어내리는데 여기서 어떻게 놀라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겠느냐고요. 사춘기 애들이 혼미할 때는 아버지와 사춘기 애의 생각이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 생각은 나랑 똑같해. 어떡하느냐 애는? 애 아버지 생각이 사춘기처럼 미숙하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의 사춘기를 되돌아보세요. 부모님과 갈등이 심하면 심할수록 훌륭한 집안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왜 행복을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일단은 수용하자. 성경에는 이래서 성공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요셉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승복이 되겠습니까? 애굽에 팔려가는 것도 그런데, 이렇게 순결한 요셉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한계가 있지 성폭행 미수범이 무엇입니까? 이 내용을 기록한 창세기 39장에 보면 성경에 반복하는 단어가 있어요. 요셉이 형통하다. 감옥 가있는 그것조차 도 형통하다. 요셉이 수용이 되겠느냐고요. 나중에 요셉이 입지적인 인물이 되잖아요. 형제들이 복수할까 두려워하여 했던 말을 보면 놀라운 답을 보거든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악한 형제들에 의해서 어긋난 인생이 되었지만, 그 상황에서 요셉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하며 나아갔기에 놀라운 결과가 일어난 것 아닙니까?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한 사람 중 하나 아닙니까? 그가 어떻게 동의합니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하나님이 포로로 보낸 것에 동의가 안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느냐고요. 그랬더니 1단계, 구구단 외우듯이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선한 분입니다. 그렇게 받으니깐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십니까? 여러 번 설명한 내용인데요.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9)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서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주셨다(단 1:9 새번역)


1만 성도 파송운동 마지막 파송예배 드리면서 했던 축복의 말씀 아십니까? 29 교회 모두 주변 사람에게, 수많은 성도들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는 그런 목사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여러분 그러고 싶으세요? 여러분에게 긍정적이고, 여러분에게 호의와 동정을 베푸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으세요? 그것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2. 몰입: 생각하고 집중하고 몰입하기


두 번째 질문은 최근에 읽은 책 제목에서 그대로 따왔습니다. 제가 몰입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부제가 생각하고 집중하고 몰입하기입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으시기에 묵상해야 합니다. 중학교 동창을 만나서 집에 와서 친구가 했던 말 묵상하고 생각하고 이 친구가 이렇게 말씀하셨지 그러지 않잖아요. 여자 분들 보면 부러워요. 얼마나 행복하게 이야기하고 돌아가면 끝이잖아요. 동창생끼리 만났더니 수준이 비슷해요. 묵상할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왜 집중해야 하냐고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신앙 성장하고 싶으세요? 묵상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벤트의 종교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잠실 체육관 빌려서 이벤트 한 적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꾸 그런 대형행사를 교회가 기획하면 우리 부교역자들은 행사에 동원되어서 심방을 못하잖아요.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못 나누잖아요. 1년에 한 번 유럽 집회를 다니는데 한 번도 부목사님에게 차 태워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왜요? 성도들을 심방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하고 그런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내 개인적인 일로 부르면 되겠느냐고요. 기독교는 묵상의 종교입니다. 얼마나 몰입하며 주님을 생각하느냐. 제가 구입한 몰입 책 목차를 보니깐 워크 하드에서 띵크 하드로 생각을 이동하라.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각하면서 일하라는 것 아닙니까? 예수 잘 믿는 것도 중요한데 생각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하면 다 받으시면 안 돼요. 잘못 전할 때 많습니다. 설교를 맹목적으로 받으면 안 되고 저게 틀린 말 하나 지켜봐야 합니다. 1부 예배가 끝나면 우리 교역자들이 엄청 많이 조언을 해주어요. 목사님 그런 표현 괜찮습니까? 제가 한 번도 어디 담임목사 설교하는데 왜 그러냐고. 그런 지적이 조심하게 만들어요.


제가 칼럼을 읽었는데 일본의 미라이 공업이라는 전기 회사는 직원들에게 1년에 석 달 휴가를 준대요. 5년에 한 번은 전 직원이 해외여행을 떠난대요. 진짜 놀라운 것은 직원들이 쉬고 싶으면 언제든지 쉬어도 된다는 룰이 있다는 것입니다. 직원이 내일 쉬겠습니다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쉬게 하는 룰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이런 회사는 망해버릴 것 같은데요. 칼럼에 보니깐 놀랍게도 이 회사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는 회사입니다. 동종업계 시장 점유율 1위, 매출 2,500억 원 칼럼 내용을 직접 읽어드릴게요.


그렇다면 직원들을 신나게 놀게 하면서 놀라운 성과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놀더라도 생각하면서 놀게 하는 게 이유이다.


알고 봤더니 그냥 쉬겠다는 것이 놀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방해받지 않는. 아이디어를 내면 현금으로 포상을 주고.


이 회사의 슬로우건은 항상 생각한다.


분당우리교회 슬로건은 이렇게 고치고 싶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우리 교회 말이 아까워서 못 없애겠지만, 항상 생각하는 교회. 예수님께 집중하는 교회. 몰입이라는 책을 쓴 저자가 또 다른 책을 썼는데, 슬로우 씽킹입니다.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을 구입하고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띠지입니다. 겉장에 띠지가 있는데 떼버려서 없어져서 아쉽게 생각합니다. 띠지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1분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1분 걸려 해결할 문제만 해결하지 못한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서 너무 복잡하게 얽힌 두 시간짜리, 세 시간짜리 척척 해결해내는 깊은 영성을 갖은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생각 좀 해라. 묵상하라는 말이 꽤 많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생각이 히브리서 3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이찬수 목사 설교 해석법, 이 설교의 흐름, 이 설교에 등장하는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필터를 통해서 재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교회가 되기를 깊이 축복합니다.




3. 진취적인 행동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으세요? 행동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0년의 긴 생활을 예고하시면서 어떤 면에서 깊은 뜻이 반영되었다고 하는 데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4-7)


2년 만에 빨리 풀려 집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악한 도성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선한 영향력을 위해서 진취적으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구현한 인물이 요셉 아닙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해서, 생각을 깊게 해서 정치적으로 엄청난 권력을 얻었다. 잘 살았다고 적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흉년이라는 끔찍한 일을 대비하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생각도 많이 해야 하지만 건강한 생각을 하고 진취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편한 것만 찾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렘 29:11)


이 말씀을 수용하시고 두 번째 단계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건강한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때부터 움직이셔야 합니다. 오늘 청년 주일입니다. 공교롭게도 이태원에서 너무나 가슴 아픈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피해자 대부분 10대와 20대입니다. 청년 주일을 하루 앞두고 가슴 아픈 사건을 접하면서 정말 할 일이 많은 나라. 슬픔을 위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청년 주일에 우리가 너무 미안해요. 교회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교회가 정립을 시키지 못해서 이 세상이 너무나 혼란한데, 분당우리교회 약속합니다. 어른들이 기초 다지기 중에 있잖아요. 예배에 집중하고 기초를 다진 열매가 다음 세대 살리는 데 다 투입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불행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이기 때문에 우리 청년 한 분을 직접 불러서 간증을 직접 듣는 것으로 이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홈페이지에 세 분의 간증을 다 올릴 것입니다. 다 들어보시고 기도 제목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10월 2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기막히게 크신 하나님을 만나다

기막히게 크신 하나님을 만나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1-5)


최인철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데요. 첼리스트 카잘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파블로 카잘스트는 어마어마한 연주가였나봅니다. 별명이 첼로의 거성, 20세기 첼로의 거장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연주자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이미 첼로에 거성이라는 첼로 계의 큰 별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93세가 될 때에도 하루에 3시간씩 첼로 연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독특하고 체력이 좋으셨나 봅니다. 인터뷰하면서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미 세계적인 연주가인데 93세임에도 불구하고 연주하십니까? 그랬더니 93세 파블로 카잘스가 요새 내가 실력이 조금 느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는 즐거움 때문에. 영어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I’m beginning to notice some improvement.


beginning to notice가 중요하고 설명합니다. 씨앗을 심어라. 방학 동안 씨앗이 자라는 것을 관찰해봐라. 기억나시죠? 아이들이 요즘으로 치면 종이컵이나 마당이 있는 아이들은 빈 마당에 가서 씨앗을 심습니다. 그리고 눈 빠지게 기다리잖아요. 싹이 트지를 않아요. 한참을 기다렸는데 어느 날 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초록색 푸릇푸릇한 싹이 올라오는 상태.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면서 와 뭐가 보인다. 이것이 beginning to notie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연주를 앞두고 아닙니다. 대부분 연주가는 보여주기 위해서 연주하잖아요.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보여주기 위해 연습하는 것도 있지만, 즐기는 것입니다. 눈이 올라올 때 탄성을 지르며 행복해하는 즐거움 때문에 93세의 할아버지가 매일 3시간씩 첼로를 연습하고 있다. 다른 것을 다 차치하고 부러웠습니다.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있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매일 탄성을 지를 수 있는 삶의 목표가 드러나고 있다면 뭐가 더 부럽겠습니까? 그러면서 교수님이 드리븐이라는 영어 단어를 통해서 청소년 대상의 강의라 영어 설명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driven 되어있는가? 뭐라고 말하느냐면 여기서 말하는 driven은 투지가 넘치는, 질주하는 뜻이 있다. 목적을 향하여 차 운전하는 것은 drive라고 하잖아요. 93세의 할아버지가 이제 첼로 연주가 움이 트는 것이 보인다. 거성이니 거장 이내에 관심이 없고 이 즐거움으로 93세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이런 즐거움이 있으신가요? 예전에 나온 책 주에서 닉 워렌 목사님이 쓰신 목적이 이끄는 삶 책이 있습니다.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사람이 쓴 책이라 Purpose Driven Life 원제목입니다. 합성으로 쓰이면 ~의 주도로. ~의 중심으로 뜻이 되기에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제목이 무엇을 강조하느냐면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내 인생은 무엇이 견인하는가. 요즘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게 자꾸 어떤 청소년을 악하게 영향력을 미쳐서 그 아이를 성적으로 짓밟든지. 돈을 다 착취하든지 악한 범죄가 득세하는 데요. 만약에 그렇게 드리운 하는 대상이 엄청나게 훌륭한 분이라면요. 그렇게 흠모하고 따라가는 분이 성적으로 죄지으려고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어마어마하게 존경할 만한 분이라면요. 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으로 한 번씩 묵상 하나면요. 무엇인가 이끌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끌려 사는가. 우리가 지으면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을 수 없도록. 무엇인가 끌려야 행복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 땅에서 세월 보내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목적과 계획이 있는데 이것을 발견하여 달려갈 때 인생이 행복해진다.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애타게 초청하고, 지난주 오셨는데 한 번만 더 오신 분 다음 주에 또 오세요. 이것을 깨달으실 때까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왜 안 되느냐 우리 성도님들은 다 압니다. 우리 아이들 사춘기 때 노래를 불렀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해줍니다. 운전자가 운전을 해주고 가다가 길 가다가 꼬맹이가 나오면 모든 운전자가 긴장한다. 저 공이 차도로 굴러가면 공밖에 안 보이기에 차가 쌩쌩 달려도 공보고 질주할 애이다. 사춘기 때는 부모가 넓은 시각으로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느낌이 꼬여있는 공밖에 안 보이기에 부모가 답답해하는 부분이다. 조금만 더 넓은 세계를 보라고. 통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춘기 내내 했거든요. 20대 후반 이제 뭔 소리인지 알겠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못 깨달은 분이 대부분인데요.


오늘 설교제목도 거기서 뽑은 데요. 기막히게 크신 하나님을 만나다. 이게 제가 읽은 책에서 따온 내용입니다. 현대인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그 책에서 하는 것입니다. 공만 보는 아이들. 하나만 몰두하다 보니깐 온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신 이야기라고 합니다. 온 우주에서 세 살 먹은 아이가 공만 보이듯이. 막 차도로 튀어나가다가 교통사고 나고 그런 것 아닙니까? 여러분을 초대한 것은 그렇게 분주하게 달려가는 것을 잠깐만 멈추시고, 공만 보지 마시고, 주변도 둘러보시고. 저는 가을이 되면 황홀합니다. 하나님의 솜씨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손길이 느껴지니깐요. 남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감성적이래요. 예전에 등산을 좋아할 때 나목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거든요. 손길이 느껴지니깐 단풍 곱다. 지난주 말씀드렸던가요. 다 죽은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60대가 되었는데 김영석 교수님 100세 넘은 분이 인생의 전성기가 65세에서 75세라고 합니다. 아직 제 인생은 전성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제 전성기가 80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초대받아 오셔서 호소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갖고 아버지가 가락지를 까우고, 신발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환대했다는 말씀이 주제였다면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날 설계하신 분. 컴퓨터 하나 사려고 잘 활용하려면 어마어마한 자동차를 구입해놓고 운전하면서 메뉴얼을 안 봤어요. 모르는 기능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이제 알아요. 자동차 하나 사놓고 메뉴얼 안보게 억울한데 여러분 지으신 분이 어떻게 해야, 무엇이 우리를 견인해야 행복한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잔치만 베풀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 모세라는 인물을 갖고 이 부분을 설명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모세 아시잖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신음하고 있을 때 해방한 인물이잖아요.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 전에는 비참한 인물이었습니다. 열정만 있어서 고통받는 민족을 어설프게 돕겠다고 하다가 광야에서 40년 유리 방황한 인물이 모세입니다. 본문에서 만난 상황도 비참한 상황입니다. 장인의 사업체에서 생계를 연명한 인물입니다. 그 모세가 본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calling이라고 합니다. 사명을 깨었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오늘 초대된 귀한 손님, 이 자리에서 불꽃이 튀고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원리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인생의 메뉴얼을 갖고 돌아봐야 합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의 핵심을 모르는 분에게 원리를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귀한 예배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를 관찰해야 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떨기나무를 사용하심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자료를 보니깐요. 당시 애굽, 시내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카시아 종류의 가시나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시나무는 쓰임새가 없잖아요. 떨기나무는 평범한 나무이고요. 부피에 비해서 쓰임새가 없는 나무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이 위대한 역사를 펼쳐나가는 현장에서 그 나무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은 엄청나게 비싸고 웅장한 나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덩치에 비해서 쓰임새가 없는 떨기나무를 사용하셨느냐.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가 떨기나무입니다. 다 설명되었죠? 제가 떨기나무입니다. 하나님 만나기전에 목사 아들이고 다 소용 없습니다. 걸어다니는 열등감. 너무나 초라하고 외모 부터 시작해서 우리 누나 이렇게 설교하면 연락이 옵니다. 내 눈에 내 동생이 최고 멋찌다고 하면 그건 누나 눈이지. 그것갖고 열등감을 말하지 않아요. 열등감이 많았던 저는 평범한 떨기나무입니다. 미국가서 엄청나게 고생하면서 모세와 견줄바는 아니지만 똑같은 것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서 20년간 큰 교회를 이끌어감에도 불구하고 큰 혼란 없이, 방황 없이, 쪼개짐 없이. 아무것도 없는 나같은 것도 지도자로 교회를 섬김에도 이렇게 교회가 순탄하게. 29 교회가 모두 은혜롭게 잘 자라거든요. 하나님이 떨기나무를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으니깐. 제가 아이큐가 높으면 똑똑하니 목회도 잘하네 이럴것 아니냐고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평생에 교회를 주셨는데 하나님이 펑 하고 나타나셔서 완전히 설득하시고 뒤집어지실 것이라는 착각. 여러분이 슈퍼맨이라면 그렇게 일하실 것입니다. 떨기나무로 임하실 것입니다.




2. 호렙산을 거룩한 땅이라 하심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어린 시절 교회가 보수적이었습니다. 강단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땅이기에 여성을 못 올라오게 했습니다. 모든 여성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교회 관리집사님 집이 있어서 새벽기도에 문을 여시는데 부인 관리집사님이 유일하게 못 올라오시는 곳입니다. 강대상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출입구가 따로 있거든요. 그래서 여집사님이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 안 해도 되니깐. 무엇을 착각한 것입니까? 호렙산이 엄청난 재료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엄청난 착각 아닙니까? 호렙사닝 거룩한 곳이다. 신을 벗으라고 하는 데요. 이름도 호렙. 건조한 사막지대 입니다. 땅으로 하면 몇 푼 못 받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호렙산이 황금으로 만들어져서 거룩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거룩한 곳입니다. 저는 저를 성직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만 성직자가 아니기에. 저는 떨기나무입니다. 성직자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에요. 인간은 떨기나무에요. 단, 제 인생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목회는 성직이에요. 지금 학교 선생님, 그것이 성직입니까? 아닙니까? 교수직 그것이 성직입니까? 아닙니까? 그것은 자기가 택한다고요.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교수직을 행하면 성직입니다. 돈벌이하려고 교수하면 가슴 아픈 직책입니다. 목사가 다 성직자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거룩한 하나님을 모시고 동행하며 하는 목회가 성직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강대상에 너무 의미 부여하는 것 우상을 섬기는 짓입니다. 이 자리만이 거룩해서 여자분들도 못 올라오는 것도 틀려먹은 것 아닙니까? 잘못된 관행을 깨부수고. 여성이다. 어른이 다로 거룩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콜링을 주시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하신 게 있습니다.




3.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요구하심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것에 대한 분석은 열 몇 가지를 본 것 같습니다. 겸손을 뜻하고. 저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만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 포기의 의미입니다. 로렌 컬린이 쓴 네 신을 벗으라 책이 있습니다. 당시 풍습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노예라는 뜻이다. 노예는 신발을 신지 못했고 권리도 없었다. 모세는 신발을 벗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임재 앞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너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책의 소제목이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승리의 삶입니다. 자기가 갖고있는 물질.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포기하는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가 똑똑한 사람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갖춘 것이 많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포기의 의미를 아는 것이 은혜로운 목회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포기 = 패배라는 가치관을 따르는 것을 권하지만, 하나님은 소중한 것을 포기할 때 거 큰 승리와 성취를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제가 나는 떨기나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잖아요. 저는 포기할 게 없기에 목회하면서도 어려운 게 없습니다. 없이 살면 되거든요. 내가 어떤 의지하고 자랑하던 무엇을 내려놓는 순간, 내 발의 신을 벗는 행위. 여기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20년 동안 11, 12월 수첩에 2023년 목표 쓴 적이 없습니다. 올해 뭐할지 모르는 제가 내년에 뭐할지 어떻게 압니까? 그날그날 지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날은 여김 없이 오리무중입니다. 제가 항상 출근하기 전에 적어도 3~4시간 하나님의 지침을 받습니다. 이것이 신을 벗는 것입니다. 거룩을 회복하라.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엄청나게 분석하지만 웃깁니다. 하나님께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잘 들으셔야 합니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포기하는 종교고요. 기독교는 거룩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사람 많이 모이네, 좋은 교회네 아닙니다. 사람 많이 모여서 좋은 교회가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일 잘 풀려서 떠드는 것이 성숙이 아니라, 예수 믿고 거룩해지는 것이 성숙입니다.


우리 목사 설교 잘해. 그냥 입에다가 모터를 달아놨는지, 설교 청산유수 같아. 그래서 좋은 목사가 아니고, 거룩을 추구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입니다. 한국교회가 타락했다고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 출발점이 거룩을 추구한 게 아니라 성장을 추구했고, 거룩을 추구한 게 아니라 큰 교회를 추구하는 것부터 라가이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이야기는 예수 믿고 내 행실이 달라졌다는 말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취직하고 가계 잘되었다는 것은 별책부록이고요. 예수 믿고 아름다운 것은 거룩한 것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새 생명 축제를 할 때마다 자괴감을 느끼는 게 자꾸 안 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불러서 두들겨 패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여기 한번 오는 게 어렵나 고요.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목사가 거룩해 보이지 않는데. 무슨 거룩한 말을 한단 말이야.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지. 사실 제가 참 떨기나무였는데 대학교 다닐 때를 보면 정말 개념 없이 살았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전공 교수님께 불려가서 너 인생 이렇게 살지 마라. 어마어마하게 꾸지람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떻게 생각 없이 사냐고.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느냐고. 웃기는 것이 뭔지 아세요? 한 시간 개념 없다고 욕먹고 놀러 갔어요. 내가 생각을 해봐요. 왜 이렇게 개념 없이 살았지? 꿈이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제게 목표를 가르쳐준 사람이 없어요. 3학년 2학기 마치고 미국 이민 갈 것이니깐. 1년, 2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중간, 기말 다 놀았습니다. 이제 졸업할 것인데. 개념이 없었던 것은 꿈이 없어서입니다. 온 식구 중에 꿈이 가장 큰 소년이에요. 가슴이 너무 벅차요. 오늘 새벽에도. 제 인생은 연습 기간이었고, 제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뻥치는 것인지 지켜보면 아실 것 가입니까? 어떤 일이 펼쳐질지 여러분 곧 보시게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꿈 펼치기 전입니다. 처음 초대받아 오시는 분 포함해서 예배드리는 모든 분이 알아야 합니다. 어떤 궤도에서 멀리 떠나갔다 할지라도 돌아갔다 할지라도 환대해주십니다. 잔치만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깨었게 해주세요. 제가 하는 일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일이라서 보다는 매일의 일상이 너무 황홀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너무 기쁘고 좋은 사람입니다. 아까 93세의 할아버지 연주자에게서 들었잖아요. 제 인생이 움이 틀듯 말 듯합니다.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10월 1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방황하는 자, 잔치를 경험하라

방황하는 자, 잔치를 경험하라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요즘 저는 환대라는 단어에 마음이 굉장히 쓰여있습니다. 환대에 관한 책을 구입해서 읽고 있고, 성경적인 개념을 찾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환대 사전을 찾아보니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최근 책에서 도전을 받았는데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플라톤이 쓴 글이라고 들은 데요.


친절히 해라.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


마음에 확 와 닿는 것입니다. 왜 환대를 베풀어야 하나. 모두가 다 전쟁 치르듯 힘들게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겪고 있지만, 코로나 19 우리 생에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거의 3년이 되잖아요. 마스크 쓰고, 저는 사람을 많이 만나니깐 누구를 만나도 두려워요. 이 세균이 누구를 통해서 전해지지 모르는 긴장상태에 있는데. 이제 코로나 19가 잦아들 것 같다고 하니깐 이번에는 세계적으로 몰아오는 경제 위기. 이렇게 환율이 올라가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예고편이고, 내년에 경제적 어려움이 온다고 하니, 저는 많은 성도님을 섬기니, 성도님들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모두가 다 전쟁 치르듯 살아가니깐요. 책 표지의 문구가 굉장히 와 닿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옮겨 적으면서 묵상하고 살피면서 마음에 도전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를 베풀었으면 좋겠다. 이제 2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오래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쓰임 받을지 모르지만, 분당우리교회 영적으로 갈아엎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하는 곳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 충분한 조건이에요. 엿새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계없이, 모든 성도님이 환대를 교회에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환대를 누린 자만이 할 수 있는, 누군가, 우리 이웃에게 환대를 베푸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 생명 축제 첫날인데요. 오늘 교회를 처음 방문하는 많은 손님이 여기를 찾아오셨는 데요.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하게 될 환대를 경험하는 실습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예수 안 믿어도, 예수 믿으라고 강요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온기로서 엿새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뜻한 친절, 환대를 연습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문하신 많은 손님, 새 신자 분들. 하나님의 따뜻한 환대는 말할 것 없고, 인간이 베푸는 이런 환대를 마당에서도 많이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맥락으로 환대를 주제로 해서 말씀을 준비해 온 대요.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환대라는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는데 몇 번이나 울컥울컥 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왜 그랬는가 하니깐 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제 인생이 자격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하고, 교회에서 수많은 어린 시절, 어른들이 베풀어주신 환대를 먹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그때나 지금이나 공부 잘하는 사람 주목하고, 잘생긴 사람 주목하고 그런 세상 속에서 저는 주목받을 조건이 없었습니다. 선생님 눈길 한번 의식을 잘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엿새를 살지만 평범한 제가 주일날 교회를 가면 주인공 만들어주시는 어른들이요. 초대받은 어른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하 아들이거든요. 저희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는데, 금식기도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얼마나 어른들의 써주시든지. 선생님들이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네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돌아가셨는데 하나님이 가만두시겠니? 저의 자신감과 건강한 자존감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면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들을 교회에서 얻었습니다. 23살 이민을 하여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단언합니다. 교회가 저를 살려줬어요. 교회가 아니면 숨 쉴 때가 없었거든요. 졸업 안 하고 미국으로 가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학비 대줄 사람이 없죠. 풀타임으로 막노동을 했습니다.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계속 쫓겨나니깐. 진짜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도 주일만 기다립니다. 주일이 저를 살려줬습니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빠도 1년 코로나 이전에는 시차 때문에 힘들어도 꼭 이민교회 가서 말씀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통하거든요. 교회는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왜 목사가 되었어 빌까? 빛 값으로고요. 그렇게 안 오려는 사람들 감언이설로 협박해서 오시게 하려고 애쓰신 것 압니까?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환대. 자격없는 환대. 부모님, 자녀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초 정자체가 호의니깐요. 예배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환대의 기쁨을 맛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갖고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있는.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서 아실 것입니다.


두 아들이 등장하는데 보통 둘 때 아들을 탕자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따 설명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둘 다 탕자에요. 가출하지 않고 뭉갠 탕재, 가출한 탕자. 이런 자격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배신한 자식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환대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이것이 예수님이 비유로 설명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두 아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탕자로 알고 있는 둘째 아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2)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 정서로도 이것 참 못된 자식이네 그럴 수 있는 데요. 당시 가부장적인 시대 다 보니깐 있을 수 없는 짓이에요. 설명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론 둘째 아들의 요구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죽었으면 좋겠다. 이런 정도로 패륜적인 짓이라는 것입니다. 패륜아 자식에게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구를 아버지가 들어주세요. 왜 들어주시는지 아시죠? 이 자식은 그래야 사는 자식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자리에 빠지고, 허랑방탕하게 빠지고, 쥐엄열매 먹고, 겪어야 정신 차리는 아들입니다. 대부분의 죄성을 갖은 인간은 그렇습니다. 겪어봐야 막다른 골목이다. 아시는 아버지께서 엄청난 재산을 낭비할 각오를 하시고 허락해주십니다. 이게 아버지 환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둘째 아들입니다.


큰아들은 겉으로 보기에 반듯하고 둘째 애하고 다르네 칭찬을 많이 들었지만, 사실은 깊이 들어가면 둘째보다 더 문제가 많습니다. 아버지 일을 돕고 섬겼지만 큰아들에게 아버지에게 마음이 가 있지 않습니다. 모든 큰아들의 문제는 여기서 파생합니다. 큰아들의 냉정함을 보세요. 동생이 먼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동생이 집에 살아 돌아왔는데 섬뜩해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요. 오늘 교회가 말입니다. 사람은 많이 교회로 오는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안 받으면 섬뜩한 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해요. 안 믿는 사람들이 비판할 때 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큰아들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은 병든 우월감입니다. 탕자의 비유, 둘째 아들이 맞지 않은 게, 비유를 주신 것이 큰아들을 경고하기 위해서 주신 비유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5:1-2)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다 큰아들입니다. 민족적인 우월감.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우월감. 함부로 하고 무시하고. 유대인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는 것 아닙니까? 나머지 민족은 다 쓸데없는 인간인데 지옥의 불쏘시개감으로 쓰려고. 이런 교만한 사람 아닙니까? 예수 못 믿으면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우리도 비슷한 괴물처럼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두려워해야 합니다. 냉정하고, 큰아들이 갖은 문제. 아버지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병든 차원에서 인정 욕구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인정받아야 내 존재가 살아나니깐요. 제가 최근에 기꺼이 불편한 예배라는 책을 읽은 데요. 선교사님이 되셨는데, 어린 시절 상처를 적었습니다. 본인은 깨진 가정에서 살았다. 내면에 상처가 많다. 이 분은 어떤 상처가 있나. 아주 어릴 때 어느 날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어디를 가시는 데요. 아이를 그 집에 대려다 놓고 엄마가 내일 데리러 올게. 하고 안 나타나셨어요. 얼마나 어린아이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어머니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니, 대인관계에서 자꾸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눈치를 보면 안쓰럽잖아요. 저 사람의 필요가 뭔지 민감하고, 만족을 시켜주지 않으면 나는 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아야 그것을 통해서 내 존재감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좋아요 갯수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니깐요. 여행도 사진 찍으러 갑니다. 좋아야 많이 받는 게 여행 가서 누리는 것보다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슴 아픈 상황 아닙니까? 교회는 영적 병원입니다. 사람 눈치를 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커서 피곤한 삶을 살았는데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치유되는 것 아닙니까? 몸은 가출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 영향력을 못 받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분석도 했더라고요. 아들이 돌아와서 잔치하니깐 아들이 격분합니다. 격분하는 심리 속에 뭐가 같이 있느냐. 동생은 몫 다 쓴 것입니다. 내 재산인데 저 쓸데없는 놈을 위해서 재산을 써야 해. 아버지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교회, 요즘에는 많이 못 듣는데 상당히 많은 분이 예수를 믿어요. 헌금을 많이 해야 많이 받는다더라. 주일 이루어 내야, 주 중에 손님을 많이 보내주신다더라. 예배 빠지면 장사 잘 안 되겠네. 하나님을 거래 관계로 해서 예수 믿는 많은 분이 참 많은 데요. 어떤 목사님들이 설교도 그런 식으로. 헌금은 투다자. 이런 식으로 굉장히 맞지 않은 설교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초대되신 손님들뿐만 아니라, 오래 예수 믿었던 우리가 모두 자칫하면 큰아들이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데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하나님의 축복에 관심이 많은가? 오늘 한번 점거했으면 좋겠습니다. 큰아들 둘째 아들 할 것 없이 둘 다 탕자인데요. 그들은 아버지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파생했다. 두 가지 대안이라고. 늘 흔쾌하지 않은 삶을 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 대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아버지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엄청난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간 데요. 거국으로 허랑방탕하게 날리고 흉년을 맞아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며 살았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 15:16)


탕자가 한 둘째 아들이 했던 가장 잘한 것.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인생은 두 종류입니다. 예외 없이 고난을 경험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환난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인생의 공통점이고요. 둘째 아들처럼 교훈을 찾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겪는 고난을 통해서 깯았는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고난은 고난대로 당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헛고생이라고 하잖아요. 둘째 아들이 가산을 다 당신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둘째 아들에게 찾아온 큰 축복이 절망에 빠진 실패를 경험하는 돼지 우리 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의 비참한 실패가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되었잖아요. 기왕의 고난이 찾아오는 게 인생이고 피할 수 없다면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나 축복이 아닙니다. 고난은 안 당하는 게 좋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게 고난이라면,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으로 만들자고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행복할 때는 누려라. 즐거워해라. 감사해라. 고난이 찾아오면 깊이 생각할 때다. 깊이 자기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두 가지를 병행해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님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누리길 원합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저는 예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있는 성도들도 2/3 다 안내해드렸습니다. 가능하면 규모가 작은 교회로 가시는 게 하나님 만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 모든 존재를 걸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떠날 때부터 어긋났으니 다시 돌아와야죠. 옛날에 뼈대 있는 집에서 자란 분이 많은 것 같은데요. 엉뚱한 짓 하다가도 잘 돌아와요. 많이 계실 텐데요. 기억나죠? 저 건넌방에서 형하고 동생 하고 머리 터지게 싸워요. 아들만 둘이 있으면 그 집은 전쟁터라고 알고 있거든요. 뼈대 있는 집은 아버지가 안방에서 우리처럼 뛰어와서 소리치고 안 해요. 안방에서 크음 헛기침을 하시면 다 정리가 됩니다. 아버지 계셨네. 쉬, 정리가 되는 게 뼈대 있는 집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존재입니다. 목사도 똑같습니다. 여차하면 엉뚱한 길로 가고, 여차하면 실수하고, 여차하면 부끄러운 자리에 빠지는 공통점입니다. 목사가 되면 좋은 것이 새벽마다 하나님의 기침 소리를 들어요. 우리 묵상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아 나 목사지 참. 하나님 계시지. 하나님 종이지. 멀리 안 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처음 초대받은 분들은 기침 소리가 나고. 뼈대 있는 가문의 인생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로 좌정해 있기를 원합니다. 동성애로 시작해서 온 세상이 뭔지를 모르겠잖아요. ‘왕이 없으므로’ 사사기 시대를 묘사하면서. ‘사람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더라.’ 딱 이 시대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부터 인생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2. 아버지가 베푸시는 잔치를 누려야 합니다.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을 소개했는데 제목이 발칙하지 않습니까? 어디에다 대고 탕부 하나님이라니. 미국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요. 영어로 된 원제도 이렇습니다. 프레디 글 갓. 어떤 뜻이 있는지 보니깐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픈, 낭비하는, 낭비 없이 다 써버리는. 뭘 강조했습니까? 그 아버지 피눈물 흘리게 하고 집 뛰쳐나가서 탕진하고. 지도 염치가 있어서 종을 써달라고 하는 파렴치한 인간을 향하여 아버지가 베풀어주는 모든 것을 낭비하고,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픈 아버지를 본문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탕자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모한 사랑을 보세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제가 어느 자료를 보니깐요. 당시로 아버지의 권위가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아버지가 자식 앞에서 달리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23)


성경에 잔치라는 것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배설한 잔치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배설한 잔치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염소 새끼 안 잡아주고. 저 패륜아 동생에게는 살진 소를 잡아주시냐고. 왜 그러냐고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큰아들 몸은 아버지에게 있는데 마음은 없어요. 왜 염소 새끼 못 먹었을까요? 요구한 적이 없거든요. 예수 믿은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 아닙니까? 메마른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조금만 잘못하면 길길이 날뛰고. 딱 큰아들 같은 사람. 하나님이 배설해준 잔치를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에게 환대를 받아본 사람만 할 수 있는 게 이웃을 향한 환대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분당우리교회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그 집 식당가면 맛이 좋다는데. 머리로 작동하는 것하고 맛을 보는 것 하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말씀만 더 드리고 환대에 관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번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했잖아요. 20대 초반 하나님께 많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민 가서 고생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고 성경 퀴즈 대회 때 기억하는데. 약속은 안 지켜도 이렇게 안 지키는 것은 처음 봤다. 막노동하고 너무 우범지역인데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엉엉 울면서 당신은 죽은 신이야. 만약 당신이 살아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신이야. 내가 그 무능한 신을 왜 믿어야 하는데. 교회 안가. 왜 당신과 같은 신에게 왜 님을 붙여야 해. 주일학교 선생님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셔서 하늘을 찔러서. 신학 공부해보니 아무 데나 찔러도 되는데. 교회 떠날 거라고. 있지도 않은 하나님 왜 믿어야 하냐고. 하늘을 향해 모든 모독과 저주를 퍼부은 데요. 가장 큰 환대를 받았던 날이 그날입니다. 그 행위로 저를 맞상대하지 않으시고요. 어떻게 목사하고 있느냐고요. 그날 하나님의 환대가 무엇입니까? 무능하다고 삿대질하는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긍휼히 보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20년 뒤에 분당에 있는 우리 교회 개척해서 담임목사 시키려고 광야 학교에 입학했더니 어떻게 저렇게 처링 없느냐고. 그 행위로 진노하지 않으시고 저를 불쌍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보듬어 주셨던 환대가 오늘 저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초대받아서 오신 분들 드릴 말씀이 너무 많지만, 다음에 또 오세요. 100일 동안 환대를 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찬양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저보다 먼저 환대를 받았던 교회의 너무나 고마운 어른들이 저를 살려줬거든요.






10월 0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탐심을 이기는 힘 자족

탐심을 이기는 힘 자족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왕하 5:20-27)


목회자로서 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분이 많은데요. 그 중 한 분이 D2 호스트 선교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중국이나 선교회라고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내지 선교회 2대 총재로 섬긴 분인데요. 중국이나 선교회 1대 선교사님이 허드슨 선교사님이었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대가인데요. 대가의 후임으로 부임했다는 것도 이 분이 대단한 분이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대단한데 이 분이 35년 동안 총재 역할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뢰를 얻었다는 뜻 아닙니까? 이 분을 마음에 담고 있는데, 큰일을 해서 마음에 담은 게 아니고요. 두 가지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첫 번째, 호스트 선교사님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룬 분입니다. 이 분이 처음부터 눈에 띄는 거목은 아니었습니다. 이분의 삶을 기록해놓은 책을 보니깐요. 젊은 시절에 중국 내지 선교회 맴버로 가입하려고 할 때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담고 있더라고요. 회원으로 가입하려니깐, 굉장히 신신한 단체다 보니 엄하게 살폈다는 것입니다. 평판을 조사하는데, 젊은 시절, 잘 아는 분의 평가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질문. 이분은 가르치는 능력이 있습니까? 잘 모르겠음.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이 분은 신중하고 잘 참는 성격입니까? 대답. 잘 모르겠음. 부르심의 자리에서 인내심을 길러야 할 것으로 생각됨. 질문. 이 분은 힘이 있고 진취적입니까? 대답. 그랬으면 좋겠음. 질문. 이 분은 성경 지식이 풍부합니까? 대답. 이 분은 어린 기독교도임. 정말 신랄합니다. 젊은 시절 성실하지도 않았고, 부족함이 많았던 분 같습니다. 25년 지난 다음에 그 단체의 총재로 선출되었고, 35년간 총재로 일했다는 것은, 시작은 모자란 게 많았지만, 이 분은 지속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부러운 대목입니다. 호스트 선교사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호스트 선교사 삶을 다운 소책자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잊히기 위해 사는 삶’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나 하니깐,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는 호스트 선교사님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호스트 선교사님을 공통으로 평가하는 글을 책에서 봤는데요.


그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서 자신은 잊히도록 살았습니다.


지금도요, 얇은 소책자 서재에 손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꺼내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잘 안됩니다. 저는 잊히고 싶지 않고 많은 사람이 저를 기억해주는 게 참 좋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알거든요. 주의 종으로서 저는 잊히고, 제가 전한 그리스도만 기억하는 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분을 마음에 담는 것 아닙니까? 잊히기 위해 사는 삶이라는 것, 저도 결심한 게 있습니다. 은퇴할 때 은퇴식 안 하겠다. 은퇴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교해서 들으면 안 됩니다. 잊히는 게 목표인 인간인데 마지막 예배 마치고 사라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은퇴식 안 해야겠다. 아직 어머니 살아계신 데 경솔하지만, 예전에 한때는 마지막 은퇴를 앞둔 마지막 설교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젊을 때니깐 과격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답을 아니깐요. 그리스도는 기억에 남게 하려고 제가 평생을 섬겼다는, 호스트 선교사에게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분에게서 배운 것. 내면의 탐심.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심이 사라져 갈 때 자기는 불행하다는 게 아닙니다. 비우고, 자꾸 내 안에 욕심을 죽여나갈 때 그게 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오늘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느냐면, 오늘 살펴볼 게아시라는 인물. 게아시는 호스트 선교사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면 딱 맞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니깐 게아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게아시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성장이 없습니다. 후배 목사님께 종종 이야기합니다. 우리 목회자 중에 제일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이 누군지 아냐. 본 게 없는 사람이다. 본게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다. 그런 면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복을 덩어리로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옥한흠 목사님을 보았거든요. 만 10년간 그분의 목회를 보았거든요. 본 게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개척하니 목사님이 한 대로 하는 거예요. 본 게 그거니깐. 제자훈련 도입하고, 목사님 한 대로 하니깐 교회가 혼란 없이 여기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이 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교역자들에게 덧붙이는 이야기가, 본 게 없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봐놓고 영향을 못 받은 사람. 게아시가 딱 그런 사람 아닙니까? 게아시는 본 게 있는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선지자. 청렴하고, 정직하고 영혼을 향한 놀라운 영향이 있었고, 당대의 인물이 엘리사 선지자인데 그 앞에서 지켜본 사람이거든요. 엘리사의 사환이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엘리사의 수석 제자 역할을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게아시를 데리고 가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봤단 말입니다. 영향을 못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아시는 성장이 없었던 인물이 가슴 아픈 특징입니다.


두 번째 특징 탐욕이 가로막았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습니다. 너무 기분 좋으니 그럴 수 있잖아요. 아람으로 돌아가서 자랑하겠다. 범하기 쉬운 인간의 모습인데 나아만 장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왕하 5:15)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고, 가을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감사를 잊어버린 시대에 영향을 받고 사는 게 아닌가? 교회에 감사를 잃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참 슬픈 말이 있잖아요.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고. 나아만 장군은 돌아서서 자기를 이렇게 고쳐준 엘리사 선지자에 대하여 얼마나 엄청난 예물을 그에게 가져왔겠느냐고요. 엘리사 선지자는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닌가. 너무 냉정합니다.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왕하5:16)


내가 내 힘으로 고쳤나. 나에게 왜 이런 것을 가져오느냐고요. 그다음 구절을 보면 어떤 마음으로 거절했는지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참 신을 알았다. 참 신을 알았기에 여호와만 섬기겠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생략된 많은 내용이 있었는데 선물을 거절하는 중심이 호스트 선교사님과 같습니다. 잊히기 위해 사는 사람. 왜 나에게 와서 이러냐고.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런 엘리사 선지자 마음을 참 기쁘게 받았습니다. 수석 제자와 같은 게아시가 옆에서 봤잖아요. 이렇게 하는구나. 그런데 게하시가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열왕기하 5장 2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왕하 5:20)


여러분, 사람이 속에 뭐가 들었는지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껍데기밖에 못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면에 탐심이 도사리고 있는 게 게아시인데요. 결정적인 순간에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왕하 5:21-22)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하는 데요. 탐심은 거짓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탐심이라는 아비가 거짓이라는 자식을 낳습니다. 저희 교회 직원들을 보면 참 귀한 직원들이 많습니다. 예전 그 앞의 직장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적은 경우인데요. 우리 교회로 와서 직원으로 섬기는 직원들이 있거든요. 등하를 나누어보면 왜 그 월급 많이 주는 직장을 두고 교회 직원으로 왔느냐 물어보면, 딱 한 가지 말합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중장부 쓰라고 하고, 모든 회사가 다 그렇지 않지만, 너무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갈등 없이 투명하게 하니깐 월급 적게 받더라고 만족스럽습니다. 탐욕이 거짓을 낳습니다.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왕하 5:25)


내 안에 있는 탐욕이 거짓이라는 자식을 낳고, 거짓이 자기를 닮은 또 다른 거짓을 낳습니다. 거짓의 열매를 낳으면 번식력이 좋아, 거짓의 연속이 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지난주 기독교 역사에서 1500년 내려온 대죄가 있다고 했잖아요. 일곱 가지 죄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된다고 했는데, 당연히 일곱 가지 죄 안에 탐욕이 들어있죠. 또 다른 죄를 만드는 번식을 갖은 악한 죄를 갖습니다. 단테는 이렇게 말합니다. 탐욕은 사회 질서도 무너뜨리는 인간 최대의 적이다. 성경 디모데전서 6장은 진리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근심으로 찌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데, 60년대, 70년대, 80년대 불면증이 급증하는 게 아시죠? 너무나 유혹하는 게 많은 도시입니다. 도시 안에서 자꾸 마음의 근심이 나를 찌릅니다.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에서 TV를 새로 샀거든요. TV 산 거 자랑하는 게 아니고, 웃기는 게 그 앞에 TV만 해도 리모컨으로 7번 2 KBS 다음 광고, 1 KBS잖아요. 예전에 선택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방송만 나오게 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훨씬 발전된 리모컨인데 그 기능이 없어졌어요. 보니깐 없애버렸습니다. 7번에서 9번으로 가는데 광고를 보라는 것이잖아요. 눈 돌리면 탐욕을 부추기고, 눈 감고 살지. 눈 감고 살면 소리가 들립니다. 계속 우리 안에 탐욕을 자극하니, 시간이 갈수록 현대인은 많은 근심이 자기를 찌르는 시대입니다. 약 먹자 않고 평정심을 찾는 시대입니다. 무서운 유혹이 있다. 우리도 엘리사자 선지자처럼, 호스트 선교사처럼 정말 탐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탐심을 이기는 비결 세 가지를 정리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자족과 단순한 삶을 훈련하기


엘리사 선지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때 얼마나 단순하게 반응합니까?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소명을 콜하니깐 그가 보니 단순함을 보십시오.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왕상 19:20-21)


거룩한 일로 부름을 받을 때 이 많은 소를 어떻게 해야 하나. 농기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많으니 근심이 많아지고, 근심이 자기를 찌르기 쉬운 게 부자 아닙니까? 엘리사가 보여준 게 단순합니다. 우리 교회에 존경 마지않은 분이 계십니다. 한결같이 단순합니다. 교회에 올 때 부자 티를 안냅니다. 표시가 안나요. 굉장히 단순합니다. 거기에 공통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엘리사 선지자의 단순함을 보십시오. 예물을 나아만이 갖고 오니깐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왕하 5:16)


저는 자족, 단순한 삶. 여기에 함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높이면 받으시고, 나는 잊혀지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세례요한 같이. 쇠해도 괜찮다는데 거기에 무슨 생각의 복잡함이 있느냐고요. 안 쇠하니깐 머리가 터지는 것 아닙니까? 제일 잘못돼봐야 쇠해지고 망하는데. 사실 예수 믿는 우리의 삶이 진짜 단순할 수 있거든요. 이 땅에서 죽는 것밖에 있습니까? 죽으면 천국 가는데. 별로 와 닿지 않는 표정이라서 강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야바위꾼 아시잖아요. 시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신을 쏙 빼놓고, 단순한 삶. 하나님 앞에서 단순한 삶은 자족에서부터 나온다. 이게 중요한데요.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자족과 관련해서 중요한 포인트를 말하는 데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 선생님하고 저와의 차이. 엘리사와 게아시의 차이는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엘리사는 성숙하게 타고났고 게아시는 미숙하게 타고난 게 아니라 배웠노라. 사도바울이 어디서 배웠느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자꾸 사업도 잘되고 부해지십니까? 여러분이 내 앞에 탐심이 있는지 점검할 기회가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분이 있으세요? 인내의 한계에 다한 분이 있으세요? 기왕에 내비게이션이 말해주는 것. 기왕에 어려운 길로 갔는데 그중에서 교훈이 있기를 원합니다. 자족하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이냐 테스트해보기를 원합니다. 내 안의 탐심을 없애고 자족을 가져다주는 훈련, 도구가 되도록.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아닙니까? 지혜로운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2. 내적 결핍 채우기


저는 나아만 장군 선물 공세에 흔들리지 않았던 엘리사 선지자 하고, 속아가면서 뒤따라가며 선물을 챙기는 게아시와 차이가 뭐냐. 내적 결핍과 충만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개척 초기부터 지난 20년을 돌아보니 내면이 허할 때 사람 수에 굉장히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면이 허할수록 껍데기에 치중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큰 교회 목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알리기 위해 근질근질했던 창피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고 물어주기를 원하며, 끝내 안 말하면 1만 명 모인다 하고. 내면이 허하면 자꾸 껍데기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과시함이 없으면 많이 모이는데 자랑합니다. 헌금 많이 하는지 아느냐. 아니 안 받으면 안 되느냐. 죽을 마음으로 빼앗다시피 받아오고. 내면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족의 비결.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자족의 능력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사도바울도 거품 많은 초라한 사역자가 안 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허하지 않은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인생 허무하다. 하나도 없습니다. 감옥 안에서 자족하는 것입니다. 그가 배웠던 일체의 비결 중에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 원천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탐욕이 힘을 쓸 수 없을 줄 알기를 바랍니다.


설교 준비하다가 추억 하나 떠올랐습니다. 40대 초반 교회 개척하고 얼마 안 된 것으로 기억하는 데요. 토요일인가, 여기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분이 늦으셨어요. 초겨울이어서 약간 춥기도 하고, 갑자기 성령님께서 내면의 충만함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거든요.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나오는데 기다리면서 찬양이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스텝을 밟으면서 춤을 추던 때입니다. 그때는 뒤에 집들이 많을 때가 아니니, 차가 지금처럼 많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모든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그때 어느 정도로 춤으로 미친 사람처럼 추지 않았죠. 너무 기쁘게 춤을 추면서 찬양했던 기억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쑥 떠올랐습니다. 그때 비해서 어마어마하게 껍데기를 갖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다고 춤을 추었는데 그때의 기쁨이 있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더 풍성해 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 지금처럼 교회도 알려지고, 커져서 기쁨이 오는 것 아닙니다. 가사 그대로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탐심을 몰아내려고 애는 절대로 안 나갑니다. 공허하고 허한 내면세계가 풍족해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내면 세계가 풍요로우니깐 나는 망해도 괜찮다. 세례요한과 같은 놀라운 고백이 가능하고, 선교사님처럼 잊히지 위해서 사는 존재다.




3. 흘려보내는 삶 실천하기


지난 특새때도 살펴봤지만, 엘리사의 제자가 먹을 것을 가져옵니다. 가난한 신학도와 생활하다 보니깐 결핍이 많은 상황입니다. 먹을 게 많은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런데 맨 먼저 거둔 보리로 만든 보리빵 스무 덩이와, 자루에 가득 담은 햇곡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지고 왔다.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하였더니,(왕하 4:42 새번역)


참 어려울 때 제자가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엘리사는 자기 것도 먹을게 궁한 상황에서 공동체 사람들에게 나누어서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심원하 교수님이 쓰신 탐욕의 특징 인상 깊은 게 있었습니다. 이웃에 대해 무정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경험상 진리라는 것입니다. 자리가 넓어지면 넓어지고, 커지면 커질수록 이웃에 대해 무정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이웃에 대하여 엘리사에게서 흘려보내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폴 스티븐슨이 쓴 ‘일, 삶, 구원’ 책을 보니깐 자기가 가진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 탐심의 반대를 성령의 열매 중에 양선이라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갈 5:22-23)


양선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상태. 탐심을 없애려고 너무 천박해. 탐심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연약한 이웃을 돕는 일, 그들을 베푸는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 탐심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삶을 훈련하는 것. 내적인 결핍을 채우는 것.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흘려보내는 삶을 실천하는 몸부림이 내 안의 탐심을 방치하지 않는 몸부림이라고 한다면 여러분하고 이 찬양으로 다 흑인 교회 같으면 다 춤추면서 하지만, 그렇게는 못 해도 마음을 다해서 이 찬양을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10월 0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나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나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왕하 5:9-19)


기독교 역사에서 1500년 이상 전해 내려오는 7가지 대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7가지 항목인데, 교만, 시기, 탐욕, 탐심, 분노, 정욕, 나태. 7가지를 기독교 역사적으로 절대로 방치하면 안되는 죄다. 신원화 교수님께서 쓰신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책에서 7가지를 다루는 것을 봤는데요. 대죄라는 표현을 썼는지 설명하는 글을 봤습니다. 7가지 죄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7가지에 대해서 항상 주의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 시기, 탐욕, 탐심, 분노, 정욕, 나태.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7가지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 중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첫 죄도 뿌리가 교만이라는 것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릴 때 어떤 것을 공략했습니까?


기독교 윤리힉자 라인 홀드 리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첫 인간이 저지른 범죄의 핵심은 교만이고, 자기 중심성이다. 최근에 제가 인터넷으로 김학철 교수님이라는 분의 강의를 들은 데요. 가으이에서 재미있는 사례를 들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미국에서 조사한 것입니다. 1천 명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는 유명인 중에서 당신 생각에 죽어서 천국 갈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졌더니 마더 테레사 아시죠? 79%가 나왔습니다. 인도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서 온 인생을 걸고 헌신했던 마더 테레사 같은 분. 이런 분이 천국 가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다음 나온 인물이 마이클 조던 69% 좀 이상했습니다. 농구 잘하면 천국 가는구나. 다음에 다이에나 왕세자빈빈 60%가 나왔습니다. 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려 87%나 응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79%밖에 안나왔는데 여러분 생각할 때 누굴 것 같은가요? 정답은 자기 자신입니다. 죄성을 갖은 인간의 기본 생각입니다. 나인홀드 리버, 첫 인간이 저지른 범죄의 핵심은 교만이고, 자기 중심성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진짜 늘 교만에 대해서 두려워하면서 싸워야 하는 데요. 한때 저는 마음으로 계속 독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길래 주문 외우듯이 독백을 했느냐면, 웃시아 왕 설명하면서 드렸지 않습니까? 16세 어린 나이에 등극해서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왕인데요. 나라를 엄청나게 잘 다스린 왕입니다. 이제 영토가 점점 확장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웃시아 왕이야말로, 제2의 다윗 왕이다.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습니다. 조금만 인정받고 잘하면 바로 찾아오는 게 있는 것. 교만. 웃시아 왕은 너무나 잘나가던 왕이었는 데요. 말년에 교만이 찾아와서 죽은 인물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


원인 강성, 결과 교만하고 악을 행한 것. 초심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계속 독백을 했습니다. 교회가 2~3년 뒤에 사람이 확 늘어나던 시기가 있는 데요. 저를 아끼는 분이 찾아와서 조언했습니다. 교만하지 마라. 어떤 성도님들은 목사님, 초심을 지켜주세요. 어머니는 과격하게 교만하면 망한다. 죽는데. 네가 잘나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 날 생각이다. 주위에서 그렇게 말하니깐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교만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혼자 독백하는 것입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뒤에 사족을 붙여야 합니다. 이찬수 교만하면 망한다. 제가 저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 해보겠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여러분이 이제 하시라고 가르쳐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를 더 붙이면서. 교만하면 너 죽어. 나 말고 너. 이게 완성이에요. 이만큼 교만하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맥락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람 왕 군대 장관 나아만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병으로 고통당하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병을 고쳐줄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길을 나선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왕하 5:9)


그에게 의사 선생님이 처방전을 주듯이 처방전을 줍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왕하 5:10)


우리가 보기에 굉장히 평범한 주문 아닙니까? 이것을 듣고 기분 나빠지신 분 있으세요? 이 이야기를 듣고 엘리사가 격분을 합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 5:11-12)


화낼 일이 아닌데, 나아만 신하들이 다 말리잖아요.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그러시냐고. 유독 나아만은 격분하면서 반응하느냐. 그 답이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지금 나아만 장군이 갖고있는 빛과 그림자가 있잖아요. 존경받는 인물이에요. 그러나 그림자는 나병 환자입니다. 후자 때문에 찾아온 것 아닙니까? 아까 9절에서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왕하 5:9)


이것부터 틀려먹은 것 아닙니까? 나병환자 입장에서 무엇을 그렇게 대동하고, 엄청나게 화려한 것 자체가 나아만에 있어서 삶의 무게중심은 나병 환자라는 병을 고쳐야 하는 절박함보다 큰 용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마음이 다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에게나 다 빛과 그림자가 있잖아요. 누군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뭐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림자가 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제를 갖고 고침 받고 가는데, 치료받으려고 가는 자기 인생은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데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거들먹 거리기 좋아하고, 말을 몰고 가고 이런 것 자체가 나아만이 가진 치명적인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제가 살면서 깯알은게 있는데, 높은 자리에 갈수록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 아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그 집 가정 교육은 끝난 것입니다. 큰딸이 유난히 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안쓰럽게 봅니다. 어디 갔다가 오면 목 왜 이렇게 딱딱하냐고 막 풀려고 하고, 항상 나갔다 오면 새우깡이라도 사 갔고 오는 것은 큰딸입니다. 항상 수고하는데. 큰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둘째 딸도 걱정 안 하고, 막내도 걱정 안 합니다. 긍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딸도 그렇고 막내도 그렇습니다. 말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빠가 권위적이고 저 위에 있고,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빠가 자녀들에게 긍휼히 여기면 교육은 저절로 됩니다.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를 불쌍히 여기면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부교역자들이 얼마나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피곤한데 우리가 하겠습니다. 저도 부교역자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섬기길 원합니다. 순장들이 순원이 안쓰럽게 생각하는 다락방은 100% 부흥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른들 말 아시잖아요. 아프면 병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아픈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처방도 나오고, 우리로 치면 기도하게 되고. 교만한 사람이 놓치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나아만이 인생이 망가뜨릴 뻔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 보니깐 교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생각의 경직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경직이 느껴지세요? 병 고치러 온 환자가 이러면 어떻게 병을 고칩니까? 이 생각의 경직입니다. 이게 왜 위험한지 아십니까? 동맥경화, 연세가 조금만 드시면 병원에서 자주 경고하는 게 동맥경화 아닙니까? 경화 사전을 찾아보니 물건이나, 몸의 조직 따위가 단단하게 굳어짐. 동맥이 두꺼워져서 탄력을 잃는 것이라고 합니다. 젊어서 동맥경화 잘 안 걸리거든요. 동맥이 딱딱해지고 굳어져 문제가 생기면 생각의 경화, 나와 있잖아요. 물건이나 몸의 조직 따위가 단단하게 굳어진다면, 우리 생각이 굳어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저 자신이 느껴요. 더 유연할 수 있는데. 자꾸 극단적인 생각으로 가다 보니깐. 교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만한 사람에서 나오는 것은 화를 잘 냅니다. 분노. 지금 엘리사자 선지자의 처방을 받은 나아만 선지자의 반응은 분노 아닙니까?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 5:12)


엘리사 선지자가 정성을 다해 처방하는데 이렇게 화낼 일이냐고요. 생각이 경직되면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제가 특이한 제목의 책을 한 권 알고 있는 데요. 책 제목이 개소리에 대하여서입니다. 제목보고 가벼운 책이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보통사람들에게 권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프린스턴 명예 교수가 쓴 책입니다. 제가 우리나라 김영일 교수님이 풀어쓴 짧은 강의를 들은 데요. 그 강의에서 설명하기를 이 책 저자가 설명하는 최악의 개소리를 어딜 감이라는 뜻입니다. 강의 내용을 들어보세요.


어딜 감이라고 자주 이야기 하는 사람은 왜곡된 나르시시즘 갖은 사람입니다. 실제로 나는 너보다 잘랐어. 나는 너보다 본질이 다르게 태어났어로 시작합니다.


교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 소리를 잘 안 듣는데 싸우다가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알면 싸우겠습니까? 제가 30대 중반에 의경한테 티켓을 받으면서 한 2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인데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나는 교통위반 안 했다. 저 사람은 티켓 끊겠다. ‘너 몇 살이야.’ 말이 튀어나옵니다. 누가 옳은지 따지는데 나이가 왜 나옵니까? 이게 개소리입니다. 이게 교만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고민이 이것입니다. 나이 들수록 우리나라에서 많은 병. 섭섭병. 옛날에는 없었는데, 워낙 교양과 인격으로 억눌러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나옵니다. 어딜 감히.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생각의 경화가 오길 쉽다는 것을 기억하고 진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까와 같이 웃시아 왕이 죽을 때 최근에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자꾸 섭섭해지니깐. 짧은 노래입니다.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이게 다해요. 작사가가 이런 뜻으로 한 게 아닌데 저는 이것을 따서. 모든 바라는 것은 죄다. 바라지 말자. 굉장히 애를 씁니다. 제가 꿈이 있는 거 알잖아요. 저는 곱게 늙기를 원합니다. 저는 추해지고 싶지 않아요. 자꾸 추해질까 봐. 지금도 다짐합니다. 우리 집 애들은 20대 초반, 중반밖에 없는데. 애들을 볼 때마다 노래합니다.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없는 거로 치겠다. 내 의무만 하겠다. 왜 다짐합니까? 기대하면 다 상처에요. 나이 들수록 섭섭병이 많아지는데.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교만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꿈틀거리는 교만이 말한 개소리. 어딜 감히. 이게 유명한 스탠퍼드 프린스턴 철학과 교수가 말한 책입니다. 개소리라고. 저와 하나님 앞에서 저와 나아만 모습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참 나아만이 부럽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아만을 고친 게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를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전 인격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변화가 나아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일하심에 나타나는 두 가지 요소를 나누고 싶습니다.




1. 맞춤 처방


이것을 본문에서 발견하고 굉장히 감동했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왕하 5:10)


성경에 나병을 고치는 건수가 여러건 나오는데, 나병을 고쳐주시면서 요단 강에 가서 7번 씻으라는 주문은 이게 전무후무합니다. 유일합니다. 그래서 맞춤이라고 합니다. 아니, 한 번도 이런 시도를 성경에서 기록한 것을 본적이 없는데 왜 나아만에게 7번 씻으라고 명하느냐면, 이것이 나아만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금 교만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나아만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이 하셨듯이. 깨끗하게 나아라. 그 자리에서 낳는 감동을 절대 쓰지 않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고침 받지 않지만 내면은 교만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방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맞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봤습니다. 목사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통해서 많은 교정과 치료를 허락해주셨는 데요. 우리 부목사님들은 너무나 은인들이라고 생각할, 너무나 훌륭하고 호흡이 잘 맞는 분들이 오셨는데, 20년 동안 그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제가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청한 것을 후회하고, 슬럼프가 올 정도로 후회하고. 제 아내에게도 말을 안 해요. 원망한 적이 많아요. 지금 돌아보니깐 그 젊은 사역자를 제게 보내주셔서 저를 다듬어 준 것입니다. 이것이 맞춤 처방입니다. 집에 사춘기 유독 심하게 한 아들이 있으면 아휴 이것 때문에 죽겠다. 생각을 바꾸세요.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여러분에게 보내주셔서 다루는 것입니다. 사춘기 아이 둘 있는 부모는 성자에요. 부부, 그렇게 고르고 골랐더니 골랐더니 이런 남자를 골라서. 우리 엄마가 반대할 때 내 눈을 찔렀지. 생각을 바꾸세요. 그 남편은 맞춤 아까 이렇게 말했더니 아무도 공감을 안해서 그랬지만 그래도 하겠습니다. 동의 안 할 줄 알았습니다. 다락방으로 넘어갈게요. 다락방 하면 꼭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 한두 사람 배정되었다고 했잖아요. 아무도 없으면 그 사람이 자신입니다. 그를 격분시키는 처방으로 해야 한다고요? 전 인격적인 치료가 필요해서입니다.




2. 하나님께 집중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왕하 5:15)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 5:17)


요단 강에 가서 7번 씻으라고 한 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내렸습니다. 나아 만이 영광을 돌리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처방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엘리사에게도 선물을 가져다주는 인간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아만이 전인격적인 치료를 하고 난 다음에 모든 결과의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 한국교회 병든 것 맞습니다. 치료하는 유일한 대안 하나 알거든요. 이 하나님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꾸 찬양하고, 인간의 영향을 받고, 오늘 담임목사 설교하나. 이런 것이 고쳐지고 담임목사에게 집중하는 에너지를 여호와 하나님에게 돌릴 때 한국교회의 병이 고쳐질 줄을 믿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맞춤 치료를 하는 것.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왕하 5:15)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 5:17)


그렇게 격분하면서 감히 이랬던 나아만의 태도가 어느 정도 바뀌었느냐. 엘리사 선지자에게 당신의 종이라고. 하나님의 맞춤 처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나아만의 두 가지 요소. 우리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나병. 그게 경제적인 문제, 실제적인 건강의 문제 하나 있고, 드러나지 않는 우리 내면의 문제. 분당우리교회는 예의 바르고 교양있는 분이 많아서 교만하게 감히 나는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양으로 끝난다면, 내면이 드러나지 않는 게 교만으로 있다면 분다우리교회는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회칠한 교회입니다. 내면에 교만이 있는데, 겉으로 하나님이 하셨죠. 호호호 하면 회칠한 무덤입니다. 나아만의 겉으로 드러났던 나병을 고쳤던 맞춤 처방으로 내 인격의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꿈틀거리는 교만은 꺾어 주기를 원합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가야 합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아만이 드리는 고백이 그것 아닙니까?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설교 제목을 나의 교만의 깨뜨리기 위해서 이라고 했는데, 문제 제기를 설교 제목이라고 했다면 답은,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야 나아만처럼 교만이 치료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열왕기하 5장 1절을 엑센트 없이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나아만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만이 고침을 받은 것을 보고, 온 천하의 여호와 말고 다만, 여호와께만 제가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깨달아서 입니다. 이것을 안 깨달았다면 여러분은 깨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기 이전에 내 힘으로 했던 것 어떤 것조차 도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었다는 것입니다. 20년 전 제 모습, 30년 전 제 모습. 20살 하나님을 조롱하고 대들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 깨달으면서 교만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임재, 압도적인 하나님 능력을 경험함으로, 은혜받기 이전에 경험한 그것조차도 나라를 구해서 큰 용사를 구하는 그였는데 알고 봤더니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09월


09월 2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능력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능력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5:1-8)


제가 예전에 한번 소개해드린 적이 있었던 지랄 총량의 법칙 기억하십니까? 설교 시작부터 저런 말을 하느냐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한동대 김두식 교수님이 쓴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한 사람이 살면서 평생동안 하게 될 지랄 총량이 정해져 있다. 이것이 지랄 총량의 법칙입니다. 점잖은 교수님께서 이런 법칙을 소개하는 게 특이했는데,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춘기를 심하게 하는 딸이 굉장히 여러 가지가 복잡했는데, 이 교수님이 상담했는데 이 법칙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할 지랄 총량이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은 사춘기에 다 떨구고, 어떤 사람은 늦바람이 나지만, 어쨌든 죽기 전까지 다 써야 한다.


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죄업 본성을 갖은 우리 인간은 평생에 써야 할 지랄이 있데요. 사춘기를 시원하게 해서 후에 정신을 차리고, 사춘기가 없었어. 그런 분 있으세요? 늙수그레할 때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것 총량의 법칙입니다. 제가 상담을 할 때 부모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려줍니다. 조금만 견디시면 총량이 다 가니깐 견디라고. 제 마음에서 되뇌는 성도님들의 위로에 쓰는 법칙, 고통 총량 법칙이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겪어야 할 불행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분들을 위로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만든 말이니깐 어떨 때는 진실일까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봐도 지랄 총량의 법칙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아주 악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악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가정생활 모범적으로 하시는 분은 그냥 쭉 가시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위로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같을까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 의미가 있느냐. 이것을 잘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사람들은 다 힘들지. 믿음으로 받고 수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통이 찾아올때 그에 대해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맨날 나혼자 죽을것 같고 나만 절대로 이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삶 자체도 고통이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권면을 할때 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나도 겪는거야. 수용하면서 나아가면 그 인생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인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나아만 장군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왕이 그를 신임하는 군대 장관이었고, 모든 백성이 존경하는 것은 나아만 장군이 나라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인정받는 것과 얼마나 멋집니까? 투구를 쓰고 나가면 모든 백성이 존경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요. 부럽고 멋진 인생인데요. 꼬리표 하나 붙어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슬쩍 읽고라면 인식을 못 하고 갈 때가 있습니다. 이게 히브리어로 그러나, 접속사가 있습니다. 원어에 가깝게 읽으려면 그는 큰 용사였지만, 그러나 그는 나병 환자더라. 참 이것이 저희에게 의미가 있는 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수많은 인물 중에 현대인과 가장 닮은 인물이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점잖게 양복으로 가리고 있고, 목사라는 타이틀로 가리고 살아가지만,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그러나가 있습니다. 얼마나 크고 굵은 글씨고 나와 있느냐. 옅은 글씨로 나와 있느냐 차이밖에 없습니다. 인기를 누리고 있던 탤런트가 자살을 했다. 그러면 항상 나아 만이 생각납니다. 화려한 갑옷, 투구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구나. 연민의 정이 생기죠. 여러분 어떻죠? 나는 그러나 꼬리표 없는 데요. 시종일관 행복하고 잘 나아가고 있는 데요. 곧 옵니다. 제가 저주하는 게 아니고요. 팩트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 따라붙는 것은 갑옷으로, 투구로 가리어서 본인은 알고 있는. 이게 피부병 아닙니까? 더 두드러지는 자기 마음의 괴로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쨋든 본문의 나아만 장군은 그러나 꼬리표를 달고 나병으로 신음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살펴보려는 인물은 꼬리표로 낙심하던 한 인물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인물입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왕하 5:2)


이 어린아이가 무엇을 했느냐.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왕하 5:3)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죠. 어린 소녀는 그야말로 존재감도 없는 인생입니다. 어느 소녀입니다. 이런 존재감 없는 소녀. 아까 말했던 고통 총량 불변의 인생으로 위로를 많이 해주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제가 어느 글을 보니깐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서 잡아갔다는 표현을 하고 전쟁 중에 일어난 게 아니라, 급습해서 약탈한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일들이 많았을 것 아닙니까? 악한 것들이 떼로 몰려와서 자기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어린 소녀를 잡아다가 노예를 시켰는데 하인으로 일하는 그 집은 누구 집입니까? 나아만 장군입니다. 괴수예요. 자기 인생을 망가트린 것들의 두목입니다. 이 괴로움을 아시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아내 시중을 드는 초라한 인생이었는 데요. 그런데 이 소녀가 원수의 두목, 원수의 수괴라고 하는 나아만 장군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왕상 5:3)


어린 소년의 한 마디로 인해서 나아만 장군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아닙니까? 예전에 제가 읽었던 글 하나가 잊히지 않습니다. 용서란 군홧발에 짓밟힌 국화꽃이 군인에게 보내는 향기다. 이런 비슷한 표현이에요. 군인이 군홧발을 자기 꽃을 밟았는데, 꽃이 군홧발을 밟고 있는 병사에게 보내는 향기. 이것이 용서입니다. 제가 어느 소녀, 이름도 없는 무명의 소녀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아만 장군은 군홧발로 밟았어요. 자기 인생을 밟은 나아만 장군에게 향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 아닙니다. 내가 저놈을 용서하지 않으면 절대 행복하지 않기에 할 수 없어서 하는 게 용서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하지 말고, 선행적으로 하자.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내 행복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용서입니다. 제가 소녀에게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내비게이션 쇼녀. 여러 번 말해서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인생이 우회전 해야 했던 인생이에요. 나아만 장군을 필두로 해서 악한 것이 몰려와서 자기 인생을 좌회전으로 몰았어요. 엉뚱한 길로 가는 거예요.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가정에 있어야 합니다. 이 소녀가 불행하게도 듣지고 보지도 못한 원수나라. 두목의 집에서 종살이하고 있는데, 왜 내비게이션이 생각나느냐고요. 저는 진짜 은혜 많이 받습니다. 제가 예전에 없던 실수 많이 해요. 어버버 하다가 저리로 가고. 그런데 내비게이션 아줌마가 저에게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분석도 안 해줘요. 목사님 나이가 드셨네요. 조언도 안 해줘요. 저 길로 들자마자 내비게이션이 하는 일은 엉뚱한 길로 간 그곳에서 어떻게 하면 빠른 길로 목적지에 가느냐. 내비게이션이 검색하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혼란을 막을 테니깐요. 무명의 소녀가 보여주는 게 그것 아닙니까? 약탈하는 것을 안 만났으면 좋겠지만 어떡합니까? 끌려간 데요. 그랬을 때 이 소녀가 보여주는, 그 인생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녀를 보고 내비게이션 소녀다. 별명을 붙여봤습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왕상 5:3-4)


먼저 이 소녀가 자기 여주인인 나아만 장군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겠죠. 이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남편에게 전해주었겠지요.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겠느냐고요. 저 어린 말을 믿어도 돼? 어떻게 믿고 일을 할 수 있는가. 재를 데리고 일한 지가 얼맙니까? 허튼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대화가 오갔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왕을 찾아가서 진지하게 이 문제를 의논하는 것이 4절입니다. 어린애가 하는 말이라고, 평소에 거짓말을 달고 다닌 애라면 접수도 안 했을 것입니다. 오늘 어린 소녀로 표현되는 아이에게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평소의 우리 삶이 신뢰를 얻는 삶이어야 합니다. 개척하는 목사님들에게 많이 말합니다. 교회 키우려고 무리하지 마세요. 15년 뒤, 20년 뒤 갔을 때 목사님이 급하게 했던 게 얼렁뚱땅하고, 과장하고 거짓말했던 모든 것들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사님의 치명적인 독이 될 때가 옵니다. 어떨 때라도 너무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마세요. 정도를 걸으세요. 천천히 걸으세요. 여러분 어떠세요? 예수 믿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도 믿겨지지 않는 소리를 하니깐. 예수라는 사람이 3일 만에 살아났다고 하고. 전도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을 하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그래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진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 옆 집사람도 관찰할 것 아닙니까? 안믿는 분인데 다 알더라고요. 텔레비전에 나오던데요. 씩 웃고 갑니다. 굉장히 긴장할 것입니다. 저 집이 언제 전도하러 올 것인가. 제 아내, 아이 관찰할 것입니다. 뭔가 이단, 이상한 집? 저희가 노력하는 것인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도지 들고 찾아가지도 않고. 중요한 평가는 이것입니다. 저 사람 믿어지지 않는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난, 거짓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평가를 제가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요셉하고 소녀가 굉장히 닮은 게 많습니다. 타의에 의해서 남의 나라에 끌려간 것도 공통점이고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창 39:4)


이 소녀와 요셉의 공통점 아시겠죠? 이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요셉 제한테는 안방 열쇠까지 맡겨도 괜찮다. 이것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얻어야 할 그것입니다. 오늘부터 해야 할 것은 정직해지기입니다.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 시간에 특새때 말씀드렸지만 여러분이 저에게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저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세요. 이런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이라는 원수 같은 한 사람 인생을 행복으로 뒤 바꾼 것이 본문에 나온 소녀입니다.


소녀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믿음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왕하 5:3)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나아만 장군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갔다가 헛방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왔다고 하면 애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아닙니까? 심각한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간단합니다. 거두절미하고 간단한 것입니다. 진리는 진짜 간단합니다. 어린 소녀처럼 우리도 평소에 정직하게 살고, 신뢰를 얻고, 누구에게 권면할 때 간단하게 있는 그대로입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예수 전할 때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만난 것.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 살사계세요. 간단하잖아요. 원숭이가 어떻게 해서 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를 갖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교만으로, 탐심으로 어긋났습니다. 이곳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려고 십자가를 각인시킨것 아닙니까? 어린 소녀가 단순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을 보세요.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왕하 5:6-7)


단순한 믿음이 없어서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정립이 안 된다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깊이 생각할수록 혼미에 빠집니다. 단순한 것입니다. 1만성도 파송운동을 10년 전에 약속드리고, 10년 내내 몸부림 쳤던 게 이것입니다. 여러분을 두고 속인 적이 없거든요. 여러분을 두고 거래한적이 없거든요. 10년 내내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이 동하시면 가시고 남으시는 것은 복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은 바로 소녀와 같은 마음을 견지하기 위해서입니다. 5천 명 안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뭐를 자꾸 만들어냈다고 하면 분당우리교회는 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왕을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5:8)


너무 단순하잖아요. 복잡한 게 없습니다. 엘리자가 단순하면 뭐에요. 능력과 에너지가 자기에게서 나오면 계산이 복잡하죠. 해낼 수 있나. 지난번에 다른 사람은 고쳤지만 이 사람은 고칠 수 있나. 믿음의 사람은 단순해요. 믿음의 원천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니깐. 어린 다윗이 왕도 부들부들 떨고. 군사도 부들부들 떨 때에 골리앗에게 와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무기도 막 갑옷 사이로 단창 쓰고, 수류탄 쓰고 아닙니다. 얼마나 단순했으면 갑옷 벗고 물 맷돌 하나 들고 갑니다. 오래 예수 믿은 분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분들 출발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갖고 신음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외면하지 않은 분인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굉장히 단순한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베드로 찬양, 새벽부터 흥얼거렸던것.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주님 나를 부르시니 주님 내게 오라시니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걸어 가리라
주님 보고 계시기에 주님 여기 계시기에


풍랑 이는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고 제자들끼리 풍랑을 만났네요. 자기들은 고기 잡는 어부가 대부분이니깐 풍랑을 한 두 번 만났습니까? 풍랑 만나는 게 자기 인생인데요. 그런데 안되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돛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오만가지 애를 다 써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고생하고 있을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떠네요. 유령이다. 주님이 엄청나게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독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이 단순함이 믿음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유령이라고 하는데 복잡한 것 없습니다. 유령이라면 빠져 주실 것이고, 주님이라면 건져 주실 것이고. 단순한 믿음이 한 가지. 베드로가 물 위로 뛰었을 때 능력으로 나타났던 비결이 있는 데요. 어린 소녀의 단순함 특징.




2. 도전정신


나아만 장군에게 함부로 말할 거리가 아닙니다. 담대하게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지만, 뿌리 깊은 믿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인생의 도전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잖아요. 지랄 총량의 법칙, 고통 총량의 법칙 사람마다 달라요. 고통이 많은 사람, 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하기에 따라서 양을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있습니다. 타고나기를 고통이 없는 경우는 없고, 자기가 고통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도전하지 않으니깐. 이름도 드러낼 수 없는 존재감 없는 소녀가 수천 년 지나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한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는 나병 환자였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절망의, 낙심의 꼬리표였는데 오늘 여러분, 어린 소녀가 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나아만 장군에게 있어서 나병을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으로 바꾸어준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나병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복덩어리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나병이 없다면 무슨 수로 기적을 경험할 것이고, 다음 주에 살펴볼 것이지만 태도가 확 바뀝니다. 너무나 겸손한. 여러분이 먼저 단순한 믿음과 도전정신을 갖고, 여러분이 먼저 여러분 인생의 꼬리표에 달린 그러나.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 나아 만의 나병, 가슴 아픈 것을 바꾸어주시고, 제2, 제3의 나아만 장군이 많은 이 시대에, 시어머니에게 누구에게 그 꼬리표, 저주로 붙어있는 그러나를 과감하게 때주는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특새를 정리하면서 무슨 사정이 있어서 특새를 참여하지 못한 분들, 제가 빌고 싶습니다. 홈페이지 들어오셔서 한 주 동안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는지 제발 한 번 살펴봐 주세요. 그중에서 지난 목요일 엘리사 선지자가 베푼 기적 중에서 어떤 게 있었느냐. 남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빛을 많이 남겨서 그런지. 남자도 없는 집에 들이닥쳐서 두 아들을 끌고 가려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자 선지자를 찾아갔는데 그릇을 준비해줄래.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왕하 4:3)


단순한 명령 중에 엄청난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 철학도 빈곤하고, 인격도 빈곤한 우리 인생에 한 번 큰 하나님의 은혜 변화 물꼬를 경험해 보고 싶으시지 않으세요? 빈 그릇입니다. 그래서 생각 많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잡한 생각으로 내 심령을 채우면,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그릇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목요일날 말씀을 갖고 묵상하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 81:10)


채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입은 우리가 벌려야 합니다. 채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릇은 우리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릇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가 명했을 때 그릇으로 무엇을 쓰려고 하지. 왜 필요한 거야 그러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코미디 갖죠? 대부분 믿음 없는 분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순종해보자고요. 단순해질 수 없습니까? 너무 계산 많이 하지 말고. 이스라엘 왕처럼 지레짐작해서 떨지 말고. 우리 한번 찬양을 같이 부르면서 베드로와 같은 단순함. 베드로 굉장히 단순한 성격이 베드로를 살리는 것 아닙니까? 유령이다. 떨고 있는데 어떡하려고 합니까? 베드로는 뛰어내리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시면 풍량을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라면 물 위를 걷도록 일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주님 아니시겠니?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주님이 부르시니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41살, 옥한흠 목사님을 통해서 뜬금없이 고등부 하던 저에게 교회 개척해라. 그리고 얼마 뒤에 개척했는지 아시죠? 바로 했습니다. 해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등부만 했는데 어떻게 하지? 심방 가서 어떻게 하지? 해놓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믿음. 머리 굴리지 마세요. 그런 이야기 종종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시키실 때 no, 기도해 보겠습니다. 한 적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진짜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님인데, 내가 복잡하게 확인하는 기도를 하겠느냐고요. 단순함에서 능력이 나옵니다.






09월 1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희망의 대안으로 준비된 사람

희망의 대안으로 준비된 사람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3-16)


약 한 달 전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 교회에 전체 교역자와 직원들이 모여서 2학기 출정식을 가졌습니다. 2기 사역이 시작되기 전 먼저 은혜를 사모하자는 말로 출정식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용했던 본문이 열왕기하 6장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하고 아람 군대가 전쟁이 벌어지는 데요. 전쟁에서 기습 공격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방심하고 있을 때 허를 찔러서 기습하는 게 중요한데, 아람 왕이 기습 작전을 준비하고, 이것을 감행하면 너무 이상하게도 어떻게 알았는지 북이스라엘에서 기습공격 작전에 대응해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아람 왕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북이스라엘 정보력이 이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내부에 적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답답한 마음으로 조사해보니깐,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왕하 6:12)


당시 강대국이었던 아람 군대의 기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강한 군사력이나 정보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부에 내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기에 엘리사라는 영적 분별력을 갖은 한 사람 때문입니다. 준비된 한 사람의 위력이 이렇게 놀라운 것이다. 그때 제가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신학교를 들어갈 때쯤, 사랑의교회가 대단했습니다. 모든 신학생의 관심의 대상이었고, 옥한흠 목사님, 준비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가. 졸업하던 때에 사랑의교회 직원으로 들어가서 보니깐, 멀리서 볼 때는 옥한흠 목사님 한 분만 보였는데 들어가서 보니깐, 너무나 많으 준비된 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제일 많이 놀랐던 것이 당시 평신도 지도자라고 불렀던 순장님들이 곳곳에 포진되어서 제 마음으로 이렇게 성도님들이 훈련되면 이런 교회는 사단 이 공격할 수 없겠다. 위력이 대단했고, 제가 교회에서 중고등부 사역을 10년 했습니다. 너무 준비된 교사들이 많은 것입니다. 10년 동역하는 것이 꿈꾸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준비된 한 사랑하면 떠오르는 것이 테이프 선교회라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로 설교를 듣기에 테이프를 찾는 사람이 없는데, 당시 목사님의 카세트테이프를 신청해서 듣는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직워이 두 명 있었습니다. 공기도 안 통하는 밀폐된 곳에서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이분들은 테이프 복사밖에 안 하는 것입니다. 돌리고 복사하고. 수 천개에 라벨을 붙이고 우체국에 가서 발송하고. 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데 그 일에 임하는 두 여직원이 시간이 지날수록 감동인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행하는 모습이 잘 준비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가 꿈꾸는 교회가 그런 교회 아닙니까? 잘 훈련된 평신도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그 일들을 감당하는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준비된 한 사람의 위력. 이것으로 묵상하고 여름을 보냈는데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타락하여 심판의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타락하지 않은 한 사람의 위력에 대해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준비된 한 사람. 오늘 본문 말씀을 이런 포인트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의 위기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열왕기상 19장 4절 말씀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엘리야 입장에서 인생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왜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지 봤더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이제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탈진해서 희망이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엘리야의 절망이 너무 공감됩니다. 여러분 중에서 어떤 일에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한번 달려갔는데 잘될 수 없었던, 실패할 수 없었던 분들이라면 엘리사의 절망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악한 시대에 아합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악한 왕에 투정했고, 그는 믿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악한 것과 싸우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공의가 살아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달려갔는데 자기는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열광기상 19장 오니깐 달라진 게 없는 것입니다. 악한 이세벨은 점점 날뛰고, 공개적으로 그를 죽이겠다고 공헌하는 상황이 되니 엘리야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 절망하는 엘리야의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엘리야가 놓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하는 엘리야에게 어떤 대안을 주시느냐.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엘리야가 단 한 번도 생각을 못 한 대안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만 본 것입니다. 나만 홀로 본 것이다. 절망만 남았는데, 다음 세대를 향한 꿈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너로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오늘 본문에서 보는 엘리야의 위기를 반절의 위기라고 지었습니다. 인간이 갖는 치명성이 이렇습니다. 단절됨. 내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대안은 엘리사입니다. 이것이 왜 저에게 감동이 되었냐면, 설교 제목을 희망의 대안으로 준비된 사람. 이렇게 제목을 잡아봤는데요. 엘리사는 절망적인 엘리야에 대해서 희망의 대안이었습니다. 엘리사에 대해서 저와 우리가 모두가 다 이 시대의 대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꿈을 품는데 두 가지 삶의 목표를 갖고 기도하면 좋겠다. 이 포인트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 잘 준비된 사람 되기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제가 발견하는 엘리사의 진 면목이 있습니다. 너무나 잘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일 볼 포인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왕상 19:19-20)


열두 겨리소는 명예를 맨 한 쌍입니다. 소 스물 네 마리를 동원했습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소 24마리로 밭을 갈 정도라면 소가 알아서 밭을 가는 게 아니라, 인부들이 함께하는 게 아니라 많았습니다. 내려놓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처음 이민 가서 최저임금도 못 받으며 힘들어할 때 맨날 쫓겨났습니다. 3일 일하고 쫓겨나고, 3일 일하고 help wanted 잊히지 않는 25센트 시카고 기사 보면서. 집에서 놀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때 한국에 가서 신학교가라 하면 할렐루야 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때는 가만히 7년 계시다가 이제 겨우 빛 내고, 형제들 도움받아서 가계 내고, 3달 해서 쪼끔 하면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한국가서 목사 하라고 소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얼마나 민망합니까? 없는데 민망합니까? 형제들에게 욕 바가지로 얻어먹었습니다. 진득이 하는 게 없다고. 그런데 본문에서 엘리사의 참모습이 무엇입니까? 엘리사가 구멍가게 낸 정도가 아닙니까? 소 24마리를 동원하고, 요즘으로 치면 엄청나게 많은 직원을 동원할 정도로 큰 부자였는데 엘리사에게 소명을 준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버려 두고,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왕상 19:20)


엘리사는 소의 기구를 다 태웁니다. 안 돌아오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잘 준비된 엘리사.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준비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준비시키는 인물이 시대마다 있는데 대표적 인물이 다윗 아닙니까? 골라앗은 괴물입니다. 모든 군사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다윗의 말이 엄청 도발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5-26)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어린 다윗은 도대체 무슨 배짱이 있어서 도발적인 도전을 하느냐고요. 어떻게 가능했냐면, 놀랍게도 다윗의 손에는 물 맷돌이 들려있습니다.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요. 청소년 사역할 때 중고등부 애들을 굉장히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QT 안 한 애들을 일어나, 손들어. 수련회 할 때는 저는 폭력 목사였습니다. 아찔합니다. 요즘은 동영상 찍어서 올라오고, 큰일 났을 것입니다. 네 엄마 아빠가 눈물로 수련회 보냈는데 이게 뭐냐고. 얼마나 야단을 쳤는지 모릅니다. 입만 살아서서. 중고등부 애들, 대학 청년부도 그렇습니다. 온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고. 맨날 북한을 달라고 하고, 아프리카를 손에 달라고 하고. 근데 늬 물멧돌은 있니? 물멧돌 없이 큰소리치면 어떻게 하겠냐. 이게 다 아버지 닮아서 그렇습니다. 말로 천지를 만드셔서. 말만 잘하는 것 아닙니까? 네가 하나님의 대안이라면, 네 손에 물 맷돌 보자. 기성세대 어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물 맷돌 준비되어있습니까? 나이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놀라운 능력을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이 모양 이꼴 아닙니까? 지금부터 각성하셔야 합니다. 물맷돌 준비하셔야 합니다. 지난 한 주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다윗의 위대함이 뭐에요? 골리앗을 반드시 잡겠다고 물멧돌 연습한 것 아닙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양지키는 일이 자기 일이어서 그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물멧돌 아닙니까? 요셉은 닥쳐올 세계적인 기근, 7년 흉년을 대비하시는 하나님의 대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저 멀리까지 가 계시는 것입니다. 저 멀리까지 계획하시고, 우리를 대안으로 준비하는데, 요셉이 하나님의 대안으로 애굽으로 팔려갔는데 첫 번째 관문이 뭐였습니까? 그 집 여자애 성적인 유혹 아닙니까? 만약 요셉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아줌마 품에 들어가서 성적으로 무너졌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멀리 보고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시시한 것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저는 한 교회 담임목사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부목사들 절대로 성추행하지 않게 해주세요. 모든 사람이 성추행하면 안되는데요. 특히 부름 받은 종은 그러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투자가 얼마인데. 어떨 때는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너 절대 성추행하지 마라. 여성도, 성이 없어 성도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그런데 눈 돌릴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제가 무너지면 분당우리교회는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특새를 앞두고 식당도 안갑니다. 코로나 걸리면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이 의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새벽인데요. 오늘 새벽에 노아가 너무 마음에 감동을 줬습니다. 주일학교 때 불렀던 동요가 새벽에 툭 떠올랐습니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높은 산꼭대기에다 배를 짓는다


아니 신성한 동요를 트로트처럼 부르네. 배를 짓는데 높은 산꼭대기에 짓는 것입니다. 노아는 위기의 때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그다음 가사가 압권입니다.


앞집의 김 서방 뒷집의 박 서방 모두 모두 반대하여도
하나님 말씀대로만 짓겠습니다


왜 자꾸 트로트같이 느껴지지. 이게 아침에 저를 너무 감동시켰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느냐고요. 예수 잘 믿으면 어떨 때 오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과 역행하는 길에 노아 할아버지가 고마운 것입니다. 조롱을 참은 것. 노아의 마음속에 이런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수모를 겪어 냈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역사의 물줄기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게 노아 아닙니까? 너무 젖어 사는 분 없습니까? 성령님이 돌이켜 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대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원합니다.




2. 사람 키우기


사람 키우는 가정, 사람 키우는 개인이 되시길 원합니다.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왜 그가 낙심했습니까? 엘리야 머리에는 후계자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상의 전환을 주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에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했습니다. 너의 후계자로 삼으라던 그때 세 가지 명령을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5-16)


놀랍게도 엘리야 생애 가운데 한 것은 맨 끝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명령을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것만 행했는데 엘리야 선지자가 행하지 못한 첫 번째 두 번째가 엘리사가 했습니다. 여기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내 대에 모든 것을 다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데까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면 됩니다. 분당우리교회 오늘부터 두 달 반 동안 장년 출석 5,000명 체크하는데 저는 확신합니다. 그간 통계를 보고 그만두지 않아도 되게 됐습니다. 이렇게 선언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워낙 동안이라서 모르고 계시겠지만, 저 60대입니다. 40대인 줄 알았죠? 1만 성도 파송운동 배수의 진을 칠 때 그런 마음으로 했습니다. 장년 출석 5,000명이 안 되더라도 사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알아야할것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7~8년 더 남아있지만, 2대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를 탁월하게 뛰어넘는 2대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이미 다 기울어갑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특새를 준비할 때마다 비장해집니다. 외부 목사님을 쓰지 않는 게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꼭 가져야 하는 진짜 중요한 것. 나 아니면 안 된다. 왜 안 되죠. 중요한 진리는 이 없으면 잇몸입니다.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힘 빠지면 망한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단절되지 않습니다. 이미 기도하고 계시겠지만 11 교회를 선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만 밀어드리면 성장할. 수도권에서 할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서울을 포함한 교회. 그래야 거기를 찾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으니깐요. 1만 성도 파송운동이 40 교회로 마무리되길 원합니다. 진짜 꿈은 이렇습니다. 내년부터 대한민국 지도를 나누어봤습니다. 충청도권, 강원도권 ..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각 권마다 10 교회를 세우길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목사님 몇 명과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드림 센터 사회환원 팀이 본격적으로 가동했습니다. 외부 세 분, 내부 두 분과 상의하고 있습니다. 드림 센터 써보니 편하고 좋은데 우리끼리 쓰면 아깝잖아요. 사회에 환원했을 때 드림 센터에 강도 만난 이웃이 치유되는 것도 원하지만 저는 드림 센터에서 사람을 키우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이 잘 준비될 수 있었던 여러 요인이 사무엘이 이끈 라마나욧 공동체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까? 아둘람 공동체, 동굴로 숨었던 열악한 그곳이지만 다윗 시대에 일꾼들이 거기서 배출되었던 것을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드림센터가 아둘람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젊은 목사님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꿈을 같이 꾸자고요. 이찬수 목사의 시대는 정리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저는 떠오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정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로서 꿈을 꿀 때 가장분들에게 부탁합니다. 어떤 꿈을 꾸세요? 다 늙어서. 절대로 그런 말 마세요. 호흡이 다 하는 날까지 물 맷돌을 준비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까지 양치는 일에 목숨 걸 거리는 아닙니다. 다윗은 목숨 건 사람입니다. 자기 민족을 구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말만 잘하는 것 문제 아닙니까?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한 교회 담임목사로서 꿈꾸세요. 이 아이가 물 맷돌이 들려져 있는. 보통 아버지 눈으로 보면 아이들이 양에 안 찹니다. 왜 이렇게 어리지. 자기는 더했는데 까먹은 것이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가만히 보면 대기만성이 많습니다. 저는 우리 집 애들에게 자주 그 말 합니다. 이야 너희는 대단하다. 아빠는 그 나이에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맨날 노는 거 좋아하고. 교회 수련회 가서 게이이나 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하냐고요. 딸을 보면 철딱서니가 없어 보이나요? 특새때 아들딸 놓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부부는 부족한 게 많아서 우리 가문에 해놓은 게 별로 없는데 엘리야가 다 하지 못한 것 엘리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한 원칙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특별 새벽기도 부흥회 때 꿈을 꾸자고요. 물 맷돌 준비하는 다윗이 되겠습니다. 우리 아들딸, 어떤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는 잘 준비된 엘리사와 같은 하나님의 대안으로 길러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아들의 아들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09월 1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경의로움으로 가득한 예배

경의로움으로 가득한 예배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1-8)


지금 우리는 신앙성장을 위한 영적 기초 다지기 네 번째 항목 예배 회복 훈련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책을 뒤지다가 예전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토미 테니까 쓴 다윗의 장막 책의 추천서도 썼고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이번에 확 와 닿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의미 있게 다룬다고 생각한 데요. 앞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기억이 있는가? 건물 자체에 대한 기억인가? 그 직장에서 일어난 기억인가? 확실하건 데 어떤 건물에 대해서 따뜻한 기척이 있다면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한 일, 친구들과 놀던 일, 어머니가 꼭 안아주던 일이다. 당신을 향수에 젖게 만드는 것은 그 집의 외면적 구조가 아니라 행복한 사건일 것이다.


이게 참 와 닿는 대목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분이 자기가 경험했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는 데요. 한 번은 저자가 자기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집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아마 다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내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네. 나무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 너무나도 신이 나서 날씨가 35도가 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서 다니면서 기쁨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데요. 차에서 에어컨 켜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 차에 들어가 있느냐 했더니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이 짐작 그대로입니다. 너무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큰딸이 자기 딸들 대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빠 아빠가 이 집에 의미를 두는 것은 아빠가 갖은 추억 때문이잖아요. 우리는 아무런 추억이 없다고요.


저도 똑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경북대학교 2년을 다니고 미국에 갔기에 학교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캠퍼스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한 번은 우리 아이들 데리고 거기에 갔습니다. 토미 테니 딸들처럼 과격하게 차에 가 있고 하지 않았는데 너무 신이 나서 예기가 아빠가 낮잠 자던 곳이야 계속 구경을 시켜주다가 보니깐 얼굴에서 온 표정에서 자기들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루해 죽겠습니다. 한 번은 실패하고, 너무 더울 때 갔나 해서 날씨 좋은 날 가서 또 한 번 보여줬는데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비슷했습니다. 성경 여기저기를 묵상하다가 저자가 사도행전 15장을 본 것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6)


저자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생긴 것입니다. 한 님은 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고 싶어하시는가. 의미 부여로 치면 최초로 지어진 모세의 장막도 있고, 규모, 웅장함으로 치면 솔로몬의 서전도 있는데 하나님은 왜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기를 원하시는가. 묵상하는데 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느냐, 내가 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고 싶어 하냐고. 그것은 추억 때문이란다. 책에 이런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곳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다윗의 장막에서 경험하였고 보물 같은 추억을 갖고 있다. 저에게 너무 소중하고, 저도 지금도 거기를 지나가면 꼭 경북대학교를 지나서 저 혼잔 두세 시간 거닐고, 약간 제가 감상적이죠. 어김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서 마음이 좋은데요. 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을 거니느냐면, 거기서 만났던 기도 각 성회에서 경험했던 친구들, 선배님들의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민 가서 경험한 것인데요. 그립다 못해 전봇대가 그립습니다. 전봇대라는 건물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 주변에서 겪었던 추억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쌓으신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다윗의 장막을 복원하기를 원하시는가. 웅장한 규모 때문이 아니라, 의미 부여가 아니라, 하나님 백 상이 교제했던 기쁨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에게 굉장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건물에 집착하는 것 아니냐. 책에 나옵니다. 건물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옆에 체육관 여름에 40도, 겨울에는 발이 시려울 정도라고 하는데, 왜 체육관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소중하냐 그것은 하나님과의 추억 때문입니다. 드려지는 예배가, 저는 토미 테니의 자녀들, 우리 집 아이들이 보였던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구경시켜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마음 아픈 것은 자녀들에게 예배가 낯선 경북대학교 캠퍼스 같은 것 아닙니까? 아빠는 가슴 벅차지만, 아이들은 지루해서 에어컨 킨 차 안이 좋은. 영적인 현실 아닙니까? 자녀들에게도 전수시켜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 이사야 6장에서 너무 소중한 추억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나라를 엄청 잘 다르신 왕입니다. 군대를 재조직하고 정비하고 재임 기간 정치를 잘해서 영토가 엄청 확장되는 왕이었습니다. 윌리엄 듬브레가 쓴 우시아 왕 평가를 보면, 거듭되는 개혁으로 다윗왕에 견줄만한 영광을 가져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다윗왕에 견줄만한 왕이라면 끝난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정치를 잘한 왕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이 웃시아 왕이 죽던 해입니다. 그렇게 정치 잘하고 모든 백성이 의지한 왕이 죽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위시해서, 자기들이 너무나 의지하던, 왕이 죽었다는 것은 자기가 의지한 무엇을 의지한 상태. 비참한 상태 표현이 웃시아 왕이 죽던 해입니다. 우리가 매달려 참 의지하던 무엇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때입니다. 임재를 목말라 매달릴 때입니다. 비참한 현실을 회복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 그 상황에서 어디를 찾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찾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2-3)


눈을 떠보면 웃사야 왕이 죽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사야 배경 아시잖아요. 1장에 보면 영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경제적인 내용을 봐도 먹구름이 온다. 정치를 봐도, 교육을 봐도 어디 하나 시원한 곳이 없는 상황입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우리가 매달려야 하는 것은 이사야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너무나 답답한 것입니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니깐,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서랍들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 세상살이 중에 주일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 그분이 주신 소망으로 숨 쉬는 시간입니다.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입니다. 배터리가 점점 막대가 줄어들고, 요새는 숫자로 표현하더라고요. 20프로 남았네 2프로 남았네 이게 꺼지게 생겼네 이런 상황에서 함께 모여서 영적으로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배터리 충전소가 교회입니다. 의욕이 생기지 않는 모든 분이 영적인 충전이 일어나서 100으로 충전이 일어나는, 영적인 충전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 너희가 예배하려고 나와 있지만, 마당만 밝는다. 이런 표현을 이사야에서 쓰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이사야가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최근에 돈 셀리어스가 쓴 예배의 감각. 예배는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보고. 듣고, 만지고, 감각이 작동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맛보아 알지어다. 경험해야 합니다. 오감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그분을 경험하고 맛보는 것. 예배를 통해서 회복해야 할 네 가지 감각이 있다고 합니다. 경회의 감각, 기쁨의 감각, 진리의 감각, 희망의 감각. 네 가지 감각을 되찾아야 하고 하는 데요. 네 가지 감각하고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네 가지 감각을 이 책에서 차용했습니다. 여기서 요구들이 너무 와 닿아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예배와 관련해서 회복해야 할 네 가지 감각




1. 경외의 감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너무 크신 그분께 압도되는 마음. 이것이 경회의 감각입니다. 이사야가 고백하잖아요.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우리 시대는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하잖아요. 특히 청소년들을 보면 참 불쌍해요. 너무 어릴 때부터 입시 지옥으로 몰고 가서 이 아이들의 감각이 다 죽은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애들에게 말을 겁니다. 아내가 애들이 싫어한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합니다. 잘 있었니? 학원 갔다. 오니? 안녕? 잘 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제 아내 말이 맞아요. 웬 아저씨가 이러는게 짜증 납니다. 나 방금 이상한 아저씨 봤다. 굴하지 않고 하다가 요새 안 해요. 저도 지쳤어요. 무슨 말로 따뜻하게 말을 해도 대응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요. 이들이 사회 주역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희로애락이 없어요. 낯선 사람의 호의 환대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요즘 추석에 아이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너는 왜 추석을 시큰둥하게 보내느냐. 우리는 추석이 축제였습니다. 옷을 사주니깐. 시장에 데리고 가서, 딱 맞는 옷을 사줍니까? 세 번을 접어야 이는 옷. 왜, 내년 추석까지 입어야 하니깐. 나이키를 사줍니까? 시장에서 운동화 하나 사주시는데, 그 감격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새 옷 입고, 고무신 신고 다니다가 운동 신으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고, 추석이 되면 너무 기쁨이 있는데, 옷을 사준다고 감격합니까? 너무 풍요로운 것이 문제 아닙니까? 불행한 세대입니다. 경이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설교를 준비하다가 창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척하고 너무 피곤함에 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개척하고 몇 년 있다가 그랜드 캐년 관광을 갔습니다. LA에서 차를 몇 시간 탔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차 타고 가는데, 언덕을 보면 협곡이 있다고 하는 데요. 딱 섰더니 그런데 캐니언협곡 봤더니 달력하고 똑같네.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목회하느라 감성이 다 죽었습니다. 그때 밥 먹는 시간이 괴롭고 자는 시간이 괴로웠습니다. 캡슐 하나 먹으면 안 먹으면 되는 것 안 만들었느냐고. 밥은 누가 먹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어서 그걸 먹겠느냐고요. 매일 잘 때마다 꼬박꼬박 자야겠느냐고요. 그러던 상황이니 그랜드 캐년협곡 보고 시큰둥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의 반응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 원래 호들갑 스럽잖아요. 어메이징, 맙소사. 이게 오늘 우리들의 정서에요.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 사람들 관광을 꼬집은 말을 봤는데 패키지고 가면 하루에 갈 수 없는 코스를 돈다고 합니다. 이유가 코스만 돌아서 그렇습니다. 차 타고 빨리 다음 코스를 가야 합니다. 이것을 관광이라고 꼬집은 글을 봤습니다. 감탄이 없으면 안 간 거랑 똑같아요. 그랜드 캐니언은 달력이랑 똑같네 하고 와도 되는데, 예배는 그렇게 드리면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


본당에 있나, 집에 있나 그게 아니라 내 마음이 실려있는 것입니다.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잘 안 되는 시대 아닙니까? 예배자가 되고 싶다면 주중에 훈련하셔야 해요. 하나님의 경외심을 감탄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지난 추석에 100년 만에 가장 둥근 달이 떴다는 기사를 보셨잖아요. 저는 새벽이네요. 제 아는 후배 목사님이 보름달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이 집에서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향하여 놀라운 감탄을 새벽에 드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진을 당회 장로님들에게 토스했습니다. 이 사진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이들이 집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마음에 감탄되어서 장로님들에게 보내고 글을 썼습니다.


저의 후배 목사님의 아들이 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달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 속에서 더욱 큰 그림을 그리는 인생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 시간 기도합니다. 그러고, 29 분립 개척한 목사님들에게 똑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목회하느라고 바쁜 것은 알겠는데 너무 현실에 함몰되지 않기를 바랐거든요.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광대하신데,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인데 우리는 아웅다웅 몇 명 출석했나. 이런 것을 떨칠 수 있는,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경외감으로 내 존재가 커지는 그 사람이 예배자가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그림으로 인생을 그려 나가니깐 이들이 보는 자연은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100년 만에 둥근 달을 보면서 토끼가 있나 없나 보자 그러셨습니까? 여호와 우리 주어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피조물로서 존재의 귀함. 인자가 무엇이관데.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회복되면서, 자녀로서 여러분의 존재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2. 기쁨의 감각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5-7)


현실은 백성들이 영적으로 타락해서 타락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이사야가 경험한 것, 위대한 하나님, 경외의 감각이 회복될 때 죄가 치유되는, 너의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사죄의 은총으로 인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도록 회복이 된 것입니다. 저 역시도 자격이 없는 목사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괴롭지만 매 예배를 통해서 입술의 연약함을 치유해주시고, 생각의 연약함을 치유해주시고 늘 회복시켜주시니깐 저에게 예배는 너무나 기쁨 예배입니다. 늘 회복이 일어나는.


옛날 할머니들이 모여서 부르시던 찬양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해병대 박수 할머니들이 원주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서 죄 사함 받아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가 씻겼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찬송가 421장. 내가 예수 믿고서)


설교를 준비하는데 60년대 말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북한보다 못살던 때입니다. 애는 9남매 먹일 양식이 없어서 고통받던 때입니다. 기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때, 주의 피로 죄 씻겼네. ‘주님 밝은 빛 되사 어둠 헤치니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이게 모든 분이 부를 수 있는 노래 아닙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지난주일 예배의 중요함을 설교하면서 갓난아기 3살, 2살 재우는 것 내가 했다고. 그래서 이 노래를 불러드렸잖아요.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집에 갔더니 온 아이들이 이야기합니다. 그 노래 기억난다고. 제가 성공한 것이에요. 세뇌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 세뇌된 것입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게 없던, 이사야처럼 사죄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는, 예배의 기쁨을 매 예배 때마다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3. 진리의 감각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 데요. 이렇게 예배하는 자. 어떻게 예배하는 자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고, 그렇게 오감으로 감성적으로 드리는 예배만 추구하면 안 됩니다. 냉철하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나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고발당하는 예배. 그래서 이사야가 본문 5절에서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위로하는 설교여서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는 예배는 처절하게 진리가 자기를 관통하는 것입니다. 네가 그래서 목사냐. 입만 살아서. 처절하게 성령의 책망을 받으면서 존전 앞에 입술이 치유를 경험하는. 영과 진리가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오늘 웃기는 말을 하자. 오늘은 웃기는 게 없네. 그게 예배가 아니라, 진리가 내 심령을 관통할 때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인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4. 희망의 감각


아무리 이사야가 예배는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감각이 작동하는 예배라더라도 8절이 없다면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이것을 소명의 말씀으로 읽었지만, 그 바탕에는 이사야에게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민족 안 끝났다. 희망이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가능하다. 거기서 이런 결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 마치고 화요일 오전까지 경험한 게 이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고. 제가 여기에 걸림돌이 될까 봐 강제 안식년을 갖고, 출석 5천 명이 안 줄면 사임하겠다고 했는데, 다음 주부터 두 달 반 체크하곘다고 했는데 행정 목사님이 자료를 보냈습니다. 내용이 파송 예배드려진 그 주일부터 지난 주일까지 예배 평균 출석률을 보내주었는데 3,242명이에요. 저는 하나님 앞에 약속되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절차를 밟기 위해서 두 달 반 하는 것이지, 29 교회 정착했습니다. 마음에 굉장한 마음에 기쁨이 있는 데요. 그렇게 하고 집에 왔는데, 이 놀라운 희망의 감각을 회복시켜주셨는데, 여러분이 다 아시지만 중지자들, 순장 7~80%, 리더 다 파송 받아 가고 사실 우리 교회는 위기입니다. 교회가 잘 안 움직여집니다. 모임도 잘 안되고, 유치부 6살 먹은 애, 교사가 없어서 선생님 한 분에 애들이 15명이라고. 호소해도 그 주에 딱 두 명 자원하는. 장애인 부서 학생 장애인 부서, 청년 장애인 부서가 있는데 11명의 교사, 총 40명의 교사가 필요하다고 눈물로 호소했는데 교사 자원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난주 1만 성도 파송운동 매듭을 짓고, 화요일 새벽에 강타한 꿈이 이것입니다. 이제 헌신하자고 하면 화 자원하고, 교회에 남아서 충성하는 분도 계시지만 예전의 분당 우리 교회가 아닌 것이 저에게 재료가 되어서 희망이 되었습니다. 화요일 오전까지 뜨거움을 주셨는데 이런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분당 우리 교회는 초신자가 많아서 교회가 잘 안 된다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초신자가 모이는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초신자들이 너무 빨리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성숙해지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겠습니다.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면, 이 교회의 시스템을 초신자 성장에 맞추기를 원합니다.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되는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업되서 하나님 앞에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초신자 2만 명 보내주세요. 1만 성도 파송운동 또 하겠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 목사니깐, 이런 희망이 용솟음쳤다면, 각자 여러분에게 회복해야 할 희망은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은 이제 회복이 어려워. 이런 상황에 놓인 분에게, 이사야를 통해서 내가 한번 힘내보겠습니다. 이런저런 삶의 현장에서 예배를 통해서 희망이 되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변해서가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다시 한 번 힘을 얻어보겠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지난주가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신 12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린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제 사명을 다 하고 네가 움직일 때다. 네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야 한다. 다다음주 부터 특별 새벽기도 부흥회가 시작되는데요. 주제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계승.






09월 0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예배를 향한 목마름의 회복

예배를 향한 목마름의 회복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 분당 우리 교회는 모든 것을 기초부터 새로 하자. 영적 기초 다지기를 위한 6가지 훈련을 계속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6가지 중에서 세 가지 항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 묵상.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다. 이것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교회 이름을 잘 지어서 그렇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잘한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잘한 게 교회 이름입니다. 전국의 교회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더라고요.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게 해달라고. 전국에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농담으로 동기 목사님을 말하면, 우리 교회는 자리 잡았으니 당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라. 교회 이름을 너무 잘 지었지만 기초 다지기 훈련을 묵상하다 보니 만약 하나님께서 시기를 다시 돌려서 너 교회 이름을 어떻게 지을래? 하면, 저는 우리 교회라고 짓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씀 묵상 교회라고 지으려고 합니다. 다음 주 부터 이름 바꿀까요? 말씀 묵상이 너무 중요해서, 회사 갔는데 말씀 묵상 교회 다닙니다 하면서 말씀 묵상 안 할까. 이름을 짓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분당우리교회 특징이, 섬기기를 잘한다. 이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는 말씀 묵상 잘하는 교회야. 이것이 첫 번째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 훈련입니다. 기도는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날 때부터 이 분은 기도 잘하게 태어난 게 아닙니다. 기도는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저 권사님이 어떻게 기도가 충만하게 되었나. 그만큼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혼자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를 방치하시지 말고, 나는 기도가 안 돼. 원래 다 안되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성장해갑니다. 분당우리교회는 2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훈련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항목은 공동체성 회복훈련입니다. 결혼은 절대 혼자 못 하잖아요. 똑같이 신앙생활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았습니까?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나고, 신앙은 좋은 공동체를 만나면 끝난다. 예수님 만나 인생의 방황이 끝날지 모르지만, 신앙은 함께 이루어져 가는 교회 공동체가 세워져 나갈 때 우리들의 신앙의 방황이 끝납니다. 분당우리교회는, 수많은 교회는 너무나 건강한 교회. 신앙의 방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공동체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적 기초 다지기 네 번째에 대해서 보려고 합니다. 예배 회복입니다. 네 번째라고 했지만, 앞에 세 개는 예배 회복을 위한 준비 훈련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배는 1번으로 꼽습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은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온르 본문을 갖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엄청나게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서 수가성 여인이라고 부르는 데요. 수가성 여인은 인간적으로 야베스 이상으로 결핍 덩어리입니다. 상처가 많고, 대인관계의 기피증이 있고, 공동 우물에는 사람 없을 때만 가서 물을 길으러 가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수가성 여인으로 두 번 설교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묵상을 하다가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두 가지 참 중요한데 왜 자각을 못 했을까. 확 와 닿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놓친 것은 모두가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인 이 여인을 음란한 여인, 성적으로 타락한 여인이라고 설교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18절로 하는 추측인데요.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이번에 보니깐 그렇지 않아요. 여러 자료를 뒤지다가 발견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성이 얼마나 억압당하는 시대입니까? 당시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다섯 번 가정이 깨졌다는 것은 남자에게 다섯 번 버림받았다는 뜻이지, 성적으로 타락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게 너무 공감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음란한 여자가 다가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사마리아에서 희생당한 사람입니다. 대인기피증이 오고 사람 만나기를 피하고, 가슴 아픈 상황을 깨었고, 여러분 중에 알고 있었던 분은 예외이지만, 수가성 여인 하면 음란한 여자 생각한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서 사과해야 합이다. 성경의 인물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람에 대해 오해하고 함부로 파단하고 정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 분에 대하여 소문이 어청 떠돌았습니다. 남편이 목사님인데 외도해서, 상담하는 가정 전문가라는 분이 가정이 깨졌다. 이런 소문을 듣고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분과 같이 사역하는 가까운 분들을 만나보니 그게 완전히 틀린 이야기입니다. 멀쩡한 남편 목사님을 외도한, 타락한 목사로 만든 정죄하는 소문이 계속 떠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 해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는 판단을 안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뭔 이야기를 들으면 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 이야기 하려고 만났는데 왜 집사님은 남의 이야기를 하느냐고.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 조심할 것이 많다.


두 번째로 수가성에 대해 묵상하면서 예전에 인식하지 못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본질에 대한 목마름이 굉장히 강했던 분입니다. 이제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이 만나주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위대한 상담가세요. 여인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물 한 잔 줄 수 있겠느냐고 접근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은 이것을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일깨워 주시잖아요. 남편 이야기에 확 들어가서 끄집어내게 만드는 데요. 상처가 많은 사람이 대부분 그래요. 낯선 남자가 오면 거부감이 들죠. 마음을 잘 열지 못했던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보느냐.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게 19절에 나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


제가 발견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여인이 이 남자분이 비범하네, 선지자인가 생각을 하면서 여인이 보낸 태도가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8:20)


남편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요. 수가성 여인이 이 대화를 하는 이 분이 선지자구나 느끼면서 화재를 어디로 바꿉니까? 예배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이 여인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자기가 우울증이 오고, 추측건대, 사람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뭔가 어긋난 인생이 되었는데, 이 분과 대화를 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내 인생의 비극의 근원적 문제는 남편 문제가 아니라 예배 글재주였구나. 누가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평상시 본질적인 문제에 고민이 많은 사람이니깐 이런 깨달음이 금방 오는 것 아닙니까? 제가 지난주에 야베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야베스는 결핍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누가 결핍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고 하겠느냐고요. 우리는 모두 인생의 목마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목마름이 없을 것 같을까요? 목회자로 하루하루 너무 행복하게 사랑가는 저지만, 순간순간 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장치를 했습니다. 어느 정도 고상한 목마름이냐. 이 차이죠. 우리가 목마름의 단계를 높여야 합니다. 수가성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날 때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을 요구하실 것 같으세요. 그날 무엇을 상담하겠습니까? 이 분이 선지자네. 그런데 나는 왜 남자 복이 없습니까? 내가 가정에서 잘 지낼 수 있습니까?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합니까? 이 여인의 초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배였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태도는 무엇이세요. 주님 가정문제가 이렇습니다. 남편 문제가 이렇습니다. 이것을 구하는 것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계를 높이자고요. 근원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네. 선지자 같은데 그러고 본질을 꺼내는 이 태도.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잡다하지 않죠. 남편이 왜 나를 버립니까. 어떻게 하면 버림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도 요긴하지만, 예배로 여인이 주제를 바꾼 것처럼 근원적인 예배 문제를 거론한 것은 너무나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 예배 문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면 예배 문제는 마스터키입니다. 다른 문제를 열고 들어갈 수 있는 키입니다. 30년간 지켜본 것 아닙니까? 심지어 어린 중등부 할 때부터 보고 온 것입니다. 제가 사랑의교회에서 중등부를 맡았는데 당시 강남역에 있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애들이 강남 8학군 애들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애가 죽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살고,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서 몇 명이나 자살했습니다. 한 번 충격을 경험하니,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는 데 좀 있다가 한 명이 또 자살합니다. 제 마음에 어떤 두려움이 생기느냐면, 하나님, 토요일 말이에요. 내일 중등부 예배를 살려주세요. 내일 예배가 살지 않으면 그 다음 주 어떤 애가 뛰어내릴지 모릅니다. 너무 절박한 것입니다. 애들은 많아서 재적이 1,400명 되니 바글바글 거리고, 저 뒤에 애들은 뒤에 집중도 안 하고 핸드폰하고 문자하고 있으면 두려운 것입니다. 그 다음 주가 안전한데, 우둔한 종을 통해 주님 만나는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때 청소년 사역을 열심히 했지만, 행사는 거의 안 했습니다. 빨간 공휴일마다 축구대회, 등산대회 교회가 스포츠 센터도 아니고 이런 거 안 한다고 했어요. 모든 에너지를 예배에 집중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얘들이 살아납니다. 여기서 예배드리는 내 제자도 꽤 많아요. 어떤 제자는 저게 인간 되겠나? 이렇게 생각하던 제자 중에 너무나 훌륭한 제자가 있습니다. 자녀교육,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열고 들어가는 마스터 키가 될 줄을 믿습니다. 불편의 영성, 우리 교회가 개척했더니 주 중에 무슨 모임을 합니까? 성경공부를 합니까? 학교인데요. 개척 초기에 다른 것은 못하니깐, 주일은 예배에 목숨 걸자. 그래서 개척 초기 부교 역자들은 정말 괴로웠습니다. 화요일 아침 7시부터 불러서 예배 체크하는데 세 시간씩 걸렸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예배를 성의 없이 준비할 수 있겠느냐고요. 설교에 정성이 안 들어간다면 나를 질책해달라고. 20년 지나고 보니 그것 하나로 충분한 게 교회더라고요. 체육대회, 등반대회 없는 게 괜찮습니다. 1만 성도 분립하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 중심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살아나는 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의 수가성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예수님하고 이 여인이 한 것은 예배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면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대인기피증이 치료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달려가 소리를 지르는 변화가 일어난 것 아닙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내면의 목마름이 있으세요? 저도 있습니다. 내면에 풀리지 않는 인생의 심각한 어려움이 있으세요? 근원적인 날 때부터 해결되지 않은 결핍을 안고이 있습니까? 예배자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진행하는 한 구절 묵상. 이렇게 정성 만든 것 안 쓰면 제가 정말 바보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래선 안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침에 내용을 곰곰이 검색해서 내려받아서 써보세요. 지난주 금요일 묵은 땅을 기경하라였는데, 홈페이지에 그런 글이 올라왔는데,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인생의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하는 것을 봤습니다. 깯았는 김에 한 단계만 더 가봅시다. 지난주에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로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여기서 말하는 묵은 땅은 하나님을 찾지 않은 악한 태도, 이것을 버리는 것이 묵은 땅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매 예배는 묵은 땅을 기경하는 시간이 될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엿새 동안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고 내 멋대로 판단한 것 묻는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예배 회복을 위해서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정말 우리가 변화를 꿈꾸어야 하는 게 있는데,




1. 비 본질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0-22)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소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 비본질적인 것이야. 예전에 미국의 교회 성장학 교수님이 교회 성장에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 하나로 주차장 확보를 꼽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 교회는 주차장 확보된 교회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입에도 담고 싶지 않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분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예배는 누구를 집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2. 하나님께 집중하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예배는 누구를 집중하느냐 문제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암 5:4-6)


주차장 확보가 교회 부흥의 열쇠 아닙니다. 수많은 분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거기서 건성으로 때우면 예배를 안 드린 것입니다. 피곤한데 머리 만지고 여기까지 오셔서 이찬수 목사만 보고 가면 예배 드린 게 아닙니다.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치명적으로 병든 게 이것 아닙니까? 5주 쉴 때 다음 주 누가 오지? 그 다음 주 누가 오시지 출석 숫자가 달라지고. 이것은 방치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입니다. 제가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추진하면서 강제 안식년을 갖겠다. 1년 동안 없어지겠다. 그래서 그 이후 1년이 되든, 2년이 되든 출석이 5천 이하가 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 인간 이찬수가 걸림돌이 되면 나를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제 안식년이 뭐에요. 날 끌어내려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저희 교회에서 글자 그대로 1만 명 성도님들이 파송 받아 가셨고 29 교회는 이미 자립을 했습니다. 어떤 교회는 천명을 넘어선다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없어질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그냥 안식년 해야겠다 했는데 근래 마음 아픈 이야기가 들었습니다. 지금도 기존 신자 등록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꾸준히 새 신자 등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많이 등록할 때는 20가정이 등록하는 것 같습니다. 사역자들이 당연히 기뻐하죠. 그런데 모두가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누적되어서 목사님이 1년 뒤 5천 명 이상 출석하면 사임한다고 하는데 이후에 이런 분들로 5천 명 이상이 되면 어떡하나. 등록이 많아져서 부담을 갖는 것은 이건 아닌 것 같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으로 이미 1만 성도 파송운동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5천 명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코로나 19 영향도 있지만 5천 명 중에서 뚝 떨어지는 숫자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거 앞에서 흥정하고 싶은 것 없습니다. 이제는 강제 안식년하고 이후에 체크하고 그런 거 없고 그냥 하자. 당회에서 상의했습니다. 9월 셋째부터 11월 말까지 두 달 반 동안 평균 출석을 내서 5천 명 이하로 한 번 더 점검을 받고 매듭을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1부 예배 때 이렇게 설교했더니 성도님들이 마음이 힘든 것입니다. 교회가 안정도 안되었는데 힘들어하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러자고 꺼내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 은혜로 잘 왔습니다. 매듭을 짓자는 것입니다. 혼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1부 예배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5천 명 이하가 율법인가? 5천 명 이하가 되든 말던, 인간을 주목하는 게 심하면 저는 사임할 것입니다. 이것을 불안으로 듣지 말고, 우리가 기초다지기를 하잖아요. 제가 몸부림치면서 호소하는 게 무엇입니까? 기왕 예수 믿는데 성장이 있어야하잖아요. 예배는 장소도 아니고, 순서도 아니고, 절차도 아니고 누구를 주목하느냐의 문제이다. 누구를 경배하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배 마치고 나가면서 은혜 많이 받았다 그 말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게 초점입니다. 누가 여기에 설교자로 서느냐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분당우리교회 모든 성도님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예배자가 되시길 원합니다. 장소의 문제도 아니고, 주차장 확보도 아니고, 누가 설교하느냐, 저 사람이 나를 만족하게 하는 설교를 하느냐가 아니라 예배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의탁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오래전 일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청소년 사역에 미쳐서 정말 너무한 남편이었습니다. 아이 기저가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온 일이 많아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재우는 것은 내가 책임질게. 약속하면 뭐합니까? 잘 때 안 나타나는데. 제가 가면 아이들이 안잘 때 제가 재우는 일을 했습니다. 자장가 불렀는데 딱 한 곡 불렀습니다. 등을 토닥이면서


주께 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어떨 때는 10번을 불러도, 20번을 불러도 안잡니다. 그러면 힘들죠. 그런데 다른 곡으로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입술로 ‘하나님, 아이들을 세뇌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자장가를 불러줄 때마다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 드림이 기쁨 됩니다.’ 왜 이런 소원을 했을까요? 예배가 우리 인생의 마스터 키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원을 여러분에게 똑같이 빌어 드리고 말씀을 마치길 원합니다.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예배 회복의 온 정성을 기울이도록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8월


08월 2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결핍을 꿈의 재료로 승화시키자

결핍을 꿈의 재료로 승화시키자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제가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로서 저 스스로 중심을 잡기 위해서 마음에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이나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구약의 인물 에녹입니다. 에녹 인물은 엘리야와 더불어 하나님이 그를 죽음을 보지 않도록 데려가도록 특별한 배려를 받은 인물입니다. 두 인물 중에서 엘리야는 성경에 놀라운 일을 해냈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는데 에녹에 대해서 기록이 없습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이라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1-23)


엘리야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엄청난 업적을 남긴 엘리야에 비해서 에녹은 초라합니다. 그런데 새롭게 발견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2-24)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엄청난 기적과 에녹이 남긴 한 마디. 무게감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목사로서 중심을 잡기 원할 때 떠올려지는 인물이 에녹입니다. 엘리야처럼 부를 갖는 종이 되고 싶습니다. 주일 설교를 하면 모든 심령이 뒤집히는 목사가 되기를 원해요. 그런데 목회를 해보니 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마음이긴 하는데 이 마음 안에는 불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주 내내 설교 준비 잘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설교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고, 설교 조회 수가 많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늘 엘리야처럼 불을 달라고 하면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에녹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엘리야처럼 나타나지 않더라도 내 삶, 하나님 앞에서 한 마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한 마디 놓치지 않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계속 묵상했습니다. 야베스를 묵상하며 여름을 보낸 데요. 야베스는 에녹처럼 업적이 기록되어있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야베스라는 이름이 수고,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새번역으로 보니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역대상 4:9)


야베스란 이름 관련해서 특이한 게 두 가지 있습니다. 애를 낳고 어떻게 고통이라고 지을 수 있습니까? 고통이 밥 먹어야지. 또 하나 특이한 것이 성경을 보면 아주 예외적인 몇 건을 빼고 아버지가 짓습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엄마가 짓습니다. 아마도 야베스는 유복자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분석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야베스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아기와 산모가 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아이가 태어났을 것이다. 분석하기도 하는 데요. 어느 분석이 옳은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죠. 추측하는 것은 결핍을 갖고 태어난 인생이다. 여러분, 누가 이런 인생을 닮고 싶겠습니까? 이번 여름 내내 야베스와 관련해서 집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구약 역대상에 보면 사람 이름이 엄청 많이 나옵니다. 역대상에만 무려 500여 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역대상 4절에만 44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헬라의 아들들은 세렛과 이소할과 에드난이며 고스는 아눕과 소베바와 하룸의 아들 아하헬 종족들을 낳았으며(대상 4:7-8)


수하의 형 글룹이 므힐을 낳았으니 므힐은 에스돈의 아버지요 에스돈은 베드라바와 바세아와 이르나하스의 아버지 드힌나를 낳았으니 이는 다 레가 사람이며(대상 4:11-12)


야베스에 이르러서는 인생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그리고 사람 이름이 쭉 나옵니다. 굉장히 독특하지 않습니까? 묵상하다 보니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람 이름을 쫙, 코로나 처음 시작했을 때 이름 적었잖아요. 제가 명단을 쭉 부르는 것입니다. 누구 집사님, 권사님 설명하다가 어느 한 분에 이르러 한 분은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라 더 부연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단을 쭉 부르다가 애들아 야베스는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인생을 짚고 넘어가야 해. 야베스를 묵상한 이유가 있는 데요. 마음에 뜨거움이 있는 게 이 대목입니다. 야베스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주목거리가 없습니다. 그 매력 없어 보이는 야베스를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20대 초반 장기 판으로 치면 졸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저 스스로 인식하기에. 저 스스로 매력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공부도 못하는, 얼굴도 못생긴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처음에 이민 가서 너무 열등감이 많아서 죽어버려야겠다. 자살 충동도 많이 느낀 데요. 어느 날 슬픈 순간이 있었습니다. 나 같은 거 죽어서 누가 슬퍼하겠는가? 얼마나 철없는 생각입니까? 가족이 있고, 교회에 친구들이 그렇게 있는데. 그것 깨닫고 열 받아서 안 죽었잖아요. 그렇게 장기판의 졸 같은 인생이었는 데요. 믿음이 들어오고 나서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때는 성경을 너무 안 읽어서 야베스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껍데기만 갖고 갖은 게 없고 열등감이 많냐. 네가 영적인 야베스다. 네가 너를 주목하고 있다. 믿음이 들어오고 나서 결정적으로 달라진 게 이것입니다. 저는 움직이는 열등감이었는 데요. 저에게 열등감 없습니다. 몇 명 모이지 않는다고 초라하지도 않고, 많이 모인다고 우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인생으로 충분합니다. 야베스를 묵상한 이유가 있는 데요. 저는 요즘에 마음이 슬픕니다. 창립 20주년이 되었잖아요. 2002년에 교회를 개척했을 때 몸 바처 충성한 연령층들이 40-50대 분이었습니다. 정말 인생을 바쳐 섬기셨어요. 사람들이 몰려드니 어떤 순장님은 다락방을 세 번 하셨어요. 온 에너지를 교회에 다 쏟으셨습니다. 50대 이셨던 분들이 70대가 되셨고, 40대이신 분들이 60대가 되셨습니다. 대부분 은퇴하셨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면 이 분이 수고한 히스토리를 모르니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치부되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데. 제가 이게 자꾸 속이 상하니 하나님이 야베스를 묵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현역시절 주의 교회를 섬기셨다가 은퇴하시고 이 교회에서 존재감도 별로 없어보이고, 마음이 우울한 분 있으신가요? 성령님이 이분들에게 말씀해주시길 원합니다. 네가 야베스야. 껍데기와 보고 판단하는 너의 수고와 과거를 모르지만, 여전히 너에게 집중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세대. 저희 어머니같이 이제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하는 수많은 어른들에게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여전히 너에게 주목하고 있어.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은 것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실 제가 이번 여름 내내 참 마음이 슬펐던 것이요. 1만 성도 파송운동 후유증이 안 없어집니다. 미국 가서도 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어떤 집사님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분도 가셨나. 바로 와서 조사를 해보니 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우울해지는지 모릅니다. 가지 마시지. 순종해서 가신 것인데. 또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떤 분이 떠오른 것입니다. 막 찾아보니깐 교회를 찾아보셔서 교회에 남기로 하신 것입니다. 너무 다행이다. 여러분, 이 분이 교회를 위하여 일이 많이 해서,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필요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자녀 삼으시고, 야베스처럼 참 보잘것없고 결핍 많은 인생으로 파악하지 말고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2학기가 시작하면서 야베스를 묵상하고 설교하면서 이런 말씀을 여러분과 나눈 것이 너무 감사한데요. 주목받은 우리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는 데요. 야베스를 보면서 두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1. (성공이 아니라) 존경 받는 인생


야베스와 관련해서 성경의 첫 언급은 이렇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대상 4:9)


야베스가 자기 형제들보다 제일 부자였더라. 제일 건강했더라. 이것은 별책부록이고,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자. 야베스는 다른 형제들보다 가장 존경을 받는 자. 우리는 추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굳이 1번 내지 성공이 아니라를 왜 넣었겠습니까? 성공이 아니라 존경을 받는 인생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명예를 지키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목사들은 디그니티, 품위, 자존감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게 말합니다. 소탐대실하지말자.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어리석은짓을 하지말자. 눈에 보이는 자산보다 무형의 자신이 너무 소중하더라. 교회가 얼마나 건물이 대단하냐보다 중요한것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


오늘 저와 여러분은 너무 급하게 살다가 혹시라도 명예를 너무 쉽게 엿바꾸어 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지. 교회가 지켜야할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가슴아프게 읽는 초대교회의 부흥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2-46)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초대 교회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서요. 왜 그렇습니까? 명예를 잃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할 때 꿈은 하나였습니다. 분당에서 유명한 교회, 애당초 품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장차 분당우리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탐욕적이라고 하니깐, 자기 것에 집중한다고 하니 어떻게 전도가 되겠느냐고요. 개척한 교회 중에 조금만 밀어드리면 불같이 일어날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드림 센터 수고하고 땀 흘려 드린 헌금으로 만들어진 드림센터를 사회에 환원합니까? 교회의 이미지가 자기 것에 집착하고, 한 번 들어오면 내놓을 줄 모르는 이미지로는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명해지는 것 좋지만 별책부록입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나 하나님이 주목하는 사람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겨 야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꿈을 품고 달려나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고난과 결핍을) 꿈으로 승화시키는 인생


야베스와 관련된 인생이 결핍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잖아요.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대상 4:9)


이런 결핍으로 시작한 인생이지만,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대상 4:10)


야베스에게서 너무나 존경스러운 모습이 이렇습니다. 자기가 갖은 아픔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재료로 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같은 결핍을 울분과 분노로 쓰고 있습니다. 은혜받고 달라진 것은 여전히 목회자로서 별핍을 느낍니다. 많은 결핍을 느끼지만, 그것으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재료로 쓸 때 명예롭게 만드는 재료로 사용합니다. 이번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처음에 이민을 간 80년대 초는 정말 열악하고 결핍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20대였는데 이민 오신 집사님들 이야기를 들을 때 태평양을 건널 때 300불 들고 왔다. 그 어른들 구역예배를 할 때 나 투잡 뛴다. 나 셋잡 뛴다. 투는 영어인데 셋은 한국어로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억이 납니다. 아니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요. 낮에는 세탁소에서 다름질하고, 밤에는 빌딩 청소하러 가는 것입니다. 어른들 입에서 한 두 주에 한 번씩 들려졌던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참 가난했고, 300불 들고왔지만 죽어라고 고생하고 투잡 뛰고, 셋잡 뛰면서 자식들만큼은 가난하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시카고에 인도 사람도 많고 바퀴벌레도 많은 한인타운은 없어졌습니다. 제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 80년대 초 보여지던 야성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2세, 3세 고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들 때문에 결핍이 없으니깐.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저는 29 교회가 너무 빨리 자리 잡는것 진짜 감사합니다. 많은 가나안 성도들이 모여들고 있어서 분당우리교회 나간 숫자보다 모인 숫자가 훨씬 많아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목사님들이 너무 빨리 자리잡혀서 부작용이 생기면 안 되나. 이 과정은 거쳐야 하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결핍의 과정이 하나님을 찾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이게 여호와 이스라엘 하나님 아뢸 때. 크라이드 아웃이라고 합니다.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지만 아뢰는 게 아니라 부르짖어 이르되. 이민 사회를 보면서 결핍이 없어짐으로 인하여 부르짖음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분당우리교회가 그 상황 아닙니까? 개척교회 70평 상가를 얻었다가 인근 교회 반대로 쫒겨나고. 고마운 독수리 학교 대안학교 빌려서 젊은 목사님, 전도사님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강대상부터 악기 트럭으로 가고, 가져와서 창고에 보관하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 결핍을 꿈으로 승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매 주일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송림 중고등학교 예배를 시작하면서 주일은 너무 행복한데, 주중에 모일 때가 없었거든요. 그 결핍이 있어서 가정, 가정에 모이고, 우리 교회가 제자훈련이 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그룹으로 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퇴근하고 금요일 8시 9시에 모이고. 그 결핍을 하고 부르짖어 은혜를 구하고. 요즘 분당우리교회는 위기입니다. 야성이 안 보입니다. 여러분, 모 교회라는 열정을 회복해야 29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국 교회의 힘이 되도록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눅 18:35-38)


예수 잘 믿으면 반드시 방해꾼이 등장해요. 그래서 주눅이 들어서 쑥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눅 18:39)


오늘 우리의 결핍이 너무 쪼금만 부르짖다가 쑥 들어가는 것입니까? 절박함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방해해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눈뜨기를 원합니다. 한번 제대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누가 뭐라고 방해해도, 나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척 초기에 그 열정이 잘 안 보이는 오늘날 분당우리교회가 아픈 것입니다. 이민교회에 아버지 세대에서 어머니 세대에서 투잡뛴다, 셋잡뛴다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러 왔다. 꿈을 꾸면서 이민사회를 만들었는데, 영어 능통한 다음 세다가 불같이 일으키기를 원하는데. 저는 목회자로서 결핍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야베스를 묵상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2학기 우리의 소원 구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조용히 하라고. 시끄러워. 이 거지가 절대로 조용할 수 없었던 이유가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 18:40-41)


분당우리교회와 이 시대 한국교회에 가슴 아픈 것. 내가 무엇을 구해야 하지? 툭 치면 나오는 것 있습니까? 금요기도회 왜 이렇게 안나오세요. 코로나라면서 오만 데는 가면서. 왜 기도회는 안 옵니까? 구할 게 별로 없는데. 쿡 찌르면 튀어나오는. 오늘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이번 여름 내내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20대 제가 그랬던 것처럼 20대가 장기판의 졸로 생각하는 분들. 무슨 일로 자신감이 꺾였는지 모르지만, 오늘 장기판의 졸로 인식하는 어떤 성도님들에게 이 말씀을 매개로 흔들어주시길 원합니다. 뭘 해주랴. 또 한가지 말씀드립니다.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20년 전, 30년 전. 온 에너지를 다 바쳤다가 세월이 흘러 은퇴하시고. 존재감이 없어진 수 많은 분에게 성령님이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려주시길 원합니다. 내가 너를 주목하고 있는데. 성령님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날마다 그 말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들고 기운 빠진 지금도 여전히 너를 주목하고 있다. 독생자를 내어주고 너를 구했거든. 하나님이 주목하는 인생으로, 결핍을 분노로 쓰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재료로 사용하시는 믿음의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8월 2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거침없이 달려가기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기 위해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나는 왜 일을 하는가? 책이 있는 데요. 새뮤얼 넥니 교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이 분은 라이트 형제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 아시잖아요. 세계 최초 유인 동력기를 만든 형제가 라이트 형제인데 넥리 교수는 라이트 형제와 경쟁하면서 비행기를 만든 사람인데요. 넥니 교수는 대단한 경력의 사람입니다. 하버드 교수를 역임했고 존경받던 고위 관료여서 유력 인사가 엄청 많았습니다. 비행기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나면서 미국 육군성으로부터 당시 5만 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후원받았고 당대 최대 드림팀을 만들어서 넥니 교수가 추진하는 유인 동력 비행기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여기와 비교하면 라이트 형제는 내세울게 하나도 없고 주목받을게 하나도 없는 형제였는데 결과는 다 아시잖아요. 넥니 교수는 세계 최초 비행기를 만든 게 아니라 무명의 라이트 형제가 만들었잖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엄청난 수많은 인재들이 만들었던 넥니 교수 팀이 라이트 형제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가. 책에 답이 적힌 것을 보았습니다.


넥니 교수는 비행기에 대해서 라이트 형제만큼의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업적을 찾아 헤맨 것입니다.


비행기 만든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최초 비행기를 만들어서 명성을 얻는 것에 관심이 섰었던 것입니다. 넥니 교수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 포기합니다. 이건 태도가 조건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형제를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는 목사니깐 저는 되묻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열심히 하는 목회의 동력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사명이기에 목회에 전념하는 것인가? 설교 열심히 준비해서 명성을 얻고 칭찬을 얻고 인정받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지니깐 여름 내내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아버지 저는 넥니 교수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갖춘 게 없더라도 그 라이트 형제라도 몰입하고 몰두하는 집중력을 허락해주시길 원합니다. 이제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은혜의 길이 무엇인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에서 지평설이라고 예전에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지 않았습니까? 지평설을 믿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대다수의 사람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이 잘못된 추정은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여행은 물론 탐험 활동도 거의 전무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멀리까지 항해하면 지구의 모서리를 만나서 추락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태어난 곳에서 보내는 삶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도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조금만 멀리 가도 툭 떨어져 죽으면 어떡하나. 모험도 없고 탐험도 없고. 글을 보면서 지구를 그렇게 만든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드셨는데. 그러다 보니깐 저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지평설을 믿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도전하고 달려가고 꿈꾸는 일이 안 되는 것인가? 이번 여름에 제가 어머니를 뵈러 미국을 방문했다가 남가주 지역을 방문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너무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남가주 지역은 태평양 바다를 끼고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해변이 많은데요. 한 번은 어느 해변을 갔는데 굉장히 독특한 게, 인공다리라고 하나요? 바다 안으로 인공다리를 만들었는데 엄청나게 길게 만들었더라고요. 한참을 안 오다가 끝에 가서 보니깐 제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느낌입니다. 막 그날 제 가슴이 격동하는 것입니다. 인공다리를 만들고 서 있다 보니깐 시야에 방해되는 게 하나도 없고 제 시야 전체가 바다입니다.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제 마음이 뜨거워지는 거에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지점이 신비롭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거침없이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그저 찰싹거리는 파도에 발 하나 담그고 하나는 땅에 닿고 파도 오면 도망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은혜 갖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남은 세월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제가 가슴이 뜨거웠던 어느 순간이 몇 주가 지났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좋습니다. 2학기 앞둔 이 시점에서 저를 격동시켰던 그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안되. 잘못 가다가 뚝 떨어져서 죽어. 나는 지평설을 믿어. 이런 연약함이 성령의 은혜로 씻겨져 나가고. 한번 제한 없이, 거침없이 달려가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참 많이 묵상했습니다. 사도바울을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설교제목 그대로입니다. 사도바울은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갔던 인물입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길은 엄청난 위험이 도사린 상황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결사대가 결정된 상황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행 23:12-14)


바울을 죽이기로 결성하고, 먹지도 않겠다는 협박이 달려가고자 하는 사도바울의 의지를 꺾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무슨 장애가 있길래 여러분의 인생길에 어떤 장애물이 도사리길래 제자리를 맴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번 여름에 여러 교회를 방문했는데 방문자인 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교회 사이즈와 다릅니다. 작은 교회도 꿈을 갖고 선교를 향하여, 건강한 교회를 향하여, 너무나 안정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도 1만 성도 파송 운동했는데,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호흡이 걷히기 전까지 사명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려갈 줄을 믿습니다. 지난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풀이 죽고 힘이 하나도 없으세요? 여름 내내 제가 주신 뜨거움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은 아직도 저 사람은 여름 동안 뭘 먹고 왔길래 흥분하나 그런 것 같습니다. 예배 한번 잘 드리면 우리 인생의 무기력이 떠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지난여름 내내 무기력하게 살아왔던 것을 한순간에 떨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 좋은 점은 한 번만 이야기하면 좋은 데 말 하기 전에 되면 좋은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어떤 난관과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는, 거침없이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 인생이 되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인도하심 으로 인한 확신


동쪽으로 가는 게 옳다. 서쪽이다. 이거 없이 가면 어떡합니까? 막 가다가 이 길 아니네. 이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여름 내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구절을 계속 되뇌었는데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행 20:22-23 새번역)


그 길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버티는 길인데, 성령께서 그 길이 네가 가야 하는 길이라고 인도해주셨길래 확신을 하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안주하고 살다 보니 그 길이 행복을 가져다주던가요?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죽이겠다고 결성 대가 협박하는데 바울이 왜 거침없이 가는 것을 아십니까? 23장 12절에 나오는데 11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바로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담대하라. 오래 예수 믿으신 여러분, 오래 예수 믿어서 소용 있는 것 없습니다. 한 달 전에 예수 믿었던, 예수를 영접한 다음에 인도하심을 맛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날마다 불안하고 두렵고, 연약한 육신을 갖고 살아가는데 주님께서 담대하라. 이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목회를 하고 있겠습니까? 못 견뎠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장애물 앞에 굴하지 않고 달려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선행조건이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작은 등불로 나를 비추어주시는, 인도하심을 맛보는 것.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진리의 성령님이 오셨잖아요. 그분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시잖아요. 날마다 물어야 합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주여 무엇을 하오리까. 자꾸 물어야 합니다. 이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까? 이 길이 원하시는 소명이 기다리는 길입니까? 자꾸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2. 목표에 대하여 올인(all in)


제가 올인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한 가지 일에 모든 일을 쏟아부음. 영어인데 국어사전에서 풀이하더라고요. 굉장히 중요한 단어인 것 같아요. 본문 24절이 올인 아닙니까?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행 20:24)


모든 분이 그러시겠지만, 저도 제 인생을 돌아보면 너무 중요한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저장된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개가 있는 경우가 있는 데요. 한 사건 장소가 미국 대사관입니다. 미국 대사관에서 제 기억이 나 인생의 전환이 몇 사건 중 하나입니다. 역 이민을 하고 한국으로 와서 목회하고 우리나라에서 신학교를 다니는데 신학교 졸업한 이후 계속 흔들렸습니다. 미국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어떨 때 이런 일이 생기냐?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그때는 목사님들이 이상하게 전도사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데요. 목사님이 이 전도사 커피 한잔 타다 줘. 속이 부글부글하며 커피 타러 여기 왔나. 내가 평생 이럴 건가? 뭐가 조금 안되면 미국 갈까? 원흉이 미국 시민권을 내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불씨를 없애겠다 하고 광화문 미국 대사관에 갔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반납했습니다. 그까짓게 뭐라고. 반납하고 오는데 마음이 허전하고 돌아가서 받아올까 이런 생각 물길하고 참 인간이 어리석어요. 저의 목회는 그 날이 진정한 첫날이에요. 돌아오니 마음이 비장해지는 거에요. 우리나라에서 적응 못 하면 끝장이다. 그것이 몰방입니다. 발걸음이 산만한 것 아닙니까? 에너지가 산만한 것 아닙니까? 미국은 골프가 테니스 치는 것처럼 싸니깐 골프 치자고 제안하는 분이 있습니다. 한 번도 흔들려본 적이 없습니다. 괜히 골프 시작했다가 재밌어서 빠질까 봐. 모든 사람이 골프에 빠져있으니깐. 설교 준비보다 골프가 더 재미있으면 어떡합니까?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목회보다 더 재미있는 것 하지 않게 해주세요. 설교 준비보다 재미있는 것이 생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설교 준비가 재미있고, 가끔씩 설교할때가 재미있습니다. 올인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 목사님들에게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올인은 무엇입니까? 잠을 자도, 찬물에 말아서라도 퍼넣어라. 금식을 해도 목회에 대한 열망을 갖고 기도해야한다. 올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목회할때 성도님들은 엿세동안 시시하게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남가주의 제가 갔던 곳은 너무 멀어서 못가니깐 인천이라도 다녀오세요. 동해 한번 다녀오세요. 속초에 가서 끝없이 펼쳐진 하나님의 넓은 자연을 들여다보시면서 꿈을 꾸자고요. 거침없이, 막힘없이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저는 요즘에 청년들이 자꾸 말을 줄여서 해서 힘들어요. 청년들이 이 생 망해서 무슨 말인가 했더닌 이번 생은 망했다. 진짜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하지 마세요. 이번 생은 망했다는 것 없어요. 다음 생이 없는데. 이번에 망하면 그냥 망하는 거에요. 그런 말하는 청년들에게 진짜 묻고 싶어요. 진짜 인생에 몰방해보기는 해봤습니까? 기회가 아직 있다고요. 하나님 살아계시잖아요. 내가 겪는 수많은 아픔과 꺾이는 것이 재료가 되어서 한 번 하나님께 달려갈 날이 있을 줄 알고, 젊은 나이에 이생망 하냐고요. 사실 저는 이번 여름에 마음이 비장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복잡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름에 어머니를 뵈러 미국에 갔습니다. 어머니 연세가 98세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형제들은 참 고맙습니다. 한국에 목회하는 막내 이 목사가 어머니 혹시 마지막을 못 보고 하나님이 어머니를 불러가실까 봐 노심초사를 해온 것입니다. 코로나 19 때 못 갔지만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올인해야하는데 여기저기 그래서 안 된다고 그래서 저도 마음이 두군두구 했습니다. 98세 연세에 코로나 확진 두 번이나 되었습니다. 1월에 비행기 표라도 샀다가 포기했습니다. 참 하나님 너무나 신실하세요. 기다려주셔서 1만 성도 파송예배 잘 드리고 미국에 다녀왔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짧은 3년도 안 되는 시간에 너무 많은 변화가 어머니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고 치면 요양병원에 계시고, 침대에서 24시간을 지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못 가시니 기저귀를 차고 계시고, 옷을 스스로 못 갈아입으니 직원들이 다 도와주셔야합니다. 저는 이번에 이런 선한 일을 하는 분, 연세 드신 노인분을 위하여 충성을 다해서 섬기는 분들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사명 없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 마음 아픈 시간을 보내고 그 다음 날 어머니를 찾아뵙는데 진짜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도 의식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맥에도 없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네가 봐도 나 초라하지? 그런데 나 쉽게 안 죽는다. 이런 말씀을 왜 하시냐고요.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그다음 하시는 이 말씀을 위해서 하셨다는것을 알고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다음 말씀이, 제가 어머니 뵙고 나오자마다 받아적었습니다. 기억을 놓칠까봐. 네가 보기에 초라하지. 그런데 나 쉽게 안 죽는다. 네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모습을 끝까지 볼 거라. 사실 저는 어머니 뵙고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이제 하나님 우리 어머니 천국 좀 데려가 주세요. 정신이 멀쩡하신데 침대에 24시간 누워 계시는 것. 여성으로서 존재감이 분명히 계시는데 남자 직원이 할 수 없잖아요. 여성 직원은 힘이 없으니. 옷을 갈아입혀주는 것. 마음에 부끄러움을 유발할텐데. 이제 우리 어머니 하나님 불러갔으면 좋겠다고. 안식하였으면 좋겠다고. 우리 어머니는 사셔야 하는 이유를 가진 것입니다. 막내아들이 목사가 되었는데 시시한 목사가 아니라. 힘을 주고 하는 말씀이 네가 하나님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끝까지 볼 거라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시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니깐 순간적으로 제가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시는 것으로 아는 거에요. 그래서 버럭 화를 내는 것입니다. 목회를 안 하고 왜 자꾸 오는데. 너 목회 대충하는구나. 그게 제 마음에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한국에서 목회하는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어머니가 올인하는 것은 목사가 되었으면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몰방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목회하잖아요. 어머니 뵈러 왔잖아요. 지금은 다 힘든 세월 아닙니까? 청년은 청년이어서 힘들고 아버지는 아버지라서 힘들고, 엄마는 엄마라서 힘듭니다. 다 힘듭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결론으로 이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힘들잖아요. 사는 데 좋아 죽어서 사는 사람이 몇 분이나 되느냐고요. 그렇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내 생을 포기할 수 없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갖고 계십니까? 98세 침대에서 보내는 저의 어머니가 사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신비로운 것입니다. 어머니의 각성의 한 마디에 제 마음이 너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교회 거의 1등으로 출근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것 아닙니까? 시시한 목사가 되고 싶지 않은 것. 그 모습을 끝까지 보는 것. 우리 어머니는 그것은 연명하는 것입니다. 침대에서 내려오지를 못하는데 무슨 교회에서 충성하느냐고요. 신비로운 것은 저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도전을 주셨고 뜨거운 가슴으로 준비하였고, 어머니의 자극을 주는 말씀으로 오늘 수 만 명의 성도님들이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주셨던 가상 칠언, 다 이루었다. 무엇을 이루셨는 데요. 주님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거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저를 시시하게 보면 안 됩니다. 저도 여러분을 시시하게 보지 않아요. 저는 여러분에게 올인한 인생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건, 그런 존귀한 사람답게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면서 지평선을 믿는 사람처럼 초라하게 살지 않고 거침없이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2학기가 시작되는 이 예배를 통하여 예배 한번 잘 드리면 오랜 무기력함이 끝나는 사건이 되기를 원합니다. 꿈을 갖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08월 1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곽규호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1-4)


당신의 헌신이 벽에 부닥칠 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삶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게 된다. 자신의 문제와 혼란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대로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기쁘고 감사하고 또 그런데 어느 순간 처음의 기쁨이 사라지고,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 자신에 실망이 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품게 됩니다. 이제는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장되고 싶다.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이런 문제를 만날 때마다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깊은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의 제자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의 말씀이 참 많이 묵상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온종일 머리를 떠나지 않고 묵상이 되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까 이렇게 질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르게 걷지 못하는 자에게 이런 설명을 하는 저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도와줍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의 죄나 잘못 때문이 아니니, 무엇인가 설명하는 제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전화나 이메일로 상담 요청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답변의 메일을 드렸습니다. 메일 남겨주시는 삶에 비해 부족한 답과 비실제적 답에 대해 화가 날법한데 기도 부탁하고 마음을 나눠주심에 감사합니다. 부끄럽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양해를 구하고, 설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 선포는 능력이 되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6-8)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듣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합니다. 우리의 모습과 비교되며 우리도 담대히 선포하는 이런 베드로를 닮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가정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많은 문제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능력이 내 안에 없으니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계속 설명하고, 변명하고 화를 내기도 하는데 문제의 원인이 남아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선포하고, 선포하니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려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제자리이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봅니다.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것이, 새로워질 수 있다.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베드로 과거를 잘 알고 있고 우리의 연약한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순간 아닙니까? 이때 꾸벅꾸벅 존 것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행 4:13 새번역)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자신을 만난다. 자신의 적날한 모습을 베드로를 통해 보게 된다. 흔들리는 베드로를 통해 우리의 흔들림을 보고, 베드로의 의심속에서 우리의 의심을 보고 움츠려든 베드로를 통해 우리의 움츠림응ㄹ 본다.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도 하고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실패의 자리에 있는 베드로를 사용하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질문으로 생각해보려고합니다.




1.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나는것이 아니라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만남 이후에 깨트려졌습니다. 삶의 목표와 주인이 바뀌고 삶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으신가요? 제가 분당우리교회 부임했을때 한 목사님이 이렇게 묻는거에요. ‘박 목사 박목사는 언제 예수님을 만났어?’ 갑자기 질문을 받았지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사건은 중학교 2학년 수련회였습니다. 물컵에 물이 있는데 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은 투명하고 갈증이 생기면 마시면됩니다. 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물을 마시는것은 다릅니다. 중학교 2학년때 예수님은 이렇게 찾아오셨어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물을 마신것처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데 체험한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올라갈때 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 부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주인은 제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간다고해서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 한분만입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 후서는 자신의 인생 마지막에 쓴 편지입니다. 인생 마지막에서 자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인 시므온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믿음과 같은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벧후 1:1)


영화 한산에 나온 박지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거북선 설계자로 나옵니다. 인터뷰하는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연달아 대박이 나서 좋으시겠습니다. 배우가 이렇게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을 맞은 분이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옆에서 거든 것밖에 없습니다. 기자가 대세가 아니기엔 광고를 6개나 찍으셨어요. 그래서 말이에요. 내 것이 아닌데 이렇게 되는 상황이 와서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고 조심하자고 합니다. 그때 들어오는 광고가 내 것이라면 감사할 텐데. 인터뷰 기사가 은혜가 되더라고요. 만약 어떠한 삶을 살더라도 우리가 칭찬할 유일한 말은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이 오더라도 그 모든 것을 삶의 주인이 아닌, 내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주인되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만난 사람이 갖추는 능력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내 생각과 주장을 낼 때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갖춘 능력으로 교회 반석이 되었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든 능력이 예수님과 만남 때문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 안에 충만하신 성령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까?


실패의 자리에 있던 베드로가 삶의 밑바닥에서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을 때 결정적이고 중요한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 1:3)


신기한 단어가 나옵니다. 1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과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 어부였던 베드로를 반석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니 큰 능력이 임하고 우리에게 작은 능력이 일하는 게 아닙니다. 영원히 떠나지 않음을 믿습니다. 신기한 단어로 번역한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니 은혜가 놀랍고 신기한 것 아닙니까? 베드로 안에 충만한 성령님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동일한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고민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있는데 여전히 바뀌지 않을까?




3. 그런에 왜 우리는 변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서 막 묵상했습니다. 베드로가 유일하게 남긴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를 읽고 묵상하는데 답을 쉽게 못 찾겠더라고요. 베드로 전후서는 사도 베드로의 여러 열매를 뜻하는, 근시 하여 기도하라,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몰라서가 아닌데 왜 이렇게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을까? 복음서와 사도행전 곳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만난 순간, 마지막 생명이 타오르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사랑 아니면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 나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는 더는 채찍질하는 자지를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주님을 사랑하니깐 달라졌습니다. 신기한 일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찬송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은 고난이 있다면 예수님 때문에 받는 희생이 있다면, 섬김의 자리가 있다면 사도 베드로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이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구주로 고백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 자체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지었습니다. 인터넷에 사랑하기 때문에 검색하니 유명한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가사의 몇 부분을 읽어 들겠습니다.


다시 돌아올 그대를 위해 내 모든 걸 드릴게요.
나 오직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이 듭니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온 베드로가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 내 모든 걸 드릴 테요. 송태근 목사님은 베드로후서에 나온 나온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거룩은 구별해서 드린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주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를 뜻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거룩하다. 자신을 구분해서 주셨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사랑하신 독생자 예수를 구분해서 드리실 줄을 믿습니다. 노래로 돌아가서 이제는 베드로에게 답가처럼 느껴집니다.


그분의 크심을 깨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러면서 좁디좁은 나를 깨었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고백이 있죠. 이제는 어느 자리이든지 부르시면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라응로 변하신 삶에 나타난 고백입니다. 선택하고 행동할 때에는 다 각자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6살, 8살, 11살 자녀가 있습니다. 세 자녀가 있으니 식당을 정하거나 여행지를 정할때도 안전하게 놀고 맛있게 먹을 곳을 정합니다.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이번 한 주간 선택하고 행동한 것에 대해서 왜 그러한 선택을 했습니까? 말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길 원합니다. 예수님 사랑하기 때문에 했습니다. 설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떠한 것으로 선택할 수 없는. 예수님께 향유를 깨트린 마리아의 행동이 사랑 이외에는 설명이 안 되었고, 히브리서 12장의 많은 선배가가 하나님 사랑 이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살아 하는 이유 하나밖에는 다른 어떠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런 꿈을 함께 꾸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제집에 키우는 강아지 이름 이루 야입니다. 너무 기뻐서 할렐루야 할 때 루야입니다. 막 꼬리를 흔들면서 폴짝 뜁니다. 집을 나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강아지가 따라 나가고 싶어도 계단은 내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신방을 신고 가족들이 외출하려고 하는데 항상 여기를 넘지 못했던 강아지가 뛰어넘습니다. 강아지도 열망이 두려움을 극복하는구나. 주님을 향한 열망과 사랑이, 강아지도 열망으로 쫓는데.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쭉 되돌아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때에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셨습니까? 나를 달콤하게 유혹하는 죄와 싸워보겠다는 열망이 언제 생기셨습니까? 기쁨으로 충만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충만할 때 아닙니까? 복음을 위해,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내 안에서 시퍼렇게 산 자와 싸우며, 나도 제자의 삶을 살아야지. 대접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을 살아야지. 정직과 거짓 사이에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제자의 길을 정직한 길을 가는 열망은 언제 생기셨습니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옳은 것인지, 세 치의 혀를 즐겁게 하는지. 좁은 길을 걷는 뚝심이 언제 생깁니까? 주님이 내 삶에 주인 되는 끄덕임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나의 전부보다 사랑한다는 생생한 고백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똑같은 인격을 갖은 우리인데, 어느 순간 용납하고, 어떨 때는 냉랭한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가득할 때 온유하고 부드럽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지는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 시간 간절히 구해야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놔둔다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식어집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그 자리에 둥둥 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패한 마음으로 흘러갑니다. 사도바울이 그의 동역자였던 데마에 대해서 안타까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바울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


바울의 동역자였던 대마인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했지만, 그 사랑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와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유언처럼 남긴 편지입니다. 베드로 후서의 앞장과 뒷장에 참 주목할만한, 기억해야 할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앎으로는 관계적인 것이기에 사랑함으로 해도 통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1장과 3장에 기록된 두 구절은 가벼운 첫 인사와 끝인사가 아닙니다. 유언과 같은 편지에서 사랑하는, 흩어진 나그네에게 같은 믿음을 갖은 동역자에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생의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에 자라가는 것. 사랑에 빠지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만난 주님은, 내가 경험한 그 사랑을 만약 여러분도 이 서신을 읽은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이 동일하게 믿고 경험한다면 여러분의 인생 전부를 거는 가치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와 평안을 약속합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를 설명하기 어려운 박혜와 환난 가운데 지킬 힘을 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의 능욕과 멸시를 당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걸 지켜준 것이 평안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가 되는 힘을 준 것도 은혜와 평안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은혜와 시선을 고정하며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사랑에 저의 삶을 드립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결단하고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08월 0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


설창석 목사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7-14)


이번 주 주일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으로 제목을 잡으니 아내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그것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듣고 싶은 질문은 놀러갈까입니다. 앞으로 휴가를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요즘 같은 휴가철에 어디로 놀러 갈까 하면 설렐 것 같습니다. 결혼 정년기에 있는 청년들은 나와 결혼해줄래? 할 때가 설레지 않을까 합니다. 뉴턴의 3 법칙 작용과 반작용, 자극이 있으면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어떤 질문으로, 어떤 대답으로 함께 본문 안에서 은혜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썼습니다. 누가의 본래 직업은 의사입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누가의 글에서도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많이 담겨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단순한 글이 아닌 사실적인 글을 많이 담고 있어서 누가를 역사가다라고 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눅 3:1)


세례요한이 사역하는 시대적 배경을 위해서 누가는 참 많은 사람의 이름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주 14년 8월에 즉위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총독에 재임한 기간이 주후 26년에서 30년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을 역사적 사실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때에 총독과 본분 왕으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본붕왕은 헤롯과 루사디아가 있다고 합니다. 지역도 생소하고 복잡하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갔다고 합니다. 총독과 본붕왕이 여럿 있으니 눈치 볼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할 때를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원래 대제사장은 한 명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안나스는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직을 해야 하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15년 후 해임되고, 사위를 세웁니다. 안나스아서 장인어른이 권력이 더 셌던지, 안나스와 가야바 이름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등장하기 전, 여러 지도자 이름을 열거하면서 이 시대에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모든 상황이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면서, 백성들이 혼란했겠다. 이방인에 의해서 제사장직이 세워지고 내려놓는 영적인 혼란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어그러지기도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혼란하고 혼미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혼란한 이때 누가복음의 '누가'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1. 말씀이 임하는 빈들이 있습니까?


세계 최강국이었던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 안나스와 가야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입합니까?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빈들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에레모스,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미드바르는 광야라는 뜻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바르 라는 말은 말씀, 말하다, 대화하다. 약속한다는 단어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해서 드비르라는 게 있습니다. 지성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 성소 넘어 거하는 곳입니다. 데베르는 전염병, 역병입니다.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이 떠날때 데베르가 온다고합니다. 도베르는 목장, 초장이라는 뜻입니다. 다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목장 초장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 광야요 빈들입니다. 요즘 이어폰 중에 노이즈 켄슬링이 된 이어폰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외부의 말을 차단하는 것이 노이즈 캔슬링입니다. 광야가 노이즈 캔슬링 역할을 합니다. 이카더라 카더라 통신 끄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는 곳이 광야요 빈들이었습니다. 말라기에서는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를 신약의 세례요한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850대 1로 전투를 하죠. 재단에 재물을 올렸을 때 850:1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벨, 너 이제 죽일 거야 위협 앞에 덜덜 떨면서 번아웃 되고 도망갑니다. 광야 같은 호렙 산의 어느 굴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데 엄청난 바람이 붑니다. 바위를 부수는데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겠다 했는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까 했는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세밀한 음성이 들리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새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빈들로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웅장한 왕국에 쇼파에 앉은 디베로가 아니라, 빌라도 총독, 헤롯 본붕왕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임한 게 아니라, 빈 들에서 메뚜기나 잡아먹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고 사용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에게 주목받는 게 있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 제스처,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관심 갖고 주목하는 사람은 빈 들의 요한입니다. 우리 인생의 빈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빈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고독한 장소에서 침묵의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줄을 믿습니다. 휴가 기간 가장 좋았던 시간은 시작한 하루 이틀이 좋았습니다. 월화는 온전히 저만의 시간을 갖을 수 있었습니다. 저 만의 노이즈 켄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 끼고, 말씀 묵상하고 기도문 작성하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애들이 방학을 하니 힘들었습니다. 방학과제로 한 구절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묵상이 올라오면 다락방 식구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참 감사합니다. 많은 말씀이 아니라 한 두 구절 말씀입니다. 묵상하는 단어 안에 소가 되새김질 하는 말씀이 심겨져 있습니다. 작은 한 두 구절 말씀이지만 되새김질 하면서 음성을 듣는 방학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습니까?


단순한 정보나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에 대한 가십거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 밤에, 오늘 새벽에 나의 빈 들에서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세례요한이 전파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 3:3)


세례는 당시에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와 세례와 제사를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7-8)


세례받으러 온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우리들은 선민이야, 선민사상으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야 뱀 새끼야 하고 이야기합니다. 너무 크게 호통칩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도 없었고 아브라함의 삶도 없었습니다. 한산도 대첩이 영화로 나와서 많은 분이 보는 것 같습니다.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혁혁한 공을 세워서 그럴 것입니다. 더불어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직계 후손 중에 독립운동가가 12명이 있습니다. 바꾸어서 이순신 장군님의 직계 후손 중에 친일파가 12명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님이 필생 즉사 그거 했다 하더라도 그의 후손들이 친일파에 12명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님 업적에 엄청난 흠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믿음도 없고 아브라함과 같은 삶도 없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있느냐.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이 너희에게 아무런 구원의 효력이 없다고 강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고등부 사역할 때 1년데 두 차례 학습세례 입교식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례받는 친구가 4명이었습니다. 입교를 하는데 31명이 입교하였습니다. 세례는 본인의 신앙고백으로 합니다. 입교는 1살, 2살에 부모님의 신앙고백으로, 유아세례를 베푸는 자들이 청소년 시기가 되어서 그때의 신앙고백이 이제 내가 고백합니다. 하며 입교하는 것이 입교입니다. 고등부 안에 세례받는 친구보다 더 많은 친구가 1살, 2살에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귀해요. 신앙의 가정에서 양육 받은 친구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가 모태신앙으로 신앙의 가정안에서 태어난 친구들이었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았다 한들 부모님의 신앙의 좋은 곳이 이 아이들에게 구원의 유효한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의 제사장 아들을 압니까?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사무엘상에서는 불량자라라고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망나니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부수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없다면 독사의 자식이다 책망받고, 도끼에 찍어서 불에 던져진다고 경고를 듣습니다. 나는 5대째 신앙의 가정입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이것은 구원에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님 족보를 기준으로 한다면 세례요한에게 나오는 사람들은 다윗왕의 28대손입니다. 다윗의 후손이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는 게 중요합니다. 회개의 세례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 광야를 간 것처럼 이집트에서 봤을 때는 홍해에 빠져 죽은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본다면 홍해에서 살아 나온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회개의 세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또한 믿음과 삶이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적은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회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뗴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성도님들이 세례받으셨습니까? 회개의 세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있으십니까? 예수 믿기 전 BC, AD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 선명하게 달라진 삶의 변화가 있습니까? 밥 먹기 전후가 다릅니다. 커피 마시기 전후가 다릅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 믿기 전, 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이 예수 믿는 게 맞을까요?


회개는 태도와 방향이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 맺는 새로운 관계로 나타난다. (로버트 테너힐)


회개는 어젯밤에 지은 죄를 면제받는 면죄부 수준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국 티켓 정도가 아닙니다. 회개는 내 삶의 태도와 방향이 지금 바뀌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으로 전환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성도님이 되시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3.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돌이킬 뿐 아니라, 회개가 입증될 삶의 열매를 거두라고 합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설교 초반에 우리가 유턴의 법칙 하면서 자극이 있으면 반응이 있다고 했는데 설교를 들은 사람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2-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청소년 사역할 때 예배는 반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는 반응이다. 예배는 무엇이라고요? 반응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아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에게 예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월드컵 기간에 한국 대표선수들이 골만 넣어도 와 골 넣었다. 올림픽 기간에 금메달 따면 와 금메달이다. 찬양할 때 기쁨으로 하고, 온몸으로 하여 반응하는 예배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매일 아침에 한 구절 묵상합니다. 그 말씀을 들었는데 아멘 하며 끝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라고 뽑았습니다. 세례요한 세례 메시지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으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 3:10-11)


가난하거나 비주류의 일반 사람들입니다. 옷 두 벌은 팔레스타인 추운 밤공기를 이겨낼 수 있는 삶의 필수품입니다. 그런데 내 사람의 생필품이라고 할지라도 옷 없는 자들을 위해서 그것을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 음식이 풍족한 것이 아니라 이것 먹을 수 있는 필수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나에게 손해가 있더라도 능동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결혼했습니다. 너무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첫째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돌이 되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비록 아빠는 가난하지만 풍요롭게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첫째가 돌이 되는 게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최고로 해주자. 빚내서라도 하자. 상의한 결과 돌잔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남시 돌볼 분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성남시에 미혼모 시설이 있다고 해서 전화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돌이 되는데, 미혼모 시설에 작년에 태어난 아이가 몇 명 있습니까? 몇 명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돌잔치를 하지 않지만, 주변에 우리 이웃이 있으니 환영받고 축하받을 수 있잖아요. 미혼모 시설의 사람들은 이렇게 축하받고 사랑받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재만으로 너무 귀한 아이들의 첫 돌을 동일하게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돌잔치 하지 않은 금액으로 미혼모 시설에 첫돌 생일선물로 드렸습니다. 이 소식을 중등부 선생님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식나이 한 두 주 지나고 주일 예배가 끝났는데 선생님들이 우르르 모였는데 우리 아이들의 깜짝 돌파티를 해주는 것입니다. 너무 감격했습니다. 비록 부모는 아이들에게 돌잔치를 해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의 돌선물 하셨는데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해서 둘째도 그렇게 하고, 셋째도 그렇게 했습니다. 셋째는 마지막일 것 같아서 아이와 엄마 커플룩을 전달하였습니다. 저의 실천들을 부서의 선생님들이 듣게 되고 본인들이 결혼하고, 아이들을 출산한 이후에 이어지더라고요. 어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이가 왔습니다. 아들이 음, 아빠 칠순 잔치는 없을 거야. 돌잔치 없었으니 칠순잔치 없을 거야. 그런 말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상상입니다. 칠순잔치 하지 않더라도 독거노인 후원하면 되겠죠. 나눔의 실천은 하나님의 더 큰 사랑과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더라고요. 사랑의 선순환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담장을 넘어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가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눅 3:12-13)


한 명, 한 명 세금을 거둘 행정력이 부족하니 세금 징수권을 경매권을 팔았습니다. 그것이 세리입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 이상을 징수해서 중간에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의 직무에 정의롭게 살라고 주문했습니다. 오늘날 나의 권한이 있습니까? 권한과 힘이 있다면 정직하게, 정의롭게 시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자녀를 향해서 부모로 권한이 있을 때 정직하게, 정의롭게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군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또 무엇을 하리이까.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4)


헤롯 안티파스의 군사입니다. 경찰직 공무원처럼 질서와 안위를 담당합니다. 이들에게 무기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는 사람은 무섭습니다. 고난과 무기, 위협을 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탐욕으로 탐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너희가 받는 금료에 만족하고 자족하라고 합니다. 탐심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동일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정직하고 정의롭고 만족하며 감사하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 처한 일상에서 회개의 열매들이 사랑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에 잘 반응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설교를 들었는데 비판하고 냉소적인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반응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알았습니다. 율법의 가르치대로 토색하거나 불의를 품거나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도 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종교적이고 제의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개혁이었습니다. 이때까지 무심한 이웃에게 시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생필품 하나, 꼭 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사랑으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삶의 정직과 정의로 살고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세례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속적 사회와 절교하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 등지고 선교사되라. 세상 등지고 목사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다 내려놓고 교회 일에 집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은사와 달란트로, 직업의 환경에서 회개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회개는 삶의 열매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설교와 반응으로 우리에게 세 가지를 던집니다. 첫 번째는 말씀이 임하는 빈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멀리하고 집중하는 빈들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 한 여름밤의 기도회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분당우리교회에 빈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습니까? 주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가롯유다처럼 심정적 후회가 아니라, 베드로처럼 돌이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삶의 회개가 있어야 할 줄을 믿습니다. 세 번째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오징어? 반면 똑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냉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자리로 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문, 그러면 우리는 어찌하리까. 우리의 기도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피를 구하는 기도를 했다면 이제 기도가 달라지겠죠. 이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 상황 안에서, 이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되묻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질문을 통해 우리의 기도가 더 깊은 기도로 들어갈 줄을 믿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빈 들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07월


07월 3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당신의 미래 누구의 손에 있나?

당신의 미래 누구의 손에 있나?


박은조 목사 (은혜샘물교회 은퇴목사)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12-22)


며칠 전에 김정은이 한 말 들었죠? 며칠 전 윤 대통령이 한 말을 듣고 까불지 말라고 한 것을 한국 방송이 뉴스 시간에 들려주었습니다. 전에는 남한을 피바다로 만들겠다는 등 못지않은 소시를 들었는데, 남한이 북한보다 군사력이 월등하다는 안심시켜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이 핵을 갖고 난 이후 전투력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바뀐 상황에서 김정은이 엄포를 두니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북한이 핵을 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였습니다. 핵을 쏘면 다 죽는 것이기에, 북한도 살자고 핵을 개발했는데. 나와 가족의 현질은 어떻습니까? 멀쩡한 사람이 암에 걸리기도 하고, 잘 돌아가만 하던 회사가 멈추어 서기도 하고, 잘 다니던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하고.. 잘 살고있는 부부가 헤어진다고 하고. 여러분,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게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은 현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신명기 말씀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갖고 우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말할 때 살아봐야 알지. 지금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에게 나는 잘 모르겠다. 너희가 잘살지 못살지.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깨지기도 했는데, 살아봐야 알지, 낸들 알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사람입니다. 윤석열이 정치를 잘한다면 우리와 자녀들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말할 때 아브라함이 잘하면 복을 받고, 다니엘은 망한 나라에서 포로로 살고 있었는데 다니엘 주변 이스라엘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페르시아 왕이 힘을 써주면 좋지 아니한가. 그 사람이 상관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페르시아 왕으로 이 사람들은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에게 표를 줄었던, 안 주었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데. 사실 걱정스럽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님이 훨씬 더 많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살지 못하면 저주를 받을 수 있지 않으냐. 자식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당연히 복을 받을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저주를 받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이런 분이 더러 있지만, 공로주의,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 내 열심에 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면 복을 받고, 내가 그렇게 못살면 하나님의 복을 기약할 수 없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을 너무 표면적으로, 표피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성이라고 하고, 아브라함이 산 때보다 약 500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가나안땅 입구에 선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많이 하니, 아브라함이 앞으로 착한 일을 할 것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자식을 선택하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시고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 삼으셨다고. 로마서 4장 5절에서도 사도바울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성이라고 말하면서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았고, 우리도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의 의미를 성령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 하나 때문에 자녀 삼을셨다 합니다.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축복이 이미 우리에게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 하나님을 아는 믿음조차 도 성경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온 천지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수백 권의 책을 뒤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그 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수고를 주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녀 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은 주시기 위해서 일찍부터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너희들이 이 말씀을 따라 잘 살면 복을 주겠다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니므이 자녀 삼으셨습니다. 모세 때쯤 와서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을 받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부모가 그런 것처럼 주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 자식을 왜 사랑하고, 왜 우리가 매깁니까? 용돈을 많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아이가 자라서 대성해서 세계를 깜짝 놀랄 정도로 귀한 인물이 될 것이기에 키웁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키우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3500년 전에 가나안 입구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 마음속에 깊이 담기를 원합니다. 신명기 말씀을 3500년 전에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출애굽 후 시내산 기슭에서 성막 설계를 받고, 시내산 언약을 맺고 한 2년 정도 하나님께 밀월기간이라는 시간을 보냅니다. 물론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막, 출애굽 할때 시내산 기슭에서 성막 설계도를 주시고 만드셨지 않습니까? 성막을 갖고 출애굽 2년 쯤 가나안 입구까지 옵니다. 각 지파에서 12명의 스파이를 뽑아서 가나안땅으로 보냅니다. 40일간 정찰을 합니다. 이 사람이 돌아와서 보고가 둘로 나뉩니다. 10명이 저 가나안땅에 들어가 보니 땅은 튼실한 포도를 키울 수 있을 만큼 튼실한데, 사람들은 거인들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하더라고 저 사람을 전투해서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메뚜기 정도인데, 어떻게 메뚜기가 거인을 이기는가? 그러나 여호수아 갈렙은 아무리 저들의 산성이 강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우리가 약해 보이더라도 저들을 이길 수 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올라가자. 여러분, 사실 엇갈린 보고는 3500년 가데스 바냐 이스라엘 백성만 받은 게 아니라 후대 모든 사람이 양 갈래 길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다. 남녀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부부가 되게 하겠다. 너희 가정을 천대에 이르도록 사랑하겠다. 네가 완전한 것처럼 네 자녀인 너희도 완전하게 하겠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두 정탐꾼 보고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내 삶 속에서 이런 게 이루어질것이다. 믿음의 음성과 함께 한 쪽에서는 아이고, 될 것을 바래야지. 원수를 쏴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원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 애당초 되지도 않을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3500년 전 이야기라고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엊그제 이야기처럼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가 엊그제 같고, 결혼할 때가 엊그제 같고, 첫 아이가 태어난 일이 엊그제 같고. 꽤 지난 일이라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3500년 전일지 몰라고 하나님은 엊그제 일로 끄집어내서 우리에게 내놓는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받은 백성들이 출애굽하고가데스바냐에 왔을 때 저 못된 10명은 우리 공동체에서 쫓아내자. 그랬더라면 가데스바냐는 주요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민수기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면서 통곡하면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죽일 곳이 없어서 여기에 죽이냐. 이집트에 사는 것이 더 낳을 뻔했다. 온갖 소리를 다합니다. 우리 아내들은 빼앗길 것이고, 우리 자식들은 노예가 될 것이고.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소수의 무리였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봤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 많은 백성이 낙심하고,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너희를 데리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38년 동안 광야 길을 돌게 합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냐에서 불신앙을 보인 20살 이상의 모든 남녀가 다 죽습니다. 그리고 광야 길에 다 묻힙니다. 38년 이후 가나안 입구에 섭니다. 광야 길을 걸으면서 부모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까? 3년도 아니고, 13년도 아니고 38년을 광야 길을 걷고 있습니다. 텐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한다는 못된 생각을 하지 마라. 그 불산앙 죄에 휩싸였지만, 너희는 절대 이런 믿음 갖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 피뭍힌 가르침을 자식들에게 가르쳤지 않습니까? 가나안땅 입구에 다시 섰는데, 모세는 이 말씀을 전하고 돌아갑니다. 모세를 통해서 신명기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는 믿음이 있지만, 불안은 없더라. 한순간은 글러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말씀이 지배할 때 불안도, 두려움도 없을 수 있는데,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믿습니다. 너희가 행복할 것이다고 13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관련해서 내가 너희에게 여러 말씀을 주었는데, 그것을 율법이라고도 하고, 교훈이라고 하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말씀을 주셨는데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주셨다고 합니다. 동일하게 적용될 말씀입니다. 이분들은 5권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66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 유리합니다. 하루종일 설교 말씀 듣고, 주일에 은혜받은 목사님 설교를 주 중에 듣고, 말씀을 많이 들으면 그 말씀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이런 오해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에 대한 우리를 집을 짓는데 비유하고 있습니다. 반석 위에,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입니까?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난 후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내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그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우리가 말씀을 따라 아무리 살려고 해도 살지 못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실 때 말씀 속에 성막을 주셨고 성막 속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속죄제 같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도를 주셨습니다. 중대한 범죄는 목숨을 내놓던지 해야 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죗값을 자기가 지불하려고 했으면 몇 년 안 가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살 수 없다고 하셨기에, 그들이 그 죗값을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의 목숨을 받고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고, 양의 피를 받고 우리의 형벌을 감해주는 제도를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양의 피가 우리를 상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서 유일한 속죄 죄를 예수 그리스도 핏값으로 구원을 받고 속죄를 받은 것이고 우리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속죄를 받은 것입니다.


어저피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못살지 않느냐. 그래서 십일조 열심히 내고, 최소한으로 살다가 천국이나 가면 다행 아니냐.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내야 할 삶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도 못살아가 아니라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 만큼, 하나님만큼 완전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인데, 해보니깐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애통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죄가 너무 많습니다. 내 연약함과 죄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태도를 보이고 갈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한 걸음 갈 때 말씀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중요하니깐 한 번 더 반복합니다. 제가 4년 전에 암 수술을 받고 빨리 은퇴하였습니다. 성도님들이 저에게 책을 많이 선물로 주셨는데, 제가 나머지 기부하고 두 권만 갖고 나왔습니다. 한 권은 건강백서라는 책입니다. 전문가들이 쓴 글입니다. 면역력을 높이는 것은 이런 게 필요하고. 이런 이야기, 전문가의 조언이 여기 가득합니다. 건강백서를 1년 100독 하면 행복해질까요? 알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절대 안 된다는 것. 전문가의 조언이 중요하니 그것을 읽고 어찌 해야 합니까? 실천해야 건강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읽기는 많이 하는데, 공부는 많이 하는데 실제 내 삶에 말씀이 없을 때 이것이 보통 비극이 아닙니다. 이 비극에 제일 가까이 있는데 목사입니다. 설교도 하니 자기가 하나님하고 가깝고,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이 아니고, 하나님을 내가 아는 만큼이 아니고, 하나님과 친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한 살짜리 아기가 자기 엄마에 대해서 정보는 눈곱만큼 밖에 없습니다. 엄마 이름도 모릅니다. 그런데 엄마를 보면 엄마 다 알아챕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를 갖다놔도 엄마가 아니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때 안다는 말이 친하다는 단어입니다.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누가 2주 안에 박은주 목사 아느냐고 하면 안다고 합니까? 저를 30분 쳐다보고 집에 갈 것인데 2주 안에 치매가 오지 않으면 기억하지 않습니까? 인터넷 검색을 해서 제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되고, 설교 한 두 편 더 듣고, 내가 설교도 들었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 그러면 박 목사하고 친하냐 하면 뭐라고 답할 것입니까? 저하고는 그런 관계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를 죽는 날까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처럼 점점 완전해지는.


이 말씀과 함께 12절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이 말씀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냐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너희는 우리 아버지다. 너희는 목자다. 자기 백성에게 자기를 가리키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아바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빠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합니까? 아파트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갑니까?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습니다. 집을 사야 하는데 말 잘하는 503호 사람 찾아가는 사람 없습니다. 공인중개사를 찾아가죠. 온 마음을 다해서 예배하고. 이런 존재로 여기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고, 네 삶의 전문가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는 것처럼 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누가 전문가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끝까지 꾀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문제를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내게 이런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이 그분에게 온 마음을 기울여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한번 갔다 와야지. 예배 안가면 찝찝해. 막 그 정도 신앙에서라도 빨리 자라면 다행인데 문제는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10년씩, 20년씩 집사, 장로가 되어서도 그때 위 소리를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배 한 번 빼먹었다고 차를 들이받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왜 쪼잔한 분으로 만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전문가시고, 이끌어가시는 등력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제1로 모시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이런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무겁게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가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인데 어떻게 소홀히 여기겠습니까?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합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 10:14)


저기는 모압땅이라고 말하지만 원래 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런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반응을 하길 원하실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사랑하는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정도 기본적인 믿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내가 암에 걸립니까? 애들하고 살 집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청약 부금을 넣어서 자격이 좀 되어서 싸게 집을 구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들어가면 떨어지고. 신앙 없는 것은 잘만 붙더구먼, 우리 교회 김 집사는 새벽기도 안 해도 붙더구먼, 나는 봉사도 하는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수의 생명까지 준 하나님이 왜 아파트 안 주시나. 이런 갈등을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습니까? 이런 갈등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내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고, 참새가 팔리는 것도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아파트도 없고, 내 아이들은 일류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있고. 하나님 앞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래서 하나님 어쩌라고요. 내 손에 쥐여주는 게 없으면서. 이런 반응에 너무 마음이 아파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쓰라린 상처를 갖고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아프게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나안땅 입구에 섯을때, 저 모든 게 다 내 것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그래서 어쩌라고요. 어떻게 38년간 광야기를 뺑뺑 돌게 하셨습니까? 이런 사람이 없었을까요? 사람이 다 똑같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기대의 마음은, 저게 다 내 것이라고 했을 때. 아저씨가 말하는 게 아니라, 삼촌이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오래전 목회 현장에 전화했던 형제가 생각이 납니다. 저에게 전화해서 목사님, 너무 기분 좋은 일이 생겨서 자랑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으로 된 땅 2,000평이 발견되었다. 그때 아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나 보고 어쩌라고요. 아싸. 아버지가 아들인 나에게 전화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땅. 아버지에게 재산을 별로 못 물려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땅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땅 이야기를 하는데 왜 나에게 전화했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게 다 내 것이다. 내가 오늘도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감동이 밀려오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가 가진 것은 내 것이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자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복된 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끝 부분에서 약자를 돌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섬기고 돌보라 너희도 나그네였다고 하는데, 앞서 설명한 말씀의 연속 선상에서 하나님이 연약한 백성을 돌봅니다. 주변의 강대국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는 수고로운 계명을 더하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붙들고 곁에 있는 연약한 사람 손이라도 쥐여주고. 설렁탕이라고 한 그릇 사주는 이런 격려를 할 때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연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단순히 하나님이 이런 것을 하라고 하냐. 계명 하나를 우리에게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원수를 사랑하라. 놀라운 말씀이 있구나! 감동으로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감동할 때 동기부여는 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되는 게 아니고, 골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골방에서. 내 꼬인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장을 허락하시고, 장 속에서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은혜받는 것이 내 삶의 모든 것처럼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존귀한 분으로 여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거부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갈등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애통해 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키워가는 방법을 잊지 마십시다. 이 길을 기꺼이 용기를 갖고 걸으심으로 여러분의 행복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07월 24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빛의 자녀로 증거를 보이라

빛의 자녀로 증거를 보이라


최홍준 목사 (호산나교회 원로목사)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여러분 교회사 세계적으로 이름난 교회가 되신 거 아시죠? 수 만 명 모이는 교회가 교회당을 짓지 않고, 오랫동안 준비해서 분리 개척한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파장이 이르렀습니다. 유명한 교회에 성도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정말 한국에 자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많은 일을 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주고받는 상처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저 역시 30여 년 목회를 한 경험자로서 일을 많이 하는 교회에 절대로 필요한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9절부터 11절까지 읽었지만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자녀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 하나님의 자녀. 그것이 안될 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제가 읽은 감동적인 책 가운데 의학박사 하루에나 시계오라는 한국인 삼세. 동문대학교에서 의학박사로서 이 분이 쓴 책이 뇌의 혁명, 뇌의 심각한 놀라운 혁명이라는 내용으로 책을 세 권 연달아 썼습니다. 그 핵심은 사람의 마음 생각은 단순히 생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학물질로 영향을 주어 근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기쁠 때와 슬플 때와 기분 나쁠 때와 불쾌할 때 어떤 상태가 되냐? 르노아르네랄린이라는 독소가 나오게 됩니다. 르노아드레날린이 나와서 우리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 독소는 우리 몸에 여러가지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에마 시게오 박사님의 논리입니다. 우리가 기쁠때 감사할 때 찬양할 때는 메타 엔돌핀이 나와서 우리를 더욱더 건강하게 하고, 노화를 방지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역사라는 것이죠. 저는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이 큰 일을 몇 년동안 하면서 주고받은 많은 상처들, 싫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면 이 문제 주님 앞에서 해결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분이 하는 이야기는 모든 질병은 스트레스에서 나온다. 이 스트레스는 이것을 통해서 몸이 망가지고, 르노아드레날린 독성은 자연계에 뱀 독 다음으로 심각한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뇌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데 굵은 혈관이 손상이 되면 뇌경색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작은 혈관이 손상을 입으면 기억력 상실과 치매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지, 고통을 주는지. 이 박사는 책을 쓰면서 성인병에 100%가 스트레스에서 온다.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 있나요?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전통 기성교회에 부임해서 저보다 15살 많은 장로님을 모시고, 저는 옥한흠 목사님 밑에서 이찬수 목사님과 같이 제자훈련 사역을 목회 본질로 하는 사역을 했는데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만만치 않아요. 적용하는 모든 면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받은 은혜 가운데 하나가 인간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포용하는 것 베타엔돌핀이 나오면 노화를 방지하고, 우리의 치명적인 질병까지고 해결해주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통해서 간경화, 간암으로 돌아간다고. 3년에서 5년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올해 79입니다. 제 동기하고 보면 제가 훨씬 젊습니다. 그게 제가 보약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범사에 감사하라, 찬양 하라고 명약 중의 명약이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보약보다 한 급수 높아요. 그것을 먹었으니 다른 사람보다 늙겠어요? 저는 자부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사랑해야 해요.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야 해요. 마음만 먹지 마시고 반드시 실천하세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4-16)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인데, 예수 믿고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새 생명 받아서 옮겼다. 그 말 아니겠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 믿습니까?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만난 자는 생명을 낳게 되고, 세상 사람들의 삶하고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비방하고 나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하고 부정적인 소리를 하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망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말씀입니다만 지금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목사 장로는 교회를 운영하지만, 생각이 다릅니다. 그것을 소화하고 이해하고, 의견이 다를지라도 풀고, 스트레스를 풀어가면서 하는 것이 목사 장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 사역이라든지, 회사라든지, 직장이라든지, 운영 위원이라든지 그것을 조율하는 은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지혜.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이루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토론 문화가 약합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토론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대부분 문화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틀린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면서 용납하고 소화하는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가운데 교육관을 짓는데 10층으로 짓는다고 당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공사가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느 장로님이 3층만 해도 됩니다.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그때 말을 다하고 회의록도 있는데 뭐하셨어요? 나는 잘 몰라요. 한 달 동안 물가가 오르고, 그 장로님은 자녀들을 다 키웠으니 반대하는 것이다. 화살이 그분이 가는 것으로 가잖아요. 안 되겠다. 이 장로님이 나중에 상당히 어려워지겠다. 한 달 뒤에 다시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공사가 안 되면 물가가 오르고 해서 공사비가 많이 듭니다.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들이 누구 반대하는 장로님이 있다고 알려지기 시작하나 봐요. 제가 10층에서 3층에서 내려오세요. 장로님은 7층으로 하세요. 그래서 7층으로 짓는데, 저는 목회하면서 비진리의 문제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 그 원칙으로 다툰 게 없습니다. 94살까지 사시는데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절대로 원수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기도문 잘 알잖아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그만큼 사랑 문제만큼 분명하게 성경에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설교 들으시면서 생각나시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웃이라든지, 친구라든지 마음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이 생각날 거예요. 이거 꼭 해결하세요. 아민이에요? 그것을 해결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고 축복하시고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7-9)


살리는 것은 영적으로 새 생명을 주면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천국 갈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상황, 모든 형편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살면서 세상 사람보다 분명히 다르게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응답이 안 되는 게 있고 풀리지 않는 게 있고, 여러분의 자녀들의 문제, 사업과 모든 직장 가운데서 맺힌 것이 있다면 풀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대게다. 공통점이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응답하는 것에서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서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천국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간구하는 문제가 안 풀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 대부분 보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하나님 사랑하느냐? 네, 사랑해요. 증거를 보자. 이것을 반드시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생각나는 사람 미루지 말고. 그와 같은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응답으로, 축복으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세상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 사랑해요. 철저하게 나를 경계하고 나에 대해서 비난하고 원수시 하는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은 안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는 아니에요. 우리는 천국 시민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형제를 용서하면, 형제를 사랑해야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빛의 자녀로서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로목사가 와서 여러분에게 무슨 설교를 하기를 원하겠어요? 유창함으로 감동함으로 끝나? 아니에요. 여러분이 실천해야 열매가 있고, 실천해야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문제가 해결될 줄을 믿습니다. 사랑은 만만치 않지만,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빛과 어둠은 반대 아닙니까? 우리는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적을 지고 미워하고 있다면 순간적으로 어둠에 속해있습니다. 사탄 마귀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내 자녀라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어둠은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어서 끊임없이 어둠의 삶과 결탁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랬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영원토록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할 수 없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 가운데 거하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권능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항상 그를 사랑하고 그와 같이 기뻐할 것이라고 스바냐 선지자는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합니다. 인도하심이 신묘막측합니다. 기도하고 응답이 되어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안 되고 있어요. 삼 남매를 낳고 입양했습니다만, 큰딸의 사위가 옥한흠 목사님 밑에서 이찬수 목사님처럼 후배로 있다가 미국 칼빈 신학교에 석사학위를 하고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사정이있어서 학위를 받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부목사를 가던지, 다른 데에서 학위를 받던지 해야 하는데 나이가 있어서 부목사를 했습니다. 대학교도 잘 나오고 신학교도 잘했는데, 설교도 꽤 잘해요. 그런데 담임목사의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부모 문제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깐 제가 목회하면서 장로님들이 당회원 20명, 목양 장로 30명, 은퇴하고 원로로 계시는 분 70명의 장로님들 가운데 은퇴하고는 장로니들하고 소원한 관계가 없는가? 한 4명이 제 마음에 나타나는 거에요. 이 분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서 내가 목회하면서 부담을 주고 상처를 준 것이 없느냐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찾았습니다. 세 사람 모두 그런 일이 없다고. 그런데 한 사람이 만나려고 하니깐 그 분은 병원에 입원한거에요. 최장암으로 입원했습니다. 속히 가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장로님 앞에 소원한 것이 없는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펑펑 울면서 제가 목사님께 부담을 주었죠. 제가 그 교회 부임했을 때 서민아파트에 와서 살면서 어려웠어요. 3층 밑에서 공장에 있다가 자기가 나와서 공장 하는데 그 공장 이르도 지어주고 기도도 해주고, 그분이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공장의 수입뿐만 아니라 그것이 출발자금이 되어서 주위의 빌딩이 경매애 붙여지면 사서 판매하면서 상당한 부를 갖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교회에 와서 많은 부를 가졌다고 하면 축복을 받았다고 하면 충성하고 저하고 등을 질 리가 없잖아요. 나도 없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교육관이 부족해서 교육관이 지으려고 전체 헌금을 하고, 지역을 옮기면서 교회당을 확장하면서 이런 게 부담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고 저를 싫어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그런데 이 분이 병원에서 수술할 기회를 놓쳐서 기도원에서 마무리하겠다고. 결과적으로 담임목사가 있지만, 원로목사가 임종 예배를 했습니다. 그 일이 해결된 다음에 사위가 담임목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그렇게 해결하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응답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 없을 정도 아닙니까? 자녀 문제, 주위에 살아오면서 많은 기도를 하잖아요. 기도원가고 철야하고 금식하는 것 좋아요. 이 문제 풀지 않으면 철야하면 응답 안 됩니다. 제가 목회할 때 사랑부가 있었어요. 사랑부는 어떤 아이들을 섬기나면 지적 장애, 정서 장애, 정서 장애 부서를 만들었어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육체적으로 열 몇 살 되는데 지적으로 아기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교회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선생이 1:1로 맞습니다. 정성껏 붙잡고 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그 아이들 때문에 팔에 인대가 늘어난 권사님도 있어요. 그 부서를 가만히 보면서 어떤 것을 깨달았느냐. 제가 목회하면서 제자 훈련 사역을 하니 전도를 하며 많이 들어왔어요. 400명이 모이는 전통 기성교회가 점점 모여서 1만 명이 될 때 제가 은퇴를 했습니다. 사랑부에서 선생님들이 자녀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처음 와서 등록해서 신앙 생활하면서 얼마 정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대화를 해보니 교회 안에서 직분자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주저앉는 사람들. 그래서 전도도 못 하면서 상처 주어서 주저앉게 하는 것. 담임목사님으로서 얼마나 부담이 되어요. 동생들 구박하면서 야단은 치지만 못하잖아요. 빤히 알면서 속으로 저런게 있나 하면서 미워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50대 되기 전에 간 경화 진단에다가 3년 내지 5년 이내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 그런 사람도 사랑하자고 사랑부 교사를 보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사랑부 교사는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하느냐 하는데 뜨겁게 헌신하고 돌보는 것을 보면서 내 부모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중직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다보니 3년 내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는 사람이 지금 제가 이야기했나요? 나이가 얼만지? 80이 다 되어도 제 동기들 보니 저보다 훨씬 나이 많게 보니고, 저는 젊어진 것은 이유가 보약을 먹어서가 아니고 그렇게 사랑하고 용납하고 미워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대로 하나님께서 즐거워하는 자에게 양약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미워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자에게 뼈를 말하게 한다는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07월 1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에브라임아, 사마리아야, 예루살렘아!

에브라임아, 사마리아야, 예루살렘아!


설교자: 류정길 목사 (제주성안교회 담임목사)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창세기에 보면 요셉 시대에 7년 풍년과 연이은 7년 흉년이 나타납니다. 장기간 극심한 흉년 그것은 이집트를 비롯한 가나안과 지중해 연안, 고대 근공 체제를 붕괴시키게 됩니다. 당시 상황을 창세기 47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창 47:13-15)


요즘으로 따지면 식량 난민이 엄청나게 발생했겠죠. 이집트만 곡식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집트로 들어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모든 돈이 양식을 사는 쪽으로 쓰여지니 고대 근동이 애굽 왕실로 쏟아져 들어갔을 것이다. 예상됩니다. 돈이 떨어질 정도입니다. 돈이 떨어지니깐 백성들이 가축을 끌고 갑니다. 이것을 양식으로 받아주세요. 요셉이 가축을 받고 양식을 줍니다. 가축도 떨어집니다. 그랬더니 땅을 가져와서 자발적으로 땅을 매각합니다. 그래서 토지 국유화가 일어나는 상황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죠. 고대 근동의 모든 돈이 애굽의 왕가로 엄청나게 쏟아져 밀려들어 옵니다. 이것을 통해서 막대한 자본이 형성되니 파라오의 강력한 왕권이 확립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토지가 바로에게 들어가니 국유화된 토지의 수확물 20%가 애굽의 재정이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대로 해서 훗날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경제력이 마련이 되고, 장정 60만 명이 되는 노예를 통솔하고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엄청난 군대. 군대를 먹고 입히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듭니까? 그것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겨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7년 흉년이 극심한 자연재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력 외교적으로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고 출애굽 사건의 토대가 마련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336년 알렉산더는 미친듯한 정보력으로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남방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까지 진군해 가게 됩니다. 12년간 알렉산더가 벌인 제국을 통해서 정복 전쟁이 끝나자 자기 사명을 다했다 듯이 허망하게 알렉산더는 죽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 남겨있습니다. 문화와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켰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모든 언어가 통일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통치하면서 법률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도시마다 군대를 주둔하고 치안이 유지되면서 로마 시민들이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됩니다. 정복 전쟁이나 로마제국의 통치가 복음의 역사와 무관해 보이지만 복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복음서가 특별히 무슨 언어로 되어있습니까?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수많은 각각 다른 언어를 거대한 제국으로 하나의 언어로 통일시킨 다음에 하나의 언어 속에 복음이 너무나 빨리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놀랍게 지중해 연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일들이 이미 로마 시대에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역사의 크고 작은 일들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복음의 역사에 씨실과 날실처럼 구원의 섭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보세요. 아주 어린 시절 바벨론 계속 등용되는 탁월한 정치인입니다. 다니엘은 정치인입니다. 다니엘의 본래 임무는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기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세계의 중심에 가져다 놓으시고 시시각각 변하는 열방을 향한 기도자로 세워놓으셔서 세계 역사를 세우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양적 완화로 돈을 풀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 폭등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서 금리 인상, 이로 인해서 경제 침체라고 합니다. 급작스러운 세계의 변화들이 그냥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손안에서 우리 눈앞에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서 성령 안에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제위기 속에서 삼성전자와 주식 창, 폭락한 코인과 부동산을 점검하면서 어떻게 하면 많은 부를 획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 한국교회는 역자의 수례바퀴가 움직이는 상황에서 어디로 가는가 변화들을 보고 기대하고,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위해서 선포하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분단되어있습니다. 북녘을 향해서.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를 보낼 때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선지자를 부르신 이유, 맡겨주신 사명. 첫 번째 사명이 뭔지 아세요? 제가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저의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무도 충격을 안 받으시다니 놀라운 분위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람이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 그러면 아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해서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실까요?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이 말씀에 하나님의 아픔이 담겨있습니다. 아픈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스라엘과 같은 고멜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깐 호세아는 선지자로서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는데 이 결혼 행위는 예언 행위로서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멜은 남편인 호세아를 배신하고 집을 나갑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인생이 추락했는지 호세아가 돈을 갖고 가서 그 아내를 되찾아가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면서 호세아가 배신하더라도 남편 역할을 할 테니 아내 역할을 해달라고 말하잖아요. 호세아서 읽을 때 피 끓는 심정으로 외치는 호세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을 위해 외치는 호세아가 종교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의무에서 외치는 게 아니에요. 피를 토하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자기 민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자기 이야기에요. 자식의 이야기이고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피를 토하면서 이야기했겠어요? 오라 여호와께로 이야기하라.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다. 자기 민족을 봐도. 시대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질어져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는 것.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그동안 지켜온 명예를 잃는 것. 돈을 잃는 것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가슴 아픈 것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인이 잃어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 완전히 매몰되어서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관심 없는 것. 이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마음 중에서 하나의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목회 데이터 연구소가 작년 10월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우리 국민 61%가 북한에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올해로 분단된 지 77년입니다. 남과 북이 왕래하지 못한 7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분단 이후 태어났고 우리 분단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서울대학교 평화통일 연구소가 작년 통일 의식 조사에서 꼭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 44.6%인 반면에 통일될 필요가 없다가 51.4%로 절반이 넘습니다. 막대한 통일비용을 지급하면서까지 통일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합니다. 완전한 하나는 25%, 두 체제가 공존하자는 것은 2배가 넘는 57% 특별히 20대가 가면 이런 서로 침범하지 말고 지내다가 71%에 이릅니다. 통일에 대한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 기도의 제목으로 남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제주도에는 특별한 방송이 있습니다. 굉장히 높이 쏟아있는 안테나가 있습니다. 매 새벽마다 북한에 설교와 찬양을 송출하고 있는 제주 극동방송입니다. 여러분이 제주에 오시면 한 번쯤 들려보시면 좋은 방송국입니다. 대기권에는 전리층이 있는데 AM이라는 전파로 송출하면 러시아로 갑니다. 중국으로 가고 일본으로 갑니다. 시간대를 달리해서 안테나 방향을 바꾸어서 러시아로 일본으로 방송을 송출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중국으로 갔을 때 조선족 여성이 듣고 있다는 것을 봤습니다. 북한에서 듣는 사람이 있을까? 몇 사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방송합니다. 제주 극동방송 전시실에 어렵게 북한 지하교회 편지가 있습니다. 제가 편지 중에 한 사람의 내용을 짧지만 소개합니다.


저는 가끔 중국 교포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방송에서 읽어주실 때마다 한반도에서 사는 저희는 한 마디도 드리지 못함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씁니다. 방송으로 들은 신앙 간증은 너무나 생동감이 있어 성도님들에게 말하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오 그렇지, 긍정도 하고 감탄도 하고 감동을 하는 것을 볼 때 그 가운데 저도 은혜받고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해서 받은 은혜를 언제 나눌 수 있을까요. 여기는 통제된 사회로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비록 방송을 듣는 살마 이 없을 것 같더라도 곳곳에서 청취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몇 안 되는 것 같지만, 말씀은 진리이기에 그때가 오고 말겠지요. 부탁하고 싶은 것은 찬송가를 받아 쓸 수 있게 찬송가 1절만이라도 한 자 한 자 천천히 부를 수는 없을까요?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통일 감격스러운 상봉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찬송가를 가질 수 없잖아요. 새벽에 지하실에 숨어 라디오를 켜놓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필사합니다. 찬송가 가사를 외우고 씹어서 먹고 버립니다. 증거가 있으면 발각되니깐요. 손짓을 보면서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을 통해 나아갔던 것처럼 너무나 가까운, 분당에서 개성과 평양, 신의주 북녘땅에서 방송의 전파가 갈 때 숨죽이며 마음을 졸이며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 대학원 시절 북한의 비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절 100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아사했다는 처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압록강을 통해 북한으로 간 사람들이 중국인에 잡혀서 인신매매 당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꽃제비들이 장마당에서 떠돌며 굶어 죽었던 신학생들이 수요일에는 금식하며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도 모임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저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수요일날 친구들과 어울리며 배가 불러서 힘들다고 말하며 까맣게 잊는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녘의 동포 이야기보다 일상의 작은 어려움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을 위해 울 수도, 통일을 위해 울 수도 없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을 이적이 나타나거나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특별한 은사처럼 드러나는 현상보다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대화가 깊어지고,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를 달 항 가는 것.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이 성령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 하나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내 마음이 머무는 것이잖아요. 오늘 호세아 12장 8절, 9절에서 북녘땅인 이스라엘을 통해 말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이 지금은 우상의 땅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저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음성이 에브라임이여, 사마리아여, 북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립니다. 갑자기 제주에서 나타난 얼굴빛이 시커먼 사람이 엄청 부담스럽게 내 삶도 힘든데 북한을 위해서 이야기하니 얼마나 여러분이 부담되시겠어요. 그러나 조금만 내 삶에서 눈을 들어 지금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한 지점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분단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에게 이렇게 요청하고 싶습니다. 식사 기도를 숟가락 떨어트리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하지 않잖아요. 짧은 몇 초라도 북한을 위해 기도할 수 있잖아요. 잊지 않겠다는 고백. 또 뉴스에서 북한이 미사일을 발생했다는 뉴스를 듣잖아요. 김정은 정권이 미사일을 발사했구나. 북한의 뉴스가 들릴 때마다 그 땅의 이들을 생각해주세요. 하나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참 평화가 임하는 그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주세요. 통일은 경제적인 가치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 사마리아를 놓치지 않았어요. 사마리아에 사람을 놓지 않았어요. 북이스라엘을 놓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을. 동독의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서독의 교회가 기도하면서 통일 독일은 그 교회들의 기도 속에서 엄청난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통일을 지도자로 길러내는 것이 소중하지 않을까요? 식사할 때마다, 북한의 뉴스가 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평화가, 이 통일이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엄청나잖아요. 북한이 열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열차가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통해서 포르투갈 땅끝까지 복음으로 연결되지 않겠어요? 수많은 선교팀들이 이스라엘과 아프리카까지 가지 않겠어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언제 주실지 모르지만, 한국인의 개인적 삶을 가장 많이 바꿀 수 있다는 삶은 통일입니다. 한국교회가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감당할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07월 1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혼란 없는 행복을 위하여

혼란 없는 행복을 위하여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지난주 새벽인데요, 제가 친하게 지내는 후배 목사님이 있는데 이분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목사님 요즘 여성 가수들이 모여서 중창팀으로 노래하는 팀이 있습니다. 인기가 없었던 11명과 왕년에 인기 가수였던 윤은혜라는 가수가 모집되었습니다. 다들 이 프로를 통해서 뜨고 싶다, 인기를 얻고 싶다고 했는데 윤은혜 가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개척교회 현실에서 어렵게 목회하는 실력 있는 목사님들과 오버랩이 되어서 많이 울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습니다.


기사를 보내줬는데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죠? 노래 실력은 출중한데 뜨지를 못했던 가수들이 모여서 중창을 하고 드러나도록 돕는 프로그램 같습니다. 12명을 다 모집이 끝나고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었는 데요. 여러 질문들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벤트를 통해서 정말 뜨고 싶습니까? 뜨고 싶은 사람 1번, 2번 단추를 누르라고 했습니다. 12명 중의 11명이 뜨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가수들하고 한 마디 인터뷰하는데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뜨고 싶다고 하면서 어떤 가수는 세상 사람들이 다 저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야기하고 제 이름이 더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노래를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가수는 생생하게 자기 마음의 꿈을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리모컨을 돌리면서 저 사람은 나오지 않는 곳이 없네! 할 정도로 뜨고 싶습니다. 자기 꿈을 피력하는데 윤은혜 가수가 갑자기 우는 것입니다. 동료 가수들의 절박한 꿈을 듣고 억누르지 못하고 실력은 있는데 실력만큼 뜨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애틋해서 우는 것입니다. 11명이 다 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제 아는 후배 목사님이 그것을 보고 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에게 보내주어서 저도 우는 것입니다. 근래에 울고 싶은 분은 제가 보내드릴게요. 왜 인터뷰를 보고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의 소원이 그렇거든요.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새벽에 묵상하다가 뜨거움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목사니깐요. 성도님들이 마음의 소원이 있을 텐데 실력보다 성공하기가 어려운 세상 가운데 얼마나 많은 목마름이 있으실까. 목사로서 목마름에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뜨거움이 올라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새벽 이야기가 불쑥 떠오른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한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이 자기 수제자입니다. 아들같이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쓴 목회 편지입니다. 저도 아끼는 후배 교역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나중에 담임목사가 돼서 편지를 쓰면 이렇게 쓰겠구나. 이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아들 같은 디모데가 정말 좋은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디모데전서를 썼고,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담고 본문을 보세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7절, 8절에서 권면을 하고 바로 다음 이렇게 피력합니다.


이 말은 참말이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입니다.(딤전 4:9 새번역)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 같은 디모데가 목회를 하는데 경건 훈련을 해야 한다. 경건히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권며을 하고 이 말을 흘려들으면 안된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다. 심정이 담겨 있거든요. 오늘 여러분, 사도바울과 똑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몇 주간 기초 다지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무리하는 결정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어우러져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경건 훈련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갖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태도. 이것이 경건입니다. 삼상 15절을 보면 왕으로 등록한 사울에게 사무엘이 조언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삼상 15:1)


뭐 하십시오. 그런 말 안 하고요. 왕은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이 말씀에 몰입되니깐 제가 사울이 된 것 같고 제 어머니가 사무엘로 느껴집니다. 개척 초기부터 저희 어머니는 그렇게 막내가 담임목사가 되니깐 불안 하신가 봐요. 전화도 오고, 전화도 드리는데 그렇게 사랑의 잔소리가 많았습니다. 제일 많이 했던 것이 분당우리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분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해라. 그리고 굉장히 모독적인 말로 네가 볼게. 뭐있다고 오겠니. 네가 잘나서 목회가 잘되면 망할 줄 알아라. 과격한 말씀도 하시고 어머니는 잔소리를 많이 하시는데 사무엘상 15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너 잘난 척 하지 말고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항상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개척 초기부터 저희 어머니가 늘 저에게 반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연세가 드셔서 조언을 해주시고 하지 못하시는데, 이 마음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능력의 원천은 저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항상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말씀 공급이 끊어지면 큰일 난다. 인식하는 게 저의 어머니가 원하는 것입니다. 저 막내아들 담임목사님 되었다고 하면서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느껴지는 부모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경건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분 가르쳐 주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갖고 경건 회복과 관련해서 두 가지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기


본문 그대로 소제목을 뽑았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망령된것은 베벨로스입니다. 허가받지 않은 상황에서 문턱을 넘다. 선을 넘은 것. 범위를 넘어서는 것. 망령되고의 의미입니다. 허탄한은 할머니의 가시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이 시대의 할머니가 소문을 만들어 퍼트렸는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가십입니다. 진실이 아닌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라. 인간이 만든 거짓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아라입니다. 이 말씀을 지난 한 주 동안 묵상하면서 망령되다. 저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견고가 되었는데요. 구약의 인물 에서 아시잖아요. 에서를 성경에서 망령된자라고 끔찍한 평가를 내립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지금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못을 박고 있는 데요. 왜 에서가 망령된 자입니까? 망령된 다는 것이 허가받지 않은 상황에서 문턱을 넘는 것. 범위를 넘는 것이 망령되다는 뜻입니다. 에서가 왜 망령된 인물입니까? 장자의 명분은 마음대로 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을 넘었습니다. 팥죽으로 증자권을 판 것입니다. 그래서 망령된 자입니다. 이 말씀이 이 마음에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담임목사잖아요. 부교 역자 시절에는 옥한흠 목사님이 너무 무서운 아버지셨습니다. 목사님 무서워서 선을 못 넘는데 이제 저는 담임목사에요. 누구도 그렇게 안 해주셔요. 어떤 부목사님도 저에게 목사님 망령된 짓 하지 마세요. 하는 분 없습니다. 허락한 범위를 넘어 선을 넘는 것이 망령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에게 망령되면 안 됩니다. 너무 어려워서 자살하겠다 하면 애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망령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해주셨습니다. 잘 길러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 주 내내, 망령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없을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섯을때 이 모든 것이 심판 아닙니까? 이 목사 라고도 안 하실 거예요.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세웠을 때 어떻게 너에게 맡겼니. 우리가 모두 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경건을 되찾고 싶습니까? 허락받지 않은 선에서 넘어간 것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망령되고 허탈한 시대입니다. 거짓 이야기가 허탈하다고 했잖아요. 선을 막 넘어선 것 아닙니까? 동성애 어디까지 왔습니까? 내 성을 내가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신체적으로 남성으로 만들어줬는데, 합법화가 된 나라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남자 신체를 갖고 있지만 나는 여탕에 갈 수 있어. 제가 실제적인 뉴스를 전했잖아요. 선을 넘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것입니다. 최근에 마음이 아팠던 것이 이 시대가 아이들에게 혼미함을 가져다주는 시대입니다. 10대 청소년들에게 마약이 유혹되고 자꾸 확산이 되고 있다는 연재 기사를 최근에 봤습니다. 이 시대 분위기가 정말 아이들에게 유해합니다. 아이들 인식 속에 상호를 만드는데 자기 집 떡볶이가 맛있다고 강조할때 마약 떡볶이라고 하잖아요. 마약 김밥. 마약 만두. 마약 곱창 제가 기사에서 본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인식한 것이 마약이란 좋은 것 아닙니까? 맛있는 것에다가 다 붙이니깐. 우리가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이유를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이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세미나도 열고 했는데 여러분에게 한 분이라도 들려드리고 싶어서 프린트로 만들었잖아요. 들어가 읽어보세요. 누가 약자들을 차별하자는 것을 누가 반대하면 제정신이 아니죠.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몸부림이 이 시대는 선을 막 넘고 있습니다. 생명 윤리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너무나 두려운 시대입니다. 경건을 되찾으려면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분당우리교회가 경건한 교회가 되려면 담임목사인 저부터가 혹시나 하나님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담임목사랍시고 선을 넘는 것이 없는지 교회의 경건히히 시작되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 번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이 쓰나미가 오늘 본문에서 말한 표현 그대로입니다. 파도가 성난 파도 이런 표현을 쓰잖아요. 광풍의 파도가 미친 듯이 불어와도 파도는 허락한 선을 넘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고 해운대 고층 빌딩을 짓는 것 아닙니까? 쓰나미는 재앙입니다. 쓰나미는 망령된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 부부간에 화를 낼 때도, 자녀 간에 양육을 할 때도. 격분할 때에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 경건을 연습하기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건을 이미 우리에게 세팅이 된 것을 상상하기 쉬운데 경건은 훈련해야 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 4:7-8)


육신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훈련을 통해, 연습을 통해 건강해지듯이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연약함이 훈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 비만으로, 저도 배가 나와서 결단하고 먹는 것을 줄입니다. 육신의 배를 집어 넣으려고 하는데 영적인 복부 비만은 어떡합니까? 기독교 방송가서 듣고, 계속 말씀은 엄청나게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연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귀만 높아지고, 영적인 복부 비만이 일어난다. 손흥민 선수가 아시아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독점 왕에 오른 데요. 손흥민 선수의 특징이 골을 전광석화처럼 넣습니다. 싹 가로채면 걸음이 빠르지 싹싹싹 가서 넣는 것이 몇 초 안 걸립니다. 여러분, 손흥민 선수가 몇 초 안에 골을 넣기 위해서 수 천 시간 연습하는 데 씁니다. 동작을 수 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이런 표현을 썼잖아요. 선수들은 머리로 기억하는 운동이 아니라 근육이 기억할 때까지 훈련한다. 근육이 기억하는 게 뭔지 아시죠.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가면 늦은 것입니다. 미처 머리가 명령 내리기 전에 몸이 가 있는 것입니다. 툭 하면 골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본능에다가 맞기면 생각하면 죄성으로 흐릅니다. 생각하면 죄로 흐르기 때문에 오래 우리가 연습하는 것으로 인해 작동하기 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뿐만 아니라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폴란드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파데레프스키라는 분이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자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이 분이 하루에 6시간 연습합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미 독보적인 존재인데 뭐가 필요해서 하는가.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평론가들이 알지.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들이 안다네. 하루를 묵상하지 않으면 제가 알고, 이틀을 묵상하지 않으면 제 아내가 알고, 사흘을 묵상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압니다. 끊임없이 묵상하는 것.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창피한 에피소드 아시죠.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눅 22:39-40)


그랬는데 제자들이 다 자 버렸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나 분석을 하니 성경 말씀에 답이 나옵니다. 습관을 따라. 습관이 안 된 것입니다. 기도 훈련이 안 된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가 잘 안 나오는지 아시겠죠? 훈련. 지난주 인용을 했던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적들이 죽이려는 상황에서 다니엘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요? 전에 하던 대로입니다. 경건 훈련이 된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는 방학이 있다고 말하잖아요. 방학 숙제를 20년 만에 처음입니다. 이번에는 숙제를 드립니다. 지금 기초 다지기를 하는 데요. 말씀 묵상과 기도 훈련에 대해서 숙제를 드립니다. 대학에 가면 전공 필수, 전공 선택이 있잖아요. 전공 필수부터 말씀드립니다. 한 구절 묵상을 창세기부터 전체적으로 은혜다운 본문을 정했습니다. 교회를 오시면 받아갈 수 있고요. 홈페이지 오면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노란 표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꿀밤 맞겠다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구절 묵상 전공 필수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은 해야 합니다. 꿈으로 나타나도록. 주여 묵상 안 한 성도님들에게 꿈에 보여 주시옵소서 기도할 것입니다.


선택사항은 말씀 묵상입니다. 저렇게 긴 것은 못 외우지 하지 마세요. 사역 훈련할 때는 로마서 8장 전 장을 다 외우게 했습니다. 이후에는 에배소서를 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본인에게 은혜가 되는 것을 암송하시고, 통으로 못 외우는 사람을 위해서 한 구절씩 외우도록 했습니다. 성경 암송 30구절을 선정해서 여러분이 하실 수 있을 때까지 암송하는 것입니다. 암송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두 번째 선택이 말씀 필사입니다. 홈페이지에 오셔서 선정한 내용을 필사하고요. 한 가지 더, 오는 주일입니다. 5주간 한 여름밤의 기도회를 합니다. 다음 주부터 4주인데 담당자부터 부탁했습니다. 이번 주부터 하면 다 오신다. 이번 주에 다 오실 것을 믿습니다. 급격히 소리가 줄어들었지만, 꼭 현장에 안 오셔도 됩니다. 금요일날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서든 기도훈련, 부르짖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수 믿은 지가 언제인데 맛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체면이고 뭐고 소리쳐 부르짖는 기도를 이번 5주간 이번 주부터 맛보고 누려야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경건은 연습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하는 것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손흥민 선수가 축구를 잘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를 기억하시고, 그런가 하면 진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적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내 길은 히브리어로 네티바인데 대로입니다. 큰 대로입니다. 빛은 공동체 전체를 인도하는 큰 빛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두 가지 조화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일상생활 가운데 내 삶에 한 걸음 인도해주시는 작은 등불 따라 인도함을 받는 우리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엘리야의 영적 침체가 나옵니다. 그게 무서운 것입니다.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함께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섬세하기 인도하는 것을 느끼는 데요. 유튜브에서 윤복희희 권사님이 쓰신 우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우리 홈페이지에 올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분당우리교회와 한국교회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외루움도 견뎌나가겠소 바보란 소리 들어도 좋소
날 비웃는 그 비웃음들을 그 사랑으로 받아주겠소
이 모든 것이 힘들다는 것을 당신은 나에게 알려줬소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많고 크오 그래서 나는 살아가겠소


당신은 주님 아닙니까? 내 발등을 비추시는 주님입니다. 때로는 모독 당하고, 수치에 빠지고,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것이 인생입니다. 내 발등을 비추어주시는 작은 등잔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손을 내밀어서 넘어진 형제 일으켜주세
사람이 살면 한 번 사는 것 걸음 멈추고 생각해보세
시냇눌이 강으로 흘러서 저 바다와 하나가 되듯이
우리는 하나요 당신과 나도 하나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오
자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저 험한 벌판을 걸어 가보세
가다 보면 폭풍도 지나고 캄캄한 밤도 지나갈거요
높은 산을 오를 때도 있소 푸른 초원도 지나갈 거요
서로가 위하고 우리가 사랑하면 이 모든 것을 이겨 나갈 거요


그저 내 발등을 비추어주는 주님의 등불만 있으면 안 괜찮습니다.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함께 대로를 가는 것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윤은혜 가수 이야기를 했잖아요. 12명이 결성을 하고, 이 이벤트를 통해 뜨고 싶다고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저를 알면 좋겠어요. 내 노래를 모든 사람이 알면 좋겠습니다. 꿈을 꾸며 마음의 소원을 말할 때 한 명 운은혜씨는 나는 뜨고 싶어에 표시를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동료 11명이 뜨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서 알아봤습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크리스천은 이것입니다. 내 발등을 비추어주시는 은혜에 감격하며, 함께 손을 맞잡고 넘어진 형제, 일으켜주세. 이번 여름에는 분당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해야 합니다. 한 구절을 교역자들이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고, 공동체로 하세요. 분당우리교회는 근 10년 기존 신자 등록을 받지 않았기에 초신자가 너무 많습니다. 기존 신자 70~80% 나가셨습니다. 살 수 있는 대안은 하나입니다. 초신자들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꿈을 꾸고.






07월 0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하나님께 소망을 둔 묵상

하나님께 소망을 둔 묵상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0-11)


정신 건강 의학자의 글을 봤는데요 전문가의 시각으로 보니깐 지금 우리나라는 집단 불안증에 빠져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집단 불안증이라는 표현이 참 와 닿았습니다.


국민 전체가 집단 불안증에 빠져있다. 나라 안팎으로 걱정이 많다. 장기적인 코로나 사태가 끝난다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두려움과 공포로 술렁인다. 물가 상승은 당장 서민 생활을 위협한다. 경제, 사회, 민생 모두가 불투명하다. 이런 시대적 사명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걱정, 불안증은 날로 더해만 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문제 제기 한 글입니다. 집단 불안증에 빠져있는 상태라며 대안, 처방전이 무엇이냐 몇 가지를 설명했습니다. 그중에서 맨 앞에 나온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루 단위로 살자는 권면을 했습니다.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루 단위로 살자는 권면을 보면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발은 히브리어로 레겔이라고 하는데 단수형으로 표현됩니다. 한 걸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내 발의 등이요 할 때 히브리어로 네르라는 단어입니다.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등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에서, 내 발에 등의고 빛이신데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온 세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드는 작은 등잔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그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따르는 원리 아닙니까? 예전에 제가 킴 윅스라고 시각장애인 성악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전도 집회하던 때에 오늘도 제가 설교하기 전에 우리 찬양 대가 나와서 찬양으로 예배를 섬기는 것처럼 킴 윅스 시각장애인 성악가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 집회의 파트너였습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는 게 대단한 일 아닙니까? 이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인 나를 인도할 때 100m 앞에 뭐가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는 장애물에 대해서만 말해줍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이렇게 인도하셨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저는 저 멀리 뭐가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안내하시는 분이 발 앞에 뭐가 있습니다. 인도해주시는 대로 한 걸음 가다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집단 불안증에 빠져있다고 하면서 전문가가 하루 단위로 살자고 하며, 하루 단위로 살되 한 걸음씩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루 단위로 살자. 그렇게 조언해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9년 전 1만 성도 파송운동을 명하셨을 때 굉장히 막막하고 두려웠습니다.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니깐요. 모든 사람이 안된다고 하니깐. 얼마나 마음에 두려움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23년은 굉장히 혼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진짜 한걸음 싹입니다. 적절하게 인도해주셔서 예를 들면 29 교회로 분립하게 되고, 집 앞에 있는 작은 교회로 가시게 하고 그렇게 했는데 30 교회로 나누어서 파송해야겠다 마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78년이 지난 이후였습니다. 그 전까지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새벽마다 아뢰었는데 1만 성도 운동이 온전히 드려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분당 우리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저희 교회가 여러분 아시지만, 송림 중고등학교를 빌려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 초창기부터 교회가 예배실로 쓰니깐 자꾸 이상한 소문이 납니다. 제가 하지도 않은 말도 나고. 애당초 교회 건축 안 했다 선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선포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입니다. 교회를 건축할지 안 할지 모릅니다. 종인 제가 어떻게 함부로 선포하겠습니까?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생각이 깊으신 분은 저게 내년에 건축하려고 운 띄우는 건가? 누가 글 올릴지 모릅니다. 분당 우리 교회 내년에 건축하기로 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또 모르죠. 그런데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할때 1만 성도 파송운동, 하나님이 갑자기 내년에 건축해라 명하지 않겠죠. 그러나 이것은 100%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결정권자는 제가 아니고 여러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니깐요. 그저 등불이 내 발등만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 걸음 비추어주시면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래서 저는 남의 교회에 대해서, 다른 교회 목사님에 대해서 뭐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만 성도 파송운동 잘 진행하고 제가 이렇게 설교한다고 가정하면 정말 나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살 것은 대형교회가 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해야 합니다. 라고 하면 월권 중의 월권입니다. 각자 교회에, 각자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서, 내 발등만 보면 됩니다. 내 발등의 불이 꺼져서 돌부리에 채이지 않도록. 그래서 저는 지금 분당우리교회가 2기 사역을 선포하고 영적 기초 다지기 제 기역으로 6주째입니다. 저분은 6가지라고 하더니 3가지에 묶여서 진도가 안 나가네. 잘 보셨습니다. 첫 번째 기초다 지가 말씀 묵상 두 번째 기도 훈련, 세 번째 개인으로 소화하지 않고 교회로 이루어가자.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음 주 되면 20년 개척 처음으로 다음 주에 이번 여름에 전 교회 적으로 말씀 묵상과 기도 훈련 숙제가 나갑니다. 진도가 안 나갑니다. 여러분에게 달렸죠. 말씀 읽기 훈련을 하면 진도 나갈게요. 내일 내일 아침에 발등에 등불을 비추어주시는 말씀 묵상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저는 본문 말씀을 이런 기준으로 한 가지 포인트 전하길 원합니다. 강대국이었던 바빌론의 침공으로 유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상황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꿈꾸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고향에 가고 싶다. 그러나 억장이 무너지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70년이 포로생활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느냐면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을 퍼트립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의 특징은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고 오늘날 거짓 목사의 특징입니다. 10절에서 정확한 팩트를 주시는 것은 혼미하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사실 팩트를 말씀하시고, 11절에 부연설명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10절 말씀이 일어나게 될 사실이라면 11절 말씀은 팩트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의미 부여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왜 하나님이 11절에서 부연설명으로 팩트에 대한 해석을 해주십니까? 인간은 너무너무 무지하기에 내버려두면 쓸데없는 생각 하니깐요. 좋은 쪽으로 오해하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우울한 쪽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해석하기를 원합니다. 묵상하는 모든 분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내버려두면 주옥같은 말씀이 선포되어도 자기식으로 이상하게 해석이 되어 내 인생은 잘 될 수 없다. 악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기에 자꾸 헤아려야 합니다. 순기능이 많은데 진짜 중요한 기능은 생각 교정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왜 해야 하느냐고요? 내 생각이 고정되게 하는 기능입니다. 아브라함 할 때 기억나시나요?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3)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못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므로 기도로 아뢰며 큰 그림을 그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엉뚱한 소리를 하고 생각이 잘못된 아브라함에게 생각을 교정해주시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


보이는 게 없어서 눈의 공급만 하고 엉뚱한 소리만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큰 그림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안될 것 같아서 불안하고, 안티들은 날 잡은 것입니다. 그게 잘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 10년 내내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 그림으로 믿음으로 나아갔기에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잖아요. 너무 동의가 되어요. 위기입니다. 그것밖에 볼 수 없기에 우리가 말씀 묵상하자는 것입니다. 자식 하나 없는 상황에서 뭇 별을 보여주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묵상하자는 것입니다. 영적 기초 다지기 중의 진짜 중요한 기둥인 말씀 묵상, 기도훈련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




1. 희망의 회복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지금 하나님이 11절에서 어떤 말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아시거든요. 노예생활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희망이거든요. 저는 이것을 너무 잘 겪었습니다. 제가 이민 초기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되뇌느냐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이 없었으면 단 한 순간이라도 못살았을 것이에요. 너의 말이 들린대로 그대로 하겠다. 잘사는 친구 만나면 스포츠카 모는 친구 만나면 나에게 희망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초라하지만 망하지 않아. 하나님 들으시고 나에게 희망으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 아시잖아요. 포로로 잡혀간 이야기를 하는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청년 아닙니까? 나중에 총리대신에 오르는 입지적인 인물이 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시는 분이 많을 텐데요.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니깐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간신들의 말에 싫어할 왕은 많지 않나 봐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니깐 창문을 닫고 기도하면 되지 않나요?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단 1:17)


환상은 히브리어로 하전이라는데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꿈은 칼롬 하나니므이 계시를 의미합니다. 왜 창문을 열어야 하나요? 하나님에게 기도 안 하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창문을 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거든요. 계시를 보거든요. 우리가 항상 그 기도합니다. 비굴하지 않게 해주세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이 여리고 약하니 비굴하기 쉬운데 비굴하지 않게 해주세요. 다니엘이 받았던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야 합니다. 출근하기 전에 말씀 묵상하고 가자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에배소서는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엡 1:16)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지금 감옥에 있는 사도바울을 밖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위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감옥에 있는 바울이 반대로 밖에 있는 사람에게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놓치면 안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감옥에서 소망으로 꽉 차있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게 가능했느냐고요?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저는 참 너무 어려운, 전문가들이 우리나라는 어둡고 우울하고 집단으로 그런 상황에 빠졌다고 진단할 정도로. 세계적인 먹구름이 몰려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어려운 때에 어떻게 헤쳐나가려고 고생을 하세요? 하나님이 주시는 11절 말씀. 말씀 묵상하세요. 어두운 이 시대에, 자영업자 성도님을 위해서 계속 마음이 쓰입니다. 빛 다 얻어서 은행 융자 얻어서 장사는 안 되는데 은행 이자율이 점점 높아져 가니깐 경제뉴스 볼 때마다 하나만 봅니다. 우리 성도님들 힘들 텐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 감사의 회복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분명히 요 뒤에 결과가 하나 더 있을 것이다.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여러분, 포로로 잡혀 온 그들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고 희망을 회복했다고 하면 반드시 거기에 감사가 회복된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 다 아시죠? 요나서 1장에서 요냐는 비참한 인생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어떤 일을 겪습니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2-3)


요나의 마음으로 읽어볼께요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대박이 터진지라


드문드문 오는 배가 딱 대박입니다. 많은 신앙이 없으면서 시험에 든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불순종해도 사업이 잘되는구먼, 여러분 1장 끝 부분에 가시면 아시죠? 겉으로 대박인 줄 알았는데 재앙의 길로 몰고가는 배입니다. 풍랑을 일으키고 수치를 일으킵니다. 좌절을 가져다주는 배입니다. 영안을 열고 하나님 앞에서 큰 그림을 이해해가기 시작하면 개념이 달라집니다. 1장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고 수모를 당하고 비참한 일을 겪는데 요나서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7-9)


7절에서 생각하였더니, 9절 감사하는 목소리로 어떤 관계인지 아십니까? 생각하였더니 히브리어는 자카르 단어인데 기억하다 상기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이 흐름을 아시겠습니까? 마치 다시스로 가는 배, 절망으로 몰고가는 배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뭐가 기억에 남나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제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타 풍랑을 만나고 죽을 것 같고,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이 순간이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헤아려 보니깐 불순종으로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연단을 통한 깨달음을 준다는 것 아닙니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부교 역자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종이라고. 모든 생각은 성도에게 맞추어야 한다. 잠이 안 오는데 왜 자야 하는지 아나? 그래야 내일 만날 성도를 힘있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야. 왜 쉬어야 하는지 아나? 힘을 얻어서 재충전하기 위함이야. 감히 우리교회 교역자들은 그래도 따르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부림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섬겨도 여러분이 기도 안 하면 말짱 헛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창조주가 아니잖아요. 제가 능력자가 아니잖아요. 저는 여러분의 가이드에 불과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제 설교만 의지하지 말라고. 제발 부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 경륜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무거운 짐 지고 왜 그렇게 고생하세요? 제가 1만 성도 파송운동 맡겨주신 사명으로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10년 가까이 고생하고, 죽겠습니다. 숙제 두 개가 남았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은 어떻게 해야겠느냐고요. 공사가 늦어져서 내년 3월에 오픈하게 생긴 데요. 가평 우리 마을을 생각하면 정말 잠이 안 오고 실제로 불면증을 겪습니다. 가평 우리 마을이 피 같은 헌금으로 세워지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책임은 제가 져야 하잖아요. 제가 누구에게 책임을 떠밀겠느냐고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약자와 장애인들과 지친이 들이 주님 이름으로 쉬는 곳을 만들어야한느데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드림 센터 사회 환원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피 같은 헌금으로 12층짜리 빌딩을 샀는데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는데 거기서 거미줄이나 쳐있고 하면 제가 여러분 앞에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게 좋은 게 뭔지 아세요? 1만 성도 파송운동 끝나고 할렐루야 남은 시간 너무 행복하게 지낼 거야 하면서 골프 하고 다니고 하면 무슨 문제가 생겨요? 여러분의 아픔을 모르게 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짐 없이 사는 줄 알게 되요. 제게 맡겨진 과업으로 2, 3일 하나님께서 만져주시기에 오래 겪지는 못했지만, 꼭 성도님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이런데 성도님들은 오죽하겠나. 그럴 때마다 딱 이 구절로 주신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제가 가평 우리 마을 때문에 연기되고, 힘들고 잠이 안 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제 마음에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평 우리 마을, 남은 또 한가지 숙제 드림 센터 사회 환원.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과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3월이면 다 드러날 텐데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늘 어깨에 지어진 짐이 무거워서 잠을 못 자며, 동시에 하나님이 이끌어갈 감격 때문에 살 맛이 나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상하게 2부 예배 때부터 가장들을 축복하라는 메시지가 저를. 모든 분이 은혜받으시겠지만 특별히 아버지가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남편들이 사실 제가 남은 두 숙제 가평 우리 마을, 드림 센터 사회환원으로 두려움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제 아내에게, 제 아들딸에게 일절 나누지 못합니다. 제 짐인데 가족들에게 나누느냐고요. 수많은 가장들이 울지도 못해요. 힘들다고 운 적이 한 두 번 기억이 갑자기 났어요. 그때 참았어야 하는데. 대부분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들, 그 무거운 짐은 모르실 거예요. 어머니들이 속으로 생각하실 거예요. 목사님은 남자라서 몰라요, 우리도 만만치 않아요.


결론은 시편 42:5로 맺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이번 주에 저도 이 은혜가 필요하고 여러분도 필요합니다. 안희숙 여사님,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죽임을 당하는 고문을 견뎌내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유지했던, 산 순교자라고 칭송을 듣던 이 분의 비결이 그분이 만든 노랫말에 다 녹아있기에 이 찬양으로 마무리된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06월


06월 2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최근에 우연히 인터넷으로 임용택 목사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요. 강의를 듣는데 두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이야기 중에 한 이야기가 강사 목사님의 아버님 이야기인데요. 아버님께서 폐암으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큰 고통을 당하셨는데, 부모님이 그렇게 고통당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겠냐로고요. 늘 마음에 아프고 힘들었는데, 아버님도 목사님이셨나 봅니다. 어느 날 아버님을 뵈러 갔더니 너무 밝아지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목사님이 너무 놀라서 어떻게 되었냐고 여쭈었더니 아버님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바꾸었어. 내가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는 말이 입에 뱄는데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데 목사가 이래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시고 내가 말을 바꾸기로 했어.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너무 아프고 힘드니깐요. 죽겠다는 불평이 나올 때마다 이렇게 바꾸셨데요. 아이고 주께 있다. 아이고 주께 있다. 죽겠다를 주께 있다고 바꾸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꾸어서 고백하니 몸도 달라지고 얼굴도 달라지시고, 그래서 아들 목사님이 보기에 달라지셨어요. 이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투병하시다가 오래 지내지 못하고 하나 인께서 불러가셨는데, 그때의 아버지 말씀이 자기에게 유언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떠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갖은 언어, 말투, 말의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내용이고요.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 들어 쓴데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 간디하고 교류가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선교사님이라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역하시다가 89세 되는 때에 중풍에 걸렸습니다. 선교활동도 그만두실 때가 되었는데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이 열정 하는 마음이 너무 크신 것입니다. 중풍에 걸려 누워계시니깐 너무 답답한 것입니다. 나는는 선교사역에 아직 할 게 많은데, 구원해야 할 영혼이 이렇게 많은데. 회복되기 소원을 하셨는데,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이 자기를 담당하는 간호사에게 독특한 부탁을 합니다. 간호사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스탠리 존스 일어나 걸으시오. 이렇게 말해달라고 합니다. 젊은 간호사 관점에서 89세 어른에게 명령하듯이 일어나 걸으세요. 얼마나 힘들겠느냐고요. 환자가 간곡하게 부탁하니 갈 때마다 간호사가 계속 선포했다고 합니다. ‘스탠리 존스 일어나 걸으세요.’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중풍으로 쓰러진 지 6개월 만에 일어나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연세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있는데, 그 절박한 마음을 갖고 계속 선포하고 다짐하기를 원하는 선교사님의 애틋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원이 있다면 선포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인간이 갖은 언어 습관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강의를 들으면서 옛날의 제 생각이 납니다. 처음 이민 갔을 때 너무 초라한 저 아닙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야 하는데 영어는 너무 안되고, 학비를 벌어야 하는데 하루 8시간, 9시간씩 전 시간으로 막노동, 그렇게 영어 실력이 짧은데 공부해도 따라가도 못하는데, 미국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해도 영 어렵지 않나 좌절도 많았고, 교회에 가면 제 또래 친구들 중에 일찍 이민 와서 영어 유창하게 하고, 스포츠카 몰고 가는 친구들을 보면, 차도 없고 너무 주눅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유명 상표 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월마트 같은 곳에 가서 제일 싼 것을 입으니깐. 싼 옷이 두 종류더라고요. 입으면 입을수록 늘어나는 옷, 줄어드는 옷 둘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고 열등감도 많고. 그랬는데 여러분,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회를 오신 것입니다. 그때 말씀 하나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설교 한편 잘 들으면 인생이 변할 수 있는 것. 그때부터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포츠카 몰고 다니는 친구 만나면 그 친구에게 말로 하면 안 되고 하나님 들으시라고. 계속 마음으로 선포했습니다. 네가 보기에 초라하지 그런 데 있잖아. 10년 뒤에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볼래? 나 이렇게 안 끝나. 나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돌아가셨는데. 계속 만날 때마다 마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우연인지 하나님의 섬세하심인지 모르겠지만 막 선포할 때가 83년도입니다. 딱 10년 뒤 93년은 제가 사랑의교회 옥한음 목사님께 발탁되어서 청소년 사역을 시작할 때입니다. 그 이후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너희 말이 네 귀에 들린 대로 그대로 해주시겠다. 제게 중요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연로하신 아버님 목사님은 아니고 주께 있다 하듯이 제가 초라하고 마음에 부담이 있으면 계속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너희 말이 네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스탠리 존스 89세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간호사에게 스탠리 존스 일어나세요. 말을 시킨 삶에 대한 의욕. 혀의 힘.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의 권세. 제가 지난주 마틴 셀리그먼 박사 말을 인용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해지기 원한다면 낙관주의자가 되고, 낙관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언어 습관을 고쳐야 한다.


저희가 지금 6가지 영적 기초 다지기를 보고 있는 데요. 6가지 전체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둥이 말씀 묵상, 기도 훈련입니다. 그래서 첫째 둘째 셋째 항목을 갖고 계속 적용해서 두 주째 하고 있습니다. 몸에 배어서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좋은 책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기현 목사님께서 쓰신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말씀 묵상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데요. 이 책에 보면 저자가 경험한 간증이 나옵니다.


말씀 묵상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 묵상이 있어서 저는 살았습니다. 30대 절반이자 후반을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보냈습니다. 죽이도록 미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을 미워한다는 것. 그것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다는 것이 괴롭고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자살의 유혹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죽든지 죽이든지 할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가장 악한 상상을 다 했답니다. 그런 저를 살린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말씀묵상이 없었다면 지그의 저는 없었습니다. 말씀 묵상이 있어서 저는 살았습니다.


이 목사님이 그러시잖아요. 내면에 분노가 가득했던 젊은 청년을 오늘 이렇게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훌륭한 목사님을 변하게 한 것이 말씀 묵상이었다고. 언어 습관을 고치는데 말씀 묵상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 아닙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우리가 위선으로 고상하게 말하는 것은 한 두 번은 되는데 툭툭 튀어나옵니다. 못 감춥니다. 그 사람 속에 든 것이 나옵니다. 말씀 묵상을 왜 해야 하느냐고요. 선한 게 있어야 선한 게 나오니깐. 말의 권세를 누가 모르느냐고요. 누가 긍정적으로 좋게 말하면 좋은 것. 세워주고 격려해주면 그 사람이 존경받는 조건인 것 모르느냐고요. 들어있는 게 악한 것이어서 항상 악한 게 나옵니다. 남들에 대해서 참 어린애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 깎아내고 자기 올리고. 계속 이런 사람이 있어요. 어린애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계속 선한 말이 나옵니다. 제가 지난주에 언어도 훈련이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하나만 말했고, 나머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말씀 묵상과 언어 절제훈련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내버려두면 툭툭 쓸데없는 상처나 주는 말을 하고, 돌아가면 그때 그 말을 왜 했지. 그게 싫으면 그전에 말씀을 집어넣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미팅이 있다면 기도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훈련은 내면이 말씀으로 충만해졌다면 개인적으로 가두어두지 않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실습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조금이라도 성숙해진 언어를 보여주고 실습하는 데입니다. 다락방 소그룹 모임이 그런 곳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내면의 성숙함이 언어로 드러나는 곳이 가정입니다. 성경도 읽고 나가면서 자기 아내에게 험한 말을 하고 가면 그것은 삼국지 읽은 것이지 성경 읽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제대로 내 안에 들어왔으면 축복의 언어, 용서의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모든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운전하려면 연료를 넣어야하잖아요. 부산으로 가려면 제일 먼저 점검해야하는 것이 휘발유가 충분한가? 계속 휘발유 공급을 받아야 운전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연료 공급을 받지 않고 가짜 석유 넣으니 생각지도 않은 것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조현서 목사님이 쓰신 말의 힘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을 보니깐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 12:18)


양약은 마르테라는 말입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


마르테 말은 두 군데 나왔는데 이 단어의 어원은 치료라는 라파입니다. 라파는 들어보지 않으셨어요? 구약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여러 가지 나오는데 여호와 라파. 하나님의 치료 하심을 강조할 때 부르는 이름 아닙니까? 그러니깐 여러분,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 온순한 혀는 생명나무와 같다. 라파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 요소에서 치료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초듳학교남 나온 분이잖아요. 신기한 게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들 너무하셨어요. 열 받으면 몽둥이로 두들기고, 그러면 상처받고 분노가 생기죠. 어머니에게 집에 가서 일러바치고 나면 신기하게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엄마가 상담 공부 하셨나? 그게 아니고요. 오늘 본문에서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 12:18 새번역)


두 극단적인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끊임없이 비수를 꽂는 일이 계속 일어나는 데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해서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효가 있습니다. 가정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비수로 찌르는 게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것,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 그런가 하면 가장 고마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그래서 저는 사모합니다. 분당 우리 교회는 후자가 흐르기를 원합니다. 비수를 꽂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성숙한 성도님이셔서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라는, 교회 안에서 증명되도록 은혜 내려주시길 원합니다. 분당우리교회는 피 흘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교회 초창기 분들을 생각하면, 이후에 오신 분도 훌륭하지만. 성숙한 분이 많으셨어요. 아주 오랜만에 권사님 한 분 가정을 찾아봐서 대화를 나누는데 잊고 있던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평범한 주부입니다. 틈틈히 상당 공부를 계속하셔서 제가 담임목사로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 부탁을 하시는 데요. 너무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담임목사를 찾습니다. 상담하다보면 상처가 너무 깊어서 한번 기도해드리고 상담해 드리고 나아질 거리가 아니라고 하면 여러 번 권사님에게 의뢰했습니다. 권사님이 그분을 만나서 대화하고 상담하면 깊은 병으로 고민하던 사람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이 링 가능했을까 하니깐, 잠언 12장 18절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 12:18 새번역)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라는 프로가 있지 않습니까?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꼭 봐라. 볼 수 있는 집에 프로그램이 없으면 옆집에 가서도 봐라. 권했던 에피소드는 모녀가 김밥집을 하는 상황입니다. 백종원 골목식당 팀이 여러 가지를 도와주는데 제가 눈물을 흘리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백종원씨하고 상담하는데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은 딸이 내 딸이 아닙니다. 입양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김밥집 하는데 민망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이후에 엄마가 하는 말을 보고 의도를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식당 하면서 엄청난 빚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전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목사들에게 와서 기도부탁 하는 게 얼마나 절박한 것이겠느냐고요. 애틋한 마음을 갖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불쑥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목사님 기도부탁을 하면 목사님이 기도부탁을 할 때 회복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타나기를 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겔 37:1)


뼈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환상 중에 이것을 보고 있는데 주님이 물으십니다. 이 뼈들이 살아나겠니? 에스겔이 자신이 없어서 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명령합니다. 마른 뼈들에 입술로 선포해라. 이런 내용을 다루는 것이 에스겔 37장입니다. 제일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가 대언하라입니다. 몇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3-5)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겔 37: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하나님과 에스겔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흐름이 읽히십니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안에서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너희 입으로 대언하여 선포할 때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이 내포된 줄을 믿습니까? 대언해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믿는다면 그 믿음이 있다면, 오늘도 말씀의 강력함이 믿는 우리에게 어떤 현장으로 가기를 원합니까? 죽겠다 하는 현장으로 가서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입으로 한다면 권사님 힘든 것 안 데요 죽겠다가 아니라 주께 있다 선포할 때입니다.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 같은 선포가 이곳저곳에서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설교할 때만 하는 선포가 아니고, 삶의 현장에서, 소그룹 안에서, 지쳐있는 성도들 안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선함은 히브리어로 노암이라는 단어입니다. 은혜스로운 뜻을 갖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엡 4:29 공동번역)


목사의 말속에서 환자들이 치유되고 상한 마음이 치유되는 능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살맛나지 않은 세상에서 그냥 엿세동안 우울하기 짝이 없는 성도님들에게 분당우리교회가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날씨도 흐린데 기분 되게 좋네.


제가 이번에 다락방을 개강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갖기를 원합니다. 재미와 의미.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안 돼요. 재미가 없으면 그 다음 주부터 안 가요. 재미가 있는데 의미가 없다. 그러면 타락한 모임입니다. 제가 교역자들 다 모아놓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교회의 모임은 재미있게 해야 한다. 모든 교역자가 한마음으로 똑같이 저를 쳐다봤습니다. 당신은? 사실 교회는 즐거워야 합니다. 제가 20대 때 저를 살려준 것은 하나님이고, 살려준 기관은 교회입니다. 영어도 못하는데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작은 비즈니스를 시작했는데 장사도 안되면 답답한데 저녁 7시에 문 닫고 나면 집으로 안가요. 훨씬 더 먼데 자리 잡고 있는 교회로 갑니다. 청년부 다해봐야 10명도 안될 때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피자 먹으러 가고 낄낄거리고 그게 저를 살려줬습니다. 그때 이민교회 청년부 회장으로 섬겼던 부부가 있는 데요. 지금도 이름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효성 장로님, 그때는 집사님입니다. 그 교회 처음 가서 예배가 끝났는데 전부 낯선 사람입니다. 자기들끼리 권사님 호호하는데 너무 외로워서 화장실 옆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권사님 호호 하지 말고 화장실 옆에 있는 사람 점검해야 합니다. 이호성 집사님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보니깐 형색도 남루하고, 그때부터 처음 오셨군요 하면서 섬겨주시는 데요. 주일 오후 예배가 마치면 꼭 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갑니다. 저는 20대이니깐, 뒷마당에 LA 갈비를 굽고, 이 사람인들 갈비를 먹을 수 있나. 사실 주 중에 먹는데. 그래서 들어와 하면서 거실에서 차 한잔 하면서 늘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하셨는 데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말이 기억 안 나는데 이런 말을 주셨더라고요..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여러분에게도 그런 말을 선포하는 종이 되기를 일주일 내내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그리스도 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 3:16)


영적 묵상, 기도훈련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또 이것 손에 듭니다. 하루 한 구절 묵상 핸드북. 저 목사 지치지도 않나. 지치라 하시라고요. 프린트하셔서 해보라고요. 말씀 묵상하시고. 그래서 결론으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비행기 탈 때마다 감동한다고 했잖아요. 안내영상.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바다에 빠지거나.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는데 연약한 아이나 장애인에게 주기 전에 먼저 산소 공급기를 껴라. 여러분 살아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회복돼야 여러분 자녀를 섬길 수 있습니다.






06월 1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영적성숙과 혀 길들이기

영적성숙과 혀 길들이기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1-8)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봤는데요, 예전에 박만덕이라는 백정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제 그 당시로 백정은 천민 계급에 속하다 보니 양반들이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만덕이 상처가 많았나 봅니다. 양반들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두 양반의 태도가 너무 다른 것입니다. 한 양반이 고기를 주문하는 데요, 백정에게 무시하는 태도로 만덕아 고기 한 근 다오. 그래서 고기 한 근을 저울에 달아서 그분에게 팔았습니다. 그다음에 같이 온 양반은 주문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아주 부드럽고 따뜻하게,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 그래서 한 근을 주어서 전해주었는데, 두 양반이 들고 나가려다 보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고기 크기가 눈에 띄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박만덕이라는 백정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똑같이 주문했는데 왜 나는 차이가 나느냐. 박만덕이라는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손님의 것은 만덕이가 자른 것이고 이분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인간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설명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도 저런 일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언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인용한 마틴 셀리그만이 있습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낙관주의자가 되려면 언어 습관을 고쳐야 한다.


말만 하면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워 좋겠어는 이해가 되는데 좋아 죽겠어. 모든게 죽겠다고 하는 것은 썩 좋은 언어 습관이 아닙니다.


페러드 쇼먼은 비슷한 말을 했는데요. 불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사람은 긍정적인 말로써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우울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에 그런데 어떡하겠느냐고요. 전문가들의 조언이 인문학적으로 연구해도 그런데요. 성경은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야고보서가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니깐 어지간하면 선생 되지 마라. 왜 선생 되지 말라고 조언하느냐면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선생이 되면 말을 많이 하잖아요. 2절에서 말 많은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니깐. 남을 잘 가리키고 못 가르치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여 던지는 말씀 아닙니까? 말의 실수가 없는 자라면 온전한 사람이라. 이런 큰 선포를 하고 그 이유에 관해서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3-5)


인간의 혀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이렇게까지 성경이 언어 사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늘 자기가 내뱉는 말들. 주일날 설교를 하고 나면 꼭 그 다음 날 제 설교를 듣습니다. 녹음을 자기 목소리로 하고 들으면 이상하잖아요. 제가 제 설교를 듣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했지. 군더더기가 왜 이렇게 많아? 제 설교를 들으면 마음이 복잡하고 힘듭니다. 그래서 듣는 것입니다. 말의 태도를 돌아봐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대화를 할 때 녹음기능이 워낙 쉽게 돼 있잖아요. 들어보면 남편에게 무례하네. 말을 왜 이렇게 하지? 확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언어 사용과 관련해서 가슴 아픈 것이 있습니다. 언어가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한데, 인간이 타락할 때 언어도 함께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무서운 경고 아닙니까?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우주도 정복했다고 하고, 인간의 엄청난 것이 발전했다고 하는 데요. 여전히 인간이 갖고있는 연약함은 자기 혀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연사가 입을 잘못 놀려서 망하는 경우를 언론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을 인색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나는 말실수가 없는 사람이야. 이것이 말실수에요. 자신감을 갖고 있다가 큰 거 하나 말실수해서 패가망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인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이 타락할 때 우리 언어도 같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것입니다. 음주 단속에 걸리면 많은 사람이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이 내려와서 똑바로 걸으라고 합니다. 자기는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데 삐뚤빼뚤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상처받은, 교회는 상처 제조기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상처받아본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다 들 것입니다. 저도 들어요. 누가 교회에서 대놓고 모독을 줄 거야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는데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음주 아니야 하는데, 똑바로 걸어야 하는데 삐뚤빼뚤 걸어야 하는데, 우리입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 눈에 들어오는데, 한발 늦었죠. 항상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 들어봤습니까? 혀 아래 도끼 들었다. 옛 어른들의 지혜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혀 아래 도끼가 들어있어서, 아내를 격려하고 싶어서 내뱉었는데 도끼로 성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를 32년째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설교 익숙할 때가 되면, 오늘 아침 포함해서 모든 설교 내용을 토시 하나 빠지지 않고 적습니다. 어떨떄는 힘듭니다. 문장 다듬는데 시간 엄청나게 걸리거든요. 1-13장 됩니다. 대충 어느 정도 하겠군.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왜 드러나면 혀 밑에 도끼가 있어요. 수 없이 다듬고 다듬고 해서 전해야 하는데, 툭 튀어나오면 상처 되는 설교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원고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즉석 해서 웃긴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예외가 가끔 있는데,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은 실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혀 아래에 도끼가 있기에. 이것이 바로 인간 원죄 이후로 혀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는데 섬뜩하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 네가 한 말에 따라서 너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결받게도 될 것이다." (마 12:36-37)


제가 심판 날에는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지어야겠느냐고요. 네가 박 집사 만났을 때 쓸데없는 말로 상처를 왜 주었니? 모두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 한마디라도 허튼 게 없다고 믿는다면 말하는 데 있었어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교역자 회의 가면, 저에게 하는 독백을 합니다. 거 참말 매우 많네. 저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저는 후배 목사님들을 보면서 다짐하는 것은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자. 요새 부목사님들에게 밥을 많이 사주는 편입니다. 제가 이것 관련한 글을 우연히 읽은 데요. 이 글을 쓰신 분의 주장이 뭐냐면 누군가 대화하다가 자기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빨리 대화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재밌는데 너무 와 닿습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봐’ 빨리 대화를 중단해야 해. 두 번째로 이 말이 서두에 나오면 중단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안 하려고 한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섭석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할 말은 해야겠어’ ‘너에게 충고 한마디 하자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제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알아서 하는 것들이 많은데, 잘되라고 했던 말이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 왜 부작용이 되느냐고요? 입술도 타락했기에 분별력이 없습니다. 죄었을 갖은 우리는 너무 좋은 말을 너무 기분 나쁘게 전하는 은사를 가졌습니다. 저렇게 좋은 말을 저렇게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지? 교회에서 상처가 되는 대부분은 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을 줄여라. 잠언 읽어보세요. 반복해서 나오는 성경의 충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원을 알기에 분당우리교회 개척 초기에 진짜 온 사력을 다해서 캠페인처럼 한 것이 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초창기부터 있었던 분들은 아십니다. 꼭 필요한 조언이고,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무례하게 말하는 것은 접수를 시켜주지 말자. 어떤 집사님하고 대화하는데 무례하면 끝까지 안 듣습니다. 집사님 잠깐만요. 내용을 들어보니깐 너무 좋은 내용인데, 귀한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난폭한 사탄의 그릇에 닿아서 하시냐고요. 이것은 접수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차분해지시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하니 성가대를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많은 선배님이 조언하였습니다. 모든 소문의 진원지가 성가대고 모든 불평불만은 성가대에서 나온다. 그런데 저는 첫주부터 성가대 없이 예배 어떻게 드립니까? 제가 자랑하는 성가대는, 선배 목사님이 우려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 성가대가 참 너무 감동이 됩니다. 지난주에도, 1부 2부 성가대가 많이 부족합니다. 4부 성가대 3부 성가대 통합을 하니 3부 성가대는 인원 모자라지 않습니다. 너무 감동을 하였습니다. 괜찮으니 3부 찬양대 누구라도 1부, 2부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모든 수군거리고 불평하는 진원지는 찬양대가 아니라 모든 입이 다 진원지입니다. 성도가 2만 명이면 2만 개의 진원지가 있습니다. 최근에 너무 감사하게 들었던 이야기가 몇 달 전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했잖아요. 절반은 분당우리교회 부목사님 중에서 청했고, 절반은 타 교회에서 사역하는 분을 모집공고를 내서 청빙을 했는데, 타 교회에서 1년 반을 같이했으니 다 우리식구죠. 타 교회에서 청빙된 목사님이 분당우리교회 개척해서 보니깐 분당우리교회 순장님 특징이 있다고합니다. 괭장히 조심하면서 조언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인상적이었다. 이 교회 훈련받았다고하면 말을 조심허달는 것입니다. 적어도 중직자라면,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사모한다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야 합니다. 성경이 그런 조언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이 흐름을 아셔야 합니다. 이 본문이, 이 주제가 다루어져야 하는가? 4주 전에 기초 다지기 6가지 항목을 다룰 것입니다. 영적 기초 다지기 항목,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을 필사, 말씀을 암송 이것이 첫 번째 항목입니다. 하루 한 구절 묵상 쓰고 계시나요? 상경을 한 구절이든, 두 구절이든 그 말씀을 머리에 집어넣고 하루를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 훈련과 기도 훈련이 공동체성 회복 훈련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구성원의 언어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 찬양대가, 주일학교 교사 모임이 건강한 모임이 되려면, 구성원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서 언어가 건강한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기본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구단을 못하면서 미분 적분을 풀겠다는게 한국교회라고 합니다. 무슨 방정식을 풀겠다고 하냐고요. 목사 안수받으면 뭐합니까? 끊임없이 입술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도가 훈련이라고. 입술 사용도 훈련입니다. 입술 훈련과 관련해서 두 균형을 말하고 싶습니다. 두 균형의 문제입니다.




1. 말씀묵상과 언어절제 훈련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약 3:2-3)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을 설명한 것을 보면서 시편 39편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말의 재갈을 물려야 주인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듯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입술에 파수꾼을 세운다는 것은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내키는 대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지난주에 말씀드린 김하중 장로님께서 대통령 의전 비서관으로 일하실 때 장로님께서 세운 철칙이 있다고 했잖아요. 보고하러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기도한다. 깜빡하고 들어갔다가 그 어려운 자리에서 깜빡 잊었다고 다시 나와서 하는 기도가 정직함과 지혜를 주시길 원합니다. 왜 대통령 만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고요? 실수하지 않도록 파수꾼을 세워야 합니다. 예전에 말 그릇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사람마다 말을 담는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사람마다 좁고 얕은 그릇이 있고, 깊고 큰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생각 없이 말이 나오는 것은 말 그릇이 작아서 그렇습니다.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결국은 그 사람이 내뱉는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됨됨이라는 것입니다. 0.1초 만에 팍 들이받아 버리고, 사춘기 때 주로 일어나잖아요. 사춘기 때 말 그릇이 만드는 과정이어서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이러면 고려해봐야 합니다. 성품 할 때 품을 국어사전을 보니 사람됨 바탕과 타고난 성품. 그런데 한자를 화면으로 올려드렸거든요. 품을 보세요. 성품의 품을 보니 입 세 개를 모아놓은 것이 품입니다. 인품, 입을 세 개 모아 놓은 것, 품격, 여러분의 입술, 언어가 우리 품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 목회하면서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유명한 분들도 만나보고, 재벌도 만나보고 많은 유명한 분들을 만나봤는데 정치하는 분들을 만나면 대부분 엄청 점잖습니다. 재벌 분을 만나면서 깊이가 있고, 그런 분들만 만났는지 모르지만 가끔 가다가 이 사람 왜이러지. 그런 신문에 사진 나오면 긴장될 것 아닙니까? 5분 대화하면 긴장이 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설명합니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성경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어른이라고 하지 않고, 좋은 옷을 입었다고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하는 게 어른 같아야 어른이라고 합니다.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으면 어린아이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긴장이 안 됩니다. 어린애처럼 잘 다루어야죠. 어린애는 자기 과시가 많잖아요. 여러분이 주변 사람에게 어린애로 접근하는 게 아닌가요? 예의가 있어서 일절 내색하지 않고, 박 집사님 어린애네 완전히 이러면 곤란한것 아닙니까? 다락방 시작한 데요. 모든 다락방에 어린애를 배치했습니다. 딱 하나씩만 배정했습니다. 누군지 궁금하다고요? 5분만 대화하면 금방 압니다. 어린애 취급받고 싶지 않으면 언어를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도 엄청나게 지적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하루 한 구절 묵상 핸드북을 오늘부터 쌓아가야 합니다. 기초 다지기 중에 기초 다지기가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 암송하고 필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성숙한 어른의 입술로 성숙해갈 줄을 믿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방언으로 기도하면 좋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한국말도 선물입니다. 어느 나라 말로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 하게 하심을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2. 공동체에서의 성숙한 언어사용 훈련


타이틀만 말씀드리고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분당우리교회 공동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골로세서 3장 16절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하고 주일에 함께 모여서 말씀 묵상한 성도들이 모여서.


이 말씀 묵상과 언어 절제 훈련이 먼저 일어나야 하고, 개인으로 산으로 가셔야 하지 않고 공동체로 가야 합니다. 다락방에서 이런 말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집사님 언어가 부드러워졌어요. 웬일이야. 집사님 말투가 상냥해요.` 그래서 저는 입례송을 부를 때 이것이 강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이 주의 이름 높이 올리며
넓은 바다가 주를 노래해
나를 통하여 나의 입술로 인하여
주의 이름 높임을 받으소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가책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경건한 목사 가정을 이루려는 선한 뜻이지만 언어가 타락해서. 신혼부터 아내에게 강요를 했습니다. 외출하려고하면 목사 부인 옷차림 왜이래 계속 지적을 했습니다. 저는 뭐 잘랐다고 교만한 것입니다. 한 번은 첫째애를 임신한 상태인데요. 교회일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과일이 먹고싶다고합니다. 겨울에 구하기 쉽지 않아요.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아십니까? 참으라고, 목사부인이 먹고싶은것 다 먹고 사는거 아니야. 이거 30년전 이야기이니깐 사랑하는 여성도 여러분 노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당연히 요즘 안그러죠. 저 부터 고쳐야죠.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부작용이 많이 있었다는것 압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말 내뱉기전에 꿀꺽 삼키고. 내 안에 나오는 것이 영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06월 1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홀로 그리고 함께

홀로 그리고 함께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오래전에 나온 책 중에서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주중대사, 통일부 장관 일들을 역임하셨던 김하중 장로님이신데요. 장로님의 별명이기도 하는 대사. 하나님에게 묻는 대사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별명을 얻었느냐면, 매사를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사셨는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 장로님이 대통령 의전 비서관으로도 일했다고 하는 데요. 의전 비서관이니 대통령 집무실을 수시로 들고 나갔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에 기도하고 들어간다. 이것이 이분에게 중요한 철칙이었는데, 그래서 보고를 하러 들어가겠다고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지금 들어오라고 연락이 온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이 어디서 소식을 듣든지 간에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정직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집무실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어느 날은 분주하여서 그랬는지, 깜빡 잊고 집무실에 기도하지 않고 들어간 것입니다. 장로님이 대통령과 대화를 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당황하다가 이런 말을 드렸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잊어버렸습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잠깐 빈방에 가서 기도하는데 내용이 감동됩니다.


오늘도 정직함과 지혜 주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다시 보고하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어서, 한 번은 대통령께서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김 비서관 자네는 뭘 자꾸 잊어버리나?’ 서류를 안 가져온 줄로 오해하셨을 것 아닙니까? 이 장로님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야 다음 일을 한다. 이게 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그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이 장로님이 가졌던 정신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기를 결심하고 살아가는 이것은 참 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느혜미아 2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느 2:4)


절대 권력자 왕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땀이 삐질삐질 나고 할 말이 생각이 안 나는데 느혜미아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이것은 오래 기도를 통해 몸에 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께 의뢰하고. 하나님께 의뢰한다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것 도와주실래요? 어떻게 하면 좋지. 이왕 예수 믿는데 일상적인 생활에서 예수 믿는 게 악세사리처럼 주일 올 때만 성경책 털고 오는 게 아니라. 매 순간순간 마다. 주중대사 최장 기간 역임한 기록이 있습니다. 민감한 중국 대사로 부임해서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으면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영적인 기초 다지기 6가지 항목을 살펴보고 있는 데요. 지난 두 주간 말씀 묵상해야 한다. 두 번째 기도 생활이 몸에 베어야 한다. 이제 3주차입니다. 꽤 많은 분이 도전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묵상을 먼저 하고, 해보니 좋다고 하고 그러시는데 3주차가 되면서 하다가 그만둔 분들이 꽤 많으실 것입니다. 손들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챙피하니깐. 습관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벤트로 6주간 하는 게 아니라 지속해서 몸에 배일때까지. 어떤 당황스러운 순간이라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빨리 대답해서 어려운 일을 겪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느혜미아처럼, 장로님처럼, 하나님께 의뢰하며 대답을 멈칫하는 분이 있는데, 손 놓으신 분 오늘부터 하십시다. 작심 3일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흘에 한 번찍 작심하면 되잖아요. 계속 될 때까지. 결국은 세상살이에 성공하는 사람은 끈기 갖고 일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잖아요. 말씀 훈련, 기도 훈련을 계속 몸에 밸 때까지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이 홀로 행하는 차원에서 하는 훈련입니다. 단계로 훈련을 할 때 말씀 읽는 것, 묵상도 훈련되고 등산을 하던지. 산책을 하시던지 많은 분이 분당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분들을 보니깐 왕복 두 세 시간 걸리더라고요. 쪼끔 지혜를 발휘에서 그때 묵상 거리를 생각해야지. 계속 개발하면 하루가 얼마나 윤택해지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저희 교회에서 주일마다 성경 암송 카드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전 성도들이 함께 묵상한 것을 같이 나누던 때가 있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묵상하는 것. 마음 안에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셋째 주입니다. 개인 훈련인 말씀 묵상, 기도가 이루어지면 눈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 공동체성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홀로 그리고 하니까 정해봤습니다. 설교 제목을 10번 정하면 10번에 한 번은 제목 잘 정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번이 그렇습니다. 이게 우리 신앙생활의 액기스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훈련은 홀로 하지만, 함께의 정신, 공동체로 나가야 합니다. 많은 분이 질문할 것입니다. 왜 꼭 그래야 해?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하는 것인데. 기도도 하고, 내가 왜 다락방을 나가야 해? 교회를 왜 나가야 해? 이런 질문을 하실 거예요.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에게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아담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트려서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아담의 타락 이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아담 혼자 충분히 모든 것을 갖추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혼자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계속 반복되는 우리, 우리, 우리 삼위일체기이게 내가 내가 내가해도 틀린 게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를 말씀하시면서 창조의 어떤 요소를 담기를 원합니까?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것이 공동체적인 것 아닙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다 압니다. 너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삼위일체를 이루었네. 너무나 아름다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 조화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그 정신이 부여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개인적 차원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 훈련을 하는 것 참 중요하고, 그런가하면 오늘 설교 제목을 홀로 잡으면 완전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함께 모였잖아요. 제가 이런 말씀을 전하려고 미리 묵상을하고 살핀 데요. 이 내용을 너무 잘 설명한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본문입니다. 뒤에 있는 열두 제자 열거하는 것 다 빼고 두 구절에서 공동체와 관련된 너무나 아름다운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곳에서 너무나 중요한 전재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공동체를 먼저 만드신 것입니다. 공동체를 먼저 만들어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중요한 원리입니다. 기독교 용어로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혼자 잘난 것은 없습니다. 공동체를 이루는데, 이루는 과정에서 예수님에게 발견한 너무나 소중한 주님의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두 가지로 정리해 드리려고 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 두 균형을 기억해야 합니다.




1. 홀로서기 훈련이 먼저


제자들을 부른 원리에서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원리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공동체로 생활하시기 전에 홀로. 단독자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다락방에서 좋은 교제를 하는 것 다 좋은데 공동체가 살아나려면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깊은 교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고독 훈련, 이런 명제를 만드는 것을 본 데요. 헨리 나우웬 공동체라는 책에서


고독이란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삶에 그런 공간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세요? 여러분의 하루 일과 중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당신의 삶에 이런 공간이 존재하는가? 당신도 하나님과 단 둘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 고독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란 당신을 내 사랑하는 딸, 내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시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우리가 다락방하고 교회에서 만난 성가대하고, 찬양하고, 먹으러 가고 교제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임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훈련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멋도 모르고 막산 것 같은데 이 철저한 하나님의 의도된 훈련을 저를 통해 이루어 주셨더라고요. 청소년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33살 때부터입니다. 10년 전부터 저를 강도 높은 고독 훈련을 시킨 것 아닙니까? 10년간 시카고로 이민 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광야에 내 던져진 것 같은. 눈물 나는 과정을 겪게 하시고. 이제는 장소를 바꾸어 주셔서 한국으로 저를 역이민 보내주셔서 신학교 3년 내내 진짜 외로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학교가 양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산 중턱에 있더라고요. 전도사님들이 사역한다고 전국으로 흩어지는데 남겨진 제가 갖은 고독감은 말로 다 못합니다. 여름방학 때 되면 하루 한 마디도 못할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만 10년간 청소년 사역자를 세워주시고 20년간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세우기 전에 고독 훈련입니다. 제가 배운 몇 가지가 있는 데요.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의지하는 성격이 강해서 사람을 의지했을 텐데, 하나님께서 저를 시카고로 던지시고, 한국으로 던졌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싶은데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죠.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고 목회해야 한다. 이찬수 목사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 내가 목회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내가 실수를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이런 것으로 조건을 걸지 않으시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니깐요. 사랑이 결핍된 배우자는 상대방이 힘듭니다. 계속 채워주어야 합니다. 계속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저는 제 아내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은 그러고 싶니? 고독훈련을 해야한다. 깊이 교제를 하고 나면 아내를 향한 사랑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고독 훈련입니다. 사랑에 결핍이 있으면 집착하게 되고, 스토커가 되는 것은 슬픈 것 아닙니까?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세요? 고독 훈련을 해야 합니다. 힘든 분 있으세요? 모든 사람이 나 같은 것 안 좋아할 거야. 마음에 상함이 있는 분 있으세요? 믿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분 있으세요? 지금이야말로 고독 훈련을 하기 좋은 날입니다. 다락방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장님이 턱없이 부족해서 올해 안으로 절대 안 된다 생각했는데 다락방을 시작합니다. 지난 20년간 분당우리교회의 강점이 뭐라고 하면 다락방이다. 다락방은 남녀 성도님들이 잘 모이기로 소문났는데, 2기는 모든 것을 걸고 다락방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홀로, 그리고 함께. 우리 성도님들은 주 중에 혼자 말씀 보고 기도하는 훈련이 되게 하시고, 그런가 하면 그런 분들이 모여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계속 묵상하십시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눅 6:12-13)


이 조화를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2기 사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그 훈련을 공동체성으로 연결하기


내가 성숙해졌습니까? 그런가 하면 성숙의 에너지를 공동체의 성숙으로 옮겨지기를 애쓰쎠야합니다. 산으로 가서 구하는 예수님께서.


나 혼자 예수 잘 믿는데 왜 굳이 다락방을 가야 해? 내가 왜 공동체에 가야 해? 나는 내성적이란 말이에요. 사람 모이는 것 안 좋아해요 라고 한다면 왜 다락방 공동체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갈 5:6 새번역)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아내를 사랑해요. 그럼 아내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사랑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결혼하는 것하고 신앙생활 하고 혼자 할 수 없는지 아시겠죠? 혼자면 증명할 길이 없잖아요. 내가 영적으로 충만하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증명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시작하고 두 주쯤 지났을 때 어떤 연세가 있으신 남자 성도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초심자입니다. 이분들은 각자 각자인데 다락방에서 만난 분입니다. 분당우리교회 못 떠날 줄 알았는데 떠나기로 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다락방 식구들이 분립개척교회로 옮겨서 자기들만 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믿음이 성장한 과정을 이야기한 데요. 어제 말씀을 준비하다가 생각이 나서 담당 순장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것은 인용하고 싶은데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했더니 답이 이렇게 왔습니다.


처음 다락방에 오셔서 나이 차이가 많은 젊은 순원들과 어울리거나 속마음을 나누기 어려우셨지요. 성경 지식이 없으니깐 다락방 교재로 나눔 할 때 늘 긴장하시고 힘드시기도 했고요.


어떻게 변화되고 세례를 받았느냐 들어보세요.


두 분이 다락방 모임에서 앞장서시게 된 계기는 두 분이 좋아하시는 등산을 다락방 순원들과 계획하면서부터입니다. 참 고마운 것은 등산이라면 질색이라는 순원도 따라나서게 되었고, 함께 산을 오르고 삼삼오오 이런저런 속마음 이야기를 하고 산 정상에서 오이도 잘라먹고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을 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분이 이찬수 목사의 주옥같은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등산을 너무 좋아하는 이 분이 가만히 보니깐 저분이 등산 싫어하는데 등산 따라오고 오이 깎아주고. 처음에 교회에 눈을 떠서 자기 위주로 배려해준다고 맥주도 줬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알고 있는데 맥주를 사주시면서 마음을 열도록 애써주신 공동체, 얼마나 성숙한 것입니까?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성공하게된 원인은 교구를 1년 반 만들어서, 그래서 남기로 한 분들에게 고마운것이 이것입니다. 다른 분들이라면 1만성도 파송이 이탈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남는 게 이탈입니다. 그 교구가 이렇게 쏙 옮겨서 교회가 됐으니깐. 나는 교회를 사랑해서 분당우리교회를 섬겨야 해.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하신 분들이 너무 많은 분입니다. 순종해서 가신 분들도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고, 이 교회를 위해서 남겠다고 하신 분들도 고마운 것입니다. 순종해서 가신 분들은 집 앞은 작은 교회와 29 교회를 위해서 힘써야 하고, 남으신 분들은 이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남기로 하신 순장님도 감사하고요. 두 가지 포인트를 아시겠죠? 고독 훈련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는 것입니다.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새 생명을 위하여, 그들에게 흘려보내 주는 두 가지 균형.


한 가지 말씀만 더 드리고 오늘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최근에 제가 너무 감동적인 글을 본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에 래드 우드 국립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특징은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나무, 가장 오래된 나무가 즐비한 곳이 레드우드 국립공원이라고 합니다. 키가 100m가 넘습니다. 둘레가 얼마나 큰지 차가 지나가는 너비의 나무입니다. 세삼 놀란 것이 그 공원에서 자라는 레드우드 나무가 주를 이루니 그렇게 공원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세계 신기록이 아니더라도 보통 60~70m 아파트 20층이라고 합니다. 나무가 키가 크면 뿌리도 깊어야합니다. 불행하게도 레드우드 지질이 바닥이 암반으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깊게 내리지 못합니다. 키가 60m 되는 나무가 뿌리를 내린 게 3m 정도라고 합니다. 캘리포니아가 바람이 많이 부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뽑히지 않는가? 어떻게 센 태풍을 견디느냐? 레드 우드 나무들끼리 뿌리가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레드우드 나무들은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붙들 뿐만 아니라 가뭄이 찾아오면 영양분이 부족한 나무에게 자기 영양분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확 오면서 기도가 나오는것 아닙니까? 담임목사부터 뿌리가 얕습니다. 바람이 불면 뽑혀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지만 교회는 서로 붙잡아주고, 초신자, 나 등산가기 싫은데 등산가기 싫은 사람 산 갔다 오면 며칠씩 앓습니다. 기꺼이 가서 오이도 깎아주고. 그분 마음을 열게 하려고 맥주도 사다 주고.


결론으로 한 마디만 더 부여하자면 여러분의 가정이 레드우드 가정이기를 원합니다. 자녀가 더디 자라는 것으로 속상하시잖아요. 뭔가 우리 아들은, 우리 딸은 더디 자라는 것 같고. 자꾸 지적하면 아이들은 주눅이 됩니다. 그들을 붙잡아주는 레드우드 나무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10년 지적한다고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 가족이 함께 모여, 우리 레드우드 나무가 되자. 홀로는 연약한데 서로 뿌리를 내리고 견고하게. 홀로 말씀 묵상하는 일에. 기도 훈련 하는 일에. 장로님처럼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기도한다. 교만으로 가지 안 하고 공동체에 에너지로 흘러간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다락방 모임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소식이 계속 전해지기를 원합니다. 좀 섬겨야 할 숫자는 많지가 않고 기존 신자 등록을 받지 않다 보니 초신자분이 많아요. 제 설교를 듣고 한계가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레드우드 나무가 되기를 원합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뜨겁게 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느 주일에나 펑펑 운 기억이 있습니다. 개척 초기에는 너무 많이 두려웠습니다. 토요일에는 제대로 발 뻗고 자본 적이 없고요. 설교 감이 안 잡히니깐. 중등부 할 때는 마음껏 목회할 수 있었지만 어른들에게는 안 맞으니깐요. 어느 날 기억이 납니다. 설교준비 다 하고 시계를 보니깐 새벽 5시입니다. 밤을 새운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 준비를 하고 설교를 해도 마음이 찝찝하고 시원하지 않고. 왜 설교를 이렇게 밖에 못할까 자책했던 저에게 여러분이 제 레드우드 나무세요. 얼마나 격려해주시고, 우리 목사님들이 설교 잘한 다보다 설교 점점 더 좋아진다. 얼마나 주변에 소문을 많이 내주시는지. 우리 교회 아서 목사님 설교 들어봐. 점점 좋아지고 있어. 여러분이 저에게 레드우드 나무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06월 0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0-18)


우리교회는 지난주부터 신앙성장 위한 영적 다지기 기초훈련 제목으로 6주간 진행을 하였습니다. 6가지 중에 첫 번째로 말씀 읽기와 묵상훈련이 영적 다지기에 가장 기초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루 중에서 제일 여유롭고 한가로운 시간이 있다면 정해놓고 읽은 말씀으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훈련을 하겠다. 지난주 부탁드린 요지입니다. 저는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지내온 20년, 앞으로 삶을 생각하면 여러분 덕분에 행복합니다. 부탁이 있으면 반응이 있으니깐요. 너무나 많은 성도님이 권면에 순종해서. 지난주 내내 교구를 담당하는 목사님, 전도사님을 통해서 이런 반응을 보이네요. 이런 변화가 있네요.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어느 성도님이 어느 목사님에게 보낸 문자 내용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항상 예배만 드리고 끝인 남편이 설교 후 묵상해야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아침 빵을 먹으며 묵상집을 읽는데 너무나 은혜가 되었습니다.


늘 교회만 오가던 분이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겠다. 그 말씀을 읽는 모습이 은혜가 되었다. 정말 감사를 드리고요. 오늘 두 번째 주일이니깐요. 두 번째 영적 기초 다지기 항목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도 훈련입니다. 이 말씀 훈련, 기도 훈련 두 가지는 6가지 중에서 기초입니다. 주 중에 모든 성도님이 훈련을 해야 하는 핵심 사항인데요. 기도 훈련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중요한 전재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를 훈련해야 한다 표현을 썼습니다. 기도는 훈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훈련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세례요한을 봐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기도는 훈련입니다. 기도가 훈련이라면 그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다른 기도를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동양 문화권에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무속신앙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게. 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설마 아직도 있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의 운세처럼 성경을 펼치고. 그것은 성경 읽기가 아닙니다.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기도가 훈련이라고 하면 분당우리교회는 우리에게 계속 제공해드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가 하나님 앞에 바로 드릴 수 있는가. 기도 훈련이 무엇이냐? 습관 훈련입니다. 기도가 왜 안 되느냐? 안 해서 그렇습니다. 기도가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 대부분 동의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동하고 성취하는 것의 95%가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기도가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기도는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본문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는 슬픔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 1:6-7)


그렇게 소원하는데 원하는 자녀가 생기지 않는 것도 슬픈데, 연적이라고 하잖아요. 못된 브닌나가 너무나 그것을 가지고 괴롭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슬픔을 겪는 상황에서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이런 면에서 있어서 좋은 남편인 것 같습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삼상 1:8)


원인을 제공한 것도 야속한 남편이고, 위로하는 사람도 남편입니다. 남편이 따뜻하게 위로하는데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9-10)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인간의 위로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어서 남편이 따뜻하게 위로해도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는 한나 모습 아닙니까? 다 느끼실 것입니다. 참 좋은 남편을 만나서 뭐가 안 풀리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배우자가 있고, 자식들이 잘 커서 부모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이 위로가 되는데 인간의 위로만으로 안 채워지는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마음의 허전함은 남아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 중에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갖고 기도의 훈련을 하자는 것은 저 잘되자고 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 중에 말씀 묵상 훈련을 하셔야 하는 데요. 말씀 훈련 하시면서 제가 질문 몇 가지를 정리해봤습니다. 기도 훈련을 하면서 잘하고 있나? 체크하는 질문 몇 개를 정리했습니다.




1.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리고 있는가?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감의 잣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 116:1-2)


시편 저자가요 뭐라고 결단합니까? 내가 평생에 기도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데 동기부여가 두 가지입니다. 왜 이런 결단을 했느냐? 1절에 나오잖아요. ‘내가 그를 사랑하도다’ 사랑할 때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데 기도를 안 해.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연애할 때 기억나십니까? 편리한 세상에 단추 누르면 싹 가지만 우리 때는 그런 게 어딨습니까? 저 같은 졸필은 편지 하나 쓰려면 한나절 다 보내야 합니다. 연애편지를 쓰면 소품으로 바닥에 편지를 던져놓은 것. 한 줄 마음에 안 들 편 던져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성입니다. 이것을 누가 시켜서 하겠습니까? 사랑하니깐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연애편지도 아닌데요. 20대 초반 처음 미국에 가서, 대학교 안에 있던 선배님이 편지를 보내주면 그 편지를 닳을 때까지 읽었습니다. 그 SFC 수련회 중이네. 이런 게 있었네! 꺼내서 또 읽고.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니깐요. 마음이 가니깐요. 시편 저자가 말하잖아요. ‘내가 그를 사랑하도다.’ 2절에 보니깐요. 자기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찬양 부를 때마다 너무나 와 닿습니다. 기도 훈련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말 하나님 사랑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뜨거운 사랑이 기도의 자리로 이끄셔야 합니다. 남편의 위로만으로 안 채워져서 한나가 기도하며 통곡하는 시간을 보내니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 엘리 제사장이 술주정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삼상 1:14-15)


한나가 기도와 관련해서 명언 중의 명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심정을 통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민 가서 저를 도우려고 했지만, 안 채워지더라고요. 초보 이민자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공감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 묻는 공감능력이 있습니까? 목회 32년 하고 있지만, 저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하면 공감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외로우니깐요. 결혼하기 전에는 장가가면 해결이 되는 줄 안 데요. 어느 정도는 해결되지만, 심정 깊은 곳의 고민은 부부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알던가요? 우리 집만 모르는 건가? 자녀와 부모 관계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을 수 있는 게 자녀와 부모 관계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한나가 남편이 그렇게 자기를 위로해주는 데요. 그렇게 통곡하는데 하나님과 심정을 통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쓴 기도라는 책을 보니


나의 영혼에 연인되시는 예수님 나로 하여금 주니므이 품으로 날아가게하소서


이 한마디로 다 설명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품에 안기는 것이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유진 피터슨의 말은 너무 와 닿아서 화면에 띄워달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추억이 없다(유진 피터슨)


이것은 핵심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지 아세요? 다 재미있는데 표정을 짓지만 재미없는 분 있잖아요. 신혼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습니다. 30년간 아내와 쌓아놓은 추억을 다 버리고 뭐하러 처음으로 가느냐고요. 부부는 추억입니다.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저에게는 하나님과 추억이 일방적인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추억이 많습니다. 20대 초반 이민 가서 말로 다할 수 없이 외로울 때 어느 순간 다 기록해야 했는데, 기록하지 않은 게 너무 억울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 30살에는 반대로 전 가족이 이민 갔는데 저 혼자 한국에 왔으니깐요. 처음 서울생활을 하니깐 말로 다할 수 없이 외로운 것입니다. 여름방학 때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너무 외로워 하나까지는 아니더라도 못 견딜 정도로 힘들어 주님께 기도했을 때 기쁨으로 확 바꾸게 하신 추억.


나는야 친구 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단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여름 성경학교 때 배운 찬양인데요. 평생에 제 노래입니다. 2절을 보면


지나간 일들 내가 생각하며 앞날의 될 일 내가 들을 때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 같네


신앙생활은 즐거움입니다. 기쁨입니다. 참 그 순간순간마다 내게 어떤 은혜로 나를 만져주시고. 나를 하나님이 얼마나 친밀감으로 다가오는가. 그것이 추억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살맛은 하나님과 추억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하자고요. 우리나라를 놓고 쓴 게 아닌데 왜 은혜가 되지?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 추억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원합니다.




2.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여호와께 기도하고는 히브리어로 팔랄입니다. 이 단어는 어려움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목회하다가 괴로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할 때입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를 갖고 저에게 기도 부탁하는데 제가 해줄 게 없습니다. 대부분 어려운 문제를 갖고 오신 분들에게 기도는 하지만 참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것 아닙니까? 자신 있게 성도님들에게 환난 날에 나를 부르십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건질 것입니다. 20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한 것 한 번이라도 들어보셨나요? 안 그대로 힘든 사람에게 희망 고문 해서 되겠느냐고요. 이게 인간입니다. 시편 50편 15절 읽을 때마다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신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으면 이런 요청을 당당하게 하시겠느냐고요. 한나를 보세요. 1절의 한나는 너무나 낙심되고 어둡고 그것으로 꽉 차있었는데 기도하고 통곡하며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그 팔랄로라고 나갔더니 2장의 한나는 완전히 딴 사람입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삼상 2:1)


저는 이렇게 의역해서 읽습니다. 왜 그렇게 한나가 기쁨으로 샘솟았나? 기도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1장에 갇혀 사시겠습니까? 언제까지 우울하고 슬픈 여자라고. 언제까지 그러시겠느냐고요. 이것을 벗어나게 하시는 것은 기도입니다. 2장의 톤이 확 바뀌잖아요. 자신감 충만입니다. 흔히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다는 반쪽짜리 진리입니다. 고난은 대부분은 축복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청나게 축복이 되는지 아십니까? 한나처럼 사시면 됩니다. 1장과 2장 건너가면서 기도가 있었습니다. 2기 사역을 선포하면서 꿈꾸며 기도합니다. 담임목사가 바뀐 것도 아닌데 2기는 무슨 2기에요. 저는 13년 전 안식년 갔다 오고도 그때도 2기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창고를 열어라 해서 32억이 들어왔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 또 2기라고 합니다. 담임목사는 바뀌지 않았지만, 기수가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역사처럼 성경에 일어난 능력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숙이 나타나고, 병이 떠나가고. 이 교회 안에 2기 사역으로 모든 성도님이 말씀 묵상과 기도 훈련에 전념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3. (기도를 통해) 삶의 시야가 넓어지고 있는가?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아들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한나가 기도를 정의할 때 여호와께 심정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아는 데 관심은 없고, 내 심정을 부모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일방통행의 심정이 아닙니다. 한나의 심정을 통해 주시고, 한나의 심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사사가 말기입니다. 타락의 극치, 영적인 무기력함의 극치. 한나 남편인 엘가나 조차도 한나의 슬픔을 만든 원인이 이 남편 때문 아닙니까? 여러 번역을 읽다 보니 공동번역을 보니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데. 신앙의 명문가문조차도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를 한 마디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저는요 언젠가 이 구절 이스라엘 왕이 없으므로 구절이 하나님의 심정을 발견하고 마음이 우울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성적으로 타락하고, 동성애가 문제이고, 그런 것들 더 깊은 내면의 문제가 왜 이런 문제가 벌어지느냐? 왕대신 하나님을 쫓아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아세요? 한나의 기도가 뭐라고요?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는 것입니다. 내 심정이 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쫓아내었다. 왕이 왜 없다고 하세요? 왕이 없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분은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벼룩보고 뛰어봤자 벼룩이지 말하잖아요. 최근에 글을 읽다가 벼룩에 관련해서 한 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키의 130배인 30cm까지 뛰어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뛰어봤자 벼룩 의지해서 엄청 뛰는 줄 알았는데 고작 30cm인 것입니다. 진짜 실망했습니다. 벼룩의 장점이 점프라는데 왜 30cm밖에 못 뛰느냐고요. 벼룩의 존재 자체가 작습니다. 죄성을 갖은 인간이 꿈의 사람 이런 말 하지 마세요. 뛰어봤자 벼룩이에요. 존재가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나처럼 기도하면서 시야가 넓어져야 합니다. 땅의 것만 집착하는 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고. 항상 촌놈이거든요. 지금도 촌놈이고, 옷 입는 것도 촌놈이고, 저는 촌놈입니다. 주 중에 저 보신 분은 저 촌놈 하나 지나가네! 생각하실것입니다. 간도 작고 뛰어봤자 벼룩입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엄청난 스케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 보셨잖아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삼 33:3)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1만 성도 파송운동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요. 취소다 하지 않는 이유가 네 교회만 커지는 게 옳으냐?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기어이 지금도 꿈꾸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지? 1만 성도 파송운동 어떻게 가능하지 하나님의 하심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잘 이루어지고, 아프기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주 중에 의욕도 없고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셨는데 너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러고 바로 꿈이 깼거든요. 그러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1시 3~40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힘들죠. 책상에 앉아서 미국의 형제들에게 이런 꿈 꾸었는데 형제들에게 전화해서 별일 없느냐고요. 당연히 별일 없으시죠. 지금은 97세가 되시는데 80대 초반의 어머니에게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80대 어머니가 나타나셨을까? 꿈은 내면의 욕구를 반영하잖아요. 80대 초반이 어머니와 깊게 대화할 마지막이었어요. 목회가 힘들 때 어머니에게 지혜를 구하는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너무 흘러 그게 안되는 상황이거든요. 우리집 아이들을 다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가 너희들이 20대 중후반이 되었으니, 나도 이해가 안될정도로 울었거든. 나도 이제 공감받고 싶고, 위로 받고 싶어. 그런 이야기를 애들에게 진지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기초다지기 훈련의 기도 훈련을 명하실때 이 심정 아닐까요? 한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심정. 나를 쫓아내버리고. 왕이 없다고 하네. 한나가 기도 응답해주신다면, 이 문제를 위해 쓰임 받는 종으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연상을 하나 준비한 데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셈플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영상에 나온 집사님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 마음의 소원을 갖고 보시기겠습니다.((Youtube) 영상 링크)


댁에서 비대면으로 드리시는 분 홈페이지에서 프린트할 수 있습니다. 내일의 경우 시편 78편. 그리스도 중심읽기 하시면 1년에 1 독합니다. 먼저 말씀 읽기를 합니다. 그리고 묵상. 읽은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산책하러 가던지. 말씀을 집어넣고 갑니다. 묵상 노트는 지난주보다 조금 더 발전된 것을 올려드렸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 오늘의 두 가지 감사,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담아서 묵상 노트를 프린트해서 쓰시면 됩니다. 하나 더 드렸습니다. 하루에 한 구절 기도입니다. 심정이 통하는 기돌르 이렇게 하셔야 한다고 샘플을 넣었습니다. 처음에 어색하고 재미도 없고, 당연히 훈련은 그렇습니다. 이제 6 영역 할 때마다 가급적 추천 도서를 추천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말씀 묵상은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이 책을 구하셔서 쓱쓱 읽으면 안 되고 진지하게 이 내용을 읽으셔야 합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팀 켈러의 기도’ 책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내용을 진지하게 읽으면서 말씀 묵상과 기도의 일에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05월


05월 2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성숙을 향한 습관 첫 단추

성숙을 향한 습관 첫 단추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3:14-17)


아마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지난주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지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손흥민 선수가 세계적인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이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이 기록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 처음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론마다 손흥민 선수는 어떻게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으나 분석하는 기사들이 많이 오르곤 했는데, 손흥민 선수가 어떻게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나 생각했을 때 한 두 가지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책을 보면, 세계적인 선수는 그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구나. 땀과 헌신, 눈물 모든 것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0개월 내내 저녁 10시 전에 잠자기, 10개월 내내 정크 푸드 먹지 않기. 10개월 내내 자유시간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쉬기, 10개월 내내 스트레지 받지 않고 쉬기.


20대 청년의 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축구 하나,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 결의가 생기는 글들 아닙니까?


내가 힘든 티를 낼때마다 아버지는 성공은 선불이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인생을 투자해야, 10년 후, 20년 후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손흥민 선수는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된 배경에는 아버지 잘 만난 것. 이것이 큰 몫을 했다고 다들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했는지. 아버지가 기초 훈련의 중요성, 아버지가 쓴 책을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제목부터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기본부터 시작한다.’ 손흥민 선수가 1,000개씩 슈팅 연습했다고 합니다. 손흥민 선수의 큰 특징 중 하나가 기회가 오면 오른발, 왼발 구분 없이 슛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세월이 흘러서 손흥민 선수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지겹도록 반복했던 기본기 연습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첫 시합을 뛰기까지 8년이 걸렸고, 몇 시간씩 볼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훈련을 거듭해온 훈련을 한 결과 무의식적으로 공에 반응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놀라운 것은 애를 8살 때부터 축구를 시켰는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시합에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기본을 다지지 않고 시합에 내보내면 기본기가 흐트러진다는 신념 때문 아닙니까? 이렇게 기본을 강조했던 것이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인데요. 이것은 히딩크 감독도 같은 원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4강 신화를 만든 히딩크 감독이요. 우리나라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강조했던 것이 한국 축구팀은 기초 체력이 약하다. 그래서 부임하자마자 축구 기술은 안 가르치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채력 훈련만 시킨 것 아닙니까? 처음에 국가 간의 친선경기를 하면 계속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했기에 월드컵 4강 신화 기록을 남긴 것이 히딩크 감독입니다. 이런 책을 보면서 목사니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기초가 약하다. 기본이 안 되어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운동선수들에게 기초 훈련이 중요해서 손흥민 선수가 초등학교 때부터 1,000개씩 훈련을 해야 한다면, 히딩크 감독이 기본을 다지기 위해서 선수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기초 훈련을 시켰다면, 예수 믿는 여러분은 어떤 기초 훈련을 해야 합니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만 많이 모이는데 기초가 안되어있어서 부실하다면 무엇을 든든하게 해야 기초가 단단한 교회가 되겠느냐?


중요한 선포를 하려고 합니다. 기초 훈련을 새로 하자는 것입니다. 6주간 영적 기초 다지기 훈련 6주를 합니다. 매주 한 항목을 갖고 기초 훈련을 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을 말하겠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 분당우리교회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작년 후반부터 전체 교역자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내년 이후가 되면 분당우리교회는 이제 6.25 폭격 맞은 서울시와 같을 것이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이루어지면 10여 년 기존 신자 등록을 받지 않아서 매년 1천 명씩 등록하는 성도님들은 다 초시는 자들 아닙니까? 짝 믿음 가정이라고 남편이나 아내가 한 분만 다니는 상황이니 섬겨야 할 성도님은 많은데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느냐 제가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섬기던 평신도 지도자분들 70%, 80%가 다 나갔습니다. 대학교, 청년부 젊은 리더들도 80%가 나갔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없기에, 올해 안으로 다락방을 할 수가 없다. 절대 못 한다. 순장들이 없는데 무슨 다락방을 하느냐? 생각했는데 세상에 3월 1만 성도 파송예배 이후로 참 눈물겨워요. 너무나 성도님들이 헌신하고, 자발적으로. 제일 연세 많은 84세 할아버지가 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 어른이 어린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순서지를 나누어주고, 너무나 아름다워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1만 성도 파송운동 이후 분당우리교회는 어떻게 하나? 6.25 폭격 맞은 서울처럼 혼란스러운데.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전화위복의 꿈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시카고 대화제 사건을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1871년 시카고에 엄청난 큰 화재사건이 일어납니다. 대부분 목조건물이니 불길이 얼마나 멀리 퍼져 나갔느냐면 9km^2에 달하는 범위가 불에 탔습니다. 불탄 가정이 10만 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 시카고는 도심에 완전히 불로 싹 쓸어버려서 시카고는 지금도 미국 내에서 도시 건축으로 유명한 지역이 된 것입니다. 대 화재사건 이후 시카고 도심 지역이 파괴되었는데 파괴된 도시 위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에 의해서 최고의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시카고 도심으로 가면 사람들이 탄성을 지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가 너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실한 게 얼마나 많았냐고. 놓치고 있는 많은 것이 있는데 2기 사역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꿈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을 굉장히 기다렸습니다. 전 교회 적으로 기초 훈련을 합니다. 목사 타이틀을 내려놓고, 장로 권사 별로 중요하지 않다. 걸핏하면 우리 집은 5대째 예수 믿는, 처음부터 시작하자.


기초 다지기 6주입니다. 오늘이 첫 주입니다. 기초 다지기 첫 주. 말씀 읽기와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읽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에게 하는 마지막 말씀이 나오는데 굉장히 비장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9-31)


언젠가 제가 은퇴하면 참 걱정이 많아질 것 같아요. 참 많은 수고를 한 순장 님들이, 교역자들이 교회를 잘 일구어갔는데, 거짓 교사가 들어오고 분쟁이 일어나면 어떡할까. 사도바울이 딱 그 마음이에요. 거짓 교사가 나타나고,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혼란하게 하는데, 어떻게 하나. 그런 염려를 하는 바울인데요. 32절에서 놀라운 대안을 말합니다. 에베소교회 부탁을 누구에게 하느냐?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왜 이런 부탁을 말씀에게 하느냐?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국교회가 왜 기초가 부족한지 답을 찾았습니다. 말씀에 교회를 부탁하지 않아요. 한국교회를 보면 기초가 약할 수밖에 없는 게 말씀을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인간 담임목사를 너무 의지하는 거에요. 모든 것이 담임목사에게 있는 것처럼. 교회 올 때마다 사모할 것 같아요. 이번 주 우리 목사가 설교준비를 잘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끼쳐야 하는데. 오늘 목사가 설교 부실하게 하면 한주 내내 굶어야하니깐. 바울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았어요. 끝내주는 목사 하나 섭외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님께 말씀이 흥황하기를 사모하는 것 아닙니까? 5대째 예수를 믿는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이 내 인생을 견인하도록. 하나님 앞에 말씀이 든든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강조점이 똑같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딤후 3:16-17)


주님 안에서 선량한 사람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기초 다지기 6가지 중에서 첫 번째를 말씀으로 했는지 아시겠죠. 손흥민 아버지는 슈팅을 잘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1,000개씩 시켰다면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에게 기초 중의 기초는 말씀 묵상이다. 외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유명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말씀의 배경을 모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왜곡된 가치관이 혼란하게 한다. 30대 초반의 젊은 아내가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물에 빠트려 죽인 혐의를 받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잖아요. 남편을 그렇게 살해했다면 가치관이 잘못된 것입니다. 가정이 뭐가 중요하냐. 돈이 중요하지. 목돈이 필요한 것이지. 그래서 남편을 죽였다고 한다면, 이런 사레는 잊힐만하면 계속 나오는 것 아닙니까?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앞에


그들 가운데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정욕에 이끌려 죄에 짓눌려 있고(딤후 3:6)


이 말씀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2000년 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구나. 그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가서, 모든 집집이 인터넷 선으로 부모들이 자고 있는데 아이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하는 시대를 살고 잇는 것 아닙니까? 본인의 가치관도 비성경적으로 악한 세상에 물들어있으면서, 가만히 남의 집에 들어가서. 지금 혼란을


지금 혼란을 가져오는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으로 만드는 시도가 저는 두렵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 번 만들었지만 누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느냐고요. 그런데 문제는 선진국이라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차별 금지법 내용을 보니깐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왜곡된 가치관이 끼워져 들어가 있더라. 그래서 오후 2시에 바로 이자리에서 차별 금지법 바로 알기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알고 반대하자. 알고 찬성하자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미국, 유럽에서 출발은 좋은 출발이지만. 어떤 남자가 우리나라로 치면 여탕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항의가 들어오니 직원이 알듯 모를 듯 답을 하네요. 그 남자 몸을 갖은 사람을 여탕에 들어 다 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여성이라고 밝혀서 캘리포니아 주 법에 따라서 여탕에 보내줬습니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저는 몸이 남자이지만 정신은 여자입니다고 이해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혹여라도 차별금지법을 만들었다가 우리도 혼란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제대로 알자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대처하지는 이야기입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딤후 3:1 새번역)


그들 가운데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정욕에 이끌려 죄에 짓눌려 있고(딤후 3:6 새번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6)


마지막 때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우는 사자와같이 삼킬 자를 찾는 이 시대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님들은 성경을 너무 몰라요. 신약의 인물인지, 구약의 인물인지. 그래서 여러분 오늘부터 6주간 진행될 영적 기초 다지기 첫 번째로 말씀 읽기와 묵상에 도전하자는 것입니다. 현장 예배에 오신 분들은 한 권씩 받은 것으로 알고,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시는 분은 이 모든 것을 똑같이 프린트할 수 있도록 올려드렸습니다. 프린트하셔서 중간에 스테이플러로 책을 만드세요. 내일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로 출근하기전에, 아이들 보내기 전에, 하루 한 구절 묵상 핸드북입니다. 길게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열어보면 사실 한 구절 아닙니다. 왜 이름이 한 구절이냐.


매일 말씀 한구절이라도 가까이하기로 소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하루 한 구절 핸드북


만든 교역자의 눈물 나는 호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일 아침부터 일어나시면 출근하기 전에 펴시면 내일 월요일 주제가 이렇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렇게 하고 시편 41편 1절부터 5절이 나옵니다. 15분만 시간을 쓰세요. 주제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는데, 이 하루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등산을하고 두 시간씩 걸을때 그냥 걷는 법이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맹탕으로 걷기에는 아깝잖아요. 묵상한 말씀을 곱씹으면서 두 시간이 삽시간에 지나갑니다. 묵상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오시면 묵상 노트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한쪽에는 말씀 묵상 핸드북을 펴 놓고, 한쪽에는 묵상 노트로 기록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적자는 것입니다. 처신 자본이 읽기만 하면 된다더니 자꾸 많아져 안 해. 하실까 봐. 15분도 많으면 5분만 쓰세요. 우리 생활에 훈련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훈련에는 목표가 있지않습니까? 저는 말씀 읽기 묵상에 두 가지 목표를 드리고 싶습니다.




1. 말씀 묵상이 인생의 즐거움임을 깨닫기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쓴 이 책을 먹으라 내용 하나를 소개해드린 기억이 나는 데요. 책의 저자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개를 키웠나 봐요. 미국은 나라가 넓다 보니 소형견은 없고 큰 개를 키웁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산림이 우거진 산기슭이라고 하는데, 자연이 너무 부럽잖아요. 아침에 키우는 개를 끌고 선택을 가다 보니 코요테가 물어 죽인 사슴의 사체를 발견할 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산책시키는 개가 계 탄 날입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슴의 사체를 끌고 이 행복은 말로 다 못합니다. 개가 물고 온 사슴의 뼈를 발라다가, 우리 집 강아지도 보니깐 자기가 좋아하는 먹이가 있으면 구석진 곳에 가서 먹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보니깐 뼈다귀가 너무 행복해해서 끌 끌 소리를 냅니다. 목사님이 성경을 읽다 보니깐 그 장면의 단어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히브리어로 하가라는 단어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개역한글)


그래서 우리 집 강아지는 한 번씩 갈비를 삶아서 강아지에게 던져주면 그 날은 난리가 납니다. 얼마나 뼈를 좋아하는지, 구석진 곳에 가서 과장하면 한나절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부부는 말합니다. 우리 강아지가 묵상하고 있네. 우리가 6가지 기본 훈련 중에서 훈련하는 이유는 이래서 비다.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묵상의 즐거움. 저의 즐거움은 대형교회 목사 타이틀에 있지 않습니다. 저의 기쁨은 새벽입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새벽에 우리 집 와서 귀를 기울이면 어떤 남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것입니다. 영적인 소리기에 귀로는 안 들릴 것입니다. 기쁨으로 지내는 시간이 있다면 다 된 것 아닙니까? 목표로 삼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푝표가 있는데




2. 말씀 묵상으로 삶의 변화 이루기


전도자 무디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지식을 쌓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의 변화를 위해 주어진 것이이다.(전도자 무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두 제자가 절망하며 엠마 오를 향해서 가고 있잖아요. 두 제자가 만나서 완전히 회복되는데 대화의 한마디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낙심해 계신 분 있으시잖아요. 꿈꾸던 일이 안되서 낙심한 분이 있으시잖아요. 부호라하신 예수주님을 만 나야하는데 산신령을 찾는게 아니라 그들이 서로 말하는데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내일 새벽부터 눈물로 호소합니다. 대 선수가 된 손흥민 선수가 된 아버지 심정으로 부탁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아침에 말씀을 피셔야 합니다. 그 좋아하는 죽은 사슴의 뼈다귀를 놓고 으르러 소리를 내는 하가. 이것이 묵상입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 전념하여 이 훈련에 마음을 담는 많은 성도님들이 일어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05월 2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삶의 중심축 없이는 행복도 없다

삶의 중심축 없이는 행복도 없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5-17)


사도바울을 묵상하다 보면 같은 길을 가는 목회자로 사도바울은 주의 종으로 평생을 헌신한 공통점이 있는데, 같은 길을 걸어간 어른 입장으로 사도바울을 비교하고 되돌아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도바울에서 느끼는 신비로움이 있다면 그는 어떤 상황이 그에게 주어지든지,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는 상황에 빠지더라도, 그런 상황 때문에 탈진, 지침, 슬럼프가 와서 못 해먹겠다. 안 할 거야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목회자가 외쳐야 할 구호가 있습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디입니다. 개는 상황입니다. 생각보다 교회가 너무 빨리 부흥을 하든지, 성장이 잘 안 되던지, 어떤 상황이든지 나는 내 속도로 가는 것입니다. 상황에 휘둘려서 갑자기 사람이 모인다고, 5천 석짜리 건축할 거야 그런 것도 없고, 기대한 만큼 잘 안된다고 주저앉는 것도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속도대로 꾸준히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딱 이러한 삶을 살고 갔습니다. 반대로 억울한 모함을 얼마나 많이 당했습니까? 자기는 자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적용허비다. 본문 골로세서는 감옥에서 쓴 것 아닙니까? 골로세서를 읽다 보면 감옥이라고 의기소침하거나 위축된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골로세서입니다. 감사하라는 권면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모릅니다. 골로세서 3장 16절 밝음의 톤으로 느껴보세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활력이 넘치는 권면을 감옥에서 적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바울을 보면 감옥이라고 좌절감으로 우울하게 쓴 것도 아니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위축된 모습 전혀 없고,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 주옥같은 성경이 감옥에서 네 권이나 나왔잔하습니까?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사도바울을 보면서 모두가 도전을 받아야 하고, 비결이 무엇인가? 걸핏하면 의기소침하고, 위축되고 주저앉기 쉬운데 흉내라도 내보자.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말에 비결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상황을 주든지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축이 있고 없고는 시편에서 잘 설명하였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요즘 바람이 많이 부니 겨 많이 볼 수 있잖아요. 바람에 따라 열심히 움직이는데 축이 없다 보니 맨날 제자리입니다. 수많은 현대인들의 딜레마가 이것 아닙니까? 아침 지하철에 타면 전부 다 좁니다. 얼마나 수면이 부족했으면, 중심축이 없으니 1년이 지나면 제자리입니다. 사도바울은 뚜렷한 삶의 중심축이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갖는 중요한 중심축. 그리스도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라는 중심축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골 3:16)


보이스피싱도 많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삶의 중심이다. 여러 번 청년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는데, 컴퍼스 기억하시잖아요. 두 다리가 있는데 한쪽에는 연필을 끼우고 한쪽은 뾰족한 침. 뾰족한 바늘을 도화지에 쿡 찍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를 해서 쿡했잖아요. 자국이 생길 정도로 쿡 찍고 원을 돌려야 차질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시작하든지, 결혼을 앞둔 분들은 잘 들어야 합니다. 하고 싶다고 날 잡는 것 큰일 날 일입니다. 직장을 들어가든지, 교회를 세우든지, 그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은 도화지에 쿡. 중심을 잡는 것이 먼저입니다. 삐뚤빼뚤 엉망의 그림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20주년이 되니깐 20대가 되어서 이 삶의 중심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분당우리교회 개척할 때 30 몇 명으로 시작했는데 그때는 원이 작았는데 20년 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는데 아빠가 보기에 그렇게 바뀐게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가 중심을 잡기에 30명이 모일때나 2만 몇천명이 모일때나 1만성도 파송운동으로 나갔을떄나 별 차이 없다. 너무나 중요한 삶의 원리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배려로 우연히 어떤 분이 묵상한 글을 올렸는데 예전에 제가 썼던 책에 나온 하나를 인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이 말씀과 맞다.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오늘을 견뎌라 책을 쓰면서 이런 말을 쓴 기억이 있습니다. 발레 용어로 프레테. 발레의 꽃이라고 합니다. 32회전 프레테는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동작. 걸핏하면 발레를 하는 분이 돌잖아요. 백조의 호수에서 32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요동하지 않고 도는 것은 묘기에 가깝습니다. 저에게 32바퀴 돌라고 하면 여기서 시작했다가 저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가 글을 읽은 데요. 먼저 발레리나가 회전하기 전에 발 하나를 들어서 뒤축을 잡습니다. 컴퍼스가 콕 찍는 것과 같은 원리 아닙니까? 회전하기 전에 관중 중에 제일 중간에 와 있는 중심에 앉은 어떤 분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분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몸은 다 돌아가는데도, 목이 돌아갈 때까지 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회전하고 빨리 그 사람을 봅니다. 예전에 설교할 때는 보여드렸는데 지금은 안됩니다. 중심을 잡아야 하고, 회전할 때는 잘 못 하니 저 멀리 흘러갈 수 있으니 한 지점을 정해놓고 끊임없이 중심을 잡아가는 것.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쿡 한 다리를 도화지에 뽀죡한 바늘 같은 것으로 중심을 잡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요동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창립 20주년이 되는 기념 예배이니 이 설교도 의미를 담고 말씀을 하길 원하는데, 20주년을 기뻐하면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삶의 중심축을 마련하지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축과 관련해서 세 가지 지침을 드리고 싶습니다.




1. 그리스도의 평강이 기준이 되게 하기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헬라어로 브라비오 입니다. 당시 운동경기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이 권면을 하는데 사도바울이 운동경기에 사용하는 단어로 설명하는데 브라비오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을 보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삶에 행동하고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었어 심판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축구 같은 것. 야구 같은 것 보면 심판이 있잖아요. 모든 사람이 볼 때 골 아니다. 판단하는 것. 이것이 심판입니다. 야구같은것 섬세한 룰을 갖고 있잖아요. 야구를 가끔씩 보면 심판마다 스트라이크 볼 판정 기준이 다릅니다. 상하 폭이 스트라이크 주는 높은 심판 있다면 어떤 심판은 좌우 폭을 넓게 보는 것. 다 틀립니다. 누구도 항의를 못 합니다. 그것은 심파느이 고유 권한이니깐. 지금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에 주장하는 말을 주면서 브라비오 용어가 심판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삶의 기준으로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뭐가 탐이 나서 무리하게 일을 과장스럽게 추진하고 있을 때 저는 목사니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성장시켜주니 고무가 되어서 나는 10만 명 모으는 교회를 할 거야. 그렇게 하기 위해서 1만 석짜리 교회를 만들 거야. 성도님보고 집을 팔아서 교회 짓는데 건축할 거야. 생각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점검하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할 때 저와 성도님들 마음에 그리스도가 주는 평강을 빼앗길 수 있는가? 사람과 관계를 하든, 무엇을 하든 모든 기준이 주님이 내게 주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훼손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를 때도 그리스도의 평강의 기준으로 판단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로마의 평화로 번역할 수 있는 팍스 로마. 로마 제국이 갖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서 유지하는 평화가 팍스 로마입니다. 세상의 묻는 평화는 거의 이 원칙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 정당에서 지금 선거철인데 의석을 많이 가지려고 요새 눈물겹습니다. 지하철 내려갈 때마다 민망해 죽겠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저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면서 복 받으라고. 그분들이 내 영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표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이니깐. 무시무시하게 질서가 바뀌는 것. 그래서 권력을 가지려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가진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평화가 이굿갛고, 불행하게도 우리 아이들에게 유치원 다닐 때도 팍스 로마를 가리킵니다. 공부 그렇게 해서 누가 너를 주목하겠느냐고. 목회하다 보니 교회도 그렇게 가기 쉽습니다. 건물 키워야 해. 큰 교회가 되어야 힘을 쓸 수 있어. 이런 시대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하냐고요. 팍스 크리스티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원리와 다르게 힘을 갖고 누르는 평화가 아니라 인내의 한계에 따르는. 이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부모들이 자녀를 대하는 것을 보면 끝 간에 없는 용서와 용납. 하실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 가정에서 팍스 로마나 원리로 아내의 힘으로, 남편의 힘으로 눌러서 유지하는 가정이 있다면 오늘 성령께서 뒤엎어주시길 원합니다. 끝없이 양보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말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이만큼 하는데 너는 나에게 하는 거 뭐야. 얼마 전에 용돈으로 대화하다가 내가 줄게 그러면 너는 나에게 뭐줄껀데? 우리가 팍스 로마나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어떤 경우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 내가 이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을 빼앗기는 일이라면 월급 두 배로 주어도 가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빼앗기고 월급 두 배가 되면 황폐해져서 살 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2-13)


이런 몸부림이 상대방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주지만, 겪어보니 이것이 나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삶의 기준이 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공급받기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저보다 10살 많은 어른입니다. 제가 멘트로 여기는 어른을 지난 수요일 찾아뵈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꿀 송이 보다 단지, 이거 녹음해도 되겠습니까? 이거 제 아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녹음하면서 꼬박 세 시간을. 제가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중해서 이 어른에게 말씀을 받았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사실 1만 성도 파송운동 예배를 드리고 제가 아파요. 만 10년간 1만 성도 파송운동 긴장하고, 모든 목사님이 이거 안된다고 하니깐. 저를 싫어하는 안티는 이찬수 목사 되지도 않을 것으로 이찬수 목사님 별짓 한다고. 10년 동안초 긴장상태로 사니깐, 무사히 1만 성도 파송 운동 예배를 마치고 긴장이 풀리면서 아픈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게 슬프고, 1만 명이 떠난 숫자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초창기 맴버도 가셨다고 하면 아픕니다. 그러다가 제가 이 어른을 만났습니다. 너무 회복되었습니다. 저에게 숙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몇 가지 정성껏 하시는지, 이미 저를 만나기 전에 질문을 준비하시고. 어른은 말을 많이 하는 역할이 아니라 어른은 포석을 두는 분입니다. 뭣도 모르고 왜 여기에 두셨지 하는데, 살다 보니 요긴한 것이 포석 아닙니까? 부모의 역할도 포석을 두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수요일 저에게 그 시간 없습니다. 너무 기쁜 시간을 보내고, 마음에 활력이 되찾아지고, 아프다고 골골 거려서 되겠느냐. 마음에 활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분 만나고 책을 10권 주문했습니다. 저보다 연세가 많아서셔 어른이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 분인데, 이 분은 평생을 하나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차 안에서 합니다. 제가 나이가 조금 들어가기 시작하니깐 나이 든다고 저절로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 16절을 다시 보세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남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이 설교 한 편을 하려고 하면 한주 내내 말씀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지식을 먹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이 중심축이 있기를 원합니다. 매일 말씀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을 인식하시길 원합니다.




3. 개인의 평화를 관계의 평화로 확장하기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 3:15 새번역)


앞에서 두 항목은 개인의 평화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은 관계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중심축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의 평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평화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본문 다음 나오는 것이, 아비들아, 상전들아, 종들아 본격적인 관계의 지침들이 이 본문 다음에 바로 나옵니다. 왜 관계에서 실패합니까? 앞에서 뿌리는 무시하고 바로 다음 구절부터 아내들아 남편들이 나오니 실천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개인의 평화가 관계의 평화로 발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로 누리는 삶입니다. 왜 분당우리교회는 창립 주일마다 헌혈합니까? 개인의 평화를 가두어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분당우리교회는 창립예배마다 헌금합니다. 창립감사헌금을 하는데, 이 헌금은 이것 같고 부설시설 만드는 데 쓰지 않습니다. 다음 주일날 원래는 당일 헌금하는데 이번에는 다음 주 일에 합니다. 이번에 의미 부여하고, 다음 주에 창립 20주년 헌금할 것입니다. 전액을 이제 12월 말에 11 교회를 조금만 더 밀어주면 일어설 수 있는 교회를 세우려고 했는데, 11개의 교회 출발 자금으로 쓰려고 합니다. 우리는 꿈을 꿉니다. 올 연말에 11 교회 수도권입니다. 마음이 열리는 분의 2차 파송이 될 것입니다. 11 교회가 잘 될 수 있도록 물질을 후원할 것입니다. 매년 10 교회씩 후원할 것입니다. 지방으로 가서 강원도 어디에, 제주도에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후원하면 일어설 수 있는 교회를. 이것을 묵상하다가 하나님 저 장수하고 싶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1년에 10 교회씩 회복하는 꿈을 주시길 원합니다. 개인의 평화가 관계의 평화로 꽃피워야 합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간증을 한 가지 하고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런저런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요. 그때가 제일 홀가분 하거든요. 너무나 홀가분하게 침대에 누워서 TV를 켰습니다. 그랬더니 10년 전에 나온 영화를 보여주는데, 국제시장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아닙니까? 한 15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국제시장 내용 다 아시죠? 6·25 때 흥남 부두에서 미군 군함에 오르는데 딸이 안 보여서 아버지가 딸 찾으러 갔다가 미군이 제공하는 군함이 다 차셔 마지막에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큰아들에게 네가 장남이야 말을 하고, 아들이 그 부담감으로 평생을 애쓰는 내용입니다. TV 켰을 때 끝 부분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70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분장이 과해서 100살처럼 보입니다. 저쪽에서 아들하고 딸하고 손자, 손녀가 낄낄 웃고 있는데 아버지가 슥 방에 가서 우시는 것입니다. 끝끝내 만날 수 없던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기에? 이만하면 잘 살았지에?’ 여기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다음 대사가 저를 무너뜨렸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베개가 젖도록 울었습니다.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요.’ 막 눈물이 펑펑 나는데 그게 웃기는 것입니다. 왜 이러지 내가. 눈물이 흐르면서 지난 10년 동안 눌려있었던 내 마음이 힘들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수 많은 가장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남자들은 내색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해요. 그 대사 한마디에 눈물이 펑펑 흐르는데, 장면이 어떻게 바뀌느냐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운 아버지가 자기를 꼭 껴안아주면서 주인공 이름이 덕수였는데요.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주면서 울지마라 덕수야.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안다. 고맙다. 힘내서 일어나야겠다. 마음의 용기가 그때도 생각났습니다. 20주년인데 오랜만에 떡하자고 건의가 들어왔는데 안하겠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19로 못 오는 사람도 있는데, 20주년이라고 우리의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많아. 그래서 잔치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꿈꾸면서 가시면 됩니다. 자주 꿈을 꾸시면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너 애쓴 것 다 안다. 우리가 이날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삶에 중심을 세우셔야 합니다. 팍스 로마나, 힘으로 지배하는 세상에 더 양보하고, 더 희생하고, 더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애써야 하고, 지칠 때마다 꿈꾸시는 것입니다. 주님 품에 안겨 아버지 힘들었습니다. 다 안다. 눈물 닦아주시는 주님. 창립 20주년 이 찬양을 선택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가는 그 길이 너무 힘듭니다.


좁은 길 좁은 문 십자가 없이 못 갑니다. 나의 십자가 지고. 그런데 소망이 있습니다. 좁은 길 끝에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21주년을 꿈꾸고 30주년 꿈꾸고. 40주년을 꿈꾸고. 우리가 소망을 갖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05월 15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TV 프로 중에서 인기 있는 프로가 있는 데요.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입니다. 중년 이후에 남자분들이 이 프로를 즐겨본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우연히 그 프로를 볼 때가 있는데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 세상을 떠나서 자연 속에서 홀로 지내는가. 무섭지 않나. 외로울 텐데.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 아내를 통해서 들어보니깐 여자 분들 중에 이 프로그램 관련 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이 프로를 보면 회사에 사표를 낼 신호가 다가온다. 이 프로를 만든 담당자들이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이유가 무엇이고, 이 프로를 보면 회사에 사표를 낼 신호라는 것일까요? 모두가 이 땅에서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이 프로를 보면서 많은 분이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힘든데 내려놓고 혼자 산에 가서 저렇게 살면 좋겠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모두가 힘들도 지치고, 특별히 인간관계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가? 브루스 톰슨 바사라고 기독교 상담가입니다. 이 분이 한 말입니다.


세상은 서로 빼앗고 얻기 위해 관계를 도모하는 곳이지만 교회는 서로 위해 희생하는 공동체이다.


교회와 세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박사님이 말한 세상은 빼앗고 얻기 위해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 피곤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를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능으로 대하기에 피곤하고 지치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준비하면서 29 교회 예배 담임목사님들이 확정되고 1년 반 동안 목회 수업을 같이했습니다. 1년 반을 예비 담임목사님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잊힐까 봐 여러 번 반복한 말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성도님들을 거래관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제가 개척할 때 참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개척교회 창립 맴버는 다 교회를 떠난다.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창립 맴버는 교회를 떠나는지 아는가? 나도 개척을 해봐서 아는데 마음이 급해지니깐 자꾸 사람을 기능으로 볼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창립 맴버로 합류하신 분 중에 일을 잘하는 분이 있으면 그분에게 마음이 가는 게 사람입니다. 인간의 죄업 본성으로 섭섭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담임 목사님들이니깐, 일을 많이 하시던 아예 일을 하지 않으시던 이런 것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거래 관계로 대하면 큰일 난다. 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 모든 상처를 다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당신들하고 나하고 굉장히 위험한 관계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거래 관계가 되기 쉽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하면서 이찬수 목사가 몇 명이나 보내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100% 상처밖에 없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거래 관계로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여야 한다. 이런 말을 여러 차례 했었습니다. 분당우리교회 20주년이 되니, 다음 주가 20주년입니다. 20주년이 되니 우리교회 부교 역자 출신 목회자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숫자가 많아졌지만 내 마음으로 생각하면 딱 두 종류였습니다.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우리 교회를 떠나간 이후 저를 거래 관계에 대한 교역자와 저를 사랑의 관계에 대한 교역자. 가끔 상처를 받습니다. 제가 아낀 후배 목사님이 있어서 기도 부탁하고 신뢰하니깐 우리 성도님을 통해서 큰 금액을 보냈는데 이후로 연락이 없습니다. 저분이 다가온 것은 저를 통한 어떤 거래가 필요했던 것이구나. 저는 우리 교회 떠나간 교역자 중에서 제가 해준 것도 없는데 이분에게는 유난히 해준 게 없는데 유난히 저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이번 주에 스승의 날이라고 너무나 마음을 표현해주는 교역자를 만나면 너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 저도 그 분에게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그러나 신앙생활은 산속에서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인격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거래 관계로 상처받은 분들이 교회에 와서 너무나 사랑의 관계로 치유를 받는 것이 교회인데, 여전히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를 안 가는 사람. 가나안 성도가 왜 많아지는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나안 성도 아시죠? 거꾸로 안 나가. 그래서 가나안 성도입니다. 왜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안가 났느냐? 가나안 성도는 나는 자연인이다 이분들입니다. 교회 가면 힘든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나를 기능으로 대하는 게 아니냐. 그래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제가 지난주에 골로세서 3장 말씀하고 바로 이어서, 다음 주에도 연결할 것입니다. 골 3장 1-10절 까지는 개인적인 성화입니다. 이런 흐름을 다루고 있는데 중요한 사항이 무엇이냐, 개인적인 성숙으로 시작한 3장 초반부 말씀이 11절에서 성숙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 오늘 본문은 그 연장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여러분 이것이 전부 대인관계 아닙니까?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단독자로서 성화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을 향해 나가야 하는데, 내 성숙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에 2시에 일어난다. 나는 새벽에 4시간 나는 묵상한다. 100번 떠들어도, 9시 교회 출근하자마자 직원들 함부로 대하고, 교역자들 함부로 대하면 저는 새벽에 하나님과 관계를 갖은 것이 아닙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오래 참음 전부 대인관게입니다. 긍휼은 이런 뜻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믿음은 좋은데 공감능력이 없어요. 사람의 슬픔에 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참 좋아.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긍휼 다음에 나오는 것이 자비입니다. 새번역으로 친절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목사님이 하루에 기도를 3시간 하는 것 중요하지만,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길성남 교수님 말씀에, 겸손은 비굴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살맛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너무 낮추어 너무 비굴한 것 아니야? 저렇게까지 해야 해? 교회가 커지고 나면 개척교회 할 때는 예의 바른 교회가 교회가 조금 커지니 목에 힘이 들어가고, 기도 부탁하면 내가 집사님 기도도 해야 하느냐고. 그것은 교회의 궤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기준으로 저 사람 저렇게까지 겸손해야 해? 저 사람 위선 아니야? 자기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오해를 받을 정도로 낮아지는 것.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분을 많이 만나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온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어로 주인의 손에 길들여진 야생입니다. 타고나기에 욱욱 올라오고 하는데 믿음이 들어와서 하나님에 의해 통제당하는 사람이 온유입니다. 제 주위에 온유의 대명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 애는 신기해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집은 잠자리가 들쭉날쭉하거든요. 저는 초저녁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고. 아내는 늦게 자고. 그런데 애는 수시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짜증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떨 때는 짓궂게 장난치면 배를 발랑 보입니다. 개라는 존재가 엄청나게 온유하다고 하는데, 한 번씩 산책 데리고 가면 다른 존재에 대하면 말로 다할 수 없게 사납습니다. 애의 형제가 한 마리는 우리 집에서 자라고 한 마리는 장모님 집에 있습니다. 만나면 얼마나 사납게 하는지 말고 다할 수 없습니다. 동물의 본성이 없어진것이 아니라 저에게 길들여진든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더라도 저에게 본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말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믿음이 조금만 약해지면 바로 드러나니깐. 제가 그런 사람이 기도합니다. 엄청 성격 급한데 거의 잘 안 드러납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이니깐요. 마지막으로 오래 참음은 분노를 오래 억제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오래참음은 영적인 힘으로 분노를 통제하여 오래 견디는것을 말합니다. 다 대인관계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께 단독자로서 성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성숙해져 가는 것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증명해야 하는. 다락방모임 가셔야 하는 이유가 거기서 마음이 상한것을 치유하면서 다듬어져 가는 훈련 장소가 소그룹 모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을 구약 인물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성화된 존재가, 우리가 닮아야 할 모델이 요셉입니다. 그 요셉에게 가장 중요한 정점이. 총리대신이 되어서 나타나니깐 형제들이 부들부들 떠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 두 번이나 반복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형제들을 보복했다면 성경에서 요셉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성숙은 인간관계에서 증명이 되나 야하니깐요. 분당우리교회 2기 사역은 어마어마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앞에선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성숙해지는 것이 2기 사역의 목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목표를 가진 자는 항상 인간관계를 통해서, 중점을 주고 싶은 것이 다락방입니다. 다락방 공동체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만 모였다면 바꾸어 달라고 하세요. 괜히 나가는 것입니다. 훈련도 안 되는데. 모난 사람 들어와서. 10명 모이면 딱 한 명씩 이상한 사람을 배정해요. 진짜 신기해요. 딱 봤는데 이상한 사람이 없다. 자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왜 그래야 하냐? 훈련하는 장소니깐요. 그래서 여러분, 분당우리교회 2기 사역은 성도님들과 제가 점점 성숙해지는 목표와 꿈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이 숙제 한 가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2기 사역에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신 숙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구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납한다는 헬라어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 나는 산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조차도 용납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쉽게 대답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감추어진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시제입니다.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를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래 시제를 사용해서 내일부터 잘해라 그게 아니라 사도바울은 현재시제를 사용합니다. 왜 바울은 해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는 것을 현재 시제로 기록했느냐.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그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재시제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강조합니다. 저부터가 절대 못 합니다.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는 맨날 저런 거 시키더라 하는데, 신앙생활이 뭔지 아세요? 되지도 않을 것 알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내게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능력이 없구나! 자각하는 것입니다. 시선이 어디로 옮겨지는 것이냐? 골로세서 맨 처음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런 각도로 포인트를 조금 다르게 해서 보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이제 무게를 달리해서 보자고요. 대인관계를 통해서 너희끼리 잘 지내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이고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를 통해서 우리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런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자신을 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한 것은 주님이 저에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 모르시잖아요. 걷만 보니깐. 목사 된 이후로 부끄러운 생각을 하고, 거짓말 안 한다고 생각하지만 튀어나오는 것은 어떡합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주신 것. 이것이 용서받지 못한 것은 못한 것입니다. 괴로워서 못합니다. 양심에 견디지 못합니다. 불면증 오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 용서를 제가 받았습니다. 그 용서가 얼마나 저를 윤택한 인생으로 만들어주었는가 감격이 용솟음치며 다시 시도하게 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하여 위의 것을 바라보고, 위의 것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2기사역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원합니까? 더 성숙해지기 위해 애쓸 때 다락방이나 교회의 여러 소모임을 통해서 인간관계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의 제가 요한입니다. 신학적인 논리를 찾고 싶으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고, 기독교 윤리를 알고 싶으면 야고보서를 읽어야 하고, 기독교의 핵심 사랑을 알려고 하면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 그 외에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 1서, 2서 3서 집에 가서 읽어보세요. 그런데 여러분,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사랑의 사도라는 요한이지만 주님 만나기 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눅 9:49 새번역)


어떤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룹 아니네,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협되었느냐고요. 다가 아닙니다. 54절에 보니깐 쉬고 싶었나 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미숙한 성격이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이걸 읽으면서 예수님이 요한 같은 성격이라면 다니시는 곳 불구덩이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편협한 것이 요한인데요.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어떻게 이렇게 큰 변화를 경험했을까요? 이 질문으로 성경을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요한이 자기가 기록한 요한복음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십시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그가 사랑하시는 자. 주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요 20:2)


요한이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겠느냐고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마음에 울분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조차 도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 대합니다. 그것이 채워지면 언제 그랬냐 듯 등을 돌리고, 어떻게 치유하느냐고요? 나는 자연인이다 보고 나도 그럴 거야. 가나안 성도로 나는 떠날 거야. 이것보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 요한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저도 요한처럼 저 자신의 정체성은 대형교회 목사, 많이 알려진 목사로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많이 받은 자.


오늘 설교 후 찬양을 이 찬양 되뇌며 참 많이 은혜를 받습니다.


아버지 찬양 내가 노래해
아버지 은혜 내가 노래해
그 사랑 변함 없으신 거짓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시는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않으시는 그 사랑


제 어머니는 제가 약하고, 그런 이야기 하면 성도님들이 네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상상하겠느냐고. 그런 말 하지 마. 그러시는데 저는 다른 것 다 순종하는데 할 것입니다. 왜 해야 합니까? 그래야 내가 용서받은 자라는 것.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받은 사례가 저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받을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요한처럼 자기의 정체성을 이렇게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받던 존재로서의 나






05월 08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5-11)


제가 최근에 어느 모임을 소개받아 갔는데요. 제 옆에 연세가 있으신 장로님을 소개하는데 굉장히 성숙 하신가 봐요. 이 분은 김인수 장로님 닮은 분이다. 저는 김인수 장로님이 누군지 잘 모르는데, 이 장로님이 펄쩍 뛰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김인주 장로님께 누가 됩니다. 저는 그분을 뒤따라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궁금해서 김인수 장로 검색을 해봤더니 기독교 신문에 기사 하나가 이분과 관련해서 떴더라고요. 머리기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신행일치. 믿음과 삶이 일치한 것 아닙니까? 신행일치 삶을 산 고 김인수 장로를 따르자. 맨 먼저 나오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죽어서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인생은 분명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사람됨의 진가는 세상을 떠났을 때 드러난다. 죽어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이 장로님이 2003년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이 분의 삶을 그리워해서 100 몇십 명이 모여서 이 분이 이러셨다. 저러셨다는 내용입니다. 또 따른 기사를 보니깐 이 사람을 평가하는 몇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김 장로의 인생은 성실, 정직, 겸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분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이 분의 평가를 읽으면서 성경 한 구절이 떠올라지는데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너무 멋진 것 아닙니까? 이 장로님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분당우리교회 이 장로님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많은 성도님이 떠올라지는 것 아닙니까? 1만 성도 파송운동 후 2기 사역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1기에 29 교회를 파송해서 60교회를 파송하자. 엄청난 일을 하는 2기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기초다지기입니다. 우리 교회의 믿음의 어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꿈을 갖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시가 향수 뿌린다고 나오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2기 사역 동안 거룩한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손자 손녀가 참 우리 할아버지는 너무 아름다우셨어, 할머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분이야. 이런 욕심을 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설교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기라는 것입니다.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화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점진적으로 점점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 이것이 성화 아닙니까? 칭의를 위해서 선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 은혜에 감격해서 징의.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비록 제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묵상하다 보니깐 이 성화 신학 용어가 쉽게 해석이 되더라고요. 멋진 인생 되기. 이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멋진 일 아닙니까? 다 아시지만 제가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 설교를 듣는 타 교회 분들을 만나면 화면보다 잘생겼네요.'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제가 거울을 보면 뭐 그냥 그래요 그냥. 제가 엄청나게 잘생겼다고 생각 안 하고, 나이 들고 흰 머리 많아지고 점점 잘생길 일은 없지만 저는 꿈을 꿉니다. 우리 목사님 잘생겼어. 말은 못 들어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2기 사역을 향해 좋은 교회 만들기는 간단합니다. 교회 구성원이 여러분과 제가 좋은 사람이면 저절로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2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거룩한 꿈을 꾸어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너무 말씀을 깊게 묵상하셔서 표현을 안 하시는데 표현해보세요. 꿈을 꾸면서 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기쁨과 은혜를 누렸는데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저와 여러분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 아닙니까? 거듭난 우리가 새 사람입니다. 새번역으로 보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 3:10 새번역)


설교제목을 여기서 따온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대단한 특징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화를 향한 꿈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은 세월이 갈수록 더 향기나고 아름다워지는 인생. 꿈을 꾸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목표를 설정하고 이제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점점 멋진 인생이 되기 위해서 실천사항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죄의 본성과 그 행위를 적대하며 싸워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 3:9)


죄의 본성뿐만 아니라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행위 방치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 그 실천사항으로 대표적인 사례 몇 개를 열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땅의 있는 지체를 죽이라 강한 표현을 쓰는 의도를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8)


여기서도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굉장히 강한 의도로 명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성화가 뭐라고 설명해드렸습니까? 성화는 갈수록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갈수록 멋진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까?에 아멘 하였다면 내 안의 더러운 본성, 악한 행위를 방치하지 않겠다. 결단이 포함된 선언 아닙니까? 본성과 악한 열매를 보십시오.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거짓말 이것 방치하고 멋진 인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TV에 보면 너무나 추하고 역겨운 인간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애들을 성추행하고 뭐하는 짓이냐고요. 얼마나 추하냐고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꿈틀거리는 죄의 본성이 만드는 너무나 악한 것을 방치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이 말씀이 쓰여지던 당시 로마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들을 영화에서 한 두 번 보셨을 텐데요. 죄의 유혹이 올 때 그냥 나 유혹하지마 좀 가줄래? 사단? 싸워야 합니다. 피흘리까지 싸워야합니다. 비참하게 묻거나,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저급한 본능과 싸워나가는 사람이 점점 멋있는 인생이 되는 것 아닙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여기 유람선에 구경 오신 것 아닙니다. 교회는 싸우는 곳입니다. 교회는 피 흘리기까지 처절하게 싸우는 곳입니다. 오늘 은혜받고 나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 전에 비장한 출정식을 선포하고 출근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얼마나 많은 유혹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추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기도합니다. 싸우길 원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지 추한 웅덩이로 빠지는 공격 앞에 비굴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강단에서 이렇게 설교하고 아무도 안보는 구석에 가서 음란한 짓거리를 하면 그것은 나 자신을 못 견디게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안 그러세요? 주차 봉사할 때 저 집사님은 광채가 난다. 거룩해 그런데, 구석에 가서 음란한 일에 기웃거리는 일에 여러분 스스로가 허용이 안 되시는 그것이 싸우는 것입니다.


존 오웬이 쓴 내 안에 죄 죽이기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소개 글을 보다가 너무나 멋진 구호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열망하라!


제게 굉장히 인상적인 구호입니다.


누가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까? 거룩한 삶을 열망하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점점 피부가 좋아지고 있는 주름살 없어지는 것은 안 됩니다. 육신의 세포는 노화되고 아름다움은 사라지지만 향기나는 인생. 어떤 사람이 그렇다고요? 거룩한 삶을 열망하는 사람.




2. 그리스도의 영향력 아래 놓여라


여러분 멋진 삶을 맨땅에 헤딩하듯이 우격다짐으로 하는 것은 안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누가 날마다 새로워지느냐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 갈수록 새로워진다는 것을 10절에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골로세서가 길지 않으니 전체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하려고 연구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체에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을 말하라고 하면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 2:7 새번역)


어떤 사람이 점점 멋진 인생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분 아래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그분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전에 나온 책 제목, 여러 번 활용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베스트 셀러가 된 책 제목이 제게 영향력을 미칩니다. 누가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시잖아요. 성격이 급한 사람은 바로 튀어나옵니다. 바로 튀어나오는 2초만 쓰시면 됩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것을 이번 한주 실험해보세요. 부부간에 한 번만 꿀꺽하면 넘길 수 있는 싸움이 많다는 것 아시잖아요. 남편이 훅 들어올 때 0.1초 만에 팍 불꽃이 튀는데 남편이 쑥 들어올 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답이 안나오실때 잊어버립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전에 나온 영화 중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설정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권력 다툼이 극에 다른 상황인데요. 왕이 살해위협. 정적들에 의해서 자기 목숨을 노리는 악몽, 불안한 시간을 보냅니다. 왕이 묘안을 하나 내는 데요. 길거리 자기와 닮은 광대 한 사람을 찾아서 자기를 흉내 내게 하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떠돌던 무식한 광대가 왕 흉내를 내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느냐고요. 어색하고, 왕복 자체가 불편해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영화가 계속 전개되는 과정에서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잊히지 않는 대사가 있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본 내시가 광대에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투가 점점 전하를 닮아가시옵니다. 저는 이렇게 은혜로운 문구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교역자 한 사람이 의미 있다고 예고편을 보여주었는데, 말투가 점점 전하를 닮아 가시옵니다. 왜 은혜가 되었느냐면 제가 광대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33년 전에 신학교에 가서 제가 신학 공부하면서 알았죠. 신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하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졸업하고 목사가 되고 나서 목회를 하고 있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행해서 목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보니깐 30대 초반, 중반은 설교할 때는 뭔지도 모르고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죠. 제가 하나님의 학문을 알겠느냐고요. 설교하면서 뭔지도 모르고 설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녔습니다. 저 자신이 위선자로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님 앞에서 허허 하는 게 위선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30년 전을 되돌아보니깐 흉내를 낸 것인데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애쓰는 저를 불쌍히 보시고, 그래도 지금은 멀었지만 30년 전을 생각해보면 더 정화된 것을 느낍니다. 저는 수 없이 이야기하잖아요. 너 30대로 보내줄까 하면 큰일 나옵니다. 큰일 날 소리를요. 이 나이가 드니깐 음란과 악한 생각으로 조금 자유로워지는 것 같은데 진흙탕 속으로 또 가라고요? 그 끔찍한 시간들이요. 안 가고 싶은 것입니다. 안 가고 싶다는 마음속에는 성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국을 닮아가는 목표가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 되는 목표입니다. 주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분들에게 그분의 성화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왜 큰 의미가 있느냐면 당시 유대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아냥하면서 나사렛 사람이다. 갈릴리 사람이다. 오늘 사도행전 11장에서 비로소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요. 헬라어로 그리스도인은 크리스티아누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헬라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크리스천 아닙니다. 누가 물으면 교회 다녀요 하세요.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조금만 의역하면 나는 작은 예수다. 크리스천이에요. 나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목표를 삼기 위해서 저를 따라 선포해보기를 원합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러분에게 비로소는 언제였습니까? 아직 구현 안 된 분이 계시나요? 괜찮습니다. 내 인생에서 비로소를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목사 안수받으면 비로소가 생깁니까? 흉내 내는 것입니다. 자료보고 짜깁기해서 설교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목사 안수받는 날이 비로소가 아니라 나는 점점 멋진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까 장로님 인용했던 것처럼. 크리스천, 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 안에 그분의 인도 하심 안에 이 꿈을 꾸어나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3. 성숙한 공동체로 살아가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헬 3:11)


거기에는 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펴본 10절에서 이렇게 변화 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엿새 동안 골방에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주일에는 11절로 가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당시 선민의식에 빠진 유대인은 지옥의 불쏘시개감으로 만든 것이라고 업신여기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헬라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 인이나. 유목민을 가르치는 표현인데 스구디아인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족속 취급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생긴 얼굴을 갖고 고집을 하고, 선입관을 갖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느냐면 거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분당우리교회 2기 사역에서 제가 강력하게 꿈꾸는 것은 다락방의 부흥입니다. 저는 우리 남은 젊은 교역자들에게 굉장히 감사합니다. 얼마나 애를 쓰는지 많은 교구 목사님들 처음 맞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청 교구 하다가 오고, 주일학교 하다가 오고. 정말 애를 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올해 안으로 다락방 모임 못할 줄 알았는데 한 달만 되면 다락방이 열립니다. 1기 때도 분당우리교회가 꽃이라고 생각했는데 2기에는 다락방이야말로 11절의 공동체가 될 줄을 믿습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차별 금지법 갖고 기독교가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차별 금지입니다. 6월 말에 굉장히 좋은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뭐고, 가르쳐드리는 전문가들이 오시기로 정리되어있습니다. 나 예수 잘 믿어요. 그런데 사람 차별해요. 그것은 위선입니다. 이찬수 목사 예수 잘 믿어. 그런데 돈 많은 사람 좋아해, 잘생긴 사람 좋아해. 그것은 위선입니다. 저는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긴 고독의 시간을 보냅니다. 어떨 때 정말 고독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새벽을 보내면 아침에 교회로 출근하면서 내가 아침에 받았던 것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무뢰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수용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내게 나타나는가?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잡기로 원합니다. 2기 사역에 거룩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4-6)






05월 01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내일이 더 멋진 삶을 위해

내일이 더 멋진 삶을 위해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18-24)


지난겨울에 낙조라고 하죠.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시간에 감동을 하였습니다. 산 중턱에 걸리는 무렵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그 부분이 훨씬 더 붉게 묽든 것입니다. 제 마음이 도전되면서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인생도 저러기를 원합니다. 인생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겉으로는 빛을 이루어가는 것 같지만, 젊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을 살았다면, 나중에는 자기 존재는 사라지는데 오히려 주변을 물들게 하고 아름답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인생인가? 많은 생각을 하며 본, 올겨울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이요. 한 사람은 사무엘, 한 사람은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은 어떤 존재인지 아시잖아요. 아무 죄가 없는 청년을 잡으려고 했던. 대조되는 인물이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현역 시절에 참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냈던 인물이지만 사무엘의 진짜 아름다움은 은퇴 이후입니다. 마음먹기 따라서 권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추종할 수 있었지만, 노년에 미련없이 내려놓고 고향으로 가 사람 키우는 일에 전념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삼상 19:19)


라마는 고향 이름이고, 나욧은 거쳐, 기숙사 뜻을 갖습니다. 이 공동체는 사무엘이 자기 공동체에 세운 선지 학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갖은 사람이 노년에 무리수를 둔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일절 하지 않고 딱 자기 역할은 여기까지 다 생각이 드니 낙향해서 사람을 키우는 모습이 저에게 엄청나게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 어렵다고 하지만 기성세대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탐욕에 쩔에 청년을 죽이려는 사울의 길을 가려는 것이 아니라, 겨울 낙조를 보면서 우리가 모두 정답을 압니다. 우리는 악한 사울이 걸어간 길이 아니라, 자기는 사라지고 사람을 길러내는 사무엘의 길을 가는 것이 정답이다.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납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 19: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는 한마디 말 안에는 엄청난 사건, 스토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권력자 사울이 다윗을 죽일것이라고 천명을 하고 창을 던져서 겨우 도망을 가는 것이 본문의 배경인데요. 다윗이 누구를 찾느냐? 사무엘 선지자를 찾습니다. 사람이 너무 잘 풀리고 성공하면 나눌 사람은 많습니다. 다윗처럼 인생 절벽이다. 벼랑끝에 섰다. 이럴 때 아픔을 나눌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상상해보세요.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서 사무엘을 찾았더니 세상의 인심은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게 왕이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데, 우리도 위험해져 미안하지만, 더 멀리 나가면 좋겠다. 이것이 세상 민심 아닙니까? 그런 세 사무엘은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교회라는 것이 젊을 때 신앙 갖기가 쉽지 않잖아요. 청년 때 어떻게 교회를 떠나고 어떻게 주일학교에 교회를 떠날 수 있지만, 인생의 위기가 올 수 있지만 그때 다윗이 사무엘을 떠올렸던 것처럼, 다윗이 라마 나욧 공동체로 갔던 것처럼, 위기가 있을 때 떠올려지는 분당우리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엘 같은 어른들이 참 많았는데. 사무엘을 분석하니, 위기를 만난 다윗을 위해서, 사무엘이 두 가지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1. 거절감이 많았던 다윗을 ‘수용’해 줍니다.


다윗을 분석해놓은 글을 읽은 데요. 다윗은 어릴 때부터 거절 감을 많이 경험했다고 합니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시 69:8)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5)


일반론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다윗의 출생은 별로 환영받지 못한 출생이었다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가정은 한 사람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가정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은 기능과 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역기능 가정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들어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이새의 집을 방문하는데 아버지 이새는 기능만 보는 것입니다. 듬직하게 생각하는 장남 엘리압을 선두로 해서 불행하게도 그 아들들에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은 없습니다. 사무엘이 다른 아이는 없습니까? 하니 그때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네 누나는 몇 점 받았는데 너는 왜 그러냐. 이게 제일 상처 아닙니까? 어릴 때부터 거절 감을 많이 경험했는데, 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이 누굽니까? 성경을 쪼금만 읽은 사람은 아시잖아요. 자기 장인입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예뻐서 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하였고, 죽이려는 어른 앞에서 얼마나 큰 상처와 거절 감이 있었겠느냐고요. 이런 상처를 갖고 사무엘을 찾아갔는데 따뜻한 수용을 합니다.


사울이 미갈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왜 나를 속이고, 원수가 빠져 나가서 살아날 수 있게 하였느냐?" 그러자 미갈은, 다윗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가는 다윗이 자기를 죽였을 것이라고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다윗은 그렇게 달아나서 살아난 다음에,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서, 그 동안 사울이 자기에게 한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곧 다윗을 데리고 나욧으로 가서 살았다.(삼상 19:17-18)


다윗을 아픔을 수용해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교회에서 오래 찬양 사역했던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요. 우리교회는 부교역자 복이 있지 않습니까? 이 목사님도 오래 찬양사역을 하신 분인데요. 설교 중에 엄청 부끄러운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사역을 갓 시작했던 대학생 때에 중요한 집회에 이 팀이 찬양을 맡은 것입니다. 대학을 다닐 때 복음성가 하나 부르고, 유행가 부르고 이런 게 유행이던 때에 이 목사님도 그렇게 놀았나 봅니다. 너무나 중요한 선교사님이 설교하시고, 콜링. 세계가 여러분을 부릅니다. 선교사역에 헌신할 청년 없습니까? 일어나서 눈물 흘리고, 찬양팀이 반주로 분위기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내려가시고 이 목사님이 대학생 때 인도하시는 찬양팀이 나와서 인도하시는데 선곡한 것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리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열정적으로 선곡했는데,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필어 향내 내리라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이 대학생이 인도자 경험도 없는데 어쩌다 그랬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연결이 안 되는 독도는 우리 땅이 나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웃으면 머리가 하얘 지집니다. 앞에서 버벅거렸는데, 그다음 맥이 안 잡혀서 우왕좌왕하는 경우 신학교 다닐 초보 때는 그랬습니다. 이 목사님이 너무 당황해서, 결단한 사람들도 다 웃고, 그렇게 예배가 끝나고 반주하는 팀은 다 도망하고, 수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수할 거리가 있고, 범위를 넘은 것입니다. 심각하고 진지한 자리에서 그 목사님은 어찌했겠느냐고요. 그날 너무나 감동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쥐구멍이라도 찾을 것 같이 힘든 마음을 갖고 담당 목사님을 찾아가니 목사님이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쓰시려고 사고를 쳐도 이렇게 치냐? 크게 될 거야. 간증하는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누군가 용납의 열매입니다. 굉장히 감동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알면 사과라도 한 박스 보내드리고 싶더라고요. 저는 누군가 용납의 열매라고 할 때, 분당우리교회가 그 용납의 열매를 얼마나 오래 누리고 있었느냐고요.


사무엘 25장을 보면 사무엘이 죽습니다. 그 과정을 담은 구절에서 굉장히 도전받는 구절을 찾았습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삼상 25:1)


다윗은 그가 머물던 라마를 떠납니다. 사무엘이 떠난 라마는 다윗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도전이 되더라고요. 엄청나게 화려한 건물, 드림센터 만들고 시설이 좋아서 눈길을 끄는게 아니라 사무엘이 있어서. 학교를 빌려써 불편하지만 여기에 사무엘 같은 좋은 분들이 있어서. 이게 사무엘이 위기를 만난 다윗에게 해준 수용해준 큰 일을 한 것입니다.




2. 라마 나욧 공동체를 경험하게 해 줍니다.


눈물 닦아주고, 힘내라 이것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다윗을 위하여 라마나욧 공동체를 경험하게 해준 것입니다.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삼상 19:18)


지난주에 매듭짓기와 새로운 인물로 1만 성도 파송운동 매듭짓기로 했습니다. 제가 29 교회에 간섭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29 교회는 분당우리교회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매듭짓기입니다. 새로운 임무.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떤 임무가 있을까요? 대학교 청년부를 살리는 것입니다. 거절 감의 아픔을 겪는 청년들이, 젊은이들이, 주일학교 아이들이 분당우리교회야말로 라마나욧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교회에서 예수 잘 믿는 어른들이 참 많았더라. 이것은 지난주까지 이야기입니다. 겨울철 낙조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라지고 오히려 더 머문 그 자리가 아름다워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대학부를 살리고 청년부를 살리고. 눈물 날 교회를 찾으면 교회가 라마나욧 공동체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이 교회를 향한 꿈을 꾸는 저와 성도님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마나욧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두 가지 구비조건이 필요합니다.




1. 지도자의 솔선수범


지난주 설교로 말하면 사무엘이 매듭짓기처럼 백성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삼상 12:3)


그랬더니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이 합창하듯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삼상 12:4)


얼마나 아름다운 매듭입니까? 그렇게 은퇴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너무나 아름다운 후학을 키우는 공동체를 만들 때 왜 거기에 힘이 있습니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 사무엘의 솔선수범입니다. 이것은 신양으로 와서 사도바울도 똑같습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8-20)


사무엘과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솔선수범입니다. 사도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말발이 세고, 그 말에 설득 안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머리보다 중요한 것은 솔선수범입니다. 좀 큰 인물 되었다고 성도님이 기도 부탁하면 나는 바쁜 사람인데 집사님 그런 것도 부탁합니까? 성도님 한 사람을 겸손과 눈물로. 이 지도자의 중요성이 성경에서 강조하는지 알잖아요. 그것을 수행하는 것을 보세요.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수 3:12-13)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명령을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지도자에게 한 것입니다. 지도자의 솔선수범. 두 주전에 1만 성도 파송예배를 드리고 정말 오랜만에 우리 교회 출신의 모든 목사님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예배 보고를 하고 목회를 어떻게 하는지 3시간 정도 보냈습니다. 화요일, 수요일 두 번에 거쳐서 시간을 갖었는데 화요일도 그랬지만 수요일은 정말 모두가 다 우리교회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처음에 분당우리교회 부임하고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쪼아대는지, 화요일 회의를 하면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웃기려고 했지만 다들 아름다운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역자들, 엄청나게 쪼아대는 것 사실입니다. 29 목사님들 1년 반 동안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다들 해방이다 했을 것입니다. 연락도 안 하니 기도가 응답하였다 했을 것 같은데, 직원들하고는 다릅니다. 예배 마치면 직원들에게 쪼지 않습니다. 너무 좋은 삼촌 같은데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왜 다르게 대합니까? 직원들은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목회자는 달라요.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다들 디그니티 기억하더라고요. 존엄성, 솔선수범해야 하고. 우리 교회가 라마나욧 같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주옥같은 말로 애들은 왜 맨날 잔소리한다고 이야기합니까? 잔소리 줄이고 우리가 솔섬 수범하는 것입니다. 책 읽는 아들을 만들고 싶으세요?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2. 영적인 능력의 나타남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니깐 아까 성경 봉독할 때 본문이 꽤 길었지 않습니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삼상 19:19-20)


다윗이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급파해서 다윗을 잡아오라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놀랍게도 라마나욧의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영을 통한 다윗을 보호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두 번 반복이 됩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삼상 19:23)


하나님의 영을 통한 보호하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라마나욧 공동체의 특징하고 너무나 대비되는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삼상 19:9)


사울의 악함과 라마나욧 공동체의 선함은 그들의 좋은 성품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지도자는 유능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배운 게 많이 없고, 예수님 죽기 직전까지 부인하고 배신한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들이 부실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강력한 특징이 무엇이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생각해보세요.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데 무슨 박사학위가 필요합니까? 따라 하면 되는데. 어떤 면에서 저를 포함해 한국교회가 목사님들이 책 읽는 것 줄여야 하나? 박사학위가 왜 필요합니까? 말하게 하는 것 따라 하면 되는데. 사무엘처럼 윤리적으로 깨끗한 것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 하심입니다. 지도자는 부실한데, 그 교회 담임목사 누구야 하면 창피해서 참 있어, 얼버무릴 수 있지만, 이 교회의 성령 역사가 나타난다면, 다윗처럼 엿새 동안 위기를 만나면 아픔을 겪고, 교회로 몰려올 때 라마나욧 공동체처럼 하나님의 영을 통한 다윗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라면 담임목사의 역할이 뭐가 중요하겠느냐고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충만함입니다. 코로나 19 영적으로 엄청나게 위험합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것이 익숙해져서 주일날 나오는 것이 힘듭니다. 새벽기도 살려야 합니다. 금요기도회.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드림 센터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빨리 본당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20년 동안 눈물 자국이 배인 자리 아닙니까?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인 공동체, 성령이 역사하는 공동체


결론은 이 편지하나 읽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를 원합니다. 최근에 지방의 청년이 편지를 보냈는데 가슴이 먹먹합니다. 애씀이 너무.


목사님 저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고 있고 합동 측 교회를 다니는 31살 청년입니다. 지난 7년간 하나님을 위해서 몸을 불태우겠다는 청년때의 에너지와 열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느덧 보니 저는 어떠한 모습으로도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삶을 주님의 영광으로 살것이라고 자신만만했던 제 과거가 부끄럽습니다. 터무니 없는 원대한 꿈을 접고, 무미건조하고 똑같은 일상에서 주님을 만나려고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도 해보고, 몸에 힘을 빼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려고합니다. 그다음 들어보세요. 그다음 눈물겨운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믿음의 선배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창피합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가 세상에서 부끄러울 정도니깐요. 내가 가려는 좁고 거룩하고 재미없고 힘든 십자가의 길. 청년의 때에 혈기, 정욕 다 죽이면서 하루하루 쓰러지다시피 하며 이겨내는 저의 삶에 실망스러운 목회자 모습 때문에, 내가 신앙생활을 유난스럽게 하나 회의감이 들고 무섭습니다. 그 길 끝까지 걸어가 주세요. 하나님만 의식하며 가는 길, 회의감이 들 때마다 목사님 같은 선배님 보고 마음을 다잡고 싶습니다. 저 같은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타협하지 말아주시고 지금 가시는 힘든 길, 제발 끝까지 가주세요. 그럼 저도 여기서 멀리서 목사님 보며 나만 이 길을 가련느게 아니구나 믿음의 선배 동지들이 있구나 이 신앙 후손에게 전하려면 이 삶 살아내리라. 이렇게 하며 견디겠습니다.


젊은 청년이 이렇게 예수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같은 목사들이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태양 같은 인생 살게 해달라는 기도 하지 말고, 힘 잃은 낙조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울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청년을 살리는 길입니다. 청년들 애쓰는 청년들, 힘 빠지게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애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04월


04월 2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매듭짓기와 새로운 임무

매듭짓기와 새로운 임무


1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수 4:1-9)


20년 전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던 초기, 제가 약간의 감정의 혼란을 겪었던 것이 제게 추억처럼 남아있습니다. 교회 개척은 기쁘고 감사하고 초창기부터 은혜를 주셔서 주일 오전이 되면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온 가족들이 예수 믿는 성도님들이 함께, 어떤 분은 반찬을 가져오시고, 대부분의 분이 점심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렇게 자치 같은 행복한 주일을 보내고, 오후에 집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다운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우울하고, 너무 힘들고. 왜냐하면, 옥한흠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의교회에서 만난 좋은 분들이 그리운 것입니다. 그때도 주일 오후에 인터넷으로 사랑의교회 예배 실황 참여하면서 옥 목사님 말씀 전하실 때 은혜도 되기도 하고, 여러 번 울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뭐하러 개척하려고 그랬나. 내가 이 울타리를 떠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밀려오면서, 오전과 오후의 감정이 너무 달라서.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2주 전 1만 성도 파송예배를 드렸더니 저같이 미련이 많은 성격. 누가 그러더라고요. 회귀본능이 강하다고. 성도님들 중에서 그런 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1만 성도 파송운동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1만 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29 교회와 지역 교회로 간 것으로 너무나 감사하고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러면서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힘듭니다. 사람이 정이 든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도 분리 개척을 했는데, 예배 인도를 너무나 담담하게 인도하신 담임목사님이 사무실로 가서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꺼이꺼이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이 떠나가신 성도님, 남은 성도님들에게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년 전에는 42살 때니깐 그런 감성적인, 감정의 혼란이 꽤 오래 가도록 방치하였던것 같지만, 요즘은 방치하지 않습니다. 요즘 주로 묵상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저 스스로 이런 것을 다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40대 초반처럼 저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에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2주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로봇이 되고 싶다. 빨리 정비해서 얼마 남지 않은 목회에서 다시 꽃을 피우며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의 소원이 있다 보니 눈물짓고 정든 성도님들이 그립고, 이런 것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제가 1만 성도 파송운동 3주 전에 파송예배를 드리고 지난주와 오늘 묶음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과거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합니다. 과거는 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로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사실 오늘 본문을 선택한 것도 그런 면에서 3주간 잘 마무리하기에 오늘 본문이 주는 너무 좋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슴이 벅찬 것으로 표현이 어렵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정에 휩싸여있어 것입니다. 오랜 세월 자기들이 꿈꾸고 달려온 가나안 진입을 눈앞에 왔습니다. 목표한 가나안이 본문의 상황입니다.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4:1)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지도자가 바뀌었습니다. 분명히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새로운 명령을 주시는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설명해 드렸던 꿈 넘어 꿈.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진입한 것이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어떤 점에서 시작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가. 이것이 꿈 넘어 꿈 아니겠습니까? 어떨 때는 눈물이 나고 하는데, 정든다는 것이 무서운데 그것을 떨치려고. AI로 만들어주세요. 그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40대 초반과 달리 저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달력 가고 싶습니다. 참 하나님 은혜로 1만 성도 파송운동이 무사히 진행되었고, 이번 주 보고해주는 것을 보니, 우리 교회 세례교인을 보니 생각보다 숫자가 적더라고요. 보고하지 않고 떠나간 분이 꽤 되나 보다. 이런 것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만, 지난주에 29 교회 넘쳐났더라고요. 은혜롭게 넘쳐나서 어떤 분은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는데, 잘 들으셔야 합니다. 29 교회로 잘 나누어졌으니 우리 목표 끝. 큰일 날 생각입니다. 지금부터입니다. 꿈이 이루어졌다면 꿈 넘어 꿈을 향해 모든 성도님과 제가 제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어떤 꿈 넘어 꿈입니까? 29 교회와 분당 우리 교회가 세 가지 꿈이 있습니다. 건강한 목회 철학으로 구성원들이 행복한 교회를 만들길 원합니다. 성장해 양합니다. 성장하지 않고 행복한 것은 위험합니다. 두 번째 꿈은 우리만 행복한 것이 아니잖아요. 침체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 인근의 작은 교회들이 같이 기뻐하고, 같이 상생하는 것이 두 번째 꿈이고, 아까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뭉클했습니다. 우리끼리 노닥거리는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한숨 돌리자 이것은 절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다시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싸구려 감정조차도 억제하고 싶습니다. 절약하고 절약해서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문 말씀을 묵상을 했는데요. 오늘 새로운 어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기 위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과거에 대해서 매듭을 잘 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념비를 마련해야 합니다.




1. 기념비 마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목표를 이룬 기쁜 순간에 엄중하신 명령을 하나 내리십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1절부터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수 4:1-3)


이 명령을 받든 지도자 여호수아가 지파 대표들에게 명령할 때 보니깐 그 돌을 어깨에 메라고 되어있더라고요. 작은 조약돌 같은 것이 아닙니다. 꽤 무게가 나가는 큰 돌입니다. 이 12돌을 세우라고 명령하는가? 5절을 보면 이유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수 4:5-7)


꿈과 목표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12돌을 세운 의도 하심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신 일이다. 돌들을 보면서 경험한 후대의 자손들이 묻거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지난 시간 매듭을 짓고 싶으세요? 분당우리교회는 두 주 전에 2기 사역을 선포했습니다. 뭔 이야기만 하면 분당우리교회는 안이랬는데요. 이런 이야기 절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남기로 하신 여러분들도 3주 이전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꿈을 갖고 새로운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데 과거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기념비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두 주전에 1만 성도 파송예배에 맨 마지막 부른 찬양이 은혜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것이 은헤였소


분당우리교회가 개척하고 이 만큼 성장하기까지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이것이 매듭짓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약에 너무나 대조적인 두 기념비가 나옵니다. 두 기념비중에 한 기념비는 사무엘이 세운 기념비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구약에 나오는 대표적인 기념비 에벤에셀, 사무엘이 세운 기념비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기념비는 성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울 왕이 세운 기념비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 15:12)


사울 왕이 아말렉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때나 지금이나 끊어지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이다. 계속 사울 왕을 아부하면서 칭송하니깐 그것에 취해서 만든 것이 사울의 기념비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이후에 보면 기념비뿐만 아니라 사울 왕의 변질이 가슴 아픈 내용을 갖고 침착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삼상 15:17)


새로운 푯대를 향해서 가야 하는데, 과거를 매듭지어야 합니다. 어떻게 지어야 하냐고요? 사무엘의 기념비를 세웁니까? 사울의 기념비를 세웁니까?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 공급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과거 매듭을 지어야 하는 때에 매듭짓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기념비를 사무엘이 세운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해주셨다고. 매듭짓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지난 세월을 고린도전서 15장 10절로 매듭짓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 세월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렇게 매듭을 짓자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할 두 가지 중에서 첫 번째입니다.




2. 앞으로 나아가기


매듭을 지었으면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애굽의 앞제에 눌려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과정을 보면 물 두번 건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건너는 것이 홍해이고, 물 두번 건너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를 건너던 과정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출 14:15)


여러 성경 번역본을 살피다 보니 공동번역이 너무 와 닿게 번역했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여라.(출 14:15 공동번역)


맨날 그렇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왜 전진은 안 하느냐. 바로 이 정신이 본문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수 3:13)


제가 발견하는 가장 강력한 깨달음은 무엇이냐면, 먼저 갈라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언약궤를 들고 가는데 시기적으로 범람했다고 합니다. 허구한 날 새벽에, 수요예배, 밤샘기도 요단 강 갈라달라고. 왜 나는 환경에 변화가 없느냐고 기도하는 것은 어떨 때는 그 기도가 맞는데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이런 응답을 주시길 원합니다. 너는 왜 부르를 짓기만 하니? 범람하기만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 상징을 기억하고, 환경을 향해 돌파를 향해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설교 맨 마지막에 부연하고 싶은 말씀이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한동안 우리가 이 말씀을 얼마나 되뇌었습니까? 그런가 하면 고난주간 많이 묵상하셨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자꾸 제가 정든 성도님들이 가신다 했을 때 아는 목사님께서 꺼이꺼이 우신 것처럼 정든 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꿈 넘어 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전거 이론, 인생은 달리거나 자빠지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꾸 지칠 때 무덤에 가면 쉬겠지. 농담처럼 하지만 그것은 진실입니다. 무덤에 가서 쉬는 것입니다. 호흡이 다 하는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을 왜 하나님께서 안 데려가고 호흡을 붙여주시는가? 신나게 달려가는 일이 안 되십니까? 자빠진 것입니다. 감상에 빠지지 말고. 눈물 흘리고 그런 거 이해는 되지만, 그만 우세요. 남는 것이 죄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2기 사역의 주역으로 쓰시려고 하였다면 남기로 하신 여러분이 너무 감사합니다. 제 목회에 함께 달려갈 동역자들을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사항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말하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수 4:10)


제사장이 일하는데 궤를 메고 있습니다. 11절에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수 4:11)


인격체도 아닌데,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까? 저기서 말씀하시는 궤는 하나님의 임재 상징입니다. 까분다고, 이제 뭘 이루었다고. 하나님의 임재고 뭐고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어. 100전 100패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어제 이 시간입니다. 수요일날 참 너무 의미 있고 기쁜 시간을 가졌습니다. 분당우리교회에서 함께 사역한 교역자들을 다 초대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보고를 하고, 설명을 3시간 가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목요일날 연락이 왔습니다. 4명이 한 테이블입니다. 정면에 같이 식사를 하던 목사님이 확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 또 시작이구나. 아무 증상도 없고 했습니다. 금요일날 아침 일찍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내일 아침에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아침에 PCR 검사를 하고, 토요일 아침에 검사받는데, 신기하게 금요일 오후부터 체력이 떨어지고,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후염이 생기고, 제 목소리가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두통이 있고, 열도 있는 것 같고. 새벽 2시쯤에 잠이 깨었는데 서재로 가서 말씀 묵상해야 하는데 100% 코로나 확진이다. 검색해보니 모든 증상이 확인도라고요. 그래서 새벽에 문밖에도 못 나가고 가족들에게 옮기게 될까 봐. 긴 새벽을 보냈습니다. 이 상황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두 주전에 이렇게 안 하도록 도와주셔서 1만 성도 파송예배 무사히 드리고, 고난주간 말씀 잘 전하고 지난주 부활절 예배 잘 드려서 이번 주 제가 설교 안 해도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속으로 이번 주 마무리 설교인데. 어느분에게 토요일 아침에 설교를 부탁해야 하냐고요. 원로목사님께 연로해야지 하면서 열도 나고 목도 따갑고 하며 100% 코로나이다. 하는데 둘째 딸이 명언을 날리는 애입니다. 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날립니다. 엄마 세 번의 행운은 오지 않아요. 결과 짐작하시겠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제 8시 30분 연락이 왔는데 음성이에요. 오죽하면 결과를 듣고 마스크를 쓰고 갔습니다. 틀릴 수 있다. 그래서 아는 분통하고 의사를 통하고 보니깐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느지막하게 10시쯤 드림 센터 사무실로 갔는데,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부터 입니다. 문을 따고 목양 실로 딱 들어가서 책상 자리에 앉는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이 드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다시 교회를 갈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뜨거움이 올라온 것이 개척하고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수도없이 교회를 들락거리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은혜였구나. 평범한 일상이 보통 기적이 아니구나. 여러분 제 설교 들으시기 불편하겠지만 저는 근래에 지금만큼 마음이 뜨거운 적이 없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원로목사님께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제 자리에서 마음이 너무 뜨거워진 것입니다. 수많은 평범한 일상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개입하심입니다. 둘째 딸 방에서 나오자마자 행운 세 번밖에 안 온다며 이번이 다섯 번째인데. 아무 말 안 하고 지 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이것이 기념비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요단 강물은 줄지 않습니다. 갈라지지 않습니다. 할 일 많습니다. 그런데도 에벤에셀.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젯밤, 오늘 아침 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너무 신기하잖아요. 확진자 걸린 목사님을 맞은편에 앉게 하시고. 지금 보니 목감기인 것 같습니다. 왜 대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에게 에벤에셀을 선포하길 원합니다. 내가 얼마나 목회를 잘했는데 이것은 망하는 길이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영적으로 올려드리고, 그리고 저와 함께 2기 사역으로 가셔야 합니다. 할 일 많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교회에 남기로 했다고 미안해하고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일 엄청나게 많습니다. 갈 걸 그랬다. 여러분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를 살리고, 저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척하고 영원히 할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지금은 초조합니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언약궤. 하나님 임재의 상징.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생하게 간증할 수 있도록. 목이 잠기고 쉰 제 목소리가 감격이 됩니다.


어제 아침입니다. 신명기 6장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 6:10-11)


모든 걸 다 누리시는데 하나만 하시길 바랍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2)


이것만 하시면 됩니다. 네가 이만큼 여유를 갖은 것은 네 손의 수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04월 1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방심했던 작은 틈이 나를 망하게 한다

방심했던 작은 틈이 나를 망하게 한다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8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왕상 11:1-8)


끝이 괜찮아야 다 괜찮다.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담겨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도 이것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고도 성경에 써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우리 가정도 그렇고 깨지는 것이 어마어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도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작은 결정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여우를 물리쳐주시길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숙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삼손이라는 인물. 수년 전에 삼손을 갖고 몇 주에 걸쳐서 공부한 기억이 있습니다. 삼손을 평가할 때 드릴라라는 악한 여자를 잘못 만나서 망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삼손이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이 사사기 13장 23절입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4)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삿 14:1-3)


삼손과 관련한 첫 번째 기록입니다. 성경이 왜 첫 번째 기록으로 남겨두기를 원했을까요? 삼손은 드릴라라는 여자로 망한 것이 아니라 첫 출발부터 그가 보이는 약점을 방치했기 때문에 망하게 된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예배 드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아직 드릴라라 인생에 개입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악연을 만난 적이 없어. 제가 이런 간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인생에 드릴라는 반드시 옵니다. 우리 약한 부분을 사단은 영물이기 때문에 가장 잘 압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 약함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돈 문제로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여러분의 약한 부분을 방치하면 그것이 오늘 이 본문의 삼손처럼, 오늘 살펴볼 솔로몬 왕처럼 비극을 맞게 만드는 결정적인 악한 도구가 됩니다. 인생을 허무는 작은 여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제가 오늘 본문을 이런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좋은 것이다. 이야기한다면 오늘 살펴볼 솔로몬 왕은 최악입니다. 솔로몬은 인생 초반에 굉장히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했습니다. 그런데 인생 후반에 가서 그만 망해버렸습니다. 솔로몬이 귀한 업적도 많이 남겼습니다. 성전 건축을 완공한 사람이 솔로몬 아닙니까?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많이 남겼고, 초창기의 솔로몬은 너무 지혜롭고 겸손했던 왕 아닙니까? 그랬던 솔로몬이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이 아합 왕 같은 왕으로 설교하면 접목하기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사람이거든요. 여러분 중에 시중 일관 악한분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처럼 잘 해오신 분이라면 소롤몬을 주목하셔야합니다. 그랬는데 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분석해서 솔로몬을 피해서 어른들을 볼 때마다 축복합니다. 귀한 권사님, 귀한 집사님, 인생의 후반전이 전반전보다 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솔로몬의 후반부 실수와 잘못을 잘 분석해야 하는 데요. 이번 한 주간 솔로몬이 왜 망하게 되었는지 여러 자료를 가지고 분석을 하고 두 가지로 압축하였습니다.




1. 첫 출 발의 잘못을 방치한 것


삼손하고 너무 흡사합니다. 보편적으로 솔로몬이 망해버린 결정적인 이유를 궁극적으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오늘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에 망할 정도로 빠져버렸나 분석 아닙니까? 오늘 본문이 분석합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왕상 11:1)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1:3)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타락의 원인이 뭔지 아시겠죠? 수많은 이방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면서 악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11장에서 솔로몬은 첫 출발이 어디서 시작하였는가?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왕상 3:1)


솔로몬은 첫 출발부터 바로 왕의 딸과 결혼하였고 방치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두려운 것은, 솔로몬이 출발할 때 첫 단추 잘못 꾀는 것을 방치했더니 죄의 확장성입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1:3)


제가 중학교 때 우표수집을 하였습니다. 잘사는 집은 우표 수집이 많았고, 저는 돈 있으면 빵을 샀습니다. 솔로몬을 보면서 우리가 우표 수집할 때 이 남자는 수많은 후궁을 수집하고 첩을 수집했구나. 웃기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지만 무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죄 문제를 방치하면 그것만 남는 것이 아니라 죄의 확장성이 너무나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경고합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예수님도 비슷한 지적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6)


바리새인이 전하는 교훈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메시지를 누룩이라고 합니까? 매우 작은 가르침도 삶을 흔들만한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빵 만들 때 누룩 조금만 넣으면 엄청나게 부푸는 것처럼. 삼손으로 치면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약점을 방치하니 비참하게 죽는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전도서 10장 1절에서 성경에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죽으면 향수 한 병을 버리게 된다. 그렇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지혜로 얻은 영광을 물거품으로 돌려버리는 수가 있다.(전 10:1 공동번역)


작은 죄의 씨앗이 있다면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첫 출발의 잘못을 방치하고있다. 아무에게 들키지 않은, 양심의 어떤 부담을 느끼는 작은 죄의 씨앗이 있다면 오늘 성령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신의 잔꾀를 의지한 것


솔로몬이 수많은 이방 여자들을 첩으로 두고, 후궁으로 둔 것은 삼손하고 케이스가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방식의 나라를 잘 통치하고 싶은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중국 강대국에 눌려 살면서 사극을 보면 정략결혼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딸과 결혼할 수밖에 없느냐?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더 악한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솔로몬을 불러서 예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전합니다.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 22:9)


온순한, 평온은 히브리어로 누아크, 같은 단어입니다. 쉼, 평안, 안정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쉼, 평안, 안정 이런 표현을 쓰고 계시는데 솔로몬 이름의 뜻을 아시나요? 솔로몬은 샬롬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주면서 생전에 평안과 안위를 이스라엘에 줄 것이다. 대적에게 평온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너 낳기도 전에 네 이름을 샬롬으로 짓기로 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약속해줬습니다. 위기에 빠트리더라도 샬롬을 지켜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만 샬롬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생전에 평안과 안위함을 이스라엘에 줄 것이다. 이스라엘에 평안과 샬롬을 주기로 했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치명적인 문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스스로 말하면 자기 스스로 만든 샬롬의 방식으로 갖고 하나님의 샬롬을 죽인 것입니다. 성적으로 충동을 못 이기면 대부분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솔로몬 같은 부류의 사람을 문제가 심각한 것이 자기 확신을 갖고 하니깐요.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평가하는 솔로몬은 나라를 두 동강 낸 인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내 방식의 샬롬이 하나님의 샬롬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큰아들은 씩씩한데 야곱은 모자랍니다. 아버지도 안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 나름대로의 해법을 갖고 아들을 위해준다고 하는 게 장자권을 빼앗는 것을 사주해서 아들이 야반도주합니다. 끔찍한 고난을 엄마가 만든 것 아니냐고요. 사랑하는 아들이 야반도주하는 것이 어머니 인생의 끝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자기가 만든 샬롬을 하나님의 살롬을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인생의 모토는 길가다가도 하고 새벽에도 하고, 이찬수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지난 10년간 암만 생각해도 될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주 너무 감격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1만 성도 파송운동 여러분만 쓰신 것만 해도 1만 명을 넘어서 감격하였습니다. 10년 내내 불안한 것입니다. 어떻게 1만 명 이상이 나가느냐고요. 자꾸 잔꾀. 저를 억제하는 것 아닙니까?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네가 하나님이냐? 이것은 남에게 하는 이야기잖아요.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는 말이잖아요. 설치지 말고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제 어머니께서는 설치지 말라고. 꾀춤을 추는지 뭔지 모른다면 예배 마치고 프라이팬에 깨를 올려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촐랑거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에게 종종 까불지 말라고 합니다. 솔로몬을 보니 자기 방식으로 확신을 하고 한 것으로 자기도 망하고 자기 민족도 망합니다. 제가 10년을 괴로워하다가 만든 것이 물철학힙니다. 이따가 설교 마치고 함께 부를 찬양인데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눈물로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보니 너는 너를 위하지 않는다. 너를 위하지 않니? 사춘기 애들을 보면 자기를 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볼 때는 멀리 내다보면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자녀 키우고 돌아보면 내버려두면 단계 단계 키워주실 텐데 우리가 뭘 해보려고 하다가 덧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멈춰 서리다. 인생을 쉽게 살자는 것입니다. 제가 아낄수록 젊은 목사님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무슨 생각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밤새도록 고민해서 답이 나오면 1년 12달 밤 세겠습니다. 우리 말에도 있잖아요.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요. 여러분의 인생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잔꾀를 의지하다가 망해버린 솔로몬, 자기의 샬롬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샬롬을 짓밟은 솔로몬의 우를 피해가기를 원합니다.


솔로몬의 두 가지 대안을 말해드리겠습니다.




1. 기초다지기: 꽃 피우기 전에 먼저 뿌리 내리기


수많은 교역자들에게 노래를 불렀던 말입니다. 당신 나이로 봐서 꽃피울 때가 아니야. 뿌리를 내리는 시기야. 목사님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성도 차별하지 않는 것. 작은 약속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 이것이 뿌리내리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제가 30대 후반까지 중고등부만 하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30 후반에 갑자기 저를 부르셨습니다. 중고등부를 내려놓고 장년 사역을 2~3년 하고 개척을 도와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날 진짜 반가웠던 것은 중고등부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중등부 진짜 어렵거든요. 중등부 한두 명만 집에 있어도 그런데 그런 애들이 1,200명입니다. 그만하라고 하니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평화, 평화로라고 하는데 툭 튀어나온 말이 목사님, 너무 고마운데요. 저는 하나님의 통전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중고등부만 오래 하고 개척하더라도 다 연결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중고등부 하더라도 사랑의 교회를 떠날 수 있게 해주세요. 옥 목사님이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가만히 있으십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너 참 고집 세다 너 좋은 대로 해라. 제가 어른 사역 하나도 안 하고 개척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으니 이론입니다. 얼마나 신실한 하나님이 그 이론적인 신앙 고백을 100%가 뭡니까? 1,000%, 10,000% 이루어주신 분이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후배 목사님들에게 중국에 유명한, 너무 어린 시기에 과거 급제하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 제일 불행하다. 내 생애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신뢰하는 지도자인 옥한흠 목사님을 만난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지 않고, 게다가 무섭기까지 한. 정말 무서웠습니다. 화요일만 되면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성도 사랑하지 않으면 목사 그만두란 말이야. 온 정신에 성도 사랑이 똘똘 뭉쳐있던. 토시 한마디 안 놓치고 다 받아적었습니다. 한 자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려면. 그렇게 일기장이 10권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유명해졌다가 성적인 죄를 짓고 몰락하는 분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옥 목사님 밑에서 10년 뿌리내렸다면 겪지 않았을 텐데. 열왕기상 3장을 보면 놀라는 많은 일들 행하는데 이방 여자랑 결혼한 건 한 건인데 그 문제가 솔로몬을 죽이는 것입니다.




2. 자기 방식의 추구가 아니라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뭐해주랴 했더니 지혜를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었다고 하는데 묘한 말씀입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지혜를 달라고 하는게 아니네요.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왕상 3:11)


솔로몬은 지혜를 귀한 것이 아니고, 듣는 마음을 구했습니다. 듣는 마음을 구했는데 그것이 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대할때나 하나님을 모실 때나 듣는 마음이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알았다면, 자기 생각으로 나라를 구하겠다고 자기 뜻대로 애썼는데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한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이 한두 개입니까?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왕상 11:1-2)


솔로몬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 있었습니다. 정략결혼인데, 얼마 되지 않아 결과가 나옵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우리 방식의 샬롬이 하나님의 놀라운 샬롬을 짓밟을 수 있다고 하면, 한번 따라 해보시겠습니까?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이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 중심의 지침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춘기 애들을 키울 때 속 터졌잖아요.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우리 엄마 판단이 옳아. 이게 자리 잡아야 권면이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이 많은 분이 따라갈 줄을 몰랐습니다. 한 번만 더 따라 하시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솔로몬의 잔꾀의 샬롬이 하나님을 짓밟았다는 것. 나 이게 꽃피울 거야. 하나님 앞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나 이제는 29 후배도 만들고 이찬수 목사는 남은 몇 년 꽃피울 때야 하는 순간 인생은 문저니느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뿌리 내리는 것은 사람 편애하지 않는 것. 마음에 든다고 막 표 내고. 그것은 기초가 안된 인간입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고, 덜 미운 사람도 사랑하고.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도 적당히 사랑하고.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04월 1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일하심(1만성도 파송예배)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일하심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1)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2:1-10)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에 관련해서 두 파트로 나누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연극으로 치면 2막의 연극입니다. 1막은 모세가 태어나는 과정을 담은 것입니다. 1막은 왕궁으로 입성하는 모세로 제목을 잡아보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은 아기 모세가 아니라 아기 어머니 요게벳입니다. 어떤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아들을 살려내는가가 1막의 주 내용입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출 2:1-2)


태어날 때부터 모세는 위기 속에서 태어난 것 아닙니까? 당시 왕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거든요. 요게벳이 너무나 놀라운 지혜를 발휘해서 갈대상자를 통해서 아기를 살리는,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는 그런 결과를 만드는 것이 어머니 요게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막의 전체 주제를 인간의 최선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잡아봤습니다. 1막 분만 아니라 전체 설교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선과 하나님의 일하심. 이런 맥락으로 본문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창의력입니다. 놀라운 아이디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스티브잡스가 이런 내용을 본다면 혀를 내 두를 것 같습니다. 갈대 상자를 통해서 아들을 살려내야겠다.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조롱할 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린 다윗을 복병으로 준비하시고 물 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의력 아닙니까? 성경이 창세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아버지의 창의력이 있는 것 아닙니까? 요게벳에서 창의력이 발휘되고 또 한가지는 절박함입니다. 갈대상자가 산책하다가 떠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 갈대상자 아닙니까? 저는 우리교회 젊은 목사님들에게 노래를 부릅니다. 목회는 창의력이다. 교회는 작년에 했던 거 올해 또 쓰고, 그래서 성도님들이 아무것도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느냐. 창의력으로 목회를 해야 하는데, 창의력은 절박함에서 나옵니다. 교회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불철주야. 책에서 본 것인데 실력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민이 차이를 만든다. 너무 와 닿아서 교역자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오늘 인생에 드리워진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 고민거리가 재료가 되는데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절시함을 갖고.


그런가 하면 세 번째로 요게벳은 모험정신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출 1:22)


두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 갈대상자를 띄워서 가는 것 아닙니까? 죽음의 강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조취를 취하고 승부수를 어머니 요게벳이 가졌다. 창의력으로 무장하고, 매사에 건성건성, 절박함을 갖고, 절실함을 갖고 절실함으로 갖고,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면 안 되는데, 죽음의 강에 도전하리라. 나아가는 것이 본문의 요게벳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여성의 가녀린 입장에서 담대하게 창의력으로, 담대하게 모험정신을 무장할 수 있었나. 두 가지 원동력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원동력. 무능한 자신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2:2-3)


갈대상자가 만들어진 과정에서 창의력과 절박함과 모험정신을 녹여서 갈대상자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놀랍게도 여인이 갖고있는 절망입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망이 오면 절망합니다. 낙심이 오면 낙심합니다. 요게벳이 세상 사람들이 갖지 않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무능한 자신에 대한 자각, 두 번째 그것을 하나님께 위임하는 태도로 승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무능한 자신을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고, 나 같은 것이 뭐가 되나 아니라 귀한 아들 모세를 하나님께 위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요게벳의 노래라고 예배 끝나면 인터넷에 뒤져서 찬양을 뒤져보세요.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잘 녹여놨습니다.


작은 갈대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아이와 입을 맞추고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 흔들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눈을 맞추며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무능한 나 자신, 더 이상 보호 할 수 없어. 어미의 마음이 잘 녹아 있는데 눈물 짓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하나님 그 손에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수년 전부터 이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어느 순간 성도님들을 보내드리고, 초창기에는 29 교회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29 교회로 되었고, 오늘이 이 날입니다. 마음에 굉장히 많은 생각이 곂치고, 요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저 AI로 취급해주세요. 로봇으로 취급해주세요. 감정, 희로애락 반납하고 싶습니다. 무덤덤하게 기계적으로 설교하고, 다른 어떤 즐거움이 없어도 좋습니다. 괜히 마음이 북받쳐서 예배를 방해할까 봐. 마음이 무덤덤하길 원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이것입니다. 모든 성도님에게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서의 삶을 맡긴다


너무 소중한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 파송해드리면서 제가 끼고 있다고 여러분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여러분의 삶을 맡길 때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줄을 믿습니다.


나의 최선과 우리들의 최선, 하나님의 일하심.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절박한 마음으로 온 창의력으로, 모험 정신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출 2:5-6)


조금만 묵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상자 하나 흘러가서 뚜껑을 열어보니 히브리 사람 아기로다. 뚜껑을 들여다본 사람은 누구냐고요. 바로 왕의 딸이잖아요. 아버지에 대하여 대적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짓을 해서 애를 살려? 분노가 생기는 상황 아닙니까? 어느 민족 아기든 상관없이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다니엘 1장에 나옵니다. 다니엘이 어린 나이에 포로로 끌려가 애를 씁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거룩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9)


아직도 선민의식을 못 버리는구나. 네까짓 게 뭔데 옥에 집어넣고 굶기는 것이 사극을 보면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새번역을 보니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서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주셨다.(단 1:9 새번역)


제가 노래를 부르는 것 아닙니까? 가정에서 문제가 많을 때 내가 욕먹어 마땅한 짓을 했는데 상대방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 다 해결됩니다. 아내가 해오라고 했는데 깜빡 잊고, 들어가면 엄청나게 화내겠다 하는데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는데 온 긴장이 풀립니다. 불쌍히 여겨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쁜 아들 이해가 되는데, 예쁜 딸 내가 보호해야지, 아닙니다. 끼고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새 학기가 되잖아요. 우리 애가 초기에 덤벙 덤벙해서 실수를 잘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호의와 동정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29 목사님들이 1부부터 3부까지 비장하게 예배를 드리는 데요. 기질이 다르죠. 자란 배경 다르죠. 교회 다 다르잖아요. 무슨 기도 하는지 아십니까? 환관장이 갖은 태도. 행동을 보고 호불호를 내는 것이 아니라 호의와 동정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참 사랑스럽기 위해서 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눈물이 많이 낫습니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하고 지난 20년 동안 여러분이 저에게 해 주신 것이 호의와 동정이었거든요. 나이는 40대 초반이고, 얼마나 덜렁거립니까? 개척 초기 생각하면 엄청나게 덤벙거립니다. 지금은 아이템보다 점잖은데, 지금은 총총 나옵니다. 집사님께서 충고했습니다. 목사님처럼 나오라고. 말도 빠르고, 원고에도 없는 이야기 툭툭 튀어나와서 열 받으면 딴 교회 가라고 하고. 갑자기 설교하다가 성가대, 새벽기도도 안 오면서 무슨 성가대 하냐고. 그러면 우리가 봉입니까? 해야 하는데 진짜 토요일부터 새벽기도 다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환관장에서 호의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공주가 이것을 보고 이런 짓을 해? 아빠에게 이야기를 해서 죽이라고 해 할 수 있는 상황에 우는 아기를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호의와 동정입니다.


제가 눈물로 부탁하는데, 29 교회가 다음 주부터 출범을 하는데, 젊은 목사님들에게 여러분이 저에게 해주신 것처럼 호의와 긍휼로 목사님들을 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담임 목사님 경험이 없는 낯선 길을 가는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긴장하시는 것이 역력합니다. 회의하는데 저에게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거기다 대고 여러분이 목사님 자꾸 왜 실수하세요? 하면 주눅이 되어서 바로 실수의 대왕이 됩니다. 목사님 그럴 수 있죠. 이찬수 목사님은 이것보다 더했습니다. 교회는 서로서로 긍휼을 베푸는 곳입니다. 무슨 실수를 해도 다 용납해주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일 하심인데요. 사실은 이런 줄거리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목요일 저녁까지 1막밖에 없었습니다. 금요일 새벽이에요. 하나님께서 제 설교에 훈수를 주시는데, 이번 파송예배는 이렇게 하고 끝나면 안 됩니다. 금요일 새벽에 2막을 새로 만든 것입니다. 1막에서 제목이 왕궁으로 입성한 모세라고 했다면 2막은 왕궁을 거부하는 모세입니다.


금요일부터 준비해서 2막은 1막보다 짧습니다. 2막으로 들어가서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금요일 새벽에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모세가 목숨을 건지고 그 공주의 입양 아들이 되었다. 계속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끝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모세가 특별한 은혜로 왕궁에 입성해서 호화로운 왕궁 생활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호의호식하게 만들었잖아요. 이러면 1막이 무슨 소용이냐고요. 자기 동족들이 압제로 피눈물 흘리는 것을 외면한다면 1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금요일날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이 이것입니다. 29 교회가 무슨 꿈을 꾸어야 하냐고요. 2막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1만 성도 파송운동 준비하면서 생각도 복잡하고 이게 무슨 사춘기 소녀같이 기뻤다가 슬펐다가 길 가다가 눈물을 흘렸다가 완전히 감정 기복 속에 살았는데, 몇 주 동안 지난 1만 성도 파송운동 선포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디서 출발이 되었냐. 저희 교회는 학교를 빌려 쓰다 보니 출석 성도 2만 명이 될 때까지 모일 곳이 없었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이 주일학교 교육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 공간을 학교가 내주어서 잠깐 쓰는데 선생님과 학생이 서서 예배를 드리는 상태였습니다. 이 주변 스무 군데를 뒤졌습니다. 우리 사이즈를 임대할 곳은 당연히 없죠. 그래서 드림 센터를 매입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내 부끄러움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편하자고. 한국에 미자립교회가 60, 70%라는 말이 있고, 한 교회가 저렇게 큰 공간을 쓰는 것이 부끄러움이에요. 분당우리교회 드림센터 네온사인 하나도 없습니다. 작은교회 목사님이 출석하다가 분당우리교회 더럽게 크네, 우리는 뭐야. 마음에 상실감이 생길까 봐 교회의 흔적을 안하는 것입니다. 29 목사님에게 명했습니다. 교회 이름에 우리자를 넣지 말라고. 이것이 작은 교회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우리 하면서 29 교회가 들어가면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얼마나 위축이 되느냐고요. 드림센터를 매입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손님 오면 드림센터로 오라고 말을 못하고, 율동공원에서 만나고, 카페에서 만나고.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셔서 1만 성도 파송운동, 그리고 저 큰 드림센터를 우리만 쓰면 안 된다. 10년을 쓰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로 시작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너무 고마운 것입니다. 제멋대로입니다. 드림센터 6개월밖에 안 썼는데 사회 환원하면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쫓겨날 짓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호의와 동정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1만 성도 파송운동인데요. 하나님이 개입해서 기적을 주신 것 아닙니까? 그때 모든 사람이 절대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1만 명을 어떻게 내보내야. 어떤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1만 성도 파송운동이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으려고 검색하는데 못 찾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포함해서 1만 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이 파송운동에 서명하셨습니다. 직접 작성하셔서 제출하신 것이기에 그 무게감이 대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고맙고 하나님께 고마운 것입니다. 1만성도 파송운동을 힘있게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완전한 독립을 선포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분당 우리 교회가 간섭하고 어떻게 하는 것 없습니다. 어떤 통제와 간섭 없이 독립될 것입니다. 이른 새벽에 교회만이 독립이 아니라 마음에서 29 목사님을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허구한 날 만나면 잔소리꾼입니다. 별명이 잔소리 대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떠나보낼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릴 것입니다. 이제 남은 1막, 2막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너무나 아름답게 풍성한 일을 누리고, 2막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왕궁을 거부하는 모세입니다. 동족들은 고통의 신음소리가 난무하는데 나는 왕궁에서 호위호식하잖아. 이런 교회들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분당우리교회도 이렇게 하고 일이 끝난 것 아닙니다. 1차 목표가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새벽에 드린 약속이 이렇잖아요. 1년은 피해드리겠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은 안식년 할 상황이 아닙니다. 10년 동안 기존 신자 등록을 안 받아서, 통계가 나왔습니다. 순장 님들 중에서 떠나는 분이 7080%입니다. 대학 청년지도자 중에서 떠난 청년들이 7080%입니다. 대신에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된 성도님들이 70~80% 남아 계십니다. 다시 한 번 분당우리교회를 성숙의 자리로 인도해주시기를 모든 것을 다 걸 것입니다. 2년으로 몸부림치고, 2년 이하로 성인 5천 명 이하로 줄지 않으면 사임할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거든요. 억지로 줄여서 내가 70살까지 해야지. 어떠한 시도도 안 할 것입니다. 이번 주 파송 예배를 드리고 다음 주부터 11 교회를 연말까지 선정할 것입니다. 이미 개척한 교회 중에 조금만 밀어드리면 아름답게 일어설 수 있는 교회 선정해서 후원할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29 교회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40 교회로 마감될 줄 믿습니다.


다음 주부터 남은 두 가지 숙제가 있잖아요. 드림센터 사회 환원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드림센터 약자를 위해서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이 2막의 모세입니다. 왕궁을 거부한 모세입니다. 조금이라도 누리는 것은 사명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파송받아 지역의 작은 교회로 떠나시는 여러분, 그간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진짜 감사하고 그 애씀을 하나님도 아시고, 장로님들도 아십니다. 그래서 세 가지 숙제를 드립니다.


첫째. 주 안에서 무조건 행복하셔야 합니다. 주 안에서 행복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29 목사님들이 순수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노아의 방주하고요. 요게벳이 만든 갈대 상자하고요. 상자와 방주는 같은 단어입니다.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바르고, 방수 처리를 하고 악한 나일 강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방수 처리하는 어미의 심정이 지금 우리 29 목사님들의 꿈입니다. 대형교회 만드는 것이 꿈이 아니라, 행복하게 해드리는것. 2부 예배 마치고, 코로나 걸려서 예배를 못 드리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현장에 오고 싶은데 못 오셔서 장문의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목사님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성도님들이 행복하신 것입니다.


둘째. 감사. 지난 시간에 감사. 이 순간에 감사. 새로운 교회에 대하여 무조건 감사로 시작하세요. 좋은 목사님들 보내주신 것 감사합니다. 지난주 목요일날 굉장히 당황스러웠을 거에요. 1년에 한 번씩은 나에게 선물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더 웃기는 것이 현물은 안 받는다. 상품권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2층에 다 앉아있으니깐 정정합니다. 현금으로 주세요. 부목사님의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상품권으로 원하느냐. 그래야 누군가에게 전하기 쉽습니다. 저는 29 목사님들에게 1년 반 동안 폭풍 잔소리를 하면서 엄청난 목회 훈련을 한다고 시켰는데 마지막은 감사예요. 감사가 없는 목회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29 목사님 마지막 수업은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엄청난 선물을 성도님들에게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개척하고 5년 차, 6년 차 하나님께 선포했던 것을 기억하실 거에요. 올 한해 식당에서 만나는 성도님들 밥값 제가 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선포하고 한 해 동안 식당을 안 갔습니다. 이것은 농담이고요. 애쓰는 것입니다. 말만 갖고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는 것. 이 전통을 이어받으리라고 믿습니다.


셋째. 사명의식. 설교 시작부터 끝까지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들려지는 소식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더라고 들리기를 원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며 함께 은혜를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04월 0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방심했던 작은 틈이 나를 망하게 한다

방심했던 작은 틈이 나를 망하게 한다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8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왕상 11:1-8)


끝이 괜찮아야 다 괜찮다.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담겨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도 이것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고도 성경에 써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우리 가정도 그렇고 깨지는 것이 어마어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도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작은 결정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여우를 물리쳐주시길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숙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삼손이라는 인물. 수년 전에 삼손을 갖고 몇 주에 걸쳐서 공부한 기억이 있습니다. 삼손을 평가할 때 드릴라라는 악한 여자를 잘못 만나서 망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삼손이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이 사사기 13장 23절입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4)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삿 14:1-3)


삼손과 관련한 첫 번째 기록입니다. 성경이 왜 첫 번째 기록으로 남겨두기를 원했을까요? 삼손은 드릴라라는 여자로 망한 것이 아니라 첫 출발부터 그가 보이는 약점을 방치했기 때문에 망하게 된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예배 드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아직 드릴라라 인생에 개입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악연을 만난 적이 없어. 제가 이런 간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인생에 드릴라는 반드시 옵니다. 우리 약한 부분을 사단은 영물이기 때문에 가장 잘 압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 약함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돈 문제로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여러분의 약한 부분을 방치하면 그것이 오늘 이 본문의 삼손처럼, 오늘 살펴볼 솔로몬 왕처럼 비극을 맞게 만드는 결정적인 악한 도구가 됩니다. 인생을 허무는 작은 여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제가 오늘 본문을 이런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좋은 것이다. 이야기한다면 오늘 살펴볼 솔로몬 왕은 최악입니다. 솔로몬은 인생 초반에 굉장히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했습니다. 그런데 인생 후반에 가서 그만 망해버렸습니다. 솔로몬이 귀한 업적도 많이 남겼습니다. 성전 건축을 완공한 사람이 솔로몬 아닙니까?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많이 남겼고, 초창기의 솔로몬은 너무 지혜롭고 겸손했던 왕 아닙니까? 그랬던 솔로몬이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이 아합 왕 같은 왕으로 설교하면 접목하기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사람이거든요. 여러분 중에 시중 일관 악한분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처럼 잘 해오신 분이라면 소롤몬을 주목하셔야합니다. 그랬는데 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분석해서 솔로몬을 피해서 어른들을 볼 때마다 축복합니다. 귀한 권사님, 귀한 집사님, 인생의 후반전이 전반전보다 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솔로몬의 후반부 실수와 잘못을 잘 분석해야 하는 데요. 이번 한 주간 솔로몬이 왜 망하게 되었는지 여러 자료를 가지고 분석을 하고 두 가지로 압축하였습니다.




1. 첫 출 발의 잘못을 방치한 것


삼손하고 너무 흡사합니다. 보편적으로 솔로몬이 망해버린 결정적인 이유를 궁극적으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오늘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에 망할 정도로 빠져버렸나 분석 아닙니까? 오늘 본문이 분석합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왕상 11:1)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1:3)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타락의 원인이 뭔지 아시겠죠? 수많은 이방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면서 악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11장에서 솔로몬은 첫 출발이 어디서 시작하였는가?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왕상 3:1)


솔로몬은 첫 출발부터 바로 왕의 딸과 결혼하였고 방치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두려운 것은, 솔로몬이 출발할 때 첫 단추 잘못 꾀는 것을 방치했더니 죄의 확장성입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1:3)


제가 중학교 때 우표수집을 하였습니다. 잘사는 집은 우표 수집이 많았고, 저는 돈 있으면 빵을 샀습니다. 솔로몬을 보면서 우리가 우표 수집할 때 이 남자는 수많은 후궁을 수집하고 첩을 수집했구나. 웃기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지만 무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죄 문제를 방치하면 그것만 남는 것이 아니라 죄의 확장성이 너무나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경고합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예수님도 비슷한 지적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6)


바리새인이 전하는 교훈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메시지를 누룩이라고 합니까? 매우 작은 가르침도 삶을 흔들만한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빵 만들 때 누룩 조금만 넣으면 엄청나게 부푸는 것처럼. 삼손으로 치면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약점을 방치하니 비참하게 죽는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전도서 10장 1절에서 성경에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죽으면 향수 한 병을 버리게 된다. 그렇듯 하찮은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지혜로 얻은 영광을 물거품으로 돌려버리는 수가 있다(전 10:1 공동번역)


작은 죄의 씨앗이 있다면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첫 출발의 잘못을 방치하고있다. 아무에게 들키지 않은, 양심의 어떤 부담을 느끼는 작은 죄의 씨앗이 있다면 오늘 성령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신의 잔꾀를 의지한 것


솔로몬이 수많은 이방 여자들을 첩으로 두고, 후궁으로 둔 것은 삼손하고 케이스가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방식의 나라를 잘 통치하고 싶은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중국 강대국에 눌려 살면서 사극을 보면 정략결혼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딸과 결혼할 수밖에 없느냐?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더 악한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솔로몬을 불러서 예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전합니다.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 22:9)


온순한, 평온은 히브리어로 누아크, 같은 단어입니다. 쉼, 평안, 안정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쉼, 평안, 안정 이런 표현을 쓰고 계시는데 솔로몬 이름의 뜻을 아시나요? 솔로몬은 샬롬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주면서 생전에 평안과 안위를 이스라엘에 줄 것이다. 대적에게 평온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너 낳기도 전에 네 이름을 샬롬으로 짓기로 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약속해줬습니다. 위기에 빠트리더라도 샬롬을 지켜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만 샬롬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생전에 평안과 안위함을 이스라엘에 줄 것이다. 이스라엘에 평안과 샬롬을 주기로 했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치명적인 문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스스로 말하면 자기 스스로 만든 샬롬의 방식으로 갖고 하나님의 샬롬을 죽인 것입니다. 성적으로 충동을 못 이기면 대부분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솔로몬 같은 부류의 사람을 문제가 심각한 것이 자기 확신을 갖고 하니깐요.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평가하는 솔로몬은 나라를 두 동강 낸 인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내 방식의 샬롬이 하나님의 샬롬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큰아들은 씩씩한데 야곱은 모자랍니다. 아버지도 안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 나름대로의 해법을 갖고 아들을 위해준다고 하는 게 장자권을 빼앗는 것을 사주해서 아들이 야반도주합니다. 끔찍한 고난을 엄마가 만든 것 아니냐고요. 사랑하는 아들이 야반도주하는 것이 어머니 인생의 끝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자기가 만든 샬롬을 하나님의 살롬을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인생의 모토는 길가다가도 하고 새벽에도 하고, 이찬수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지난 10년간 암만 생각해도 될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주 너무 감격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1만 성도 파송운동 여러분만 쓰신 것만 해도 1만 명을 넘어서 감격하였습니다. 10년 내내 불안한 것입니다. 어떻게 1만 명 이상이 나가느냐고요. 자꾸 잔꾀. 저를 억제하는 것 아닙니까?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네가 하나님이냐? 이것은 남에게 하는 이야기잖아요.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는 말이잖아요. 설치지 말고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제 어머니께서는 설치지 말라고. 꾀춤을 추는지 뭔지 모른다면 예배 마치고 프라이팬에 깨를 올려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촐랑거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에게 종종 까불지 말라고 합니다. 솔로몬을 보니 자기 방식으로 확신을 하고 한 것으로 자기도 망하고 자기 민족도 망합니다. 제가 10년을 괴로워하다가 만든 것이 물철학힙니다. 이따가 설교 마치고 함께 부를 찬양인데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눈물로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보니 너는 너를 위하지 않는다. 너를 위하지 않니? 사춘기 애들을 보면 자기를 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볼 때는 멀리 내다보면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자녀 키우고 돌아보면 내버려두면 단계 단계 키워주실 텐데 우리가 뭘 해보려고 하다가 덧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멈춰 서리다. 인생을 쉽게 살자는 것입니다. 제가 아낄수록 젊은 목사님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무슨 생각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밤새도록 고민해서 답이 나오면 1년 12달 밤 세겠습니다. 우리 말에도 있잖아요.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요. 여러분의 인생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잔꾀를 의지하다가 망해버린 솔로몬, 자기의 샬롬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샬롬을 짓밟은 솔로몬의 우를 피해가기를 원합니다.


솔로몬의 두 가지 대안을 말해드리겠습니다.




1. 기초다지기: 꽃 피우기 전에 먼저 뿌리 내리기


수많은 교역자들에게 노래를 불렀던 말입니다. 당신 나이로 봐서 꽃피울 때가 아니야. 뿌리를 내리는 시기야. 목사님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성도 차별하지 않는 것. 작은 약속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 이것이 뿌리내리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제가 30대 후반까지 중고등부만 하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30 후반에 갑자기 저를 부르셨습니다. 중고등부를 내려놓고 장년 사역을 2~3년 하고 개척을 도와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날 진짜 반가웠던 것은 중고등부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중등부 진짜 어렵거든요. 중등부 한두 명만 집에 있어도 그런데 그런 애들이 1,200명입니다. 그만하라고 하니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평화, 평화로라고 하는데 툭 튀어나온 말이 목사님, 너무 고마운데요. 저는 하나님의 통전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중고등부만 오래 하고 개척하더라도 다 연결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중고등부 하더라도 사랑의 교회를 떠날 수 있게 해주세요. 옥 목사님이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가만히 있으십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너 참 고집 세다 너 좋은 대로 해라. 제가 어른 사역 하나도 안 하고 개척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으니 이론입니다. 얼마나 신실한 하나님이 그 이론적인 신앙 고백을 100%가 뭡니까? 1,000%, 10,000% 이루어주신 분이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후배 목사님들에게 중국에 유명한, 너무 어린 시기에 과거 급제하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 제일 불행하다. 내 생애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신뢰하는 지도자인 옥한흠 목사님을 만난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지 않고, 게다가 무섭기까지 한. 정말 무서웠습니다. 화요일만 되면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성도 사랑하지 않으면 목사 그만두란 말이야. 온 정신에 성도 사랑이 똘똘 뭉쳐있던. 토시 한마디 안 놓치고 다 받아적었습니다. 한 자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려면. 그렇게 일기장이 10권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유명해졌다가 성적인 죄를 짓고 몰락하는 분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옥 목사님 밑에서 10년 뿌리내렸다면 겪지 않았을 텐데. 열왕기상 3장을 보면 놀라는 많은 일들 행하는데 이방 여자랑 결혼한 건 한 건인데 그 문제가 솔로몬을 죽이는 것입니다.




2. 자기 방식의 추구가 아니라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뭐해주랴 했더니 지혜를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었다고 하는데 묘한 말씀입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지혜를 달라고 하는게 아니네요.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왕상 3:11)


솔로몬은 지혜를 귀한 것이 아니고, 듣는 마음을 구했습니다. 듣는 마음을 구했는데 그것이 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대할때나 하나님을 모실 때나 듣는 마음이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알았다면, 자기 생각으로 나라를 구하겠다고 자기 뜻대로 애썼는데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한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이 한두 개입니까?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왕상 11:1-2)


솔로몬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 있었습니다. 정략결혼인데, 얼마 되지 않아 결과가 나옵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우리 방식의 샬롬이 하나님의 놀라운 샬롬을 짓밟을 수 있다고 하면, 한번 따라 해보시겠습니까?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이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 중심의 지침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춘기 애들을 키울 때 속 터졌잖아요.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우리 엄마 판단이 옳아. 이게 자리 잡아야 권면이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이 많은 분이 따라갈 줄을 몰랐습니다. 한 번만 더 따라 하시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솔로몬의 잔꾀의 샬롬이 하나님을 짓밟았다는 것. 나 이게 꽃피울 거야. 하나님 앞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나 이제는 29 후배도 만들고 이찬수 목사는 남은 몇 년 꽃피울 때야 하는 순간 인생은 문저니느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뿌리 내리는 것은 사람 편애하지 않는 것. 마음에 든다고 막 표 내고. 그것은 기초가 안된 인간입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고, 덜 미운 사람도 사랑하고.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도 적당히 사랑하고.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03월


03월 2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끝이 허무하지 않은 기쁨

끝이 허무하지 않은 기쁨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1-6)


아마도 성도님들이 방금 본문 말씀을 읽으려고 성경책을 폈다면 부연 설명을 봤을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런 부연 설명을 보셨을 텐데요. 시편 120편부터 135편까지 15편은 순례자의 노래 시리즈입니다. 오늘 본문은 15편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 126편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데 고국으로 돌아간 그들이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편 126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에 대한 표현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 126편 첫 출발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저도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꿈꾸듯이 기뻤던 것이 몇 번 있었는데 제일 기뻤던 것이 장가갔던 것. 요즘으로 치면 늦어졌거든요. 이 땅의 미혼 여성은 나 같은 스타일은 싫어한다 생각하던 쫌에 이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맞선을 보고 결혼까지 금방 결정되었는데 장가를 못 갔다면 어쩔뻔했는가 꿈꾸듯이 기뻤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영어도 못해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할 때 어느 세월에 졸업하나 했는데 맨 마지막 학기 마지막 수업 끝내고 제 졸업 조건을 체크하고, 직원이 졸업을 축하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고속도로 안에서 얼마나 기뻤는지, 꿈인가? 생시인가 이런 경험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늘 옥한흠 목사님을 사모하면서 사랑의교회 주변을 맴도는데 졸업하던 해에 교육전도사 모집에 이력서 냈는데 연락이 한참 있다 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자취방에서 때굴때굴 구르면서 너무 기뻐했는데 이것이 1절의 꿈꾸는 것 같이 기쁜 것입니다. 1절에서 끝나지 않고 2절에서 감격이 계속됩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다락방에 갔는데 안 웃고 싶은데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해도 웃고. 2절이 그런 상태의 표현입니다. 2주 전에 경이로움을 회복해야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했는데, 너무나 황홀할 정도의 꿈꾸는 것이 묘사되고 있는데 시편 126편의 말씀을 좋아하는 것이 기쁨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기쁨과 관련된 소중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먼저 시편 126편 구조를 잘 봐야 합니다.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반부 1절부터 3절, 후반부 4절부터 6절까지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가 나누어서 기쁨과 관련된 중요한 포인트를 찾으려고 합니다. 먼저 전반부를 보려고 합니다.




1. 전반부: 두 가지 요소가 내포된 기쁨

(1) 기쁨의 현재성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시제입니다. 과거의 일이냐, 현재의 일이냐 살펴보면 다 과거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무엇 때문에 기쁨이 유발되었습니까? 과거에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전부 과거를 묘사하고 있는데 과거의 은혜가 어떤 현재에 영향을 미치느냐, 3절에 현재형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3)


과거에 주셨던 은혜의 기쁨과 감격이 메말라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전반부 1절부터 3절까지 따로 떼서 읽으면서 시제가 보여주는 메시지가 참 귀하더라고요. 여러분, 과거의 하나님이 하셨던 일로 인해서 그때부터 얼마 조금 기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영향을 주어서 기쁨을 가져다주면 얼마나 기쁩니까? 과거의 기쁨을 유지하는 것도 실력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내가 결혼을 허락해주어서 꿈꾸듯이 기쁜 것이 가정생활에도 영향을 주길 원합니다. 저희집은 거의 싸움이 없지만,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주일 아침의 시간은 1분이 1시간입니다. 마음은 초조한데 이 분이 다른 것은 저에게 자유를 주는데 넥타이 고르는 것은 독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거나 매면 되는데 굉장히 신중합니다. 선거철에는 매면 안 되는 색깔이 있다고 합니다. 어떨 때는 짜증이 납니다. 아무꺼나 매자고 짜증이 나면 저는 결혼할 때 꿈꾸듯 기쁘던 때로 생각을 돌립니다. 이 분이 나를 택하지 않으면 총각 목사로 목회가 제대로 되겠냐. 현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2) 기쁨의 공동체성


다 복수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3)


제가 기뻤던 것은 다 단수였잖아요. 옥한흠 목사님을 만난 것, 졸업한 것, 내게 주신 기쁨을 내게 가두어두면 그것은 성경의 원리가 아닙니다. 자격없는 저에게 사랑의교회 분리교회 1호거든요. 기뻤는데 가두어두면 안 되잖아요. 이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고 옥한흠 목사님과 사랑의 교회에 기쁨이 되고. 나 혼자 감사했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20년 내내 외쳤던 구호가 있잖아요.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분당우리교회라고.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코로나 19만 아니었으면 오늘이 마지막 예배잖아요. 부득불 오미크론이 득세해서 2주를 미루었지만, 요즘은 오래 계셨던 분이 찾아와서 우세요. 외로웠던 시절 분당우리교회에와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순장 님을 만나고 회복이 되었다고. 교회 이름을 우리로 지은 것은 너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양의 우리의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울타리인 우리 안에서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이름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폐쇄적이면 우리끼리만 함께 울고 우리끼리만 함께 웃으면 곤란합니다. 29 교회에 미안하지만 우리자 이름을 넣지 말자. 우리 말은 쓰지 말라 했더니 머래더라 머의 우리 교회는 안 됩니까? 제가 몇 개나 들었는데 까먹었습니다. 다 안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자는 쓰지 말자. 폐회적인 우리끼리의 우리 교회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기자가 우리 혀에는 왜 의미가 있는지 후반부 설명을 말씀드리겠지만, 나로부터 시작한 기쁨이 확산하는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둔 기쁨은 변질하기 쉬운 기쁨과 같습니다.




2. 후반부: 기쁨의 확장성


1절부터 3절까지의 기쁨은 포로생활을 마친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놀랍게도 4절부터 어떻게 변하느냐?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시 126:4)


자기들의 기쁨을 3절까지 표현했다면 아직도 남아있는 그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합니다. 시선이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다시 보세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시 126:4)


새 번역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 보내 주십시오(시 126:4)


어떤 탄원을 하나님께 드립니까? 네겝 지역은 메마른 지역 아닙니까? 우기가 있고 건기가 있는데, 네 격차의 시내들이 건기가 찾아오면 메마르기 짝이 없는 황량한, 우리나라도 가뭄이 계속됩니다. 그러면 바짝 마른 시냇가를 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것을 시편 기자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돌려보내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하는 표현은 마침 포로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은 메마르고 삭막하겠습니까? 마치 건기가 되어서 말라 비틀어진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격렬하게 비를 보내주실 때 격렬하게 물이 흘러가는 시내가 바꾸어지듯이 갑자기 부어주시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해방의 기쁨을 주시길 원합니다. 남아있는 간절한 심정이 담긴 탄원입니다. 인생은 두 종류입니다. 1절부터 3절의 기쁨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장가 잘 갔어, 내가 졸업 잘했지, 사랑의 교회에서 분리 개척교회시켜주어서 잘 되었지. 그런데 4절부터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1절부터 3절에 갇혀 있습니다.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4절로 건너가는 사람에게는 대가지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 5)


텃밭 일구는 사람들은 울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쓰는 이유를 아시겠죠? 그렇게 기쁨을 누렸던 그들인데 4절로 건너가는 바람에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대가 지불입니다. 우리 말로 사서 고생입니다. 1만 성도 파송 운동 두 주 앞두고 저만 보면 우신다고 하였는데 정말 마음 아팠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일학교 담당했던 교역자가 4학년짜리 남자애가 집에 안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배드렸던 부서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1만 성도 파송운동에 순종해서 동네의 작은 교회로 가기로 해서 오늘이 마지막 예배라며 운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분들이 많으신데, 초창기 어떤 성도님께서 등록하셨는데 이전 교회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가 분당우리교회에 등록하였습니다. 제가 심방해서 아픈 사연을 들었습니다. 장로님, 다시는 교회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도록 정말 제가 잘하겠습니다.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덕담으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장로님 장례는 제가 치루어 드리겠습니다. 그랬는데 이 분이 최근에 오셨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으로 떠나기로 했다고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저 장례 치루어 주신다고 했는데.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사서 고생 아닙니까? 이것이 대가지불입니다. 그렇게 충만한 기쁨이 1절부터 3절까지 넘쳤는데 울며 씨를 뿌리는.


제가 지난주에 담당 교역자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픔과 사연으로 갈등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이들 포함해서 1만 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29 교회와 지역 교회로 가기로 했다. 교역자가 무슨 말을 하나면 목사님이 2년 뒤에 5천 명 줄어드는 것 이야기만 안 하셨어도 이름 그대로 1만 성도 파송운동이니깐 이미 목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너무 감사했지만, 그날부터 제가 악몽을 꿉니다. 누워있으면 자다가 악몽을 꾸고 깹니다. 1절부터 3절 기쁨을 누리는 1만 명의 성도님들이 울며 씨를 뿌리는 대가 지불을 겪어야 하니깐 그렇게 저에게 아픔입니다. 자꾸 새벽에 깨고, 마음에 소원을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작정한 사람들인데 마지막 결론이 이것 아닙니까? 기쁨으로 단을 거두길 원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29 교회를 두고 기도합니다. 먼저는 29 교회 예외 없이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건강한 목회 철학을 갖고 성도님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준비 과정이니 크고 작은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순장님께 이메일이 왔습니다. 저에게 요청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이나 저희 몇 사람의 안위가 아닌 규정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한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뚜렷한 목회 철학에 대한 규정집을 만들어달라. 대위원이 있는데 바로 소집하였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로 꾸는 꿈이 있습니다. 건강한 연합체를 이루어 한국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미자립교회에 힘이 되도록 열매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의 소원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대가지불을 통한 아픔이 있더라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이 소원을 하고 기쁨의 확장성이라고 했는데, 이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1. 또 다른 차원의 기쁨 맛보기


1절부터 3절은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기쁨이라면 4절부터 6절은 오늘 내가 수고한 것으로 열매가 맺어지는 기쁨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결과적인 기쁨도 있지만 29 교회, 동네의 작은 교회로 가는 것이 힘들지라도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대형교회 목사가 되니깐 위험요소가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 것 중 하나가 권태감입니다. 성도님 많이 모이지 않다가 모이는 것이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하니 인간이 갖은 죄성은 감사도 안나오고 숫자밖에 없습니다. 제가 만든 용어인데 새우깡 론이있습니다. 이 나이에도 창피한데 새우깡을 좋아합니다. 요새는 맛동산으로 바뀌었는데, 몇 주 견디다 견디다 안되면 한 봉지 사서 아무도 안보이는데서 먹습니다. 봉지를 뜯을 때부터 가슴이 떨립니다. 먹으면 말로 다 못합니다.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도 맛있습니다. 조금 더 먹으면 버리기 아까워서 먹습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과정에서 권태감이 사라지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선포한 지난 기간 동안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에 권태감은 없습니다. 불안해 죽겠는데 무슨 권태감입니까? 하나님께 매달리고 응답받고. 29 교회에 이런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2. 하나님과의 동역 이라는 신비한 기쁨을 누리기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누가 뿌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뿌리는 게 아니라 인간이 뿌리잖아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우리가 씨를 뿌려야 자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동역자 의식입니다. 너무나 신기하고 오묘하게도 우리집에 확진자가 또 생겼습니다. 두 패턴이 똑같습니다. 주일 저녁에 증상이 시작하고 월요일에 확진 판정받았는데 주일에 이상하다고 하고 월요일에 바로 쌌습니다. 한번 해 본 경험이 있어서 빠트리는 것 없이 잘 쌌습니다. 왜 똑같은 일이 반복합니까? 목사님은 그전에 큰딸 손도 잡고 마스크 안 써도 괜찮다는데, 무엇이 급하게 짐 싸듯이 나갔습니까? 할 수 있는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감염되고 안 하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첫 번째 짐을 쌀 때는 평생 분당에 나간 적이 없어서 해방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쨰는 힘들더라고요. 대가지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짐을 싸고 나온 것 아닙니까?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누려야 하지만 배려받는 기끔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대가지불하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귀를 쫑긋 세우는 대목이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비행기 안 타본지가 오래되었지만 메시지를 얻는 대목이 있습니다. 꼭 이 멘트를 합니다. 만약 비행기가 위급 상황이 될때는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면 먼저 본인이 착용하고 자녀들과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멘트를 합니다. 자기는 안 하고 애들 한다고 그러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죠? 섣불리 4절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을 먼저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누리고 기쁨의 에너지를 갖고 4절로 건너가 포로생활 하는 우리 동족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모든 성도님이 기쁨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오래전에 받았던 기쁨이 단절되지 않고 현재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03월 2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좁은 길을 걸어도 행복한 삶

좁은 길을 걸어도 행복한 삶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0-26)


흔히들 기독교를 역서르이 종교라고합니다. 역서르이 사전적 정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사실은 깊은 진실을 담고있는 표현이다. 이것이 역설이라는 사전적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책도 역설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역설이 성경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세상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어떻게 미련한 것들이 지혜 있는 것을 부끄럽게 할 수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말하는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역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느냐? 하나님 나름대로의 기준이 인간이 익숙하게 생각하는 기준과는 다를 때 사용하는 것이 성경의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방금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것들, 약한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냐면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나님의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명한 기독교 역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상황적으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있는가?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예수님 당시의 문화가 가장 존경을 표하는 것이 이런 것 같습니다.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한 지도자로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이스라엘 왕이시어 하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열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대인만 상대하셨는데 이제는 이방인, 헬라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요 12:20-21)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러 온 세상이 그를 따르도다 하니라(요 12:19)


다 오해할 수 있는 거죠. 예수님도 환영받는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러나 주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차원에서 말씀하셨느냐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3-24)


모든 사람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열광하고 환영하고 그 여인이 옥합을 깨트려 버리고 하는 것이 전성기와 영광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인 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역설 아닙니까? 목회를 하는데 수많은 성도들이 열광하고 말씀 전하고 나면 칭찬이 끊이지 않는 것이 영광이지. 그렇게 배척당하시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게 영광입니까? 그래서 역설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역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영광이 영광이라고 신앙생활 하면 그것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세상의 가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지난한 주 동안 머리로 상상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중고등부 사역을 많이 해서 쓸데없는 상상이 만 하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장면 기억하시죠? 밤새도록 그물질했는데 고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뻔했습니다. 지난주 내내 떠올랐던 상상은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면서 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랑 동업합시다. 하나님 나라 어려운 이야기 하지 마시고 동업합시다. 주님은 고기 있는 곳 맥만 짚으면 50대 50으로 나눕시다. 있지도 않은 일인데 상상이 되는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왜 이것이 머리에 상상이 되었을까요? 지난한 주간 상상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 복 주시면 반반씩 나눕시다. 헌금도 많이 하고. 구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가깝게 신앙생활 하는 분이 많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조르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은 자꾸 우리를 작게 만들려고 한다. 겨우 내 한 몸 먹게 살고, 내 한 가족 먹고살게 만드는 삶이 목표가 되도록 한다. 1인분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복음이 가르치는 포기와 복음이 가르치는 얻음의 역설을 실천할 수 없다.


고기 잡는 곳 가르쳐주세요. 헌금 많이 드릴게요. 6:4 드릴게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1인분의 삶을 뛰어넘는. 그래서 복음이 가르치는 포기, 복음이 가르치는 얻음의 역설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이것을 여러 갈래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의미는 권리 포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리 포기. 제가 2, 3년 전인데 본회퍼와 함께 기다리는 성탄으로 묵상한 적이 있는데 그 책에 나오는 말구유와 십자가 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두 장소를 지목합니다. 한 곳은 말 구유입니다. 낮은 곳입니다. 춥고 냄새나는 곳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따뜻한 곳에서 태어납니다. 또 한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죽임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가장 흉악한 죄수를 참혹하게 죽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리스도는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때 설교 제목을 말구유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제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무엇으로 구축할까 했을 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말 구유와 십자가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 포기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좁은 길을 걸어도 행복한 삶.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삶이 행복한 길이지. 좁은 길을 걷는데 어떻게 행복한 삶이냐고요. 구현해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 길을 앞에 놓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엄청난 옥합을 깨트리는 헌신보다도. 수많은 사람들이 왕이라고 열광하는 순간보다도. 예수 님이 생각하시는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며 사명을 다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제가 대형교회 목사가 되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환영받고 대접받는 것이 영광이거든요. 그래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제가 누리는 것을 내려놓기 위하여 참 계속 기도하며 몸부림하는 것이 목회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좁을 길을 걸으면서도 행복하게 걸을 수 있도록 두 가지 꼭 해야 할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1. 권리 포기를 실천하기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앞에 나오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를 묵상하다가 예전에 읽었던 책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이것은 저자가 한때 인터넷에 떠도는 어린아이의 새해 소원을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새해 소망을 적은 글을 봤는데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었을까요? 그렇게 떠돌던 어린아이의 새해 소망에서 책 제목을 따왔는데, 진짜 재미있는 것은 다음에 나와요. 풀로 읽어드릴게요.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꼭 나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아서 이런 소원을 썼겠느냐고요. 왜 자기만 잘되게 해달라고 썼겠느냐고요. 태어나서 세상이 세뇌하는 것이 철저한 자기중심의 삶 아닙니까? 이런 집착을 내려놓는 것.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삶을 위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삶에 일어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당신이 적게 가졌다고 해도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유명하거나 유명하지 않은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개척했더니 커졌네?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자기 집착에서 벗어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의 배경이 이방인,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주님에게 하신 말씀이 많은 메시지를 줍니다. 전할 메시지는 권리 포기라는 것 아닙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것이 내게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가는 그것이 영광이다. 이것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나, 저 같은 목사가 더 헬라화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것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대안을 전해야 하는데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지는 것이 영광이라고 하면 말은 살아서. 이것이 우리 아닙니까?




2. 권리 포기를 통한 열매 맺기를 추구하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 포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권리 포기란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최근에 바로 이 말씀을 그대로 구현해낸 지도자가 있죠?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일 세계가 찬사하는 글들이 쏟아지고 나오는데,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고 조롱당한 사람입니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에게 완전히 반전이 일어나서 세계가 이 사람을 칭찬합니다. 반전이 어디서 일어난 지 아시죠? 미국이 계속 대피하라고 권했다고 하잖아요. 단호하게 거절하고 한 말이 멋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탈출을 필요한 탈것이 아니라 탄약입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해외로 도망갔다. 말이 있을 때 수도에서 셀카봉을 들고 나 아직 여기 있는데.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가 이런 모습이구나. 미국 측의 탈출하라는 조언을 듣지 않고 진두지휘하는데 며칠이면 점령할 수 있다 하는데 안 이루어지잖아요. 모두 한마음으로 저항하니 이 말씀이 구현된 것 아닙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것이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앞에서 읽어드렸던 김구원 교수님의 글을 한 번 더 읽어드리고 싶어요.


세상은 자꾸 우리를 작게 만들려고 한다. 겨우 내 한 몸 먹게 살고, 내 한 가족 먹고살게 만드는 삶이 목표가 되도록 한다. 1인분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복음이 가르치는 포기와 복음이 가르치는 포기와 얻음의 역설을 절대로 실천할 수 없다.


정말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 말미암아. 제 마음에 항상 기준은 열매 맺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가 커지는 것이 하나님 관점에서 열매 맺는 일인가?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정의해달라고 하면 이렇게 정의할 것입니다. 권리 포기라는 희생과 열매 맺기 운동입니다. 요즘은 만나면 우시잖아요. 그렇게 우시면서 정말 발이 안 떨어진다고 하면서 수많은 메일을 보내주시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을 당연히 분당우리교회 등록 교인인데 이 교회를 지킬 권리가 있는데 낯설고 어색한 곳으로 왜 가야 하냐고요. 개인적으로 만나면 말씀드립니다. 힘드시면 안 가셔도 된다고. 권리 포기 아닙니까?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추구하는 것은 열매 맺기입니다. 나누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권리 포기를 위하여 29 교회, 다음 세대, 젊은 목회자들에게 용기가 되는 일이 되게 해주시고. 부족하지만 한 국교회를 위하여 밀매 맺는 결과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입니다.


지난주에 은퇴하신 연로하신 선교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20년을 열악한 해외에서 선교사역을 하시고 은퇴하시고 한국에 들어오셨는데 땅문서를 들고오셨습니다. 그분의 겸손한 표현으로 목사님 작은 땅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에 써주세요. 저는 항상 말립니다. 선교사님 제가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것 같습니다. 네가 평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해외에서 고생했으면 남은 인생 너를 위해 살아라. 그랬더니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제가 목사님 설교 듣다가 이거 내놔야겠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278억 정도 예산이 드는데 분당우리교회가 책임져야죠. 그것을 감당하는데 이것을 29 교회가 독립하면 분당우리교회에 값은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것. 분당우리교회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한국교회를 위하여 씨드 머니를 위해서 쓸 것이라는 표현을 듣고 집도 머신데 친히 오셔서 문서를 주고 가셨습니다.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되돌려드렸지만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권리를 포기해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이 된다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영광의 때가 왔다.


오늘 결론의 두 균형 이야기로 맺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 균형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6-27)


어느 글을 본다니 내 몸을 친다는 말은 격투기 용어라고 합니다. 사람을 때려눕히기 위해서 몸을 친다는 것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 자아를 격투기처럼 이길 수 없다. 우리 자아를 못 이기잖아요. 첫 번째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겪은 말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 딸 아이가 확진되어서 유리 방황했다고 웃으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지난날 딸 아이와 손잡아도 감염이 안되었던것은 한 주를 되돌아보니 하나님 없으면 설명할 수 없던 일이 있어서 뜨거웠잖아요. 그 후일담입니다. 주일에 새벽 5시 15분에 교회를 향해 가는데 호텔이 주차장이 열악해서 키를 맡기고 가면 기계식 주차장에 넣고, 몇 시까지 가면 직원이 빼주는 방식입니다. 5시 30분에 가니 연세가 드신 분이 빼주시는데 마음이 고맙더라고요. 평소에 안 하는 팁을 듬뿍 드렸습니다. 기분 좋게 교회 와서 예배 잘 드리고 집에 가려고 보니깐 차 옆을 긁어났어요. 확 배신감이 들잖아요. 팁까지 두둑하게 줬는데 남의 차를 긁어놓고. 머리로는 당연히 가서 말하고 보험도 호텔이 들었으니 수리해주는것이 정상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마음에 항변하고 저항할 힘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상한 것입니다. 그분에 대하여 괘씸한 생각도 안 들고, 내 권리 주장하면 나이 드신 분이 감점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이것이 오지랖이잖아요. 머리로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고, 직원이 차를 긁었으면 수리 부탁할 수 있는 것. 생각이 드는데 차 몰고 거기까지 가는 힘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분에게 이렇게 하라는 뜻도 아니고, 심각하게 차를 다 망가뜨린 것 아니에요. 긁어놨을 뿐입니다. 비록 조명도 침침하고, 냄새도 나고 열악한 그곳이지만 하나님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감격으로, 은혜를 받고 보니 내 권리를 주장할 의지력이 꺾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깯알았습니다. 격투기 하듯이 의지력으로는 자아를 꺾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는 것입니다. 은혜가 자아를 무기력하게 만들더라고요. 고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볼 때마다 은혜가 이기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제게는 감동입니다.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감동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 살겠다고 바둥바둥 거리는 자. 누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인가.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책에 다음같이 나옵니다.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 있다. 매일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생명과 평화를 얻을 수단이 없다.






03월 1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감탄과 경이로움을 회복하라

감탄과 경이로움을 회복하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 18:9-15)


최근에 나온 책중에 생각의 지도가 이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길은 없다.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마늗ㄹ어진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점점 열등해진다. 짜증을 내다보면 점점 더 짜증이 난다. 지금과는 다른 길을 만들고 시다면 지금까지 다니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정해 자주 다니면 된다.


무엇을 강조하는지 아시겠죠? 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묵상하다가 그 책 내용이 불쑥 떠올랐던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딱 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이런 반응은 남편 아브라함도 똑같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창 17:16-17)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 생각의 길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간에 접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참 위험한 상황이구나 생각하는 것은,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보니 심각한 증상이 보입니다.


첫째는 무기력증입니다. 국어사전에 어떤 일을 감당할 기운과 힘이 없음.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 모습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창 18:12 새번역)


제일 슬펐던 번역이 공동번역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창 18:12 공동번역)


무기력한 모습이 오늘 사라의 모습입니다. 29 예비 담임 목사님들에게 가끔식 부탁합니다. 청년들이 북적거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세 드신 어른들이 힘을 얻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나 교회를 위해서 할 게 없는데, 이런 생각을 갖지 않도록.


두 번째는 반복되는 부정적인 언어입니다. 그들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언어는 본에서 반복되는 것이 나는 늙었다. 나는 못한다. 이제 내 나이에 무슨 낙을 보랴? 언어가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부정적인 언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왜 위험하냐면, 사람 속에 맴도는 수 천 가지 생각 있는데 언어는 구체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깜빡이를 안치고 확 들어오면 저 혼자 독백으로 선언합니다. 살다 보면 저럴 수 있지. 아무도 없는데 왜 그렇게 말하느냐? 생각이 더 화가 나고 분노 쪽으로 흐를까 봐. 참 신기합니다. 바쁜가 보지. 너도 바쁠 때 안 그러냐? 그러면 상대방에대해 이해하는 생각이 늘어나는 것을 경헙니다. 그 사람하고 나란히 가는데 운전 똑바로해 하는 순간 화가 생겨나는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수도 있지 살다보면. 탁 내뱉고 나면 머릿속에서 이해하는 쪽으로 정리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지속해서 자기들의 모습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지속해서 부정적인 것은 자기를 세뇌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부정적인 쪽으로 길이 나서, 계속 무기력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냉소적이게 됩니다. 말씀에 은혜가 될수록 냉소적으로 됩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하나님인들 어떻게 하겠어. 하~. 굉장히 상대방이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참 놀라운 말씀으로 깨트리는 강력한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3-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말씀 속에는 이미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 길이 나버린 아브라함과 사라 생각에 대하여 너무 소중한 두 가지 권면의 말씀이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 너희 생각의 초점을 바꾸어라


방금 읽은 13절 14절을 주어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 18:13)


사라의 초점은 내가입니다.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계속 반복되는 초점이 자기 자신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지금 여러분 사실은, 사라의 관점으로 보면 다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 하나도 없습니다. 비관 되고 좌절되는 분 한 분이라도 있습니까? 다 근거가 있습니다. 마음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있습니다. 생각의 주어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결하는 입장에서 감기는 몇천 원 안 들고 금방 낫습니다. 그런데 암이라면 많은 힘이 듭니다. 주어가 바뀌는 순간 이건 아무도 못 고쳐 하는 것까지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민수기 13절에 가나안 정탐꾼이 같은 것을 보고 한쪽은 악평하고 한 쪽은 긍정적으로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 상황과 사물을 바라보는 주어가 우리 는입니다. 우리는 정말 메뚜기 같다. 참 비참하다. 참 초라하다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데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 14:7)


어떻게 이게 가능했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8)


자기에 집중하면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은 존재라는 비관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틈만 나면 내 안에 비실비실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틈만 나면 우울한 것이 인간입니다. 내 생각의 주어를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 섬기는 것도 머리가 복잡한데 가평우리마을은 가짜도 안나와요. 1만 성도 파송운동 때문에. 드림 센터 사회 환원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제 목회가 너무나 아름다운 목회가 되는 것이고 주어가 제가 되면 메뚜기가 됩니다.




2. 감탄과 경의로움을 회복하라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능하다는 경이롭게 여기다. 팔라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시편 71편에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시 71:17)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 3:5)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갖추어라. 거룩하라. 하시면서 왜 기이한 일을 하라 함께 기대감을 주십니까? 악한 이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감탄과 경이로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시 71:17)


내가 이제 늙어서,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인생의 서리가 내렸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팔을 펴서 나타내 보이신 그 능력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렵니다.(시 71:18 새번역)


똑같이 늙어서라는 표현, 나이 드신 시편 시인하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71편 시인은 무엇을 계속 드러냅니까? 젊은 시절 하나님 없이 설정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맛보게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후대에 전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여기 나이 들지 않는 분들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길로 가겠습니까? 시편 71편으로 가겠습니까? 참 젊은 시절 기이한 일들을 많이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잘 전달하겠습니다. 한국교회 어른들이 다음세대에 가슴벅참, 기이한 일을 못 전한 것 아닙니까? 일반 신문 칼럼에서 본 것입니다.


경이롭다 말은 타우마조인데 헬라 사람들에게 신적이다로 통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감탄을 자아내는 자연풍경, 건축물, 훌륭한 작품들 모든 대상에 신적이다라는 말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반성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모두 다 감탄과 경이로움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도 감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신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무기력증은 이 감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 첫날 털썩 주저앉으면서 눈물을 쏟았던 수많은 분들. 우리들의 문제는 그 감탄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딱 지난주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처음 시작하신 초신자 분이 있으십니다. 지역의 가까운 작은 교회로 옮기셨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말을 하시는데 말씀이 너무 좋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욕심이 많잖아요. 그 설교 나도 보고 은혜받읍시다. 해서 유튜브에 올리는지 내막을 잘 모르는데 설교 파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는데 어느 부분에서 은혜를 받았지 했습니다. 초신자가 정상인 것입니까? 제가 정상입니까? 꽤 많은 분의 증상입니다. 옆에 초신자는 가슴 벅차 눈물을 흘리는데 옆에서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1년만 지나봐라. 나처럼 된다.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경의가 됩니다. 그 책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때는 동화가 필요없었다. 어릴때는 온 세상이 동화인데. 아무 이야기로 충분했고 사는 것 자체로 충분했다.


어른이 돼서 감동이 없어져서 영화 보러 가고 뮤지컬 보러 가는 것 아닙니까?


7살 짜리 아이 토미는 용이 있는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흥분한다.


문을 열었는데 용이 있데요. 흥분되나요?

성인들은 로멘틱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아기들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로멘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행복에 겨워 못 견뎌 하고.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감수성이 없어 불쌍합니다. 우리 때는 여고생 시절 날아가는 새를 봐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마나 감성이 풍부했느냐고요. 우리 남자들보다 여성의 감성은 풍성합니다. 예전 10대의 감성은 많이 까먹으신 것 아닌가요? 사실 저도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어린 시절 저는 감성이 풍부한 소년이었습니다. 사운드오브 뮤직을 고등학교 때 봤는데 당시 감독을 1년 내내 가졌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테이프를 1년 내내 들었습니다. 우리 누나가 지금도 이야기합니다. 들으면서 상상하고. 어렸을 때 TV 많이 보는 것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이 없잖아요. 집은 5식구 복잡하게 사는 소년이라 할지라도 상상력이 풍부해서 전 세계를 날아다니는. 그게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절대 권력자가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자존감이 높으니깐 왕이 죽이려고 그래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했던 것처럼 무슨 낙으로 사냐. 없습니다. 별 하나만 봐도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지난 한 주간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집에 확진자가 생겼습니다. 확진자를 제공한 큰딸에게 한 주 내내 감사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저희 큰딸이라고 밝히는 게 둘째 딸에게 자꾸 너지 너지 해서 출처를 밝힙니다. 갑자기 목이 붓고 해서 검사를 했더니 양성이 나와서 확진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검사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고 짐 싸서 가출했습니다. 장장 토요일에 결혼식 주례가 있는데 결혼식 주례자가 확진이다. 되면, 일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설교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주제인데. 집을 나와서 방황하는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방황하는 한 주가 왜 행복했는지 아십니까? 지난주는 혼자 있으니 진짜 시간이 길더라고요. 많은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4번째 시간입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는데 신랑이 여기 서 있잖아요. 신랑 신부가 다 확진자라는 것입니다. 신부 아버님이 확진자였고, 신랑 동생이 확진자였습니다. 아찔하더라고요. 당시 확진자만 같이 있으면 2주 자가격리하던 시절 아닙니까? 1만 성도 파송운동 선포를 앞두고 PCR 검사를 받았습니다. 음성이 나왔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우리교회 청년들, 제가 파악한 청년들 다 자가격리에 들어갔습니다. 저에게 당국이 연락이 오기를 자가격리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대면한 저는 풀어주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4번 겪은 것, 마지막 4번이 지난주 우리 딸입니다. 지난주는 심각했습니다. 주일 저녁에 약간의 증상이 있을 때 저에게 와서 인생상담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애는 상황이 급하니깐 코앞에 침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데 그날마다 말이 잘 나와서 이야기하고 악수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애는 확진이 되었으니 저는 100% 확진 아닙니까? 그런데 PCR 검사했는데 저는 음성이 나왔습니다. 저녁에 시간이 많으니 하나님 이름 없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행복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족을 떠나있는데 굉장히 불편하더라고요. 내 집인데 들어가질 못합니다. 문고리에 도시락을 걸어둡니다. 도시락 찾아가서 교회 가서 혼자 먹습니다. 오후에 도시락을 가져다줍니다. 새 걸로 문고리에 걸어줍니다. 큰딸에게 감사한 것은 설교하면서 되돌아보니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경이로운 하나님을 경험하고 감격으로 설교하라고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셨습니다. 지난 선거 결과를 보면서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표차가 근소한 것은 위험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골백번도 이야기하지만 저는 여당 야당 내색하지 않은 것은 머릿속에 성도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절반은 기뻐하시겠지만, 절반이 경험할 우울함은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어차피 경이로움은 신적인 영역입니다. 인간 지도자가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어려워지고, 러시아는 저러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주어로 삼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다면 우리를 떠나지 않을 줄 믿습니다. 영화 보면 맨 마지막에 그 후 1년 뒤 나오잖아요. 오늘 본문을 다 설명해 드렸고, 그 후 1년 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1-6)


하나님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사라의 비웃음을 감격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이삭의 뜻이 웃음입니다. 정말 살맛 나지 않은 세상이다. 자영업자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비관적인 세상이라 답답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붇잡고, 그 비웃음을 환의로 바꾸실 줄을 맛보아 아실 줄 믿습니다. 너무 기쁨에 겨워 웃게 하시는 하나님. 지난 한 주 내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웃게 하신 하나님. 그 목사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 감격에 찬 시편 8편을 갖고 만든 찬양으로 부르겠습니다.






03월 0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감격으로 행하는 호의와 환대

감격으로 행하는 호의와 환대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18)




오늘 본문에서 굉장히 독특한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는 데요.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모습은 감추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창세기 18장 1절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 18:1-2)


사람 셋이 하나님과 천사라는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편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창 18: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아본 것처럼 번역되었지만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창 18:3 새번역)


나그네 손님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왜 당신의 모습을 감추었을까요? 성경에 이유가 나오지 않아 추측하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테스트가 아닐까.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지난주에 살펴본 창세기 17장을 되살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18년간의 침체기를 청산하고 언약 갱신으로 회복을 경험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말씀이 17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맨 마지막.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창 17:26)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감추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하나님의 시험 의도와 모습은. 이중수 목사님의 책에 보니깐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로 끝을 맺었고, 18장은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을 예시한 것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는 제일 먼저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테스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이민을 하였을 때 80년대 초 모든 게 다른데, 제일 인상적인 것이 약자를 대하는 미국사람들의 호의입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침에 미국 공장에서 청소하고 오후에 야간학교 다니던 때인데요. 제가 예전에 연식이 오래된 디젤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디젤이 추위에 약하잖아요. 시카고는 한번 추위가 불어닥치면 체감온도가 영하 40도가 내려갑니다. 보닛에 헌 옷으로 꽁꽁 싸매도 시동이 안 걸리는 것입니다. 제가 고속도로 1시간 걸리는 공장으로 가는데, 제가 안가면 사무실부터 쓰레기 치우는 것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발을 동동굴리는데, 어떤 미국사람이 오더라고요. 시동이 안 걸리느냐 물어보고, 점프 케이블로 자기 차에 시동 거는 거 도와주는데, 처음 이민 온 입장에 있겠습니까? 없다고 했습니다. 회사 출근하던 사람이 다시 돌아가 자기 집으로 가 점프 케이블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두 개를 연결해서 시동을 걸어주셨는데, 이 분이 적어도 20~30분 소모했습니다. 시동 걸어주고 유유히 멋있게 사라졌어요. 대단한 일로 생각 안 하고. 만 7년 이민생활 내내 경험했던 것이 약자에 대한 환대. 참 독특했는데,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왜 그때가 생각났느냐면, 미국 사람들은 약자에게 친절하다. 이것이 기독교 문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이해가 되는데, 안 믿는 사람들도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약자에게 친절한 것이 기독교 문화라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설명을 방금 읽어드렸잖아요. 최태영 교수님께서 쓴 책을 보니깐, 인간의 성숙이란 자기중심의 삶에서 타자 중심의 삶으로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봅니다. 어떤 종교학자는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차이가 여기에서 옵니다. 고등종교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가 지향하는 인생은 남을 위하고 세상을 위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자기의 삶에서 남을 위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정리되시겠습니까? 할례를 통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를 감추시고 인간의 모습. 더운 지역 날씨의 지친 나그네의 모습으로 임한 것. 얘가 제대로 은혜받았나? 이것이 최태영 교수님의 설명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테스트하는 궁극적인 뚜렷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지향하는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데 있는 것이 복의 통로가 되는 것 아닙니까? 조금도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복의 통로가 되겠습니까? 이런 의도에서 테스트하시는데 아브라함은 100점 만점에 100점입니다.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였습니다. 더위에 지친 세 나그네를 얼마나 섬겼는지 모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창 18:1-5)


당신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 다음 지나가소서 환대를 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창 18:6)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8)


처음에 아브라함의 오지랖이라고 제목을 지었다가 오지랖이 부정적인 단어여서 긍정적인 오지랖 했다가 오지랖 단어를 뺏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테스트하러 오셨는데, 제가 발견한 중요한 사항은, 그 테스트의 범위가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17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았다면, 어마어마한 테스트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지나가는 나그네로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신 10:42)


누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못 떠다 주느냐고요. 그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웅장하시고 스케일이 크시고, 너무 감동되는데, 스케일이 큰 사람이 디테일이 약합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 큰 교회 목회자. 그 목사님은 스케일이 진짜 큽니다. 이 분의 문제는 지나가다가 만나요. 요즘 뭐하냐. 내가 장학금 줄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도 약속을 많이 하셔서. 툭툭 약속하시는데 안 지키는 것이 많다는 것이 오래전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들어줄게, 하시고 다 잊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섬세하신지. 제가 드림 센터로 가는데, 우리 교회로 부임 안 교육전도사님이 땀이 뻘뻘 흘립니다. 물을 주는 것. 뭐가 어렵나 고요. 하나님은 생수 한 병 준 것도 기억하시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스케일으로 뻥뻥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약속 지키는 것 하나부터. 이런 맥락에서 디모데전서 3장을 심각하게 읽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제가 충격이 되는 것은 저 같은 목사님에게 중요한 건, 설교라고 합니다. 교회 선택해서 설교 잘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딤전 3장에 가르치기를 잘하며가 맨 꼴찌로 나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이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앞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설교를 잘하느냐가 아니라, 아무 일 같지 않은 사소한 것에 마음을 잘 쓰느냐? 나그네가 땀을 뻘뻘 흘릴 때 내가 무엇으로 저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강단에서만 저를 보시지만, 저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찔림을 많이 받습니다. 교회가 크니깐 어떻게 모든 성도님을 만날 수 있겠냐하고 아무도 안 만나면 저는 좋은 목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하려는 몸부림이 있는 목사를 좋은 목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변화를 받고, 해외 선교지로 달려나가고, 엄청난 결단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아 왜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다가갔느냐고요. 여러분의 신앙이 작년보다 성장했습니까? 여러분의 회사에서, 가정에서 대하는 것이 부드러워지셨나요?


작가가 파리의 서점에서 발견한 문구를 저도 옮겨 적었습니다.


낮선 사람을 환대하라. 그는 어쩌면 변장한 천사일수도 있으니


너무나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나라 분들 좋아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환대를 누릴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릅니다. 내가 호의를 갖고 문을 열어주는데 왜 저 쪽문 열고 들어가느냐고요. 안 가고 문을 붙들어주고 있는데. 쑥스러워서 그러겠죠. 참 메마름이 환대를 베풀 줄도, 받을 줄도 모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고 뒷사람이 다치게 하지 말고 문 열고 기다려주세요. 은혜받은 사람의 태도는 어마어마한 것 아닙니다. 삶 속에서 작은 친절을 베풀고.


아브라함이 바로 하나님의 이 테스트에 통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죠. 아브라함은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낯선 나그네에게 극진한 환대와 대접을 베풀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려면 17장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17장은 자격 상실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이라는 첩을 통해서 자식을 낳는 죄를 저질렀잖아요. 하나님을 불신한 죄 아닙니까? 13년 동안 그 사실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이삭을 통한 역사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언약, 계약이 파기된 것 아닙니까? 자격 상실한 아브라함이었는데 17장에서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호의를 베풀어주시잖아요.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6)


아브라함에게 어떤 감격이 있습니까? 이 자격없는 나. 13년을 허송세월한 나를 하나님께서 상상을 초월하는 호의로 다가오셔서, 상상을 초월한 환대로 베풀어주신 뜨거운 감격. 17장에서의 감격이 18장에서 제가 아브라함의 오지랖이라고 적을 정도로 과도하게 베푸는 원동력이 되었다가 제가 깨달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거든요. 신학교 입학을 하고 1년 내내 울었습니다. 말씀을 교수님이 잘 전할 때도 눈물이 났지만, 길가면서도 눈물이 났습니다. 점심 먹으러 우르르 가는데 거기에 내가 섞여 가는 것이 눈물이 납니다. 자격없는 나를 어떻게 귀한 반열에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는가. 새벽기도를 가면서 전도사님이 우르르 새벽기도 실로 가는 행렬에 있다는 것 만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을 1년 내내 경험했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18장에 아브라함의 환대가 무엇인지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감격이 넘친 신학교 1학년 시절 온 세상이 아름다웠습니다. 창고에 제 양복 물건들을 넣었더니 여름 지나니 곰팡이가 슬었던. 그러나 내 생에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남루한 아저씨에게 축복해주고 싶었던 시절. 길가의 돌멩이가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17장에서 자기를 환대해주시는, 13년 자격을 잃어버린.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의 감격이 18장에서 아브라함의 오지랖을 만든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진행과정에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침에 직원의 보고를 들어보니 지금까지 헌금이 59억 원이나 들어왔습니다. 특이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교회 안 다니시는 분들의 헌금이 많습니다. 지방에 있으신 분은 설교를 들으시고 상가 건물을 바치는 물건 해주셨습니다. 왜 본인이 출석하시는 교회가 아닌데 이런 어마어마한 헌금을 해주시는가. 저 알아요. 이 분은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100% 공통점이 이름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이 헌금을 해주셔서 감사하면서도 마음이 아픕니다. 지난주에 어떤 작은 교회 목사님, 제 후배입니다. 오셨는데, 부탁의 요지가 너무 마음에 아픕니다. 우리 작은 교회 모두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29 교회 중 한 교회가 근처로 올까봐. 너무 위축될 것 같다고. 저를 찾아오신 목사님도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작해서 자리 잡히나 하다가 코로나 19로 힘들어진 상황입니다. 목사님, 우리 작은 교회 목사들 모두 1만 성도 파송운동 너무 지지하는데 그런데도 29 교회 중 하나가 우리 교회 근처로 올까 봐 우리는 불안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근에 있는 성도들 절대로 등록을 안 받는 것. 약속하겠다. 설득해서 과격하게 인근 교회 성도님들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썼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 시간 나누고 가는데 뭘 하나 꺼내는데 100만 원이 든 봉투를 주면서 29 교회를 위해 써 달라고 했습니다. 29 교회 중에 자기 교회 근처로 올까 봐 긴장되어서 도와달라고 한 그 사람이 29 교회를 위하여 큰 헌금을 하는 모순은 어디서 나온 거냐고요. 분당 우리 교회가 잘 되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창세기 17장에서의 하나님의 환대, 호의,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 헌금을 받아놓고도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긴장하고 있다고 하는 주변 작은 교회에 부담 주는 일을 절대하면 안되지. 그래서 29 교회 주소를 일부러 오픈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안이 마련되지 전에는 오픈하지 말자.




1.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환대를 누리기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 19:34)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아시지만, 다윗은 늘 쫓기는 신세를 살지 않았습니까? 죽이려고 추적하는 원수 사울 앞에서 끝까지 위축되지 않던 버티는 힘을 어디서 공급받았는지 아십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저는 이 말씀 앞에 요즘에, 4월 첫 주가 다가오고 자꾸 성도님들이 우신다는 보고를 받아요. 남자 성도님을 드림 센터 앞에서 만났는데 어색해하셔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입만 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지나온 2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데, 개척하고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환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


개척하고 7년 차 되니깐 안 그렇다 하지만 지쳐있었던 때 같습니다. 1년간 안식년 허락을 받고 LA 플로 신학대학교에 잠깐 공부하러 갔었는데 하나님께서 환대의 시간이었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 성도님들에게 대접을 받지 않는데 남가주 사랑의교회에서 잠깐 새벽 집회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호의와 환대가 부어지는데 LA 도착하는 첫날부터 차량을 구하는 과정부터 상상을 초월합니다. 너무 하나님 앞에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7년, 8년 수고를 알고 계시구나. 금방 회복이 되었습니다. 12월 말까지 하기로 했는데 8월 말에 돌아왔습니다. 다 회복되었는데 뭐하러 있느냐고. 그 상황 상황 속에서 저를 20년간 환대한 은혜가 얼마나 감격이 되는지 모릅니다. 1만 성도 파송 운동을 앞두고 많이 힘들어하시는 성도님 중에 하나님의 환대를 많이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제가 참 자존감이 낮은가 봐요. 자꾸 자신감을 잃어가고, 그럴 때마다 주변에 호의를 베푸시는 성도님들, 장로님들을 통해서 담대한 목회자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환대를 누리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받은 환대 되갚기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6)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17장에서 아브라함이 놀라운 환대를 받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감추시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온 것이 이것입니다. 제가 너무 고마운 성도님들, 이렇게 부족한 목사여도 격려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어떻게 해서든 잘해주고 싶어하시는 모든 성도님의 수고를 받아서,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하면 복음이 아닙니다. 미자립 교회 목사님을 만나면 담은 얼만 라도 봉투에 담아서 식사하시라고. 작은 일들이 이것이 되갚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다음 주에 이어서 하고, 1만 성도 파송운동으로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시고, 남기로 하신 분들이 마음에 죄책감을 느끼신다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셋 중에 하나.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주셨잖아요. 29 교회, 동네 작은 교회, 분당 우리 교회 남아도 좋습니다. 가시든, 남으시든 지난 세월 보내주신 환대. 이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듣거든요. 말씀이 좋아서 은혜받은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데 눈물을 주시는 하나님. 회복을 통하여 환대를 누리시는 여러분, 남으셔도 가셔도 좋은데 이 은혜를 되값는 은혜로 남으시고, 남는 것 죄책감 갖으시면 안 됩니다. 순장 대부분 간 데잖아요. 주일학교 교사는 전부다 간 데잖아요. 남아도 각오를 하고. 4월 첫째 주가 되면 또 다른 과업을 줍니다. 11 교회, 조끔만 밀어주면 잘 될 교회를 밀어줄 것입니다. 맨날 은혜를 공급받는데 어떻게 중단하겠느냐고요. 환대 많이 누리세요. 그리고 거기만 머물러 계시지 마시고 18장으로 건너오셔서. 어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어떤 작은 한 사람, 하나님이 변장하고 찾아온 천사인 줄 누가 압니까?








02월


02월 27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창 17:22-27)


제가 설교시간에 간혹 인용하는 빅터 프랭클 박사님을 아실 텐데요. 2차 세계대전 나치 포로수용소에 끌려가서 죽음을 방불케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입지적인 인물 아닙니까? 그가 한 이 한마디 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달려있다.


세 가지 개념이 나오는데, 자극, 반응, 공간입니다. 제가 어느 칼럼에서 이 세 가지 개념을 잘 설명한 글을 읽은 데요. 맨 처음 나오는 자극에 대해서 이렇게 예를 듭니다.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합니다. 옆 차선에 있는 차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끼어드는 것입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사고가 날뻔했습니다. 이것이 자극입니다. 화가 나서 반응을 합니다. 박 경적을 올리고, 성격이 진짜 급하고 화가 난 사람은 차를 바짝 옆에 대고 운전을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욕을 하거나 보복 운전하는 것이 자극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빅터 프랭클 박사가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주장하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극과 반응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갖지 않고 바로 행동하면 하루종일 이 사람의 마음에 평환느 없어지는 것입니다. 빅터프랭클 박사가 주장하는 것은 외부의 어떤 자극이 왔을 때 즉시 반응하지 않고 생각하는 시간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칼럼에서 예를 들기를 대기업 회장은 직원이 실수하면 바로 불러드리지 않고 30초짜리 모래시계가 있다고합니다. 30초가 지날때까지 부를까 말까, 야단의 강도는 어느 정도로 할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게임 중독에 빠진 어머니는 10까지 센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들이 전부 빅터 프랭클 박사가 말하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생각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제가 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던데요. 이 원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통합니다. 얼마나 복잡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상한 마음이 생기기 쉬운데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자극과 반응 사이에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전날에 어떤 일을 만나고 분노가 생기고, 집에 왔는데도 안 풀리면 그냥 저는 잠을 잡니다. 제가 풀려고 해봐야 풀리지 않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4시간 5시간 하나님께 답을 구하면 거의 대부분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이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저는 젊은 목사님들에게, 성도님들에게 종종 권면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중에 생각하는 시간. 저는 쿠션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불이 나서 소방대원이 와서, 위에서 뛰어내리기에 바닥에 공기쿠션을 설치하잖아요. 뛰어내려도 완충이 되어서 다치지 않잖아요.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에 쿠션이 있어야 치명적으로 다치는 일은 없거든요. 저는 목회자니깐, 7시에 잘 때도 있고, 저녁 먹고 바로 잘 때도 있고, 직장생활 다니시면 못하시잖아요. 30분만 하세요.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비추어 조명하고.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자극과 반응에 생각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영적으로도 유효합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


아브라함 입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건강한 자극을 받은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조언을 아브라함이 알았다면 자극 다음에 생각을 해야 하는데, 바로 불신을 갖고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창 17:17)


웃는게 비웃는 거거든요. 아브라함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까? 이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을 안 하고 이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딱 잘라버리는 것입니까? 대답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이 확신을 하는 생각이 있거든요. 나는 나이가 99세가 되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이고 뭐고 불가능하다. 못을 박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저를 상대해서 대화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생각이 맞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범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에 놓고. 어리석은 말을 하게 됩니다. 한 주 내내 끼고 다닌 책이 있는 데요.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너무 많은 메시지를 책의 제목에 함축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작은 상자 속에 갇히신 분 아닌가?


포인트가 너무 와 닿더라고요. 이 구호 같은 몇 가지 글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몰라도 너무 모른다. 목사여도 이 말씀이 너무 맞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발견하라. 참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을 보고 하는 말 갖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고,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모독하는 말을 던진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한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에 어떤 영향을 미친 지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하나님은 엄청난 스케일을 갖고 아브라함에게 온 것 아닙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아브라함을 대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이렇게 작은 생각의 통에 가두니깐 눈에 가둔 이스마엘이나 잘해주시지.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이런 말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당신 인생의 크기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스마엘이나 잘해주시지. 아브라함의 한계가 무려 13년 동안 방황하게 하는 나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한국교회의 성도님들에게 구현되기를 원합니다. 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자기 연민에 빠질까 봐 가장 두렵고, 사람들을 대할 때, 성도님들을 대할 때 그야 말로 좁은 밴댕이 속이라고 하나요? 좁은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까 봐 걱정됩니다. 그저 이스마엘이나 잘해주지. 성경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약속합니다. 믿음 좋은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크신 하나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마다 용서하면 되는 일을 갖고. 페이스북 안 하잖아요. 들어가면 복잡해요. 설명하면 오해하고. 어떻게 크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어떻게 좁아터질 수 있는가? 정말 이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너무 좁은 생각이 난무하고 있느냐고요. 당신의 인생의 크기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면 내 생각의 좁은 상자에 하나님을 구겨 넣은 상태 아닙니까?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을 멋대로 재단하는 것. 좁아터진 나를 만드는 원흉이 된다는 것.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오는데, 정말 기도합니다. 교회는 1번 찍어라, 2번 찍어라, 13번 찍어라. 이것이 강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원리를 말합니다. 5년이나 나라를 걸머질 지도자라면 하나님, 정말 역사의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지도자가 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까지 어우를 수 있는.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도 오늘 성도님들이 먹어야 할 양식도 준비하고, 5년 후, 10년 후도 준비하는데, 한 나라의 지도자가 큰 스케일을 갖고. 코로나 19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이 번쩍 뜨이는 대안이 마련되고. 꿈이 없어 신음하는 젊은이들이 불쌍합니다.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지도자. 정말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1번이다. 그 사람이 2번이다. 그 사람이 4번이다. ... 강단에서 내 생각에는 누구를 지지한다.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응답받아야 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위한 기도 하고 있는데 정말 기도하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가 인식하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는 주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크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만났기에 허송세월을 지나고 회복과 치유를 경험합니다. 가장 큰 포인트를 잡은 것이 아브라함의 변화. 허송세월한 아브라함을 단번에 회복시킨 은혜가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동력을 두 가지로 말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교정해 주심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7-18)


이렇게 좁은 생각과 잘못된 생각을 갖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제가 방송실에 아니라 라는 말에 강조해달라고 했습니다. 모든 목회자는 두 가지입니다. 공통점과 차이점은, 모든 목회자는 실수합니다. 모든 목회자는 성도님들을 혼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어떤 목사님은 엉뚱한 길로 갈 때마다 교정해주시는 목회자가 있고, 이것을 경험 못 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권사님 두 종류입니다. 모든 권사님은 잘못 생각할 수 있고, 잘못된 자리에 범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권사님은 이러시면 안 되는데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왔습니다. 목사님 어제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 와서 하나님이 아니다. 교정하심의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바로 지적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잘못된 생각에 빠진 아브라함의 생각을 교정하신 아브라함, 생각을 교정해주실 줄 믿습니다. 자녀교육 30년을 하면서 잘못한 것은 바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교정해주시길 더 기도해얐어야하는데.


실수하지 않으려면 인생이 경직됩니다. 서로 서로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사도바울에 대하여 교정해주시는 어른이 필요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우리의 비극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잘못된 특징이 모든 권위를 죽는 것. 교정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고,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인간 지도자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이 바르게 행하게 하고, 교정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데요. 1월 1일에 창세기 1장 읽다가 마신 분이 있잖아요.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3월이 왔습니다. 성경 한 장 안 읽은 분들을 위하여 모세 5경 전체를 10분 만에 정리한 강의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딱 10분 만에 지난 두 달 동안 성경 읽다가 중단한 모든 게 갈무리가 되어서 모세 5경 전체를 정리해서 놀라운 사면을 선포합니다. 10분 영상을 보면 읽은 것으로 쳐 드리겠습니다. 홈페이지 오면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가 무엇인지 영상을 올렸습니다. 성경 읽기 표, 필사 노트 다 홈페이지에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리딩 지저스 올렸습니다. 여기 초신자가 계시잖아요. 성경 하루에 두장 석 장 못 읽습니다. 다 좋습니다. 다 한 장 읽으세요. 이 말씀을 통해 교정해주시는 하나님을 대할 것 아닙니까? 제 아내와 저가. 시간이 갈수록 더 사랑하고, 깊이 이해하는 관계가 된 진짜 비결이 있다면 말씀입니다. 새벽마다 주님 앞에 말씀으로 대면하면 항상 내리는 결론은 아내에게 무례하게 대하면 안된다. 깊이 사랑해야 한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도 성급했던 많은 것을 지적해주십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습니다.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정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핵심 구절을 한 절씩 올려드리고 있으니깐. 이것이 아브라함이 누렸던 첫 번째 은혜입니다.




2. 깨달은 즉시 행동에 옮김


아브라함의 너무 귀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창 17:22-23)


On that very day (창 17:27)


very는 바로, 즉시를 뜻하는 형용사 아닙니까? 성경이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순종했다는 것도 알려주지만, 즉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읽고 있는 책 중에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라. 이 제목의 책이 있는데 책을 펼치니깐 맨 앞장에서 나폴레옹이 한 말을 인용합니다.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행동할 때가 오면 생각을 멈추고 뛰어들어라(나폴레옹)


행동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지라도, 행동없는 행복이란 없다. (윌리엄 제임스)


제가 설교 제목을 이렇게 잡을 뻔했습니다. ‘지금 당장 행동하는 힘’ 구약의 두 대조적인 인물이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성적인 범죄를 범하고도,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잘못을 지적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고꾸라진 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주께서는 겸손하게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시 51:17 현대인의 성경)


대조적인 인물 삼손.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7)


여러분은 다윗 유형입니까? 삼송 유형입니까?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 다윗처럼 주께서는 겸손하게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시고.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저는 외도를 한 번도 안 했지만 끊는 게 힘들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망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극단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즉시. 오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피부로 느끼는데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현이 멕스 모케이도 미국 목회자입니다. 이 목사님 설교가 오늘 결론 마무리 같습니다. 너무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대로 여러분에게 인용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문제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너무 작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인지하고 있으십니까? 산을 만드신 분의 마음을 생각하세요.


그다음 너무 와 닿아서 방송팀에게 자막으로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엑 폭풍이 얼마나 큰지를 말씀드리지 말고 폭풍에게 여러분의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세요.


하나님 앞에 문제가 너무 힘들다고 말해야 하지만 문제에 선포하세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여러분의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를 말씀하세요.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 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


인간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 내 문제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의 크기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당신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발견하라. 참 하나님을 알아야 인생의 목적도 알 수 있다.


크신 하나님을 인정해드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02월 2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듣고 배우고 행하게 하라

듣고 배우고 행하게 하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15-21)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이런 제목의 책이 있는 데요. 세계적인 경영 사상가가 말씀하신 찰스 헨리가 쓴 책입니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저자가 연세가 88세가 되었을 때 손자, 손녀들에게 쓴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추천사에 보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살았는가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해답이 될 것이다. 88세의 할아버지가 살면서 얻은 경험과 삶의 지혜를 손자, 손녀를 위해 쓴 책이라는 것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른들의 삶의 지혜를 귀하게 여기고 후손이 삶의 지혜로 받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형섭 교수님께서 김형섭의 인생 문답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일반인들 20대에서 60대분들이 많은 분이 질문을 보냈는데 31가지로 질문을 추려서 질문을 답으로 묶어서 낸 책입니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돈은 얼마만큼 가져야 행복할까요? 인격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103세까지 산 사람이기에 답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암 투병으로 죽음을 앞에 둔 스승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전달한다. 귀한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 세대, 손자 손녀세대로 지혜가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윗대 어른들의 신앙과 지식과 사상과 철학의 자산들이 그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것이 부럽고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을 접하다가 저의 중학교 시절 교회 선생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30~40명 데려다 놓고 특강을 하였습니다. 달느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하나 기억납니다. 선생님 뭔지 아니 먼저 선 날 생입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먼저 경험한 내용을 전하는 것이 선생이야. 이것이 참 맞다고 생각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시겠죠? 먼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어린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역할.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은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사님과 장로님 입장에서 당당하게 전할 많은 진리가 있어야 어른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은 신앙 전수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게 메시지가 담겨있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 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아들 대로 전수에서 전수가 일어나는 아름다운 흐름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자꾸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개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흐름을 보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블하마 후손들은 언약의 혜택을 맺는 수혜자로 묘사하였는데 19절에 언약이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기에 말도 안 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흐르는 강물에 돛단배 같습니다. 흐름따라 흘러가는데 뭐가 힘드냐고요. 윗대 어른들의 놀라운 수혜자입니다. 동시에 제가 어떻게 됐습니까? 나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창 25:11)


예배하는 가정에 이런 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역할이 다 끝났을 자녀들이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느 후보가 공략 많이 하는 후보도 눈여겨봐야겠지만 다음 세대에 누가 유익할까? 우리 살 만큼 살았잖아요. 좋은 대통령이 선출되어 우리 다음 세대가 복을 받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원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말씀을 준비하는데 너무 무거운 글을 슬쩍 보았습니다. 가출 청소년이 있는데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집에서 가출해서 아이들이 당장 가출하면 잘 데가 없으니깐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내가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도와주실 분 없습니까? 이런 요청을 올리자마자 악한 남성 어른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어 성매매 쪽으로 유인하고 악한 쪽으로 유혹한다는 기사를 보면서 제가 영적으로 묵상하다 보니 이 시대의 신앙교육이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시간 지나면 주님 앞에 들어오는데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바로 그 자리에 우는 사자와 같이 기회를 노리는 것이 아이들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당대뿐만 아니라 아들 대. 아들의 아들 대.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예수 믿는 우리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여러분의 자녀 대가 자녀의 자녀까지 복을 받기를 간절히 추구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끝나면 분당우리교회가 모든 성도님이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은 다음 세대입니다. 다음 세대로 복을 흘려보내는, 연구소가 이렇게도 의논하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꼭 해야 할 신앙교육 두 가지입니다.




1.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Doing)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 (창 18:19)


아브라함에게 주신 숙제가 이것입니다. 오늘 이런저런 은혜로 예수 믿게 되고 이 자리에 온 여러분에게 숙제가 있습니다. 모든 복의 통로가 되셔서 자녀들에게 가르쳐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창 18:19)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숙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신 31:10-12)


듣고, 배우고, 행하게하라. 우리에게 주신 숙제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제 3월부터 분당우리교회에서 독특한 반 모임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교역자들과 제가 걱정이 많았습니다. 원래 12월 말에 하려고 하니깐 코로나 19로 3달을 연기했지 않습니까? 4월 첫주에 D데이를 잡는데 2월 말 끝나고 4월에 시작하니깐 한 달의 공백이 있습니다. 한 달을 위해서 반을 새로 하긴 어렵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십니다. 3월 한 달 엄마·아빠가 자기 아이의 반 담임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모이는 경우가 있는데 반 담임을 맡듯이 엄마 아빠를 위한 주일학교 교육을 영상으로 바로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일일 주일학교 교사가 되겠다. 우리 주일학교 교사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느껴보시고. 대청 교구 교역자들에게도 고맙게 생각하는데 1달 과도기 기간 성경 익힘을 만들었습니다. 표지를 초등학교 국어책처럼 만들었습니다. 핵심 장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 31:13)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읽기 대대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싶습니다. 설교 제목을 어디서 따왔다고합니까? 말씀을 듣고, 배우고, 배운대로 행하게 하는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전수된다는것입니다. 교회에서 수년동안 심혈을 기울였지않습니까? 커피 한잔 덜 마시더라도 구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엄마가, 아빠가 성경적인 성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인데, 엄청난것을 가르칠 수 있지만 성경적인 교육을 가정으로 끌고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니 말도 안되는 타락한 영상을 봐서 잘못되고 외곡된 성을 배우는것 아닙니까? 미국이 유럽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성 교육을 가정으로 끌고와야합니다. 성경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선물로주신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르쳐야합니다. 지난 1월달에 이진아 전도사님을 강사로 초청해서 다음세대를 위한 성교육 세미나를 갖었는데 너무 감사했습니다. 강의도 주옥같고,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온라인으로 하는 좋은 점이 무제한으로 하니깐 괭장히 많은 부모님들이 오셨는데 축도가 마치면 20분으로 축약해서 이진아 전도사님의 강의를 올릴것입니다. 강사님이 허락해주셔서 홈페이지에 강의를 오픈하였습니다. 자녀들과 대화하고, 자녀들과 토론해야합니다. 마땅히 해야할일을 잘 가르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이진아 전도사님이 강의중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식모입니까?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것, 성경적 세계관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느낌은 확 와 닿잖아요. 우리가 부모입니까? 가사도우미입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관에 대하여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어릴 때 해야 합니다. 제가 doing 쓴 것입니다.




2. 약속의 주체인 것을 알도록 가르치라(Being)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아버지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내 하니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언약을 맺어주셨다는 것. 1대 왕 사울이 타락하고 2대 왕으로 다윗이 등극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다윗을 2대 왕으로 기름 부습니다. 아버지조차도 애는 아니야 하는 막내였는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읍니다. 오랜 세월 훈련 기간이 있잖아요. 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는데 Doing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데 자기 존재 Being의 문제도 큽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벌떡벌떡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갖는 존재의식이 빕니다. 초라한 나였지만 하나님은 나를 인정해주셨고 2대 왕으로 점지해주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점지한 왕이 될 사람이다.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게 한. 29 예비 담임목사님들 엄청나게 힘듭니다. 담임목사가 되어야 하니깐, 부교역자에서는 할 수 없던, 그분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하나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점에서 저는 정말 좋은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금식 기도하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에게 계속,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신 시골 어머니였지만 저에게는 교육학 박사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린 저에게 어머니께서 목사가 되라고. 저는 안 한다고 하였는데, 사춘기 내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춘기에는 짜증도 많은데 짜증 내면 훌륭한 목사님이 되실 분이 그러면 안 되는데, 공부 안하고 텔레비전만 보면 요새 목사님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종종 이런 말씀을 하세요. 네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목회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고. 제 사춘기 시절 계속 들리는 말씀인데,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최근에 제대한 아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자꾸 제가 엄하게 하니깐 불만도 있고 하니깐 저를 놀리려고 했는지, 아빠는 뽀뽀를 몇 살에 했어요? 31살이었던 거 했더니 에이 연애도 안 해보셨어요? 하니깐 많이 했지 내가 인기가 많았는데. 어떻게 31살에 했는지. 왜 그런 게 늦었는지 아니? 대학교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하는 대화가 이렇습니다. 자매님 깜찍하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다가 그런데 뽀뽀하실래요? 이런 생각이 안 들어. 젊은 세대는 목사님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만난 지 첫날 어디 뭐 호텔을 하고 이런 악한 소설 같은 것이 난무하는 시대이지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육체적인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에 두 주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세 아이가 같이 모여서 이찬수 목사님 아들딸로 사는 것 힘든지 아십니까? 하다가 내가 너희를 위해서 미니 특강을 준비할 테니 그것이 소중한 이유 4가지 하겠다고 하고 다시 모여서 특강을 했습니다. 근래에 가장 적은 세 명의 성도를 앞두고 특강을 했습니다. 여당후보 야당후보가 곤욕을 치르는 것이 무엇이니? 검찰총장 시절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것 아니니?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에 이만큼 이 잡듯이 뒤져내는 것과 같아. 이찬수 목사님 아들딸로 사는 것이 불편했다면 그만큼 귀하게 보신다는 뜻이야. 삼손이 가졌던 비극이 이것 아닙니까? 놀라운 신분의식과 괴력을 부어주셨는데 삼손은 신분 의식을 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드릴라 저질 여자 이후는 이후 문제이고, 잘못된 여자에게 기웃거리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삼손과 대조적인 인물이 다니엘입니다.비극적인 시대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신분의식입니다. 나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이분들과 섞이지 않을.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모든 초점을 다음 세대에게 맞추기를 원합니다. 자기 존재가 하나님이 구별해주신 특별한 존재 의식을 갖게 하려면 교화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부끄러운 고백을 했잖아요. 대학교 다닌 시절 돈 훔친 이야기를 수십만 명 앞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런 거 한번 고백을 하면 며칠 몸살을 앓는다. 너무 창피해서. 이렇게 스스로가 고발하는지 아느냐? 다시는 부끄러운 고백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긍지가 되도록 해주자고요. 목사인 저도 노력해야합니다. 세상과 차별된 거룩한 어른으로 자리매김해야 자녀 세대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것 안입니까? 교회 다니는 것 창피해서 못 다니겠다고.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라. 이런 제목의 책이 있는 데요. 책에서 자극적인 표현이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것이 기억이 납니다.


주둥이라고 가르치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모든 동물은 몸으로 가르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목사 아들딸이 얼마나 귀한지 아냐? 백 전 가르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거룩한 사람으로 거룩한 행실로, 돈에 찌들지 않고, 초라한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신앙인으로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때 자녀드에게 영향을 미치리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가문의 야곱이지만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창 27:20)


고작 이런 고백밖에 못 합니까? 내 하나님 아닙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들지 못하고 잔꾀로 살아가서 아버지의 하나님밖에 소리치지 못하였지만 자기 인생의 말년에 극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 48:15)


우리는 자녀교육 잘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슴 아픈 현실이라도 하나님께서 다루고 계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루어주셨거든요. 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해주시는 그 날을 사모하면서 기대하면서 기다리면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님의 세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2월 1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아직 기회 있을 때 잡아라

아직 기회 있을 때 잡아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온 아브라함을 묵상하다가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싱어게인에서 나온 가수가 자기는 러닝머신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계속 달리니깐 앞으로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제자리였다고 합니다. 싱어게인이라는 오디션 프로를 검색해보니 한 번 더 기회가 필요한 가수들이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돕는 리부팅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성격을 아고 가수가 나는 러닝머신 같은 사람이다. 앞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제자리다. 이 말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가수를 향해 최선을 다해 갔는데 제자리였다. 그 말 아닙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다가 왜 러닝머신이 떠올랐느냐면 아브라함이 딱 그 상황입니다. 기록거리가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인생이 끝나지 않는. 내 인생은 러닝머신 위의 인생이었다. 이것이 두려운 이야기 아닙니까?


또 하나는 예전에 소개했지만, 박하사탕 영화의 첫 장면. 주인공의 절규가 제 머리에서 한 주 내내 머물렀습니다. 20년 만에 야유회에 참석해서 난장판을 만듭니다. 고가 철길 위에 올라가서 달려오는 기차를 보면서 막 절규하며 나 다시 돌아갈래 하며 자살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인데요. 이 영화가 타임리프 기법으로 비참하게 인생을 끝내는 것으로 자살하기 바로 4일 전으로 주인공의 못브을 설명하고, 좀 있다가 5년 전의 모습을 추적하며 영화의 마지막 모습은 자살한 주인공이 너무 해맑고 청순한 대학생 시절. 야유회에서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는 게 저에게 엄청 여운이 남았습니다. 누가 인생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이 끝나리라고 예측을 했겠느냐고요. 주인공이 다시 돌아갈래하고 인생을 끝내는 것을 보면서 타임리프 기법이 묘하더라고요. 죽기 4일 전에도 기회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5년 전에도, 그 이전에도. 엉뚱한 길로 들어가지 않는 그 길에서 돌아설 수 있었을 텐데. 못 돌아가고 인생을 비극으로 끝낸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하고 영화의 주인공하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생의 궤도를 이탈한 것 아닙니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는 엉뚱한 길로 가고 무려 13년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 그것이 아브라함 아닙니까? 이것이 공통점인데, 지난주 내내 비극의 주인공의 막 절규하다가 기차에 치여 죽는. 남자 주인공과 아브라함은 마지막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을 흠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주인공의 공통점은 아브라함은 돌아온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 앞에 반응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고 인도하시는 인생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관계를 끊고 허랑방탕했지만 문밖에 선 아버지가 계시기에 부잣집 아들이라는 정상적인 회복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원상회복이 되고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가치있는 존재로 자리매김 한 것은 아브라함의 회복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회복과 관견하여 회복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1.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제가 오늘 본문에서 감동적으로 생각하는 구절은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창 17:2)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


창세기 15장 횟불 언약 기억하십니까?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고대 근동 중요한 계약시 계약하는 두 사람이 고기 사이로 지납니다. 짐승을 잡아 반으로 쪼개고 쪼갠 고가 사이를 지나가면서 만약 약속을 안 지키면 쪼갠 짐승처럼 되어도 좋습니다. 이런 비장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놀라운 것은 둘 다 같이 약속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지키마. 오늘 본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아들을 낳고, 아브라함을 되돌리기에는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아직 횃불 약속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랗마이 잘못된 방식으로 아들을 낳고 17년의 세월을 허송세월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에게 하는 약속은 아직 파기되지 않았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이것이 기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횃불 언약 때 아브라함에게 너도 지나가라 했으면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더 이상 성경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입니다.


지난주에 어떤 담임목사님이 찾아왔는데 40대 초반의 옛 된 담임 목사님이십니다. 넘 순수하고 말씀대로 사시려는 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여건이 안돼서 만나달라고 했을 때 만나지 못했는데 정성이 느껴져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목회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전들 뭐 압니까? 제가 개척하고 20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한 시간이 금방 거라고요. 제 방에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자. 한 시간 대화하는것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시시비비 가리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쟁쟁 거리는 것입니다. 횃불언약을 통하여 13년 동안 엉뚱한 길을 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주님이 만나주시고, 너에게 한 약속 아직도 유효하다. 목회는 은혜의 감격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사를 시시비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런저런 일들로 해서 제가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치고, 상대방이 다수입니다. 그런데 10분 만에 확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횟불언약. 내가 이렇게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까? 긍휼한 마음이 있으니 그냥 지나가더라고요.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논리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 것은. 계약은 말도 안 되는 계약 아닙니까? 내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약속한 언약은 아직도 유효하다.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2. 할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 갖기


증료를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증명이 되는 표. 언약이 유효하다고 하시고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12)


어마어마한 의미들이 담겨있습니다. 그중에서 여러 자료를 보다 보니 김태형 교수님께서 쓰신 책에서 할례를 기억의 측면으로 쓰신 것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갖은 문제점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는 금방 수용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말씀대로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고 다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긴장된 마음이 느슨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가나안에 도착하고, 흉년이 오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애굽으로 갔다가 위기를 만나고. 우리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까? 이런 아브라함의 현실을 정확하게 아시니, 할례의 의미의 정확한 포인트는 초심을 잘 못지키고, 그렇게 뜨거웠닥다 존재를 잊어버리는 아브라함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기억하도록. 아브라함의 살에다가 약속을 세기는 조처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 17:13)


큰 의미의 할례의 의미가 있지만, 마음에 기억되도록. 우리 마음에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말씀을 받으면 불로 하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인지 잊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늘 그것을 감격하고.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엉뚱한 길로 잘못 가더라도 철로 위에서 인생 끝낼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을 마음의 할례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이러면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제가 부족한 것은 많지만 나는 돈 문제는 깨끗하다. 천 원짜리 한 장 나는 집에서도 깨끗하다 하다가 마음의 할례를 묵상하다가 불쑥 떠올리면 안 되는 문제 하나가 떠올리는 것입니다. 아르바이트하다가 신뢰를 받았으니 금고를 맡겼습니다. 이 장면이 탁 떠오르는 것입니다. 20불짜리 꺼내서 제 주머니에 쏙 넣는 것.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게 지난주에 확 떠오르는 것입니다. 돈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생각하다가 20대 초반이니 40년전 일이 너무 생생한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기 위해서 부끄러운 우리 과거를 얼버무리면 안 됩니다. 이보다 더 한 부끄럼도 많은데 다 오픈 안 하려고 합니다. 다 오픈하면 1만 성도 파송운동 저절로 다 됩니다. 지금 마음에 할례를 묵상하다가 40년 전의 장면이 왜 떠올려지는 것입니까? 목사 한다고 돌아다니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유능해서 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이것보다 수치스러운 자리에 빠질 수 있다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음의 할례. 하나님이 나를 늘 견인해주시기 때문에. 옆길로 새다가도 또 돌아오고. 마음의 할례가 있을 때 작동하는 것입니다. 늘 저는 한 번도 분당우리교회 자격, 이 자리가 익숙해.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목사안수 받은지 30년 전이지만 목사님 하면 낯섭니다. 엉뚱한 짓을 안 해서 아브라함이 아니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이것이 신약에서 마음의 할례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할례 있습니까? 그 모양이냐? 하지 않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마음과 당신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순종하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신 30:6 새번역)


제가 오늘 예고했던 것은 이 시간에 29 교회를 위한 헌금을 드리자. 예배 중 헌금을 예고했는데 한 주간 마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제 부끄러운 믿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286억을 성도님들 다 있는 데서 해도 어려운데 1만 5천 명 나가시고, 5천 명 남아서 어떻게 갚겠나. 최근에 돈 이야기를 하잖아요. 했으면 됐는데 대놓고 하다가 은근히 하다가, 예배 시간에 하자고, 전혀 의논된 것도 아닌데. 한 주간 부끄러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당우리교회 파산시키시겠습니까? 설교할 때 큰 소리 뻥뻥 치지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고마운 분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몇 주 전에 여러분이 헌금하자고 하니 제일 먼저 나온 무리 중에 그 목사님이 소개하시는데 미자립교회인데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30명 모이는 교회입니다. 제 설교를 듣고 목사님이 연락이 와서 아이 포함 30명 모이는 미자립 교회에서 한 달 월세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부산에서 최근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50명 모입니다. 연락해서 무슨 이야기 하다가 1만 성도 동참하길 원한다며 두당 얼마씩하여 헌금을 보내주셨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목사님이 차를 몰고오셨습니다. 겨우 미자립교회를 벗어난 상태인데 개척교회 하는 동안 주신은혜가 너무 커서 또 다른 미자립교회를 돈으로는 못하고, 이 분이 건축을 하시는데 미자립교회를 위하여 재능기부하는데, 연락도 없이 쑥 와서 분당우리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셨는데 쑥 와서 백만원을 개인적으로 준비했다고하면서 봉투를 건네고 가는데 얼얼한 것입니다. 누가 마음에 할례를 가진 자며, 누가 마음에 할례를 가졌을 때 담대함이 생기는가. 이야기는 성도님, 집사님 이야기인데 원고에서 없는데 툭 나오네요. 제가 헌금에 대해 설교를 하고 난 이후로 상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설교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서, 팔아서 드려야 하는데, 문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 머리에 인상적인 것이 담당 교역자가 예의를 갖추는데, 절대 이야기를 못하게 합니다. 내가 감사받을 게 아니라고. 너무나 이런 마음의 할례를 갖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십시일반 헌금하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예배시간 순서도 넣고 해야 헌금하지 않습니까? 잘못 생각한 것은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29 교회 헌금 이야기를 더 이상 안 꺼내려고 합니다. 한 마디만 진짜 하고요. 이번에 남는 분들 헌금하셔야 합니다. 가시는 분들 여러분 교회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합니다. 헌금이 적게 나와서 곤란한 교회도 없고. 나머지는 분당우리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두 가지.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틈만 나면 신분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데를 기웃거리는 아브라함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인할 수 없는. 아브라함이 아무리 헤맬지라도, 여전히 너에게 한 약속이 유효하다.


결론적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레나 마리아 아시죠? 태어날 때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30cm밖에 안되고 태어났지만, 못하는 게 없습니다. 스톡홀름 현대음악과 졸업. 구족 화가협회, 오케스트라 협연, 가수 겸 작곡가로 9장의 앨범 출시, 10개국 언어로 출판된 베스트셀러 작가. 제가 최근에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드다다가 레나 마리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삼 도전을 받았습니다. 훌륭하게 자란 배후의 부모님이 계시는데, 기도는 이 아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레나 마리아가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음반을 냈는데, 레나 마리아 딱 써있고, 그 밑에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 제목 아닙니까? 그것밖에 내놓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분이 자라면서 스웨덴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레나 마리아가 자라면서 들은 말이 어메이징 뎀네이션, 지옥살이. 제는 저주스러워라는 욕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자기는 자라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노래할 거야. 설교하시는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시면서, 당신이 돈이 없다는 것. 당신이 온전한 신체가 아니라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시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출발이 그녀가 팔이 없고 다리가 없는 것으로 출발하면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생의 출발을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인생이라는 출발로부터 오면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것입니다. 약점이 많을수록, 육신적으로나, 연약한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합니다.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나누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오픈하지 못하는 심지어 목사 안수받은 이후 저질렀던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백이 안 지워집니다. 깯알았습니다. 그게 지워지면 안 된다는 것이요. 지워지는 순간 제가 교만에 빠진다는 것이요. 제가 흠도 티도 없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은혜. 나는 기회를 놓쳤어. 나는 철길 위에서 비명 지르다가 끝날 거야. 오늘 이찬수 목사가 못하는 것. 성령님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의 할례가 우리 안에 각인됨으로 말미암아. 내가 갖은 무엇으로 출발하는 어메이징 뎀네이션을 끊어지는 것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어떤 것도 저주받은 인생은 없습니다. 저처럼 허물이 크면 많을수록,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되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고, 감격하고, 단에 설 수 있는 그것만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






02월 0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하나님과 함께 그 목표 이루어가기

하나님과 함께 그 목표 이루어가기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아마도 모든 목회자 가정과 자녀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데요. 우리 집 아이들도 목사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든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제 딸이 자기 엄마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아이의 허락을 받고 저에게 토스를 해주어서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목사 딸로 살아가면서 겪은 억눌리고 참아야 하고 많은 사람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가 피력하는 것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인가 기억하는 데요. 제 본가는 미국에 계시다 보니깐 어민과 형제분들에게 아이들을 인사시키러 갈 때가 있습니다. 막내에게 제 고모가 물었다고 합니다. 장래희망이 뭐냐고. 이 아이가 대답하는 게 목사님이 되는 것이요. 믿는 가정은 그게 좋은 답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한 2~3년 지나서 이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인가 그쯤 되고 미국에 방문했을 때 고모가 다시 꿈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애가 하는 말이 아니요. 목사님 안 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꿈이 바뀌었느냐고 물어보니 애가 하는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자기는 목사님 안 한다. 아빠에게 누를 끼칠까봐요. 초등학교 때입니다. 어린애 머릿속에 혹시나 아빠에게 누를 끼치면 어떻하나 말이 많았으면 자기도 아빠 뒤를 이어서 목사님이 되었다가 누를 끼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이 고맙지만,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서 이 아이가 갖고있는 마음의 상처가 하나 있는 데요. 6학년때로 기억합니다. 너무 좋은 주일학교 선생님이 반 담임선생님입니다. 제자들이 20대가 되었는데 밥 사주시고, 선물도 주시고 용돈도 주시는 정성을 다하시는 분입니다. 6학년 아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일 분반 공부 시간에 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영화 보여줄게, 몇 시에 만나자 했던 것 같습니다. 애가 물었겠죠. 저녁에 반 친구들하고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가도 되느냐고? 한마디로 안된다고 했습니다. 주일은 우리 유익을 위해서 있는 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있는 날이야. 주일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안 하는 게 좋아. 그래서 허락을 안 했더니 애에게 엄청나게 상처가 된 것입니다. 그날 애가 너무나 많이 힘들어해서 기억합니다. 막 울면서 했던 이야기가 친구들 다 된다고 하는데 그다음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집사님 집은 되는데 우리 집은 왜 안되느냐고요. 저도 그 날을 기억합니다.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이 이것이 마음에 큰 상처가 된 것입니다. 늘 목사님 집에서 자라기 때문에 맨날 못한다고 하고 안된다고 하고.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제대했습니다. 5식구가 모여서 이야기하는데 애들이 이찬수 목사님 딸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아들로 사는 게 힘든지 아세요? 쏟아서 나왔어요. 민망하기도 하고 이렇게 말했어요. 이찬수 목사님 아들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면 이찬수 목사자 당사자는 어떻겠니? 나도 너무 힘들다. 나도 울고 싶다. 물론 분위기가 어색하니 웃기려고 그런 말을 했죠. 그 말 한마디에 다 평정히 되었습니다. 이후 재미있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새벽입니다. 딱 일어났는데 집사님 집은 되는데 우리 집은 왜 안 되느냐 말이 맴돌았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아픔이 되는, 새벽에 미안하기도 하고, 사실 저는 제 인생에서 두려운 것이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경계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어제 있었던 아이들 이야기, 제가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나는 울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 마음에 울컥 맺혔는데 그날 새벽에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내가 목사로 살면서 하나님 나에게 엄격하게 해서 집사님은 다 되는데 나는 못하게 하는 게 한 두 가지였느냐고요? 자기들은 다 하면서. 교회 커져서 다음 달부터 내가 벤츠를 몰겠습니다. 허락해주실 것인가요? 그런데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지난 저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억제하고 누르는 인생으로 너무 풍성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기쁨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래야 하는 답을 갖고 있거든요. 여러분은 제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배가 아파서,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살이 하느라. 다르게 하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 하나가 저 아닙니까? 그게 저에게 무한 영광인것입니다. 그날 새벽에 너무나 감사했던것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저는 다혈질이어서 말싸움으로 저를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과합니다. 예전에 저를 어떤 이념으로 공격할 때도 바로 사과합니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저를 따르는 청년들과 그분들이 따르는 청년들이 싸울까 봐. 아무 반응을 하지 마라 내가 잘못한 것이다. 기쁨으로 거둘 것에 대한 소망이 있어서 울면서 뿌리는 것입니다. 제대하는 날 새벽에 나오는데 애가 아빠가 부러운 것이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아빠는 20대보다 30대가 더 행복하고, 40대보다 50대가 더 기대가 된다고 하는데 그게 부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비결이 뭐냐고 하니깐, 진짜예요? 아빠 60대를 지켜보면 알꺼야. 60대가 얼마나 풍성하고 행복한지. 네가 답해라. 그런 자신감을 느끼고 답을 말해주면서 이것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온 세상 사람들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 억울하세요? 이 세상을 보면 마음대로, 본능대로 사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의 부부가 딱 이 케이스입니다. 13년이라는 긴 영적 침체기를 겪고 있습니다. 긴 영적 침체기의 첫 출발이 어디서 출발하였습니까?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아들을 낳은 이것 때문에 그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이것과 관련해서 자료를 모으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아시잖아요. 아브라함이 살던 메소포타미아 법을 묶은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 부부와 비슷한 케이스가 세 건이나 언급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첩이 아이가 낳은 경우 그 아이가 상속자가 된다.


이 규정이 있다는 것은 여종을 첩으로 낳고,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빈번했으면 그중에 분쟁이 생길 것 아닙니까? 그러니깐 함무라비 법전 세 군데나 이런 조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 초등학교 때 철이 없을 때로 치면, 온 세상이 다 이렇게 사는데, 좀 있는 집안은 전부 몸종, 여종이 아들을 낳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시냐고. 남을 해롭게 하는 일은 아닌데. 아브라함이 그랬을 것 같지 않지만 딱 그런 상황 아닙니까? 온 세상이 통용되는데 저만 갖고 그러냐고요. 마음속의 상처가 되는, 집사님 집만 다 되는데 우리 집은 이러냐고요. 이런 말씀을 묵상하다가 옥한흠 목사님이 그리워졌습니다. 화요일 7시 30분 아침에 목회자를 소집해서 얼마나 야단을 치는지. 걸핏하면 목사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소명도 없으면서 당신도 힘들고 성도님들도 힘들게 하느냐고요. 포인트는 제대로 성도님들을 섬기라는 것 아닙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저를 위시해서 모든 교역자가 마음에 아픔은 있고 두려움은 있지만, 상처를 안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무시해서, 자격도 없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고상한 가치를 부여해주시고 가능성을 보시기에 그렇게 무섭게 야단치시는 것 아닙니까? 후배 목사님들 모아놓고 설교할 때는 직격탄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목회자들 모아놓고 하시는 설교제목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표준을 낮게 잡으면 망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너를 통해서 복을 흘려보내는 놀라운 꿈을 갖고 있는데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너도 그렇게 살면 안 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아닙니까? 이번 새벽에 감사한 것은 이렇게 나에게 고상한 꿈을 주셨구나. 온 세상 사람들이 본능을 따라 살더라도 나는 절제해야 하는 것이 내게 면류관이 되고, 별로 참고 절제한 것은 없지만,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기쁨으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기에 그 꿈을 갖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큰 교회 목사가 어디 있고 작은 교회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부목사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목사면 다 같은 목사이지 정 목사가 있고 부목사가 있습니까? 교회 커지면 헌금 많이 나오고, 담임목사 대우가 달라지고 이런 본능이 꿈틀거릴 때마다 너희는 그러지 않을지니. 우리가 갖고있는 가치의 기준이 세상에 담고 살다 보니, 교회 안에서 장로가 높고. 장로가 못되어서 안달복달하는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제가 어릴 때는 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너희는 그렇지 말지니. 교회는 가장 낮아 보이는 그 사람이. 그래서 부목사님들, 일부로 화난 척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짜 화를 낸 경우가 몇 번 있는 데요. 유력한 장로님, 유력한 권사님일 때 부목사님들 우르르 가서 다 매우 고가서 제가 불같이 화낸 적이 있습니다. 이게 교회의 모습이냐? 언제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그분들을 위해 목회하는 것이 목회자지. 모든 성도님을 제대로 섬길 자신이 없으면 장로님들에게 그렇게 안 하려고 합니다. 20년 목회하면서 장로님 자녀가 유학 간다고 집에 찾아가서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님에게 그렇게 해줄 수 없다면 그렇게 안 합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런 정신을 갖고 아브라함이 억울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나올 정도로 나만 갖고 그러시냐고요. 항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도 세기기를 원합니다.




1. 보다 높은 목표 설정하기


지난주 설교 기억하시잖아요. 암흑기를 겪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엘샤다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을 전제로 한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두 번째 명령은 완전 하랍니다. 완전하라 단어는 히브리어로 티민인데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이 단어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레 1:3)


하나님께서 완전하라. 어느 정도로 완전하냐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때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흠 없는 제물을 필요로 하듯이 그런 존재로 살아가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치가 엄청나게 높은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에게 대한 하나님의 꿈이 크기에 큰 꿈을 갖은 사람다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부끄러운 장면을 떠올랐습니다. 오래전입니다. 드림 센터도 없을 때, 뒤에 사무실이 조그마한 게 있고, 차를 타고 가면 5분 정도 시에서 하는 헬스클럽이 있습니다. 시에서 하니깐 3만 원 정도로 저렴하게 했습니다. 젊은 여성 트레이너 한 사람이 돌아다니며 자세를 교정해줍니다. 나이가 들면 이 땅의 모든 제자는 스승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트레이너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바벨 갖고 역기를 하는데 처음에는 겨우 들고 했는데 몇 달 하니깐 쑥쑥 들리는 것입니다. 이거 할 때마다 많이 늘었네요 하는데 기회가 왔습니다. 씩씩하게 역기를 드는데 그 답은 원하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왜 무게를 고것 같고 드세요? 무게를 늘릴 때가 되었는데. 그날 부끄러움은 내 인생에 경고되었습니다. 종종 떠오릅니다. 영적으로 메시지이거든요. 예수 오래 믿은 여러분. 그 날의 그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40대 아저씨가 가벼운 거 들고 대견해 하는 것이 영적으로 여러분 아닙니까? 무게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담임목사가 되니깐 청소년 사역할 대보다 꿈꾸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시련이 오더라고요. 시험 앞에 여러분 알잖아요. 별의별 모함 다 당하고, 수치 당해도 어려움 없이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 무게를 올려주시나 보다. 초등학교 애가 집사님 집은 다 되는데 우리 집은 안되냐는 단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보다 높은 목표를 갖자고요. 보다 높은 목표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성경의 인물 닮기 힘은 들겠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자. 이 구절을 휘두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세 아이에게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기를 원합니다. 네 아빠가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 알지. 너희도 나를 본받았으면 좋겠어.




2. 하나님과 함께 그 목표를 이루어가기


제가 흠모하는 인물 중에서 세례요한을 흠모하는 데요. 누가복음 1장을 보니깐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세례요한 부모님에게는 이 사람은 이루고 있다. 도전되잖아요.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노아는 완전한 자로 이룬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아닙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창 18:23)


이 목표가 인간도 되네요. 놓아도 되고, 다윗도 되고, 세례요한 부모님도 되네요. 우리라고 왜 안될까요?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 반에서 1등 못하였지만, 공부를 아주 못하지 않았습니다. 청소년이 여기 와있다면, 적당히 공부하고 싶다면 제 이야기 잘 들어야 합니다. 저는 비결이 있는데 전교권 친구를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 볼 때마다 마음으로 속삭입니다. 애는 되는데 나는 왜 안돼. 이게 고상한 질투심, 건강한 질투심이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목회하면서 마찬가지입니다. 옥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질투를 느낍니다. 목표가 점점 높아져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노아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세례요한 부모가 있는데 왜 우리 아이는 안되냐고. 세례요한도 라이벌로 삼으려면 분석해야 합니다. 저는 공부 잘하는 애와 친해지려고 여러 번 쇼도 했습니다. 믿는 애들이니깐 책에 성구 적어서 우연히 마주치는 척 하면서, 남자들이 여자 꼬실 때 하는 것 아닙니까? 어! 기다렸다가 만나놓고서, 이거 생일선물이야. 기어이 친구 만들고 우리 집에서 같이하자. 숙식 무료. 그때 귀한 달걀 후라이를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애가 잘 때 자고, 따라 하니깐 되더라고요. 노아를 라이벌로 삼고 싶은가요? 노아를 분석해야 합니다. 어떻게 완전한 자가 되었는지를요.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시 18:23)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work before me. 불교를 믿지 않은 것이 개인적으로 감사합니다. 남의 종료를 평가할 건 아니지만. 제가 수행하는 것은 이루어내지 못할뿐더러 엄두도 안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쉬워요. 주님과 동행하면 되는데. 그분을 보고 따라 하면 되는데.


요즘에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길 가다도 울컥하는데 이번 설날에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설날 당일 새벽에 눈 엄청나게 왔거든요. 그 때가 4시 전후입니다. 물 마시려고 가다 보니깐, 컴컴하긴 하는데 눈이 들이 퍼 붓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열었습니다.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데 눈이 고요하니깐 눈 쌓이는 소리인가 봤더니 그게 아니에요. 저 누군가가 눈을 쓸고있었던 것입니다. 다 잠든 그 시간에 아침에 그 길을 지나가다가 미끌어 넘어질까 봐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 새벽에 29 예비 담임목사님에게 문자로 보냈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행인들 미끄러지지 않도록 미세한 소리. 지난 한해 모두가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던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울컥한 것입니다. 왜 절제해야 하냐고요. 아내 말고 다른 여자에게는 옆눈질이라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압니다. 목사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눈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족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여기까지가 설교 원고 준비한 것인데요. 사족 하나 붙이겠습니다. 오늘 당회가 열립니다. 29 담임목사님과 초기비용을 분당우리교회에서 담당해야 하잖아요. 금액을 보니깐 기도 제목으로 오픈합니다. 286억 청구되었습니다. 처음보다 몇십 억 늘어났습니다. 장로님들에게 늘 죄송한 사람들입니다. 계속 일 저지르니깐, 우리가 이 돈이 없습니다. 대형교회가 돈 없어서 부끄럽지도 않아요. 잘 썼어요. 드림 센터 빛 값느라 주일학교는 독립군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2년후 환원하니 활용할수도 없고. 여러분에게 있는 대로 오픈하고, 다음 주일날 헌금하기로. 작정해라. 이런거 안합니다. 경제적인 여건이 안되는 분들은 잊어버리세요. 헌금 안 하셔도 됩니다. 드림센터 아직 기증 안 했으니 담보로 해서 융자 얻으면 됩니다. 너무 고맙게도 분당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닌 분들이 헌금들을 30~40% 해주십니다. 사양하지 않는 이유가 모아진 초기 비용으로 쓰고, 교회가 자립을 하면 그대로 회수할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꿈을 꿉니다. 29 교회가 잘 세워져서 11 교회가 더 연말까지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조금만 더 밀어주면 설 수 있는 교회. 많은 문의가 들어오는데 아직 결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01월


01월 30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설교자: 김상복 목사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 도시, 북한, 우리 주변의 일본, 중국, 러시아 심지어 저 우크라이나까지 우리가 걱정하고 관심하고 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려고 하는지 걱정해야 하고, 전 세계가 우리의 관심거리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도 있어서 내 시간, 내 관심을 이끌려고, 인터넷, 유튜브, 너무 머리가 복잡해요. 사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별의별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머리가 복잡하고 짜증도 나고 속도 상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목소리가 너무나 커요. 제가 처음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오니깐 신문이 여러 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사회를 알기 위해서 신문을 여러 개 가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시간이 신문 읽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드는 거에요. 목소리가 다 다르고 이슈도 다르고 속도 상하고 기분도 나쁘고 머리가 아주 복잡해져요. 그래서 신문 이렇게 많이 보면 안 되겠다. 나를 편하게 하는 방법은 신문을 안 보는 것. 이제는 신문을 안 봐요.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하루의 첫 시작을 복잡한 머리로 시작하는 거에요. 성경 읽고 잘 시작했는데 아멘 하고 신문을 보니깐. 첫 6페이지는 전부 골치 아픈 이야기뿐이에요.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되겠더라고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좀 더 단순하게, 쉽게, 편안하게 사는 길은 없나. 내가 한 인생을 살아야하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이잖아요. 내가 행복해야 내 아내도 행복하고. 내 직장도 행복하고. 교회도 그렇죠. 복잡한 머리를 가지고 마음의 어려움과 어둠이 가득 찬 사람이 있으면 너무 힘들고요. 우리나라 얼마나 머리가 아픕니까? 힘든 세상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단순하게 살면 좋겠다 생각해봅니다. 좀 더 편안하게 살고 싶고. 결국, 결론이 어디로 가나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 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인생입니다. 죄성 때문에 좋지 못한 생각을 하고, 말도 하고 느낌도 있고, 우리 삶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떱니까? 죄가 있기에 생각이 나옵니다. 사과나무여서 사과가 나는 것입니다. 배는 배나무에서 나는 것입니다. 바나나는 바나나 나무이기 때문에 바나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죄의 열매는 죄의 나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새롭게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할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금년에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가는데,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66권이니깐, 수 천 년 동안의 이야기, 수많은 사건, 수많은 나라, 수많은 언어, 수많은 문화. 수많은 이간의 이야기들이 다 들어있으면서 모든 스토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너무 많으니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말해준 곳이 있는가? 이것 하나만큼은 수많은 하나님의 뜻 중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는 것. 세 가지가 있더라고요.




1.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첫째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 땅에서 살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이 사람으로서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듯고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구원 받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로마서 읽은 말씀 속에서 보면 너희가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에는 모든 가치관이 있어요. 다른 것들이 많이 있는데 보이니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세상이 뭐라 그러든지 간에 너희가 마음을 새롭게 해서,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여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40일 금식을 해도, 절에 들어가서 몇 년을 묵상해도 도리가 없어요. 인간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인간은 멸망하는 존재입니다. 이미 자기의 죄업 본성과 죄 때문에 정죄 받은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이미 정죄해버린 존재입니다. 이미 정죄 받은 자를 왜 또 정죄합니까? 죄 때문에 야단을 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려고 왔노라. 여러분, 성경 읽다가 정죄함으로 끝나는 것은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해방을 받고 용서를 받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게 아닙니다. 이미 정죄 받았기 때문에 또 정죄할 이유는 없어요. 해방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죄로 인해서 정죄를 이미 받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셔서 영원히 새롭게 태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있으사. 오래 참아서 끝까지 구원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시간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온 인간이 다 누구든지 구원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그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오셔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덮어버렸습니다. 바닷속에 던진 거섳럼 다시 건져내지 마라. 바닷속에 던져넣고 십자가 때문에 덮어버렸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으로 인정해준다.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의 고통을 닿게 하셨으니깐. 하나님에게는 어청난 희생입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너무도 쉽게 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에게 구원의 역사는 이미 끝났고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인간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천국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세요. 너 믿니 네 믿습니다. 한마디가 영원히 한 나라를 소망으로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 약 먹는 것보다 쉬워요. 제 아내가 약을 먹는데 약이 커요. 마시는데 안 내려가고 걸려요. 약 먹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구원받는 것은 약 먹는 것보다 쉽고 주면 감사합니다고고 끝나는 것입니다. 값없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영적인 선물을 여러분 전부가 받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회개하고 돌아서서 천국 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어요. 내가 곧 진리요.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 오는 것. 영원히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축복이 이 땅과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할지라도 누구든지 전부가 천국 가는 것입니다. 한 명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가정에 이루어지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기쁨입니다. 무슬림은 천국 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뉴욕의 교회 건물을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야 바로 천국 간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하나님도 그분들도 천국 가도록 천국 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생명 없이 살다가 이쪽이요. 돌아서시오. 이것이 회개 아닙니까?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천국을 향해갈 때. 우리가 갈 나라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을 정확히 듣지 못해서. 우리가 설명해주지 못해서. 한 생명이라도 멸망에 이르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합니다.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2. 구원받고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 4:3)


우리 속에 많이 들어가 있고 솟아오릅니다. 세상이 악한 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바꾸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마귀와 악한 영들이 우리를 혼란시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 축하할 일입니다. 태어난 것은 잠깐이요. 태어난 다음에 대학까지 준비하고 결혼하고, 자기 자녀를 이루고, 엄청난 시간입니다. 구원은 잠깐이요.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인데, 영적 생명이 태어난 다음에 자라는 것은 평생 가는 것입니다. 계속 읽으면 죄성이 점점 씻어지는 것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달라지는 것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금년에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음은 heart가 아니라 mind입니다. 생각의 변화가 먼저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느낍니다. 아이 기분이 나빠지면 기분이 나쁩니다. 생각하는 대로 말이 나오고, 생각하는 대로 감정이 나타납니다. 생각의 패턴을 변화하라. 이것이 거룩해지는 출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암송하고 배우고 나누고 행동을 해보고. 실제 엑션을 취해보고. 우리의 생각이 변하니깐 말이 변하는 것입니다. 태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변하니깐 좋아지니, 좋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생각이 들어가면 나쁜 태도가 나타나고 나쁜 습관이 생깁니다. 생각을 컨트롤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우리의 죄성을 씻어가고, 태도를 씻고, 우리의 감정을 순화하고, 우리 행동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기를 축복합니다. 건물도 눈에 보이지만 건물은 건축사의 머릿속에 생각으로 있었습니다. 생각이 나타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변해가는 축복이 반드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생각부터 변화시켜서, 말씀으로 변화시켜서. 안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이 여러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셔서 변화의 축복. 변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도움으로, 신앙생활 속에서 계속적인 변화가 경험돼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3.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여러분과 제가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인생이 짧습니다. 은퇴한 지 13년이 지났습니다. 언제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짧은 인생을 사는데 왜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까? 불행하고 속이 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있고 변화가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석을 다시 함으로써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해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사건은 객관적이지만 해석은 주관적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를 원합니다. 기뻐하려고 했더니 잘 안되더라고요. 여러분의 삶 속에 몇 번이나 있습니까? 기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쁘기를 기다려서는 행복이 없습니다. 항상 일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다시 해석하면 습관입니다. 기뻐하는 습관을 만들라. 습관은 무엇입니까? 행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괜찮아. 자꾸만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입니다. 세상이 안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습니다. 습관입니다. 입에서 괜찮다. 좋다. 아르답다. 고맙다. 반복함으로써,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뻐하는 훈련을 하시길 바랍니다.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20번하고 100번하고 반복할 때 그것이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기쁨에 찬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어요. 성격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소를 짓는 습관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반복할 때 미소의 근육이 발달해서 자동으로, 저절로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소에 기쁨의 근육이 잘 발달하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드니깐 미소의 근육이 없어집니다. 굳어집니다. 젊었을 때는 미소의 근육이 잘 움직였는데 나이 들어서는 잘 안됩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 인생은 즐겁게 사는 삶. 데살로니가를 보면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주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진리를 알게 되었고, 죄에서 해방을 받는 과정을 알게 되니깐 기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시 생가갛면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두 번째 회상한즉, 마음에 다시 생각해보니깐 하나님의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도다. 새로워지고, 다시 나타나고, 영적인 생각을 해볼 때 훈련입니다. 꼭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도 습관입니다. 기도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덥습니다. 춥습니다. 하나님 가르쳐주세요. 기도의 생활화. 쉬지 말고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하나님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세요. 삶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때 주여. 못 참으면 사고 납니다. 습관입니다. 기도가 습관입니다. 모든 것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도로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가 기쁨과 감사입니다. 마지막이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기도하니깐 기도의 결과가 나옵니다. 기쁨과 감사의 보판에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 생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해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받아서 여러분의 생각으로부터 변화가 되어서 언어와 감정과 태도가 행동, 습관, 인격이 변화되는 것이 새해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행복하게 사는 것. 염려 대신 기뻐하는 것. 여러분이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인생이 되기를 이 한해에 여러분에게 축복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01월 23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발걸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발걸음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예전에 어떤 보험회사에서 만든 광고 중에 걱정 인형 시리즈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광고 문구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걱정을 대신해주는 걱정 인형입니다. 최근에 어떤 글을 보니깐 걱정 인형은 과테말라의 전통적인 인형이라고 합니다. 과테말라에서 어떤 애가 근심하면 부모는 나무상자에 인형을 넣어서 그 아이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 상자에는 보통 6개의 인형이 있는데 아이가 하루에 하나씩 인형을 꺼내서 걱정을 인형에게 말하고 배게 밑에 둡니다. 그리고 부모가 치우고 아이에게 부모가 걱정은 인형이 가져갔단다고 말합니다. 저에게 걱정 인형이신 하나님은 인격을 갖으신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선포한 지난 9년 내내 그랬고, 걱정에 빠져있으면 보험 광고 그대로 걱정은 나에게 다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마음의 고백입니다.


또 한가지 이야기는, 새해가 되면 대부분 교회는 올해의 성구를 정하지 않습니까? 저희 교회도 매년 1년 동안 성도님들이 묵상할 성경 문구를 발표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힘은 히브리어로 마오즈라는 말입니다. 안전함, 보호라는 말입니다. 전쟁에 쓰일 때는 투구, 요새. 파도에서는 방파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위기에 필요한 보호기능을 갖은 단어입니다. 단어를 묵상하니 예전에 어른들이 너무나 자주 불렀던 찬양입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이 찬양에서 2절 가사가 그렇게 은혜가 됩니다.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마오즈 아닙니까? 평상시에는 우리 하나님은 있는 듯 없는 듯 계십니다. 하나님은 스토커 같은 분이 아닙니다. 수시로 괴롭히는 분이 아닙니다. 평안히 길을 갈 땐, 그래서 젊을 때 예수 믿기 쉽지 않아요. 부모가 다 해주니깐요. 여러분이 젊을 동안 하나님 경험이 되지 않는다면 부모님이 나머지 것을 다 해주셨다.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는데,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 다가와 손 내미시네. 여호와를 기뻐함이 힘이니라. 걱정인형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평안한 가운데 말씀하지 않으시고, 평온한 가운데 평온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는 가사가 우리 삶 속에서 구현될 때가 있다면, 바로 나타나셔서 모든 걱정을 내게 가져와라. 걱정 인형을 자처해주시는 하나님.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에게 있어서 걱정 인형이 되는 존재이기를 원합니다. 형통함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노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삶을 누리고 싶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걱정인형되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두 이야기를 왜 드리느냐면 아브라함의 형편이 이에 빗대어 드릴 수 있는 형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수단으로, 첩을 통해서 그렇게 아들을 낳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행동으로 13년이라는 긴 공백기를. 영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써봐라. 단 한중거리가 나오지 않는 허송세월한 것이 본문의 아브라함입니다. 왜 가슴 아픈 공백을 보냈습니까? 하나님 약속의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약속을 잊는다면 결과지상주의를 만듭니다. 기도가 결과지상주의입니다. 언제까지 응답해주시라고. 모든 관심은 언제 응답해주시지? 안 해주실걸? 이런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 가슴 아픈 약점이 하나 있는 데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려야 할 진짜 중요한 것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 이것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이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불신앙이 없었다면, 부부의 관심은 언제 약속 지켜주시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네. 그런 불신앙에 빠지지 않았다면 창세기 12장 이후 하나님 걱정인형 되시는 분께서 얼마나 소소한것을 주셨냐고요. 여러분 점검해보세요. 일상의 크지도 않아요. 소소한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살고 계십니까? 이것을 놓쳐버린것이 아브라함의 연약함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87세에 아들을 보았습니다. 겉보기에 애들 말로 대박. 우리 친구 손자 하나 보면 얼마나 기쁜지 스마트폰 보여주면서 예쁘지 합니다. 87세에 아들을 낳은 사건은 인생의 대박 사건 같은데 놀랍게도, 축복 같은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빠진 사건은 가장 절망적인 비극을 가져옵니다. 이번에 승진했습니다. 집도 샀습니다. 것 보기에 인생 승승장구네? 영적으로도 그럴까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긴 침묵 기를 만드는 사건이라면 인생의 축복이 아닙니다. 분당우리교회가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합니까? 교회 개척되고 6년, 7년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몰려오는데 1년 등록이 4,000명 됩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되던 때에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5천 명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려웠거든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가 알려지고, 붐비고, 모여들고 본능적으로 싫어한 사람이 있느냐고요? 싫어하면 위선자입니다. 너무나 기쁜데 두려운 것입니다. 이게 87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의 상황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 잘 된다고 떠들고 다니고.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다면 점검해보세요.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있다면 여러분 인생에 변장하고 찾아온 저주입니다. 너무 어려운데, 너무 인생의 밑바닥을 걷는 것 같은데, 감옥에 들어가고, 너무 낙심과 절망이 찾아오는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함으로 형통했다고 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놓친 것입니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과 재미나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끔찍한 13년입니다. 제가 본문의 아브라함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브라함의 약한 모습을 묵상했지만,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할 강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수용성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창 17:1-2)


3절에서 말씀을 받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세요.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창 17:3)


말씀을 수용하는 그의 태도가 이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약간 웃기려고 하는 말인데요. 우리 집 애들은 아빠가 대화하자고 하면 그 말씀을 수용하는 태도가 나쁩니다. 저녁 늦게까지 씩씩하게 젊은 애들이 저녁이 어디 있고 낮이 어디 있습니까? 라면 해먹고 씩씩했는데 늦게까지 기다렸다가 오늘 컨디션 좋네 이야기할까?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서 자야겠다고 해서. 웃기려고 하는 말이 섞여 있지만 사실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긴 13년의 공백기를 깨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주시니 아브라함의 반응은 우리 집 애들 같지 않습니다. 엎드렸더니. 수용하는 태도 아닙니까?


...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창 17: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장 많은 말씀을 쏟아내는 말이 창세기 17장입니다. 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분들도 늘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장로, 권사 다 소용없습니다. 직분이 그 사람을 저절로 견인하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말씀으로 인도하십니까? 말씀 앞에 반응하는 자입니다. 제가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이 부족한 종이 대언해서 하는 설교인데도, 무엇을 선언하면 지키려고.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를 시작했는데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아직까지 성경을 한 번도 안 펴본 분이 계시잖아요. 여기저기에서 장로님을 만났더니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옆길로 샐 수 있고, 잘못 판단할 수 있지만, 13년의 공백에 빠트리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회복력을 원합니까? 말씀 앞에 성의껏 반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선행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엎드려 말씀하며 수용하며 반응하시는. 긴 13년의 공백기가 끝이 나는 것이 17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긴 말씀을 주시는데 첫마디 말씀이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요구를 주십니다. 영적인 회복기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오늘 본문에 집중하려고 한 절만 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두 가지 중에서 두 번째 것은 다음 주에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첫 번째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1.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work before me. 이것이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더라고요. 창세기 5장에 너무나 중요한 말씀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4-5)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6-8)


몇 년을 살고 죽었더라. 은행에서 번호표 뽑고 기다렸듯이 모두가 그런 것 아닙니까? 아담의 족보와 다른 것은 하나입니다. 몇 세에 죽을지는 모릅니다. 죽을 것이라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타락한 아담의 족보에서 반복하는 낳았으며, 몇 년을 살고 죽었더라 패턴의 공식을 깨는 사람이 나오는데 에녹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창 5:21-23)


그 뒤에 죽었더라가 없습니다. 계속 마지막 결론을 죽었더라고 끝나는 아담의 족보에서 에녹의 결정적인 차이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work before me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예수 믿은 지 20년이 되셨든, 5년이 되셨던 불문에 부치고 오늘부터 우리가 목숨 걸고 붙잡아야 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3년이나 허송 생월 한 아브라함을 보시고 만나 자마다 어쩌려고 굼뜨냐. 목적지 부산에 가려면 지금쯤 김천까지 가야 하는데 천안까지밖에 못 갔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반드시 얻어내야 하는 것이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앞으로 수십 번 더 말씀드릴 것이지만 새벽입니다. 아내를 무지 사랑하는 사람인데요. 아내를 사랑하는 것만큼 더 좋은 것은 아내 없는 새벽 시간입니다. 저는 예전에 주일학교에 불렀던 찬양이 저의 새벽을 요약한 것 같습니다.


나는야 친구 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단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나간 일들 내가 생각하며 앞날의 될 일 내가 들을 때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믿으니 이 세상 천국 같네


번 아웃도 왔고, 지난 주일 제가 1부 때는 많이 울었습니다. 미국에 우리 누나들은 은혜받으려고 은혜들이지만 동생 컨디션 어떤지 보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울더라는 것입니다. 전화로 통화하는데 조심스럽게 묻더라고요. 혹시 너 우울증이니 묻습니다. 우울증 아니거든요. 우울해서 운 것 아니거든요? 목요일날 말로 다할 수 없는 함께하심의 은혜가 느껴져서 가슴이 벅차올랐기에. 지난 30 몇 년 동안 동행해주신 하나님을 생각해서 감격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상 속의 소소한 기쁨. 저는 초저녁에 잡니다. 빨리 새벽을 만나려고.


나는야 친구 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단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그런가 하면 옛날 어른들이 즐겨 부르시던 찬양


저 장미꽃 위에 있을 아직 맺혀있을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하면서 나를 친구삼으셨네


저를 가장 기쁘게하는 맨 마지막 한 마디.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과 저와 단둘이 누리는 사랑의 기쁨.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누리는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큰 교회 목사가 되어서 기쁜 게 있느냐고요? 기쁜 게 있죠. 힘든 게 더 많죠. 이름 알려지고 더 좋은 것 같습니까? 텅 빈 공간에서


주님 나와 동행을하면서 나를 친구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에녹이 에녹이 되게끔 결정적인 것. 이 찬양과 관련해서 글을 읽었는데 너무 감동되었습니다. 중국은 종교 탄압국가 아닙니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분이 지하교회에서 이끌다가 공안에 잡혀 18년간 수용소에서 살았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영국 목회자 모임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글에는 점잖게 썼는데 똥 푸는 일을 했습니다. 악질인 사람에게 인분 푸는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악취가 나서 간수들도 가까지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분에게 불편했는데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을 압니다. 지키는 사람도 냄새가 심해서 안 오니깐, 수용소에서 지키니깐 보지를 못하는데 똥 푸는 일에서만큼은 마음대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암송할 수 있습니다.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너무 오래 했다. 편한 일로 바꾸어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즐겨 불렀던 찬양이


주님 나와 동행을하면서 나를 친구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미 하나도 없는 세상 아닙니까? 이런 세상과 상관없이 새벽일 수 있고, 저녁일 수 있고. 주님과 교제를 누리는 복이 있는데, 일상에서의 작은 기쁨을 누립니다. 순간순간 주시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점진적인 즐거움을 누리기에. 물철학이라고 종종 말씀드리잖아요. 30명의 예비 담임목사님을 청하면서 15분은 우리 부목사님 15분은 외부에서 청빙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 외부의 6 목사님께 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2년 전에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설명하는데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냐고.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습니다. 30 교회를 가는 것도 만나기 직전에 결정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두 가지 신기하다고 합니다.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어떻게 우리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했는지, 어떻게 하나씩 풀려나가는지. 때맞추어 일어시는 능력을 알거든요.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분당 우리 교회 1만 성도 파송운동은 40 교회임을 선포합니다. 목요일날 하나님의 지령을 받은 거거든요. 제가 맨 처음 40 교회를 기도했는데 예산이 안된다는 얕은 생각으로 30 교회로 줄였습니다. 지난 목요일 엘샤다이 하나님. 헷갈리지 않도록 29 + 11 교회라고 했습니다. 29 교회 분리는 4월 첫주 스타트입니다. 12월 첫째 주에 스타트할 것입니다. 이미 개척한 교회지만 조금만 밀어드리면 불이 붙을 교회를 밀어드릴 것입니다. 4월 둘째 주부터 밀어붙일 것입니다. 또 파송운동이 시작될 것입니다. 힘드시다고요? 저는 더 힘듭니다. 4월 첫주 끝내고 안식년도 갖고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림도 없다고 합니다. 연말까지 40 교회가 놀라운 출발을 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비다. 매 새벽마다 어떤 하나님의 지침을 주실지. 놀라운 기쁨을 주는 것. 내년에도 또 다른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울뻔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29 목사님들과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해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였으면 좋겠다고. 김 집사 왜 자꾸 나와 거래하자고 하냐고. 이거 드릴게요 뭐해주실래요?






01월 16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시시하게 살기엔 너무 크신 하나님

시시하게 살기엔 너무 크신 하나님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1-8)


오늘부터 구약의 인물 아브라함을 보려고 합니다. 예전에 발견하지 못한 포인트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17장이 아브라함의 나이블 밝힘으로 시작하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앞 16장 끝 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창 16:16)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 수십 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16절 마지막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창 16:16)


왜 13년의 공백이 생겼는지 보니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첩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은 그 사건 이후로 13년의 공백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많은 학자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보니깐, 그 기간이 하나님의 침묵기었다. 아브라함이 잘못된 길로 갔기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는 분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편으로 공감되었지만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13년 동안 과연 침묵하셨을까요? 저는 동의가 안되었습니다. 나름대로 분석한 것이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한 마디로 안 하신 기간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취하지 않은 잘못된 길로 간 이후로부터 그 긴 13년의 세월 동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거리가 한 줄도 안나오는 세월을 보낸 게 아닌가.


요즘에 제 신학교 동기 목사님을 만나거나 나이가 같은 친구를 만나면 하는 행동이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스마트폰을 꺼내서 하나 한참 찾습니다. 내 손자다.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예쁘지? 강요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86세의 나이에 손자를 본 것이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이것을 제가 추측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진짜 13년 동안 침묵하셨는지, 아브라함이 엉뚱한 곳으로 가서 무가치한 세월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현실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창세기 17장을 묵상하다 보니 노래 하나가 툭 맴도는 것입니다. 예전에 특새에 소개한 노래입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중고등학교 대안학교인 간디학교 교가로 알고 있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 별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 셀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 꾸며 사랑하는 우리 /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드러가려고 하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있네 우린 알고 있네 /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아브라함의 13년은 첩을 통해 아들을 낳는 순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꿈에 대한 발전이 없는 기간인 것을 확신합니다. 13년의 세월을 묵상하다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여러 참고 책을 보다가 발견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낚시꾼이 있었는데 행동이 이상합니다. 낚시해서 큰 고기가 나오면 좋아하고, 새끼 고기를 보면 도로 바다에 던져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낚시꾼은 반대입니다. 큰 물고기가 잡히면 바다로 보내고 작은 물고기를 잡으면 요리하려고 가져가는 것입니다. 옆에 낚시꾼이 왜 반대로 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이 낚시꾼의 이야기가 웃깁니다. 그것은 우리 집 프라이팬이 12인치짜리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잃어버린 13년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이 갖고있는 생각의 폭이 너무 작기에 하나님의 큰 꿈이 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13년을 되돌아보세요. 이게 언제적 일입니까? 지난 13년의 세월을 보내고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글 한 줄 안나오는 세월 보낸 적 있으신가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창세기 17장입니다. 그 어떤 성경 본문보다도 뜨겁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너무 감동되는 것입니다. 시시한 아브라함을 보면서 가동을 받는 게 아니라 엄청난 13년의 세월을 잃어버린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그 아브라함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창 17:1-2)


오늘은 1절 말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 소모적이고 13년의 잃어버린 시간을 보낸 아브라함을 종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하심입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다 사라져버리고 허무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면 이찬수 목사가 집에 가서 세게 기도해준다고, 여러분에게 갈비 사들인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침체한 것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가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에 올인하기로 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이 완성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님으로는 위기입니다. 순장님 대부분이 29 교회로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1,500명 주일학교 교사들이 대부분 나가기로 했다고 우려 섞인 보고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당우리교회는 지금까지 견지해오던 척추 같은 것이 와해되는 해입니다. 사역훈련 1년, 제자훈련 1년, 평신도 훈련 1년, 졸속으로 세워지는게 아니잖아요. 제 남은 목회 기간 다 해도 이런 순장에 의한 구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순장님, 리더님 안심하고 가세요.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제가 확신하는 것은 더 이상 제자훈련 사역 기능이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재가 없습니다. 여전히 이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면 분당우리교회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이것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13년의 세월을 잃어버린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으로 회복이 되는것이 본문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영적 침체에 빠진 분이 있으시다면 본문을 보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1. 엘 샤다이를 선포하심


오늘은 엘 샤다이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은 13년간 긴 공백을 보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시자마자 엄청난 말씀을 주시는데 제일 첫 마디 엘 샤다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선포하셨을까요? 13년 허무한, 잃어버린 세월의 궁극적인 원인이 아브라함에게는 엘샤다이에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는 애 낳을 기능이 없는데요. 이런 모든 것은 천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아시잖아요. 1년 남았습니다. 엘 샤다이 놀라운 역사가 첩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통해서 이삭이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아들을 낳게 될 때 아브랗마의 벅찬 가슴을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월요일 새벽입니다. 너무나 가슴이 먹먹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 영어권 고등학교 아이들이 나와서 불렀던 찬양이 이것이었습니다.


엘 샤다이 엘 샤다이 에르캄카노 아도나이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고, 엘 엘리요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에르캄카이 아도나이는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가사입니다. 시편 18편 1절에 나오는 말씀이더라고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엘 샤다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먹먹한 감격을 경험했는데 오늘 새벽에 끆끆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24살, 이렇게 사니 죽는 게 낫지. 영어권 고등부 아이들 입술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선포하시고 새벽에 왜 눈이 붓도록 울었는지 아십니까? 38년 세월동안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로 꿈을 꾸는 목회를 하는 것.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많이 힘드신 것 알거든요. 코로나는 잠재워지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무리해서 가게를 냇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절망에 있고. 제 나이쯤 되니깐 모함당해도 마음에 굳은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20대 청년들은 꼭 부드러운 속살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청년이 그런 형편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사래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염려나 절방이 겹치고 겹쳤으면. 자기 몸을 통하여 아름다운 아들을 얻었을 때 얼마나 벅찼겠느냐고요. 저는 등산할 때 영하 11도. 등산하다 만나는 겨울나무가 아름답습니다. 겨울나무는 체면이고 뭐고 없습니다. 가을에 다 떨어트립니다. 겨울나무가 갖고있는 목표는 하나입니다. 살아남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나목이라합니다. 겨울나무가 견뎌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견뎌내면 꽃은 반드시 피운다는 것. 첩을 통해 아이를 낳는 이스마엘도 이해가 되지만 족므 더 견딜 수 없을까요? 하나님 앞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언제 가질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이 믿음이 없어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2. 이름을 바꾸어주심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


아브라함은 무리의 아버지, 열국, 열방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13년 공백기를 갖는 아브라함에게 왜 이름을 바꾸어주셨을까요? 스케일의 문제입니다. 정식 우리말이던데요. 국어사전을 보니 인물의 도량, 일이나 계획 따위의 틀이나 범위 이것을 스케일이라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름을 바꾸어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십니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3-5)


한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로 사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스케일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집에 세 아이 아들 하나 딸 둘에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 아이에게 인정받고 싶은 꿈이 있지만 이것 때문에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애들이 지금도 원망합니다. 아빠 어릴 때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시계를 큰딸 태어난 시간으로 되돌린다 하더라도 저는 이렇게밖에 못 갑니다. 저는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잖아요. 스케일을 넓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에게 좋은 아빠도 가치가 있지만, 열방의 아비가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 81:10)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스케일이 커지기를 원합니다. 매듭을 깆고가는 차원으로 이야기하고 더이상 안 하려고 합니다. 한때 저를 좌파, 우파니 그날 설교로 책 제목 뽑아서 잘 뽑았다. 뭘 실수했는지 잡아서 좌파, 우파 하면 악하다기보다 스케일이 작은 것입니다. 우리끼리 맨날 싸우고 정죄해서 되겠습니까? 제가 분노했던 것은 악한 뉴스 때문에 할머니 권사님이 이찬수 목사라는 사람이 좌파라며 그 사람 설교 안 들어. 제가 그 할머니에게 무릎 꿇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 아니라고. 모든 성도님이 어떤 선입견 없이 전하는 복음에만, 아시잖아요.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 안하는 것. 이 자리는 하나님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임재가 선포되는 자리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29 교회로 나뉘는 과정에서 노회 목사님들을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29 교회 목사님들이 우리 교단이 아닌 목사님도 있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렸습니다. 한국교회를 섬기기로 한 것이다. 눈물 나게 다 수용하였습니다. 어떤 교회 안 밝힙니다. 어느 교단, 어디 출신 이런 것보다 소중한 것은 그 종의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


왜 이름을 바꾸었느냐고요? 하나님께서 꿈을 주신 것입니다. 어느 교단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꿈입니다. 열방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열방의 아비가 되를 원하시는. 아브라함이 너무 야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꿈으로 자기를 부르시고, 상징적으로 상상하였습니다. 열방이 아비가 될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블하마이 야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는 노래가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목요일날 하나님께서 너무나 당황스러운 꿈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30 교회가 아니라 40개 교회였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암만 생각해도 예산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30 교회, 한 분의 목사님이 나가서 29 교회가 되었는데, 40 교회로 가라. 11 교회에 대한 꿈을 어떻게 주셨냐면, 이미 교회를 개척한 어느 목사님, 새벽에 마음이 너무 뜨거워졌습니다. 조금만 밀어주면 부흥할 교회가 너무 많은데. 오늘 새벽까지 재정부 직원이 보내준 메일이 11억 원 들어왔습니다. 29 교회 세우는데 가예산이 250억 들어갑니다. 나머지는 드림 센터 융자해서 빛 내야 하는데 오늘 당회를 소집한 상황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동안 장로님들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한 교회당 5억씩 후원해서 60억씩 11 교회 살지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해야 합니다. 당회가 의논해서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꿈꾸기를 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면 40 교회, 50교회 은퇴할 때까지 100여 개 교회를 후원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안되도 괜찮아요. 물 흐르듯 하나님께서 일하기를 원합니다. 분당 우리 교회 알콩달콩 지내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조끔만 힘을 실어주면 불같이 부흥할 교회를 꿈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결론을 이렇게 맺기를 원합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꿈이라는 것 아시잖아요. 분당우리교회 알콩달콩 지내는 게 뭐가 싫겠습니까? 4월 1일,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01월 09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집착을 떨치고 달려가기

집착을 떨치고 달려가기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1-8)


오늘 본문 말씀은 죽음을 앞둔 지도자 모세가 후계자 모세와 백성들에게 격려하고 당부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백성들에게 하는 당부를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신 31:6-7)


이 말씀들을 보면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고 주신 말씀과 맥락이 같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9)


왜 자꾸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까? 후계자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치루어야할 일이 많다는 것, 모두가 예외가 아닙니다. 걸핏하면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본문에 있는 상황이나 우리들의 상황이나 다른 게 없다고 봅니다.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모두는 연약해서 걸핏하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기에 새해가 되면서 정말 기도합니다.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 올 한해 두려움 없이 달려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올 한해 두려움 없이, 에너지 낭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향해 달려 가를 원합니다.


본문 모세의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목표를 향하여 두려움 없이 달려간 인물이었다.


부럽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가 두려움 없지, 인생의 낭비 없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길을 잘 달려갈 수 있기를 위해서 두 가지 구비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1. 자기집착에서 벗어나기


제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신 31:1-2)


지금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모세가 갖고있는 가슴 아픈 현실이 어떤 것입니까? 2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모세 개인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홍해를 건너고 40년간 달려간 약속의 땅 가나안인데 모세 너는 못 간다. 제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세에게서 너무나 분하고 원통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조치에 대해서 연연하는게 안보입니다. 모세 마음에 갈등하는 것이 안 보입니다.


온 우주가 나 하나를 중심으로 굴러가고 가나안에 백성들이 들어가거나 말거나 나만 들어갈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죄성을 갖은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인간의 자기 집착 때문에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집착이 강한 사람 두 사람이 결혼하면 그 가정에 발마 잘 날이 없습니다. 자기 집착 때문에 나이가 들면 추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 집착 때문에 평생 쌓은 명성을 한 번에 날리는 것을 뉴스를 통해, 신문을 통해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모세에게서 놀랍게 자기 집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오늘 본문의 모세를 보면서도 세례요한을 보면서도 사도 바울을 보면서도 느낌이 오잖아요. 사람이 깔끔하잖아요. 구질구질하지 않잖아요. 우리 교회에도 많은 분이 계세요. 자기 집착이 많은 분들은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요. 그런 분이 모세 같은 조치를 당하면 아마 한 달 내내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생각 좀 돌이켜달라고. 자기 집착이 강한 분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자기에게로 온 거세요. 맨날 건강, 물질의 풍요를 달라고 하고. 저는 늘 싸울 왕을 반면교사 삼고 있습니다. 사울 왕 아시잖아요. 다윗을 많은 백성이 칭찬하고, 여러분 그러면 좀 안 되는 것입니까? 다윗을 사람들이 주목하니깐 자기 집착에 빠진 사울 왕이니깐 못 견디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인생에 뒷부분은 자기보다 백성들에게 주목을 받는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잖아요. 저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이런 일이 안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제가 설교를 다 뒤지면서 나보다 설교 잘하는 목사 절대 안 세워야지. 설교를 조금만 잘하면 보이지도 않아요. 그래서 막 충고를 해요. 담임목사님 들으니깐 설교 잘하면 안 된다고. 이 사울 왕이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헤롯왕도 마찬가지 압니까? 자기 집착이 강한 지도자를 만나면 큰일 납니다.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두고 있는데 진짜 기도합니다. 교회가 1번 찍어라, 2번 찍어라 박수치면 안되지만, 성도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기도 하셔야 합니다. 두 눈 부릅뜨고 어느 후보가 자기 집착에 빠져있는지, 어느 후보가 마음을 비우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사람인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어리석어서 겉보기에 보고 판단합니다.


모르고 살고 사는 즐거움 책에서 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걱정이라는 것은 100% 쓸데없는 것인데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걱정을 못버리는 이유는 내 고집과 집착이 고질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집착이 고질병이 되어서 걱정근심에 빠져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연말과 올 초에 책 두 권을 꺼내 읽고 있는데 김영민 교수님이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책을 보면 제목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있다. 모든 이야기에 결말에 의해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도 결말에 따라서 좌우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 산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은 선택할 수 있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의 평가는 어떻게 죽었느냐는 것입니다. 일본 에도시대 무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아침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야 무사로서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해야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데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깔끔한 인생. 저와 여러분이 깔끔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타고난 외모야 다 구질구질한데. 생긴 것은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그러나 내면세계는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산소를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상큼해요. 만나면 우는소리 하고 만나면 죽는소리하고. 저 정도면 먹고살 만한데. 그런 인생은 가까이할 수 없어요.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 예수 믿는 보혈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 깔끔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년에 읽은 또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예전에 나온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최근에 다시 꺼내서 봅니다. 저자가 자기가 겪은 이야길르 하나 적었습니다. 아들이 만 2살, 한참 예쁜 시기입니다. 장난감 없으면 못살 때가 요 때인데 아버지가 장난감 가게로 갔습니다. 아이가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어하는데 하나를 골랐습니다. 껴안고 어찌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산대 앞에 돈을 치루어야 아이 것이 되는데 안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하고 줄게 설명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강제로 하려고 하니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모르는 게 있잖아요. 움켜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진짜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못븐 아닙니까? 여러분이 움켜쥐어서 여러분 것이 되는 것이 뭐가 있나요? 이 땅은 잠시 갖고 떠나는 소풍 길입니다. 돈 돈, 명예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자기 것이 되는데. 왜 책의 저자가 내려놓음의 책에 이런 이야기를 적었냐겠냐고요. 오병이어의 도시락. 어린아이가 내 먹을 거라고 움켜쥐고 나무 밑에서 혼자 먹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훨씬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기적을 맛보는 하루가 된 것이 아닙니까? 이평강을, 기쁨을 절대로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여호수아서를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모세는 끝났습니다. 모세는 죽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다 맡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교훈은 무엇인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2)


어떤 교훈이 떠오르시나요? 모세는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묵상하다 보니 진짜 위험한 잘못된 것 하나가 떠오르더라고요. 나 아니면 안 된다. 우리가 놓치는 것은 이것 아닙니까? 왜 안 돼요 되지. 하나님은 중요한 일일수록 한 사람에게 다 맡기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어도 그 일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기 집착에서 나오는 열매가 나 아니면 안 된다 입니다. 처음에 분당우리교회 몇 사람 안되니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제가 다 했습니다.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은 제가 직접 하는 일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는 완전히 독립입니다. 대청교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무슨 사람을 뽑는지 모릅니다. 교육전도사를 만나는데 제가 심사를 안 했으니 청년인 줄 알고 공손하게 인사했는데 교육전도사라고 하면 당황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은 그것을 테스트하는 거로 생각합니다. 이찬수 목사가 아니라면 안되는 교회라면 문 닫는 것이 좋습니다. 모세는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자기 스스로 절제하는 마음 없이는 자기 집착이 거기에 버섯처럼 악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2.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신 31:3)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8)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왜 집착하지 않았느냐.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퇴하고도 계속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영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꿈을 꿉니다. 은퇴하면 떠나야 덕스럽다고 하는데 저는 은퇴하면 안 떠날 것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있을게요.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는 이 교회 안에서 계속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민을 떠날 23살쯤에 대학교 기독교 동아리 선배님이 책을 한 권 선물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책입니다. 안 읽었습니다. 23살에 벽돌 같은 것 누가 읽습니까? 그런데 그 책이 제 인생에 너무나 소중한 책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이 책에 몇 자를 적어두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찬수를 사랑하사 시카고땅에 앞길을 평탄하게 해주셨을 거라 믿는다.’ 이런 요지의 내용입니다. 제가 23살에 이민 가서 엄청 고생을 했다고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자살 충동을 느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느꼈다. 이 말을 무시해서 안 해도 되는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선배가 적어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했다면 제가 몇십 년 지나서 오랜 세월 지나고 그때를 되돌아보니깐 시카고에서의 땅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일하심이더라고요. 자격없는 저를 분당우리교회로 점지하시고 걸맞은 지도자 수업을 시카고에서 하시는 것인데 그 믿음이 없는 것이니 맨날 하나님께 화를 내고. 형제들에게 얼굴이 화끈합니다. 얼마나 형제들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왜 안도와줬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도와주었는데 자기 집착이 있으니 양에 안 차는 것입니다. 23살의 저와 같이 오류를 범하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불평 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 인생에 버릴 것 하나 없습니다. 순탄하면 앞서 행하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어려운 일이 찾아오면 정금같이 빚어가시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제가 요즘에 그때 선배님의 신명기 정신을 갖고 썼구나.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앞서 행하시는 은혜를 주셨다. 또 오늘의 삶을 돌아보니 임마누엘,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피부 속에, 삶 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면서 감격으로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두 가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인생을 위해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기,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올 한해 분당우리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읽기에 전념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모세가 그렇게 자기 집착이 없고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확신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왜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에 전념하자는 것입니까? 지난 한 주 동안에 깜박 잊고 안하신 분이 있다면 오늘부터 하시면 됩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성경 읽기 표를 내려받는 것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교회가 두 달치씩 성경 읽을 분량을 제공할 것인데 계획 세우시고 지난주 안 읽으신 분은 내일 분량부터 하시면 됩니다. 계속 그동안 반복해오던 것. 새해에는 굳은 결심을 했는데 창세기는 이번으로 37번 읽는데 창세기 다음에 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전략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다 안 읽으셔도 됩니다. 1년 내내 너무 바빠서 12월 31일에 요한계시록 읽으시면 완주로 생각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하면 그 날의 핵심 장을 정해드렸습니다. 한 장만 읽으시면 됩니다.


두 가지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참고 강의를 만들었습니다. 외부 강사님으로 구성된 성경 읽기 가이드 영상입니다. 짤막짤막하게 그 주의 성경의 흐름이 어떤가. 알고 읽으시면 성경 읽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두 번째가 새벽기도회 영상입니다. 성경 읽기 표대로 우리가 중요한 핵심 장을 찾아서 새벽에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자료는 성경 권별 심화학습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이런 것이 권별입니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 팀에서 제공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책 ‘리딩 지저스’입니다. 미국 신학 교수님이 쓰신 책이니 어떤 분은 너무 어려운데요. 초신자에게 어려우면 안 읽으시면 됩니다. 우리 교역자가 친절하게 책에 대한 강의 영상을 올렸습니다. 성경을 좀 아시는 분은 굉장히 재미있을 것입니다.


올 한해 적어도 매일 하루 한 번 이상은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완주하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심령의 자리에, 자기중심적인 그 끔찍한. 나 하나를 위하여 온 우주가 돌아간다는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통해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든든한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제가 선서하듯이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을 앞두고 초반에 두려움도 많고 염려도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하면서 선서하듯이 말하겠습니다. 두려움이 0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거짓이면 제가 목회자가 아닙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인 줄 알기를 원합니다.






01월 02일 분당우리교회 주일설교 | 위기가 계속되는 인생이지만

위기가 계속되는 인생이지만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1-2)


여호수아서는 엄청난 위기로 시작하는 성경입니다. 1장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이것이 엄청난 표현입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대리인 아니었습니까? 어느 정도 의미인가는 이 설명해 드리면 바로 아실 것 같습니다. 출애굽닉에 나온 금송아지 우상 사건 아시잖아요. 왜 우상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왜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는지 아시겠죠? 모세가 안 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모세의 존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짐작 가능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정복전쟁 할 일이 엄청 많은데 모세의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데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이 말 한마디가 가장 의지할 대상을 잃었다는 것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도발적인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다. 코로나 19가 왜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예측이 없었잖아요. 은행 융자 내고 오랜 기간 요리를 배우고 다 갖추고 식당을 오픈하셨는데 이것은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오픈하고 두 달 만에 코로나 19가 터져버렸네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 일어나서 너무나 많은 자영업자분이 절망하는 상호아. 이것이 인생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새해가 되었는데 연말에 묵상하였는데 이틀 전 송구영신에배때 전하고 오늘도 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당황스럽고 난감한, 모세가 죽은 후에 시작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인생길인데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싶은 포인트는 하나입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급작스러운 위기를 만날 수 밖에 없는데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려도 된다는 말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가 우리를 망하지 못하게 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낙심되는 상황에서 말씀이 들려 지가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면 절대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조금 더 부연설명을 드리겠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비유 다 아시죠?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이 있고 아주 현명해서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이 있늗네 평상시에는 차이를 모르는데 그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보셔졌다. 이런 인생은 미련한 인생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진짜 중요한 원리를 발견했는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두 사람의 차이는 어리석나, 현명하나에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둘을 가르는 차이를 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말씀이 들리느냐는 거에요. 가이드가 있느냐는 거에요. 그 말씀 앞에 우리가 영향을 받고 사느냐? 그 인생은 바람이 불고, 갑자기 모세가 죽고, 의지할 것이 사라지는 절망적인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말씀이 들려지고 말씀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것이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는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 여러분의 인생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어지간히 누가 흔들더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로운 인생이십니까? 혼란에 빠지시는 인생입니까? 사람이 지혜로운 게 아닙니다. 가이드가 있는 것입니다. 인도해주시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헤쳐나가기에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가는 것이 인생길이지만 CS 루이스 말을 아시죠. 고난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확성기이다. 어떤 사람은 고난은 고난이지 고난이 어떻게 변장하고 온 축복이냐고.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입니다. 고난은 인생에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입니다. 뭘 하듯이 지지하고 응원하시는 고마운 성도님들도 내 인생에 잊히지 않는 은인들이지만 모함하고 가짜뉴를 퍼트리는 분도 저를 이만큼 성장하게 만든 은인들입니다. 저는 마음으로 항상 되뇝니다. 죽이지 모샇는 고난은 다 나를 성장시킨다. 휘청휘청 거릴 때마다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난은 모두가 나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되고 재료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모세가 죽은 후 이스랑레 배성드렝게 절망적은 고통이고 말도 안 되는 위기이지만 여호수아를 통하여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모세가 주셨다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다 아시잖아요. 여호수아에게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승리를 기록하신 책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위기가 찾아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우리 인생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 있을 때 다른 어떤 것보다 말씀을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위기의 때에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를 정리하였습니다.




1. 삶의 목표와 사명에 대한 자각을 주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2)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입니다. 절망적인 사건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시련이 주님의 말씀, 잊고 있던 사명을. 놓치고 있던 꿈과 비전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첫 시간에 나누지 않았습니까?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도중에 새버리는 것입니다. 그 전에 시련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의지하는 대상이 사라지는 두려워하는 일로 말미암아 자기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서 가는 것입니다. 많은 분이 이야기합니다. 29 목사님들 가운데 이야기합니다. 순탄하게 아무 일 없이 갔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요. 하루하루가 사건 사고입니다. 지금도 후유증이 있습니다. 저녁에 집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조끔 어려운 것은 교구 목사님으로 해결합니다. 담임목사님을 찾는 것은 저래도 해결이 안 되니깐 찾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순풍에 돛 단 듯 온 교회가 아닙니다. 놀랄 일 많고 시련이 많았는데 너무나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 너무나 많은 순장님들 너무나 귀한 당회 장로님들, 사역 장로님들 무임 장로님들. 다락방안에 하루가 멀다하고 순원들의 눈물 나는 기도제목을 받을 때마다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성도님들이 많이 계시기에 일이 일이 아는 것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선언하고 송구영신 예배에 말씀드렸지만,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1만 성도 파송운동 선언하고 한때는 제가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지난 12월 31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이 왔다는 것은 이 어려운일을 가는데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말씀이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으면 오해가 해결된다고. 새해 첫 예배.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모세가 죽은 후에 이것만 되뇌는 분이 있다면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마지막에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의지하던, 사모하던 모세가 죽은 사건을 너희 민족에게 준 꿈을 기억하고, 그 땅을 향해. 내종 모세가 죽었으니. 모세가 걸림돌이 된 것처럼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힘을 내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꿈을 꾸어라. 낙심하는 성도님들에게 아픈 사건이 여러분의 인생에 의미부여가 되고, 여러분의 인생에 잃어버린 목표가 다시 찾아지는. 주님 축복의 사건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목표를 향한 의욕을 회복시켜줍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수 3: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수 6:12)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수 7:16)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수 8:10)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 3:5)


청소년 사역할 때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영어 성경으로 어메이징 띵스입니다. 놀라운 일을 주님께서 계획하고 계신다. 오늘 현실은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현실에 절망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의욕을 회복시켜주십니다. 내일이 없는 인생은 다 아시죠? 단테의 신곡이던가요. 지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는 요지의 글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떤 아픔을 겪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의지하는 모세가 죽는 것을 경험하더라도.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의 결핍된 많은 것들 때문이 아니라. 정복하지 못한 땅이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이런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를 한 번 만나보자고. 더 기도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죽기 전에 이런 지도자 만나볼까요? 현실이 너무나 어려운데 정말 놀라운 꿈을 심어주고. 정치는 어떻게 제가 할 수 없으니깐. 목회만이라도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날 교회만 오면 엿새 내내 모세가 절망하던 상황에 이싿가 늘 하나님 말씀 앞에 일어나라. 꿈을 향해 달려가라. 29 목사님들과 함께 이야기합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오느냐. 그게 아니라 이 사람들과 함께 꿈을 꾸기를 원합니다. 목회가 그렇고 인생이 이렇습니다. 끊임없이 끊으려는 세력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지난 간증 했지만 2학기에 번아웃이 왔습니다. 번아웃도 일종의 우울증이라는 것입니다. 참 그럴듯하다고 싶은 게 새벽이 즐겁지 않은 것은 2학기가 처음입니다. 책상에 앉아있으면 의욕이 없습니다. 이러니 잠이나 자지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왜 이렇게 빨리 회복한 것이 어떤지 아십니까? 방치 안 했습니다. 싸웠습니다. 일어나기 싫을 때 이를 악물고 일어났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금방 회복이 되던데요. 개척 초기에 이명이 왔습니다. 29 목사님들에게 협박합니다. 개척하면 겪을 거 다 겪는다. 기절도 해보고요. 새벽기도 시간에 얼마나 수면이 부족했는지. 말하는데 내가 무슨 소리 했지? 이것을 다 겪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과정을 견디게 한 것은 새벽입니다. 말씀이 회복시켜주니 이명, 평생 간다고 하던데요. 금방 낳았습니다. 는 아니고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귀에서 이명이 들려서 상대방 말이 안 들리더라고요. 그 고비도 말씀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의욕이 꺾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것 같은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때 말씀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의욕을 가지고 달려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함께의 정신을 회복시켜주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2)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홀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백성들과 함께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엘리야 선지자 아시죠? 대단한 종 아닙니까? 갈멜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850명을 상대로 승리한 인생입니다. 그때도 홀로 싸웠지 않습니까? 요즘으로 치면 우울증 같은 것입니다. 영적 침체를 만났는데.


...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텅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 지난가을에 겪었던, 수많은 성도님들을 섬기는 담임목사님에도 불구하고 자주자주 혼자 들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거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나만 홀로 남았거늘 증상에 있다면 말씀을 사모하세요. 그래서 남겨진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하나님에게 들어야 합니다. 29 예비 목사님들이 장소 때문에 고생합니다. 진짜 부탁을 하는데 고등학교나 중학교나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목사님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덕 보자 하지 말고 장학금 있는 대로 드리고. 장소를 아시는 분은 꼭 좀 연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어 하시는 것입니다. 분당을 다 뒤져도 장소가 나오지 않는데 딱 한 군데 70평 얻었는데, 인근 목사님이 못 들어온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빌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당시 보여준 인물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 함께 하기로 한 20명의 청년과 성도님들이 있는데 왜 현실을 과장하느냐고. 하늘이 노랗고 다 끝난 것 같은 것. 이것이 사단의 과장된 공격입니다. 뺏긴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주옥같던 옥한흠 목사님을 내려놓고 사랑의교회를 떠난 분이 20~30명이 되는데. 예배당 장소가 없으면 우리 집에서라도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가서 목사님에게 깨끗하게 양보하겠습니다. 천몇백만 원 손해 봤잖아요. 그러나 그 사건이 분당우리교회를 세워가는 내내 몇천만 원과 비교 안 되는 어마어마한 은혜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나와 함께하는 동역자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까? 몇 천명이 있습니다. 흩어지는 것이 슬픕니까?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디아스포라입니다. 언제 이것에 확신이더냐? 말씀이 임할 때입니다. 지난주에 29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자고 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가보자고. 헌금을 안 하셔도 드림 센터가 계획이 되어있습니다. 추정컨데 300억 정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에게 헌금을 요청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가보자. 강북 먼 지억 분은 얼마 못 따라가니 부익부 빈익빈. 어떤 헌금은 실내장식 할 돈도 없고, 그래서 한 통장으로 가보자고요. 부자 교회도 없고 가난한 교회도 없고 똑같이 필요한데요. 하나님 앞에서 청구하면 심사도 없고 금사도 없다. 마음이 불안하면 넉넉한 대로 청구하라.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주실 거라고 믿는다고. 통장을 홈페이지에 올렸더니 분당우리교회 성도님들도 헌금을 많이 했는데 미국에 계시는 권사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자세히는 말씀을 못 드려요 금방 알 것 같아서. 지난주에 택배가 하나 왔습니다. 엄청나게 무거워요. 딱 열어봤더니 동전이 이만큼 들어있는 것입니다. 광주 광역시에 계시는 성도님들이 수 년간 모아온 동전을 지폐와 함께 헌금을 보내주시고 손글씨로 썼더라고요. 29 교회 새로운 씨았으로 사용해주십시오. 분당우리교회 4대 비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한 교회가 1만성도 파송운동하고 4대 비전을 품고 있는데 광주 광역시에 있는 남쪽에 있는 성도님들이 정성껏 모은 헌금을 보내주시는 것이 이게 함께의 정신 아닙니까? 제가 마음에 두려움이 있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29 교회의 밑거름으로 사용하고 다 회수하여 또 다시 한국교회를 위하여 꿈을 꾸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될 줄울 믿습니다. 그 일을 우리는 할 수 있는 실력이 안 되니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읽기. 내년에는 우리 다락방도 못합니다. 상당한 순장 님들께서 29 교회로 가시기에.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기에 선포합니다. 오늘부터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읽기에 교회의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가기를 선포합니다. 권별 성경 해설. 미국에서 보내준 것을 봤는데 권별 성경 안내를 매주마다 영상을 제공해주실 것이고, 월요일, 목요일마다 읽다가 진도를 놓치시는 분들. 창세기는 34번째 읽으시는데 출애굽기까지 진도를 안 나가시는 분들. 읽다가 놓치면 끝이다를 막아드리겠습니다. 월, 목요일마다 3장 단위로 국내외에 있는 전문가 목사님들에게 의뢰하였습니다. 강의를 놓치면 끝까지 가보자고요. 드문드문 읽더라도 계시록까지 가보자고요. 그동안 새벽기도는 매일 성경으로 했는데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읽기에 맞추어서 진행됩니다. 아침부터 계속 그것을 올려드릴 것입니다. 장별로 강조하는 것을 익히고, 3장 단위로 익히고, 성경 권별로 익히면서 성경 읽기 다운받고 숙지하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한 말씀만 드리고 마치기를 원합니다. 지난 금요일 마음이 비장해지더라고요. 정들었던 성도님들, 이게 마지막 송구영신 예배가 되겠구나. 내내 추억의 찬양이 있습니다. 특별 새벽기도회 때마다 불렀던 찬양인데 가사를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진정으로 찬양할 때니
모이자 하나가 되자 우리가 갈 길이라


우리가 가정 가장마다 드리는 예배가. 29 교회가 되는 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꿈을 갖고 갈 것이며 우리는 가나안을 향하여 같이 춤추며 함께 울고 웃으며 나아갈 것입니다. 새해 첫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한동대학교 현동홀 4층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