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nant


1516교회 설교 녹취록 모음






12월

2025.12.31(수) | 송구영신 |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마 16:24-27)

요약 정리


  • 사람은 온 천하를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마 16:26).
  • 하나님이 주신 세계와 물질은 ‘노예처럼 매이는 대상’이 아니라 ‘감사로 경영하며 예배로 돌려드릴 선물’이다.
  • 세상은 사람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지만, 성도는 사람을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바라봐야 한다.
  • 보석의 가치는 숨기는 데 있지 않고 드러나 비추는 데 있다. 성도는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한다(마 5:13–14).
  • 마태복음 16장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선언하시고 제자들에게 동일한 길을 요구하시는 분수령이다.
  • 결국 ‘한 영혼을 살리는 삶’이 가장 가치 있게 한 생명을 쓰는 길이다.
  • 적용과 권면(실천 포인트)
    •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한 가족이 되라(관계의 회복, 환대, 용기).
    • 다음 세대를 위해 교사, 순장, 양육자, 중보기도자로 헌신하라.
    • 가족과 이웃 가운데 한 영혼을 품고 복음을 전하는 2026년이 되라.
    • 새가족을 환대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공동체 문화를 세우라.



녹취록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은혜와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힘 주시고 능력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동행하시며 위로해 주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합니다. 이곳에 다윗의 장막을 허락하셔서 주님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서 드려지는 모든 기도와 찬양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예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가득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표어 아래 삶의 방향을 주님의 가르침에 맞추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힘겨운 순간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시퍼시를 통해 교회 개척의 비전을 품게 하시고, 리조이스 캠프를 통해 청년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432일 워십을 통해 뜨겁게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힐링 그레이스를 통해 상처 입은 마음들을 만져 주시고 회복하게 하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로 귀하게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성도들에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품는 긍휼한 마음을 허락하셔서, 눈물로 기도하며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는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해에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강건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시간 우리 교회 성도들을 힘들게 했던 모든 아픔과 고통은 주님의 은혜로 사라지게 하시고, 더욱 건강하고 은혜가 풍성한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마음의 상처와 원치 않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완전한 치유와 자유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어둠의 권세는 주님의 이름 앞에 물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2026년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새해에는 더욱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시고,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는 거룩한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목사님과 사역자님들, 차세대 교사들, 모든 봉사자들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새해에도 영육 간의 강건함과 새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시는 이상준 목사님께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대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선포되는 말씀이 마음판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열매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희 교회가 이제 3년이 됐고 내년 4년 차인데, 그동안의 표어를 점검해 보면 2023년은 “다윗의 장막을 세우라”, 2024년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라”, 2025년 올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였습니다.


2026년 내년 표어는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가정이 되기를 바라고, 한 영혼을 살리는 여러분의 기업이 되기를 바라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이 말씀을 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이 문장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 소출이 많았어요. 그래서 창고를 크게 짓고 곡식을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즐기며 먹고 마시고 기쁘게 지내자”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20절.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온 천하 만물이 사실 한 영혼을 위해서 지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밤에 보는 찬란한 별들도, 드높은 하늘도, 물고기로 가득한 바다도, 온갖 동식물이 생동하는 자연도, 다양한 곡식과 과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 세계를 경영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이 물질 세계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431일 워십 미니스트리를 하는 것입니다. 주일 1, 2부 예배 밴드는 1516 밴드라고 하고요. 오늘 8시, 10시 예배를 섬긴 밴드는 3, 4부를 섬기는 431 밴드입니다.


왜 431인가? 이사야 43장 21절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일요일 교회를 만나 다윗과 같은 예배자로 예배가 회복된 것이 감사의 제목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 게, 세상이 악하여져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사람이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노예를 사고팔았고, 오늘날에도 일터에서 사람이 돈을 벌어들이는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돈 때문에 영혼을 파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슴에 손 얹고 따라해 보세요. 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나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입니다. 아멘.


최근에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20년 동안 방황하던 사람이 돌아오고, 30년 동안 방황하던 사람이 돌아옵니다. 그런 분들을 상담하면 참 감격이 있어요.


어떤 청년은 사춘기 때부터 일탈을 시작해 어둠과 거짓과 향락으로 살았지만,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기도 때문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마음이 들어 교회 예배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빠져나오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어둠의 세계에 오래 있다 보니 무당이 “귀신이 많이 붙었다, 굿하러 와야 한다” 유혹합니다. 그러나 굿으로는 약한 것만 떨어져 나가고 더 센 것이 들어오는 문제가 생깁니다. 지난주 설교를 듣고 “나는 거기 가면 안 되겠다” 결단하고, 나쁜 친구들의 연락을 끊고 버티는데 밤마다 흔들림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말합니다. “목사님, 저 같이 마음대로 살던 사람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받아 주실까요?” 자신이 없어서 말도 더듬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인 줄로 믿습니다. 과거가 부끄럽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분들, 직장 리더십을 가진 분들에게도 권면합니다. 직원이든 소비자든 그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입니다. 돈벌이 수단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영혼으로 바라보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겉모습이나 경제적 수준, 사회적 지위만 보는지, 영혼을 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성은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보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든 교회든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이든, 내 영혼을 봐줄 수 있는 사람, 내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평생의 동역자가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따라해 보세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톨스토이 작품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파홈이라는 농부가 땅에 대한 욕심으로 “땅만 넉넉하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해가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걸은 땅을 다 주겠다, 단 해 지기 전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제안을 받고 도전합니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욕심을 부리며 더 넓은 땅을 얻으려 뛰고 뛰어, 결국 출발 지점에는 돌아오지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습니다. 결국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한 평 남짓이었다는 결론으로 끝나죠.


온 천하를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입니다.


우리는 건강 관리, 자산 관리, 재산 관리는 열심히 하지만, 내 영혼을 돌보는 ‘소울 케어’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새벽기도로 한 해를 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사에서도 떠오르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온 천하를 얻었지만 33세에 요절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 또한 33세에 십자가를 지셨지만,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너무나 다른 결과입니다.


이제 본문 흐름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27절을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마지막 날 심판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혼이 귀하다”는 말이 “그 영혼을 숨겨 두고 나만 보존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가치를 쌓아 자기만 쓰려고 숨겨 두는 삶을 꿈꿉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많은 돈, 빠른 은퇴, 평생 편안한 삶. 이른바 파이어(FIRE) 라이프 같은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말합니다. 보석의 가치는 숨겨 둘 때가 아니라 드러날 때 빛납니다. 마태복음 5장 13–14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 소금은 녹아야 맛을 내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밝힙니다.


만약 예수님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가지셨다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실 이유가 없었겠죠. 하늘나라의 소유주이신 분이 왜 고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려오셨고, 섬기셨고, 오해를 받으셨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25절을 다시 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장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를 선언하시고, 그 십자가의 보혈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장입니다.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라며 막았지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제자도는 ‘사는 길’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가치한 것에 생명을 바치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론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가장 가치 있게 사는 길은, 또 다른 한 생명을 살리는 데 내 시간과 마음과 재능과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첫째,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한 가족이 되십시오. 송구영신예배에 오신 분들 환영합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나 더 자주 뵙고 싶습니다. 주일에도 뵙고, 한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가 있었던 분들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얻으려면 상처받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랑은 상처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의 생명을 내어 주시는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둘째, 다음 세대를 위해 섬겨 주십시오. 교회 학교에서 선생님이 되어 주십시오. 공동체에서는 순장이 되어 주시고, 일대일 양육자가 되어 주십시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품고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큰 축복입니다.


셋째, 가족과 이웃 가운데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2026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생명은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일 때 가장 가치가 있습니다.


결혼도 서로를 섬기기 위해 함께 서는 것이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한 생명을 위해 내 삶을 쏟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생명에게 복음을 전해 그 영혼을 살리는 것이 하늘에서 가장 기뻐하는 가치 있는 일입니다.


또한 새가족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처음 보는 분들에게 따뜻한 말로 인사해 주십시오. 예배당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작은 미소와 인사 하나가 교회를 “너무 좋은 곳”으로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철판 깔고 올라와서 예배드리고 다시 철판 깔고 내려가는 것, 그만합시다. 서로 아는 분은 더 반갑게, 모르는 분은 더 따뜻하게 인사합시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옆에 가족과 손을 잡으시고,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손을 잡으시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일요일 교회에 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2026년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회복되고 밝아지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이 한 영혼을 살리는 가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일터에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교회가 한 영혼을 살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2025.12.28(주) | 주일설교 | 하늘문이 열리는 기도의 사람 (삼상 29:1-2)

요약 정리


  • 제목: 하늘문이 열리는 기도의 사람 (사무엘상 강해 55회)
  • 본문 흐름: 다윗의 진퇴양난(삼상 29:1-2)과 사울의 두려움, 그리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 사건(삼상 28장)을 통해 “하늘로부터 열리는 응답”과 “땅의 방식으로 끌어올리는 해결”의 차이를 대비한다.

  • 1) 위기는 내 인생의 본질을 드러낸다: 다윗의 막다른 골목
    • 블레셋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전쟁 동참을 요구한다.
    • 다윗은 충성 서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애매한 답을 한다(참전도, 불참도 쉽지 않은 상황).
    • 여기서 드러난 본질은 “편한 선택으로 도피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리(이스라엘로 돌아갈 길)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 위기는 삶을 흔들어 놓지만, 동시에 내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본질을 붙잡게 한다.

  • 2) 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평소의 신앙이 위기의 응답을 만든다
    • 중요한 순간에만 하나님께 ‘친한 척’하며 해결을 얻으려는 태도는 지속되지 않는다.
    • 신앙 인격은 평범한 일상에서 형성된다.
    •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감동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위기의 순간에도 길이 열린다.

  • 3) 두려움은 사람을 비정상적 선택으로 몰고 간다
    • 사울은 블레셋의 전면전 의도를 보고 마음이 크게 떤다.
    • 하나님께 묻지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이 없다(삼상 28:6).
    • 두려움이 커질수록 사람은 ‘쉽고 빠른 길’, ‘검은 길’을 선택하기 쉽다.
    •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 중요하다(수 1:7).

  • 4) 하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돌아오라”는 부르심일 수 있다
    • 하나님의 침묵을 곧바로 버림으로 단정하지 말라.
    • 고난의 터널 같은 시간에도 하나님은 끝에서 기다리신다.
    • 호 5:15-6:1의 흐름처럼,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때는 ‘돌아오라’는 결단을 기다리는 때일 수 있다.

  • 5) 땅에서 끌어올리는 방식(샤머니즘) vs 하늘에서 내려오는 응답(복음)
    • 신명기 18:10-12는 점술, 무당, 신접, 박수, 초혼을 분명히 금한다.
    • 사울은 과거엔 신접한 자를 쫓아냈지만, 두려움 속에서 결국 엔돌의 무당을 찾는다.
    • 무당(미디움)은 “중간자”를 자처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딤전 2:5).
    •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국 더 강한 어둠을 불러오는 방식일 뿐이며 나중 형편이 더 심해진다(벧후 2:20).
    • 본문에서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은 방향부터가 왜곡된 표지다(삼상 28:13). 하나님의 응답은 하늘로부터 임한다.

  • 6) 결론: 하늘문이 열리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라
    •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가까이하신다(약 4:8).
    •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약 4:7).
    • 계 4:1의 “하늘에 열린 문”처럼,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자의 길로 돌아오라.
    • 마 16:19의 천국 열쇠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권세로 땅을 다루는 자리로 부름 받는다.
    • 연말과 새해의 전환점에, 세상 방식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로 하나님께로 돌아가 결단하라.



녹취록


네, 하늘문이 열리는 기도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해 55회 차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1절과 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아기스는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다윗에게도 전쟁에 동참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간 아기스 왕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를 받으며 지냈던 다윗은, 이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 놓입니다. 지난 1년 4개월 동안 충성스러운 신복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겉으로는 충성 서약 같은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애매한 답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참전할 수도, 참전하지 않을 수도 없는 진태양난의 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이 전쟁에 참전해 사울 왕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면, 그는 이스라엘로 돌아갈 길이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 약속하신 그 약속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길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믿고 지원해 준 아기스 왕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고 거절한다면, 그 또한 위태로운 상황이 됩니다.


사람들은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본질이 그 순간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이 순간에 드러난 본질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편한 길을 택해 광야의 훈련을 스스로 접고 블레셋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생에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스라엘로 돌아갈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편한 대로 두지 않으시고 유다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을까요?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의 본질을 붙잡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비로소, 지난 1년 4개월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제 연말입니다. 새 결심을 마음에 정직하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 기준점을 세우는 순간,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내 인생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스스로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선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정체성을 흔드는 선택을 하면 안 됩니다.


이제 3절과 4절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냄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무엘의 죽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오늘 사건의 배경으로 다시 제시됩니다.


특히 사울이 통치 초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오경, 특히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8장 10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점쟁이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사울이 처음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을 때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왔을 때 기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왕은 정보도 많고 돕는 자도 많아 보이지만, 높은 자리는 바람이 더 셉니다. 사울은 포지션상 결코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이 북쪽 수냄에 진을 치고, 사울이 길보아 산에 진을 칩니다.


이 배치는 전면전을 의미합니다.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의 허리를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깔린 것입니다. 사울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은 압도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이 없습니다.


종종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또 온 천지 만물도 하나님의 손길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나누고 싶은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인생은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선을 그리는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게 살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멋진 점을 찍으려는 태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신앙 인격은 매일의 평범한 순간에서 형성됩니다.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답은 1번입니다”라고 밀어붙이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태도가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 순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감동에 반응하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정직하라는 마음이 들 때 정직하십시오.


절제하라는 마음이 들 때 멈추십시오.


분노 대신 기도로 엎드리라는 감동이 올 때 순종하십시오.


영성은 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순종으로 문을 열면, 하나님은 다음 문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계속 무시하면, 문이 더 열리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그래야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제가 이 말씀을 보며 깨달은 것은, 말씀을 읽으면 자동으로 힘이 생긴다는 얘기 이전에, 강하고 담대해야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람을 비정상적 선택으로 몰아넣습니다.


갈망이 클수록 두려움도 커집니다. 그때 이상한 길, 검은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강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돌아오라”는 간절한 외침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오랫동안 불순종했기에 영적 감각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침묵이 곧 버림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욥도 고난 중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욥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고난의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호세야 5장 15절에서 6장 1절의 흐름처럼,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때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결단을 기다리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생이 어려울수록 세상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점집, 운수, 미신, 검은 해결책으로 가지 마십시오. 재미로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이제 7절에서 9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하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내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니라.


사울은 결국 무당을 찾습니다.


성경 번역에서는 “신접한 여인”이라 하지만, 히브리어로는 오브라는 말로 무당을 뜻합니다.


무당을 영어로 미디움이라고도 부릅니다. “중간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한 분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아버지께로 올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어둠의 방식에 기대려 합니까?


겉으로는 “효과”가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약한 어둠을 더 강한 어둠으로 눌러 덮는 방식입니다. 당장의 해결처럼 보여도, 결국 나중 형편이 더 심각해집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 말씀이 이를 경고합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해진다.


돈 문제도 그렇습니다. 제1금융권이 안 되면 제2, 제3로 내려가고, 결국 사채로 가면 당장 막을 수 있어도 더 큰 멍에가 생깁니다.


폭력 문제도 그렇습니다. 공권력이 아니라 폭력으로 해결하면, 더 큰 폭력에 종속됩니다.


내 인생을 누구에게 묻겠는가?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13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을 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문이 열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계시록 4장 1절에도 “하늘에 열린 문”이 등장합니다.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급하게 해결하려고 검은 길을 택하지 마십시오.


건강한 길, 근본이 회복되는 길을 택하십시오.


마태복음 16장 19절 말씀처럼, 천국 열쇠를 주시는 주님 안에서 하늘의 권세로 땅을 다루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5.12.27(토) | 새벽기도 |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수 23:1-10)


요약 정리


설교: 새벽기도 251227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수 23:1-10) / 이상준 목사


  • 본문은 여호수아가 말년에 지도자들을 불러 남기는 유언적 메시지다. 성경에서 유언적 메시지는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남기는 신앙의 핵심을 담는다(모세의 신명기, 다윗의 유언, 바울의 디모데후서, 베드로후서 등과 같은 결).

  • 여호수아가 먼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재정의다.
    • 여호와(야훼)는 자존자, 모든 존재 위에 계신 분이다.
    • 그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를 맺으셨다는 뜻이며, 사랑 때문에 그 관계 속으로 들어오셨다.
    •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로 역사하셨고, 앞으로도 약속을 완성하신다.

  • 핵심 정리는 “하나님을 걱정하지 말라”에 있다.
    • 여호수아는 평생의 경험으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확신한다.
    •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역할(순종)을 끝까지 감당하느냐에 있다.
    • 광야 1세대의 급격한 변질을 본 여호수아는 다음 세대의 영적 태만을 더 염려한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순종’에 집중하는 삶이다(수 23:6).
    • 정복이나 분배가 본질이 아니라,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 바울과 베드로의 유언적 권면도 동일하게 “성경을 붙들라 / 성경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결론으로 모인다.

  • 우상과의 거리, 하나님과의 거리 관리가 결정적이다(수 23:7-8).
    •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맹세하거나, 섬기지 말라.
    • 하나님께 가까이 하라. 두 마음을 품지 말라(약 4:7-8 인용).
    • 하나님과 “냉전” 상태(삐짐, 거리두기, 예배·교회 이탈)는 결국 영적 틈을 만들고 시험의 표적이 되기 쉽다.

  •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요구로 거래”하는 신앙이 아니라,
    • 삶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결단하는 신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며,
    • 그 결단 이후 하나님이 기대 이상으로 채우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녹취록


10절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총 2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23장인데, 여호수아가 지도자들을 불러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이어서 온 회중을 불러 또 한 번 유언적 메시지를 전하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성경에서 “나이 많아 늙었다”는 표현은 한 인물의 마지막 순간, 유언적 메시지가 시작되는 전형적인 신호로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1장도 다윗이 “나이 많아 늙었다”로 시작하고, 2장에서 솔로몬에게 마지막 권면을 남깁니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은 디모데후서, 베드로의 마지막 서신은 베드로후서입니다. 모세의 유언적 메시지는 신명기입니다. 요단강을 앞에 둔 모압 평지에서 남긴 한 달간의 메시지가 신명기이지요.


유언적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평생 하나님과 동행해 온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일생일대의 신앙적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 말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이제 나의 시대가 저물어가니, 너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겠다는 서론입니다.


3절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먼저 상기시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라.” 여호수아가 붙드는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언약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신 자존자이십니다. 모든 존재 위에 계시고, 다른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며, 어떤 타자에 의해 존재하지 않으시는 근원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와 언약적 관계를 맺으셨다는 뜻입니다.


언약은 쌍방의 약속이기에, 하나님도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스스로를 메어 두십니다. 존재의 위계로 보면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작은 존재와 약속을 맺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약속이 소중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언약을 맺으셨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구원의 완성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분이시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싸워야 할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 말합니다. 천지의 창조주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4절과 5절은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과 앞으로 하실 일을 함께 말합니다. 요단에서 대해까지,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나라들을 제비뽑아 기업으로 나누게 하셨고, 앞으로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쫓아내셔서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하나님의 역할을 상기시키고 재촉하는 것이 기도라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빨리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평생 경험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걱정할 대상이 아니라, 신뢰할 대상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역할을 감당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여호수아는 광야 2세대의 순복과 승리뿐 아니라, 광야 1세대의 불순종과 변질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떠난 뒤 다음 세대가 얼마나 빨리 무너질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안일해질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여호수아 1장에서 시작한 메시지, 곧 “말씀대로 살라”는 권면을 마지막에도 동일하게 남기는 것입니다.


정복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분배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순종이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정복도 은혜로 주시고, 분배도 은혜로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유언적 메시지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도 동일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도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끝까지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에서는 우상과의 거리를 분명히 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맹세하지 말고,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라. 우상을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서 4장 7-8절의 원리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거룩은 두 마음이 아닌, 하나의 초점과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싸우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해서, 혹은 원하는 응답이 없어서, 마음을 닫고 기도하지 않고 예배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아무 일도 없어 보여도 사실상 냉전이고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는 사이, 다른 것이 끼어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실망했다며 예배와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세상과 더 가까워지려 합니다. 혹은 “어디서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말로 이단과 사이비의 길로 기울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싸워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권면은 결국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너희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라. 하나님께 속한 태도를 분명히 하라.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아십니다. 몸이 돌아가기 전에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 뜻을 기뻐하십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마음에 품은 결단도 하나님이 아시고 받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10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천 명을 쫓는 승리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능력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능력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은 영원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큰 능력을 갖추느냐가 아니라, 내가 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느냐입니다.


기도를 거래처럼 만들지 마십시오. “이걸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밀당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삶을 구별하고 결단하는 기도가 믿음의 길입니다. 다윗이, 다니엘이, 에스더가 결단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책임지셨고, 상상하지 못한 자리까지 이끄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내가 이것을 요구해서 하나님이 주셨다”를 자랑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생을 결단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들로 채우시는 삶을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자의 삶, 예배자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2025.12.21(주) | 주일설교 | 천국의 인사이더 예수 그리스도 (마 2:1-6)

요약 정리


본문 흐름


  • 마 2:1: 헤롯 시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심.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을 찾음
  • 마 2:2-3: 동방 박사들의 질문에 헤롯과 예루살렘이 “소동”
  • 마 2:4-5: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메시아 출생지를 묻고, “베들레헴”이라는 답을 들음
  • 마 2:6: 베들레헴에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 “내 백성의 목자”가 되신다는 예언 성취가 제시됨



핵심 메시지


  • 하나님 나라는 ‘인사이드 아웃’의 나라다
    • 세상의 중심(권력/기득권)에 있다고 자부하는 인사이더들은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고 배제될 수 있다
    • 오히려 바깥에 있던 아웃사이더들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으로 부름받아 경배의 자리에 선다
  • 예수님은 천국의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이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 스스로 낮아져 오셔서 “목자”로 섬기기 위해 오셨다



인물 대비로 보는 본문의 구조


  • 헤롯(정치 권력의 인사이더)
    • 강력한 권력자이지만,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집착이 지배함
    • “유대인의 왕” 소식 앞에서도 경배가 아니라 제거와 음모로 반응하는 상징적 인물로 제시됨
  •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성전 인사이더)
    • 메시아 출생지 지식을 알고도 ‘확인’과 ‘경배’로 나아가지 않음
    • 오히려 권력과 결탁해 정보를 제공하며 자기 지위와 이익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드러남
  • 동방 박사들(아웃사이더)
    • 이방인이지만 별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을 찾고 “경배”하러 옴
    • 하나님께서 아웃사이더를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로 불러 세우시는 반전의 상징으로 제시됨



하나님 나라의 반전 원리


  •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천국에 앉는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8:11-12)을 연결해
    • ‘자기 확신’과 ‘교만’으로 버티는 내부자는 오히려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음을 경고
    • 겸비한 자, 소외된 자, 절망한 자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중심에 선다는 원리를 강조
  • 성경 전반의 ‘작은 곳/변방/낮은 자리’의 패턴을 연결
    •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 성전 중심이 아니라 변방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구원 역사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 왕좌 쟁탈이 아니라 목자 되심


  • 예수님은 “다스리는 자”이면서 동시에 “내 백성의 목자”로 오심(마 2:6)
  • 예수님의 시선은 권력 중심이 아니라 ‘목자 없는 양 같은’ 지친 사람들(마 9:36)에게 향함
  • 구약의 약속(겔 34:15-16)처럼
    • 하나님이 친히 잃어버린 자를 찾고, 상한 자를 싸매고,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 목자가 되신다는 약속이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고 해석함



“천국의 내부자”로서 예수님이 드러내는 복음의 비밀


  • 설교는 ‘내부 고발(폭로)’의 비유(영화 The Insider)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는 관점을 제시함
  • 그 비밀의 핵심은 복음
    • “나는 죄로 망가진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다”
    • “내 생명까지 내어주고 너희를 살리겠다”
  • 정치·종교·어떤 제도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됨



결론 정리


  • 세상의 인사이더(권력·기득권)는 예수를 두려워하고 제거하려 하지만
  • 하나님은 아웃사이더를 불러 경배의 주인공으로 세우시며
  • 예수님은 절대 권력자이면서도 스스로 낮아져 목자로 오셔서
  • 복음의 비밀을 드러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신다



녹취록


주일설교 2025.12.21 "천국의 인사이더 예수 그리스도" (마 2:1-6) | 이상준 목사


오늘 설교의 제목은 "천국의 인사이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2장 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 왕은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초까지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의 내부자, 곧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헤롯 대왕, 영어로는 헤롯 더 그레이트라고 불리는 이 사람의 이름 뜻은 "영웅의 아들"입니다. 이름처럼 상당히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에돔이 국가로서 무너진 뒤, 에돔 족속의 후예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25세에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로마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당시 로마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파르티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이를 물리치는 공을 세웁니다. 로마 원로원의 인정을 받아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이 되고, 이 헤롯 왕가는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이어집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 항구를 만들고, 사해 근처에 마사다를 건설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현대식으로 대규모 증축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가족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아내를 비롯해 친족들을 죽이고, 아들들까지 의심해 제거했습니다. 특히 후계자로 삼을 만큼 출중한 아들도, 자신이 죽기 일주일 전에 의심하여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왕이 있던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장 1절이 말하듯, 오늘 본문에서 헤롯은 단지 시대적 배경일 뿐입니다. 진짜 중심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동방 박사들입니다. 동쪽, 곧 바벨론과 페르시아 지역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그들은 중동권에서 유명한 점성술사이자 지혜자, 고위층의 조언자들이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이런 지혜자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장면이 나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을 뿐인데, 세상의 관계 지형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웃사이더였던 사람들을 갑자기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로 불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점에서 동방 박사들은 이방인이고, 낯선 점성술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계사를 주름잡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어서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소식을 듣고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찾아 경배하겠다는 말에,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이 반가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소동으로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왕도, 예루살렘의 사람들도 그분께 경배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웃사이더를 불러내어 그들이 주님께 경배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아웃사이더의 경배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12절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동서로부터 오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스스로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밖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전의 은혜가 있는 나라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주님 앞에 겸비한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반전은 성탄의 시작부터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은 들러리가 되고, 예루살렘 곁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 중심지가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성전이 있는 수도 예루살렘보다 북부 변방 갈릴리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하셨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도 왕궁이 아니라 예루살렘 동편의 가난한 마을 베다니에 머무셨습니다.


성경은 성전의 역사에서도 같은 반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겠다고 하신 성전은 모세의 성막도, 솔로몬 성전도, 스룹바벨 성전도, 헤롯이 증축한 대성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고 싶다 하십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입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하나님 나라는 인사이드 아웃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내보내시고, 바깥에서 소외되고 절망하던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우십니다.


창세기를 보아도 강력한 제국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히브리라는 말 자체가 변방 사람, 나그네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역사 무대의 중심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의료 어느 분야에 있든, 내가 인사이더라고 생각할수록 더욱 주님 앞에 겸비해야 합니다. 내 집, 내 권력, 내 이익이 예수님보다 중요해지는 순간, 우리는 헤롯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무엘상에서도 같은 구조를 봅니다.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였던 사울은 하나님께서 내보내시고, 주목받지 못하던 시골 목동 아웃사이더 다윗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우십니다.


오늘날에도 역기능적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느끼는 사람들, 취업난으로 지친 청년들, 타지 생활이 버거운 외국인 노동자들, 미래가 암담한 청소년들,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방황하는 가나안 성도들, 스스로를 큰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까지도 주님은 치유하고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꿈꾸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헤롯은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4절과 5절에서 헤롯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답하며 선지자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종교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성전의 내부자들이었지만, 어느 순간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왕의 하수인처럼 움직였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확인하러 가지도, 경배하러 가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날지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그 지식을 권력에 넘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절대 권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대 권력이 오시면 상대 권력들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계시록 19장 16절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선언합니다.


이후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나도 가서 경배하겠다"며 거짓말을 하고, 장소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른 길로 돌아가자,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는 유아 학살을 저지릅니다. 권력에 집착한 헤롯의 끝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제거하려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 신성모독죄와 황제모독죄라는 두 가지 큰 죄목을 씌워 십자가형으로 몰아갑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자리와 생계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유대 땅 베들레헴아… 내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자리를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목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습니다. 왕궁이 아니라 구유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같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에스겔 34장 15-16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고, 상한 자를 싸매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들레헴은 실제로 목자들의 마을입니다. 다윗도 베들레헴 출신의 목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성탄의 시작부터 보여 주십니다.


정치와 종교의 인사이더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이신 예수님은 정반대로 행동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내려놓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책 "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일상 가운데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일상에서도 천상을 살아낼 수 있음을 보여 주시고,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짐을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포합니다. 모든 슬픔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기뻐할지어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도 기뻐할지어다. 더 이상 살 용기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지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러 오셨고, 이 땅에서 잠깐 잘 살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전은 인사이드 아웃을 넘어, 예수님 안에서는 업사이드 다운입니다. 가장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통과하시고 부활과 승천으로 다시 올라가셨을 뿐 아니라, 우리도 그 천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영화 "더 인사이더"(The Insider)는 담배 회사의 내부자가 진실을 폭로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천국의 내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묵상했습니다.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은 한마디로 복음입니다. "나는 죄로 망가진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 생명까지 내어주고 너희를 살리겠다." 이 비밀을 공개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오셨습니다.


정치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종교나 문화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영역이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가짜 인사이더들을 밖으로 밀어내시고, 세상에서 절망하던 아웃사이더들을 "너희가 진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 부르시며 무대 한가운데 세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여러분의 가정과 인생과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 행하실 일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을 기대합니다. 아멘.




2025.12.20(토) | 새벽기도 | 박애와 편애의 하나님 (수 21:27-45)

요약 정리


  • 설교: 새벽기도 251220 "박애와 편애의 하나님"
  • 본문: 여호수아 21:27-45
  • 핵심 주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베푸시는 박애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 진정성과 열정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가문에게 특별한 호의(favor)를 주시는 편애의 하나님이시다.



1. 본문 관찰: 레위 지파 기업 분배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 여호수아 21장은 레위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성읍들을 기록한다.
  • 레위 지파는 “여호와가 기업”이라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생계를 위한 거주지와 목축을 위한 목초지가 포함된 성읍들이 주어진다.
  • 게르손 자손은 요단 동편(므낫세 반 지파)과 요단 서편(잇사갈·아셀·납달리)에서 성읍들을 받아, 동서에 걸쳐 배치된다.
  • 무라리 자손은 스불론(서편)과 르우벤·갓(동편) 지파 영역에서 성읍을 받는다.
  • 레위 지파 전체가 받은 성읍은 총 48개이며, 이는 하나님 백성(12)의 완전성과 땅의 사방(4)을 아우르는 상징적 의미로도 묵상할 수 있다.
  • 본문 결론(45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응했다는 선언은, 기업 분배와 정착, 안식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임을 강조한다.



2. 설교 전개: ‘분배 본문’에서 읽어내는 영적 구조


  • 성경의 기업 분배는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니라, 이후 역사와 신앙 구조에 영향을 주는 배치다.
  • 레위 지파는 전국에 흩어져 예배와 말씀 교육을 담당하는 구조로 자리 잡는다.
  • 네 그룹(아론의 자손 / 고핫 / 게르손 / 무라리)으로 나뉘어 성읍이 배분되는데, 각 그룹이 맡은 역할의 성격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
    • 고핫: 성물 운반(가장 중심 역할)
    • 게르손: 성막의 휘장·천막 관련 운반
    • 무라리: 기둥·받침 등 무거운 구조물 운반
  • 지파별 배치를 지도로 보면, 상대적으로 ‘중요한 지역’과의 연관성이 보이며 하나님 나라 안의 질서와 우선순위를 생각하게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3. 첫 번째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반전(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 하나님 나라는 인간 질서의 고정된 서열을 뒤집는 반전이 반복된다.
  • 장자 중심 구조가 늘 그대로 가지 않고, 아벨/요셉/에브라임처럼 ‘예상 밖의 선택’이 나타난다.
  • 이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하나님 나라 원리를 보여준다.
  • 결론적으로, ‘뒤처졌다’고 느끼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충분히 반전의 기회를 가진다.



4. 두 번째 메시지: 하나님은 박애이면서도 편애하신다


  •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으로, 모두에게 관대하게 베푸시는 박애의 하나님이시다.
  • 동시에 성경은 특정 인물에게 “큰 은총(호의, favor)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 다니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 마리아: “은혜(호의)를 입었다”
  • favor(호의)가 반복적으로 특정 대상에게 쌓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편애’처럼 보일 수 있다.
  • 설교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과 열정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고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성경 원리(잠 8:17)로 정리한다.



5. 결론: 특별한 은총을 사모하는 가문이 되라


  • 하나님의 박애만으로도 우리는 안전하게 살 수 있지만, 예배자라면 “특별한 은총”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 레위 지파(특히 제사장 가문)의 헌신은 단지 한 세대의 선택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큰 영적 영향력을 남긴다.
  • 설교는 새벽 예배의 ‘현장에 나오는 결단’ 자체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가문과 자녀 세대에 은총을 베푸시길 구하며 기도로 마무리한다.



녹취록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21장 27절에서 45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레위 가족의 게르손 자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살인자의 도피성 바산 골란과 그 목초지를 주었고, 또 브에스드라와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두 성읍이오. 야르묵과 그 목초지와 감몬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네 성읍이오. 아셀 지파 중에서는 미가엘과 그 목초지와 압돈과 그 목초지와 헬갓과 그 목초지와 르홉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네 성읍이오. 납달리 지파 중에서는 살인자의 도피성 갈릴리 게데스와 그 목초지를 주었고, 또 함못과 그 목초지와 가르단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세 성읍이라.


게르손 사람이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은 모두 열세 성읍과 그 목초지들이었더라. 그 남은 레위 사람 무라리 자손의 가족들에게 준 것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욕느암과 그 목초지와 가르다와 그 목초지와 딥나와 그 목초지와 나할랄과 그 목초지이니 네 성읍이오. 준 것은 베셀과 그 목초지와 야하스와 그 목초지와 그데못과 그 목초지와 므바앗과 그 목초지이니 내 성읍이오,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길르앗 라못과 그 목초지이며, 또 마하나임과 그 목초지와 헤스본과 그 목초지와 야셀과 그 목초지이니, 모두 내 성읍이라. 이는 레위 가족의 남은 자, 곧 무라리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이니, 그들이 제비뽑아 얻은 성읍이 열두 성읍이었더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받은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성읍이옥, 또 그 목초지들이라. 주위에 목초지가 있었고, 모든 성읍이 다 그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을 때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 45절 같이 읽겠습니다."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아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 같이 함성할까요?"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아멘. 하나님께서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에게 동행하여 주시는 은혜가 체험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박애와 편애의 하나님"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박애와 편애의 하나님.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 그리고 요단 서편의 아홉 지파 반, 합쳐서 열두 지파에게 기업 분배를 해주었습니다.


19장까지 그리고 20장으로 건너와서 도피성 6개를 결정했는데, 도피성 요단 동편의 3개, 요단 서편의 3개 이렇게 결정을 합니다. 지도를 한번 보여주시면, 지도 상에 보시면 도피성 6개가 북쪽으로 갈릴리, 게레스, 그리고 중부에 세겜이 있고 남부 유다 산악지대 해브론이 있고, 우측으로 건너오면 루벤 땅에 베셀이라고 있습니다. 중부 지역에는 가드 지파에 속한 길르앗 라못이 있고, 북쪽에는 골란이 있습니다. 6개의 도피성이 어느 지역에서든 30km 안에 접근이 가능하고, 또 굉장히 중요한 랜드마크 지역에 해놨기 때문에, 어디 시골에 어려운 데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리고 도피성은 이 대로를 열어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피신하기에 적합하게, 용이하게 그렇게 만들어 놨던 거죠. 도피성이 이렇게 요단 동쪽의 세 개, 서쪽의 세 개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그게 이제 여호수아 20장이고요. 그리고 오늘 21장으로 들어와서, 어제가 이제 전반부, 오늘이 후반부인데, 레위 지파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분량이 너무 많으니까 21장 전체를 반으로 나눴어요. 전반부 어제 본문은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에게 준 기업이 몇 개냐, 여러분 기억나세요? 기억이 아마 안 날 겁니다. 숫자까지 우리가 다 세지 않으니까. 그래서 레위 지파 중에서 고핫 자손의 모세와 아론이 속해 있고, 그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죠.


제사장의 자손들에게 준 게 열세 성읍이고, 그다음에 고핫, 게르손, 무라리, 게르손, 고핫, 무라리 삼형제잖아요. 레위 지파의 세 아들입니다. 그들에게 기업을 나눠줬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패밀리가 게르손, 고핫, 무라리 중에 어디예요? 고핫입니다. 그러면 왜 고핫가 제일 중요한가? 성경적으로 찾아보면 누가 동생이 고핫 더 헌신을 했다든지, 뭘 더 잘했다든지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거기서 모세와 아론이 나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 가문으로 평생을 대대로 헌신을 했기 때문에 그들을 가장 중요하게 으뜸으로 여겼죠. 둘째인 고핫 제일 중요한 사역에서도 역할을 했고, 그리고 땅도 기업도 먼저 우선순위로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게르손, 그다음에 막내인 무라리 이렇게 받습니다.


그래서 어제 내용은 아론 자손, 제사장 패밀리에게 준 기업, 그리고 고핫 자손에게 준 기업, 그리고 오늘의 내용은 게르손 자손에게 준 기업, 무라리 자손에게 준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정복 부분을 여러분이 아침 큐티하고 묵상하실 때는 와 신난다 그랬는데, 분배, 오늘은 또 뭘 묵상을 해야 되나 이런 고민이 되시죠? 네, 고민 안 하세요? 이거 고민이 되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조금 전체적으로 정리를 해서 보고, 그리고 어제와 오늘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27절 말씀 보여주세요.


레위 가족의 게르손 자손에게는 므낫세 반지파 중에서 살인자의 도피성 바산 골란과 그 목초지를 주었고, 또 브에스드라와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두 성읍이요. 레위 지파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지 않겠다라고 분명히 얘기하셨어요. 신명기 10장 9절 같이 읽어볼까요?"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아멘.


그래서 레위 지파에 보면 분명히 형제들 중에 분깃이 없고 땅을 기업으로 준다고 했어요, 안 준다고 했어요? 안 준다고 해놓고 48개나 줬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오늘날로 생각을 해보자면 목회자들이나 사역자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해서 사는 겁니다. 세상 물질에 특별한 욕심을 갖지 않는 게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 분명히 그들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겠다고 했지만, 적어도 그들이 살아갈 기반은 주셨다.


그래서 이건 생각하기 나름인데, 영적인 부분, 또 실제적인 부분, 이 두 가지의 균형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오늘 본문에도 27절 다시 보여주시면 바산 곤란과 그 목초지를 주었고, 베셀과 그 목초지를 주었다. 성읍만 준 게 아니라 그 성읍을 당시에는 고대 사회는 1차 산업, 농경 시대고 목축업을 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주변 목초지까지 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거주할 곳뿐만 아니라 그들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제사장 같은 경우에는 다윗 시대에 24반차가 있었죠. 그러면 15일 동안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성전 업무를 보고, 나머지 11개월 15일은 자기 땅에 가서 농사 짓는 거예요. 제사장도 농사 지었어요. 저 혼자 재미있어 하는데.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들과 사역자들, 그래서 교회마다 그리고 목회자들마다 약간의 관점이 다르긴 한데, 저는 하나님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 자체를 또 제공해야 된다. 이 두 가지 균형의 관점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 27절에 다시 한번 보여주시면 게르손 자손에게는 어느 지파에서 두 개 성읍을 줬어요? 므낫세 반 지파, 이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인가요, 서편인가요?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이죠.


요단 동편. 아까 지도상에 보셨어요? 28절 한번 보시겠어요? 제 절수에 의하면 보여주세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또 네 개의 성읍을 줍니다. 30절.


아셀 지파 중에서 또 네 개의 성읍을 줍니다. 32절. 같이 읽어볼까요? 납달리 지파 중에서는 살인자의 도피성 갈릴리 게데스와 그 목초지를 주었고, 또 함못과 그 목초지와 가르단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세 성읍이라. 그래서 게르손 자손에게 총 몇 개를 주었나요? 33절에 보면 13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좀 약간 독특한 점은 요단 동편과 서편에 걸쳐서 줬다는 거. 이게 보이세요? 안 보이세요? 27절에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이었잖아요. 이스라엘, 아셀, 납달리, 갈릴리, 게레스 이쪽은 다 요단 서편이잖아요. 요단 서편의 갈릴리 쪽, 북부 갈릴리 지역인 겁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지형에 대한 그림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34절. 므라리 자손의 가족들에게 준 것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용람과 그 목초지와 가르다와 그 목초지와. 그래서 므라리 자손에게 준 첫 번째 땅의 배분을 어느 지파에서 줬다고요? 스불론.


너무 빨리 사라지셨는데. 36절 한번 보겠습니다. 루벤 지파 중에서 준 것은 베셀과 그 목초지와 야하스와 그 목초지와. 그 다음에 루벤입니다.


여러분이 본 첫 번째 스불론은 요단 동편이에요? 서편이에요? 헷갈려하지 마세요. 루벤, 갓, 므낫세 반 외에는 다 서쪽이에요. 그러니까 스불론은 서쪽이에요. 그런데 36절에 어느 지파요? 르우벤 지파.


르우벤 지파는 어느 쪽이에요? 요단 동편이에요. 38절 같이 읽어볼까요? 갓 지파 중에서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길란, 나목과 그 목초지이며, 또 마하나임과 그 목초지와 총 4개를 줍니다. 그래서 4개, 4개, 4개 해서 40절에 보면 무라리 자손에게 몇 개를 주었어요? 12개를 주었어요. 그리고 나서 총합을 계산하는데 41절 같이 읽겠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받은 성읍은 모두 48 성읍이오. 또 그 목초지들이라. 48개를 주었습니다. 자, 레위 지파에게 기업 분배를 할 때 총 4그룹으로 나눴던 거예요.


게르손, 고아, 무라리인데 왜 네 그룹인가? 왜냐하면 고핫 자손 중에서 모세와 아론이 나왔고, 아론 제사장 지파에게 첫 번째를 준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 그리고 게르손, 고아, 무라리 이렇게 총 넷입니다. 그러니까 좀 정리를 해보자면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에게 맨 먼저 주면서 총 몇 개를 줬다고요? 13개를 줬어요. 그리고 고핫 자손은 성물 운반 중에서 성막이 40년 동안 이동할 때 뭘 담당했냐면 그 안에 있는 성물을 담당했어요.


성물을 움직인다는 게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고핫 자손에게 그 역할을 맡겼고, 아무래도 그들이 제사장을 배출한 가문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고, 또 제사장들하고 직접 소통을 하는 데도 가장 좋았겠죠. 그래서 그들이 성물 운반을 담당했는데, 그들은 총 몇 개를 받았어요? 어제 본문을 보면 10개를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세 번째가 게르손이 장남인데, 게르손이 두 번째로 밀렸죠.


아론의 제사장 때문에 세 번째로 밀렸고, 그래서 게르손이 받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몇 개를 받았어요? 13개를 받았어요. 13개, 10개, 13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막내인 무라리가 몇 개를 받았어요? 알았어요? 12개. 방금 전에 읽은 거 우리가 기억이 나잖아요.


그렇죠? 13개, 10개, 13개, 12개. 이렇게 하면 총 몇 개예요? 그게 48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저도 성경을 계속 보다 보니까 숫자가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많이 갖잖아요. 레위 지파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역자들이었는데, 열둘이라는라는 숫자 자체는 하나님 백성의 완전수이고 곱하기 4 그러면 48이 되는데, 4는 동서남북 사방 땅의 완전수이죠.


레위 지파가 원래는 시몬과 레위가 폭력을 행사하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저주를 받아서 형제들 가운데 흩어질 거다. 그 예언대로 됐는데, 레위 지파는 그래도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표현하는 사건을 통해서 반전을 이루게 되고 제사장 지파로 선택이 됐죠. 그러니까 그들이 전국으로 이렇게 흩어진 겁니다. 전국으로 흩어져서 그들은 제사 업무를 담당하고 또 말씀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전국에 12개의 지파로 흩어져서 12 지파에게 예배와 말씀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러면 12개, 12개, 12개, 12개를 주지 왜 13개, 10개, 13개, 12개였을까? 성경 어디에도 답은 없어요. 그래서 그냥 저 혼자 생각인데, 전체 지도를 놓고 계속 보니까 이거는 땅의 크기와 그 안에 있는 성읍들의 개수의 영향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제일 조금 낸 데가 요셉 지파예요.


요셉 지파가 좀 욕심을 냈나? 여전히 요셉 지파에 대해서는 제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얘네들은 항상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여튼 그런 부분은 있지만, 아무래도 땅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전체 구도를 갖고 얘기하는 건, 오늘 본문은 제가 다 봤어요.


전체 구도를 갖고 얘기하자면, 제가 이 48개 성읍에 대해서 보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보니까 새로운 깨달음이 생기더라고요. 지도를 한번 보시면, 다시 지도를 보겠습니다. 오늘 지도가 되게 중요한데, 뒤쪽에 앉으신 분들 좀 보일지 모르겠어요. 제사장 지파가 전체 사역자들, 성전 사역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라고 해서 전부 제사장이 되는 게 아닙니다. 레위 지파는 사실 성소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사장들만 성소에 들어가고, 그중에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중에서 제사장 역할을 했던 고핫 자손의 아론의 가문에게 준 땅이 어디였어요? 제일 아래쪽에 유다 지파에게 줍니다. 유다 지파가 우리가 생각할 때 열두 지파 중에서 제일 중요한 지파이죠. 거기서 앞으로 장차 다윗의 자손들, 왕들이 나오고 메시아가 오십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 갈렙이 점령했던 헤브론, 그러니까 도피성 중에도 6개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 헤브론이거든요.


그 헤브론을 누구에게 주었어요?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었어요. 그래서 이 중요도가 그대로 연결이 됩니다. 제일 중요한 아론의 자손들에게 유다 지파 지역에서 13개를 줍니다. 유다 지파는 성읍들도 많고 땅도 굉장히 넓죠.


그리고 연결되어 있는 게 그 안에 있는 시몬과 베냐민인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시몬은 남북 왕국이 갈라질 때 시몬이 북쪽으로 올라가지만, 그러면 베냐민은 남게 되죠. 기적적인 것은 베냐민이 배출한 첫 번째 왕이 누구였어요? 사울이었어요. 사울은 다윗을 평생 원수 삼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그 자손들을 각별히 여겼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는 남북이 갈라질 때 오히려 남습니다. 그것도 또 하나의 성경의 반전인데, 그래서 유다, 시므온, 베냐민에서 13개의 성읍을 제사장 가문에게 준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지파가 어디겠어요? 땅의 기름 부음과 땅의 축복을 받은 지파가 어디입니까? 요셉 지파예요. 그중에서도 에브라임이죠.


에브라임과 므낫세인데, 그래서 에브라임이 가장 중심의 땅에 자리를 잡은 거예요. 그래서 에브라임하고 연결된 데가 어디입니까? 남쪽으로 단과 북쪽으로 므낫세 반 지파인 거예요. 여기에 누구에게 어느 레위 지파 가족에게 땅을 주었겠어요? 게르손, 고핫, 므라리 중에 제일 중요한 데가 고핫이죠. 고핫 자손에게 그 다음 여기서 땅을 준 겁니다.


열 개. 이런 관점으로 보니까 재미있지 않으세요? 안 재미있어요? 언젠가 저희가 이스라엘을 가야 됩니다. 내후년에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가기는 가요. 그래서 제가 좀 더 안정이 된 다음에 성지순례 가려고 하는 겁니다.


북쪽으로 올라가 보면 잇사갈, 아셀, 납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잇사갈, 아셀, 납달리가 요단 서편이 본격적인 약속의 땅이니까. 그래서 이제 세 번째 구역입니다. 지금 전체를 네 구역으로 나눴을 때 유다, 에브라임, 북부 다음에 동부예요.


동부가 제일 마지막이에요. 그러니까 동부에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가 저는 주저앉았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생들이 주인공인 곳에서 우리는 아무 흥미가 없다. 그리고 주저앉은 것은 별로 영적 관점에서 보면 좋지 않다.


이렇게 해석을 하니까 보라통독을 하는 분들이 성경에 어디 그렇게 써있냐고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데 성경 전체의 맥락을 놓고 이것도 제가 언젠가 책을 쓸 텐데, 하여튼 정리를 해보면 요단 동편은 약속의 땅에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어요. 제일 마지막에 제일 빨리 이방 지역으로 바뀝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대가벌리가 들어서죠.


그러니까 완전히 이방 땅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군대 귀신들린 자가 돼지 떼에 들어가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키우지 않거든요. 대가벌리 땅이라는 게 요단 동편이 그 정도로 심각하게 이방 지역으로 변질됐다, 이런 걸 알 수 있죠.


그래서 루벤과 므낫세를 보면 안타까운 부분인데, 다시 세 번째 그룹,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요단 동편 갈릴리 동편에 있는 므낫세 반까지를 포함해서 므낫세 반은 요단 동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복받은 요셉의 자손이기 때문에 껴줬는지, 하여튼 간에 그렇게 네 개 중에서 게르손 자손에게 13개를 줍니다. 여기도 땅이 상당히 넓고 성읍들이 많기 때문에 13개를 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추정이에요.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어디겠어요? 요단 동편의 아래쪽에 있는 루벤과 갓.


그런데 여기다가 왜 스불론을 껴줬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거는 저도 아무리 추정을 해봐도 잘 모르겠어요. 누구 아시는 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세 개를 합쳐서 맨 마지막 막내인 므라리에게 네 개를 줍니다.


게르손, 고핫, 므라리 세 패밀리가 있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인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고핫 자손에서 제사장 아론의 후손들이 나오게 되고, 고핫 자손이 성막을 40년 동안 계속 운반했잖아요. 불기둥, 구름기둥이 옮길 때마다 운반을 했어요. 그러면 순서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고핫 자손이 성물을 들고 먼저 나가요. 성물을 이렇게 각각 보호에 싸서 이렇게 나갑니다. 나가고 나면 기둥을 먼저 뺄까요? 아니면 지붕하고 천막을 먼저 뺄까요? 그렇죠. 지붕하고 천막을 먼저 빼야지, 안 그러면 기둥부터 빼면 그냥 주저앉아 버리잖아요.


그래서 게르손 자손이 천막과 휘장과 지붕과 이런 것들을 정리를 해서 이동을 합니다. 그리고 나면 무라리, 막내가 제일 고생했어요. 기둥 넓은 거, 제일 무거운 거 들고 이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방금 본 것처럼 레위 지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제사장 가문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인, 영적 지파, 영적인 기름 부음을 받은 유다 지파에게서 기업을 받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그 유다 지파가 결국에는 다윗의 계보를 이어가는 이스라엘의 가장 핵심 중의 핵심이죠. 그리고 그 다음 중요한 고핫 자손에게 땅의 복을 받은 에브라임과 그 주변 지파들, 그 다음 중요한 게르손 자손에게 그래도 남아있는 요단 서편의 북부 지역, 그리고 그 옆에 붙어있는 므낫세 반 지파, 마지막으로 무라리 자손에게 요단 동편 르우벤, 갓, 그리고 스불론을 하나 끼워서 거기서 열두 개를 줍니다. 자,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열두 지파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맞아요.


맞죠? 네, 맞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도 게르손과 무라리를 보았는데, 다 성전 사역자이고 다 성전 사역에 헌신된 사람인 거 맞아요. 그러나 오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경중에 따라 순서를 달리하셨다. 경중에 따라서 그들에게 준 지역이 달랐다라는 거예요.


이런 부분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을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이거는 전에도 한번 강조했던 건데 마태복음 19장 30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은이라. 아멘.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하나님 나라는 소외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반전의 은혜가 있는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반전의 은혜를 이야기하자면 성경에 너무너무 예시가 많아요. 항상 장자들이 복을 받도록 해주셨는데, 장자들이 꼭 복을 못 받고 막내들이 복을 받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가인과 아벨 중에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예배자는 아벨이었어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고 축복한 아들은 거의 막내라고 할 수 있는 열한 번째 요셉이었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원래 므낫세가 장자인데, 동생인 에브라임이 더 복을 받았어요. 우리가 방금 보았던 레위의 세 아들 게르손, 고핫, 므라리 중에서도 장자인 게르손이 아니고 고핫이 복을 받았어요. 장자, 장녀 여러분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장자와 장녀에게는 하나님이 이미 법적으로 최고의 축복을 주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거 믿고 그냥 하나님하고 안 친하고 자기 멋대로 살면 그 가진 복을 자기가 쏟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런데 둘째나 막내들은 슬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법적으로 보장된 게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반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거를 막아두시는 게 아니라, 그 막내가 둘째가 더 하나님을 향해 진정성이 있고 열정을 가지면 그 인생을 하나님이 기꺼이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현상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리더십을 주셨어요. 이거는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에서 은혜 받으시는 분들은 자매님들이에요. 그래서 안타깝다는 얘기입니다. 어제 한 성도님이 장례식장에서 그런 얘기 하시더라고요."1516교회 와보고 깜짝 놀랐다.


전체 순장 모임 왔는데 남자 순장들이 이렇게 많은 교회는 처음이다."저희가 부부 순을 가능하도록 권면하는 이유 중에 하나죠. 그리고 지파의 반전도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저주받아서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헌신해서 제사장 지파가 되고, 유다 지파가 동생을 20냥에 팔아넘겼다가 기회주의자였는데 인생이 반전이 돼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영적인 리더십을 가진 지파가 됩니다. 예수님 시대도 종교인들은 예수님께 엄청 혼나기만 하고,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의 인생도 반전이잖아요. 박해자가 전도자가 되었어요.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하나님 나라는 반전의 은혜가 있는 나라입니다."그래서 여러분 항상 어떻게 보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되고, 내가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잃지 않을까 스스로 겸비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되는 거죠. 그리고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절대로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반전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뭐냐면, 두 번째는 하나님은 반전의 은혜도 주시지만, 그러나 편애하시는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다니엘에 대한 부분, 다니엘 10장 11절 같이 읽어볼까요?"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다니엘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큰 은총을 받은 사람아."여기서 은총은 영어 번역에 은혜라는 'grace'로 번역을 안 하고 주로 'favor', 호의라는 단어로 번역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로 같이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뭘 입었다고요? 은혜를 입었다.


이 단어도 'favor'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Favor'라는 건 호의라는 뜻인데, 오늘 제게 절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럴 때 호의를 베풀어주시겠어요?"Would you do me a favor?"이렇게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이 'favor'가 쌓이고 쌓이면 편애가 되는 거예요. 제 이 설교는 가끔 들어보신 분이 있을 거예요.


캐나다 밴쿠버에 있을 때 제일 마지막 예배가 청년부 예배였어요. 그런데 밴쿠버는 북미는 '라이드' 문화잖아요. 대중교통이 그렇게 잘 되어 있지 않고 각자 차들을 갖고 다니는데, 청년부 예배가 딱 끝나면 형제들이 자매들한테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적극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favor'를 주겠다는 얘기를 못 듣는 자매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마음이 어려워서 잘 정리를 해주고 그랬는데, 만약에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에게 계속 'favor'를 주잖아요? 다른 사람에게는 안. 주고 이 사람한테만 주잖아요. 그러면 그걸 우리는 편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편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시는 일반 은총을 주시는 분이세요.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박애라는 게, 필랜트로피라는 단어는 박애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한다가 박애예요. 박애주의.


아시겠어요?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이것도 있어요. 이게 없다고 얘기하지 마세요. 그래서 무슨 평준화 교육을 한다고 해서 진짜 탁월한 친구들이 있잖아요.


탁월한 친구들은 영재 교육도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교육계에 있는 분들은 이게 모든 걸 다 표준화 교육시키고 공평하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누구만 편애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니요, 특출한 사람들도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그렇게 교육을 시켜야 나라에 유익이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냐면 악인들에게도 너는 햇빛을 안 쏘여줘. 넌 빗방울도 내리지 마라. 이렇게 안 하신단 말이에요.


다 베풀어 주신다고요. 하나님은 굉장히 관대하신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을 향해서 진정성을 갖고 열정을 갖고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더 이뻐하실까요? 안 하실까요? 더 이뻐하시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다니엘과 마리아 예를 들어드린 겁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너는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페이버를 받은 사람이다라고 표현을 한 거예요. 성경 잠언 8장 17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구절 보시면 주님을 진정성 있게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님이 더 이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말씀과 기도에 특별한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편애하신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박애로도 우리는 평생을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자로 산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특별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는 인생을 살아봐야겠다, 이런 욕심을 내시면 좋겠어요. 이런 열정을 가지시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왜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모세와 아론이 그냥 40년 광야에서 고생하고 끝났겠는가? 그 자손들이 제사장 가문이 돼서 그 제사장 가문으로 세상에 모든 걸 다 끊고 언약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겠는가? 하나님이 오늘 레위 지파에게 어제와 오늘 분배해 주시는 걸 보면 여러분, 그냥 딱 나눠주고 끝난 게 아니라 이게 앞으로 오는 역사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미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머지 10개 지파는 반역을 일으키고 남북 분열 왕국 시대 때 그냥 올라가 버리잖아요. 그리고 그들이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우상 숭배하고 엉망이 되잖아요. 그래도 끝까지 다윗 언약을 지켰던 남유다의 땅을 배분받았던 레위 지파는 아론 제사장 가문의 후손들밖에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한 가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오고 오는 세대의 그 여파를 보고 계시는 거잖아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제 단에 오늘 올라오면서 하나님, 오늘 이 새벽에 이 메시지를 듣는 현장에 나오신 분들 특별한 은총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했어요. 여러분, 현장에 나온다는 거, 이게 생각보다 물론 약간 오늘 날씨가 풀리긴 했지만 여러분 새벽에 나오실 때 결단이 필요하지 않나요? 우리 자녀들 벌써 아까는 반쯤 깨있더니 지금 완전히 기절했는데, 이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걸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아니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배당에 와서 성전에서 드러누워서 자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헛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한 가지 기도하고 여러분 개인 기도하시면 좋겠는데요. 하나님, 저와 저희 가족들, 저희 자녀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니엘처럼, 마리아처럼 제사장 가문처럼 하나님 앞에 특별한 헌신과 열심을 내는 가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가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삼창으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임재하여 주시고 말씀하여 주시고 깨우쳐 주시옵소서. 하나님, 한 번뿐인 인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일반적인 사람으로 살지 않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중에도 더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는 나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깨어 일어날지어다. 우리의 자녀들이여, 깨어 일어날지어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헌신하며, 사역자로 헌신하며, 하나님 앞에 삶을 구별하며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나도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합니다.




2025.12.13(토) | 새벽기도 |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가 (여호수아 18:1-10)


📢 설교 요약: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가


본문: 여호수아 18:1-10
설교자: 고대욱 목사 (1516교회)




1. 영적 리셋: 길갈에서 실로로 (삶의 중심 이동)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전쟁에 지쳐 "이 정도면 됐다"며 안주하려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기지였던 '길갈'에서 회막(성막)이 있는 '실로'로 중심을 옮깁니다.

  • 이동의 의미: 단순히 장소를 옮긴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전쟁과 생존'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리셋(Reset)하는 결단이었습니다.
  • 무너짐의 경고: 타협과 안주는 예배의 무너짐으로 이어지고, 결국 삶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나중에"라는 핑계를 끊고, 다시 삶의 중심에 예배를 세워야 합니다.



2. 왜 머뭇거리는가? ('Slack'의 상태)


아직 기업을 받지 못한 7지파에게 여호수아는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지체하다'는 영어로 'Slack(느슨함, 태만)'을 의미합니다. 이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느슨해진 상태입니다.


  • 머뭇거림의 원인:
    1. 에너지 분산: 세상 일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예배할 힘이 없음.
    2. 의미 상실: 소명의식의 부재.
    3. 두려움: 실패에 대한 공포.
    4. 완벽주의: 완벽하게 하려다 시작조차 못 함(통제 욕구와 불신앙).
  • 해결: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부족해도 발을 떼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3. 믿음의 구체화: 가서 그려오라


여호수아는 막연한 두려움을 끊기 위해 각 지파에게 땅을 두루 다니며 "그려오라(지도를 만들어오라)"고 명령합니다.


  • 객관화 작업: 막연한 추측은 두려움을 키우지만, 직접 현장을 밟고 확인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믿음을 작동시킵니다.
  • 사람의 몫과 하나님의 몫:
    • 사람: 가서 확인하고, 기록하고, 준비하는 최선의 노력 (그려오라).
    • 하나님: 제비 뽑기를 통해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주권 (여호와 앞에서).
  • 영적 질서: 우리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되, 최종 결과와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태도입니다.



녹취록


제목: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가 (수 18:1-10)


오늘 저는 여호수아 18장 1절부터 10절 말씀을 가지고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종종 삶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더 이상 진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전처럼 절박하지 않고, 더 이상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어느 선에서 멈춰 서서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안주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그 선에 머물게 두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어떤 사명의 자리나 예배의 자리에 더 깊게 들어가라고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약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약속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깨우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어디에 모였습니까? 실로였습니다.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 지역에 있었고 산지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2지파 전체가 모이기에 지리적으로도 굉장히 좋은 위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실로가 어떤 곳이냐보다는 이곳에 무엇을 세웠는가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세웠습니까?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습니다.


회막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부족한 백성 가운데 임재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서는 거룩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분배를 하시다가 말고 길갈에서 실로로 회막을 옮겼을까?'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주요 전략지는 길갈이었고, 길갈은 전쟁의 중심지이자 행군의 기지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회막을 실로로 옮깁니다.


그는 이유 없이 회막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쉴 틈 없이 달려왔습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부터 40년간의 광야 생활, 그리고 7년 동안의 가나안 정복 기간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긴장과 싸움과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속에 '아, 이제 좀 쉬고 싶다. 그만 좀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남은 기업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이미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는 동편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편에 남은 땅들을 바라보며 남은 지파들이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남은 전쟁들이 굉장히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남은 땅도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꼭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나? 이 정도면 되지 않나?' 그렇게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핑곗거리를 만들고 미루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그 사명은 흐릿해지고, 예배의 열정은 식어지고, 초심이 흔들리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 8장부터 18장까지의 흐름을 보면 그 흔들림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수아 8장에 보면 아이성 전투 직후에 이들은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고 말씀을 낭독하면서 말씀 중심의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9장부터 타협의 순간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타협의 자리에서 이들은 계속적인 실패를 경험하고, 타협하고, 신앙의 흔들림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가나안과 동맹을 금지했지만 결국 기브온과 동맹을 맺었고, 유다 자손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으며, 요셉 자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역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핑계를 찾고, 타협에 무덤덤해지고, 욕심이 섞이게 되며 점점 더 신앙은 흐릿해져 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너지는 방식은 대개 대놓고가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마치 댐 사이에 작은 균열로 시작된 물줄기 하나가 시간이 지나서 댐을 완전히 무너뜨리듯이, 결단치 못했던 그 작은 타협의 순간들, 그 틈이 결국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들의 불평과 타협은 결국 예배의 무너짐으로 나타나고, 결국 그것은 삶의 무너짐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길갈에 있던 회막을 실로로 옮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리셋(Reset)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은혜의 땅 중심에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세워나가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임을 분명히 아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땅을 정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면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이 길갈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십니까? 매일의 삶이 전쟁 같고 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 있고, 책임은 날마다 무거워지고 마음은 지쳐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득 "지금은 좀 쉬고 싶다. 예배의 자리, 사명의 자리에 콜링하는데 아, 난 지금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지칠 때 우리 안에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나중에 하면 되지."


그런데 여러분, 이 말들은 단지 피곤의 말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가장 먼저 나타나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타협, 미룸, 합리화가 반복될 때, 결국 우리의 내면은 예배에서 멀어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떨림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로는 단지 지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는 선언입니다. 삶의 중심에 다시 예배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전쟁 같은 일상과 끊임없는 책임이 우리를 길갈에 머물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멈추지 마라, 거기서 멈추지 마라. 더 깊은 예배의 자리로, 더 깊은 은혜의 감격으로, 나의 사랑의 자리로 나아오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결단들이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신앙이 아니라, "나중에, 나중에"라는 말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끊어야 하는데 끊지 못한 그 작은 타협 하나를 오늘 이 시간 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삶의 예배를 다시 세우시기 바랍니다. 삶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깊이 들어오라고 하시는 것은, 더 사역의 자리, 더 예배의 자리를 더 들어오라고 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더 얹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깊은 임재로, 더 깊은 사랑의 자리로, 더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써 여러분들 가운데 은혜의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믿음으로 점령해야 될 때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넓은 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 은혜의 자리, 예배자입니다. 더 깊은 임재의 체험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를 살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중심이 다시 세워지고, 미뤄두었던 순종들이 다시금 시작되고, 식어있던 우리의 열정과 사랑들이 다시 불붙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2절에서 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예배 중심으로 리셋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마음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조금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하십니다. "왜 아직도 내가 허락한 땅에 들어가지 않느냐? 왜 아직도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느냐? 왜 너에게 허락된 그 은혜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벌써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곱 지파(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단, 납달리)가 그 기업을 받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하나님은 벌써 은혜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하셨어요. 그러나 백성이 결단하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지체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간이 늦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Slack(슬랙)'이란 단어입니다. 스스로 느슨해지고 태만해지고 꾸물거리고 손을 놓아버린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상황이 안 돼서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느슨해진거다, 슬랙해진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길을 여셨는데, 은혜의 땅을 허락하셨는데 우리가 발을 떼어야 하는데, "아, 나 힘들다고, 나 시간이 없다고, 나 지친다고, 이거면 충분하지 않냐고, 이 정도면 됐다고" 그렇게 마음을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때문에 내려놓은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결단하며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책망하는 것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 너 빨리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사명에 대해서 마음을 내려놓고 풀어져서, 더 이상 발걸음을 뗄 생각조차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해이함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믿음 없음, 용기의 결핍, 의도적인 게으름으로 인한 영적 해이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 14장에 나오는 갈렙입니다. 갈렙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나이가 많았습니다. 환경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대단했고, 사명에 대한 마음이 느슨해지지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이미 은혜를 주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이미 주셨어요. 벌써 은혜의 땅을 열어가셨습니다. 축복의 길을 열어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머뭇거리고 있는가? 왜 더 깊은 예배의 자리, 헌신의 자리, 사명의 자리,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길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있으십니까? 혹시 우리도 상황을 핑계 삼아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느슨함을 감추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우리가 슬랙해지는가, 왜 이렇게 마음이 풀 어지는가'에 대해서 네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1. 에너지의 분산: 너무 많은 곳에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예배가 되고 하나님만 생각해도 모자랄 판인데, 너무 많은 곳에 관심이 가 있고 에너지가 그곳에 다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배하려고 하는데 너무 힘이 없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가정 생활 등 다른 데다 다 힘을 쓰고 오니까 정작 예배할 때는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2. 의미 상실: 내가 이것을 왜 하고 있는지 사명이 자꾸 흔들릴 때,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의식이 흔들릴 때, 결국 말씀 앞에 더욱더 안 나가고 있을 때 일어나는 증상들입니다.
  3. 두려움과 부담: 바로 실패의 두려움입니다.
  4. 완벽주의: 어떤 사람은 게을러서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못할 것 같아서 시작조차 안 하는 것입니다. 도전조차 하지 않아요. 이 완벽주의 안에는 두려움과 통제 욕구가 섞여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기보다 내 능력으로 완벽하게 다 해내려는 마음이 더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더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서 순종을 미루고 완벽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완벽함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사람을 하나님이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주님, 제가 좀 더 준비되면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아니라, "주님, 부족하지만 순종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나가겠습니다. 예배하며 나가겠습니다"라는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호수아의 고백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한번 질문해 보길 소망합니다.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어느 때까지 손을 놓고 있겠느냐? 어느 때까지 나중이라는 말로 순종을 미루고 있겠느냐?" 이 질문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려는 질문입니다. 우리를 다시 신뢰와 희망 앞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부르시는 질문들입니다. 느슨해지는 우리의 마음의 끈을 다시 조여 매고 더욱더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오늘 새벽 여러분들의 마음에 풀려있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주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순종 한 걸음을 정하시고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자리 하나하나를 완성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진 다음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발을 뗄 때 역사하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이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주 구체적인 처방을 내립니다. 4절부터 10절까지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


이제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대표를 뽑아 땅을 답사하게 하고 그 결과를 그려서 기록하게 한 후에 다시 가져오게 합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제 정말 눈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정리하는 객관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삶이 느슨해지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추측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아마 힘들 거야, 아마 별로 남는 게 없을 거야, 아마 저긴 위험할 거야.'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확인해 보지도 않고 벌써 마음이 먼저 물러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추측을 끊어냅니다. "가서 한번 직접 확인해 봐라, 두루 다녀봐라, 그리고 기록해서 그것을 가져와라."


믿음은 상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에 근거해서 현실을 직면하고, 그 현실 속에서 한 걸음 순종의 결단으로 나아갈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막연함이 슬랙을 키운다면, 구체적인 믿음과 결단의 순종은 우리 삶의 슬랙을 완전히 죽이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가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지도는 사람들이 그립니다. 답사하고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은 백성이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업의 분배는 누가 합니까? 맞습니다.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이 제비 뽑기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 제비 뽑기는 그냥 우연을 바라는 게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을 인정하는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협업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를 아주 선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주도권과 모든 결정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서 확인하고, 기록하고, 준비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축복의 땅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최종 결론적인 부분에는 여호와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 제가 이것에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무엇을 더 해야만 합니까? 제가 오늘 순종해야 할 걸음은 무엇입니까?" 더 질문해야 합니다. 더 신뢰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돌아오라"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복귀 명령이 아닙니다. "너희가 할 일을 다 하고, 그 다음은 여호와 앞에 서라. 결정은 하나님께 맡겨라"라는 것입니다. 지도 그리는 일은 사람이 하지만, 기업을 나눠주시는 그 모든 결정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의 영적인 질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다 통과할 수 있는 혼자이고 하나님은 도장만 찍히시길 바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가서 그리라" 말씀하시고, 동시에 "돌아와 여호와 앞에 서라" 말씀하십니다. 행동하되 주권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마지막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의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 은혜의 땅을 바라보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머뭇거리며 지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지체한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여러분의 삶의 중심은 정말 예배의 중심, 신뢰의 회복입니까? 아니면 그냥 내 삶의 편의와 안정이십니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그 순종의 자리는 어디이십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형편이 안 된다는 이유로, 두려움과 완벽주의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아버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냥 추측으로 막연함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걸어가 봐라. 네가 두려워할지라도, 네가 앞이 안 보일지라도 한번 가봐라. 그리고 확인해 봐라. 뒤로 물러서지 말아라. 가서 두루 살펴보고 그려보고 하나님의 꿈을 꿔봐라. 기록해 봐라. 그리고 내 앞에 돌아와라. 그리고 간구해 봐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순종하되 마지막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 최선을 다하되, 그 이후의 것은 주께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 정말 우리가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막막한 현실, 두려움의 현실에 주저하고 있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사명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신뢰의 자리에서 더욱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삶의 자리를 구체화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발을 내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로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고 구체적으로 순종하고, 그 모든 결과를 여호와 앞에 맡기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우리의 삶에도 온전히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그것을 바라보면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 우리의 삶의 현실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너무나도 부담되어서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할 때가 너무나도 많았음을 이 시간 회개하며 나아갑니다. 우리의 중심이 흔들렸음을 고백하며 나아갑니다. 피곤함을 핑계로, 환경을 핑계로 작은 타협을 쌓아왔던 것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를 신뢰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이 새벽 우리 삶 가운데 회막을 다시 세워 주옵소서. 예배의 감격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말씀 앞에 다시 떨게 하시고, 주님 앞에 다시 무릎 꿇게 하시며, 미루었던 순종을 오늘 시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예배로 다시 세워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믿음의 반응을 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겁내하지 말지어다. 용기를 갖고 나아가게 될지어다.




2025.12.07(주) | 주일설교 | 주 앞에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삼상 26:13-25)


요약 정리


📢 설교 요약: 주 앞에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본문: 사무엘상 26:13-25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정체성이 태도를 결정합니다 (나는 누구의 사람인가?)


다윗은 사울 왕의 창과 물병을 가져온 뒤, 왕을 지키지 못한 군대장관 아브넬을 책망합니다. 아브넬과 3,000명의 정예병은 능력이 있었지만, 명분 없는 일(다윗 사냥)에 동원되어 동기부여를 잃고 무기력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쫓기는 신세였음에도 사울 왕을 보호했습니다. 이는 사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윗 스스로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 적용: 직장 상사나 환경이 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실히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2. 후회 대신 회개를 선택하십시오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했지만, 똑같은 잘못을 반복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즉시 멈추고 돌이켰습니다.


  • 후회 vs 회개: 후회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지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 자유함: 완벽주의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라고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통제권을 하나님께 맡길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다윗은 원수 사울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사(生死)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 두려움의 원인: 두려움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자녀, 미래, 환경 등)을 내 힘으로 통제하려 할 때 생깁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 맡김의 은혜: 내 인생의 조종간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헌신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담대해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4.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여호와의 기업에서 쫓겨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 즉 하나님의 공동체로부터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공동체의 중요성: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풍조 속에서 "나 혼자 잘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 결단: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문제가 있을지라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녹취록

"아 주 앞에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의 쉰세 번째 시간입니다.


다윗이 두 번째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주면서 오늘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13절과 14절의 내용을 제가 그냥 정리를 해 드릴게요. 다윗이 사울 왕의 두 가지 아이템을 가져왔죠. 뭐를 가져왔죠? 창과 물병. 네. 이 두 가지를 갖고 충분히 먼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아브넬을 부릅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사촌 동생이자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아브넬의 이름을 불렀는데 아브넬이 뭐라고 대답을 했냐면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이렇게 대답했어요. 여러분, 왕을 부른 게 아니라 아브넬을 불렀잖아요. 근데 아브넬이 왜 이렇게 반응을 했을까요? 왕을 지키는 자이니까 무엄하도다. 감히 네가 왕이 주무시는데 깨우느냐? 뭐 그런 의미였던 것이죠. 그런데 잘 보면 이 아브넬이 왕을 지켜야 되는 사명을 제대로 했나요? 그러지도 않으면서 왕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기가 큰 소리를 칩니다. 여러분 조직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나요, 없나요? 꼭 있습니다.


자, 그러면 다윗이 아브넬에게 어떤 책망을 했는가? 15절과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자, 다윗이 아브넬에게 네가 직무 유기를 했다. 책망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용사가 이 위험한 광야에 나와서 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거죠. 지난주에 우리가 본 것처럼 능력이 출중할지라도 인생의 동기 부여가 결여되면 그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헛된 일을 하러 나왔다는 측면에서는 지금 사울 왕이나 군대장관 아브넬이나 아니면 3천 명의 정예병이나 다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이 허우대는 멀쩡한 사람들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는 허수아비처럼 된 거예요.


자, 그런데 한 가지 반전은 뭐냐면 지금 다윗의 대사를 보니까 왕의 안위를 가장 위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왕이 죽이려고 하는 누구예요? 다윗이었다는 거예요. 지도자가 간신을 곁에 두면 충신이 곁에서 멀어지게 돼 있고 아첨하는 말을 듣기 좋아하면 여러분 긍정적인 피드백을 나는 들어야만 리더로서 자신감이 생긴다. 그런 게 뭐 물론 있죠. 있지만 그게 너무 강하면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멀리하게 돼 있어요.


제가 이걸 보면서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현장에 피드백을 받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자존감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뭘 나눴냐면 능력은 뭐가 결여된 개념이다? 도덕성이 결여된 개념이다. 자, 유능한 사람은 선한 일에도 유능하게 일을 잘할 수 있지만 악한 일에도 유능할 수 있다. 이게 위험성이라고 했죠.


근데 또 한 가지 개념을 말씀드리면 능력은 지향성도 배제가 된 개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능력을 발휘할 것이냐? 뭐 이 사람에게도 할 수 있고 저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능력은 물처럼 흘러가는 길을 스스로 찾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능력 발휘할 수 있어요. 다만 무의미한 대상에게 능력을 계속 발휘하라고 하면 이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뭐 직장에서나 어떤 특정 상황에서 일을 할 때 야 내가 저런 사람에게 충성을 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내가 도저히 이 조직에서는 일을 더 이상 못 하겠다. 그런 생각이 드실 때가 있죠. 네. 있으시죠? 네. 그럼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브넬과 이 삼천인처럼 반응해야 될까? 아니면은 감동을 주는 리더와 조직을 찾아다녀야 될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사울 왕이 감동을 주는 리더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가운데는 충분한 동기 부여를 갖고 충성을 다했다는 거예요. 가장 멀리 있는 사람 게다가 쫓기는 신세인데도 충성을 다 했어요. 왜냐면 다윗의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 인간 리더인 사울 왕을 섬기지만 그는 온전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정체성을 움직이는 거였어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죠. 어, 난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니면 이렇게 밖에를 떠돌아다니면 나는 이방인이 된 게 아닌가? 나는 사울 왕의 사람인가? 아니면 그 정권에서 밀려났으니까 나는 그의 사람이 아닌가? 여러분, 어떤 조직, 어떤 리더 밑에서 자기 정체성을 평가할 때가 많아요. 아,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고 그 직장에서 인간 리더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섬겨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광야 한가운데에서 삶에도 불구하고 삶을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야 될 충분한 동기 부여를 갖고 날마다 살았다는 거예요. 왕 곁에 있는 사람들은 동기 부여가 없는데 광야의 떠돌이 다윗은 삶의 동기 부여가 날마다 충만했다.


제가 어제 위임식을 하면서 어 제 시간들을 좀 돌이켜 봤어요. 여러분 그 담임 목사와 위임 목사의 차이는 사실 법적으로 총회 헌법에 따르면 담임 목사는 3년마다 재임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3년이 다 돼 가는데 그런데 어 위임 목사는 종신제, 여러분이 좋든 싫든 그냥 종신으로 가는 거예요. 예.


그래서 제가 어제 이제 답례품을 개수를 몇 개 준비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제가 그 필요 없는 걱정을 했어요. 답례품을 준비한 거보다 더 많이 오시면 어떻게 하나? 근데 여러분이 그냥 저를 믿고 신뢰해 주셔서 예, 굉장히 조금 오셨어요. 제가 위임 목사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물론 굉장히 중요한 사명감으로 받아들였어요. 아 그러나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제 우울증에 빠져 있던 소년을 건져 주신 이후로 그때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드렸거든요.


제가 교육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드렸기 때문에 내가 교육자가 되고 나서 마음이 뭔가 물론 뭐 그 직분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사명감이 생기지만 저는 큰 차이는 없었던 거 같아요. 제가 파트일 때와 전임일 때, 제가 부목사일 때와 담임 목사가 돼서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오 개척하니까 마음이 다르지 않나요? 뭐 책임감이 더 있지 않나요? 근데 저는 파트 때나 부목사일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마음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생을 산다. 내가 은퇴를 하든 중간에 안식년을 하든 내가 파트이든 내가 평신도이든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여러분 이 고백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역기능적인 세상 안에서 어떻게 하면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우리는 세상에 속하였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별하게 살면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생각보다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그 거부 반응에 대해서 놀라지 말라고 하셨어요. 요한복음 15장 19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래 세상이 여러분을 어 저 사람 좀 유별하네. 뭐 저렇게까지 신앙생활을 그런 점이 있어야 정상이라는 거예요. 자, 여러분 정상이시죠? 그런데 이렇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만 다윗처럼 어둡고 망가져 있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품었던 다윗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예요.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서 어둠의 땅에 빛으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자기 백성이 영접했다, 안 했다. 안 했다는 거예요. 환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럼 환영하지 않는 세상을 노 네가 나를 거절해 그럼 나도 너네를 거절하겠다 이러셨나요? 그 세상을 끌어안고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표현하시고 이 세상을 치유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죠.


자, 이번엔 그러면 사울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17절, 18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이르되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요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자, 사울이 십 사람들의 밀고를 듣고 충동적으로 다윗을 잡으러 나왔어요. 그런데 정작 다윗의 음성을 듣고 나니까 너무 반갑고 미안한 거예요. 참 어리석은 일을 한 거죠. 그런데 사울 왕이 "내 아들 다윗아, 이게 내 음성이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저희 아들이 이제 기본 훈련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아서 그 면회를 한번 가려고 날짜를 조율하고 있어요. "내 아들 다윗 이게 내 음성이냐?" 무슨 군대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 면회 간 아버지가 해야 될 것 같은 대사 아닌가요? 예. 사울이 막 다윗을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그리고 21절에 보면 사울 왕이 내가 크게 잘못했다. 내가 범죄했다. 어리석은 일 했다.


사울 왕은 왜 후회할 일을 반복했을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후회할 일을 반복하지 않았어요. 첫 번째 부하들이 죽이라고 했을 때 그때 옷자락을 베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이 두 번째는 완전히 난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럼 후회가 많으신 분들이 간혹 있을 텐데 어 후회가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인 특징 두 가지만 얘기하면 첫 번째는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서 스스로에게 점수가 박한 경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기가 스스로 만족을 잘 못 해요. 지나치게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사는 사람들. 그러면 물론 공부도 더 잘할 수 있어요. 뭐 회사에서 일도 잘할 수 있어요. 사역도 잘할 수 있어요. 근데 내면 세계가 건강할까요? 건강하지 않아요.


대한민국 사회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사회 아닌가요? 네.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되고 계속 뭔가 결과를 내야 되고 더 성장해야 되고 더 발전해야 되고 더 올라가야 되고 여러분 이제는 좀 자기 자신을 격려하실 필요가 있다. 자, 두 번째 관계 중심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한 사람들. 그런데 정직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관계 중심형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왜 이런 사람들이 후회가 많은가 사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에요.


자존감이 낮다라는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님의 음성보다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넌 충분히 지금 잘하고 있어." 이 음성을 들려 주셔도 사람들의 평가가 이 모든 거를 다 잡아먹기 시작하면 여러분 그것은 자존감이 낮은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여러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후회가 많은 분들 있잖아요. 내가 왜 그 일을 그렇게 했을까? 내가 왜 이 사람을 이렇게 대했을까? 여러분 후회하지 마세요. 이 후회할 일을 안 해야 후회를 안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도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면 첫 번째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으시면 회개를 하세요. 후회를 하는 게 아니라 회개를 하셔야 돼요. 제가 오늘 이걸 계속 묵상하면서 깨닫는 본질은 뭐냐면 후회는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 앞에 하는 거예요.


후회라는 감정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겁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거예요. 근데 이 실망과 자기 연민의 늪은 거기에 빠져서 아무리 후회를 반복을 한들 더 깊이 빠져들게 돼 있어요. 빠져나오지 못해요. 자기 머리를 스스로 끄집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것은 단순히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드셔야만 다시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인정을 하세요. "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저를 따라 해보세요. "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걸 인정하시라는 거예요. 어 제가 그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서 뭘 해도 잘해야 되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피말리면서 살았거든요. 저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근데 이제 저는 굉장히 많이 자유함을 얻었어요. 그건 뭐냐면 아 내가 완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 완전성을 추구하는구나. 이거 한 가지를 알게 됐고 그러나 스스로는 인간이 완전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완벽주의라는 것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완벽한 척하려고 발버둥치는 거예요. 그럼 평생이 불행해지게 돼 있어요.


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그냥 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세요. 인정. 네. 그래서 그냥 잘못하고 실수하고 실패할 때 "하나님 제가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다니. 할렐루야. 너무 감사합니다. 내게 다시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스스로 더 강력한 심판자가 되어서 자비판을 하며 살아요. 여러분,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강력해질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넉넉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제가 10대 때 20대 중반까지도 늘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인생을 살았어요. 밤마다 하루를 하나님 은혜 가운데 돌이켜 봐야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나 오늘 또 왜 이랬을까? 왜 이랬을까?' 이걸로 몇 시간을 에너지를 낭비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바보로 생각할까?' 뭐 이런 생각하는 어 여러분 사울의 후회의 프레임에 빠져 살지 마시고 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그다음에 돌이키면 되는 거예요. 부족한 것은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 놀라운 고백을 하는데 19절 상반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느니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재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아 다윗이 지난주에 이어서 또 한번 놀라운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는 원수 사울 왕의 생명도 주님께 맡겨 드리겠다 했어요. 그가 뭐 사고사로 죽든 자연사로 죽든 그냥 하나님께 맡기겠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생명도 주님께 맡겨 드리겠다. 여러분 이게 쉬운 고백인가요? "하나님 원하시면 오늘 저 데려가셔도 돼요." 이 고백을 하는 게 쉬운가요? 여러분 대답을 어려워하시나요? 아예 이거 어려운 얘기입니다.


근데 저는 이 생사의 문제를 생각하면 늘 영문학 전공이니까 누가 떠오르겠어요? 햄릿의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모든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떻게든 '난 죽지 않을래, 나는 살아볼래.' 이 아우성을 하며 살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생사의 문제를 그냥 뛰어넘은 거예요. 네.


사울이 죽어야 자기가 사는 건데 사울의 생명도 주님께 맡기고 나도 만약에 당신을 통해서 나를 죽이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냥 가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네. 그러니까 자신의 생명까지 하나님께 맡긴 거예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0절 2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누구세요?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할렐루야. 아멘.


네. 내가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이니까 내가 사나 죽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위기 상황이 되면 "어우 이러다가 나 죽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합니다. 입사 동기들은 다 임원 승진 보드에 올라갔는데 나만 이렇게 누락이 다니 '나 이 조직에서 죽는 거 아니야?' 나 사람들과 인간관계에서 이렇게 비난받고 오해받고 '나 죽는 거 아니야?' 대학 입시에 떨어졌는데 '나 죽는 거 아니야?'


여러분, 이것을 심리적으로 재앙화 사고라고 합니다. 예.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무너뜨릴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재앙화 사고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이 극도의 공포증에 시달리거나 공황장애에 빠지거나 요즘같이 뭐 극단적인 기계 문명 시대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 변화가 극심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개인적인 재앙화 사고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재앙화 사고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몇 년 전에 알던 한 여성도님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제 애를 키우니까 그런 걱정이 있었던 거 같은데 "목사님 정말 우리 시대 계시록의 대환난이 일어나면 저희는 어떻게 하죠?" 이게 종말이 올까 봐 막 두려운 거. 그리고 "우리나라에 쓰나미가 오면 어떻게 하죠? 우리나라의 대지진이 일어나면 어떡하죠? 저는 안전한 캘리포니아로 도망가고 싶어요." 그 제가 그 캘리포니아 그 태평양 해안도 100년에 한 번씩 쓰나미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지역입니다.


대재앙이 오면 세상 어디에 가서 숨은들 평안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평안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사는 것도 아까 얘기한 후회와 정반대 스탠스인데 사실은 같은 것이더라고요. 왜냐면 후회라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적 해석에 자신을 걸어 놓고 사는 거예요. 근심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에 자신의 인생을 다 걸어 놓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인데 이거를 못 사는 거예요. 양쪽에 그냥 끌려서 이쪽으로 끌려갔다 저쪽으로 끌려갔다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자유할지어다. 후회와 근심으로부터 자유할지어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못 맡기겠는가?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해서 맡겨 드리는 거잖아요. 자, 비행기를 많이 탄 사람들이 비행기 공포증에 걸린다고 하는데 여러분, 난기류에 막 비행기가 흔들리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잖아요. 그런데 두 가지 팩트를 좀 인지할 필요가 있어요. 이게 비행기 공포 환자에게 치료할 때 사용하는 두 가지 사실인데 첫 번째는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이 오히려 안전한 것입니다.


만약에 난기류가 강하게 오는데 흔들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딘가가 날개가 부러지든지 고장이 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거에 맞춰서 약간 출렁해 줘야 오히려 안전하다. 자, 두 번째는 아, 저 보이지 않는 조종실 안에 10년 차 이상의 베테랑 파일럿이 이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죠. 왜 사람들이 두려움이 생기는가? 통제 불능이라고 느낄 때 여러분의 인생에 난기류가 오고 고난이 오면 여러분이 통제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거를 통제하고 싶어하는 심리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셔야 돼요. 인생의 난기류를 온전히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세요.


그분께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께 맡겨 드리고 내 인생을 과감하게 헌신하고 살면 담대해지게 돼 있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권면하는데 음지를 줄이려고 하지 말고 뭐를 넓히라? 양지를 넓혀 가라.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 이 두려움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과감하게 인생을 주님께 헌신하고 살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돼 있어요.


어제 위임식과 임직식을 마치면서 찬양을 했는데 이 찬양 저희가 1절, 2절 같이 찬양해 봤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찬송가 곡이에요. 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부름 받아 나섬이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골 골짝 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라.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라. 아멘."


여러분 헌신의 고백을 하잖아요. 그 헌신의 고백에는 항상 결연함과 숭고함이 있고 담대함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인생 바치겠습니다. 죽음인들 이 길을 막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어 '나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수비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면 항상 위축되는 것이고요. 아낌없이 내 생명도 주께 드리겠습니다. 내 시간도 내 재능도 내 물질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담대해지는 거예요. 할렐루야.


자, 그런데 내가 주님께 다 드린다고 하면 주님이 다 가져가시나요? 다 가져가지 않으세요. 근데 제가 경험적으로 보니까 좀 많이 가져가긴 하세요. 내가 두 손에 이렇게 다 와서 원하시면 다 가져가세요. 이렇게 드리면 가져가시는데 그런데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여러분 내 손으로 드린들 얼마나 드리겠어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은혜로 우리 인생을 채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두려워하지 마세요. 상황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에요.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게 선하면 가겠습니다." 이게 다윗의 고백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제가 남아서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평안해지는 거예요. 그럼 누구도 여러분을 흔들 수 없게 돼 있어요.


자, 이어지는 19절 하반절 그리고 20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만일 사람들이면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자, 다윗이 사울의 생명도 주께 맡기고 자신의 생명도 주께 맡기고 아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윗이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있다는 고백을 한 거예요. 그건 뭐냐면 사울 주변에 있는 간신들이 "넌 이방인의 땅에 가서 우상 숭배나 해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조롱하는 거죠. 여호와의 기업으로부터 나를 쫓아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인의 땅에서 내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 이게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상황이었어요.


그럼 왜 그거를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골리앗 앞에 나설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을 수 없어 했잖아요. 여러분 그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놓고 보면 선한 왕이 죽으면 열조의 무덤에 묻어줬어요. 그런데 악한 왕이 죽으면 열조의 무덤에 묻어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 묻지를 못하고 바깥에 묻었어요.


그러니까 열조의 무덤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어서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나는 돌아간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활 생명과 은총을 누리며 산다라는 개념이었어요. 그러니까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끊어지는 것.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역의 바운더리에서 내가 버려지는 거. 이게 그가 두려워했던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느냐? 하나님 경외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현대 크리스천에게 비교를 해 본다면 '오 나 이렇게 살다가 천국 못 가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가장 두렵잖아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기와 명예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간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실존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중세 가톨릭 시대에는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징계를 받는 게 수찬 정지였어요. 오늘 성찬식을 했는데 이 성찬식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공동체에서 끊어진다는 게 가장 두려운 거였어요.


그래서 다윗이 나중에 왕궁에 들어갔을 때 죄를 짓고 그가 두려워하는 내용이 시편 51편 11절에 나옵니다. 무슨 얘기를 하냐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과 사실 같은 맥락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성령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나실까 봐 그게 너무너무 두려웠어요. 여러분, 그는 하나님의 공동체 가운데 머무는 것을 가장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날 이 시대를 보면서 놀라운 현상을 한 가지 보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희한한 현상이 생겼는데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 복음을 전하면 예전에는 그냥 뭐 하나님을 뭐 내 눈에 보여주면 믿겠다. 심지어 사람은 뭐 내 주먹을 믿겠다. 이 정도는 약과였어요. 요즘은 뭐라고 답변하는 사람들이 나오냐면 다 그런다는 게 아니라 어 '내가 책임을 져야 되면 내가 책임지고 지옥 가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요즘 늘었어요.


저는 굉장히 전도를 많이 하니까 이런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그 개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상정을 하고 '뭐 가라 그러면 가면 되지'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를 다니던 분들도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교회 안 나가면 되지.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 되지.' 이런 생각이 굉장히 팽배해졌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교회가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문제가 생겨요, 안 생겨요? 당연히 생기는 거예요. 문제가 많아요. 한 세 명, 다섯 명 모여서 새로운 뭐 스타트업, 기업만 만들어도요. 문제가 많이 생겨요. 사람이 모이는 것은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문제가 많은 이스라엘에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요. 왜 그럴까요? 그곳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있어야 될 장소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 나는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 여러분, 이 개인주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그 정반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면 교회는 그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물줄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평생에 어떠한 인생의 업다운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로부터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평생에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2025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어떻게 여러분 결산하려고 하십니까? 특별히 이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은 정말 그 어떤 분 중에는 "목사님 제가 3년 동안 예 온라인으로 예배를 보다가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세요. 온라인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은 꼭 현장에 다윗의 장막에 나오시기를 바라고 또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분들은 제가 이제 한 달 동안은 좀 이 어두움이 익숙하지 않아서 여러분이 잘 안 보였지만 이제는 85% 한 90% 여러분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가 안 보이는 이 몇 개 안 되는 기둥 뒤에 앉으시려고 하거나 좀 조명이 낮은데 앉으시려고 하시는 분들 빛 가운데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난 하나님은 좋지만 조직은 싫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의 공동체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세요. 다윗이 그 광야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으로 깨어 있잖아요. 뭐가 그렇게 하나님의 공동체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다윗이 꿈꾸는 것은 '나 혼자 예배 잘 드리면 되지'가 아니었어요. 그 시대에 예배 공동체를 살리는 거예요. 내가 그들의 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다 함께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예배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여러분, 여러분의 평생에 그런 신앙생활의 체험 있기를 축복합니다.




2025.12.06(토) | 새벽기도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1-15)


📢 설교 요약: 갈렙의 믿음과 도전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본문: 여호수아 14장 1~15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동역 (땅 분배의 원리)


  • 하나님의 주권: 가나안 땅 분배는 제사장, 여호수아, 지파 족장들이 모여 진행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비 뽑기 방식을 통해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 인격적인 동역: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모든 리더가 참여하여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압도하지 않고 인격적인 자유의지를 통해 동행하시기를 원하심을 보여줍니다.
  • 기도의 바른 자세: 기도는 하나님께 훈수를 두어 보좌를 흔드는 샤머니즘적 발상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결단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 45년을 기다린 갈렙의 담대함


  • 히든카드 제시: 유다 지파를 이끌고 여호수아 앞에 나온 갈렙은 45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네가 밟는 땅은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고 맹세했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 강건한 생존: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다"며, 40세 때와 다름없이 강건한 체력과 힘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준비한 삶의 결과입니다.
  • 도전의 선언: 갈렙은 이미 정복된 쉬운 땅이 아닌, 가장 어려운 땅, 거인족 아낙 사람의 지도자가 있는 기럇 아르바(헤브론) 산지를 요구했습니다.



3. 갈렙의 진정한 고백: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 가장 어려운 곳을 선택한 이유: 45년 전, 10명의 정탐꾼이 아낙 자손을 보고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간담을 녹였고, 이로 인해 광야 1세대가 멸망하는 영적 수치를 당했습니다. 갈렙은 그 수치의 근원인 거인족의 최고 요새(기럇 아르바)를 쳐서 민족의 수치를 씻고자 했습니다.
  • 믿음의 핵심: 갈렙의 가장 유명한 고백은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이지만, 그가 가장 많이 한 고백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삶으로 증명하기 원했습니다.



4. 희생적 리더십과 축복의 통로


  • 유다와 갈렙의 계보: 갈렙의 도전 정신과 희생적 리더십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형제를 지켰던 유다의 자기 희생적인 리더십을 잇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리더십을 예표합니다.
  • 축복의 원리: 갈렙은 목숨 걸고 얻은 헤브론 땅을 나중에 백성들을 위한 도피성으로 내놓았습니다. 이처럼 섬길 마음과 나눌 마음 없이 이기적으로 복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적인 당위성이 없지만, 하나님은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그를 통해 복이 자손 대대로, 그리고 열방으로 흘러가게 하십니다.
  • 죽고자 하는 믿음: 하나님께 모든 소유와 생명을 기꺼이 드릴 수 있다는 고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고백이 합당한 기도이며, 하나님은 그 고백을 기뻐하시고 넘치는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녹취록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으며,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


그때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40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높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내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내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였으며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어떻게 순종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우리가 새벽에 이렇게 나와서 기도하시는 게 너무 훌륭한데, 여러분 훌륭하지 않나요? 여러분, 때로는 새벽 기도를 하다 보면 아, 내가 참 기특하다. 모두가 자고 있는 이 시간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니. 그런데 기도할 땐 하나님 이거 하셔야 됩니다, 저거 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훈수를 두는 게 기도로 착각하면 기도 백날 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할을 안 하셔서 역사에 문제가 된 적은 없어요. 인간의 역할을 안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역할을 걱정해 드리는 게 기도가 아니라,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깨닫고 결단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응답을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 보좌를 흔드는 기도. 굉장히 위험한 사고예요. 여러분, 온 우주에 가장 온전하시고 완전하시고 견고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겠다. 흔들어서라도 내가 원하는 기도 응답을 받겠다. 이것은 굉장히 샤머니즘적인 발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그것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오늘 갈렙의 인생에서 명확하게 보이는 장면이죠.


여호수아서는 총 몇 장이죠? 24장입니다. 24장 가운데 12장이 정복, 12장이 분배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호수아서 그러면 항상 정복 얘기만 나올 것 같지만, 분배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러분, 사회도 마찬가지죠. 경제가 발전하는 것도 중요하고, 부의 재분배도 그만큼 중요하고.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13장 바로 앞장에서는 요단 동편 땅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어떻게 땅을 분배해 주었는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 14장으로 건너와서 요단 서쪽, 본격적인 약속의 땅이죠. 여기에 9지파 반에 대해 땅의 분배를 해주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중에서 첫 번째 지파인 유다 지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과 2절 한번 다시 읽어볼까요? 시작!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지금 가나안 땅 즉 요단강 서편의 약속의 땅을 어떻게 분배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의 1절에 보면 누가 이 일을 주도했냐면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그리고 민족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그리고 아홉 지파 반의 족장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럼 아홉 지파 반이니까 아홉 명 반이 올 수는 없으니까 열 명이 오지 않았을까? 총 12명이 분배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2절 말씀에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어떤 방식을 썼다고요? 제비 뽑기 방식을 했다. 민수기 26장에 보면 제비 뽑기를 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제비 뽑기를 했다는 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건가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제가 그래서 1절, 2절을 보면서 아니, 제비 뽑기를 하는데 굳이 이 사람들이 다 모일 필요가 있나? 여러분, 뭐 사람이 다 모인다고 해서 자기가 제비를 뽑는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제비 뽑기 방식이지만, 그러나 모든 각 지파의 지도자들, 또 영적 지도자, 민족 지도자 다 함께 모여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또 진행을 했어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밀실에 들어가서 한두 사람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섭리하시는 일일지라도 동시에 모든 리더들이 다 참여해서 이 일을 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개인의 인생을 살 때도 그렇고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이 하시니까 우리가 굳이 나설 게 있나? 하나님이 하신다면서.


그래서 예정론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죠. 예정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했으면 굳이 가서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필요가 뭐가 있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어떻게 하든 이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실 텐데, 그거는 굉장히 가벼운 생각이죠. 여러분, 만약에 이 사람을 들어서 이 사람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면, 이 사람이 움직이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 사람은 계속해서 복음을 못 듣게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론도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죠.


우리가 보통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리더십과 팔로우십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 또 가정과 일터는 어떤 공동체인가. 가끔 가정을 보면 부모가 캐릭터가 너무 강하잖아요. 그럼 아이들이 약해질까요, 안 약해질까요? 약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부모가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고 해도 집에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집에서는 따뜻하게 하셔야 돼요. 부드럽게 하셔야 돼요. 집에서도 내가 대표님이고, 집에서도 내가 사회적 지위로 활동한다,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 부모가 강하면 아이가 약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가끔 가다 이렇게 보면 우리 아이는 순종을 참 잘합니다. 그런데 순종을 잘하는 건지, 아이가 자기 주관이 없는 건지, 개성이 없는 건지, 이거는 다른 문제예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적 의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행복한 동행을 원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압도하셨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의 개인의 의지가 있어도 벌벌 떨며 아무것도 결정 못할 거예요. 하나님 캐릭터가 너무 강하니까 자녀들의 캐릭터가 작아지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강력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하나님이 개입을 안 하시는 거 아니야? 이렇게 느낄 정도로 역사와 인생에 대해서 누구에게 자유의지와 결정권을 주셨어요? 우리에게.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동행을 원하시는구나.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들과 인격적인 동행을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영적인 리더십들을 세우죠. 오늘 위임식도 있고 임직식도 있고 굉장히 중요한 날인데, 여러분. 그러나 영적인 리더라고 해서 본인이 하나님을 등지고 호가호위하면 사람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없죠.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은사를 주님을 위해서 올려드릴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자유함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의 일터도 그럴 때 능률이 향상되는 것이죠.


오늘 이어지는 갈렙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6절에서 9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때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높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가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왔다. 그런데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할 말이 있으면 우리 둘이 장막에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이래야 될 텐데 유다 지파를 전부 끌고 나왔다는 거예요. 유다 지파를 다 데리고 나왔어요. 왜 그랬을까? 공개적인 대담을 한 것인데, 저는 결론적인 내용을 보면 유다 지파의 이 모든 사람들이 갈렙의 도전 정신과 믿음을 함께 보고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갈렙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45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시내 반도가 있으면 이집트에서 건너와서 시내 산에서 1년여 머물다가 그들이 움직여서 바란 광야, 신 광야 여기를 막 헤매고 다녔죠. 바란 광야의 끝 지점, 신 광야에 이어지는 부분인데, 가나안 땅 바로 아랫부분입니다.


그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이 정탐꾼을 보냈었잖아요. 그런데 믿음의 보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10명의 사람들이 백성들이 통곡하면서 모세를 원망하죠. 결국에 가나안 땅에 진입을 못하게 됩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다고요?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무슨 징계를 내리셨냐면 정탐을 며칠 동안 했어요? 40일 동안 했습니다. 거기에 1년씩 곱해서 40년, 40일 곱하기 1년 해서 40년 동안 너희가 이 광야를 돌게 될 것이다 그랬으니까 믿음의 보고를 했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광야 1세대의 불신 때문에 40년을 광야를 돌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복 전쟁이 대략 마무리되고 약속의 땅을 분배하는 이 과정에 갈렙이 그때 모세가 약속한 것을 내게 지켜달라, 히든카드를 딱 꺼냅니다. 45년 동안 품고 있었던 그 마음, 이거를 딱 얘기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에 보면 모세가 맹세했다, 그 맹세를 지켜줘야 된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내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민수기 14장 24절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러나 내 종 갈렙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아멘.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는 거죠.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광야 2세대. 광야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죠. 모세도 거기서 죽었습니다. 아론도, 미리암도 다 거기서 죽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광야 1세대, 유이하게 두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죠. 누구죠? 여호수아와 갈렙이에요.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러니까 최고령자 두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나머지는 다 한참 다음 제너레이션, 다음 세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같은 최고 리더인 갈렙이 이렇게 지파까지 데리고 나와서 그때 약속을 지켜달라, 이렇게 요구를 하니까 도대체 어떤 땅을 요구할까 긴장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10절과 11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이제 보소서 여호수아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자, 45년을 광야를 돌았다고 왜 이야기를 했을까요? 정확하게는 40년인데, 사실 이제 출애굽해서 시내산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소요됐고, 시내산에서 1년을 머물렀고, 그리고는 38년이 지났어요. 그러니까 총 합쳐서 40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38년이에요.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그 가데스 바네아에서 45년이라고 계산을 했기 때문에 정복 전쟁은 7년이 걸렸다고 보는 거죠. 38년 더하기 7년 해서 총 45년을 내가 돌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내가 85세지만 여전히 생존해 있고, 그리고 11절에 여전히 강건하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내가 생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건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갈렙을 상상해보면, 백발의 굉장히 다부진 체격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갈렙이 연상됩니다. 아마 갈렙을 상상해보는데, 45년 동안 내가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걸 보고야 말겠다, 매일 덤벨 들고 운동하고 매일 아침 조깅하고 그러지 않으셨을까.


제가 이 얘기를 하는 거는 제 친구 아버님이 80대이신데, 매일 아침 역기 들고 매일 아침 산에 오르시고, 제가 볼 때는 한 2, 30대처럼 건강하시더라고요. 놀랍더라고요. 매일 아침마다 냉수 마찰 하시고 그런 분이 계세요. 여러분, 갈렙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때를 기다렸다, 내가 이때를 기대했다.


그래서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우리가 찬양도 하지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가 정확한 대사가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저를 따라해보세요.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나 더 이상 못 기다린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지금 나에게 이 약속을 지켜달라.


12절부터 15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며,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습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아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또 함께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그리고 1516교회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낙 사람들은 거인족들이었죠. 그런데 그 거인족들이 자리 잡고 있는 어느 도시를 찾겠다고 했어요? 기럇 아르바. 기럇이라는 것은 마을, 성읍 이런 뜻이고요. 아르바라는 사람의 성읍이다. 그래서 그 아르바는 아낙 자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어요.


그러면 왜 굳이 이 도시였을까? 여러분, 가장 어려운 도시잖아요. 그런데 굳이 이 도시를 치려고 했을까, 여러분? 그래서 민수기 아까 14장을 봤는데, 13장에서 불신의 보고를 했던 사람들의 핵심 내용을 한 구절 읽어볼게요. 민수기 13장 33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거기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또 우리 자신이 보기에 어떻다고요? 메뚜기 같았다. 너무 심하죠. 아낙 자손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기 정체성도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고, 영적인 수치를 당했던 기억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갈렙은 "올라가서 싸우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이 땅을 취할 것이다." 할렐루야.


그런데 아무도 그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백성들이. 그러니까 얼마나 그의 마음 가운데 안타까웠을까. 결국에는 믿음의 고지가 저 앞에 있는데, 사람들이 다 안 된다, 다 불신해가지고 그 믿음의 고지의 코앞에서 올라가지를 못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의 마음 가운데 굉장히 안타까웠죠.


그래서 거인족들, 그때 그 불신의 보고를 하게 만들었던 그 거인족들, 광야 1세대가 불신의 보고를 한 거지만, 그 거인족들 중에서 머리가 되는 도시, 내가 이 머리가 되는 도시를 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깊은 수치, 쌓인 수치를 제거하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기럇 아르바, 헤브론이라고도 하는데, 헤브론은 남부 가나안 산악지대 가장 높은 최고봉입니다.


그래서 아르바라는 거인족의 최고봉이 남부 지역의 최고봉이 되는 도시에 위치를 했다는 것은 다 의도적인 것이었겠죠. 그리고는 거기를 치겠다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동안 갈렙이 "내가 너무나 억울한데, 이거 반드시 내가 오늘 해야겠다. 이 수치를 떠나가게 해야겠다." 이런 의도였을 거라고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늘 12절, 다시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12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늘 갈렙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사는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저를 따라해보세요.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게 가장 주목할 만한 고백이고, 또 우리가 가장 마음에 감동이 되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고 또 읽어보니까 가장 많이 한 표현은 다른 표현이었어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때 내게 말씀하신 대로." "이 약속을 지켜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이 땅을 취하겠다." 할렐루야.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봐야겠다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다는 것을 봐야겠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데 여러분, 이 고백을 하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안 하실까요? 하나님 너무 기뻐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지난 45년을 온 갈렙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헛된 말씀이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생존을 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건강을 주시고 리더십을 주시고 탁월함을 주셔서 그 성읍을 치게 하시잖아요. 놀라운 일입니다. 말씀을 신뢰하는 자에게. 어떤 인생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할렐루야.


그 갈렙이 그렇게 나왔을 때 여호수아는 열두 지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고마웠을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미 최고령이고 모세의 약속도 있고, 그들이 7년 동안 정복한 땅들도 있잖아요. 그 중에서 좋은 땅, 아니면 그 중에서 특별히 좋은 땅이 아니어도, 그 중에서 어떤 땅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내줘야 될 상황이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갈렙도 유다 지파도 다 그 땅도 밟고 함께 전쟁을 치른 것이니까.


그런데 이 갈렙이 모두 앞에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장 어려운 성읍을 나에게 허락해 달라고, 얼마나 귀감이 됩니까. 하나님이 기꺼이 그에게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죠. 창세기를 보면 유다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사실 기회주의자 역할을 했었잖아요. 그래서 동생 죽이지 말고 그냥 팔아넘기자, 그렇게 죄를 지었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추적하심으로 인해서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켜서 가정의 회복자가 되죠.


자기 목숨을 걸고 베냐민을 지키겠다고 이야기하므로 요셉의 마음이 움직여서 결국엔 야곱 때문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돼요. 창세기 49장 10절에 아버지가 유다에게 또 유다의 자손들에게 준 축복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 왕의 통치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 왕이 되는 세상의 탑리더가 되는 축복을 받았네. 여러분, 그것이 아니죠. 본질적인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자기 희생적인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세상의 리더가 되어야만 세상이 온전히 회복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계보에서 우리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하나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람들이 만든 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섬김의 리더십, 겸손의 리더십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그 유다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고, 그 계보 가운데, 그 흐름 가운데 갈렙이 또 보여주는 거예요.


갈렙이 자기가 제일 어려운 데를 올라가서 목숨 걸고 싸우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걸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지 않으시겠냐고요. 그리고는 그렇게 목숨 걸고 얻은 헤브론 땅을 백성들을 위해서 도피성으로 나중에 내놓거든요. 내가 그 땅 차지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서 섬기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의 자랑이라는 거죠. 할렐루야.


그러니 이런 사람은 어떻게 축복을 안 해주시겠어요? 여러분이 정말 이기적으로 내 일, 내 가정, 내 자녀, 내 사업, 하나님 좀 복받게 해주세요, 근데 섬길 마음이 없고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될 영적 당위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한두 번은 응답이 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걸 계속 응답이 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유다와 같은 마음, 갈렙과 같은 마음, 예수님이 보여주신 리더십,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 복을 안 주시냐고요. 많은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유다도 자기가 자기 목숨 내놓고 희생하겠다고 했고, 갈렙도 어떻게 보면 이 노년의 마지막 힘을 쏟아서, 마지막 자신의 생명을 쏟아서 "내가 이때를 위해서 기다렸는데, 내 한 생명 바쳐서 이 민족의 수치를 씻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마음의 고백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냐고요. 그러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주를 위해서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할 때 "제가 주를 위해 기꺼이 죽겠습니다" 진짜 죽이시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기도가 나올 수도 없고, 그 기도를 할 수도 없고, 그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는 반드시 복 주셔야 됩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 됩니다" 이 기도를 할 능력이 안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와 갈렙, 또 다윗 그 계보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인생이 단 한 번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비효율적으로 살라고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주님 앞에 "하나님, 이 물질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이 생명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다 가져가시냐고요? 좀 많이 가져가시긴 하더라고요. 다 가져가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것보다 넘치는 복을 주세요. 그렇게 지난 인생의 세월을 살아보니까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게 축복인 거예요.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고백을 하면 큰일 날까 봐 고백을 못하더라고요.


"주님이 보내시면 땅 끝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이러다가 하나님 나 선교사 보내면 어떡하지? 선교 영상 보면서 너무 감동받을까 봐 자제해야 돼, 자제해야 돼 이러면서 선교 영상 헌금만 좀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축복의 통로가 되겠어요? 여러분 그 고백을 한다고 여러분의 인생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아직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제가 여기 들어와서 한 달 반 동안은 이 어둠 가운데 여러분의 얼굴이 안 보였어요. 근데 요즘은 익숙해져서 여러분의 얼굴이 보여요. 저 뒤에 계신 분의 표정도 보여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어차피 하나님, 이 재물을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나의 소유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내 생명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계획에 없던 것을 그냥 갑자기 가져가실까요? 그러지 않으세요.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가져가시려고 하면 내가 그 얘기를 안 해도 가져가실 수 있어요, 없어요? 내가 그 고백을 하는 걸 왜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 고백을 하든 말든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어리석게, 내가 올해는 추수한 게 많은데 창고를 하나 더 지어서 곡식을 가득 쌓아놓고 1년 내내 배불리 먹으면서 즐기면서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너의 영혼을 부르면 그것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은 자여,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어차피 내가 그 고백을 하든 안 하든 그건 하나님이 결정하세요. 그래서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할 수 있다는 게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의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 기꺼이 나의 인생을 들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너무 기쁘신 거예요. 너무너무 기쁘신 거예요.


그 기도가 너무나 합당한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복이 그를 통해서 자손 대대로 흘러가고, 동시대에 흘러가고, 열방에 흘러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님들이 그런 성도들 되게 하시고, 우리 자녀들이 그런 자녀 되게 하시고, 1516교회가 그런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 가족 함께 오신 분들, 가족들 손을 잡고 기도하시고요. 또 가족을 대표해서 오신 분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고요. 하나님, 우리가 갈렙의 믿음, 갈렙의 도전정신, 갈렙의 헌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45년을 기다렸던 그 갈렙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가정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이 기도생활이 하나님, 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 그러한 고백이 있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셔도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 날에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허락하신 섭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약속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유다와 같이 헌신하며 갈렙과 같이 헌신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헌신하신 것처럼 기꺼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헌신하며 나아가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이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달려가리라, 인도 아닌 인도 아닌 오직 성령으로 주 얼굴 향하여 달려가리라. 오, 주의 영광 안에 살게 하소서.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라. 인도 아니 늦도 아니 오직 성령으로 주 얼굴 향하며 달려가리라 오, 주의 영광 안에 살게 하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라. 감사합니다.




2025.12.11(목) | 4321 WORSHIP | 어린 양과 유다의 사자 (계 5:1-14)

요약 정리


본문: 요한계시록 5장 1-14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하나님의 뜻을 향한 거룩한 갈망


천상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안팎으로 쓰고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비밀스러운 구원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천상과 지상, 그 어디에도 이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어 사도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


  • 예배자의 자세: 요한의 눈물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었습니다. 우리도 예배에 나올 때 내 뜻을 관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거룩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2. 유일한 합당자: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


장로 중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하며 두루마리를 펴실 분을 소개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 유다의 사자 (Lion of Judah): 야곱의 예언처럼 희생의 리더십을 통해 왕권을 얻으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 다윗의 뿌리 (Root of David):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실상은 다윗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 이기신 자: 세상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분입니다. (이단 교주가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이긴 자이십니다.)



3. 어린 양의 신성(Divinity)과 경배


예수님은 일곱 뿔(완전한 권세)과 일곱 눈(성령)을 가진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네 생물과 24 장로가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 완전하신 하나님: 하나님 외에 경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이지만, 성부 하나님은 어린 양이 경배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100% 사람이자 100%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시키지 마십시오.



4.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History)를 완성합니다


장로들은 '거문고(찬양)'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성도의 기도)'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섰습니다.

  • 역사의 동역자: 구원 역사의 하이라이트인 예수님이 등장하는 순간, 그 한가운데에 성도의 찬양과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에 가장 가까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구원 역사를 완성해 가십니다.



5. 결론: 왕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 정체성: 세상에서 종살이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왕의 자녀(King's Kids)'입니다. 어린아이일지라도 왕의 자녀는 권세가 있습니다.
  • 돌려드리는 삶: 모든 만물이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릴지어다"라고 찬양합니다. 예배는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그분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녹취록


오늘은 말구유에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실제로 천상에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1장, 2-3장, 그리고 4장부터 22장까지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에서는 천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게 되고, 2-3장에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나머지는 대환난과 영원한 천국의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4장과 5장은 이 앞부분과 뒷부분의 대반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키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미 내가 본 예수님의 환상(과거사)과 지금 있는 일곱 교회 보내는 편지(현재사), 그리고 장차 일어날 일(미래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미래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예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분이 누구냐를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그게 이제 천상의 하나님의 보좌가 쫙 열리면서,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6장에서 보았던 그 천상의 보좌, 그리고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인자 같으신 이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서 그 보좌로부터 영원한 권세와 나라와 능력을 받는 장면(다니엘 7장), 그리고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보았던 하나님과 그 보좌 우편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고백(사도행전 7장)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그 동일한 환상을 지금 사도 요한이 보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예배할 때 이분들이 보았던 그 하나님 보좌의 거룩한 환상이 우리에게도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 크리스마스인데, 어떻게 보면 시작점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 시작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지점에 천상의 예수 그리스도와 이렇게 중첩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천상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다고 했는데, 오른손은 헬라어로 '덱시오스'라는 단어인데 권위, 능력(Authority, Power)을 의미합니다. 두루마리를 헬라어로 '비블리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더 바이블(The Bible)'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책'이란 뜻이고, 이 비블리온은 원래 그냥 책이란 뜻입니다. 고대에는 양피지나 파피루스를 돌돌 말아서 책으로 썼지요.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위 가운데 붙들고 계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계시의 말씀이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비밀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책 안에 담겨 있는 예언의 말씀, 계시의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는 또 다른, 한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제가 설교문 문장을 써 놓고도 이 문장이 맞나 고민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펼쳐서 보여 주시는 것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동일하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한 차원 다른 계시의 말씀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이 지금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야기하는 강조점이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힘 있는 천사가 외치기를 누가 이 책을 펴기에 합당하고 누가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 외쳤습니다. 그런데 천상에도 지상에도 지하에도 세상 어디에도 합당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 있는 천사'라고 했는데, 왜 힘 있는 천사라고 했을까요? 영적인 존재들인 천사들의 세계에도 위계(Hierarchy)가 있습니다. 천군을 이끄는 천사장 미가엘이 있고, 하나님의 메시지 중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은 수태고지 때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줬잖아요.


그런데 여기 보면 힘 있는 천사가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이거를 전달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전달하신 그런 비밀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단어, '악시오스'는 우리가 찬양에서 많이 사용하는 "존귀하신 주(Worthy is the Lamb)", 그 어린 양은 존귀하시다고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4절 말씀, 아무도 그 책을 펴지 못해서 사도 요한이 안타까워하는 장면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아니, 천상에서도 우는 사람이 없는데 왜 사도 요한이 울까요? 통곡을 하면서 크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갈망이 너무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너무너무 알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예배 자리에 나올 때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라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고 싶어서 "하나님 제 뜻을 좀 알아주세요"가 아니라, "제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사업의 영역, 우리 교회의 영역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갈망으로 간구하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 주실 것이고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사모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 때, 천상의 보좌 앞 스토리가 마치 드라마 같습니다. 사도가 울거나 말거나 그게 중요하지 않다면 이 얘기가 왜 써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T 성향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요한이 울든 말든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고 하시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F적 감성도 갖고 계십니다. T와 F를 다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가운데 24 장로 중 한 사람을 통해서 정답을 알려 주십니다. 5절 말씀 읽겠습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네 생물'은 동서남북 땅의 완전수 4를 상징하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보좌하고 섬긴다는 의미이고, '24 장로'는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합친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수 대표자들입니다. 그래서 만물과 만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대표자들 중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천사도 몰라서 질문하고 사도 몰라서 슬퍼했는데,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가 "짜잔" 하고 공개를 하는데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역사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유일하게 합당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이신가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세 가지로 고백했는데 유다의 사자(Lion of Judah), 다윗의 뿌리(Root of David), 이기신 자(The Conqueror)라고 표현했습니다. 단순히 게임을 이기는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정복하신 분이라는 개념입니다.


'유다의 사자'는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12 아들을 축복할 때 유다 지파에게 희생의 리더십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를 사자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장차 그 계보로부터 왕들이 나올 것이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응답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어린 양이 아니라 유다의 사자, 사자 왕이십니다.


'다윗의 뿌리'는 마태복음 1장 1절에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되어 있듯이 다윗의 자손이신데, 사실은 다윗의 원뿌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시간의 관점에서 다윗이라는 인물을 놓고 보면 그의 후손으로 장차 오실 분이시면서, 사실은 그의 존재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관점에서 그분을 이해하려고 하면 모순된 표현인 것입니다.


세 번째, '이기신 자'. 이긴 자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이단이 어디입니까? 신천지입니다. 교주 이만희가 이긴 자라고 거짓 교리를 가르쳐서 혹세무민합니다. 계시록에 예언된 사건을 모두 보았고 들었고 증거하는 자가 이만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마귀를 이긴 자가 이만희 자신이기 때문에 14만 4천의 구원의 완전한 수를 이룰 수 있는 교주는 이만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가 방금도 읽었잖아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그러나 너희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신 자입니다. 무슨 이만희가 이긴 자입니까? 계시록 3장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그'는 누구일까요? 이기는 성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최후 승리를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기는 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처럼"이라고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인 승리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승리자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일 파티를 하면서 주인공이 빠졌는데 생일 파티 할 수 있습니까? 주인공이 안 나타나는데 생일 잔치 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들이 그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그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생일 잔치 하시라고 크리스마스 디너 프로그램을 계속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대한민국에서 크리스마스는 비싼 선물과 맛있는 외식 하는 날, 젊은이들에게는 남녀 간에 데이트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떠도는 저속한 밈이 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금값인데 지나면 헐값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데이트하는 황금 같은 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공이 잘못됐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아실 겁니다. '크라이스트(Christ)' + '미사(Mass)', 즉 그리스도께 경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종교적인 중립성 때문에요.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너무나 노멀한 생일 잔치 인사잖아요. "Happy Birthday to Jesus" 이거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 16세기부터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함께 예배하는 그날이 행복한 날이라는 표현을 쓴 거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백화점에서도 종교색을 빼기 위해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자체를 안 씁니다. 크라이스트가 들어가니까요. 그래서 10여 년 전부터 'Happy Holidays'를 많이 썼는데 요즘은 이 말도 안 쓰더라고요. 제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 갈 일이 있어서 가 보니까 '아뜰리에 드 노엘(Atelier de Noel)'이라고 써 있더군요. 노엘이 탄생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노엘이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걸 모르니까 그 개념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Wonder all the way', 쇼핑이 원더(Wonder)라는 백화점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탄의 참 주인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탄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주인이신 줄로 믿습니다.


6절과 7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보좌 앞에 어린 양께서 일찍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인데, 일곱 뿔과 일곱 영을 가지셨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거룩의 완전수입니다. 뿔은 권세와 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권세를 지니고 계시고, 일곱 영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오른손에서 비밀의 말씀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이 마지막 최고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기에 합당하신(악시오스)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일 뿐만 아니라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이단 사이비들이 득세하고 있어서 너무나 안타까운데, 마지막 때가 물질문명이 첨단으로 갈 뿐만 아니라 거짓 영들의 활동이 극단으로 가는, 물질의 극단 그리고 거짓 영성과 거짓 종교들의 극단으로 가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깨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유일하게 완전하게 알려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설교 시간에 "나만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완벽하게 해석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거나, "내 설교 자체가 계시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설교 들으면 안 됩니다. 큰믿음교회가 그렇게 주장했거든요. 지금은 이름을 사랑하는교회로 바꿨는데, 목사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람들을 얼마나 정죄하고 비난하고 괴롭혔는데요. 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전하고 대언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하지만, 내 언어 자체가 계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의 위험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계시의 권위와 교황의 교시의 권위를 동급으로 두잖아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번역한 성경만 유일하게 무오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말씀보존학회의 킹제임스 버전 역이라는 한글 번역을 따로 씁니다. 정통 교회 서점에서도 모르고 파는 경우가 있는데 보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번역한 성경만이 유일한 완전한 성경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절대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이 절대 구원자이시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열차가 열심히 달린다 한들 철로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진리의 길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네 생물과 24 장로가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물론 너무나 감격해서 엎드렸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잖아요. 그러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지금 그걸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장면을 보면서, 지금 경배를 하나님께 하는 게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고 있는데 기분 나빠하셨나요?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에게 경배하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 보시기에 성자 어린 양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한 레벨이 아래라면 성자에게 경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걸 기뻐하십니다. 마지막 구원의 완성의 계시가 선포되는 것만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 어린 양께 모든 존재가 경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반인반신이 아닙니다. 100% 신성과 100%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흠 없으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유일한 다리,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격화시키면서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는 하나 아래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오늘부로 다 접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격화시키고 그 자리를 교주들이 채우려고 하는 거 절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단의 경계선에 있는 곳들도 있으니 무턱대고 가지 마시고 예의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 11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 땅, 땅 아래 있는 모든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표현해야 하는데, 누가 영광을 받으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우리 3차원 시공간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그분은 신적 존재이시고 이 세계를 초월적인 영역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으로 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높여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천국 소망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소망도, 죄와 저주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네 생물과 24 장로는 한 손에는 거문고, 다른 한 손에는 향을 담고 있는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문고는 찬양을 의미하고, 향을 가득 담은 대접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인데 사도 요한이 통곡하고 우는 게 뭐가 중요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다 써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 섭리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 나라의 조력자가 된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환상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그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전달자, 동역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실 이 모든 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 온전히 전달하고 실천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반전의 중간 지점에서 어린 양 주인공이 등장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시고 그분이 구원의 계시의 두루마리를 가지시니까 영계와 자연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배합니다. "이분이십니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거문고와 성도들의 기도가 나오냐는 것입니다. 거문고는 찬양이고 예배잖아요. 성도들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기도잖아요. 계시록 7장에 가면 순교자들이 하나님 앞에 탄원하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기도를 우리가 하든 안 하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실까요? 이루시는데,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 하이라이트 조명 딱 받으시는 그 순간에 갑자기 그 가운데 찬양이 올라가고 기도가 올라가는 장면을 정중앙에 배치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높여 드릴 때 하나님이 그것을 너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소망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찬양을 흠향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기쁨과 감격에 충만하셔서 구원 역사의 계시를 펼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한가운데, 유일한 주인공 예수님이 등장하는 자리에 거문고(수금/Harp)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수금을 타면서 하나님 앞에 예언을 하고 찬양을 했습니다. 예언서는 전부 운문이잖아요. 몇 년 뒤에 개역개정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문장 부호(큰따옴표, 작은따옴표 등)가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서 해독하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영어 성경은 운문의 라인을 끊어서 써 주거든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의 곡조로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향으로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있는데 이 기도가 주님 앞에 올라가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분향단 기억하시나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 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게 분향단입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낮에 '나인 투(9 to ...)' 기도의 집을 열잖아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흐느끼며, 마음속으로, 외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셔야 되는 이 장면에서 찬양과 기도가 한가운데 배치돼 있다는 것,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말씀해 주시는 우리 주님이 너무나 좋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9절과 10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우리가 땅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요? 왕 노릇 하리로다.


어떤 분들은 "나는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지만 세상에서 종살이하듯 살고 있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만난 어떤 분도 직장에서 대표가 이용해 먹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다고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세상에서 종살이하는 것처럼 살지만, 우리가 정말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왕의 자녀들입니다. 예전에 '킹스키즈(King's Kids)'라는 선교 단체 있었죠. 가슴에 손 얹고 저를 따라 해 보세요. "나는 왕의 자녀입니다."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오늘 본문에 보셨잖아요. 천상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한가운데 우리 예배자들과 기도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역사를 완성하시는 그 계시의 한복판에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의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목동이었잖아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이었고 삯꾼과 같은 존재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수치를 입는 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군대도 왕도 나서지 않는데 목동 소년 다윗이 왕 노릇을 했습니다. 킹스키즈, 왕의 자녀인 것입니다. 왕처럼 담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로 로마로 끌려갈 때 광풍 가운데서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데, 그들을 안심시키며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죄수 신분인데 왕 노릇 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비밀, 가장 놀라운 계시를 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하나님의 자녀 된 놀라운 특권을 갖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세요.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11절, 12절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만만 천천, 무한수의 천사들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계시를 펼치시기에, 구원 역사를 이루시기에, 유일하게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3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천상과 지상과 지하, 해저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주님을 찬양하는데, 마지막에 '드린다'고 되어 있나요, '돌린다'고 되어 있나요? '돌린다'는 표현을 잘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시편 29편 1절에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Render'라는 단어를 쓰는데,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원래 그분의 것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원래 모든 영광과 부와 지혜와 권능과 아름다움과 권위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눠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맡겨 주신 것입니다.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찬양과 참된 예배는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14절 말씀,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할렐루야.


사실 앞에 찬양을 하는데 '그냥 오늘은 설교 안 해도 좋겠다, 계속 찬양하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그분이 받으시기 합당한 경배를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존재 이유인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영원토록 천국에서 할 일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계시와 섭리를 펼치시는 데 있어서 우리가 조력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찬양과 기도입니다. 예배자로, 기도자로 평생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참된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우리도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 하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왕 노릇 하는 것은 그때의 일이고, 이 지상에서... "아니 내가 이렇게 연약한데, 집에서 핍박받는데, 직급이 낮은데..." 아니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도, 사도 바울도, 에스더도, 다니엘도 보셨잖아요. 포로일지라도, 어린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 왕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왕의 자녀이기 때문에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의 종이 아니라 왕의 자녀입니다. 집안에 건장한 종들이 여럿 있어도 아장아장 걷는 주인의 아이가 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연약하다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왕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왕 노릇 하는 승리자들이 될지어다.


미리 얘기를 안 해서 죄송하긴 한데, 찬양팀 올라오시면 '내 삶의 이유라' 찬양 한 곡 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나의 삶에 존재 이유가 되십니다. 나의 찬양의 이유가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가 입술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으로 이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예배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 찬양하면 좋겠습니다.


[ 기도 ]


주님, 돈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내 능력을 보여 주려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내 꿈과 내 인생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죄와 사망과 저주의 권세에서 건져 주시고 살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이름의 아름다움과 그 이름의 선하심과 그 이름의 영원한 생명을 찬양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주님, 날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걸음과 모든 행보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평생에 예배자와 기도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고백이 있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을 들고 전심으로 주여 삼창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와 명령과 계획과 언약을 완성하실 뿐, 그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섭리를 계시하시고 펼치시고 완성하실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위해서 살아가는 나의 평생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천상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찬양과 우리의 기도와 동역하기를 원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너의 기도에 응답하며 내 구원 역사를 완성하기를 원한다"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찬양에 흠향하시고 감격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기 원한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거시적인 역사와 섭리에 우리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심으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전심전력 찬양하며 나아가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 주옵소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동역자로 삼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평생에 이러한 예배자로, 기도자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증거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는 분들, 평생의 예배자로 기도자로 하나님 앞에 헌신되고 구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분들 단으로 나오셔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단으로 올라오시고요, 단 앞에도 오시고요.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셔도 됩니다. 각자 선 자리에서 부르심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 평생의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 구원 역사를 완성하는 데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될지어다.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


골방의 예배자, 골방의 기도자가 세상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불신 가정에서, 갈수록 유물론과 물질 만능주의, 첨단 과학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 무신론적 시대에, 이 세상 한가운데서 예배자와 기도자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천상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찬양에 화답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의 자리에 동역자로 불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완성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섭리에 내가 제외된 사람이 아니라 포함된 사람인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님께 감사 영광의 박수 올려 드리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자리로 가셔서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여러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왕 노릇 하리라. 어떤 역할을 한다고요? 왕 노릇 하리라. 우리가 저 세상에 천국에 가서 천년왕국에 왕 노릇 하는 것은 그때의 일이고, 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라.


[ 기도 ]


저를 보시겠어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 합니다. '야, 내가 주님을 안 만났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 10년 감수가 아니라 정말 영원(Eternity)을 감사한 건데, 우울증에 바닥을 치며 바닥을 뚫고 들어가면서 살았거든요. 오늘 낮에 대학 때 친구가 미국에서 와서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했는데, "상준아 네가 욕을 해 본 적이 있어?"라고 묻더군요. "나 말끝마다 욕을 했지." 제가 내 안에 분노와 불만이 가득해서 죽고 싶으니까, 이 인생이 죽을 맛이니까 매가 쏟아져 나오고 싸우고 엉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의 감격도 체험했습니다. 근데 10대 중반, 20대 때까지도 우울 기질과 여러 증상들이 여전히 있었어요. 자신감도 없고 자존감도 낮았고 전도사가 돼서도 자존감도 낮았습니다. 근데 한 가지 제가 명확하게 갖고 있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저 사람 지금 나를 못 알아보고 있구나.' 항상 그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데. 저 사람 나를 못 알아보고 있네.'


권사님 한 분이 엘리베이터에서 "목사님 요즘 살쪘어" 그러셔서 제가 충격을 받았는데, 예전에 그런 생각 했습니다. '저 사람은 나의 내면을 안 보고 껍데기만 보고 있구나.' 제가 예수님 만나고 한 가지 명확하게 알게 된 것,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이고 예수님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할 만큼 존귀하게 여겨 주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근데 여전히 제가 정말 너무나 못난이였거든요. 너무너무 못난 인간인데도 그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못난이로 대하면 '아니 날 못 알아보고 있구나. 하나님이 저 사람의 영안을 열어 주셔야 될 텐데' 이런 생각 하며 살았습니다. 혼자 꿈을 꾸며 산 것처럼요. 근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빚어가시고 만들어 가시더라고요.


여러분,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보내는 시선, 평가에 왜 흔들리세요? 여러분의 마음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도 상처 될 거 없어요. 동의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동의하는 줄로 믿습니다. 진리의 말씀에만 고집스럽게 동의하세요. "이 말씀만 나는 붙잡고 살겠다."


베드로 사도도 바울 사도도 그들의 마지막 서신에서 마지막 유언처럼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 성경 말씀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받아쓴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마지막 때에 미혹케 하는 영이 판을 치는 이 시대,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왕 노릇 하며 사세요. 여러분이 왕의 자녀인 걸 몰라보는 사람들, "아, 모르는구나. 못 알아보는구나" 하고 불쌍히 여기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왕의 자녀답게 사세요. 그 자존감, 그 자신감, 그 자아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며 사세요. 삶이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 월급이 적을지라도, 내가 지금 무직일지라도,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을지라도, 사람들이 뭐라고 판단하든 상관없어요.


제가 전도사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중학생들 앞에서 말을 하도 버벅거리면서 벌벌 떨며 얘기하니까 앞에 있던 나이 많은 선생님이 "전도사가 말도 못 하네"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제 전도사 시작이었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말하는 거 별로, 지금은 매우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좋아하지 않아요. 말을 진짜 못하는 사람이었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저는 그때도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메신저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들려주실 하나님 메시지가 있어서 나를 보내셨다.'


상황이 어떻든, 내가 아무리 못나고 부족하고 결핍이 있고 찌질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셔야 됩니다. 왜 타협하십니까? 왜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십니까? 우리 하나님 말씀만 붙잡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 말씀의 약속, 말씀의 선포,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지어다.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왕의 자녀로, 존귀한 하나님 나라의 꿈과 환상 가운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지어다. 두 손을 들고 주여 삼창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


우리가 오늘 세상에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사람을 따라 살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가 있을 수 있도록 성령님 기름 부으시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 주님 기름 부으십시오. 세상을 향하여,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할 말을 일러 주시고, 우리들에게 영적인 지혜를 더하여 주시고 말씀의 통찰력을 더하여 주셔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따라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여기까지 왔사오니 주님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가득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넘치기 원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 가득 차 주님의 귀한 도구가 되어질 수 있도록 성령님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 모든 겸손의 마음이 넘치도록 부어질 수 있도록 성령님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모든 두려움과 의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떠나가게 하여 주시고 오직 주님만 붙들고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아버지의 그 마음이 부어질 수 있도록 성령님 기름 부으시기를 원합니다.


날 자녀라 부르시고 우리의 선하고 인자하시며 인격적인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자리를 선택하고 우리가 늘 날마다 하루하루를 계획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의 이 시간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많은 계획과 생각과 방법과 나름의 인생의 노하우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전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의심과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가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기를 소망하오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마음 가운데 있는 두려움들은 떠나갈지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의심은 물러갈지어다.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회복이 있고 능력이 있고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우리가 입을 열어 선포하며 나아갈 때마다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든 예배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람을 따라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사명을 따라 살며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우리를 삼아 주시옵소서.




2025.12.04(목) | 하프타임 셀러브레이션 | 아기 예수 나셨네(사 9:6)


요약 정리


📢 설교 요약: 아기 예수 나셨네


본문: 이사야 9:6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아기로 오신 통치자 (The Government)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예언했습니다.

  • 영원한 통치: 세상의 대통령이나 리더는 나이가 들어서 권력을 잡지만, 예수님은 가장 무력한 '갓난아기'로 오셨음에도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없는 통치자이십니다.
  • 역설적 권위: 모든 전능함과 잠재력을 가지셨지만, 부모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2. 기묘자라, 모사라 (Wonderful Counselor)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상담자(Counselor)이십니다.


  • 인생의 길잡이: AI나 세상의 전략가들은 불완전한 데이터에 기반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십니다.
  • 미로 속의 전망대: 인생이라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주님의 조언은 마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듯 우리가 가야 할 선한 길을 정확히 인도해 주십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어린아이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의 '방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 아버지의 마음: 능력은 도덕성을 담보하지 않아 악하게 쓰일 수도 있고,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전능하신 능력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녀인 우리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4. 평강의 왕 (Prince of Peace)


세상의 상대주의는 포용을 말하지만 그릇이 작아 모두를 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을 가지신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차별 없이 모두를 품으십니다.

  • 사랑을 선택하신 힘: 갈등과 분열, 갑을 관계가 만연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힘'을 키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힘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 하나 됨의 신비: 인간의 노력으로는 진정한 하나 됨이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는 차별 없이 누구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5. 결론: "나를 좀 안아 주겠니?"


전능하신 분이 왜 무력한 아기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나를 좀 안아 주지 않겠니?"라고 인격적으로 요청하시기 위함입니다.

  • 인격적인 초청: 원하지 않는 사람을 강제로 껴안는 것은 무례함입니다. 주님은 힘으로 우리를 제압하는 대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분을 안기를 기다리십니다.
  • 치유와 회복: 춥고 외로움이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을 때, 그분의 온기가 우리 영혼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참된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녹취록


성탄절이 되면 목회자들은 어떤 본문의 말씀을 전할까 항상 갈등을 많이 합니다. 저희 같은 경우 하프타임에서도 크리스마스 셀러브레이션을 하고, 12월 17일에도 하고, 성탄 주일 예배도 있고, 성탄절 기간에는 새벽 기도 메시지도 있습니다. 목회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매년 성탄절 메시지를 하게 되는데, '오늘은 어떤 메시지를 할까' 고민이 될 땐 그냥 정공법으로 가는 게 좋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가장 대표적인 예언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사야서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은 "아기 예수 나셨네"입니다. 제목을 써 놓고 계속 읽다가 끝에 '얼쑤'를 붙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는 영어 제목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The Baby is Born." 세상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바로 그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700여 년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한 구절의 내용들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인구 감소가 심각해서 인구 절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경제를 생각하면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결혼을 안 하려 하고, 결혼을 해도 자녀를 안 낳으려고 합니다. (오늘 아이들 대표가 왔는데 반갑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굉장히 귀한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TV에서 육아 프로그램들을 많이 보지 않으십니까? 요즘 애들을 많이 낳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는데, 왜 그런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을까요? TV를 보고 계신 분들이 중장년, 노년층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사랑하고, 아기를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너무나 반갑고 고맙습니다. 새 생명이 주는 파릇파릇한 희망 넘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기는 특별한 아기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 무엇을 메었습니까? '정사'를 메었습니다. 이 정사는 히브리어로 '미스라'라는 단어인데, '통치'라는 뜻입니다. 정부(Government)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즉 다스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표준새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그 어린 아기가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시대를 생각해 보면 탈권위주의 시대가 되었고 평등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공동체에는 아주 작은 조직이든 큰 조직이든 간에 리더십의 원리가 작용합니다. 어떤 리더가 세워지느냐에 따라서 그 시대와 공동체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리더가 권위주의적인 리더인가, 아니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섬김의 리더인가에 따라 양상은 굉장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실 아기가 태어날 텐데, 그 아기의 어깨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주어집니다. 요즘 영화 트렌드를 보면 어린아이를 통해 신을 묘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부르시는 하나님을 어린아이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에서 신성 모독적이지 않냐는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사야 말씀을 보면 상당히 근거 있는 표현입니다. "어린 아기인데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것을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는 말처럼, 아이의 인생에 어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관점에서 과거로 돌아가 회고하는 관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9장 6절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나는데 그분이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은 시간의 회귀적 관점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차원에서의 초월적 관점입니다. 이 아기는 우리에게 아기로 태어났지만, 그분의 통치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는 영원한 통치이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오늘 궁금해서 검색을 해 봤습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선물이 남았나요? 네, 그럼 선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신 분은 누구일까요?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AI를 너무 신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번째 질문, 미국 역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대통령은 누구일까요? 존 F. 케네디 같죠? 그는 43살에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살 더 일찍 된 사람이 있습니다. 네, 루즈벨트입니다. (정답 맞히신 분 축하드립니다.)


최근 뉴욕 시장에 맘다니가 34살에 당선되어 센세이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30대, 40대에 한 나라나 조직을 대표한다는 것이 굉장히 이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이고 수직적 관점이 강해서인지 대통령들의 나이가 거의 60대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갓난아기셨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신생아(Newborn baby)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아기를 생각해 보면 아기는 힘이 없습니다. 무기력합니다. 특히 인간 아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은 새끼를 낳으면 몇 시간 내지는 며칠 만에 일어나서 걸어 다닙니다. 다음 세대 중에 태어나고 나서 자기 발로 서는 데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게 누구겠습니까? 사람입니다. 보통 12개월, 빠르면 9~10개월 걸립니다. (저희 큰아들이 10개월 만에 걸었습니다. 13평 좁은 집에 살아서 조금만 기어가면 벽이라 빨리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인간 아기는 엄마 아빠가 하루 24시간 돌봐 주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 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그 아기를 돌보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아기로 오셨을까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전능자가, 만능인도 아니고 유능한 어떤 존재로 오신 것도 아니고,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아기로 오셨다는 겁니다.


최근에 신인 감독 김연경 선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회에 뽑힌 선수들이 프로팀에서 은퇴하거나 실력이 안 돼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현역 감독들이 김연경에 대해 "선수로서는 훌륭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진짜 지도자도 아니고 예능 감독 아니냐"며 회의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햇병아리에 불과한 이 예능 감독이 놀라운 진정성을 보여 줍니다. 전술을 탁월하게 사용해서 선수들이 그것을 감당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막에 '신(神)인 감독'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힘을 내려놓고 아기로 오셨을까요? 그분이 엄청난 잠재력(Potential)과 전능성을 갖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내려놓고 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그분에 대해 또 한 가지 묘사를 하는데 "기묘자라, 모사라"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ounselor"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놀라우신 조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AI에게 거의 모든 조언을 받기도 하고 대화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 구절이나 신학적인 질문을 해 보면 엉뚱한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AI가 거짓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빅데이터의 근거가 부족하고 잘못된 데이터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콘텐츠에 대해 검색하면 이단 자료가 상위에 뜨기도 합니다. 출처를 정확하게 보지 않으면 잘못된 자료를 참고하게 됩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면 명의를 찾고, 자녀들 진로 상담을 하려면 전문가를 찾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카운슬러가 되어 주실 그분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Wonderful Counselor, 기묘자라, 모사라."


동양의 대표적인 모사라면 제갈량이 떠오릅니다. 전쟁은 무력으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지략으로 싸우는 것임을 보여주었죠. 서양에서는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가 떠오릅니다. 냉철한 통치와 전략적 사고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땅의 최고의 모사가 되십니다. 그분이 단순히 통치자로 우리에게 바르게 살라고 판단만 하신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우리 곁에서 최고의 카운슬러가 되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인생의 과거를 건강하게 해석하시고 미래를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사가 되시면, 우리 삶 가운데 하늘의 평강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제주도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아시아 최대 미로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미로에 들어가는 순간 제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중간중간에 전망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체가 조망됩니다. "아,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 있고, 전체 구도가 이러하니 우측으로 갔다가 좌측으로 돌아서 가면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모르지만, 미로 같은 우리 인생길에 언제나 하늘이 열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분의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조망하시는 관점으로 그분의 조언을 듣게 되면, 우리 인생길이 정말 그분이 인도하시는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아기 예수님에 대해 또 한 가지 표현을 같이 읽어 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어린아이에게 하나님에게만 쓰는 칭호를 썼다는 것은 구약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성 모독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인간 아기로 태어나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같이 능력 중심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전능성, 예수님의 전능성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러운 것일까요. 그런데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면 과연 이것이 좋은 것일까요?


능력은 도덕성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이 선하게 쓰일 수도 있지만 악하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능력은 방향성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능력을 써 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인 목사님이 큰 마트에 갔다가 한 어린아이가 과자를 고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아저씨, 이 과자 사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부모님이 어디 계시니?"라고 물어봤습니다. 내가 이 아이가 원하는 과자를 사 줄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1달러, 5달러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 능력은 분명히 내가 써야 할 대상이 있고, 사용하지 않을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능력을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다음에 나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우리에게 사용하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능력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평강의 왕"입니다. 한번 따라 해 볼까요? 평강의 왕.


능력은 도덕성을 전제로 하지 않기에 악한 일에도 쓰일 수 있지만, 오시는 그분의 전능하심은 평화를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 시대, 기업에서도 다양성과 포용성(Diversity and Inclusion)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상대주의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포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을 다 끌어안을 만한 그릇 자체의 사이즈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적 기준을 갖고 계시고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시니, 세상의 일부분만 포용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능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야말로 모든 것을 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역설입니다. 상대성은 포용하고 싶어도 그릇이 안 되지만, 절대성은 그분의 절대적 기준으로 모두를 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사랑에는 차별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저는 어렸을 때 교회 학생부를 다니면서 "우리는 하나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이야기를 늘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 됨'이더라고요. 인간이 하나 된다는 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부부가 완전한 하나 됨이 가능합니까? 아이를 정말 100% 다 포용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 이 하나 됨이라는 것은 요원한 문제입니다.


오늘 청주에 장례가 있어서 다녀오다가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스다' 싶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첫눈이 내린다, 사랑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첫눈이 내리는 날 나와 함께하고 싶구나"라고 하더라고요. (생존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싱글일 때는 작업 멘트를 하면 위험한 사람이지만, 결혼해서는 작업 멘트를 해야 합니다.


평생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해도, 내 배에서 태어난 아이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해도, 자기의 다짐조차 지키기 어려운 게 인간입니다. 세상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하셨지만,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만큼 빈부 격차가 심했던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갑을 관계가 너무나 심각합니다. 계급 사회가 아님에도 계급이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키우고 싶어 합니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생존을 위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자께서 힘이 아닌 무엇을 선택하셨습니까? 사랑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전능성을 갖고 계신 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 왜 사람들의 헌신과 케어를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아기로 오셨을까요? 그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 그분을 품을 수 있도록 아기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힘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겸손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이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예언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은 놀라운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평화의 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사용하기 위해 오셨다면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오히려 우리의 처분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시는 어린아기로 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시고,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 가운데 압도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시켜 주시는 우리 예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립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일터에서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해야 하고 그 때문에 지치고 낙심하고 상처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도, 우리의 일터도, 이 대한민국 사회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으로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 그렇게 찾아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어둠과 슬픔 가운데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빛 가운데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더 능력을 채워서 나의 이력으로, 나의 실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인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인하여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찾아가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그 마음을 녹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외로움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나를 좀 안아 주겠니"라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나를 좀 안아 주겠니?"라는 음성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인하여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홀로 골방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결혼도 원하지 않고, 인생의 짐을 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합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주님이 오셔서 "나를 좀 안아 주지 않겠니?"라고 하십니다. 그 아기 예수님을 안는 순간 우리 영혼에 그분의 온기가 스며들고, 얼어붙었던 모든 것이 녹아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길 가다 보면 "Free Hugs, 나를 안아 주세요" 카드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힘을 믿고 다른 사람을 안아 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먼저 안는다면 얼마나 무례한 일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매우 인격적인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기 예수로 오셔서 "나를 좀 안아 주지 않겠니?"라고 물으십니다.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압도적인 온기를 체험하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12월 한 달이 아기 예수님을 내 품에 꼭 품고 그 주님의 임재 온기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우 바쁜 일정 가운데 살지라도 아기 예수님의 온기로 충만한 한 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며 나아갑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전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오셨지만 먼저 우리에게 안아 달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격적으로 다가오시고 우리를 존중해 주시고 우리가 마음 문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환영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1월

2025.11.30(주) | 주일설교 |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삼상 26:1-12)

요약 정리


📢 설교 요약: 주님 손에 맡겨 드리라


본문: 사무엘상 26:1-12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어리석음 (사울과 십 사람들)


십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 끼어들어 일을 만들었고, 사울은 국가의 최고 정예부대 3,000명을 무의미한 '다윗 사냥'에 낭비했습니다.


  • 잘못된 열정: 명확한 동기부여와 선한 목적이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 것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 하나님의 개입: 사람이 나서서 억지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2. 고난이 주는 유익: 인생의 무게 중심을 낮추다


아이러니하게도 밝은 곳에 있는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하지만, 어두운 광야에 있는 다윗은 사울을 명확히 봅니다. 불안하면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지만, 평안하면 보입니다.


  • 고난의 순기능: 고난은 우리 인생의 들뜬 무게 중심을 낮춰줍니다. 그때 비로소 인생의 본질이 보이고, 진짜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3.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입니다 (아비새 vs 다윗)


아비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며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그는 용맹한 장수(능력)였지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지장(智將)이자 덕장(德將)으로서 능력을 절제할 줄 알았습니다.


  • 능력의 위험성: 능력은 물과 같아서 흘러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신앙과 가치관이라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만 넘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 리더의 자세: 리더는 사람의 말(수평적 소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수직적 소통)을 먼저 경청해야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4. 두려움의 실체와 '맡김'의 은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라며 심판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자녀, 배우자, 상황 등)을 내가 통제하려 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 진정한 승리: 사울은 손에 잡히지 않는 다윗을 잡으려다 불행해졌지만, 다윗은 손에 잡힌 사울조차 하나님께 맡겨드림으로 승리했습니다. 자녀와 배우자, 내 인생의 문제들을 억지로 붙잡지 말고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릴 때 참된 평안과 해결이 찾아옵니다.



5. 창과 물병만 취하라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취하는 대신, 그의 왕권(창)과 생명(물병)을 상징하는 물건만 가지고 조용히 떠납니다. 왕권과 생명은 이미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월권하지 않았습니다.




녹취록


네. '주님 손에 맡겨 드리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의 쉰두 번째 시간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명확하게 '내가 손대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이번에도 십 사람들이 다윗을 고발합니다. 지도를 참고해서 보시면, 유다 지역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헤브론에서도 남동쪽으로 8km입니다. 십 황무지에서 기브아 왕이 있는 기브아까지는 무려 40km입니다. 산길을 가다 보면 한 45km, 50km 정도 됩니다. 이렇게 먼 지역을 가는 것이 쉬울까요? 당연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십 사람들은 왜 유다 지파, 같은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을 그렇게 사울에게 밀고해서 다윗 사냥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일까요? 사울이 한번 다윗에게 "내가 잘못했다"는 인정을 한 적이 있잖아요. 그리고는 포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가만히 있고 싶은 사울을 왜 또 흔든 것일까요?


여러분 주변에 보시면 불필요한 일에 관심과 애정과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강하게 확신하세요? 우리가 보통 이제 '호사가'라고 부르는데, 그냥 주변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굳이 필요 없는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의미합니다.


십 사람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죠. "아니다. 우리는 해결이 되지 않은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렇게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땅에서 사울과 다윗의 애매한 공존 상태, 이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시겠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나서야 할 때도 있지만,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때로는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비가일과 비교를 해 보면, 아비가일이 당장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 것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대행한 것이었기에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간과하고 자기들이 나선 것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잠언 11장 9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십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과 섭리를 간과하고 앞뒤 없이 "내가 해결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어지는 2절의 사울의 반응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 이번에도, 24장에서도 그랬고 26장 오늘 본문에서도 3,000명의 정예부대와 함께 갑니다. 제가 이걸 보면서 '야, 이건 정말 국가적인 낭비다' 싶었습니다. 최고의 인재들을 모아서 이렇게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정도 기업도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이 주신 재정과 맨파워, 인력을 선한 목적에,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1516교회를 사실 행정적인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시작해서 가장 미안한 분들은 새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등록한 지 3개월, 6개월이 지났는데도 "제가 순 배정을 못 받았습니다" 이런 분들이 계셔서 너무 죄송했어요. 요즘은 거의 그런 일은 없는데 혹여나 아직도 그런 문제가 있으면 꼭 얘기를 해 주세요. 우선 먼저 교회를 대표해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 3년이 되었고 내년에는 네 살이 되는데, 여전히 "우리가 행정적으로 준비가 미비해서 그렇다" 이렇게 얘기할 순 없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맨파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새가족반이 바뀝니다. 한 달 동안 논의를 해서 준비했는데, 여전히 강의는 하지만 이제 새가족이 들어오시면 라운드 테이블로 각 지역 공동체 새가족 사역자가 아예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럼 이제 새가족이 앉아서 같이 강의를 듣고, 첫 주부터 새가족 사역자와 대면해서 어떻게 순과 공동체에 정착을 하게 될지 저희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예전에 정부에서 일하시는 고위 공무원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대기업에서 일하면 고액 연봉으로 일할 수 있는데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사명감과 명예 때문입니다." 오늘날 물질이 굉장히 중요한 삶의 가치 기준이 됐지만, 아무리 물질주의 시대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인생에 중요한 게 있더라고요. 그것은 동기 부여입니다.


"내가 도대체 이 일을 왜 해야 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명확하지 않으면 조직이 단합되기도 어렵고 능률을 올리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오늘 사울이 데리고 나온 3,000인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정말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이 사람들이 다윗 사냥을 제대로 했습니까? 아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왕 옆에서 3,000명이 누워서 다 자고 있습니다. 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게 무슨 기능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의미 있는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왜 해야 되는지에 대한 동기 부여가 생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태만하고 싶었던 게 아닌 거죠. 반면 다윗을 따르는 600인은 정반대입니다.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다윗과 함께 장차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는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소망이 있고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도 충성을 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동기 부여 얘기를 했는데, 제가 1516교회 문화로 꼭 정착시키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왜'라는 질문을 환영하는 교회입니다. "왜(Why)"라는 질문(Question)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교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사건건 "도대체 왜 하냐" 이렇게 얘기하시라는 게 아니고요. "크리스마스 디너는 왜 합니까?", "일대일 양육은 왜 합니까?", "리조이스 캠프를 서울에서만 하지 부산까지 가서 왜 합니까?", "왜 교회 개척 운동을 합니까?" 이런 질문들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들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질문이 있어야만 답이 있습니다. 저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을 할 때 교회는 근본적인 고민과 해답을 내놓게 되고 방향성과 좋은 아이디어들을 얻게 됩니다. 1516교회가 부디 사울의 3,000인이 아니라 다윗의 600인과 같은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 5절 상황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24장과 26장이 비슷한 상황입니다. 표를 보여 주시면, 추격자 사울은 다윗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근데 오히려 도망자 다윗은 사울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유령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정말 광야에서 끝없이 도망을 치는데도 늘 사울이 손 안에 있는 것처럼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요?


표에서 보시면 굴 밖에, 굴 어귀에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오히려 모순되게 굴 안의 어두운 부분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대답을 안 하시나요? 제가 여기 들어온 지 이제 두 달 됐잖아요. 처음에는 당황스럽더라고요. 여러분 얼굴이 안 보여서요. 근데 제가 이제 두 달 되고 나니까 거의 80%의 얼굴이 보여요. 그래서 여러분 약간 오후에 예배드리면서 따뜻하고 졸리고 임재 가운데 들어가고 싶으셔도 제가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굴 어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오히려 어둠 속이 안 보이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빛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진이 26장에 보면 길가에 진을 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개활지입니다. 사방이 다 트여 있는 곳이라고요. 그러면 시야가 확보돼야 되잖아요. 근데 산속에 있는 다윗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산속에 있는 다윗은 오히려 길가에 진을 치고 있는 사울이 너무너무 잘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 화려하게 사는 것 같아도 사울처럼 불안불안하고 중요한 포인트들이 안 보이는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처럼 굴 속에, 산속에, 고난 가운데 사는 것 같지만 평안함 가운데 중요한 삶의 포인트들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 번째는 여러분이 불안도가 올라가면 볼 수 있는 것도 안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불안도가 떨어져야만 중요한 것들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두 달 전에 갑자기 저도 제가 어둡게 하자고 해 놓고 어두우니까 제가 당황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평안하니까 여러분 거의 다 보이거든요. 이것이 여러분이 불안하지 말아야 될 이유예요.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변수가 우리를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흔들림 없는 상수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3,000명이나 되고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가 안 보입니다. 근데 다윗은 주변에 그를 밀고 하는 악인들 때문에 힘들고, 그가 있는 위치는 산속 굴속이라 안 좋지만 인생의 중요한 본질들이 보입니다. 제가 운동 좋아해서 교역자들하고 매주 운동을 하는데, 운동을 할 때 보면 무게 중심을 낮춰야 안정감이 생기죠.


인생의 고난이라는 것은 인생의 무게 중심을 낮춰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왜 이렇게 바닥에 떨어졌나'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고난 가운데는 인생의 무게 중심이 낮아진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지금까지 내가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잡고 있었구나' 이런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정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구나.' 내가 화려하고 잘 나갈 때 그때 친구가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내 곁을 지켜 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본질이 무엇이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축복의 시간으로 반전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 8절, 이제 다윗의 반응을 한번 읽어 볼까요?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다윗이 부하들 중에서 특별히 딱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출중한 무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사람은 헷 사람 아히멜렉이었고 또 한 사람은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 즉 다윗에게는 사촌 형인 아비새였습니다. "누가 나와 함께 사울에게 내려가겠느냐?" 아비새가 "내가 가겠다" 이렇게 나섭니다. 그리고는 지난번과 동일한 대사를 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다. 내가 창으로 단번에 찔러서 죽이겠다"라고 합니다.


아비새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다윗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원수를 제거할 수 있는 고마운 말을 한 것일까요? 제가 이 상황을 딱 묵상을 해 보니까 사울 왕 옆에 있는 십 사람들과 다윗 옆에 있는 아비새가 다른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리더에게 나쁜 일을 권하는 측근이라는 측면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과도한 열정과, 이 아비새가 "내가 왕을 제거하겠다"는 과도한 열정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같은 동족이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제거하자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편하자고 말이죠.


회사나 국가의 지도자들은 꼭 기억을 하셔야 되는데, 권력을 갖게 되는 사람은 권력이라는 속성 자체가 그 사람을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측근들이 그 사람을 변질시킵니다. 이 측근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울 왕은 40km나 떨어진 측근이지만 십 사람들이 흔드니까 흔들렸습니까, 안 흔들렸습니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비새가 흔드는데 흔들렸습니까? 안 흔들렸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나눈 것처럼 교회는 합리적인 쌍방 소통의 구조가 열려 있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교회는 수평적인 개방성보다 하나님과 소통이 열리는 수직적인 개방성이 반드시 확보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공동체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왕을 세울 경우에는 그 왕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된다는 것이 신명기 1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리더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첫 번째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질서,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고, 두 번째 수평적인 질서, 형제들을 위해 교만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좌우로 치우치는 길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고 그의 왕위가 장구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좋은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기업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기업에 좋은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나라 일을 하시는 분들은 나라의 좋은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교회에서 직분과 사역을 가지신 분들은 교회 좋은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일을 하고 사람들과 뭔가 계획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침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리더십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즘 연말이 되고 겨울이 되다 보니까, 오늘은 좀 날씨가 풀렸지만 새벽 기도 나오시던 분들이 안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시 한번 결심하시기를 바라고 시편 46편 5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


인간이 뭔가를 계획하고 일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시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9절과 10절, 다윗의 반응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다윗이 아비새의 능력을 활용해서 자기 원수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 달라"며 능력 중심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능력은 '도덕성'이라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능력은 그냥 능력이지 옳고 그름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력은 마치 물과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물의 속성이 무엇이냐면 물을 바닥에 부으면 물은 자기가 흘러갈 길을 스스로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은 능력이 표출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칼을 잘 쓰는 칼잡이가 칼 솜씨를 활용하고 싶을까요, 아닐까요? (네, 오늘 3부는 대답이 없으신데 칼을 쓰고 싶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동석같이 힘이 넘치는 사람이 힘을 쓰고 싶을까요, 아닐까요? 당연히 쓰고 싶죠.


생각해 보니까 이건 남녀노소 모두가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하루 종일 기기만 하던 아이가 일어나고 걷고 뛰기 시작하면 다 온 세상을 다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게 인간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유능한 사람은 자기가 유능하다는 걸 알까요, 모를까요? 압니다. 그리고 그 유능한 것을 펼쳐보고 싶을까요? 당연히 펼쳐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비새를 묵상해 볼 때, 이 사람은 출중한 장수였습니다. 유능한 사람은 선한 일에도 유능하지만 악한 일에도 유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능력 우선 사회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한 가지는 가치 판단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우선시하지만 능력이라는 거는 도덕성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것입니다. 칼을 잘 쓰는데 이걸 선한 일에 쓸 수도 있지만 악한 일에 쓸 수도 있는 것이죠.


장수로 치자면 아비새는 맹장(猛將)이었습니다. 용맹한 사람이죠. 제가 생각하면서 삼국지의 장비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엄청난 전쟁터에서 공적을 올리지만 도덕성이 떨어지는 사람. 그러면 다윗은 어떤 장수인가요? 다윗도 용장이나 맹장이나 다 용맹한 거니까 비슷하지만, 그는 지장(智將)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전략가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는 덕장(德將)이었습니다. 자기 부하들에게만 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 원수에게도 덕을 베푸는 사람.


다윗은 중근동의 최고의 장수였습니다. 다윗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전 인생을 놓고 볼 때 이 사람은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능력이 너무 과해서 문제가 생길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절제의 훈련을 계속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제하도록 계속 하나님이 상황을 만드시고, 나발 사건이 '아, 이렇게 패악무도하게 하는 사람에게도 칼을 쓰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 교훈적 사건이 그에게 예방 주사가 되었던 것이죠.


제가 가끔 생각하는 건데 저를 따라 해 보세요. "미인박명(美人薄命)." 미인들은 고민이 많이 되실 것 같은데, 여러분 미인만 해당될까요? 이거는 '가인(佳人)', '재인(才人)', 탤런트가 있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정리를 해 보자면 여자가 아름다우면 인생이 기구해진다. 동의하십니까? (미인들을 왜 빨리 동의 안 하세요?) 남자가 재능이 넘치면 생명이 짧아진다, 제 명에 못 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인간은 자신의 장점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가치관이라는 그릇이 필요한 것입니다. 철학이 필요하고 도덕성이 필요한데 그릇은 조그만데 능력은, 내용물은 막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화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심이 없고 인생 철학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들이 능력만 탁월하면 그것이 나중에 자기에게는 안 좋은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개인뿐이 아닙니다. 인류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첨단 도시 문명이 하늘을 찌를 것 같지만 인본주의로 인해서 기존의 좋은 가치관들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성경적 가치관들이 무너져 가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멋진 첨단 도시 문명이 과연 건강하게 오래 버틸 수 있느냐?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디스토피아로 갈 가능성이 큰 것이죠.


아비새와 다윗을 보면, 8절에 아비새가 "당신의 손에 하나님이 넘겨 주셨다"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그러면서 희한한 대사를 했습니다. 오늘 다윗이 "그가 나이가 들어서 죽든지 전장에 나가서 죽든지"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얘긴가요? 자연사로 죽든지 사고사로 죽든지 그냥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울의 시대가 가야 다윗의 시대가 오는, 자기 전 인생에 걸려 있는 문제고 자기를 따라오는 이 공동체의 명운이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럼 보통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이 문제 해결해 주실 겁니까? 언제 이 광야 시대가 끝나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소리치고 부르짖고 그렇게 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인물도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깊어 가는 가을에 꼭 읽어 보시라고 권한 책, <두려움 너머의 삶>에서 언제 사람이 두려움이라는 증상이 생긴다고 했습니까? 어떤 상황이요? '통제 불능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걸 묵상해 보니까 우리가 과도한 탐욕을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만 죄가 아니고요, 하나님 보시는 관점에서는 두려움도 죄입니다. 두려움이 왜 생겨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를 통제하고 싶어질 때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통제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맡겨야 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안 되는 걸 내가 붙잡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불안해하고 왜 두려워합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자녀가 내 손에 잡혀야 되는데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 손에 잡혀요, 안 잡혀요? 아주 어린 아기도 유아식 먹일 때 스푼에 떠서 줘도 먹기 싫으면 혓바닥으로 계속 밀어냅니다. 걔도 자기 의지가 있습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를 딱 내 손에 잡아서 내가 통제하는 대로, "야 좀 질서 있게 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러면 좋겠죠.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 주고 내가 원하는 좋은 결혼을 해 주고 그러면은 부모의 마음이 평안하겠는데, 자녀가 손에 안 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하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는 잠시 평안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서면 불안해지죠. 이유가 뭘까요? 기도는 했는데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겼어요, 안 넘겼어요? 안 넘겼습니다.


"하나님 내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얘가 내 말을 듣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통제권은 드리지 않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을 내가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 거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거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이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야, 도대체 사울은 뭐 하려고 또 나왔나? 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울의 심리 상태가 우리의 심리 상태인 것입니다. 사울의 손에 다윗이 잡혀요, 안 잡혀요? 안 잡힙니다. 하나님이 잡을 수 없게 만드셨잖아요. 근데 그걸 왜 잡으려고 합니까? 그가 한번 포기했죠. 우리도 그렇습니다. 엄마들이 "얘들아, 내가 그냥 내려놓기로 했어." 다음날 또 잡으러 돌아다닙니다. "막 잡히기만 해 봐라." 그러니까 미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사울 왕을 그의 손 앞에 딱 갖다 놓으시잖아요. 근데 다윗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이러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제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손에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직원들 여러분 손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까? (대답은 잘하세요.)


제가 가끔 보는 김창옥 교수가 재밌는 얘기를 했어요. "엄마는 밉고 이모는 좋은 이유. 아빠는 싫고 삼촌은 좋은 이유." 뭔지 아시죠? 엄마 아빠는 의식주 모든 걸 다 해 줘요. 그런데 나를 통제하려고 해. 그러니까 서로 싸우는 거예요. 갈등 반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모하고 삼촌은 어떻게 해요? 용돈 줘요. "예쁘다, 착하다" 칭찬해 주고. 내 인생에 대해서 전혀 개입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모하고 삼촌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남편이 손에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이미 포기하셨구나.) 안 잡히는 걸 잡으려고 하니까 서로 불행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을 그냥 옆집 아저씨라고 생각해라." 옆집 아저씨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이상한 아줌마 없잖아요. "자식을 조카라고 생각해라." 조카에게 용돈 주고 칭찬해 주지만 절대 그 인생에 개입하지 않아요.


전에 가정사역자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아이들은 마치 점토 찰흙 같아서 만질수록 망가진다." 점토 찰흙 한 시간 지나면 굳어 버리잖아요. "이렇게 만들까? 저렇게 만들까?" 부모가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이렇게 저렇게 주물럭거리다가 애가 이도 저도 안 되고 굳어 버린다고요.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시고) 1부 예배 끝나고 한 남자 성도님이 "오늘 딱 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었습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데 요즘 맨날 스마트폰만 보고 또 성적인 콘텐츠도 보고 해서 세상에 너무 악한 게 많은데 핸드폰을 그냥 뺏어 버렸대요." 그래서 제가 "아, 오늘 교회 가서 목사님이 돌려주라고 했다" 얘기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하나님께 맡기겠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게 중요하고 부모와 관계가 좋은 게 중요하다"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걸 억지로 빼앗는다고 걔가 안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저희 두 아들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두 아들 얘기했다는 것도 저희 아들들한테 가서 얘기하지 마세요.) 저희 둘째가 사춘기 들어서면서, 저희 아내가 큰아들하고 둘째하고 네 살 차이니까 큰아들에게 많이 자문을 구하거든요. "지성아, 지훈이가 요즘 스마트폰을 유독 많이 보는데 스마트폰에 이런저런 폭력적인 거 성적인 거 많은데 엄마가 한번 얘기해야 되지 않을까?" 그랬더니 "엄마 그냥 두세요. 그냥 그 나이 때 지나가는 거예요. 그거 괜히 건드리면 숨어서 음지에서 합니다." 저희 큰아들이 선생님이거든요. 그래 그냥 놔둔 거예요.


여러분 아이들을 내가 잡겠다고 해서 잡힙니까? 안 잡힙니다. 부모가 신앙의 본을 보이고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가 건강한 대화의 관계가 되고 행복한 관계가 되는 게 중요하지, 이걸 잡으려고 한다고 해서 잡히냐고요? 안 잡히는 걸 잡으려고 하는 것은 사울의 심보입니다. 인생이 불행해지게 돼 있습니다. 자기도 불행하고 아이들도 불행해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온전히 맡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 마지막 11절, 12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다윗이 사울의 무엇을 가져갔습니까? 창과 물병입니다. 처음에는 옷자락을 베어 갔고 이번에는 창과 물병입니다.


여러분, 창과 물병은 사울의 왕권과, 그 광야에서 물이 없으면 죽잖아요, 사울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의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 주시기로 정하셨잖아요. 그리고 그의 생명을 두 번이나 넘겨 주셨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냥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다 하나님께 맡겨 드립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그거 잡겠다고 인생이 노심초사하고 불안에 떨고 불행한 인생입니다. 반면 한 사람은 자기 손에 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맡겨 드리니까 최선의 때 최고의 복을 받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인생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5.11.29(토) | 새벽기도 | 압도적으로 승리하라! (수 10:15-28)


📢 설교 요약: 압도적으로 승리하라


본문: 사무엘상 25:18-44 (주요 배경: 여호수아 10장)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멈추지 않는 승리의 원칙 (여호수아의 강박)


여호수아는 남부 연합군 다섯 왕을 막게다 굴에 가둔 후에도 멈추지 않고, 지휘관들에게 남은 후군(後軍)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이 성읍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적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 압도적인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에서 나타난 강박적인 두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것. (단순히 이익 창출이 목적이 아님)
  2. 가나안 족속을 진멸할 것 (헤렘/Cherem).



2. 삶의 '음지(陰地)'를 좁혀가라


'진멸(헤렘)'의 원칙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양지(陽地, 선한 부분)'를 넓혀가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음지(부정적인 부분)'를 줄여가야 합니다.


  • 영적 대청소: 연말 대청소를 하듯, 분노, 우울감, 부정적인 생각, 성적 유혹, 물질의 탐욕 등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악의 습관들을 끊고 정리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 선택과 집중: 거룩을 향한 적극적인 결단과 노력이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3. 원수를 발판 삼는 영적 패러다임


여호수아가 지휘관들에게 다섯 왕의 목을 발로 밟게 한 것은 고대 풍습인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1)


  • 뱀의 정수리를 깨뜨리는 승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사탄)의 정수리를 깨뜨리실 것(창 3:15)처럼,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마귀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 두려움 없이 밀고 나갈 것: 영적 전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우리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밀고 나아가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4. 거룩과 순결을 추구하는 교회 공동체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두 가지 이유는 그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거룩: 현대 교회는 죄의 문제(돈, 권력, 성적 비위) 앞에서 '치리(징계)'가 사라지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도덕적 기준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4)
  •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할 것: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므로, 세상에서 사업하던 방식을 교회에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재정 문제 등에서 작은 부분일지라도 세상보다 더 철저하게 거룩하고 깨끗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5.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멸 명령은 우리가 주변의 죄악 요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반드시 변질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괜찮겠지." (내로남불)라는 생각은 가장 위험한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했듯이, 내가 가장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고 죄와의 싸움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녹취록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제목은 "압도적으로 승리하라"입니다. 한번 제목 읽어 볼까요? 압도적으로 승리하라. 예,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리고와 아이성을 쳤습니다. 여기가 중부 지역입니다. 그리고는 기브온이라는 성읍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기브온을 차지하게 되니 남부 연합군 다섯 개 도시의 왕들이 연합군으로 기브온을 치러 와서 여호수아가 그들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중부를 치고 남부를 치게 되고, 이제 그다음에는 북부로 올라가게 되는데, 오늘 내용은 중부와 남부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15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길갈은 가나안 땅 중부 지역에 들어와서 처음 그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입니다. 기브온을 치러 온 남부 연합군들을 물리치고 나서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16절부터 19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그 다섯 왕들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어떤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이르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들이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 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막게다 굴에 숨은 남부 연합군 다섯 왕입니다. 여호수아 10장 3절에 보면 그 다섯 왕의 이름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헤브론 왕 호함, 야르뭇 왕 비람, 라기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고 패전하게 되니 군대가 다 흩어지게 되고, 이 왕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굴속에 숨었습니다. 막게다는 가나안 땅 남부 지역, 위도상으로는 사해 중간 정도 위치에 해당합니다.


고대의 전투에서는 왕을 잡으면 전쟁이 끝나는 것입니다. 왕을 잡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가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기서 멈추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후군을 쳐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왕들이 막게다 굴에 갇혀 이미 잡힌 상태인데 그들을 지키도록 하고, 후군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에서 보이는 강박적인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말씀에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땅을 넓히고 소유지를 넓히며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해야 한다'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강박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진멸한다는 것은 '헤렘'이라고 했습니다. 명사로는 헤렘이고 동사로는 하람인데, 이 진멸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화요일에 잠시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착한 일, 좋은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에 부정적인 습관들, 죄악의 습관들이 있다면 그것을 끊고 멈추고 제거하는 일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내가 학업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사업을 이 어려운 시대에도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가정을 여기까지 지켜 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또한 연말이 되면 대청소를 하듯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습관들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결단하고 정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헤렘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과연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요소를 우리는 얼마나 철저히 내려놓으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더니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남부의 다섯 개 큰 도시의 연합군이 이스라엘과 맞서 싸웠는데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에, 그 주변에서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압도적인 승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압도적인 승리'라고 써 놓고 안세영 선수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나라 배드민턴의 안세영 선수가 여자 선수로는 1년 동안 글로벌 대회에서 10관왕을 차지한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개인 종목이든 축구나 농구, 배구 같은 팀 종목이든 최고의 선수들, 최고의 팀이 "우리가 넉넉하게 이길 수 있지"라며 설렁설렁하는 거 보셨습니까?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합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유는 이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부족한 게 보이면 "어, 우리도 해 볼 만한데?"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밀고 무너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양지도 넓혀 가야겠지만 음지도 줄여 가셔야 합니다. 제가 늘 음지를 줄이려고 애쓰는 것보다 양지를 넓히시라고, '선택과 집중'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매듭을 지으실 때가 있습니다. 연말이 되어 한 해를 돌이켜 보고 삶을 어떻게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인가 고민할 때, 집 대청소를 하는 것처럼 여러분 삶의 음지를 좁혀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23절에서 25절 이어지는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하여 그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굴에서 그에게로 끌어내니라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가나안 남부 다섯 왕을 굴에서 끌어내서 지휘관들에게 그들의 목을 밟게 했습니다. 현대 독자들은 이걸 보면서 "아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첫 번째는 고대 중근동에서는 승장이 패장의 목을 밟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 번, 두 번 승리를 거두게 되면 마음이 해이해질까요, 아닐까요? 해이해집니다. 여리고 무너뜨리고 아이성 전투 때 해이해져서 어려움을 겪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는 이 정복 전쟁이 긴 여정이기 때문에, 지휘관들에게 우리가 이것을 확실하게 해내야 한다, 압도적인 승리로 끝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이 구절은 메시아 시편인데,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같은 개념입니다. 원수를 그 발 아래 밟는다.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뱀의 정수리를 깨뜨리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에서 굉장히 중요한 패러다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 전쟁을 치를 때도 내가 거룩하게 잘 살다가 가끔씩 무너지고 죄짓고, 반복적인 습관 때문에 또 엎어지고 사탄에게 종노릇하고 타협하면 사탄이 우리를 우습게 볼까요, 아닐까요? 우습게 봅니다.


어떤 분들은 특별히 영적 전쟁이 치열하지 않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이 치열하지 않은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예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은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원수가 특별히 괴롭힐 일도 없습니다. 원수가 주는 세상적인 편의를 누리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포로수용소에 있으면 미음이라도 주며 생존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내가 바르게 살겠다고 결단하면 영적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아 이거 너무 힘든데, 너무 어려운데 내가 괜히 이렇게 살기로 결단했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 생활 시작해야지, 헌신하며 살아야지, 거룩하게 살아야지, 복음 전하며 살아야지 결단한 것이 오래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거기서 멈추고 다시 포로수용소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더 밀고 들어가서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해야만 주변에 있는 대적들이 감히 맞서 싸울 수가 없는, 하나님이 그런 영적인 높이까지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캐나다 밴쿠버에 갔을 때 한인 교회들이 너무나 많이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목회자들 모임에 갔는데 "밴쿠버는 목회자들의 무덤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무덤에 왔다는 거잖아요. 목회자니까 죽어야 하잖아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교회가 너무나 무너져 있고 성도들이 너무나 무너져 있으니까 원수가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는 안 된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도들이 본인의 입술로 고백하고 삶으로 체험하고, 목회자들이 이것을 삶으로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예배하고 연합하고 영적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공격(Attack)이 너무나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더 밀고 나가니까 압도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하시더라고요. 할렐루야. 여러분,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어정쩡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성화의 진도를 나아갈 때도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을 결단하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1세기가 첨단 도시 문명이지만 빛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흐름을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운동 좋아해서 목회자들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운동을 하는데, 운동할 때도 보면 "저 사람이 잘한다" 생각되면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주눅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프로 선수들도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여러분, 영적 분위기를, 영적 주도권을 원수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신앙생활, 이 교회 공동체의 영적 분위기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방향으로 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28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그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막게다를 여리고처럼 진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현대의 독자들은 온정주의가 있으니까 "너무 불쌍하지 않냐,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에 대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들의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너무나 심각했는데, 자식을 우상에게 제물로 불태워서 바치는 인신제사가 성행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어서 징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남겨 두었을 때 그들의 죄악에 물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날 교회에도 거룩과 순결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영적 관점으로 접근합니까? 안타까운 것은 현대 교회는 치리(징계)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는 교회에서 권사님 두 분이 싸웠다고 1년 동안 수찬 정지(성찬식 참여 금지), 대표 기도 금지 등 징계를 내렸습니다.


오늘날 그런 게 있나요? 부서나 순에서 누가 싸웠다고 1년 동안 사역하지 말라고 하면 아마 교회 떠날 겁니다. "교회가 뭔데 나한테 이러냐"라고 하겠죠. 오늘날 과연 우리는 거룩과 순결에 대해서 얼마나 집중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우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웁니까? 히브리서 12장 4절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 공동체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방식으로 교회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하고 사역을 하다 보면 세상에서 사업하던 방식으로 교회 사업 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요,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정 문제에 있어서도 깨끗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각 부서의 예산을 쓰는 것을 사람들이 자기 개인 돈을 쓰는 것보다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서류를 다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해도 목적과 다르게 되어 있는 건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단 5만 원, 10만 원일지라도 서류 반려하고 다시 기안해서 올리시라고 합니다. "그 정도 갖고 그렇게 해야 되나"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법인 카드 받아서 개인적으로 쓰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의 도덕적 기준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쓰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안 쓰기를 바랍니다. 그게 여러분의 구원 문제와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여러분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만도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과연 우리가 얼마나 거룩의 싸움을 철저하게 싸워 가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종이나 펜은 집에 가져가지 않습니다. 밴쿠버에서 이사를 세 번 했는데, 거기는 이삿짐센터가 없어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교회 청년들이 도와줬는데, 힘든 것 중 하나가 테이프였습니다. 우리나라 테이프처럼 좋은 게 없고 '덕테이프'라고 하는데 너무 약한 겁니다. 모든 마트를 다 뒤졌는데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충 붙이고 사무실에 왔는데, 간사님이 "여기 하나 있어요, 이거 갖다 쓰세요"라고 하더라고요. "난 그거 안 써. 이건 교회 거니까 안 써"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이사를 하면 교회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회 물건과 제 물건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물질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철저하게 사십니까? "내 것도 내 거, 저 사람 것도 내 거" 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재정에 관해서 깨끗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세요. 교회 재정을 아껴 쓰려고 노력하세요.


오늘날 교회가 돈 문제, 권력 다툼 문제, 성적 비위 문제로 얼마나 많이 깨어집니까? 그런데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치리하지 않습니다. 덮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중요하니까요. 그 사람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이 더 중요합니까? 오늘날 교회는 거룩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거 싸워야 합니다. 그냥 열심히 예배드리고 좋은 사역 많이 해서 사람들 모이면 교회 부흥한다고 좋아할 것입니까? 그렇게 부흥한 교회들이 세상에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건 아니지 않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교회 놀이에 빠져서 죄 문제와 심각하게 싸우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죠.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식재료를 조금만 오래 두면 부패하는 것과 같습니다. 냉장고에 넣어 놔도 시간이 지나면 부패합니다. 조금이라도 공기가 유입되면 곰팡이가 생기니까 진공 포장을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진멸하라 말씀하시는 것은 가나안 족속에 대한 징계이기도 하지만, "너희 자신이 그거를 감당하지 못할 거다. 죄 문제를 그대로 놔두면 너희는 반드시 변질될 거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너무 신뢰하지 마세요. "아, 내가 이 정도는 해도 되지, 문화적으로 이 정도는 누려도 되지?" 아니요. 여러분 스스로가 죄의 문제에 있어서 넘어진 경험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결단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 습관은 고쳐야겠다."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순간 성령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가나안 정복에 대해 너무 온정주의적 관점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시대부터 500년 이상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에 대해서요. 하나님이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그 땅에 남아서 살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나라를 세울 수 없을 거라는 게 하나님의 걱정인 것입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죠. 왜 온정주의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합니까? "나는 괜찮겠지." 아니요, 내가 제일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내가 최악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 그런 나를 건져 주신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내가 제일 심각한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만 거룩의 싸움, 죄와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주기 원하십니다. 여호수아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승리는 나중에 다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사업이 성공하고 많은 물질을 얻게 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들을 주셔도 우리가 거룩의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다 우리를 부패하게 만들고 끝납니다.


마지막 남은 한 달 동안 거룩의 결단을 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해 동안 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결단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삶 가운데 끊어내지 못한 안 좋은 습관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내려놓게 하여 주옵소서. 분노, 우울감, 부정적인 생각, 화를 내는 습관, 성적인 유혹, 물질의 탐욕 등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한 거룩한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025.11.23(주) | 주일설교 | 그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는가? (삼상 25:18-44)


요약 정리


  • 본문: 사무엘상 25:18-44
  •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지혜는 디테일과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가 임박한 위기 속에서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지만, 그 내용은 엄청난 정성과 디테일이 살아있었습니다. 오늘의 디테일이 내일의 스케일을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또한 그녀는 남편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 주여, 이 죄악을 내게 돌리소서"라며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이는 죄인들의 책임을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지혜자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임을 지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2.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십시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그의 인생을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주었습니다.


  • 과거: 다윗은 도망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온 사람입니다.
  • 현재: 원수들이 생명을 찾을지라도,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싸개' 속에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평안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 미래: 하나님이 반드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니 훗날 후회할 오점을 남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십시오.



3.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내 뜻을 관철하려 하지만, 참된 지혜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데서 옵니다. 다윗은 분노에 차 있었지만, 아비가일을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지혜로운 조언을 수용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막았습니다. 지혜로운 조언자가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큰 능력입니다.




4.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나발은 자신의 탐욕 속에 왕 같은 잔치를 벌였으나 결국 하나님이 치심으로 열흘 만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딸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으나, 결국 실패를 대물림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직접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유다 지파의 목자로 빚어지고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삶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녹취록


그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는가? 사무엘상 강해 쉰한 번째 시간입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고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18절과 19절을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아비가일이 급하게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어떻게 마련했다고요? 네, 급하게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라고 분명히 되어 있는데, 언제 이 많은 것을 이 급한 와중에 준비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정성껏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18절을 읽고 나서 이 자매님이 굉장히 일을 많이 해 보신 분이구나 하는 첫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급하게 하다 보면 대충 하게 되잖아요. 또 일을 정성껏 하다 보면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서비스업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모토가 있다면 '신속 정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묵상해 보니 이것은 틀린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정확 신속'이어야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마음만 서두른다고 일이 되나요? 일을 오히려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느려도 정확하면 시간이 갈수록 속도는 따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 초년생으로 일을 하거나 어떤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시작할 때, 디테일을 해 보지 않고 큰 규모, 큰 스케일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시도입니다. 오늘의 디테일이 내일의 스케일을 만드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고 멋진 일만 선호하기보다는 작고 사소한 일을 정확하게, 정성껏 하는 훈련을 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디테일의 차이가 명품을 만들고, 내일의 스케일의 성공을 이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비가일을 보면서 첫인상이 그냥 머리만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삶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똑똑한 아비가일이 한 가지를 빠뜨렸습니다. 19절을 보니까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빠뜨렸습니다. 만약 그녀가 항상 어떤 일을 할 때 남편을 패싱하고, 무시하고 지나쳐서 일을 하는 타입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정말 위급할 때는 과단성이 필요합니다.


요나단도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블레셋 진영에 진입할 때 아버지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허락을 구했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단독 행동을 했기 때문에 승기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국방부에서도 대응 사격의 원칙이 바뀐 지 10년 정도 되었는데, 북한이 도발할 경우 '선 조치 후 보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현장에서의 빠르고 정확한 판단과 결정이 중요한 것이죠. 이런 것은 선천적인 기질의 문제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연습을 삶의 훈련을 통해 쌓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지금 들이닥치려고 하는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이것이 이어지는 21절과 22절에 나옵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의 마음이 이미 완전히 굳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나눈 것처럼 차분하던 사람이 화가 나면 큰 사달이 난다고 했죠. 세 가지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그의 소유를 지켜 준 게 다 헛되게 되었다'는 허망감이 몰려왔고, 두 번째는 '나의 선에 대해서 그가 악으로 갚았다, 그 잘못을 내가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다'는 정죄하는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맹세하건대 그 집 남자를 다 죽이리라'는 복수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라는 표현이 원어를 직역하면 '담에 오줌 누는 자들'이라는 속된 표현을 썼습니다. 이런 저속한 말까지 섞어가면서 다윗이 완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였습니다. 이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입니다. 나발은 워낙 완고한 사람이고, 다윗은 차분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폭발 직전이니, 둘이 충돌하게 되면 큰일이 나야만 끝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누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때 오늘의 지혜로운 주인공이 다시 한번 나타납니다. 23절에서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아비가일이 다윗과 400인이 오는 길목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 길로 나갑니다. 화가 루벤스의 1630년 작품으로 추정되는 '다윗과 아비가일의 만남'이라는 그림을 보면, 다윗이 완전무장을 하고 칼을 들이미는 화가 난 장면이고, 아비가일이 엎드려서 그를 설득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400인과 피바람을 일으키려고 진군해 오는데, 아비가일이 그 앞에 정확하게 나타나서 나귀에서 내려 급하게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땅에 완전히 엎드렸습니다. 저는 이 첫 번째 행동이 너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말을 잘하는 여자입니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말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파격적인 행동, 땅에 엎드리는 그 행동을 통해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고,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내 주여, 이 죄악을 내게 돌리소서." 이 말의 뜻은 "내 잘못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이게 지금 아비가일의 잘못인가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기 잘못이라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다윗의 상한 마음과 그가 당한 모욕을 누군가는 사죄를 해야 하는데, 남편 나발이 사과할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안주인으로서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불량자요 우매자인 남편 나발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낸 소년들을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도 내가 이 집을 관리하는 안주인으로서 내 책임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악인이라면 "그래, 너도 책임 있어. 그럼 너도 당해 봐"라고 하겠지만, 다윗이 그 정도의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인의 말에 자신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또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일어나고 상처가 생기고 손해를 보는 일들이 생기면 서로에게 탓을 하기가 바쁩니다. 제가 2005년도에 캐나다에 갔을 때 조금 독특한 것을 봤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I'm sorry(미안하다)", "It's my fault(내 잘못이다)" 이런 얘기를 잘할 것 같은데, 조금 심각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면 'Sorry'도 안 하고 'My fault'라는 표현을 안 쓰더라고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그 말을 하는 순간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나의 잘못입니다. 내 탓입니다"라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과연 누가 책임을 집니까?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을 우리가 보통 조직에서 '리더'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리더를 책임자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세상에서는 과연 책임지려고 합니까?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서로 탓하기 바쁘고, 기업 안에서 조직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상급자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급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무책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망가뜨린 세상을 책임지시겠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줄로 믿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것은 어리석은 너희의 잘못이지, 아름다운 세상을 주시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주신 아버지의 잘못은 없다"라며 몸을 빼셨다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분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신 겁니다.


지혜자는 지혜로운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을 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언변의 능력으로 지혜를 뽐내고 싶어 하지만, 저는 이 여인을 보면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이 마음, 그것이 문제를 풀어가는 단초이고 굉장히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것을 이 여인이 알았다는 점에서 굉장히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26절,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윗도 맹세를 했지만 다윗은 피를 흘리겠다고 분노에 차서 한 맹세였죠. 그런데 아비가일의 맹세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피를 흘려 복수하는 일을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보면서, 정말 이 여인이 다윗을 위해서 진정성 있게 기도하지 않고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아비가일은 이 다급한 상황에도 굉장히 차분하게, 지혜롭게, 신속하게 모든 것을 행하고 해결해 버립니다. 만약 그녀가 남편 나발은 워낙 한심한 사람이지만, 평상시에 존경받던 다윗이 우매자의 말에 요동치는 걸 보면서 '야, 다윗도 실망이네. 남자들이란 다 하나같이 자존심이 세서 어리석구나'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이 여인이 다윗에게 이런 대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비가일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에게 "제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삶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잖아요. 이 얘기를 듣고 얼마나 그의 영혼이 번쩍였을까요?


우리가 대부분 기도를 할 때 내가 원하는 응답이 이루어지기를 원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강청 기도한 그대로 남편도 그렇게 움직여 주기를 원하고, 아이들도 그렇게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또 남자분들은 "하나님이 사업을 성공시켜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나님께 해 드리겠습니다"라며 약간 거래를 하듯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아비가일은 사실 그런 유형의 기도를 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고백을 한 것인데, 누가복음 22장 42절에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누구의 원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이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진다는 게 무엇일까요? 자기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상황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오는 줄로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특히나 이렇게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될지, 어떤 선택을 내려야 될지 진짜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분들은 자신을 위한 기도, "내가 어떻게든 이 환난을 피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도에 집착하고 포기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런 상황이 될수록, 내가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과감하게 다 내려놓고 기도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 백지를 들고 나아가서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대부분 어떻게 하냐면 "하나님 제가 상황을 이렇게 분석을 해 보건대 이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동의만 하시면 됩니다. 밑에 서명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내용이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사인만 구합니다. 프린터에 이면지 방향을 잘못 끼워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출력이 되어 있는 면에 글자가 또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도 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안 하시는 게 아닙니다. 제가 누차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많이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백지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그 뜻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녀가 나발의 어리석음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자신의 안위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지켜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개입을 하는 것은 저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시고자 하는 선택입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지혜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어지는 27절에서 28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이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아비가일이 "이것을 내 책임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삶에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한 뒤, 과거와 현재, 미래 세 가지 단계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는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여기까지 걸어온 길을 내가 알고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셔서 당신이 지금까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지 않았느냐?"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날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워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생에 악행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의롭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그 복잡한 정치판에서도, 어려운 전쟁터에서도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이 얘기를 해 줍니다.


다윗이 사실 속이 뒤집어진 이유는 나발이 "넌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놈이다", "근본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되는데 왜 동의를 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멘토인 사무엘이 죽는 순간 자신의 과거가 다 무너지고 부정되는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얘기를 들으니까 마음 가운데 그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에게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 말에 동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동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 약점을 너무나 잘 압니다. 성을 공격할 때 '공성전'을 벌이는데, 성의 튼튼한 부분을 공략합니까, 아니면 취약한 부분을 공략합니까? 취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아직 건강하게 해석되지 않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트라우마와 상처가 있는 부분에서 원수가 정확하게 찌를 겁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건강하게 해석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내면의 아픔을 놓고 하나님께서 기도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월이 깊어 가는 가을에 왜 사람들이 자꾸 상실감에 사로잡힐까 생각해 보니 면역력이 전체적으로 떨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몸이 약해지면 사람이 마음이 약해지잖아요. 그래서 '내 인생이 열심히 살아오기는 했는데 다 헛수고였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인생에 "당신이 헛되게 걸어온 거 아니다"라고 확인해 준 것처럼,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 가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이 찬송가를 여러분 자신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올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가사에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라고 했는데, 인생이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평탄대로를 갈 때에도 고난의 길을 갈 때에도 주 안에 있으면 그것이 형통인 줄로 믿습니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승리의 순간에 자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원수의 거짓말에 속으면 과거는 여전히 상처와 트라우마를 일으키고, 현재는 불안으로 충만하고, 미래에는 근심이 한가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여러분의 과거가 건강하게 해석되고 치유될 줄로 믿습니다. 현재는 평안하고 미래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울증이 굉장히 심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 체험하고 나서 내면 세계, 사람의 지·정·의가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어지는 29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당신의 과거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준 뒤,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키십니다." 또한 놀라운 고백입니다. 다윗이 반드시 들어야 될 얘기를 해 준 겁니다. 대적들이 일어나서 당신을 죽이려고 해도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싸개' 안에 있고, 당신의 원수들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물매돌'처럼 던지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그 물매돌처럼 당신이 첫 시작을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제 나를 지켜 주신 그 하나님은 또한 오늘 나를 지키시고 내일도 지키실 하나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겪고 있는 이 현재의 고난을 건강하게 재해석을 해 줬습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언제 잡힐지 모르는 상황이니 매 순간이 살얼음판일 것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아비가일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평안하십시오. 평안은 당신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로 믿습니다." 이 얘기를 해 준 것입니다.


그의 과거, 그의 현재를 건강하게 해석해 주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미래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축복이죠. 30절, 31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세 번째,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미래를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놀라운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당신은 반드시 어느 날 왕이 될 것인데, 당신이 그날에 후회할 일을 지금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며 지혜로운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어떤 말을 덧붙였습니까? "그날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드라마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다윗이 아비가일을 기억하게 되죠.


아비가일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나발을 건지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다윗을 위해서 매일 중보 기도한 사람이 아니고는 어떻게 이런 말을 했을까 싶습니다. 진정으로 다윗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진정성이 흘러간 것입니다. 다윗이 나발 같은 악인을 처단하겠다고 유다 지파 사람을 칼로 휘둘러서 죽이고 나면 나중에 유다 지파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못 돌아옵니다. 한 번의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길 뻔했는데 그것을 이 여인이 막아 준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그녀의 지혜로운 말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32절과 3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어떤 분들은 "다윗이 그렇게 맹세를 하더니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했냐"고 하는데, 저는 지혜자가 지혜자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보입니다. 다윗이 세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첫 번째는 당신을 보내서 나를 막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내 맘대로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을 칭찬합니다. 다윗의 인생에 큰 과오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죠. 세 번째는 다윗이 아비가일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지혜로운 조언자가 있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분기탱천해 있을 때 사람이 한순간에 내려놓는다는 게 쉬울까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다윗이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통독 심화반에서 토의 수업을 하다가 한 남자 성도분이 "어렸을 때는 엄마 말을 들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아내 말을 들으면 평안합니다"라고 약간 도인처럼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정말 아내의 말을 그렇게 잘 들으십니까?" 했더니 "사실 그건 아닙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아내의 말을 들으면 손해 볼 것이 없다, 평안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게 항상 성립이 될까요?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 바람에 중동의 분쟁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스마엘의 후손과 이삭의 후손이 매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아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아내 말을 들어야 평안하다'고 얘기할까요? 남자와 여자가 특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뇌과학에서는 '브레인 섹스'라는 표현을 쓰는데, 태어날 때부터 뇌 구조 자체가 성별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한 얘기인데, 이렇게 바운더리를 선을 그어 놓고 "이 안에서만 놀아라" 하면 여자아이들은 그 안에서 논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아이들은 선을 그어 놓고 "이 안에서 놀아라" 하면 첫 번째로 하는 행동이 선을 넘으면서 엄마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바운더리를 일단 넘어서는 것부터 시도하는 게 남자아이들입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들 중에 ADHD가 상대적으로 많게 되어 있습니다. 밖에서 뛰어놀고 룰을 넘어가야 되고 새로운 룰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엄마나 아내가 볼 때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남자들은 도전을 좋아하지만 도전은 항상 위험 부담을 수반합니다. 여자들은 평안하고 질서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남편을 보고 아들들을 보면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인생을 왜 저렇게 살까?" 싶어서 잔소리를 하고 근심 걱정으로 바가지를 긁는 것입니다. 남자는 뭔가 새로운 꿈을 꾸고 도전을 하려고 하고, 아내는 그것을 끄집어내리려고 하니 서로가 싸우게 됩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서 '아비가일처럼 역시 남편을 떠나야 된다' 이런 적용을 하시라고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아내가 인간적인 걱정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들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잠언 31장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깨어서 기도하는 어머니, 아버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제 어머님을 평생 가장 존경했던 것은 하나님과 하루 종일 대화하시는 분이기도 했지만, 보통 은사가 있으신 분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저희 어머님은 평생 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거든요. 아버님이 10여 년 동안 아파서 누워 계셨고,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아들 셋은 집안 물건을 다 깨부수고... 어머님이 남편 때문에도 자식들 때문에도 많이 힘드셨는데, 그것을 매일 새벽에 가서 두 시간씩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시는 겁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다 쏟아 놓고 자녀들을 대할 때는 항상 평안한 미소로 "하나님이 너에게 이걸 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아서 획 돌아서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더라고요. 버텨봤자 내 손해니까 어머니의 말을 신경 쓰고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 뒤에 계신 하나님 때문인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신앙의 부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인간적인 근심 걱정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달하는 이 아비가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나발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36절에서 38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함으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이웃에게는 그렇게 인색했던 사람이 자기는 왕의 잔치처럼 항상 차려놓고 부어라 마셔라 먹어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목숨 걸고 가서 이 상황을 반전시키고 돌아왔는데 남편 꼴을 보면 한심하잖아요. 여러분 같으면 "야 이 한심한 인간아" 그러고 쏟아놓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밤새 참았다는 것, 이것은 정말 지혜로운 여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기 쉽지 않습니다. 아침에 술이 깬 뒤 이 일을 이야기했더니 그가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만용을 부리던 사람이 갑자기 쫄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한 열흘 만에 치셔서 그가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악인을 스스로 상대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시면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실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42절부터 44절까지 읽어 볼까요?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다윗이 또 이스라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다니 엄청난 복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결혼할 당시에는 광야의 방랑자들 무리의 두목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고생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다윗이 온 것도 아니고 다윗의 전령들이 왔는데 그 전령들 앞에 똑같이 엎드립니다. 그러면서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을 씻길 종입니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아예 각오를 하고 이 길을 출발한 것입니다. 대지주의 안주인이었던 사람이 고생길로 들어서면서 그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까지 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여인 아히노암과도 결혼을 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중부 지역이 아니라 유대 지역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유다 지파의 두 여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도망자 다윗이 유대 지역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모압 지경으로 망명을 간 적이 있었는데 금방 돌아오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그가 이 땅에서 유다 지파 사람들의 목자 역할을 하고 이곳에서 평생에 함께할 동역자들을 만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 내 광야의 시즌이 빨리 끝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왜 끝이 안 날까요? 여기서 아직 내가 해야 될 일이 있고, 내가 만나야 될 축복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머물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갈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이 미갈을 발디에게 넘겨 준 것이, 다윗도 저렇게 결혼을 하니까 딸을 넘겨 줬을까요? 보통은 성경이 시간 순서대로 써 있는 게 아니라 중요한 연관된 이벤트들을 써 놓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충동적인 성격상 다윗이 도망자가 된 직후에 딸을 발디에게 넘겨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이 '발디'라는 이름이 놀랍게도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베냐민 지파 대표의 이름이 뭐였을까요? 네, 발디입니다. 그러니까 발디는 베냐민 지파에서 대표적인 이름인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자신의 딸을 정치적 미끼로 사용했는데 소용이 없어지게 되니까, 그 딸을 베냐민 지파의 또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입니다. 사울도 베냐민 지파잖아요. 왕궁에서 다윗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자신의 가문에서 다윗의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시잖아요.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면, 사울은 모든 권력을 다 갖고 있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그 실패를 자신의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는 인생입니다. 반면 다윗은 광야에서 고난 가운데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중요한 때마다 그를 지켜 주시고 복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는 인생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던 사울의 인생이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에 이루어지이다" 이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025.11.16(주) | 주일설교 | 당신은 분노에서 자유하십니까? (사무엘상 25:1-17)

당신은 분노에서 자유하십니까?

분노는 내면의 어둠과 죄의 뿌리에서 비롯된다. 어떤 분노에도 합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 내려놓아 치유받아야 한다. 다윗의 사례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기반한 분노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준다.


1. 사무엘의 죽음과 다윗의 상실감


1) 본문 배경


  • 본문: 사무엘상 25장

  • 주제: “당신은 분노에서 자유하십니까?”

  • 사무엘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사사 시대 이후 360년 만의 영적 거장의 죽음이었다.


2) 다윗의 깊은 상실감


  •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되지 않은 상태.
  • 다윗은 생부·국부·영적 멘토(사부)를 모두 잃은 상황.
  • 인생을 지탱해 주던 울타리가 무너진 시점이었다.

3) 잘못된 대처: 바란 광야로 내려감


  • 슬픔을 해결하기보다 더 척박한 광야로 내려감.
  • 바란 광야: ‘영광의 광야’라는 이름과 달리 강수량 50mm의 척박한 땅.
  • 마음이 우울할수록 더 우울해지는 선택을 하는 인간의 경향.
  •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사랑·절제하는 마음이다.

2. 나발의 등장과 다윗의 정중한 요청


2.1. 나발과 아비가엘


나발

  • 양 3000마리, 염소 1000마리의 부자.
  • 이름의 뜻: ‘바보’.
  • 고집스럽고 행실이 악함.
  • 갈렙 족속 출신이지만 세속적이고 이기적.

아비가엘

  • 이름의 뜻: ‘내 아버지의 기쁨’.
  •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

갈렙 족속에 대한 고찰

  • 믿음의 용사 갈렙의 후손 중 어떻게 나발과 같은 인물이?
  • 믿음 좋은 가정에서 자녀가 신앙을 떠나는 현상(PK/MK 방황)과 유사한 패턴을 설교자는 지적.

2.2. 다윗의 요청 (양털 깎는 날)

  • 다윗은 ‘샬롬’을 세 번이나 전하며 극도로 정중하게 인사.
  • 자신을 ‘아들 다윗’이라 낮추어 표현.
  • 양털 깎는 날 = 축제 날. 나누는 날.
  • 다윗은 나발 집을 보호해 준 은혜에 대한 작은 보훈을 요청한 것.
  • 다윗의 생존 방식: 약탈 없음, 오히려 보호함 → 자발적 후원으로 생존.

3. 나발의 모욕과 다윗의 분노


3.1. 나발의 세 가지 모욕


1)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2) “주인에게서 떠나는 종이 많도다” — 왕의 배신자 취급
3) “근본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랴?” — 근본 없는 인간 취급


3.2. 왜 상처가 되었는가?


  • 그 말들이 다윗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기 때문.
  • 광야에서 잊혀져 가는 존재라는 내면의 불안과 맞닿아 있었음.
  • 근거 없는 비난인데도 상처가 되는 이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다윗의 반응


  • 즉시 분노 폭발 → 암살자 모드.
  • 칼을 차고 400명과 함께 나발 집으로 향함.
  • 평소 사울에게도 분노를 내지 않던 다윗이 극단적으로 폭발한 상황.
  • ‘내리분노’의 대표적 사례: 참다 참다 약한 대상에게 분풀이.

3.4. 분노 중독자의 특징


  • “내 분노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사람.
  • 이는 상대방을 탓하며 죄책감을 씌우는 가스라이팅과 유사.
  • 착한 사람, 합리적인 사람일수록 폭발하면 더 큰 난리가 난다.

4. 아비가엘의 개입과 분노의 본질


4.1. 하인의 보고


  • “주인은 불량하여 더불어 말할 수 없다.”
  • 나발의 어리석은 말 때문에 가문 전체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음.
  • 다윗의 분노는 평소와 다르며, 그의 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 것.

4.2. 분노의 본질: 자기 의(Self-Righteousness)


  • 착하고 합리적일수록, 자신은 옳다고 생각해 분노를 정당화한다.
  • 그러나 어떤 분노에도 합당한 이유는 없다.
  • 분노는 불을 지르는 행위와 같다: 가정·관계·일터·교회 모두를 태운다.

4.3. 다윗과 나발의 동일성


  • 나발은 자기 중심적.
  • 이 순간의 다윗도 자기 중심적.
  • 다윗이 복수했다면 나발과 동일한 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 “내가 그동안 착한 척하며 살아왔던 죄인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4.4. 사례와 경고


  • 40년 헌신적이던 아버지가 퇴직 후 아내 말에 폭발하여 목을 조른 사건.
  • 모세도 온유했으나 분노 한 번으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감.
  • 분노는 수십 년 쌓아온 삶을 한순간에 태운다.

5. 분노를 내려놓는 영적 훈련


5.1.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


  • “하나님, 나는 한심한 죄인입니다. 우아한 척했지만 죄인입니다.”
  • 분노를 참아내는 방식은 풍선효과일 뿐. 결국 다른 곳에서 터진다.

5.2. 영적 경계


  • 원수의 거짓말에 동의하지 말 것.
  • 분노로 인해 인생과 가정을 망가뜨리지 말 것.
  • 영혼이 깨어 있어야 악에 동조되지 않는다.

5.3. 마무리 권면


  • 주님은 치유와 회복의 주님.
  • 우울함이나 상실감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밀어 넣지 말고,
  •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와 생명력으로 충만한 계절을 누리라.



녹취록


오늘 설교의 제목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당신은 분노에서 자유하십니까?"


사람마다 자주 화를 내는 사람, 자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무엘상의 쉰 번째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이 죽은 이후에 나발이라는 악인을 만나서 마음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사무엘이 죽었다.'


그냥 하나의 서술에 불과한 것 같지만, 굉장히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떠났다는 것은 역사서에서 항상 서두의 1장 1절에 나오는 표현이거든요. 여호수아 1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또 사사기 1장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고 나옵니다. 한 시대의 영적인 거장이 사라지게 된 것이 과연 다음 세대에게는 위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기회가 될 것인가? 우리 인생과 역사의 위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이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사의 전환점이 지금 사무엘하 1장 1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25장 중간에 나온 것입니다. 시대의 영적 표상이 떠난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영적으로 바닥을 치던 사사 시대 360년 만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장 20절에 보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따르고 의지했던 시대의 영적 거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 충격이었겠지만 다윗에게는 더더욱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되리라고 예언했던 선지자는 떠났는데, 예언은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인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상실감과 허탈감이 밀려왔을까요? 다윗의 신세는 정말 끈 떨어진 연 같은 신세가 된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와 이어서 말씀드리면, 생부에게 버림받고 국부에게 버림받고, 이제는 자신의 영적 멘토인 사부마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 아버지의 롤 모델이 다 무너지고 인생의 울타리가 다 허물어진 상황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 다윗이 얼마나 그 장례식장에 가고 싶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도 그 슬퍼하는 무리들과 함께 거기 가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데...' 하지만 자신은 도망자 신세이지 않습니까. 자기가 있는 유대 광야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라마인데, 오히려 어디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까? 1절에 보면 '바란 광야'입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바란 광야'입니다. 바란 광야는 '영광스러운 광야'라는 뜻입니다. 광야가 영광스럽다는 것은 압도적으로 크고 두려운 광야라는 뜻입니다. 연 강수량이 50mm밖에 안 됩니다. 비가 며칠이나 오겠습니까? 그만큼 너무너무 척박한 땅입니다.

11월이 결실의 계절을 지나 약간 상실감의 계절로 들어가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윗이 자신의 마음 가운데 굉장히 큰 슬픔과 상실감을 느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더 혹독한 상황과 환경으로 들어감으로써 이것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다윗의 선택이 결코 좋지 않았다고 봅니다.

제가 이것을 묵상하면서 제 10대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제 10대 사춘기 때 일부러 얇은 옷을 입고 찬 바람이 부는데 낙엽을 밟으면서 몇 시간씩 하염없이 걷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감과 불안함 같은 것을 온통 제 폐부로 들이켰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된통 감기에 걸리고 급성 기관지염에 걸리고, 40도 이상의 고열이 여러 번 나면서 그때 건강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그때의 심리는 무엇이냐면, 우울한 내 인생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내 안에 있는 슬픔을 더 슬프게, 더 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런 것을 안 할까요? 어른들도 합니다. 자기 인생이 괴로울 때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오히려 밤새 술을 퍼마시면서 자기를 무너지게 만들지 않습니까. 또 자매님들은 괜히 밤에 혼자 울적한데 우울한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눈물을 닦으며 '내 인생은 왜 이럴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우울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컨디션이 매우 안 좋은 상황에서 아주 안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2절과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지도상에 보시면, 우리가 '갈멜' 하면 보통 엘리야가 불로 응답받은 갈멜산을 생각합니다. 이 지도상에서 조금 해변을 따라서 올라가면 지중해변에 있는 것이 그 갈멜산입니다. 그런데 여기 지도상에는 마온 황무지 위에 '갈멜'이라는 지역이 있고, 이 또 다른 갈멜은 유대 광야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목축을 하는 나발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인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좀 특이합니다. '나발'의 이름의 뜻은 '바보'입니다. 부모가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아니면 그의 별명(닉네임)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이름은 무엇이죠? 아비가일입니다. '아비'는 우리 동양 언어와도 비슷한데 'father', '내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가일'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딸'이거나 '지아비의 기쁨이 되는 아내'라는 의미입니다. 이 여인은 상당히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의 출신 성분이 문제입니다. 어느 족속이라고요? 갈렙 족속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의 용사 갈렙의 후손에게서 이렇게 속물적인 인간이 나왔을까요? (설교 본문에서 언급된 히브리어 뜻에 대한 설명은 생략됨) 영어로 '케일럽(Caleb)'이라는 이름을 되게 좋아하는데, 사실은 그 의미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파생되어 두 번째 의미로 '충성스럽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랍비들은 '케일럽'이라는 사람은 이름도 그렇고 이방인이 분명했는데, 그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개종한 케이스로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유다 지파의 지파장까지 했는지, "정말 미스터리한 인물이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갈렙)가 여호수아 정복 시대에 믿음으로 전진해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도시, 어디를 정복했습니까? 헤브론입니다. 기럇 아르바, 헤브론을 정복하고 그것을 자기의 땅으로, 소유로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도피성으로 사람들에게 내놓습니다. 굉장히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문에서 나발이라는 자가 나왔는데, 사업적인 능력은 출중했지만 너무나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집안의 자녀들이 이런 심리적인 현상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탁월한 신앙을 보고 '와, 나도 저렇게 따라가야겠다'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신앙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들어보셨겠지만 PK(Pastor's Kids), MK(Missionary's Kids)라고 들어보셨죠? 목회자 자녀, 선교사 자녀들이 방황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자녀들이 방황을 안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교회로 놓고 보면 임직자의 자녀들, 즉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자녀들이 유독 교회를 많이 떠나고 하나님을 많이 떠납니다. 기독교 4대, 5대 집안임을 자랑했는데 신앙의 계보가 끊어진 그런 자녀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 8절의 내용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내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이 상황을 좀 설명드리면, 목축업자에게 '양털 깎는 날'이라는 것은 농부에게 '추수 날' 같은 축제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룻이 찾아왔을 때 룻에게 보리를 여섯 되를 안겨 주면서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날은 이웃들과 함께 잔치를 벌입니다. 특별히 뭘 한 게 없어도 그냥 와서 밥 달라고 할 수 있는 날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넉넉하게 베풀어 주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엄한 날 온 게 아닙니다. 1년 중에서 가장 좋은 날, 잔칫날에 사람을 보내서 먹을 것을 나눠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6절에 보면 세 번이나 '샬롬'의 인사를 합니다. "당신에게도 샬롬, 당신의 가족에게도 샬롬, 당신의 모든 소유에도 샬롬이 있기를." 굉장히 정중하게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들에 있을 때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전혀 해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 줬다고 말합니다. 약간 다윗이 생색을 내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다윗이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실제로 베풀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은혜를 다시 베풀어 주면 좋겠다" 이렇게 보은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맹수들의 공격에서 지켜주고, 또 약탈적인 아말렉이나 블레셋으로부터 지켜주며 정말 그들이 울타리 역할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축제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공짜로 먹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날인데도, "내가 공짜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정말 노력했는데 그것에 대한 보은만 좀 해 주면 좋겠다"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이라고 표현합니다. 천하의 다윗이 굉장히 자신을 낮춰서 겸손하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다윗을 보면서, 자기 600명의 부하들과 그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정말 이렇게 자기를 낮춰 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과 그 일행들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거나 약탈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의 농부들과 목자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그들이 자발적으로 후원을 해 주는 그런 형태로 생존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정중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발이라는 자가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게 답변을 했는지 10절과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이 악하고 어리석은 나발이 정말 망언 3종 세트를 쏟아붓습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이렇게 얘기했으면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알면서도 "난 너를 모른다. 안중에 없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아무 이름 없는 무명인 취급을 합니다.


두 번째는 "주인에게서 요즘 도망치는 종들이 많다"며 그를 나라의 배신자 취급을 합니다. 세 번째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근본도 없는 놈이다"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He is from out of nowhere.) 이 말이 얼마나 다윗에게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잔인한 말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을 곰곰이 묵상을 해 보는데, 나발이 '바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끝마다 다 맞는 얘기를 한 것입니다. 틀린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다윗이 한때는 정말 잘나가던 사람이었죠. 왕의 사위였고, 최고의 장수였고, 나라의 서열 4인방 안에 드는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기의 이름은 잊혀져 가는 것 아닙니까.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렇게 왕과 이 나라와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 "주인에게서 도망친 자 아니냐" 이 표현도 가슴에 아픈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근본도 없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다윗이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근거지도 없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 마디의 말은 나발이 정말 정곡을 찌른, 다윗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찌른 말들이었습니다.


제가 늘 '건강한 관계의 두 가지 요소'라고 강조하는데,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친밀함과 존중함."


부모 자식 간에, 또 믿음의 지체들 간에 아무리 친밀하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030년, 3040년 살던 부부도 비수 같은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서 이혼하고 갈라서는 경우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이 기도를 다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윗 입장이라면, '아니, 그 사람이 근거 없는 비난을 했는데 그것을 왜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아두고 있는가?' 할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말이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말이 와서 가슴에 박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용조 목사님이 "상처를 줘도 상처를 안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건 것이 내 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발의 말이 다윗의 마음에 5%가 됐든 10%가 됐든 동의가 된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 광야에서 이렇게 살다가 사람들에게 잊히고 내 백성들에게 잊히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닐까? 내가 정말 이 나라를 배신한 인생인가? 난 배신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내가 이 광야에서 정말 근본 없이 인생이 여기서 소멸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가 거짓말하는 것에 절대로 동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 중 현장 언급)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3부 예배가 약간 위험합니다. 겨울이 될수록. 밥을 먹어서 기운이 없는 데다가 따뜻하고 조명은 어둡고...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 약간 임재 가운데 빨리 들어가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내 마음 가운데 정말 원수가 한 말에 내가 1%도 동의하지 않으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5%, 10% 동의가 되면 마음에 상처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의 거짓말에 동의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동의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인생이 무명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처 없이 떠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에 유일하고 견고한 기초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나발은 정말 진실하게 살아가는 다윗에게 경멸과 조롱의 인신공격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습니까? 미쳐 날뛰는 왕에게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충성을 다했습니다. 식량과 거처가 필요한데도 주변에 있는 약자들에게서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오히려 보호해 줌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아주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삶의 형태를 살았습니다. 다윗의 인생 전체 시즌에서 가장 곤고하고 가장 어려운 기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옷깃을 여미며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나발이 그런 다윗을 근본부터 자극하고 공격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이 된다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것이 이 상황에서는 당연지사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묵상하고 싶은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분노가 일어나는 다윗의 마음이 건강한 것이었을까? 제가 볼 때는 결코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옛말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얘기 들어 보셨죠? 그런데 왜 종로와 한강인지 아십니까? 제가 보니까 조선 초기에 궁궐 앞에 '육의전(六矣廛)'이라고, 여섯 가지 품목의 종류별로 물건을 팔 수 있도록 시전을 베풀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허락을 해 준 공식적인 상점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들이나 소상공인들은 여기서 물건을 살 때 굉장히 어려움을 많이 당했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나라를 등에 업고 독과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한강의 마포나 노량진 같은 나루터에서는 사람들이 물건을 배에 실어다 날라서 그냥 노상에 펼쳐 놓고 물건을 파는 것입니다. 이것을 '난전(亂廛)'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냥 여기저기 사람들이 마음대로 펼쳐 놓은 상점들입니다. 그러니까 시전에 가서 억울하게 당한 것을 난전에 와서... 상인들이 조금 값을 더 매기고 싶어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기서 막 폭발을 하는 것입니다. 화풀이를 하는 겁니다.


다윗이 왕에게 억울하게 당했죠. 사부마저 생사를 달리하게 되고 너무나 외롭고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발 같은 자에게 분풀이를 하고 화풀이를 하는 것이 정말 맞았을까요? 우리 집의 가장이 회사에서 상사에게 엄청 깨지고 당하고, 거기다 화풀이는 못 하니까 집에 왔는데 아내가 조금만 걸리는 말을 한마디 하면 갑자기 폭발을 하는 것입니다.


"왜 당신, 그렇게 화를 낼 일도 아닌데 그래?" 아이가 조금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빠가 막 폭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내리분노'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를 따라 해 보세요. "내리분노."


사랑도 내려가지만 분노도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겁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상사한테 혼나면, 집에 와서 아내한테 화를 냅니다. 그러면 아내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괜히 아무 잘못 없는 강아지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입니다. 강아지는 자기 밥그릇을 엎어 버립니다. 내리분노. 분노가 흘러 내려갑니다.


저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의 내면적 양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가 뭐냐면, 우리가 유교 문화이지 않습니까. 수직적 질서가 강하다 보니까 잘 참습니다. 그런데 잘 참는 만큼 또 잘 터집니다. 그래서 '나는 화를 잘 참는다' 하는 것은 자랑스러워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언젠가 터지면 난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과 같은 연말, 11월, 12월 이렇게 들어가면 상실감이 사람들이 많이 느껴지기 때문에, 특히 여러분, 매일 아침 새벽 기도와 큐티(QT)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히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2절,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 이 모든 말을 그에게 전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다윗이 소년들의 말을 듣고 눈이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이 사람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냉정하게 '암살자 모드'로 전환이 됩니다. 400명에게 칼을 다 채우고 자기도 칼을 차고... 당대 다윗의 무공을 넘어설 자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이 칼부림을 한다고 하면 이제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피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그런 뉴스들 보지 않습니까. 태권도 사범이 화나는 일이 있다고 길거리에서 누구랑 부딪쳤다고 그 사람을 때리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러다가 사람 잡습니다. 큰일 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함부로 칼을 쓰면 안 되는 유형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어디다 풀 길이 없는데, '성난 놈 뺨 때려 준'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 분풀이하지 않았던 것처럼, 백성들과 약자들에게도 분풀이를 하지 않았고, 이제 악인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에게도 이것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 악에 악으로 대응을 하면 나도 악을 쓰게 되고 악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왕의 옷자락 하나 벤 것으로도 마음이 아파했던 그 영적인 감수성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다윗이 이렇게 막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자신이 분노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을까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분노 중독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분노 중독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항상 그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 건 너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네가 나를 자극했기 때문에 내가 화를 내는 거야."


(제가 지금 화내는 거 아니에요?) 이것을 반복적으로 하면 이걸 뭐라고 합니까?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세뇌시키는 것이죠. 자기 배우자나 자기 자녀나 혹은 직장의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는 이 사람이 냈고 사고는 이 사람이 치고 시끄럽게 문제를 일으켰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아빠, 내가 잘못했어. 엄마, 내가 잘못했어.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자극했어.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적이고 건강한 것이 아니죠.


마지막 14절에서 17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하인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소서.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인 중 하나가 여주인에게 이 상황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이 하인의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여주인한테 "당신 남편은 불량자다. 상종할 수 없는 인간이다" 이 얘기를 그냥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집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불량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량자, 당신 남편이 다윗을 자극해서 다윗이 당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을 해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발과 다윗을 좀 비교해 보면, 나발의 폭언이 실수였을까요, 습관성이었을까요? 습관성이죠. 너무나 뻔합니다. 이 사람은 잘못된 유형의 성격이죠. 습관적으로, 중독적으로 분노를 유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의 '설화(舌禍)'. 이 혀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설화 때문에 엄청난 쓰나미급의 보복을 당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복수를 하려고 하는 이 마음은 실수였을까요? 실수라고 볼 수 있습니까? 평상시에 항상 조심성 있게 행동을 했던 다윗으로서는 이상한 모습이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의외의 모습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다윗 안에서 나온 것이지 않습니까. 다윗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드리면 여러분이 이해를 하실까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고, 여러분 가족이나 주변에 있는 분들일 수도 있는데, 굉장히 합리적이고 차분한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분들이 한번 폭발하면 난리가 납니다.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착한 분들, 화를 안 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화를 내면 정말 대폭발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냐면, 그런 사람이 화를 낼 때는 '합당한 분노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지라도, "나같이 착하게 살던 사람이, 나같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 나같이 늘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화를 내게 만든 너는 정말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거야.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해" 이런 당위성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내면 상태는 이해했는데, 영적인 상태를 묵상해 보니까 딱 한 단어가 떠오르더라고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은 "내가 얼마나 평상시 합리적으로 살았는지 너희가 다 알잖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분노하는 것은 자기 의에 바탕을 두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사람의 분노도 자기 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같이 괜찮은 사람이 화를 낼 때는 너는 정말 심각한 잘못을 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묵상을 해 보면, 어떠한 분노에도 합당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어떠한 분노에도 합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분노가 문제가 되냐면, 분노는 마치 불을 지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불을 지릅니까? 내 마음에 분노의 불을 지르고, 관계 가운데 불화의 불을 지르고,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 일터에 불을 지르고, 교회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어제 이랜드 물류 센터에서 대형 화재가 났지 않습니까. 초기 진압을 하는 데만 9시간 반이 걸렸다고 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화재였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상대방이 나에게 거절감을 주었든 배신감을 주었든 당혹감을 주었든, "이것은 내가 분노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야"라고 근거를 대면서 만약 집에다가 불을 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합당합니까? 여러분의 직장에, 오피스에 불을 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노는 마치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다가 내가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화가 나니까 불을 지르겠다?"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면 안 됩니다.


나발은 불량한 사람이죠. 그런데 다윗은 선량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냐면, '나발의 분노는 불합리하고 다윗의 분노는 합당하다'는 이런 패턴의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묵상을 해 보니까, 다윗도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확 죽여 버리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하는 순간 다윗도 나발하고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발을 보면 굉장히 자기중심적이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폭언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안 그럴까요? 다윗도 이 상황에서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 나를 건드려? 그냥 확 다 질러 버리고 싶은 거야." 그래서 다윗이 만약에 이 사고를 쳤다면, 그도 똑같은 한심하고 비참한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됐을 때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아, 내가 그동안 고상한 척하며 살아온 죄인이었구나. 내가 착한 척하며 살아온 죄인이었구나. 내가 그동안 그렇게 착하게 산다고, 바르게 산다고 얘기했는데 결국엔 나도 똑같은 죄인이었구나." 이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분은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개인적으로 상담해서 아는 거니까.) 제가 전에 교회에서 굉장히 점잖고 교회 리더십인데, 공동체에서도 정말 본이 되고 인품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부모님도 교회에 헌신하시고 자녀들도 청년부에서 임원으로 섬기고 헌신하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퇴직을 하고 나서, 아무래도 퇴직을 하고 나서 마음에 상실감이 있었겠죠. (제가 자세한 얘기는 모릅니다.) 그런데 집에서 아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게 걸린 것입니다. 마음에 폭발을 한 것입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평생을 그 아버지를 존경했던 자녀들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럴 수가?"


그러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는 모습이 아닌가요? 그것도 그 사람의 모습이죠. 저 밑에 깔려 있었던 내 안의 어둠, 내 안의 죄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혈기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그의 혈기를 다 빼셔서 40년 광야 지도자 생활을 할 때는 "지면에 모세의 온유함보다 승한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을 도는데 끊임없이 백성들이 불평불만하니까 성질이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억울한 것일까요? "평생을 내가 정말 착하게, 선하게, 바르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왔는데..." 그 분노의 불이 붙으면 화재로 인하여 대형 화재로 건물 하나가 그냥 다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몇십 년을 아름답게 가꾼 산들이 다 불타 버리지 않습니까. 분노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잘 참아내는 분노'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기를 잘했다" 뭐 이런 얘기들 하지만, 사실은 '풍선 효과'입니다. 이쪽에서 참으면 (사울 왕에게 참았던 것), 이쪽 반대편에서 (나발에게) 폭발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분노를 건강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내면 세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한심한 죄인입니다. 내가 우아한 척했지만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로 인하여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인생과 우리 가정, 공동체를 망가뜨리겠습니까? 원수는 와서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왜 우리가 원수에게 동조를 해 주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깨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살려내시는 생명의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가을이 깊어져 가고 또 (날씨가)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괜히 추운 가을, 겨울날 길거리를 헤매며 옷깃을 세우고 우울한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인생의 상실감을 곱씹으면서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해 봐라. 너 잘 걸렸다' 이런 것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이 가을의 계절을 보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5.11.13(목) | 4321 WORSHIP |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 있네 (행 4:5-14)


요약 정리


  • 설교 요약: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 있네
  • 본문: 사도행전 4장 5-14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세상의 위협 앞에서의 담대함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이후 산헤드린 공회(당대 최고 권력 기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원수(사탄)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빛의 자녀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압박 앞에서 위축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어둠에 위협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처럼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2. 당신의 배후(Background)는 누구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는 "너의 배경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학력, 인맥, 스승 등 눈에 보이는 배경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 없는 범인이었음에도, 그들의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의 스펙이나 배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배경입니다.




3. 후광 효과(Halo Effect)를 버리고 본질을 붙드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심지어는 큰 교회의 이름을 자신의 배경으로 삼아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후광 효과'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모세, 예수님, 바울처럼 세상적인 직함과 배경을 다 내려놓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으로 일하게 하십니다.
능력은 도덕성과 방향성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만이 유일한 지혜이며 능력입니다. 세상의 배경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이름 하나로 쓰임받기를 구하십시오.




4. 유일한 구원의 이름, 예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세상 사람들은 현세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를 쫓지만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돈은 세상에서만 돌고 도는 것일 뿐,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기초는 학력도 재력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5. 결론: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는 인생의 많은 선택(대학, 직장, 결혼 등)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 즉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선택'을 마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작은 선택들이 실수나 실패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대한 선택 아래 있기에 우리 인생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어 두려워하기보다,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함 가운데 걸어가십시오.




녹취록


제목: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 있네 (행 4:5-14)


여러분, 목요일에 멀리서 오시는 분들은 식사를 못 하시죠? 식사 못 하고 오신 분 계신가요? 오, 거의 없으시네요. 할렐루야. 오늘은 저희가 원래 목요일 날 집회에 음식을 준비하지는 않는데, 오늘은 혹시 수험생들 중에서 마음도 허하고 배도 고프고 그런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서 가실 때 먹거리를 좀 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분 시험도 안 봤는데... 뭐 인생의 시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까요. 오늘 수능 시험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그래요. 저는 기사만 몇 가지 봤는데, 약간 예상하기는 했던 것이 7년 만에 응시자들이 가장 많았던 시험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서 시험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험 보고 만족스러운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오늘 수능 시험 보고 오신 학생들 있나요?


네, 있나요? 어, 네. 우리 큰 박수로 격려해 주시겠어요? 근데 제가 볼 때는 집에서 나올 기운이 없어서... 그런 친구들도 지금 라이브로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수험생들과 우리 가족들에게 격려 박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차세대와 청년들이 대한민국의 소망이고 한국 교회의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메시지는 사실 여러분 시험 안 봤지만, 어떻게 보면 이분들을 주로 대상으로 설교 준비를 했어요. 수험생의 마음으로 여러분도 들어 보세요.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이 승천하셨고, 2장에 성령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이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솔로몬 행각, 성전에 있는 복도 같은 곳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해서 그날 예수를 믿은 사람이 5천 명이나 더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죠.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이 난리가 난 겁니다. 왜냐하면 한 번 부는 바람으로 예루살렘 초대교회 부흥이 끝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역대급 태풍이 계속 부는 거예요. 3천 명이 예수를 믿고 5천 명이 예수를 믿으니까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오늘 5절과 6절 이어지는 내용 같이 읽어 볼까요?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산헤드린 공회가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제사장 가야바, 증경 대제사장 안나스, 그리고 요한과 알렉산더가 나왔는데 가야바의 후임들로 여겨집니다.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였고, 유대 종교 사회 최고 권위자 70명이 다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여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는 자리입니다. 이 사람들은 실형을 선고할 수 있는 사법권은 없지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최고 의결 기관입니다.


여러분, 경기를 잘 이기려면 판세를 읽어야 하잖아요. 인생에서 우리가 승리하려면 영적인 판도를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수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하나님을 이기고 하나님 백성을 이길 수 있어서 공격을 하나요? 아니요. 결국에 자기들은 패배하고 무저갱으로 갈 존재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원수 사탄이 공격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놈이 먼저 성질낸다고 하잖아요. 본인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제사장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서 공격적으로 언급을 하거나 무슨 행위를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원수들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하면 긴장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이걸 알게 됐습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힐까? 내가 존재감이 없을 땐 굳이 괴롭히지 않더라고요.


내가 원수의 감옥에 갇혀서 원수가 주는 거 그냥 먹으면서, 이 세상에서 주는 떡밥 먹으면서 살면 그때는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안 건드려요. 그런데 우리가 다윗처럼 일어나고 이런 사도들처럼 일어나면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영적 전쟁이 시작이 돼요. 그것은 내가 원수들에게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구나 생각할 부분이 아니라, '아, 내가 어둠의 나라에, 어둠의 세력에 그들을 위협하는 유의미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저들이 두려워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기독교 절기 중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인 성탄절이 오잖아요. 아기 예수가 오실 때 헤롯 대왕이 2세 미만의 아이들을 살해하는 유아 살해극을 벌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아이들을 죽였어요. 뭐가 그렇게 어린아이가 두려웠을까요? 아기 예수가 등장하는 순간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실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 상반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할렐루야.


우리 발 아래 사탄의 머리를 밟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적용했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3장 15절 하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우리가 원복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뱀에 의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패배한 것 같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사탄의 머리를 밟을 수 있는 영권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들, 청소년, 청년들... 뭐 아직은 연약해 보이고 준비 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여러분은 어둠의 세력을 위협하고 위축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역사하는 줄로 믿습니다. 존재 자체가 어둠의 나라에 위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긴장하고 위축되어 있는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고,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협하고 위축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장 9절에 우리가 요즘 새벽에 암송하고 있는데 같이 선포해 보겠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 보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했으면 좋겠다고 권면하거나 덕담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면 원수에게 협조하는 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다음 세대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앞으로 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영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순전하게 신뢰하는 그 믿음의 은사에 있어서는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미 아이들이 주인공인 거예요.


예배자 다윗도 10대 목동 시절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잉태하고 이 세상의 통로가 된 마리아가 14세에 부름을 받은 걸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기도자 에스더도 나이를 18세로 추정합니다. 전부 10대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시편 110편 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아멘.


그래서 자녀들에게 지금은 공부하고 사역이나 헌신은 나중에 하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별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어린이들과 청소년, 청년들이 세상의 압박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 위에 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10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아멘.


산헤드린 최고 법정에 서게 된 베드로와 요한이 얼마나 압박을 받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죠. 누가복음 12장 11절,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아멘.


이 사람들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참된 영적 권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기관이 인증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생명은 맘대로 좌지우지할지 모르지만 영혼을 맘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과 영혼을 온전히 결정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평가는 사람들이 할지라도 내 인생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람들을 대할 때 좋은 우정을 맺으시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되, 사람들이 마치 세상의 결정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연말에 수능 시험도 쳤으니까 대학 면접을 보게 될 것이고, 취준생들은 회사 면접을 봐야 하잖아요. 면접 보는 학생들, 청년들이 저에게 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제가 짧은 시간이지만 꼭 하는 얘기가 있어요. 생각을 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뽑지 않으면 여러분 손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면접을 보라고요. 제발 나를 뽑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면접 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그게 다 보이거든요.


제가 한 7년 전인 것 같아요. 서빙고 온누리교회 건널목 앞에 있는데 밴쿠버에서 같이 신앙생활 했던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이 "우리 아들이 이제 곧 면접을 봐야 되는데 교육학과를 가기 때문에 교수님들 앞에서 10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된대요"라고 하시는 겁니다. 면접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되는데 10분이나 발표를 해야 한다니, 애가 너무너무 괴로워한다는 거예요. 고3 때 연습을 하는데 매번 망쳤다는 겁니다.


그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상담실에 남학생이 딱 들어오는데 아이가 훤하게 너무 잘생기고 호감형인 거예요. "야, 너는 이렇게 호감형으로 잘생겼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니?" 그랬더니 자기가 발표할 때마다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고 다 망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신앙적으로, 성경적으로, 심리적으로 긴장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원리들을 설명해 줬어요. 근데 시간이 없는데도 마음에 받아들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충격요법을 썼습니다. "넌 이번 면접에도 또 떨 거야." 너는 반드시 떨 거라고 얘기해 줬습니다. 아이가 눈이 동그래져서 왜 그렇게 얘기하시냐고 묻길래, "이 분야의 최고의 교수님들 앞에서 네가 떨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니? 지금 너의 마음에 온통 갖고 있는 생각이 '떨면 안 돼'인데 떨지 않을 수 없다. 떠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면접을 보면서 떨리는데 떨지 않는 척하려는 게 더 불쌍하고 괴롭다"라고 해줬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분명히 이번 면접에도 떨 텐데, 떨리는 순간 그거 아닌 척하지 말고 그냥 교수님들 앞에서 '이거 하려니까 너무 떨립니다'라고 인정을 해라." 우리 내면에 터부시하는 생각을 계속 사로잡고 있으면 발표에 집중을 못 하고 엉뚱한 데로 가게 되거든요. "그걸 빨리 인정하고, '나는 원래 부족합니다. 부족한데 그냥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완벽한 척할 필요가 없다."


이 친구가 면접을 봤습니다. 떨었을까요, 안 떨었을까요? 당연히 떨었죠. 근데 예전에는 아닌 척하고 진땀을 빼면서 발표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떨립니다"라고 인정했더니 교수님들이 "야, 들어와서 다 떨어. 괜찮아" 하고 웃어 주시니까 얘도 마음이 편해진 거예요. 그래서 발표를 잘 마무리했고, 붙었습니다. 할렐루야.


시험도 여러분이 보는 것이고 면접도 여러분이 보는 거예요. 그러나 그 결과는 내가 책임지지 못합니다. 최종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은 부모님도 아니고 여러분 자신도 아니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7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무슨 권세로 했느냐? 누구 이름으로 했느냐?"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배후에 누가 있느냐?"입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배후에 누가 있느냐?


우리 사회에서 늘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확인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배경을 묻는 거예요. 어느 대학 나왔어? 스카이 출신이야? 지방이야? 예체능하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사사했어? 어느 대가에게 수학했어? 이런 거 물어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거, 좋은 학문 공동체를 경험하는 거 중요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에는 갈릴리 어촌의 어부 출신이라 내세울 게 없어요.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여서, 가장 잘 나가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너희의 출신과 배경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는데 얘기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너무나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합니다.


오늘 본문의 13, 14절을 한번 읽어 볼까요?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아멘.


학문 없는 범인, 평범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담대하고 실제로 병든 사람이 나은 현실이 있으니까 비난할 말이 없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살려냈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아멘.


베드로가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은과 금, 재력으로 했나요? 학력으로 했나요? 경력으로 했나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한 줄로 믿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면접 볼 때 제일 마음이 어려운 종류의 사람들은 이력서를 길게 쓰는 사람들입니다. 폼을 벗어나서 한 장짜리인데 2~30장을 쓴 사람도 봤습니다. 질문에 짧게 답변해 달라고 했는데 엄청 길게 답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이 자기를 어필하기 위해 굉장히 애를 쓰고 있구나'라고 느낍니다. 면접관들이 뭘 보는 줄 아세요? 얼마나 정답을 얘기하느냐, 말을 잘하느냐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정답인지를 봅니다.


사실은 무슨 얘기를 했느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근데 자꾸 장황하게 가면 '이 사람 뭔가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포장하려고 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미 선택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정답 인생입니다. 그래서 정답을 자꾸 말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어요. 자신을 정답인 척 포장할 필요도 없어요.


제 이야기를 하면 저도 출신과 배경으로 목회를 하라고 했다면 목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과정인 M.Div(Master of Divinity) 과정밖에 안 한 사람입니다. 석사, 박사 과정 그런 거 안 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 같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 이력서를 내면 서류에서 떨어집니다. 제 스펙은 서류에서 떨어지는 스펙이에요. 그런데 제가 사역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도 사업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세상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배후에 누가 있느냐?" 이 얘기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제가 대학생 때입니다. 도서관에서 학생회관을 지나 기도실로 가는데, 학생회관 앞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남학생이 있었어요. 제가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저를 붙잡고 자기 단체로 데려가려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작심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느냐? 전도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해야지. 자기 단체로 믿는 사람들을 끌어가려고 하는 건 성경적이지 않다." 그랬더니 왜 성경적이지 않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로마서 15장 20절을 들어 설명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선교 원칙을 어기고 있는 거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 설득이 된 거예요.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이 "당신의 배후에 누가 있소?"였습니다. "내 배후에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도 "당신의 배후에 있는 리더와 내 배후에 있는 리더가 만나게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제 배후에 누가 있나요?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 계신 거죠. 여러분의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제가 오늘 배경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냥 나 혼자 인생을 사는 거지 생각하지만 다 배경을 깔고 있어요. 제가 함께 사역하는 목회자들에게 항상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잘 알려진 분들하고 어울려 다니려고 하지 마라. 똑같이 모든 성도들을 대야 한다." 목회자가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리려고 하는 이유는 후광 효과(Halo Effect)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다니느냐에 따라서 배경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여러분 사진 찍을 때 배경 좋은 데서 찍잖아요? 내 얼굴이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왜 공부하고 일하고 직책이 중요합니까? Halo Effect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경이 중요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요.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요한가, 아니면 배경이 중요한가요?


심지어는 내가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 있을 때 온누리 교인이라는 걸 굉장히 목에 힘을 주고 다니려고 하더라고요. 제가 온누리에서 목회를 할 때 '온누리 목사'라는 게 자랑스러워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야 할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 게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저는 1516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 개척 운동을 하는데, 두 번째 개척한 교회 이름을 '1203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바꿨어요. 교회 이름 하나에 사람의 신앙 고백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 이런 교회 다니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얼마나 이 Halo Effect, 배경 효과에 자신을 띄우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세상 사람입니까? 배경의 효과를 얻으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떤 배경, 어떤 상황에서도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성경책이 읽고 이해하기 쉬운 책인가요? 어렵습니다. 제가 중3 때 성령 체험하고 성경을 읽는데 궁금한 게 많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제게 성경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태복음 23장 8절, 10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Your teacher, your master is only Christ." 너희의 스승은 단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제가 그 본문을 읽는데 성령님이 제 안에서 "오늘부터 내가 너의 스승이 되어 주겠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부님!" 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질문했습니다.


계속 질문하니까 놀라운 일을 경험시켜 주셨습니다. 어두컴컴한 예배당에서 "하나님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됩니다" 하고 질문하면, 관주에도 안 나오는 관련 구절들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팝업창 뜨듯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 성경 공부를 하나님이 시켜 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이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제일 못하는 수학 과목도 가르쳐 주시고, 이해가 안 되는 암기 과목도 외우게 해 주셨습니다.


자연을 만드신 분, 세상 모든 학문과 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 학문들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의 현상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건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 세상의 한계를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신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24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멘.


세상 지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혜입니다. 여러분을 화려하게 만들어 주고 지경을 넓혀 줄 수는 있지만, 천국 문 앞에 여러분을 세워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최고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경험)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이성, 합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스칸달론, 걸림돌)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모든 것,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 유대인들의 관점(헤브라이즘)과 헬라인들의 관점(헬레니즘) 이 두 가지 양극단 안에 있습니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귀납법과 연역법, 아래로부터의 접근과 위로부터의 접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이 양극단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양극단의 위에 계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이 양쪽 영역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며 최종 결론을 내리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지혜가 열릴지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의 이름으로 사는가? 내가 나온 대학 이름, 직장 이름, 직책명...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아멘.


사실 예수님도 동일한 논쟁에 휘말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예수님은 랍비 교육도, 자격증도 없으셨습니다. 모세도 왕자일 때가 아니라 미디안 광야의 목동일 때 부름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12사도가 아니었기에 평생 자격 논란에 시달렸지만, 일부러 추천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쓰실 때 투 트랙(Two Tracks)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배경과 지위를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여러분이 원하는 지위와 직함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일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고, 재력을 갖지 못하고, 취직과 결혼이 안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여러분에게 직함을 다 내려놓게 하시고, 아무런 자격과 타이틀이 없는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있을 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기회를 안 주셨습니다. 새벽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글자가 떨어지게 하시며 "앞으로 네가 쓸 책의 제목과 목차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학교 교육도 가장 기초적인 것밖에 못 한 사람인데 책을 쓰라고 하시니... 그런데 제가 쓴 책을 보고 교수님들이 성경적이고 주해적으로 너무 귀하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는 거죠.


저는 기질상 앞에 나와서 얘기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향적인 사람이라 10을 준비해도 1로 잘 표현을 못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지쳐서 자고 있는데 새벽에 하나님이 이사야 55장 4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내가 너를 세웠다." 네 학력, 경력, 배경, 기질로 일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불렀고 세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학 안 되면, 취직 안 되면, 결혼 못 하면 어떻게 사나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호흡을 주시니까, 사명 주시니까,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배경으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사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죄 사함 받지 못했고, 하나님 자녀 되지 못했고, 천국 백성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외롭고 힘들 때 의지할 분이 없었겠죠.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마지막 11, 12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학력과 경력입니까? 배경과 재력입니까? 나의 인생의 유일한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리 스트로벨이라는 인물은 시카고 트리뷴지의 법률 전문 편집자이자 무신론자였습니다. 성공과 명예를 다 잡았지만, 그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고 윤리 도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허무함 가운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공해서 사람들이 얻으려는 게 결국 물질과 쾌락입니다. 현세주의는 쾌락주의와 물질주의로, 그다음 퇴폐주의로, 결국 허무주의(니힐리즘)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돌고 도는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돈은 세상에서만 도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를 천상까지 이끌어 줄 힘이 없습니다. 제가 '돈다'의 반대말을 찾아봤더니 '한 곳에 머무르다'라는 뜻도 있더군요. 저는 중3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인생무상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평강, 영원한 신뢰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예수 믿으면 돈도 나오고 떡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실 것입니다.


내 삶의 이유가 되시는 분, 내 존재의 유일한 근거(Foundation)가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을 떠나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도 유효 기간이 있고, 나중에는 그것에 발등 찍히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기초 위에 내 인생을 세우겠습니까?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겠어요? 잠잠히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지금까지 나는 과연 어떤 배경에 의지해서 살았습니까? 내가 이런 학력, 이력, 명함을 가지면, 내 자식의 성공이 배경이 되어 주면 내가 좀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쫓아서 살아왔는지... 하나님, 나 이런 거 다 없어도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자랑이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내 존재 이유가 되시며,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서 있는 유일한 견고한 기초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의 고백으로 담담하게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의 영혼의 고백을 주께 드리게 하시고, 내가 그동안 외면해 왔던 내 영혼의 진실이 있다면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임재의 거울 앞에 나를 세우시고 '내가 무엇을 구하였느냐, 무엇을 찾았느냐,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느냐' 물으실 때, 우리 영혼의 참된 본질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기를 원합니다.


(찬양: 그 이름에 크신 능력 영원한 생명이 내 삶의 이유라...)


왜 모세가 왕자라는 신분이 있을 때 쓰지 않으시고 다 내려놓게 하시고 쓰셨습니까? 왜 청년 사울의 모든 배경을 내려놓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세상적으로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은 것이, 나를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습니다. 그게 아프고 힘들지 몰라도,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실수와 실패가 있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쓰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어린아이도 좋고 청소년, 청년, 어른도 좋습니다. 단위로 올라오셔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의지한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의지하여서 내 인생을 주님께 구별하여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 하나로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분들은 단위에 올라오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실 분들은 일어나서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통성 기도)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정말 예수 이름에만 구원이 있다고 삶으로 믿고 살았는지... 학력, 직업, 직책이 있어야만 내 인생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정말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이 있다고 믿고 고백하는 삶인지...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십니다. 아멘.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거기서부터 삶의 모든 능력과 비전과 열정과 힘과 전략과 관계를 하나님께서 쏟아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왜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기적을 베풀지 않으십니까 따지지만,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후순위로 내려놓기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삶의 진정한 최우선 순위가 예수 그리스도이신지, 그 이름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고백이 명확한지... 이 고백이 명확하면 하나님께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아니하시고 존귀하게 세우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이름에 구원이 있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네. 예수 이름에 치유하심이 있네. 예수 이름 그 이름 안에 모든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평생에 이 고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지어다. 두 손을 들고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통성 기도)


주님,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우리 인생이 때로는 시온의 대로를, 때로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지만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골짜기도 대로로 만드시고 높은 험산령도 낮추셔서 주께서 역사하시는 대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놀라지 말지어다.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승리를 주실 우리 주님께 감사 영광의 박수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이 시간 자리에 다 돌아가셔서 한 번 더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우리를 인생의 모든 상황 가운데 구원하실 분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의 인생을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인생의 큰 결정들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합니다. 어느 대학, 어떤 전공, 어떤 사람과 결혼, 어떤 직장...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 가장 중요한 선택, 가장 영속적인 결과를 가져올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들이 이 거대한 선택 아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을 하든, 때로는 실수를 하든 실패를 하든 우리의 인생은 완전한 실패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성공이 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나는 천국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담대할지어다. 평안할지어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지어다.


내가 내리는 선택이 내 인생을 크게 좌우할까 봐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미 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분의 현존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의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은 나의 평생뿐만 아니라 영원까지 나의 구주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유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 내가 좋지 않은 선택,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앞날을 알 수 없어 두려워하지만, 내 인생의 궁극적인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평안하게 이 길을 걸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가을과 겨울, 내년 봄이 오는 이 기간이 평강 가운데 걸어가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통성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한 예수 그 이름에 우리의 삶의 모든 능력과 힘과 권세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간절히 나아갔던 모든 예배와 우리의 모든 전심은 이 예배가 끝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 동일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가 우리의 삶의 힘이 되며 능력임을 믿음으로 계속해서 선포하며 나아가는 승리하는 예배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10월

2025.10.09(목) | 4321 WORSHIP | 도시마다 예수님을 전하라 (행 8:4-8)


요약 정리


  • 설교 제목: 막다른 골목인가? 마지막 고난인가?
  • 본문: 사무엘상 27:1-12
  • 핵심 주제: “막다른 골목”이라고 느낄 때, 하나님을 떠난 ‘자구책의 평안’은 오히려 고난을 연장시키고, 하나님은 시글락(도가니) 같은 자리에서 마음의 불신을 드러내어 연단하신다.



1. 서론: 불안이 만든 결론(다윗의 자기 결단)


  • 다윗은 “결국 사울 손에 잡힐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블레셋 땅으로 망명을 선택한다.
  • 아이러니하게도, 다윗이 가장 두려워하던 “이방 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실행한다.
  • 설교는 ‘부정적 멘탈 리허설’이 실제 행동을 촉발해 두려움을 현실화시키는 위험을 강조한다.



2. 하나님의 훈련장을 이탈하는 선택


  • 하나님이 기적같이 붙드시는 가운데서도 다윗은 불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훈련장을 벗어난다.
  • 군대 ‘위수 지역’ 비유를 통해, 답답해도 지켜야 할 경계가 있고(약속의 땅/하나님의 자리), 임의 이탈은 더 큰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을 설명한다.
  • 다윗의 “사울 손에서 벗어나리라”는 고백은, 결과적으로 ‘사울의 손’뿐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도 벗어난 선택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3. 잠깐의 평안: 눈에 보이는 유익과 보이지 않는 손실


  •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자 아기스가 다윗을 환대한다(정치적 역학: “내 적의 적은 내 친구”).
  • 망명의 유익처럼 보이는 결과들:
    • 흩어져 있던 가족이 다시 모여 살게 됨
    • 사울의 수색이 멈춤
    • 도망자 생활 중 처음으로 ‘두 다리 뻗고 자는’ 쉼을 얻음
  • 그러나 설교는 “다윗 뜻대로 되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 ‘이지 컴, 이지 고’(쉽게 얻은 편안함의 낮은 내구성)를 강조하며, 효율만 높아지는 시대일수록 지속성/깊이가 약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 이 흐름 속에서 예배(특히 현장 예배)와 공동체적 신앙의 중요성을 권면한다(12월의 예배/성탄 시즌, 가족 초대, 함께 누리는 평강).



4. 시글락으로 이동: 자유가 커질수록 더 위험한 상태


  • 다윗은 왕도(가드 중심지)를 피하고 지방 성읍을 요청해 시글락을 받는다.
  • 성경이 굳이 “1년 4개월”을 기록한 이유를 ‘문제의 시간’으로 해석한다:
    • 가장 평안해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안한 시기
    • 이스라엘도, 블레셋도 아닌 애매한 정체성
    • 기도도, 완전한 세속화도 아닌 중간 지대에서의 위험
  • “하나님이 날수를 세고 계신다”는 표현으로, 하나님을 떠난 시간의 무게를 강조한다.



5. 공동체를 떠나는 신앙의 위험


  • 신앙은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이 반드시 있다고 강조한다(시편 133편 인용).
  •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로, 예배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 예배만 드리고 관계를 회피하는 신앙은 위기 때 붙들어 줄 사람이 없어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대형 예배당 2층/3층의 익명성 비유).



6. 이중생활의 시작: 약탈과 거짓 보고


  • 다윗은 게술/기르스/아말렉 등을 치고 전리품을 취한다.
  •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명령한 본문이 아닌데도, 다윗이 개인 판단으로 움직였음을 지적한다.
  •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여라므엘/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보고하며, 실제와 다른 ‘연출’을 한다.
  • 이 과정에서 다윗의 정치적 수완과 계략이 드러나지만, 설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흐름’이 아니라 ‘불안이 만든 기술’이었다고 진단한다.



7. 두려움의 전이: 사울에서 아기스로


  • 다윗은 거짓이 탄로 날까 두려워 남녀를 살려두지 않는다(증언 차단).
  • 사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더니, 이제는 아기스에 대한 두려움에 갇히는 구조가 된다.
  • ‘언더커버’(잠입 수사) 비유를 통해, 이중정체성은 결국 드러날 위험을 내포한다고 설명한다.
  •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은 없다”는 메시지로, 어둠의 말과 행위는 드러난다는 경고를 덧붙인다.



8. 결론: 시글락은 안식처가 아니라 도가니(연단의 자리)


  • 시글락의 의미를 ‘철을 녹이는 그릇/용광로/도가니’로 연결해 해석한다.
  • 잠언 17:3(도가니와 풀무의 연단)로, 하나님이 마음을 연단하신다는 결론을 강화한다.
  • 시글락은 다윗에게 “하나님 없이 누리는 평안”의 실체를 드러내는 자리이며,
    마지막 밑바닥에 남아 있던 불신과 불안을 드러내어 제거하는 연단의 자리로 기능한다.
  • ‘지킬 박사와 하이드’ 비유로, 이중생활이 길어지면 예배자도 어둠에 잠식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하나님이 다윗을 건지기 위해 이 시간을 다루신다는 방향으로 마무리한다.



9. 설교의 최종 결론


  • 우리가 “막다른 골목”이라고 느끼는 순간, 벗어나려는 본능이 강해진다.
  •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고난의 마지막 구간”일 수 있으며, 그 구간을 벗어나려 할수록 고난이 연장될 수 있다.
  •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의 영광에 이르듯, 끝 구간에서 하나님과 함께 견디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권면으로 마친다.



녹취록


제목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막다른 골목인가? 마지막 고난인가? 네. 다윗이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블레셋 망명을 선택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오늘 본문 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니라.


자, 지난주 말씀 가운데 다윗이 속내를 드러내는데,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이었죠? 네. 이방인의 땅에 가서 피를 흘리며 거기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 이게 제일 두려운 거라고 했어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오늘, 스스로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일을 실행했다는 거예요. 이 불안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제 발로 이방인의 땅으로 망명을 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사람은 스스로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되도록 만들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자꾸 부정적인 멘탈 리허설을 하면서 그쪽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상황이 이해는 됩니다.


사울왕이 다시는 추격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또 나타났잖아요. 그러니까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고, 또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끊임없이 밀고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 인생의 데드엔드에 있는 것이죠.


이제 왕과 세 번째 마주치게 되면 “그날은 내가 잡히는 날이 될 것이다” 이런 두려움이 생겼어요.


근데 참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기적같이 그를 붙잡고 계시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훈련장을 스스로 이탈해 버린 겁니다.


제가 큰아들이 군대에서 기본 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어요.


그래서 면회를 어떻게 할 수 있나 서로 날짜 조율을 하고 있는데, 면회를 가려고 보니까 위수 지역이 있는 거예요. 이런저런 기사들을 보니까 7년 전에 위수 지역을 폐지하자고 논의가 심각하게 있었더라고요. 그러나 여전히 있습니다.


대부분은 군인이 자기가 복무하는 그 군대에서 한두 시간 거리 정도를 위수 지역으로 합니다. 그래서 부대에서 언제든지 콜이 오면 한두 시간 내에 복귀를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저희 아들이 있는 부대는 기밀일 수 있으니까 말씀은 안 드리겠는데, 위수 지역을 파악해 봤더니 20분 거리예요. 20분. 보통 부대들은 외진 데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차로 20분이면 정말 거의 아무것도 없거든요. 제가 지금 흥분하고 있죠.


그러니까 20분 거리 위수 지역이라는 거는 “꼼짝 마” 수준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거 좀 심각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마음이 답답해도 위수 지역을 지켜야 되나요? 안 지켜도 되나요? 반드시 지켜야죠.


다윗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하지만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자기 맘대로 이탈해 버린 거예요.


사울이 이제는 자신을 단념하기를 바라면서 망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1절에 뭐라고 얘기하냐면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예요.


그런데 제가 이걸 묵상하면서 질문이 생겼어요. 다윗의 블레셋 망명은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것일까?


사울의 손에서도 벗어났지만, 하나님의 손에서도 벗어난 것이었어요. 전자는 평안을 가져다주지만, 후자는 너무 불안한 겁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하자면,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견디시겠어요?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서 평안을 누리시겠어요? 네. “하나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고 싶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명확한데, 인생이 항상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잖아요.


자, 다윗이 그런 생활을 한 뒤에 어떤 실행을 했는가? 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자, 자신의 사람 600명과 함께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습니다. 블레셋은 해안 지역의 5대 도시(펜타폴리스)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 국가인데, 그중에 머리 역할을 하는 게 가드이거든요.


그가 처음 21장에서 가드 왕 아기스를 찾아갔을 때는 위태로웠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다윗이 도망자 신세인 걸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게다가 가드는 그들의 최고의 장수 골리앗의 고향이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골리앗을 죽인 철천지 원수가 제 발로 걸어들어오잖아요. 그래서 다윗이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 미친 척하고 도망을 쳤었죠.


자, 그러나 지금 27장에서는 세월이 한참 지났어요. 그러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국제 미아 신세라는 것을 주변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다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가 어떻게 보면 최대 원수 중 하나인데도 다윗을 환대해 줍니다.


왜 그랬을까? 좋은 논리는 아니지만 인간관계 역학에서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는 계산이 있죠. “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블레셋의 최대 적수였던 이스라엘 왕 사울이 다윗 사냥에 혈안이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윗을 데려다가 품고 있으면, 사울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견제 세력을 키우게 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은 고대 역사에서나 오늘날의 역사에서나 정치사에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자, 그러면 망명한 게 잘한 것일까? 3절과 4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하였더니,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자, 블레셋으로 망명한 결과를 세 가지로 말한다면, 첫째, 여러분 가족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왔을까요? 흩어져 지냈던 겁니다. 600명이 기동성 때문에 장정들만 다녔어요. 후방의 안전한 곳에 가족들을 따로 두었던 거죠.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 온 가족이 드디어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됐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둘째, 다윗이 예상한 대로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수색하지 않게 되었다.


셋째, 도망자 세월이 시작하고 나서 정말 처음으로 두 다리 뻗고 자지 않았을까? 그렇겠죠. 광야에서는 맨날 뜬눈으로 밤새지 않았겠어요?


제가 이번에 연구해 보면서 이 가드라는 도시가 중요한 블레셋 도시라고 했죠. 와인 프레스, 그러니까 포도를 넣고 짜서 포도즙을 내고 포도주를 만드는 “술틀”이라는 뜻으로도 풀이됩니다.


제가 더 찾아보니까 현대 이스라엘에도 유명한 와이너리 지역들이 있는데, 가드 일대가 그와 연관된 지역으로 거론되기도 하더라고요. 너무 관심 있게 듣지 마세요.


상상을 해 보면, 다윗이 “야, 드디어 이제 편하게 침대에 두 다리 뻗고 누워서 포도주 한잔 마시며 쉴 수 있구나” 이렇게 편안하게 있는 거예요. 다윗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1절에서 다윗이 블레셋 망명을 기도하고 결정했나요? 혼자 생각이었나요? 혼자 생각이었어요. 기도하지 않았어요.


자, 우리는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내 뜻으로 밀어붙여 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둔갑을 시키거나, 일이 잘 안 되고 나면 “왜 하나님 그러셨어요”라고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평생에서 말씀과 기도가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과목이죠. 1516교회 모든 성도들이 QT와 통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루의 첫 시작을 기도로, 새벽 기도로 시작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런데 다윗이 그동안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손쉽게 편리함과 편안함을 얻게 되니까, 제가 딱 떠오른 말이 있습니다. 이지 컴, 이지 고. 쉽게 온 것은 쉽게 가게 돼 있다.


여러분, 돈도 쉽게 벌면 쉽게 나가게 돼 있어요. 내게 쉽게 다가온 사람은 또 쉽게 떠나게 돼 있어요. 여러분 쾌락을 쉽게 얻겠다고 술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쾌락이 쉽게 떠나갈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고통이 찾아오죠.


대가 지불 없이 쉽게 얻은 행복은 내구성이 떨어지게 돼 있고, 지속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가 오면, 그때는 항상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팔았어요.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 저와 동시대에 살고 계신 분들이죠. 크리스마스 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고 해서 좋은 의미로 사고, 문방구에 가서 카드도 몇 장 구입해서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정성껏 편지 쓰고, 씰도 붙이고 우표도 붙여서 빨간 우체통에 넣을 때, 그 설렘이 기억납니다.


근데 어느새 이런 카드나 편지가 이메일로 대체되고, 이제는 이메일도 별로 안 쓰고 카톡이나 인스타나 SNS로 다 대체됐잖아요.


가성비와 효율성이 오르는 사회가 될수록, 인생은 순간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는데 지속성에 대한 감각은 확실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오늘 예배뿐만 아니라 12월 한 달 동안 계속 강조할 텐데, 온라인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이 저희는 또 나오시는 분들만큼 많거든요. 저는 여러분이 현장 예배에 나오는 것이 당연히 수고스럽지만, 꼭 나오시는 결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1년 내내 잘 못 나오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여러 사정으로 그런 분들도 12월에는 교회를 나올 구실이 많다. 이번 주 같은 경우에 크리스마스 셀레브레이션도 있고, 다음 주일은 성탄 주일 예배고, 특별새벽기도도 있고, 송구영신 예배도 있고. 할렐루야. 나올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또 여러분에게 꼭 권면하는 것은 “그것도 프로그램 하라고 해서 해야 되나?”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디너를 꼭 하세요.


왜냐하면 우리 가족끼리 앉아서 “야, 우리 같이 예배드리자” 하면 “왜 아빠는 안 하던 거야?” 이렇게 돼서 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가족을 한 가족이라도, 한 명이라도, 두 명이라도 초대하면 가족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정말 의미 있는 예수님 생일 잔치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천사들이 이야기하기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성탄의 기쁨과 평강을 혼자 누리라고 하신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누리라고 해 주신 거예요.


자, 그다음 다윗이 어떤 요구를 했는지 5절에서 7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아기스가 그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자, 아기스가 다윗을 사울의 견제 세력으로 키워 준 건데, 다윗은 또 다른 속셈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기스에게 “내가 왕도에 있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저를 지방 하나에 보내 주십시오” 요청합니다.


그가 이미 이스라엘 왕도에서 권력의 핵심을 봤잖아요. 권력이 핵심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다 끄집어내리려고 하죠. 공공의 타깃이 됩니다. 그래서 블레셋 땅에 와서 자기가 또 그런 상황이 되는 걸 원치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럼 어디로 가게 됐는가? 아기스가 다윗을 어디로 보내줬다고요? 시글락.


지도상에 보시면 이름이 독특해서 잘 익숙하진 않은데, 이 시글락은 유다 지파 남부 지역에 있습니다. 브엘세바가 최남단인데 브엘세바에서 한 20km 정도 떨어져 있고요. 원래는 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던 성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점유하고 있었어요. 아기스가 가드에서 한 40km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시글락으로 다윗을 보내 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더 잘된 거예요. 사울 왕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아기스의 손에서도 상당한 자유를 얻은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를 갑자기 언급해요. 여러분 그 날 수가 얼마나 됐다고요? 1년 4개월이었다.


성경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면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 이 기간을 언급했을까요? 다윗 인생의 문제의 시간인 거예요.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평안하면서도 가장 불안했던 시기, 1년 4개월입니다. 폭풍 전야이기 때문이에요. 이때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블레셋 사람도 아닌 거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 사람이 완전히 될 수도 아닌, 아주 애매한 시간을 보냈던 겁니다.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아멘.


우리가 다윗을 보면, 오고 오는 세대에 최고의 예배자, 전심 전력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들판의 목동이었잖아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광야에서 얼마나 주옥같이 많은 찬양을 지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예배의 모범으로 인정을 받는 다윗입니다.


그런 다윗이 약속의 땅, 하나님의 땅을 떠난 거예요.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떠난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역을 떠났다는 것은 거룩한 땅, 성소와 멀어진 것이고, 오늘날로 얘기하면 교회를 떠난 거예요.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니까 괜찮겠지.” 그러면 하나님이 괜찮다고 보실까요? “요놈 봐라. 너 나를 떠난 지 몇 개월째다.” 하나님이 날 수를 세고 계시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이 보면 “신앙이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문제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차원만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이 반드시 있습니다.


시편 133편 1절과 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여러분,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복을 명하셨다. 즉 예배하는 공동체 위에 복을 내리셨다.


우리는 개인에게 영생을 주신다고만 생각하는데, 시편 133편은 예배하는 공동체 위에 영생의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과 이 예배 공동체 위에 그런 은혜 체험 있기를 축복합니다.


냉담자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혼자서 집에서 성경 보고 혼자 예배드리시는 분들, 하나님은 마치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다리고 계세요.


물론 가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안부 인사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어찌 보고 싶지 않으시겠어요?


여러분이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오는 날,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런 하나님 안에 기쁨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가끔 제가 그런 분들을 뵙거든요. 10년 만에, 20년 만에 돌아오신 분들. 기도해 달라고 기도할 때 정말 하나님의 뭉클한 감동이 있어요.


제가 양재 온누리교회를 섬길 때, 본당이 1층만 있는 게 아니라 2층이 있고, 2층 끝에는 3층도 있었어요. 최대 인원이 3,000명 넘게 들어가니까요.


근데 제가 예배를 계속 인도하다 보니까, 2층, 3층에 앉으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게 된 거예요. 예배만 드리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분들.


대부분 그런 분들이 2층, 3층에 앉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부터 얘기했어요. “저 멀리 3층쯤에 앉아 계신 분들, 이제 좀 땅으로 내려오십시오.”


셀 가족반에 들어오시고, 이제 한 가족이 돼서 신앙생활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 3층에 소속돼 있는 분 중에 한 분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10년 동안 예배만 드리셨어요.


제가 참 놀라웠던 이유는 뭐냐면, “나 예배만 드리지, 사람들 관계는 너무 부담스럽다. 신경 쓰인다” 이런 분들 중에 거의 대부분은 2년, 3년이 안 돼서 예배도 포기해요.


인생이 항상 평탄한가요? 인생은 굴곡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때 아무도 잡아 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한 번 예배 빠지고, 두 번 예배 빠지다가, 아예 예배조차 나오지 않는 분들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전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머물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8절에서 10절, 다윗이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게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니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남방과 여라므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하였더라.”


자, 다윗이 어떤 일을 했냐면, 게술 사람들은 원래 요단 동편, 바산왕의 영토에 살던 사람들이에요. 근데 이스라엘이 거기까지 점령해 버렸기 때문에 땅을 잃고 유다 남부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방 족속이었던 기르스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보면 가장 문제 족속 중 하나였던 약탈족 아말렉 족속. 이런 이방 족속들을 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본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어요. 그냥 개인 행동을 한 겁니다.


일종의 이중 첩자 역할을 한 건데, 실제로는 이방 족속을 약탈했으면서도 가드 왕 아기스에게는 유다 지파 사람들을 약탈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본문에 “유다 남방, 여라므엘 사람의 남방, 겐 사람의 남방”이라고 말하는데, “남방”이라는 말은 브엘세바 아래쪽, 남쪽 사막과 광야가 시작되는 지역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입니다. 네게브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는데, 본래 “남쪽”이라는 뜻이죠.


여라므엘 사람들도 유다 자손의 한 갈래예요.


그리고 겐 족속이 나오는데, 여러분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뭐죠? 세 글자. 네, 이드로입니다. 이드로가 겐 족속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친이스라엘 성향” 같은 겁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와 가까운 겐 족속 사람들을 친 것처럼 거짓 보고를 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유다 남부에 있는 약탈족과 이민족들을 쳐서 유다 지파 사람들의 안위를 도모했던 거예요.


그리고 전리품의 일부는 아기스에게 주고, 또 일부는 유다 지파 사람들과 겐 족속에게도 나눠줬던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앞으로 진도를 나가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유다 지파와 완전히 원수가 된 것처럼 상황을 꾸며 놓고, 아기스의 환심도 사고, 자신의 안위도 지키고, 유다 지파와의 연대도 공고히 한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그냥 순전한 예배자인 줄만 알았는데, 엄청난 모사였구나” 이걸 알 수 있죠. 정치적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교묘한 계략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간 게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불안이 있었다는 겁니다. 일이 잘되면 잘될수록, 내가 원하는 거, 내가 계획한 것이 다 되면 될수록, 불안불안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을 쳤는데, 또 다른 두려움에 빠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1절과 12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 하였더라.”


다윗이 전쟁에서 전리품만 취하고 노예를 잡아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유는 자신의 거짓이 아기스에게 탄로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죠.


자, 그러면 다윗의 이런 이중 생활이 나중에 탄로 날 위험이 올까요, 안 올까요? 네. 오게 됩니다.


사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더니, 이번에는 아기스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게 됐다.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묵상하다가 떠오른 게 있어요. 첩보 영화에 보면 경찰이 범죄 조직에 잠입해 들어갈 때 보통 어떤 용어를 써요? 언더커버라는 표현을 쓰죠. 이 언더커버가 보스의 신임을 얻고 보스의 오른팔이 됩니다.


나중에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나는 상황이 와요, 안 와요? 오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도 보셨군요, 영화.


지난 한 주간 유난히 연예인들의 어두운 삶을 폭로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왔어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이건 비밀이야. 이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돼”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그런 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행한 것, 말한 것, 다 빛 가운데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비밀 이야기를 할 때에도,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셔야 되고, 어리석은 일, 험담하는 이야기, 악한 일들은 나누지 마셔야 돼요.


제가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왜 “막다른 골목인가? 마지막 고난인가?” 이 제목을 썼냐면, 시글락 때문입니다.


자, 어느 도시 때문에요? 시글락.


시글락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있는데, 저는 종종 유대 랍비들의 자료도 찾아보거든요. 유대 랍비들은 “철을 녹이는 그릇”이라고 해석했어요.


왜 그러냐면 시글락이 당시에 철을 용해하는 산업에 상당히 집중되어 있었던 도시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시글락은 용광로인 거예요. 도가니.


여러분, 도가니가 뭔지 아시죠? 광물을 녹여서 불순물들을 다 드러나게 하고 제거하는 장치예요.


여러분, 다윗의 인생 여정에서 시글락은 안식처였는가? 아니면 용광로, 풀무불이었는가?


처음엔 안식처인 줄 알고 찾아갔죠. 그런데 이 스토리가 뒤로 갈수록 이게 풀무불이 됩니다.


다윗의 도망자 세월 동안 하루도 마음 편하게 잔 날이 없는데, 가장 편안했던 곳이 시글락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뜻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없이 누리는 평안이 평안인가요? 하나님 없이 누리는 평안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안한 거예요. 이제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폭풍 전야 같은 상황이 된 겁니다.


잠언 17장 3절 같이 읽어 볼까요?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냥 보고 계십니다. 1년 4개월이 지나도 그냥 보고 계세요.


그러면서 그 시글락이라는 도가니에서 다윗 마음의 바닥을 드러내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 내 생명도 맡깁니다. 원수의 생명도 맡깁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라고 말했지만, 마지막 밑바닥에 남아 있는 찌꺼기, 마지막 불신과 불안이 다 드러나도록 하시는 곳이 시글락이었어요.


제가 다윗의 이중 생활을 생각하다가 몇 가지 떠오른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나온 작품이죠. 여러분 잘 아시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인간 안에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공존 상태인 거죠. 지킬 박사는 선행을 많이 했던 사람인데, 그 안에 있는 악한 하이드, 미스터 하이드가 그 착한 지킬을 결국 잠식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마지막에 하이드가 완전히 그를 장악해서 스스로 죽게 만드는 비극적 결말의 스토리입니다.


여러분, 1년 4개월 동안 시글락에서 다윗이 이중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이 시킨 일도 아닌데 자기 묘수로, 자기 모략으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삽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기간을 단축시키지 않으시고 그냥 놔두셨다면, 정말 하이드처럼 이런 예배자도 인생의 어두움 가운데 파묻히지 않았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기 원하셨던 거죠.


자, 그러면 왜 다윗은 이런 길로 갔는가? 여러분,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처럼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딱 이 고난의 마지막 구간만 지나면 되는 거예요. 거기서 견뎌야 되는 거예요.


근데 거기를 벗어나려고 하니까,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니까, 고난을 연장시키는 거죠.


제가 성도님들 상담하다가 안타까운 경우가 딱 이런 상황이에요. 지금까지 그렇게 믿음으로 어려운 상황을, 고난과 결핍을 이겨냈는데 마지막 구간을 버티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리고는 다시 골짜기로 들어가는 거예요. 다시 고난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넘어서 하나님의 승리의 자리에 이르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부활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09월

2025.09.11(목) | 4321 WORSHIP |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 있네 (행 18)


요약 정리


1) 핵심 한 문장

복음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이며, 두려움의 순간일수록 주님의 확언성령의 권능, 그리고 동역의 구조 안에서 끝까지 전진해야 한다.


2) 본문 흐름 요약 (사도행전 18장)


  •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해 아굴라·브리스길라를 만나 동역의 기반을 세운다.
  • 회당에서 말씀을 변증하고 설득하지만, 강한 반대가 일어나며 사역의 중심이 전환된다(유대 중심 → 이방 중심).
  • 회당장 그리스보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는다.
  • 주께서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는 확언과 보호의 약속을 주셔서 사역을 지속하게 하신다.
  • 갈리오 재판 장면에서도 하나님이 길을 여시며 복음 전파가 계속되도록 지키신다.



3) 설교 핵심 메시지


  • 오직 한 길
    • 예수는 ‘대안’이 아니라 ‘유일한 길’이다.
  • 두려움의 해법
    • 감정 진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확언)과 성령의 능력으로 버틴다.
  • 전략적 순종
    • 반대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시는 방식으로 전환하며 계속 간다.
  • 동역의 가치
    • 사역은 개인전이 아니라 공동체적 동역으로 확장된다.
  • 열매의 패턴
    • 말씀 선포 + 관계 형성 + 공동체 연결이 맞물릴 때 ‘믿음과 세례’라는 결실이 나타난다.



4) 적용 질문


  • 나는 예수를 ‘여러 옵션 중 하나’로 두고 있지 않은가? 정말 ‘오직 한 길’로 붙들고 있는가?
  • 반대나 부담을 만나면 멈추는가, 아니면 전환하며 계속 가는가?
  •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확언은 무엇인가?
  • 나는 사명을 혼자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함께 걷는 동역자/공동체가 있는가?



5) 기억할 문장


  • 하나님은 멈추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두려움을 깨고 다시 말하게 하시는 분이다.
  • ‘오직 한 길 예수’는 상황이 좋을 때만 붙드는 구호가 아니라, 흔들릴수록 더 분명히 붙드는 중심이다.
  • 사명은 감정으로 지속되지 않고, 확언과 동역으로 지속된다.



녹취록

오직 한 길 예수! (사도행전 18장) | 이상준 목사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네 짧은 구절이니까 한 번 더 시작,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네 오늘 지저스 웨이브 첫 번째 집회에 어떤 말씀을 나눌까 이렇게 고민하고 기도 많이 했는데 역시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한 길 예수 따라 해 보시겠어요. 오직 한 길 예수 네 예수 그리스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시죠.


제가 그 예수님을 본받으라 이번 여름에 책을 쓰면서 이제 오늘 오늘 책이 나왔는데요. 제가 이 책을 쓰면서 그 오랫동안 가장 깊은 신앙적 목마름 중에 하나가 정말 교회 사역 열심히 했고 또 많은 사역이 부흥하는 것을 보았고 또 성경 통독하면서 성경에 많은 지식도 알게 됐고, 그런데 그 목회 여정 가운데에도 가장 근본적으로 내 안에 있는 질문은 과연 나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나 나는 정말 예수님을 닮은 성품과 예수님을 닮은 인생을 살고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더 만나고 싶고 더 갈망하게 되고 사모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책 제목을 내면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가 이 책 제목하고 똑같이 제목을 내려고 했거든요. 책 제목이 똑같은 게 많은 거 아시죠?


네 가능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저는 너무나 편하게 그냥 그리스도를 본받아 외에는 생각이 안 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로 책 제목을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출판사 사장님의 그건 안 되지 않냐 그 유명한 고전 책 이름과 똑같을 순 없지 않냐 이렇게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뭐 뭐 같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제가 생각을 할수록 과연 우리는 천상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일까 지상의 예수님을 본받는 것일까 왜냐하면 성자의 천상의 이름이 그리스도이고 지상에 이 땅에 계셨을 때 이름이 이제 예수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천상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또 종말의 심판주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절대 주권 아래 순복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절대 주권을 갖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보다 좀 겸손한 이를 예수님을 본받으라. 이 땅의 성자의 지상의 모습을 우리가 본받아야겠다.


어떻게 사람의 모양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그런데 그분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삶을 사셨을까?


여러분 인성을 입고도 온전한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과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근데 제가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야 이거는 뭐 완전히 영혼의 차원의 것이니까 이건 뭐 불가능에 가깝다고 얘기하고 예수님을 본받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수님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여러분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분이 예수님이시잖아요.


그럼 어떻게 아버지 뜻대로 예수님은 행하셨을까? 우리랑 동일한 인성을 입으셨고 육체를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분에겐 그게 가능했을까 왜냐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과 동일한 뜻, 동일한 마음을 품고 사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특별히 이제 아버지라는 표현을 요한복음 많이 사용하죠.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그 일을 하고 또한 아버지께서 보시는 것을 나도 보고 또한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을 나도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마음의 결을 같이 하셨던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겉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우리가 과연 잘 알까 그래서 이제 제가 이 책에서는 예수님의 어떤 겉모습보다는 예수님의 내면 세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을 과연 인간이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놀라운 고백을 했잖아요. 고린도전서 2장 16절 같이 읽어볼까요? 누가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제가 이 구절을 보고 깜짝 놀란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도 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안다고 주장하겠냐는 거예요. 그럼 너가 주님의 마음을 알면 주님도 가르치겠네.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앞부분에 한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뒤에 반전이죠.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셨는데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해 주셨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놀라운 선언을 사도 바울만 한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는 그 그리스도의 마음을 뭐라고 표현을 했어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신성한 성품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개혁 한글에서는 이제 신의 성품 에 동참한다. 그러면 그 신의 성품이 무엇일까?


제가 여기다는 안 써놨는데 1장 4절 이후에 이제 5 6 7절 쭉 보면 믿음의 덕을 덕의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해 인내를 인내의 경건을 경건해 형제 우애를 형제 우의 사랑을 총 신의 성품의 8가지를 이야기를 합니다. 몇 가지요? 네 집중하고 계시네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걸 몇 가지로 얘기했냐면 9가지로 이야기를 했어요. 9가지가 뭘까요?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베드로의 신의 성품 8가지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성령의 열매 9가지. 근데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어요.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베드로의 신의 성품은 마지막 결론이 사랑으로 귀결돼요. 사랑으로 수렴이 되고 그리고 성령의 9가지 열매 베드로가 바울이 이야기한 9가지 열매는 뭐부터 시작해요? 사랑부터 시작해요.


성령의 열매는 그러고 9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뭘까요? 아마 이 본문의 강의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열매가 복수가 아니고 단수예요. 하나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맺혀지는 연속적인 과정인 겁니다. 그래서 양쪽이 다 결국에 바울도 강조한, 베드로도 강조한 정말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성령께서 내조하심으로 맺혀지는 열매의 마지막 결론은 뭔가요? 사랑입니다. 사랑 결국에는 사랑 한 가지로 수렴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 뭘까요? 하나님 사랑 유사 이 두 가지만 하시면 여러분은 신앙 완성된 거예요. 인생 완성이에요.


근데 여러분이 아무리 화려하게 살고 아무리 많은 것을 얻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랐어도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안 되면 그거는 미완성이에요.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화려해지고 첨단을 달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죠. 신성한 성품 성령의 열매 이것을 우리 안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너희 속에 뭐를 이루기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금 너희를 품고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태초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류 문명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태초의 원형을 향해 달려가야 되는 거야. 하나님의 형상 회복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죠. 사도 바울이 그래서 놀라운 권면을 했어요.


에베소서 5장 1절에 보면 너희는 누구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여러분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볼 때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타락하고 망가진 죄인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천상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가 완전한 성자이시고 완벽한 거룩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가 죄의 시궁창에서 구르며 살고 있는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네.


할렐루야


우리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태초부터 하나님은 이 일을 꿈꾸셨고 이 일을 원하셨고 이 일을 기대하고 계셨던 거예요.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 온전했던 그 모습 여러분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요?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갈망이 제 안에 있어요. 어 제가 뭐 요즘 많이 느끼는 것이긴 한데 나이가 들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예전에 어르신들이 젊은데 뭐가 그렇게 고민이 많냐 그때가 좋은 거다. 그러면 나는 막 온 인생의 고민을 지고 20대에 살았던 것 같은데 근데 그때가 참 좋다라는 걸 알게 돼요.


제가 그 아파트 뒤에 있는 공원에서 가끔 이렇게 산책도 하고 뛰기도 하고 그러는데 예전 같지 않아요. 걷기만 해도 뛰기만 해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요. 예전 같지 않다. 예전 같지 않다. 계속 이 느낌이 드는 거예요. 육신 장막을 벗을 날이 멀지 않았거든요.


여러분도 뭐 다르지 않잖아요.


20대 때는 밤을 새도 끄떡이 없었는데 며칠씩 새도 상관이 없었는데 이제 밤새면 이제 금방 티가 나죠. 소화가 안 되고. 예. 근육이 처지고 피부가 뒤집어지고 머리가 하얘지고 머리 속도 하얘지고 밖에도 하얘지고 다 그래요. 제가 저희 아내가 무슨 얘기를 할 때마다 이렇게 가끔 가다가 이렇게 마음이 잘 안 꼬이는 편인데 이렇게 마음이 꼬일 때가 있어요. 저한테 이렇게 얘기를 해요. 제 머리를 보면서 어우 남자는 머리가 하얘지는 게 멋있어 그러면서 본인은 본인의 흰머리를 정리해요. 저한테 이걸 좀 도와달라고 막 정리를 해달래요. 이건 좀 잘못된 거 아니냐 어떻게 동일한 기준이 적용돼야지 이 남자는 흰머리가 멋있다고 얘기하냐 근데 멋있대요.


여러분 남자는 흰머리가 멋있나요?


다 자매님만 대답하잖아요. 아니에요. 시드는 거예요. 다 시드는 겁니다. 다 시들어가는 거거든요. 왜 이렇게 꽃도 화분에 꽂아 놓으면 시간 지나면 이렇게 시들잖아요. 시들고 있는 거예요.


제가 물론 뭐 매주 교역자들하고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올 초에 야 그래도 내가 50대 중반이 돼 가는데 그래도 여전히 농구를 하고 축구를 하고 있구나 할렐루야 물론 성도들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건 제가 이해합니다. 그 다 접대 축구 아니냐 목사님 앞에서 이렇게 홍해가 갈라지듯이 그런 상상을 많이 하시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물론 저에게 테크를 잘 안 하긴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여튼 제가 평생을 살면서 이런 외적인 부분 외적으로 내가 육신 장막을 벗을 날은 가까워 오지만 나는 과연 내면적으로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이 고민을 합니다. 내가 언제쯤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야 내가 40대인데 내가 이제 50대 중반이 돼 가는데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있거든요. 내가 이거밖에 안 되나 난 도대체 언제 언제 돼야 정신을 차릴까 뭐 이런 생각할 때 있어요.


여러분 어떠신가요?


네 뭐 아멘을 하려고 그러지 마시고 과연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게 뭘까 여러분 사람이 정말 진정 제대로 사람다워진다는 게 뭘까? 그것은 성경에 쭉 정리를 했지만 하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본받고 성령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예요. 지식 집약적인 시대에 수많은 지식을 쌓고 풍요로운 문화적 화려함을 누리고 첨단 기계 문명의 이로움을 다 우리가 갖고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 이 껍데기들 안에


본질적인 외피들을 다 벗기고 나면 과연 나는 무엇이 남는가? 나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그 한 가지가 남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답게 인생을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오늘 본문에 말씀한 오직 오직이에요.


저를 따라 해보세요.


오직 오직이라는 단어로 시작을 합니다. 오직 이 한 길밖에는 없다는 거예요. 이 한 길만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다원주의 시대일지라도 개인주의 시대일지라도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이 있는데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6절. 오늘 본문에 이제 앞에 앞에 절이죠. 보면 제자들이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제 부활하실 예수님이 승천하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 특강을 하시고 그 하나님 나라 특강에 대한 강의 내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요? 없어요.


저는 그게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걸 왜 기록을 안 했을까 기록을 어디다 했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40일 동안 강의를 듣고 나서 무슨 얘기를 했어요? 하나님 나라 얘기를 안 하고 이 땅의 나라가 언제 회복되냐고 질문했어요. 전부 낙태 점수여서 예수님이 기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신 게 아닐까 할렐루야 이런 뭐 그냥 농담 반 진단반인데 여러분 이 제자들이 이 나라는 언제 회복됩니까? 이거에 관심을 가졌어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도대체 이 대한민국은 언제 정상화될까? 어 소시민들은 다 열심히 사는데 나라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라를 보면서 과연 이 나라가 언제 정상화되나 그 안타까움이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의무도 맞고 우리가 지나가야 되는 과정도 맞아요.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헌신해야 될 사명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사도행전 1장 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너희가 알 바 아니오 알 바가 아니다.


여러분 때와 시기에 대해서 알려고 하실 필요가 있나요?


없나요? 네 왜 확신이 없나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 마지막 때와 시기를 알고 계시나요? 마태복음 24장에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36절.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래서 제가 이거 이상한 거예요.


여러분 삼위일체 삼위일체이신데 어떻게 성부가 아시는 것을 성자가 모르실 수가 있나 이게 가능한 얘기인가?


그래서 여러분 조금만 제 해석에 유머 감각을 가지시면 첫 번째 예수님이 비밀 유지 조항에 서명을 하셨나 야 그건 나도 몰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도대체 뭘까 모르실 수가 없는데 두 번째 명확한 것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는 인포메이션이 아니다. 이 얘기를 하셨어요. 세 번째.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여기도 이제 종말론에 관한 책이죠. 5장 2절과 4절에 보면 충격적인 얘기가 나와요.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모르는 것만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 한번 구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룰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


그날과 그때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밤에 도둑과 같이 오고 그냥 번개가 치듯이 오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4절에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같이 읽어볼까요?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함에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


도둑같이 온다는 거예요. 도둑같이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도둑같이 오는데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도둑같이 오지 못하게 된다.


아멘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때와 시기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내가 성령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라는 거예요.


여러분 역사의 마지막 시점과 역사의 완성에 대해서 왜 걱정하냐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케어하실 문제고 오늘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으로서 성령을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게 우리에게 관건이라는 거예요. 언제 주님 오십니까? 이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아니다. 오늘 약속하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신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언제 오시지 여러분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누워서 기다리듯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사모하고 기대하고 체험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치 이런 것이에요.


여러분 제가 시험과 공부 얘기하면 학창시절이 지났는데도 반응이 별로 유쾌하지 않더라고요.


여러분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뭔지 아세요?


선생님 언제 시험 봐요? 시험 날짜는 언제예요? 이거 맨날 물어보거든요. 언제 시험을 보느냐 그럼 왜 그렇게 언제 시험 보느냐를 물어볼까요? 시험 볼 준비가 돼 있는 거예요. 안 돼 있는 거예요. 안 돼 있기 때문인 거예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토플 공부를 이제 토플 책을 사서 공부할 수 있는 책들이 많잖아요. 그중에서 이제 대표적인 책 하나를 사서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나름 저도 성실하게 공부하는 편인데 진도가 잘 안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음 가운데 딱 결정을 하고 그냥 시험을 신청하고 특별히 어디다가 뭐 제출할 것도 없는데도 그냥 시험을 딱 신청하고 날짜가 정해지니까 진도가 막 나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점수로 나중에 이제 미국의 교환 학생을 가게 됐어요. 물론 시험 볼 때는 계획이 없었는데 여러분 제가 벤쿠버에서 목회를 할 때 미국의 방문을 갈 때마다 국경에서 이제 보도에서 그 패스포트 컨트롤에서 심사를 하면서 하여튼 간에 그 한 분의 심사관이 있었는데 이분이 계속 저한테 트집을 잡는 거예요. 왜 너는 워킹 비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이렇게 왔다 갔다 하냐 뭐 그런 얘기였어요. 왜냐하면 미국은 제가 알기로는 이제 종교인들에게 알비자가 있거든요.


그런데 캐나다는 종교인 비자가 없어요. 그래갖고 제가 거기 4년을 있었는데도 비지토 비자예요. 그냥 방문 비자에다가 요런 조건 하에서 일을 할 수 있다라고 퍼밋을 줘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제한적인 거죠.


그런 제한적인 비자를 가지고 너 미국에 뭐 하러 가는데 너 미국에 혹시 돈 벌러 가는 거 아니야 이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컨퍼런스가 있어서 가야 된다 모임이 있어서 가야 된다 제가 그러다가 이제 3년이 지나면서 야 이거 도저히 더 이상 안 되겠다 그래서 이제 영주권을 신청하고 시험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이제 다시 4년 만에 나오게 돼서 다 내려놨지만 그래서 이제 캐나다 같은 경우에는 영연방에서 보는 IELTS라는 시험이 있습니다 보신 분들 있을 텐데 그래서 제가 이제 시험을 신청을 하고 공부를 하다가 그냥 설교 시간에 제 3 얘기를 많이 하니까 제가 IELTS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다 했거든요.


그랬더니 예배 끝나고 나서 한 교인이 저한테 조용히 찾아오더니 목사님 목사님 시험 본다는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 시험이 꽤 어려운 시험이에요.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이제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이유가 뭐냐 그런데 물론 성적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날짜를 정해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잖아요. 날짜도 안 정해 얘기도 안 해 나 이 공부 안 한다.


여러분 공부를 실제로 안 하게 돼 있어요.


날짜가 정해져야 돼요. 심지어 사람들에게 얘기도 해야 돼요. 그래야 공부하게 돼 있어요. 네 그 시절이 기억이 안 나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언제 주님이 도대체 오시는 겁니까?


세상의 종말은 언제입니까?


여러분 언제가 중요한가요?


요즘도 시한부 종말론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는 국내에 여러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인류 종말의 날이 언제 오는가?


성경에 하나님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얘기하셨어요.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래서 마태복음 28장에도 마가복음 16장 15절에도 온 천하에 다니면 만민에게 뭐를 전하라고요?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파해서 그 전파하는 것이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다 증거가 되면 그때 끝이 온다.


여러분 언제 끝이 오는가?


이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만 끝이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다시 사도행전 1장 8절 한번 보여주실래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심이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 자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언제 끝납니까? 마지막 피니시라인의 엔드라인은 그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고 그 지점까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 역사의 전개에 사명을 맡은 게 우리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해야 끝이 오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복음은 끝까지 전해야 하는 것이고 경주는 끝까지 달려야 하는 것이고 내게 맡겨진 영혼들은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시간의 끝도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구원 역사에 책임 있는 동반자들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지난달에 청년부에서 책과 PT ChatGPT를 이제 책과 PT라고 이야기를 하고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중에 하나 나왔던 질문이 이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예정하셨다면 내가 노력할 게 뭐가 있냐 여러분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들 많거든요. 특별히 인생이 내가 애를 써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자꾸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의욕을 상실하게 되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정론이 맞다면 아니 구원할 사람 하나님이 어떻게든 알아서 다 구원하실 텐데 전도가 무슨 필요가 있으면 선교가 무슨 필요가 있냐 이런 얘기하시잖아요. 제가 이제 축구를 좋아하니까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물론 선발 라인업을 정하는 것도 전수를 짜는 것도 전부 감독의 권한이다. 그러면 선수가 이거 전부 다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하는데 내가 노력한 대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게 맞아요. 틀려요. 대답을 안 하시네요. 틀린 얘기죠. 내가 노력할 게 뭐가 있냐? 아니요. 박지성 선수가 맨유에 가서 정말 마지막 3분 5분 뛰는 선수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가 굉장히 중요한 선수로 발돋움을 하게 되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를 따라 해보세요.


나의 노력과 하나님의 섭리 네 나의 노력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이끌어가시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정론 얘기가 나왔으니까 예정론과 만인 구원론 제가 다음 주에 장신대 가서도 집회 때 이야기를 할 텐데, 여러분 예정론과 만인 구원론에 성경에 근거 구절이 있나요? 없나요? 둘 다 있어요. 에베소서 1장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요? 예정하셨다.


예정론이 맞냐 틀리냐 이런 거 뭐 철학적으로 여러분이 교리적으로 아니면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하지 마세요. 성경에 예정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되도록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비하셨고 알고 계셨고 결정해 두셨다는 거예요. 이게 구원받은 사람들의 엄청난 감격이죠. 아 하나님이 그냥 우연히 가다가 이렇게 길거리 캐스팅 하듯이 뽑으신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나를 영혼으로부터 품고 계셨구나 이거를 깨닫는 거예요.


그런데 정반대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도 정해져 있는 거 아니냐 하나님 비정한 하나님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러면 일부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냐 여러분 하나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세요? 안 원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디모데전서 2장 4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


아멘 아멘 아멘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를 이제 두 가지 차원 두 가지 층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근원적 의지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도덕적 의지가 있는데 여러분 끝까지 악을 행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도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인격적으로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 의지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반응하고 보이고 드리느냐 그 사람에게 하나님도 인격적으로 반응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볼게요. 가롯 유다가 예수님이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 그 정도로 그의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가롯 유다를 제가 오늘 이 관점에서 묵상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내어드렸다면 그가 베드로가 될 수도 있었다라는 거예요.


아니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돈까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베드로가 될 수 있느냐?


여러분 참 희한한데 예수님을 동전 30에 팔아넘긴 사람이 신약의 누구라고요?


유다 구약의 자기 동생 요셉을 동전 20개 팔아넘긴 사람이 누구였어요? 유다 둘 다 유다예요. 왜 이런 싱크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그 유다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보다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해서 아 동생 죽여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돈 받고 팔아넘겼다고요? 종으로 그런데 나중에 그 유다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자기 동생을 살려내기 위해서 베냐민을 살려내기 위해서 목숨을 걸잖아요. 그래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그 형제들의 관계가 화해하는 데 있어서 유다가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유다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그 헌신 때문에 축복의 선언을 받게 됩니다. 네 그래서 너의 가정에서 왕의 계보가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구약의 유다가 변할 수 있었다면 신약의 유다도 변할 수 있었던 거예요.


변할 수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너무나 요즘 이제 청년들이 자기의 인생이 이제 풀리지 않고 또 요즘은 청소년들 어린이들조차도 여러분 초등학생이 저한테 와서 무신론자라고 얘기한다니까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지금은 이제 중고등학생이 저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기도 많이 해봤는데 하나도 들어주시는 거 없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난 그런 신을 믿지 않는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고 계속해서 어려운 방향으로 가고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가 이런 치명적인 잘못을 한다니.


그러나 그 인생이 변할 수 있어요. 없어요. 변할 수 있어요. 자기 의지를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드린다면 베드로와 같은 반전을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베드로도 어차피 배신했었잖아요.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요.


그런데 결국에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끝내 주님을 선택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죠. 아니 자살을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선택한 거냐 아니요. 내가 세운 공든 탑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겠다고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세상에 의지가 약해서 우울증에 빠지고 또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상에서 이제 기업을 일으키신 뭐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있잖아요. 자수성가 하신 분들 이 자수성가라는 게 마이 오 헨스 내 손으로 내가 읽은 기업 내가 일으킨 인생, 내가 일으킨 가문.


그런데 세상에 인생을 살면서 40년 50년, 60년 동안 내가 노력해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어느 날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생기잖아요. 그러면 내가 쌓은 탑을 내가 무너뜨리는 거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정말 우리가 볼 때는 뭐 정계에서 재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강하기 때문이에요.


야 되는데 끝까지 그 죽음의 순간까지 자기를 선택하는 거예요.


여러분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겼을 때 누가 임하셨는가?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이 임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만 태어나면 안 됐을 내가 태어나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복이 되지 않을 만한 그런 처절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성령이 임하셔야만 변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시고는 예수의 증인이 될 길이 없고, 성령이 아니시고는 이 세속적인 시대에 예수님의 닮은 꼴이 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고는 이 세속적인 시대를 능히 이겨낼 방법이 없어요.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그 온전한 자리까지 이끌어가실 유일한 동행자, 유일한 보혜사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제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나누고 같이 기도하겠는데요.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에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라고 썼다가 그냥 그리스도를 빼고 오직 한 길 예수 이렇게 썼어요. 약간 이렇게 님자를 빼면 불경건한 느낌이 나서 제가 일부러 그러는데 예수까지만 썼어요. 자 여러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예수 예수 2천 년 전에 이 예수라는 이름은 어떤 이름이었는가 물론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마태복음 1장에 설명하죠. 그런데 우리가 철수 영희 이런 얘기하는 것처럼 철수 같은 이름이에요. 구약에 어떤 이름하고 똑같은 이름이냐 하면 여호수아 호세야 똑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많이 사용되던 아주 인기 있는 이름이었어요. 오늘날의 서구권에서 영어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죠. 그러나 이 스페인 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 스페인 이런 데서 굉장히 흔한 이름이에요. 축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스날에 가브리엘 제수스라는 선수가 있었어요. 반응이 별로 없네요.


좀 세상도 알고 사셔야 되는데 이 브라질 출신의 선수인데 브라질은 이제 포르투갈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제수스라는 그 제수스가 헤수스 히헤수스 예수입니다. 예수 영어로는 지저스죠. 우리가 지저스 웨이브라는 집회를 하는 것은 개개인이 정말 예수님 닮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단순히 우리가 그냥 거기 가서 기도하고 거기서 찬양하면 영적인 좀 막혀 있는 게 풀린다 그런 거 말고요. 궁극적으로 내가 예수 닮은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닮은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흘러가서 여러분의 가족에게 흘러가고 일터로 흘러가고 학교로 흘러가고 이 대한민국 사회로 흘러가고 전 세계로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한류라고 류라는 게 웨이브잖아요. 지저스 웨이브가 일어나야 됩니다.


과연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냥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지저스 웨이브가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 한 가지 길이 있는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을 받아야만 예수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뜻하는 대로 되는 것보다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너무나 많이 가기 때문에 유다처럼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셨던 분들.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됐을까?


여러분 가롯 유다뿐만 아니라 창세기의 유다도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동생을 팔아 넘기고 그 돈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자기 가정을 떠나고 이름도 모르는 현지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들이 첫째가 죽고 둘째가 죽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의 인생에 비극의 불행의 그늘을 들이우시는데 구약의 유다도 신약의 유다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전 인격을 주님 앞에 맡겨드리면 나를 완전히 과감하게 내려놓겠습니다. 성령님은 나를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옵소서 그런 사람들은 인생이 바뀌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에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분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시고요.


그런 분들은 자리에서 좀 일어나시겠어요.


그런 분들만 일어나세요.


여러분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한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 노력과 애씀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직 성령이 아니시면 이 길을 감당할 수 없고, 이 인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인생 하나를 감당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람이 되어서, 강력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이 세속의 파고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성령의 사람, 예수의 사람이 될지어다.


[ 기도 ]


성령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주사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새 영이 임하시면 옛 사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워서 마음의 결심을 해서 내가 노력을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새 영이신 성령님이 임하시면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생각이 많고 복잡한데 정리가 안 되시는 분들 생각은 하고 있는데 삶으로 펼쳐지지 않고 삶에 전혀 어떤 결실과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분들 성령이 임하시면 여러분의 생각에 질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하나님이 놀라운 창의성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마음 가운데 불안과 우울과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사람들 여러분 그런 감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심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일단 내조하시고 나니까 성령님은 빛이신 줄로 믿습니다. 빛 가운데 거하시는 빛의 영이시기 때문에 어두운 감정과 공존하실 수가 없어요.


원수가 내 안에 부정적인 생각 너는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 너는 너의 인생을 너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공격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어두운 감정을 같이 쌓아둘 수 없게 만드세요. 반드시 성령님은 우리의 우울과 우리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시는 영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내가 저 사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이게 마음이 묶일 때가 있죠. 자기 가족도 내가 일주일째 한 달째 저 사람 미워해야지 그런 마음이 생길 때 있죠. 성령이 내조하시면 악한 의지를 오래 품고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지어다. 성령의 사람이 될지어다. 성령 하나님 이 시간 불같이 바람같이 임하셔서 우울


이 치유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조울증이 치유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 임하사 공황장애가 치유될 지어다. 성령이 임하사 왜곡된 인격


인격의 장애가 치유될 지어다.


[ 기도 ]


여러분 저를 보시겠어요 제가 최근에 본 기사 중에 제일 안타까웠던 기사 중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불과 몇 년 만에 우울증이 150%로 증가했어요.


팬데믹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러분 이게 무슨 영향일까요? 제가 이거를 보면서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 150%나 우울증이 증가를 할까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제가 저희 아들에게도 그런 얘기하고 저 자신도 그런 생각하는데 우리가 빛을 많이 보면 우리 눈이 어떻게 되나요? 우리 눈이라는 거는 이게 유효기간이 있잖아요. 연식이 있기 때문에 계속 빛에 많이 노출되면 그만큼 시력은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세상의 화려함 여러분 물질의 부요함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사실 그런 것들인데 여러분 아셔야 될 게 있어요. 아이들이 일찍부터 그걸 누리면 마음에 우울이 빨리 오게 돼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 제가 상담할 때 그 가족들을 상담할 때마다 하는 얘기가 있어요. 우울증 환자가 계속 우울하고 나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나 힘들어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잖아요. 중증 우울증 환자인 경우에는 그날이 자살을 시도하는 날이에요. 왠지 아세요? 자살을 딱 결심하는 순간 자유해지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야. 얼굴이 밝아지는 거예요.


여러분 이 우울증이 도대체 왜 현대인들에게 어린 아이들께까지 이렇게 쓰나미처럼 덮쳤는가?


여러분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일찍부터 보고 누리고 즐기는 인생을 아이들을 그렇게 살게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시대적인 흐름이고 문명의 흐름이지만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화려함과 세상의 부유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갈망하고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의 영혼의 시력은 잃어가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세요.


결정하세요.


내가 이 시대가 추구하는 것, 이 시대가 쫓아가는 것, 이 시대가 갈망하는 것, 내가 그거 누리며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분명한 예수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세요. 성령의 온전한 다스리심 가운데 살기로 결단하세요. 우울증 사라집니다. 내가 세상의 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이슈이면 우울증이 오게 돼 있어요. 그러나 내가 예수의 사람으로 살면 내가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회를 하면 잘하면 주님의 영광이요, 못하면 부족한 나를 쓰시는 주님께 감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울증은 떠나갈지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며 예수의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우울증이 치유되고 불안증이 치유되고 공황장애가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이러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과 어려움이 있는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 듣는 것으로 인하여서 여러분의 삶이 계속해서 어두워져가고 있다면 여러분의 눈과 귀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기를 원한다면 자녀들에게 안수하고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


성령의 사람에게는 생각의 질서와 평강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어두운 감정들이 떠나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악한 의지가 사라지고 거룩한 의지가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을 죄와 악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병기로 주님께 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새로워질지어다 새 영이 임하사 새 사람으로 살게 될지어다. 하나님 행하실 새 일을 기대할 지어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한 번 더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할 때 집회를 할 때는 물론 이것이 좋은 영적 계기가 되고 모멘텀이 된다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그러나 집회를 할 때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지만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면 우리의 주님 앞에 헌신하고 기도하고 부르짖고 찬양하는 것이 다 무의미해집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 결단을 드리시기를 바라는데, 내가 이제 예수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온전한 결단과 결심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내조하시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생각, 원하시지 않는 감정, 원하시지 않는 뜻과 계획 등 돌리고, 마치 주님이 보시지 못할 것처럼 나 혼자 어리석게 행하는 모든 어두움과 죄악의 습관들, 주님 다 내려놓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인정하고 살겠습니다.


진정한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예수님이 함께하심으로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육신과 존재로 전 존재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가운데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실 수 있는 분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고 서서 기도하셔도 좋고, 무릎이 안 좋으신 분들은 서서 앉아서 기도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주님 한 분을 따르겠습니다.


내 삶이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완전히 새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단하는 분들은 무릎을 꿇고 또 일어서서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예수의 증인으로 오직 이 길밖에 없음을 선포하고 결단하며 살겠습니다. 주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


아멘 성령님은 강물과 같이 흐르시고 우리와 친구와 같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임재하시면 우리가 성전에서 예배할 때뿐만 아니라 삶의 자리에 돌아갈 때도, 운전을 할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학교나 일터를 나아갈 때도, 사람들을 만날 때도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성령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그 바다에 발목만 담그는 것이 아니라 무릎만 담그는 것이 아니라 창일한 강물과 같이 그 성령의 임재 가운데 충만히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서 삶의 자리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뜻하는 것, 의지하는 것, 느끼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나타날지어다. 새로워질지어다. 주님의 평강이 임할지어다. 육신의 질병도 치유될 지어다. 관계의 깨어짐이 치유될 지어다. 가정과 일터와 한국 교회는 치유될 지어다.


여러분 계속해서 기도하며 나아갈 때 저희가 축도를 하지 않고 여러분 계속 기도하는 집회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하시다가 또 자유롭게 가시면 되겠는데, 여러분 여러분 이 집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사 잠시 머물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08월

2025.08.31(주) | 주일설교 | 인생의 출국장에 서라 (사무엘상 20:18-42)

[설교 요약] 인생의 출국장에 서라


본문: 사무엘상 20:18-42
설교자: 이상준 목사 (1516교회)




1.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파송받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떠나야 하는 상황을 단순히 '도망'이나 '추방'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22절)"라고 말하며,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임을 선포합니다.

  • 신앙적 해석: 현실적인 이유(사울의 시기, 시대적 상황 등)가 있을지라도, 결국 인생의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 요셉의 고백: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 내 인생의 고난과 이동을 '하나님이 나를 보내심'으로 해석할 때, 내면의 상처 없이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에벤에셀'을 넘어 '에셀 바위'로


7장의 '에벤에셀(도움의 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의 안전지대(Safety Zone)라면, 20장의 '에셀 바위'는 떠남의 장소(Departure Gate)입니다.

  • 떠나야 할 때: 아무리 익숙하고 안전한 곳이라도, 하나님이 출국장에 세우시면 떠나야 합니다.
  • 정중동(靜中動): 머물러 있을 때는 집중하되, 하나님이 신호를 주시면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머물 때와 떠날 때를 분별하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3.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순종하십시오


다윗은 떠나라는 신호는 받았지만, 구체적인 목적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 배가 항구에만 있으면 안전하지만, 그것은 배의 존재 목적이 아닙니다. 망망대해라도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출항해야 합니다.
  •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는 걸음마다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습니다.



4. 출국장과 입국장은 한 곳에 있습니다


공항의 출국장과 입국장이 한 건물 안에 있듯이, 하나님 안에서의 떠남은 영원한 상실이 아닙니다.

  • 회복의 약속: 다윗이 눈물로 떠났지만 결국 왕이 되어 돌아왔듯, 인생의 썰물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밀물로 바뀝니다.
  • 고난의 의미: 떠남과 광야의 시간은 다윗을 훌륭한 지도자로 빚어내는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길도 승리의 길이 됩니다.



녹취록


인생의 출국장에 서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해 42번째 시간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강력한 것을 보고 요나단이 다윗을 떠나보내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18절과 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초하루 식탁에 다윗이 불참하면 부왕께서 질문하실 것이라고 요나단이 예상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즉 3일 동안 기브아 들에 숨어 있다가 그 일이 있던 날, 즉 19장에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공개적으로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그날입니다. 그날에 숨었던 곳에 가서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고 합니다.


어디 곁에 있으라고요? 에셀 바위입니다. 오늘 중요한 지명입니다. 에셀 바위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중요한 랜드마크였습니다. 이 땅이 지금 어떤 지역이라는 걸 보여주는 지계석 같은 것이죠. 요나단은 다윗과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것을 약속합니다. 20절에서 2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화살 셋을 그 바위 곁에 쏘고 아이를 보내어 가서 화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서로 주고받은 신호가 화살 세 발을 쏘고 아이를 보내서 가져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아이는 구약에 많이 나오는 나아르라는 단어로 15세에서 22세 정도의 청소년, 청년입니다. 왕자의 호위병에게 화살을 가져오게 하면서 보라 화살이 이쪽에 있지 않냐라고 하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이쪽으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라고 하면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심이라라는 뜻입니다.


요나단이 과녁에 화살을 쏘는 활 연습을 하는 것처럼 누가 봐도 그렇게 위장을 한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윗과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나누기로 신호를 정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나단의 말 가운데 놀라운 것은 네 길을 가라라고 하면서, 너의 길을 가는 것이지만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시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나누었지만 요나단이라는 사람은 신앙적 당위성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위성과 현실성이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사람의 장점이 드러납니다. 신앙적 관점입니다. 만약 다윗 네가 떠나는 상황이 올지라도 그것은 사울 왕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보내시는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굉장히 당황하고 감정적이 됩니다. 속으로 본인도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시대가 나를 몰라준다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윗이 결국 떠나게 된 것은 사울 때문이 맞습니다. 사울이 완전히 미쳤으니까요. 그리고 다윗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너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시대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군사 정권은 그 지도자가 얼마나 무력에 있어서 강한 사람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지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을 동시에 리더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구조였습니다. 난세의 영웅이라고 하죠. 영웅은 난세에는 환영받지만 평시에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성웅 이순신도 선조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죠. 이순신이 반란을 일으켜 역성혁명을 해서 왕이 되겠습니까? 그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이순신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백성들의 지지도가 선조에 대해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가 왕으로서 상당히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나 현실적인 이유들을 이야기하자면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결국 인생과 역사의 결정권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될 때 누구 때문에, 아니면 내가 못나서, 내가 문제를 일으켜서, 아니면 시대가 나를 몰라줘서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 길을 떠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심이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보내심이라. 아멘.


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인생이 해석되는 사람들은 인생이 건강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원인들 때문에 내가 이 어려운 길을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원한과 불만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종이 되어 팔려갑니다. 그의 나이 17살이면 정말 창창한 나이입니다. 그런데 13년 동안, 30살까지 가장 빛나는 인생의 시즌에 종살이와 옥살이 13년을 합니다. 그러다가 총리로 발탁이 되어 형들을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형들이 자기가 죽이려 했던 막내가 총리가 된 것을 보고 벌벌 떱니다. 그 벌벌 떠는 형들 앞에서 요셉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창세기 45장 7절,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이렇게 해석이 된 사람은 내면에 상처가 없습니다. 짐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차세대 사역, 청년 사역, 두란노 사역, 성인 사역 등 여러 사역들을 행복하게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밴쿠버로 사역을 가라고 발령이 났습니다. 제가 25년간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물론 리더십이 인사적인 결정을 하고 발령을 내지만, 항상 25년 동안 교회에서 발령을 내기 전에 하나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기도 가운데 알려 주시고, 꿈으로도 알려 주시고, 말씀으로도 알려 주셨습니다.


단 한 번 미리 알지 못했던 적이 있는데 그게 밴쿠버 갈 때였습니다. 그래서 밴쿠버 갈 때는 너무 긴장이 되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가라고 하셔서 가기는 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없이 갈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도 하나님, 왜 저를 보내십니까? 하나님 제가 가서 사고 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밴쿠버에 가기 전에 LA에 들려서 잠깐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민 목회 선배 목사님들이 그렇게 겁을 주셨습니다. 이민 교회 목회는 한국 교회 목회와 비교할 수 없이 힘들다고요. 그런데 제가 밴쿠버에 가서 그 힘들다는 이민 교회 성도들을 만나면서 정말 눈물과 감격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그게 저에게도 엄청난 축복이었고 교회에도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보면서 좀 삐딱하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국 한국이 싫어서 떠난 사람들 아니냐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인생이 그렇게 쉽게 단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잠언 16장 9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계획 세운다고 다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최선.


제가 제 평생의 모토로 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지만 그냥 가만히 누워서 다 이루어 주실 걸로 믿고 있으면 안 됩니다. 부르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걸 좀 다르게 표현한다면, 저를 따라 해 보세요. 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


여러분 열심히 계획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학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목회 사역을 하든 계획표 짜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내 계획한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그분의 섭리 가운데 나를 갑자기 다른 길로 인도하시면, 그분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평강의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이어지는 24절에서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그러나 그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 보다 정녕히 부정한가 보다 하였음이더니


초하루 식탁은 굉장히 중요한 절기 식탁입니다. 이스라엘 4인방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4인방은 사울과 군장 아브넬과 왕자 요나단과 천부장 다윗입니다. 이 면면을 보면 사울의 사촌과 아들과 사위입니다. 다 친인척으로 구성되어 있는 리더십 그룹입니다.


사울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리였을까요? 충분히 상상이 가능합니다. 비즈니스 미팅을 하거나 중요한 손님을 모셔서 식당에 방을 예약하면 제일 상석이 어디인가요? 문에서 정반대 편입니다. 그 좌석이 제일 상석인데 사울이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울이 딱 보니 다윗만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일이 생겨서 부정해졌는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정이라는 것은 모세오경에서 이야기하는 의식적 부정입니다. 민수기 19장 16절을 한번 읽어 볼까요?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길 가다가 숲속을 지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접촉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워낙 군사 작전을 많이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죽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일이 많겠습니까. 부정해지면 7일 동안 정결 과정을 거쳤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튿날 곧 그 달의 둘째 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둘째 날에도 다윗이 불참하자 왕이 재차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요나단이 준비한 대답을 했습니다. 가족의 매년제가 있어서 베들레헴에 가도록 요청을 했다고요. 사울 왕이 이에 대해서 이제 화를 내게 되는데, 제가 생각을 하다 보니 사울의 촉이 맞기는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간 게 아니었죠. 기브아 들판에서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이 자기 마음이 평안하고 관계가 평안하다면 굳이 이런 걸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숫자가 많아지는데 직원들에게 동선을 다 보고하라고 해 보세요. 사장님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나요? 때로는 교회들마다 그런 경우도 있더라고요. 부목사님이 성도를 누구를 만나는지, 언제 만나는지, 어디서 만나는지 다 보고해야 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는 부목사님들에게 알아서 하시라고, 내가 그것까지 다 챙길 순 없다고 합니다. 관계가 서로 신뢰 관계이고 화평한 관계면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는 거를 지금 신경 쓰고 있는 것입니다.


30절에서 31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사울이 요나단의 설명을 듣고 납득이 된 게 아니라 갑자기 화가 솟구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아들이 다윗을 너무 감싸고도니까, 아버지를 지지해야 되는데 다윗을 지지하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해서 다윗을 살려두는 한, 이 왕위와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할지라도 아들과 좀 정상적인 대화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뭐라고까지 얘기했습니까?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라고 표현했습니다. 멀쩡한 아들을 갑자기 패륜아로 만들어 버렸고, 두 번째는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아이를 출산할 때의 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그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하고 효심이 깊은 제일 자랑스러운 맏아들을 향해, 한순간에 네가 태어난 것 자체가 수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울이 아들을 사랑해서 이 이야기를 했나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아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특별히 사랑하신 이유는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거나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사람들이 변합니다. 공직은 국민이 세워준 자리에 앉는 것이고 성직은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서 너 왕위에서 내려와라 하셨는데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울과 사탄, 둘 다 '사' 자로 시작하는데 컨디션이 비슷하더라고요. 사탄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쫓겨나서 이 땅에 내려와 세상을 불법으로 왕 노릇 하잖아요. 왕이 아닌데 왕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냥 신앙적인 구호가 아니라 여러분의 진심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생에 하나님 최우선의 삶과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돌봐 주신 것처럼 여러분을 돌봐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32절과 33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요나단도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아니 도대체 다윗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라고 이야기하니까 사울이 가만두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왕자 요나단에게도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항상 그냥 무심코 읽어 가면서 죽이려고 했다니까 단창을 던지려고 움찔만 했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텍스트를 보면 단창을 던졌다가 맞습니다. 아들에게도 단창을 던졌습니다.


사울이 기브아에서 통치하는 그 자리는 왕궁이 아닙니다. 왕궁은 다윗 시대에 맨 처음 세워졌거든요. 그러니까 개인 집이란 말입니다. 그 집이 넓어야 얼마나 넓겠습니까. 거기서 아들에게 단창을 던졌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이죠. 너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되지 않냐고 그렇게 얘기해 놓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분노를 쏟으면서 자식들에게 야,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기야,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야라고 하지만 그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아들 죽여 놓으면 그다음에는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나요?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느 한계선을 넘어서 언어적인 폭력을 가하고 또 그들의 내면에 상처를 줄 정도로 선을 넘는다면, 그것은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은 해도 실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이 왕좌에 어떻게 올랐는데, 내가 이 나라를 어떻게 세웠는데, 내가 그동안 이 공든 탑을 어떻게 쌓아 올렸는데 그냥 남에게 줄 순 없지, 이건 내 자식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조차도 나에게 순응하지 않으면 너도 창을 받아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능력을 갖춰라, 사회적인 경쟁력을 가져라고 하는 것도 물론 자녀가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겠지만,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나의 욕심과 나의 불안을 아이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울의 심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네가 이어받지 않으면 네가 내 인생을 망치고 있는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언어폭력과 정서적 학대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축복과 격려의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녀의 마음이 깨지고 영혼이 깨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인생이 잘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요나단이 약속한 대로 3일 만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들판에서 화살을 쏘면서 아이에게는 달려가라고 해놓고 그 위로 화살을 쏩니다. 화살이 보통 시속 200km에서 250km까지 날아갑니다. 그 화살 세 발을 날리고 나서 뭐라고 이야기했죠?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않냐, 지체 말고 빨리 달려가라고 합니다.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리고 나서는 그 소년에게 자신의 무기를 다 들려서 성으로 먼저 보내고 다윗과 요나단이 마지막 고별의 자리를 갖습니다.


41절과 42절, 마지막 두 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하니라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좋은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나단은 결국 자기 부왕 곁을 떠나지 못해서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되죠. 그렇지만 다윗이 건재해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라를 이어갈 것을 생각하며 마음은 평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다윗 입장에서는 함께 요나단과 동역하지는 못했지만 하늘 아래 나를 정말 100%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표현이 있죠. 이 강남이 우리나라 한강 이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 아시나요? 중국의 양자강 이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주 멀리까지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도 하나님이 떠나게 하시면 떠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본격적인 도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우리가 보기에는 한 두세 장 정도에 걸친 이야기지만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10대 소년이었을 때 사울 왕을 처음 만났고 이스라엘의 최고의 장수가 되었고 왕의 사위가 되었고 수많은 공적을 쌓았고 20대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가장 창창한 시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왜 그는 이 타이밍에 그의 익숙한 모든 것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요나단이 처음에 이야기해 준 대로 하나님이 그를 떠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적인 요소, 관계적인 요인들 다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이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중요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생의 어디에 세우실 때가 있다고요? 출국장에 세우실 때가 있습니다. 공항에 가면 출국장, Departure Gate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있잖아요.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게 될 때 우리가 출국장에 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굉장히 중요한 랜드마크 하나가 있다고 했죠. 그게 뭐죠? 에셀 바위입니다. 그런데 에셀 바위를 히브리 텍스트로 보면 사실은 '에벤 하에젤'입니다. 에벤에셀 어디서 많이 보았죠? 7장에서 에벤에셀이라고 나옵니다. 에벤은 돌이라는 뜻이고 에제르는 도움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도움의 돌이고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을 표시하는 지계석입니다.


그런데 20장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셀 바위는 끝에가 R이 아니고 L입니다. 다른 단어입니다. '에벤 에젤'은 떠남의 바위입니다. 여기에서 떠나라, 여기에서 출발하라는 의미입니다. 두 단어를 보면 상당히 비슷한 발음으로 되어 있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7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해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승리를 한 그 지점까지를 에벤에셀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승리의 공간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안전지대, Safety Zone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20장에 나오는 에셀 바위는 이 안전지대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를 출발점으로 해서 떠나야 한다는 출국장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3일 동안 그 빈들에서 낮과 밤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나와서 3일째 세 개의 화살을 날렸고, 다윗이 요나단 앞에 세 번 절을 하고 떠나게 됩니다. 이 3이라는 숫자가 오늘 본문에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의 완전수죠. 우리가 언제 떠나는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타이밍이나 조직에서 계획했던 타이밍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떠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떨 때는 사실 떠난다는 것 자체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힘들고, 떠날 것을 결정하는 순간이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도 여러 번 나누었지만 사실 저는 한국 교회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계속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보내 주실 만한데 안 보내 주시는 겁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서 25년 사역하면서 마지막 8년 양재 담당할 때는 사역적으로는 제일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가운데는 8년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시는 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무리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있었어도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분연히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우리를 에셀 바위 곁에 세우시고 출국장에 세우시고 티켓까지 우리의 손에 들려주시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떠나야 됩니다. 주저함 없이 떠나셔야 합니다. 거기에 20년을 있었든 50년을 있었든 떠나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참 안타까운 것이 우리가 머물 때에는 한눈팔지 말고 거기 집중을 해야 되고, 떠날 때는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서 떠나야 하거든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걸 보면 정반대로 삽니다. 내가 여기 머물러 있을 때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딴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아 내가 이 회사를 계속 다녀 말아 하면서 다닙니다. 그러니까 집중을 못 하는 것입니다.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그 인생이 떠나야 할 때는 가볍게 떠나야 되는데 질척거리고 주저하고 거기에서 굉장히 고민하는 사람들이 또 많습니다. 그것도 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한 단어로 이야기를 한다면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정중동(靜中動).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의 신호가 오면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25년 동안 온누리교회에 있으면서 저는 항상 정중동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25년 동안 있으면서 성도들은 잘 모르지만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나 개인적으로 청빙 제안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항상 진지하게 기도해 보고 답변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그 얘기를 듣고 아니 이 좋은 온누리교회를 왜 떠나려고 하냐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분인데도 "아니 왜 그렇게 얘기하십니까? 우리는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있고 싶어도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는 거고, 떠나고 싶어도 머물러 있으라고 하면 머물러 있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 결정을 어떻게 감히 본인이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머물 때와 떠날 때만 분별할 줄 알아도 인생에 엄청난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 구름기둥이 뜨면 따라가고 멈추면 멈춰 섰습니다. 앞으로 가, 제자리, 일어나, 앉아 하는 게 사람 괴롭히는 것 같지만, 이 단순한 훈련이 인생의 때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시면 나도 가고 하나님이 멈추시면 나도 멈춘다는 것이죠.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이 직장에서 평생을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회사를 떠나야 될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소중한 가족이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불러 가셔서 그 가족을 떠나보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들이지만 나만의 부르심의 길을 가라고 하나님이 강권하시면 떠나야 될 때가 된 것입니다. 교제하는 연인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아니다, 그만 헤어져라고 하시면 아무리 슬퍼도 결단하고 떠나야 합니다. 어릴 적부터 다녔던 교회 공동체가 있지만 하나님이 새로운 공동체로 인도하시면 떠나야 될 때가 있습니다. 고국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출국장에 세우시면 떠나야 될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오늘 계속 설교를 하면서 떠나라, 떠나야 될 때 가면 떠나야 된다고 하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십니다. 진짜 떠나라는 거야? 이러면서요. 다 떠나라는 건 아닙니다. 떠나야 될 때 떠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제 앞으로 본격적인 도피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떠나라고 하셨는데 어디로 가라는 얘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습니다.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출국장에 세워 놨습니다. 티켓도 들려줬습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안 써 있습니다. 그럼 떠나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래도 떠나야 합니다. 배가 안전한 포구에 있는데 항해를 하라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일단 출항해라. 망망대해를 향해서 나가라는 것입니다.


1516교회 처음 시작할 때 딱 그 기분이었습니다. 명확하게 하나님이 비전을 주셔서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교회를 살리는 교회 비전을 주셔서 시작하라고 해서 했는데 장소를 안 주시는 겁니다. 그때 분당우리교회가 29개 교회를 1년 전에 개척을 시켜서 분당의 웬만한 공간은 다 나간 상태였습니다. 장소가 없는 겁니다. 불정로 옥탑방 120명 들어가는 장소에서 시작했잖아요. 그것도 권사님 한 분이 빌려 주셔서 그런 거지 아니었으면 진짜 길바닥에서 시작할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라고 해 놓으시고 어디로 가라는 얘기를 안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하나님이 계획이 없으실까요? 다윗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획이 없으실까요? 제가 이번에 한솔 프라자로 들어가는 걸 생각해 보니까 2년 반 만에 하나님이 다섯 번째 움직이게 하신 겁니다. 맨 처음에 불정로 옥탑에서, 그래비티 호텔도 여러 번 빌려서 예배드리고, 새마을 연수원, 그리고 성심 빌딩, 다섯 번째가 한솔 프라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게 보내셨지만 걸음마다 다 계획이 있으신 겁니다.


목적지나 적어 놓고 저한테 가라고 하셔야지 도대체 어딜 가란 얘기입니까, 안 보여주시면 못 갑니다가 아닙니다. 일단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야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십니다. "You shall be a blessing."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엄청나게 감동적인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6, 7, 8절로 내려가면, 그래서 가 봤더니 이미 현지인들이 다 있고 주인 다 있고... 갈대아 우르 멋진 저택에서 살다가 이삿짐을 이만큼 싸 가지고 나왔는데, 그 먼 거리를 왔는데 보니까 평생에 이삿짐을 이고 지고 다녀야 되는 나그네 생활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합니까? 떠나라 그래서 떠났는데 그러면 입주할 집을 보여 주셔야 마땅한 것이지. 자식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번창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 땅도 주시겠다, 복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평생에 얻은 거는 아들 딱 하나, 땅 한 조각.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떠나야 합니까? 네. 떠나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게 하시는가?


오늘 본문 마지막을 보면서 두 사람이 다 울었는데 다윗이 더 많이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더 불쌍한 상황이잖아요. 42절 제일 마지막에 보면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정처 없이 목적지도 없이 떠나는 다윗은 불쌍한 길을 가는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요나단은 평안한 길을 가는 것인가요?


앞으로 이 두 사람의 인생은 반대가 됩니다. 왕성으로 돌아가는 게 평안한가요? 사울 왕이 있는 기브아는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평생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요나단이 살게 됩니까? 반면 다윗이 들어가게 되는 광야는 너무너무 평화로운 것입니다. 너무 평화로워서 문제지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안전한 포구에 배가 있으면 항상 안전할 것 같지만 태풍이 몰아치고 폭풍이 불어오면 그 안전한 항구에 있던 배들이 다 산산조각 나기도 하고 불타기도 합니다.


내가 익숙한 자리에 머무는 건 항상 좋은 길이고 익숙한 자리를 떠나는 것은 항상 불안한 선택이다, 그건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자리는 고통의 자리가 될 것이고, 아무리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길을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승리의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 다윗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그 시간은 다 잃어버리는 시간이 되는 것인가요?


그래서 제가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여러분이 공항에 가면 이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Departure Gate(출국장)와 Arrival Gate(입국장). 출국장과 입국장이 공항에서 따로 있나요? 층은 다르지만 한 건물 안에 있게 되어 있습니다.


왜 나를 떠나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 출국장에 있는 동일한 건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먼 세월이 지나서. 그리고 그 나라를 이끌어가게 하십니다. 그가 떠나게 될 때에는 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하시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가 싶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회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썰물은 반드시 밀물로 변화될 것이고, 인생의 이별의 시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재회의 시간으로 회복될 것이고, 우리가 내려놓았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일 마지막에 생각한 것은, 때를 분별해야 될 사람은 사실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가 진작에 내려왔어야 되는데 내려오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이 에셀 바위에, Departure Gate에 딱 세우시는 순간 결단하고 떠납니다. 그가 떠났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고난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