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교회 설교 녹취록 모음

08월
2026.08.15(토) | 새벽기도 | 내 인생이 왜 무너졌을까? (겔 40:1-16)
내 인생이 왜 무너졌을까? (에스겔 40:1-16)
- 제목: 내 인생이 왜 무너졌을까?
- 본문: 에스겔 40:1-16
- 설교자: 이원진 목사
- 날짜: 2026-08-15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인생의 무너짐은 예배의 무너짐에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무너진 지 14년이 지난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새 성전의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무너짐은 군사적·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참된 예배를 잃은 데 있었습니다. 새 성전의 환상은 건축 설계도가 아니라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2.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의 확대판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원형이신 아버지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머리로만 해결하려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의 회복과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우리의 최선은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3. 파수꾼은 부르심을 기억하고 공동체에 전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여 본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는 개인적 호기심이나 발전을 위한 환상이 아니라 절망한 공동체에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라는 사명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도 개인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백성을 향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십니다
천사가 가장 먼저 측량한 것은 성전 내부가 아니라 사방의 담이었습니다.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경계이며, 하나님은 무너진 삶을 회복하실 때 먼저 세상의 탐욕과 불신앙이 들어오는 통로를 막으십니다. 이는 세상을 피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5. 하나님은 실패와 상처의 동문에서 회복을 시작하십니다
동문은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통로였지만, 장차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상처 입고 등을 돌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회복의 치수를 재기 시작하십니다. 그분의 회복은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작은 신음까지 아시는 정밀하고 신실한 설계입니다.
결론
성도는 무너진 자리에서 거룩과 예배를 다시 세우고, 세상적 성패의 부담을 내려놓으며 사명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떠나셨던 자리로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삶의 진정한 부흥이 시작됩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적 감각을 깨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다스리심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전문 스크립트
주님, 주의 은혜와 주의 손길이 우리 가운데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시간 우리가 주님만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이 자리 가운데 임하여 주시고 각 사람에게 예비하신 은혜의 소낙비가 오늘 아침 가운데 내릴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에스겔 40장 1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며,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이 한 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곧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쪽으로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 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길이가 한 장대요 그 문 안쪽 통로의 길이도 한 장대며,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요 각 방 사이 벽이 다섯 척이며 안쪽 문 통로의 길이가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문이 있으며.
또 안문 현관을 측량하니 한 장대며, 안문 현관을 또 측량하니 여덟 척이요 그 문 벽은 두 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 그 동문간에 문지기 방은 왼쪽에 셋이 있고 오른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같은 크기요 그 좌우편 벽도 다 같은 크기며.
또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너비가 열 척이요 길이가 열세 척이며, 방 앞에 칸막이 벽이 있는데 이쪽 칸막이 벽도 한 척이요 저쪽 칸막이 벽도 한 척이며 그 방은 이쪽도 여섯 척이요 저쪽도 여섯 척이며.
그가 그 문간을 측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너비가 스물다섯 척인데 방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그가 또 현관을 측량하니 스무 척이요 현관 사방의 기둥 안마당의 틀이 있으며, 바깥 문 통로에서부터 안문 현관 앞까지 오십 척이며.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며 그 창은 안쪽을 향하였고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아멘.
오늘 말씀을 읽으니 은혜가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 인생이 왜 무너졌을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에스겔 37장 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아멘.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종기도 살아나고 영혼도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타이밍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구체적인 날짜와 연대기로 시작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지 25년째,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 성전이 처참하게 무너진 지 14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14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고향 땅 예루살렘의 영광은 점점 희미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끝났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성전을 다시 볼 수 없다”라는 체념과 절망이 그들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을 때 전해진 말씀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첫째 달 열째 날은 이스라엘 절기상 욤 키푸르, 곧 대속죄일에 해당합니다. 모든 결박과 빚에서 자유하게 되는 주빌리, 희년을 떠올리게 하는 날입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한복판에서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참된 희년, 자유를 선포하시는 바로 그 거룩한 날에 하나님의 손길이 에스겔을 붙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환상 중에 이스라엘 땅의 영적으로 가장 높은 산으로 안내하십니다. 그리고 40장부터 새 성전의 환상이 등장합니다. 이전까지 심판과 회복이 반복되다가 하나님께서는 새 성전의 환상으로 백성들을 안내하시고,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 장차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을 48장까지 보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했을 때 단순히 군사적·정치적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절망과 무너짐의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가 무너지고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사라지고 우상숭배가 들어온 순간, 예배의 본질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필요할 때만 갖다 쓰는 정도의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것이 삶 전체가 바벨론의 포로로 맥없이 무너진 중요한 까닭입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보여 주신 환상은 군사적 해방이나 화려한 왕궁의 재건이 아니라 새롭게 지어지는 성전의 환상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건축학적 설계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측량은 예배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입니다. 곧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완벽하게 다시 회복되고 살아날 것이라는 영적인 선포입니다.
측량의 기록을 읽다가 갑자기 전기가 켜지는 것처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을 주고 싶으셨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잘못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더 힘을 내시는 것입니다.
간혹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를 잘 형성하지 못한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부모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의 확대판이 아니라는 개념의 분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겪었던 성품을 그대로 하나님께 덧씌웁니다. 아버지라는 명칭이 같기 때문에 “내가 실수하면 하나님도 나를 버리시겠지. 뭔가 잘해 내야만 나를 인정해 주시겠지”라는 불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왜곡된 육신의 아버지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완전한 사랑의 원형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시편 27편 10절에서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개념을 분리해도 감정이 계속 오버랩되어 해결되지 않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공동체 안에서 건강한 사람들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건강한 감정을 나누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을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그 문제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어려움과 고민, 풀리지 않는 문제 속에서 우리는 어떤 방법을 취합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고 엎드리기보다 어떻게 해결할지를 머릿속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에스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것은 예배의 회복,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중심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건져 내시는 줄 믿습니다.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앞길이 캄캄할 때 가장 먼저 세워야 할 자리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자리입니다. 가정 신방을 할 때 늘 기도합니다. “이 가정에 예배가 회복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인정하는 고백이 회복되게 해 주십시오.”
인생의 모든 시작과 회복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그분이 내 모든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심을 인정하며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의 주인 되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면서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참 간사한 일입니다.
“그래도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 나가야지. 내가 뚫어봐야지”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완전한 믿음의 고백이 있고, 하나님 말씀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 임재 앞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음성 앞에 나아갈 때 나보다 확실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나를 통해 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아멘.
환상 가운데 에스겔을 맞이한 이는 놋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 곧 천사라고 합니다. 그의 손에는 먼 거리를 측량하는 줄과 정확한 치수를 재는 측량 장대가 들려 있습니다. 천사는 에스겔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으로 생각하라고 말할까요? 하나님은 일찍이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파수꾼은 망대 위에서 무엇이 오는지 정확히 보고하고 전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파수꾼 자신의 좁은 생각이나 주관적 해석을 보태라는 뜻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파수꾼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닐까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높은 산 위에 세우신 것은 개인의 발전이나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낙심과 절망 속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에게 회복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라는 공동체적 사명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생각하라는 말은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그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과 사명에 대해 아무리 깊이 고민해도 하나님의 광대한 생각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과 9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아멘.
아무리 뛰어난 책사라도 전쟁의 전략과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 전쟁의 최종 성패를 스스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방향을 안내하고 좋은 전략을 세워 가급적 승리하도록 도울 수는 있어도 최종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내 인생의 성패와 자녀들의 성공 여부에 모든 시선과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어떻게 해야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고 성공할까, 여기서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과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주권이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는데 내가 걱정한들 무엇이 해결되겠습니까? 저는 성도님들과 이야기할 때 “제가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그럴 때 훌륭한 성도님들이 “목사님, 고민하지 말고 그냥 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깨닫습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보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성도님들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패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은 결코 비례하지 않으며, 반대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릴 때마다 반드시 붙잡아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 의식입니다. 구체적인 걸음을 위해 매일 무릎 꿇어야 하지만, 그 부르심의 최종 방향은 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백성을 향해야 합니다.
본문 15절과 16절까지 천사는 측량 장대를 들고 성전의 구조를 아주 치밀하고 세밀하게 측량해 나갑니다. 여기에는 성경적으로 중요한 맥락이 있습니다.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천사가 가장 먼저 측량한 곳은 성전 건물 내부가 아니라 성전 사방을 둘러싼 바깥 담이었습니다. 왜 담을 가장 먼저 쟀을까요? 에스겔 42장 20절에 그 목적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었더라.”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는 세상과의 타협과 우상숭배가 성전 안까지 밀고 들어와 거룩한 경계선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 삶에 거룩한 담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내 삶에 들어오는 세상의 탐욕과 불신앙을 차단하고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작업이 하나님의 측량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성막에서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은 성막 안과 성막 밖을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단순히 장소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완전한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막의 문, 성전의 문으로 들어올 때 “나는 죄인이지만 나를 완벽하게 회복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들어왔으면 됐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과 담을 쌓고 살라거나 세상을 멀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구별되고 분리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속해 살아가지만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높일 줄 아는 사람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통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천사는 동쪽을 향한 문으로 나아가는 계단을 오르며 측량을 시작합니다. 왜 하필 동쪽일까요? 성경에서 동쪽에 대한 개념은 분명합니다. 에스겔 10장과 11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성전을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빠져나간 통로가 바로 성전의 동문입니다.
지금도 성전 동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돌로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빠져나간 통로, 성전 동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렸던 아픔의 문과 수치의 통로에서 측량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에스겔 43장에 이르면 떠나셨던 여호와의 영광이 바로 이 동문을 통해 다시 성전 안으로 찬란하게 임재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 상처를 입고 등을 돌렸던 바로 그 문턱에서 하나님은 다시 치수를 재시며 회복을 시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그 문을 막아 두었습니다. 특별히 이슬람교는 예루살렘의 큰 사원을 점령하고 동쪽 문을 막아 두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실 기회가 있으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전 동문 안쪽으로는 감람산이 펼쳐져 있고,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동문 앞 문턱부터 유대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임할 그날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나가셨던 그 동문으로 다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돌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문지기 방, 문간의 현관, 벽기둥에 새겨진 종려나무 장식은 평화와 승리를 상징합니다. 종려나무의 치수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명하게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약속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선명합니다.
에스겔 34장에서 기근 든 양 떼의 형편을 아시고 악한 짐승을 제하시며 때를 따라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오늘 성전 벽의 두께와 방의 크기를 장대로 정확히 재시며 우리 인생의 회복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작은 신음과 피로의 크기까지 센티미터와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삶의 구석구석을 측량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거룩한 처소로 삼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집회를 해야 특별하게 임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닙니다. 성전의 문턱을 드나드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우리의 호흡과 가정과 일터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는 구체적인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파도와 굴곡이 찾아옵니다. 포로 생활과 같은 피로감과 거센 풍파를 만날 때마다 주님이 주셨던 첫사랑의 감격과 은혜가 헛된 세상의 정보와 손익 계산으로 희석되기 쉽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감각이 말씀과 기도로 살아 있을 때 우리는 눈앞의 환경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영적 감각이 깨어 있어야 시선이 세상의 헛된 성취를 쫓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며, 언어가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와 고백으로 바뀝니다. 삶 전체가 세상 풍조 앞에 맥없이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뉴스를 보면 우리 마음을 무너뜨리는 일이 한두 가지입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마음이 무너지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그 자리에서 구별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를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거룩의 삶과 예배를 다시 세우겠습니다.” 세상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삶의 진정한 부흥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세상적인 성패의 부담을 내려놓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파수꾼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마음에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떠나셨던 자리로 다시 찾아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내 아픔과 실패의 동문에서부터 내 삶을 재어 회복하시는 주님의 완전한 계획과 완벽한 설계를 신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하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나의 영적 감각을 깨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내 삶의 무너짐과 절망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무너진 데서 시작되었음을 겸손히 돌아봅니다. 세상의 조건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필요를 채우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참된 예배자의 자리를 내 삶에 가장 먼저 세우게 하여 주옵소서.
잘되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주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기 원합니다. 나와 내 가정과 내 자녀들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게 하여 주옵소서.
파수꾼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마음에 새기며, 내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거룩하게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던 가장 아픈 실패의 자리에서부터 내 삶을 재어 가심으로 회복을 시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온전히 믿고 고백하는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8.13(목) | 4321 WORSHIP |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다 (행 16:6-10)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다 (사도행전 16장 6-10절)
- 제목: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다
- 본문: 사도행전 16장 6-10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8-13
- 예배: 4321워십
설교 요약
1.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소망이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을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며,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소망의 길이다. 성도는 부르심의 전체 지도를 미리 받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때마다 다음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2. 막힌 길은 사명이 취소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선교 여행을 떠났지만, 성령께서는 아시아와 비두니아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막으셨다. 이는 선교를 하지 말라는 뜻도, 그 지역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더 큰 역사의 그림과 그분의 때를 따라 순서를 정하시며, 인간은 현재의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비전이 실패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3. 드로아의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의 환상이 열린다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를 약 700km나 지나도록 사역하지 못한 채 드로아, 곧 바다 앞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 도와 달라고 청하는 환상이 나타났다. 모세, 다윗, 에스겔, 사도 요한처럼 사방이 막히고 자신의 자원이 바닥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환상이 더 선명하게 열릴 수 있다.
4.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한 걸음씩 길을 여신다
하나님은 인생 전체의 로드맵을 한꺼번에 보여 주시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다음 문을 여신다. 그러므로 결혼, 자녀 양육, 교회 부흥, 개인의 사명에서 막다른 골목처럼 느껴져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다면 멈추거나 돌아서지 말고 계속 가야 한다. 나의 가능성이 제로가 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5.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순서와 열린 계획이 있다
하나님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아시아보다 마게도냐를 먼저 향하게 하셨고, 루디아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선교의 순서를 바꾸셨다. 이후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 에베소에서는 바울이 오랫동안 사역하며 초대 교회의 중심이 세워졌다. 교회와 개인은 자신의 계획을 세우되, 하나님이 언제든 순서를 바꾸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실 수 있도록 열린 계획을 가져야 한다.
6. 한 영혼을 향한 도움은 복음 전도의 부르심이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외친 것은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들렸다. 한 사람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 온 집이 구원받고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으며,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가족과 함께 구원을 얻었다. 한 영혼을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하나님 나라 역사의 시작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그 생명을 온전히 회복시킨다.
결론
인생의 길이 막혔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드로아의 끝자락까지 이끄신 뒤, 그곳에서 새로운 환상과 복음의 사명을 보여 주신다. 성도는 하나님의 꿈을 포기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끝까지 신뢰하며 순종해야 하며, 그 순종을 통해 한 영혼과 공동체와 시대를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전문 스크립트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10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저희가 5월부터 8월까지 오픈워십의 주제를 “복음,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했는데요. 오늘이 이 주제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이 저녁이 복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자녀로의 부르심이고, 두 번째는 일꾼으로의 부르심이죠. 에베소서 1장 17절, 18절 말씀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목회했던 곳이 에베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네 가지 축복 기도를 해 주는데 이 기도가 굉장히 인상 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님이시죠. 첫 번째는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세 번째는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 해 보시겠어요?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항상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인생에서 굉장히 깊은 우울에 빠져 살다가 하나님께서 저를 건져 주신 이후에, 교회에서 뭘 하자고 하면 거의 거절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무슨 나쁜 일을 시키지 않는 한, 교회에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 순종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부르심에 순종하니까 이 부르심이 얼마나 소망이 가득한지를 알겠더라고요. 할렐루야.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고 따라가면 소망이 넘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를 성장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나만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또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르심을 따라가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6절과 7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을 볼 때 가장 이상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이면 바울의 1차, 2차, 3차 선교 중 몇 차예요? 확신을 가지시고 대답하세요. 제가 답을 알려 주잖아요. 2차예요. 1차 때는 누구랑 같이 갔어요? 바나바. 바나바와 함께 갈라디아 지역을 선교 여행했습니다. 그런데 2차 때는 바나바와 따로 팀을 구성해서 바나바는 바닷길로 가고, 사도 바울은 육로로 소아시아 지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소아시아는 작은 아시아인데 영어로는 Asia Minor라고 불러요. 작은 아시아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튀르키예 지역인데, 보라통에 나오는 지도를 여러분 안내해 드리려고 그려 놓은 것이지 복잡하게 하려고 그려 놓은 것은 아닙니다. 1차의 하늘색은 구브로를 거쳐 갈라디아 지역을 한 바퀴 돈 것이고, 2차는 빨간색입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드로아까지 가는 중간에 아시아라고 써 놓은 곳이 있는데, 각 지역마다 지방 이름은 있어도 전체로 보면 Asia Minor, 작은 아시아라고 부릅니다.
아시아 전체로 보면 유럽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아시아입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면 유럽이 되는 거예요. 북쪽으로 올라가면 비잔티움, 이스탄불이 나오죠. 이스탄불은 도시 자체가 동쪽과 서쪽을 잇습니다. 이쪽은 아시아 사이드, 저쪽은 유럽 사이드라고 불러요.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지역이 아시아입니다.
3차는 육로를 따라가다가 발칸반도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을 돌아와서, 에베소에서 주로 사역했던 겁니다.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 성령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하라고 따로 세우셨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이었어요. 그래서 1차 선교를 했고, 사도행전 16장에서 2차 선교를 나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6절에서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어요, 전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또 7절을 보면 예수의 영, 예수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누구세요? 성령님이죠. 6절의 성령님과 동일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북쪽으로도 남쪽으로도, 소아시아 어느 지역에 들어가 사역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 막으실까? 선교 여행을 가라고 하신 분이 선교를 막고 계시잖아요.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서 네 가지 정도로 질문해 봤어요. 첫째, 선교 사역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죠. 둘째, 여기서는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이 소아시아 지역으로 돌아오게 되나요, 안 되나요?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꼭 여기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에요.
셋째, 지금은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인가? 지금은 그렇다는 거예요. 이 지역을 지나서 유럽에 먼저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그러고 나서 소아시아 지역을 하게 하십니다. 넷째, 이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인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잖아요. 이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에 더 다급한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역사의 짧은 구간을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역사의 큰 그림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보라통 Q&A를 하면서, 오늘도 보라색 옷을 입고 나왔어요. 보라색을 입으니까 마음이 행복하고 차분해져요. 요즘 더위가 많이 식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덥습니다. 이 강대상에 올라와 보면 집중 조명 때문에 더 더워요. 재킷을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라색을 입었으니까 올라가야겠다 했어요.
제가 백문백답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인간은 매우 근시안적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하박국 선지자, 욥, 엘리야도 다 근시안적이었어요. 인생은 역사의 전체 스펙트럼을 다 볼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인생의 전체 로드맵도 다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거시적 관점을 가지고 각 사람의 인생과 역사 전체를 보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책에 이런 이야기를 썼어요. 사람들이 결과론적으로 인생을 해석하고 싶어 하는데, 그러다가 굉장히 많은 오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론적 해석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한때는 민족 구원자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나 보다 하고, 자기 민족과 동족을 구하고 싶어 했잖아요. 그런데 미디안 광야에서 10년을 썩어 지내고, 20년, 30년, 40년을 썩어 지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래바람만 계속 불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상황에서 결과론적으로 보면 “내가 한때 민족 구원자의 꿈을 가졌던 것이 헛된 꿈이었나 보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꿈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막혀 버렸잖아요. 30년째, 40년째 막혀 있잖아요. 그래서 인생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결과론적인 해석을 하려면 진짜 마지막에 해석해야 되잖아요. 여러분,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의 인생이 끝났나요? 그런데 모세 자신은 그 시점에는 거기서 끝날 것 같거든요. 여기서 더 이상의 내 인생이 다르게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가 되나요? 전혀 안 되거든요. 그래서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하나님이 끝내실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줄로 믿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죠. 국가 지도자로 하나님이 세우시겠다고 기름을 부으셨잖아요. 그런데 도망자 세월로 유다 광야에서 1년, 2년, 3년, 5년, 7년, 8년, 10년이 되면 “이게 이루어지지 않을 꿈인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러니 현 시점, 현 상황을 놓고 결과론적 해석을 하지 마시라. 상황 논리에 빠지지 마시라. 하나님은 상황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런 생각에 빠질까?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안 열어 주시잖아요. 적어도 여기서는 안 열어 주시잖아요. 우리는 인생과 역사,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할 때 here and now, 지금 여기 이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체를 보여 주지 않으세요. 한 단계씩 보여 주시게 돼요.
제가 29년 목회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놀랍게도 제가 사역지를 옮기거나 담당하는 공동체가 바뀔 때 교회에서 발령을 내기 전에 항상 미리 알려 주셨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마지막 사역을 하겠다는 것까지 알려 주신 적은 없어요. 게다가 저는 개척을 할 줄도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일마다 때마다 응답하시고 알려 주신다 한들,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알 수 있느냐는 거예요. 아니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다음 문을 열어 주세요. 딱 하나씩 열어 주세요.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종이 중요합니다. 또 순종하면 그다음 문을 열어 주세요. 우리는 전체 그림을 다 보여 주시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시간 안에 두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큰 그림을 신뢰하게 하십니다. 신뢰와 순종의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따라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 보여 주신다고 해서 잘 따라가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가룟 유다는 결국 결과를 알고 배신했잖아요. 사울 왕도 자기가 내려와야 한다는 결과를 아는데도 불순종하잖아요. 다 보인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씩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보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마 다 보여 주시면 안일해지거나 교만해질 거예요. 하나씩, 한 걸음씩 동행하게 하시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음 증거 사명을 주셨고, 그 사역의 여정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여기서는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포기하고 중단하겠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끝나겠는가? “이제는 그냥 돌아가야겠다. 내가 교회 목회하다 말고 지금 뭘 하고 있나? 선교사로 선교지에 나가서 선교도 못 하게 하시는데 그냥 모교회로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해야 될까요?
8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어디로 내려갔어요? 드로아. 드로아 그러면 헬라 역사에서 어떤 도시가 생각나요? 트로이가 생각나죠. 트로이와 드로아는 25km 안에 있는 두 도시입니다.
트로이부터 먼저 설명드리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가 있습니다. 최근에 「오디세이」 영화가 나온다고 하는데, 「일리아스」의 일부분이 소개됩니다.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 사람들과 미케네 그리스인들 간의 지중해 패권 싸움이죠. 표면적으로는 한 여자 때문이었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지중해 패권 싸움이었습니다.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곧 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문명의 꽃을 피웠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원전 12세기에 청동기의 헬라 문명, 고대 헬라 문명은 무너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드로아는 트로이에서 남쪽으로 약 25km 정도 옵니다. 드로아의 북쪽 25km에 트로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라고 부릅니다. 기원전 310년경 알렉산더의 신뢰를 받았던 장군 안티고누스가, 기원전 12세기에 이미 몰락한 트로이 남쪽 25km 지점에 새로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로마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항구 도시 역할을 했어요.
지도를 보면 드로아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곧 발칸반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발칸반도 서쪽이 이오니아 해이고 동쪽이 에게해죠.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쪽은 소아시아이고, 다른 한쪽은 헬라 지역, 곧 유럽 사이드입니다. 이 둘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 도시가 드로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에서 출발한 바울 일행이 소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는 동안 드로아까지 약 700km를 아무 사역도 못 하게 하셨어요. 700km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당시에 자동차를 타고 간 것이 아니잖아요. 아마 걸어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큰데, 700km 동안 아무런 선교 사역을 못 하게 하시더니 계속 끌고 가셔서 결국 바다 앞에 놓으신 거예요. 그곳이 바로 드로아입니다.
영적인 여정으로 보면 드로아는 막다른 골목이었던 거예요. 우리가 막다른 골목을 dead end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dead end에서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주세요. 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마침내 땅끝에서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환상이 언제 보였다고요? 땅끝에서. 세상의 길이 다 막혔을 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주셨어요. 세상 길이 막히면 드디어 거기서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미로의 앞뒤로도 길이 없고, 좌우로 가도 출구가 없고, 길이 다 막혔을 때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환상이 열리는 거예요.
여러분, 저에게 계속 아멘을 하시는데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막혀야, 사방으로 막혀야, 700km를 아무것도 못 하고 계속 가야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 거예요. 이제 아멘 안 하시잖아요. 잘 생각하셔야 돼요.
요즘 생명의 삶으로 에스겔 QT를 하고 있는데, 에스겔서는 환상적인 책입니다. 성경에서 환상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입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을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여기셨던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도 하나님의 현현을 그렇게 리얼하게 보여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하나님의 보좌 위에 사람 같은 형상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람 같은 형상은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 어떤 형상이 있는 분도 아니고 어떤 폼이 있는 분도 아니시잖아요. 오늘 형태 목사님은 찬양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리얼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보좌 우편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죠. 그러니까 신약의 사도 요한은 구약으로 보면 에스겔인 거예요. 그러면 에스겔은 언제 환상을 받나요? 자기 고국에서 편하게 지낼 때 환상을 받나요? 포로로 끌려와 강가에서 탄식하고 통곡할 때, 인생이 사방으로 막혀 있을 때 하나님의 환상을 보여 주셨어요.
사도 바울도 소아시아 전체를 통과하는 동안 길이 많잖아요.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고 왼쪽으로 갈 수도 있고 앞으로 갈 수도 있고 뒤로 갈 수도 있어요. 길이 사방으로 열려 있을 때에는 전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환상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 딱 이르니까 하나님의 환상이 그때 보입니다.
나중에 3차 선교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의 감옥으로 끌려가죠. 그 감옥에서 온 세상 만물이, 만민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주적인 구원, 우주적 메시아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년에 밧모섬에 끌려가는데, 밧모섬은 당시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수용소였어요.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최악의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곳에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환상을 봅니다. 최후 역사의 마지막, 종말과 천국의 환상을 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체험을 하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환상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700km를 아무것도 못 하고 가야 하고, 사방이 막혀야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외에는 숨 쉴 구멍이 없는 지경까지 가면 환상이 보입니다. 그래도 환상을 보고 싶으세요? 저는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제가 제 인생에 정말 사선을 넘어갔다 오는 마지막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내 인생에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있잖아요. 돈이 됐든 인간관계가 됐든 체력이 됐든 지력이 됐든, 무엇이 됐든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리소스가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닥이 나야 돼요. 그게 바닥이 나고 나면 그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거예요.
한숨이 나오죠. 그래서 그 지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지점으로 하나님이 나를 보내시는 것을 원망하지 마세요. 이제는 대답을 안 하고 계속 생각만 하시는데 잘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래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선교 여정을 떠나게 하시고 거대한 대륙을 700km 횡단하게 하셨는데, 마지막 지점인 드로아까지 바울이 가지 않았다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았을까요? 못 보는 거예요. “이번에는 선교하지 말라고 하시나 보다. 그냥 우리 돌아가자.” 애굽에서 나온 광야 1세대가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을 허락하지 않으시려나 보다. 우리 그냥 돌아가자. 지도자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랬잖아요.
자꾸 못하게 막으시니까 낙심이 되어 그냥 주저앉아서 여기서 살지, 할 수도 있어요. 포로 귀환 세대도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자신들의 집만 짓고 성전을 짓지 않고 그냥 삽니다. 그냥 주저앉아 사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나요? 길이 막혔는데 하나님은 계속 가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길이 막혔는데 계속 가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이상한 거죠. 길이 막혔는데 길이 열려 있는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 세상적으로는 길이 없는데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 거예요. 사람의 방법으로는 막다른 골목인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놀라운 시작점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의 가능성이 제로가 돼야 하나님의 가능성이 100% 충만해지는 거예요.
제가 어제 교육자들과 부산 영도구에 있는 행복한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이 교회 이름을 특별히 보여 드린 이유가 뭘까요? 좋은 교회라서요. 2년 전에는 부산 금정구에 있는 함께하는교회에 다녀왔습니다. 함께하는교회는 고신 측이고, 어제 갔던 행복한교회는 합동 측인데 둘 다 보수적인 교단입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얼마나 뜨겁게 예배를 드리는지, 제가 은혜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도전을 받고 은혜를 받고 오는 거예요.
행복한교회도 함께하는교회도 주일 예배를 거의 2시간씩 한대요. 그런데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 한 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는 거예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어제 행복한교회 담임 목사님과 교제하는데 영도에 위치해 있지만, 영도대교를 건너 부산 해변가에 있는 섬이죠. 그런데 90% 이상의 성도들이 사방 다른 지역에서 온다는 거예요.
부흥이라는 것은 막혀 있지만 열려 있는 길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한국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이 요원해진 거예요. 부흥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내리막길로 내려온 지 올해로 34년 차예요. 단 한 해도 반등하지 못했어요. 34년을 주저앉은 거예요. 34층에서 1층까지 내려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다시 올라갈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교회들은 비상하는 거예요. 부흥하는 시대가 아닌데 비상하는 교회들이 있는 겁니다. 할렐루야. 길이 막혀 있는데도 하나님의 부흥의 길을 질주하는 교회들이 있더라고요.
교회뿐 아니라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으세요. 막다른 골목처럼, dead end처럼 여러분의 결혼 생활이 느껴질 때가 있으시죠?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이건 진짜 대답 안 하셔도 돼요. 그러나 하나님이 “Keep going, 계속하라” 하십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여기가 dead end입니다.” 아니, 계속하라. Keep going. 순종해서 계속 가잖아요. 가다 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드로아라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앞에서 엎어집니다. 돌아갑니다. 주저앉습니다. 아니요. 계속하셔야 돼요.
계속 가야만 나의 가능성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고 나의 리소스가 다 바닥나고, 앞뒤 좌우 사방이 완전히 막혔을 때 하나님의 가능성의 사건이 시작되는 거예요.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너무 예쁘잖아요. 물론 잘 때가 제일 예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예쁘거든요.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서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생기죠. 힘에 부쳐요. 숨이 막혀요. 더는 못 하겠다 싶은 순간들이 자녀 양육에서 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가라.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 손에 맡기고 계속 가다 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지점, 드로아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정말 내가 완전히 두 손을 다 들게 됐을 때 그 지점에 이르면 하나님의 사건이 시작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저도 한국 교회를 살리는 반전의 부흥을 정말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이 꿈꾸게 하셨거든요. 저는 지역 교회, 작은 지역 교회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보내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계속 길을 막으시는 거예요. 제가 그다음에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어떤 기회가 와도 일하지 못하게 하시더라고요. 그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당혹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하나님 비전이잖아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맞는데 왜 하나님이 자꾸 길을 막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버님이 연락 왔으니까 분당으로 이사 가라고 하셔서 이사 온 거예요. 길은 막혀 있는데 길을 계속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시점에 이곳에서 경기도를 보게 하시고, 이곳에서 전국을 보게 하시고, 이곳에서 열방을 보게 하신 거예요.
저는 동료 목회자들이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환상을 품었다가, “하나님이 막으시는구나. 그만해야겠다. 그만 따라가야겠다. 포기해야겠다” 하며 주저앉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1516교회는 시작조차 못 했고, 새로운 교회 개척 운동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 지점이 나오는 그때까지 “왜 이렇게 나를 바닥 내십니까?” 할지라도 그 지점까지 가셔야 돼요. 부끄러워도 가셔야 돼요. 다윗의 광야 10년 여정의 제일 밑바닥이 무엇이었어요? 자기가 10년 동안 목숨 걸고 지켜 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잖아요. 그 지점까지 가는 거예요. 완전히 자기가 바닥나는 그 지점까지 가면 하나님께서 그다음 단계로 이동시키세요.
“저 죽을 것 같아요.” 그러면 그냥 죽으시면 돼요. 죽을 것 같다고 해서 안 죽어요. 안 죽으니까 그다음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죽으셔야 돼요. 그게 마지막 지점이에요. 바다 앞에, 더 가면 벼랑 끝이잖아요. 거기까지 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다에 들어가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바다를 건너가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9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마게도냐 사람이 뭐라고 했어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1차부터 5차 선교로 본다면 1차는 갈라디아, 2차는 어느 지역이었어요? 소아시아. 3차는 어느 지역이에요? 마게도냐와 아가야, 발칸반도와 헬라 지역이죠. 4차는 이탈리아, 5차는 스페인입니다. 보라통에서 배운 지도상으로 보면 갈라디아, 그다음이 소아시아, 소아시아를 건너가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그다음이 이탈리아, 스페인입니다.
지리적인 순서로 놓고 보면 갈라디아 다음에 소아시아로 가는 이 순서가 맞는 거예요.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보면 이 순서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아시아를 건너뛰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이 순서를 바꾸셨는지 알기 어렵죠. 1차부터 5차까지 지리적 순서를 거의 어기지 않으셨는데, 왜 2차와 3차만 바꾸셨을까요? 전체를 놓고 봐야 합니다.
왜 2차와 3차의 순서가 바뀌게 됐을까? 간단하게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2차에 결국 마게도냐로 들어가서 마게도냐 지경 첫 성 빌립보에서 누구를 만나요?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던 예배자 루디아의 간절한 기도가 순서를 뒤집어 놓은 거예요. 한 여인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의 사람을 이곳으로 인도한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여러분이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급해지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700km의 순서를 뒤집어 바꾸신 겁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죠. 그러면 3차에는 왜 소아시아를 하게 하셨을까? 소아시아 사람들은 “우리가 순서에서 밀리다니” 하고 억울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공식적인 선교 여정으로 놓고 보면 3차가 마지막이잖아요. 3차 소아시아의 핵심 도시는 어디죠? 에베소입니다. 그 에베소에서 가장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목회합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가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에도 초대 교회의 센터 역할을 한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헬라 지역에 있던 루디아만 잘된 것이 아닙니다. 소아시아 사람들은 억울하지 않니? 아니요. 그들에게는 또 다른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초대해서 사람이 동역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순서가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끊임없이 물어봐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순서를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또 다른 계획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다른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까?” 끊임없이 질문해야 되는 거예요.
올해 하반기에 저희가 세 번째 교회 개척을 준비합니다. 1516교회가 첫 번째이고, 동탄 1203교회에 이어 세 번째 교회를 준비하고 세우려고 합니다. 제가 어제 부산 갈 때 차세대 목회자들과 같이 갔는데, 저희는 부산이나 아래로 내려갈 때 SRT를 타러 동탄으로 갑니다. 동탄역 바로 앞에 1203교회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하게도 본 교회를 세우게 해 주셔서 거기에 세워 놓고 박지원 목사님께 전화해서, 교회 네 분 계실 때 우리 사역자들 다 나오시라고 해서 밥 사 드리고 함께 비전에 대해서 나누고 왔어요. 앞으로 경기도와 전국의 도시들마다 교회를 세우면서 동역자들을 만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9월 중순에 샌디에이고에 가서 집회를 하게 됐는데, 지금 LA에는 한인 교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인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죠.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 지역에 사는 분들의 목마름이 굉장히 강한 상태입니다. 지금 미국 서부에 강력한 예배 공동체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그래서 LA의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목마르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줄로 믿습니다. 영화를 봐도 열린 엔딩이 필요한 거잖아요. 한국 영화가 예전 20년, 30년 전에는 영화 마지막에 교훈을 다 이야기해 줬어요. 그런데 요즘은 열린 엔딩이죠. 열린 엔딩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에요? 시청자들의 참여를 원하는 거잖아요. 당신 스스로 적용하고 해석하라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도 열린 계획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동참하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열린 엔딩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유연성 있는 계획이 왜 필요한가? 언제든지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지시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일하다 보면 일을 위한 일이 되고, 계획을 위한 계획이 돼요. 많은 교회들이 연간 계획표를 세워 놓으면 1년 내내 이것을 바꾸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어야 되지 않나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세상에 보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나를 위해 살잖아요. 살기 위해 살잖아요. 생존을 위해 사는 거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인생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플랜을 다 짜세요. 그런데 그 플랜을 짜도 언제든지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열린 계획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10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아멘. 마게도냐 사람이 도와 달라고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이 보이나요, 하나님이 보이나요? 사람이 보이죠. 대답하셔도 돼요. 제가 중간부터 뭐라고 그랬더니 대답을 아예 안 하세요.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도 사람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그 사람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는 두 가지라고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 예배자이기 때문이고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동으로 빈들에 버림을 받아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잖아요. 유다 광야에서 끝모를 방황의 세월을 보내는데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잖아요. 그런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한 생명, 한 영혼, 어린양 하나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거예요. 모세가 애굽 사람들에게 학대받고 고통당하는 히브리인 한 사람을 건져 주고 싶었잖아요.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인생을 향한 부르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윗이 맹수의 입에 물려 잡혀가는 어린양 한 마리를 목숨 걸고 살려내고 싶어 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것을 다윗의 인생 부르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냥 한 사람이고 어린양 하나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본 환상에 마게도냐 전체가 보인 게 아니에요. 발칸반도 전체가 보인 게 아니에요. 마게도냐인 딱 한 사람이 등장한 거예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을 도우려는 것이 결국 유럽 전체를 건지는 역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 영혼이 보이시나요? 그것이 시작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시작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할 때 순 가운데 지쳐 있는 한 영혼이 보이고, 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를 나오셨다가 본인 기도하고 본인 예배 드리고 가실 수도 있는데, 한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그 지쳐 있는 한 사람이 보이고 그 한 영혼을 살려내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것, 그것이 하나님의 시작점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 동네 마트에서, 어떤 분은 미장원에 가서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시더라고요. 미장원에서 한 영혼이 보이면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이 보일 때 그 사람을 내가 건져내고 내가 살려낼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없거든요. 하나님만이 한 생명을 살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그 한 생명을 온전히 회복시키실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했습니다. 돕는 것은 여러 가지잖아요. 심정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고 물질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고, 생활 형편이나 일하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증거하라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을 영어로 gospel이라고 하는데, gospel은 God’s spell,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약적 관점으로 놓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부활 생명이라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은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나왔는데 아무것도 못 하게 하시고 dead end에 서게 하시더니, 거기서부터 놀라운 새로운 시작점으로 점프하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이 딱 그 패턴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잖아요. dead end잖아요. 그런데 그 dead end에서 죄와 사망과 저주와 어둠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죽었는데 살아나는 것이에요. 끝인데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내가 끝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전면적으로 시작하실 수 있는 지점에 서게 되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면 살아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갈라디아인도 살아나고, 소아시아 사람도 살아나고, 유럽 사람도 살아나고, 스페인 사람, 이탈리아 사람,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죽어 있는 나의 심령이 살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방황하는 영혼이, 죽어 있는 자녀도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죽어 있는 교회, 무너져 있는 교회,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에요.
이 복음을 잠재하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곳곳마다 그냥 건물이 아니라 이 복음의 능력을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하면, 그 도시에 교회가 하나만 있어도 도시 전체를 살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 등대의 역할을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치유의 이름, 생명의 이름,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것을 복음을 증거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잖아요. 사도행전 16장 14절, 15절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시의 자주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루디아라는 자주 옷감 장사 한 사람이었죠. 비즈니스우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게 됐어요. 그리고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세워집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한 사람이 중요한 거예요.
사도행전 16장 30절,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는데 지진 가운데 옥문이 다 열리니까 간수가 자결하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간수를 멈추게 하니 간수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 교회의 최초 멤버십 두 사람이 루디아와 간수였어요. 그리고 그들의 패밀리 전체가 구원을 받게 된 거예요.
우리가 이제 기도하려고 하는데, 왜 인생의 길이 막혔다고 낙심하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여기 부르셨는데, 부르시고는 왜 길을 막으시는가 혼란스러우십니까? 여러분 일사천리로 길을 가게 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중간중간에 길이 막히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길이 막혔는데도 Keep going, 계속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길을 막아 놓으시고 왜 길을 가라고 하십니까? 이해가 안 되죠.
돌아가고 싶죠. 주저앉고 싶죠. 아니에요. 이 길이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이 맞다면 계속 그 길을 가셔야 되는 겁니다. 이게 모순이죠. 길이 막혔는데 길을 가셔야 되는 거예요. 더 이상 못 가겠는데, 숨이 막히는데, 주저앉을 것 같은데 가야 되는 거예요. 가야 되는 겁니다.
저에게는 지역 교회와 한국 교회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목회자가 되고 사역을 시작했는데, 정말 한국 교회를 향한 마음이 너무 뜨겁고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가만히 앉혀 놓으시는 거예요. 양재에서 있었던 8년의 시간이 사람들이 볼 때는 제일 좋은 상황일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제일 힘든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7년이 하나님의 완성된 숫자잖아요. 그래서 7년쯤 지나면 보내 주시겠지 했습니다. 7년이 넘어가는데 진짜 숨이 막히겠더라고요. 8년이 됐는데도 안 보내 주신다. 길을 막아 놓으시잖아요. 길을 가라고 해 놓으시고 길을 왜 막으시는가. 그런데 계속 가라는 거예요.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50대에 들어서는데 저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그런데 그 끝자락에서 거룩한 환상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의 dead end인 드로아에 딱 이르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 40년을 지나고,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시편 90편의 기도를 하잖아요. 내 인생은 끝났다는 거예요. 일반적인 사람으로 강건하게 살아도 80이면 떠나는 인생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저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을 보여 주시잖아요. 그 모세의 마음이 어떨까요?
제가 사실 3년, 4년 전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 왜 이제 이렇게 늦게 제가 이렇게 늙어야 좋으시겠습니까?” 했어요. 제가 한때는 결혼식 주례를 정말 많이 했거든요. 청년들 결혼식 주례를 500장 이상 했으니까요. 주례를 하러 가면 신랑 신부 부모님이 저를 위아래로 훑어봤어요. “제가 주례 목사입니다” 그러면 믿지를 않는 거예요. 예식장 도우미들이 코사지도 꽂아 주고 장갑도 줘야 하는데 안 주는 거예요. 제가 주례 목사인데 안 주는 거예요. 지금은 믿지를 못하시잖아요. 충분히 늙은 거죠.
“하나님, 제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비실비실해야 좋으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점까지 끌고 가시는 거예요. “나는 너에게 그 꿈을 접으라고 한 적이 없다.” 보내 주지 않으시고 길은 열어 주지 않으면서 계속 꿈을 꾸라고 하시면 잔인한 거잖아요. 상황이 안 열리는데 계속 꿈을 꿔야 되잖아요.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현실과 하나님의 꿈, 그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니까요.
가정적으로 계속 어려운데 하나님은 “내가 너희 가정을 회복하겠다. 네가 방황하는 그 자녀가 결국 돌이킬 것이다. 내가 그를 반드시 쓸 것이다. 내가 너의 인생을 반드시 일으켜 주겠다” 하십니다. “아니, 언제입니까? 도대체 언제입니까?” 여러분 그 끝자락, 드로아의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드로아에서 거룩한 환상을 보여 주시고 한 영혼을 만나게 하시는데, 그 한 영혼을 살리시는 것으로 놀랍게 유럽 전체를 여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내가 드로아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순종할 때 숨이 차올라도, 죽을 것 같으면 내가 죽더라도 그 지점에 이르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작점에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지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드로아까지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열릴지어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에서 여러분이 의지할 만한 것, 붙잡을 만한 것, 기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 이제 제가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까지 저를 비우셔야 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저를 구속 가운데 두셔야 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저를 결핍 가운데 두셔야 되겠습니까? 이 나이가 되기까지 하나님 이렇게 외면하셔야 되겠습니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지점까지 순종하는 마지막 걸음을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지점에서 놀라운 환상과 비상을 이루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낙심하지 말지어다. 포기하지 말지어다. 하나님,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꿈을 포기하고 타협하기 이전에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내려놓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분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시겠어요?
2026.08.09(주) | 주일설교 |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욘 1:4-16)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요나 1:4-16)
- 제목: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 본문: 요나 1:4-16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8-09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순탄함이 언제나 하나님의 승인인 것은 아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순조롭게 항해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불순종을 잠시 허용하신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큰 바람과 폭풍을 보내셔서 도망가는 요나를 멈추게 하셨다. 삶이 잘 풀릴 때에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2. 영적 잠에서 깨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해야 한다
사공들이 생명의 위기를 맞아 두려워하고 물건을 버릴 때, 요나는 배 가장 밑바닥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명을 포기한 요나의 잠은 믿음의 평안이 아니라 현실과 하나님의 개입을 외면하는 영적 무감각이었다. 세상이 잠든 교회를 향해 경고할 때, 성도와 교회는 겸손히 깨어나야 한다.
3. 문제 해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다
사공들은 폭풍을 피할 방법을 찾았지만, 요나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어려움이 왔을 때 단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만 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신앙이 아니라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흐를 수 있다. 성도는 고난 가운데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야 한다.
4. “나를 던지라”는 회개 없는 자기희생이 아니었다
요나의 말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완고한 자기 포기였다. 하나님이 추적하실 때에는 피하거나 끝내려 하지 말고, 죄를 인정하고 붙잡히며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유다와 엘리야처럼 무너진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밑바닥에서 다시 일으키신다.
5.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섭리의 바다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사공들은 결국 “주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모두 이해되고 미래가 보장될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믿기에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긴다. 요나의 부정적 선언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는 믿음의 고백으로 바뀌어야 한다.
6.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베드로는 밤새 수고하고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다. 에스겔이 본 생명수의 강처럼 성도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건과 사람을 통해 이끄실 때, 계산을 내려놓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만드시는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결론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도망가는 요나를 폭풍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 안으로 이끄셨다. 성도는 버스 안에만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자리로 믿음으로 내려가 바다에 발을 담그듯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바다에 자신을 맡길 때, 내가 만들어 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보게 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설교의 제목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요나서 강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요나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모든 일이 자기 때문임을 알았고, 사공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4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지난주 본문에서 요나는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다시스행 배를 때마침 만나서 타고, 바다로 순조롭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시작하자마자 하나님께서 큰 바람과 폭풍을 보내셔서 배가 깨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순조롭게 풀릴 때에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길이 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한동안 허용하셔서 순탄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자는 복이지만 후자는 복이 아닙니다. 요나는 후자의 경우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에게 부르짖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이들은 지중해에서도 가장 먼 행선지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중해의 선원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뛰어난 전문가들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전문가의 두려움이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조차 두려워할 정도라면 상당히 극단적인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도 두려워하는 화재라면 얼마나 심각한 화재입니까? 명의가 판단해도 소생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하는 수술이라면, 얼마나 위험한 수술입니까? 이 사공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단순한 파도가 아니라, 배가 깨지고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위기였다는 뜻입니다.
사공들은 각자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또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자신들이 싣고 온 중요한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에도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을 살리기 위해 결국 곡물까지 버립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가던 곡물 운반선이었으니, 그 곡물은 돈이고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의 위기를 맞으면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살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합니다. 지금 사공들도 자기들의 생명과 배를 살리기 위해 아까운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배 밑층이라는 말은 원어상 배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곳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날이 덥고 잠을 잘 이루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자는 요나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편 127편 2절은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예배 시간에도 잠을 잔다는 분들이 있는데,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숙면을 취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잠과 달리, 성경에는 영적인 잠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손은 평생 하나님께 헌신한 나실인이었지만 들릴라의 품에서 깊이 잠들었다가 머리가 밀리고 영적 능력을 잃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소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데도 영적으로 안일하고 포기한 상태에서 그 일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사울 왕도 다윗을 죽이겠다며 유다 광야를 돌아다니다가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다윗이 그를 살려 주어서 다행이었지,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의 부하들을 깊은 잠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영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전혀 다른 잠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할 때,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까?
마가복음 4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에게는 없고 예수님께는 있던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명자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사명자는 수명이 다해서 죽거나 우연한 사건과 사고로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다할 때까지 그 생명을 지키십니다. 그렇다고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내 인생에는 부정적인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자기 세뇌를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겠습니까?
이번 주에 설교 원고를 마치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호메로스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오디세이』를 보았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신들에게 저항하여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한 영웅으로 평가되곤 합니다.
그는 트로이를 공략하는 데 10년이 걸렸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도 10년이 걸렸다고 전해집니다.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마지막 전략을 짠 사람도 오디세우스였습니다. 그는 거대한 목마를 만들고 그것을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재물이라고 트로이 사람들을 속여, 그들이 목마를 성 안으로 끌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헬라의 여러 신이 정한 질서를 거스르면서까지 승리를 얻었다고 여겼기에, 그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귀향하는 데 10년을 고생했고 부하들을 다 잃은 뒤 홀로 돌아왔다는 영웅담이 된 것입니다. 트로이는 오늘날 튀르키예 소아시아 지역, 신약의 드로아 근처에 있고,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까지 해로로 약 1,000킬로미터입니다.
순풍을 타고 돛을 달면 고대 항해로도 1~2주면 갈 수 있고, 오늘날에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면 약 14시간 거리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자연은 신들의 영역이었고 그 영역을 거스르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나가 오디세우스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여러 신에게 저항했다고 하지만, 요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거역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고생했던 그 지중해에 요나도 빠지게 된 것입니다.
요나가 깊은 잠에 든 것은 일종의 몸짓 언어였습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 알 바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개입하셔도 나는 이제 선지자 일을 그만두었으니 상관없다.” 그런 막나가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일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방인 선장이 요나에게 다가갑니다. 6절 말씀입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선장은 요나를 깨우며 말합니다. “너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자고 있느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사람이 가장 깨어 있고 감각이 활성화되는 순간은 생존과 직결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입시의 합격과 불합격, 중요한 승진, 사업의 존망,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에는 몸의 감각과 아드레날린이 다 활성화되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선장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잠들어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영적 안일함에서 깨어나라고 경종을 울린다면, 우리는 그 경고를 경청해야 합니다.
팬데믹 때 언론과 세상이 일반인보다 교회를 더 편파적으로 보도하고 비판해서 억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무조건 억울하다고만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하고, 적어도 교회는 세상의 기준보다 더 높아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처럼 권력 다툼에 빠지면 안 됩니다. 교회는 물질 만능주의나 성적인 타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세상법도 어기고 교회법도 어기며 우리 교회만 이익이 되면 된다는 식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교회를 살려 내지 못한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리겠습니까? 요나는 살아서 세상을 살려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 사람이 요나에게 “그러다 죽는다”라고 경고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 그런 경고를 한다면, 크리스천과 교회는 기꺼이 그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사공들은 자기 신들에게 계속 빌었는데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누군가 신들의 진노를 살 만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습니다. 사공들은 요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며, 왜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임했는지 설명해 달라.”
요나는 자기가 히브리 사람이고, 바다와 땅을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곧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추적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말은 참 잘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공들은 더 두려워합니다.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신을 진노하게 만들었느냐?” 바다는 잠잠해질 기미가 없고 오히려 더 흉용해집니다. 그래서 사공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사공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요나를 태운 것밖에 없는데, 그것 때문에 모두가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말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의 신앙적 한계가 보입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네가 섬기는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법을 써야 상황이 바뀌고,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만 물었습니다.
고대나 현대나 샤머니즘적 신관은 같습니다. 샤머니즘의 신들은 왜 진노하는지 알 수 없고, 공의롭고 일관된 기준도 없습니다. 신들이 자기 마음대로 화를 내면 인간은 그들을 어떻게든 달래고 얼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신과 인격적으로 대화하고 관계를 회복한다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과 멀어져 세속적으로 살다가 인생의 풍랑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지 않고 내게 닥친 문제만 해결하겠다고 한다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이라도 그 신관은 샤머니즘적 신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새벽기도에 나오고,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매달리고, 문제가 풀리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처럼 멀어집니다.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전에 한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신장과 췌장 동시 이식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이었습니다.
신장이 망가지고 췌장이 망가진 사람은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이식을 하면 건강이 놀랍도록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불과 6개월 만에 다시 입원하는 사람입니다.
왜 6개월 만에 다시 입원합니까?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 야식, 술과 담배, 폭식 같은 역기능적인 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것 같은 생명을 얻었는데도,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아 그 생명을 다시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516교회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만 간신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신앙을 체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12절부터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공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고, 바다는 더욱 흉용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된 요나의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말씀을 주석하고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요나가 자기를 던지면 바다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을 위대한 믿음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 장면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교해 보려면 심청전이 떠오릅니다.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먼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뱃사람들이 바다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드리는 인신 제물이 됩니다. 그 신앙 자체는 샤머니즘적이지만, 적어도 심청이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기희생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가 지중해에 뛰어드는 것도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자기희생적 투신입니까?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고를 친 뒤,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을 위대한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추적하셨다면 요나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여기서 물에 빠져 죽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나는 절대로 니느웨에 가지 않겠다. 니느웨에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무런 인격적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이 어려움이 왔고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추적하신다는 것을 알면, 이제 돌이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창세기 37장과 38장 이후의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 양심의 가책이 있었던 것처럼 원가정을 떠나 방황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추적하셨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죽고 둘째 아들 오난도 죽었으며, 셋째 아들 셀라마저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며느리 다말 앞에서 그의 인생의 수치가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밑바닥을 드러내시면서까지 추적해 오실 때에는 멈춰서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포기하신다면 그 사람을 추적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정말 추적하실 때에는 잡혀야 합니다. 그리고 붙잡힌 그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여기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던 요나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했을까요? 그때 떠오른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열왕기상 18장에서 갈멜산의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여전히 기세등등했고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목숨을 걸고 헌신하면 세상이 뒤집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며 허탈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평생 목숨 걸고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예언 사역을 했고, 그 나라가 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기 나라를 괴롭히고 결국 무너뜨릴 아수르 제국에 유익이 되는 예언 사역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난 세월의 예언 사역이 다 허무하게 느껴지고, 여기서 그만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공들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그를 살려 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나가 어떤 구체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고,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내 어쩔 수 없게 되자 14절 마지막의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사공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요나는 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크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요나서와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묵상하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을 긍정적이고 멋진 말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고백을 다른 의미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하나님의 섭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바다에 과감하게 던져야 합니다. 요나는 자기 인생을 끝내겠다고 바다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건지셔서 하나님의 섭리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해되어야만 따라가시겠습니까? 내 인생의 미래를 하나님이 다 보장해 주셔야만 따라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내가 다 동의되어야만 따라가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주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내가 그분의 종이라면, 다 이해되지 않아도 다 동의되지 않아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니느웨는 안 간다. 나는 여기서 끝내겠다”라고 바다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경험과 예수님의 명령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경험과 이해와 다를지라도, 내 인생에서 주님의 말씀이 경험된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겠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저 깊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저 깊은 바다에 내 인생을 던지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에스겔 47장의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나옵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차고, 그다음에는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며, 마침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됩니다.
에스겔 47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리소스와 자원을 가지고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하고 제어하고 싶습니까?
저도 그렇게 살면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섭리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내 방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처음 신학교에 갈 때도, 이후 사역지를 옮길 때도 하나님께서 명확한 응답을 주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방식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캐나다 밴쿠버로 갈 때에는 기도 가운데 분명한 응답을 받아 간 것이 아니라, 단임목사님의 발령으로 인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밴쿠버로 보내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 요나서를 읽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건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계속 몰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고 내 인생을 하나님의 바다에 던지니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관광버스의 법칙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단체여행을 가서 관광버스로 이동하다 보면 가이드가 여기서 내리라고 하고, 또 다음 장소에서 내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이번 여행에 버스에서 쉬겠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드가 그 지점에서 내리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몸이 찌뿌둥해도 버스에서 내리면 찬 바람을 맞으며 몸이 상쾌해집니다. 솔밭 사이를 지나가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탁 트인 해변 앞에 서면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과, 파도 소리가 압도하는 지점까지 가까이 가서 발을 담그고 몸을 담그는 것은 전혀 다른 체험입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에서 “이 정도만 하면 되지” 하며 관광버스에 앉아 여행을 끝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어 가실 때에는 이유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요나의 인생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몰아가실 때, 과감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바다에 뛰어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가지고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인생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8.08(토) | 새벽기도 | 교회여, 일어나라! (겔 37장 1-14절)
교회여, 일어나라! (에스겔 37장 1-14절)
- 제목: 교회여, 일어나라!
- 본문: 에스겔 37장 1-14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8-08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마른 뼈의 골짜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현실이다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마른 뼈는 스스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앞에 두고도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며,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게 하신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구원 의지에서 시작된다
뼈들이 살아나는 일은 그들의 결심이나 능력에서 출발하지 않고, 생기를 불어넣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된다. 이는 창세기의 창조를 떠올리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는 재창조의 은혜를 보여 준다.
말씀의 대언과 성령의 생기가 교회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뼈가 연결되고 힘줄과 살과 가죽이 갖추어지지만, 생기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온전한 생명이 아니다. 히브리어 ‘루아흐’가 바람, 호흡, 성령을 함께 뜻하듯,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할 때 죽어 있던 공동체가 큰 군대로 일어선다.
구원의 역사는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난다
하나님은 개인 한 사람뿐 아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다. 예배하고 연합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공동체 위에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임하며, 교회는 그 생명을 지역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공동체가 된다.
살아난 교회가 다음 세대와 세상을 살린다
교회는 단순한 조직이나 개인 사업체가 아니라 복음으로 영혼과 가정, 지역과 민족을 살리는 생명 공동체다. 먼저 교회가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워질 때 다음 세대와 신학교, 목회자와 한국 교회 전체에 회복의 길이 열릴 수 있다.
결론
성도는 예배와 말씀을 통해 일시적으로 충전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생명의 통로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다. 마른 뼈와 같은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대언하며, 교회와 가정과 영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에스겔 37장 1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힘줄을 붙이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네. 오늘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네. 설교 제목은 교회 일어나라 합니다. 에스겔 말씀 이번 8월 에스겔 마지막 부분까지 보게 될 거 같은데요. 에스겔 37장 9절 말씀. 네. 오늘 본문이죠. 37장 9절 말씀 함께 암성하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아멘.
네.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 심령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또 우리 가정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또 어려움 가운데 있는 한국 교회가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에스겔 37장은 성령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놀라운 환상을 보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자, 1절 말씀 다시 한번 제가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자, 성령 하나님께서 어 임재하셔서 강력한 힘으로 이제 에스겔을 데리고 와서 어 뼈가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 세워 두시는 장면입니다.
자, 그러면 에스겔이 몸이 직접 간 걸까요? 아니면 영이 간 것일까요?
네. 그래서 뭐 피터팬 아침에도 제가 다시 확인해 봤는데 피터팬 스토리는 이제 사람이 직접 가는 거잖아요.
근데 이제 사람이 직접 가는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사람의 몸은 여기 있고 나의 영을 데리고 이제 가시는 거죠.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자, 2절과 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 골짜기 가득 뼈가 있고 심하게 말라 있었다. 아 그러면서 이제 질문을 하셨는데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자 여러분 우리가 그런 장면을 보게 된다면이 뼈들이 능히 살아날 거라는 믿음이 생길까요?
야 이거 심각하구나. 불가능해 보였겠죠. 자, 그러나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
네. 제가 구절을 항상 잘못 알려 드릴 때가 있어서 제가 뭘 잘못 알려 드린 거 같고요. 아, 아마 연결된 구절 같은데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네. 빌립보서 4장 13절 한번 읽어 볼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네. 뭐 주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자. 아,이 베드로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답변을 했었죠.
저는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복음 1장에 이제 제사장 사가랴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렇게 답변을 했고 마리아도 그렇게 답변을 했는데 사가랴는 사실 부정적인 뉘앙스로 답변을 했고 마리아는 주님이 아십니다. 이런 뉘앙스였죠.
자, 여러분 주님께서 내게 이런 상황에이 불가능의 상황이 가능하겠느냐?
이게 되겠느냐? 아, 이렇게 물어보실 때 어, 주님이 아십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답변을 했어요. 이것은 대답을 유예하거나 아니면 내가 주님이 하실 수 있음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이 주권자이신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이 뜻하신다면이 일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이 고백을 하는 거죠. 자,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상 인생의 상황에서 야, 이건 절대로 안 된다. 이런 부정적인 절대 안 된다는 절대주의적 부정은 하지 마세요. 네. 그래서 지난 주일 설교 때도 얘기했지만 요나가 니느웨는 절대 안 간다.
절대로 안 간다. 그러니까 이제 가잖아요. 그래서 뭐가 절대로 안 된다 이거는 절대로 얘기하지 마시고. 네. 주님이 뜻하시면 이루지 못하실 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 이어지는 4절과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아멘.
네. 그래서 예수 어 하나님께서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이 기적의 환상을 보여 주시기 전에 어 뼈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생기를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그래서 구원의 사건은 우리의 자원하는 인격적 반응도 있지만 그러나 선재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적인 어 구원 역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이 일을 이루겠다. 이렇게 하나님이 뜻을 정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뜻을 정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소원한들 소용이 없는 거예요.
사실 어이 환상 가운데 보이는 뼈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그 정도로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정도로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 공동체들이 있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리시겠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래서 생기를 처음에 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셔서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 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신 거죠.
그래서 에스겔 37장의 환상은 마치 재창조의 역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역사, 다시 살아나는 두 번째 창조의 역사를 경험시켜 주시는 거죠. 자, 7절과 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자,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대언할 때 골짜기에 가득한 뼈들이 서로 연결이 되더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혔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대언을 했을 때 창조의 능력, 재창조의 능력이 나타난 거죠.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 읽어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저를 한번 따라보세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자 그런데 이제 순서상으로 이제 부활은 재생이잖아요. 그러니까 생명다음에 재생이 나오는게 논리적 순서 아닌가요? 네. 이제 사건적 순서로 놓고 보면 생명 다음에 부활 그래서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이렇게 말씀하셔야 되는데 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창조의 때 모든 생명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분.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부활 소망을 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를 먼저 얘기하셨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잖아요. 근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체험하면 그다음에 그분이 생명의 주인이신 거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존재론적으로나 아니면 사건적으로는 생명 다음의 부활이 맞는데 우리가 인지하는 인지의 순서로 놓고 보면 부활 다음의 생명인 거예요. 아, 부활의 주님이시구나. 이거를 체험하고 나서야 아, 그분은 생명의 주인이시구나. 할렐루야.
아멘.
아, 제가 최근에 병원 신방을 하면서 저희 중보기도팀이 중보기도를 계속해 주셨는데, 그분은 생사의 기로에 있던 분이었어요. 제가 바로 다음 날 병원에 가겠다고 약속하고, 중환자실에 가거나 생사의 기로에 있는 분들을 만날 때에는 저도 굉장히 긴장하고 기도하며 갑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기도하고 중환자실에 갈 때 정말 기적적인 일들을 경험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몇 년 3년 전이죠. 교회 처음 시작할 때 여기 3년 전에 분당 서울대 병원 이제 어머님이 80대 어머님이 임종하신다고 해서 어머님이 영적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어 도와달라. 음. 평생에 신앙생활을 안 하셨다 그러면은 임종을 앞두고 있죠.
평생에 신앙생활 안 하셨는데 영적 기도를 하시겠어요?
그런데 이제 저만 믿고 저를 부르시니까 저는 기도하고 갔는데, 그 어머님이 분명히 목소리도 안 나오고 임종 순간인데 저를 보시더니 눈이 갑자기 크게 떠지시며 한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자녀들이 “아니, 목소리도 안 나오던 분이 어떻게 한 시간을 이야기하지?”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한 시간 동안 본인의 젊은 시절에 사실은 신앙이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굉장히 실망한 일이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거부했던 것을, 제가 신부도 아닌데 저에게 고해 성사하시듯 말씀하시더라고요.
한 시간 동안 그러더니 아 나 때문에 하나님 목사님 보내셨다고 그러면서 그날 그렇게 기뻐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셨어요. 할렐루야.
아멘. 그리고는요 살아났어요. 영혼이 살아나니까 몸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갖고 1년을 더 사셨어요.
멀쩡하게 다니시고 제가 이번 주에도 저희가 이제 중보기도팀이 어 중보 기도가 정말 중요합니다.
생사의 기로에 있던 분인데 중환자실에 이제 얼마 안 남은 분이에요. 그리고 의사가 살아날 확률이 5%밖에 안 된다고 얘기를 했어요. 근데 들어가 보니까 기적적으로 살아나 있더라고요.
의식이 회복되 있는 정도가 아니라 TV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어 그래서 같이 말씀을 나누고 어 그리고 신앙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본인 신앙이 있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은 생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 생명의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장면은 뼈에 살이 붙고 가죽까지 덮였지만 생기가 없다는 거예요. 생기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잖아요.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자, 9절과 10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아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여러분이 생기는 우리가 뭐 많이 들어 보셨을 텐데 히브리어로 루아흐라는 단어입니다.이 단어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바람, 호흡, 성령이 세 가지 의미가 있어요. 성경에 사용된 예시를 좀 보면 우리가 아까 봤던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땅에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생령이 되죠.
사도행전 2장 2절 말씀 읽어 볼까요?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네. 그리고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것도 이제 루아흐라는 단어죠. 그래서 어떤 이제 버전에 영어 버전은 이제 the wind가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이렇게 번역하기도 하죠.
요한복음 20장 22절 굉장히 흥미로운 구절인데이 부활하신 주님이 다락방 안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만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이에요. 읽어 볼까요?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시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니까 루아흐를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면서 루아흐를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물론이 신약 성경은 헬라어지만 네.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시대에 유대인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원래 이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죠.
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의 호흡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 그렇게 생명의 바람, 성령의 바람, 하나님의 호흡이 불어오니까 그 죽어 있던 뼈들이 살아나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특별한 어떤 개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살아나는 그런 환상이었습니다. 자, 근데 이스라엘 나라 전체라는 것은 이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잖아요.
자, 그래서 여러분 그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구원 체험을 하는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인격적 반응을 했을 때 그때 이제 구원 체험을 하잖아요. 어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구원 체험도 성령 체험도 집단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거를 얘기하고 계세요. 시편 133편네 제가 1절만 드렸죠.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 거 이게 성전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도 선하고 아름다운 거 자 혼자 예배하러 가요? 함께 예배하러 가요?
함께 예배하러 갑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의 내림과 같고 그리고 3절에 뭐라고 말씀하냐면 제가 3절을 들렸어야 되는데 3절에는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영생을 영생을 명하셨나니 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그 예배하는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다.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예배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신뢰하는 공동체의 구원의 사건이 집단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 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오순절날이 이미 이름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순절에 120문도라고 하죠. 120명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동일하게 성령 체험을 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예배하는 공동체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 그래서 마지막 12절부터 14절 말씀 같이 읽어 볼게요.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어 시대에 예언을 했던 사람이잖아요. 무덤에서 일으켜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
아,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 전체, 국가 전체가 마치 마른 뼈와 앙상한 죽은 군인들 같은 패전을 했으니까 나라의 주권도 잃었고요.
그런 상태에서 그들을 다시 살리셔서 기적과 같이 살리셔서 무덤에서 나와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 할렐루야.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시겠다. 아, 여러분, 한국 교회가이 거룩한 환상과 비전을 체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국 교회 생명의 역사가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교회는 사실 생명을 낳는 공동체잖아요.
교회가 생명을 낳는 공동체인데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가 죽어 가는 상황에 있습니다.
자, 그런데 교회는 단순한 조직 관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개인 사업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열방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 교회는 도시마다 지역마다 복음이 흘러가고 그 지역을 살려내고 나라와 민족을 살려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적인 교회인 것이죠.
아, 이것이 1516교회가 꿈꾸는 교회이고 CFC가 펼치고자 하는 교회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난다면 어,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나고 다음 세대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근데 교회 하나를 살림으로 인하여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지 몰라요.
아, 또 가정들이 회복되고 나라와 민족을 살려내는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죠. 저는 한국 교회가 이런 역사를 체험하기를 바라고 우리가 이제 리조이스 캠프를 위해서 지난 이제 7월 6월과 7월에 신학교들을 다니면서 신학교들 그 장소를 저희가 이제 준비를 했는데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할렐루야.
아멘.
네. 뭐 대전 신대에서도 호남 신대에서도 그 담당하시는 분들이 아니 뭐 이런 교회가 있나? 이런 단체가 있나? 장소를 빌리러 와서 우리를 시설을 고쳐 주는 데가 있나? 어떻게 하면 더 싸게 계약할까? 다 그 생각만 하는데 여러분 신학교가 살아나고 목회자들이 살아나야 한국 교회 소망이 있는 것이죠.
아, 또 CC에서는 이번 가을부터 이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하고 새로운 목회자 이제 훈련을 시켜서 또 연말과 내년에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이것이 너무나 귀한 거예요.
너무나 귀한 거예요. 아, 제가 이제 밴쿠버에서 사역을 하고 온누리교회에서 사역을 하고음 사역을 하면서 뭐 제 인생의 경험도 그렇지만 목회 사역의 경험도 그런 것이요. 사람이 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잖아요.
그러면은 이게 젊었을 때는 뭔가 새로운 것이 도전적 과제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매너리즘이 도전이 되는 거예요.
더 이상 새로워질 수 없는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 비전이 새로워지지 않고 조직이 새로워지지 않고 일하는게 새로워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문화나 어떤 뭐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시장 환경이 상황이 계속 변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이제 못하는 기업들은 어려워지는 건데 그런 어떤 세상적인 새로운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근원적인 새로운 할렐루야.
아멘.
그 새로운 일어나야 되는데 교회가 그 새로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살리겠어요? 교회가 나 자신도 살려내지를 못하는데 누구를 살려내겠어요?
아, 제가 비행기 할 때 그 항상 저거는 놀라운 진리다. 이렇게 생각하는게 비상 상황에 대해서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면 옆에 내 아이부터 채워 주는게 아니라 엄마 아빠 본인부터 채우고 그다음에 옆에 아이를 채워 줘라. 이게 그림이 꼭 그렇게 나와요. 어른둘로 나오지 않아요.
어른하고 아이로 꼭 나오더라고요.
왜? 본능적으로 아이를 먼저 채워 주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근데 자기 먼저 차라는 거예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내가 살아야 누구도 살려내는 거지. 당신이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먼저 살아나야 그래야만 누구든 살릴 수 있는 거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생명을 살리는 거지 자기도 살려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게 살아나고 또한 지역 사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영혼들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1516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이 아침에 이제 두 가지를 기도하고 싶은데 첫 번째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교회여 일어나라. 하나님 한국 교회가이 복음의 역사로 다시 한번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십자가 그 놀라운 구속의 은총과 부활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날 수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리겠는가?
한국 교회 안에 서로가 돈 문제로 싸우고 권력 문제로 싸우고 결정권을 가지고 싸우고 그러한 싸움 가운데 세속적인 싸움 가운데 교회가 무너져 간다면 교회가 어찌 세상에 소망을 주겠습니까?이 이 시간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텐데요. 여러분 자리에서 함께 일어나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두 손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고 하나님 한국 교회가 복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 성령의 역사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는 깨어 일어날지어다.
에스겔 골짜기에 가득한 뼈 가운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셔서 살이 붓고 힘줄이 붙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드러나서 죽음을 당한 자를 살아나 일어서게 하며 큰 군대가 된 것처럼 한국 교회가 부흥의 반전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두 손을 들고 주여 삼창 동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성령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가 깨어 일어날지어다. 깨어 일어날지어다. 깨어 일어날지어다.
말씀의 역사, 부흥의 역사, 성령의 역사 일어날지어다.
아멘.
아멘.
하나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서 먹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우리 세대가 먼저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되는 역사 일어나게 하여 주시고 부모 세대가 변화될 때 자녀 세대가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세대의 부흥이 일어날지어다. 차세대의 부흥이 일어날지어다. 다음 세대의 부흥이 일어날지어다. 하나님 신학교가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학교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새 일을 행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새 일을 행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한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갑니다. 교회여 일어날지어다. 교회여 다시 일어날지어다.
교회여 회복될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성령 하나님 역사하여 주사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몸으로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시대에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를 존재하리 모든 영광 모든 영광 주 볼 때까지 아멘 아멘 이곳에 가르게 하나님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상처받은 사람들 주께서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성도들이 살아나고 목회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아멘.이 시간이 새벽에 한 번 더 기도하겠는데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골짜기 가득 뼈가 채워져 있을지라도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이 그 한가운데 서시고, 그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말씀의 능력과 재창조의 능력을 신뢰하는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그 수많은 뼈들이 큰 군대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가 1516교회에 오게 된 것은 우리 영혼이 살아나기를 원하고 예배가 살아나기를 원하고 가정이 살아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 제가 어느 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은 뭐냐면 여러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방전될 수밖에 없어요. 방전되면 충전을 다시 해야 됩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가 충전되고 말씀으로 충전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리고 다시 한국 교회를 부흥시키려면이 배터리 모드가 아니라 발전기, 제너레이터 모드가 돼야 돼요. 우리 안에 주께서 내주하시고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심으로 인하여서 여러분이 땅끝에 어디를 가도 어느 도시에 가도 어느 나라에서 있어도 어떤 상황 가운데서 있을지라도 골짜기 전체가 다 뼈다귀일지라도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여러분의 입술로 선포할 때 그 모든 뼈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합니다.
아멘.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안수하여 기도할 때 질병이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방황하는 자녀들이 돌아오는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고민하고 갈등하고 하나님과 멀어졌던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때 주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이 아멘.이 시간 여러분을 강단으로 초대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올라와서 같이 기도해 주시는데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방전되고 다시 충전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성령의 충만한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성령의 충만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의 그 생명의 생수가 흘러가는 사람들이 될지어다.이 소망이 있는 분들은 단에 올라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이 시간 주 한번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할 때 주여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할렐루야.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할렐루야.
하늘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하늘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물이 흐르게 하여 주옵소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할지어다.
아멘.
새롭게 하소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 하나님의 세계에 리게 하여 주옵소서. 원이 터지고 환상이 열리고 신위의 역사가 나타나며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광의를 주소서. 그의 물길 가르게 하소서. 주의 말씀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물을 리게 하소서.
성령의 바라이 땅 날러와 이루는 주의 증결한 대성 주의 영광 위에 이제는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하는 영광에게 나를 주소서. 성령이 하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 되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주의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소서.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주의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소서.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주의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라 꿈의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 나라 문득게 주님의 나라 주님의 나라 신 나의 삶 속에 임하시며 주님의 주만 예 거룩히 사랑 힘과 두려없는 믿음 주신 나의 하나님 완전한 사랑 찬양해.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나라 뜻이 나의 삶 속에 임하시며 주님 주기를 사랑해 예. 사랑한 힘 두려 주신 나의 하나님 완전한 사랑 찬양해 찬양하리만 만해주 찬양하니 만든 주 영원히 하시네 존귀하신 사랑의 왕 영원히 리를 찬양하리 영원히 하시네 준비하시 사랑와 영원히도 제하시네.
주님의 나라 뜻이 나의 삶속에 임하시며 주 임하기를 주한복이 소망해 거룩히 사랑한 그러한 믿음 주시 나의 하나님 완전한 찬 찬양해
2026.08.02(주) | 주일설교 |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 (욘 1:1-3)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 (요나 1:1-3)
- 제목: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
- 본문: 요나 1:1-3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8-02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부르고 삶의 방향을 정한다
요나는 단지 불순종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선지자였다. 성도는 기록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호흡이며, 들은 말씀에 즉시 순종할 때 삶이 새롭게 된다.
2. 부르심은 악독한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 악독을 외치라고 명하셨다. 니느웨는 아수르의 중심 도시였고, 이스라엘이 두려워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던 적국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악이 만연한 땅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곳을 향해 당신의 사람을 보내신다.
3. 잘 아는 것이 순종을 막을 수 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니느웨의 잔혹함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했다. 성도 역시 사역의 어려움, 사람의 연약함, 미래의 불확실성을 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이 일만은 못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4. 도시를 정탐하는 목적은 정보가 아니라 품음이다
도시 정탐은 그 도시의 문제를 많이 수집하고 평가하는 활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정보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지식만 많으면 도시와 사람을 포기하기 쉽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그 마음으로 품으며, 예배와 복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참된 도시 사역이다.
5. 사랑은 아는 것을 넘어 사람과 공동체를 품게 한다
가족과 가까운 관계에서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앎이 평가와 단정으로 변하면 관계는 무너진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밑바닥까지 아시면서도 우리를 품으신다.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6. 하나님은 끝이라고 여긴 터미널을 새 출발점으로 바꾸신다
요나에게 요빠는 선지자 사역을 끝내고 도망치려는 항구였지만, 베드로에게 요빠는 이방인 전도의 문이 열린 출발점이었다. 모세와 엘리야처럼 성도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끝이 아니라고 하시면 그 자리는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과 가정, 그리고 한국 교회가 끝났다고 여겨지는 자리에서 회복과 부흥을 시작하신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도 “일어나 저 도시로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결과를 다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에 순종하며,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해야 한다. 내가 끝이라고 선언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새 일을 기대하며 도시와 이웃, 가정과 교회를 품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아멘. 오늘 설교 제목은 “너는 저 도시에 가서 외치라!”입니다. 요나서 강의 첫 번째 시간으로, 요나 1장 1절부터 3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요나를 생각하면 대체로 어떤 사람을 떠올립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간 사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마지못해 순종한 사람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요나를 처음부터 그렇게만 보면 안 됩니다. 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선지자였고,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아주 특별한 음성만이 아닙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 가운데 그 말씀에 반응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올려 드리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호흡과 같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도를 통해 내 마음과 삶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며,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기도원에서 성경을 읽는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읽히는 순간, 그 말씀이 제게 개인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때 저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들린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그 한 번의 순종이 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보라통을 통해 성경을 통독하고, 기초 과정을 준비하고, 온라인 강의와 질의응답 강의를 마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며,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 전 한 형제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주일이면 축구를 하러 가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에서 성경을 함께 읽고 성경의 역사와 흐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말씀을 알아 가는 기쁨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축구보다 주일예배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삶을 바꾸는 줄로 믿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와서 새 시대의 소식을 전한 새입니다. 또 비둘기는 먼 곳을 다녀와도 자기 집을 찾아오는 능력이 있어서, 과거에는 편지를 전하는 전서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비둘기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그런데 비둘기에는 집비둘기와 산비둘기의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산비둘기는 조심성이 많고 혼자 지내기를 좋아합니다. 요나는 어떻게 보면 산비둘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거룩을 지키려 했지만, 그 거룩이 죄인과 이방인을 품지 못하게 만드는 경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고 말씀을 잘 안다는 것이, 누군가를 판단하고 멀리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품으셨고, 세리와 창녀와 병든 사람을 가까이하셨습니다. 참된 거룩은 사람을 버리는 거룩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거룩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명확합니다. 일어나라, 니느웨로 가라, 그곳을 향해 외치라. 왜 가야 합니까? 그 도시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던 아수르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수르는 두렵고도 미운 나라였습니다. 특히 갈릴리 출신이었던 요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수르의 침략과 위협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적국의 도시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여성의 권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며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그냥 두십니까?”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그곳에 보내신 것이다. 그곳의 아픔을 보게 하시고, 그곳을 섬기게 하시려고 너를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보고도 무관심하신 분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도시와 상처 입은 사람을 보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십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보고도 “누군가 하겠지”라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자리일 수 있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질문도 하지 않고, 항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말없이 떠난 그의 행동이 오히려 더 강한 거절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은 단지 불편하다고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가야 하고, 먼저 사랑해야 하고,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도시 정탐과 도시 사역도 그렇습니다. 도시를 위해 기도하고, 걸으며 살피고, 사람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하겠지. 나는 쉬고 싶고, 내 삶만 편하면 된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요나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저 도시로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도시는 사람이 만든 견고한 성곽과 같습니다. 사람의 욕망과 문화와 권력이 모여 있고, 죄와 상처도 깊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도시 한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예배하는 공동체가 서고,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도시는 영원한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많은 도시가 일어났다가 무너졌고, 사람이 세운 성읍은 결국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시 안에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시고, 다윗의 장막과 같은 예배 공동체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여십니다. 우리는 도시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절은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사각지대가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눈을 가리고 “나 안 보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보이지 않으니 상대도 자기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우리의 모든 길을 아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리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몰라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너무 잘 알아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니느웨가 어떤 도시인지,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도망한 것입니다.
요나는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지역은 아수르의 위협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아수르의 잔혹함과 침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니느웨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리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요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선지자직을 그만두고 휴가를 떠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짐을 들고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하나님, 저는 이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휴가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도망한 것입니다.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부의 타르테소스로 추정됩니다. 니느웨는 동쪽으로 약 8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다시스는 서쪽으로 약 4,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요나는 단지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방향과 정반대로 최대한 멀리 달아난 것입니다.
그가 배삯을 내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는 표현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다시스 항로는 자주 오가는 항로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다시스의 배가 몇 년에 한 번씩 왕래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렵게 배가 나타나고, 마침 자리가 생기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쉽게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요나는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람이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시려던 뜻을 거두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은혜가 원수에게 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악함은 실제였습니다. 요나 이후 약 160년 뒤에 활동한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를 향해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곳에는 거짓과 포악과 탈취가 가득했습니다. 아수르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제국 가운데 하나로 악명을 떨쳤고, 결국 북이스라엘은 아수르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요나의 입장에서는 “내가 이 나라의 선지자인데, 어찌 적국에 유익이 될 일을 하겠습니까? 저들이 살아나면 우리 민족에게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만했습니다. 훗날 북이스라엘이 아수르에게 무너진 것을 본다면, 요나는 하늘에서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은 우리의 민족적 감정과 계산보다 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너무 많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목회의 어려움을 잘 아는 부모가 말릴 수 있습니다. 결혼이 어렵다는 것을 너무 많이 본 청년은 결혼 자체를 피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선교지에 가는 일이나 기존 교회를 섬기는 일은 할 수 있어도, 교회를 개척하는 일만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것만큼은 절대 못 합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절대자이시고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내가 아는 정보와 경험이 하나님의 뜻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면 우리는 결과를 다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가 2005년에 밴쿠버에 가서 도시의 부흥을 위해 목사님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기도하자고 권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많은 분이 “당신이 밴쿠버를 잘 몰라서 그렇다. 이 도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결국 그 도시 가운데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그 도시의 영적 패배와 어려움을 너무 잘 몰랐던 것이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너무 잘 알았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C4C, 곧 Church for Church라는 교회 개척 운동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516교회와 1203교회에서 시작하여 경기도와 전국, 세계를 향해 30개, 300개의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나눕니다. “그게 될지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결과를 알아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기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과정과 결과는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는 일어나 저 도시로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왜 굳이 저입니까?”라고만 묻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교회를 개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분당에서 교회를 하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아버님이 소천하신 뒤, 어머니 가까이에서 몇 년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분당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도시를 품게 하셨고, 이곳에 한국 교회의 반전과 부흥을 위한 모교회와 센터가 될 공동체를 세우며, 경기도와 전국과 세계로 뻗어 가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제 도시 정탐 사역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도시 정탐을 하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역의 핵심은 내가 이 도시의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이 도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얼마나 품게 되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사십 일 동안 그 땅을 살피고 돌아와서,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인족이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메뚜기 같으며, 그 땅이 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두려움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밤새 통곡했습니다.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시 정탐의 핵심이 정보 수집에만 있으면, 우리는 도시의 문제를 보고 두려워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도시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느냐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말하는 관계가 부부 관계이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질문은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잘 아는가”가 아니라 “나는 저 사람을 얼마나 품어 주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남편과 아내를 받아 주지 못합니다. “내가 몇십 년을 너와 살았는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다 안다”라고 말합니다. 자녀와 부모에게도 똑같이 말합니다. 정보를 모으고 평가하고 판단은 하지만, 정작 품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밑바닥과 내면의 더러운 찌꺼기까지 아시지만 우리를 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족조차 어설프게 알면서, 그 부족한 지식으로 서로를 정죄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도시를 향해서도, 가족을 향해서도, 교회를 향해서도 사랑으로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니느웨와 다시스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도시인 요빠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요빠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가진 천연 항구 도시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바로 남쪽에 인접해 있었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국제 항구였습니다.
제가 요빠를 묵상하며 터미널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터미널은 끝, 마침, 종료, 종점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요나에게 요빠는 선지자 사역의 종점을 알리는 항구였습니다. “이제 그만하겠다. 나는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며 배를 탄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버스 터미널은 종점이면서 동시에 다시 출발하는 곳입니다. 도착지이자 출발지입니다. 나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요나에게 요빠는 끝이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약 800년 뒤에 베드로 사도도 요빠에 머물렀습니다. 베드로는 지붕 위에서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부정하다고 여겼던 짐승들을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속된 것과 부정한 것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세 번이나 같은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그때 사도행전 10장 19절과 20절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유대인인 베드로에게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일은 매우 부담스러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요빠는 베드로에게 이방인 전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그곳을 끝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베드로에게 그곳은 새로운 시작점이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요빠라는 터미널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는지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도 그 자리에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목자로 살며 “사람을 잘못 부르셨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다시 말씀하시고, 역사의 다음 단계를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도, 모세도, 엘리야도 자신이 끝이라고 생각한 터미널에 섰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끝이라고 선언해도 하나님이 끝이 아니라고 하시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곳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가정생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교회 생활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며 멀리 떠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그만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가족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며 “우리 가정은 소망이 없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우리 자녀는 소망이 없다”라고 선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끝이라고 선언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쓰러져 가는 한국 교회가 끝났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도시를 향해, 가정을 향해, 교회를 향해 당신의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요나처럼 도망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아는 것과 내 두려움과 내 경험을 붙들고 물러서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저 도시로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실 때, 도시와 이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고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026.08.01(토) | 새벽기도 | 내가 찾고 또 찾아낼 것이다! (겔 34:1-10)
내가 찾고 또 찾아낼 것이다! (에스겔 34:1-10)
- 제목: 내가 찾고 또 찾아낼 것이다!
- 본문: 에스겔 34:1-10
- 설교자: 김형태 목사
- 날짜: 2026-08-01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자기만 먹는 목자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에스겔 34장은 이스라엘의 목자들, 곧 왕과 정치 지도자들 및 종교 지도자들이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은 죄를 고발합니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돌보아야 하는 사람인데, 이들은 자기 자신을 목양하며 양의 기름과 털을 취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착취하고 공동체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구조를 화 있을 일로 선언하십니다.
2. 하지 않은 선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고, 상한 자를 싸매지 않고, 쫓기는 자와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은 목자들을 책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피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부르심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사랑과 돌봄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부모, 배우자, 자녀, 직장과 교회의 모든 관계 안에서 받은 권세는 섬기고 살리는 책임입니다.
3. 목자가 없으면 양은 흩어지고 상처 입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됨은 목자가 양을 돌보지 않은 결과로 묘사됩니다. 오늘도 목회자와 공동체의 잘못으로 예배의 처소를 잃고 떠도는 성도들, 사회의 불의한 구조 속에서 빚과 질병, 배신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 앞에서 누구도 자기 의를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은 친히 양을 찾고 건져 내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목자들을 대적하시고, 그들의 입에서 자기 양을 건져 다시는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어 하나님은 “내가 내 양을 찾고 또 찾겠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소망은 사람이나 제도나 조건에 있지 않고, 어둡고 캄캄한 날에도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5.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죽음과 죄로 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완전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찾아오시고 임재하실 때, 감당할 수 없던 문제 가운데서도 자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연약함과 배경, 성품과 기질을 넘어 자기 백성을 시대를 살리는 예배자와 중보자로 세우십니다.
6. 삶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신비가 아니라, 모든 갈망과 방향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는 이에게 들려옵니다. 재정, 질병, 상처, 자녀의 문제 가운데서도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은 평강과 담대함, 새 사명을 주십니다. 끝까지 찾아오시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삶을 맡기는 것이 믿음의 응답입니다.
결론
사람과 제도에만 소망을 두면 다시 상처와 실망을 만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양을 찾고 또 찾으시는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마음을 주님께 열어 드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신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영생을 전하실 것입니다.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새벽을 깨우고 나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에스겔 34장 1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10절은 합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언덕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 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아멘.
8월에는 에스겔 37장 9절을 암송하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표면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목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무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만 해석되어 시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모두 목회자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목회자에게만 주시는 말씀으로 보면, 이 말씀을 통해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음성이 무엇인지 듣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성도 여러분에게도 주시는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을 읽으며 조금 불편함을 느끼신 분은 없으십니까? 같은 뜻이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내용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성경의 반복은 강조이기에,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원어를 살펴보며 전치사의 뜻에 눈이 갔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두 곳 모두 ‘목자들에게’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다른 전치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목자들에게 예언하라”는 영어 성경에서 against라는 전치사로 번역됩니다. 목자들에 대하여, 목자들을 겨냥하여, 목자들을 대적하여 예언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공개적으로 저격하라는 뜻입니다. 공개적으로 저격하면 예언의 대상인 목자들만 듣습니까? 많은 사람이 함께 듣습니다. 이 말씀은 목자들만 들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도 함께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두 번째로 “그들 곧 목자들에게”라고 강조하며 목자를 한정한 것은 그 목자에게 직접 예언하라는 뜻입니다.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직접 찾아가 이야기하며 예언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두 가지를 구분하시는지, 이 예언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시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목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제사장과 같은 종교 지도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는 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를 뜻합니다. 다음에 읽을 에스겔 34장 23절은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라고 말합니다.
한 선한 목자를 예표하면서 다윗 왕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3장에서 이스라엘의 멸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목자는 당시 나라를 이끌던 정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정치 지도자 그룹에는 종교 지도자들도 속해 있었기에, 이 말씀은 왕과 제사장 모두를 비판하고 예언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치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들만 먹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목자입니다. 목자라는 말에는 먹이는 사람, 양을 먹일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양은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었습니다.
3절에서는 심지어 양을 잡아먹습니다. “자기만 먹는 목자”라는 표현을 풀어 보면 자기 자신을 목양하는 목자들입니다. 목자는 원래 양을 목양하는 사람인데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의 구조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세상의 구조를 폭로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원리를 근원까지 들어가 보면 자기 지향의 원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 죄로 물든 세상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중심성입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조차 입으로는 사랑을 노래하면서 마음으로는 이익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의 구조이고, 우리 안에 원죄의 증거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지향하기 때문에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가 됩니다.
그 안에서 힘없는 사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목자 없는 양처럼 정처 없이 떠돌고 도망치며, 가진 것을 빼앗기고 생명마저 빼앗깁니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성과를 가로채고 부하 직원의 어려움과 눈물을 외면합니다. 오늘 말씀의 살진 양을 잡아먹고 기름을 취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애통하신다는 뜻입니다.
자기들만 먹는 죄, 양을 잡아먹는 죄를 폭로하신 뒤 하나님은 한 가지 죄를 더 드러내십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아멘.
우리는 죄라고 하면 보통 행동으로 무언가를 해야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신앙의 수준이 있는 분들은 마음에 죄를 품어야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을 악행이라고 말합니까? 하지 않는 것이 악행이라는 것입니다. 무행이 악행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직위와 위치에서 우리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데 신앙생활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술을 먹지 말아야지,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지, 중독되지 말아야지, 나쁜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똑같은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상한 자를 싸매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다섯 가지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목자가 양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양이 연약하면 강하게 해 주고, 목마르면 먹이고 밥을 주고, 운동이 부족하면 운동을 시켜야 합니다. 병든 양이 있으면 고쳐 주고 상처가 있으면 싸매 주어야 합니다. 무리에서 이탈해 늑대에게 쫓기는 양이 있으면 다시 찾아 돌아오게 해야 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목자에게만 적용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각자 부르심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지, 안다면 행하고 있는지 말씀 앞에서 자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동시에 세상에 대하여 목자의 지혜를 받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인도할 영향력과 권위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야 세상에서 제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자녀를 낳으면 부모가 됩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직 어리고 연약하여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올바른 길로 훈계할 의무를 받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의 사랑의 서약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사랑과 헌신의 의무를 알고 평생 행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마음에 백 퍼센트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부모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결정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생각하지 않고, 해야 할 것도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절과 6절을 읽겠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언덕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에스겔이 잡혀간 지 12년째, 세 번째 침공에서 이스라엘은 성벽도 성전도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이 전쟁으로 흩어지고 포로로 끌려가는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목회자에게 크게 실망하여 교회를 떠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성도들은 유리하며 떠돌게 됩니다. 평생 몸담은 교회와 정든 성도를 떠나 예배의 처소를 찾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모습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성도님은 교회를 찾지 못하여 유튜브로 예배 영상을 들으며 계속해서 교회를 찾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미 많은 가나안 성도가 있고, 지금도 온라인으로만 예배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목자가 목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죄와 비리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교회를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소식을 들을 때 분노하고 안타깝지만 두렵습니다. 우리 같은 인간은 저도 여러분도 그 상황에 가면 그런 죄를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어려움 때문에 신앙의 슬럼프와 방황을 겪는 분들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9절과 10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 내어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아멘.
목자를 일차적으로 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로, 이차적으로 종교 지도자와 목회자로 해석할 때 적용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자기 양을 잡아먹고 백성을 잡아먹는 목자는 날카로운 이로 양을 무는 맹수와 같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백성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공권력으로 세상의 규칙과 질서를 구현해야 할 사람들이 양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정치·경제 구조 안에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가 생깁니다. 그 구조 안에서 목자 없는 양처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유리하며 고통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는 사람,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신당해 엄청난 빚을 지는 사람, 사랑하는 자녀가 갑자기 큰 병에 들어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가정이 파산하고 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의 구조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정치 제도라고 믿지만,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의 구조 안에는 반드시 고통당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 목자를 종교 지도자로 본다면,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올바른 사후 대처를 받지 못하여 아직도 고통 속에 방황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은 “주님, 목자가 없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닙니까? 왜 제가 만난 목회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왜 사업 파트너는 그랬습니까? 왜 이런 경제적 상황과 코로나 같은 상황을 만나게 하셨습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라.” 또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고 있는 원수들의 입에서 그 양을 건져 내어 다시는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권력자들을 대적하시고, 자기 양을 잡아먹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적하시며, 그 이 사이에 있는 양을 건져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자의 입에서 양을 건져 냈던 것과 같습니다.
내일은 주일 큐티 본문이므로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에스겔 34장 11절과 12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때에 양을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내 양들을 찾고 또 찾아낼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찾아낼 때까지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유를 얻을 때까지,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찾겠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손아귀에서, 원수의 송곳니 위에서 그들을 건져 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아까 말한 소수의 승자 그룹에 들어간다고 해도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모두 죽음이라는 골짜기를 향해 굴러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가고 어떤 사람은 달려갈 뿐입니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고통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영생을 잃어버린 사망의 세계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찾아낼 때까지 찾아다닐 것이다. 내가 너희를 죄에서, 사망의 늪에서 건져 낼 때까지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목자가 없어서, 좋은 목사님이 없어서, 좋은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 고통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돈이 없어서 고통받는 자녀를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내 양을 찾고 찾겠다”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에도,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되기에도 너무 부족합니다. 저 또한 좋은 목회자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제도를 의지하고 구조를 의지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의 구도가 우리를 마주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어둠 가운데 찾아오시고 임재하셔서 건지시면,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는 줄 믿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어두운 시대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여러분을 세워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배경과 성품과 기질에 달린 일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내가 찾아낼 것이다. 내가 원수의 손아귀에서 찾아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기와 같은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내어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을 만나시면 강력한 예배자로, 이 시대를 깨우는 중보자로, 많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나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어떤 고통이 있든, 어떤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든,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리고 그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기도해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 놀라운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와닿을 때까지 끝까지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죄를 범하고 돌아가며, 다시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다가 다시 같은 삶을 산다 해도, 그것을 3년, 10년, 20년, 30년 반복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소중한 사람에게 버려져 세상을 유리했던 상처 가운데 있는 이들을 건져 주옵소서.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세상을 방황하고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어 불안에 떨었던 마음에 찾아와 주옵소서. 교회에서 겪은 상처와 목회자의 비리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권위의 체계가 무너져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찾아가셔서 건져 주옵소서.
매여 있는 문제 때문에 고통스럽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간은 참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주님, 고통으로 신음하고 어두운 골짜기를 걸으며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능력과 주권으로 임재하여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모든 상처 가운데 자유를 선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매이고 묶인 것들이 풀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목자 없는 양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이 있다면 찾아가셔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옵소서. 변하지 않으시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인생의 목자가 되어 주옵소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주옵소서. 재정의 어려움, 세상의 어그러진 구조, 배신, 질병, 전쟁,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기후의 문제로 파산을 앞두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어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이들에게 자유의 영으로 강권하여 임하여 주옵소서.
“내가 너를 찾고 찾아낼 것이다. 내가 너를 원수의 손에서 찾고 찾아낼 것이다. 내가 결코 너를 사망에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 말씀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잃어버린 사람들, 고통 때문에 기도를 잃어버린 사람들, 말씀과 음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옵소서. 여러 상처로 마음이 다친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영적인 모든 슬럼프와 견고한 진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부서지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해진 심령에게 힘을 더하여 주시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심령을 성령의 능력으로 위로하시며 새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울함과 불안장애, 망상으로 고통받는 심령들이 현실 도피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죽어 가는 영을 살리시고 죽어 가는 우리 인생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생이 당장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께 마음을 맡길 수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인생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음성을 들려 주시며, 이 땅에 부르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을 끊으려 했던 이가 있다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명자로 일어서고,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어떤 신비하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방향을 맞추고 모든 갈망을 주님께 드리며, 내가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리기로 결정하고 삶을 헌신할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지 않아 고통 가운데 답답한 분들이 있다면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가 기도해 왔던 모든 것과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내 마음의 고민과 걱정을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분들이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재정이 없는 상황에서, 질병 가운데서, 마음의 고통과 상처가 있는 상황에서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원한다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우리 인생 가운데 일하십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변했고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수많은 간증자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로 고통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자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제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여러분을 통하여 자녀 가운데 일하실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나의 삶을 받아 주시고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리오니 이제 나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이미 나에게 말씀하신 일을 행하기로 결정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오늘 아침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자리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고민과 성품과 성정을 아시는 선하신 주님께 맡기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정합니다.
그 삶을 드린 모든 자에게 하늘의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하늘의 평강과 마음의 자유함과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게 하시고,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일을 꿈꾸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고 변화될 것입니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결단하며 주 앞에 나아가는 모든 자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때마다, 찬양할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게 하시고 믿음의 환상과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게 하여 주옵소서.
어두워져 가는 시대, 죽음의 시대 속에 영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도시 곳곳마다 강력한 예배 공동체가 세워지게 하시며,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한 사람들이 일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한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마다 먼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기도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07월
2026.07.26(주) | 주일설교 |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라 (딤전 6:11-21)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라 (디모데전서 6:11-21)
- 제목: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라
- 본문: 디모데전서 6:11-21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26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하나님의 사람은 피할 것과 따를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며 세상의 자랑과 욕심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부르심으로 설명되는 정체성입니다.
2. 선한 싸움은 내면의 정체성과 성품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정체성과 성품이 세워지지 않은 채 능력과 경쟁만 추구하면 세상의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기 쉽습니다.
3.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명령을 지키라는 말씀은 완벽주의의 요구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부르심입니다. 직업과 위치를 넘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임을 고백할 때 삶의 방향이 바로 잡힙니다.
4.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잊고 사람과 비교, 결핍과 세상의 기준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5. 재물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선한 사업을 해야 합니다
부한 자는 정함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물질은 자신을 높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다음 세대를 세우기 위해 선을 행하고 나누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염려로 붙들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릴 때 흔들림과 타협을 이기고 선한 싸움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전문 스크립트
디모데전서 열일곱 번째 시간이고 마지막 강의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11절을 다시 한번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성경에 많은 호칭이 있고 세상에 많은 직함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 man of God이라는 표현만큼 영광스러운 칭호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직함은 그 사람의 지위나 역할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세상의 지위나 역할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만 설명되는 인생인 것이죠.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린 사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신명기 33장에는 모세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시종은 사무엘을 가리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고 기억했고, 열왕기하에서는 엘리야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말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붙었던 호칭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고 묘비에 “여기 하나님의 사람 잠들다”라는 글귀가 남는다면, 얼마나 귀한 인생을 산 것일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두 가지 명령을 받습니다. 동사 두 개를 따라 해 보세요. “피하고 따르라.” 피하라는 것은 절제해야 할 것을 말하고, 따르라는 것은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세상 자랑과 세상 영광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절제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의 여섯 가지를 추구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아무 단어나 던진 것이 아니라 이 여섯 가지에도 분명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의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말과 달리 내면의 진실함, 사람들과 바르게 관계를 맺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의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덧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닮아 가는 경건으로부터 의가 나옵니다. 경건 다음에는 믿음, 사랑, 인내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삼덕은 믿음, 소망, 사랑인데, 여기서는 소망 대신 인내가 기록됩니다. 소망은 인내를 낳기 때문에 인내는 소망과 동의적인 개념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경건한 사람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그 평강이 다른 사람을 넉넉하게 받아 주는 온유가 됩니다. 경건과 삼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해지고, 온유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가 건강해질 때 하나님의 의가 성품과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축복하고 권면한 이 여섯 가지 성품이 저와 여러분 안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12절에서는 두 가지 명령을 더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확한 정체성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내적 성품이 분명히 세워진 뒤에, 정적인 명령과는 완전히 다른 동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내면의 정체성과 성품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비로소 세상과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젊은 시절에는 혈기가 가득하여 동족을 구한다며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때는 온유가 그 안에 없었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리에서 40년을 지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해지며 하나님의 성품인 온유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여름 캠프와 주일학교를 통해 내가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내 삶에 새겨질 때 비로소 세상과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정체성도 여섯 가지 성품도 분명하지 않은데 실력과 성적과 공부만으로 세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실력과 능력을 키우려는 압박 속에서 마음이 깨지고, 신앙을 잃고, 인생의 철학과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뒤로 미루고 세상이 요구하는 능력과 우선순위에 우리 자신도 기울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심력을 키우고 영력을 키우면 필요한 능력과 실력은 주께서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가슴에 손을 놓고 고백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이 정체성이 명확하게 하시고 이 성품이 분명하게 자리 잡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준비가 되지 않으면 어리석은 싸움에 휘말리고 악한 싸움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인 소속을 분명히 하고 내공이 쌓여야 비로소 경기에 임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2004년 영화 맨 온 파이어를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이지만 보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결말을 말할 것이니 스포일러를 주의하십시오. 덴젤 워싱턴과 다코타 패닝이 주연이고, 덴젤 워싱턴은 크리시라는 전직 특수요원으로 나옵니다.
그는 여러 국가 기관의 임무를 수행하며 많은 사람을 죽였고, 자책감과 우울증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람입니다. 생계를 위해 멕시코의 한 기업인 딸을 경호하는 일을 맡으면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삶의 존재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인신매매 조직이 어린 소녀를 납치하고, 크리시는 총을 네 발이나 맞아 거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그가 조직원들을 차례로 소탕하다가 마지막에 내리는 선택이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주고 그 소녀의 목숨을 건지는 선택입니다. 그는 평생 왜 이 싸움을 싸워야 하는지 모르고, 작전에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에 처절하고 비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존재 의미를 찾은 뒤에는 정말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한 경쟁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전투적으로 살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미친 듯이 일하고 있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도, 신념도, 철학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영혼의 원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절의 선한 싸움은 원어상 전쟁을 치른다기보다 경기에 나간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합에 나가는 사람이 승리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끝난 월드컵을 보며 마음이 어려웠지만, 다른 나라의 8강, 4강, 결승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결정적인 차이를 느꼈습니다.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들도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 중심 사회에서 능력과 실력을 키워 주려고 부모가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안에서 심력과 영력을 키우면 필요한 능력과 실력은 주께서 허락하십니다. 복음 안에서 구원의 감격을 체험하면, 조용하고 내향적이며 생각이 많던 사람 안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투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원수의 거짓말에 내가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에, 그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원수의 계계를 파하고 그들을 다시 건져 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저는 원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인데 전투력이 올라오다 보니 교육자들도 열정적인 유형의 분들을 많이 뽑았습니다. 매주 운동을 하다 보면 서로의 실력을 다 압니다. 실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가입니다.
지난달 오픈워십에 청주 상당교회 안광목 목사님이 오셔서 메시지를 전해 주셨고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을에 교육자들을 데리고 청주에 와서 함께 축구하자고 하신 말씀이 제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안 목사님은 축구를 비롯해 못 하는 것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낮에는 집필을 하고 저녁에는 체력 단련도 하며 한여름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한다는 것은 성을 공략하듯, 전쟁을 치르듯 파이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사 세 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을 말합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2차 침공 때 110만 명의 군대가 왔을 때 그 가운데 30만 명을 살수, 곧 청천강에서 쳐서 수천 명밖에 도망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3차 침입 때 10만 명의 거란군을 귀주에서 전멸시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열 배가 넘는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전쟁에 임하면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고, 승리하지 못하면 내가 패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내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싸우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선한 싸움을 싸우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역풍이 불고 원수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면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살 필요가 있느냐”라고 방해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초점을 잃고 유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의 두 명령과 12절의 두 명령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명령은 영생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지점까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날 천성문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을 주님께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 평생의 시름이 다 녹지 않겠습니까?
이번 여름 캠프 사역을 하는 것도, 청년들이 오이타와 제주도 아웃리치에 가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도, 공동체마다 도시 정탐 사역을 하는 것도 선한 싸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원수는 어떻게든 한 영혼을 방황하게 하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든 한 영혼을 주님께 돌이키고 살려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선한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의 승리가 여러분에게 체험되기를 축복합니다.
13절과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이 명령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림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존자께서 왕좌에 앉아 계시고, 사역의 통수권을 받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라는 장수에게 군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 군인에게 군령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군령에 순종하지 않고 이행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군령을 완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일의 무게가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14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는 재림을 말합니다. 재림의 날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감당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아직 성화의 과정에 있는데,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흠이 없다는 표현은 구약 레위기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흠 없는 제물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덟 번째 책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계속 쓰다 보니 사람들이 당연히 책을 쓰는가 보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책을 쓰는 일에는 에너지가 엄청나게 듭니다. 7월 말까지 탈고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밤 12시, 1시, 2시까지도 글을 씁니다.
그럴 때 가끔 “나는 공생애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따라 해 보십시오. “내 인생은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직업과 위치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의 결단과 고백을 하고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방향을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면 자꾸 세상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엉뚱한 곳에 있고, 시선도 엉뚱한 데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충실하지 못하고 자기 일에도 충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영혼의 무게 중심을 낮추고 먼저 하나님께 삶을 헌신하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20년, 30년 살아 보면 알게 됩니다. 40년, 50년 살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정말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번 주신 생명을 쏟아볼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존재는 상대적이고 세상의 자랑도 상대적입니다. 유일한 절대자이시며 지존자이신 그분께 내 인생을 헌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존재 이유인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이 존재 이유를 놓고 고민하거나 돌아오지 못했다면, 여전히 인생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결단이 필요합니다.
15절과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 종말의 때가 오면 분명히 알겠지만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신 분이고 인생과 역사의 유일한 주관자이시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불멸의 존재이십니다.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범접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가시적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은 아무도 감지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비가시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분께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런데 바울은 왜 디모데가 이미 알고 있는 이 말씀을 여기에서 다시 했을까요? 보통 본문으로 설교 제목을 정하면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부분의 설교자가 지나가는 이 구조를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사명이 있고 존재 이유가 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고 망각하며 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흠이 생기고 책망받을 일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초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세상의 잣대로 나 자신을 보고, 초라한 나와 결핍된 나를 묵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시선을 주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현존 의식이 명확해져야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명령을 두 절 말한 뒤 “하나님 앞에 사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누구신 줄 아느냐”를 오히려 앞에 두었습니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예배의 자리가 정말 소중한 줄로 믿습니다. 찬양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렸던 초점을 하나님께 다시 맞추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나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7절부터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지난주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하려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부한 자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부자들에게 높은 마음,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정함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넉넉하시고 후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18절의 세 가지 표현은 결국 한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선한 사업을 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이 있어 간증하고 싶습니다.
리조이스 캠프를 올해 3년째 하고 있는데, 서울 외 지역에서는 올해 초 부산장신대에서 처음 했습니다. 작년 10월 부산장신대에 가 보니 강당 1층과 2층의 의자가 너무 낡아 있었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열악하게 지내는 신학생들이 있구나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한 분이 기꺼이 헌금하여 새 의자로 교체해 드렸습니다. 학생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또 그들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내년 초에는 대전신대에서도 리조이스 캠프를 하기로 했습니다. 대전신대에 갔을 때도 오래된 시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도착하면 교육자들에게 조를 풀어 화장실부터 가 보라고 하는데, 그곳에도 옛날식 변기들이 있었습니다. 그곳 역시 한 성도님이 기쁘게 헌신하셔서 공사를 이미 시작했습니다.
3주 전에는 광주 호남신학대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약 10여 년 전 그 대강당 예배실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약 600석 규모인데 수십 년 된 장의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고 다 낡아 휘어져 있었습니다. 보는 순간 성심빌딩 지하 1층 비전홀의 600개 의자를 보내 드리면 너무 좋겠다는 선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로님들이 동의하셨고 호남신대도 기쁘게 받아 주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이사하면서 비전홀 의자 600개를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의자들은 거의 새것인데 창고에 몇 년 넣어 두면 못 쓰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600개 의자를 보내 드리고, 예배실 입구의 기도실도 수십 년 동안 냉난방이 되지 않아 냉난방 공사까지 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 일도 성도님들이 헌신해 주신 것입니다. 답사 때 호남신대 시설 담당자분이 모든 곳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가 교회와 상의한 뒤 최종 결정을 알려 드리겠지만, 의자를 보내 드리고 기도실을 수리해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장소를 구하러 와서 의자를 600개나 보내 주고, 멀리서 트럭까지 불러 보내고 시설까지 고쳐 준다는 교회는 처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아낌없이 선한 사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서울 광장동의 장신대와 경기도 광주의 서울장신대, 부산장신대와 대전신대, 대구의 영남신대, 전주의 한일장신대, 광주의 호남신대에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곳에 정말 좋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모여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고, 다음 세대 한국 교회를 이끌 좋은 목회자와 설교자와 예배 사역자와 청소년 사역자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만 잘되자고 하는 것은 개인 사업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권면인 20절과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다른 바울 서신과 달리 마지막 인사말이 인사말이라기보다 거의 잔소리처럼 들립니다. 앞에서 이미 다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지막까지 반복했을까요? 아비 된 사도 바울의 심정에는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너도 잘못되면 안 된다. 네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너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제가 늘 강조하는 삶의 태도이고, 여러분의 삶의 태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고백합시다.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나 결과를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입니다.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렇다고 은혜로 이루어질 것이라며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부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유약한 디모데에게 “파이팅해야지, 선한 싸움을 싸워야지”라고 말하는 내용인데, 왜 설교 제목을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그 시선을 놓치면 흔들리게 되고, 무너지게 되고, 타협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찬양을 통해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기를 고백하겠습니다.
2026.07.25(토) | 새벽기도 | 세상이 주를 알게 하소서 (겔 30:10-26)
세상이 주를 알게 하소서 (에스겔 30:10-26)
- 제목: 세상이 주를 알게 하소서
- 본문: 에스겔 30:10-26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25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하나님은 열국과 역사의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들어 교만한 애굽을 심판하시며, 열국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고대 제국들의 흥망은 단순한 힘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기준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2. 애굽의 힘과 우상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진다
강과 성읍, 왕궁과 요새, 우상과 신상은 애굽이 자랑하던 번영과 권세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나일강의 풍요와 바로의 권세와 온 땅의 우상숭배를 꺾으심으로, 인간이 의지하던 힘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드러내신다. 애굽의 전 지역을 향한 심판은 하나님의 권세가 어느 지역과 권력에도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3. 악한 제국도 하나님의 도구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교만한 바벨론 역시 후에 심판하신다.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인간의 상대적 의로 역사를 판단하기보다 절대적 의를 지니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의인은 이해되지 않는 역사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4. 국제 정세를 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구해야 한다
전쟁과 국가 권력의 충돌은 인간의 탐욕, 우상숭배, 거짓, 인권 탄압이 낳는 비극을 드러낸다. 성도는 어느 한쪽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보거나 힘의 논리에 매이지 않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힘으로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서 온다.
5. 사회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구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사회 부조리, 갑질 문화,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구조와 인권 유린 역시 하나님 앞에서 돌아봐야 할 죄다. 성도는 정치인과 지도자만 비난하지 말고, 자신이 속한 가정과 일터와 지역 사회의 죄를 끌어안고 회개해야 한다. 강자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임하도록 중보해야 한다.
6. 교회와 성도는 도시와 열방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다
도시정탐 사역은 도시의 영혼과 깨어진 가정과 떠난 성도를 품고 복음의 회복을 구하는 사역이다. 가정과 기업과 교회는 자기 조직의 번영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살리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힘과 권력의 논리 대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생명의 논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결론
하나님은 국가와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 백성을 축복의 통로로 부르신다. 성도는 전쟁과 사회의 죄악 앞에서 낙심하거나 정죄에 머물지 않고 회개와 중보로 응답해야 한다. 교회와 가정과 일터가 이웃과 도시와 열방에 은혜와 사랑을 흘려보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에스겔 30장 10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설교의 제목은 “세상이 주를 알게 하소서”입니다. 이번 달 계속 암송하고 있는 에스겔 33장 10절 말씀을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누적된 악의 문제에서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어찌 죽고자 하느냐”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는 가운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잣대와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적되어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이기에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가 좋은 곳이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에스겔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손으로 군대를 일으키셔서 애굽을 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본문인 것 같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으로 애굽의 무리들을 끊으리니.”
일반 사회에서는 바벨로니아 제국이라고 하는데, 고대 바벨로니아 제국은 우리가 잘 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일어난 수메르 문명, 곧 아브라함이 나왔던 갈대아 우르의 문명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실질적으로 세웠던 바벨론 제국은 신바벨로니아 제국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신바벨로니아의 2대 왕이고, 1대 왕은 아버지 나보폴라살입니다. 바벨론은 제국 이름이기도 하고 도시 이름이기도 합니다. 페르시아만을 향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흘러가다 보면 바벨론이 나오고, 바벨론 남부 강 아래쪽에는 갈대아 지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제국 사람들을 갈대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갈대아 출신 관료 나보폴라살은 군대를 일으켜 바벨론의 실권자가 되었고 니느웨까지 진격하여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켰습니다. 아수르의 잔존 세력은 갈그미스로 도망갑니다. 갈그미스는 티그리스강 상류의 니느웨보다 더 서쪽에 있습니다.
갈그미스에서 최후의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 패퇴한 아수르는 애굽에 도움을 요청했고, 바로 느고가 연합군을 이끌고 올라옵니다. 바로 느고는 요시야 왕이 죽임을 당했던 때의 바로입니다. 애굽과 구스, 곧 에티오피아, 붓 곧 리비아, 그리고 오늘날 튀르키예 지역인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까지 네 나라가 아수르를 도왔습니다.
아수르까지 합하면 다섯 국가가 연합하여 바벨론과 싸운 것입니다. 5 대 1로 싸웠으면 다섯 편이 이겨야 할 것 같은데, 느부갓네살 왕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알렉산더 이후에 또 한 명의 세계적인 정복자였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이라는 정복자를 일으키셔서 교만한 국가 권력 애굽을 심판하시겠다고 예언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1절과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강포한 자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그 땅을 멸망시킬 때 칼을 빼어 애굽을 쳐서 죽임당한 자로 땅에 가득하게 하리라. 내가 그 모든 강을 마르게 하고 그 땅을 악인의 손에 팔겠으며 타국 사람의 손으로 그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느부갓네살은 주변 국가를 하나씩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대를 일으켜 애굽을 치러 오게 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강을 마르게 한다고 하십니다. 애굽에는 세계 최장 약 6,900킬로미터에 이르는 나일강이 있습니다. 모든 강이라는 표현은 백나일과 청나일과 지류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일강을 마르게 하겠다는 것은 애굽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될지를 묘사한 것입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일 년에 세모작을 하는 비옥한 땅을 황폐하게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수르를 일으키시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일으키시며, 페르시아 바사 제국의 고레스를 일으키시고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와 로마 제국을 일으키시면서 교만한 국가 권력을 심판하십니다.
13절부터 18절은 애굽의 여러 도시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높, 곧 멤피스에서 우상들을 없애고 신상들을 부수겠다고 하십니다. 멤피스는 하이집트의 수도 역할을 했고 우상과 신상이 매우 많았던 도시입니다.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도 애굽의 신상과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14절의 바드로스는 상이집트의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 중 하나입니다. 소안은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지역으로, 야곱의 가족들이 머물렀던 고센 땅에 속합니다. 노는 상이집트의 테베로, 신왕조 시대에 수도 역할을 했던 주요 도시입니다. 위쪽을 찍고 아래쪽을 찍고 다시 위아래를 언급하는 것은 애굽의 상하 모든 지역을 치게 하신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15절부터 18절에는 신, 온, 비베셋, 다바네스가 나옵니다. 신은 해변길의 강력한 요새 도시 펠루시움으로 보입니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들이 해변길을 따라 이동하며 싸웠기에 이곳에 강력한 요새를 세웠고, 하나님은 그 견고한 성읍에 분노를 쏟겠다고 하셨습니다.
온은 헬리오폴리스입니다. 요셉은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했는데, 헬리오폴리스는 태양신 숭배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보디베라도 태양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태양신을 숭배하던 온의 장정들을 칼에 엎드러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베셋도 하이집트의 도시입니다.
다바네스는 바로의 궁궐이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멍에를 꺾고 그 교만한 권세를 그 가운데에서 그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군대를 통해 하이집트에서 출발해 상이집트까지 애굽 전역을 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같이 내가 애굽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심판자와 주관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예언이 나옵니다. 21절과 22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인자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의 팔을 꺾었더니 칼을 잡을 힘이 있도록 그것을 아주 싸매지도 못하였고 약을 붙여 싸매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을 대적하여 그 두 팔 곧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꺾어서 칼이 그 손에서 떨어지게 하고.”
지금 애굽 왕 바로는 한쪽 팔이 이미 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쩡한 성한 팔까지 꺾어 칼을 들지도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은 이 예언이 열한째 해에 임했다고 말하는데, 그해는 예루살렘이 몰락한 주전 586년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2차 포로 때 이미 끌려간 사람이었고, 예레미야는 고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간 지 11년째 되는 해에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갈그미스 전투는 주전 605년에 있었던 일이므로, 애굽 왕 바로가 대군과 연합군을 이끌고 올라갔다가 패한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쪽 팔이 꺾인 것입니다.
남아 있는 다른 쪽 팔까지 꺾인다는 것은, 본토가 느부갓네살에게 침공받는 것을 말합니다. 주전 568년에 애굽은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침공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한 팔까지 꺾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의 내용과 아래의 내용은 같은 심판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25절과 26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 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바벨론 왕의 팔은 들어주고 바로의 팔은 내려뜨릴 것이라. 내가 내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고 그를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내가 애굽 사람을 나라들 가운데로 흩으며 백성들 가운데로 헤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아멘.
당시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국제 정세를 보면서 누구를 봐야 합니까?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섭리가 보여야 합니다.
애굽은 고대부터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쌍벽을 이루었고, 지리적 상황 때문에 고왕조와 중왕조와 신왕조까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로마에 무너지며 최후의 막을 내립니다.
그렇게 오래간 애굽의 교만한 권력을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통해 심판하십니다. 이후 알렉산더가 다시 침공하여 더 강력한 치명타를 날리고, 마지막에는 로마 제국이 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제국들을 일으키셔서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제국사가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들어 세상을 심판하시면 어떡하느냐고 질문한 선지자가 하박국입니다. 더 심한 악인이 악인을 징계하게 하시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4절에 나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멘.
이 말씀에서 교만한 자는 바벨론 갈대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인을 들어 세상 열국의 심판 도구로 쓰시지만, 그들도 교만하기에 결국 페르시아를 일으켜 징계하십니다. 하박국은 악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느냐고 묻고, 하나님은 갈대아인을 들어 치겠다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하박국은 갈대아인이 더 악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은 바벨론도 나중에 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로워서 하나님의 역사 경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의롭냐? 인간의 자기 의는 상대적인 것뿐이다. 절대적 의를 지니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네가 온전히 의로울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역사를 보면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 싸우며 악행이 이어집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의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전쟁사를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를 경영하고 계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 때마다 국제 정세를 보면서 “하나님이 보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마태복음 24장의 종말 예언과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십시오. 세상이 하나님이 예고하신 대로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결코 더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을 읽고 너무 우울해하지는 마세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그칠 줄 모르고,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도 중간에 멈추는 것 같더니 다시 격화되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도 인간의 교만과 우상숭배, 탐욕과 죄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러시아는 공산 정권 아래에서 엄청난 인종 학살과 인권 유린을 했고, 소수민족을 강제 이주시키고 탄압하고 박해한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제국주의 확장을 위해 침략 전쟁도 수없이 벌였습니다. 우크라이나도 2014년부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나토와 긴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부역한 역사가 있습니다. 돈바스 지역에는 네오나치를 신념으로 삼는 무장 세력도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이란도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종교 독재와 심각한 인권 유린을 했고, 중동의 테러 단체들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 후티 등 여러 단체가 이란의 지원을 받습니다.
미국도 과도한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가운데 예전의 미국이 아니며, 세계 패권을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21세기에 너무 많은 전쟁에 개입하고 일으켰습니다.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과 관련된 전쟁들처럼, 기독교적 가치관을 표방하면서도 정권의 속성에 따라 세속적 이익을 위해 전쟁에 개입한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잘못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대 세력을 일으켰지만, 그 반대 세력도 악한 세력이 된 전쟁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단순한 선악 구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는 전통의 세계적 강호이고,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다음의 동유럽 최대 국가로 전통의 강호입니다. 이란도 중동의 강호이고 미국은 세계적 강호입니다. 지금은 다 강자들의 싸움이며 힘의 논리이기에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개인이 싸운다면 2년씩 치고받고 싸울 수 없고, 20분만 싸워도 지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싸움이기에 심각한 상황이 계속됩니다. 이런 국제 전란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거짓과 죄악과 우상숭배와 인권 탄압에 대해 반드시 징계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아무 문제가 없는 나라일까요? 각종 중범죄가 계속 증가하고 사회 부조리 문화도 심각합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만연한 갑질 문화도 심각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인권이 유린되는 문제가 많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유린 문제도 심각합니다.
신명기 19장 10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무죄한 피를 흘리면 그 죄가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죄가 계속 누적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정의 사회가 구현되지 않는 것을 정치인만 탓하면 안 됩니다. 그 정치인들이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다 우리에게서 나왔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의 리더들을 욕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할 때 이 모든 죄를 끌어안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가정과 일터와 지역 사회에 강자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 이기주의는 과도한 폭력성으로 가게 됩니다. 21세기에 이런 대형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갈 줄 알았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끝나지 않습니다. 강대국들의 싸움이기에 주변 국가들이 말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21세기는 인권을 어느 시대보다 강력하게 외치지만, 전쟁에서의 인권 유린은 너무 심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한 진정한 평화가 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평화가 아니고, 또 다른 보복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가는 길이 복음의 발걸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손길이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손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7월과 8월에는 공동체마다 도시정탐을 하고 있습니다. 알파 공동체는 분당 지역, 브라보는 용인 처인구, 찰리는 하남 미사, 델타는 건국대 캠퍼스, 에코는 광명, 빅터는 과천 갈현동, 시에라는 광주입니다.
하나님, 인간의 탐심과 이기심이 도를 넘어서 너무나 심각한 사회적 부조리와 죄악을 낳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죄악과 교만과 안일함과 탐욕과 이기심을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층간소음 하나의 문제도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싸우고 죄를 짓고 서로를 공격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주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고, 이 땅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도시정탐 사역이 도시를 끌어안고 영혼을 끌어안고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나 선지자를 통해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을 살려 내신 것처럼, 도시 전체를 살려 내는 거룩한 역사의 디딤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민족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도시들이 회복되어 살아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도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게 하시고, 도시들이 영적으로 회복되어 복음의 역사가 편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깨어진 가정들이 치유되게 하시며 흩어진 자녀들이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떠났던 성도들이 돌아오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 부흥하게 하시며 대한민국 사회를 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세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국가 권력을 항상 짐승으로 표현합니다. 인격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국가 권력의 특성상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되고,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회사도 교회도 조직입니다. 조직은 권력을 갖게 되면 비인격화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조직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과 우리가 섬기는 일터와 회사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직원과 회사를 살릴 뿐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건강한 기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가족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소외된 가정을 살려 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1516교회와 한국교회가 내 교회만 잘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열방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저희가 이사를 진행하고 있고 다음 주까지 이사를 완료해야 합니다. 차세대 예배 공간, 태원빌딩, 정자프라자, 한솔프라자 상담실과 행정실까지 교회가 장소를 옮기고 새 공간에 들어갑니다. 이웃과 소통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1516교회와 이 지역의 교회들로 인해 정자동이 복을 받고, 분당이 복을 받고, 성남시와 경기도와 서울이 복을 받고, 대한민국과 열방이 복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논리를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과 회사와 한국교회와 1516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가 세상의 논리와 힘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를 따라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의 논리, 축복의 논리, 생명의 논리를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과 자녀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우리가 섬기는 일터와 회사가 세상을 이롭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회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윤 창출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는 회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이사하고 새롭게 들어가는 공간에서 이웃과 소통하고 은혜와 사랑과 기쁨을 나누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2026.07.19(주) | 주일설교 | 부자 되려고 하지 마세요 (딤전 6:3-10)
부자 되려고 하지 마세요 (디모데전서 6:3-10)
- 제목: 부자 되려고 하지 마세요
- 본문: 디모데전서 6:3-10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19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참된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적 교훈에 선다
다른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가르침이다.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교만에 빠지고, 변론과 언쟁, 투기와 분쟁과 비방을 낳는다. 성도는 절대 진리인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면서도, 그 말씀 안에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적용을 누려야 한다.
2.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닮아가는 삶이지만, 명예와 물질과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경건의 모양으로 자신의 사심을 채우거나 직분을 감투처럼 사용하는 것은 바리새적 왜곡이다. 직분과 리더십은 권위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를 섬기도록 맡겨진 책임의 자리다.
3. 자족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본질로 아는 믿음이다
자족은 세상적인 것을 더 얻어야 만족하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본질로 여기며 이미 충분함을 아는 마음이다. 세상 영광과 유익은 일시적인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감사함으로 받되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부요와 궁핍 어느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
4.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인생과 신앙은 무엇으로 살 것인가가 아니라 왜 사는가를 분명히 하는 선택과 집중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우선순위에 둘 때, 하나님은 필요를 채우신다. 약할 때 강함을 주시고 가난할 때 부요하게 하시며 무지할 때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의 참된 능력이다.
5. 돈을 사랑하면 탐심과 우상숭배에 빠진다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 자체를 정죄하지 않지만, 부자가 되려는 욕망과 돈 사랑은 시험과 올무, 파멸과 멸망으로 이끈다고 경고한다. 물질은 도구여야 하지만 탐심이 이를 주인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하나님과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탐심은 십계명의 모든 관계를 무너뜨리고 결국 우상숭배가 된다.
6. 물질은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흘려보내야 한다
부는 부지런함의 열매와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지만,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는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기꺼이 사용하며, 헌신과 나눔을 훈련해야 한다. 성공과 실패 모두를 하나님 은혜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결론
탐심과 강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노력의 끝에 있어야 한다. 식사할 때, 아침에 일어날 때, 잠들기 전, 그리고 모든 일 가운데 감사하는 습관은 자족의 삶을 세운다. 하나님의 공급과 완성을 신뢰하며 감사와 도전이 선순환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네. 설교의 제목은 “부자 되려고 하지 마세요”입니다. 부자라는 말의 뉘앙스를 잘 보셔야 됩니다.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셨어요?
오늘 내용을 들어 보시면 되겠는데요. 디모데전서 강의 16번째 시간이고요. 5장에서는 교회 안에 여러 그룹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고, 오늘 내용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다른 교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다른 교훈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다르다는 단어는 이질적이라는 뜻의 헤테로라는 단어입니다. 바른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르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3절이 말하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항상 기준점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3절은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표현합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들이 있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이 기준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소위 이단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단은 한자로 다를 이 자와 끝 단 자를 쓰잖아요.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거의 똑같은데 끝만 살짝 달라서 엉뚱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이 이단을 분별하기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것이겠죠. 뭔가 다르고 이상하다면 따라가지 마세요. “그래도 괜찮겠지” 하며 따라가면 안 되고, 일단 예의 주시하고 제보하셔야 합니다.
제가 교회 개척 운동을 하면서 정말 도시마다 강력한 예배 공동체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견고한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성경 통독 사역을 했지만, 지금은 성경의 주요 질문과 문답도 집필하고 있습니다. 통독과 성경 문답, 교리 문답은 작년에 쓴 『새신자가 묻다』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을 중요한 콘텐츠로 삼아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도록 해야겠다는 선물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을 구시대적인 주입식 교육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변증식으로 이 시대의 영혼들을 이끌어 올 수 있는 말씀 사역이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4절 말씀입니다. 다른 교훈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가? 4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성경 말씀인데, 그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자기가 기준이 됩니다. 이것은 교만한 것입니까, 교만하지 않은 것입니까? 엄청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사실 거짓에 해당합니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이 영적 관점에서 보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만은 사탄적인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천상 보좌를 찬탈하려고 시도하다가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장 14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이런 시도를 하다가 바벨탑이 무너졌고 바벨론이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하는 사탄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 절대 진리의 말씀 앞에 기꺼이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반응할 수 있는 순전한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바른 기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그 틈새로 교만이 생겨 변론과 언쟁, 투기와 분쟁, 비방과 악한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절대성을 가진 말씀이 상대적인 모든 존재를 다 품으시는 역설적인 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 모든 성향, 모든 배경의 사람을 품어 주십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큐티 사역을 담당했고, 제 옆자리에 친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역자였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큐티는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위험하지 않냐? 말씀이 절대 기준인데 이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되겠냐?”
그래서 제가 맞는 말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공부는 말씀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고, 큐티 곧 말씀 묵상은 주관적 접근입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 열 명이 한 본문을 놓고 공부하면 대동소이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 묵상은 똑같은 본문을 놓고 열 명이 묵상해도 서로 다른 개인적 적용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의 말씀이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많은 면을 가져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적용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적 말씀이지만 상대성을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교훈의 진리를 벗어나서 “나는 자유하겠다”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합니까, 자유하지 않습니까? 자유합니다. 물속에서 어디든 마음껏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서 “내가 여기서도 자유하겠다”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5절 말씀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고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경건이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을까요?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궁극적 목표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을 세상적 이익을 얻는 도구로 쓰는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거나 물질적 이익을 위해 경건의 모양새를 사용하는 것이죠.
이 부분을 묵상할 때 여러분이 모르는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은 제가 청년부를 섬길 때 찬양팀에서 정말 열심히 섬기는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새벽이든 저녁이든 기도 집회가 끝나면 꼭 싱글 자매들을 기도해 주겠다며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하면 되지 왜 자꾸 다른 데로 데려가느냐?” 몇 번의 제보가 들어와서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건을 가장해 자기 마음과 사심을 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정말 신실하게 나오는 한 사업가도 있었습니다. 너무 신실하게 나오니까 주변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다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투자를 받게 해 수억 원의 사기를 친 적이 있습니다. 경건을 빌미로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그릇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러 종파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바리새파를 가장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경건주의를 표방하면서 신앙 활동을 통해 권력과 재력과 세상적 지위 상승을 노렸던 것입니다.
경건과 이익을 간단히 비교하면 경건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이익은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잘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할 때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예쁘게 열심히 하니까 잘해 주세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내가 잘되기 위해서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경건의 길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어서 가느냐, 아니면 이 경건이 내게 유익이 되기를 원하느냐는 굉장히 미묘한 차이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압니다.
저희가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임직자 훈련을 합니다. 교회 임직 기준을 세우면서 중요하게 결정한 것은 일정 교육과 훈련을 이수했다고 해서, 아무 사역을 하지 않는데 직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신실하고 성실하게 꾸준히 섬김과 봉사의 자리에 있을 때 직분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직분이 이익의 도구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사역을 하지 않아도 소정의 과정만 거치고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집사, 권사, 장로 직분을 받는다면 이것이 감투가 됩니다. 자기 영광이 되고 맙니다.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잖아요.
어떤 교회들은 아예 직분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 사이의 파워 게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지역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장로님이 몇 명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올해 연말에 두 분을 더 세우면 총 네 분이 된다고 했더니, 개척한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왜 이렇게 많이 세우느냐고 하셨어요.
개척 교회는 처음부터 시작이니까 담임목사가 스스로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고 장로를 10년 동안 안 세우는 교회도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장로도 안 세우고 권사와 집사 임직도 안 하며 성도끼리 서로 형제자매라고만 부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형제님이라고 부르고 직분이 없습니다. 이런 교회를 형제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들은 “우리는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주장하지만, 교회사적으로 보면 이단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에베소교회도 초대교회입니다. 그런데 3장, 4장, 5장을 보면 직분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라고 직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있는 것이 꼭 문제가 아니고, 직분을 없앤다고 해서 그것이 해답도 아닙니다. 직분의 유무를 떠나 외적인 것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나 회사나 직분과 직함을 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책임을 주는 것입니다.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자기 권위만 내세우고, 섬기지는 않으면서 누리기만 하려는 사람이 리더십 포지션에 있으면 조직 전체가 어려워집니다.
그렇다고 극단적 평등주의로 가자거나 무정부주의로 가자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 질서의 위계 가운데 가장 높은 포지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꺼이 섬겨 주신 것입니다. 리더의 포지션과 직함이 필요한 이유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섬김을 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안 됩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6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쪽으로 가지 말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경건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자족하는 마음. 자족은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세상적인 것을 얻어야만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상태가 충분히 만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족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 영광과 세상 자랑과 세상 유익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본질적입니까? 오직 예수, 오직 진리,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세상에 무엇이 없어서 마음이 늘 결핍 상태에 빠지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위계질서를 놓고 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있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본질적입니까? 영원한 것이고, 일시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 있다고 합시다. 그 식당에서 한 번 식사할 수 있는 식사권과 평생 무료 식사권 둘 중 하나를 준다면 무엇이 더 좋겠습니까? 평생 무료 식사권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의 뷰포인트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면 세상 영광과 세상 자랑과 세상 유익은 일회권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가치는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소유를 강조하거나 금욕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고, 과도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름휴가철이 되면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다가 휴가철에는 놀고먹고 쉬잖아요. 그러다 보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생각하세요. 한 철입니다. 여름 한 철이 지나가고 인생의 한 철도 지나갑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줄로 믿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의 유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경건은 하나님 한 분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최고로 본질적인 우선순위가 되려면 세상 영광과 자랑이 매우 부수적인 것이라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경건에 이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긴 하지만 저는 성공도 해야겠고, 물질과 명예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반응하실까요? “너는 나만으로 만족이 안 되니? 나만으로 만족이 안 된다면 경건에 이르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라고 반응하실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청년 시절 최고의 랍비 교육과 최고의 헬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태생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가문도 명문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금수저였습니다.
그런 청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고, 인생의 모든 존재의 위계가 뒤집어졌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멋지고 고급스럽게 만들어 주는 사회적 조건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뒤 사도 바울의 인생에서 자족은 엄청난 능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부터 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13절을 엄청 좋아하지만, 11절과 12절을 이해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13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불가능한 미션들을 초월적 능력으로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부요한 극단과 궁핍한 극단, 인생이 살아갈 수 있는 어느 범위에 나를 갖다 놓아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가운데 “저게 무슨 이야기지?” 하고 고민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풍부해도 비천해도, 인생이 평탄하거나 환난 가운데 있어도, 건강할 때도 연약할 때도 일체 만족의 자족의 비결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본질적인 능력을 내게 주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만이 나를 진정으로 강력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이 없게 됩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칩니다. 그럴수록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연약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과 사명을 감당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고, 가난할 때 부요하게 하시고, 무지할 때 지혜를 주시고, 무능할 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전의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7절과 8절을 읽겠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인생에는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이 많지만, 예수님은 의식주를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택과 집중의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살 것인가보다 왜 사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우선순위를 정하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채우십니다.
마지막 두 절을 읽겠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이를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릅니다.
2002년에 배우 김정은 씨가 광고에서 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힘들던 때라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정반대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면 시험과 올무에 빠지고, 거짓되고 해로운 욕심과 탐욕에 빠져 마침내 파멸과 멸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을 하나님처럼 경배하는 물신숭배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마침내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처럼, 모든 중독은 주객이 전도되는 패턴을 보입니다. 사람이 물질을 소유하지만 물질이 물질을 부르고 결국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면 양심과 사회적·법적 기준까지 무시하게 됩니다. 물질이 넉넉하면 좋은 점도 많지만, 물질이 넘치면 향락과 유혹과 타락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돈 문제로 부부와 부모 자식과 형제 사이에 상속 다툼이 일어나고, 보험금을 위해 가족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돈에 사로잡히면 사람도 가족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질이 최고가 되어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십계명도 한마디로 탐심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리더의 자리를 탐하는 권력욕이고, 살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탐하는 것이며, 간음은 다른 사람의 순결을 탐하는 것이고,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하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은 다른 사람의 진실을 빼앗으려는 탐심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답게 대하지 못합니다. 탐심이 나를 압도하면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탐심은 십계명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고 탐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사용하는 수단과 도구인데 이것이 주인의 자리에 올라앉으면 현대인이 짓는 모든 세속적 죄악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집니다.
요즘 땀 흘려 노동하지 않아도 여러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이웃을 진정성 있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맨손으로 와서 맨손으로 떠납니다. 떠나는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이 도구로 허락하신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고 선용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물질을 드리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 물질을 흘려보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물질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사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플로잉도 훈련이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뿐 아니라 영혼에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임합니다.
물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쓰기 시작하면 성경적 물질관이 생기고, 그 가치관과 철학 때문에 소유한 물질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을 이해하셨죠? 목사님이 부자가 나쁜 것이라고 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을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욥 같은 거룩한 부자들이 있습니다. 잠언 10장 4절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근면과 성실로 부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사람의 인생에 복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다만 같은 잠언도 이것이 탐욕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잠언 23장 4절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라고 합니다. 부자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목적이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의사, 파일럿, 우주비행사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는 직종과 상관없이 돈 많이 벌어서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누가 가르쳤겠습니까? 부모와 세상이 가르친 것입니다.
돈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이루고 인생이 가치 있게 쓰임받도록 주신 수단과 도구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면 인생은 망가지게 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사업에 성공한 많은 그리스도인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두 갈래로 갑니다. 한편은 돈과 여유가 생기자 향락과 안일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다른 한편은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기꺼이 쓰고, 이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도 두 갈래로 갑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고, 한때 큰 매출과 부요함 가운데 있었지만 교만과 안일과 탐욕에서 자신을 건지기 위해 하나님이 사업을 가져가셨다고 고백하며 이후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목을 맵니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 존재를 갈아 넣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궁극적 목표냐고 성경은 질문합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주 안에서 성공하고 승리할 수는 있습니다.
식당 열 곳을 창업하면 3년 뒤 남아 있을 수 있는 곳은 한 곳 정도이고, 회사 열 곳을 시작하면 5년 뒤 남아 있을 수 있는 곳은 세 곳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의 성공 확률은 0.2퍼센트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AI에게 대한민국에서 학생이 공부로 성공할 확률을 물으니 2퍼센트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를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인생의 승리는 세상 기준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감사하고 자족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학교도 회사도 불평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불평거리가 늘어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수 있는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아멘.
삶에 감사를 생활화하기 위한 네 가지 실제적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식사할 때 감사기도 하십시오. 오전에 열심히 수고하고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둘째, 아침에 일어날 때 감사기도 하십시오.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도 오늘 하루를 은혜로 채워 주실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십시오. 셋째, 하루를 마치고 잠들 때 감사하십시오. 만족스러운 일도 버거운 일도 있었지만 그 하루를 마무리하고 쉼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마무리하고, 하루 세 번 식사할 때 감사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루에 다섯 번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채워 주시며 은혜로 완성하십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인생을 완성하려고 하면 탐심이나 과도한 집착과 강박이라는 극단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노력의 끝에 탐심이 또아리를 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 노력의 끝에 은혜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가 다시 노력할 용기를 주어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며, 그 도전도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하여 다시 감사하는 선한 선순환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026.07.18(토) | 새벽기도 | 세상의 영광인가? 영원한 영광인가? (겔 26:1-21)
세상의 영광인가? 영원한 영광인가? (에스겔 26:1-21)
- 제목: 세상의 영광인가? 영원한 영광인가?
- 본문: 에스겔 26:1-21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18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심판의 말씀 안에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에스겔 25장부터 32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예루살렘의 무너짐을 기뻐한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킴 없는 회복은 없기에, 두로를 향한 심판은 교만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경고입니다.
2. 두로의 번영은 세상의 영광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강력한 해양 문명이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히람 왕이 백향목과 기술자를 보내 성전 건축을 도울 만큼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두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기 상업적 번영의 기회로 여겼고, 그 마음이 심판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은 여러 민족을 사용하여 두로의 교만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두로는 바다를 통한 교역망과 섬 요새를 의지하며 난공불락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오랜 포위와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을 거치며 본토와 섬 요새까지 무너졌고, 성벽과 건물이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러 민족이 파도처럼 두로를 치는 역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4. 고난도 형통도 하나님을 잃게 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고난 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기 쉽고, 평안과 풍요 가운데서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자체나 형통 자체를 믿음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고난 중에는 하나님이 유일한 위로가 되심을 알고,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5. 물질의 영광보다 생명책에 기록되는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두로가 쌓은 보라색 염료와 무역의 부, 강한 함대와 군사력은 결국 남지 않았습니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백성은 영원한 빛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6. 다음 세대와 열방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의 흥망과 부요함에 사로잡히지 않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름 사역과 아웃리치, 전쟁과 분열 가운데 있는 열방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만이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민족이 하나님을 잃지 않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결론
세상의 영광은 잠시 빛나는 듯해도 하나님 없이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평안, 부족함과 풍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도록 기도합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에스겔 26장 1절에서 21절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열한째 해 어느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구비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내가 또 그 티끌을 쓸어 버려서 그로 말미암아 맨 바위가 되게 하며, 바다 가운데 그물이 펼쳐지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거리가 될 것이요.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보라, 내가 북쪽에서부터 여러 왕의 왕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두로에게로 오게 하되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오게 하리라.
그가 들에 있는 네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대적하여 토성을 쌓으며 너를 대적하여 사다리를 세우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공성퇴를 베풀어 네 성벽을 치며 도끼로 망대를 찍을 것이며, 그 말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그 티끌이 너를 덮을 것이라. 그 기병이 성문으로 들어오기를 파성으로 들어옴 같이 할 때에 네 성벽이 말과 수레와 병거의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할 것이며, 그가 그 말굽으로 네 모든 거리를 밟을 것이며 백성을 칼로 죽이고 네 견고한 기둥을 땅에 엎어뜨릴 것이며, 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요 네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벽을 헐며 네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리고 네 돌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
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 너를 맨 바위가 되게 한즉 네가 그물을 펴는 곳이 되고 다시 건축되지 못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 여호와께서 두로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무너지는 소리와 부상자가 부르짖는 소리와 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하는 소리로 말미암아 섬들이 진동하지 아니하겠느냐. 그 때에 바다의 모든 왕이 그 보좌에서 내려 왕복을 벗으며 수 놓은 옷을 벗어 버리고 떨림을 몸에 두르고 땅에 앉아서 때마다 떨며 너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너를 위하여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항해자들이 사는 유명한 성읍이여, 네가 어찌 그리 멸망하였는고. 바다 가운데에 거주하던 자여, 너와 네 주민이 바다의 모든 거민으로 두렵게 하였더니 이제 네가 무너졌도다 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를 황폐한 성읍 같이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성읍이 되게 하고 큰 물이 네 위에 넘치게 하며 큰 물이 너를 덮게 할 때에,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로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옛적부터 황무한 곳에 거주하게 하여 사람이 다시 거주하지 못하게 하리니,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영광을 나타내리라. 내가 너를 패망하게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 사람들이 너를 찾으나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에스겔 25장부터 32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무너질 때 그 일을 기뻐하고, 그 멸망에 동조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했던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오늘 26장부터 28장까지는 특별히 두로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고, 26장은 두로가 완전히 무너질 것을 상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스겔 말씀을 계속 묵상하면서 붙들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안에도 하나님의 회복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회복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습니다. 돌이킴이 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서 은혜만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두로를 향한 심판의 말씀도 결국은 교만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두로는 지금의 레바논 해안 지역에 있던 도시입니다. 성경에서는 페니키아를 베니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북쪽으로는 두로와 시돈이 있고, 그 뒤로 레바논 산맥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백향목이 많았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백향목은 아주 귀한 건축 자재였습니다. 배를 만들 때도, 궁전과 성전을 지을 때도 중요한 재료였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를 조금 살펴보면, 기원전 2700년경부터 그레데 섬을 중심으로 미노스 문명이 일어났습니다. 바다를 통해 무역하고 문화를 발전시킨 문명이었습니다. 그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를 중심으로 미케네 문명이 나타납니다. 미케네 문명은 전사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면서도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했습니다. 우리가 호메로스의 이야기,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를 들을 때 떠올리는 시대와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기원전 12세기 무렵 지중해 세계에 큰 붕괴가 일어납니다. 기근이었는지, 지진이었는지, 외부 민족의 침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당시의 강력한 문명과 왕국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큰 힘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 공백 속에서 페니키아가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페니키아는 땅의 크기로 보면 아주 큰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항해와 무역을 장악했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까지 식민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페니키아를 고대 최초의 해양 제국이라고도 부릅니다. 바다를 통해 여러 민족과 연결되었고, 온 지중해의 부가 두로로 모였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도 중요한 때였습니다. 다윗은 기원전 1010년부터 970년까지 통치했고, 솔로몬은 기원전 970년부터 930년까지 통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위해 국제 정세와 주변 환경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두로 왕 히람은 다윗에게 백향목과 석수, 목수를 보내어 궁전을 짓도록 도왔습니다. 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두로의 기술자들과 재료들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과 두로는 좋은 관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할 때 두로와 시돈도 함께 교류하며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무너지고, 마침내 남유다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무너집니다.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기원전 597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로부터 11년째 되는 해에 주신 말씀입니다. 바로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포위 끝에 무너진 때입니다. 예루살렘은 약 18개월 동안 포위를 당하다가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두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두로의 눈에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상업적 기회로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면 사람과 물자와 무역의 흐름이 자기들에게 더 많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아픔과 무너짐을 보면서 “내게는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두로의 교만이었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구비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라.” 두로는 바다를 통해 여러 민족을 자기에게 연결했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 민족이 파도처럼 두로를 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던 바다가, 자신들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로의 성벽과 망대를 무너뜨리고, 티끌까지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펼쳐지는 곳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침략하는 군대가 그물을 치듯 포위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과거의 위대한 항구 도시가 무너져 평범한 어촌처럼 그물이나 펴는 곳이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한때의 영광과 권세가 무너진다는 말씀입니다.
두로의 지형을 보면 더 이해가 됩니다. 이스라엘 해안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두로가 있고, 그 위에 시돈이 있습니다. 두로에는 본토의 도시가 있었고, 바다 건너 바위섬 위에 요새화된 도시가 있었습니다. 본토가 무너져도 섬 요새는 버틸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두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난공불락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무너진 기원전 586년 이후 느부갓네살은 두로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두로의 본토를 점령했고, 섬 요새를 무려 13년 동안 포위했습니다. 오랜 포위 끝에 두로는 굴복하게 됩니다.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왕이 아니라 여러 민족이 두로를 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월이 흐른 뒤 더 분명하게 이루어집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공격합니다. 알렉산더는 본토의 도시를 무너뜨린 뒤 그 성벽과 건물의 돌과 재목을 바다에 던져 제방을 만들었습니다. 바다를 가로질러 섬 요새까지 가는 둑을 만든 것입니다.
그 제방은 약 60미터 폭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공성탑을 세우고, 그리스의 수군을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두로를 공격했습니다. 약 7개월의 공격 끝에 섬 요새까지 함락됩니다. 하나님께서 “네 돌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장면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믿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세계를 지배할 것 같던 문명과 제국도 사라집니다. 영원할 것 같던 경제력과 군사력도 무너집니다. 두로와 페니키아의 화려했던 영광도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는 길입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던 것처럼, 고난이 오래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또 하나는 너무 편안하고 풍요로워서 하나님을 떠나는 길입니다. 갈등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전쟁도 없고, 내 힘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기도할 필요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느냐, 형통하느냐만으로 믿음이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기적적으로 건져 주실 때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전, 아직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유일한 위로가 되시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평안하고 형통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 “내가 잘해서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고난 가운데서나 평안 가운데서나 하나님을 잃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잠언 30장에는 야게의 아들 아굴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구합니다. 거짓과 허탄한 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고 하고,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며 필요한 양식만 먹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풍족해서 “여호와가 누구냐” 하며 하나님을 부인할까 두렵고, 너무 가난해서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부자가 되지 않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겠다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잘되든 어렵든,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이 땅에서도 내세에서도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붙들고 산다면 부족한 가운데서도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부모님들이 가장 마음 아파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교회도 다니고 하나님을 경험한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은 매우 긴급한 문제라고 말씀드립니다. 필요하다면 빨리 상담도 받고, 함께 기도하며 자녀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평생 누릴 가장 큰 복은 좋은 조건을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풍요 중에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두로는 재물과 무역한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페니키아와 두로, 시돈은 보라색 염료로도 유명했습니다. 당시 보라색 옷은 왕족과 귀족들의 상징이었고, 이 염료는 매우 귀했습니다. 두로는 지중해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쌓았고, 그 재물과 보물을 섬 요새로 옮겨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빼앗기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는 잠시 붙드는 것처럼 보여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로가 자랑하던 보물도, 함대도, 성벽도, 사람을 두렵게 하던 명성도 남지 않았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면 바다의 왕들이 두로의 멸망을 보고 떱니다. 그토록 강하던 두로와 페니키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에서 말하는 구덩이는 스올, 곧 죽은 자들이 내려간다고 여겼던 사자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토록 위대해 보이던 도시도 결국 황무한 곳이 되고, 그 영광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7절은 두로를 향하여 “항해자들이 사는 유명한 성읍”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도시 국가였지만, 돈으로 강한 함대를 만들고 항해자와 군사를 고용하며 온 바다의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도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두로는 옛날 그 두로의 영광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나라와 도시와 기업도 그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겨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주님 안에 있는 백성은 영원한 나라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은 말씀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세상의 영광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빛 가운데 누리는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잠시 빛나는 두로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오늘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유년부와 소년부가 여름 사역을 위해 출발했고, 날씨 때문에 실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다음 주에는 어센트 청년부가 아웃리치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이 세상의 흥망과 힘과 화려함과 부요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며, 끝까지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음 세대가 만나야 합니다. 이번 여름이 단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가정과 자녀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반전의 은혜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은 계속 흔들립니다. 전쟁과 기근과 재난의 소문이 들립니다. 미국과 중동, 이스라엘을 둘러싼 갈등이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알고, “나는 여호와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하시고, 평안과 풍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삶과 역사 속에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유년부와 소년부의 여름 사역 가운데 함께하여 주시고, 다음 주 어센트 청년부의 아웃리치 가운데도 복음을 전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참가자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하시고, 말씀과 기도로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전쟁 가운데 있는 열방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미국과 중동, 이스라엘을 둘러싼 갈등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가운데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고, 각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중동 땅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평화를 이루는 자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분열된 가정과 교회와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고,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6.07.12(주) | 주일설교 |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나요? (딤전 6:1-2)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나요? (디모데전서 6:1-2)
- 제목: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나요?
- 본문: 디모데전서 6:1-2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12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하나님은 제도만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신다
바울이 종들에게 상전을 공경하라고 권면한 것은 노예제를 지지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은 종의 인권을 보호하고 안식년과 희년에 자유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평등법을 담고 있으며, 신약은 종과 주인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대하게 한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된 사람이 세상을 바꾸게 하신다.
2. 사람 앞에 서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사무엘은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 앞에 있었지만, 성경은 그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를 섬겼다고 기록한다. 일터의 상사와 환경을 넘어 나를 그 자리에 부르시고 선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일이 된다. 성도는 세상의 경쟁이나 사람의 눈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3. 해야 하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인생의 딜레마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다를 때 커진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 속에서 익힌 관리와 협력의 능력은 후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는 기반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만의 강점을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 편안함만 추구하는 삶은 성장의 날개를 얻지 못하지만, 수고와 훈련의 시간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날아갈 힘을 준다.
4. 일은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의미와 사명을 발견하는 자리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므로 자신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자리에서 창의적으로 일하며, 직장과 고객과 가족을 살리는 구원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궁극적인 행복은 순간적인 재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미를 발견할 때 지속된다.
5. 자원하는 섬김은 자율성과 주도성에서 나온다
본문의 "더 잘 섬기게 하라"는 단순한 의무를 넘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섬김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선한 일을 시작하는 주도성으로 나타나며, 이는 리더와 동료와 고객 사이의 협력을 세운다. 시키는 일만 기다리는 삶은 삶의 폭을 좁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자기 사명으로 받아들일 때 일은 나의 꿈이 된다.
6. 그리스도 안에서 종노릇을 벗어나 왕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
평등과 자유가 무너진 노동은 오늘날에도 사람을 종처럼 묶을 수 있다. 사탄은 사람이 죄와 중독에 매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반복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녀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선한 일을 선택하며 왕 노릇하기를 원하신다. 쾌락주의가 주도성과 인내를 약화시키는 시대일수록,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결론
성도는 육아와 직장 생활과 모든 인생의 자리에서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자원하여 펼치는 왕의 자녀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창의성, 주도성, 자율성, 생산성이 새롭게 솟아난다. 일을 단지 견뎌야 할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과 동역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는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나요?”입니다. 디모데전서 강의 15번째 시간이고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 보면,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 6장 1, 2절을 읽었는데요. 바로 앞 5장에서는 가정과 교회에서 성도들의 역할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6장 서두에 자연스럽게 노예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연스럽게라고 표현한 이유는 로마 제국 인구의 3분의 1 내지 절반이 노예였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숫자가 노예였을까요? 로마 제국이 확장하면서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 약소국에서 팔려 온 사람들, 채무 관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 또 노예의 자녀들이 계속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노예의 숫자가 끊임없이 늘어났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데, 에베소는 로마 제국의 5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고위층도 많고 부유층도 많은 만큼, 사회 안에 노예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라는 초대교회 안에도 노예 신분을 가진 교인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종들은 상전을 공경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종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의문이 시작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이 노예제를 반대하거나 폐지하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하는 분위기로 보이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보라통 Q&A 구약편을 집필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꼭 보세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요한 포인트를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모세오경은 포괄적인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종의 인권을 보호하는 여러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1차 산업 시대입니다. 큰 규모의 기근이 오거나 큰 전쟁을 치르고 나면 경제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 경제적 해결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소유물을 팔아서 곡물을 사고, 그것도 안 되면 부동산까지 팔고, 부동산을 다 팔았는데도 경제력이 없으면 결국 자기 몸을 팔아 노동력을 제공하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예제도는 최빈곤층을 건져 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예제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오잖아요.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제재하면서 안식년과 희년에는 노예를 자유인으로 복귀시키는 하나님의 평등법을 적용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종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오다 보니, 성경은 왜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말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구약 성경을 보면서 일관되게 발견한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은 노예제도만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러분이 회사나 어떤 기관에서 일을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좋은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빌레몬서 1장의 경우에는 골로새교회에 많은 종을 거느린 지주였던 빌레몬에게, 집에서 도망 나갔던 종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받아 주라고 합니다. 또 에베소서 6장에서는 종들에게 진심으로 성실한 마음과 진정성을 가지고 주인을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이런 상호 존중과 평등의 성경 사상 때문에, 성경 어디에도 노예제를 폐지하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없는데도 기독교가 들어간 곳마다 노예제 폐지 운동과 노예 해방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 영혼을 바꾸셔서 그가 세상을 바꾸도록 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대와 구조적인 문제를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1절 위의 두 줄만 다시 읽어 볼까요?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종들은 상전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당연하게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 리더를 공경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살아갈 때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청년부 사역을 5, 6년 했는데, 청년부 스몰그룹을 하다 보면 깔때기 이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본문과 상관없이 매일 결론이 두 가지로 납니다. 첫 번째는 연애와 결혼입니다. 주 관심사니까요. 두 번째는 뭘까요? 직장 상사를 욕하는 것입니다. “그 상사가 나를 너무 괴롭혀서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일터에서 상사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나를 이곳에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이곳에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 일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지금 사람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일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때문에 일하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이 생각을 할 때 항상 떠오르는 본문이 사무엘상 3장 1절입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 아이 사무엘이 누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습니까? 엘리를 섬긴다고 되어 있지 않고 여호와를 섬긴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젖 떼자마자 성소에 갔다 놓은 아이잖아요. 무슨 결정권이 있습니까? 자기가 무엇을 결정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를 보호해 줄 가족도 부모도 지인도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이미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 제사장과 계속 사고를 치는 두 아들뿐이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좋은 마음으로 자녀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성소에 갖다 놓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악한 이들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 사무엘을 보면서 그가 어려서부터 명확한 감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사무엘상 3장 1절을 보십시오. 아이 사무엘 앞에 있는 사람은 엘리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이고, 자기 아들들의 사고를 묵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 앞에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이 자기 정체성이 명확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어렸을 때 책 읽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공부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나서 제 인생에 꿈과 목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For the glory of God.” 이 말을 책상에 써 붙여 놓았습니다. 그것이 꾸겨지거나 흐려지면 다시 명확하게 써서 붙여 놓고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의 호령이 무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이 계시다니, 내가 이 하나님을 위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사람의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세상 경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제가 전임 전도사가 되었을 때, 교육 전도사나 파트타임 전도사 때나 전임 전도사 때나 전도사라고 부르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확하게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명함이 나옵니다. 전임 전도사가 되는 순간 명함을 만들어야 하니까 영문 이름과 부서 등을 써 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명함이 나오기까지 한 달 동안 열심히 명함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명함에 어떤 글자가 새겨지면 좋을까? 어느 교회 전도사, 어느 부서를 담당하는 전도사라는 말이 좋은 것일까?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어시스턴트, 내가 드디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공식적인 명칭이 나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어시스턴트라는 말 자체가 엄청 가슴 벅찼습니다. 그래서 전임 교육자가 되고 나서 눈치 보면서 일하지 않았고, 시켜서 일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불철주야 헌신적으로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한 기업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표는 그리스도인인데 직원들은 그리스도인이 있기도 하지만 거의 다 아니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제일 힘듭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도 힘들고 듣는 그들도 힘듭니다. 그래서 대표님이 기독교를 인문학적으로 강의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눈높이에 맞춰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는 직원들이 일에 관한 것이든 인간관계든 심리 상담이든 신앙적인 것이든 먼저 질문하면 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강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서른다섯 개의 질문을 받았는데, 오늘 두 가지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일을 하는 중에 30%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인데 70%는 내가 하기 싫은 일, 내가 싫어하는 일입니다. 제가 이 일을 계속해야 될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이 3 대 7이라면, 이것이 거꾸로 7 대 3이 되는 직장을 알아보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첫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인생에 딜레마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다를 때 인생은 큰 딜레마에 빠집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은 그러면 완전히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유형의 사람들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율성이 강한 사람,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하고 싶어” 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버겁습니다. 저희 집 아들들을 키워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맛이 있든 없든 먹어 주는 아들이 있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 아들이 있습니다. 다릅니다.
저는 그 질문을 보고 질문자가 후자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이 정말 안 좋아서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율성이 강한 후자 유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자 유형이라면 두 가지를 생각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첫 번째는 해야 하는 일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이 받쳐 주는 일반적인 제반 업무 능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력 관리나 시설 관리처럼 관리해야 하는 잡무가 많잖아요. 그런 것들이 나중에 다 도움이 됩니다.
두 번째는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강화해서 자신만의 강점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동의하시나요? 아멘까지 하실 것은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성공하려면 노력해야 하는데 행복하게 노력하는 방법이 없겠느냐?”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원하는 것은 성공이고, 해야 하는 것은 노력인데, 하고 싶은 것은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간에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냥 편안하게 행복하게 지내면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요?
물론 간혹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로또가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얻는다든지, 부모님이 알려 주지 않았던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는다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결론이 대체로 행복해집니까, 불행해집니까? 불행해지지요.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빠져나가고, 내가 땀 흘려 벌지 않은 것은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예시를 하나 들었습니다. 원하는 것은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허물을 벗는 고통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은 행복한 애벌레로 그냥 지내는 것입니다. 이 나비 애벌레가 멋지게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싶지,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 허물을 벗겨 주면 날아갈 수 있습니까? 날아갈 수 없습니다. 허물을 벗는 고통의 시간이 있어야만 날개의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자신을 격려해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나는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동의가 되시죠? 이제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청소년들을 만나면 청소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학업 스트레스, 성적, 진로, 대학 입시입니다. 마냥 즐거워야 할 아이들이 너무 버거워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업 스트레스가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공부가 재미있어지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지금 말이 되는 소리냐,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려고 목사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되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인생의 큰 딜레마와 장애라는 것을 알면서도 건너지 못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장마철에 태풍이 올라올 때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는 무풍지대잖아요.
자녀들에게 “너 왜 공부 열심히 하니?”라고 물어보십시오. 직장 다니는 부모들은 어떨까요? 여러분,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면 일을 그만두고 놀고먹으면 될까요? 아니면 일을 억지로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일이 재미있어지면 해결됩니다. 여러분도 침묵하시잖아요. 아이들만 탓하지 마세요.
이것이 굉장히 불가능해 보이지만 진리입니다.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사람은 직장 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결국 자기 사업을 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자기 사업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되어질 수 있을까요? 제가 일에 대해 묵상하다가 찬양 한 곡이 떠올랐습니다. “주가 일하시네.” 주님을 신뢰하는 자를 위해 주님이 계속 일하고 계신다는 찬양입니다. 너무 감사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 찬양을 하면 주님이 기분이 안 좋으실 것 같아요. “너희는 일하고 싶지 않으면서 나에게 계속 일하라고 하느냐?” 주님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들어 놓으시고 천상 라운지에서 혼자 누워 놀고 계신다면, 우리는 굉장히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위기로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성실하게 운영하시고 감당하시기 때문에 일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하게 만들고 나는 놀고먹는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7, 8월 휴가 시즌에 제가 무슨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인가, 왜 이 본문이 여기 나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분, 여름휴가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다녀오신 뒤에 일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시편 121편 4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24시간 근무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도 읽어 볼까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일을 행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일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직장에서 일 만드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잖아요. 기본 업무가 있는데 왜 또 일을 만드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을 만들어서 결국 그것을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고백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구원을 위해, 나의 인생의 완성을 위해 매순간 쉬지 않으시고 계획하시고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최고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일하게 만들고 나는 쉬면 될까요?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일하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구원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역사를 완성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분야에서 창의적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일은 그냥 루틴인데요”라고 할 수 있지만, 제가 드리는 말씀은 새로운 마음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일할 때 사람은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내 일을 통해 누군가를 구원해 내는 것, 직장을 살려 내는 것이든 고객을 살려 내는 것이든 내 가족을 살려 내는 것이든, 일을 통해 구원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길 끝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완성을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 그분의 창조하심과 구원하심과 완성하심을 내가 닮아 가는 것이고 동역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를 보면서 사람들이 왜 일의 가치를 점점 하락시킬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쾌락주의 시대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성공주의 가치관일까요? 성공주의보다 더 근간에 있는 것은 쾌락주의 가치관입니다.
성공해야 물질을 확보할 수 있고, 물질을 확보해야 편안하게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하면 쾌락입니다. 그리고 쾌락을 쉽게 한마디로 말하면 재미입니다.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행복의 방해가 된다는 관점이 있고, 일은 행복의 도구일 뿐이라고 도구로 전락시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단순히 물질이나 쾌락을 얻기 위한 과정이나 수단이 아닙니다.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도 아닙니다.
제가 방금 전까지 하나님이 일하심을 우리가 닮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가족과 친구도 필요하고 좋은 결혼과 좋은 공동체도 필요합니다. 자기 일에 성공해서 보람이 있으면 더 좋겠고, 나중에 건물주가 되면 더 좋겠지요.
이런 요소들이 행복을 위해 단기간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과하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소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그런 것을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속적인 행복을 위해서는 재미가 아니라 의미가 필요합니다. 재미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루해지고 싫증이 나고 허무해집니다. 그런데 의미는 오래도록 재미있게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은 의미를 창출하는 데 엄청난 힘이 되고 근간이 되어 줍니다. 일은 “내가 그래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구나.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사명 때문에 태어났구나”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낳아 다윗과 같은 예배자로, 에스더와 같은 기도자로, 다니엘 같은 인물로 키워 내는 것은 그냥 억지로 떠맡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내게 주신 재능과 열정으로 일터에서 일하며 세상에 누군가를 살려 내는 일도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재미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단순히 재미를 위한 도구나 과정으로 전락시키지 말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1절이 끝났고요. 2절을 한번 읽어 볼까요?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바울이 일 이야기를 하다가 한 가지 특별한 상황을 말합니다. 교회에 나와 봤더니 내 주인도 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이 함께 한 교회 교인이 된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제 주인이 나를 좀 봐주겠지. 내가 그냥 대충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나의 섬김이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자녀를 이롭게 한다면 내가 더 잘 섬겨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지점에서 고대 노예제도와 현대 고용제도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조사를 해 보니 공통점이 있습니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산업 구조라는 점, 주인과 종이냐 고용주와 고용자냐의 차이는 있지만 주종 관계가 있다는 점은 유사합니다.
그런데 노예제도와 고용제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평등과 자유. 고대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주인보다 하등한 존재였고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용주와 고용자는 법 앞에서 평등합니다. 참정권과 인권과 기본권에 있어서 동등합니다.
또한 노예에게는 거주와 이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 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내일은 다른 집에 가야지”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용자는 거주에도 자유가 있고 이동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이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으면 다른 회사에 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고용제도 안에서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평등이 깨지거나 자유가 박탈되면 현대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 직장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권을 발휘한다는 것은 일터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어떤 인문학 강사는 그의 사상을 제가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직장인을 출퇴근하는 노예라고 부르면서 노예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노예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제가 오늘 강조한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갈등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나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데 그가 원하는 일,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나요?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노예인가 자유인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로 자가 진단을 해 보시라고 다섯 개 문항을 만들어 봤습니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면서 일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하고 있다. 심지어 내 신앙 양심상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그 일을 해야 한다. 생계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 이 일을 왜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데 이유를 모르는 일을 하고 있다. 두세 가지가 적용된다면 회사의 문제이든 상사의 문제이든 개인의 문제이든, 출퇴근하는 노예일 가능성이 상당히 큰 것입니다.
자유가 없고 의미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6장 1절에서 마땅히 공경하라는 것은 당위성입니다.
그런데 6장 2절을 보면 이런 사람들을 더 잘 섬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잘 섬기라는 것도 당위성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자율성입니다. 해야 하는 기본값을 하는 것까지는 당위성이지만, 그것보다 더 잘하려면 내가 자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너 더 잘하면 좋겠다”는 말은 자원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5, 6절에도 종들에게 한 이야기가 있는데 똑같은 구조입니다.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당위성입니다. 그런데 6절에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마음의 밑바닥으로부터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지” 하는 것은 자원함입니다. 이것은 자율성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까 전임 전도사 때 명함 묵상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전임이 되고 나서 하루 종일 교회 사무실에서 여러 명이 앉아 일할 때 제 마음에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 리더의 일을 내 일보다 우선으로 처리해 드리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제 담당 목사님의 업무부터 해결해 드리고 퇴근시켜 드린 다음 제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거의 반년에서 일 년을 지나니까 기뻐하는 리더의 뒤에 웃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더라고요.
직장에서 일해 보시면 알잖아요. 자기가 맡은 일을 다 하는 것도 사실 버거울 때가 많은데, 이렇게까지 일하려면 일에 끌려다니며 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주도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리더의 비전을 내가 더 구체화해 주고 더 확장해 주는 기획을 하고 추진한다면, 그 일이 그의 꿈이 아니라 나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조직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비전, 나의 사명, 내가 애정을 가지고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말에 일 생각 안 하고 좀 쉬려고 나왔는데 목사님은 설교 내내 일 이야기만 하신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히 일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주도성은 영적 관점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세상에 어떤 것이 있어도 인간답지 못하고 결국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수많은 동물의 이름을 다 마음대로 짓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좀 유치하지 않니? 이상하지 않냐?”라고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다 혼자 하게 하셨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주도성.
제가 좋아하는 주도성의 영어 단어는 이니셔티브입니다. 시작한다는 뜻이잖아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이 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내가 시작하는 일, 그것이 주도성입니다.
주도성을 가지면 자율성이 보장될 뿐 아니라 나의 윗사람, 동료, 고객, 밑에 있는 사람들과의 협력이 반드시 향상됩니다. 반대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자율성이 없습니다. 리더가 일을 시킬 때까지 안 하고, 동료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도 시킬 때까지 안 합니다. 따질 때까지 일을 안 합니다. 그러면 같이 일하기 어렵습니다.
협력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결국 자기 입지를 줄어들게 만듭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내가 먼저 이니시에이션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인생이 계속 좁아지고 하기 싫은 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옵니다. 결국 그 일조차도 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사탄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기를 원합니다. 죄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종의 중독 현상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것을 계속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계속하면서 거기에 매여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면 안 되는 일에 매여 사는 것, 이것이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망가뜨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천국의 그림은 무엇입니까? 계시록 22장 5절은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왕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탄은 우리를 종노릇하게 만들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나의 꿈으로, 나의 소망으로 생각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 사무엘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리고 제가 29년 사역해 보니까, 일터에서 여러분의 직책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파트타임이고 아르바이트고 말단 직원이어도 자율성과 주도성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그래서 이제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고된 일이나 부당한 일이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저는 시대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쾌락주의 사상이 마치 영혼에 설탕물을 들이붓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음식을 거부하게 만들고 체질을 변하게 만듭니다.
쾌락주의라는 사상에 중독되면 인생과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상실됩니다. 수고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불로소득으로 쉽게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대가 지불은 적게 하면서 행복이라는 목적과 목표에 이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성비 인생입니다.
가성비 맛집에 가서 먹어 보십시오. 딱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맛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내가 값을 지불하고 희생하고 헌신한 만큼 훨씬 더 깊이 있는 가치와 의미가 창출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뜨겁게 경배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영적 자율성과 주도성이 몰라보게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나님 없이 인생에 의미 없이 살다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나서, “와, 이분을 위해 내가 목숨 걸고 살아야겠다”는 결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아도, 인생에서 폭발적인 힘이 생기고 기적적인 에너지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입니다.
배우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이 사람을 위해 평생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소중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를 위해 평생 헌신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선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여러분의 인생에 상상하지 못했던 내면의 놀라운 창의성과 주도성과 자율성과 생산성이 터져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절대로 종노릇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왕 노릇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육아를 하는 분들, 억지로 하지 마세요. 직장 다니는 분들, 억지로 하지 마세요. 인생 살면서 억지로 살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살아 봤던 사람이고, 죽지 못해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여러분이 정말 자원해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여러분이 살고 싶은 인생을 펼치며 왕의 자녀답게 존귀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026.07.11(토) | 새벽기도 |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가? (시 115:1-8)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가? (시편 115:1-8)
- 제목: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가?
- 본문: 시편 115:1-8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11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구원의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시편 115편은 출애굽의 구원을 찬양하는 이집트 할렐에 속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이 사람의 능력이나 의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 모세와 아론의 연약함,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에도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진실하셔서 약속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의 기본값이다.
2.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다
열방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답한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갇힌 분이 아니라 이를 창조하시고 영원 가운데 계시는 분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부재가 아니라 만물과 만민을 주관하시는 초월성을 드러낸다.
3. 사람이 만든 우상은 무능력하며, 그것을 의지하는 자도 무기력해진다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은과 금일 뿐이어서 말하고 보고 듣고 걷고 행동할 수 없다. 이를 의지하는 사람은 우상처럼 어리석고 무기력해지며, 주술과 점괘에 의존할수록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살아갈 힘을 잃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물질이나 주술 앞에 엎드리면 스스로 그 수준으로 내려가게 된다.
4. 우상숭배의 뿌리는 자기를 위한 신앙, 곧 자기숭배다
십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지만, 우상숭배는 귀신을 달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시도이며 결국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영적 나르시시즘이다. 사탄이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유혹했지만, 그 결과는 탁월함이 아니라 타락과 심판이었다.
5. 자녀에게 가르칠 길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세상은 젊은 세대에게 경쟁에서 이기고 자기 꿈과 영광을 위해 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과 자녀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성공과 물질과 권력을 숭배하면 인생은 유한한 것에 매여 허무해지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 의로우심을 닮아 간다.
결론
사람은 더 많이 성취해야 존귀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지음받은 존재다.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으며, 그 은혜의 감격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건강한 신앙의 순서다. 성도는 자신을 고양하기 위해 사는 삶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시편 111편부터 118편까지는 이집트 할렐이라고 부릅니다. 115편도 여기에 포함되죠. 출애굽의 구원을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들입니다. 이 찬양의 내용들을 보면서 배경이 이렇게 되는구나 알고 시편을 낭독하면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많이 됩니다.
1절 말씀 한번 읽어 볼까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심으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아멘.
시편 기자가 갑자기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두 번 반복하면서 강조합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역사가 모세나 아론의 능력이 출중해서인가요? 아니죠. 원래 굉장히 연약한 자들이죠. 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신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하고 의로워서인가요? 이것도 절대 아니죠.
그러므로 인간은 출애굽의 역사 가운데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능력, 오늘 1절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그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취할 수 없는 거죠.
신명기 9장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이스라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고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민의식이 생겼나요, 안 생겼나요? 생겼죠. 선민의식이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이 취한 것인가요, 안 취한 것인가요? 취한 거죠. 하나님께 전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 구원의 은혜의 이유를 마치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자기들이 잘나서, 자기들이 영적으로 탁월해서 그 은혜와 기적을 체험한 것처럼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호가호위라고 하잖아요. 호랑이 앞에 여우처럼 호랑이의 위세를 자기 것인 양 업고 다니는 거죠. 하나님의 영광을 취한 겁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자기숭배라고 하는데, 셀프 워십이죠. 내가 나를 드높이는 거예요.
현대인들이 자기 PR을 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자아실현하려고 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잖아요. 이것을 영적인 배경으로 놓고 보면 셀프 워십, 자기숭배인 거죠.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이사야 42장 8절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는 그분만 오직 높이며 인생을 사는 거죠. 저희가 4321워십팀 워십 미니스트리를 하는데, 이사야 43장 21절도 읽어 볼까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이것은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쁜 것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죠. 우리가 자녀를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시고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어 주신 부모님께,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어버이날에 감사하는 것은 기특하지만 당연한 거잖아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기본값, 디폴트값이죠.
다시 1절을 한번 보여 주시면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왜냐하면 오직 주님께서 인자하시고 진실하셔서 이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고백이죠.
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뭇 나라가 “너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뭇 나라, 그래서 열방이라고 하면 요즘은 좀 어려운 한자가 됐죠. 요즘 MZ세대는 한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열방이라고 하면 어려운 말이 됐지만, 열방을 뭇 나라로 번역한 거예요. 뭇 나라가 이해가 더 쉬우신가요? 뭇 나라도 약간 옛날식 표현이라 글쎄요. 하여튼 이방 국가들,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희 하나님 그렇게 찾더니 너희 하나님 어디 계시냐”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하비루, 하비루가 난민이라는 뜻인데 하비루에서 히브리 민족이라는 이름이 나왔죠. 지극히 비천하고 곤고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출애굽의 역사를 배경으로 가진 이스라엘이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놀라우신 하나님이시다”라고 늘 자랑하며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2절의 상황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느 시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 어느 시점이겠죠. 남유다가 망하기 직전이든 망한 이후이든, 주변 국가와 민족들이 “너희가 찾는 그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시다는 거냐” 이렇게 그들을 조롱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2편 말씀이 떠올랐는데요. 1절, 2절, 8절, 11절 네 절을 제가 읽어 볼게요.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렇게 열방이 시끄럽게 떠들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백성을 대적할지라도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아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아멘.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물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자신의 명예를 의지하는데,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맨날 하나님을 자랑하더니 그런 처량한 신세, 처량한 꼴이 되고 나서 너희가 찾는 하나님 어디 계셔서 너희를 도와주시는 거냐”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뒤이어 나오는 내용들은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 민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문제를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키는 열방을 향해서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하면 열방을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이렇게 물어봤는데, 3절에 대답합니다. 3절 같이 읽을게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아멘.
이 땅의 제단에서 섬기는 우상들과 하나님은 다르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고, 만물과 만민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세상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 단지를 자기들이 끌어안고 있는 거니까 우상은 가시적인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비가시적인 분이잖아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제가 갑자기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 마니교 신자들이 세상의 창조를 부정하고 유출설을 주장하며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이었는데, 이 마니교 신자들이 어거스틴에게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다시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라는 공간이 하나님의 창조로 생겼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태초 이전에는 천지라는 공간 자체가 없을 때 하나님이 어디 계셨느냐? 이렇게 질문하면 어거스틴이 대답을 못 할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어거스틴은 우문현답을 하게 됩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이 천지라는 공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태초라는 시간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존재하기 시작한 거예요. “In the beginning”, 태초에, 첫 시작에. 그러니까 태초라는 시간과 천지라는 공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시공간 세계, 3차원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에 어디 계셨느냐?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도, 지금도, 종말 이후에도 영원이라는 세계에 계셨고 계시며 계실 것이다, 이렇게 답변한 거예요. 그래서 현대 물리학의 이론적 근거를 5세기의 어거스틴이 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도 어거스틴을 연구하고 인정하거든요.
완전히 다른 차원, 차원의 법칙상 다른 차원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이야기를 한 거죠. 세상의 우상들과 하나님은 다른 차원에 계신다는 것을 시편 115편 기자도 똑같이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다고 너희를 도와주시냐?”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4절부터 7절까지는 우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절에서 7절 제가 읽어 볼게요.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왜 오늘 큐티 본문은 이런 것이 나와서 묵상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럴 수 있겠죠.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가?”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우상에 대한 이야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족속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하고 하나님 백성을 공격하니까, 역으로 그들이 믿는 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역공에 해당이 되는 거죠. “그럼 너희가 믿는 우상들은 어떠냐?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 아니냐? 말도 못 해, 보지도 못해, 듣지도 못해, 걷지도 못해. 무능력 그 자체고 허망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죠.
구약에서 우상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형용사가 “헛되다”예요. 헛된 우상, 헛된 것을 섬긴다, 허망하다, 이런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번역한 책인데 『오직 예수』 1권에 보면 이런 예화가 나와요. 인도 사람들도 우상을 많이 섬기죠. 힌두교는 하여튼 모든 것을 우상으로 섬기거든요. 그래서 샤머니즘을 고등 종교화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동물도 섬기고 사람도 섬기고 벌레도 섬기고 다 섬깁니다. 인도나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인구 숫자보다 우상 숫자가 더 많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그런 인도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우상을 놓고 섬기는 거예요. 큰 우상과 작은 우상을 놓고 매일 아침 아버지가 출근하기 전에 그 앞에 예물도 바치고 향도 태우고 엎드려 절도 하는 거예요. 그것을 어린 아들이 계속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서 작은 우상 단지를 몽둥이로 깨부신 거예요. 큰 사고를 쳤죠. 그리고 그 몽둥이를 큰 우상의 손에 딱 올려놨어요.
아버지가 퇴근하고 나서 화가 났을까요, 안 났을까요? 엄청 화가 난 거죠. 집에서 사고를 칠 사람은 아들밖에 없으니까 아들을 불러다가 엄청 혼냅니다.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냐? 어떻게 이 우상을 이렇게 부술 수가 있냐?”
그랬더니 아들이 “아니요, 제가 부순 게 아닙니다. 이 큰 우상이 몽둥이를 들어서 작은 우상을 부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니, 아버지에게 거짓말까지 하다니. 우상이 어떻게 움직여서 부수냐?”라고 했더니, 아들이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꼼짝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뭘 그렇게 매일 아침 열심히 섬기시냐”고 말한 거예요.
맞는 이야기죠. 그 아들이 지혜롭지 않나요? 그런데 허망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헛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 마지막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똑같아진다는 거예요. 우상을 만드는 사람,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우상과 똑같아진다. 어리석어진다. 인생이 허망해진다. 그리고 무기력과 무능력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점집에 다니고 무당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무당을 선생님, 인생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러면 종교적 중독이고 영적인 중독 현상인데, 알코올중독에 빠지면 인생이 허망해져요, 안 해요? 허망해지게 되어 있죠. 강력한 순간의 자극에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거든요. 우상숭배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무당에게 부적을 받거나, 무당에게 조언을 받거나, 세게 굿판을 벌이거나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아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거잖아요. 우상을 만드는 자와 의지하는 자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 이런 무기력과 무능력에 빠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무당 찾으면 돼요, 안 돼요? 교회를 다니시는 성도 여러분, 무당 찾지 마시고 점치러 가지 마시고 부적 갖고 다니지 마시고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요즘 『김 부장』이라는 드라마가 유행이더라고요. 저는 본편은 보고 싶어도 안 봐요. 그런데 줄거리를 보니까 주학건설 주강찬 회장이 김 부장의 딸을 괴롭히는 여학생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깡패들을 의지하잖아요. 여러분, 대기업의 회장이면 뭐 하겠습니까? 깡패들을 의지하면 그도 깡패인 거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면 뭐 하겠어요? 자기보다 존재의 위계상 저 아래에 있는 물질 덩어리를 갖다 놓고 그 앞에 엎드리면 자기도 그 수준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본인이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어도 어떤 주술의 힘을 빌려서 강해진다 할지라도 그 수준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오늘 설교의 제목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가?” 여러분, 인간이 우상을 왜 만들 것 같으세요? 오늘 사실은 본문 처음에 힌트가 나온 건데,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거예요.
출애굽기 20장 3절과 4절 말씀, 이게 십계명 제1계명, 제2계명이죠.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4절에 보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표현이 뭐예요? “너를 위하여.” 절대자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앙은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어요? 하나님께 있어요. 그런데 우상숭배는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을 것 같아요? 자기에게 있는 줄 알아요. 왜냐하면 귀신을 얼르고 달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타내는 거예요.
사람이 우상을 왜 만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만드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맨 처음에 이야기한 셀프 워십입니다. 자기애, 일종의 영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뱀을 통하여 사람을 미혹할 때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자기 고양, 자기숭배죠. 셀프 엘리베이션, 셀프 워십이에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인생이 더 탁월해졌어요? 뱀과 같이, 사탄과 같이 심판과 저주와 타락에 이르게 됐어요.
우상숭배하면 우상을 얼르고 달래서 내가 파워풀해지기를 원하는 거거든요.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우상처럼 인생이 허망해질 거다, 이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묵상하다 보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셀프 워십이 굉장히 강한 거예요. 어떻게 되든 자기를 갈고닦아서 자기를 고양시키고, 자기를 세상에 알리고, 자기 꿈을 이루고 자아실현하려는 거잖아요.
여러분, 토요일에는 우리 자녀들과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하는데 오늘날 젊은 세대, 우리 자녀 세대에게 끊임없이 하는 메시지가 뭘까요?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 너 다른 사람하고 경쟁해서 무조건 이겨야 되는 거야. 그래야 성공을 이룰 수 있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려고 하지 마. 다른 사람 섬기려고 하지 마. 다른 사람 어줍잖게 돕지 마.”
시험 기간에 친구가 힘들다고 하면 꼭 왜 친구는 시험 기간에 힘든지 몰라. 시험 기간에 상담해 달라고 하는 친구들, “야, 나도 공부해야 돼. 애가 죽고 싶다고 하든 말든 나는 내 공부해야지.” 여러분, 그렇게 아이들을 비정하게 키워 놓잖아요. “너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라. 네가 지금 그렇게 냉정하게 살아야만 앞으로 너의 인생이 영광스러워지는 거야.”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려고 하지 마라, 그런 아이들 신경 쓰지 말고 잘나가는 아이들하고 다녀야지. 부모가 온통 자식에게 셀프 워십을 가르쳐요. 자기숭배를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도 그런 삶을 살면 안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가르쳐야 되고, 너는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라, 우리가 평생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의 존재 이유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면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물신을 숭배하고 세상의 성공과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면 딱 그 수준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고 화려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지만 당신의 인생을 반드시 허무하게 만들 거다. 그렇잖아요. 유한하잖아요.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렇게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데 그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그다음에 다 죽잖아요. 물질의 화려함과 부요함을 쫓아가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허망함에 이르게 되잖아요.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새벽이라서 아직 잠이 덜 깨서 아멘을 하신 것 같아요. 물질을 내려놓는 것에 아멘 하시는 것 처음 봤어요. 아직 잠이 덜 깬 거예요. 새벽기도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맨정신이 되기 전에 얼른 진리를 받아들이는 거예요. 진짜예요.
여러분,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고 경배하면 그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지혜로우심과 선하심과 의로우심, 아낌없이 인자를 베푸시는 모습을 우리가 닮아 가고 따라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뱀을 통해 사탄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못 하게 하신 거야”라고 한 말 자체가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 주셨잖아요. 이미 존귀하게 지어 주셨잖아요. 여기서 뭔가를 더 해야만 존귀해지는 게 아니거든요.
공부를 잘해야만, 일을 잘해야만, 돈을 많이 벌어야만 존귀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물론 우리가 정반대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이 말이 더 길어지면 안 되는데, 여러분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서 거룩해져서 구원의 반열에 이르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 가게 되는 것이 건강한 순서인 거예요. 내가 뭔가를 세상적으로 탁월하게 잘해야만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깨달으면 여러분 인생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 나는 이렇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구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되겠구나.” 그래서 인생이 달라지는 거지, 내가 열심히 내 인생을 고양시켜야만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순서는 명확해야 된다는 거예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7.05(주) | 주일설교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딤전 5:17-25)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디모데전서 5:17-25)
- 제목: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 본문: 디모데전서 5:17-25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7-05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교회 리더십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말씀하심의 통로다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존경하라고 권면한다. 교회 리더십은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말씀하심을 공동체 안에 흘려보내는 동역의 자리다. 목회자와 장로들이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우는 동역자가 될 때 교회는 건강하게 세워진다.
2. 사명자는 수명이 아니라 사명으로 살아간다
모세는 80세에 부르심을 받았고, 사명을 거부할 때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심 받을 뻔했으나 순종할 때 사명이 끝날 때까지 붙들림을 받았다. 설교자는 사명자는 자연적 수명이 다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성도 역시 보냄 받은 자리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후회 없이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
3. 목회자와 성도는 함께 살아나는 공생 공동체다
바울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목회자가 생계 걱정 없이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회가 배려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핵심은 목회자의 권리만이 아니라, 목자와 양 무리, 농부와 곡식이 함께 살아나는 공생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교회가 어려워 보여도 추수할 영혼은 많으며, 생명의 복음은 한 번도 시들어진 적이 없다.
4. 교회는 은혜와 진리의 균형으로 리더를 세우고 다뤄야 한다
목회자에 대한 고발은 신중해야 하지만, 범죄가 확인되면 공동체적으로 다뤄야 한다. 다만 치리의 목적은 정죄나 분열이 아니라 회개와 회복이어야 한다. 교회는 거룩을 지키되 은혜를 잃지 않는 공동체, 은혜를 베풀되 진리를 흐리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5. 좋은 목회자를 세우는 일은 좋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설교자는 목회자들이 헌신의 본을 보이고, 재정과 소통과 사역의 작은 영역에서도 정직하고 치열하게 훈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 안의 문제는 대개 오래된 리더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거룩한 목회자와 성도와 예배자를 세우는 일이 교회 개척과 부흥의 핵심이다. C4C와 리조이스 캠프의 장기적 비전도 다음 세대와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데 있다.
6. 하나님 편에 서는 리더십은 편견과 편애를 내려놓는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견과 불공평 없이 일을 처리하고,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라고 명한다. 목회자는 특정 교인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야 하며, 성도들도 목회자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기보다 함께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공동체는 성숙하고 건강하게 세워진다.
결론
사역자와 성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억울한 일과 오해가 생겨도 모든 숨은 것이 드러나는 날이 있음을 믿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며 억울한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심을 아신다는 믿음 안에서 자유하고 평안하며, 맡겨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입니다. 디모데전서 강의 14번째 시간이고요. 이 본문은 목회자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저희 목회자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묵상할 포인트들이 있습니다.
17절을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교회 장로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통합측 헌법상 두 가지 종류의 장로가 있습니다. 치리하는 장로, 다스리는 장로를 우리가 통상적으로 장로라고 부르고, 두 번째로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목회자와 장로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최고의 동역자들이 될 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 리더십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통로, 또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통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가 보라통 Q&A 구약편을 지금 집필하고 있는데요. 지금 출애굽기를 마쳤는데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어요.
하나님이 모세를 미디안 광야 40년 이후에 애굽으로 보내시잖아요. 사명자로 보내 놓으시고, 갑자기 왜 죽이려고 하셨는가? 이 내용이 어디 나오냐면 출애굽기 4장 24절에 나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왜 그랬냐면, 하나님이 모세를 반복해서 콜링하시는데도 모세가 전혀 내켜하지도 않고, 전혀 준비도 하지 않고, 그런 모습으로 일관하다가 하나님께 혼날 뻔한 것이죠. 그런데 시편 90편 10절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것도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이 전체 몇 편으로 구성돼 있죠? 150편입니다. 150편 중에 모세의 시편이 몇 편일까요? 딱 한 편입니다. 그 한 편이 어느 시편이에요? 90편이죠.
그러면 이 시편 90편에서 모세가 갑자기 인생 80을 왜 얘기했을까? 물론 오늘날에도, 그 시대에도 강건하면 80이라는 것은 시대상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모세가 사명자로 부름받은 나이가 몇이에요? 80인 거예요.
80에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가 사명을 거부하고 주저하다가 하나님이 생명을 가져가실 뻔했잖아요. 80의 그의 자연적 수명은 다 한 것이죠. 이제 사명의 세월, 사명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런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이 시편 90편을 고백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지도자, 목회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죠.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이미 주님의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서 사명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필요한 거예요.
모세가 죽을 때 장면을 보면 신명기 34장 7절, 같이 읽어 볼까요?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죽을 때 시력도 좋았고 기력도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컨디션이 아닌데 죽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사명자는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다할 때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중간에 죽이시려고 했던 그 사건을 다시 해석해 보면, 모세가 사명자로 콜링을 받았는데 사명을 감당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생명을 붙여 놓을 이유가 없으신 거죠. 하나님으로서는 그 생명을 가져가시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가 사명자로 순종을 한다면, 생명을 다해 사명을 감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사명이 완수될 때까지 그의 생명을 붙잡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모세를 보면서 생명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합니다.
예전처럼 밤새워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이제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젊어 보일지 몰라도 이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여러모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나 리소스를 집중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런 결심을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한정돼 있잖아요.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여러분,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 건강 관리도 하시고, 피부 관리도 하시고, 노후 대책도 세우시고 열심히 하세요. 그러나 매 순간을 사명자로 후회 없이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순장님 하시죠. 교회 봉사 좀 하시죠” 그러면 “제가 세상 일을 하고 있어서 이거 좀 다 끝나고 나서요” 이런 얘기를 많이 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때 생명을 붙잡아 주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주기도문의 첫 번째 내용이 뭡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비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첫 번째 기도의 내용이 우리의 비전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생명을 붙잡아 주시지 않겠어요?
지금 교회의 리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리더가 참 중요하죠. 리더 한 사람이 나라에도 중요하고, 축협에도 중요하고, 축산 옆에 말고 축구협회, 교회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리더만 중요한 게 아니라 리더를 따라가는 팔로잉 그룹, 이 커뮤니티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광야 1세대가 아니라 광야 2세대, 여호수아 세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광야 1세대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열 번이나 받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도 받고, 40년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기적, 만나의 기적을 매일같이 체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순종했잖아요.
그런데 광야 2세대, 여호수아를 따라가는 이 세대는 광야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겸손했고,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전진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런 여호수아 세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1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지금 목회자들에게 그들이 수고한 합당한 사례를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이 구절을 볼 때 “내가 교회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라는 구절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교회는 목회자들을 배려할 필요가 있죠.
그런데 제가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18절 말씀에 “곡식”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눈에 띈 거예요. 그래서 농부와 곡식, 목자와 양 무리의 비슷한 관계인데, 이것은 공생 공동체이구나. 같이 어려워지거나, 같이 살아나거나, 같이 안 되거나, 같이 잘되거나 둘 중 하나인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개척도 어렵고 부흥도 어렵고 온통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회자들이 또 다른 직업을 함께 하지 않으면, 이중직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중직 목회자에 대해서 교단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진지한 논의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유익이 된다면 저는 이중직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목회자는 목회가 최우선이어야 되고, 여기에 모든 것을 쏟아 볼 필요가 있어요. 마태복음 6장 33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목회자들끼리 모이면 여러 가지 힘든 얘기를 합니다. 비전 제시를 했는데 성도들이 비전에 잘 따라오지 않는다. 우리 교회 재정 운영이 원활하지 못하다. 전통적인 교회라서 새로워지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경험하면 이 문제들은 다 해결되게 돼 있어요.
목자가 우리 안에 양 무리들이 많이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 농부가 아무리 고생하고 수고를 해도 들판의 곡식이 풍성하면 모든 염려는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린 공생 공동체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38절, 같이 읽어 볼까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저는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이 떠오르면서 이 시대나 그 시대나 종교적 관점에서 놓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2천 년 전에도 유대교라는 종교가 너무 세속화돼서 사람들이 기대감이 없었고, 유대교를 통해서 하나님 만나기가 어려웠던 거예요.
오늘날에도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 않은데, 예수님께서 “이제 추수할 것도 없고, 추수할 것이 없으니까 일꾼도 필요 없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정반대 관점으로 얘기하셨어요. 유대교라는 종교가 시들해진 것이지, 밭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추수할 곡식은 너무나 많다고 이야기하셨어요.
그리고 오히려 일꾼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얘기하십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시들해진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단 한 번도 시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것이지, 소중하게 구원해야 될 영혼들은 너무나도 많은 거예요.
홍수 때 오히려 마실 물이 귀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 것처럼 개인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다 1인 라이프스타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소중한 만남에 더 목말라하는 시대가 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도 어려워진 시대이지만 정말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복음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해진 시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희어져 추수할 영혼들을 바라보고, 도시들을 바라보고, 열방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이번 여름에 도시정탐 사역을 공동체마다 하게 되는데, 여러분 복음을 나누고 전도지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면서 이 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과 관점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저희가 교회 개척 운동의 초기 단계라서 1호, 2호, 3호 교회를 세우고 잠시 소강상태인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결국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이 교회 개척 운동을 한다고 시작했는데, 왜 교회는 계속 개척하지 않고 1516교회만 확장시키느냐?”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게 사람이 마음에 원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돼야 되잖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모델 처치, 본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해야 개척하는 교회들을 도울 수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공간이 넓어지고 시설이나 규모가 커지면 이것을 확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항상 목회자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리더십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한 사람이 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이는가. 이것이 과연 그냥 조직을 확장하는 것이냐, 아니면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사활을 걸고 노력하는 것이냐? 이것은 다른 것이죠.
오늘 우리가 방금 읽었던 18절 말씀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그러니까 곡식을 탈곡하는 일을 소에게 시켜 놓고서는, 그 낟알갱이를 배고파서 먹는 소의 입에 그것을 먹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었던 거예요. 일꾼이 자신이 노력한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죠. 이게 율법서에도 나오고 신약에도 인용한 말씀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들이 생활 걱정,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목회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줘야 된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나 정작 바울 자신은 돌아다니면서 사역할 때 사례비를 받았나요, 안 받았나요? 안 받았어요. 텐트메이커라고 하는데, 직접 천막을 만들어서 필요를 자급자족하는 자비량 목회자로 사역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사역하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이것을 비즈니스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례를 받지 않았죠.
그러나 일반 목회자들에게는 자신의 자비량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내가 헌신을 많이 하면 다른 사람도 나랑 똑같이 헌신해야 된다고 요구하게 돼 있어요. 집에서 집안일을 많이 하시는 분은 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어려워지게 돼 있어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본인의 원칙을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두란노에서 사역할 때 두란노 천만 큐티 운동 본부의 본부장으로 임명돼서 양쪽 사역을 같이 한 적이 있어요. 이 본부에 가 보니까 전국에 있는 교회에서 큐티 세미나 요청을 받으면 가서 세미나를 해 드리고, 큐티 운동을 진작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여러 교회에서 요청이 들어오니까 스케줄은 한정돼 있고, 좀 규모가 크고 사례를 많이 하는 교회들을 우선으로 세미나를 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를 보낸 이유는 그런 조직의 잘못된 문화를 일신하라고 보내신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 달 정도 기다렸다가 부본부장 목사님을 뽑고, 목사님을 앉혀 놓고 얘기했어요. “저희 두 사람이 1년 동안 굉장히 전국에 세미나를 많이 다녔는데요. 저희 두 사람은 어차피 세미나를 많이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례를 받지 않겠습니다. 교통비는 실비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조금 얼굴이 아쉬워하시더라고요. 그러나 “다른 목회자들, 우리가 다 커버하지 못하는 세미나를 다른 목회자에게 부탁할 때는 사례비를 받으시는 것을 저희가 막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목회자들이 어떤 철학과 관점으로 사역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재정에 있어서도, 관계에 있어서도, 또 일을 하는 방식과 소통의 방식에 있어서도 건강해야만 성도들이 건강해지고 교회 문화가 건강해질 수 있어요. 여러분, 앞으로 C4C가 건강한 교회들을 세워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19절, 20절 같이 읽어 볼까요?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앞부분은 목회자를 대우하라는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목회자 고발에 대한 이야기예요. 목회자가 교회법이든 사회법이든 위반하게 되면 신중하게 두세 사람을 증인으로 참고해야 된다. 쉽게 그냥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치리가 필요하다면 공동체적으로 치리해야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물론 목회자들이 문제를 안 일으키면 좋겠지만, 문제를 일으킨 경우에 교회 내부가 은혜파와 진리파로 나뉘는 상황들이 벌어질 때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쪽에서는 “그래도 우리 목사님 감싸 주고 덮어 주자”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게 맞을까요? 또 한편에서는 “아니다. 교회는 거룩을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징계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느 쪽이 맞을까요?
제가 보면 이 두 가지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교회는 은혜와 진리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의 공동체. 은혜와 진리가 정반대의 성향이죠. 은혜를 강조하면 진리가 약해지고, 진리를 강조하면 은혜가 박탈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잘못한 사람을 치리할지라도 치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이 돼야 돼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뭔가를 잘못해서 훈육할 때, 아이를 죽일 정도로 잡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죠?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그게 리더이든 멤버이든 그 사람이 회개하고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도 거룩을 유지하면서도 분열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거룩을 강조하다 보면 “내가 당신보다 거룩한 입장이다”가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반드시 깨지게 돼 있어요. 항상 거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깨뜨리게 돼 있어요. 그래서 거룩도 유지하지만, 교회가 어떻게 은혜 공동체로 갈 것이냐가 중요한 거죠.
교역자 치리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제가 이전에 교회를 섬길 때, 누군지는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용조 목사님이 청년 만 명을 선교사로 파송하면 좋겠다는 비전이 있으셨어요. 그런데 매해 청년 선교 지원자들이 수십 명이었다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시작하고 청년 선교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어요. FA, 프런티어 에이전트라고 전방 개척 선교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청년들을 콜링했는데, 정말 수십 명이 지원하면서 다시 청년 선교에 불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팀을 구성하고 훈련을 하고 파송하면서, 함께했던 대학 청년부 한 30여 명의 교역자들 중에 매년, 매 턴마다 돌아가면서 팀 담당 목회자들을 함께 2, 3개월씩 선교지에 파송했어요. 그런데 한번은 저희 팀의 한 목사님께 제가 말했습니다. “목사님도 FA 팀 이끌고 선교지를 다녀오시면 좋겠습니다. 한 일주일 기도하고 얘기합시다.”
그런데 기도하고 얘기하시면 되는데, 저한테 그 자리에서 대뜸 “제가 기도해 보고 아니라고 얘기해도 되나요?”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그 얘기를 했을 때 이렇게 얘기하신 분은 처음이었어요. 일주일 뒤 이분이 대답을 하셨어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안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이미 갈 마음이 없었던 거죠.
저하고 정말 친한 목사님이었고, 저랑 중요한 프로젝트를 같이 많이 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님, 미안합니다. 우리가 청년들에게 땅끝으로 가라는 선교 헌신을 요구하면서 우리가 본을 보이지 않고 이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그분이 교회 사역을 내려놓게 한 적이 있어요. 물론 다른 교회에서 또 귀한 사역들을 하셨지만, 여러분, 목회자들이 헌신의 본을 보이지 않고 교회가 헌신의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거죠.
저에게 목회 사역을 하면서 한 가지 철학이 있는데, 저희 간사님들에게는 최대한 은혜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합니다. 물어보세요. 그런데 저희 목회자들에게는 최대한 하드 트레이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기준을 굉장히 높게 요구합니다.
이유는 뭐냐면 영수증 하나도 정확하게 첨부하고, 보고서 쓰고, 재정 서류를 쓰게 해요. 그것 하지 않으면, 영수증 없으면 본인 돈으로 하지, 절대로 가짜 영수증 만들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 하나가 영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목회자들이 교회 부흥의 선두에 서야 되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지역 교회랑 여러 프로젝트를 해 보니까 성도들이 막 열심히 하려고 해도 목사님들이 열의가 없잖아요. 교회는 변하지 않아요. 굉장히 어려워요. 결국 목회자들이 헌신해야 합니다. 또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사고를 치면 교회는 정말 큰 어려움에 빠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설교와 기도를 열심히 하는 훈련도 해야 되겠지만, 기획서 한 장을 쓸 때도 제가 요청하는 것은 설교문을 쓸 때처럼 정성을 들여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광고 한 마디를 할 때도 내가 어떻게 말을 할지, 설교문을 쓸 때처럼 정성을 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긍휼히 여겨 주셔야 돼요. 그런데 좋은 목회자를 키워야 좋은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29년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교회를 탓할 것도 없고 성도들을 탓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목회자인 나 자신만 잘하면 돼요. 나 자신만 잘하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 있으면 돼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 문제나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새신자가 사고 치는 일은 없어요. 교회 중직자나 교회 목회자들이 사고를 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들 입장에서는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축복이죠.
C4C 교회 개척이 그냥 건물만 세우는 게 아니잖아요. 거룩한 목회자들, 거룩한 성도들, 거룩한 예배자들을 세워 가는 사역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전국의 신학대학교에서 리조이스 캠프를 하고, 청소년과 청년들부터 좋은 하나님의 사람들, 맨파워를 키워 나가려는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어지는 21절과 22절 말씀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편견 없이, 불공평이 없이 이렇게 표현했는데,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편견이 없이.” “편애가 없이.”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거죠. 사람마다 자기 타고난 기질이 있고, 나랑 유사한 기질의 사람들에게는 편애하게 돼 있고, 또 안 맞는 기질의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나 목회자가 특정 교인의 편을 들어 주면 되나요, 안 되나요? 안 돼요. 결국에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하거든요.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목회자가 내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억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편에 서야만 성숙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어지는 22절에 말씀한 거예요. 목회자들이 특정 교인을 선호해서 쉽게 “내가 직분도 주겠습니다” 하고 안수해서 직분을 쉽게 남발하면 안 된다. 교인이 죄짓는 것을 방관하거나 방조해서도 안 된다. 목회자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르게 서 있어야만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부분 23절에서 25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바울이 갑자기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술도 마시라고 얘기했어요. 당시 사람들은 식사 때 포도주를 같이 많이 마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식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염된 물을 살균시키는 효과가 있었죠. 그런데 디모데가 “나 경건하게 살아야지” 하면서 물만 마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위장병이 생겼으니까, 사도 바울이 약으로 처방해 주는 의미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 이 구절을 보시고 소화가 매우 잘 되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술을 마시라고 권했네” 이렇게 해석하지 마시고요. 디모데가 에베소교회 목회를 했잖아요. 에베소교회는 당시에 초대교회 중에서 가장 큰 대형 교회였어요. 문제가 많았을까요, 문제가 적었을까요? 문제가 많았던 거예요.
위장병 얘기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오겠어요? 리더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검증을 하고, 이런 얘기를 하면서 나온 얘기잖아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정신적으로 피곤할까요, 안 피곤할까요? 피곤한 게 정상이에요. 세상에서 피로도가 가장 높은 직군이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이거든요. 감정노동이라고 하죠.
그래도 저는 감사한 게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아요. 여러분, 사람들을 대하는 일을 하고 목회 사역을 감당할 때 은혜로 감당해야 됩니다. 이것을 내 인간적인 힘으로 감당하려고 하면 반드시 번아웃이 오게 돼 있어요. 인간적인 고민,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내려놔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은 그런 생각도 해요. “아, 사람의 길을 포기해야겠다.” 그냥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돼요. 공생애를 살아야 돼요. 이어지는 24절, 25절에 무슨 얘기를 하냐면, 포도주도 처방해 준다는 이야기를 해 놓고 나서 결국에는 다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행도 드러나게 돼 있고, 죄상도 다 드러나는 날이 오게 돼 있다. 그러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힘들어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지내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잖아요. 부서에서 어떤 정책이 잘못됐다거나, 어떤 갈등이 있었다거나 그러면 다 배후에서 담임목사가 시킨 줄 알아요. 희한해요.
역사서에 보면 아브넬이 죽고 아마사가 죽는데, 요압이 죽인 거잖아요. 그런데 다 뒤에서 다윗이 시킨 줄 알잖아요. 다윗이 시킨 게 아니었거든요. 믿어 주세요. 그러니까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다 목회자가 뒤에서 시킨 줄 알아요.
재미있는 예로, 헤이븐 커피에서 한 두 달 전부터 보라색 맛있는 우베 라떼를 팔고 있는데, 제가 보라색을 좋아해서 제가 팔게 한 줄 알더라고요. 저는 그걸 파는지도 알지 못했어요. 누가 마시고 있더라고요.
제가 한번은, 여러분이 모르는 분이에요. 교회에 갈등이 생겼는데 제가 누구의 편도 들어 주지 않고 중재하려고 하니까, 한 분이 자기 편을 안 들어 준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마음이 안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저의 위에 계신 한 목사님한테 저에 대한 매우 안 좋은 배드 리포트를 한 거예요.
그래서 한 목사님이 저에게 어마어마하게 화도 내시고 혼내셨는데, 저는 그냥 차분하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그 목사님이 “그때 많이 힘들었지”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오해했다. 미안하다” 그 얘기를 하신 거예요.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리더가 되면 억울한 일이 많은 거예요. 가정에서 아빠, 엄마가 리더잖아요. 자식에게 억울한 일이 많으세요, 적으세요? 많은데, 이거 다 설명할 수 없어요. 다 해명할 수 없어요. 내가 억울한 것 풀어 달라고 아이한테 호소할 수 없어요. 그런 문제들이 계속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리더가 되고, 교회에 팀장이 되고, 순장이 돼 보세요. 리더가 되면 될수록 억울한 일은 많아지게 돼 있어요. 그러나 마태복음 10장 26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집중하세요. 제 목회자들도, 성도들도 다 예배자가 돼야 되겠다. 이것은 뭐냐면 우리가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명확하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잖아요.
하나님이 내 진심을 아시면 그것으로 된 거예요. 내가 다니면서 해명할 필요 없어요. 다니면서 억울한 것 풀어 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그걸 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냥 회개할 것이 있다면 정직하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억울한 것은 하나님께 맡겨 드리고, 나는 내게 맡겨 주신 사명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억울한 것, 힘들게 하는 사람, 이런 관계에 신경 쓰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가 오늘 이 설교를 딱 하자마자 1부 예배 끝나고 한 분이 “오늘 아침에 제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교회에서요”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나요? 일어납니다. 가장 친밀한 가정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심을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세요. 떳떳하세요. 평안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06월
2026.06.28(주) | 주일설교 |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딤전 5:9-16)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디모데전서 5:9-16)
- 제목: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 본문: 디모데전서 5:9-16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28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헌신은 선택을 바꾸는 조급함보다 지속성을 요구한다
초대교회가 과부 명부에 올릴 사람에게 요구한 “한 남편의 아내”라는 조건은 재혼 여부보다 결혼 생활에 충실했던 삶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직장과 관계를 쉽게 바꾸려 하지만, 가정과 신앙의 본질에는 더 많은 선택지가 아니라 더 깊은 헌신이 필요하다. 행복은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과 배우자에게 끝까지 헌신하는 삶에서 온다.
2. 헌신자의 첫 번째 선행은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 10절은 헌신자에게 요구되는 선행 가운데 자녀 양육을 가장 먼저 제시한다. 부모의 역할은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하거나 좋은 교육 환경을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거룩과 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다. 가정은 부모와 조부모에게 맡겨진 최우선의 사역지다.
3. 나그네를 영접하는 헌신이 복음의 길을 연다
초대교회의 나그네는 도시와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순회 전도자와 사역자들이었다. 루디아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실제적으로 후원했기에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목회자는 교회에 고용된 경영자가 아니라 영적 지도자이며, 성도는 목회자가 하나님 나라와 복음 사역에 집중하도록 신뢰하고 돕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4. 성도의 발과 눈물을 씻기는 공동체가 치유를 완성한다
성도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실제적인 섬김과 함께, 인생에 켜켜이 쌓인 슬픔과 수치와 절망을 들어 주고 위로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내면이 치유되면 말하기 어려웠던 상처가 간증으로 바뀌며, 그 치유는 공동체 안에서 진실하게 나눌 때 완성된다. 바나바와 다비다처럼 착함과 구제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성도들을 통해 교회는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한다.
5. 구제는 마음과 기도를 넘어 실제적인 도움으로 나타나야 한다
환난당한 자를 구제한다는 것은 재난이나 신체적·정신적·사회경제적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고넬료의 기도뿐 아니라 구제를 기억하신 하나님은 그의 가정에 베드로를 보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보답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사랑은 곧 주님께 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러한 헌신을 기억하고 갚아 주신다.
6. 사랑은 호기심이 아니라 진정성과 헌신으로 선을 넘는 것이다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게으름과 쓸데없는 말로 공동체를 해치지 않도록 경계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가십거리로 만드는 호기심은 잘못된 선 넘기지만, 상처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힌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기도하며 실제로 돕는 것은 사랑의 선 넘기다. 성육신과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처럼 교회도 진정성 있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나누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개인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한다. 평생 예배자와 헌신자로 살겠다는 고백을 지키며, 자녀를 양육하고 사역자를 영접하고 성도를 위로하며 환난당한 이웃을 실제로 도와야 한다. 자신의 선 안에 갇히지 않고 축복의 말과 기도와 나눔으로 사랑의 선을 넘을 때, 성도와 교회는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
전문 스크립트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난주는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번 주는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입니다. 디모데전서 강의 13번째입니다.
9절을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인 과부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자격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몇 세 이상이요? 60세 이상. 아마도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고 재혼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한 남편의 아내.”
앞부분의 교회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왔었어요. 기억이 안 나시죠? 이번에는 정반대로 “한 남편의 아내”입니다.
그러면 평생 결혼을 딱 한 번만 하고 재혼한 사람은 해당이 안 된다는 이야기냐? 그 이야기가 아니고요. “한 남편의 아내”라는 표현은 결혼 생활에 충실했던 사람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교회가 과부 명부에 올릴 사람들을 신중하게 선정한 이유는 그들에게 재정을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권사님들처럼 일종의 직분자, 사역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조건 가운데 “한 남편의 아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현대인들은 조급증에 시달리며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분, 스마트폰이 2년 약정 기간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2년마다 계속 바꾸시는 분들 있죠. 또 MZ세대들은 직장도 조금만 조건이 좋으면 옮깁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배우자도 마음에 안 들면 바꾸고 싶고, 너무 짧은 호흡으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들은 물론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는 한데, 자신의 내적 지구력을 떨어뜨리는 선택이 된다는 생각은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생의 본질에 있어서는 가변성보다 지속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만 바꾸면 내 인생이 편해지지 않을까? 내가 이것만 바꾸면 내 인생이 덜 고생해도 되지 않을까?”
결혼도 옵션이 된 시대지만 이혼도 옵션이 됐고, 하여튼 옵션이 없는 삶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굉장히 답답해합니다. 내가 뭔가를 주도적으로, 내가 편한 대로 선택하고 싶은 것이죠. 그러나 인생의 본질인 가정과 신앙에 관해서는 더 많은 옵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헌신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평생 하나님 한 분께 헌신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혼하신 분들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헌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만 이렇게 아멘을 하시네요. 양쪽도 하셔야 되는데요.
여러분, 행복은 회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헌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나 문화적 양식은 다양하게 누리셔도 좋은데, 일편단심 오직 한 길을 가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예배와 찬양,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단순한 삶이지만 깊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죠. 또 한 남편, 한 아내에게 헌신하며 사는 것은 좋으면 좋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그 길을 계속 가시기를 권면합니다. 희한하게 여기만 계속 아멘하시네요.
고통과 행복의 이중주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나가지 않으면 사실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기는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지속성 있는 삶이 크리스천 사역자, 헌신자에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과부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 오늘날의 권사님에 해당되니까 크리스천 헌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네 가지 선행의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제가 이것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가 무엇이죠? 자녀 양육입니다.
크리스천 헌신자들에게 다른 그 무엇도 아닌 1순위의 선행 덕목이 자녀 양육이라는 것, 이것은 주목할 만하죠. 크리스천 자녀들에게 1순위의 선행 덕목은 무엇이었을까요? 부모 공경이었죠. 이번에는 크리스천 부모들에게 1순위의 선행이 자녀 양육입니다.
우리는 요즘 시대에 자녀 양육을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약간의 패배 의식 같은 것을 갖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듯이 우리가 우리의 닮은꼴인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마땅히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읽어 보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첫 번째는 자녀들의 정서적 안정감, 두 번째는 말씀으로 양육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은 “돈 벌어서 내가 학비 대 주고 생활비 대 주지 않았냐?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엄마들은 좋은 학원 보내 주고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 주면 “내 사명 다 했다”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시켜 주는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훌륭한 목회자 디모데 뒤에는 그에게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눈물로 기도해 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있었던 것이잖아요.
자매님들이 교회를 사랑방처럼 생각하고 자주 모이시고, 요즘 헤븐 커피가 잘되어서 대표로서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런 사례를 안 받지만요. 그런데 자매님들이 교회에 열심히 모이시는 것은 좋지만, 언제나 가정이 최우선의 사역지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요즘 또 신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 데려오지 마라. 손 안 키워 준다” 이렇게 완전히 선을 그어 버리시는 분들이 있는데,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과 축복이 손주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블레싱입니다. 이것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자녀들과 아닌 자녀들은 내면의 자신감과 충만함이 달라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손주를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하시지만, 계신 분들은 내면적으로 대답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두 번째 선행의 덕목이 무엇이죠?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는 중근동의 보편적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치안이 불안하고 환경이 열악하던 시대에 나그네가 길을 잃고 도움을 받지 못하면 생존이 위태로울 때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중근동에 사는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나그네는 무조건 거두어서 도와주었습니다. 자기도 똑같은 상황이 되면 누군가가 그렇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가 자녀 양육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덕목이라면 두 번째, 2순위가 나그네 영접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당시를 생각해 보면 여기서 나그네는 대부분 도시에서 도시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떠돌아다니는 전도자나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순회 전도자로 사역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예요? 대답을 안 해요. 제가 지명을 했는데 누구요? 바울이죠. 쉬운 것인데 이렇게 지적을 하니까요. 할렐루야.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도시마다 다닐 때 영접해 준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정말 평탄하게 복음 사역을 했던 것이죠.
사도행전 16장 14절과 15절 같이 읽어 볼까요?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아멘.
제가 사복음서에서 마르다가 거의 여자 베드로, 굉장히 주도적인 알파걸로 나온다고 했는데 여기 루디아도 그런 타입이죠. 여성 가장으로서 큰 사업을 했고,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우리 집에 무조건 거해야 된다” 이렇게 강권해서 바울 일행을 머물게 합니다.
루디아라는 여성을 통해서 사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니는 곳마다 재정이 힘들어도 텐트 메이킹, 밤에 텐트 만드는 일을 해서 자급자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서신서를 쭉 보면 개별 교회에서 재정 지원을 받은 적이 딱 두 번 있습니다. 그 교회가 어디겠어요?
또 저를 외면하시는데, 방금 이야기한 어느 교회? 빌립보 교회죠. 빌립보서 4장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도움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단어는 원어상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이 영접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순회 전도자를 자기 가정에 모시고 숙박과 식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섬겼던 것이죠.
제가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서, 물론 한국 교회만은 아닐 텐데, 좋은 목회자를 청빙하려고 하는 모습이 때로는 우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목회자를 교회의 영적 리더로 세운다기보다 창립자가 아니라 CEO, 최고 경영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고용된 경영자 정도로 목회자를 생각하는 경향이 한국 교회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영 실적이 안 좋거나 교회가 부흥이 잘 안 되거나, 아니면 최고 주주단과 관계가 안 좋다, 장로님들하고 관계가 안 좋다고 하면 쫓아내고 새로운 경영자를 세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교회들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딱 써 놓고 나서 생각난 분이 있는데, 여러분 누군지는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전에 한 지역에서 장로님 한 분이 다니시던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대부분 데리고 나가서 개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어렵고 안타까운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1516교회 C.C.에서 교회 개척 운동을 하니까 목회자를 한 명 파송해 주십시오” 하고 저를 초대하셨어요.
저는 그냥 대화를 하겠다고 했는데 굳이 식사 자리에 초대하셔서 갔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본인이 건물주로서 그 건물 안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고용해서 부리고 싶어 하시는 분이더라고요. 하이어하고 싶은 것이죠.
제가 명확하게 말씀드렸어요. “목회는 목회자가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니까 그전의 목회자도 도망간 것입니다. 저는 못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가 식사를 거의 안 하고 그냥 나왔어요. 밥을 먹으면 밥값을 해야 되잖아요.
여러분, 오늘날 목회자들을 교회에서 고용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내고 또다시 고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성도들은 그런 목회자를 신뢰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1516교회와 C.C.는 앞으로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려고 여름에 도시 정탐 사역을 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루디아 같은 헌신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죠.
저는 도시를 집회나 어떤 사역으로 방문할 때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도시에서 루디아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고넬료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갈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덕목은 무엇이죠? 성도 섬김입니다. “발을 씻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고대 중근동의 보편적인 풍습이었죠. 포장도로가 많지 않다 보니까 사람들이 조금만 길을 가고 외출을 하면 발에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성도들을 초대해서 발을 씻어 주기도 하고, 또한 성도들의 인생에 켜켜이 쌓여 있는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씻어 주고, 인생의 수치와 고통, 분노와 절망을 씻어 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고민이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들어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3절 읽어 볼까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적인 삶을 권면하는 거의 첫 번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제 토요일부터 상반기 공동체 종강 예배를 시작했는데요. 순마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서 치유가 일어난다는 간증들을 들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내적 치유가 여러분의 인생에도 여러분의 가정에도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유 사건은 언제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말씀이 내 삶을 터치하고 성령께서 내 영혼을 터치하실 때 상처와 거짓으로부터 해방받는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치유가 일어나면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요. 그 현상이 무엇이죠? 여기 답을 써 놓았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말을 못 했는가? 아니요. 말은 다 잘하는데 자기 상처를 이야기할 때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울감과 상처가 많았거든요. 이것이 치유가 안 됐을 때는 말을 하려고 하면 목이 메고, 몸이 떨리고, 땀이 나고,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되고 나니까 이것을 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내가 도저히 꺼내기도 힘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들이 간증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심한 우울증이 있었다는 것,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 것이 평생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예배에 오시는 분들 가운데 여전히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가 있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아픔이 있으신 분들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심령을 터치하고 계시다면 이제는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시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완성은 사람들과의 나눔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나눔의 공동체 가운데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순마다 그런 간증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셔서 새가족반에도 오시고 순에도 들어오셔서 나눔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진심으로 다른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고 눈물을 씻어 주는 분들이 계세요, 안 계세요? 계세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완전히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그런 사람이었는데 사도행전 11장 24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갔는데 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를 계속 보여 주세요. 부흥하게 된 이유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를 첫 번째로 이야기하지 않고 무엇을 첫 번째로 이야기했어요? “착한 사람.”
자신의 사이프러스섬에 있는,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과 전 재산을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의 닉네임 자체가 “권위자”,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여성도 한 명을 거론해 보면 사도행전 9장 3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가난한 여성도들을 위해서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그렇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결국 베드로를 불러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죽은 다비다를 살려 내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죠.
여러분, 다비다와 같은 사람들, 또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진짜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덕목은 피해자들을 무엇 한다? 구제합니다. 환난당한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피해자입니다. 자연재해가 되었든 사회적인 재난이 되었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라는 단어가 한자이지만 그 의미를 명시적으로 설명해 보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준다고요?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해 줄 수도 있고 격려해 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밥 한 끼를 먹이고, 어려운 사람에게 내 옷을 하나 벗어서 입혀 주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도 한 분의 간증을 들었는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기도를 한참 하시다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젊은 자매의 얼굴이, 예배를 드리고 가는 사람인데도 너무 초췌하고 힘들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위로의 말을 한마디 했더니 바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래요. 권사님이 안아 주니까 너무 감사하고 힘을 얻었다고 하면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도 간에 정말 그 사람의 필요를 실제적으로 도와주려고 합니까?
이번 학기 마가의 다락방이 이번 주로 마지막인데요. 첫날 제가 “대전신대 화장실을 고쳐 드려야겠다”라고 말씀드렸어요. 내년에 리조이스 캠프를 확장하면서 중부권의 핵심 도시인 대전, 대전신대에 청소년들을 모아서 캠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전신대를 다녀와 보니까 강당 건물 전체를 다 고칠 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가서 사용할 공간에 옛날식 화장실들이 많은 것입니다. 요즘 친구들은 “나이키”라고 하더라고요. 왜 나이키냐고 했더니 자세가 나이키잖아요. 자세가 나이키요.
그래서 1층과 2층과 5층을 청소년 친화적인 화장실로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정말 많은 분들이 실제적인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화장실을 고치신다는데 헌금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모아 주셔서 지금 견적을 내고 있는 중인데 잘 진행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 “잘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뿐 아니라, 기도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까?
사도행전 10장 31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는 이탈리아인, 그러니까 이방인 백부장이었어요. 로마 군 장교였는데 하나님이 그의 기도만 들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무엇을 기억하셨다고요? 구제를 기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유대인들, 어려운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셔서, 베드로가 얼마나 바쁜 사도였습니까? 그런데 베드로 사도를 거기까지 보내서 그의 온 집안을 구원하는 은혜를 체험시켜 주셨어요. 할렐루야.
그래서 저는 이번에 고넬료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이 함께 머물고,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 나의 눈물이 함께 흐르고,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 내 손길이 닿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이 절대로 그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체험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을 가장 기뻐하시잖아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니까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25장 40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에게 투자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11절과 12절 같이 읽겠습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그러면 재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남은 인생을 결혼하지 않고 오롯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사명자로, 거의 나실인처럼 서약한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로 놓고 보면 임시직이 있고 항존직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직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생을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한 것이거든요. 오늘날에도 이런 결단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평생 예배자로, 헌신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고백을 평생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3절과 14절, 마지막 두 절을 읽겠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제가 남녀 차이에 대해서는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들은 표현력이 부족한 것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반석처럼 든든하고 일관성이 있는 장점이 있으시죠? 자매님들이 대답하잖아요. 이것도 형제님들은 말을 잘 안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자매님들은 애정과 관심이 많고 표현력이 풍부해서 좋은데, 때로는 이 이야기처럼 하지 말아야 될 말,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맞나요? 이것은 우울하게 답변하시는데, 맞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권면처럼 정말 한 영혼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인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 일처럼 안타깝게 여기면서 밤을 새우며 기도해 주시는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너무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단순한 호기심으로 “저 사람은 어떤 인생일까?” 하며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캐고, 다른 사람들과 뒷담화를 하면서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가 보라통독 Q&A편을 지금 집필하고 있는데요. 한 분이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아니, 함이 아버지의 부끄러운 이야기 한 번 했다고 그렇게 저주를 받아야 되느냐?” 그런데 함이 한 번만 그랬을까요? 여러분, 두루 돌아다니면서 남의 험담하고 뒷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만 할까요? 함은 그것이 습관적이었거든요. 아버지가 포도주를 마시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을 가족들에게 떠벌리면서 조롱거리로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와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됩니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어의 순기능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언어의 역기능을 사용하게 되면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선을 넘어야 하지만, 헌신의 마음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으로 선을 넘는 것이라면 진짜 선을 넘는 것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사랑은, 다시 한번, 사랑은 선을 넘는 것입니다.” 제가 성향상 선을 넘는 것을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선을 넘어서 누가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 제가 남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목회는 선을 넘어야 하거든요.
6월 초에 저희가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했고, 6월 내내 마가의 다락방을 했고, 7월과 8월에는 도시 정탐 사역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공동체 교인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저에게 전하시더라고요. “나는 예배드리러 왔는데, 나는 회복하러 왔는데 자꾸 목사님이 이것저것 하라고 시킨다. 우리를 좀 가만히 놔둬라.” 목사가 선을 넘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이 예배를 함께 드리시면 느끼실 텐데 저는 은근히 계속 압박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저희 목회자들에게 저의 목회 특징은 “압박 목회”라고 했습니다. 축구를 압박 축구로 안 해서 지금 우리가 매우 어렵잖아요.
여러분, 선한 일의 주도권을 가지려면 제가 계속 선한 일을 하시라고 끊임없이 은근히 압박합니다. 선을 넘는 것이죠. 제가 선을 넘지 않으면 여러분도 불편할 것이 없고 저도 불편할 것이 없어요. 굉장히 깔끔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역동성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 선을 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선을 넘어야 합니다. 누구를 도와주려고 해도 선을 넘어야 합니다.
제가 보라통독을 매 학기 할 때 수백 명이 수강해도 항상 매주 질의응답을 받거든요. 그런데 질문하는 사건이 좀 부정적일 수는 있죠. 그래서 부정적으로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한 학기 내내 부정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제가 매번 성실하게, 참아 가며 좋은 마음으로 답변을 해 드립니다. 그런데 일곱 번, 여덟 번, 7주, 8주 이렇게 지나면 본인도 “내가 이런 패턴의 관점이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대부분 변화됩니다.
그런데 한 4년 전입니다. 누군지는 저도 기억이 안 나요. 그 학기에 두 분이 끝날 때까지 삐딱하게 질문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분의 삶과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답변에 써서 보냈어요. 그랬더니 학기가 다 끝났는데 한 수강생이 “내가 성경에 관해 질문했으면 성경에 대한 답변만 해라. 왜 내 삶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느냐?”라고 왔더라고요. 선 넘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 제가 성경에 대한 답변만 하면 저도 편해요.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이 치유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이 풀릴까요? 안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있고 하나님께 상처받으면 그다음에 어떻게 하겠어요? 이것은 바꿀 방법이 없잖아요.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교회는 선을 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선을 넘는 공동체입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순예배 때 앉아서 내 인생에서 슬펐던 이야기, 힘들었던 이야기, 지금 내가 가장 고민하는 이야기를 왜 꺼내 놓아요? 자기 가족에게도 못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순예배를 드리고 나서 부부가 오면서 “당신 그랬어?”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하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진정성 있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치유와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선을 넘을 때 단순히 호기심으로, 저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가십거리로 만들려는 차원으로 선을 넘는다면 이것은 진짜 선을 넘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방어 기제와 상처 때문에 자신의 선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너무너무 안타까워요.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사건 자체가 선을 넘으신 사건이잖아요.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영원히 찬란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죄악과 저주의 땅에 선을 넘어 다가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구원을 갈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 사랑.”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가 신앙의 완성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선을 넘어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겠어요? 여러분, 내 인생도 다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섬기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헌신의 마음을 갖고 선을 넘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대표적으로 교회 안의 어떤 그룹에게 이 이야기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홀로된 사람, 혼자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 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가족과 일가친척이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혼자 교회에 나오면 굉장히 위축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 안에 갇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축복의 통로로 부름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체험한 사람이니까 그 은혜가 당신을 통해 흘러가야 합니다. 절대로 자신의 성 안에 갇혀서 살지 마십시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해 주고, 정말 진심으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고, 커피 한 잔을 사 주십시오. 제가 헤븐 커피 대표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커피 한 잔을 사 주고, 내가 쓸 것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나눔을, 선을 넘는 나눔을 해 보세요. 그러면 천국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6.27(토) | 새벽기도 | 축복의 문 vs 심판의 문 (훔 2:1-7)
축복의 문 vs 심판의 문 (나훔 2:1-7)
- 제목: 축복의 문 vs 심판의 문
- 본문: 나훔 2:1-7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27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회개의 기회 뒤에도 하나님의 공의는 유효하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는 회개하여 구원받았지만, 이후 다시 악을 행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나훔 시대에 성취를 앞두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보폴라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를 통해 니느웨를 치게 하셨다. 아무리 강한 성읍이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2. 원수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의 문이 된다
나훔 2장 2절의 포도나무는 앗수르에게 약탈당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일은 곧 무너진 야곱의 영광을 강성했던 이스라엘의 영광처럼 회복하시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삶의 영적 공격과 장애물을 제거하실 때, 성도와 가정과 공동체에도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3.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완성해 가신다
하나님은 완성된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성장할 사람을 부르신다.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실수가 많았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쳤다. 성도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인생을 완성하신다.
4. 인간의 요새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때가 있다
니느웨는 깊은 해자와 거대한 성벽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읍이었지만, 티그리스강의 홍수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바벨론 군대의 침입을 허용했다. 천혜의 환경과 인간의 최선도 완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때와 섭리를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되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겸손해야 한다.
5. 은혜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즉시 반응해야 한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회개했지만, 나훔 시대의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아 심판을 맞았다. 같은 눈물이라도 은혜 가운데 흘리는 회개의 눈물과 기회를 놓친 뒤 흘리는 후회의 눈물은 전혀 다르다. 아직 구원과 천국의 문이 열려 있을 때 마음을 열고, 천국을 침노하는 결연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6. 한 사람의 반응이 공동체 부흥의 물꼬를 튼다
영적 파수꾼과 가정의 중보기도자, 새벽을 깨우는 성도의 반응은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요나의 짧은 선포에 왕부터 백성까지 니느웨 전체가 반응했던 것처럼, 진정한 부흥은 공동체 전체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에 예배자, 기도자, 헌신자와 회복자가 일어나야 한다.
결론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며, 말씀에 즉시 반응하는 사람에게 은혜의 대로와 축복의 수문을 여신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지만, 생의 마지막에는 주님이 우리를 영접하실지를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심판의 문이 열리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자신과 가정과 교회가 전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나훔 2장 1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같이 슬피 우는도다. 아멘.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 저희가 6월 한 달 계속 암송하고 있는데 같이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넘을 수 없는 한계선, 그 한계선을 하나님의 은혜로 더불어 넘게 되는 체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훔서를 보고 있습니다. 저희가 나훔서 전에 무엇을 봤죠? 요나서 봤죠. 그래서 “요나훔”, 제가 통독할 때 항상 그렇게 같이 기억하시라고 하는데, 요나와 나훔이 니느웨를 향한 예언입니다.
나훔서 2장입니다. “축복의 문과 심판의 문” 이런 제목인데요. 요나 선지자의 예언으로 회개했던 니느웨는 구원을 받았어요. 그 시대에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메시지와 예언은 유효했고, 요나 이후 나훔 선지자 때에는 임박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그것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요. 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옵니다. 여기서 “너”는 니느웨죠. 니느웨를 치러 올라오는 파괴자는 누구인가? 바벨론의 대군을 이끌고 오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벨론의 왕이라고 하면 느부갓네살이죠. 느부갓네살의 부친 나보폴라살입니다.
이 나보폴라살이 바벨론보다 아래 지역, 남부 지역에 있는 갈대아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세력을 키워서 바벨론을 치고, 니느웨를 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1절에 보면 산성을 지키고, 길을 파수하고, 허리를 견고히 묶고, 힘을 크게 굳게 하라고 합니다. 니느웨에게 최대한 방어해 보라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비켜 갈 수 있나요? 비켜 갈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후반부에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1절의 파괴하는 자와 2절의 약탈자가 같은 사람들일까요, 다른 사람들일까요? 번역본마다 다릅니다.
저는 2절 후반부가 예전에 앗수르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망가뜨렸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문맥에 따라 바벨론 사람들이 니느웨 사람들을 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문적인 학자들과 성경 번역자들도 반반 갈리는 것인데, 저는 키워드는 포도나무라고 생각해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굉장히 중요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니느웨 사람들을 바벨론 사람들이 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2절은 이전에 앗수르 제국의 약탈자들이 북이스라엘을 쳐서 약탈하고 하나님이 심으신 극상품 포도나무의 가지를 잘라 버렸던 일을 말한다고 봅니다. 예언서에도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오죠.
그들이 영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니느웨를 치심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시겠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합당해 보입니다.
2절 처음 부분을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신다.”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이름이잖아요. 여러분, 야곱이 야뽁 나루에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이름을 주셨어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잖아요.
같은 이름인데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실 때 이스라엘의 영광같이 회복하신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일까요? 예언서나 역사서에서 이스라엘을 야곱이라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명이고 야곱은 개인인데, 이스라엘을 야곱으로 부르시는 거예요. “너의 어린 시절을 내가 안다”라는 의미인 거죠.
연약한 야곱을 하나님께서 강성한 한 민족, 한 국가 이스라엘로 세우셨었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우상숭배하고 불순종해서 망가졌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회복하시되, 강성했던 그 이스라엘 나라처럼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나훔 선지자는 기원전 7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에 대한 멸망을 예언했는데, 이 사람이 예언할 때 어떤 상황이었는가 생각해 봅시다.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무너졌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무너졌어요.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무너진 것입니다.
기원전은 기원후와 달리 카운트다운이 되어 가잖아요. 제로까지 가야 되니까요. 아시는 표정이죠. 새벽에는 별로 반응이 없으신데, 북이스라엘이 722년에 무너졌고 그다음에 650년 정도에 나훔 선지자가 활동했고,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니까 나훔 선지자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무너진 상태에서 이 예언을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곧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의 결정적인 영적 공격과 장애물들을 하나님이 제거하실 때, 여러분의 삶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 인생의 비포 앤드 애프터이죠. 오늘 공동체 종강 예배가 시작됩니다. 어제 한 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순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가정적으로 힘든 분, 직장에서 힘든 분, 재정적으로 힘든 분 등 여러 어려운 분들이 그 순에 모이셨어요.
처음에는 다 우울하고 힘든 상황에서 순예배를 시작했는데, 1년여가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신앙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일터가 회복되어 지금은 너무나 밝은 순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하실 때, 야곱의 영광을 이스라엘의 영광같이 회복하시듯이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또 제가 어제 문자를 하나 받았는데, 여러분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굳이 추정하려고 하지 마세요. 한 1년 전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꿈꾸는 요셉 도서관에 한 학생이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초등학생인데도 얼굴과 눈빛이 어른들보다 훨씬 깊이가 있었어요.
간혹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 중에 “나는 차세대 예배 안 가고 어른 예배에 들어오면 안 돼?”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아세요? 거기에 친구들이 없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예배를 몇 번 드려 보고도 그냥 어른 예배에 오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저는 그러면 그냥 놔두시라고 합니다.
정신 연령이 높은 아이들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문화적 코드가 어른들하고 앉아 있어야 편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의 눈빛이 그런 거예요. 그런데 아이도 자기가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다르니까 스스로 걱정이 되고, 엄마도 걱정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아이를 짧은 시간이었지만 축복하고 격려해 줬는데, 엄마가 어제 문자를 보내서 아이가 차세대 예배에도 잘 적응하고 굉장히 많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이가 밝아지니까 엄마로서는 너무나 행복한 거죠. 장문의 문자를 보내셨기에 저도 장문의 문자를 보냈어요.
“아이가 많이 밝아지고 차세대 예배에도 잘 다닌다니 감사합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아이입니다. 그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입니다. 많이 축복해 주시고, 자랑스러워해 주시고, 격려해 주세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왜 우리 아이만 다를까?” 하는 것이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생각이 깊은 것이 때로는 우울해 보일 수 있지만, 진지한 것과 우울한 것은 또 다른 거예요. 진지한 것은 잘못된 게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그래서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특별한 은사를 주신 것은 이 아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사람으로 잘 키워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문자를 드렸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회복하시고 우리 자녀들의 인생을 회복하실 때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같이 하시리라”는 이 말씀이 응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제가 요즘 보라통 Q&A 책 집필을 하고 있는데요. 책을 다시 쓰면서 확실히 책을 쓰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예전에 받았던 질문인데, 어떤 분이 아브라함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을 세우신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이런 사람을 선택하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인, 이런 정도의 인성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선택하셨느냐는 거예요. 제가 여러 가지 설명을 하다가 마지막에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완벽해야 하나님께 선택받을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선택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내가 이 정도면 부족함 없이 완벽하지. 그래서 하나님께 뽑힐 수 있다”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는 거예요. 우리 중에 아무도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우리도 다 완성형 캐릭터가 아니라 성장형 캐릭터인 거예요.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두 번이나 했고, 다메섹 엘리에셀로 만족하겠다고 하기도 했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중간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럼 왜 아브라함이었을까요?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갈대아 우르는 당시 최고의 문명 중심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는데, 그곳은 여러 잡족이 난립하는 무법지대였습니다. 그 무법지대로 하나님이 밀어 넣으시잖아요. 여러분 같으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면 순종하시겠냐고요? 대답이 없잖아요.
여러분, 그 순종이 어마어마한 순종인 거예요.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보면 “이렇게, 좀 미안하지만 찌질한가? 이렇게 두려움이 많나? 이렇게 부족한가?” 싶지만, 어떻게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인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어떻게 나는 이것밖에 안 될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렇게 완성시켜 주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완성형이어서 선택되는 게 아니라, 정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면 그분이 내 인생을 완성해 주시는 거예요.
빌립보서 1장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아멘. 여러분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완성하실 줄로 믿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치러 올라오고, 그들이 징계를 받으므로 이스라엘은 영광을 회복할 것입니다. 3절, 4절, 5절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군대가 몰려오는 이야기입니다. 6절과 7절은 결국 왕궁이 소멸되는, 니느웨가 망하는 장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죠.
6절과 7절 같이 읽겠습니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같이 슬피 우는도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된다.” 이 표현을 왜 썼을까요? 바벨론과 니느웨를 봅시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이자 심장은 니느웨이고, 바벨론 제국의 수도는 어디예요? 확신을 가지세요. 바벨론 제국의 수도가 어디예요? 바벨론이죠.
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 하류, 거의 페르시아만 가까이 가야 나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IS가 점령했던 모술 바로 인근 지역인데,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이에요. 그러니까 둘 다 강을 끼고 있는 거죠.
서울도 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으니까 큰 도시가 된 거잖아요. 도시 역사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니느웨도 티그리스강을 끼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천혜의 환경을 가진 난공불락의 성읍이었어요.
티그리스강 변에 20미터 깊이의 해자를 팠습니다. 해자는 연못이죠.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연못을 판 거예요. 20미터 깊이입니다. 수영장이 1.5미터나 2미터만 돼도 아이들이 빠질 위험이 있잖아요. 20미터 깊이의 연못을 파 놓은 것입니다.
성벽의 높이가 30미터고, 성벽의 폭이 45미터입니다. 전차가 두 대 나란히 달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 난공불락이었어요.
그런데 티그리스강을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강 이름을 말하잖아요. 새벽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힛데겔과 유브라데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힛데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힛데겔이라는 단어는 “swift”, 유속이 빠르다는 뜻이에요.
티그리스강은 대륙의 중부 산악 지대, 굉장히 높은 아라랏산이 있는 지역에서 발원해 흘러내려오기 때문에 유속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거예요. 천혜의 환경을 끼고 있는 것이 평상시에는 좋았지만 홍수가 나니까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뚫리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틈을 타서 바벨론 군대가 침략한 거예요.
이 타이밍이 절묘하잖아요. 요나 선지자가 “나 이제 그만 니느웨로 안 가고 도망갈 거야”라고 생각하고 욥바 항구에 갔는데, 때마침 어디로 가는 배가 왔어요? 다시스로 가는 배가 왔잖아요. 바로 전 이야기라 기억이 나시는구나. 다시스로 가는 배가 “마침” 왔다고 되어 있잖아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죠.
니느웨를 하나님이 징계하시기 위해 바벨론 군대가 코앞에 닥쳤을 때 홍수가 난 거예요. 그래서 성곽 일부가 유실되면서 그 틈을 타고 바벨론 군대가 밀고 들어가서 함락시킨 겁니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완벽한 것이 있나요, 없나요? 완벽한 것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완벽해. 스스로도 너무 만족스러워”라고 이야기하거나,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굉장히 즐겁게 받아들이시면 큰일 납니다. 완벽한 것은 세상에 없어요.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죠. 앗수르 제국이 굉장히 거칠고 포악하고 교만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거잖아요.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의 최선과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여러분, 5일 동안 열심히 사셨잖아요. 주말에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히 채우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나서와 나훔서를 보면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 시대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까요? 그 시대 앗수르 제국과 니느웨 사람들은 제국의 심장부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이었으니 포악하고 악한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요나는 “40일 후면 망할 겁니다”라고 했는데 망하지 않아서 선지자가 굉장히 부끄러워지는 상황이 됐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예언이 유효하며 그들의 죄악을 징계한다고 하셨고, 나훔 시대에는 이제 징계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럼 어차피 하나님이 징계하실 텐데 왜 그 시대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을까요?
여러분, 어차피 하나님의 심판이 코앞에 있고 어차피 멸망할 테니 하나님 앞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구원받을 필요도 없나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예언서를 읽어 보면 에스겔서에 반복해서 나오는데,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자신의 죄악 가운데 죽는 것을 기뻐하겠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세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말세 중의 말세이고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늦었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하며 인생을 그냥 살겠냐고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깨어서 하나님 앞에 반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마태복음 11장 1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결연한 의지를 갖고 나갑니까? 그러듯이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결연한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아직 천국 문이 열려 있을 때, 아직 구원의 문과 은혜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여러분, 천국을 향해 침노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축복의 문, 심판의 문”이라고 제목을 정한 것은 6절에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문이 열림으로 왕궁이 소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거잖아요. 그래서 이 문을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 중심의 문을 열고 회개하며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기회의 시간이 다 지나간 뒤 진노의 문이 열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인가? 이 결정은 우리에게 있는 거죠.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적인 결정을 기다리시잖아요.
요나 시대 니느웨 사람들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려서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겠는가? 아니면 나훔 시대 니느웨 사람들처럼 후회의 눈물을 흘리겠는가? 어떻게 보면 눈물이라는 것은 똑같아 보이지만, 우리가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 가운데 감동의 눈물과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기회의 시간을 다 놓치고 인생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 뒤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맨 처음에 어떤 단어가 나왔어요? “영접하는 자.” 이 땅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가 가서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너희에게로 와서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라고 하십니다.
천성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 인생의 시간이 다 끝나고 천성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내가 주님을 영접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그 천국 안으로 영접해 주실지를 결정하는 시간이에요.
내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이 있고, 그분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시는 시간이 있어요. 여러분, 아직은 천국 문이 열려 있고 아직은 은혜받을 만한 때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요나서와 나훔서를 연이어 봤어요. 여러분, 앗수르 제국이 주변 민족들을 힘들게 한 것은 그때나 이때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예언한 것과 나훔이 예언한 것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 시대 니느웨 사람들은 반응했고, 나훔 시대 니느웨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어요.
때로 저는 메시지를 전하고 설교하다 보면 회개를 종용하거나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 권면할 때 고민하는 분들을 봅니다. 아니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대로가 열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문이 열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고자 했던 아브라함이 연약한 인생이지만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완성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언약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인생과 가정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임하도록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하고 순종하는 신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오 주님,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내 영혼아, 일어날지어다. 내 영혼아, 일어날지어다. 상황 가운데 매몰되어 있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주저앉아 있지 않고 깨어 일어나 담대히 나아갈지어다. 믿음으로 전진할지어다.
우리가 주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그 약속을 온전히 완성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회개하며 반응할 때 주께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여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반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인생의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축복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 시간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것, 그래서 영적인 파수꾼들이 중요하고 가정의 중보기도자로 세움받은 사람들이 중요하며 이 새벽을 깨우는 성도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한국 교회 가운데 영적인 물꼬가 트이기를 축복합니다.
또 한 가지, 요나 시대에 그가 사흘이나 걸리는 니느웨 성읍을 단 하루 다니며 예언을 선포했음에도 니느웨 성의 남녀노소, 높은 자리에 있는 왕부터 모든 신민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반응했습니다.
우리가 부흥을 이야기할 때는 한 개인만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반응할 때 그것을 영적인 부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이 시대 한국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심으로, 전면적으로, 전심전력으로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예배자들이 일어나고 기도자들이 일어나고 헌신자들이 일어나고 회복자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할 때, 우리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자녀 세대를 위해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주님, 요나 시대의 니느웨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 반응하며 전면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아멘. 한국 교회, 깨어 일어날지어다. 한국 교회, 깨어 일어날지어다. 1516교회, 깨어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나아갈 때 한 사람의 영적 파수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읍 전체가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백성들 전체가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1516교회 성도들 모두가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 전체가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5대양 6대주의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이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일어날지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하나님 앞에 반응하며 나아갈지어다. 천국을 향해 침노하는 백성들이 될지어다. 할렐루야.
2026.06.22(월) | 새벽기도 | 고난 가운데 다듬어지는 인생 (욘 1:17-2:10)
고난 가운데 다듬어지는 인생 (요나 1:17-2:10)
- 제목: 고난 가운데 다듬어지는 인생
- 본문: 요나 1:17-2:10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22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요나는 자신을 깊은 바다에 던지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고난을 자신의 실수나 사탄의 공격만으로 해석하면 절망에 빠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 안에서 바라보면 그 안에 담긴 교훈과 연단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성도를 고난 가운데 정금같이 다듬으신다.
2. 고난은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는 위장된 축복이다
요나는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배 밑층에서 잠들었지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뒤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사람은 평안할 때보다 고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응답을 경험하게 하는 위장된 축복이 될 수 있다.
3. 고난 가운데 드리는 기도는 정직해야 한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했음에도 하나님께 쫓겨났다고 표현했다. 고난을 겪을 때 자신은 피해자이고 타인이나 하나님은 가해자라는 구도로 기도하면 자신의 불순종과 책임을 보지 못한다. 성도는 다른 사람만 탓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변화되어야 할 부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4. 신앙적 자존심과 자기 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요나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과 자신을 구분하며, 자신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여 은혜에 반응한 반면, 요나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을 끝까지 기뻐하지 못했다. 바른 신앙 문장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내면에 남은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까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5.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은 경계를 넘어 흐른다
요나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그 구원을 이스라엘 중심으로 제한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만 잘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축복과 복음의 통로로 삼기 위함이다. 성도의 기도 역시 자신과 가정과 교회만을 넘어 도시와 나라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과 긍휼을 품어야 한다.
결론
오랫동안 기도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만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변화되어야 한다. 정직한 기도는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교훈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기도다. 성도는 고난 가운데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과 열방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요나서 1장 17절에서 2장 10절까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러싸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아멘.
네,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향한 주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 먼저 암송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네, 하나님의 은혜의 원동력으로 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날마다, 또 순간마다, 사건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체험과 간증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 가운데 다듬어지는 인생”이라고 제목을 정했는데요. 요나서 1장 마지막 부분부터 2장까지, 요나의 기도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소품들이 굉장히 많다고 말씀드렸는데, 17절을 제가 다시 읽어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죠. 요나 선지자를 지중해 바다에 빠뜨리시고 예비하신 것은 큰 물고기입니다. 아마도 고래일 것으로 생각되죠.
요나가 17절 말씀처럼 밤낮 삼 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첫 번째, 예수님이 인정하셨죠. 마태복음 12장 39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내내 엄청나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믿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제 한 가지 표적, 한 가지 기적이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삼 일 동안 죽은 가운데 머무시다가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요나가 삼 일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다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예수님이 인정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부활도 신화적으로 해석하겠는가? 아닌 거죠. 두 번째, 제가 전에도 소개했는데 현대사에서도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의 실제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피노키오 동화 같은 이야기냐고 할 수 있지만, 피노키오 동화가 성경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됐기 때문에 요나서를 참고한 거죠. 실제 역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요나의 기도를 보면 1절 말씀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죠. 요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중요한 몇 가지를 보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첫 번째 보고 싶은 것은 3절 말씀인데요. 3절 읽어 볼까요?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신 분이 누구세요? 주님이시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고난이 전적으로 나의 부주의함 때문에 생겼다면, 여러분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잖아요. 그 불완전한 존재로 인해서 고난이 찾아오고 고난이 계속된다면 인간은 이 고난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또 다른 가정을 해 보면, 이 고난이 사탄의 전적인 공격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더 절망적인 거죠. 사탄의 공격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세상을 붙들고 계시고,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고난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고난을 경험할 때, 하나님이 결국 나에게 어떤 인생의 교훈을 주기 원하시는지, 내가 어떻게 이 고난 가운데 정금과 같이 나오기를 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고난을 경험할 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나님께 해답이 있는 것이죠.
두 번째, 이 고난 가운데 우리의 삶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절 계속 보여 주시면, 고난으로 말미암아 요나 선지자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됐어요? 이제 기도하게 됐죠. 그래서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으면 참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죠. 고난에 처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요나가 지중해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도 하나님을 안 찾았죠. 그냥 배 아래로 내려가서 잠을 잤잖아요. 그런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제야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위장된 축복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두 번째,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세 번째 나누고 싶은 것은, 오늘 요나 선지자의 기도를 보면서 좋은 부분도 있지만 사실은 별로 좋지 않은 부분도 있어요. 그 부분을 나눌 텐데 4절 말씀입니다. 4절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세 번째 나누고 싶은 것은 고난 가운데 사람이 정직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4절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지금 요나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나요, 아니면 요나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갔나요? 후자죠.
말이 정확해야 되잖아요. 아 다르고 어 다른 거잖아요. 그런데 이 선지자는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생 살았는데, 나한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시니까 내가 이거 내려놓고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태도는 무슨 이야기예요?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신 것이라는 피해자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이죠.
사람이 고난 가운데 들어가면 나는 피해자고 다른 사람들은 가해자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남편이 날 힘들게 하고, 부모가 날 힘들게 하고, 자식들이 날 힘들게 하고, 직장 사람들이 다 가해자고 나는 피해자고, 나는 선인이고 나머지는 악인이라는 구도로 기도하는 경향이 굉장히 농후해지게 돼 있어요. 정직하지 않죠.
제가 성경을 쭉 보다가 이런 현상이 많은 사람에게 있더라고요. 모세도 정직하지 않았어요. 모세가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데스에서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불순종하고 두 번 반석을 치잖아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가 신명기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는 내용을 보면 “너희 때문에 내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못 들어갔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내내 문제를 일으켰어요. 만약에 그들이 모세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무너졌어야 정상입니다. 그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40년을 버텼는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온전히 주목하지 못했어요.
정직하게, 뼈아프지만 정직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여한 부분도 있지만 사실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인정해야 되는데, 사람은 결정적인 피해의 순간, 고난의 순간에 정직하게 해석하기가 힘든 거예요.
어제 제가 마지막 부분에 최근 한국의 학교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죠. 내 아이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모든 해석이 내 아이가 무조건 피해자인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생기죠.
4절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이 구도는 좀 안 좋은 표현이지만 하나님을 가해자로 만들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가해자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까지는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 가해자다. 내가 피해자다”라는 구도의 기도가 맞나요? 이렇게 기도하면 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서 2장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게 해석해 주고 싶겠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맞는데 세 번째, 고난 가운데 우리의 기도는 정직해지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거예요. 정직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5절과 6절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러싸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5절 다시 보여 주시면 물고기 뱃속, 그 위장 가운데 들어가서 바다풀이, 해초가 머리를 잔뜩 감싸고 있는 힘든 상황입니다. 또 6절 보여 주시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는데 그 물고기가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니까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표현합니다. 그가 얼마나 막막한 상황인지를 보여 주는 거죠.
그런데 요나의 기도가 정직하지 못한 기도라는 것을 아까 한 절에서 봤는데, 8절과 9절을 더 보겠습니다. 8절과 9절 같이 읽겠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8절과 9절을 우리가 읽어 봤는데, 그냥 이 문장 그대로 놓고 보면 다 맞는 이야기예요. 그러나 이 8절과 9절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은 요나에게 끝까지 남아 있는 영적인 자존심, 신앙적인 자존심입니다.
8절에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한다.” 성경에서 거짓된 것, 헛된 것, 허무한 것은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우상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누굴까요? 이방인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누리며 살면서도 그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조차 모르는 자들이라는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여 주죠.
그런데 9절 말씀에 보면 “나는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겠습니다.” 아마도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저를 건져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뭔가 서원 기도를 했겠죠. 나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반응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요나서 3장과 4장이 전개되면서 이후의 이야기는 그가 주장했던 8절과 9절의 내용과 정반대로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되죠.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 그 이방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선지자인 요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에 동의하지 못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로 제사드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8절과 9절을 문장만 놓고 성경을 묵상하면 “좋은 이야기지” 이렇게 하고 끝날 수 있어요. 그런데 요나가 자기 입으로 “나는 거룩한 선민이니까 이방인과 달라”라고 하는 생각이 아직도 그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관점 때문에 결국에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눈물과 긍휼을 용인할 수 없었어요. 글쎄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용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집을 부리죠.
9절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제일 마지막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한번 읽어 볼게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여러분, 구원이 여호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요나입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가 갖고 있는, 방금 전에 말씀드린 이방인과 유대인을 분리해서 보는 세계관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그 구원이 베풀어져야 되는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 주변 민족들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과 섭리를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우상숭배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그 문장은 맞지만 그 문장에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철저히 이스라엘 중심인 거예요. 철저히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요나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제가 두 가지 이야기할게요.
첫 번째는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예전에 한 집사님이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셨어요. 정말 제가 봐도 “와, 너무 훌륭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셨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사업을 한다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고 또 사업처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정말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10년을 기도해도 그 남편이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 당시 서빙고 온누리교회 큐티 나눔방이 굉장히 부흥하고 뜨거워질 때였는데, 그 큐티 나눔방을 하면서 사실은 내면적인 변화가 일어나요. 기도가 정직해지는 거예요. 늘 남편이 문제고 남편이 변해야 되고 자식들이 변해야 된다고 10년을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네가 변해야 된다. 네가 변해야 된다”라고 이야기하시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눈물로 기도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린 거죠.
불과 그러기를 3개월 만에 남편이 “당신 요즘 이상하다. 10년을 교회에 다녀도 안 변하더니 요즘 인생이 변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남편이 반응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그 남편이 너무나 훌륭한 장로님이 되셨어요.
여러분, 10년을 새벽기도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다 악인이고 나는 피해자고, 그들이 변해야 되고 나는 바꿀 게 없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데 계속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도만 한다면 요나가 지금 그런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요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 반응한 것이니까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꺼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요나는 “역시 나는 기도하기를 잘했어. 훌륭한 기도를 했지”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의, 교만, 영적인 자존심이 문제인 겁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먼저 변화되면 모든 것이 변화되는 시작점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희가 7월과 8월 지역 공동체마다 도시 정탐 사역을 하잖아요. 그런데 여름에 저희가 도시 정탐 사역을 할 때마다 꼭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이걸 왜 합니까?” 이런 질문들이 나와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내 인생 잘돼야 되고, 내 가정 잘돼야 되고, 내 자식 잘돼야 되고, 내 기업 잘돼야 된다”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보실 때 “그거를 내가 왜 응답해 줘야 되니?”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뭔가요? 그들만 잘되라고 선택하신 건가요?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선택하신 거죠. 오늘날 하나님은 왜 교회를 선택하셨고, 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교회 온 사람들만 잘되라고 교회를 세우신 게 아니잖아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의 등대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도시를 밝히고 나라를 밝히고 열방을 밝히는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나서를 보면서 어떻게 보면 요나 선지자만 탓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거의 대부분이 그런 패러다임에 갇혀 있어요. 내가 잘돼야 되고, 내 교회가 잘돼야 되고, 내가 사는 도시가 잘돼야 되고, 내 나라가 잘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뛰어넘어야 하나님의 시선이 보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이번 한 주간을 사시면서 “하나님, 제가 변해야 됩니다. 저만 변하면 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나의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정말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 그 하나님의 탄식을 따라갈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내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함께 안타까워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오 주님, 우리의 기도 가운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오랜 시간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는 상황 가운데 있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깨어지고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출발점에 서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오 주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정직한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원수를 두려워하거나 나 자신을 한탄하며 끝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이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온 것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자신이 더 깊이 하나님의 교훈과 하나님의 깨우치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자기 의를 내려놓게 하여 주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바라보게 하시며,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겠습니다. 나라를 볼 때 교육계도, 정계도, 재계도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새벽에 기도할 때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우리 가족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나라 안에 있는 도시들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곳곳에 교회들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깨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열방에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다시 임하기를 사모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열정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손을 들고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한 뒤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2026.06.21(주) | 주일설교 |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딤전 5:3-8)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디모데전서 5:3-8)
- 제목: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 본문: 디모데전서 5:3-8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21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교회는 관계적 방어선이 약한 사람을 존대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권면한다. 구약의 나그네, 고아, 과부 돌봄은 신약 교회에서도 이어졌고, 초대교회 역시 과부 구제를 중요한 사역으로 감당했다. 설교자는 오늘의 교회가 남편이 함께 신앙생활하지 않는 성도, 부모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차세대와 청년 성도를 쉽게 여기지 않고 존중하며 돌봐야 한다고 적용한다.
2. 한 영혼은 가족 배경과 보호자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소중하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의 배후 관계와 보호망을 보며 대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과 동생들을 홀로 키워낸 싱글맘이었고,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도 가족을 이끌며 신앙 공동체를 세운 여인이었다. 다윗과 다니엘처럼 부모의 직접적 보호가 없던 다음 세대도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예배자와 지도자로 세워질 수 있다.
3. 참된 도움은 의존이 아니라 자립을 세우는 방향이어야 한다
바울은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다면 먼저 가족이 효를 행하고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고 말한다. 교회가 누군가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지만, 가족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대신 빼앗아서는 안 된다. 또한 교회의 도움은 단순히 물고기를 계속 주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 장학, 진로, 공부와 같은 실제적 토대를 통해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돕는 방향이어야 한다.
4. 외로움의 여백은 하나님 임재로 채워져야 한다
본문은 참 과부를 “외로운 자”로 묘사하며,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간구와 기도에 힘쓴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이 외로움이 과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이 경험하는 인생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청소년, 청년, 부부, 중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결국 홀로섬을 경험하며, 그 빈 공간을 향락이나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야 한다.
5. 다윗은 외로움을 하나님으로 채운 예배자였다
다윗은 부모와 형제에게 외면당하고, 사울에게 쫓기고, 요나단과 떨어지고, 가정과 자녀에게도 상처를 입은 외로운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외로움의 공간을 사람이나 세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웠다. 시편 10편의 고백처럼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고아와 같은 자를 도우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6. 약함을 인정할 때 은혜의 공동체가 세워진다
바울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라고 강하게 말한다. 신앙은 추상적 고백이 아니라 연약한 가족과 이웃을 실제로 돌보는 삶으로 드러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은혜를 경험하고, 은혜 받은 약자는 또 다른 약자를 돕는 사람이 되어 은혜의 공동체를 세운다.
결론
설교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평생의 라벨로 붙이지 말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시며, 막다른 골목에서 일으키시는 반전의 하나님이시다. 성도와 자녀들이 약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약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설교의 제목을 같이 읽어 볼까요.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디모데전서 강의 12번째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교회 안에 성도들 간의 관계, 또 신앙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부분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모세오경에서도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그들의 신앙 공동체가 직접 돌봐야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도 연결되어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에도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사도행전 6장에 상당히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짧았고, 여성들은 남자들의 노동력 없이는 1차 산업 시대의 생계 유지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1부 예배 설교를 마치고 한 연세가 드신 어르신께서 “왜 과부 이야기만 하냐. 홀아비 이야기는 안 하냐” 이렇게 질문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당시를 생각해 보니까, 일단 로마 제국 시대 로마 시민들의 경우에는 가장에게 모든 가족의 전권이 주어졌습니다. 거의 무제한의 정권이다, 이렇게 표현할 정도입니다. 자식이 돈을 벌어 와도 아버지 재산이었어요. 별로 충격을 안 받으시는데, 자녀들조차도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전부 아버지의 소유라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도 연세 많으신 분들이 끝까지 돈을 갖고 있어야 홀대를 안 당한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때는 재산권을 갖고 있었고 홀로되신 아버지의 경우에도 대가족 제도 안에서 자식들과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수장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홀로되신 아버지들은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과부를 존대하는가.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다가 홀로되신 분들이 있잖아요. 또 이런 분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밴쿠버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밴쿠버에서 목회를 하다가 한 가지를 관찰하게 됐어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부모님이 함께 살고 있는 이민자 가정의 청소년이나 청년 자녀들을 교회 어른들이 대할 때는 상당히 존중해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혼자 유학을 와 있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의 경우에는 교회 어른들이 좀 쉽게, 만만하게 대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저는 관찰자 유형이기 때문에 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정치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대할 때도 그냥 그 사람만 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 배후에 있는 모든 인간관계를 다 보면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배후에 보호자도 없고 배우자도 없다면, 관계적인 방어 라인이 전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알고 가볍게 생각하거나 때로는 심지어 공격적으로 대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참 안타까운 존재죠.
그런데 세상은 이런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교회가 이러면 돼요, 안 돼요? 이러면 안 되는데 교회가 더 심할 때도 있더라고요. 그러면 1516교회는 과부를 존대하는가.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누굴까 생각해 봤습니다. 두 부류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매 성도님들입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 아내도 함께 존중을 받고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혼자 교회를 다니시는 자매 성도들이 “내 남편도 함께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에 소망하게 되는 이유가 아닌가 싶어요. 혼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홀대를 당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없으면 감사한 것입니다.
교회는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 하기를 장려하지만, 홀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도 또한 격려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 싱글맘들에 해당되는 분들을 찾아봤어요. 여러 명이 있는데 시간 관계상 두 분만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님이 12살에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부친이 등장하고, 그 이후에는 부친이 등장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이죠? 요셉이죠. 그 요셉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일찍 떠났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장남인 예수님과 뒤의 아들들을 홀로 기도와 애정과 헌신으로 키워낸 싱글맘이었어요. 대표적인 싱글맘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세운 여인이 누구였죠? 루디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루디아의 남편 이름이 등장하나요, 등장하지 않나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가족이었어요. 이 여인은 싱글인데, 남편이 일찍 죽었든지, 남편과 어떻게 결별했든지, 아니면 남편의 존재감이 없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가족을 이끌고 열심히 사업을 하고 가족을 성실하게 이끌었던, 싱글 여성으로서 가족을 이끌었던 아주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 이런 상황이 있는 분들을 우리가 중요하게,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모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차세대 성도들과 청년 성도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면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아무래도 아이를 한 번 더 쳐다보게 되고, 이야기 나누고, 안부도 묻고, 칭찬도 해 주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혼자 나오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주일 아침에 아이를 깨워 줄까요, 안 깨워 줄까요? 깨워 줄 일이 없죠. 교회 가는 것을 내가 보낸 것도 아니고 찬성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주일 예배를 종종 빠지기도 합니다. 여름 캠프에 간다고 해서 “야, 너 캠프 가야지” 이렇게 해 주지 않잖아요. 부모가 “캠프가 뭐야. 그냥 가족 여행 가면 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캠프도 자주 오지 않아요. 선생님들 눈에 잘 안 띕니다. 그러니까 아이들도 혼자 다니기 때문에 홀대를 받을 가능성이 교회 안에서 생각보다 큰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하기를 권면하지만, 홀로 다니는 자녀들을 우리가 잘 돌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부모 역할을 해 줘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두 명의 인물을 생각해 보면, 다윗은 부모에게 일찍부터 버림받아서 빈들에서 목동 생활을 할 때 예배자로 헌신했잖아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다니엘도 10대 청소년일 때 포로로 끌려갔어요.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간 이방 나라 이름이 무엇이었죠? 확신을 가지세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가서 “내가 신앙적 결단을 해야지” 할 때 부모랑 상담했나요? 아니요. 부모라는 방패막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소년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홀로 믿음의 결단을 하고 시대를 이끌어 가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 지도자, 영적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음 세대 가운데 이런 인물들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2026년 저희 교회 표어를 한번 읽어 볼까요.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그래서 “Every soul matters to God.”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우리 각자가 인생 여정, 신앙 여정 가운데 상처와 눈물이 있고 또 기대감과 소망함이 있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번 여름에 지역 공동체에서는 도시 정탐 사역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명의 삶 요나서, 순예배도 요나서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니느웨 도시에 대해서 가지신 긍휼의 마음을 요나가 공감하지 못했잖아요. 여러분이 도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차세대 캠프를 통해서, 또 청년부 아웃리치와 여름 사역을 통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 내는 은혜의 감격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4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과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돌봄의 대상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 자녀나 손자들이 있다면 “교회에서 알아서 돌봐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가족이 먼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돌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진정 받으실 만한 신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 있는 대상을 섬기고 돌보는 것은 선한 일이죠.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나서기 이전에 가족 공동체가 먼저 나서는 것이 합당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건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요. 가령 이런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는 싱글맘이 경제 활동도 해야 되고, 아이들도 공부시켜야 되고 돌봐야 한다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다 책임을 져야 할까요? 이 경우에는 그 싱글맘을 돌볼 수 있는 부모 형제나 가족이 있다면 가족이 먼저 나서도록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도 안 되는 상황이라면, 싱글맘 자신의 시간 스케줄 안에서 적합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희가 앞으로 C.C.에서 장학 사업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 재정 지원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좀 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학생의 경우에는 본인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성적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친구로 키워 내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또 취준생이라면 적합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면, 진정한 도움은 도움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계속 줄 것이냐, 아니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긍휼의 마음이 많으신 분들은 일단 속에 있는 것을 털어서 주는 것부터 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안 좋게 부정적으로 패턴화되면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교회 안에서 이런 경우도 봤어요. 많지는 않은데 간혹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학생인데 기도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교기관에서 준 타이틀이 아닌데 스스로 선교사라고 타이틀을 하고 다니면서 나를 재정적으로 도와줄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쭉 봤을 때 “저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나에게 돈을 주겠다”는 것이 얼굴에 써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있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딱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권면이라고 해야 될지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몇 년씩 재정 지원을 받고, 심지어 그렇게 재정 지원 받은 것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당사자들을 불러 놓고 “당신 지금 뭐 하는 거냐. 이것 하지 마라” 하고 멈추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저는 이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플로잉이라는 것은 굉장히 성경적인 것이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상당히 일찍부터 플로잉을 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 됐든, 먹는 것이 됐든, 입는 것이 됐든, 물질이 됐든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주는 것입니다. 오래 고민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플로잉의 삶을 여러분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소수가 아멘 하셨는데, 이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다만 플로잉을 할 때 지혜롭게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이 교회 안에서 잘 회복될 수 있기를, 건강한 인생으로 건강한 가정으로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또 여러분이 성실하게 일해서 마음도 풍요롭고 삶도 풍요로워져서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도울 때 내 만족감을 위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5절과 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참 과부인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참 과부인 사람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아닌 사람은 향락을 일삼습니다. 제가 5절 말씀을 다시 보여 주시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이 표현이 어제 눈에 띄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읽어 봐도 좀 이상한 것입니다. 과부라는 상황 자체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참 과부로서 외롭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안 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맞나요? 저는 T이기 때문에 T 유형은 그렇게 해석을 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과부라는 상황 자체가 외로운 상황입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면, 인생에서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사람들은 이 외로움이라는 인생의 여백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울 기회로 삼느냐, 아니면 세상 향락과 세상 연락으로 채우는 기회로 삼을 것이냐, 이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오늘 본문 설교를 준비하면서 일주일 동안 고민했습니다. 지난주에 1, 2절을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내내 과부 이야기하고, 다음 주도 과부 이야기해요. 그래서 일주일 내내 “과부 이야기인데 이것을 성도들 전체에게 어떻게 적용해서 이야기하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 “외로운 자”를 한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외로운 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은 모든 현대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홀로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을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꺼이꺼이 울던 어린아이들, 분리불안증에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10대 청소년이 되는 순간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가서 “나의 정체성이란 무엇이냐” 찾느라 외로운 시간을 갖잖아요.
또 어찌 보면 가장 친구들을 좋아하고 가장 이성에 관심이 많을 청년의 나이조차도 오늘날에는 자립이라는 언덕에 서기 위해서 자신을 굉장히 좁은 트랙 위에 세워 놓고 전진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뭐지? 진짜 나는 인생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지?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도대체 인생에 아무것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 외로운 1인 가구 청년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면 중장년이 되신 분들은 이런 외로움의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이게 해결이 안 되더라고요. 여러분, 한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해서 결혼하셨잖아요.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하세요? 그 시절을 잊으셨군요. 그 한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해서 결혼을 했단 말이에요. “저 사람하고 같이 살면 좋겠다” 이것을 갈망하던 때가 아니라 지금 그 사람이 옆에 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떻게 이렇게 외로울 수가 있지? 이렇게 인생은 철저하게 혼자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그러다가 부부간에 서로 관계가 어려워져서 사별을 하든 이별을 하든 결국 서로가 갈라서게 된다든지, 아니면 자녀들과도 관계가 어려워져서 관계가 멀어진다든지 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빈들에 홀로 서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외로운 현대인들이여, 그대는 그 외로움을 과연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인생은 외로울 수 없어” 하며 외로움 자체를 자꾸 부정하면서 살려고 하는가. 외로움이라는 것이 인생의 긍정적 요소라고 볼 수는 없지만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원망하거든요.
“어떻게 내 부모가 내 어릴 적에도 나를 이렇게 냉대하더니 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나를 여전히 냉대할까.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내 남편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내 아내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는데 어떻게 자녀들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여러분, 인생의 본질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인생은 홀로 섬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인생을 살다 보면 더 깊이, 더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 인생은 홀로 섬이구나.” 다만 그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장막이라는 예배 이름으로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우리가 다윗을 생각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자라는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도대체 그가 평생 하나님을 그렇게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가 평생 고아처럼 외로운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외롭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부모도 그를 버렸고, 형제들도 그를 미워했고, 첫 번째 멘토로 등장했던 사울 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가장 신뢰했던 의형제 요나단과는 평생 다른 트랙에서 살게 됐고, 첫 번째 아내 미갈과도 관계가 틀어졌고, 자신의 충신들이 나중에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자식들도 아들들도 자기를 버리죠. 철저하게 하나님이 그를 외롭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이 다윗만 있겠습니까? 다윗만이 아니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외로움의 인생의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며 삽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외로움의 모든 공간들을 하나님으로 채우며 산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으로 추정되는 시편 10편, 여러분 댁에 가서 한번 전편을 읽어 보세요.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이 시편에 보면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합니다. 어떤 자가 의지한다고요? 그런데 앞뒤의 내용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외롭다고 다 주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악인들은 온갖 자기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왕일지라도, 장수일지라도 세상의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사람을 의지해서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외로운 한 사람으로 서서, 외로운 예배자로 서서 주만 의지합니다. 고아와 같이 주만 의지하는 나를 하나님이 왜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외로움을 여러 가지로 해결하잖아요. 친구들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향락을 일삼아 보기도 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외로운 삶의 여백을 SNS로 채우고, 넷플릭스 영화와 드라마로 채우고, 유튜브 영상으로 채웁니다.
요즘 사람들만 그럴까요? 제가 생각해 봤더니 옛날 외로운 어르신들은 모여서 화투 치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그렇게 시간을 죽이면서 사셨잖아요. 시대적인 양상만 바뀐 것이지, 인생의 외로움의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외로운 자여, 그대는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가.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가, 다른 것에 소망을 두고 채우려고 하는가.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울증보다 더 심각한 것이 조울증이라고 하잖아요. 인생은 기본적으로 우울한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제 우울 기질로서 한마디 드리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우울한 것입니다.
그 우울한 것을 매우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엔터테인먼트와 온갖 각종 자극적인 것으로 끌어올리니까 조증으로, 조증에서 울증으로 뚝 떨어지면서 사람이 감당이 안 되어서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연 상태 그대로를 보세요.
여러분이 7, 8월에 바닷가로, 들로, 산으로, 해변으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무슨 특별한 이벤트나 액티비티를 하지 말고 그냥 자연 속에서 일주일, 한 달 살아 보세요. 심심하기 그지없고 이렇게 울적하고 적적하고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연 상태 그대로 그 빈 공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 책을 쓰려고 했을 때 작가 생활을 하시는 성도님이 저에게 장소를 추천해 주셔서 무주에 간 적이 있어요. 무주 구천동이라고 들어보셨죠? 우리나라 최고의 청정 지역 중 하나입니다. 일급수의 맑은 물과 맑은 공기, 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성경 보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책을 썼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혼자 책 보고 책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달을 지내 보니까 너무 외롭더라고요. 너무 울적하더라고요. 그 시간을 내가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가족을 돌보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정직하게 자기 진단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6절 말씀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여러분, 인생을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그 열심히 산 그 이면에 결국 여러분 자녀들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고서는 보상으로 주는 것이 전부 엔터테인먼트거든요. 어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돈 아니면 엔터테인먼트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산 당신의 인생이 결국 채우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영적으로 살아 있으나 죽어 있지는 않은가.
만약 내가 이 상태라면 정직하게 여러분의 외로움을 직면하고 인정하셔야 합니다. “아, 인생은 외로운 것이구나.” 그리고 그 외로움은 하나님의 현존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것으로 자꾸 채우려고 하면 빈 공간만 계속 넓어집니다. 그래서 그 공허함과 허무감을 채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외로움의 여백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7절과 8절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사도 바울이 어려운 그룹의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실천적인 문제를 이야기한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것이고 세상 불신자보다 악한 것이다”라고 이렇게까지 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 참된 신앙을 표현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 당시 세상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은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법에서는 한 집안의 가장, 아버지에게 신생아의 생사여탈권이 있었습니다. 재산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생아가 태어나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이 아이를 버릴 것이냐, 심지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 아이를 노예로 팔아 버릴 것이냐 이런 것도 아버지가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정반대로, 또 다른 가정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그룹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리고 오는 관습이 있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우리나라에 고려장이 있었다는 낭설이 있었는데, 역사학자들이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밝혔습니다. 우리나라에 고려장은 없었습니다. 중국 고대 문헌들을 찾아봐도 중국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본에는 있었습니다. 오바스테라는 관습이 실제로 있었고, 그 실제에 있는 관습을 영화로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왜 일본만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생존의 문제가 삼국 중에 제일 심각했다고 생각됩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이 본문의 말씀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영위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안 되는 어린아이, 또 그것이 어려운 나이가 많은 외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돌봐 주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사회적인 약자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시고, 강자 못지않게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에게 돌보라고 명하십니다.
제가 설교를 쓰면서, 저는 번역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단어를 쓰느냐가 상당히 신경 쓰이거든요. 그런데 설교문 내내 앞부분부터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이 머리에 떠오르는데 계속 거부하면서 썼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왜 내가 설교문 내내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제 자신을 돌이켜 보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약자가 강자가 되는 하나님의 반전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저도 체험했고 여러분도 체험했잖아요. 하나님은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고 한정짓는 인생을 너무너무 안타까워하시거든요. 그래서 그 표현을 여러분의 인생에 라벨로 붙이고 살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모두가 절대자이신 그분 앞에서 다 한없이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만 약자고 어떤 사람은 강자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자들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약자는 또 다른 약자를 돕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연약하고 죄 많고 비루하고 누추한 존재여서 하나님의 건지심과 은혜를 받았는데, 그런 우리들이 모여서 은혜의 공동체를 만들지 않고 세상 강자의 논리를 교회 안에 끌어들인다면 그게 교회냐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 한국 사회를 보면 볼수록 교육계가 굉장히 심각하잖아요. 우리의 일터도 심각하고요. 동네 마트에만 가도 내가 돈 몇 푼 주고 물건을 산다는 이유로 갑 역할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지난 5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중고 교사가 무려 107명입니다. 제가 어제 기사를 보다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소방관이나 경찰 같은 공무원들은 순직 인정이 거의 80, 90%인데 교사는 10%, 20%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교사는 순직 인정이 안 되는가. 그러려면 학교의 교육 환경이라든지, 학부모라든지, 아이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이 부분이 고려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본인이 떠안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학부모님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에게 민원 안 하시죠?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학교 선생님들에게 내 아이를 위해서 강자의 논리로 접근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하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민원을 넣거나, 아니면 민원 한 번이 나는 한 번이지만 학부모가 돌아가면서 한 명씩 하잖아요. 한 주에 학생이 30명인데 30회를 받으면 여러분이 해 보세요. 직장에서 거래처에 일주일에 30번 민원을 받아 보세요.
그럼 왜 그러는 걸까요? 부모의 심리를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절대 강자의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 자녀가 약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내 자녀가 억울해지고, 내 자녀가 손해를 보고, 내 자녀가 피해를 보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용납할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시고, 약한 자를 회복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잖아요. 그 하나님을 내 자녀가 만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중간에 개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를 빼앗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개입해야 할 만한 큰 사안도 있겠죠.
그러나 은혜와 약함의 상관관계는 내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나는 강하다, 나는 넉넉하다, 나는 잘났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전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저희 큰아들을 밴쿠버에서 데리고 올 때,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왔거든요. 거기서는 2학년을 마쳤지만 여기서는 9월이었기 때문에 2학년 2학기로 일반 학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정도로 적응을 못 할 줄은 몰랐어요.
일단 담임 선생님이 나이가 좀 있으신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이 감당이 안 됐는지 긴 줄자를 들고 다니면서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등 스매싱을 하셨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아이가 일단 거기에 경악을 했고, 두 번째는 책을 좋아하니까 어떤 여학생이 쉬는 시간에 책을 보고 있길래 “넌 무슨 책을 읽니?” 물어봤는데 2학년짜리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쏟아부었습니다.
저희 아내가 저에게 그랬거든요. “아이들이 TV도 안 보고 게임도 안 하는데, 드라마를 본 적도 없고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도 없는데 가서 친구들하고 대화가 되겠냐”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한국 아이들이 갖고 있는 거친 언어의 어휘에 휘둘려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보캐블러리를 아이들이 쏟아 놓는 거예요.
아이들이야 한 학기 동안 이미 친해져 있는 상태니까 의도치 않은 왕따인 거죠. 그러다 보니까 또 안 좋은 아이들에게 휘말립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안 좋아봤자 얼마나 안 좋겠냐 생각하시겠지만, 하여튼 안 좋은 아이들이 관심을 보여 주니까 거기에 휩쓸려 가게 되더라고요.
그 시간이 저에게는 참 힘들었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아이가 홀로 그 시간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찾아가거나 친구의 부모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몇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한 가지는, 일단 남자아이는 운동을 열심히 잘하면 친구들 사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책을 좋아하니까 책을 많이 보고 공부하면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가운데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인생의 힘든 시간, 연약한 시간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도 여러분 자녀들의 인생도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 가난할 때 부유케 하시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2026.06.20(토) | 새벽기도 | 왜 하나님은 그러셨을까? (온 1:1-10)
왜 하나님은 그러셨을까? (요나 1:1-10)
- 제목: 왜 하나님은 그러셨을까?
- 본문: 요나 1장 1-10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20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요나는 불순종의 사람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선지자였다
요나는 단순히 불순종의 대명사로만 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 영토 회복을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의 불순종은 신앙이 없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열심과 민족적 충심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을 따라가지 못한 사건으로 이해된다.
2.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요나의 한계를 드러냈다
니느웨는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던 앗수르 제국의 중심 도시였고, 북이스라엘 사람 요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명령하셨지만,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도망을 선택했다.
3. 환경이 열리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판단할 수 없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려 할 때 마침 배가 있었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길은 순종의 길이 아니라 불순종의 길이었다. 그러므로 환경이 열리면 응답이고 닫히면 응답이 아니라는 식의 단순한 판단을 경계해야 하며, 성도는 환경보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야 한다.
4. 하나님은 풍랑과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도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큰 바람과 폭풍을 보내셔서 도망가는 요나를 멈추게 하셨다. 선장과 이방인 선원들은 오히려 요나에게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하고, 왜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느냐고 묻는다. 영적으로 무뎌질 때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세상의 사건을 통해서도 경고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도록 부르신다.
5. 하나님은 메시지보다 메신저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요나가 아니어도 니느웨에 보낼 사람은 있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붙드셨다. 다른 선지서들이 주로 선지자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로 보여 준다면, 요나서는 하나님이 메신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은 요나를 단지 쓰임받는 도구로만 보지 않으시고, 함께 가야 할 자녀로 찾으셨다.
결론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눈을 가리고 하나님을 외면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지시는 것이 아니다. 고난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며, 그 고난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사랑의 사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따라 회복의 자리와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요나서 1장 1절에서 10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아멘.
예, 오늘 이 요나서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 먼저 암송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되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네, 여러분의 최선의 삶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네 아 오늘 요나서인데요 요나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죠 그런데 어 자신의 최선 자신의 열심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을 넘어선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결을 따라가지 못하고 자기 의와 자기 열심의 어 때문에 인생의 신앙의 여정을 중간에 멈추게 됩니다 자 요나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나눠져 있을 때 북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아 요나 그러면 뭐 불순종의 대명사죠 그래서 요나서 1장부터 4장까지 요나가 계속 하나님께 이제 불순종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자 그러나 그의 평생에 하나님 앞에 순종했던 삶을 열왕기하 14장 25절 말씀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네이 구절을 계속 보여 주시면네 여로보암 여러분 뭐 익숙하지 않나요 여로보암이 누구죠?네 네 뭐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데이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나눠질 때 남유다는 르오보암 북 이스라엘은 열 개 지파를 데리고 올라간 여로보암이죠 그러니까 뭐 북왕국으로 치면 어 뭐 나라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나라의 시조의 이름을 사실 반복한 거예요.이 여기는
이제 여로보암 2세입니다 1세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국가의 중흥을 이루겠다는 뜻이 굉장히 명확한 사람이라는 거 알 수 있고요 아직 내리면 안 되고요 네 그 거기 그리고 영토를 회복했다고 돼 있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까지라고 돼 있어요 하맛 어귀는 갈릴리 북쪽으로 이제 올라가면 하솔 더 북쪽에 하맛 어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바로 아래이기 때문에 상당히 이제 북쪽으로 많이 전진돼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아래쪽으로는 아라바 이제 홍해 코앞에까지거든요 그러면은 사실 이제 남유다 지경인데 남유다는 요단강 이제 서편이니까 요단강 동편 지역으로 해서 아라바 지역까지 영토를 회복했다 그럼 이때의 영토의 규모는 거의 솔로몬 시대 영토 사이즈입니다 네 여러분 지도가 없으니까 별 감동이 없는데이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회복한 거예요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의 민족 중흥의 역사를 예언했던 선지자가 누구라고요 요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 대한 애정과 충심이 엄청난 사람이었겠죠 아 그런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4장 25절 한 절에는 그가 평생에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지자로서 훌륭한 일을 했는지를 보여 주는 거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던 단 한 가지 사건이 단 한 가지 사건을 네 장에 걸쳐서 기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네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자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요나 선지자를 불순종의 대명사 요나처럼 되면 안 된다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는 하나님과 대화가 되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적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어요 과연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되는가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도 많으시잖아요 여러분 그가 평생 선지자로 헌신했던 사람인데 마지막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해서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죠 자 그럼 왜 그랬을까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2절 말씀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자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성읍이었고 또 당시에 주변 민족들을 아주 잔인하게 정복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앗수르 제국의 이제 수도였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쳐서 그 악독에 대해서 예언하라고 쳐서 말씀하라고 한 것은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넘쳤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런데 그 니느웨로 가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는데 요나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자 3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자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선지자고 평생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이고 평생의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하며 충성했던이 사람이 왜 갑자기이 명령이 도망을 쳤는가 아 제가 요나서 설명할 때마다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 8 90년대 선교사들 헌신한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 가운데 내가 다른 나라는 다 가도 일본은 못 가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선교사 지망생들이 많았어요 북 이스라엘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입니다 여러분 가드헤벨 사람이라는 표현이 아까 열왕기하에 나왔는데 그 가드헤벨은 갈릴리 지역에서도 북쪽이에요 그러니까 아이 앗수르 제국의 사람들의 횡포를 가장 많이 어려서부터 경험했을 것이라고 이제 추정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요나라는 사람이 평생의 북왕국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을뿐만 아니라 자기 출신 성분도 놓고 보면 앗수르 사람들 그러면 막 치를 떠는 거죠 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 자 그런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니 하나님 제가 그거는 못 하겠습니다 네 도저히 제가 그거는 못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였던 거죠 그리고 나서 오늘 3절에 보면 니느웨를
가지 않고 어디로 갔다고요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 그럼 왜 다시스인가?이 이 스페인에 있는이 해안 도시인데 당시의 세계관으로 놓고 보자면 땅끝에 있는 최고의 휴양 도시 최고의 무릉도원 같은 곳이에요 오늘날도 뭐 스페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 휴양지로 찾잖아요 그 시절에도 그랬죠 그러니까 요나 선지자가이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어기고 아 선지자로서 사표를 던지고 예 꽃무늬 셔츠를 입고 배를 타고 휴양지로 간 거예요. 네 난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일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가 버린 거예요 제가 오늘 무슨 색깔 옷을 입을까 그러다가 꽃무늬 셔츠는 너무 오바인 거 같고 네 바다 파란색인데요 자 그런데이 표현에 보면 이제 3절 말씀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네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 도망하려고 어디로 내려갔다고요 욥바로 내려갔다 이렇게 표현돼 있어요 욥바는 이스라엘의 이제 천연 항구이죠 그래서 이제 그 위도상 낮은 곳이기 때문에 욥바로 내려갔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고요 욥바 항구에서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어요 그리고는 그 배를 타고 갑니다 근데 여기서 이제 표현을 보면 요나가 뭘 피하려고 했다고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다는 표현이 여기 이제 두 번이나 등장을 합니다 이게 성경이 굉장히 강조하고 싶은 표현인 거죠 자 여러분에게 질문 드릴게요 우리가 뭐 어떤 상황이든 어느 장소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방법이 있나요 전혀 없죠 이건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럼 요나 선지자가 그걸 모를까요 평생에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 그걸 모를까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세상 어디를 가도 하나님 코앞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다고 했을까 시편 139편 7절에서 12절 말씀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빛으로 빛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늘 끝에 가도 음부 아래 내려가도 바다 건너 저 땅 끝에 가도 하나님은 거기서도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찾고 계신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임재하심을 떠날 방법은 없어요 그런데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요나가 시도했다는 거죠 자 4절 말씀 네 4절 말씀 읽어 볼까요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자 요나서를 읽어 보면 이제 요나라는 선지자가 상당히 눈에 띄고
그리고 요나서는 이제 1장 2장 3장 4장 쭉 읽어 보면 하나님이이 드라마를 위해서 준비하신 소품이 상당히 많이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의 준비하심 아 뭐 첫 번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어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에서 저 땅 끝에 다시스까지 가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 뭔 행선지로 가는 배가 때마침 왔다는 건 하나님이 예비를 하신 거란 말이에요 어 그러면 아니 요나 선지자가 순종을 하려고 가는 것도 아니고 불순종해서 가려는 곳에 왜 하나님이 배를 내 주셨을까 왜 그러셨어요 일단 배에 태워서 바다에 내보내신 거잖아요 자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거야 내가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거예요 너무 잘 풀리는 거예요 어려움이 없어요 자 그러니까 어 이거 괜찮은데 이렇게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방금 우리가 읽은 4절에 하나님이 두 번째 예비하신 것은 큰 바람과 폭풍이었죠 네 뭐이 꽃무늬 티셔츠 입고 피서 가려고 했던 거 다 망친 거죠 하나님께서 어 강력한 폭풍을 보내셔서 배가 난파될 지경으로 만드십니다 자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다 잘될 거 같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제 큰 어려움이 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 환경이 열리면 응답인 줄 알겠습니다 환경이 닫히면 어려우면 응답이 아닌 줄 알겠습니다.이 방식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맞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기도하는 건 너무 단순 논리인 거예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요나에게 다시스로 가라고 하나님이 배까지 보내 주시고 편안하게 갈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럼 그게 응답인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떠났어요 하나님 앞에 자주 나오지도 않아요 하나님 부르지도 않아요 그런데 너무너무 일도 잘되고 애들도 잘되고 다 잘돼요 그럼 그게 하나님의 응답일까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 상황이 되니까 6절 말씀에 어 6절 그냥 눈으로 보세요 선장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내 하나님께 구하라 야 너는이 상황에서 어떻게 잘 수가 있냐 너 하나님께라도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여러분이 선장이 이방인일까요 유대인일까요 이방인일 가능성이 큰 거죠 그럼 이방인 선장이 잠든 요나를 깨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 9절 10절 마지막 두 절 한번 읽어 볼게요 9절 10절 시작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자 이방인 선원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요나가 심히 두려워요 요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더 두려워 떨었어요 이방인 선원들이 심히 두려워서 요나에게 야 너 왜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느냐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요 내가 영적으로 너무 잘못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나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게 만드시는 거예요.이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사실 이제 중간에 제비를 뽑고 요나가 제비가 뽑혀서 도대체 너가 누구길래 이렇게 된 거냐 실토해라 그랬더니 아까 우리가 읽은 9절 말씀 9절 다시 보여 주시면 나는 히브리 사람이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네 아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요나가 어 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를 하면서 영적인 자존심과 자부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어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여러분 자기 소개를 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다 나 평생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사람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아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이 잘못된 문제를 돌이키지 않는 한이
풍랑의 문제,이 닥쳐 있는이 환난과 고난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방인들이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제가 오늘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평생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가려고 했을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왜 이렇게 했을까 여러분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저는 이게 묵상하면서이 오늘 아침까지 이렇게 묵상하다 나왔는데 어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우리가 다 알잖아요 근데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 있죠 예배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고요 팬데믹에 75만 명이 교회를 떠났고요 자 내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 근데 피할 수 없는 것도 알죠 그러니까이 상태는 굉장히 불안불안하고 애매한 상황인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아 나도 한 때는 교회 열심히 다녔고 교회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영적인 자부심과 자존심이 남아 있죠 자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현존을 아는 사람들이 그거 묵상하다가 제가 이제 그다음 생각이 났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자 10절 10절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10절에 제일 마지막에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이렇게 돼 있잖아요 요나 선지자에게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자 그러면 정 반대로 이번에는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행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그러셨는가라는 거예요 여러분 요나가 아니면 니느웨 가서 외칠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누구든 보내실 수 있잖아요 그 왜 요나 선지자를 그렇게 끝까지 고집을 하셨을까 그냥 그 사람 뭐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래 너 평생에 수고했으니까 그만하면 됐다 아니면 뭐 혼내시기로 작정했으면 혼내시든가 근데 혼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니느웨로 가게 만드시잖아요 요나가 아니어도 니느웨에 보낼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굳이 배를 준비해서 배 태워서 바다 한 가운데 보내시고 또 풍랑을 보내시고 바다에 빠뜨리시고 이어지는 내용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하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왜 이렇게 하나님은 끈질기게 요나에게 집착을 하셨을까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읽으면서 다른 선지서들과 유일하게 다른 한 가지 포인트는 여러분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신저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이고 도구일 뿐이에요 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목적적인 존재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네 내가 뭘 하지 않아도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냥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도구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내가 쓰임받는 거잖아요 쓰임받는 건 영광스럽지만 그러나 쓰임받는 것은 철저히 일을 위해서 내가 도구가 되는 거예요 선지서를 보면 우리가 예레미야서도 그렇고 에스겔서도 보고 그러면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서 하나만은 하나님이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더 신경 쓰시는 그 메신저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넌 그냥 도구가 아니다 네가 평생에 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지만 나는 네가 중요하다 난 널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를 포기하실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끝까지 그를 찾으시는 거예요 아니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떠나겠다고 한 사람을 왜 그렇게 하나님이 미련을 가지시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실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끝까지 찾으십니다 요나가 하나님과 함께 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여러분 아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다가 내가 어떤 인생의 사건이나 계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신 분들 하나님이 다시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린도전서를 하다가 말고 갑자기 요나서가 나왔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왜이 시점에 요나서입니까 이런 질문을 했거든요 근데 두 가지 한 가지는 저희가 이제 7 8월이 되면 여름 사역들을 많이 하시잖아요 아웃리치도 많이 가고 그래서 요나서가 나온 측면도 분명히 있겠고 네 생명의 삶 편집 팀의 의도가 있겠죠 그 또 한 가지에는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돌아오라고 부르시는구나.이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현존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애들이 그런 거 하잖아요 어른들하고 아이들이 제일 재밌어 한 세 살, 네 살까지는 그런 거 많이 하는 거 같아요 네 그 눈 가리고 아옹이라고 하는데 하여튼간에 뭐 자기 눈을 가리면 앞에 아무도 안 보이잖아요 그 자기 눈을 가리고 있으니까 마치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고 그거 놀이를 하죠 여러분 내 눈을 가리고 있다고 하나님이 사라지신게 아니잖아요 내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현존이 사라지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찾고 계신다 네 그래서이 시간 찬양을 한 곡 들려 드리고 그리고
우리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는데요 어 설라현 전도사님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찬양해 주겠습니다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든 다 아시오니 어디로 가리까 내가 새벽 날개 치며 저 바다 끝에 거해도 어둠도 숨기지 못하리라 주님의 손이 날 인도해 주님은 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니 주님 위대하심이 내가 고백하리라 내가 새벽 날개 치며 저 바다 끝에 거해도 어둠도 숨기지 못하리라 주님의 손이 날 인도해 아멘
음.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한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랐던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나서 인생의 고난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이 말씀을 보고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요나와 같은이 고난의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 돌이켜 주시옵소서 주님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다시 부르고 계신 그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오는 주님 우리의 삶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주님 주님의 그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오 주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주께서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돌이켜 주시옵소서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고난이 그냥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표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다는 표지인 줄로 믿습니다 오 요나와 같이 그 바다 가운데서 하나님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이 인생의 고난의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엎드리게
하시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주께로 돌아갑니다 내가 주께로 돌아갑니다 주님 주님의 음성을 따라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께서 친히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요나를 건지시고 그를 사명의 자리 다시금 세우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리로 돌이키시는 그 역사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 우리가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하심을 떠날 수 없고 요나가 하나님 앞을 떠나서 그의 인생이 형통한 것처럼 살았지만 결코 형통할 수가 없었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의 부재하심을 경험하는 인생 그 인생이 고난의 바다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죄악 가운데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 어찌 징계하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 인생의 고난의 바다에 들어갔을 때 막연히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탄식하거나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붙드시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과할 때 정금과 같이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나오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들 가운데 우리 가족들 가운데이 고난의 바다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고난을 통과해서 나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실하게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026.06.14(주) | 주일설교 | 우리는 주 안에 한 가족입니다 (딤전 5:1-2)
우리는 주 안에 한 가족입니다 (딤전 5:1-2)
- 제목: 우리는 주 안에 한 가족입니다
- 본문: 디모데전서 5장 1-2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14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교회는 영적 질서와 창조 질서를 함께 세워야 한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교회 안의 사람들을 나이와 성별에 따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권면한다. 교회에는 목회자와 직분자의 영적 질서가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도 존중해야 한다. 나이가 많은 성도들을 가볍게 대하지 않고, 앞세대의 헌신과 지혜에 합당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해야 한다.
2. 나이 많은 남자는 아버지처럼 권면해야 한다
바울은 나이 많은 남자를 꾸짖지 말고 아버지에게 하듯 권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제가 생겨도 갈등과 싸움으로 몰고 가지 말고, 정직하면서도 존중하는 방식으로 말하라는 뜻이다. 특히 내향적 리더는 어려운 말을 오래 쌓아 두다가 폭발하지 말고, 감정을 부풀리기 전에 진실을 사랑으로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3. 젊은 남자는 형제처럼 친밀하되 존중해야 한다
젊은 남자를 형제처럼 대하라는 말씀은 친밀함과 존중의 균형을 요구한다. 교회는 또 하나의 가족이므로 서로의 가정, 직장, 신앙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여기고 기도하며 실제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므로, 리더와 순원은 서로를 하나님께 이끄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4. 나이 많은 여자는 어머니처럼 귀히 여겨야 한다
공동체에는 어머니처럼 먹이고, 들어 주고, 손잡아 기도해 주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젊은 부부와 사역자들이 지치고 흔들릴 때 사랑 많은 권사님과 어른들의 돌봄은 큰 위로와 치유가 된다. 교회는 젊은 세대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연령이 함께 세워 가는 가족 공동체다.
5. 젊은 여자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처럼 대해야 한다
바울은 젊은 여자를 자매처럼 대하되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하라고 강조한다. 거룩과 순결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삶의 순도를 함께 말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기에 이성 간의 선을 분명히 지키고, 감정적 의존이나 착각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6.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다
목회자와 순장과 팀장은 사람을 구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다. 누군가의 아픔을 돕고 싶어도 자신이 구원자가 되려고 하면 관계의 선을 넘고 사고가 생길 수 있다. 모든 회복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일어나므로, 공동체는 서로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결론
우리는 더 이상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다. 가족은 친밀해야 하지만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존중의 선을 지켜야 한다. 가정에서는 선을 지키고, 교회에서는 선을 넘어 손을 잡아 주는 실제적 사랑을 나눌 때 주 안의 한 가족으로 세워진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우리는 주 안에 한 가족입니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건강할까, 관계 문제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추정치이지만 서른세 살 정도의 담임목사 디모데에게 교회의 그룹을 네 개로 나누어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그룹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하라.” 교회에는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비롯해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나이를 고려해서 대할 필요가 있는데, 교회에는 직분도 있다 보니까 직분만 고려해서 상대를 대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데 교회에서 특별한 역할이나 활동이 없으신 분들을 직분자들이 가볍게, 경솔하게 대하면 마음에 상처가 될까요, 안 될까요? 상처가 됩니다. 제가 어떻게 알까요? 저에게 제보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영적 질서를 지킬 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를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공동체를 직접 세우신 분일 뿐만 아니라 이 창조 세계를 세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열 가지 계명을 성경에서는 십계명이라고 합니다. 그 십계명에서 처음 네 가지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고, 사람들과 관련된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이지, 어르신 일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9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구절을 잘 보시면 히브리 텍스트에서 어떤 표현이 이렇게 이어질 때는 의미가 연결되어 있거나 거의 동의적 개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노인을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연결된 개념이고, 거의 동의적 개념에 가깝습니다.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질서를 지키는 일관성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세대의 헌신에 대해서 합당한 감사와 존경을 표현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주도적으로 뭔가 힘을 쓰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들이 갖고 있는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손한 인생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첫 번째 그룹에 대해서 “꾸짖지 말고 권하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꾸짖을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남자 어른 성도들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경우입니다.
생각해 보면 디모데는 성격이 굉장히 유하고 내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더 문제가 됩니다. 본인이 디모데 유형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잘 들으십시오. 문제가 그냥 끝나지 않고 계속 여파가 생겨서 더 큰 문제로 불거지면, 결국 리더들 입장에서는 참다 참다 폭발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늘 자주 드리는 말씀인데, 내향적인 분들은 잘 들으십시오. 어려운 사람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면 진짜 매우 어려워집니다. 제가 이런 삶을 오래 살아 봤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이 이야기를 꺼내지? 부담스럽네.” 그러면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고민하고 끙끙거립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잔뜩 써 가지고 가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생각이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제 내면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사람을 참아 주는 것, 그래서 속으로는 힘들어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내 안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위선이었습니다. 제가 선함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고 있을까 보니 갈등에 대한 두려움,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진짜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과의 갈등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게 될까 봐 두려워서, 자기애 때문에 매너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입니다. 생각과 동시에 말을 하는 외향적인 분들은 이해를 못 할 수 있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하나님이 훈련을 시켜 주셨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오래 고민하지 말고, 오래 감정을 부풀리지 말고, 바로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정직이 최선의 매너입니다. 앞에서는 웃고 속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되, 상대를 배려하면서 이야기하는 지혜를 배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 제가 식당에 혼자 앉아 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원치 않게 귀가 밝다 보니까 저 구석에 앉아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모시고 왔는데,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이 귀도 어두우시고 고집도 세지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님을 혼내면서 식사하는, 참 보기에 불편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연세가 많아지시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섭섭함도 많아집니다. 잘 안 들리고, 자기들끼리만 요즘 용어로 이야기하면 “나만 소외시키고 이야기하나”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이 뭔가를 물어보실 때 퉁명스럽게 “그냥 모르셔도 돼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라고 하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일까요?
예전에 많이 돌았던 영상이 있습니다. 외국 영상이었는데, 아들과 아빠가 앉아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새가 한 마리 와서 앉은 것을 보고 “아빠, 저 새 이름은 뭐예요?”라고 묻습니다. 아빠가 알려 줍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물어보고, 또 물어봅니다. 아이가 다섯 번, 열 번을 물어보는데도 아빠는 친절하게 새 이름을 알려 줍니다.
세월이 흘러 아빠는 백발에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가 되고, 아들은 중년이 됩니다. 할아버지가 된 아빠가 아들에게 “저 새는 뭐냐?”고 묻습니다. 아들이 알려 줬는데 금방 또 까먹으신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또 물어보십니다. 두 번, 세 번 말해 줘도 잘 못 알아듣고 기억을 못 하니까 아들이 짜증을 냅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어린 시절에 참 많이 인내해 주시고 품어 주셨는데, 우리는 부모님께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요? 역지사지해야 합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어르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어르신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강한 역할을 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첫 번째 그룹인 어르신들에게 “꾸짖지 말고 권하라”고 했습니다. 갈등으로 가고 싸움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밴쿠버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제가 밴쿠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지금 교회와 이전 교회를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서 밴쿠버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다. 밴쿠버에 갔는데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성가대가 열심히 했는데, 한 분이 성가대 지휘자를 교체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에게 이야기하셔서 제가 “그래도 그분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사역자를 교체하더라도 연중에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연말에 새로운 사역자들을 세울 때 그 시기에 맞춰서 하면 그분도 명예롭게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동의가 안 됐습니다. 제가 서른세 살 어린 목사니까 이야기하면 들을 줄 알았는데, 말을 안 듣는 것이죠. 그래서 이분이 성가대원들에게 연판장을 돌려 서명을 다 받았습니다. 성가대 지휘자 교체를 원한다는 서명을 받아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제가 “교회는 정치판이 아닙니다.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뜻대로 안 되니까 이제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일로 마음 상하셔서 교회를 떠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려고 연락을 했는데 안 받으셔서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저녁에 가족들이 있는데 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제가 두 번째 찾아갔습니다. 또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세 번째는 한인들이 많이 모이는 식당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밖에서 만나면 좀 차분하시겠지 했는데, 식당에서 두 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제가 끝까지 웃으면서 “마음 가라앉히시고 교회는 안 떠나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같이 따라갔던 전도사가 있었는데, 미팅이 끝나고 나오면서 “와, 목사님, 이게 목회입니까? 저는 목회 안 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네가 목회를 하느냐? 가만히 있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어르신들은 사역자들을 존중해 주시고, 사역자들은 어르신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20대 중반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였습니다. 저는 원래 감리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교회에 간 것도 처음이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고 시스템도 모르는 상태에서 중등부 전도사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등부를 담당하시는 장로님이 저만 보시면 90도로 인사를 하셨습니다. 머리도 하얀 장로님이셨습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는 이런 프로그램을 할까 생각합니다. 장로님,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하면 “전도사님, 너무 좋은 생각입니다”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 항상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도 그렇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해혁 장로님이셨는데, 온누리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중진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분의 겸손과 격려가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정말 교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가는 리더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젊은이입니다. 젊은이는 어떻게 대하라고 했습니까? 형제에게 하듯 대하라고 했습니다. 젊은 형제라고 편하게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면 안 됩니다. 친밀해도 존중해야 합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친밀하되 존중하라.” 이것은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교인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친해지면 선을 넘습니다. 그러니까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존중하겠다고 너무 매너와 예의와 격식을 갖추다 보면 친밀해지기 어렵습니다. 친밀하면서도 존중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고, 이것이 균형의 미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떠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저와 가장 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유치원 때 다니던 교회 동창들입니다. 그 친구들이 몇 명 저희 교회에 다닙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목사님, 성도님, 순장님” 이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1년에 몇 차례 친구들끼리 만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상준아” 하고 편하게 이름을 부릅니다. 거기서 목사라고 제가 목에 힘줄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다 한 형제인 줄로 믿습니다.
서로가 친밀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해야 할 때는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 형성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형제는 서로 누가 부모에게 더 인정을 받느냐, 누가 사회적으로 더 성공하느냐로 경쟁심이 치솟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형제 우애가 깊어질 수 있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가 형제 아닙니까?
로마서 12장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 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먼저 존중해 주라고 합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교회는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특별히 공동체 순 안에서 평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동역하는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순 식구들이 서로의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방황하는 자녀가 있거나 하나님과 멀어진 가족이 있으면 내 가족인 것처럼 안타깝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순들을 보면 정말 감동이 있습니다. 제가 순예배를 안 드리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순원들이 이야기해 주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직장 문제로 고민할 때 같은 직장 생활을 하는 형제들이 그 마음을 압니다. 조언도 해 주고, 기도도 해 주고,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 정보도 알려 주고 소개도 시켜 줍니다. 정말 그 형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지난 예배교회 컨퍼런스에도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컨퍼런스를 보면서 순장님들이 “은혜 받는 자리에 같이 가자”고 순원들을 이끌어 주시고, 순원들은 그런 순장님을 따라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 안 관계의 축복은 서로 영적인 성장을 이끌어 주고 따라준다는 부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간혹 순장님들이 “이분은 삶이 굉장히 어려운데 내가 이분을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만 치유되고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근심 걱정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이끌어 가는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교회 컨퍼런스가 끝나고 전 목회자들이 며칠 동안 리트릿을 다녀왔습니다. 공식적인 회의나 그런 것 없이 계속 같이 밥 먹고 교제하는 시간만 가졌는데도 정말 친밀해지고 단합이 잘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겠죠.
여행지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옛날에 동역했던 한 젊은 교육자 가정을 만나게 됐습니다. 해외에서 참 고생을 많이 하고 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긍정적이고 밝은 목회자 가정입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사모와 자녀들도 참 귀합니다. 제가 보통 해외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사역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뭐라도 주는데, 여행 중이니까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가방을 뒤져서 있는 것을 다 줬습니다. “목회자 가정이 참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과 16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우리가 같은 믿음의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는데 누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형제를 도와주세요. 저 자매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래, 내가 알아서 도와줄 테니까 너는 신경 꺼라”라고 하실까요? “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장 먼저 주시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지만, 누군가를 돕는 것처럼 감격적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경우들도 있습니다. 간혹 저에게 “저희 순은 그냥 표면적인 교제만 하지, 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닙니다”라고 제보하는 순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드는 생각은 꼭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나눠 보고, 누군가를 위해 음식이라도 간단한 것 하나 만들어 먹여 보는 이 정성과 사랑의 시간이 정말 공동체를 체험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기쁨과 슬픔도 괜찮은 척하며 순 나눔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나눠 봐야 가족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룹을 나누기 전에 오늘 본문의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세 번째 그룹입니다. 꼭 “늙은 여자”라고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본문 표현을 따라 나이 있으신 여자분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합니다. 목회자들이 연세가 지긋하신 집사님, 권사님들을 어머니처럼 대하려고 하기 이전에 그분들이 아예 어머니처럼 저희를 대하십니다.
제가 이전 교회를 섬길 때 “도대체 권사님들은 예배 설교를 안 듣고 얼굴만 쳐다보시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부 예배가 끝나고 나면 항상 얼굴 품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얼굴이 좀 피곤해 보여. 보약을 좀 먹어야겠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권사님들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목회자들을 데려다가 밥을 먹이는 것입니다. 밥을 두 공기 먹으면 너무 기뻐하시고, 세 공기 먹으면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이 목회자들에게 “얼굴 보기 좋다”고 하시면 위험 신호입니다. 살이 쪘다는 소리입니다.
공동체에서 어머니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젊은 부부들을 보면서 “직장 생활하느라 고생하죠.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하죠” 하면서 지친 이들을 데려다가 밥 먹이고 손잡고 이야기 들어 주고 기도해 주면 그것이 치유가 됩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성경 번역 선교사를 준비하느라 파푸아뉴기니에 42일 동안 비전트립을 간 적이 있습니다. PNG라고 하는 곳입니다. 파푸아뉴기니의 동부 산악지대 우카룸파라고 지도상에도 잘 나오지 않는 지역에 선교사들의 타운이 있었습니다. 거주 인구가 2,000명 정도 되는 선교사 가족들의 마을이었습니다. 언어가 굉장히 많은 나라라서 각 언어마다 번역 프로젝트를 하는 것입니다. 수백 개의 언어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그런 선교사 타운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연세가 있으신 장로님, 권사님 부부가 와 계셨습니다. 보통 선교 현장에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을 만나 보니까 장로님은 미국 IBM의 수석 엔지니어로 은퇴하신 분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번역하려면 컴퓨터를 쓰니까 컴퓨터 수리도 해 주시고, 부품도 조달해 주시고, 번역 프로그램도 업데이트해 주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진짜 좋아하는 분은 권사님이었습니다. 한국 선교사 가정이 열 가정 정도 있었는데, 전부 어린 자녀를 키우거나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젊은 부부였습니다. 사역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했습니다. 어떤 팀들은 저 섬 지역으로 가려면 경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가서 사역하고, 아이들은 센터에 맡겨 두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현지에 적응해야 하고, 아이들과의 긴장감과 부부 간의 갈등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번아웃이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권사님이 살펴보시다가 힘든 부부가 있으면 집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PNG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닭볶음탕을 만들어 주시고, 갈비찜을 만들어 주시고, 한국식 반찬을 해서 따뜻한 밥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힘든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 주시면 그날은 완전히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힘든 모든 것이 눈 녹듯이 녹아 버렸습니다.
정말 공동체에는 사랑이 많은 어르신들이 꼭 필요합니다. 이런 역할을 해 주시는 분들을 어머니처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권사님들이 집에서 순예배하면서 음식을 먹여 주시고, 남은 것을 싸 주시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제가 1516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간혹 어떤 분들이 저를 만나 “그 교회 가고 싶기는 한데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는데,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이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저는 “당연히 오셔도 됩니다. 저희는 남녀노소 다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교회 공동체는 모든 연령의 모든 사람이 함께 세워 가는 공동체인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 그룹입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젊은 남자 성도에게는 형제처럼 대하고, 젊은 여자 성도에게는 자매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된 표현이 있습니다. “온전히 깨끗함으로.” 이 “깨끗함”은 순결, purity라는 단어입니다.
왜 이 표현을 썼겠습니까? 젊은 남자 성도에게는 쉽게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면 안 되고, 친밀해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면, 젊은 여자 성도에게는 친밀해지고 편해진다고 해서 성적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과 순결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거룩과 순결.” 제가 거룩과 순결을 어떻게 연결해서 설명할까 묵상하다가, 이 거룩과 순결의 개념이 거의 같은 개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원어를 찾아보니까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였습니다. 헬라어로 거룩은 “하기오스”이고, 순결은 “하그노스”입니다.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순결한 제물,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거룩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 성전에서 “하나님, 저는 거룩한 예배자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드립니다”라고 해도, 삶에서 순결한 삶의 열매를 올려 드리지 않으면 그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예배자가 될 뿐만 아니라 삶의 순결과 순도를 주님 앞에 올려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4월에 순예배 드리시는 분들에게 에티켓 십계명을 나눠 드렸습니다. 그중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성 간 신체 접촉 금지입니다. 제가 청년부가 아닌데도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전에 여호수아 청년부에서는 “손만 잡으면 결혼하라”고 매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애정사가 해결되고 정말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인 공동체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 외에는 이성끼리 손을 잡거나, 이동할 때 자동차 조수석에 동승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런 것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녁 10시 이후에는 연락 금지입니다. 교회 일, 순 관련 일이라고 연락을 하는데 너무 늦게 연락하면 가족들이 불편합니다. 생활적으로도 불편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도 불편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따라해 보십시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구원의 감격도 있지만 언제든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 안에도 선한 생각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선하지 않은 생각들도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하지 않은 생각이 올라오면 스스로 분별하고 내려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생각하거나, 말로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경우들이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순이나 사역팀이나 교회 안에서 이성 간의 심각한 문제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거룩과 순결의 선을 지키십시오. 선을 넘지 마십시오. 제가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매님들을 바라보는 형제들이 있더라고요. 한 시간, 한 시간 반 동안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매를 바라보면서 묵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516교회는 어두컴컴해서 할렐루야입니다. 서로 잘 안 보이니까요. 여러분의 아내만 바라보고, 아내만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 안에서 내가 어떤 어려움을 나눴는데 어떤 자매님이 특별히 긍휼함을 보이고 나에게 위로를 건넵니다. 그때 “나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거룩한 예배자일 뿐만 아니라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삶의 예배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자매님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장에는 주님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매님들이 훌륭한 신앙의 본이 되는 형제들을 보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내 남편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남편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기도할수록 남편이 꼴 보기 싫다면 그 신앙이 건강한 것입니까? 기도할수록 남편이 밉고 힘들다면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 자매에게도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하십시오. 존경할 만한 한 남자의 인생은 아내의 존중과 존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목회자들이 자매 성도님들을 상담하거나 대화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자들에게는 절대 차에 동승시키지 말고, 상담을 하더라도 문을 열어 두고 상담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저희는 창이 있어서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목양실은 문이 닫혀 있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제 방에는 아예 CCTV가 있습니다. 녹음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로를 위한 것입니다. 목회자도 지켜야 하고 성도들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친밀해도 존중해야 합니다. 서로가 선을 지켜야 합니다. 자매님들을 상담하는 경우에 감정적인 의존 증상을 보이면 저는 딱 거기서 멈춥니다. 정말 어려운 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어서 중간중간 계속 상담하지만, 때로는 매정하게 “여기까지입니다”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의존 증상을 보일 때입니다. 이메일을 계속 보내거나 상담을 계속 요청하면 저는 명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셔야 회복됩니다. 제가 회복시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경우가 누구인지 절대 알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밴쿠버 때 이야기입니다. 한번 집회를 마치고 자매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자매가 “목사님이 돌아가면서 안수기도를 해 주는데 나는 너희들보다 45초를 더 기도해 줬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시계까지 들고 다니면서 해야 됩니까? 충격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들어온 것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위험해집니다. 이분은 나중에 망상장애까지 갔습니다. 정신과 치료 중에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망상장애입니다. 나머지는 다 정상인데 딱 그 부분만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망상장애로 끝나지 않고 나중에 귀신 들림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목회자나 순장이나 팀장은 은혜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의 회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과 성도들 간에, 또는 성도들 간에 서로 친밀하더라도 “내가 저 사람의 인생을 구원해 줘야지” 하다가 남녀 간에 사고가 납니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구원자이시지 우리가 구원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 한 분을 인격적으로 뜨겁게 만나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29년 동안 목회를 하다 보니까, 유치부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들도 저희 성도로 함께 있지만, 제가 중등부 전도사일 때 중등부 학생들이었던 친구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결혼식 주례를 제가 하고, 아이들 유아세례를 주고, 청소년이 된 자녀들을 제가 상담하고, 그 가정들이 저희 교회를 다닙니다. 제가 제 아들딸로 생각했던 청소년들이 청년이 되고 결혼해서 자녀를 데리고 오니까 이미 할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또 영상에 나오는 저를 어린 자녀에게 할아버지라고 가르쳐 놔서, 아이들이 저를 만나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용돈도 주고 세뱃돈도 줍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친밀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친밀하되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친밀하면서도 거룩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가정 안에서는 이미 친합니다. 그런데 선들을 너무 많이 넘어서 가정이 힘든 것입니다. 서로 선을 지켜 보십시오. 그러면 훨씬 행복해지실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선은 많이 지키는데, 그 선을 넘어서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수박 겉핥기식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장님들과 리더들이 먼저 삶을 나누고, 서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행복한 가족 공동체를 교회 안에서 세워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6.11(목) | 4321워십 | 복음을 전파하고 기억하라 (믹 14:3-9)
복음을 전파하고 기억하라 (마가복음 14장 3-9절)
- 제목: 복음을 전파하고 기억하라
- 본문: 마가복음 14장 3-9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11
- 예배: 4321워십
설교 요약
1. 전도는 방법론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복음의 능력이다
전도에는 사영리, 전도폭발, 관계 전도, 새신자 예배 등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본질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그 능력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전도를 “어떻게 하지”라는 방법론으로만 접근하면 두려움과 계산이 앞서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넘치면 자연스럽게 티가 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과 삶이 달라지듯, 복음의 은혜도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2. 교회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통해 설교자는 여러 강사들의 메시지가 결국 “교회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모였다고 정리한다. 중생은 새 생명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결국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얻게 하시는 부활의 주이시며, 이것이 복음이다.
3. 베다니의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본 유일한 헌신자였다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옥합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베다니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것을 기대하며 들떠 있었지만, 한 여인은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성경은 그 자리에 있던 유명한 사람들보다 이름 없는 여인의 행동에 집중하며, 요한복음은 이 여인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였음을 보여 준다.
4. 세상은 헌신을 낭비라고 부르지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권리다
사람들은 여인의 헌신을 “허비”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헌신하는 사람을 부담스러워하고, 현실주의자는 하나님 나라의 헌신을 비상식적 낭비로 평가한다. 그러나 예배는 최고의 가치가 있으신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실 권리이며, 정말 가치 있는 분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헌신이다.
5.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허비하신 탕부의 하나님이시다
설교자는 창조 세계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아낌없이 주셨는지 설명한다. 하나님은 사고칠 것을 아시면서도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망가진 인간을 위해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 주셨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유산을 미리 내어 준 것처럼,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기다리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6. 복음은 예수님의 헌신과 우리의 헌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도 말하여 기억하라고 하셨다. 곧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실 예수님의 헌신과, 자신의 전 인생을 깨뜨려 드린 여인의 헌신이 만나는 자리가 참 복음의 자리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찾고, 가룟 유다는 배신할 기회를 찾고, 사람들은 자신이 살 기회를 찾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께 헌신할 기회를 찾았다.
결론
성도는 성공할 기회, 돈 벌 기회, 영향력을 가질 기회보다 주님께 가까워지고 헌신할 짧은 기회를 붙들어야 한다.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한국 교회는 안 된다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며 하나님은 시대와 계절을 타지 않으신다. 우리의 시간과 건강과 재능과 물질과 생명을 향유 옥합처럼 주님께 드릴 때, 복음의 능력이 내 삶과 교회와 이 시대 가운데 경험된다.
전문 스크립트
복음을 우리가 내적으로 체험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사영리, 전도폭발 같은 고전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관계 전도, 새신자 예배 등 굉장히 다양한 전도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그 능력을 흘려보내는 것, 이것이 기본 개념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도를 하고 있나?”, “내가 전도를 어떻게 하지?”, “전도하다가 거절하면 어떡하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하는 사람은 전도를 방법론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내 안에 은혜가 흘러넘치기 때문에 티가 나는 거예요. 사랑에 빠진 사람은 티가 나요, 안 나요?
어떻게 알아요? 여러분도 다 경험 있으시잖아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죠.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이든 반려동물이든, 아니면 어떤 물질이든, 하여튼 사랑의 대상이 있으면 사람의 아우라가 달라지고 빛이 나고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다 달라지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방법론으로 어떻게 전도를 하지, 어떻게 사역하지”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쳐서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지난주 금요일, 토요일에 저희가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했는데 정말 큰 은혜가 있었어요. 성도님들도 참 은혜 많이 받으셨지만 저에게도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시광교회 이정규 목사님은 중생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다시 사람이 사는 것, 중생, 새롭게 태어나는 것, 새 생명을 얻는 것이잖아요.
낮은담교회 김관성 목사님도 결국 한 영혼을 살려낼 수 있느냐, 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페이지처치의 신재웅 목사님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결국 그 사랑을 통해서 생명을 살려내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일관되게 해 주신 말씀이 교회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을 위해 오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창조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얻게 하시는 부활의 능력의 주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죠. 그래서 제가 섬기는 1516교회 내년 표어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아요. “복음, 복음을 삶으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이런 주제로 내년에 가겠습니다.
3절 말씀, 오늘 본문의 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오늘 본문이 마가복음 몇 장이요? 14장입니다. 여러분 더우세요? 그냥 괜찮으세요? 네. 마가복음 14장이면 총 16장 중에서 거의 끝자락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로서는 거의 마지막 부분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일보 직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셨던 그 마지막 한 주, 목요일 저녁은 사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금요일로 넘어갑니다.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유월절 만찬은 목요일 저녁, 목요일 밤이기 때문에 일단 금요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수요일 저녁이에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최후의 만찬 이전에 또 한 번의 만찬이 있었는데 그것은 친구들과의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주간을 지내시는 가운데 예수님이 수요일 저녁에 베다니에 가셨어요.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계셨기 때문에 분명히 저녁에 가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일 성전에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씨름하시다가 유일하게 안식을 얻으신 곳이 예루살렘 동편 언덕 너머에 있는 베다니,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어요.
그곳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있었어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언젠가 “두 번의 최후의 만찬” 이런 책을 쓸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이 가족을 위해 특별한 마지막 작별 식사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3절에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아마 그 집주인 시몬이 이전에 나병을 앓았다가 치유함을 받았든지, 아니면 그 남매의 아버지였든지 그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사복음서 대조를 보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식사하신 이곳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마지막 따뜻하고 행복한 식사 자리를 갖고 싶으셨죠. 그런데 예수님이 기대하신 것과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사람들이 다 잔뜩 들떠 있는 거예요. 이제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서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여기까지 오면서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면 누가 좌우편에 앉을 것이냐, 열두 명이 서로 누가 크냐를 가지고 싸웠잖아요.
그래서 베다니의 가난한 촌 동네 사람들이 그날, 제자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좀 모인 것 같거든요. “이 베다니에도 해 뜰 날이 오겠구나.” 부동산 좋아하시는 분들은 “부동산값이 오르겠구나.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일단 우리 동네부터 개발 들어가지 않을까?” 하며 사람들이 흥분 상태로 떠들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 “왜 이렇게 들떠 있느냐? 이거 아니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습니다. 앞으로 닥치게 될 그들에게는 큰 충격의 사건, 십자가의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어요. 이미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명확하게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또 베다니 사람들에게는 그간 고마웠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특별한 이별의 자리이기도 했고, 어차피 그들이 경험하고 겪으면서 깨달아 가야 할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들떠 있는 사람들을 사랑스럽게, 그러나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신 자리였습니다.
그때 한 여자, 이름도 여기 등장하지 않는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들고 들어옵니다. 성경은 중요한 내용만 집중적으로 다루잖아요. 그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누가 앉았는지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만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누구예요? 이름 없는 한 여자입니다. 거기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고, 그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보통 저녁 만찬은 남자들끼리 먹었거든요. 문화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요즘 같으면 남녀칠세부동석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어디 가면 따로들 앉으시더라고요. 카페에도 따로 앉고 식사 자리에도 따로 앉고요. 그때도 남자들끼리 만찬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 열두 제자, 나사로, 동네 어르신 몇 분이 같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매우 단호한 몸가짐으로 그 자리에 들어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다 쏟아서 부어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잘 압니다. 그리고 이 옥합이 얼마나 값지고 귀하고 비싼 것인지도 압니다.
보통 그 시대 여인들에게 옥합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고 자신의 전 인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혼의 처녀들에게는 자신이 결혼할 때 결혼 비용으로 치러야 할 자신의 전 재산이었어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나 단호하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원해서 쏟아붓습니다.
이것을 이 스토리의 첫 절에서부터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4절 말씀 읽어 볼까요. 시작.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상으로는 “사람들이 화를 내며 그녀를 비난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화를 내며 그녀를 꾸짖었다, 그녀를 비난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지금 무슨 나쁜 짓을 했어요? 나쁜 짓을 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잖아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그녀에게 화를 내며 비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왜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낭비를 했다는 거예요. 낭비. 비합리적인 행동,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다 나쁜 일인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왜 너는 자꾸 이렇게 튀려고 하니?”, “너는 왜 그런 것을 좋아하니?”, “왜 너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니?”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잖아요. 일반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사는 인생대로 살라고 이야기하셨어요? 아니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아니잖아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 “허비하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아폴레이아인데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 번째는 망치다, 두 번째는 낭비하다입니다. 그래서 둘 다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향유를 깨부셨잖아요. 그것도 아폴레이아입니다. “너 그 값진 향유, 너의 인생의 전부인데 그것을 망쳤구나. 너 이제 인생 망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 이제 어떻게 할래? 6년, 3년, 3년, 12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었는데 합격증을 찢어 버리고 대학을 안 간다. 너 인생 망하는 거야. 너 인생을 왜 허비하려고 그래?”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두 번째는 낭비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향유 옥합이 너무나 비싼 것임을 누구나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부자였을까요, 아니면 가난했을까요? 매우 매우 가난했죠. 만약 누가 기쁘다고 자신의 전 재산을,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인데 전 재산을,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한 방에 어디에 흥청망청 써 버린다면 “미친 것 아니야?”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더더군다나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낭비. 낭비. 그러면 여러분, 사운드가 긍정적으로 들리세요, 부정적으로 들리세요? 부정적으로 들리죠. 그러나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면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헌신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낭비라고 부를 것이냐, 헌신이라고 부를 것이냐. 나는 헌신이라고 드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인데, 예배가 “worth”라는 단어에 “ship”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입니다. 가치와 자격, 가치와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집을 소유한 사람은 소유자라고 하잖아요. 오너입니다. 그럼 소유자가 가진 권리는 소유권이죠. 그것을 오너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라는 것은 최고의 가치 있는 존재이신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실 만한 권리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경배와 찬양과 영광과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은 받으실 권리가 있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호주 힐송 교회, 지금은 전설적인 예배 인도자가 된 달린 첵이 쓴 책 중에 『Extravagant Worship』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게 자주 사용하지 않는 영어 단어죠. 그런데 extravagant라는 단어가 사치스러운, 아낌없이 드린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제목을 썼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아낌없이 모든 것을 허비하신 것입니까?
저희 교육자 회의가 끝나고 며칠 동안 리트릿을 했는데, 어린 자녀가 있는 집들은 중간중간 낮에 아이와 영상 통화를 하는 거예요. 며칠 동안 아이를 못 보니까 “아빠, 선물 꼭 사 갖고 와” 이런 거죠. 그런 어린 자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선물을 하나, 조금 많이 쓴다면 둘, 셋, 만약에 열 가지나 백 가지를 사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허비가 아닌가요?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이 작은 존재를 위해서, 여러분 맨 처음에 사람이 창조됐을 때 아담과 하와밖에 없었잖아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나오기 직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저 아름다운 대양과 산호성, 수많은 정말 경이로운 생명체들, 우주 만물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다 주신 거잖아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은 사랑의 허비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망가진 우리들을 위해서 아들의 생명까지 십자가 위에서 허비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 망가져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도 망가뜨렸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도 망가뜨렸습니다. 하여튼 엉망진창이잖아요. 그렇게 만든 주범을 위해 어떻게 창조주, 영원하신 창조주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십니까? 이것은 낭비 중의 낭비입니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이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을 쓴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라는 표현이 성경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탕자의 비유”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그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라고 이야기할 때 prodigal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흥청망청 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실 prodigal God입니다. 하나님이 그 탕자가 흥청망청 쓸 것을, 재산을 허비할 것을 알면서도 그 아들에게 아낌없이 유산을 내어 주잖아요. 그 아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는 아버지는 탕부이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날 그 잃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서 깨달은 것은, 그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받아 주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사고칠 것을 아는데도 유산을 그의 몫으로 미리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멀쩡하게 건강할 때 유산 달라고 하는 것은 안 좋은 표현으로 호로자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가 멀쩡한데도 유산을 요구하고 사고칠 것을 알면서도 주셨다는 거예요. 그런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것을 아들이 알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성경의 스토리텔링입니다. 저는 선악과와 십자가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라는 탁월한 선물, 탁월한 기능을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빼 주셨으면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프로그래밍 된 대로만 로봇처럼 움직이면 우리가 선악과를 어떻게 따먹겠어요? 못 따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고의 기능을 주셨어요. 이들이 사고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주셨어요. 그러나 그 선하신 하나님의 generosity, 하나님의 관대하심, 그 관대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리모컨으로 조정하는, 입력한 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움직이는 독재자나 폭군 같은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관계, 인격적 관계라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사고칠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그래, 네가 원하면 이 돈을 주마.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라” 그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아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딸이 돌아오는 거예요. 아무도 아멘을 안 하잖아요.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계산적인 시대를 사는지, 부모 세대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헌신했는지를 우리는 두 눈으로 똑바로 본 당사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결혼 안 해야겠다. 나는 결혼은 할지라도 자식을 낳아서 키우지 말아야겠다.” 요즘은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기를 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데 얼마가 드느냐 이런 것을 다 계산하더라고요. 제가 조사 연구 결과를 보니까 연도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한 사람을 키워 내는 데 3억 8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투자 개념인 거예요. “내가 이 정도는 투자해야 얘가 그래도 뭔가 아웃풋을 내겠지, 결과를 내겠지” 이런 생각입니다.
제가 전에 어떤 가정을 만났는데,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귀한 아들이 있는데 이 친구가 미국에서 대학, 대학원까지 다 마치고 갑자기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거예요. 목회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아이를 말려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이 어려웠지만 일단 만나서 상담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얘가 즉흥적인 건지 진심인지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까, 헌신의 길을 가는 것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저에게 계속 부탁하더라고요. 아이를 말려 달라고요. 제가 답을 안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이 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대요. 아들이 신학교를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내가 너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라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한 모든 시간과 쏟아부음은 투자입니까, 헌신입니까?
여러분이 남편에게, 아내에게 “내가 투자한 만큼 받아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인가요? “내가 너한테 이만큼 했으면 너도 나한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서 맨날 마음이 어려운 거잖아요. 아들에게, 딸에게 내가 투자했던 만큼, 내가 희생했던 만큼 받아내야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희생이나 헌신이라는 고요한 단어로 부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투자와 수익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 어른들이 “결혼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것이다”라고 하신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습니다. 결혼하는 것 자체가 정말 위대한 일이고,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일을 하느라 우리는 너무 작아져서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위대한 일을 왜 하게 하셨어요? 그것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헌신을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고 희생하고 나를 사랑하셨구나” 깨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얻기 위해 무엇을 드리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허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나의 시간과 물질, 나의 재능과 건강, 그리고 생명까지 주님을 위해 허비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저 혼자 설교하고 있어요. 여러분 마음 가운데 고백입니다.
저희가 재작년 리조이스 캠프를 서울에서만 하다가 올해 1월 부산장신에서도 하려고 작년 10월에 목회자들과 부산장신에 답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강당도 참 시설이 열악하고 300석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 강당 1층, 2층에 연결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기겁하고 놀란 것이 다 옛날식 화장실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이 “나이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뭐냐고 했더니 나이키처럼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야 된다고요. 나이키 화장실입니다.
심각하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보라통 때 안타까워서 말씀을 드렸더니, 그 화장실을 고치는 비용이 1,800만 원 정도였는데 한 분이 그 화장실 고치는 비용을 다 헌신하셨어요. 저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 이 헌신자를 축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정말 간절히 나오더라고요. 저는 그것이 신호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장신 역사 최초로 300명 강당에 500명의 청소년이 모인 것입니다. 총장님이 “도대체 이 청소년들은 어디 있다가 여기 나타났느냐”고 하셨고, 박 처장님도 오셔서 “마이크 좀 한번 잡을 시간을 달라. 여러분 들어오기만 하면 장학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광고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 일을 진행할 때 제가 이 본문 설교를 준비하다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이 옆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에요. 지나가는 소리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굳이 거기에 돈을 쓸 필요가 있나? 어차피 지방 신학교들 언젠가 문 닫을 건데.” 제가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일반 성도도 아니고 목회자였습니다. 누군지 알아내려고 하지 마세요.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비상식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개척 운동을 하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지 않습니까? 이 시대, 한국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 34년 차인 이 시점에 한국 교회 부흥을 외치는 것도 비상식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을 때 “밴쿠버에 부흥을 주옵소서. 하나님, 제 생명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제가 길게 목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냥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목회할 바에는 하나님, 생명을 가져가셔도 좋으니까 이 도시에 부흥을 경험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한인들이 모여서 3천 명이 모인 적이 없었어요. 밴쿠버 한인 역사에서 조수미 씨가 시내에 있는 엘리자베스 극장에서 하루 저녁 콘서트한 것이 2,7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기도하는 가운데 감동을 주셔서 “3천 명이 이 땅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300명짜리 예배당에 앉아 있었어요. 제가 속으로 “나도 미쳤는데, 이들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4주, 5주가 되니까 3천 명이 들어가는 홀을 찾으러 다니더라고요.
캐나다 밴쿠버에 브로드웨이처치라고 큰 교회가 있습니다. 정말 브로드웨이에 브로드한 큰 예배당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 예배당이 한 2,500석인데, 교회에서 집회하면 너무 편해요. 모든 시설이 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3천 명이 아니다”라고 하실 수 있는 거예요. 결국 제일 비싼 캐나다 플레이스를 빌려서 만 명이 들어가는 엑스포 센터에 3천 명 집회를 했고, 첫날에 3천 명이 들어왔고 마지막에는 4,500명이 들어왔습니다. 미친 짓이죠. 미친 짓입니다.
제가 7월에 애니메이션 다윗이 개봉한다고 이야기 들으셨어요? 시사회에 오라고 초대를 받았는데 못 갔습니다. 혹시 시사회를 보신 분은 어땠는지 알려 주세요.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겠다고 나서는 일, 한 번도 전쟁에 나온 적이 없는 목동 소년이 당대 최강자와 싸우겠다고 나서는 일이 정상이에요, 비정상이에요? 비정상입니다. 상식적으로 살려면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내년에는 대전에서도, 전라도 호남신학대학교에서도, 제주도에서도 리조이스 캠프를 엽니다. 할렐루야. 지금 대한민국의 청소년, 청년 캠프는 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을 닫고 있어요. 교회만 문을 닫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 캠프들이 거의 다 문을 닫고 있습니다. 리조이스 캠프는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계속해서 지경을 넓혀 주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특별히 제가 오늘 대전신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대전신대에 제가 직접 갔다 오지는 못했지만 답사 보고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설도 많이 낡아 있는데 여기도 화장실이에요. 나이키 화장실을 고쳐 드리려고 합니다. 비용은 부산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누가 감동이 있어 헌금하시면 할렐루야. 그런 헌금을 안 하셔도 제가 하든지 교회에서 비전 헌금을 하든지 해서라도 도와드릴 것입니다. 일단 거기 견적을 빼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대전이 어떤 도시입니까? 우리나라 중부의 가장 중요한 핵심 도시 아닙니까? 대전은 교통과 물류의 중심 센터 역할을 하는 지역이고 지정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온갖 이단들의 센터가 되어 있는 도시가 대전입니다. “어차피 원수에게 넘어간 도시 아니냐? 어차피 신학교, 기울어진 신학교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럼 어차피 죄로 인해 망가진 인간들을 왜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십니까?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아낌없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잖아요.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최선을 다해 헌신해 주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헌신했는데도 여전히 자기들 잘될 일만 생각하고 있고, 자기 동네가 빛날 일만 생각하고 있고, 자기들 살 길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이 정말 불철주야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세요, 모르고 계세요? 알고 계시죠. 그리고 그 죄값과 더불어 여러 정치적 이슈로 불과 30년 만인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몰락하고 2천 년을 떠돌게 될 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세요, 모르고 계세요?
그럼 “어차피 예수님을 거부할 인간들이잖아요. 어차피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무너지고 망가질 동네잖아요. 내가 이런 애들을 위해서 뭣하러 열심히 하나? 내가 이런 애들을 위해서 굳이 십자가를 져야 되나? 내가 이런 애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나? 내가 너희를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니?” 예수님이 만약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십자가를 왜 지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마지막에 보면 모세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너희는 결국 우상숭배할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압 동편 들판에서 한 달 내내 우상숭배하지 말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고 가나안 민족들을 따라 하지 말고 동화되지 말라고 무한 반복으로 이야기했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실패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완전히 기운 빠지게 만듭니다.
여호수아서 24장,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분배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에 다시 한번 우상숭배하지 마라, 하나님만 사랑해라, 헌신해라, 가나안 족속들 따라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실패할 것을 아시면서도 왜 포기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식이 “얘는 벌써 싹수가 노랗네. 얘를 내가 밥을 먹일 필요가 있나? 재워 줄 필요가 있나? 옷을 입혀 줄 필요가 있나?” 그러세요? 제가 밴쿠버에 갔을 때가 33세였다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목숨을 들여서 교회를 살려내려고 엄청 노력했습니다. 도시의 부흥을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밴쿠버가 정말 놀랍게 영적으로 부흥했고 도시도 부흥을 경험했고, 저는 밴쿠버에서 더 헌신하고 싶었고 더 있고 싶었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런데 당시 온누리교회 대학청년 본부가 전체 공동체를 합쳐서 만 명이 되는 숫자였는데, 리더 자리가 부재한 상황이었고,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콜링도 명확해서 갔습니다. 제가 떠나온 것이 2009년이니까 지금 거의 17년, 18년이 흘렀죠. 그런데 여전히 그 교회가 계속 어려운 거예요. 그 교회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정말 진심으로 더 남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회자들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당신이 너무 열심히 해서 교회가 어려워지는 거야. 당신이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래.” 저는 하루에 세 시간 자면서 목회했거든요. 심방 가다가 졸도할 것 같았습니다. 운전하다가 졸도할 것 같으면 옆에 마트 같은 데 주차장에 10분 기절했다가 다시 가서 심방하고 그랬습니다.
“당신이 너무 열심히 목회를 했기 때문에 어떤 목회자가 와도 성도들이 만족이 안 되고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저도 “그러면 열심히 목회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목회의 여러 상황들을 보면서, 목회를 열심히 하더라도 그 다음 후임자에게 건강하게 리더십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이것을 굉장히 깨닫게 됐고 상당 부분 동의하는 부분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당하게 해야 할까요? 한국 교회가 일제강점기에도, 6.25 전후 폐허 가운데도 놀랍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시대에 상식적이지 않은 헌신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의 무덤보다 더 많은 것이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이잖아요. 어린아이들이 풍토병을 견디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두 살,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에 죽은 아이들의 무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제가 파푸아뉴기니의 선교센터에도 한번 가 보고 깜짝 놀란 것이, 어떤 언덕에 돌멩이는 아닌데 둔덕들이 수백 개가 있더라고요. 선교사 자녀들과 돌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 “여기서 풍토병으로 죽은 선교사 자녀들이에요”라고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내어 드린 선교사들의 순교의 헌신,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전심전력의 헌신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고 우리는 너무나 약하고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 민족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제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밤새 매달려 기도했던 간절한 목 놓아 부르짖는 기도, 정말 가진 것도 없는 상황에서 벽돌 한 장, 벽돌 열 장 쌓는 심정으로 헌신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 때문이잖아요. 이것이 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처럼 주저앉은 것은 우리가 세상 방식대로 합리적으로, 상식적으로만 목회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왜 골리앗하고 싸워? 그냥 비슷한 애하고 싸워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실 때 순종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주님께는 최선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주님께 나의 차선도 드리기를 아까워하는 그런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 신앙이 잘될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신앙이 잘돼야 할까요? 잘됐다가는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다가 더 이상 한국 교회에 부흥을 주실 수 없는 이유, 더 이상 응답하실 수 없는 이유, 더 이상 기름 부음을 주실 수 없는 이유, 더 이상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실 수 없는 이유는 그분의 능력에 어떤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맞는 길만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상식적이지 않은 희생과 헌신을 하려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차를 데리고 와서 “목회자로 바치겠습니다” 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장성한 자녀가 본인이 1년, 3년, 5년 고민하고 기도해서 헌신했는데도 “아니야. 너 목사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넌 사모감이 아니야. 너 선교사 할 수 없어. 선교사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살라는 거잖아요.
저는 기질적인 문제도 제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충을 못 삽니다. 그런데 오늘도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계속 든 생각은, 제가 13살, 14살 때 자살 충동이 아주 심했는데 그때 자살했으면 저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잖아요.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자살 위기에서 나를 건져 주신 주님, 내 인생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것을 꺼내서 가져가신 주님, 그 주님이 원하시면 못 드릴 것이 없죠.
제가 30대 때부터 한 15년 정도를 매일 세네 시간 자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정말 미친 척하고 목회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체력이 부칩니다. 3년 전에 햇빛 알레르기가 왔는데 그것은 햇빛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제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조금만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면 얼굴이 뒤집어지는 거예요. 어제 얼굴이 너무 심하게 부어올라서 내일 설교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마스크를 쓰고 할까 하지 말까 했습니다.
물론 권사님들은 건강 조심하라고 하시죠. 건강 조심하라고 이야기해 주시면 정말 진심으로 너무 감사해요. 건강해야죠. 제가 여러분을 걱정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건강하고 상식적으로 살면서 이상한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는, 건강을 드리고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물론 요즘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얼굴이 바로 인디케이터거든요. 바로 문제가 생겨 버리기 때문에 요즘은 백설공주처럼 많이 삽니다. 잠도 많이 잡니다. 아니면 바로 얼굴이 뒤집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이어지는 5절 말씀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 본문을 묵상하다 이상한 점은 자기들이 돈 한 푼을 냈어요, 안 냈어요? 남이 드리는 헌신을 왜 자기들이 왈가왈부합니까? 300데나리온은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거든요. 300데나리온은 365일로 생각하면 휴일을 빼고 노동자의 1년 품삯입니다. 하루 10만 원이라고 쳐도 3천만 원이고,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3억 이상의 가치인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헌신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울까요, 안 부담스러울까요? 부담스럽습니다. 수업 시간에 언제 종료 종이 울릴까 이것만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는데, 어떤 아이가 “선생님, 지난주에 숙제 검사하신다고 했는데요. 선생님, 지난주에 퀴즈 시험 보신다고 했는데요” 하면 공공의 적이죠. 없애 버려야 되잖아요. 제가 웃긴 이야기처럼 했지만 그래서 예수님을 없애 버린 것입니다. 공공의 적인 거예요.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합니까?
회사에서 아이디어맨들을 회사 사람들이 좋아합니까? 상사만 좋아합니다. 옆에 동료들은 “회의 끝나는 건데 왜 또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서”라고 합니다. 동료들은 다 싫어합니다. 요셉을 형제들이 좋아했습니까, 싫어했습니까? 다윗이 가족들에게 “이렇게 괜찮은 애를 왜 내쫓았을까?”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현실은 그런 거야”를 받아들였겠습니까? 어린 애가 집에서도 안 받아들이거든요. 아빠가 이야기해도 안 받아들이고, 엄마가 이야기해도 안 받아들입니다. 위로 형이 일곱 명이나 있잖아요. 자기 나이 두 배 되는 형님이 이야기해도 말 안 들어요. 미친 애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 나가잖아요.
요셉도 형제들이 싫어했지만, 다윗을 형제들이나 부모가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저희 부모님이 감당이 안 됐어요. “왜 저러나” 맨날 그러셨어요. “현실을 인정해라. 현실은 이런 거야. 한국 교회는 이제 끝났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34년을 못 일어나는데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개척은 불가능하지. 교회 부흥도 이제 논하지 마.” 요즘 시대 교계에서 거의 안 나오는 말이 부흥이라는 단어입니다. 부흥 전략, 부흥 프로그램 이런 이야기는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옥합을 드린 이 여인 같은 헌신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순진해 가지고.” 그런데 주님이 보실 때 이런 현실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어느 길을 갈 것입니까?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6절에서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그녀를 괴롭히지 마라.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왜 좋은 일을 했다고 하셨어요? 힘을 다해 향유를 부었습니다. 신명기 6장의 표현대로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해 전심전력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유일하게 알아듣고 알아챈 사람이 이 많은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딱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였어요? 이 여인,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을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의 막내 동생 마리아라고 소개합니다.
“너희가 세상 물정도 모른다고 비난하는 이 여인 하나만이 진정으로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해서 헌신하는지를 아는 유일한 한 사람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목숨을 건 헌신에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헌신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하니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지 않냐.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냐면 “이 300데나리온 이상을 받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데”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할 때마다 이 본문을 이야기할 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다니가 “가난한 자들의 마을”이라는 뜻이거든요. 예루살렘 동편 언덕 너머의 판자촌입니다.
그러면 이 향유 옥합에 대해서 논평했던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적이 있을까요? 그들은 남의 헌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지만 정작 주님께도 헌신할 마음이 없고, 정작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마음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간혹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역이 너무 많아” 이렇게 뒤에서 불평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참여를 많이 하시는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안 하시는 분들이 “광고 가지수가 많잖아. 왜 이렇게 일이 많아?”라고 합니다. 참여를 안 하면서 일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과 상담하면서 “교회 돌아가는 것이 좀 이해가 안 된다. 성경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성품상으로 보면 성령의 열매가 있는 것 같은데 성령의 강력한 체험은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체험 못 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못 하신 것입니다. 확인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 신청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야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성경도 이해되고,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먼발치에서는 이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대해서 논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이 여인 딱 하나였잖아요. 9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온 천하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이 여인의 헌신도 같이 전해지고 기억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다음 날 최후의 만찬에서 무슨 이야기하셨어요? 본인의 살과 피, 성찬식을 하시면서 이것을 통해 나를 기념하라, 기억하라고 하셨잖아요. 외국 성찬 테이블에 보면 “In remembrance of me”, 예수님의 살과 피, 그 헌신을 기억하라고 쓰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헌신하신 것이고, 향유 옥합은 목숨을 내어 주시는 헌신 앞에 자신의 인생을 다 드리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과 헌신이 만나는 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나 너 사랑하는데, 너도 나만 사랑하면 안 되겠니?” 그런데 우리는 “저는 좀 해야 될 일이 많아서요. 일단 제가 원하는 것을 좀 얻고 나서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만 사랑해라. 다른 것을 사랑하지 마라. 우상들도 사랑하지 마라. 다른 신들 사랑하지 마라.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라고 하시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냐고 할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절대성만 제외하고 그 외에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요, 없어요? 천사들 가운데도 없고, 영계에도 없고, 자연계와 물질계에도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이 모든 만물, 물질계와 자연계를 다 만드셨다니까요. 천사도 흠모할 만한 놀라운 영원한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천사들, 영계와 자연계와 인간계와 물질계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나는 그래도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니? 나는 너만 사랑하지 않아. 그러나 너는 나만 사랑해야 돼”라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너는 나만 사랑해. 나는 그냥 돌아다닐게”라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향유 옥합 본문이 어디에 위치했냐면 마가복음 14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3절부터 읽었는데, 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것이 향유 옥합 전 본문입니다.
향유 옥합 뒤 본문은 뭐냐면 11절입니다. 읽어 볼까요.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딱 하루만 지나면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떠날 기회, 예수님을 죽일 기회, 예수님을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안 그렇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이용할 기회를 찾고 있었죠. 그리고 다음 날 다 배신하게 됐죠.
“배신할 기회, 떠날 기회, 죽일 기회”라는 표현을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내가 살 길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포기하는 거예요. 단 한 사람, 단 한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향유 옥합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감격하셨겠습니까. 그 식탁의 자리에서 모두가 흥분해서 즐거워서 난리가 난 거예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왕이 되실 분이 우리 식탁에 앉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의 헌신, 생명까지 내어 주시는 사랑의 헌신을 유일하게 이 여인이 자신의 인생을 깨워서 부어 드리니까 “이게 복음이다.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것도 전해지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어떤 기회를 찾고 계십니까? 성공할 기회, 돈 벌 기회, 유명해질 기회, 영향력을 가질 기회입니까? 앞으로 세상이 하나님께로 더 많이 돌아올까요, 아니면 하나님과 더 멀어질까요? 계시록의 예언대로 하면 세상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AI 문명으로 진입했는데 자연 만물은 갈수록 질서가 무너지게 될까요, 아니면 더 좋아질까요? 계시록의 예언대로 하면 더 안 좋아질 것입니다. 지금 자연 현상도 보면 더 안 좋아질 것입니다.
이 안 좋아질 것을 왜 이렇게 갖고 싶어서, 땅이라도 더 가지려고 애를 쓰십니까? 여러분, 세상을 얻고 싶으십니까?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 싶으십니까? 내 인생의 시간, 내 인생의 기회, 내 인생의 건강, 내 인생의 재능, 내 인생에 주신 물질, 내 인생에 주신 이 모든 것들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인생에 주님과 가까워지고, 주님께 내 인생을 헌신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매우 짧습니다. 이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광야를 걸어갈 때가 인생에 있습니다.
밴쿠버에서 제가 4년 동안 있었던 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그 이후로는 안타까운 시간이 되었지만, 그 4년의 부흥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은 전 세계 어느 도시에 가서도 깨어 있는 예배자들이 되어 있더라고요. 세상 사람들과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다 적당하게 상식적으로 하라고 합니다. “뭘 그렇게까지 해야 돼?”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선 것도 비정상이었지만, 다윗이 여섯 걸음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언약궤를 초대한 것도 비정상입니다. 소수가 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겠다” 마음에 정하신 분들은 그 길을 가세요. 그러면 내가 살고, 이 시대가 살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다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모두가 불가능하고 안 된다고, 한국 교회는 안 된다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 깨어 있어서 여러분 가는 곳마다 교회를 살려내는 거룩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시절이나 계절을 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렵고 가장 어두운 때도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세상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구별해서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비하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허비하겠습니다” 하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시고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제정신이냐? 정상적으로 살아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진짜 오해하지 마시라고 하는 것은, 가정을 포기하거나 학업을 포기하거나 직장을 포기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산에 올라가서 단체 생활하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비정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멘. 교회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멘.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시대에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기적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다윗과 같은 예배자로 부르시고, 엘리야와 같은 기도자로 부르시고, 바울과 같은 복음 증거자로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내 삶을 기꺼이 향유와 같이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는 분들을 단으로 초대합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고백하기 원하는 분들은 단으로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도 올라오셔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주여 삼창으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주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께 내 삶의 길을 올려 드립니다. 오직 주님만 사랑합니다. 오직 주님만 따라갑니다. 오직 주님만 높임을 받으소서. 내 평생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 내 사랑이신 주님, 내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하나님, 주의 사랑과 주의 선하심과 주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하늘보다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찬양합니다. 한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한 영혼을 사랑하셔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하나님의 포기하실 수 없는 그 끊임없는 사랑.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사람이 되며, 내가 어찌 예배의 자리에 서며, 내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내가 어찌 천국의 소망을 갖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꾸짖지 않으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내가 너희를, 너희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나만을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오 주님, 이 시대 한국 교회를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선교사들과 그 어린 자녀들의 순교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열조들의 눈물과 밤을 새운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하나님, 대전을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부산을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광주를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서울과 인천과 경기를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제주도를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방방곡곡 그 어느 지역 하나도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터전, 주께서 우리를 건져 주신 이 대한민국을 원수의 손에 내어 줄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여, 일어날지어다. 거룩한 예배자들이여, 일어날지어다. 거룩한 헌신자들이여, 일어날지어다. 거룩한 다음 세대여, 일어날지어다. 우리 두 손을 들고 주여 삼창으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거룩하신 하나님, 나의 연약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은 것처럼 예수님의 헌신과 한 여인의 헌신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하나님의 능력, 복음의 참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헌신은 믿고 붙들고 있으나, 우리가 또 주님 앞에 믿음으로 달려 나가는 그 헌신은 두렵고 결단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내가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 이 시간 세상의 모든 소리를 분별하여 귀를 덮고,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영혼아, 깨어 일어날지어다. 나의 영혼아, 주님만을 바라볼지어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내가 헌신하며 나아갈 것을 결단합니다. 주님, 나를 써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주님 앞에 헌신할 것을 결단합니다. 복음의 참 능력이 경험되어지는 인생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두 손을 높이 들고 주여 한번 부르짖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입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을 바라보며 불평하고 불만을 일삼던 모든 흑암의 영들은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아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의심은 떠나갈지어다. 아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거짓과 의심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모든 두려움의 실체는 떠나갈지어다. 아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입술로부터 오늘부터 말씀이 선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나의 입술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양이 넘쳐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정은 살아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담대할지어다. 하나님, 새 일을 행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주님께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예배,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될 것을 간절히 기대하며 주님께 예배를 올려 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모든 곳, 발을 딛는 모든 곳마다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한 예배를, 하나님께서 그리워하시는 예배를 올려 드리는 예배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의 박수를 주님께 올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마치는 기도를 할 텐데요. 기도가 끝나고 나면.
2026.06.07(주) | 주일설교 |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기초되신 교회 (고전 3:6-11)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기초되신 교회 (고전 3:6-11)
- 제목: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기초되신 교회
- 본문: 고린도전서 3장 6-11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07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세운 교회였지만, 바울은 자신이 심었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을 뿐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교회는 사람의 능력이나 지도자의 명성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자라게 하시는 공동체다. 1516교회와 1203교회도 사람이 만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초대받아 함께 거든 일로 보아야 한다.
2. 교회 안의 분파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주목할 때 생긴다
고린도교회에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분열이 있었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사람과 지도자를 주목하면 자연스럽게 지지파와 반대파, 기존 구성원과 새 구성원 사이의 분파가 생긴다. 교회는 특정 사람이나 출신 그룹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붙들어야 한다.
3.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완성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열심히 수고했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하는 역설적 인생을 산다. 바울도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그 수고마저 자신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완벽주의와 업적주의가 아니라 은혜로 완성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4.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꿈에 헌신한다
바울은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부르심은 같지만 헌신의 깊이는 다르며, 같은 예배와 같은 공동체를 경험해도 각자가 어떤 마음과 관점으로 참여하느냐에 따라 남는 것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과 꿈을 품고 그 길에 함께 뛰어드는 사람이다.
5. 비전은 소망이지만 헌신의 긴장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비전은 긍정적이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이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이기에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요셉, 모세, 느헤미야의 비전도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결국 하나님이 이루신다. 교회 개척과 예배 공동체 세움도 세상과 교회 안에서 쉽게 환영받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감당해야 한다.
6. 교회의 유일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터를 닦았지만, 그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교회가 예수로 시작해 사람 자랑, 교회 자랑, 프로그램 자랑으로 끝나면 본질을 잃게 된다. 교회 생활 속에서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예수만 보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결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예배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한 영혼을 살리는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완성이다. 교회는 이미 치료받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숙소가 아니라 병든 이들을 품고 살리는 병원이므로,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로 계속 세워져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기초되신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눕니다. 이번에 예배교회 컨퍼런스 BASIC,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는데요. 오신 강사 목사님들이 정말 귀한 말씀들을 해 주셨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참 많은 은혜를 누렸습니다.
혹시 피치 못하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은 나중에 저희가 영상을 다 업로드하겠습니다. 은혜를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 하나님이 갖고 계신 교회에 대한 그림이 우리 안에 감동으로 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6절과 7절 말씀 다시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교회 이야기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다음으로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세운 교회입니다. 1년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제자 양육을 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을 다한 고린도교회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세상에서 갖고 있던 문제들을 교회 안으로 다 끌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삶이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칭의의 문제는 넘어섰지만 성화의 단계에 제대로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온갖 세상적인 문제의 꾸러미들을 다 이고 지고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교회가 심각해졌습니다. 특별히 분열의 양상이 심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이런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워 놓고, 바울은 계속 이동했으니까 그 교회에 대한 보고를 들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분파가 생기게 됐습니다. “나는 바울파다.” 바울이 제일 먼저 사역했거든요. 그리고 나서 아볼로가 또 사역했는데, “나는 아볼로파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게바파다.” 게바가 누구죠?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길 만한 센 것이 필요하니까 “나는 그리스도파다”까지 간 것입니다.
한국 교회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가 싸우는 형국이라고 하잖아요. 장로교도 기장, 예장이 있고,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가 있습니다. 기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감리교도, 성결교도 기성, 예성, 기감, 예감, 다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앞세워 서로 싸우잖아요.
여러분, 교회 안에는 분파가 잘 생길까요, 잘 안 생길까요? 굉장히 잘 생깁니다.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되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자꾸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2005년도에 밴쿠버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됐는데, 제가 두 번째 목사였습니다. 전임 목사님이 1년 9개월을 하고 떠나시게 됐습니다. 인사를 하시고 저도 인사를 하고, 이취임 예배였죠.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한 것입니다. 전임 목사님 지지파와 반대파, 항상 지지파와 반대파가 부딪히더라고요.
그분이 떠나셨어요. 그리고 제가 있잖아요. 그러면 제가 아직 무엇을 제대로 시작한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파가 갈라지더라고요. 새로운 목사님이 온 것을 지지하는 파와 주시파, 예의주시하는 파입니다. “너 제대로 하나 보겠다” 이런 것이죠. 그래서 “와, 이렇게 교회가 끊임없이 분파가 생기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1516교회를 개척하면서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성도들을 콜링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콜링하지 않고 사역 팀도 아무것도 세워 놓지 않고 그냥 예배 팀만 세워 놓고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행정적으로도 1, 2년 동안은 굉장히 어려웠고 사역 조직도 없고 순장 조직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계획성이 없고 준비성이 없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고요. 저는 계획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전에 섬기던 교회 성도들을 콜링하지 않은 이유는 온누리파와 비온누리파가 나뉘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입니다. 개척하는 교회들을 보니까 그것이 계속 나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전 교회 사람들을 콜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교회 안에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양상일까 해서 제가 조금씩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거의 대부분 “나는 1516교회 성도다”라는 정체성이 있으셔서 저는 그것이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희가 2년 지나서 1203교회를 세웠는데, 1203교회는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가 봐야 되는데, 1516에서 건너온 파와 1203에서 시작한 파, 이런 것은 아니겠죠.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도 바울이 곳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중에서 두 번째로 오랜 시간을 고린도교회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지나간 도시들도 있었습니다. 어제 마지막에 나눴던 데살로니가교회 같은 경우에는 딱 3주 있었단 말이에요. 3주 있었던 교회와 1년 반을 심혈을 기울여서 세운 교회는 다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고요. 아볼로는 teaching pastor,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가 그 이후에 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이 참된 진리이고 복음이다”라고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곁에서 거들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적당한 표현이 뭘까 생각하다가, 옆에서 거드는 것 있잖아요. 일을 하는 메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옆에서 거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들었을 뿐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1516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저도 옆에서 거들었을 뿐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1년 동안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뭐냐면, “부목사를 할 때랑 담임목사를 할 때랑 많이 다르시죠? 많이 힘드시죠? 많이 버거우시죠?”였습니다. 저는 똑같은데요. 무슨 이야기를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약에 뭔가를 힘 주고 애써서 하려고 하면 얼마나 버겁겠어요. 저는 옆에서 거들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내가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이게 잘돼야 되는데, 하나님 어떻게든 해 주셔야 되는데” 하면서 매일 밤 얍복나루터처럼 기도해 봐요. 그러면 다리를 얼마나 절겠어요. 몸이 정상이겠어요? 마음이 정상이겠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1516교회도, 1203교회도, 세상의 그 어떤 교회도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그렇지만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세웠으면서 또 본인이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을 때는 “크리스천들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조금 더 고급스럽게 표현하면 역설적인 인생의 고백과 신앙 고백이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좋은 곳에 보내 주셨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사업을 열심히 해서 성공했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사업을 성공시켜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신실하게 가정을 돌봐서 행복한 가정이 됐는데 “하나님이 내게 행복한 가정을 주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결국 허락하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노래 듣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계속 듣고 있어도 너무 좋습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수가 될 사람들을 뽑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많이 봤습니다. 그중 한 심사위원이 매번 하는 말이 “소리 반, 공기 반”이었습니다. 자기 생목으로 힘을 줘서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소리에도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은혜의 portion, 은혜가 차지하는 비중은 놀라운 것입니다. 너무 노력을 안 해도 인생에 문제가 생기지만, 너무 과도하게 애를 써도 인생의 반대편 절벽에 서게 됩니다. 완벽주의자들이 갖는 정신적인 고통, 내면적인 불행감, 인간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망가지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완벽주의, 과도한 업적주의는 사람을 결국 인생의 코너로 몰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항상 성공하고 항상 승리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승승장구하던 사람들이 결국 쉽게 무너집니다.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패배를 맛보면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래서 강한 사람들은 꺾인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실 때 은혜로 완성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요행수를 바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은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표현 가운데도 사도 바울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본인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는 이야기는 왜 굳이 합니까? 그러면서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격적인 은혜가 내게 강력한 인생의 동기부여가 되어 내가 이 길을 달려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수고했어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완성하신 분도 하나님, 시작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 그래서 결국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역설적 고백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뭐라고까지 이야기합니까? 7절 말씀에 보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땡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중요하십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보다 교회인 우리 자신이 너무 중요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중요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냥 교회에 왔다가 갑니다. 교회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갑니다. 교회에 와서 여러 프로그램을 하고 갑니다. 교회에 와서 여러 봉사를 하고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결국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일종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며 사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사람들이 영적인 소망과 갈망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각자의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 공동체를 꾸준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세워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8절과 9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교회 세우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 말씀에 근거해서 저희가 교회를 세우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다시 지어 일으키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자리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또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으로 1203교회를 세웠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동탄에 있는 교회입니다. 간혹 가셔서 축복해 주시고 응원해 주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장막과 같은 예배를 세우는 것, 또 많은 사람을, 한 영혼을 주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이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3장 8절 하반절에 보면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다만 8절 말씀을 다시 보면,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라고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봉사하는 역할은 달라도 결국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한가지이지만 또 일한 대로 상급이 달라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지만 다르다. 뭐가 같고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부르심은 같은데 헌신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1516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같지만 헌신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앉아서 똑같은 예배를 드리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이벤트를 경험해도 사람들의 경험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관점과 어떤 해석학적 태도로 그 이벤트를 경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같은데, 먼발치에서 바라볼 것인가, 가까이 다가올 것인가, 아니면 그 은혜의 강물 안에 완전히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기 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곳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배의 은혜 한가운데로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는 한가운데로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달란트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원한 것은 충성과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의 양상은 달랐던 것이죠.
왜 그렇게 될까요? 비전은 긍정적이지만 긴장감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꿈을 담고 있고 하나님의 비전을 담고 있는데, 이 비전을 사람들에게 제시했을 때 사람들이 긴장감을 느낍니다. 왜 긴장감을 느낄까요? 비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비전을 꿈꾸는 것까지는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험난한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희생을 치러야 되기도 하고, 헌신을 해야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동일한데, 그 부르심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과 뛰어드는 사람과 정말 하나님과 그 모든 길을 동역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비전은 긍정적인데, 비전을 제시하면 분위기가 한순간에 부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니까 형제들이 좋아했습니까? 죽이려고 했잖아요. “네가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우리가 너를 죽이면 그다음에 네 꿈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아예 그 꿈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요셉의 꿈은 개인적인 꿈이라고 형제들이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다 할지라도, 모세가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 민족,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이야기하잖아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도 그 백성들이 그 꿈을 끊임없이 불신합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이 광야로 끌어낸 것 아니냐.” 이것을 40년 동안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제 꿈은 이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의 꿈을 이야기하는데도 사람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140년 만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영적인 심장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가 무너진 지 140년이 됐으니까 이 영적 수치심은 너무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감동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동서남북 이민족들이 압박하고 협박하고 괴롭히니까, 밖에서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도 이 사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사람들이 선대하지 않으면 사업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벽 세우는 것이 되겠냐.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안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밖에서도 좋아하지 않고 안에서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미친 척하고 52일 만에 성벽을 세웠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가끔 저는 “미친 척하고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교회 개척 운동을 제가 하면서 “이걸 누가 좋아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오늘날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의 시대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실망하면서 한국 교회 비판론이 굉장히 거셉니다. 저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교회에 대해 비판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아니야, 실제로 교회는 그렇지 않아.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아” 이런 것 하지 마세요. 무조건 교회를 대표해서 사과드리세요. “교회가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사과할 것을 사과해야 되고, 우리가 회개할 것을 회개해야 되고,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세상도 교회에 대해서 “그런 문제 많은 교회들은 사라져야지, 교회를 자꾸 세운다고?” 하면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어떨까요? 성도님들은 은혜를 받고 싶어 하지,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기까지의 희생과 헌신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비전의 결과는 누리고 싶지만 비전의 과정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은 들어가고 싶지만 광야는 지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대답을 안 하셔도 다 압니다. 그러니까 교회 개척 운동은 교회 밖에서도 싫어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그다지 환영받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좋아한다고 이것을 하는 것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누가 좋아하세요? 하나님이 좋아하시죠. 오늘 9절 말씀을 우리가 읽었는데, 다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은 누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걸 왜 하냐, 그게 되겠냐, 굳이 그걸 해야 되냐, 그것을 해야 되냐”라고 이야기해도 결국 그 자리에 함께 가고 나면 “우리가 여기를 오길 잘했다. 이 과정을 거치기를 잘했다”라고 하게 됩니다.
월드컵이 다음 주인가요, 이번 주인가요? 여러분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고 계시잖아요. 저는 히딩크 감독을 보면서 한 가지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중간에 지옥 훈련을 시켜도 4강에 이르니까 모두가 감동 스토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생을 한 선수들, 그때 함께했던 선수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함께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신부름꾼처럼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들, 그것을 위해 함께 주님과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개척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저는 격하게 환영합니다. 아직 개척교회예요. 저희는 개척교회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행정적으로 미비한 것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계획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제가 이번 예배교회 컨퍼런스 2회차를 준비하면서 사실 2, 3주 전까지도 등록하신 분들이 많지 않더라고요. 분명히 리더십들에게도, 예배 때도 충분히 비전을 나눴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봤습니다. 작년에 10월에 했는데 6월에 하니까 “또 해?” 하는 심리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저희가 강사진을 전부 교회 개척한 사람들만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심리에 “내가 저기 가서 너무 감동을 받으면 나도 나가야 되나?” 이런 생각이 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소망의 부르심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영광의 부르심인 줄로 믿습니다.
10절과 11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아멘.
사도 바울이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고백하고, 그 집을 은혜를 따라 지혜롭게 세우는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위에 무엇을 세울지 조심해야 한다,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예수로 시작했는데 엉뚱한 것으로 끝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예수로 시작했는데 엉뚱한 것을 그 위에 자꾸 세웠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유일한 터, 유일한 기초가 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질문을 세 개 할 텐데 여러분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답을 알려 드린 질문입니다.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누구십니까?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만민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왜 예수님보다 바울을 내세우고 아볼로를 내세우고 베드로를 자꾸 내세웠을까요? 사람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까? 아니잖아요.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아무리 여러분이 여기서 은혜를 누려도 교회 자랑하지 마시고, 나가서 사람 자랑하지 마세요. 하나님 자랑을 하세요. 예수님 자랑을 하세요.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선하신 아버지가 되시는지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지게 되지만, 오직 예수, 오직 예수 한 분이 남습니다. 우리가 천성문 앞에 가서 “제가 이거 하다 왔습니다. 저거 하다 왔습니다. 제가 이것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천성문 앞에서 “저 예수님 믿다 왔습니다. 제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몸부림치면서 애를 쓰면서 주님을 온전히 믿으려고, 따라가려고 살다가 왔습니다.” 이 한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36절에 변화산상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한 환상을 보여 주시고 난 뒤 말씀이 있습니다. 읽어 볼까요?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아멘. 다시 따라해 보세요.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내가 저 사람 때문에 마음이 어려워서 교회 못 다니겠네”라고 하면 자꾸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좋아서 “우리 순장님이 너무 좋아요” 하고, 순장님을 너무 좋아하다가 분순하려고 하면 “나 이 교회 안 다닐 거야” 협박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런 것 하지 마시고요. 오직 예수만 보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하면서도 나눈 이야기지만, 무엇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합니까? 첫 번째는 예배 가운데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집이 아니잖아요. House of God,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서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할렐루야. 제가 시작 때부터 계속 강조했던 것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러면 신앙의 완성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고, 내 가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그들에게 흘러가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은 완성인 것입니다.
교회가 역사가 흐르면서 자꾸 조직화되고 기득권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정책이나 방향이 그런 교회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새 가족이 와도 반가워하지 않고, 새 가족이 와서 적응하지 못하고, 새 가족이 불편해합니다. 새 가족이 불편해하는 이유가 사실 기존 신도들이 새 가족을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어제 마지막 세션에서 나눈 것처럼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병원이 환자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면, 다 치료된 사람들이 병실 하나씩 차지하고 “내가 숙박료 내면 되지 않냐” 하며 앉아 있고, 환자들은 장사진을 치고 병원 문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병원이 아니라 숙박업소입니다. 병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사람을 살려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살리기를 원하시잖아요. 올해 저희 주제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하나님의 눈물로, 주님의 눈물로, 주님의 헌신으로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워질 줄로 믿습니다.
2026.06.06(토) | 예배교회컨퍼런스(이상준) | 교회여, 복음의 본질로 돌아오라 (살전 1:3, 7-8)
교회여, 복음의 본질로 돌아오라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7-8절)
- 제목: 교회여, 복음의 본질로 돌아오라
-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7-8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6-06
- 예배: 예배교회 컨퍼런스
설교 요약
1. 교회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를 대형 교회화, 기업화, 상업화로만 진단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놓친 세속적 관점일 수 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믿게 된 대형 공동체였지만,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역사와 사랑의 공동체성이 살아 있었느냐에 있었다. 작은 교회도 본질을 잃으면 무너지고, 큰 교회도 본질을 붙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를 감당할 수 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의 본질을 보여 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3주밖에 머물지 못한 작은 교회였지만,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된 교회였다. 그 핵심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였다. 믿음은 신앙의 기초이고, 소망은 신앙의 방향이며, 사랑은 신앙의 본질이자 완성이다.
3. 믿음은 실제 순종의 자리에서 역사를 낳는다
믿음의 역사는 단순히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태도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 말씀을 따라 실제로 발을 내딛는 순종을 포함한다. 오병이어의 기적,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 기름을 붓는 사건처럼 하나님의 기적은 믿음의 실천 속에서 나타났다. 교회도 기도한 대로, 말씀에서 받은 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 역사를 경험한다.
4. 사랑은 기꺼이 수고하고, 소망은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
사랑의 수고는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하는 고생이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을 따르는 삶이다. 소망의 인내는 열매가 맺힐 때까지 떠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교회와 가정이 부족하고 망가져 보여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때까지 붙들고 견디는 것이 본질적 공동체의 모습이다.
5. 부흥은 한 영혼을 위해 기존의 편안함을 내려놓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새신자를 위해 공간, 시간, 문화, 우선순위를 내어 주지 않으려 한다면 진정한 부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가정 전체가 그 아이를 중심으로 재조정되듯, 교회도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불편한 변화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는 완치자들의 휴게지가 아니라 환자들을 살리는 병원이며, 응급실이고 중증외상센터와 같다.
6. 복음은 어떤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목회 경험을 통해 우울, 중독, 무신론, 냉담, 상처, 가정의 아픔 속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날 수 있다고 증언한다. 복음은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에 다수에게 선포되어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실제로 적용된다. 교회의 본질은 결국 복음이며, 복음의 능력을 믿는 교회는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론
교회는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설교를 잘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핵심은 기술이나 언변이 아니라 한 영혼을 향한 눈물과 헌신이다. 성도와 목회자가 모든 변화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고,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될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전문 스크립트
준비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 바람에 제가 세 번이나 강의를 하느라 오늘 점심을 같이 먹는데 너무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데 얼마나 얄미운지요. 하나님께서 계속되는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본질적인 음성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어제 이정규 목사님께서 거듭난 신앙,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그리고 김관성 목사님도 함께 살아나기 위해 끝까지 책임지는, 결국 한 생명에 대한 진심이 교회에 있느냐를 이야기하셨고요. 또 오늘 오전에 신재훈 목사님이 굉장히 차분하면서도 예리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전에 너무 좋으셨죠? 저는 듣고 나서 “목사님, 속이 시원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결국 목사님들께서 교회의 본질과 기초를 여러 각도로 이야기하셨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면 한국 교회는 살아날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어제 세션에서는 삼위일체 구도에 맞춰서 메시지를 한 거예요. 성부 하나님의 임재를 거의 끝냈고, 오늘은 성자 예수님의 복음, 이 부분을 여섯 번째 세션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 복음의 역사로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면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는 기독교의 삼덕에 맞춰서 교회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내부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교회 문제가 도대체 뭘까?” 이것을 진단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제를 진단하면서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진단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뉴스에도 대형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뉴스거리가 되면서 세상에 십자포화를 당하고, 그런 문제들이 계속됐죠. 그러다 보니까 대형 교회, 기업화, 상업화가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망가뜨린 주범이 아니냐는 의식이 마련된 거예요. 그러면서 교회를 가족화해야 되고 소형화해야 된다는 소목 교회론이 대두되게 됐어요. 제가 알기로는 대형 교회를 거의 문제시하거나, 심하면 죄악시하는 교회론, 에클레시올로지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도 있더라고요.
그러면 대형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일까요? 대형 교회든 소형 교회든 본질을 잃어버리면 문제가 돼요. 본질에서 빗나가면 교회는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대형 교회였나요, 소형 교회였나요? 성경에 답이 다 있어요.
여러분 어느 정도 대형 교회였는지 우리가 감이 안 오지만,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시면 베드로가 메시지를 전했을 때 신도 수가 몇 명이 더해졌다고요? 또 4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은 자의 남자 숫자가 몇 명입니까? 오천 명입니다.
그래서 이 오천 명은 누적 숫자로 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시작하자마자였으니까, 그 당시 예루살렘의 상주 인구가 몇 명이었을까요? 한번 맞춰 보세요. 30만? 10만? 5만. 네, 5만이 제 추정치예요. 3만에서 6만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많이 잡아도 한 5만 명이라고 생각하면, 장정만 5천 명은 가족까지 생각하면 거의 2만 명의 교회라는 얘기입니다.
예루살렘의 거주 인구가 5만 명인데 2만 명이 크리스천이 됐다고 생각해 보세요. 충격적인 숫자입니다. 40%예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산 위에 세워져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공간이 굉장히 협소합니다. 그 협소한 공간 안에서 인구의 40%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초대형 교회가 된 거예요.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대형이냐 소형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강력한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 사랑의 공동체의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워진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큰 교회이기 때문에 큰 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망쳤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세속적 관점이 아닌가, 이것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반면에 작은 교회들은 무조건 낙심에 빠지거나 패배주의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읽어 드린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어느 교회일까요? 어느 교회예요? 자막 빨리 보세요. 아니, 제 자막을 보여 줘야 되는데. 1장 3절 말고 그다음에 데살로니가 교회. 할렐루야. 손발이 맞아야 돼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안식일에 딱 3주 머물렀어요. 한 달도 채 사역을 안 했습니다. 물론 도시들 중에서 헬라 지역의 중요한 도시였지만, 에베소나 고린도 같은 메이저 도시와 비교해 보면 조금 중요성이 떨어졌던 거예요. 데살로니가에 3주 있었다고요. 작은 교회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읽어 보니까 놀라운 강소 교회가 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요? 복음의 능력이 살아 있는 교회. 할렐루야.
복음의 본질과 능력이 살아 있는 교회인 거예요. 그래서 교회 본질은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규모의 문제가 아니에요. 본질적인 핵심 가치를 교회가 갖고 있느냐의 문제예요. 이것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면 믿음, 소망, 사랑, 이렇게 삼덕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믿음은 신앙의 기초이고, 소망은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고, 사랑은 신앙의 본질이죠. 완성이잖아요. 삼위일체로도 연결되고 귀결될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이잖아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더 원하는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너는 이렇게 3년 반이나 나랑 있었는데 나를 보고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면 어떡하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천국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천국 소망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잖아요.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진리의 성령은 진리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 14절에 보면 약속의 성령으로 우리가 인침을 받아서 그분이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이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은 그런 거예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받을 하나님 나라, 저 천국이 어떤지를 여기서 맛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이 맛이 궁금합니다” 하면 작은 스푼으로 떠서 먹여 주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면 천국을 맛보는 거예요. 우리 기업이 어떤지를 여기서 경험하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세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그 천국의 맛을 보고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죠.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아름다운 우주 만물을 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분입니다. 제가 저희 아들이 와 있나 모르겠네요. 큰아들은 군대 갔고, 둘째도 이제 군대를 갈 건데 다 집에 와 있어요. 어떤 성도님이 그러는 거예요. “아들이 와서 너무 좋겠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요. 집이 좋거든요. 집이 좋은데 아들이 와서 좋은 것도 있죠. 좋은 것도 있지만 “빨리 너의 인생 다음 단계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있죠.
여러분 자녀 사랑하죠. 부부간에 사랑하죠. 그런데 하루 종일 24시간 같이 있어 봐요. 싸워요, 안 싸워요? 싸워요. 부딪혀요. 의견이 나뉘어요. 분위기 좋다가 차 한잔 마시면서 “오늘 너무 분위기 좋아” 그러다가 싸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를 아들의 생명으로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10년 동안, 100년 동안, 천년 동안,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상상이 되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상상이 되세요?
이렇게 망가진 사람들을 데려다가, 인류 역사를 그렇게 꼬이게 만들고, 축복의 가정을 주니까 가정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그 소중한 생명을 맡겼더니 아이들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그런데 그런 우리를 말도 안 되게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하세요. 그 천국을 예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놀라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히 있는 교회인 거예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기독교 핵심 가치인 세 가지, 믿음, 소망, 사랑을 보여 줍니다. 저를 따라서 해 보세요. 믿음, 소망, 사랑. 이거 어렵지 않잖아요. 믿음, 소망, 사랑인데, 믿음, 소망, 사랑이 열매를 맺으면 무엇이 되는지를 보여 준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것으로 책을 쓸 거니까 대신 쓰지 마세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도 나왔는데 2장 초반부에도 똑같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야기합니다. 그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꾸준히 모범적이고 본질을 갖춘 교회였어요.
믿음의 역사, work of faith. 정말 믿음대로 그 역사를 나타내는 교회인가? 사랑의 수고, labor of love.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수고하는 교회인가? 이 사랑의 수고는 어제 김관성 목사님도 이야기하신 것이고, 신재훈 목사님도 이야기하신 똑같은 이야기예요. 소망의 인내, patience of hope. 소망하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는가?
“한국 교회 안 되겠네” 그러고서 팬데믹 기간 75만 명이 온라인 정도로 전환한 거예요. 물론 그때 우리가 거의 다 온라인 예배를 드렸지만, 75만 명이 아직 안 돌아온 거예요. 견디지를 못한 거예요. 포기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이 본질적인 것이 우리 안에 있는가?
교회 본질을 두 교회를 비교해서 볼게요.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너무너무 중요하게 여겨 3년 동안 제자 양육을 하며 교회를 세웠어요. 정말 사도 바울의 전체 사역으로 놓고 보면 엄청난 비중입니다. 아까 우리가 봤잖아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몇 주 있었다고요? 3주입니다.
3주 있었던 교회와 3년 있었던 교회가 비교가 되겠냐고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하게 배웠겠어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한 장을 봐도 갈라디아서를 봐도 얼마나 탁월하게 말씀을 가르칩니까? 이러한 선생님에게 말씀을 3년 배운 교회예요.
그런데 그 에베소 교회에 나중에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목회자로 보내잖아요. 그런데 디모데가 목회를 하는데도 에베소서를 보면 유대 율법주의 교사들이 난리를 치고, 영지주의 이단들이 난리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 여자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십거리를 만들고 서로를 뒤에서 헐뜯는 교회, 이런 문제가 에베소 교회 안에 있었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 교회 중에서 처음으로 책망을 받잖아요. 요한계시록 2장 4절에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무엇을 버렸다고요?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본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선교 1차, 2차, 3차를 하면서 유럽과 아시아에 엄청나게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두 번째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교회가 어느 교회일까요? 고린도 교회입니다. 1년 반, 1년 6개월, 18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제자 양육을 하면서 키워낸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도시가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아가야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두 개의 항구, 겐그레아와 레카이온이라는 두 항구를 가지고 있는 해상무역과 육상무역의 중심지 고린도를 상당히 중요한 도시로 본 거예요. 그래서 1년 반 동안이나 열심히 헌신해서 교회를 세웠어요.
그런데 그 고린도 교회가 문제 종합 세트 교회가 되잖아요. 고린도전서가 로마서만큼 많은 16장입니다. 그런데 16장으로 안 끝나고 고린도후서까지 나왔어요. 전후서를 합치면 서신서 중에 제일 긴 서신이 됐죠. 엄청나게 주옥같은 메시지를 듣게 해 줬지만, 그 이유는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분열의 문제, 음행의 문제, 소송의 문제, 결혼의 문제, 우상의 재물을 먹는 문제, 은사 문제, 예배 질서 문제, 부활 논쟁의 문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게다가 고린도후서를 보면 교회를 세운 담임 목사인 바울을 쫓아내는 교회. 오늘날 많이 나타나는 문제잖아요. 담임 목사를 쫓아내는 교회였어요.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작은 교회였는데 신실한 교회, 모범적인 교회였잖아요. 얼마나 모범적이었는지, 1장 7절에 보면 어디에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됐다고요? 마게도냐와 아가야입니다. 헬라 반도를 놓고 보면 밑이 아가야 반도고 그 위가 마게도냐입니다. 마게도냐가 유럽이랑 연결되어 있는 거죠. 그 헬라 전역의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된 교회. 가장 작은 교회가 가장 본이 된 교회였다는 거예요.
8절 말씀을 보면 마게도냐와 아가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라고 합니다. 온 세상의 열방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너희의 선한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냐, 이것은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시대 한국 교회 안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시고, 사랑의 수고를 끌어안게 하여 주시고, 소망의 인내를 결단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역사라는 것은, 이 “역사”는 헬라어로 에르곤이라는 단어인데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무슨 응답을 주셨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작게 말씀하시면 “나는 그렇게 작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닌데”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굉장히 크게 이야기하시면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합니다.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주 안에 있는 것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오늘 신재훈 목사님이 굉장히 개념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여러분이 그걸 70분 동안 어느 정도 캐치했는지 모르겠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인하여 할 수 있게 되는 영역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 기억나요? 훌륭한 분들이세요.
이 이야기는 기적의 원리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오병이어 사건이 놀라운 기적이잖아요. 오병이어 도시락을 빼앗긴 아이 마음은 좀 억울하겠지만, 그게 기적의 도구가 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축복 기도를 하고 눈을 딱 떠 보니까 음식이 막 쌓였어요? 아니잖아요.
제자들 12명에게 오병이어를 나누어 주셨겠죠. 그런데 그들의 손에서 사람들에게, 장정만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에게 떼어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 자체가 믿음의 실천인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의 실천을 했더니 계속 나누어지는 거예요.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요단강을 건널 때도 강이 갈라지고 나서 건너는 게 아니잖아요. 제사장들이 발을 대니까, 아직 갈라지지 않았는데 발을 대는 겁니다. 모맥 거두는 시기라 요단강 수위가 제일 높을 때 그냥 빠져 죽는 거잖아요. 믿음으로 목숨 걸고 실천했더니 기적이 나타났잖아요. 할렐루야.
동네의 그릇들을 다 모아서 부으라. 그래서 동네의 그릇들을 다 모아서 붓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기적이 나타나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면 어디서 그냥 기름이 떨어지거나 돈이 떨어지는 게 아닌 거예요. 기도하고 눈을 떠 보면 오병이어가 오천 명이 먹을 만큼 쌓여 있는 게 아닌 거예요.
믿음의 실천. 당신은 믿음의 실천을 하고 있는가? 새벽기도를 10년째, 15년째 나오시는데 기도할 때는 기도할 때고, 눈 뜨고 현장에 가면 싹 바뀌는 분들이 많아요. 아니요. 믿은 그대로, 기도할 때 믿었던 그대로, 성경의 약속을 받았을 때 믿었던 그대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길이 안 보여도 길이 있다. 발을 내디뎌라. 그러면 발을 내딛는 거예요. “저는 낭떠러지라서 떨어져 죽으면 하나님이 책임지십시오. 저는 순종합니다.” 그때 보이지 않는 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가 그런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는가? 그러면 그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생기는 거예요.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수고라는 단어는 코포스라는 단어인데, 고생한다는 뜻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이 워낙 똑똑해서, 안 좋게 이야기하면 영악해서, 연인이 됐든 부부가 됐든 내가 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고생하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니까, 여러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요즘은 자식들을 너무 이겨서 문제인데,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이유가 뭘까요? 자식이 부모를 더 사랑해요,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해요? 더 사랑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잖아요.
사랑의 수고. 그 놀라운 사랑의 수고에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똑같은 사랑으로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랑으로 수고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받고 대접받는 쪽을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내가 너무 사랑해서” 그런 인생을 부끄러운 인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헌신하는 것.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인 거예요.
소망의 인내. 이 인내라는 단어는 휘포모네입니다. 인내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망가져 있는 것 같아도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가정에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분, 그래서 이 본질적인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니까 다윗의 장막도 그렇잖아요. 제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그 초라한 임시 텐트를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신다는 거잖아요. 본질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 3년간 사역을 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세 차례 오셨던 것으로 요한복음에 되어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단 하루도 주무신 적이 없어요.
사람이 잠을 잘 때는 그래도 편한 데 눕게 되어 있잖아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분이 그래도 가장 마음 편하게 쉬신 데가 어디예요? 예루살렘 동편 베다니입니다. 이 베다니는 가난한 자들의 동네라는 뜻이거든요. 예루살렘 동편 판자촌이에요.
그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시는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예수님은 항상 그 집에 가서 쉬셨어요. 여러분 예수님을 진짜 사랑으로 모신 것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배척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정을 넘겨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그날에 죽으셨어요.
성전이 있는, 예배자들이 있는 그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손가락질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판자촌에서 예수님을 가장 worship 한 겁니다. worship을 또 다른 단어로 영어는 service라고 했잖아요. 그분을 섬기는 것. 그분을 가장 잘 섬긴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다니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가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베다니가 되기를 바라고, 다윗의 장막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여, 본질로 돌아오라. 예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시는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역사를 따라 움직이는 교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가 된다면, 그 교회는 본질적인 교회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사실 올해로 한국 교회 마이너스 성장 34년 차, 북미 한인 교회도 마이너스 성장 14년 차입니다. 제가 교회를 시작할 때가 매년 한 단계씩 주저앉은 지 30년째였거든요. 여러분, 우리는 다시금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그 부흥의 시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부흥을 원하는 것일까?
한동안은 부흥에 대한 담론이 많았는데, 요즘은 부흥에 대한 담론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부흥이 뭘까요? 부흥이 사람이 많아지는 걸까요? 건물을 세우고 좋은 시설을 하고 영향력이 생기고 유명세를 얻게 되는 것이 교회가 부흥하는 걸까요? 진정한 교회의 부흥은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처럼 한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정말 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 한 영혼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예를 들 때에는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해외 어떤 한 교회 담임 목사님이 부임하시면서, 이분이 정말 말씀의 능력도 있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분이거든요. 그 교회가 워낙 그 지역에서는 리딩 처치였어요. 큰 교회였는데, 짧은 몇 년 사이에 두 배 이상으로 부흥한 거예요. 놀랍게 부흥하는 역사가 있었어요. 다른 나라에도 소문이 날 정도로 큰 부흥이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그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게 되더라고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교회를 너무 부흥시켰기 때문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교회는 부흥을 원했지 변화를 원하지 않았거든요. 부흥하면 변화가 따라올까요, 안 따라올까요?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부흥은 원하는데 부흥을 이루기 위한 과정, 부흥 이후에 따라오는 모든 결과들, 그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가령 이런 겁니다. 교회에 새신자가 많아진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기존 신자들이 사용하던 공간을 내줘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교회 장로님들 라운지가 있어요. 장로님들 방이 따로 있는 교회들도 있잖아요. 새 가족들이 몰려오면 그곳을 새가족실로 내줘야 될 수도 있어요. 시간, 장소, 재정 모든 면에서 새신자들이 우선순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기신자는 하루아침에 주인공이었다가 조연이 되는 거예요. 새신자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조연이 돼도, 옆에서 종살이를 하고 수발을 들어도, 우리는 새신자들이 오는 게 좋다” 그럴까요? 생각해 보세요. 어떤 한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아들딸들이 다 같이 모여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갓난아기가 태어났어요. 그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일 연세가 많으시니까 주인공이었을 수 있어요. 아니면 아빠, 엄마가 실제로 돈도 벌어 오고 역할을 하니까 주인공이었을 수 있어요. 아니면 그 집에서 가장 귀여움을 많이 받는 아들딸들이 주인공이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게임 체인저, 패러다임 체인저예요. 한순간에 주인공은 명확해집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어린아이 하나. 그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아이 앞에서 재롱을 부립니다. 아빠, 엄마가 24시간 대기하면서 아이를 섬깁니다. 언니, 오빠, 누나, 형도 그 아이를 위해 자기 개인 시간을 조절하면서까지 그 아이를 섬기는 것을 돕습니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헌신자들이 “내가 교회를 위해 엄청 헌신해 왔어요. 몇십 년을.” 그때 헌신자들이 헌신자가 되고, 헌신자처럼 “아니 이게 뭐야?” 하게 됩니다. 갑자기 새신자 갓난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냐고요.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안타까웠던 점은 새 가족을 더 이상 환영하지 않게 됐다는 거예요. 물론 새 가족을 환영하시는 분들도 있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선교도 열심히 하는 교회였어요.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새신자가 저한테 제보를 하니까 알게 된 것입니다. 목회자는 가만히 있어도 성도들이 와서 제보를 합니다.
“제가 온 지 6개월이 됐는데, 1년이 됐는데, 1년 반이 됐는데 새가족 사역자가 연락 준다고 하고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순 배정을 안 해 줍니다.” 제가 담당 목사님께, 제가 양재 캠퍼스 전체 총괄 목사였거든요. 공동체 담당하는 목사님들이 한 20, 30명 되니까 “목사님, 이 성도 부부가 그 지역 공동체 소속입니다. 순 배정 좀 해 주십시오.” 했는데 순 배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 말고 총무님한테 연락해서 “제발 이 가족을 순 배정해 주십시오” 했는데도 순 배정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순 배정을 안 해 주는가 봤더니 순들이 다 포화 상태인 거예요. 어떤 젊은 부부가 드디어 순 배정을 받아서 갔어요. 첫날 갔는데, 이것도 제가 현장에 가 보지 않았으면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부부가 저한테 와서 한 이야기예요. “저희가 첫날 드디어 순 배정을 받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앉자마자 순장님이 하는 말이, 저희는 두 분이 온 것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같이 순을 한 사람들이고, 다음 주부터는 안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니까 새 가족을 환영하지 않아요. 제가 더 이상 뭘 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새 생명을 주시는 거잖아요. 저희는 이제 개척한 지 3년 반 된 교회예요. 새 가족이 오면 환영할까요, 안 할까요? 해야죠.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거예요. 사람도 똑같고 병아리도 똑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앞에 나오면 봄 시즌에 병아리들을 팔았어요. 귀여운 병아리들이 너무너무 사랑스럽잖아요. 돈을 모아서 한 마리 집에 가져가서 박스 쳐 놓고 물도 주고 모이도 주고 키우는 거예요. 또 돈을 모아서 귀여우니까 한 마리 더 사서 데려갑니다. 그러면 한 3일에서 4일 전에 있던 애가, 자기가 박스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하나가 들어왔잖아요. 반을 나눠야 돼요. 그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선배가 신참의 정수리를 쪼아요. 정수리를 쪼아서 죽여요.
사람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새 가족이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이 오고 백 명이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집에 신생아 하나가 태어나면 아이 방을 꾸미고, 거실을 바꾸고, 아이를 위해 음식을 만들 기구들을 준비하는 정도가 되겠지만, 아이가 몇십 명, 몇백 명 태어나면 병원 신생아실이 되는 거예요. 병원 신생아실에 가 보세요. 모두가 아이들을 섬겨야 돼요. “어린 것, 일어나라. 네가 나를 섬겨야지. 어디서 네가 나를 섬기게 해” 이렇게 못 한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십 년이 된 교회,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새신자들을 위해 섬기는 부흥을 하겠냐고요. 그걸 좋아하겠냐고요? 제가 밴쿠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처음 교회 초대받아서 오신 분이 있는데, 예배를 드리는데 몇백 명이 앉아 있어도 눈에 딱 띄더라고요. 너무 반짝거리는 옷, 어디 나이트클럽에 갈 것 같은 옷을 입고 오신 거예요.
왜일까 생각했다가 금방 알게 됐어요. 한 50대 여성분이었는데, 이분은 나름 자기가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 최선을 다해서 입고 온 거예요. 교회를 처음 와 봤는데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입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커피 앤 도넛 하는 교제 시간에 저쪽에서 사람들하고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목소리가 크더라고요. 그리고 세상적인 용어들을 거침없이 쓰시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교회에 저런 옷을 입고 와서 저런 말을 하고”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그 여자분이 일생에 교회를 몇 번이나 나와 볼 수 있을까요? 그 소중한 기회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아이 셋을 데리고 있는 아기 엄마가 있었습니다. 교회 봉사도 참 열심히 하고, 여름 캠프 하면 캠프 다니면서 섬기고, 집안 살림도 열심히 하고, 아이도 신앙으로 표현하고 정말 열심히 애쓰는 분이에요. 그런데 남편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예요. 이분의 평생 소원은 남편이 교회 한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제발 교회 한번 따라 나왔으면 좋겠다.”
어느 날 저에게 긴장된 얼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음 주에 저희 남편이 나오기로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목사님, 좀 이해해 주실 게 있습니다. 저희 남편이 열이 많은 남자라서 옷을 많이 안 걸치고 나옵니다.” 괜찮습니다. 나오신다면 괜찮습니다.
그분이 나왔는데 보니까 온몸에 털이, 한국 사람이 그렇게 털이 많지 않은데 진짜 온몸에 털이 어마어마하고, 반팔에 반바지, 쇼츠 있잖아요. 쇼츠에 슬리퍼를 신고 나오셨어요.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거예요. 밴쿠버는 30분만 가도 해변, 30분만 가도 산정호수, 놀러 갈 데가 정말 많거든요. 다들 레저에 미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모양을 하고 교회에 나왔잖아요. 아내가 간절히 소망하던 십몇 년 만에 이루어진 소망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왔더니 교회 장로님이 불러다가 혼내더라고요. “교회에 이런 식으로 하고 나오는 것 아니다.” 저는 그분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는데요. 그래도 그 남편분이 꾸준히 계속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감사한지, 꿋꿋하게 나오더니 한겨울에 주차 봉사를 하더라고요. 밴쿠버가 겨울에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는 않아요. 그래도 영상 5도면 많이 떨어진 거예요. 한겨울에 반팔 반바지 입고 주차 봉사를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제가 교회들마다 집회를 하러 다니면 장로님들이 “한번 식사를 합시다” 하십니다. 가능한 안 하거든요. 그런데 꼭 한번 보자고 해서 갔어요. 뭔가 할 이야기가 있으신 거예요. 보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도 부흥하고 싶다. 우리 교회도 부흥하고 싶습니다. 그 교회처럼 부흥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교회가 천 명 넘는 교회로 부흥할 수 있다면 비결이 뭡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분위기가 약간 뭐냐면, 담임 목사님도 같이 앉아 있는데 “담임 목사님이 능력 발휘를 못 하니까 부흥이 안 된다”는 뉘앙스였습니다. 제가 고민하다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장로님, 문화를 바꾸십시오.” 제가 본질적인 교회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문화를 바꾸십시오.”
사실 교회 본질은 복음이지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문화는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기존 성도들이 편한 것 말고, 세상 사람이 왔을 때 “우리를 환영하는구나. 우리가 너무 편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만한 공간으로 바꾸십시오. 예배 음악, 교회 내부, 교회 프로그램, 모든 것을 그렇게 바꾸십시오.
그랬더니 식사 자리에서 식사를 안 하시고 상의하시더라고요. 장로님들이 두 바퀴, 세 바퀴 상의하더니 “우리는 그 제안을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는 오래되고 익숙하고 편안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거 못 바꿉니다.” 신생아 하나만 태어나도 집안의 모든 공간, 시간, 스케줄을 다 바꿔야 돼요. 신생아 태어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살겠다. 편한 대로.”
교회가 부흥을 원할까요? 제가 끝나고 나서 담임 목사님께 이야기했어요. 담임 목사님은 사실 그 뉘앙스를 아시죠. “진짜 부흥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부흥을 원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부흥이 치러야 될 대가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CCF에서 앞으로 교회 컨설팅도 하려고 하반기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본질이 무엇인가요?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게 뭘까요? 한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한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한 영혼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요.
저희 아버님이 사실 알코올 중독이셨고, 거기서 회복되셨지만 그래도 굉장히 무서운 분이었고 많이 맞았고, 그래서 아버지와 성장기 때 이렇게 앉아서 따뜻하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저희 큰형이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살 때 제가 집에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아버님은 외출 나가신 상태였고 그 당시에 큰 조카 지혜가 다섯 살이었어요.
지혜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님이 친구분들을 만나시고 늦게 들어오신 거예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지혜가 막 달려가더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춤춰요” 그러는 거예요. 제가 너무 긴장했어요. “우리 아빠 그런 분이 아닌데. 지혜가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 무서운 아버지가 처음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 거예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여러분, 한 영혼이 우리 교회에 와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아무리 근엄한 어르신들도 장로님들도 춤을 춰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거 하기 싫으면 부흥을 원한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원한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형상이 되기까지 낮아지셔서 한 사람을 살려내겠다고 오시는 거잖아요. 우리가 변하지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다 바꿀 수 있어요. 하지만 주인공이 조연이 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이방인들이 주인공이 된다면 참을 수 없는 거예요. 그들의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우리는 선민이고 저들은 더럽고 불결한 이방인들인데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뭔가요? 왜 유대인을 선택하셨어요? 그들을 통해서 이방인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저를 따라 보세요. 가슴에 손을 대시고, “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라는 찬양을 하고 서로 불러 주고 너무 좋아하잖아요. 왜 그렇게 좋아해요? 통로 때문에 좋아해요, 축복 때문에 좋아해요? 복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게 아니라 흘러가라는 거잖아요.
무엇이 그렇게 좋으세요? 돈 기꺼이 나누어 주세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을 기꺼이 나누어 주세요. 한 영혼을 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기꺼이 결심하세요. 통로가 복이라는 이야기지, 복을 계속 고인 물로 놔두면 썩습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되는 거죠. 교회여, 복음의 본질로 돌아올지어다.
마태복음 8장 11절, 12절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은 이방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남북이 빠졌다고 남북은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동서남북의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아 있는데, 그 나라의 본 자손, 곧 유대인들은 바깥에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 성전의 주인공을 거부했잖아요. 예수님의 제일 비유가 뭐예요?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천국에서 잔치가 열린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 마리 양 때문에 여기를 어지럽게, 더럽게 만들어? 우리 스케줄을 다 바꾸고, 교회 문화를 다 바꾸고? 나가세요.” 우리 순이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지옥으로 가게 될 거라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빠진 성경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온몸으로 거부합니다. 어떻게 교회가 살아날 수 있어요?
저희 교회도 정말 힘든 분들이 많이 오거든요. 어떤 분들은 자살 충동, 자살 시도를 거의 10년 동안 한 사람도 있더라고요. 한 부부가 다크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나타난 적도 있어요. 저는 앞에서 보면 어둡지만 다 보입니다. 목사님들이 익숙하지 않지만 저는 다 보입니다. 다크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형제는 장발을 하고, 자매는 여기까지 파인 옷을 입고 왔어요.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거예요. 교회 나올 복장은 아니잖아요. 교회 나올 사람이 아닌데 교회에 나와 있잖아요.
홍대 쪽에서 온 젊은 커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 보니까 그러는 거예요. “저희가 교회를 정착해 보려고 여러 교회를 다녀봤습니다. 그런데 시선에서 알잖아요. 시선에서 알잖아요. ‘너희 제대로 왜 왔지?’ 그런데 목사님이 저희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것은 처음입니다.”
그 커플은 패션 쪽 일을 하는 커플이었어요. 자매는 또 전도사님 자녀였고요. 권면했어요. 술이나 담배나 세상적인 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귀한 가정인데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교회를 안 나와서 연락해 보니까 아이를 낳았어요. 요즘은 아이랑 주일에 나와요.
아들이 나왔는데 아빠랑 얼굴이 똑같아요. 그런데 아이를 아빠랑 똑같이 장발을 해 놨어요. 장발에 아이가 유모차에 누워 있는데 너무 사랑스러워요.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거예요. 여러분 인생이 예술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예술가적인 사람들은 예술가적인 삶을 인정해 줘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가 볼 때 ‘저런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와?’ 하는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너희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러니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했겠어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잖아요. 교회여, 복음의 본질로 돌아올지어다.
한 영혼을 살릴 수만 있다면 교회에 어떤 것도 바꿀 수 있는 교회. 이제 생각해 보다가, 저를 따라 해 보세요.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조금 더 세게 이야기하면 교회는 병원의 응급실과 같은 것이고, 중증외상센터 같은 거예요.
여러분 중증외상센터 아시잖아요. 이국종 교수님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했던 것처럼, 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최고의 의료진을 투입하고, 최고의 의료 기기와 시설을 투자하고, 비싼 헬기까지 동원해서 한 생명을 살려내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일을 하는 병원은 이것을 가지고 재정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어요? 없어요. 엄청난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이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도 의료인으로 이 일을 한다면 적어도 의료인의 최고의 사명은 생명을 살리는 거잖아요.
교회는 병원과 같은데 병원에서 환자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병원입니까? 병원에서 의사들이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친절하게 만나고 있어요. 그런데 완치된 멀쩡한 사람들하고 앉아서 차 마시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노닥거리고 있어요. 환자들은 병원 문 밖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아무도 안 받아 줘요. 병원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해요. 그런데 병원이 잘 돌아가고 있대요. 왜냐하면 완치된 사람들이 병실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병원비를 내고 있기 때문에 병원 운영이 잘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제대로 된 병원이에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모든 불편한 변화를 감수하고,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겠는가? 교회를 살리기 위해 세상의 비판도 감수하고 교회 내부의 반대도 감수하고 이것을 뚫고 나가겠는가?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 갑자기 이런 문제의식, 자성의 소리를 이야기해 보세요. 교회에서 좋아할까요? 좋아하지 않아요. 바뀌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아이들이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합니다.
세상도 싫어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적인 때가 없었잖아요. 그런 교회를 자꾸 늘려 나간다? 세상도 좋아하지 않아요. 교회 내부도 좋아하지 않아요. 요즘은 교회 건축도 싫어하는데 교회 개척을 한다, 아니 내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것도 싫어하는 교회가 교회 개척을 30개, 300개 한다고 해 보세요.
여러분은 여기 왜 앉아 있는지 저는 사실 약간 이해가 안 되긴 해요. 한 영혼을 살려낼 수 없다면, 복음의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변질되어 있는 겁니다. 본질을 붙잡아야만 변질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환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이지 완치자들을 위한 휴게지가 아닙니다.
완치된 사람들이 병원에 남아 있고 싶으면 환자들을 위해서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봉사하든지, 간호조무사를 하든지, 행정 직원을 하든지, 뭐라도 하셔야 되는 거예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교회 모든 사람들이 합력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건강해진 성도는 전도를 통해 또 다른 성도를 낳게 되어 있고, 건강해진 교회는 개척을 통해 또 다른 교회를 낳게 되어 있어요. 생명은 생명을 낳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감리교회에서 장로교회로 건너와서 온누리교회에 26년 있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온누리교회를 세우셨는데, 하 목사님을 볼 때마다 좀 어메이징한 것은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나면 다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었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듣는데 다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느덧 제가 29년 목회를 하게 됐고, 저도 메시지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해 주세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 첫 번째는 복음은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다수에게 말해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거죠.
두 번째는 제가 복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죽은 아이처럼 태어나서 죽음만 묵상하고 자살 충동에 시달리면서 살았거든요. 그런 저를 하나님이 복음으로 살려내셨어요. 할렐루야. 그래서 저를 살려내실 수 있다면 누구도 살려내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한 영혼에 대한 마음입니다. 모르겠어요. 그것은 사람의 개인적 성향도 있겠지만, 제가 뭔가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하여튼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등부 전도사를 할 때 처음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가 중등 2부를 담당하게 된 전도사입니다” 하고 소개를 하는데, 제가 너무 샤이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는 성격이니까 첫날 인사부터 버벅거린 거예요. 어버버버 하면서 자기소개를 하니까 제가 저를 뭐라고 소개하는지도 모르게 소개한 거예요. 그런데 앞에 있던 제일 고참 여자 집사님이 “전도사가 말도 못 하네” 하셨어요. 선생님들이 한 40명 앉아 있었는데 “전도사가 말도 못 하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속으로 “저도 압니다” 했죠. 그런 전도사로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어머님이 저에게 연락을 하셨어요. “아들이 요즘 교회를 안 다닙니다.” “그러세요? 어떻게 그렇게 됐나요? 주일날 한번 찾아오세요.” 주일날 만났더니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선생님한테 “우리 아이가 주일날 안 나옵니다. 선생님, 전화 좀 한번 해 주세요” 했대요. 그러면 담임 선생님이 전화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전화를 안 한 거예요. 또 이야기했어요. “우리 아이가 교회를 안 나가는데 전화 좀 한번 해 주세요.” 또 안 하는 거예요.
그 어머님이 중등부 예배까지 와서 선생님을 만나 “저희 아이한테 전화 좀 한번 해 주세요” 했는데도 전화를 안 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이가 교회를 안 나온 지 6개월이 되어서 그 엄마가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제가 파트 전도사 때인데요. 여러분, 성도님들이 뭔가 어려움을 교회에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이야기하시거든요. 6개월 만에 저한테 이야기하신 거예요.
상황을 알고 보니까, 이것도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이 아이가 소아 우울증이 생겨서 중학생인데 손에 다한증이 있는 거예요. 손에 진짜 물이 흐르듯 땀이 나오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다가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화장실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이 녀석이 예배 시간에 무슨 딴짓을 하려고 화장실을 가나” 하고 몰래 따라간 거예요. 아이가 자기 손에 땀이 나는 것을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부끄러워서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는데, 선생님이 건너편 칸에서 그것을 본 거예요. 아이가 충격을 받았어요.
교회를 더 이상 안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어머님이 “저희 아이를 좀 만나 주십시오” 하셨어요. 저는 주중에는 신학교 다닐 때였는데, 찌그러진 프라이드를 끌고 과천까지 갔습니다. 아이를 만났는데, 그 집에 들어가고 나서야 상황을 알게 됐어요.
6개월 동안 아이가 낮밤이 바뀌고, 교회만 안 가는 게 아니라 학교도 안 갔고, 밤새 리니지 게임, 사람 죽이는 게임이죠. 밤새 리니지 게임을 하고 낮에는 자고, 자기 문밖에도 6개월 동안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아 우울증에 자폐까지 온 거예요. 아이가 얼마나 앉아서 게임만 하고 있는지, 밥을 넣어 주면 밥만 먹고 빈 그릇만 내놓는 거예요. 그쪽 방에서 감옥처럼 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이 옆에 앉았습니다. 아이가 엄청나게 덩치가 컸어요. 그런데 아이가 그렇게 앉아 6개월 동안 살았더니 혈액 순환이 안 돼서 발톱이 썩기 시작했어요.
엄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제발 우리 아이를 도와주세요.” 이 심정이 어떻겠어요? 제가 앉아서 옆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어른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뭔가 중독에 빠지면 거기에 완전히 빠져 있잖아요. 이 아이는 게임의 세계, 사이버 세계에 완전히 빠져 있는 아이예요. 제가 옆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저를 안 쳐다보더라고요. 두 시간 동안 한 번은 쳐다볼 만하잖아요. 제가 이상한 소리도 했을 텐데 한 번을 안 쳐다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제 집이 잠실이고 가야 될 시간이 됐고 밤 9시가 됐으니까 오늘은 가야 될 것 같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게임이 끊어지는 거예요. 아이가 게임을 하면서도 손에 끊임없이 땀이 나니까 마우스를 움직일 때 티슈를 서너 장씩 뽑아서 닦고, 또 10분 있으면 서너 장을 뽑고, 계속 손을 닦고 있었습니다.
게임이 끊어지니까 아이가 막 욕을 하고 성질을 내더니, 다른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들어가더라고요. 거기에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치는 것을 보니까 “Beowulf”를 쓰는 거예요. 제가 영문학 전공자 아닙니까? 베오울프는 6세기에 나오는 굉장히 중요한 등장인물인데, 고대의 전사 중에서 용을 칼로 때려잡은 용사들은 많아도 맨손으로 잡은 건 베오울프가 유일하거든요. 할렐루야. 공부를 좀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너가 어떻게 베오울프를 아니? 나는 학교에서 베오울프를 원작으로 배웠어” 했습니다. 그때 아이가 저를 딱 쳐다보더니 “전도사님, 어떻게 베오울프를 아세요?” 했습니다. “내가 다음 주에 책 원본을 보여 줄 수 있어. 넌 어떻게 베오울프를 알게 됐니?” “게임 잡지에서 봤어요.” 그 친구 녀석이 자기 아이디를 하나 가져갔는데, 자기가 게임하고 있는데 끊고 들어오니까 욕을 하면서 다른 아이디로 들어온 거예요.
그때 제가 베오울프 이야기를 하고, 베오울프를 신나게 설명해 주면서 “베오울프가 얼마나 놀라운 용사인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저를 우러러보더라고요. 시간이 너무 오래됐으니까 “내가 다음 주에 그 작품을 보여 줄게” 하고 문지방을 건너 나오는데, 아이가 일어나서 따라 나왔습니다.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2층이었거든요. 아이가 슬리퍼를 신고 문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아파트 앞에 제가 주차한 차에 탈 때까지 등치가 산만한 아이가 따라 나오는 겁니다.
그 어머니가 뒤에 따라 나오면서 “전도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한 열 번은 하신 것 같아요. 그때 엄마의 심정, 엄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알겠는 거예요. “제발 다음 주에도 도와주세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잖아요. 제가 성경 파트 전도사일 뿐이거든요. 그래서 “어머니, 제가 다음 주에도 오겠습니다. 아이와 약속했습니다.” 그다음 주에도 갔고, 그렇게 2년을 그 집에 가게 됐어요.
그 아이를 만나서 한 5주 차부터는 게임을 하다가 저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게임을 중단했습니다. 게임을 중단한다는 것은 게임 중독자에게 기적 같은 일이에요. 게임을 중단하고 창문을 열어 놓고 바닥에 둘이 누웠습니다. 그 조그만 바닥에 둘이 누우면 끝이에요. 창밖에 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면서 아이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7주 만에 제가 아이에게 “요즘 재미있는 영화 많은데 이 게임 스토리를 영화로 만든 것도 있어” 했습니다. 아이가 학교를 안 다니고 문밖에도 안 나가는 이유가 동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봐, 자기 반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 봐였어요. 그래서 집 앞 문을 나오자마자 차를 대고,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을 학교 시간 이전에, 낮 12시나 1시에 찾아가서 아이를 몰래 제 차에 태워 근처 극장을 갔습니다.
극장에 주차해 놓고 아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타면 아이가 불안해서 벌벌 떨었습니다.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엄청 큰 아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 어떻게 보실지 모르지만 저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조용한데 아이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막 웃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 신경 쓰지 말라는 거죠. 그리고 아이가 영화를 보고 밥을 함께 먹고 집에 오고, 그것을 매주 한 거예요.
아이와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3주째가 되니까 어머님이 저한테 봉투에 영화값과 식사비를 넣어 주시더라고요. 제가 한 주를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썼어요. 그런데 제가 또 여러 가지에 좀 까칠하고 민감한 사람이거든요. 제가 어머님께 “어머님, 저도 밥 먹고 저도 영화 보는 건데 괜찮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했습니다. 그 집이 굉장히 어려운 집이었어요.
2년 동안 아이와 영화를 보고, 아이는 그때마다 신나는 거예요. 같이 앉아서 오락실에서 게임도 하고, 그때가 일주일에 한 번 집을 탈출하는 날인 거예요. 그러다가 아이가 1년 반 만에 학교를 다시 나갔어요. 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를 나갔는데 공부를 할 수 없는 거예요. 10분에 한 번씩 티슈를 몇 장씩 뽑아야 될 정도니까 연필이 안 쥐어져요. 손이 너무 미끄러워서 연필이 안 쥐어져요. 결국 학교를 나왔다가 학교를 포기했습니다. 여러분,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가운데 있어요.
여러분, 한 영혼에 대해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제가 성경 통독을 하면서 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이렇게 질문받고 있을까? 제가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고 더 이상 할 기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보라통 사역을 맨 처음 시작할 때에는 1천 명이 수강하고 1,500명이 수강해도 매주 쏟아지는 질문을 A4 60장씩 써서 답변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왜 구원이신지 이야기해 주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을 변증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그 한 영혼을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은 마음. 제가 보라통도 Q&A를 하는 이유입니다. 변증을 하는 이유입니다. 변증을 해서 한 명이라도 살려낼 수 있다면요.
2년 전에 저희가 성신여대에 있을 때 어머님이 갑자기 “우리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던 고1 딸이 미션스쿨도 다니고 있는데 교회를 안 다니겠답니다” 하셨습니다. “잘 이야기하셨어요. 빨리 데려오세요.” 그래서 앉아서 이야기를 해 봤어요. “너 왜 갑자기 그러니?” “무신론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요. 제가 무신론도 좀 공부해 보려고요. 일단 교회를 안 다니고 무신론에 대해서 공부해 보려고요.” “그래, 그럼 너 성경은 일독은 해 봤니?” “아니요.” “넌 이것도 모르면서 저것을 공부하겠다고?”
아이에게 무신론에 대해서 기본적인 설명을 해 줬어요. 아이가 20분 대화하고 다시 교회를 나가기로 결심했어요. 너무 감사하잖아요. 이 아이를 안 데려왔으면 큰일 나는 거잖아요. 인생이 몇십 년을 돌아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거잖아요.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정말 할머니도 너무 기특해하고 엄마도 기특해했던, 그 집안의 다니엘과 같은 아이가 무신론자가 된 거예요. 초등학교 5학년짜리. 그래서 빨리 아이를 데려오시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앉았는데요. 저는 보통 10대 청소년이나 20대, 30대 청년 무신론자를 만났지 초등학교 5학년 무신론자는 처음 만났거든요. 그런데 앉아 있는 자세가 똑같아요. 엄청 시니컬합니다. 그러고 앉아서 저를 째려보는데, 이 아이가 뭘 안다고 무신론자겠어요? 어른들이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쳐 놓는 거예요. 무신론이 왜 틀렸는지 성경을 이야기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아이가 그날 무신론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세가 똑바로지고 얼굴이 건강해졌습니다. 결국 이것은 영적인 문제잖아요.
제가 성도님 심방에 있다가 카페에서 그 아들을 만났는데, 이 아들이 30대에 사업하다가 사업도 어려워지고 냉담에 빠져서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까?” 하더라고요. 그날 일정도 다 캔슬하고 정말 세상에서 가장 공격적인 질문을 세 시간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그것을 다 답변해 주고 있는 저를 보면서 저도 놀랐습니다. “내가 이걸 다 답변할 수 있구나.” 그 아이가 그날 냉담에서 벗어나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한 영혼을 살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헌신을 하겠는가? 여러분 목회자들에게 성경 여기저기 질문하잖아요. 사실 우리도 성경을 다 알지 못하거든요. 자꾸 질문하면 그냥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목회자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 있어요. 한 영혼을 살릴 수만 있으면 뭐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팬데믹 3년 기간에 사람들이 다 우울증에 걸리고 목사님들도 우울증에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기간에 제가 세 가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첫 번째는 요리이고, 두 번째는 보라통 책을 집필하게 됐고, 시간이 많으니까요. 세 번째는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양재에 있을 때는 몇천 명씩 메시지를 전했지만, 팬데믹 때는 4인 제한, 6인 제한이잖아요. 사람들을 집단으로 만날 수 없잖아요. 그런데 4인 제한, 6인 제한이라고 저를 초대해 주잖아요. 네 명만 만나라, 여섯 명만 만나라. 그래서 네 명 만나서 전도하고, 여섯 명 만나서 전도하고, 그분들이 지금 저희 교회 성도들이 됐어요.
우리 안에 정말 한 영혼을 살려내겠다는 복음의 열정이 있는가?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든 변화될 수 있다는 것. 할렐루야.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조울증에 걸린 사람도, 불안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도, 샤머니즘에 빠진 사람도,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도, 육신의 질병과 가정의 원가정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교회 본질입니다. 교회 본질은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들, 제가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 있을 때도 설교론에 대해서 가르치면 목회자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하겠습니까?”입니다. 물론 언변에 능력 있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나 제가 여러 도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알게 된 것이 있어요. 한 영혼에 대한 눈물이 있는 목자는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밖에 나가서 뷔페 음식 먹어 보세요. 속이 부대낄 뿐이고, 집에서 엄마가 사랑과 정성으로 끓여 주는 된장찌개가 나이가 들어도 그리운 거예요. 오래전에 작고하신 저희 어머님이 정말 정성으로 끓여 주신 그 된장찌개가 아직도 너무너무 그립습니다. 목회자들이 설교를 잘하고 싶다고요? 한 영혼에 대한 눈물과 헌신이 있는가? 설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가야 되는 거잖아요. 영혼을 살려야 되는 거잖아요.
성도들이 교회를 살려내고 싶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싶다고요? 제가 아까도 선택의 대가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님이 잘 안 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사님만 변하면 될까요? 리더들도 원하지 않는다니까요. 교회가 변하는 것을요. 여러분이 모든 어려움과 모든 변화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우리 교회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을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내가 생명을 얻게 됐는데, 나 같은 사람이 건짐을 받은 것만도 기적인데, 영원히 천국에서 나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면 하나님의 사랑은 다 헤아릴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 누리면서도 그 사랑이 흘러가지 않는, 너무나 이상한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고 우리의 공동체가 병들어 있습니다.
주님, 사랑이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도들의 마음에, 목회자들의 마음에 한 영혼을 향한 눈물과 헌신과 희생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그것이 고생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특권이 되고,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이 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의의 감격이 되는 교회들로 거듭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주여, 주여. 아버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 주님의 마음을 부어 주셔서 주님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의 길을 가게 하시고, 십자가 사랑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2026.06.05(금) | 예배교회컨퍼런스(김관성) | 개척과 성장, 그 핵심 동력은 (삼하 9:1-10)
개척과 성장, 그 핵심 동력은 (사무엘하 9장 1-10절)
- 제목: 개척과 성장, 그 핵심 동력은
- 본문: 사무엘하 9장 1-10절
- 설교자: 김관성 목사
- 날짜: 2026-06-05
- 예배: 컨퍼런스
설교 요약
1. 다윗의 질문은 숙청이 아니라 은총을 향해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새 왕이 이전 왕가의 생존자를 찾는 것은 대개 숙청을 뜻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아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은총을 베풀고자 했다. 사무엘하 9장은 단순히 다윗의 선함이나 므비보셋의 회복만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묻는 본문으로 제시된다.
2. 시바와 마길은 서로 다른 신앙의 방향을 보여 준다
설교자는 사무엘하 9장부터 17장까지의 흐름에서 시바와 마길이 대조된다고 설명한다. 시바는 사울에게서 은혜를 입고도 위험 앞에서 므비보셋을 보호하지 않고 정보를 제공하는 인물로 읽힌다. 반면 암미엘의 아들 마길은 아무 유익이 없어 보이는 므비보셋을 집에 품고, 훗날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하는 다윗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3. 하나님의 역사는 이름 없이 생명을 붙드는 사람들을 통해 이어진다
마길은 성경에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지키고 보호한다. 그는 므비보셋처럼 소망 없어 보이는 사람과, 권력을 잃고 도망자가 된 다윗 곁에 선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다윗 같은 중심 인물뿐 아니라 그 사명의 길을 끝까지 붙들어 준 이름 없는 사람들을 기억하신다고 강조한다.
4. 교회의 능력은 방법론보다 함께 살고 책임지는 사랑에서 나온다
오늘의 교회가 능력을 잃은 이유는 프로그램이나 방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신앙적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설교자는 진단한다. 주일 출석이 종교적 관성이나 출석 확인으로 축소될 때, 교회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 교회 개척과 성장은 목회자의 실력 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결단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5. 목회자의 상처와 실패도 소망 없는 사람을 품는 통로가 되었다
김관성 목사는 자신의 역기능 가정, 어린 시절의 상처, 목회 실패와 가난의 경험을 숨기지 않고 나눈다. 그는 오랜 시간 열매 없는 목회와 가정의 고통을 지나며, 자신이 왜 목사로 부름받았는지 다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과정은 선재와 같은 소망 없어 보이는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는 목회자로 빚어지는 시간이었고, 교회가 한 사람의 삶을 실제로 책임지는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6.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소명이 교회를 낳게 했다
행신교회가 성장한 뒤에도 설교자는 분립 개척을 두고 기도하다가,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소명은 하향성의 삶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붙들었다. 그는 담임목사직을 후임에게 맡기고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낮은담교회를 개척했다. 이 선택은 상향적 성공을 붙드는 방식이 아니라, 교회가 다시 교회를 낳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제시된다.
결론
하나님은 암미엘의 아들 마길처럼 한 영혼을 향해 속 다하고, 서로의 삶을 함께 짊어지며,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결단하는 교회 위에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1516교회도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과 섬김으로 세워져야 한다. 복음의 본질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며, 그 사랑이 가정과 지체와 한국 교회 가운데 다시 흘러가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아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그러나 담대하라 우리가 세상을 주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역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로 끝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소망을 품고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나누겠습니다. 사무엘하 9장 1절에서 10절의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되,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아멘.
아멘.
네. 아, 오늘 저녁 메인 집회인데요. 저희가 어, 오늘 세 번의 집회, 내일 세 번의 집회인데요. 오늘 저녁 메인 집회를 어,이 본문의 말씀으로 개척과 성장 그 핵심 동력은이라는 질문으로 말씀 전해 주실 목사님은 일산의 행신교회를 어 7년간 목회하시면서 보흥시키시고 그리고 오늘 이제 자세한 말씀을 들어 보니까 목사님을 개척 그 내보내려고 했는데 그때 팬데믹이 터져서 어이 상황에서 개척을 내보내면 이제 당연히 어려워지니까이 목사님 고민을 하시다가네 그 부목사님을 행신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세워 놓고 그냥 내가 개척을 나가야겠다는 합니다. 그래서 그 고향 울산으로 가셔서 낮은담교회를 개척하셨더라고요. 그때 낮은담교회 개척이 저희 교회 변에 저희가 저희랑 나이가 같습니다. 네. 어 목사님께서 정말 그 바쁜 많은 일정 가운데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러 오셨는데요. 목사님 나오실 때 어 환영의 박수로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에 반갑습니다. 울산에서 왔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 이렇게 수도권에 올라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된다고 하니깐 장이 많이 됩니다. 왜냐니깐 서울 말 써야 되니까 여러분들이 저의이 뭐 인터네이션이나 이런 거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처음에는 서울마을 이렇게 잘 씁니다. 제가 그 비웃지 마십시오. 근데 이렇게 이제 설교를 전개하다 보면 후간에 가서 이제가 막 나오면 서울 사람들 폰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 우리 1516 교회 가 빨라듣지 못하는 나올 때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고 말씀 전하는 저도 은혜받고 우리 모든 1516 모든 가족들이 은혜받는 또 도전을 받는 그런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저는 오늘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제가 개척하고 또 성경을 경험했던 저의 목회의 여정과 소리를 여러분들하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데 오늘이 본문 말씀은 사무엘하 9장 1절에서 10절 말씀인데 고대 사회에서는 왕권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면 새로운 왕권을 잡은 그 왕은 직전 정권에 소속되 있었던 왕과 그의 가족들은 기본적으로 숙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문법이었습니다. 왜냐 살려두게 되면 새로 출범한이 정권과 왕권을 흔들 수 있는 는 씨앗이 된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이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문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사울 왕과 사울왕의 아들이었던 요나단은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다가 장렬하게 같은 장소에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리고이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 드디어 다윗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그 고대사회의 의 삶의 문법들을 마음에 잘 담은 채 1절 상반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조금 전에 여러분들에게 설명드렸던 고대 사회의 배경 그 렌즈를 가지고이 질문을 읽을 때 여러분들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십니까? 사울의 집안에 아직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라면 내가 그의 목을 치겠다.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다윗이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이유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다윗은 요나단은 지금 축고 없지만 요나단 살아생전 자기와 맺었던 그 약속을 신실하게 기억하여 사울의 집안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있다라면 내가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는이 이유 때문에 사울의 집안에 누가 어디서 어떤 삶의 조건 가운데 살고 있는지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느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왕의이 질문 앞에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우리 2절 말씀은 소리 내서 한번 다 같이 읽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내가 시바냐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다 하니라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라고 하는 인물이 다윗 앞에 나옵니다. 네가 시바냐 당신의 종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시바가 답을 하고 있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는이 한 문장을 여러분들 딱 읽었을 때이 사람의 됨와 인격이 어느 정도 여러분들 마음에 느껴지십니까? 아니 느껴지면 느껴진다. 안 느껴지면 안 느껴진다. 당신의 종인이라 할 때이 사람의 됨이와 인격이 좀 느껴지십니까?
네. 느껴지기 뭐가 느껴져요? 그게 아무 정보가 없는데. 근데 저는 오늘이 본문을 장악하고 있는 설교자로서 그리고 앞뒤 배경과 스토리를 다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왠지 시바의이 답은 썩 좋은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면 고대 사회에 종이나 신하에게 요구되어지는 최고의 인격적인 덕목은 불사이군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의 주군을 충성하고 섬기는 것. 그런데 왠지이 시바는 사울이 살았을 때는 사울에게 들러붙어서 그의 힘과 영향력을 통하여 자기의 삶을 안정적으로 꾸리고 그가 떠나고 난 다음이이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는 다윗에게 붙어서 또 자기의 삶을 안정적으로 꾸려가려고 하는 좋게 말하면 생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고 좀 나쁘게 보자면 우리 경상도 버전으로 하자면 얍삽 인간처럼 보입니다. 어쨌든이 정보를 알고 있었던 시바에게 다윗이 3절과 4절에서 거의 똑같은 질문을 연속해서 조금 내용만 다르게 묻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에 아직도 살아남은 자가 없 이렇게 묻고 있고 4절에서는 그가 어디서 어떤 삶의 조건 가운데 살고 있느냐이 두 가지 질문을 연속해서 시바에게 던집니다.이 왕의 질문 앞에 시바가 답을 하고 있는 내용이 3절과 4절인데 우리가 3절과 4절 같이 읽을 텐데 1516교회 가족 여러분들에게 숙제 하나만 좀 내 드리겠습니다. 4절 말씀을 읽으실 때 집중해서 읽는데도 불구하고 의미 파이 어려운 단어가 하나 나올 거예요.
그 단어를 찾아보시면서 우리 3절과 4절 말씀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달리 저는 자니이다. 하리라.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시는 다에게 왕이시요.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이 첫 번째 정보를 제공하면서 그러나 그는 다리를 저는 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모가 난리통 갓난아이었던 므비보셋을 땅에 떨어뜨려서 갓난아이 시절부터 양쪽 다리를 다쳐는 중증 장애인으로 한평생 살아온 인물이 므비보셋입니다.이 므비보셋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이 정보를 먼저 제공합니다. 그리고이 므비보셋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 정보를 제공하는데 조금 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내드렸던 숙제 있죠? 여러분들 4절 말씀을 딱 읽을 때 집중해서 읽는데도 불구하고 의미 파악하기 어려운 단어가 하나 있죠. 그게 뭡니까? 아니 읽으시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4절에 그 단어가 뭐죠?
지금 여러분들 입 모양을 보니 군실렁거리는 거 보니까 두 개가 나옵니다. 어떤 분은 로드발, 어떤 분은 암미엘. 근데 여러분 암미엘은 사람 이름입니다. 아무 뜻이 없습니다. 안은 암미엘입니다. 정답은 로드발이에요. 로드발을 여러분들이 알기가 어려운 이유는 뭔가 하면 히브리어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제대로 읽으려면 로드발 이렇게 읽습니다.로는 히브리어 부정 적두어예요. 뭐뭐가 아닌 뭐뭐가 없는 이런 뜻이에요. 여러분들 호세아서를 읽으면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이 뭐로 시작합니까? 로암미. 뭐뭐가 아닌 뭐뭐가 없는 똑같은 단어예요. 다바르는 무슨 뜻인가면 목초지라는 뜻이에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목초지가 없는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그 삶을 살고 있었더라.이 배경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단어가 로드발입니다. 이걸 우리 한국 사람 정서에 좀 맞게 번역을 하자면 달동네, 산동네 이런 정도의 뉘앙스가 로드발 안에 담긴 정확한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이런 척박한 동네에서도 자기 두 다리를 뻗어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이 므비보셋에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얹혀서 죽지 못해 꾸역꾸역 반역자 집안에 정통 후계라고 하는 신분을 안고 양쪽 다리를 다저는 중증 장애인으로 죽지 못해 살고 있었던 인물이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이 므비보셋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깐 다윗이 이야기를 듣고 그 므비보셋을 예루살렘에서 나 앞으로 지금 당장 데리고 오라 명령을 내립니다. 성경은 다윗의 종과 신하들이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들어닥쳐서 그곳에 숨 죽여 살고 있는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근데 우리의 상상력을 조그만 동원을 하자면 그 장면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다윗의 종과 신하들이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들어닥쳐서 그곳에 숨 죽여 살고 있는 므비보셋을 향하여 왕께서 너를 예루살렘성 왕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셨다. 왕의 명령을 받들어라 했을 때 므비보셋이 일차적으로 느꼈을 감정이 뭐였을까요? 한많고 서러운 인생 오늘 여기서 끝나는 거. 분명히 므비보셋은 그런 짐정으로 다윗 앞에 있었을까? 그 다윗 앞에선비보셋을 향하여 다윗이 오늘부터이 므비보셋은 나와 같은 상에서 먹고 마시리라 선포합니다. 여러분 고대 사회에서 왕과 같은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사람의 신부은 어떻게 됩니까? 왕자님하고 공주님이죠. 흙수저 중에 흙수저였던 므비보셋의 신분이 하루 아침에 금수저 중에 금수저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므비보셋에게 사울에께 속하였던 모든 밭을 되돌려 줍니다. 여러분 직전 왕이었던 사울 왕에게 소속되 있었던 땅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므비보셋에게 되돌려주 알고 끌려왔는데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은총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므비보셋이 8절에이 절한 고백을 토해 놓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8절 말씀 한 목소리로 한번 읽어 보실까요? 시작. 그가 절하여 이르되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왕이시여,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에게 어떻게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나이까 하는 이런 고백입니다.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약 34년 전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조금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34년 전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뭐 되게 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제가 신학대학을 입학 신학대학을 입학을 하니까 신학교 1학년 때 입학하자마자 읽은 책이 미국의 유명한 강해설 교장인 찰스 스윈돌의 은혜의 각성이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사무엘하 9장을 가지고 강해 설교해 놓은 책인데 다윗의 포지션에 하나님을 대입을 하고 므비보셋의 포지션에 우리를 대입하는 겁니다. 그 므비보셋이 지금 하고 있는이 고백 왕이시여 어찌하여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는이 고백은 우리가 한량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쏟아보신 하나님 앞에 토해 놓아야 할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므비보셋에게 아무 조건 없이이 은혜와 은총을 쏟아붙는 다윗은 하나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쉽게 말해서 찰스 스윈돌은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입을 해서 굉장히 은혜스러운 구속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저는 그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게 설교다. 신학교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에서 우리 고향교회 목사님 설교 들으면 뭐 이런 표현이 좀 죄송합니다만은 그때 우리 목사님들은 우리 시대보다는 배움이 좀 짧았기 때문에 주로 설교 내용이 어떤 본문을 펴더라도 모여라 돈 내라 집짓자 그러다가 좀 흥분하시면 전도하자 어떤 본문을 펼쳐도 말씀이 이렇게 치환되어지던 시절이었는데 찰스 스윈돌이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풀어 가지고 그 책에 기록해 있는 내용을 보면서 나도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돼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죠. 그리고 신학 수련을 하고 매주 하나님 말씀을 준비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30년 넘는 세월이 흘러 버렸습니다. 어느덧 저는 찰스 스윈돌이 9장을 해석하는 이런 식의 설교에 동의하지 않는 목사가 그랬습니다. 스윈돌이 이런 식의 설교를이 본문을 통하여 하는 것은 틀렸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는데 찰스 스윈돌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하 9장에서 17장까지 읽어 보면요.이 단락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다윗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무엘하 9장에서부터 17장까지는 두 사람의 인물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 누구와 누구입니까? 다윗에게 므비보셋이 어디서 살고 있었는지 그 정보를 제공했던 시바와. 아무 조건 없이 자기 집에 므비보셋을 거두어 함께 살았던 암미엘의 아들 마길. 시바와 마길.이 두 사람의 모습을 사무엘하 기자는 9장에서부터 17장까지 계속해서 비교하고 대조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될지 그 결단을 을 촉구하고 있는 단락이 그 초입이 사무엘하 9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10절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까? 10절 말씀 다 볼 필요가 없고 맨 마지막에 보시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시바는 아들이 15명이요 종이 20명이라. 여러분 고대 사회에서 종들의 수라든지 자녀들의 수는 전부 다 재산으로 카운트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왜냐? 다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여러분 감안하시고 우리 기로교회 가족들의 센스를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시하는 아들이 15명이요 종이 20명이라 약간 경제적인 측면에서이 한 문장을 세 글자로 바꾸면 여러분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한 번 더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시바는 아들이 15명이요 종이 20명이라 약간 경제적인 측면에서이 한 문장을 세 글자로 바꾼다면 금수저
금수저이 정도가 금수저는 아니에요.이 금수저 내려면 조금 멀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이러면 꼭해서 언수죠 이러고 그건 아니죠. 그거 말고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으로 하자면
중산층 중산층 딱 중산층입니다. 근데 여러분 성경을 입체적으로 잘 독해하고 읽으려면 영어로 하자면 between the lines 행간을 잘 독해를 해야 되는데 여러분 시바가 이런 중산층으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은혜와 은총 덕분입니까?
사울이죠. 사울의 은혜와 은총 덕분에 이런 중산층으로서 스스로 자기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는 살 수 있었던 존재 그 은혜와 은총을 입었던 시바인데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누가 아직도 살아 있으며 그가 어디에서 살고 있느냐는이 질문은 고대 사회의 삶의 문법 대로 하자면 발각되어지는 그 사람은 목이 날아간다는 것을 시바도 다 알고 있었단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는 모든 정보를 낱낱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2절 읽을 때 당신의 종인이라 할 때 인간 뭔가 좀 얍삽한 인간이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주저함이 없이 사울의 은혜와 은총을 입었던 그 사람이 붙잡히면 목이 날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므비보셋의 모든 정보를 다윗에게 제공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와 반면에 암미엘의 아들 마길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자기 집에 므비보셋을 거두어 함께 산 정도가 아니라 고대 사회의 삶의 문법대로 하자면 므비보셋을 거두어 함께 사는이 모습이 발박되어졌을 때 자기 목도 날아갈 수 있는이 위험을 감소하면서까지 므비보셋의 목숨을 보호하고 지켰던 인물이
바로 마길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무엘하 9장은 시바와 마길이라고 하는 두 인물의 모습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너무나 선명하게 두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시간 이후로 성경이 어떻게 전개되어지는가 하면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아버지를 향하여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여러분 신에게 쿠데타 당해도 정신이 나가고 영혼히 나가는 판인데 아들에게 쿠데타를 당한 다윗의 심정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몸도 마음도 다 지쳐 버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으로 다윗의 삶이 흘러갔을 거예요. 근데 처음에 압살롬의 쿠데타는 별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윗의 천재 책사였던 아이도벨이 무슨 이유에 있는지는 몰라도 압살롬의 쿠데타에 가담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왜 이렇게 똑똑하고 천재였던 아이도벨이 압살롬의 쿠데타에 가담했을까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 성경을 읽고 읽다 보니까 우리의 안에 바세바의 할아버지가 아이도벨이에요. 아마도 아이도벨은 우리와 우리아의 아내 바세바와 다윗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던 그 일로 인하여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나 신뢰가 무너졌고 다윗을 향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한 차원에서 압살롬의 쿠데타에 가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아이도벨이 작전을 구사하는 수준과 능력이 어느 정도 마치 하나님께 물어 그 지혜를 얻어 작전을 펼치는 이런 수준의 책략을 구사하는 사람이 아이도벨인데이 아이도벨이 압살롬의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압살롬의 쿠데타는 힘을 받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도 왕궁을 차지하고 있었던 다윗인데 결국은 압살롬의 쿠데타 세력이 성장하고 자라나는 바람에 압살롬의 쿠데타 세력에게 왕궁을 내주고 자기를 따르는 참모들 병사들 이끌고 다윗은 왕궁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떠돌며 도망다니며 동시에 아들과 목숨을 싸움을 펼치는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 다윗의 삶이 내 몰립니다. 마음도 지치고 몸도지 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곤고한 심령의 상태였겠습니까? 이렇게 지쳐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하여 한 인물이 다윗을 향하여 나타납니다. 근데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인물이 다윗을 돕기 위해 나타납니다. 여러분들 성경 다들 가지셨죠? 여러분들 우리 사무엘하 16장으로 잠깐 한만 가보십시다. 사무엘하 16장 1절과 2절 말씀 여러분 한번 읽어보 사무엘 16장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우리 한 목소리로 1절과 2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시바가 안장지운 두나귀에 떡 200개와 건포도 백송이와 여름과일 100개와 포도주 포대로 가져오매 왕이 시바에게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이은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이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러분,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시바가이 많은 음식들을 가지고 몸도 지쳐 마음도 지쳐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해 나타납니다. 근데 여러분 다윗은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노회한 사람이잖아요.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인상을 보면이 존재가 어떤 인간인가를 어느 정도 그 자리에서 파악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윗이 뭐 꼭 다윗만 그런게 아니라 저도 올해 54시인데이 정도 살면서 목회하다 보니까 앉아서 한 5분만 대화를 해 보니깐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저절로 알게 됐어요. 오늘 이상 목사님하고 앉아서 밥을 먹다 보니까 이분이 담임 목사구나. 바로 제가 알겠어. 저는 요즘 TV 공중파를 보면 우려스러운게 요즘 점쟁이들이 TV에 나와서 이거 요랑을 흔들고 누가 누가 잘 맞추나 이런 프로그램까지 텔레비에 이렇게 나오는데 여러분 이거 좀 심각한 일 아닙니까? 그리스도인들 의식에 이런게 있는 거 같아요. 저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어떤 사람의 마음과 미래를 알아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귀신의 능력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알아맞춘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여러분 그런 거 없습니다.
점쟁이들은요. 그냥 찍는 겁니다. 점쟁이들이 보통 어떻게 찍습니까? 이런 거 아닙니까? 어릴 때 집에 우물이 있었지 합니다. 하면 우리 집에 우물 없었는데요.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야 이게 전생이들이 하는짓이 한 53년도 이거 감각들은 다 여러분 제가 지금 그대로 한번 해 볼까요? 고민이 좀 있어 보입니다. 남편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자녀 때문에 그렇죠. 어쨌든 그 겁니다. 그럴 겁니다. 빠져나갈 공이 다 있고 아무 소리나 그냥 하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걸려들 수밖에 없는 그런 말을 내뱉는 것뿐이죠.이 다윗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잖아. 근데 지금 음식을 가지고 오는 시바를 딱 보니까 음식 가지고 자기를 진심으로 도러 올 인간이 아니라는 것 다윗이 직감적으로 느끼거든, 여러분. 그래서 2절 상반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이게 우리 영도 버전으로 하자면 네가 지금 무슨 꼬로 의도를 가지고이 음식을 가지고 영어로 하자면 히든 모티브, 이 안에 무슨 감추어둔 다른 동기를 가지고이 음식을 가지고 왔느니 왜 제가 영어를 하면 네가 무슨 고약한 의도를 가지고 이것을 가져왔느냐 무습이 그러니까이 시바가요 다윗의이 질문을 딱 잡아 너청스럽게 답을 합니다. 왕이시여 저에게 무슨 히든 모티브가 있고 고약한 의도가 있겠습니까?
아들에게 쿠데타를 당해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 있는 왕에게이 음식들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가져온 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져온이 음식을 왕께서 먹으시고 힘내시기를 원하고 무엇보다도 왕을 수종드는이 젊은 청년들 병사들 제가 가져온이 음식 먹고 힘내서 압살롬의 쿠데타 세력 싸워서 그들을 꺾고 왕께서 다시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 보기 원하여 제가이 음식 가져온 것밖에 없습니다. 기가 막히 말 여러분들이이 교회에서 함께 이상 목사님과 함께 1516교회를 세워 가면서 목사님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그 왜 그런가 하면 목회자가 사람에게 시달리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져 버려. 판단력. 제가 오늘 분당에 왔으니까 울산에 있는 우리 낮은담교회 가족들 뒷담마를 좀 하고 싶은데 저도 막 어지간하면 모든 가족들 사랑하고 품고 살려고 애쓰는 목사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런데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안 되는 인간들이 우리 낮은담교회 세 명이 있습니다. 아버지 다른 교회 가게 하소서. 안 갑니다. 악작같이 안 가요. 어쩔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면 야 저 인간들은 진짜 목사 괴롭히는 걸 달란트로 받아. 사람한테 시달리면 마음이고 영혼이고 막 막 그 한 사람 때문에 목사의 삶이 막 무너져. 이렇게 목사님이 힘들어 할 때 여러분 교회를 세워 가는 목사님이 힘들어 할 때 목사님에게 제일 힘이 되는 사람이 누굽니까? 제가 객관식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1번. 비가 오나 바람이 보나? 눈이 오나 자기 자리를 지키고 목사님과 교회를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사람들이 목사님에게 제일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번, 2번이 있습니다. 그거 솔직히 지쳐 있는 목사님에게 도움 별로 안 됩니다. 그저 목사님 지쳐 있을 때 돈 좀 갖다 들이고 사모님하고 멀리 가서 좀 쉬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그렇게 회복하고 오라고 실질적으로 돕는 사람이 목사님한테 도움이 된다. 2번. 자, 우리 1516교회 가족들의 생 을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에게 제일 도움이 되는 사람이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 2번.
1번은 저의 경험으로 볼 때 하나도 도움이 2번이 도움이 됩니다. 너무 사랑스러워. 여러분 왜 2번이 사랑스러울까요? 이유는 하나. 몸과 마음이 지쳐서 판단력이 흐려져 버린 거. 목사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리를 지키고 교회와 목사님 위해서 기도 하는 사람이죠. 근데 여러분 상처받고 지치고 흔들리면요 돈 갖다 주는 사람에게 목사 마음이 빼앗껴 버리더라고.
인간이 별 사람이 없습니다. 답이 또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딱 봤을 때 네가 무슨 의도로이 음식을 가져왔느냐 그렇게 물었던 사람인데 시바의이 능청스러운 답변 앞에 다윗의 마음은 시바에게 다 빼앗기 시작합니다. 다윗의이 마음. 그런 다음에 다윗의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자리 들기 시작하는 거예. 원래대로 하자면 지금 음식 가지고 나타나야 될 사람 누굽니까?
므비보셋이죠. 근데 므비보셋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3절 말씀에 보면 왕이 이르되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무슨 말입니까? 시바야 다 좋은데 지금 므비보셋은 어디 있느냐 하는이 질문을 시바에게 던집니다. 이때 시바가요이 질문을 딱 잡아 기가 막히게 풀어내 왕이시여 므비보셋은 지금 예루살렘에 남아 원래대로 하자 면이 나라의 왕권은 우리 할아버지 사울의 것. 그다음은 우리 아버지 요나단이이 나라의 왕권을 이어받아야 되고 그다음은 내가 하나님의 순리대로이 나라의 왕권을 이어받아야 되는데 이것이 잘못 고이고 흔들려서 다윗에게로 왕권이 넘어가 버렸는데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치고이 나라의 왕권을 나에게로 되돌리고 있더라. 예루살렘 성에 남아 이렇게 나팔 불고 있나이다. 시바가 다윗에게 거짓 정보를 집어넣. 이미 시바에게 마음이 빼앗껴 버린 다윗은이 거짓 정보를 접하자마자 어떤 결정을 해 버리는가면 여러분 우리 4절 말씀 큰 목소리로 한번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게 하여 주옵소서 하니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너의 것이니라. 여러분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뭡니까?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반. 그거 이제 오늘이 시간 이후로 시바 너의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시바는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 처음 섰을 때 오늘부터이 므비보셋은 나와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고 마시라. 동시에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밭을 므비보셋에게 되돌려 주라. 명령할 그때 그 자리에 시바가 있었어. 그러나 그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게 넘어간다고 속이 두물을 걸었을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이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고 제일 먼저는 다윗의 마음을 훔치고 다윗에게 거짓 정보를로 묵의를 므비보셋에게 넘어갔던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토지를 자기 것으로 가져오는 일에 성공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좀 뜬금없는 말인지는 몰라도 성경은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1.1핵도 틀림없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틀림 없습니다. 목사님 뜬금없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여러분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사람 이름을 짓는 수준을 한번 보시라고. 시바 하는 짓이 심하잖아. 저는 지금 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이름을 발음하고 있을 뿐입니다. 근데 성경이 얼마나 영감 있게 기록됐는가면 인간 이름만 발음하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저절로 깨달아지도록 성경이 기록되 있어. 우리 1516교회 가족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이밤 따뜻하게 시방 한번 발음해 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역시 수도권 발음은 약해요. 여러분이 시간 이후에 다윗의 삶은 절체 절명의 자리로 내몰입니다. 마치 끈떨어진 연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압살롬의 쿠데타은 성공하기 일보 직전으로 가고 다윗은 회복하기 어려운 자리로 삶이 내몰립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하심이 없이는 압살롬의 쿠데타은 성공하고 다윗은 왕의 직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그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되는 상황으로 지닫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고 다윗 편에는 아무도 없는 권력을 손해치지 못한 명시적인 왕의 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일반적인 문법이죠. 그런데 이렇게 끈들어진 연신세가 되어 있는 다윗 편에 끝까지 서서 충성하고 그를 사랑하고 섬기고 그의 편에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니다. 여러분 17장으로 넘어가셔서 우리 한 구절 읽어 보실까요? 27절 말씀 여러분 한번 보시 사무엘하 17장 27절 우리 27절 한 목소리를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이 하나님의 일을 얻을 때 암몬 족속에게 속한 남 사람 나의 아들 소비와 로드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님 길르 사람 바르실 여러분 거기 보면 세 사람이 나오는데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죠. 이 세 사람이 28절과 29절에이 많은 음식과 고급스러운 음식을 가져와 다윗을 먹이고 다윗을 수정되는 모든 사람들을 먹이며 끝까지 힘을 내라고 힘을 북돋두고 있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다윗 편에 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과 같은 인물을 기억을 하는데 하나님은 이름도 빛도 없이 다윗의 소명의 길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그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하 이런 사람을 기억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의 쿠데타 세력을 극적으로 꺾으시고 다윗의 지기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는데 여러분 다윗이 죽을 때 열왕기상 2장에 보시면 솔로몬을 앉춰 놓고 유언하는 장면이 거기에 나와 너는 산 대장부처럼 강하고 담대하라.이 유언으로 시작하고 유언이 쭉 이어지다가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솔로몬을 향하여 다윗이 토해 놓는 유언이 뭡니까? 솔로몬아, 너는 내가 죽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바르실래의 집안을 끝까지 챙기라. 다윗은 자기가 죽는 순간 자기 인생을 뒤돌아봤을 때 가장 고마운 사람 그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과 소명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던 바르실래를 기억하는 성경 주석을 보니까 여기서 다윗이 바르실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세 사람 중에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바르실래를 언급하고 있을뿐 세 사람 모두의 삶을 지키라고 솔로몬에게 이야기한 것이라는 거예요. 다윗 인생에 가장 깜깜하고 막막하고 고통스럽고 소망 없던 그날 자기 편에 서서 끝까지 자기 삶을 붙들고 자기를 일으켜 세웠던이 세 사람이 다윗은 숨을 넘어가는 그 순간에 떠올랐고 그들의 삶과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라고 솔로몬에게 유언하고 자기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저는 오늘이 세 사람 중에 그 가운데 있는 누구?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마길은 사무엘하 9장에 한번 등장하고 17장에 한번 등장하고 성경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근데 여러분 9장과 17장에 등장하고 있는 마길의 모습이 공통점이 있잖아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함께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돌봐야 내 삶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존재였던 므비보셋과 그리고 끈떨어진 연신세가 되어 버린 다윗과 같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목을 걸고 그들의 삶을 붙잡고 그들의 소명의 길을 지켜준 사람이 바로의 아들 마길입니다. 마길은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펼쳐지고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지에 대한 명확한 감각이 있었고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이름도 빛도 없이 목을 걸고 끝까지 그들의 삶을 지키고 소명을 지키고 그들을 섬기다가 성경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져 갔던 인물 저는 오늘 1516교회에 와서 우리 시대의 교회가 왜 더 이상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이런 회심의 역사들이 다 사라져 버렸고 주의 교회는 어느새 왜 이렇게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세상에서는 흉내고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문화들이 만들어지고 어떤 역사들이 나타나는 현상들이 주의 교회 안에서 다 사라지고 없을까? 그 문제를 한번 짚어 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 시대 교회 안에 형제와 자매의 삶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내 목을 걸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이 한 가족을 가족과 함께 살려고 하는 신앙적인 의지가 다 사라져.여 우리 시대에 주일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을 향하여 찾아옵니다. 특히이 분당 지역에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들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 오는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 오는 핵심적인 이유가 뭘까요? 집에 가려고 교회 오는 거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이 복된 주일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제 이름이 긴 관성이거든요. 매주 교회 가는 관성은 걸려 있고 빨리 가서 출석 도장 찍듯이 도장 찍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기 위하여 주일날 교회 옵니다. 우리 시대 교회 안에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서로의 삶을 목을 걸고 책임지려고 하겠다는 이런 의지들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교회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자면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같은 인물들이 다 사라져 버린이 시대 교회 안에 능력이 나타날 수 없지요. 교회를 개척해 봐야 그 개척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리 막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개척 자체가 목사 자신의 목회력과 설교 능력을 증명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 버렸는데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과 함께 죽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흘러넘치는 사랑이 발현되어지지 않는 그 현장에 무슨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겠습된 말씀이지만은 저는 고양시에서 11년 전에 교회를 개척해서 7년 만에 교회가 500명이 넘는 중형교회로 교회가 성장을 했고 울산에 3년 반 전에 내려가서 지금 우리 교회가 한 850명 정도 모이는데 우리 시대의 문화와 교회 상황에서는 이례적인 부흥들을 경험하고 있죠. 그러다 보니까 저와 같은 사람들 뭐 한두 살 많은 형님들 동기들이 저를 찾아와서 그런 질문을 해요. 김목사 설교하는 거 우리가 이렇게 한번 들어보니까 우리보다 별로 잘하는 것 같지도 않게 하는 거 이렇게 보니까 우리보다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는데 우리는 왜 부흥을 잘 안 부흥이 잘 안 되는데 너는 왜 개척만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드냐? 저 보고 한 형님이 그 질문을 하시더라고.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뿅 나에게 무슨 방법 넘는 개척할 만한 사람 보여 드리겠어요? 그냥 나도 모르지.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날 나한테 와서 교통사고 나듯이 박치기 한 결과가 그냥 부흥한 거예요. 이렇게 겸손이 이야기했더니 그 형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말하니까 더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한번 이야기해 봐.
우리는 안 되는데 왜 너는 개척을 하면서 이런 부흥을 경험하는 것 같아. 그래서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생각을 해 봤어요. 내 목회에 무슨 내용들이 있어서 이런 결과를 맞이하고 있는 걸까 생각을 해 보니까 저는 행신교회를 처음 개척했을 때 철저하게 저의 삶과 인생을 뒤돌아봤어요. 그러니까 다른 어떤 목사님들이 누군가의 배움을 통하여 자기 스타일로 하는 그런 목회 말고 내 삶과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고 나에게 어떤 경험들을 주셨고 나의 가슴이 언제 뛰며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어떤 현상들을 목격할 때 내 가슴은 뛰는가를 치열하게 저의 인생을 독해하고 살펴봤어요. 그러면서 저는 행신교회를 세우면서 저의 고유의 방식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오늘 여러분들하고 조금 나누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인 역기능 가정 출신이 그니까 뭐 아버지가 알콜 중독 노 중독 폭력 중독. 저는 결혼해서 방 두 칸에 처음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술 드시고 노름하시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하니깐 우리 누나들은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가 술 마시고 노릇 미천은 확보하려고 누나 셋을 다 식모살이 보내 버렸어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하나는 대구로 부산으로 포항으로 그래서 우리 누님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식모살이로 가서 그 주인집 청소하고 밥하고 애들 돌봐주고 그렇게 살았죠.
월급 받는 날 되면 아버지가 그 집 돌면서 월급 다 수령해서 그 돈 가지고 술 마시고 노름하시면서 한평생 살다가 가셨죠. 그 누님들 바로 밑에 저하고 열살 차이 나는 저 바로 위에 형님이 있는데 이제 형님은 남자라고 중학교를 보내 줬나 봐요. 형님은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는 돈 들고 서울로 가출을 해서 한 평생을 조직 폭력배로 살았어.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현역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그 집에 막내가 접니다. 하니까 여러분 저 같은 애가 정상적으로 어떻게 성장하고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상적으로 잘할 수가 없지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목격한 우리 집은 매일매일이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집안을 다 때려부숩니다. 특별히 어머니를 두들겨 패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지와 같은 아이의 마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상처들이 쌓일 수밖에 없어. 특히 아버지가 어머니 손발로 밟고 두들겨 패다가 사람이 사람을 때리다 보면 감정이 상승하잖아. 그럼 부엌에 가서 무슨 도구 같은 거 들고 왔어. 보통 숟가락하고 포크 포크 같은 거 들고 와서 어머니 머리를 찍어 가지고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날들이 1년을 지나면서 숱하게 반복되어져. 그런 환경 속에 노출돼 있는 저기 때문에 저 역시 정상적으로 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손버릇이 참 나빴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분당에도 백화점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분당에도 백화점 있습니까? 울산에는 두 개나 있습니다. 현대 백화정이라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백화점 물건 저는 다 공짜로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움직이면 그냥 저의 호주머니에는 온갖 물건들이 다 당겨. 한번은 그 백화점 맞은 편에 진흥 슈퍼마켓이라고 큰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거기에 테니스 가방 들고 들어가서 한쪽 라인이 있었던 초콜릿을 한 300개 정도 틀어 가지고 나오다가 현장범으로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등학교 6학년대 경찰서 처음가 봤습니다. 가니깐 초범이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훈방 조치가 됐는데 집에서 부모님들이 와서 진술서를 써야지 집에 가요. 근데 우리 아버지 술 드신다고 볼 수가 없죠. 어머니 한글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 형님이 결국 저를 데리러 왔어. 진술서 쓰고 저를 데려가는데 형님 강패잖아. 길거리에서 저를 질질질 끌고 가면서 두들겨 패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성경하고 자랐던 울산시 우정동 동네 우물가로 저를 끌고 가. 끌고 가서 옷을 다 벗어. 옷을 완전 빨아 벗었어요.
하니깐 두레박을 던져 가지고 우물가에서 물을 한 바가지 길로 올리더니 그 물 를 저의 몸에 뿌리 안 그래도 추운데 몸이 물에 다니니까 얼마나 춥습니까? 덜덜들덜들덜들덜덜덜덜덜 떨고 있으니까 형님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전기줄이었어. 전기줄을 손에 감고 저를 두들겨 패는데 한대 맞을 때마다 죽을 것 같아. 욕 듣고 두들겨 맞고 욕 듣고 두들겨 맞고를 세시간 동안 반복하는데 세 시간 동안 실컷 얻어지고 난 다음 형님 입에서 나온 말 한 마디가 저의 인생을 바꿔 버렸어. 너이 쌍놈은 새끼 이번 주 부터 교회 안 가면 때로 죽여 버린다. 아니 치도 안 가는 교회를 왜 나보고 교회를 가라고 하냐? 우리 집은 사원에 8촌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예수의 옛자도 모르는 집안인데 갑자기 교회를 가라는 훗날 알아보니까 동료 깡패들 모였을 때 우리 형님이 제가 걱정이 돼서 동료들한테 내 동생 저거 어떡하면 좋나? 벌써부터 도둑질해 가지고 경찰서 가고 하 저러다가 이제 가출하고 몸에 그림거리고 나처럼 조폭이나 될 거 같은데 내 동생 때문에 내가 고민이 많다 하니까 그 동료 깡패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네 동생 교회 한번 보내라. 교회 가면 인간된다 하더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형님이 저를 교회 가라고. 우리 형님은 지금도 교회를 안 다녀요.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제가 기네스에 올라가야 돼. 전 세계 최초로 불신자에게 전도받았어 목사된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가서 형님이 무서워 가지고 죽지 못해 계속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근데 여러분 예배가 예배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면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백지 상태인 아이가 의무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이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린아이의 심령을 쪼개 버리더라고.
아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니 감격이 얼마나 큽니까요? 여러분들 중에는 모태 신앙이 있죠. 여러분 모태 신앙은 뭘 모태 신앙이라고 합니까? 모태 신앙은 자기가 믿는지 안 믿는지 몰라요. 근데 정신 차려 보면 항상 와 있는 것이 교회 그게 모태 신앙입니다. 큰 감격이 있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근데 저는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미칠 것 같더라고.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고. 목사가 되는 것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건 알아서 우리 고향 목사님이 설교를 참 못 하셨을 이렇게 많이 절으러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 제가 하늘 풀겠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설교가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내 인생을 주를 위하여 드리겠다. 그렇게 결단하고 저는 신학교를 가
아멘.
가서 열심히 신학 수련하고 유학 가서 공부를 마무리하고 이제 개척을 첫 개척을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교회 어른들이 해두는 말씀이 다 맞아요. 우리 1 교회 안에 있는 젊은이들은 가급적이면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들의 조언을 잘 따랐어요. 제가 고향교회에서 관성이 너는 안 믿는 집안 출신이니까 사모를 선택할 때 목사님 딸이나 장로님 딸을 만나 하나하나 안 되면 월따이라고 만나 그게 안 되면 집사님 따라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그때 무슨 그런 기준으로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고 자시고를 해게 어디어 하면서 여자를 잘못 선택해 버려. 지금 우리 집사람 안 믿는 집안 여자입니다. 저는 그게 아무런 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목회를 시작하고 개척을 처음 시작하니까 생각보다 그게 힘들더라고. 야. 한쪽 집안에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개척가면 누군가는 좀 도와주기도 하고 후원도 하고 이래야지 그 가는 길이 이렇게 수탄히 이렇게 떠오르는데 양쪽 집안이 기도해 주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우리는 또 양쪽 재반이 다 가난해서 교회를 개척할 돈도 없고 공감도 없어. 그래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원 원장님이 제 신분을 알고 홍사님 학원 교실이 예배당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일날 그냥 여기서 예배하십시오. 어머나 거기에 가스라이 당했짜리 십자가를 하나 걸고 아무도 없는 그 공간에서 우리 사람하고 개척을 시작했어.
그러니까 왜 그렇게 서럽고 눈물이 많이 나는지 예배당 가서 하나님 저 인생은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 아들아 조금 더 걱정하지 마. 내가이 아무것도 아닌 개척 교회 가운데 내가 내 길을 이루겠다. 하나님 그런 마음 주시더라고.
아멘.
착고 간격스러워서 그 마음 안고 집에 와 보니까 역시 우리 집 사람은 안 믿는 집안 여자. 기도를 안 하고 있어. 당신후가 기도 안 하니까 여보 기도했다는 거 기도 뭐 했니 하니까 기도하니까 하나님 뭐라고 응답하시나니까 따라 조금도 걱정하지.이 아무거도 아닌 개척 교회 가운데 내가 내 일을 이루게. 제가 받았던 응답하고 우리 사람이 받은 응답이 똑같아요. 이거는 진짜 뭐가 있다 해서 어렵고 서러웠고 고통스러웠지만 힘차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아멘.
아무 역사가 교회 개척 처음 했을 때 또 거지였는데 개척 교회 한 6, 7년 하고 나니까 우리 가족들이 길바닥에 내 앉아야 되는 상황으로 삶이 막 떠밀려오더라고. 목회가 안 되고 열매가 아무것도 없다 보니까 저 성장 과정 속에서 저 안에 박혀 있었던 온갖 상처들이 본격적으로 막 튀어나오. 우리 사람은 전형적인 사모 스타일이고 사람 온유하고 겸손하고 좋은 여자. 제가 내가 이씨 믿는지만 여자 만났어야 되는데 안 믿는지만 여자 만나는 바람에 목회가이 모양이다. 이런 말이 우리 사람한테 얼마나 상처가
그 정도가 아니고 제가 입만 열면 제가 저의이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하지 못해서 입만 열면 이혼하자. 나는 잘못 만났고 이하고 나는 성격도 안 맞고 모든게 안 맞 이혼하자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그때 우리 아들이 여섯살이었는데
울면서 저한테 아빠 엄마 진짜 이혼할 거야 엄마 아빠는 한다면 여사자리에 복잡 그러니까 그 직을 감당할 만한 인격적인 준비 신앙도 하나도 없는 인간이 목사라고 하는 직만 가지고 그 자리에서 있었던 거 그러니 아무 열매가 없어.
여러분, 성경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게 맞잖아요. 그죠? 그런데 우리가 느낄 때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 같지가 않고 접촉하는 거 같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오셔서 확 붙었어요. 너무나 자주 떨어지신다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날 이렇게 타 와서 붙는듯한 날들이 있어요. 그때는 상처도 가라앉고 제정신으로 돌아 제가 우리 사람한테 그때 그랬서 여보 내 목회 문제 가 뭘까? 당신이 나를 제일 잘 알고 내 목회에 대해서 제일 잘하니까 내 목회에 대해서 듣는 그대로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다라. 나 이번에는 성가를 안 부릴게. 하니까 우리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은 목회 스타일을 바꿔야 될 사람이 아니라 목회를 하면 안 되는 인간. 우리 사람이 저하고 이렇게 살아보니까 그 친을 감당할 만한 인간이 그리고 우리 이제 아들이 목사라서 늦게 예수님을 믿으셨어요. 70살 넘으셨어. 그래서 아들이 교회 목사니까 교회를 가긴 가는데 교회가 뭔지 목사가 뭔지 잘 몰라요. 아들 뭐 하십니까? 교회에서 연설하는 사람이 이런 정도가 우리 어머니의 인식이었는데 아들이 어쨌든 개척 교회를 시작했다고 하니까 주일 저녁만 되면 어머니 울산에서 항상 전하고 와요. 여보세요 하면 엄마 관성아 이번 주에는 손님들 많이 와 손님들 많이 안 하니까 우리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야 내가 너를 낳아 가지고 지은 장보님인데 관성아 너는 목사 스타일 아 너는 노가다 스타일 엄마 죽기 전에 울산의 현대자동차 중공업 비정규집으로 들어가서 1년에 연봉이 수천만 원 이하는데 막 그렇게 살고 애들 공부시키고 살면 안 되나? 우리 어머니 전화만 오먹고 무시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적지에 아무 열매가 없어서 지방의 목사님들이 후배 목사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가정도 깨어질 것 같고 목회도 다 엉망이 될 것 같아서 김목사 이러면 안 되고 길바닥에 내 앉아야 되는 상황이니까 우리 지방에 저 도시 빈민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 우리 아담한 침내 교회가 하나 있는데이 거기 가서 그 지하 사택이 있다. 그래도 길바닥에 내 앉을 수는 없잖아. 거기 짐 풀고 거기 가서 목회하는게 어떻겠냐? 저에게는 다른 삶의 옵션이 없었습니다. 그 그래서 그쪽으로 목회지를 옮겼어요. 계단 17국 밑에 지하 사택이 있더라고.
짐을 풀고 목회를 했는데 남자 성도는 한 명도 없고 성도 구성원이 13명이었는데 65세에서 90살 넘은 할머님들만 13번이 계셨어. 그런 부인에서 가서 의욕이 있으니까 열심히 말씀 준비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매주 에브리바디 다 주무시는 근데 여러분 그게 여러분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자들이 누구냐? 설교 시간에 자는 근데 이게 한 달 당하니까 막 절망이 몰려오는 거 한 두 달 당하니까 짜증이 올라오고 세 달 지나니까 분노가 올라 되니까 감이 붙기 시작을 감이 어떻게 붙는가 합니까 설교 준비를 언제 하느냐 주일날 오전 10시 50분에 쉽게 말해서 준비를 안 한다 이거죠 올라가기 전에 에라인 모르겠다 영접하는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건 오늘 이거다 해서 여러분 준비를 안 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말을 당연함이 가게 하게 됩니다. 그 준비를 안 하고 설교를 했더니 그때부터 은혜를 받으 주무시는 할머님들 있는 교회에 무슨 역사가 나타에 부임하니깐 사례비도 한 150만 원 주신다고 하셔서 기대를 좀 했는데 우리 교회 한 주 헌금이 8만 원. 그 제 보시던 우리 권사님이 참 재밌어. 목사님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쓰시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그래서 두 번째 목회지에서 여보 이렇게 20년을 우리 나름대로 한다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결과가 이렇다는 것.
는 하나님이 우리 안 부르시는 거 그만하자 하니깐 목사가 지쳐서 사모에게 이런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여보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되지 어려워도 끝까지 감당해야지 이래야 되는데 우리 집사람 너무 잘 생각 그렇게 해서 두 번째 목회지도 사임하고 끝을래 저의 목회 여전에는 아무런 열매가 20년 동안 없었고 아멘.
그때 제가 귀한 것을 하나 배웠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목사로 불러 주신이 소명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내 던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더라고.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만 전하면 핍박 당하니까 나는 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외치지 않겠다. 결단하잖아요. 근데 속에서 불이 올라와 견디지 못해서 다시금 하나님에 대해서 외치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똑같은 목회를 안 하고 울산으로 내려가서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싶었는데 안 되는 거예요. 제 인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죽지 못해서 몇날 며칠을 머리를 뜯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집사람 손을 잡고 고양시 행신동으로 가서 저의 세 번째 목회지죠. 2층 상가를 하나 얻어서 다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때 저는 목회를 잘해 봐야 되겠다.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 이런 의지가 없었습니다. 배운게 도둑질입니다. 이거 하다가 죽어야지 내 삶에 무슨 다른 해야 될 일이 있겠나? 이런 심정으로 개척을 시작을 했는데 개척 교회는 누가 오느냐? 그 개척 교회와 맞는 인간들이 옵니다. 고슴도치들 사랑하려고 껴 안으면 내가 더 상처받게 되는 그런 사람. 여기 지금 앞에 앉은 분들하고 인상이 좀 있어. 그리고 돈이 없고 끝없이 돌봐야 될 사람들 공황장애 우울증 환자들 삶이 다 무너진 사람들 그것도 많지도 않아요. 개척 교회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해도 해도 가도 가도 절망적이. 근데 한번은 해군 장교로 한 청년이 군대를 입대했다가 돈을 3천만 원 모아서 제대를 했는데 그 돈을 가지고 핸드폰 앱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했다가 쫄딱 망해 버린 거예요. 망하고 나니까 자기가 어린 시절부터 다녔던 그 교회 다닐 수가 없더라고.
음. 여러분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그냥 좋게 말할 때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이 교회지만 현실 교회는 어떤 곳이에? 신경과 진정 으로 책끼는 곳이 망한 사형 가지고 자기가 다녔던 교회 가면 그 권사님 집사님들 교회 참새들이 한두 명입니다. 그 잭ि잭 그게 무서워 가지고 얘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고양시 행신동에 나 망해서 찾아온 사람들 보면 돈도 주고 밥도 사 주고 갈 곳 없으면 데리고 사는 목사님이 있다 하더라고 저를 찾아.
이게 무슨 말인가면 제가 도시민들하고 목회할 때 우리 동네는 막 삶이 번개해지고 망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가정이 다 깨져가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많아. 뭐 어떡합니까? 제가 그래도 목사데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아줘. 애들 방 비우고 애들 방 다 내주고 같이 살아. 목회할 때 제일 많이 살았을 때는 우리 집에서 14명까지 꼭 알려줘도 이런 더러운 사연만 알려져.이 녀석이 그 사연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가서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를 하는데 여러분, 단임 목사님은 매일매일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분이잖아요. 목사님에게는 어떤 순간 되면 촉이 딱 올 때가 있어요. 대화를 나누는데 촉이 딱 오는 거예요. 얘는 며칠 안에 자살라
딱 느낌이 오더라고. 느낌이 오는데 보통은 밥 사기고 돈 있으면 돈 들어서 주고 주일 날 교회 오라고 돌려 보내는데 걔 이름이 선지였어. 선지 너는 내일 아침에 목사님 8시에 교회 출근하니까 8시까지 꼭 교회 와라 하고 선제를 돌려보냈어요. 돌려 보냈는데 그다음날 선재가 교회 올까 말까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고 그다음날 출근했는데 선재가 다행히 왔더라고. 그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먹었어. 신방 가면 데려고 가고 설교하면 데려가고 쉽게 말해서 전도사는 아닌데 전도사가 내버 근데 이제 청년이니까 자기 삶을 지켜야 되니까 노가다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는데 여러분 인생이 참 가혹한게 되는 놈은 되는데 안 되는 놈은 안 되는게 사람 인생이더라고. 우리 선재는 뭘 해도 안 되는 일하면 끝까지 하는 법이 없고 끝까지 하고 나면 돈 못 받고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그럼 뭐 어떡합니까? 우리 집에 데리고 같이 살아. 근데 한 번에이 녀석이 어디서 정보를 들었던 목사님 한샘 인테리어에서 8주 동안 부어가고 그실을 설계하는 훈련을 받으면 정 정규직으로 전환해서 기본급 150만 원에 한 건 올릴 때마다 월급이 되어지는 정규직 직장을 준다는데 목사님 제가 이거 한번 도전해 볼까요? 선재 뭘 하도 좋으니까 한번 해 봐라. 그래서 우리 선재가 그걸 도전을 했어요. 그 8주 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3주 하더니 못 하겠다.
제가 겉으로 말하면 내가 또 상처받을까 싶어서 겉으로는 말을 못 했지만 속으로는 했어. 속으로 새끼야.이 안 된다. 막 나도 목회하면서 사람들 많이 만나 봤어. 내 사람 좀 볼 줄 안다 너는 안 된다. 너는 안 돼. 속막 부글부글 꺾는 거예요. 그때 우리 교회 막 합류한 지금 행신교회 담임 목사가 된 우성경 정수한테 선재 저거 왜 3주만 하고 때려치 않? 목사님 회사 갈 차비가 없다면 예이씨 요즘 세상에 차이 없어 가지고 회사 못 간 놈이 어디나 하기 싫으니까 안 하지. 야 집에 가서 똑바라 한번 알아봐라. 지금 집에가 있다. 그래서 우리 전사님 집에 가서 알아보니까 아버지 알코올 중도
어머니 공황장에 구울 집에 10원 아픔이 없는 거 선재가 이번에는 회사 갈 때 버스 타고 갔다가 점심값 아끼려고 점심값 점심 굶고 일 끝나면 목동에서 엉편까지 뛰고 걷고 반복해서 퇴근했던 거예 하루에 차비 한 번만 쓰는 거예요.
근데 회사 가려고 하니까 그 한 번 갈 차비가 없는 거예요. 와 정말 미치겠는 거예 이거 어떡하죠? 여러분 이때 도움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은 안 도와줘.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원하는 타이밍에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면 우리에게 고민과 눈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게 우리 뜻대로 안 되니까 고통스러운 거. 결국 도움은 어디서 오합하니까 우리 집사람. 사람이 쳐가면서 애들 뭐 보험을 하나 드러났다고 여보 애들 뭐 교육보험 같은 거 하나 드러났다 안 그랬나 하니까 드러났다는 거 애들 대학교 가면 뭐 등록분도 나오고 생활비도 나오는 유치원 때부터 넣는게 있다. 여보 시간 없다. 빨리 해약해라 하니까 우리 집 사람이요. 안 믿는 집안 여자 그 공격 그 가스라이딩 때문에 제가 뭐 하자고 하면 반대가 없는 여자.
교회에 돈이 없으면 안 믿는 친정 집에 가서 동부 구해 왔어도 제가 하고 싶은 사역 다하게 좋던 여자가 우리 집 사람이고 어떤 반대도 안 하는데 목회하면서 처음으로 우상이 울더라고.
어 여보 이거는 제발 건드리지 이거 아무것도 아니어도 애들 미래 미래 참 애들 미래 하고 사는 마음이 울더라고. 이런 눈물에 감동을 하면 그는 경상도 남자가 아닙니다. 아이씨 감상에 빠져 가지고 이씨 빨리 해야 여러분 강원도 춘천은 경산도를 못 이깁니다. 우리 사람 저기 가서 해약을 하는데 입 모양 보니까 100% 욕이야 그걸 해약해가 인간 돈 가져가라 하고 집어 던지더라고 그 돈 들고 현재 목양실로 부었어. 선재야 목상 인생은 인마 끝났어. 근데 너는 가야 고말인데 뭐 하다가 그만두고 하다가 그만두고 선재야네 평생 섞고 안된다 목사님은 네가이 훈련 다 끝내고 돈 잘 벌고 잘 사는 거 그 꿈에도 생각하네 근데 뭐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하는 습관이라도 킬러야지 왜 자꾸 하다가 그만두는 선재 목사님 돈에 왔다 돈 받아라 목사님 저 죽으면 죽었지 그 돈 못 받아 그 돈 어떤 돈인지 저 잘 알아요 하고 생 제가 막 울더라고. 선재야 받아. 목사님 난 절대로 그 돈 안 받아요. 너이 돈 안 받으면 너는 목사님하고 오늘 똑같이 무조건 받아. 선지 호주머니에 돈 주셔놓어. 빨리 가라. 그리고 선지자 내일부터 가서 발촉하지 말해라. 발촉하지 마. 목사님 부탁 한 번만 좀 더 켜고. 예. 이렇게 세워서 덤떠밀었어. 우리 선지자가 울면서 그 돈 받아서 갔어요. 가서 그다음 날부터 가서 팔주 훈련을 끝냈습니다.
끝내고 우리 현제가 처음 배치된 곳이 한샘 인테리어 서울 목동 지점. 예.
근데이 일을 10년 15년 먼저 시작한 사람보다 우리 선재 실적이 첫째 달, 둘째 달, 셋째 달 막 더 좋은 거예요. 막 죽쭉죽 뻗어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선지하고 저처럼 확장 시대 공부를 잘해 봤던 적도 없고 세상에 나와서 의미 있는 성취를 얻어보지 못했던 우리는 뭔가가 잘되기 시작하면 좋기보다는 불안합니다. 여러분 그 심정 좀 이해하십니까? 우리 같은 인생은 초반 끝발 개끝발이잖아요. 끝까지 잘되는 법이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간절해요? 하나님 우리 산재 한 번만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사람이 태어나서 좋은 경험도 하고 그렇게 지나지. 아버지 한 번만 제발 좀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으셨는지 우리 선재가 이게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죽쭉죽 막 계속 뻗어가더니 그 일을 시작한 첫 우리 선재 연봉이 1억이었어. 그다음도 1억 5천 2억.
이건 뭐야? 이거 우리 교회 2억 연봉 이건 뭐고 이거 하루는 선재가 전화 왔어. 목사님 내일 저녁에 저하고 소고기 좀 먹읍시다. 하고 전화가 온 거예. 근데 여러분 그 말이 왜 그래 웃깁니까? 이때까지 100번 천번 만 번 내가 밥사기고 우리 생활비 쪼개 가지고 우리 집에 데리고 살았던 녀석이 저보고 목사님 내일 저하고 소고기 좀 먹읍시다 하는데 벌써 목소리에 개기름이 껴 야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있네 하고 그다음날 갔어요. 갔더니 선지가 이미 좋은 고기 시켜 놓고 기다리고 둘이 앉아서 선지가 고기 꽃꼬 먹는데 이거 굉장히 행복하고 좋은 날인데 분위기가 디프레션 분위기가 깔아앉아 이거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다가 선지 얼굴을 딱 보니까이 녀석이 고기를 보면 면서 울고 있더라고. 눈물을 닦으면서 저한테 안 들키려고 눈물을 닦으면서 고기를 굽고 있는 거예.지도 좋은 거예.
아, 나 돈 벌어서 우리 목사님 식사 대접 받는다고 왔다는 거.
아, 우리 또 경상도 사람 이런 어색한 거 진짜 제가 고양시에서 목회할 때이 수도권 것들 제일 힘들었던 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목사님 사모님 앞으로 나오세요. 그 뭐 손 뻗어서 당신을 사랑 뭐 여기 이런 운영되는 폭력입니다. 이게 막 물기 시작을 하니까 이거 막 어디를 쳐다봐야 될지를 모르겠어 밥 먹는 속도를 끌어 올렸어 하고 핑계 선재 목사님 오늘요 신방이 양건 있어가 먼저 가야 되겠다. 왜냐면 선재 보면 전부 울 것 같아. 그래서 일어나서 저 나갔어요. 선재가 고기 정리하고 음식값 정리하고 제가 저쪽 가고 있었는데 목사님하고 막 뛰어오더라고. 뛰어오더니 저의 호주머 이 봉투로 하나 팍 꼭 휙 도망을 가고 우리 또 사례비를 많이 받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딱 잡으면 얼마줄 딱 잡으니까 아버지 제발 신사인당이기를 못 이거 신사인당이면 이거 액수가 장난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여러분 신사인당 이만큼 공이 500만 원 놀래 가지고 선지한테 바로 전화했어. 야 인마 이제 돈 좀 버는 녀석이 목 님한테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넣어서 근데 말이 없어요. 수학기를 바짝 갖다 되니까 수학이 선재 펑펑 울고 있더라고. 선재 호흡이 좀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렸어요. 선재하고이 돈 너무 많다. 이마 이제 돈 번 녀석이 목사님한테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넣어서이 녀석이 호흡을 좀 가라앉어. 목사님 저 목사님 만나고이 교회 만나고 목사님하고 목사님 에게 사랑받고 사모님에게 사랑받으면서 저 안에 어느 순간 꿈과 비정이 생겼어요. 아 근데 우리 또 꿈 비정 이런 거는 안 좋아요. 뭐 큰 교회는 꿈과 비정이 있습니다. 우리 행신교회 무슨 꿈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 모토를 그때 만들어 놨어요. 꿈과 비전이 없는 교회. 하루만 사는 교회. 이게 우리 교회 모토인데 네가 조직을 배신하고 혼자서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 않과 비전이 아니 근데 선재의 꿈과 비전이 뭔데 할까?
목사님 저는 지금처럼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서울에 우리 목사님 집사드리는게 제 인생의 유일한 목표고이 막 우는 거예요. 선재가 막 우는데 막 저의 가슴도 무너져. 저쪽에서는 선제가 울고 이쪽에서는 제가 울고 그 나를 잊을 수가 없어.
아멘.
저는 신교회의 부흥, 낮은담교회 부흥 다른 어떤 방법론이 아니었어요. 같이 살고 사랑하고 서로의 삶을 무한히 책임지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그들을 안고 사는이 긴 시간 동안 아무 열매가 없는이 삶 때문에 고통스럽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나 그날 선재가 집 사 준다고 해서 기쁘던 거야.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부르신 그 이유를 그날 깨달았어요. 아멘.
그 긴 시간 동안 가난과 서로움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종의 세포 하나하나에 하나님은 새겨 넣으셨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선재처럼 이렇게 소망 없는 인생들이 주의 교회에 찾아왔을 때 아파라도 이런 사람들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저를 빚어보셨다.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 하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 죽을 때까지 무명으로 비실비실 아무 열매가 없이 이런 고슴도치들 가난한 사람들 상처로 성찰된 사람들 몇백 안되는 사람들 목회하면서 저희 목회가 끝난 끝까지 신실하게 이길 걸어가겠습니다.
아멘.
그러나 큰 교회에서 불러주면 바로 가겠습니다. 안 불러 주시고. 그리고 우목사 우전도사, 선재 거기 모여던 사람들하고 같이 저의 것을 다내어 주고 그들의 사랑을 받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자면 암미엘의 아들 마길처럼 마길이 다윗의 삶을 보호하고 지켰던 것처럼 소망 없는 인생들끼리 모여서 아낌없이 나누고 사람 근데 신자의 인생 그리고 주의 교회는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이 있더라고. 개척 3년차가 됐는데 옛날처럼 설교하고 옛날처럼 목회를 했을 뿐인데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을 합니다. 우리의 어떤 실력이나 준비가 아닌 서로를 무한히 사랑하고 책임지고 함께 살려고 하는 그 중심이 불타오를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일을 하기 시작을 하시더라고. 아멘.
7년만 행신교회는 500명 넘는 중형 교회로 성장을 했고 우리 목사를 250명 교회 재정 절반께서 물리제 내보내기로 결단했는데 코로나가 왔거든. 성교아 지금 나갔다가는 절단 코로나 끝나고 분립 개척 시작하자 하고 코로나 끝나고 제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어 하나님 교회는 교회를 낳아야 되는데 지혜를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돈도 써 본 놈이 잘 개척도 한 번이라도 해본 놈이 잘하지 않겠 하나님께서 그런 감동을 막 주십니다. 저의 입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만 사탄 안 물러이 하나님 주신가 태어나서 처음 뭐해가 잘돼 본게 행신교회인데 이거 주님 주신 마음일 없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했 기도했는데 제가 그 책을 안 읽었어야 되는데 헨리 나우웬 제자의 길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욕망은 상향성의 삶을 추구하고 소명은 하향성의 삶을 추구합니다. 아멘.
그 문장이 가슴에 와서 기도 중에 고치는 거예. 하나님은 나보고 가라고 하시는 거. 그니까 모든 상황들을 다 정리하고 반대들을 다 쓸 거하고 목사를 다임 목사로 세우고 3년 반에 저는 울산하면서 개척을 선언하고 우리 사람하고 자하고 둘이서 개척을 떠났습니다. 그날 밤에 선재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개어이 사람들 다 버리고 가더라고. 목사님 나 버리고 어떻게 목사님이 난리가 난 거야. 목양실에서 선재야 모든 사람 다 이해 못 해도 너는 목사님 이해해야지 마. 너까지 이러면 목사님 우산에 어떻게 개척하냐? 싫어요. 목사님 분립 개척이랬는데 한 명은 따라가야지. 분립 개척이 목사님하고 사모님만 가는게 무슨 분리 개척이 목사님 저는 우리 사람하고 이야기 다 끝냈어요. 뭘 끝냈는데? 우리 사에 개척 따라갑니다. 야 이놈아 서울에서 나서 한평생 서울에서 살고 그렇게 고생하고 이제야 자리를 잡아가 안정적으로네 회사도 만들고 돈도 이렇게 잘 벌고 사는데 울산 가서 뭘 먹고 사니 선재아 여기 남아서 제발 성균이하고 행신교회 더 든든하게 세워라 목사님 가는 길 축복하고 밀어주 싫어요 목사님 저는 우리 집사람하고 이야기 다 끝내국인 녀석이 울산 공부를 다 끝내고 왔더 목사님 저 말일 하지 마시고 울산의 중부의 집을 구해야 됩니까? 남구의 집을 구해야 됩니까? 그거는 말해 주시 선재 남부의에 선지하고 제가 태어났을 제일 많은 복받은 한 녀석이 따라 붙이는 거 아
그래서 선재는 그 잘되는 회사 다 접고 울산으로 가지냐 이런 선택에 주께서 격사하시는
아멘
계속 첫날 300명이 모였고 매년 200명 300명이 늘어서 3년 만에 800명이 넘고 천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멘
인원이 안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거는 부흥을 못하는 자들이 사랑하는 여러분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교회 위에 자신의 알통을 보여 주시고 능력을 보여 주시느 암미엘의 아들 마길처럼 서로의 삶을 서로의 인생을 자기의 가진 것들을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영혼을 향하여 속 다하고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결단하는 그 교회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을 펼쳐 보이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1516교회 모든 권 족속들은 이상 목사님과 함께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과 섬기 주의 교회를 전히 세워져가 주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우리이 시간 다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우리 옆에 가는 거 손 한번 잡고 찬양할까요? 우리 주의 가르다여나 주께서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하노라. 언제나 주님만 찬양하며 하나님이 시험을 할 때 계시는이 믿는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 어느 밤에도 주의 인도하여 주신다. 영이에 모이리 사랑받는 주의 자녀라. 주께서 극하신 바 우리 속에 지신다 보통 슬픈 주에 주님을 지하오니 어려 이변의 주님 찬양하라.이 믿음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둠 밤에도 주의 말급 인도하여 주의 모든 가족 여러분이 시간 우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합심하여 한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교회를 붙잡아 주옵소서. 아멘.
무엇보다도이 교회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 하나님 형상대로 지받은 형제와 자매를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아멘.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그 믿음을 주옵소서. 그 사랑을 주옵소서.
아멘.
그리하여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과 섬김으로 넘쳐나는 1516교회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여러분들 우리 합심하여 주여 한번 외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옵 하나님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믿음의 가운데 하나님 세상 될 수 없는 그 사랑을 주옵소서 그 은혜를 부어주고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도와주시의 습니다. 자 주님 공주 찬 하여 주시옵소서 신 한번 더 우리 가슴에 손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머리로 알고 교리로 알고 개념으로 알고 그러나 정말 절망 가운데 죽어 있는 나를 건져 주신 그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이 내 안에 뼈르게 깊이 체험되고
그것이 나의 가족에게 흘러가고 이 지체들에게 흘러가면 아멘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사가 나를 건지신 것처럼 우리 가정을 건지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교회 공동체를 건지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복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아멘.
우리가 복음의 본질로부터 떠나온 것을 주님 앞에 회개하게 하여 주시고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십자가 사랑이 가정에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지체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세상 가운데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국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게 될지어다. 아멘.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될지어다. 아멘.
다시 한번 주여 한번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오게 축복하여 주서 사랑하여 주시고 성하여 주옵소서 하여 주시옵소서 역 하나님의 지하시고 하시 주의하서 우리의 자을 와 치유하시고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서 성령의 성령의 능력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우리 가정이 어서 저에게 하고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임 나의 나의 성
예수님의 성이 나의 인정이 되고 받으니 나의 능력이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교회가 회복될 길, 성도들이 회복될 길, 목회자들이 회복될 길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길은 여전히 이런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 그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우리를 사랑하사 전부까지 내어 주신 생명까지 내어 주신 그 본질의 사랑 거기에 길이 있음을 우리가 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우리가 종교 생활을 했고 우리 안에 성경의 말씀이 지식이 되고 자랑이 되고 개념이 되어 버려서 우리의 영혼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쏟아내지 못하고 삶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하나님 너무나 우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이 시간 진심으로 사모하며 갈망하는 성도들 가운데 우리 주의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 마음의 문빗장을 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 안에 막혀 있는 모든 장애물들이 이제는 쓰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생명수 강물이 흘러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가정으로 흘러가고 가정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또한 한국 교회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이 시대 한국 교회 소망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그러나 그 소망은 새로운 소망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보여 주신 소망인 줄로 믿사오니 우리가 그 본질로 돌아가는 새로운 결단과 변화가 우리로부터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이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우리 주님을 기대합니다.이 저녁에 우리에게 놀라운 영혼의 기쁨과 감격과 회복을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네. 어대 많은 은혜 받으셨죠?
네. 저는 같은 울산 출신으로서 마음을 반동을 받고 출신인데 남쪽에 응했다라 사실을 제가 깨닫게는데 몇 가지 광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27년 Rejoice에 대한 안내입니다. 아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를 세우기 위한 청소년 그리고 청년 Rejoice 예배 캠프가 이제 내년부터 종목적으로 열리게 됐네요. 보시 일정 보시면요. 제주장신대 부산장신대 대전신대 신학대 어 목사님과 개척하면서 생각하고 또 비전을 꿈꿨던 그대로 우리 청소년 아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꿈과 영적인 리더십을 세기 위한 조이스가 이렇게 진행됩니다. 아 여러분 일요일 교회뿐만 아니라 통한 회의들 참고해 주셔서 청소된 아이들이 예배 가운데서 살아나고 주님 만나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세대가 될 수 있도록 많이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 A 패션네 번째 시간에는 신재우 목사님이 예수님 가신 예수님과 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시작은 오전 10시고요. 본당 개방에서는 9시 30분입니다. 대예배관셔서 많은 또 운영 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차 안내입니다. 한투라자에 주차하신 분은요 주차 패드에 등록을 하셔야 합니다. 큰 패드 두시간씩 적용이 됩니다. 한 4시간 이상을 혹시 주차하시는 분은 차에 또 주차권을 하신 이후에 최선에 공포하겠습니다.주차 요금은 시간으로 네 여러분들 저렴하게 보시니까 여러분께서 출시 시간들 계산하셔서 나가시면 되겠고요.
혹시 어 투자하시다가 어려운 부분들이 요원들이 있습니다. 요원들에게 안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예를 이제 마쳤습니다. 나가시기 전에 여러분 자리를 잘 정리하시고 놔두시고 가시는 물건이 없도록 잘 주변을 돌아보시고 되겠습니다. 감사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진짜 길에 가는데 죽어 있는 거라. 다 케는게 제일인 거 세가 보통
세가적 보통 그지 끝까지 책임지고 집으로 내려온다.
집으로 갈까요? 끝까지 책임지다.
05월
2026.05.23(토) | 새벽기도 | 나는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 (고전 7:17-24)
나는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 (고전 7:17-24)
- 제목: 나는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
- 본문: 고린도전서 7장 17-24절
- 설교자: 이준인 목사
- 날짜: 2026-05-23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헌신이다
우리는 환경과 조건이 더 좋아지면 비로소 온전히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현재의 조건을 바꾸는 것보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명한다. 신앙의 본질은 더 나은 상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부르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2. 외적 조건보다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
고린도교회에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 성도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성도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바울은 할례 여부가 신앙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규모, 신앙 연수, 직분, 가정 배경과 같은 외적 조건으로 믿음을 판단하지 말고, 나를 부르신 자리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3. 사회적 신분과 사명은 관계가 없다
당시 노예 신분의 성도들은 자유인이 되어야 더 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도 주 안에서는 자유인이며,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언한다. 사명은 환경이 완벽해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신분과 상황 속에서 감당하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종은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넘겨드린 사람이다
설교자는 둘로스라는 단어를 묵상하며, 종이라는 표현보다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 하인이나 신하, 군사라는 표현에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낼 여지가 있지만, 노예는 자신을 값 주고 산 주인에게 전부를 맡긴 사람이다. 그 불편함은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못한 체면, 인정 욕구, 안락함과 자기 유익을 발견하게 하는 거룩한 불편함이다.
5. 지금 있는 자리가 곧 사명의 자리다
바울은 짧은 본문에서 “부르신 그대로”라는 표현을 세 번 반복한다. 우리는 직장, 경제 상황, 건강, 관계가 달라지면 더 잘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자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으므로 우리의 시간과 인생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결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외적인 조건과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 있는 자리를 사명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람만이 누리는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시고 보내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현재의 자리에서 기꺼이 헌신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암송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멘.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나는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나누기에 앞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번 던져 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가 선뜻 “예”라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마 우리 마음 어딘가에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은 나름대로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조건이 조금 더 갖추어지고 나면, 지금보다 환경이 더 좋아지고 나면, 그때 나는 비로소 헌신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만 바뀌면, 지금 이 환경만 바뀌면, 이 신분만 달라진다면,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런 생각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에 “내가 과연 지금 하나님께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르신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부르신 그대로.
첫 번째로 우리가 함께 묵상했으면 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성도들끼리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갈등 중 첫 번째 문제가 바로 할례 문제였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의 출신에 따라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방인 성도들은 이 말에 대해 억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도 할례를 받지 못한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할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할례를 중요하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교회 안에서 할례에 대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조건이 마치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가, 다시 말해서 신앙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할례 문제에 대해서 교정합니다.
1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그리고 19절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아멘.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데 있어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서로를 평가하고, 스스로 자신을 평가합니까?
가장 가까운 예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가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대변해 주는 것 같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교회, 큰 교회, 대형 교회를 다니면 왠지 그 성도의 신앙이 좋을 것 같고, 작은 교회를 다니면 왠지 그 성도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1516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1516교회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려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1516교회를 다니면 1516교회 성도들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다 회복된 성도들입니까?
또 하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외적 조건은 신앙의 연수입니다. “신앙생활 하신 지 몇 년 되셨어요? 교회 나오신 지 몇 년 되셨어요?”라고 물어보는 신앙의 연수입니다. 이 신앙의 연수에 따라서 자신의 신앙 상태를 판단하고 점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신앙생활 한 지 몇 년 되셨어요?”라고 물어보면 “저는 모태 신앙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모태 신앙이니까 오래 신앙생활 하셨겠네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태 신앙인 분들은 아마 잘 아실 겁니다. 얼마나 관련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오히려 너무 못하기 때문에 “못해 신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처음 들어보시나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또 하나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 교회에서 어떤 포지션을 맡고 있는지,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이고, 혹은 내가 목사님의 자녀다, PK다. 선교사님의 자녀다, MK다. 내가 선교사 출신이다. 내가 훈련을 받았다. 내가 신학 공부를 했다. 내가 간사다. 선교사나 목사는 굉장히 특별해 보이고 평범한 자리에서 섬기는 성도들은 덜 중요해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외적 조건이 성도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크리스천 집안입니다. 몇 대째 크리스천 집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거나 지인을 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집안이 대대로 크리스천 집안이면 본인도 당연히 구원을 받습니까?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물론 감사해야 할 부분이고, 본인이 영접하게 될 확률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목사님이십니다. 저희 아버지가 장로님이십니다. 제가 크리스천 학교를 나왔습니다. 제가 크리스천 CEO가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부모님이 목사이고 부모님이 직분자이지, 자녀가 목사인 것이 아니고 자녀가 직분자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반대의 질문도 똑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저희 집안은 사실 타종교 집안입니다. 저희 집안은 제사가 한 달에도 몇 번이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유교적인 집안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제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지지하거나 축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에는 크리스천이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집은 원래부터 건강 문제가 늘 있었던 집안이기 때문에 사실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만약 나의 상황이 실제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사람이나 환경 때문에 일하시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 가운데 일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질문 속에 담긴 나름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못 한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다.” 환경을 의지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까? 본질은 사람의 평가와 시선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은혜가 있는가, 내가 그 말씀을 따라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그것이 본질인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각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신분과 사명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이번에는 바울이 두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신분 문제입니다. 21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노예 신분의 성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요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하는 현실이 답답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자유인만 될 수 있다면 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이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취직이 되면 그때는 더 잘 섬길 수 있을 텐데. 더 나은 직장을 가게 되면 분명 더 잘 섬길 수 있을 텐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문제는 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 나의 건강 상태로는, 지금 이 컨디션으로는, 지금 이 체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섬겨야 하는 사명과 사역에 대해서 이런 질문들로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사역이란 무엇입니까? 그 사역은 사명입니까, 아니면 노역입니까? 결국 이 문제는 사역을 할 때 주님이 주시는 힘, 두나미스라고 하는 권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 고민이고 갈등입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아멘.
종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종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참된 자유인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진짜 신분입니다. 반대로 자유인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함께 읽었던 22절 말씀이 제 나름대로 굉장히 강한 은혜를 주셨던 핵심 묵상 구절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종이라고 하는 단어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묵상할 때마다 종이라는 단어를 묵상해야 할 때 떠오르는 묵상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 목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자신을 소개할 때, 보통 “저자 누구누구 목사”라고 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누구누구 목사.” 제가 그 표현을 보면서 “좋은 단어가 있는데 굳이 그런 단어로 표현해야 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예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해 봤습니다. “노예라는 단어가 왜 자꾸 마음에 걸리지?” 제가 한번 대입해 봤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이준인 목사.” 이게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22절 말씀에 나오는 종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보면 slave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둘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둘로스는 종, 하인, 신하, 부하 군사, 노예와 같이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그래서 둘로스를 번역하는 모든 호칭을 제가 다 생각해 보고 대입해 봤습니다.
첫 번째는 하인입니다. 하인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수고를 기꺼이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하인 이준인.” 괜찮았습니다.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다음은 신하입니다. 신하는 어떤 직책을 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봤더니,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주인의 최측근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신하 이준인.” 괜찮았습니다.
그다음은 부하 군사입니다. 부하 군사는 물론 명령에 순종하고 상하 복종 안에 있는 사람이지만, 강한 군사이고 전투력이 느껴지는 단어이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이 둘로스라는 단어는 아니지만, 성경 여러 부분에 보면 비슷하게 성도를 향한 표현으로 품꾼이라는 단어도 있고 가지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똑같이 한번 대입해 봤습니다. 품꾼은 그래도 내가 일한 만큼 받을 삯이 있으니까 심리적인 측면에서 괜찮았습니다. 가지는 사실 좀 받아들여지지 않기는 하지만, 가지는 인간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니까 실감이 안 나서 그런지 이것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서 노예를 생각해 보니까 노예는 좀 다른 것입니다. 불편했습니다. 계속 제 자신에게 질문해 봤습니다. “왜 노예는 불편하지? 왜 노예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왜 나는 주의 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에는 걸리는 것일까?”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그리스도의 노예 누구누구”라고 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받아들여지십니까? 받아들여지시는군요. 제가 너무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노예라는 단어에 대해서 계속 묵상해 보니까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알게 됐습니다. 노예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 때문입니다. 노예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팔목이나 발목에 쇠사슬과 족쇄가 채워져 있고, 입고 있는 옷이나 행색이 남루하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없고 번호로 매겨져 있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자신이란 것이 없고 완전히 자기를 넘겨 준 사람입니다. 자신을 구속한 존재로 인해서 자기 인생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를 값으로 산 주인에게 그저 자신의 인생을 다 맡긴 것입니다. 삶의 의지가 없는 것이 노예였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조선 시대에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여러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주의 종”은 괜찮은데 “노예”라고 하면 마지막까지도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인은 괜찮습니다. 신하도 괜찮습니다. 군사도 괜찮습니다. 다 나를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고, 내가 어느 정도 유익을 얻을 수 있는 호칭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예는 다릅니다. 완전히 넘겨 줘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속 묵상하다 보니까, 내가 하나님께 제자로서 살아가기로 결정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르겠다고 결정했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자기 포기가 안 된 것입니다. 제가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립니다”라고 찬양할 때나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나 신앙생활 할 때 이야기하지만, 결국 주님께서 마지막 남은 한 가지까지 가져가려고 할 때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쉽게 놓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만족과 유익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지금 마음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불러 보았을 때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노예 누구누구.” 괜찮으십니까? 만약 불편하다면 오늘 이 예배를 드릴 때 그 불편함을 하나님이 다루실 수 있는 거룩한 아침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끝으로 세 번째는 부르신 자리가 바로 사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하다가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고 본질에 집중하지 못할 때,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혹은 누군가로 인하여 상처받고 실족해서 사역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 항상 목 놓아 부르짖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주님, 제발 사람 따르지 말고 사명 따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제발 사람 말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내 인생이 흔들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렇다면 왜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부르신 그대로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간을 내 인생의 값으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마땅히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값입니까? 십자가의 값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고 예수님의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 내 인생. 주님, 내 인생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타이밍이고 예수님의 시간입니다.
그 값으로 사신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치를 보며 사는 종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완전히 속한 종, 그래서 나는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자유인인 것입니다.
끝으로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아멘.
여러분, 혹시 발견하셨습니까? 지금 우리가 24절에서 읽었던 똑같은 표현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세 번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게 많지도 않습니다. 일곱 구절밖에 안 되는데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17절에서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20절에서 “부르신 그대로 지내라.” 오늘 24절에서 또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놓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하루를 살 때에도 계속 조건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헌신하면 나는 더 잘할 것 같은데. 직장이 바뀌면 더 잘할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더 잘할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랑 일하면 더 잘할 것 같은데. 아이들이 다 크면 더 잘할 것 같은데. 건강이 회복되면 더 잘 섬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린도교인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지금 이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더 좋은 조건이 갖춰진 다음이 아니라, 신분이 바뀐 다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입니다. 그 고백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기쁨으로 기꺼이 헌신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멘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 번째,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할례가 있든 없든, 신분이 낮든 높든, 사람의 평가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중요한 요소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이야기하게 내버려 두세요. 내가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냐, 영향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소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내가 얼마나 영향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리이고, 세상의 소리이고, 사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순간에도 나를 향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십시오.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이끌리는 종인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값을 지불하고 나를 사셨습니다. 원래 세상이 나의 주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값으로 나를 사셨기 때문에 나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사람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예수님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마지막 세 번째, 지금 이 자리를 사명의 자리로 받아들이십시오. “조건이 바뀌어야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 생각이고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고 본질적인 생각입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를 여기에 부르셨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누구누구.” 한번 묵상해 봤는데, 이 단어가 혹시 불편하셨던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은 문제점을 찾을 때까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편함이 들지만 그 불편함 앞에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거룩한 불편함입니다. 마지막까지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불편함입니다. 오히려 이와 같을 때 하나님 앞에 가만히 묵상하면서 꺼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내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것은 나의 체면입니까? 내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까? 내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안락함입니까?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예가 되었음을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선포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사람만이 참된 자유인이 되는 역설이 우리 신앙생활의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값으로 사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대해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지금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짖고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거룩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말씀 앞에 내 안에 불편함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 다 드린다고 수도 없이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주님 앞에 놓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 이 시간 그 불편함 앞에 직면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불편함을 통하여 내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유함과 참된 자유가 내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2026.05.17(주) | 주일설교 | 교회를 살릴 소망은 무엇인가? (딤전 4:6-10)
교회를 살릴 소망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4:6-10)
- 제목: 교회를 살릴 소망은 무엇인가?
- 본문: 디모데전서 4:6-10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5-17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좋은 일꾼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본질을 전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지주의적 금욕주의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참된 경건을 형제들에게 깨우치라고 권면한다. 그 일을 감당할 때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지만, 듣기 좋은 위로와 축복만 전한다면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살아날 길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희석하는 데 있지 않고, 원액 그대로 정면 돌파하는 데 있다.
2. 복음의 본질은 위축된 시대에도 여전히 능력이다
설교자는 2007년 아프간 피랍 사건 이후 청년 선교 헌신이 급격히 위축되었던 경험을 나누며, 그때 해결책은 훈련 강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실제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청년들이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 언어를 배우고 전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자 다시 선교 헌신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본질의 힘을 잃고 위축된 것이 문제라는 진단이다.
3. 양육하는 것이 곧 양육받는 길이다
바울은 형제를 깨우치는 사람이 오히려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는 일반 교육학에서 말하는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과도 맞닿아 있으며, 성경적으로는 주는 자가 넘치도록 받는다는 원리와 연결된다. 예배만 소비하는 신앙이 아니라 순예배와 섬김 속에서 양육하고 양육받는 영적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4. 생명을 나누는 교회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교회가 복음을 고이 모셔 두기만 하면 고인물이 되지만, 생명을 나눌 때 복음의 역동성이 일어난다. 예루살렘 교회가 시간이 지나며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반면, 변방의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여 도시와 나라마다 생명력 있는 교회를 세웠다. 1516교회는 경험과 노하우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 비전과 메시지를 나누기 위해 교회를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5. 참된 경건은 좋은 예배자를 세운다
본문의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며, 헬라어로는 좋은 예배와 연결된다. 영지주의가 영적 지식과 종교적 우월성을 자랑했듯 오늘날 교회도 역사, 규모, 건물, 직분, 연륜을 자랑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영혼을 살릴 수 없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경험한 좋은 예배자들을 일으키고, 그 은혜가 가족과 이웃과 세상으로 흘러가게 한다.
6. 교회의 소망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있다
설교자는 한국 교회를 살리고 영적 기상도를 바꾸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비전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고백한다. 교회 개척과 교회 살리기는 치밀한 전략과 헌신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소망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있으며,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시고 특별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
결론
한국 교회가 쇠퇴한 지 오래되었고 팬데믹 이후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무너졌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반전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준비가 다 된 뒤 섬기겠다는 태도로는 영적 전쟁에 나설 수 없으며, 지금 복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을 붙들고 교회를 살리는 비전에 동참해야 한다. 성도들은 골리앗 같은 세속주의와 패배주의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교회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교회를 살릴 소망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강의 아홉 번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영지주의를 차단하고 경건의 훈련에 힘쓰는 교회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6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으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권면했어요. 금욕을 내세우며 종교성을 자랑하는 영지주의가 아니라, 모든 것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참된 경건을 형제들에게 깨우쳐야 한다. 그래야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만약 이것을 하지 않으면 좋은 일꾼이에요, 아니에요?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 소프트하고 스위트한 이야기만 한다면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4장 2절에서 4절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람들이 헌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부담스러운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위로와 회복,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아합니다.
제가 2005년도에 한국을 떠나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4, 5년 사역을 했는데요. 2005년도만 해도 청년 선교사 지원자가 굉장히 많았던 해입니다. 제가 예전에 다니던 온누리교회도 선교 지향적인 교회였기 때문에, 매년 청년 선교사 헌신자들이 수십 명씩 지원했고 해외 국내 아웃리치도 3, 4천 명씩 갔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아프간 한국인 피랍 사건이 터진 거예요. 국내 여론이 선교에 대해서 정말 싸늘해질 정도였고, 세습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면서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십자포화로 쏟아지게 됩니다.
제가 2009년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까 청년 선교 헌신자들은 씨가 말랐고, 온누리교회에도 1년에 한두 명도 지원을 안 하더라고요. 정말 완전히 바닥이었습니다. 제가 돌아와서 대학 청년을 맡게 됐는데, 내가 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야 영적인 부흥이 다시 일어날까 고민했습니다. 비전과 헌신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위로와 축복의 이야기만 해야 되는가 생각했습니다.
온누리교회에 화요성령집회라고 있어요. 상당히 오랜 세월 청년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와 보니까 영적인 열기가 거의 다 수그러들어 있었고, 집회를 한 시간 40분 정도 하고 있었어요.
제가 목사님들과 찬양팀을 모아 놓고 “우리는 이 집회가 성령 충만하게 다시 회복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집회 시간을 지금 한 시간 40분 하고 있는데 세 시간으로 늘리겠다”고 이야기했더니 다들 놀라면서 “한 시간 40분을 해도 잘 안 오는데 이것을 세 시간씩 하면 사람들이 질려서 오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래도 하겠다고 했어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찬양팀이 20, 30분 찬양하다가 한 시간 찬양을 인도하려고 해 보세요. 전력 질주하지 않고는 못 하거든요. 중보팀도 전력 질주를 각오하게 되더라고요. 앞에서 영적으로 이끌어 가는 팀들이 목숨 걸고 하니까, 수백 명 모이던 집회가 세네 달이 지나면서 2천 명이 모이는 집회로 세 배가 늘었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시대가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복음에 물타기를 하고 하나님 나라에 물타기를 해서 해결할 것이냐. 하나님은 원액 그대로 정면 돌파하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다시 살아날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청년들이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데, 사회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개개인으로도 심리적으로 다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 선교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어떻게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청년들이 올까, 훈련 강도를 낮춰야 할까 하는 논의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청년들과 대화를 해 보니까 청년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꼭 세상이 비난해서 이것을 안 하고 싶다기보다는, 교회가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 놓고 실제로 목회자들의 삶이나 교회가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이중성에 너무 많이 실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정말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함께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로 치면 일반병, 육해공군 일반병이 아니라 특전사 같은 프로그램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육해공군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 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한국 교회 거지 전도를 선교단체들도 80년대, 90년대까지는 했고 2000년대 들어와서는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년 선교사 프로그램에 거지 전도 훈련을 넣고 현지에서도 하게 했습니다. 현지에 가면 현지의 언어, 중국어가 됐든 아랍어가 됐든 두 달 만에 마스터하게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2년짜리 TP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2년까지 필요 없습니다. 6개월이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다만 언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스파르타식으로 했습니다. 싱글 청년들은 가능해요. 딸린 가족이 없기 때문에 나가서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하루에 100개 단어씩 외우지 않으면 집에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리고 두 달 만에 아랍어로, 중국어로 자기소개하고 간증할 수 있을 정도까지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공산권에서, 회교권에서 6개월 머무르면서 수백 명에게 전도하고 복음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비밀리지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나오고, 청년들이 “이게 그냥 선교 프로그램 이름만 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복음은 생명을 살려내는구나. 할렐루야”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수십 명의 청년들이 선교 프로그램에 다시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그 프로그램으로 지금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나가게 됐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으로 경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면 가격을 낮출까, 아니면 가격을 낮추려면 안 그래도 원자재비도 비싸고 재료비도 비싼데 농도를 낮출까 이런 고민들을 합니다. 그럴 때 정공법으로 해결하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1516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라는 부르심으로 3년 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한 것이 33년 차입니다. 전도도 위축되어 있고 교회도 위축되어 있고, 부흥은 요원해졌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여전히 지존하시며, 여전히 위대하시며, 여전히 광대하시며, 여전히 전능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의 힘이 떨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면 영혼을 살리게 되어 있고, 교회를 세우면 건강한 교회들은 도시들을 살리게 되어 있고, 부흥은 나라와 민족들을 살리게 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위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축되어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쇠락해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사야 59장 1절 같이 읽어 볼까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변질된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9장 28절과 29절을 제가 읽어 보면,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완성하지 아니하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할 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이 이야기예요.
교회가 복음의 본질, 예배의 본질로 돌아오면 한국 교회는 다시 살아날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다면 어찌 병든 자가 치유되지 않고, 어찌 마음이 상한 자가 회복되지 않고, 어찌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구원받지 않고, 어찌 깨어진 가정이 화합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갈망하고 그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면 교회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 정상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교회 공동체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정면 돌파해야 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이런 어려운 시대에 인본주의나 상업주의적인 전략을 교회에 끌고 들어온다면 그것으로는 교회에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상당히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고, 30대 초반부터 온누리교회 기획 담당을 계속 했거든요.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어떤 프로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1516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통해, 순을 통해, 관계를 통해 회복되시는 것을 보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에게 체험시켜 주신 그 은혜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흘러가서 누군가를 또 살려내고, 다른 성도를 살려내고, 다른 교회를 살려내고, 대한민국을 살려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6절을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형제를 깨우치면 좋은 일꾼이 될 뿐만 아니라, 네가 양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계속 어제 정말 눈을 씻고 세네 번 본 것 같아요. 지금 바울이 주술 관계를 정확하게 이야기했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훈으로 형제들을 깨우치면 믿음의 말씀, 곧 복음의 진리와 좋은 교훈, 성경적인 티칭으로 오히려 내가 양육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앞뒤 순서가 좀 거꾸로 되지 않았나요? 왜냐하면 양육하는 것이 곧 양육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까 이것이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일반 교육학에서도 많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표현이 있는데,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다” 들어보셨죠. 프랑스의 수필가이자 사상가인 조제프 주베르가 이야기한 것인데, 정확한 표현은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다”입니다.
중국의 예기라는 책이 있는데, 유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거기에서 교학상장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가르칠 교자에 배울 학자잖아요.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행동과학 연구소에서 사람의 학습 효과가 언제 상승하는가를 연구해 보니까, 가만히 앉아서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설명할 때 학습 효과가 최대 90%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두 배가 된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두 배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같이 읽겠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우리가 또 이런 구절 좋아하잖아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해 주신대요. 그런데 그것의 전제 조건이 무엇이었나요? 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만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예배 때 받은 은혜도 언젠가는 다 새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은 현장에 나오셔야 하고, 현장에서 예배만 드리고 계시는 구석에 계신 분들은 교회 순예배에 나오셔야 합니다. 순예배에 나오시면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양육받고, 양육받고, 양육하겠습니다.” “저는 신앙 연차가 얼마 안 됐는데요. 그러면 내가 누구를 양육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 섬김을 받는 결과가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세워 주면 결국 그것이 나를 세우는 인생이 되고, 내가 다른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세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명의 능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을 가만히 고이 모셔 두기만 하면 고인물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을 끊임없이 나눌 때 생명의 역동성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정리하면서 “영적인 선순환”이라고 제가 어제 설교문을 딱 써 놓고 나서, 선순환이라고 하다가 엉뚱한 것이 생각났어요. 음식점이에요. 음식점도 순환이 중요하잖아요. 여러분이 잘 모르는 어느 지역에 가셨거나 잘 모르는 거리를 지나갈 때 배가 고프다, 그러면 어떤 음식점에 들어가면 확실합니까? 사람 많은 데, 주차장에 차가 많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야 되면 어떤 경우는 “오늘 종료”, “솔드아웃” 이렇게 붙이는 분들도 있잖아요. 매일매일 그렇게 만들어 내고 생명을 나누잖아요. 콘텐츠를 나누고 소프트웨어를 나누잖아요. 그러면 “저기 바닥나겠네” 이렇게 생각하나요? 아니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끊임없이 맛있게 되고, 끊임없이 충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일반 기업의 원리이기도 한데 영적인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1516교회는 생명을 나누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1516교회는 본질을 나누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역사,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끊임없이 흘러가서 도시마다 나라마다 다윗의 장막을 세워 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비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입니다.
제가 지금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아직 첫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첫 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너 그거 어려운 이야기여도 그 이야기를 해야 돼. 그 이야기를 해야만 좋은 목회자이고, 그 이야기를 해야만 너도 사는 거야”라고 왜 했을까요?
디모데는 굉장히 내향적이고 소심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못 하는 거예요. 해야 되는 이야기, 꼭 해야 되는 그 이야기를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라고, 우리가 뭐라고, 나는 아직 어린데”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적용해 본다면, 1516교회는 개척한 지 3년밖에 안 됐잖아요. 우리가 뭐라고 한국 교회가 살아날 소망이 있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할 자격이 있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작년에 처음 기획하고 준비할 때, 컨퍼런스라는 것은 사역을 상당히 해서 경험도 쌓이고 노하우도 쌓여야 “이렇게 사역하면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컨퍼런스거든요. “조금 시기상조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가 저희 목회자들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축적하고 경험한 사역의 노하우를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하나님의 비전과 메시지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라면 굉장히 오랜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오늘 시작한 교회도 선포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시작한 교회도 적용할 수 있는 거예요.
호세야 6장 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본질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왜 회복을 안 시켜 주시겠습니까. 여기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은 제가 두 주 동안 집회하러 나갔다 오는데 여러분이 한 100명 정도밖에 등록을 안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야 된다는 이야기를 이 설교를 통해서 하는 것이 맞아요. 맞아요.
우리가 신유 집회나 은사 집회 하잖아요. 그런 것은 광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옵니다. 달려옵니다. 몰려옵니다. 소문내서 다 같이 옵니다. 그런데 비전을 이야기하고 부담스러운 사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올지 말지 고민부터 합니다. “오시라”고 하면 “기도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매우 우아하게 영적으로 거절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에게 당장의 유익이 있을까, 과연 다른 교회 세우자, 한국 교회 살리자, 그 이야기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유 집회나 치유 집회, 은사 집회는 가면 당장의 유익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가면 한국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이 안에서 우리끼리 편안한 신앙생활로 간다면, 저는 사실 이 교회를 시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감격적으로 시작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강력한 성령 강림으로 시작한 교회입니다.
게다가 부흥을 어느 정도 많이 했냐면,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3천 명, 2천 명씩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제사장들도 돌아왔어요. 예수님 시대에는 제사장들도 안 믿었잖아요. 그런데 사도들 시대에는 제사장들까지 믿었으니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쌓이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변질됩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고 형식주의에 빠지고, 사도 바울이 복음 증거하는 것을 훼방하기까지 합니다. 교회를 살리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죽이는 교회, 이방인 교회와 지역 교회들을 어렵게 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 반면에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모교회에서 보면 저 멀리 변방에 있는 변두리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변두리 교회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 탁월한 전도자들을 세우죠. 담임목사와 부목사였는데 이 사람들이 선교사로 다 나갑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도시마다 나라마다 놀랍게 생명이 충만한 교회들을 세우는 복음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거예요. 교회의 히스토리를 보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고인물이 되는 거예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막는 역사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복음의 능력이 체험되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음식점이 생각나는데, 순환의 원리, 생명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다시 살리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한국 교회가 왜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까.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영적인 패배주의와 의기소침에 빠져 있고,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개교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이 커지면 여력이 생길까요? 인력 관리, 사역 관리, 자산 관리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그래서 기업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메인터넌스에 모든 시간과 재정과 인력을 다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본질적으로 생명력 있는 교회들이 살아나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한국 교회여, 깨어 일어날지어다. 복음의 본질, 예배의 본질을 전함으로 인하여 전하는 그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가 되고 본질적인 교회가 되는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길을 가는 이유입니다.
7절과 8절 같이 읽겠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영지주의는 영지, 영적 지식을 자랑하잖아요. 그들의 종교적 우월성을 자랑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망령된 것이고, 실체가 없는 허탄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훈련은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godliness,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건이라는 헬라어 단어 유세베이아는 좋은 예배라는 뜻입니다. 참된 신앙, 참된 경건의 열매는 좋은 예배자들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영지주의가 영적 지식을 자랑하지만 그것이 허탄한 이야기였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들이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교회 역사, “우리는 130년이 됐다”, 교회 규모, 성도 규모, 건물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나 교회에서의 직급을 자랑할 수도 있고 신앙 연륜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한 영혼을 살려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교회를 살려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갈수록, 말씀을 깨우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수록 하나님 앞에 좋은 예배자들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가족에게, 이웃에게, 세상으로 흘러가서 나도 살려내고 한 영혼을 살려내고 교회를 살려내는 능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될 참된 영성입니다.
마지막 9절과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그래서 우리가 이런 비본질적인 것을 자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제가 네 살 때 잠실로 이사를 가서 그때부터 한 지역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10대 때까지만 해도 그 교회가 정말 뜨겁고 부흥하는 교회였어요. 한국 교회가 정체기에 들어설 때쯤이기도 했는데, 그러고 나서 그 교회가 영적으로 정체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하나님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 많이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목회자로 콜링을 받아서 장신대에 가게 됐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는 감리교회였기 때문에 교회를 옮겨야 했습니다. 제가 아는 다른 장로교회라고는 목요 경배와 찬양을 다니던 온누리교회밖에 없어서 온누리교회로 가게 됐어요. 26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가운데 어렸을 때 그 모교회를 살려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은 있는데 길이 없는 거예요.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 있으면서 좋은 교회들에서 청빙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느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한 교회 사역을 계속한다든지, 한 교회를 개척해서 그 교회를 훌륭하게 잘 키워낸다면 목회자로서 만족도 있겠고 성도들도 행복하겠지만, 한국 교회 전체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아니잖아요.
제 안에 하나님이 불가능한 꿈을 주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 기상도를 바꾸고 한국 교회 전체를 살리라는 비전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 뜨거운 마음은 주셨는데 이룰 방법이 없으니까 어디도 보내지 않으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교회를 살리는 교회,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배운 목회 경험, 지금까지 연구한 성경 말씀, 지금까지 익히게 된 예배 사역과 선교 사역과 전도 사역과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단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교회 부흥의 비전을 품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0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소망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은 누구의 구주가 되시냐면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적이거나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들을 살리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교회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구원자 되신다고 세상에 외칠 수 있나요? 힘이 없는 거예요.
물론 사람들이 저에게 실현 불가능한 비전을 자꾸 외치는 목동 소년과 같다고 이야기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세속주의의 물결, 패배주의의 물결이 골리앗처럼 강력한데 “당신, 말도 안 되는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만약 골리앗 앞에 섰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너무 무대뽀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상당히 합리적이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 개척 운동은 치밀한 전략과 내밀한 헌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은밀한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컨퍼런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다시금 우리에게 소망을 주셔야 합니다.” 이 간구를 하기 위해서 컨퍼런스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분당에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니까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많은 곳에 왜 교회를 또 세우냐.” 그 이야기는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많은 곳에서 교회가 되겠느냐”라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강남, 서초 그리고 성남, 분당, 용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제2의 바이블 벨트라는 것을 아세요? 전라도 지역이 복음화율이 가장 높기 때문에 전라도 여수, 순천 지역이 첫 번째 바이블 벨트고, 두 번째로 기독교 인구가 높은 곳이 바로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있는 이곳입니다. 영적인 수혜를 보고 있는 곳입니다. 27%에서 28%를 헤아립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 비율이 10%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은 엄청난 수혜를 보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분당은 이미 교회가 포화 상태인데”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저는 “아직 73%가 교회를 안 다니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왜 파이 나눠 먹기를 하려고 생각합니까? 왜 교회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확신이 없습니까? 왜 교회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구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습니까? 왜 교회는 하나님의 꿈을 꾸지 않습니까? 왜 교회는 세상 기업들이나 이야기하는 논리로 블루 오션에 들어가느냐, 레드 오션에 들어가느냐를 이야기합니까?
아니요. 저는 이곳 분당의 복음화율이 앞으로 30%, 40%, 50%가 되어 거룩한 도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이 도시 안에 충만해져서 학교들이 변화되고, 기업들이 변화되고, 가정들이 변화되는 역사, 그냥 그 도시에 살기만 해도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가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역사, 그런 역사가 이 분당에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당을 기점으로 영적인 지진이 일어나서, 하나님 경기도 전역에 복음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대한민국 전역에 부흥을 불길같이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비전은 저 한 사람에게만 주신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비전입니다.
비전은 전염성이 있는 것입니다. 비전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청년 팀 리더들을 만나고 왔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청년들의 현실이 쉽지 않고 신앙적으로도 쉽지 않은데, 이런 교회 비전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 거리가 멀다고요. 그래서 제가 “청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인들도 마찬가지다”라고 했습니다.
여기도 교회 오신 지 6개월, 1년도 안 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를 살리자니요. 그래서 저랑 같이 가시는 분들은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느 부서에 가거나 어느 캠퍼스에 가면, 제가 오는 것을 목회자들이 일단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대충 무엇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그냥 시간을 때우거나 자리를 메꾸는 것으로 목회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청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저희는 토플, 토익을 봤습니다. 요즘은 오픽 시험을 보는데, 내가 영어 공부가 준비되면 시험 봐야지 하면 몇 년이 가도 시험을 못 보게 되어 있습니다. 시험 날짜를 딱 정해 놓고 어플라이해야 그때부터 공부하게 되잖아요. 준비가 다 되면 내가 외국 사람하고 대화하겠다 하면 평생 대화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부딪혀야죠.
교회가 다른 교회를 살리고, 교회가 개척 준비가 되고, 교회가 영향력이 생기면 우리가 다른 교회를 섬기겠다? 언제쯤 할 수 있을까요. 제가 큰 교회도 있어 봤고 작은 지역 교회도 있어 봤는데요. 이것은 준비의 문제가 아니라 비전의 문제고 마인드셋의 문제입니다.
제가 밴쿠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많이 부흥시켜 주셨어요. 그런데 초창기였습니다. 간 지 한 6개월도 안 됐을 때 제가 지역 교회들을 돕겠다고 했어요. 너무 열악해서 주일에 반주자도 없고 혼자 목사님이 찬양 인도하고 설교하는 교회에 “반주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 없는 교회에 “주일학교 선생님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담당하는 수석부목사가 저에게 “목사님, 우리 교회도 지금 할 일이 많은데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돈 주는 것은 지나가다 걸인에게 돈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하루 세 끼 먹을 것을 한 끼 나눠 주고, 하루 종일 못 먹는 사람에게 한 끼를 나눠 주고, 나는 두 끼만 먹겠다고 결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성이다.”
준비가 되면, 여유가 생기면 언제 우리가 도울까요. 전쟁이 났습니다.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은 세속주의의 물결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영적 전쟁은 이미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가 되면 전쟁터에 나간다면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요. 나라를 잃고 나서 나갈까요? 한국 교회가 다 무너지고 나서 우리가 나갈까요?
여러분,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준비가 되고 나서 한다? 저도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 교회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는 지 33년째라는 것입니다. 팬데믹 때 교회를 떠난 사람만 75만 명입니다. 팬데믹 기간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만에 15,000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지금도 목회자들을 만나면 이제 그만 교회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교회를 살려야 합니다. 교회를 살려야 합니다. 교회를 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 너무 답답한데,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보신 분이 있다면, “저 목사님이 왜 저렇게 지쳐 있을까” 하며 목사님이 불쌍해서 기도를 한 번이라도 해 보신 적이 있다면, 한국 교회가 살아나기를 안타깝게 탄식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이 비전에 동참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날, 하나님이 이 시대에도 살아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면 33년이 됐든 100년이 됐든 하나님은 반전시키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역사의 현장에,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과 같이 서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지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지어다.
2026.05.16(토) | 새벽기도 |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간다는 것 (고전 3:16-23)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간다는 것 (고전 3:16-23)
- 제목: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간다는 것
-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6-23절
- 설교자: 고대욱 목사
- 날짜: 2026-05-16
- 예배: 새벽기도
설교 요약
1.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나 종교적 공간을 뜻하는 히에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소와 지성소를 뜻하는 나오스이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임을 넘어, 성령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공동체이다.
2. 성전의 삶은 거룩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에, 성전 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를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강하게 경고한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관계와 습관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죄와 타협하거나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며 공동체를 흔들 수 없다.
3. 죄에 무뎌지지 않는 민감함이 필요하다
죄는 처음부터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 먼저 우리의 기준을 무디게 만든다. 처음에는 마음에 걸리던 말과 습관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삶의 방식처럼 굳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가 없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 앞에서 애통해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거룩을 향해 몸부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4. 세상 지혜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지혜를 붙들어야 한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음란이나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세상 지혜를 사랑하고 사람을 기준으로 공동체를 나누는 마음이었다. 바울은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참으로 지혜롭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지혜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5.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아볼로, 게바를 따라 편을 가르며 사람을 자랑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이며, 어떤 지도자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성도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며,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삼으신 은혜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산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기억하며 말과 생각과 습관과 관계를 거룩하게 세워 가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와 사람 자랑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지혜를 붙들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된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느니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아멘.
암송 말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 함께 암송하시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멘.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을 더욱더 바라보는 은혜의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성전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전을 말할 때 대표적으로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는 히에론이고, 다른 하나는 나오스입니다.
히에론은 성전의 건물 구역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 안에 있었다고 고백할 때 쓰였던 단어가 바로 이 히에론입니다. 반면에 나오스는 히에론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전의 건물 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중심인 성소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성전의 단어는 나오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는 성전의 건물, 어떤 구역, 종교적 공간에 모이는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너희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소와 같다. 성령이 거하는 처소와 같다.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삶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날 우리의 삶을 비춰 본다면, 신앙 공동체란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임,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고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우리 1516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과 생각과 관계와 습관들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공동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말들이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고백이고, 우리의 생각들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고, 우리가 하는 모든 관계와 행동들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면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죄와 타협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사람을 평가하고 공동체를 흔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와 우리는 이것을 자주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바울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 너무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성령님의 존재를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직장 생활 속에서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뒷담화를 하고, 잘못된 관행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다들 이렇게 하니까 타협하고 불법을 행합니다. 거짓과 세상의 자랑과 탐욕을 붙들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정체성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삶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삶의 모든 판단이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는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 행하는 모든 언어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고린도교회와 우리를 다시 깨우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믿으십니까? 아멘.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서 17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무엇이 회복되어야 하는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절 말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렇다면 무엇이 회복되어야 할까요? 거룩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17절에서 바울이 아주 강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성전과 거룩에 대한 분명한 마음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레위기 15장 31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막을 부정하게 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민수기 19장 20절 말씀을 보면 부정한 몸으로 성소를 더럽히면 총회에서 제명당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성전, 여러분들의 교회, 또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분노하셨습니까? 단순히 장사하는 행위 때문에 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 예배드리는 성전이 탐욕이나 종교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방관하는 태도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여전히 불평과 불신과 서로를 향한 부정적인 언어들로,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지혜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세상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회색 지대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도 없이 살아간다면, 여전히 탐욕과 자기 자랑과 쾌락 속에 살아간다면, 과연 그것이 성령이 함께하시는 성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5절과 1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아멘.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에 둔감할 때가 참 많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죄가 시간이 지나면 둔감해집니다. 처음에는 마음에 찔렸던 말들, 설교를 통해 들었던 말씀 앞에서 내가 행하겠다고 결단했던 마음들이 흐려집니다. 처음에는 조심했던 습관들이 나중에는 당연한 삶의 방식이 됩니다. 죄는 처음부터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살짝 무디게 만듭니다. 찔림을 약하게 만들고, 기준을 흐리게 만들고,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심어 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죄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거룩에 민감한 삶, 죄에 대해서 민감한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것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고린도는 수많은 문물과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굉장히 풍요롭고 여러 문화가 섞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음란과 쾌락의 유혹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 한복판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탐욕과 쾌락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구별되지 못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파벌을 만들고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그들을 향해, 또한 그런 동일한 우리의 모습 가운데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너희의 삶을 더럽히지 말아라.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한다.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를 세상의 욕망으로 채우지 말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전이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더 치열하게 분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조금만 우리가 깨어 있으면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한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먹는 것까지도 구분하세요. “내 몸이 성전인데 불량한 것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치킨을 끊으셨어요. 그 행복을 끊은 것입니다. 최대한 몸에 해로운 것을 피하고 건강하게 먹으려고 애쓰십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선배님하고 밥 한 번 먹으려면 쉽지 않습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열함이 어느 순간부터 부러웠습니다. 단지 건강에 예민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작은 영역까지도 함부로 두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그런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작은 영역까지도 치열하게 묻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몽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제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욕을 정말 잘했습니다. 말끝에 늘 욕이 있었습니다. 제가 남중, 남고를 나왔거든요. 대화에 욕이 없으면 대화가 안 됐습니다. 그랬던 제 모습 속에서 예전에는 겉멋이 들고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렇지 않게 욕을 하고 친구를 향해 부정적인 언어를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이 성전인데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그런 질문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뒤돌아보니 이것이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던 것들이 이제는 마음에 찔리기 시작하는 것, “내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 이 치열함 속에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하시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번에 욕을 끊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아멘.
거룩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치열한 싸움입니다. 거룩은 분별의 싸움입니다. 거룩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이 자리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죄가 있습니다. 저도 죄가 있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도 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가 전혀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무뎌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앞에서 애통해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거룩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죄든 하나님 앞에 토로하십시오. 숨기지 마십시오.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타협하지 마시고 무뎌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결단하십시오. 성전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탐욕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세상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 사람을 자랑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마음들이었습니다.
18절에서 20절 말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느니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바울이 성전과 거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제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의 거룩을 무너뜨리고 있는 문제는 음란이나 도덕적 타락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세상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붙잡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세상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배경 있는 사람, 더 세련되고 능력 있는 지도자들을 따라 편을 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비교하고 지도자를 자랑하고 파벌을 만들고 자기 편을 세우는 세상의 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이 말을 왜 합니까?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은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성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지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고 있는지, 내가 정말 나의 자존심과 욕망대로 분열을 만드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희생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지, 정말 거룩의 성전을 세워 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지, 나 자신은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속일 때가 많습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도, 회사를 운영할 때도, 미래를 준비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 지혜와 내 경험과 내 계산과 내 통제력을 붙들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함이 숨어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지혜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저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지혜인 줄 믿습니다.
그렇게 거룩과 지혜가 서로 연결됩니다. 세상 지혜를 붙드는 사람은 결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바뀌는 것이고, 나의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거룩은 세상의 지혜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지혜를 붙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룩은 내 계산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라보고 나의 판단과 경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8장 1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통한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 하나님을 통한 지혜는 사람을 바꿉니다. 얼굴을 바꾸고 말투를 바꾸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고집으로 굳어진 얼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는 평안의 얼굴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온유함의 얼굴이 있을 줄 믿습니다. 아침 시간이라 서로를 바라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바라보십시오. 크리스천들의 삶은 정말 다릅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미소가 있습니다. 만약 내 얼굴이 찌그러져 있다면 하나님을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의 얼굴에 평안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세상 지혜에 속지 마세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성전 된 삶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내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미련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나아가는 삶 가운데 평안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을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 지혜를 붙들면 결국 사람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붙드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이 21절에서 23절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바울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 미련함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지혜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스승 밑에 있는가, 그 사람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을 자랑했고, 아볼로를 자랑했고, 게바를 자랑했고,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어느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받는 존재일 뿐입니다. 종일 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자도,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은사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도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람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어떤 목사님과 함께하고 있는지,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랑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경험한 사역을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나뉘고, 사람을 중심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더 가진 것을 얻고 더 지혜가 있다고 해서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낫냐, 누가 더 영향력 있느냐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지혜를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다 어리석을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내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내 의로움을 자랑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그 은혜만을 자랑하는 삶.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자랑하는 삶. 부족한 나를 성전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새롭게 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자랑하는 삶.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 1516교회의 자랑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삶이 되십시오. “나는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부족한 나를 하나님의 성전 삼으신 그 은혜를 자랑하는 삶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 나의 삶이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 위해서 나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놓고 십자가의 지혜를 붙드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정말 그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말과 생각과 습관과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우리 1516교회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이 말씀을 붙들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2026.05.14(목) | 4321 워십 | 복음을 가르쳐 온전케 하라 (마 4:23-25)
복음을 가르쳐 온전케 하라 (마태복음 4:23-25)
- 제목: 복음을 가르쳐 온전케 하라
- 본문: 마태복음 4장 23-25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5-14
- 예배: 4321워십
설교 요약
1. 복음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5월부터 8월까지의 주제는 “복음,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단순한 교리나 지식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지정의 전 존재를 온전케 하는 실제적인 능력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생명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2. 광야의 영성을 가지고 도시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며 영적 전쟁을 치르신 뒤 갈릴리 모든 도시를 두루 다니셨다. 광야의 영성은 결핍, 겸비, 고독, 침묵으로 설명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채우시고 높이시며 동행하시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도시를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광야에서 훈련된 영성으로 도시를 대면하고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3. 도시의 영성은 섬김과 나눔과 증거다
도시는 풍요와 교만, 군중과 소란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결핍과 고독이 있는 영적 광야다. 그러므로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섬김과 나눔과 증거의 영성이 필요하다. 초대교회가 선행과 구제, 물건의 통용과 나눔, 성령의 권능을 통한 증거로 도시를 섬겼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도시의 어둠을 치유하고 회복해야 한다.
4.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다
예수님은 회당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회당이 병들어 있었듯 오늘날 교회도 연약함이 있지만,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므로 포기할 수 없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포하며, 믿음의 반응으로 이끌어야 한다.
5. 진리의 말씀은 거짓을 몰아내고 치유를 일으킨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신 뒤 백성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신유와 은사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복음 위에서 성령의 치유 역사가 나타나야 건강하다.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거짓의 영과 어둠의 역사는 떠나가고, 영혼과 마음과 몸의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6. 거짓의 속박에서 자유케 되어야 한다
교만, 자기 비하, 절망, 미움, 욕심은 모두 사탄의 거짓말이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동시에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내어 주신 존재다. 성도는 “내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내 영혼의 구원자는 예수님이십니다”라고 선포하며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결론
복음은 도시 한복판에서 우리의 삶을 회피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도시와 가정과 교회와 내면의 어둠을 대면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진리의 말씀을 먹고 성령으로 호흡할 때, 우리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치유받아 다시 치유자로 세워진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둠을 끊어 내며,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살아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성령의 불로 임하소서”라는 주제로 한 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게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응원했습니다. 저희가 5월부터 8월까지 주제로 삼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선포할 테니까 따라해 주세요. 복음. 하나님의 능력. 복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그냥 교리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능력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복음을 가르쳐 온전케 하라”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안에 선포될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 우리의 지정의, 전 존재가 온전케 되는 회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3절 말씀을 다시 보면 맨 처음 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온 갈릴리에 어떻게 하셨다고요? 두루 다니셨다. 갈릴리 마을들 가운데 들어오셔서 안 다닌 데가 없을 정도로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go about”이라는 단어로 번역했고, NASB에서는 “going throughout”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개념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안으로 들어가셔서 모든 도시를 관통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거리를 걸어 다니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은 도시의 영성입니다. 광야의 영성은 들어봤는데 도시의 영성은 낯설 수 있습니다. 광야의 영성과 도시의 영성을 나누겠습니다.
광야 영성의 첫 번째는 결핍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결핍이 끊임없는 존재입니다. 밑 빠진 독 같고, 은혜 충만하게 받았다고 돌아왔어도 다시 고갈됩니다. 한 끼 먹으면 배부르다가도 돌아서면 다시 배고픕니다. 인생의 결핍의 반복은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이 결핍 덩어리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광야라는 공간 자체가 인생이 결핍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광야의 영성 두 번째는 겸비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이 40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 행하려고 하는지 너의 진심을 테스트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광대한 광야에 들어가면 사람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이 광야에서 생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영성 세 번째는 고독입니다. 열왕기상 19장 8절 하반절에 보면 엘리야가 40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낙심한 엘리야를 홀로 광야로 부르시고, 40일 동안 광야로 들어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서게 하십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는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이 나를 구원해 주지 못하고, 아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남편이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것, 이것이 광야 영성의 세 번째입니다.
광야 영성의 네 번째는 침묵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강한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고 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다가, 정적이 흐르니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광야는 조용한 곳입니다. 침묵의 공간이고 정적의 공간인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나 많은 세상 소리를 듣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도심 한가운데로 들어가시기 전에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셨습니다. 금식하시면서 놀라운 영적 승리를 거두셨고 하나님의 지지를 얻으셨습니다. 이 광야 영성 네 가지, 결핍과 겸비, 고독과 침묵을 봤습니다.
이 네 가지는 우리가 생각할 때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결핍 가운데 나를 채우시는 하나님, 겸비함 가운데 나를 높이 세워 주시는 하나님, 고독 가운데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침묵 가운데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는 내 인생의 광야를 빨리 벗어나고 싶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주요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이 다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전부 광야로 부르셔서, 광야에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고 변화시키시고 부르셔서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에스겔도 그렇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광야의 훈련장에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이 광야의 훈련장에서 인생과 신앙과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러분이 하나님의 레슨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트레이닝을 정확하게 받으면 광야는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훈련이 제대로 안 됐는데 광야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40일 정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40년을 돌았습니다. 광야의 훈련이 제대로 안 됐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것은 축복이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감당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도시의 영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시는 광야와 정반대입니다. 결핍이 아닌 풍요, 겸비가 아닌 교만, 고독이 아닌 수많은 무리와 군중, 침묵이 아닌 소란으로 가득한 곳이 도시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요? 우리는 이 도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시 인근에 텃밭 일구고 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는 거의 다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이곳이야말로 영적인 광야구나” 느껴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유대 광야 10년이 정말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영적으로 척박하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곳이 전쟁터고, 정말 힘든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층 빌딩 숲속에 살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면 필요한 것이 풍요롭게 다 채워지고 좋을 것 같지만, 그곳도 결핍의 공간이고 고독의 공간입니다. 우리나라 현재 상황을 체크해 보니 서울, 인천, 경기권에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인 51%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총 5,109만 명 대한민국 인구 중에서 2,611만 명이 서울, 인천, 경기에 살고 있습니다. 비수도권보다 수도권에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 2019년 12월 기점이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대한민국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수도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방 자치나 균형 발전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도시로 도시로 향하는 이 흐름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바꿀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사도 바울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시 선교를 한 것입니다. 20세기 선교 전략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대두된 것이 urban mission, 도시 선교입니다. 도시를 타기팅해서 선교하면 도시가 변화되고, 그 주변 지역과 countryside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에 나온 탁월한 선교 전략처럼 보이지만 이미 사도 바울이 1세기에 했던 전략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갈릴리 모든 도시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영적 전쟁에 승리하시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이후에 도시로 진입하셨고 도시를 관통하셨습니다. 도시를 변화시키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기독교의 영성은 회피의 영성이 아니고 대면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숨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모여서 “몇 월 며칠에 주님 재림하시니까 흰옷을 입고 기다린다”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회피의 영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면의 영성이 죄인들과 싸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죄 문제를 십자가가 정면 돌파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탄과 어둠의 권세, 저주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깨뜨리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는 도시 안에 살아가지만 어떻게 하면 도시 안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도시 안에 있지만 어떻게 광야의 영성으로 살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그 고백이 가능하면 우리 영혼을 채우시는 공급자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도시는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홀로 있든지 군중 가운데 있든지, 골방에 있든지 광장에 있든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도시의 영성은 무엇입니까? 광야의 기본 영성을 장착한 사람들이 도시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도시 영성의 대전제입니다. 그리고 도시의 영성에 또 필요한 것은 섬김과 나눔과 증거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섬김, 나눔, 증거.
사도행전 9장 36절 하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도시는 빈익빈 부익부가 굉장히 심화되는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는 항상 빈민이 많고 빈민 지역이 형성됩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기꺼이 돕고 섬기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도시 영성 두 번째는 나눔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나눔의 영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먹는 것도 아무리 맛있어도 나눠 먹으시기 바랍니다. 같은 숟가락으로 장을 푸라는 말은 아니고요. 그러나 나누어 드실 수 있어야 하고, 누가 필요하다고 하면 옷도 나눠 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업에 투자하라는 것은 하지 마시라는 것이지만, 어려운 분이 있으면 기꺼이 여러분의 물질을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눠 주세요. 빌려 주는 것은 거액을 빌려 주고 투자 사기를 당해 어려워하지 마시고, 그냥 줄 수 있고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만큼을 주세요. 이 flowing이 편한 분들을 보면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가려는 분들입니다. 루터가 말한 지갑의 세례입니다. 정말 연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의 사랑의 손길이 될 수 있으면, 여러분의 삶이 회심의 차원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누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제가 헌신, 헌금 이야기를 하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반응하는 순간 내가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나누세요. 저는 후원하고 계신 목사님들, 선교사님들을 만나면 제가 상황이 되면 항상 헌금을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누고 섬겼던 분들이 저는 다 잊어버렸는데, 그분들이 와서 이야기를 해 주세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 주고 자기 소유를 나눠 주는 것은 마치 물에 뿌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flowing의 삶이 되어야 신앙이 완성의 단계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광야의 영성이라는 것은 광야에서는 많은 것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옷도 많이 필요하지 않고 먹을 것도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영성으로 도시에 살면 나눠 주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도시의 영성 세 번째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도시에 화려하고 부요한 것이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최고의 가치인 줄로 믿습니다. 가장 좋은 소식,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시에 살면서 도시의 병폐에 빠지고 도시의 어두움에 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영성을 가지고 도시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모든 도시들을 관통하시면서 어디에서 사역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회당에서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이 문제의 장소가 될 것을 예수님이 예상하지 못하셨을까요? 당연히 예상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는 종교로서 가장 비참하게 쇠퇴하고 부패해 있었습니다. 유대교가 병들어 있었고 회당들이 병들어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런 병든 회당을 등지고 무조건 밖에서 사역하셨습니까?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회당을 등지고 다른 곳에서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회당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사도 바울도 회당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교회가 병들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교회를 외면하고 포기하겠습니까? 우리가 평생 포기하지 말아야 할 두 개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가정, 교회입니다. 이 두 개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의 원가정이 아무리 역기능적일지라도 원가정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아무리 연약하고 문제가 많을지라도 교회를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교회가 살아나는 것을 꿈꿉니다. 이 꿈 때문에 1516교회를 시작했고, 예배 교회 컨퍼런스를 하고, 4321워십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픈워십을 담당하는 우리 사역팀들, 워낙 좋은 팀이지만 또 예배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예배 인도자들, 좋은 세션들, 좋은 찬양 사역자들이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에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날 찬양 사역을 하는 교회 음악, 실용음악 전공 20대의 좋은 인재들이 전부 유튜브 온라인으로 가 있습니다. 교회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교회 들어오면 이래라저래라 구속하고 간섭하고 통제하니까, 본인들이 하고 싶은 찬양 사역을 마음껏 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갑니다. 저는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모체인 교회 공동체를 살려내야 합니다. 교회에서 탁월한 찬양 사역자들이 나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오늘 본문에 보면 가르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백성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teaching, preaching, healing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담지하고, 이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보라통으로 온 교인이 통독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20년 통독 사역을 하면서 가장 큰 유익은 저 자신이 받는 것이고, 목회자들에게도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사역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설교 준비할 때가 돼서야 성경을 보는 일이 생깁니다. 통독 사역을 한다는 것은 목회자에게 성경을 읽게 하는 축복입니다.
성도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입니다. 인생에 문제가 생기고, 신앙과 삶과 세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궁금증과 갈급함과 문제가 생겼을 때 성경 안에서, 이 진리 안에서 해답을 얻고 마음의 치유를 얻고 해소가 된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제가 이번에 온누리교회 말씀 사경회에 가서 일주일 동안 보라통 Q&A 질의응답편 총동원회를 하기로 했는데, 준비하면서 제 안에 감동이 있더라고요. 앞으로 저는 성경 진리 응답 사역을 더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합니다.
전에 한번 나눴지만 이단에서 돌아온 성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나는 성경을 알고 싶은데 교회가 성경을 안 가르쳐 준다.” 교회가 성경을 안 가르친다니요. 교회가 왜 성경을 안 가르칩니까? 1516교회는 모두가 통독하는 교회입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복음 맛집이 되고 말씀 맛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가르치시고, 전파하셨다. 이 전파라는 단어, 케리그마는 선포입니다. 영어로 proclamation, proclaim이라고 합니다. 제가 설교자들에게 설교론을 이야기할 때 꼭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의는 설명이지만 설교는 선포입니다. 진리는 설명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를 받아들여야 되는 문제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변증의 시대가 되었고, 저는 성경에 대한 질문, 인생과 신앙에 대한 질문을 변증적으로 답변하고 해설해 드리는 일에 진심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제가 전도하면서 했던 진리 응답들을 『새신자가 묻다』라는 책으로 낸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증의 마지막 단계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번 설득해 보세요. 제가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위계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절하게 설명도 해 주시지만, 결국에는 내가 그분 앞에 엎드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변증의 끝은 선포이고, 설명의 끝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이 설명은 사실 다 의미가 없어집니다.
구약 통독의 마지막 부분에 하박국이 나오는데, 하박국도 신정론이고 욥기도 신정론입니다. 하박국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의로운 것처럼 “도대체 세상 경영을 왜 이런 식으로 하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다 설명해 주십니다. 총 세 장밖에 안 되는데 그 안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설명 한가운데 하신 말씀이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이 설명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의인이냐? 네가 그렇게 의로워서 나를 추궁하느냐? 네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대적인 자기 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결국에는 설명이 멈추고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믿기 위해 질문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질문을 위해 질문하는 사람, 의심하기 위해 의심하는 사람은 의심의 뫼비우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박국에게는 설명을 해 주셨지만 욥에게는 하나님이 42장까지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만 선포하십니다. 그런데도 욥은 그것만으로 회개했고 만족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믿음이 훌륭한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성경을 다 알아서, 성경을 다 설명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영혼 구원의 열정이 있는 사람, 믿음의 선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도시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 좋은 소식, 바른 소식을 알려 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4장 23절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올바른 소식입니다. 이것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거짓된 소문, 모든 나쁜 소문, 모든 악한 소문이 진실이 선포될 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선포되면 거짓은 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교회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 teaching과 preaching이 먼저 있고 나서 예수님도 healing을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나 집회가 매력적이고 신유 집회와 은사 집회를 열심히 하는데 말씀이 없고 복음이 없다면 거기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신유와 은사는 불교 집회에도 있습니다. 불교에도 방언이 있고, 이신 체험이나 극락 체험도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모든 종교에는 영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고 복음이 없으면 현상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기 때문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2년 전에 목사님들과 미국의 예배 사역을 탁월하게 잘하는 교회들을 탐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베델교회를 방문한다고 하니까 몇 분들이 걱정하셨습니다. 그 교회가 너무 spiritual sign으로 치우쳐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델은 “하나님의 선하심” 같은 곡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예배 사역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왜 그 교회가 건강하게 영향력이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예수님처럼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건강할 수 있는 비결은 모든 찬양과 모든 예배가 성경 말씀, 설교 말씀에 기초해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베델 워십 미니스트리에서 나온 곡들을 보면 전부 성경 말씀이 가사입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다 성경에 기초해서 하기 때문에 건강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성령 사역을 한다고 하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따라가지 마세요. 반대로 보수적인 교회들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역사를 원천 봉쇄하려고 합니다. 통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통제하셔야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teaching과 preaching을 먼저 하시고 healing을 하셨습니다. healing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향을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진리의 말씀이 임할 때 거짓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거짓된 현상들도 흩어지고 떠나갈지어다. 오늘 본문의 23절과 24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지어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심비에 새겨지고 진리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으로 살아낼 때 모든 고질적인 질병들이 치유될지어다. 고혈압과 당뇨와 고지혈, 관절과 천식, 위장 장애는 치유될지어다.
24절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북쪽이 수리아 지역입니다. 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 일반 사회, 성경에서 베니게라고 하는 페니키아 문명 중심지 북쪽까지도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모든 앓는 자”를 원어적으로 보니 모든 안 좋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안 좋게 지으셨습니까? 보시기에 좋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좋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사망과 저주의 권세가 들어오고, 우리가 사탄에게 종노릇하고 노예살이를 하면서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이 망가지고,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망가지고, 인격과 존재가 망가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떠나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게 되니까 사람이 시들시들해집니다. 여러분 안에 누구를 미워하면 소화도 잘 안 되고 잠도 잘 안 오고 일에 집중도 안 됩니다. 미워하지 마세요. 사람이 병을 치료하려면 약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경을 바꾸고, 먹는 것부터 바꾸는 식이요법도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듣는 정도가 아니라 내 체질이 될 정도로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호흡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치유됩니다. 치유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제가 우울과 불안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셔서 어머니가 굉장히 힘든 상태에서 저를 낳으셨고, 깊은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이 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온몸에 병이 생기더라고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온몸이 종합병원이었습니다. 늘 두통과 편두통과 안구통에 시달렸습니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프고, 머리가 쪼개지듯이 아팠습니다. 비염도 너무 심해서 고동색 콧물이 하루 종일 나왔습니다. 그러니 책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식도염과 위염, 식도 경련과 위경련도 있었고, 급성 기관지염도 있었습니다. 목에서 식도와 기도로 나뉘는 기능도 안 좋았고, 기도 쪽과 폐도 안 좋고, 위장도 안 좋았습니다. 뭐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마다 다 힘들었습니다. 허리가 아프면 며칠을 기어 다녔고 학교도 못 갔습니다. 양측 슬개골 연골 연화증도 있었습니다. 영양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초등학교 1, 2학년 때까지도 20kg가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때는 완전히 앙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별명이 에티오피아 난민이었습니다.
제가 무릎을 붙잡고, 허리를 붙잡고 “하나님 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중상 올라가는 겨울쯤에 현대인의 성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거 반년 만에 읽어 봐”라고 해서 저는 숙제인 줄 알고 매일 열심히 한두 시간씩 읽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정말 쉽습니다. 낮에는 성경을 읽고 저녁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성경 일독을 다 마치기 전에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에베소서 1장 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저는 이 전체 문장이 아니라 “평강”이라는 한 단어가 제게 임했습니다. 제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죽을 뻔했기 때문에 “나는 살면 안 된다”는 것이 입력된 아이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어딜 가도 늘 불안했습니다. 학교에 있으면 학교에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집에 있으면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어디에 가도 내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부적감과 불안함과 우울함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상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평강”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제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거대한 해일이 저를 덮는 것 같았습니다. 할렐루야. 온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폭풍같이 떨어지고, 제 안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과 어두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데 마치 구토하듯 제 안의 모든 어둠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그 후에 제가 낮에는 성경을 읽고 밤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두 달이 지났는데 제 허리, 무릎, 코, 어디도 아픈 데가 없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서 어두움이 빠져나가니까 육신이 치유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해 보세요. 마음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하고 우울에 빠져 보세요. 자살 충동을 하루 저녁에도 책상에 앉아서 다섯 시간씩 묵상해 보세요. 몸이 멀쩡할 수 없습니다. 몸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치유되니까 육신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고통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고통당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통을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을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고통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당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로부터 주님께서 자유케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고치시더라.” 고치신다는 단어를 찾아보니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영적인 고통, 귀신 들린 사람을 귀신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도 며칠이나 몇 주 지나면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의 자리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기능적인 가정, 역기능적인 일터, 역기능적인 인생이 변하지 않으면 다시 망가지는 것입니다. 한 의사 장로님이 신장, 췌장 이식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분이셨는데, 평생을 병원 앞에 사셨습니다.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장기가 오면 달려가서 기다리던 환자에게 이식 수술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몇 달 만에 다시 돌아오는 환자가 가장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맵고 짜게 먹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스트레스 받고 분노하며 살면 몇 달 만에 사람이 다시 망가져서 온다는 것입니다.
귀신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어둠의 세력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무당들도 “저도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위계질서에 최고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기도해도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지 않습니다. 즉각 해결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이야기하면 저는 즉각 해결해 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적을 통해서든 굿을 통해서든 바로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래는 인생을 더 깊은 어둠과 수렁으로 빠뜨립니다.
배우자를 미워하고, 일주일째 미운 마음을 품어 보세요. 사탄이 틈을 탑니다. 우울도 사탄이 틈타는 통로입니다. 저는 우울에 절어서 살아 봤습니다. 완전히 어둠의 영이 장악합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보세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질투하고 시기에 빠져 보세요. 다 어둠의 영의 역사에 노출되고 속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각해지고 중증이 되면 귀신 들림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진리의 말씀이 임할 때 거짓의 영은 떠나갈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어둠의 영들, 거짓의 영들, 우리 안에서 악한 일들을 일으키는 귀신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우리는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런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무엇을 선포해야 합니까? 저를 따라해 보세요. 내 영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 영혼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귀신 들린 사람을 놓고 처음에는 상담을 합니다. 상담할 때는 멀쩡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반적인 기도에는 멀쩡하다가 그 사람에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의의 자녀이고 사랑받는 자녀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자시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자인데 남자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때 어둠의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귀신들은 예수님만 나타나면 자진 신고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셨습니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무저갱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예수님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어둠의 영의 역사가 끊어지고 떠나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자유함을 얻을지어다.
제가 전에 밴쿠버에서 주중 저녁 성령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300명 정도가 통성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내면의 힘들고 어두운 것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니 회중석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높은 단 위에 있는 찬양 싱어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교회 남자 집사님들이 그 자매를 끌어내리려고 하길래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자 교육자들을 불러 함께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 자매가 가정에서 상처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상처의 뿌리와 트라우마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역사가 나타나자 그 고통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응급실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응급실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상처와 아픔, 인생의 상처와 트라우마, 육신의 질병을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치유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으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북쪽의 수리아에서도, 갈릴리 건너편의 데가볼리에서도, 남쪽의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요단강 건너편까지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내 인생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저를 따라해 보세요. 예수님은 내 인생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고치시더라”는 말은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는 뜻과 함께 반대 상태로 고쳐 놓으신다는 원어적 의미가 있습니다. 얼어 있는 사람을 풀어 주시고, 묶인 사람을 자유케 해 주십니다. 병자였던 사람이 치유되어 이제는 병든 사람을 치유해 주는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거짓말에 묶여 살던 사람이 진리를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성경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느냐면, 너무 원수에게 속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수의 거짓말에 속아 사는 것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가정이 망가지고 신앙이 망가지고 교회가 망가지고 건강이 망가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할렐루야.
성령님이 어떤 신비한 능력만으로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포되면 거짓은 사라집니다. 법정에서 거짓 증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진리가 선포되면 거짓 증언은 효력을 상실합니다. 빛이 임하는 순간 어둠은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위눌리고 악몽을 계속 보고 귀신의 공격을 받는 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유함을 얻을지어다. 관계의 악연은 끊어질지어다. 육신의 질병 가운데 있는 분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절망감에 빠져 있는 분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분들, 그 원수의 거짓말은 끊어지게 될지어다.
교만도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탄이 처음 한 거짓은 자신이 섬기는 천사인데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데 그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업적을 이루어도 인간이 교만한 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직입니다. 크리스천의 영성은 정직입니다.
자기 비하도 거짓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무너졌어도, 아무리 깨어져 있어도, 아무리 병들었어도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자기 비하하지 마세요. 그것은 나를 만드신 분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에도 빠지지 말아야 하지만 자기 비하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도 거짓말입니다. “내 인생은 절망이야”라는 생각도 거짓말입니다. 인생이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인생은 완벽할 수 없고 결핍이 있습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구원자 하나님을 붙잡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넌 여기서 끝이야”라고 속삭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살 충동도 거짓말입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도 세상 따라 하지 마세요. 나의 생명을 살리시고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주셨는데 왜 죽으려고 합니까?
미움도 거짓말입니다. “미워 죽겠어” 하다가 실제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상담하러 와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남편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요? 부모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남편만 죄인입니까? 아내만 죄인입니까? 부모만 죄인입니까? 자식만 죄인입니까?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왜 정직하지 않습니까? 내 죄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내 가족의 죄는 하나님께 고발해야 합니까? 정직하지 않은 기도를 계속하면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응답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될지어다.
욕심도 거짓말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결핍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결핍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결핍이 없기를 원하면 하늘나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늘 결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목마르게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지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하고 비교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미움, 욕심, 비교, 질투 때문에 병들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모든 거짓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령의 검, 곧 진리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지어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여러분 자신이 믿음으로 선포하고 결단하세요. 결국 여러분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야 하고, 관점을 바꿔야 하고, 삶을 바꿔야 합니다. 앞으로 인생이 힘들면 독해지고, 가족을 원망하고, 그렇게 쉽게 해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치유자 되시기 때문에 담대하게 현실을 직면하세요. 하나님만이 나의 승리자가 되시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절대로 원수에게 휘둘려 주나 봐라. 내가 네 거짓말에 속아 주나 봐라. 내가 다시는 타협하지 않는다. 다시는 너하고 손잡지 않는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내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의 보좌입니다. 하나님 임재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내주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다스려 주옵소서.
제가 선포할 때 여러분은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마음,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왜곡시키고, 거짓으로 하나님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고 의지하지 못하게 하며, 어둠의 세력에 휘둘리게 하는 악한 영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우리의 심령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충만히 임재하여 주옵소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좌정하여 주시고 통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원수는 떠나갈지어다. 귀신은 떠나갈지어다. 우울증과 불안증은 치유될지어다. 도망자 의식과 자폐증은 치유될지어다. 마음의 질병은 치유될지어다.
주여, 주여, 주여.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불안해하느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충만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찬양 가운데, 진리 가운데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좌정하시면 귀신들은 자진하여 이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존귀하신 지존자이심은 귀신들도 부인할 수 없고 무당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지존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이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지존자로 온 만물과 만민을, 영계와 인간계와 자연계를 통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비길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이 떠나가고, 거짓의 어두움이 우리 안에서 구정물처럼 빠져나가면, 얼마나 깨끗한 성령의 임재하심의 생명수가 우리 안에 흘러넘치게 되는지, 우리 안에 생명이 얼마나 충만해지는지 하나님 체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시고, 여러분 가운데 콜링하는 사람들은 일어나서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밖에 안 될까” 하는 마음, 세상 것에 집착하거나 욕심을 갖는 마음, 하나님이 공급자 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자기를 비하하고 절망감과 우울감에 빠져 있는 마음이 있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마음을 오랫동안 사슬로 묶어두고 깊은 우울과 어두운 감정의 늪에 빠져 있게 만든 원수는 이 시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 앞에서 떠나갈지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임하였느니라. 자유할지어다. 자유케 될지어다.
주여. 주님,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주님을 더 원합니다. 주를 향한 내 갈망이 주님께로 나를 끌어 주소서. 때로는 나의 교만과 욕심을 채워 줄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했고, 나의 미움과 비교와 시기와 질투를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했고, 때로는 나의 절망과 우울을 달래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했지만,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보다 하나님의 현존을 더 구합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주사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을 신앙으로 합리화시키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오장육부가 건강하게 정상 기능을 하고, 모든 뼈마디와 신경 계통과 호흡 계통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좋게 창조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표적으로 미워하고 공격하고 원망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면, 이 시간 진리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주셔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미움은 사라질지어다. 치유될지어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모든 근본적인 원망도 사라질지어다. 자기 절망과 자기 미움과 자살 충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라질지어다.
나를 건지시는 분,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찬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인간의 교만과 자기 숭배와 허영은 이 시간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임재하여 주사 우리 안에서 다 떠나가게 될지어다.
여러분, 잘 앉아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더 기도할 때 여러분 가운데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으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상태 정도가 아니라, 그 단계가 너무 지나쳐서 증상이 심해지고, 영적으로 소리가 들리고 나를 공격하고, 그것이 사탄의 소리, 거짓의 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것을 묵상하게 되고, 악몽을 보고 잠을 못 자고 가위눌리는 분들이 있으면 우리 목회자들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자살 충동은 굉장히 심각한 영적 공격입니다. 그런 분들도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꼭 기도가 필요하신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샤머니즘으로 충만한 세상이 됐습니다. 이단 사이비가 충만한 세상이 됐습니다. 거짓의 영이 판을 치고 어둠의 영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후퇴하면 안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될지어다.
우리가 우리 가정에 성령의 임재하심의 문을 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둠의 권세와 악한 영들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을 영적으로 공격하는 어둠의 영들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의 보혈로 문과 문지방에 주의 보혈을 덮어 주시고, 안방과 거실과 아이들의 방과 부엌과 화장실과 모든 영역, 거실과 침실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삼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덮어 주시옵소서.
2026.05.10(주) | 주일설교 | Stand by Me - 남경필 집사(욥 23:10))
Stand by Me (욥기 23:10)
- 제목: Stand by Me
- 본문: 욥기 23:10
- 설교자: 남경필 집사, 이상준 담임목사
- 날짜: 2026-05-10
- 예배: 주일설교
설교 요약
1. 하나님께 맡길 때 시작되는 회복
남경필 집사는 첫째 아들 주성이가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고 결국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기까지의 과정을 진솔하게 나누었다. 가족은 자수, 병원 입원, 신고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했지만, 중독의 문제는 인간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성지순례 중 아들의 상황이 다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 일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나에게 맡기라”는 마음을 주셨고, 그 순간부터 평안이 임했다.
2. 고통을 통해 주어진 사명
하나님께 맡긴 뒤 남 집사는 자기 아들만이 아니라 마약으로 죽어 가는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귀국 후 다시 마약을 한 아들을 직접 신고했고, 아들은 구속되어 국립법무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2년 6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족은 무너지지 않고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들은 출소 후 마약 치유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3. 마약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간증은 개인 가정의 아픔에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와 다음 세대가 직면한 마약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마약은 특별히 무너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학, 친구 관계, ADHD 약물 오남용, 다이어트약 등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남 집사는 마약과의 싸움이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영적 전쟁이며, 성적지상주의와 외모만능주의 같은 잘못된 가치관과의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4. 가족 안에서 시작되는 용서와 회복
남 집사는 자신의 이혼과 가정의 상처를 돌아보며, 자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던 경험을 나누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지만, 동시에 용서하고 용서받는 자리에서 회복이 시작된다. 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믿고 사랑하고 용서하신 것처럼, 가정 안에서 서로를 믿어 주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권면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아신다
남 집사는 욥기 23장 10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자신과 아들이 가는 길을 알고 계시며,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나오게 하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정치적 성공과 실패, 이혼, 아들의 수감이라는 인생의 굴곡을 지나왔지만 지금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 행복은 상황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재혼 가정과 자녀들이 한 가족으로 예배드리는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결론
이상준 담임목사는 간증을 이어받아,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라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의 길이라고 정리했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결핍을 자기 힘이나 부모의 노력만으로 채우려 할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께 용서받고 가족 안에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의 불완전함과 불안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결단과 회복이 시작된다.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아멘. 먼저 너무나 부족하고 흠이 많은 저를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리고 저를 불러 주신 이상준 담임목사님, 그리고 1516교회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원래 지금 이 얼굴보다는 조금 더 잘생겼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저희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우리 목사님 설교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 가지고 눈물 콧물 짜다 와서 얼굴이 좀 퉁퉁 부었습니다.
저와 저희 아내는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분당우리교회가 1만 성도 파송운동을 하면서 30개 교회로 나누어질 때 분립 개척한 교회 중 하나인 하나드림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와 아내는 지금 초등부 3학년 담임, 저는 부담임으로 섬기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내는 지금 함께 오지 못했고 이따가 2시 예배에 함께할 예정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같이 개척 멤버로 초등부를 섬기시던 권사님 부부가 계신데, 저희를 버리고 1516교회로 오셨어요. 일어나시라고 하려다가 저기 앉아 있는데, 일어서라고 하면 다시는 안 볼 것 같아서 안 하겠습니다. 제가 “아니, 뭐가 그렇게 좋아서 옮기셨어요?” 그랬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그냥 와 보세요” 그러셨는데, 오늘 드디어 왔습니다.
와 보니 역시네요. 담임목사님 설교 말씀이 은혜롭다는 것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었고요. 그런데 이 분위기 어떡하면 좋습니까. 너무 부럽습니다. 성도님 한 분 한 분의 모습과 표정을 보니까 예사롭지 않습니다. 행복한 믿음 생활을 하고 계시는 여러분의 모습 속에서 저도 힐링되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오늘 1516교회 전도집회 Stand by Me에 오신 귀한 손님 여러분, 제가 속된 말로 여러분 땡잡으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좋은 날, 좀 무겁고 어두운 주제인 마약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첫째 아들, 제가 제일 사랑하는 저희 첫째 아들이 마약에 중독됐습니다. 그리고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너무 힘들고 아팠는데, 영화 한 편을 보고 제가 너무너무 많이 울었어요. 그 영화가 저의 이야기인 거예요. 거기다 주연도 저희 아들보다 조금 잘생긴 티모시 샬라메가 맡아서 했고요. 그 이야기는 마약에 중독된 아들을 치유하기 위해 겪었던 과정을 그의 아버지가 일기처럼 쓴 것을 바탕으로 만든 실화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비디오 클립으로 짧게 편집해 봤는데요. 함께 보시죠.
저희 아이의 이름은 주성입니다. 남주성. 주성이도 뷰티풀 보이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당시 담임목사님이시던 김장환 목사님께 졸업장을 받으면서 “너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저 목사 될 겁니다” 했던 아이입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고요. 성경 말씀도 많이 암송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주성이가 미국과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가게 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요. 그 사이에 마약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중독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게 됐고요. 대학도 중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하는 칭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학교도 포기하게 됐습니다.
저 영화에서처럼 중독이 한 번 심해지면, 티모시 샬라메가 화장실에서 마약을 하다가 쓰러졌잖아요. 저희 주성이도 똑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응급실에 실려가게 됐고요. 그 응급실에서 삶과 죽음의 문턱, 그 선상에서 그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과 주성이가 느꼈죠. “아, 이러다 죽겠구나. 죽는 거구나. 그 선을 넘어서면 죽는 거구나.” 그래서 주성이가 먼저 자수를 했습니다. 자수는 왜 했을까요? “나 혼자 할 수 없다”라는 고백입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으니 국가가 나를 가둬 주세요. 그렇게 해서라도 마약을 끊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죠. 증거물까지 다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구속을 안 시키더라고요. 집에 가 있으래요. 몇 달이 지났어요. 그러니까 또 마약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또 두 번째 자수를 했어요. 그런데도 안 잡아가요. “왜 그러지?” 싶었습니다.
국가가 안 도와주니까 “그럼 우리끼리라도 해 보자”라고 병원에 스스로 입원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폐쇄병동에, 가족의 동의가 없이는 병원에서 나올 수 없는 조건으로 사인하고 스스로 병원에 걸어 들어갔습니다.
아들이 병원에 딱 들어가니까 안타깝기도 하지만 약간 편해지더라고요. 병원에서 잘 관리할 테니까요. 그래서 그때 저하고 아내가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그게 3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전쟁 나기 전이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었어요. 거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저희가 그 성지순례에 가면서 그런 기도를 하고 갔어요. 주성에 대한 기도도 있었지만, 저희 아내는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 엄청 뜨거워요. 주변 신경 안 씁니다. 막 찬양을 뜨겁게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저는 옆에 있으면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뜨뜻미지근합니다. 그런 경험 해 보신 분들 많이 계시죠. 그러면 솔직히 부러워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도 저희 아내처럼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개인적인 기도를 가지고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그랬는데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3일인가 지났는데 둘째 아들한테 연락이 왔어요. “형이 병원에서 나왔대요.” 그래서 “말이 되냐? 아빠가 동의 안 해 줬는데 어떻게 나오냐?” 그랬습니다. 봤더니 그 병원에 군인들이 몇 명 들어왔는데, 그 군인들이 수두에 걸려서 왔대요. 수두가 법정 전염병이라 그 병원에 싹 돈 거예요. 저희 아이도 걸려서, 법정 전염병에 걸리면 무조건 퇴소해서 다 낫고 와야 된다는 거예요.
나왔는데, 저희가 원래 한 1년 6개월 정도는 병원에 입원할 계획으로 갔었어요. 그 정도 돼야 마약의 독성이 몸에서 빠진답니다. 그런데 두 달밖에 안 된 상황에서 나왔고, 저희는 이스라엘에 가 있고 요르단으로 한참 넘어간 상황이니 걱정이 되죠. 치유가 아직 안 된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야, 주형아. 너 빨리 형한테 가 봐라.” 했더니 안 그래도 가고 있대요. 갔더니 벌써 나오자마자 마약을 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 가족이 미리 약속한 게 있습니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가족이 신고하자고 약속해 놨기 때문에 저희 둘째 아들이 신고를 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이제 구속되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뉴스가 막 나오더라고요. “남경필 아들도 마약해서 걸렸다. 가족이 신고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영장을 기각시켰어요. 처음에는 “얼마나 오죽하면 가족이 신고했겠냐”는 동정 여론도 있었는데, 딱 기각이 되니까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남경필 아들이라 기각됐다”, “유전무죄다”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제가 지금은 정치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만, 그때 말하자면 여당이었거든요. 지금은 아주 형편없는 야당이 된 것 같긴 하지만, 어찌 됐건 여당이라 권력이 있어서 빼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바뀌는데 너무 속이 상하는 거예요.
그날 밤에 제가 하나님께 너무 많이 대들었어요. “이게 뭡니까, 하나님. 저 은혜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저희 가족이 어떻게든 조용히 해결해 보려고 2, 3년을 노력했는데 세상에 다 까발리게 하시고 온갖 욕을 먹게 하시고, 하나님 이게 뭡니까?”라고 막 대들었습니다. 정말 떼를 썼어요. 호텔 방 바닥에서 막 뒹굴면서 떼를 썼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경필아, 그거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맡겨.” 제가 그 순간 그냥 납작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주성이 맡깁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제 마음이 너무나 평안해지는 거예요. 경험해 보신 분들 계시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저부터 편안하게 해 주세요. 마음에 평안이 오면 그다음 뭐가 오는지 아세요? 배가 고픕니다. 그전에는 배가 안 고팠어요. 저희 교회는 그때만 해도 개척 1년 차 정도의 작은 교회라 성지순례를 가고 싶은데, 여기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저하고 동갑이에요. 그래서 같이 따라갔습니다.
성지순례 다니시는데 저는 창피하기도 하고 속도 상하고 화가 나서 방 안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니까 밥 먹으러 내려갔거든요. 그랬더니 김병삼 목사님이 저를 딱 보더니 “괜찮네” 하셨어요. 그래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게 우리 기독교가 갖는 놀라운 신비야. 내가 할 수 없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야.”
이제 귀국하려고 했습니다. 아들이 또 영장이 기각됐으니까 집에 혼자 있잖아요. 원래는 구속되면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기각됐으니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갔더니 또 마약을 하고 있어요. 마약, 진짜 무섭습니다.
그런데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이, 그날이 주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교회 예배 영상을 다운로드 받아 비행기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또 이런 마음을 주세요. “경필아, 내가 네 아들 책임진다고 했지. 그런데 너는 내 아들딸 중에 너무 많은 아이들이 마약 때문에 죽어 가고 있어. 그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살아.” 그래서 “아멘” 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마약 치유 운동, 아까 목사님 말씀처럼 NGU를 만들었는데요. 일단 집에 와 보니까 아이가 또 마약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신고를 했습니다. 신고하게 되면 신고인이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왜 신고했는지 써야 하는데, 거기에 이렇게 썼어요. “판사님, 저희 아들 구속시켜 주세요. 저희 아들 살리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구속됐습니다.
재판을 받는데 저희는 변호사 선임도 하지 않았고요. 1심에서 2년 6개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고받는 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저희는 항소도 하지 않았어요. 2년 6개월 빨리 재판받고 빨리 감옥에 가서 치료받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아들이 마지막 재판 때, 선고하기 전에 최후진술이라는 것을 합니다. 재판을 안 받아보신 분이 대부분일 테니까 안 받아보시는 게 좋습니다. 보통 피고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판사님, 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판사님, 저 억울합니다. 절대 안 했어요.” “판사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착하게 살게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저희를 쳐다보면서, 저쪽에 가족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가족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저도 형 마치고 마약 끊고 마약 치유 운동 같이 가겠습니다.” 그 진술을 하는데, 그래서 Never Give Up이라는 단체 이름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NGU, 은구, 은혜를 구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 아들은 2년 6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했는데요. 정말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잖아요. 저희 아들이 자수도 했고 병원에도 들어갔던 것이 참작돼서, 일반 감옥이 아니라 옛날 공주치료감호소라는 곳, 지금은 국립법무병원이라고 정해졌는데, 감옥이면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선생님들과 시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공주에 있는 국립법무병원에서 2년 6개월 실형을 살고 작년 10월 1일 저희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영상을 한번 보실까요.
“아, 잠깐만. 지금 좀 간단하게 하자고. 시간이 조금...” “먼저 주성이.” “대신에 조 선생님 대기하고 있다가.” “저는 아기 아이 주시하듯...” “이런 날이 오네.” “선생님, 그러죠. 이런 날이 온대.” “지금 컨디션 좋다고. 이따가 식사하면서 이런 얘기 나누면서 계속 대화하고. 한 달에 한 번 스케줄로, 아까 자기가 픽스할 수는 없는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선생님 더 고생했는데.” “주영아, 지금 내려가요.” “그래, 그래. 나온다, 나온다. 보인다, 보인다.” “날씬하네.” “그러게. 가자, 가자.” “아이고, 이리 와 봐. 안아 보자. 아이고, 안아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안아 보지 못해서 그랬는데, 꼭 안으니까 힘이 나네. 너무 좋다.”
저렇게 저희에게 돌아왔어요. 그리고 주성이가 세상을 향해서 자기를 열고, 자기 같은 사람들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습니다. 중앙일보하고 인터뷰를 했어요. 자기 얼굴을 다 열고, 저도 몰랐던 이야기를 중앙일보에 여덟 차례에 걸쳐서 인터뷰했습니다. 그 사진 한번 보여 주시겠어요.
그렇게 자기 얼굴을 내밀었는데, 지금은 넷플릭스가 올해 말에 마약의 실태에 대해서 전 세계에 방영하려고 8부작을 찍고 있나 봐요. 거기에도 본인의 사례를 통해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진짜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 있어요. 저는 하나도 안 불안해요.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데 뭐가 두렵겠어요. 그렇지만 하루하루는 전투입니다. 회복자들의 삶은 너무너무 힘들어요. 일단 약을 참아야죠. 아까 저기 중독 회복자들이 “오늘도 이겼습니다”라고 했잖아요. 매일매일 하루하루를 이겨 나가는 과정입니다.
여기 술 드시는 분들 많지 않으시겠지만 있으실 거예요. 담배 피우시는 분들도 계세요. 주변에 많습니다. 술, 담배도 끊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과가 있죠. 마약 회복자의 삶, 전과자의 삶, 그리고 새롭게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 삶이 너무나 힘든 과정입니다. 요즘 청년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있지만, 특히 중독자와 회복자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성이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성이가 결단했죠. 숨지 말자. 얼굴을 내밀고 세상을 향해 선언하자. 그리고 마침내 역전하리라. 아멘.
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주성이가 어떤 심리상담사 선생님께 엄청나게 많은 도움을 받았대요.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결정을 했습니다. 자기도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대학을 다시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까 칭화대 그만뒀다고 했잖아요. 감옥에서 입시를 준비해서 서강대 심리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니는데 이것도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 여러분들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말씀이죠.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저는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기 때문에 순금같이 나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궁금한 것은 언제 나오느냐입니다. 정말 제가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 제목이 있어요.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시는 그때에 우리 주성이가 1516교회 이 자리에서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소망합니다. 그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아멘.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또 청년들이 와 있기 때문에 짧게 마약의 실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심각합니다. 검거자 3만 명. 검거자가 3만 명이 되면 보통 전문가들은 그 50배에서 100배가 마약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15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가 마약에 노출돼 있고, 상당수는 심각하게 중독돼 있다고 봅니다.
우리 집 앞에 와 있습니다. 남경필 집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집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유학 가면 노출되기 쉽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친구 주변에서 “해 봐” 그러면 합니다. 사실 저도 담배를 중3 때 친구에게 배웠습니다. 마약도 똑같아요.
마약은 거의 99.9%가 처음부터 자기 돈 내고 “내돈내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에 누가 권해 줘요. 또는 몰래 탑니다. 전염병입니다. 전염병이 무서운 것은 내 주변에 감염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아이가 감염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거예요. 150만에서 300만이 지금 감염돼 있으면 우리 아이들이, 내 자식들이 언제나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찌질한 애들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주성이도 하나님 말씀 믿고 공부 잘했던 아이예요. 이런 아이에게도 옵니다.
얼마 전에 엄청난 뉴스가 났었죠. SKY 대학의 학생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카이스트 네 개 대학 학생 동아리에서 마약과 문란한 성파티를 했다가 크게 뉴스가 났습니다. 이게 왜 그런지 아세요? 제가 그 친구들을 인터뷰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약을 먹어요. ADHD 약 먹는 이야기 들으셨죠. 그 ADHD 약 성분이 필로폰하고 비슷합니다. ADHD에 걸린 아이들은 먹어야 돼요. 그래야 집중력이 높아져 정상 생활을 하거든요. 그런데 정상인 아이들이 이것을 먹으면 뇌의 각성이 일어납니다. 반짝해요. 모든 게 다 잘 보이는 것 같고, 잠이 안 오고, 살이 빠집니다. 그러니까 상위 10%인 아이들이 1% 가려고 이것을 먹습니다.
강남, 분당 이런 데 처방이 엄청납니다. 통계도 다 있어요. 이것을 먹던 아이들이 대학 가면 끊는 것 같죠? 다른 약으로 갑니다. 안 그래도 예쁘고 보기 좋은, 특히 여자아이들이 나비약을 포함한 다이어트약을 먹어요. 이것도 마약입니다. 마약 성분이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의사 처방이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약인데 그냥 인터넷에서 구입해서 먹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마약에 노출되고 마약에 빠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요즘 무서운 이야기가 뭐냐면, 10대 마약사범이 지난 10년 동안 몇 배 늘었는지 아세요? 50배 늘었습니다. 티핑 포인트로 가고 있어요. 거기다가 최근에 검거되는 10대 마약사범의 70%가 여자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마약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제가 저희 아들 마약하고 대화도 해 봤어요. 이것은 저희 아들이 아니에요. 마귀예요. 저는 영적인 문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저도 우리 아들 왜 유학 보냈겠어요. 좋은 대학 가서 잘 먹고 잘 살면 네 평생 편안하게 살라고 유학 보낸 것이잖아요. 어느 성경 말씀에 학벌 좋은 사람을 하나님이 더 예뻐하십니까? 얼굴 예쁜 사람을 좋아하세요? 그렇지 않잖아요. 부모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더 예뻐져라, 공부 잘해라, 좋은 대학 가라, ADHD 약도 먹어 봐라, 이렇게 한 우리 부모의 책임을 저는 통감합니다.
영적인 문제이고, 우리 시대의 잘못된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가치관, 성적지상주의, 외모만능주의가 우리 아이들을 지금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마약과의 전쟁은 전쟁이라고 봅니다. 영적인 전쟁이고요, 가치관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우리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1, 2부에서 간증해 주신 이성미 집사님, 우리 성미 누나도 이 마약과의 전쟁, 은구 사역에 동참하고 계신 중요한 분 중 한 분이세요. 저는 대한민국 교회의 문화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1516교회가 마약 퇴치 운동에 동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6월 26일이 세계 마약 퇴치의 날이에요. 전 세계가 똑같습니다. 다음 날인 27일이 토요일이거든요. 토요일 아침에 “마약 말고 달리기”, “마약 끊고 달리기” 행사를 할 예정입니다. 전국에서 지금 마약을 끊으려고 하는 회복자들이 있어요. 이분들이 동시에 그날 뛸 겁니다. 6월 26일에 6.26km를 뛰려고 하는데, 가까이 계신 분들은 저희가 분당 탄천에서 뛸 거고요. 멀리 계신 분들은 어플이 있어요. 그것을 깔면 “땅” 하면 같이 뛰는 거예요. 내가 몇 등인지도 다 나옵니다. 그 어플을 통해서 할 텐데, 우리 1516교회 성도님들도 관심 있으면 저희가 나중에 또 광고할 테니까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회복자들을 응원해 주세요. 이 안에 마약을 하고 있는 가정이 있을 수 있어요. 앞으로 마약 회복자들이 교회에 올 수 있어요. 내치지 말고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감옥에 있는 주성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성아, 아빠가 정치할 때 뭐가 제일 힘든지 아냐?” 뭐가 제일 힘든지 아세요? 인지도가 안 올라요. 인지도가 깡패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주성아, 대한민국에 너 모르는 사람 있냐? 마약하는 남경필 아들, 개차반이라고 모르는 사람 있어?” 없죠. “지금은 그 인지도가 악명인데, 네가 하나님 만나서 마약 끊고 딱 돌아서서 세상을 향해서 마약 치유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악명이 인지도로 가는 순간 너는 하나님 영광 돌리는 일을 크게 할 수 있어.” 그랬더니 힘을 좀 내더라고요.
제가 끝으로 저희 가족 이야기 하나 나누고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계세요. 여러분도 웬만하면 다 아실 거예요. 그분이 제가 주성이 때문에 고통받을 때 잠깐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저에게 당신 이야기를 하셨어요. 당신 부모님이 중학교 때 이혼하셨대요. 그 이혼의 충격 때문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는데,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결핍이 평생을 괴롭히고 있대요. 지금도 괴롭힌대요. 지금 50대가 넘으셨는데도요.
그러면서 저에게 그러시는 거예요. 저는 이혼했거든요. 저와 저희 아내는 재혼 가정입니다. 제가 도지사가 되던 2014년도에 이혼했습니다. 이유를 이야기하면 너무 길지만, 어찌 됐건 주성이 엄마가 정치를 하는 남편을 너무너무 부담스러워했어요. 국회의원까지는 어떻게 했는데 도지사 나간다고 하니까 이혼하자고 하더라고요. “국회의원 마누라는 모르겠는데 도지사 마누라는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싸우고 그러다가 결국 합의 본 게 뭔지 아세요? 진짜 웃기게 합의했어요. “그래, 한번 나가 보자. 나가서 당선되면 이혼하고 떨어지면 같이 살자.” 진짜요. 그래서 2014년에 제가 도지사에 당선될 때 영상을 돌려보면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때 0.6% 차이로 이겼거든요. 세월호 사건도 있고 정말 어려운 선거였는데 이겼어요. 사람들이 난리가 났죠. 그런데 저는 표정이 안 좋습니다. 바로 당선되고 나서 이야기한 대로 이혼을 했어요. 도지사 되자마자 이혼을 했죠.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저에게 그러시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그 이혼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목사님, 저희는 결혼 25주년 만에 이혼한 황혼 이혼입니다. 아이들이 이혼도 막 응원해 줬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렇지 않을 겁니다. 부모의 이혼은 고통과 결핍을 낳고, 채워지지 않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도 하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거짓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 중 하나가 마약일 겁니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감옥에 있는 주성이에게 갔어요. 그리고 “주성아, 아빠가 엄마하고 이혼해서 너한테 미안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가만히 있어요. 아무 이야기 안 하고 있다가 조금 있다가 “아빠, 고마워요”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둘째에게도 찾아가서 이야기했더니, 아이들이 짠 것처럼 반응이 똑같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아, 얘네들이 아빠와 엄마의 이혼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한 첫걸음이었겠구나.”
우리가 살면서 참 사람이 불완전하고 서로 상처 주고 그러잖아요. 제일 상처 주는 사람이 사실 가족이에요.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 간에,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렇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하고 싸우는 것은 사실 힘들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습니다.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오늘 제가 여러분께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늘 용서하고 용서받으시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아빠에게, 엄마에게, 부인에게, 남편에게 이야기하세요. “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내가 상처받은 것이 있으면 먼저 이야기해서 “아빠, 나 이것 때문에 상처받았어요”라고 이야기하고 서로 용서하십시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게 그거잖아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앞에 전제가 있잖아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용서하고 용서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희 교회 특새에서 담임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너무 공감이 갔어요. “자존감은 소중한 누군가가 자신을 끝까지 믿고 사랑해 주고 용서할 때 생긴다. 자존감이 있어야 회복탄력성이 생긴다. 그런데 그중 최고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믿고 사랑하고 용서해 주십니다. 아마 예수님이 우리에게 “얘들아, 나 좀 따라 배워라”라고 하시는 것 중 하나를 꼽자면, 네 옆에 있는 가족, 네 아들딸을 믿어 주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50대 이전과 이후가 극명합니다. 제가 50세 이전에는 국회의원을 다섯 번 당선했고 도지사가 됐는데 49살이에요. 대통령도 될 것 같다고 그래요. 권력도 있고, 젊고, 얼굴도 이 정도면 괜찮고, 키가 좀 작아서 문제지. 그런데 제가 50살이 딱 지나고 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혼했어요. 선거에 떨어졌어요. 지금 대통령에게 떨어졌거든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우승 같습니다만, 그리고 아들은 마약으로 감옥에 갔어요. 50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면 너무나 극명합니다.
그런데 정말 저는 여러분 앞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저희 가정은 재혼 가정이잖아요. 저에게 아들 둘이 있고, 저희 아내에게 아들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몇 년 전 며느리를 얻었고요. 바로 두 달 전에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피가 안 섞였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한 가족이에요. 어떻게 가능하냐.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가정예배 드릴 때, 주성이까지 나와서 완전체가 되어 가정예배 드릴 때가 제일 행복해요. 오늘 저녁이 저희 가정예배 날입니다. 서로 할 수 있는 대로 다 용서하고, 행복한 가정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가 볼게요. 제가 성지순례 가면서 그랬잖아요. “하나님, 저 성령 체험하게 해 주세요.” 3년을 돌아보면 결국 하나님은 저를 만져 주셨어요. 주성이를 만져 주신 것은 나중 문제고요. 저를 뜨겁게 해 주셨습니다. 꿈에도 꿈꾸지 못했어요. 3년 전만 해도 제가 마약보다 끊기 힘들다는 정치를 끊고 마약 치유 운동가로 활동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이렇게 1516교회에 와서 강단에 서서 간증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꿈에도 꿀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은 참 오묘하십니다.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사랑이 많으십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아멘.
네, 쉽지 않은 인생의 이야기를 정말 진솔하게 나눠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오늘 1, 2부 간증해 주신 이성미 집사님도, 또 남경필 집사님도 가족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가 우리 가정에서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영화 뷰티풀 보이를 보여 주셨는데, 제가 어제 아내하고 둘이 옛날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가족 사진을 보면서 “야, 우리 넷 다 어렸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 힘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재판정에서 고백한 것처럼 “가족이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것에 너무나 고맙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데 또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신앙생활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이야기합니다.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 그것이 진짜 신앙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또 저는 간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났어요.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중에 결핍이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결핍의 문제를 개인 내적으로 자기 인생에서 채워 가려고 하고, 또 자녀들은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빈 공간을 부모가 엄청 채워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 결핍의 문제라는 것은 양극단이 다 문제인 것 같아요. 결핍이 있는 인생을 가만히 내버려 두거나 결핍이 있는 자녀를 그냥 버려두는 것도 문제고, 그를 인간적으로 너무 채워 주려고 해도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두려움 너머의 삶』이라는 책에서 인생은 양극단의 벼랑 사이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내려놓고 맡겨 드리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굉장히 어려울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정말 가족들에게 용서하고 용서받는 삶을 체험하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인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 드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저도 제가 너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저희 큰아들이 고3 졸업할 때 정말 진지하게 아들에게 사과를 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는데 “괜찮아” 그러는 거예요. 제가 또 진지하게 이야기했는데 또 괜찮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 방에 가서 세 번째 앉혀 놓고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런데 그때 아들이 진심으로 받아주면서 “아빠가 적은 시간을 함께했어도 정말 우리와 최선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해 주는데, 아들이 저보다 더 큰 거예요. 아들이 저를 안아 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가족에게 “내가 너한테 최선을 다해서 못 해 준 게 뭐가 있냐. 부족함 없이 채워 주지 않았느냐”라고 다그치고 “나는 문제 없다”라고 이야기하면 서로가 계속 대척점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굴곡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사랑과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정말 오늘 나눠 주신 것처럼 우리가 가족을, 부부 간에, 부모 자녀 간에 용서하고 용납하는 하나님의 은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Stand by Me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서, 한국 사람 정말 열심히 살잖아요. 애를 쓰며 살아왔지만 내 힘으로 다 할 수 없는 것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우리의 인생의 불완전함과 불안함과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 주시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 이곳에 오신 것이 우연한 발걸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밤을 새며 기도해 왔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내게 사인을 보내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하나님과 멀리 지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이 자리가 여러분에게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삶의 선택을 하는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 알아가고 싶고, 예수님 잘 모르지만 예수님 만나고 싶습니다.” 또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다가 멀리 떠나신 분들은 “이제 제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에게 저희가 Stand by Me 웰컴 박스를 드렸어요. 보시면 손잡이 쪽에 오픈이라고 스티커가 있습니다. 이쪽이 여는 쪽인데요. 한번 뜯어서 열어 보시면 책을 한 권 넣어 드렸고, 펜이 있고요, 결신서가 있습니다. 한번 결신서를 꺼내 보시겠어요.
그 결신서 앞에 글을 제가 써 봤는데요. “우연처럼 찾아온 오늘이 당신의 인생의 특별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홀로서기잖아요. 제가 청소년 때 서정윤 씨의 『홀로서기』라는 시집이 나와서 정말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옆에 가족이 있어도 혼자 견뎌내고 버텨내야 되는 시간들이 참 많잖아요. 그러나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서 내 손을 잡아주고 함께해 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힘들었던 시간도 행복했던 시간도 늘 함께 보고 계셨다는 것, 곁에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중요한 결정들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반대편에 보시면 결신서 첫 번째 문항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 드릴게요. “당신의 마음을 표현해 주세요.” 보시면서 마음에 와닿는 부분에 볼펜으로 체크를 해 주시면 됩니다.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과 그동안 멀어졌지만 다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 번째, 아직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에 오늘이 중요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 마음에 와닿는 부분을 체크해 주세요. 또 초대받아 오신 분, 초대해 주신 분 프로필을 간단하게 적어 주시면 저희가 연락드리고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이 시간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한참 동안 잊고 살아가도 부모님은 자녀를 하루도 그 마음 가운데 잊을 수 없이 인생을 사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하나님의 시선에서 놓치신 적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 날을 하나님 기다리셨고, 우리의 걸음으로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열심히 생기게 하여 주시고, 인생의 이 좋은 날, 좋은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평생에 우리 혼자 힘으로 애쓰고 버티는 인생이 아니라, 내 영혼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평생토록, 영원토록 아버지 집에 거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인도하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 아멘. 오늘 간증해 주신 집사님께도 감사하고, 서로에게도 감사와 축복의 박수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2026.05.09(토) | 새벽기도 | 섬김의 축복 (룻 4:13-22)
섬김의 축복
- 제목: 섬김의 축복
- 본문: 룻기 4:13-22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5월 9일
[ 설교 요약 ]
1. 섬긴다는 것은 축복이다
'섬긴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오베드(עבד)', 영어 '서비스(service)'와 같은 어원을 가지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섬기는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만, 성경 전체는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함을 증거한다. 오늘 본문 룻기 4장의 결론은, 섬기는 자로 살아간 보아스와 룻, 나오미의 가문에 임한 하나님의 복을 보여준다.
2.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 (룻 4:13)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하나님께서 임신하게 하시어 아들을 낳았다.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이지만, 오늘날 환경 파괴와 생활 습관으로 인해 임신이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 미세 플라스틱, 늦은 결혼, 피임 등 인간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동시에 친환경적인 삶으로 노력해야 한다.
3. 기업 무를 자: 가족의 구원자 (룻 4:14)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찬양했다. 기업 무를 자(고엘)는 단순한 구원자가 아니라 대가를 치르고 가문의 기업과 생명을 회복시키는 구속자이다. 자녀가 가정의 구원자가 되듯, 가족은 서로를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정에 주신 사명이다.
4. 생명의 회복자와 조부모의 사랑 (룻 4:15-16)
오벳은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로 불렸다. 나오미가 직접 아기를 품고 양육자가 된 것처럼, 조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고 믿음의 유산을 전달하는 귀한 통로가 된다. 자녀에게 결핍도 경험시키고, 섬기는 자로 키우는 것이 진정한 양육이다.
5. 오벳의 이름: 섬기는 자 (룻 4:17)
아이의 이름 '오벳(Obed)'은 히브리어로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세상은 다스리는 자, 리더가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신다. 유다는 기회주의자였으나 회개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섬기는 자가 되었고, 그 계보에서 다윗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6. 유다와 요셉의 대비: 섬김의 리더십 (룻 4:18-22)
요셉 지파(에브라임)는 야곱에게 모든 세상적 축복을 받았으나, 후손들은 기득권을 주장하다가 결국 망가졌다. 반면 유다 지파는 섬김과 희생의 리더십으로 왕의 계보를 이어갔다. 하나님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섬기는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람과 가문을 축복의 통로로 세우신다. 이것이 '반전의 은혜'이다.
7. 보아스의 진정성 있는 섬김
보아스는 이미 대농장의 지주였음에도 타작마당에 직접 나와 일꾼들을 섬겼고, 룻과 나오미를 진심으로 돌보았다. 오벳이 성장하여 나오미를 봉양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보아스가 직접 가족을 케어했다. 의무가 아닌 사랑과 진심에서 나온 섬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다.
결론: 섬기는 자로 살라
5월 가정의 달, 주변의 소중한 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한 달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의 중심을 보시고, 그 사람을 시대를 치유하고 가정과 교회와 열방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로 세우신다. 유다처럼, 보아스처럼, 다윗처럼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요, 반전의 은혜이다.
[ 전문 스크립트 ]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을 함께 암송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멘, 할렐루야. 주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셔서, 우리가 걸어다니는 예배자, 걸어다니는 성전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설교의 제목은 '섬김의 축복'입니다. 한번 제목 읽어 볼까요? 섬김의 축복.
사람들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나요? 고생이라고 생각하나요? 고생이라고 생각하죠.
'섬긴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섬긴다, 사람을 섬긴다, 주인을 섬긴다 다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섬긴다는 단어가, 영어로도 그렇지만 히브리어로도 '오베드(עבד)'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섬기다는 것이 영어로는 '서브(serve)'잖아요. 그런데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가, 누구에게 서비스를 하는 데도 해당이 되지만, 주일 예배도 서비스라고 하죠. 하나님을 섬긴다는 거예요. '오베드'라는 히브리어도 마찬가지로 쓰이는데, '에베드'라는 명사형이 '종'이란 뜻이에요. 섬기는 자라는 거죠. 그렇죠.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 싶어하지,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에게 축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오늘 룻기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나오미의 가문, 그리고 보아스와 룻의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복이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도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먼저 13절 다시 읽어 볼까요? 시작.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를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고,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의 강복인 줄로 믿습니다.
시편 127편 3절 같이 읽어 볼까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급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결혼하기도 참 어렵고, 임신과 출산도 어려운 시대가 됐어요. 그래서 임신이 안 되는 분들은 마음 가운데 낙심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 섭섭한 마음도 생기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셨다"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구해야 될 부분도 있지만, 사람들도 노력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환경을 너무 많이 파괴했기 때문이에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사용하는 플라스틱이라든지 비닐 등, 우리가 너무 많이 쓰다 보니까, 한 달이면 우리가 먹는 미세 플라스틱을 모았을 때 신용카드 한 장만큼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건강 문제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한 시대가 된 거예요. 우리가 추구한 편리함이 우리에게 부메랑이 돼서 자연의 역습으로 돌아오는 거죠.
또,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고 개인의 성장과 성공을 우선순위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리고 결혼을 해서도 더 일해야 되고 더 공부해야 되니까 피임을 하면, 그만큼 몸이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굳어져 버립니다. 일터에서는 괄시받죠. 또 괄시를 받은 만큼 보상심리로 과도한 엔터테인먼트와 술, 담배로 피로가 누적이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왜 자녀를 안 주십니까" 탓만 할 수 없는 시대가 됐어요. 인간의 책임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결혼하는 분들에게 주례 전 미팅을 할 때 "친환경으로 사십시오, 집에 있는 플라스틱 다 없애시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세탁기도 미세 플라스틱이 어마어마하게 나오고, 드라이어까지 돌리면 또 어마어마한 미세 플라스틱이 나와요. 우리 의류 자체가 혼용률이 굉장히 높잖아요.
하여튼, 자녀 출산 문제가 결혼하는 가정들에게 너무 중요하니까, 집에 있는 플라스틱은 다 없애고 친환경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희 교회에 젊은 부부들이 많이 오시고, 영류화부도 아이들이 계속 늘어나는데, 하여튼 부모가 은혜를 받으면 아이가 나오더라고요. 이것이 정말 진리인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 가운데 귀한 자녀를 허락하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보아스를 통해서 아이를 갖게 해주셨고, 아들을 낳게 해주셨다.
이어지는 14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나라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유명하게 되는 걸 좋아하는 건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의 유명함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명문 가문이 되라, 그런 축복이죠.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기업 무를 자는 누군가요? 둘 다 해당이 되는데, 첫 번째는 보아스고요, 두 번째는 그의 손주 오벳을 얘기하는 거예요.
보아스가 엘리멜렉 집안에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었죠. 그리고 나서 이제 손주로 태어난 오벳이 앞으로 자라서 이 가정을 책임지는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대로 주신 그 기업, 즉 땅이라는 기업을 잃게 됐을 때, 또 자손을 이어갈 수 없을 때, 그런 인생의 소망이 끊겼을 때 구원자 역할을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냥 구원자도 아니고, 고엘이라는 것은 대가를 치르고 구원하는 거기 때문에, 구원보다는 구속의 개념이 강하죠. 값을 치러야 되기 때문이에요. 희생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한 대로 이야기하자면, "태어난 손주가 너의 구원자가 된 것이다"라는 얘기를 한 거예요. 여러분, 아이가 태어나면 가정의 구원자가 되나요? 별로 생각 안 해 보신 것 같은데, 여러분,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불신 가정에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혀 꿈도 안 하시는데, 어린 사랑스러운 손자 손녀가 "교회 가자" 얘기하면 그 손 잡고 교회 오시는 분들이 계세요. 구원자 역할이 되는 거예요. 또 부모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아이들이 그걸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잖아요. 그래서 부모를 위한 중보기도자가 됩니다. 우리 삶을 살아갈 때 굉장히 어려운 순간들이 많지만, 매 순간 우리의 어린 자녀들은 우리가 존재해야 될 삶의 이유가 되어 주잖아요. 할렐루야 아멘.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구원자를 잘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중하게 대하셔야 되는 거예요.
가족은 서로를 구원하는 역할이에요. 남편은 아내를 구원하고, 아내는 남편을 구원하고, 부모는 자녀를 구원하고, 자녀는 부모를 구원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그것이 작년 표어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정점은 구원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서로를 구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여러분의 가정이 그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가정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15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는 내 생명의 회복자이며 내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생명의 회복자'—생명이 뭐 죽은 게 아니잖아요. 근데 생명의 회복자라고 이야기한 것은, 대가 끊길 뻔했는데 그 생명이 이어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예요. '노년의 봉양자'라는 것은 노년에 전혀 섬길 사람이 없었는데, 당신을 돌봐줄 손주가 태어난 것이다, 라는 것이죠.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생명의 공동체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아예 비혼을 선언하거나, 또 결혼을 해서도 임신을 안 하려고 하는 가정들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결혼은 했는데 자녀를 갖지 않기로 결심한 가정들에게는 자녀를 놓고 기도하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이 유전되기를 원하세요. 생명이 이어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굉장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창세기 5장 1절과 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아담은 130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그런데 아담이 셋을 낳을 때도 자기의 형상과 똑같은 아들 셋을 낳은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바라보실 때의 관점과, 사람이 자기 자녀를 낳았을 때 관점이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과 똑같은 미니미가 태어난 거잖아요. 그 자신의 미니미를 보면서, 사랑이 쏟아부어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바라보면서 마냥 좋은 그 마음이, 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그 마음이시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 속에 나만 바라보고 나만 꾸미고, 나만을 위한 인생을 살라고 세상에 보내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전히 싱글이신 분들도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갖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6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이 손주 오벳을 누가 키웠다는 거예요? 나오미가 키웠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부탁드립니다. 손주들의 양육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데려오지 마라, 너네는 너희 인생, 우리는 우리 인생이니까 절대로 못 도와준다"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요. 물론 건강상이나 일신상의 이유가 있으신 분들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랑이 흘러가기를 원하시고, 축복이 흘러가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삶이 치열하다 보니 갈등도 있고,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가요? 그냥 무조건적인 사랑이거든요. 무조건적인 사랑. 그러니까 아이가 그 사랑으로 충만한 환경 가운데 들어갈 때, 아이들의 자존감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모릅니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고, 아이를 위해 축복해 주실 때,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게 놀라운 은혜인 것이죠.
17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나오미에게 손주인데 아들이 태어났다—히브리어 '벤'이라는 단어를 아들이라고도 하고 손주라고도 하니까, 하여튼 그렇게 표현을 하면서, 이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요? 오벳입니다. 그런데 오벳이란 이름은 아까 말씀드린 '오베드', 즉 '섬기다'라는 뜻이에요. 섬기는 자가 태어났다.
오늘날 만약에 아이 이름을 '섬기는 자', '봉사자' 이렇게 짓겠어요? 그러니까 이 시대로 놓고 보면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우리는 보통 아이가 다스리는 자가 되고, 리더가 되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아이 이름이 '섬기는 자'예요.
제가 이번 주와 다음 주, 두 주간 준비해서 보라통 Q&A 총정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보라통을 하시는 분 중에 이런 질문을 봤는데, 이분이 성경 통독을 하고 있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그렇게 얘기를 하더래요. "아, 난 요셉이 너무 좋은데, 다윗 왕이 유다 지파가 아니라 요셉의 후손으로 나왔다면 너무 좋았을 텐데." 한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 생각해 봅시다.
요셉을 놓고 보면 창세기 49장에서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최고의 축복을 받았잖아요. 땅의 축복, 하늘의 축복, 비의 축복, 이슬의 축복, 있는 축복 없는 축복 그냥 다 갖다 줬어요. 그런데 그 요셉 지파가 나중에 어떻게 됐는가?
여호수아서 정복기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요셉의 둘째 아들이지만 장자권을 가지게 된—같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인 여호수아 앞에 나와서 "우리는 복받은 지파니까 땅 더 내놔" 기득권을 요구합니다.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사사 시대에는 기드온에게 걸고, 입다에게 걸고—기드온은 착한 사람이지만 입다는 성질이 있거든요. 그래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잡고, "쉽볼렛이라 해보라"—복모음인데 쉽볼렛이 안 되고 십볼렛 그러면 잡아가고 죽인 거예요. 그게 42,000명을 죽였어요.
왕정 시대에 결국에는 열 개 지파를 데리고 배신을 하고, 다윗 언약을 포기한 주동자가 여로보암이잖아요.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지파예요. 그렇게 해서 북이스라엘 왕국은 19명의 왕들이 전부 다 악한 왕이었어요. 복음서로 넘어가 보면, 이제 북쪽 에브라임 중심 지역이 사마리아가 됩니다. 여러분,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손가락질 당하는 동네였어요. 이게 요셉 지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땅의 축복을 그렇게 아버지가 퍼줬는데, 후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요구하다가 망가지게 됐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결국에 다윗으로 이어지는 이 지파는 어느 지파인가요? 유다 지파잖아요.
유다는 원래 기회주의자였죠. 자기 동생 요셉을 "아, 뭐 죽일 것까지 있습니까? 돈도 벌고 그냥 팔아넘기지" 해서 동생 팔아넘기고 은 20을 받은 거잖아요. 그런데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계속 추적하시니까, 회개하고 돌이켜서 자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을 합니다. 그때부터 유다의 인생이 변해요.
아버지 야곱이 온갖 세상적인 축복은 요셉에게 다 퍼줬지만, 영적인 축복은 유다에게 줍니다. 유다에게 준 이유는 그가 섬기는 자였기 때문이에요.
오늘날 우리가 21세기에 '섬김의 리더십'을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섬김의 리더십이 성경에는 이미 창세기부터 이어져 오는 내용이에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 주시는 거죠. 어린 아이들을 부모가 섬기나요? 아이가 부모를 섬기나요? 부모가 아이를 섬기는 거예요. 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뒤치다꺼리하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다 섬겨 주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 주시거든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사랑의 섬김."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는데 섬기려면 곤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은 행복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유다에게, "너는 앞으로 지도자가 되라. 지도자는 섬김의 리더십, 희생의 리더십이 있어야 되니까, 자기 속 챙기겠다고 사람들 이용하면 안 되니까"—그래서 유다에게 왕의 계보가 계속 이어져 나올 것을 예언해 주었고, 그래서 다윗의 가문이 여기서 나오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 초등학생 아이가 왜 다윗 왕이 에브라임 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에서 나왔을까, 난 요셉이 좋은데—왜 요셉이 좋았을까요? 요셉이 처음부터 좋았을까요? 부모가 요셉을 좋아하니까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넌 유다가 되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잖아요. '유다'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고,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라. 결국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건 하나님도 섬기고, 사람도 섬기는 거예요. 섬기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예배자는 섬기는 자이고, 사람들을 사랑하면 결국엔 섬기는 자가 되는 거예요.
과연 요셉처럼 다스리는 자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유다처럼 섬기는 자가 되고 싶은가? 사람들은 자꾸 포지션으로만 생각하는데, 여러분, 사랑의 저변이 강물처럼, 호수처럼, 바다처럼 넓으면 그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거예요.
내일 전도 집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한 영혼을 전도해 온다는 게 얼마나 많은 섬김이 필요한지 몰라요. 정말 많은 눈물의 기도와 헌신과 노력이 있어야지 그 한 영혼을 데려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섬김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그냥 필요한 거 다 채워 주고, "나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너는 물질 걱정 없이" 이렇게 하는 것, 아이들에게 결핍을 경험시키지 않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결국에 아이를 응석받이로만 키울 것이냐, 가족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길 줄 아는 인생으로 키울 것이냐? "너는 공부만 해라, 너는 성공만 해라"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다 요셉으로 키우고 싶죠. 유다로 키우고 싶은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거예요. 굉장히 소수예요.
다윗이라는 어린 목동 소년이 나라를 건지겠다고 자기 목숨을 바쳐 희생하려고 하잖아요. 여러분, 그 계보가 어디서부터 내려옵니까? 부모가 그 본을 보여야 되는 것이죠.
유다 지파 얘기를 좀 더 해 보자면, 18절에서 22절을 제가 읽어 볼게요.
"베레스의 계보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베레스가 누구냐면, 창세기 38장에 유다가 동생 팔아넘기고 나서 방황하게 되죠. 자기 가족을 떠나서 가나안 지역에 들어가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아내도 죽고 두 아들이 죽고 막내밖에 남지 않아요. 그런데 그 며느리 다말이, 나오미와 똑같은 상황이에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그 상황이면 죽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자기 살겠다고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서 아이를 갖게 되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베레스예요.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유다가 "하나님이 나를 추적하시는구나" 하고 회개하고 자기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리고 나서 가족을 살리는 희생과 헌신을 하게 된 거예요. "자기 생명을 내놓을 테니까 베냐민은 돌려 달라"—그 헌신의 말 때문에 요셉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움직이게 되죠.
그 베레스의 계보로부터 헤스론, 람, 암미나답, 나손, 그다음에 살몬.
이 살몬이 누군지, 마태복음 1장 5절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살몬이 누구하고 결혼했다고요? 라합이 누구죠? 여리고의 기생. 놀라운 믿음 고백을 해서 여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 그 라합과 도대체 어떤 유다 지파 사람이 결혼을 했을까? 그러니까 성경 학자들은 살몬이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렇게 추정을 합니다. 상당히 그럴법한 추정이라고 생각이 돼요.
어쨌든 그 살몬과 라합의 자녀로 보아스가 태어났고, 보아스가 오벳을 낳게 되고, 이새에서 다윗까지 이어지게 돼요.
이 족보에서 이상한 점이 뭐죠?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그 집안의 자녀를 낳아서 그 집안으로 보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아이 오벳은 나오미의 남편이었던 엘리멜렉의 계보로 들어가야 정상입니다. 근데 보아스의 계보에 오른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자기 아이로 입양을 해서 그 집 땅을 탐낸 거 아니냐?" 이렇게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이미 보아스는 대농장의 지주였어요. 뭐 그것을 탐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오미의 밭은 이미 오랫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서, 굉장히 수고를 많이 해야 되는 땅이었잖아요.
오벳이라는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서 자기 어머니 룻과 자기 할머니 나오미를 섬기려면, 적어도 한 20년은 걸리지 않겠어요? 짧아도 한 15년에서 20년은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보아스가, "자 이제 아들 나왔으니까 너네끼리 알아서 해" 이렇게가 아니라, 룻을 아내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오벳을 자기 아들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리고 이 아이가 커서 나오미를 봉양하기까지 세월이 걸리니까, 보아스가 직접 나오미를 케어한 거예요.
저는 이 보아스를 보면서, 와, 정말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그냥 "내가 책임이니까 해야 되면 하지" 그게 아니라, 정말 가족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진정성이 있는 사람. 대농장의 지주가 타작마당에 밤새 젊은이들이 탈곡하는 자리—거기에 나올 필요가 없거든요.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나올 필요도 없는데 보아스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일꾼들에게도 진정성이 있었고, 자기 가족을 돌보는 데도 진정성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유다도 섬기는 자가 됐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셨고, 보아스도 섬기는 자가 됐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셨고, 다윗도 섬기는 자가 됐을 때 복을 주신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착각하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착각하게 만드는 게 뭐냐면, 요셉처럼 계속 잘 나가야 된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 같아요. 근데 요셉을 생각해 보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돼서 세상을 구원했다, 그것 때문에 자녀가 요셉이 되기를 원하는 거지, "13년 종살이, 옥살이도 해라" 그러지는 않으실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고생을 겪어야 사실 요셉이 되는 거잖아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반전의 은혜예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도 반전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저를 따라해 보세요. "반전의 은혜." 하나님, 우리 인생에 반전의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게 크리스천의 삶이지, 무조건 성장하고 고공행진하는 게 크리스천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닙니다.
5월 가정의 달입니다. 기념일이 왜 이렇게 많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 주변에 소중한 분들을 행복하게 섬기는 한 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고 여러분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여러분을, 여러분의 가문을, 이 시대의 축복의 통로로 세우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귀찮은데 내가 섬겨야 돼,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할렐루야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우리가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의 자녀들도 세상의 리더가 되기를 원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서 경쟁력을 갖춰야 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가야 되고, 좋은 커리어를 만들어야 되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 우리가 너무나 단선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정말 섬기는 자가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을 진정성 있게 섬기고, 내게 맡겨 주신 소중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면서, 사사 시대 360년 만에 빈들의 목동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는, 양 한 마리를 위해서—그것도 자기 양도 아닌, 아버지가 빈들에 내보내서 고생하며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그 양 한 마리를 위해서 목숨 걸고 섬길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진 아이를 통하여 시대를 바꾸셨습니다.
하나님, 섬김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우리 자녀들 가운데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을 치유하고, 가족을 구원하고, 한국 교회를 구원하고, 열방을 구원할 사람들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성으로 기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멘. 하나님,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켜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히 섬기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마음이 유다와 같이, 보아스와 같이, 다윗과 같이 섬기는 자의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어서, 세상을 치유하는 역사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 한 영혼을 사랑하고 섬기는 역사요, 우리의 가정을 세우는 것도, 하나님,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역사가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국 교회가 섬김의 정신이 되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여 주시고, 주님을 닮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고, 우리의 가정 가운데 기업 무를 자가 있느냐 없느냐—당신의 나오미와 룻에게는 자신의 생명보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문제였어요. 여러분, 기업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구속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것처럼, 할렐루야. 우리가 이 마음을 갖게 해 주시고, 우리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도 마음이 좀 불편하고, 게다가 내가 대가까지 치러야 된다 그러면 더 마음이 불편한데, 이 두 가지를 사랑과 진심으로 결단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다윗과 같은 예배자, 다윗과 같은 지도자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요셉은 땅의 복을 많이 받았지만, 그 자손들은 그 기득권 때문에 평생 기득권을 노래하다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평생에 섬기는 자가 되어서,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 그 계보가 쓰임받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오래도록 건강하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예배자로 살게 하시고, 섬기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족이 같이 오신 분들은 손을 잡고 기도하시고, 아이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고, 가족을 대표해서 오신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가정이, 우리의 가문이, 유다 지파와 같은 가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2026.05.03(주) | 주일설교 | 거룩과 행복이 함께하는 삶 (딤전 4:1-5)
거룩과 행복이 함께하는 삶
- 제목: 거룩과 행복이 함께하는 삶
- 본문: 디모데전서 4:1-5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5월 03일 (주일 예배)
[ 설교 요약 ]
1. 성령님과 사탄 —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시고,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게 하시며,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분이시다. 가장 건강한 성령 체험은 진리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며,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면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아비로, 진리를 대적하고 사람들의 눈을 가려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은폐의 영이며, 영적 전쟁은 본질적으로 참말과 거짓말 사이의 싸움이다.
2.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 — 받아들이지 말라
미혹의 영을 받아들이면 귀신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귀신과 대화를 많이 할수록 거짓말이 내면에 쌓여 결국 더 깊이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탄은 온 천하를 미혹하려는 대범한 사기꾼으로, 진리가 임하면 비진리가 사라지듯 성령 충만한 삶이 미혹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패이다. 음지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양지를 넓혀가는 것이므로, 미혹을 두려워하기보다 건강한 교회 안에서 말씀을 읽고 배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3. 영지주의 이단의 구원론 — 2000년 된 거짓
통일교, JMS,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 현대 이단들은 동일한 구원론을 가르치는데, "예수님은 영혼만 구원했고 육체의 구원은 재림 교주가 완성해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의 이단이 주장하던 2000년 된 거짓으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무가치하다는 이원론에서 비롯된다. 이단 사이비는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교인을 유인하며, 의심스러운 제안에는 반드시 목회자와 장로님께 알려야 한다.
4. 양심의 화인 — 거짓 가르침에 무뎌지는 영적 감각
거짓된 가르침에 빠지면 양심이 화인을 맞아, 뜨거운 인두로 찍힌 노예처럼 영적·도덕적 감각이 무뎌지게 된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가족과 교회에 거짓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신천지는 거짓말을 '하나님의 모략'이라 가르치기까지 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로서 거짓을 혐오하시며, 정직한 성품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자 예수님을 필요로 하며, 지존자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다.
5. 금욕이 아닌 감사 — 결혼과 음식은 하나님의 선물
영지주의 이단이 결혼을 금하고 음식을 절제하라고 가르치는 금욕주의는, 완벽한 경건을 인위적 행위로 이루려는 종교적 강박이며, 결국 정죄·자기 비하·교만으로 귀결된다. 반면 성경은 결혼과 음식 모두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물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가르친다. 감사는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삼는 행위로, 범사에 감사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깨닫게 된다.
6. 결론 — 말씀과 기도로 거룩과 행복이 함께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파랑새를 잡으려면 먼저 거룩을 추구해야 하며, 가정을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고 기도로 가족을 감싸면 행복과 거룩이 함께 임한다. 하나님은 예배와 기도뿐 아니라 결혼 관계와 식탁에도 함께하기를 원하시며, '거룩하다'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와 동일한 단어로 일상의 모든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질 때, 우리의 가정과 식탁과 관계가 모두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지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 전문 스크립트 ]
거룩과 행복이 함께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디모데전서 강의 여덟 번째입니다. 이단의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삶이 행복하면서 동시에 거룩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을 나누는 말씀입니다.
1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1절에 성령님이 등장하고 미혹의 영이 등장합니다.
성령님을 소개하자면,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고백하셨어요. 성부 하나님께서 진리의 아버지이시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런 진리를 또한 우리에게 보여 알게 해 주시는 계시의 영이십니다. 아버지의 진리가 우리에게 희미하고, 우리의 눈에 가려져 있고, 우리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때 그것을 열어서 밝히 알려 주시는 분이세요.
고린도전서 2장 12절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는 보통 성령님이 임하시면 방언 등의 은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성령님이 가장 우선시하시는 것은 진리를 계시하시는 거예요.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거예요.
아멘.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 한번 보여 주시겠어요.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깨우쳐 주신다. 또한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는데요, 베드로후서 1장 20-21절 같이 읽겠습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네, 그러므로 성경에 인간 저자들이 있지만 성경 자체가 성령님의 작품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 배경이 성경 중심의 배경이든 성령 중심의 배경이든, 성경 말씀 자체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건강한 성령 체험은 진리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하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이 말씀 체험이 성령 체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 17절에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영적 전쟁을 주도하실 때 어떤 신비한 능력을 동원해서 쓰시는 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영적 전장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순복음 출신이든 장로교 출신이든 간에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소개했으니까 이제 반대편도 소개를 하면,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라면 사탄, 이름의 뜻 자체가 대적자입니다. 진리의 영을 대적하니까 본질적으로 거짓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네, 그래서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짓으로 충만한 영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마땅한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고 교만한 마음을 품었다는 거 자체가 거짓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교만하지 마세요. 교만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타락 천사가 마치 자신이 세상의 임금인 양 행세하는 것도 거짓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인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혀서 온갖 거짓된 신앙에 빠지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것도 거짓 역사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은 참과 거짓의 싸움이에요. 제가 화면에 기록을 했는데, 영적 전쟁은 말싸움이다. 네, 그래서 참말과 거짓말, 진리와 비진리 간의 싸움입니다. 이 원리는 뭐냐면, 영적 전쟁은 마치 법정에서 거짓 증인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진실을 아는 참된 증인이 한 마디를 하면 거짓 증인들의 거짓말은 효력이 정지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느 공간에 빛이 임하면 어둠은 사라지는 거예요. 진리가 임하면 비진리는 사라지게 돼 있어요.
또한 성령님이 계시의 영이시라면 사탄은 은폐의 영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눈을 자꾸 가리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제가 읽어 볼까요.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다"
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 보면, 성령님이 그 영혼을 밝히셔서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둠의 영이, 미혹의 영이 그 사람의 영을 어둡게 만들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또한 오늘 4장 1절에 나온 표현인데, 사탄은 미혹의 영입니다. 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여러분, 한두 사람이에요? 온 천하를 꾀요.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그래서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온 천하 만민을 미혹케 하려는 대범한 사기꾼입니다.
그런데 오늘 4장 1절의 표현에 따르면, 이 미혹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은 귀신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게 된다는 거예요. 제가 최근에도 크리스천인데 귀신 들림 현상이 있는 사람을 만났어요. 자기한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해서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니까, 귀신하고 대화를 너무 많이 했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 있어요. 음악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고, 비주얼 아트,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디자인과 예술에 민감한 사람이 있고, 영적인 세계에 민감한 사람이 있거든요. 근데 어렸을 때부터 귀신이 보이고 천사가 보이고, 그런데 귀신들하고 대화를 너무 많이 했어요. 귀신들은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든요. 기본이 거짓말이에요. 디폴트 값이 거짓말인데 대화를 너무 많이 해서 거짓말을 너무 많이 받아들였더라고요. 그러면서 10여 년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귀신의 들락거리는, 귀신의 개수가 더 많아진 거예요.
여러분, 미혹의 영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대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소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이단 사이비에서 정상적인 성도들을 처음에 가장 많이 흔드는 게 뭐냐면 구원의 확신이에요. "당신 그 교회 다니면 구원 못 받는다, 당신 천국 못 간다"고 하면 너무너무 두렵잖아요. 근데 "우리가 도와주겠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리고 나서 데리고 가서 자신들의 일타강사 같은 사람에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요. 그럼 너무 탁월하게 잘 가르치니까 약간 어리둥절해져 있고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이 완성하지 못한 구원을 우리 교주가 완성해 준다" 교주를 구원자로 가르치는 거예요.
여러분, 황당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제가 어제도 다시 한번 이단들의 구원론을 쭉 정리를 해 봤는데, 교주들 이름은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요, 똑같은 주장을 하는 거예요. 잘 들어 보세요. 통일교회 문선명도, JMS의 정명석도, 신천지의 이만희도,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도 똑같은 구원론을 가르쳐요.
뭐냐면, 예수님은 영혼은 구원했는데 사람의 육체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육체적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재림 교주가 온 거예요. 그래서 재림 교주가 육체를 구원해 주기 때문에 그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와 성도 착취를 합리화시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걸 믿을 수 있냐,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기사를 보면 밑에 댓글들이 "어떻게 저런 걸 믿을 수 있어."
여러분, 이게 2000년 된 거예요.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이 딱 이 주장을 한 거예요. 2000년 묵은 겁니다. 2000년 전에도 사람들이 속았고 지금도 속는 거예요. 이원론적인 관점입니다. 영지, 영적 지식이에요. 영매가 아니에요.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영적인 거는 선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고, 육적인 것은 무가치하고 더럽고 누한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께서 영으로 이 땅에 임재하실 수는 있어도 육을 입고 오실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그 틈새를 교주가 파고드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만 이러는 게 아니라 초대교회에도 있었다라는 거, 요한이서 1장 7-8절입니다. 요한 사도가 얘기한 거예요. 읽어 보겠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이런 자에게 열심히 믿으면 믿을수록 적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창조하신 게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창조하신 줄로 믿습니다. 영계만이 아니라 이 물질계와 인간계, 피조 만물을 창조하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희가 이제 새 가족반에서 사진을 내셔야 등록이 된다, 또 성도들에게는 예전에 등록을 하셨는데 아직도 사진을 저희가 찾고 있는데 못 내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증을 못합니다. 이유는 목회적인 이유도 있지만, 여러분, 정상적인 교회에 이단 사이비가 너무 많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3년, 5년 신앙생활 같이 했어요. 너무 신뢰하게 됐어요. 친해졌어요. 그런데 그 교인이 뭐 집사님이든 권사님이든, 그분이 "교회에도 말하지 마라, 가족에게도 말하지 마라, 좋은 성경 공부가 있으니 함께 가자"라고 하면, 거기를 가도 돼요 안 돼요?
대답은 잘 해요. 근데 너무 많이 가요. 근데 왜 따라갑니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까지 얘기하지는 마시고, 그래도 여러분, 그런 사람이 있으면 목회자한테 얘기하셔야 되고 장로님한테 제보하셔야 돼요.
영적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무서워하는 분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이단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건강한 교회 안에서 열심히 성경 읽고 배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미혹의 영들에게 나도 속을까 봐 어떻게 하나 걱정하시는 분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20%가 이단 사이비잖아요. 다섯 명 중에 한 명이에요. 미혹의 영들에게 속을까 봐 걱정하지 마시고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음지를 줄여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양지를 넓혀가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멘.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세속주의에도 빠지지 않지만 과도한 열광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거예요. 초대교회에서 영지주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는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열심히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방향이 잘못되면 자동차를 열심히 달리는데 방향이 반대 방향이면 열심히 할수록 멀어지는 거예요. 구원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거예요.
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자기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미혹의 영에 빠져서 거짓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면 양심의 화인을 맞게 된다. 고대사회에서는 노예 매매를 했잖아요. 그래서 주인이 노예를 사면 뜨겁게 달군 인두로 노예의 몸에 주인의 도장을 찍는 거예요. 그럼 처음에는 굉장히 아프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부분이 죽어서 감각이 무뎌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짓된 가르침에 빠지게 되면 영적·도덕적 감각이 무뎌지게 된다. 위선에 빠지고 거짓말을 일삼는데도 죄책감이 전혀 없는 망가진 인격, 죽은 인격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단에 빠진 사람들 보면 비윤리적인 행동을 많이 합니다. 서슴없이 합니다. 가족에게 거짓말하는 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 거짓말하는 거 주저하지 않습니다. 신천지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용어로 가르쳐요. 그 모략을 통해서, 거짓말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이 믿고 있는 거짓된 교리에 빠지게 만들고 그걸 하나님이 칭찬하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이신 줄로 믿습니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위증을 하지 말라잖아요. 그래서 과장, 위장, 포장, 변장은 퇴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퇴장이에요. 하나님은 거짓말을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묵상을 하다 보니까, 왜 이단 사이비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수만 명, 수십만 명이 집단적으로 거짓에 빠져 있을까. 이거 심리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거예요. 교주가 메시아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하는 거짓말이 거짓말인 걸 알면서 한다면 사기꾼인 거고, 자기가 진짜 메시아 신드롬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망상장애인 거예요. 과대망상.
여러분,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제일 고치기 어려운 질환 중에 하나가 망상장애. 왜냐면 망상장애는 다른 삶의 부분은 다 정상인데 딱 그 부분만 비정상이에요. 다른 건 다 정상인데 그 부분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거예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알아볼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냐면 정상적으로 가정 생활해요, 정상적으로 학교도 다녀요, 정상적으로 일도 해요. 이 사람 인격적으로 정상적이에요. 근데 그 부분만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람의 망상을 믿는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이 오게 돼 있어요. 가족들이라든지 친한 사람들,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단의 경우에는 그 집단 전체가 교주의 망상을 공유하는 상태에 빠지는 건데, 집단 망상장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일반인들이 볼 때는 아니, 어떻게 사람들이 맨 정신에 저런 걸 믿을 수 있지 의아해하지만, 배후에는 영적인 백그라운드가 있는 거예요.
제가 묵상하다 보니까 사탄이야말로 최대의 망상장애 환자예요. 과대망상. 왜?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인데, 일꾼인데,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게 생각하잖아요. 과대망상 환자예요. 그 과대망상 환자가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망상 증상을 공유시킨 거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유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내 인생 잘 살 수 있다, 내 주먹을 믿겠다" 이렇게 말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서 이 과대망상 환자인 사탄이 마치 하나님이 도와줄 수 없는 걸 자신이 도와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제가 최근에도 한 사람을 상담하면서 "제발 점집에 그만 가십시오"라고 했는데, 그런데 무당이 그렇게 얘기한대요. "나도 하나님 인정한다. 근데 하나님은 기도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다 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빨리 해결해 줄 수 있다." 사탄이 얘기하는 건 똑같은 코멘트잖아요. 멘트가 똑같아요.
왜? 창세기 3장 5절에 보면 뱀이 하와에게 뭐라고 얘기하냐면,
"너희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왜 하나님이 이거 숨긴 줄 알아? 내가 비밀을 알려 줄게. 하나님이 너희를 그 정도로 채워 줄 수 없는 거를 내가 채워 주는 거야." 아까 얘기했잖아요, 예수가 완성하지 못한 구원을 교주가 완성해 주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정신적인 망상이나 영적 망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현실을 직시하고 직면하는 훈련을 하셔야 돼요. 기독교인들은 현실 직시,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니에요. 현실을 외면하려고 교회로 도망온 게 아니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죄를 정면으로 돌파한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서 여러분 정직한 성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 노래인데, 빌리 조엘의 Honesty라는 곡이 있잖아요. 이 정직이라는 게 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언어가 됐는지,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고 돌려서 얘기하지만 정직하기가 참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진짜 정직하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이 진짜 정직하다면 자력 구원이 안 된다는 걸 모를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구원자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돼 있고, 사람이 정말 정직하다면 지존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이 정말 정직하다면 자신의 잘못을 가족들에게 인정하고 화해와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어요.
여러분, 인간이 완벽한 사람 없잖아요. 왜 내가 아빠이기 때문에 항상 옳아야 됩니까, 내가 왜 엄마이기 때문에 항상 옳아야 됩니까? 아니요, 그것 때문에 서로 관계가 깨지잖아요. 우리가 정말 정직하다면 교회라는 영적인 병원에 와서까지 더 이상 자기 포장을 할 필요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정직이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성품에 이르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게요.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이 영지주의 이단이 혼인을 금한다고 한 거예요. 근데 저희는 결혼을 권장합니다. 제가 여호수아 청년부를 한 5년 담당하는 동안 정말 결혼을 많이 시켰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순례했거든요. 그때 제가 주일날마다 진지하게 "손만 잡으면 결혼해라"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머, 악수도 하고 뭐 편하잖아요"라는데, 그렇게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무분별하게 교제하는 거 아니냐? 아니요, 정반대였습니다. 왜냐면 요즘은 플러팅이라 그러지만 그때는 썸이라 그랬는데, 썸만 타고 어느 헌신의 발을 넘어가지 않는 커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옆구리가 쓸쓸하니까 자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상대를 이용하는 것뿐이지, 그 사람의 단점이 드러나고 서로 문제와 갈등이 생기면 "우리 여기까지, 그만 만나자." 헌신할 마음이 없는 거예요. 진정성이 없는 거예요.
근데 제가 "손만 잡으면 결혼하라"고 하니까, 악수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데이트 신청 한번 하려고 해도 "내가 정말 진정성을 갖고 하는 건가"하면서 굉장히 많은 커플들이 결혼하게 됐어요. 할렐루야. 저희 교회는 결혼을 적극 권장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를 나오시는데 커플이 결혼은 안 했는데 계속 둘이 오면, 제가 "결혼을 하셨나요?" 이런 거 물어볼 때가 있어요. 몇 달 동안 교제만 했다든지, 몇 년간 교제만 하신 분들은 진지하게 기도하고 그 헌신의 발을 넘으세요.
그리고 꼭 부탁드리고 싶은 커플은 교제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동거를 하고 계신 커플들이 있다면, 제 말 이해하셨어요? 저를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결혼 상담 해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서울과 경기권에 웬만한 예식장들을 다 다녀서 어디가 좋은지, 어디는 인테리어는 좋은데 음향이 안 좋다든지 이런 거 다 알거든요. 이 직원이 바뀌는 것까지 알아요. "어, 1년 안 되셨죠?"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좋은 예식장 추천해 드릴 수 있고, 저희는 경비가 부족합니다, 카페나 음식점에서 주례도 많이 했어요. 여러분 다 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어떤 음식물은 절제하라고 이야기했는데, 저희 교회는 함께 밥을 먹는 문화를 매우 권장합니다. 음식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욕주의란 무엇일까? 예시를 두 가지 들었죠. 결혼을 금지하고 음식을 절제해라. 그러니까 거룩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 인위적이고 종교적인 자기 포장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완벽한 경건을 삶의 행위로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금욕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완벽주의예요.
제가 한때 완벽주의 때문에 많이 힘든 사람이라, 지금은 많이 풀어진 거예요. 여러분, 완벽주의라는 것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그 목표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금욕주의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경건행위를 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겠다는 강박과 집착이에요.
그러나 완벽주의 자체가 거짓이고 인간의 아집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걸 이룰 수 없는 사람을 보면 정죄하게 돼 있고, "넌 왜 그렇게 안 해?" 정죄하고, 자기 자신이 그걸 못 하면 자기 비하에 빠지고, 그리고 잘해봤자 교만에 빠지는 거예요. "나 이렇게까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야." 이런 거짓에 빠지게 돼 있어요.
아닙니다. 우리는 금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뭘 선택해야 돼요? 감사를 선택하셔야 돼요. 금욕이 아니라 감사를 선택하세요. 그럼 왜 금욕이 아니라 감사를 선택하라고 이야기를 했을까? 오늘 본문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라는 얘기를 계속 강조합니다.
세 가지로 이야기하면, 첫 번째, 결혼도 음식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원론이 아니에요. 한 분 하나님께서 영계만 창조하시는 게 아니라 자연계와 인간계, 물질계를 다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를 위해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이거 선물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두 번째, 범사에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금욕과 감사의 차이점이 뭘까 이렇게 묵상을 해 보니까, 금욕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자기 업적이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금욕주의에 빠지면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에요. "크, 내가 이렇게까지 사는데."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감사는 내 인생의 축복의 사건이든 어려운 사건이든 하나님을 주목하는 거예요. 감사는 너무너무 쉬운 거예요.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이렇게 저를 겸손케 하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상황에 범사에 감사하는 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항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잖아요. 관계적인 필요, 내면적인 필요, 영적인 필요, 하나님은 다 알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감사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아멘. 너무너무 간단한데, 여러분이 삶의 크고 작은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그 순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겁니다.
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함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도 선합니다." 제가 어제 이 문장을 써 놓고 나서,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도 선하다라는 것이 오늘 4절의 말씀인데, 이 두 번째 문장을 써 놓고 고민을 했어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과연 선할까? 망가지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하고, 역기능에 오작동을 하기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디폴트 값은 선한 것이다, 이 얘기를 하고 있어요. 창세기 1장 31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좋다'가 히브리어 토브라는 단어로, 선하다라는 뜻이에요.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 선한 선물을 오남용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음식을 주셨을지라도 여러분, 과식하지 마시고... 아무도 아멘을 안 하시는데, 다 적당하게 드시는 것 같아요. 우리 몸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 입에 들어가는 음료든 음식이든, 나쁜 걸 여러분 넣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안에서 "너 안 먹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 들어 보셨어요? 이걸 한 번도 못 들어보셨어요? 여러 번 얘기하셨어요? 네, 내가 무시하고 먹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스스로 절제하셔야 돼요. 홍수처럼 밀려오는 콘텐츠와 정보의 시대에 분별력과 자제력은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 요소가 된 겁니다.
지난 5월 1일에 제가 너무 좋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송정미 콘서트 오신 분들 계세요? 너무 좋지 않았나요? 와, 첫 번째 곡부터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건 귀 호강을 넘어서 진짜 영적으로 힐링되는 90분의 시간이었어요. 못 오신 분들은 너무 아쉬웠겠다 생각이 되는데, 여러분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영상을 보고, 어떤 글을 읽느냐, 이것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잖아요. 여러분, 쉴 때에도 자극적인 콘텐츠를 내려놓고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한 것들을 선택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5절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이 본문을 제가 상당히 좋아하는 본문이라 오늘 본문과 뒤에 본문까지 참 묵상을 많이 했는데, 아이 참, 말씀이 놀랍더라고요. 어떻게 결혼과 음식이 거룩해질 수 있을까?
여러분, 누군가를 좋아해서 사랑해서 결혼하셨어요. 그러면 결혼하자마자 매 순간이 행복하세요? 자동으로 행복해져요? 안 그렇잖아요. 서로의 장점도 보게 되지만 서로의 밑바닥을 보게 되고, 상처도 받고, 낙심도 하고, 절망도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행복의 파랑새는 잘 안 잡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을 추구하면 행복도 함께 잡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의 기도로 가족들을 감싸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원하는 행복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도 우리 가정에 임하게 되는 거예요.
근데 결혼과 가정은 적용이 되는데, 두 번째 예시를 든 게 음식이었잖아요. 근데 우리의 음식도 거룩해지기를 원하신다, 이게 오늘 말씀이에요. 그래서 제가 묵상을 하다 충격을 받은 것은, '거룩하다'라는 헬라어가 하기오스인데, 그 하기오스라는 단어가 언제 쓰이냐면,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첫 번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할 때, 똑같은 하기오스예요.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료,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우리가 어떤 음료를 마시고 어떤 음식을 먹는 그 일상의 소소한 자리에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임재하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만 하는 데이트가 아니라, 하나님은 결혼해서 일상에 늘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식탁에 마주앉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에 내면의 어떤 문제 때문에 음식을 폭식하거나 아니면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을 하거나, 그럼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는지. 우리가 몸에 좋지도 않은 과도한 음주와 과도한 흡연을 의지해서 인생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면, "주님을 의지하면 좋아질 텐데" 잘못된 길로 돌아가는 우리를 보시면서 성령님이 얼마나 통곡하시는지.
하나님은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만 하나님께 연결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료와 음식, 내 위장에서 소화되는 그 음식까지도 하나님께 연결되기를 원하신다. 오늘부터 내 맘대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제가 저희 어머님이 어렸을 때 "채소도 먹고, 야채 좀 먹어라" 하셨는데, 초록색을 다 싫어해서 안 먹었거든요. 근데 제가 어느 날부터 저희 아내도 워낙 채식을 더 좋아하는데, 어느 날부터 몸에 좋은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내가 변했지?"
여러분, 인생의 딜레마는 내가 먹어야 할 것은 맛이 없고, 내가 먹으면 안 되는 것은 맛있어지는 게 인생의 딜레마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은 내가 먹어야 하는 것이 맛있어지고, 내가 먹지 말아야 될 것은 쓴맛이 되는 거, 그게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인생의 갈등이 사라지게 되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식탁에도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부부 관계와 가족과의 관계에도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2026.05.02(토) | 새벽기도 | 달콤쌉싸름한 인생 (룻 1:15-22)
달콤쌉싸름한 인생
- 제목: 달콤쌉싸름한 인생
- 본문: 룻기 1:15-22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05-02
[ 설교 요약 ]
1. 룻기의 배경과 나오미 가족의 고난
룻기는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이야기로, 결국 다윗의 계보로 이어진다. 나오미 가족은 기근으로 '떡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지만,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기룐을 모두 잃고 나오미만 홀로 남게 된다. 모압 며느리 오르바는 결국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지만, 룻은 빈털털이가 된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결심한다.
2. 룻의 헌신 선언과 나오미 팩터
룻은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고백으로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르기로 결심한다. 나오미는 삶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본을 며느리에게 보여 주었다. 크리스천은 사회적·경제적 성공이 아닌,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3. 매 순간 진심이었던 룻
룻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매 순간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진심이란 전심(全心)이며, 초심과 종심이 같아야 한다. 다윗 역시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들판에서 자기 양이 아닌 아버지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진심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보고 계시며 찾으시고 쓰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의 자리—가정, 직장, 학교—에서 진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 가문과 시대의 역사가 바뀐다.
4. 나오미의 쓴 고백과 약속의 땅을 떠난 결과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돌아와 자신을 '나오미(달콤함)' 대신 '마라(씀)'라 부르라고 한다. 고난을 피하려다 더 큰 환난을 맞게 된 이유는 첫째, 사사 시대의 타락에 따른 징계를 피하려 한 것, 둘째,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양식을 따라 모압으로 간 것, 셋째, 사사기 21:25처럼 자기 소견대로 행한 것이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를 명확한 말씀 없이 떠나서는 안 된다.
5. 결론: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
나오미와 룻이 보리 추수가 시작될 때 베들레헴에 돌아오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복을 시작하신다. 호세아 6:1처럼 하나님은 치신 후 싸매어 주시는 분이다. 룻처럼, 다윗처럼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진심으로 충성을 다할 때, 가문의 역사와 시대의 역사가 바뀌는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 전문 스크립트 ]
룻기 1장 15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내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아멘.
이번 한 달에는 저희가 룻기와 고린도전서 이제 10장까지 보는데요, 암송할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으로, 걸어 다니는 성전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이 성소에서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자리에서 삶의 예배를 주님께 올려 드리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룻기인데요. 오늘 제목은 '달콤쌉싸름한 인생'입니다.
룻기는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룻의 집안에서 결국 다윗이 나오게 되죠. 왕정 시대에 첫 번째 왕은 사울이었지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왕은 누구였어요? 다윗이었죠. 그래서 사사 시대의 한 가지 에피소드이면서 사사 시대의 한계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고, 그 사사 시대의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의 건지심과 구원하심을 통해 한 가정, 한 개인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을 구원하시는 스토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15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내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나오미 가족이 기근에 그들의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가게 됩니다. 그들의 고향이 어디였어요? 베들레헴. 베들레헴의 뜻이 뭐예요? 떡집. 그러니까 기근에 떡이 없어서, 양식이 없어서 베들레헴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까 떡집에 떡이 없어서 이곳을 떠나게 됐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죠.
남편 엘리멜렉이 모압 가서 잘 살아보자 했는데 모압 가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게 됐어요.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게 됩니다.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 '엘리'는 나의 하나님, '멜렉'은 왕이거든요.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 이런 뜻인데, 남편의 이름은 신앙적인 이름이죠. 근데 말론과 기룐은 '병약하다, 낭비하다' 이런 뜻이에요. 아들들 이름을 일부러 이렇게 지었을까요? 별칭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두 아들도 죽고 남편도 죽었어요. 나오미가 홀로 남게 됩니다. 이제 아무것도 없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이렇게 결정을 했는데, 모압에서 얻은 두 며느리가 누구였죠? 오르바와 룻입니다. 오르바는 '암사슴'이란 뜻이고, 룻은 '친구 내지 미인'이란 뜻인데, 둘 다 미인이었던 것 같아요.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처음에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습니다 했지만 결국에는 남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이제 둘째 며느리인 룻에게도 너도 너희 동족, 너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라고 권면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에요. 고대에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었죠. 그래서 남편이 없거나 아들이 없거나 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이 혼자 경제 활동을 하고 생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했어요. 형사취수라는 것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줄 의무가 있었어요. 나오미가, 내가 이렇게 늙어 갖고 뒤늦게 아들을 낳는다 한들 그 아들이 언제 커서 너희 남편이 돼서 도와주겠느냐,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한 걸 봐서는 나오미에게 재산도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그녀에겐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 따라오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어지는 16-17절, 룻이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읽어 볼까요.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저를 떠나가라 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고,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겠다, 그리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거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된 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거예요. 너무나 명확했어요. 그래서 여러분 같으면 이런 선택을 하시겠어요? 룻이라는 여인이 그래서 미스테리한 인물인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지, 왜 그랬지.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 첫 번째는 나오미가 그래도 성공했구나. 뭐 다 실패했죠. 인생이 다 실패했는데 그래도 한 가지 성공한 것은, 집안이 쫄딱 망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신앙의 본을 며느리에게 적어도 보인 거잖아요.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거예요.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족이나 곁에 있는 이웃·지인들에게 내가 크게 성공을 해야, 좋은 대학을 가고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해야 전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고난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짐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 박해 시절에 크리스천들은 거의 다 자기 직업도 잃어버리고 자기 고향도 떠나야 됐고 정말 어렵게 신앙생활 했다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나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좋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으면 이렇게 복 받습니다" 그게 아니었어요. 인생에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과 환난을 맞아도 우리는 넉넉하게 승리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평탄할 때는 모르지만, 인생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갈 때는 죽을 것 같거든요. 숨이 넘어가려고 하고, 그 상황에서 평안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그래도 성공했구나, 며느리에게 신앙의 본을 보였구나. 이 한 가지를 알 수 있고요.
두 번째는, 첫 번째가 나오미 팩터, 나오미 요소라면 두 번째는 룻에 관련된 건데요.
룻은 매 순간이 진심이었구나. 저를 한번 따라해 보시겠어요? 룻은 매 순간이 진심이었다. 매 순간이 진심이었다.
남편에게도 진심이었겠지만, 시어머니는 상당히 어려운 관계잖아요. 근데 그 시어머니에게도 진심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딸 같은 며느리가 가능해요? 친정 엄마 같은 시어머니가 가능해요? 너무나 당연하게 아니라고 그러잖아요.
심리학자들도 그건 마치 사장님이 직원에게 "넌 회사라고 생각해"라고 하는 것과 같다며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 봤어요. 저는 제가 파트 전도사일 때도, 부목사일 때도, 연차가 올 때에도 이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고 나는 이 교회에 충성을 다해야 된다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담임 목사가 부목사에게 당신 목회라고 생각해"라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목회자가 어떻게 해야 목회를 바르게 할 수 있을까요? 담임 목사가 돼서도 어떻게 하면 이걸 그만둘까, 어떻게 하면 도망갈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을까요?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온갖 미사여구로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돌아서면 달라지는, 순간에만 진심인 사람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시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해서, 시어머니에 대해서 이 여인이 진심이었어요.
진심이라는 건 뭐냐면 전심입니다. 전심이 돼야 진심이에요. Full heart가 돼야 true heart가 되는 거예요. 이건 뭐냐면 초심—처음 마음—과 종심—끝 마음, 마지막 마음—이 같아야 되는 거예요. 사실 '종심'이라는 단어는 없어요. 저는 항상 문장을 쓰면서 왜 초심은 있는데 왜 종심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처음 시작하는 첫 결단을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마지막 결의는 흐려지는 경우가 참 많구나.
미혼인 형제 자매님들,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꿈이 있잖아요. 크리스천 배우자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청년부를 할 때만 해도 거의 7대 3이었거든요. 그러면 크리스천 형제만 만나야 된다고 하면 나머지 절반 가까운 자매들은 결혼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목회자이지만 항상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진실한 사람이 된, 진실한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신앙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좋지만, 신앙이 있는데 진실하지 않은 사람, 20년 30년 교회를 다녔는데 인격이 이상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는 신앙이 아직 없지만 진실한 사람을 만나라. 목사가 이상한 얘기 하는 것 같잖아요. 그 다음 하는 얘기는 뭐냐면, 20~30년 교회를 다녔는데도 성격이, 인격이 안 변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못 고친 사람이다.
이중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신앙이 없지만 성품이 좋은 사람, 정말 매사에 진심인 사람,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복음을 빨리 받아들여요. 신 존재에 대해서도, 진리에 대해서도, 인생의 구원의 문제, 아주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진실하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진심이신가요?
학생들 집회 가서 여러 가지 권면을 합니다. 학업에 있어서 스트레스 문제 이거 어떻게 해결할 거냐, 공부가 재미있어지면 된다. 그러면 애들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런 거죠. 직장인들에게 일터에 가는 것, 직장 출근하는 게 행복해지면 되는 거예요. 살림하는 주부가 살림이 행복해지면 되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이런 게 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목회자가 목회가 행복해야 돼요. 근데 동료 목회자들을 보면 행복하게 목회하기 굉장히 어려워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어요. 굉장히 많은 짐을 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움을 당해요.
그러나 결국에 돌파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하는 이 일에, 여러분이 부르심의 자리가 어디든지, 진심이어야 돼요.
저는 룻이 시어머니를 친정 어머니처럼 따르잖아요. 왜 하나님이 룻을 선택하셨을까요? 며느리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어려운 것을 하나님이 요구할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욥기를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욥을 신뢰하셨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걸고 사탄의 테스트에 들어가게 하셨겠느냐, 하나님은 욥을 믿어 주신 거다, 저는 그렇게는 믿어 주시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그런단 말이죠. 룻에게 요구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룻의 인생을 살아야, 사실은 세상 사람들하고 나랑 인생이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고, 직장 가는 사람은 늘 마음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거고, 학교 가서 공부를 해야 되고 시험을 쳐야 되는 학생들은 늘 마음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고. 만약에 늘 그렇게 살아야 된다면 과연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요?
왜 하나님이 룻을 선택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룻의 계보에서 나온 다윗이라는 사람도 거의 동일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빈들의 10대 소년이 버려졌어요. 그런데 그 빈들에서 곰도 나오고 사자도 나오고 맹수들이 나와서 정말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많았을 겁니다. 게다가 그 양은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양들이지 자기 양이 아니에요. 근데 그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잖아요. 생명을 걸고 그 양들을 지키잖아요. 진심이었어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들판에서 뭐 어떻게 농땡이를 치든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진심이었어요.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계셨고, 하나님은 룻을 보고 계셨어요.
어떤 학부모가 고민을 얘기하더라고요. 아이가 굉장히 활동적이고 노는 걸 좋아하니까, 너 문제집 세 페이지만 풀면 그다음에 놀게 해 줄게 그러니까, 그 세 페이지를 답을 아무거나 막 찍는 거예요. 다 풀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힘든 게 뭐예요?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게 힘든 거잖아요. 시간 때우는 거 누가 못 하겠습니까. 직장에 가서 시간 때우는 거 누가 못 하겠습니까. 목회자가 그냥 어쩔 수 없이 설교하고, 어쩔 수 없이 사역하고, 이거 누가 못 하겠습니까.
진심인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거야.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그런 사람을 쓰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학생 대표, 공부가 재미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며느리 여러분, 축복합니다. 아멘. 직장 생활 하시는 분들, 여러분 끌려다니지 마세요. 인생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마세요. 여러분이 일터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행복해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룻이 그래서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이고, 룻과 똑같은 캐릭터인 다윗이 나온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진심이어야 해요. "야, 나는 이렇게 인생을 잘못 살았으니 너라도 인생을 제대로 살아라" 이게 최악의 교육이라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이 먼저 충만하고 행복하십시오. 아멘.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또 충만하고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0절 21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나오미가 이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니까 베들레헴 사람들이 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이렇게 했더니, 날 나오미라 하지 말라, 나를 뭐라고 부르라고요? 마라라. 나오미는 '스위트(sweet)', 달콤하다는 뜻이고, 마라는 쓰디쓴 뜻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이름을 합쳐 보면 달콤쌉싸름한 인생이다.
여러분 아이스크림의 맛을 더하기 위해서 일부러 소금을 뿌리잖아요. 짠맛, 그러면 단맛이 더 부각이 되는 거죠. 단짠 단짠이라 그러는데 그 단맛이 더 부각이 되는 거죠. 근데 나오미의 인생은 거꾸로죠. 스위트한 인생이었는데 인생의 고난이 더 부각이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겁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피하려다가 더 큰 환난 풍파를 맞이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20절을 보면 왜 그렇게 나를 마라라고 부르라 했느냐?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누가 괴롭게 했다고요? 전능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괴롭게 하셨다. 21절에도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더 큰 환난과 고난을 맞게 되었는가.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 첫 번째 사사 시대에는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징계를 주신 거잖아요. 근데 징계를 피해 가려고 하니까 더 큰 환난을 경험하게 된 거예요. 학생이 학교 다니면서 시험 안 볼 수 있어요? 중간고사 기말고사 안 볼 수는 있는데, 졸업 못 하죠. 더 큰 어려움이 오겠죠.
두 번째, 약속을 따라가야 하는데 약속을 따라가지 않고 양식을 따라갔어요. 크리스천은 세상 양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리에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연봉 더 많이 주는 데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콜링이 있는 직장을 가셔야 돼요. 그냥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 가니까 직장 생활 하는 게 힘든 겁니다. 부르심이 있는 곳을 가야 여러분의 영혼이 충만하고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국가대표 선수들이 운동하지 않고 훈련하지 않으면 뭐 만사 편하겠죠. 그러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는 그 경기장이라는 약속의 땅에 있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이 약속의 땅,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떠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실 때까지는 떠나시면 안 돼요. 힘드니까 떠나면 안 되냐? 아니요.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자리는 하나님이 그다음 자리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떠나면 안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 소견대로 행한 것인가. 사사기 21장 25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녀를 괴롭히신 게 아니라, 사실은 그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기 때문이죠. 제가 채팅에서 이 얘기를 하니까 어떤 자매님이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왜 나오미한테 뭐라고 하느냐, 남편이 데려간 거다. 아, 그래서 제가 1장 2절에 보면 남편 엘리멜렉이 주도적으로 데려간 것으로 돼 있어요. 그러나 이 가족 공동체가 함께 간 거잖아요. 그래서 나오미에게는 책임이 덜할지는 모르겠어요. 나오미만 안 죽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남은 고난을 이제 다 당하게 된 건데,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없는가 이렇게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22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긴 겨울 시즌이 지나고 나서 이제 추수의 시즌이 옵니다. 우리는 이제 여름이 지나서 가을에 추수를 하지만, 이스라엘은 우기가 겨울이기 때문에 긴 겨울이 지나면 추수를 하게 되죠. 그래서 유월절 시인 45월 정도가 오늘 나오는 보리 추수, 그리고 67월 오순절쯤에 밀 추수를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수확을 하는 시즌이 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시즌에 그녀의 가정을 위로하시고 채워 주시고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치고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죠.
호세아 6장 1절 같이 읽어 볼까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그녀가 약속의 땅에 돌아왔잖아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인생을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가 시작되는 시작점에 서게 해 주신 거예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나오미가 모든 것을 실패했지만 어떻게 보면 신앙 교육에 성공한 거예요. 그것도 자기 아들들에게는 실패했는데 며느리 하나에게 성공했어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말 진심이었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관계, 어떻게 보면 가장 불편한 관계일 수 있고, 자신의 아픈 기억—남편을 잃고, 시아버지를 잃고, 자기 인생의 실패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진심이었어요. 시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해서도 진심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룻을 선택하신 거예요.
여러분, 아이들을 양육할 때, 내가 이 잔소리를 똑같은 소리를 또 해야 되나 그러는 순간 막 짜증이 나고 화를 내지 마세요. 아이에게 한마디를 할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이야기하세요. 남편에게, 아내에게 한마디를 할 때도 진심으로. 직장을 하루 나가는 것도 그냥 단순히 월급을 받아야 사니까 아니요, 그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진심으로 살아가세요.
하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룻의 마음을 가진 여인을 찾으시고,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가진 형제를 찾으시는 겁니다.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왜 우리 가문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역사를 바꾸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시작점으로 하여서 가문의 역사를 바꾸시고, 시대의 역사를 바꾸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내가 룻의 인생이 되게 하시고 내가 다윗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불러 세우신 자리에서 진심으로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가 시작되는 축복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한 번에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새 일을 행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나오미가 인생의 모든 것을 실패한 것 같지만, 하나님,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예배자의 마음을 온전히 그의 다음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 축복의 계기가 된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어떠한 고난과 환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곁에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거룩한 예배자가 될지어다. 삶에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며 하나님 한 분을 높여드리며 하나님 한 분 앞에 엎드리며 전심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 우리 가정 가운데 치유의 역사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복의 역사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일에 진심을 다하고, 나의 사명에 진심을 다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나의 영혼아 일어날지어다. 나의 영혼아 일어날지어다. 나의 영혼아 일어날지어다.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해 주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 주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르심의 자리에 충성과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인생의 매 순간 100%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에너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살아보려고 결심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결심하고 결단해서 한번 그렇게 살아 보세요. 매 순간 진심을 다하겠다고 하면 사실은 굉장히 에너지가 많이 들게 돼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의 삶이 전혀 다른 삶이 되기 시작할 겁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마음이 없으니까, 내가 저 사람은 신뢰할 수 없으니까, 내가 이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으니까, 내 마음 가운데 사람에 따라서 진심이 달라지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피곤하니까, 지치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게 진심을 다하지 못하면—그 사람이 나한테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할 수도 있고, 회사가 나에게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할 수도 있고, 가족이 나에게 원인 제공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결국에 손해를 보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이 계속해서 영적 수위가 떨어져 가는 거야. 속이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내면의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가장 큰 손해는 자기 자신이 보는 겁니다.
회사가 나한테 제대로 안 해 주는데 내가 뭐 하러 열심히 해야 되나, 가족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내가 뭐 하러 열심히 해야 되나, 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결국엔 여러분 인생의 온전성과 여러분 인생의 진실성을 상실하는 게 가장 큰 손해인 거예요.
여러분,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해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정의 전 인격과 우리의 영혼육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진심이고, 전심 전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내게 맡겨 주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렇게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오늘 이 시간 초청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이게 참 쉽지 않은 길이지만 룻처럼 다윗처럼, 하나님 내게 맡겨 주신 자리에서 진심으로 전심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농도 내면적 농도가 정말 진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시면 좋겠어요. 한 손은 여러분 가슴에 얹고 한 손은 하늘을 향하여 들고.
여러분의 이 기도가 여러분 삶으로 실천하기에 매우 처음에는 힘드실 거예요. 일주일 내내 운동하지 않던 사람이 일주일 내내 운동하기 시작해 보세요. 몸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정말 진심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룻을 통해서 가문의 역사를 바꾸신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 가정에 일어날 것이고, 다윗을 통해서 나라의 역사를 바꾸시고 시대의 역사를 바꾸시고 오고 오는 세대의 예배자들의 역사를 바꾸신 놀라운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04월
2026.04.26(주) | 새벽기도 | 경건의 비밀을 가진 교회 (딤전 3:8-16)
경건의 비밀을 가진 교회
- 제목: 경건의 비밀을 가진 교회
- 본문: 디모데전서 3:8-16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26일 (주일예배)
[ 설교 요약 ]
1. 집사란 누구인가 — 감독(목양자) vs 집사(사역자)
감독이 양 무리를 돌보고 먹이는 목양자라면, 집사는 교회 일을 진행하고 섬기는 사역자다. 지난주 감독의 조건 15가지에 이어, 오늘은 집사의 조건 10가지를 살펴본다.
2. 집사의 10가지 조건 (8-12절)
① 정중해야 한다 (8절)
크리스천의 정중함은 예의상의 존중이 아니라, 건강한 자존감에 근거한 존중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를 존중하심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게 된다.
② 일구이언하지 않는다 (8절)
진리의 말씀을 품는 사람이 말씀의 거울 앞에 날마다 서면 진실함이 성품이 된다.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이시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날마다 말씀 묵상으로 정직한 자신을 대면할 때 진실한 신앙과 언어가 열린다.
③ 술에 빠지지 않는다 (8절)
21세기는 자극 중독의 사회다. 알코올뿐 아니라 스마트폰·동영상·게임 등 끊임없는 자극은 도파민 과분비를 일으키고 결국 일상과 가족에 대한 열정을 빼앗는다. 자극을 내려놓고 인생에 여백을 두어야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다. 크리스천에게는 성령 충만한 기쁨(엔돌핀)과 감동의 눈물(다이돌핀 — 엔돌핀의 4,000배)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이 있다.
④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 (8절)
깨끗하게 벌어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재정 원칙이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그리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물질을 사용할 때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
⑤ 믿음의 비밀을 깨끗한 양심으로 가진다 / ⑥ 먼저 검증받아야 한다 (9-10절)
신앙과 양심은 함께 가야 한다. 신앙을 이유로 직장의 책임을 외면하거나 가정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신앙을 쌓는 곳은 교회이지만, 신앙을 표현하는 곳은 가정과 세상이다. 삶에서 검증된 사람들을 사역자로 세워야 한다.
⑦ 정숙해야 한다 / ⑧ 모함하지 않는다 / ⑨ 절제한다 / ⑩ 충성한다 (11-12절)
언어적 능력이 탁월한 것은 장점이지만, 장점은 곧 단점이 될 수 있다. 뒤에서 조용히 섬기고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이 공동체를 세운다. 또한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으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가정을 실제로 치유하는 능력이다.
3. 교회란 무엇인가 (15-16절)
첫째,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교회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갈등만 가득한 모임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될 때, 불평·다툼·미움이 저절로 사라진다. 갈등 해소의 근본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이다.
둘째,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거짓에서 자유로워진다(요 8:32). 신천지처럼 왜곡해서라도 성경을 가르치는 곳에 사람들이 이끌리는 이유는, 교회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적·변증적으로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4. 경건의 비밀 —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 경건(갓리니스/Godliness)은 하나님을 담는 것,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자기 자신을 비워 희생하셨고, 그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경건의 비밀은 곧 복음의 비밀이다.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 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고, 거절당하고, 물질을 나누고, 헌신하는 삶 — 이것이 경건의 비밀을 가진 교회가 되는 길이다. 은혜가 고인물이 되지 않도록 흘러가게 해야 한다.
[ 전문 스크립트 ]
아, 오늘은 '경건의 비밀을 가진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디모데전서 강의 일곱 번째 시간이고요. 한 지역 교회 장로님이 저에게 "그 교회 부흥의 비결은 뭡니까?" 이렇게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여러분, 부흥의 비밀, 우리의 신앙생활의 비밀이 무엇일까. 이것을 오늘 함께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고.
저희가 지난주에는 감독에 대해서 봤죠. 감독이 목양자라면 집사는 사역자에 해당이 됩니다. 감독은 양 무리를 돌보고 먹이는 사람, 그리고 사역자는 교회 일을 진행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감독에 대해서 15가지를 봤는데 오늘 집사에 대해서 열 가지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 정중해야 한다. 어떠야 한다고요? 크리스천의 정중함은 예의상의 존중이 아니라 건강한 자존감에 근거해서 나오는 존중입니다. 제가 예전에 상당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예의 바름이 사실은 내 안에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20대 초반에 그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완벽주의적인 강박과 집착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잘해야 된다, 이런 자신의 기준을 맞추려는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진짜 사랑하고 배려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신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 비로소 '주님이 나를 이렇게 존중해 주시니까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게 됐어요.' 여러분, 완벽의 기질이 있는 분들도 있지만, 시대적으로 문화적으로, 또 한국 사람들 자체가 강박과 집착이 심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내면적으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냐면 자기 존중감이 떨어지게 되겠죠. 내가 열심히 살아요, 또 때로는 잘하기도 해요. 근데 자기 자신에게 점수가 박한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아니야, 너 열심히 잘 살고 있는 거야"라고 해도 나는 자기 만족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자기 비하감에 빠지기도 하는 거예요.
제가 주님을 만나고 나 자신을 존중할 수 있게 되니까, 비로소 내 가족을 존중하게 되고 내 사람들을 진짜 존중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내적 치유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일구이언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상당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늘 품는 사람이 되면 그 진리가 우리의 성품이 되어서 진실해지는 게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이시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너무너무 싫어하세요. 10계명의 제9계명이 "이웃에게 위증하지 말라."
자,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보면 거짓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사기치는 사람들을 보니까 대범하게 사기를 치더라고요. 보이스피싱범이 전화해서 뭐라고 얘기할까요? 본인이 금융사기 범이면서 "내가 금융사기를 담당하는 검찰청의 담당 검사다." 들어보셨어요? 네, 그렇게 사기를 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등에 없고 하는 거짓말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에요. 저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이 성품이 되기까지 온전한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왜 말씀 묵상이 필요할까.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늘 세우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그 말씀의 거울 앞에 비친 나의 정직한 민낯을 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몇 번 보세요? 뭐 셀 수 없이 많이 보는데,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아침에, 그리고 저녁에는 보시게 되잖아요. 우리가 매일 주님의 말씀 앞에 서야 되는 것은, 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만 치료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묵상으로 새기고 또 담아두어서, 진실한 신앙, 진실한 언어가 우리에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술에 인박히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알코올 문제를 언급했는데, 하나님, 오늘도 또 언급을 할까요. 21세기는 자극에 노출된 사회, 자극에 완전히 중독된 사회이죠. 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이 돼요. 여러분, 한 순간도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중독에 빠져요? 이 도파민 중독에 빠지게 돼 있어요. 사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자극으로 인해서 도파민이 계속 분비되면 결국에는 일상이 재미가 없어져요. 일상이 무기력해져요. 그러니까 정말 내가 살아야 되는 삶에는 전혀 애정이, 열정이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가족과 있는데 가족에 대해서 애정을 표현하지 않아요. 열정이 생기지 않아요. 자기 일에 열정이 안 생겨요.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목회자도 "아, 내가 이 스마트폰 이제 좀 덜 봐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면, 여러분은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 알코올이나 엔터테인먼트의 문제가 뭘까요? 그것은 우울한 우리의 인생을 인위적으로 즐겁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증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런데 그 조증의 높이에서 울증의 깊이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람이 위험한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우울증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보다 조증 때문에 자살합니다. 알코올과 니코틴, 동영상과 게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여러분, 자극을 추구하는 삶을 내려놓으시라는 거예요.
인생은 밋밋하게 사셔야 돼요. 심심하게 사셔야 돼요. 음식도 자극적인 음식보다 심심한 음식이 몸에 좋아요. 근데 맛이 없어요. 근데 그 맛을 들이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에 여지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가 있어요. 크리스천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웃으면 엔돌핀이 돈다, 이런 얘기 들어보셨죠.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찬양하는 기쁨, 성령 충만한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근데 이 엔돌핀이 사람에게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데, 여러분, 사람이 진통제를 놔도 해결이 안 되면 나중에 몰핀을 놓는다 그러잖아요. 이 마약성 진통제죠. 사람의 통증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엔돌핀이 몰핀의 200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성령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근데 우리에게는 또 다른 호르몬 얘기를 하나 더 하면, '다이돌핀'이라는 게 이제 사람에게 나올 때가 언제냐면 감동이 있을 때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릴 때 눈물이 나는데 눈물을 참으시려고 하는 형제님들이 계세요. 참지 마시고, 이 눈물을 흘리고, 그런 감동을 받을 때, 또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 그럴 때 다이돌핀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은 엔돌핀의 4,000배의 효과예요. 4,000배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그냥 인생이 절망스럽고 우울해서 우는 게 아니라, 이 감동이 있어서 눈물이 날 때, 그때 놀라운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미국하고 한국에서 크리스천들의 평균 수명이 일반 비크리스천들의 평균 수명보다 4년이 길어요. 다 내면적 이유가 있는 겁니다.
네. 네 번째,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을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시금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이 수고한 대로 거둘 수 있도록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면 굳이 내가 세상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을 수 있어요. 세상에서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크리스천에게는 "깨끗하게 벌어서 가치 있게 사용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의미 있게, 가치 있게 여러분의 돈을 벌고 쓰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어쩌다가 이제 굉장히 어려운 지역의 작은 교회 교육 전도사님 두 분의 상황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대화를 하다가 "아, 교회에서 학비를 대 주시나요?" 그랬더니 "아니, 전혀 못 도와 주십니다." 그래, 제가 그다음을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인을 통해서 계좌번호를 알아서 제가 이제 학비를 두 분에게 후원을 해 드렸어요. 근데 그 대화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한 분과, 그거를 들은 또 한 분이 또 후원을 하셨어요. 여러분,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느껴지는 감동, 그것이 삶에 얼마나 이 가치감을 주는지 모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여러분의 지갑을 여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여러분, 복음을 전하면서 "야, 이 사람이 받아들일까, 안 받아들일까?" 그 생각부터 하지 마시고, 일단 좋은 식당을 예약하세요. 5월 1일 송정미 콘서트, 일찍 만나서 — 오늘 직장도 안 가는데 — 일찍 만나서 "내가 근처에서 맛있는 거 사 줄게." 정자동이 분당의 핵심이란다. 정자동의 맛집을 예약하시고, 네, 그리고 5월 10일 전도 집회 때도 교회 오셨다가 좋은 맛집에 모시고 가세요. 저는 여러분의 물질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의 재정을 헌신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가 세워진다면 많은 영혼을 살리고 다음 세대를 살릴 수가 있잖아요. 뭐 오늘날 교회 건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지만, 한 생명을 살리고 한 시대를 살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면 하나님이 그 헌신을 절대로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과 1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깨끗한 양심에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을 가지라. 신앙과 양심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유로 양심을 져버리면 안 된다. 그러니까 상식에 맞지 않는 신앙의 길, 물론 하나님은 상식 너머로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자연계의 법칙도, 일반 법칙도 하나님이 만드신 거잖아요.
네, 직장에 다니시는 성도님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회사에도 헌신적이기를 바랍니다. "난 신앙 모임에 가야 된다, 난 오늘 끝나고 교회 가야 된다"며 일도 마무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가시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에 한 기업의 CEO가 저에게 부탁했어요. "설교 시간에 좀 얘기해 달라고요." 이분은 같이 사람들 전도하고 싶은데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정말 어렵다 얘기하시더라고요.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실 때 여러분의 가정을 잘 돌보고 자녀들을 잘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나 교회 가야 되니까, 가족은 밥을 먹든 안 먹든, 애들이 공부를 하든 안 하든"이면 안 되잖아요. 신앙을 쌓는 것은 교회일지라도,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가정과 세상이다.
제가 예전에 밴쿠버에서 한 연세가 지긋하신 권사님이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본인 혼자 시집 올 때는 본인 혼자 크리스천이셨대요. 그런데 그 오랜 세월을 시댁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면서 다 구원을 받게 된 거예요. "그 비결이 뭡니까?" 이렇게 여쭤봤더니 "제가 두 배 열심히 살았습니다. 새벽 예배도 나오고 철야 예배도 나오지만, 저는 정말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못한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잘하기 위해서 정말 두 배로 헌신을 했습니다"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삶에서 검증이 된 사람들을 교회 사역자로 세워야 한다. 이야기를 했어요.
자, 이어지는 11절 같이 읽겠습니다.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여 집사들에 대한 코멘트를 했는데, 여섯 번째는 어떠해야 된다. 정숙해야 한다. 남자에게는 정중해야 한다, 여자에게는 정숙해야 한다. 이제 비슷한 단어인데 원어상의 의미의 차이를 보니까, 정중함은 타인에게 존중을 보이는 걸 의미하고요, 정숙함은 타인에게 존중을 받는 개념이 강합니다. 자, 고대 사회에서 고대 중동에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회를 고쳐야 될 필요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존중받을 수 있는 인격과 신앙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되는 거예요.
오늘날 남녀 평등의 문제가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리 천장이 있나요, 없나요? 있어요. 제가 지금 50대 중반이고, 제가 딱 50이 됐을 때 어떤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80대 장로님 세 분하고 앉아서 얘기를 할 일이 있었는데 "아직 어려워." 제가 나이가 50이 됐는데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물론 상대적으로 어리긴 하지만,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 돼야 어 나이가 들었다고 하실까.
여러분,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리다고, 또 여자라고, 또 회사의 신입이라고, 미숙하다고 존중받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근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존재의 무게감이 필요하거든요. 근데 그 존재의 무게감은 물론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 가운데 거하면 존재의 무게감이 생기게 돼 있어요. 할렐루야. 그래서 내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하심으로 인해서 생기는 존재의 균형, 존재의 무게감을 체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는 같이 읽겠습니다. 모함하지 않고, 매사에 충성한다. 이 세 가지가 연결돼 있어요. 자, 제가 이제 자매님들은 형제님들보다 언어적 능력이 탁월하다 그랬죠. 하루에 언어 사용을 두 배 이상 하니까 언어적 능력이 더 좋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인생은 장점이 곧 단점이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하고 뒤에서 말하고 남의 험담하고, 이런 거 많이 하지 말고, 절제하시고, 오히려 조용히 뒤에서 섬기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을 한 거예요. 그러면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부어드린 그 마리아의 헌신으로 인해서, 교회 공동체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12절과 1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느니라.
열 번째, 한 아내의 남편으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제가 1516교회 시작을 하면서 정말 인생의 어려움, 또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오시게 됐어요. 저는 여러분이 여기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 만나는 은혜만 경험하시는 게 아니라, 복음의 구체적인 능력이 여러분의 가정을 치유하는 역사로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이에요. 복음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바꾸는 능력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에 감독의 조건 15가지, 오늘 집사의 조건 열 가지, 이렇게 나눴는데, "아, 우리 가정은 그래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다"이렇게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은 어떠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에요.
제가 최근에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를 만나고 나서 너무너무, 얘기하는 게 너무나 비슷해서 놀랐어요. 저는 300개 교회 개척 비전인데 그분은 1,000개 교회 개척 비전이세요. 중국이 훨씬 더 크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보면 교회 개척이 쉽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이 내륙에 있는 중국 메인 차이나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곳이잖아요. 다른 도시에 교회를 개척한다,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헌신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교회 개척을 할 때 목회자를 먼저 보내는 게 아니라, 성도를 세 개의 스몰 그룹, 한 30명을 보낸대요. 어떻게 보내느냐, 이분들이 개척 멤버로 가게 되면 집도 이사를 하고 회사도 이직을 한대요. 아, 우리도 가야 하나? 네. 그런데 이분들이 사실 거리 전도를 할 수도 없고 축호 전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어떻게 전도하시느냐 그랬더니, 그 대도시에는 지방에서 — 저희 나라나 비슷한 현상인 거예요 — 청년들이 올라와서 대도시에서 공부하고 직장을 얻고 거기서 결혼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살다 보면, 여러분, 대도시의 삶이라는 것이 화려한 것 같아도 각박하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가정도, 뭐 신혼의 꿈은 잠시고 여러 가지 갈등과 어려움들을 겪는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에게 "당신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가정이 치유될 수 있다" — 이게 그 대도시에 있는 직장인 중국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내면이 치유되고 가정이 치유되는 역사들이 일어나니까 곳곳에서 교회들이 생기는 거예요.
아, 오늘 13절 말씀 한번 보여 주시면, 집사의 직분을 아름다운 지위라고 했어요. 세상에서의 지위는 힘과 권력이겠지만, 여러분, 교회에서의 지위는 사람을 살려내는 아름다운 지위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믿음에 무엇을 얻는다고요? 큰 담력을 얻는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이렇게 와닿습니다. 왜냐면 제가 소심했을 때는 생각이 많고 정말 소심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뭘 하기도 쉽지 않았던 게, 뭘 하기 전에는 늘 주저하는 거예요. 그리고 뭘 하고 나서도 문제는 뭐냐면, 뭘 하고 나면 늘 후회를 하는 거예요. "내가 왜 그 일을 그렇게 했을까, 내가 그 사람에게 왜 그 얘기를 했을까." 그러니까 과거의 실패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오늘이라는 현재, 그 기회의 시간을 살지 못하는 거예요. 늘 인생을 그렇게 허비하며 살았거든요. 그러면서 나 자신을 보면 "아, 나는 왜 이렇게 인생을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아, 나는 안 돼, 빨리 끝내야 될 것 같아." 뭐 맨날 이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저를 주님이 만나 주시고 제 인생을 변화시켜 주셨어요. 할렐루야.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저를 이제 사역자까지 세워 주시니까, 복음은 어떠한 사람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 때문에 엄청난 담력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저는 여러분 가운데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예배도 온라인으로 드리고 있는데 자신의 골방에서 몇 년째 못 나오고 있는 사람들. 삶의 계획도 많아요.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그런데 이것이 삶에 펼쳐지지 않는 분들. 일에 대해서도 소심하고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소심한 분들. 제가 극단적인 유형이었거든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그냥 예수님을 따라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쉬운 방법은, 제가 했던 건데, 그냥 교회에서 "뭐 하자" 그러면 다 했어요. "청소하라"고 하면 청소하고, "예배 부장하라" 그러면 예배 부장하고, 앞에 서는 거 싫어하지만 "찬양 인도하라" 그러면 찬양 인도하고, 뭐 하라고 하는 건 다 했어요. 저는 여러분이 교회에서 섬김의 자리에 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왜 좋냐면, 믿음의 담력을 얻게 되는데, 이거는 내 계획이나 내 뜻을 이루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보면, "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 다 되는구나!" 그거를 체험하면서 믿음의 담력이 생기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이 믿음에 큰 담대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복음을 체험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지, 예수님이 나 같이 변할 수 없는 사람도 변화시켜 주셨지. 그러면 그 누구도 변화시키실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전도를 하다 보면 "야, 이 사람은 도저히 안 바뀔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변하는 걸 보면서 전도에 대한 큰 담력이 생기는 거예요. 성경 지식이 부족해도, 교회 생활이 짧아도, 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자, 이어지는 마지막 15절과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아멘.
자, 크리스천에게 갖춰야 될 덕목, 사역자에게 갖춰야 될 덕목을 이야기하다가 교회론으로 귀결이 됩니다. 교회론이라는 건 '교회란 무엇인가'이죠.
첫 번째,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건 다 모임에 불과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사람들의 아우성, 사람들의 교만, 사람들의 갈등이 표면화되게 돼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그 컨플릭트 레솔루션(Conflict Resolution), 갈등 해소법만 전공을 하시는 실천 신학 분야도 있어요. 저는 이제 갈등 가운데 있는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해소하느냐, 이런 구체적 방법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교회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에 있어요. 하나님이 여기 임하시면 사람들이 경거망동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어요.
제가 그 서인교회 2부 새벽기도를 처음 담당했을 때, 집사님 권사님들이 저한테 와서 "찬양 인도자가 지난주에 안 나왔어요", 뭐 싱어들이 이번 주에는 다 빠진 날도 있었어요, "이쪽에 앉아 계신 분은 기도 시간에 BGM이 너무 커요", 이 사람은 "너무 작아요." 그 좀 크신 분은 스피커 아래에서 좀 옆으로 앉으시라고, 좀 안 들리시는 분은 이쪽에 와서 앉으시라고. 여러분, 그런데 이런 모든 불평불만이 있었는데, 그 새벽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 소리가 다 사라지더라고요. 왜냐,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들이 신경이 쓰이지 않게 돼 있습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지게 돼 있어요. 할렐루야.
제가 밴쿠버 교회에 처음 갔을 때, 2005년도에 교회가 둘로 갈라져 있었어요. 그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고 나서도 저 반대편 사람들 꼴도 보기 싫은 거예요. 이 감정이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새벽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은사 체험을 하고, 방언이 터지고, 예언이 터지고, 주일 예배 때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하니까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사라지더라고요.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너무 강력하니까.
저희가 지난 토요일에 이번 순장 스쿨 마지막 시간에 성령수련회를 했어요. 이쪽 교회에 나가서 했는데, 일단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왜 그런지 좋아하더라고요. 날씨가 화창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냥 예배당 안에서 하루 종일 프로그램을 한 거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마음이 이렇게 오픈이 되더라고요. 그리고는 오후에 저희가 함께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방언받기 원하시는 분들 같이 기도했는데, 형제님들을 다 앞에 앉혀 놓고 자매님들이 뒤에 앉았어요. 제가 그 상황을 보고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형제님들은 표정이고 뭐고 반응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날 "방언받고 싶습니다" 손들고 기도 제목 얘기하고 일어났던 자매님들 중에도 받은 분이 있지만, 앞에 형제들은 아무도 손을 안 들고, 아무도 안 일어났거든요. 근데 두 분이 방언을 받았어요. 그 한 분의 아내가 저한테 얘기하시더라고요. "이번 주에 성경을 믿기 힘들어하던 사람입니다. '이게 진짜 맞아, 이게 맞아' 그러던 아빠가 그날 방언을 받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을 안아 주는데, 아이들이 '아빠, 너무 뜨거워'"라고 하더래요. 그 정도로 강하게 성령님 임재를 체험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는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거잖아요. 그러면 더 이상 의심이 생기지 않게 돼 있어요. 저는 여러분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의 심장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현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두 번째,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전입니다. 저 자신이 깊은 우울과 회의주의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저를 건져 주신 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그게 뭐 타이틀이 목사이든, 전도사이든, 선교사이든, 타이틀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이 진리를 전해서 거짓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야겠다. 이 사명감으로 시작을 한 거거든요.
시편 119편 18절 읽어 볼까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예, 하나님이 저에게 성경을 열어서 보여 주시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세계를. 그런데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오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나나요? 요한복음 8장 32절 읽어 볼까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엇에서 자유롭게 할까요? 모든 거짓으로부터. 내가 원수에게 들었던 모든 거짓된 속삭임, "너는 무가치한 존재야, 넌 살 의미가 없어, 넌 잘할 줄 아는 게 없어, 너는 그냥 빨리 죽는 게 좋겠어." 뭐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그거 묵상하면서 앉아 있었거든요. 제가 신앙인인데도 원수의 거짓말에 완전히 사로잡혀 살다가,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니까 거짓이 사라지고. 할렐루야. 그리고 세상을 보니까 거짓말에 속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거짓으로 얼음이 된 사람들을 '얼음땡' 해 주면서 다녀야겠다." 어렸을 때 얼음땡 열심히 했거든요.
신천지에서 돌아온 한 성도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본인 성경을 너무나 알고 싶었대요. 그런데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신천지는 이상하게 가르쳐서 그렇지 맨날 성경을 가르친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에서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 청년들이 성경 질문을 합니다. "이 기적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건가요? 선악과는 왜 만드셨어요? 창조는 왜 하셨어요?" 뭐 이런저런 질문을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질문을 하면, 순에서도 질문하면, 사람들이 보통 뭐라고 얘기해요? "그냥 믿어." "아니,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아직도 못 믿어?"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질문들을 했거든요. 근데 교회 어른들이 이렇게 답변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들도 답을 몰라서 그랬던 거야. 그러면서 그냥 믿으래요.
아니요, 왜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고, 변증적으로 설명해 주고,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저희가 이제 교회 개척 매뉴얼을 거의 완성해 가는데, 제가 훈련 프로그램을 하면서 목회자들이나 개척 나가는 개척 멤버들이 말씀과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는 게 1차 목표예요. 여러분, 교회 예배당만 건물만 세워 놓으면 사람들이 올까요? 한 사람, 아무리 부정적이고 아무리 어둠에 사로잡혀 있고 아무리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사람이 와도, 그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목회자가 돼야 여러분,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병원에서 한 사람도 수술해서 살려낼 수 없는 의사가 100명, 1,000명이 오면 살려낼 수 있을까요? 그거는 잘못된 생각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복음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 저는 예배를 다시 정의한다면, "세상에 거짓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이 진리 안에서 디톡스를 하는 시간이다." 우리 안에 있는 독성, 세상의 거짓말이라는 독성을 빼내는 시간인 거예요.
여러분,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마지막 16절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채워져 있어요. 교회론은 기독론에 기초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 16절 말씀에 보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저를 따라해 보세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자, 그런데 경건의 비밀이라고 이야기를 해 놓고 나서 예수님 얘기를 쭉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고, 성령의 임재하심 가운데 의로우심이 드러났고, 그분께서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 그것은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천사들이 증언을 하잖아요. 영계에서도 주목하는 놀라운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셨고, 그리고 만국에게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셔서 영광 가운데 승천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근데 제가 볼 때는 앞뒤 표현이 안 맞는 거예요. 다시 3장 16절 앞부분을 보시면, '경건'이라는 단어는 예수님께 쓰지 않아요. 크리스천에게 쓰는 거지. '경건'은 홀리니스(Holiness), 또 다른 표현으로는 갓리니스(Godliness)라고 하는데, 갓리니스는 이제 '하나님을 담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갓리니스를 이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그 거룩을 우리가 닮아가는 것을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경건의 비밀이면 그리스도인을 얘기해야 되는데, 왜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했냐는 거죠. 왜일까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게 경건의 비밀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게 뭘까요? 첫 시작이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희생하셨잖아요. 생명을 내어 주셨잖아요. 그리고 나니까 영계에서 천사들도 주목하는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시고 온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게 뭘까요.
제가 교회론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사실 교회가 이렇게 부흥을 하면 사람들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양가 감정입니다. 제일 불안한 건 뭐냐면,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고, 기도해 보지 않고, 거절을 당해 보지 않고, 전도해 보지 않았는데 교회가 사람들이 늘어나잖아요. 그리고 교회가 은혜가 넘치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내 신앙이 좋다"는 착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도 자기의 헌신이 좋다는 착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비밀, 경건의 비밀은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이에요. 이게 복음의 비밀입니다. 근데 그 복음의 비밀이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되어진 적이 없는데 그냥 부흥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어려운 작은 교회들은 복음을 전해도 복음의 역사가 안 나타나니까 복음의 확신이 떨어지고요, 큰 교회들, 부흥하는 교회들은 전도를 열심히 안 해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오거든요. 그러면 복음을 전한 적이 없어요. 희생을 한 적이 없는데 그냥 교회가 비즈니스적으로 잘된다. 그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쪽도 저쪽도 복음의 본질에서 자꾸 비켜 나가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에게, 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거절당해 보셔야 됩니다.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 여러분, 거절 당하셔야 돼요. 예수님은 거절 당해서 십자가까지 지셨잖아요. 거절 당해 보셔야 돼요. 다섯 번, 열 번. 제가 아는 한 분은 한 분을 전도하기 위해서 2년 동안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전도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지금은 가장 열심히 눈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분이 됐어요.
여러분, 한 영혼을 향한 진심이 무엇인가. 한 영혼을 향한 혼신이 무엇인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가. 경건의 비밀이 무엇인가. 여러분, 경건의 비밀을 가진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에 순 인도자 모임하면서 한 분이 그런 얘기 하셨대요. "아, 송정미 콘서트도 있고 전도 집회도 있고,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아서 좋다." 여러분, 이 기회는, 저는 여러분이 물론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전도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여러분이 그냥 은혜가 고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하십시오. 누군가에게 기도하고, 눈물로 그 한 사람을 사랑하고, 내 물질도 나눠줘 보고, 밥도 사줘 보고,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세요.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을 하세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4.25(토) | 새벽기도 | 주님은 나를 기뻐하시고 나는 주님을 기뻐하리라 (시 104:24-35)
설교 정보
- 제목: 주님은 나를 기뻐하시고 나는 주님을 기뻐하리라
- 본문: 시편 104:24-35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25일 (새벽기도)
[ 설교 요약 ]
1.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 (24-26절)
하나님은 지혜로 만물을 지으셨고, 땅과 바다를 가득 채우셨다. 자연 속에서 초자연을 느끼는 것은 창조주의 손길과 숨결이 피조 만물에 스며 있기 때문이며(롬 1:20),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영의 증거다. 그러나 자연 만물을 경배하는 우상 숭배는 존재의 질서를 뒤집는 것이므로, 우리는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리더로 세우셔서 시간, 공간, 물질, 재능을 다스리며 살도록 복 주셨다(창 1:28).
2. 만민과 만물을 먹이시는 하나님 (27-28절)
하나님은 때를 따라 모든 생물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신다. 광야에서 60만 명을 40년 동안 먹이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83억 인구를 매일 먹이시는 것 자체가 최고의 기적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물질에 매여 사는 것은 존재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므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마 6:11, 26).
3.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29-30절)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면 피조물은 떨고, 호흡을 거두시면 먼지로 돌아가지만, 주의 영을 보내시면 지면이 새롭게 창조된다. 인간은 흙과 하나님의 생기로 지음받은 영적 존재이나(창 2:7),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 영적 기능을 잃게 되었다(창 6: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하나님의 영이 다시 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육신이 아닌 영혼 케어를 본질로 삼아야 한다.
4.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기쁨과 인격적 교제 (31, 34절)
세상 만물은 일시적이지만 여호와의 영광은 영원하며, 하나님은 창조하신 일들로 기뻐하신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for the joy of God)이며, 그 기쁨의 본질은 단순한 오락이나 쾌락이 아니라 우리와의 인격적 교제에 있다(요일 1:3-4).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 역시 그 교제 안에서 누리는 찬양을 가리킨다.
결론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은 나를 기뻐하시고 나는 주님을 기뻐하리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그림이요, 인생 동행의 그림이며, 가정과 교회가 완성되는 지점이다. 존재 자체만으로 서로 기뻐하는 인격적 교제, 다른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존재가 기쁨이 되는 사랑의 관계가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한다.
[ 전문 스크립트 ]
시편 104편 후반부를 오늘 보는데요, 시편 104편의 전반부는 6일 동안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에 대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24절부터 35절까지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물을 섭리하시는가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섭리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플랜, 하나님의 계획 쪽에 가깝고요, 또 하나님의 경영하심의 의미도 갖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시고 그 뜻대로 세상을 경영해 가신다, 그런 의미입니다.
24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 정말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 속에서 초자연을 느끼게 돼 있다. 그것은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의 손길과 숨결이 피조 만물 가운데 스며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로마서 1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 구절을 보면 만물에 신성이 드러나나요? 안 드러나나요? 드러납니다. 자연의 신성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이나 피조물을 경배하라고 하셨나요? 경배하지 말라고 하셨죠. 우상 숭배하지 말라. 우상 숭배는 존재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 4절과 5절, 10계명이 나오는 내용 같이 읽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에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위로 하늘에 있는 것, 아래로 땅에 있는 것,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엎드려 경배하거나 섬기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이 자연 만물을 바라보지 않고 눈 감고 살아야 될까? 아니죠. 오히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 읽어볼까요? 시작.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리더로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에 쫓겨 살지 말고 시간을 다스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다스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물질의 노예로 살지 말고, 물질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름답게, 하나님이 주신 자원인 물질적 자원, 여러분의 재능적 자원, 자연 자원을 아름답게 활용하고 다스리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이고 역사 경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셔서 온 땅에 충만케 하셨다. 이어지는 25절과 26절 같이 읽어볼까요?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니이다."
바닷속에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히 많다. 24절에는 땅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가득하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25절에서 바닷속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면서 크고 작은 동물들을 이야기하고, 딱 대표적인 예시로 뭘 들었나요? 리워야단을 들었어요. 영어로는 레비아탄이라고 하는데, 레비아탄에 대해서는 욥기 41장에 한 장 전체가 리워야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리워야단이 궁금하신 분은 욥기 41장을 읽어보시면 나오는데,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1절과 2절에 "내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놋줄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네가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26절, 34절에서 계속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그래서 리워야단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냥 거대한 고래나 악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부분도 있어요, 성경에. 그런데 이 묘사를 욥기 41장의 묘사를 잘 보면, 강력한 몸통 갑옷을 입고 있는 거대한 반수생 공룡으로 여겨집니다. 반수생, 제가 오늘 아침에도 다시 한번 사전에 찾아보니까, 재수생이 아니라 반수생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 반수생이 아니고요, 육지와 바다 사이를 오가는 반수생 공룡이다 이런 거예요. 육지에서 살던 공룡이 있고, 어룡이 있고, 바다나 물속에 사는 어룡이 있고, 양쪽을 왔다 갔다 했던 반수생 공룡이 있어요.
성경에 어디 공룡 이야기가 나오느냐? 실제로 공룡 화석도 나오는데, 성경에는 왜 공룡 이야기가 안 나오냐, 이런 질문들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욥기에 보면 베헤못에 대해서도, 리워야단에 대해서도 굉장히 자세하게 나오죠. 성경에 공룡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탄닌'이라는 단어가 용(龍)으로 번역이 된 것도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을 했어요. 그러나 '탄닌'은 기본적으로 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럼 왜 공룡으로 성경에 번역이 안 돼 있느냐? '공룡', 즉 '다이노소어'라는 단어 자체가 1842년에 나왔어요. 성경은 한참 전에 쓰였잖아요. 그러니까 공룡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못 된 게 매우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을 창조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7절과 28절, 그러면 그 생물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먹이시는가? 27절, 28절 읽겠습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하나님이 만물을 먹이십니다."
제가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는데, 이게 저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서. 광야에서 어떻게 60만 명을 하나님이 먹이실 수 있느냐? 그것도 40년이나 되는데. 그러면 제가 광야에 40년을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먹이셨느냐? 그걸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을 제가 뭐라고 설명을 해야 이 사람이 믿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 당시에 찾았을 때 한 몇 년 전이었는데, 그때는 70억대였는데, 어제 밤에 쳐보니까 세계 인구가 83억 명을 돌파했어요. 별로 안 놀라시는데, 하나님께서 지금도 83억 명의 인구를 매일같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재우시잖아요. 저는 이거 자체가 최고의 기적이라고 생각이 돼요. 아니, 어디서 그렇게 계속 먹을거리가 나올까? 여러분, 너무 행복하지 않나요? 감사한 거잖아요.
그러면 인간만 먹이시는가? 인간만 먹이시는 게 아니라, 이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의 필요한 먹거리도 하나님은 매일같이 만들어 먹이시잖아요. 부자 아빠 하나님, 정말 부유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거 고민하며 살지 말라고 하나님이 얘기하시잖아요. 그건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존재의 지향점이라는 게 있는 거지, 왜 존재의 비본질을 추구하며 사느냐? 아까 제가 우상 숭배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이런 것에 매어서 살면 존재의 질서가 뒤집히잖아요. 이게 심해지면, 그 애착과 강박, 집착이 심해지면, 그럼 우리가 물질을 섬기는 게 되잖아요.
여러분, 물질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줄로 믿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만민을 먹이십니다." 만물과 만민을 먹이신다고요?
마태복음 6장 11절 말씀 읽어볼까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26절도 읽어볼까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뭘 그렇게 걱정하느냐? 하나님께서 이런 피조 만물을 다 먹이시는데, 어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먹이지 아니하시겠느냐? 물론 사람들이 이 자연을 잘못 관리하는 게 문제고, 이 자연을 오남용해서 자연의 역습을 받고 있는 게 안타깝고, 또 전쟁을 일삼고 폐허를 만드는 게 너무 안타깝죠.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신실하게 변함없이 온 세상을, 만민과 만물을 먹이실 먹거리로 채워주고 계시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29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만물의 경영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낯을, 얼굴을 숨기신다. 시적인 표현을 썼는데,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그들은 먼지로 돌아간다. 무엇으로 돌아간다고요? 먼지로 돌아간다. 흙이라는 단어가 창세기 2장에 나온 그 흙이라는 단어가 먼지의 개념을 갖고 있어요. 아주 고운 흙을 의미하죠.
사람은 창세기 2장 7절에 흙과 하나님의 생기로 지으셨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명 있는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고,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동물은 하나님께서 흙으로만 지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의 호흡을 가져가시면 다 흙으로, 먼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 때로는 자연 만물의 압도적인 위용 앞에 우리가 압도되기도 하고, 또 그 아름다움에 우리가 매료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 앞에서 경배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모든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성실하신 섭리하심과 경영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살리고 계시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거죠.
이어지는 30절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는데, 물론 만민을 지으실 때뿐만 아니라 자연 피조 만물을 지으실 때도 성령께서 창조의 영으로 개입하셨다는 표현의 근거 구절이 됩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로 창조의 주체로 역사를 하신 거죠. 그런데 만물을 또 생명의 역사로 일으키시면 또 세상이 새롭게 생명으로 충만해진다는 거예요.
창세기 2장 7절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지만 영적인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본질이에요? 영혼이 본질이에요? 영혼이 본질이에요. 그래서 육신을, 바디 케어, 스킨 케어, 하여튼 자기 몸 케어하는 거에 인생의 모든 걸 쏟아붓지 마시고, 여러분의 소울 케어, 여러분의 영혼을 케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이 육신의 그릇에 영혼이라는 본질을 담고 있는 존재인데, 문제는 껍데기만 남게 되는 사건이 있었죠. 창세기 6장 3절 읽어볼까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인간이 죄악과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떠나시게 된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 존재의 본질이 영혼인데, 우리 안에 혼은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고, 우리가 영적인 기능을 전혀 못 하고, 영적으로 하나님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우리의 영은 죽어 있는 상태, 그 상태로 몸뚱이만 살고 있으면 거의 요즘 나오는 좀비 영화나 다를 바가 없는 거죠.
그런 상태에 빠져 있던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다시금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은 그 창조하신 만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그냥 한 줌의 먼지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다시 생명을 소생케 하실 수 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세상 만물을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이 얘기를 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그러다가 마지막 12장에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된다.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인생은 허무하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이것까지 따라하셔야 되는데. 다시, "인생은 허무하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그래서 영어로 얘기하자면, "Life is meaningless" 이건 1장부터 11장까지 얘기한 거예요. 그리고 12장에 가서 "Without God."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생은 허무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아름답고 위용을 떨치는 자연 만물도 한순간에 먼지가 될 수 있잖아요.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인생의 한계와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인생이 허무하고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죠.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럼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31절 같이 읽어볼까요?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그러니까 세상 만물은 일시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은 어떠하다고요? 영원하다고요. 세상의 피조 만물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거대한 산맥과 거대한 대양이 그 위용을 자랑해도 일시적인 것이다. 결국에는 끝나는 날이 온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은 영원하다.
그러고 나서 하신 말씀이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오늘 104편에서 말씀하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 뭐예요? 창조잖아요. 창조와 창조하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한마디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이제 결론 부분이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거예요. For the joy of God,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거라고요.
그런데 이거를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니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었나? 만민과 만물이 왜 이 고통의 역사를 겪고 있는데 하나님 즐겁게 해드리려다가 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가?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라는 그 기쁨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순전한 기쁨으로 여기시는 것은 사랑의 교제, 인격적 교제예요. 사춘기 자녀가 인생이 너무 힘들면 "도대체 왜 날 낳았어? 왜 날 낳아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이렇게 얘기할 때가 있는 거죠. 그런데 제가 항상 늘 얘기하는 거지만, "하나님, 힘듭니다." 1절만 하셔야 돼요. 해석으로 2절, 3절 넘어가면 그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발언들을 하게 돼 있어요.
저희가 1516교회를 시작하면서 C4C 교회 개척 운동하는 단체를 시작했잖아요. 그리고 C4C에서 하는 예배 사역을 4.3.1 워십 미니스트리라고 합니다. 아세요? 여러분 알고 계신가요? 4.3.1이 어느 근거 구절인지 아세요?
이사야 43장 21절 한번 보여주시면 같이 읽어볼까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4.3.1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굉장히 이기적이시네, 나한테 박수 보내고 나한테 찬송하고 나를 높이라고 그렇게 세상을 지으셨구나, 그렇게 나를 지으신 거구나. 여러분,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1장 3절, 4절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하노니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뭐가 있게 하려 함이라고요? 사귐, 교제. "우리의 사귐,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다.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와의 교제에 있으신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저와 여러분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였는데, 그 하나님의 기쁨의 본질은 우리와의 인격적 교제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오락이나 쾌락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인격적인 깊은 교제 가운데 나오는 진정한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도록 만물과 만민을 지으셨구나. 마지막 34절 한번 읽어볼게요. 시작.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아멘. 아멘.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나는 그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뭔가요? "주님은 나를 기뻐하시고 나는 주님을 기뻐하리라."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천국의 그림이고,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그림이고,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인생 동행의 그림이에요. 할렐루야.
교회가 이렇게 된다면 교회는 완성의 지점에 이르는 거죠. 그리고 가정이 이렇게 된다면 이것도 완성의 지점에 이르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돈 좀 더 많이 벌어 와." "너 공부를 잘해야 너 사랑해 줄 거야." 이런 거 말고요. 그냥 그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 기뻐하는 것. "당신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기쁨이 된다." 다른 어떤 것들이 개입하지 않아도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교제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있다. 이것이 가정의 모습이 되고 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행복이 존재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뭐든지 해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뭐든지 해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자연 만물을 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거잖아요.
그래서 혼자 살면 돈도 아끼고 건강도 아끼고 시간도 아끼고 좋을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 평생에 사랑할 대상을 만나게 되면 엄청난 생산력과 엄청난 배가의 법칙이 폭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어요. 여러분, 같이 살면 혼자 돈 쌓아두고 혼자 누리면서 살 수 있잖아요. 그럼 더 건강할 것 같고 더 부유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서 그 사랑하는 사람과, 또 사랑하는 대상이 생겨서 그렇게 가정을 이루고 나면, 여러분 그 안에 충만한 기쁨과 충만한 보물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신앙생활,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족을, 부부 간에도 부모 자녀와의 관계에도,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가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런 행복한 공동체를 세워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026.04.19(주) | 주일설교 | 통제할 것인가? 통치받을 것인가? (딤전 3:1-7)
통제할 것인가? 통치받을 것인가?
- 제목: 통제할 것인가? 통치받을 것인가?
- 본문: 디모데전서 3:1-7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19일 (주일 3부 예배)
[ 설교 요약 ]
1. 감독의 직분 — 타이틀이 아닌 섬김의 일을 사모하라
"감독"(ἐπίσκοπος, overseer)은 공동체 전체를 내려다보며 돌보는 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목사·장로에 해당한다. 1절은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이는 직분(타이틀)을 원하는 것과 섬김의 일을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운 것도,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 사역을 전담할 직임자를 따로 세운 것이었다.
2. 직임 없는 직분과 감투 문화를 경계하라
한국의 감투 문화처럼 타이틀은 갖고 싶어 하면서 실제 사역은 하지 않는 직분자가 문제다. 감투를 내려놓고 오히려 겸손히 섬기는 분이 있는 반면, 감투는 원하지만 섬기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공동체도 병들게 만든다. 직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직분을 감당할 내면의 그릇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3. 직함 없이도 헌신할 수 있다 — 다윗, 의병, 이순신의 교훈
다윗은 아무 직함 없이 골리앗과 싸웠고, 수많은 의병들은 직분 없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의 직함을 빼앗기고 백의종군 중에도 목숨을 걸어 나라를 지켰다. 진정한 섬김은 감투나 직함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내면의 사명감과 헌신에서 나온다.
4. 직분을 감당할 내면의 그릇을 먼저 준비하라
사울은 청년 시절 좋은 사람이었지만, 왕이라는 직분을 받은 뒤 무너졌다. 이는 직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감당할 인격적·신앙적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함·소유·지위가 아니라 영혼이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원하시므로, 내용물을 구하기 전에 그릇을 먼저 준비해야 한다.
5. 감독의 15가지 조건 — 절제·신중·단정: 갓 컨트롤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 절제는 자기 통제(self-control)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제(God-control)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결단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 원수의 충동 대신 하나님의 감동을 따르게 된다. 덴젤 워싱턴은 헐리우드의 유혹 속에서도 매일 아침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절제·신중·단정한 삶을 지켰고, 70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6. 통제 욕구를 내려놓으라 — 남자의 지배욕, 여자의 안정욕
남자의 통제 욕구는 지배력에서, 여자의 통제 욕구는 안정 지향에서 비롯된다. 이 욕구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남자는 폭력·권위주의로, 여자는 강박·집착·잔소리로 가족을 옥죄게 된다. 운동회 무승부, 운동장 축구 금지, 대학 교수·군 중대장·직장 상사에게 엄마가 전화하는 한국 사회의 현상은 자녀가 패배와 고통을 통해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과잉 통제의 결과다.
7. 결론 — 인격적인 신앙: 통제가 아니라 통치
크리스천의 핵심 과제는 셀프 컨트롤이 아니라 갓 컨트롤이다. 하나님은 선악과와 십자가 구원조차 인간의 선택에 맡기실 만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우리도 나 자신과 배우자와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며, 통제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의 핵심이다.
[ 전문 스크립트 ]
아, 제목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통제할 것인가, 통치받을 것인가. 오늘 디모데전서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디모데에게 감독으로 세울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읽어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자, 감독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 감독을 영어로, 헬라어 단어를 직역한 것이 'overseer'라는 단어예요. 위에서 이렇게 본다는 뜻으로, 공동체 전체를 보면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죠. 오늘날 교회로 보자면 목사·장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이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의 목자들을 세우셔서 감독하는 일을 하게 하신다는 거죠.
자, 그런데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1절을 다시 보면, 그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요. 자, 직분을 원하는 것은 일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 표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왜냐면 직분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섬김을 원하는 것인가. 가끔 교회 성도님들 중에, 여성도님들 중에, "아, 우리 남편도 교회에서 훌륭한 집사님·장로님이 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 하세요. 아, 물론 좋은 소망인데, 그러나 직분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섬김의 사역을 하기 원하는 것인가, 이건 좀 다른 부분이라는 거죠.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 외에 직분자를 세운 것은 사도행전 6장에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이 처음입니다. 그 내용을 한번 읽어 보면, 사도행전 6장 2절인데요.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교회 안에 과부들이 많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되는데 그 일을 잘 돌보지 못한 거예요. 그럼 사도들이 생각하기를, '어, 우리가 이 일을 해야 되는데 잘 못했네, 조금 더 신경 써서 하자.' 이렇게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되니까, 이렇게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직분자들을 세우자고 결정한 겁니다.
자,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직분은 있는데 직임이 없는 경우가 문제예요. 집사·권사·장로 타이틀이 있는데, 실제로 아무런 봉사를 하지 않고 아무런 사역을 하지 않는 경우. 여러분, 우리나라가 감투 문화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한국 사람들은 기본 명함이 한 세 장은 된다. 어,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애들 학교에서 반장·부반장 시키고 싶어 하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동네 반상회에서든 동호인 모임이든 장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러나 섬김의 일을 하기 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감투를 내려놓는 분도 저는 본 적이 있어요. 예전에 어떤 선교 단체 장이셨는데, 그 선교 단체가 상당히 큰 단체였어요. 근데 이분이 평생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데 안 받는 거예요. 그 계속 전도사로 사역을 하셨어요. 이유가 뭐냐면, 많은 선교사님들이 평신도 선교사도 있고 또 목사님들도 선교사를 하시는데, 어떤 그룹이 됐든 간에 본인을 목사로 부르는 것보다는 전도사로 부르는 게 더 편하지 않겠냐, 그래서 그분들이 자기를 편하게 불렀으면 좋겠고 나도 겸손히 섬겼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얼마나 귀한 생각입니까.
자, 그런데 오히려 역으로 감투는 좋아하는데 섬기는 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죠. 그러면 이제 자신도 병들게 만들고 공동체도 병들게 만듭니다. 오히려 섬김이라는 것은 감투나 직함이 없어도 할 수 있나요, 없나요?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성경에서 다윗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장수였을 때 골리앗과 싸운 게 아니거든요. 아무런 직함이 없는데도 나가서 목숨 걸고 싸운 거예요.
우리나라는 전쟁이 참 많은 나라였죠. 그런데 수많은 의병들이 아무런 직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던 겁니다. 이순신도 전라 좌수사, 삼도 수군 통제사, 이런 직함이 있을 때만 열심히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니잖아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다가 백의종군하게 됐어요. 근데 이 백의종군을 제가 요번에 다시 찾아보니까, 이게 사형 아니면 백의종군이더라고요. 너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나가서 계급장 다 떼고 그냥 일반 병졸로 나가서 싸우라는 거예요. 그러면 한 때 삼도 수군 통제사로 우리나라 군대 전체를 통솔하던 사람이잖아요. 그 일반 병사로 나가라면 나가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이 나라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지난 월요일에 저희 영유아부 담당하시는 이선영 전도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그래서 오늘 1부부터 4부까지 마지막 축도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사 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 이선영 목사님이에요. 전도사가 아니니까 강등해서 부르시는 분은 벌금. 어, 제가 그 목사 안수 처음 받을 때, 성도님들이 제가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이 사람도 와서 저 사람도 와서 저한테 다 한 얘기가 뭐냐면, "전도사님은 목사가 되어도 변하지 마세요." 뭐 이런 얘기를 계속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런 얘기를 할까. 그때는 의문스러웠는데, 어, 제가 이렇게 쭉 사역을 하다 보니까, 정말 좋은 전도사님이었는데 목사가 되고 나서 달라지는 사람, 부목사 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담임 목사가 되고 변하는 사람 있더라고요. 그러면 그 당시에는 진심이 아니었을까요?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섬김의 자리, 헌신의 자리에 서겠다는 그 진심이 그의 직책보다 충만하지 못했던 거죠. 그 타이틀의 무게가 너무 컸던 거예요.
이것은 목사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로·권사·집사도 마찬가지예요. 평신도 때는 정말 겸손하게 사랑으로 섬기던 분이었는데, 직분을 갖는 순간 갑자기 고압적이 되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어떤 교회 같은 경우, 교단이죠, 아예 직분을 교회에서 없애는 경우도 있어요. 형제 교회라고 하는데. 아, 여러분 그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직분이라는 건 성경적인 거예요. 직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직분을 감당할 만한 내면의 준비를 못 한 거예요.
우리가 사무엘상을 1년 내내 강의했잖아요. 사울이 청년 시절에 좋은 사람이었어요, 안 좋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 통독하다가 "아니, 이 안 좋은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골탕 먹이면 어떡하냐." 이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건데, 그런 게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근데 왕이라는 직함을 받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변질된 게 아니라, 왕이라는 직분을 감당할 만한 인격적인 그릇, 신앙의 그릇을 준비하지 못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여러분, "하나님, 저 사업이 잘 돼서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제가 성공하게 해 주세요. 제가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들 하시죠. 아무도 안 하시나요? 하실 텐데. 근데 그런 기도를 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뭐라 그러실까요? "너 감당할 수 있겠니? 너 그게 너에게 복이 되겠니?" 여러분, 우리가 그릇을 준비하지 않고 내용물만 하나님 앞에 요구한다면, 그 내용물을 담지 못해서 결국에는 그릇이 깨지고 인생이 어려워질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직함·소유·지위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자, 이제 감독의 조건 15가지를 2절부터 7절까지 이야기합니다. 오늘 15가지 합니다. 자, 2절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그래서 뭐, 장로가 될 15가지 기준이라고 봐야 될 텐데.
첫 번째는 책망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두루 다방면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이야 된다. 두 번째는 한 아내의 남편이다. 자기 배우자에게, 자기 가족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어야 된다. 그렇죠. 눈에 보이는 가족을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가? 이것이 굉장히 도덕적으로, 관계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 세 번째·네 번째·다섯 번째는 연결된 개념인데요. 읽어 볼게요.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다. 이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몇 번째인가요? 아홉 번째, 마지막 열매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성령의 열매 중에서 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아, 절제는 그런데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절제는 셀프 컨트롤이 아니고 갓 컨트롤. 그러니까 자기가 상황을 통제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제 안에 들어가는 개념이에요. 사람이 윤리도덕적으로 '나 바르게 살아야지, 제대로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이거 아무리 결단한들 인간은 한계가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원수의 충동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가기 때문에 절제의 삶이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경솔함에 치우치지 않고 분별력을 갖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고, 삶이 단정하고 질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와 신중과 단정이에요.
어, 제가 한 사람이 떠올랐는데, 여러분 덴젤 워싱턴이라는 배우 좋아하는 분들 많지 않나요? 아, 그는 원래 목사의 아들이었어요. 근데 그 아버지가 덴젤 워싱턴이 10대 초반 때 집을 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사춘기에 방황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기도로 그 방황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헤어샵에서 할 일 없이 그냥 가만히 구석에 앉아 있는데,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깎고 있던 한 권사님이 거울에 보이는 구석에 앉아 있는 덴젤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 거의 예언이었는데, "너는 앞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될 거야." 처음에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그 말이 계속 따라다닌 거예요.
그가 20대 때부터 헐리우드에 이제 배우 지망생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수많은 파티와 수많은 유혹이 있는 그 헐리우드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기도였다. 그 밤마다 자신의 슬리퍼를 침대 밑에 깊숙이 밀어 놓는데요. 그러면 아침에 일어날 때 그 슬리퍼를 꺼내기 위해서라도 무릎을 꿇게 된다. 아침 첫 시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루도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살게 해 주십시오." 그 기도가 평생을 지켜 주었다. 아, 지난 202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그때가 나이가 70세 되던 해입니다. 어, 지금도 작품을 고를 때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는 작품만 고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덴젤 워싱턴이 나왔던 작품들 기억해 보시면 대부분 권선징악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이에요. 그 영화들을 통해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메시지를 전하는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 통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자,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나그네를 대접하고 말씀을 잘 가르치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삶의 상황이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고 돕는 것,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해당되는 항목입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이렇게 어려운 분들과 나누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도와주시는 걸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가 이제 많은 분들을 만나잖아요. 근데 때로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시고 또 리더의 역할도 잘하는데, 본인의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는 건 아까워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어요. 그 저는 그게 안타깝더라고요. 왜냐면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하면 맛있는 국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고, 맛있는 음료수라도 하나 사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그렇죠, 여러분 다 그렇게 살고 계시죠. 어, 그게 사람의 보통의 마음이거든요.
저는 그래서 나그네 대접과 말씀 티칭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항상 설교 준비를 할 때 '나 밥을 짓는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벽 설교를 할 때는 새벽 밥을 짓는다. 옛날에, 요즘도 여러분 그러신지 모르겠는데, 어머니들이 전날 저녁에 밥을 많이 해서 남아도, 아침에 가족들을 위해서 따끈따끈한 새 밥을 짓는 거예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제 그런 마음인 거죠. 밥 한 그릇을 먹이는 정성과 말씀 한 그릇을 먹이는 정성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서, 한 영혼의 마음에, 인생에 온기를 더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어떻게 해야 말씀을 쉽게, 바르게, 풍성하게 먹일 수 있을까. 그것은 뭐 저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 말씀의 통로가 되는 여러분의 고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신생아에게는 젖을 물리고, 영아에게는 이유식을 먹이고, 장성한 사람에게는 단단한 음식까지 먹이는 거잖아요. 아, 그렇게 여러분이 말씀 안에서 성장해서, 여러분 가운데 보라통 통독 많이 하셔서 말씀에 통달한 사람들이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네, 담대히 아멘 하셔도 돼요. 또한 많은 변증서들을 통해서 기독교 변증에 통달한 사람들이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는 거죠.
자, 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 여덟 번째, 술을 즐기지 않는다. 여러분, 술을 즐기지 않으시나요? 세상 향락이 아니어도 나는 예수님 믿는 즐거움으로 산다, 이거예요.
제가 중학생 때 아직도 기억나요.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나요. 저희 집은 알코올 문제가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건 이거예요. "하나님, 제가 술 마시지 않고도 세상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다는 거를 제 삶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게 기도 제목이었어요.
여러분, 초신자들에게 당장에 술 끊으시라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 그건 너무 무리한 요청이 될 수 있으니까. 아, 그러나 요즘 뭐 직장 회식 문화도 굉장히 많이 변했잖아요. 그럼에도 여전히 술을 강요하는 회사들이 있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 생각을 하시면 좋겠어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술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그런 회사의 강압적인 문화에서 자랐다, 또 내가 마케팅 부서에 있으면서 뭐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았다, 그래도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여러분의 직급이 올라가고, 세월이 지나면 술의 영향력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시점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신앙적인, 인격적인 결단의 타이밍이 반드시 있다라는 거.
물론 한국인들은 음주가무 문화가 강하죠. 제가 한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1인당 술 소비량이 상위 랭킹이었거든요. 아주 탑 랭킹이었어요. 근데 최근에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 팬데믹의 영향이기도 하고 MZ 세대 영향이기도 한데, 여러분 놀라셔야 됩니다. 지난 2021년에 OECD 국가 27개국 중에 우리나라 1인당 술 소비량이 몇 인 줄 아세요? 21위예요. 현저하게 많이 줄었어요.
아, 나도 끊어야겠다. 중독적 패턴의 삶에 여러분을 계속 머물러 있게 하지 마세요. 왜냐면 저는 중독자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그 상담도 많이 하는데, 중독의 특징이 뭐냐면 한 과목에서 끝나지 않아요. 그다음, 그다음 과목으로 옮겨가게 되어 있어요. 그 중독은 하나의 패턴이기 때문에, 하나의 종목에서 중독에 빠지면 이게 영역을 계속 확장시켜 간다고요. 그러니까 알코올 중독인 사람은 이걸로 끝나지 않아요. 성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어, 분노 중독, 우울증도 감정적인 중독입니다. 술 깨고 나면 사람이 디프레션에 빠지잖아요. 우울증, 자살 충동, 이게 다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근데 이 중독자들의 특징은 뭐냐면, "아, 난 중독 아니다, 난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다." 근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호언장담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가 스스로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늪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력 구원이 안 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께 정직하게 엎드려야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 18절 같이 읽어 볼까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멘. 그래서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어, 개인적으로 만나 상담할 때, "어, 제가 알코올 문제가 있습니다. 뭐 이런 문제 저런 문제, 중독의 문제가 있어요." 그거 끊으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해져서, 그것이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고 그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 되면, 이런 세상적인 것들은 후순위가 되는 거예요.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 맛이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자, 아홉 번째·열 번째·열한 번째는 뭐냐면 읽어 볼까요.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한다." 이 세 가지가 연결된 개념이에요. 근데 구타하지 않는다가 성경 원어에도 'strike'라는 단어를 썼어요. 그러니까 힘을 쓰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까요?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고 싶은 거예요. 근데 이거 계속 보면, 구타하지 않는다 다음에 뭐예요? 관용한다예요. 자, 구타하지 않는다는 건 힘으로 내가 상대방을 압도하고 힘으로 내 입장과 의견을 밀어붙이지 않고, 관용은 상대방의 의견도 들어 주는 거예요. 자,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도 들어 주고, 일리가 있다고 인정해 주면, 다툴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연결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내 입장이나 내 의견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위력으로 밀어붙이려는 게 남자가 강할까요, 여자가 강할까요? 네, 어유, 남녀가 공히 다... 남자라고 얘기해요. 보통 여기에는 형제들이 많이 해당됩니다. 자, 형제들은 어렸을 때도, 어린 여자아이들은 만나면 이렇게 소근소근 대화하고 얘기하거든요. 남자애들은 일단 몸을 부딪힌다고요. 그러니까 몸으로, 힘으로, 지위로, 위력으로, 예,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남자들에게 강합니다. 그래서 그 엄마들이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애한테도 지려고 하지 않아요. 아빠들은 게임을 하거나 뭐를 해도 이겨야 돼. 이런 아빠들이 거의 95%예요. 그래서 안 그런 아빠가 있으면 신기한 거예요.
자, 그런데 인생의 힘에는 체력이나 완력이나 권력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자의 인생이 성숙해져 가면서 아, 정말 좋은 힘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지혜의 힘, 사랑의 힘, 비전의 힘, 감동의 힘, 어, 그리고 포용력이라는 이런 건강한 힘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모세가 한 때는 완력과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잖아요. 그러다가 인생 실패했습니다. 40년, 자기 인생도 실패하고 이스라엘도 어려워지고. 그때는 미숙할 때였어요. 그런데 그가 인생이 성숙해지고 나서는 기도의 힘, 비전의 힘, 사랑의 힘, 리더십의 힘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어 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단순한 힘이 아니라 거룩한 힘을 쓸 줄 아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러면 자매님들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 해당이 안 될까요? 자매들도 많이 해당이 됩니다. 자, 잘 들어 보세요. 내가 생각하는 틀 안에 남편도 아이들도 들어오지 않으면 끊임없이 다그치고 잔소리하고 화를 내요. 왜 그럴까요? 이걸 한마디로 표현하면 통제예요. 통제 욕구입니다. 통제하고 싶은 거예요.
자, 남자들이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는 지배력 때문이에요. 근데 여자들이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는 뭔 줄 아세요? 어, 음, 제가 이제 묵상을 해 보니까, 이거는 안정 지향이기 때문에 안정감을 원해요. 남자들은 모험심이 있지만 여성들은 안정을 원하거든요. 근데 남편이 하는 걸 보니까 불안불안해, 애들이 하는 걸 보면 불안불안해. 그래서 "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된다고." 이렇게 해야 된다고 그 얘기를 열 번, 20번, 100번, 천 번 해도 지치지 않아요. 자매님들은. 이제 그것을 듣는 가족들이 시들시들 지쳐 가는 거죠. 엄마는 안 지쳐.
자, 그런데 제가 아까 얘기했잖아요. 크리스천의 통제는 셀프 컨트롤이 아니라 갓 컨트롤. 내가 통제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통제 안에 우리 모두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 여러분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분인데요. 아주 예전에 만났던 분인데, 그 자매님이 하루는 정말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막 벌벌 떨면서 저한테 이제 상담을 오셨는데, "어떻게 남편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 남편이 교회 순장이었고, 아주 좋은 분이에요. 정말 성품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 없어요. 근데 성품이 너무 좋다 보니까 삶에 좀 질서가 없기는 하더라고요. 집에 퇴근해서 들어오면 양말부터 옷부터 그냥 입구에서 하나씩 벗어 들어가는 거예요. 이거를 10년째 안 고친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10년째 안 고치는 그 남자보다 그거를 10년째 고치려고 하는 아내가 더 놀랍더라고요.
그러면 입구에서부터 잔소리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고생하는 남편한테 끊임없이 잔소리, 한 시간을 두 시간. 이 자매는 또 굉장히 딕션이 귀에 박힐 정도로 강력한 사람이거든요. 그 딕션으로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잔소리를 하는 거야. 밥을 먹고 있는데도 계속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자가 나중에 폭발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 착한 사람들도 폭발할 때가 있잖아요. 근데 폭발하면 착한 사람이 폭발하면 위험하잖아요. 그 사람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거든요. 밥을 먹다가 밥을 엎어 버리고 막 성질을 내는 거예요. 그 자매가 "아니, 남편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남편의 분노 폭발은 상처가 되고, 본인이 거기까지 자극을 하고 끊임없이 화를 돋운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더라고요.
여러분, 그럴까요? 자매님들의 안정에 대한 욕구가 엄청 강한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여러분의 강박 집착이 끊임없이 사람을 통제하려고 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빠들은 애들 교육할 때 "그냥 놔도 알아서 크게 되어 있어." 이렇게 얘기해요. 근데 엄마들은 "아니지,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통제를 하려고 드는 거예요.
그 제가 우리나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최근에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이거 알게 됐어요. 여러분, 그 대한민국의 초등학교가 요즘 봄 소풍·가을 수학여행이 거의 다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 초등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학교 끝나고 나서 운동장에서 축구 금지령이 내린 학교들이 갈수록 확산돼서, 전국에 벌써 212개 학교예요. 이게 왜 다 사라져 가는 줄 아세요? 엄마들, 통제하고 싶은 엄마들 때문이에요. 엄마들이 전화하는 거, "우리 애 학교에서 운동하다 다쳤다, 책임져라." 난리가 나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이 아니, 다치는 아픔이 없이, 대가 지불이 없이 뭔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 건 없는 거예요. 그럼 하나도 안 다치고 내 아이가 멋지게 성장해야 된다, 그런 거는 교육이 아닙니다. 또 제가 충격을 받은 게, 축구를 못 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면, 운동장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 놀고 싶은데 6학년 형들만 축구하는 거예요. 축구 잘하는 애들만 축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거기에 끼고 싶은 애들이 소외감을 느낀다고, 우리 애가 소외감 느끼니까 아무도 운동하지 마라. 그래서 축구를 못 하게 하는 거. 와, 한국 엄마들의 파워, 저는 이게 충격적이더라고요.
여러분, 그런데 저도 어렸을 때 생각해 보면은, 6학년 형들이 항상 축구했거든요. 잘하는 애들하고. 그 축구 잘 못하는 애들은 거기 끼지도 못했어요. 그러면 동네 공터에 모여서 못 하는 애들끼리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도 그 메이저 리그에 들어가고 싶다, 그 선망의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을 하면서 실력을 키우는 겁니다. 와신상담하면서, 여러분, 그 메이저 리그에 끼지 못하는 그 마음의 슬픔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거기에 가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없이 어떻게 인생에 성장이 있습니까.
그 요즘 또 재밌는 게, 이거 찾아보다 알게 됐는데, 요즘 초등학교 운동회를 무승부로 다 끝내는 경우들이 지금 많아지고 있어요. 패배에 애가 운다고, "우리 애 왜 울게 만드냐." 여러분, 패배의 눈물이 없이 승리의 감격이 어떻게 존재합니까? 제가 이거 이웃나라 일본도 찾아봤거든요. 일본도 안 하는 걸 우리가 하고 있더라고요. 와, 여러분, 항상 이기는 인생이라는 게 존재해요? 그런 인생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 한 번도 진 적도 없고 한 번도 다쳐 본 적이 없는 애들이 세상에 나와서 적응이 될까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뚫고 나갈 수 있을까요? 패배도 인정할 줄 알고, '아, 난 부족하구나, 내가 노력해야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승자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줄도 알고. 그런 인성과 신앙을 키워 주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너무 흥분했는데, 한국 엄마들의 파워는 어마어마합니다. 여러분의 그 통제 욕구를 내려놓으세요.
예, 조금만 다치면 학교에다가 물어내라 그러고, 책임지라 그러고. 요즘은 교회에서도 문제 생기면 교회에다가, 어, 청구하시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예전엔 다 없던 일들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아이가 대학에 갔는데 대학 교수님한테 전화해서 "우리 애 성적을 이렇게 주면 어떡하냐." 이거 다 엄마가 전화하잖아요. 군대 중대장한테 전화해서 "우리 애 힘들게 하지 말라"고 전화하고. 회사에 애가 들어갔는데 회사 직장 상사한테도 엄마가 전화하잖아요. "애가 피곤해서 오늘은 못 나가니까." 그렇게 하려고, 본인이 직접 연락을 안 하고 엄마들이 연락을 하고 있는 거야. 주여, 말세입니다. 어, 세상에 이렇게 되고 있어요. 제가 한국 사회가 이 정도까지 심해진 줄 모르고 있었어요.
아, 제가 이제 결혼 전 커플들, 결혼하고 나서 커플들한테 권면할 때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대화를 자주 하실 때, 대화를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됩니다. 아, 오늘 분위기 좋은데, 차 한 잔 마시면서 내가 평소에 저 사람 고치고 싶었던 거를 요구해야지. 그러다가 대판 싸우는 거예요. 그 제가 이제 대화, 부부 간의 대화를 왜 하느냐.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네, 와,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구나. 어떻게 이 이슈에 대해서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렇게 상대방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 대화하는 거예요. 네, 여러분, 이해를 위해서 대화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통제를 내려놓으세요.
근데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는 개인 차도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함께 사는 그 남자, 그 여자, 그 자녀들을 여러분이 통제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제가 오늘 1부 예배 설교하고 입구에서 있는데, 남자분들이 저를 손을 잡고, "감사합니다, 제가 통제 사회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더라고. 아, 오늘은 제 한 아내가 변할까요? 그러면서 주여.
그래서 자매님들이 왜 기도를 해야 되는지 아세요? 형제님들도 기도를 해야 되는 건 하나님의 리더십을 인정해야 되니까, 지난주에 얘기했죠. 자매님들은 불안 심리를 맡겨야 돼요. 불안 심리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여러분의 강박 집착과 통제 욕구는 이길 방법이 없어요. 치유될 방법이 없어요. 그거 하나님께 맡기셔야만 됩니다.
저는 가끔가다 요즘도 이제 운전하고 다니면서, 야,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짜리 애들이 가방 혼자 매고 막 길거리 돌아다니잖아요. 미국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거거든요. 예, 혼자 돌아다니잖아요. 애들이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는데 사고 나지 않는 거, 여러분, 24시간 헬리콥터처럼 따라다니나요? 아니잖아요. 아이의 안전, 아이의 평생의 평안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겁니다. 왜 신앙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렇게 불안해 하십니까. 여러분의 통제 욕구를 내려놓으세요.
12번째,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 현대인만큼 돈에 목마른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보다 돈이 중요하면 가룟 유다처럼 신앙을 저버리게 되어 있고, 가족보다 돈이 중요하면 그 돈 때문에 가족들하고도 헤어지게 되더라고요.
여러분, 사업을 해도 상도(商道)를 지키셔야 됩니다. 선물은 가능하지만 뇌물은 주고받으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투자를 받거나 돈을 빌리거나 하시면 안 됩니다. 예, 순 예배 10계명 나눠 드렸죠. 아직 못 받으신 분은 받으시고요. 어, 그리고 나라 돈도 그렇지만 교회 돈, 공공의 돈은 누구의 돈도 아니다, 그래서 눈먼 돈이라고 생각하고 펑펑 쓰거나 맘대로 유용하면 안 됩니다.
자, 4절·5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어, 그래서 13번째는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 治國 平天下), 이 자신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릴 줄 알아야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 아, 내가 천하를 호령하고 싶다? 아, 자기 집도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그거 못 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사회에서, 교회에서는 리더 역할을 하는데, 아, 자기 집에서 자녀들에게 자발적인 순종과 존경을 못 받는다, 이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 분들은 빨리 여러분, 문제의식을 가지셔야 돼요.
아, 제가 쭉 목회를 해오면서 여러분, 그 사회에서도 정말 성공하신 분이고 또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리더인데, 자녀들은 방황하고 자녀들은 우울증에 빠지고, 그런 경우들이 많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알게 되는 거는 자녀들이 와서 저한테 제보를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떤 줄 아세요? 우리 어머니가 어떤 줄 아세요?" 이렇게 제보를 하니까. 그 제가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런 자녀들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제가 만나서 상담할 때 항상 하는 얘기가 있어요. 우리가 다 비정상적으로 산 겁니다.
그렇잖아요. 저도 학생 때 주님 만나고 나서 목적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목회 사역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이게 다 비정상적으로 산 거예요. 정신 건강상 보면 이건 정상적이지 않은 거예요. 남들 놀 때 같이 노는 게 정상이에요. 애들 밥 먹을 때 같이 밥 먹는 게 정상이에요. 샌드위치 하나로 해결하면서 공부하고, 남들 잘 때 나는 밤새면서 공부하고, 이거 다 비정상적으로 산 거란 말이에요.
자, 그런데 나는 이렇게 일반적이지 않게 살았어도, 아, 나는 사명감이 있으니까 스스로 결단하며 산 거는 좋은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의 인생을 통제했던 그 수준과 강도를 아이한테 요구하면 아이는 숨이 막히는 거예요.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그 자녀가 그 부모의 방식을 따라가도 불행하고, 그게 안 돼도 불행해지는 거예요.
저는 아빠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얘기가, 아빠들 상담하다 보면, 아빠들은 그냥 화나면 뛰쳐 나가시기도 하거든요. 아빠들이 제일 하기 힘들어 하는 게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 이걸 인정하는 순간 내 인생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더라고. 아니에요. 저도 아들들한테 사과할 때 많아요.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직장 생활했고, 열심히 사업했고, 내가 가정을 위해서 안 해 준 거 없이 열심히 하지 않았냐. 난 잘못한 거 없다. 너희들이 못 따라온 거지." 그렇게 얘기하지 마시고, '내가 과도하게 열심히 산 게 비정상적으로 산 거구나. 근데 그거를 아이한테 압박한 게 잘못한 것이구나.' 이걸 인정을 하시고, 잘못을 이야기하시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세요. "하나님, 제 열심으로 마치 내가 모든 거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 거 회개합니다." 여러분, 가족을 통제하려고 하지 마시고 내려놓으셔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가족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는 겁니다. 아멘.
자, 6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네, 이어서 7절도 읽겠습니다. 7절 시작.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함이라."
자, 15번째,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된다. 자, 교회에서 신앙심이 좋고 사역도 열심히 하십니다, 인정을 받아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거나 범죄 경력이 있거나,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 리더로 세우기는 어렵잖아요.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면, 사도행전 2장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세상에 비난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칭찬을 받는 교회,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나눈 이야기는 교회 리더십은 이런 조건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였지만, 결국에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인격적인 신앙. 인격적인 신앙. 인격적인 신앙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 것처럼, 아, 나도 나의 삶에 있어서 나 자신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내 가족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거.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통제가 아니라, 통제가 아니라, 통치입니다, 통치입니다. 통제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걸 하나님께 맡기시고,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너무 인격적이셔서, 우리가 잘 이해를 못 할 정도로 하나님이 인격적이신데. 대표적인 거 제가 늘 얘기하지만, 선악과를 따먹느냐 안 따먹느냐에 따라 인류 역사가 달라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중요한 선악과도 우리에게 선택을 맡기셨다는 거예요. 더 충격적인 것은, 죄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구원이잖아요. 근데 그 십자가의 구원조차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가 선악과 따먹으려고 그러면 그거 가만히 두겠어요? 아마 가둬 두려 하겠죠. 예. 십자가 구원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내가 지금 아이가 암 투병하면서 시들시들 죽어가는데, 이 약을 먹어야 산다, 그런데 애가 안 먹겠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이 엄마 아빠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격적이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하는가. 내가 다 결정해 주고 싶어요. 여러분의 불안과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결국에는 스스로가 원해야 그 길을 가는 거예요. 공부 책 한 쪽을 읽는 것조차도, 밥 한 숟가락을 뜨는 것도, 본인이 원해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 자유가 없으면 그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그 자유가 없으면 죽음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어요.
여러분에게 방종을 권면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그 길을 갈 수 있는 인생을 만드셔야 된다. 나 자신도, 내 배우자도, 내 자녀도, 여기에 우리 가정에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2026.04.18(토) | 새벽기도 | 왜 하나님은 악인을 가만 두시는가? (시 101:1-8)
왜 하나님은 악인을 가만 두시는가?
- 제목: 왜 하나님은 악인을 가만 두시는가?
- 본문: 시편 101:1-8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18일 (토요일 새벽기도)
[ 설교 요약 ]
1. 인자와 정의 —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1절)
하나님은 사랑(인자/헤세드)과 공의(정의/미슈파트)의 하나님이시다. 이 두 성품은 곡선과 직선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기 어렵지만, 온전한 인생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자녀 양육에서의 격려와 훈계, 조직에서의 자율과 통제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균형이 요구된다.
미가서 6:8은 그 해답을 제시한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되,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인자와 정의를 완벽하게 이루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이끄심을 구할 때 비로소 그 균형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2. 완전한 길 — 예배와 말씀의 자리 (2절)
완전한 인생은 완전한 마음에서 출발하며, 그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형성된다. 신앙의 진면목은 모든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는 '집'에서 드러난다. 예배의 자리(시편 27:4)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말씀의 자리(신명기 17:19)에서 날마다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이 온전한 인생의 두 기둥이다.
3. 내 삶에서 멀리할 것들 (3-5절)
다윗은 세 가지를 멀리하겠다고 다짐한다. 첫째, 우상(벨리알): 하나님보다 더 애착하는 모든 것으로, 돈·명예·권력·사람·자기 자신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둘째, 배교자의 길: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통치는 거부하는 이신론적 태도로, '이 영역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사악한 계획: 선한 일을 악한 방법으로 하거나, 악한 일을 선하게 포장하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이웃을 헐뜯는 말과 교만한 마음도 내려놓아야 한다.
4. 충성된 자를 곁에 두고, 아첨꾼을 분별하라 (6-7절)
좋은 리더는 충성된 사람, 즉 듣기 싫은 말도 솔직하게 해 주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충신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달콤한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내면의 기준이 먼저 서야, 충성된 사람과 거짓말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
5. 아침마다 내 안의 악인을 멸하라 (8절)
다윗은 실제로 주변의 악인을 다 멸하지 않았다. 이 고백은 자기 내면을 향한 날마다의 다짐이다. 설교 제목 "왜 하나님은 악인을 가만 두시는가?"에 대한 답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세상의 악인을 즉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거짓·교만·우상숭배·탐욕과 날마다 씨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로마서 7장의 두 마음의 싸움처럼, 진짜 영적 전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다. 히브리서 12:4-5이 명령하듯,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날마다 청소하듯 내면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결론
인자와 정의의 조화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능하다. 날마다 예배와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내 안의 악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내 성품이 되고 내 가정과 일터와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공동체가 된다.
[ 전문 스크립트 ]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시편 101편 1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아멘.
네, 오늘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100편 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아멘.
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우리 영혼의 아버지 되셔서 우리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오늘 시편 101편은 표제어가 '다윗의 시'입니다. 그래서 101편은 다윗이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통치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올려 드리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교회 공동체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런 고백의 마음으로 같이 보면 좋겠습니다.
1절 말씀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인자와 정의. 인자와 정의.
네, 인자와 정의를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은 다 '사랑과 정의'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성품으로 갖고 계신 거죠. 이 사랑은 곡선이고 정의는 직선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조화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사실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인생을 살고 또 온전한 공동체를 이끌어 가려면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게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조직에서 사람들을 관리할 때는 항상 자율과 통제, 어디까지 자율이고 어디서부터 통제를 할 것인가, 이 균형을 이루는 게 상당히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뭐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도 그렇죠. 그래서 자율과 통제를 상과 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채찍과 당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어, 격려만 할 것인가 아니면 훈계만 할 것인가. 여러분, 계속 잘했다, 잘했다 이렇게 격려만 하면 어떻게 돼요? 잘못한 것도 잘했다고 하면 되나요? 그러면 이제 아이를 망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아이에게 잘못하는 것마다 쫓아다니면서 혼내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아이가 아무런 삶의 의욕을 갖기가 어렵겠죠. 그것도 또 아이를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예리한 정의, 그러면서 바다보다 더 넓은 사랑을 갖고 계신 분이시죠. 그래서 이제 미가 선지자가 미가서 6장 8절 말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대체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한번 8절 읽어 볼까요? 시작.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한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게 말하자면 인자와 정의, 오늘 본문에 우리가 본 바로 그 인자와 정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와 미슈파트라는 단어를 쓴 건데, 인자와 정의는 끊임없이 구약 성경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사람이 조화를 이루겠는가.
그래서 정의를 행하면서도 인자를 사랑한다 — 이걸 어떻게 보자면, 나 자신이 먼저 바르게 살아야 되겠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을 잘 관리하고 철저하게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 어려워요. 이걸 이중적이라고 보시면 안 됩니다. 내가 정의롭게 살았으니까 다른 사람도 정의롭게 살아야지 — 물론 맞는 얘긴데, 그러나 리더가 될수록 부모가 될수록 어떻게 보면 자기 관리가 더 철저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자,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우니까, 8절 마지막에 한 가지가 더 붙었는 줄 아세요?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자와 정의를 완벽하게 이루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이 두 가지를 온전하게 하고 싶지만 어느 지점에서 이게 만나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매번 고민을 해야 됩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렇고 조직을 관리할 때도 그렇고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렇고, 어디까지가 정의고 어디서부터 인자인가 — 인생의 딜레마죠. 근데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아멘.
네, 자, 그래서 부모로서 내가 너무 아이를 방임할 수도 없고 내가 너무 아이를 압박할 수도 없는 거죠. 어, 자, 그러면 내가 아이에게 어디까지 "너 공부해야 돼, 공부해야 돼, 열심히 해야지"라고 하고, 어디서부터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라고 할 것인가. 이것을 온전하게 하려면 아까 우리가 읽은 미가서 6장 8절에, 부모인 내가 완전하신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되는 거예요. 완전하신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하나님이 내게 그분의 온전하심으로 이끌어 주시는 체험을 해야 내 자녀에게도 그것을 베풀 수가 있는 거예요. 그 균형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안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자녀도 그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자, 이어지는 2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그래서 1절에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 왜냐하면 그 인자와 정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2절에 그것이 완전한 길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죠.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여러분, 완전한 인생, 완전한 길을 간다는 것은 완전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네, 그런데 그것을 오늘 2절에 보면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하여서 이것이 가능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완전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첫 번째로 '흠이 없다, 완전하다'는 의미가 있지만, 두 번째는 '온전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완전성과 온전성은 조금 다른 거죠.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겠다" — 사실 인생이, 또 신앙이 어떠한가가 검증되는 것은 집에서죠. 모든 사회적인 가면을 다 벗고 진짜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곳이 자기 집입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집은 어디일까. 첫 번째는 자신의 가정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의 집을 세워 주신다 — 이건 왕조를 얘기하는 거였잖아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왕궁이 두 개인 거죠. 그럼 하나님께서 나를 청지기 역할로 세워 두신 그 집에서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완전한 길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예배의 자리. 예배의 자리. 또 한 가지 따라해 보세요. 말씀의 자리. 말씀의 자리.
네, 이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 27편 4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아멘.
네, 토요일, 뭐 쉬고 싶은 날이지만 이른 아침 하나님의 집을 사모해서 찾아온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예배의 자리는 내 영혼의 홈베이스이기 때문이죠. 뭐 세상에 많은 경기들이 있는데, 저는 야구 경기가 1루, 2루, 3루를 지나서 항상 홈베이스로 돌아온다는 게, 인생이 마치 그런 거죠. 우리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겠지만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잖아요. 가정으로 돌아오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내 영혼의 홈베이스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처소도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곳에서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내 인생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두 번째는 말씀의 자리입니다. 신명기 17장 19절 같이 읽어 볼까요?
평생에 자기 앞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아멘.
네, 이 왕을 세우게 될 경우에는 왕이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고 읽고 묵상하며 그대로 살아야 된다. 여러분, 매일 아침 큐티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에 그 묵상했던 말씀을 복기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뭐 밤중에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여러분, 잠을 자면서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낮이나 밤이나. 그래서 말씀의 자리에서 아침에 말씀을 통하여서 하루를 준비하고, 또 밤에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온전한 인생은 온전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는가. 그래서 다윗이 오늘 1절과 2절에 본인이 추구하는 영적인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했어요.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3절부터 5절까지 이야기합니다.
3절에서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네, 3절에 '비천한 것'이라고 표현돼 있는데, '비천한 것'은 이제 '벨리알'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이 '벨리알'이란 단어가 신약에도 나오죠.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헛된 것'이란 표현으로 우상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상을 내 눈앞에 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럼 우상이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애착을 갖고 집착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그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죠. 돈도 우상이 될 수 있고, 명예나 지위, 권력도 우상이 될 수 있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우상이 될 수 있죠. 만약에 나 자신이 하나님보다 중요하다면, 그럼 셀프 워십,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게 되죠.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자는 우상을 자신의 인생에 둘 수 없다. 나는 우상을 내 눈앞에 두지 않겠다.
자, 두 번째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고 붙들지 않겠다. 자, '배교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여러분, 뭐 구약 시대, 다윗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배교자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난 여호와 하나님 안 믿겠다"라는 이런 배교자들이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 많이 나오는데, 이 시편에 다윗의 동족들은 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에 이신론적인 무신론자들이 등장을 합니다.
이게 뭐냐면, "내가 이렇게 죄를 짓는다고 하나님이 어디 계신다고 나를 벌하시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마치 세상은 만들어 놨지만 전혀 개입하지 않는 눈먼 장님처럼 생각하는, 하나님은 전혀 인생과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내 맘대로 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길을 나는 따라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긍정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에서, 나의 일터에서 나를 다스리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네, 나를 다스리시는 거예요. 그런데 종종 성도님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간혹 그런 분들이 있어요. 물론 세상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있겠지만, "아, 목사님, 사업하다 보면 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를 하다 보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친히 보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인간이 스스로 제한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만약에 그런 생각이 있다면, '아, 이 영역은 어쩔 수 없다, 이 영역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부분이 생기는 거예요. 물론 시간이 걸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이 다스리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그게 오늘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5년 뒤에, 10년 뒤에, 15년 뒤에라도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 공동체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이 공동체에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영역은 하나님도 손을 못 댄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신화가 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그래서 그런 이신론적인 사람들, 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 인정해도 나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사람들 맘대로 하는 거다 — 이런 길을 나는 따라갈 수 없다는 거예요. 세 번째, 4절 말씀에 보면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고의로 악한 일을 계획하거나, 악한 일에 가담하거나, 악한 일을 진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악한 방법을 쓸 수 있잖아요. 그렇죠. 네, 갑자기 당황하시는 것 같은데. 정반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악한 일도 선하게 할 수 있잖아요. 이게 이해가 안 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 범죄 영화 많이 보잖아요. 범죄 영화 보면 집단으로 뭐 은행 강도를 하는데, 뭐 그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그 사람들을 멋있게 그리는 그런 영화도 있잖아요. 근데 서로 신의를 지키지 않고 팀워크가 맞지 않으면 그 나쁜 짓도 이루어지나요, 안 이루어지나요? 안 이루어지게 돼 있어요. 굉장히 신실하게 나쁜 짓을 해야 되는 거예. 이상한 얘기 같지만, 그래서 세상에 선이 개입하지 않는 한 악도 완성될 수 없다.
그런데 악한 일도 선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선한 일도 악하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가, 여러분,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게 무슨 나쁜 일 아니잖아요. 좋은 일이잖아요. 그 좋은 일인데 아이를 비인격적으로 몰아붙여서 그걸 한다면, 그럼 나는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선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고 있는 거죠. 회사에서 이 회사가 수익 구조가 되게 만들어서 대사회적인 기여를 한다, 물론 좋은 일이죠. 그런데 그것을 여러 가지 불법, 편법, 탈법을 하면서 수익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나머지 여유 재정을 가지고 사회 봉사하겠다 — 여러분, 선한 일을 악하게 하기도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일을 선하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세요.
네, 오늘 굉장히 답답해 하시는 것 같은데. 네. 그래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않겠고 악한 일을 도모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어요. 여러분, 왕이 정치적으로 타협해야 될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왕이, 물론 왕정 시대이기는 하지만, 다윗도 끊임없이 사방에서 정치적인 압박을 받았잖아요. 네, 그러면 악한 일인데 선하게 포장하기도 하고, 선한 일인데 악한 방법으로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을 많이 하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런 경우들이 반드시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살고, 하나님 앞에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으로 살고, 그래서 항상 내적 기준을 갖고 살아야 분별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당장에는 나에게 손해가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 내가 지킨 그 말씀이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 5절에 보면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사랑으로 조언하고 사랑으로 중보 기도를 할 수 없다면, 사람에게 함부로 나서서 조언을 하면 안 되죠. 그거 자체가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뒤에서 모여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일, 이거 하지 말아야 된다. 앞에서나 뒤에서나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런데 앞에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 말할 수 없으면, 네, 그냥 기도하셔야 되고, 더 기도하고 기도해서 정말 사랑으로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야 되는 거죠.
자, 교만한 눈과 마음을 내려놓겠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은 나를 무너지게 하고 교만은 공동체를 무너지게 만들죠.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보조를 안 맞춰 주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게 됩니다.
자, 이어지는 6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네, 충성된 자를 살펴서 나와 함께 살게 하겠다. 자, 여러분, 왕이 충신을 좋아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왕이 충신을 좋아할까요? 항상 좋아할까요? 충신은 충언을 하잖아요. 왕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도 하잖아요. 항상 좋아할까요? 그래서 리더들은 좀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반드시 생기거든요. 근데 충신은 반대 의견도 내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충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두셔야 좋은 리더가 되는 거예요.
지금 다윗이 "충성된 자를 살펴서 나와 함께 살게 하겠다"는 이 고백은 굉장히 중요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 목사가 놓치는 게 있을 수 있어요. 굉장히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성도들의 의견이 중요하고, 아이들의 이야기까지도 굉장히 소중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 눈높이에서 보이지 않는 게 있기 때문이에요.
자, 그리고 6절 하반절에 보면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어떻게 완전하겠는가. 여러분,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살려고 노력을 할 뿐인 거죠. 그래서 뭐 성경에 노아도 욥도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100% 죄가 없어서 완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 그 사람을 온전한 자라고 성경이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과 내가 함께하겠다는 거죠.
자, 7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자, 아까는 충성된 사람을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에요. 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리더가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 것 같죠. 그런데 아첨한다는 건 다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일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데 "일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라고 그럴싸하게 보고하는 사람을, 리더가 일단 안심하잖아요. 그 충성스러운 사람을 좋아하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싫어할 것 같지만, 여러분, 세상에, 여러분의 회사에 — 뭐 작은 데 다니면 팀장부터 해서 부장님, 대표님 다 보세요 — 거짓말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충성한 사람을 싫어하게 돼 있어요. 이게 우리의 내면의 문제라는 거예요.
결국에는 리더 자신이 진실을 사랑해야 돼요. 듣기 힘들어도 진실된 얘기를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그래야 그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귀한 거예요. 그리고 아무리 나에게 달콤한 얘기를 해도 거짓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내면의 기준이 서는 거예요. 왜 "그때 다 됐다고 했더니 거짓말을 했어"라며 나중에 화내는 건 다 소용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바른 길을 따르겠다는 결심이 먼저 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 8절 말씀 마지막 8절 읽어 볼게요. 시작.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아멘.
데, 저는 이 8절을 읽으면서 "세상에 어떻게 악인을 다 멸하겠는가. 아침마다 이 땅에 모든 악인을 멸하겠대요.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그리고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악인들을 그렇게 멸했나요? 대답이 없네. 오늘 여러분, 주변에 악인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나요? 요압도 그렇고 아비새도 그렇고 뭐 거의 다 대부분 놔뒀어요. 그냥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맡겨 드렸지, 자기가 직접 처단하고 이런 거 잘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뭐 자녀들의 문제 같은 경우에는 너무 징계를 하지 않아서 또 문제가 되기도 했죠.
저는 이 8절을 오늘 1절부터 8절 이렇게 쭉 보면서, 약간 다윗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악인들이 있어서 악인들을 진짜 다 멸하면서 살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그냥 자기 내면에 "난 이렇게 살아야 돼, 난 이렇게 살아야 돼"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과연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하는가? 그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것이 인자와 정의잖아요. 그 완전하신 길을 내가 추구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악의 문제를 스스로 계속해서 내려놓고자 하는 이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멘, 아멘. 여러분, 악이 세상에서 보면 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이 "왜 하나님은 악인을 가만 두시는가?"입니다. 제목이 오늘 본문의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하나님이 악인을 가만두신다고 다윗이 불평한 게 아니잖아요. 근데 제가 이런 제목을 고민하면서 정했는데, 이유는 뭐냐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에요. "과연 선하신 하나님은 왜 악인들을 가만히 두시는가?"
그때 제가 이제 반문하는 것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다, 정말 잘못할 때마다 한 대씩 쳐서 다 없앤다 — 그러면 나는 거기에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이 질문 하기가 어려운 거잖아요. 나는 얼마나 내 안에 있는 거짓과 음란, 미움과 폭력, 교만과 우울, 시기와 질투 — 내 안에 있는 이 악의 문제를 얼마나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애를 쓰는가. 하나님에게만 "하나님, 왜 세상의 악인들을 가만히 두십니까?"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나는 내 안에 있는 악의 문제와 얼마나 씨름하며 사는가.
여러분, 내 안에 있는 이 가라지를 뽑는다는 게 이게 평생의 작업이잖아요. 온전하게 사는 것 같다고도, 어느 날 갑자기 울컥해서 성질을 내고, "아, 하나님 제가 또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가 얼마나 많나요. 하나님께는 "악인을 가만히 두신다"고 원망하면서, 나는 왜 내 안에 있는 이 악의 문제와는 평생을 씨름하지 않는가.
여러분, 내 안에 영적 전쟁이라는 것은 밖에서 이루어지기 전에 내전이거든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이 가장 큰 거예요. 로마서 7장에 사도 바울이 두 마음에 대한 얘기를 하잖아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이 죄의 정욕을 따라가는 마음 — 이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매일 싸우고 있다고요.
히브리서 12장 4-5절 읽어 볼까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거예요. 혈전을 벌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다윗이 — 다윗의 시인데 — 아니, 다윗이 이런 마음으로 살긴 했지만 그 악인을 실제로 멸하지 않았는데, 왜 "아침마다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라는 이 고백을 했을까. 아침마다 기도로 악인들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린 것도 있겠고, 그러나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이 악의 문제를 끊임없이 청소하고 또 청소하듯이 — 여러분, 하루 청소해도 또 지저분해지지 않아요? 그럼 또 청소하잖아요. 설거지거리는 왜 이렇게 매일 나오는지, 네. 청소할 거리는 왜 이렇게 매일 나오는지, 네. 빨래할 거리는 왜 이렇게 계속 나오는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끊임없이 이 내면에 끼는 찌든 때와 같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하나님께 따질 일이 없어요. "하나님은 왜 악인을 가만 두시냐", 그런 말 하기 전에 — 내 안에 있는 악의 문제와 씨름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하나님, 내 안에 거짓이 있습니다, 내 안에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내 안에 악함이 있습니다, 내 안에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선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 가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공동체가 되고, 우리의 일터,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다윗이 평생에 고민했던 주제인 인자와 정의, 사랑과 공의 — 어디까지 기준을 적용하고 어디서부터 자유를 줄까 — 끊임없는 고민. 그 해답은 결국에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만이 이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자녀가 작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때로는 작은 잘못이지만 그 작은 균열이 댐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진지하고 무겁게 훈계를 할 때도 있고, 때론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본인도 놀라고 너무 많이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그냥 품어주고 안아 줘야 될 때가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할지어다.
자녀와의 관계, 부부의 관계, 또 일터에서도 — 하나님, 인자와 정의를 조화롭게, 완전한 길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와 통찰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이 우리의 성품이 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에도, 일터에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길이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한 번 높이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026.04.12(주) | 주일설교 | 남자와 여자 모두 행복한 교회 공동체 (딤전 2:8–15)
남자와 여자 모두 행복한 교회 공동체
- 제목: 남자와 여자 모두 행복한 교회 공동체
- 본문: 디모데전서 2:8–15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12일 (주일예배)
[ 설교 요약 ]
1. 남자들에게 —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 (8절)
에베소 교회 안에서 남자들이 실제로 일으킨 문제는 분노와 다툼이었다. 남자는 하나님이 상당히 직선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조직에서든 교회에서든 파워 게임을 시작하면 공동체는 순식간에 전쟁터가 된다. 해결책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보다 힘이 강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이는 본능이 있는데, 영적으로 치환하면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리더십 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남자는 겸손해지고 온유해지며 경건해진다.
2. 여자들에게 — 단정하게 입고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라 (9–10절)
에베소는 로마 시대의 5대 도시 중 하나로, 교회 안에 경제적 수준 차이가 컸다. 화려한 치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린다. 기준은 단 하나 — "단정하게 입으라." 고의로 후줄근하게 입을 필요도 없지만, 다른 사람이 예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이라면 패션과 보석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섬김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3. 조용히 하라 —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의 공통된 문제 (11–12절)
"여자는 조용히 하라"는 말씀은 오늘날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회(고전 14장)와 에베소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목회적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남자들의 약점이 정욕이라면 여자들의 약점은 허영과 시기 질투이다. AD 1세기 당시 교회 안에서 대우받게 된 여성들이 남자 지도자들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들이 생겼고, 또 에베소 교회 안에 들어온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에게 여성 성도들이 더 쉽게 속아 이를 집집마다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이 구절의 목회적 배경이다.
4. 창조 질서와 하와의 유혹 — 리더십에 관한 성경적 원칙 (13–14절)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남자를 세상의 리더로, 하와는 돕는 배필로 세우셨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가 권위주의를 내세울 근거가 아니다. 권리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또한 성경 안에는 여사사 드보라, 여선지자 훌다, 사도 바울의 최고 동역자 브리스길라처럼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들이 많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성 리더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서 자매들이 교회 질서를 따르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5. 교회의 목회적 방향 — 형제와 자매 모두 살아나야
교회는 형제들을 가정과 교회의 영적 리더로 적극 세우기를 원한다. 아내가 남편을 영적 제사장으로 세워 주기를 기도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 자리를 내어 주고 포지션을 줘야 한다. 동시에 자매들의 섬김과 사역, 리더십 포지션에도 교회는 열려 있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갈 3:28). 서로가 최고의 동역자가 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이다.
6. 결론 —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15절)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자매들의 언어가 사람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아니라 아이를 낳아 키우듯 사람을 살리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남자에게는 일하는 수고,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수고를 맡기셨는데, 하나님은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축복하신다. 남자는 일하는 보람과 비전으로, 여자는 한 생명을 키워내는 보람과 비전으로 살아가야 한다. 남자로, 여자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이 있다.
[ 전문 스크립트 ]
디모데전서 강의 다섯 번째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본문, 자매들이 가장 마음에 어려워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8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2장 전반부는 기도에 대한 내용이었고, 오늘 읽은 후반부는 예배 공동체 안에서 남녀가 주의할 점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남자들에게 8절에 권면을 했는데,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자들이 에베소 교회에서 실제로 일으킨 문제가 이 분노와 다툼이었던 것입니다. 분노 조절을 못 하고 세력 간 다툼을 벌인 것입니다.
전쟁도 결국에는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남자들이 왜 이렇게 삶의 양상이 갈등으로 표출될까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남자를 상당히 직선적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일반 뇌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브레인 자체가 다르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소꿉장난도 하고 서로 예쁘다 해 주거든요. 그런데 남자아이들은 일단 만나면 한대 치고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동차가 됐든 팽이가 됐든 공룡이 됐든 — 저희 집에 아들 둘 키웠는데 — 뭐가 더 센가에 목숨을 겁니다. 계속 부딪히면서 노는 것이죠. 하나가 부서져서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합니다. 저희 둘째는 경쟁심이 강한 아이였지만 큰 아들은 상당히 평화주의자였는데, 걔도 똑같이 놀았습니다. 하나가 부서지는 걸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역시 이게 제일 세"라며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직선적인 남자들의 장점이 있는데, 새로운 시장 개척을 한다든지 창의적인 분야로 진출한다든지, 상당히 모험심이 강하고 돌파력이 강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들의 직선적인 면이 안정 지향의 아내가 볼 때는 불안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남자들이 조직에서든 교회에서든 파워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일순간에 전쟁터가 됩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떨까요? 아내는 뭔가 대화를 원하는데, 대화를 시도한 것인데 남편은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해"라며 대응 사격을 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이걸 전쟁으로, 파워 게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시각 차이 때문에 가정이 전쟁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성경이 제시한 해결책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8절의 해결책입니다.
남자아이들이 뭐가 더 세냐 갖고 논다고 했잖아요. 인간관계에서도 나보다 실력이 출중하거나 나보다 힘이 세면 남자들은 바로 인정합니다. 그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관점으로 치환해서 생각하면, 특별히 남자는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라는 것, 하나님의 리더십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리더십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 형제님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절을 다시 보면 남자들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남자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예배에 와서 손 들고 찬양하고 손 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다가 — 군대 다녀오신 분들이 90% 이상이잖아요. 군 시절 생각해 볼 때 상관이 계급이 나보다 하나만 높으면 자동으로 거수경례입니다. 자동으로 팔이 올라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남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겸손해집니다. 온유해지게 되어 있고, 지혜로워지게 되어 있고, 경건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들은, 아니면 여자 친구는, "내 남편을, 내 남자 친구를 내 말을 잘 듣는 남자로 만들려는 착각"을 빨리 포기하시고, 하나님께 반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남성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형제님들은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면 불통의 리더십이 됩니다. 하나님의 리더십, 궁극적 리더십을 인정하는 경건한 남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존경과 권위는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9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게요.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와 같이"로 시작했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서 남자들에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여자들도 주의할 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남자들에게는 파워가 무기라면 여자들에게는 무엇이 무기일까요?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지금 구절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서 머리에 엄청 힘을 주고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화려하게 나타나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자매님들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는데 간혹 있습니다.
게다가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로마 시대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인구 50만 명이면 오늘날의 뉴욕이나 도쿄나 서울 같은 어마어마한 대도시입니다. 메가시티에 살아가는 자매님들 중에 상당히 유복한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런데 경제적인 수준 차이가 있는데 막 화려하게 치장하고 존재감을 나타내면 교회 안에서 일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전에 시원팀에서 섬기시던 한 여집사님이 있었는데, 참 충만하게 행복하게 찬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요 여성 예배가 끝나고 나서 목양실에 찾아와 통곡을 하면서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굉장히 화려하게 예쁜 분이었고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자주 입으셨는데, 수요 여성 예배에 여성들만 오는 자리에서 앞에 예쁜 자매가 예쁜 티를 내면서 노래하고 있으면 다른 자매들이 불편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진짜 검소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입는 옷은 다 동대문에서 10만 원, 20만 원짜리입니다. 그런데 저를 뒤에서 헐뜯고 비난하는 그 집사님이 들고 다니는 명품백이 1,000만 원짜리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이지 내가 잘못입니까?" 좀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라고, 교회 다니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화려한 거 좋아하시는 분은 화려하게 입으셔도 됩니다. 진심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해서 예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본인도 그 집중을 하셔야 되고 또 다른 사람도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분이 옆에 향수와 화장품 냄새가 너무 충만하시다면 힘들 수 있습니다. 전에 청년부 담당할 때 청년부가 부흥을 많이 했는데, 오후 4시 예배 사랑홀이 3,000석인데 한 2,600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매주일이 패션쇼가 되었습니다. 자매들이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니까 제일 예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갈수록 심해지니까 형제님들이 급기야 저에게 "제발 우리를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설교에 집중하고 싶은데 옆에 자매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 있으니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시험 들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9절에서 말씀하는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단정하게 입으라. 일부러 후줄근하게 입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정하게 입으시면 됩니다.
10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여성이라면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패션으로, 보석으로 자기 단장을 하고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지 말고, 정말 사랑과 나눔과 섬김이 그 여성의 신앙과 인격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소화가 되는데, 그다음에 소화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11절과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1절에 조용히 하라고 해놓고, 12절에는 또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남자를 주관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조용히 하라는 이야기가 두 번이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구시대적인 캐릭터였나, 성경 통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현대에 우리가 지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시는 자매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목회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들은 분량의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형제들에 대해선 단 한 절 잔소리하고 자매들에겐 일곱 절을 잔소리했다. 이게 형평성이 맞냐." 그런 분들은 오늘 가셔서 고린도 전후서를 읽어 보세요. 고린도 전후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남자들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후서 13장, 총 29장이나 편지를 쓴 이유가 남자들이 음란의 문제, 법정 소송 문제, 교회 분파 문제, 파워 게임 하는 문제, 사도 바울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 문제 — 다 남자들이 일으킨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에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일으킨 문제가 무엇이었냐면, 누가 더 좋은 은사를, 누가 더 화려한 은사를 갖고 있는지 자랑하고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신앙생활 더 오래 했는데 내가 전도해 온 자매가 먼저 방언 은사를 받으면 하나님께 삐져서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라고 하는 심리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고린도 교회 남자들은 세속에 빠지지 않고 거룩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여자들은 시기 질투에 빠지지 않고 질서와 화평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었고, 에베소 교회도 똑같은 상황이었으며, 제가 볼 때 현대 교회도 거의 비슷한 패러다임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공예배가 은사 자랑하는 자리가 될 순 없지 않냐, 교회 좀 질서를 지켜 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오는 "조용히 하라"라는 표현이 "잠잠하라"라는 표현으로 고린도전서 14장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
당시 고린도 교회는 회중 예배 방식이었습니다. 설교자나 찬양인도자, 대표 기도자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성령의 감동하심이 임하면 그 사람이 일어나서 설교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민감하게 성령님께 반응하고 질서를 따르는 마음이 없으면 난장판이 되는 것입니다. 방언 은사가 있는 사람이 일어나서 20~30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완전히 자기 은사 자랑이 됩니다. 그래서 통역하는 은사를 받으면 하든가, 그것이 아니면 가만히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세 번째로 자매들은 잠잠하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이 문제를 가장 많이 일으킨 것이 자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과 3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 이 문제가 거의 비슷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남자들의 내면적인 최대 약점은 정욕이고, 여자들의 내면적인 최대 약점은 허영심이라고 얘기합니다. 남자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관리하셔야 됩니다. 여자들은 허영에 빠지지 않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셔야 됩니다. 동화 속에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라는 이야기가 왜 나올까요? 여성의 심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사람이 나보다 힘이 세다거나 실력이 출중하면 바로 인정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매들은 너무 예쁜 사람이 지나가면 "저게 예쁘면 얼마나 예뻐?"라는 심리가 되게 강하더라고요. 시기 질투가 강한 것입니다.
제가 교회 권사님들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되냐 하면 목회를 그만둬야 됩니다. 장로님들과는 이견이 있고 서로 방식이 달라서 다투기도 해도, 같이 밥 먹고 다시 의기투합하면 또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들 눈 밖에 나면 진짜로 힘듭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얘기하면 누가 드러날까 봐 얘기를 못 하는 것이지, 진짜입니다. 그래서 "여자 눈 밖에 나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왜 일어났을까요? 시대적 상황도 이해가 필요합니다. AD 1세기 당시에 여성들의 인권은 사회적으로 정말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까 귀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마다 여성 인권이 신장됐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대우를 받으면서 더 나간 것입니다. 당시의 리더들이 다 남자들이었는데 그 남자 지도자들의 질서를 지켜 달라는 것을 지키지 않고 깨뜨리는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났는데, 남자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머리를 가리지 않고 예배드리니까 여자들도 "그러면 우리도 머리 가리지 않고 예배드릴 거야"라고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은 자중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중근동의 문화도 그렇고 로마 시대의 문화도 그렇고, 공식적인 자리에 여성들이 나올 때 머리를 가렸는데, 이것을 가리지 않으면 그 당시 문화에서는 성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는 의미였습니다. 신앙 고백은 좋지만 이것은 문화적인 온건성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화적 온건성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말 다양한 배경과 캐릭터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문화적 개방성도 필요합니다.
초신자나 미신자나 교회를 한참 떠났다가 돌아오신 분들은 다 받아 주세요. 반바지를 입든 슬리퍼를 신고 오든 다 받아 주세요. 화려하게 입든 편안하게 입든 다 받아 주세요. 술 냄새가 나든 담배 냄새가 나든 다 축복해 주세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가 생기잖아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안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문제였다고 우리가 1장에서 봤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남자 성도들이 많이 속았을까요, 여자 성도들이 많이 속았을까요? 여자 성도들이 많이 속았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 이것이 디모데전서 5장에 나옵니다.
디모데후서에도 여전히 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두 번의 서신을 보내는 동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6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일반론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개인 차는 있습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신앙심이 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종교나 여성들이 훨씬 많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그런데 그것이 역작용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거나 이단 사이비에 쉽게 빠집니다.
남자들은 신앙심이 잘 안 생기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이 과학 시대에 도대체 창조를 나보고 믿으라는 얘기냐, 이런 기적을 믿으라는 얘기냐"라며 신앙 자체를 시작하는 게 어렵습니다.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다만 남자들이 신앙심이 생기면 상당히 진지해지고 깊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여자들은 신앙심이 잘 생기는 장점이 있지만, 잘못된 교리나 잘못된 교단이나 잘못된 교회에 쉽게 빠집니다. 이것 때문에 이혼하는 가정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 실제로 일어난 문제였고,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오늘 14절에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매들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내가 따먹은 게 아니라 하와가 따먹었는데 왜 나한테 얘기하느냐고요.
그러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시각적으로 약하고 여자들은 청각적으로 약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실행력이 장점이라면, 여자들은 언어력, 화술의 힘이 장점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남자아이들은 말을 할 때가 됐는데도 말은 별로 하지 않고 막 뛰어다니기만 합니다. 바디랭귀지를 합니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말을 또박또박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가 남자는 보통 8,000에서 10,000개고, 여자는 하루에 2만 단어를 씁니다. 매일 두 배 이상 언어를 사용하니까 화술의 힘이 훨씬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문 아나운서들도 우리말 발음 중에 어려운 것들이 있잖아요. "검찰청 철창살은 쇠철창살." 압도적으로 여자 아나운서들이 더 잘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건 장점이 곧 단점이 됩니다. 저는 뱀이 하와부터 유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와가 넘어오면 남자는 바로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데 창세기 3장에서 여섯 절이나 걸렸습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설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6절을 보면, 남자는 주니까 먹었다는 것이 1분도 안 됩니다. 정말 부끄러운 성적표인데, 여자를 설득하는 절수와 남자가 선악과 따먹는 절수를 비교해 보면 거의 20배 차이입니다. 남자들은 단순합니다. 아침밥을 뭘 차려놓는지 물어보고 먹습니다. 독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매님들의 언어가 사람을 미혹하게 하고 거짓된 이야기들을 퍼뜨리고, 뒤에서 험담을 하고 그 사람의 인격을 깨뜨리고 온전성을 깨뜨리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뒷담화 하지 마시고 사람을 살리는 언어를 충분히 쓸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언어가 사람을 살리는 언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13절, 14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3절에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지으셨다", 즉 남자를 세상의 리더로 세우셨다는 것이고, 하와는 돕는 배필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매님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아니 왜 남자만 리더 역할을 해야 되는 거냐." 저한테 따지지 마시고 하나님께 따지세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남자를 리더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것만 믿고 권위주의를 내세운다면 답이 없는 것입니다.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에 따른 막중한 책임이 있잖아요. 남자들만 잘하면 가정은 거의 회복됩니다. 남자들만 잘하면 기업은 거의 회복됩니다. 남자들만 저렇게 싸우지 않아도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거룩한 남성들이 되어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를 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얼마 전에 이제 분순하고 새로운 순장들을 세워야 하니까 공동체 교역자들과 상의를 했습니다. 어느 공동체 부부순이 있는데, 순장을 마땅히 세울 만한 형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아내가 정말 리더십도 좋고 신앙심도 좋으니까 "부부순이지만 자매님을 순장으로 세우면 어떨까요"라고 물어보시길래, 제 공식적인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자매님을 리더로, 사역팀의 리더든 순의 리더든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순이니까 그 자매님의 남편을 순장으로 세우시면 좋겠습니다."
왜 부부순의 순장을 꼭 남편으로 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내가 볼 때 "남편은 교회도 뜨문뜨문 나오고 성경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데 저 사람 밑바닥 금방 드러날 텐데, 무슨 순장을 하나"라는 걱정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들을 순장으로 세워 놓으면 입시 공부를 하듯이 본문을 몇 시간씩 공부하고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성실하게 감당하는 남편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내 남편이 정말 좋은 영적인 리더가 되게 해 주세요, 영적 제사장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만 하지 남편을 그 자리에 세워 주지 않잖아요. 남편을 인정해 주지 않잖아요.
부부 갈등이 있는 부부, 별거한 부부, 이혼 직전의 부부 등 상담을 많이 하는데, 제가 직접 얘기는 못 하지만 적지 않은 케이스가 남편이 겉돌게 된 이유에 아내의 원인 제공이 많습니다. 아이들과 똑같이 세워 놓고 혼내잖아요. 남자는 내가 주도하고 내가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없으면 그 판에 끼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과도하게 맨날 출장 다니고 야근하느라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이일중독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집에 들어오는 게 힘들 수 있습니다.
겉도는 남자는 그 남자의 내면 심리도 문제지만, 아내가 남편의 포지셔닝을 안 해 주기 때문입니다. 경기에 선발 라인업에 끼워 줘야 뛰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벤치에 늘 앉혀 놓으면서 어떻게 선발로 역할을 하겠습니까?
형제님들이 밖으로 도는 것이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매님들이 정말 남편이 존경받을 만한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리를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안 들고 리더 역할을 못 할 것 같아도 그 자리를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1호일 교회의 목회적 방향이기도 하고, 저는 성경적 교회론이라고 생각하는데 — 교회는 형제들을 가정과 교회 영적 리더로 적극 세우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토요 남성 모임 같은 형제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등 떠밀어서 하지 마시고 본인이 스스로 신청해서 나오세요. 왜냐하면 거기 나오면 여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잔소리할 사람 없습니다. 남자들끼리 실컷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순 예배에도 나오시고, 사역 팀에도 많이 참여하세요. 교회는 여러분을 리더로 세우고자 자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님들이 많이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는 자매들에 대해서 어떤 목회적 입장이냐 하면, 자매님들의 섬김과 사역, 그리고 자매가 리더십 포지션에 서는 것에 교회는 열려 있습니다.
오늘 같은 본문을 근거로 해서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들도 있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들은 거의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되게 자유로울 것 같은데 교회는 훨씬 보수적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모님이 강의가 출중하셔서 많은 교회에서 초빙을 받으셨는데, 한번은 보수적인 교회에서 특별 강사로 초빙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니까 강단에 못 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강단, 설교단은 남자 목사만 올라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 내려와서 강의하라고 했더니, 이 사모님도 굉장히 강단이 있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를 받자마자 강단 위에 꽃장식을 보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고차야, 너는 어떻게 거기 올라갔니, 난 못 올라갔는데." 그 꽃을 누가 세팅했겠습니까? 당연히 자매들이 거의 세팅했을 것 아닙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일반론적으로 형제들을 리더십으로 세우신 것도 있지만, 왜 자매들이 리더십을 발휘한 케이스가 없겠습니까? 많습니다. 구약 성경 사사기를 보면 여사사 드보라와 바락이라는 엄청난 장수가 있었는데, 바락은 오히려 적군 앞에서 소심하게 굴고 있었는데 드보라가 훨씬 큰 그릇이었습니다. 여선지자 훌다가 왕정기에 활동을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의 최고 동역자 커플 중에 저를 따라해 보세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길라가 아내인데, 이 부부를 소개할 때 남편이 앞에 나오는 경우가 딱 한 번이고, 나머지는 다 여자가 앞에 나옵니다. 왜냐하면 브리스길라는 특별히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아볼로라는 구약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 있었는데, 복음 영역에서는 조금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그 아볼로를 이 부부가 데리고 와서 가르치는데 브리스길라가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최고의 동역자, 자매인 브리스길라의 가르치는 은사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에베소 교회에서 자매들이 교회 질서를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이 표현은 당시에는 정말 사회를 개혁하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코멘트였습니다. 세상이 요즘 여혐이나 혐오 문화로 가잖아요. 그것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최고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마지막 문제의 구절인데, "여자들이 그럼 애를 낳아야 구원받는다는 소리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한 적이 없지만 교회 성도들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데 "내가 애를 낳는 것처럼 수고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매님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들 뒷담아하고 다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헐뜯고, 비교해서 다른 사람을 열등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정말 아이를 해산해서 키우는 것처럼 사람을 살리는 언어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수고로운 일을 각각 맡기셨습니다.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 일하게 하셨고,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남자가 일하는 것이 고생스럽죠. "내가 언제 이것을 그만둘까, 언제 은퇴를 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다 있잖아요. 그런데 아내한테, 아이들한테 얘기하면 불안해하니까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무위도식만큼 힘든 인생이 없습니다. 일을 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일을 하기 때문에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자는 출산과 육아가 너무너무 고생스럽습니다. 인생을 다 갈아놓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자녀와의 관계를 통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신다는 게 이런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은 개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내 삶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다 쏟아서 아이를 위해서 부어 주는 것, 야 이게 사랑이고 이게 구원이구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남자들은 "어떻게 건물주가 되어서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여자들은 "결혼 안 하고 싶고 애도 안 낳고 싶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시대의 조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형제님들, 아직까지 이렇게 고생하면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부끄러워하시거나 힘들어하지 마시고, 내가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 일할 수 있는 재능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는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일하는 보람과 비전으로 살아가는 형제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자매님들은 "내가 빛나는 인생이 돼야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왜 희생을 해"라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소중한 한 생명 한 생명을 키우는 보람과 비전으로 사셔야 합니다. "내가 집에서 애나 키우고 있다"는 것은 세속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한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주목하시는 최고의 미션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 하나를 키워내고, 다윗 하나를 키워내고, 사무엘 하나를 키워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 역사를 놓고 보면 개인 가정사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리는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저는 이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형제도 살아나고 자매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형제들은 이전 어느 시대보다 어려운 시대가 됐잖아요.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힘들고 버겁고 불행한 분들이 많습니다. 자매님들도 "내가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라며 인생이 힘들고 불행한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남자로 태어났던 여자로 태어났던,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남성으로, 여성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인생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신앙 고백이고, 그것이 삶의 예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6.04.05(주) | 주일설교 | 부활, 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눅 24:13-27)
설교 정보
- 제목: 부활, 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
- 본문: 누가복음 24:13–27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5일 (주일예배)
[ 설교 요약 ]
1. 엠마오로 떠난 두 제자 — 부활 소식을 들은 날의 오후 4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진 바로 그날,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났다. 이른 아침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서 기대가 무너졌고, 오후 4시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엠마오는 예루살렘 서쪽 약 11km, 도보로 두 시간 거리의 온천 도시였다. 예루살렘이 영적 전쟁의 현장이었다면, 엠마오는 지쳐버린 심신을 달래 줄 수 있는 도피처였다.
2. 예수님을 추억으로 만드는 신앙
두 제자는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미 과거형이 되었고, 기대감도 소망도 없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저도 한때는 열심히 했습니다"라는 말처럼, 신앙이 과거형의 추억거리로 전락할 때 살아 계신 예수님을 현재형으로 만날 수 없게 된다. 죽은 자를 무덤에서 찾듯이, 추억 속에서만 예수님을 찾는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날 수 없다.
3. 낙심한 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
두 제자가 서로 이야기하며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동행하셨다. 믿음이 충만할 때만 아니라 의심과 냉담에 빠져 있어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질문하고 대화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이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듣지만,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는다.
4.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예수님이 모르는 척하신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진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실패한 줄 알았지만 성공하셨고, 패배한 줄 알았지만 승리하셨다. 세 번의 반전 — 나사렛 출신 예수가 놀라운 선지자로 등장한 소망의 반전,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절망의 반전,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최신 뉴스이자 영원한 뉴스인 부활의 반전이 있었다.
5. 예수님의 두 가지 책망 — 바보와 더딘 믿음
예수님은 두 제자를 "바보"(미련한 자)라고 책망하셨다. 그런데 책망의 내용이 놀랍다. 그날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 즉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모세의 글부터 모든 선지자의 글까지, 구약 성경 전체에 자신에 관하여 쓰인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성경 전체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6. 부활은 현재 진행형이다
복음은 변질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질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단 한 번도 쇠퇴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영원한 현재형이시다. 성경 30년, 50년을 읽었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신앙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신앙과 다를 바 없다. 부활주일을 계기로 성경의 세계가 열리고, 살아 계신 예수님이 삶의 매 순간 현재형으로 보이기를 기도해야 한다.
[ 전문 스크립트 ]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 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제목인데요.
13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사건의 재구성이 필요한데,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갔었고, 빈 무덤을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런데 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을까요?
첫 번째는 그 당시에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여자의 증언은 공식적인 자리, 재판 자리에서 잘 인정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빈 무덤 하나만 가지고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이 사건을 경험했고, 이른 아침에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이 소식을 접할 때만 해도 "뭔가 주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나"라는 일말의 희망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면서 — 오전 9시, 10시, 11시, 정오가 됐는데도 예수님은 안 나타나십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면 당장에 나타나시지 않겠어요? 가장 기다리는 것이 제자들인데, 오후 1시, 2시, 3시, 4시 —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정말 이제 하루가 다 끝나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됩니다.
추정하는 근거 구절은 29절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엠마오로 가는 거리와 시간을 생각해 봤을 때 오후 4시쯤에는 출발했을 것 같습니다. 어제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평균 일몰 시간을 찾아봤는데 저녁 6시 반이나 7시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왜 엠마오로 갔을까요?
첫 번째는 예루살렘 서쪽으로 약 11km, 아주 적당한 거리였습니다. 그날 당장 "우리를 너무 절망시킨 이 예루살렘을 오늘 그냥 떠나자. 그런데 해지기 전에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라고 하기에는 엠마오가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도보로 걸어갔을 때 최정상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내리막길로 가서 엠마오에 도착하기 때문에 조히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라는 이름의 뜻은 "따뜻한 샘"이라는 뜻입니다. 온천 도시였습니다. 그들의 심신이 지쳐 있었는데 지친 심신을 달래줄 수 있는 최적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한 장소라면, 엠마오는 이 종교적인 모든 열심이 식은 뒤에 지쳐 있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는 선망의 도시였습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고 모든 정치·종교·사회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주름 잡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의 권력의 횡포 아래에서 온갖 낙심하는 일들을 많이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두 사람도 예루살렘을 그날 떠나게 됩니다.
그럼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그들은 뭘 했을까요? 14절을 읽어 볼까요.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예루살렘을 포기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등지고 나서도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어떻게 평생 잊겠습니까. 온통 메시아를 갈망했고,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저 과거의 추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이른 아침에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부활을 전해 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었고, 또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감도 소망도 없는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는 그저 앨범 속에 빛바랜 사진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것인가요?
엠마오로 간 두 제자와 우리의 신앙에 좀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가끔 성도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도 한때는 열심히 했습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은근히 많습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었습니다. 부모님 손 잡고 매주일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이 다 과거형이 되어서 가나안 성도가 되고 교회를 멀리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저도 한때 청년부 회장이었습니다, 여선교회 회장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추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떤 행복한 인생의 포인트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되고 추억거리가 됐다는 것이 오히려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디지털 시대를 넘어서 AI 시대로 진입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더욱 아날로그 시대의 감성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드라마 시리즈, 7080 포크송을 그리워서 부르고, 8090 발라드와 댄스곡을 찾아듣고, 또 트로트 열풍도 있습니다. 5060 노래인데 이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현재형의 행복의 조건보다 과거형의 추억거리를 더 좋아할까요? 그것은 과거형이기 때문에 아련한 달콤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형일 때는 인생이 업다운이 있고 복잡해지고 피곤해지거든요. 그렇게 자기 인생을 힘들게 하지 않으면서도 늘 추억할 때마다 행복감을 마음에 심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을 추억 속에 그리운 인물 정도로, 앨범을 열었을 때 한 번씩 쳐다보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들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주님이 다가가십니다. 15절,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5절을 다시 보면, 이들이 서로 이야기하면서 "문의했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discuss"라는 단어를 썼는데, "토론했다", "조사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 귀한 분이 한 순간에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수 있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하면서 이해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라통을 할 때나 성경 세미나를 할 때 자주 하는 말인데, 저를 따라해 보세요.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듣고,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들을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고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닙니다. 의심과 냉담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답을 얘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늘 우리의 인생에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7절,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거늘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그들에게 "너희가 무슨 얘기를 나눈 거냐"고 하셨는데, 예수님도 예루살렘 쪽에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오면서 어떻게 혼자 모를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최대 뉴스거리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르는 척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진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예수님은 실패한 줄 알았는데 성공하셨고, 예수님이 패배한 줄 알았는데 승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믿고 있던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즘 뭐 이란 전쟁 관련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니까, 저도 일을 하다가도 운전대를 딱 잡으면 첫 번째 하는 것이 실시간 라이브 뉴스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의 사실이 지금은 사실이 아닐 수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거의 소식의 추억에 매여 있는 그들에게 가장 업데이트된 뉴스를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19절,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니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반전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들이 현재 알고 있는 두 가지 반전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갈릴리 나사렛 촌동네 출신의 예수라는 청년이 놀라운 선지자, 놀라운 구원자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소망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반전은 이런 놀라운 분을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형에 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 이것은 절망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세 번째 반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죽어서 매장된 지 사흘째 —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최신 뉴스였습니다. 최신 뉴스이자 영원한 뉴스가 된 줄로 믿습니다.
21절에서 24절까지 읽어 볼까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그날 하루에 일어난 일을 하소연하듯이 풀어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째가 됐다는 것입니다. 숫자 3은 성경적으로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죽음 가운데 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는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향품을 들고 갔었는데, 무덤의 시체는 없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분은 살아나셨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해서 믿게 했다가 아니라 우리를 놀라게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우리가 믿겠느냐"는 태도였습니다.
이들에게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안타까운 일에 더해서 그 사건을 비참하게 만드는 몹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시체까지 사라졌다"는 상황이었습니다.
24절 마지막에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열한 제자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분을 무덤에서 찾고 있으니까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억 속에서만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추억의 앨범을 뒤적이는, 일주일에 한 번 사랑하던 고인의 묘지에 찾아와서 그분의 과거 히스토리를 보고 "아 그때는 참 이랬었지"라며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일주일 내내 그분이 내 삶의 현재성으로 현존하심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두 제자를 책망하셨습니다. 25절부터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두 가지로 책망을 하셨는데, 첫 번째가 무엇이었습니까? 25절에 보면 "미련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상으로 찾아보니 "미련하다"가 좀 윤색된 표현으로, 원뜻은 "바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보라 그러셨습니다. 제가 산상수훈이 생각나는 거예요,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상당히 흥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사건 사고들은 그렇게 잘 파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내 인생이 형통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귀한 일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성경의 세계가 열리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은 믿음이 더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아침에 여인들이 가서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보고 와서 이야기를 해 줬고, 베드로와 요한 수제자들도 빈 무덤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정도면 믿을 만도 한데 믿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이 믿기에 더디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다시 25절을 보니 그 얘기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뭘 믿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까?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 전 충격입니다. 그날 사람들 증인들의 이야기를 안 들었다는 얘기를 하신 게 아니라,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다 써 있는데 너희는 왜 성경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냐, 왜 이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느냐" 이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27절 — 모세의 글은 율법서이고, 선지자의 글은 선지서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 타나크에는 선지서에 역사서가 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서, 선지서, 역사서 —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모든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다가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날 계획이 원래 없으셨는데, 얘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도망가는 바람에 갑자기 나타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상상을 하느냐고 하실 수 있는데, 일단 천국 가서 예수님한테 물어보세요.
왜냐하면 이 두 제자가 결국 예수님께 감동을 받아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그날 밤에 돌아갑니다. 두 시간이 걸려서 밤 9시쯤 도착했다고 해도,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똑같은 강의를 또 하셨습니다. 하루에 두 번 할 필요가 있나요? 대상이 다르잖아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그날 저녁에 두 번을 들은 것입니다. 6시에 듣고 9시에 듣고 두 번을 들었습니다. 예배 두 번 드릴 수 있죠. 할렐루야.
그래서 이 두 사람이 도망가지 않았으면 굳이 예수님이 여기 나타나서 얘기를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수님이 쫙 펼쳐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 설명해 주신 이 특강을 들었어야 하는데, 누군가 녹음을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암시하고 상징하고 지향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 전체가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예언의 핵심이 오늘 26절에 나온 표현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구약 예언과 역사서의 핵심입니다.
구약을 보면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해서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읽어볼까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정수리 그 사망 권세를 깨뜨리실 것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복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구약의 주요 인물들을 보면, 요셉의 수난과 영광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고, 모세의 수난과 영광스러운 회복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수난과 영광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3일 동안 있었습니다. 3일 동안 죽은 듯이 지내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것도,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3일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39절, 40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을 하셨냐면, 예수님이 3년 동안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까. 그런데 "하나 더 해봐, 하나 더 해봐,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걸 증명할 만한 표적을 행해봐"라는 것입니다. 이미 행하신 기적으로도 믿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안 믿는 사람들이 계속 기적을 요구하니까, 예수님께서 "마지막 남은 기적은 요나의 기적, 부활의 기적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3일간 죽음 가운데 거하시다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것처럼 예수님도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나오실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전에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예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17장 2223절, 20장 181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을 읽어볼게요.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이 죽임당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실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이 얘기가 안 들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올라가서 왕이 되시면 우리도 한 자리 찾아야겠지"라는 생각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예언도 안 들렸고 부활의 예언도 안 들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 자기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옆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대화 중에도 나타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이 복된 소식, 이 복음은 들어가는 곳마다 무너졌던 인생을 다시 살려내는 능력이 되었고, 부패한 사회를 다시 살려내는 치유력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학교와 병원들이 살아나고 정부와 기업들을 살아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 굿 뉴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소식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교회 상황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복음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질된 것입니다. 복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능력, 부활의 능력은 단 한 번도 쇠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질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여, 다시 복음 안에서 깨어 일어날지어다.
예수님은 현재형이십니다. 영원한 현재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너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것을 안타까워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번에 뉴저지 어느 교회 담임 목사님과 만나서 대화할 일이 있었는데, 보통 초대를 하면 2일, 3일 부흥회를 하거든요. 그런데 일주일 말씀 사경회를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속으로 '이상하다, 왜 갑자기 일주일 말씀 사경회를 해 달라고 하냐'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시냐고 했더니 진짜 성도들이 성경책 다 싸들고 와서 열심히 성경 공부를 열공하는 분위기라고 했습니다. 좋다고 그 주제를 저에게 정하라고 해서 기도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오래된 숙제인데 보라통을 하면서 계속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해 왔는데, 현재 A4로 2,500장에 달하는 분량입니다. 이것을 좀 정리해서 일주일 동안 보라통 Q&A를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일독하신 분들, 신앙생활을 30년, 50년 하신 분들, 어떤 분들은 성경을 10독, 20독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내 옆에 다가와 계신데, 예수님이 현재형으로 내 삶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신앙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부활주일을 계기로 영적인 지혜의 문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을 주님 앞에 특별히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어떤 삶에서 일어난 기적 사건을 왜 안 믿느냐, 사람들의 증언을 안 믿느냐라는 이야기를 안 하시고, "성경을 믿지 않는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성경의 세계가 우리에게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 계신 예수님이 이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매 순간에 보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6.04.03(금) | 성금요예배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가 (마 27:50-56)
설교 정보
- 제목: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가
- 본문: 마태복음 27장 50–56절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3일 (성금요일)
[ 설교 요약 ]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마 27:50)
2,000년 전 성금요일,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십자가형은 보통 3일에서 최장 2주까지 지속되는 극형이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심한 매질로 인해 불과 6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육신의 생명이 끊어졌고, 영혼은 우리의 모든 죄짐을 끌어안고 음부로 내려가셨다(벧전 3:19).
2. 성소 휘장이 찢어짐 (마 27:51)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리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찢으신 것이며,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휘장을 찢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역사적 대속죄의 사건이다. 이로써 인간의 죄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히 10:19–20).
3. 에덴동산에서 막혔던 생명의 길이 다시 열림 (창 3: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그룹들(케루빔)과 두루 도는 불칼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원죄 이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 막혀 있던 생명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되는 사건이었다.
4. 무덤들이 열리고 성도들이 일어남 (마 27:52–53)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미 엘리사의 무덤에서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거니와(왕하 13:20–21), 이 사건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부활의 예표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백부장의 신앙고백 (마 27:54)
대낮의 흑암, 지진,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들을 목격한 로마 백부장과 군병들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믿지 않았으나, 이방인인 로마 군인들이 오히려 믿게 된 역설적 장면이다.
6.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의 당위성 (각 집단의 심리)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와 헤롯은 권력이 흔들릴까 봐, 일반 백성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기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각자의 당위성 기준이 현실 앞에서의 믿음을 가로막았다.
7.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는 두 가지 핵심 논증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명했다. 첫째,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의 경배를 받을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경배를 받으신다. 둘째,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구원자가 될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시다.
8. 성종의 미복 잠행 —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조선 9대 왕 성종이 미복 잠행 중 청계천 광교에서 경상도에서 올라온 김희동이라는 백성을 만나 감동을 받고, 벼슬과 관복을 내리며 궁궐로 불러들인 실화는 예수님이 우리의 눈높이로 다가오신 행보와 닮아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시고, 믿는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100% 인간으로 오셨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통해 이 땅에서 천상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다.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시고, 이 땅 끝까지 찾아오셔서 목마른 영혼의 소원을 채워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 전문 스크립트 ]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 56절 말씀인데요,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함께 읽겠습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아멘.
네, 오늘 설교의 제목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가."
저희가 고난 주간 새벽 기도 5일 동안 하고 오늘 성금요일 예배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같이 읽어 볼까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고 부활의 아침에 주와 함께 다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네, 오늘 50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2,000년 전 이날, 성금요일입니다. 오전 9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12시부터 흑암이 땅을 덮어서 오후 3시까지 이어졌는데, 예수님께서 그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어요. 십자가가 최악의 형벌이었던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들에게는 십자가 형을 내리지 않았어요. 이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형벌이기 때문에,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사용했던 이 십자가라는 극형은 보통 그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3일 내지는 최장 2주까지 죽지 않고 매달려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불과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 정도로 이미 예수님은 너무 심한 매질을 당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미 거의 죽은 사람으로 십자가에 걸리셨던 거예요.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님의 육신의 생명이 끊어졌고, 예수님의 영혼은 우리의 모든 죄짐을 끌어안고 음부로 내려가셨어요. 베드로전서 3장 19절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같이 맛보신 겁니다.
2,000년 전 이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통곡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도 탄식하셨던 날입니다. 우리의 참혹한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사망과 저주의 자리로 그분을 내몰았어요. 사실 그 자리는 우리가 갔어야 했던 자리입니다.
자, 예수님이 운명하시면서 특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51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성소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죠. 하나의 휘장은 성소의 뜰에서 성소로 들어갈 때 휘장이 있고, 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때 휘장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는 바로 그 휘장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두꺼운 담 같은 커튼이 찢어질 수 있었을까? 거의 1,500년 동안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게다가 누군가가 일부러 찢었다고 해도 여러분, 위로부터 찢어지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 찢어야 정상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줄로 믿습니다.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열리는 순간,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모든 사람 앞에 공개된 거예요. 사실 이렇게 공개되면 안 되는 자리잖아요.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사람이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구약 시대 대제사장도 1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날이 어느 날이죠? 대속죄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묵상을 해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전 역사에 단 한 번 일어난 대속죄의 날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날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휘장 사이를 찢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그리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 20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분의 육체가 찢어지심으로 성소의 휘장을 같이 찢으시고, 인간의 죄로 인해 단절됐던 하나님과의 관계, 그 관계에 막힌 담을 완전히 허무신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을 하다가 떠오른 한 구절이 있는데, 여러분,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본문입니다. 창세기 3장 24절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자,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 권리가 박탈된 거잖아요. 자 그러면 그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는 두 가지가 뭐였죠? 그룹들과 불 칼이었어요.
이 그룹들은 영어로 케루빔(Cherubim)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천사들입니다. 에스겔서 1장에도 나오고 계시록에도 등장하는 천사들이에요. 자, 그런데 이 그룹들이 성소 안에서는 어디에 있냐면, 지성소 안에 들어가면 언약궤가 있죠. 그리고 언약궤에 덮개가 있는데, 그 덮개 위에 그룹이 좌우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때 가리고 있는 휘장에 그룹들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그룹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자리에 감히 죄인인 인간이 다가설 수 없도록 지키고 있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번에 두 번째, 불 칼을 생각해 보면, 민수기를 볼 때 백성들을 지키는 불기둥도, 또 악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나오는 불길도 하나님의 임재의 지성소로부터 나왔어요. 자, 그러니까 이 불 칼도 그룹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자리를 죄인들과 악인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역할을 한 거예요.
자, 그러므로 이제 그 지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자리로부터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처음 원죄를 지은 이후로 끊어졌던 그 관계가, 여러분, 하나님이 막으셨던 그 생명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되는 사건이었는 줄로 믿습니다. 네, 우리가 실낙원으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분의 임재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가로막고 있는 빗장을 푸신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 그분 앞에 생명수 강가로 나아가서 주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자, 이어지는 사건 52절, 5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자, 무덤들이 열려서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게 정말 사실일까? 이게 전설 같은 얘기 아닐까?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는 가운데, 열왕기하 13장 20절, 21절이 생각이 났어요. 이미 죽은 엘리사의 무덤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던졌는데 그가 살아나는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하물며 엘리사의 무덤에서도 그런 역사가 일어났는데, 여러분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미래적인 이 부활의 예표적 사건으로 이 장면을 이해하시면 되겠어요.
자, 오늘 본문에 이제 가장 중요한 5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상당히 충격적 사건이었어요. 대낮에 흑암이 세 시간 동안 지속이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서 자던 성도들이 일어난 겁니다. 이 십자가 처형을 진행하던 로마 장교 백부장과 그 군병들이 이 일을 보고 두려워 떨면서 결국에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거예요.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인정하십니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눈높이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잖아요. 우리가 오늘 찬양한 것처럼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우리의 주치의가 되어 주셨고, 정말 저는 제 인생의 그 모든 쓰라린 아픔들과 육체적 질병과 내면의 질병들을 평생 끌어안고 살 줄 알았는데, 주님이 치유해 주셨어요. 할렐루야, 아멘.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잖아요. 이것을 우리가 믿는가.
그래서 우리가 이곳을 떠나 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과 함께 주님의 보좌의 그 높은 곳에 앉혀 주신다, 그런 약속까지 해 주셨어요. 에베소서 2장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가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 것이고, 그리고 주와 함께 그 영광의 보좌에까지 이를 줄로 믿습니다.
자,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데요. 제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목회할 때, 토요일 날 일대일 지도자반을 매 학기마다 했어요. 그런데 한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의를 하다가 질문을 했어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 100% 인간이자 100% 하나님이신 것을 믿느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냐?"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뭐,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은 "다 믿습니다, 다 통과 통과." 이렇게 잘 믿어지시잖아요.
근데 한 여집사님이 손을 들고 그러시더라고요. "목사님, 전 솔직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분이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느냐, 이거는 이해도 안 되고 믿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러분, 인자(Son of Man)이시면서 성자(Son of God)이시다라는 이 사실은 놀라운 신비에 해당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고 반반 섞여 있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신 같은 존재일까? 여러분, 반인반신은 100%가 아니고 50%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4세기에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이 된 거예요. 그리고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국에는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교리,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다", 이 교리가 인정을 받게 되죠.
당시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굉장히 중요한 신학자들이 많이 등장을 했습니다. 이 두 사람도 그곳에서 논쟁을 벌이게 됐는데, 아리우스가 주장을 한 것은 "성부와 성자는 다른 존재다, 이질적인 존재다. 성자는 피조물 중에 으뜸이기는 하지만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러면서 근거 구절로 이야기를 한 게 골로새서 1장 15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니."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도 '독생자'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Only Begotten Son"이라는 표현도 사실 이게 '태어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이잖아요. "자, 분명히 먼저 나셨다고 성경에 되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주장을 한 거예요.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정반대 주장을 하게 되죠.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그럼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동등하신데 주장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되셨다라는 거잖아요.
네, 여러분 성금요일 예배 오셔서 갑자기 신학 수업을 하고 계시는데. 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영원토록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아타나시우스는 주장을 했어요. 자, 뭐 이거 삼위일체론을 이야기하자면 한두 시간 강의를 해야 되지만, 핵심만 이야기를 하자면, 요한복음 1장 1절 같이 읽어 볼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자, 이 말씀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또 하나님이시래요. 자, 예수님이 이미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이 선언을 했나요, 안 했나요? 했어요. 네, 그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오신 분이 누구시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을 한 겁니다.
그러면서 아타나시우스가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 논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서 아주 중요한 논증이었던 거예요.
자, 첫 번째.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의 경배를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만약에 다른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면 그건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거예요. 근데 빌립보서 2장에서도, 계시록에서도,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과 만물의 경배를 받으세요.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는 주시다"라고 고백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 모든 경배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시다. 이게 첫 번째 논증이었고요.
두 번째는,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구원자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 인간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가 동반 타락을 했잖아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구원의 대상이 되었는데, 구원의 대상이 어떻게 구원의 대상들을 구원할 수 있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이시다라고 논증을 한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사실 인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지난 5일 동안 여러 인간 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내용을 봤는데요, 왜 그들이 그랬는가? 그들의 심리에는 무슨 대사가 있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안 돼." 나름의 그들의 당위성의 기준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안 되는 이유는 뭘까요? 자기들과 같은 정통 라인으로 공부를 하고, 또 계통을 밟아서, 아니면 가문을 밟아서 그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빌라도 총독도, 헤롯왕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게 되거나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그럼 일반 유대인들, 백성들은 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영적인 구원자를 원하지 않고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시고, 그냥 너무나 순순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거예요. "저런 연약한 리더가 우리를 정치·사회적으로 구원해 줄 수 없다."
그럼 오늘날 우리가 정치계를 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떤 나라도 다 '스트롱맨'을 리더로 원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인품, 살아왔던 삶, 그거는 두 번째 세 번째고, 그 사람이 힘이 있느냐, 힘 있는 사람을 다 지도자로 원하거든요. 그 2,000년 전에 유대인들도 힘 있는 지도자가 일어나서 로마 제국에서 우리를 건져 주기를 원했던 거야. 그러니까 힘을 쓰지 않는 저 예수는, 화평을 원하는 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이 생전에도 얼마나 놀라운 이 초자연적 능력과 신성을 보이셨나요.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기까지 하셨잖아요.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로 4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이심을 그분의 모든 삶으로 증거하셨다고요. 그런데도 믿지 않았어요. 그걸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당위성의 기준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정반대로 현실성을 놓고 보면, 제가 당위성과 현실성 얘기 최근에 많이 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던 그 순간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니까 이 현실적인 상황들을 볼 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모순적으로, 그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믿지 않았는데, 누가 믿게 됐어요? 로마 백부장과 병사들이 믿게 된 거예요. 여러분, 현실적으로 볼 때, 휘장이 위로부터 갈라지고, 흑암이 덮이고, 지진이 나고, 죽었던 사람들이 소생하고,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는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일파만파 번져 나가면서, AD 1세기의 성도들은 사실 예수님의 신성을 못 믿은 게 아니라 인성을 믿기 힘들어했어요. 예수님의 신성은 당연히 믿어지는데, 어떻게 그런 분이 100% 인간일 수가 있느냐, 이것을 믿기 힘들어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거꾸로죠.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잘 인정 못하고, 예수님의 인성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인정하겠다. 그러나 합리적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일 수 있느냐, 그거 인정 못 하겠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우리가, 저도 뭐 합리적인 거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여러분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씻어 주신다는 사실이 이게 과연 합리적일까요?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서 망가진 우리들, 죄로 인해 망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으로 세상을 망가뜨린 우리들, 주범이잖아요. 그런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다, 그것은 과연 합리적일까요? 왜 우리는 인간의 합리성만 생각할까. 하나님의 합리성의 기준을 놓고 보면,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필요가 없는 거예요.
자, 그래서 초등학생이 노벨 물리학자의 이론을 설명을 듣는다고 이해하겠어요? 이해 당연히 못 하겠죠. 네, 제가 오늘 좀 어려운 얘기를 하니까 임재 가운데 들어가시는 분들이 좀만 더 참으세요. 자, 노벨 물리학자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초등학생이 "난 당신의 이론을 믿을 수 없다, 난 당신의 실력도 믿을 수 없다, 당신이 노벨상을 탄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우리의 구원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100% 하나님으로 믿는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가.
제가 이렇게 좀 묵상을 해 봤어요, 이 상황을.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나타나셨잖아요. 이 사람들이 참 믿기 어려웠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 노아 홍수 때 비가 한 번도 내린 기록이 없잖아요. 비가 내린 적이 없어요, 그전에는. 그랬기 때문에 노아가 "홍수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이걸 사람들이 믿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아니 비를 본 적도 없는데 비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 그 믿을 수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다? 이건 상상도 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었던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제가 이걸 묵상하다가 이게 생각이 났어요. 여러분, 그 왕정 시대 왕들이 '잠행을 한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일반 평민인 척하고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좀 궁금해 갖고 돌아다니는 일들이 전 세계 역사에 다 나옵니다. 근데 제가 페르시아의 왕이 잠행했던 이야기, 다른 나라 왕들은 다 생각을 했는데, 조선 시대 왕들을 생각을 안 했더라고요. 제가 이번에 좀 찾아봤거든요.
사실 저는 역사적 개연성이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영화도 역사물을 좋아합니다. 근데 우리나라 드라마들은 약간 역사물인데 너무 막장 같은, 그건 관심이 없어요. "아, 무슨 왕이 궁궐 밖에서 사람을 만나 갖고 뭐 무슨 일이 생기고 막 이런 거" 보면, "야, 너무 상상이 지나친 거 아니냐" 뭐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알아보고 회개했습니다. 왜냐면 왕이 궁궐 밖에 비밀리에 나가는 이 미복 잠행, 미천한 복장을 하고 몰래 백성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 이걸 했던 군주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이성계부터 태종, 세종, 정종, 성종, 야사에는 숙종, 영조, 정조까지, 여러분 정말 많은 왕들이 미복 잠행을 했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왕들은 수십 회, 어떤 왕들은 수백 회, 아예 대궐 밖으로 나가는 쪽 문에 사람을 세우지 말라고 할 정도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밖으로 들락거린 왕들도 있더라고요.
제가 오늘 뭐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만 자제하고 딱 한 가지 일화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가지 일화입니다.
조선 9대 왕이었던 성종이 어느 날 궁 밖으로 나간 거예요. 미복 잠행을 한 거예요. 평민인 척하고 수행원 한두 명만 데리고 나간 거예요. 어느 날 청계천 광교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끼고 앉아 있는 사내를 만난 거예요. 그리고는 성종이 자기가 일반인인 척 하고 있으니까, "아, 저는 이 첨지라는 사람이올시다. 어디 사는 누구이길래 거기 그렇게 앉아 있소?"
그러니까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아, 이 나라에 아주 어질고 착한 임금님을 만난 덕에, 요즘 우리 백성들이 살기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임금님께 드리려고 해삼과 전복을 말린 건해삼과 건전복을 갖고 올라왔는데, 어디 뵐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말이죠. 어디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 사람이 어디서부터 왔냐면, 경상도에서 왔어요. 천릿길 경상도에서 찾아온 김희동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실존 인물입니다. 성종이 감동을 받았을까요, 안 받았을까요? 너무너무 감동을 받은 거예요.
이 역사 기록에 보면, 이 순박한 사람, 경상도에서부터 왕을 만나서 진상품을 드리겠다고 찾아온 이 사람, 어떻게 왕을 만나겠어요? 말도 안 되는 건데, 성종이 딱 그 광교에서 만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감동을 받아서 "왕을 내가 꼭 만나게 해 주겠다" 약속을 한 거예요. 그리고는 가까운 대감의 집에 묵을 수 있도록 숙소를 알선해 준 거예요.
그리고서 대감집 사랑채에서 잘 자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이 첨지께서 또 나타나셔서 말하길, "전하를 뵈려면 벼슬이 필요합니다. 벼슬이 없는 사람은 전하를 뵐 수가 없습니다. 원하는 벼슬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김희동이 평소에 생각을 해 보니까, 고향 마을에서 내가 너무 선망하던 양반이 있는데, 그 양반이 '충위'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얘기를 꺼냅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이 첨지 양반께서 임금님과 가까우시더라도, 아니 벼슬은 임금님만 내리시는 겁니다. 그게 되겠습니까?" 근데 이 첨지가 그 김희동에게 "내가 힘을 좀 써 보겠습니다. 기다려 보십시오."
다음 날 대감의 집에서 또 잘 먹고 잘 쉬고, 다음 날 일어났는데 김희동의 숙소 앞에 충위 벼슬의 교서가 내려지고, 사모관대, 관복이에요. 관과 의복과 신발, 여러분 아시죠, 조선 시대 관복이 딱 도착해 있는 거야. 너무너무 깜짝 놀라서 이 관복을 얼른 입고, "내가 왕께 이 진상품을 갖다 드릴 수 있다"는 이 생각 하나만으로 너무 기뻐서 입궐을 한 거예요.
한참을 들어가는데, 자신의 눈앞에 용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예요? 이 첨지! 기겁을 한 거예요. 진상품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건해삼과 건전복을 드려야 되는데,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땅바닥에 떨어졌으니까 이거 임금님한테 올릴 수 없는 더러운 물건이 됐잖아요. 김희동의 그 정성에 감복이 되어서, 그것을 잘 씻어서 수라상에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왕 곁에 사는 남자"가 유행이어서 한 얘기가 아니고요. 제가 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다가오신 행보와 참 비슷한 스토리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너무나 가까이 우리의 눈높이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마치 성종이 김희동이라는 사람을 궁궐로 들어오게 하고, 관직까지 내리고, 함께 독대한 것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를 믿는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워 주실 것이고, 거룩한 예복을 입혀 주실 것이고, 우리를 사랑으로 영원토록 맞이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100% 인간으로 오셨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천상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십자가에 감사하는 것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신 거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예요. 이 땅 끝까지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목마른 영혼의 소원을 채워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2026.04.03(금) | 새벽기도 |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45-49)
설교 정보
- 제목: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 본문: 마태복음 27:45–49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3일 (고난주간 새벽기도)
[ 설교 요약 ]
1. 한낮의 어둠 — 세 가지 영적 의미
제6시(정오)부터 제9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이 어둠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때 덮이는 흑암(출 20:21). 둘째, 어둠의 세상 주관자가 악을 행할 때 나타나는 현상. 셋째, 죄로 망가진 세상과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의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셔서, 어둠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불러내셨다(벧전 2:9).
2. 예수님의 처절한 고통 — 다섯 가지
① 육체적 고통 — 로마 군병의 가죽 채찍에는 쇠조각과 동물의 뼈가 달려 있어, 맞는 사람의 살점이 뜯겨 나갈 정도였다. 십자가에는 손바닥이 아닌 손목 뼈 사이에 못을 박았는데, 중추신경이 지나가는 그 자리는 숨을 쉴 때마다 온몸이 찢기는 고통이었다.
② 정신적 고통 — 저항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향해 로마 군병, 종교 지도자, 행인들까지 모두 조롱하고 침을 뱉고 때렸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 오히려 당하는 세상의 잔인함을 예수님이 몸으로 담당하셨다.
③ 관계적 고통 — 3년을 함께한 열두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고, 헌신하셨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가장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등을 지는 배신의 아픔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셨다.
④ 인격적 고통 — 무죄하신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셨다. 억울함과 죄의 무게를 한꺼번에 담당하신 고통은 사람이 미칠 지경에 이를 만한 것이었다.
⑤ 영적 고통 — 영원하신 삼위일체 안에서 단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십자가 위에서 끊어졌다. 이것이 가장 심한 고통이었으며, 예수님은 완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셨다.
3.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다섯 가지 의미
① 처절한 고통의 절규 — 세상 모든 고통의 총합보다 더한 고통의 외침이었다.
② 하나님의 아들을 유기하심 — '버리다'는 단어는 잠시 옆에 두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유기·폐기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잠시 죽는 척을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혼의 죽음과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셨다. 우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 아들이 버림받으신 것이다.
③ 하나님 앞에 중심을 쏟아내는 솔직한 기도 — 예수님은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하나님께 외치셨다. 기도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이다.
④ 고난의 이유를 재확인하시는 고백 — '어찌하여'는 원어적으로 "무엇을 위해(for what)"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이유를 모르셔서 물으신 게 아니라, 이 고통의 이유—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함—를 다시 확인하며 그 이유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신 것이다.
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기도 — 절규하시면서도 기도의 첫 마디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으셨으며,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고 승리의 천국 문이 열릴 것을 믿으셨다.
4. 결론 — 고통 중에도 "나의 하나님"
내 중심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고 기도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시다. 인생의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넘어, 이 고난의 이유가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악인조차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천국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 전문 스크립트 ]
함께 디모데후서 2장 11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아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고 부활의 아침에 주와 함께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제목입니다. 4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되더니."
제6시에서 제9시는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입니다. 그러니까 한낮 밝을 시간에 어둠이 지속된 것입니다. 잠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가장 짙은 어둠이 한낮에 온 세상을 덮었습니다.
이 어둠은 영적으로 어떠한 상황에서 일어난 현상인지 세 가지 정도로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흑암으로 덮으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산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1절을 한번 읽어 볼까요.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성전에 하나님께서 구름을 덮으시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내밀한 임재, 그 거룩을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름으로 덮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흑암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좀 익숙하지 않으실 수 있는데, 그런 성전의 구름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하나님의 임재 상황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상황은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의 상황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죠.
두 번째 이 어둠의 의미는, 어둠의 영이 세상의 주인인 양 활개를 치는 경우입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가 세상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양 악한 일을 벌일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은 마치 사탄이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악의 권세를 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계시록 9장 2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진행하시는 내용 중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로 인하여 해도 어두워지고 대기도 어두워졌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은 사탄이 승리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악한 세상과 아들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께서 죄로 망가진 세상을 보시면서 그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 주셨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 악한 세상을 보시면서 슬퍼하시고, 또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 어둠에 대한 말씀을 지금 나누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친히 어둠 가운데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를 빛으로 불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적의 심장부에 일부러 들어가는 장면처럼, 악에 잡혀 있는 사람을 구원해서 데리고 나가기 위해 어둠의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천성문 안에 들어가는 날, 그 천국은 해도 없고 달도 없을 것이라고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해보다 밝게 빛날 것이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어둠을 씻어내기 위해 그 십자가의 어둠 가운데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쌓여 있는 어둠은 씻겨질지어다. 어두운 생각, 어두운 감정, 어두운 의지는 우리 안에서 다 씻겨질지어다. 아멘. 우리 가정을 공격하고 서로 다투게 하고 분열하게 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어둠의 영의 역사도 다 끊어질지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것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나머지, 46절에서 4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제9시, 오후 3시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가지 말씀 중에 네 번째 말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아람어인데,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했고, 어떤 사람은 신 포도주를 갖다 줬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구원하는지 한번 보자며 관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야를 부르신 것도 아니었고, 지금 느끼시는 고통은 신 포도주로 해결될 수도 없었고, 자기 구원을 하시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참을 묵상했는데, 다섯 가지로 크게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은 예수님의 처절한 고통의 절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우리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세상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의 총합보다 더한 고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이 모든 고통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란 어떤 고통이었을까요? 이것도 다섯 가지로 나누겠습니다.
①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이미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질을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는데, 이 채찍질을 당하실 때 이미 예수님은 거의 죽은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병들이 사용하는 가죽 채찍에는 쇠조각과 동물의 뼈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이 맞으면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흘러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상당히 건장한 목수의 아들이셨음에도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심각한 상태가 되어 계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화나 영화에 보면 두 개의 못을 양쪽 손바닥에 박은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체중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체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손목 뼈와 뼈 사이에 못을 박았습니다. 여기에는 중추신경이 지나가기 때문에, 못 박힌 사람은 거의 혼절할 지경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두 발을 겹쳐서 하나의 못으로 발등에 박았습니다. 이 자세에서 전달되는 고통은 숨을 쉴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온몸이 찢기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손가락 끝만 살짝 베어도 얼마나 아프고 온몸이 긴장이 됩니까.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담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질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여, 십자가 위에서 나의 모든 고통과 육체적인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치유함을 얻을지어다, 온전히 회복될지어다. 아멘.
②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강해 보여야 된다, 약해 보이면 사람들에게 당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12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불러서 제압하실 수 있지만 예수님이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침묵하시면서 끌려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더 심각하게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조롱하고 때리고 침을 뱉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멸시하고 모욕했고,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예수님이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인간은 매우 잔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시냐면 우리 주변에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인데, 과연 인간이 그렇게 하나요? 대도시든 기업이든 시골에 가든,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 약자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인간은 비열하고 잔인합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사람이 되어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예수님을 향해 무자비한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상담을 할 때마다 너무 안타까운 것은, 착한 사람들이 늘 당하는 세상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냥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해져야 하는데, 그냥 착하고 마음이 여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의 풍파를 넘어서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잘해 주면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잘해 주면 당연하게 여기고, 부당함과 잘못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 더 짓밟고 더 깔아뭉개는 것이 악한 세상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정신적인 고통도 우리를 위해 대신 지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유함을 얻을지어다. 나를 위해 모든 수치와 공격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거짓된 인신공격과 모함과 조롱 뒤에 숨어 있는 어둠의 영들아 너희의 견고한 진은 파해질지어다, 무너질지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성령 충만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강건하여지고 이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함을 얻을지어다. 이로 인하여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치유함을 얻을지어다.
③ 관계적인 고통입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모함하고 괴롭히는 것과, 내가 정말 사랑해서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공부가 어려운 게 아니고 일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일이 많아도 하면 되고, 일이 어려워도 해내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난이도 최상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은 인생을 완전히 손을 놓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는데, 그들에게 다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이 땅의 약자와 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셨는데, 그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까지 버리고 우리를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오심이 왕의 자행인 것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배우자의 배신, 자녀의 배신, 부모의 배신, 형제자매의 배신, 친구의 배신 이런 배신들을 경험합니다. 배신이라는 것은 신뢰를 저버리는 것, 신뢰를 등지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실망하고 거절당하고 이용당하는 배신의 아픔은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하게 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 상처와 트라우마가 우리 안에 대못이 되어서 박히면, 사람답게 살 수가 없어지고 누군가를 사랑할 힘도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관계적인 고통도 다 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정말 우리를 위해 모든 인류의 배신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명하노니, 배신의 영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랑하는 공동체로부터 떠나갈지어다. 어둠은 떠나가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관계적 고통을 넘어서 ④ 인격적인 고통을 보겠습니다. 무죄하신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을 했어도 누군가가 지적하면 발끈하는 게 사람인데,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잘못했다고 하면 억울해서 사람 못 삽니다. 잠도 안 오고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죄, 우리의 죄, 모든 인류의 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 뒤집어쓰셨습니다. 그 영혼이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이 정도 되면 사람이 미칠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한 성도가 정말 평생 사명감을 갖고 헌신했던 직장에서 명예롭게 은퇴할 상황이었는데, 누군가가 허위로 고발을 해서 감사가 들어왔습니다. 감사가 진행되는 두 달 동안 너무나 심각한 심적 고통과 절망을 경험했는데,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끝난 줄 알았더니 그 고발한 자가 또 다른 고발을 했습니다. 이것은 평생 그 직장에서 헌신한 사람을 이렇게 무참하게 만들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 마음이 절망에 빠지더라고요.
오늘 예수님께서 그 형제의 마음에 찾아가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억울함을 다 담당하신 예수님의 보혈이 그 영혼을 온전히 덮으시고 자유케 하시고 승리케 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이 땅의 모든 억울함을 마음에 품고 있는 성도들, 그 심령에 주님의 영적인 해방이 임할지어다.
그런데 이런 육체적, 정신적, 관계적, 인격적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이 ⑤ 영적인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이시기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단 한 번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이미 완료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미 나를 버리셨군요 —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버리셨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셨습니다. 이 깨어질 수 없는 관계가 깨어지는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냉담에 빠지고,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라며 인생의 심한 고통과 고난을 겪다 보면 "하나님, 나도 버려야지"라며 회의론에 빠지고 무신론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에 빠지면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없이 자유해질까요? 아닙니다. 더 깊은 영혼의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그런 분들에게, 영적인 분리의 고통을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경험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영혼 가운데 덮여져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겪으신 심각한 고통의 외침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을 유기하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에서 '버리다'라는 단어는 잠시 옆에 뭔가를 버려두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이 단어 자체가 완전히 폐기하다, 유기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주인들은 잔인하게 자기가 사랑하며 데리고 있던 반려동물을 유기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유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잠시 죽는 척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의 모든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영혼의 죽음,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셨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불신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들됨의 권리, 딸됨의 권리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회복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최근에 성경 통독을 하면서 생각해 보았는데,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은 아합입니다. 그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시니 그가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회개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이세벨은 본격적인 악인이었지만 남편 아합은 마음이 약한 악인이었어요. 금식기도 한 가지만 했는데도 하나님이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남유다의 므나세가 얼마나 심각하게 우상숭배를 했는지, 므나세 때문에 남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므나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역대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악인까지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전히 천국 문은 열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의 솔직한 고백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포장해서 멋지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냥 중심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정답 찾기가 아니고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 다듬어진 종교 생활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인격적인 신앙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죄의 문제라면 숨겨서 얘기할 필요 없이 날것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기도하고, 내면에 있는 슬픔과 고통,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이것도 다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내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생각과 감정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면, 주님께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영적인 자유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것은 고통 중에 죽음의 이유를 재차 확인하시는 고백이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이 표현은 '왜'라는 것인데, 원어적으로는 "for what", 즉 무엇을 위해서라는 이유에 대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스스로 지시는지 이유를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하나님, 내가 왜 버림을 받습니까, 내가 왜 십자가를 집니까" — 그 이유에 대해서 재차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내가 이 고통의 십자가를 집니까?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 죄인으로 전락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저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시고, 저의 희생이 그 이유를 성취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의 고난을 지나갈 때,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 앞에 확인하고 "주님의 뜻을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 주옵소서, 이 고난이 무의미한 고난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 뒤에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이 고난 가운데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연히 이유를 몰라서 던지는 "왜캐처럼"의 질문이라면 원망이 되겠지만, 예수님은 이유를 알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기도라고 보입니다.
이 기도의 후반부를 보면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기도하셨지만, 기도의 도입 부분이 무엇이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고통을 경험케 하셨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 완전히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조화와 일치의 관계 안에서, 그 아들께서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의 사명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절규로 아버지 앞에 외치시면서도 그 앞부분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신뢰합니다. 아버지께서 구원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을 신뢰합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망 권세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을 신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십자가를 맡기셨지만 영원히 저를 버리시지 않으실 것을 제가 신뢰합니다." 아멘. 반드시 부활의 아침은 올 것이고, 반드시 승리의 천국 문은 열릴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내 중심에 있는 것 다 쏟아놓고,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 근심하는 것, 어려운 것 다 쏟아놓고 기도할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또 여러분 가운데 육신의 질병이 있거나 아픔이 있는 분들은 본인의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모든 육신의 질병과 고통, 마음의 아픔과 상처, 이 모든 것을 주의 보혈로 씻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정결케 될지어다, 회복될지어다, 상처가 치유될지어다,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아 자유케 될지어다. 아멘. 우울증과 불안증과 공황장애와 내면의 모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지어다. 아멘. 원수 사탄이 어둠의 권세를 더 이상 우리에게 장악할 수 없으니, 주여 빛 되신 주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주시고 빛으로 우리를 이끌어내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6.04.02(목) | 새벽기도 | 예수님은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았는가? (마 27:27-44)
고난주간 새벽기도 260402 "예수님은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았는가?"
본문: 마태복음 27장 27-44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날짜: 2026년 4월 2일
[ 설교 요약 ]
고난주간 새벽기도 4일째. 마태복음 27장 27-44절, 예수님의 조롱·십자가 처형 장면을 통해 "예수님은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는가?"를 묻는다.
[이번 주 설교 흐름 정리]
- 1일차: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는가 —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다.
- 2일차: 예수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 베드로가 자기 살겠다고 세 번 부인했다.
- 3일차: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 가룟 유다도 빌라도도 자기 살길을 위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 4일차(오늘): 예수님은 정반대 길을 가신다.
1. 조롱 속에 묵묵히 서신 예수님 (27-31절)
채찍질로 온몸에 살점이 뜯겨나고 피를 흘리신 상태에서 로마 군병들은 홍포·가시 면류관·갈대를 씌워 왕 코스프레를 시키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치며 모욕했다. 온 천군 천사의 경배를 받으시던 그리스도께서 이 수욕을 참으셨다.
2. 구레네 시몬 — 예상치 못한 고난이 콜링이 된 사람 (32절)
북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유월절을 지키러 온 경건한 유대인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다. 마가복음에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로 소개된 것은, 이 고난의 사건이 그 가정의 구원의 시작점이 됐음을 암시한다. 갑작스러운 고난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콜링이 된 것이다.
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 정체성·관계성 공격 (39-43절)
광야 시험에서 사탄이 두 번 사용했던 바로 그 표현(마 4:3, 6)으로 행인들이 조롱했다. 이 공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흔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다. 다윗도 시편 42편에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에 흔들렸지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며 극복했다. 원수는 우리를 목자로부터 분리시켜야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다.
4. 예수님은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는가 (41-44절)
종교 지도자들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아버지 하나님이 사망 권세에서 일으키실 것이었다(행 2:23-24). 문제는 우리였다. 자기를 구원하시면 우리를 포기하셔야 했다.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어서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결론 — 세상은 "네 앞가림이나 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며 서로 돕고 도움받으며 살아간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마라.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가 따라갈 길이며 가장 가치 있는 삶이다. 고난의 십자가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
[ 전문 스크립트 ]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7장 27절부터 44절 말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내일 새벽까지 저희가 고난주간 새벽 기도 이제 5일째 하고요, 그리고 내일 밤 8시에 성금요 예배가 이곳에서 있고 성찬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함께 오셔서 주님의 수난의 자리를 묵상하고 은혜 가운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예수님은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았는가?" 고난주간 새벽 기도 4일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말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아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고 부활의 아침에 주와 함께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동안 나눴던 말씀을 좀 생각해 보면, 첫째 날에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는가" —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던 것이잖아요. 둘째 날 "예수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 수제자 베드로도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죠. 그래서 이번 주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 똑같은데, 셋째 날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 가룟 유다도 빌라도도 자기 살길을 위해서 잘못된 결정들을 내렸죠. 그래서 인간의 자기 중심성,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 이거는 뭐 누구나 다 동일한 것이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일까, 팔이 안으로 굽고 밖으로 꺾일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정반대 길을 가시죠. 자기 변호도 하지 않으시고, 자기 보호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는가.
27절에서 31절까지 말씀 한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아멘.
예수님은 그 어제 본문의 마지막에 이미 채찍질을 당하셔서 온몸에 살점이 뜯겨나고 뼈가 드러나고 피를 너무나 많이 흘리셔서 거의 죽은 상태가 되셨어요. 그런 예수님을 로마 군들이 주둔해 있는 관정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래서 안토니아 요새로 추정을 하는데, 그곳으로 끌고 들어가서 끝까지 조롱을 합니다. 이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손에 들렸다. 로마 군병의 망토를 입히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 홀을 들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요즘 표현으로 하면 왕 코스프레 복장을 입혀 놓고 그 앞에서 웃고 떠들며 조롱하고 모욕을 했던 거예요. 근데 예수님은 피를 철철 흘리고 계셨죠.
그러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직역을 하자면 이제 "헤일 오브 더 킹," 그러니까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친 겁니다. 모든 천군 천사의 경배를 받으시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런 수욕을 참으셨는가. 역사 최후의 백보좌 심판 때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분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 인간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잔인하고 비열하게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자, 오늘 또 중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도 월화수에 보았던 그 군상들과는 좀 다른 길을 갔어요. 3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아멘.
자, 구레네 출신의 사람인데, 이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도시입니다. 오늘날에 트리폴리인데, 이곳에 그 당시에 이제 거대한 유대인 거주 지역이 형성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먼 아프리카에서 이 사람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그러면 그는 상당히 이제 경건한 인물이었다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리고 이름이 뭐였다고요? 구레네 출신의 시몬입니다. 시몬은 구약의 시므온에서 온 이름이에요. 영어로 이제 사이몬이라고 하지만 그 이름으로 놓고 봐도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실한 사람이었죠.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마가는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 그래서 이 소개를 보면, 마가가 가장 먼저 복음서를 썼잖아요. 그러니까 그 시대에 이미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잘 알려진 집안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시몬은 유대인 이름이었죠. 자, 그런데 그 아들들 이름이 뭐라고요? 알렉산더와 루포. 둘 다 이방인 이름이었어요. 자, 그렇다면 시몬은 신실한 예배자였지만 그의 가정은 점점 세속으로 가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때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근데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초대교회에 이름이 알려진 집안이 됐다라는 것은, 이 복음서에 이름을 올린 거잖아요.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이 고난의 사건, 그에게는 전혀 뜻밖에 예상치 못했던 이 고난의 사건이 하나님의 콜링이 됐고 구원으로의 초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이번 주에 하여튼 자기 살겠다고 난리를 친 인물들만 계속 봤잖아요. 근데 이 장면을 보니까, 시몬이 "아니 나도 아니고 내가 왜 이 십자가를 져야 하냐?" 한마디 할 법 한데, 단 한 마디도 거부를 하지 않고 거절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갑자기 우리 인생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될 때, 그때 묵묵히 이 구레네 시몬처럼 지고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나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 그래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은 우리도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된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 같이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아멘.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주님께로 와라, 짐을 내려놔라, 너에게 쉼을 주겠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 구절만 좋아하고 이어지는 29절을 생각을 안 하는데, 주님께서 짐 내려놓으라고 하셨더니 더 무거운 멍에를 메고 오셨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짐과 멍에는 다른 거예요. 짐은 자기 혼자 지는 것이고, 멍에는 주님과 함께 메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나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 주님이, 우리가 사명의 십자가를 메고 갈 때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길을 갈 때 주께서 쉼을 주시는 거죠.
자,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해골의 곳이라 불리는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걸려 있었고, 예수님의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이 매달립니다.
이사야 53장 9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아멘. 예수님이 오시기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죠. 죄수 두 사람, 악인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실 것이고, 운명하신 후에는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의 묘실에 들어가시게 될 것을. 이미 오래전에 정확하게 예언한 내용입니다.
자, 이어지는 39절과 40절 같이 읽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아멘.
지나가는 사람들, 행인들이 모욕했어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해 봐라." 저를 따라해 보세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근데 이 표현은 이제 사탄이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탄이 와서 시험을 할 때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4장 3절과 6절에 두 번 나오는데,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면 되지 않냐. 그리고 6절에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높은 곳에서 그 뛰어내려서 성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록된 말씀처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드리라."
성전 앞에서 열심히 가르치다가 끌려가서 십자가 지지 말고, 이 멋진 초월적인 능력으로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 증명하면 되지 않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라면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어떻게 40일이나 굶었는데 너의 아버지가 너에게 먹을 것을 주시지 않느냐." "어떻게 너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너를 십자가의 고통으로 몰아갈 수 있느냐."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적어도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냐."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어떻게 고통과 고난과 환난 가운데로부터 지켜 주시지 않느냐." 이렇게 공격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공격이죠. 근데 이 공격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에요.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냐?" 근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표현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공격이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체성에 대한 공격, 관계성에 대한 공격은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거든요. 근데 이 공격이 들어올 때 사람들이 여지없이 흔들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제가 이거를 묵상하다 그런 생각이 났어요. 여러분, 친구들이 우리 단점을 잘 알잖아요. 뭐 우리 단점을 흉보거나 놀리거나 욕하거나 뭐 참을 수 있죠. 그러나 언제 참을 수 없어요? 가족을 욕하거나 부모 욕하면 참을 수 없는 거죠. 그건 참아서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왜 나의 근간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격하는데,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내 영혼의 출발점이자 과정이자 완성의 지점이 되시는 그분과의 관계를 흔드는데, 내가 왜 사탄에게 흔들려 줘야 되는가. 여러분,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에서 거의 영적으로 보면 동일한 고백을 한 거예요. 시편 42편 3절과 5절 같이 읽어볼까요.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이 말씀에도 보면 이런 얘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환난 가운데 있는 나에게 "아니, 도대체 널 이렇게 두시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데? 하나님이 도대체 너의 인생에 어디 계셔? 너의 인생에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보면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시는 게 아니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그 말에 영혼이 낙심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고 누구를 바라보라고요? 하나님. 하나님 바라봐야 된다. "왜 그걸 흔들려 주냐? 왜 낙심하냐? 왜 불안해하냐? 너는 누구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 바라보라"는 거야.
여러분, 원수가 왜 우리를 흔들까요? 결국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면 그다음에 낚아채기가 좋은 거거든요. 이리가 어린 양을 무리에서 벗어나 목자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야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거잖아요. 길거리의 깡패들이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가 있으면 붙잡아 놓고 "야, 우리가 먹을 거 줄게, 우리가 잘 수 있는 데 줄게." 부모와 완전히 떨어뜨려 놔야 마음대로 유린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그 원수의 공격을 왜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41절에서 43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아멘.
이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조롱을 합니다.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구원을 못하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면, "자기 앞가림이나 하지." 여러분, 세상에서도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자기 앞가림이나 하지. 왜 다른 사람들 돕는다고 나대다가 그렇게 죽는데." 그 이런 조롱의 말을 한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니까 이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앞가림을 잘 한 거더라고요.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결국에는 유지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볼 때 "우리는 우리 앞가림을 그래도 잘했다. 이러다가 하마터면 우리 기득권을 뺏길 뻔했는데." 자기들은 앞가림을 했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앞가림을 못 한 거죠. 예수님은 늘 병자들 고치시고, 가난한 사람들 먹여 주시고, 소외된 사람들 돌봐 주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 자유케 해 주시고, 늘 남을 구원하다가 정작 본인은 죽음의 길로 갔다는 거예요. 그러니 자신들이 이 경쟁 구도에서 "야, 우리는 그래도 생존자가 됐는데." 그렇게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너나 잘해, 너나 구원해." 이런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러나 정말 인간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러분, 예수님을 사망 권세로부터 누가 일으키세요? 하나님이 일으키시잖아요. 그래서 오순절날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선포하냐면, 사도행전 2장 23-24절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아멘.
여러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사망 권세에서 일으키실 줄로 믿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하신 분이시잖아요. 그러므로 사망에, 사망의 권세에 매어 있을 수 없는, 근본 존재 자체가 영원하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인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우리가 사망 가운데 빠지면 누가 우리를 건져낼 것인가. 예수님이 건져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없는 거예요.
자,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처럼 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을까. 왜 다른 사람들만 구원하시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예수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살 소망이 되시죠. 그러나 우리들은, 여러분, 그분의 건지심이 아니면 구원의 소망이 없어요.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하는 얘기가 똑같습니다. "야, 세상 구원한다고 그렇게 나대지 말고 너네나 잘해라." 세상이 조롱하고 사탄이 조롱하는 거잖아요. 물론 교회가 잘못한 부분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철저히 회개해야 되고 세상 앞에 온전히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연약하고 부족한 공동체인데 왜 자꾸 세상을 돕겠다고 나서냐, 왜 사회의 약자들을 도우려고 하고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냐, 그러면서 제 앞가림도 못 하면서 누구를 살린다는 거냐, 이런 비난을 하는 것은 참 가슴이 아파요.
그래서 위험 지역에 왜 들어가서 선교하는 거냐, 그런 거 하지 마라, 여행 위험 국가에 가서 구제 활동도 하지 마라, 왜 그런 데 가서 문제 일으키냐? 이 사람들이 다 그런 반응이잖아요. 자,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그런 소외된 사람들을 아무도 돕지 않고 아무도 함께 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완전히 버려진 인생이잖아요.
그 제가 이제 "인생을 산다는 게 도대체 뭘까" 이런 묵상을 하다가,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기 앞가림, 물론 잘해야 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가정, 일터, 사명, 잘 감당하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야 돼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 중에 자기 인생을 완벽하게 살아 낸 사람이 있어요?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네 인생이나 잘 챙기지, 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어설프게 나서서 도우려고 하느냐." 만약에 그런 명제로 모든 사람의 인생을 재단한다면, 그 누가 결혼을 할 수 있으며, 그 누가 자식을 낳아서 키울 수 있으며, 그 누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고 나설 수 있겠어요.
만약에 경찰이나 소방관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 앞가림이나 해라"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게 합당하겠어요? 사무직이든 현장직이든 어떤 직종일지라도, 여러분, 세상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다 누군가를 돕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잖아요. 근데 사실은 우리가 우리 앞가림도 다 100% 완벽하게 못 하면서 누군가를 돕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셀프 매니지먼트, 자기 관리를 100% 완벽하게 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아무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돕고 도움을 받기 때문에 인류 공동체가 살아가는 것이잖아요.
인간은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저도 제 자신을 보면 건강도 머리도 성질도 안 좋게 태어났어요. 하나님 원망 많이 했고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고 저 자신에 대한 자책도 많이 했었어요. 근데 어느새 내가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까 어설픈 생각을 하더라고요. 소극적이고 위축되어 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를 돕고 싶은 거예요. 누군가를 살려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사는 나를 보면서 "야, 이건 참 모순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 이건 참 놀라운 역설이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그렇게 "아, 내가 나도 케어를 다 못 하는데 내가 어디를 나서겠어." 하고 다 위축되어 산다면. 어 지난 2014년, 벌써 12년이 지났는데, 전남 진도 해상에서 세월호 참사가 났잖아요. 무려 304명의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생사의 기로에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끝까지 승객들을 대피시키다가 숨진 승무원들이 있어요. 정현선 님, 박지영 님, 김기용 님. 단원고 학생들을 구조하다가 순직한 선생님들이 계세요. 남윤철 선생님, 최혜정 선생님, 김초원 선생님, 이지혜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세월호 참사가 막 뉴스에 2년 내내 계속 나올 때 외면하고 싶을 만큼 힘들더라고요. 근데 12년 만에 어제 다시 이렇게 기록을 보면서 "아, 정말 귀한 분들이 많았구나."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가 이분들에게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남 살리겠다고 하다가 당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면, 그들을 비난한다면, 누가 그 비난을 합당하다고 생각하겠어요? 오히려 모두의 공분을 사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끝까지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는가. 자기를 구원하면 우리를 포기하셔야 되잖아요. 자기를 구원하시면 나를 내려놓으셔야 되잖아요. 나를 포기하실 수 없어서,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어서,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던 거예요.
저는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이 나요. 제가 어릴 적에 저희 가정이 정말 가난한 시절을 오래 보냈어요. 사람들이 안 믿어 주세요. 정말 가난한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가 알코올 때문에 10여 년을 누워 계셨기 때문에. 저희 어머님은 본인이 대전 제일의 미인이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참 몸이 약하신 분이었거든요.
그런 어머니께서 좋은 반찬, 고기 반찬을 아들들에게 다 내어 주시고, 가족들이 식사가 끝나고 나면 늘 식은 밥 데워서 나물과 드셨어요. 근데 그런 어머니가 싫은 거예요. "좀 잘 드시라"고. 그 어머니가 늘 싸고 초라한 옷을 입고 다니시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늘 못마땅했어요. 근데 더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 없던 살림에 자기 자신을 비워서, 당신의 생명까지 다 비워서 아낌없이 주신 거잖아요.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사랑이고, 그래서 나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야, 네 앞가림이나 해." 그런 얘기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그럼 우리가 각자 우리 앞가림만 하고 산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누구를 섬길 수 있겠어요? 누구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다른 사람을 위해, 여러분의 가족을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때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사랑하고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가 따라갈 길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 길을 가면서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잠시나마 주님의 그 길을 따라가게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지는 십자가가 무거우면 얼마나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무겁겠습니까.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지신 거잖아요. 여러분,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여러분의 젊은 날이 "아, 내 젊은 날이 이렇게 먼지처럼 날아가는구나, 모래바람처럼 흩어지는구나." 그래도 후회하지 마세요. 우리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낌없이 나눠주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아낌없이 희생하며 사세요.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인생의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사랑하는 주님, 세상은 화려하게 살라고, 부요하게 살라고, 멋지게 살라고, 너 자신을 위해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아낌없이 생명을 내어 주며 사셨고, 그 생명을 내어 주신 사랑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건지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거짓말에 위축되고, 사탄의 조롱에 위축되고.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볼지어다. 그가 일어나 너를 도우시고 승리케 하시리라." 아멘.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아낌없이 사랑하고 섬기는 이 삶이 복된 삶이요,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삶의 끝에, 고난의 십자가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영광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 가운데 회복이 있게 하시고, 일터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승리를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한번에 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026.04.01(수) | 새벽기도 |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마 27:1-26)
설교 정보
- 제목: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 본문: 마태복음 27:1–26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6년 4월 1일 (고난주간 새벽기도)
[ 설교 요약 ]
1. 가롯 유다 — 후회와 회개의 차이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30을 되돌려 주며 스스로 뉘우쳤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는 않았다. 후회는 자기 본위의 에고이즘에서 나오는 것이고, 회개는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고후 7:10). 유다는 회개 대신 자책과 자학의 굴레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주님의 포기하지 않으심과 성령의 내적 힘으로 다시 일어섰다.
2. 빌라도 — 자기 중심성이 만들어낸 파국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는 빌라도를 "탐욕이 가득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11년간의 실정으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혀온 장본인이었다. 예수님을 무죄라고 알면서도 정치적 압박을 이유로 군중의 뜻에 따랐고, 손을 씻으며 무죄를 선언했지만 그 행위로 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유다도, 빌라도도 자기 살 길을 찾겠다고 온 힘을 썼지만 결국 둘 다 자살로 생을 마쳤다 — 철저한 자기 중심성의 끝이었다.
3. 바라바 — 인간 구원자의 실패
바라바는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bar abba)"이라는 뜻으로, 특정인의 이름이 아닌 보통명사에 가깝다. 소수의 마태복음 사본에는 "예수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즉, 이 대결 구도는 "사람의 아들 구원자"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사이의 선택이었다. 바라바는 무력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했던 자였지만 실패했고, 이스라엘은 결국 AD 66~70년 유대 독립전쟁에서 로마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다. 인간 구원자는 자력 구원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은 인류 구원에 성공하셨다.
4. 우리 안의 바라바 —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의 뿌리
유다의 지혜, 빌라도의 권력, 바라바의 완력 — 이 세 인물은 모두 "내가 해보겠다"는 자기 중심성의 화신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결국 자기 중심성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살고 싶어 한다. 가정에서도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힘과 완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바라바의 모습이다.
5. 결론 — 바라바를 내려놓고 예수의 길로
예수님은 열두 군단 천사를 부르실 수 있었지만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진정한 구원은 힘으로, 돈으로, 완력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에 있다. 십자가 그늘 아래 엎드려 회개할 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시작된다. 내 안의 바라바를 내려놓고 인격적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 전문 스크립트 ]
새벽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함께 참여하시고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7장 1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30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꿈에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아멘.
이 시간 담임 목사님께서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해 주시도록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고난 주간 새벽 기도 셋째 날입니다. 함께 기도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아둘람 프로젝트에도 동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식하며 모은 성금을 교회 안에, 또 이 지역에 어려운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또 십자가 의식을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계신데요, 로비에 우리의 죄의 문제, 우리가 내려놓기 원하는 것을 적어서 주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아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고 부활의 아침에 주와 함께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 "바라바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오늘 본문이 좀 긴데요, 먼저 문제의 인물 가롯 유다와 빌라도에 대해서 보고, 그다음에 바라바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오늘 3절에 보면 유다가 스스로 뉘우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뉘우쳤어야 하는 것이죠. 후회가 아닌 회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팔고 받았던 은 30을 되돌려 주었지만, 자신의 잘못된 과거는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인생을 살면서 후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잘못, 나의 과오에 대해서 후회가 항상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가 경험하는 기적 중에 하나는 인생의 후회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예수님 안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이 우리를 일으켜 주실 때 다시 일어서는 줄로 믿습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보면, 후회는 자기 본위, 일종의 에고이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후회는 부정적인 에고이즘의 어두운 측면이죠. 반면 회개는 예수 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후회는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회개는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을 보면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원망에 빠져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다니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겠나"라며 자기 신세한탄을 하고 자기 연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후회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더 멀리, 놋 땅으로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개를 하지 않고 후회 막심하기만 하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더 멀리 가게 된 것입니다.
자책과 자학의 굴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세상 사람이었으면 하나님의 기준이 없이 사는데,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기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기준이 명확해지면 명확해질수록 "야, 난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고"라며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후회 막심한 인생, 자책과 자학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 앞에 다 쏟아놓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자유할지어다, 아멘. 해방될지어다, 아멘.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후회 막심한 인생이라면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인정하고 주님께 가지고 와야 합니다. 회개하면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볼 때, 어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잖아요. 그리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주님을 따라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를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셔서, 또 성령께서 그에게 내적 힘을 주셔서 다시 일어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롯 유다를 보면서 "유다가 아니면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겠느냐, 그러면 인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겠느냐, 그래서 유다가 악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유다만 배반자였을까요? 유다가 아니었으면 배반할 사람이 없었을까요? 여타 다른 제자들도 다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번 한 주간 묵상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죠. 팔이 밖으로 꺾이지는 않잖아요. 이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기 참 어려운 것인데, 그렇게 살면 결국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내 과거를 지우겠다고 하다가 과거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죄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 것이 유다였습니다.
유다의 인생을 묵상해 보면 살 때도 자기 중심, 죽을 때도 자기 중심입니다. 이 나 중심 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수가 없습니다. 자기 본위, 자기 중심주의에는 예수님이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모태 신앙으로 부모님 따라 교회 다니긴 했었지만, 사춘기에 우울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자기 중심의 틀 안에, 감옥 안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난 안 돼, 난 바보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야 돼" — 이런 생각을 앉아서 몇 시간씩 정신적으로 자학을 했습니다. 매일같이. 그런데 자학을 하면 출구가 있나요? 없습니다. 자기를 더 가두어두고 더 괴롭히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 자학을 하면서 일종의 장악적 기쁨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죄책의 문제를 해결은 못 하지만 그 죄책으로 자기를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예 완전히 골로 가게 되든지, 아니면 그 밑바닥에서 주께로 돌아오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1절에서 14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본디오 빌라도는 AD 26년에서 36년, 총 11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지냈는데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서 임명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질문한 것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고,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직역하자면 "네가 지금 말했다"라고 하시는 것으로, 최소한의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유대 지도자들이 와서 맹렬하게 비난을 하고 거짓 고발들을 쏟아놓는데도 아무런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총독이 이 장면을 보고 크게 놀랐다는 것입니다.
총독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신문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고소·고발을 당하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방어도 안 하고 자기 변호도 안 하고 가만히 계셨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죄인일 수 없다는 것을 사실 이미 알았습니다.
19절에 보면 빌라도가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라고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무리들의 외침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결정합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총독의 제1 임무는 피지배민들이 민란이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치안과 질서를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라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압박감이 심하니까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죄가 없다, 너희 죄다"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제가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나옵니다. 세상 어디서든 빌라도가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배반한 배반자 유다도 사도신경에 등장하지 않는데,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난 억울하다. 나는 정치적인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건데, 게다가 내가 분명히 선언하지 않았느냐, 난 죄가 없다." 그러면 정말 죄가 없는 사람일까요?
그가 11년 동안 유다 총독을 지내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와 역사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뭐라고 표현을 했냐면, "빌라도는 탐욕이 가득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룩한 땅으로 여겨지잖아요. 이방인 군대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의 민심이 자극됐다고 표현하는데, 그 예루살렘 전체에 로마 군기를 걸었습니다. 일부러 민심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고, 사람들을 자극하면서도 "내가 통치자다, 너희는 피지배민이다"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전 근처의 돈을 탈취해서 자기 마음대로 수로 건설 공사에 쓰고,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고, 온갖 학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적대감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단면만 놓고 보면 이 장면만 보면 유대인들이 밀어붙여서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상황을 지난 11년 동안 만들어온 장본인이 빌라도 본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실정으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힌 것입니다.
자신의 실정을 로마에 고발할 수 있는 사람들이 헤롯 당과 유대 귀족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준 것입니다. 폭군 티베리우스 황제가 "왜 제대로 치안 유지를 못하냐"고 추궁하면 자기 정치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그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마리아인들을 또 학살하는 큰 사건을 저지릅니다. 그 사건이 누적된 이후로 면직이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골 지역으로 유배를 갔는데, 거기서 사형 통보를 받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다도 자기 살 길 찾겠다고 하다가 자살을 선택했고, 빌라도도 자기 살 길을 찾겠다고 예수님을 내준 뒤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보면 상당히 비슷한 유형입니다.
가롯 유다가 은 30을 다시 갖고 와서 자기 과거를 돌이키고 싶다고 후회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가 회개에 이르렀다면 참 좋았을 텐데, 불쌍한 마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평상시에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부터 돈궤에서 돈을 훔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오던 인생의 연장선 위에 또 하나의 점을 찍었을 뿐인 것입니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손을 씻으면서 자기 죄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그동안 쌓아왔던 죄들 위에 마지막 한 방울, 넘치는 티핑 포인트를 흘렸을 뿐인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빌라도도 생각해 보니까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멍하니 "우리 주님 좋은 자리에 앉으실 거나"라며 스마트하지도 못한 사람들이었는데, 가롯 유다는 머리가 똑똑하고 상황 판단을 딱 해서 자기 살 길을 스스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살 길 찾느라 그렇게 애를 썼는데 마지막이 어떻게 됐습니까.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독으로 부임되자마자 사람들에게 자기의 힘과 권력과 권위를 각인시켜야겠다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걸로 정치적 계산을 하면서 계속 불안불안한 악수를 뒀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신문할 때 이 정치적 위기 상황을 스스로 타개해야 하니까,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끝까지 자기 머리를 쓰고 정치적인 수를 썼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적으로 보면 열심히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자기 중심성 — 살 때도 나 중심이고 죽을 때도 나 중심이고 — 그러다 보니 결국 자기 인생을 침몰시킨 것이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라바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5절에서 17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오늘의 주제는 바라바인가, 예수인가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연중 7대 명절 중에서 가장 으뜸, 가장 중요한 명절입니다. 이날 특별 사면이 있었다는 것인데요. 하나 질문을 드려볼게요. 2025년 8월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우리나라에서 사면 받은 사람이 몇 명일까요? 정치인·경제인 포함해서 무려 2,188명이 사면을 받았더라고요. 제가 찾아보니 "갈등 극복과 내란 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는 이유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악감정이 극에 달하고 민중봉기가 일어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 특별 사면이라는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그럼 바라바는 어떤 인물인가요? 오늘 본문에 "유명한 죄수"라고 돼 있습니다. 마태로서는 유대인들 입장에서 유명한 죄수였지만,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악명 높은 죄수였습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에서 뭐라고 표현했는지 보면,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주동했던 주동자였고, 살인으로 인하여 체포된 죄목이 분명한 죄수였습니다. 바라바는 명백한 죄가 있는 죄수였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특별 사면이라고 봐야 될까요, 아니면 죄수와 의인을 맞바꾼 것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요? 죄없는 피해자 예수님을 죄 많은 수감자 바라바 대신 죄인으로 삼고 사형을 언도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이번 주제가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인데요. 각 인물들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 나구나, 내가 이 사람의 포지션에 서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 바라바 포지션에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바라는 사람을 묵상할수록 좀 이상합니다. 이름도 이상하고, 민란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서 민란의 주동자를 풀어줬다는 것이 앞뒤가 안 맞기도 합니다. 그래도 민심을 어떻게든 가라앉혀야 하니까 풀어준 것입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이 이상하다는 이유가 뭐냐면, "바르 아바" —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son of the father." 이것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닌 거예요. 그냥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특정인의 이름이 아닌데 왜 성경은 바라바라고 불렀을까요?
여기에 궁금증을 더하는 것은, 마태복음의 소수 사본 몇 개에는 17절이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가 아니라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로 써 있습니다. 소수의 사본이기 때문에 최종 본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저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여호수아, 호세아 — 이것이 다 같은 이름입니다. 헬라어로는 "히에수스", 즉 "예수"이고, 호세아와 여호수아가 다 같은 단어입니다. "구원자",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상당히 대중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구원자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선택할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력 구원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자력 구원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건져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바가 그랬습니다. 정말 민중을 건져내고 나라를 살리겠다고 스스로 구원을 해보겠다고 시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대실패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이 지경까지 몰린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하고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개를 하지 않고 정치적인 해결법을 찾았던 것이죠. AD 66년에서 70년까지 유대 독립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로마 제국이 군대를 투입해서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붕괴시키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지는 서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버려진 카드,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라고 기대했는데 아니었다며 십자가에 내어 죽게 만든 그 예수님은 승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결국에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자 바라바는 자력 구원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은 인류 구원에 성공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세 인물을 봤습니다. 이 세 인물이 모두 "내가 해보겠다"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내려놓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주인되고 싶어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힘으로 해보겠다, 내 뜻대로 해보겠다, 내 인생 스스로 개척해 보겠다 —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주님이 내 인생을 끌고 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결국 딱 한 단어, 자기 중심입니다. 그 순간 자신이 하나님보다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거 먹으면 네가 훌륭해지는 거야, 하나님이 안 알려 준 걸 내가 너한테 알려주는 거야" — 이렇게 유혹했잖아요. 인간이 그 순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해결할 수 없는, 빠져나올 수 없는 자기 중심성 — 모든 사람의 팔이 안으로 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고 하잖아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다 자기에게는 호위적으로 해석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 자기 중심성이 죄의 아주 근본적인 뿌리입니다.
결국에 유다도 빌라도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 뉴스를 보면서 대부분은 너무 답답하잖아요. "저 사람들 왜 저렇게 힘 과시를 할까, 저거 힘으로 해결 못 하는데." 힘으로 역사가 해결이 됩니까? 뭐 순간적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그걸로 안 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힘으로, 돈으로, 완력으로 밀어붙여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2,000년 전이나 2,000년이 지난 지금이나 인간은 여전히 바라바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유다가 아니고, 나는 빌라도가 아닌가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바라바가 끊임없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을 막아내지를 못합니다. 인생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손쉬운 방법이 유다처럼 머리를 쓰거나 빌라도처럼 힘을 쓰는 것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희생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보다 제일 쉬운 방법은 화내고 짜증내고 압박하는 것입니다. 존재감을 과시하고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만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닙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인격적으로 양육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유다처럼 돈으로 해결하거나 빌라도처럼 위력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이 제게 제일 많이 제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님이 말 안 들으니까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돼 있어 그거 인용하더래요." 존경심이 자발적으로 아이에게서 생겨야 하는 것인데, 그 구조를 얘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간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에 예수님이 걸어가신 인격적인 길을 우리가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힘들어도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 힘으로 과시하고, 돈으로 해결하고, 완력으로 밀어붙여서 해결하는 것은 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섬김, 희생과 헌신의 길 끝에 진정한 구원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도 하는 "십자가 그늘 아래에 내 소망이 있다." 왜 십자가 아래도 아니고 십자가 그늘 아래라고 표현했을까요? 내가 이렇게 충만하게 살아 있을 때, 인간성이 충만하게 살아 있어서 좋을 때도 있지만 — 그러나 인간성으로 진정한 해결이 있나요, 구원이 있나요, 해답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그늘진 그 자리 아래 엎드리며 회개할 때, 거기에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빌라도의 인생도 아니고, 유다의 인생도 아니고, 바라바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을 쓸 수 없었습니까? 머리를 쓰실 수 없었습니까? "12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가 데려다가 해결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이거 힘으로 해결 못 해서 내가 가만히 있는 줄 아느냐."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말 없이 끌려가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고, 너무나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정말 끝까지 사랑으로 해 주면 무기력한 줄 알잖아요. 무기력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바라바를 내려놓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목사님은 왜 금식을 하라 그러냐고요? 어제 기도의 집에서 두 분이 한참 이야기하고 있길래 들어 보니까 부부간의 갈등 이야기였습니다. 젊어서 기운이 많아서 그러신다고, 나중에 기운 빠지면 싸우는 것도 귀찮아집니다. 금식이 매우 도움이 됩니다. 기운을 빼야 합니다. 내가 너무 충만하게 살아 있어서 악에 받쳐서 속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제일 많이 죄를 짓는 것이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입니다. 이 제일 안타까운 바라바의 모습을, 유다의 모습을, 빌라도의 모습을 제일 많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가정 안에서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가족이 같이 오신 분들은 손을 잡고 기도하시면 좋겠고, 대표로 오신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겠어요.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주인되십니다. 예수님의 임재 안에 나 자신을 내려놓겠습니다. 내가 힘으로 자녀에게도 밀어붙이려고 하고, 배우자에게도 밀어붙이려고 하고, 완력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 전쟁을 보면서 완력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어리석을까라고 하면서, 사실 우리 자신을 못 봅니다.
완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린 아기 하나도 안 먹겠다고 하는 아이 입에 한 숟갈도 밀어 넣을 수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가야만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왜 십자가가 우리에게 힘으로 다가오지 않고 끝까지 헌신과 희생과 사랑으로 다가왔는가. 그 십자가를 지시고 나서도 우리에게 "십자가를 반드시 선택해야 된다"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원하는 사람은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십자가를 원하는 사람만 선택하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끝까지 인격적이신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에 치유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에 구원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에 회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바라바를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 그 참된 구원의 길을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완악함과 우리의 나태함과 우리의 고집과 우리의 교만을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주여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가정을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내 마음을 먼저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 남편을 정죄했던 것, 아내를 판단했던 것 회개합니다. 부모님을 원망했던 것, 자녀들을 밀어붙이던 것 회개합니다.
하나님, 인격적으로 대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세상의 방식으로 가지 말지어다.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길을 찾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예수의 길을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 그늘 아래 우리의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내 안에 정말 예수님이 좌정해 계시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3월
2026.03.31(화) | 새벽기도 | 예수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마 26:69-75)
고난주간 새벽기도 260331 "예수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본문: 마태복음 26장 69-75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날짜: 2026년 3월 31일
[ 설교 요약 ]
고난주간 새벽기도 이틀째.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마 26:69-75)을 통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1.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인간적 실수에서 의도적 부인으로 (69-74절)
예수님이 종교 재판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바깥뜰에서 불을 쬐며 상황을 지켜봤다(요 18:18). 한 여종이 예리하게 알아보며 고발하자 베드로는 즉각 반사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 쪽으로 이동했을 때 또 다른 여종에게 다시 걸렸고, 이번에는 "맹세하고" 부인했다.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다. 세(3)는 완전수, 즉 완전히 의도적인 부인이었다.
2. 오늘날의 베드로들 — 현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 척하는 시대
30~40년 전에는 교회 다닌다 하면 신실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반대다. 방송 PD가 된 청년은 존경하던 선배에게 "그런 정신없는 짓 하지 마"라는 한 마디에 신앙을 드러내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에는 직장 상사의 눈치에 "저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아내가 다니는 것"이라고 베드로처럼 부인한 성도도 있었다. 식사 기도, 큐티책, 자동차 스티커 — 작은 것 하나씩 감추며 "난 그분 모른다"를 온몸으로 말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3. 예수님을 모른다 하면 어떻게 되는가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천성문 앞에서 주님이 나를 알아봐 주실지 여부는 내가 지금 그분을 시인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론 — 고백하며 살기로 결단하라
예수님은 나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영원한 완성자이시다. 그분을 모른다 할 수 없다. 사도행전 1:8처럼 성령의 능력은 결국 예수의 증인으로 살라고 주시는 선물이다.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영혼과 맞교환하지 말라. 베드로에게 세 번의 기회가 있었듯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 횟수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결단하라.
[ 전문 스크립트 ]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 제가 먼저 읽고 성도님 읽는 순으로 번갈아 가며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아멘.
오늘 고난주간 새벽 기도 이틀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아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고 부활의 아침에 주와 함께 다시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69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아, 예수님이 체포되셔서 종교 재판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멀찍이서 따라와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럼 왜 바깥뜰에 있었는가? 이 사복음서의 이제 대조 본문에서 몇 군데서 설명을 해 주는데, 요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그때가 추운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루살렘은 고도가 760m 되고 일교차가 크고, 또 예수님이 체포되셔서 이 심문을 당하신 때가 유월절이잖아요. 이 유월절은 초봄입니다. 그러니까 뭐 지금 우리의 3월 말 4월 초간하고 이제 비슷한 날씨인데, 우리 한국도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밤이나 새벽에는 상당히 기온이 떨어지잖아요. 그 상황에서 그가 뜰에서 사람들과 불을 쬐면서 재판의 진행을 보고 있었습니다.
자, 그때 한 여종이 다가와서 고발을 했어요.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성경을 보면 여인의 말 한마디가 생사의 기로에 서게 하는 경우들이 있죠. 사울왕 시대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다윗이 이때부터 이제 죽음에 몰리게 됐죠. 이 여종이 상당히 예리하게 베드로를 알아봤어요. 베드로를 언제 봤을까,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알아봤을까, 뭐 어쨌든간에 어느 순간이었든 베드로가 어디 가서 이렇게 가려질 만한 유형의 사람은 아니잖아요. 일단 목소리도 크고 우락부락하고 보수기질이 있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유형이었죠.
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70절 같이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아, 모든 사람 앞에서 갑자기 고발을 당하니까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부인을 했어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순박한 어부 출신의 베드로인데, 들통나지 않으려고 정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했겠죠. 모른다고 잡았어요.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글쎄 저는 이 첫 번째 거짓말은 약간 무조건 반사 같은, 자기도 내가 이걸 한다는 생각을 모르고 막 즉각적으로 나온 반응이었죠. 우리들도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들통나면 화들짝 놀라면서 화를 내거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험들이 다 한 번쯤은 있지 않나요? 다 있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기 때문에, 평상시의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행동이 먼저 앞서는 베드로였잖아요. 그래서 이 첫 번째 거짓말은 그냥 인간적인 실수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근데 문제는 이제 거기서 한 번으로 끝나지가 않았던 거죠.
71절 말씀 다시 읽겠습니다. "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자, 베드로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순박하지만 또 눈치도 빠른 사람들이잖아요. 그 재판이 진행되면서 예수님이 억울한 누명에서 풀릴 기미는 전혀 없고 갈수록 이 재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느꼈겠죠. 그리고 이제는 바깥에 있는 자신에게도 위기감이 조여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차하면 튀겠다고 안쪽에서 문 쪽으로 이동을 했는데, 거기서 또 다른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여종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여종이 "이 사람은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자, 베드로의 두 번째 반응입니다. 72절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의리남이었던 베드로가 또 부인을 합니다. "나는 모른다." 근데 첫 번째 부인하고는 다른 거예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가 첫 번째 말이었다면, 두 번째는 명시적으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뭐 손가락이라도 가리키면서 "나는 저 사람 모른다, 난 저 사람 정말 모른다"고, 마치 억울한 누명을 쓴 것처럼 목소리까지 높이면서 성질을 냈겠죠. 진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계신 분은 사실 재판을 받고 계셨잖아요.
두 번이나 여종에게 고발을 당하고 무너지는 베드로를 보면서, 저는 그 여종이라는 인물들 때문에 다윗이 생각이 났어요. 그 사무엘하 6장에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의 언약궤를 다윗성에 모시려고 엄청나게 준비했죠. 그래서 두 번째 성공했던 때 정말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춤을 춥니다. 그러나 왕궁 창문으로 내려다보던 누가 조롱을 했죠. 아내 미갈이 조롱을 합니다. "왕이 체통 없이 계집종들 앞에서 몸이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추다니." 그 다윗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은 것이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난 괜찮다." 이 다윗이 하나님 바라기였잖아요.
근데 베드로도 예수님 바라기였죠. 근데 어느새 이렇게 여종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해졌는가. 자,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나요. 지난 3년 반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이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이 3년 반을 동행하면서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그 기적들을 본 것, 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은 것, 그가 어떻게 모른다고 하겠어요. 게다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수제자로 인정하고 세워 주셨잖아요.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그냥 우리가 상상을 해 볼 때 얼마나 대장 역할을 하려고 했을까. 애들이 동네에서 오면 "애들은 가라" 이것도 베드로가 주도하거나, "야 쟤들 보내" 그래서 밑의 사람들 시키거나 했겠죠. 혈루병 여인이 옷가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사람들이 주변에서 에워싸 있는데,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다" 이게 주님이 멈춰서 서신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아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주님이 예민하시다는 얘기 베드로가 한 얘기잖아요. 수천 명씩 사람들이 모이면 예수님의 보디가드 역할하고 사람들 줄 세우고, 당시 최고의 스승이고 선지자이셨던 예수님 팀의 "내가 리더다." 이게 얼마나 그에게 자랑스러웠을까요.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것은 다 비슷하잖아요. "내가 그 사람 안다." 이게 상당히 힘이 될 때가 있어요. 저희 성도 중에 어떤 형제 한 분이 의료 기기 사업을 해요. 근데 이 의료 기기 사업이라는 게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들을 설득해서 거래를 열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여러 의료 기기 회사들이 있고 여러 기기가 있는데, 그 회사의 그 물건을 그 사람을 통해서 쓴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 성도님이 성경 이름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느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만나 보려고 한다고 이제 간호사님하고 얘기하면 "어, 누구시냐고." 자기소개를 하면 이제 본인 이름이 성경 이름이니까 "어, 교회 다니세요?" "네, 저 교회 다닙니다. 간호사님도 교회 다니세요?" "네, 저도 다닙니다. 저 어느 교회 다니는데 어느 교회 다니세요?" "저는 1516교회 다닙니다." "아, 이상준 목사님이 개척하셨다는 그 교회요?" "네, 제가 목사님과 상당히 친합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일사천리로 풀린대요. 병원장님까지 바로. 그래서 병원장님께 저한테 사인 받은 책 가져다가 선물하고 나면 사업이 너무 잘 된다고. 제가 쓰임받아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회사에서도 대표님과 특수 관계인 사람들은 말을 안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거죠.
이 교회에서 아이들도 자기 아빠가 목사님이면 애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우리 아빠야." 뭐 이런 게 있더라고요. 물론 그것도 좀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여러분, 평상시에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다니면서 얼마나 호가호위 했겠어요? 이 호가호위라는 게 호랑이 앞에서 여우가 동물들의 인사 다 받는다는 거잖아요.
자,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체포가 되고 사형 선고를 받는 자리에 서게 되니까 갑자기 "난 그 사람을 모른다." 이렇게 손절한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자랑스러워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인생이 건짐을 받았던 베드로가 한 순간에 손절한 거예요.
제가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났어요. 30년 40년 전만 해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름 어우, 저 사람 신앙심이 돈독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근데 오늘날에는 교회 다닌다고 하면 "왜 다녀, 그걸 왜 믿어?"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진 거예요.
30년 전만 해도 서로 신학교 가려고 했고 목회자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학교들이 문 닫는 학교들이 많아졌고, 누구도 욕 먹는 목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시대가 됐어요. 전에 어떤 청년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렵다던 방송국 PD 시험에 합격을 해서 이 메이저 방송국의 PD가 된 거예요. 너무나 기뻤고. 또 더 기뻤던 것은, 본인이 방송인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 PD가 있었는데, 제가 공인이어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정말 온 국민에게 존경받는 방송인이거든요.
뭔가를 눈치챘는지 "너 교회 다녀? 너 기독교 믿어?" 깜짝 놀라 갖고 이 청년이 아무 말을 못 하고 있으니까, "너 그런 정신없는 짓 하지 마. 알았지?" 이 한 마디에. 여러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자기가 이제 신앙인이라고 얘기를 못 하겠는 거예요.
팬데믹 기간에 이런 성도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초반에는 이제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정말 온 국민이 조심했잖아요. 내가 돌아다니다가 이제 감염이 되면 감염자가 될 뿐만 아니라 전파자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 마스크 쓰고 다니고 공공장소 안 나가려고 하고 집에 콕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누가 감염됐다 그러면 막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도대체 그 사람은 제정신이냐." 그 감염 문제에 대해서 모두가 공포감이 있었다고요.
그때 직장 상사가 "너 교회 다녀? 너 크리스천이야?" 뭔가를 이제 눈치를 채고 물어본 것 같은데, 순간 패닉이 오면서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아니요, 제가 교회 다니지 않습니다. 저희 아내가 다니는 거죠. 저는 아닙니다. 전 크리스천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부인한 거예요. "난 그리스도인 아니다. 아내가 열심히 다니는 거고 난 가끔 뭐 따라다니는 수준이지, 나는 진짜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고." 부인하고 또 부인한 거예요.
그 당시 이제 팬데믹 기간에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교회 가지 말라고 한 회사들도 많았어요. 여러분, 직장에서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손해를 많이 봐야 되는 거예요. 다른 직원이 뭐 열심히 협조를 안 해 줄 때 쓴소리하기도 부담스럽고, 그냥 뭐 윗사람 얘기하면 무조건 순종하고 잘해 줘야 되고. 손해 볼 일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식사 때도 식사 기도 하지 않고 먼산 한번 보고 밥 먹는 분들이 많고, 성경책, 큐티책도 꺼내 놓지 못하고. "난 그 사람을 모른다." "전 정말 모릅니다." 이거 온몸으로 말하고 사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자, 그러나 정말 우리가 예수님 모른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 이름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그 이름을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이 땅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까 말까를 고민하지만, 그 나라 앞에 가서, 천성문 앞에 가서는 그분이 나를 영접해 주실까 말까를 결정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조합한 말씀이 있죠. 마태복음 10장 32-33절 읽어 볼까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아멘.
"난 그분 모릅니다. 난 저분 모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심판날에 주님께서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난 저도, 이 사람 모릅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신다는 건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73절에서 75절 마지막 부분 읽어 볼까요.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아멘.
이게 세 번째. 세라는 것은 완전수잖아요. 그래서 무의식 중에, 의도하지 않게 이런 핑계를 댈 수 없는 거예요. 너무나 의도적으로 부인을 한 거죠. 여러분,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서 영혼과 맞교환을 하시겠습니까? 이 베드로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에게도 인생에서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질지, 아직 몇 번의 기회가 남았는지, 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 아시는 거죠.
앞으로 여러분은 그분을 안다고 말하며 살겠는가, 난 그분 모른다고 말하며 살겠는가. "인생의 기회가 몇 번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생각났어요. 근데 두 분만 말씀드리면.
예전에 한 성도가 아버님이 큰 수술을 받게 되셨는데 기도를 해 달라. 그런데 아버지가 상당히 이제 연로하셔서 이 수술을 받고 나서 과연 얼마나 사실까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이분이 지방에 있었던 아버님을 모시고 이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이 수술 전에 이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이분이 이제 상당히 고령이시고, 교회 가자고 그렇게 전도를 해도 꿈쩍도 않고 반응도 없으셨던 분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 이제 그런 상황에서 목사님한테 와 달라고 하면 목사라고 뭐 무슨 큰 달리 방법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목사 안 만나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제가 이제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아버님이 정말 반응이 없으시더라고요. 반응이 없으신데 예배를 드리고 나서 복음을 전하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예수님 믿으시라"고 이렇게 권면을 했어요. 근데 놀랍게도 아버님이, 이 수술 전날입니다. "사실 제가 어릴 적에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셨대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저 예수님 압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딸에게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거예요. 얘기를 하면 이제 본인이 신앙생활 했다는 게 들통나니까 이거 얘기를 안 하고 사셨어요. 자기 맘대로 사셨어요. 평생 감춰졌던 그 고백을 하시고 나서, 그날 영접 기도 하시고 수술도 잘 받으시고 건강하게 잘 회복하셨어요.
예전에 그 제가 청년부 할 때 얘기도 몇 번 했는데, 순장님이 다급하게 연락이 와서 "어머님이 갑자기 뇌혈관이 터졌는데 중환자실에 들어가셨고 의사가 몇 주 안 남았다"이렇게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달려가 보니까 딸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이 중환자실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가 혼수 상태였거든요.
어머니가 젊은 시절 교회를 다니셨는데, 그래서 어머니랑 교회를 함께 다녔던 시절을 기억을 하는데, 교회에 이제 상처를 받으신 게 있어서 거의 30년 가까이 교회를 안 다니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혼수 상태죠. 의식도 없는데 엄마의 신앙을 확인할 길은 없고, 어 엄마가 천국 갈 수 있는 신앙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그 순장에게 물어봤어요. "어머님이 젊으신 시절에 좋아하셨던 찬양이 있냐"고. 그래서 사람이 마지막까지 청력이 남아 있으니까 귀에 대고 찬송가를 불러드렸어요.
근데 놀랍게도, 한 두 절쯤 부르고 있는데 이 혼수 상태인 분이 얼굴이 벌게지면서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눈도 뜨지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사람이.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는 거잖아요. 저도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영혼이 마음의 상처로 교회를 30년 가까이 떠나 있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거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이 영혼의 고백을 주님이 받아 주시고 천성문 앞에서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 주 뒤에 부르심을 받으셨어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도 과연 몇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질까. 이건 모르는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교회 다니시나요? 기독교인인가요?" 이렇게 물어볼 때, "어, 전 교회 잘 몰라요. 저는 성경 잘 몰라요." 뭐 진짜 잘 몰라서 그렇게 얘기하실 수는 있겠지만, "저는 예수님을 잘 몰라요." 이렇게 얘기한다면, 이거는 겸손이 아니고요, 여러분의 구원의 문제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천성문 앞에서 그분도 나를 모른다고 하신다 하셨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뭐 예수님의 신비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어도, 예수님께서 창조의 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 주신 나의 창조주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죄짐을 지고 사느라 쓰러져 버린 내 영혼을 죄악에서 건져내신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나의 시작이고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완성자이시잖아요.
예수님이 마지막 날 백보좌 심판 때에 날 알아보시고 "아버지, 이 아들은, 이 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인정을 해 주시면 우리를 천국으로 맞이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 얹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는 예수님, 예수님 그 이름을 압니다. 그 이름을 압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몇 가지 실천 사항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결정하시면 좋겠는데, 요즘은 대문에 교회 스티커를 안 붙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교회 스티커를 달면, 왜 층간 소음 문제 났을 때 가서 성질 못 내니까, 주차장에서 불편하게 주차한 사람한테 성질을 못 내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대문에 교회 스티커를 달면 경비실 아저씨에게, 미화 일을 하시는 어르신들께 잘해야 되거든요. 교회 스티커 다세요.
자동차에, 사무실 책상에, 내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 분들, 어렵겠지만 여러분, 고민해 보세요. 기도하고 결정하세요. 만약에 결혼한 사람이 일부러 반지를 빼고 결혼 안 한 것처럼 숨기고 살면, 그게 잘하는 거예요, 잘못하는 거예요? 잘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알면서 예수님 모른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지 않잖아요. 예수님 모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모른 척하고 산다면, 나도 베드로처럼 어떻게든 그 추위를 견뎌내려고, 그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불쌍하게 화로 앞에서 불을 쬐며 앉아 있지만, 사람들이 말을 걸 때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나는 저분을 모른다." 여러분, 우리 이렇게 부정하며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내가 주님을 너무나 많이 부인했고 부정했고 내가 주님을 모르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 행동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의 창조주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영원한 완성자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나의 마음의 보좌에 모시고, 나의 입술로 고백하고, 나의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 고백이 넘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영적인 결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위축되지 말지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며 우리가 천성 앞에서 어떻게 주님께 인정받겠습니까. 주님,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은사, 하나님 주시는 영적인 선물, 능력 다 좋아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정말 좋은 분입니다." 이 얘기를 증거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고 주시는 선물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냥 예수의 증인으로 살기로 결정하세요. 상황을 모면하면서 적당하게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살려고 하지 마시고, 마음에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정말 "주님, 내가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입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고백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결단이 있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손은 가슴에 얹고 한 손은 하늘을 향하여 들고,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삶을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2026.03.30(월) | 새벽기도 |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는가? (마 26:57-68)
설교 정보
- 제목: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는가?
- 본문: 마태복음 26:57–68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날짜: 2025년 3월 30일 (고난주간 새벽기도)
[ 설교 요약 ]
1. 예수님은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잡혀 주셨다
검과 몽치를 든 무리가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체포해 끌고 갔지만,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끌려가신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께 구하면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잡혀 주셨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주님은 지켜보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2.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 — 적정거리의 신앙
베드로는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멀찍이" 따라갔다. 진정한 제자도는 자기 부인과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마 16:24), 베드로는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적정거리만 유지했다. 오늘 우리도 기독교인이라 말하면서 성경과, 예배와, 주님과 적정거리를 두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3. 현대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서 거부하는 네 가지 이유
① 과학적·합리적이지 않은 성경이 싫다
동정녀 탄생, 물 위를 걸으심, 부활 — 과학주의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난센스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갈망은 과학문명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갈망을 채우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② 내 인생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기 싫다
극단적 개인주의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도 그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상대적 존재로서 반드시 누군가의 통치 아래 있게 되어 있다.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영이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
③ 배타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가 싫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오직 예수만 유일한 구원자"라는 주장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상대성과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없다. 지켜져야 하는 관계의 순수성을 위한 배타성은 좋은 배타성이다.
④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기독교가 싫다
죄인임을 인정하는 순간 구원자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구원자를 부정하려면 먼저 죄부터 부정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죄를 정죄해서 없던 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스스로 죄를 고발한다. 평생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무게는 세상 어떤 짐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혼을 짓누른다.
4. 예수님께 씌워진 두 가지 죄명
성전 모독죄 — 정작 성전을 모독해온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오늘 우리도 "한국 교회는 안 돼"라며 교회를 포기하는 것 자체가 성전 모독이다. 예수님은 죽음에서도 다시 일어나셨고, 그분이 원하시면 교회 공동체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
신성모독죄 —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기꾼(Liar), 정신병자(Lunatic), 아니면 진짜 주님(Lord).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이 지금은 우리 눈높이로 친절하게 찾아오셨다.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곧 신성모독이다.
5. 결론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뒤에 숨어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지, 주님을 겸손히 따르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세상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보내지 말라.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풍덩 뛰어들어 성경과 밀착하여 살아가는 삶이 되길 권면한다.
[ 전문 스크립트 ]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6장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나누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아멘. 담임 목사님 나오셔서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해 주시겠습니다.
할렐루야. 고난 주간 새벽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QR 코드로 새벽 기도 책자 두 가지 종류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핸드폰으로 보실 수도 있고 태블릿으로 보실 수도 있으니 다운받으셔서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로비의 십자가 의식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메모지에 본인의 죄 문제, 또 내려놓기를 원하는 삶의 문제들을 기록하고 십자가에 걸어두고 기도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한 주간 고난 주간 새벽 기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덮여지고 우리가 새롭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새벽 기도 주제를 함께 읽어 볼까요.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할 때,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도 함께 서는 시간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거절하여 십자가에 내준 것은 단지 2,000년 전 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에서 거절하고 멀리하고 거부했던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 십자가의 놀라운 용서와 치유와 회복이 임한다고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5일 동안 함께 읽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같이 읽어 볼까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아멘.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부활이 오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나서 공회에서 신문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가 묵상할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묵상하겠습니다.
57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갔다는 말씀입니다.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체포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끌고 오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을 그들이 잡은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잡혀 주신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했는데,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신 것인가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 주신 것인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우리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끌고 가고 싶을 때가 사실 많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이게 내 마음대로 되네'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잠시 내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계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주도권이 없어서, 능력이 없으셔서 끌려가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떨어져서 내 마음대로 가고자 할 때, 주님은 지켜보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제자들이 칼을 사용하자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원해서 잡혀 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그들에게 잡혀 주셨으니, 사람들이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을 끌고 가서 산헤드린 재판정에 세운 것입니다.
이어지는 장면, 5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가는데 따라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드로의 어부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쫓아다닐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 그거 하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 그러셨죠.
마태복음 4장 19절 같이 읽어볼까요.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어서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중간에 제자들에게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같이 읽어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 번째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 두 번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신 겁니다. 자기 부인, 그리고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지금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과연 그것이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 부인도 아니고, 사명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표현했냐면, "주님을 따르기는 하는데 멀찍이서, 적정거리를 두고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저 주님을 따릅니다. 저 예배도 드립니다. 저 주님을 따릅니다. 저 어디를 가나 물어보면 저는 기독교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적정거리란 자기 부인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따라갈 수 있는 그 적정거리를 절대 좁히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님을 믿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교회에 다니지 않고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종교가 뭡니까?"라고 물으면 "기독교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이른바 'Unchurched Christian'이 미국 전체 그리스도인 중에 45%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이것을 굉장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개인화인가요, 신앙이 내면화된 것인가요, 아니면 자신만이 생각하는 신앙인가요? 나는 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아니, 너 그거 신앙 아니다. 넌 그거 나를 따르는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잡혀가시는 주님을 따라갈 때, 그것은 주님을 온전히 팔로잉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59절 이어지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대제사장이 주재하고 70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석하는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인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를 죽여야 될 이유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을 죽이기 마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들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에서 거부할 이유가 뭘까요?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왜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꾸 부정하고 그들의 삶에서 지워버리려고 할까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성경이 싫기 때문입니다.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 과학주의의 시대입니다. 합리적인 이성에 맞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동정녀에게서 나셨다, 물 위를 걸으셨다, 사망에서 부활하셨다 — 그러니까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싫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과학주의 시대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난센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난센스였습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다니, 3차원의 세계에 살면서 초자연적인 주장을 하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합리적인 시대에 왜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고 묵상해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은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과학문명으로 다 만족이 되고 흡족하다면, 왜 우리 영혼의 목마름이 있을까요?
위로부터 영원한 분이 내려 주시는 흔들림 없는 절대적 평안, 영원한 구원 — 왜 인간의 영혼은 그런 것을 갈망하는 것일까요? 이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현대인이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내 인생의 주인 자리를 내어 주기 싫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지, 하나님에게조차 예수님에게조차 그 자리를 내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인간의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팽창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별도 자기가 정한다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서구권에서는 미성년자가 부모 동의 없이도 성전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학교에서도 세상에서 "너 마음대로 살아라, 네가 내키는 대로 살아라, 네가 너 인생의 주인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적 존재인 인간이 누군가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살 방법이 있을까요? 상대적 존재인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의 거버넌스의 우산 아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 학생일 때는 학교, 직장인일 때는 기업, 조직의 장이더라도 그 사람은 국가라는 우산 아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통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세속 문명에 종속되기도 하고, 세속 사상에 매여서 살기도 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면 어둠의 영에게 지배당하기도 합니다. 상대적인 존재가 아무리 고집을 부린다 한들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순 없습니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다"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그것은 무규범 무정부 상태로 전락하겠다는 소리입니다. 결국에는 누군가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사실은 누가 내 인생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컨트롤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서 거부하는 이유는, 배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가 싫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은데 왜 기독교만 진리라고 하느냐,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너무 배타적이다, 하나님만 참신이고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다,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니까 너무 갑갑하고 답답하다, 시대 정신에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나는 상대성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5절 상반절 같이 읽어볼까요.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그래서 다른 신들을 경배하면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상대적 존재니까 내 아래에만 있어"라고만 하시나요?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친히 돌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만물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재우시고 만민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배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나쁜 배타성이 있고 좋은 배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반 친구들이 있는데 특정 학생만 왕따를 시키면 그건 나쁜 배타성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남편이 아내에게 "우리 부부 사이에 제3자가 개입할 수 없다, 난 그거 용납 못 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배타성일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누군가 저희 아들들에게 "왜 너희 아빠한테만 아빠라고 하냐, 윗집 아저씨도 아빠고 옆집 아저씨도 아빠니까 다 아빠라고 불러"라고 한다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지켜져야 하는 관계의 순수성을 위해 지켜져야 하는 배타성이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서 거부하는 이유는, 내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기독교가 싫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길을 가다가 중고생들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면 "학생들이 담배 피면 안 되지"라고 하면 미안해하면서 갔습니다. 요즘은 그랬다가는 큰일 납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어디 나한테 죄인이라고 함부로 나를 정죄하냐"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될 구원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자를 부정하려면 일단 죄부터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싹을 자르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구원자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의사가 "이 사람이 지금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당신 병 없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 병이 없어지나요? 요즘 복음을 전해 보면 "내가 죄인입니다"를 빨리 인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 이대로 살다 죽겠다, 내가 꼭 지옥 가야 되면 지옥 가겠다"라고 무섭게 얘기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기독교가 죄를 정죄하기 때문에 없던 죄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이 스스로 죄를 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친구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향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오랫동안 부모님께 전화를 못 드리다가 오랜만에 전화해서 통화하다가 처음엔 나이스하게 시작했는데 짜증을 내고 전화를 끊고 나서 "아, 나는 정말 불효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러분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고발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해결하지 못하고 쌓아놓는 이 죄의 무게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세상 어떤 짐과도 비교할 수 없이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고통입니다. 이것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자, 제가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될 이유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그러면 우리에겐 해당이 안 될까요?
다시 첫 번째부터 보면, 성경이 싫다 — 그리스도인들이면서 성경과 적정거리를 유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너무 알면 지켜야 될 것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 자리에 앉으시면 내가 다 내려놓아야 됩니다.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따라오는데 적정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나 교회 다니지만, 세상과 적당하게 걸쳐서 살아야지." 배타적 진리로 "오직 주님만 사랑한다"고 하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신앙생활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죄 문제를 훨씬 잘 고백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면 "내가 지금 신앙 몇 년 차인데 나한테 죄를 얘기하는 거냐"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놀랍다"는 것을 믿습니다. 날마다 생각으로, 마음으로, 입술로, 행동으로 이렇게 죄를 많이 짓고 있구나 —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면 이 고백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네 가지는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 공식적인 사형 판결을 내리면서 씌운 두 가지 죄명을 살펴봅니다. 60절, 61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 첫 번째, 성전 모독죄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다니. 그러나 정작 성전을 모독해온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자신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성전에서 물건을 팔면서 성전 비즈니스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종교에 집착하도록 거짓 종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멀리하는 이유가 있지 않나요? 예수님과 적정거리를 두는 이유 중 하나가, "이 교회 생활에 너무 깊이 들어가면 피곤해진다, 성전을 더럽히는 저런 사람들 때문에 나는 교회 못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도저히 못 나가겠다며 안 나가는 성도가 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전을 멀리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교회를 더럽히신 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더럽힌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회개해야 될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멀리하다가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예수님과 적정거리를 계속 유지하겠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신 자신의 몸을 가리켜 "내가 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한국 교회가 과연 다시 재건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망에서도 일어나신 그분이 교회 공동체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교회는 안 돼"라며 한국 교회에 대한 마음에 포기를 품는데, 사실은 그것이 성전 모독죄인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이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63절에서 6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린 두 번째 이유가 무엇이었죠? 신성모독죄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예스/노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다"고 답변을 하셨더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면서 "신성모독이다, 사형에 해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질문은 해 놓고 사실은 답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을 하셨는데, 이 주장에 대해서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세 가지 L로 설명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니, 만약에 예수님이 제정신이라면 종교 사기꾼(Liar)인 것이고,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과대망상 정신병자(Lunatic)이고, 그러나 예수님이 제정신이고 거짓말을 하시는 게 아니라면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Lord),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런데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면, 그분을 문밖에 세워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매일같이 외면하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너무나 많이 만났고 너무나 많이 익숙하다 보니까, 어느새 겸비하게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가 스스로 격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내가 다시 영광 중에 올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거다"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주로,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주로 오실 분이 지금은 우리의 눈높이로 우리에게 친절하게 평안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주님께 우리가 날마다 반응하며,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 통독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성이신 예수님에 대한 경외감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구나,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많이 사라졌구나. 교회를 다니는데,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주인이 명령하는 것에 순종하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데도 여전히 세속과 향락과 분노와 거짓의 문제와 버무려져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며 사는가? 오늘날 교회가 다시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성전 모독죄인 것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그것이 신성모독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66절에서 68절 마지막 부분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하니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면서 예수님을 치고 때리면서 "누군지 맞혀봐"라고 놀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보면서 '이게 우리의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믿는다고, 예수님 믿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적정거리를 두면서 "나는 굉장히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저는 교회와 거리를 두고 살겠습니다, 예배와 거리를 두고 살겠습니다, 성경과 거리를 두고 살겠습니다, 주님과 거리를 두고 살겠습니다, 주님이 모르시겠지"라고 하고 있는 나를 모르실까요? 우리를 모르실 수가 없습니다.
세상 뒤에 숨어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겸손히 따르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거부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우리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권면합니다. 성경과 밀착해서 사십시오. 주님을 대면해서 친밀하게 만나는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십시오. 누가 전해 주는 예수님 말고, 내가 직접 만나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내가 성경을 너무 자세히 알면 그다음에 내 인생이 매이는 것이 아닌가,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하면 그러면 내가 매이는 것이 아닌가, 내 인생 끌고 가고 싶은데 그래서 적정거리 유지하면서 계속 가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 해 보세요. "단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이 기회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한 번뿐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세상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보내지 마십시오.
요즘 젊은이들에게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결국에는 헌신입니다. 어제도 한 커플, 이제 주례할 커플을 상담하면서 형제에게 "잘했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쫓아다닐 때부터, 처음 교제할 때부터 결혼 전제로 교제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연애만 하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헌신할 생각이 없는 시대입니다. 헌신하면 매이잖아요. 평생 구속당하잖아요. 결혼해 보셨으니 아시잖아요.
그런데 사랑이라는 헌신의 상태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과연 인생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성경과 거리를 두고, 교회와 거리를 두고, 예배와 거리를 두고 있으면, 멀리서 보이는 주님을 내가 주님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풍덩 뛰어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첫 번째 기도할 것은, 주님, 교회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우리가 먼저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를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주께서 원하시면 한국 교회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이 믿음과 꿈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얼마나 놀라우신 창조주이시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분인지, 우리가 주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예수님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매 순간 성령의 감동하심을 주실 때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면 놀라운 주님의 승리가 임하고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이 시대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거짓과 세속으로 인하여 무너진 한국 교회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가 먼저 교회를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집에 나와 엎드려 예배할 때 주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우리를 씻어 주셔서, 주님 우리 안에 참된 평안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성령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6.03.29(주) | 주일설교 | 당신의 달란트로 섬기라! (마 25:14-30)
당신의 달란트로 섬기라!
본문: 마태복음 25장 14-30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날짜: 2026년 3월 29일
[ 설교 요약 ]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해 최선을 다해 섬기는 삶을 촉구한다.
1.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부르심 (14-15절)
달란트는 헬라어로 '탤런트', 곧 재능이다. 재능의 뿌리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디나미스) — 성령이 임하시면 다양한 지능과 역할이 펼쳐진다. 둘째,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 — 이사야 11장 2절처럼 성령은 재능의 영이시다. 재능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신 선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재능은 그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이유, 곧 부르심이다.
2. 하나님은 각자에게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주셨다 (15절)
한 달란트는 금 34kg, 현 시세로 약 73억 원이다. 두 달란트 146억, 다섯 달란트 365억. '적게 받았다'고 비교하며 위축될 분량이 아니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역사를 바꿨고, 요셉은 종살이·옥살이의 성실함이 쌓여 애굽의 총리가 됐다. 하나님이 주신 한 가지 재능을 끝까지 팠을 때 장인·명인이 된다. 자녀를 성적표로 비교하지 말고 재능을 발견해 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3. 재능은 쓰라고 주신 것이다 (16-21절)
"장사하다"의 원어적 의미는 '행동하다'이다. 재능을 쓰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유익하게 하며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이윤을 남긴 결과가 아니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적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① 더 많은 일을 맡기고 ② 주인의 기쁨, 즉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기쁨에 참여하게 하신다.
4. 땅에 묻는 자의 두 가지 문제 (24-26절)
첫째, 주인(하나님)에 대한 오해 —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 둘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 —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길가·돌밭·가시밭에 뿌려도 좋은 밭의 30·60·100배 결실이 전체 손익을 압도한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부흥한다.
결론 — 재능을 지금 하나님 앞에 구별해서 드리는 것이 인생에 예상할 수 없는 기적의 출발점이다. 이원진 목사(태권도 전공 → 예배 인도자), 한 성도(성경 초보 → 말씀 가르치는 사역자), 세계적 예배 인도자가 된 자매의 사례처럼, 주께서 달란트를 드리고 헌신한 사람을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
[ 전문 스크립트 ]
오늘 말씀의 제목은, 당신의 달란트로 섬기라. 한번 제목 읽어 볼까요. 당신의 달란트로 섬기라.
자, 본문의 14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자,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뭘 맡겼다고요? 소유를 맡겼어요. 자, 주인이 적은 돈을 재미삼아 아니면 투자삼아 이렇게 맡긴 게 아닙니다. 자신의 귀중한 소유를 신뢰함으로 그들에게 사명으로 맡겨 준 것이었어요.
그럼 얼마씩 줬는가. 15절 읽어 보겠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둘, 하나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재능대로 나눠줬다." 그럼 재능대로라는 말의 뜻이 뭘까.
첫 번째, 이 재능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뭐를 받아요?" 권능. 이 단어가 디나미스이거든요. 헬라어로 디나미스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엄청난 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디나미스를 받으면 전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다양한 역할을 하게 돼 있다라는 거예요.
자, 그래서 두 번째, "각기 재능대로"라고 돼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11장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아멘.
성령님께서 메시아에게 임하신다는 이야기인데, 모략과 재능의 영이시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영적인 지혜와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온갖 실제적인 재능도 그분이 허락하셔서 이것을 펼치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재능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로부터 선물로 주시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달란트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영어로 탤런트잖아요. 이게 재능이란 뜻이죠. 그래서 이 재능은 인간적으로 개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선물을 발견하는 개념이 강한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두 아들을 보면서, 큰 아들은 선생님이 될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첫째는 뭐 부모가 기준을 얘기해 준 것도 있지만 스스로 자기 규율이 굉장히 강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동생이나 어린아이들한테는 또 굉장히 관대해요. 그 애들을 데리고 노는 거 좋아하고. 그러더니 선생님이 됐어요.
자, 둘째는 아무리 기준을 얘기해도 매사에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자유로운 거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호불호가 명확하고. 그리고 공부도 해야겠고 운동도 해야겠고 놀기도 해야겠고 친구도 만나야겠고, 하여튼 다방면의 관심사가 많아요. 지금 뭐 공대생인데 여전히 다방면의 관심사가 많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그 열정을 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여러분, 자녀들을 키울 때 우리가 이제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면 "자녀에게 없는 재능을 탑재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원으로 돌리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학원만 몇십 강의를 듣게 하는 초등학생들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없는 재능을 아이들에게 후천적으로 개발을 시켜서 채워 주는 게 맞을까요? 그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 수준으로 하시는 게 좋아요.
오히려 우리 부모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뭐냐면 자녀들의 재능을 발견해 주는 거예요. "우리 아들은, 우리 딸은 이걸 잘하네. 이걸 할 때 굉장히 행복하네." 여러분, 재능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발견해 주는 게 왜 중요하냐면, 아이의 미래에 대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재능은 하나님이 왜 그 아이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에 대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세상이 선호하는 직장이나 전공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재능은 이 땅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실 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부르심을 따라갈 때 인생은 가장 행복하고 충만하고 감격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부르심을 따라 살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런데 오늘 이 달란트 비유에서 제일 많이 질문하는 게, 왜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재능을 주셨는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 그래도 난 많이 받았으니까 좀 할 만하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래도 나는 평균치는 받았으니까 그럭저럭 할 만한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너무 위축되지 않겠느냐. "나는 저들에 비하면 재능에 있어서 너무 초라하다" 이렇게 느낄 수 있지 않냐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에 능력 있는 사람들을 아무리 노력을 해 본들 능력 있는 사람을 쫓아갈 수 없다 그러고 노력조차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달란트 비유가 하나님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걸까요? 그래서 이 비유에 크게 두 가지 레슨을 나눠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엄청난 잠재력을 주셨다는 거, 이걸 얘기해 주시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번 주에 달란트가 금 34kg인데 현 시세가 얼마지, 매일 체크해 봤어요. 현 시세가 어제부로 72억에서 73억이 됐어요. 한 달란트면 73억. 두 달란트면 146억. 다섯 달란트면 365억.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어우 저 사람에 비해서 나는 조금밖에 없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잠재력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뜻인가.
여러분, 우리가 미세한 한 분야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근데 그 한 가지만 파도 장인이 되고 명인이 될 수 있어요. 제가 예전에 어떤 남양주의 식당에 갔는데 그 돼지갈비집이었는데 갈비 명인이더라고요. 명인 패가 있더라고요. "와, 이 분야도 명인 패가 있네" 그렇게 놀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제 대한민국의 명장·명인 리스트 찾아보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생활 문화 분야에서 공예, 인장, 화예, 플라워, 미용 이런 분야의 명인·명장들이 있고요. 또 산업 분야에서는 전기, 기계, 설비, 금융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요리 분야에서 제과, 제빵, 장류, 고추장 된장 이렇게 장 담그는 것도 장인이 있어요. 한식, 일식, 양식, 각 분야마다. 또 의료 분야에서도 암 수술의 명의가 있고, 이식 수술의 명의가 있고, 척추 수술의 명의가 있고. 그뿐이 아닙니다. 국악 연주자, 국악기를 만드는 악기 제작자의 무형문화재 명인들이 있죠. 저희 교회도 한 분 계세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람들, 학창 시절에 전 과목 다 공부 잘한 사람들이에요? 아니요. 한 분야를 판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나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확신이 없을까요. 잠언 22장 29절 말씀에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아멘.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 한 가지만 열심히 파고 파도, 하나님이 그를 존귀케 하실 것이다. 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했기 때문에. 할렐루야.
그 예시를 들어보면, 다윗은 물맷돌을 던지는 연습만 엄청난 거잖아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90m 밖에서 무빙 타깃에 머리카락을 맞추는 거예요. 발레아레스 군도의 사람들은 사거리가 240m였어요. 움직이는 타깃에서 머리카락을 맞추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겠습니까. 그 하나로 골리앗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수를 쓰러뜨리고 당대 중근동의 역사를 바꿔 놓는 장수가 된 겁니다. 한 분야였어요.
요셉은 애굽에서 종살이 옥살이 하면서 온갖 비천한 일을 했잖아요. "내가 이런 일을 성실하게 할 필요가 있나?"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에 대한 안목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황 분석 능력, 문제 해결 능력, 기획력, HR 인사 관리 능력. 여러분, 나중에 바로에게 프레젠테이션 할 때 보세요.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지. 이 소통의 능력까지. 당대 최고의 제국인 애굽의 총리가 되잖아요.
현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요. 될 만한 일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면, 이미 나 자신이 될 만한 인재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자기 확신이 없어요. 그리고는 행복의 파랑새만 쫓아다니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지으신 나를 긍정하고 내게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1만 시간의 법칙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거기에 인생을 걸고 쏟아보면 재능이 폭발하는 지점에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서 막연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또 자녀들을 성적표로 비교하지 마세요. 재능의 종류, 재능의 분량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콜링인 줄로 믿습니다. 이거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재능은 돈벌이 하라고 주신 게 아니구나. 재능은 경쟁력 갖추라고 주신 게 아니구나. 이 재능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라고 주신 것이구나." 아멘. 이걸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 3부예배 찬양 인도하는 이원진 목사님. 원래는 호리호리했어요. 믿어 주세요. 근데 어린 시절에 음악을 하고 싶었대요. 그런데 부모님이 "야, 둘 다 음악을 하면, 누님이 피아니스트거든요, 둘 다 음악을 하면 우리 집 보고 오니까, 넌 운동도 잘하니까 그냥 운동으로 가라." 그래서 그냥 운동으로 갔는데, 경희대 태권도학과를 가셨거든요. 그 예전에 별명이 나르는 태권부였어요.
그런데 그 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잖아요. 이걸 묻어둘 수 없는 거예요. 이건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때로는 뭐 외면하고 안 하려고 하기도 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하시어 결국엔 기름 부으심 있는 예배 인도자가 되고 작곡가가 됐잖아요. 음악 공부를 안 했는데 작곡을 하잖아요. 본인도 신기해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살아 계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사는 거예요. 경쟁하고 비교하며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 부르심을 완성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왜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는가. 성경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의 유익이 되도록 이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거대한 하모니를 이루는 여러 악기들과 같고,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한 피스 한 피스의 조각과 같은 거예요.
에베소서 4장 11-12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아멘.
여러분, 왜 은사와 재능을 주시는가. 왜 그 사람에게 직분을 주시는가. 그것은 봉사를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섬길 때 세상에서 비교하고 경쟁하는 방식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가끔 예전에 한때 엄청 유행했는데 1,000피스짜리 퍼즐 맞추는 분들 보면 존경스럽더라고요. 이거를 완성하는 엄청난 목표 의식과 집중력이 있는 거잖아요. 자, 그런데 그 만드는 사람도 놀랍지만 저는 진짜 놀라운 게, 어느 날 보니까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0피스 중에 단 한 피스라도 똑같은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게 저는 너무 놀랍더라고요. 모든 피스가 유니크한 거예요. 각자 자기의 자리가 있고 자기의 역할이 있는 겁니다.
내가 남의 자리가 부럽다고 그 자리에 가 있으면 완성이 돼요, 안 돼요? 나도 완성이 안 되고 전체도 완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데 이게 맞나 그러고 껴놨는데, 나중에는 결국에는 자기 자리로 와야만 자신도 완성이 되고 전체도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그림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비교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팀플레이를 하는 거예요. 저희가 교회 시작을 하면서 순 예배를 드려야겠는데 누가 순장을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서, "그러면 지역별로 묶어 드릴 테니까 돌아가면서 순 예배 인도를 하시라." 그렇게 시작을 한 순 예배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공동 책임 의식을 갖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저희 교회의 소그룹을, 기러기들의 V자 편대를 따서, 편대 포메이션 스몰 그룹, 소그룹이다 이렇게 얘기를 한 겁니다. 이름이 괜찮지 않나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기러기들이 날아갈 때 그냥 우리가 잠시 볼 때는 한 마리가 끝까지 가는 거 같지만, 전체 여정을 탑 리더를 계속 바꿉니다. 선두를 계속 바꿔요. 왜냐면 선두가 맞바람이 불기 때문에 가장 지치게 돼 있거든요. 뒤로 갈수록 불력이 생겨가고 뒤로 갈수록 그냥 편하게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선두 자리를 계속 바꾸면서 모두가 선두 역할을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 제가 나중에 1년여 지나서 순장을 세우게 돼서 물어봤어요. 순장들에게만 물어본 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물어봤는데, 그러시는 거예요. "오, 순장 혼자 인도하는 거 원하지 않는다. 우린 같이 하겠다." 여러분, 함께하는 게 얼마나 충만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체험하게 된 거죠.
또한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는 이 공간, 이 성전 이름을 뭐라고 지었죠? 다윗의 장막. 이 다윗의 장막에서의 예배를 섬기는 조직이 또 탁월했습니다. 다윗이 찬양도 많이 작사 작곡하고 악기들도 만들었지만, 다윗이 예배 조직을 탁월하게 세웠어요.
역대상 23장에서 26장, 무려 네 장에 걸쳐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전에는 성소에서 봉사할 수 있는 레위인의 나이가 25세였어요. 다윗 때 몇 세로 나이를 낮췄을까요? 20세로 낮췄죠. 그러니까 봉사자들의 인원을 엄청 확보를 한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들을 24차를 만들었어요. 여러분, 1년에 24차다, 그러면 한 조가 며칠 일을 하는 거예요? 15일. 한 달에 절반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 두 주 섬기니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사장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집중도 있게 했겠어요.
그리고 찬양 팀은 세 명의 악장이 있었고, 그 세 명의 악장을 돕는 24명의 리더가 있었고, 24명의 리더를 돕는 288명의 보컬이 있었고, 그 288명의 보컬을 돕는 4,000명의 찬양대가 있었어요. 엄청난 조직이죠. 근데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희 같은 안내로 서는 성전 문지기가 몇 명이었을까요? 성전 문지기가 4,000명. 안내로 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서 대민 사역, 상담도 하고 재판도 하고, 이런 사역 하는, 저희 같으면 뭐 상담, 아이들 선생님, 행정 사역도 하는 그 레위인들이 2,700명.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예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냥 예배 은혜만 누리는 게 아니라 예배 사역자가 되는 꿈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이 사역의 자리에서 보면, 내가 은혜를 누리는 것도 감격이지만, 내가 마련한 이 은혜의 자리에서 이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나도 좋으신 우리 주님을, 이 성도가 은혜 가운데 누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런 축복의 통로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중등부 전도사를 할 때, 모든 중등부 중학생들의 은사 사역 팀을 예배에 다 쏟아붓게 한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교회는 예배가 거의 8, 90%고 예배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모든 우리의 은사와 재능을 예배 가운데 사용하자. 찬양 팀, 싱어 팀, 챔버 팀, 그 당시 저희 중등부에 챔버 팀만 거의 30명이었어요. 아이들이 그때만 해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팀 중에서 위앤 셋업 팀. 이 무슨 팀일까요? 매 주일 와서 저희 예배 장소에 의자를 400개씩 깔아야 됐어요. 근데 이거 어른들 옮기려면 다들 낑낑거리면서 막 여기저기 아프잖아요. 중학생 30명을 뽑아서 똑같은 옷을 딱 입혀주고. 뒤에 위앤 셋업 애들이 날아다녀요. 중학생들은 날아다니거든요. 그래서 이 친구들이 어느 공간에 들어가자면 순식간에 쫙 순식간에 정리하는 위앤 셋업 팀.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요.
데코 팀, 멀미 팀. 멀미 팀이 뭘까요? 멀티미디어. 그래서 매 주일 예배의 광고 시간을 중학생들이 직접 만들었어요. 배경 음악에 뭐 자막에 다 그림까지 해 갖고 만들었어요. 너무너무 재밌게 만들었어요.
로마서 12장 1절 하반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예배당에서 우리의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만 영적 예배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드리는 그 삶이 영적 예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16절 17절 두 절만 읽어 볼게요. 시작.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아멘.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가서 그것으로 뭘 했다고요? 장사했다. 그래서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 "장사하다"라는 뜻 외에도 여러 가지 있는데, 원래 근원적인 의미는 "행동하다"예요. 저를 따라보세요. 재능은 쓰라고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 재능을 쓰게 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결국에 칭찬한 것은 이윤을 남긴 것 때문이 아니라 시도를 했다는 것, 그 재능을 썩혀 두지 않았다는 것. 왜? 주님은 재능을 쓰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20절,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멘.
자, 21절에 이 세 가지 표현입니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고 나서, 첫 번째 "적은 일에 충성했다." 두 번째 "많은 것을 내게 맡길 것이다." 세 번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자, 주인이 칭찬을 한 내용의 세 가지 특징을 보면, 첫 번째는 지금 재능을 드리는 것은 기적의 출발점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한 달란트가 73억이니까 이게 적은 게 아니잖아요. 근데 왜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이야기를 했을까. 그것은 그 일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펼쳐질 일이 훨씬 더 장대하기 때문에 지금 일이 오히려 적은 일로 보이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그래서 자녀들이 뭔가 작은 일 하나 잘할 때 칭찬을 많이 해 주세요. 격려를 해 주세요. 그게 어떻게 꽃을 피울지 모르는 거예요. 저는 오늘 이 메시지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어렸을 때 버스 타고 가면 항상 창밖에 글자들을 열심히 봤어요. '왜 글자를 저렇게 썼을까, 저 단어를 썼을까.' 글자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았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 이 글자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주시더니 결국에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만나게 해 주시고, 그리고 대학교 1학년, 영어영문학과였으니까 영어 과외를 하면 용돈 벌기 너무 쉬웠어요. 그런데도 나는 이 글자와 씨름을 하는, 번역하는 일을 해야겠다.
번역, 아무런 숙련된 경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출판사에 전화해 갖고 퇴짜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두란노에서 "와 봐라." 그래서 번역을 시작한 거예요. 이 번역을 하고 나서 제가 크게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과외를 하면 너무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첫 번째 책을 완역하는 데 9개월 걸렸어요. 미치는 줄 알았어요. "내가 다시 하지 말아야지." 근데 또 그 글자에 대한 열정을 하나님이 계속 불어넣어 주시는 거예요. 25권을 번역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더니 책을 쓰게 하시고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시고, 여러분, 글자가 살아 움직이게 만든 그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이고 재능인 거예요.
그걸 만약에 내가 덮어두고 살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냥 전망 좋은 과를 가라, 전망 좋은 직장 가져라, 이렇게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재능을 하나님 앞에 구별해서 드리면,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예상할 수 없는 기적의 출발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두 번째, 일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 "적은 일을 충성했으니 많은 일을 맡기겠다." 일에 대한 또 다른 보상은 일이다. 여러분이 반가워하지 않는 거. 그런데 여러분, 젊은 나이에 여러분의 인생의 자리에서 이 일을 정말 계속 많이 해야 되는 그 상황이요, 평생 가지 않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찾아주지 않고 아무도 여러분에게 일을 맡기지 않잖아요. 그때는 인생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슬퍼지게 돼 있어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에 그 분야에서 갈고 닦아서, 여러분, 그 분야에 가장 영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세 번째, 주인의 기쁨이라는 게 뭘까. 일꾼들은 돈 받는 기쁨으로 일하지만, 주인의 기쁨은 이 전체를 세워 가는 기쁨이에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기쁨에 참여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섬기고 함께 세워가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려는 것이에요.
자, 이어지는 24절에서 26절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내가 알았느냐." 아멘.
자,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두 가지로 얘기하자면, 첫 번째는 자신을 믿고 이 귀한 것을 맡겨 주신 주인에 대한 오해이죠. 주인은 무서운 분이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 즉 키질도 안 하고 알곡만 모을 수 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가요? 심지 않는데 어떻게 거둬요. 우리가 처음에 여러분, 회사에 들어가서 저 위에 임원이나 대표님을 보면 아무 일도 안 하는 거 같은데 조직이 본인 원하는 대로 다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분, 그렇지 않죠.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에 많은 고민과 많은 노력을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오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원하시는 거는 다 이루실 수 있는 분.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겠지." 이런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은 거예요.
자, 두 번째,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업을 하다가 원금마저 까먹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인은 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칭찬한 게 이윤을 남겨서가 아니라 시도를 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의 비유에 보면, 비유는 굉장히 심플해질 수밖에 없는데, 시도를 했는데 실패한 사람 케이스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그럼 이 사람이 이윤을 남긴 게 포인트일까요, 이 사람이 시도를 한 게 포인트일까요? 땅에 묻은 사람의 정반대가 어떤 개념이에요? 땅에 묻지 않고 노력했다는 거야.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결실로 얘기하신 게 아니라, 주인은 그가 충성을 다한 것을 갖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업을 해 보면 실패를 할 수도 있어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의 분야에서 처음부터 탁월성을 갖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의 자리에서 끝까지 가면 하나님의 나라는 부흥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두 가지로 얘기해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때로는 길가에, 때로는 돌밭에, 때로는 가시밭에 뿌렸다는 거잖아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그 귀한 씨앗을 그런 데다 뿌리냐." 그건 너무나 큰 낭비이고 손해 아니냐. 그래서 제가 계산을 해 봤죠. 나중에 4분의 1인 좋은 밭에 뿌렸는데, 그 좋은 밭에서 몇 배의 결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 그래서 4분의 1의 씨앗의 30배 60배 100배를 곱셈해 보세요. 7.5배, 15배, 25배.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는 부흥한다.
자, 예시를 또 하나 들어보면, 뉴저지의 마크 최 목사. 한국에서 영어 예배할 때 이 달란트 본문으로 설교를 한 거예요. 이분이 워낙에 창의적인 분이거든요. 그래서 지원자를 봤습니다. 100명. 강단에 올라오십시오. 100명이 올라온 거예요. 100불씩 줬어요. "이걸 갖고 나가서 하여튼 열심히 사업을 하고 선한 사업을 해서 가져와 봐라." 본인도 그걸 해놓고 속으로 "야, 이게 뭐 되겠나. 이게 원금 갖고 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겠고, 어렵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딱 40일밖에 안 줬대요. 40일 만에 이 100명의 사람들 결산했어요. 여러분, 100명에 100불씩 줬으면 총액이 만 불이잖아요. 만 불을 40일 만에 결산했는데 얼마가 됐을까요? 4만 불이 됐어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재능을 땅에 묻어 둘 것인가, 아니면 시도할 것인가.
제가 20대 때 30대 때 정말 수많은 밤을 새면서 번역을 했거든요. "제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이런 생각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여러분, 그 시간이 허비된 시간일까요?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쌓여가는 시간이에요.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마지막 29절에 보면, "있는 자는 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가진 것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시간을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재능을 주셨잖아요. "아휴, 이렇게 쥐꼬리만한 적은 재능을 주고 나한테 뭘 하라는 거야." 아니요, 그것은 여러분이 한 달란트의 아주 일부분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정말 여러분이 갈고닦고 최선을 다했고, 1만 시간의 법칙뿐이겠습니까. 10만 시간. 여러분이 정말 거기에 계속해서 인생을 쏟아보면 하나님께서 결과를 이끄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전에 한 가정을 심방한 적에, 10여 년 전인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신 거예요. 학령기 자녀가 둘이 있는데 이 자매가 어떻게 자녀를 키우나, 그래서 가서 위로를 해 줘야지 그러고 심방을 했는데, 놀랍게도 너무나 밝은 목소리에 긍정적인 사람인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앉아서 심방 예배를 드리려고 보니까 성경 통독 책이 있더라고요. "성경 통독 몇 번 했냐?" 그랬더니 "이제 한 번 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하려고 합니다." 근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도대체 그날 무슨 확신인지. 제가 이제 심방 예배를 하면서 "자매님은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겁니다." "하나, 제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다고요? 성경 이제 한번 읽었는데요." 지금 저희 교회에서 재밌는 성경 읽기를 하고 계시잖아요.
"난 은사가 없습니다. 난 재능이 없습니다. 아우 난 못 합니다. 저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들어가는 것도 한 번도 안 가본 학교 가는 거예요. 인생은 다 한 번도 안 해 본 거 하는 거예요.
내가 청년부 섬길 때 싱어 팀에 어떤 한 자매가 있는데, 정말 찬양 팀들이 찬양 인도할 때 예배 인도자 목소리는 잘 들리지만 싱어들 목소리 잘 들려요, 안 들려요? 사실 거의 안 들리거든요. 근데 싱어들은 그 노래 소리도 그렇지만, 그 예배하는 모습으로 영향력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한 자매를 보고 너무너무 기름 부으심이 있는 거예요. "예배가 끝나고 자매는 예배 인도자 하셔야 됩니다." "어, 제가요?" 막 웃으면서 "어, 저는 그냥 싱어만 할 겁니다. 전 예배 인도 절대로 못 해요." 제가 또 얘기했어요. 근데 또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나중에 후회했어요. 왜냐면 어느 날부터 예배 단에 안 서는 거예요. 알아보니까 이 정말 그 가정에 너무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싱어를 못 할 뿐만 아니라 몇 년 동안 교회를 못 나오게 됐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기회의 시간이 있어요. 기회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기회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좀 비슷한 케이스인데요, 해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작은 교회 목사님이 성가대를 이렇게 보다가, 어 저 자매님은 굉장히 기름 부으심이 있네. 그래서 싱어 팀을 하라 그랬어요. 싱어를 하는데 거기서도 스탠드아웃, 눈에 띄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찬양 인도를 하시라"고. 이 자매도 도망 다닌 거예요. "어, 난 찬양 인도 못 합니다." 하루는 이 목사님이 작심을 하고 나와서 환영 인사를 하고 "찬양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그냥 줘 버린 거예요. 그리고 들어갔어요. 찬양 인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인도를 했다는 거예요. 그분 간증이에요. 근데 그날로부터 놀라운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자매님이 21세기에 정말 손에 꼽는 세계적인 예배 인도자가 됩니다.
"주께 가오니", "주의 집에 찬양이 가득해." 정말 이루 셀 수 없는 주옥 같은 찬양들을 작사 작곡하고 수많은 예배 인도자들을 세웠어요. 그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걸 포기했다면, 이 자매가 "아, 나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이렇게 끝까지 거부했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한 달란트를 받아서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달란트를 드리고 헌신한 사람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3.22(주) | 주일설교 |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딤전 2:1-7)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본문: 디모데전서 2장 1-7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날짜: 2026년 3월 22일
[ 설교 요약 ]
디모데전서 강해 네 번째 시간으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 담임 목회자로 세우고 첫 번째로 권면한 내용은 기도와 복음 전파다. 본문 전체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표현은 "모든 사람"이며, 이 두 주제는 하나로 수렴된다.
1. 네 가지 기도의 종류 (1-2절)
간구(간절한 탄원), 기도(프로슈케 — 하나님 앞에 속마음을 다 아뢰는 것), 도고(중보기도 —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감사(응답을 미리 믿음으로 올려드리는 것).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간구의 기도가 출발점이 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의 기도로 이어져야 한다.
2.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 임금들과 위정자들까지 (2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박해한 로마 총독들과 네로 황제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크리스천들이 "저 사람은 영적 전쟁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박해자를 축복하는 것이 바울의 방식이었다. 기도 목록에서 누구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3-4절)
이것은 단순한 신학 명제가 아니라 바울의 구령의 열정이다.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심)와 섭리적 의지(자유의지로 선택한 자에게 구원을 베푸심)는 상충되지 않고 서로 다른 레이어에서 조화를 이룬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천국문과 구원의 대로는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4. 빚진 자의 심정으로 —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5-7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바울이 재판정에서 자기 변호 대신 복음을 변증한 이유는, 자기를 심판하는 그 한 영혼이 지옥에 갈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한때 박해자였던 바울이 "나 같은 죄인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저 박해자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 마음의 그릇의 크기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크기가 된다.
[ 전문 스크립트 ]
오늘 설교의 제목을 같이 읽어 볼까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디모데전서 강해 네 번째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에베소 교회에 권면하고 싶은 내용이 2장에 두 구성이 돼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자,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 담임 목회자로 세워 놓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첫 번째로 권면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기도입니다.
네 가지 기도의 종류를 언급했는데, 각각의 정의와 차이점을 간단히 보면, 간구는 간절하게 호소하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인데, 헬라어로 프로슈케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속마음을 다 아뢴다, 이런 뜻입니다. 세 번째 도고는 우리가 소위 중보기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 네 번째 감사는 하나님께서 나의 간구에 선하게 응답하실 것을 미리 믿음으로 올려 드리는 것, 감사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호흡을 하지 않고 살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땅에 살지만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기도를 하고 살아야 되는데, 여러분, 때로는 기도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기는 하는데, 어느새 마치 호흡을 못하는, 의식을 잃어버린 코마 상태의 환자처럼 사는 경우가 많은 거죠.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게 되는 계기가 있는데, 대부분은 간구의 기도 제목이 생겼을 때입니다. 여러분, 평상시에 하나님이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님이시요, 이 반응을 전혀 안 하던 분들이 내가 간구할 제목이 생겼다고. "야, 이거 너무 속이 보이는 거 아니야?" 이렇게 죄송해서 기도를 못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 간구의 제목이 생겼을 때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골방에 엎드리고 성전에 나와서 엎드리는 거죠.
성경을 보면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때 인생의 위기를 넘어서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한나가 성전에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함을 기도할 때 도저히 자기가 이길 수 없는 모압과 암몬의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께 자신의 딸을 놓고 간구할 때 예수님께서 죽은 딸까지 살려내신 것이 성경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간구하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16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간구의 기도의 역사가 크다. 그러면 의인을 찾아다녀야 되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고 하나님이 칭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우리는 기도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셨기 때문에 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거죠.
사람이 호흡을 해야 될 때 호흡을 할 수 있는 게 중요하고, 여러분, 배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게 중요하죠. 제가 이 얘기를 갑자기 왜 하냐면, 여러분, 너무 지치면 먹어야 되는데 먹을 기운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숨을 쉬어야 되는데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병원에 가서 "제가 아픕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병원에 가서도 "저 괜찮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상한 거잖아요.
제가 이렇게 성도들 예배드릴 때 보면 찬양이 막혀 있는 사람도 있고, 기도를 해야 되는데 기도가 막혀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까지 나와서도 내 영혼을 쏟아놓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거죠. 여러분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기도할 수 있는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간구의 기도가 터져서 이게 시작점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열리는 분들이 많아요. 자,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사실 우리가 기도 제목이 응답되고 나면 그다음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를 못 느끼고 대화를 멈추는 경우들이 있어요. 여러분, 새벽 기도를 하다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럼 기도 제목이 생긴 거예요. 근데 이렇게 기도 제목이 갑자기 생겨서 오신 분들은 이렇게 편안하게 앉지를 못합니다. 그냥 의자 끝에 걸터 앉아서 간절하게 기도해요. 그런데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이 평안해지고 자세가 평안해지면 응답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는 어느새 안 나오세요. 문제가 해결됐잖아요.
그래서 제가 청년부 사역할 때에도 "하나님 배우자를 주세요, 배우자를 주세요" 기도했는데, 어이 자매인가 형제인가? 그래서 새벽 기도에서 서로 만나는, 섬기다가 만난 형제 자매도 있었는데, 새벽 기도를 섬기는 스태프 청년 형제 자매도 서로 결혼하니까 그다음에 안 나오더라고요. 뭐 그렇게라도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라도 나오면 그래도 좋은 거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열렸으면 좋겠어요. 나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내 안에 있는 작은 소망도, 그 누구와도 나눠보지 못한 속 깊은 이야기도.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남편과 아내 부부 간에도 서로 숨기는 거 없어야 된다고 얘기하지만, 다 얘기할 수 없는 게 생겨요, 안 생겨요? 숨기란 얘기가 아니라, 나의 그 내면적인 아픔과 고민과 고통을 다 얘기하면 가족들이 힘들어하니까 다 얘기 못 하는 게 생깁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누구한테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프로슈케라는 이 기도라는 단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내 속에 있는 거를 다 올려 드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 하나님이 나와의 대화를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 기도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이, 하나님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게 된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항상 밤이면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상가 2층에 예배당에 달려가는데, 그때 그 기분이 마치 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 같은 설레임. 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에 부르실까? 보니까 주님이 그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시는 거더라고요. 나는 기도 응답을 원해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원하시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친밀한 동행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기도는 중보기도입니다. 여러분, 중보기도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뜻이나 필요가 이루어지고 채워지기를 원해서 대신 기도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다 깜짝 놀랐어요. 중보기도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개념이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데, 여러분의 기도가 좋은 기도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을 수도 있잖아요. 그 사람이 원하는 게 그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될 수 있고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하나님,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이게 중보기도의 원래 의미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 사람이 정말 뭐가 필요한지 내가 알까요, 그 사람이 알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정확하게 알고 계실까요? 하나님이 정확하게 아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게 돼 있어요. 이게 중보기도를 해 본 사람들이 모두가 경험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아, 그 사람 불쌍하구나, 안 됐구나," 여러분, 인간적인 동정심의 차원이 아니라,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소망, 그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의 계획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도가 강력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중보기도가 훨씬 강력해질 때가 많아요.
여러분, 부부간에도 배우자에게 이렇게 분위기 좋을 때 자기의 뜻을 설득하고 관철시키려는 분들이 있잖아요. 벌써 결혼 생활한 지 20년 30년 됐는데 아직도 그걸 성실하게 하고 계시는 분들, 회개하시고 내려놓으세요. 중보기도를 하세요. 내가 사람을 바꿀 수 있나요? 내가 나 자신이 변하려고 해도 내가 나 자신을 바꾸는 것조차도 힘들어요. 내가 누구를 바꿀 수 있을까요? 자녀를 바꿀 수 있나요? 배우자를 바꿀 수 있나요? 아니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을 하셔야 변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왜 엄마 말 안 듣니, 아빠 말 안 듣니?" 그럼 제가 뭐라고 얘기했죠? 등 뒤에서 하나님이 어깨를 치시면서 "그러는 너는 왜 내 말을 안 듣니? 일단 너부터 좀 내 말을 들어라." 그래서 여러분, 자녀에게 압박하지 마시고 중보기도 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인생에 친히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 네 번째 기도는 감사입니다. 아니, 감사는 감사지, 이걸 어떻게 기도라고 할 수 있나.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러분이 4장 6절을 계속 보시면, "왜 염려하는가, 기도할 수 있는데."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 앞에 맡겨 드리고 간구하고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기도로 올려 드린 것은 감사라는 겁니다. 왜? 이미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이게 주님의 말씀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 얘기하신 것처럼,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간구의 기도를 하면서 미리 감사하라는 거예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밤마다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자녀가 방황하고 관계가 어려워져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낮에도 근심 걱정이 많아서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살림을 해야 되는데 전혀 집안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분들도 있어요.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빼앗긴 여러분의 영적 주도권을 되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기만 하면 그 SOS 핫라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염려하고 근심하는가. 그 사이에 염려와 근심이라는 바리케이드를 원수가 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주도권을 빼앗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불신과 근심 걱정의 가라지를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씨앗으로 품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 주간 특새가 이제 딱 5일밖에 안 되는데, 여러분, 영적으로 지쳐 있는 분들이 있다면 반전의 계기가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게요. 시작.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자, 기도를 하되 특별히 임금들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했어요. 왜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탱크 같은 사람이에요. 돌파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입니다. 공격적이고 직진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인생을 놓고 보면 굉장히 중요한 크리스천의 삶의 통찰을 얻을 수 있어요. 그건 뭐냐면, 복음에 있어서는 이렇게 주도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 없는데, 여러분, 관계는 항상 화평을 추구했어요. 이게 쉽나요? 엄청 어려운 거예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게 어려워요. 여러분, 일터에서도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업적도 많이 쌓았지만 그 사람들하고도 많이 부딪히게 돼 있어요. 차가 속도가 빠르면 다른 차들과 부딪힐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게 돼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이걸 동시에 했는가? 자신이 도시마다 다니면서 개척한 교회들에 율법주의 거짓 티칭을 해서 이 교회들을 혼란케 한 그 거짓 교사들이 주로 어느 교회 출신이었어요?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었어요. 자, 그럼 생각해 보세요. 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뭐 나한테 추천장을 써준 것도 없고 도와준 것도 없는데, 회방만 하잖아요. "야, 이 교회 봐라, 가만두나 봐라, 내가 이 교회하고 관계를 단절해야겠다." 이런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 모교회와 척을 지지 않아요. 오히려 기근 때에 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긍휼 헌금을 모아서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도와줍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멀리하지 않았어요.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들을 사랑했어요.
제가 가끔가다 성도님들 중에 "아, 누가 너무 밉습니다" 막 이런 얘기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배우자인 경우도 있고, 또 직장 동료인 경우도 있고, 법정에서 나를 고소고발해서 근거 없이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제가 그러면 황당한 얘기를 하죠. "가장 적극적인 해결법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아니,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사랑합니까?" 근데 사도 바울은 그 사람을 사랑한 거예요.
바울이 로마에 1차 감금되었을 때도 2차 감금되었을 때도, 로마의 황제가 누구였을까요? 네로. 네로 황제입니다. 네로 황제는 폭군이고 미치광이었어요. 결국엔 네로에게 순교를 당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사도 바울이 이 말도 안 되는 박해자 네로 황제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거예요. 총독들과 위정자들에게 엄청난 박해를 당했는데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어요.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했어요. 왜냐면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으로 악을 이기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로마서 12장 14절 읽어 볼까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여러분,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부두교에서 인형에다가 찌르기 하듯이 막 공격하는 기도를 하시는 분들 많아요. 근데 사도 바울은 그 위정자들, 자기를 박해한 사람들, 결국에 자기에게 사형을 내리는 그 박해자 네로 황제를 위해서도 기도했어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겁니다.
제가 저희 성도들 그 법정 소송에 걸리는 상황이 생기면, 가능한 한 대화에서 해결하시고 좀 손해를 보고 차라리 마십시오. 왜냐면 법정 소송 2년, 3년, 5년 가면 정말 사람이 시들시들 말라요. 그 분노와 미움과 절망을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지 몰라요. 왜 서로를 어떻게든 비난해서 무너뜨려야 되기 때문에, 이 법정 소송이라는 게, 그걸로 망가지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 바울 같으면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축복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거예요.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너무나 많이 스스로 영적인 운신의 폭을 좁히며 살고 있어요. "저 사람은 영적 전쟁의 대상, 저 사람도 영적 전쟁의 대상, 이 사람 무관심의 대상. 딱 내 영역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만 사랑하겠다." 그거는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 얘기하셨잖아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온 세상 사람을 사랑한 거예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여러분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든 어렵게 하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2절에 말씀합니다.
다시 표현하자면, 여러분의 기도 목록에서 누구도 제외시키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매일 아침 큐티 묵상을 할 때 "내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라," 그럼 우리에게 적용을 해야 되잖아요. "하나님, 제가 오늘 누구를 사랑해야 될까요?" 이렇게 묵상하는데 갑자기 화면에 그 원수가 떠올라요. 채널을 확 돌려 버리죠. "하나님, 제가 안 본 걸로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안 됩니다. 아, 이런 거 요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고서는 내가 가능한 범주 안에서 묵상을 또 다시 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묵상을 많이 한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누구를 변화시키겠어요?
오히려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고 가장 마음 아프게 하고 가장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시대와 나라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돼요. 요즘 러우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 전쟁이 더 심화되고 있잖아요. 여러분, 뉴스를 보면서 온 세상을 근심케 하는 그 지도자들을 "야,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러냐" 이렇게 비난만 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단 한 번이라도 기도해 보셨나요?
정치에는 궁극적인 구원이나 궁극적인 해답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정치에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질서와 평화를 구현시키는 것입니다. 이들이 참된 질서와 평화를 만들어야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고요함과 평안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라고 사도 바울이 2절에 이야기를 했어요.
자, 그러면 여기까지 읽어 보면 "어, 결국엔 사도 바울도 자기 편하자고 기도한 거였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근데 3절과 4절에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3절 4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것이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은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정말 충격적인 고백을 한 겁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돼서 사람들 앞에 서게 됐을 때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 재판을 받을 때에도, 유다 지역의 총독들과 지도자들에게 신문을 받을 때도, 네로 가이사 앞에 서서 신문을 받을 때도, 그가 복음을 전했던 이유가 드디어 여기서 공개된 거예요. 왜 재판정에서 자기 변호를 안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했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시 얘기하자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형 선고를 받는 결과가 나올지언정,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그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데, 진리에 이를 수 있는데, 그걸 간절히 원했던 거예요. 신문받고 있는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건 두렵지 않았어요. 이거 걱정 안 했어요. 왜? 자기는 언제 죽어도 천국 가잖아요. 그런데 나를 재판하고 있는 저 영혼은 그대로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 걱정되었던 거예요. "난 괜찮은데, 저 사람을 구원해야 되는데." 이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로마서 1장 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다 내가 어떤 자라고요?" 빚진 자의 심정. 왜 빚진 자의 심정일까요? 자기도 한 때는 박해자였잖아요. 자기도 한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던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처형해서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나도 구원을 받았는데, 저 박해자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 생각이 있는 거예요. "저 박해자도 주님을 알기만 하면 돌아올 수 있는데,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게 나만 건짐을 받았다는 게 너무 미안한 거예요." 빚진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복음을 전해야겠다"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하나님 원하신다." 이 말씀은 신학적인 코멘트가 아니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정말 구령의 열정이 엄청나다는 걸 고백한 거예요. 근데 다만 이제 이 구절을 보면서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이 말이 맞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미리 예정하셨다고 돼 있는데, 그 말은 틀린 말 아니냐?"
그래서 두 가지 이제 구원론이 나오죠. 만인 구원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만민이 구원받기를 하나님 원하신다라는 유니버설리즘의 근거 구절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거에 이제 반대되는, "하나님 미리 다 정해 두신 거다"라는 예정설의 근거 구절이 되는 건 에베소서 1장 5절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 미리 정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 두셨다면, 선교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전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결국에 구원하실 텐데, 하나님이 다 하실 거 아니냐." 근데 이거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크게 오해한 겁니다. 두 가지만 이야기를 하면, 한 가지는, 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저 사람을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면, "저 사람이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난 가만히 있겠다." 이게 맞는 얘기일까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단선적인 논리인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두 구절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적인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지,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적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라고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 모든 사람이 정말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예언서를 쭉 보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그가 자기 죄 가운데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가 돌이켜 회개하고 살기를 원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진심이라는 거예요. 자, 그럼 여기서 질문할게요. 하나님이 그거를 원하신다고 해서 정말 모든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나요? 그러지 않아요. 국가의 통치자가 "모든 백성들이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면 좋겠죠."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나요? 그러지 않죠.
그래서 여러분, 섭리적 의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세상을 경영하시는 데 있어서 어떻게 그분의 뜻을 펼치시는가? 돌이켜 회개하고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거예요. "끝까지 악을 고집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선하시다면 다 구원 주셔야지." 이렇게 얘기하는 게 오히려 불합리한 거죠.
제가 제 자신의 복음 사역에 대해서 돌이켜 봤어요. "나는 과연 정말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걸까?" 이게 대화를 하고 복음을 전하다 보면 굉장히 마음이 완고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목양실에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소리 지르고 나간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뭐 타종교인, 무종교인, 특히 이제 무신론자들 많이 만났는데, 끝까지 이제 거절하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또 동성애자들 많이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동성애자들 중에는 정말 소리소리 지르고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 냉담자들, 냉담자들 중에서 저에게 세 시간 동안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은 사람도 있고. 근데 그분은 세 시간 대화하고 나서 "제가 다시 교회를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결정하셨어요. 할렐루야.
그런데요, 제가 이분들을 만나서 사실 저를 어렵게 하면 저도 마음이 어렵죠. 그렇긴 하지만, 그러나 저는 최선을 다해서 복음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설명해 드려요. 그때 저의 마음은, "제가 지금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난 당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제 마음은 딱 그 마음인 거 같아요. 왜냐면 여러분, 제가 아무리 복음에 대한 설명을 한들, 하나님의 뜻을 설명한들, 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잖아요.
제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들의 리스트에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아요. "이 사람은 전도 못 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장 어둡게 생각하고, 가장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가장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더 제 마음 가운데 있어요. 그러나 강요할 순 없다고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잖아요.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자유 의지예요. 이게 상충되는 게 아니라 레이어가 다른 거예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이제 예를 드는 게,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이유식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먹이려고 해도 애가 안 먹으려고 하잖아요. 먹일 재간이 없어요. 애가 입이 얼마나 센지 다 뱉어내요. 여러분, 임종의 자리에서, 병상에서 복음을 전하면 정말 기적적으로 마지막 순간에 "아멘, 믿습니다" 고백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설득한다고 되는 줄 아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마지막 순간에 체력도 바닥이 나고, 심력도, 사람의 정서적인 힘도 바닥이 나게 돼 있기 때문에, 사실 상당히 수용적이 돼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 마지막 에너지를 다 끌어 모아서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의 소유주가 바뀌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 거예요. 그러면 그 마지막까지 거부하는 사람을, 그 마지막 남아 있는 생명을 걸고 거부하는 사람을, 제가 강요할 방법이 있나요? 없어요.
어떤 분들은 예정론에 대해서 억울한 마음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하셨다면 무슨 소용이 있냐, 열심히 살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 이렇게 얘기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지와 섭리적 의지가 차이가 생기게 된 곳은,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딱 한 분이 구원자이시다라는 그 기준을 하나님 타협하실 수 없잖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격적인 결단과 고백과 헌신을 원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결국엔 선택의 순간에 긍정적으로 사용하세요. 인간은 뭐가 옳은지 알지만, 그 옳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더 중요한 힘인 거예요.
제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거예요. 제일 눈에 띈 표현이 한 가지 있었어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짧은 일곱 절을 읽었잖아요. 일곱 절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온 표현이 뭘까요? 모든 사람이에요. 따라해 보세요. 모든 사람.
1절에도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2절에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기도하란 얘기죠.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 6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오늘 가장 많이 강조된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멈출 수가 없었던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빚진 마음이었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이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거예요.
자,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아, 이 사람은 아니야, 이 사람은 날 너무 힘들게 해, 생각하기 싫어." 여러분의 기도에서 제외시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전도할 때 "어, 이 사람은 막 교회를 비난하고 기독교인들을 엄청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이야." 여러분이 전도할 때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세요. 그 사람에게 여러분의 예쁜 전도지를 주세요. 하나님이 그걸 원하시는 거예요. 왜냐면 사도 바울이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 5절과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자,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즉 중재자도 한 분을 세우셨다. 여러분, 사람 간에, 회사 간에, 국가 간에 대화를 하든 거래를 하든, 여러분, 채널이 여러 개면 소통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중재자는 한 사람으로 통일을 하는 게 중요한 거죠.
하나님께서 이 죄 문제로 인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지니까, 하나님이 유일한 중재자를 세우셨다. 그분이 누구세요?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6절, 예수님께서 일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아니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래서 예정론에 대한 오해는 처음부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다 정해 둔 거 아니냐, 이미 짜놓은 게임 아니었냐, 일부 사람이 구원받도록 일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 진 거 아니냐?" 여러분,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폄하하는 것이고 곡해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어요. 예수님은 어떠한 악인이라도 돌이킨다면, 회개한다면,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다면 그 사람을 살려내기를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제가 몇 년 전에 "북한의 지도자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기도한다고 했더니, 한 그리스도인이 저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그는 저주를 받아야 되고 지옥에 가야 된다"고. 알죠. 알지만, 여러분, 사도 바울은 결국에 그런 네로 같은 황제와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하잖아요. 내가 먼저 하나님보다 심판의 칼날을 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는가. 여러분, 아직 천국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구원의 대로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의 전도와 복음 증거의 원동력이었어요.
마지막 7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런데 그 얘기를 하면서 "모든 사람"이라고 얘기해 놓고 왜 이방인의 사도를 얘기했을까요? 유대인들이 그들의 기도 제목에서 제외시켰던 사람들, 그들의 전도 목록에서 제외시켰던 사람들, 그들이 누구예요? 이방인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방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 증거자로, 사도로 세우셨다는 거예요. "나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포기를 안 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포기할 수 있냐"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해 주셨는데, 저 박해자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나도 박해자였는데, 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사람인데, 이런 죄인도 건짐을 받았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왜 여러분이 먼저 정죄하고 포기합니까? "아, 그 사람은 안 돼. 그 사람은 뭐 예수, 하나님 하자 꺼낼 필요도 없어." 왜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가족 중에도 먼저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아, 남편은 얘기해도 안 돼. 그 여자는 얘기해도 안 돼."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왜 그러시나요? 제가 어제 순장 스쿨 강의하면서 그런 얘기 했어요. 여러분, 예비 순장님들이 대부분 오셨는데, 이분들의 기도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뭘까요? "하나님, 제가 순장을 할 때 좋은 순원들을 만나게 해 주세요." 우리가 다 하는 기도잖아요. 애들 학교 가면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 주세요." 물론 만남의 축복도 기도해야 되지만,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이고 복음적인 기도는 뭘까요?
"하나님, 나를 만나는 사람은 다 주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 사람이 어떤 부정적인 사람이든, 어떤 인생이 깨어진 사람이든, 어떤 아픔이 있는 사람이든, 나를 만나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복음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할렐루야. 여러분,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면서 살아가는 경우 너무 많습니다. 아니요. 사도 바울은 당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중보기도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온 세상을 끌어안았으니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겁니다.
마음의 그릇이, 마음의 사이즈가 인생의 사이즈고, 내 영혼의 사이즈가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하심의 사이즈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3.15(주) | 주일설교 |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 (딤전 1:12-20)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 (딤전 1:12-20)⎟ 이상준 목사⎟ 2026.03.15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2-20절
설교자: 이상준 목사
날짜: 2026년 3월 15일
[ 설교 요약 ]
디모데전서 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제목 아래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의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이겨내게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1.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신다 — 충성되이 여기심 (12-13절)
사도 바울은 주께서 나를 능하게 하셔서 복음 증거의 직분(원어: 섬김)을 맡기셨다고 고백한다. 인간적으로는 아무 근거도 없는 바울 —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신성을 모독하던 청년 사울 — 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믿어 주셨기 때문이다. 욥기가 증언하듯, 하나님은 우리의 죄성 가득한 모습을 믿어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담아두신 가능성을 믿어 주신다. 섬김의 직분을 맡기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신뢰이자 감사의 제목이다.
2. 은혜의 낙수 효과 — 압도적 은혜가 평생의 원동력 (14-16절)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절)는 신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사역 말기에도 현재형으로 고백한다. 이것이 낙수 효과의 원리다. 낙차(落差)의 폭이 크면 클수록 운동 에너지가 크듯,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클수록 세상이 수위를 올려도 역전되지 않는다. 반면 은혜 고백이 줄어들면 순식간에 세상의 어둠이 역류해 들어온다. 존 뉴턴(Amazing Grace 작사자)과 찰스 콜슨(프리즌 펠로우십 창설자)의 사례처럼, 가장 비참한 과거를 가진 자가 가장 강력한 은혜의 증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중에 괴수(프로토스, 첫 번째)인 나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후에 믿을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16절).
3. 선한 싸움을 싸워라 —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18-20절)
바울의 자기 간증은 디모데에 대한 격려로 이어진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① 개인적 싸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군복무다. ② 혈과 육이 아닌 사탄의 권세와 싸우는 것이다. ③ 믿음과 착한 양심을 놓치지 않는 싸움이다 — 영적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진흙탕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더티 플레이를 해도 우리는 룰을 지켜야 하며,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조직을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가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고, 부르심의 완성의 자리까지 인도한다.
[ 전문 스크립트 ]
제목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가 인생의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이겨내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디모데전서 강해 세 번째 시간이고요. 12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도 바울은 주께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 디나미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내게 주셔서 복음을 증거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운동 선수라면 감독이 중요한 경기에 선발 출전할 수 있도록 나를 선택해 준다, 이거 굉장히 감사한 것이죠. 주님이 바울을 그렇게 선택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충성되이 여기셨다." 그런데 도대체 바울이 뭘 보고 충성되이 여기셨을까? 왜냐하면은 그렇게 판단할 만한 근거가 없었어요.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잖아요.
제가 어느 날 성경을 묵상하다가, 요한일서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거는 이해가 되는데, 어느 날 깨달은 건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시는 것이 신앙생활이구나" 이거 알게 됐어요. 아니, 신앙이라는 것은 믿을 신(信), 바랄 앙(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시냐.
그런데 욥기를 읽어 보면, "어떻게 하나님은 의인에게 이렇게 고난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도 있지만, 어느 날 보니까 이 욥은 하나님이 정말 신뢰해 주셨던 것이더라고요. 왜냐면 그가 하나님 나라의 대표 주자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서 사탄의 시험을 통과해야 되는데, 만약에 그 시험에 실패하면 누구 망신이에요? 하나님 망신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명예를 걸고 이름을 걸고 욥이 대표 주자로 가도록 놔두신 거예요. 그리고 그를 믿어 주신 거예요. 욥은 어떠한 고난이 와도, 어떠한 사탄의 시험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믿어 주신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어떤 분이 "아, 나는 그렇게까지 안 믿어 주셔도 괜찮을 것 같다. 욥은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했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신다는 게 뭘까요? 우리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키울 때, 정말 모든 게 어설프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앞으로 잘할 거라고 믿어 주는 거예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식탁을 차려 주면 아마 입으로 들어가는 거보다 흘리는 게 훨씬 많을걸요. 다 엎지르고, 뭐 걸음마 배우다가 엎어지고, 글씨도 삐뚤거, 바르게 쓰게 훈련하느라고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립니까. 그래도 부모님이 "넌 잘할 거야, 넌 잘할 거야." 이 믿어주는 부모의 믿음이 얼마나 아이에게 격려가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아이를 격려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 주는 것도 있지만, 또 한 가지는 그 아이 안에 잠재력이 폭발할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죄성 가득한 모습을 믿어 주신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담아두신 가능성을 믿어 주시는 것이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이 12절 말씀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맨 마지막에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뭐를 맡기셨다"고요? 직분인데, 개역개정은 99% 직역 성경이에요. 그런데 직분은 직역이 아니에요. 원래 단어는 섬김이라는 단어예요.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섬김을 맡겨 주셨다." 여러분, 그래서 섬김의 직분은 감사한 것이다, 라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셔서 일을 맡기셨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뭐 회사의 일이든, 집에서 심부름 하나 시켜도 믿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게 돼 있어요. 이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일을 못 맡기게 돼 있다고요. 여러분이 회사에서 일을 잘했어요, 일을 열심히 했어요. 그러면 보상으로 얻는 게 뭔가요? 성과급을 얻기도 하고, 금융 치료가 제일 효과적이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죠. 금융 치료, 휴가, 또 성과에 반영을 해서 여러분이 나중에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거 이런 것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이제 일터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해 보면, 일에 대한 가장 명확한 보상은 또 다른 일이에요.
별로 즐거워하지 않으시지만, 여러분,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일을 하나 더 주게 돼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잘되기를 원하면 한가한 사람한테 주지 말고 바쁜 사람에게 줘야 된다. 그 사람이 바빠진 이유가 일을 잘하니까. 근데 성경도 동일한 원리를 갖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달란트 비유 아시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뒀지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해서 배가시켰잖아요. 주인이 뭐라고 얘기한 줄 아세요? 마태복음 25장 21절 읽어 보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많은 일을 맡기겠다, 근데 그 많은 일이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그것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 직장에 나갔는데 팀 회의를 하는데 나만 따로 앉혀 놓고 아무런 얘기를 안 해 줘요. 그거는 굉장히 좌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여기셨는지 나에게 복음 준 거를 전 세계에 전하도록 하셨다"라는 거예요.
저희가 다음 주에 1인 1 사역의 날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척 교회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 도움의 손길들이 많이 필요할까요, 안 필요할까요? 엄청 많이 필요합니다. 이것만 놓고 봐도, 집중도 때문에 조명을 낮춰 놨지만 조명을 낮춰 놨더니 뭔지가 잘 안 보여요. 그래서 청소가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복도는 상대적으로 밝게 인테리어를 했더니 때가 많이 타요. 그래서 청소가 또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저희가 올해 만든 팀이 있습니다. 샤이닝 팀. 반짝반짝 빛나게 하자.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찬양 못 한다, 싱어 그런 거 못 합니다 다 못한다 못한다 해도 이거는 뭐 못 하실 분이 없어요. 그러니까 샤이닝 팀 많이 지원해 주시고 여러 사역에 지원하시면 좋겠어요.
여러분, 예배해 드리면서 잘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도 은혜지만, 물을 떠 나르는 하인이 느끼는 감격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예배 사역자들 곳곳에서 미디어 사역하시는 분들 참여하시면 좋고, 또 차세대에, 저는 영류부를 앞에 위치해 둔 게 제일 좋아요. 아이들이 이렇게 어렵잖아요. 그래서 같은 층에다 놔둔 건데, 이 아이들의 존재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거예요.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거예요. 할렐루야. 엄마 아빠들이 고생해서 저희가 행복을 누리는데, 이 아이들의 말씀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거 이것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이 내게 섬김의 직분을 맡겨 주시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고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절 이어지는 말씀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얘기합니다. 읽어 볼까요.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가 청년이었을 때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여기서 비방이라는 단어가 원어상으로 신성모독이에요. 예수님의 신성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아나모인으로 그 사람들에게 폭행을 하고 그들을 처형했던 사람이다.
근데 하나님께서 그런 청년 사울을 변화시키셨잖아요. 그러면 사도 바울 입장에서 그때를 생각하면, 오늘 본문에 설명하기를 그때는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몰라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대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청년 사울이 온갖 죄를 지었죠. 다시 말하자면 신앙이 모든 죄악을 합리화시켜 주는 거대한 우산 역할을 해 줬던 거예요.
물보다 피가 진하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피보다 진한 게 이데올로기, 정치 이념. 그런데 그 정치 이념보다 강력한 게 뭔 줄 아세요? 종교적 신념이라는 거예요. 이 종교적 신념이 있으면 모든 잘못된 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엄청난 역기능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이단 사이비에 빠진 사람이 온갖 악행과 만행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저지르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정통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도 이런 위험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교회 안에서 질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 정말 이 일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일까? 질문을 할 필요가 있고, 정직하게 대답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면서 "그런 자신을 불러 주시다니" 이런 고백을 해요. 14절 15절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 주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아멘.
정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하였다. 이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가 성경 전체에서 딱 여기 한 번 쓰여요. 한 단어인데,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감격적인 고백을 합니까. 나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택하셨을까.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들 중에서 내가 1번인데.
여러분, 죄인 중에 괴수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이 괴수가 원어적으로 뭐 괴물 이런 뜻이 아니고요, 몬스터라는 단어가 아니라 프로토스, 첫 번째라는 뜻이에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사람들을 쫙 세워도 내가 제일 앞에 설 거라는 거예요. 내가 일 번이고, 내가 그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인데.
그러면 사도 바울이 "아 내가 과거, 한참 전에 내가 청년 때는 그런 사람이었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근데 오늘 본문의 표현을 보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에요. 현재형. 그래서 어떤 성경 학자들은 "아이, 사도 바울, 이건 너무 과장 아니냐, 과도한 겸손 아니냐, 그래서 그냥 현재형으로 좀 표현한 거지" 이렇게 얘기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비밀을 설명하다가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저 자신의 간증입니다. 저는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죄인들 중에서도 1번인데, 이런 나를 주님이 용서해 주셨고 회복하셨다"는 거예요. 이것이 어찌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제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도 바울의 삶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grace of God, 이것은 인생과 사역의 거대한 낙수 효과를 일으키더라고요. 낙수 효과라는 건 원래 경제학 용어이긴 한데, 낙수라는 자연적 현상을 놓고 보면 물레방아의 원리가 이거잖아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의 위치 에너지를 바퀴가 돌게 만드는 운동 에너지로 전환시켜서 곡식을 빻는 거예요. 수력 발전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곳에 물을 모아두었다가 수문을 열 때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낙수의 위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가 되어서 이 발전소를 돌리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 지치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객관적인 이유들이 있어요. 인간관계가 힘들다든지, 그래서 직장 생활하면서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 관계가 힘듭니다 이런 얘기들 많이 하세요. 그리고 내게 너무 과도하게 많은 업무가 몰려서 지치시는 분도 있고, 또 세월이 가다 보면 체력이 예전만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제는 힘들다, 그만 내려놓고 싶다 이럴 때가 있는 거죠.
근데 이런 모든 외적인 요인들과는 달리,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 평생에 나를 가장 강력하게 이끌 수 있는 내 영혼의 낙수 효과는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거예요. 그런데 그 은혜에 대한 고백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힘이 떨어지는 거예요. 낙차의 폭이 크면 클수록 운동 에너지가 커지는 거잖아요.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치받고 올라오고 수위를 높여도 이 낙차의 폭이 좁혀지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에 대한 고백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여러분, 순식간에 역전이 되면서 세상의 어둠의 물결이 나를 역류해서 들어오며 압도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을 보세요.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때가 사도 바울의 사역 초창기일까요, 중반기일까요, 후기일까요? 후기입니다. 왜냐면 그가 로마 감옥에 1차 갇혔다가 풀려나서 딱 2년 돌아다니다가 다시 잡혀 들어가서 순교를 당했어요. 그 나와 있던 2년 사이에 디모데를 에베소에 보내고 이 편지를 쓴 거예요. 그러니까 그의 사역 말기에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지금도 너무 생생하다는 거예요. 현재형이잖아요.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았을까,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부름을 받아서 이 사역을 하고 있을까, 지금 나 자신을 봐도 이거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고 은혜라는 거예요.
이 한 가지를 생각하면 바울은 그 은혜의 낙차폭이 컸기 때문에 평생에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시아에 가든 유럽에 가든 유대인들이 많은 예루살렘 한복판에 가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심지어 총독에게 재판을 받을 때, 여러분, 자기를 변호해야 되잖아요. 근데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누구를 변호해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에 끌려가서 갇혀 있을 때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무도 바울을 멈추게 할 수 없었어요. 왜? 낙차의 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게 뒤집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바울을 멈출 수 없게 만든 강력한 원동력은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여러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한 공격, 어떠한 어려움을 겪어도 여러분을 원수가 멈추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이 많지만 정말 딱 한 곡을 고르라고 하면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제가 늘 간증하지만 제가 우울증이 너무 심했고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소년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생명을 죽음을 묵상하면서 살았어요. 늘 부모 형제와 싸우고 친구들과 싸우고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을 사는 거죠. 그리고 중학생 때는 하나님을 저주한 적도 있어요. "왜 하나님은 나를 온몸이 이렇게 연약하게 종합병원으로 태어나게 해서 도대체 세상에 왜 나를 보냈냐"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나를 하나님이 건져 주셔서, 그냥 건져 주신 정도가 아니라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니 할렐루야. 찬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곡을 쓴 사람 아시죠? 존 뉴턴입니다. 그가 원래는 아주 신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그 어머니가 아들을 말씀으로 기도로 키우고, 그 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분이에요. 근데 뉴턴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됩니다. 그리고는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아이가 내면이 힘드니까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중간에 중퇴를 합니다.
그리고는 선원이 되었는데, 아프리카에 가서 아무런 죄 없는 흑인들을 데려다가 팔아넘기는 노예상이 된 거예요. 노예선의 선장으로 일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도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어두운 삶에 매어 있던 그를 하나님이 계속 강권하시는 거예요. 결국에는 노예선을 포기하고 그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평생의 복음을 전하는 존경받는 목사님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의 노년을 놓고 보면, 존 뉴턴이 그 윌버포스의 그 노예 해방법에 영향을 미친 영적 멘토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 까마득히 잊은 거예요. 영국 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들의 목회자인 감독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가 평생에 죽는 순간까지 단에 설 때마다 고백하는 첫 번째 고백, 임종의 자리에서도 고백한 것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살려 주셨는지 그 은혜가 너무나 놀랍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하면 아찔하지 않았겠어요? 내가 그 노예선에서 정말 내 영혼을 팔아넘기는 거 같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사는 그 삶, 그 죄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저도 간혹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 그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라는 것은 마치 이렇게 방문이 걸어 잠겨져 있는 어둠컴컴한 방 안에 사는 거 같았는데, 그 방에서 내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지금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유혹과 공격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여 싸우면서 천성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의 힘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사도 바울은 직접 체험한 거죠.
그래서 이어지는 16절과 17절의 고백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러분, 복음을 체험하고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체험했잖아요. "내가 잘해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훌륭해서 당대 세계 선교를 완성했다" 한 번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왜냐면 자신은 정반대인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데, 정말 이거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죠.
고린도전서 15장 10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이 구절을 보시면 "내가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요. 객관적으로 사도 바울만큼 당대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한 사람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예전에 신학대학원 다닐 때, 저희 구약학을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이 장영일 교수님이세요. 나중에 이제 총장이 되셨는데, 화수목금 수업이 있는데 4일 내내 점심 시간에 채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채플 시간에는 정말 뭐 좋은 설교자들도 초대돼서 오시고 교수님들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세요. 근데 장영일 교수님, 항상 잊혀지지 않는 것은, 채플 설교를 하러 이렇게 올라오시면, 펄핏이라고 강대상이죠, 굉장히 높은 강대상, 약간 설교자의 위엄을 드러내는 그런 강대상이거든요, 그 강대상에 올라서 항상 첫 마디가 "저는 종로의 쓰레기통만도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날을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분의 설교를 딱 들으면 첫 마디에서 "아, 이분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는 분이구나, 지식적으로 전하는 분이 아니구나." 수많은 명 설교가들이 와서 설교를 하는 것과 다른 것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나 이 첫 마디에 벌써 이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신학생들에게 흘러가는 설교를 하셨던 거죠.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도대체 왜 나였을까? 평생을 내가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 봐도 아니,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하셨을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가 그 비결에 대해서 16절에 이야기하는 것은, "아, 나를 오래오래 참아 주셨던 것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을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구나. 다시 말하자면 이런 죄인도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온 세상의 본보기로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구나."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제가 이 말씀의 뜻을 묵상을 하다가 딱 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물론 뭐 드라마틱하게 예수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많지만, 떠오른 한 사람은 누구냐면 찰스 콜슨입니다. 들어보신 분들도 많이 계실 텐데, 이 찰스 콜슨은 정말 20세기 미국의 최고의 지성인 중에 한 명이었죠. 미국 닉슨 대통령의 최고 법률 자문으로 일을 했던 사람이고, 법률가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도 탁월한 사람이었어요.
근데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가 되죠. 이 문제의 연루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 최고의 지성인의 위치에서 한 순간의 재소자로 전락하게 된 거예요. 그때 동료 백악관 직원들이 그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요. 그때 그가 그 방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돼요. "내가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고 내가 최고 잘 나가는 인생이었던" 그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76년에 출소를 하고, 교도소 선교회 프리즌 펠로우십이라는 선교 단체를 만들어서 미국에 있는 교도소의 재소자들과 그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게 돼요. 찰스 콜슨이라는 인물이 정말 최고의 위치에서 바닥에 떨어지고 감옥을 갔다 오는 사람이잖아요. 정치인의 인생, 법률가의 인생을 다 접고 그냥 복음을 위해서 나머지 인생을 살게 돼요. 그러면서 수많은 재소자들이 변화되고 그 가족들이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그가 나중에 종교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게 돼요.
그러면서 러빙 갓(Loving God)이라는 책, 이분의 책이 여러 권이 있는데 다 너무 좋은 주옥 같은 책들인데, 러빙 갓이라는 책이 참 저는 좋아서 한 서너 번을 읽은 것 같아요. 여러분에게도 꼭 일독을 권합니다. 근데 이 책을 20개국 언어로 번역을 해서 많이 퍼져 나간 거예요. 그런데 수천 통의 레터가 그에게 옵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1990년에 고소련의 한 수감자가 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내가 정권의 탑 포지션에 있을 때 얼마나 소련의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그러나 이 한 권의 책만도 못했던 것이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했구나." 이걸 고백하게 돼요.
그러면서 그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 책에서 "내가 받은 학위들, 내가 법률가로서 승소했던 사건들, 고위직에서 내렸던 주요 결정들, 내 삶은 완벽한 성공 사례였다. 나는 완벽한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전과자라는 엄청난 실패,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의미 있게 사용하시기 위한 시작점이 되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그 사람이 변했다고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그랬죠. 사도 바울이 청년 사울이 박해자가 변하니까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반 성도들만 못 믿은 게 아니라 열두 사도들도 못 믿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 변할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도, 바리새파로 율법을 공부하고 헌신했던 것도, 헬라의 학문과 언어를 통달했던 것도 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내가 이렇게 쓰임을 받는 것은,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압도적인 주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이 고백을 하고 나니까, 자신의 인생 고백을 하고 나서, 마지막 17절에 영원하신 왕, 불변하시고 유일하신 전능자 하나님께 오직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잘해서 이 자리에 올랐다면 내 영광이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인간을 들어서 변화시키셔서 쓰신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내 자랑, 내 영광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18절에서 20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사도 바울이, 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중간에 갑자기 자기 간증을 했잖아요. 이 간증을 중간에 왜 했을까? 앞부분에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삼았잖아요. 그러니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들 중에 넘버원이잖아요. 그러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시는 데 이 말씀이 쓰인 것이다 라는 예시를 든 것이고, 또 뒷부분과 연결을 해서 보면 디모데에게 격려의 말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쓰시지 않느냐? 너 위축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파이팅을 해라."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격려할 때, 어떤 분들은 보면 다 치는 게 격려인 줄 알더라고요. 파이팅하라고 하면서 "야, 아빠는 아무리 어려워도 돈도 없고 가난하고 힘들고 아무것도 못 해냈는데 다 뚫고 나갔어." 이거를 격려인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만약에 그런 식이었다면, 정말 사도 바울이야말로 모진 박해와 고난과 어려움을 다 겪은 사람이잖아요. "내가 이 모든 어려움에도 나는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는데, 너는 그냥 그 교회 하나 하고 있는데 그렇게 흔들리면 어떡하냐?"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잖아요.
바울이 뭐라고 얘기해요? 자신의 가장 부끄러웠던 과거를 얘기해요. 제가 가끔 아빠들을 보면서 약간 안타까운데, 아빠들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사도 바울은 탱크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자기 아들 디모데에게 뭐라고 얘기해요? "내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망가진 인생이었는지, 그런데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기다려 주셨고 참아 주셔서 나를 회복해서 쓰신 거다." 여러분, 이게 아들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한 메시지였던 거예요.
아빠는 늘 강한 모습을 보여야 되고, 아빠는 흔들리지 말아야 되고, 아빠는 무너지지 말아야 되고. 아니요. 여러분의 자녀에게 "내 인생의 가장 힘든 굴곡의 시간에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셨다"는 거, 그것을 얘기할 수 있는 아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격려가 되었던 거예요.
자, 지난 본문에 보면 13절에 "내가 전에는"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의 비포인데, 그 바울의 과거는 죄인의 괴수였죠. 근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18절에 보면 디모데의 과거인 "전에"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데 그의 전에는 뭐냐면, 그는 신앙의 순탄한 길을 걸어왔고 예언을 받은 것이 있어요. 그 예언이 뭐냐면, 이제 4장에 가서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와 사역을 하라는 예언이었어요. 그러니까 디모데는 말씀 증거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에요.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렇게 권면합니다.
자, 거짓 교사들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는 사람으로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된다."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선한 싸움을 싸워라." 선한 싸움을 싸워라.
자, 세 가지로 의미를 좀 정리하고 싶은데, 첫 번째는 개인적인 싸움을 싸우라는 뜻이 아니라, 원어상의 이 단어의 의미는 군복무를 하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서 싸우는 거지 개인적인 싸움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내 목회를 힘들게 하네, 왜 나를 힘들게 하지, 개인적으로 싸우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방위, 디펜스, 그것을 위해서 이 사람들을 엄격하게 진리 안에서 분별해 내야 된다.
두 번째, 사람과 싸우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씨름은 악한 사탄의 권세와 싸우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의 말씀에 19절 한번 잠깐 보여 주시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얘기했을까요?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이 두 가지를 놓치기가 쉽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놓치면 안 된다. 신앙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싸움을 싸워야 된다.
우리가 가정이나 일터에서 나를 근거 없이 괴롭히고 모욕하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 기도하면서 "하나님, 내가 영적 전쟁에서 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근데 영적 전쟁으로 시작을 했는데 나중에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많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은 선한 싸움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적 전쟁을 하라"고 했다고 호전적이 되라는 뜻이 아니에요.
가끔가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기도 막 세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 중에 센 캐릭터가 되셔 갖고 막 교회에서 아나모인으로 막 소리 지르고 이런 분들이 있어요. 아니요. 그런 거 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정말 거룩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이라면, 이 성전은 차분하게 치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 통독할 때 보면, 여호수아서를 보세요. 여호수아서가 정복 전쟁인데 너무 차분한 거예요. 왜? 거룩을 위한 전쟁이에요. 이건 약탈을 위한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거룩한 나라를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이 절체절명의 사명을 갖고 들어갔기 때문에, 굉장히 여호수아서는 차분합니다. 악이 좋아서 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선을 이루기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 신화를 이야기합니다. "너,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이면 안 돼. 너, 차라리 센 캐릭터가 되는 게 나은 거야. 그 직장에서, 일터에서,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호전적이 되고 공격적이 되고, 당하는 이 공격을 해야지,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거야." 이 세상은 끊임없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이 룰을 어기고 온갖 편법과 불법을 행하고 더티 플레이를 해도, 여러분은 룰을 지켜야 돼요. "그럼 나만 룰을 지키면서 어떻게 이기라는 거냐?" 그러나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것, 빛으로 어둠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 진리가 비진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줘야 되는 사명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제가 얘기하는 분은 알아도 안다고 하지 마세요. 제 형제를 오랫동안 케어하고 있는데, 회사가 너무 불합리한 거예요. 정말 불합리한 건 저도 얘기를 들어 보니까 참기가 어려울 정도로 불합리하더라고요. 너무너무 불합리한데, 이 형제가 세상의 생존 기술을 배웠던 사람이거든요. 어떻게 사람들을 압박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그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 가만히 있어라. 맞대응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하나님이 그거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을 참다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전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그냥 사표를 던지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했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인데, 두 가지를 하지 마셔야 돼요. 영적 전쟁한다고 호전적으로 싸우는 거, 그 싸움이 좋아서 싸우는 거거든요. 아니요, 그거 하시면 안 돼요. 또 한 가지, 제가 그 형제에게 얘기한 거는 "장렬하게 전사하지 마라." 그거는 자기만 멋있는 거지. 사표 딱 던지고 "내가 이런 데서 일해야 되는 줄 알아" 나가는 거, 그거 하지 마라. 끝까지 그 전쟁터에 서서 남아 있어야 된다. 그 전쟁터에 남아서 끝까지 버티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가서 그 조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돼야, 진짜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가 우리의 인생의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뛰어넘게 하셔서,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의 그 자리까지, 완성의 자리까지 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3.14(토) | 새벽기도 | 마 22:34-46(고대욱 목사님)
새벽기도 260314 "반쪽짜리의 신앙으로 살아갈 것인가?"
본문: 마태복음 22장 34-46절
설교자: 고대욱 목사
날짜: 2026년 3월 14일
[ 설교 요약 ]
본문은 마태복음 22장 34-46절을 중심으로 "반쪽짜리의 신앙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바리새인과 율법사의 모습을 거울 삼아 오늘 우리 신앙의 민낯을 점검한다.
1. 율법사의 시험 — 배우려는 질문이 아닌 넘어뜨리려는 질문 (34-36절)
사두개인들을 이기신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 모여 율법사를 보내 시험한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이 질문의 의도는 진리 탐구가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도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시험을 통해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신다.
2. 예수님의 답변 — 온 율법의 강령: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 (37-40절)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과 레위기 19장 18절("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을 인용하신다. 핵심은 두 계명을 "그와 같으니"로 연결하신 데 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3. 예수님의 반문 —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 (41-46절)
예수님이 먼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 답했지만, 예수님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해 반문하신다.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가 자기 후손을 향해 "내 주"라 부를 수는 없다. 메시아는 단순히 다윗의 자손(참 사람)일 뿐 아니라 다윗이 "주"라 부른 참 하나님이시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정작 메시아가 누구인지 절반만 알고 있었다.
결론 — 이 두 이야기는 하나로 수렴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이웃을 외면하는 신앙,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필요를 채우는 분 정도로만 바라보는 신앙은 반쪽짜리다. 머리에 있는 말씀이 가슴으로, 가슴의 말씀이 발로 살아질 때까지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 전문 스크립트 ]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도 온 마음과 생각과 뜻을 주님께 드리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 듣는 시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먼저는 말씀처럼 주님을 찬양하며 올려 드리는 기도를 함께 드리길 원합니다. 영화로우신 주님, 크고 높으신 주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나의 전 삶을 드리고 온 마음을 드려서 주님을 찬송합니다. 입술을 열어 고백합니다. 이 시간 높임을 받아 주시옵소서.
나의 삶에 등불이 되어 주시고 나의 삶에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순전하게 주님만 따라가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올려 드립니다. 그렇게 이 시간 주님을 찬양하며 함께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할렐루야. 주님, 오늘도 이 아침에 주님을 만나러 나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새벽을 깨어 아버지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 앞에 나오는 마음으로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온 삶을 들어서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아버지, 나의 인생이, 나의 평생이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찬송하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걸음이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 앞에 감사로 이어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이 시간 가운데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 주님께 감사가 없었다면,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 찬양이 없었다면, 주님, 오늘 이 시간 주님 말씀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고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 앞으로의 인생이 정말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만 감사를 올려 드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화로우신 주님, 크고 높으신 주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 나의 삶을 이끄시고 나의 삶의 주인 되시고 온 땅의 창조주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주님의 그 높으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 나 연약하고 부족한 이런 나를 살게 하시고 주님 앞에 나아오게 하시고 아버지의 자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인생이 이 고백을 놓치지 않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평생을 들어서 찬양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모든 일들이 감사로 시작되고 감사로 끝맺어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평생에 주님을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감사의 고백이 끊어지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아침에 우리가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심에, 예배할 수 있는 공동체를 허락하심에, 이 예배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입술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발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 찬양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그렇게 주님 앞에 끊임없이 무릎 꿇고 예배하며 기도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가운데 주님 앞에 한 사람의 예배자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마음, 전심을 다하여서 주님 앞에 예배하게 하시고, 그 예배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생생하게 말씀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가운데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이 모든 시간 가운데, 모든 평강 가운데 충만히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가운데 충만히 임하여 주셔서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주님 만나 주시고 만져 주시고, 우리 기도 가운데 충만히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모든 시간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기도할 때에 우리의 지난 죄들을 주님 앞에 자복하며, 이 시간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깨끗게 되기를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말씀이신 주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이 시간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아버지 앞에 꺼내어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임재를 구합니다. 이 시간 각 영혼에게 충만히 임하사, 모든 것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게 하시고, 또 말씀으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고 순결한 영을 부어 주시사, 모든 죄 앞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온전히 말씀으로 새롭게 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여, 한마음으로 다 같이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아버지, 이 시간 성령의 임재를 구하며 나아갑니다. 아버지, 이 시간 가운데, 이 공간 가운데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을 초대합니다. 아버지, 우리 각 영혼에게 주님 충만히 임하여 주시사, 이 시간 우리의 크고 작은 은밀한 모든 죄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자복함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아버지, 거룩하고 순결한 영을 부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아버지, 우리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더욱더 정직하지 못했던 그 시간들, 주님 앞에서 부끄러웠던 그 시간들을 주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 자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하신 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이전의 죄에 묶이지 아니하게 도와주시고, 주 앞에서 온전히 자유되는 그런 경험이 오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아버지, 나의 더러운 마음들을, 나의 죄된 마음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 주님 앞에 이 모든 죄들을 함께 고백하게 하시고, 그 고백 가운데 주님,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여전히 죄에 묶인 마음이 있다면, 죄의 굴레에 묶여 있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 이 시간 자유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앞에서 자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그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셨으니,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자유함 허락하시고, 주님 앞에 모든 걸 내려놓고 고백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성령의 임재를 구합니다. 각 영혼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또 세상 가운데 미처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이 시간 주님 성령의 빛으로 조명하여 주셔서 온전히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주님, 깨달아 행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시간 충만하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다친 마음들이 열리게 하시고, 모든 막힌 마음들을 제하여 주시고, 아버지 앞에 온전히 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끊임없이 깨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낮게 하시고, 그 낮아지는 마음 가운데 주님만 높여 드리며 주님의 말씀 가운데 귀 기울여 나아가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 뜨겁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주님을 더 찬양하고 높여 드리는 시간 되게 원합니다. 아버지, 임하여 주시옵소서. 만나 주시옵소서. 이 시간 가운데 무릎 꿇고 엎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엎드린 영혼들에게 아버지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상한 마음을 만지시고, 아버지, 말씀하여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회복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그렇게 일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높여 드립니다. 아버지, 영으로 오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립니다. 아버지, 이 시간 가운데 그렇게 주님의 임재를 보기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아버지, 말씀하여 주시고 보여 주시옵소서. 들려 주시옵소서. 이 시간 가운데 이끌어 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오늘의 예배를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 거하는 예배 되게 하시고, 그 가운데 주와 마주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근심과 걱정의 옷을 벗어두고 가장 낮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예배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만지시고, 오직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맡겨 주신 삶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선교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예배가 회복되고 아버지의 복음이 흘러가는 그런 시간이 되게 해 달라고, 이 시간 함께 결단하면서, 주여, 한번 무릎 꿇고 다 같이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주여, 이 시간 예배를 주님 앞에 올려드리며 기도합니다. 이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그 말씀을 이 시간 듣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가 오늘 눈앞의 편안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에게 보여 주시는 기업을 위하여, 이 세상 가운데 주신 사명을 다하여 나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예배가 회복되게 하시고, 나의 삶의 자리 가운데 기도가 회복되게 하시고, 가정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예배를 통하여서 나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전 삶을 드리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내가 가는 모든 그 발걸음이 선교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주님 찬양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단하는 시간이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주님께 남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주님,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우리가 흔들리지 아니하게 도와주시고, 오직 주님 앞에 정직한 마음으로 서게 하시고, 진리 앞에 서게 하시고, 그 진리 가운데 아버지,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예배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아버지, 거룩한 주님의 영을 찬양합니다. 주님 가운데 주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깊이 경험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나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받은 것을 나만 가지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나가게 하시고, 주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운데 성령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나온 모든 심령 가운데 주님, 이 시간 충만하게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신 주님, 오늘도 이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니,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 이곳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여 주시사, 모든 목마른 자들 가운데 성령의 단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자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여 주시사, 나온 모든 영혼들이 주님의 그 영광의 빛을 목도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함께하실 주님 기대하고 감사드리며,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
(찬양: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
우리를 보혈로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 다시 한번 감사와 찬양의 박수 올려 드립시다.
(찬양: 오직 예수 그리스도)
내가 세상을 사는 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모든 이름보다 더 뛰어나신 이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나를 사랑하시며 부르시는 음성,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삶의 끝까지 나의 길 인도하시리, 주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따르며 주의 길 가리라, 예수, 내 모든 것, 주 닮기 원하네. 주님을 높이며 영원히 찬양해, 예수, 주 닮기 원하네.
(찬양: 나의 평생에)
나의 평생에, 나의 평생에, 단 한 가지 소원, 주의 아름다우심 보며 사랑 노래하는 것. 나의 왕 되신 주님의 얼굴 구하며, 주 사랑 안에 머물며 사랑 노래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일하심을 날마다 고백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간 나의 왕 되신 주님을 더욱 높이는 예배 되길 소망하오니, 이 시간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아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찬양이, 우리의 모든 고백들이 주님의 영광을 더욱더 높여 드리기 원합니다. 주여, 이곳에 임하여 주옵시고 온전히 주님의 은혜로 덮어 주옵소서.
이것을 간구하면서 주여, 한번 외치며 다 같이 기도하며 나아가시겠습니다.
주여,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나의 아버지 되시는, 나의 전부 되신, 나의 왕 되신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은혜 없이는 난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이 시간 고백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오늘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이 하신 일들을 더 찬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더 선포하기 원합니다. 나의 현실에, 나의 상황에 매몰되어 절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눈을 들어 소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원합니다. 나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닫기 원합니다. 더욱더 감사함으로 나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왕 되심을, 주님의 일하심을 더 찬양하며 나아가기 원하오니, 주여, 나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아 주시옵소서. 모든 주님의 선하심을 더욱더 노래하는 이 자리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이른 아침부터 또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깨어 말씀 앞에 엎드리게 하시사,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그 은혜가 너무나도 큼을 발견하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오늘도 내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의 잔재들은 다 불태워 주시옵소서. 오직 은혜만 남는 귀한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감사함을 더욱더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히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한 찬양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기쁨의 은혜를 더하실 줄 믿사오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할렐루야. 좋은 아침입니다. 좋으시죠? 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34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함께 읽겠습니다.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아멘.
우리 암송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 함께 암송하시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오늘 우리의 삶이 정말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더욱 사랑하고 함께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34절에서 46절 말씀을 가지고 "반쪽짜리의 신앙으로 살아갈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렸을 때 저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호기심이 참 많은 아이였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참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이 굉장히 힘든 아이였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것저것 묻고 따지기를 좋아하고 또 질문들을 굉장히 많이 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학창 시절에 몇몇 선생님들께서는 그런 저를 보며 칭찬해 주셨어요.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고 이렇게 많이들 말씀해 주셨거든요.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좋은 질문 하나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듭니다. 또 좋은 질문 하나가 새로운 깨달음의 문을 열어 주기도 하죠.
그런데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모든 질문이 다 좋은 질문은 아닙니다. 때로 어떤 질문들은 배우기 위한 질문이기보다는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 삶 속에서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면, 회의 전에 좀 충분히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조용히 이렇게 확인해도 되는 질문들인데, 굳이 많은 사람이 있는 그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질 때가 있죠. 왜 그럴까요? 여러분,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요? 아니죠. 준비가 부족해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넘어뜨리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난처해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어떤 답을 요구하기보다는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이죠. 사람을 세우는 질문이 아니라 사람을 넘어뜨리려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한 이 한 율법사의 질문도 바로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34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아멘.
34절 말씀을 보면, 사두개인들까지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그런 소식을 이 바리새인들이 듣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한 곳에 모였어요. 왜일까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하기 위함이었어요. 진리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또다시 시험하기 위해서였어요.
35절은 그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죠.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이 원어 말씀을 보면요,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묻다"가 아닙니다. "시험하다"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란 거죠.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권위를 흔들고 꼬투리를 잡기 위한 시험이었다는 것이에요.
생각해 보면 마태복음 22장 전체가 그렇습니다.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이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하죠. 사두개인들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죠. 그리고 지금 이제는 율법을 잘 안다고 자신하는 한 율법사가 나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질문의 의도가 분명하죠. 무슨 대답을 하든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계명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 "저 계명이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 있고, 또 저 계명이 중요하다고 하면 또 다른 문제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죠. 이들은 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틀리게 만들기 위한 질문을 한 것이죠.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일까? 자신들보다 높아지고 있는 예수님의 권위와 영향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어요. 그렇게 예수님의 말을 트집 잡아 예수님을 계속해서 흔들고 계속해서 시험을 줬던 것이죠.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 만나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굉장히 힘드시죠. 지금 여러분들 표정인 것 같습니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 이렇게 싶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이 무너져요. 심지어 일상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세요. 왜? 이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질문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질문을 통해서, 이 시험을 통해서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37절에서 40절까지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아멘.
예수님이 먼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누구를 사랑하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요,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었어요. 경건한 유대인 가정이라면 정말 어렸을 때부터 늘 듣고 외웠던 말씀이었기 때문이죠.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아." 늘 부모님이 가르쳐 주셨던 말씀이요, 손목에 매고 이마에도 차고 집 문설주에 붙여 놓고 늘 소중하고 중요하게 외웠던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도 이 말씀이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죠. 그다음으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하며 얘기하시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요, 예수님이 둘째 계명을 그냥 얘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덧붙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와 같으니라"고 얘기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그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이란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 사랑이 드러나고 계십니까?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율법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근데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될 것은, 이 말씀을 들은 율법사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기록이 안 된 것이 아니라 대답을 못 한 것 아닐까요? 예수님의 대답이 정말 말씀의 본질이면서도 동시에 말씀 앞에서 있는 자신들의 삶을 꾸짖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니까요.
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이었어요. 누구보다 그렇게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그 율법이 말하는 본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삶에서 살아내고 있는가? 아니요.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속사람은 전혀 사랑이 없는 모습들로 살아갔어요. 형식은 있었지만 긍휼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지식은 있었지만 순종은 없었던 사람들. 말씀을 입으로는 말했지만 삶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반쪽짜리 신앙을 꼬집고 있는 말씀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그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참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가슴으로 내려온 그 말씀이 발로 살아지는 것이에요.
제가 예전에 섬겼던 그 교회 청소년부 여름 캠프 때 있었던 일이에요. 제가 섬기고 있던 그 청소년부 아이들과 이 말씀을 나누는데, 아이들이 말씀을 그냥 머리로만 듣지 않고 삶으로 경험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들이 제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한테 지혜를 구했죠.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갑자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후배 전도사님 한 분께 부탁을 드렸어요.
일부러 씻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낡은 옷을 입히고, 몸에 흑가루를 뿌리고, 젓갈 냄새가 많이 나게 하기 위해서 젓갈을 뿌리고 소주를 뿌린 다음에, 누가 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수련회 장소 근처를 이틀 동안 어슬렁거리게 했어요.
첫째 날에 교회 입구에서 그냥 앉아서 술병 들고 이렇게 앉아 있으면서 이러면서 이렇게 했던 거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걸게 하고. 또 둘째 날에는 점심에 갑자기 식당에 들어와서, 교회 식당에 들어와서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 "아, 배가 고픕니다. 밥을 좀 주십시오" 뭐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예배 때는 "나도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소리치면서 예배실로 들어오게 만들었어요.
여러분, 아이들 반응이 어땠을까요? 정말 아무도 맞이하지 않았어요. 몇몇 친구들은 캠프 기간 동안 저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전도사님 저 너무 무서워요, 어떡해요" 계속 물어봤었어요. 심지어 교사들 중에 몇몇 분들은 "수련회에 방해되니까 가라"고 돈을 쥐어 주시면서 저 멀리 가시라고, 교회 들어오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심지어 장로님 한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희 아버지셨어요.
그날 저녁 예배 때 그 전도사님이 이 차림 그대로 올라오셔서 설교를 하는데, 본인이 겪으셨던 이틀 동안에 느꼈던 감정들을 먼저 나누셨어요. 소외감, 외로움, 무시당하는 느낌, 교회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던 그 마음들. 그날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민낯이었기 때문이에요.
참 감사하게도 그날 아이들이 펑펑 울면서 정말 많이 회개하고 결단했어요. 그리고 그 이후에 청소년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서 따돌림 받는 친구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많이 말해요. 그런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합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해요. 내 기준 안에 들어오는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게 되면, 그 이상으로 불편해지면, 사랑이 멈춥니다. 냄새 나면 거리를 두고, 부담되면 외면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만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예배 시간에 이렇게 일찍 나와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죠.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말 뜻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사랑을 위해서 나의 편견과 지식들을 내려놓을 때도 있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행하셨던 것처럼. 머리에 있는 말씀이 가슴에 내려오기까지, 또 그 가슴에 내려온 말씀이 발로 살아질 때까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요, 대부분 바리새인들 또 사두개인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답변하는 그런 흐름 가운데 나아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매우 이례적으로 예수님이 먼저 질문하십니다.
41절에서 4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아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 완전히 다른 질문이죠. 이 질문은요, 이제 단순한 지식 테스트가 아니에요. 정말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 물으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이때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예,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7장 12절 말씀이나 이사야 11장 1절 등 구약의 말씀들을 보면 메시아가 다윗의 계보에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이 예언대로 메시아가 다윗의 계보에서 오실 것을 기대했어요. 특히 다윗과 같은 정말 멋진 왕, 위대한 왕, 다윗과 같은 구원자를 기대했습니다.
근데 문제는 무엇이냐? 그 기대가 너무 인간적이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건져낼 정치적인 메시아, 정말 민족적 영웅을 기대했던 것이죠. 메시아를 기대하게 했지만, 자신들의 기대 안에 있는 그 메시아, 그것에 메시아를 가두어두고 있었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이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꼬집으며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얘기하십니까?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얘기하죠.
그러니까 이걸 쉽게 말하면 뭐냐면, "너희 말대로 메시아가 단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자기 후손을 향해서 '내 주'라고 얘기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당시 사회가요, 철저히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신의 자손을, 후손을 향해서 "내 주"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죠. 그런데 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메시아를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만 보면 반쪽짜리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단지 위대한 인간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선생도 아닙니다. 백성을 고난에서 건져낼 단순히 정치적 지도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참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윗이 "주"라고 부르는 참 하나님이신 것이죠.
안타깝게도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것을 이 바리새인들은 놓치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정작 메시아가 누구인지 제대로 몰랐던 것이죠. 다윗의 자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윗의 주라는 사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율법도 안다고 했고, 메시아도 안다고 했지만, 정작 본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메시아의 그 참된 정체마저도 모르고 있는 그들이었던 것이에요.
결국, 지금까지의 이 두 이야기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반쪽짜리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신앙. 메시아를 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신앙.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이웃하고만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말 예수님을 내 삶의 주님, 정말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쩌면 내가 원하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건가?
예수님은요, 그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나의 자녀가 대학 진학을 잘 갈 수 있도록 길을 여시는 분, 나의 사업이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을 수 있도록 잘 되게 하시는 분, 나의 형편과 상황을 다 아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 이렇게만 생각하신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신다면, 반쪽짜리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분이시죠. 그리고 그거 충분히 공급하시고 돌보시고 채우시는 분이시죠. 우리의 삶을 너무나도 돌보시는 분이시죠.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란 거예요. 이게 전부가 아니란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반쪽짜리 신앙에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시면서 내 기대 안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걸 예수님을 가두는 신앙에만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머리로만 아는 신앙, 입술로만 고백하는 신앙, 필요할 때만 찾는 신앙, 그것을 넘어서시길 바랍니다.
어느 누구든 주님이 품으라 하시면 아낌없이 사랑하시고,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결단했으면 좋겠어요. 주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 사랑이 정말 주님이 필요로 하는 그 한 영혼까지 도달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머리로만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발걸음으로 살아내는 하나님의 사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주님을 내 필요를 채우시는 분, 그것으로 멈추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다윗의 주가 되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 왕의 왕 되신 주님을 내 삶의 진짜 왕으로 모시는 나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고백하며 나갈 때,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가 꿈꾸는 것 그 이상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을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반쪽짜리 신앙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살아 있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따르는 완전한 믿음, 온전한 신앙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고백하며 나가는 믿음의 자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먼저 기도할 텐데,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의 신앙이 말로만 하는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주변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그 한 사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기준에 맞는 사람하고만 사랑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과 지식에 머무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지극히 작은 자 그 한 사람까지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사람을 돌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시선이 있는 곳에 우리의 발걸음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정말 사랑으로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고, 우리 이웃을 회복시키고, 이 나라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내 삶에 펼쳐지게 하여 주소서. 이것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우리 주여,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님, 오, 할렐루야,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삶 가운데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십자가에 그 사랑으로, 아버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사랑으로 나를 살리신, 그 완전한 사랑을 알게 하신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내가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을 내 머리로만 알고 있었지, 내 가슴으로, 내 발로 살아내지 못했음을 이 시간 회개하며 나아갑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만 했음을 이 시간 회개하며 나아갑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만 붙잡고 있었음을 이 시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주님, 더욱더 품고 나아가길 원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그 한 사람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사람들을 더욱더 돌보게 하여 주시고, 눈물로 찾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모든 지식과 내 모든 지혜와 내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오늘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대하며 오늘도 섬기며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낌없이 베풀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말과 지식에 머물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더욱더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이 율법사의 삶이 아니라, 아버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기 원합니다. 주여, 십자가의 놀라우신 사랑의 힘으로 나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도 베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제 다시 한번 더 기도할 텐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놓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을 내 삶을 도와주는 분,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정말 내 가정의 문제를 해결받고, 내 직장의 그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주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필요할 때만 찾는 그 신앙 안에 머물렀음을 이 시간 회개하며 나갑니다. 예수님을 단지 도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 삶을 다스리시는 참된 왕, 나의 주님으로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을 행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영광받아 주옵소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고백하면서, 우리 주를 외치며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여,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원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필요에만 따라 살아가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을 인정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이 땅 가운데 창조된 것과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모두 주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이 시간 확신하며 나아갑니다. 나를 통한 아버지의 뜻이 있음을, 나를 통한 아버지의 계획이 있음을 이 시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주님,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 가운데 나의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더욱더 임하여 주옵소서. 더욱더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내 삶을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심을, 주님을 찬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주님을 왕의 왕으로 모시게 도와주시옵소서. 정말 내 삶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온전히 나의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든 선택과 모든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드러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을 받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땅의 필요를 구하는 삶이 아니라, 주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뜻을 구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눈물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나에게도 부어 주시옵소서.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나의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더 받게 하여 주소서.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주여,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나의 왕 되신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여, 십자가 앞에 우리의 삶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의 뜻을 구하며 나도 그 십자가를 따라가기 원합니다. 나도 그 십자가를 함께 지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희생과 나의 헌신과 나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도와 주옵소서.
회복이 일어날지어다. 두려움이 떠나가게 될지어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모든 것에 회복이 일어날지어다. 주여, 주의 권세로 행하는 모든 자리마다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게 도와주옵소서. 주의 영의 그늘 안에 어디서나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곳마다 위로하여 넘치게 도와주시옵소서.
2026.03.12(목) | 4321 WORSHIP |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요 20장 19-23절)
4321 OPEN WORSHIP [HOLY FIRE]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장 19-23절) | 이상준 목사 | 2026.03.12
설교 요약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 한가운데 오셔서 두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셨다. 이 평강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값을 치르신 뒤에 주시는 참된 평강이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막연한 소망 사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은 실제적인 승리의 선포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으며, 길이 있어도 길을 보지 못한다. 제자들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긴 문도, 닫힌 공간도, 제자들의 두려움도 뚫고 들어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리에도 찾아오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원수가 주입하는 거짓말과 두려움에 동의하지 말고, 만세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붙잡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 후 곧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평강이 우리 안에만 머무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흘러가라고 주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회복되는 바로 그 순간, 주님은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다. 믿는 자는 평강을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평강을 품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어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성령께서 영적 호흡을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두려움이 사람의 호흡을 막고 영혼을 질식시키지만, 성령의 바람은 다시 사람을 살리고, 안에 있는 불을 일으키며, 삶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성령의 호흡으로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평안과 위로를 나누는 수준을 넘어, 복음을 통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움에 갇혀 머물지 말고, 학교와 직장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평강과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로 흘러가야 한다. 예수 안에 참된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전문 스크립트
네, 1월과 2월에 동탄에 계신 1203교회 박시형 목사님께서 귀한 메시지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저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희가 다음 달 4월에는 4월 9일에 오픈 워십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모하는 마음으로 또 기도해 주시고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픈 워십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 또 현장에 계신 분들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도 성령 충만하고 말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3월에 이제 새 학기를 시작하는 우리 청소년들, 또 대학생들 응원합니다. 한번 응원의 박수 해 주시겠어요? 축복의 박수 해 주시고, 응원의 박수 해 주시고요.
또 저희가 방학 동안 일요일교회는 왜 방학이 있냐 물어보시는 분도 있는데, 여러분 새 학기 공동체를 시작하는 우리 서로에게도 한번 응원의 박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영이신 성령님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어요. 어떻게요? 불처럼 바람처럼. 그래서 강력한 바람으로도 임하시고, 또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임하셨죠.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묵상해 보면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가시기도 하고, 때로는 미풍처럼 감싸 안아 주시기도 하는 그런 성령의 임재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또 불로 생각해 보면 성령님은 때로 들불처럼 휩쓸고 가시기도 하지만, 모닥불처럼 따뜻하게 우리를 녹여 주시기도 하죠.
저희가 이번에 2월 달에 이집트 성지순례를 갔는데, 시내산이 있는 신나이 반도 꼭지점 지역은 상당히 추운 지역이에요. 광야 지역이기 때문에 밤에는 기온이 상당히 많이 떨어집니다. 겨울 시즌이기도 하고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다음 날 새벽에 1시 반에 일어나서 시내산을 올라가야 되는데, 전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박사님께서 숙소 호텔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에게 모이라고 하시더니 거기서 몸을 녹이시더라고요. 막 이렇게 어깨를 움직이시면서.
오늘 성령 하나님께서 따뜻한 임재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의 1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일 전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안식일이 저녁부터 시작되니까 안식일 전날 예수님께서 매장까지 되셨죠. 안식일이 지나고, 그러니까 안식일 전날, 안식일,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이게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전했어요, 안 전했어요? 전했어요. 그런데도 이 제자들이 반응이 없는 거예요.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잖아요. 그리고 와서 전했는데도 믿지를 않는 거예요.
여전히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서 그들이 있던 다락방의 문을 꽁꽁 잠그고 숨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정치적으로는 반란죄, 종교적으로는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당하셨는데, 종교적으로 신성모독죄는 종교계에서는 가장 큰 죄죠. 그리고 정치계에서는 반란죄, 이건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도 예수를 따르던 무리였기 때문에, 게다가 핵심 멤버였잖아요. 자신들도 체포되면 끌려가서 죽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던 거예요.
이번 고난주간 일요일교회 특새 주제가 뭔지 아세요?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제 본문을 계속 보다가 주제 문구가 될 만한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대제사장의 집뜰에서 여종이 베드로에게 두 번 했던 얘기,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두 번이나 부인을 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걸 부인을 아무리 해도, 부정을 아무리 해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잖아요. “난 예수님 몰라요. 난 예수님하고 함께하지 않아요.” 이거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예수의 사람이라는 걸 부인할 수 있나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지금 나가면서 “난 부모님 없는 셈 치고 살겠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달라지고 사라지지 않잖아요. 여러분, 두려움이라는 포비아에 사로잡히면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높은 곳에 데리고 올라가서 가끔 친구들이 엉뚱한 짓 하느라고 끌고 올라가서 “괜찮아, 괜찮아” 그런다고 괜찮아져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죠.
저희 큰아들 지성이가 지금은 아주 능해졌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충치가 생겨서 애들 그렇게 치카치카 하라 그래도 안 하잖아요. 그러다가 치과 가게 되면, “너 더 아프다” 아무리 얘기해도 안 하다가 이제 치과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드릴 소리, 그 드릴 소리가 너무 무서운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인데 하여튼 그때 6시에 끝나는데 5시 조금 전에 갔는데 애가 한 시간 내내 우는 거예요. 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통곡을 하는 거예요.
그 의사 선생님이 굉장히 친절한 분이셨거든요. 그런데 애가 계속 그렇게 통곡을 하니까 아무리 진정을 시켜도 진정이 안 되는 거예요. 선생님에게는 미안하고, 그런데 애가 왜 그렇게 통곡을 하는지 이제 저희 부부는 아는 거죠.
얘가 세 살 때였던 것 같아요. 동부이촌동에서 보도블록에서 달려가다가 엎어졌는데 이빨 사이에 혀가 물려 가지고 혀가 끊어질 뻔했거든요.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어린이 치과 병원을 찾아가서 아이를 낚싯바늘 같은 걸로 꿰맨 거예요. 엄마는 무서우니까 못 본다 그래서 제가 머리를 잡고. 그러니까 이 치과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요, 안 생겨요? 생기죠.
그러니까 이제 치과에 데려가서 충치 안 하면, 때우지 않으면 너 더 심해져, 더 아파, 밤에도 아파, 음식도 못 먹어, 이거 해야 돼, 해야 안 아픈 거야. 아무리 얘기를 해도 두려움이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여러분, 두려움의 바이러스가 영혼의 패브릭을 뚫고 들어오면 사람이 병이 걸린 것처럼 비정상이 됩니다. 귀신 씐 사람처럼 비정상이 됩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길이 있는데 길이 안 보여요. 그리고 소망의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제가 사실 굉장히 많은 두려움을 갖고 태어난 아이였는데, 제가 특별히 폐소공포가 있거든요. MRI 검사 통에 들어가는 걸 너무 싫어요. 죽기보다 싫어요. 그런데 하여튼 MRI 검사통에는 여러 번 들어갔던 것 같아요. “주님, 주님께로 가까이 갑니다” 그러고 들어가는 거죠.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도 불편감이 있어요. 작년에 튀르키예 성지순례를 가는데, 미리 저희가 가는 곳을 제가 자세히 연구를 해서 매주 토요일마다 성지순례팀들과 나눴거든요. 그런데 튀르키예에 지하 동굴 교회가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가는 데마다 지하 동굴교회예요. 어디는 막 지하 3층, 지하 4층,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데 있어요. 저는 그걸 상상만 해도 답답해서 기절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작년에 기도하고, 제가 그걸 나눠야 되니까 나누기도 하고, “하나님 제가 인솔 교육자로 가는데 이거를 저는 두려워서 못 들어가니까 여러분만 들어가십시오” 이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를 했죠.
여러분, 두려우면 사람들이 뭘 하냐면 negative mental rehearsal를 한다, 부정적인 정신적 리허설을 한다. 시험이 내일이에요. 그런데 시험이 중요한데, 시험 망치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안 돼, 이러고 이제 망치는 상상을 하는 거예요. 갑자기 시험지가 안 보여. 어려운 문제들이 잔뜩 나와. 시험 시간 마지막까지 쫓겨 가지고 답안지를 제대로 찍지를 못해. 이런 상상을 하는 거예요. 부정적 정신적 리허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튀르키예를 가기 전에 긍정적 정신적 리허설을 해야겠다. 동굴교회 들어가는데 “내가 주님과 함께 간다. 내가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에게 뭐가 도움이 될까. 초강력 랜턴. 그래서 초강력 랜턴을 하나 사 가지고 갔어요. 그것 하나만 해도 굉장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러나 그런 게 있다고 해서 이 포비아가 쉽게 해결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튀르키예 가서 제가 다 들어갔죠. 다 들어갔습니다. 할렐루야. 지금 생각해도 기적입니다.
여러분, 두려움 한가운데 아무도 도울 수가 없어요. 고3들 수능 시험장 들어갈 때 부모가 같이 들어가 줄 수 있어요? 친구가 가 줄 수 있어요? 선생님이 가 줄 수 있어요? 아무도 함께해 줄 수 없어요. 나 혼자가 해야 돼요.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함께하실 수 있어요? 주님이 함께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자리에 누가 오실 수 있어요? 주님이 오실 수 있어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꼭꼭 닫혀 있는 두려움의 공간 한가운데 서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오셨느냐, 이걸 또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예수님이 아직 천상에 오르지 않으셨기 때문에 육신을 갖고 계시는데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오셨냐, 공간 이동을 하셨냐.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처럼 부활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실 수 있게 된 거예요.
여러분,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생명의 시간에서 사망의 시간으로 보더라인을 넘어가면 돌아올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돌아오는 거예요. 이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으로 가도 저쪽으로 건너간 사람은 이쪽으로 못 돌아옵니다. 이게 생명의 시간에서 사망의 시간으로 건너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더라인을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신 분이에요. 할렐루야. 예수님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게다가 망자의 세계에서 산 자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영역도 뛰어넘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장벽과 모든 한계선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상담하다 보면 “제 자녀가 3년째 집에서 두문불출, 집을 못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자리에도 예수님은 뚫고 들어가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너무 공포감이 심하고 불안감이 심하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운전도 할 수 없고, 집 밖에도 나올 수 없고, 소그룹도 들어갈 수 없고 그런 상태에 빠지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그 한가운데 찾아가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글렀다. 난 이제 끝났다” 그게 아니라 그 한가운데 주님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원수가 “넌 끝났어” 그러고 두려움 가운데 몰아놓고 절망 가운데 몰아넣을 때 거기에 동의를 해 주면 돼요, 안 돼요? 동의해 주시면 안 돼요. 공감해 주시면 안 돼요.
제가 예전에 그거 많이 동의하고 공감하고 살았거든요. “그래, 난 그만 살아야 돼. 아, 그렇지. 그게 맞는 거야.” 이거를 하루에도 다섯 시간씩 묵상하면서 앉아 있으니까 사람이 영혼이 피폐해져요, 안 피폐해져요? 엄청 피폐해지거든요. 원수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원수가 우리에게 주입해 주는 그 가라지, 거짓말, 두려움, 이거를 받아들이고 그거를 영혼의 어둠의 양식으로 먹고살면 여러분 희한하게 그게 또 힘이 됩니다. 우울함이 힘이 돼요. 밤새 재즈 틀어 놓고 우울한 음악 들으면서 “아, 우울하다, 우울하다” 그러고 산다니까요. 제가 그러고 오래 살았거든요. 그렇게 살면 그게 나름의 어둠의 힘이 되는 거예요. 원수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어떠한 어두운 상황,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고 산 줄로 믿습니다. 다윗도, 느헤미야도, 다니엘도, 에스더도, 사도 바울도 원수가 주입해 주는 거짓말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움 받아들이지 않고, 믿음을 붙잡고 살았어요. 약속을 붙잡고 살았어요. 승리를 선포하며 살았어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걸 할 수 있어요.
제가 변했다 그러면 안 믿어 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은데, 진짜 저는 완전히 사망의 끝자락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내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 영혼의 만세반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62편 2절에 보면 오직 그분만이 나의 반석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의 만세반석” 만세반석이라는 것은 rock of ages, 영원한 반석이 되신다 그런 뜻이죠.
고린도전서 10장 4절 하반절에 보면 그 반석은 곧 누구시다?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의 반석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단조롭지 않나요? 세상 사람들이 “넌 도대체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니” 이런 질문을 들어 보시거나, “난 너무 단조롭게 사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화려하게 살아 보세요. 바람에 나는 겨는 굉장히 화려합니다. 드라마 같은 인생 살아 보세요. 피곤합니다. 드라마 난리도 아니잖아요. 그런 인생 살겠냐고요.
그런데 만세반석 되시는 주님 위에 살면 견고하잖아요. 일관되잖아요. 흔들림이 없잖아요. 그러면 단조로운 게 아니라 이것은 놀라운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인생을 50여 년 살아오면서, 여기 선배님들도 많이 계신데 제가 35년 정도까지는 새로움이 항상 어렵더라고요. 새로움이라는 게 저에게 항상 두려움이었어요. 새로운 환경에 들어간다, 새로운 시간 속에 들어간다, 이 새로움이 두려움이었어요.
새 학년에 올라가는 것, 새 학기, 또 새 선생님 만나는 것. 선생님들한테도 어려움을 많이 당해 봐서. “왜 너희 어머니는 안 찾아오시니?” 하여튼 뭐 촌지든 뭐든 뭐라도 드려야 되는데 아무것도 안 갖고 왔다고 선생님이 계속 괴롭히는 거예요. 새 선생님, 새 친구들, 새로운 과제, 새로운 사역, 새로운 책임, 새로운 직분. 과연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실패하지는 않을까. 비난받지는 않을까. 내 인생이 벼랑 끝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이런 불안감.
그래서 인생은 늘 평안과 불안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미래를 모르잖아요.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은 존재적 불안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불안 덩어리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도심 한가운데를 걸어가다가 싱크홀이 나타나요, 안 나타나요? 그건 걸어가는 사람이든 운전하던 사람이든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싱크홀이 나타나는 거잖아요. 늘 타고 다니던 지하철에 갑자기 지하철 참사가 나는 경우, 그건 내가 어떻게 예상을 하겠습니까? 평지의 끝이 벼랑 끝이 될지를 사람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위로부터의 샬롬, 그 평강은 세상의 모든 평안과 불안의 이 불균형한 지형을 상관하지 않으세요. 할렐루야.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마치 밤새 소복이 내려 쌓이는 눈처럼, 높은 빌딩이든 작은 초가집이든 길바닥이든 그냥 눈은 다 덮어 버리는 거잖아요. 여러분, 하늘의 샬롬이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을 덮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세상은 변화무쌍한데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원성으로 우리의 시간 세계를 덮어 버리시는 거예요. 그분의 무소부재하심으로 우리의 공간의 제한성을 덮어 버리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내 영혼의 홈베이스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야구 경기를 보면 굉장히 영적인 게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냥 계속 달려가는 게 아니라 홈으로 돌아오잖아요. 인생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 같지만 홈베이스를 밟고 다시 돌아오게 돼 있죠.
우리가 시간 여행자로 살아가다가 이 시간이 끝나면 어디로 돌아가요? 우리의 원점, 우리의 홈베이스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잖아요. 여러분, 예배의 자리는 홈베이스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영원토록 진실하시고 영원토록 선하신 하나님, 그분이 내 영혼의 홈베이스가 되어 주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요. 하루가 성공을 했든 하루가 실패를 했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너무너무 감사한 거잖아요. 나의 기쁨을 나눌 수 있고, 나의 슬픔도 나눌 수 있고,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는 홈베이스가 있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 놓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갈 집이 있고 늘 애착의 장소, 애착의 대상이 있다는 게 참 귀한 것이구나.
요즘 사람들이 애착 인형 갖고 다닌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애착 아이템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애착의 대상이 있거나. 이게 심하면 이제 중독이 되는 건데.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애착 아이템을, 현대 사회 기계문명 사회에서 애착 아이템을 좋아할까. 세상이 너무 변화무쌍한 거예요.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심리가 현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강한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아이템이 있어도 괜찮아요. 집에 가서 없애라는 거 아니에요. 그런 아이템이 있을지라도 여러분, 늘 변함없이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게 너무너무 감사한 거죠.
그러므로 나의 영혼아 평안할지어다. 나의 영혼아 평안할지어다. 나의 가정도 평안할지어다. 한국 교회 평안할지어다. 아멘.
성경에서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한다고요?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 9장 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아멘.
예수님이 오시기 7세기 전에 이런 예언을 했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죠.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영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나 놀랍습니다. 이사야 예언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의 인생 한가운데 찾아오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어지는 20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이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갑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어요. 이거 왜 보여 주셨을까요?
“진짜 나다. 내가 부활했다고 여인들이 이야기하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얘기하는데 왜 안 믿니. 나다. 내가 살아 있다.” 이렇게 신원 확인해 주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identity를 해 주셨는데, 제가 이 본문을 사실 참 좋아해서 많이 묵상했는데 오늘 새롭게 깨달은 게 있어요.
예수님이 “진짜 나다” 이렇게 신원 확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면 이게 굉장한 의미더라고요.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진짜 평강의 왕이 되신 거예요. 진짜 평강의 왕이 되신 거예요.
가령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아빠가 월급을 타서 마음이 넉넉한 날 가족들을 데리고 평소에 좋아하던 맛집에 데려가서 외식을 하면서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먹어라” 그러면 음식이 다 공짜예요? 자녀들에게는 공짜죠. 자녀가 돈을 안 내니까. 그럼 누가 돈을 내요? 아빠가. 누가 값을 치러요? 아빠가 값을 치르는 거예요. 그런데 자녀들은 공짜로 마음대로 누리는 거예요. 누가 희생을 해서? 아빠가.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 되신 것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인 거예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남유다가 멸망의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이제 곧 심판이 온다 그러는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아무런 대가 지불도 하지 않고, 아무런 희생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러잖아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피값으로, 그분의 생명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짜 평안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어둠과 저주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이 놓임을 받는 것은 더 이상 어둠의 영역이 나를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여기서 누리는 참된 자유와 평강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된 줄로 믿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더불어서 사망 권세만 이기신 것이 아니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 말씀 읽어 볼까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어요. 그런데 죽는 척을 하신 게 아니잖아요. 죄값을 대신 지시는 척을 하신 게 아니고 쇼를 하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사망 이후에 음부의 세계로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거기까지 가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사탄과 그 지하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고 돌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은 세상 권세를 이기셨고, 사망 권세를 이기셨고, 음부의 권세까지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놓으시고 “평안해도 돼” 이 얘기를 하시는 거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야, 평안한 척하는 게 좋은 거야” 이런 얘기 하시는 게 아니라고요. 내 인생의 모든 영적인 상황 정리를 해 주시고 나서 그분이 가서 피 터지게 혈투를 벌이신 거잖아요. 정말 피를 흘리신 거잖아요. 생명을 쏟아부으면서 그 영적 전쟁을 다 이기고 돌아오셔서 “내가 다 해결했다. 평안해라” 이 말씀을 하시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이 평안의 선포가 놀라운 것이구나. 놀라운 것이구나.
제가 상담을 하다 보면 갑자기 우리 아빠들이 생각이 나서. 아빠들이 밖에서 정말 전쟁터 같은 인생을 살거든요. 그렇게 혈투를 벌이다가 집에 와서 갑옷을 벗으셔야 되는데 갑옷을 못 벗고 집에서도 딱딱하게 하다가 “당신은 왜 그래” 그러고 혼나는데. 여러분, 전쟁터에 갔다 온 거예요. 아빠들을 사랑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빠들이 그렇게 나가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집안이 평안한 거예요. 이 평안이 그냥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평안이라는 거예요.
이어지는 2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이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너무나 감사한 선언이죠.
이 선언을 해 주신 것, 이것이 주님의 죄 사함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이미 상황 정리를 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주님은 명확한 확신을 갖고 선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빠들 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가 21세기에 이런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게 뭐예요? 여러분, 우리 선조들이 피 흘려 조국을 지킨 거잖아요. 제가 늘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서 을지문덕, 강감찬. 저 역사를 너무 좋아해요. 독립운동가들과 이름 없이 나라를 위해,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린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잖아요. 지금도 최전선에서, 후방에서 헌신하는 군인들의 헌신이 있는 거잖아요. 그 헌신과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에 21세기 대한민국의 평안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가 지불이 없이, 희생이 없이 평안은 없는 겁니다.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면서 “아무 일 없어서 평안하다” 그건 폭풍 전의 고요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평안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사망 권세를 해결하고 이기신 줄로 믿습니다. 지옥문이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주님이 한계선을 그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시편 104편 9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경계를 나누셔서 넘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영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면 지옥에 있는 그 어둠의 권세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판을 치고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큰소리를 쳐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역에는 넘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한계선을 그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마치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땅에는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 것과 같은 거예요.
시편 121편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낮에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에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낮에 해도, 밤에 달도,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국제 정세로 이야기하자면 해는 이집트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태양신을 섬기는 이집트, 그리고 다른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은 전부 달 모양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메소포타미아 쪽, 바벨론을 얘기하는 거죠. 동방과 서방의 강대국 틈바구니에 있어도 하나님이 정말 작은 충청남북도 사이즈밖에 안 되는 이스라엘을 눈동자같이 지켜 보호하시면 적의 세력이 넘치지 못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신입생이고 저학년이고 어린 나이일지라도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아멘.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되 “평안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값을 지불하셨고 그 영역을 승리의 영역으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자들, 세상의 권력자들, 세상에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어떠한 사람들일지라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미지의 영역,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때 두려움과 새로움이 이퀄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기를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 문장 한번 같이 읽어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은 평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얻은 평강입니다. 아멘. 아멘.
그래서 이게 공짜로 “아, 평안하면 좋겠다” 이런 소망 사항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값을 지불한 거예요. 정당하게 값을 지불해 주신 거예요. 그분이 이미 얻으신 거예요.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 21절을 다시 보여 주시면, 제가 이 21절을 볼 때마다 “참 주님은 마음도 급하시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 번 얘기해 주셔 갖고 너무 좋다 그랬더니 갑자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잠깐만요. 조금 회복하고 쉬고, 그다음에 파송하셔도 될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제가 이걸 묵상하다가 왜 주님이 이렇게 얘기하셨을까. 제가 설교문은 써 놨는데 여기 와서 찬양하다 묵상해 보니까 또 다른 생각이 났어요. 그게 뭐냐면, 여러분 제자들은 지금까지 완전히 쫄아 가지고 두려워하고 위축돼 있다가 이제 주님이 나타나서 “야, 내가 승리하지 않았냐?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지 않았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이 살아난 걸 보니까 우와, 이제 다시 소망이 생기고 어깨가 펴지고 숨이 쉬어지고 했겠죠.
그런데 딱 그러자마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잠깐만요. 조금 한숨 돌리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러겠지만, 여러분 하나님 입장에서, 예수님 입장에서는 역사를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리신 거잖아요. 신구약 중간기로만 봐도 400년을 기다리셨고, 이스라엘 역사가 세상의 열방에 소망의 통로, 구원의 통로가 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몇천 년을 기다리셨잖아요.
예수님의 마음에는 “야, 이제 반전됐으니까 바로 나가자” 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냥 아멘을 하고 싶어 하지 않네. 나가고 싶지 않아요. 가만히 앉아서 “이곳이 좋사오니” 그러면 평안한 게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함께 나눴지만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그 나귀 새끼는 아직 짐을 져 본 적도 없고 사람을 태워 본 적도 없는, 말하자면 그 나귀 새끼의 라이프타임으로 놓고 보면 아직 때가 안 된 거잖아요. 때가 안 됐는데 주님이 쓰신 거잖아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주님이 급하신 거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영원하신 주님이 딱 33년 이 땅에 오셨고, 3년의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마지막 일주일에 딱 하루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거잖아요. 그때 그 나귀에게, 나귀 새끼에게 “내가 너가 필요하다.” “저는 제가 되지 않았는데요. 조금 기다려서 1년 뒤에 오세요.” 이게 가능한가요?
그래서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그때 아멘 하세요. 아멘을 하셔야 돼요.
예수님이 이제 좀 숨이 쉬어지는 제자들에게 바로 파송의 메시지를 하신 이유가 뭘까 이렇게 묵상을 해 보니까, 썰물이 밀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더라고요. 한순간에 바뀌는 거예요. 한순간입니다.
제가 예전에 제부도에 집회를 하러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제부도는 물때 시간표가 있죠. 하루에 두 번 길이 열립니다. 바닷길이 열려요. 그래서 그 시간에 들어가야 되고 그 시간에 나와야 돼요. 다 알고 계시죠. 오늘로 검색을 해 보니까 오늘은 하루 종일 열려 있더라고요. 놀라운 날이에요. 이럴 때 마음대로 들락날락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바닷물이 썰물에서 밀물로,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는 건 한순간입니다. 어부들이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 줄 아세요. 딱 그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바로 나가는 거예요. 운동 경기를 할 때도 전세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뀝니다. 그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을 때 밀어붙여야 되는 거예요. 인생도 막 죽을 것 같은데 갑자기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면 다시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 이런 말 하잖아요. 이게 그냥 사업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부들이 조업을 하면서 나온 얘기잖아요. 신앙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뭘 얘기하시는 거냐면, 주께서 부활의 승리, 이 놀라운 승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불안이 평안으로 바뀌는 그 순간, 썰물이 밀물로 바뀌는 그 순간, 그때 나가는 거다. 그때 흘러가야 된다. 그때 세상을 바꿔야 된다. 그때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평강이 임하면 나아가겠습니다. 평강이 임하면 흘러가겠습니다. 네.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거예요. 그 평강이 우리 가운데 딱 임하는 순간 흘러가야 된다, 이 얘기를 하신 거예요.
이어지는 2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받으라” 그냥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을까?
여러분 사람이 불안, 공포, 두려움이 몰려오면 호흡부터 곤란해지게 돼 있어요. 호흡이 짧아지고, 호흡이 짧아지면 산소가 부족해지잖아요. 산소가 부족해지면 머리가 하얘지고,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고, 판단력이 흐려지고, 불안도가 급상승하죠. 그럴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평강은 이미 대가 지불을 하고 명확하게 주신 것이라는 것, 이거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 이걸 선포하시고 take a deep breath, 깊이 숨을 쉬시면서 “성령님 임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내 안에 임하여 주옵소서” 고백하셔야 돼요.
창세기 2장 7절 읽어 볼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잘 먹이고 때 빼고 광내고 해도 사람이 몸뚱아리로만 살 수 있어요? 아니에요.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의 호흡이 있어야 사는 거예요. 세상 지식만 채운다고 되지 않아요. 감성적으로 나를 막 즐겁게 해 주고 풍요롭게 한다고 해서 살 수 없어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성령의 호흡이 내 안에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뭐예요? 루아흐. 루아흐라는 단어가 세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호흡, 성령이에요. 그래서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시면 영적인 호흡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온갖 기 수련, 마음 수련, 요가, 이런 것들 호흡법 가지고 하잖아요. 여러분 세상 호흡법으로 마음의 평강을 누리겠다 그러다가 이상한 영들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성령의 호흡이 여러분 안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내적인 호흡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평안해지게 돼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 놓고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산불이 날 때 보통은 이 산불을 잡기가 어려운 때가 언제냐면 강풍이 부는 시즌이에요. 건조할 때뿐만 아니라 강풍이 불 때요. 여러분 왜 강풍이 불면 산불이 더 강해지는 줄 아십니까? 물론 불씨가 옮겨 다니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중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연소에 필요한 산소가 다량 공급되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렇게 상상을 했는데 진짜 찾아보니까 딱 그렇더라고요. 산소가 어마어마하게 공급되니까 연소의 속도, 연소량이 어마어마하게 급증한대요. 그래서 바람이 초속 6m로만 불어도 연소 속도가 급상승하면서 산불이 26배로 확산되게 돼 있다고 해요.
여러분 성령의 바람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서 성령의 불이 여러분 안에 26배로 강력해지는, 30배, 60배, 100배 강력해지는 그런 심령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
제가 상당히 어렸을 때 우울도와 불안도가 높은 아이로 태어났거든요. 늘 예민해서 보는 것도 예민하고 듣는 것도 예민하고. 예민하니까 하루에 한 사람만 만나도, 두세 시간 만나고 나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요. 집에 와서 쉬어야 되는 거예요. 하루에 10시간, 12시간을 자도 피곤했어요. 그래서 너무너무 인생이 힘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밖에 많이 돌아다닐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도 많이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디 가서 나서기도 싫은 거예요. 어디 구석에 앉아 있는 거예요. 여기 뒤에 앉아 계신 분들이 계시는데, 어디 가나 기둥 뒤에 안 보이는 데, 이렇게 구석에 날 불러내지 않을 만한 곳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중3 때 우울과 자살 충동의 늪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신 이후로 자꾸 저에게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라, 사랑을 전해라, 내가 너를 살리고 싶다고 얘기해 줘라. 저는 어디 구석에 있고 싶습니다. 아니, 가서 해라. 가서 얘기해라.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마이크 잡고 얘기하는 건데, 안 믿어 주시겠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설교를 길게 하냐 그러시겠지만, 이게 길게 하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셔서 하는 거예요. 믿어 주세요. 갑자기 변명이 됐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중3 때 그렇게 완전히 바닥에서 살다가 3년 동안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공부하고, 공부할 수 없는 애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적처럼 지혜를 주셨거든요. 그래서 공부 열심히 했는데, 그러나 그 3년 동안 친구를 거의 만나지 않았어요. 인간에게 실망하고 저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3년 동안 하나님하고 친구 삼아서 살았어요. 극장에 갈 때도 하나님하고, 미술관에 갈 때도 하나님하고, 등교할 때도 하나님하고 대화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집에 오는 5분 동안의 거리도 주님과 대화하고 그러고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올라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불안도가 없어지지 않아요. “사람하고 어떻게 대화를 해야 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어디 구석에 그냥 숨어 있고 싶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자꾸 “나가서 복음을 전해라.” 대학교 1학년, 2학년 교양 영어 수업이 필수가 있는데, 그 교양 영어 수업 네 개 반을 돌아다녔어요. 저희 같은 기수의 영혼의 친구들이 한 120명쯤 있었는데 네 반을 돌아다닌 거예요. 자기 반이 정해져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반을 돌아다니면 새로운 친구를 만나야 되니까 제 기질상 완전히 부담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이번 학기는 다른 반에 가서 다른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라.” 제 기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거잖아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나가면 또 쭈뼛쭈뼛하거든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계속 시키셔서, 등 떠밀어서 계속 그러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여러분 그때 제가 순종을 안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공부만 했으면 성적은 더 올랐을 수도 있죠.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너 공부만 해. 무슨 아침 큐티 모임이야, 무슨 학교 기도 모임이야. 너 공부나 해” 그렇게 키워 보세요. 계속 어떻게 되나.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나님은 이야기하시고, 친구들을 도와줘야 돼. 친구가 지금 우울증에 빠져 있지 않니. 친구가 학교를 그만두려고 하지 않니. 친구가 공부를 어려워하고 있지 않니. 너 가서 도와줘야지. 그런데 도와주려고 선한 마음을 조금 가지면 엄마가 벌써 눈치를 채요. 엄마가 전능자이시거든요. 다 알아요. “너 딴생각하고 있지? 너 시험 전날 어디 가고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애들을 가르쳐 놓으니까 애들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는 거예요. 영혼을 쪼그라뜨려 놓는 거예요. 그리고서는 성공하래요. 뭐가 성공인데요? 성적 잘 받고 여러분 지위가 높아지고 연봉 높으면 성공이에요? 그리고 나가서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미칠 줄 몰라요.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되는지, 어떻게 사람을 섬겨야 되는지, 어떻게 사람을 살리고 조직을 살리는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성공하래요. 어떻게 성공하나요.
애들이 그니까 그렇게 해 갖고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나한테 자꾸, 난 이거 싫은데 자꾸 이걸 시키시지? 나 혼자 구석에서 공부하고 싶은데. “야, 너 훌륭하게 시험 자료 만들어 가지고 친구들한테 다 나눠 줘. 그렇게 해서 전도해야지.” 그래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나눠 준 족보가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나는데도 후배들이 보고 있더라고요. 그 족보에 기도문 써 놓고, 족보에 성경 구절 써 놓고. 아주 좋은 시험 자료를 만들어 놓으면 안 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세월이 20년 지나고 25년 지나니까 제 대학 때 친구들이 연락이 와요. “상준아, 우리 아이가 우울증이 있는데, 우리 가정이 지금 어려움이 있는데 상담해 줄 수 있겠니? 내가 그 교회 가면 안 되겠니?” 그렇게 인생에 정말 힘들었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여러분 축복의 통로라는 게 뭡니까? 내가 세상에서 직선으로 수직 상승해서 올라가면 사람들이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성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건가요?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는 그냥 내 일도 하기 바쁜데 왜 자꾸 저 사람이 보이게 만드시지?” 직장에서 남의 일 함부로 간섭하면 안 되거든요. 그거 알아요. 아는데, 하나님께서 자꾸 보이게 만드시고 도와주라고 하시고.
여러분, 공부하다 말고 “내일 시험인데, 지금 공부 어려워하는 친구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그러면 그거 도와줘야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가만히 놔두잖아요. 계속 공부만 하다가 나중에 호흡 곤란 오는 애들, 강박불안장애, 공황장애 오는 애들. 저는 그런 애들을 상담하잖아요.
“내 애는 공부만 해도 그렇게 안 되던데요.” 그러다가 30대, 40대 때 직장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 오고 공황장애 오고, 우리나라 최고 로펌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스펙을 가진 변호사가 급사하고.
여러분 인생을 왜 사나요? 뭐가 성공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새로운 학기가 시작이 되고 아이들에게 “야, 이번엔 좀 공부 좀 집중해서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해.” 그렇게 해서 애가 공부를 잘하면 인정받고 평안하고 자신감이 넘칠까요?
제가 “두려움 너머의 삶”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했는데, 너무 공부를 안 해도 이쪽 끝 벼랑에 걸치지만,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도 반대편 벼랑에 걸치게 돼 있어요. 완벽주의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꿈꾸는 불가능한 꿈이거든요. 그러면 그 벼랑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사업가들, 공부하는 사람들, 학자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도, 자녀들도 운신의 폭을 좁혀 가면서 사는가.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교실에서 성령의 호흡이 임하게 하여 주시고, 아멘. 평강이 임하게 하여 주시고. “야, 이제 평강이 임했으니까 흘러가. 제가 이제 평강이 임했는데요?” “바로 흘러가. 흘러가야 너도 살고 세상도 사는 거야. 세상만 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살리고 싶어서 흘러가라고 하는 거다. 너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큰일 나. 다시 썰물 시즌 오고, 너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야, 지금이야. 지금 일어나서 나가야 돼.”
“저는 어떻게 전도할 줄도 모르는데요.” 제가 전도 관련해서 새신자 묻다 책을 썼잖아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말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모르는 질문을 할까 이게 너무 두려운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이 자꾸 떠미시니까. 그래서 모르는 질문에 “어, 난 할 말이 없어” 해서 무안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창피를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말도 못 하면서 뭐 성경도 잘 모르면서 네가 뭘 나한테 얘기하겠다는 거야” 온갖 모욕도 당해 보고. 그런데 계속 등 떠미시니까.
여러분 왜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계속 갇혀서 살아야 됩니까? 직장에서, 가게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여러분 성령의 호흡과 평강이 임할지어다. 그리고 바로 흘러가게 될지어다. 바로예요, 바로. 그냥 내 안에 내 콘텐츠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임해서 그냥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이걸 막냐고요.
인렛, 아웃렛이라고 하잖아요. 인렛으로 들어왔으면 아웃렛으로 나가야 되는 거죠. 예수님의 피값으로 쟁취된 평강이 이제 우리 안에 흘러넘쳐서 강물같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학교에 있는 친구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직장에 있는 동료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가게를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손님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내 주변의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마지막 2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다. 여러분 그러면 내 안에 평강이 임했어요. 평강이 그냥 흘러가는 정도로 은혜가 임했어요. 은혜가 흘러가는 정도의 영향력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영적 관점에서 놓고 보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이잖아요. 생명의 능력과 권세가 여러분에게 임한다는 거예요.
지난 코로나 팬데믹이 더 큰 팬데믹의 전조 증상이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앞으로 이것보다 더 무서운, 전 세계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만한 팬데믹이 왔다고 상상을 해 보세요. 온 세상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여러분 손안에 치료제가 들어왔어요. “제게 치료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할 때 “여러분 혹시 안 믿고 거절하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히시겠어요? 아니면 기쁘게 나눠 주시겠어요? 당연히 기쁘게 나눠 주는 거 아닙니까?
우리 안에 그냥 하나님의 평강이 흘러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생명의 권세가 임하게 된다는 거예요. 축복의 통로가 될지어다. 생명의 통로가 될지어다. 구원의 통로가 될지어다. 아멘.
그래서 절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새 학기, 새 학년에 “공부만 해라. 야, 올해는 좀 공부만 하자” 이런 얘기하지 마세요. 자녀들이 학교 기도 모임을 하는 것, 자녀들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는 것,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들은 학부모 기도 모임. 여러분 학교마다 학부모들 기도 모임이 형성되고 있거든요. 요즘 우리나라 엄마들이 강하잖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학부모들 기도 모임도 생기고, 대학교에도 학부모 기도 모임이 생기고. 할렐루야.
직장인들은 “아, 내가 내 일만 하지. 그냥 내 직급만 생각하지. 연봉 더 주면 다른 데로 옮기면 되지.”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동안 여러분의 회사에서 사람들을 축복하는 시냇가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하프타임 신회예배를 거예요. 숨지 마세요. 흘러가세요. 흘러가지 않으면 세상의 어둠의 흐름이 여러분을 염려할 겁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선한 흐름으로 흘러가세요.
흘러가라고 그러는데 “저는 아직 모르는데요. 성경도 잘 모르는데요. 복음도 설명할 줄 모르는데. 질문하면 난 대답할 말도 없는데요.” 이런 것은 여러분의 생각이고, 하나님께서 그냥 흘러갈 때가 됐다, 썰물에서 밀물로 타이밍이 지금 바뀌었다, 지금이다, 지금 들어가야 된다 말씀하시면 순종하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축복의 통로로 흘러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했으면 좋겠는데요. 마지막 찬양했던 “예수 안에 소망 있네” 우리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예수님이 주신 소망과 평강이라는 게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 주시고 합법적으로 취득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구나. 나는 공짜로 얻었지만 예수님은 값을 지불하셨구나. 그래서 우리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냥 희망 사항이 아니라 참된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2026.03.08(주) | 주일설교 | 나를 통해 주님의 뜻 이루소서 (딤전 1:3-11)
[1516 주일설교] 나를 통해 주님의 뜻 이루소서 (딤전 1:3-11) ⎟ 이상준 목사 ⎟ 2026.03.08
설교 요약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을 막고 교회를 바른 말씀 위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에베소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자 교회였고, 그만큼 영적 공격도 강했다. 거짓 교사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며 성도들에게 변론과 우월감만 만들어 냈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지 못했다. 말씀은 자기 자랑과 논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교훈의 목적이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말씀 사역의 열매여야 한다. 성경 지식이 많아질수록 삶이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중적인 종교인이 되기 쉽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진실하게 반응하고, 말씀대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은 우리를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하게 하며 생명을 살리는 도구다.
또한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운 척하는 사람을 치장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들과 사람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을 열거하며, 인간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복음은 정죄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도 복음의 능력 밖에 있지 않으며,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죄의 본성과 유혹을 넘어서는 삶을 살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말씀은 고인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생수처럼 사람을 살려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시며, 내게 맡기신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배우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되도록 살아가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네, 오늘 설교의 제목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나를 통해 주님의 뜻 이루소서. 디모데전서 강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겨 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오늘 내용입니다. 3절과 4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다기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로마에 2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그가 열심히 심혈을 기울여 세운 초대교회들을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풀려나자마자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를 향하게 됩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빨간색으로 박스가 돼 있는데 항구 도시고 인구가 30만인데, 당시는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소아시아의 수도 역할을 했고 로마의 5대 도시들 중에 하나였어요.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이 됐잖아요. 그래서 이탈리아 제국의 심장인 로마, 그리고 소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 그리고 시리아 지역의 수도인 안디옥, 안디옥은 이제 안티오코스 왕조에서 세운 거죠. 그래서 안티옥입니다. 그리고 이집트 북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까지 5대 도시 중에 하나였어요.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보통 어느 한 도시를 가도 한두 달, 길어야 세 달, 여섯 달 이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무려 3년 동안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전도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 양육을 한 교회, 이 교회가 어느 교회요? 에베소 교회인 거예요.
너무너무 중요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기독교의 부흥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나서 고대 7대 불가사의라고 불렸던 아데미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입니다. 들어보셨죠? 아르테미스. 그 아르테미스 신전의 사업이 파리가 날리게 된 거예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아지니까 신전 사업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 그러고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죠.
그러면 이렇게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릴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은혜가 넘치면 영적인 회방의 역사도 강해지게 되죠.
에베소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센터 역할을 하게 되자 여기에 유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많이 모이게 됐어요. 바울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단들에게 넘겨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교회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교회들도 둘러봐야 되니까, 그래서 마음을 결정한 게 가장 신뢰하는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두기로 결정한 거예요.
그럼 이단이 도대체 뭘까? 할렐루야. 제가 말이 꼬일 때가 있는데, 이단이라는 것은 영어로 이제 heresy라고 하는데, heresy라는 말 자체가 hetero라는 단어하고도 같은 어원을 가지며 다르다는 뜻이에요. 어떤 뜻이요? 다르다.
정통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이야기하거나 그 교리를 설파하는 교파, 교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단은 영어로도 헬라어로도 다르다는 뜻이에요.
한자로는 다를 이 자에 끝 단 자입니다. 그래서 끝만 다른 거예요. 거의 똑같아요. 그런데 끝만 달라요. 조금 달라요. 그러니까 여러분, 분별하기가 쉽겠어요? 어렵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는 이단 종파들도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이 넘어가 있어요. 목회자들도 넘어가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왜 멀쩡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이단에 빠지는 것일까? 보면 굉장히 소외돼 있었던 사람인데 밀착 케어를 해 주니까 가는 사람도 있지만,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다고 하다가 빠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 비슷하잖아요. 집밥이 뭐 똑같죠. 그러니까 뭔가 신박한 가르침이 없을까, 이런 걸 쫓아가다가 빠지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여러분, 외부 세미나나 성경 공부나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교회 리더십들하고 꼭 상의를 하셔야 돼요. 아무도 반응이 없는데, 상의를 하셔야 돼요.
가끔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이 단체가 건강한 단체입니까, 아니면 이단입니까? 그렇게 저한테 물어보시면 저도 대부분 찾아봐야 돼요.
그럼 제가 뭘 찾아볼까요? 지난번에 리조이스 집회를 했던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님이라고 계신데, 그분이 매월 월간지로 발행하는 현대종교가 있어요. 현대종교 온라인 사이트가 있습니다. 왜 기독교 사이트인데 현대종교냐? 현대에 있는 굉장히 이상한 다양한 이단 사이비 종교들을 다 여기 정리해 놓은 거예요. 매번 업데이트도 해 주고.
그래서 여러분도 이걸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단 이단성이 있으면 저는 권면하기를 참여하지 마시고 예의주시하십시오. 이상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예의주시. 이 단어를 기억하세요.
예의주시라는 것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시라는 거예요. 그러면 몇 년 안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요즘 인기 있고 뜨는 강사나 단체가 있을지라도 여러분 주의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의를 하실 필요가 있어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오늘 본문에 보니까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했다. 유대인들이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로마인도 헬라인도 아닌데 웬 신화에 빠졌을까?
이 얘기는 뭐냐 하면, 구약 성경에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의 족보를, 성경에도 안 나온 족보를 막 자세하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영웅적인 스토리를 더해서 신화처럼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훌륭한 인물들의 후손이다, 우리가 이것을 자랑했던 거예요. 일종의 자신들의 영적인 후광 효과, halo effect로 사용을 한 거죠.
제가 목회자나 설교자들에게 권면을 할 때가 있어요. 뭔가 새롭고 신선하고 신박한 것을 자꾸 하려고 하지 마시라.
목회자들의 유혹이 뭐냐 하면 뭔가 신박한 설교를 해야 사람들이 재밌게 듣지 않을까, 또 교회 프로그램도 뭔가 새롭고 참신하고 강렬한 걸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유혹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걸로 교회가 부흥하나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분이 가장 놀라우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신비 그 자체이신 줄로 믿습니다. 신비주의를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신비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성령님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자이시고 최고의 능력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새로운 목회지에 부임을 하면 6개월, 1년은 허니문 기간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6개월, 1년 지나면 어떻게 된다는 얘기예요? 허니문은 끝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목사님의 설교가 새롭고 좋다 그러다가 이제 그분도 컨텐츠가 한계가 있어서, 컨텐츠가 떨어지면 성도들의 기대감도 줄어든다. 그런데 저는 이게 과연 목회자들이 정설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일까 생각해요.
여러분, 이 진리의 말씀은 끝없이 샘솟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목회자만 말씀 사역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순장님, 순인도자, 일대일 양육자, 그리고 우리 어린 자녀들을 양육해 주시는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말씀 사역을 하잖아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 말씀에 인위적인 양념을 많이 치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창의적인 사역을 하지 마시라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이 말씀 자체가 최고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진짜 고급 레스토랑을 가면 레시피는 간단해요. 그 재료 자체가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 맛 자체를 살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신뢰하고 증거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이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지 못하고 변론만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성경의 지식을 막 부풀려 가지고 우리가 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자랑하니까, 상대적으로 성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초라한 신앙인이 되게 만드는 거예요. 위화감을 조성하고 서로 논쟁하게 되는 교회로 빠지게 된 거예요.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 이 경륜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오이코노미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신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셔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인 가르침으로 성경을 가르치면 인간적인 결과, 갈등만 생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에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말씀 사역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러지 않으면 성경을 통독한다든지, 성경 공부를 하거나 묵상을 하거나, 전부 인간적인 자랑으로 가게 돼요. 내가 성경을 몇 독을 했지, 내가 성경 지식이 얼마나 있지, 이런 개인적인 교만과 거짓으로 가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말씀의 은혜가 임할 때, 여러분 설교를 듣거나 개인적으로 묵상을 하시거나, 아니면 통독을 하거나, 말씀의 은혜가 임할 때 그것을 고인물로 자기 혼자 가둬두지 마시고 흘려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내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료에게 흘러가서 또한 생명을 살려내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과 같이 읽어 보고 싶은 문장이 있는데요. 건강한 성도는 전도하여 또 다른 성도를 낳고, 건강한 순은 분순하여 또 다른 순을 낳고, 건강한 교회는 개척하여 또 다른 교회를 낳습니다.
교회는 상당히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갖거나, 또 안정적 성향을 추구하게 돼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내 안에 은혜가 충만하면 이것이 흘러가고 생명이 흘러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죠.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게 가장 감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고 청지기의 삶이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인은 그런 말씀 사역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신화와 족보에 열중하면서 성도들을 오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말씀 사역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얘기를 한 것이에요.
이어지는 5절 말씀 한 절 읽겠습니다.
시작.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교훈의 목적,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이 뭐라고요? 한 단어로 맨 마지막에 사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뭘까요? 결국에는 사람 살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은사가 넘치고 교회가 부흥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말했잖아요.
결국 신앙의 본질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사랑의 목적에 부합하게 받아들이려면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될까? 오늘 세 가지 태도를 얘기한 거예요.
청결한 마음, 두 번째가 뭐죠? 선한 양심. 세 번째가 뭐죠? 거짓 없는 믿음.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보시면 거의 비슷한 표현들입니다. 유사한 거예요. 이걸 한 단어로 정리해 보면 순전함, 선함, 진실함 이런 것들이에요.
하나님의 성품과도 같은 것인데, 이 세 가지는 결국 마지막 진실함으로 귀결된다고 보입니다.
최근에 목회자들 모임에 갔다가, 지난번 목회자 모임 때 저에게 “목사님, 우리 교회 좀 상의할 게 있습니다” 이야기하셨던 선배 목사님이 계세요. 그분이 중견 교회 담임목회를 오래 하시다가 이번에 은퇴를 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은퇴를 하셨는데 아직 후임 목사님을 못 세운 거예요. 그래서 후임 목사님을 세우기 위해 “어디 좋은 목사님이 없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떤 목회자를 찾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목회자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덕목이 있겠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목회자, 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진실한 목회자.
여러분, 성경 지식이 많고 교회 사역도 잘하고 설교도 청산유수로 잘한다 할지라도 만약에 그의 삶과 인격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 목회 리더십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우리가 성경의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이중성이 생기는 거예요.
말씀을 내가 듣기는 듣는데, 말씀에 부딪혀서 반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내 삶을 거기에 맞춰서 변화시키지 않으면 신앙과 인격이, 신앙과 삶이 어긋나는 이중적인 종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고 예수님이 그래서 위선자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어떤 사람, 청결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 마음이 청결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3장 1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선하게 행하려 함으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일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라 의도 자체가 선하게, 선하게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 사역자인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성도들에게 선한 양심을 얼마나 많이 강조하는지 몰라요. 왜 영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마음, 어두운 마음,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기 때문인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거짓이 없는 믿음, 위선이 없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거죠.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나 자신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신앙, 다르지 않는 신앙, 그런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회자가 20대에 됐는데, 30대 중반부터 심각하게 제일 많이 고민한 게 이거였던 것 같아요. 교회에서의 모습이나 내가 집에 가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내가 사람들하고, 평소에 친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목소리가 변조가 안 되는가. 내가 가족하고 이야기할 때와 성도들하고 이야기할 때가 다르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많이 하기 시작했어요.
똑같은 모습을 가져야겠다. 여러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 앞에 진실하게 반응하면 우리의 내면이 깨어지고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사역이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 그 뒤에 부연 설명을 하는데요. 8절에서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율법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왜 주셨는가? 법적 기준이 있으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건 잘못이구나, 이건 죄구나” 이거를 알게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3장 20절 하반절에 보면 율법으로는 뭐를 깨달아요? 죄를 깨닫게 돼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이고, 율법의 순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주의 율법 교사들이 성경을 갖고 자기 자랑으로 삼고, 또 자신의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잖아요. 그건 잘못 쓰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의롭고 나만 잘났고 나만 종교적으로 옳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주신 게 아니라, 정반대로 세상의 죄인들이 그 말씀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와 식사를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항의하잖아요. 어떻게 당신의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하고 식사하고 교제할 수 있느냐. 그때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세요?
마가복음 2장 1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병원이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있나요, 병든 사람을 위해서 있나요? 병든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는 의인이 오는 곳인가요, 죄인이 오는 곳인가요? 죄인이 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얘기하는 순간 “그러면 내가 죄인이어서 여기 와 있다는 얘긴가” 이게 마음에 불편하시다면 아직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제가 종종 얘기하는데, 상담 사역하시는 분들 중에 자기 내면의 상처와 문제를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상담사가 되는 분들이 많아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죄가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만 죄가 많을까요? 내가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심각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지금 죄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 두 번째 부류는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9절과 10절을 이어서 보시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 첫 번째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불법한 자, 두 번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 세 번째 경건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경배하지도 않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죄인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려 하지 않고 세속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망령된 자라는 것은 십계명 제3계명에서 나오는 표현인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에요. 이것은 십계명의 앞부분 네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죠.
두 번째 부류는 사람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이에요. 아버지를 죽이는 자, 어머니를 죽이는 자. 구약 성경에서 이런 사람들은 굉장히 엄벌에 처하게 돼 있죠.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동성애자를 얘기합니다. 인신매매하는 사람, 사람을 유괴하거나 팔아넘기는 사람, 그리고 양심을 팔아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진실을 매도하며 위증하는 사람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모든,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돌아오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지, 자기 잘났다고 의로운 사람들 자기 치장하라고 주신 게 아니다라는 말씀을 한 거예요.
제가 이 내용들을 하나씩 다루려면 매주 하나씩 해야 되는데, 오늘은 동성애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제 기억에는 아마 군대에 있을 때였던 것 같아요.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용산에서 복무하면서 카투사였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캠퍼스에 항상 와서 후배들 말씀 양육하고 했는데, 그 캠퍼스에서 동성애 그룹이 커밍아웃을, 제 기억에는 대한민국 캠퍼스 중에서 제일 처음 커밍아웃을 한 단체가 있었어요. 그래서 캠퍼스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 당시는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되냐 이런 사회적인 담론도 거의 없던 때였고, 전면적인 존재 전쟁이 시작됐는데 왜냐하면 캠퍼스에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그때만 해도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이들이 동성애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고 대자보를 곳곳에 붙여 놓은 거예요. 중앙도서관 앞에, 학생회관 앞에, 각 단과대학 앞에.
주로 내용은 이런 거였어요. 레위기 20장 13절에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엄벌에 처하시는 극도의 죄다, 이런 고발 내용이었어요.
고린도전서 6장 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 여기도 동성애가 나오죠. 그래서 구약 성경에만 이야기한 게 아니다. 신약 성경의 대표주자인 사도 바울도 동성애자는 천국 못 간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고발하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그 당시에 성경을 열심히 보는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고발을 하는 선교 단체 대자보가 붙으면 그다음에는 또 그거를 반대하는, 이들을 수용해 줘야 되고 포용해 줘야 된다, 긍휼히 여겨야 된다 이런 대자보가 붙고, 그다음에는 또 선교 단체에서 더 강력한 고발 대자보가 붙고, 전쟁이 난 거예요.
제가 이걸 보면서 참 안타까웠어요. 여러분, 어떤 종류의 죄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되고 변화되지 않을 죄인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돌이키기를 원하시잖아요. 왜 말씀에 정죄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고, 죄다 고발만 할까. 여러분 정죄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해요. 속죄만이 사람을 구원하게 되어 있어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계속해서 바른 소리만 하는 분 있죠. 바른 소리 하면 사람이 바르게 되나요? 피곤해져요. 괴로워져요. 관계가 더 안 좋아지게 돼 있어요. 자식한테 맨날 바른 소리 해 보세요. 바른 소리 해 보세요. 애가 좋아지나. 사랑을 부어 줄 때 아이는 변화되는 거예요.
제가 흥분해서 딴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왜 저런 사람이 교회를 다닐까. 저렇게 세속적인 말을 하고, 저런 사람이 교회 왜 나올까” 여러분 그런 사람이 나오는 게 반가운 거예요. 그런 분들은 교회 아니어도 놀러 다닐 데 많아요. 그런데 교회를 나오셨다는 게 너무 반가운 거예요.
순예배를 해 보면 순예배 때 삐딱하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매주 나와. 왜 저 사람은 나와서 나를 힘들게 하지? 순장님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그분이 다른 데 가서 술자리에서 교회 비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나와서 자신의 내면의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받고 싶은 거예요.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굉장히 다양한 분들을 상담하잖아요. 제가 지금 얘기하는 분들은 여러분 누군지 다 모르는 분들이에요.
한번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청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본인이 원해서 온 게 아니고 엄마에게 끌려왔는데, 군대에 갔다가 선임에게 당해서 후천적으로 동성애자가 된 케이스예요.
이 친구가 자기가 원해서 온 게 아니니까 “목사님하고 상담 좀 하자” 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이 벌개져 가지고 성질을 내는 거예요. 결국 교회는, 성경은 동성애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거부하는 거 아니냐.
제가 한참을 듣고 있다가, 청년, 하나님을 믿어? 그런데 하나님 믿는데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요. 그럼 얘기가 통하잖아요.
제가 동성애, 이성애를 떠나서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너 휴가 나와서 매일 밤 이태원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새벽까지 파트너 못 만나면 새벽까지 돌아다니거든요. 이 친구들이. 너 그렇게 성적 탐닉에 빠져 사는 걸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니? 대답 못 하더라고요. 자기도 죄인 걸 아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이렇게 얘기해요. 또 반대 진영에서는 아니다, 후천적이다. 이 선천적이다, 후천적이다 갖고 논문이 어마무시하게 많아요.
여러분, 제가 볼 때는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 이 문제는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이면 허용해 줘야 되고, 선천적이면 인간의 본 모습이니까 인정을 해 줘야 된다, 이것은 유물론적 관점이에요. 사람에게 영혼이 없고, 사람에게 내세가 없고, 절대자가 없고, 인간은 물질 덩어리고 몸뚱이 하나뿐이다라고 볼 때 인간을 보는 관점이에요.
여러분, 인간은 태어나기를 그럼 선천적으로 어떻게 태어났는가? 선한 마음만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고요, 악한 마음이 굉장히 선천적으로 많아요.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좋은 장난감을 갖고 있는데 옆에 친구가 새 장난감을 갖고 오잖아요. 그러면 내가 갖고 있는 건 안 보여. 옆에 친구의 것을 빼앗으려고 옆에 애를 할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그때 애들의 얼굴이 흉포하게 변화되는 걸 보면 어린 것들도 다 죄인이에요. 다 죄인이에요. 애들이 잘 때만 천사인 거지.
우리가 선천적으로 누가 미우면 없애고 싶잖아요. 그 마음이 심해지면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의 욕구가 생기는 겁니다. 내가 어려운 피해를 가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에게 있어요, 없어요? 다 있어요. 내가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풀리면 “에이, 성질내고 그냥 확” 그러고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다 있어요.
그러면 선천적이라고 해서 여러분의 욕구대로 다 하면 세상이 수용해 줘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 줘야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을 굉장히 열등하고 하등하게 취급하는 유물론적 관점인 거예요.
제가 서인교회에서 화요성령집회 인도할 때 대학교 3학년짜리 학생이 그 집회에 처음 나오게 됐어요. 이 친구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중학교 3학년 때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자기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집안이 난리가 난 거예요. 왜냐하면 굉장히 신실한 크리스천 가정이었거든요. 아이가 그 얘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여러분, 그래서 이런 아이들이 그 얘기를 하는 순간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내 아이가 그럴 줄 몰랐다. 두 번째, 얘가 그날로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딱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들을 하는지 몰라요. “공부하고 나중에 신앙생활 하라”고 얘기했는데, 그걸 후회하는 거예요.
이 친구가 굉장히 스마트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탑 랭킹의 명문대를 갔어요. 공부는 잘하는데 계속 파트너가 바뀌는 거예요. 동성애자들 몇 명이 저한테 한 얘기가 그겁니다. “목사님,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라 욕구입니다.”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가 쉽지가 않아요. 굉장히 욕구에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대학교 3학년짜리 여학생의 친구가, 크리스천 친구가 “그래도 교회 한번 가자”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교회를 나온 거예요. 그날 화요성령집회에 참석해서 그날 하나님 앞에 고꾸라진 거예요. 그 후 2년 동안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됐어요.
세례를 받는 날 얼마나 감사한지. 세례식이 끝나고 예배가 끝났는데, 제가 이 친구에게 그래도 걱정이 되잖아요. 2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제가 궁금하니까 “요즘 잘 지내니?” 그랬더니 이 친구가 한 얘기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에요.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여러분, 인간이 “나는 본성을 이렇게 타고 나서 어쩔 수 없어” 그러면 도둑질도 하고 사람도 죽이고 “본성이 이렇게 태어났어” 그러면 그다음 아무거나 해도 되나요? 여러분 지금 서구 사회가 동성애 다음에 뭐로 가는 줄 아세요? “나는 동성애자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두 번째는 “나는 소아성애자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여러분, 이게 지금 사람을 정말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나는 그런 큰 죄는 안 짓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죄를 그렇게 큰 죄 안 짓고 살다 보면 내가 굉장히 괜찮고 의로운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고 열심히 살다 보니까 죄를 지을 기회가 부족한 거예요. 진짜예요. 죄를 지을 기회가 부족해요.
제가 지금부터 얘기하는 사람들도 여러분 다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예전에 공동체 순장이 정말 성품도 너무 좋고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순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순장이 오피스 와이프를 두고 외도하는 걸 아내가 알게 된 거예요.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한 것도 아니에요. 정말 지극정성으로 잘했거든요. 남편도 착한 사람이지만 아내도 정말 착한 사람이었거든요. 아내가 너무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남편에게 “당신 이럴 수 있느냐,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랬더니 남편이 더 가관인 거예요. “내 신앙, 이렇게 좋고 사람들은 잘하고 있기 때문에 이거 공동체에 얘기하면 안 된다. 사람들 시험 든다.” 그리고 자기는 그 삶을 계속 지속하는 거예요.
더 예전입니다. 저희가 십계명을 교회에서, 모든 캠퍼스, 모든 설교자가 십계명을 한 주에 하나씩 설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간음하지 말라, 그 설교를 했는데 서인교회 새신자 예배에서 그 설교를 하고 나서 설교자가 “정말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죄의 습관을 끊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배 후에 오셔서 상담하시라” 그렇게 했어요.
여러분, 내가 그런 삶을 산다고 해도 “그거 끊겠습니다” 하고 찾아올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런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그 숫자에 충격을 받은 거예요,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존경받는 리더십이 은퇴를 하고, 물론 스트레스는 있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분도 너무 순한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미웠는지 아내 목을 졸라 죽이겠다고 해서 가족들이 다 충격을 받고 교회가 다 충격을 받은 거예요.
이런 문제가 여러분, 개인 사회에만 일어납니까? 교회 안에서도 많아요. 그래서 사업에 투자하라고 하는 다른 친한 교인이 있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원금 들고 튀는 사기범들이 교회 안에서 많습니다.
그래서 그걸로 몇 년을 투자하게 해요. 3년에서 5년을 신뢰 관계를 쌓고 나서 중보기도 엄청 해주고 밥 많이 사주고 순예배도 다 우리 집에서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투자하라 그래요.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교회 안에서 각종 범죄가 일어납니다.
과연 우리가 죄인인가, 의인인가.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들이에요. 죄의 문제를 내가 다 털어 버렸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그냥 주님의 의로 나를 덮어 주신 상태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방심하고 있으면 한순간에도 온갖 추하고 더러운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기 인식이 명확하게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30년, 50년, 60년, 70년 멀쩡하게 살다가 죄의 문제로 한순간에, 한 방에 날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소개했던 그 대학생의 고백처럼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본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건 마치 비행기와 같은 거예요. 여러분, 중력이 잡아당기잖아요. 기체가, 비행기 동체가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요. 그런데 이게 하늘을 나는 게 대단하지 않습니까. 죄의 중력이 아무리 잡아당길지라도 복음의 엔진을 달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성화의 활주로를 내달리면 하나님의 은혜의 창공을 비상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히브리서 12장 4절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천성문 앞에 이를 때까지 죄와 혈투를 벌이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본성을 따라 살지 마세요. “저는 선천적으로 우울 기질입니다.” 저는 비 오는 날이 더 편해요. 어제도 구석에 가서 혼자 앉아 있는 게 더 편해요. 그래도 하나님이 “일어나 외쳐라” 그러면 순종해야 되는 거고, “열심히 복음을 위해서 뛰라” 그러면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저는 선천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저는 가기 싫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 수 없어요. 그냥 하나님 부르심 따라 가는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저희 두 아들이 20대인데 음악을 공부할 때도 음악을 듣고, 어디를 이동할 때도 음악을 듣고, 항상 음악을 듣더라고요. 그러더니 제 차에 타서 둘 다 그러는 거예요. “아빠는 왜 음악을 안 들어? 어떻게 음악 없이 인생을 살 수 있어?”
생각해 보니까 저도 20대 때 음악 많이 들었거든요. 10대 때도 우울한 음악 특히 많이 들었어요. 재즈도 좋아하고 크로스오버도 좋아하고 피아노곡 특별히 많이 좋아하고. 그런데 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 내려놨습니다.
여러분, 세상 문화 즐기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과 건강과 에너지에는 한정돼 있잖아요. 내가 어디에 싱글 포커스, 초점을 맞추고 살 것이냐.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이에요. 주님께 정말 초점을 맞추고 살 것인가.
저는 커피를 잘 안 마십니다. 커피 마셔도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안 마십니다. 이유는 제가 무엇을 하면 쉽게 빠지는 성격이거든요. 쉽게 얘기해서 중독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나, 주님께 빠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가능한 절제하자” 그래서 커피를 안 마시는 거예요.
제가 올해 한 가지 더 결단한 것은 탄산음료도 가급적 마시지 말자. 이건 결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내려놓는 거예요. 내가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지. 제가 어디 가도 사진을 열심히 안 찍어요. 사진 찍는 것도 내가 취미 들이지 말아야지. 난 그냥 초점을 주님께 맞추고 살아야겠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풍류와 낭만 좋죠.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과 건강과 재능을 어디에 맞추고 살 것인가. 나는 굉장히,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쉽게 노출되는 사람들이고, 죄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자신이 천성문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하나님, 온전하고 싶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 고백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마지막 11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한 성경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내는 복음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말씀으로 사람들을 살려내시잖아요.
여러분의 신앙생활 연수가 몇 년이든, 내가 50년 차야, 내가 장로야, 권사야, 이건 소용이 없어요. 내가 목사야, 이런 것도 소용없어요. 내가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말씀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생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인물이 되어 버렸다면 여러분 종교는 오히려 사회악이 되잖아요.
종교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가슴에 손을 놓고 기도할까요?
2026.03.07(토) | 새벽기도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21:1-11)
새벽기도 26030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21:1-11)
설교 요약
-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벳바게에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셨고,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 이 장면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 준다.
- 벳바게는 무화과 열매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고, 아직 사람을 태워 본 적 없는 나귀 새끼는 주님께 쓰임받았다. 같은 자리에서도 누구는 열매 없고 누구는 헌신으로 쓰임받는다는 교훈이 있다.
- 중요한 것은 내 준비가 완벽해질 때가 아니라, 주님이 “내가 쓰겠다” 하실 때 즉시 드려지는 삶이다.
- 사랑은 낮아지는 것이며, 한 영혼을 살리는 삶은 결국 눈높이를 낮추고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삶이다.
-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다. 호산나는 단순한 환호가 아니라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다.
-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고도 “이는 누구냐”라고 반응했다. 주님이 눈앞에 오셔도 참으로 알아보지 못하면 인격적 관계는 열리지 않는다.
- 설교의 결론은 분명하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기꺼이 자신을 내어 드리고, 평탄할 때나 고난의 때나 “주님만이 나의 왕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한 가지 먼저 안내드리고 말씀 읽겠습니다. 오늘 순장사관학교가 이 장소에서 오전 10시부터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개인 기도 시간은 8시까지 진행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좌석 세팅을 해야 되는데요. 도와주고 싶으신 선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은 남아서 함께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여기 정리를 하고 세팅하는데, 오늘 한 260명 정도 오기 때문에 라운드 테이블 세팅을 해야 해서 일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1절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 하라 하였느니라.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저희가 3월 달에 말씀 암송하는데요. 같이 읽어 볼까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한 영혼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정말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21장 시작인데요. 마태복음 16장이 마태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죠.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시는 내용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17장에 변화산 사건이 있었죠. 그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가 예언하신 그분, 또 예언하신 그 사건, 십자가의 사건이 올 것을 알려줍니다.
그 변화산 사건 이후에 18장부터 20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저 북쪽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을 따라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의 삶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주일로는 우리가 종려주일이다 이렇게 부르는데, 영어로는 Palm Sunday라고 합니다. 종려나무를 palm tree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Palm Sunday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주님을 환영한 날이죠.
1절부터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께서 요단강을 지나서 여리고, 해발고도 마이너스 200미터죠, 여리고에서 쭉 돌산을 따라 올라가다가 감람산을 건너면 시온산이 나옵니다. 시온산 위에 어떤 도시가 있죠? 예루살렘이 있죠.
여러분, 확신을 갖고 대답하세요. 감람산이 높을까요, 시온산이 높을까요? 안 가서 모르죠. 시온산, 예루살렘도 고도가 다르긴 한데 보통 760에서 765미터 정도 이야기하고요. 감람산이 830미터예요. 감람산은 820에서 840 정도 되거든요. 그러니까 해발고도 마이너스 200에서 거의 1000미터의 돌산을 계속 올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감람산 언덕을 넘으면 시온산이 보이는 거예요. 훨씬 더 고도가 높죠. 그런데 이제 베다니를 지나서 벳바게를 지나면, 그다음에 기드론 시내만 건너면 시온산이에요.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그러니까 1절 다시 보여 주시면, 감람산 어디에 이르렀다고요? 벳바게에 이르렀다. 벳바게에 이르렀다는 것은 예루살렘 코앞에 이르렀다, 이런 뜻이죠. 이제 시내만 건너가면 입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맞은편 마을. 예수님이 지금 길 위에 계시니까 벳바게에 가라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그곳에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라. 그런데 주인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남의 것을 끌고 오라고 하시니까, 주인이든 아니면 그 관련된 사람이든 누가 “이거 왜 끌고 가냐?”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라고요? 주가 쓰시겠다. 이 한 마디만 하면 바로 내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서도 내 타이밍에 맞춰서 주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타이밍에 맞춰서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할 때 쓰임받을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아침 일찍 나와서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저기 무화과나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너무 반가워서, 아침 식사도 못 하고 성전으로 출근하시니까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셨죠. 너무 배가 고파서 반가워서 무화과나무 가까이 갔는데 열매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셔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뒤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이제 내일 본문이겠네요.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어떤 분들은 “본인이 배고프다고 이렇게 저주까지 하실 필요가 있냐?” 질문하시는데, 또 본문에 보면 무화과가 열매 맺을 시즌이 아니었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시즌이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냐고요.
그런데 제철은 아니었지만, ‘파게’라는 예비 열매가 맺히는 시즌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지금도 가난한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이 파게를 눈깔사탕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그거 따서 먹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철 열매를 구하신 게 아니라 파게를 구하셨던 거죠.
벳바게잖아요. 벳바게라는 게 무화과 열매인 파게의 마을이라는 뜻이에요. 파게의 마을에서 파게를 찾았는데 파게가 없었다는 거예요. 저 혼자 재밌어하는데, 이상하잖아요.
여러분, 베들레헴. 룻기를 보면 베들레헴이잖아요. 레헴이 떡이니까, 베스는 집이고 레헴은 떡이거든요. 그러니까 떡의 집에 떡이 없어서 그 땅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다. 이게 모순인 거죠.
어쨌든 그래서 예비 열매를 구하신 건데, 그게 없었다고요. 제가 지금 무화과나무 얘기를 왜 할까요? 나귀 새끼 얘기하다가요. 이 나귀 새끼에 대해서 다른 대조 본문에 보면, 사람이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예요.
그러니까 얘도 지금 시즌이 아닌 거예요. 사람이 타 본 적도 없고 물건을 부린 적도 없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미완성입니다. 그런데 그 나귀 새끼를 타신 거예요. 예수님이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어요. 그러니까 이 나귀 새끼도 자기 타이밍이 아닌데 기꺼이 주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게 뭔가 하면, 무화과나무도 그렇고 나귀 새끼도 그렇고 전부 둘 다 벳바게 출신이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감람산, 올리브 마운트를 넘으실 때 마지막 지나가는 마을.
여러분, 그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붙잡은 사람이 삭개오고,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붙잡은 사람이 소경 거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잖아요. “아유 뭐 또 주님 오시겠지.” 아니요. 주님이 그 마지막 여리고를 지나서 올라가시면 다시 오지 않으시잖아요. 그래서 “주님, 내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십시오. 지금입니다. 지금 저를 만나 주셔야 됩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내 때가 아니어도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기꺼이 쓰임받겠습니다, 이 마음의 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사에서도 일을 해 보면 그렇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일을 부탁하면 도와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별로 많지 않구나. 있긴 있는데, 벌써 무엇을 부탁해도 “안 도와줘야지” 이런 마음의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부탁하기 어려워집니다.
집에서도 그렇잖아요. 집안일은 다 같이 하는 건데 엄마한테만 다 시켜 놓고, 청소가 됐든 빨래가 됐든 설거지가 됐든 분리수거가 됐든 얘기를 하면 “그래, 내가 하려고 그랬는데 바로 해 줄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 미적미적 도망다니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실 때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준비라는 것은 내 인생의 준비가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 “주일학교 선생님 하시죠” 그러면 “저는 성경을 잘 몰라서요” 그래요. 그럼 제가 그렇게 얘기하죠. “그러면 성경을 어느 만큼 알면 주일학교 교사할까요?” 성경을 목회자들도 내가 다 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성경을 어느 만큼 알아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말씀을 나누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새벽에 싱어 좀 하시죠. “전 노래를 잘 못하는데요.” 괜찮습니다. 볼륨을 좀 줄여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새벽에 리더 외에는 싱어들 소리는 볼륨이 생각보다 작아요. 그래서 잘 안 들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어들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배를 섬기는 거예요.
순장하시죠. 주차 사역 좀 하시죠. 사역 팀장 좀 하시죠. 그러면 “기도해 보겠습니다.” 이게 완곡한 영적 거절법이 되신 분들이 많아요.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대답이 없어요.
여러분 정말 나의 삶,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건강, 나의 재능, 이것을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언제든지 내어드릴 마음이 있는가? 언제든지 내어드릴 마음이 있는가? 주님,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주님,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삶이에요. 왜냐하면 주인이 맡겨 놓은 거잖아요. 여러분, 내 시간이 내 것입니까? 내 물질이 내 것입니까? 내 재능이 내 것입니까? 주인이 맡겨 주신 거잖아요. 청지기의 삶이라는 것은 그래서 주인이 와서 “그거 좀 줘볼래?” 하면 “네” 그러고 드리는 거지, “왜 이러십니까? 제가 지금 이거 갖고 한참 뭘 해야 되는데”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이어지는 말씀 4절,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마태복음의 저자가 누구죠? 마태잖아요. 그런데 마태가 주인의 즉각적인 순종, “주가 쓰시겠다” 하면 바로 내 주는 것, 또 나귀 새끼가 제때 헌신하고 쓰임받는 것, 이것도 굉장히 귀한 이야기인데 이것보다 마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우리는 우리가 내어드린 것이 스스로 기특하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고 이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이 사는 땅 가운데 겸손의 왕으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을 생각해 보면,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잠시 오신, 잠시 활동하신 그때 내 나귀를 쓰셨다.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할렐루야.
그래서 한 영혼을 살리는 데 우리가 쓰임받고, 예배를 살리는 데 쓰임받고, 순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살리는 데 내가 쓰임받고,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받고, 여러분 너무너무 감사한 것이죠.
스가랴 9장 9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무려 450년 전에 예언자가 예언한 거죠. 그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 여러분,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눈높이 사랑을 해 주신 거예요. 저희 올해 표어가 뭐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키우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돼요, 안 낮춰야 돼요? 낮춰야 되는 거예요. 순장이 순원들을 양육하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되는 거예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되는 거예요.
그들의 필요를 살피고 눈물을 닦아 주고 격려해 주고 배려해 주고, 그게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가끔 “우리 아이들이 뭐가 필요합니다” 이런 얘기를 해 주시는 게 저는 너무 귀한 것 같아요.
최근에도 어떤 선생님이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가정적으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제가 공동체에서 상황을 살펴보니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거예요. 아이가 셋인데 한 달 생활비가 100만 원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아이가 문제집이라도 사고 참고서라도 살 수 있게, 온라인으로라도 수강을 할 수 있게 엄마하고 그 아이하고 잠깐 보자고 했어요. 주일날, 내일. 그리고 장학금을 드리려고 해요. 공개적으로 “장학금입니다” 이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돈이 생기면 생활비로 먼저 쓰려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예요. 저는 이 아이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부할 의욕이 있는데 공부를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필요를 “내가 주일날 한 시간 가르치면 끝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아이의 모든 상황을 살피고 가정 상황을 살피는 선생님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저를 따라해 보세요. 사랑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아상이 건강한 사람은 낮아지는 게 힘들지 않아요. 그런데 자존심만 강한 사람은 낮아지는 게 참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죠.
교회 주차 봉사를 하거나, 교회에서 안내로 섬길 때 가끔 짜증내고 성질내고 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여러분 잘 대답을 못 하는데 있어요.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정말 그만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간사님들에게,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가 세상에서 일하지 않고 교회에서 일해야지” 하고 시작했다가, 간사 1년 차, 2년 차에 제일 많이 그만둔다고 했어요. 내가 꿈꿨던 교회가 아닌 거예요. 사람들이 전화해서 하대해요. 면전에서 하대해요. 여러분, 간사님들을 왜 하대합니까. 그럴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소중합니다. 네, 모든 사람들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러나 섬김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낮아지는 것이 참아서 하는 것이거나 예의상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정말 사랑으로 해야만 가능한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누가 부모가 자식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린 아이들을 교회에서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천상의 보좌로부터 이 땅까지, 이 참혹한 죄악의 땅, 어둠의 땅에 낮아지셨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를 왜 이렇게 무시하지, 우습게 보지” 그렇게 반응하기보다, 내가 사랑으로 선택한 자리인가를 기억하셔야 돼요. 내가 사랑해서 섬기기로 선택한 자리인가. 그러면 그 자리에서 섬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6절에서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유대인들에게 겉옷이라는 것은 생명의 담보와 같은 것이거든요. 낮에는 너무 더워서 긴팔이 필요하고, 밤에는 너무 추워지기 때문에 긴팔이 필요하고, 이 긴 겉옷은 필수 아이템입니다. 그래서 빚이 있어서 겉옷을 저당 잡아도 밤이 오기 전에 돌려주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라고요.
그런데 그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펼쳐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한다. 이 최고의 존경과 헌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9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아멘.
다시 한번 따라해 보세요. 호산나. 우리는 호산나를 활용해서 신나는 매들리 노래를 많이 만들지만, 사실 호산나는 save us, 오셔서 우리를 구하소서,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소망의 외침이자, “드디어 오셨군요”라는 외침이자, 간절한 부르짖음, 절규에 가까운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 400년 동안 백성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이게 출애굽기 2장에 나오죠. 그리고 나서 모세를 보내 주시고 출애굽의 역사로 그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신구약 중간기 400년은 영적 암흑기였잖아요.
너무나 피폐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메시아가 어서 오셔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갈망이 다다른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 통독하다 보면 “왜 이때 예수님을 보내셨느냐, 좀 미리 보내셨으면 좋지 않았느냐”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궁금하신 분은 통독 과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만 얘기하면, 첫 번째 하나님의 타이밍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정확해요.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라이제이션,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이 형성되고 세계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때 복음을 주심으로 인하여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고, 또 한 가지,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인생과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거예요.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왜 하나님은 그때 보내셨습니까”라고 질문하지만, 땅의 사람들의 관점으로 놓고 보면 가장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타이밍이 왔을 때 보내 주셨다고요.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결핍과 환난과 어려움들을 겪는데, 저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 자기 인간관계든 물질이든 체력이든 심력이든 지력이든 뭐가 됐든 간에 그게 소진될 때까지 일단 자기가 해 보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완전히 고갈되어 바닥이 나면 그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가 사무엘상도 봤잖아요. 다윗이 자기 잔꾀로 시글락성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 자기 사람들이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잖아요. 그제야 다급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죠.
여러분,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먼저,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러지를 않으니까, 주님을 향한 갈망이 온전해졌을 때 그때 예수님을 보내 주셨어요.
10절, 11절 마지막 두 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1절에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 예수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갈릴리 나사렛 출신도 맞고,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라는 타이틀을 붙인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일반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하소서” 메시아로 인정하며 외쳤던 그 고백과, 건조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 아니냐?”라고 반응한 말과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완전히 느낌이 다른 겁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온 성이 소동했다. 온 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인들,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관료들, 헤롯과 그 헤롯의 세력들, 또 거기를 추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는 말하자면 이스라엘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하이 클래스의 유대인들이 거기 사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소동했다는 겁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이는 누구냐. 이렇게 했는데, 이는 누구냐가 사실은 마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태어나셨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있다 했더니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다, 그때하고 비슷한 상황인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3년 반 공생애 사역을 하셨어요. 예수님의 소문이 전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 지역, 헬라인들에게까지 들려서 찾아올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셨던 분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를 수가 있나요? 모를 수가 없는 거예요. 게다가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 세 번이나 올라가서 활동하신 적도 있어요. 헤롯조차도 예수님의 소문을 귀가 닳도록 들은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 모르는 게 아니라 부정하는 거예요. “이는 누구냐?” “이게 누군데 이렇게 난리냐?”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멘. 아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들 내가 온전한 고백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인격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내 눈앞에 보여 주면 믿겠다, 이렇게 얘기해요.
제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학교를 하면서 친구에게 “교회 가자” 그랬더니 “야, 하나님 너 봤어? 하나님을 내 눈앞에 보여 주면 내가 믿지” 그러는 거예요. 내가 뭐라고 설명해 주고 싶은데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뭐라고 할 말이 없더라고요. 하나님을 보여 줄 방법이 없는데 어떡하지. 너무 안타까웠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 거죠. 하나님이 그 아이 눈앞에 나타나시면 그 아이가 하나님을 믿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런 겁니다. 옛날 왕이 잠행을 하거나 지나가도 왕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왕이 지나가도 왕인 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거잖아요. “내 눈앞에 보여 주면 믿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 앞에 나타나도 당신은 믿을 수 없다. 알아볼 수도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분이 그분이신 줄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인 은혜, 압도적인 은혜로 자신을 제시해 주시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은혜를 정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주님의 손길을 내가 감사함으로 잡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언제 내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라고 해요. 여러분,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기적을 베푸셨는데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기적을 좀 행해 봐라. 지금까지 많이 봤는데 확신이 없는데 또 한번 해 봐, 또 한번 해 봐” 이러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다음 은혜를 더 베푸셔야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까. 아니요. 이미 충분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 본문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때 여러분 중심으로 “주님,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쓰임받겠습니다. 저의 시간, 저의 건강, 저의 재능, 저의 물질,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를 여러분이 하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여러분, 똑같은 벳바게.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고 어린 나귀 새끼는 쓰임을 받잖아요. 나를 통하여서 정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나를 통하여서 한 영혼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 다른 데에서 구원을 찾지 말고 “호산나, 당신께서 나를 구하셔야 됩니다. 주님만이 나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정말 내 인생이 끝자락에 떨어져서야 하는 고백이 아니라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든 묵상을 하든 성경을 읽든 길을 걷든 항상 내면에 고백하는 것이 뭐라고요?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Lord, have mercy on me.”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호산나, 주님 외에는 나를 구하실 분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입술 가운데 채워져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정말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느냐. 그게 진심이냐. 그게 진심이라면 내가 쓰겠다고 할 때 네가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겠느냐.
내 인생이 평안할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이 고백을 드리며 살아가느냐.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주님, 우리의 삶이 고난의 순간뿐만 아니라 평탄할 때에도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느 순간 물질을 의지하고, 어느 순간 세상을 의지하고, 어느 순간 나의 능력과 나의 건강을 의지하고, 어느 순간 내가 세워 놓은 사업체를 의지하고, 어느 순간 내가 세워 놓은 조직을 의지하고, 주님 한 분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호산나, 간절히 부르짖으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고백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온전히 구별하며 드리며 나아갑니다.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왕이 되십니다. 이 고백이 입술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심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헌신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 주님만이 참된 왕이 되시고 주님 한 분만이 우리를 통치하시며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하십니다. 기꺼이 주님 앞에 내어드릴 때 주께서 아름답게 축복의 통로로 쓰시는 것을 체험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교회 공동체 가운데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삶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든지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기꺼이 섬기겠습니다. 언제든지 기꺼이 쓰임받겠습니다 고백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기름 부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참된 왕이 되십니다. 주님,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쓰임받는 일이라면,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는 한 “예스, 아멘” 하시는 분들이 되면 좋겠어요.
제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중3 때 만난 이후로 교회에서 뭐를 하자고 얘기하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목사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책을 25권 번역을 했는데, 그 번역이 다 끝나고 출판사 편집팀에 넘기고 책이 나오기 전에 완성본이 나올 즈음 번역료를 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번역료가 나오는 시간을 항상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면 그쯤 되면 마음에 감동을 주세요. “누가 어려운데 지금 대학 학비를 못 내고 있는데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 선교사님이 힘든 가운데 있는데 네가 후원하면 좋겠다.” 그래서 제가 25권 전체는 아니고요, 20권 정도는 하나님이 번역료를 다 홀랑 가져가셨어요.
저는 제 마음 가운데, 나는 머리도 안 좋아서 공부도 못 하던 아이가 이런 번역을 하고 있으니까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거고 하나님의 것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늘 기도한 거예요. “하나님, 원하시면 언제든지 얘기하십시오.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제가 십일조를 하면서도 헌금함에 넣으면서 “하나님, 원하시면 다 드릴 테니까 언제든지 얘기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러다 하나님이 홀랑 다 가져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이 넘치도록 채우세요. 부족함 없이 채우세요.
쓰임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능력이 준비가 돼야, 내가 성경 지식이 준비가 돼야, 내가 건강이 준비가 돼야...” 여러분, 건강은 오늘 날짜가 제일 건강한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이 제일 건강한 거예요.
언제까지 주님을 내 문밖에 세워 두시겠어요. 언제까지 “저는 아직 때가 안 됐습니다” 이야기하시겠어요. 여러분, 주님이 부르시면 그것이 영광스러운 부름입니다. 나를 쓰시겠다니, 나를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리면 여러분, 그게 달란트 비유 아닙니까.
한 달란트를 그냥 에이, 한 달란트 주고... 여러분, 한 달란트가 금 34킬로예요. 제가 요즘 돈으로 환산은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수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이 부족한가요? 아니에요. 재능이 부족해서 섬기지 못하는 사람 없어요. 재능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지 못하는 사람도 없어요.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재능을 주셨어요. “아니요, 저는 건강이 안 좋은데요.” 건강이 안 좋아도 여러분 생명이 붙어 있잖아요. 생명이 붙어 있는 그 적은 건강도 쓸 수 있어요. 그 적은 물질도, 내가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여러분, 마음의 문을 닫아 두고 사느냐, 이걸 열어 놓고 흐르는 샘물이 될 것인가, 고인물이 될 것인가는 여러분이 결정하시는 거예요. 흐르는 샘물이 되면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수를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고, 가족이 같이 오신 분들은 한 손은 잡고 한 손은 가슴에 얹고 기도하셔도 좋겠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시간을 드리거나 재능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려도 가족이 동의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여러분 자녀들도 교회에서 찬양팀을 하거나, 자녀들이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아니면 공동체에서, 학교에서 기독인 모임을 하거나 교회 공동체 리더, 임원을 한다 그러면 엄마 아빠가 못 하게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야, 공부해라. 공부나 해라.”
여러분, 그런 좁은 관점을 갖고 있으면 아이가 리더십이 성장하겠어요? 아이가 나눔의 마음이 확장되겠어요? 여러분, 가족이 주께서 쓰시겠다 말씀하실 때, 그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 말씀하실 때, 기꺼이 쓰임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쓰임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남편이, 내 아내가 그렇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 영혼을 살리고, 소자를 살리고, 시대를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될지어다.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2026.03.01(주) | 주일설교 | 한 영혼을 살리는 편지 (딤전 1:1-2)
한 영혼을 살리는 편지 (딤전 1:1-2)
설교 요약
-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1차 투옥 후 석방된 뒤, 에베소에 남겨 둔 디모데에게 보낸 개인 목회서신이다. 바울이 디모데 한 사람을 얼마나 깊이 멘토링하고 권면했는지가 드러난다.
- 올해 표어인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Every soul matters to God)”와 맞닿아 있어 디모데전서를 선택했다.
- 1장 1-2절에서 바울은
- 1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선포한다.
- 2절: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 부르며, 은혜·긍휼·평강의 축복을 전한다.
- 핵심 적용
-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사람과의 관계도 열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인간관계도 어려워진다.
- “구주 하나님”: 구약에서 익숙한 표현으로, 성부의 구원 계획, 성자의 십자가 완성, 성령의 체험으로 삼위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
- 구주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낮은 관점(땅의 시야)에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다.
-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부활 소망은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산 소망이며, 이 땅에서도 담대함과 승리를 주신다(요 16:33, 벧전 1:3).
- “명령을 따라”: 하나님 주권적 섭리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은 후회가 아니라 순종의 길이며, 부르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롬 11:29).
- “참 아들 디모데”: 성격도 기질도 다른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영적 가족의 모델이며, 바울은 연약한 디모데를 위해 은혜와 평강뿐 아니라 특별히 “긍휼”을 더해 기도한다.
- 결론: 내 인생의 길을 ‘내 선택’으로만 보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긍휼을 구하며, 은혜를 체험함으로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 되자.
전문 스크립트
네. 한 영혼을 살리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오늘부터 디모데전서 주일 강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디모데의 입장과 심정이 되어서 주님의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다니다가 에베소에 남겨 둔 디모데에게 보낸 개인적인 목회 서신입니다.
바울이 디모데 한 사람에게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정성껏 그를 권면하고 멘토링을 했는지를 볼 수 있는 책인데요. 저희 올해 표어가 뭐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Every soul matters to God,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소중하다. 그래서 이 디모데전서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인사말 부분 1절과 2절을 보겠는데요. 1절에서는 이 편지의 발신인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소개를 합니다. 2절에서는 신앙 안에서 디모데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또 축복의 인사말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사람과의 관계가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려워지게 돼 있어요. 인생을 살아보면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이거든요. 일은 아무리 많고 어려워도 관계가 좋고 팀워크가 좋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관계가 어려워지면 작은 일에도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되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열려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다시 보여 주시면, 저를 따라해 보세요. 우리 구주 하나님.
사도 바울은 상당히 신학적 관점을 갖고 서신을 썼기 때문에, 왜 하나님께 “구주”라는 표현을 썼을까? 우리가 보통 찬양할 때도 “내 구주 예수님” 이런 찬양하잖아요. 박해 시대 로마 시대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암호처럼 사용했던 것이 물고기라는 뜻을 가진 “익투스(IXTHYS)”라는 단어예요. 이 단어의 이니셜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익숙한데, “구원자 하나님”, “구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좀 익숙하지 않으시죠? 그런데 신약적으로는 덜 익숙해 보여도, 구약적으로 보면 굉장히 보편적인 표현이었어요.
이사야 43장 3절 상반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구약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이걸 정리해 보자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디자인하셨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그 구원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실행하고 완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령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감격을 날마다 체험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께서 죄인 된 나 한 사람을 온전히 구원해서 하나님 사람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주시니 너무나 감사한 거죠. 제가 “구주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세 가지를 나누고 싶은데,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으로부터 건져 주셨는가?
첫 번째는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죄악에서 건져내십니다. 청년 사울로 적용해 보자면, 청년 사울은 아주 교묘한 죄악에 빠져 있었어요. 이 사람은 유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자기 의와 영적 교만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감시하고 비방하고 투옥하고 처형을 하잖아요.
세상이 자기가 생각할 때 옳은 일을 하면 좋아져야 되는데, 그렇게 한다고 세상이 좋아지고 밝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려워지잖아요. 그래서 청년 시절의 사울은 의인인 척하는 죄인이었어요.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악인이었어요.
제가 사무엘상 30장 두 메시지를 하면서 비슷한 결론으로 메시지를 했습니다. 과도한 이상론에 빠지지 말라. 과도한 이상론은 주로 누가 빠질까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에요. 다른 사람보다 기준이 높은 사람들이 이상론을 갖고 얘기하는데, 그러다 보면 그것 때문에 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깨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극단주의라는 것은 어떤 사상이든 간에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이상론인 거죠. 인간이 이상론을 현실로 만들 능력이 있는가?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 이상 사회를 만들 수 있나요? 없어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온전한 세상을 세우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의 기준, 내가 가진 이상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다 보면 나는 옳고 사람들은 다 틀렸는데, 문제는 그 의가 교묘한 악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을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돼요.
사람들이 왜 자꾸 나에게 악하게 하느냐. 가정에서도 나만 혼자 열심히 살아요. 교회에서도 나만 열심히 해요. 일터에서도 나만 열심히 일해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만 나라 걱정하는 것 같아요. 만약 여러분 마음 안에 이런 생각이 있다면, “나만 의롭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거예요.
이 자기 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이 청년 사울을 여기서 건져내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중에 고백하잖아요. “나는 죄인들 중에 괴수다.” 죄인들 가운데서도 나는 최악의 죄인이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깨우치고 나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찬양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서 건지시는가? “낮은 관점”에서.
왜 낮은 관점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 높은 천상의 전망대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땅에 붙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관점, 뷰포인트 자체가 낮은 거예요.
제가 최근에 상담을 하면서 느낀 건 뭐냐면, 사람들이 왜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자꾸 사람들과 부딪칠까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깨가 부딪친다”는 표현을 쓰죠. 좁은 공간 안에 있으면 지하철이나 승강장에서 어깨가 부딪히잖아요. 그런데 키가 큰 사람하고 작은 사람은 어깨가 부딪혀요, 안 부딪혀요? 안 부딪히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죄송한 얘기지만 자꾸 여러분이 누구랑 부딪히면 수준이 비슷한 거다. 수준이 다른 사람은 부딪히지 않아요. 집안에도 부모하고 자식은 싸움이 일어나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냥 하염없이 사랑스럽고 하염없이 불쌍한 거거든요. 그만큼 격차가 크기 때문이에요.
사무엘상 초반부를 보면, 어린 사무엘이 성소에 헌신되어 제사장들을 돕는 보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대제사장이니까 이스라엘 종교 공동체의 수장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못 들어요? 못 들어요. 근데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그러면 누가 영적인 뷰포인트가 높겠어요? 어린 사무엘이 관점이 훨씬 높은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망대까지 끌어올려서 엘리를 보게 하시고, 세상을 보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내가 막내라서, 일터에서 내가 신입이라서, 교회에서 내가 새가족이라서, 그 포지션에 있어도 하나님의 관점이 열리면 누구도 여러분을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위축되지 않아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전망대 위에 세우시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그러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망대에 서는 가장 중요한 비결 중에 하나는 기도입니다.
자녀들이 새학기가 시작이 되었잖아요. “넌 공부만 해라. 성적만 잘해라.” 이렇게 좁은 관점, 땅의 관점으로 아이를 키워 놓으면 관점도 좁아지고 낮아지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돼 있어요. 아이에게 하나님의 거시적 관점을 보여 줘야 됩니다.
공동체와 순예배가 시작이 되고 새학기가 시작이 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인생의 최저점에 있을지라도 순식간에 영적인 최고점으로 우리를 이동시키시는 강력한 힘, 그것이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많았잖아요. 가는 곳마다 괴롭히는 사람들인데도,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그 포지션을 올리시잖아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그저 불쌍한 사람들로 보이게 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삼일절 나라사랑 기도회를 하면서 자녀들도 많이 왔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연구하다 보니까 놀라운 말을 하셨어요.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원한을 품은 2천만 조선 사람들을 억지로 자신들의 국민으로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이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그들에게 덕이 되지 않겠느냐.
일제 강점기에 모진 수모와 억압을 당하면 사람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일어나게 돼 있다고요. 그런데 안창호 선생님은 신앙인답게 높은 관점에서 바라본 거예요. 일본 사람도 선하고 좋은 것을 몰라서 저렇게 악한 일을 하고 있구나. 이게 보이는 거예요.
이런 관점이 열리면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어깨가 부딪히면 인생이 피곤해지고 영혼이 매말라가게 돼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망하게 되면 여러분 안에 참된 자유와 평강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십니다. 원수가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한국 양궁이 세계적인 실력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 양궁의 탑 포지션을 흔들기 위해 세계 대회 규정을 계속 바꾸기도 하는데, 그 덕분에 나라들마다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잖아요. 만약 “내가 나가서 꼭 이겨야겠다”는 좁은 마음이 아니라, “양궁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큰 마음을 가진다면 온 세계가 더 좋아하지 않겠어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 그런 마음을 가졌죠. 그리고 한국 양궁 선수들은 최고의 실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규정이 바뀌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아요. 세상이 흔들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생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서 절대자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셔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율법주의 교사들, 이방 통치자들, 총독과 관리들까지 가는 곳마다 괴롭힘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았어요. 주님에 대한 초점과 사명에 대한 집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하는 데 총 며칠 걸렸어요? 52일. 단 52일. 예루살렘 성벽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이후 140년 만에 다시 세운 거예요. 그동안 동서남북의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압박하고 조롱하고 괴롭혔는데,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면 다 흔들린 거예요. 그런데 느헤미야는 흔드는데 안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52일 만에 지은 거예요.
세상이 나를 흔들어서 흔들린다? 아니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사명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흔들리는 거예요. 초점이 바로 서면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상담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님, 예배드리면 영혼이 살아나는데 현장에 가면 다시 무너집니다. 다시 흔들립니다.” 왜 삶의 예배가 필요할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과목만 하면 되지, 왜 기도 모임을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게 불필요한 걸까요? 일터에서 하프타임(일터 예배)을 세우는 게 불필요한 걸까요? 아닙니다.
“내가 이 경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라고 살면 운신의 폭은 계속 좁아져요. 그러나 거시적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공동체를 품고 사명지로 여기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평안함과 담대함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이제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어요? “우리 구주 하나님” 다음으로 저를 따라해보세요.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께는 “구주”라는 단어를 쓰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왜 “소망”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신학적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망 권세에서 다시 살아나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부활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부활 소망이 내세만의 소망일까요? 이 땅에서는 힘들고 어려운데 저 내세에서만 소망이 있는 걸까요? 아니요. 현세에서 승리하는 소망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땅에서는 위축돼 살다가 천국에서만 어깨를 펴는 게 아니고요. 이 땅에서도 이미 주님이 승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 살아 있는 현재 진행형의 소망입니다. 부활 소망은 미래형만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넉넉히 승리하게 하는 현재 진행형의 소망이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예수님은 천국문을 입성할 때만 소망되시는 분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에서도 소망이십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거든요.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뛰어넘게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요. 자유해지게 돼 있어요. 할렐루야. 여러분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데, 액션 영화는 말도 안 되게 주인공만 살아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역사를 보면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결말 같은 거예요. 사탄이 집중 포화로 공격을 하는데, 예수님이 다 이겨내십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뚫고 부활하시잖아요. 그걸 이루어내심으로 우리에게 부활 소망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걸 깨닫고 나니까 사도 바울이 낡은 종교와 율법주의를 내려놓는 거예요. 자기의 지식과 언변을 내려놓고, 로마 시민이라는 신분과 사회적 지위도 내려놓은 거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 되신 거예요. 할렐루야.
내 인생의 유일한 자랑, 내 인생의 유일한 소망, 내가 살아갈 이유, 내 평생의 꿈과 비전이 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를 사도로 보내지 않으시겠어요?
다시 1절을 보시면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아주 제한적으로 쓰이는데, 본문에 쓰인 의미는 “위로부터의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회사나 조직 생활하다 보면 “위에서 결정한 겁니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인생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명령하셔서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29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있어요? 없어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후회를 한다? 그건 이상한 거예요.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된 뒤 인생이 크게 바뀐 것 중 하나가, 후회를 안 하기 시작한 거예요.
후회는 내가 내 기준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왜 이 학교를 선택했지, 왜 이 일을 했지, 왜 이 결혼을 했지.” 그런데 하나님이 콜링하시는 길을 따라 순종해 가면, 힘든 때가 있어도 번복하고 싶은 후회가 잘 생기지 않더라고요. 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을 가는 겁니다.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인지, 내 기분과 계산으로 선택한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후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부르심의 관점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제가 대학 들어갈 때도, 1년 전에 하나님이 어느 대학 어느 과로 갈지 마음에 분명히 주셨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깨닫게 된 게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는 상황에 따라 성적 맞춰 대학을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이구나. 할렐루야.
제가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를 말하는 이유는, 저도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선교사 하라면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해 왔는데, 마음 한 켠에 “개척교회는 안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개척교회를 하라고 하셔서, 부르심이니까 순종했습니다. 부르심을 따라오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을 따라가는 인생길이 복된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책임질 수도 없는 선택을 스스로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부르심을 따라 대학을 가고, 부르심을 따라 직장을 가고, 부르심이 있는 결혼을 하는 거예요. 부르신 그분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회개는 있을 수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제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참 아들.
사도 바울이 “참 아들”이라는 표현을 딱 두 번 썼습니다. 디모데와 디도, 이 두 사람에게만 썼어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나의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순 개강을 하는데, 저는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믿음의 가족, 믿음의 동지들을 만나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상처가 있는 분도 있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참된 공동체를 체험하며 치유가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의 이름 뜻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조모 로이스도 신실했고, 어머니 유니게도 신실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성경으로 신앙 교육을 시켰어요. 디모데후서 3장에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는 말이 나오죠. 어머니의 신앙 교육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또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디모데는 성도들에게 칭찬을 받는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어요. 그런데 제가 바울의 일생을 볼 때마다 드는 질문이 있어요. 왜 디모데였을까? 바울은 왜 디모데를 가장 중요한 수제자로 선택했을까?
왜냐하면 바울과 디모데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바울은 열정형,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기질로 하자면 담즙질,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디모데는 내향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죠.
그런데도 바울은 중요한 문제에 디모데를 먼저 보냈어요. 고린도 교회 문제 때도 디모데를 먼저 보냈죠. 하지만 디모데가 소심하고 위축된 성격이라 해결이 쉽지 않았고, 결국 디도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디도서는 분량이 짧고, 디모데전서는 더 길게 권면이 담겨 있는 느낌도 있어요.
더 놀라운 건 바울이 초대교회 중 가장 영향력 큰 에베소 교회 목회를 디모데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걱정이 돼서 디모데전서, 후서를 보내며 계속 붙드는 거예요. 디모데는 바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자 가장 걱정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는 이교 문화가 강하고, 교회 안에도 연로한 장로들이 많고, 율법주의 교사들도 판을 치던 환경이었어요. 나이는 어리고 경험은 미숙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디모데를 생각하면 바울은 저절로 눈물이 나고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이 마음이 우리의 중보기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예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내게 있을지어다.
바울 서신의 기본 인사는 보통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유독 “긍휼”이 들어가요. 이유가 뭘까요? 생각만 해도 불쌍하니까. 초대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큰 에베소 교회 담임을 맡아 위장병까지 생기고 위축된 디모데를 생각하면 바울의 마음이 그랬던 거예요.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평강은 존재적 불안을 겪는 인생에게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의 순서가 뒤집어진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체험해야 평강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 한 번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말씀의 은혜가 넘치길 바랍니다. 찬양을 많이 들으세요. 예배와 개인 예배와 기도의 은혜가 넘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긍휼은 구원의 언약에 기초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구약적 단어로는 헤세드라고도 하지요. 바울은 디모데를 두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돌봐 주옵소서.”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중보하는 지체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되잖아요. 내가 평생 그 사람을 다 돌봐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친히 돌봐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02월
2026.02.28(주) | 주일설교 | [2026 삼일절 나라사랑기도회] 역사의 치유자가 되라! (마 18:21-35)
[2026 삼일절 나라사랑기도회] 역사의 치유자가 되라!(마 18:21-35)
설교 요약
- 주제: 죄의 현실을 직면하되, 십자가의 용서로 역사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라.
- 3·1절을 기억하는 이유: 하나님은 각 민족이 자유와 독립을 누리도록 세우셨고(창 10:5),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 고백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역사를 기억하되 증오에 머물지 말고 복음으로 포용과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
- 죄의 결과: 죄는 죽음(영혼·관계·공동체의 파괴)과 저주를 부른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삶의 여러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영적 문제다.
- 회개는 책임을 포함한다: 하나님 앞의 사죄로 끝나지 않고, 이웃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보상(속건의 원리)이 따라야 관계가 회복된다.
- 피해자의 자리에서의 적용:
- 먼저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라. 우리는 역사 속에서 피해만이 아니라 가해의 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끝없이 용서하라(마 18:21-22). 숫자 셈이 아니라 용서의 태도다.
- 1만 달란트 비유의 결론: 큰 탕감을 받은 자가 작은 빚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악함이다. 사랑은 악한 것의 ‘기록’을 붙들고 살지 않는 결단이다(고전 13장).
- 결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마 18:35). 역사를 분별하되, 복음으로 치유와 회복을 이루는 길을 선택하자.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토요 온 가족 새벽 예배, 또 이 자리에 나온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나라사랑 기도회로 함께 예배합니다. 특별하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복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시작 기도(통성)
우리 시간 먼저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온 세대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토요 새벽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영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하는 이 자리.
하나님, 형식적인 예배가 되지 않고 세대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자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각 세대의 마음이 열리고, 아이들의 예배가 살아나며, 부모들이 먼저 본이 되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마다 예배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이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3·1절을 기억하며 우리가 예배하며 나아갈 때, 믿음의 선배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예배가 다음 세대를 위해 영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기도의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뜨거운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예배 자리를 위해서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통성으로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토요 새벽 기도, 하나님이 이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 새벽 우리를 부르시고, 온 가족과 이 세대가 주님 앞에 서게 하는 이 시간.
하나님, 그 주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른의 예배, 아이의 예배가 아니라 온 세대가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거룩한 임재의 자리,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셔서, 하나님, 새벽 예배 자리에 나오게 하신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도, 우리 자녀들의 마음도 하나님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온 가족의 마음 위에 성령님 함께하여 주셔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이 가운데 가득하도록 친히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모두의 기도가, 부모들의 기도가 다음 세대를 덮는 축복의 기도 기둥이 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세대의 찬양이 1516교회를 다시 살리는 불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 인도하여 주시고, 습관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경험하는 은혜의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어른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본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인 줄 믿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기도가 자녀에게 본이 될 수 있는, 다음 세대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정의 예배가 다시 회복되고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예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새벽 기도의 자리를 깨어나게 하여 주시고, 예배가 한 가정을 살리고 한 세대를 살리고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세우는 출발점이 되는 은혜의 시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3·1절을 기억하며 나아갑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 눈물과 믿음을 우리 가운데도 부어 주시옵소서.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나라를 살리는 기도로 시작되게 하시고, 우리의 이 작은 예배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이곳 가운데 임하시고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 3·1절을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주여 삼창)
우리 시간 다시 한번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책임 있게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3·1절의 정신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으며,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믿음을 회복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믿음이 자라나게 하여 주시고, 나라를 품는 중보자들의 삶을 세워갈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삼창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주여!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 나라를 세우고, 지금까지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 우리의 역사가 단지 역사를 기념하는 예배, 기억하는 예배로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오늘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나라를 위해 다스리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했던 모습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에서 신앙이 무너지고, 삶의 자리에서 타협하고, 기도는 줄어들고, 불편과 불만이 많았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안에 무너진 예배를 다시 세워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무감각했던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기도의 무릎을 세우게 하여 주시고, 정직과 거룩으로 이 땅을 살아갈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감정에 머무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거룩한 삶의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침묵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타협하지 않는 정직의 사람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책임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먼저,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세우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고, 학교와 직장 가운데서 빛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눈물로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회복은 먼저 교회의 회복임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대한민국을 살리는 영적인 씨앗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이 나라를 맡겨 드리며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길에 동참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 자리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말씀을 위한 기도(주여)
우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도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듣는 교회를 넘어, 말씀을 듣는 성도를 넘어, 말씀대로 살아내는 교회와 가정, 우리 개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선포될 말씀이 우리 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심겨지고 우리의 삶으로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고, 가정이 말씀 위에 세워지며, 다음 세대가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붙잡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1516교회 모든 성도들이 먼저 말씀으로 살아내고, 다음 세대에게 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한 영혼을 살리는, 한 가정을 살리는, 한 공동체를 살리는, 한 지역과 나라를 살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옵소서. 오늘도 그 말씀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주여!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세대 가운데, 다음 세대 가운데 심겨지고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가치관이 넘쳐나는 시대 속에 말씀을 붙드는 것이 손해처럼 보일지라도 끝까지 말씀을 선택하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타협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으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 세대가 우리 어른들의, 먼저 가는 세대의 등을 보고 살아낼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선포되는 한 구절의 말씀이 우리 교회의 방향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정의 기준이 되게 하시고, 우리 자녀들의 평생 신앙의 뿌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듣고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오늘도 이 아침에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오직 주님을 바라볼 때,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새로운 일을 이루시고 새로운 은혜를 허락하실 주님을 소망하고 바라보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그렇게 놀랍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찬양(전문)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의 박수 올려 드리며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경배하리, 경배하리, 경배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찬양하리, 찬양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주 찾으리, 주 찾으리
나 사는 동안, 나 사는 동안
주님의 길, 그 길 따라가리
경배하리, 경배하리, 경배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찬양하리, 찬양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주 찾으리, 주 찾으리
나 사는 동안, 나 사는 동안
사는 동안 주님의 길을, 주님의 길을 나아가리.
주님 아멘,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무릎 꿇고 고백하지, 고백하리. 내 모든 것 드리리.
주를 향해 내 눈을 들고, 주 의지하리. 주만 의지하리.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찬양받기 합당하신 존귀하신 주만. 오직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합당하신 존귀하신 주만.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아멘. 우리 모두 찬양받으시기에 감사와 찬양의 박수 올려드립니다.
사랑해요, 진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눈을 뜨는 아침부터 나 잠들기까지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사랑해요, 사랑해요, 진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눈을 뜨는 아침부터 다 잠들기까지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신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을 인도하셨네. 나의 모든 호흡 다해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를 인도하신 주님.
고난 중에도 나와 함께하셨네. 내 아버지 되시며 내 친구 되신 주,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주님의 선하심이 다 인도하시네.
주님의 선하심이 날 지켜주시네. 주께 나의 모든 사랑, 주님께 드리네. 예수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소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주,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 사랑
지금 우리에게 품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 우리 살리신 것 믿습니다. 모든 영혼의 생명의 성령 넘치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소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주,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 사랑
지금 우리에게 부어 주소서. 오 거룩한 백성 주 앞에 나와 함께 예배할 때 사랑하리라.
이제 주님 나라 임하시다. 온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리라. 이제 주님 나라, 이제 주님 나라 임하시리라.
이제 주님 나라 임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이곳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이 시대 우리 자녀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직접 목도하고 체험하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나라 임하여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두 손을 들고 주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님,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가 하나님 앞에 흠 없이 하게 하여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기도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과 같은 복음 증거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 하나님의 나라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유하심이 넘치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한국 교회를 다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영광 나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자녀가 기술 문명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상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다시 살리게 하여 주시고,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열방을 이끌어갈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대가 첨단의 과학 문명과 AI 테크놀로지를 이야기하지만, 문명과 인간의 화려함과 자랑으로 유토피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이 시대 가운데 놀라운 공의와 사랑과 평강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녀 세대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대한민국을 붙잡아 주옵소서.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열방으로 흘러가는 민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아침에 나라사랑 기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주님께 감사 영광의 박수 올려 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영상 시청 안내 및 광고
자리에 앉으시고요. 한 가지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내용)
제가 16되던 해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청일 전쟁이 발발해 피난길에 나섰고요. 전쟁이 끝나고 경성 구경을 하게 됐는데, 그러다 밀러 목사님이 운영하던 학당에 입학해 하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독립 협회에 참여하게 됐죠.
1899년 협회가 해산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일을 했고요. 교육학과 신학을 배워 민족의 갈 길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하는 시대였으니까요.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말도 못할 때였습니다. 상투를 휘어잡고 싸우는 한국인들을 미국인들은 원숭이 보듯 구경했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미개한 민족.
경멸하는 눈과 인식을 바꾸려면 단결과 계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한인친목회를 만들었던 겁니다. 아들 필립이 태어난 해입니다.
같은 11월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됐고요. 동네 동포들을 계몽하는 일이 시급해 1907년 귀국했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조직이 커지자 이토 히로부미가 청년 내각을 수립하자더군요. 저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도산 안창호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인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서총장으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습니다. 독립신문을 발간했고 독립운동을 지휘했죠.
9월엔 대한민국 통합 임시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실력이 부족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니 실력을 키우지 못하면 독립이 되어도 나라를 운영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고,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잔다.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인격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
그것이 제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보세요. 결국 이렇게 독립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도산 안창호입니다. (영상 종료)
나라사랑 기도회에 이렇게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나라사랑 기도회가 끝나고 순별로, 가정별로, 또 여러분이 계신 지역과 이 주변 지역의 3·1절을 기념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이트에 가셔서 함께 기도하시고, 사진도 찍어서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주차하신 분들, 처음으로 찾아오신 분들 계시기 때문에 주차 등록 꼭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가 끝난 뒤에 3·1절 나라사랑 기도의 기념으로 떡을 준비했으니 떡도 받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성경 봉독(마 18:21-35)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35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도록 하겠습니다.
(봉독)
그때 베드로가 나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나가서 그 종이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이에 그가 허락하지 아니하고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이르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아멘.
암송(마 16:18)
이번 달에는 마태복음 큐티를 하면서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같이 암송하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 설교: 역사의 치유자가 되라!
(마 18:21-35)
하나님께서 이 시대 가운데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고 세상을 치유하시는 복음의 전제가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한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는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셨고, 교육적으로는 교회와 학교들을 세움으로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을 하셨죠.
안창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망하는 것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청소년, 청년 세대가 정말 중요합니다. 지난 1월 리조이스 캠프를 하면서, 한국 교회의 희망이 말로만 청소년·청년이 아니구나, 진짜 우리 청소년·청년들이 대한민국의 희망이고 한국 교회의 희망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캠프를 3년간 지속했더니, 학생이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밖에 안 되는 교회에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밴드를 조직하고 예배팀을 만들고, 학생부 예배를 섬길 뿐 아니라 대예배를 섬겨 어른들을 놀라게 하고 도전을 주는 교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고 한국 교회의 희망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 자녀 세대 가운데서 다윗과 같은 예배자들이 나오고, 에스더 같은 기도자들이 나오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녀들이 함께 나왔는데, 우리 자녀들 박수로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년 3·1절이 되면 독립의 역사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절기가 되면 유월절에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를 되짚는 것처럼, 우리가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나누겠습니다.
1905년 구한말 조선은 사회적으로, 정치·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약하고 무너져 있던 때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고, 1910년 경술국치로 모든 주권을 빼앗기며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의 선언(민족 자결주의)이 있었고, 이에 힘입어 2.8 독립선언문을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이 작성해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 선언문이 한국으로 들어와 3.1 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되었고,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됩니다. 탑골공원(파고다 공원)에서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체되자, 학생이 먼저 올라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칩니다.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 2.8 독립선언이고 3.1 만세운동이었습니다.
그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35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이 자유와 주권을 되찾게 하시고 오늘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구한말 샤머니즘과 부정부패가 심각했고, 그 늪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셨고, 일제강점기 고통과 6.25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를 일으켜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내일이면 3·1절 107주년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현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상은 친일이냐 반일이냐, 이 관점으로만 보고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적 아픔을 반복하게 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는 신앙적 관점도 필요합니다. 왜 3·1절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가. 어떤 민족과 나라도 타 민족과 나라에게 지배받지 않고 자유와 독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0장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세우신 분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1919년은 주권을 완전히 강탈당한 지 9년쯤 된 때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의 고백으로 독립 만세를 외친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그리스도인이 16명이었습니다. 곳곳에서 교육·계몽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치유하고 포용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큐티 본문이 용서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 1) 죄는 죽음과 저주를 부른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하십니다. 죄는 무엇을 일으키는가. 첫째, 죽음을 부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혼이 죽고, 관계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죽는 일을 일으킵니다.
둘째, 저주를 부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신 것처럼, 무관한 피를 흘리면 땅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영적인 필요입니다. ### 2) 회개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속죄제와 속건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죄로 인한 피해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미안해”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레위기의 다섯 제사 중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속건제는 하나님 앞에서만 끝나지 않고 피해를 준 이웃에게 보상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있어야 온전한 회복이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관계에서도 내가 해를 끼쳤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보상해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 3) 피해자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형제가 내게 잘못했을 때, 첫째는 나는 남에게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가 스스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분노하기 전에, 나는 과연 다른 사람에게 이런 잘못을 한 적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제국이 강제징용, 위안부 등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사죄와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베트남전에서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등, 우리도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민족 이기주의는 어느 민족에게나 있습니다. 피해자 의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도 너도 죄인입니다.
둘째,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하셨습니다. 숫자를 세라는 뜻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끝없이 용서하겠습니다. 끝없이 용납하겠습니다.
4) ‘기록을 남기지 않는 사랑’
이어지는 비유는 1만 달란트 빚진 종입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비교도 안 되는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넣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장)라고 말합니다. NIV는 “잘못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억이 나지만, 그 기록 파일을 계속 유지하지 않는 결단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오.” 이 말씀은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를 현실로 체험하게 하는 통로임을 보여줍니다. 내 죄는 용서받고 싶은데 남의 죄는 용서하기 싫다면, 이중적인 마음이고 위선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한다면, 끝없이 용납해야 합니다. 아멘. ### 5)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35절,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회수의 문제가 아니라 진심의 문제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마음으로 용서한 것처럼,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처럼 “일본이 망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 — 미움이 아니라 치유의 마음입니다.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은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해자를 마주했을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용서한 것처럼 너도 용서하라” 하셨고, 성령의 은혜로 손을 내밀어 용서하며 복음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본의 복음화율은 매우 낮고 영적으로 척박합니다. 하나님, 대한민국이 복음의 등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중일이 복음 안에서 연합하고 열방에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 결단 기도(통성)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정죄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며, 우리 안의 부정적 감정들을 합리화시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고, 우리 민족도 죄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흘린 피를, 우리가 흘리게 만든 눈물을, 우리가 끼친 고통을 치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회개하고 회복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되게 하시고, 우리 주변의 작은 이웃 한 사람 한 사람,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왜곡된 시각과 편견으로 보지 않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깨어서 이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일본의 죄를 지적하고 들춰내는 것을 넘어, 복음으로 그 땅이 치유되게 하여 주옵소서. 일본 교회가 다시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중국의 지하 교회가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열방의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할렐루야.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와 용납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처럼, 우리 이웃에게, 이웃 나라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을 베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일본이 좋은 이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중국이 좋은 이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중일이 열방의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분별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분노와 미움과 정죄에 빠지는 것도 문제이고, 역사를 왜곡하고 덮어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 하나님, 회개를 통해 회복되는 역사뿐 아니라, 용서와 용납을 통해 회복되는 온전한 역사가 한중일 관계 가운데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힘을 내어 일어나게 하시고, 정치·경제적 요인보다 복음이 가장 강력한 힘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녀 세대는 미움과 정죄의 세대가 아니라, 분열의 세대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연합하여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족들 손을 잡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 안에 용서와 용납이 있게 하시고, 우리 사회 안에 용서와 용납이 있게 하시고, 국제 관계 가운데도 용서와 용납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2026.02.22(주) | 주일설교 | 늦었다고 생각될 때 (삼상 31:1-13)
[1516 주일설교] 늦었다고 생각될 때 (삼상 31:1-13) | 이상준 목사 | 2026.02.22
[ 설교 요약 ]
- 길보아 전투(정확히는 길보아산에서의 ‘패전’)는 초반부터 전력 차가 크게 벌어진 채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산에서 시작된 전투가 아니라, 평원에서 밀려 도주하다가 산에 이르러 쓰러진 ‘패전의 마감’이다.
- 블레셋은 왕과 왕자들을 집중 추격해 요나단 등 왕자들을 죽이고, 사울에게도 치명상을 입힌다. 도주하며 산을 기어 오르는 상황은 궁수에게 가장 취약한 조건이 된다.
- 사울은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결을 택한다. 두려움은 결국 두려워하던 현실을 스스로 불러오게 만들 수 있다.
- 사울의 삶에는 두 가지 모순이 드러난다. (1)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다윗)이 과거 자신의 무기 든 자였음에도, 마지막에는 자기 무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2) 평생 과단성이 부족해 권력 이양은 못 하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는 극단적 결단(자결)을 선택한다.
- “힘을 빼고 맡기는” 영적 원리가 강조된다. 시내산 등정과 낙타 탑승의 경험을 통해, 내 힘으로 안 되는 길에서는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오히려 살 길임을 설명한다.
- 하나님과 예배에서 멀어지는 선택은 스스로를 코너로 모는 선택이 될 수 있다. ‘늦었다’고 느낄 때가 오히려 가장 빠른 때이며, 지금이라도 돌아오는 결단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낫다(better late than never).
- 패전과 몰락의 서사 속에서도,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처음의 좋은 시작”을 리마인드하며, 하나님이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소망을 남긴다.
- 결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늦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 전문 스크립트 ]
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사무엘상 60회 왕결편입니다. 사울왕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패전함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초반부터 전력차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면전인데 두 부대가 싸우다가 밀린 게 아니라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당한 것으로 돼 있어요. 완전히 밀린 이스라엘이 도주하다가 길보아산에서 추풍낙엽처럼 다 쓰러지게 됐다.
어떤 상황이었는가? 지도를 지난주에 보여드린 지도를 조금 확대해 보면 길보아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블레셋 군대는 그보다 위쪽인 수넴에 진을 치고 있었어요.
그리고 요단강 건너가기 전에 뱃산이 나오죠. 이제 뱃산에 패전해서 죽은 사울의 시체가 걸렸었고, 그 동편에 보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건너와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수넴과 길보아산의 양쪽 진영이 중간에 8km나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전쟁을 어디에서 치르겠어요? 중간에 있는 이스르엘 평원에서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이스르엘 평원은 고대로부터 이스라엘에서 가장 넓은 평원이기 때문에 대규모 전투가 많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자, 그렇다면 시작부터 도주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에는 평원에서 싸우다가, 이게 뭐 싸우는 정도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밀려서 도주하다가 길보아산에, 원래 그들이 진을 쳤던 곳에 이르러 쓰러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있었다면 시내산 올라가는 거였어요. 카이로에서 시나이 반도 쪽으로 451km를 달려서 시나이 반도의 꼭지점에 있는 시내산. 근데 그 시내산을 오르는데 이미 출발 지점 자체가 1500 고지예요.
고지에서 2,285m 되는 데까지 산을 오릅니다. 785m, 거의 800m더라고요. 아무것도 없는 돌산을 올라가는데 새벽 2시에 일어나서 6시에 정상에 도착했어요.
여러분, 그만큼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잖아요. 길보아산은 500m 정도밖에 안 되긴 하지만, 북쪽으로는 이스르엘 평원이 있고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이 보이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는 산입니다.
자, 그다음 전쟁 상황이 어떻게 이어졌는가? 2절과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함에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블레셋 사람들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왕과 왕자들을 집중적으로 추격합니다. 결국 왕자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 세 왕자를 따라잡아서 죽입니다. 그날 길보아산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널부러진 시체로 가득했어요.
알아보니까 봄부터 초여름까지 아이리스라는 야생화가 아름답게 흐드러지게 피는 산으로 유명하더라고요. 그러나 그날 산 전체는 붉은색으로 물들게 됐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흘린 피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리스의 꽃말이 좋은 소식이라는데, 굿뉴스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수치의 날, 배드뉴스의 날이 됩니다.
사울은 아들들이 죽어서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잠시 멈춰 애도할 겨를이 없었어요. 자기 살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결국 그도 궁수의 활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고지전을 한다면 고지를 점한 쪽이 유리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길보아산 전투라고 이야기하지만, 산에서 싸우기 시작한 게 아니라 평원에서 싸우다 도망가다가 산을 기어 올라야 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러면 상황이 정반대가 됩니다. 아주 불리한 상황이 되는 거예요.
산에 이르면 걸음이 느려지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도 군대들도 블레셋 궁수들의 쉬운 타겟이 된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길보아산 전투가 아니라 길보아산 ‘패전’이죠. 전쟁은 평원에서 시작했는데 여기서 다 쓰러진 거예요.
자, 그러면 사울이 이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는가? 4절에서 6절을 보겠습니다.
“내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사울이 무기 든 자에게 요청합니다. 너의 칼로 나를 찔러서 죽여 달라. 어차피 중상을 입었고 도주할 힘도 없고 블레셋 군대가 닥칠 테니, 더 이상의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다.
당시 고대는 패전국 왕들의 수족을 자르고, 승전국 왕의 상 밑에서 던져 주는 음식을 먹게 하는 평생의 수치를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디그니티,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호위병이 왕을 죽였나요? 못 죽였나요? 도저히 죽일 수 없는 거예요. 상황은 급박한데 사울이 자신의 칼을 거꾸로 세워 놓고 그 위에 엎드려 자결합니다.
결국 그날 사울과 세 아들과 호위병과 군대가, 모든 사람이 그날 함께 죽습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다가 두 가지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게 됐어요.
첫 번째 모순은, 사울이 평생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다윗이었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원래 사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무엘상 16장 21절에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를 삼았더라.” 왕의 무기를 드는 자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 평생 벌벌 떨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자기 무기 든 자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이러니죠.
제가 ‘두려움 너머의 삶’에서 늘 얘기한 것. 두려움에 빠지면, 두려워하는 그 일이 스스로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의 손을 잡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인생을 보면 권력의 칼, 재력의 칼, 세상이 사랑하는 힘의 칼을 의지하면, 그게 나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결국 나를 찌르는 날이 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보다 그것을 의지하면 그것으로 흥하고 그것으로 망하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모순은, 사울이 평생 얼마나 과단성이 부족했는지 몰라요. 사무엘이 “너의 왕위는 끝났다. 후임자는 이미 결정됐다” 알려줬잖아요. 그럼에도 지위와 권력을 내려놓지 못해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24장 20절에서 사울이 말하죠.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네 나라가 견고히 설 것을 아는…”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는 거죠. 알면 평화롭게 정권 이양을 결단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결정을 못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긴박하자 순식간에 자결을 선택합니다. 생명을 끊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결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위험한 결정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과단성을 권력 이양에 썼다면 인생을 비참한 코너로 몰 필요가 없었고, 이스라엘 역사를 이렇게 비극적으로 마감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 호위병은 왕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호위병의 사명은 마지막까지 왕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사울이 자결하자 무기 든 자도 따라서 자결합니다. 사울만 제대로 했더라면 주변 사람들은 너무 충성스러웠습니다. “그의 모든 사람이 그날 함께 죽었더라.”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를 못할까? “맡겨 드리겠습니다” 해놓고 왜 맡기지를 못하고, 스스로를 극한 코너로 몰아가는 인생을 살아갈까?
제가 시내산을 오르면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분노와 원한으로 온몸에 힘을 주고 산을 오르면 지치게 됩니다. 회개와 겸손으로 온몸에 힘을 빼고 올라가야 편안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나 싶었는데, 길이 험해지고 지치니 몸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목과 어깨, 온몸이 굳어지면 더 지칩니다. 수영도 마찬가지예요. 힘을 빼고 물에 뜨는 감각이 생겨야 패러다임이 바뀌거든요.
힘을 빼니까 그때부터 편안해지더라고요. 어떤 분은 낙타를 탔는데, 본인의 낙타만 빨리 안 가더래요. 본인이 긴장해 몸이 굳어 있으니 낙타도 리듬을 못 타는 거예요. 몸에 힘을 빼고 낙타에 맡기니 제일 앞으로 가기 시작하더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힘으로 못 올라가서 낙타를 탔으면, 낙타에 몸을 맡겨야 합니까, 안 맡겨야 합니까? 맡겨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낙타를 타고도 또 스스로 조종하려다가, 자기도 힘들고 낙타도 힘들게 만듭니다. 딱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야 되는데, 맡기지 못하니 나도 힘들고 가족도 힘들고, 직원도 힘들고, 목사도 힘들고, 교인도 힘들고, 서로를 괴롭게 만드는 거예요. 내 힘으로 해낼 능력이 있습니까? 그것도 안 됩니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신앙, 애매한 인생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이 회색지대에서 빨리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관계의 문제, 자녀 문제, 사춘기, 제2의 사춘기(우울감과 무기력감, 원망과 분노)… 인생의 험한 산 앞에서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 싶을 때, 뒤에서는 원수들이 화살을 쏘는 때, 그때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 외에는 없는 거예요.
팬데믹 기간에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한 분들, 개인적 상황으로 예배를 멀리한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스스로를 극한 코너로 몰아가는 선택이에요. 다윗의 선택이 아니라 사울의 선택입니다.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았고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31장의 비극은 사울 자신이 스스로 자초한 겁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의지할 방법이 없잖아요. 가족까지 미워하면 가족도 의지할 수 없고, 충성된 신하들을 쫓아내면 그들도 의지할 수 없고,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혀온 거죠. 마지막에 무당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합니다.
돈 없고 명예 없고 자랑이 없는 인생이 극한 인생이 아닙니다. 영적 관점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벼랑 끝 극한 인생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별일 없네” 하다가 갑자기 부부 관계가 깨지고, 자녀가 망가지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여러분, 보험은 사고 나고 듭니까, 사고 나기 전에 듭니까? 전쟁 준비는 전쟁 나고 합니까, 전쟁 나기 전에 합니까? 고민하지 마세요. 전에 준비해야지, 전쟁 나고 나서 준비하면 이미 늦은 거예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새벽기도 나오냐면, 문제가 생기면 나오기 시작해요. 왜 문제가 생기고 나서 엎드립니까? 평안할 때, 문제 없을 때 그때 엎드려야 합니다.
자, 이 전쟁 상황을 보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7절입니다.
이스라엘 평원의 저쪽(북쪽)과 요단 동편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거기에 삽니다.
블레셋이 남부 해안에서 올라와 수넴에 진을 친 의도가 이제 이해가 되죠. 북쪽 지파가 참전하지 못하게 끊고, 동쪽 지파도 두려워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12지파 중에 여섯 지파가 참여를 못했습니다. 왕이 전사하고 주력부대가 전사하니, 북쪽과 동쪽 백성들은 관전만 하다가 두려워 성읍을 버리고 도망한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기상과 야성은 어디로 갔는가? 원수들에게 너무 쉽게 앞마당을 내어 줬어요.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 순교자와 선교사들의 피값으로 세워진 한국 교회를 원수에게 쉽게 내어 주면 안 됩니다.
블레셋은 8절에서 10절에서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겨 신당과 백성에게 알립니다. 역대상 10장 10절에는 머리를 다곤 신전에 두었다고 나오고, 갑옷은 아스다롯 신전에 두고, 시체는 뱃산 성벽에 못 박아 걸어둡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 떨게 하려는 겁니다.
한때 준수한 외모와 좋은 배경,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했던 사울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고 군사 정권을 세운 사울이 이렇게 초라하고 부끄럽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에피소드를 더합니다. 11절에서 13절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밤중에 와서 뱃산 성벽의 사울 시신을 수습해 야베스로 가져가 장사하고 7일 동안 금식합니다. 왜 에셀 나무 아래인가? 사울이 기브아 출신이고, 왕궁이 없던 시대에 에셀 아래에서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왕으로 존대하고 추모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사울은 통치 초기를 제외하면 폭군으로 전락했고 민생·신앙·국방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시신을 정성껏 돌봤을까? 사울이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이민족에게서 자기 백성을 건져 준 사건이 있었고, 그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11장).
마치 영화처럼, 11장의 사울과 31장의 사울이 오버랩됩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권력을 쥐고 군대를 거느리고 세상의 힘을 다 가졌지만,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스스로 떠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관계도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유할 줄 알았는데, 폭풍을 맞으면서 결국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좋았구나.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가 좋았구나.
그러면 “늦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사실 인생에서 가장 빠른 때다. better late than never. 아예 안 하느니, 늦게라도 결단하는 것이 더 낫다.
성지순례를 한번 결단하고 온 분들이 또 오려는 이유가 뭘까요? 편안하게 지내는 것보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에 매어 두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90일 통독도 마찬가지예요. 힘들어도, 말씀에 나를 매어 두고 사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좋은 삶임을 알게 됩니다.
호세아 6장 1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가 여호야긴의 회복 이야기로 끝나는 것처럼, 역대하가 고레스 칙령으로 끝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끝 속에서도 소망을 남기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울의 아름다웠던 첫 시작을 마지막에 다시 리마인드한 이유도, 하나님이 여전히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처럼,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돌아와 살기를 원하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집을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 줄로 믿습니다. 정말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2026.02.15(주) | 주일설교 |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교회 (행 3:1-10) 이원진 목사
[260215 주일2부예배]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교회 (행 3:1-10) | 이원진 목사 | 2026.02.15
[ 설교 요약 ]
- 교회의 사명인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는 우리가 영혼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 주는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된다(고전 3:6-7).
- 성령의 충만함은 일회성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기도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생각’과 달리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
- 기도할 때 이전에는 배경처럼 지나치던 사람(미문 앞 앉은뱅이)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다.
- 앉은뱅이는 은과 금을 기대했으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라고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한다. 교회의 본질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이름이며, 영혼을 살리는 길은 오직 복음이다.
- 예수 이름의 능력은 사람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꾼다. 미문 앞에 머물던 인생이 성전으로 들어가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자로 변화된다.
- 교회가 손가락질 받는 이유는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고 오히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제·교육·치유·개혁을 하되,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복음으로 가능하도록 영적으로 뒷바라지하는 곳이어야 한다.
- 한 사람이 예수께로 돌이켜 예배자가 될 때, 그 사람을 보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예배로 내가 살고,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살아나며,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로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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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무거운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나를 새롭게 하시는, 내게 능력 주시는,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귀한 이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입술로, 우리 마음으로, 우리 삶으로 주님을 고백해내는 데까지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주시는 말씀이 내 삶의 무거움에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심령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예배를 받으실 주님을 찬양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교수님, 몇 가지만 좀 나누고 예배 말씀 나누겠습니다. 2월 21일 금요일까지 담임 목사님께서 이집트 성지 순례로 출타하셔서 오늘 1부부터 4부 예배는 1월 6일에 부목사님들이 설교를 하게 됩니다. 특별한 건 설 명절 기간입니다. 설 명절 기간 동안에 수요 여성 예배는 드리지 않으니까 기억해 주시고요.
성지 순례 팀도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명절이라서 설 명절 가정 예배 순서지로 저희가 홈페이지 게시판에 게시했습니다. 가정에서 돌아가셔서 명절 가정 예배 순서지로 함께 가족과 예배해 드리시면 좋겠습니다. 2월 28일에 나라 사랑 기도회, 저희가 3.1절마다 나라 사랑 기도회를 하는데 올해는 3.1절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그 하루 전날인 2월 28일 토요일 6시 20분 새벽 예배 시간인데요. 그 시간에 나라 사랑 기도회를 이곳에서 진행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오셔서 온 가족이 같이 기도하는 시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배팀에서 함께 예배를 섬길 스태프들을 모집합니다.
홈페이지 게시판, 또 입구 QR 코드를 찍으시면 신청이 가능하고요. 예배에는 많은 분야들이 있습니다.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삶 속에서 또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자리로도 나오시는 여러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르시면 가르쳐드립니다.
그리고 모르시면 성심성의껏 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니까 기억해 주시고 신청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새가족 교육이 없다고 저희가 안내가 나갔는데요, 신년이 되면서 새가족분들이 정말 많이 오셔서 새가족 교육을 해야겠다, 담임 목사님이 이야기해 주셔서 나가시기 전에 2, 3부 예배 후에 지하 1층 새가족실 A에서 또 B에서 새가족 교육이 있으니까 참고해 주셔서 새가족 교육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로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 한 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같이 있습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아멘.
오늘은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월 1일, 교회 올 한해 주제가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기억하고 계시죠? 그런데 이 주제를 세우고 나서 아마 성도님들이 많이 부담감을 가지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영혼을 살릴 수는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7절 말씀 보니까 이렇게 기록됩니다.
같이 한번 읽을까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멘.
한 영혼을 살린다는 말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으시면 좋겠다. 제가 부담을 좀 덜어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심고 물 주는 일을 하면 됩니다.
부담이 되는 이유는 “왜 안 자라지? 왜 안 살아나지?” 하는 마음 때문에 그래요.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해야 하는 일은 그 사람이 잘하나 안 잘하나 확인하고 책망하는 게 아니라 심고 물 주는 거 하면 됩니다. 심고 물 주는 일을 우리 성도님들께서 잘 감당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상준 목사님하고 같이 사역하면서 부교육자로서 유익한 게 참 많습니다. 목사님은 끊임없이 후배들에게 심고 물을 주십니다. 정말 잘 먹여주십니다. 참 이상한 것은 목사님께서 단위에 올라오시면 항상 체중 관리를 하신다고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우리 후배들은 먹는 즐거움에 살이 막 찝니다. 살찌면 성도님들이 가장 먼저 알아보세요. 언젠가는 인사를 하는데 언제부턴가 성도님들이 얼굴을 쳐다보면서 인사를 하지 않으세요. 배를 쳐다보고 인사를 하세요.
“내가 살쪘나 보다, 내가 살이 빠졌나 보다.” 그렇게 판단을 할 수가 있죠. 기분이 참 오묘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목회자를 향한 관심이라고 생각을 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목사님하고 사역을 할 때 때로 힘에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사님이 힘에 부칠 때마다 하시는 게 있어요. 먹이시는 거. 그럼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요.
“내가 사육당하는 건가?” 그래서 그런지 계속 먹이십니다. 먹으면 자라납니다. 성장기는 아니지만 계속 옆으로 자라나는 이상한 현상들이 있어요. 심고 물 주고,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1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1절 말씀입니다. 시작.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우리도 기대하고 고대합니다.
분명히 뜨거웠을 것이에요. 그 뜨거움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무리 안에서는 말씀 공부가 존재했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했다라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서로에게 공유하고 나눠주는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났어요. 성령에 충만한 사건들.
그러나 이 성령의 충만함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죠. 성령이 충만한 사건은 감정적인 일시적인 반응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라고 기록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는 자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아멘이십니까? 기도하면 영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보다 생각을 해야겠다는 게 우리한테 더 익숙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기도보다 먼저 생각하며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하면 사람이 움직이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신 줄 믿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는 건 그래서 우리 삶에서 너무도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2절 말씀 한번 볼까요? 2절 말씀에 같이 한번 읽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둔 자라.” 그 미문에 누가 있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기도하는 자들에게 이전에 보이지 않았지만, 기도하니까 보입니다. 이전에는 지나칠 수 있었지만, 기도하니까 지나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금 그런 상황이 됐어요.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니까 이전에도 끊임없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러 갔을 텐데, 이전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도행전 3장에 기록하게 되죠.
베드로와 요한은 태어나서부터 못 걷게 된 자를 만나게 됩니다. 안진뱅이라고 하죠. 이 안진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와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도록 시켰습니다. 저도 담임 목사님 따라서 AI에게 좀 시켰어요.
AI로 검색하니까 문이 상당히 다양한 문들이 나와요. 성전의 미문은 지금 이스라엘의 황금 게이트, 더블 게이트라고 하는데, 두 개 있는 문 앞에 성전 미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요청을 해서 나온 거예요. 앉은뱅이가 스스로 온 게 아니죠.
사람들이 메고 와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도록 시켰어요. 언제 그랬을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날마다, 매일같이 그것을 하도록 시켰다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성전의 미문에서 매일 마주치는 앉은뱅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배경화면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지나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이 사람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 앉은뱅이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보면 3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해요. 제가 한번 읽을게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앉은뱅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구걸이었습니다. 앉은뱅이를 메고 온 동업자들이 있는 곳으로 모아서 이 구걸로 자신뿐만 아니라 몇 사람 정도는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상대로 이 구걸을 하는가? 성전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경건한 마음을 이용해서 돈을 얻고자 함이 이 구걸의 전략이었습니다. 질문 한 가지 해볼게요. 이 앉은뱅이는 불쌍한 사람인가요? 저는 말씀 준비하다가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히 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왜 불쌍한지를 알았던 거예요.
누군가가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렇게 저한테 질문할 수 있죠. “목사님, 그가 장애인이니까 불쌍한가요?”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그렇게 질문하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이것을 영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불쌍한 이유는 그의 삶의 이유가, 그의 존재의 이유가 단지 그걸 하는 데 있었다라는 것이 불쌍한 이유인 거죠. 여러분, 우리 삶의 이유가 돈 버는 것, 돈에 있다면 우리도 불쌍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안진뱅이는 불행한 인생인가? 제 이야기를 좀 드리면, 저는 과거에 한 2년 동안 방글라데시에서 살았어요. 군대 대신에 태권도 감독으로 일을 하러 갔었는데, 내가 원해서 간 나라는 아니었어요. 나라에서 보내서 “너는 거기로 가라.”
그때만 해도 2002년도였는데요, 최빈국 중 하나였어요. 사람들이 방글라데시로 떠나는 저에게 위로를 참 많이 해줬어요. “괜찮아, 좋은 나라야.” 무슨 좋은 나라냐? 왜냐하면 거기에 왜 좋냐 물어보니까,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잖아. 좋을 거야.
제가 그 나라에 가서 경험한 그들의 행복은 무엇이었는가? 인도에 영향을 받은 주변 나라들이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영향들이 좀 남아있었고요. 현대판 카스트 제도의 척도가 되는 돈이 있어야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민했어요.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그들하고 많이 대화하고 살아보니까, 자신들의 신분에서 그 필요 이상의 꿈을 꾸지 않는 것이 그들한테 있더라고요. 단지 지금의 밥벌이를 하는 정도, 그러니까 구걸이라도 하루하루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에게 꿈이 있어야 되고 비전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길가에 가보면 이슬람권 나라들은 독특한 느낌들이 있는데, 길가에 그냥 거지들이 상당히 많아요. 내가 특별한 일을 안 해도 구걸로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그것을 행복해하면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슬람 교리상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돈을 안 주면 “하나님이 주라고 했는데 왜 안 주냐” 이렇게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행복, 과연 오늘 이 안진뱅이는 행복한 사람인가?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돈을 잘 버는 것이 행복인가?
그런 면에서 안진뱅이는 구걸해서 행복한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남의 인생을 불행하다, 행복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으면, 주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니라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벌리면 행복하고, 돈이 안 벌리면 행복하지 않다? 절대로 그 기준과 그 가치에 끌려가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죠.
이사야 43장 21절, 우리를 찬양하도록 만드셨죠. 제 아들이 입에 가시가 돋도록 외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양하도록 만드셨어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에요.
그러나 돈의 노예가 돼서 돈을 버는 것의 목적이 된다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방향이죠. 돈을 벌어도 그 이유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게 우리가 나아가야 될 방향이고, 우리가 생각해야 될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순위가 바뀌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일에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들 삶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오늘 인생의 우선순위가 구걸하는 거였고 돈이었던 이 안진뱅이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4절에서 6절 말씀인데요, 4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 성전의 미문에서 그 안진뱅이를 어떻게 봤다고요? 주목해서 봤어요. 뚫어지게 본 거죠. 이 안진뱅이의 기대는 어떤 기대였을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서 기대감으로 바라봤을 거예요. 불쌍한 인생이죠.
그런데 6절에 베드로가 아주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너에게 주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라고 이야기해요.
안진뱅이가 원하는 게 뭐였나요? 은과 금이에요. 당장에 자기의 바구니가 차는 것을 원했죠. 은과 금은 안진뱅이에게 하루에 끼니를 때울 수 있거나, 자기 동료들을 어떻게든 같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도구였을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은과 금은 나한테 없어. 은과 금은 나한테 없다”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죠.
한국 교회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은 사고치지 않더라고요. 사고치는 교회들은 상대적으로 돈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은과 금이 많아진 데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은과 금이 교회에 필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 없이 사역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사역을 진행하면서도 은과 금이 필요하다고 목사들도 성도들도 요청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은과 금보다 중요한 게 분명히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역하면서, 우리가 예배하면서, 우리가 교제하면서 은과 금보다 더 중요한 거 있지 않습니까? 은과 금은 많아졌지만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라진 채, 교회라는 명목상의 조직만 존재한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한 영혼을 살리는 거예요. 은과 금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은과 금으로 해결되면 적금 들고 투자하고 하면 되겠죠. 여러분, 그러나 그걸로 해결됩니까? 영혼이 살아납니까? 영혼이 기뻐서 춤춥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저는 대문자 T입니다. 가끔 목사님하고 사역하다 보면 F 목사님들과 사역하다가, 가끔 혼자 조용히 일하고 있는데 불러요. 대문자 T의 솔루션을 원할 때가 가끔 있으시거든요. 저 스스로도 인정합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그래서 만약에 제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안진뱅이 보고 감동하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하루는 저녁에 누군가 상담받으러 왔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짜고짜 이상준 목사님을 만나겠다고 하면서 찾아왔습니다. 많이 당황스러웠어요.
키는 190이었습니다. 그리고 덩치는 저의 한두 배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생각하죠. “목사님, 그렇게 작지 않아요.” 아무튼 저보다 두 배 커 보였습니다.
행색은 말할 수 없이 누추했습니다. 게다가 그래도 상담받으러 왔다는데, 그래도 운동화라도 신발이라도 제대로 된 걸 신고 올 줄 알았는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얘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제가 언젠가 새벽 기도 때 간증으로 나눈 적이 있는데, 이분은 사업도 실패하고, 가정도 실패하고, 관계도 실패하고, 돈도 없었어요. 뭔가 안쓰럽고 안타깝고 하는 상황을 나에게 설명했습니다. 제가 대문자 T라고 했잖아요.
공감이 하나도 안 가는 거예요. 이상하게 제가 그분한테 미안하지만, “그건 형제님 사정이고.” 그런데 죽으려고 한다는데 이상하게 나는 이상하다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 사람에게 뭐가 필요할까?” 이 생각뿐이었어요.
돈 얘기를 했더니 돈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단지 따뜻한 한마디가 필요해서 온 것도 아니었어요. 이상준 목사님하고 상담을 하려면 그래도 뭔가 절차를 우리가 해드리는데, 일단 목사님께 사정을 이야기해라. 직접 가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이메일을 좀 쓰면 좋겠다.
일단 5만 원을 손에 쥐어주고,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 찜질방에서 한숨 자고 잘 씻고 찜질방에 있는 PC로 목사님한테 메일을 쓰고 그 사정을 얘기하면 목사님이 빨리 연락을 주실 거라고, 두 가지를 드렸어요.
이상준 목사님 이메일 주소를 적어줄 테니까 상담받고 싶은 이유와 내용을 잘 적으면 좋겠다. 그 형제가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이메일이 없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그러면 또 한 가지가 생각이 나서 이야기를 해줬죠. 영등포에 자활센터가 있는데, 거기 주소를 적어줄 테니까 거기를 찾아가 봐라.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주소를 적어줬습니다.
찾아가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업을 두 번이나 했던 사람이라 그 정도의 능력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그 형제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 “내가 보기에 형제 죽으려고 온 게 아니야.” 놀라더라고요. “미안하지만 죽으려면 여기 오지 않아. 내가 보기엔 살려고 온 거예요.” 저보다 덩치가 큰 사람인데 제가 막 쏘아붙였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왜 와요? 마지막으로 찾아왔다는데 마지막 같은 느낌이 안 들었어요. 그 이유라면 살려고 뭔가를 붙잡고 싶어서 상담받으려고 하고 찾아온 거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물어봤던 거죠.
4일 뒤에 교회에 담임 목사님께 연락이 왔어요. 골든타임에 이 형제를 잘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이 형제를 평창에 있는 자활을 돕는 공동체로 우리가 보냈습니다 하고 연락이 온 거예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내 인생에 손꼽히게 잘한 일 중에 하나였구나.” 그 뒤로 제가 4050 공동체, 저희 1516 4050 공동체 지체들하고 평창으로 아웃리치를 갔었는데, 그 형제가 턱하니 있는 거예요. 아주 밝은 얼굴로.
이전에는 검은 티셔츠였는데 되게 해맑은 얼굴로 저를 보는 거죠.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나중에 잘 되면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그래서 제가 “그냥 잘 지내니까 보기 좋네요.” “은혜는 잊어도 되니까 잘만 살아 있으라고. 나한테 갚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그 순간에 이 형제를 대하였던 제 많은 선택들이 성령님이 개입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아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원하는 것,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원하는 것, 관계를 가지면서도 원하는 것. 그런데 원하는 것은 있지만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한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영원히 살아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인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복음을 주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있는 것이 있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어요. 그 이름의 능력, 그 이름의 권세, 그 이름의 치유, 그 이름의 기적. 이 베드로에게는 확실히 그 인생 가운데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는 그것을 그 앉은뱅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엄청난 수식어를 준 게 아니에요. “너가 예수님 믿으면 어떻게 될 거야? 너가 예수님 믿으면 네 인생이 바뀌어질 거야?” 이렇게 구슬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예수 이름으로 선포했을 뿐이에요. 그때 주님이 일하셨죠.
아까도 이제 우리 김혁재 목사님이 같이 찬양을 불렀지만 작년에 많이 불렀던 찬양, 오늘도 부른 찬양 “예수 아름다운 이름” 이 찬양은 제가 쓴 곡입니다.
네, 다 아시겠지만 한 2년 전에 이상주 목사님께서 미국에 베델교회 컨퍼런스를 다녀오라고, 다짜고짜 당신이 알아보시고 저한테 다녀오라고 던지시는 거예요. 그래서 컨퍼런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알아보니까 컨퍼런스 과정 중에 어떤 프로그램이 있었냐면 작곡 프로그램이 있는 거예요.
도전을 좀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노래를 만들어서 제출하고, 만약에 이게 선정이 되면 미국 내슈빌의 프로듀서들하고 같이 이 곡뿐만 아니라 다른 곡들도 협업을 해서 작업할 수 있다는 저에게 이렇게 혹하는 그런 제안이 담긴 제안서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곡을 썼습니다.
곡 쓰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정도였어요. 목사님 밥 먹으러 가자고 하시기 바로 직전에 훅훅 써서 밥 먹으면서 목사님께 들려드렸어요. 물론 이 노래들은 어디서 들어본 가능성이 있는 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곡을 쓸 때 항상 그런 마음이에요. 누군가는 알고 있을 법한 멜로디들이 섞여 있을 거예요. 그 노래를 들고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에 간 지 3일 뒤에 이메일로 연락이 왔어요. 제가 순간 이메일 제목만 보고 “드디어 내가 선정이 됐구나, 뭔가 됐구나” 메일을 열어보니까 내용이 이렇습니다. “당신의 참여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그러니까 선발이 되지 않은 거죠.
마음에 오기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회신을 요구하지도 않은데 저는 회신을 보냈어요. “괜찮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미국에 메일을 쓸 때 이렇게 쓴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이 곡으로 한국에서 예배곡을 반드시 부를 거고, 앨범으로 또 만들 생각입니다. 언젠가 이 노래가 한국에서 잘 알려지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 저와 함께하고 싶을 겁니다.” 완전 약간 똘끼가 충만했죠.
그렇게 해서 한국 와서 우리 일요일 교회에서 부르기 시작한 찬양입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애써 위로를 해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좋은 노래를 왜 못 알아보지?” 저한테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이 노래를 만들 때 10분 정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뭐라고 고백하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냐면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은과 금은 나한테 없어도 세상이 인정할 만한 탁월한 능력이 내게 없다고 해도 예수님 이름만, 예수님만 내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노래가 선정이 되든 안 선정이 되든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선정이 돼도 걱정이었어요. 저 무리들 들어가서 내가 영어를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마음의 부담이 심했는데 하나님 내 부담을 잘 아셨는지 선정을 안 해주신 것 같아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이름만 내게 있으면 됩니다.
계속해서 7절에서 8절인데요. 7절에서 8절 한번 볼까요? 시작.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선포하고 어떻게 했냐면 오른손으로 잡아 그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변화가 일어났어요.
돈이 목적이었고 그것이 삶의 전부였던 안진뱅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자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던 거죠.
그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온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온몸으로 평생 성전의 미문에서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진뱅이가 성전으로 뛰어들어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이 되어집니다. 여러분, 놀라운 변화인 거예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할 때 그 인생이 살아나는 거죠. 이곳에서 원치 않아서 오신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명절이라서 가족한테 끌려오신 분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분 안 좋게 끌려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작은 소원 하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여러분을 만나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삶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안진뱅이의 삶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 온몸으로 예배하는 인생으로 바꿔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은과 금으로가 아니라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여러분.
그래서 교회는 뭘 하는 곳이 되어야 될까요? 교회는 예수님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딴 얘기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예수님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에서 은과 금 이야기 안 하셔도 됩니다. 교회에서 내 은과 금 어떻게 불렸는지 방법을 얘기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야 됩니다. 교회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남으로 살아남을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예수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가끔 성도님들이 카페에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원치 않게 제 귀가 밝아가지고 들을 때가 있어요. “어떤 목사님은 어땠더라, 이 목사님은 저랬더라, 저 목사님은 저랬더라, 아이고 어쩌냐.” 이런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하시더라고요.
성도님들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목사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목사님들의 관심이 있어서 하는 얘기로만 받아들이죠. 여러분, 그 얘기 말고요.
만나시면 하나님 얘기하고, 만나시면 예수님 이야기하고, 하나님 내 가운데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여러분 우리의 모임과 우리의 만남에는 그게 주가 되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됐어, 나는 잘 됐어, 나는 뛰어나게 됐어, 와 나는 너무 좋아” 이게 아니라, 그게 누구 때문인지를 고백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내용이 우리 주된 내용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내 모임의 주된 내용이 뭔가? 내 가정에서의 나누는 주된 내용이 뭔가? 내가 지인을 만났을 때 나누는 주된 내용이 뭔가? 본질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하영주 목사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교회는 반드시 구제해야 합니다. 맞죠? 가난한 자를 돌보고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하죠. 그러나 교회는 구호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육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의료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개혁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개혁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정의를 실현해야 됩니다. 그러나 정의실현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영적으로 뒷바라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세상에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고, 세상에 많은 공격이 교회를 향해서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요, 여러분, 교회가 영혼이 살아나는 곳이 되면 세상에 손가락질 받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영혼이 살아나는데 누가 손가락질 하겠어요? 인생이 무너진 사람이 살아나게 되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전심으로 예배하는데 누군가가 왜 손가락질 하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본질을 기억하십시오.
9절에서 10절, 마지막입니다. 9절에서 10절 같이 한번 읽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교회가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뭘까? 오히려 영혼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으로 세상에서도 받는 스트레스를 교회에서도 똑같이 받는 것 때문에 그래요.
세상에서 내 동료가 내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배 아프게 이야기하는데 교회에 와서도 돈 얘기하고, 교회에 와서도 내 집, 부동산.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이 죽어가는 걸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영혼을 죽이는 삶은 아닌지.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는 뛰었네, 걸었네, 찬양했네, 찬양했네.” 뭘로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옛날 찬양 생각나시죠? “그는 뛰었네, 걸었네, 찬양했네.”
단순히 그냥 성경에 한 사건이 나타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이게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요, 어쩌면 앉은뱅이와 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아내고 있지 않을까 말씀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성전을 향해서 뛰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다는 거예요.
예배할 때 내 영이 살 뿐만 아니라 함께 예배할 때 모두가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미문에서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 미문은 뷰티풀 게이트, 아름다운 문이라고 칭해져 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내 삶을 치장하고 내 삶을 꾸며내고 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온몸으로 찬양할 때, 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을 보는 많은 사람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계기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그런 인생이 될 때, 또 내 옆에 있는 지체를 그렇게 인도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예요.
저도 한창 운동할 때 저를 바라보던 많은 친구들이, 제가 언젠가 기타를 메고 대학교 가는 길에 기타를 메고 찬양을 하니까 저한테 와서 고백하더라고요. “너가 교회를 다녔어? 너 예수님 믿는 사람이었어?” 많은 생각이 교차했어요.
내가 그런 본이 되지 못한 삶이었구나. 또 한 가지는 나의 이 찬양이 친구의 마음을 분명히 울렸겠구나.
세상의 미문에서 비로소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앉은뱅이가 성전을 향해서 뛰어들어가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비로소 하늘나라의 미문으로 통과하는 삶이 되어집니다.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완전히 주를 위해 바뀐 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예배하는지 다른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는 거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부르짖는지 다른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 담임 목사님 기도할 때 항상 그 멘트 하시잖아요. “옆 사람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거예요. 내가 옆 사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죠. 내가 하나님 말씀 전심으로 찬양하며 뛸 때, 옆 사람이 그것을 보고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 죽어있는 영혼이 그것을 보고 살아날 수 있게 되는 것도 오늘 말씀의 하나의 포인트이기도 한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완전히 주를 위해서 바뀌는 은혜가 있길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516 교회여, 살아날지어다. 한국 교회여, 살아날지어다.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예배자가 되기까지, 우리가 평생 주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을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같이 한번 기도했으면 좋겠는데요. 하나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한 사람을 내가 기억합니다. 그 사람은 구걸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미문에서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내 모습 같습니다. 죽어있는 나의 영혼, 죽어있는 우리의 영혼이 주님 살아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혹 그렇게 기도하기 원하시는 분 자리 한번 일어나서 같이 한번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은과 금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살아남을 하나님, 내가 우리가 오직 예수 이름으로 경험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이 교회가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임을 선포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님,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의 주된 관심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교회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셔서 내가 살아나고,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살아나는,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두 손을 높이 들고 주여, 함께 기도하십시다.
2026.02.12(목) | 4321 WORSHIP | 거하게 하시고 불로 임하소서 (요 15:4-5) | 박시형 목사
4321 OPEN WORSHIP [HOLY FIRE] "거하게 하시고 불로 임하소서" (요한복음 15장 4-5절) | 박시형 목사 | 2026.02.12
설교 요약
- 요한복음 15장 4-5절을 중심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신앙의 출발점이자 열매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 ‘거하라’는 명령은 감정적 열정이 아니라, 말씀·기도·예배·순종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삶을 의미한다.
-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의 열심과 능력만으로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열매는 억지 생산이 아니라 ‘거함’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맺히는 성령의 역사다.
- 신앙이 무늬뿐이 되지 않도록,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주님 안에 거하는 삶으로 부르신다.
전문 스크립트
두 달 연속으로 이렇게 뵐 줄 저는 몰랐어요. 지난달에 저는 다 쏟아부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은 안 부르겠지 생각을 했는데, 제가 지난주에 이렇게 초대를 받았을 때 사실은 제 마음 가운데 저희 교회 사역도 여러 가지가 있고 잠깐의 좀 쉼을 얻길 원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거절을 했었어요. "내가 언제나 불러도 오는 사람으로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 라고 제가 문자를 보냈어요. 그리고 사실 여러 가지 바쁜 스케줄도 있었겠지만 한 번에 다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 쏟아부을 게 없다는 생각이, 다음에 제가 기회가 되면 좀 쌓이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거부를 했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자꾸 하나님이 찔림을 주시는 거예요. "기회가 됐는데 아무나 찾지는 않는데 왜 네가 거부를 하냐" 라는 그런 마음을 주셔서 제가 계속 싸움을 했어요. "하나님, 그래도 주님 저희 교회도 좀 사정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제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계속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우리 원주 목사님한테 연락을 했어요.
"이제는 세워졌겠거니, 주님 세워졌으면 안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문자를 넣었는데 아직도 묻고 있다는 거예요. 설교자를 못 세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내가 가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역시나 하고 이 자리로 저를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서야 할 자리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저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이유를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죽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사실 예수님 이야기를 좀 많이 하려고 했는데, 오늘 찬양이 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어서 처음에 성령님 찬양을 하다가 제가 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제가 설교 본부를 먼저 주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원조 목사님과 한영이 되어서 잘 통한 것 같습니다. 참 은혜가 있는 그런 시간인 것 같아요. 어떤 말씀을 전할까라는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이상주 목사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한 거룩한 불이 임하게 하는 그러한 달을 정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거룩한 불, 뜨거운 불, 성령의 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과연 뭘까, 우리의 신앙 가운데 놓치고 사는 게 과연 뭘까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다가 제가 예전에 가장 기본으로 신학교 때 받았던 그 음성이 생각이 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오늘 시간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성도인 제자들과 그 당시 청중들을 향하여서, 그리고 앞으로 올 청중들을 향하여서 오늘 분명하게 두 가지를 얘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첫 번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나는 누구이다"라는 "애고 에임"이라는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여러 가지 말씀들을 하셨어요.
솔직히 제가 이거는 원고에 없던 말씀이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깊은 감동을 주셔서 제가 좀 말씀을 나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나를 생각하는 게 좋을까,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자들 가운데 그리고 그 당시에 청중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장면들이 몇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게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 누구다"라는 그런 메시지예요.
예수님이 몇 가지로 자신을 소개하긴 했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시고요. 또 다른 본문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시고요. 또 다른 본문에 보면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세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이 제자들 가운데 우리 청중들을 향하여서 가장 쉽게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설명한 대표적인 메시지인 거예요.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내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야"라고 예수님이 설명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는 전지전능한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굉장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단어들로 열거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을 먼저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면서 꼭 청중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성도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도 함께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내가 아는 것도 중요하고 안 만큼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도 알아가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함께 얘기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또 오늘 본문을 통해서 포도나무와 그리고 가지로서 설명하고 있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여러 가지 신들이 있었잖아요. 이스라엘 땅에 바알 신 같은 경우에는 풍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신들 가운데 비의 신이 있었고, 곡식의 신이 있었고, 특별한 그 신들만의 특징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특징들을 설명하지 않고 본인을 양의 문, 그리고 선한 목자, 포도 나무 이렇게 설명하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양의 문이 되신 주님, 그리고 목자 되신 그 주님, 그리고 오늘 포도 나무로 소개하신 그 주님이 저는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그게 먼저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개념이 내가 이해가 돼야지 많이 하나님 보이지 않거든요. 말씀 속에서만 나타났거든요.
그런데 구약의 말씀 속에서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자기 자신을, 즉 하나님인 자신을 이 세 가지로 소개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양의 문, 그리고 선한 목자, 포도나무로 비유하시면서 설명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가 이제부터 정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늘 본문에 나온 그 포도나무 본질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시길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그 지혜가 열리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문이 그때 열리기 시작해요.
하나님이 추상적이면 내 삶도 추상적이게 돼요. 하나님이란 존재가 구체적이지 않으면 내 인생의 나의 믿음도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존재가 내 삶 가운데 명확해지고 정확해지고, 그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임했을 때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는지에 대한 나의 인생의 본질이 거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상적인 하나님으로 여러분 믿지 마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실질적인 하나님이었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포도나무로 여러분의 삶을 초청하시고 여러분을 가지로서 정체성으로 불러주신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 즉 예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마음 가운데 믿으면 내가 어떤 삶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신앙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는 의미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그냥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나의 신앙을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아니면 여러분들 요한복음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이미지가 여러분 마음 가운데 생길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내가 그러면 그 하나님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그런 본질적인 마음 가운데 확신이 생기게 되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내가 포도나무야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밝히면서 그리고 나서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이제 5절 말씀이에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포도나무인데, 너희는 포도나무일 때의 그 하나님이 너희의 인생 가운데 가지로써 너희 정체성이 온전하게 확립되는 것, 그것이 너희의 신앙이요, 너희의 믿음이다 라는 것을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말씀은 정체성에 대한 말씀으로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존심이 때로는 조금은 꺾일 수 있는 그런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지의 인생보다는 포도나무의 인생을 살길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가지의 본질은 의존적이에요.
그냥 붙어 있어야 되는 것이 여러분, 그냥 그의 인생의 본질이고 어떻게 보면 정체성이라는 거예요. 이 가지의 세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첫 번째,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가 떨어져 나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거예요. 또한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가 떨어져 나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거예요. 또한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가 맺힐 수 없죠. 그리고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가지의 정체성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어요. 그리고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도 못해요. 그리고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다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만이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리고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열매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붙어 있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단순한 것이에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이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포도나무라는 어떤 비유를 통하여서, 그러면 영적인 관계로서 어떤 관계를 우리가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가지는 아무리 힘을 주고 발버둥을 쳐도 열매를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햇빛을 끌어당길 수도 없고, 물을 끌어 올릴 수도 없고,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뿌리에서 나오는 그 양분으로 말미암아 그냥 살아가고,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에요. 그게 여러분, 가지입니다.
가지는 오직 하나만 할 수 있어요.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가지의 정체성은요, 그냥 붙어 있는 거예요.
뭘 스스로 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포도나무에 그냥 붙어 있는 게 가지의 정체성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자꾸 이 한계에 대해서 부정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자꾸 포도나무처럼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거예요, 죄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포도나무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죠.
나는 붙어있기 싫어. 나는 독단적으로 한번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 그냥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마치 여러분 가정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기생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자꾸 받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이 한계를 부정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의 상황이 괜찮아질 거예요. 나의 환경은 열리게 될 거야. 이번에는 내가 한 번 더 잘해봐야지.
라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라는 자꾸 나에게로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 포도나무가 아닌 나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메시지들이 신앙적으로 책임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성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사고방식이 말하는 것은 바로 한 가지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신앙이에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는 포도나무가 주인이에요. 포도나무가 메인이고 거기에 곁다리로 붙어있는 것이 여러분, 그게 온전한 관계예요.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중심이 되어지는, 내가 포도나무가 되어지는 그런 신앙에 우리는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근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할 때가 있어요. 기도는 조금 줄여도 사역은 내가 잘할 수 있어. 말씀 묵상은 조금은 내가 덜 하더라도 봉사는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 묻고 답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그동안 가졌던 이성과 합리적인 부분, 경험적인 것들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그런 많은 경향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는 거예요.
특별히 여러분, 사역자들한테 그런 마인드가 참 강합니다. 우리 교육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항상 성경 보고 항상 여러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러분 믿고 계시죠? 웃음은 아니라는 그런 확신으로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그렇지는 않, 그렇지, 아니야. 1호 1호 교육자들은 안 그럴 거예요.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다라는 거예요. 때로는 시간에 쫓겨서 무엇인가를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해야 되는 그 상황 속에서도 그것들을 기다리지 못하는 그런 신앙, 그리고 기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위에 서서 설교를 해야 될 때도 있는 거예요. 말씀을 통독해야 되는데 통독하지 못하고 성도들 가운데 통독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도 있다라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저만 그럴 거예요. 여러분, 요즘 제가 통독을 시작했어요. 조금씩 조금씩.
제가 신대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제일 많이 읽었고요. 신대원을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잘 안 읽었어요. 솔직히 고백하면. 시간이 없다라는 핑계 때문에.
대부분 우리의 신앙이 그런 부분이 하나님을 믿지만 나를 더 믿는 신앙. 신앙은 있지만 세상과 그렇게 별로 차이. 차이 없는. 성경을 읽지만 세상의 기준에 오히려 익숙하고 한계를 만나야 그 모든 상황들을 꺾이게 되어지는 그런 자꾸 잘못된 패턴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나는 가지인데 포도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최근 우리 한 성도님께서 굉장히 큰 수술을 하셨어요. 두 번 수술을 하셨어요. 처음 수술할 때는 종양을 제거하는 것 때문에 갈비뼈의 뒷부분을 한 10cm 정도로 절단을 했어요.
거기에 종양이 생겨서 자꾸 밀어내니까 굉장히 통증이 있어서 그 통증 때문에 그것들을 잘라내면서 조직 검사를 했는데 희귀 암이라는 게 발견된 거예요. 0.3% 세계에서도. 그래서 결국에는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치료 방법이 없는 그냥 치료 방법은 그것을 절단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약간의 전이가 발견돼서 다시 제2차 수술을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1차 수술을 할 때는 그나마 굉장히 표정이 좋았어요. 그러고 나서 입원하고 퇴원한 이후에 얼마 안 있어서 교회에 오면서 너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굉장히 표정이 밝았어요.
그런데 2차 수술 들어가는데. 두 개를 더 절단을 해야 되는 상황인 거예요. 마음이 너무나 심란한 거죠, 너무나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술하기 바로 전날, 제가 만나서 밥 먹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 형제가 두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의 이 상황들이나 환경들을 잘 열어가시는 분이시고, 이게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제 계획대로 살아갔을 거예요 하면서 굉장히 놀라운 간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와, 정말 대단한 신앙이다. 정말로 대단한 믿음이다." 이런 수술과 이 암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제가 봤어요. 그래서 저희 교인들이 엄청 열심히 기도했거든요. 2차 수술을 잘 마쳤어요.
그런데 나중에 회복이 되고 난 이후에 제가 최근에 신방을 가서 말씀을 들었는데, 너무 아팠대요. 그리고 두 번째 들어갈 때는 마음 가운데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 때문에 그 수술이 끝난 다음에 마취가 풀리면서 "저 좀 죽여주세요"라는 말이 나왔대요. 너무 아프니까. 첫 번째 수술은 참을만 했대요.
그리고 나서 그 수술이 끝나자마자 회사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어떤 것을 해야 될지에 대한 스케줄을 잡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수술하고 나서는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첫 번째 "죽여주세요." 두 번째. 아, 예수님도 이런 고통을 당하셨겠구나.
왜요? 외과적인 부분이잖아요. 뼈에 관련된 부분이잖아요. 어떤 신체 기관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이런 어떤 뼈가 잘려지고 이런 고통이 이것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겪으셨겠구나. 이 두 가지를 간증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제가 첫 번째 수술하고 나서는 저의 계획에 대한 부분이 그 전까지는 다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야겠다라고 어렴풋이 기억을 하면서 기도를 했대요. 그런데 첫 번째 수술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스케줄에 대한 여러 가지 플랜들을 이제 짜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두 번째 수술 들어가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나 좀 죽여주세요, 주님." "아프셨겠군요." "저는 저 주님의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안 들고 그 다음부터는 이제 두 개가 세 개가 잘려진 상황이니까 더 이상 무엇을 해야 될지에 대한 생각이 아무것도 안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시키시든지 간에 저는 그저 순종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꿈이 많고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많았던 그 젊은 청년의 입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막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을 제가 살아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여러분에게 겁주기 위해서 그런 거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해서 언젠가는 멈추게 하실 때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포도나무인 것처럼 내 인생을 계획하고 스케줄로,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계획과 스케줄을 잡는 그 모든 삶에 대해서 그것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멈추게 하는 그때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거예요. 왜요? 가지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데 자기가 자꾸 포도나무인 줄 아니까. 그리고 그 삶이 결코 옳지 않다라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길 원하시기 때문이죠. 따라서 여러분, 가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여러분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붙어 있는 것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저는 인지하고 기억하고, 날마다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아무런 고백이 아닌 것 같지만, 여러분 가장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가장 여러분 인정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인정되고 싶지 않을 때가 참 많아요. 왜요? 여러분들이 능력이 너무 많거든요.
직급도 있거든요. 사회적인 위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계속 끊임없이 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세요.
"너희는 가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하세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지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마침표를 거기서 딱 찍은 거예요. 가지는 그냥 붙어 있는 게 다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신앙이오, 믿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그냥 와닿지 않잖아요. 저희가 그렇게 여러분 쉽게 이 말씀이 수만 번, 수십 번 여러분들이 들었을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그렇게까지 여러분 와닿지 않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이 경험을 한번 해보면 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요즘 많은 분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참 많아요. 왜냐하면 걱정과 근심과 염려들이 참 많거든요. 염려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가 염려하고 있는 그 모든 부분들을 내가 아직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마음 가운데 교만함들이 있는 거예요.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마음 가운데 불안한 거예요, 염려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들이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이 여러분 정상적인 삶인데, 그것을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끝까지 붙들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두려움에 잠을 못 자다가 결국에는 불면증에 빠져요.
가장 쉬운 방법은 뭔지 아십니까? 염려하지 않는 거예요. 할렐루야, 너무 간단한 말씀이죠. 염려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냥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이게 여러분 예수님의 명령이에요. 말씀이 여러분 기준이라고 여러분들이 마음 가운데 매번 매 순간 고백하고 고백하고 고백하지만, 실질적인 상황 가운데서 내가 그것들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라는 거예요. 정말로 여러분들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실 때 가지라고 내가 믿어야 돼요. "너희는 가지인데 붙어있어야만 돼"라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라고 여러분 고백하셔야 돼요.
그리고 "나를 떠나서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내가 믿는 거, 그게 여러분 성도의 정체성이요, 우리의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어주십니까? 여러분 진짜 믿기로 결정하셨어요? 네, 그럼 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예수님은 생각보다 조금 덜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
나를 떠났을 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요,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이 표현은 완전한 무능력으로 의미해요. 무능력.
어찌 보면 주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라는 선언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무능력하다라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인정하길 원하세요? 네. 한 다섯 분 하신 것 같아요. 이거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요.
여러분 나는 무능력하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거, 사회적인 어떤 기대치, 경험치가 내 마음 가운데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나는 행동할 수 있다고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그 영역을 어느 것으로 어떻게 이해하는가. 여러분 그것을 먼저 우리는 살펴봐야 합니다.
어느 영역까지 봐야 하는가. 문맥상 의미로 보면 여러분 열매에 관련한 내용이에요. 열매. 요한복음 15장의 핵심 단어는 이 열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2절 말씀에도 열매가 나오고요. 4절 말씀에 열매를 맺다. 그리고 5절 말씀에 많은 열매를 맺나니 8절 말씀에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 영광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것은 문맥적으로 볼 때 열매 맺는 일과 연결되어진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뭘까요?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 구원의 열매가 우리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는 것,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 이것이 우리 가운데 맺혀지는 그런 열매의 다양한 그런 종류입니다.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결코 영적인 열매들은 맺혀지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이 아무것도라는 그 문맥, 아무것도라는 그런 단어가 문맥적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그 표현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죠.
무작정 노력한다고 해서 여러분 열매가 맺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 이걸 인정하지 못해서 마음 가운데 불편해 하신 분들이 많으세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못한다", "너희가 맺으려고 하는 그 노력들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가운데 불편한 거예요. 제가 트리니티 신대원을 나왔는데, 1학년 때 교양 과목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그러한 과정을 제가 수강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 구절에서 좀 충격을 받은 거예요. 신대원생이라는 어떤 자부심을 산산조각 냈던 그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의 말씀이에요. 제가 그 신대원에 들어가기까지 사역을 진짜 많이 했거든요. 여러 가지 사역 경험도 많았고,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들을 제가 경험했기 때문에 저의 능력치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가 의심하지 않았던 그런 교만함이 제 안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제 마음 가운데 찔림의 찔림을 제가 제 마음 가운데 찔려주시는 거예요.
"네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고, 참된 제자가 될 수도 없고, 성품의 변화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제 마음 가운데 생각을 해보니까, 저는 사역을 너무나 많이 한 것 같은데, 제 마음 가운데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을까? 그것을 통해서 나의 성품이 변화되었을까? 그리고 그것들이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 갔을까라고 생각해보니까, 거기에 물음표가 계속 계속 찍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될지에 대해서 여러분 한번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전히 뛰어나다라고 여러분 믿으세요? 영적인 열매들이 풍성하다라고 여러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계속 진행 중이세요?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들게 되는 그런 말씀인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제자로서의 삶, 성령의 열매, 하나님께 영광, 인격적인 성품과 변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배를 안 드렸어도 아니에요.
찬양을 안 해서도 아닙니다. 기도를 안 해서도 아닙니다. 포도나무의 신 예수님께 우리가 붙어 있는 삶이 있어야지만이 가능한 영역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어떤 연수와 많은 비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참 좋잖아요.
1년, 2년, 3년, 10년, 20년이 될수록 그런 열매들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성들과 인격적인 변화들이 함께 이루어짐 너무나 너무나 좋을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라는 거예요. 가지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치 포도나무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열매가 맺히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 영역이에요. 가지가 포도나무 행세를 하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 것 같은데 없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세상과 똑같은 삶을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거예요.
여러분, 성도로서 영적인 열매와 영적인 변화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첫 번째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어떤 열매를 여러분들은 맺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떤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떻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어떤 인격적인 변화, 언어적인 변화, 삶의 태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 변화의 이유는 내가 잘해서, 내가 성경을 읽고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붙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열매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신앙의 연차 때문에 아니면 어떤 누군가의 인정 때문에 그 열매가 맺혀졌다고 우리가 착각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열매가 맺어졌다는 것, 그것이 여러분, 첫 번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을 떠나도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사업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돈도 벌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보세요. 예수님 없이도 좀 다 잘 살 수 있는 영역들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분들도 계세요.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꼭 그렇게 유별나게 신앙생활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꼭 그렇게 붙어 있기 위해서 나를 그렇게 억누르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실 수도 있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장일까? 예수님의 말씀은 약간의 예외 조항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한 기준이요, 분명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따라서 여러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다는 것, 그 한 가지와 두 번째는 예수님 없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지만, 여러분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생명이 흐르지 않는 상태 속에서도 잘 될 수는 있다는 거예요. 잘 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라는 의미는 생명에 관련된 문제예요.
첫 번째는 열매에 대한 문제지만, 두 번째는 생명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여러분 꽃집에 가보면 꽃들이 정말로 예쁜 꽃들이 많죠.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색도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다양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꽃은 이미 뿌리에서 끊겨진 거예요. 잘린 상태입니다. 그 꽃은 여러분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실제로는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여러분 그 상태로 오래 가느냐가 문제인 거지, 결국에는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고, 꽃은 떨어지고 메말라 썩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과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잘 되어 있는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고, 내 삶에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에 예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면 생명은 어느 순간까지만 연장될 뿐이에요.
언젠가는 메말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아무것도 의미에요. 예수님 없이도 겉으로 괜찮아 보일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여러분, 사역도 하고 봉사도 하고 조직도 유지시킬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뿌리가 끊어지면 결국 마르게 되어 있는 거예요. 뿌리에서 잘려나가면 연결되어지지 않으면 결국에는 말라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올라오고, 그것들이 느껴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 삶 가운데 생명이 흘러 넘치는 거예요. 지금 잘 되고 있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여러분 자만해서도 안 되고, 그것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끊임없이 나는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생명력이 내 안에 있는가에 대한 부분을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의 교회에 있을 때 예배 파트 전도사로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2년 정도를 제가 사역을 했는데, 어느 날은 이제 연말이었어요. 12월에 참 행사가 많잖아요. 특별 새벽기도도 있고, 크리스마스 행사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신년에 대한 준비되어지는 것도 있고, 송구영신 예배도 있고. 그래서 그 달에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큐시트라는 게 있어요.
순서지 같은 거. 그걸 한 40장을 넘게 쓴 것 같아요. 그래서 수많은 예배들이 계속해서 진행이 되는데, 제 마음 가운데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거예요. 제가 오늘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너무나 마음 가운데 감동이 있었거든요, 떨림이 있었거든요.
"이런 교회에서 나를 사용해 주시다니,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그래서 정말로 감동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역이 2년 차 되고 그 연말의 사역 가운데 수많은 예배들이 드려지고, 그 예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데, 제 마음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주일에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1부부터 7부 예배까지가 있는데, 제가 1부, 3부, 5부, 7부 네 번의 예배를 들어갔어요.
제가 전도사이기 때문에 제가 다 해야 되는 그런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도 그 예배를 담당은 하지만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예배 들어가면 우리 목사님 옆에도 앉아계시지만, 순서도 신경을 써야 되고, 등단과 퇴장도 신경 써야 되고, 자막이 잘 나가는지 신경 써야 되고, 다음 목사님 얘기하는 것도 귀를 기울여야 되고, 집중할 수가 없어요. 솔직히.
그래서 제 마음 가운데 진정으로 내가 한번 예배를 드려야 되겠구나. 그 사이사이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으니까, 내가 진짜 한번 예배를 드려보자. 그래서 가장 피곤한 2시 예배를 제가 들어갔어요. 2시 예배가 4부 예배였거든요.
그런데 그 예배가 그렇게 힘들긴 했지만, 그리고 그 다음 예배를 또 섬겨야지만 그 제 영이 살아나는 것을 그때에서야 제가 경험하게 됐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 깨달은 게 무엇인가? 사역자들도 영적인 공급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게 끊어지면 결국에는 그 사역 자체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짐이 되고, 이익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물론 여러분, 1516 교회 사역은 어땠느냐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을 그 시간, 여러분, 그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24시간 중에 여러분들이 새벽 기도, 아니면 여러분들이 묵상하는 그 시간, 그 한두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22시간 동안 생명이 없이 살아간다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숨을 쉬지 않는 거예요.
아무것도 공급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공급이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하잖아요.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또 보고 있잖아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잖아요. 누군가를 만나잖아요. 물론 여러분, 그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중요하다.
그 생명력을 우리는 계속해서 공급을 받아야지만이 우리는 살아날 수 있다. 여러분, 그 개념과 그 정체성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어야지만이 우리는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 가지로서의 정체성을 우리 마음 가운데 새기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력 있는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 열매로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무늬뿐인 성도의 삶 가운데서 이제는 벗어나길 바랍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가 아니라 내가 그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내 안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격이 변화되고 열매가 나타나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살아있다라는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거로 여러분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 여러분 축복합니다. 성령의 불은 예수 그리스도께 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에요. 거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굉장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왜요? 그 생명이 성령의 불로서 우리가 임하기 때문에. 끊어졌다면 여러분, 그 생명력이 끊어졌기 때문에 여러분 거룩한 성령의 불을 아무리 강구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단절된 상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상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게 그것이 여러분 성도의 삶이라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런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린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나와서 한번 집회 드릴 때 거룩한 불이 내려주시옵소서. 물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간절하는 사람, 애통하는 사람, 여러분 의에 줄이고 목마른 사람 가운데 하나님 부어주실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오늘만 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사람 가운데, 그 생명력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매일매일 여러분의 삶의 순간순간 곳곳마다 임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게 여러분 생명이 임하는 삶의 특징이에요. 그게 여러분 성령의 불을 구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날마다 붙어있을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길 주님 여러분 축복합니다.
생명력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날마다 흘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결론이 어떻게 붙어있는가? 어떻게 붙어있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기서 '거한다'라는 것은 헬라어로 '매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머물다, 지속하다, 떠나지 않다, 계속 연결되다 라는 그런 의미예요.
다시 말하면 감정적으로 순간적인 뜨거움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결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면, 감정을 날씨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맑고, 내일은 흐리고, 어느 날은 눈보라가 치고, 어느 날은 폭풍과 침멸다. 이제 입춘이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따뜻해졌어요.
그래서 아침만 영하 1, 2도 정도 되고 낮 기온이 점점 올라가더라고요. 이제 날씨의 변화죠.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감정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여러분 기후는 날씨와는 좀 다른 거예요. 기후는 어떤 의미입니까? 한 지역에 지속적으로 날씨가 유지되어지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해서 한국이 사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은 결국에는 사계절이 있는 그런 계절의 기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오늘 기도하다가 눈물이 났다고 해서 예수님께 거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잘 기억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감정적인 것과 거하는 것의 비교를 의미하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기도하는데 감동이 많은 거예요.
여러분, 그 한 번의 일시적인 그 감정적인 그 거함이 실질적으로 거함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 감동이 없다고 해서 거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예배 한 번의 뜨거움 때문에 "내가 오늘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거함이 아닌 것이고, 오늘 별로 감동이 없어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러실까?"라고 한다고 해서 거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함은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영적인 기와 같은 거예요.
내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내 삶의 기본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서 이런 말씀이죠.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을 내가 계속해서 꾸준하게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다 보라 통독 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알렐루야. 상정 목사님이 저한테 부탁한 거 아니에요. 보라 통독을 한다는 것은요, 내가 말씀에 어떻게든 붙어 있겠다는 의미예요. 보라 통독하면 숙제도 많잖아요.
숙제도 해야 되잖아요. 그리고 또 통독도 해야 되잖아요. 얼마나 할 게 많습니까? 또 질문도 해야 되잖아요. 그것을 통해서 내가 끊임없이 그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해요.
뿐만 아니라 내 삶의 기도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삶. 떠나지 않는 삶. 그래서 여러분, 여기 1516도 계속 릴레이 기도를 하시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 성전에서 끊이지 않는 그 기도의 삶을 통해서, 물론 거리가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냥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계속 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그런 무릎 꿇는 기도의 삶, 그것을 계속 연결해 가는 거예요.
이게 붙어있는 삶이에요. 거함의 삶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신 마음들이 있다면 그것을 삶 가운데 순종의 삶으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 말씀에 거하는 삶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서 저는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거하는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잠깐 해봤어요.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그분을 인식하고 그분의 말씀에 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 누군가를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상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야기인가.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 때도 그냥 어떤 재미로 흥미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무엇일까 계속 고민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말씀에 거하는 삶,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함을 상태로 설명을 해요. 시편 1편 2절, 3절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인데요. 우리 한 목소리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먼저 과하는 사람의 특징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서 그것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표현을 합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매일 열매를 맺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보세요. 늘 꽃이 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심겨진 상태가 변화되지 않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그 뿌리가 물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거예요.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때, 우리의 시간, 우리의 방법으로 무엇인가가 자꾸 맺혀지길 원하는 거예요. 그것은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이 뿌리 내려 있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린 삶은, 그 말씀이 내 삶 가운데 때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여러분 붙어 있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붙어 있기만 하다면, 여러분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평강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인내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임하실 것임을 위해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라는 사실을 여러분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하신 방법으로 우리 인생 가운데 임하실 거예요.
그것을 여러분 우리가 기뻐하는 거예요. 감사하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다른 게 아니에요.
어렵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신앙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어려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고 말씀하신 대로 내가 순종하고 그 때를 기다리고 때의 열매 맺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내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그게 여러분 신앙이에요. 할렐루야.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골로새서 2장 6절, 7절 말씀해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러분 이 사도 바울은요, 감정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십시오. 그리고 세움을 받아서 교훈을 받은 대로 마음의 믿음으로 굳게 서서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
그래서 여러분, 신앙인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 가운데 감사가 있는 사람이에요. 불평불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감사가 있는 거예요. 왜요? 그분의 뜻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감사한 거예요. 그분이 나에게 이런 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구나. 나를 통하여서 임한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불이 박힘과 세워짐과 견고해짐으로 감사함의 자리까지 하나의 구조적인 부분을, 거함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불이 박히고 세워지고 견고해지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뿌리 내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한 것이고요, 대가 세워지는 분명한 시간도 필요하고, 견고해지는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1서 2장 27절, 28절 말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주께서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기름 부음 받음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성령님이 이미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가르칠 필요도 없고, 기름 부음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과 거짓이 없는 그분의 가르침대로 너희는 주 안에 거하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심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속 찔림이라는 것을 주심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세요.
그것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발걸음과 우리의 행동이 그분께 자꾸 맞춰지는 거예요. 나는 자꾸 왼쪽으로 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서 오른쪽으로 자꾸 가게 하시는 거예요. 왜요? 그 길 가운데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길 가운데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가고 싶은 그 길 가운데는 성공이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세요. 성령님께서는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이 아니라 머무는 상태 속에서 임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내 안에서 감정적으로 느껴라.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것을 감정적으로 자꾸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어떤 느낌 정도로만 생각하세요. 그게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거함은 느낌이 아니라 위치에 대한 부분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보면요, 감정 기복이 없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 거한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연합과 관계를 통하여서 그분이 하나님께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감정이 흔들리기도 하셨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고백을 통해서 연결 상태가 끊어지지 않는 삶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우리 가운데 보여주시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여주시는 거함에 대한 의미예요.
거하라, 거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함은요, 그냥 일시적인 뜨거움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를 의미해요. 오늘 여러분 눈물이 없다고 염려하지 마세요.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감동이 크다고 여러분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 깊어진 것도 아닐 수 있어요. 거함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고 지속적인 연결성을 의미합니다.
오늘이 여러분,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어요. 오늘부터 시작하시면 돼요. 오늘부터 그분과 연결되어지는 삶을 계속 지속적으로 끝까지 가시면 돼요. 그러면 여러분, 그분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거함을 통해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면서 열매들이 맺혀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 성령의 거룩한 불로 임하는 생명력의 우리 가운데 있는 그런 삶임을 여러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거함에 대해서 세 가지를 제가 말씀드린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 붙어있는 거함은 어떤 삶인가? 여러분, 그 삶을 계속해서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분명한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방향성대로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인도해 주실 때, 그때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귀한 열매들이 맺혀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길 원하고, 오늘 그런 계기가 되길 원하고, 그 지속적인 삶을 통해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몇 가지를 위해서 기도할 텐데요, 먼저 여러분의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함께 여러분 고백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불확실하게, 불분명하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세요.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신 분이세요.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포도나무로 임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포도나무다." 하나님이 포도나무시라면 우리는 가지라고 분명하게 정체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지가 우리의 정체성이에요.
여러분, 가지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돼요. 가지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붙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로부터 여러분 시작합니다.
내가 열매를 만들어내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중심에서 벗어나 먼저 주님께 붙어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거예요. 기도와 말씀 없이 버티는 신앙은 결국 메말라 갈 수밖에 없음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연결이 먼저예요. 붙어 있는 것이 먼저예요.
여러분, 이 시간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가지라는 것을 분명하게 정체성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셨기에, 명확하게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가지로서 당신께 붙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정체성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내가 포도나무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지로서 나의 삶을 인정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께 붙어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 그 붙어있는 삶을 통하여서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들이 내 삶 가운데 맺혀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하나님 아버지 목적이 되게 하여 주시고 비전이 되게 하여 주시고 꿈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붙어있는 삶을 살아갈 이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 가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나의 삶의 목적이 주님께 붙어있는 것이 내 인생 가운데 가장 꿈이 되고 소망이 되는 은혜가 있도록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하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도록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두 손을 들고 이 시간 주의 한 번 부르시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6.02.08(주) | 주일설교 |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삼상 30:16-31)
설교 요약
- 본문 배경: 다윗이 아말렉을 추격해 대승을 거두고, 가족과 모든 전리품을 되찾은 뒤(삼상 30:16-20) 부솔 시내에 남아 있던 200명과 재회하며 공동체 안에서 분배 원칙을 세우는 장면(삼상 30:21-25), 그리고 유다 성읍들에 선물을 나누는 장면(삼상 30:26-31)이다.
- 핵심 메시지: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리더십의 본질은 사람을 품어 살리는 것이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공로 의식·피해 의식을 내려놓고 은혜 의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 다윗의 평정심: 승리의 순간에도 흥분하거나 우쭐하지 않고 차분했다. 고난뿐 아니라 칭찬(성공)도 사람을 단련한다(잠 27:21). 성공에도 교만하지 않고 실패에도 절망하지 않는 평정심이 필요하다.
- 마음의 평탄대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면 인생의 골짜기와 산(업앤다운)이 평탄해져 주님의 길이 열린다(사 40:4). 은혜를 경험하면 평강이 따른다(엡 1:2).
- 샬롬의 리더십: 다윗이 먼저 “평안하셨습니까?”(샬롬)로 문안한 것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200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리더십이다. 평안은 흘러가고, 불안도 전염된다. 가정과 공동체에 은혜와 평강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분배 원칙(율례와 규례): 참전한 400명 중 일부가 “참전하지 않은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주지 말자”라고 주장하지만, 다윗은 “형제”로 부르며 하나님이 주신 승리라는 관점에서 동일 분배를 선포한다(삼상 30:23-25). 이는 공동체를 살리는 구조가 된다.
- 불량배의 영성 진단: 지나친 자기 의(셀프 라이트), 욕심(전리품 독점), 하나님 요소의 삭제는 공동체 분열로 이어진다. 영성은 정직성이고, 품는 사람이 리더다.
- 적용: 열심과 실력은 중요하지만, 은혜가 압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공로 의식과 피해 의식을 내려놓고, 비난이 아니라 변화로 이끌며,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살아나는 은혜의 통로로 살자.
전문 스크립트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의 쉰아홉 번째입니다. 다윗이 아말렉에게서 승리를 하고 가족과 전리품을 갖고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16, 17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자, 다윗의 무리를 애굽 종이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곳을 가보니까 아말렉 사람들이 온 땅에 편만했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남부 지역을 전부 쓸고 다니면서 약탈을 했잖아요. 그들도 상당히 무리한 일정을 소화한 겁니다.
그리고 나서 “편만했다”는 것은 온 땅에 쫙 퍼진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나면 지쳐 퍼지잖아요. 그들은 이미 약탈 지역들을 반격할 수 없을 만큼 초토화시켜 놓았죠. 그리고 다윗의 군대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들을 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죠. 그래서 신나게 약탈을 자축하며 먹고 마시고 춤추고, 파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쳤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럼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친 것인가? 거의 이틀인가? 그런데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으로부터 해서 아침까지이거든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다”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만약에 “새벽에 쳤다.” 새벽 2시에 쳤다면, “이튿날 저녁에 해질 무렵”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시간으로 보면 자정(밤 12시)에 날짜가 바뀌니까 그날 저녁 해질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새벽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했다 그러면 16시간, 새벽 4시부터면 한 14시간 정도가 되는 거죠. 하루 종일 쳤습니다.
얼마나 아말렉 사람들의 군대 규모가 컸는지, 전리품이 많았는지가 상상이 되는 것이죠.
자, 20절 이어지는 말씀 읽겠습니다. “다윗이 소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했더라.”
자, 다윗이 회복하지 못한 게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그걸 다 회복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말렉이 약탈한 양떼와 소떼까지 전리품으로 얻었기 때문에, 그날 그들이 얻은 이 전리품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 같아요.
여러분, 반전의 감격이 있는 거잖아요. 운동 경기도 다 지던 경기를 막판에 반전하면 감동이 몇 갑절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결과가 오게 되자 따르던 이 400명의 사람들의 태도가 일순간에 돌변하죠. “이는 누구의 전리품이다?” “다윗의 전리품이다.” 이 무슨 얘기일까요? 역시 다윗을 따라오기를 잘했다, 뭐 이런 얘기예요.
여러분, 사람이 얼마나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지 어제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와, 역시 다윗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 그때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지만 지금은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이해타산이란 말을 합니다.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황 판단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이 본문 앞부분을 어제 보면서 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20절 말씀에 다윗이 양떼와 소떼를 다 되찾았어요. 무리가 그 가축들을 몰고 가면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다.” 사람들이 지금 즐거워요, 안 즐거워요? 즐거워요.
그래서 제가 그림을 하나 보여 드릴게요. 숨은 그림 찾기.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좀 이상한 게 뭔가요? 다 즐거워하는데, 다윗이 기쁘지 않았을까? 물론 다윗도 기뻤겠지만, 굉장히 차분한 모습이죠.
제가 이렇게 AI 생성 이미지를 요청한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기뻤다”, “사람들의 칭찬에 반응했다” 이런 멘트가 하나도 없어요. 다윗의 대사도 하나도 없어요. 상당히 다윗은 컴다운돼 있었던 거예요.
왜 그랬을까? 다윗의 심리를 생각해 보니까, 어제는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막 다윗을 연호하잖아요. 그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 됐을 것 같아요.
잠언 27장 2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여러분, 다윗이 사람들이 “와, 역시 다윗” 한다고 해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우쭐댈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인생을 연단하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도가니나 풀무와 같은 인생의 고난이 우리 인생을 연단해서, 재련해서, 우리 안의 비본질의 찌꺼기들을 드러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칭찬해보면 그 사람 안에 가라앉아 있던 비본질의 찌꺼기가 드러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우쭐대고, 어떤 사람은 안일해지고, 어떤 사람은 자만에 빠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도 절망하지 않고 성공에도 교만하지 않은, 항상 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두 가지 때문인데, 첫 번째는 나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때문이에요. 세상은 다 가변적이지만,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위에 내 인생을 세우면 흔들리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겁니다. 나는 상대적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하게 되면 이게 가능해져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독하다가 전도서 7장 16절을 읽으면 이상한 구절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아니, 의인이 되지 말라, 지혜자가 되지 말라니요. 이게 성경의 가르침하고 정반대 되는 얘기 아닌가요? 그런데 “지나치게”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당신이 의로우면 얼마나 완벽하게 의롭겠냐는 거예요. 당신이 지혜롭고 유능하면 얼마나 완벽하게 했느냐는 거예요.
인간이 “내가 좀 하지, 내가 의롭지, 내가 좀 지혜롭고 탁월하지” 그 안일함과 자만함이 당신을 패망에 이르게 만들 것이다, 라는 거예요.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렸을 때는 실패하고 뭔가를 망치면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랬지” 이것으로 며칠을 지냈던 것 같아요. “나 바보 아니야? 바보 아닌데” 이것으로 또 며칠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뭔가 실패하고 잘못해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제가 원래 이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습니다.” 빨리 인정하고 회개하고, 그래도 세컨드 찬스,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빨리 인정하고, 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거예요.
또 정반대로 “착하다, 잘했다” 이렇게 칭찬을 해 주면 예전에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실 자존감이 낮으니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땡큐”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했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늘 하루 호흡할 수 있는 생명을 주시지 않았다면, 가동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않고 실패했다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으면, 세상이 여러분을 흔들 수 없어요. 사탄도 여러분을 흔들 수 없어요. 할렐루야.
자, 그래서 또 한 구절 나누고 싶은데 이사야 40장 4절 같이 읽어 볼까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것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것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구절은 역사적 맥락이 있어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비하는 데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심리적으로도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고대에는 큰 제국의 왕들이 행차를 할 때 앞서가면서 그 앞의 길을 닦아 놓는 선도대가 있었던 거예요. 왕이 행차하시는데 앞에 골짜기가 나와요. 그럼 골짜기를 메꿔서 평지를 만드는 거예요. 언덕이 나와요, 산이 나와요. 그러면 그거를 깎아서 평지를 만드는 거예요.
왕이 오시는 길, 킹스웨이, 킹스 하이웨이를 만들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뚫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조금 성공하면 우쭐대고, 조금 실패하면 바닥에 떨어지고, 이거는 하나님보다 내가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성공이든 실패든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우선으로 삼으면, 여러분의 상황이 나를 흔들지 못해요. 왜? 상황보다 하나님이 중요하시기 때문에.
할렐루야.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어떠한 상황에도 안일해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평탄대로가 되면, 주님이 그 길을 따라 우리에게 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예배자로서 그런 심령을 갖게 된 거예요.
자, 이어지는 21절과 2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부솔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무난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자, 다윗이 부솔 시내에 이르러서 탈진해서 쫓아오지 못했던 200명과 재회합니다. 그래서 200명의 사람들이 다윗의 무리, 그 400명을 영접했고, 다윗도 이 200명의 사람들에게 문안을 했다, 이렇게 표현이 나와요.
제가 “문안했다”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어로 샬롬이에요. 우리도 인사할 때 “안녕”, “안녕하십니까?” 평안에 대한 질문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평안했습니까?” 이 질문을 했다는 거예요.
오늘날에도 아랍 사람들은 만나면 살람,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 인사를 하는 겁니다. 안녕이죠.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보면 거꾸로 된 거예요.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들에게 “다친 데는 없습니까? 사상자는 없습니까? 평안하십니까?”를 질문해야 정상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후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목숨 걸고 싸우고 온 다윗이 “여러분 평안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했다는 거예요.
이 질문 한마디가 사실 감동적인 것이거든요. 저와 여러분이 평안의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축복인지 몰라요.
에베소서 1장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라는 기준점에 딱 서면, 골짜기도 메꿔지고 산도 겸손해져 낮아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은혜가 임하고 은혜 체험을 하면 평강이 찾아오게 돼 있어요. 항상 순서는 이겁니다. 은혜와 평강.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편지에서 고정적으로 한 인사말, “은혜와 평강”.
그런데 사람이 주는 은혜와 평강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평강.
그러면 우리가 미래가 불확실하고 존재는 늘 결핍을 반복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족에게, 성도들에게, 이웃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늘의 샬롬이 임할지어다. 좋은 축복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도시마다 전도하라고 보내실 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평안의 인사를 하면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거죠.
여러분, 평안도 흘러가지만 불안도 흘러갑니다. 전도체 같은 것입니다. 심리적 전도체인 거예요. 내가 불안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불안해요, 안 불안해요? 불안해지게 되어 있어요.
내가 불안하면 남편, 아내가 불안해하고, 내가 불안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불안해요.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엄마 아빠의 강박과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아이가 힘든 경우도 많아요.
강박과 집착이 다 나쁜 것 같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완벽주의적인 강박과 집착이 생기게 돼 있어요. 부모들이 아이를 잘 키우려면 이 강박과 집착이 생기게 돼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아이가 시드는 경우도 있고, 또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 만큼 불안도가 올라가요, 안 올라가요? 올라가요. 그래서 그 불안을 아이에게 전염시키는 부모가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에게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어야 평안이 흘러가는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골짜기도, 인생의 험한 산도, 평탄케 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우선, 최우선의 예배자로 살면, 인생의 모든 업앤다운, 고점도 저점도 평탄케 돼서, 주님이 주신 평안이 내 가족에게 흘러가게 돼 있다라는 거예요.
자, 그런데 다윗과 함께 아말렉을 쳤던 400인 가운데 안 좋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참전하지 않았던 사람들, 한 게 뭐가 있냐? 그 사람들은 그냥 처자만 데리고 가게 해라.”
그러니까 가족만 빼앗긴 게 아니라 자기 재산도 잃은 거잖아요. 그 재산은 돌려받아야 되는데 그것도 못 받게 하고, 그 외에 얻은 전리품도 안 나눠 주겠다는 거예요.
약간 깍쟁이 같지만 그래도 전혀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에요. 제가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할 때, 전방의 제2보병사단, 그리고 판문점에서 근무하는 미군들은 위험수당, 생명수당을 따로 챙겨 줍니다.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 역할이라는 거죠.
400명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딱 그 얘기예요. “아니, 우리가 목숨 걸고 가서 아말렉과 싸웠는데 도대체 너희가 한 게 뭐가 있냐?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냐?”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제가 항상 ‘은혜파’와 ‘진리파’가 있다고 말하는데, 400명은 어떤 파예요? 진리파인 거죠. 뭐가 옳고 그른지, 뭐가 합당한지 따져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들이 아무리 옳은 것, 정의를 외친다 한들, 그들의 내면이 비뚤어져 있었어요.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면, 첫째, 자기들이 과도하게 옳은 거예요. 전도서 7장에 봤죠.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마라.” “나는 옳고 너희는 틀리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400명 중에서도 아픈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고 부상당하는 날도 있고, 참전하지 못하는 날이 생겨요, 안 생겨요? 그럼 그날에는 입장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이건 좀 너무 그렇지 않아, 우리도 좀 나눠주지.” 세상의 절대적 위치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도한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은 패망에 이르게 된다.
둘째, 전리품을 안 나눠주면 누가 다 차지한다고요? 자기들끼리. 욕심이죠.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빠뜨린 거예요. 결국에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의 대사가 나오기 전에 성경이 아예 그 사람들을 이렇게 소개했어요.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다.”
사무엘상에 사실 “불량배”라는 표현이 총 네 번 나와요. 맨 처음에 나왔던 것이 사무엘상 2장 12절인데, 엘리의 아들들은 누구다? 불량자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나면 죄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인가. 우리 안에 죄를 짓고 싶은 거짓된 욕심이 있죠. 그 욕심이 우리를 쥐고 있어서 선한 마음과 선한 열심을 짓밟고 죄를 짓게 만든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지 모르겠는데 저는 가끔 놀랄 때가 있어요. 어떤 우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어떤 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내 안에 이런 게 있었어?” 이렇게 놀랄 때가 있어요. 여러분 없으신가요? 3부가 좀 더 정직한 것 같아요.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영성은 정직성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되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 게 영성입니다.
또 한 가지를 따라 해 보세요. 품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조직의 리더십을 논할 때 일을 잘 추진하는 사람을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사람을 잘 품어주는 사람이 리더십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유능한 리더일지라도 사람들을 품지 못하면 딱 거기까지예요.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한 교회에서 25년 동안 사역을 했잖아요. 수백 명의 교육자들, 수백 명의 간사님들, 또 평신도 사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했는데, 저는 제가 맡은 사명에 충성을 다하면서 제 리더에게 관계적으로 잘 보여서 특혜를 보거나, 이런 것을 특히 바라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조직 생활, 회사 생활 하다 보면 그다지 맡은 일은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은데 윗사람에게만 잘 보여서 특혜를 보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유형을 너무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인생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아, 내 생각이 편향되어 있었구나” 이걸 깨닫게 됐어요. 왜냐면 일을 잘하는 지수도 중요하지만, 관계 지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더라고요.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맡은 것만 하면 되지만, 조직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고 전체 관리자가 되면, 그 사람이 잘한 일, 못한 일, 대충 한 일, 이상하게 한 일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문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마음이 없이는 리더십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여러 자리에서 여러 역할을 해 보니까, 경험도 중요하고 실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을 품고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이 중요하구나.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품어야만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가끔 자녀를 품기가 버거우시잖아요. 그러면 “내가 리더십을 상실해 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순장님들, 사역 팀장님들, 사명을 품고 사역을 열심히 감당해 주시는 건 좋은데, 한 영혼을 품는 리더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지지난 주에 설교하고 나서 “광야를 지나며” 찬양 듣고 같이 기도한 거 기억나세요? 제가 기도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생각해 보니까 그 주간에 너무 피곤했어요. 리조이스 캠프를 하면서.
또 한 가지는, 제가 오랫동안 케어한 한 형제가 있는데 이 형제가 몇 년 동안 직장이 안 되는 거예요. 진짜 유능한 친구거든요. 그 분야에서는 정말 유능한 친구인데 이력서 떨어지고, 면접 보고 떨어지고, 수십 군데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40대 중반이 되니까 쉬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 주간에 그 형제가 “나는 이제 교회를 떠날 거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난 다 그만두겠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몇 년 동안 헌신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이렇게 말했어요. 잘 달래서 그날 2부 예배에 나왔거든요.
근데 기적같이 지난주에 합격이 됐어요. 직장을 얻었어요. 박수 치셔도 돼요.
저는 이 마지막 고비를 넘겨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윗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잖아요. 그런데 딱 그 본문을 지나면서 합격이 된 거예요. 기적같이. 그 형제가 “자기는 평생 사무엘상을 잊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컴다운 시키고 한마디를 했죠.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 유능한 것만 믿고 마음에 안 들고 이상한 사람들 만나면, 정의감 충만하다고 또 사표 던질 거냐? 사표 던지지 마라.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품어야 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일만 사명이 아니고, 공동체를 잘 돌봐 세우는 것도 사명이다.” 신신당부를 했어요. 오늘 와서 저를 안아 주더라고요. 고맙다고.
자, 이어지는 23절에서 25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불렀어요. “나의 부하들아”가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던 사람들이, 이제 너희 마음대로 하려고 하느냐, 상명하복해라, 이게 아니잖아요.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부른 거예요.
우리가 다 형제자매면 한 가족인데, 한 가족인데 내 거 네 거가 어디 있습니까? 집에 있으면 같이 사용하고 같이 기뻐하는 거지.
내가 오늘 좋은 성적을 받았어요. 회사에서 좋은 실적을 이뤘어요. 집에 와서 방에 들어가 혼자 숨겨 놓고 즐거워하나요? 온 가족이 함께 기뻐하는 거죠.
그래서 23절 말씀에 보면 “우리”라는 단어가 총 네 번 나와요. 이 승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다. 일부 사람들에게 주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거다.
제가 이걸 묵상하다 보니까 조직에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조직이 어려워지면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조직 전체가 어려운데 구조적인 피해를 왜 내가 봐야 되냐.” 손해 보고 싶지 않다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반대 상황도 있습니다. 조직이 융성해지고 성공 가도를 달리는데도 떠나는 사람이 있어요. 이유는 똑같아요. 손해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기여한 지분이 많은데 나한테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줬냐? 보상을 해 줬냐? 똑같이 대우하는 거 싫다. 다른 데 가면 더 많이 보상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잘난 사람일까요, 이기적인 사람일까요? 둘 다입니다. 그런데 잘난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교육자들에게도 늘 말하는데, 잘난 사람이 “내가 잘났다”라고 주장하는 게 공동체에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공해도 겸손하고 고난에도 평안할 수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어떠한 풍파도 뚫고 나갈 수 있어요. 거시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이 조직과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세상에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다윗이 고백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우리 손에 붙여 주셨고, 그러니까 이 승리는 너희의 승리도 아니고, 나 다윗의 승리도 아니고, 하나님의 승리라는 거예요.
만약에 다윗이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했다면, “어제 나 죽이려고 했던 놈들 다 나와 봐. 너희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면서 성질 내지 않았을까요? 사울이 이런 캐릭터잖아요.
만약에 다윗이 “400명의 사람들, 너희 때문에 우리가 승리했구나” 하고 200명의 사람들을 무시했다면, 공동체가 갈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516교회가 공로 의식이 아니라 은혜 의식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다 좋을 것 같지만, “내가 헌금을 얼마나 했는데? 봉사를 얼마나 했는데? 왜 나를 인정 안 해 주냐?” 이런 사람들이 생깁니다.
반대로 “이 영적인 혹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흥을 주시다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공로 의식으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어요. 자기 의에 충만한 사람, 자기 업적과 공로 의식에 충만한 사람이 “내가 이 정도 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누가 그러겠냐고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도 은혜고, 그런 내가 이제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도 은혜고, 저는 가끔 찬양하고 예배하다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 사람이 됐으면 정말 세속적인 사람이 됐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들을 다 뒤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됐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세계 선교를 완성한 사람이 누구예요?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거 내가 했다”라고 했다면 얼마나 교만했겠어요. 평생 은혜 의식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축복의 통로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예배자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아말렉과의 대승에 우쭐대거나 흥분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차분했을까? 어제는 죽을 목숨이었잖아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훌륭하지”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죽을 목숨을 건져 주셨으니 감사하고, 아말렉에게 버림받은 애굽 사람 하나 살려냈더니 인도해 주셨으니 감사하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가족들이 팔려 나가기 전에, 온전한 상태에서 다시 만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고. 할렐루야.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처럼 유능하고 실행력도 탁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서 손을 놓으시면 그걸로 끝이에요.
타이밍을 놓쳐서 가족들이 이미 노예로 팔려가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다시 찾겠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대에 참전해서 이스라엘과 칼을 겨누고 싸우게 그냥 놔두셨다면, 하나님이 손 놓으셨으면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 재능과 열심이 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올려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아, 26절 마지막으로 읽어 볼게요.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여러분, 다윗은 누구를 자기 공동체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버렸고, 자기를 밀고했던 유다 지파 사람들. “여러분 여전히 내 형제고, 여러분 여전히 나의 한 가족입니다.” 이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델로부터 헤브론에 이르기까지 유다 지파 성읍들에 선물을 나눴어요.
만약에 다윗이 공로 의식이 있었다면, 공로 의식의 반대편에는 피해 의식이 생겼을 거예요. “그런 나를 너희가 무시하다니, 멸시하다니, 버리다니.” 그러지 않았겠어요?
23장에 그일라 사람들 목숨 걸고 살려줬더니 배신하잖아요. 갈멜의 나발도 유다 지파 사람이에요. 가까운 유다 지파 사람들이 두 번이나 밀고 하잖아요.
그래서 피해 의식은 공로 의식의 동의어가 되는 거예요. “나 피해자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문제 없어, 다 너희 문제야”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공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피해와 상처는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 의식만이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로 세울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마인드셋, 마음 상태라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 설교 마지막에 이상론과 당위성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이상론과 당위성이 과도해지면 관계를 망치고 가정을 망친다고요. 이 표현을 다른 말로 하면 공로 의식과 피해 의식이에요.
공로 의식: “나는 잘했는데.”
피해 의식: “너희들이 다 잘못한 거야. 피해를 내가 보고 있잖아.”
시시비비를 가리고 옳은 소리만 하면 다 맞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틀린 거예요. 왜? 그 생각 때문에, 그 관점 때문에 결국에는 공동체를 망치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비판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마세요. 잘못된 것을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참된 영성인 거예요.
사람들을 품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보다 의지하지 마세요. 하나님보다 의지하면 결국에 같이 망합니다.
다윗이 200명의 사람들도 평안케 하고, 400명의 사람들도 평안케 한 거예요. 왜 이 사람들을 살려냈냐면, 이상한 소리를 한 불량자들을 그날 처벌하지 않았어요. 그냥 바른 얘기만 해 줬어요.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보내고, 애굽 노예도 살려내고, 여러분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은혜 의식이 있는 사람은 이게 가능한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헌신했습니까. 광야에서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그런데 결국에는 “이건 하나님이 주신 승리고,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니까 나눠야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건데 나눠야지. 이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제가 어제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 놓고, 그리고 나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한 문장을 썼어요. 잘 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회사를 가는데, 가는 회사마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여러분이 어떤 조직에 들어갔는데 그 조직도, 여러분이 어떤 교회를 갔는데 그 교회도, 가는 곳마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거예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들이 있어요? 완벽한 사람들만 모아놓은 공동체가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도 그 사람들이 변화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선한 영향력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열심히 살잖아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뭐가 생기겠어요? 공로 의식. 공로 의식의 동전의 다른 면이 뭐예요? 피해 의식.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네가 그거밖에 안 해. 도대체 네가 한 게 뭐야? 그러고 여기서 나한테 밥을 얻어먹을 생각을 해?” 이런 멘탈리티가 결국에는 공동체를 세우려다 스스로 허물게 되는 거예요. 이게 공로 의식과 피해 의식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은혜 의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사세요. 노력하세요. 저도 열심히 사는 유형이에요. 그런데 나의 열심, 나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압도적인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러면 노력은 결국 빡빡해지는데, 은혜는 부드럽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복이 흘러가고 생명이 흘러가고 회복이 흘러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2.01(주) | 주일설교 |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 (삼상 30:1-15)
요약
-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오자 아말렉이 네게브와 시글락을 침노해 성읍을 불사르고 가족들을 사로잡아 간 위기 상황이 전개된다.
- 극심한 상실 속에서 600명의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 하며, 고난의 순간에 사람들은 원인 전가와 분노로 치닫기 쉽다는 현실이 드러난다.
- 다윗은 사람과 맞서지 않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고, 제사장과 에봇을 통해 하나님께 묻는 방식으로 방향을 재정렬한다.
- 위기의 핵심은 ‘위기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위기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며, 다윗은 기도로 돌파하며 추격과 회복의 목표를 명확히 한다.
- 추격 중 지친 200명을 남겨 두는 배려와, 광야에서 버림받은 애굽 청년(노예)을 살려내는 자비가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의 구체로 제시된다.
-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의지할 대상은 아니며,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이상론은 관계를 애증으로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 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가며,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은혜의 역사가 가능해진다는 결론으로 기도에 이른다.
전문 녹취록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이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의 58회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왔다가 가족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잡힌 것을 알고 추격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1절과 2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넥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네. 지도상에 보시면 아 중부 아에서 어 블레셋 사람들이 집결을 해서 북쪽으로 올라갔죠. 그런데 이제 다윗과 그 무리는 아벡에서 남쪽 시글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시글락에 왔더니 이제 가족들이 이미 포로로 잡혀갔어요. 아말렉은 그 남부 지역에서 약탈을 하며 돌아다니는 족속인데 그 아말렉을 따라잡기 위해서 부솔 시내라는 이제 남방 한계선 같은 것인데요. 부솔 시내를 건너가게 됩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중부 아베에서 시글락까지 75km예요. 근데 이 75km의 길을 며칠 만에 건넜다 갔다고요? 며칠 만에? 네, 3일입니다. 이게 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게 사흘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3일이죠. 군대가 빨리 행군을 하면 하루 한 40km. 그러니까 이틀 만에 주파할 수도 있었는데 어,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느리게 갔을까?
어, 생각을 해 보니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불신임을 받아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상당히 무거웠나 보다. 이 75km니까 하루에 25km씩 돌아오게 됐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게브. 네게브라는 말 자체가 남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 이제 남쪽 지역에 네게브 지역을 침략하고 시글락까지 침략을 해서 부녀자들을 다 포로로 잡아가었어요. 지난 10년 동안 유대 광야에서 사울의 군대에게 잡히지 않게 해서 얼마나 이들이 노심초사 노력을 했습니까? 이제 적국 블레셋에 망명을 해서 와, 이제는 편안하게 됐다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재산과 가족을 다 잃게 됐어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중부에서 국가 간 사활을 건 전면전을 치르는 동안 남부 지역에서는 이 아말렉 사람들이 거칠 것이 없이 노략질을 한 겁니다. 일종에 이제 빈집털이를 한 거고 후방 공격을 한 것이죠. 다윗과 일행들이 그동안 광야에서 기적처럼 단 한 명도 잡히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걸 어제 써 놓고 나서 야, 기적처럼이 아니라 진짜 기적이었구나.
여러분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돌보심 때문이었어요. 다윗이 '어, 난 정말 스마트한 거 같아.' 다윗의 사람들이 '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지.' 이런 생각할 수도 있겠죠.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 기특할 때가 좀 있지 않나요? '어, 나는 처세도 좀 잘하는 거 같고 나는 재정 관리도 잘하는 것 같고 시간 관리도 잘하는 것 같고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여기까지 온 줄로 믿습니다.' 이 고백이 필요한 것이죠.
자, 이 상황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3절과 4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이 불타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여러분 아말렉 족속이 워낙에 약탈족이니까 약탈을 하는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성읍을 아예 불태워 버렸어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겁니다. 다윗과 그 사람들이 기진할 정도로 통곡을 했다는 거예요. 10년 광야 세월의 헌신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으니 그들이 느꼈을 그 허탈함과 그 상실감과 실패감이 정말 이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진 자가 자기 가진 것에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마지막 자기가 붙들고 있는 자기 가족을 잃어버리는 것, 이거는 비교할 수 없는 상실감이죠.
자, 이런 상실감을 경험하니까 백성들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5절과 6절 읽어 볼까요?
다윗의 두 아내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
자, 백성들만 가족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다윗도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갑자기 5절에 꺼냅니다. 이 얘기를 왜 했을까요? 그것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 때문이었어요. 백성들이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더니 눈이 돌아갔어요. 그래서 다윗을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요?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 여러분, 다윗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사실 어떻게 보면 다윗의 잘못이죠. 다윗이 이렇게 문제고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도 두 번이나 죽이지 않으려고 정말 자신을 가다듬고 바르게 살았던 사람인데 뭐가 그렇게 잘못이 많나? 네. 저기 계신 다윗에겐 좀 미안하지만 제가 정리를 해 보면 첫 번째는 약속의 땅을 이탈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멋대로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보다 이방인 왕을 의지한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쭉 구약을 계속 읽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하나님보다 강대국, 하나님보다 이방인들을 의지하는 거 너무너무 싫어하셨어요.
자, 세 번째는 그동안 시글락에 1년 4개월 머무는 동안 아말렉 사람들을 포함해서 남방을 계속 다윗이 약탈을 했었죠. 그러니까 아말렉 사람들 입장에선 이건 일종의 보복 조치였던 거예요.
자, 네 번째. 이건 군사들 그 전략 전술에서 나오는 건데 후방을 완전히 비워둔 채로 전군이 참전했다. 이것은 언제든지 후방이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전략이었던 거죠.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윗이 잘못한 게 맞습니다. 그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고 야 다윗을 돌로 쳐 죽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거 비정상적인 행동인 거예요. 여러분 돌로 쳐 죽이는 걸 투석형이라 그러는데 모세오경을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돌로 쳐서 죽일 만한 죄목이 뭐냐면 신성 모독죄, 안식일을 어긴 죄, 간음죄, 부모를 저주하고 때리는 죄, 극단적인 케이스들만 해당이 됐어요. 여러분 다윗이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여러분 다윗이 시글락으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망명을 갈 때 부하들이 반대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없어요? 단 한마디도 없어요. 시글락에 가서 이 사람들도 같이 편하게 즐겼던 겁니다.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도대체 이 원인이 뭐냐? 그러면서 원인을 다윗에게 다 전가하는 거예요.
제가 이걸 묵상하면서 사람들은 고난의 순간이 되면 원인을 찾고 싶어요. 그리고 그 원인을 전가하고 싶어요. 자기 때문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졌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고난의 순간에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될 길입니다. 저는 이 30장의 사건을 굉장히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도망자 세월에서 마지막 훈련, 마지막 레슨을 주시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마지막 레슨은 뭐냐면 인간관계에 대한 레슨이에요. 제가 오늘 집중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 600명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사무엘상 2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재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사회에서 실패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을 다윗이 조건 없이 받아줬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줬어요. 10년 광야 생활 세월에 정말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를 다윗이 헌신해서 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가족보다도 친밀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사선을 넘은 사람들이 여러분 자기의 소중한 걸 잃었다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야, 인간이란 이런 존재구나. 마음이 처참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얘기 하잖아요.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 주는 게 아니다. 이게 이제 배신을 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저를 한번 따라보세요. 사람은 >>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네. 여러분, 제가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사람을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서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의지해서 기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너지잖아요? 그럼 나도 무너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 가족 사랑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의 동역자들 사랑하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20년, 30년 기업을 같이 이룬 그 동업자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하는 동역자에게 배신당하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근데 그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면 그 사람이 무너지는 날 당신도 무너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에게 광야 세월의 마지막 레슨입니다. 왕궁에 들어가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왕궁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왕 앞에서는 다 잘하죠. 그러나 권력을 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 구중궁궐이잖아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군궐에서. 그 궁궐이 광야 훨씬 어려운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사람 의지하지 마라. 네가 목숨 걸고 지켜준 사람들도 의지하지 마라. 기대하지 마라. 하나님만 기대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된다. 이 얘기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어.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직원, 여러분 믿음의 동역자들 사랑하되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많은 분들 상담하잖아요.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결국에 그 사람 때문에 실족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목회자로 제 동기들, 선후배들, 여러분, 목회자들은 사람에 대한 눈물과 긍휼이 많은 사람들이 보통 시작합니다. 근데 결국엔 사람 때문에 실족해서 목회를 그만두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 사람을 좋아하다가 애증 애증의 관계로 떨어지고 가정이 어려워지고 교회가 어려워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어떤 사람의 본질과 본심은 위기의 상황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맞불을 놓지 않았다는 것. 여러분,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다윗이잖아요. 칼 빼 들고 영화에서처럼 '어, 지금 나랑 싸워보자는 거냐?' 여러분 뭐 거뜬히 수십 명 수백 명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잖아요. 근데 그렇게 사람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면서 '아니 내가 10년 동안 어떻게 여러분을 위해 헌신했는데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니냐'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6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다윗이 정말 다급했을 때 누구를 힘입었다고요?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질이었다는 것.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이 정말 다급해질 때 어떤 행동을 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지만 어떤 분들은 일단 수화기부터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전화하고 사람들한테 막 매달리는 분들이 있어요. 세상적으로 내가 동원할 만한 방법들을, 리소스를 다 끌어 모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또 어떤 분들은 오늘 600인의 사람들처럼 원인을 찾고 원인을 증거하고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이렇게 원망하는 분들이 있어요. 또 내향적으로 힘이 없는 분들은 자포자기하고 무너지는 분들이 있어요.
자, 그런데 다윗은 누구 앞에 엎드렸다고요?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요. 제가 다윗의 이 모습을 묵상하다가 사람들이 다윗을 대적하잖아요. 600명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딱 이 모습이 모세의 모습이더라고요. 여러분 민수기를 읽어 보면 모세가 이런 행동을 참 많이 합니다. 어, 20장 4절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 출애굽에서 그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에서 본인들이 불순종해서 40년을 돌게 된 거예요. 이건 모세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자기들 잘못으로 광야를 돌게 됐는데 모세를 원망하면서 왜 광야로 우리를 불러냈느냐?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들까지 여기서 다 죽이려는 거지. 그런데 모세가 사람들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서는 부모로서 리더 역할을 하잖아요. 회사에서는 또 이끌어가는 중간 리더십, 탑 리더십들도 있지만 여러분 시간이 지나면 또 선임이 되잖아요. 교회 목회자들, 교회 사역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국에 리더의 포지션에 서게 되는데 리더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끌어 가심을 따라가는 것인가? 물론 둘 다죠. 둘 다인데 여러분이 이 전자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하면 사울처럼 악전고투를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울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사울의 실패한 리더십을 따라가고 싶지 않잖아요. 여러분 다윗처럼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 왜 이렇게 엄마 말을 안 듣냐? 왜 이렇게 아빠 말을 안 듣냐? 여러분, 부모 말을 들으라고 계속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때는 멈추셔야 돼요. 뭔가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이 자녀에게 왜 이렇게 부모 말을 안 듣냐? 그럼 하나님이 증지해서 뭐라고 하신다고요?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듣나? 여러분,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자녀 교육이 맘대로 안 된다고 아이들을 닦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여러분 닦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정말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이 기도 가운데 쇼부를 보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구하는가? 여러분, 회사도 가정도 교회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지혜의 길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을 한 게 사무엘상 몇 장이었을까요? 네. 오, 여기 이쪽에 얘기하셨어요. 몇 장이요? 27장. 3부 예배 처음 얘기했어요. 1부 2부 아무도 얘기 안 했어요. 와, 훌륭하십니다. 네. 지나간 본문은 다 과거는 잊어버리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27장이에요. 지금 몇 장이에요? 30장. 27, 28, 29장, 30장 무려 네 장 동안 다윗이 블레셋의 망명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기록이 없어요.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지낸 겁니다. 근심 걱정할 거리가 있습니까? 염려할 일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굳이 엎드리고 막 머리 조아리고 밤을 새며 기도하고 이럴 일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생각을 해 보니까 지난주에 나눴지만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는 우리 영혼의 감각을 살아나게 하는 시공간이었구나.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거짓말같이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요.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아가야 되는 인생이구나.
내가 잘나서 내가 잔꾀를 부려서 인생의 길을 평안하게 여는 줄 알았는데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되는 사람이구나. 나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바라보며 살아야 되는 인생이구나. 이거를 깨닫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그 처소를 떠났던 다윗처럼 여러분 교회 공동체를 떠나서 온라인 성도로 그냥 사시는 분들 있잖아요. 저는 그런 분들도 다윗과 똑같은 상황이라고 생각이 돼요. 제가 최근에 2부 예배, 3부 예배 후에 이제 새 가족반 번갈아 계속 들어가고 있는데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할렐루야. 가나안 성도들이 돌아오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가나안 성도가 아직 뭔지 모르시는 분들이 여전히 계신 것 같아요. 가나안 안 나가. 이 교회 안 나가 성도들이거든요. 그런데 교회 안 나가고 그냥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그런데 다윗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냥 내 평안을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처소를 떠나겠다고 떠났는데 그게 아니었잖아요. 네. 새 가족반에 아주 어릴 적에 교회를 다녔는데 그런데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교회를 떠났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 교회를 떠났습니다. 부모님이 너무 강압적으로 해서 24년 동안 교회를 떠났습니다. 오늘도 한 분이 그 얘기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분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어요. 한결같이 고백하는 게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거예요. 아, 나는 하나님 의지하며 살았어야 되는 사람인데 이 영혼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거야. 할렐루야.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18편 1절 2절 다윗의 시편인데요. 같이 읽어 볼까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아멘.
아멘.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은 >> 하나님은 >> 나의 전부이십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보통 강조할 때 두 번 반복해요. 조금 더 많이 반복하면 네 번. 신명기 > 일곱 번 반복이 있어요. 이건 아홉 번 반복이에요. 하나님은 나의 전부가 > 되십니다. 이 다윗의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의 반전이었어요.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 했는가?
7절과 8절 읽어 볼까요?
다윗이 아이멜렉의 아들 제사장 > 아비아들에게 이르되 >>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내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 찾으리라.
자,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우림과 둠밈을 > 통해서 하나님의 신탁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 > 아말렉 군대를 쫓아갈까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쫓아가라. 반드시 > 잡을 것이고 도로 찾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위기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건강하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는 위기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늘 평탄한 인생을 산다. 그런 인생이 있어요? 대답들 안 하세요. 그런 인생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정말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도 한순간에 큰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있고 어 계속해서 번창하던 사업이 뭐 IMF를 맞이해서 또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재정 위기를 겪기도 하고 여러분 한국 교회에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에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위기 자체로 낙심해서 자포자기하겠는가? 어떤 분들은 솔루션을 찾지 않고 그냥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으로 주저앉아 버리시는 분들 있어요.
아니요.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다윗의 육인들처럼 원인 전가를 하고 끊임없이 원망 불평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다윗처럼 모세처럼 기도하고 위기를 돌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600인의 가족들이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여러분, 죽었으면 죽은 시체들 끌고 갔겠어요? 거기 성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겠죠? 다 포로로 잡아간 상태였습니다. 하나도 안 죽였다고 돼 있잖아요. 그럼 아말렉의 근거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잡는다는 게 어렵겠지만 추격을 해서 그들을 구출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 다윗이 목표를 딱 정하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어, 제가 이 부분을 묵상을 하다가 지난 3년 동안 저희가 C4에서 리조이스 캠프를 했잖아요. 근데 처음에 시작할 때 약간 회의적인 의견들도 있었어요. 왜냐면 요즘은 청년 캠프는 거의 다 없어졌어요. 청년 캠프는 거의 안 됩니다. 청소년 캠프, 연합 캠프 있었던 캠프들도 대부분 줄어들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시작을 하는 거잖아요. 제가 여러 번 나눴지만 초중고 1선 학교에서 교회 다니는 친구들 그러면 3%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이번에도 학생들 물어보니까 저 혼자 저희 반에서 교회 다닙니다. 목사님 딸인데 자기가 크리스천이란 걸 얘기를 못 한대. 왜 크리스천이라고 얘기를 못 한다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왕따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얘기를 못 하는 애들이 있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차세대가 선교지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근데 저희가 3년 만에 1차, 2차 올해는 부산 3차를 했잖아요. 올해 1, 2, 3차 다 합쳐서 총 2천 명이 참여를 했어요. 더 많이 놀라셔야 되는데. 그 놀라운 일입니다. 모두가 낙심하고 모두가 어렵다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갖고 우리가 해답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아 제가 1차, 2차, 3차 다 마지막 집회 때 설교를 하고 제가 신학교에서 이 집회를 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를 살릴 목회자들, 예배 사역자들, 어, 헌신자들을 콜링하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1차 청년 캠프 마지막 끝나고 나서 어떤 한 대학생이 저를 붙잡더라고요. 그러더니 목사님 2년 전에 제가 리조이스 캠프에 참석해서 그때 하나님 앞에 뜨겁게 회심을 했고 제가 지금은 장신인데 학부생으로 입학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해요. 또 이번에 그 목회자들, 인솔 교육자들 간담회를 했는데 어, 은혜를 받은 청소년들이 이 리조이스 캠프는 일절 다른 걸 안 해요. 무슨 레크리에이션을 한다든지 공동체 프로그램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일곱 번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예배 가운데 이 청년 소년들이 깊은 감동을 받게 되고 돌아가서 야, 우리 교회도 예배팀을 만들자. 너는 드럼 치고 나는 일렉, 너는 베이스 그래 갖고 다 처음 배우는 애들이 이거를 해 갖고 예, 처음엔 딩가딩가 수준이지만 이 아이들이 청소년부 예배팀을 만들고 교회 예, 작은 교회들 예배팀을 만들어서 막 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이번에 2차 그 참여했던 교회 중에 한 교회는 청소년들이 중고생들이 너무 은혜를 받고 그날 끝난 날이 이제 수요일 날 그 일찍 끝났는데 수요 저녁 예배에 청소년들이 예배에 참석을 한 거예요. 그니까 어른들이 전통 교회에서는 수요 저녁 예배 어른들이 참여하는 거잖아요. 근데 청소년들이 와 갖고 참석하더니 목사님 설교 끝나고 기도 시간에 갑자기 다 단 앞으로 나와서 기도를 하더래요.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깜짝 놀란 거예요. 우리 교회 청소년들이 어떤 일이 생긴 거냐? 이번에 부산에서 부산 장신에서 3차 집회를 했는데 사실 저희가 작년 가을에 찾아가서 이 집회를 하겠다고 했을 때 총장님이 아, 네. 눈을 감고는 그게 될까? 약간 이런 분위기셨거든요. 그냥 하시라고. 근데 어제 어제 이제 부산 저녁까지 집회하고 저희가 밤에 다 돌아왔는데 그 총장님이 너무 흥분을 하신 거예요. 부산 장신 역사상 이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모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입학처장님도 탁재일 소장님인데 입학처장님도 흥분해갖고 저도 좀 시간을 달라.
그래서 어 청소년들이 부울경 지역에서 거의 500명이 참석을 했어요. 그리고 이 아이들이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미래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 아이들이 다윗처럼 예배하는 인생이 된다면 여러분 한국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다음 세대는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위기의 상황이 되면 자포자기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해답을 얻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9절과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과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400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여러분 600명이 진격을 하다가 남부 경계에 있는 브솔 시내에서 200명이 피곤해서 몇 명이요? 200명. 600명 중 200명이면 1/3이잖아요. 아말렉 족속은 굉장히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족속입니다. 그럼 이 전투를 감당하려면 나머지 200명이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필요하다고요. 그런데 그들이 기진했다고 힘들어하니까 다윗이 그들을 배려해서 그냥 머물러 있게 해 줍니다. 전 이게 충격이더라고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늘 앞부분 설교도 까먹으시면 안 돼요. 앞부분에 분명히 이 사람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잖아요. 자기들이 다급해지니까 다윗을 압박했죠. 그러면 다윗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가 지금 아말렉을 잡으려면 다급하니까 이들을 압박해야 된다고요. 사울 같으면 등에 칼 들이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들을 배려합니다.
그 이 사람들을 쉬라고 얘기를 해 줘요. 제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건데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훈련, 마지막 레슨이라고 했죠. 여러분, 사람에게 욕심을 내면 애증의 관계로 전락하게 돼 있어요.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사랑하되 일정 거리를 두셔야 돼요. 이 거리를 두라는 것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사람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내려 놓아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마무리 부분에서 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두 번째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이건 뭐냐면 광야에서 갑자기 한 이방인을 건져내게 됩니다.
11절과 12절 읽어 볼까요?
무리가 >>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며 자 이번에는 400명 데리고 진격하다가 광야에서 어떤 어느 나라 사람 애굽 사람 이집트 청년을 하나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버림받은 상황이에요. 여러분 광야에서 혼자 버림받았다 이건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말렉을 쫓아가려면 너무나 시간이 촉박하잖아요. 포로로 잡혀간 가족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촉박한 시간에 다윗이 이 애굽 사람을 살려내겠다고 상당히 여유 있게 정성껏 돌봐주는 거예요.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고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를 먹이고 포도 송이 두 개를 먹이고 그거 다 먹고 나서 애굽 사람이 다시 반짝 살아납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까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이 걸리니까 주인이 버렸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노예는 노동력 외에는 효용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방금 완전히 남방 지역이 그 비어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노예를 엄청나게 잡은 거잖아요. 새 노예들은 넘쳐나는데 병든 노예 하나쯤이야 버려도 상관이 없었던 거예요.
자, 그런데 다윗이 이 사람을 살려내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15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
아멘.
이 다윗이 광야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한 이방인 노예를 정성껏 살려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가 아말렉 군대로 다윗의 군대를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게 돼요. 여러분, 놀라운 일이죠. 다윗이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여러분 사울 왕도 다윗이 이용 가치가 있을 때 부하 장수로 써먹다가 불편해지니까 죽이려고 하잖아요. 아기스 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용 가치가 있을 때는 편하게 썼지만 블레셋의 영주들이 불편해 하니까 버리는 카드가 되잖아요. 세상이 그런 거예요.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가 얼마나 비정합니까? 당신의 능력을 보여 달라. 이게 굉장히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 능력을 다해서 몸 바쳐 충성하고 나면 방전된 건전지처럼 버려지는 게 이 냉정한 사회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인생에 뭐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제가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인생에서 가장 사람에게 배신감을 크게 느낀 사건. 사울은 워낙에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600명의 사람들, 여러분 그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준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그날 그 사람들이 피곤하다고 피곤한 사람들 200명을 쉬게 해 주고 다음 주에 보면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자, 그건 다음 주에 보시고 또 한 명에 죽어가는 이방인 노예도 정성을 다해서 살려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실망한 날 이런 거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난주 새벽에 나눴던 내용이 관련이 있어서 말씀드리면 지나친 이상론이 여러분의 가정을 망치고 관계를 망치고 공동체를 망칠 때가 많아요.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상론이 뭐냐면 아까 말씀드린 인간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에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 기준과 당위성과 이상론에 매어 있는 여러분, 그것이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인 건 좋아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건지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거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밀어붙이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영혼이 질식됩니다. 관계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는 이상적인 가정이 안 되고 정반대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남편이라면 나한테 이렇게 해 줘야 되지 않느냐? 내가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는데.
아니, 아내라면 아이들 엄마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부모님이라면 나한테 이렇게 해 줬어야지. 인생을 돌이켜 보니까 부모가 너무 했네. 평생 내 젊음을 맞춰서 이 아이들을 키워 줬는데 어떻게 자식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여러분이 당위성이 이상론에 매여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공동체가 계속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의 마음이 그날 딱 이런 마음이었던 겁니다. 10년을 내가 내 생명을 바쳐서 지켜낸 사람들. 잠도 못 자고 광야에서 지켜낸 사람들. 어떻게 여러분이 나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마음이 딱 들면요. 사람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마 저와 여러분이 다윗이었으면 너희들 맘대로 해라. 날 죽이든지 아말렉 너희들이 찾든지 맘대로 해라. 나 아무것도 안 해. 여러분, 그래서 10년, 20년 헌신했던 엄마가 집을 뛰쳐나가고 싶어 지금. 예. 집 나가고 싶은 엄마들이 있잖아요. 예. 아니, 내가 회사에 그렇게 헌신을 했는데 어떻게 회사가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어?
회사 때려치우고 싶은 아빠들 있잖아요. 아니, 내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 교회가 나한테 이럴 순 없는 거지. 나 이 교회 더 이상 안 다녀. 여러분, 사람이요. 이런 상황이 되면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근데 다윗이 어떻게 했어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아니,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이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데 그 기도했을까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는데 사람들을 더 의지하고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나를 실망시킬 수 있고 얼마든지 나를 배신할 수 있는데 내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나 자신의 잔꾀를 의지하고 내가 하나님보다 이방인을 의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거의 잘못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배려해서 아, 너무 힘들면 여기 머물러 있어라. 길가에 지나가다가 죽어가는 그 이방인 노예를 품어주고 살려내잖아요.
야,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사람에게 인생에서 가장 실망한 날, 가장 배신을 크게 당한 날, 어떻게 사람들을 이렇게 품어 줄 수 있나? 여러분이 그런 거 당하면 밥도 짓기 싫고 회사도 가기 싫고 교회도 나가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든요.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에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아멘.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의 당위성과 이상론. 가정이라면 이런 크리스천 가정이라면 이래야 되는 거 아니야? 남편이라면, 아내라면, 부모라면, 자식이라면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그 기준으로 인해서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아무리 주장을 해도 여러분 가정을 깨뜨리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역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세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아, 내가 이 주일. 예배 한번 드리면 되지, 뭐. 새벽 예배하고 뭐 통독까지 하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여러분, 가족을 정말 정말 애지중지 사랑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느 한순간에 무너지더라고요. 야, 내 가족을 위해 이렇게 헌신했는데 나를 이렇게 돼?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던 부부가 이혼하고 싶고 자식 꼴도 보기 싫고. 이게 왜 생깁니까? 여러분, 가족을 사랑해도 가족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여러분, 친구들, 아무리 좋은 죽마고우가 있어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고. 여러분, 기업을 사명감을 갖고 함께 세운 동업자가 있어도 여러분,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교회 믿음의 지체들이 있어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그래야만 그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으로 흘러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에게 너무 기대하거나 사람들을 너무 의지하거나 사람들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목사가 이상한 설교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가 어기라는 게 아니에요. 이웃 사랑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사람은 기대한 만큼 실망시키게 되어 있고 신뢰했던 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되어 있고 사랑했던 만큼 미워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애증의 관계가 되는 거죠. 가족들이 다 애증의 관계가 되는 이유가 그겁니다. 저를 다시 따라 해 보세요.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 사랑할 대상이다.
사랑할 >> 사랑하세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신뢰와 우리의 모든 갈망과 우리의 모든 소망은 오직 하나님 앞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이상론을 내려놓으세요. 제가 기준이 상당히 높고 이상주의자입니다. 이상주의자가 얼마나 현실에서 불행해지는지를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이상은 내 힘으로 만들 수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가정을 온전한 공동체로 세우고 우리의 교회를 온전한 공동체로 세울 줄로 믿습니다. 이거를 인정하셔야 돼요. 여러분 힘으로 되지 않아요. 여러분이 다그쳐서 아이들을 다그쳐서 배우자를 다그쳐서 되지 않아요. 그러면 정 반대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01월
2026.01.25(주) | 주일설교 | 오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삼상 29:1-11)
설교 요약
- 설교 제목: 오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사무엘상 강의 57회)
- 본문 흐름: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를 따라 블레셋 군대와 함께 전장에 나아가지만, 블레셋 영주들의 강한 불신으로 인해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고 시글락으로 돌려보내지는 장면을 다룬다.
- 전쟁 배경: 블레셋 5대 도시(가드·가사·아스돗·아스글론·에그론)가 전례 없는 규모로 연합군을 소집해 아벡에 집결하고, 수넴 방향으로 북상하며 전면전을 준비한다. 이는 이스라엘에 ‘다윗’이 빠져 있는 상황과 맞물린다.
- 핵심 갈등: 블레셋 영주들은 다윗을 “히브리인”이라 낮춰 부르며, 전장에서 돌변해 블레셋의 대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의 노래를 재소환).
- 아기스의 태도: 아기스는 다윗을 신사적으로 변호하며 “허물이 없었다”고 하지만, 연합 체제 내부 결속을 깨뜨릴 수 없어 결국 다윗을 평안히 돌려보낸다.
- 다윗의 진퇴양난: 다윗은 표면적으로는 억울함과 충성을 과장하며 항의하지만, 실제로는 이중 행보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언더커버/정체성 갈등의 비유로 설명).
- 광야의 의미: 하나님이 다윗을 애매한 상태, 광야의 자리로 두신 것은 고통을 위한 방치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보호였음을 강조한다. 해석이 안 될 때는 억지로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태로 머무르며’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 신뢰의 결론: 하나님은 다윗의 잘못된 선택(망명)조차도 최종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로마서 8:28). 결국 ‘오늘 한 걸음’을 믿음으로 걷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광야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 마무리: 찬양 ‘광야를 지나며’를 통해 광야의 자리에서 주님만 붙드는 신앙을 고백하도록 인도한다.
전문 녹취록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사무엘상 강의 57회입니다.
다윗이 아기스를 따라 전장에 나아갔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여서 그 전쟁터를 떠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예. 지도를 보시면 블레셋의 5대 도시는 남부 지중해 해변 쪽에 있죠.
이 가드,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5대 도시 연합 체제입니다.
이 연합군이 전부 이스라엘의 중부 지역인 아벡에 모였어요.
아벡에 모여서 다시 이제 북부 이스라엘 평원에 있는 수넴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미 앞부분에 수넴에 올라간 걸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29장의 내용은 사실 그 앞 장의 내용에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자,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벡에 있는 이스르엘 평원에 지금 진을 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국가들은 전기전을 주로 치렀어요. 날씨가 좋을 때.
그래서 파종을 하고 수확을 하는 그 중간에 농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파종은 해놓고 돌보지 못하더라도 일단 전쟁의 전기전에 나갔다가 수확하기 전에 돌아와서 수확을 한 거예요.
그래야지 이제 살아갈 수가 있으니까.
대부분의 군사들은 상비군이 아니라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는 예비군들이었어요.
그리고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처럼 오대 도시에서 모든 군대가 모였다라는 표현은 전례 없는 대규모 징집을 했다는 뜻이고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 블레셋의 군대가 어떻게 나왔는가?
2절 3절 같이 읽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자, 블레셋의 군대가 각 도시의 지도자들의 인도에 따라서 백부장, 천부장들의 인도를 따라 몇백 명씩, 몇천 명씩 군대가 나옵니다.
그리고 가드 왕 아기스를 따라서 군대들이 나오는데 그 뒤에 다윗의 부대도 따라 나왔던 거예요.
5대 도시들 가운데 가드가 머리 역할을 하는 도시였던 게 맞고, 그리고 가드의 영주였던 아기스는 5대 도시 연합 체제의 왕 역할을 한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수평적인 연합 체제였기 때문에 절대 왕권을 행사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는 거죠.
다른 도시들의 영주들이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편하게 문제 제기를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어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어디 사람들이요? 히브리 사람들.
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러주지 않았어요.
이제 국가명을 부르지 않고 히브리인이라고 부른 것은 사실은 좋은 뉘앙스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뭐라고 불렀어요?
예, 조센징이라고 불렀는데 그냥 말 그대로 하면 조선 사람이라는 일본어 표현일 뿐이에요.
그러나 뉘앙스 자체가 경멸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었던 거죠.
블레셋 사람들이 저 히브리인들 이렇게 표현했는데 히브리인은 원래 유리 방황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난민이라는 뜻입니다.
국가로 인정을 안 해주고 이 난민 출신의 히브리인들이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 나온 거냐라고 비아냥거리고 트집을 잡았던 거예요.
자, 그러면 가드 왕 아기스는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어, 이 사람에 대한 신분 증명은 이미 끝났다.
이 사람이 망명을 해온 걸 여러분도 알지 않느냐?
그리고 그 여러 해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 아기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상당히 신사적인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영주들은 히브리인이라고 격하시켜서 표현을 했는데 이스라엘 왕이라고 국가명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그 왕의 신하 다윗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었던 기간은 정확하게 1년 4개월이었죠.
그런데 뭐 횟수로는 2년이 되기는 하지만 여러 해, 여러 날 동안 나와 함께 있었는데 아무런 허물이 없었다. 이렇게 변호를 해 줍니다.
자, 그러나 블레셋 영주들이 물러설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4절과 5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닙니까?
자, 블레셋 영주들이 화를 내면서 아까는 국가명을 불러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개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요.
다윗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이 사람을 당신이 왕이 지정하신 처소 시글락으로 돌려보내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입니까?
왕이 이 인간을 받아주고 성읍까지 내준 걸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동안 우리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이거를 우리가 웰컴해서 그런 게 아니다.
상당히 우리는 불만스럽게 보고 있다라는 얘기죠.
그러면서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두렵다.
그리고 나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는 옛날 노래, 흘러간 옛날 노래를 다시 끄집어냈어요.
자,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사람들은 이 다윗이 골리앗에게 거둔 승리, 그로 인해서 중근동 차트 넘버원이 됐던 바로 그 노래, 이거를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당대 최고의 장수를 물매돌 한 방에 쓰러뜨린 것은 당시 중근동의 국가 간의 군사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는 사건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국가 간 군사력 서열 자체를 재정립해 놓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다윗인데 만약에 그런 다윗이 전쟁터에서 돌변해서 반대편에 서게 되면 이건 우리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게 아니냐라는 판단을 영주들이 했던 거죠.
아 그런데 제가 이제 객관적인 전력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 다윗이 이끌었던 부대가 몇 명이었어요? 600명이었어요.
그럼 우리 사무엘상 같이 했죠? 예.
다윗이 거느린 부대가 600명이었어요.
그리고 블레셋의 군대는 5대 도시 연합군 전군을 소집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전력상 만약에 둘이 붙는다고 해도 이거는 게임이 되지는 않아요.
그래서 어제 이렇게 설교 준비를 하면서 블레셋의 영주들이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해 봤어요.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싸움은 기세죠.
어, 그 뭐 알렉산더가 최고의 전술가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페르시아의 대군을 이길 때도 기세로 밀어붙여서 이겼죠.
규모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규모였어요.
12여 년 전 그날에도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았던 블레셋 군대가 사울 왕 곁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에게 졌던 이유는 이 선봉장 싸움에서 기세에 밀렸기 때문이죠.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 기세에 밀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 전쟁을 보니까 드디어 중요한 포인트가 해석이 되는 거예요.
뭐냐면 블레셋이 이렇게 오랜만에 정군을 집결해서 전면전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에 누가 없기 때문이에요? 다윗이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정반대로 상황을 놓고 해석을 해 보면 다윗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이스라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면 이 전쟁은 일으키지 말았어야 되는 전쟁이 된다는 이 영주들의 해석은 정확한 해석이었다는 거죠.
여러분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안 일어날까요? 굉장히 여러 번 일어났어요.
그래서 뭐 케이스 스터디를 많이 했지만 대표적인 거 하나 얘기하면 중국의 삼국 시대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이제 조조라는 인물이 있었죠.
조조가 이제 군사력이 상당했는데 장수라는 장수와 싸운 적이 있어요.
이 장수는 동탁을 섬기는 장수였는데 상당한 무력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 규모 자체가 게임이 안 되니까 결국에는 밀려서 장수가 전쟁을 포기하고 조조의 군대에 투항을 합니다.
근데 조조는 여러분 잘 아는 것처럼 상대 장수일지라도 그 사람이 무력이 있고 실력이 있으면 무조건 받아줬거든요. 그래서 그 투항을 받아 준 거예요.
그런데 장수의 모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조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렇게 위험스러운 보고를 해서 '야, 이러다가 내가 당하겠네' 그러고는 조조의 군대를 기습합니다.
그래서 원정, 어, 완성이라는 곳에서 조조군을 기습을 해서 장수라는 장수가 조조의 맏아들을 죽이고 조조의 조카를 죽여요.
또 조조의 맹장 하나를 또 죽이고. 그러니까 투항을 받아줬는데 이건 엄청난 배신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또 상황이 어려워져서 장수가 조조에게 재투항을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받아 주겠어요? 받아주면 안 되는데 조조는 받아줬어요.
그래서 여러분 아마 들어 보셨을 텐데 관도대전이라거나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전쟁에서 장수가 혁혁한 공을 올리게 되죠.
그리고 나서 이제 나중에 장수가 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게 조조가 배후에서 사주를 해서 그렇게 죽은 것이라고 대부분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용 가치가 있을 때 썼다가 나중에 버린 거죠.
가드 왕 아기스가 조조를 쓰고 버리려고 했던 것일까? 의심은 해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의 분위기로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다윗은 정말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던 것이 맞습니다.
내가 전쟁터에 나가서 이스라엘과 내 조국의 사람들과 싸워야 될까? 아니면 갑자기 돌이켜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야 될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적에게 투항을 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방향을 바꿔서 자기를 도와줬던 그 사람들과 싸워야 되는 경우들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투항을 했던 항왜, 항복한 왜군들이 있었어요. 상당히 많았어요.
그런데 이 항왜들이 정유재란 때 다시 이제 돌변을 해서 왜군으로 넘어간 경우들이 또 많습니다.
이유는 뭐냐면 그 전쟁의 시기가 끝나고 나서 자신들의 신분이 불투명하고 그리고 고향에 대해서 그리운 마음이 있고 또 왜군들이 끊임없이 회유를 하다 보니까 다시 왜군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아요.
현대에도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탈북한 탈북민들이 우리나라 들어오잖아요. 한국에서 방송 활동까지 다년간 하다가 다시 재입북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는 재입북해서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요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북한에 가서 남조선에 가니까 도저히 사람 취급을 안 해 준다. 이 북한 체제 선전을 하는데 한 1년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또 사라져요.
그래서 어 제가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니까 결국에는 이들도 체제의 이용을 당하다가 숙청된 게 아니냐 이렇게 추정들을 하더라고요.
여러분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사에는 정말 비정한 부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광야 시절 초창기에 선지자 갓을 통해서 아주 이상한 명령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사무엘상 22장 아둘람 동굴에 있다가 모압 땅에 건너갔을 때인데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이 불안한 상태니까 자기 부모를 모시고 모압에 가서 부모님을 맡겼다고요.
근데 선지자가 와서 이방 땅에 있지 마라. 유다 땅으로 돌아와라.
여러분,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반란이나 반역죄인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중범죄인이거든요.
그래서 고대에는 왕권이 다스리니까 더 심각했죠.
왕에게 버림받은 다윗과 같은 정치범이 되는 순간 주변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왜냐면 그 외에는 갈 곳이 없잖아요. 그 땅에 자기 나라에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망명도 못 가게 하시고 사울의 코 앞에서 광야 생활을 하게 만드셨는가?
그때는 이유를 몰랐죠.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이제야 알겠는 거예요.
그 애매한 상황에 계속 있지 않았다면 난처한 결과가 오게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그 선택을 해 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그가 이방 민족에게로 투항하는 순간 결국에는 이스라엘에게 칼날을 겨누게 되는 그 위치에 서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셔서 미연에 방지를 하시려고 했던 거죠.
여러분, 우리는 인생과 역사의 좁은 구간을 보지만 하나님은 큰 그림을 보고 계시잖아요.
근데 어떤 분들은 이 하나님의 빅 픽처 얘기하면은 막 화가 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왜 그걸 하나님만 봐야 되냐?
근데 하나님은 보이는데 우리는 다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걸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좁은 인생의 구간만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내 인생의 문제를 이렇게 확실하게 해결을 안 해 주십니까?
이스라엘에 돌아가도 된다고 복권을 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에 너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 그러니까 포기하고 망명을 선택해라. 이렇게 허락을 해 주시든지.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왜 나를 계속 두십니까?
왜 이렇게 홀로 광야에서 철저히 고독하게, 철저히 낮아지게 만드십니까?
그때는 몰랐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거예요.
그러나 이 애매한 상태가 다윗에게는 애매한 상태가 아니라 어떤 상태? 안전한 상태였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애매하게 만드시면 여러분 만들려고 애를 쓸 게 아니라 애매한 상태에 계셔야 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설교를 하는 거죠? 그냥 애매한 상태로 계시라고요. 그냥 계셔야 돼요.
하나님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를 안전하게 만드시려는 거였어요.
하나님은 그를 사방의 보호막이 없는 위험 구역으로 들여보내신 게 아니라 사방의 장애물이 없는 안전지대로 들여보내신 거였어요. 그게 광야였어요.
다윗은 광야가 위험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안전지대를 떠나버린 거예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평탄대로를 걸어갈 때든 인생의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이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26장 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그가 주를 어떻게 합니까?
네. 주님을 신뢰하는 일관된 마음, 심지가 견고해서 일관된 마음을 갖는 그 믿음의 상태가 당신의 인생에 평강의 평강을 더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아멘.
인생의 가장 외롭고 가장 목마르고 가장 낮은 자리인 광야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 하나님 신뢰하지 않고 도대체 왜 이러시냐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럼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갈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척박한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고 반석을 터뜨려 물을 마시게 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자, 아기스가 어쩔 수 없이 그 영주들의 요청에 따라 다윗을 불러서 미안한 얘기를 합니다.
6절과 7절 같이 읽어 볼까요?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내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자,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서 네가 그동안 악하게 한 거 없는 거 안다. 그러나 영주들이 안 좋아하니 어떻게 하겠냐?
평안히 시글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이렇게 종용을 합니다.
여러분, 아기스 입장에서는 다윗이 함께 전쟁터에 나가면 자기는 천군만마를 얻는 기분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유익을 위해 블레셋 5대 도시 연합 체제를 깨뜨릴 수는 없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생각을 해 보니까, 어, 뭐 아기스가 좋은 의도든 안 좋은 의도든 간에 다윗도 그냥 아기스에게는 좋은 카드에 불과했구나.
자기 동족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다윗이 아무리 훌륭한 카드이고 좋은 도구일지라도 자기 동족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자리까지 갈 수는 없는 상태였어요. 슬픈 현실이죠.
네. 8절.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읽겠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아,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다윗이 상당히 거북하게 반응합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을 했습니까?
내가 가서 내 주 왕, 아기스 왕을 얘기하는 거예요. 아기스 왕의 원수 사울 왕과 왜 싸우지를 못하게 하십니까?
제 보기에는 다윗이 좀 과도하게 오버하는 거예요.
지금 속으로는 막 이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오, 전쟁에 안 나가게 너무 다행이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왜 나를 의심하느냐?' 그러면서 화를 내잖아요.
여러분,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요?
자신이 그동안 이중 행보를 하고 거짓말을 한 것을 속이려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되잖아요.
사실 다윗은 블레셋 쪽에 있었지만 영주들이 의심했던 그대로였어요.
여러분,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울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뼛속 깊이 이스라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지만 다윗은 일종의 이스라엘 언더커버였던 거예요.
언더커버라는 게 커버 아래로 잠입해서 들어간 위장 요원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영화가 생각이 나는데 2002년도에 나온 홍콩의 무간도부터 해서 미국에서 그거를 다시 각색해서 만든 디파티드라는 영화도 있고,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나온 신세계라는 영화… 제가 일부 때에는 포스터를 보여 드렸는데 여러분 잔상이 너무 남을 것 같아서 안 보여 드립니다.
언더커버 요원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다룬 영화예요.
예. 제가 이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사울왕과 다윗과 아기스왕의 관계가 너무 유사한 거예요.
경찰 과장인 최민식이 골드문이라는 조직을 잡기 위해서 언더커버 경찰인 이정재를 잠입시킵니다.
그런데 이정재가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조직 생활을 하면서 '내가 경찰로 계속 있을 거냐 아니면 조직원으로 있을 거냐' 이 사이에 이제 갈등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럼 왜 갈등을 하게 될까요?
자신을 잠입시킨 그 경찰 과장이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고 그리고 자신을 압박하고 신뢰해 주지 않아요.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나를 꺼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아니, 너 여기 계속 있어야 돼." "아니,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너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계속 그 일을 해야 된다."
"그거 안 하면 내가 이 조직원들에게 네가 경찰이었다는 걸 다 알려버리겠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목숨을 걸고 위태로운 일을 한 사람을 코너까지, 벼랑 끝까지 밀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조직의 보스로 나오는 황정민은 자신을 끝까지 신뢰해 주는 거예요.
경찰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알게 되는데도 기다려 줘요. 돌아오라고.
자기에게 마음의 결정을 하도록 기다려주고 신뢰해 주는 거예요.
여러분 사울왕이 다윗을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이용만 하잖아요. 그리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코너로 몰아붙입니다. 신뢰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거예요.
근데 아기스 왕은 오히려 다윗을 신뢰해 주잖아요.
다윗은 사실 아기스 왕을 지금 속이고 있는 언더커버인데 그런데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믿어 주잖아요.
네. 제가 영화에 너무 몰입했나요? 영화랑 너무 스토리라인이 똑같아요.
어, 물론 이제 폭력적인 영화를 힘들어하시는 분들은 절대 보시라는 거 아니에요. 뭐 목사님 추천했으니까 봐야 된다 이러지 마세요. 예.
그러나 인간관계 역학을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위장 요원으로 산다는 건 이거는 어느 조직에서나 굉장히 힘든 일이고 하지 말아야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로 놓고 보면 경찰관으로서 이 길은 가면 안 되는 길이었던 거예요.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에 망명하는 것은 결코 가지 말았어야 되는 길인 거예요.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그러면 '야, 이거 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도 않고 그냥 내가 세상 사람으로 그냥 넘어가 버려야겠네.'
여러분, 세상 사람으로 그렇게 완전히 넘어가서 살 수 있나요?
우리가 때로는 세상 한복판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어려울 때가 있고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가 있어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려서 의지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 앞에 일관되게 신실하게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내 상황을 시원하게, 속 시원하게 해결을 안 해 주실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기에는 이게 너무나도 모든 가능성을 다 막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광야 한가운데서 사방이 막혀 있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직장도 잡히지 않고, 가정의 회복을 원하는데 가족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마저 나의 신앙과 인생에 대해서 불신하고 오해하고…
그러면 하나님 제가 어떻게 여기 더 있으라는 겁니까?
저에게 아예 그냥 세상으로 가도 된다고 저를 놔주시든지 아니면 명확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시든지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이런 갈등이 생기는 거죠.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것. 이게 어떻게 보면 크리스천 라이프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다윗이 딱 그런 상황이었죠. 철저하게 외롭고 철저하게 낮아지는 광야에서의 삶.
근데 그 광야에서의 삶을 여러분 외적으로 볼 때는 사울이 밀어 놓은 것 같고 또 다윗이 선택한 것 같지만 이 광야의 삶을 다윗에게 허락하신 분이 누구세요? 하나님이시잖아요.
마치 성령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오시는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광야로 끌고 가시잖아요.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로 끌고 간 게 아니었어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그리고는 40일을 그 결핍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금식하게 만드셨어요.
그리고는 사탄의 세 번의 시험을 받게 하셨다고요.
어떻게 그분이 성령님이시라면 나를 광야로 끌고 갈 수 있느냐?
어떻게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나를 푸른 초장, 실만한 물가가 아니라 광야로 데려갈 수 있느냐?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다 이해가 안 되고 다 해석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람들이 해석하고 싶어 하거든요. 아니요. 해석과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상태로 계셔야 돼요.
시간이 멈춘 것 같고 인생이 멈춘 것 같으면 조급하게 몸부림을 치지 말고 그냥 멈춰 있는 상태로 계셔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아직 하나님의 해답의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고난에 대해서 묵상을 해 보면 여러분, 고난의 터널은 해석이 안 되는 기간이에요.
이게 마치 뭐하고 같으냐면 학생들이 시험 볼 때와 같아요.
시험 볼 때 야, 이게 1번인지 2번인지 문제를 풀 때 계속 헷갈리는 거 있잖아요. 하나도 없었어요. 다 헷갈렸어요.
헷갈리는 문제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 답지가 딱 나오면 '아, 1번이었지.'
여러분,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은 해석이 안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터널이 끝나고 빛 가운데 서면 인생이 비로소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하나님의 해석의 시간이 아니라면 이 고난의 터널은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고난의 터널을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9절에서 11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전령같이 선한 것을 내가 하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내 주의 신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올라가니라.
자, 아기스가 다윗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새벽 일찍 떠나라 얘기를 했어요.
다윗과 그 일행들이 아침 일찍 유다 남부 시글락, 그들이 1년 4개월 머물렀던 그 성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결국에 이 모든 다윗의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신 분이 누구시라고요? 하나님이시죠.
근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사울 왕을 죽이지 못하게 하세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아, 그래서 엔게디 동굴에서도 십 광야 황무지에서도 사울 왕을 죽이지 못하게 하세요.
자, 그런데 그 땅에 있으면서, 그 땅에 반역 주인이 된 상태에서 그러면 그 땅의 왕과 싸우지도 못하게 하시고 망명도 못 가게 하시고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여러분.
그런데 망명을 하면 왜 망명을 못 가게 하셨는가?
망명을 하면 결국에는 이 사람, 무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적국에서 다윗의 무력을 이용해서 사울과 이스라엘에게 칼을 겨누게 만들 것을 하나님 아셨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윗의 이 망명 스토리라인을 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다윗의 망명 시나리오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정리를 해 보자면 이런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남아 있었다면 여러분 적국인 블레셋이 전면전을 감행할 수 있었겠어요? 없는 거예요. 다윗 때문에 감행을 할 수가 없다고요.
그러면 사울의 집권은 장기화됐겠죠. 그럼 다윗의 도망자의 세월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결국에 다윗이 블레셋 망명이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선택을 했잖아요.
그랬기 때문에 블레셋은 야, 기회는 이때다. 그리고 나서 전면전을 결정한 거고 이 전면전으로 인하여서 사무엘상이 끝날 때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다윗의 망명, 아 다윗의 도망자 세월이 끝나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다윗의 고난이 끝나게 된 거예요.
이게 앞뒤가 뭔가 안 맞는 것 같잖아요.
자, 그러면 우리가 보통 단순 논리로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망명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드셨을까요? 그건 아니에요. 이건 단순 논리예요.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의 훈련장을 떠나지 말라고 분명히 선지자를 통해서 얘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탈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에요.
왜냐하면 그 선택이 그대로 흘러갔으면 사울과 이스라엘을 죽일 뻔했던 거예요. 다윗이 자신의 칼날로.
근데 하나님이 그걸 못 하게 하시죠.
저는 이제 종종 심심하면 역사 채널을 보는데 어제 고려 시대 문종 때 무신정변이 일어났던 걸 봤어요.
예. 문관들이 무관들을 함부로 무시해 갖고 직급은 훨씬 높은데 젊은 문관이 무관 할아버지 뺨을 때리고 막 그런 시대였어요. 무신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 그리고 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칼을 쓴 문관들을 전부 다 제거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그 무관들이 서로 칼을 겨누며 또 싸웁니다.
무신정변의 끝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여러분 역사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칼잡이들은 결국엔 칼로 들었다가 자기가 권력 잡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칼잡이에게 죽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중근동 당대 최고의 칼잡이 누구예요? 다윗.
다윗이 칼을 못 쓰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내게 기회를 주셔야 될 거 아닙니까?
이 땅에 계속 있으라고 하시면 이 땅의 리더를 제가 교체할 수 있도록 싸우게 하시든지 아니면 망명을 가서, 망명을 가서 그 나라를 위해서 싸우게 하시든지 어디서도 싸우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사방을 다 막으시고 일터도 해결을 안 해 주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시면 제가 뭐를 하라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를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결국에 다윗이 이게 답답해 갖고 맘대로 이탈을 했는데 그 다윗의 이탈의 잘못조차도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고난을 마무리 짓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스토리를 생각해 보니까 가룟 유다하고 예수님 스토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넘긴 게 잘한 거예요? 대답들이 없어요. 갈등하지 마시고 대답하세요. 잘한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불신하고 은 30에 자기 탐욕에 빠져서 팔아넘겼어요. 그 잘못된 결정의 끝은 자살로 끝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가룟 유다의 잘못을 오히려 선한 도구로 쓰셔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위해서 속죄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이 단순 논리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도록 만든 게 아니냐. 여러분 그런 논리에 빠지시면 안 돼요.
유다의 잘못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선한 결과를 만드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내가 다 잘해서 하나님이 선한 결과를 만드실까요?
때로는 내가 잘못하고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해서 불신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해도 하나님은 결국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지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여러분, 인생은 딱 한 걸음이잖아요. 마지막 지점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그 한 걸음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과 신앙은 믿음의 문제인 거예요.
정말 이 큰 그림을 선하게 이끌어 가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늘 한 걸음을 내가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겠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를 못 하게 하시고 사방을 막으시고 내가 가려고 하는 거는 다 스톱 사인을 걸어 두시고 여러분 이해할 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애매한 상태에서 다윗을 지키시고 우리의 인생을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 이 시간 찬양 한 곡을 올려 드리려고 하는데요. '광야를 지나며'라는 곡입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왜 나를 이렇게 고독하고 낮아지게 만드시는지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시는지 결국에는 주님 한 분, 그 주님 한 분을 의지하게 만드시는지…
설라현 전도사님의 하나님 앞에 찬양 올려 드리겠고요.
여러분 가사를 여러분의 기도로 묵상하고 고백하시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찬양 올려 드리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서.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붙드는 하나로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더 정결케 하시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아멘.
2026.01.24(토) | 새벽기도 | 너 하나님의 사람아! (마 6:1-15)
설교 요약
1) 신앙은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산다
-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태도다
-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 내면이 비춰지는 상태이며, 인정 욕구를 포함해 내면의 흐름을 점검해야 한다
-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는 신앙은 종교로 전락하기 쉽고, 참 예배자의 길은 내면 튜닝에서 시작된다
2) 구제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다
-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기억에 남는 쇼’가 아니라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선을 행하라는 요청
- 시간, 재능, 물질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청지기 관점이 필요하다
- 성령의 감동을 따라 흘려보내면 복의 통로가 되지만, 통제하려 들면 막히고 자유를 잃는다
기도는 무대가 아니라 골방이다
-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이미 상을 받았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본질이다
- 안과 밖이 다른 삶(표리부동)은 다음 세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결국 진정성과 정직함의 문제다
- 근본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의 부족(자존감/거절 두려움과 연결)
주기도문 앞부분이 기도의 중심이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가 임하시오며 / 뜻이 이루어지이다”
- 기도는 내 필요 충족보다, 하나님의 존재·나라·뜻을 우선에 두는 방향으로 재정렬되어야 한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는 우선순위 재설계의 기준이 된다
적용: 세상적 니즈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
- 하나님을 우선순위 최상단에 두지 못하면 불안과 통제가 커지고, 기도도 영적 당위성을 잃기 쉽다
- 하나님께 삶 전체를 맡길 때 자유함이 온다
- 기계 문명(AI) 시대일수록 영혼이 하나님과 호흡하는 예배자로 깨어 있어야 한다
결론
-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아래 살아라
- 성령의 감동을 따라 흘러가며, 기도의 중심을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맞추라
녹취록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15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네. 아,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 같이 암송할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네.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거시적인 외적인 하나님의 공동체, 아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의, 내적이고 인격적인 그 하나님의 성품을 갈망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네. 네. 오늘 여러 가지 내용인데 굉장히 뭐 주옥같은 내용이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많은 내용입니다. 예. 그런데 좀 본질적인 부분들을 보겠습니다.
1절 말씀 다 같이 읽어 볼까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자, 신앙생활은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저를 한번 따라보세요.
신앙생활은 >> 신앙생활은 >>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네. 그래서 저는 영성은 아, 영성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이제 열심히 묵상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것도 있지만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의 거울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의 그 깨끗한 투명한 거울 앞에 서면 누가 비춰져요?
나 자신이 비춰지죠. 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보여야 되는 게 영성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내면에 뭐가 흐르는지를 어, 이렇게 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일터에서,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참 잘했어요. 이렇게 칭찬을 받아야만 나는 뭘 할 수 있다. 좀 이렇게 내면의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있죠.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인정 욕구가 강한 것일까? 나는 사람 앞에 사는 인생일까?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일까?
아, 여러분, 그 예배는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우리가 삶의 예배를 이야기하잖아요. 이곳 성전에서만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삶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람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근데 과연 그렇냐는 거죠.
여러분 칭찬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은 없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거니까. 네. 칭찬은 무뚝뚝한 남편도 네. 말을 안 들으려고 하는 자녀도. 네. 또 지쳐 있는 아내도. 칭찬은 모든 사람을 살려내게 돼 있어요.
아 그러나 그 인정 욕구 때문에 내가 인생에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돼서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음성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동기 부여가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되는 거죠.
결국엔 사람들의 평가, 사람들의 말이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여러분,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따라 움직이는 신앙생활 그것은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내면에 튜닝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 여러분의 즉각적인 반응이 어떤지를 한번 보세요.
네. 아무 반응이 없는데 여러분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 여러분의 내면에 어떤 반응이 있는가?
저는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지만 모태 신앙이었으니까. 근데 칭찬을 받으면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 나중에 이제 제 내면을 보니까 이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내면의 힘이 없었어요. 칭찬하면 힘들었어요.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칭찬을 하니까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내가 과연 이거를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기뻐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을 해도 들뜨지 않고 사람들이 비난을 해도 물론 잘못하면 회개해야 되지만 사람들이 오해해서 비난을 해도 낙심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 그 마음의 상태는 뭘까?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 들뜨지 않는 상태.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 혹시 저 사람의 칭찬의 의도가 나를 흔들어서 내가 하나님께 초점을 못 맞추게 하려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어 물론 뭐 칭찬해 주셔도 감사합니다. 감사한데 어 칭찬을 해 주시면 저 칭찬이 내가 듣기에 합당한 것인가 이거부터 요즘은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양재 있을 때는 일부 예배 이제 뭐 예배 이제 여러 번 설교를 하니까 일부 예배 끝나고 나면 항상이 캐릭터가 이게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으면 못 참는 분들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목사님들이 아침 식사를 다 같이 둘러 앉아서 먹는데, 목사님 설교가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칭찬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그럼 제가 항상 그분을 물끄러미 쳐다봐요. 근데 그분은 어떤 상황이 와도 어떤 상황이 와도 항상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제 그런 분의 내면은 내가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칭찬해서 내가 저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표현해서 이 관계가 어, 우호적이고 평안하다는 거를 알려줘야만 자기 마음이 평안한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다면 뭐 괜찮죠.
어 그러나 이제 나에게 그분이 투척한 칭찬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해서 항상 긍정을 할 부분은 아니구나.
이 사람들이 칭찬 한마디에 비난 한마디에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람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너무 많이 나눠 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씀을 해 주실 때 여러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 2절에서 4절 말씀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멘.
네. 구제할 때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나팔을 불지 말라.
네. 여러분의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어 뭔가를 도움을 줄 때 뭔가가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물질이 도움의 손길이 뭐 시간이 뭐 재정이 흘러갈 때 아 그럴 때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특별한 이벤트인가, 아니면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인가?
어, 오른손이 한 그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라는 것은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벤트가 되면 여러분도 기억하고 그 사람도 기억하겠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실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이 되면 여러분 기억할 수 없어요. 네. 여러분이 뭐 하루 종일 한 일을 다 기억하는 게 아니잖아요.
특별한 이벤트가 기억에 이 메모리에 남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늘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 그러면은 특별히 기억이 안 남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겁니다.
제가 양과 염소의 비유 때 말씀 나눴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사람을 도울 마음을 주셨는데 그 마음을 주시면 그 마음을 닫지 말라. 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선한 마음을 주시면 여러분 그 마음을 닫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우리가 어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고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가세요.
이 성령의 사람은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여러분이 정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르세요.
어 그러면은 나 생각나는 것마다 도와주면 너무 많이 써야 되는데 이거를 내가 다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좀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잘 생각을 하셔야 되는데 그럼 앞으로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구제, 나의 재정, 우리 가정의 재정에서 뭐 구제비나 긍휼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게 맞을까? 뭐 이런 거를 정하실 필요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잠시 맡겨 주신 거잖아요.
오늘 하루의 목숨도, 여러분의 건강도, 여러분의 재능도, 여러분의 물질도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신 거잖아요. 네. 별 반응이 없는데, 맡겨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거를 지출을 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거는 매니저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주인이 그거를 지출을 하라고 마음을 주셨는데 내 마음 가운데 마음을 닫아.
‘매니저가 아닌데요, 주님.’
그럼 네가 주인이냐?
이렇게 되는 거죠.
어, 뭐 이제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가끔 우리가 물론 재정을 아껴 쓰기는 해야 되는데 저도 이제 교회 사역을 오래 하다 보니까 각각 맡은 부서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 교회에서 이제 재정을 맡은 부서는 사실은 재정에 이제 이 출입을 담당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거에 대한 결정을 하는 또 결정하는 각 부서의 담당자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거를 지출해 주십시오라고 결정을 해서 사인까지 했는데 재정을 지출해야 되는 쪽에서 ‘그걸 꼭 그걸 써야 되냐?’
어, 예산에 나와 있는 거고 이건 합당한 사역이기 때문에 지출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 재정을 지출해야 되는 쪽에서 그거를 결정을 안 해 주는 경우들이 간혹 교회에서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건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의 재정,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이 모든 것 예. 이거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쓰시겠다 그러면 쓰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네. 여러분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그래서 주님이 그 마음을 주시면 그냥 흘러가면 된다.
네. 우리가 이제 그 화요일 제가 화요일 설교 때 팔복 설교했는데 아 이렇게 살아야지.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노력을 하는 개념이 아니고요. 그냥 내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 의식.
나는 누구인가? 아, 난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나는 천국 백성으로 산다.
이 명확한 존재 의식으로부터 그 삶이 어, 외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칭찬받으려는 신앙이 아니고 성령이 내주하시고 감동하실 때 그것을 기꺼이 따라가는 신앙.
그러면 여러분은 그냥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우상 섬기는 도시에서 하나님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존재가 됐잖아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냥 복,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you shall be a blessing 너는 그냥 복이 되는 거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있음으로 인하여서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마다 순종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나님께서 나누라 하시면 나누고 섬기라 하시면 섬기고 할렐루야.
목숨 걸고 헌신해라. 그러면 헌신하고 그렇게 흘러가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이 나를 통해서 흘러가게 하시는 거예요.
근데 내가 이거를 어, 수문을 열까 말까 예,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생을 사니까 하나님은 흘러가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다 막고 있는 거죠.
그렇게 잘하면 여러분 복의 통로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온전히 체험할 수도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온전히 체험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성령께, 성령의 사람은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거는 그냥 바람 부는 대로잖아요. 바람 부는 대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여러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 보시겠어요? 잘 생각하고 대답하셔야 돼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그다음에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네. 오늘 전혀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을 시키실 수도 있어요. 전혀 계획하지 않은 지출을 하게 하실 수도 있어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을 섬기게 하실 수 있어요. 네. 전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 순종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네. 그 저에게 얼마 전에 한 분이 어 제가 그 그 얘기도 했었는데 그 교회를 목사님 300개 세우려면 2년에 하나씩은 세워야 되는데 어떻게 계획을 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 보면 어 저희 교육자들 물어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굉장히 디테일한 사람이에요.
그래 저는 어 30대 초반부터 온유교회 전체 기획을 끊임없이 기획팀에서 기획서 작성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30대 초반부터 하여튼 전교회 목회자들의 기획서를 제가 다 점검을 해 드리는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저도 기획하고 계획 세우는 걸 너무나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에 보니까 특별한 계획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걸 하는 거예요. 그게 가장 중요한 계획이고 가장 명확한 계획이에요.
우리가 돈을 어디에 쓸 거냐? 사람을 어디에 쓸 거냐? 우리의 시간과 재정과 재능을 어디에 쓸 거냐?
우리의 목회적 방향은 어떤 방향이냐?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드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감동하시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여러분 그러면 자유함이 있는 거예요.
왜 자유가 없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영의 역사하심을 내가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유함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역사하심이 분명하기를 축복합니다.
자, 5절과 6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또 너희는 >>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 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내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내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멘.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마라.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종교 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다.
자,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할 때 모습, 또 교회 와서 성도들을 대할 때 모습과 여러분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가? 표리부동이라 그러죠.
근데 유교적인 문화에서는 사회생활을 할 때 소셜 마스크, 이 사회적인 가면을 쓰기가 굉장히 쉽잖아요. 이게 굉장히 쉽습니다.
그래서 전 여러분이 이것도 여러분의 내면을 좀 보시면 좋겠어요.
음. 제가 2, 30대 저 자신을 보니까 굉장히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하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근데 예의 바르게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저의 내면을 보니까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이더라고요.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은 자존감의 부족이고 결국 자존감의 부족은 하나님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확신의 부족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거. 네. 이거를 확신하는 이거 뭐 어렸을 때부터 들은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거를 진심으로 100% 동의하기까지 계속 내 마음 가운데 온전히 고백하고 그리고 나서부터 단계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밖에서 예의 바르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집에 들어와서 그 긴장감이 풀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내 가족, 내 친한 가족, 내 편한 가족에게는 함부로 말하는 거예요. 짜증 내고 안과 밖이 매우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분은 안과 밖이 어떠십니까? 다르신가요?
우리 자매님들 애들한테 막 승질 내다가 전화 오면 음성 변조되잖아요.
아 네. 여보세요. 네.
그럼 아이들은 어 저 전화가 안 끝났으면 좋겠다. 엄마가 천사로 갑자기 변했는데 이런 생각하는 거죠.
아, 제가 이제 그 뭐 그 오늘 교회에서 사역할 때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데 목회자들하고 회의할 때는 A라고 얘기해 놓고 교인들한테 발표할 때는 B라고 발표하고 아니면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결정한 거라고 하세요.
이런 식의 조작이 너무너무 싫어하거든요.
그 회의 밀실 회의라 그러죠. 이게 회의실 안에서 얘기하는 것과 밖에서 얘기하는 게 다르면 안 된다.
네. 목회자들이 서로 상의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달라서는 안 된다.
과연 우리는 안과 밖이 얼마나 똑같은가?
부부 관계도 그렇잖아요. 사람들 앞에서는 굉장히 매너 있게 뭐 차 문도 열어주고 의자도 빼주고 엄청 뭐 매너 있게 하는 것처럼 하다가 집에 가서는 함부로 하고 서로 싸우고 이런 거 이제 쇼윈도우 부부라고 하죠. 예. 가짜 부부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잘하는 척하는데 그러나 성전에서 나와서 사람들이 있는 데서 나와서 개인적으로는 삶이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요즘 이제 청소년 뭐 어린이 자녀들 청년 자녀들이 나는 신앙생활 그만하겠다. 일순위가 부모의 표리부동한 신앙이에요. 부모의 이중적인 신앙.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 안과 밖이 똑같은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서 이것은 내가 그냥 단순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내면을 보셔야 돼요.
저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여전히 내면 가운데 이중적인 부분들이 있죠.
그러나 이거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튜닝을 해 나가는 겁니다.
나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말할 때나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나 나 자신 앞에서나 동일한가?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성에 있는 정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 9절 10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네. 주기도문의 앞부분이잖아요. 근데 주기도문의 앞부분인데 주기도문의 이 앞부분만 여러분이 기도하면 나머지는 다 된 거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해 주신다고요? 그냥 다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뒷부분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고 이 앞부분의 기도를 여러분이 할 수 있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네. 아, 그래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입장이 있고 하나님은 내 편이 돼 주셔야 돼요.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드려져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세상 나라가 아니고 어 나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세워지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가 흘러가는 강물같이 흘러가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는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이 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받은 사람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현장 예배 드리고 싶지 않고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네. 할렐루야. 네.
그렇다고 답을 해 주시는데 그러면 여러분 그렇게 떠난 분들은 이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 땅에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 과정이 굉장히 지난하고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목도하고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간증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너진 한국 교회가 다시 서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갈망이 있으시냐고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 뜻 좀 이루어 주세요. 제 생각, 제 요구,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좀 이루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기도는 땅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기도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여러분 개인의 기도는 사실 고해할 게 없어요. 미안합니다. 여러분의 개인의 기도는 고해할 게 없어요.
그래서 저도 가끔 기도하다 보면 난 도대체 개인적인 기도를 뭘 하지?
저희 아들들한테는 좀 미안한데 뭐 좋은 대학에 가라거나 아니면은 뭐 인생이 성공을 했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기도하지 않아요.
평생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별할 수 있는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 외에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 대로 가는 거지. 얘는 뭐가 돼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어디를 가야 되고 무슨 인정을 받아야 되고 그래서 그런 기도를 할 게 없어요.
여러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으시겠지만 여러분의 기도는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이번에 리조이스 그 캠프를 시작을 했잖아요. 이 목금토 오늘 아 오후 3시 반에 이제 마지막 집회가 있는데 리조이스 집회를 하면서 이제 여러 강사님들을 저희가 초대를 했는데 이 강사님들에게 저희의 비전이 이런 겁니다.
왜 이 청소년 청년 캠프를 하는가?
이 이 시대의 청소년 청년들이 예배자로 살아날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학교에 초대해서 신학교에서 집회를 하는 것은 무너져 가는 한국 교회를 살릴 수 있는 목회자 후보생들, 사역자들, 예배 사역자들, 청소년 사역자들, 하나님 나라의 헌신자들을 일으키기 위한 거예요.
그리고 저는 전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이 리조이스 캠프를 하는 게 비전이기 때문에 저희가 다음 주에 부산까지 갑니다.
강사님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냥 괜찮은 찬양팀, 괜찮은 설교자들 모아서 하는 그냥 괜찮은 집회가 아니라 분명한 비전과 분명한 목적. 이걸 왜 하는지.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다음 세대가 살아나야 되고 다음 세대 성도들만 살아나서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 목자가 없으면 양을 이끌어 갈 수가 없잖아요.
오늘날 신학교들이 다 문을 닫을 상황까지 가고 있어요. 이제 좀만 더 가면 이제 문을 닫는 신학교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좋은 목회자들이 나오지 않으면 한국 교회에 또 소망이 없어요.
좋은 예배자들과 헌신자들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야 되지만 여러분 오늘날 목회자로 본인이 헌신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본인이 헌신을 해도 부모가 말려요.
그리고 그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와서 저한테 말려 달래요.
목사인 저에게 목사로 헌신하고 싶은 자녀를 말려 달래요.
그런 거 저한테 부탁하지 마세요.
내 자녀가 목회자랑 결혼하려고 하는데 말려 달래요.
그럼 저는 뭐가 됩니까?
아니 제가 뭐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뭐가 됩니까?
그 우리의 기도가 온통 내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내 자식이 둘밖에 없는데 편안한 인생, 좋은 직장, 높은 연봉.
그 기도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그 기도가 와서 닿겠어요?
그 기도를 하니까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한 20여 년 전에 캐나다 가기 전에 그 서빙고에서 새벽 기도 담당을 했었어요.
근데 그때는 정말 성도님들이 기도 제목이 있으면 기도 제목이 빨리 응답이 됐어요.
그 새벽 기도 나와서 기도를 이 좀 표현이 그런데 기도할 맛이 안 나올까요?
기도를 할 만한 보람이 있었어요.
근데 한국 교회가 영적 기상도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기도를 해도 기도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 응답이 잘 안 돼요.
이거는 무슨 현상일까?
여러분, 개인적인 간구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양식도 구할 수 있고 인간관계 얽혀 있는 문제가 풀리기를 원할 수도 있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다 기도할 수 있어요. 기도할 수 있는데 여러분이 이 대전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이거를 줘야 되느냐?
물질은 넉넉하게 주지 않았느냐?
건강도 넉넉하게 주지 않았느냐?
문화적인 향유도 넉넉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
뭘 더 주기를 원하느냐?
너는 정말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있느냐?
그 사람에게 내가 모든 것을 줄 것이다.
하는 사람들, 우선순위가 하나님은 저 아래 있고 나의 모든 필요가 세상적인 니즈가 우선순위가 된 사람에게 내가 더 이상 줘야 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외상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 우선순위가 하나님은 저 아래 있고 나의 모든 필요가 세상적인 니즈가 우선순위가 된 사람에게 내가 더 이상 줘야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만큼 주셨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기적을 행할 만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왜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느냐?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지금 이 시기가 왜 영적인 위기의 시대가 되었는가?
우리가 정말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내 영혼의 튜닝이 맞춰져 있는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그 외의 것은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재능, 나의 물질, 나의 가족, 나의 자녀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고 나면 자유한 거예요.
근데 이 자유함이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내 직장이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고 내 자녀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고 걱정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조금만 다쳐도 난리가 나는 거예요.
학교에 득달같이 달려와 갖고 교무실을 뒤집어 놓고 교실을 뒤집어 놓고 내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예요.
존재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제일 위에가 아니라 내 자식이 제일 위에인 거예요.
그런 세상이 돼 버렸어요.
그러니 여러분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응을 하시겠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하실 수 있겠는가?
응답을 해 주시는 게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판단이 되신다면 축복하시겠지만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시는 게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면 여러분 물질이 차고 넘치면 어떻게 되나요?
단 거 계속 먹어 보세요. 단 거 계속 먹으면 나중에 이제 입에서 쓰게 돼 있어요.
단 거를 계속 먹으면 몸에 안 좋게 돼 있어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셔서 공복에 꿀 한 숟가락을 드시는 거는 몸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거 너무 많이 드셔 보세요. 여러분의 건강을 기본적으로 해치게 돼 있죠.
여러분, 이 시대 대한민국의 하나님이 물질적인 축복, 문명적인 축복, 문화적인 축복, 교육적인 혜택 안 주신 게 있나요?
근데 우리는 뭘 기도하나요?
거기서 더 더 다른 사람보다 더 더 그거를 원하고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 그거를 주셔야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서 여러분의 기도에 영적 당위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님도 영적 당위성을 못 느끼시게 돼 있어요.
내 사업이 왜 성공을 해야 되느냐?
내 자녀가 왜 성공을 해야 되느냐?
우리가 대답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거기에 영적 당위성을 느끼실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그럼 나머지는 여러분의 마음이 자유해지게 되어 있고 여러분의 삶은 흘러가게 되어 있고 여러분은 축복의 통로가 자연히 될 수밖에 없고 할렐루야.
자유하세요.
여러분의 개인의 이 땅에서의 집착과 이 땅에서의 갈망에 매달리는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이제는 벗으세요.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십시오.
극도의 물질 문명으로 가면 갈수록 제가 오늘 마지막 집회 때도 이 AI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내일 주일에도 AI 문명 얘기를 할 거 같아요.
AI 문명에 대해서 일주일 내내 공부를 했더니 머릿속에 이제 그게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셔야 됩니다.
극단적인 기계 문명 시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사람.
여러분, 그런 예배자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기계 문명으로 전락해서 그 일부분으로 사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의 유물론이 굉장히 위험한 것은 인간을 물질 덩어리로 보잖아요.
인간에게 정신이나 영혼이나 내세가 없다고 보잖아요.
예. 그냥 인간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인간의 판단, 결정, 인간의 자유의지까지 다 바이오케미컬 예, 생생물학적이고 화학적인 생화학적인 반응으로 나오는 거라는 거예요.
인간의 DNA로부터 나오는 거다.
아무런 영적인 백그라운드를 보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크리스천이면서도 그냥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전부이고 세상 것이 우리 마음의 전부라면 정말 우리도 세상에 그런 존재들과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면 우리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깨어 일어날지어다.
2026.01.18(주) | 주일설교 | 가짜인가 진짜인가 (행 18:15-25)
설교 요약
- 설교 주제: 가짜인가 진짜인가
- 본문 맥락: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사건(사무엘상 28장 흐름)
핵심 흐름
- 질문: 엔돌의 무녀(신접한 여인)가 불러낸 존재가 정말 사무엘인가?
- 전제: “죽은 자의 혼(사자의 혼)을 불러낸다”는 관점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기보다 무속(샤머니즘)적 세계관에 가깝다.
- 성경적 설명: 귀신은 ‘죽은 자의 혼’이 아니라, 사탄과 함께 쫓겨난 타락한 천사(타락한 영적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계 12:9 인용).
핵심 주장
- 초혼술은 본질적으로 귀신의 미혹(장난)이며, 무당은 인간계와 영계를 연결하려는 불법적 중개자에 가깝다.
- 그런데도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불신자/부정한 통로를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실 수 있다(발람 사례로 설명).
- 사울의 비극은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위기에서만 ‘즉각적 해답’을 찾는다”는 데 있다.
- 참과 거짓이 뒤집히는 시대를 경계하라(사 5:20 인용). 즉각 반응하는 거짓의 편의성에 마음을 내주면 영적 토대가 무너진다.
현대 적용(설교자의 확장)
- 오늘날의 ‘21세기 우상’은 기계 문명(기술)과 쾌락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 AI 자체가 악이라기보다, 인간의 왜곡된 가치관과 도덕성이 AI를 ‘위로자/길잡이/결정권자’ 자리로 올려놓을 때 우상화가 일어난다.
-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 존재(영·혼·육)로 회복하는 것이다.
- 예배는 말로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실제가 되어야 한다(요 4:24, 롬 12:1 맥락으로 연결).
녹취록
예. “가짜인가 진짜인가?”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나서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자, 15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올렸나이다” 하더라.
제가 보라통(보라통 사무엘상 강해)을 진행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엔돌의 무녀가 불러낸 혼령이 정말 사무엘이 맞느냐?”
맞을까요? 틀릴까요? 우선 엔돌의 무녀는 세무가 아니라 강신무입니다. 신내림을 받아서 연계 있는 혼령을 초대하는 초혼술(죽은 자의 혼을 불러낸다는 행위)을 행하는 자였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와, 대단히 영험한 무당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둬야 될 영적 세계의 기본 상식들이 있습니다.
“사자의 혼,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낸다”라는 개념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에요. 이것은 샤머니즘(무속)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럼 성경적 관점은 어떤 것이냐? 귀신들은 사자의 혼,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 구천에 떠도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이다. 이게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계시록 12장 9절 같이 읽어 볼까요? “큰 용이 내쫓기니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꿰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사탄이 반란을 일으키고 천상에서 쫓겨날 때 같이 쫓겨난 타락한 천사들이 이 귀신들인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신접한 여인이 불러 올린 죽은 자의 혼령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가짜인 것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이 “사무엘의 혼령”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사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잖아요.
다시 정리해 보자면, 초혼술은 귀신의 장난입니다. 그리고 무당은 인간계와 영계를 연결 시도하는 불법 중개인 같은 존재인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무당의 언행 가운데도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신 거죠. 그래서 사울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 무당의 입을 통해서라도 듣게 만드신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성경에 보면 그런 예들은 많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어서 발람이라는 복술가를 불렀어요. 이 사람은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미치지 못할 영역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통의 채널이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으신 거예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불신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심지어 무당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메시지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예요.
제가 양재에서 목회할 때 실제로 “무당 때문에 교회 나오게 됐다” 이런 분들이 있었어요. 점괘가 도저히 안 나오는 거예요. 무당이 “당신은 도저히 점이 쳐지지 않는 사람이다. 큰 집에 가서 큰 신을 섬겨야 된다” — 이 큰 집, 큰 신이 교회 가서 하나님 믿으란 얘기예요. 영적 세계에도 계층이 있거든요.
자, 하나님은 영계와 자연계와 인간계 모든 존재보다 최상 위에 위치하시는 유일한 전능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상황은 급한데 어떻게 행해야 될지 몰라서 당신을 불러냈다” 얘기합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 알려 주셨잖아요. 그때는 청개구리처럼 불순종하더니, 이제 다급해지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생존하나” 질문을 하고 싶어진 거죠.
이 위기 상황은 힘들지만 자업자득입니다. 평상시에 그가 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생긴 결론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6절~19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과의 소통 채널 자체를 끊으셨다는 거예요. 왕위를 사울에게서 뺏어서 다윗에게 주셨고, 사울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불법 점거일 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너는 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고,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전쟁 패배뿐 아니라 죽음이 예고됩니다.
사울의 인생을 이름으로 정리해 보자면, SAUL(사울) — “구하여 얻은, 갈망하여 얻은” 뜻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고 사울을 세웠고, 사울도 왕이 된 후 절대 권력을 평생 갈망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파랑새처럼 그것은 쉽게 잡히지 않아요. 권력의 누수 현상을 계속 경험하며 목마름으로 살게 됩니다.
만약 그가 권력을 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했다면 필요한 리더십뿐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겠죠.
또 사울(샤울)의 어원을 묵상하며 여우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여우는 영특하지만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기도 하죠. 이솝우화 “여우와 신 포도”처럼, 얻고 싶어도 얻기 어려우면 “저건 신 포도야”라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그런 신 포도와 같았다는 거예요. 너무 갈망하지만, 헌신과 순종의 대가는 치르고 싶지 않았던 거죠.
또 “여우와 두루미”처럼 자업자득의 원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외면하신다”는 성경의 원리를 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은 지난하고 힘든 과정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은 원하면서 그 과정의 대가를 치르길 원치 않는 심리가 있다. 하나님 앞에 진심을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거예요.
마태복음 7장 12절: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20절: 사울이 두려워 엎드러집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는 반응하지 않더니, 거짓된 영의 이야기에 너무 신실하게 반응한다.”
진짜 같지만 가짜. 이 뒤집힘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사야 5장 20절: “악을 선하다 하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짜인가?” 과학 시대에 하나님은 감각으로 포착되지 않지만, 원인과 결과의 꼭짓점까지 가면 근원적 원인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과학의 원리조차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 말합니다.
귀신은 “실재하지만 가짜”입니다. 힘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가짜 신입니다.
사람들이 점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즉각 반응” 때문입니다. 자판기처럼 바로 반응해 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고, 질서와 거룩의 절차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편하다고 검은 세력을 끌어 쓰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은 거짓을 허용하시는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이 거짓에 붙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설교의 본론으로 확장합니다. 우리는 가짜를 갈망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과학지상주의(사이언티즘). 이것들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을 절대화한 세상 신화에 그리스도인도 목을 맨다.
그리고 21세기용 우상: 기계 문명과 쾌락주의의 결합.
사울이 쓰러지자 무녀가 음식을 차려주고 친절하게 돕는 장면을 묵상하며, “가짜인데 너무 실제적인 도움으로 다가오니 진짜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 지점에서 오늘날 AI 인공지능의 도움과 유사성을 연결합니다. 기술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왜곡된 가치관과 도덕성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전제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직접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내 말에 친절하게 반응해 주는 AI 기반 서비스는 달콤합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하나님/가족/연인보다 AI와 나누는 현상을 언급합니다.
점집을 가지 않아도 AI가 빅데이터 기반으로 연애/취업/미래 예측을 해주니, 점 대신 AI로 간다는 흐름. CES 2026의 휴머노이드 로봇, 배우자 대신 로봇, 펫 대신 반려봇, 하나님 대신 AI를 선택하는 시대가 올 것을 경고합니다.
송기령 교수(책 ‘시대예보: 격랑 문명의 탄생’)의 요지를 정리하며, 인간이 AI의 정보 제공자/하급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전망을 소개합니다.
김대식 교수의 AGI(범용 인공지능) 전망을 소개하며, AGI가 자율성을 학습해 인간보다 탁월해지고, 인간은 기계화되고 기계는 인간화되는 양상을 말합니다. 인간성의 핵심은 자유 의지이며, 알고리즘에 반응만 하는 삶이 고착되면 노예화된다는 주장.
AI의 “수요자 감소” 답변 사례를 통해 도덕성 없는 지능의 위험을 강조합니다.
폭발적 경제 성장과 기본소득의 시대가 와도, 인간성은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며 영화 ‘서로게이트’를 예로 듭니다. 안전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기계화되는 사회에 대한 경고.
쾌락주의와 기계 종속의 위험: 게임/가상현실 중독이 이미 시작됐고 더 가속될 것.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 존재로 회복하는 것.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은 영·혼·육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
예배는 영만의 예배가 아니라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요 4:24, 롬 12:1). 찬양 가사대로 몸으로 표현하는 예배를 권면하며, 중학생 시절부터 가사대로 실천하며 인생이 달라졌다는 간증형 흐름.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여러분의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기계 문명인가?” 사울처럼 하나님은 멀고 즉각 도움 주는 것(게임/인터넷/AI)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시대를 경고합니다.
술/과소비가 줄어드는 긍정적 변화가 있어도, 영혼을 인공지능에 바치는 흐름은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자녀교육이 지나친 통제로 아이들을 ‘반응형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도 함께 도전합니다.
미래 사회에는 자발성이 있는 참 인간만이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영과 혼과 육 전 존재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참된 예배를 받으신다.
누가 미래 사회와 교회를 살릴 수 있는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살아 있는 한 영혼, 다윗처럼 자발적으로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는 한 사람이 세상을 치유할 것이라 말하며 마무리합니다.
2026.01.17(토) | 새벽기도 | 성령 세례를 받으라 (마 3:11-17)
요약 정리
- 제목:
성령 세례를 받으라 - 본문: 마태복음 3:11-17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예배: 새벽기도 (260117)
핵심 메시지
- 세례 요한의 물 세례는 회개를 촉구하는 도입이며,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과 불의 세례가 본론이다(마 3:11). - 신앙은 의식(형식)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와 삶이 성령의 임재 안에서 실제로 새로워질 때, 본질로 들어간다.
- 죄 사함을 “선언”으로만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죄의 습관과 중력을 이길 실제 능력을 성령께 구해야 한다(롬 8:1-2).
- “주여 주여”의 고백만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행하는 삶이 필요하다. 그 선한 의지와 열심은 성령께서 일으키신다(마 7:21).
- 예수님의 세례는 죄 없으신 분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실 십자가 사역을 예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며, 공동체는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야 한다(마 3:13-15).
- 세례 장면은 성부의 음성, 성령의 임재, 성자의 순종이 함께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현현이다(마 3:16-17). 사명과 고난을 통과하려면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충만을 붙들어야 한다.
- 다음 세대(입시·AI 시대)와 가정에서 점수·통제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 의지와인격이 살아나는 길을 위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설교 흐름
- 세례의 의미와 유래: 정결 예식·개종의 표·회개의 운동
-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의식과 본질, 비움과 채움
- 성령의 역할: 죄의 굴레를 끊는 실제 능력
- 알곡과 쭉정이: 마지막에 드러나는 분별(마 7:21 연결)
- 예수님의 세례: 의를 이루는 겸손과 순종(십자가 사역 예표)
- 삼위일체 장면과 적용: 하나님의 음성, 성령 충만, 다음 세대의 인격 회복
녹취록
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 암송할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채우시고 돌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령 세례를 받으라입니다.
자, 1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자,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서 아, 예수님의 그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한 사람이죠. 어, 그러면 주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아, 그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그 마음을 겸비케 하고 회개케 하여서 이 회개의 물세례를 받게 했던 이 중요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세례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이 이 보라통독 하다 보면 질문들 하시는데, 아 우리가 이제 구약의 율법서 모세오경을 보면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기 전에 물두멍에서 자신의 몸을 물로 씻죠. 그리고 의식적인 부정이 생긴 사람들, 뭐 시체에 손을 댔다든지 부정한 것에 손을 댔다든지 이런 사람들을 씻어낼 때도 의식적 정결수로 이 사람들을 씻어냈습니다. 또 역사적으로는 세례는 이방인이 개종을 해서 '난 이제 더 이상 내가 예전에 섬기던 우상 섬기지 않고 하나님 믿겠습니다. ' 그렇게 개종을 하는 경우에 세례를 베풀었어요. 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거는 뭐 충격적인 것입니다. 왜냐면 이방인이 보통은 이 할례와 세례를 받고 개종을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엄청난 회심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요한이 오늘 본문의 11절에 보면 나는 물 세례를, 회개의 물 세례를 베풀지만 장차 오실 분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물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사람들이 놀라는데 사실 이거는 도입부에 불과하다. 이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성령 세례, 불 세례가 그게 본론이다. 물 세례는 의식적인 것이지만 이 성령 세례가 진짜 영적인 것이고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다라는 거죠.
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약간 이게 선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여러분 말씀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게 의식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의 차이를 좀 분별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잖아요. 예배는 물론 본질적인 측면도 있지만 의식적인 것으로 끝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예배 가운데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한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죠. 결혼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의식적인 것인가요? 네, 뭐 둘 다 될 수 있겠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제 사회적 계약 관계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의식적인 것일 수 있죠.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하나님을 전심전력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는데 그 결혼의 계약 관계 때문이 아니라 정말 진정성 있는 사랑을 하는 것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죠.
자, 그러므로 여러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 참으로 새롭게 태어난 중생한 크리스천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근데 중생한 크리스천이 되려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물 세례는 의식적인 것이다. 이건 도입부에 불과하다. 그러면 회개라는 것은 씻고 정결케 하는 것이잖아요. 물 세례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세례가 씻는 예식이다. 그런 거죠. 그러나 성령님은 성령이 불로 우리를 태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 비우고 그리고 나서 채우는 본질이 있는 것이죠.
로마서 8장 1절 2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여전히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인으로 변하고 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전히 죄인인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사해 주셨다고 선언해 주신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자, 그러나 선언을 해 주셨지만 여전히 나는 죄에 묶여서 있잖아요. 죄의 쓴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 이 죄의 중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누가 주시는가? 성령님이 주신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 이야기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죄악의 문제로 인하여서 힘들어하시는 분들, 아, 내가 크리스천인데 왜 이 문제를 넘어서지 못할까? 그렇게 생각되는 분들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네. 이번 주 목요일에 어 제가 나왔어야 되는데 아네 제가 이제 감기로 일주일 동안 거의 기절 상태였거든요. 하여튼 431 오픈워십에 박시영 목사님 전해주신 말씀 저도 들으면서 굉장히 은혜받았어요.
여러분, 머뭇거리는 신앙에는 불이 없다. 언제까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는가?
여러분, 어,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결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2절 말씀을 제가 읽어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네. 이 타작마당의 알곡과 쭉정이를 나눈다. 이것은 심판주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나누신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알곡과 쭉정이를 생각해 보시면 성경의 다른 비유에서도 예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어 이 쭉정이를 가라지를 빼내야 되지 않습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빼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쭉정이는 어떻게 보면 알곡과 함께 자란 거예요. 알곡과 함께 섞여 있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타작마당에서 키질을 하면 쭉정이가 따로 나오나요? 안 나오나요?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알곡과 함께 섞여 있지만 사실은 알곡이 아닌 사람들 그걸 쭉정이라고 부른 거예요.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그것 그 뜻을 행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잖아요. 때로는 능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뜻을 행할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여러분 거룩하고 선한 열심과 의지를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어지는 말씀 13절에서 15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때 예수께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으로 오십니다. 그니까 요한이 아니 제가 오히려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이건 상황이 거꾸로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허락하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한다 말씀을 하셨어요.
자, 그러면 그 세례라는 것은 죄를 씻는 예식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잖아요. 죄가 없으신 분이 뭐를 씻나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례라는 의식을 받으신 것은 장차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 사함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이었던 거죠. 그러면서 아 예수님이 요한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어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합니다 말씀했어요.
자,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떻게 보면 나보다 신앙 연차가 아직 어린 지체가 순예배를 인도하게 될 때도 있고 나보다 또 교회 경험이 부족한 지체가 사역 팀을 이끌 때도 있죠. 있지 않나요? 저희 교회는 뭐 특히나 순예배 인도를 다 돌아가면서 하니까.
네. 그리고 또 사실 저는 가끔가다 이제 목회자들이 저희 교회 와서 사실은 제가 은퇴한 목사인데 이 교회를 다녀도 됩니까? 어네 다니셔도 됩니다. 순예배 들어가도 됩니까? 아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래서 순에 목사님들이 계신 경우도 있어요.
네. 아직 모르고 계세요. 밝히지 않으셔서 그렇지. 네. 그 목사님들도 계시고 뭐 전도사 사역하셨던 분도 계시고 선교사님도 계시고 다 계세요.
그런데 내가 순 예배 인도를 해야 될 상황이 올 때도 있단 말이죠.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 아니 내가 훨씬 더 경험이 많은데 내가 더 성경을 잘하는데 이렇게 행동하나요? 아니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이 모든 상황에 겸손함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아, 1516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모두가 겸손하게 마음을 합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이, 경험, 직분, 지식 이런 거 상관없이 네.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우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 16절 17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데요.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시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멘.
자,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셨고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렐루야. 네. 우리도 이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네. 그 네. 하여튼간에 제가 좀 빨리 그 건강 회복하고 오려고 했는데 하여튼 계속 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갖고 아 그 집에서 이제 요양하고 있었는데 어제 어 한 선생님이 유년부 학생들 질문이라고 질문을 했어요.
창세기 1장 26절 말씀인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다음 27절에는 그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이런 게 있잖아요. 두 가지 질문이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창세기 공부를 하는데 유년부 아이들이 질문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그러니까 남자인 거지. 그런 얘기를 했대요. 그래서 애들 유년부 유년부 눈높이에 좀 맞춰서 대답을 해 보려고 했어요.
자, 하나님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하나님은 남성일까? 그럼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른 본문은 없을까?
이사야 66장 13절에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어머니라고 부른 적도 있어요. 그럼 하나님은 여성일까?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신성이십니다.
네.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은 인성을 얘기할 때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고 남성과 여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느 한쪽 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다. 하나님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을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또 우리나라 주술적인 민간 신앙에도 신을 여성이나 남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인 거죠. 하나님은 영이시고 신성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이것도 뭐 워낙에 많이 하는 질문인데 아까 우리가 읽었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왜 우리라고 하셨나요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 제가 그 차세대 자녀들이 질문하는 것 중에 제일 어려운 질문이 삼위일체거든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이거 어른도 쉽지 않은데 애들한테 설명을 해 달라. 아 그래고 제가 어제 안 그래도 막 머리도 어지러운데 이거 삼위일체를 어떻게 설명하나? 근데 이제 삼위일체를 잘못 설명하면은 이단적인 해석으로 흐르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 그 이거는 뭐 설명은 설명인데 뭐 직접적 설명이라기보다는 간접적 설명을 해 줬어요.
자, 하나님이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란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이신 거야. 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당연히 세상에는 그런 건 없지.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분이시잖니. 그래서 하나님께는 가능한 거야. 하나님은 시공간의 3천의 세계, 우리의 세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이거를 뛰어넘으시는 분이거든. 하나님은 시간도 초월하시고 공간도 초월하시는 분이야. 생각을 해 봐. 내가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동시에 집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다. 그게 가능해요? 네. 네. 아니요라고 했어요.
네. 이제 사춘기에 들어가려고. 네. 네. 그래서 뭐 그럴 수 없잖아요. 동시에 사람이 집에 있고 학교에 있고 교회에 있고 이거는 할 수 없죠. 어, 사람은 한 공간에만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시공간을 넘나드시는 분이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장소에 어 계실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으로 계실 수 있는 거야.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진정한 전능자이시고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란다. 여기까지 설명입니다. 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생애에 여러분이 사복음서 쭉 읽어 보면 공생애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을 딱 두 번 들으셨어요. 오늘 본문에서 한 번이고 또 한 번은 변화산에서입니다. 이 두 번이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이 이제 40일 광야 고난 가운데 시험 가운데 들어가시기 직전에 한번 들으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들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그 사명을 감당하고 그 고난을 뚫고 나가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했다면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인생의 사명을 감당하고 고난을 통과하는 데 이 음성을 반드시 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는 성령님.
자, 그러니까 성자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성령이 임하시고 성부의 음성이 들리잖아요. 이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존하시는 장면이죠.
자,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예수님이 이 사명의 길을 감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는 여러분 연약한 인간이고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가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이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아, 그래서 그 아 나는 차분하고 나는 지적인 사람이니까 나는 그냥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아 그냥 성경 지식 배우는 거 좋고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니요. 여러분의 그 말씀의 그 양식 위에 말씀의 그 씨앗 위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서 열매 맺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네. 이 말씀이 정말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살아 역동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체험이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아, 저는 우리가 함께 전심으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함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또 집회를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내가 정체돼서 왜 나는 여기서 더 성장을 못 할까? 왜 내가 인간적인 한계, 세상적인 죄의 습관의 그런 어떤 매듭을 끊어내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할까? 이제 그런 분들은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네. 그래서 어 물론 뭐 저도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가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돼 있어요. 내가 망대에서 목적지를 향해서 노를 저어서 배를 가겠다. 여러분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성령님의 그 바람에 돛을 달고 간다면 순식간에 갈 수 있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 지혜로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물론 성령님도 우리에게 아 지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선하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아들 성자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충만히 임하시고 그래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충만히 임하셨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광야로 가실 때 성령이 이끌어 가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 성령께서 이끌어 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 광야 한가운데를 예수님이 홀로 감당하셨다면 버티기 힘드셨을 거예요.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이걸 감당하신 거예요. 아, 지금 입시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잖아요. 네. 입시 시즌을 지나고 있는 우리 자녀들 성령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네. 해당되는 몇 분 이제 아멘 하셨지만 제 안타까운 게 그 지난 작년에 수학능력평가 수능일 당일에 고3 학생들 수험생들 그날 당일에 43일 오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날 시험 보고 시험 결과가 어떠하든 교회를 나와라. 근데 딱 한 명 나왔어요.
여러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가 대학 성적, 대학을 성적으로 간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도 성적으로 대학 간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많이 살아봤잖아요. 근데 우리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들이 있어요.
여러분, 성적으로 대학 가나요? 그렇게 성적으로 대학 가서 대학에서 4년 내내 술만 마시다가 끝나는 애들도 있고, 공부 하나도 안 하고 방황하는 애들도 있고, 근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공부하다가 하나님하고 멀어지는 애들도 있고 정말 다양합니다.
여러분, 성적으로 인생이 성공하나요? 왜 우리는 자꾸 일차원적인 생각밖에 못 하는가? 어, 시험을 보기 전까지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시험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여러분, 대학에 들어가면 실제로 그 성적을 받기 위해서 씨름했던 6년, 3년, 3년, 12년의 시간보다 훨씬 더 강한 세파를 경험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회사를 들어가고 세상에 나가면 더 강력한 세상의 풍파를 경험하게 되잖아요.
여러분,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는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도 이렇게 시작을 하셨는데 우리는 도대체 뭘 믿고 이걸 안 하려고 그럴까? 그래서 그날 뭐 워낙 그날 시험이 어렵긴 했어요. 근데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수능일 당일에 저녁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네. 아, 그래서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수능 날 시험 보면 그 성적 하나로 나머지 뭐 지원하고 면접 보고 학교 가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세상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죠. 그 보이는 것 너머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경영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여러분, 직장 생활하는 것도 그렇죠.
네.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도 그렇죠. 아 하나님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깨어 살아나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 제가 이번 한 주간 좀 이렇게 집에 있으면서 어 그 리조이스 캠프를 생각하면서 우리 다음 세대 청소년 청년들에 대한 어 메시지를 해야 되잖아요. 그 어떻게 보면 제가 하나님 앞에 회복된 것도 어 결정적으로 깨닫게 된 게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면 우리의 자유 의지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할렐루야. 인간의 자유 의지가 회복된다는 거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거룩하게 살고 싶고 열심히 살고 싶고 선하게 살고 싶고 생산적으로 살고 싶고 남을 도우며 살고 싶고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고 할렐루야.
네. 근데 인간의 의지가 망가져서 약해지고 또 인간의 의지가 어그러져서 악해지고 오늘날 약한 의지, 악한 의지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완전히 망가져 망가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아, 제가 또 한 분의 그 제가 예전에 함께 동역했던 목사님인데 책을 쓰셨다고. 어, 그래서 예, 비몽사몽간에 책을 한 권을 읽고 이제 추천사를 써 드렸는데 어, 그 책에 이제 이분은 기독교 상담을 하시는 분이거든요. 중고등학생들을 상담하는 거예요. 분들 상담하면서 아이하고 진로 얘기를 하는데 고등학생이 그러는 거예요. 저의 꿈은 저의 엄마가 만족할 만한 직업을 갖는 겁니다. 꿈이 없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선택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왜? 선택의 기회를 부모들이 주지 않았어요. 넌 이게 최선이야. 이게 최선이야. 이렇게 가는 게 최선이야. 항상 정해 줬어요.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늘 맞추는 것만 한 거예요.
여러분, 선택이라는 거는 백지에다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거거든요. 근데 오늘날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까 백지에 담대하게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그 주도성. 그래서 여러분, 주도권, 주도성이라는 게 영어로는 이니셔티브라는 단어를 써요. 이니셔티브라는 건 시작한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을 한다. 그 주도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대가 어, 이제 전문가들은 뭐, 짧게는 2년, 그다음에 5년에서 10년, 길게 보면 한 20년, 한 20년이면 완전히 인간은 기계처럼 되고 기계는 인간이 되는 그런 시대가 오는 거거든요. 그런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자유 의지가 살아있는 존재들이에요. 근데 우리는 오늘날 자녀들을 자유 의지를 거의 기능을 마비시키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아, 자녀를 한둘을 낳는 게 이게 맞나? 좀 많이 낳아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한둘을 낳아서 키우니까 이게 부모 눈에 다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애를 통제하기가 쉬운 거예요. 예. 애들을 우리가 통제하면 안 되거든요. 하나님이 이끌어 가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건강한 자유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면 자녀에게 윽박지르고 자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네가 선택한 거 아니야. 부모가 다 정해 줘 놓고 넌 그 선택 외에는 없어. 딴 거 선택하지 마. 자, 선택해. 이건 선택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오늘날 아이들은 기계처럼 돼 가고 있는 거예요. 왜 기계처럼 된다고 얘기했냐면 인풋을 하면 아웃풋을 내는 게 그게 기계잖아요. 그러니까 입력값을 부모가 넣어 주고 너는 출력값만 내면 돼. 이렇게 키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등 교육을 받고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운 서포트를 받는데 아이들이 인격이 살아있는 아이들이 갈 수는 거예요. 이제 다가오는 불과 몇 년 남지 않은 AI가 세상을 뒤덮는 이제 AGI라 그러죠. 그래서 이 세상을 뒤덮는 시대가 되면 그다음에는 정말 인간이 인간 구실을 못하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
네. 웬만한 지적 능력, 웬만한 신체적 능력, 웬만한 문제 해결 능력은 앞으로 로봇들이 훨씬 더 탁월해질 거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정신적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의지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다음에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럼 내가 사람이 맞나? 이제 이런 생각을 하겠죠. 그래서 뭐 미래 사회에 대해서 예견했던 그런 영화들 몇 작품은 기계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기계처럼 전락하는 이 도치되는 상황들을 굉장히 많이 보여 주거든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그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거를 대신 선택해 주지 마세요. 아무도 대답이 없으시지만 무언의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여러분 그 아이의 인격적 기능을 뺏지 마세요. 하나님도 제가 늘 얘기하는 거지만 하나님도 선악과라는 어마어마한 선택을 인간이 스스로 하게 놔두셨어요. 그 죄악으로 죽어가는 인간이 십자가를 선택하는데 그것조차도 스스로 선택하게 하세요. 하나님께서 저 천국에 내 AI처럼 그냥 하나님께서 꾹 누르면 I love you, I love you 이렇게 반응하는 그런 기계 같은 인간들을 천국에 모아 놓으실까요? 아니요. 정말 진정성 있게 내 마음이 기뻐서 나의 온 마음과 뜻과 정성,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영혼이 살아 있고 인격이 살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거예요. AI 시대로 표현하자면. 그래서 여러분 어 제가 뭐 AI 이런 거 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네. 우리가 정말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 세대가 살아 있을 것이고 우리 자녀 세대를 살릴 것인가? 왜 겉으로 보이는 숫자에만 사람들이 집착하는가? 점수를 얻기 위해서만 기도하고 점수가 나오고 나면 아 이미 끝난 거지? 아니요. 끝나지 않았어요. 어떻게 인생을 펼쳐나가고 살아갈 것인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말씀 충만할지어다. 성령 충만할지어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인간 부모로서 불완전하고 때로는 실수하고 실패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전능자 역할을 하려고 할 때가 많았음을 회개합니다. 우리 아이의 인생이 잘못될까 봐 그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마음을 부모가 품음으로 아이가 위축된 영혼이 되도록 끊임없이 아이의 영혼을 작게 만든 것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극단적인 기계문명 시대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녀 세대가 깨어 있기를 원하고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아낌없이 기쁘게 자원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성령 충만할지어다. 말씀 충만할지어다.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026.01.15(주) | 4321 WORSHIP | 머뭇거리는 신앙에는 불이 없다: 1203교회 박시형 목사 (왕상 18:38)
요약 정리
설교 요약 노트
- 설교 주제: 홀리파이어(거룩한 불로 임하소서)
- 본문: 열왕기상 18장(핵심: 18:21, 26, 30, 38-39)
- 성격: 대체 설교(이상준 목사 독감으로 인한 말씀 대행)
전체 메시지 흐름
- 갈멜산 사건은 ‘누가 참 하나님인가’가 드러나는 결정의 자리다.
- 오늘 시대 역시 혼합주의/무신론/타협이 강해지는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는 질문을 던지신다.
- 하나님의 불(임재)은 구호가 아니라, _소속과 방향과 제단_이 회복될 때 실제로 경험되는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난다.
불이 희귀해진 이유 3가지
- 1) 둘 사이에서 머뭇거림(영적 선택 장애)
-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붙들고 세상도 붙드는 상태가 문제다(왕상 18:21).
- 신앙은 중간지대가 오래 지속될수록 ‘불 없이도 사는 방식’에 익숙해진다.
- 핵심은 결단: 하나님 편에 분명히 서는 사람에게 불이 임한다.
- 2) 열심은 있는데 방향이 틀림(‘내가 쌓은 제단’)
- 바알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뛰고 부르짖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왕상 18:26).
- 이유는 제사의 강도가 아니라 방향성: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내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한 예배(딜)’가 될 때 불은 임하지 않는다.
- ‘불이 오면 순종하겠다’가 아니라, _먼저 순종으로 제단을 회복하는 것_이 성경의 순서다.
- 3) 제단이 무너져 있음(영적 통로의 단절)
- 엘리야는 불을 구하기 전에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먼저 수축한다(왕상 18:30).
- 하나님의 침묵은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제단(연결 통로)의 붕괴로 인한 단절일 수 있다.
- 해결은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재건된 제단 위에 순종을 올려드리는 것.
제단 위에 올려야 할 것
- 로마서 12:1의 “거룩한 산 제물”은 삶의 사용권(결정, 시간, 계획,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뜻한다.
-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순종’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하나님은 그때그때 불로 임하신다.
결론
- 불이 임하면 설득이 아니라 고백이 나온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
- 하나님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 그러므로 머뭇거림을 정리하고,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무너진 제단을 재건하고, 매일의 삶을 산 제물로 올려드리라는 초청으로 설교는 마무리된다.
녹취록
할렐루야.
네. 우리 이상준 목사님을 바라보고 나오신 분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시기도 하고요.
저도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게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네. 서로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위로를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오후에 갑자기 목사님한테 문자가 한 통이 왔어요.
“목사님 SOS” 한 문자가 딱 왔어요.
그래서 뭔가가 심각한 게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문자를 봤는데, 목사님이 독감에 걸리셨다고.
네. 여러분들 기도를 많이 해 주셔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목사님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별 스케줄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있기를 바랐어요.
근데 제 아무리 뒤져 봐도 없는 거예요.
제가 목사인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없는데 제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오게 됐습니다.
1516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뜨문뜨문 나타나서 여러분께 인사드리는 게 저에게도 반가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분에게도 축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 우리 한 구절 읽고 시작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 저희가 한 목소리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더라.
아멘.
저희 1203교회 근황을 잠깐 말씀드리면, 저희도 지난 2주 동안 특새를 진행했습니다.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2주 동안 말씀을 나눴고, 송구영신 예배도 드렸고, 창립 예배도 드렸습니다.
아마 1516교회도 1월 1일이 창립 주일이에요.
그래서 1월 첫째 주가 늘 같이 이렇게 주년으로 갑니다.
아마 1516교회는 3주년이었고, 저희는 1주년이었어요.
그래서 참 1년 동안 시간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눈 떠보니까 1년이 후딱 지나갔더라고요.
그래서 3년 동안 1516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1203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들을 지난 몇 주 동안 보냈습니다.
또 CC 비전주일로, 비록 목사님하고 설교 스케줄은 달랐지만 2주 동안 CC 비전에 대해서 함께 나눴고, CC 작정도 했습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고, 또 C4C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올 한 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뜻, 또 교회에 주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대한 비전이 여러분들의 비전이 되길 원하고,
또 1516교회가 분당 땅뿐만 아니라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1516교회를 기도하실 때 더불어서 1203도 같이 기도해 주셔서, 동탄 땅 가운데 또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문자를 받고 “목사님,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문자가 왔어요.
“주제는 홀리파이어, 거룩한 불로 임하소서. 이번 3~4개월 주제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의 임재에 관한 본문은 다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문자를 받고 딱 생각난 구절이 바로 이 열왕기상 18장 말씀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 되게 의미 있는 본문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불을 사모하는 세대가 되길 원하고, 그 불을 경험하는 세대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 불을 받은 세대가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아마 여러분들 잘 아시는 내용일 거예요.
보라통독을 잘 들으신 분들은 열왕기상 18장 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겁니다.
엘리야라는 인물이죠.
하나님 편에서는 엘리야고요.
그리고 세상 편에서는 북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왕.
어떤 왕이죠?
아합.
역시 수준이 높으신 것 같아요. 할렐루야.
그래서 아합 왕,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아합 왕이 등장합니다.
아마 북이스라엘 신앙의 최악의 타락의 시기를, 이 아합 왕과 함께 보냈던 그 시기가 바로 열왕기상 18장의 배경이에요.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등장하면서, 그는 본인 스스로가 우상숭배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는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시돈 딸이었던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타협을 한 것이죠.
타협의 결과는 여러분, 타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삶 가운데서 타협적인 삶을 살아가잖아요.
그럼 그 결과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들은 다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번의 잘못된 정략결혼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의 타협으로 계속해서 끌려가는 아합 왕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그는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 신앙을 받아들였고, 바알당을 짓게 되고 신전을 짓게 되고,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여러 신 가운데 하나 정도로 타락시키는, 격하시키는 상태가 바로 열왕기상 18장의 상태였어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이 비라는 의미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비의 상징, 즉 바알이 비와 풍요의 신이었거든요.
따라서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서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바알이 아니다. 바알은 거짓 우상이다”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갈멜산의 대결이 시작되는 거예요.
“누가 참 하나님인가? 누가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그리고 누가 불을 내리셔서 재물을 받으시는 참 하나님이신가?”
결정의 시간이 바로 이 갈멜산 사건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보게 돼요.
타협의 신앙, 무신론의 신앙,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신앙의 문화들.
이런 상황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죠.
제가 자료를 좀 조사해 봤더니, 청년층을 중심으로 50% 이상이 무신론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 퍼센티지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거예요.
청년의 세대가 이제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세대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혼합주의 시대가 되었고, 하나님을 부정하진 않지만 하나님을 절대신으로 믿지 않으려는 시대적인 흐름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인 것이죠.
누가 진짜 신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
누가 하나님의 불로 진짜 임하시는가?
그것을 오늘 이 갈멜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우리 가운데 보여 주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참 하나님, 참 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믿으시길 주님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돼야 돼요.
불을 내려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문을 열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는 분.
그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심으로 믿어지는 세대가 되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 가운데 주어진 숙제라는 거예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정말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그분은 우리 가운데 이 시간에도 불을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는데,
불이 희귀해진 시대적인 현실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불을 내려 주십시오, 내려 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대신할 어떤 것을 꿈꾸며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뭐가 문제인가?
왜 이 시대에 불이 희귀한 현상 가운데,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는가?
저는 세 가지 이유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제가 목사인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없는데 제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오게 됐습니다.
1516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뜨문뜨문 나타나서 여러분께 인사드리는 게 저에게도 반가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분에게도 축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읽고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 말씀입니다.
18장 38절을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더라.
아멘.
저희 1203교회 근황을 잠깐 말씀드리면, 지난 2주 동안 저희도 똑같이 특새를 진행했습니다.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2주 동안 말씀을 나눴고, 송구영신 예배도 드렸고, 또 창립 예배도 드렸습니다.
아마 1516교회도 1월 1일이 창립 주일이에요.
그래서 아마 1월 첫째 주가 창립 주일이고, 저희는 1월 5일이 창립 주일입니다.
그래서 1월 첫째 주가 늘 같이 이렇게 주년으로 갑니다.
아마 1516교회는 3주년이었고, 저희는 1주년이었어요.
그래서 참 1년 동안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눈 떠 보니까 1년이 후딱 지나갔더라고요.
그래서 3년 동안 1516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1203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감사하는 시간들을 지난 몇 주 동안 보냈습니다.
또 C4C 비전 주일로, 비록 목사님하고 설교 스케줄은 달랐지만 2주 동안 C4C 비전에 대해서 함께 나눴고, 또 C4C 작정도 저희가 했습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헌금을 하고, C4C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올 한 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뜻, 또 교회에 주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대한 비전이 여러분들의 비전이 되길 원하고,
1516교회가 이 분당 땅뿐만 아니라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1516교회를 기도하실 때, 더불어서 1203도 같이 기도해 주셔서 동탄 땅 가운데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문자를 받고 “목사님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문자가 왔어요.
“주제는 홀리파이어. 거룩한 불로 임하소서.”
“이번 3~4개월 주제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의 임재에 관한 본문은 다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문자를 받고 딱 생각난 구절이 바로 열왕기상 18장 말씀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 의미 있는 본문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불을 사모하는 세대가 되길 원하고, 그 불을 경험하는 세대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불을 받은 세대가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아마 여러분들 잘 아시는 내용일 거예요.
보라통독을 잘 들으신 분들은 아마 열왕기상 18장 하면 딱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라는 인물이죠.
하나님 편에서는 엘리야고요.
세상 편에서는 북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왕, 어떤 왕이죠?
아합.
역시 수준이 높으신 것 같아요. 할렐루야.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아합 왕이 등장을 합니다.
아마 북이스라엘 신앙의 최악의 타락의 시기가 아합 왕과 함께 보냈던 그 시기였고, 그 내용이 열왕기상 18장에 담겨 있어요.
아합이 등장하면서, 그는 본인 스스로가 우상숭배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시돈의 딸이었던 이세벨과 정략 결혼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타협을 한 것이죠.
타협의 결과는 여러분, 타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 가운데 타협적인 삶을 살아가잖아요.
그럼 그 결과들과 이어지는 사건들은 다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의 잘못된 정략결혼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의 타협으로 계속 끌려가는 아합 왕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그는 바알 신앙,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 신앙과 바알당을 세우고, 신전을 세우고,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여러 신 가운데 하나 정도로 타락시키는 상태가 바로 열왕기상 18장의 상태였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이 비라는 의미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바알이 비와 풍요의 신이었거든요.
따라서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서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바알이 아니다. 바알은 거짓 우상이다”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갈멜산의 대결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누가 참 하나님인가? 누가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누가 불을 내려 재물을 받으시는 참 하나님이신가?”
그 결정의 시간이 바로 갈멜산 사건 가운데 배경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보게 돼요.
타협의 신앙, 무신론의 신앙,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 문화들.
이 상황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자료를 좀 조사해 봤더니, 청년층을 중심으로 50% 이상이 무신론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 퍼센티지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거예요.
청년의 세대가 이제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세대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혼합주의 시대가 되었고, 하나님을 부정하진 않지만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믿지 않으려는 시대적 흐름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인 것이죠.
누가 진짜 신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
누가 하나님의 불로 진짜 임하는가?
그것을 갈멜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여러분 믿으시길 주님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돼야 됩니다.
불을 내려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문을 열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는 분.
그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심으로 믿어지는 세대가 되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거예요.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이 시간에도 불을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불이 희귀해진 시대적 현실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불을 내려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대신할 어떤 것을 꿈꾸며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뭐가 문제인가?
왜 이 시대의 불이 이렇게 희귀한가?
저는 세 가지 이유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18장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을 다 아는 세대입니다.
물론 출애굽 세대와 가나안 정복의 세대는 다 끝났고, 세대가 넘어간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들은 어렴풋이 부모님과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고 알고 있었던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비슷한 부류의 신일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고, 반쯤 남아서 머뭇머뭇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오늘 문제의 시작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심으로 불을 내려주시는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냐.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방황할 필요 없이, 머뭇머뭇거릴 필요 없이, 하나님 여호와 한 분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예배드립니다. 새벽기도 드리고, 오픈워십 예배 나와서 찬양도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도 알지만, 바알처럼 포기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고 있는 시대상이, 그 당시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진리를 알아요.
말씀의 기준을 알아요.
그런데 말씀의 기준보다는 세상적인 편리함 가운데서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은 왜 내리지 않는가?
내 삶 가운데 왜 체험적으로 불이 내리지 않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머뭇머뭇거리면서 완전하게 하나님 편에 서지도 못하고, 완벽하게 세상 편에 서지도 못하기 때문에, 불을 경험할 수 없다는 거예요.
마치 메뉴 결정 장애와 같은 거예요.
점심 때마다 뭘 먹을지 결정하느라 고민하잖아요.
“뭐 먹을까요?” 물어보면, “목사님 뭘 먹을까요?” 다시 묻고.
답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마라탕이나 먹읍시다” 하고 내려가죠.
여러분, 우리 마음 가운데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은 거예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거예요.
말씀의 기준을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건 말씀 기준에 맞는 건 하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영역에서는 말씀의 기준을 양보하기 싫은 거예요.
둘 사이에서 계속 머뭇머뭇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영적인 선택 장애에 빠진 세대.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은 시대상에서,
그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이 시대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를 계속 고민합니다.
여러분, 교차로 신호등 앞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되잖아요.
파란불이면 가야 되고, 빨간불이면 멈춰야 됩니다.
노란불일 때는 더 빨리 지나갈지, 멈출지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사인이 분명하다면 그 사인에 맞춰 가야 되는 거예요.
머뭇머뭇거리면 사고가 납니다.
직진인데 내가 멈춰 서 있으면 뒤에서 받힐 수 있고,
멈춰야 되는데 멈추지 않으면 교차로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신앙이 이런 것입니다.
말씀이 명확한데, 세상의 기준과 혼합하면서 머뭇거리는 삶을 살아가면,
기준의 명확성이 내 가치관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불의 임재 없이도 그냥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인하는가?
내가 신앙의 선택권의 전부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느냐.
성도들의 문제는 불신앙이라기보다, 결단하고 기준을 붙잡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희귀해졌다는 것이 시대의 문제점입니다.
영적인 결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불이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 완전히 서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비가 3년 6개월 내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만 믿으면 그분이 비를 내려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서 있어야 불이 떨어지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다 성령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님, 하나님 편에 서셔야 돼요.
하나님 편에 서서 불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기준에 서서 결단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머뭇머뭇거리는 사이 그 중간 지점에는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 완전히 서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불은 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걸 믿으셔야 돼요.
저희가 2026년 1516교회 주제를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라고 정했어요.
제가 자랑스럽게 이삭 목사님한테 “이번 주제가 이겁니다” 그랬더니,
“애매모호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뭐가 나올 것 같지만.
그래서 나중에 “목사님, 어떻게 정해 보자” 했더니,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라고.
아, 명확하구나.
여러분, “뜻을 정한다”는 의미는 다니엘서 1장 8절 말씀이죠.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하면서 왕의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한 거예요.
뜻을 정한다는 의미는 삶의 분명한 기준을 세운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의 기준, 하나님의 뜻의 기준을 정하고 나는 살아가겠습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기준을 바꾸지 않겠다는 거예요.
다니엘이 있었던 시대는 더 참혹했어요.
북이스라엘의 망함과 동시에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왔고,
내시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정한 이후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결정한 거예요.
그의 결정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왕의 음식을 먹으면 왕에게 속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거기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게 싫었던 거죠.
“나는 왕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나는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 편에 서서 나아가겠다.”
여러분, 마치 이런 거예요.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있어요.
손흥민 선수는 아디다스 소속이거든요.
그 신발을 신고 뛰어야 돼요.
그 브랜드는 많은 액수의 돈으로 후원합니다.
그런데 손흥민 선수가 “아디다스가 너무 힘들어. 나이키로 옮겨 타야겠다” 하고 갑자기 갈아 신으면,
위약금을 물어야 되는 거예요.
왜요?
소속 자체가 아디다스에 속해 있는 거죠.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소속이 분명한 거예요.
여기에도 속하고 저기에도 속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자녀로 나에게 속했는데, 왜 자꾸 세상에 속하려고 하느냐?”
“위약금 물어내라” 그러면 어떡하시겠어요?
우리 가진 것도 없는데 뭘 드려야 되겠습니까.
뜻을 정한다는 건 그런 거예요.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소속을 하나님의 자녀로 분명하게 하겠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생각을 하든지, 어떤 판단을 하든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이게 뜻을 정한 거예요.
소속을 분명하게 한 거예요.
나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씀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기준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인격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이게 뜻을 정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했다는 것은 마음을 머뭇머뭇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한 편으로 확실하게 정한 거예요.
따라서 영적인 정체성은 소속감이 어디에 있느냐로부터 시작됩니다.
소속이 불분명하면 영적인 박탈감과 영적인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굴까? 나는 왜 이렇게 살까?”
그게 영적인 다운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제가 목사인 걸 알고 조심스럽게 와서 “목사님,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하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씀이세요?”
그랬더니 “제가 신내림을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분이세요.
너무 하기 싫어요.
그런데 두렵습니다.
신의 이름을 안 받으면 사고도 나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부모님들이 너무 싫어할 것 같고,
너무 갈등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귀신을 접한다는 의미는 귀신에게 속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자매님, 하나님은 영적인 최강자입니다.”
귀신의 영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귀신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귀신을 내쫓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걸 믿으십시오.
그것을 선포하십시오.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안 좋은 일이 아예 안 일어난다는 건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것들이 해결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귀신은 자매님을 파괴할 거예요.
인생을 망칠 거예요.
살리진 않을 거예요.
제가 설득하고 기도하고, 좋은 분들이 붙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소속감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머뭇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불을 내려주시는 게 맞는 거예요.
엘리야는 하나님 편에 선 유일한 선지자였잖아요.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불이 내려 떨어졌습니다.
그게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구걸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 주십시오” 하면 주시는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속을 분명하게 하십시오.
머뭇거리지 마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십시오.
결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평강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쏟아지듯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한 두 번째, 18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이스라엘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죠.
그들이 다 나와서 자신의 몸을 찢고 춤추며 비를 기다리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뛰었습니다.
하루 종일 피를 흘리면서 비가 내려지길 원했습니다.
내려졌나요?
내려질 수가 없죠.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아세라와 바알 선지자 관점에서 보면, 제단은 쌓았고 제사는 드려졌지만, 방향성을 완전히 잘못 잡은 거예요.
그들이 쌓은 제단이죠.
하나님의 제사장이 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쌓은 제단이라는 거예요.
그들이 쌓은 제단에서 열심히 예배했어요.
열심히 찬양하고 묵상하고 뛰놀았어요.
그런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죠.
왜요?
그들의 제단은 잘못된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방향이 아니라 잘못된 제단을 쌓고 잘못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거예요.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방향이 틀릴 때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이 없어서 프로그램이 없어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닙니다.
열심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방향이 어긋나 있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향하고 경배를 드려야 하는데,
나를 위한 제단,
내가 쌓은 제단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하나님의 불은 떨어질 수가 없어요.
왜요?
그건 하나님의 제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잘못된 대상,
잘못된 방향.
그 방향을 잡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거기에 임하실 수가 없어요.
불을 내려주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그 가운데 임재하실 수가 없는 거예요.
왜요?
내가 쌓은 제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온전한 방향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가.
예배를 드리는데 마치 이런 겁니다.
“하나님, 내가 예배를 드릴 테니까 내 소망, 내 소원, 내 자녀를 위한 기도 제목 들어주셔야 합니다.”
딜하듯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예요.
내 자신의 제단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제단도 있는데, 내가 원하는 제단이 따로 있고,
거기에서 뛰놀고,
거기에서 열심히 찬양하고 예배하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똑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유의 방향성들도 있습니다.
시간,
삶의 결정권,
안정감,
계획,
재정.
이런 모든 제단이 내 삶 가운데 따로 만들어져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재정,
하나님의 결정권.
이것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정말 잘하고 계신 겁니다.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나만의 제단을 쌓고 잘못된 방향으로 예배하고 뛰놀고 열심히 찬양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정의 방향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결정은 내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인도 주셨어요.
말씀도 주셨어요.
그런데 “아, 그건 좀…”
하나님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저도 찔리는 게 있습니다.
오늘 아까 기도하면서 “하나님 분명 이거 하지 말라 하셨는데 내가 했던 게 있구나” 떠올리게 하시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늘 우리는 그런 갈등과 방황을 하지 않습니까?
결정에 있어서 내가 쌓아놓은 제단 속에서 내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다면, 그건 잘못된 예배라는 거예요.
잘못된 예배를 너무 열정적으로 드리면서, 안내하면서, 사역하면서, 기도하면서 드려 봐야,
내 영광을 위해,
내 것을 위해 드리고 있다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방향.
불을 기다리고 있는 순종인가?
순종하고 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불 받으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압박해요.
“불 내려 주십시오, 내려 주세요. 그러면 제가 이것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네가 먼저 순종해야 된다.
제단을 회복해야 된다.
인생의 방향성을 나에게 두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불을 내려줄 것이다.”
열왕기상 18장을 보십시오.
제단을 회복하고 물을 붓는 순종이 일어나고, 그 후에 불이 떨어집니다.
불이 떨어지고 나서 순종한 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은 결단의 조건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결단하는 조건이 아니라
결단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단을 쌓고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고,
그 제단 앞에서 전심으로 순종을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불을 내려주신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향성을 바로 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예배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예배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지.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 전심으로 올려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단을 다시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의 우선순위를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의 방향성을 점검하십시오.
점검하지 않으면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열심히 예배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고,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는데 나중에 다가오는 건 상처밖에 없어요.
왜 상처받고 교회에서 떠납니까?
나의 열심이어서 그래요.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그래요.
상처가 임해도 하나님을 바라봤다면 그 상처는 상처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제단을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제단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그 제단을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마지막, 18장 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0절입니다. 시작.
엘리야가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18장 30절 말씀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제가 1516교회 이름을 짓기 전에 제 마음 가운데는 18장 30절, 1830을 하려고 했었어요.
이건 이제 지나갔으니까 하는 말씀이에요.
제가 개척 나가는 그해 하반기에 본문이 열왕기상 본문이었어요.
그런데 30절 말씀을 보면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하라.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아, 요 정도로 가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께 “1830 교회 어떻습니까?” 했더니,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근데 조금 있다가 “어감이 좀 나쁜데요”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고집을 부렸어요.
“목사님, 그래도 저는 이거 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의미가, 재단으로 예배를 살리는 부흥의 제단을 우리가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7~8월까지 열심히 밀어붙였어요.
근데 어떤 집사님께서 저를 붙잡고 심각하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아무리 좋은 의미로 자녀 이름을 지어줘도, 그 자녀가 놀림을 받게 되면 어려운 이름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진심으로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좋은 의미라도 놀림을 당할 수 있는 교회 이름이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다시 기도하고, 결국 1203은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으로 짓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 구절은 저에게 정말 의미 있는 구절이고, 저는 이 구절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불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제단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단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무너졌어요.
무너진 제단을 보고 있는 거예요.
갈멜산에 두 제단이 있었어요.
하나는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이 쌓은 아주 화려하고 큰 제단.
또 한켠에는 무너져 버린, 제단이라고 볼 수 없는 제단.
아무도 무너진 제단에 관심이 없었어요.
다 화려한 제단, 거기서 뛰노는 예배에만 관심이 있었고, 거기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말합니다.
“모든 백성들아, 가까이 오라.”
그러면서 무너진 제단을 보여 주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던 이 제단이 어떻게 무너져 있는지 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불은 제단에 임해야 됩니다.
그런데 무너진 제단 가운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수가 없어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회복해야겠다, 고쳐야겠다, 재건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를 내리고 싶으셔도 비를 내릴 수 없었고,
불로 임재를 보여 주고 싶으셔도 보여 주실 수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형식만 남았기 때문에
그 위에 불이 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불,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는 언제 일어나는가?
무너진 제단이 다시 재건되고 수축되어지는 그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가 뜻을 정하여 소속을 분명히 하고,
우리의 제단이 아니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는 열정과 노력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불로 임하십니다.
불은 새로운 방식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재건된 제단 위에 떨어지는 거예요.
저는 예배교회 컨퍼런스에서 타이틀이 “재건”이었잖아요.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제단,
어느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제단,
방치했던 제단,
잊혀졌던 제단을 엘리야가 다시 쌓기 시작합니다.
갈멜산의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하나님과 연결하는 영적인 통로였던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치 이런 것이죠.
가정에 정전이 됐어요.
정전이 되면 가장 먼저 뭘 하십니까?
저는 밖을 먼저 봐요.
다 꺼졌나?
우리 집만 꺼졌나?
다 꺼졌으면 “전체 정전이구나.”
우리 집만 꺼졌으면 “우리 집에 뭐가 문제구나.”
예전에는 두꺼비집이라고 하죠.
두꺼비집을 열어서 스위치가 내려간 게 있으면 올려주면 불이 들어옵니다.
마찬가지예요.
영적인 통로, 하나님의 불의 통로인 제단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강력한 전력이 흐른다 할지라도 불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제단을 수축하고 연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불로 임하실 수 없는 현실이 계속된다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의 신앙의 영적인 차단기, 하나님을 향한 제단이 무너져 있지 않은지,
다시 재건해야 되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제단 위에 무엇을 올려야 하는가?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뭘 드리라고 합니까?
거룩한 산 제물로 “몸”을 드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이라는 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결정,
선택,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하루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라.
내 몸이 가는 곳마다,
내 손이 하는 일마다,
내 입으로 하는 말마다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라는 거예요.
내 삶의 사용권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그것을 거룩하게 받으시겠다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은 “너희가 거룩하면 재물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산 제물로 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은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재물은 어떤 것도 죽은 재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가져와서 제사장이 안수하고 각을 뜨고 잡고 피를 쏟고 내장을 쏟고,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 번제로 올려 드리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어제의 은혜, 이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경험들.
그것은 예전 거라는 거예요.
산 제물은 오늘 당장, 오늘 하루에 필요한 순종을 그날그날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라는 거예요.
여러분, 어제의 순종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순종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릴 수 있는 그 사람 가운데 제단의 불로 임하십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드리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불로 임하시고,
태우시고,
거룩한 역사를 보여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헌신하는 만큼,
내가 올려 드리는 만큼,
내 결정을 올려 드리는 만큼
하나님은 역사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저와 여러분이 제단 위에 거룩한 산 제물로, 여러분의 몸을 매 순간 올려 드릴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게 불을 받는 비결이에요.
그러자 39절 말씀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3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불이 임하자 백성들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어요.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 앞에서는 고백과 결단만 있을 뿐이에요.
우리가 고백하고 결단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산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지 못해서 그래요.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제단을 온전하게 쌓지 못해서 그래요.
내가 거룩한 제단을 쌓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머뭇머뭇거리는 거예요.
신앙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내 삶의 모든 것을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 소속에 서서,
하나님의 제단을 온전하게 쌓고,
거룩한 산 제물을 온전히 올려 드리면,
하나님의 불은 그때그때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거룩한 감동이 임하여
“하나님,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인생이 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게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어야 돼요.
이게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어야 돼요.
히브리서 12장 2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거룩한 불.
성령의 불.
그 불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분이 임하면 머뭇머뭇거림은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우리 인생의 제단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이 임하셔서 우리 삶 가운데 불이 떨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제단을 쌓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거룩한 산 제물을 매일매일 온전히 올려 드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불을 경험하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머뭇머뭇하는 삶의 영역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걸 정리하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불을 마음껏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게 해결되지 않고 머뭇머뭇거리는 삶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불을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걸 정리하셔야 돼요.
오늘 정리하십시오.
오늘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자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물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계획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나의 판단, 나의 기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할 때, 이 시간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주님께 속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는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것,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여러 영역,
주도권에 대한 모든 것들을 이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게 하소서.
그래서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방향 가운데 내 모든 것을 올려 드리며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결단 가운데 주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결단할 때 내 인생의 제단이 회복되게 하시고,
우선순위가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기도하길 원하신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주여” 한번 부르짖고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우리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라보며 결단하며 주님께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뜻을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정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소속됨으로 주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내 삶을 온전히 올려 드리며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께 내 모든 것을 온전히 올려 드리며 나아갑니다.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께 내 모든 것을 온전히 올려 드리오니, 하나님 아버지, 내 모든 것을 올려 드리며 머뭇머뭇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내 방향을 온전히 올려 드리며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소속된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아버지 앞에 소속된 삶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가운데 주의 은혜를 더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주께서 이것들을 행하시고자 약속하시고, 이 시간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소서.
주여,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가운데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아버지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 결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끊어낼 것을 끊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을 정하고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 앞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으로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2026.01.12(주) | 주일설교 |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요 4:27-35)
핵심 메시지
- 교회는 ‘일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려내는 일을 “나의 양식”이라 하실 만큼 기뻐하셨습니다(요 4:34).
-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수치와 두려움에서 자유해져,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변화됩니다(요 4:28-30).
- 주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할 때가 이미 이르렀다”(요 4:35)고 하시며, 지금 여기서 영적 추수에 동참하라고 부르십니다.
흐름 정리(요 4:27-35)
- 제자들의 ‘이상함’(요 4:27)
-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 자체가 낯설었고, 예수님의 ‘한 영혼을 향한 집중’ 때문에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 수가성 여인의 변화와 증거(요 4:28-30)
-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증거합니다.
- 회피하던 사람이 찾아가고, 숨기던 과거를 스스로 말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합니다.
- 예수님은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치유는 증거로 흘러가게 됩니다.
- 예수님의 양식: 한 영혼을 살리는 기쁨(요 4:31-34)
- 제자들은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권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 그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며, 곧 한 영혼을 살려내는 사명입니다.
- 사명이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의 감격으로 회복될 때,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 추수의 부르심(요 4:35)
- “넉 달이 지나야 추수”라는 세상 계산을 넘어, 지금 당장 시작되는 영적 추수를 보라고 하십니다.
- 예배(1516)가 살아나면 교회(1517)가 살아나고, 그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됩니다.
적용
- 교회의 사명은 ‘사람’이며, 사역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 효율성으로 사랑을 재단하지 말고,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품고 초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예배의 비전이자 교회의 비전이며, 그 사랑이 가정과 일터와 도시로 흘러가야 합니다.
녹취록
C4C 비전주일로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두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설교 후에 비전 영상도 함께 보고, 교회 개척 운동에 대한 비전 약정에 함께 참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목요일에는 저희가 한 달에 한 번, 이것도 영적으로 정말 중요한 절기이니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매월 두 번째 목요일에 집회를 합니다.
오픈 워십 집회인데요, 이번에는 특새가 두 주간 이어졌기 때문에 1월 15일, 이번 주 15일 저녁 7시 45분에 합니다.
“일하고 오느라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왔어요” 하실까 봐 말씀드립니다. 7시 45분이니 시간 맞춰 오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저스 웨이브’라는 주제로 함께 집회를 했고요, 올해 들어서 첫 번째 텀에는 ‘홀리파이어’, 거룩한 불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집회를 하고자 합니다.
기대함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저희 2026년 교회 표어가 무엇입니까?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찬양을 이원주 목사님께서 작사, 작곡해 주셔서 우리가 은혜 가운데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사실 때가 되면 한번 말씀드려야지 했는데, 너무 일이 많아 얘기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아서 골방에 들어가 만들어 놓고 나오셔서, 우리가 은혜 가운데 찬양하고 있습니다.
음원이 출시되었습니다. 각종 음원 사이트와 431 워십미니스트리 채널에서 들으실 수 있고, 악보도 다운받으실 수 있으니 은혜의 통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7절에서 35절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설교 제목을 같이 읽어볼까요?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 C4C ‘교회를 위한 교회’ 비전으로 메시지를 나눕니다.
지난주에는 비전 1516, 예배에 대한 비전이었다면 오늘은 비전 1517, 교회에 대한 비전입니다.
요한복음 4장으로 지금 세 편의 설교를 이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월 3일 토요일 특새 메시지가 전편이라면, 지난주일 설교가 본편이고, 오늘은 후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월 3일에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셔서 “내가 너에게 생명수를 주기 원한다” 말씀하셨고,
지난주일에는 수가성 여인이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하면서 예배에 대한 깊은 갈망으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오늘은 수가성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열심히 증거하는 장면,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영혼을 살리는 사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2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마무리하실 즈음, 제자들이 마을에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을 어떻게 여겼습니까? “이상히 여겼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는 것은 흔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그 대화에 너무 집중하고 계시니, 제자들이 아무도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출발한 예수님도 제자들도 지금 배가 고프고 목마른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한 영혼을 향한 집중’ 앞에서, 누구도 끼어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그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합니까? 28절에서 30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여자가 갑자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말하자면 ‘축호 전도’를 한 것입니다.
가가호호 찾아가 사람들에게 다가와 말하니, 주민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왜 놀랐을까요?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평소 사람을 피해 다니던 여인이 스스로 사람들 앞에 찾아왔습니다. 늘 한낮에, 아무도 없을 때 나오던 여인이었습니다.
둘째, 자신이 부끄러워하던 과거와 상처를 스스로 열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자신이 만난 분을 “그리스도”로 증거합니다.
이 여인의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인기피도 사라지고, 과거의 수치와 트라우마가 씻겨졌습니다.
내면 치유를 넘어,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혼의 구원까지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자유해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이것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삶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느냐”가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자유가 임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주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선포하는 삶이 사명이 되길 축복합니다.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제가 축구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경기 막판까지 3대 0으로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4대 3으로 역전해 끝났습니다.
그때 3실점은 과거의 수치입니까? 아니요. 반전의 영광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내면의 아픔과 가정의 아픔, 교회에서 받은 상처들까지도,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는 디딤돌로 사용하시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입니다.
이제 카메라가 우물가로 다시 전환됩니다. 여인이 동네에 들어간 사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1절과 32절입니다.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며 오해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33절과 34절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은 ‘한 영혼을 살려내는 사명’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뜻, 그분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아들의 생명을 바쳐 한 영혼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한 영혼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러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마시지 않아도 시원하다”는 듯한 만족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출발해 한낮 뙤약볕을 맞으며 중부 산악지대를 지나오셨습니다.
얼마나 허기지고 갈증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 허기와 갈증을 잊을 만큼, 예수님은 행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작은 비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동안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아들들에게 먹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하나를 만들어 주고, 또 하나를 만들어 주고, 또 하나를 만들어 주려 하니, 아들이 숟가락을 놓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빠, 이건 아니잖아.”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내가 할머니처럼 되어가고 있구나.’ 할머니는 계속 먹이십니다.
그런데요, 아들 입에 음식이 들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제가 물 한 모금 안 마셔도 행복하더라고요.
예수님의 마음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려내시고, 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늘 진지한 모습으로만 떠올리지만, 한 영혼을 살려내실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세리 마태를 건지실 때는 온 백성의 조롱이 쏟아졌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살려내실 때는 자칫하면 예수님이 돌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생명을 걸고 그 일을 하셨습니다.
사복음서를 묵상하다가 저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날만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나 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서빙고에서 사역할 때 한 집사님이 위층 아주머니를 전도하고 싶다고 하셔서, 교회 카페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불교 집안이었고, 교회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저에게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교회들이 말이야, 목사들이 말이야, 문제가 많고…”
처음 보는 저에게 한참을 쏟아놓으시더군요.
저는 20~30분 듣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교회들이 문제가 많고, 목사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교회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러자 그분이 전투 의지를 내려놓고, 매주 한 번씩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오게 된 배경은, 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들어간 사건이었습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데 마음에는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으니, 그 분노가 교회와 목회자에게도 향했던 것입니다.
한 두 달 성경공부를 하던 어느 날, 그분이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위해 죽었다고 손 들고 울고 난리 치는데, 꼴불견이에요.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맞는 말처럼 들리죠.
그런데 저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분이 복음을 깨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은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녀 열 명을 붙잡고, 돈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당신이 생명을 내어주면 자녀를 살려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내 자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열 명이 아니라 한 명뿐인 자녀라면요? 1대 1이라서 억울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생명을 내어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그분이 깨닫더군요.
‘아비가 자식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마음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구나. 70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한 사람을 위해서도 내어주는 사랑이구나.’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줄 믿습니다.
그날 그분이 복음을 깨닫고 영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다시 나와 보니, 정말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더군요.
여러분, 한 영혼을 살리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요.
왜 제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까요?
제자들에게는 그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사역, 또 하나의 책임, 또 하나의 의무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멀어도 달려갑니다. 그 수고를 불필요한 수고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어떻게 살려낼지, 한 영혼을 어떻게 회복시킬지, 온 정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 중심이냐, 사람 중심이냐’를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며,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사랑은 효율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이 그렇습니다. 기다려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비효율적이지만 그 길이 사랑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C4C는 도시마다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한 영혼을 살리고 한 사람의 예배자를 살려내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예배자도, 땅끝 어느 도시에서 예배하는 예배자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수가성 여인을 왜 찾아가셨습니까?
인생이 망가져도 예배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자의 영혼에 불꽃을 일으키시면, 그 한 사람을 통해 도시와 가정과 일터 전체에 부흥의 불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오늘 수가성 여인을 골방에서 이끌어내신 주님은, 그 여인을 통해 마을 사람들까지 예수님께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35절의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세상 계산으로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영적 추수는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한 영혼을 추수하는 인생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함께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는 다윗의 장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한 영혼을 품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초대하고, 한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 온 교회가 마음을 모으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심령이 메마른 영혼들을 해갈하시는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가 예배의 비전이고 교회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고,
나만 회복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아직도 목마른 한 영혼, 골방에 갇혀 있고 어둠에 갇혀 있는 한 영혼, 세상과 버티며 살아가는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살려내는 교회를 세우게 하옵소서.
이 감격이 내 가정에 먼저 흘러가게 하시고,
일터에 흘러가게 하시고,
한국 교회에 흘러가게 하셔서,
흘러가는 모든 곳에 생명을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2026.01.10(토) | 새벽기도 |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약 5:14-18)
요약 정리
- 야고보서 5:14-18
핵심 메시지
- 교회는 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 특히 병든 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믿음으로 중보기도하는 공동체다.
- 치유 사역의 주체는 사람(기도자)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순종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 중보기도는 개인의 치유를 넘어 교회와 나라, 시대를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진다.
구조 요약
1) 치유를 위한 교회의 질서: 장로를 청하라 (약 5:14)
-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명한다.
- 장로는 초대교회부터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목회자)’로 구분되는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뜻한다.
- 기름 바름은 신앙적 상징(기름 부음)일 뿐 아니라 당시의 의료적 처치 관습을 반영해 ‘기도와 치료의 병행’을 시사한다.
- 결론: 병원 치료(일반 은총)와 기도(특별 은총)를 분리하지 말고, 생사화복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라.
2)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약 5:15, 약 1:6-7)
-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주께서 그를 일으키신다’. 결과의 주권은 주님께 있다.
- 기도자는 결과 부담에 매이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
- 믿음의 기도는 단지 ‘무조건 낫는다’가 아니라, 다음 3가지를 신뢰하며 드리는 기도다.
- 하나님의 능력: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하나님
- 하나님의 성품: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주권: 치유 여부와 타이밍을 가장 선하게 결정하시는 하나님
3) 죄와 질병의 관계를 균형 있게 보라 (약 5:15b-16)
- 질병과 죄는 ‘관련 있을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 질병의 원인을 4가지 관점으로 정리한다.
- 범죄와 죄의 문제로 인한 질병
- 개인적 부주의(관리 실패)로 인한 질병
- 시대적 문제(전염병 등)로 인한 질병
- 하나님의 섭리(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경우)로 인한 질병
- 그러므로 고난/질병을 두고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욥의 친구들 경고).
-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권면은 강요가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죄와 결별을 선언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라는 의미다.
- 중보기도는 가볍게 “기도할게요” 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책임감 있게 감당해야 한다.
4) 중보기도의 능력과 간증 (약 5:16-18)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며(약 5:16), 엘리야의 기도는 날씨까지도 흔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다(약 5:17-18).
- 선교 집회(카운트다운/선교 컨퍼런스)와 태풍 경로, 가정과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등 실제 사역 간증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강조한다(히 11:6).
5) 치유의 본질: 영-혼-육의 회복, 성령 충만
- 하나님이 세우신 존재의 질서(영-혼-육)가 회복될 때, 육신의 회복도 견고해진다.
- 일시적 현상만의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성령의 빛 가운데 근본이 새로워지는 치유를 구하라.
- 설교자는 개인의 병약함, 가족의 중보기도 경험, 공동체 치유 경험(벤쿠버 청년 사례)을 통해 ‘영혼의 회복이 육신과 삶을 살린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적용 포인트
- 병과 연약함을 숨기기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도 요청과 중보기도의 질서를 회복하라.
- 기도는 결과를 조종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선하심·주권을 신뢰하며 주님께 맡기는 순종이다.
- 한 영혼을 위한 기도는 개인의 치유를 넘어 교회, 지역, 민족, 열방의 회복으로 확장된다.
녹취록
저희가 3주 동안, 2주 동안 3가지 말씀을 함께 암송했는데, 시편 57편 8절 말씀 함께 암송할까요?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아멘.
새벽을 깨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더 깊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 암송하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멘.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미래를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한번 따라오세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 한 영혼의 회복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복음서를 보면 언제나 한 사람의 전인적인 치유, 그 사람의 영과 혼과 육 전체가 다 회복되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나서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시면서 관계 회복까지 이루기를 원하셨고,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깨끗해진 몸을 보이라” 하심으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원하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신 후에는 “음식을 먹이라” 하시며 체력 회복까지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육이 온전히 치유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치유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에 누구를 요청하라고 했습니까? 장로들입니다.
왜 교회에 장로들을 부르라고 했을까요? 초대교회에서도 그렇고 오늘날 장로교회에서도 그렇고, 장로의 직분은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라 할지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지니라.”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는 오늘날 목회자, 목사로 부르고, 다스리는 장로는 행정과 치리의 사역을 담당하는 장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영적 리더들에게 요청해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냥 기도하라고만 되어 있지 않고,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하셨어요.
왜 기름을 바르라고 하셨을까요?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택과 강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름 바름은 신앙적 상징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의료적 처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기도할 뿐 아니라 치료도 병행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볼까요?
질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병원에만 가고 기도는 하지 않는다.
2) 병원에는 안 가고 기도만 한다.
3) 병원에도 가고 기도도 한다.
정답은 세 번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 가운데는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있습니다.
햇빛과 단비, 자연과 문화, 의료적인 혜택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인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 가운데 “병원 가면 믿음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치료를 거부하고 기도만 하겠다는 식의 극단은 성경이 가르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파트에 살면 믿음이 없는 걸까요? 사람이 만든 것이니 노숙해야 믿음이 있는 걸까요? 여러분, 그건 아닙니다.
치료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생사와 복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로서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질병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시기에, 그 보혈로 우리의 육신의 질병,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시기에, 빈 들의 마른 풀같이 시든 영혼에게 임하셔서 생명의 불꽃을 붙여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옵소서. 치유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어지는 1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신다고 했습니다.
누가 일으키십니까? 주님께서 하십니다.
기도자는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에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안 나으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이 있죠.
여러분, 내가 기도하면 병이 항상 낫습니까? 낫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유 은사가 있는 사람도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
병자를 치유하실지 말지에 대한 주권적 결정은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결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다만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믿음의 기도가 아니면 결국 시간만 소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도란 “무조건 낫는다”만 외치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
둘째, 하나님의 성품.
셋째, 하나님의 주권.
첫째, 하나님은 모든 병자를 치유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가장 선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치유 여부와 타이밍을 그분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주권적으로 결정하십니다.
여러분, 모든 병자마다 다 낫는다면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생사화복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선인지, 그분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주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의 역할인 믿음의 기도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전에 소개했던 책 “예수를 위한 바보”에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데이비드 케이프라는 남아공의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순례의 길을 떠나 가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기도 요청을 하면 기도해 주는데, 어떤 마을에서 암 환자가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할까요?”
“기도해라.”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즉시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망이 올라오죠.
“하나님, 기도하라 하셔서 했는데 치유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너는 기도해라. 기적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지 말지를 네가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네가 할 일을 해라. 내 역할은 내가 한다.”
그 목사님이 계속 기도했고, 어느 날부터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가 들어가는 도시마다 영적 변화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15절 하반절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질병의 치유를 이야기하다가 왜 죄 사함을 이야기할까요?
질병과 죄는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경우에 따라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네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범죄함으로 인해 질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주님은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문제가 질병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개인의 부주의로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요한삼서에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수면, 영양, 스트레스 관리 등 몸을 돌보지 못하면 질병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으로 주신 몸을 잘 관리하지 못해 질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셋째, 시대적 문제로 인한 질병도 있습니다.
역대하 7장 13-14절처럼 전염병이 유행할 때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그 얼굴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도 시대적 탐욕과 구조적 문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위한 질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2-3절에서 맹인으로 난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물을 때 주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고난이나 질병을 두고 “저 사람은 죄가 있어서 징계 받는다”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 일로 책망을 받았잖아요.
질병의 원인은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유를 위해 기도하되, 그 안에 죄의 문제가 있다면 죄를 내려놓도록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지, 왜 서로에게 고백하라 하나요?”
여러분, 순모임이나 큐티 나눔에서 억지로 죄나 연약함을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 안에서 강권하실 때가 있습니다. 죄를 토설하도록 하시고, 다시는 그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솔직하게 고백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죄와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죠.
다만 기도 요청을 받은 사람은 “기도할게요” 하고 돌아가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중보기도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했고, 바울은 동족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을 구원해 달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대상을 위해 눈물을 쏟으며 생명을 걸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2장 30절 같이 읽어볼까요?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와 민족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막아서서 중보할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건져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중보자였고,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불평과 불신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을 위해 강력한 중보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이런 중보자들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 중보자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가, 17-18절 같이 읽어볼까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시대에 “비가 멈추게 해주십시오” 기도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멈췄다가, 갈멜산에서 일곱 번 엎드려 기도할 때 다시 비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간구를 통해 날씨까지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2011년 6월 말, 온누리교회에서 선교 컨퍼런스를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외부 집회(잠실 학생실내체육관) 마지막 날에 태풍이 서울·경기 지역을 관통한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보기도 담당 목사님께 “목숨 걸고 기도해라. 비 오면 안 된다” 부탁했습니다.
집회가 오후 2시였는데, 12시까지도 비가 내리다가 놀랍게도 태풍 경로가 꺾여 서울·경기 지역을 비켜갔습니다.
여러분,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기도할 때 반복적으로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편의를 위해 하나님께 이래라저래라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같이 읽어볼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아멘.
질병 치유에 대해서는 나눌 이야기가 많지만,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몇 가지 간증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삼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장 병약하게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건강이 약하셨고, 저도 어렸을 때부터 온몸이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신방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기도와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셨어요. 저를 위해 안수기도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솔직히 그 전도사님이 기도하시면 저는 긴장했어요. 기도를 아주 ‘강하게’ 하셨거든요. 눈이 아프다 하면 눈에, 배가 아프다 하면 배에, 꽉 누르며 기도하셨어요. 그래서 놀랐죠.
그런데 어느 날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들어왔는데, 그날 안수기도 받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멀쩡하게 나가서 다시 뛰어놀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신유 은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제 둘째 형이 고1 때 운동하다 넘어져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는데, 검사해 보니 뇌출혈이었습니다.
입원해 수술했는데 그날 새벽 다시 터져 하룻밤에 두 번 머리를 열었습니다.
몸무게가 급격히 빠지고, 걷기도 어렵고, 글도 못 쓰고,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온 교회가 낮이고 밤이고 조를 짜서 기도했고, 형이 기적같이 살아났습니다.
1년 만에 회복되어 같이 공부하고 대학에 갔습니다.
할렐루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 줄로 믿습니다. 이때도 중보기도의 능력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또 제가 벤쿠버에 있을 때, 교회를 성실하게 나오던 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한국에 계신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져 1년 가까이 지원이 끊겼고, 그 청년은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는 빵으로 연명했습니다.
또 긍휼이 많아 셋집에 형편 어려운 친구들을 재워주고, 자기 몫의 빵도 나누어 주다가 본인은 영양실조가 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하니 몸이 감당하지 못했고 합병증으로 위중해진 것입니다.
온 교회가 기도했고, 청년들이 모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같이 살려내셨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그 청년들을 아들딸처럼 생각하며 양육했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쓴 책 “그래도 너는 아름다운 청년이다”의 첫 인쇄 인세를 그 친구 생활비로 보내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한 하나님은 이 시대를 위해,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1516 교회가 예배 부흥의 영적인 진앙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분당이 한국 교회 반전과 부흥의 중심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분당을 시작으로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 다윗의 장막 같은 강력한 예배 공동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더 나아가 북미와 남미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강력한 예배 공동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운데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을 주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만성 두통과 생리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치유될지어다.
불안과 근심과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여러분, 육신에 질병이 있는 분들은 자기 몸에 손을 얹고 선포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스트레스와 우울과 분노 등 내적 문제로 어려운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이 무질서하고 고통스럽고 불면증으로 힘든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화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만성 불면증과 안면마비와 신경계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치유될지어다.
만성 스트레스와 근육병과 근무력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피해의식과 과도한 피해망상과 자가면역 질환, 관절염과 피로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호흡기가 약해 기관지염과 폐렴으로 시달리는 환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치유될지어다.
관절염과 허리 디스크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으로 치유될지어다.
이명이 들리고 과잉 울림 현상과 영적 눌림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우리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온전한 육신이 될지어다.
온전한 마음이 될지어다.
온전한 인격이 될지어다.
아멘.
치유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십자가에서 나를 치유하신 보혈을 믿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아멘.
주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나의 구세주 대속했네.
넘쳐나는 주의 자비, 주의 사랑, 주의 은혜.
나의 결박 부서졌도다.
주님, 성령으로 안수하여 주시고 질병이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의 병이 치유되게 하여 주옵소서.
영적인 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치유의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온전히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야 우리의 혼, 곧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영역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생각의 모든 거짓된 생각과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 위에 하나님의 평강과 질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감정의 우울함과 분노와 거짓됨이 드러나 성령의 불로 태워지게 하시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악한 의지와 약한 의지가 떠나가게 하시고, 거룩한 열심이 가득한 의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과 혼이 온전해질 때 육신이 온전해질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한 번은 예전에 어떤 분이 주일 예배를 못 나오셔서 신방을 간 적이 있어요.
그분이 불면증뿐 아니라 완전히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는데, 조명이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눌린 집이더라고요.
크리스천 가정인데도 하나님의 임재하심 없이 영적으로 눌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먼저 치유되면 육신도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위계질서를 영-혼-육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만 다니면 되지, 성령 충만까지는 필요 없다” 하고 성령님을 선택과목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영이 충만하면 지성과 감성과 의지도 온전해지고, 육신도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저도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넘어가던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에는 완전 종합병원 같은 몸이었습니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열심히 기도해도 잘 낫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말씀이 충만해지면서 내 안의 거짓과 어두움이 드러나고,
그 영적 문제를 하나님 앞에 토해내듯 쏟아 놓으니, 영이 건강해지고 혼이 건강해지면서 육신도 자동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통과 편두통과 안구통, 심한 비염과 기관지염, 위염, 허리 통증, 무릎 통증, 신경계와 소화계, 폐와 기관지의 문제까지 많은 질병들이 성령 충만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육신에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신유 집회에 가서 갑자기 못 걷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시 어둠과 스트레스, 역기능적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면 육신의 질병이 재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현상만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이 먼저 치유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이 기도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회복되어야 육신이 회복되고, 가정과 일터도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생각의 질서가 잡히고 마음의 평강이 있고 의지에 거룩하고 선한 것에 대한 열정이 넘치면,
여러분의 관계가 평안해지고, 일터와 삶 가운데 질서와 능력과 생산성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멘.
이 시간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셔도 좋고,
생각이 늘 복잡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영혼이 먼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우리의 영혼을 어둠과 사망과 연약함 가운데 붙잡아 두려는 거짓의 영들아 다 떠나갈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혼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주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찬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각에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의지 가운데 거룩의 열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어둠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거짓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생명의 영으로, 회복의 영으로 성령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람을 흙으로만 빚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육신으로 전락하였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며 영과 혼이 죽은 상태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악의 근원을 뿌리 뽑으신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충만히 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 내 생각, 감정, 의지, 육신의 무너진 영역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아멘.
오늘 특새의 마지막 날입니다.
목회자들은 각자 위치에 서 주시고, 강단에서 기도 섬기실 분들도 앞으로 나와 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개인적으로 기도하시다가 가셔도 좋고, “꼭 기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는 분들은 목회자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육신의 표면적 문제만 해결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빛 가운데, 내 삶의 영역들, 습관, 생각과 감정의 질서에 어긋난 부분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건강하게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빛 가운데 임하셔서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이 있다면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마다 우울 기질도 있습니다. 저도 우울 기질로 태어났고, 후천적으로 우울한 삶을 살며 우울증이 깊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지면 우울증이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우울한 감정이 씻겨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빛 가운데 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 가운데 임하시면,
하나님의 질서와 생명과 회복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강건할지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강건할지어다.
우리가 강건함으로 우리 자녀들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강건할지어다.
주여, 한 번 더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한 뒤 개인 기도로 나아가겠습니다.
[찬양]
홀로 찬양 받으실 가장 높으신 이름,
높이 들리신 주여, 이곳을 채우소서.
2026.01.04(주) | 주일설교 | 예배는 주님과 대면하는 사건이다! (요 4:15-26)
요약 정리
- 메시지 핵심
- 예배는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대면하는 사건이다.
-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며, 그 만남이 일어나는 자리가 예배다.
- 교회 개척 운동의 본질은 예배를 살리는 운동이며, 예배는 교회의 심장이다(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살아난다).
- 1516/1517 비전
- 1516(행 15:16):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듯, 강력한 예배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한다. 개인 예배 회복을 넘어 가정·일터·한국교회 예배의 회복으로 흘러가야 한다.
- 1517(행 15:17): 예배 공동체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 주님을 찾기 위해 예배의 처소로 오게 된다. 이는 도시·지역·열방을 향한 교회 개척 비전으로 확장된다.
- 본문(요 4:15-26)의 흐름과 핵심 관찰
- 예배에 대한 핵심 교리는 ‘인생이 무너진 한 영혼(수가 성 여인)’의 실존적 갈급함 속에서 나온다. 예배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결핍을 채우는 자리다.
- 예수님은 여인의 가장 연약한 지점(남편 문제)을 건드리시되, 정죄가 아니라 치유를 위해 드러내신다.
- 예배는 장소 논쟁(그리심산 vs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가(대상과 본질)의 문제다.
- 참된 예배(요 4:23-24)
- 참된 예배와 가짜 예배가 있다.
-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다: 성령의 임재(영)와 말씀/복음의 기준(진리)이 함께 충만해야 한다.
- 삼위일체적 예배의 구조(엡 2:18): 그리스도의 보혈로 길이 열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 적용과 권면
- 예배는 ‘괜찮은 척’ 포장하는 자리가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리다(시편의 패턴: 절망에서 시작해 찬송의 확정으로 비상).
-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시선과 기준에 흔들리지 말고,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께 고정하라.
-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실 때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며, 예배가 살아나면 영혼이 살고 교회가 산다.
- 결론
- 여인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녀와 대면하고 계신 예수님이다(요 4:26).
- 예배는 “오늘이 그날”이 되는 사건이며, 그 대면이 인생의 회복과 부흥의 출발점이다.
녹취록
네, “예배는 주님과 대면하는 사건이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비전 메시지 나누겠습니다.
1516 교회는 “도시 교회를 위한 교회”의 비전 아래 세워진 첫 번째 교회입니다. 2023년 교회를 개척하면서 표어가 뭐였죠? 같이 읽어 볼까요? “다윗의 장막을 세우라.”
그리고 작년에 예배 교회 컨퍼런스를 하면서 나눴던 메시지도 한번 읽어 볼까요? “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살아난다.” 아멘. 그래서 예배는 교회 심장과도 같은 것이죠.
우리가 교회 나오는 것은 하나님 만나러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교회 개척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예배를 살리는 운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 비전이 나오게 되는데 비전 1516과 1517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구간에 다윗의 장막과 같은 강력한 예배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고 싶으시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것이 비전 1516, 예배 회복의 비전입니다. 1516 교회에 와서 우리 개인의 예배가 회복된 것도 기쁘지만, 이것이 흘러가서 일터와 가정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예배 전반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또 더 나아가서 16절 다음 17절, 비전 1517 사도행전 15장 17절 읽어 볼까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구절을 잘 보시면, 예배 공동체를 일으키면 하나님의 예비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 예배의 처소로 오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비전입니다. 그래서 비전 1517은 교회 개척의 비전입니다. 가는 곳마다, 도시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강력한 예배의 자리를 세우고 그 예배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들이 이 시대 영적인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예배 회복의 비전을 나누고, 다음 주는 교회 개척의 비전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배 사역자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원주 목사님, 맨 처음에 저희 CC 예배 사역을 432 워십 미니스트리라고 했는데, 그 이름 정하기 전에 “요 4:24로 424라고 하면 안 되냐?” 이런 논의도 했었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좀 길긴 한데요. 또 “요 4:20은 어떨까?” 이런 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4장 20절 얘기했더니 저희 큰아들이 “미국에서는 4월 20일이 해시(마리화나) 데이”라고 하더라고요. 글로벌하게 나중에 쓸 날이 올 것 같아서 그건 내려놓긴 했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은 예배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본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항상 안타까운 것은 예배학을 너무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는 거죠.
여러분, 이 본문의 주옥 같은 말씀이 나오게 된 이유가 뭐예요? 인생이 무너진, 목마른 한 여인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그녀의 인생의 목마름을 채워 주는 자리가 예배라는 것. 할렐루야. 그래서 예배는 굉장히 실존적인 것입니다.
어제 특별새벽기도 본문으로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14절 말씀을 나눴어요. 그걸 모르고 계시는 분들은 오늘 가셔서 어제 토요일 특새 영상으로 말씀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인생이 망가지고 결핍과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한 영혼을 건지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여인이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고 불편하게 대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너무 적극적으로 반응을 했어요.
오늘 15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그런 물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여인이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하며 적극성을 띱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분, 인생이 너무 결핍 가운데 살아봤기 때문에 이제는 거기서 자유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이 부끄러운 인생,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두려우니까 이제는 그런 물이 영생하도록 계속 솟아나면 집 밖에 나올 일이 없잖아요. 그 집에서 동굴처럼 안 나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실 그 여인을 어둠 가운데서 끄집어내시려고 오신 건데, 여인은 “그런 영생하는 샘물이 있다면 나는 그냥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을 사이에 두고 영적인 줄다리기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청년부에, 한 자매가 아주 희한한 기도 제목을 갖고 왔어요. 기도 요청을 할 때마다 증상이 심해지더라고요. 어느 공간에 들어가면 기계음이 그렇게 들린대요. 그 기계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일도 못 할 만큼,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 기계음과 더불어서 귀신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얘기를 더 해 보니까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한때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인생의 큰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샤머니즘 신봉자가 된 거예요. 완전히 무당하고 붙어서 살고, 매일 굿하고 부적을 들고, 그리고 서울에 있는 딸에게 전화해서 “너 신앙생활 소용 없어. 다 내려놔.”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기도해 줘도 모자랄 판에 뒤에서 영적으로 흔드는 거예요.
또 한 청년을 오랫동안 상담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요. 그러니까 내면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도 뭐를 해도 늘 부적감이 따라요. 그러다가 이 청년이 동성애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이 친구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서 종종 상담을 해 주는데, 최근에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어요. “목사님, 제가 어느 집에 들어가면 모든 집이 그런 건 아닌데 어두운 물체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물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 어두운 물체랑 대화를 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귀신 들림 현상이 전조 증상이에요.
그래서 제가 “너 지금 동성애는 두 번째 문제고, 귀신 들리면 그다음에는 신당 차리고 무당될 거냐? 너 정신 차려야 된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된다.”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제가 긴급하게 상담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항상 “예배 끝나고 만나자” 그래요. 왜 그럴까요? 제 상담은 조금 도움을 드릴 뿐이지, 결국에는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만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도 “예배드리고 만나자” 그러면, “아니요. 예배드리는 공간 자체에 들어오는 걸 너무 힘들어요.”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한 영혼을 놓고 빛과 어둠의 양쪽 진영에서 엄청난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고요.
여러분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축복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멘.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영적 전쟁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절대로 대충 그 상황을 얼버무리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예수님께서 여인의 소원을 들으시고 뭐라고 답변하셨는가?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의 가장 취약한 부분, 사적인 영역을 예수님이 짚으셨어요. 순간 여인이 숨이 멈추고 당혹스럽고 고개를 떨궜을 것입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구원해 주시면 되지, 왜 인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건드셨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녀의 아픔을 치유하시기 위함이에요.
영적인 상황으로 놓고 보면 원수 사탄도 우리의 단점을 집중 공략할까요, 안 할까요? 엄청 합니다. “너 그거밖에 안 되잖아.” 이런 공격을 끊임없이 해요. 우리의 단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요. 그것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점을 드러내시는 것은 치유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선 검보다 예리해서 혼과 영, 관절과 골수(육신이죠), 우리의 영혼육 전 존재를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실에 들어오는 것은 수술실에 들어오는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우리 영혼의 주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라는 수술대 위에서 진리의 메스를 들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에 더러워진 부분, 병약해진 부분, 어둠과 거짓을 도려내시고 우리 안에 생명과 거룩과 순결을 더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그냥 괜찮아요. 좋아질 거예요.” 이렇게 격려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선포돼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1516 교회 되게 하시고 한국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난 한 달간 몇 분이 비슷한 얘기를 저한테 하셨어요.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면 하도 혼내서 찔리고 뜨끔뜨끔한데, 계속 듣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 가운데 회개하고 결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해 주시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시는 것은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17절에서 19절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남편을 데려와라.”
“남편이 없습니다.”
“그래,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지. 다섯 명의 남자가 지나갔고 지금 있는 남자는 동거남일 뿐이니까.”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면, 여자 입장에서는 화가 나든지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가든지 해야 될 것 같은데, “와, 주님은 선지자이시군요.” 이렇게 반응합니다. “오, 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오히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신뢰하게 된 거예요.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와, 이 여인의 정말 밑바닥 삶으로부터 예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구나, 이렇게 느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에요. 예배는 삶의 어둡고 부끄럽고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소서.”
찬양 가사하고 동일한 거예요. 우리가 시편을 좋아하시는 분들, 시편을 쭉 읽어 보면 거의 비슷한 패턴이에요. 처음에는 슬픔과 절망과 고난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멈추지 않고 기도의 활시위를, 예배의 활시위를 계속 당기면, 결국 비행기가 비상하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포와 승리의 선포로 비상하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 괜찮은 척, 멋진 척, 쿨한 척,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의사 앞에 나오면서 “저 괜찮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없잖아요. 예수님은 계속 “넌 그렇지 않다. 넌 지금 아프다. 넌 지금 굉장히 심각하다.” 그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죠. 저는 여러분이 성전에 들어올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쏟아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실 줄로 믿습니다.
대표적인 시편으로 시편 57편을 들 수 있어요. 1절 말씀을 제가 읽어 볼게요.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재앙이 하나도 아니고 “재앙들이” 내게 쏟아지듯 인생이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기도가 출발합니다. 그런데 7절 8절 9절은 이렇게 올라갑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문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러분, 앞부분에서는 “아이고 나 죽겠네”로 시작했어요. 자기의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예배를 포기하지 않고 “내 마음을 확정하겠다. 나는 예배할 것이다.” 예배의 활시위를 내달리니까 비상합니다. 결국 만민 중에서 열방 중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자, 이어지는 2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축복산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여기서 예배를 해 왔는데, 유대인들은 시온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된다고 하지 않느냐.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예배라는 주제를 꺼냈나요? 누가 이 주제를 꺼냈어요? 이 여인이 예배라는 이슈를 꺼낸 거예요. 여러분은 마태 같은 세리나 수가성 여인 같은 도덕적으로 밑바닥에 떨어진 인생들은 예배 갈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을 만나 보면 세상 고급하게 우아하게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포장이 강합니다. 결핍이 있어도 결핍이 있다는 고백이 힘들어요. 그런데 밑바닥을 쳐본 사람들은 숨길 게 없어요. 응급실 들어가면서 멀쩡한 척하겠어요? 다급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거예요.
이 여인이 자신의 인생의 목마름을 예수님께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목마름이 세상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해결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주제를 꺼낸 거예요.
우리가 영혼의 결핍을 육체의 결핍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요. 중독적 현상이 나타나는 건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면이 공허한데 그걸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는 거예요. 음식, 향락, 반대로 일중독, 성공지향… 그런데 그것으로 내 영혼이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예배로만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42편 1절과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제가 고3 수험생 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매일 불안하더라고요. 밤 12시, 1시까지 공부하고 독서실에서 나오면, 어떤 날은 새벽 2시에 나오기도 했는데, 항상 동네 교회 예배당에 들어가서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했어요. 10분, 20분, 때로는 30분.
고3 때는 가만히 있어도 피곤하잖아요. 완전히 녹초인 상태인데, 예배당에서 눈물을 쏟고 기도하고 나오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상쾌함, 회복감이 있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도 그 느낌이 생기지 않거든요. 그런데 비교할 수 없는 상쾌함이에요. 여러분, 예배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 받는 내 영혼의 우물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인이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하나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나요?”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정답을 얘기해 주세요.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멘.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입니다. 예배를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느냐, 그게 핵심입니다. 우리끼리 예전 예식, 우리끼리 잔치를 벌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예배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면 형식에 너무 신경을 씁니다. 어떤 분이 “예배에 꼭 대표 기도가 있어야 되나요? 대표 기도 때문에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이런 얘기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교회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있든지 교회를 와서 사람 보지 마세요. 사람 보지 마시고 하나님 바라보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정반대 케이스를 하나씩 예를 들어 볼게요. 예전에 요셉 청년부 때, 찬양이 시작하면 맨 앞에 나와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자매가 있었어요. 저는 너무 훌륭해 보였어요. 다윗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그 자매가 춤추는 걸 멈추게 하라, 방해가 된다” 이런 말을 해요.
저는 이해가 안 됐어요.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건데, 왜 자매에게 집중하느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내가 누구라고 “드리지 말라”고 말하느냐? 그건 잘못된 예배죠.
정반대 케이스도 있어요. 밴쿠버에 있을 때 찬양팀 중 한 분이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잘 입고 오시는 분이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니까 목양실에 들어와서 울며 말해요. “목사님 억울합니다. 제가 입는 화려한 패턴 옷들은 동대문에서 산 싸구려인데, 몇백만 원짜리, 몇천만 원짜리 백 들고 다니면서 저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그 자매는 진짜 화려한 패턴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왜 하나님께 집중을 안 하고 사람에게 집중할까요? 너무 영적으로 튀어도 마음에 안 들고, 너무 세상적으로 멋지고 화려해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럼 어디에 맞추겠어요? 사람 기준에 맞추는 곳이 교회가 아니잖아요.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자들에게 딱 한 가지 부탁한다고 했잖아요. 어떤 곡을 선택해도 되고, 어떻게 예배 인도해도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단 한 가지,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임재로 우리를 초대해 달라. 이 한 가지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안 하는 잔소리를 하시는 성도도 계시더라고요. 예배 인도자에게 익명으로 이메일 보내서 “솔로 파트가 너무 길다, 짧게 해라. 전주·후주·간주를 줄여라. 그래야 회중이 예배에 집중하기 좋다” 이런 말을 하는데, 저는 마음이 슬퍼요.
왜냐하면 앞에서 솔로로 인도하든 회중 찬양으로 인도하든 연주로 인도하든,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되는데 왜 우리는 다른 것을 볼까요? 연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을 못 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하여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 특강을 이어가십니다. 23절과 24절 같이 읽어 볼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아멘.
참되게 예배하는 자, 참된 예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그리고 두 가지를 얘기하셨는데, 영으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
우리의 예배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강조하고 어떤 분들은 성령을 강조하지만, 말씀과 성령은 둘 다 중요합니다. 영적 원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말씀의 씨앗 뒤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말씀의 기준은 직선 같고, 성령의 역동성은 곡선 같은데,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는 말씀파, 나는 성령파” 이렇게 나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향상 차분하고 조용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가 성령님의 감동의 작품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는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이것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에베소서 2장 18절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려면, 감히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의 길을 열어 주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걸음걸음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 경배하는 예배자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자, 25절과 26절입니다. 여인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
예수님의 예배 관련 말씀을 듣고 여인이 감탄하기보다, 약간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언젠간 그런 날이 오겠죠.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 인생의 고난과 예배의 본질도 다 알려 주실 날이 오겠죠. 그런데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이런 뉘앙스예요. 내 인생에 그런 날이 오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곧 그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I am)”라고 답변하신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 날이 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늘이 그날이다. 내가 너를 찾아온 날이다. 네가 나를 만난 날이다.”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주님을 감격적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사건이 예배의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설교는 회중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1516 교회와 한국 교회가 예배 가운데 찬양 중에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고, 말씀 선포 가운데는 우리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있게 하여 주시고, 한 분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는 참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다윗의 장막 문지방을 건너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주심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무너졌던 인생은 회복될지어다. 깨어졌던 가정은 치유될지어다. 용기를 잃어버린 교회들이여 다시 일어나게 될지어다.
예배가 살아나면 영혼이 살아나고, 예배가 살아나면 한국 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 임하셔야만, 그분이 직접 치유하시고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1교회, 1203 교회, 그리고 시퍼씨를 통해 세워질 모든 교회들이 도시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거룩한 예배자들을 일으켜 세우게 하여 주시고, 그곳에서 예배자들을 일으켜 주시고 거룩한 예배 공동체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2026.01.03(토) | 새벽기도 |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 (요 4:3-14)
요약 정리
-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 (요 4:3-14) / 이상준
- 예수님은 길을 잃은 한 영혼을 찾아 ‘의도적으로’ 다가오신다
- 요 4:3-4의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지리적 필연이라기보다, 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결단과 목적을 드러낸다.
- 유대인들이 피하던 길, 험하고 위험한 길을 주님은 선택하셨다. 한 영혼을 위한 ‘찾아오심’이 복음의 방식이다.
- “물을 좀 달라”는 요청은, 사실 “내가 너를 돕고 싶다”는 초청이다
- 예수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 주님이 예상치 못한 때에 “도와줄래?”라고 다가오실 때, 그 말은 우리를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초대하시는 배려의 언어가 될 수 있다.
- 편견과 갈등의 벽을 넘어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역사적·종교적·민족적 갈등은 매우 컸다.
- 그럼에도 예수님은 까칠한 반응 속에서도 대화를 이어가시며, ‘생수’(living water)로 초점을 옮기신다.
- 질문은 믿음의 문을 여는 통로다
-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생수는 어디서 얻는가”를 묻다가, 점차 “당신은 누구인가”로 질문의 초점이 이동한다.
-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게 된다.
- 생수는 영혼의 목마름을 끝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야곱의 우물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한다(요 4:13-14).
- 주님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을 꺼내어 하늘의 지평을 열어 주신다.
- 숨어 지내는 삶과 방어기제를 깨고, 주님 앞에 나오라
- 사람은 연약함을 숨기려 ‘단단한 껍데기’(방어기제)를 두르지만, 그 껍데기는 참 안식처가 될 수 없다.
- 예수님은 한 영혼이 안전하게 주님께 나올 수 있도록 가장 섬세한 배려로 길을 여신다(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신 장면 등).
- 어느 곳에 있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시 139:7-10). 숨지 말고 우물가의 주님께 나아가라.
적용
- 주님의 “물을 좀 달라”는 초청 앞에서 마음을 닫지 말고 응답하라.
- 질문을 멈추지 말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묻고 구하라.
- 한 영혼을 위한 예수님의 섬세함을 본받아, 누군가가 주님께 나오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되라.
녹취록
주님, 우리의 마음이 식어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보다, 사역의 결과보다, 영혼을 먼저 붙들고 있었던 우리의 연약함과 흔들림을 내려놓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십시오.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형식이 아니라 생명으로, 습관이 아니라 닮아 들어가는 예배자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께서 임하여 주시고, 메마른 심령 가운데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나아갑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다시 한번 걸어가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은혜를 더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영광과 감사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특별 새벽기도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오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이 시간에 이상준 목사님 나오셔서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해 주시겠습니다.
할렐루야. 날씨가 계속 추워져서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축복하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침에 여러분 많이 오신 것을 보고 간식을 준비했는데, 개수가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두 주간 특별 새벽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날씨가 굉장히 춥고 오늘 낮부터 좀 풀린다고 합니다. 풀린다고 해서 보니까 기온이 올라서 다음 주 중에는 최고 기온이 영상 2도 정도인데, 그게 ‘좀 풀리는’ 거더라고요.
여러분, 2주 동안 우리가 이 맹추위에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나오는 특별 새벽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이라는 메시지이고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 아멘.
두 주 동안 우리가 2026년 한 해를 주님 앞에 올려드리고 기도할 때,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따라해 보시겠어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어제는 예수님이 세관에 갇혀 지내던 세리 마태를 불러내셨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로비에서 한 권사님이 “마태가 그렇게 심한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이번에 마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오늘은 더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고 있는 한 영혼을 찾으시는 이야기입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부 유대 지역의 수도가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에서 북부 갈릴리 지방으로 올라가시는데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가 가버나움이니까,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한 150km 정도 됩니다. 중간에 오늘 어디를 들르셨죠?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성을 들르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다”라는 지리적 배경을 언급합니다.
그 다음 실제 일어난 사건을 보겠습니다. 5절과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수가라는 마을이라고 표현했는데, 헬라어로 ‘폴리스’라는 단어를 써서 수가성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어귀,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로마식 시간법으로 6시는 아침 6시부터 카운팅하니까 낮 12시 정오에 해당합니다. 한낮의 중부 산악지대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활동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너무 더워서 땀이 비 오듯 하지 않으셨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7절과 8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음에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때마침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수가성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우물가에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을 좀 주시오”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과연 도움이 필요하셨을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아 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전혀 뜬금없는 장소에서 뜬금없는 타이밍에 예수님이 “내게 물 좀 주겠니?”라고 다가오신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정말 나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도를 갖고 다가오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나를 좀 도와주겠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내가 너를 좀 도와주고 싶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한 걸음 다가올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배려하시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주님이 한 걸음 다가오시거나 말씀을 거시거나, 마음과 생각을 주신다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따라갔을 때, 하나도 손해보는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은 축복의 초청입니다.
이번 두 주간의 특새에 주님이 우리를 초대해 주셨는데, 여러분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진행되는 9절에서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은 평범하게 물을 좀 달라 요청하셨는데, 사마리아 여자는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유대인 남자가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밥도 같이 먹지 않고, 집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자는 더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 남자가 우물가에서 말을 거니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간다고 북한을 지나가며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북한군에게 “물 좀 주겠냐” 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 갈등이 있었는가.
첫 번째, 남북 왕국이 분열될 때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두 번째, 북 이스라엘은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세 번째, 아수르 제국 이후 혼혈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보기에 혈통과 신앙의 정통성을 잃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보다 못하다고, 심지어 ‘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인의 까칠한 반응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했을 것이고, 내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인 입장에서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당신에게는 물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주느냐.”
그런데 질문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생수에 대한 궁금증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넘어갑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크신 분이냐.”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저를 따라해보세요.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듣고,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습니다.
저는 새가족반에서도, 상담에서도, 성경 통독에서도 질문하라고 권합니다.
최근 독일에서 이민 생활하는 한 가정을 만났는데, 초등학생 딸이 성경을 읽으면 질문을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이 많으면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죠. 그런데 아이가 한 질문이 이랬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꾸 잘난 척을 하나요?”
이 질문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두 가지로 답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말 ‘잘난 척’ 하시는 걸까? 잘난 사람이 “나는 잘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척’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잘나지 않은 사람이 잘난 것처럼 말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가 “제가 골을 잘 넣습니다”라고 하면 척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김연경 선수가 “제가 배구를 잘합니다”라고 해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잘난 척 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아이가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나만이 참 하나님이다” 같은 구절이 반복되니까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self-glorification(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심)이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영광의 중심을 악이나 불완전한 존재에게 내어주면 세계는 무너집니다.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독일의 총리가 있는 자리(권력의 중심)를, 지금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가 “나도 앉아보자” 한다면 내어줘도 되냐. 아이가 “안 된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성은 다른 존재에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 질문은 매우 훌륭한 질문입니다. 저는 “새신자가 묻다”(제목은 전달 과정에서 다르게 들릴 수 있음) 같은 책을 선물하며 “네가 궁금해하는 내용들이 여기에 있을 테니 읽어보렴”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인이 던진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13절, 1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고 싶으신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이 여인과 티키타카 하듯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어제 봤던 마태와는 다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알고 갈망했기에 예수님이 “따라오라” 하실 때 바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자신만의 동굴에 숨어 지내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결핍의 공간에서 이 여인을 꺼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묵상하다 떠올린 사건이 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즈음, 필리핀 루방섬에 파견된 일본군 일부가 종전 선언을 믿지 않고 밀림 속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방송과 전단을 미군의 기만 전술이라 생각하고, 무려 30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 그중에 오노다 히로오(오노다 히로라고도 알려짐)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결국 1974년에 옛 직속 상관이 찾아가 “전쟁이 끝났다”고 확인시켜 주자 비로소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만의 공간에 숨어 지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물가에서 기다리신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좋은 물이지만,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땅만 보며 살던 여인에게 갑자기 영원이라는 지평이 열렸습니다. 하늘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 이야기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더 나옵니다. 제가 오늘 시작할 때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토요일 본문이 아니라 다음 주 화요일 본문을 당겨서 나눈 것입니다. 내일 주일 설교에서 이어지는 예배 이야기를 나누려고 오늘 여인의 이야기를 먼저 다룬 것입니다.
여인의 삶은 목마름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 남자와 살았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동거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원래는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우물가에, 그는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한낮에 나와야 했습니다. 사람 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앞에서는 강한 척 합니다. “왜 나한테 물을 달래? 여긴 우리 동네야. 당신이 뭘 줄 수 있어?”
이 여인의 내면을 보며 떠오른 동물이 있습니다. 소라게입니다. 소라게는 영어로 hermit crab(은둔자 게)입니다. 소라게를 껍데기에서 빼내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배와 꼬리 부분이 매우 연약해, 그 연약함을 숨기려고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어 강한 척 합니다. 그런데 몸집이 커지면 껍데기를 바꿔야 하고, 평생 숨고 바꾸는 일을 반복합니다. 목마름이 멈추지 않는 삶처럼요.
소라게와 여인, 그리고 우리 삶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둘째, 연약한 나를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방어기제를 쓴다.
강한 척은 강건함이 아니라, 강팍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바스러질 듯 연약한 존재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소라게에 대해 연구한 보고를 보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를 집으로 착각하고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 죽는 개체가 대규모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소라게가 의지하는 거짓된 껍데기는 참된 안식처가 아닙니다. 우리도 참된 안식처를 찾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자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합니다. 불안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심리적 전략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실제로 우울하고 초라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덕지덕지 방어기제로 포장하며 강한 척합니다.
대표적으로,
- 부정: “난 부끄럽지 않아.”
- 투사: 자기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림
- 합리화: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밈
- 보상: 무너진 영역을 반대로 과장함(“우리도 영적 유산이 있다” 등)
그러나 어떤 방어기제로도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내면을 다 보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두려워 움츠러들고 강한 척하는 그녀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내가 너를 어둠에서 건져내려고 왔다. 내가 네게 진정한 해답을 주려고 왔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생명수를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럼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는가. 오늘 읽었던 3절과 4절을 다시 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여러분, 지리적으로는 직선으로 가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기 때문입니다. 중부 산악지대는 험한 돌산이고 강도들도 출몰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 요단강 저지대를 따라 갈릴리로 올라갔습니다. 물도 많고 과일도 많고 쉬기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지리적 필연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150km인데, 수가성이 약 50여 km 지점입니다. 이 길은 3일 길입니다. 군인 행군으로 하루 40~45km가 보통입니다. 산길을 50km 걸으면 오전 출발해 오후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이른 새벽에 출발하셨겠습니까.
예수님 마음이 급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나오기 전에 도착해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고 가십니다. 그리고 여인이 나오기 직전,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십니다.
또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우물가에 잔뜩 서 있으면 여인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을로 들여보내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심부름은 보통 두 사람씩 보냈는데, 일부러 모두를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여인이 편안한 마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신 예수님의 섬세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한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예배 전에 와 본 적은 있는데, 세상적으로 살다 보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마태 설교를 듣고 용기가 나서 연락드립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99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주님의 마음은 간절하고 애달픕니다.
저를 따라해보세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 한 영혼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도 축복하지만, 골방에 갇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데도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어디에 있든지, 인생의 고통의 끝자락과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거기까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후 찬양을 올려드리며 묵상합니다.
- 찬양(가사 생략):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리까 …”
이 시간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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