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nant


1516교회 설교 녹취록 모음






01월

2026.01.10(토) | 새벽기도 |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약 5:14-18)

요약 정리


  • 야고보서 5:14-18

핵심 메시지


  • 교회는 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 특히 병든 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믿음으로 중보기도하는 공동체다.
  • 치유 사역의 주체는 사람(기도자)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순종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 중보기도는 개인의 치유를 넘어 교회와 나라, 시대를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진다.



구조 요약


1) 치유를 위한 교회의 질서: 장로를 청하라 (약 5:14)


  •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명한다.
  • 장로는 초대교회부터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목회자)’로 구분되는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뜻한다.
  • 기름 바름은 신앙적 상징(기름 부음)일 뿐 아니라 당시의 의료적 처치 관습을 반영해 ‘기도와 치료의 병행’을 시사한다.
  • 결론: 병원 치료(일반 은총)와 기도(특별 은총)를 분리하지 말고, 생사화복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라.



2)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약 5:15, 약 1:6-7)


  •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주께서 그를 일으키신다’. 결과의 주권은 주님께 있다.
  • 기도자는 결과 부담에 매이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
  • 믿음의 기도는 단지 ‘무조건 낫는다’가 아니라, 다음 3가지를 신뢰하며 드리는 기도다.
    • 하나님의 능력: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하나님
    • 하나님의 성품: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주권: 치유 여부와 타이밍을 가장 선하게 결정하시는 하나님



3) 죄와 질병의 관계를 균형 있게 보라 (약 5:15b-16)


  • 질병과 죄는 ‘관련 있을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 질병의 원인을 4가지 관점으로 정리한다.
    • 범죄와 죄의 문제로 인한 질병
    • 개인적 부주의(관리 실패)로 인한 질병
    • 시대적 문제(전염병 등)로 인한 질병
    • 하나님의 섭리(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경우)로 인한 질병
  • 그러므로 고난/질병을 두고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욥의 친구들 경고).
  •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권면은 강요가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죄와 결별을 선언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라는 의미다.
  • 중보기도는 가볍게 “기도할게요” 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책임감 있게 감당해야 한다.



4) 중보기도의 능력과 간증 (약 5:16-18)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며(약 5:16), 엘리야의 기도는 날씨까지도 흔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다(약 5:17-18).
  • 선교 집회(카운트다운/선교 컨퍼런스)와 태풍 경로, 가정과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등 실제 사역 간증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강조한다(히 11:6).



5) 치유의 본질: 영-혼-육의 회복, 성령 충만


  • 하나님이 세우신 존재의 질서(영-혼-육)가 회복될 때, 육신의 회복도 견고해진다.
  • 일시적 현상만의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성령의 빛 가운데 근본이 새로워지는 치유를 구하라.
  • 설교자는 개인의 병약함, 가족의 중보기도 경험, 공동체 치유 경험(벤쿠버 청년 사례)을 통해 ‘영혼의 회복이 육신과 삶을 살린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적용 포인트


  • 병과 연약함을 숨기기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도 요청과 중보기도의 질서를 회복하라.
  • 기도는 결과를 조종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선하심·주권을 신뢰하며 주님께 맡기는 순종이다.
  • 한 영혼을 위한 기도는 개인의 치유를 넘어 교회, 지역, 민족, 열방의 회복으로 확장된다.



녹취록


저희가 3주 동안, 2주 동안 3가지 말씀을 함께 암송했는데, 시편 57편 8절 말씀 함께 암송할까요?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아멘.

새벽을 깨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더 깊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 암송하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멘.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미래를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한번 따라오세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 한 영혼의 회복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복음서를 보면 언제나 한 사람의 전인적인 치유, 그 사람의 영과 혼과 육 전체가 다 회복되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나서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시면서 관계 회복까지 이루기를 원하셨고,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깨끗해진 몸을 보이라” 하심으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원하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신 후에는 “음식을 먹이라” 하시며 체력 회복까지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육이 온전히 치유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치유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에 누구를 요청하라고 했습니까? 장로들입니다.

왜 교회에 장로들을 부르라고 했을까요? 초대교회에서도 그렇고 오늘날 장로교회에서도 그렇고, 장로의 직분은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라 할지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지니라.”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는 오늘날 목회자, 목사로 부르고, 다스리는 장로는 행정과 치리의 사역을 담당하는 장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영적 리더들에게 요청해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냥 기도하라고만 되어 있지 않고,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하셨어요.

왜 기름을 바르라고 하셨을까요?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택과 강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름 바름은 신앙적 상징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의료적 처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기도할 뿐 아니라 치료도 병행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볼까요?

질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병원에만 가고 기도는 하지 않는다.

2) 병원에는 안 가고 기도만 한다.

3) 병원에도 가고 기도도 한다.

정답은 세 번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 가운데는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있습니다.

햇빛과 단비, 자연과 문화, 의료적인 혜택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인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 가운데 “병원 가면 믿음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치료를 거부하고 기도만 하겠다는 식의 극단은 성경이 가르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파트에 살면 믿음이 없는 걸까요? 사람이 만든 것이니 노숙해야 믿음이 있는 걸까요? 여러분, 그건 아닙니다.

치료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생사와 복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로서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질병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시기에, 그 보혈로 우리의 육신의 질병,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시기에, 빈 들의 마른 풀같이 시든 영혼에게 임하셔서 생명의 불꽃을 붙여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옵소서. 치유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어지는 1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신다고 했습니다.

누가 일으키십니까? 주님께서 하십니다.

기도자는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에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안 나으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이 있죠.

여러분, 내가 기도하면 병이 항상 낫습니까? 낫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유 은사가 있는 사람도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

병자를 치유하실지 말지에 대한 주권적 결정은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결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다만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믿음의 기도가 아니면 결국 시간만 소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도란 “무조건 낫는다”만 외치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

둘째, 하나님의 성품.

셋째, 하나님의 주권.


첫째, 하나님은 모든 병자를 치유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가장 선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치유 여부와 타이밍을 그분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주권적으로 결정하십니다.

여러분, 모든 병자마다 다 낫는다면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생사화복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선인지, 그분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주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의 역할인 믿음의 기도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전에 소개했던 책 “예수를 위한 바보”에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데이비드 케이프라는 남아공의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순례의 길을 떠나 가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기도 요청을 하면 기도해 주는데, 어떤 마을에서 암 환자가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할까요?”

“기도해라.”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즉시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망이 올라오죠.

“하나님, 기도하라 하셔서 했는데 치유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너는 기도해라. 기적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지 말지를 네가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네가 할 일을 해라. 내 역할은 내가 한다.”

그 목사님이 계속 기도했고, 어느 날부터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가 들어가는 도시마다 영적 변화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15절 하반절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질병의 치유를 이야기하다가 왜 죄 사함을 이야기할까요?

질병과 죄는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경우에 따라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네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범죄함으로 인해 질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주님은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문제가 질병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개인의 부주의로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요한삼서에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수면, 영양, 스트레스 관리 등 몸을 돌보지 못하면 질병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으로 주신 몸을 잘 관리하지 못해 질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셋째, 시대적 문제로 인한 질병도 있습니다.

역대하 7장 13-14절처럼 전염병이 유행할 때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그 얼굴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도 시대적 탐욕과 구조적 문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위한 질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2-3절에서 맹인으로 난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물을 때 주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고난이나 질병을 두고 “저 사람은 죄가 있어서 징계 받는다”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 일로 책망을 받았잖아요.

질병의 원인은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유를 위해 기도하되, 그 안에 죄의 문제가 있다면 죄를 내려놓도록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지, 왜 서로에게 고백하라 하나요?”

여러분, 순모임이나 큐티 나눔에서 억지로 죄나 연약함을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 안에서 강권하실 때가 있습니다. 죄를 토설하도록 하시고, 다시는 그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솔직하게 고백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죄와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죠.


다만 기도 요청을 받은 사람은 “기도할게요” 하고 돌아가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중보기도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했고, 바울은 동족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을 구원해 달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대상을 위해 눈물을 쏟으며 생명을 걸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2장 30절 같이 읽어볼까요?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와 민족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막아서서 중보할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건져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중보자였고,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불평과 불신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을 위해 강력한 중보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이런 중보자들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 중보자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가, 17-18절 같이 읽어볼까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시대에 “비가 멈추게 해주십시오” 기도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멈췄다가, 갈멜산에서 일곱 번 엎드려 기도할 때 다시 비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간구를 통해 날씨까지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2011년 6월 말, 온누리교회에서 선교 컨퍼런스를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외부 집회(잠실 학생실내체육관) 마지막 날에 태풍이 서울·경기 지역을 관통한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보기도 담당 목사님께 “목숨 걸고 기도해라. 비 오면 안 된다” 부탁했습니다.

집회가 오후 2시였는데, 12시까지도 비가 내리다가 놀랍게도 태풍 경로가 꺾여 서울·경기 지역을 비켜갔습니다.

여러분,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기도할 때 반복적으로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편의를 위해 하나님께 이래라저래라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같이 읽어볼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아멘.


질병 치유에 대해서는 나눌 이야기가 많지만,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몇 가지 간증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삼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장 병약하게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건강이 약하셨고, 저도 어렸을 때부터 온몸이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신방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기도와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셨어요. 저를 위해 안수기도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솔직히 그 전도사님이 기도하시면 저는 긴장했어요. 기도를 아주 ‘강하게’ 하셨거든요. 눈이 아프다 하면 눈에, 배가 아프다 하면 배에, 꽉 누르며 기도하셨어요. 그래서 놀랐죠.

그런데 어느 날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들어왔는데, 그날 안수기도 받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멀쩡하게 나가서 다시 뛰어놀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신유 은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제 둘째 형이 고1 때 운동하다 넘어져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는데, 검사해 보니 뇌출혈이었습니다.

입원해 수술했는데 그날 새벽 다시 터져 하룻밤에 두 번 머리를 열었습니다.

몸무게가 급격히 빠지고, 걷기도 어렵고, 글도 못 쓰고,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온 교회가 낮이고 밤이고 조를 짜서 기도했고, 형이 기적같이 살아났습니다.

1년 만에 회복되어 같이 공부하고 대학에 갔습니다.

할렐루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 줄로 믿습니다. 이때도 중보기도의 능력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또 제가 벤쿠버에 있을 때, 교회를 성실하게 나오던 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한국에 계신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져 1년 가까이 지원이 끊겼고, 그 청년은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는 빵으로 연명했습니다.

또 긍휼이 많아 셋집에 형편 어려운 친구들을 재워주고, 자기 몫의 빵도 나누어 주다가 본인은 영양실조가 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하니 몸이 감당하지 못했고 합병증으로 위중해진 것입니다.

온 교회가 기도했고, 청년들이 모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같이 살려내셨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그 청년들을 아들딸처럼 생각하며 양육했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쓴 책 “그래도 너는 아름다운 청년이다”의 첫 인쇄 인세를 그 친구 생활비로 보내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한 하나님은 이 시대를 위해,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1516 교회가 예배 부흥의 영적인 진앙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분당이 한국 교회 반전과 부흥의 중심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분당을 시작으로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 다윗의 장막 같은 강력한 예배 공동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더 나아가 북미와 남미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강력한 예배 공동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운데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을 주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만성 두통과 생리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치유될지어다.

불안과 근심과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여러분, 육신에 질병이 있는 분들은 자기 몸에 손을 얹고 선포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스트레스와 우울과 분노 등 내적 문제로 어려운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이 무질서하고 고통스럽고 불면증으로 힘든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화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만성 불면증과 안면마비와 신경계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치유될지어다.

만성 스트레스와 근육병과 근무력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피해의식과 과도한 피해망상과 자가면역 질환, 관절염과 피로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호흡기가 약해 기관지염과 폐렴으로 시달리는 환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치유될지어다.

관절염과 허리 디스크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으로 치유될지어다.

이명이 들리고 과잉 울림 현상과 영적 눌림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우리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온전한 육신이 될지어다.

온전한 마음이 될지어다.

온전한 인격이 될지어다.

아멘.


치유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십자가에서 나를 치유하신 보혈을 믿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아멘.

주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나의 구세주 대속했네.

넘쳐나는 주의 자비, 주의 사랑, 주의 은혜.

나의 결박 부서졌도다.


주님, 성령으로 안수하여 주시고 질병이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의 병이 치유되게 하여 주옵소서.

영적인 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치유의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온전히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야 우리의 혼, 곧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영역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생각의 모든 거짓된 생각과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 위에 하나님의 평강과 질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감정의 우울함과 분노와 거짓됨이 드러나 성령의 불로 태워지게 하시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악한 의지와 약한 의지가 떠나가게 하시고, 거룩한 열심이 가득한 의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과 혼이 온전해질 때 육신이 온전해질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한 번은 예전에 어떤 분이 주일 예배를 못 나오셔서 신방을 간 적이 있어요.

그분이 불면증뿐 아니라 완전히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는데, 조명이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눌린 집이더라고요.

크리스천 가정인데도 하나님의 임재하심 없이 영적으로 눌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먼저 치유되면 육신도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위계질서를 영-혼-육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만 다니면 되지, 성령 충만까지는 필요 없다” 하고 성령님을 선택과목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영이 충만하면 지성과 감성과 의지도 온전해지고, 육신도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저도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넘어가던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에는 완전 종합병원 같은 몸이었습니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열심히 기도해도 잘 낫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말씀이 충만해지면서 내 안의 거짓과 어두움이 드러나고,

그 영적 문제를 하나님 앞에 토해내듯 쏟아 놓으니, 영이 건강해지고 혼이 건강해지면서 육신도 자동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통과 편두통과 안구통, 심한 비염과 기관지염, 위염, 허리 통증, 무릎 통증, 신경계와 소화계, 폐와 기관지의 문제까지 많은 질병들이 성령 충만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육신에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신유 집회에 가서 갑자기 못 걷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시 어둠과 스트레스, 역기능적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면 육신의 질병이 재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현상만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이 먼저 치유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이 기도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회복되어야 육신이 회복되고, 가정과 일터도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생각의 질서가 잡히고 마음의 평강이 있고 의지에 거룩하고 선한 것에 대한 열정이 넘치면,

여러분의 관계가 평안해지고, 일터와 삶 가운데 질서와 능력과 생산성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멘.


이 시간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셔도 좋고,

생각이 늘 복잡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영혼이 먼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우리의 영혼을 어둠과 사망과 연약함 가운데 붙잡아 두려는 거짓의 영들아 다 떠나갈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혼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주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찬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각에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의지 가운데 거룩의 열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어둠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거짓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생명의 영으로, 회복의 영으로 성령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람을 흙으로만 빚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육신으로 전락하였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며 영과 혼이 죽은 상태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악의 근원을 뿌리 뽑으신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충만히 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 내 생각, 감정, 의지, 육신의 무너진 영역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아멘.


오늘 특새의 마지막 날입니다.

목회자들은 각자 위치에 서 주시고, 강단에서 기도 섬기실 분들도 앞으로 나와 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개인적으로 기도하시다가 가셔도 좋고, “꼭 기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는 분들은 목회자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육신의 표면적 문제만 해결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빛 가운데, 내 삶의 영역들, 습관, 생각과 감정의 질서에 어긋난 부분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건강하게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빛 가운데 임하셔서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이 있다면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마다 우울 기질도 있습니다. 저도 우울 기질로 태어났고, 후천적으로 우울한 삶을 살며 우울증이 깊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지면 우울증이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우울한 감정이 씻겨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빛 가운데 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 가운데 임하시면,

하나님의 질서와 생명과 회복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강건할지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강건할지어다.

우리가 강건함으로 우리 자녀들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강건할지어다.


주여, 한 번 더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한 뒤 개인 기도로 나아가겠습니다.

[찬양]

홀로 찬양 받으실 가장 높으신 이름,

높이 들리신 주여, 이곳을 채우소서.




2026.01.04(주) | 주일설교 | 예배는 주님과 대면하는 사건이다! (요 4:15-26)


요약 정리


  1. 메시지 핵심
  • 예배는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대면하는 사건이다.
  •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며, 그 만남이 일어나는 자리가 예배다.
  • 교회 개척 운동의 본질은 예배를 살리는 운동이며, 예배는 교회의 심장이다(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살아난다).

  1. 1516/1517 비전
  • 1516(행 15:16):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듯, 강력한 예배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한다. 개인 예배 회복을 넘어 가정·일터·한국교회 예배의 회복으로 흘러가야 한다.
  • 1517(행 15:17): 예배 공동체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 주님을 찾기 위해 예배의 처소로 오게 된다. 이는 도시·지역·열방을 향한 교회 개척 비전으로 확장된다.

  1. 본문(요 4:15-26)의 흐름과 핵심 관찰
  • 예배에 대한 핵심 교리는 ‘인생이 무너진 한 영혼(수가 성 여인)’의 실존적 갈급함 속에서 나온다. 예배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결핍을 채우는 자리다.
  • 예수님은 여인의 가장 연약한 지점(남편 문제)을 건드리시되, 정죄가 아니라 치유를 위해 드러내신다.
  • 예배는 장소 논쟁(그리심산 vs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가(대상과 본질)의 문제다.

  1. 참된 예배(요 4:23-24)
  • 참된 예배와 가짜 예배가 있다.
  •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다: 성령의 임재(영)와 말씀/복음의 기준(진리)이 함께 충만해야 한다.
  • 삼위일체적 예배의 구조(엡 2:18): 그리스도의 보혈로 길이 열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1. 적용과 권면
  • 예배는 ‘괜찮은 척’ 포장하는 자리가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리다(시편의 패턴: 절망에서 시작해 찬송의 확정으로 비상).
  •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시선과 기준에 흔들리지 말고,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께 고정하라.
  •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실 때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며, 예배가 살아나면 영혼이 살고 교회가 산다.

  1. 결론
  • 여인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녀와 대면하고 계신 예수님이다(요 4:26).
  • 예배는 “오늘이 그날”이 되는 사건이며, 그 대면이 인생의 회복과 부흥의 출발점이다.



녹취록


네, “예배는 주님과 대면하는 사건이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비전 메시지 나누겠습니다.


1516 교회는 “도시 교회를 위한 교회”의 비전 아래 세워진 첫 번째 교회입니다. 2023년 교회를 개척하면서 표어가 뭐였죠? 같이 읽어 볼까요? “다윗의 장막을 세우라.”


그리고 작년에 예배 교회 컨퍼런스를 하면서 나눴던 메시지도 한번 읽어 볼까요? “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살아난다.” 아멘. 그래서 예배는 교회 심장과도 같은 것이죠.


우리가 교회 나오는 것은 하나님 만나러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교회 개척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예배를 살리는 운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 비전이 나오게 되는데 비전 1516과 1517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구간에 다윗의 장막과 같은 강력한 예배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고 싶으시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것이 비전 1516, 예배 회복의 비전입니다. 1516 교회에 와서 우리 개인의 예배가 회복된 것도 기쁘지만, 이것이 흘러가서 일터와 가정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예배 전반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또 더 나아가서 16절 다음 17절, 비전 1517 사도행전 15장 17절 읽어 볼까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구절을 잘 보시면, 예배 공동체를 일으키면 하나님의 예비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 예배의 처소로 오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비전입니다. 그래서 비전 1517은 교회 개척의 비전입니다. 가는 곳마다, 도시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강력한 예배의 자리를 세우고 그 예배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들이 이 시대 영적인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예배 회복의 비전을 나누고, 다음 주는 교회 개척의 비전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배 사역자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원주 목사님, 맨 처음에 저희 CC 예배 사역을 432 워십 미니스트리라고 했는데, 그 이름 정하기 전에 “요 4:24로 424라고 하면 안 되냐?” 이런 논의도 했었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좀 길긴 한데요. 또 “요 4:20은 어떨까?” 이런 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4장 20절 얘기했더니 저희 큰아들이 “미국에서는 4월 20일이 해시(마리화나) 데이”라고 하더라고요. 글로벌하게 나중에 쓸 날이 올 것 같아서 그건 내려놓긴 했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은 예배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본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항상 안타까운 것은 예배학을 너무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는 거죠.


여러분, 이 본문의 주옥 같은 말씀이 나오게 된 이유가 뭐예요? 인생이 무너진, 목마른 한 여인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그녀의 인생의 목마름을 채워 주는 자리가 예배라는 것. 할렐루야. 그래서 예배는 굉장히 실존적인 것입니다.


어제 특별새벽기도 본문으로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14절 말씀을 나눴어요. 그걸 모르고 계시는 분들은 오늘 가셔서 어제 토요일 특새 영상으로 말씀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인생이 망가지고 결핍과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한 영혼을 건지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여인이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고 불편하게 대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너무 적극적으로 반응을 했어요.


오늘 15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그런 물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여인이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하며 적극성을 띱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분, 인생이 너무 결핍 가운데 살아봤기 때문에 이제는 거기서 자유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이 부끄러운 인생,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두려우니까 이제는 그런 물이 영생하도록 계속 솟아나면 집 밖에 나올 일이 없잖아요. 그 집에서 동굴처럼 안 나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실 그 여인을 어둠 가운데서 끄집어내시려고 오신 건데, 여인은 “그런 영생하는 샘물이 있다면 나는 그냥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을 사이에 두고 영적인 줄다리기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청년부에, 한 자매가 아주 희한한 기도 제목을 갖고 왔어요. 기도 요청을 할 때마다 증상이 심해지더라고요. 어느 공간에 들어가면 기계음이 그렇게 들린대요. 그 기계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일도 못 할 만큼,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 기계음과 더불어서 귀신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얘기를 더 해 보니까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한때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인생의 큰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샤머니즘 신봉자가 된 거예요. 완전히 무당하고 붙어서 살고, 매일 굿하고 부적을 들고, 그리고 서울에 있는 딸에게 전화해서 “너 신앙생활 소용 없어. 다 내려놔.”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기도해 줘도 모자랄 판에 뒤에서 영적으로 흔드는 거예요.


또 한 청년을 오랫동안 상담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요. 그러니까 내면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도 뭐를 해도 늘 부적감이 따라요. 그러다가 이 청년이 동성애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이 친구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서 종종 상담을 해 주는데, 최근에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어요. “목사님, 제가 어느 집에 들어가면 모든 집이 그런 건 아닌데 어두운 물체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물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 어두운 물체랑 대화를 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귀신 들림 현상이 전조 증상이에요.


그래서 제가 “너 지금 동성애는 두 번째 문제고, 귀신 들리면 그다음에는 신당 차리고 무당될 거냐? 너 정신 차려야 된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된다.”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제가 긴급하게 상담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항상 “예배 끝나고 만나자” 그래요. 왜 그럴까요? 제 상담은 조금 도움을 드릴 뿐이지, 결국에는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만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도 “예배드리고 만나자” 그러면, “아니요. 예배드리는 공간 자체에 들어오는 걸 너무 힘들어요.”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한 영혼을 놓고 빛과 어둠의 양쪽 진영에서 엄청난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고요.


여러분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축복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멘.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영적 전쟁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절대로 대충 그 상황을 얼버무리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예수님께서 여인의 소원을 들으시고 뭐라고 답변하셨는가?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의 가장 취약한 부분, 사적인 영역을 예수님이 짚으셨어요. 순간 여인이 숨이 멈추고 당혹스럽고 고개를 떨궜을 것입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구원해 주시면 되지, 왜 인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건드셨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녀의 아픔을 치유하시기 위함이에요.


영적인 상황으로 놓고 보면 원수 사탄도 우리의 단점을 집중 공략할까요, 안 할까요? 엄청 합니다. “너 그거밖에 안 되잖아.” 이런 공격을 끊임없이 해요. 우리의 단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요. 그것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점을 드러내시는 것은 치유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선 검보다 예리해서 혼과 영, 관절과 골수(육신이죠), 우리의 영혼육 전 존재를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실에 들어오는 것은 수술실에 들어오는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우리 영혼의 주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라는 수술대 위에서 진리의 메스를 들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에 더러워진 부분, 병약해진 부분, 어둠과 거짓을 도려내시고 우리 안에 생명과 거룩과 순결을 더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그냥 괜찮아요. 좋아질 거예요.” 이렇게 격려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선포돼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1516 교회 되게 하시고 한국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난 한 달간 몇 분이 비슷한 얘기를 저한테 하셨어요.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면 하도 혼내서 찔리고 뜨끔뜨끔한데, 계속 듣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 가운데 회개하고 결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해 주시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시는 것은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17절에서 19절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남편을 데려와라.”
“남편이 없습니다.”
“그래,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지. 다섯 명의 남자가 지나갔고 지금 있는 남자는 동거남일 뿐이니까.”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면, 여자 입장에서는 화가 나든지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가든지 해야 될 것 같은데, “와, 주님은 선지자이시군요.” 이렇게 반응합니다. “오, 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오히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신뢰하게 된 거예요.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와, 이 여인의 정말 밑바닥 삶으로부터 예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구나, 이렇게 느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에요. 예배는 삶의 어둡고 부끄럽고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소서.”


찬양 가사하고 동일한 거예요. 우리가 시편을 좋아하시는 분들, 시편을 쭉 읽어 보면 거의 비슷한 패턴이에요. 처음에는 슬픔과 절망과 고난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멈추지 않고 기도의 활시위를, 예배의 활시위를 계속 당기면, 결국 비행기가 비상하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포와 승리의 선포로 비상하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 괜찮은 척, 멋진 척, 쿨한 척,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의사 앞에 나오면서 “저 괜찮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없잖아요. 예수님은 계속 “넌 그렇지 않다. 넌 지금 아프다. 넌 지금 굉장히 심각하다.” 그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죠. 저는 여러분이 성전에 들어올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쏟아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실 줄로 믿습니다.


대표적인 시편으로 시편 57편을 들 수 있어요. 1절 말씀을 제가 읽어 볼게요.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재앙이 하나도 아니고 “재앙들이” 내게 쏟아지듯 인생이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기도가 출발합니다. 그런데 7절 8절 9절은 이렇게 올라갑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문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러분, 앞부분에서는 “아이고 나 죽겠네”로 시작했어요. 자기의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예배를 포기하지 않고 “내 마음을 확정하겠다. 나는 예배할 것이다.” 예배의 활시위를 내달리니까 비상합니다. 결국 만민 중에서 열방 중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자, 이어지는 2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축복산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여기서 예배를 해 왔는데, 유대인들은 시온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된다고 하지 않느냐.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예배라는 주제를 꺼냈나요? 누가 이 주제를 꺼냈어요? 이 여인이 예배라는 이슈를 꺼낸 거예요. 여러분은 마태 같은 세리나 수가성 여인 같은 도덕적으로 밑바닥에 떨어진 인생들은 예배 갈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을 만나 보면 세상 고급하게 우아하게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포장이 강합니다. 결핍이 있어도 결핍이 있다는 고백이 힘들어요. 그런데 밑바닥을 쳐본 사람들은 숨길 게 없어요. 응급실 들어가면서 멀쩡한 척하겠어요? 다급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거예요.


이 여인이 자신의 인생의 목마름을 예수님께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목마름이 세상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해결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주제를 꺼낸 거예요.


우리가 영혼의 결핍을 육체의 결핍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요. 중독적 현상이 나타나는 건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면이 공허한데 그걸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는 거예요. 음식, 향락, 반대로 일중독, 성공지향… 그런데 그것으로 내 영혼이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예배로만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42편 1절과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제가 고3 수험생 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매일 불안하더라고요. 밤 12시, 1시까지 공부하고 독서실에서 나오면, 어떤 날은 새벽 2시에 나오기도 했는데, 항상 동네 교회 예배당에 들어가서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했어요. 10분, 20분, 때로는 30분.


고3 때는 가만히 있어도 피곤하잖아요. 완전히 녹초인 상태인데, 예배당에서 눈물을 쏟고 기도하고 나오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상쾌함, 회복감이 있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도 그 느낌이 생기지 않거든요. 그런데 비교할 수 없는 상쾌함이에요. 여러분, 예배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 받는 내 영혼의 우물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인이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하나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나요?”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정답을 얘기해 주세요.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멘.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입니다. 예배를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느냐, 그게 핵심입니다. 우리끼리 예전 예식, 우리끼리 잔치를 벌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예배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면 형식에 너무 신경을 씁니다. 어떤 분이 “예배에 꼭 대표 기도가 있어야 되나요? 대표 기도 때문에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이런 얘기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교회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있든지 교회를 와서 사람 보지 마세요. 사람 보지 마시고 하나님 바라보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정반대 케이스를 하나씩 예를 들어 볼게요. 예전에 요셉 청년부 때, 찬양이 시작하면 맨 앞에 나와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자매가 있었어요. 저는 너무 훌륭해 보였어요. 다윗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그 자매가 춤추는 걸 멈추게 하라, 방해가 된다” 이런 말을 해요.


저는 이해가 안 됐어요.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건데, 왜 자매에게 집중하느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내가 누구라고 “드리지 말라”고 말하느냐? 그건 잘못된 예배죠.


정반대 케이스도 있어요. 밴쿠버에 있을 때 찬양팀 중 한 분이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잘 입고 오시는 분이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니까 목양실에 들어와서 울며 말해요. “목사님 억울합니다. 제가 입는 화려한 패턴 옷들은 동대문에서 산 싸구려인데, 몇백만 원짜리, 몇천만 원짜리 백 들고 다니면서 저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그 자매는 진짜 화려한 패턴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왜 하나님께 집중을 안 하고 사람에게 집중할까요? 너무 영적으로 튀어도 마음에 안 들고, 너무 세상적으로 멋지고 화려해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럼 어디에 맞추겠어요? 사람 기준에 맞추는 곳이 교회가 아니잖아요.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자들에게 딱 한 가지 부탁한다고 했잖아요. 어떤 곡을 선택해도 되고, 어떻게 예배 인도해도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단 한 가지,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임재로 우리를 초대해 달라. 이 한 가지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안 하는 잔소리를 하시는 성도도 계시더라고요. 예배 인도자에게 익명으로 이메일 보내서 “솔로 파트가 너무 길다, 짧게 해라. 전주·후주·간주를 줄여라. 그래야 회중이 예배에 집중하기 좋다” 이런 말을 하는데, 저는 마음이 슬퍼요.


왜냐하면 앞에서 솔로로 인도하든 회중 찬양으로 인도하든 연주로 인도하든,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되는데 왜 우리는 다른 것을 볼까요? 연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을 못 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하여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 특강을 이어가십니다. 23절과 24절 같이 읽어 볼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아멘.


참되게 예배하는 자, 참된 예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그리고 두 가지를 얘기하셨는데, 영으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


우리의 예배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강조하고 어떤 분들은 성령을 강조하지만, 말씀과 성령은 둘 다 중요합니다. 영적 원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말씀의 씨앗 뒤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말씀의 기준은 직선 같고, 성령의 역동성은 곡선 같은데,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는 말씀파, 나는 성령파” 이렇게 나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향상 차분하고 조용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가 성령님의 감동의 작품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는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이것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에베소서 2장 18절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려면, 감히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의 길을 열어 주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걸음걸음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 경배하는 예배자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자, 25절과 26절입니다. 여인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


예수님의 예배 관련 말씀을 듣고 여인이 감탄하기보다, 약간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언젠간 그런 날이 오겠죠.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 인생의 고난과 예배의 본질도 다 알려 주실 날이 오겠죠. 그런데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이런 뉘앙스예요. 내 인생에 그런 날이 오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곧 그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I am)”라고 답변하신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 날이 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늘이 그날이다. 내가 너를 찾아온 날이다. 네가 나를 만난 날이다.”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주님을 감격적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사건이 예배의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설교는 회중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1516 교회와 한국 교회가 예배 가운데 찬양 중에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고, 말씀 선포 가운데는 우리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있게 하여 주시고, 한 분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는 참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다윗의 장막 문지방을 건너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주심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무너졌던 인생은 회복될지어다. 깨어졌던 가정은 치유될지어다. 용기를 잃어버린 교회들이여 다시 일어나게 될지어다.


예배가 살아나면 영혼이 살아나고, 예배가 살아나면 한국 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 임하셔야만, 그분이 직접 치유하시고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1교회, 1203 교회, 그리고 시퍼씨를 통해 세워질 모든 교회들이 도시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거룩한 예배자들을 일으켜 세우게 하여 주시고, 그곳에서 예배자들을 일으켜 주시고 거룩한 예배 공동체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2026.01.03(토) | 새벽기도 |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 (요 4:3-14)

요약 정리


  •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 (요 4:3-14) / 이상준

  1. 예수님은 길을 잃은 한 영혼을 찾아 ‘의도적으로’ 다가오신다
  • 요 4:3-4의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지리적 필연이라기보다, 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결단과 목적을 드러낸다.
  • 유대인들이 피하던 길, 험하고 위험한 길을 주님은 선택하셨다. 한 영혼을 위한 ‘찾아오심’이 복음의 방식이다.

  1. “물을 좀 달라”는 요청은, 사실 “내가 너를 돕고 싶다”는 초청이다
  • 예수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 주님이 예상치 못한 때에 “도와줄래?”라고 다가오실 때, 그 말은 우리를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초대하시는 배려의 언어가 될 수 있다.

  1. 편견과 갈등의 벽을 넘어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역사적·종교적·민족적 갈등은 매우 컸다.
  • 그럼에도 예수님은 까칠한 반응 속에서도 대화를 이어가시며, ‘생수’(living water)로 초점을 옮기신다.

  1. 질문은 믿음의 문을 여는 통로다
  •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생수는 어디서 얻는가”를 묻다가, 점차 “당신은 누구인가”로 질문의 초점이 이동한다.
  •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게 된다.

  1. 생수는 영혼의 목마름을 끝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야곱의 우물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한다(요 4:13-14).
  • 주님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을 꺼내어 하늘의 지평을 열어 주신다.

  1. 숨어 지내는 삶과 방어기제를 깨고, 주님 앞에 나오라
  • 사람은 연약함을 숨기려 ‘단단한 껍데기’(방어기제)를 두르지만, 그 껍데기는 참 안식처가 될 수 없다.
  • 예수님은 한 영혼이 안전하게 주님께 나올 수 있도록 가장 섬세한 배려로 길을 여신다(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신 장면 등).
  • 어느 곳에 있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시 139:7-10). 숨지 말고 우물가의 주님께 나아가라.



적용


  • 주님의 “물을 좀 달라”는 초청 앞에서 마음을 닫지 말고 응답하라.
  • 질문을 멈추지 말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묻고 구하라.
  • 한 영혼을 위한 예수님의 섬세함을 본받아, 누군가가 주님께 나오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되라.



녹취록


주님, 우리의 마음이 식어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보다, 사역의 결과보다, 영혼을 먼저 붙들고 있었던 우리의 연약함과 흔들림을 내려놓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십시오.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형식이 아니라 생명으로, 습관이 아니라 닮아 들어가는 예배자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께서 임하여 주시고, 메마른 심령 가운데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나아갑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다시 한번 걸어가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은혜를 더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영광과 감사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특별 새벽기도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오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이 시간에 이상준 목사님 나오셔서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해 주시겠습니다.


할렐루야. 날씨가 계속 추워져서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축복하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침에 여러분 많이 오신 것을 보고 간식을 준비했는데, 개수가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두 주간 특별 새벽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날씨가 굉장히 춥고 오늘 낮부터 좀 풀린다고 합니다. 풀린다고 해서 보니까 기온이 올라서 다음 주 중에는 최고 기온이 영상 2도 정도인데, 그게 ‘좀 풀리는’ 거더라고요.


여러분, 2주 동안 우리가 이 맹추위에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나오는 특별 새벽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이라는 메시지이고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 아멘.


두 주 동안 우리가 2026년 한 해를 주님 앞에 올려드리고 기도할 때,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따라해 보시겠어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어제는 예수님이 세관에 갇혀 지내던 세리 마태를 불러내셨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로비에서 한 권사님이 “마태가 그렇게 심한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이번에 마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오늘은 더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고 있는 한 영혼을 찾으시는 이야기입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부 유대 지역의 수도가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에서 북부 갈릴리 지방으로 올라가시는데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가 가버나움이니까,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한 150km 정도 됩니다. 중간에 오늘 어디를 들르셨죠?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성을 들르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다”라는 지리적 배경을 언급합니다.


그 다음 실제 일어난 사건을 보겠습니다. 5절과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수가라는 마을이라고 표현했는데, 헬라어로 ‘폴리스’라는 단어를 써서 수가성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어귀,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로마식 시간법으로 6시는 아침 6시부터 카운팅하니까 낮 12시 정오에 해당합니다. 한낮의 중부 산악지대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활동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너무 더워서 땀이 비 오듯 하지 않으셨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7절과 8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음에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때마침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수가성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우물가에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을 좀 주시오”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과연 도움이 필요하셨을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아 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전혀 뜬금없는 장소에서 뜬금없는 타이밍에 예수님이 “내게 물 좀 주겠니?”라고 다가오신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정말 나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도를 갖고 다가오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나를 좀 도와주겠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내가 너를 좀 도와주고 싶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한 걸음 다가올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배려하시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주님이 한 걸음 다가오시거나 말씀을 거시거나, 마음과 생각을 주신다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따라갔을 때, 하나도 손해보는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은 축복의 초청입니다.


이번 두 주간의 특새에 주님이 우리를 초대해 주셨는데, 여러분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진행되는 9절에서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은 평범하게 물을 좀 달라 요청하셨는데, 사마리아 여자는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유대인 남자가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밥도 같이 먹지 않고, 집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자는 더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 남자가 우물가에서 말을 거니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간다고 북한을 지나가며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북한군에게 “물 좀 주겠냐” 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 갈등이 있었는가.


첫 번째, 남북 왕국이 분열될 때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두 번째, 북 이스라엘은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세 번째, 아수르 제국 이후 혼혈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보기에 혈통과 신앙의 정통성을 잃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보다 못하다고, 심지어 ‘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인의 까칠한 반응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했을 것이고, 내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인 입장에서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당신에게는 물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주느냐.”


그런데 질문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생수에 대한 궁금증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넘어갑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크신 분이냐.”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저를 따라해보세요.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듣고,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습니다.


저는 새가족반에서도, 상담에서도, 성경 통독에서도 질문하라고 권합니다.


최근 독일에서 이민 생활하는 한 가정을 만났는데, 초등학생 딸이 성경을 읽으면 질문을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이 많으면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죠. 그런데 아이가 한 질문이 이랬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꾸 잘난 척을 하나요?”


이 질문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두 가지로 답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말 ‘잘난 척’ 하시는 걸까? 잘난 사람이 “나는 잘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척’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잘나지 않은 사람이 잘난 것처럼 말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가 “제가 골을 잘 넣습니다”라고 하면 척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김연경 선수가 “제가 배구를 잘합니다”라고 해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잘난 척 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아이가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나만이 참 하나님이다” 같은 구절이 반복되니까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self-glorification(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심)이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영광의 중심을 악이나 불완전한 존재에게 내어주면 세계는 무너집니다.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독일의 총리가 있는 자리(권력의 중심)를, 지금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가 “나도 앉아보자” 한다면 내어줘도 되냐. 아이가 “안 된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성은 다른 존재에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 질문은 매우 훌륭한 질문입니다. 저는 “새신자가 묻다”(제목은 전달 과정에서 다르게 들릴 수 있음) 같은 책을 선물하며 “네가 궁금해하는 내용들이 여기에 있을 테니 읽어보렴”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인이 던진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13절, 1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고 싶으신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이 여인과 티키타카 하듯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어제 봤던 마태와는 다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알고 갈망했기에 예수님이 “따라오라” 하실 때 바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자신만의 동굴에 숨어 지내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결핍의 공간에서 이 여인을 꺼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묵상하다 떠올린 사건이 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즈음, 필리핀 루방섬에 파견된 일본군 일부가 종전 선언을 믿지 않고 밀림 속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방송과 전단을 미군의 기만 전술이라 생각하고, 무려 30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 그중에 오노다 히로오(오노다 히로라고도 알려짐)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결국 1974년에 옛 직속 상관이 찾아가 “전쟁이 끝났다”고 확인시켜 주자 비로소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만의 공간에 숨어 지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물가에서 기다리신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좋은 물이지만,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땅만 보며 살던 여인에게 갑자기 영원이라는 지평이 열렸습니다. 하늘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 이야기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더 나옵니다. 제가 오늘 시작할 때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토요일 본문이 아니라 다음 주 화요일 본문을 당겨서 나눈 것입니다. 내일 주일 설교에서 이어지는 예배 이야기를 나누려고 오늘 여인의 이야기를 먼저 다룬 것입니다.


여인의 삶은 목마름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 남자와 살았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동거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원래는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우물가에, 그는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한낮에 나와야 했습니다. 사람 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앞에서는 강한 척 합니다. “왜 나한테 물을 달래? 여긴 우리 동네야. 당신이 뭘 줄 수 있어?”


이 여인의 내면을 보며 떠오른 동물이 있습니다. 소라게입니다. 소라게는 영어로 hermit crab(은둔자 게)입니다. 소라게를 껍데기에서 빼내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배와 꼬리 부분이 매우 연약해, 그 연약함을 숨기려고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어 강한 척 합니다. 그런데 몸집이 커지면 껍데기를 바꿔야 하고, 평생 숨고 바꾸는 일을 반복합니다. 목마름이 멈추지 않는 삶처럼요.


소라게와 여인, 그리고 우리 삶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둘째, 연약한 나를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방어기제를 쓴다.


강한 척은 강건함이 아니라, 강팍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바스러질 듯 연약한 존재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소라게에 대해 연구한 보고를 보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를 집으로 착각하고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 죽는 개체가 대규모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소라게가 의지하는 거짓된 껍데기는 참된 안식처가 아닙니다. 우리도 참된 안식처를 찾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자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합니다. 불안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심리적 전략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실제로 우울하고 초라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덕지덕지 방어기제로 포장하며 강한 척합니다.


대표적으로,

  • 부정: “난 부끄럽지 않아.”
  • 투사: 자기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림
  • 합리화: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밈
  • 보상: 무너진 영역을 반대로 과장함(“우리도 영적 유산이 있다” 등)

그러나 어떤 방어기제로도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내면을 다 보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두려워 움츠러들고 강한 척하는 그녀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내가 너를 어둠에서 건져내려고 왔다. 내가 네게 진정한 해답을 주려고 왔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생명수를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럼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는가. 오늘 읽었던 3절과 4절을 다시 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여러분, 지리적으로는 직선으로 가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기 때문입니다. 중부 산악지대는 험한 돌산이고 강도들도 출몰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 요단강 저지대를 따라 갈릴리로 올라갔습니다. 물도 많고 과일도 많고 쉬기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지리적 필연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150km인데, 수가성이 약 50여 km 지점입니다. 이 길은 3일 길입니다. 군인 행군으로 하루 40~45km가 보통입니다. 산길을 50km 걸으면 오전 출발해 오후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이른 새벽에 출발하셨겠습니까.


예수님 마음이 급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나오기 전에 도착해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고 가십니다. 그리고 여인이 나오기 직전,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십니다.


또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우물가에 잔뜩 서 있으면 여인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을로 들여보내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심부름은 보통 두 사람씩 보냈는데, 일부러 모두를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여인이 편안한 마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신 예수님의 섬세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한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예배 전에 와 본 적은 있는데, 세상적으로 살다 보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마태 설교를 듣고 용기가 나서 연락드립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99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주님의 마음은 간절하고 애달픕니다.


저를 따라해보세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 한 영혼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도 축복하지만, 골방에 갇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데도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어디에 있든지, 인생의 고통의 끝자락과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거기까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후 찬양을 올려드리며 묵상합니다.

  • 찬양(가사 생략):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리까 …”

이 시간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