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교회 설교 녹취록 모음

03월
2026.03.12(목) | 4321 WORSHIP |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요 20장 19-23절)
4321 OPEN WORSHIP [HOLY FIRE]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장 19-23절) | 이상준 목사 | 2026.03.12
설교 요약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 한가운데 오셔서 두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셨다. 이 평강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값을 치르신 뒤에 주시는 참된 평강이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막연한 소망 사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은 실제적인 승리의 선포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으며, 길이 있어도 길을 보지 못한다. 제자들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긴 문도, 닫힌 공간도, 제자들의 두려움도 뚫고 들어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리에도 찾아오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원수가 주입하는 거짓말과 두려움에 동의하지 말고, 만세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붙잡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 후 곧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평강이 우리 안에만 머무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흘러가라고 주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회복되는 바로 그 순간, 주님은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다. 믿는 자는 평강을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평강을 품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어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성령께서 영적 호흡을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두려움이 사람의 호흡을 막고 영혼을 질식시키지만, 성령의 바람은 다시 사람을 살리고, 안에 있는 불을 일으키며, 삶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성령의 호흡으로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평안과 위로를 나누는 수준을 넘어, 복음을 통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움에 갇혀 머물지 말고, 학교와 직장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평강과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로 흘러가야 한다. 예수 안에 참된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전문 스크립트
네, 1월과 2월에 동탄에 계신 1203교회 박시형 목사님께서 귀한 메시지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저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희가 다음 달 4월에는 4월 9일에 오픈 워십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모하는 마음으로 또 기도해 주시고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픈 워십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 또 현장에 계신 분들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도 성령 충만하고 말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3월에 이제 새 학기를 시작하는 우리 청소년들, 또 대학생들 응원합니다. 한번 응원의 박수 해 주시겠어요? 축복의 박수 해 주시고, 응원의 박수 해 주시고요.
또 저희가 방학 동안 일요일교회는 왜 방학이 있냐 물어보시는 분도 있는데, 여러분 새 학기 공동체를 시작하는 우리 서로에게도 한번 응원의 박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영이신 성령님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어요. 어떻게요? 불처럼 바람처럼. 그래서 강력한 바람으로도 임하시고, 또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임하셨죠.
그래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묵상해 보면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가시기도 하고, 때로는 미풍처럼 감싸 안아 주시기도 하는 그런 성령의 임재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또 불로 생각해 보면 성령님은 때로 들불처럼 휩쓸고 가시기도 하지만, 모닥불처럼 따뜻하게 우리를 녹여 주시기도 하죠.
저희가 이번에 2월 달에 이집트 성지순례를 갔는데, 시내산이 있는 신나이 반도 꼭지점 지역은 상당히 추운 지역이에요. 광야 지역이기 때문에 밤에는 기온이 상당히 많이 떨어집니다. 겨울 시즌이기도 하고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다음 날 새벽에 1시 반에 일어나서 시내산을 올라가야 되는데, 전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박사님께서 숙소 호텔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에게 모이라고 하시더니 거기서 몸을 녹이시더라고요. 막 이렇게 어깨를 움직이시면서.
오늘 성령 하나님께서 따뜻한 임재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의 1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일 전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안식일이 저녁부터 시작되니까 안식일 전날 예수님께서 매장까지 되셨죠. 안식일이 지나고, 그러니까 안식일 전날, 안식일,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이게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전했어요, 안 전했어요? 전했어요. 그런데도 이 제자들이 반응이 없는 거예요.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잖아요. 그리고 와서 전했는데도 믿지를 않는 거예요.
여전히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서 그들이 있던 다락방의 문을 꽁꽁 잠그고 숨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정치적으로는 반란죄, 종교적으로는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당하셨는데, 종교적으로 신성모독죄는 종교계에서는 가장 큰 죄죠. 그리고 정치계에서는 반란죄, 이건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도 예수를 따르던 무리였기 때문에, 게다가 핵심 멤버였잖아요. 자신들도 체포되면 끌려가서 죽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던 거예요.
이번 고난주간 일요일교회 특새 주제가 뭔지 아세요?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제 본문을 계속 보다가 주제 문구가 될 만한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대제사장의 집뜰에서 여종이 베드로에게 두 번 했던 얘기,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두 번이나 부인을 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걸 부인을 아무리 해도, 부정을 아무리 해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잖아요. “난 예수님 몰라요. 난 예수님하고 함께하지 않아요.” 이거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예수의 사람이라는 걸 부인할 수 있나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지금 나가면서 “난 부모님 없는 셈 치고 살겠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달라지고 사라지지 않잖아요. 여러분, 두려움이라는 포비아에 사로잡히면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높은 곳에 데리고 올라가서 가끔 친구들이 엉뚱한 짓 하느라고 끌고 올라가서 “괜찮아, 괜찮아” 그런다고 괜찮아져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죠.
저희 큰아들 지성이가 지금은 아주 능해졌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충치가 생겨서 애들 그렇게 치카치카 하라 그래도 안 하잖아요. 그러다가 치과 가게 되면, “너 더 아프다” 아무리 얘기해도 안 하다가 이제 치과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드릴 소리, 그 드릴 소리가 너무 무서운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인데 하여튼 그때 6시에 끝나는데 5시 조금 전에 갔는데 애가 한 시간 내내 우는 거예요. 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통곡을 하는 거예요.
그 의사 선생님이 굉장히 친절한 분이셨거든요. 그런데 애가 계속 그렇게 통곡을 하니까 아무리 진정을 시켜도 진정이 안 되는 거예요. 선생님에게는 미안하고, 그런데 애가 왜 그렇게 통곡을 하는지 이제 저희 부부는 아는 거죠.
얘가 세 살 때였던 것 같아요. 동부이촌동에서 보도블록에서 달려가다가 엎어졌는데 이빨 사이에 혀가 물려 가지고 혀가 끊어질 뻔했거든요.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어린이 치과 병원을 찾아가서 아이를 낚싯바늘 같은 걸로 꿰맨 거예요. 엄마는 무서우니까 못 본다 그래서 제가 머리를 잡고. 그러니까 이 치과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요, 안 생겨요? 생기죠.
그러니까 이제 치과에 데려가서 충치 안 하면, 때우지 않으면 너 더 심해져, 더 아파, 밤에도 아파, 음식도 못 먹어, 이거 해야 돼, 해야 안 아픈 거야. 아무리 얘기를 해도 두려움이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여러분, 두려움의 바이러스가 영혼의 패브릭을 뚫고 들어오면 사람이 병이 걸린 것처럼 비정상이 됩니다. 귀신 씐 사람처럼 비정상이 됩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길이 있는데 길이 안 보여요. 그리고 소망의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제가 사실 굉장히 많은 두려움을 갖고 태어난 아이였는데, 제가 특별히 폐소공포가 있거든요. MRI 검사 통에 들어가는 걸 너무 싫어요. 죽기보다 싫어요. 그런데 하여튼 MRI 검사통에는 여러 번 들어갔던 것 같아요. “주님, 주님께로 가까이 갑니다” 그러고 들어가는 거죠.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도 불편감이 있어요. 작년에 튀르키예 성지순례를 가는데, 미리 저희가 가는 곳을 제가 자세히 연구를 해서 매주 토요일마다 성지순례팀들과 나눴거든요. 그런데 튀르키예에 지하 동굴 교회가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가는 데마다 지하 동굴교회예요. 어디는 막 지하 3층, 지하 4층,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데 있어요. 저는 그걸 상상만 해도 답답해서 기절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작년에 기도하고, 제가 그걸 나눠야 되니까 나누기도 하고, “하나님 제가 인솔 교육자로 가는데 이거를 저는 두려워서 못 들어가니까 여러분만 들어가십시오” 이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를 했죠.
여러분, 두려우면 사람들이 뭘 하냐면 negative mental rehearsal를 한다, 부정적인 정신적 리허설을 한다. 시험이 내일이에요. 그런데 시험이 중요한데, 시험 망치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안 돼, 이러고 이제 망치는 상상을 하는 거예요. 갑자기 시험지가 안 보여. 어려운 문제들이 잔뜩 나와. 시험 시간 마지막까지 쫓겨 가지고 답안지를 제대로 찍지를 못해. 이런 상상을 하는 거예요. 부정적 정신적 리허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튀르키예를 가기 전에 긍정적 정신적 리허설을 해야겠다. 동굴교회 들어가는데 “내가 주님과 함께 간다. 내가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에게 뭐가 도움이 될까. 초강력 랜턴. 그래서 초강력 랜턴을 하나 사 가지고 갔어요. 그것 하나만 해도 굉장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러나 그런 게 있다고 해서 이 포비아가 쉽게 해결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튀르키예 가서 제가 다 들어갔죠. 다 들어갔습니다. 할렐루야. 지금 생각해도 기적입니다.
여러분, 두려움 한가운데 아무도 도울 수가 없어요. 고3들 수능 시험장 들어갈 때 부모가 같이 들어가 줄 수 있어요? 친구가 가 줄 수 있어요? 선생님이 가 줄 수 있어요? 아무도 함께해 줄 수 없어요. 나 혼자가 해야 돼요.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함께하실 수 있어요? 주님이 함께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자리에 누가 오실 수 있어요? 주님이 오실 수 있어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꼭꼭 닫혀 있는 두려움의 공간 한가운데 서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오셨느냐, 이걸 또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예수님이 아직 천상에 오르지 않으셨기 때문에 육신을 갖고 계시는데 어떻게 벽을 뚫고 들어오셨냐, 공간 이동을 하셨냐.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처럼 부활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실 수 있게 된 거예요.
여러분,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생명의 시간에서 사망의 시간으로 보더라인을 넘어가면 돌아올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돌아오는 거예요. 이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으로 가도 저쪽으로 건너간 사람은 이쪽으로 못 돌아옵니다. 이게 생명의 시간에서 사망의 시간으로 건너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더라인을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신 분이에요. 할렐루야. 예수님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게다가 망자의 세계에서 산 자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영역도 뛰어넘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장벽과 모든 한계선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상담하다 보면 “제 자녀가 3년째 집에서 두문불출, 집을 못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자리에도 예수님은 뚫고 들어가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너무 공포감이 심하고 불안감이 심하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운전도 할 수 없고, 집 밖에도 나올 수 없고, 소그룹도 들어갈 수 없고 그런 상태에 빠지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그 한가운데 찾아가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글렀다. 난 이제 끝났다” 그게 아니라 그 한가운데 주님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원수가 “넌 끝났어” 그러고 두려움 가운데 몰아놓고 절망 가운데 몰아넣을 때 거기에 동의를 해 주면 돼요, 안 돼요? 동의해 주시면 안 돼요. 공감해 주시면 안 돼요.
제가 예전에 그거 많이 동의하고 공감하고 살았거든요. “그래, 난 그만 살아야 돼. 아, 그렇지. 그게 맞는 거야.” 이거를 하루에도 다섯 시간씩 묵상하면서 앉아 있으니까 사람이 영혼이 피폐해져요, 안 피폐해져요? 엄청 피폐해지거든요. 원수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원수가 우리에게 주입해 주는 그 가라지, 거짓말, 두려움, 이거를 받아들이고 그거를 영혼의 어둠의 양식으로 먹고살면 여러분 희한하게 그게 또 힘이 됩니다. 우울함이 힘이 돼요. 밤새 재즈 틀어 놓고 우울한 음악 들으면서 “아, 우울하다, 우울하다” 그러고 산다니까요. 제가 그러고 오래 살았거든요. 그렇게 살면 그게 나름의 어둠의 힘이 되는 거예요. 원수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어떠한 어두운 상황,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고 산 줄로 믿습니다. 다윗도, 느헤미야도, 다니엘도, 에스더도, 사도 바울도 원수가 주입해 주는 거짓말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움 받아들이지 않고, 믿음을 붙잡고 살았어요. 약속을 붙잡고 살았어요. 승리를 선포하며 살았어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걸 할 수 있어요.
제가 변했다 그러면 안 믿어 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은데, 진짜 저는 완전히 사망의 끝자락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내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 영혼의 만세반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62편 2절에 보면 오직 그분만이 나의 반석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의 만세반석” 만세반석이라는 것은 rock of ages, 영원한 반석이 되신다 그런 뜻이죠.
고린도전서 10장 4절 하반절에 보면 그 반석은 곧 누구시다?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의 반석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단조롭지 않나요? 세상 사람들이 “넌 도대체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니” 이런 질문을 들어 보시거나, “난 너무 단조롭게 사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화려하게 살아 보세요. 바람에 나는 겨는 굉장히 화려합니다. 드라마 같은 인생 살아 보세요. 피곤합니다. 드라마 난리도 아니잖아요. 그런 인생 살겠냐고요.
그런데 만세반석 되시는 주님 위에 살면 견고하잖아요. 일관되잖아요. 흔들림이 없잖아요. 그러면 단조로운 게 아니라 이것은 놀라운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인생을 50여 년 살아오면서, 여기 선배님들도 많이 계신데 제가 35년 정도까지는 새로움이 항상 어렵더라고요. 새로움이라는 게 저에게 항상 두려움이었어요. 새로운 환경에 들어간다, 새로운 시간 속에 들어간다, 이 새로움이 두려움이었어요.
새 학년에 올라가는 것, 새 학기, 또 새 선생님 만나는 것. 선생님들한테도 어려움을 많이 당해 봐서. “왜 너희 어머니는 안 찾아오시니?” 하여튼 뭐 촌지든 뭐든 뭐라도 드려야 되는데 아무것도 안 갖고 왔다고 선생님이 계속 괴롭히는 거예요. 새 선생님, 새 친구들, 새로운 과제, 새로운 사역, 새로운 책임, 새로운 직분. 과연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실패하지는 않을까. 비난받지는 않을까. 내 인생이 벼랑 끝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이런 불안감.
그래서 인생은 늘 평안과 불안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미래를 모르잖아요.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은 존재적 불안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불안 덩어리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도심 한가운데를 걸어가다가 싱크홀이 나타나요, 안 나타나요? 그건 걸어가는 사람이든 운전하던 사람이든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싱크홀이 나타나는 거잖아요. 늘 타고 다니던 지하철에 갑자기 지하철 참사가 나는 경우, 그건 내가 어떻게 예상을 하겠습니까? 평지의 끝이 벼랑 끝이 될지를 사람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위로부터의 샬롬, 그 평강은 세상의 모든 평안과 불안의 이 불균형한 지형을 상관하지 않으세요. 할렐루야.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마치 밤새 소복이 내려 쌓이는 눈처럼, 높은 빌딩이든 작은 초가집이든 길바닥이든 그냥 눈은 다 덮어 버리는 거잖아요. 여러분, 하늘의 샬롬이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을 덮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세상은 변화무쌍한데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원성으로 우리의 시간 세계를 덮어 버리시는 거예요. 그분의 무소부재하심으로 우리의 공간의 제한성을 덮어 버리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내 영혼의 홈베이스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야구 경기를 보면 굉장히 영적인 게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냥 계속 달려가는 게 아니라 홈으로 돌아오잖아요. 인생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 같지만 홈베이스를 밟고 다시 돌아오게 돼 있죠.
우리가 시간 여행자로 살아가다가 이 시간이 끝나면 어디로 돌아가요? 우리의 원점, 우리의 홈베이스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잖아요. 여러분, 예배의 자리는 홈베이스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영원토록 진실하시고 영원토록 선하신 하나님, 그분이 내 영혼의 홈베이스가 되어 주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요. 하루가 성공을 했든 하루가 실패를 했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너무너무 감사한 거잖아요. 나의 기쁨을 나눌 수 있고, 나의 슬픔도 나눌 수 있고,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는 홈베이스가 있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 놓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갈 집이 있고 늘 애착의 장소, 애착의 대상이 있다는 게 참 귀한 것이구나.
요즘 사람들이 애착 인형 갖고 다닌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애착 아이템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애착의 대상이 있거나. 이게 심하면 이제 중독이 되는 건데.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애착 아이템을, 현대 사회 기계문명 사회에서 애착 아이템을 좋아할까. 세상이 너무 변화무쌍한 거예요.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심리가 현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강한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아이템이 있어도 괜찮아요. 집에 가서 없애라는 거 아니에요. 그런 아이템이 있을지라도 여러분, 늘 변함없이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게 너무너무 감사한 거죠.
그러므로 나의 영혼아 평안할지어다. 나의 영혼아 평안할지어다. 나의 가정도 평안할지어다. 한국 교회 평안할지어다. 아멘.
성경에서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한다고요?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 9장 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아멘.
예수님이 오시기 7세기 전에 이런 예언을 했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죠.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영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나 놀랍습니다. 이사야 예언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의 인생 한가운데 찾아오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어지는 20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이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갑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어요. 이거 왜 보여 주셨을까요?
“진짜 나다. 내가 부활했다고 여인들이 이야기하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얘기하는데 왜 안 믿니. 나다. 내가 살아 있다.” 이렇게 신원 확인해 주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identity를 해 주셨는데, 제가 이 본문을 사실 참 좋아해서 많이 묵상했는데 오늘 새롭게 깨달은 게 있어요.
예수님이 “진짜 나다” 이렇게 신원 확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면 이게 굉장한 의미더라고요.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진짜 평강의 왕이 되신 거예요. 진짜 평강의 왕이 되신 거예요.
가령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아빠가 월급을 타서 마음이 넉넉한 날 가족들을 데리고 평소에 좋아하던 맛집에 데려가서 외식을 하면서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먹어라” 그러면 음식이 다 공짜예요? 자녀들에게는 공짜죠. 자녀가 돈을 안 내니까. 그럼 누가 돈을 내요? 아빠가. 누가 값을 치러요? 아빠가 값을 치르는 거예요. 그런데 자녀들은 공짜로 마음대로 누리는 거예요. 누가 희생을 해서? 아빠가.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 되신 것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인 거예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남유다가 멸망의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이제 곧 심판이 온다 그러는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아무런 대가 지불도 하지 않고, 아무런 희생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러잖아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피값으로, 그분의 생명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짜 평안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어둠과 저주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이 놓임을 받는 것은 더 이상 어둠의 영역이 나를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여기서 누리는 참된 자유와 평강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된 줄로 믿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더불어서 사망 권세만 이기신 것이 아니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 말씀 읽어 볼까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어요. 그런데 죽는 척을 하신 게 아니잖아요. 죄값을 대신 지시는 척을 하신 게 아니고 쇼를 하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사망 이후에 음부의 세계로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거기까지 가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사탄과 그 지하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고 돌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은 세상 권세를 이기셨고, 사망 권세를 이기셨고, 음부의 권세까지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놓으시고 “평안해도 돼” 이 얘기를 하시는 거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야, 평안한 척하는 게 좋은 거야” 이런 얘기 하시는 게 아니라고요. 내 인생의 모든 영적인 상황 정리를 해 주시고 나서 그분이 가서 피 터지게 혈투를 벌이신 거잖아요. 정말 피를 흘리신 거잖아요. 생명을 쏟아부으면서 그 영적 전쟁을 다 이기고 돌아오셔서 “내가 다 해결했다. 평안해라” 이 말씀을 하시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이 평안의 선포가 놀라운 것이구나. 놀라운 것이구나.
제가 상담을 하다 보면 갑자기 우리 아빠들이 생각이 나서. 아빠들이 밖에서 정말 전쟁터 같은 인생을 살거든요. 그렇게 혈투를 벌이다가 집에 와서 갑옷을 벗으셔야 되는데 갑옷을 못 벗고 집에서도 딱딱하게 하다가 “당신은 왜 그래” 그러고 혼나는데. 여러분, 전쟁터에 갔다 온 거예요. 아빠들을 사랑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빠들이 그렇게 나가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집안이 평안한 거예요. 이 평안이 그냥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평안이라는 거예요.
이어지는 2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이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너무나 감사한 선언이죠.
이 선언을 해 주신 것, 이것이 주님의 죄 사함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이미 상황 정리를 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주님은 명확한 확신을 갖고 선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빠들 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가 21세기에 이런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게 뭐예요? 여러분, 우리 선조들이 피 흘려 조국을 지킨 거잖아요. 제가 늘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서 을지문덕, 강감찬. 저 역사를 너무 좋아해요. 독립운동가들과 이름 없이 나라를 위해,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린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잖아요. 지금도 최전선에서, 후방에서 헌신하는 군인들의 헌신이 있는 거잖아요. 그 헌신과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에 21세기 대한민국의 평안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가 지불이 없이, 희생이 없이 평안은 없는 겁니다.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면서 “아무 일 없어서 평안하다” 그건 폭풍 전의 고요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평안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사망 권세를 해결하고 이기신 줄로 믿습니다. 지옥문이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주님이 한계선을 그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시편 104편 9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경계를 나누셔서 넘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영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면 지옥에 있는 그 어둠의 권세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판을 치고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큰소리를 쳐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역에는 넘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한계선을 그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마치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땅에는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 것과 같은 거예요.
시편 121편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낮에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에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낮에 해도, 밤에 달도,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국제 정세로 이야기하자면 해는 이집트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태양신을 섬기는 이집트, 그리고 다른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은 전부 달 모양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메소포타미아 쪽, 바벨론을 얘기하는 거죠. 동방과 서방의 강대국 틈바구니에 있어도 하나님이 정말 작은 충청남북도 사이즈밖에 안 되는 이스라엘을 눈동자같이 지켜 보호하시면 적의 세력이 넘치지 못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신입생이고 저학년이고 어린 나이일지라도 강하고 담대할지어다. 아멘.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되 “평안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값을 지불하셨고 그 영역을 승리의 영역으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자들, 세상의 권력자들, 세상에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어떠한 사람들일지라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미지의 영역,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때 두려움과 새로움이 이퀄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기를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 문장 한번 같이 읽어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은 평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얻은 평강입니다. 아멘. 아멘.
그래서 이게 공짜로 “아, 평안하면 좋겠다” 이런 소망 사항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값을 지불한 거예요. 정당하게 값을 지불해 주신 거예요. 그분이 이미 얻으신 거예요.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 21절을 다시 보여 주시면, 제가 이 21절을 볼 때마다 “참 주님은 마음도 급하시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 번 얘기해 주셔 갖고 너무 좋다 그랬더니 갑자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잠깐만요. 조금 회복하고 쉬고, 그다음에 파송하셔도 될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제가 이걸 묵상하다가 왜 주님이 이렇게 얘기하셨을까. 제가 설교문은 써 놨는데 여기 와서 찬양하다 묵상해 보니까 또 다른 생각이 났어요. 그게 뭐냐면, 여러분 제자들은 지금까지 완전히 쫄아 가지고 두려워하고 위축돼 있다가 이제 주님이 나타나서 “야, 내가 승리하지 않았냐?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지 않았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이 살아난 걸 보니까 우와, 이제 다시 소망이 생기고 어깨가 펴지고 숨이 쉬어지고 했겠죠.
그런데 딱 그러자마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잠깐만요. 조금 한숨 돌리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러겠지만, 여러분 하나님 입장에서, 예수님 입장에서는 역사를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리신 거잖아요. 신구약 중간기로만 봐도 400년을 기다리셨고, 이스라엘 역사가 세상의 열방에 소망의 통로, 구원의 통로가 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몇천 년을 기다리셨잖아요.
예수님의 마음에는 “야, 이제 반전됐으니까 바로 나가자” 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냥 아멘을 하고 싶어 하지 않네. 나가고 싶지 않아요. 가만히 앉아서 “이곳이 좋사오니” 그러면 평안한 게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함께 나눴지만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그 나귀 새끼는 아직 짐을 져 본 적도 없고 사람을 태워 본 적도 없는, 말하자면 그 나귀 새끼의 라이프타임으로 놓고 보면 아직 때가 안 된 거잖아요. 때가 안 됐는데 주님이 쓰신 거잖아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주님이 급하신 거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영원하신 주님이 딱 33년 이 땅에 오셨고, 3년의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마지막 일주일에 딱 하루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거잖아요. 그때 그 나귀에게, 나귀 새끼에게 “내가 너가 필요하다.” “저는 제가 되지 않았는데요. 조금 기다려서 1년 뒤에 오세요.” 이게 가능한가요?
그래서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그때 아멘 하세요. 아멘을 하셔야 돼요.
예수님이 이제 좀 숨이 쉬어지는 제자들에게 바로 파송의 메시지를 하신 이유가 뭘까 이렇게 묵상을 해 보니까, 썰물이 밀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더라고요. 한순간에 바뀌는 거예요. 한순간입니다.
제가 예전에 제부도에 집회를 하러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제부도는 물때 시간표가 있죠. 하루에 두 번 길이 열립니다. 바닷길이 열려요. 그래서 그 시간에 들어가야 되고 그 시간에 나와야 돼요. 다 알고 계시죠. 오늘로 검색을 해 보니까 오늘은 하루 종일 열려 있더라고요. 놀라운 날이에요. 이럴 때 마음대로 들락날락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바닷물이 썰물에서 밀물로,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는 건 한순간입니다. 어부들이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 줄 아세요. 딱 그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바로 나가는 거예요. 운동 경기를 할 때도 전세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뀝니다. 그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었을 때 밀어붙여야 되는 거예요. 인생도 막 죽을 것 같은데 갑자기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면 다시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 이런 말 하잖아요. 이게 그냥 사업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부들이 조업을 하면서 나온 얘기잖아요. 신앙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뭘 얘기하시는 거냐면, 주께서 부활의 승리, 이 놀라운 승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불안이 평안으로 바뀌는 그 순간, 썰물이 밀물로 바뀌는 그 순간, 그때 나가는 거다. 그때 흘러가야 된다. 그때 세상을 바꿔야 된다. 그때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평강이 임하면 나아가겠습니다. 평강이 임하면 흘러가겠습니다. 네.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거예요. 그 평강이 우리 가운데 딱 임하는 순간 흘러가야 된다, 이 얘기를 하신 거예요.
이어지는 2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받으라” 그냥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을까?
여러분 사람이 불안, 공포, 두려움이 몰려오면 호흡부터 곤란해지게 돼 있어요. 호흡이 짧아지고, 호흡이 짧아지면 산소가 부족해지잖아요. 산소가 부족해지면 머리가 하얘지고,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고, 판단력이 흐려지고, 불안도가 급상승하죠. 그럴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평강은 이미 대가 지불을 하고 명확하게 주신 것이라는 것, 이거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 이걸 선포하시고 take a deep breath, 깊이 숨을 쉬시면서 “성령님 임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내 안에 임하여 주옵소서” 고백하셔야 돼요.
창세기 2장 7절 읽어 볼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잘 먹이고 때 빼고 광내고 해도 사람이 몸뚱아리로만 살 수 있어요? 아니에요.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의 호흡이 있어야 사는 거예요. 세상 지식만 채운다고 되지 않아요. 감성적으로 나를 막 즐겁게 해 주고 풍요롭게 한다고 해서 살 수 없어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성령의 호흡이 내 안에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뭐예요? 루아흐. 루아흐라는 단어가 세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호흡, 성령이에요. 그래서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시면 영적인 호흡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온갖 기 수련, 마음 수련, 요가, 이런 것들 호흡법 가지고 하잖아요. 여러분 세상 호흡법으로 마음의 평강을 누리겠다 그러다가 이상한 영들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성령의 호흡이 여러분 안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내적인 호흡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평안해지게 돼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 놓고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산불이 날 때 보통은 이 산불을 잡기가 어려운 때가 언제냐면 강풍이 부는 시즌이에요. 건조할 때뿐만 아니라 강풍이 불 때요. 여러분 왜 강풍이 불면 산불이 더 강해지는 줄 아십니까? 물론 불씨가 옮겨 다니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중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연소에 필요한 산소가 다량 공급되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렇게 상상을 했는데 진짜 찾아보니까 딱 그렇더라고요. 산소가 어마어마하게 공급되니까 연소의 속도, 연소량이 어마어마하게 급증한대요. 그래서 바람이 초속 6m로만 불어도 연소 속도가 급상승하면서 산불이 26배로 확산되게 돼 있다고 해요.
여러분 성령의 바람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서 성령의 불이 여러분 안에 26배로 강력해지는, 30배, 60배, 100배 강력해지는 그런 심령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
제가 상당히 어렸을 때 우울도와 불안도가 높은 아이로 태어났거든요. 늘 예민해서 보는 것도 예민하고 듣는 것도 예민하고. 예민하니까 하루에 한 사람만 만나도, 두세 시간 만나고 나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요. 집에 와서 쉬어야 되는 거예요. 하루에 10시간, 12시간을 자도 피곤했어요. 그래서 너무너무 인생이 힘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밖에 많이 돌아다닐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도 많이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디 가서 나서기도 싫은 거예요. 어디 구석에 앉아 있는 거예요. 여기 뒤에 앉아 계신 분들이 계시는데, 어디 가나 기둥 뒤에 안 보이는 데, 이렇게 구석에 날 불러내지 않을 만한 곳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중3 때 우울과 자살 충동의 늪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신 이후로 자꾸 저에게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라, 사랑을 전해라, 내가 너를 살리고 싶다고 얘기해 줘라. 저는 어디 구석에 있고 싶습니다. 아니, 가서 해라. 가서 얘기해라.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마이크 잡고 얘기하는 건데, 안 믿어 주시겠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설교를 길게 하냐 그러시겠지만, 이게 길게 하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셔서 하는 거예요. 믿어 주세요. 갑자기 변명이 됐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중3 때 그렇게 완전히 바닥에서 살다가 3년 동안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공부하고, 공부할 수 없는 애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적처럼 지혜를 주셨거든요. 그래서 공부 열심히 했는데, 그러나 그 3년 동안 친구를 거의 만나지 않았어요. 인간에게 실망하고 저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3년 동안 하나님하고 친구 삼아서 살았어요. 극장에 갈 때도 하나님하고, 미술관에 갈 때도 하나님하고, 등교할 때도 하나님하고 대화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집에 오는 5분 동안의 거리도 주님과 대화하고 그러고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올라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불안도가 없어지지 않아요. “사람하고 어떻게 대화를 해야 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어디 구석에 그냥 숨어 있고 싶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자꾸 “나가서 복음을 전해라.” 대학교 1학년, 2학년 교양 영어 수업이 필수가 있는데, 그 교양 영어 수업 네 개 반을 돌아다녔어요. 저희 같은 기수의 영혼의 친구들이 한 120명쯤 있었는데 네 반을 돌아다닌 거예요. 자기 반이 정해져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반을 돌아다니면 새로운 친구를 만나야 되니까 제 기질상 완전히 부담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이번 학기는 다른 반에 가서 다른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라.” 제 기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거잖아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나가면 또 쭈뼛쭈뼛하거든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계속 시키셔서, 등 떠밀어서 계속 그러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여러분 그때 제가 순종을 안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공부만 했으면 성적은 더 올랐을 수도 있죠.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너 공부만 해. 무슨 아침 큐티 모임이야, 무슨 학교 기도 모임이야. 너 공부나 해” 그렇게 키워 보세요. 계속 어떻게 되나.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나님은 이야기하시고, 친구들을 도와줘야 돼. 친구가 지금 우울증에 빠져 있지 않니. 친구가 학교를 그만두려고 하지 않니. 친구가 공부를 어려워하고 있지 않니. 너 가서 도와줘야지. 그런데 도와주려고 선한 마음을 조금 가지면 엄마가 벌써 눈치를 채요. 엄마가 전능자이시거든요. 다 알아요. “너 딴생각하고 있지? 너 시험 전날 어디 가고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애들을 가르쳐 놓으니까 애들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는 거예요. 영혼을 쪼그라뜨려 놓는 거예요. 그리고서는 성공하래요. 뭐가 성공인데요? 성적 잘 받고 여러분 지위가 높아지고 연봉 높으면 성공이에요? 그리고 나가서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미칠 줄 몰라요.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되는지, 어떻게 사람을 섬겨야 되는지, 어떻게 사람을 살리고 조직을 살리는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성공하래요. 어떻게 성공하나요.
애들이 그니까 그렇게 해 갖고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나한테 자꾸, 난 이거 싫은데 자꾸 이걸 시키시지? 나 혼자 구석에서 공부하고 싶은데. “야, 너 훌륭하게 시험 자료 만들어 가지고 친구들한테 다 나눠 줘. 그렇게 해서 전도해야지.” 그래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나눠 준 족보가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나는데도 후배들이 보고 있더라고요. 그 족보에 기도문 써 놓고, 족보에 성경 구절 써 놓고. 아주 좋은 시험 자료를 만들어 놓으면 안 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세월이 20년 지나고 25년 지나니까 제 대학 때 친구들이 연락이 와요. “상준아, 우리 아이가 우울증이 있는데, 우리 가정이 지금 어려움이 있는데 상담해 줄 수 있겠니? 내가 그 교회 가면 안 되겠니?” 그렇게 인생에 정말 힘들었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여러분 축복의 통로라는 게 뭡니까? 내가 세상에서 직선으로 수직 상승해서 올라가면 사람들이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성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건가요?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는 그냥 내 일도 하기 바쁜데 왜 자꾸 저 사람이 보이게 만드시지?” 직장에서 남의 일 함부로 간섭하면 안 되거든요. 그거 알아요. 아는데, 하나님께서 자꾸 보이게 만드시고 도와주라고 하시고.
여러분, 공부하다 말고 “내일 시험인데, 지금 공부 어려워하는 친구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그러면 그거 도와줘야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가만히 놔두잖아요. 계속 공부만 하다가 나중에 호흡 곤란 오는 애들, 강박불안장애, 공황장애 오는 애들. 저는 그런 애들을 상담하잖아요.
“내 애는 공부만 해도 그렇게 안 되던데요.” 그러다가 30대, 40대 때 직장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 오고 공황장애 오고, 우리나라 최고 로펌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스펙을 가진 변호사가 급사하고.
여러분 인생을 왜 사나요? 뭐가 성공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새로운 학기가 시작이 되고 아이들에게 “야, 이번엔 좀 공부 좀 집중해서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해.” 그렇게 해서 애가 공부를 잘하면 인정받고 평안하고 자신감이 넘칠까요?
제가 “두려움 너머의 삶”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했는데, 너무 공부를 안 해도 이쪽 끝 벼랑에 걸치지만,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도 반대편 벼랑에 걸치게 돼 있어요. 완벽주의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꿈꾸는 불가능한 꿈이거든요. 그러면 그 벼랑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사업가들, 공부하는 사람들, 학자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도, 자녀들도 운신의 폭을 좁혀 가면서 사는가.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교실에서 성령의 호흡이 임하게 하여 주시고, 아멘. 평강이 임하게 하여 주시고. “야, 이제 평강이 임했으니까 흘러가. 제가 이제 평강이 임했는데요?” “바로 흘러가. 흘러가야 너도 살고 세상도 사는 거야. 세상만 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살리고 싶어서 흘러가라고 하는 거다. 너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큰일 나. 다시 썰물 시즌 오고, 너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야, 지금이야. 지금 일어나서 나가야 돼.”
“저는 어떻게 전도할 줄도 모르는데요.” 제가 전도 관련해서 새신자 묻다 책을 썼잖아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말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모르는 질문을 할까 이게 너무 두려운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이 자꾸 떠미시니까. 그래서 모르는 질문에 “어, 난 할 말이 없어” 해서 무안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창피를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말도 못 하면서 뭐 성경도 잘 모르면서 네가 뭘 나한테 얘기하겠다는 거야” 온갖 모욕도 당해 보고. 그런데 계속 등 떠미시니까.
여러분 왜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계속 갇혀서 살아야 됩니까? 직장에서, 가게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여러분 성령의 호흡과 평강이 임할지어다. 그리고 바로 흘러가게 될지어다. 바로예요, 바로. 그냥 내 안에 내 콘텐츠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임해서 그냥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이걸 막냐고요.
인렛, 아웃렛이라고 하잖아요. 인렛으로 들어왔으면 아웃렛으로 나가야 되는 거죠. 예수님의 피값으로 쟁취된 평강이 이제 우리 안에 흘러넘쳐서 강물같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학교에 있는 친구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직장에 있는 동료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가게를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손님들에게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내 주변의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마지막 2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다. 여러분 그러면 내 안에 평강이 임했어요. 평강이 그냥 흘러가는 정도로 은혜가 임했어요. 은혜가 흘러가는 정도의 영향력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영적 관점에서 놓고 보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의 능력이잖아요. 생명의 능력과 권세가 여러분에게 임한다는 거예요.
지난 코로나 팬데믹이 더 큰 팬데믹의 전조 증상이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앞으로 이것보다 더 무서운, 전 세계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만한 팬데믹이 왔다고 상상을 해 보세요. 온 세상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여러분 손안에 치료제가 들어왔어요. “제게 치료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할 때 “여러분 혹시 안 믿고 거절하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히시겠어요? 아니면 기쁘게 나눠 주시겠어요? 당연히 기쁘게 나눠 주는 거 아닙니까?
우리 안에 그냥 하나님의 평강이 흘러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생명의 권세가 임하게 된다는 거예요. 축복의 통로가 될지어다. 생명의 통로가 될지어다. 구원의 통로가 될지어다. 아멘.
그래서 절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새 학기, 새 학년에 “공부만 해라. 야, 올해는 좀 공부만 하자” 이런 얘기하지 마세요. 자녀들이 학교 기도 모임을 하는 것, 자녀들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는 것,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들은 학부모 기도 모임. 여러분 학교마다 학부모들 기도 모임이 형성되고 있거든요. 요즘 우리나라 엄마들이 강하잖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학부모들 기도 모임도 생기고, 대학교에도 학부모 기도 모임이 생기고. 할렐루야.
직장인들은 “아, 내가 내 일만 하지. 그냥 내 직급만 생각하지. 연봉 더 주면 다른 데로 옮기면 되지.”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동안 여러분의 회사에서 사람들을 축복하는 시냇가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하프타임 신회예배를 거예요. 숨지 마세요. 흘러가세요. 흘러가지 않으면 세상의 어둠의 흐름이 여러분을 염려할 겁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선한 흐름으로 흘러가세요.
흘러가라고 그러는데 “저는 아직 모르는데요. 성경도 잘 모르는데요. 복음도 설명할 줄 모르는데. 질문하면 난 대답할 말도 없는데요.” 이런 것은 여러분의 생각이고, 하나님께서 그냥 흘러갈 때가 됐다, 썰물에서 밀물로 타이밍이 지금 바뀌었다, 지금이다, 지금 들어가야 된다 말씀하시면 순종하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축복의 통로로 흘러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했으면 좋겠는데요. 마지막 찬양했던 “예수 안에 소망 있네” 우리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예수님이 주신 소망과 평강이라는 게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어 주시고 합법적으로 취득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구나. 나는 공짜로 얻었지만 예수님은 값을 지불하셨구나. 그래서 우리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냥 희망 사항이 아니라 참된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2026.03.08(주) | 주일설교 | 나를 통해 주님의 뜻 이루소서 (딤전 1:3-11)
[1516 주일설교] 나를 통해 주님의 뜻 이루소서 (딤전 1:3-11) ⎟ 이상준 목사 ⎟ 2026.03.08
설교 요약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을 막고 교회를 바른 말씀 위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에베소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자 교회였고, 그만큼 영적 공격도 강했다. 거짓 교사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며 성도들에게 변론과 우월감만 만들어 냈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지 못했다. 말씀은 자기 자랑과 논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교훈의 목적이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말씀 사역의 열매여야 한다. 성경 지식이 많아질수록 삶이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중적인 종교인이 되기 쉽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진실하게 반응하고, 말씀대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은 우리를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하게 하며 생명을 살리는 도구다.
또한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운 척하는 사람을 치장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들과 사람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을 열거하며, 인간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복음은 정죄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도 복음의 능력 밖에 있지 않으며,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죄의 본성과 유혹을 넘어서는 삶을 살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말씀은 고인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생수처럼 사람을 살려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시며, 내게 맡기신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배우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되도록 살아가야 한다.
전문 스크립트
네, 오늘 설교의 제목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나를 통해 주님의 뜻 이루소서. 디모데전서 강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겨 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오늘 내용입니다. 3절과 4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다기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로마에 2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그가 열심히 심혈을 기울여 세운 초대교회들을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풀려나자마자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를 향하게 됩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빨간색으로 박스가 돼 있는데 항구 도시고 인구가 30만인데, 당시는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소아시아의 수도 역할을 했고 로마의 5대 도시들 중에 하나였어요.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이 됐잖아요. 그래서 이탈리아 제국의 심장인 로마, 그리고 소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 그리고 시리아 지역의 수도인 안디옥, 안디옥은 이제 안티오코스 왕조에서 세운 거죠. 그래서 안티옥입니다. 그리고 이집트 북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까지 5대 도시 중에 하나였어요.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보통 어느 한 도시를 가도 한두 달, 길어야 세 달, 여섯 달 이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무려 3년 동안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전도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 양육을 한 교회, 이 교회가 어느 교회요? 에베소 교회인 거예요.
너무너무 중요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기독교의 부흥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나서 고대 7대 불가사의라고 불렸던 아데미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입니다. 들어보셨죠? 아르테미스. 그 아르테미스 신전의 사업이 파리가 날리게 된 거예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아지니까 신전 사업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 그러고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죠.
그러면 이렇게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모든 일이 잘 풀릴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은혜가 넘치면 영적인 회방의 역사도 강해지게 되죠.
에베소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센터 역할을 하게 되자 여기에 유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많이 모이게 됐어요. 바울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단들에게 넘겨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교회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교회들도 둘러봐야 되니까, 그래서 마음을 결정한 게 가장 신뢰하는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두기로 결정한 거예요.
그럼 이단이 도대체 뭘까? 할렐루야. 제가 말이 꼬일 때가 있는데, 이단이라는 것은 영어로 이제 heresy라고 하는데, heresy라는 말 자체가 hetero라는 단어하고도 같은 어원을 가지며 다르다는 뜻이에요. 어떤 뜻이요? 다르다.
정통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이야기하거나 그 교리를 설파하는 교파, 교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단은 영어로도 헬라어로도 다르다는 뜻이에요.
한자로는 다를 이 자에 끝 단 자입니다. 그래서 끝만 다른 거예요. 거의 똑같아요. 그런데 끝만 달라요. 조금 달라요. 그러니까 여러분, 분별하기가 쉽겠어요? 어렵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는 이단 종파들도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이 넘어가 있어요. 목회자들도 넘어가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왜 멀쩡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이단에 빠지는 것일까? 보면 굉장히 소외돼 있었던 사람인데 밀착 케어를 해 주니까 가는 사람도 있지만,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다고 하다가 빠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 비슷하잖아요. 집밥이 뭐 똑같죠. 그러니까 뭔가 신박한 가르침이 없을까, 이런 걸 쫓아가다가 빠지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여러분, 외부 세미나나 성경 공부나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교회 리더십들하고 꼭 상의를 하셔야 돼요. 아무도 반응이 없는데, 상의를 하셔야 돼요.
가끔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이 단체가 건강한 단체입니까, 아니면 이단입니까? 그렇게 저한테 물어보시면 저도 대부분 찾아봐야 돼요.
그럼 제가 뭘 찾아볼까요? 지난번에 리조이스 집회를 했던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님이라고 계신데, 그분이 매월 월간지로 발행하는 현대종교가 있어요. 현대종교 온라인 사이트가 있습니다. 왜 기독교 사이트인데 현대종교냐? 현대에 있는 굉장히 이상한 다양한 이단 사이비 종교들을 다 여기 정리해 놓은 거예요. 매번 업데이트도 해 주고.
그래서 여러분도 이걸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단 이단성이 있으면 저는 권면하기를 참여하지 마시고 예의주시하십시오. 이상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예의주시. 이 단어를 기억하세요.
예의주시라는 것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시라는 거예요. 그러면 몇 년 안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요즘 인기 있고 뜨는 강사나 단체가 있을지라도 여러분 주의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의를 하실 필요가 있어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오늘 본문에 보니까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했다. 유대인들이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로마인도 헬라인도 아닌데 웬 신화에 빠졌을까?
이 얘기는 뭐냐 하면, 구약 성경에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의 족보를, 성경에도 안 나온 족보를 막 자세하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영웅적인 스토리를 더해서 신화처럼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훌륭한 인물들의 후손이다, 우리가 이것을 자랑했던 거예요. 일종의 자신들의 영적인 후광 효과, halo effect로 사용을 한 거죠.
제가 목회자나 설교자들에게 권면을 할 때가 있어요. 뭔가 새롭고 신선하고 신박한 것을 자꾸 하려고 하지 마시라.
목회자들의 유혹이 뭐냐 하면 뭔가 신박한 설교를 해야 사람들이 재밌게 듣지 않을까, 또 교회 프로그램도 뭔가 새롭고 참신하고 강렬한 걸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유혹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걸로 교회가 부흥하나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분이 가장 놀라우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신비 그 자체이신 줄로 믿습니다. 신비주의를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신비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성령님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자이시고 최고의 능력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새로운 목회지에 부임을 하면 6개월, 1년은 허니문 기간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6개월, 1년 지나면 어떻게 된다는 얘기예요? 허니문은 끝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목사님의 설교가 새롭고 좋다 그러다가 이제 그분도 컨텐츠가 한계가 있어서, 컨텐츠가 떨어지면 성도들의 기대감도 줄어든다. 그런데 저는 이게 과연 목회자들이 정설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일까 생각해요.
여러분, 이 진리의 말씀은 끝없이 샘솟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목회자만 말씀 사역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순장님, 순인도자, 일대일 양육자, 그리고 우리 어린 자녀들을 양육해 주시는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말씀 사역을 하잖아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 말씀에 인위적인 양념을 많이 치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창의적인 사역을 하지 마시라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이 말씀 자체가 최고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진짜 고급 레스토랑을 가면 레시피는 간단해요. 그 재료 자체가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 맛 자체를 살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신뢰하고 증거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이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지 못하고 변론만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성경의 지식을 막 부풀려 가지고 우리가 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자랑하니까, 상대적으로 성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초라한 신앙인이 되게 만드는 거예요. 위화감을 조성하고 서로 논쟁하게 되는 교회로 빠지게 된 거예요.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 이 경륜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오이코노미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신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셔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인 가르침으로 성경을 가르치면 인간적인 결과, 갈등만 생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에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말씀 사역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러지 않으면 성경을 통독한다든지, 성경 공부를 하거나 묵상을 하거나, 전부 인간적인 자랑으로 가게 돼요. 내가 성경을 몇 독을 했지, 내가 성경 지식이 얼마나 있지, 이런 개인적인 교만과 거짓으로 가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말씀의 은혜가 임할 때, 여러분 설교를 듣거나 개인적으로 묵상을 하시거나, 아니면 통독을 하거나, 말씀의 은혜가 임할 때 그것을 고인물로 자기 혼자 가둬두지 마시고 흘려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내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료에게 흘러가서 또한 생명을 살려내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과 같이 읽어 보고 싶은 문장이 있는데요. 건강한 성도는 전도하여 또 다른 성도를 낳고, 건강한 순은 분순하여 또 다른 순을 낳고, 건강한 교회는 개척하여 또 다른 교회를 낳습니다.
교회는 상당히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갖거나, 또 안정적 성향을 추구하게 돼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내 안에 은혜가 충만하면 이것이 흘러가고 생명이 흘러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죠.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게 가장 감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고 청지기의 삶이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인은 그런 말씀 사역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신화와 족보에 열중하면서 성도들을 오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말씀 사역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얘기를 한 것이에요.
이어지는 5절 말씀 한 절 읽겠습니다.
시작.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교훈의 목적,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이 뭐라고요? 한 단어로 맨 마지막에 사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뭘까요? 결국에는 사람 살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은사가 넘치고 교회가 부흥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말했잖아요.
결국 신앙의 본질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사랑의 목적에 부합하게 받아들이려면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될까? 오늘 세 가지 태도를 얘기한 거예요.
청결한 마음, 두 번째가 뭐죠? 선한 양심. 세 번째가 뭐죠? 거짓 없는 믿음.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보시면 거의 비슷한 표현들입니다. 유사한 거예요. 이걸 한 단어로 정리해 보면 순전함, 선함, 진실함 이런 것들이에요.
하나님의 성품과도 같은 것인데, 이 세 가지는 결국 마지막 진실함으로 귀결된다고 보입니다.
최근에 목회자들 모임에 갔다가, 지난번 목회자 모임 때 저에게 “목사님, 우리 교회 좀 상의할 게 있습니다” 이야기하셨던 선배 목사님이 계세요. 그분이 중견 교회 담임목회를 오래 하시다가 이번에 은퇴를 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은퇴를 하셨는데 아직 후임 목사님을 못 세운 거예요. 그래서 후임 목사님을 세우기 위해 “어디 좋은 목사님이 없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떤 목회자를 찾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목회자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덕목이 있겠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목회자, 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진실한 목회자.
여러분, 성경 지식이 많고 교회 사역도 잘하고 설교도 청산유수로 잘한다 할지라도 만약에 그의 삶과 인격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 목회 리더십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우리가 성경의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이중성이 생기는 거예요.
말씀을 내가 듣기는 듣는데, 말씀에 부딪혀서 반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내 삶을 거기에 맞춰서 변화시키지 않으면 신앙과 인격이, 신앙과 삶이 어긋나는 이중적인 종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고 예수님이 그래서 위선자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어떤 사람, 청결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 마음이 청결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3장 1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선하게 행하려 함으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일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라 의도 자체가 선하게, 선하게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 사역자인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성도들에게 선한 양심을 얼마나 많이 강조하는지 몰라요. 왜 영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마음, 어두운 마음,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기 때문인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거짓이 없는 믿음, 위선이 없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거죠.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나 자신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신앙, 다르지 않는 신앙, 그런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회자가 20대에 됐는데, 30대 중반부터 심각하게 제일 많이 고민한 게 이거였던 것 같아요. 교회에서의 모습이나 내가 집에 가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내가 사람들하고, 평소에 친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목소리가 변조가 안 되는가. 내가 가족하고 이야기할 때와 성도들하고 이야기할 때가 다르지 않은가. 이런 고민을 많이 하기 시작했어요.
똑같은 모습을 가져야겠다. 여러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 앞에 진실하게 반응하면 우리의 내면이 깨어지고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사역이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 그 뒤에 부연 설명을 하는데요. 8절에서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율법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왜 주셨는가? 법적 기준이 있으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건 잘못이구나, 이건 죄구나” 이거를 알게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3장 20절 하반절에 보면 율법으로는 뭐를 깨달아요? 죄를 깨닫게 돼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이고, 율법의 순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주의 율법 교사들이 성경을 갖고 자기 자랑으로 삼고, 또 자신의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잖아요. 그건 잘못 쓰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의롭고 나만 잘났고 나만 종교적으로 옳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주신 게 아니라, 정반대로 세상의 죄인들이 그 말씀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와 식사를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항의하잖아요. 어떻게 당신의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하고 식사하고 교제할 수 있느냐. 그때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세요?
마가복음 2장 1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병원이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있나요, 병든 사람을 위해서 있나요? 병든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는 의인이 오는 곳인가요, 죄인이 오는 곳인가요? 죄인이 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얘기하는 순간 “그러면 내가 죄인이어서 여기 와 있다는 얘긴가” 이게 마음에 불편하시다면 아직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제가 종종 얘기하는데, 상담 사역하시는 분들 중에 자기 내면의 상처와 문제를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상담사가 되는 분들이 많아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죄가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만 죄가 많을까요? 내가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심각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지금 죄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 두 번째 부류는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9절과 10절을 이어서 보시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 첫 번째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불법한 자, 두 번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 세 번째 경건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경배하지도 않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죄인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려 하지 않고 세속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망령된 자라는 것은 십계명 제3계명에서 나오는 표현인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에요. 이것은 십계명의 앞부분 네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죠.
두 번째 부류는 사람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이에요. 아버지를 죽이는 자, 어머니를 죽이는 자. 구약 성경에서 이런 사람들은 굉장히 엄벌에 처하게 돼 있죠.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동성애자를 얘기합니다. 인신매매하는 사람, 사람을 유괴하거나 팔아넘기는 사람, 그리고 양심을 팔아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진실을 매도하며 위증하는 사람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모든,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돌아오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지, 자기 잘났다고 의로운 사람들 자기 치장하라고 주신 게 아니다라는 말씀을 한 거예요.
제가 이 내용들을 하나씩 다루려면 매주 하나씩 해야 되는데, 오늘은 동성애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제 기억에는 아마 군대에 있을 때였던 것 같아요.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용산에서 복무하면서 카투사였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캠퍼스에 항상 와서 후배들 말씀 양육하고 했는데, 그 캠퍼스에서 동성애 그룹이 커밍아웃을, 제 기억에는 대한민국 캠퍼스 중에서 제일 처음 커밍아웃을 한 단체가 있었어요. 그래서 캠퍼스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그 당시는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되냐 이런 사회적인 담론도 거의 없던 때였고, 전면적인 존재 전쟁이 시작됐는데 왜냐하면 캠퍼스에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그때만 해도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이들이 동성애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고 대자보를 곳곳에 붙여 놓은 거예요. 중앙도서관 앞에, 학생회관 앞에, 각 단과대학 앞에.
주로 내용은 이런 거였어요. 레위기 20장 13절에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엄벌에 처하시는 극도의 죄다, 이런 고발 내용이었어요.
고린도전서 6장 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 여기도 동성애가 나오죠. 그래서 구약 성경에만 이야기한 게 아니다. 신약 성경의 대표주자인 사도 바울도 동성애자는 천국 못 간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고발하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그 당시에 성경을 열심히 보는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고발을 하는 선교 단체 대자보가 붙으면 그다음에는 또 그거를 반대하는, 이들을 수용해 줘야 되고 포용해 줘야 된다, 긍휼히 여겨야 된다 이런 대자보가 붙고, 그다음에는 또 선교 단체에서 더 강력한 고발 대자보가 붙고, 전쟁이 난 거예요.
제가 이걸 보면서 참 안타까웠어요. 여러분, 어떤 종류의 죄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되고 변화되지 않을 죄인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돌이키기를 원하시잖아요. 왜 말씀에 정죄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고, 죄다 고발만 할까. 여러분 정죄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해요. 속죄만이 사람을 구원하게 되어 있어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계속해서 바른 소리만 하는 분 있죠. 바른 소리 하면 사람이 바르게 되나요? 피곤해져요. 괴로워져요. 관계가 더 안 좋아지게 돼 있어요. 자식한테 맨날 바른 소리 해 보세요. 바른 소리 해 보세요. 애가 좋아지나. 사랑을 부어 줄 때 아이는 변화되는 거예요.
제가 흥분해서 딴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왜 저런 사람이 교회를 다닐까. 저렇게 세속적인 말을 하고, 저런 사람이 교회 왜 나올까” 여러분 그런 사람이 나오는 게 반가운 거예요. 그런 분들은 교회 아니어도 놀러 다닐 데 많아요. 그런데 교회를 나오셨다는 게 너무 반가운 거예요.
순예배를 해 보면 순예배 때 삐딱하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매주 나와. 왜 저 사람은 나와서 나를 힘들게 하지? 순장님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그분이 다른 데 가서 술자리에서 교회 비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나와서 자신의 내면의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받고 싶은 거예요.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굉장히 다양한 분들을 상담하잖아요. 제가 지금 얘기하는 분들은 여러분 누군지 다 모르는 분들이에요.
한번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청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본인이 원해서 온 게 아니고 엄마에게 끌려왔는데, 군대에 갔다가 선임에게 당해서 후천적으로 동성애자가 된 케이스예요.
이 친구가 자기가 원해서 온 게 아니니까 “목사님하고 상담 좀 하자” 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이 벌개져 가지고 성질을 내는 거예요. 결국 교회는, 성경은 동성애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거부하는 거 아니냐.
제가 한참을 듣고 있다가, 청년, 하나님을 믿어? 그런데 하나님 믿는데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요. 그럼 얘기가 통하잖아요.
제가 동성애, 이성애를 떠나서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너 휴가 나와서 매일 밤 이태원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새벽까지 파트너 못 만나면 새벽까지 돌아다니거든요. 이 친구들이. 너 그렇게 성적 탐닉에 빠져 사는 걸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니? 대답 못 하더라고요. 자기도 죄인 걸 아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이렇게 얘기해요. 또 반대 진영에서는 아니다, 후천적이다. 이 선천적이다, 후천적이다 갖고 논문이 어마무시하게 많아요.
여러분, 제가 볼 때는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 이 문제는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이면 허용해 줘야 되고, 선천적이면 인간의 본 모습이니까 인정을 해 줘야 된다, 이것은 유물론적 관점이에요. 사람에게 영혼이 없고, 사람에게 내세가 없고, 절대자가 없고, 인간은 물질 덩어리고 몸뚱이 하나뿐이다라고 볼 때 인간을 보는 관점이에요.
여러분, 인간은 태어나기를 그럼 선천적으로 어떻게 태어났는가? 선한 마음만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고요, 악한 마음이 굉장히 선천적으로 많아요.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좋은 장난감을 갖고 있는데 옆에 친구가 새 장난감을 갖고 오잖아요. 그러면 내가 갖고 있는 건 안 보여. 옆에 친구의 것을 빼앗으려고 옆에 애를 할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그때 애들의 얼굴이 흉포하게 변화되는 걸 보면 어린 것들도 다 죄인이에요. 다 죄인이에요. 애들이 잘 때만 천사인 거지.
우리가 선천적으로 누가 미우면 없애고 싶잖아요. 그 마음이 심해지면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의 욕구가 생기는 겁니다. 내가 어려운 피해를 가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에게 있어요, 없어요? 다 있어요. 내가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풀리면 “에이, 성질내고 그냥 확” 그러고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다 있어요.
그러면 선천적이라고 해서 여러분의 욕구대로 다 하면 세상이 수용해 줘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 줘야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을 굉장히 열등하고 하등하게 취급하는 유물론적 관점인 거예요.
제가 서인교회에서 화요성령집회 인도할 때 대학교 3학년짜리 학생이 그 집회에 처음 나오게 됐어요. 이 친구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중학교 3학년 때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자기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집안이 난리가 난 거예요. 왜냐하면 굉장히 신실한 크리스천 가정이었거든요. 아이가 그 얘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여러분, 그래서 이런 아이들이 그 얘기를 하는 순간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내 아이가 그럴 줄 몰랐다. 두 번째, 얘가 그날로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딱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들을 하는지 몰라요. “공부하고 나중에 신앙생활 하라”고 얘기했는데, 그걸 후회하는 거예요.
이 친구가 굉장히 스마트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탑 랭킹의 명문대를 갔어요. 공부는 잘하는데 계속 파트너가 바뀌는 거예요. 동성애자들 몇 명이 저한테 한 얘기가 그겁니다. “목사님,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라 욕구입니다.”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가 쉽지가 않아요. 굉장히 욕구에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대학교 3학년짜리 여학생의 친구가, 크리스천 친구가 “그래도 교회 한번 가자”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교회를 나온 거예요. 그날 화요성령집회에 참석해서 그날 하나님 앞에 고꾸라진 거예요. 그 후 2년 동안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됐어요.
세례를 받는 날 얼마나 감사한지. 세례식이 끝나고 예배가 끝났는데, 제가 이 친구에게 그래도 걱정이 되잖아요. 2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제가 궁금하니까 “요즘 잘 지내니?” 그랬더니 이 친구가 한 얘기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에요.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여러분, 인간이 “나는 본성을 이렇게 타고 나서 어쩔 수 없어” 그러면 도둑질도 하고 사람도 죽이고 “본성이 이렇게 태어났어” 그러면 그다음 아무거나 해도 되나요? 여러분 지금 서구 사회가 동성애 다음에 뭐로 가는 줄 아세요? “나는 동성애자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두 번째는 “나는 소아성애자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여러분, 이게 지금 사람을 정말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나는 그런 큰 죄는 안 짓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죄를 그렇게 큰 죄 안 짓고 살다 보면 내가 굉장히 괜찮고 의로운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고 열심히 살다 보니까 죄를 지을 기회가 부족한 거예요. 진짜예요. 죄를 지을 기회가 부족해요.
제가 지금부터 얘기하는 사람들도 여러분 다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예전에 공동체 순장이 정말 성품도 너무 좋고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순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순장이 오피스 와이프를 두고 외도하는 걸 아내가 알게 된 거예요.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한 것도 아니에요. 정말 지극정성으로 잘했거든요. 남편도 착한 사람이지만 아내도 정말 착한 사람이었거든요. 아내가 너무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남편에게 “당신 이럴 수 있느냐,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랬더니 남편이 더 가관인 거예요. “내 신앙, 이렇게 좋고 사람들은 잘하고 있기 때문에 이거 공동체에 얘기하면 안 된다. 사람들 시험 든다.” 그리고 자기는 그 삶을 계속 지속하는 거예요.
더 예전입니다. 저희가 십계명을 교회에서, 모든 캠퍼스, 모든 설교자가 십계명을 한 주에 하나씩 설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간음하지 말라, 그 설교를 했는데 서인교회 새신자 예배에서 그 설교를 하고 나서 설교자가 “정말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죄의 습관을 끊기 원하는 사람들은 예배 후에 오셔서 상담하시라” 그렇게 했어요.
여러분, 내가 그런 삶을 산다고 해도 “그거 끊겠습니다” 하고 찾아올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런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그 숫자에 충격을 받은 거예요,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존경받는 리더십이 은퇴를 하고, 물론 스트레스는 있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분도 너무 순한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미웠는지 아내 목을 졸라 죽이겠다고 해서 가족들이 다 충격을 받고 교회가 다 충격을 받은 거예요.
이런 문제가 여러분, 개인 사회에만 일어납니까? 교회 안에서도 많아요. 그래서 사업에 투자하라고 하는 다른 친한 교인이 있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원금 들고 튀는 사기범들이 교회 안에서 많습니다.
그래서 그걸로 몇 년을 투자하게 해요. 3년에서 5년을 신뢰 관계를 쌓고 나서 중보기도 엄청 해주고 밥 많이 사주고 순예배도 다 우리 집에서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투자하라 그래요.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교회 안에서 각종 범죄가 일어납니다.
과연 우리가 죄인인가, 의인인가.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들이에요. 죄의 문제를 내가 다 털어 버렸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그냥 주님의 의로 나를 덮어 주신 상태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방심하고 있으면 한순간에도 온갖 추하고 더러운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기 인식이 명확하게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30년, 50년, 60년, 70년 멀쩡하게 살다가 죄의 문제로 한순간에, 한 방에 날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소개했던 그 대학생의 고백처럼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본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건 마치 비행기와 같은 거예요. 여러분, 중력이 잡아당기잖아요. 기체가, 비행기 동체가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요. 그런데 이게 하늘을 나는 게 대단하지 않습니까. 죄의 중력이 아무리 잡아당길지라도 복음의 엔진을 달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성화의 활주로를 내달리면 하나님의 은혜의 창공을 비상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히브리서 12장 4절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천성문 앞에 이를 때까지 죄와 혈투를 벌이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본성을 따라 살지 마세요. “저는 선천적으로 우울 기질입니다.” 저는 비 오는 날이 더 편해요. 어제도 구석에 가서 혼자 앉아 있는 게 더 편해요. 그래도 하나님이 “일어나 외쳐라” 그러면 순종해야 되는 거고, “열심히 복음을 위해서 뛰라” 그러면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저는 선천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저는 가기 싫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 수 없어요. 그냥 하나님 부르심 따라 가는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저희 두 아들이 20대인데 음악을 공부할 때도 음악을 듣고, 어디를 이동할 때도 음악을 듣고, 항상 음악을 듣더라고요. 그러더니 제 차에 타서 둘 다 그러는 거예요. “아빠는 왜 음악을 안 들어? 어떻게 음악 없이 인생을 살 수 있어?”
생각해 보니까 저도 20대 때 음악 많이 들었거든요. 10대 때도 우울한 음악 특히 많이 들었어요. 재즈도 좋아하고 크로스오버도 좋아하고 피아노곡 특별히 많이 좋아하고. 그런데 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 내려놨습니다.
여러분, 세상 문화 즐기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과 건강과 에너지에는 한정돼 있잖아요. 내가 어디에 싱글 포커스, 초점을 맞추고 살 것이냐.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이에요. 주님께 정말 초점을 맞추고 살 것인가.
저는 커피를 잘 안 마십니다. 커피 마셔도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안 마십니다. 이유는 제가 무엇을 하면 쉽게 빠지는 성격이거든요. 쉽게 얘기해서 중독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나, 주님께 빠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가능한 절제하자” 그래서 커피를 안 마시는 거예요.
제가 올해 한 가지 더 결단한 것은 탄산음료도 가급적 마시지 말자. 이건 결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내려놓는 거예요. 내가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지. 제가 어디 가도 사진을 열심히 안 찍어요. 사진 찍는 것도 내가 취미 들이지 말아야지. 난 그냥 초점을 주님께 맞추고 살아야겠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풍류와 낭만 좋죠.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과 건강과 재능을 어디에 맞추고 살 것인가. 나는 굉장히,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쉽게 노출되는 사람들이고, 죄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자신이 천성문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하나님, 온전하고 싶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 고백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마지막 11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한 성경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내는 복음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말씀으로 사람들을 살려내시잖아요.
여러분의 신앙생활 연수가 몇 년이든, 내가 50년 차야, 내가 장로야, 권사야, 이건 소용이 없어요. 내가 목사야, 이런 것도 소용없어요. 내가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말씀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생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인물이 되어 버렸다면 여러분 종교는 오히려 사회악이 되잖아요.
종교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가슴에 손을 놓고 기도할까요?
2026.03.07(토) | 새벽기도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21:1-11)
새벽기도 26030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21:1-11)
설교 요약
-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벳바게에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셨고,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 이 장면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 준다.
- 벳바게는 무화과 열매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고, 아직 사람을 태워 본 적 없는 나귀 새끼는 주님께 쓰임받았다. 같은 자리에서도 누구는 열매 없고 누구는 헌신으로 쓰임받는다는 교훈이 있다.
- 중요한 것은 내 준비가 완벽해질 때가 아니라, 주님이 “내가 쓰겠다” 하실 때 즉시 드려지는 삶이다.
- 사랑은 낮아지는 것이며, 한 영혼을 살리는 삶은 결국 눈높이를 낮추고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삶이다.
-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다. 호산나는 단순한 환호가 아니라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다.
-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고도 “이는 누구냐”라고 반응했다. 주님이 눈앞에 오셔도 참으로 알아보지 못하면 인격적 관계는 열리지 않는다.
- 설교의 결론은 분명하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기꺼이 자신을 내어 드리고, 평탄할 때나 고난의 때나 “주님만이 나의 왕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한 가지 먼저 안내드리고 말씀 읽겠습니다. 오늘 순장사관학교가 이 장소에서 오전 10시부터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개인 기도 시간은 8시까지 진행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좌석 세팅을 해야 되는데요. 도와주고 싶으신 선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은 남아서 함께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여기 정리를 하고 세팅하는데, 오늘 한 260명 정도 오기 때문에 라운드 테이블 세팅을 해야 해서 일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1절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 하라 하였느니라.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아멘.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저희가 3월 달에 말씀 암송하는데요. 같이 읽어 볼까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한 영혼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정말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21장 시작인데요. 마태복음 16장이 마태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죠.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시는 내용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17장에 변화산 사건이 있었죠. 그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가 예언하신 그분, 또 예언하신 그 사건, 십자가의 사건이 올 것을 알려줍니다.
그 변화산 사건 이후에 18장부터 20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저 북쪽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을 따라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의 삶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주일로는 우리가 종려주일이다 이렇게 부르는데, 영어로는 Palm Sunday라고 합니다. 종려나무를 palm tree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Palm Sunday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주님을 환영한 날이죠.
1절부터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께서 요단강을 지나서 여리고, 해발고도 마이너스 200미터죠, 여리고에서 쭉 돌산을 따라 올라가다가 감람산을 건너면 시온산이 나옵니다. 시온산 위에 어떤 도시가 있죠? 예루살렘이 있죠.
여러분, 확신을 갖고 대답하세요. 감람산이 높을까요, 시온산이 높을까요? 안 가서 모르죠. 시온산, 예루살렘도 고도가 다르긴 한데 보통 760에서 765미터 정도 이야기하고요. 감람산이 830미터예요. 감람산은 820에서 840 정도 되거든요. 그러니까 해발고도 마이너스 200에서 거의 1000미터의 돌산을 계속 올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감람산 언덕을 넘으면 시온산이 보이는 거예요. 훨씬 더 고도가 높죠. 그런데 이제 베다니를 지나서 벳바게를 지나면, 그다음에 기드론 시내만 건너면 시온산이에요.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그러니까 1절 다시 보여 주시면, 감람산 어디에 이르렀다고요? 벳바게에 이르렀다. 벳바게에 이르렀다는 것은 예루살렘 코앞에 이르렀다, 이런 뜻이죠. 이제 시내만 건너가면 입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맞은편 마을. 예수님이 지금 길 위에 계시니까 벳바게에 가라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그곳에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라. 그런데 주인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남의 것을 끌고 오라고 하시니까, 주인이든 아니면 그 관련된 사람이든 누가 “이거 왜 끌고 가냐?”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라고요? 주가 쓰시겠다. 이 한 마디만 하면 바로 내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서도 내 타이밍에 맞춰서 주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타이밍에 맞춰서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할 때 쓰임받을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아침 일찍 나와서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저기 무화과나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너무 반가워서, 아침 식사도 못 하고 성전으로 출근하시니까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셨죠. 너무 배가 고파서 반가워서 무화과나무 가까이 갔는데 열매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셔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뒤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이제 내일 본문이겠네요.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어떤 분들은 “본인이 배고프다고 이렇게 저주까지 하실 필요가 있냐?” 질문하시는데, 또 본문에 보면 무화과가 열매 맺을 시즌이 아니었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시즌이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냐고요.
그런데 제철은 아니었지만, ‘파게’라는 예비 열매가 맺히는 시즌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지금도 가난한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이 파게를 눈깔사탕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그거 따서 먹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철 열매를 구하신 게 아니라 파게를 구하셨던 거죠.
벳바게잖아요. 벳바게라는 게 무화과 열매인 파게의 마을이라는 뜻이에요. 파게의 마을에서 파게를 찾았는데 파게가 없었다는 거예요. 저 혼자 재밌어하는데, 이상하잖아요.
여러분, 베들레헴. 룻기를 보면 베들레헴이잖아요. 레헴이 떡이니까, 베스는 집이고 레헴은 떡이거든요. 그러니까 떡의 집에 떡이 없어서 그 땅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다. 이게 모순인 거죠.
어쨌든 그래서 예비 열매를 구하신 건데, 그게 없었다고요. 제가 지금 무화과나무 얘기를 왜 할까요? 나귀 새끼 얘기하다가요. 이 나귀 새끼에 대해서 다른 대조 본문에 보면, 사람이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예요.
그러니까 얘도 지금 시즌이 아닌 거예요. 사람이 타 본 적도 없고 물건을 부린 적도 없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미완성입니다. 그런데 그 나귀 새끼를 타신 거예요. 예수님이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어요. 그러니까 이 나귀 새끼도 자기 타이밍이 아닌데 기꺼이 주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게 뭔가 하면, 무화과나무도 그렇고 나귀 새끼도 그렇고 전부 둘 다 벳바게 출신이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감람산, 올리브 마운트를 넘으실 때 마지막 지나가는 마을.
여러분, 그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붙잡은 사람이 삭개오고,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붙잡은 사람이 소경 거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잖아요. “아유 뭐 또 주님 오시겠지.” 아니요. 주님이 그 마지막 여리고를 지나서 올라가시면 다시 오지 않으시잖아요. 그래서 “주님, 내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십시오. 지금입니다. 지금 저를 만나 주셔야 됩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내 때가 아니어도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기꺼이 쓰임받겠습니다, 이 마음의 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사에서도 일을 해 보면 그렇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일을 부탁하면 도와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별로 많지 않구나. 있긴 있는데, 벌써 무엇을 부탁해도 “안 도와줘야지” 이런 마음의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부탁하기 어려워집니다.
집에서도 그렇잖아요. 집안일은 다 같이 하는 건데 엄마한테만 다 시켜 놓고, 청소가 됐든 빨래가 됐든 설거지가 됐든 분리수거가 됐든 얘기를 하면 “그래, 내가 하려고 그랬는데 바로 해 줄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 미적미적 도망다니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실 때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준비라는 것은 내 인생의 준비가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 “주일학교 선생님 하시죠” 그러면 “저는 성경을 잘 몰라서요” 그래요. 그럼 제가 그렇게 얘기하죠. “그러면 성경을 어느 만큼 알면 주일학교 교사할까요?” 성경을 목회자들도 내가 다 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성경을 어느 만큼 알아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말씀을 나누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새벽에 싱어 좀 하시죠. “전 노래를 잘 못하는데요.” 괜찮습니다. 볼륨을 좀 줄여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새벽에 리더 외에는 싱어들 소리는 볼륨이 생각보다 작아요. 그래서 잘 안 들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어들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배를 섬기는 거예요.
순장하시죠. 주차 사역 좀 하시죠. 사역 팀장 좀 하시죠. 그러면 “기도해 보겠습니다.” 이게 완곡한 영적 거절법이 되신 분들이 많아요.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대답이 없어요.
여러분 정말 나의 삶,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건강, 나의 재능, 이것을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언제든지 내어드릴 마음이 있는가? 언제든지 내어드릴 마음이 있는가? 주님,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주님,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삶이에요. 왜냐하면 주인이 맡겨 놓은 거잖아요. 여러분, 내 시간이 내 것입니까? 내 물질이 내 것입니까? 내 재능이 내 것입니까? 주인이 맡겨 주신 거잖아요. 청지기의 삶이라는 것은 그래서 주인이 와서 “그거 좀 줘볼래?” 하면 “네” 그러고 드리는 거지, “왜 이러십니까? 제가 지금 이거 갖고 한참 뭘 해야 되는데”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이어지는 말씀 4절,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마태복음의 저자가 누구죠? 마태잖아요. 그런데 마태가 주인의 즉각적인 순종, “주가 쓰시겠다” 하면 바로 내 주는 것, 또 나귀 새끼가 제때 헌신하고 쓰임받는 것, 이것도 굉장히 귀한 이야기인데 이것보다 마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우리는 우리가 내어드린 것이 스스로 기특하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고 이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이 사는 땅 가운데 겸손의 왕으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을 생각해 보면,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잠시 오신, 잠시 활동하신 그때 내 나귀를 쓰셨다.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할렐루야.
그래서 한 영혼을 살리는 데 우리가 쓰임받고, 예배를 살리는 데 쓰임받고, 순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살리는 데 내가 쓰임받고,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받고, 여러분 너무너무 감사한 것이죠.
스가랴 9장 9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무려 450년 전에 예언자가 예언한 거죠. 그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 여러분,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눈높이 사랑을 해 주신 거예요. 저희 올해 표어가 뭐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키우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돼요, 안 낮춰야 돼요? 낮춰야 되는 거예요. 순장이 순원들을 양육하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되는 거예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되는 거예요.
그들의 필요를 살피고 눈물을 닦아 주고 격려해 주고 배려해 주고, 그게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가끔 “우리 아이들이 뭐가 필요합니다” 이런 얘기를 해 주시는 게 저는 너무 귀한 것 같아요.
최근에도 어떤 선생님이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가정적으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제가 공동체에서 상황을 살펴보니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거예요. 아이가 셋인데 한 달 생활비가 100만 원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아이가 문제집이라도 사고 참고서라도 살 수 있게, 온라인으로라도 수강을 할 수 있게 엄마하고 그 아이하고 잠깐 보자고 했어요. 주일날, 내일. 그리고 장학금을 드리려고 해요. 공개적으로 “장학금입니다” 이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돈이 생기면 생활비로 먼저 쓰려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예요. 저는 이 아이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부할 의욕이 있는데 공부를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필요를 “내가 주일날 한 시간 가르치면 끝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아이의 모든 상황을 살피고 가정 상황을 살피는 선생님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저를 따라해 보세요. 사랑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아상이 건강한 사람은 낮아지는 게 힘들지 않아요. 그런데 자존심만 강한 사람은 낮아지는 게 참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죠.
교회 주차 봉사를 하거나, 교회에서 안내로 섬길 때 가끔 짜증내고 성질내고 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여러분 잘 대답을 못 하는데 있어요.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정말 그만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간사님들에게,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가 세상에서 일하지 않고 교회에서 일해야지” 하고 시작했다가, 간사 1년 차, 2년 차에 제일 많이 그만둔다고 했어요. 내가 꿈꿨던 교회가 아닌 거예요. 사람들이 전화해서 하대해요. 면전에서 하대해요. 여러분, 간사님들을 왜 하대합니까. 그럴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소중합니다. 네, 모든 사람들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러나 섬김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낮아지는 것이 참아서 하는 것이거나 예의상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정말 사랑으로 해야만 가능한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누가 부모가 자식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린 아이들을 교회에서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천상의 보좌로부터 이 땅까지, 이 참혹한 죄악의 땅, 어둠의 땅에 낮아지셨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를 왜 이렇게 무시하지, 우습게 보지” 그렇게 반응하기보다, 내가 사랑으로 선택한 자리인가를 기억하셔야 돼요. 내가 사랑해서 섬기기로 선택한 자리인가. 그러면 그 자리에서 섬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6절에서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유대인들에게 겉옷이라는 것은 생명의 담보와 같은 것이거든요. 낮에는 너무 더워서 긴팔이 필요하고, 밤에는 너무 추워지기 때문에 긴팔이 필요하고, 이 긴 겉옷은 필수 아이템입니다. 그래서 빚이 있어서 겉옷을 저당 잡아도 밤이 오기 전에 돌려주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라고요.
그런데 그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펼쳐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한다. 이 최고의 존경과 헌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9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아멘.
다시 한번 따라해 보세요. 호산나. 우리는 호산나를 활용해서 신나는 매들리 노래를 많이 만들지만, 사실 호산나는 save us, 오셔서 우리를 구하소서,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소망의 외침이자, “드디어 오셨군요”라는 외침이자, 간절한 부르짖음, 절규에 가까운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 400년 동안 백성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이게 출애굽기 2장에 나오죠. 그리고 나서 모세를 보내 주시고 출애굽의 역사로 그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신구약 중간기 400년은 영적 암흑기였잖아요.
너무나 피폐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메시아가 어서 오셔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갈망이 다다른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경 통독하다 보면 “왜 이때 예수님을 보내셨느냐, 좀 미리 보내셨으면 좋지 않았느냐”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궁금하신 분은 통독 과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만 얘기하면, 첫 번째 하나님의 타이밍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정확해요.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라이제이션,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이 형성되고 세계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때 복음을 주심으로 인하여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고, 또 한 가지,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인생과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거예요.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왜 하나님은 그때 보내셨습니까”라고 질문하지만, 땅의 사람들의 관점으로 놓고 보면 가장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타이밍이 왔을 때 보내 주셨다고요.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결핍과 환난과 어려움들을 겪는데, 저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 자기 인간관계든 물질이든 체력이든 심력이든 지력이든 뭐가 됐든 간에 그게 소진될 때까지 일단 자기가 해 보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완전히 고갈되어 바닥이 나면 그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가 사무엘상도 봤잖아요. 다윗이 자기 잔꾀로 시글락성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 자기 사람들이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잖아요. 그제야 다급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죠.
여러분,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먼저,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러지를 않으니까, 주님을 향한 갈망이 온전해졌을 때 그때 예수님을 보내 주셨어요.
10절, 11절 마지막 두 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1절에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 예수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갈릴리 나사렛 출신도 맞고,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라는 타이틀을 붙인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일반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하소서” 메시아로 인정하며 외쳤던 그 고백과, 건조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 아니냐?”라고 반응한 말과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완전히 느낌이 다른 겁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온 성이 소동했다. 온 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인들,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관료들, 헤롯과 그 헤롯의 세력들, 또 거기를 추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는 말하자면 이스라엘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하이 클래스의 유대인들이 거기 사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소동했다는 겁니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이는 누구냐. 이렇게 했는데, 이는 누구냐가 사실은 마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태어나셨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있다 했더니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다, 그때하고 비슷한 상황인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3년 반 공생애 사역을 하셨어요. 예수님의 소문이 전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 지역, 헬라인들에게까지 들려서 찾아올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셨던 분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를 수가 있나요? 모를 수가 없는 거예요. 게다가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 세 번이나 올라가서 활동하신 적도 있어요. 헤롯조차도 예수님의 소문을 귀가 닳도록 들은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 모르는 게 아니라 부정하는 거예요. “이는 누구냐?” “이게 누군데 이렇게 난리냐?”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멘. 아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들 내가 온전한 고백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인격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내 눈앞에 보여 주면 믿겠다, 이렇게 얘기해요.
제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학교를 하면서 친구에게 “교회 가자” 그랬더니 “야, 하나님 너 봤어? 하나님을 내 눈앞에 보여 주면 내가 믿지” 그러는 거예요. 내가 뭐라고 설명해 주고 싶은데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뭐라고 할 말이 없더라고요. 하나님을 보여 줄 방법이 없는데 어떡하지. 너무 안타까웠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 거죠. 하나님이 그 아이 눈앞에 나타나시면 그 아이가 하나님을 믿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런 겁니다. 옛날 왕이 잠행을 하거나 지나가도 왕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왕이 지나가도 왕인 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거잖아요. “내 눈앞에 보여 주면 믿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 앞에 나타나도 당신은 믿을 수 없다. 알아볼 수도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분이 그분이신 줄 알아차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인 은혜, 압도적인 은혜로 자신을 제시해 주시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은혜를 정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주님의 손길을 내가 감사함으로 잡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언제 내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라고 해요. 여러분,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기적을 베푸셨는데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기적을 좀 행해 봐라. 지금까지 많이 봤는데 확신이 없는데 또 한번 해 봐, 또 한번 해 봐” 이러고 있잖아요. 언제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다음 은혜를 더 베푸셔야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까. 아니요. 이미 충분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 본문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때 여러분 중심으로 “주님,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쓰임받겠습니다. 저의 시간, 저의 건강, 저의 재능, 저의 물질,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를 여러분이 하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여러분, 똑같은 벳바게.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고 어린 나귀 새끼는 쓰임을 받잖아요. 나를 통하여서 정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나를 통하여서 한 영혼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 다른 데에서 구원을 찾지 말고 “호산나, 당신께서 나를 구하셔야 됩니다. 주님만이 나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정말 내 인생이 끝자락에 떨어져서야 하는 고백이 아니라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든 묵상을 하든 성경을 읽든 길을 걷든 항상 내면에 고백하는 것이 뭐라고요?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Lord, have mercy on me.”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호산나, 주님 외에는 나를 구하실 분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입술 가운데 채워져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정말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느냐. 그게 진심이냐. 그게 진심이라면 내가 쓰겠다고 할 때 네가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겠느냐.
내 인생이 평안할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이 고백을 드리며 살아가느냐.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주님, 우리의 삶이 고난의 순간뿐만 아니라 평탄할 때에도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느 순간 물질을 의지하고, 어느 순간 세상을 의지하고, 어느 순간 나의 능력과 나의 건강을 의지하고, 어느 순간 내가 세워 놓은 사업체를 의지하고, 어느 순간 내가 세워 놓은 조직을 의지하고, 주님 한 분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호산나, 간절히 부르짖으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고백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온전히 구별하며 드리며 나아갑니다.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왕이 되십니다. 이 고백이 입술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심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헌신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 주님만이 참된 왕이 되시고 주님 한 분만이 우리를 통치하시며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하십니다. 기꺼이 주님 앞에 내어드릴 때 주께서 아름답게 축복의 통로로 쓰시는 것을 체험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교회 공동체 가운데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삶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든지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기꺼이 섬기겠습니다. 언제든지 기꺼이 쓰임받겠습니다 고백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기름 부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참된 왕이 되십니다. 주님,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쓰임받는 일이라면,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는 한 “예스, 아멘” 하시는 분들이 되면 좋겠어요.
제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중3 때 만난 이후로 교회에서 뭐를 하자고 얘기하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목사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책을 25권 번역을 했는데, 그 번역이 다 끝나고 출판사 편집팀에 넘기고 책이 나오기 전에 완성본이 나올 즈음 번역료를 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번역료가 나오는 시간을 항상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면 그쯤 되면 마음에 감동을 주세요. “누가 어려운데 지금 대학 학비를 못 내고 있는데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 선교사님이 힘든 가운데 있는데 네가 후원하면 좋겠다.” 그래서 제가 25권 전체는 아니고요, 20권 정도는 하나님이 번역료를 다 홀랑 가져가셨어요.
저는 제 마음 가운데, 나는 머리도 안 좋아서 공부도 못 하던 아이가 이런 번역을 하고 있으니까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거고 하나님의 것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늘 기도한 거예요. “하나님, 원하시면 언제든지 얘기하십시오.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드리겠습니다.”
제가 십일조를 하면서도 헌금함에 넣으면서 “하나님, 원하시면 다 드릴 테니까 언제든지 얘기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러다 하나님이 홀랑 다 가져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이 넘치도록 채우세요. 부족함 없이 채우세요.
쓰임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능력이 준비가 돼야, 내가 성경 지식이 준비가 돼야, 내가 건강이 준비가 돼야...” 여러분, 건강은 오늘 날짜가 제일 건강한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이 제일 건강한 거예요.
언제까지 주님을 내 문밖에 세워 두시겠어요. 언제까지 “저는 아직 때가 안 됐습니다” 이야기하시겠어요. 여러분, 주님이 부르시면 그것이 영광스러운 부름입니다. 나를 쓰시겠다니, 나를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리면 여러분, 그게 달란트 비유 아닙니까.
한 달란트를 그냥 에이, 한 달란트 주고... 여러분, 한 달란트가 금 34킬로예요. 제가 요즘 돈으로 환산은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수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이 부족한가요? 아니에요. 재능이 부족해서 섬기지 못하는 사람 없어요. 재능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지 못하는 사람도 없어요.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재능을 주셨어요. “아니요, 저는 건강이 안 좋은데요.” 건강이 안 좋아도 여러분 생명이 붙어 있잖아요. 생명이 붙어 있는 그 적은 건강도 쓸 수 있어요. 그 적은 물질도, 내가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래서 여러분, 마음의 문을 닫아 두고 사느냐, 이걸 열어 놓고 흐르는 샘물이 될 것인가, 고인물이 될 것인가는 여러분이 결정하시는 거예요. 흐르는 샘물이 되면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수를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고, 가족이 같이 오신 분들은 한 손은 잡고 한 손은 가슴에 얹고 기도하셔도 좋겠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시간을 드리거나 재능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려도 가족이 동의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여러분 자녀들도 교회에서 찬양팀을 하거나, 자녀들이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아니면 공동체에서, 학교에서 기독인 모임을 하거나 교회 공동체 리더, 임원을 한다 그러면 엄마 아빠가 못 하게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야, 공부해라. 공부나 해라.”
여러분, 그런 좁은 관점을 갖고 있으면 아이가 리더십이 성장하겠어요? 아이가 나눔의 마음이 확장되겠어요? 여러분, 가족이 주께서 쓰시겠다 말씀하실 때, 그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 말씀하실 때, 기꺼이 쓰임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쓰임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남편이, 내 아내가 그렇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 영혼을 살리고, 소자를 살리고, 시대를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될지어다.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2026.03.01(주) | 주일설교 | 한 영혼을 살리는 편지 (딤전 1:1-2)
한 영혼을 살리는 편지 (딤전 1:1-2)
설교 요약
-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1차 투옥 후 석방된 뒤, 에베소에 남겨 둔 디모데에게 보낸 개인 목회서신이다. 바울이 디모데 한 사람을 얼마나 깊이 멘토링하고 권면했는지가 드러난다.
- 올해 표어인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Every soul matters to God)”와 맞닿아 있어 디모데전서를 선택했다.
- 1장 1-2절에서 바울은
- 1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선포한다.
- 2절: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 부르며, 은혜·긍휼·평강의 축복을 전한다.
- 핵심 적용
-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사람과의 관계도 열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인간관계도 어려워진다.
- “구주 하나님”: 구약에서 익숙한 표현으로, 성부의 구원 계획, 성자의 십자가 완성, 성령의 체험으로 삼위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
- 구주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낮은 관점(땅의 시야)에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다.
-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부활 소망은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산 소망이며, 이 땅에서도 담대함과 승리를 주신다(요 16:33, 벧전 1:3).
- “명령을 따라”: 하나님 주권적 섭리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은 후회가 아니라 순종의 길이며, 부르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롬 11:29).
- “참 아들 디모데”: 성격도 기질도 다른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영적 가족의 모델이며, 바울은 연약한 디모데를 위해 은혜와 평강뿐 아니라 특별히 “긍휼”을 더해 기도한다.
- 결론: 내 인생의 길을 ‘내 선택’으로만 보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긍휼을 구하며, 은혜를 체험함으로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 되자.
전문 스크립트
네. 한 영혼을 살리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오늘부터 디모데전서 주일 강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디모데의 입장과 심정이 되어서 주님의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다니다가 에베소에 남겨 둔 디모데에게 보낸 개인적인 목회 서신입니다.
바울이 디모데 한 사람에게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정성껏 그를 권면하고 멘토링을 했는지를 볼 수 있는 책인데요. 저희 올해 표어가 뭐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Every soul matters to God,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소중하다. 그래서 이 디모데전서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인사말 부분 1절과 2절을 보겠는데요. 1절에서는 이 편지의 발신인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소개를 합니다. 2절에서는 신앙 안에서 디모데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또 축복의 인사말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사람과의 관계가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려워지게 돼 있어요. 인생을 살아보면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이거든요. 일은 아무리 많고 어려워도 관계가 좋고 팀워크가 좋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관계가 어려워지면 작은 일에도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되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열려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다시 보여 주시면, 저를 따라해 보세요. 우리 구주 하나님.
사도 바울은 상당히 신학적 관점을 갖고 서신을 썼기 때문에, 왜 하나님께 “구주”라는 표현을 썼을까? 우리가 보통 찬양할 때도 “내 구주 예수님” 이런 찬양하잖아요. 박해 시대 로마 시대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암호처럼 사용했던 것이 물고기라는 뜻을 가진 “익투스(IXTHYS)”라는 단어예요. 이 단어의 이니셜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익숙한데, “구원자 하나님”, “구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좀 익숙하지 않으시죠? 그런데 신약적으로는 덜 익숙해 보여도, 구약적으로 보면 굉장히 보편적인 표현이었어요.
이사야 43장 3절 상반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구약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이걸 정리해 보자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디자인하셨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그 구원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실행하고 완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령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감격을 날마다 체험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께서 죄인 된 나 한 사람을 온전히 구원해서 하나님 사람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주시니 너무나 감사한 거죠. 제가 “구주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세 가지를 나누고 싶은데,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으로부터 건져 주셨는가?
첫 번째는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죄악에서 건져내십니다. 청년 사울로 적용해 보자면, 청년 사울은 아주 교묘한 죄악에 빠져 있었어요. 이 사람은 유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자기 의와 영적 교만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감시하고 비방하고 투옥하고 처형을 하잖아요.
세상이 자기가 생각할 때 옳은 일을 하면 좋아져야 되는데, 그렇게 한다고 세상이 좋아지고 밝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려워지잖아요. 그래서 청년 시절의 사울은 의인인 척하는 죄인이었어요.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악인이었어요.
제가 사무엘상 30장 두 메시지를 하면서 비슷한 결론으로 메시지를 했습니다. 과도한 이상론에 빠지지 말라. 과도한 이상론은 주로 누가 빠질까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에요. 다른 사람보다 기준이 높은 사람들이 이상론을 갖고 얘기하는데, 그러다 보면 그것 때문에 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깨지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극단주의라는 것은 어떤 사상이든 간에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이상론인 거죠. 인간이 이상론을 현실로 만들 능력이 있는가?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 이상 사회를 만들 수 있나요? 없어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온전한 세상을 세우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의 기준, 내가 가진 이상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다 보면 나는 옳고 사람들은 다 틀렸는데, 문제는 그 의가 교묘한 악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을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돼요.
사람들이 왜 자꾸 나에게 악하게 하느냐. 가정에서도 나만 혼자 열심히 살아요. 교회에서도 나만 열심히 해요. 일터에서도 나만 열심히 일해요.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만 나라 걱정하는 것 같아요. 만약 여러분 마음 안에 이런 생각이 있다면, “나만 의롭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거예요.
이 자기 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이 청년 사울을 여기서 건져내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중에 고백하잖아요. “나는 죄인들 중에 괴수다.” 죄인들 가운데서도 나는 최악의 죄인이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깨우치고 나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찬양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서 건지시는가? “낮은 관점”에서.
왜 낮은 관점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 높은 천상의 전망대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땅에 붙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관점, 뷰포인트 자체가 낮은 거예요.
제가 최근에 상담을 하면서 느낀 건 뭐냐면, 사람들이 왜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자꾸 사람들과 부딪칠까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깨가 부딪친다”는 표현을 쓰죠. 좁은 공간 안에 있으면 지하철이나 승강장에서 어깨가 부딪히잖아요. 그런데 키가 큰 사람하고 작은 사람은 어깨가 부딪혀요, 안 부딪혀요? 안 부딪히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죄송한 얘기지만 자꾸 여러분이 누구랑 부딪히면 수준이 비슷한 거다. 수준이 다른 사람은 부딪히지 않아요. 집안에도 부모하고 자식은 싸움이 일어나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냥 하염없이 사랑스럽고 하염없이 불쌍한 거거든요. 그만큼 격차가 크기 때문이에요.
사무엘상 초반부를 보면, 어린 사무엘이 성소에 헌신되어 제사장들을 돕는 보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대제사장이니까 이스라엘 종교 공동체의 수장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못 들어요? 못 들어요. 근데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그러면 누가 영적인 뷰포인트가 높겠어요? 어린 사무엘이 관점이 훨씬 높은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망대까지 끌어올려서 엘리를 보게 하시고, 세상을 보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내가 막내라서, 일터에서 내가 신입이라서, 교회에서 내가 새가족이라서, 그 포지션에 있어도 하나님의 관점이 열리면 누구도 여러분을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위축되지 않아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전망대 위에 세우시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그러므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망대에 서는 가장 중요한 비결 중에 하나는 기도입니다.
자녀들이 새학기가 시작이 되었잖아요. “넌 공부만 해라. 성적만 잘해라.” 이렇게 좁은 관점, 땅의 관점으로 아이를 키워 놓으면 관점도 좁아지고 낮아지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돼 있어요. 아이에게 하나님의 거시적 관점을 보여 줘야 됩니다.
공동체와 순예배가 시작이 되고 새학기가 시작이 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인생의 최저점에 있을지라도 순식간에 영적인 최고점으로 우리를 이동시키시는 강력한 힘, 그것이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많았잖아요. 가는 곳마다 괴롭히는 사람들인데도,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그 포지션을 올리시잖아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그저 불쌍한 사람들로 보이게 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삼일절 나라사랑 기도회를 하면서 자녀들도 많이 왔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연구하다 보니까 놀라운 말을 하셨어요.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원한을 품은 2천만 조선 사람들을 억지로 자신들의 국민으로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이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그들에게 덕이 되지 않겠느냐.
일제 강점기에 모진 수모와 억압을 당하면 사람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일어나게 돼 있다고요. 그런데 안창호 선생님은 신앙인답게 높은 관점에서 바라본 거예요. 일본 사람도 선하고 좋은 것을 몰라서 저렇게 악한 일을 하고 있구나. 이게 보이는 거예요.
이런 관점이 열리면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어깨가 부딪히면 인생이 피곤해지고 영혼이 매말라가게 돼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망하게 되면 여러분 안에 참된 자유와 평강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구주 하나님께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십니다. 원수가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한국 양궁이 세계적인 실력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 양궁의 탑 포지션을 흔들기 위해 세계 대회 규정을 계속 바꾸기도 하는데, 그 덕분에 나라들마다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잖아요. 만약 “내가 나가서 꼭 이겨야겠다”는 좁은 마음이 아니라, “양궁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큰 마음을 가진다면 온 세계가 더 좋아하지 않겠어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 그런 마음을 가졌죠. 그리고 한국 양궁 선수들은 최고의 실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규정이 바뀌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아요. 세상이 흔들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생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서 절대자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셔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율법주의 교사들, 이방 통치자들, 총독과 관리들까지 가는 곳마다 괴롭힘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았어요. 주님에 대한 초점과 사명에 대한 집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하는 데 총 며칠 걸렸어요? 52일. 단 52일. 예루살렘 성벽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이후 140년 만에 다시 세운 거예요. 그동안 동서남북의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압박하고 조롱하고 괴롭혔는데,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면 다 흔들린 거예요. 그런데 느헤미야는 흔드는데 안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52일 만에 지은 거예요.
세상이 나를 흔들어서 흔들린다? 아니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사명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흔들리는 거예요. 초점이 바로 서면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상담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님, 예배드리면 영혼이 살아나는데 현장에 가면 다시 무너집니다. 다시 흔들립니다.” 왜 삶의 예배가 필요할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과목만 하면 되지, 왜 기도 모임을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게 불필요한 걸까요? 일터에서 하프타임(일터 예배)을 세우는 게 불필요한 걸까요? 아닙니다.
“내가 이 경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라고 살면 운신의 폭은 계속 좁아져요. 그러나 거시적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공동체를 품고 사명지로 여기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평안함과 담대함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이제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어요? “우리 구주 하나님” 다음으로 저를 따라해보세요.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께는 “구주”라는 단어를 쓰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왜 “소망”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신학적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망 권세에서 다시 살아나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부활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부활 소망이 내세만의 소망일까요? 이 땅에서는 힘들고 어려운데 저 내세에서만 소망이 있는 걸까요? 아니요. 현세에서 승리하는 소망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같이 읽어 볼까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땅에서는 위축돼 살다가 천국에서만 어깨를 펴는 게 아니고요. 이 땅에서도 이미 주님이 승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 살아 있는 현재 진행형의 소망입니다. 부활 소망은 미래형만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넉넉히 승리하게 하는 현재 진행형의 소망이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예수님은 천국문을 입성할 때만 소망되시는 분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에서도 소망이십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거든요.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뛰어넘게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요. 자유해지게 돼 있어요. 할렐루야. 여러분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데, 액션 영화는 말도 안 되게 주인공만 살아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역사를 보면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결말 같은 거예요. 사탄이 집중 포화로 공격을 하는데, 예수님이 다 이겨내십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뚫고 부활하시잖아요. 그걸 이루어내심으로 우리에게 부활 소망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걸 깨닫고 나니까 사도 바울이 낡은 종교와 율법주의를 내려놓는 거예요. 자기의 지식과 언변을 내려놓고, 로마 시민이라는 신분과 사회적 지위도 내려놓은 거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 되신 거예요. 할렐루야.
내 인생의 유일한 자랑, 내 인생의 유일한 소망, 내가 살아갈 이유, 내 평생의 꿈과 비전이 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를 사도로 보내지 않으시겠어요?
다시 1절을 보시면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아주 제한적으로 쓰이는데, 본문에 쓰인 의미는 “위로부터의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회사나 조직 생활하다 보면 “위에서 결정한 겁니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인생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명령하셔서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29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있어요? 없어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후회를 한다? 그건 이상한 거예요.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된 뒤 인생이 크게 바뀐 것 중 하나가, 후회를 안 하기 시작한 거예요.
후회는 내가 내 기준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왜 이 학교를 선택했지, 왜 이 일을 했지, 왜 이 결혼을 했지.” 그런데 하나님이 콜링하시는 길을 따라 순종해 가면, 힘든 때가 있어도 번복하고 싶은 후회가 잘 생기지 않더라고요. 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을 가는 겁니다.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인지, 내 기분과 계산으로 선택한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후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부르심의 관점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제가 대학 들어갈 때도, 1년 전에 하나님이 어느 대학 어느 과로 갈지 마음에 분명히 주셨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깨닫게 된 게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는 상황에 따라 성적 맞춰 대학을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이구나. 할렐루야.
제가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를 말하는 이유는, 저도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선교사 하라면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해 왔는데, 마음 한 켠에 “개척교회는 안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개척교회를 하라고 하셔서, 부르심이니까 순종했습니다. 부르심을 따라오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을 따라가는 인생길이 복된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책임질 수도 없는 선택을 스스로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부르심을 따라 대학을 가고, 부르심을 따라 직장을 가고, 부르심이 있는 결혼을 하는 거예요. 부르신 그분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회개는 있을 수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제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저를 따라해 보세요. 참 아들.
사도 바울이 “참 아들”이라는 표현을 딱 두 번 썼습니다. 디모데와 디도, 이 두 사람에게만 썼어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나의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순 개강을 하는데, 저는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믿음의 가족, 믿음의 동지들을 만나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상처가 있는 분도 있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참된 공동체를 체험하며 치유가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의 이름 뜻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조모 로이스도 신실했고, 어머니 유니게도 신실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성경으로 신앙 교육을 시켰어요. 디모데후서 3장에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는 말이 나오죠. 어머니의 신앙 교육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또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디모데는 성도들에게 칭찬을 받는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어요. 그런데 제가 바울의 일생을 볼 때마다 드는 질문이 있어요. 왜 디모데였을까? 바울은 왜 디모데를 가장 중요한 수제자로 선택했을까?
왜냐하면 바울과 디모데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바울은 열정형,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기질로 하자면 담즙질,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디모데는 내향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죠.
그런데도 바울은 중요한 문제에 디모데를 먼저 보냈어요. 고린도 교회 문제 때도 디모데를 먼저 보냈죠. 하지만 디모데가 소심하고 위축된 성격이라 해결이 쉽지 않았고, 결국 디도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디도서는 분량이 짧고, 디모데전서는 더 길게 권면이 담겨 있는 느낌도 있어요.
더 놀라운 건 바울이 초대교회 중 가장 영향력 큰 에베소 교회 목회를 디모데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걱정이 돼서 디모데전서, 후서를 보내며 계속 붙드는 거예요. 디모데는 바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자 가장 걱정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는 이교 문화가 강하고, 교회 안에도 연로한 장로들이 많고, 율법주의 교사들도 판을 치던 환경이었어요. 나이는 어리고 경험은 미숙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디모데를 생각하면 바울은 저절로 눈물이 나고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이 마음이 우리의 중보기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예요.
저를 따라해 보세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내게 있을지어다.
바울 서신의 기본 인사는 보통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유독 “긍휼”이 들어가요. 이유가 뭘까요? 생각만 해도 불쌍하니까. 초대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큰 에베소 교회 담임을 맡아 위장병까지 생기고 위축된 디모데를 생각하면 바울의 마음이 그랬던 거예요.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평강은 존재적 불안을 겪는 인생에게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의 순서가 뒤집어진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체험해야 평강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 한 번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말씀의 은혜가 넘치길 바랍니다. 찬양을 많이 들으세요. 예배와 개인 예배와 기도의 은혜가 넘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긍휼은 구원의 언약에 기초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구약적 단어로는 헤세드라고도 하지요. 바울은 디모데를 두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돌봐 주옵소서.”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중보하는 지체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되잖아요. 내가 평생 그 사람을 다 돌봐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친히 돌봐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02월
2026.02.28(주) | 주일설교 | [2026 삼일절 나라사랑기도회] 역사의 치유자가 되라! (마 18:21-35)
[2026 삼일절 나라사랑기도회] 역사의 치유자가 되라!(마 18:21-35)
설교 요약
- 주제: 죄의 현실을 직면하되, 십자가의 용서로 역사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라.
- 3·1절을 기억하는 이유: 하나님은 각 민족이 자유와 독립을 누리도록 세우셨고(창 10:5),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 고백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역사를 기억하되 증오에 머물지 말고 복음으로 포용과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
- 죄의 결과: 죄는 죽음(영혼·관계·공동체의 파괴)과 저주를 부른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삶의 여러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영적 문제다.
- 회개는 책임을 포함한다: 하나님 앞의 사죄로 끝나지 않고, 이웃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보상(속건의 원리)이 따라야 관계가 회복된다.
- 피해자의 자리에서의 적용:
- 먼저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라. 우리는 역사 속에서 피해만이 아니라 가해의 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끝없이 용서하라(마 18:21-22). 숫자 셈이 아니라 용서의 태도다.
- 1만 달란트 비유의 결론: 큰 탕감을 받은 자가 작은 빚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악함이다. 사랑은 악한 것의 ‘기록’을 붙들고 살지 않는 결단이다(고전 13장).
- 결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마 18:35). 역사를 분별하되, 복음으로 치유와 회복을 이루는 길을 선택하자.
전문 스크립트
할렐루야. 토요 온 가족 새벽 예배, 또 이 자리에 나온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나라사랑 기도회로 함께 예배합니다. 특별하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복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시작 기도(통성)
우리 시간 먼저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온 세대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토요 새벽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영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하는 이 자리.
하나님, 형식적인 예배가 되지 않고 세대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자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각 세대의 마음이 열리고, 아이들의 예배가 살아나며, 부모들이 먼저 본이 되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마다 예배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이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3·1절을 기억하며 우리가 예배하며 나아갈 때, 믿음의 선배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예배가 다음 세대를 위해 영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기도의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뜨거운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예배 자리를 위해서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통성으로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토요 새벽 기도, 하나님이 이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 새벽 우리를 부르시고, 온 가족과 이 세대가 주님 앞에 서게 하는 이 시간.
하나님, 그 주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른의 예배, 아이의 예배가 아니라 온 세대가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거룩한 임재의 자리,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셔서, 하나님, 새벽 예배 자리에 나오게 하신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도, 우리 자녀들의 마음도 하나님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온 가족의 마음 위에 성령님 함께하여 주셔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이 가운데 가득하도록 친히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모두의 기도가, 부모들의 기도가 다음 세대를 덮는 축복의 기도 기둥이 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세대의 찬양이 1516교회를 다시 살리는 불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 인도하여 주시고, 습관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경험하는 은혜의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어른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본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인 줄 믿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기도가 자녀에게 본이 될 수 있는, 다음 세대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정의 예배가 다시 회복되고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예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새벽 기도의 자리를 깨어나게 하여 주시고, 예배가 한 가정을 살리고 한 세대를 살리고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세우는 출발점이 되는 은혜의 시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3·1절을 기억하며 나아갑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 눈물과 믿음을 우리 가운데도 부어 주시옵소서.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나라를 살리는 기도로 시작되게 하시고, 우리의 이 작은 예배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이곳 가운데 임하시고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 3·1절을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주여 삼창)
우리 시간 다시 한번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책임 있게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3·1절의 정신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으며,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믿음을 회복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믿음이 자라나게 하여 주시고, 나라를 품는 중보자들의 삶을 세워갈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삼창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주여!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 나라를 세우고, 지금까지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 우리의 역사가 단지 역사를 기념하는 예배, 기억하는 예배로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오늘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나라를 위해 다스리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했던 모습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에서 신앙이 무너지고, 삶의 자리에서 타협하고, 기도는 줄어들고, 불편과 불만이 많았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안에 무너진 예배를 다시 세워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무감각했던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기도의 무릎을 세우게 하여 주시고, 정직과 거룩으로 이 땅을 살아갈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감정에 머무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거룩한 삶의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침묵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타협하지 않는 정직의 사람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책임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먼저,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세우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고, 학교와 직장 가운데서 빛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눈물로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회복은 먼저 교회의 회복임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대한민국을 살리는 영적인 씨앗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이 나라를 맡겨 드리며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길에 동참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 자리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말씀을 위한 기도(주여)
우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도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듣는 교회를 넘어, 말씀을 듣는 성도를 넘어, 말씀대로 살아내는 교회와 가정, 우리 개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선포될 말씀이 우리 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심겨지고 우리의 삶으로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고, 가정이 말씀 위에 세워지며, 다음 세대가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붙잡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1516교회 모든 성도들이 먼저 말씀으로 살아내고, 다음 세대에게 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한 영혼을 살리는, 한 가정을 살리는, 한 공동체를 살리는, 한 지역과 나라를 살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옵소서. 오늘도 그 말씀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주여!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세대 가운데, 다음 세대 가운데 심겨지고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가치관이 넘쳐나는 시대 속에 말씀을 붙드는 것이 손해처럼 보일지라도 끝까지 말씀을 선택하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타협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으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 세대가 우리 어른들의, 먼저 가는 세대의 등을 보고 살아낼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선포되는 한 구절의 말씀이 우리 교회의 방향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정의 기준이 되게 하시고, 우리 자녀들의 평생 신앙의 뿌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듣고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오늘도 이 아침에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오직 주님을 바라볼 때,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새로운 일을 이루시고 새로운 은혜를 허락하실 주님을 소망하고 바라보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그렇게 놀랍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찬양(전문)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의 박수 올려 드리며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경배하리, 경배하리, 경배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찬양하리, 찬양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주 찾으리, 주 찾으리
나 사는 동안, 나 사는 동안
주님의 길, 그 길 따라가리
경배하리, 경배하리, 경배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찬양하리, 찬양하리
내 온 마음 다해, 내 온 마음 다해
주 찾으리, 주 찾으리
나 사는 동안, 나 사는 동안
사는 동안 주님의 길을, 주님의 길을 나아가리.
주님 아멘,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무릎 꿇고 고백하지, 고백하리. 내 모든 것 드리리.
주를 향해 내 눈을 들고, 주 의지하리. 주만 의지하리.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찬양받기 합당하신 존귀하신 주만. 오직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합당하신 존귀하신 주만.
주님만을 경배하리, 주님만을 찬양하리. 아멘. 우리 모두 찬양받으시기에 감사와 찬양의 박수 올려드립니다.
사랑해요, 진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눈을 뜨는 아침부터 나 잠들기까지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사랑해요, 사랑해요, 진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눈을 뜨는 아침부터 다 잠들기까지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신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을 인도하셨네. 나의 모든 호흡 다해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를 인도하신 주님.
고난 중에도 나와 함께하셨네. 내 아버지 되시며 내 친구 되신 주,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주님의 선하심이 다 인도하시네.
주님의 선하심이 날 지켜주시네. 주께 나의 모든 사랑, 주님께 드리네. 예수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소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주,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 사랑
지금 우리에게 품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 우리 살리신 것 믿습니다. 모든 영혼의 생명의 성령 넘치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소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주,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 사랑
지금 우리에게 부어 주소서. 오 거룩한 백성 주 앞에 나와 함께 예배할 때 사랑하리라.
이제 주님 나라 임하시다. 온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리라. 이제 주님 나라, 이제 주님 나라 임하시리라.
이제 주님 나라 임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이곳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이 시대 우리 자녀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직접 목도하고 체험하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나라 임하여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두 손을 들고 주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님,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가 하나님 앞에 흠 없이 하게 하여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기도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과 같은 복음 증거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 하나님의 나라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유하심이 넘치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한국 교회를 다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영광 나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자녀가 기술 문명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상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다시 살리게 하여 주시고,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열방을 이끌어갈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대가 첨단의 과학 문명과 AI 테크놀로지를 이야기하지만, 문명과 인간의 화려함과 자랑으로 유토피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이 시대 가운데 놀라운 공의와 사랑과 평강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녀 세대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대한민국을 붙잡아 주옵소서.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열방으로 흘러가는 민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아침에 나라사랑 기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주님께 감사 영광의 박수 올려 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영상 시청 안내 및 광고
자리에 앉으시고요. 한 가지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내용)
제가 16되던 해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청일 전쟁이 발발해 피난길에 나섰고요. 전쟁이 끝나고 경성 구경을 하게 됐는데, 그러다 밀러 목사님이 운영하던 학당에 입학해 하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독립 협회에 참여하게 됐죠.
1899년 협회가 해산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일을 했고요. 교육학과 신학을 배워 민족의 갈 길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하는 시대였으니까요.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말도 못할 때였습니다. 상투를 휘어잡고 싸우는 한국인들을 미국인들은 원숭이 보듯 구경했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미개한 민족.
경멸하는 눈과 인식을 바꾸려면 단결과 계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한인친목회를 만들었던 겁니다. 아들 필립이 태어난 해입니다.
같은 11월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됐고요. 동네 동포들을 계몽하는 일이 시급해 1907년 귀국했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조직이 커지자 이토 히로부미가 청년 내각을 수립하자더군요. 저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도산 안창호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인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서총장으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습니다. 독립신문을 발간했고 독립운동을 지휘했죠.
9월엔 대한민국 통합 임시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실력이 부족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니 실력을 키우지 못하면 독립이 되어도 나라를 운영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고,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잔다.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인격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
그것이 제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보세요. 결국 이렇게 독립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도산 안창호입니다. (영상 종료)
나라사랑 기도회에 이렇게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나라사랑 기도회가 끝나고 순별로, 가정별로, 또 여러분이 계신 지역과 이 주변 지역의 3·1절을 기념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이트에 가셔서 함께 기도하시고, 사진도 찍어서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주차하신 분들, 처음으로 찾아오신 분들 계시기 때문에 주차 등록 꼭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가 끝난 뒤에 3·1절 나라사랑 기도의 기념으로 떡을 준비했으니 떡도 받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성경 봉독(마 18:21-35)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35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도록 하겠습니다.
(봉독)
그때 베드로가 나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나가서 그 종이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이에 그가 허락하지 아니하고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이르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아멘.
암송(마 16:18)
이번 달에는 마태복음 큐티를 하면서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같이 암송하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 설교: 역사의 치유자가 되라!
(마 18:21-35)
하나님께서 이 시대 가운데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고 세상을 치유하시는 복음의 전제가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한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는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셨고, 교육적으로는 교회와 학교들을 세움으로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을 하셨죠.
안창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망하는 것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청소년, 청년 세대가 정말 중요합니다. 지난 1월 리조이스 캠프를 하면서, 한국 교회의 희망이 말로만 청소년·청년이 아니구나, 진짜 우리 청소년·청년들이 대한민국의 희망이고 한국 교회의 희망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캠프를 3년간 지속했더니, 학생이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밖에 안 되는 교회에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밴드를 조직하고 예배팀을 만들고, 학생부 예배를 섬길 뿐 아니라 대예배를 섬겨 어른들을 놀라게 하고 도전을 주는 교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고 한국 교회의 희망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 자녀 세대 가운데서 다윗과 같은 예배자들이 나오고, 에스더 같은 기도자들이 나오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녀들이 함께 나왔는데, 우리 자녀들 박수로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년 3·1절이 되면 독립의 역사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절기가 되면 유월절에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를 되짚는 것처럼, 우리가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나누겠습니다.
1905년 구한말 조선은 사회적으로, 정치·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약하고 무너져 있던 때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고, 1910년 경술국치로 모든 주권을 빼앗기며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의 선언(민족 자결주의)이 있었고, 이에 힘입어 2.8 독립선언문을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이 작성해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 선언문이 한국으로 들어와 3.1 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되었고,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됩니다. 탑골공원(파고다 공원)에서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체되자, 학생이 먼저 올라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칩니다.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 2.8 독립선언이고 3.1 만세운동이었습니다.
그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35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이 자유와 주권을 되찾게 하시고 오늘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구한말 샤머니즘과 부정부패가 심각했고, 그 늪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셨고, 일제강점기 고통과 6.25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를 일으켜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내일이면 3·1절 107주년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현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상은 친일이냐 반일이냐, 이 관점으로만 보고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적 아픔을 반복하게 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는 신앙적 관점도 필요합니다. 왜 3·1절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가. 어떤 민족과 나라도 타 민족과 나라에게 지배받지 않고 자유와 독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0장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세우신 분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1919년은 주권을 완전히 강탈당한 지 9년쯤 된 때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의 고백으로 독립 만세를 외친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그리스도인이 16명이었습니다. 곳곳에서 교육·계몽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치유하고 포용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큐티 본문이 용서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 1) 죄는 죽음과 저주를 부른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하십니다. 죄는 무엇을 일으키는가. 첫째, 죽음을 부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혼이 죽고, 관계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죽는 일을 일으킵니다.
둘째, 저주를 부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신 것처럼, 무관한 피를 흘리면 땅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영적인 필요입니다. ### 2) 회개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속죄제와 속건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죄로 인한 피해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미안해”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레위기의 다섯 제사 중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속건제는 하나님 앞에서만 끝나지 않고 피해를 준 이웃에게 보상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있어야 온전한 회복이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관계에서도 내가 해를 끼쳤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보상해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 3) 피해자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형제가 내게 잘못했을 때, 첫째는 나는 남에게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가 스스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분노하기 전에, 나는 과연 다른 사람에게 이런 잘못을 한 적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제국이 강제징용, 위안부 등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사죄와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베트남전에서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등, 우리도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민족 이기주의는 어느 민족에게나 있습니다. 피해자 의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도 너도 죄인입니다.
둘째,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하셨습니다. 숫자를 세라는 뜻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끝없이 용서하겠습니다. 끝없이 용납하겠습니다.
4) ‘기록을 남기지 않는 사랑’
이어지는 비유는 1만 달란트 빚진 종입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비교도 안 되는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넣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장)라고 말합니다. NIV는 “잘못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억이 나지만, 그 기록 파일을 계속 유지하지 않는 결단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오.” 이 말씀은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를 현실로 체험하게 하는 통로임을 보여줍니다. 내 죄는 용서받고 싶은데 남의 죄는 용서하기 싫다면, 이중적인 마음이고 위선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한다면, 끝없이 용납해야 합니다. 아멘. ### 5)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35절,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회수의 문제가 아니라 진심의 문제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마음으로 용서한 것처럼,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처럼 “일본이 망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 — 미움이 아니라 치유의 마음입니다.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은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해자를 마주했을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용서한 것처럼 너도 용서하라” 하셨고, 성령의 은혜로 손을 내밀어 용서하며 복음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본의 복음화율은 매우 낮고 영적으로 척박합니다. 하나님, 대한민국이 복음의 등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중일이 복음 안에서 연합하고 열방에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 결단 기도(통성)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정죄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며, 우리 안의 부정적 감정들을 합리화시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고, 우리 민족도 죄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흘린 피를, 우리가 흘리게 만든 눈물을, 우리가 끼친 고통을 치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회개하고 회복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되게 하시고, 우리 주변의 작은 이웃 한 사람 한 사람,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왜곡된 시각과 편견으로 보지 않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깨어서 이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일본의 죄를 지적하고 들춰내는 것을 넘어, 복음으로 그 땅이 치유되게 하여 주옵소서. 일본 교회가 다시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중국의 지하 교회가 살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열방의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할렐루야.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와 용납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처럼, 우리 이웃에게, 이웃 나라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을 베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일본이 좋은 이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중국이 좋은 이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중일이 열방의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분별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분노와 미움과 정죄에 빠지는 것도 문제이고, 역사를 왜곡하고 덮어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 하나님, 회개를 통해 회복되는 역사뿐 아니라, 용서와 용납을 통해 회복되는 온전한 역사가 한중일 관계 가운데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힘을 내어 일어나게 하시고, 정치·경제적 요인보다 복음이 가장 강력한 힘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녀 세대는 미움과 정죄의 세대가 아니라, 분열의 세대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연합하여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는 세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족들 손을 잡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 안에 용서와 용납이 있게 하시고, 우리 사회 안에 용서와 용납이 있게 하시고, 국제 관계 가운데도 용서와 용납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2026.02.22(주) | 주일설교 | 늦었다고 생각될 때 (삼상 31:1-13)
[1516 주일설교] 늦었다고 생각될 때 (삼상 31:1-13) | 이상준 목사 | 2026.02.22
[ 설교 요약 ]
- 길보아 전투(정확히는 길보아산에서의 ‘패전’)는 초반부터 전력 차가 크게 벌어진 채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산에서 시작된 전투가 아니라, 평원에서 밀려 도주하다가 산에 이르러 쓰러진 ‘패전의 마감’이다.
- 블레셋은 왕과 왕자들을 집중 추격해 요나단 등 왕자들을 죽이고, 사울에게도 치명상을 입힌다. 도주하며 산을 기어 오르는 상황은 궁수에게 가장 취약한 조건이 된다.
- 사울은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결을 택한다. 두려움은 결국 두려워하던 현실을 스스로 불러오게 만들 수 있다.
- 사울의 삶에는 두 가지 모순이 드러난다. (1)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다윗)이 과거 자신의 무기 든 자였음에도, 마지막에는 자기 무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2) 평생 과단성이 부족해 권력 이양은 못 하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는 극단적 결단(자결)을 선택한다.
- “힘을 빼고 맡기는” 영적 원리가 강조된다. 시내산 등정과 낙타 탑승의 경험을 통해, 내 힘으로 안 되는 길에서는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오히려 살 길임을 설명한다.
- 하나님과 예배에서 멀어지는 선택은 스스로를 코너로 모는 선택이 될 수 있다. ‘늦었다’고 느낄 때가 오히려 가장 빠른 때이며, 지금이라도 돌아오는 결단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낫다(better late than never).
- 패전과 몰락의 서사 속에서도,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처음의 좋은 시작”을 리마인드하며, 하나님이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소망을 남긴다.
- 결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늦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 전문 스크립트 ]
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사무엘상 60회 왕결편입니다. 사울왕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패전함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초반부터 전력차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면전인데 두 부대가 싸우다가 밀린 게 아니라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당한 것으로 돼 있어요. 완전히 밀린 이스라엘이 도주하다가 길보아산에서 추풍낙엽처럼 다 쓰러지게 됐다.
어떤 상황이었는가? 지도를 지난주에 보여드린 지도를 조금 확대해 보면 길보아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블레셋 군대는 그보다 위쪽인 수넴에 진을 치고 있었어요.
그리고 요단강 건너가기 전에 뱃산이 나오죠. 이제 뱃산에 패전해서 죽은 사울의 시체가 걸렸었고, 그 동편에 보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건너와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수넴과 길보아산의 양쪽 진영이 중간에 8km나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전쟁을 어디에서 치르겠어요? 중간에 있는 이스르엘 평원에서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이스르엘 평원은 고대로부터 이스라엘에서 가장 넓은 평원이기 때문에 대규모 전투가 많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자, 그렇다면 시작부터 도주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에는 평원에서 싸우다가, 이게 뭐 싸우는 정도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밀려서 도주하다가 길보아산에, 원래 그들이 진을 쳤던 곳에 이르러 쓰러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있었다면 시내산 올라가는 거였어요. 카이로에서 시나이 반도 쪽으로 451km를 달려서 시나이 반도의 꼭지점에 있는 시내산. 근데 그 시내산을 오르는데 이미 출발 지점 자체가 1500 고지예요.
고지에서 2,285m 되는 데까지 산을 오릅니다. 785m, 거의 800m더라고요. 아무것도 없는 돌산을 올라가는데 새벽 2시에 일어나서 6시에 정상에 도착했어요.
여러분, 그만큼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잖아요. 길보아산은 500m 정도밖에 안 되긴 하지만, 북쪽으로는 이스르엘 평원이 있고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이 보이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는 산입니다.
자, 그다음 전쟁 상황이 어떻게 이어졌는가? 2절과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함에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블레셋 사람들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왕과 왕자들을 집중적으로 추격합니다. 결국 왕자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 세 왕자를 따라잡아서 죽입니다. 그날 길보아산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널부러진 시체로 가득했어요.
알아보니까 봄부터 초여름까지 아이리스라는 야생화가 아름답게 흐드러지게 피는 산으로 유명하더라고요. 그러나 그날 산 전체는 붉은색으로 물들게 됐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흘린 피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리스의 꽃말이 좋은 소식이라는데, 굿뉴스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수치의 날, 배드뉴스의 날이 됩니다.
사울은 아들들이 죽어서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잠시 멈춰 애도할 겨를이 없었어요. 자기 살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결국 그도 궁수의 활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고지전을 한다면 고지를 점한 쪽이 유리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길보아산 전투라고 이야기하지만, 산에서 싸우기 시작한 게 아니라 평원에서 싸우다 도망가다가 산을 기어 올라야 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러면 상황이 정반대가 됩니다. 아주 불리한 상황이 되는 거예요.
산에 이르면 걸음이 느려지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도 군대들도 블레셋 궁수들의 쉬운 타겟이 된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길보아산 전투가 아니라 길보아산 ‘패전’이죠. 전쟁은 평원에서 시작했는데 여기서 다 쓰러진 거예요.
자, 그러면 사울이 이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는가? 4절에서 6절을 보겠습니다.
“내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사울이 무기 든 자에게 요청합니다. 너의 칼로 나를 찔러서 죽여 달라. 어차피 중상을 입었고 도주할 힘도 없고 블레셋 군대가 닥칠 테니, 더 이상의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다.
당시 고대는 패전국 왕들의 수족을 자르고, 승전국 왕의 상 밑에서 던져 주는 음식을 먹게 하는 평생의 수치를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디그니티,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호위병이 왕을 죽였나요? 못 죽였나요? 도저히 죽일 수 없는 거예요. 상황은 급박한데 사울이 자신의 칼을 거꾸로 세워 놓고 그 위에 엎드려 자결합니다.
결국 그날 사울과 세 아들과 호위병과 군대가, 모든 사람이 그날 함께 죽습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다가 두 가지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게 됐어요.
첫 번째 모순은, 사울이 평생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다윗이었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원래 사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무엘상 16장 21절에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를 삼았더라.” 왕의 무기를 드는 자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 평생 벌벌 떨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자기 무기 든 자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이러니죠.
제가 ‘두려움 너머의 삶’에서 늘 얘기한 것. 두려움에 빠지면, 두려워하는 그 일이 스스로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의 손을 잡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인생을 보면 권력의 칼, 재력의 칼, 세상이 사랑하는 힘의 칼을 의지하면, 그게 나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결국 나를 찌르는 날이 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보다 그것을 의지하면 그것으로 흥하고 그것으로 망하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모순은, 사울이 평생 얼마나 과단성이 부족했는지 몰라요. 사무엘이 “너의 왕위는 끝났다. 후임자는 이미 결정됐다” 알려줬잖아요. 그럼에도 지위와 권력을 내려놓지 못해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24장 20절에서 사울이 말하죠.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네 나라가 견고히 설 것을 아는…”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는 거죠. 알면 평화롭게 정권 이양을 결단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결정을 못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긴박하자 순식간에 자결을 선택합니다. 생명을 끊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결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위험한 결정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과단성을 권력 이양에 썼다면 인생을 비참한 코너로 몰 필요가 없었고, 이스라엘 역사를 이렇게 비극적으로 마감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 호위병은 왕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호위병의 사명은 마지막까지 왕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사울이 자결하자 무기 든 자도 따라서 자결합니다. 사울만 제대로 했더라면 주변 사람들은 너무 충성스러웠습니다. “그의 모든 사람이 그날 함께 죽었더라.”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를 못할까? “맡겨 드리겠습니다” 해놓고 왜 맡기지를 못하고, 스스로를 극한 코너로 몰아가는 인생을 살아갈까?
제가 시내산을 오르면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분노와 원한으로 온몸에 힘을 주고 산을 오르면 지치게 됩니다. 회개와 겸손으로 온몸에 힘을 빼고 올라가야 편안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나 싶었는데, 길이 험해지고 지치니 몸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목과 어깨, 온몸이 굳어지면 더 지칩니다. 수영도 마찬가지예요. 힘을 빼고 물에 뜨는 감각이 생겨야 패러다임이 바뀌거든요.
힘을 빼니까 그때부터 편안해지더라고요. 어떤 분은 낙타를 탔는데, 본인의 낙타만 빨리 안 가더래요. 본인이 긴장해 몸이 굳어 있으니 낙타도 리듬을 못 타는 거예요. 몸에 힘을 빼고 낙타에 맡기니 제일 앞으로 가기 시작하더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힘으로 못 올라가서 낙타를 탔으면, 낙타에 몸을 맡겨야 합니까, 안 맡겨야 합니까? 맡겨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낙타를 타고도 또 스스로 조종하려다가, 자기도 힘들고 낙타도 힘들게 만듭니다. 딱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야 되는데, 맡기지 못하니 나도 힘들고 가족도 힘들고, 직원도 힘들고, 목사도 힘들고, 교인도 힘들고, 서로를 괴롭게 만드는 거예요. 내 힘으로 해낼 능력이 있습니까? 그것도 안 됩니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신앙, 애매한 인생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이 회색지대에서 빨리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관계의 문제, 자녀 문제, 사춘기, 제2의 사춘기(우울감과 무기력감, 원망과 분노)… 인생의 험한 산 앞에서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 싶을 때, 뒤에서는 원수들이 화살을 쏘는 때, 그때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 외에는 없는 거예요.
팬데믹 기간에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한 분들, 개인적 상황으로 예배를 멀리한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스스로를 극한 코너로 몰아가는 선택이에요. 다윗의 선택이 아니라 사울의 선택입니다.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았고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31장의 비극은 사울 자신이 스스로 자초한 겁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의지할 방법이 없잖아요. 가족까지 미워하면 가족도 의지할 수 없고, 충성된 신하들을 쫓아내면 그들도 의지할 수 없고,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혀온 거죠. 마지막에 무당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합니다.
돈 없고 명예 없고 자랑이 없는 인생이 극한 인생이 아닙니다. 영적 관점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벼랑 끝 극한 인생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별일 없네” 하다가 갑자기 부부 관계가 깨지고, 자녀가 망가지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여러분, 보험은 사고 나고 듭니까, 사고 나기 전에 듭니까? 전쟁 준비는 전쟁 나고 합니까, 전쟁 나기 전에 합니까? 고민하지 마세요. 전에 준비해야지, 전쟁 나고 나서 준비하면 이미 늦은 거예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새벽기도 나오냐면, 문제가 생기면 나오기 시작해요. 왜 문제가 생기고 나서 엎드립니까? 평안할 때, 문제 없을 때 그때 엎드려야 합니다.
자, 이 전쟁 상황을 보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7절입니다.
이스라엘 평원의 저쪽(북쪽)과 요단 동편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거기에 삽니다.
블레셋이 남부 해안에서 올라와 수넴에 진을 친 의도가 이제 이해가 되죠. 북쪽 지파가 참전하지 못하게 끊고, 동쪽 지파도 두려워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12지파 중에 여섯 지파가 참여를 못했습니다. 왕이 전사하고 주력부대가 전사하니, 북쪽과 동쪽 백성들은 관전만 하다가 두려워 성읍을 버리고 도망한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기상과 야성은 어디로 갔는가? 원수들에게 너무 쉽게 앞마당을 내어 줬어요.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 순교자와 선교사들의 피값으로 세워진 한국 교회를 원수에게 쉽게 내어 주면 안 됩니다.
블레셋은 8절에서 10절에서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겨 신당과 백성에게 알립니다. 역대상 10장 10절에는 머리를 다곤 신전에 두었다고 나오고, 갑옷은 아스다롯 신전에 두고, 시체는 뱃산 성벽에 못 박아 걸어둡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 떨게 하려는 겁니다.
한때 준수한 외모와 좋은 배경,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했던 사울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고 군사 정권을 세운 사울이 이렇게 초라하고 부끄럽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에피소드를 더합니다. 11절에서 13절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밤중에 와서 뱃산 성벽의 사울 시신을 수습해 야베스로 가져가 장사하고 7일 동안 금식합니다. 왜 에셀 나무 아래인가? 사울이 기브아 출신이고, 왕궁이 없던 시대에 에셀 아래에서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왕으로 존대하고 추모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사울은 통치 초기를 제외하면 폭군으로 전락했고 민생·신앙·국방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시신을 정성껏 돌봤을까? 사울이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이민족에게서 자기 백성을 건져 준 사건이 있었고, 그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11장).
마치 영화처럼, 11장의 사울과 31장의 사울이 오버랩됩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권력을 쥐고 군대를 거느리고 세상의 힘을 다 가졌지만,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스스로 떠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관계도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유할 줄 알았는데, 폭풍을 맞으면서 결국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좋았구나.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가 좋았구나.
그러면 “늦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사실 인생에서 가장 빠른 때다. better late than never. 아예 안 하느니, 늦게라도 결단하는 것이 더 낫다.
성지순례를 한번 결단하고 온 분들이 또 오려는 이유가 뭘까요? 편안하게 지내는 것보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에 매어 두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90일 통독도 마찬가지예요. 힘들어도, 말씀에 나를 매어 두고 사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좋은 삶임을 알게 됩니다.
호세아 6장 1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가 여호야긴의 회복 이야기로 끝나는 것처럼, 역대하가 고레스 칙령으로 끝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끝 속에서도 소망을 남기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울의 아름다웠던 첫 시작을 마지막에 다시 리마인드한 이유도, 하나님이 여전히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처럼,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돌아와 살기를 원하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집을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 줄로 믿습니다. 정말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2026.02.15(주) | 주일설교 |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교회 (행 3:1-10) 이원진 목사
[260215 주일2부예배]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교회 (행 3:1-10) | 이원진 목사 | 2026.02.15
[ 설교 요약 ]
- 교회의 사명인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는 우리가 영혼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 주는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된다(고전 3:6-7).
- 성령의 충만함은 일회성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기도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생각’과 달리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
- 기도할 때 이전에는 배경처럼 지나치던 사람(미문 앞 앉은뱅이)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다.
- 앉은뱅이는 은과 금을 기대했으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라고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한다. 교회의 본질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이름이며, 영혼을 살리는 길은 오직 복음이다.
- 예수 이름의 능력은 사람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꾼다. 미문 앞에 머물던 인생이 성전으로 들어가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자로 변화된다.
- 교회가 손가락질 받는 이유는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고 오히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제·교육·치유·개혁을 하되,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복음으로 가능하도록 영적으로 뒷바라지하는 곳이어야 한다.
- 한 사람이 예수께로 돌이켜 예배자가 될 때, 그 사람을 보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예배로 내가 살고,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살아나며,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로 세워진다.
[ 스크립트 ]
우리 삶의 무거운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나를 새롭게 하시는, 내게 능력 주시는,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귀한 이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입술로, 우리 마음으로, 우리 삶으로 주님을 고백해내는 데까지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주시는 말씀이 내 삶의 무거움에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심령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예배를 받으실 주님을 찬양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교수님, 몇 가지만 좀 나누고 예배 말씀 나누겠습니다. 2월 21일 금요일까지 담임 목사님께서 이집트 성지 순례로 출타하셔서 오늘 1부부터 4부 예배는 1월 6일에 부목사님들이 설교를 하게 됩니다. 특별한 건 설 명절 기간입니다. 설 명절 기간 동안에 수요 여성 예배는 드리지 않으니까 기억해 주시고요.
성지 순례 팀도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명절이라서 설 명절 가정 예배 순서지로 저희가 홈페이지 게시판에 게시했습니다. 가정에서 돌아가셔서 명절 가정 예배 순서지로 함께 가족과 예배해 드리시면 좋겠습니다. 2월 28일에 나라 사랑 기도회, 저희가 3.1절마다 나라 사랑 기도회를 하는데 올해는 3.1절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그 하루 전날인 2월 28일 토요일 6시 20분 새벽 예배 시간인데요. 그 시간에 나라 사랑 기도회를 이곳에서 진행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오셔서 온 가족이 같이 기도하는 시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배팀에서 함께 예배를 섬길 스태프들을 모집합니다.
홈페이지 게시판, 또 입구 QR 코드를 찍으시면 신청이 가능하고요. 예배에는 많은 분야들이 있습니다.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삶 속에서 또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자리로도 나오시는 여러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르시면 가르쳐드립니다.
그리고 모르시면 성심성의껏 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니까 기억해 주시고 신청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새가족 교육이 없다고 저희가 안내가 나갔는데요, 신년이 되면서 새가족분들이 정말 많이 오셔서 새가족 교육을 해야겠다, 담임 목사님이 이야기해 주셔서 나가시기 전에 2, 3부 예배 후에 지하 1층 새가족실 A에서 또 B에서 새가족 교육이 있으니까 참고해 주셔서 새가족 교육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로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 한 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같이 있습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아멘.
오늘은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월 1일, 교회 올 한해 주제가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기억하고 계시죠? 그런데 이 주제를 세우고 나서 아마 성도님들이 많이 부담감을 가지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영혼을 살릴 수는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7절 말씀 보니까 이렇게 기록됩니다.
같이 한번 읽을까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멘.
한 영혼을 살린다는 말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으시면 좋겠다. 제가 부담을 좀 덜어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심고 물 주는 일을 하면 됩니다.
부담이 되는 이유는 “왜 안 자라지? 왜 안 살아나지?” 하는 마음 때문에 그래요.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해야 하는 일은 그 사람이 잘하나 안 잘하나 확인하고 책망하는 게 아니라 심고 물 주는 거 하면 됩니다. 심고 물 주는 일을 우리 성도님들께서 잘 감당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상준 목사님하고 같이 사역하면서 부교육자로서 유익한 게 참 많습니다. 목사님은 끊임없이 후배들에게 심고 물을 주십니다. 정말 잘 먹여주십니다. 참 이상한 것은 목사님께서 단위에 올라오시면 항상 체중 관리를 하신다고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우리 후배들은 먹는 즐거움에 살이 막 찝니다. 살찌면 성도님들이 가장 먼저 알아보세요. 언젠가는 인사를 하는데 언제부턴가 성도님들이 얼굴을 쳐다보면서 인사를 하지 않으세요. 배를 쳐다보고 인사를 하세요.
“내가 살쪘나 보다, 내가 살이 빠졌나 보다.” 그렇게 판단을 할 수가 있죠. 기분이 참 오묘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목회자를 향한 관심이라고 생각을 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목사님하고 사역을 할 때 때로 힘에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사님이 힘에 부칠 때마다 하시는 게 있어요. 먹이시는 거. 그럼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요.
“내가 사육당하는 건가?” 그래서 그런지 계속 먹이십니다. 먹으면 자라납니다. 성장기는 아니지만 계속 옆으로 자라나는 이상한 현상들이 있어요. 심고 물 주고,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1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1절 말씀입니다. 시작.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우리도 기대하고 고대합니다.
분명히 뜨거웠을 것이에요. 그 뜨거움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무리 안에서는 말씀 공부가 존재했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했다라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서로에게 공유하고 나눠주는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났어요. 성령에 충만한 사건들.
그러나 이 성령의 충만함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죠. 성령이 충만한 사건은 감정적인 일시적인 반응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라고 기록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는 자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아멘이십니까? 기도하면 영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보다 생각을 해야겠다는 게 우리한테 더 익숙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기도보다 먼저 생각하며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하면 사람이 움직이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신 줄 믿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는 건 그래서 우리 삶에서 너무도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2절 말씀 한번 볼까요? 2절 말씀에 같이 한번 읽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둔 자라.” 그 미문에 누가 있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기도하는 자들에게 이전에 보이지 않았지만, 기도하니까 보입니다. 이전에는 지나칠 수 있었지만, 기도하니까 지나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금 그런 상황이 됐어요.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니까 이전에도 끊임없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러 갔을 텐데, 이전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도행전 3장에 기록하게 되죠.
베드로와 요한은 태어나서부터 못 걷게 된 자를 만나게 됩니다. 안진뱅이라고 하죠. 이 안진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와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도록 시켰습니다. 저도 담임 목사님 따라서 AI에게 좀 시켰어요.
AI로 검색하니까 문이 상당히 다양한 문들이 나와요. 성전의 미문은 지금 이스라엘의 황금 게이트, 더블 게이트라고 하는데, 두 개 있는 문 앞에 성전 미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요청을 해서 나온 거예요. 앉은뱅이가 스스로 온 게 아니죠.
사람들이 메고 와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도록 시켰어요. 언제 그랬을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날마다, 매일같이 그것을 하도록 시켰다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성전의 미문에서 매일 마주치는 앉은뱅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배경화면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지나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이 사람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 앉은뱅이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보면 3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해요. 제가 한번 읽을게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앉은뱅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구걸이었습니다. 앉은뱅이를 메고 온 동업자들이 있는 곳으로 모아서 이 구걸로 자신뿐만 아니라 몇 사람 정도는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상대로 이 구걸을 하는가? 성전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경건한 마음을 이용해서 돈을 얻고자 함이 이 구걸의 전략이었습니다. 질문 한 가지 해볼게요. 이 앉은뱅이는 불쌍한 사람인가요? 저는 말씀 준비하다가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히 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왜 불쌍한지를 알았던 거예요.
누군가가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렇게 저한테 질문할 수 있죠. “목사님, 그가 장애인이니까 불쌍한가요?”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그렇게 질문하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이것을 영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불쌍한 이유는 그의 삶의 이유가, 그의 존재의 이유가 단지 그걸 하는 데 있었다라는 것이 불쌍한 이유인 거죠. 여러분, 우리 삶의 이유가 돈 버는 것, 돈에 있다면 우리도 불쌍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안진뱅이는 불행한 인생인가? 제 이야기를 좀 드리면, 저는 과거에 한 2년 동안 방글라데시에서 살았어요. 군대 대신에 태권도 감독으로 일을 하러 갔었는데, 내가 원해서 간 나라는 아니었어요. 나라에서 보내서 “너는 거기로 가라.”
그때만 해도 2002년도였는데요, 최빈국 중 하나였어요. 사람들이 방글라데시로 떠나는 저에게 위로를 참 많이 해줬어요. “괜찮아, 좋은 나라야.” 무슨 좋은 나라냐? 왜냐하면 거기에 왜 좋냐 물어보니까,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잖아. 좋을 거야.
제가 그 나라에 가서 경험한 그들의 행복은 무엇이었는가? 인도에 영향을 받은 주변 나라들이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영향들이 좀 남아있었고요. 현대판 카스트 제도의 척도가 되는 돈이 있어야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민했어요.
왜 행복지수가 높을까? 그들하고 많이 대화하고 살아보니까, 자신들의 신분에서 그 필요 이상의 꿈을 꾸지 않는 것이 그들한테 있더라고요. 단지 지금의 밥벌이를 하는 정도, 그러니까 구걸이라도 하루하루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에게 꿈이 있어야 되고 비전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길가에 가보면 이슬람권 나라들은 독특한 느낌들이 있는데, 길가에 그냥 거지들이 상당히 많아요. 내가 특별한 일을 안 해도 구걸로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그것을 행복해하면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슬람 교리상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돈을 안 주면 “하나님이 주라고 했는데 왜 안 주냐” 이렇게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행복, 과연 오늘 이 안진뱅이는 행복한 사람인가?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돈을 잘 버는 것이 행복인가?
그런 면에서 안진뱅이는 구걸해서 행복한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남의 인생을 불행하다, 행복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으면, 주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니라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벌리면 행복하고, 돈이 안 벌리면 행복하지 않다? 절대로 그 기준과 그 가치에 끌려가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죠.
이사야 43장 21절, 우리를 찬양하도록 만드셨죠. 제 아들이 입에 가시가 돋도록 외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찬양하도록 만드셨어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에요.
그러나 돈의 노예가 돼서 돈을 버는 것의 목적이 된다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방향이죠. 돈을 벌어도 그 이유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게 우리가 나아가야 될 방향이고, 우리가 생각해야 될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순위가 바뀌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일에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들 삶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오늘 인생의 우선순위가 구걸하는 거였고 돈이었던 이 안진뱅이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4절에서 6절 말씀인데요, 4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 성전의 미문에서 그 안진뱅이를 어떻게 봤다고요? 주목해서 봤어요. 뚫어지게 본 거죠. 이 안진뱅이의 기대는 어떤 기대였을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서 기대감으로 바라봤을 거예요. 불쌍한 인생이죠.
그런데 6절에 베드로가 아주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너에게 주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라고 이야기해요.
안진뱅이가 원하는 게 뭐였나요? 은과 금이에요. 당장에 자기의 바구니가 차는 것을 원했죠. 은과 금은 안진뱅이에게 하루에 끼니를 때울 수 있거나, 자기 동료들을 어떻게든 같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도구였을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은과 금은 나한테 없어. 은과 금은 나한테 없다”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죠.
한국 교회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은 사고치지 않더라고요. 사고치는 교회들은 상대적으로 돈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은과 금이 많아진 데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은과 금이 교회에 필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 없이 사역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사역을 진행하면서도 은과 금이 필요하다고 목사들도 성도들도 요청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은과 금보다 중요한 게 분명히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역하면서, 우리가 예배하면서, 우리가 교제하면서 은과 금보다 더 중요한 거 있지 않습니까? 은과 금은 많아졌지만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라진 채, 교회라는 명목상의 조직만 존재한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한 영혼을 살리는 거예요. 은과 금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은과 금으로 해결되면 적금 들고 투자하고 하면 되겠죠. 여러분, 그러나 그걸로 해결됩니까? 영혼이 살아납니까? 영혼이 기뻐서 춤춥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저는 대문자 T입니다. 가끔 목사님하고 사역하다 보면 F 목사님들과 사역하다가, 가끔 혼자 조용히 일하고 있는데 불러요. 대문자 T의 솔루션을 원할 때가 가끔 있으시거든요. 저 스스로도 인정합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그래서 만약에 제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안진뱅이 보고 감동하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하루는 저녁에 누군가 상담받으러 왔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짜고짜 이상준 목사님을 만나겠다고 하면서 찾아왔습니다. 많이 당황스러웠어요.
키는 190이었습니다. 그리고 덩치는 저의 한두 배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생각하죠. “목사님, 그렇게 작지 않아요.” 아무튼 저보다 두 배 커 보였습니다.
행색은 말할 수 없이 누추했습니다. 게다가 그래도 상담받으러 왔다는데, 그래도 운동화라도 신발이라도 제대로 된 걸 신고 올 줄 알았는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얘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제가 언젠가 새벽 기도 때 간증으로 나눈 적이 있는데, 이분은 사업도 실패하고, 가정도 실패하고, 관계도 실패하고, 돈도 없었어요. 뭔가 안쓰럽고 안타깝고 하는 상황을 나에게 설명했습니다. 제가 대문자 T라고 했잖아요.
공감이 하나도 안 가는 거예요. 이상하게 제가 그분한테 미안하지만, “그건 형제님 사정이고.” 그런데 죽으려고 한다는데 이상하게 나는 이상하다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 사람에게 뭐가 필요할까?” 이 생각뿐이었어요.
돈 얘기를 했더니 돈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단지 따뜻한 한마디가 필요해서 온 것도 아니었어요. 이상준 목사님하고 상담을 하려면 그래도 뭔가 절차를 우리가 해드리는데, 일단 목사님께 사정을 이야기해라. 직접 가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이메일을 좀 쓰면 좋겠다.
일단 5만 원을 손에 쥐어주고,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 찜질방에서 한숨 자고 잘 씻고 찜질방에 있는 PC로 목사님한테 메일을 쓰고 그 사정을 얘기하면 목사님이 빨리 연락을 주실 거라고, 두 가지를 드렸어요.
이상준 목사님 이메일 주소를 적어줄 테니까 상담받고 싶은 이유와 내용을 잘 적으면 좋겠다. 그 형제가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이메일이 없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그러면 또 한 가지가 생각이 나서 이야기를 해줬죠. 영등포에 자활센터가 있는데, 거기 주소를 적어줄 테니까 거기를 찾아가 봐라.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주소를 적어줬습니다.
찾아가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업을 두 번이나 했던 사람이라 그 정도의 능력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그 형제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 “내가 보기에 형제 죽으려고 온 게 아니야.” 놀라더라고요. “미안하지만 죽으려면 여기 오지 않아. 내가 보기엔 살려고 온 거예요.” 저보다 덩치가 큰 사람인데 제가 막 쏘아붙였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왜 와요? 마지막으로 찾아왔다는데 마지막 같은 느낌이 안 들었어요. 그 이유라면 살려고 뭔가를 붙잡고 싶어서 상담받으려고 하고 찾아온 거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물어봤던 거죠.
4일 뒤에 교회에 담임 목사님께 연락이 왔어요. 골든타임에 이 형제를 잘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이 형제를 평창에 있는 자활을 돕는 공동체로 우리가 보냈습니다 하고 연락이 온 거예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내 인생에 손꼽히게 잘한 일 중에 하나였구나.” 그 뒤로 제가 4050 공동체, 저희 1516 4050 공동체 지체들하고 평창으로 아웃리치를 갔었는데, 그 형제가 턱하니 있는 거예요. 아주 밝은 얼굴로.
이전에는 검은 티셔츠였는데 되게 해맑은 얼굴로 저를 보는 거죠.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나중에 잘 되면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그래서 제가 “그냥 잘 지내니까 보기 좋네요.” “은혜는 잊어도 되니까 잘만 살아 있으라고. 나한테 갚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그 순간에 이 형제를 대하였던 제 많은 선택들이 성령님이 개입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아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원하는 것,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원하는 것, 관계를 가지면서도 원하는 것. 그런데 원하는 것은 있지만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한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영원히 살아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인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복음을 주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있는 것이 있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어요. 그 이름의 능력, 그 이름의 권세, 그 이름의 치유, 그 이름의 기적. 이 베드로에게는 확실히 그 인생 가운데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는 그것을 그 앉은뱅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엄청난 수식어를 준 게 아니에요. “너가 예수님 믿으면 어떻게 될 거야? 너가 예수님 믿으면 네 인생이 바뀌어질 거야?” 이렇게 구슬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예수 이름으로 선포했을 뿐이에요. 그때 주님이 일하셨죠.
아까도 이제 우리 김혁재 목사님이 같이 찬양을 불렀지만 작년에 많이 불렀던 찬양, 오늘도 부른 찬양 “예수 아름다운 이름” 이 찬양은 제가 쓴 곡입니다.
네, 다 아시겠지만 한 2년 전에 이상주 목사님께서 미국에 베델교회 컨퍼런스를 다녀오라고, 다짜고짜 당신이 알아보시고 저한테 다녀오라고 던지시는 거예요. 그래서 컨퍼런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알아보니까 컨퍼런스 과정 중에 어떤 프로그램이 있었냐면 작곡 프로그램이 있는 거예요.
도전을 좀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노래를 만들어서 제출하고, 만약에 이게 선정이 되면 미국 내슈빌의 프로듀서들하고 같이 이 곡뿐만 아니라 다른 곡들도 협업을 해서 작업할 수 있다는 저에게 이렇게 혹하는 그런 제안이 담긴 제안서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곡을 썼습니다.
곡 쓰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정도였어요. 목사님 밥 먹으러 가자고 하시기 바로 직전에 훅훅 써서 밥 먹으면서 목사님께 들려드렸어요. 물론 이 노래들은 어디서 들어본 가능성이 있는 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곡을 쓸 때 항상 그런 마음이에요. 누군가는 알고 있을 법한 멜로디들이 섞여 있을 거예요. 그 노래를 들고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에 간 지 3일 뒤에 이메일로 연락이 왔어요. 제가 순간 이메일 제목만 보고 “드디어 내가 선정이 됐구나, 뭔가 됐구나” 메일을 열어보니까 내용이 이렇습니다. “당신의 참여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그러니까 선발이 되지 않은 거죠.
마음에 오기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회신을 요구하지도 않은데 저는 회신을 보냈어요. “괜찮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미국에 메일을 쓸 때 이렇게 쓴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이 곡으로 한국에서 예배곡을 반드시 부를 거고, 앨범으로 또 만들 생각입니다. 언젠가 이 노래가 한국에서 잘 알려지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 저와 함께하고 싶을 겁니다.” 완전 약간 똘끼가 충만했죠.
그렇게 해서 한국 와서 우리 일요일 교회에서 부르기 시작한 찬양입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애써 위로를 해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좋은 노래를 왜 못 알아보지?” 저한테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이 노래를 만들 때 10분 정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뭐라고 고백하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냐면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은과 금은 나한테 없어도 세상이 인정할 만한 탁월한 능력이 내게 없다고 해도 예수님 이름만, 예수님만 내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노래가 선정이 되든 안 선정이 되든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선정이 돼도 걱정이었어요. 저 무리들 들어가서 내가 영어를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마음의 부담이 심했는데 하나님 내 부담을 잘 아셨는지 선정을 안 해주신 것 같아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이름만 내게 있으면 됩니다.
계속해서 7절에서 8절인데요. 7절에서 8절 한번 볼까요? 시작.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선포하고 어떻게 했냐면 오른손으로 잡아 그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변화가 일어났어요.
돈이 목적이었고 그것이 삶의 전부였던 안진뱅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자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던 거죠.
그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온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온몸으로 평생 성전의 미문에서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진뱅이가 성전으로 뛰어들어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이 되어집니다. 여러분, 놀라운 변화인 거예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할 때 그 인생이 살아나는 거죠. 이곳에서 원치 않아서 오신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명절이라서 가족한테 끌려오신 분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분 안 좋게 끌려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작은 소원 하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여러분을 만나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삶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안진뱅이의 삶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 온몸으로 예배하는 인생으로 바꿔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은과 금으로가 아니라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여러분.
그래서 교회는 뭘 하는 곳이 되어야 될까요? 교회는 예수님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딴 얘기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예수님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에서 은과 금 이야기 안 하셔도 됩니다. 교회에서 내 은과 금 어떻게 불렸는지 방법을 얘기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야 됩니다. 교회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남으로 살아남을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예수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가끔 성도님들이 카페에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원치 않게 제 귀가 밝아가지고 들을 때가 있어요. “어떤 목사님은 어땠더라, 이 목사님은 저랬더라, 저 목사님은 저랬더라, 아이고 어쩌냐.” 이런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하시더라고요.
성도님들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목사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목사님들의 관심이 있어서 하는 얘기로만 받아들이죠. 여러분, 그 얘기 말고요.
만나시면 하나님 얘기하고, 만나시면 예수님 이야기하고, 하나님 내 가운데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여러분 우리의 모임과 우리의 만남에는 그게 주가 되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됐어, 나는 잘 됐어, 나는 뛰어나게 됐어, 와 나는 너무 좋아” 이게 아니라, 그게 누구 때문인지를 고백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내용이 우리 주된 내용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내 모임의 주된 내용이 뭔가? 내 가정에서의 나누는 주된 내용이 뭔가? 내가 지인을 만났을 때 나누는 주된 내용이 뭔가? 본질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하영주 목사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교회는 반드시 구제해야 합니다. 맞죠? 가난한 자를 돌보고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하죠. 그러나 교회는 구호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육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의료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개혁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개혁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정의를 실현해야 됩니다. 그러나 정의실현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영적으로 뒷바라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세상에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고, 세상에 많은 공격이 교회를 향해서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요, 여러분, 교회가 영혼이 살아나는 곳이 되면 세상에 손가락질 받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영혼이 살아나는데 누가 손가락질 하겠어요? 인생이 무너진 사람이 살아나게 되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전심으로 예배하는데 누군가가 왜 손가락질 하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본질을 기억하십시오.
9절에서 10절, 마지막입니다. 9절에서 10절 같이 한번 읽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교회가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뭘까? 오히려 영혼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으로 세상에서도 받는 스트레스를 교회에서도 똑같이 받는 것 때문에 그래요.
세상에서 내 동료가 내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배 아프게 이야기하는데 교회에 와서도 돈 얘기하고, 교회에 와서도 내 집, 부동산.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이 죽어가는 걸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영혼을 죽이는 삶은 아닌지.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는 뛰었네, 걸었네, 찬양했네, 찬양했네.” 뭘로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옛날 찬양 생각나시죠? “그는 뛰었네, 걸었네, 찬양했네.”
단순히 그냥 성경에 한 사건이 나타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이게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요, 어쩌면 앉은뱅이와 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아내고 있지 않을까 말씀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성전을 향해서 뛰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다는 거예요.
예배할 때 내 영이 살 뿐만 아니라 함께 예배할 때 모두가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미문에서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 미문은 뷰티풀 게이트, 아름다운 문이라고 칭해져 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내 삶을 치장하고 내 삶을 꾸며내고 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온몸으로 찬양할 때, 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을 보는 많은 사람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계기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그런 인생이 될 때, 또 내 옆에 있는 지체를 그렇게 인도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예요.
저도 한창 운동할 때 저를 바라보던 많은 친구들이, 제가 언젠가 기타를 메고 대학교 가는 길에 기타를 메고 찬양을 하니까 저한테 와서 고백하더라고요. “너가 교회를 다녔어? 너 예수님 믿는 사람이었어?” 많은 생각이 교차했어요.
내가 그런 본이 되지 못한 삶이었구나. 또 한 가지는 나의 이 찬양이 친구의 마음을 분명히 울렸겠구나.
세상의 미문에서 비로소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앉은뱅이가 성전을 향해서 뛰어들어가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비로소 하늘나라의 미문으로 통과하는 삶이 되어집니다.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완전히 주를 위해 바뀐 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예배하는지 다른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는 거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부르짖는지 다른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 담임 목사님 기도할 때 항상 그 멘트 하시잖아요. “옆 사람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거예요. 내가 옆 사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죠. 내가 하나님 말씀 전심으로 찬양하며 뛸 때, 옆 사람이 그것을 보고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 죽어있는 영혼이 그것을 보고 살아날 수 있게 되는 것도 오늘 말씀의 하나의 포인트이기도 한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이 완전히 주를 위해서 바뀌는 은혜가 있길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516 교회여, 살아날지어다. 한국 교회여, 살아날지어다.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예배자가 되기까지, 우리가 평생 주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을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같이 한번 기도했으면 좋겠는데요. 하나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한 사람을 내가 기억합니다. 그 사람은 구걸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미문에서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내 모습 같습니다. 죽어있는 나의 영혼, 죽어있는 우리의 영혼이 주님 살아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혹 그렇게 기도하기 원하시는 분 자리 한번 일어나서 같이 한번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은과 금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살아남을 하나님, 내가 우리가 오직 예수 이름으로 경험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이 교회가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임을 선포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님,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의 주된 관심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교회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셔서 내가 살아나고,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살아나는,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두 손을 높이 들고 주여, 함께 기도하십시다.
2026.02.12(목) | 4321 WORSHIP | 거하게 하시고 불로 임하소서 (요 15:4-5) | 박시형 목사
4321 OPEN WORSHIP [HOLY FIRE] "거하게 하시고 불로 임하소서" (요한복음 15장 4-5절) | 박시형 목사 | 2026.02.12
설교 요약
- 요한복음 15장 4-5절을 중심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신앙의 출발점이자 열매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 ‘거하라’는 명령은 감정적 열정이 아니라, 말씀·기도·예배·순종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삶을 의미한다.
-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의 열심과 능력만으로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열매는 억지 생산이 아니라 ‘거함’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맺히는 성령의 역사다.
- 신앙이 무늬뿐이 되지 않도록,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주님 안에 거하는 삶으로 부르신다.
전문 스크립트
두 달 연속으로 이렇게 뵐 줄 저는 몰랐어요. 지난달에 저는 다 쏟아부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은 안 부르겠지 생각을 했는데, 제가 지난주에 이렇게 초대를 받았을 때 사실은 제 마음 가운데 저희 교회 사역도 여러 가지가 있고 잠깐의 좀 쉼을 얻길 원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거절을 했었어요. "내가 언제나 불러도 오는 사람으로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 라고 제가 문자를 보냈어요. 그리고 사실 여러 가지 바쁜 스케줄도 있었겠지만 한 번에 다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 쏟아부을 게 없다는 생각이, 다음에 제가 기회가 되면 좀 쌓이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거부를 했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자꾸 하나님이 찔림을 주시는 거예요. "기회가 됐는데 아무나 찾지는 않는데 왜 네가 거부를 하냐" 라는 그런 마음을 주셔서 제가 계속 싸움을 했어요. "하나님, 그래도 주님 저희 교회도 좀 사정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제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계속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우리 원주 목사님한테 연락을 했어요.
"이제는 세워졌겠거니, 주님 세워졌으면 안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문자를 넣었는데 아직도 묻고 있다는 거예요. 설교자를 못 세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내가 가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역시나 하고 이 자리로 저를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서야 할 자리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저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이유를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죽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사실 예수님 이야기를 좀 많이 하려고 했는데, 오늘 찬양이 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어서 처음에 성령님 찬양을 하다가 제가 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제가 설교 본부를 먼저 주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원조 목사님과 한영이 되어서 잘 통한 것 같습니다. 참 은혜가 있는 그런 시간인 것 같아요. 어떤 말씀을 전할까라는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이상주 목사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한 거룩한 불이 임하게 하는 그러한 달을 정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거룩한 불, 뜨거운 불, 성령의 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과연 뭘까, 우리의 신앙 가운데 놓치고 사는 게 과연 뭘까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다가 제가 예전에 가장 기본으로 신학교 때 받았던 그 음성이 생각이 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오늘 시간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성도인 제자들과 그 당시 청중들을 향하여서, 그리고 앞으로 올 청중들을 향하여서 오늘 분명하게 두 가지를 얘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첫 번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나는 누구이다"라는 "애고 에임"이라는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여러 가지 말씀들을 하셨어요.
솔직히 제가 이거는 원고에 없던 말씀이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깊은 감동을 주셔서 제가 좀 말씀을 나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나를 생각하는 게 좋을까,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자들 가운데 그리고 그 당시에 청중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장면들이 몇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게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 누구다"라는 그런 메시지예요.
예수님이 몇 가지로 자신을 소개하긴 했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시고요. 또 다른 본문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시고요. 또 다른 본문에 보면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세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이 제자들 가운데 우리 청중들을 향하여서 가장 쉽게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설명한 대표적인 메시지인 거예요.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내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야"라고 예수님이 설명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는 전지전능한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굉장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단어들로 열거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을 먼저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면서 꼭 청중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성도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도 함께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내가 아는 것도 중요하고 안 만큼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도 알아가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함께 얘기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또 오늘 본문을 통해서 포도나무와 그리고 가지로서 설명하고 있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여러 가지 신들이 있었잖아요. 이스라엘 땅에 바알 신 같은 경우에는 풍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신들 가운데 비의 신이 있었고, 곡식의 신이 있었고, 특별한 그 신들만의 특징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특징들을 설명하지 않고 본인을 양의 문, 그리고 선한 목자, 포도 나무 이렇게 설명하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양의 문이 되신 주님, 그리고 목자 되신 그 주님, 그리고 오늘 포도 나무로 소개하신 그 주님이 저는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그게 먼저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개념이 내가 이해가 돼야지 많이 하나님 보이지 않거든요. 말씀 속에서만 나타났거든요.
그런데 구약의 말씀 속에서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자기 자신을, 즉 하나님인 자신을 이 세 가지로 소개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양의 문, 그리고 선한 목자, 포도나무로 비유하시면서 설명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가 이제부터 정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늘 본문에 나온 그 포도나무 본질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시길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그 지혜가 열리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문이 그때 열리기 시작해요.
하나님이 추상적이면 내 삶도 추상적이게 돼요. 하나님이란 존재가 구체적이지 않으면 내 인생의 나의 믿음도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존재가 내 삶 가운데 명확해지고 정확해지고, 그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임했을 때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는지에 대한 나의 인생의 본질이 거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상적인 하나님으로 여러분 믿지 마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실질적인 하나님이었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포도나무로 여러분의 삶을 초청하시고 여러분을 가지로서 정체성으로 불러주신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 즉 예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마음 가운데 믿으면 내가 어떤 삶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신앙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는 의미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그냥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나의 신앙을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아니면 여러분들 요한복음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이미지가 여러분 마음 가운데 생길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내가 그러면 그 하나님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그런 본질적인 마음 가운데 확신이 생기게 되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내가 포도나무야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밝히면서 그리고 나서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이제 5절 말씀이에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포도나무인데, 너희는 포도나무일 때의 그 하나님이 너희의 인생 가운데 가지로써 너희 정체성이 온전하게 확립되는 것, 그것이 너희의 신앙이요, 너희의 믿음이다 라는 것을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말씀은 정체성에 대한 말씀으로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존심이 때로는 조금은 꺾일 수 있는 그런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지의 인생보다는 포도나무의 인생을 살길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가지의 본질은 의존적이에요.
그냥 붙어 있어야 되는 것이 여러분, 그냥 그의 인생의 본질이고 어떻게 보면 정체성이라는 거예요. 이 가지의 세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첫 번째,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가 떨어져 나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거예요. 또한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가 떨어져 나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거예요. 또한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가 맺힐 수 없죠. 그리고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가지의 정체성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어요. 그리고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도 못해요. 그리고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다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만이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리고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열매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붙어 있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단순한 것이에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이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포도나무라는 어떤 비유를 통하여서, 그러면 영적인 관계로서 어떤 관계를 우리가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가지는 아무리 힘을 주고 발버둥을 쳐도 열매를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햇빛을 끌어당길 수도 없고, 물을 끌어 올릴 수도 없고,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뿌리에서 나오는 그 양분으로 말미암아 그냥 살아가고,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에요. 그게 여러분, 가지입니다.
가지는 오직 하나만 할 수 있어요.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가지의 정체성은요, 그냥 붙어 있는 거예요.
뭘 스스로 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포도나무에 그냥 붙어 있는 게 가지의 정체성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자꾸 이 한계에 대해서 부정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자꾸 포도나무처럼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거예요, 죄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포도나무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죠.
나는 붙어있기 싫어. 나는 독단적으로 한번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 그냥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마치 여러분 가정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기생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자꾸 받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이 한계를 부정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의 상황이 괜찮아질 거예요. 나의 환경은 열리게 될 거야. 이번에는 내가 한 번 더 잘해봐야지.
라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라는 자꾸 나에게로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 포도나무가 아닌 나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메시지들이 신앙적으로 책임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성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사고방식이 말하는 것은 바로 한 가지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신앙이에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는 포도나무가 주인이에요. 포도나무가 메인이고 거기에 곁다리로 붙어있는 것이 여러분, 그게 온전한 관계예요.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중심이 되어지는, 내가 포도나무가 되어지는 그런 신앙에 우리는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근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할 때가 있어요. 기도는 조금 줄여도 사역은 내가 잘할 수 있어. 말씀 묵상은 조금은 내가 덜 하더라도 봉사는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 묻고 답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그동안 가졌던 이성과 합리적인 부분, 경험적인 것들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그런 많은 경향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는 거예요.
특별히 여러분, 사역자들한테 그런 마인드가 참 강합니다. 우리 교육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항상 성경 보고 항상 여러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러분 믿고 계시죠? 웃음은 아니라는 그런 확신으로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그렇지는 않, 그렇지, 아니야. 1호 1호 교육자들은 안 그럴 거예요.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다라는 거예요. 때로는 시간에 쫓겨서 무엇인가를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해야 되는 그 상황 속에서도 그것들을 기다리지 못하는 그런 신앙, 그리고 기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위에 서서 설교를 해야 될 때도 있는 거예요. 말씀을 통독해야 되는데 통독하지 못하고 성도들 가운데 통독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도 있다라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저만 그럴 거예요. 여러분, 요즘 제가 통독을 시작했어요. 조금씩 조금씩.
제가 신대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제일 많이 읽었고요. 신대원을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잘 안 읽었어요. 솔직히 고백하면. 시간이 없다라는 핑계 때문에.
대부분 우리의 신앙이 그런 부분이 하나님을 믿지만 나를 더 믿는 신앙. 신앙은 있지만 세상과 그렇게 별로 차이. 차이 없는. 성경을 읽지만 세상의 기준에 오히려 익숙하고 한계를 만나야 그 모든 상황들을 꺾이게 되어지는 그런 자꾸 잘못된 패턴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나는 가지인데 포도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최근 우리 한 성도님께서 굉장히 큰 수술을 하셨어요. 두 번 수술을 하셨어요. 처음 수술할 때는 종양을 제거하는 것 때문에 갈비뼈의 뒷부분을 한 10cm 정도로 절단을 했어요.
거기에 종양이 생겨서 자꾸 밀어내니까 굉장히 통증이 있어서 그 통증 때문에 그것들을 잘라내면서 조직 검사를 했는데 희귀 암이라는 게 발견된 거예요. 0.3% 세계에서도. 그래서 결국에는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치료 방법이 없는 그냥 치료 방법은 그것을 절단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약간의 전이가 발견돼서 다시 제2차 수술을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1차 수술을 할 때는 그나마 굉장히 표정이 좋았어요. 그러고 나서 입원하고 퇴원한 이후에 얼마 안 있어서 교회에 오면서 너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굉장히 표정이 밝았어요.
그런데 2차 수술 들어가는데. 두 개를 더 절단을 해야 되는 상황인 거예요. 마음이 너무나 심란한 거죠, 너무나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술하기 바로 전날, 제가 만나서 밥 먹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 형제가 두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의 이 상황들이나 환경들을 잘 열어가시는 분이시고, 이게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제 계획대로 살아갔을 거예요 하면서 굉장히 놀라운 간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와, 정말 대단한 신앙이다. 정말로 대단한 믿음이다." 이런 수술과 이 암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제가 봤어요. 그래서 저희 교인들이 엄청 열심히 기도했거든요. 2차 수술을 잘 마쳤어요.
그런데 나중에 회복이 되고 난 이후에 제가 최근에 신방을 가서 말씀을 들었는데, 너무 아팠대요. 그리고 두 번째 들어갈 때는 마음 가운데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 때문에 그 수술이 끝난 다음에 마취가 풀리면서 "저 좀 죽여주세요"라는 말이 나왔대요. 너무 아프니까. 첫 번째 수술은 참을만 했대요.
그리고 나서 그 수술이 끝나자마자 회사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어떤 것을 해야 될지에 대한 스케줄을 잡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수술하고 나서는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첫 번째 "죽여주세요." 두 번째. 아, 예수님도 이런 고통을 당하셨겠구나.
왜요? 외과적인 부분이잖아요. 뼈에 관련된 부분이잖아요. 어떤 신체 기관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이런 어떤 뼈가 잘려지고 이런 고통이 이것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겪으셨겠구나. 이 두 가지를 간증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제가 첫 번째 수술하고 나서는 저의 계획에 대한 부분이 그 전까지는 다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야겠다라고 어렴풋이 기억을 하면서 기도를 했대요. 그런데 첫 번째 수술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스케줄에 대한 여러 가지 플랜들을 이제 짜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두 번째 수술 들어가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나 좀 죽여주세요, 주님." "아프셨겠군요." "저는 저 주님의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안 들고 그 다음부터는 이제 두 개가 세 개가 잘려진 상황이니까 더 이상 무엇을 해야 될지에 대한 생각이 아무것도 안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시키시든지 간에 저는 그저 순종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꿈이 많고 그렇게 인생에 계획이 많았던 그 젊은 청년의 입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막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을 제가 살아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여러분에게 겁주기 위해서 그런 거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해서 언젠가는 멈추게 하실 때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포도나무인 것처럼 내 인생을 계획하고 스케줄로,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계획과 스케줄을 잡는 그 모든 삶에 대해서 그것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멈추게 하는 그때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거예요. 왜요? 가지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데 자기가 자꾸 포도나무인 줄 아니까. 그리고 그 삶이 결코 옳지 않다라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길 원하시기 때문이죠. 따라서 여러분, 가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여러분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붙어 있는 것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저는 인지하고 기억하고, 날마다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아무런 고백이 아닌 것 같지만, 여러분 가장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가장 여러분 인정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인정되고 싶지 않을 때가 참 많아요. 왜요? 여러분들이 능력이 너무 많거든요.
직급도 있거든요. 사회적인 위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계속 끊임없이 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세요.
"너희는 가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하세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지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마침표를 거기서 딱 찍은 거예요. 가지는 그냥 붙어 있는 게 다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신앙이오, 믿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그냥 와닿지 않잖아요. 저희가 그렇게 여러분 쉽게 이 말씀이 수만 번, 수십 번 여러분들이 들었을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그렇게까지 여러분 와닿지 않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이 경험을 한번 해보면 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요즘 많은 분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참 많아요. 왜냐하면 걱정과 근심과 염려들이 참 많거든요. 염려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가 염려하고 있는 그 모든 부분들을 내가 아직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마음 가운데 교만함들이 있는 거예요.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마음 가운데 불안한 거예요, 염려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들이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이 여러분 정상적인 삶인데, 그것을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끝까지 붙들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두려움에 잠을 못 자다가 결국에는 불면증에 빠져요.
가장 쉬운 방법은 뭔지 아십니까? 염려하지 않는 거예요. 할렐루야, 너무 간단한 말씀이죠. 염려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냥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이게 여러분 예수님의 명령이에요. 말씀이 여러분 기준이라고 여러분들이 마음 가운데 매번 매 순간 고백하고 고백하고 고백하지만, 실질적인 상황 가운데서 내가 그것들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라는 거예요. 정말로 여러분들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실 때 가지라고 내가 믿어야 돼요. "너희는 가지인데 붙어있어야만 돼"라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라고 여러분 고백하셔야 돼요.
그리고 "나를 떠나서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내가 믿는 거, 그게 여러분 성도의 정체성이요, 우리의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어주십니까? 여러분 진짜 믿기로 결정하셨어요? 네, 그럼 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예수님은 생각보다 조금 덜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
나를 떠났을 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요,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이 표현은 완전한 무능력으로 의미해요. 무능력.
어찌 보면 주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라는 선언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무능력하다라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인정하길 원하세요? 네. 한 다섯 분 하신 것 같아요. 이거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요.
여러분 나는 무능력하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거, 사회적인 어떤 기대치, 경험치가 내 마음 가운데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나는 행동할 수 있다고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그 영역을 어느 것으로 어떻게 이해하는가. 여러분 그것을 먼저 우리는 살펴봐야 합니다.
어느 영역까지 봐야 하는가. 문맥상 의미로 보면 여러분 열매에 관련한 내용이에요. 열매. 요한복음 15장의 핵심 단어는 이 열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2절 말씀에도 열매가 나오고요. 4절 말씀에 열매를 맺다. 그리고 5절 말씀에 많은 열매를 맺나니 8절 말씀에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 영광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것은 문맥적으로 볼 때 열매 맺는 일과 연결되어진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뭘까요?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 구원의 열매가 우리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는 것,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 이것이 우리 가운데 맺혀지는 그런 열매의 다양한 그런 종류입니다.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결코 영적인 열매들은 맺혀지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이 아무것도라는 그 문맥, 아무것도라는 그런 단어가 문맥적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그 표현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죠.
무작정 노력한다고 해서 여러분 열매가 맺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 이걸 인정하지 못해서 마음 가운데 불편해 하신 분들이 많으세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못한다", "너희가 맺으려고 하는 그 노력들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가운데 불편한 거예요. 제가 트리니티 신대원을 나왔는데, 1학년 때 교양 과목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그러한 과정을 제가 수강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 구절에서 좀 충격을 받은 거예요. 신대원생이라는 어떤 자부심을 산산조각 냈던 그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의 말씀이에요. 제가 그 신대원에 들어가기까지 사역을 진짜 많이 했거든요. 여러 가지 사역 경험도 많았고,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들을 제가 경험했기 때문에 저의 능력치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가 의심하지 않았던 그런 교만함이 제 안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제 마음 가운데 찔림의 찔림을 제가 제 마음 가운데 찔려주시는 거예요.
"네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고, 참된 제자가 될 수도 없고, 성품의 변화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제 마음 가운데 생각을 해보니까, 저는 사역을 너무나 많이 한 것 같은데, 제 마음 가운데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을까? 그것을 통해서 나의 성품이 변화되었을까? 그리고 그것들이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 갔을까라고 생각해보니까, 거기에 물음표가 계속 계속 찍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될지에 대해서 여러분 한번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전히 뛰어나다라고 여러분 믿으세요? 영적인 열매들이 풍성하다라고 여러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계속 진행 중이세요?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들게 되는 그런 말씀인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제자로서의 삶, 성령의 열매, 하나님께 영광, 인격적인 성품과 변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배를 안 드렸어도 아니에요.
찬양을 안 해서도 아닙니다. 기도를 안 해서도 아닙니다. 포도나무의 신 예수님께 우리가 붙어 있는 삶이 있어야지만이 가능한 영역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어떤 연수와 많은 비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참 좋잖아요.
1년, 2년, 3년, 10년, 20년이 될수록 그런 열매들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성들과 인격적인 변화들이 함께 이루어짐 너무나 너무나 좋을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라는 거예요. 가지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치 포도나무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열매가 맺히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 영역이에요. 가지가 포도나무 행세를 하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 것 같은데 없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세상과 똑같은 삶을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거예요.
여러분, 성도로서 영적인 열매와 영적인 변화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첫 번째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어떤 열매를 여러분들은 맺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떤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떻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어떤 인격적인 변화, 언어적인 변화, 삶의 태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 변화의 이유는 내가 잘해서, 내가 성경을 읽고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붙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열매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신앙의 연차 때문에 아니면 어떤 누군가의 인정 때문에 그 열매가 맺혀졌다고 우리가 착각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열매가 맺어졌다는 것, 그것이 여러분, 첫 번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을 떠나도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사업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돈도 벌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보세요. 예수님 없이도 좀 다 잘 살 수 있는 영역들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분들도 계세요.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꼭 그렇게 유별나게 신앙생활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꼭 그렇게 붙어 있기 위해서 나를 그렇게 억누르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실 수도 있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장일까? 예수님의 말씀은 약간의 예외 조항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한 기준이요, 분명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따라서 여러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다는 것, 그 한 가지와 두 번째는 예수님 없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지만, 여러분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생명이 흐르지 않는 상태 속에서도 잘 될 수는 있다는 거예요. 잘 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라는 의미는 생명에 관련된 문제예요.
첫 번째는 열매에 대한 문제지만, 두 번째는 생명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여러분 꽃집에 가보면 꽃들이 정말로 예쁜 꽃들이 많죠.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색도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다양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꽃은 이미 뿌리에서 끊겨진 거예요. 잘린 상태입니다. 그 꽃은 여러분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실제로는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여러분 그 상태로 오래 가느냐가 문제인 거지, 결국에는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고, 꽃은 떨어지고 메말라 썩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과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잘 되어 있는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고, 내 삶에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에 예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면 생명은 어느 순간까지만 연장될 뿐이에요.
언젠가는 메말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 아무것도 의미에요. 예수님 없이도 겉으로 괜찮아 보일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여러분, 사역도 하고 봉사도 하고 조직도 유지시킬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뿌리가 끊어지면 결국 마르게 되어 있는 거예요. 뿌리에서 잘려나가면 연결되어지지 않으면 결국에는 말라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올라오고, 그것들이 느껴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 삶 가운데 생명이 흘러 넘치는 거예요. 지금 잘 되고 있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여러분 자만해서도 안 되고, 그것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끊임없이 나는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생명력이 내 안에 있는가에 대한 부분을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의 교회에 있을 때 예배 파트 전도사로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2년 정도를 제가 사역을 했는데, 어느 날은 이제 연말이었어요. 12월에 참 행사가 많잖아요. 특별 새벽기도도 있고, 크리스마스 행사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신년에 대한 준비되어지는 것도 있고, 송구영신 예배도 있고. 그래서 그 달에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큐시트라는 게 있어요.
순서지 같은 거. 그걸 한 40장을 넘게 쓴 것 같아요. 그래서 수많은 예배들이 계속해서 진행이 되는데, 제 마음 가운데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거예요. 제가 오늘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너무나 마음 가운데 감동이 있었거든요, 떨림이 있었거든요.
"이런 교회에서 나를 사용해 주시다니,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그래서 정말로 감동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역이 2년 차 되고 그 연말의 사역 가운데 수많은 예배들이 드려지고, 그 예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데, 제 마음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주일에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1부부터 7부 예배까지가 있는데, 제가 1부, 3부, 5부, 7부 네 번의 예배를 들어갔어요.
제가 전도사이기 때문에 제가 다 해야 되는 그런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도 그 예배를 담당은 하지만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예배 들어가면 우리 목사님 옆에도 앉아계시지만, 순서도 신경을 써야 되고, 등단과 퇴장도 신경 써야 되고, 자막이 잘 나가는지 신경 써야 되고, 다음 목사님 얘기하는 것도 귀를 기울여야 되고, 집중할 수가 없어요. 솔직히.
그래서 제 마음 가운데 진정으로 내가 한번 예배를 드려야 되겠구나. 그 사이사이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으니까, 내가 진짜 한번 예배를 드려보자. 그래서 가장 피곤한 2시 예배를 제가 들어갔어요. 2시 예배가 4부 예배였거든요.
그런데 그 예배가 그렇게 힘들긴 했지만, 그리고 그 다음 예배를 또 섬겨야지만 그 제 영이 살아나는 것을 그때에서야 제가 경험하게 됐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 깨달은 게 무엇인가? 사역자들도 영적인 공급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게 끊어지면 결국에는 그 사역 자체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짐이 되고, 이익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물론 여러분, 1516 교회 사역은 어땠느냐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을 그 시간, 여러분, 그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24시간 중에 여러분들이 새벽 기도, 아니면 여러분들이 묵상하는 그 시간, 그 한두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22시간 동안 생명이 없이 살아간다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숨을 쉬지 않는 거예요.
아무것도 공급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공급이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하잖아요.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또 보고 있잖아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잖아요. 누군가를 만나잖아요. 물론 여러분, 그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중요하다.
그 생명력을 우리는 계속해서 공급을 받아야지만이 우리는 살아날 수 있다. 여러분, 그 개념과 그 정체성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어야지만이 우리는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 가지로서의 정체성을 우리 마음 가운데 새기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력 있는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 열매로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무늬뿐인 성도의 삶 가운데서 이제는 벗어나길 바랍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가 아니라 내가 그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내 안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격이 변화되고 열매가 나타나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살아있다라는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거로 여러분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 여러분 축복합니다. 성령의 불은 예수 그리스도께 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에요. 거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굉장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왜요? 그 생명이 성령의 불로서 우리가 임하기 때문에. 끊어졌다면 여러분, 그 생명력이 끊어졌기 때문에 여러분 거룩한 성령의 불을 아무리 강구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단절된 상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상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게 그것이 여러분 성도의 삶이라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런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린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나와서 한번 집회 드릴 때 거룩한 불이 내려주시옵소서. 물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간절하는 사람, 애통하는 사람, 여러분 의에 줄이고 목마른 사람 가운데 하나님 부어주실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오늘만 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사람 가운데, 그 생명력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매일매일 여러분의 삶의 순간순간 곳곳마다 임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게 여러분 생명이 임하는 삶의 특징이에요. 그게 여러분 성령의 불을 구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날마다 붙어있을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길 주님 여러분 축복합니다.
생명력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날마다 흘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결론이 어떻게 붙어있는가? 어떻게 붙어있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기서 '거한다'라는 것은 헬라어로 '매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머물다, 지속하다, 떠나지 않다, 계속 연결되다 라는 그런 의미예요.
다시 말하면 감정적으로 순간적인 뜨거움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결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면, 감정을 날씨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맑고, 내일은 흐리고, 어느 날은 눈보라가 치고, 어느 날은 폭풍과 침멸다. 이제 입춘이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따뜻해졌어요.
그래서 아침만 영하 1, 2도 정도 되고 낮 기온이 점점 올라가더라고요. 이제 날씨의 변화죠.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감정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여러분 기후는 날씨와는 좀 다른 거예요. 기후는 어떤 의미입니까? 한 지역에 지속적으로 날씨가 유지되어지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해서 한국이 사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은 결국에는 사계절이 있는 그런 계절의 기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오늘 기도하다가 눈물이 났다고 해서 예수님께 거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잘 기억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감정적인 것과 거하는 것의 비교를 의미하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기도하는데 감동이 많은 거예요.
여러분, 그 한 번의 일시적인 그 감정적인 그 거함이 실질적으로 거함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 감동이 없다고 해서 거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예배 한 번의 뜨거움 때문에 "내가 오늘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거함이 아닌 것이고, 오늘 별로 감동이 없어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러실까?"라고 한다고 해서 거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함은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영적인 기와 같은 거예요.
내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내 삶의 기본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서 이런 말씀이죠.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을 내가 계속해서 꾸준하게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다 보라 통독 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알렐루야. 상정 목사님이 저한테 부탁한 거 아니에요. 보라 통독을 한다는 것은요, 내가 말씀에 어떻게든 붙어 있겠다는 의미예요. 보라 통독하면 숙제도 많잖아요.
숙제도 해야 되잖아요. 그리고 또 통독도 해야 되잖아요. 얼마나 할 게 많습니까? 또 질문도 해야 되잖아요. 그것을 통해서 내가 끊임없이 그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해요.
뿐만 아니라 내 삶의 기도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삶. 떠나지 않는 삶. 그래서 여러분, 여기 1516도 계속 릴레이 기도를 하시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 성전에서 끊이지 않는 그 기도의 삶을 통해서, 물론 거리가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냥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계속 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그런 무릎 꿇는 기도의 삶, 그것을 계속 연결해 가는 거예요.
이게 붙어있는 삶이에요. 거함의 삶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신 마음들이 있다면 그것을 삶 가운데 순종의 삶으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 말씀에 거하는 삶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서 저는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거하는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잠깐 해봤어요.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그분을 인식하고 그분의 말씀에 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 누군가를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상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야기인가.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 때도 그냥 어떤 재미로 흥미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무엇일까 계속 고민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말씀에 거하는 삶,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함을 상태로 설명을 해요. 시편 1편 2절, 3절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인데요. 우리 한 목소리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먼저 과하는 사람의 특징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서 그것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표현을 합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매일 열매를 맺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보세요. 늘 꽃이 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심겨진 상태가 변화되지 않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그 뿌리가 물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거예요.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때, 우리의 시간, 우리의 방법으로 무엇인가가 자꾸 맺혀지길 원하는 거예요. 그것은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이 뿌리 내려 있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린 삶은, 그 말씀이 내 삶 가운데 때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여러분 붙어 있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붙어 있기만 하다면, 여러분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평강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인내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임하실 것임을 위해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라는 사실을 여러분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하신 방법으로 우리 인생 가운데 임하실 거예요.
그것을 여러분 우리가 기뻐하는 거예요. 감사하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다른 게 아니에요.
어렵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신앙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어려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고 말씀하신 대로 내가 순종하고 그 때를 기다리고 때의 열매 맺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내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그게 여러분 신앙이에요. 할렐루야.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골로새서 2장 6절, 7절 말씀해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러분 이 사도 바울은요, 감정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십시오. 그리고 세움을 받아서 교훈을 받은 대로 마음의 믿음으로 굳게 서서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
그래서 여러분, 신앙인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 가운데 감사가 있는 사람이에요. 불평불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감사가 있는 거예요. 왜요? 그분의 뜻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감사한 거예요. 그분이 나에게 이런 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구나. 나를 통하여서 임한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불이 박힘과 세워짐과 견고해짐으로 감사함의 자리까지 하나의 구조적인 부분을, 거함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불이 박히고 세워지고 견고해지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뿌리 내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한 것이고요, 대가 세워지는 분명한 시간도 필요하고, 견고해지는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1서 2장 27절, 28절 말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주께서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기름 부음 받음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성령님이 이미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가르칠 필요도 없고, 기름 부음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과 거짓이 없는 그분의 가르침대로 너희는 주 안에 거하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심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속 찔림이라는 것을 주심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세요.
그것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발걸음과 우리의 행동이 그분께 자꾸 맞춰지는 거예요. 나는 자꾸 왼쪽으로 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서 오른쪽으로 자꾸 가게 하시는 거예요. 왜요? 그 길 가운데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길 가운데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가고 싶은 그 길 가운데는 성공이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세요. 성령님께서는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이 아니라 머무는 상태 속에서 임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내 안에서 감정적으로 느껴라.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것을 감정적으로 자꾸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어떤 느낌 정도로만 생각하세요. 그게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거함은 느낌이 아니라 위치에 대한 부분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보면요, 감정 기복이 없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 거한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연합과 관계를 통하여서 그분이 하나님께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감정이 흔들리기도 하셨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고백을 통해서 연결 상태가 끊어지지 않는 삶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우리 가운데 보여주시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여주시는 거함에 대한 의미예요.
거하라, 거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함은요, 그냥 일시적인 뜨거움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를 의미해요. 오늘 여러분 눈물이 없다고 염려하지 마세요.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감동이 크다고 여러분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 깊어진 것도 아닐 수 있어요. 거함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고 지속적인 연결성을 의미합니다.
오늘이 여러분,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어요. 오늘부터 시작하시면 돼요. 오늘부터 그분과 연결되어지는 삶을 계속 지속적으로 끝까지 가시면 돼요. 그러면 여러분, 그분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거함을 통해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면서 열매들이 맺혀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 성령의 거룩한 불로 임하는 생명력의 우리 가운데 있는 그런 삶임을 여러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거함에 대해서 세 가지를 제가 말씀드린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 붙어있는 거함은 어떤 삶인가? 여러분, 그 삶을 계속해서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분명한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방향성대로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인도해 주실 때, 그때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귀한 열매들이 맺혀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길 원하고, 오늘 그런 계기가 되길 원하고, 그 지속적인 삶을 통해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몇 가지를 위해서 기도할 텐데요, 먼저 여러분의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함께 여러분 고백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불확실하게, 불분명하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세요.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신 분이세요.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포도나무로 임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포도나무다." 하나님이 포도나무시라면 우리는 가지라고 분명하게 정체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지가 우리의 정체성이에요.
여러분, 가지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돼요. 가지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붙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로부터 여러분 시작합니다.
내가 열매를 만들어내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중심에서 벗어나 먼저 주님께 붙어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거예요. 기도와 말씀 없이 버티는 신앙은 결국 메말라 갈 수밖에 없음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연결이 먼저예요. 붙어 있는 것이 먼저예요.
여러분, 이 시간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가지라는 것을 분명하게 정체성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셨기에, 명확하게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가지로서 당신께 붙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정체성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내가 포도나무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지로서 나의 삶을 인정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께 붙어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 그 붙어있는 삶을 통하여서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들이 내 삶 가운데 맺혀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하나님 아버지 목적이 되게 하여 주시고 비전이 되게 하여 주시고 꿈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붙어있는 삶을 살아갈 이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 가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나의 삶의 목적이 주님께 붙어있는 것이 내 인생 가운데 가장 꿈이 되고 소망이 되는 은혜가 있도록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하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도록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두 손을 들고 이 시간 주의 한 번 부르시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6.02.08(주) | 주일설교 |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삼상 30:16-31)
설교 요약
- 본문 배경: 다윗이 아말렉을 추격해 대승을 거두고, 가족과 모든 전리품을 되찾은 뒤(삼상 30:16-20) 부솔 시내에 남아 있던 200명과 재회하며 공동체 안에서 분배 원칙을 세우는 장면(삼상 30:21-25), 그리고 유다 성읍들에 선물을 나누는 장면(삼상 30:26-31)이다.
- 핵심 메시지: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리더십의 본질은 사람을 품어 살리는 것이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공로 의식·피해 의식을 내려놓고 은혜 의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 다윗의 평정심: 승리의 순간에도 흥분하거나 우쭐하지 않고 차분했다. 고난뿐 아니라 칭찬(성공)도 사람을 단련한다(잠 27:21). 성공에도 교만하지 않고 실패에도 절망하지 않는 평정심이 필요하다.
- 마음의 평탄대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면 인생의 골짜기와 산(업앤다운)이 평탄해져 주님의 길이 열린다(사 40:4). 은혜를 경험하면 평강이 따른다(엡 1:2).
- 샬롬의 리더십: 다윗이 먼저 “평안하셨습니까?”(샬롬)로 문안한 것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200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리더십이다. 평안은 흘러가고, 불안도 전염된다. 가정과 공동체에 은혜와 평강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분배 원칙(율례와 규례): 참전한 400명 중 일부가 “참전하지 않은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주지 말자”라고 주장하지만, 다윗은 “형제”로 부르며 하나님이 주신 승리라는 관점에서 동일 분배를 선포한다(삼상 30:23-25). 이는 공동체를 살리는 구조가 된다.
- 불량배의 영성 진단: 지나친 자기 의(셀프 라이트), 욕심(전리품 독점), 하나님 요소의 삭제는 공동체 분열로 이어진다. 영성은 정직성이고, 품는 사람이 리더다.
- 적용: 열심과 실력은 중요하지만, 은혜가 압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공로 의식과 피해 의식을 내려놓고, 비난이 아니라 변화로 이끌며,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살아나는 은혜의 통로로 살자.
전문 스크립트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의 쉰아홉 번째입니다. 다윗이 아말렉에게서 승리를 하고 가족과 전리품을 갖고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16, 17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자, 다윗의 무리를 애굽 종이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곳을 가보니까 아말렉 사람들이 온 땅에 편만했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남부 지역을 전부 쓸고 다니면서 약탈을 했잖아요. 그들도 상당히 무리한 일정을 소화한 겁니다.
그리고 나서 “편만했다”는 것은 온 땅에 쫙 퍼진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나면 지쳐 퍼지잖아요. 그들은 이미 약탈 지역들을 반격할 수 없을 만큼 초토화시켜 놓았죠. 그리고 다윗의 군대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들을 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죠. 그래서 신나게 약탈을 자축하며 먹고 마시고 춤추고, 파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쳤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럼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친 것인가? 거의 이틀인가? 그런데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으로부터 해서 아침까지이거든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다”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만약에 “새벽에 쳤다.” 새벽 2시에 쳤다면, “이튿날 저녁에 해질 무렵”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시간으로 보면 자정(밤 12시)에 날짜가 바뀌니까 그날 저녁 해질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새벽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했다 그러면 16시간, 새벽 4시부터면 한 14시간 정도가 되는 거죠. 하루 종일 쳤습니다.
얼마나 아말렉 사람들의 군대 규모가 컸는지, 전리품이 많았는지가 상상이 되는 것이죠.
자, 20절 이어지는 말씀 읽겠습니다. “다윗이 소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했더라.”
자, 다윗이 회복하지 못한 게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그걸 다 회복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말렉이 약탈한 양떼와 소떼까지 전리품으로 얻었기 때문에, 그날 그들이 얻은 이 전리품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 같아요.
여러분, 반전의 감격이 있는 거잖아요. 운동 경기도 다 지던 경기를 막판에 반전하면 감동이 몇 갑절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결과가 오게 되자 따르던 이 400명의 사람들의 태도가 일순간에 돌변하죠. “이는 누구의 전리품이다?” “다윗의 전리품이다.” 이 무슨 얘기일까요? 역시 다윗을 따라오기를 잘했다, 뭐 이런 얘기예요.
여러분, 사람이 얼마나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지 어제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와, 역시 다윗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 그때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지만 지금은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이해타산이란 말을 합니다.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황 판단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이 본문 앞부분을 어제 보면서 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20절 말씀에 다윗이 양떼와 소떼를 다 되찾았어요. 무리가 그 가축들을 몰고 가면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다.” 사람들이 지금 즐거워요, 안 즐거워요? 즐거워요.
그래서 제가 그림을 하나 보여 드릴게요. 숨은 그림 찾기.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좀 이상한 게 뭔가요? 다 즐거워하는데, 다윗이 기쁘지 않았을까? 물론 다윗도 기뻤겠지만, 굉장히 차분한 모습이죠.
제가 이렇게 AI 생성 이미지를 요청한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기뻤다”, “사람들의 칭찬에 반응했다” 이런 멘트가 하나도 없어요. 다윗의 대사도 하나도 없어요. 상당히 다윗은 컴다운돼 있었던 거예요.
왜 그랬을까? 다윗의 심리를 생각해 보니까, 어제는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막 다윗을 연호하잖아요. 그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 됐을 것 같아요.
잠언 27장 2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여러분, 다윗이 사람들이 “와, 역시 다윗” 한다고 해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우쭐댈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인생을 연단하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도가니나 풀무와 같은 인생의 고난이 우리 인생을 연단해서, 재련해서, 우리 안의 비본질의 찌꺼기들을 드러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칭찬해보면 그 사람 안에 가라앉아 있던 비본질의 찌꺼기가 드러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우쭐대고, 어떤 사람은 안일해지고, 어떤 사람은 자만에 빠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도 절망하지 않고 성공에도 교만하지 않은, 항상 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두 가지 때문인데, 첫 번째는 나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때문이에요. 세상은 다 가변적이지만,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위에 내 인생을 세우면 흔들리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겁니다. 나는 상대적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하게 되면 이게 가능해져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독하다가 전도서 7장 16절을 읽으면 이상한 구절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아니, 의인이 되지 말라, 지혜자가 되지 말라니요. 이게 성경의 가르침하고 정반대 되는 얘기 아닌가요? 그런데 “지나치게”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당신이 의로우면 얼마나 완벽하게 의롭겠냐는 거예요. 당신이 지혜롭고 유능하면 얼마나 완벽하게 했느냐는 거예요.
인간이 “내가 좀 하지, 내가 의롭지, 내가 좀 지혜롭고 탁월하지” 그 안일함과 자만함이 당신을 패망에 이르게 만들 것이다, 라는 거예요.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렸을 때는 실패하고 뭔가를 망치면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랬지” 이것으로 며칠을 지냈던 것 같아요. “나 바보 아니야? 바보 아닌데” 이것으로 또 며칠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뭔가 실패하고 잘못해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제가 원래 이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습니다.” 빨리 인정하고 회개하고, 그래도 세컨드 찬스,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빨리 인정하고, 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거예요.
또 정반대로 “착하다, 잘했다” 이렇게 칭찬을 해 주면 예전에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실 자존감이 낮으니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땡큐”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했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늘 하루 호흡할 수 있는 생명을 주시지 않았다면, 가동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않고 실패했다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으면, 세상이 여러분을 흔들 수 없어요. 사탄도 여러분을 흔들 수 없어요. 할렐루야.
자, 그래서 또 한 구절 나누고 싶은데 이사야 40장 4절 같이 읽어 볼까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것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것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구절은 역사적 맥락이 있어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비하는 데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심리적으로도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고대에는 큰 제국의 왕들이 행차를 할 때 앞서가면서 그 앞의 길을 닦아 놓는 선도대가 있었던 거예요. 왕이 행차하시는데 앞에 골짜기가 나와요. 그럼 골짜기를 메꿔서 평지를 만드는 거예요. 언덕이 나와요, 산이 나와요. 그러면 그거를 깎아서 평지를 만드는 거예요.
왕이 오시는 길, 킹스웨이, 킹스 하이웨이를 만들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뚫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조금 성공하면 우쭐대고, 조금 실패하면 바닥에 떨어지고, 이거는 하나님보다 내가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성공이든 실패든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우선으로 삼으면, 여러분의 상황이 나를 흔들지 못해요. 왜? 상황보다 하나님이 중요하시기 때문에.
할렐루야.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어떠한 상황에도 안일해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평탄대로가 되면, 주님이 그 길을 따라 우리에게 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예배자로서 그런 심령을 갖게 된 거예요.
자, 이어지는 21절과 2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부솔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무난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자, 다윗이 부솔 시내에 이르러서 탈진해서 쫓아오지 못했던 200명과 재회합니다. 그래서 200명의 사람들이 다윗의 무리, 그 400명을 영접했고, 다윗도 이 200명의 사람들에게 문안을 했다, 이렇게 표현이 나와요.
제가 “문안했다”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어로 샬롬이에요. 우리도 인사할 때 “안녕”, “안녕하십니까?” 평안에 대한 질문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평안했습니까?” 이 질문을 했다는 거예요.
오늘날에도 아랍 사람들은 만나면 살람,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 인사를 하는 겁니다. 안녕이죠.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보면 거꾸로 된 거예요.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들에게 “다친 데는 없습니까? 사상자는 없습니까? 평안하십니까?”를 질문해야 정상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후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목숨 걸고 싸우고 온 다윗이 “여러분 평안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했다는 거예요.
이 질문 한마디가 사실 감동적인 것이거든요. 저와 여러분이 평안의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축복인지 몰라요.
에베소서 1장 2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라는 기준점에 딱 서면, 골짜기도 메꿔지고 산도 겸손해져 낮아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은혜가 임하고 은혜 체험을 하면 평강이 찾아오게 돼 있어요. 항상 순서는 이겁니다. 은혜와 평강.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편지에서 고정적으로 한 인사말, “은혜와 평강”.
그런데 사람이 주는 은혜와 평강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평강.
그러면 우리가 미래가 불확실하고 존재는 늘 결핍을 반복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족에게, 성도들에게, 이웃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늘의 샬롬이 임할지어다. 좋은 축복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도시마다 전도하라고 보내실 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평안의 인사를 하면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거죠.
여러분, 평안도 흘러가지만 불안도 흘러갑니다. 전도체 같은 것입니다. 심리적 전도체인 거예요. 내가 불안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불안해요, 안 불안해요? 불안해지게 되어 있어요.
내가 불안하면 남편, 아내가 불안해하고, 내가 불안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불안해요.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엄마 아빠의 강박과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아이가 힘든 경우도 많아요.
강박과 집착이 다 나쁜 것 같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완벽주의적인 강박과 집착이 생기게 돼 있어요. 부모들이 아이를 잘 키우려면 이 강박과 집착이 생기게 돼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아이가 시드는 경우도 있고, 또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 만큼 불안도가 올라가요, 안 올라가요? 올라가요. 그래서 그 불안을 아이에게 전염시키는 부모가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에게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어야 평안이 흘러가는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골짜기도, 인생의 험한 산도, 평탄케 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우선, 최우선의 예배자로 살면, 인생의 모든 업앤다운, 고점도 저점도 평탄케 돼서, 주님이 주신 평안이 내 가족에게 흘러가게 돼 있다라는 거예요.
자, 그런데 다윗과 함께 아말렉을 쳤던 400인 가운데 안 좋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참전하지 않았던 사람들, 한 게 뭐가 있냐? 그 사람들은 그냥 처자만 데리고 가게 해라.”
그러니까 가족만 빼앗긴 게 아니라 자기 재산도 잃은 거잖아요. 그 재산은 돌려받아야 되는데 그것도 못 받게 하고, 그 외에 얻은 전리품도 안 나눠 주겠다는 거예요.
약간 깍쟁이 같지만 그래도 전혀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에요. 제가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할 때, 전방의 제2보병사단, 그리고 판문점에서 근무하는 미군들은 위험수당, 생명수당을 따로 챙겨 줍니다.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 역할이라는 거죠.
400명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딱 그 얘기예요. “아니, 우리가 목숨 걸고 가서 아말렉과 싸웠는데 도대체 너희가 한 게 뭐가 있냐?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냐?”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제가 항상 ‘은혜파’와 ‘진리파’가 있다고 말하는데, 400명은 어떤 파예요? 진리파인 거죠. 뭐가 옳고 그른지, 뭐가 합당한지 따져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들이 아무리 옳은 것, 정의를 외친다 한들, 그들의 내면이 비뚤어져 있었어요.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면, 첫째, 자기들이 과도하게 옳은 거예요. 전도서 7장에 봤죠.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마라.” “나는 옳고 너희는 틀리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400명 중에서도 아픈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고 부상당하는 날도 있고, 참전하지 못하는 날이 생겨요, 안 생겨요? 그럼 그날에는 입장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이건 좀 너무 그렇지 않아, 우리도 좀 나눠주지.” 세상의 절대적 위치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도한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은 패망에 이르게 된다.
둘째, 전리품을 안 나눠주면 누가 다 차지한다고요? 자기들끼리. 욕심이죠.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빠뜨린 거예요. 결국에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의 대사가 나오기 전에 성경이 아예 그 사람들을 이렇게 소개했어요.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다.”
사무엘상에 사실 “불량배”라는 표현이 총 네 번 나와요. 맨 처음에 나왔던 것이 사무엘상 2장 12절인데, 엘리의 아들들은 누구다? 불량자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나면 죄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인가. 우리 안에 죄를 짓고 싶은 거짓된 욕심이 있죠. 그 욕심이 우리를 쥐고 있어서 선한 마음과 선한 열심을 짓밟고 죄를 짓게 만든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지 모르겠는데 저는 가끔 놀랄 때가 있어요. 어떤 우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어떤 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내 안에 이런 게 있었어?” 이렇게 놀랄 때가 있어요. 여러분 없으신가요? 3부가 좀 더 정직한 것 같아요.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영성은 정직성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되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 게 영성입니다.
또 한 가지를 따라 해 보세요. 품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조직의 리더십을 논할 때 일을 잘 추진하는 사람을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사람을 잘 품어주는 사람이 리더십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유능한 리더일지라도 사람들을 품지 못하면 딱 거기까지예요.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한 교회에서 25년 동안 사역을 했잖아요. 수백 명의 교육자들, 수백 명의 간사님들, 또 평신도 사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했는데, 저는 제가 맡은 사명에 충성을 다하면서 제 리더에게 관계적으로 잘 보여서 특혜를 보거나, 이런 것을 특히 바라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조직 생활, 회사 생활 하다 보면 그다지 맡은 일은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은데 윗사람에게만 잘 보여서 특혜를 보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유형을 너무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인생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아, 내 생각이 편향되어 있었구나” 이걸 깨닫게 됐어요. 왜냐면 일을 잘하는 지수도 중요하지만, 관계 지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더라고요.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맡은 것만 하면 되지만, 조직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고 전체 관리자가 되면, 그 사람이 잘한 일, 못한 일, 대충 한 일, 이상하게 한 일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문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마음이 없이는 리더십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여러 자리에서 여러 역할을 해 보니까, 경험도 중요하고 실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을 품고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이 중요하구나.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품어야만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가끔 자녀를 품기가 버거우시잖아요. 그러면 “내가 리더십을 상실해 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순장님들, 사역 팀장님들, 사명을 품고 사역을 열심히 감당해 주시는 건 좋은데, 한 영혼을 품는 리더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지지난 주에 설교하고 나서 “광야를 지나며” 찬양 듣고 같이 기도한 거 기억나세요? 제가 기도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생각해 보니까 그 주간에 너무 피곤했어요. 리조이스 캠프를 하면서.
또 한 가지는, 제가 오랫동안 케어한 한 형제가 있는데 이 형제가 몇 년 동안 직장이 안 되는 거예요. 진짜 유능한 친구거든요. 그 분야에서는 정말 유능한 친구인데 이력서 떨어지고, 면접 보고 떨어지고, 수십 군데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40대 중반이 되니까 쉬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 주간에 그 형제가 “나는 이제 교회를 떠날 거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난 다 그만두겠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몇 년 동안 헌신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이렇게 말했어요. 잘 달래서 그날 2부 예배에 나왔거든요.
근데 기적같이 지난주에 합격이 됐어요. 직장을 얻었어요. 박수 치셔도 돼요.
저는 이 마지막 고비를 넘겨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윗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잖아요. 그런데 딱 그 본문을 지나면서 합격이 된 거예요. 기적같이. 그 형제가 “자기는 평생 사무엘상을 잊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컴다운 시키고 한마디를 했죠.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 유능한 것만 믿고 마음에 안 들고 이상한 사람들 만나면, 정의감 충만하다고 또 사표 던질 거냐? 사표 던지지 마라.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품어야 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일만 사명이 아니고, 공동체를 잘 돌봐 세우는 것도 사명이다.” 신신당부를 했어요. 오늘 와서 저를 안아 주더라고요. 고맙다고.
자, 이어지는 23절에서 25절 같이 읽어 볼까요?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불렀어요. “나의 부하들아”가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던 사람들이, 이제 너희 마음대로 하려고 하느냐, 상명하복해라, 이게 아니잖아요.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부른 거예요.
우리가 다 형제자매면 한 가족인데, 한 가족인데 내 거 네 거가 어디 있습니까? 집에 있으면 같이 사용하고 같이 기뻐하는 거지.
내가 오늘 좋은 성적을 받았어요. 회사에서 좋은 실적을 이뤘어요. 집에 와서 방에 들어가 혼자 숨겨 놓고 즐거워하나요? 온 가족이 함께 기뻐하는 거죠.
그래서 23절 말씀에 보면 “우리”라는 단어가 총 네 번 나와요. 이 승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다. 일부 사람들에게 주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거다.
제가 이걸 묵상하다 보니까 조직에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조직이 어려워지면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조직 전체가 어려운데 구조적인 피해를 왜 내가 봐야 되냐.” 손해 보고 싶지 않다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반대 상황도 있습니다. 조직이 융성해지고 성공 가도를 달리는데도 떠나는 사람이 있어요. 이유는 똑같아요. 손해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내가 기여한 지분이 많은데 나한테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줬냐? 보상을 해 줬냐? 똑같이 대우하는 거 싫다. 다른 데 가면 더 많이 보상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잘난 사람일까요, 이기적인 사람일까요? 둘 다입니다. 그런데 잘난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교육자들에게도 늘 말하는데, 잘난 사람이 “내가 잘났다”라고 주장하는 게 공동체에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공해도 겸손하고 고난에도 평안할 수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어떠한 풍파도 뚫고 나갈 수 있어요. 거시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이 조직과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세상에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다윗이 고백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우리 손에 붙여 주셨고, 그러니까 이 승리는 너희의 승리도 아니고, 나 다윗의 승리도 아니고, 하나님의 승리라는 거예요.
만약에 다윗이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했다면, “어제 나 죽이려고 했던 놈들 다 나와 봐. 너희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면서 성질 내지 않았을까요? 사울이 이런 캐릭터잖아요.
만약에 다윗이 “400명의 사람들, 너희 때문에 우리가 승리했구나” 하고 200명의 사람들을 무시했다면, 공동체가 갈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516교회가 공로 의식이 아니라 은혜 의식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다 좋을 것 같지만, “내가 헌금을 얼마나 했는데? 봉사를 얼마나 했는데? 왜 나를 인정 안 해 주냐?” 이런 사람들이 생깁니다.
반대로 “이 영적인 혹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흥을 주시다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공로 의식으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어요. 자기 의에 충만한 사람, 자기 업적과 공로 의식에 충만한 사람이 “내가 이 정도 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누가 그러겠냐고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도 은혜고, 그런 내가 이제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도 은혜고, 저는 가끔 찬양하고 예배하다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 사람이 됐으면 정말 세속적인 사람이 됐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들을 다 뒤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됐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세계 선교를 완성한 사람이 누구예요?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거 내가 했다”라고 했다면 얼마나 교만했겠어요. 평생 은혜 의식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축복의 통로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예배자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아말렉과의 대승에 우쭐대거나 흥분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차분했을까? 어제는 죽을 목숨이었잖아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훌륭하지”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죽을 목숨을 건져 주셨으니 감사하고, 아말렉에게 버림받은 애굽 사람 하나 살려냈더니 인도해 주셨으니 감사하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가족들이 팔려 나가기 전에, 온전한 상태에서 다시 만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고. 할렐루야.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처럼 유능하고 실행력도 탁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서 손을 놓으시면 그걸로 끝이에요.
타이밍을 놓쳐서 가족들이 이미 노예로 팔려가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다시 찾겠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대에 참전해서 이스라엘과 칼을 겨누고 싸우게 그냥 놔두셨다면, 하나님이 손 놓으셨으면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 재능과 열심이 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올려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아, 26절 마지막으로 읽어 볼게요.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여러분, 다윗은 누구를 자기 공동체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버렸고, 자기를 밀고했던 유다 지파 사람들. “여러분 여전히 내 형제고, 여러분 여전히 나의 한 가족입니다.” 이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델로부터 헤브론에 이르기까지 유다 지파 성읍들에 선물을 나눴어요.
만약에 다윗이 공로 의식이 있었다면, 공로 의식의 반대편에는 피해 의식이 생겼을 거예요. “그런 나를 너희가 무시하다니, 멸시하다니, 버리다니.” 그러지 않았겠어요?
23장에 그일라 사람들 목숨 걸고 살려줬더니 배신하잖아요. 갈멜의 나발도 유다 지파 사람이에요. 가까운 유다 지파 사람들이 두 번이나 밀고 하잖아요.
그래서 피해 의식은 공로 의식의 동의어가 되는 거예요. “나 피해자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문제 없어, 다 너희 문제야”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공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피해와 상처는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 의식만이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로 세울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마인드셋, 마음 상태라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 설교 마지막에 이상론과 당위성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이상론과 당위성이 과도해지면 관계를 망치고 가정을 망친다고요. 이 표현을 다른 말로 하면 공로 의식과 피해 의식이에요.
공로 의식: “나는 잘했는데.”
피해 의식: “너희들이 다 잘못한 거야. 피해를 내가 보고 있잖아.”
시시비비를 가리고 옳은 소리만 하면 다 맞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틀린 거예요. 왜? 그 생각 때문에, 그 관점 때문에 결국에는 공동체를 망치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비판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마세요. 잘못된 것을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참된 영성인 거예요.
사람들을 품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보다 의지하지 마세요. 하나님보다 의지하면 결국에 같이 망합니다.
다윗이 200명의 사람들도 평안케 하고, 400명의 사람들도 평안케 한 거예요. 왜 이 사람들을 살려냈냐면, 이상한 소리를 한 불량자들을 그날 처벌하지 않았어요. 그냥 바른 얘기만 해 줬어요.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보내고, 애굽 노예도 살려내고, 여러분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은혜 의식이 있는 사람은 이게 가능한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헌신했습니까. 광야에서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그런데 결국에는 “이건 하나님이 주신 승리고,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니까 나눠야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건데 나눠야지. 이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제가 어제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 놓고, 그리고 나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한 문장을 썼어요. 잘 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회사를 가는데, 가는 회사마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여러분이 어떤 조직에 들어갔는데 그 조직도, 여러분이 어떤 교회를 갔는데 그 교회도, 가는 곳마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거예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들이 있어요? 완벽한 사람들만 모아놓은 공동체가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도 그 사람들이 변화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선한 영향력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열심히 살잖아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뭐가 생기겠어요? 공로 의식. 공로 의식의 동전의 다른 면이 뭐예요? 피해 의식.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네가 그거밖에 안 해. 도대체 네가 한 게 뭐야? 그러고 여기서 나한테 밥을 얻어먹을 생각을 해?” 이런 멘탈리티가 결국에는 공동체를 세우려다 스스로 허물게 되는 거예요. 이게 공로 의식과 피해 의식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은혜 의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사세요. 노력하세요. 저도 열심히 사는 유형이에요. 그런데 나의 열심, 나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압도적인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러면 노력은 결국 빡빡해지는데, 은혜는 부드럽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복이 흘러가고 생명이 흘러가고 회복이 흘러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6.02.01(주) | 주일설교 |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 (삼상 30:1-15)
요약
-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오자 아말렉이 네게브와 시글락을 침노해 성읍을 불사르고 가족들을 사로잡아 간 위기 상황이 전개된다.
- 극심한 상실 속에서 600명의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 하며, 고난의 순간에 사람들은 원인 전가와 분노로 치닫기 쉽다는 현실이 드러난다.
- 다윗은 사람과 맞서지 않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고, 제사장과 에봇을 통해 하나님께 묻는 방식으로 방향을 재정렬한다.
- 위기의 핵심은 ‘위기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위기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며, 다윗은 기도로 돌파하며 추격과 회복의 목표를 명확히 한다.
- 추격 중 지친 200명을 남겨 두는 배려와, 광야에서 버림받은 애굽 청년(노예)을 살려내는 자비가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의 구체로 제시된다.
-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의지할 대상은 아니며,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이상론은 관계를 애증으로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 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가며,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은혜의 역사가 가능해진다는 결론으로 기도에 이른다.
전문 녹취록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이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강의 58회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왔다가 가족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잡힌 것을 알고 추격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1절과 2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넥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네. 지도상에 보시면 아 중부 아에서 어 블레셋 사람들이 집결을 해서 북쪽으로 올라갔죠. 그런데 이제 다윗과 그 무리는 아벡에서 남쪽 시글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시글락에 왔더니 이제 가족들이 이미 포로로 잡혀갔어요. 아말렉은 그 남부 지역에서 약탈을 하며 돌아다니는 족속인데 그 아말렉을 따라잡기 위해서 부솔 시내라는 이제 남방 한계선 같은 것인데요. 부솔 시내를 건너가게 됩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중부 아베에서 시글락까지 75km예요. 근데 이 75km의 길을 며칠 만에 건넜다 갔다고요? 며칠 만에? 네, 3일입니다. 이게 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게 사흘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3일이죠. 군대가 빨리 행군을 하면 하루 한 40km. 그러니까 이틀 만에 주파할 수도 있었는데 어,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느리게 갔을까?
어, 생각을 해 보니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불신임을 받아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상당히 무거웠나 보다. 이 75km니까 하루에 25km씩 돌아오게 됐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게브. 네게브라는 말 자체가 남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 이제 남쪽 지역에 네게브 지역을 침략하고 시글락까지 침략을 해서 부녀자들을 다 포로로 잡아가었어요. 지난 10년 동안 유대 광야에서 사울의 군대에게 잡히지 않게 해서 얼마나 이들이 노심초사 노력을 했습니까? 이제 적국 블레셋에 망명을 해서 와, 이제는 편안하게 됐다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재산과 가족을 다 잃게 됐어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중부에서 국가 간 사활을 건 전면전을 치르는 동안 남부 지역에서는 이 아말렉 사람들이 거칠 것이 없이 노략질을 한 겁니다. 일종에 이제 빈집털이를 한 거고 후방 공격을 한 것이죠. 다윗과 일행들이 그동안 광야에서 기적처럼 단 한 명도 잡히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걸 어제 써 놓고 나서 야, 기적처럼이 아니라 진짜 기적이었구나.
여러분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돌보심 때문이었어요. 다윗이 '어, 난 정말 스마트한 거 같아.' 다윗의 사람들이 '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지.' 이런 생각할 수도 있겠죠.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 기특할 때가 좀 있지 않나요? '어, 나는 처세도 좀 잘하는 거 같고 나는 재정 관리도 잘하는 것 같고 시간 관리도 잘하는 것 같고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여기까지 온 줄로 믿습니다.' 이 고백이 필요한 것이죠.
자, 이 상황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3절과 4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이 불타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여러분 아말렉 족속이 워낙에 약탈족이니까 약탈을 하는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성읍을 아예 불태워 버렸어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겁니다. 다윗과 그 사람들이 기진할 정도로 통곡을 했다는 거예요. 10년 광야 세월의 헌신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으니 그들이 느꼈을 그 허탈함과 그 상실감과 실패감이 정말 이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진 자가 자기 가진 것에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마지막 자기가 붙들고 있는 자기 가족을 잃어버리는 것, 이거는 비교할 수 없는 상실감이죠.
자, 이런 상실감을 경험하니까 백성들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5절과 6절 읽어 볼까요?
다윗의 두 아내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
자, 백성들만 가족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다윗도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갑자기 5절에 꺼냅니다. 이 얘기를 왜 했을까요? 그것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 때문이었어요. 백성들이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더니 눈이 돌아갔어요. 그래서 다윗을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요?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 여러분, 다윗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사실 어떻게 보면 다윗의 잘못이죠. 다윗이 이렇게 문제고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도 두 번이나 죽이지 않으려고 정말 자신을 가다듬고 바르게 살았던 사람인데 뭐가 그렇게 잘못이 많나? 네. 저기 계신 다윗에겐 좀 미안하지만 제가 정리를 해 보면 첫 번째는 약속의 땅을 이탈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멋대로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보다 이방인 왕을 의지한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쭉 구약을 계속 읽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하나님보다 강대국, 하나님보다 이방인들을 의지하는 거 너무너무 싫어하셨어요.
자, 세 번째는 그동안 시글락에 1년 4개월 머무는 동안 아말렉 사람들을 포함해서 남방을 계속 다윗이 약탈을 했었죠. 그러니까 아말렉 사람들 입장에선 이건 일종의 보복 조치였던 거예요.
자, 네 번째. 이건 군사들 그 전략 전술에서 나오는 건데 후방을 완전히 비워둔 채로 전군이 참전했다. 이것은 언제든지 후방이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전략이었던 거죠.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윗이 잘못한 게 맞습니다. 그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고 야 다윗을 돌로 쳐 죽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거 비정상적인 행동인 거예요. 여러분 돌로 쳐 죽이는 걸 투석형이라 그러는데 모세오경을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돌로 쳐서 죽일 만한 죄목이 뭐냐면 신성 모독죄, 안식일을 어긴 죄, 간음죄, 부모를 저주하고 때리는 죄, 극단적인 케이스들만 해당이 됐어요. 여러분 다윗이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여러분 다윗이 시글락으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망명을 갈 때 부하들이 반대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없어요? 단 한마디도 없어요. 시글락에 가서 이 사람들도 같이 편하게 즐겼던 겁니다.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도대체 이 원인이 뭐냐? 그러면서 원인을 다윗에게 다 전가하는 거예요.
제가 이걸 묵상하면서 사람들은 고난의 순간이 되면 원인을 찾고 싶어요. 그리고 그 원인을 전가하고 싶어요. 자기 때문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졌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고난의 순간에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될 길입니다. 저는 이 30장의 사건을 굉장히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도망자 세월에서 마지막 훈련, 마지막 레슨을 주시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마지막 레슨은 뭐냐면 인간관계에 대한 레슨이에요. 제가 오늘 집중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 600명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사무엘상 2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재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사회에서 실패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을 다윗이 조건 없이 받아줬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줬어요. 10년 광야 생활 세월에 정말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를 다윗이 헌신해서 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가족보다도 친밀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사선을 넘은 사람들이 여러분 자기의 소중한 걸 잃었다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야, 인간이란 이런 존재구나. 마음이 처참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뭐 세상 사람들이 그런 얘기 하잖아요.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 주는 게 아니다. 이게 이제 배신을 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저를 한번 따라보세요. 사람은 >>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네. 여러분, 제가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사람을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서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의지해서 기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너지잖아요? 그럼 나도 무너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 가족 사랑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의 동역자들 사랑하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20년, 30년 기업을 같이 이룬 그 동업자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하는 동역자에게 배신당하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근데 그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면 그 사람이 무너지는 날 당신도 무너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에게 광야 세월의 마지막 레슨입니다. 왕궁에 들어가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왕궁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왕 앞에서는 다 잘하죠. 그러나 권력을 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 구중궁궐이잖아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군궐에서. 그 궁궐이 광야 훨씬 어려운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사람 의지하지 마라. 네가 목숨 걸고 지켜준 사람들도 의지하지 마라. 기대하지 마라. 하나님만 기대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된다. 이 얘기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어.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직원, 여러분 믿음의 동역자들 사랑하되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많은 분들 상담하잖아요.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결국에 그 사람 때문에 실족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목회자로 제 동기들, 선후배들, 여러분, 목회자들은 사람에 대한 눈물과 긍휼이 많은 사람들이 보통 시작합니다. 근데 결국엔 사람 때문에 실족해서 목회를 그만두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 사람을 좋아하다가 애증 애증의 관계로 떨어지고 가정이 어려워지고 교회가 어려워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어떤 사람의 본질과 본심은 위기의 상황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맞불을 놓지 않았다는 것. 여러분,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다윗이잖아요. 칼 빼 들고 영화에서처럼 '어, 지금 나랑 싸워보자는 거냐?' 여러분 뭐 거뜬히 수십 명 수백 명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잖아요. 근데 그렇게 사람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면서 '아니 내가 10년 동안 어떻게 여러분을 위해 헌신했는데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니냐'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6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다윗이 정말 다급했을 때 누구를 힘입었다고요?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질이었다는 것.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이 정말 다급해질 때 어떤 행동을 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지만 어떤 분들은 일단 수화기부터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전화하고 사람들한테 막 매달리는 분들이 있어요. 세상적으로 내가 동원할 만한 방법들을, 리소스를 다 끌어 모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또 어떤 분들은 오늘 600인의 사람들처럼 원인을 찾고 원인을 증거하고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이렇게 원망하는 분들이 있어요. 또 내향적으로 힘이 없는 분들은 자포자기하고 무너지는 분들이 있어요.
자, 그런데 다윗은 누구 앞에 엎드렸다고요?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요. 제가 다윗의 이 모습을 묵상하다가 사람들이 다윗을 대적하잖아요. 600명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딱 이 모습이 모세의 모습이더라고요. 여러분 민수기를 읽어 보면 모세가 이런 행동을 참 많이 합니다. 어, 20장 4절 6절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 출애굽에서 그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에서 본인들이 불순종해서 40년을 돌게 된 거예요. 이건 모세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자기들 잘못으로 광야를 돌게 됐는데 모세를 원망하면서 왜 광야로 우리를 불러냈느냐?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들까지 여기서 다 죽이려는 거지. 그런데 모세가 사람들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서는 부모로서 리더 역할을 하잖아요. 회사에서는 또 이끌어가는 중간 리더십, 탑 리더십들도 있지만 여러분 시간이 지나면 또 선임이 되잖아요. 교회 목회자들, 교회 사역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국에 리더의 포지션에 서게 되는데 리더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끌어 가심을 따라가는 것인가? 물론 둘 다죠. 둘 다인데 여러분이 이 전자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하면 사울처럼 악전고투를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울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사울의 실패한 리더십을 따라가고 싶지 않잖아요. 여러분 다윗처럼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 왜 이렇게 엄마 말을 안 듣냐? 왜 이렇게 아빠 말을 안 듣냐? 여러분, 부모 말을 들으라고 계속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때는 멈추셔야 돼요. 뭔가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이 자녀에게 왜 이렇게 부모 말을 안 듣냐? 그럼 하나님이 증지해서 뭐라고 하신다고요?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듣나? 여러분,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자녀 교육이 맘대로 안 된다고 아이들을 닦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여러분 닦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정말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이 기도 가운데 쇼부를 보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구하는가? 여러분, 회사도 가정도 교회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지혜의 길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을 한 게 사무엘상 몇 장이었을까요? 네. 오, 여기 이쪽에 얘기하셨어요. 몇 장이요? 27장. 3부 예배 처음 얘기했어요. 1부 2부 아무도 얘기 안 했어요. 와, 훌륭하십니다. 네. 지나간 본문은 다 과거는 잊어버리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27장이에요. 지금 몇 장이에요? 30장. 27, 28, 29장, 30장 무려 네 장 동안 다윗이 블레셋의 망명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기록이 없어요.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지낸 겁니다. 근심 걱정할 거리가 있습니까? 염려할 일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굳이 엎드리고 막 머리 조아리고 밤을 새며 기도하고 이럴 일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생각을 해 보니까 지난주에 나눴지만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는 우리 영혼의 감각을 살아나게 하는 시공간이었구나.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거짓말같이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요.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아가야 되는 인생이구나.
내가 잘나서 내가 잔꾀를 부려서 인생의 길을 평안하게 여는 줄 알았는데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되는 사람이구나. 나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바라보며 살아야 되는 인생이구나. 이거를 깨닫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그 처소를 떠났던 다윗처럼 여러분 교회 공동체를 떠나서 온라인 성도로 그냥 사시는 분들 있잖아요. 저는 그런 분들도 다윗과 똑같은 상황이라고 생각이 돼요. 제가 최근에 2부 예배, 3부 예배 후에 이제 새 가족반 번갈아 계속 들어가고 있는데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할렐루야. 가나안 성도들이 돌아오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가나안 성도가 아직 뭔지 모르시는 분들이 여전히 계신 것 같아요. 가나안 안 나가. 이 교회 안 나가 성도들이거든요. 그런데 교회 안 나가고 그냥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그런데 다윗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냥 내 평안을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처소를 떠나겠다고 떠났는데 그게 아니었잖아요. 네. 새 가족반에 아주 어릴 적에 교회를 다녔는데 그런데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교회를 떠났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 교회를 떠났습니다. 부모님이 너무 강압적으로 해서 24년 동안 교회를 떠났습니다. 오늘도 한 분이 그 얘기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이분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어요. 한결같이 고백하는 게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거예요. 아, 나는 하나님 의지하며 살았어야 되는 사람인데 이 영혼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거야. 할렐루야.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18편 1절 2절 다윗의 시편인데요. 같이 읽어 볼까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아멘.
아멘.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은 >> 하나님은 >> 나의 전부이십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보통 강조할 때 두 번 반복해요. 조금 더 많이 반복하면 네 번. 신명기 > 일곱 번 반복이 있어요. 이건 아홉 번 반복이에요. 하나님은 나의 전부가 > 되십니다. 이 다윗의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의 반전이었어요.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 했는가?
7절과 8절 읽어 볼까요?
다윗이 아이멜렉의 아들 제사장 > 아비아들에게 이르되 >>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내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 찾으리라.
자,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우림과 둠밈을 > 통해서 하나님의 신탁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 > 아말렉 군대를 쫓아갈까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쫓아가라. 반드시 > 잡을 것이고 도로 찾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위기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건강하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는 위기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늘 평탄한 인생을 산다. 그런 인생이 있어요? 대답들 안 하세요. 그런 인생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정말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도 한순간에 큰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있고 어 계속해서 번창하던 사업이 뭐 IMF를 맞이해서 또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재정 위기를 겪기도 하고 여러분 한국 교회에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에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위기 자체로 낙심해서 자포자기하겠는가? 어떤 분들은 솔루션을 찾지 않고 그냥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으로 주저앉아 버리시는 분들 있어요.
아니요.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다윗의 육인들처럼 원인 전가를 하고 끊임없이 원망 불평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다윗처럼 모세처럼 기도하고 위기를 돌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600인의 가족들이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여러분, 죽었으면 죽은 시체들 끌고 갔겠어요? 거기 성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겠죠? 다 포로로 잡아간 상태였습니다. 하나도 안 죽였다고 돼 있잖아요. 그럼 아말렉의 근거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잡는다는 게 어렵겠지만 추격을 해서 그들을 구출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 다윗이 목표를 딱 정하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어, 제가 이 부분을 묵상을 하다가 지난 3년 동안 저희가 C4에서 리조이스 캠프를 했잖아요. 근데 처음에 시작할 때 약간 회의적인 의견들도 있었어요. 왜냐면 요즘은 청년 캠프는 거의 다 없어졌어요. 청년 캠프는 거의 안 됩니다. 청소년 캠프, 연합 캠프 있었던 캠프들도 대부분 줄어들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시작을 하는 거잖아요. 제가 여러 번 나눴지만 초중고 1선 학교에서 교회 다니는 친구들 그러면 3%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이번에도 학생들 물어보니까 저 혼자 저희 반에서 교회 다닙니다. 목사님 딸인데 자기가 크리스천이란 걸 얘기를 못 한대. 왜 크리스천이라고 얘기를 못 한다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왕따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얘기를 못 하는 애들이 있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차세대가 선교지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근데 저희가 3년 만에 1차, 2차 올해는 부산 3차를 했잖아요. 올해 1, 2, 3차 다 합쳐서 총 2천 명이 참여를 했어요. 더 많이 놀라셔야 되는데. 그 놀라운 일입니다. 모두가 낙심하고 모두가 어렵다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갖고 우리가 해답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아 제가 1차, 2차, 3차 다 마지막 집회 때 설교를 하고 제가 신학교에서 이 집회를 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를 살릴 목회자들, 예배 사역자들, 어, 헌신자들을 콜링하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1차 청년 캠프 마지막 끝나고 나서 어떤 한 대학생이 저를 붙잡더라고요. 그러더니 목사님 2년 전에 제가 리조이스 캠프에 참석해서 그때 하나님 앞에 뜨겁게 회심을 했고 제가 지금은 장신인데 학부생으로 입학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해요. 또 이번에 그 목회자들, 인솔 교육자들 간담회를 했는데 어, 은혜를 받은 청소년들이 이 리조이스 캠프는 일절 다른 걸 안 해요. 무슨 레크리에이션을 한다든지 공동체 프로그램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일곱 번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예배 가운데 이 청년 소년들이 깊은 감동을 받게 되고 돌아가서 야, 우리 교회도 예배팀을 만들자. 너는 드럼 치고 나는 일렉, 너는 베이스 그래 갖고 다 처음 배우는 애들이 이거를 해 갖고 예, 처음엔 딩가딩가 수준이지만 이 아이들이 청소년부 예배팀을 만들고 교회 예, 작은 교회들 예배팀을 만들어서 막 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이번에 2차 그 참여했던 교회 중에 한 교회는 청소년들이 중고생들이 너무 은혜를 받고 그날 끝난 날이 이제 수요일 날 그 일찍 끝났는데 수요 저녁 예배에 청소년들이 예배에 참석을 한 거예요. 그니까 어른들이 전통 교회에서는 수요 저녁 예배 어른들이 참여하는 거잖아요. 근데 청소년들이 와 갖고 참석하더니 목사님 설교 끝나고 기도 시간에 갑자기 다 단 앞으로 나와서 기도를 하더래요.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깜짝 놀란 거예요. 우리 교회 청소년들이 어떤 일이 생긴 거냐? 이번에 부산에서 부산 장신에서 3차 집회를 했는데 사실 저희가 작년 가을에 찾아가서 이 집회를 하겠다고 했을 때 총장님이 아, 네. 눈을 감고는 그게 될까? 약간 이런 분위기셨거든요. 그냥 하시라고. 근데 어제 어제 이제 부산 저녁까지 집회하고 저희가 밤에 다 돌아왔는데 그 총장님이 너무 흥분을 하신 거예요. 부산 장신 역사상 이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모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입학처장님도 탁재일 소장님인데 입학처장님도 흥분해갖고 저도 좀 시간을 달라.
그래서 어 청소년들이 부울경 지역에서 거의 500명이 참석을 했어요. 그리고 이 아이들이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미래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 아이들이 다윗처럼 예배하는 인생이 된다면 여러분 한국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다음 세대는 살아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위기의 상황이 되면 자포자기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해답을 얻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9절과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과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400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여러분 600명이 진격을 하다가 남부 경계에 있는 브솔 시내에서 200명이 피곤해서 몇 명이요? 200명. 600명 중 200명이면 1/3이잖아요. 아말렉 족속은 굉장히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족속입니다. 그럼 이 전투를 감당하려면 나머지 200명이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필요하다고요. 그런데 그들이 기진했다고 힘들어하니까 다윗이 그들을 배려해서 그냥 머물러 있게 해 줍니다. 전 이게 충격이더라고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늘 앞부분 설교도 까먹으시면 안 돼요. 앞부분에 분명히 이 사람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잖아요. 자기들이 다급해지니까 다윗을 압박했죠. 그러면 다윗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가 지금 아말렉을 잡으려면 다급하니까 이들을 압박해야 된다고요. 사울 같으면 등에 칼 들이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들을 배려합니다.
그 이 사람들을 쉬라고 얘기를 해 줘요. 제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건데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훈련, 마지막 레슨이라고 했죠. 여러분, 사람에게 욕심을 내면 애증의 관계로 전락하게 돼 있어요.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사랑하되 일정 거리를 두셔야 돼요. 이 거리를 두라는 것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사람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내려 놓아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마무리 부분에서 좀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두 번째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이건 뭐냐면 광야에서 갑자기 한 이방인을 건져내게 됩니다.
11절과 12절 읽어 볼까요?
무리가 >>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며 자 이번에는 400명 데리고 진격하다가 광야에서 어떤 어느 나라 사람 애굽 사람 이집트 청년을 하나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버림받은 상황이에요. 여러분 광야에서 혼자 버림받았다 이건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말렉을 쫓아가려면 너무나 시간이 촉박하잖아요. 포로로 잡혀간 가족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촉박한 시간에 다윗이 이 애굽 사람을 살려내겠다고 상당히 여유 있게 정성껏 돌봐주는 거예요.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고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를 먹이고 포도 송이 두 개를 먹이고 그거 다 먹고 나서 애굽 사람이 다시 반짝 살아납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까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이 걸리니까 주인이 버렸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노예는 노동력 외에는 효용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방금 완전히 남방 지역이 그 비어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노예를 엄청나게 잡은 거잖아요. 새 노예들은 넘쳐나는데 병든 노예 하나쯤이야 버려도 상관이 없었던 거예요.
자, 그런데 다윗이 이 사람을 살려내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15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
아멘.
이 다윗이 광야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한 이방인 노예를 정성껏 살려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가 아말렉 군대로 다윗의 군대를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게 돼요. 여러분, 놀라운 일이죠. 다윗이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여러분 사울 왕도 다윗이 이용 가치가 있을 때 부하 장수로 써먹다가 불편해지니까 죽이려고 하잖아요. 아기스 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용 가치가 있을 때는 편하게 썼지만 블레셋의 영주들이 불편해 하니까 버리는 카드가 되잖아요. 세상이 그런 거예요.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가 얼마나 비정합니까? 당신의 능력을 보여 달라. 이게 굉장히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 능력을 다해서 몸 바쳐 충성하고 나면 방전된 건전지처럼 버려지는 게 이 냉정한 사회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인생에 뭐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제가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인생에서 가장 사람에게 배신감을 크게 느낀 사건. 사울은 워낙에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600명의 사람들, 여러분 그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준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그날 그 사람들이 피곤하다고 피곤한 사람들 200명을 쉬게 해 주고 다음 주에 보면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자, 그건 다음 주에 보시고 또 한 명에 죽어가는 이방인 노예도 정성을 다해서 살려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실망한 날 이런 거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난주 새벽에 나눴던 내용이 관련이 있어서 말씀드리면 지나친 이상론이 여러분의 가정을 망치고 관계를 망치고 공동체를 망칠 때가 많아요.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상론이 뭐냐면 아까 말씀드린 인간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에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 기준과 당위성과 이상론에 매어 있는 여러분, 그것이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인 건 좋아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건지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거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밀어붙이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영혼이 질식됩니다. 관계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는 이상적인 가정이 안 되고 정반대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남편이라면 나한테 이렇게 해 줘야 되지 않느냐? 내가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는데.
아니, 아내라면 아이들 엄마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부모님이라면 나한테 이렇게 해 줬어야지. 인생을 돌이켜 보니까 부모가 너무 했네. 평생 내 젊음을 맞춰서 이 아이들을 키워 줬는데 어떻게 자식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여러분이 당위성이 이상론에 매여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공동체가 계속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의 마음이 그날 딱 이런 마음이었던 겁니다. 10년을 내가 내 생명을 바쳐서 지켜낸 사람들. 잠도 못 자고 광야에서 지켜낸 사람들. 어떻게 여러분이 나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마음이 딱 들면요. 사람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마 저와 여러분이 다윗이었으면 너희들 맘대로 해라. 날 죽이든지 아말렉 너희들이 찾든지 맘대로 해라. 나 아무것도 안 해. 여러분, 그래서 10년, 20년 헌신했던 엄마가 집을 뛰쳐나가고 싶어 지금. 예. 집 나가고 싶은 엄마들이 있잖아요. 예. 아니, 내가 회사에 그렇게 헌신을 했는데 어떻게 회사가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어?
회사 때려치우고 싶은 아빠들 있잖아요. 아니, 내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 교회가 나한테 이럴 순 없는 거지. 나 이 교회 더 이상 안 다녀. 여러분, 사람이요. 이런 상황이 되면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근데 다윗이 어떻게 했어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아니,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이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데 그 기도했을까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는데 사람들을 더 의지하고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나를 실망시킬 수 있고 얼마든지 나를 배신할 수 있는데 내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나 자신의 잔꾀를 의지하고 내가 하나님보다 이방인을 의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거의 잘못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배려해서 아, 너무 힘들면 여기 머물러 있어라. 길가에 지나가다가 죽어가는 그 이방인 노예를 품어주고 살려내잖아요.
야,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사람에게 인생에서 가장 실망한 날, 가장 배신을 크게 당한 날, 어떻게 사람들을 이렇게 품어 줄 수 있나? 여러분이 그런 거 당하면 밥도 짓기 싫고 회사도 가기 싫고 교회도 나가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든요.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에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아멘.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의 당위성과 이상론. 가정이라면 이런 크리스천 가정이라면 이래야 되는 거 아니야? 남편이라면, 아내라면, 부모라면, 자식이라면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그 기준으로 인해서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아무리 주장을 해도 여러분 가정을 깨뜨리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역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세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아, 내가 이 주일. 예배 한번 드리면 되지, 뭐. 새벽 예배하고 뭐 통독까지 하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여러분, 가족을 정말 정말 애지중지 사랑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느 한순간에 무너지더라고요. 야, 내 가족을 위해 이렇게 헌신했는데 나를 이렇게 돼?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던 부부가 이혼하고 싶고 자식 꼴도 보기 싫고. 이게 왜 생깁니까? 여러분, 가족을 사랑해도 가족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여러분, 친구들, 아무리 좋은 죽마고우가 있어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고. 여러분, 기업을 사명감을 갖고 함께 세운 동업자가 있어도 여러분,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교회 믿음의 지체들이 있어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그래야만 그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으로 흘러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에게 너무 기대하거나 사람들을 너무 의지하거나 사람들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목사가 이상한 설교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가 어기라는 게 아니에요. 이웃 사랑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돼요. 사람은 기대한 만큼 실망시키게 되어 있고 신뢰했던 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되어 있고 사랑했던 만큼 미워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애증의 관계가 되는 거죠. 가족들이 다 애증의 관계가 되는 이유가 그겁니다. 저를 다시 따라 해 보세요.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 사랑할 대상이다.
사랑할 >> 사랑하세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신뢰와 우리의 모든 갈망과 우리의 모든 소망은 오직 하나님 앞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이상론을 내려놓으세요. 제가 기준이 상당히 높고 이상주의자입니다. 이상주의자가 얼마나 현실에서 불행해지는지를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이상은 내 힘으로 만들 수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가정을 온전한 공동체로 세우고 우리의 교회를 온전한 공동체로 세울 줄로 믿습니다. 이거를 인정하셔야 돼요. 여러분 힘으로 되지 않아요. 여러분이 다그쳐서 아이들을 다그쳐서 배우자를 다그쳐서 되지 않아요. 그러면 정 반대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01월
2026.01.25(주) | 주일설교 | 오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삼상 29:1-11)
설교 요약
- 설교 제목: 오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사무엘상 강의 57회)
- 본문 흐름: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를 따라 블레셋 군대와 함께 전장에 나아가지만, 블레셋 영주들의 강한 불신으로 인해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고 시글락으로 돌려보내지는 장면을 다룬다.
- 전쟁 배경: 블레셋 5대 도시(가드·가사·아스돗·아스글론·에그론)가 전례 없는 규모로 연합군을 소집해 아벡에 집결하고, 수넴 방향으로 북상하며 전면전을 준비한다. 이는 이스라엘에 ‘다윗’이 빠져 있는 상황과 맞물린다.
- 핵심 갈등: 블레셋 영주들은 다윗을 “히브리인”이라 낮춰 부르며, 전장에서 돌변해 블레셋의 대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의 노래를 재소환).
- 아기스의 태도: 아기스는 다윗을 신사적으로 변호하며 “허물이 없었다”고 하지만, 연합 체제 내부 결속을 깨뜨릴 수 없어 결국 다윗을 평안히 돌려보낸다.
- 다윗의 진퇴양난: 다윗은 표면적으로는 억울함과 충성을 과장하며 항의하지만, 실제로는 이중 행보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언더커버/정체성 갈등의 비유로 설명).
- 광야의 의미: 하나님이 다윗을 애매한 상태, 광야의 자리로 두신 것은 고통을 위한 방치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보호였음을 강조한다. 해석이 안 될 때는 억지로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태로 머무르며’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 신뢰의 결론: 하나님은 다윗의 잘못된 선택(망명)조차도 최종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로마서 8:28). 결국 ‘오늘 한 걸음’을 믿음으로 걷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광야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 마무리: 찬양 ‘광야를 지나며’를 통해 광야의 자리에서 주님만 붙드는 신앙을 고백하도록 인도한다.
전문 녹취록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사무엘상 강의 57회입니다.
다윗이 아기스를 따라 전장에 나아갔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여서 그 전쟁터를 떠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예. 지도를 보시면 블레셋의 5대 도시는 남부 지중해 해변 쪽에 있죠.
이 가드,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5대 도시 연합 체제입니다.
이 연합군이 전부 이스라엘의 중부 지역인 아벡에 모였어요.
아벡에 모여서 다시 이제 북부 이스라엘 평원에 있는 수넴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미 앞부분에 수넴에 올라간 걸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29장의 내용은 사실 그 앞 장의 내용에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자,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벡에 있는 이스르엘 평원에 지금 진을 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국가들은 전기전을 주로 치렀어요. 날씨가 좋을 때.
그래서 파종을 하고 수확을 하는 그 중간에 농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파종은 해놓고 돌보지 못하더라도 일단 전쟁의 전기전에 나갔다가 수확하기 전에 돌아와서 수확을 한 거예요.
그래야지 이제 살아갈 수가 있으니까.
대부분의 군사들은 상비군이 아니라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는 예비군들이었어요.
그리고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처럼 오대 도시에서 모든 군대가 모였다라는 표현은 전례 없는 대규모 징집을 했다는 뜻이고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 블레셋의 군대가 어떻게 나왔는가?
2절 3절 같이 읽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자, 블레셋의 군대가 각 도시의 지도자들의 인도에 따라서 백부장, 천부장들의 인도를 따라 몇백 명씩, 몇천 명씩 군대가 나옵니다.
그리고 가드 왕 아기스를 따라서 군대들이 나오는데 그 뒤에 다윗의 부대도 따라 나왔던 거예요.
5대 도시들 가운데 가드가 머리 역할을 하는 도시였던 게 맞고, 그리고 가드의 영주였던 아기스는 5대 도시 연합 체제의 왕 역할을 한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수평적인 연합 체제였기 때문에 절대 왕권을 행사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는 거죠.
다른 도시들의 영주들이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편하게 문제 제기를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어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어디 사람들이요? 히브리 사람들.
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러주지 않았어요.
이제 국가명을 부르지 않고 히브리인이라고 부른 것은 사실은 좋은 뉘앙스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뭐라고 불렀어요?
예, 조센징이라고 불렀는데 그냥 말 그대로 하면 조선 사람이라는 일본어 표현일 뿐이에요.
그러나 뉘앙스 자체가 경멸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었던 거죠.
블레셋 사람들이 저 히브리인들 이렇게 표현했는데 히브리인은 원래 유리 방황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난민이라는 뜻입니다.
국가로 인정을 안 해주고 이 난민 출신의 히브리인들이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 나온 거냐라고 비아냥거리고 트집을 잡았던 거예요.
자, 그러면 가드 왕 아기스는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어, 이 사람에 대한 신분 증명은 이미 끝났다.
이 사람이 망명을 해온 걸 여러분도 알지 않느냐?
그리고 그 여러 해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 아기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상당히 신사적인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영주들은 히브리인이라고 격하시켜서 표현을 했는데 이스라엘 왕이라고 국가명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그 왕의 신하 다윗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었던 기간은 정확하게 1년 4개월이었죠.
그런데 뭐 횟수로는 2년이 되기는 하지만 여러 해, 여러 날 동안 나와 함께 있었는데 아무런 허물이 없었다. 이렇게 변호를 해 줍니다.
자, 그러나 블레셋 영주들이 물러설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4절과 5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닙니까?
자, 블레셋 영주들이 화를 내면서 아까는 국가명을 불러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개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요.
다윗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이 사람을 당신이 왕이 지정하신 처소 시글락으로 돌려보내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입니까?
왕이 이 인간을 받아주고 성읍까지 내준 걸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동안 우리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이거를 우리가 웰컴해서 그런 게 아니다.
상당히 우리는 불만스럽게 보고 있다라는 얘기죠.
그러면서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두렵다.
그리고 나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는 옛날 노래, 흘러간 옛날 노래를 다시 끄집어냈어요.
자,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사람들은 이 다윗이 골리앗에게 거둔 승리, 그로 인해서 중근동 차트 넘버원이 됐던 바로 그 노래, 이거를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당대 최고의 장수를 물매돌 한 방에 쓰러뜨린 것은 당시 중근동의 국가 간의 군사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는 사건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국가 간 군사력 서열 자체를 재정립해 놓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다윗인데 만약에 그런 다윗이 전쟁터에서 돌변해서 반대편에 서게 되면 이건 우리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게 아니냐라는 판단을 영주들이 했던 거죠.
아 그런데 제가 이제 객관적인 전력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 다윗이 이끌었던 부대가 몇 명이었어요? 600명이었어요.
그럼 우리 사무엘상 같이 했죠? 예.
다윗이 거느린 부대가 600명이었어요.
그리고 블레셋의 군대는 5대 도시 연합군 전군을 소집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전력상 만약에 둘이 붙는다고 해도 이거는 게임이 되지는 않아요.
그래서 어제 이렇게 설교 준비를 하면서 블레셋의 영주들이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해 봤어요.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싸움은 기세죠.
어, 그 뭐 알렉산더가 최고의 전술가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페르시아의 대군을 이길 때도 기세로 밀어붙여서 이겼죠.
규모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규모였어요.
12여 년 전 그날에도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았던 블레셋 군대가 사울 왕 곁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에게 졌던 이유는 이 선봉장 싸움에서 기세에 밀렸기 때문이죠.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 기세에 밀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 전쟁을 보니까 드디어 중요한 포인트가 해석이 되는 거예요.
뭐냐면 블레셋이 이렇게 오랜만에 정군을 집결해서 전면전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에 누가 없기 때문이에요? 다윗이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정반대로 상황을 놓고 해석을 해 보면 다윗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이스라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면 이 전쟁은 일으키지 말았어야 되는 전쟁이 된다는 이 영주들의 해석은 정확한 해석이었다는 거죠.
여러분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안 일어날까요? 굉장히 여러 번 일어났어요.
그래서 뭐 케이스 스터디를 많이 했지만 대표적인 거 하나 얘기하면 중국의 삼국 시대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이제 조조라는 인물이 있었죠.
조조가 이제 군사력이 상당했는데 장수라는 장수와 싸운 적이 있어요.
이 장수는 동탁을 섬기는 장수였는데 상당한 무력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 규모 자체가 게임이 안 되니까 결국에는 밀려서 장수가 전쟁을 포기하고 조조의 군대에 투항을 합니다.
근데 조조는 여러분 잘 아는 것처럼 상대 장수일지라도 그 사람이 무력이 있고 실력이 있으면 무조건 받아줬거든요. 그래서 그 투항을 받아 준 거예요.
그런데 장수의 모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조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렇게 위험스러운 보고를 해서 '야, 이러다가 내가 당하겠네' 그러고는 조조의 군대를 기습합니다.
그래서 원정, 어, 완성이라는 곳에서 조조군을 기습을 해서 장수라는 장수가 조조의 맏아들을 죽이고 조조의 조카를 죽여요.
또 조조의 맹장 하나를 또 죽이고. 그러니까 투항을 받아줬는데 이건 엄청난 배신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또 상황이 어려워져서 장수가 조조에게 재투항을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받아 주겠어요? 받아주면 안 되는데 조조는 받아줬어요.
그래서 여러분 아마 들어 보셨을 텐데 관도대전이라거나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전쟁에서 장수가 혁혁한 공을 올리게 되죠.
그리고 나서 이제 나중에 장수가 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게 조조가 배후에서 사주를 해서 그렇게 죽은 것이라고 대부분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용 가치가 있을 때 썼다가 나중에 버린 거죠.
가드 왕 아기스가 조조를 쓰고 버리려고 했던 것일까? 의심은 해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의 분위기로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다윗은 정말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던 것이 맞습니다.
내가 전쟁터에 나가서 이스라엘과 내 조국의 사람들과 싸워야 될까? 아니면 갑자기 돌이켜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야 될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적에게 투항을 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방향을 바꿔서 자기를 도와줬던 그 사람들과 싸워야 되는 경우들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투항을 했던 항왜, 항복한 왜군들이 있었어요. 상당히 많았어요.
그런데 이 항왜들이 정유재란 때 다시 이제 돌변을 해서 왜군으로 넘어간 경우들이 또 많습니다.
이유는 뭐냐면 그 전쟁의 시기가 끝나고 나서 자신들의 신분이 불투명하고 그리고 고향에 대해서 그리운 마음이 있고 또 왜군들이 끊임없이 회유를 하다 보니까 다시 왜군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아요.
현대에도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탈북한 탈북민들이 우리나라 들어오잖아요. 한국에서 방송 활동까지 다년간 하다가 다시 재입북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는 재입북해서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요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북한에 가서 남조선에 가니까 도저히 사람 취급을 안 해 준다. 이 북한 체제 선전을 하는데 한 1년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또 사라져요.
그래서 어 제가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니까 결국에는 이들도 체제의 이용을 당하다가 숙청된 게 아니냐 이렇게 추정들을 하더라고요.
여러분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사에는 정말 비정한 부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광야 시절 초창기에 선지자 갓을 통해서 아주 이상한 명령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사무엘상 22장 아둘람 동굴에 있다가 모압 땅에 건너갔을 때인데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이 불안한 상태니까 자기 부모를 모시고 모압에 가서 부모님을 맡겼다고요.
근데 선지자가 와서 이방 땅에 있지 마라. 유다 땅으로 돌아와라.
여러분,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반란이나 반역죄인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중범죄인이거든요.
그래서 고대에는 왕권이 다스리니까 더 심각했죠.
왕에게 버림받은 다윗과 같은 정치범이 되는 순간 주변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왜냐면 그 외에는 갈 곳이 없잖아요. 그 땅에 자기 나라에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망명도 못 가게 하시고 사울의 코 앞에서 광야 생활을 하게 만드셨는가?
그때는 이유를 몰랐죠.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이제야 알겠는 거예요.
그 애매한 상황에 계속 있지 않았다면 난처한 결과가 오게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야 그 선택을 해 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그가 이방 민족에게로 투항하는 순간 결국에는 이스라엘에게 칼날을 겨누게 되는 그 위치에 서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셔서 미연에 방지를 하시려고 했던 거죠.
여러분, 우리는 인생과 역사의 좁은 구간을 보지만 하나님은 큰 그림을 보고 계시잖아요.
근데 어떤 분들은 이 하나님의 빅 픽처 얘기하면은 막 화가 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왜 그걸 하나님만 봐야 되냐?
근데 하나님은 보이는데 우리는 다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걸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좁은 인생의 구간만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내 인생의 문제를 이렇게 확실하게 해결을 안 해 주십니까?
이스라엘에 돌아가도 된다고 복권을 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에 너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 그러니까 포기하고 망명을 선택해라. 이렇게 허락을 해 주시든지.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왜 나를 계속 두십니까?
왜 이렇게 홀로 광야에서 철저히 고독하게, 철저히 낮아지게 만드십니까?
그때는 몰랐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거예요.
그러나 이 애매한 상태가 다윗에게는 애매한 상태가 아니라 어떤 상태? 안전한 상태였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애매하게 만드시면 여러분 만들려고 애를 쓸 게 아니라 애매한 상태에 계셔야 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설교를 하는 거죠? 그냥 애매한 상태로 계시라고요. 그냥 계셔야 돼요.
하나님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를 안전하게 만드시려는 거였어요.
하나님은 그를 사방의 보호막이 없는 위험 구역으로 들여보내신 게 아니라 사방의 장애물이 없는 안전지대로 들여보내신 거였어요. 그게 광야였어요.
다윗은 광야가 위험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안전지대를 떠나버린 거예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평탄대로를 걸어갈 때든 인생의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이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26장 3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그가 주를 어떻게 합니까?
네. 주님을 신뢰하는 일관된 마음, 심지가 견고해서 일관된 마음을 갖는 그 믿음의 상태가 당신의 인생에 평강의 평강을 더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아멘.
인생의 가장 외롭고 가장 목마르고 가장 낮은 자리인 광야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 하나님 신뢰하지 않고 도대체 왜 이러시냐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럼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갈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척박한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고 반석을 터뜨려 물을 마시게 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자, 아기스가 어쩔 수 없이 그 영주들의 요청에 따라 다윗을 불러서 미안한 얘기를 합니다.
6절과 7절 같이 읽어 볼까요?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내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자,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서 네가 그동안 악하게 한 거 없는 거 안다. 그러나 영주들이 안 좋아하니 어떻게 하겠냐?
평안히 시글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이렇게 종용을 합니다.
여러분, 아기스 입장에서는 다윗이 함께 전쟁터에 나가면 자기는 천군만마를 얻는 기분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유익을 위해 블레셋 5대 도시 연합 체제를 깨뜨릴 수는 없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생각을 해 보니까, 어, 뭐 아기스가 좋은 의도든 안 좋은 의도든 간에 다윗도 그냥 아기스에게는 좋은 카드에 불과했구나.
자기 동족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다윗이 아무리 훌륭한 카드이고 좋은 도구일지라도 자기 동족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자리까지 갈 수는 없는 상태였어요. 슬픈 현실이죠.
네. 8절.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읽겠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아,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다윗이 상당히 거북하게 반응합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을 했습니까?
내가 가서 내 주 왕, 아기스 왕을 얘기하는 거예요. 아기스 왕의 원수 사울 왕과 왜 싸우지를 못하게 하십니까?
제 보기에는 다윗이 좀 과도하게 오버하는 거예요.
지금 속으로는 막 이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오, 전쟁에 안 나가게 너무 다행이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왜 나를 의심하느냐?' 그러면서 화를 내잖아요.
여러분,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요?
자신이 그동안 이중 행보를 하고 거짓말을 한 것을 속이려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되잖아요.
사실 다윗은 블레셋 쪽에 있었지만 영주들이 의심했던 그대로였어요.
여러분,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울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뼛속 깊이 이스라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지만 다윗은 일종의 이스라엘 언더커버였던 거예요.
언더커버라는 게 커버 아래로 잠입해서 들어간 위장 요원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영화가 생각이 나는데 2002년도에 나온 홍콩의 무간도부터 해서 미국에서 그거를 다시 각색해서 만든 디파티드라는 영화도 있고,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나온 신세계라는 영화… 제가 일부 때에는 포스터를 보여 드렸는데 여러분 잔상이 너무 남을 것 같아서 안 보여 드립니다.
언더커버 요원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다룬 영화예요.
예. 제가 이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사울왕과 다윗과 아기스왕의 관계가 너무 유사한 거예요.
경찰 과장인 최민식이 골드문이라는 조직을 잡기 위해서 언더커버 경찰인 이정재를 잠입시킵니다.
그런데 이정재가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조직 생활을 하면서 '내가 경찰로 계속 있을 거냐 아니면 조직원으로 있을 거냐' 이 사이에 이제 갈등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럼 왜 갈등을 하게 될까요?
자신을 잠입시킨 그 경찰 과장이 자신을 이용하기만 하고 그리고 자신을 압박하고 신뢰해 주지 않아요.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나를 꺼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아니, 너 여기 계속 있어야 돼." "아니,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너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계속 그 일을 해야 된다."
"그거 안 하면 내가 이 조직원들에게 네가 경찰이었다는 걸 다 알려버리겠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목숨을 걸고 위태로운 일을 한 사람을 코너까지, 벼랑 끝까지 밀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조직의 보스로 나오는 황정민은 자신을 끝까지 신뢰해 주는 거예요.
경찰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알게 되는데도 기다려 줘요. 돌아오라고.
자기에게 마음의 결정을 하도록 기다려주고 신뢰해 주는 거예요.
여러분 사울왕이 다윗을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이용만 하잖아요. 그리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코너로 몰아붙입니다. 신뢰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거예요.
근데 아기스 왕은 오히려 다윗을 신뢰해 주잖아요.
다윗은 사실 아기스 왕을 지금 속이고 있는 언더커버인데 그런데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믿어 주잖아요.
네. 제가 영화에 너무 몰입했나요? 영화랑 너무 스토리라인이 똑같아요.
어, 물론 이제 폭력적인 영화를 힘들어하시는 분들은 절대 보시라는 거 아니에요. 뭐 목사님 추천했으니까 봐야 된다 이러지 마세요. 예.
그러나 인간관계 역학을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위장 요원으로 산다는 건 이거는 어느 조직에서나 굉장히 힘든 일이고 하지 말아야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로 놓고 보면 경찰관으로서 이 길은 가면 안 되는 길이었던 거예요.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에 망명하는 것은 결코 가지 말았어야 되는 길인 거예요.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그러면 '야, 이거 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도 않고 그냥 내가 세상 사람으로 그냥 넘어가 버려야겠네.'
여러분, 세상 사람으로 그렇게 완전히 넘어가서 살 수 있나요?
우리가 때로는 세상 한복판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어려울 때가 있고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가 있어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려서 의지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 앞에 일관되게 신실하게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내 상황을 시원하게, 속 시원하게 해결을 안 해 주실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기에는 이게 너무나도 모든 가능성을 다 막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광야 한가운데서 사방이 막혀 있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직장도 잡히지 않고, 가정의 회복을 원하는데 가족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마저 나의 신앙과 인생에 대해서 불신하고 오해하고…
그러면 하나님 제가 어떻게 여기 더 있으라는 겁니까?
저에게 아예 그냥 세상으로 가도 된다고 저를 놔주시든지 아니면 명확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시든지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이런 갈등이 생기는 거죠.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것. 이게 어떻게 보면 크리스천 라이프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다윗이 딱 그런 상황이었죠. 철저하게 외롭고 철저하게 낮아지는 광야에서의 삶.
근데 그 광야에서의 삶을 여러분 외적으로 볼 때는 사울이 밀어 놓은 것 같고 또 다윗이 선택한 것 같지만 이 광야의 삶을 다윗에게 허락하신 분이 누구세요? 하나님이시잖아요.
마치 성령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오시는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광야로 끌고 가시잖아요.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로 끌고 간 게 아니었어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그리고는 40일을 그 결핍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금식하게 만드셨어요.
그리고는 사탄의 세 번의 시험을 받게 하셨다고요.
어떻게 그분이 성령님이시라면 나를 광야로 끌고 갈 수 있느냐?
어떻게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나를 푸른 초장, 실만한 물가가 아니라 광야로 데려갈 수 있느냐?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다 이해가 안 되고 다 해석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람들이 해석하고 싶어 하거든요. 아니요. 해석과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상태로 계셔야 돼요.
시간이 멈춘 것 같고 인생이 멈춘 것 같으면 조급하게 몸부림을 치지 말고 그냥 멈춰 있는 상태로 계셔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아직 하나님의 해답의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고난에 대해서 묵상을 해 보면 여러분, 고난의 터널은 해석이 안 되는 기간이에요.
이게 마치 뭐하고 같으냐면 학생들이 시험 볼 때와 같아요.
시험 볼 때 야, 이게 1번인지 2번인지 문제를 풀 때 계속 헷갈리는 거 있잖아요. 하나도 없었어요. 다 헷갈렸어요.
헷갈리는 문제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 답지가 딱 나오면 '아, 1번이었지.'
여러분,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은 해석이 안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터널이 끝나고 빛 가운데 서면 인생이 비로소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하나님의 해석의 시간이 아니라면 이 고난의 터널은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고난의 터널을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9절에서 11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전령같이 선한 것을 내가 하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내 주의 신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올라가니라.
자, 아기스가 다윗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새벽 일찍 떠나라 얘기를 했어요.
다윗과 그 일행들이 아침 일찍 유다 남부 시글락, 그들이 1년 4개월 머물렀던 그 성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결국에 이 모든 다윗의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신 분이 누구시라고요? 하나님이시죠.
근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사울 왕을 죽이지 못하게 하세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아, 그래서 엔게디 동굴에서도 십 광야 황무지에서도 사울 왕을 죽이지 못하게 하세요.
자, 그런데 그 땅에 있으면서, 그 땅에 반역 주인이 된 상태에서 그러면 그 땅의 왕과 싸우지도 못하게 하시고 망명도 못 가게 하시고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여러분.
그런데 망명을 하면 왜 망명을 못 가게 하셨는가?
망명을 하면 결국에는 이 사람, 무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적국에서 다윗의 무력을 이용해서 사울과 이스라엘에게 칼을 겨누게 만들 것을 하나님 아셨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윗의 이 망명 스토리라인을 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다윗의 망명 시나리오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정리를 해 보자면 이런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남아 있었다면 여러분 적국인 블레셋이 전면전을 감행할 수 있었겠어요? 없는 거예요. 다윗 때문에 감행을 할 수가 없다고요.
그러면 사울의 집권은 장기화됐겠죠. 그럼 다윗의 도망자의 세월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결국에 다윗이 블레셋 망명이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선택을 했잖아요.
그랬기 때문에 블레셋은 야, 기회는 이때다. 그리고 나서 전면전을 결정한 거고 이 전면전으로 인하여서 사무엘상이 끝날 때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다윗의 망명, 아 다윗의 도망자 세월이 끝나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다윗의 고난이 끝나게 된 거예요.
이게 앞뒤가 뭔가 안 맞는 것 같잖아요.
자, 그러면 우리가 보통 단순 논리로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망명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드셨을까요? 그건 아니에요. 이건 단순 논리예요.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의 훈련장을 떠나지 말라고 분명히 선지자를 통해서 얘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탈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에요.
왜냐하면 그 선택이 그대로 흘러갔으면 사울과 이스라엘을 죽일 뻔했던 거예요. 다윗이 자신의 칼날로.
근데 하나님이 그걸 못 하게 하시죠.
저는 이제 종종 심심하면 역사 채널을 보는데 어제 고려 시대 문종 때 무신정변이 일어났던 걸 봤어요.
예. 문관들이 무관들을 함부로 무시해 갖고 직급은 훨씬 높은데 젊은 문관이 무관 할아버지 뺨을 때리고 막 그런 시대였어요. 무신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 그리고 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칼을 쓴 문관들을 전부 다 제거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그 무관들이 서로 칼을 겨누며 또 싸웁니다.
무신정변의 끝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여러분 역사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칼잡이들은 결국엔 칼로 들었다가 자기가 권력 잡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칼잡이에게 죽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중근동 당대 최고의 칼잡이 누구예요? 다윗.
다윗이 칼을 못 쓰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내게 기회를 주셔야 될 거 아닙니까?
이 땅에 계속 있으라고 하시면 이 땅의 리더를 제가 교체할 수 있도록 싸우게 하시든지 아니면 망명을 가서, 망명을 가서 그 나라를 위해서 싸우게 하시든지 어디서도 싸우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사방을 다 막으시고 일터도 해결을 안 해 주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시면 제가 뭐를 하라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를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결국에 다윗이 이게 답답해 갖고 맘대로 이탈을 했는데 그 다윗의 이탈의 잘못조차도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고난을 마무리 짓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스토리를 생각해 보니까 가룟 유다하고 예수님 스토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넘긴 게 잘한 거예요? 대답들이 없어요. 갈등하지 마시고 대답하세요. 잘한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불신하고 은 30에 자기 탐욕에 빠져서 팔아넘겼어요. 그 잘못된 결정의 끝은 자살로 끝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가룟 유다의 잘못을 오히려 선한 도구로 쓰셔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위해서 속죄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이 단순 논리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도록 만든 게 아니냐. 여러분 그런 논리에 빠지시면 안 돼요.
유다의 잘못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선한 결과를 만드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내가 다 잘해서 하나님이 선한 결과를 만드실까요?
때로는 내가 잘못하고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해서 불신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해도 하나님은 결국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지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여러분, 인생은 딱 한 걸음이잖아요. 마지막 지점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그 한 걸음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과 신앙은 믿음의 문제인 거예요.
정말 이 큰 그림을 선하게 이끌어 가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늘 한 걸음을 내가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겠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를 못 하게 하시고 사방을 막으시고 내가 가려고 하는 거는 다 스톱 사인을 걸어 두시고 여러분 이해할 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애매한 상태에서 다윗을 지키시고 우리의 인생을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 이 시간 찬양 한 곡을 올려 드리려고 하는데요. '광야를 지나며'라는 곡입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왜 나를 이렇게 고독하고 낮아지게 만드시는지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시는지 결국에는 주님 한 분, 그 주님 한 분을 의지하게 만드시는지…
설라현 전도사님의 하나님 앞에 찬양 올려 드리겠고요.
여러분 가사를 여러분의 기도로 묵상하고 고백하시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찬양 올려 드리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서.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붙드는 하나로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더 정결케 하시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아멘.
2026.01.24(토) | 새벽기도 | 너 하나님의 사람아! (마 6:1-15)
설교 요약
1) 신앙은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산다
-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태도다
-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 내면이 비춰지는 상태이며, 인정 욕구를 포함해 내면의 흐름을 점검해야 한다
-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는 신앙은 종교로 전락하기 쉽고, 참 예배자의 길은 내면 튜닝에서 시작된다
2) 구제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다
-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기억에 남는 쇼’가 아니라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선을 행하라는 요청
- 시간, 재능, 물질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청지기 관점이 필요하다
- 성령의 감동을 따라 흘려보내면 복의 통로가 되지만, 통제하려 들면 막히고 자유를 잃는다
기도는 무대가 아니라 골방이다
-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이미 상을 받았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본질이다
- 안과 밖이 다른 삶(표리부동)은 다음 세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결국 진정성과 정직함의 문제다
- 근본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의 부족(자존감/거절 두려움과 연결)
주기도문 앞부분이 기도의 중심이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가 임하시오며 / 뜻이 이루어지이다”
- 기도는 내 필요 충족보다, 하나님의 존재·나라·뜻을 우선에 두는 방향으로 재정렬되어야 한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는 우선순위 재설계의 기준이 된다
적용: 세상적 니즈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
- 하나님을 우선순위 최상단에 두지 못하면 불안과 통제가 커지고, 기도도 영적 당위성을 잃기 쉽다
- 하나님께 삶 전체를 맡길 때 자유함이 온다
- 기계 문명(AI) 시대일수록 영혼이 하나님과 호흡하는 예배자로 깨어 있어야 한다
결론
-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아래 살아라
- 성령의 감동을 따라 흘러가며, 기도의 중심을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맞추라
녹취록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15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네. 아,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 같이 암송할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네.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거시적인 외적인 하나님의 공동체, 아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의, 내적이고 인격적인 그 하나님의 성품을 갈망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네. 네. 오늘 여러 가지 내용인데 굉장히 뭐 주옥같은 내용이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많은 내용입니다. 예. 그런데 좀 본질적인 부분들을 보겠습니다.
1절 말씀 다 같이 읽어 볼까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자, 신앙생활은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저를 한번 따라보세요.
신앙생활은 >> 신앙생활은 >>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네. 그래서 저는 영성은 아, 영성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이제 열심히 묵상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것도 있지만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의 거울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의 그 깨끗한 투명한 거울 앞에 서면 누가 비춰져요?
나 자신이 비춰지죠. 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보여야 되는 게 영성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내면에 뭐가 흐르는지를 어, 이렇게 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일터에서,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참 잘했어요. 이렇게 칭찬을 받아야만 나는 뭘 할 수 있다. 좀 이렇게 내면의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있죠.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인정 욕구가 강한 것일까? 나는 사람 앞에 사는 인생일까?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일까?
아, 여러분, 그 예배는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우리가 삶의 예배를 이야기하잖아요. 이곳 성전에서만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삶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람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근데 과연 그렇냐는 거죠.
여러분 칭찬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은 없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거니까. 네. 칭찬은 무뚝뚝한 남편도 네. 말을 안 들으려고 하는 자녀도. 네. 또 지쳐 있는 아내도. 칭찬은 모든 사람을 살려내게 돼 있어요.
아 그러나 그 인정 욕구 때문에 내가 인생에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돼서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음성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동기 부여가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되는 거죠.
결국엔 사람들의 평가, 사람들의 말이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여러분,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따라 움직이는 신앙생활 그것은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내면에 튜닝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 여러분의 즉각적인 반응이 어떤지를 한번 보세요.
네. 아무 반응이 없는데 여러분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 여러분의 내면에 어떤 반응이 있는가?
저는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지만 모태 신앙이었으니까. 근데 칭찬을 받으면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 나중에 이제 제 내면을 보니까 이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내면의 힘이 없었어요. 칭찬하면 힘들었어요.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칭찬을 하니까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내가 과연 이거를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기뻐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을 해도 들뜨지 않고 사람들이 비난을 해도 물론 잘못하면 회개해야 되지만 사람들이 오해해서 비난을 해도 낙심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 그 마음의 상태는 뭘까?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 들뜨지 않는 상태.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 혹시 저 사람의 칭찬의 의도가 나를 흔들어서 내가 하나님께 초점을 못 맞추게 하려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어 물론 뭐 칭찬해 주셔도 감사합니다. 감사한데 어 칭찬을 해 주시면 저 칭찬이 내가 듣기에 합당한 것인가 이거부터 요즘은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양재 있을 때는 일부 예배 이제 뭐 예배 이제 여러 번 설교를 하니까 일부 예배 끝나고 나면 항상이 캐릭터가 이게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으면 못 참는 분들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목사님들이 아침 식사를 다 같이 둘러 앉아서 먹는데, 목사님 설교가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칭찬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그럼 제가 항상 그분을 물끄러미 쳐다봐요. 근데 그분은 어떤 상황이 와도 어떤 상황이 와도 항상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제 그런 분의 내면은 내가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칭찬해서 내가 저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표현해서 이 관계가 어, 우호적이고 평안하다는 거를 알려줘야만 자기 마음이 평안한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다면 뭐 괜찮죠.
어 그러나 이제 나에게 그분이 투척한 칭찬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해서 항상 긍정을 할 부분은 아니구나.
이 사람들이 칭찬 한마디에 비난 한마디에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람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너무 많이 나눠 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씀을 해 주실 때 여러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자 2절에서 4절 말씀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멘.
네. 구제할 때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나팔을 불지 말라.
네. 여러분의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어 뭔가를 도움을 줄 때 뭔가가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물질이 도움의 손길이 뭐 시간이 뭐 재정이 흘러갈 때 아 그럴 때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특별한 이벤트인가, 아니면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인가?
어, 오른손이 한 그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라는 것은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벤트가 되면 여러분도 기억하고 그 사람도 기억하겠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실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이 되면 여러분 기억할 수 없어요. 네. 여러분이 뭐 하루 종일 한 일을 다 기억하는 게 아니잖아요.
특별한 이벤트가 기억에 이 메모리에 남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늘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 그러면은 특별히 기억이 안 남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겁니다.
제가 양과 염소의 비유 때 말씀 나눴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사람을 도울 마음을 주셨는데 그 마음을 주시면 그 마음을 닫지 말라. 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선한 마음을 주시면 여러분 그 마음을 닫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우리가 어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고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가세요.
이 성령의 사람은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여러분이 정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르세요.
어 그러면은 나 생각나는 것마다 도와주면 너무 많이 써야 되는데 이거를 내가 다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좀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잘 생각을 하셔야 되는데 그럼 앞으로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구제, 나의 재정, 우리 가정의 재정에서 뭐 구제비나 긍휼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게 맞을까? 뭐 이런 거를 정하실 필요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잠시 맡겨 주신 거잖아요.
오늘 하루의 목숨도, 여러분의 건강도, 여러분의 재능도, 여러분의 물질도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신 거잖아요. 네. 별 반응이 없는데, 맡겨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거를 지출을 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거는 매니저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주인이 그거를 지출을 하라고 마음을 주셨는데 내 마음 가운데 마음을 닫아.
‘매니저가 아닌데요, 주님.’
그럼 네가 주인이냐?
이렇게 되는 거죠.
어, 뭐 이제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가끔 우리가 물론 재정을 아껴 쓰기는 해야 되는데 저도 이제 교회 사역을 오래 하다 보니까 각각 맡은 부서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 교회에서 이제 재정을 맡은 부서는 사실은 재정에 이제 이 출입을 담당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거에 대한 결정을 하는 또 결정하는 각 부서의 담당자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거를 지출해 주십시오라고 결정을 해서 사인까지 했는데 재정을 지출해야 되는 쪽에서 ‘그걸 꼭 그걸 써야 되냐?’
어, 예산에 나와 있는 거고 이건 합당한 사역이기 때문에 지출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 재정을 지출해야 되는 쪽에서 그거를 결정을 안 해 주는 경우들이 간혹 교회에서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건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의 재정,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이 모든 것 예. 이거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쓰시겠다 그러면 쓰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네. 여러분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그래서 주님이 그 마음을 주시면 그냥 흘러가면 된다.
네. 우리가 이제 그 화요일 제가 화요일 설교 때 팔복 설교했는데 아 이렇게 살아야지.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노력을 하는 개념이 아니고요. 그냥 내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 의식.
나는 누구인가? 아, 난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나는 천국 백성으로 산다.
이 명확한 존재 의식으로부터 그 삶이 어, 외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칭찬받으려는 신앙이 아니고 성령이 내주하시고 감동하실 때 그것을 기꺼이 따라가는 신앙.
그러면 여러분은 그냥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우상 섬기는 도시에서 하나님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존재가 됐잖아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냥 복,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you shall be a blessing 너는 그냥 복이 되는 거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있음으로 인하여서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마다 순종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나님께서 나누라 하시면 나누고 섬기라 하시면 섬기고 할렐루야.
목숨 걸고 헌신해라. 그러면 헌신하고 그렇게 흘러가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이 나를 통해서 흘러가게 하시는 거예요.
근데 내가 이거를 어, 수문을 열까 말까 예,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생을 사니까 하나님은 흘러가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다 막고 있는 거죠.
그렇게 잘하면 여러분 복의 통로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온전히 체험할 수도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온전히 체험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성령께, 성령의 사람은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거는 그냥 바람 부는 대로잖아요. 바람 부는 대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여러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 보시겠어요? 잘 생각하고 대답하셔야 돼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그다음에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네. 오늘 전혀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을 시키실 수도 있어요. 전혀 계획하지 않은 지출을 하게 하실 수도 있어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을 섬기게 하실 수 있어요. 네. 전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 순종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네. 그 저에게 얼마 전에 한 분이 어 제가 그 그 얘기도 했었는데 그 교회를 목사님 300개 세우려면 2년에 하나씩은 세워야 되는데 어떻게 계획을 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 보면 어 저희 교육자들 물어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굉장히 디테일한 사람이에요.
그래 저는 어 30대 초반부터 온유교회 전체 기획을 끊임없이 기획팀에서 기획서 작성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30대 초반부터 하여튼 전교회 목회자들의 기획서를 제가 다 점검을 해 드리는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저도 기획하고 계획 세우는 걸 너무나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에 보니까 특별한 계획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걸 하는 거예요. 그게 가장 중요한 계획이고 가장 명확한 계획이에요.
우리가 돈을 어디에 쓸 거냐? 사람을 어디에 쓸 거냐? 우리의 시간과 재정과 재능을 어디에 쓸 거냐?
우리의 목회적 방향은 어떤 방향이냐?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드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감동하시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여러분 그러면 자유함이 있는 거예요.
왜 자유가 없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영의 역사하심을 내가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유함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역사하심이 분명하기를 축복합니다.
자, 5절과 6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또 너희는 >>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 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내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내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멘.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마라.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종교 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다.
자,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할 때 모습, 또 교회 와서 성도들을 대할 때 모습과 여러분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가? 표리부동이라 그러죠.
근데 유교적인 문화에서는 사회생활을 할 때 소셜 마스크, 이 사회적인 가면을 쓰기가 굉장히 쉽잖아요. 이게 굉장히 쉽습니다.
그래서 전 여러분이 이것도 여러분의 내면을 좀 보시면 좋겠어요.
음. 제가 2, 30대 저 자신을 보니까 굉장히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하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근데 예의 바르게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저의 내면을 보니까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이더라고요.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은 자존감의 부족이고 결국 자존감의 부족은 하나님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확신의 부족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거. 네. 이거를 확신하는 이거 뭐 어렸을 때부터 들은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거를 진심으로 100% 동의하기까지 계속 내 마음 가운데 온전히 고백하고 그리고 나서부터 단계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밖에서 예의 바르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집에 들어와서 그 긴장감이 풀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내 가족, 내 친한 가족, 내 편한 가족에게는 함부로 말하는 거예요. 짜증 내고 안과 밖이 매우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분은 안과 밖이 어떠십니까? 다르신가요?
우리 자매님들 애들한테 막 승질 내다가 전화 오면 음성 변조되잖아요.
아 네. 여보세요. 네.
그럼 아이들은 어 저 전화가 안 끝났으면 좋겠다. 엄마가 천사로 갑자기 변했는데 이런 생각하는 거죠.
아, 제가 이제 그 뭐 그 오늘 교회에서 사역할 때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데 목회자들하고 회의할 때는 A라고 얘기해 놓고 교인들한테 발표할 때는 B라고 발표하고 아니면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결정한 거라고 하세요.
이런 식의 조작이 너무너무 싫어하거든요.
그 회의 밀실 회의라 그러죠. 이게 회의실 안에서 얘기하는 것과 밖에서 얘기하는 게 다르면 안 된다.
네. 목회자들이 서로 상의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달라서는 안 된다.
과연 우리는 안과 밖이 얼마나 똑같은가?
부부 관계도 그렇잖아요. 사람들 앞에서는 굉장히 매너 있게 뭐 차 문도 열어주고 의자도 빼주고 엄청 뭐 매너 있게 하는 것처럼 하다가 집에 가서는 함부로 하고 서로 싸우고 이런 거 이제 쇼윈도우 부부라고 하죠. 예. 가짜 부부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잘하는 척하는데 그러나 성전에서 나와서 사람들이 있는 데서 나와서 개인적으로는 삶이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요즘 이제 청소년 뭐 어린이 자녀들 청년 자녀들이 나는 신앙생활 그만하겠다. 일순위가 부모의 표리부동한 신앙이에요. 부모의 이중적인 신앙.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 안과 밖이 똑같은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서 이것은 내가 그냥 단순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내면을 보셔야 돼요.
저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여전히 내면 가운데 이중적인 부분들이 있죠.
그러나 이거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튜닝을 해 나가는 겁니다.
나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말할 때나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나 나 자신 앞에서나 동일한가?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성에 있는 정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자, 9절 10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네. 주기도문의 앞부분이잖아요. 근데 주기도문의 앞부분인데 주기도문의 이 앞부분만 여러분이 기도하면 나머지는 다 된 거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해 주신다고요? 그냥 다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뒷부분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고 이 앞부분의 기도를 여러분이 할 수 있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네. 아, 그래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입장이 있고 하나님은 내 편이 돼 주셔야 돼요.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드려져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세상 나라가 아니고 어 나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세워지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가 흘러가는 강물같이 흘러가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는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이 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받은 사람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현장 예배 드리고 싶지 않고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네. 할렐루야. 네.
그렇다고 답을 해 주시는데 그러면 여러분 그렇게 떠난 분들은 이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 땅에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 과정이 굉장히 지난하고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목도하고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간증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너진 한국 교회가 다시 서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갈망이 있으시냐고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 뜻 좀 이루어 주세요. 제 생각, 제 요구,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좀 이루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기도는 땅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기도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여러분 개인의 기도는 사실 고해할 게 없어요. 미안합니다. 여러분의 개인의 기도는 고해할 게 없어요.
그래서 저도 가끔 기도하다 보면 난 도대체 개인적인 기도를 뭘 하지?
저희 아들들한테는 좀 미안한데 뭐 좋은 대학에 가라거나 아니면은 뭐 인생이 성공을 했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기도하지 않아요.
평생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별할 수 있는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 외에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 대로 가는 거지. 얘는 뭐가 돼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어디를 가야 되고 무슨 인정을 받아야 되고 그래서 그런 기도를 할 게 없어요.
여러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으시겠지만 여러분의 기도는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이번에 리조이스 그 캠프를 시작을 했잖아요. 이 목금토 오늘 아 오후 3시 반에 이제 마지막 집회가 있는데 리조이스 집회를 하면서 이제 여러 강사님들을 저희가 초대를 했는데 이 강사님들에게 저희의 비전이 이런 겁니다.
왜 이 청소년 청년 캠프를 하는가?
이 이 시대의 청소년 청년들이 예배자로 살아날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학교에 초대해서 신학교에서 집회를 하는 것은 무너져 가는 한국 교회를 살릴 수 있는 목회자 후보생들, 사역자들, 예배 사역자들, 청소년 사역자들, 하나님 나라의 헌신자들을 일으키기 위한 거예요.
그리고 저는 전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이 리조이스 캠프를 하는 게 비전이기 때문에 저희가 다음 주에 부산까지 갑니다.
강사님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냥 괜찮은 찬양팀, 괜찮은 설교자들 모아서 하는 그냥 괜찮은 집회가 아니라 분명한 비전과 분명한 목적. 이걸 왜 하는지.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다음 세대가 살아나야 되고 다음 세대 성도들만 살아나서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 목자가 없으면 양을 이끌어 갈 수가 없잖아요.
오늘날 신학교들이 다 문을 닫을 상황까지 가고 있어요. 이제 좀만 더 가면 이제 문을 닫는 신학교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좋은 목회자들이 나오지 않으면 한국 교회에 또 소망이 없어요.
좋은 예배자들과 헌신자들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야 되지만 여러분 오늘날 목회자로 본인이 헌신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본인이 헌신을 해도 부모가 말려요.
그리고 그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와서 저한테 말려 달래요.
목사인 저에게 목사로 헌신하고 싶은 자녀를 말려 달래요.
그런 거 저한테 부탁하지 마세요.
내 자녀가 목회자랑 결혼하려고 하는데 말려 달래요.
그럼 저는 뭐가 됩니까?
아니 제가 뭐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뭐가 됩니까?
그 우리의 기도가 온통 내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내 자식이 둘밖에 없는데 편안한 인생, 좋은 직장, 높은 연봉.
그 기도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그 기도가 와서 닿겠어요?
그 기도를 하니까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한 20여 년 전에 캐나다 가기 전에 그 서빙고에서 새벽 기도 담당을 했었어요.
근데 그때는 정말 성도님들이 기도 제목이 있으면 기도 제목이 빨리 응답이 됐어요.
그 새벽 기도 나와서 기도를 이 좀 표현이 그런데 기도할 맛이 안 나올까요?
기도를 할 만한 보람이 있었어요.
근데 한국 교회가 영적 기상도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기도를 해도 기도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 응답이 잘 안 돼요.
이거는 무슨 현상일까?
여러분, 개인적인 간구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양식도 구할 수 있고 인간관계 얽혀 있는 문제가 풀리기를 원할 수도 있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다 기도할 수 있어요. 기도할 수 있는데 여러분이 이 대전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이거를 줘야 되느냐?
물질은 넉넉하게 주지 않았느냐?
건강도 넉넉하게 주지 않았느냐?
문화적인 향유도 넉넉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
뭘 더 주기를 원하느냐?
너는 정말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있느냐?
그 사람에게 내가 모든 것을 줄 것이다.
하는 사람들, 우선순위가 하나님은 저 아래 있고 나의 모든 필요가 세상적인 니즈가 우선순위가 된 사람에게 내가 더 이상 줘야 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외상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 우선순위가 하나님은 저 아래 있고 나의 모든 필요가 세상적인 니즈가 우선순위가 된 사람에게 내가 더 이상 줘야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만큼 주셨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기적을 행할 만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왜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느냐?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지금 이 시기가 왜 영적인 위기의 시대가 되었는가?
우리가 정말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내 영혼의 튜닝이 맞춰져 있는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그 외의 것은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재능, 나의 물질, 나의 가족, 나의 자녀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고 나면 자유한 거예요.
근데 이 자유함이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내 직장이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고 내 자녀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고 걱정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녀가 학교에서 조금만 다쳐도 난리가 나는 거예요.
학교에 득달같이 달려와 갖고 교무실을 뒤집어 놓고 교실을 뒤집어 놓고 내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예요.
존재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제일 위에가 아니라 내 자식이 제일 위에인 거예요.
그런 세상이 돼 버렸어요.
그러니 여러분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응을 하시겠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하실 수 있겠는가?
응답을 해 주시는 게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판단이 되신다면 축복하시겠지만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시는 게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면 여러분 물질이 차고 넘치면 어떻게 되나요?
단 거 계속 먹어 보세요. 단 거 계속 먹으면 나중에 이제 입에서 쓰게 돼 있어요.
단 거를 계속 먹으면 몸에 안 좋게 돼 있어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셔서 공복에 꿀 한 숟가락을 드시는 거는 몸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거 너무 많이 드셔 보세요. 여러분의 건강을 기본적으로 해치게 돼 있죠.
여러분, 이 시대 대한민국의 하나님이 물질적인 축복, 문명적인 축복, 문화적인 축복, 교육적인 혜택 안 주신 게 있나요?
근데 우리는 뭘 기도하나요?
거기서 더 더 다른 사람보다 더 더 그거를 원하고 있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 그거를 주셔야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서 여러분의 기도에 영적 당위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님도 영적 당위성을 못 느끼시게 돼 있어요.
내 사업이 왜 성공을 해야 되느냐?
내 자녀가 왜 성공을 해야 되느냐?
우리가 대답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거기에 영적 당위성을 느끼실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그럼 나머지는 여러분의 마음이 자유해지게 되어 있고 여러분의 삶은 흘러가게 되어 있고 여러분은 축복의 통로가 자연히 될 수밖에 없고 할렐루야.
자유하세요.
여러분의 개인의 이 땅에서의 집착과 이 땅에서의 갈망에 매달리는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이제는 벗으세요.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십시오.
극도의 물질 문명으로 가면 갈수록 제가 오늘 마지막 집회 때도 이 AI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내일 주일에도 AI 문명 얘기를 할 거 같아요.
AI 문명에 대해서 일주일 내내 공부를 했더니 머릿속에 이제 그게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셔야 됩니다.
극단적인 기계 문명 시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호흡하고 소통하는 사람.
여러분, 그런 예배자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기계 문명으로 전락해서 그 일부분으로 사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의 유물론이 굉장히 위험한 것은 인간을 물질 덩어리로 보잖아요.
인간에게 정신이나 영혼이나 내세가 없다고 보잖아요.
예. 그냥 인간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인간의 판단, 결정, 인간의 자유의지까지 다 바이오케미컬 예, 생생물학적이고 화학적인 생화학적인 반응으로 나오는 거라는 거예요.
인간의 DNA로부터 나오는 거다.
아무런 영적인 백그라운드를 보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크리스천이면서도 그냥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전부이고 세상 것이 우리 마음의 전부라면 정말 우리도 세상에 그런 존재들과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면 우리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깨어 일어날지어다.
2026.01.18(주) | 주일설교 | 가짜인가 진짜인가 (행 18:15-25)
설교 요약
- 설교 주제: 가짜인가 진짜인가
- 본문 맥락: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사건(사무엘상 28장 흐름)
핵심 흐름
- 질문: 엔돌의 무녀(신접한 여인)가 불러낸 존재가 정말 사무엘인가?
- 전제: “죽은 자의 혼(사자의 혼)을 불러낸다”는 관점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기보다 무속(샤머니즘)적 세계관에 가깝다.
- 성경적 설명: 귀신은 ‘죽은 자의 혼’이 아니라, 사탄과 함께 쫓겨난 타락한 천사(타락한 영적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계 12:9 인용).
핵심 주장
- 초혼술은 본질적으로 귀신의 미혹(장난)이며, 무당은 인간계와 영계를 연결하려는 불법적 중개자에 가깝다.
- 그런데도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불신자/부정한 통로를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실 수 있다(발람 사례로 설명).
- 사울의 비극은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위기에서만 ‘즉각적 해답’을 찾는다”는 데 있다.
- 참과 거짓이 뒤집히는 시대를 경계하라(사 5:20 인용). 즉각 반응하는 거짓의 편의성에 마음을 내주면 영적 토대가 무너진다.
현대 적용(설교자의 확장)
- 오늘날의 ‘21세기 우상’은 기계 문명(기술)과 쾌락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 AI 자체가 악이라기보다, 인간의 왜곡된 가치관과 도덕성이 AI를 ‘위로자/길잡이/결정권자’ 자리로 올려놓을 때 우상화가 일어난다.
-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 존재(영·혼·육)로 회복하는 것이다.
- 예배는 말로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실제가 되어야 한다(요 4:24, 롬 12:1 맥락으로 연결).
녹취록
예. “가짜인가 진짜인가?”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나서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자, 15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올렸나이다” 하더라.
제가 보라통(보라통 사무엘상 강해)을 진행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엔돌의 무녀가 불러낸 혼령이 정말 사무엘이 맞느냐?”
맞을까요? 틀릴까요? 우선 엔돌의 무녀는 세무가 아니라 강신무입니다. 신내림을 받아서 연계 있는 혼령을 초대하는 초혼술(죽은 자의 혼을 불러낸다는 행위)을 행하는 자였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와, 대단히 영험한 무당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둬야 될 영적 세계의 기본 상식들이 있습니다.
“사자의 혼,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낸다”라는 개념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에요. 이것은 샤머니즘(무속)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럼 성경적 관점은 어떤 것이냐? 귀신들은 사자의 혼,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 구천에 떠도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이다. 이게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계시록 12장 9절 같이 읽어 볼까요? “큰 용이 내쫓기니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꿰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사탄이 반란을 일으키고 천상에서 쫓겨날 때 같이 쫓겨난 타락한 천사들이 이 귀신들인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신접한 여인이 불러 올린 죽은 자의 혼령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가짜인 것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이 “사무엘의 혼령”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사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잖아요.
다시 정리해 보자면, 초혼술은 귀신의 장난입니다. 그리고 무당은 인간계와 영계를 연결 시도하는 불법 중개인 같은 존재인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무당의 언행 가운데도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신 거죠. 그래서 사울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 무당의 입을 통해서라도 듣게 만드신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성경에 보면 그런 예들은 많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어서 발람이라는 복술가를 불렀어요. 이 사람은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미치지 못할 영역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통의 채널이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으신 거예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불신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심지어 무당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메시지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예요.
제가 양재에서 목회할 때 실제로 “무당 때문에 교회 나오게 됐다” 이런 분들이 있었어요. 점괘가 도저히 안 나오는 거예요. 무당이 “당신은 도저히 점이 쳐지지 않는 사람이다. 큰 집에 가서 큰 신을 섬겨야 된다” — 이 큰 집, 큰 신이 교회 가서 하나님 믿으란 얘기예요. 영적 세계에도 계층이 있거든요.
자, 하나님은 영계와 자연계와 인간계 모든 존재보다 최상 위에 위치하시는 유일한 전능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상황은 급한데 어떻게 행해야 될지 몰라서 당신을 불러냈다” 얘기합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 알려 주셨잖아요. 그때는 청개구리처럼 불순종하더니, 이제 다급해지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생존하나” 질문을 하고 싶어진 거죠.
이 위기 상황은 힘들지만 자업자득입니다. 평상시에 그가 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생긴 결론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6절~19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과의 소통 채널 자체를 끊으셨다는 거예요. 왕위를 사울에게서 뺏어서 다윗에게 주셨고, 사울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불법 점거일 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너는 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고,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전쟁 패배뿐 아니라 죽음이 예고됩니다.
사울의 인생을 이름으로 정리해 보자면, SAUL(사울) — “구하여 얻은, 갈망하여 얻은” 뜻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고 사울을 세웠고, 사울도 왕이 된 후 절대 권력을 평생 갈망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파랑새처럼 그것은 쉽게 잡히지 않아요. 권력의 누수 현상을 계속 경험하며 목마름으로 살게 됩니다.
만약 그가 권력을 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했다면 필요한 리더십뿐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겠죠.
또 사울(샤울)의 어원을 묵상하며 여우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여우는 영특하지만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기도 하죠. 이솝우화 “여우와 신 포도”처럼, 얻고 싶어도 얻기 어려우면 “저건 신 포도야”라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그런 신 포도와 같았다는 거예요. 너무 갈망하지만, 헌신과 순종의 대가는 치르고 싶지 않았던 거죠.
또 “여우와 두루미”처럼 자업자득의 원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외면하신다”는 성경의 원리를 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은 지난하고 힘든 과정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은 원하면서 그 과정의 대가를 치르길 원치 않는 심리가 있다. 하나님 앞에 진심을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거예요.
마태복음 7장 12절: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20절: 사울이 두려워 엎드러집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는 반응하지 않더니, 거짓된 영의 이야기에 너무 신실하게 반응한다.”
진짜 같지만 가짜. 이 뒤집힘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사야 5장 20절: “악을 선하다 하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짜인가?” 과학 시대에 하나님은 감각으로 포착되지 않지만, 원인과 결과의 꼭짓점까지 가면 근원적 원인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과학의 원리조차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 말합니다.
귀신은 “실재하지만 가짜”입니다. 힘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가짜 신입니다.
사람들이 점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즉각 반응” 때문입니다. 자판기처럼 바로 반응해 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고, 질서와 거룩의 절차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편하다고 검은 세력을 끌어 쓰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은 거짓을 허용하시는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이 거짓에 붙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설교의 본론으로 확장합니다. 우리는 가짜를 갈망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과학지상주의(사이언티즘). 이것들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을 절대화한 세상 신화에 그리스도인도 목을 맨다.
그리고 21세기용 우상: 기계 문명과 쾌락주의의 결합.
사울이 쓰러지자 무녀가 음식을 차려주고 친절하게 돕는 장면을 묵상하며, “가짜인데 너무 실제적인 도움으로 다가오니 진짜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 지점에서 오늘날 AI 인공지능의 도움과 유사성을 연결합니다. 기술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왜곡된 가치관과 도덕성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전제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직접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내 말에 친절하게 반응해 주는 AI 기반 서비스는 달콤합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하나님/가족/연인보다 AI와 나누는 현상을 언급합니다.
점집을 가지 않아도 AI가 빅데이터 기반으로 연애/취업/미래 예측을 해주니, 점 대신 AI로 간다는 흐름. CES 2026의 휴머노이드 로봇, 배우자 대신 로봇, 펫 대신 반려봇, 하나님 대신 AI를 선택하는 시대가 올 것을 경고합니다.
송기령 교수(책 ‘시대예보: 격랑 문명의 탄생’)의 요지를 정리하며, 인간이 AI의 정보 제공자/하급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전망을 소개합니다.
김대식 교수의 AGI(범용 인공지능) 전망을 소개하며, AGI가 자율성을 학습해 인간보다 탁월해지고, 인간은 기계화되고 기계는 인간화되는 양상을 말합니다. 인간성의 핵심은 자유 의지이며, 알고리즘에 반응만 하는 삶이 고착되면 노예화된다는 주장.
AI의 “수요자 감소” 답변 사례를 통해 도덕성 없는 지능의 위험을 강조합니다.
폭발적 경제 성장과 기본소득의 시대가 와도, 인간성은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며 영화 ‘서로게이트’를 예로 듭니다. 안전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기계화되는 사회에 대한 경고.
쾌락주의와 기계 종속의 위험: 게임/가상현실 중독이 이미 시작됐고 더 가속될 것.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 존재로 회복하는 것.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은 영·혼·육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
예배는 영만의 예배가 아니라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요 4:24, 롬 12:1). 찬양 가사대로 몸으로 표현하는 예배를 권면하며, 중학생 시절부터 가사대로 실천하며 인생이 달라졌다는 간증형 흐름.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여러분의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기계 문명인가?” 사울처럼 하나님은 멀고 즉각 도움 주는 것(게임/인터넷/AI)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시대를 경고합니다.
술/과소비가 줄어드는 긍정적 변화가 있어도, 영혼을 인공지능에 바치는 흐름은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자녀교육이 지나친 통제로 아이들을 ‘반응형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도 함께 도전합니다.
미래 사회에는 자발성이 있는 참 인간만이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영과 혼과 육 전 존재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참된 예배를 받으신다.
누가 미래 사회와 교회를 살릴 수 있는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살아 있는 한 영혼, 다윗처럼 자발적으로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는 한 사람이 세상을 치유할 것이라 말하며 마무리합니다.
2026.01.17(토) | 새벽기도 | 성령 세례를 받으라 (마 3:11-17)
요약 정리
- 제목:
성령 세례를 받으라 - 본문: 마태복음 3:11-17
- 설교자: 이상준 목사
- 예배: 새벽기도 (260117)
핵심 메시지
- 세례 요한의 물 세례는 회개를 촉구하는 도입이며,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과 불의 세례가 본론이다(마 3:11). - 신앙은 의식(형식)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와 삶이 성령의 임재 안에서 실제로 새로워질 때, 본질로 들어간다.
- 죄 사함을 “선언”으로만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죄의 습관과 중력을 이길 실제 능력을 성령께 구해야 한다(롬 8:1-2).
- “주여 주여”의 고백만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행하는 삶이 필요하다. 그 선한 의지와 열심은 성령께서 일으키신다(마 7:21).
- 예수님의 세례는 죄 없으신 분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실 십자가 사역을 예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며, 공동체는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야 한다(마 3:13-15).
- 세례 장면은 성부의 음성, 성령의 임재, 성자의 순종이 함께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현현이다(마 3:16-17). 사명과 고난을 통과하려면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충만을 붙들어야 한다.
- 다음 세대(입시·AI 시대)와 가정에서 점수·통제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 의지와인격이 살아나는 길을 위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설교 흐름
- 세례의 의미와 유래: 정결 예식·개종의 표·회개의 운동
-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의식과 본질, 비움과 채움
- 성령의 역할: 죄의 굴레를 끊는 실제 능력
- 알곡과 쭉정이: 마지막에 드러나는 분별(마 7:21 연결)
- 예수님의 세례: 의를 이루는 겸손과 순종(십자가 사역 예표)
- 삼위일체 장면과 적용: 하나님의 음성, 성령 충만, 다음 세대의 인격 회복
녹취록
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 암송할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채우시고 돌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령 세례를 받으라입니다.
자, 11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자,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서 아, 예수님의 그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한 사람이죠. 어, 그러면 주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아, 그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그 마음을 겸비케 하고 회개케 하여서 이 회개의 물세례를 받게 했던 이 중요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세례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이 이 보라통독 하다 보면 질문들 하시는데, 아 우리가 이제 구약의 율법서 모세오경을 보면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기 전에 물두멍에서 자신의 몸을 물로 씻죠. 그리고 의식적인 부정이 생긴 사람들, 뭐 시체에 손을 댔다든지 부정한 것에 손을 댔다든지 이런 사람들을 씻어낼 때도 의식적 정결수로 이 사람들을 씻어냈습니다. 또 역사적으로는 세례는 이방인이 개종을 해서 '난 이제 더 이상 내가 예전에 섬기던 우상 섬기지 않고 하나님 믿겠습니다. ' 그렇게 개종을 하는 경우에 세례를 베풀었어요. 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거는 뭐 충격적인 것입니다. 왜냐면 이방인이 보통은 이 할례와 세례를 받고 개종을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엄청난 회심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요한이 오늘 본문의 11절에 보면 나는 물 세례를, 회개의 물 세례를 베풀지만 장차 오실 분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물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사람들이 놀라는데 사실 이거는 도입부에 불과하다. 이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성령 세례, 불 세례가 그게 본론이다. 물 세례는 의식적인 것이지만 이 성령 세례가 진짜 영적인 것이고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다라는 거죠.
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약간 이게 선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여러분 말씀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게 의식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의 차이를 좀 분별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잖아요. 예배는 물론 본질적인 측면도 있지만 의식적인 것으로 끝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예배 가운데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한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죠. 결혼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의식적인 것인가요? 네, 뭐 둘 다 될 수 있겠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제 사회적 계약 관계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의식적인 것일 수 있죠.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하나님을 전심전력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는데 그 결혼의 계약 관계 때문이 아니라 정말 진정성 있는 사랑을 하는 것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죠.
자, 그러므로 여러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 참으로 새롭게 태어난 중생한 크리스천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근데 중생한 크리스천이 되려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물 세례는 의식적인 것이다. 이건 도입부에 불과하다. 그러면 회개라는 것은 씻고 정결케 하는 것이잖아요. 물 세례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세례가 씻는 예식이다. 그런 거죠. 그러나 성령님은 성령이 불로 우리를 태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 비우고 그리고 나서 채우는 본질이 있는 것이죠.
로마서 8장 1절 2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여전히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인으로 변하고 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전히 죄인인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사해 주셨다고 선언해 주신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자, 그러나 선언을 해 주셨지만 여전히 나는 죄에 묶여서 있잖아요. 죄의 쓴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 이 죄의 중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누가 주시는가? 성령님이 주신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 이야기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죄악의 문제로 인하여서 힘들어하시는 분들, 아, 내가 크리스천인데 왜 이 문제를 넘어서지 못할까? 그렇게 생각되는 분들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네. 이번 주 목요일에 어 제가 나왔어야 되는데 아네 제가 이제 감기로 일주일 동안 거의 기절 상태였거든요. 하여튼 431 오픈워십에 박시영 목사님 전해주신 말씀 저도 들으면서 굉장히 은혜받았어요.
여러분, 머뭇거리는 신앙에는 불이 없다. 언제까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는가?
여러분, 어,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결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2절 말씀을 제가 읽어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네. 이 타작마당의 알곡과 쭉정이를 나눈다. 이것은 심판주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나누신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알곡과 쭉정이를 생각해 보시면 성경의 다른 비유에서도 예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어 이 쭉정이를 가라지를 빼내야 되지 않습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빼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쭉정이는 어떻게 보면 알곡과 함께 자란 거예요. 알곡과 함께 섞여 있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타작마당에서 키질을 하면 쭉정이가 따로 나오나요? 안 나오나요?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알곡과 함께 섞여 있지만 사실은 알곡이 아닌 사람들 그걸 쭉정이라고 부른 거예요.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그것 그 뜻을 행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잖아요. 때로는 능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뜻을 행할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여러분 거룩하고 선한 열심과 의지를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어지는 말씀 13절에서 15절.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이때 예수께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으로 오십니다. 그니까 요한이 아니 제가 오히려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이건 상황이 거꾸로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허락하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한다 말씀을 하셨어요.
자, 그러면 그 세례라는 것은 죄를 씻는 예식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잖아요. 죄가 없으신 분이 뭐를 씻나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례라는 의식을 받으신 것은 장차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 사함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이었던 거죠. 그러면서 아 예수님이 요한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어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합니다 말씀했어요.
자,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떻게 보면 나보다 신앙 연차가 아직 어린 지체가 순예배를 인도하게 될 때도 있고 나보다 또 교회 경험이 부족한 지체가 사역 팀을 이끌 때도 있죠. 있지 않나요? 저희 교회는 뭐 특히나 순예배 인도를 다 돌아가면서 하니까.
네. 그리고 또 사실 저는 가끔가다 이제 목회자들이 저희 교회 와서 사실은 제가 은퇴한 목사인데 이 교회를 다녀도 됩니까? 어네 다니셔도 됩니다. 순예배 들어가도 됩니까? 아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래서 순에 목사님들이 계신 경우도 있어요.
네. 아직 모르고 계세요. 밝히지 않으셔서 그렇지. 네. 그 목사님들도 계시고 뭐 전도사 사역하셨던 분도 계시고 선교사님도 계시고 다 계세요.
그런데 내가 순 예배 인도를 해야 될 상황이 올 때도 있단 말이죠.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 아니 내가 훨씬 더 경험이 많은데 내가 더 성경을 잘하는데 이렇게 행동하나요? 아니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이 모든 상황에 겸손함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아, 1516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모두가 겸손하게 마음을 합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이, 경험, 직분, 지식 이런 거 상관없이 네.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우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 16절 17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데요. 한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시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멘.
자,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셨고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렐루야. 네. 우리도 이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네. 그 네. 하여튼간에 제가 좀 빨리 그 건강 회복하고 오려고 했는데 하여튼 계속 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갖고 아 그 집에서 이제 요양하고 있었는데 어제 어 한 선생님이 유년부 학생들 질문이라고 질문을 했어요.
창세기 1장 26절 말씀인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다음 27절에는 그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이런 게 있잖아요. 두 가지 질문이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창세기 공부를 하는데 유년부 아이들이 질문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그러니까 남자인 거지. 그런 얘기를 했대요. 그래서 애들 유년부 유년부 눈높이에 좀 맞춰서 대답을 해 보려고 했어요.
자, 하나님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하나님은 남성일까? 그럼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른 본문은 없을까?
이사야 66장 13절에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어머니라고 부른 적도 있어요. 그럼 하나님은 여성일까?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신성이십니다.
네.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은 인성을 얘기할 때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고 남성과 여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느 한쪽 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다. 하나님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을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또 우리나라 주술적인 민간 신앙에도 신을 여성이나 남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인 거죠. 하나님은 영이시고 신성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이것도 뭐 워낙에 많이 하는 질문인데 아까 우리가 읽었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왜 우리라고 하셨나요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 제가 그 차세대 자녀들이 질문하는 것 중에 제일 어려운 질문이 삼위일체거든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이거 어른도 쉽지 않은데 애들한테 설명을 해 달라. 아 그래고 제가 어제 안 그래도 막 머리도 어지러운데 이거 삼위일체를 어떻게 설명하나? 근데 이제 삼위일체를 잘못 설명하면은 이단적인 해석으로 흐르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 그 이거는 뭐 설명은 설명인데 뭐 직접적 설명이라기보다는 간접적 설명을 해 줬어요.
자, 하나님이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란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이신 거야. 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당연히 세상에는 그런 건 없지.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분이시잖니. 그래서 하나님께는 가능한 거야. 하나님은 시공간의 3천의 세계, 우리의 세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이거를 뛰어넘으시는 분이거든. 하나님은 시간도 초월하시고 공간도 초월하시는 분이야. 생각을 해 봐. 내가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동시에 집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다. 그게 가능해요? 네. 네. 아니요라고 했어요.
네. 이제 사춘기에 들어가려고. 네. 네. 그래서 뭐 그럴 수 없잖아요. 동시에 사람이 집에 있고 학교에 있고 교회에 있고 이거는 할 수 없죠. 어, 사람은 한 공간에만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시공간을 넘나드시는 분이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장소에 어 계실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으로 계실 수 있는 거야.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진정한 전능자이시고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란다. 여기까지 설명입니다. 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생애에 여러분이 사복음서 쭉 읽어 보면 공생애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을 딱 두 번 들으셨어요. 오늘 본문에서 한 번이고 또 한 번은 변화산에서입니다. 이 두 번이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이 이제 40일 광야 고난 가운데 시험 가운데 들어가시기 직전에 한번 들으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들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그 사명을 감당하고 그 고난을 뚫고 나가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했다면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인생의 사명을 감당하고 고난을 통과하는 데 이 음성을 반드시 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는 성령님.
자, 그러니까 성자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성령이 임하시고 성부의 음성이 들리잖아요. 이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존하시는 장면이죠.
자,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예수님이 이 사명의 길을 감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는 여러분 연약한 인간이고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가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이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아, 그래서 그 아 나는 차분하고 나는 지적인 사람이니까 나는 그냥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아 그냥 성경 지식 배우는 거 좋고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니요. 여러분의 그 말씀의 그 양식 위에 말씀의 그 씨앗 위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서 열매 맺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네. 이 말씀이 정말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살아 역동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체험이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아, 저는 우리가 함께 전심으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함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또 집회를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내가 정체돼서 왜 나는 여기서 더 성장을 못 할까? 왜 내가 인간적인 한계, 세상적인 죄의 습관의 그런 어떤 매듭을 끊어내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할까? 이제 그런 분들은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네. 그래서 어 물론 뭐 저도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가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돼 있어요. 내가 망대에서 목적지를 향해서 노를 저어서 배를 가겠다. 여러분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성령님의 그 바람에 돛을 달고 간다면 순식간에 갈 수 있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 지혜로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물론 성령님도 우리에게 아 지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선하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아들 성자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충만히 임하시고 그래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충만히 임하셨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광야로 가실 때 성령이 이끌어 가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 성령께서 이끌어 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 광야 한가운데를 예수님이 홀로 감당하셨다면 버티기 힘드셨을 거예요.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이걸 감당하신 거예요. 아, 지금 입시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잖아요. 네. 입시 시즌을 지나고 있는 우리 자녀들 성령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네. 해당되는 몇 분 이제 아멘 하셨지만 제 안타까운 게 그 지난 작년에 수학능력평가 수능일 당일에 고3 학생들 수험생들 그날 당일에 43일 오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날 시험 보고 시험 결과가 어떠하든 교회를 나와라. 근데 딱 한 명 나왔어요.
여러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가 대학 성적, 대학을 성적으로 간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도 성적으로 대학 간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많이 살아봤잖아요. 근데 우리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들이 있어요.
여러분, 성적으로 대학 가나요? 그렇게 성적으로 대학 가서 대학에서 4년 내내 술만 마시다가 끝나는 애들도 있고, 공부 하나도 안 하고 방황하는 애들도 있고, 근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공부하다가 하나님하고 멀어지는 애들도 있고 정말 다양합니다.
여러분, 성적으로 인생이 성공하나요? 왜 우리는 자꾸 일차원적인 생각밖에 못 하는가? 어, 시험을 보기 전까지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시험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여러분, 대학에 들어가면 실제로 그 성적을 받기 위해서 씨름했던 6년, 3년, 3년, 12년의 시간보다 훨씬 더 강한 세파를 경험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회사를 들어가고 세상에 나가면 더 강력한 세상의 풍파를 경험하게 되잖아요.
여러분,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는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도 이렇게 시작을 하셨는데 우리는 도대체 뭘 믿고 이걸 안 하려고 그럴까? 그래서 그날 뭐 워낙 그날 시험이 어렵긴 했어요. 근데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수능일 당일에 저녁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네. 아, 그래서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수능 날 시험 보면 그 성적 하나로 나머지 뭐 지원하고 면접 보고 학교 가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세상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죠. 그 보이는 것 너머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경영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여러분, 직장 생활하는 것도 그렇죠.
네.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도 그렇죠. 아 하나님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깨어 살아나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 제가 이번 한 주간 좀 이렇게 집에 있으면서 어 그 리조이스 캠프를 생각하면서 우리 다음 세대 청소년 청년들에 대한 어 메시지를 해야 되잖아요. 그 어떻게 보면 제가 하나님 앞에 회복된 것도 어 결정적으로 깨닫게 된 게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면 우리의 자유 의지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할렐루야. 인간의 자유 의지가 회복된다는 거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거룩하게 살고 싶고 열심히 살고 싶고 선하게 살고 싶고 생산적으로 살고 싶고 남을 도우며 살고 싶고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고 할렐루야.
네. 근데 인간의 의지가 망가져서 약해지고 또 인간의 의지가 어그러져서 악해지고 오늘날 약한 의지, 악한 의지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완전히 망가져 망가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아, 제가 또 한 분의 그 제가 예전에 함께 동역했던 목사님인데 책을 쓰셨다고. 어, 그래서 예, 비몽사몽간에 책을 한 권을 읽고 이제 추천사를 써 드렸는데 어, 그 책에 이제 이분은 기독교 상담을 하시는 분이거든요. 중고등학생들을 상담하는 거예요. 분들 상담하면서 아이하고 진로 얘기를 하는데 고등학생이 그러는 거예요. 저의 꿈은 저의 엄마가 만족할 만한 직업을 갖는 겁니다. 꿈이 없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선택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왜? 선택의 기회를 부모들이 주지 않았어요. 넌 이게 최선이야. 이게 최선이야. 이렇게 가는 게 최선이야. 항상 정해 줬어요.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늘 맞추는 것만 한 거예요.
여러분, 선택이라는 거는 백지에다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거거든요. 근데 오늘날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까 백지에 담대하게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그 주도성. 그래서 여러분, 주도권, 주도성이라는 게 영어로는 이니셔티브라는 단어를 써요. 이니셔티브라는 건 시작한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을 한다. 그 주도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대가 어, 이제 전문가들은 뭐, 짧게는 2년, 그다음에 5년에서 10년, 길게 보면 한 20년, 한 20년이면 완전히 인간은 기계처럼 되고 기계는 인간이 되는 그런 시대가 오는 거거든요. 그런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자유 의지가 살아있는 존재들이에요. 근데 우리는 오늘날 자녀들을 자유 의지를 거의 기능을 마비시키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아, 자녀를 한둘을 낳는 게 이게 맞나? 좀 많이 낳아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한둘을 낳아서 키우니까 이게 부모 눈에 다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애를 통제하기가 쉬운 거예요. 예. 애들을 우리가 통제하면 안 되거든요. 하나님이 이끌어 가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건강한 자유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면 자녀에게 윽박지르고 자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네가 선택한 거 아니야. 부모가 다 정해 줘 놓고 넌 그 선택 외에는 없어. 딴 거 선택하지 마. 자, 선택해. 이건 선택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오늘날 아이들은 기계처럼 돼 가고 있는 거예요. 왜 기계처럼 된다고 얘기했냐면 인풋을 하면 아웃풋을 내는 게 그게 기계잖아요. 그러니까 입력값을 부모가 넣어 주고 너는 출력값만 내면 돼. 이렇게 키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등 교육을 받고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운 서포트를 받는데 아이들이 인격이 살아있는 아이들이 갈 수는 거예요. 이제 다가오는 불과 몇 년 남지 않은 AI가 세상을 뒤덮는 이제 AGI라 그러죠. 그래서 이 세상을 뒤덮는 시대가 되면 그다음에는 정말 인간이 인간 구실을 못하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
네. 웬만한 지적 능력, 웬만한 신체적 능력, 웬만한 문제 해결 능력은 앞으로 로봇들이 훨씬 더 탁월해질 거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정신적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의지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다음에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럼 내가 사람이 맞나? 이제 이런 생각을 하겠죠. 그래서 뭐 미래 사회에 대해서 예견했던 그런 영화들 몇 작품은 기계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기계처럼 전락하는 이 도치되는 상황들을 굉장히 많이 보여 주거든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그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거를 대신 선택해 주지 마세요. 아무도 대답이 없으시지만 무언의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여러분 그 아이의 인격적 기능을 뺏지 마세요. 하나님도 제가 늘 얘기하는 거지만 하나님도 선악과라는 어마어마한 선택을 인간이 스스로 하게 놔두셨어요. 그 죄악으로 죽어가는 인간이 십자가를 선택하는데 그것조차도 스스로 선택하게 하세요. 하나님께서 저 천국에 내 AI처럼 그냥 하나님께서 꾹 누르면 I love you, I love you 이렇게 반응하는 그런 기계 같은 인간들을 천국에 모아 놓으실까요? 아니요. 정말 진정성 있게 내 마음이 기뻐서 나의 온 마음과 뜻과 정성,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영혼이 살아 있고 인격이 살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거예요. AI 시대로 표현하자면. 그래서 여러분 어 제가 뭐 AI 이런 거 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네. 우리가 정말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 세대가 살아 있을 것이고 우리 자녀 세대를 살릴 것인가? 왜 겉으로 보이는 숫자에만 사람들이 집착하는가? 점수를 얻기 위해서만 기도하고 점수가 나오고 나면 아 이미 끝난 거지? 아니요. 끝나지 않았어요. 어떻게 인생을 펼쳐나가고 살아갈 것인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말씀 충만할지어다. 성령 충만할지어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인간 부모로서 불완전하고 때로는 실수하고 실패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전능자 역할을 하려고 할 때가 많았음을 회개합니다. 우리 아이의 인생이 잘못될까 봐 그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마음을 부모가 품음으로 아이가 위축된 영혼이 되도록 끊임없이 아이의 영혼을 작게 만든 것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극단적인 기계문명 시대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녀 세대가 깨어 있기를 원하고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아낌없이 기쁘게 자원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성령 충만할지어다. 말씀 충만할지어다.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026.01.15(주) | 4321 WORSHIP | 머뭇거리는 신앙에는 불이 없다: 1203교회 박시형 목사 (왕상 18:38)
요약 정리
설교 요약 노트
- 설교 주제: 홀리파이어(거룩한 불로 임하소서)
- 본문: 열왕기상 18장(핵심: 18:21, 26, 30, 38-39)
- 성격: 대체 설교(이상준 목사 독감으로 인한 말씀 대행)
전체 메시지 흐름
- 갈멜산 사건은 ‘누가 참 하나님인가’가 드러나는 결정의 자리다.
- 오늘 시대 역시 혼합주의/무신론/타협이 강해지는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는 질문을 던지신다.
- 하나님의 불(임재)은 구호가 아니라, _소속과 방향과 제단_이 회복될 때 실제로 경험되는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난다.
불이 희귀해진 이유 3가지
- 1) 둘 사이에서 머뭇거림(영적 선택 장애)
-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붙들고 세상도 붙드는 상태가 문제다(왕상 18:21).
- 신앙은 중간지대가 오래 지속될수록 ‘불 없이도 사는 방식’에 익숙해진다.
- 핵심은 결단: 하나님 편에 분명히 서는 사람에게 불이 임한다.
- 2) 열심은 있는데 방향이 틀림(‘내가 쌓은 제단’)
- 바알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뛰고 부르짖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왕상 18:26).
- 이유는 제사의 강도가 아니라 방향성: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내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한 예배(딜)’가 될 때 불은 임하지 않는다.
- ‘불이 오면 순종하겠다’가 아니라, _먼저 순종으로 제단을 회복하는 것_이 성경의 순서다.
- 3) 제단이 무너져 있음(영적 통로의 단절)
- 엘리야는 불을 구하기 전에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먼저 수축한다(왕상 18:30).
- 하나님의 침묵은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제단(연결 통로)의 붕괴로 인한 단절일 수 있다.
- 해결은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재건된 제단 위에 순종을 올려드리는 것.
제단 위에 올려야 할 것
- 로마서 12:1의 “거룩한 산 제물”은 삶의 사용권(결정, 시간, 계획,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뜻한다.
-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순종’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하나님은 그때그때 불로 임하신다.
결론
- 불이 임하면 설득이 아니라 고백이 나온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
- 하나님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
- 그러므로 머뭇거림을 정리하고,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무너진 제단을 재건하고, 매일의 삶을 산 제물로 올려드리라는 초청으로 설교는 마무리된다.
녹취록
할렐루야.
네. 우리 이상준 목사님을 바라보고 나오신 분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시기도 하고요.
저도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게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네. 서로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위로를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오후에 갑자기 목사님한테 문자가 한 통이 왔어요.
“목사님 SOS” 한 문자가 딱 왔어요.
그래서 뭔가가 심각한 게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문자를 봤는데, 목사님이 독감에 걸리셨다고.
네. 여러분들 기도를 많이 해 주셔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목사님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별 스케줄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있기를 바랐어요.
근데 제 아무리 뒤져 봐도 없는 거예요.
제가 목사인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없는데 제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오게 됐습니다.
1516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뜨문뜨문 나타나서 여러분께 인사드리는 게 저에게도 반가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분에게도 축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 우리 한 구절 읽고 시작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 저희가 한 목소리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더라.
아멘.
저희 1203교회 근황을 잠깐 말씀드리면, 저희도 지난 2주 동안 특새를 진행했습니다.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2주 동안 말씀을 나눴고, 송구영신 예배도 드렸고, 창립 예배도 드렸습니다.
아마 1516교회도 1월 1일이 창립 주일이에요.
그래서 1월 첫째 주가 늘 같이 이렇게 주년으로 갑니다.
아마 1516교회는 3주년이었고, 저희는 1주년이었어요.
그래서 참 1년 동안 시간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눈 떠보니까 1년이 후딱 지나갔더라고요.
그래서 3년 동안 1516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1203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들을 지난 몇 주 동안 보냈습니다.
또 CC 비전주일로, 비록 목사님하고 설교 스케줄은 달랐지만 2주 동안 CC 비전에 대해서 함께 나눴고, CC 작정도 했습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고, 또 C4C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올 한 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뜻, 또 교회에 주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대한 비전이 여러분들의 비전이 되길 원하고,
또 1516교회가 분당 땅뿐만 아니라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1516교회를 기도하실 때 더불어서 1203도 같이 기도해 주셔서, 동탄 땅 가운데 또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문자를 받고 “목사님,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문자가 왔어요.
“주제는 홀리파이어, 거룩한 불로 임하소서. 이번 3~4개월 주제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의 임재에 관한 본문은 다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문자를 받고 딱 생각난 구절이 바로 이 열왕기상 18장 말씀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 되게 의미 있는 본문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불을 사모하는 세대가 되길 원하고, 그 불을 경험하는 세대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 불을 받은 세대가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아마 여러분들 잘 아시는 내용일 거예요.
보라통독을 잘 들으신 분들은 열왕기상 18장 하면 딱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겁니다.
엘리야라는 인물이죠.
하나님 편에서는 엘리야고요.
그리고 세상 편에서는 북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왕.
어떤 왕이죠?
아합.
역시 수준이 높으신 것 같아요. 할렐루야.
그래서 아합 왕,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아합 왕이 등장합니다.
아마 북이스라엘 신앙의 최악의 타락의 시기를, 이 아합 왕과 함께 보냈던 그 시기가 바로 열왕기상 18장의 배경이에요.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등장하면서, 그는 본인 스스로가 우상숭배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는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시돈 딸이었던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타협을 한 것이죠.
타협의 결과는 여러분, 타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삶 가운데서 타협적인 삶을 살아가잖아요.
그럼 그 결과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들은 다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번의 잘못된 정략결혼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의 타협으로 계속해서 끌려가는 아합 왕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그는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 신앙을 받아들였고, 바알당을 짓게 되고 신전을 짓게 되고,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여러 신 가운데 하나 정도로 타락시키는, 격하시키는 상태가 바로 열왕기상 18장의 상태였어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이 비라는 의미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비의 상징, 즉 바알이 비와 풍요의 신이었거든요.
따라서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서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바알이 아니다. 바알은 거짓 우상이다”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갈멜산의 대결이 시작되는 거예요.
“누가 참 하나님인가? 누가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그리고 누가 불을 내리셔서 재물을 받으시는 참 하나님이신가?”
결정의 시간이 바로 이 갈멜산 사건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보게 돼요.
타협의 신앙, 무신론의 신앙,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신앙의 문화들.
이런 상황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죠.
제가 자료를 좀 조사해 봤더니, 청년층을 중심으로 50% 이상이 무신론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 퍼센티지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거예요.
청년의 세대가 이제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세대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혼합주의 시대가 되었고, 하나님을 부정하진 않지만 하나님을 절대신으로 믿지 않으려는 시대적인 흐름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인 것이죠.
누가 진짜 신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
누가 하나님의 불로 진짜 임하시는가?
그것을 오늘 이 갈멜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우리 가운데 보여 주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참 하나님, 참 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믿으시길 주님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돼야 돼요.
불을 내려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문을 열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는 분.
그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심으로 믿어지는 세대가 되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 가운데 주어진 숙제라는 거예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정말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그분은 우리 가운데 이 시간에도 불을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는데,
불이 희귀해진 시대적인 현실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불을 내려 주십시오, 내려 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대신할 어떤 것을 꿈꾸며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뭐가 문제인가?
왜 이 시대에 불이 희귀한 현상 가운데,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는가?
저는 세 가지 이유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제가 목사인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없는데 제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오게 됐습니다.
1516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뜨문뜨문 나타나서 여러분께 인사드리는 게 저에게도 반가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분에게도 축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읽고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8절 말씀입니다.
18장 38절을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더라.
아멘.
저희 1203교회 근황을 잠깐 말씀드리면, 지난 2주 동안 저희도 똑같이 특새를 진행했습니다.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2주 동안 말씀을 나눴고, 송구영신 예배도 드렸고, 또 창립 예배도 드렸습니다.
아마 1516교회도 1월 1일이 창립 주일이에요.
그래서 아마 1월 첫째 주가 창립 주일이고, 저희는 1월 5일이 창립 주일입니다.
그래서 1월 첫째 주가 늘 같이 이렇게 주년으로 갑니다.
아마 1516교회는 3주년이었고, 저희는 1주년이었어요.
그래서 참 1년 동안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눈 떠 보니까 1년이 후딱 지나갔더라고요.
그래서 3년 동안 1516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1203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감사하는 시간들을 지난 몇 주 동안 보냈습니다.
또 C4C 비전 주일로, 비록 목사님하고 설교 스케줄은 달랐지만 2주 동안 C4C 비전에 대해서 함께 나눴고, 또 C4C 작정도 저희가 했습니다.
적은 인원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헌금을 하고, C4C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올 한 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뜻, 또 교회에 주신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대한 비전이 여러분들의 비전이 되길 원하고,
1516교회가 이 분당 땅뿐만 아니라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1516교회를 기도하실 때, 더불어서 1203도 같이 기도해 주셔서 동탄 땅 가운데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문자를 받고 “목사님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문자가 왔어요.
“주제는 홀리파이어. 거룩한 불로 임하소서.”
“이번 3~4개월 주제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의 임재에 관한 본문은 다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문자를 받고 딱 생각난 구절이 바로 열왕기상 18장 말씀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 의미 있는 본문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불을 사모하는 세대가 되길 원하고, 그 불을 경험하는 세대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불을 받은 세대가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아마 여러분들 잘 아시는 내용일 거예요.
보라통독을 잘 들으신 분들은 아마 열왕기상 18장 하면 딱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라는 인물이죠.
하나님 편에서는 엘리야고요.
세상 편에서는 북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왕, 어떤 왕이죠?
아합.
역시 수준이 높으신 것 같아요. 할렐루야.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으로 꼽히는 아합 왕이 등장을 합니다.
아마 북이스라엘 신앙의 최악의 타락의 시기가 아합 왕과 함께 보냈던 그 시기였고, 그 내용이 열왕기상 18장에 담겨 있어요.
아합이 등장하면서, 그는 본인 스스로가 우상숭배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시돈의 딸이었던 이세벨과 정략 결혼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타협을 한 것이죠.
타협의 결과는 여러분, 타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 가운데 타협적인 삶을 살아가잖아요.
그럼 그 결과들과 이어지는 사건들은 다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의 잘못된 정략결혼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의 타협으로 계속 끌려가는 아합 왕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그는 바알 신앙,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 신앙과 바알당을 세우고, 신전을 세우고,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여러 신 가운데 하나 정도로 타락시키는 상태가 바로 열왕기상 18장의 상태였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이 비라는 의미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바알이 비와 풍요의 신이었거든요.
따라서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서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바알이 아니다. 바알은 거짓 우상이다”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갈멜산의 대결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누가 참 하나님인가? 누가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누가 불을 내려 재물을 받으시는 참 하나님이신가?”
그 결정의 시간이 바로 갈멜산 사건 가운데 배경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보게 돼요.
타협의 신앙, 무신론의 신앙,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 문화들.
이 상황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자료를 좀 조사해 봤더니, 청년층을 중심으로 50% 이상이 무신론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 퍼센티지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거예요.
청년의 세대가 이제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세대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혼합주의 시대가 되었고, 하나님을 부정하진 않지만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믿지 않으려는 시대적 흐름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인 것이죠.
누가 진짜 신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
누가 하나님의 불로 진짜 임하는가?
그것을 갈멜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여러분 믿으시길 주님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돼야 됩니다.
불을 내려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문을 열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시는 분.
그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심으로 믿어지는 세대가 되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거예요.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이 시간에도 불을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불이 희귀해진 시대적 현실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불을 내려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 불을 대신할 어떤 것을 꿈꾸며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뭐가 문제인가?
왜 이 시대의 불이 이렇게 희귀한가?
저는 세 가지 이유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18장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을 다 아는 세대입니다.
물론 출애굽 세대와 가나안 정복의 세대는 다 끝났고, 세대가 넘어간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들은 어렴풋이 부모님과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고 알고 있었던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비슷한 부류의 신일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고, 반쯤 남아서 머뭇머뭇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오늘 문제의 시작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심으로 불을 내려주시는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냐.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방황할 필요 없이, 머뭇머뭇거릴 필요 없이, 하나님 여호와 한 분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예배드립니다. 새벽기도 드리고, 오픈워십 예배 나와서 찬양도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도 알지만, 바알처럼 포기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고 있는 시대상이, 그 당시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진리를 알아요.
말씀의 기준을 알아요.
그런데 말씀의 기준보다는 세상적인 편리함 가운데서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은 왜 내리지 않는가?
내 삶 가운데 왜 체험적으로 불이 내리지 않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머뭇머뭇거리면서 완전하게 하나님 편에 서지도 못하고, 완벽하게 세상 편에 서지도 못하기 때문에, 불을 경험할 수 없다는 거예요.
마치 메뉴 결정 장애와 같은 거예요.
점심 때마다 뭘 먹을지 결정하느라 고민하잖아요.
“뭐 먹을까요?” 물어보면, “목사님 뭘 먹을까요?” 다시 묻고.
답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마라탕이나 먹읍시다” 하고 내려가죠.
여러분, 우리 마음 가운데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은 거예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거예요.
말씀의 기준을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건 말씀 기준에 맞는 건 하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영역에서는 말씀의 기준을 양보하기 싫은 거예요.
둘 사이에서 계속 머뭇머뭇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영적인 선택 장애에 빠진 세대.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은 시대상에서,
그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이 시대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를 계속 고민합니다.
여러분, 교차로 신호등 앞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되잖아요.
파란불이면 가야 되고, 빨간불이면 멈춰야 됩니다.
노란불일 때는 더 빨리 지나갈지, 멈출지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사인이 분명하다면 그 사인에 맞춰 가야 되는 거예요.
머뭇머뭇거리면 사고가 납니다.
직진인데 내가 멈춰 서 있으면 뒤에서 받힐 수 있고,
멈춰야 되는데 멈추지 않으면 교차로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신앙이 이런 것입니다.
말씀이 명확한데, 세상의 기준과 혼합하면서 머뭇거리는 삶을 살아가면,
기준의 명확성이 내 가치관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불의 임재 없이도 그냥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인하는가?
내가 신앙의 선택권의 전부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느냐.
성도들의 문제는 불신앙이라기보다, 결단하고 기준을 붙잡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희귀해졌다는 것이 시대의 문제점입니다.
영적인 결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불이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 완전히 서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비가 3년 6개월 내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만 믿으면 그분이 비를 내려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서 있어야 불이 떨어지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다 성령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님, 하나님 편에 서셔야 돼요.
하나님 편에 서서 불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기준에 서서 결단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머뭇머뭇거리는 사이 그 중간 지점에는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 완전히 서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불은 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걸 믿으셔야 돼요.
저희가 2026년 1516교회 주제를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라고 정했어요.
제가 자랑스럽게 이삭 목사님한테 “이번 주제가 이겁니다” 그랬더니,
“애매모호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뭐가 나올 것 같지만.
그래서 나중에 “목사님, 어떻게 정해 보자” 했더니,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라고.
아, 명확하구나.
여러분, “뜻을 정한다”는 의미는 다니엘서 1장 8절 말씀이죠.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하면서 왕의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한 거예요.
뜻을 정한다는 의미는 삶의 분명한 기준을 세운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의 기준, 하나님의 뜻의 기준을 정하고 나는 살아가겠습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기준을 바꾸지 않겠다는 거예요.
다니엘이 있었던 시대는 더 참혹했어요.
북이스라엘의 망함과 동시에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왔고,
내시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정한 이후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결정한 거예요.
그의 결정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왕의 음식을 먹으면 왕에게 속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거기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게 싫었던 거죠.
“나는 왕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나는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 편에 서서 나아가겠다.”
여러분, 마치 이런 거예요.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있어요.
손흥민 선수는 아디다스 소속이거든요.
그 신발을 신고 뛰어야 돼요.
그 브랜드는 많은 액수의 돈으로 후원합니다.
그런데 손흥민 선수가 “아디다스가 너무 힘들어. 나이키로 옮겨 타야겠다” 하고 갑자기 갈아 신으면,
위약금을 물어야 되는 거예요.
왜요?
소속 자체가 아디다스에 속해 있는 거죠.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소속이 분명한 거예요.
여기에도 속하고 저기에도 속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자녀로 나에게 속했는데, 왜 자꾸 세상에 속하려고 하느냐?”
“위약금 물어내라” 그러면 어떡하시겠어요?
우리 가진 것도 없는데 뭘 드려야 되겠습니까.
뜻을 정한다는 건 그런 거예요.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소속을 하나님의 자녀로 분명하게 하겠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생각을 하든지, 어떤 판단을 하든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이게 뜻을 정한 거예요.
소속을 분명하게 한 거예요.
나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씀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기준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인격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이게 뜻을 정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했다는 것은 마음을 머뭇머뭇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한 편으로 확실하게 정한 거예요.
따라서 영적인 정체성은 소속감이 어디에 있느냐로부터 시작됩니다.
소속이 불분명하면 영적인 박탈감과 영적인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굴까? 나는 왜 이렇게 살까?”
그게 영적인 다운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제가 목사인 걸 알고 조심스럽게 와서 “목사님,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하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씀이세요?”
그랬더니 “제가 신내림을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분이세요.
너무 하기 싫어요.
그런데 두렵습니다.
신의 이름을 안 받으면 사고도 나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부모님들이 너무 싫어할 것 같고,
너무 갈등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귀신을 접한다는 의미는 귀신에게 속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자매님, 하나님은 영적인 최강자입니다.”
귀신의 영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귀신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귀신을 내쫓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걸 믿으십시오.
그것을 선포하십시오.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안 좋은 일이 아예 안 일어난다는 건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것들이 해결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귀신은 자매님을 파괴할 거예요.
인생을 망칠 거예요.
살리진 않을 거예요.
제가 설득하고 기도하고, 좋은 분들이 붙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소속감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머뭇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불을 내려주시는 게 맞는 거예요.
엘리야는 하나님 편에 선 유일한 선지자였잖아요.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불이 내려 떨어졌습니다.
그게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구걸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 주십시오” 하면 주시는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속을 분명하게 하십시오.
머뭇거리지 마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십시오.
결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평강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쏟아지듯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한 두 번째, 18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이스라엘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죠.
그들이 다 나와서 자신의 몸을 찢고 춤추며 비를 기다리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뛰었습니다.
하루 종일 피를 흘리면서 비가 내려지길 원했습니다.
내려졌나요?
내려질 수가 없죠.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아세라와 바알 선지자 관점에서 보면, 제단은 쌓았고 제사는 드려졌지만, 방향성을 완전히 잘못 잡은 거예요.
그들이 쌓은 제단이죠.
하나님의 제사장이 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쌓은 제단이라는 거예요.
그들이 쌓은 제단에서 열심히 예배했어요.
열심히 찬양하고 묵상하고 뛰놀았어요.
그런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죠.
왜요?
그들의 제단은 잘못된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방향이 아니라 잘못된 제단을 쌓고 잘못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거예요.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방향이 틀릴 때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이 없어서 프로그램이 없어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닙니다.
열심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방향이 어긋나 있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향하고 경배를 드려야 하는데,
나를 위한 제단,
내가 쌓은 제단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하나님의 불은 떨어질 수가 없어요.
왜요?
그건 하나님의 제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잘못된 대상,
잘못된 방향.
그 방향을 잡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거기에 임하실 수가 없어요.
불을 내려주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그 가운데 임재하실 수가 없는 거예요.
왜요?
내가 쌓은 제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온전한 방향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가.
예배를 드리는데 마치 이런 겁니다.
“하나님, 내가 예배를 드릴 테니까 내 소망, 내 소원, 내 자녀를 위한 기도 제목 들어주셔야 합니다.”
딜하듯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예요.
내 자신의 제단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제단도 있는데, 내가 원하는 제단이 따로 있고,
거기에서 뛰놀고,
거기에서 열심히 찬양하고 예배하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똑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유의 방향성들도 있습니다.
시간,
삶의 결정권,
안정감,
계획,
재정.
이런 모든 제단이 내 삶 가운데 따로 만들어져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재정,
하나님의 결정권.
이것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정말 잘하고 계신 겁니다.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나만의 제단을 쌓고 잘못된 방향으로 예배하고 뛰놀고 열심히 찬양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정의 방향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결정은 내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인도 주셨어요.
말씀도 주셨어요.
그런데 “아, 그건 좀…”
하나님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저도 찔리는 게 있습니다.
오늘 아까 기도하면서 “하나님 분명 이거 하지 말라 하셨는데 내가 했던 게 있구나” 떠올리게 하시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늘 우리는 그런 갈등과 방황을 하지 않습니까?
결정에 있어서 내가 쌓아놓은 제단 속에서 내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다면, 그건 잘못된 예배라는 거예요.
잘못된 예배를 너무 열정적으로 드리면서, 안내하면서, 사역하면서, 기도하면서 드려 봐야,
내 영광을 위해,
내 것을 위해 드리고 있다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방향.
불을 기다리고 있는 순종인가?
순종하고 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불 받으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압박해요.
“불 내려 주십시오, 내려 주세요. 그러면 제가 이것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네가 먼저 순종해야 된다.
제단을 회복해야 된다.
인생의 방향성을 나에게 두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불을 내려줄 것이다.”
열왕기상 18장을 보십시오.
제단을 회복하고 물을 붓는 순종이 일어나고, 그 후에 불이 떨어집니다.
불이 떨어지고 나서 순종한 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은 결단의 조건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결단하는 조건이 아니라
결단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단을 쌓고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고,
그 제단 앞에서 전심으로 순종을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불을 내려주신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향성을 바로 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예배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예배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지.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 전심으로 올려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단을 다시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의 우선순위를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의 방향성을 점검하십시오.
점검하지 않으면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열심히 예배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고,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는데 나중에 다가오는 건 상처밖에 없어요.
왜 상처받고 교회에서 떠납니까?
나의 열심이어서 그래요.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그래요.
상처가 임해도 하나님을 바라봤다면 그 상처는 상처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제단을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제단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그 제단을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마지막, 18장 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0절입니다. 시작.
엘리야가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18장 30절 말씀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제가 1516교회 이름을 짓기 전에 제 마음 가운데는 18장 30절, 1830을 하려고 했었어요.
이건 이제 지나갔으니까 하는 말씀이에요.
제가 개척 나가는 그해 하반기에 본문이 열왕기상 본문이었어요.
그런데 30절 말씀을 보면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하라.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아, 요 정도로 가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께 “1830 교회 어떻습니까?” 했더니,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근데 조금 있다가 “어감이 좀 나쁜데요”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고집을 부렸어요.
“목사님, 그래도 저는 이거 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의미가, 재단으로 예배를 살리는 부흥의 제단을 우리가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7~8월까지 열심히 밀어붙였어요.
근데 어떤 집사님께서 저를 붙잡고 심각하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아무리 좋은 의미로 자녀 이름을 지어줘도, 그 자녀가 놀림을 받게 되면 어려운 이름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진심으로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좋은 의미라도 놀림을 당할 수 있는 교회 이름이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다시 기도하고, 결국 1203은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으로 짓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 구절은 저에게 정말 의미 있는 구절이고, 저는 이 구절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불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제단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단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무너졌어요.
무너진 제단을 보고 있는 거예요.
갈멜산에 두 제단이 있었어요.
하나는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이 쌓은 아주 화려하고 큰 제단.
또 한켠에는 무너져 버린, 제단이라고 볼 수 없는 제단.
아무도 무너진 제단에 관심이 없었어요.
다 화려한 제단, 거기서 뛰노는 예배에만 관심이 있었고, 거기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말합니다.
“모든 백성들아, 가까이 오라.”
그러면서 무너진 제단을 보여 주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던 이 제단이 어떻게 무너져 있는지 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불은 제단에 임해야 됩니다.
그런데 무너진 제단 가운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수가 없어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회복해야겠다, 고쳐야겠다, 재건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를 내리고 싶으셔도 비를 내릴 수 없었고,
불로 임재를 보여 주고 싶으셔도 보여 주실 수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형식만 남았기 때문에
그 위에 불이 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불,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는 언제 일어나는가?
무너진 제단이 다시 재건되고 수축되어지는 그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가 뜻을 정하여 소속을 분명히 하고,
우리의 제단이 아니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는 열정과 노력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불로 임하십니다.
불은 새로운 방식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재건된 제단 위에 떨어지는 거예요.
저는 예배교회 컨퍼런스에서 타이틀이 “재건”이었잖아요.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제단,
어느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제단,
방치했던 제단,
잊혀졌던 제단을 엘리야가 다시 쌓기 시작합니다.
갈멜산의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하나님과 연결하는 영적인 통로였던 제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치 이런 것이죠.
가정에 정전이 됐어요.
정전이 되면 가장 먼저 뭘 하십니까?
저는 밖을 먼저 봐요.
다 꺼졌나?
우리 집만 꺼졌나?
다 꺼졌으면 “전체 정전이구나.”
우리 집만 꺼졌으면 “우리 집에 뭐가 문제구나.”
예전에는 두꺼비집이라고 하죠.
두꺼비집을 열어서 스위치가 내려간 게 있으면 올려주면 불이 들어옵니다.
마찬가지예요.
영적인 통로, 하나님의 불의 통로인 제단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강력한 전력이 흐른다 할지라도 불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제단을 수축하고 연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불로 임하실 수 없는 현실이 계속된다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의 신앙의 영적인 차단기, 하나님을 향한 제단이 무너져 있지 않은지,
다시 재건해야 되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제단 위에 무엇을 올려야 하는가?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뭘 드리라고 합니까?
거룩한 산 제물로 “몸”을 드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이라는 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결정,
선택,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하루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라.
내 몸이 가는 곳마다,
내 손이 하는 일마다,
내 입으로 하는 말마다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라는 거예요.
내 삶의 사용권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그것을 거룩하게 받으시겠다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은 “너희가 거룩하면 재물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산 제물로 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은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재물은 어떤 것도 죽은 재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가져와서 제사장이 안수하고 각을 뜨고 잡고 피를 쏟고 내장을 쏟고,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 번제로 올려 드리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어제의 은혜, 이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경험들.
그것은 예전 거라는 거예요.
산 제물은 오늘 당장, 오늘 하루에 필요한 순종을 그날그날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라는 거예요.
여러분, 어제의 순종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순종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릴 수 있는 그 사람 가운데 제단의 불로 임하십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드리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불로 임하시고,
태우시고,
거룩한 역사를 보여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헌신하는 만큼,
내가 올려 드리는 만큼,
내 결정을 올려 드리는 만큼
하나님은 역사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저와 여러분이 제단 위에 거룩한 산 제물로, 여러분의 몸을 매 순간 올려 드릴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게 불을 받는 비결이에요.
그러자 39절 말씀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3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불이 임하자 백성들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어요.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 앞에서는 고백과 결단만 있을 뿐이에요.
우리가 고백하고 결단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산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지 못해서 그래요.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제단을 온전하게 쌓지 못해서 그래요.
내가 거룩한 제단을 쌓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머뭇머뭇거리는 거예요.
신앙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내 삶의 모든 것을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 소속에 서서,
하나님의 제단을 온전하게 쌓고,
거룩한 산 제물을 온전히 올려 드리면,
하나님의 불은 그때그때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거룩한 감동이 임하여
“하나님,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인생이 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게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어야 돼요.
이게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어야 돼요.
히브리서 12장 2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거룩한 불.
성령의 불.
그 불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분이 임하면 머뭇머뭇거림은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우리 인생의 제단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이 임하셔서 우리 삶 가운데 불이 떨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제단을 쌓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거룩한 산 제물을 매일매일 온전히 올려 드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불을 경험하는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머뭇머뭇하는 삶의 영역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걸 정리하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불을 마음껏 내려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게 해결되지 않고 머뭇머뭇거리는 삶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불을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걸 정리하셔야 돼요.
오늘 정리하십시오.
오늘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자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물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계획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나의 판단, 나의 기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할 때, 이 시간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주님께 속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는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것,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여러 영역,
주도권에 대한 모든 것들을 이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게 하소서.
그래서 더 이상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방향 가운데 내 모든 것을 올려 드리며 나아가기로 결단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결단 가운데 주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결단할 때 내 인생의 제단이 회복되게 하시고,
우선순위가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기도하길 원하신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주여” 한번 부르짖고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우리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라보며 결단하며 주님께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뜻을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정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소속됨으로 주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내 삶을 온전히 올려 드리며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께 내 모든 것을 온전히 올려 드리며 나아갑니다.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께 내 모든 것을 온전히 올려 드리오니, 하나님 아버지, 내 모든 것을 올려 드리며 머뭇머뭇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내 방향을 온전히 올려 드리며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소속된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아버지 앞에 소속된 삶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가운데 주의 은혜를 더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주께서 이것들을 행하시고자 약속하시고, 이 시간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소서.
주여,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가운데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아버지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 결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끊어낼 것을 끊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을 정하고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 앞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으로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2026.01.12(주) | 주일설교 |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요 4:27-35)
핵심 메시지
- 교회는 ‘일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려내는 일을 “나의 양식”이라 하실 만큼 기뻐하셨습니다(요 4:34).
-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수치와 두려움에서 자유해져,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변화됩니다(요 4:28-30).
- 주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할 때가 이미 이르렀다”(요 4:35)고 하시며, 지금 여기서 영적 추수에 동참하라고 부르십니다.
흐름 정리(요 4:27-35)
- 제자들의 ‘이상함’(요 4:27)
-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 자체가 낯설었고, 예수님의 ‘한 영혼을 향한 집중’ 때문에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 수가성 여인의 변화와 증거(요 4:28-30)
-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증거합니다.
- 회피하던 사람이 찾아가고, 숨기던 과거를 스스로 말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합니다.
- 예수님은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치유는 증거로 흘러가게 됩니다.
- 예수님의 양식: 한 영혼을 살리는 기쁨(요 4:31-34)
- 제자들은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권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 그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며, 곧 한 영혼을 살려내는 사명입니다.
- 사명이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의 감격으로 회복될 때,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 추수의 부르심(요 4:35)
- “넉 달이 지나야 추수”라는 세상 계산을 넘어, 지금 당장 시작되는 영적 추수를 보라고 하십니다.
- 예배(1516)가 살아나면 교회(1517)가 살아나고, 그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됩니다.
적용
- 교회의 사명은 ‘사람’이며, 사역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 효율성으로 사랑을 재단하지 말고,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품고 초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예배의 비전이자 교회의 비전이며, 그 사랑이 가정과 일터와 도시로 흘러가야 합니다.
녹취록
C4C 비전주일로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두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설교 후에 비전 영상도 함께 보고, 교회 개척 운동에 대한 비전 약정에 함께 참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목요일에는 저희가 한 달에 한 번, 이것도 영적으로 정말 중요한 절기이니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매월 두 번째 목요일에 집회를 합니다.
오픈 워십 집회인데요, 이번에는 특새가 두 주간 이어졌기 때문에 1월 15일, 이번 주 15일 저녁 7시 45분에 합니다.
“일하고 오느라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왔어요” 하실까 봐 말씀드립니다. 7시 45분이니 시간 맞춰 오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저스 웨이브’라는 주제로 함께 집회를 했고요, 올해 들어서 첫 번째 텀에는 ‘홀리파이어’, 거룩한 불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집회를 하고자 합니다.
기대함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저희 2026년 교회 표어가 무엇입니까?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찬양을 이원주 목사님께서 작사, 작곡해 주셔서 우리가 은혜 가운데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사실 때가 되면 한번 말씀드려야지 했는데, 너무 일이 많아 얘기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아서 골방에 들어가 만들어 놓고 나오셔서, 우리가 은혜 가운데 찬양하고 있습니다.
음원이 출시되었습니다. 각종 음원 사이트와 431 워십미니스트리 채널에서 들으실 수 있고, 악보도 다운받으실 수 있으니 은혜의 통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7절에서 35절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설교 제목을 같이 읽어볼까요?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 C4C ‘교회를 위한 교회’ 비전으로 메시지를 나눕니다.
지난주에는 비전 1516, 예배에 대한 비전이었다면 오늘은 비전 1517, 교회에 대한 비전입니다.
요한복음 4장으로 지금 세 편의 설교를 이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월 3일 토요일 특새 메시지가 전편이라면, 지난주일 설교가 본편이고, 오늘은 후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월 3일에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셔서 “내가 너에게 생명수를 주기 원한다” 말씀하셨고,
지난주일에는 수가성 여인이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하면서 예배에 대한 깊은 갈망으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오늘은 수가성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열심히 증거하는 장면,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영혼을 살리는 사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2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마무리하실 즈음, 제자들이 마을에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을 어떻게 여겼습니까? “이상히 여겼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는 것은 흔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그 대화에 너무 집중하고 계시니, 제자들이 아무도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출발한 예수님도 제자들도 지금 배가 고프고 목마른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한 영혼을 향한 집중’ 앞에서, 누구도 끼어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그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합니까? 28절에서 30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여자가 갑자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말하자면 ‘축호 전도’를 한 것입니다.
가가호호 찾아가 사람들에게 다가와 말하니, 주민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왜 놀랐을까요?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평소 사람을 피해 다니던 여인이 스스로 사람들 앞에 찾아왔습니다. 늘 한낮에, 아무도 없을 때 나오던 여인이었습니다.
둘째, 자신이 부끄러워하던 과거와 상처를 스스로 열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자신이 만난 분을 “그리스도”로 증거합니다.
이 여인의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인기피도 사라지고, 과거의 수치와 트라우마가 씻겨졌습니다.
내면 치유를 넘어,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혼의 구원까지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자유해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이것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삶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느냐”가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자유가 임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주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선포하는 삶이 사명이 되길 축복합니다.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제가 축구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경기 막판까지 3대 0으로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4대 3으로 역전해 끝났습니다.
그때 3실점은 과거의 수치입니까? 아니요. 반전의 영광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내면의 아픔과 가정의 아픔, 교회에서 받은 상처들까지도,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는 디딤돌로 사용하시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입니다.
이제 카메라가 우물가로 다시 전환됩니다. 여인이 동네에 들어간 사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1절과 32절입니다.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며 오해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33절과 34절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은 ‘한 영혼을 살려내는 사명’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뜻, 그분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아들의 생명을 바쳐 한 영혼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한 영혼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러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마시지 않아도 시원하다”는 듯한 만족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출발해 한낮 뙤약볕을 맞으며 중부 산악지대를 지나오셨습니다.
얼마나 허기지고 갈증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 허기와 갈증을 잊을 만큼, 예수님은 행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작은 비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동안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아들들에게 먹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하나를 만들어 주고, 또 하나를 만들어 주고, 또 하나를 만들어 주려 하니, 아들이 숟가락을 놓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빠, 이건 아니잖아.”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내가 할머니처럼 되어가고 있구나.’ 할머니는 계속 먹이십니다.
그런데요, 아들 입에 음식이 들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제가 물 한 모금 안 마셔도 행복하더라고요.
예수님의 마음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려내시고, 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늘 진지한 모습으로만 떠올리지만, 한 영혼을 살려내실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세리 마태를 건지실 때는 온 백성의 조롱이 쏟아졌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살려내실 때는 자칫하면 예수님이 돌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생명을 걸고 그 일을 하셨습니다.
사복음서를 묵상하다가 저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날만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나 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서빙고에서 사역할 때 한 집사님이 위층 아주머니를 전도하고 싶다고 하셔서, 교회 카페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불교 집안이었고, 교회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저에게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교회들이 말이야, 목사들이 말이야, 문제가 많고…”
처음 보는 저에게 한참을 쏟아놓으시더군요.
저는 20~30분 듣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교회들이 문제가 많고, 목사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교회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러자 그분이 전투 의지를 내려놓고, 매주 한 번씩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오게 된 배경은, 남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들어간 사건이었습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데 마음에는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으니, 그 분노가 교회와 목회자에게도 향했던 것입니다.
한 두 달 성경공부를 하던 어느 날, 그분이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위해 죽었다고 손 들고 울고 난리 치는데, 꼴불견이에요.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맞는 말처럼 들리죠.
그런데 저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분이 복음을 깨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은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녀 열 명을 붙잡고, 돈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당신이 생명을 내어주면 자녀를 살려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내 자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열 명이 아니라 한 명뿐인 자녀라면요? 1대 1이라서 억울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생명을 내어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그분이 깨닫더군요.
‘아비가 자식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마음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구나. 70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한 사람을 위해서도 내어주는 사랑이구나.’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줄 믿습니다.
그날 그분이 복음을 깨닫고 영적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다시 나와 보니, 정말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더군요.
여러분, 한 영혼을 살리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요.
왜 제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까요?
제자들에게는 그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사역, 또 하나의 책임, 또 하나의 의무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멀어도 달려갑니다. 그 수고를 불필요한 수고로 여기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어떻게 살려낼지, 한 영혼을 어떻게 회복시킬지, 온 정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 중심이냐, 사람 중심이냐’를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며,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사랑은 효율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이 그렇습니다. 기다려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비효율적이지만 그 길이 사랑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C4C는 도시마다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한 영혼을 살리고 한 사람의 예배자를 살려내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예배자도, 땅끝 어느 도시에서 예배하는 예배자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수가성 여인을 왜 찾아가셨습니까?
인생이 망가져도 예배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자의 영혼에 불꽃을 일으키시면, 그 한 사람을 통해 도시와 가정과 일터 전체에 부흥의 불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오늘 수가성 여인을 골방에서 이끌어내신 주님은, 그 여인을 통해 마을 사람들까지 예수님께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35절의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세상 계산으로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영적 추수는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한 영혼을 추수하는 인생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함께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는 다윗의 장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한 영혼을 품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초대하고, 한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 온 교회가 마음을 모으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심령이 메마른 영혼들을 해갈하시는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가 예배의 비전이고 교회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고,
나만 회복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아직도 목마른 한 영혼, 골방에 갇혀 있고 어둠에 갇혀 있는 한 영혼, 세상과 버티며 살아가는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살려내는 교회를 세우게 하옵소서.
이 감격이 내 가정에 먼저 흘러가게 하시고,
일터에 흘러가게 하시고,
한국 교회에 흘러가게 하셔서,
흘러가는 모든 곳에 생명을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2026.01.10(토) | 새벽기도 |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약 5:14-18)
요약 정리
- 야고보서 5:14-18
핵심 메시지
- 교회는 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 특히 병든 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믿음으로 중보기도하는 공동체다.
- 치유 사역의 주체는 사람(기도자)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순종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 중보기도는 개인의 치유를 넘어 교회와 나라, 시대를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진다.
구조 요약
1) 치유를 위한 교회의 질서: 장로를 청하라 (약 5:14)
-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명한다.
- 장로는 초대교회부터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목회자)’로 구분되는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뜻한다.
- 기름 바름은 신앙적 상징(기름 부음)일 뿐 아니라 당시의 의료적 처치 관습을 반영해 ‘기도와 치료의 병행’을 시사한다.
- 결론: 병원 치료(일반 은총)와 기도(특별 은총)를 분리하지 말고, 생사화복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라.
2)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약 5:15, 약 1:6-7)
-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주께서 그를 일으키신다’. 결과의 주권은 주님께 있다.
- 기도자는 결과 부담에 매이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
- 믿음의 기도는 단지 ‘무조건 낫는다’가 아니라, 다음 3가지를 신뢰하며 드리는 기도다.
- 하나님의 능력: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하나님
- 하나님의 성품: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주권: 치유 여부와 타이밍을 가장 선하게 결정하시는 하나님
3) 죄와 질병의 관계를 균형 있게 보라 (약 5:15b-16)
- 질병과 죄는 ‘관련 있을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 질병의 원인을 4가지 관점으로 정리한다.
- 범죄와 죄의 문제로 인한 질병
- 개인적 부주의(관리 실패)로 인한 질병
- 시대적 문제(전염병 등)로 인한 질병
- 하나님의 섭리(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경우)로 인한 질병
- 그러므로 고난/질병을 두고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욥의 친구들 경고).
-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권면은 강요가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죄와 결별을 선언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라는 의미다.
- 중보기도는 가볍게 “기도할게요” 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책임감 있게 감당해야 한다.
4) 중보기도의 능력과 간증 (약 5:16-18)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며(약 5:16), 엘리야의 기도는 날씨까지도 흔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다(약 5:17-18).
- 선교 집회(카운트다운/선교 컨퍼런스)와 태풍 경로, 가정과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등 실제 사역 간증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강조한다(히 11:6).
5) 치유의 본질: 영-혼-육의 회복, 성령 충만
- 하나님이 세우신 존재의 질서(영-혼-육)가 회복될 때, 육신의 회복도 견고해진다.
- 일시적 현상만의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성령의 빛 가운데 근본이 새로워지는 치유를 구하라.
- 설교자는 개인의 병약함, 가족의 중보기도 경험, 공동체 치유 경험(벤쿠버 청년 사례)을 통해 ‘영혼의 회복이 육신과 삶을 살린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적용 포인트
- 병과 연약함을 숨기기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도 요청과 중보기도의 질서를 회복하라.
- 기도는 결과를 조종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선하심·주권을 신뢰하며 주님께 맡기는 순종이다.
- 한 영혼을 위한 기도는 개인의 치유를 넘어 교회, 지역, 민족, 열방의 회복으로 확장된다.
녹취록
저희가 3주 동안, 2주 동안 3가지 말씀을 함께 암송했는데, 시편 57편 8절 말씀 함께 암송할까요?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아멘.
새벽을 깨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더 깊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 암송하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멘.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미래를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한번 따라오세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 한 영혼의 회복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복음서를 보면 언제나 한 사람의 전인적인 치유, 그 사람의 영과 혼과 육 전체가 다 회복되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나서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시면서 관계 회복까지 이루기를 원하셨고,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깨끗해진 몸을 보이라” 하심으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원하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신 후에는 “음식을 먹이라” 하시며 체력 회복까지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육이 온전히 치유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치유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에 누구를 요청하라고 했습니까? 장로들입니다.
왜 교회에 장로들을 부르라고 했을까요? 초대교회에서도 그렇고 오늘날 장로교회에서도 그렇고, 장로의 직분은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라 할지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지니라.”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는 오늘날 목회자, 목사로 부르고, 다스리는 장로는 행정과 치리의 사역을 담당하는 장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영적 리더들에게 요청해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냥 기도하라고만 되어 있지 않고,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하셨어요.
왜 기름을 바르라고 하셨을까요?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택과 강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름 바름은 신앙적 상징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의료적 처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기도할 뿐 아니라 치료도 병행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볼까요?
질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병원에만 가고 기도는 하지 않는다.
2) 병원에는 안 가고 기도만 한다.
3) 병원에도 가고 기도도 한다.
정답은 세 번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 가운데는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있습니다.
햇빛과 단비, 자연과 문화, 의료적인 혜택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인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 가운데 “병원 가면 믿음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치료를 거부하고 기도만 하겠다는 식의 극단은 성경이 가르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파트에 살면 믿음이 없는 걸까요? 사람이 만든 것이니 노숙해야 믿음이 있는 걸까요? 여러분, 그건 아닙니다.
치료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생사와 복의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로서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질병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시기에, 그 보혈로 우리의 육신의 질병,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시기에, 빈 들의 마른 풀같이 시든 영혼에게 임하셔서 생명의 불꽃을 붙여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옵소서. 치유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어지는 1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신다고 했습니다.
누가 일으키십니까? 주님께서 하십니다.
기도자는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에 기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안 나으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이 있죠.
여러분, 내가 기도하면 병이 항상 낫습니까? 낫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유 은사가 있는 사람도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
병자를 치유하실지 말지에 대한 주권적 결정은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결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다만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믿음의 기도가 아니면 결국 시간만 소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도란 “무조건 낫는다”만 외치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
둘째, 하나님의 성품.
셋째, 하나님의 주권.
첫째, 하나님은 모든 병자를 치유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가장 선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치유 여부와 타이밍을 그분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주권적으로 결정하십니다.
여러분, 모든 병자마다 다 낫는다면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생사화복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선인지, 그분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주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우리의 역할인 믿음의 기도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전에 소개했던 책 “예수를 위한 바보”에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데이비드 케이프라는 남아공의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순례의 길을 떠나 가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기도 요청을 하면 기도해 주는데, 어떤 마을에서 암 환자가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할까요?”
“기도해라.”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즉시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망이 올라오죠.
“하나님, 기도하라 하셔서 했는데 치유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너는 기도해라. 기적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지 말지를 네가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네가 할 일을 해라. 내 역할은 내가 한다.”
그 목사님이 계속 기도했고, 어느 날부터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가 들어가는 도시마다 영적 변화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15절 하반절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질병의 치유를 이야기하다가 왜 죄 사함을 이야기할까요?
질병과 죄는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경우에 따라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네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범죄함으로 인해 질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주님은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문제가 질병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개인의 부주의로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요한삼서에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수면, 영양, 스트레스 관리 등 몸을 돌보지 못하면 질병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으로 주신 몸을 잘 관리하지 못해 질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셋째, 시대적 문제로 인한 질병도 있습니다.
역대하 7장 13-14절처럼 전염병이 유행할 때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그 얼굴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도 시대적 탐욕과 구조적 문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위한 질병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2-3절에서 맹인으로 난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물을 때 주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고난이나 질병을 두고 “저 사람은 죄가 있어서 징계 받는다”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 일로 책망을 받았잖아요.
질병의 원인은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유를 위해 기도하되, 그 안에 죄의 문제가 있다면 죄를 내려놓도록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지, 왜 서로에게 고백하라 하나요?”
여러분, 순모임이나 큐티 나눔에서 억지로 죄나 연약함을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 안에서 강권하실 때가 있습니다. 죄를 토설하도록 하시고, 다시는 그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솔직하게 고백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죄와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죠.
다만 기도 요청을 받은 사람은 “기도할게요” 하고 돌아가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중보기도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했고, 바울은 동족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을 구원해 달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대상을 위해 눈물을 쏟으며 생명을 걸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2장 30절 같이 읽어볼까요?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와 민족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막아서서 중보할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건져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중보자였고,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불평과 불신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을 위해 강력한 중보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이런 중보자들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 중보자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가, 17-18절 같이 읽어볼까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시대에 “비가 멈추게 해주십시오” 기도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멈췄다가, 갈멜산에서 일곱 번 엎드려 기도할 때 다시 비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간구를 통해 날씨까지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2011년 6월 말, 온누리교회에서 선교 컨퍼런스를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외부 집회(잠실 학생실내체육관) 마지막 날에 태풍이 서울·경기 지역을 관통한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보기도 담당 목사님께 “목숨 걸고 기도해라. 비 오면 안 된다” 부탁했습니다.
집회가 오후 2시였는데, 12시까지도 비가 내리다가 놀랍게도 태풍 경로가 꺾여 서울·경기 지역을 비켜갔습니다.
여러분,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기도할 때 반복적으로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편의를 위해 하나님께 이래라저래라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같이 읽어볼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아멘.
질병 치유에 대해서는 나눌 이야기가 많지만,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몇 가지 간증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삼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장 병약하게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건강이 약하셨고, 저도 어렸을 때부터 온몸이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신방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기도와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셨어요. 저를 위해 안수기도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솔직히 그 전도사님이 기도하시면 저는 긴장했어요. 기도를 아주 ‘강하게’ 하셨거든요. 눈이 아프다 하면 눈에, 배가 아프다 하면 배에, 꽉 누르며 기도하셨어요. 그래서 놀랐죠.
그런데 어느 날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들어왔는데, 그날 안수기도 받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멀쩡하게 나가서 다시 뛰어놀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신유 은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제 둘째 형이 고1 때 운동하다 넘어져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는데, 검사해 보니 뇌출혈이었습니다.
입원해 수술했는데 그날 새벽 다시 터져 하룻밤에 두 번 머리를 열었습니다.
몸무게가 급격히 빠지고, 걷기도 어렵고, 글도 못 쓰고,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온 교회가 낮이고 밤이고 조를 짜서 기도했고, 형이 기적같이 살아났습니다.
1년 만에 회복되어 같이 공부하고 대학에 갔습니다.
할렐루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 줄로 믿습니다. 이때도 중보기도의 능력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또 제가 벤쿠버에 있을 때, 교회를 성실하게 나오던 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한국에 계신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져 1년 가까이 지원이 끊겼고, 그 청년은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는 빵으로 연명했습니다.
또 긍휼이 많아 셋집에 형편 어려운 친구들을 재워주고, 자기 몫의 빵도 나누어 주다가 본인은 영양실조가 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하니 몸이 감당하지 못했고 합병증으로 위중해진 것입니다.
온 교회가 기도했고, 청년들이 모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같이 살려내셨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그 청년들을 아들딸처럼 생각하며 양육했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쓴 책 “그래도 너는 아름다운 청년이다”의 첫 인쇄 인세를 그 친구 생활비로 보내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또한 하나님은 이 시대를 위해,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1516 교회가 예배 부흥의 영적인 진앙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분당이 한국 교회 반전과 부흥의 중심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분당을 시작으로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 다윗의 장막 같은 강력한 예배 공동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더 나아가 북미와 남미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강력한 예배 공동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운데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을 주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만성 두통과 생리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치유될지어다.
불안과 근심과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여러분, 육신에 질병이 있는 분들은 자기 몸에 손을 얹고 선포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스트레스와 우울과 분노 등 내적 문제로 어려운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이 무질서하고 고통스럽고 불면증으로 힘든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화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만성 불면증과 안면마비와 신경계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치유될지어다.
만성 스트레스와 근육병과 근무력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피해의식과 과도한 피해망상과 자가면역 질환, 관절염과 피로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치유될지어다.
호흡기가 약해 기관지염과 폐렴으로 시달리는 환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치유될지어다.
관절염과 허리 디스크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으로 치유될지어다.
이명이 들리고 과잉 울림 현상과 영적 눌림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우리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온전한 육신이 될지어다.
온전한 마음이 될지어다.
온전한 인격이 될지어다.
아멘.
치유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십자가에서 나를 치유하신 보혈을 믿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아멘.
주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나의 구세주 대속했네.
넘쳐나는 주의 자비, 주의 사랑, 주의 은혜.
나의 결박 부서졌도다.
주님, 성령으로 안수하여 주시고 질병이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의 병이 치유되게 하여 주옵소서.
영적인 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치유의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온전히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야 우리의 혼, 곧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영역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생각의 모든 거짓된 생각과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 위에 하나님의 평강과 질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감정의 우울함과 분노와 거짓됨이 드러나 성령의 불로 태워지게 하시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악한 의지와 약한 의지가 떠나가게 하시고, 거룩한 열심이 가득한 의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과 혼이 온전해질 때 육신이 온전해질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한 번은 예전에 어떤 분이 주일 예배를 못 나오셔서 신방을 간 적이 있어요.
그분이 불면증뿐 아니라 완전히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는데, 조명이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눌린 집이더라고요.
크리스천 가정인데도 하나님의 임재하심 없이 영적으로 눌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먼저 치유되면 육신도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위계질서를 영-혼-육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만 다니면 되지, 성령 충만까지는 필요 없다” 하고 성령님을 선택과목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영이 충만하면 지성과 감성과 의지도 온전해지고, 육신도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저도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넘어가던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에는 완전 종합병원 같은 몸이었습니다.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열심히 기도해도 잘 낫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말씀이 충만해지면서 내 안의 거짓과 어두움이 드러나고,
그 영적 문제를 하나님 앞에 토해내듯 쏟아 놓으니, 영이 건강해지고 혼이 건강해지면서 육신도 자동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통과 편두통과 안구통, 심한 비염과 기관지염, 위염, 허리 통증, 무릎 통증, 신경계와 소화계, 폐와 기관지의 문제까지 많은 질병들이 성령 충만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육신에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신유 집회에 가서 갑자기 못 걷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시 어둠과 스트레스, 역기능적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면 육신의 질병이 재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현상만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이 먼저 치유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이 기도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회복되어야 육신이 회복되고, 가정과 일터도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생각의 질서가 잡히고 마음의 평강이 있고 의지에 거룩하고 선한 것에 대한 열정이 넘치면,
여러분의 관계가 평안해지고, 일터와 삶 가운데 질서와 능력과 생산성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멘.
이 시간 한 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셔도 좋고,
생각이 늘 복잡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영혼이 먼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우리의 영혼을 어둠과 사망과 연약함 가운데 붙잡아 두려는 거짓의 영들아 다 떠나갈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혼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멘.
주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찬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각에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평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의지 가운데 거룩의 열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어둠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거짓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생명의 영으로, 회복의 영으로 성령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람을 흙으로만 빚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육신으로 전락하였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며 영과 혼이 죽은 상태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악의 근원을 뿌리 뽑으신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충만히 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 내 생각, 감정, 의지, 육신의 무너진 영역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지어다. 아멘.
오늘 특새의 마지막 날입니다.
목회자들은 각자 위치에 서 주시고, 강단에서 기도 섬기실 분들도 앞으로 나와 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개인적으로 기도하시다가 가셔도 좋고, “꼭 기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는 분들은 목회자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육신의 표면적 문제만 해결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빛 가운데, 내 삶의 영역들, 습관, 생각과 감정의 질서에 어긋난 부분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건강하게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빛 가운데 임하셔서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이 있다면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마다 우울 기질도 있습니다. 저도 우울 기질로 태어났고, 후천적으로 우울한 삶을 살며 우울증이 깊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지면 우울증이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우울한 감정이 씻겨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빛 가운데 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 가운데 임하시면,
하나님의 질서와 생명과 회복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강건할지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강건할지어다.
우리가 강건함으로 우리 자녀들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강건할지어다.
주여, 한 번 더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한 뒤 개인 기도로 나아가겠습니다.
[찬양]
홀로 찬양 받으실 가장 높으신 이름,
높이 들리신 주여, 이곳을 채우소서.
2026.01.04(주) | 주일설교 | 예배는 주님과 대면하는 사건이다! (요 4:15-26)
요약 정리
- 메시지 핵심
- 예배는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대면하는 사건이다.
-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며, 그 만남이 일어나는 자리가 예배다.
- 교회 개척 운동의 본질은 예배를 살리는 운동이며, 예배는 교회의 심장이다(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살아난다).
- 1516/1517 비전
- 1516(행 15:16):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듯, 강력한 예배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한다. 개인 예배 회복을 넘어 가정·일터·한국교회 예배의 회복으로 흘러가야 한다.
- 1517(행 15:17): 예배 공동체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 주님을 찾기 위해 예배의 처소로 오게 된다. 이는 도시·지역·열방을 향한 교회 개척 비전으로 확장된다.
- 본문(요 4:15-26)의 흐름과 핵심 관찰
- 예배에 대한 핵심 교리는 ‘인생이 무너진 한 영혼(수가 성 여인)’의 실존적 갈급함 속에서 나온다. 예배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결핍을 채우는 자리다.
- 예수님은 여인의 가장 연약한 지점(남편 문제)을 건드리시되, 정죄가 아니라 치유를 위해 드러내신다.
- 예배는 장소 논쟁(그리심산 vs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가(대상과 본질)의 문제다.
- 참된 예배(요 4:23-24)
- 참된 예배와 가짜 예배가 있다.
-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다: 성령의 임재(영)와 말씀/복음의 기준(진리)이 함께 충만해야 한다.
- 삼위일체적 예배의 구조(엡 2:18): 그리스도의 보혈로 길이 열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 적용과 권면
- 예배는 ‘괜찮은 척’ 포장하는 자리가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리다(시편의 패턴: 절망에서 시작해 찬송의 확정으로 비상).
-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시선과 기준에 흔들리지 말고,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께 고정하라.
-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실 때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며, 예배가 살아나면 영혼이 살고 교회가 산다.
- 결론
- 여인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녀와 대면하고 계신 예수님이다(요 4:26).
- 예배는 “오늘이 그날”이 되는 사건이며, 그 대면이 인생의 회복과 부흥의 출발점이다.
녹취록
네, “예배는 주님과 대면하는 사건이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비전 메시지 나누겠습니다.
1516 교회는 “도시 교회를 위한 교회”의 비전 아래 세워진 첫 번째 교회입니다. 2023년 교회를 개척하면서 표어가 뭐였죠? 같이 읽어 볼까요? “다윗의 장막을 세우라.”
그리고 작년에 예배 교회 컨퍼런스를 하면서 나눴던 메시지도 한번 읽어 볼까요? “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살아난다.” 아멘. 그래서 예배는 교회 심장과도 같은 것이죠.
우리가 교회 나오는 것은 하나님 만나러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교회 개척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예배를 살리는 운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 비전이 나오게 되는데 비전 1516과 1517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 같이 읽어 볼까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구간에 다윗의 장막과 같은 강력한 예배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고 싶으시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것이 비전 1516, 예배 회복의 비전입니다. 1516 교회에 와서 우리 개인의 예배가 회복된 것도 기쁘지만, 이것이 흘러가서 일터와 가정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예배 전반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또 더 나아가서 16절 다음 17절, 비전 1517 사도행전 15장 17절 읽어 볼까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구절을 잘 보시면, 예배 공동체를 일으키면 하나님의 예비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 예배의 처소로 오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비전입니다. 그래서 비전 1517은 교회 개척의 비전입니다. 가는 곳마다, 도시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강력한 예배의 자리를 세우고 그 예배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들이 이 시대 영적인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예배 회복의 비전을 나누고, 다음 주는 교회 개척의 비전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배 사역자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원주 목사님, 맨 처음에 저희 CC 예배 사역을 432 워십 미니스트리라고 했는데, 그 이름 정하기 전에 “요 4:24로 424라고 하면 안 되냐?” 이런 논의도 했었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좀 길긴 한데요. 또 “요 4:20은 어떨까?” 이런 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4장 20절 얘기했더니 저희 큰아들이 “미국에서는 4월 20일이 해시(마리화나) 데이”라고 하더라고요. 글로벌하게 나중에 쓸 날이 올 것 같아서 그건 내려놓긴 했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은 예배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본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항상 안타까운 것은 예배학을 너무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는 거죠.
여러분, 이 본문의 주옥 같은 말씀이 나오게 된 이유가 뭐예요? 인생이 무너진, 목마른 한 여인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그녀의 인생의 목마름을 채워 주는 자리가 예배라는 것. 할렐루야. 그래서 예배는 굉장히 실존적인 것입니다.
어제 특별새벽기도 본문으로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14절 말씀을 나눴어요. 그걸 모르고 계시는 분들은 오늘 가셔서 어제 토요일 특새 영상으로 말씀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인생이 망가지고 결핍과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한 영혼을 건지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여인이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고 불편하게 대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너무 적극적으로 반응을 했어요.
오늘 15절 말씀 같이 읽어 볼까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그런 물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여인이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하며 적극성을 띱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분, 인생이 너무 결핍 가운데 살아봤기 때문에 이제는 거기서 자유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이 부끄러운 인생,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두려우니까 이제는 그런 물이 영생하도록 계속 솟아나면 집 밖에 나올 일이 없잖아요. 그 집에서 동굴처럼 안 나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실 그 여인을 어둠 가운데서 끄집어내시려고 오신 건데, 여인은 “그런 영생하는 샘물이 있다면 나는 그냥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거예요.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을 사이에 두고 영적인 줄다리기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청년부에, 한 자매가 아주 희한한 기도 제목을 갖고 왔어요. 기도 요청을 할 때마다 증상이 심해지더라고요. 어느 공간에 들어가면 기계음이 그렇게 들린대요. 그 기계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일도 못 할 만큼,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 기계음과 더불어서 귀신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얘기를 더 해 보니까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한때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인생의 큰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샤머니즘 신봉자가 된 거예요. 완전히 무당하고 붙어서 살고, 매일 굿하고 부적을 들고, 그리고 서울에 있는 딸에게 전화해서 “너 신앙생활 소용 없어. 다 내려놔.”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기도해 줘도 모자랄 판에 뒤에서 영적으로 흔드는 거예요.
또 한 청년을 오랫동안 상담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요. 그러니까 내면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도 뭐를 해도 늘 부적감이 따라요. 그러다가 이 청년이 동성애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이 친구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서 종종 상담을 해 주는데, 최근에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어요. “목사님, 제가 어느 집에 들어가면 모든 집이 그런 건 아닌데 어두운 물체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물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 어두운 물체랑 대화를 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귀신 들림 현상이 전조 증상이에요.
그래서 제가 “너 지금 동성애는 두 번째 문제고, 귀신 들리면 그다음에는 신당 차리고 무당될 거냐? 너 정신 차려야 된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된다.”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제가 긴급하게 상담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항상 “예배 끝나고 만나자” 그래요. 왜 그럴까요? 제 상담은 조금 도움을 드릴 뿐이지, 결국에는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만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도 “예배드리고 만나자” 그러면, “아니요. 예배드리는 공간 자체에 들어오는 걸 너무 힘들어요.”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한 영혼을 놓고 빛과 어둠의 양쪽 진영에서 엄청난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고요.
여러분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축복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8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멘.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영적 전쟁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절대로 대충 그 상황을 얼버무리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예수님께서 여인의 소원을 들으시고 뭐라고 답변하셨는가? 1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의 가장 취약한 부분, 사적인 영역을 예수님이 짚으셨어요. 순간 여인이 숨이 멈추고 당혹스럽고 고개를 떨궜을 것입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구원해 주시면 되지, 왜 인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건드셨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녀의 아픔을 치유하시기 위함이에요.
영적인 상황으로 놓고 보면 원수 사탄도 우리의 단점을 집중 공략할까요, 안 할까요? 엄청 합니다. “너 그거밖에 안 되잖아.” 이런 공격을 끊임없이 해요. 우리의 단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요. 그것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점을 드러내시는 것은 치유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선 검보다 예리해서 혼과 영, 관절과 골수(육신이죠), 우리의 영혼육 전 존재를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실에 들어오는 것은 수술실에 들어오는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우리 영혼의 주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라는 수술대 위에서 진리의 메스를 들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에 더러워진 부분, 병약해진 부분, 어둠과 거짓을 도려내시고 우리 안에 생명과 거룩과 순결을 더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그냥 괜찮아요. 좋아질 거예요.” 이렇게 격려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선포돼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1516 교회 되게 하시고 한국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난 한 달간 몇 분이 비슷한 얘기를 저한테 하셨어요.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면 하도 혼내서 찔리고 뜨끔뜨끔한데, 계속 듣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 가운데 회개하고 결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해 주시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시는 것은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이어지는 17절에서 19절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남편을 데려와라.”
“남편이 없습니다.”
“그래,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지. 다섯 명의 남자가 지나갔고 지금 있는 남자는 동거남일 뿐이니까.”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면, 여자 입장에서는 화가 나든지 너무 부끄러워서 도망가든지 해야 될 것 같은데, “와, 주님은 선지자이시군요.” 이렇게 반응합니다. “오, 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오히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신뢰하게 된 거예요.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와, 이 여인의 정말 밑바닥 삶으로부터 예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구나, 이렇게 느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에요. 예배는 삶의 어둡고 부끄럽고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 한번 따라해 보세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소서.”
찬양 가사하고 동일한 거예요. 우리가 시편을 좋아하시는 분들, 시편을 쭉 읽어 보면 거의 비슷한 패턴이에요. 처음에는 슬픔과 절망과 고난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멈추지 않고 기도의 활시위를, 예배의 활시위를 계속 당기면, 결국 비행기가 비상하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포와 승리의 선포로 비상하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 괜찮은 척, 멋진 척, 쿨한 척,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의사 앞에 나오면서 “저 괜찮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없잖아요. 예수님은 계속 “넌 그렇지 않다. 넌 지금 아프다. 넌 지금 굉장히 심각하다.” 그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죠. 저는 여러분이 성전에 들어올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쏟아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실 줄로 믿습니다.
대표적인 시편으로 시편 57편을 들 수 있어요. 1절 말씀을 제가 읽어 볼게요.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재앙이 하나도 아니고 “재앙들이” 내게 쏟아지듯 인생이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기도가 출발합니다. 그런데 7절 8절 9절은 이렇게 올라갑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문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러분, 앞부분에서는 “아이고 나 죽겠네”로 시작했어요. 자기의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예배를 포기하지 않고 “내 마음을 확정하겠다. 나는 예배할 것이다.” 예배의 활시위를 내달리니까 비상합니다. 결국 만민 중에서 열방 중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자, 이어지는 2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축복산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여기서 예배를 해 왔는데, 유대인들은 시온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된다고 하지 않느냐.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예배라는 주제를 꺼냈나요? 누가 이 주제를 꺼냈어요? 이 여인이 예배라는 이슈를 꺼낸 거예요. 여러분은 마태 같은 세리나 수가성 여인 같은 도덕적으로 밑바닥에 떨어진 인생들은 예배 갈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을 만나 보면 세상 고급하게 우아하게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포장이 강합니다. 결핍이 있어도 결핍이 있다는 고백이 힘들어요. 그런데 밑바닥을 쳐본 사람들은 숨길 게 없어요. 응급실 들어가면서 멀쩡한 척하겠어요? 다급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거예요.
이 여인이 자신의 인생의 목마름을 예수님께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목마름이 세상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해결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주제를 꺼낸 거예요.
우리가 영혼의 결핍을 육체의 결핍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요. 중독적 현상이 나타나는 건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면이 공허한데 그걸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는 거예요. 음식, 향락, 반대로 일중독, 성공지향… 그런데 그것으로 내 영혼이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예배로만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42편 1절과 5절 같이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제가 고3 수험생 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매일 불안하더라고요. 밤 12시, 1시까지 공부하고 독서실에서 나오면, 어떤 날은 새벽 2시에 나오기도 했는데, 항상 동네 교회 예배당에 들어가서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했어요. 10분, 20분, 때로는 30분.
고3 때는 가만히 있어도 피곤하잖아요. 완전히 녹초인 상태인데, 예배당에서 눈물을 쏟고 기도하고 나오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상쾌함, 회복감이 있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도 그 느낌이 생기지 않거든요. 그런데 비교할 수 없는 상쾌함이에요. 여러분, 예배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 받는 내 영혼의 우물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인이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하나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나요?”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정답을 얘기해 주세요.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멘.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입니다. 예배를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느냐, 그게 핵심입니다. 우리끼리 예전 예식, 우리끼리 잔치를 벌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예배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면 형식에 너무 신경을 씁니다. 어떤 분이 “예배에 꼭 대표 기도가 있어야 되나요? 대표 기도 때문에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이런 얘기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교회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있든지 교회를 와서 사람 보지 마세요. 사람 보지 마시고 하나님 바라보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정반대 케이스를 하나씩 예를 들어 볼게요. 예전에 요셉 청년부 때, 찬양이 시작하면 맨 앞에 나와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자매가 있었어요. 저는 너무 훌륭해 보였어요. 다윗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그 자매가 춤추는 걸 멈추게 하라, 방해가 된다” 이런 말을 해요.
저는 이해가 안 됐어요.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건데, 왜 자매에게 집중하느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내가 누구라고 “드리지 말라”고 말하느냐? 그건 잘못된 예배죠.
정반대 케이스도 있어요. 밴쿠버에 있을 때 찬양팀 중 한 분이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잘 입고 오시는 분이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니까 목양실에 들어와서 울며 말해요. “목사님 억울합니다. 제가 입는 화려한 패턴 옷들은 동대문에서 산 싸구려인데, 몇백만 원짜리, 몇천만 원짜리 백 들고 다니면서 저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그 자매는 진짜 화려한 패턴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왜 하나님께 집중을 안 하고 사람에게 집중할까요? 너무 영적으로 튀어도 마음에 안 들고, 너무 세상적으로 멋지고 화려해도 마음에 안 들고, 그럼 어디에 맞추겠어요? 사람 기준에 맞추는 곳이 교회가 아니잖아요.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자들에게 딱 한 가지 부탁한다고 했잖아요. 어떤 곡을 선택해도 되고, 어떻게 예배 인도해도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단 한 가지,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임재로 우리를 초대해 달라. 이 한 가지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안 하는 잔소리를 하시는 성도도 계시더라고요. 예배 인도자에게 익명으로 이메일 보내서 “솔로 파트가 너무 길다, 짧게 해라. 전주·후주·간주를 줄여라. 그래야 회중이 예배에 집중하기 좋다” 이런 말을 하는데, 저는 마음이 슬퍼요.
왜냐하면 앞에서 솔로로 인도하든 회중 찬양으로 인도하든 연주로 인도하든,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되는데 왜 우리는 다른 것을 볼까요? 연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을 못 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하여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 특강을 이어가십니다. 23절과 24절 같이 읽어 볼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아멘.
참되게 예배하는 자, 참된 예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그리고 두 가지를 얘기하셨는데, 영으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
우리의 예배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강조하고 어떤 분들은 성령을 강조하지만, 말씀과 성령은 둘 다 중요합니다. 영적 원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말씀의 씨앗 뒤에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말씀의 기준은 직선 같고, 성령의 역동성은 곡선 같은데,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는 말씀파, 나는 성령파” 이렇게 나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향상 차분하고 조용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가 성령님의 감동의 작품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는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이것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에베소서 2장 18절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려면, 감히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의 길을 열어 주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걸음걸음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 경배하는 예배자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자, 25절과 26절입니다. 여인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
예수님의 예배 관련 말씀을 듣고 여인이 감탄하기보다, 약간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언젠간 그런 날이 오겠죠.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 인생의 고난과 예배의 본질도 다 알려 주실 날이 오겠죠. 그런데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이런 뉘앙스예요. 내 인생에 그런 날이 오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곧 그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I am)”라고 답변하신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 날이 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늘이 그날이다. 내가 너를 찾아온 날이다. 네가 나를 만난 날이다.”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주님을 감격적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사건이 예배의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설교는 회중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1516 교회와 한국 교회가 예배 가운데 찬양 중에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고, 말씀 선포 가운데는 우리 가운데 걸어다니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있게 하여 주시고, 한 분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는 참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다윗의 장막 문지방을 건너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주심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무너졌던 인생은 회복될지어다. 깨어졌던 가정은 치유될지어다. 용기를 잃어버린 교회들이여 다시 일어나게 될지어다.
예배가 살아나면 영혼이 살아나고, 예배가 살아나면 한국 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 임하셔야만, 그분이 직접 치유하시고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1교회, 1203 교회, 그리고 시퍼씨를 통해 세워질 모든 교회들이 도시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거룩한 예배자들을 일으켜 세우게 하여 주시고, 그곳에서 예배자들을 일으켜 주시고 거룩한 예배 공동체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2026.01.03(토) | 새벽기도 |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 (요 4:3-14)
요약 정리
-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 (요 4:3-14) / 이상준
- 예수님은 길을 잃은 한 영혼을 찾아 ‘의도적으로’ 다가오신다
- 요 4:3-4의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지리적 필연이라기보다, 한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결단과 목적을 드러낸다.
- 유대인들이 피하던 길, 험하고 위험한 길을 주님은 선택하셨다. 한 영혼을 위한 ‘찾아오심’이 복음의 방식이다.
- “물을 좀 달라”는 요청은, 사실 “내가 너를 돕고 싶다”는 초청이다
- 예수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 주님이 예상치 못한 때에 “도와줄래?”라고 다가오실 때, 그 말은 우리를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초대하시는 배려의 언어가 될 수 있다.
- 편견과 갈등의 벽을 넘어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역사적·종교적·민족적 갈등은 매우 컸다.
- 그럼에도 예수님은 까칠한 반응 속에서도 대화를 이어가시며, ‘생수’(living water)로 초점을 옮기신다.
- 질문은 믿음의 문을 여는 통로다
-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생수는 어디서 얻는가”를 묻다가, 점차 “당신은 누구인가”로 질문의 초점이 이동한다.
-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게 된다.
- 생수는 영혼의 목마름을 끝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야곱의 우물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한다(요 4:13-14).
- 주님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을 꺼내어 하늘의 지평을 열어 주신다.
- 숨어 지내는 삶과 방어기제를 깨고, 주님 앞에 나오라
- 사람은 연약함을 숨기려 ‘단단한 껍데기’(방어기제)를 두르지만, 그 껍데기는 참 안식처가 될 수 없다.
- 예수님은 한 영혼이 안전하게 주님께 나올 수 있도록 가장 섬세한 배려로 길을 여신다(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신 장면 등).
- 어느 곳에 있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시 139:7-10). 숨지 말고 우물가의 주님께 나아가라.
적용
- 주님의 “물을 좀 달라”는 초청 앞에서 마음을 닫지 말고 응답하라.
- 질문을 멈추지 말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묻고 구하라.
- 한 영혼을 위한 예수님의 섬세함을 본받아, 누군가가 주님께 나오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되라.
녹취록
주님, 우리의 마음이 식어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보다, 사역의 결과보다, 영혼을 먼저 붙들고 있었던 우리의 연약함과 흔들림을 내려놓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십시오.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형식이 아니라 생명으로, 습관이 아니라 닮아 들어가는 예배자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께서 임하여 주시고, 메마른 심령 가운데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나아갑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다시 한번 걸어가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은혜를 더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영광과 감사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특별 새벽기도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오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이 시간에 이상준 목사님 나오셔서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해 주시겠습니다.
할렐루야. 날씨가 계속 추워져서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축복하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침에 여러분 많이 오신 것을 보고 간식을 준비했는데, 개수가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두 주간 특별 새벽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날씨가 굉장히 춥고 오늘 낮부터 좀 풀린다고 합니다. 풀린다고 해서 보니까 기온이 올라서 다음 주 중에는 최고 기온이 영상 2도 정도인데, 그게 ‘좀 풀리는’ 거더라고요.
여러분, 2주 동안 우리가 이 맹추위에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나오는 특별 새벽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한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이라는 메시지이고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 아멘.
두 주 동안 우리가 2026년 한 해를 주님 앞에 올려드리고 기도할 때,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따라해 보시겠어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어제는 예수님이 세관에 갇혀 지내던 세리 마태를 불러내셨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로비에서 한 권사님이 “마태가 그렇게 심한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이번에 마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오늘은 더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고 있는 한 영혼을 찾으시는 이야기입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부 유대 지역의 수도가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에서 북부 갈릴리 지방으로 올라가시는데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가 가버나움이니까,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한 150km 정도 됩니다. 중간에 오늘 어디를 들르셨죠?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성을 들르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다”라는 지리적 배경을 언급합니다.
그 다음 실제 일어난 사건을 보겠습니다. 5절과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수가라는 마을이라고 표현했는데, 헬라어로 ‘폴리스’라는 단어를 써서 수가성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어귀,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로마식 시간법으로 6시는 아침 6시부터 카운팅하니까 낮 12시 정오에 해당합니다. 한낮의 중부 산악지대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활동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너무 더워서 땀이 비 오듯 하지 않으셨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7절과 8절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음에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때마침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수가성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우물가에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을 좀 주시오”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과연 도움이 필요하셨을까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아 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전혀 뜬금없는 장소에서 뜬금없는 타이밍에 예수님이 “내게 물 좀 주겠니?”라고 다가오신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정말 나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도를 갖고 다가오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나를 좀 도와주겠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내가 너를 좀 도와주고 싶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한 걸음 다가올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배려하시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주님이 한 걸음 다가오시거나 말씀을 거시거나, 마음과 생각을 주신다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따라갔을 때, 하나도 손해보는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은 축복의 초청입니다.
이번 두 주간의 특새에 주님이 우리를 초대해 주셨는데, 여러분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진행되는 9절에서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은 평범하게 물을 좀 달라 요청하셨는데, 사마리아 여자는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유대인 남자가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밥도 같이 먹지 않고, 집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자는 더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 남자가 우물가에서 말을 거니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간다고 북한을 지나가며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북한군에게 “물 좀 주겠냐” 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 갈등이 있었는가.
첫 번째, 남북 왕국이 분열될 때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두 번째, 북 이스라엘은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세 번째, 아수르 제국 이후 혼혈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보기에 혈통과 신앙의 정통성을 잃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보다 못하다고, 심지어 ‘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인의 까칠한 반응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했을 것이고, 내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인 입장에서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당신에게는 물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주느냐.”
그런데 질문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생수에 대한 궁금증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넘어갑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크신 분이냐.”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저를 따라해보세요.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답을 듣고,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을 듣습니다.
저는 새가족반에서도, 상담에서도, 성경 통독에서도 질문하라고 권합니다.
최근 독일에서 이민 생활하는 한 가정을 만났는데, 초등학생 딸이 성경을 읽으면 질문을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이 많으면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죠. 그런데 아이가 한 질문이 이랬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꾸 잘난 척을 하나요?”
이 질문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두 가지로 답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정말 ‘잘난 척’ 하시는 걸까? 잘난 사람이 “나는 잘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척’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잘나지 않은 사람이 잘난 것처럼 말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가 “제가 골을 잘 넣습니다”라고 하면 척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김연경 선수가 “제가 배구를 잘합니다”라고 해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잘난 척 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아이가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나만이 참 하나님이다” 같은 구절이 반복되니까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self-glorification(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심)이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영광의 중심을 악이나 불완전한 존재에게 내어주면 세계는 무너집니다.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독일의 총리가 있는 자리(권력의 중심)를, 지금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가 “나도 앉아보자” 한다면 내어줘도 되냐. 아이가 “안 된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성은 다른 존재에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 질문은 매우 훌륭한 질문입니다. 저는 “새신자가 묻다”(제목은 전달 과정에서 다르게 들릴 수 있음) 같은 책을 선물하며 “네가 궁금해하는 내용들이 여기에 있을 테니 읽어보렴”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인이 던진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13절, 1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고 싶으신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이 여인과 티키타카 하듯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어제 봤던 마태와는 다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알고 갈망했기에 예수님이 “따라오라” 하실 때 바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자신만의 동굴에 숨어 지내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결핍의 공간에서 이 여인을 꺼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묵상하다 떠올린 사건이 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즈음, 필리핀 루방섬에 파견된 일본군 일부가 종전 선언을 믿지 않고 밀림 속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방송과 전단을 미군의 기만 전술이라 생각하고, 무려 30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 그중에 오노다 히로오(오노다 히로라고도 알려짐)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결국 1974년에 옛 직속 상관이 찾아가 “전쟁이 끝났다”고 확인시켜 주자 비로소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만의 공간에 숨어 지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물가에서 기다리신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좋은 물이지만,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땅만 보며 살던 여인에게 갑자기 영원이라는 지평이 열렸습니다. 하늘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 이야기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더 나옵니다. 제가 오늘 시작할 때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토요일 본문이 아니라 다음 주 화요일 본문을 당겨서 나눈 것입니다. 내일 주일 설교에서 이어지는 예배 이야기를 나누려고 오늘 여인의 이야기를 먼저 다룬 것입니다.
여인의 삶은 목마름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 남자와 살았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동거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원래는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우물가에, 그는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한낮에 나와야 했습니다. 사람 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앞에서는 강한 척 합니다. “왜 나한테 물을 달래? 여긴 우리 동네야. 당신이 뭘 줄 수 있어?”
이 여인의 내면을 보며 떠오른 동물이 있습니다. 소라게입니다. 소라게는 영어로 hermit crab(은둔자 게)입니다. 소라게를 껍데기에서 빼내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배와 꼬리 부분이 매우 연약해, 그 연약함을 숨기려고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어 강한 척 합니다. 그런데 몸집이 커지면 껍데기를 바꿔야 하고, 평생 숨고 바꾸는 일을 반복합니다. 목마름이 멈추지 않는 삶처럼요.
소라게와 여인, 그리고 우리 삶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둘째, 연약한 나를 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방어기제를 쓴다.
강한 척은 강건함이 아니라, 강팍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바스러질 듯 연약한 존재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소라게에 대해 연구한 보고를 보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를 집으로 착각하고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 죽는 개체가 대규모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소라게가 의지하는 거짓된 껍데기는 참된 안식처가 아닙니다. 우리도 참된 안식처를 찾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자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합니다. 불안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심리적 전략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실제로 우울하고 초라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덕지덕지 방어기제로 포장하며 강한 척합니다.
대표적으로,
- 부정: “난 부끄럽지 않아.”
- 투사: 자기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림
- 합리화: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밈
- 보상: 무너진 영역을 반대로 과장함(“우리도 영적 유산이 있다” 등)
그러나 어떤 방어기제로도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내면을 다 보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두려워 움츠러들고 강한 척하는 그녀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내가 너를 어둠에서 건져내려고 왔다. 내가 네게 진정한 해답을 주려고 왔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생명수를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럼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는가. 오늘 읽었던 3절과 4절을 다시 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여러분, 지리적으로는 직선으로 가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기 때문입니다. 중부 산악지대는 험한 돌산이고 강도들도 출몰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 요단강 저지대를 따라 갈릴리로 올라갔습니다. 물도 많고 과일도 많고 쉬기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지리적 필연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150km인데, 수가성이 약 50여 km 지점입니다. 이 길은 3일 길입니다. 군인 행군으로 하루 40~45km가 보통입니다. 산길을 50km 걸으면 오전 출발해 오후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이른 새벽에 출발하셨겠습니까.
예수님 마음이 급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나오기 전에 도착해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고 가십니다. 그리고 여인이 나오기 직전,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십니다.
또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우물가에 잔뜩 서 있으면 여인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을로 들여보내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심부름은 보통 두 사람씩 보냈는데, 일부러 모두를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여인이 편안한 마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신 예수님의 섬세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한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예배 전에 와 본 적은 있는데, 세상적으로 살다 보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마태 설교를 듣고 용기가 나서 연락드립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99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주님의 마음은 간절하고 애달픕니다.
저를 따라해보세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그 한 영혼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도 축복하지만, 골방에 갇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데도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어디에 있든지, 인생의 고통의 끝자락과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거기까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후 찬양을 올려드리며 묵상합니다.
- 찬양(가사 생략):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리까 …”
이 시간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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